헬조선


Uriginal
17.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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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단군이 존재하지 않은 근거로 삼국사기에 일절 기록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하면

삼국사기가 중화 사대주의적 역사서기 때문에 없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을 유사역사가들이 하는데

삼국사기를 보면 삼국을 본기에 기록하고 있는데 본기는 원래 황제에 대해서 쓰라고 있는 것인데 거기에 한반도의 군주를 넣은 것이지만

삼국사기와 같은 형식의 역사서인 고려사에 본기 자체가 없고 한반도의 군주를 세가에 넣은 것을 봐도

삼국사기가 한국사를 황제의 역사로 격상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게 자주적이라는 삼국사기에 단군에 대한 기록이 아예 없다는 것은 아무리 자국을 자주적으로 간주해도 단군을 도저히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 되지 않나

아무튼 여진족이 세워서 자주적이라는 조선이 쓴 역사서가 어떻게 저렇게 중화사대주의적일 수가 있는가 하지만

일본식 역사관에 따르면 북방 유목민은 중국에 독자적이고 중국을 침략한 것에 대해 엄청나게 호의적인데, 한편으로 한반도를 북방 유목민과 필사적으로 관련시키려고 하고 이성계가 여진족이었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고집하는 것에 비해 조선이 어째서 그렇게 철저하게 중화사대주의적이었는지는 설명을 못하지만 어째서 이런가 한다.






  • 조선은 자주적이지도 않았고 단군이란 거의 후대에 의해 날조된 반-신화적 존재라고 봐야 하지만요. 

    단군이라는 단어의 최초등장시기가 이미 고려 시대라는 걸 생각하면 날조의 가능성이 거의 100%
  • Uriginal
    17.06.06
    기자는 적어도 문헌적으로라도 교차 검증이 되는데 단군은 그런 것이 없기도 하고
    삼국사기가 중화사대주의 역사서라서 일부러 단군을 제거했다는 유사역사가들의 논리가 애초에 삼국사기가 한반도 군주들을 본기에 넣어서 황제 취급하고 있는 것에서 논파된다는 이야기입니다만
    아무튼 이성계 여진족설을 대중에 확신시킨 일본인 학자 오카다 히데히로는 원래 몽골사, 만주사 연구하는 사람인데 유목민이 중국을 지배했고 한화되지 않고 독자적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이성계가 여진족이라고 하면서 조선에 대해서는 한없이 사대적이고 나약했다고 주장하는데 진취적이고 독자적인 여진족이 세웠다는 이씨 조선이 왜 그렇게 사대주의적이었나 합니다만.
  • 애초에 단군이라는 단어 자체가 날조이고, 삼국사기는 중화사대주의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지만.

     
    이성계 여진족설은 그 배경상 가능성이 조금은 있다고 생각하지만, 원래 조지아 소수민족이었던 스탈린과 유대인 등 변방민족의 혈통이 있었던 히틀러 같은 자들도 집권뒤에는 얼마든지 자기 혈통을 주류민족의 주류 혈통으로 포장했듯이 이성계도 마찬가지로 집권한 뒤에는 철저하게 중국에 사대하는 조선의 그것을 철저하게 따른 것으로 추정되지만.
     
    위의 오카다 히데히로의 말대로 이성계와 그 일파는 여진족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그들에게는 독자성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지만요. 이건 종족으로서는 몰라도 통치자로서의 개인의 이해관계는 철저하게 중국과 조선의 그것을 따랐기에 그러하였다고 보는 게 타당할듯요. 
     
    만약 그가 고려로 오지 않고, 그지역에 남아 혹여나 여진족 족장들을 규합하는 데 성공해 여진족 왕 같은 게 되었더라면, 개인의 기존 성향하고는 상관없이 여진족 족장으로서의 성향을 보였겠지요.
  • 산신령 전설을 왜곡과 날조로 꾸미고 확대시킨 것 같지만.

    아무튼 꾸며놓은 전설이 완전한사육100일 인데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어린미개한인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면서 세뇌시키니 미개한인들의 성품이 이상해지는데 이바지 하는 것 같지만.
  • Uriginal
    17.06.07
    아무튼 삼국유사는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할 책인 것 같지만
    아무튼 반중화 민족주의자라는 애들은 중국인이 황제, 염제 타령을 하는 것에 불만이 많은 것 같은데
    있지도 않은 단군 타령이나 하면서 무슨 자격으로 그러나 하지만
  • 아무튼 내가 하면 로망스, 남이 하면 불륜 이 미개한인들의 보편적인 가치관 같은.
  •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1. 이 편지의 목적

    이 편지의 목적은 아무것도 감추거나 과장하지 않고 명쾌함을 획득하는 것이다. 명쾌함은 혁명정책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상호이해에 이르려는 이런 시도는 침묵, 표리부동, 외교적 수완의 모든 흔적으로부터 자유로울 경우에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은 당에 매우 불쾌하고 고통을 주는 일을 포함하여 모든 것은 그 이름대로 불리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경우에 적이 비판을 포착해 이용할 것이라고 고함치는 것이 관례였다. 현재, 계급의 적이 중국혁명을 가장 추악한 패배로 이끈 지도부의 정책에서, 아니면 무오류성이라는 잘못된 명성을 뒤흔든 반대파의 억눌린 경고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볼 수 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은 어쭙잖은 짓일 것이다.

    영-러위원회, 곡물 징수, 쿨락 일반, 그리고 모든 공산당 지도부가 따른 방침의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반대파는 최근 5년 동안 코민테른의 더딘 성장을 비판하지 않는다. 사회민주주의가 많은 경우 반대파의 비판으로부터 약간 이득을 보려고 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도 필요한 만큼 염탐하며, 약삭빠르게 굴고 있다. 이렇게 하지 못했다면 그것도 이상했을 것이다. 용어의 넓은 역사적 의미에서 볼 때, 현재의 사회민주주의는 기생적 당이다. 전후, 특히 분명히 영(0)으로 환원된 1923년 이후에 아래로부터 부르주아사회를 보증하는, 말하자면, 본질적 측면에서 부르주아사회를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사회민주주의는 공산당의 오류나 부주의 ,결정적 순간에 저지른 이들의 항복, 아니면 이에 반해서 이미 지나간 혁명적 상황을 되살리려는 이들의 모험주의적 시도에 편승하여 번창해왔다. 1923년 가을 코민테른의 항복과 사후에도 이 거대한 패배의 의미를 통 깨닫지 못한 지도부,1924~25년의 모험주의적 초 좌익노선,1926-27년의 철저한 기회주의 정책 一 이것들이 사회민주주의의 부활을 야기한 것이며, 최근 독일 선거에서 사회민주주의가 9백만 표 이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가 가끔 반대파의 이런 저런 비판적 견해를 그 맥락에서 떼어내 칭찬을 늘어놓은 다음 노동자에게 제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로 사소한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가 그 좌익一사회민주주의 정당이 부르주아사회의 필수적 안전판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민주주의 좌익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에서 필수적 안전판 구실을 한다一을 가장하여 이따금씩 반대파에게 마음에도 없는 '공감' 을 표하지 않았더라도, 사회민주주의가 더 멀리 나아가지 않았더라도 현재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사회민주주의는 반대파가 얼마 되지도 않고 탄압받는 소수파로 머무는 경우에만, 그리고 이러한 '공감'이 사회민주주의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동시에 노동자의 동정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경우에만, 마음에도 없는 '공감'을 표했다.

    현재 사회민주주의는 근본 문제에 대한 자신의 노선이 없으며, 또 가질 수도 없다. 이 영역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노선은 자본가계급에게서 나온다. 그러나 만약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 정당이 말한 모든 것을 단순히 되풀이만 했다면, 자본가계급에게 더 이상 유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차적인, 막연한, 또는 요원한 문제에 대해 사회민주주의는 선홍색을 포함하여 온갖 빛깔로 장난을 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장난을 쳐야 한다. 게다가 반대파의 이런저런 판단을 이용함으로써 사회민주주의는 공산당의 분열을 일으키고 싶어 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의 작동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사회민주주의의 일부 우익 사기꾼이나 좌익 풋내기가 우리 비판에 찬성하여 문장을 인용한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반대파의 평판을 떨어뜨리려는 시도는 틀림없이 가엾은 이데올로기적 견해로 나타날 것이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정치적 문제에서, 특히 중국과 영-러위원회 문제에서는 조금도 진지하지 않다.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공감은 지도부의 '현실적' 정책을 편들었지만 우리의 정책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연방과 코민테른의 틀 내에서 투쟁하는 경향들에 대해 자본가계급 자신이 내리는 일반적 평가이다. 자본가계급은 이 문제에 대해 발뺌하거나 시치미 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 점에서 바다 양편에 있는 세계 제국주의의 모든一별것 아닌 것까지도一진지하고, 중요하고, 권위 있는 기관들은 반대파를 자신의 불구대천의 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내내 이들은 공식 지도부가 취한 수많은 조치에 대해 제한적이고, 신중한 공감을 직접적으로 표하거나, 반대파의 총체적 청산, 그 완전한 물리적 절멸(심지어 오스틴 체임벌린[오스틴 체임벌린(Austen Chamberlain, 1863-1937) : 1924-29년 볼드윈 내각의 외무장관, 1925년 로카르노조약 체결, 나중에 영국총리가 된 네빌 체임벌린의 이복형이다.])은 총살형을 요구했다)이 부르주아 체제에 공헌하는 소비에트 권력의 '정상적 발전' 을 위한 필수적 전제라는 취지의 자기 생각을 말했다. 심지어 우리가 참고할 만한 어떠한 근거자료 없이도 우리는 기억을 더듬어 이런 유형의 수많은 선언을 지적할 수 있다: 프랑스중공업 통보(通報)Information Bulletin[1927년 1월], 런던과 뉴욕〈타임즈〉Times의 선언, 미국 주간지〈더 네이션>The Nation을 포함하여 많은 출판물에 전재된 오스틴 체임벌린의 선언 등. 이런 사실만으로도 우리 당이 지난 몇 달 동안 겪었으며, 여전히 겪고 있는 위기에 대해 우리 계급의 적이 내린 판단을 우리당 기관지가 (초기였으며, 그것도 전적으로 성공적인 시도가 아니었음에 비추어) 통째로 재인쇄하는 것을 막도록 강제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선언들은 반대파의 혁명적, 계급적 본질을 지나치게 날카롭게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대부분은 제6차 대회가 소집될 때까지 양심적으로 교정을 본 두 권의 책이 출판된다면, 명쾌함의 근거를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 한다 : 코민테른의 논쟁에 대한 진지한 자본주의 출판사의 판단을 담은 백서(White Book)와 이에 필적하는 사회민주주의의 판단을 포함한 황서(Yellow Book)가 그것이다.

    어쨌든 우리 논쟁에 직접 참여하려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시도가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라면, 우리가 코민테른의 정책에 치명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건전한 것을 분명하게, 그리고 정확히 지적하는 것을 잠시도 방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외교적 수완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정교화 해야 할 올바른 혁명정책을 통해서 이를 분쇄시킬 수 있을 것이다.

    * * *

    강령초안이 출판된 지금, 이와 함께 국제 노동자혁명의 모든 근본적인 이론적 실천적 문제는 당연히 새로운 초안에 비추어 검토해야 한다. 실제로 새로운 초안의 임무는 고려해야할 문제를 다루는 이론적 방법과 함께, 이미 코민테른이 겪은 모든 경험에 대한 일반화된 검증과 평가를 제공하는 것에 있다. 이런 식으로 문제를 검토함으로써만 우리는 원칙, 초안의 완성도, 실행가능성에 대한 초안의 정확성 정도를 확인하면서, 초안 자체를 검토하여 초안에 대한 현명한 판단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허용된 아주 제한된 시간 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강령 초안을 다룬 특별문서에서 이런 비판을 정식화했다. 우리의 비판을 명백히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 것은 근본적 문제였다. 우리는 이를 다음과 같은 3개 장(章)으로 나누었다.

    1.국제혁명의 강령인가 일국사회주의의 강령인가?
    2.제국주의 시대의 전략과 전술
    3.중국혁명의 개괄과 전망, 동방의 나라들과 코민테른 전체를 위한 그 교훈

    우리는 국제 노동운동의 생생한 경험과 특히 지난 5년 동안의 코민테른의 경험을 검토함으로써 이런 문제들을 분석하려고 했다. 이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초안이 전혀 일관성이 없고, 그 원칙적 테제에 절충주의가 섞여 있으며, 체계적이지 못하고, 불완전하며, 설명에서도 누덕누덕 기우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략을 다루는 절은 주로 최근 몇 년의 혁명적 경험에 대한 심오하고 비극적인 질문을 피하는 경향이 특징적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미 대회에 보낸 문서에서 검토한 문제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에서 즉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편지의 목적은 완전히 다르다. 이를테면, 위기와 정책을 다루어야 했다. 일반적 전망에서 우리는 어제까지 갈수록 소원해지고 있던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 내에 존재하는 경향들의 화해를 위한 출발점으로 삼기위해 이제 공식적으로 이뤄진 좌선회가 정확히 어느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아야만 한다. 분명히 사상의 완전한 명쾌함에 기초하여 구한 화해나 결코 아첨이나 관료적 권모술수(Byzantinism)의 화해가 아니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

    이 전환은 이것을 낳은 자극이 형성된 소련의 국내문제에서 가장 지독하게 나타났다. 따라서 우리는 이 편지에서 주로 소비에트 혁명의 위기로 인한 소련공산당의 위기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노동자국가의 발전이라는 핵심적 문제를 검토하는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국내적 발전과 문제 모두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국제적 요인에서 우리 자신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이 편지에서도 강령 초안을 다룬 우리의 일부 테제를 되풀이함으로써 코민테른의 활동 상황과 방식을 간략하게 특징 짓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예비적 소견의 결론으로 나는 대회에 보내는 이 편지뿐만 아니라 강령 초안에 대한 비판도 대회 모든 대의원들의 주의를 환기시킬 것이라는 나의 확신을 표하고 싶다. 나는 제5차 대회가 나를 집행위원회의 교체위원으로 선출했기 때문에라도 이렇게 할 파기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공식적이라고 간주될 이 편지는 코민테른 최고위층의 명령으로 내게서 권리와 의무를 빼앗아간 부당한 결정에 대한 나의 항소이유서다.

     

    2. 왜 4년 이상 코민테른 대회가 소집되지 않았는가?

    제5차 대회 이후 4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이 시기에 코민테른 전체뿐만 아니라 각국 지부 지도부의 구성과 함께 지도부의 노선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제5차 대회가 선출한 의장은 면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에서 제명되기까지 했으며, 제6차 대회 직전에 복당되었다. 이 모든 것은 대회와 아무런 관련도 없이 이뤄졌다. 대회소집을 방해한 객관적 장애물이 전혀 없었는데도 말이다. 세계노동자계급운동과 소비에트공화국의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에서 코민테른 대회는 불필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해마다 장애물이나 무거운 짐 때문에 연기되었다. 대회가 기정사실만을 대면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만 소집되었다.

    자의(字義)와 민주집중제의 정신에 따르면, 대회는 당 활동에서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 당 활동은 언제나 대회의 준비와 그 임무에서 최고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현재, 대회는 무거운 짐이자 귀찮은 의례가 되어있다. 소련공산당 제15차 당대회는 1년 이상 독단적으로 연기되었다. 코민테른 대회는 4년을 경과한 뒤에 소집되었다. 이 얼마만인가! 가장 거대한 역사적 사건과 가장 심각한 견해 차이로 점철된 이 4년 동안에 셀 수 없이 많은 관료적 대회와 협의회, 완전히 썩어빠진 영-러위원회협의회, 장식적 반(反)제국주의투쟁동맹의 대회, 소련 우방들의 과장된 기념대회를 위한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오직 세 차례의 코민테른 정기대회를 위한 시간과 공간만을 발견할 수 없었다. 외국의 대의원들이 전례 없는 어려움을 이겨내야 했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가 도중에 목숨을 잃기도 한 내전과 경제봉쇄 중에도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 대회는 혁명당의 규약과 정신에 따라 정기적으로 소집되었다. 이것이 지금 어떤 이유로 용납되지 않는 것인가? 우리가 지금 '실천적' 임무로 너무 바쁘다고 사칭하는 것은 단지 당의 정신과 의지가 지도부의 일을 방해하고, 대회가 매우 진지하고 중요한 일에 족쇄를 채우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당을 관료적으로 청산하는 길이다.

    최근 4년 이상 공식적으로 모든 문제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나 상임간부회의가 결정했다. 그렇지만 실상은 소련공산당 정치국,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단연코 당 기구에 기초를 두고 있는 서기국이 결정했다. 물론 이 점에서 쟁점은 소련공산당의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이 아니다. 이 영향력은 오늘날의 그것보다 레닌 아래에서 훨씬 더 컸으며, 대단히 건설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 이 점에서 쟁점은 전적으로 막후에서 기능하는一레닌 아래에서 징후조차 없었으며, 레닌이 당에 한 마지막 충고에서 엄중히 경고한 현상一전지전능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서기국이다.

    코민테른은 모든 지부들이 완전히 복종해야 하는 유일한 국제 당이라고 선언했다. 이 문제에서 레닌은 일평생 중재자 역할을 했다. 그는 정치적 준비가 부족하다면, 중도주의가 관료주의로 타락하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지도부의 중도주의 편애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고했다. 공산당의 정치적 발전과 이데올로기적 성숙은 자신의 경험에 기초를 둔 나름의 내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다. 코민테른의 경험과 소련공산당이 그 안에서 수행한 결정적 역할은 이 리듬을 촉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촉진은 어느 정도 강제적인 제한 속에서만 시작될 수 있다. 이 촉진이 자주적 활동, 자기비판, 자기적응 능력을 엄중한 행정적 조치로 대체하려는 시도로 도를 넘어서면, 정반대의 결과를 얻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련의 경우, 이러한 정반대의 결과에 이르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레닌이 활동을 중단했다면, 문제를 다루는 초(起)중도주의 방식이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집행위원회는 결국 세계당 대회를 책임져야할 단일한 세계당의 전권을 가진 중앙위원회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확인한 것은 무엇인가? 대회는 정작 가장 필요했을 때, 소집되지 않았다: 중국혁명만으로도 두 차례의 대회소집이 정당화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집행위원회가 세계 노동자운동의 강력한 중심이다. 실제로 지난 몇 년 동안 집행위원회는 냉혹한 방식으로 여러 차례 개편되었다. 제5차 대회에서 선출되어 집행위원회 내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한 일부 집행위원은 면직 되었다. 같은 일이 코민테른의 모든 지부들에서, 아니 적어도 가장 중요한 지부들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대회가 소집되지 않았다면, 결국 대회를 책임져야 할 것은 개편된 집행위원회 아닌가? 대답은 아주 명백하다. 사람들이 바뀐 소련공산당의 지도적 중핵은 코민테른의 규약과 제5차 대회의 결정을 완전 무시하면서 매번 집행위원회 위원을 새로이 선출했다.

    마찬가지로 소련공산당의 지도적 중핵 내에서 이뤄진 변화는 대회 사이의 휴지기에, 따라서 대회와 무관하게, 기구 쪽의 물리력을 통해, 늘 상당히 예기치 않은 방식一코민테른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소련공산당 자체에 대해서도 막후에서一으로 나타났다.

    지도부의 '기예'는 당을 기정사실과 대면시키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막후에서 조종하는 메커니즘의 작동에 따라 연기된 대회는 지도부의 새로운 구성에 엄격히 부합하는 식으로 선택되었다. 동시에 전 대회에서 선출된 이전의 지도적 중핵은 그저 '반(反)당 수뇌부'라고 지칭 했을 뿐이다.

    이런 과정의 가장 중요한 단계를 전부 열거하는 것은 너무 오래 걸릴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인용하는 데 그칠 것이지만, 이것은 한 다스의 가치가 있다. 공식적 입장에서나 실제로도 제5차 대회는 지노비예프 그룹이 이끌었다. 이것은 바로 이 그룹이 이른바 반(反)'트로츠키주의' 투쟁을 통해 이 대회의 근본적 색조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막후에서 생긴 필요와 이 투쟁의 음모는 전체적 방향에서 대회의 일탈을 낳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것은 뒤이은 시기에 범한 가장 큰 오류의 원천이었다. 이들 오류는 다른 곳에서 자세히 검토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코민테른의 어느 당에서도 제5차 대회의 지도적 분파가 제6차 대회까지 분파 자체를 유지할 수 없었다는 사실 한 가지만은 추릴 필요가 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소콜니코프 등으로 대표되는 이 분파의 중심 그룹은 1926년 7월 선언에서 이렇게 단언했다 : '1923년 반대파의 주요 중핵들이 노동자 노선으로부터 일탈할 위험, 기구 체제의 위협적인 성장에 대해 올바르게 경고했다는 것은 현재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조금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와 중앙통제위원회 합동회의 때(1926년 7월 14-24일), 제5차 대회의 지휘자이자 고무자인 지노비예프는 1917년 오류와 1923년 반대파에 대항한 투쟁을 '자기 생애 중에 범한 주요한 오류'로 생각한다一속기록에 담긴 이 선언은 제 15 차 당 대회전에 중앙위원회가 다시 출판했다一고 밝혔다.

    지노비예프는 이렇게 말했다 : '내가 더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는 두 번째 오류, 즉 레닌 생전에 범한 1917년 오류는 레닌에 의해 교정되었다. … 반면에 1923년의 내 오류는 사실에 … 있었다.'

    오르조니키제: ‘그렇다면 당신은 왜 당내 모든 사람들의 이성을 틀어막았는가?...’

    지노비예프: '기구로 인한 일탈 문제에서, 또 관료적 억압문제에서 그렇다, 여러분에 비해 트로츠키가 올바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퇴보의 문제, 즉 정치노선의 퇴보, 당체제의 퇴보 문제가 견해 차이의 골자를 이룬다. 1926년에 지노비예프는 이 문제에 대해 1923년 반대파가 옳았으며, 자신이 10월 전복에 저항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자기생애 가장 큰 오류는 1923~25년에 자신이 수행한 반(反)'트로츠키주의' 투쟁이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최근 며칠 동안 신문은 지노비예프 등을 복당시킨 중앙통제위원회의 결정을 게재했다. 이들이 '자신의 트로츠키주의적 바보짓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에피소드인 이 모든 일은 우리 손자나 증손자들에게 몇몇 풍자가가 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비록 문서로 완벽하게 입증될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단지 일개인이나 한 그룹만 관련된 것이었다면, 지난 몇 년 동안 코민테른 내에서 수행된 이데올로기 투쟁과 밀접한 관계가 없는 사태였다면, 이 사태가 말하자면, 관료적 방식의 무제한적인 힘에 의해 4년 동안 대회를 불필요하게 만든 동일한 조건에서 유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 편지에서 언급하는 것은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재, 코민테른의 이데올로기는 지침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낸 것이다. 더 이상 인식과 전망의 수단이 아닌 이론은 행정적, 기술적 도구가 된다. 어떤 견해는 반대파에 따른 것이고, 이런 '견해'에 기초하여 반대파는 판단된다. '트로츠키주의'와 관련된 어떤 개인은 뒤이어 마치 이것이 장관실 직원을 임명하는 공무원 문제인 것처럼 소환된다. 지노비예프의 경우는 결코 예외가 아니다. 단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눈에 부각될 뿐이다. 어쨌든 제5차 대회를 지휘하고 고무한 바로 코민테른 전임 의장이라는 사람이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의 이데올로기적 격변은 매번 위에서 일어나고, 어떤 면에서 소련공산당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의 다른 정당들에서도 정상적 체제를 이루며 이미 체계화된 조직적 격변을 불가피하게 동반한다. 바람직하지 못한 지도부를 면직하는 공식 이유는 진정한 동기와 좀처럼 일치하지 않는다. 사상의 분야에서 표리부동이 낳은 피할 수 없는 결과가 체제의 완전한 관료화이다. 이런 시기에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 폴란드 등 공산당의 주요 분자들은 여러 차례 끔찍한 기회주의적 조치에 의지했다. 그러나 이들은 전혀 처벌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소련공산당 내부 문제에 대해 이들이 취한 입장이 이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반대파에 반대 투표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기에 더해 큰소리로 짖어대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타격에 대하여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다. 아래로부터 나올지도 모르는 타격으로부터 이들을 보증하는 것은 기구가 어떠한 통제로부터도 자유롭다는 사실에 의해 제공된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아직도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대단히 생생하다. 아주 최근까지 철저히 멘셰비키적인 진독수, 담평산 등의 중국 지도부는 반대파에 대한 비판에 비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누렸다. 이들의 비판에서 놀랄 만한 것은 전혀 없다. 코민테른 집행 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 당시에 담평산은 이렇게 증언했다 : '트로츠키주의가 출현하자마자, 중국공산당과 공산주의청년동맹은 즉시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하는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의사록, 205쪽)

    러시아, 핀란드, 독일, 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와 다른 나라들의 노동자혁명에 저항하고 훼방을 놓은 분자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자체에서, 그리고 그 기구 내에서 매우 큰 역할을 했다. 때마침 이들은 반(反)'트로츠키주의' 투쟁에서 자신의 적성을 드러냄으로써 이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담평산은 단지 이런 분자들의 제자일 뿐이다. 그의 스승이 욕지거리를 피할 능력이 있는 반면에, 그에게 욕지거리가 쌓인 것이라면, 이는 이따금씩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체제가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최근 5년 동안에 가장 눈에 띄고,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특성은 소련공산당에서는 물론이고 코민테른 전체에서도 점차적으로, 그리고 점점 더 가속적으로 관료주의가 성장하고, 이와 관련된 전횡이 증대해왔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런 공식적인 주장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물론이고, 완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규약 무시와 유린, 조직과 사상 분야에서 연속적인 격변발생, 대회연기, 매번 기정 사실과대면한 협의회, 전횡의 증대一이 모든 것은 우연일 수 없으며, 심각한 원인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파벌들의 권력투쟁 등처럼, 오로지 또는 주로 개인적 이유에 입각한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레닌의 유언장을 보라). 그러나 여기에 관련된 것은 대단히 심각하고 장기간에 걸친 과정이기 때문에 그 원인은 틀림없이 심리적일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대단히 사실적이다.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체제 전체의 관료화의 주요 원천은 지도부의 정치적 노선과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노선 사이의 커지기만 하는 격차에 있다. 이 두 노선이 일치하지 않을수록, 지도부의 노선이 사태에 의해 논박될수록, 비판에 노출됨에 따라 당의 조치에 의지함으로써 노선을 적용하기가 더 힘들어지고, 그만큼 더 기구나 심지어 국가의 조치를 통해 위에서 당에 강제되어야 했다.

    그러나 지도부의 노선과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노선, 즉 볼셰비키 노선 사이의 격차 증대는 비(非)노동자계급의 압력을 받을 때만 일어날 수 있다. 일반적이라고 생각되는 이 압력은 소련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도 격렬한 진동이 두 방향으로 가로지르면서 최근 5년 동안에 예사롭지 않은 비율로 증대했다. 기구가 비판과 자기 당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질수록, 지도부는 그만큼 더 기구를 통해 전해지는 비(非)노동자계급의 염원과 제안에 영향 받기 쉽고, 따라서 양보하게 되었다. 이것은 정치적 노선을 더욱 오른쪽으로 이동시켰으며, 이를 노동자전위에 강제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더욱 더 가혹한 관료적 조치를 필요로 했다.

    따라서 정치적 퇴보과정은 불가피하게 조직적인 억압조치로 완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도부는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절대로 허용하려고하지 않았다. 관료적 체제는 '형식주의적'이고, 여기에 가장 적합한 이데올로기는 스콜라주의이다. 최근 5년은 완전히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에 대한 현학적 왜곡, 정치적 퇴보의 요구와 관료적 권력 찬탈의 정신에 대한 비열한 적응에 전념한 시기이다. '쿨락이 사회주의에 익숙해지게 하라', '부자가 되라!'는 권고, '단계를 뛰어넘지 않는', '4계급 블록', '두 계급 당', '일국사회주의'一오른쪽으로 이동하는 이 모든 중도주의 사상과 슬로건은 불가피하게 마르크스와 레닌의 진정한 제자에 대해 형법 조항의 적용을 낳았다.

    현학적 피폐의 원인, 관료주의와 전횡의 증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지도부의 개인적 책임을 조금도 면제하지 않으며, 거꾸로 더욱 더 큰 책임을 지운다.

     

    3. 1923~27년의 정책

    의심할 나위 없이, 제6차 대회소집의 거듭된 지연 이면에 있는 주요한 동기가운데 하나는 상당한 국제적 승리를 기다리려는 바람이었다. 이러한 경우에 사람들은 최근의 패배를 더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떠한 승리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으며, 이 또한 우연이 아니다.

    이 시기에 유럽과 세계 자본주의는 새롭고 진지한 일시적 모면이 허용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회민주주의는 1923년 이후 상당히 강화되었다. 공산당의 성장은 지지부진했다一어쨌든 제5차 대회를 고무한 예측보다는 훨씬 낮은 조짐을 보였다. 우리는 이것이 코민테른조직과 대중에 대한 그 영향력 모두에 해당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대중은 1923년 가을부터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시대 전체를 검토 중에 있었다. 만약 누군가 대담하게도 이 4~5년 동안 공산당 지도부가 연속성과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그 것은 의심스러울 것이다. 거꾸로 이런 입장은 이전에 가장 보증된 소련공산당에서조차 완전히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소비에트공화국은 경과기간 중에 사회주의적 관리 방식의 효능과 중요성, 특히 이 속에 깃든 거대한 가능성을 처음으로 세계에 보여주면서 경제적, 문화적 견지에서 중대한 발전을 이뤘다. 그러나 이런 성공은 이른바 자본주의의 안정에 기초하여 발전했는데, 이 자본주의의 안정 자체는 세계혁명의 일련의 패배의 결과였다. 이는 소비에트공화국의 외부적 상황을 상당히 악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에게 적대적인 방향으로 그 내적 역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레닌의 표현에 따르면, 소련이 '완전히 자본주의 세계에 고립된 변방'으로 계속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못된 지도에 의해 자본주의 세력과 경향이 중대해진, 아니 더 정확히는 심상치 않아진 국민경제의 발달에 이르게 되었다. 낙관적 주장과는 반대로 경제와 정치의 내적 역관계는 노동자계급에게 불리하게 바뀌었다. 따라서 일련의 고통스러운 위기가 소련공산당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10월 혁명의 위기를 낳은 근본적 원인은 노동자계급의 일련의 참혹한 패배로 야기된 세계혁명의 지연이다.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은 상황에서 전후 초의 운동과 봉기는 1923년까지 패배를 맞았다. 그 결과로 공산당은 발달 초기에 있었으며, 아직은 힘이 미약했다. 1923년부터 상황이 급변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 이상 노동자계급만의 패배가 아니라 코민테른 정책의 참패였다. 독일, 영국, 중국에서 이 정책이 범한 큰 실수나 일련의 다른 나라들에서 저지른 더 소규모의 실수는 볼셰비키당의 역사에서 두 번 되풀이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1905-17년 시기의 멘셰비키주의의 역사나 그 이전 몇 십 년의 역사를 검토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크고 작은 실수들이 되풀이되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코민테른의 더딘 성장은 최근 5년 동안 잘못된 정책의 직접적 결과이다. 코민테른은 안정의 본질을 순전히 현학적인 방식으로 이해함으로써, 특히 책임을 피하려고 함으로써 구한 '안정'에 책임이 없다고 생각한다. 안정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현존하는 조건이 자동적으로 바뀐 결과가 아니다. 정치적 계급역관계가 불리하게 바뀐 결과다. 노동자계급은 1923년 독일에서 지도부가 항복했기 때문에 진이 빠져버렸다. 1926년에는 코민테른 지도부가 블록을 계속 유지했기 때문에 영국에서 농락당하고 배신당했다. 1925-27년 중국에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정책은 노동자계급을 국민당의 덫에 빠뜨렸다. 이것이 패배의 직접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원인이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이런 실패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성격의 근거라는 것이다. 비록 뒤이은 정책이 옳았더라도 패배가 불가피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은 타락한 숙명론으로 떨어지는 것이며, 혁명적 지도부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볼셰비키의 개념을 포기하는 것이다.

    잘못된 정책에 의해 좌우된 노동자계급의 참패는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자본가계급에게 숨 돌릴 틈을 제공했다. 자본가계급은 자신의 경제적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이 틈을 이용했다. 이것이 독일공산당이 항복한 1923년 10월 시기에 시작된 안정기의 출발점을 제공한 원인이다. 물론 자본가계급이 얻은 경제적 지위의 강화는 다시 정치적 환경을 '안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최근 5년의 안정기에 자본주의가 우세를 차지한 근본적 원인은 코민테른 지도부가 사태에 대해 어떠한 견지에서도 대처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다. 혁명적 상황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이를 장기간에 걸쳐 이용할 수 없었다. 이런 약점은 개인적이거나 우연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다. 중도주의 노선의 필연적인 결과다. 중도주의 노선은 일시적 소강기에 자가당착을 감출 수도 있지만, 혁명기의 격변 중에는 불가피하게 재앙을 불러일으킨다.

    소련과 지배정당의 내적 발전은 국제적 상황의 변화를 완벽하게 반영했다. 따라서 이것은 생소하고 반동적인 일국사회주의 이론과 고립적 발전론을 반박하는 본보기였다. 소련 안에서 지도부의 노선一오른쪽으로 이동하는 중도주의一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노선과 같았다. 국제무대에서 뿐만 아니라 국내정책에서도 지도부의 노선은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지위를 약화시키면서 똑같이 심각한 해악을 끼쳤다.

    이제 이뤄진 좌선회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26-27년에 완전히 폭로된 우익 중도주의로 일탈한 일반적 노선뿐만 아니라 이전시기에 퇴보를 준비한 1923-25년의 초좌익주의 노선을 완벽하고 뚜렷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것은 레닌 사후 5년에 대한 일시적 평가의 문제이다. 이 시기에 적대적인 계급세력의 압력을 받았으며, 지도부의 불안정성과 근시안 때문에 국내, 국제문제 모두에서 레닌주의에 대한 교정, 변경, 실제적 수정이 일어났다.

    이미 소련공산당 제12차 당 대회(1923년 봄)에서 소비에트연방의 경제적 문제에 대해 두 가지 입장이 뚜렷하게 눈에 띄었다. 두 입장은 그 다음 5년 동안 발전했으며, 작년 겨울에 벌어진 곡물징수의 위기에 비추어 점검되었을지도 모른다. 중앙위원회는 농민과의 동맹을 위협하는 주요한 위험이 산업의 미성숙한 발전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했다. 1923년 가을의 상상적인 '판매위기'에서 이런 입장이 확인되었다. 이 위기의 일시적 성격에도불구하고 이런 입장은 공식 지도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내가 제 12차 당 대회에서 밝힌 입장은 상반된 평가를 내 놓았다. 즉, '노농동맹'과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위협하는 본질적 위험은 산업의 후진성을 반영하는 농산물과 공산물의 가격차를 상징하는 '협상가격차'에 있다. 또한 이 불균형의 지속과 고조는 불가피하게 농업과 수공업의 분화, 자본주의 세력의 일반적 성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나는 이미 제12차 당 대회에서 이런 입장을 매우 분명하게 밝혔다. 아울러 이때 나는 무엇보다도 만약 산업이 계속 후진상태에 머문다면, 풍년은 사회주의적 경향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원동력이 될 것이고, 이것은 사회주의 경제를 와해시키는 도구를 자본주의 분자들의 수중으로 넘겨줄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결과적으로 이런 근본적 정식은 다음 5년의 투쟁을 가로질러 두 가지 면에서 나타났다. 이 시기에 그 본질에서 모순적이고 반동적인 반대파에 대한 비난一'농민을 두려워한다', '풍년을 걱정한다', '농촌의 부유(富裕)화를 우려한다', 아니 차라리 '농민을 약탈하고 싶어 한다'고 선언하는一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그 한 예로, 제12차 당 대회 초에, 특히 1923년 가을의 토론 중에 공식분파는 계급적 기준을 거부했으며,'농민' 일반과 같은 개념을 교묘히 다뤘다. 문제를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은 이미 새로운 부르주아 계층의 압력이 주변에 영향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계층은 신경제정책에 기초하여 형성되고 있었으며, 국가기구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억압에 저항하며, 레닌주의의 탐조등 빛을 피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국제적 경향의 사태가 결정적인 중요성을 얻게 되었다. 1923년 후반부는 독일에서 노동자혁명에 대한 기대감이 팽팽한 시기였다.

    상황은 너무 늦게, 그것도 우유부단한 방식으로 평가되었다. 공식 스탈린-지노비예프 지도부 내에서 거대한 충돌이 발생했다. 사실이다. 이 충돌은 공통된 중도주의노선의 틀 내에 머물렀다. 모든 전조에도 불구하고 템포상의 변화는 마지막 순간에서야 일어났다. 모든 일이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적에게 결정적 진지를 넘겨준 독일공산당 지도부의 꼴사나운 항복으로 끝났다.

    이것은 그 자체로 우려할 만한 성격의 패배였다. 그러나 사태의 꽁무니를 쫓는 정책으로 이 패배를 대부분 야기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지도부는 참패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심각성을 파악하지도 못했으며, 단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기 때문에 훨씬 더 고통스러운 의미를 얻게 되었다.

    지도부는 혁명적 상황이 계속 발전하고 있었으며, 결정적 전투가 곧 수행될 예정이었다고 고집스레 주장했다. 이런 근본적으로 잘못된 평가에 기초하여 제5차 대회는 1924년 중반 무렵 자신의 방침을 세웠다.

    이에 비해 반대파는 1923년 후반부에 다가오고 있는 정치적 대단원에 대해 경보를 발했으며, 정확하게 무장봉기를 지향하는 노선을 요구했으며, 이러한 역사적 순간에는 몇 주, 때로는 며칠이 앞으로 여러 해 동안 영향을 미칠 혁명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끈질기게 경고했다. 반면에, 제5차대회가 열리기 전인 다음 6개월 동안 반대파는 혁명적 상황은 이미 유실되었다; 배에 탈수 있으려면 맞바람이 불기를 기대해야하며, 봉기가 의제가 아닌 지금은 노동조합 속에 거점을 만들고, 부분적 요구로 대중을 결합시키는 등 공세를 취하는 적에 대항하여 방어투쟁을 조직해야한다고 지속적으로 반복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무엇이 박두했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는 '트로츠키주의'라는 낙인이 찍혔으며,'청산주의'라고 비난받았다. 제5차 대회는 정치적 쇠퇴기에 직면하여 여봐란듯이 봉기를 지향했다. 제5차 대회는 단 한방에 공산당들 사이에 혼란을 유포시킴으로써 모든 공산당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비약적이며 분명한 안정화 경향의 해인 1924년은 점점 더 큰 힘으로 사태의 진전에 역행한 불가리아와 에스토니아에서의 모험, 극좌 노선이 일반적인 해가 되었다. 이때부터 라디치와 라폴레트에 대한 일시적 관심,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을 손상시키는 농민인터내셔널의 역할 과장, 영국 노동조합 지도부에 대한 잘못된 평가, 국민당 상층계급과의 우호 등, 사이비 농민당을 이상화하는 여러 나라들에서 노동자계급 외부에 존재하는 준비된 혁명세력에 대한 요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자신을 엄호하기 위해 극좌 노선이 모험적으로 구한 이 모든 버팀목은 그 후에 분명히 우익노선의 주요한 지주가 되었다. 이 우익노선은 극좌주의자들이 1924~25년의 안정화 과정과 충돌한 상황을 이제 더 이상 마주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극좌노선을 대체할 수 있었다.

    충격적인 독일노동자계급의 패배는 소련공산당 공식지도부의 개념에 따르면, 자연스러운 경제발전에 대한 수동적 적응과정인 국내정책 ('초산업화'에 대한 투쟁, 계획 원칙에 대한 조롱 등)을 승인하는 것을 그 임무로 삼은 1923년 가을의 토론을 촉진시켰다. 국제 문제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일은 가장 확실한 혁명적 상황이 유실되었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 노동자계급이 참패한 사실은 1923년의 불안한 기다림으로 긴장이 고조되어 있었던 대중의 의식에 꽂혔다. 독일에서뿐만 아니라 소련과 다른 나라들에서도 독일 지도부의 항복은 세계혁명 일반에 대한 비통한 회의론적 요소들을 노동자 대오에 끌어들였다. 그 뒤 곧 이 사태에 불가리아와 에스토니아의 패배가 더해졌다. 1925년 중반 무렵, 결국 안정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안정이 눈에 띄기 시작한 지 1년 반 뒤에). 또한 이미 심각한 균열이 생기고 있을 때에 이뤄졌다(영국과 중국에서). 게다가 부분적으로 대중을 사로잡은 세계혁명에 대한 일정한 실망감은 중도주의 지도부를 완전히 일국적인 전망으로 밀어냈다. 이 실망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국사회주의이론으로 지독하게 보답 받게 되었다.

    상황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1924~25년의 초극좌주의는 그만큼 더 잔인하게 우경화로 대체되었다. '단계를 뛰어넘지 않는' 이론의 성공 아래 식민지 자본가계급에 적용된 우경화정책은 소부르주아민주주의와 노동조합관료집단, '강한 중농'으로 명명된 쿨락, '질서'와 '규율'을 대표하는 관료를 이끌었다.

    부차적인 문제에서 볼셰비키주의로 체면치레를 한 우익 중도주의 정책은 거대한 사태의 밀물에 넋을 잃어버렸으며, 중국혁명과 영-러위원회 문제에서 단연코 멘셰비키적이며, 대단히 곤혹스러운 대관식을 치렀다. 이때까지 어떤 혁명사에서도 중도주의 만큼 이렇게 완벽하게 상승과 하강의 곡선을 그린 경우는 없었다. 중도주의가 언젠가 다시 똑같은 곡선을 그릴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시된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에 중도주의는 물질적 분야와 사상의 분야에서 코민테른의 강력한 자원을 마음대로 써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중도주의는 어떠한 저항에 대해서도, 그리고 모든 비판에 대해서도 노동자국가가 임의로 쓸 수 있는 모든 자원으로 미리 빈틈없이 대비할 수 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책의 객관적 결과는 혁명을 더욱 지연시켰으며, 소련의 국제적 입장을 대단히 악화시킨 안정을 부양한 새로운 원동력을 제공했다.

    * * *

    이론의 견지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템포 문제를 국내, 국제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와 견고한 매듭으로 동여맨 것은 1923년 시작된 두 경향의 투쟁 과정 중에서였다.

    자본가계급에게서 빼앗은 바로 쓸 수 있는 자본을 근거로 이루어진 재건기(1923~27년)의 환상에 속아 넘어간 공식지도부는 고립된 경제발전을 목표 그 자체로 여기는 입장으로 점점 더 빠져들었다. 나중에 일국사회주의이론이 국제적 패배가 가한 타격에 힘입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가장 지독한 오류에 근거한 것이다. 재건기의 결론이 세계경제와의 연관 필요성을 점점 더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 바로 그 시기에 세계경제와의 단절을 설교했다.

    우리 경제발전의 템포 문제는 공식 지도부가 제기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공식 지도부는 소비에트 경제가 수출입을 통해 세계시장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음에 따라 그만큼 더 세계시장에 의해 엄밀하게 통제된다는 것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가 소비에트사회 건설의 템포는 세계경제와 세계정치에 좌우된다는 것을 끈질기게 지적하자, 공식 노선을 지휘하고 고무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 '우리의 사회주의 발전에 국제적 요인을 주입할 필요가 없다'(스탈린),다른 한편에서는 '아주 느린 속도일지라도 우리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이다.'(부하린) 이런 생각을 논리적으로 그 결론까지 따를 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즉 우리 경제발전의 템포 문제에 '국제적 요인을 주입할 필요가 없다'면, 이것은 단지 10월 혁명의 운명에 코민테른을 '주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왜냐하면 코민테른은 '국제적 요인'의 혁명적 표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핵심은 중도주의가 자신의 생각을 목표를 이룰 때까지 추구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템포 문제는 분명히 경제에서 뿐만 아니라 특히 '응축된 경제'인 정치에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만약 발전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어느 때보다도 더 크게 뒤처져 있는 경제에 접근하는 잘못된 방식 때문에 우리의 국내 상황이 낙후된 것이었다면, 거꾸로 국제혁명의 문제에 직면하여 고질적인 템포 상실은 혁명적 상황을 자세히 평가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를 이용할 능력이 없는 중도주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올바른 지도부가 이끌었다면, 독일 노동자계급은 확실히 권력을 장악하고 지켰을 것이라거나, 지도부가 정확히 살펴보았다면, 영국 노동자계급은 확실히 총평의회를 타도하고, 따라서 노동자 승리의 시간을 상당히 앞당겼을 것이라거나, 강제된 국민당의 기치에 속지 않았다면, 중국노동자계급은 확실히 토지혁명을 성공적인 결말로 이끌고, 자기를 따르는 빈농을 지도하여 권력을 장악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허한 현학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 차례의 만일의 사태에 이르는 길은 열려 있었다. 독일에서는 활짝 열려있었다. 이에 비해 계급투쟁에 역행한 지도부는 자기계급을 희생시켜 적을 강화시켜 줌으로써 핵심적으로 패배를 보증했다.

    템포 문제는 모든 투쟁에서 결정적이며, 세계적 차원의 투쟁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소비에트공화국의 운명은 세계혁명의 운명과 분리될 수 없다. 몇 백 년 아니 몇 십 년도 마음대로 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쓰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각각의 큰 실수, 각각의 부주의가 적에게 득이 되고, 무방비의 영역을 빠짐없이 점령하는 투쟁의 역학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올바른 경제정책이 없다면, 소련에서 노동자독재는 붕괴할 것이며, 외부로부터 구제될 때까지 견딜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국제노동자계급에게 막대한 손상을 끼칠 것이다. 코민테른의 올바른 정책이 없다면, 세계혁명은 정해져 있지 않은 역사적 시기 동안 지연될 것이다. 지금이 이를 결정할 때이다. 자본가계급이 얻은 것은 국제혁명이 잃어버린 것이다. 사회주의건설은 소비에트국가와 국내자본가계급 뿐만 아니라 세계자본가계급 사이의 경쟁이기도하다. 이 경쟁은 전 세계 계급투쟁에 기초하여 수행된다. 만약 자본가계급이 다시 세계노동자계급으로부터 상당한 역사적 시기를 빼앗을 수 있다면,기술, 부, 육군과 해군의 월등한 우세에 기초하여 소비에트 독재를 무너뜨릴 것이다. 경제적, 정치적 수단이나 군사적 수단, 또는 이 세 가지 수단을 짜 맞춰서 이를 이룰 것인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시간은 단지 중요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결정적 요인이다. 만약 코민테른이 1923년 독일당의 항복, 1924년 에스토니아의 폭동, 1924~25년의 극좌적 오류, 1926년의 영-러위원회라는 악명 높은 코미디, 1925~27 년의 중국혁명을 파멸시킨 연속된 일련의 중대한 실수로 나타난 정책을 계속 고수한다면, 우리가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일국사회주의이론은 우리가 이런 오류를 관대하게 대하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게 만든다. 마치 우리가 그동안 줄곧 우리가 원하면 뜻대로 된 것처럼 말이다.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시간은 정치, 특히 두 체제 사이의 목숨을 건 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격렬한 역사적 전환기에서 결정적 요인이다. 우리는 경제에 가장 큰 시간을 할당해야 한다. 코민테른은 1923년 이후 지도부가 저지른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한다면 5년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코민테른은 10월혁명이 대중에게 발휘하는 흡인력 덕분에 마르크스와 레닌의 기치를 붙들고 있다. 지난 시기 동안 코민테른은 자신의 기본 자산에 의지해 연명하고 있다. 코민테른은 같은 오류를 범한다면 5년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코민테른이 붕괴한다면, 소련도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가 우리나라에서 10분의 9는 실현되었다(스탈린)고 알리는 관료의 성가(聖歌)는 따분한 장황처럼 보일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노동자 혁명은 결국 승리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 그리고 어떤 희생을 대가로, 얼마나 많은 희생을 대가로? 국제적 혁명가의 새로운 세대는 끊긴 연속성의 실을 다시 묶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치로 대중의 신뢰를 다시 획득해야 할 것이다. 이 기치는 사상의 분야에서 오류, 격변, 날조의 연속적인 고리 때문에 타협할지도 모른다.

    이런 말은 현실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아버린 겁쟁이이기 때문에 살아남은 낙관주의자들의 피할 수 없는 울부짖음, 비명소리, 박해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국제적 노동자전위에게 분명하게, 그리고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전해져야 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 코민테른의 정책은 다른 모든 문제들을 좌우한다. 올바른 국제정책이 없다면, 소련에서 가능한 모든 경제적 성공도 10월혁명을 구하지 못할 것이며, 사회주의로 이끌지 못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올바른 국제정책이 없다면, 국내 상황에 대한 올바른 정책도 없다. 왜냐하면 노선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지구위원회의장이 쿨락에게 아첨하는 잘못된 방식은 단지 쇠사슬의 작은 고리일 뿐이다. 총평의회에 대한 적색노동조합의 태도, 또는 장개석과 퍼셀에 대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태도는 가장 큰 고리에 해당한다.

    유럽 자본가계급의 안정, 사회민주주의의 강화, 공산당의 더딘 성장, 소련에서 자본주의적 경향의 강화,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 지도부의 우경화 정책, 체제전체의 관료화, 반대파를 궁지로 내몬 좌익에 대한 광포한 캠페인一이 모든 과정은 확실히 일시적이지만 기본적으로 노동자혁명의 입장을 약화시키는 시기, 노동자전위에 대해 적대 세력이 압력을 가한 시기를 특징짓는 것과 확고하게 결합되어 있다.

     

    4. 대중의 급진화와 지도부의 문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2월 전원회의(1928년)는 부정할 수 없는 좌선회를 시도했다. 즉, 가장 중요한 두 문제一영국공산당과 프랑스공산당의 정책一에 대해 반대파가 옹호한 견해 쪽으로 좌선회를 시도했다. 앞뒤가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레닌의 전략의 근본적 규칙一올바른 정책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잘못된 정책을 비판한다一을 적용하고 있었다면, 이 전환은 단지 징후적 중요성만이 아니라 결정적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될 지도 모른다. 프랑스, 독일이나 다른 나라들에서 공동전선은 영-러위원회의 방침을 따랐다. 영-러위원회의 노선은 중국공산당에 대한 국민당의 노선처럼 영국공산당에게는 거의 재앙과 같았다.

    중국 문제에 대한 결의문에 관한 한, 이것은 저지른 모든 오류를 정당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끔찍한 새로운 오류를 준비하고 있다.

    러시아 문제에 대한 2월 전원회의의 결의문은 어떤 정치노선보다도 코민테른의 체제를 훨씬 더 잘 반영한다. 이는 이 결의문이 담고 있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명시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와 함께 트로츠키주의자는 소비에트 권력의 전복에 기대를 걸고 있다.'(〈프라브다〉지, 1928년 2월 19일자)

    (반대파가 소비에트 권력의 전복에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완전한 천치만을 위해) 믿을만한 말 한 마디도 없는 이러한 단언에 찬성하기 위해 손을 드는 온순함을 잃은 사람, 경험이 입증하는 것처럼, 이러한 사람도 계급의 적에 대한 단호한 투쟁에 손을 들기 위해 매번 용기를 내지는 않는다.

    전체적으로 볼 때, 2월 전원회의는 모순적인 좌선회 시도를 상징한다.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시도는 주로 유럽, 특히 독일의 거대한 노동자계급 대중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정서상의 변화에 좌우된다. 이 변화와 이것이 열어젖힌 전망의 성격을 분명히 이해하지 않고는 올바른 지도를 이야기할 수 없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2월 전원회의에서 텔만은 연설, 아니 반대파를 악담한 모욕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트로츠키주의자는 국제 노동자계급의 급진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상황이 점점 더 혁명적으로 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는다.'(〈프라브다〉지, 1928년 2월 17일자)

    따라서 그는 관례에 따라 힐퍼딩과 함께 우리가 세계혁명을 매장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의식(儀式)적 논증으로 넘어간다. 여기에 관련된 것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텔만이 대표한 코민테른에서 두 번째로 가장 큰 당이 아니었다면, 이런 치기어린 험담을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반대파가 이해하지 못한 이 노동자계급의 급진화는 무엇인가? 이것은 다름 아닌 텔만과 다른 많은 사람들이 1921년, 1925년, 1926년, 1927년의 '급진화'라고 칭한 것이다. 이들에게 1923년의 항복 이후 공산당의 영향력 쇠퇴와 사회민주주의의 성장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이런 현상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자문해 보지도 않았다. 정치적 알파벳의 첫 글자를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불행히도 이것은 텔만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혼자만이라면 아무런 문제도 안 된다. 세마르(Semard)도 마찬가지다. 제3차 대회는 혁명 전략의 진정한 학교였다. 구별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어떤 일이든지 이것이 첫째 조건이다. 고조기와 쇠퇴기가 있다. 그러나 고조기와 쇠퇴기는 차례로 발전의 다양한 단계를 거친다. 이런 각각의 단계의 정책은 이미 경험한 전술의 관점에서 채택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급격한 상황 변화에 허를 찔리지 않기 위해 이전부터 준비된 방침과 권력 장악을 위한 방침을 수행하는 일반적 노선을 유지할 필요도 있다. 제5차대회는 제3차대회의 교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다. 객관적 상황에 등을 돌렸으며, 선동적인 승인이 사태에 대한 분석을 대체했다: '노동자계급은 점점 더 급진화되고 있으며, 상황은 점점 더 혁명적으로 되고 있다.'

    실제로 독일 노동자계급은 작년에서야 비로소 1923년 패배의 결과에서 회복하기 시작했다. 반대파는 맨 먼저 이것에 주목했다. 우리가 발표한 문서에서 텔만이 인용한 부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유럽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부정할 수 없는 좌경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는 파업투쟁의 격화와 공산당의 득표수 증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변화의 첫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공산당의 득표수 증대와 나란히 사회민주주의 투표자 수도 늘어나고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공산당의 득표수의 증대를 능가한다. 만약 이 과정이 발전하여 심화하면,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변화가 시작될 다음 단계에 들어설 것이다.(트로츠키, 새로운 단계에 대하여)

    독일과 프랑스의 가장 최근 선거에 관한 자료에 한해 판단해보자면, 유럽, 특히 독일 노동자계급의 상황에 대한 위의 평가는 거의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불행히도 소련공산당을 포함하여 코민테른의 기관지는 노동자계급 속에 존재하는 분위기나 경향에 대해 진지하고, 면밀한, 문서화되고, 도해화된 분석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제시된 통계자료는 단지 지도부의 '명성'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특수한 경향에 적합한 것뿐이다. 이것들은 이런 자료가 잘못된 판단이나 지시를 반박 하더라도 1923~28년 시기에 노동자운동의 곡선을 결정한 이례적으로 중요한 실제적 자료를 줄곧 아무 말 없이 무시한다. 이 모든 것은 대중의 급진화의 역학관계, 그 템포, 범위, 가능성을 판단하기 대단히 어렵게 한다.

    텔만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2월 전원회의에서 '… 트로츠키주의자는 국제노동자계급의 급진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권리가 조금도 없었다. 우리는 유럽 노동자계급의 급진화를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이 점에 대해 이미 작년에 위기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밝혔다. 위기는 5월 제국의회 선거(1928년)에 의해 완전히 확증되었다. 급진화는 여전히 대중을 사회민주주의의 경로로 이끌면서 그 첫 단계를 통과하고 있다. 이를 살펴보려고 하지 않은 텔만은 2월에 이렇게 주장했다 : '상황은 점점 더 혁명적으로 되고 있다.' 이런 일반적 형태의 주장은 공문구에 지나지 않는다. 부르주아체제의 주요 버팀목인 사회민주주의가 성장하고 있는데도 '상황이 점점 더(?) 혁명적으로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혁명적 상황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대중의 '급진화'는 어쨌든 노동자가 사회민주주의에서 공산당으로 모여들 예비단계를 여전히 거쳐야 한다. 확실히 부분적 현상이지만, 이것은 이미 지금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흐름의 주요방향은 아직까지 그렇지 못하다. 아직 반(半)평화주의적 이고, 반(半)협조주의적인 급진화의 초기단계를 혁명적 단계와 혼동하는 것은 끔찍한 중대 실수로 나아가는 것이다. 구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해마다 단지 '대중이 급진화되고 있으며, 상황은 혁명적이다'라고 되풀이하는 사람이라면 볼셰비키지도자가 아니다. 거창한 선동가일 뿐이다. 이 사람은 실제로 혁명이 다가오는 경우에도 이를 인지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사회민주주의는 부르주아 체제의 주요한 버팀목이다. 그러나 이 버팀목은 자체 내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만약 노동자가 공산당에서 사회민주주의로 넘어가고 있었다면, 전적인 확신을 가지고 부르주아 체제가 공고화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24년에 그랬다. 당시 텔만과 제5차 대회의 다른 지도자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우리의 주장과 충고에 모욕으로 답했다. 현재의 상황은 다르다. 공산당은 사회민주주의와 나란히 성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사회민주주의를 직접적으로 잠식하지 못하고 있다. 대중은 두 정당으로 평행하게 흐르고 있다: 지금까지는 사회민주주의로 향하는 흐름이 더 크다. 이런 과정의 근저에 있는 노동자의 부르주아 정당에 대한 단념과 정치적 무관심으로부터의 자각은 분명히 자본가계급을 강화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의 성장도 혁명적 상황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구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상황은 어떻게 한정되어야 하는가? 모순을 포함하고 있으며, 아직까지 구별되지 않는 이행적 상황은 여전히 다양한 가능성을 비치고 있다. 이 과정의 뒤이은 발전은 무미건조한 말에 취하는 일 없이, 언제나 급격한 상황 변화에 준비를 갖추고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한다.

    사회민주주의는 투표자 수 증대에 마냥 흐뭇해하지만은 않는다. 사회민주주의는 아주 근심스럽게 노동자의 쇄도를 주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사회민주주의에 큰 어려움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사회민주주의에서 공산당으로 대거 넘어오기 시작하기 전에(그리고 이러한 시기의 도래는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사회민주주의 자체 내에서 새롭고 커다란 갈등 一 더욱 근본적인 그룹의 형성과 분열 등 一 이 일어날 것을 예상해야 한다. 이것은 십중팔구 대중의 혁명적 분화 과정을 촉진하기 위해, 즉 주로 노동자를 사회민주주의에서 떼어놓기 위해 '공동전선' 노선을 따라서 공산당의 적극적, 공격적, 전술적 작전을 위한 전장을 열어젖힐 것이다. 그러나 만약 '좌익'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철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공산당이 다시 이들의 입을 바라볼 수도 있는(이들이 훨씬 더 왼쪽으로 나아갈지도 모른다) 것으로 '책략'을 격하시킨다면 우리에게는 화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책략'이 1923년 작센에서 소규모로, 그리고 1925-27년 영국과 중국에서 대규모로 실행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 모든 경우에 책략은 혁명적 상황을 유실시키고, 참패를 불러일으켰다.

    텔만의 판단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강령 초안에서 볼 수 있다.

    '대중의 급진화 과정이 심화되고 있으며, 공산당의 영향력과 권위증대 … 이 모든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새로운 혁명적 물결이 일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이 강령적 일반화라면,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지금이 제국주의와 노동자혁명의 시대인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며, 앞으로 '심화하는 급진화 과정'뿐만 아니라 대중이 오른쪽으로 나아가는 시기도 겪을 것을 알고 있다. 또한 공산당의 영향력이 증대할 뿐만 아니라 특히 오류 또는 중대 실수를 저지르거나, 항복하는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영향력이 하락하는 시기도 겪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해당 시기에 어떤 나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전 세계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은 위기의 견지에서 판단할 문제라면, 이런 판단이 어울리는 자리는 결의문이지 강령이 아니다. 강령은 노동자혁명의 시대 전체를 위해 작성된 것이다. 불행히도 이 5년 동안 코민테른 지도부가 혁명적 상황의 발전과 소멸에 대해 변증법적으로 이해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해 코민테른 지도부는 여전히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의 현 단계를 근본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급진화'를 다루는 퇴색하지 않는 스콜라주의에 머물러 있다.

    독일의 정치생활이 그 위기의 특수한 성격으로 두드러져 보인 것은 제1차 대전 중에 경험한 패배 때문이다. 독일의 노동자전위는 책임감이 따르는 상황에 직면하여 이를 알아차렸다. 전후 5년 내내 독일 노동자계급이 패배한 것은 직접적으로는 혁명정당의 이례적인 허약함 때문이었다. 뒤 이은 5년 동안 독일노동자계급이 패배한 것은 지도부의 오류 때문이었다.

    1918~19년의 혁명적 상황은 혁명적 노동자당을 완전 결여하고 있었다. 쇠퇴가 시작된 1921년에 벌써 상당히 강해진 공산당은 혁명의 직접적인 전제가 없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불러일으키려고 시도했다. 이때 이후 예비활동('대중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은 당의 우익적 일탈로 끝났다. 혁명적 시야와 주도력을 뺏긴 지도부는 전체 상황(1923 년 가을)의 급격한 좌선회에 난파당했다. 우익은 이미 혁명의 쇠퇴와 맞물려 있었지만 우위를 점한 좌익에 의해 보완되었다. 그러나 좌익은 이를 납득하지 못했으며, 완고하게 '봉기를 향한 노선'을 견지했다. 이로부터 좌익지도부를 파멸시키고, 당을 약화시킨 새로운 오류가 생겨났다. 은밀히 '우익'에 의지하고 있는 현 중앙위원회는 그동안 줄곧 무자비하게 좌익과 싸웠다. 좌익은 그동안 줄곧 대중이 급진화되고 있으며, 혁명이 가까이 와 있다고 기계적으로 되풀이했다.

    독일공산당의 발전사는 정치적 곡선의 변동에 의지하면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분파의 갑작스런 교체를 보여준다. 각각의 지도 그룹은 정치적 곡선의 갑작스런 상향적 또는 하향적 전환이 일어날 때, 즉 일시적 '안정'을 향하든, 반대로 혁명적 위기를 향하든 난파당해 경쟁 그룹에 자리를 내준다. 상황이 바뀌면, 권력 장악을 위한 혁명적 투쟁의 열차로 갈아타기 위해 모든 활동을 집중할 수 없는 무능력을 자신의 약점으로 가진 우익그룹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에 비해 좌익그룹의 약점은 준비기에 객관적 상황에서 나오는 이행적 요구로 대중을 결집할 필요성을 인정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한 그룹의 약점은 다른 그룹의 약점으로 보완되었다. 지도부가 상황이 급변할 때마다 대체되었기 때문에 당의 지도적 중핵은 발전과 쇠퇴, 밀물과 썰물, 공격과 후퇴를 통해 넓어지는 더 광범한 경험을 습득할 수 없었다. 진정으로 혁명적인 지도부는 우리 시대를 갑작스런 변화와 급격한 전환의 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교육될 수 없다. 지명으로 선발하는 무작위 방식의 지도자 선발은 불가피하게 맨 처음의 주요한 사회적 위기에 지도부의 새로운 파산이라는 잠재적인 위험을 자체에 내포하고 있다.

    지도하는 것은 예측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유 있는 휴지기에 텔만은 알랑거리는 짓을 멈출 필요가 있었다. 오로지 반대파에 퍼부으려는 가장 야비한 욕설을 찾기 위해 하수도를 샅샅이 뒤져야 했기 때문이다. 담평산이 단지 텔만의 모욕을 중국어로 번역했기 때문에 제7차 전원회의에서 귀여움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독일 당은 텔만이 2월에 정치적 상황에 대해 통과시킨 견해가 야비하고, 독단적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 야 한다. 최근 5년 동안 저지른 전략적, 전술적 중대 실수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이들로 인해 입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기에 앞서 이를 의식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 전략적 교훈은 이들이 착실히 사태를 따라갈 경우에만 정착할 수 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저지른 오류나 벨기에의 노동자 혁명가들을 처벌하려는 게페우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들을 응징하기 위해 당지도자들을 대체하는 일은 중지되어야 한다. 젊은 중핵들이 자립심을 갖도록 이들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도와야 한다. 단지 선행에 대한 자신의 증명서 (즉, 이들이 반대파에 반대한다면)에 기초하여 지도적 지위에 '임명하는 일'은 중지되어야 한다. 보호를 위한 중앙위원회의 체계는 단호하게 포기해야 한다.


    5. 소련공산당의 현 좌경화는 어떻게 준비되었는가

    지도부의 좌경화에 부합하는 정확한 지점을 알아보기 위해 코민테른의 정책과 체제를 개괄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이 좌경화는 소련에서 경제적 위기를 야기한 조건에서 직접 유래했기 때문에, 또한 특히 국내 문제를 다루는 방침에 따라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과거는 물론이고 최근까지 어떻게 나타났으며, 이에 대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가장 최근의 새로운 결의문과 조치는 무엇인지 더 면밀하게, 그리고 더 자세하게 검토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만 뒤이어 계속될 정책의 올바른 방향이 우리 앞에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올해(1928년) 곡물 징수에서 경험한 이례적인 어려움은 경제뿐만 아니라 당과 정치 분야에서도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다. 이런 어려움이 좌선회를 부추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른 한편, 이런 어려움만으로도 경제와 일반적 정책의 대주기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입증할 수 있다.

    전시공산주의에서 사회주의 경제로의 이행은 노동자혁명이 즉시 선진 국가들로 확대되는 경우에만 거대한후퇴를 동반하지 않고 실현될 수 있었다. 이 확대가 몇 년 동안 지체되었다는 사실은 1921년 봄에 신경제 정책이라는 거대한 후퇴一깊고 지속적인 후퇴一로 우리를 이끌었다. 피할 수 없는 후퇴의 규모는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근거를 신중히 검토함으로써 결정되었다. 1921년 가을에는 이미 더욱 심각한 후퇴가 불가피했다.

    1921년 10월 29일, 즉 신경제정책으로 전환한 7개월 뒤, 레닌은 모스크바 지구협의회에서 이렇게 밝혔다.

    봄에 이뤄진 신경제정책으로의 전환, 이런 우리 쪽의 후퇴는 … 우리가 후퇴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공세를 취할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한 것으로 입증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아직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났다. … 따라서 우리가 타조 식으로 머리를 감추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닥친 위험을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제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후퇴가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을, 즉 우리가 국가자본주의에서 국가가 통제하는 구입, 판매, 화폐 유통의 창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더욱 후퇴할 추가적 후퇴를 실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 이런 이유로 우리는 결국 뒤이은 단계에서 공세로 나아가기 위해 계속 후퇴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의 처지에 있는 것이다. (레닌,《전집》, 제18권, 397쪽 이하)

    같은 연설의 뒤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1921년 봄과 1921~22년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현재에도 우리가 경제 분야에서 계속 후퇴하고 있다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노동자계급에게, 대중에게 숨기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완전한 인사불성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또한 상황을 정정당당하게 직시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활동하고 투쟁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앞의 책, 399쪽 이하)

    다음해(1922년) 봄에서야 레닌은 후퇴를 중지시킬 신호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1922년 3월 6일에 열린 금속노동자 대회 분파 회의에서 처음으로 이에 대해 말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자본가들에게 양보했다는 의미의 이런 후퇴가 끝났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바라건대, 당 대회는 러시아의 지도 정당의 권위로도 공식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앞의 책, 2부, 13쪽)

    그리고 곧바로 언제나처럼 진정으로 레닌주의적인 솔직하고 정직한 설명을 덧붙였다.

    후퇴의 중지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우리가 이미 새로운 경제의 토대를 구축했으며, 따라서 우리가 평온하게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 토대는 아직까지 구축되지 않았다. (앞의 책, 2부, 13쪽)

    레닌의 보고에 기초하여 제11차 당 대회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대회는 당이 작년에 사적 자본주의에 대해 필요한 양보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하고 적용한 조치들이 전부 한계에 이르고, 이런 의미에서 후퇴가 끝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의사록, 143쪽)

    깊이 심사숙고한 이 결의문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주의 깊게 준비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당이 잡은 새로운 출발점이 느리지만 새로운 후퇴의 움직임 없이 사회주의적 공세에 착수할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레닌이 이끈 지난 대회의 기대는 이 점에서 정확히 입증되지 않았다. 1925년 봄에 새로운 후퇴를 실행할 필요성이 생겼다 : 농촌의 부유층에게 노동자를 고용하고 토지를 임대함으로써 하층을 착취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

    1922년 레닌의 전략적 계획이 예측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가 엄청난 이 새로운 후퇴의 필요성은 단지 후퇴의 한계를 ‘너무 줄여’ 잡았다는 사실 때문에만 생긴 것이 아니었다(가장 기초적인 신중함도 이를 피할 수 없게 했다). 또한 1923~24년 중에 지도부가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자기가 책임진 임무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시간을 '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1925년 4월의 새롭고 고통스러운 후퇴는 레닌이 예상한 것처럼, 심각한 패배와 후퇴로 간주되지 않았다. 이것은 노농동맹이 승리를 거둔 단계이자, 사회주의 건설의 일반적 메커니즘에 단순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 레닌은 바로 이러한 바람직스럽지 못한 사태 진전에 대해 죽을 때까지 경고했다. 봄에 시작된 불가피한 후퇴가 계속해서 깊어진 1921년 가을에 특히 그랬다.

    (레닌은 앞에서 인용한 모스크바 지구협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로부터 모든 결론을 끌어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위험스런 패배가 아니다. … 우리는 패배를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패배의 경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만약 우리가 패배를 인정함으로써 진지를 포기하는 것과 비슷한 의기소침을 유발하고, 투쟁의 에너지를 약화시키는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러한 혁명가들이 땡전 한 푼의 가치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우리 강점은 미래에도 여전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 행동에서 바뀌어야 하는 것을 경험에서 배우면서, 가장 가혹한 패배도 더할 나위없는 냉철함으로 고려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이를 솔직히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 정확성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실천적 관점에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만약 어제의 경험이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기존 방식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새로운 방식으로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레닌,《전집》, 제18권, 1부, 396쪽)

    그러나 이런 주목할 만한 경고는 레닌이 지도부에서 물러난 이후 완전히 잊혀졌다. 정말로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기억되지 않았다.

    1925년 4월의 결정이 발전하고 있는 농촌의 분화를 합법화하고, 그 수문을 연 것인 한, 노농동맹은 노동자국가와 쿨락 사이의 상품 교환이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임을 뜻했다. 이 끔찍한 위험을 인정하는 대신에 쿨락을 사회주의로 흡수한다는 맹목적 이론이 즉시 만들어졌다. 이 과정의 완전한 형태가 세계경제, 세계혁명과 상관없이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으로서 당의 이름으로 당 협의회에 처음 제출되었다. 요컨대, 이 소부르주아적, 반동적 이론의 출현 자체는 사회주의 건설의 진정한 성공 때문이 아니다. 사회주의 건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이론은 바로 사회주의 건설을 방해하는 것, 그에 따라 지도자들 사이에 생겨난 필요를 위해 자본주의에 허용한 새로운 물리적 양보에 대한 평형추로서 노동자계급에게 '도덕적' 위안을 주는 것이다.


    산업화에 대한 제14차 당 대회(1926년 1월)의 결의문은 반대파가 1923-25년에 이 문제에 대해 발전시킨 일부 견해를 거의 글자 그대로 반복하면서 올바른 일련의 테제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 결의문과 나란히 '초산업주의자'라고 부른 좌익, 즉 단지 문서상에나 남아있을 결정을 채택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캠페인이 수행되었다. 쿨락의 위험에 대한 우리의 경고는 어리석은 '공포'를 지칭하는 것으로 제시되었다. 농촌에서 계급의 분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사실로 가정하는 것은 반(反)소비에트 선전으로 처벌되었다. 산업의 이점으로 쿨락에게 더 강한 압력을 가하자는 요구는 '농민을 약탈하는' 경향이라는 딱지가 붙었다(스탈린-리코프-퀴비셰프 선언). 결국 이 산업화에 대한 결의문은 당내 민주주의와 코민테른의 집단적 지도부에 대한 제14차 당 대회의 다른 일부 결의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제 경제 과정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1926년에 반대파는 1923년 봄 훨씬 전에 시작된 노농동맹에 대한 논쟁을 다음과 같은 식으로 정식화했다.

    질문: 반대파의 정책이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노농동맹을 분열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대답: 이런 비난은 철저히 잘못된 것이다. 노농동맹은 현재 한편으로 산업의 뒤처짐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 쿨락의 성장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부족한 산업생산은 농촌과 도시 사이를 이간시키고 있다.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쿨락은 중농과 빈농을 노동자계급에게 대립시키면서 이들을 지배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런 사태 전개는 아직 그 초기 단계에 있다. 이것이 바로 노농동맹을 위협하는 것이다. 산업의 뒤처짐과 쿨락의 성장에 대한 과소평가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독재의 토대인 두 계급 사이의 동맹에 대한 올바른 레닌주의 지도력을 혼란시킨다. (질문과 대답)

    우리가 1926년에 밝힌 '아직 그 초기 단계에' 있는 쿨락의 위험은 우리를 자본주의로 흡수할 길을 닦는데 적합할 뿐이며, 이런 쿨락을 사회주의로 흡수한다는 배신적 이론에 반대하여 상승하고 있는 투쟁이 격렬하겠지만 이 문제에서도 반대파가 과장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여기서 강조하자. 우리는 1923년 이후 위험이 다가오고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우리는 각각의 새로운 단계에서 위험이 커지는 모습을 묘사했다. 제때에, 즉 아직 '그 초기 단계에' 있으며, 그 이상의 발전 가능성을 막을 위험을 파악할 수 없다면, 지도부의 기예는 다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인가? 지도하는 것은 예측하는 것이다一예측할 수 있는 사람을 박해하는 것이 아니다.

    당을 가장 불행하게 한 것은 앞에서 인용한 노선을 공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를 퍼뜨렸기 때문에 가장 뛰어난 투사들이 공상을 품지 않은 관료들에 의해 당에서 제명되었다. 관료들은 내일을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그렇게 할 능력도 없었다.

    1926년 12월 9일에 열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에서 부하린은 노농동맹과 곡물 징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반대파를 비난했다.

    우리의 반대파가 당 중앙위원회에 대항하여 동원한 가장 강력한 주장은 무엇이었는가?(내가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1925년 가을이다) 당시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 모순이 무섭게 증가하고 있으며, 당 중앙위원회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또 이렇게 말했다 : 잉여곡물의 거의 전부를 수중에 집중시킨 쿨락은 우리에 대항하여 '곡물파업'을 조직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곡물이 대단히 부족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런 말을 들었다. … 반대파는 나머지는 모두 이 근본적 현상의 정치적 표현일 뿐이라고 평가했다. 뒤이어 같은 반대파 동지가 이런 말로 끼어들었다 : 쿨락은 더욱 부유해지고 있으며, 위험은 더욱 증대되고 있다. 동지 여러분, 만약 첫 번째와 두 번째 단언이 옳았다면, 올해 노동자계급에 대한 '쿨락의 파업'은 훨씬 더 강할 것이다. … 반대파는 우리가 쿨락의 성장에 기여하고 있으며, 우리가 계속해서 양보를 하고 있으며, 우리가 곡물파업을 조직하려는 쿨락을 돕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를 중상한다. 실제 결과는 정반대의 증거뿐이다. … (의사록, 제2권, 118쪽)

    부하린에게서 인용한 이 단문만으로도 우리 경제정책의 핵심 문제에 대한 지도부의 완전한 무지가 드러나지 않는가?

    그렇지만 부하린에게는 예외가 없었다. 그는 지도부의 무지를 이론적으로 '일반화했을' 뿐이다. 당과 경제의 가장 책임 있는 지도자들은 우리는 위기를 극복했다(리코프), 우리는 농민시장을 지배하고 있으며, 곡물 징수의 문제는 엄밀히 말하면 소비에트 기구의 순전히 조직적인 문제가 되었다(미코얀)고 선언하면서 서로 다뤘다. 1927년 중앙위원회 7월 전원회의의 결의문은 1927년 동안 경제활동의 발전은 전체적으로 볼 때, 어떠한 위기도 없이 이루어졌다고 발표했다. 동시에 공식 기관지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상당히 좋아진 농촌의 상품이 품귀를 빚고 있다고 일제히 주장했다.

    이 모든 것을 상쇄하기 위해 반대파는 제15차 당 대회를 위해 쓴 테제에서 다시 이렇게 말했다.

    한편으로 곡물 징수의 총량 감소는 도시와 농촌 사이의 관계에 존재하는 심각한 혼란의 직접적 증거이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새로운 어려움의 원천이다.

    우리 어려움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반대파는 이렇게 대답했다.

    최근에 산업은 국민경제 전체의 발전에 뒤처져서 대단히 완만하게 발전했다. 이 때문에 쿨락에 대한 국가경제의 의존과 원료, 수출, 식료품 분야에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증대하고 있다.

    반대파의 가장 날카로운 개입이 1927년 11월 7일의 10월혁명 기념 시위 중에 있었다는 점도 상기하도록 하자. 이 개입에서 정식화된 가장 날카로운 슬로건은 이것이었다 : '우리의 총구를 쿨락, 중개상, 관료 등 우익에게로 돌리자, 곡물 징수를 사보타주하는 쿨락과 중개상에게로 돌리자, 도네츠 재판 중에 조직적으로 단결하거나 손 놓고 쉰 관료에게로 돌리자.' 경미하지 않았으며, 어떤 점에서는 혁명의 두뇌가 걸린 논쟁은 게페우 첩자의 협박에 따라 1927~28년 겨울에 끝났다. 반대파에게는 형법 제58조에 따라 서둘러 유형에 처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은 특히 부하린의 무지는 일반적인 중도주의적 무지와도 다른 '일탈'이었다.

    이것이 1923년 테제로부터 시작하여 1927년 11월 7일의 플래카드로 끝난 반대파의 이전 활동 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면, 반대파가 미리 올바른 예측을 제시하지 않았다면, 반대파가 당과 노동자계급 대오에 충분히 이유 있는 경종을 울리지 않았다면, 곡물 징수의 위기는 단지 자본주의 세력을 더욱 부추기는 방향으로 우익 노선의 발전을 재촉했을 것이다.

    이전 역사에서 노동자전위, 아니 전위의 전위도 여러 차례 자기 계급의 전진을 위해 또는 적의 공격을 격퇴하기 위해 자신의 파멸로 대가를 치렀다.

     

    6, 일보전진, 반보후퇴

    중국, 영-러위원회, 기타 위기와 달리 곡물 징수의 위기는 조용히 지나칠 수 없었으며, 정책상의 새로운 국면을 향한 자극이 되었다. 전체 경제뿐만 아니라 노동자 각자의 일상생활에서도 곡물 징수 위기의 직접적 파문이 일었다. 이런 이유로 새로운 정치적 시기가 곡물 징수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과거와 어떠한 관련도 없이 당은 1928년 2월 15일자 〈프라브다〉지에 바꿔 말하기 위해 필요했는지도 모르는 논설을 실었다. 그런데 이 글은 부분적으로 제15차 당 대회에 제출된 《반대파의 강령》을 거의 문자 그대로 복제하고 있다.

    곡물 징수 위기의 직접적 압력에 따라 작성된 이 예기치 않은 글은 이렇게 공표했다.

    곡물 징수에서 경험한 어려움을 결정지은 많은 원인들 가운데서 다음에 말하는 것을 추려낼 필요가 있다. 농촌은 발전하여, 부유해졌다. 무엇보다도 쿨락이 발전하여, 부유해졌다. 3년간의 풍작은 그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이 아니다.

    요컨대, 농촌이 도시에 곡물을 주려고 하지 않는 것은 ‘농촌이 부유해 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즉, 이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은 부하린의 슬로건 ‘부자가 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노농동맹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침해하는 농촌의 부유화 이유는 무엇인가? 이 글은 이렇게 답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쿨락이 발전하여, 부유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쿨락과 빈농을 희생하여 중농이 발전했다고 단언하는 이론은 단지 쓸모없는 쓰레기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무엇보다도 쿨락이 발전하여, 부유해졌다.’

    그렇지만 농촌에서 쿨락이 부유해진 것도 도시와 농촌 사이의 교환 붕괴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쿨락과의 동맹은 사회주의적 동맹이 아니다. 그러나 곡물 위기는 심지어 이런 노농동맹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그래서 쿨락이 발전하여, 부유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체르보네츠(chervonetz : 10루블 금화)를 위해 자신이 저장해둔 천연산물을 교환할 필요를 깨닫지도 못한 것뿐이다. 자신이 원하지만 도시에서 구할 수 있는 상품에 대해서 쿨락은 도시 에는 절대적으로 불충분한 양의 곡물로 대가를 치른 것뿐이다. 〈프라브다〉지는 곡물 위기의 근본적 원인 밑에 있는 두 번째 원인도 설명한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공산품 공급에 직면한 … 농민의 수입 증대는 농민 일반, 특히 쿨락의 곡물 저장을 가능케 한다.’

    이제 전체적인 상황이 분명해진다. 근본적 원인은 뒤떨어진 산업이며, 공산품의 부족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협동조합에 속해 있는 빈농, 중농과 사회주의적 노농동맹을 맺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쿨락과의 자본주의적 노농동맹도 맺을 수 없다. 방금 언급한 〈프라브다〉지의 두 인용문을 이전 장에 제시된 반대파 문서의 인용문과 비교해보면, 〈프라브다〉지가 나의〈〈질문과 대답〉〉의 표현과 견해를 사실상 축어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 글은 당에서 나를 내치는 형벌의 상징이 되었다.

    그렇지만 〈프라브다〉지의 논설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여전히 쿨락이 ‘주요한 곡물 저장자’는 아니라는 유보조항을 달면서 글은 쿨락이 농촌의 경제 권력자이며, ‘더 높은 곡물 가격을 치르는 도시의 투기꾼과 노농동맹을 수립했으며’, ‘중농을 자기 뒤로 끌어당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다. 농촌에 존재하는 관계를 정확하게 특징짓고 있는 이런 묘사는 중농의 경제적 역할이 지배적이며, 계속해서 증대하고 있다는 최근의 공식적 전설과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반(反)당적 문서로 간주된 우리 강령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노동자 독재가 수립된 11년 뒤에 쿨락이 ‘농촌의 경제 권력자’이자 ‘중농을 자기 뒤로 끌어당길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중농은 수적인 견지에서 계속 농촌의 중심적 인물이었지만, 쿨락에 경제적으로 속박되어 있음을 알았다. 쿨락이 ‘주요한 곡물 저장자’가 아니라는 취지의 유보조항은 전체적인 상황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음침하게 한다. 만약 우리가 현재 쿨락의 덕분으로 여겨지는 곡물 무역의 몫으로 약간 의심스러운 20%라는 수치를 받아들인다면, 쿨락이 시장에서 중농을 ‘자기 뒤로 끌어당길’ 수 있다는 사실, 즉 국가의 곡물 징수를 사보타지하게 한다는 사실은 그 만큼 더 선명하게 튀어 보일 것이다. 뉴욕은행은 유통되는 상품 전체를 소유하지도 않지만 이를 지배한다. 누가 이 ‘적당한’ 20%를 증거로 간주하려고 시도하든 그렇게 함으로써 곡물시장에서 지배적 역할을 장악하기 위해 쿨락이 곡물의 5분의 1을 자기 수중에 두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강조할 뿐이다. 이렇게 해서 산업이 뒤처져 있는 상황에서 국가가 농촌경제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이다.

    쿨락의 ‘지도적’ 역할이 전체 지역에서가 아니라 몇몇 지역에서만 기록되었을 뿐이라는 취지의 또 다른 불가피한 유보조항은 변명도 아니다. 반대로 일어나고 있는 일의 심상치 않은 의미를 확실히 하기까지 한다. 이런 ‘몇몇’ 지역은 이미 도시와 농촌의 노농동맹을 그 토대에서부터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이 과정이 같은 정도로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것인가?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것은 생생한 경제적 과정이지 안정된 통계적 수단이 아니다. 이 가장 복잡하고 포괄적인 과정은 우리가 따라 나아간 것처럼, 양적으로, 그리고 정확하게 측정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 질을 결정해야 한다. 즉, 현상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는지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20%를 가지고 있다. 내일은 더 많이 가질지도 모른다. 일부 지 역은 앞서 나아갔다. 다른 지역은 뒤처져 있다. 실제로 농촌에서 쿨락의 권위와 쿨락이 중농을 자기 뒤로 끌어당길 가능성은 과거의 직접적인 잔재가 아니다. 그렇다, 과거에 우리는 쿨락 탄압에 뒤이어 일어난 신경제정책의 토대에서 비롯한 새로운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상이 더 뚜렷해 보이는 지역은 단지 더 ‘후진적인’ 지역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물론 5년 동안, 특히 1925년 4월 이후를 지배한 경제정책 노선이라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누구의 희생으로 새로운 ‘소비에트’ 쿨락이 농촌에서 권위를 얻었는가? 노동자국가와 지배적인 그 기관, 국영기업, 협동조합을 희생시킨 결과다. 만약 쿨락이 중농을 자기 뒤로 끌어당길 가능성을 얻게 된다면, 그가 누구에게 대항할 것인가? 바로 노동자국가다! 여기에 중대하고 심각한 경제적 노농동맹의 분열, 또 다른 전제인 훨씬 더 큰 위험, 즉 정치적 동맹의 분열이 있다.

    이것은 1923년 봄의 경우처럼, 더 이상 오늘날 사태를 예측하는 문제나 이론적 고려의 문제가 아니라 혹독하게 검증된 사실의 문제다. 노동자계급의 독재에도 불구하고, 토지의 국유화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보호하는 협동조합에도 불구하고 산업의 더딘 발전은 농촌을 몇 년 동안 사회주의 건설의 불구대천의 적의 지배 아래 두었다. 이것은 1928년 2월 15일자 〈프라브다〉지가 처음으로 인증했다. 

    이 모든 것에서 절망적인 결론을 끌어낼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에 앞서 분명하고 완전한 사실이 당에 제시되어야 한다. 조금도 과소평가하거나 윤색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이유로 〈프라브다〉지의 논설은 그 인색함, 확실치 않은 유보조항에도 불구하고 중대한 일보전진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이 문제에 대해 지난 5년 동안 지도부가 따른 노선과 반대파의 노선을 분리시키고 있는 거리를 상당히 줄인다. 모든 반대파 동지들은 이를 환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일보전진 다음에 적어도 반보후퇴가 뒤따랐다. 곡물 징수 견지에서 긴급한 행정적 조치 덕분에 심각한 상황이 조금 진정되자마자, 공식적 낙관주의라는 장치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최근(1928년 6월 3일) 중앙위원회의 강령적 선언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사회주의적 경제 부문의 훨씬 더 큰 성장에도 불구하고 농촌의 전반적인 생산력 증대에 기초하여 쿨락의 저항이 증대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이 진짜라면, 경보를 울릴 여지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행동방침을 혼란시키지 않고도 계속해서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조용히 건설하는 일만 남을 것이다. 만약 자본주의적 요소, 즉 특히 쿨락의 비중이 경제 안에서 해마다 하락하고 있다면, 쿨락의 기세에 밀려 매우 갑작스런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는 투쟁하고 있는 두 세력, 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역학관계에 의해 해결된다 一 누가누구를 패배시킬 것인가? ‘끔찍하든’ ‘해롭지 않든’ 쿨락은 이 관계가 바뀌는 방향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이 부분에서 중앙위원회의 선언은 경제에서 자본주의적 요소에 대해 사회주의적 요소의 우위가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제15차당대회의 결정을 헛되이 구하려고 한다. 그러나 정말로 〈프라브다〉지 2월 15일자 논설은 곡물 징수 중에 필요했던 전체 작전 과정에 의해 실제로 반증된 이 부정확한 테제에 대한 공공연한 반박이다. 어떻게 이것이 논리적으로 일치하는가?

    풍작을 거둔 3년 동안 비(非)사회주의적 부문에 비해 사회주의적 부문이 더 빨리 성장했다면, 우리는 아마 국영기업의 잉여생산물 一 농업에서는 상당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는 一 로 나타나는 상업이나 산업공황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대신에 우리는 곡물 징수에서 위기를 겪었다. 〈프라브다〉지 2월 15일자는 농민, 특히 쿨락의 농산품 一 공산품에서는 상당하는 것이 없는 제품 一 축적의 결과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3년간의 풍년의 결과인 곡물 징수의 위기, 즉 노농동맹의 위기와 악화는 경제적 과정의 일반적 역학관계에서 사회주의적 부문이 자본주의적, 사적 상품 부문 일반에 비해 더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지도부가 앞뒤 분간 못하는 것으로 드러나자마자 불가피해진 행정적 압력으로 이 관계에 도입된 조정은 어떤 식으로든 근본적 결론을 바꾸지 못한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것은 부분적일 뿐일지라도 쿨락이 이미 가담하고 있는 정치세력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전시공산주의의 무기고에 있는 긴급한 방식에 의지할 필요성 자체는 바로 경제생활 분야를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세력관계가 불리하게 바뀐 증거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결정적이며 심지어 더 중요한 또 다른 기준이 있다. 노동자계급의 물질적 조건이 그것이다. 만약 국민경제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사실이다), 사회주의적 축적이 사적 축적에 비해 더 빨리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현실에 반하는 중앙위원회의 선언처럼), 노동자계급의 상황이 최근에 왜 더 나빠졌는지, 최근의 공동약정이 왜 심상치 않은 충돌과 치열한 투쟁의 원천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비(非)노동자부위의 생활수준이 올라가고 있는 반면에, 노동자 부위의 생활수준이 떨어지고 있다면, 이와 같은 커지고 있는 자본주의적 요소에 대한 사회주의적 요소의 '우위'를 사실로 가정할 노동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노동자에게 치명적으로 악영향을 끼치는 이런 실천적 기준은 이론적 기준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며,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중앙위원회의 낙관주의를 반박한다. 경제와 생활 자체에 의해 제시된 이런 객관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적 부문의 성장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입증하려는 모든 시도는 얼토당토않은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진지를 넘겨준 데다 전투에서 입은 손실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는 군대 지휘관이 자기편이 우위에 있었다는 것을 교묘한 통계적 계수로 입증하려는 시도와 같은 것이다. 아니 쿨락은 경제적 무기를 가지고 수행된 경우에 한해, 매우 중요한 이런 전투에서 쿨락 쪽에 있는 것으로 드러난 우위를 입증했다(그리고 낙관주의를 받아들이게 한 통계적 조합보다는 그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 여성 노동자의 가계비도 이것의 증거이다. 누가 누구를 패배시킬 것인가의 문제는 경제의 생생한 역학관계에 의해 해결된다. 만약 수치가 투쟁의 명백한 결과이자, 생활 자체의 증언을 부정한다면, 수치는 사기일 것이다, 아니 기껏해야 전혀 다른 문제에 관련된 답을 제공할 것이다.

    정말로 우리는 1927년 사례에서 곡물 징수에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행정적인 개입을 했을 뿐만 아니라 통계에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개입을 경험하기도 했다. 제14차 당 대회 직전에 통계자료는 쿨락에 거의 완전히 ‘동화된’ 중앙위원회 서기국에 의해 갱신되었다. 이런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해서는 단지 며칠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나 기구의 전횡으로 상처 입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설사 우리가 통계의 융통성 있는 성질을 제쳐 놓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특히 우리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을 극도로 세분화한 통계는 언제나 뒤늦다는 사실이 여전히 남아 있다. 통계는 그 경향에 물들지 않은 채, 과정의 순간적인 횡단면을 제공한다. 이런 사실에서 이론이 우리를 도와야 한다. 과정의 역학관계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이론적 평가는 산업의 뒤처짐은 심지어 풍년도 사회주의 건설에 적의를 품을 것이며, 농촌에서 쿨락의 성장과 도시에서 더욱 길어진 식량배급 열을 낳을 것이라고 미리 예측했다. 이 예측은 사실이 되었으며,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제공했다.

    〈프라브다〉지 2월 논설에서 개괄한 곡물 징수 위기의 교훈에서 우리는 강제를 행사하고, 결과적으로 국가경제면에서 적자, 즉 노동자 독재의 경제적 토대의 비중 감소와 함께 증가하는 불균형을 그만큼 더 명백하게 확인한다. 이와 함께 우리는 중농을 자기 뒤로 끌어당기는 쿨락의 당면하고 직접적인 통제 아래 곡물 징수의 운명, 바꿔 말하면 노농동맹의 운명을 결정할 정도로 이미 심각한 농민의 분화를 확인하고 있다.

    만약 도시와 농촌 사이의 불균형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면, 만약 자본주의 세력의 일정한 성장이 불가피하게 우리의 현재 경제의 본질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작년의 불균형 악화와 쿨락 쪽으로 세력 관계가 바뀐 것은 전적으로 지도부의 잘못된 계급정책의 결과일 것이다. 지도부는 통제수단을 완전히 자유롭게 풀어주거나 이를 발작적으로 억제하면서 국민소득의 분배를 조직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반대파는 1923년 이후 전년 대비 체계적인 불균형 극복에 기초를 둔 확고한 계획노선만이 농촌에 대한 실질적인 지도적 역할을 국영기업에 부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더욱이 이에 반해서 산업의 뒤처짐은 불가피하게 농촌의 계급모순을 심화시키고, 노동자 독재의 경제 수뇌부의 비중을 낮출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따라서 우리는 제14차 당 대회 중에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하려고 한 것처럼, 단발적인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국영기업과 농촌경제 전체의 사적 상품 형태 사이의 결정적 관계에 기초하여 쿨락을 다뤘다. 농촌 경제의 범위 안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단발적인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중농의 더 부유한 계층과 농촌 전체에 대한 그 경제적 영향력과 관련하여 쿨락을 다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단발적으로가 아니라 세계시장과 관련하여 이런 근본적인 두 가지 내적 과정을 다뤘다. 세계시장은 수출입을 통해 우리의 경제 발전 템포에 대해 언제나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모든 것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우리는 제15차 당 대회에 제출한 테제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주로 농촌의 부유한 계층으로부터 수출 무역을 위한 잉여곡물과 원료를 획득하는 한, 그리고 바로 이런 계층이 대부분의 곡물을 저장하고 있는 한, 우리는 주로 쿨락과 부유한 농민에 의한 수출무역을 통해 ‘통제되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지도부가 앞으로 얼마 동안 이미 날짜를 정했기 때문에 반대파가 문제를 제기하는 데서 ‘미숙’했다는 이의가 제기될지도 모른다. 이러쿵저러쿵 해도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하기 위해 가장 중요해진 것을 매번 당에 공급한 이런 철없는 스탈린주의의 주장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거의 없다. 인상적인 증거 한 가지를 제시해보자. 1928년 3월 9일에 열린 모스크바 소비에트 회의에서 리코프는 곡물 징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캠페인은 의심의 여지없이 특별작업대(shock-brigade) 활동의 뚜렷이 구별되는 모든 특징을 띠고 있다. 만약 내가 곡물 징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더 정상적인 방법, 즉 이러한 특별작업대 캠페인에 의지하지 않고는 더 잘해내지 못했을 것인지 물었다면, 나는 더 잘했을 것이라고 솔직하게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허비했다, 우리는 곡물 징수의 어려움을 초기에 소홀히 했다, 우리는 곡물 징수 캠페인의 성공적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련의 조치를 제때에 취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프라브다〉지, 1928년 3월 11일자)

    만약 지연이 주로 행정적 관점에서 이런 말로 인식된다면, 정치적으로 이를 보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제때에 필요 불가결한 행정적 조치를 적용하기 위해 국가기구를 고무하고 지도하는 당은 〈프라브다〉지 2월 15일자 논설에서 제시된 것과 같은 적어도 일반적 방침을 위한 개략적인 자료를 제때에 제공해야 한다. 따라서 지연은 행정적인 성격이 아니라 당적-정치적 성격을 띠는 것이다. 반대파의 원칙적 경고는 제때에 귀 기울여 경청되어야 하며, 그 실천적 조치는 능률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작년에 반대파는 부분적으로 가장 부유한 농민기업 10% 중에서 1억5천에서 2억 푸드의 곡물을 강제 대출할 것을 제안했다. 이때 이 제안은 전시공산주의의 조치라는 혹평을 받았다. 당은 중농을 해치지 않는 쿨락을 짜내는 것은 불가능하다(제14차 당 대회의 스탈린)거나, 알다시피 쿨락은 노동자 독재의 틀 내에서 선험적으로 제약받고 있다(부하린)고 가르쳤다. 그러나 올해는 형법 제107조(즉, 곡물을 징수하는 억압 조치)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뒤 중앙위원회는 전시공산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반(反)혁명적 중상이라고 설명해야 했다. 비록 중앙위원회 자신이 바로 직전에 훨씬 더 신중하고 조직적인 반대파의 제안에 전시공산주의라는 딱지를 붙였지만 말이다.

    흰 것이 흰 것으로 불리고, 검은 것이 검은 것으로 불리는 한, 올바른 관점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와 미래를 예측할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다. 반대파의 관점은 이런 규정 아래서 나온 것이지만, 공식 지도부의 관점은 그런 적이 없다. 결국 사실은 최고기관보다 위에 있는 것이다. 작년 겨울의 곡물 징수 캠페인 이후, 공식 정책과 이데올로기의 심각한 위기를 낳으면서 권력층이 일으킨 히스테리 발작을 이제야 누구나 캐물을 수 있다. 반대파는 그 ‘오류’를 인정한다. 이러한 상황은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는 누가 옳았는가 하는 점이 아니다. 이 문제는 어느 노선이 옳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만 의미가 있다. 지도부의 방향 전환을 알리는 첫 번째 징후에 비추어 이 마지막 문제를 간과하는 것은 당에 대한 가장 비열하고 악명 높은 범죄일 것이다. 당은 아직까지 이를 알아볼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모든 조치, 논쟁, 단계는 당 자신이 투명해졌는가 그렇지 않은가 여부에 의지해야만 진정한 가치를 가진다. 원칙적 입장은 아직까지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미래는 보장되지 않았다. 일보 전진할 때마다 반보 후퇴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7. 책략인가 새로운 노선인가?

    현재의 좌선회는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이를 결합주의적 책략 아니면 진지한 새로운 노선, 즉 노동자노선과 국제정책의 부활로 볼 수 있는가? 불신이 완전히 만연해 있다.

    단지 당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 결정을 채택하는 것 一 이것이 현 지도부의 근본적 방식이 되고 있다. 산업화, 빈농, 중국혁명 문제에 대해 이들이 잇따라 채택한 결의문은 명백히 하고, 설명하고,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현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시치미 떼고 감추는 것이다. 레닌은 정치에서 멍청이만이 말을 믿는다고 말했다. 탈(脫)레닌주의 시기는 이 우매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멍청이도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책략인지 새로운 노선인지 여부는 계급의 내적 관계와 이것이 소련공산당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를 포함하는 문제이다. 나라의 유일한 당인 소련공산당은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그룹을 통해 다양한 계급의 압력에 다르게 반응한다.

    앞에서 인용한 ‘역사적인’ 〈프라브다〉지의 2월 15일자 논설은 이 문제에 관한 주목할 만한 고백을 담고 있다. 즉, 우리 당내에서 새로운 계급이 그룹화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것은 어쩌면 이 논설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일지도 모른다. 그 문구는 다음과 같다.

    당이나 다른 곳의 우리 조직 모두에서 당에 이질적인 특정분자가 최근에 나타났다. 농촌에서 계급을 보지 않는 사람, 우리 계급정책의 기초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농촌에서 아무도 해치지 않고, 쿨락과 평화롭게 살고, 대체로 농촌의 ‘모든 계층’에서 평판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려는 사람이다.

    여기서 언급한 것이 당원이기는 하지만, 위 이야기는 공산주의자와 대조를 이루는 신(新)부르주아, 테르미도르파(Thermidorian) 현실주의 정치인에 대해 거의 완전한 서술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프라브다〉지는 이들 분자가 어떻게 당에 들어왔는지에 대한 설명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들이 ‘나타났다’一이것이 전부다! 이들은 어디서 왔으며, 어떤 문을 통해 들어왔는가? 이들이 외부로부터 당에 잠입했는가? 게다가 어떻게 비집고 들어왔는가? 아니면 이들이 내부에서 싹텄는가, 그렇다면 어떤 토양에서 싹튼 것인가? 그런데 잘 들어두라, 이 모든 것이 농민 문제라는 노선을 따라 중단 없는 당의 ‘볼셰비키화’라는 조건 속에서 일어났다. 논설은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당이 어떻게 우스트리얄로프주의자(Ustrialovists)[니콜라이 우스트리얄로프(Nikolai Ustrialov, 1880-1937):입헌민주당 출신으로 모스크바 대학 교수였으며, 민족적 볼셰비키주의를 주창했다.]나 테르미도르파가 곡물 징수 정책에서 자신의 행정적 힘을 드러낸 순간까지도, 또 당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인정한 쿨락一중농을 자기 뒤로 끌어당기고, 곡물 징수를 사보타주한 一 이 어떻게 권력을 획득한 순간까지도 이들을 못보고 지나칠 수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프라브다〉지는 이 이상의 설명을 사양한다. 왜 귀찮게 해! 1928년 2월에 우리는 중앙기관지로부터 우리가 오래 전에 알고 있던 것, 그리고 우리가 여러 차례 밝힌 것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전해 들었다. 다시 말하자면, 새로운 신경제정책 쪽으로, 즉 서서히 자본주의로 끌어당기는 강력한 우익이 레닌의 당에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구체화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1927년 말 무렵에 이 문제에 대해 내가 말한 것이다.

    반대파에 대한 공식적 투쟁은 두 개의 기본적 슬로건 아래 수행되고 있다. 두 당 반대와 '트로츠키주의' 반대가 그것이다. 두 당 반대 투쟁이라는 스탈린주의의 사기는 전국적인 이중권력의 성장과 그 기치의 엄호 아래 소련공산당의 우익으로 결성한 부르주아당을 위장한 것이다. 일련의 장관 집무실에서, 서기국 회의실에서 반대파에 대한 투쟁 방법과 슬로건을 다듬기 위해 당기구의 추종자와 전문가, 우스트리얄로프주의 교수들 사이의 비밀협의회가 개최되었다. 이것이 진짜두 번째 당을 결성하는 것이다. 이 두 번째 당은 전력을 다해 그 자체에 복종하려고 애쓰며, 부분적으로 복종하는 우리 당의 노동자 중핵과 그 좌익을 몰살시키려고 한다. 이 두 번째 당의 결성을 감싸는 동시에 기구는 반대파가 두 번째 당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비난했다. 一 바로 반대파가 증가하는 부르주아적 영향력과 압력 밑에서 당의 노동자 중핵을 떼어놓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실패한다면, 볼셰비키당의 단결을 전혀 지킬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독재가 분할할 수 없는 당에 대한 주문으로 지켜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한 환상이다. 하나의 당 또는 두 당의 문제(말뿐인, 선동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유물론적, 계급적 의미에서)는 바로 당과 노동자계급 내부의 저항세력을 불러일으키고 결집할 수 있을 조치에 따라 결정된다. (새로운 노선에 대하여)

    6월에 스탈린은 두 번째 당 문제에 대해 모스크바의 고등연구소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쿨락경제의 발전과 전개에서 쿨락경제로 되돌아가 상황의 탈출구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분명히 우리 시대에 이러한 것에 대해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히 지주경제로의 복귀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은 소비에트 권력을 위해 … 쿨락경제의 전면적 발전의 필요성에 대해 그만큼 더 손쉽게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소비에트 권력이 동시에 상반된 두 계급, 즉 경제적 원칙이 노동자계급을 착취하는 것인 쿨락이라는 계급과 경제적 원칙이 모든 착취를 격파하는 것인 노동자라는 계급에 입각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반동들에게나 가치 있는 주문이다. 이런 반동적 계획은 노동자계급의 이해, 마르크스주의의 원칙, 레닌주의의 임무와 전혀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입증할 가치도 없다.

    이런 이야기는 《반대파 강령》의 첫째 장 도입부를 어느 정도 간소화한 설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스탈린이 아직 이것 때문에 유형에 처하겠다고 협박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 비밀을 지키지는 않는다. 물론 스탈린의 연설에서 두 번째 당 결성에 대한 노골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노동자당내에 쿨락의 자본주의 경제 쪽으로 노선을 돌리는 ‘사람들’(어느 쪽 사람들?)이 있다면, 단지 신중함 때문에 대규모 지주경제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자제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만약 호칭도 정해지지 않은 이런 '사람들'이 이와 같은 강령으로 서로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사이라면, 곡물 징수 중에, 산업계획, 임금체계 등등을 다듬는 중에 이 강령으로 지도되었다면, 이것은 바로 신(新)부르주아의 중핵, 즉 테르미도르파의 당일 것이다. 이는 장개석, 퍼셀, 쿨락, 관료 쪽으로 노선을 돌리지 않고도 볼셰비키당에서 가능하다. 아니, 이것은 단지 볼세비키당에서 있을 수 있는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볼셰비키당에서 자본주의의 발전 쪽으로 노선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우리의 문서 ‘새로운 노선에 대하여’에서 꾸밈없이 표현되었다.

    따라서 알 수 없는 원인에서 ‘나타나고 있는’ 우익이 곡물 징수 중에 처음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다시 한 번 100% 이질적 분자가 없음을 입증한 제15차 당 대회 이후, 다른 무엇보다도 장개석의 궁정 철학자인 대계도(載季陶, Tai Chi-tao)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계급과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라는 영향력 있는 당내 그룹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곡물을 시장에 가져오지 않는 쿨락을 발견했다. 이런 내재적 국민당주의자는 이른바 토론 중이나 당 대회에서 자기 생각을 들려주지 않았다. 물론 이런 영웅적인 ‘당원들’은 맨 먼저 ‘사회민주주의’로 일탈한 반대파의 제명에 찬성 투표했다. 또한 이들은 좌익의 모든 결의문에도 찬성 투표했다. 왜냐하면 결의문을 이해하는 법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내의 테르미도르파는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가다. 이들은 새로운 소유자, 소부르주아 지식인, 관료집단과 나름의 고유한 노농동맹을 맺는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경제, 문화 부문과 심지어 ‘국민국가’의 관점에서 당 활동까지도 지휘한다. 그러나 이들에 맞서 싸울 필요가 없을 만큼 우익이 약해질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현 좌선회 전체의 운명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먼저 드는 생각은 우익이 대단히 약하다는 것이다. 위에서 나온 외침은 곡물 징수와 부분적으로 일반적인 농민정책을 즉시 ‘좌익적’ 경로를 따라 지도할 필요가 있음을 충분히 입증했다. 그러나 바로 이 놀랄 만한 용이함은 그 결과로 우익의 약점에 대한 지나치게 성급한 결론을 경계하는 경고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얻었다.

    우익은 소부르주아적, 기회주의적, 관료적, 멘셰비키적이며, 자본가계급 쪽으로 끌어당기는 화해주의 분파다. 당내에 볼셰비키주의의 혁명적 중핵과 수많은 노동자가 있는데도 우익이 독자적 세력이 될 수 있고, 그 경향을 노골적으로 적용하여, 노동자계급 대중을 결집시킬 수 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현상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익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비(非)노동자계급의 압력을 기구에 전달할 만큼 강하다. 이것은 당내 우익의 힘이 당의 범위를 넘어 당 바깥에 위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관료기구, 새로운 소유자, 세계 자본가계급의 세력이다. 따라서 거대한 세력이다. 그러나 바로 우익이 당내에서 다른 계급의 압력을 반영하기 때문에 아직 그 강령을 노골적으로 제시할 수 없고, 당의 여론을 결집할 수 없는 것이다. 은폐물을 필요로 하는 당내 우익은 당 노동자 중핵의 경계를 잠재워야 한다. 당내 우익과 노동자 중핵 모두 기구 체제를 갖춘다. 당의 과장된 단일성 아래 기구는 혁명적 노동자의 견해로부터 우익을 덮어 싸는 동시에 반대파에 일격을 가함으로써 노동자를 겁먹게 한다. 반대파는 노동자계급 독재의 운명에 대해 노동자계급에게 경보를 울리는 의식적 표현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기구와 우익 사이에 존재하는 틈은 우익으로 하여금 잠정적으로 후퇴하여 때를 기다리는 반면에, 운동이나 파업을 줄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우익은 만약 기구가 테르미도르파 제거를 통한 자체 정화를 위해 당에게 진지하게 상황 분석을 청했다면, 우익은 일반당원에 의해 완전히 일소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일반당원은 파괴분자나 폭력단원 무리에 의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국내 자본가계급과 전 세계 자본가계급에 기댈 수 있는 당 내부의 지렛대가 없을 것이다. 물론 자본가계급의 총공격이 즉시 사라지거나 줄어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당에 대항해야 한다면, 적을 마주 보고 적의 세력과 의도를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당과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침투를 통해 작동하는 자본가계급의 은밀한 지하 방식의 압력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절반의 승리일 것이다.

    우익은 자신이 처해 있는 입장을 이해한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사실, 즉 당에게 사상과 대오를 진지하게 정화할 것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당의 사상과 대오는 지금까지 볼셰비키-레닌주의자(반대파)가 제시한 것과 다른 목표를 추구하고, 다른 슬로건을 채택함으로써 최근에 상당히 엉겨 붙어버렸다. 그러나 우익은 이때 반대파 자체에 대한 태도를 급격하게 바꿀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중도주의 기구의 냉소적인 원칙 결여가 노골적으로 알려질 것이다. 우익이 중도주의가 대담하게 그 활동을 바꿀 용기가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까닭이 없지 않다. 우익분자들이 이를 갈면서 후퇴함으로써 이들은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중도주의에게도 위험한 싸움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중도주의에게 자신의 요구를 제시한다 : 당내의 현 상태를 바꾸지 마라, 즉 좌익에 반대하는 우익과 중도주의의 블록을 깨지 마라, 현재의 긴급사태가 무조건적으로 요구하는 것에 비해 그 이상으로 좌익에게 다가가지 마라, 바꿔 말하면, 기존 방침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을 예비로 남겨두고, 즉시 신(新)신경제정책의 길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우익분자들은 자신들이 잠시 동안 될 수 있는 대로 조용히 좌선회를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어쨌든 이들에게는 간단한 책략일 뿐이다. 이들은 조용히 있으면서 마음의 준비를 한다. 이들은 외부로부터의 계급적 반응 덕분에, 내분, 관료기구의 은밀한 저항 덕분에, 무엇보다도 중도주의의 선천적인 지그재그 경향 덕분에 좌익적 실험이 실패하기를 기대한다. 우익은 자기 동맹세력을 잘 알고 있다. 한편에서 우익은 중도주의가 고안한 것이 아니라 단지 처음부터 반대파가 말한 것을 되풀이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좌우로 보여주면서 중도주의와 열심히 타협한다. 난처한 입장에 처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중도주의에 관한 한, 우익은 계속해서 반대파를 감옥에 처넣는다. 우익은 기구가 좌익에게 더한 타격을 가하려면, 자기들에게 더욱 의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들은 방어에서 공격으로 나아가는 것이 목표이며, 좌익적 실험이 패배(그리고 현재의 상황에서 우익은 이 패배에 확고히 의지한다)로 마무리될 때 복수하는 것이 목표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러한 만일의 사태는 결코 배제되지 않는다. 방향 전환이 당내의 현상유지에 기초를 두는 한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 더 불가피해 보인다.

    이것은 현재의 지그재그가 좌익 노선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고려해 넣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솔직해지자: 최근에 지도부가 추구한 정책뿐만 아니라 현재의 지도도 우리로 하여금 틀림없이 사태가 지도부의 통찰력과 일관성에 의지하는 한, 위 문제에 대해 회의적으로 답변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요지는 바로 당의 훨씬 더 광범한 집단과 더 광범한 계급계층을 바이스로 죄면서 초기의 책략이 심각한 정치적 지그재그로 발전했다는 사실에 있다. 더 광범한 계급계층은 기예를 위해 지도부가 구사한 지도력의 기예에서 책략의 역학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방향 전환에서 비롯되는 객관적인 경제적, 정치적 결과에 관심이 있다. 이런 영역의 문제는 방향 전환을 주창한 사람들의 선의, 일관성, 그리고 대개는 의도 자체가 훨씬 더 거대한 집단의 의지와 이해로 진지하게 바뀐 것을 깨닫는 경우 핵심에 이른다. 이런 이유로 현재의 지그재그가 일관된 노동자 노선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온당치 못할 것이다.

    어쨌든 그 견해와 경향에 의해 반대파는 현재의 지그재그가 레닌주의의 길로 가는 중대한 전환으로 확대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이러한 결과가 말하자면, 당과 독재를 위해 가장 적은 혼란을 포함하는 가장 건전한 결과일 것이다. 이것이 소비에트 국가의 개혁을 위해 필요 불가결한 전제인 당의 완전한 개혁의 길일 것이다.

     

    8. 현 위기의 사회적 기초

    당내 투쟁의 소음은 훨씬 더 심각한 혼란으로 반복될 뿐이다. 계급 속에 축적된 변화가 제때에 볼셰비키주의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으면, 10월 혁명 전체가 고통스런 위기 앞에 놓일 것이다.

    제15차 당 대회 이후 두 달도 안 되어 서둘러서 대회 시점에 올바른 것으로 간주된 노선과 결별한 지도부는 그 자체로 국제적 상황 전체와 관련하여 농촌에서 계급의 변화 과정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의 틀림없는 징후이다. 국제적 상황은 경제적 양이 정치적 질로 바뀌고 있다는 점에서 중대한 단계에 이르렀다. 이런 점에서 예측은 1923년 이후 몇 차례나 제출되었다. 이것은 제15차 당 대회 시점에 반대파의 테제에서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표현되었다.

    작고 왜소하기까지 한 농민과 소(小)소유자 일반이 압도적 다수를 이루는 나라에서 뒤이어서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갑자기 나타나기 위해서만 원자화되고 비밀스런 방식으로 어느 순간까지 가장 중요한 과정이 진행된다.

    분명히 아직 발전 초기에 있는 경우,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적 평가를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나 '예기치 않다.'

    중농을 자기 뒤로 끌어당긴 쿨락의 곡물파업, 자본가와 샤흐티(Sha- khty:사회주의적 생산을 사보타주하는 부르주아적 전문가)의 결탁, 국가나 당 기구의 영향력 있는 부위에 의한 쿨락 파업의 보호 또는 반(半)보호, 공산주의자가 기술자나 관료의 은밀한 반(反)혁명적 술책을 보고도 못 본 체할 수 있었다는 사실, 스몰렌스크나 다른 곳에서 '철의 규율'이라는 구실 아래 악당들에게 내준 타락한 면허 一 이 모든 것은 이미 가장 중요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건전한 방식으로 추론하는 공산주의자라면 감히 이것이 경제적, 정치적 과정 덕분에, 그리고 지난 5년 동안 당 지도부의 정책 덕분에 증대되지 않고, 특징이 되지도 않은 우연한 현상이라고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사실은 예측할 수 있고, 예측되어야한다. 누구나가 이용가능한 제15차 당 대회에서 반대파가 발표한 테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한편으로 쿨락, 소유자, 부르주아 지식인과 다른 한편으로 수많은 고리를 가진 국가와 당 관료집단 사이의 융합은 가장 명백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사회적 생활에 대한 가장 우려할 만한 과정을 이룬다. 이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위협하는 이중권력의 싹이 생긴 것이다.

    1928년 6월 3일 중앙위원회가 배포한 선언이나 회람장은 당과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국가기구에서도 '가장 타락한 관료주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회람장은 이 관료주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려고 한다 : (1) 과거 관료적 유산의 잔재, (2) 대중의 후진성과 몽매주의의 산물, (3) 대중의 '통치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 (4) 대중을 빠르게 국가통치로 끌어들이지 못한 점. 이 네 가지 사정은 실제로 존재한다. 이것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관료주의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관료주의의 거칠고 거리낌 없는 성장을 이해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지난 5년 동안 대중의 문화적 수준은 높아져야 했다. 당 기구는 더 월등한 속도로 대중을 통치 임무로 끌어들이는 법을 배워야 했다. 소비에트의 상황에서 자란 신세대는 오래된 관료들을 상당한 비율로 대체해야 했다. 그렇다면 그 결과로 관료주의는 쇠퇴해야 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바로 관료주의가 거대하게 성장한 사실에 있다. 관료주의는 '가장 타락한 관료주의'가 되었다. 관료주의는 위로부터의 명령에 따른 은폐, 협박, 경제적 조치에 의한 억압, 편애, 상호 협정을 통한 관료들의 결탁, 강자에 대한 양보, 약자에 대한 억압과 같은 통치방식을 체계로 구축했다. 소비에트 경제의 성장과 대중의 문화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기존 계급기구에서 이런 경향의 지나치게 빠른 부활은 계급적 원인, 즉 소유자의 사회적 강화, 국가기구와의 얽힘, 기구를 통해 당에 행사한 이들의 압력 때문이다. 증대하는 체제의 관료화의 계급적 원인을 이해하지 않으면, 악폐에 대한 투쟁은 곧잘 날개를 펄럭이지만 어떤 곡물도 빻지 못하는 풍차에 비길 수 있다.

    산업의 더딘 성장은 가격에서 배길 수 없는 '협상가격차'를 낳았다. 낮은 가격을 위한 관료적 투쟁은 농민에게 아무것도 주는 것 없이 노동자를 속여 빼앗으면서 시장을 요동치게 했을 뿐이다. 10월혁명으로 성취한 토지혁명에서 농민이 얻은 거대한 이익은 공산품 가격이 먹어치우고 있다. 노농동맹을 좀먹는 이것은 농촌의 광범한 계층을 내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자유무역이라는 슬로건을 가진 쿨락 쪽으로 밀어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무역업자는 유리한 경작지와 덮개를 찾는 반면에, 자본가계급은 해외에 기지를 취득한다.

    당연히 노동자계급은 크나큰 환상을 가진 압도적 대중 가운데서 훨씬 거대한 희망을 안고 혁명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발전의 더딘 템포, 그리고 대단히 낮은 물질적 생활수준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가까운 장래에 전체 사회체계를 완전히 바꾸려는 소비에트 권력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불가피하게 적어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지도부가 이미 코민테른을 장악한 지난 몇 년 동안 세계혁명의 패배는 같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들은 세계혁명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태도에 새로운 분위기를 이입할 수 없었다: 희망의 현저한 유보, 지친 부위들 사이의 회의론, 미성숙한 부위 사이의 노골적인 의심과 적의를 지니기까지 한 분노.

    이런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평가는 그 표현을 찾았다. 만약 이것이 당에서 발견되었다면, 가장 선진적인 층은 아마 국제혁명, 특히 자국의 혁명에 대해 다른 태도를 취했을지도 모른다. 이 태도는 덜 고지식하고, 숭고하며, 더 비판적이지만 그 대신에 더 균형 잡히고, 견실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사고, 판단, 포부, 열망은 안쪽으로 내몰렸다. 5년 동안은 오래되고 잘 알려진 슬로건 아래서 살았다: '생각하지 마라! 상층부가 당신보다 머리가 더 좋다.' 처음에 이것은 분노를 낳고, 그 다음에는 수동성, 마지막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침묵하게 하는 제약받는 생존을 낳았다. 본인 스스로 끝났다고 말하기 전까지 노동자는 사방에서 '이봐, 자네! 지금은 1918년이 아니야'라는 말을 들었다.

    노동자계급에 적대적인 또는 반(半)적대적인 계급과 집단은 국가기구나 노동조합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경제생활, 그리고 일상생활을 통해서도 느낀 노동자계급의 비중 감소를 감안한다. 따라서 증가하는 중간부르주아 계급과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소부르주아 계급 사이에서 나타난 넘치는 자신감이 나온다. 중간부르주아 계급은 우호관계를 회복했으며, 전체 ‘기구’와 긴밀하고 가족적인 유대를 재건했다. 그리고 자기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확고한 견해를 가졌다.

    소련의 국제적 지위 악화, 가장 노련하고 광신적인 영국 자본가계급의 지도 아래 세계 자본주의의 적대적 압력 증가一이 모든 것은 국내 자본가계급의 가장 비타협적 부위가 다시 머리를 쳐들게 할 수 있다.

    이것이 10월혁명의 위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는 최근 쿨락과 관료의 곡물 파업에서 부분적인 징후를 보였다. 당내 위기는 그 가장 일반적이고 위험한 반영이다.

    어쨌든 아직 반(半)비밀인 이중권력을 향한 이런 과정이 언제, 어떤 형태로 공개적인 정치적 형식을 띠려고 할지 멀리서 예측하는 것이 아직까지 불가능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 과정은 국내정책뿐만 아니라 국제적 상황에도 크게 의존한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혁명적 노선은 늘어가기만 하는 적이 공세를 취할 유리한 순간을 포착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추정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의 속담처럼, 나무보다 훨씬 높은 적에 직면하여 우리가 공세를 취하는 것에 있다. 잃어버린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다. 중앙위원회가 결국 대부분 자신의 정책에서 기인하는 불길한 사실에 대해 경보를 울린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경보를 울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보편적인 호소문을 내야 한다. 쿨락을 짜내자는 슬로건이 아직 지도적 분파에 의해 순전히 문필적 성격을 지녔을 때인 제15차 당 대회 이전에도 반대파는 그 테제에서 이렇게 말했다.

    쿨락과 네프맨을 짜내자는 슬로건은 … "만약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면, 모든 국가기관의 정책 전체의 변화, 새로운 방침을 전제로 한다. 지금 바로 분명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쿨락도, 다른 한편으로 빈농도 2년 동안(제14차와 제15차 당 대회 사이) 중앙위원회가 완전히 다른 정책을 수행했다는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앙위원회의 이전 입장에 대해 잠자코 있음으로써 테제의 기초자들이 정책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아마 새로운 칙령을 공포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완전히 명백하다. 그러나 일부 계급의 격렬한 저항을 극복하지 않고, 또한 다른 계급세력을 결집시키지 않은 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새로운 슬로건을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말은 현재에도 충분한 효력을 지니고 있다. 레닌주의의 길에서 우익 중도주의의 길로 당을 변화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볼셰비키 당내에서 계급을 '인정'하지 않는 영향력 있는 분파를 만들고 강화하기 위해서, 당이 이 분파의 존재에 공적인 주의를 기울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지도부에게 몇 년 동안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제15차 당 대회가 폭로하지 않은 이 분파에게 당을 통해서가 아니라 곡물교환을 … 통해서 공식적으로 알려지도록 하기 위해서一이 모든 것에 더하여 쿨락의 사회주의로의 통합을 바탕으로 하여, 그리고 굶주린 사람의 기생적 심리를 모방하여 수많은 스탈린주의자와 부하린주의자를 밀어 넣은 것에 더하여, 단지 이들이 쿨락의 존재를 알아차렸기 때문에 통계국을 파괴한 것에 더하여, 전선(全線)에 걸친 지각없는 관료들의 승리에 더하여,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많은 것에서 궤변을 늘어놓는 강단사회주의자(Katheder-Sozialisten)라는 새로운 선전가 양성소 수립 등 새로운 방침을 지지하는 쉴 새 없는 선전에 5년이 걸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좌익 노동자에 대한 악의적인, 분별없는, 막돼먹은, 배신적인, 독단적인 박해가 가해졌다. 그 사이에 당내의 모든 테르미도르파(〈프라브다〉지의 의미심장한 표현에 따르면, '나타난' 사람)가 모습을 갖추고 통합되어 연줄, 유대, 공감을 갖게 되었으며, 당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어 거대한 대중이라는 토양에 깊숙이 그 뿌리를 뻗쳤다. 이 모든 것은 그 표현방식이 아무리 기운차더라도 조그만 회람장을 통해 제거될 수 없다. 재교육할 필요가 있다. 교정할 필요가 있다. 재편성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두꺼운 쟁기로 잡초가 무성한 밭을 갈 필요가 있다.

    반대파는 허약하고, 무능력하다는 생각으로 자기 자신과 당을 달래려는 시도는 반대파에 대한 격렬한 투쟁과 융합될 수 없다. 반대파는 박해의 포화 속에서 달궈졌으며, 당에 대한 충성심에서 흔들림이 없는 중핵과 사태에서 검증된 행동강령을 가지고 있다. 상승하는 역사적 노선을 표현하는 이러한 중핵은 제거되거나 파괴될 수 없다. 반대파는 당이라는 검의 칼날이다. 이 날카로움을 약화시키는 것은 적에 대항하여 들어 올린 칼을 무디게 하는 것이다. 반대파의 문제는 전체 좌익 노선의 중심점이다.

    세계혁명의 당당한 발전만이 대외적 위기뿐만 아니라 국내의 위기로부터도 진정한, 완전한 해방을 이끌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기초이다. 그러나 이것과 부하린주의자의 스콜라주의가 우리에게 그럴듯하게 늘어놓은 공허한 숙명론 사이에는 다리를 놓을 수 없는 거대한 공간이 벌어져 있다. 위기가 계속되고 있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은 지배적인 자본가계급의 정책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올바른 정책은 부르주아 국가를 일으켜 세우고, 잘못된 정책은 파괴시키거나 지체시킨다.

    공식적 스콜라주의는 기계적 결정론(숙명론)과 주체적인 자기의지 사이에 유물변증법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숙명론은 '이러한 후진성에 직면하여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속류 주관주의는 '이것은 식은 죽 먹기다! 우리는 그럴 의지가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라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만약 여러분이 세계의 상황과 국내의 후진성에 의존해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면, 올바른 정책으로 일어서 자기 입장을 견고히 하고, 당당히 세계혁명으로 여러분 스스로를 통합시킬 것이다’라고 말한다.

    선진국 노동자계급이 확고하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위기는 이행기 소비에트 체제에서 불가피하다. 그러나 지배적인 정책의 임무는 소비에트 체제 내의 위기가 체제 전체의 위기가 될 정도로 축적되는 것을 막는 데 있다. 이를 위한 첫째 조건은 지배계급인 노동자계급의 입장과 자각이 유지, 발전, 강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유일한 도구는 자주적으로 행동하고, 유연성이 있으며, 능동적인 노동자 당이다.

     

    9. 당의 위기

    일반적 정책뿐만 아니라 올바른 경제정책은 1923년 이후 얻지 못한 올바른 정식화만으로는 보증되지 않는다. 노동자 독재의 정책은 사회의 모든 계급층이 줄곧 신중히 검토한 것에 기초해서만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정책은 굼뜨고, 많은 점에서 부적절한, 유연성이 없는, 둔감한 관료적 기구를 통해 수행될 수 없다. 노동자 독재의 정책은 살아 있으며 능동적인 노동자당을 통해, 공산주의의 척후병, 선봉자, 사회주의의 건설자를 통해 수행되어야 한다. 증대하는 쿨락의 역할이 통계적으로 기록될 수 있기 전에, 이론가가 이를 일반화할 수 있기 전에, 정치인이 이를 명령어로 옮기기 전에 당은 무수한 촉수를 통해 이를 감지할 수 있어야 하며, 경보를 울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위해 당 전체의 대중은 예민하고 유연해져야 하며, 무엇보다도 관찰하고, 이해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 국영기업의 사회주의적 성격은 실제로 상당히 원자화되어 있다. 다양한 트러스트와 공장들 사이의 경쟁, 노동자 대중의 어려운 물질적 상황, 중요한 임금노동자 집단의 불충분한 문화적 수준 때문이다. 산업의 사회주의적 성격은 당의 역할, 노동자 전위의 자발적인 내적 응집력, 관리자, 노동조합 관료, 공장세포원들 등의 의식적 규율에 따라 취한 결정적 조치로 결정되고 보증된다. 만약 우리가 이 망이 약해지고, 부서지고, 찢어지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짧은 기간 안에 국영기업, 운송수단 등의 사회주의적 성격이 전혀 남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무조건 자명해질 것이다. 트러스트와 개별 공장은 독립생활을 살기 시작할 것이다. 현재도 대단히 미약한 초기의 계획은 그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의 경제투쟁은 세력관계가 자유롭게 남겨둔 영역을 얻을 것이다.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는 처음에는 법률상의 의제(換制)로 바뀔 것이고, 나중에는 법률상의 의제까지도 폐지될 것이다. 따라서 이 점에서도 문제는 노동자 전위의 의식적인 응집력, 관료주의의 녹과 우스트리얄로프주의의 고름으로부터 노동자 전위의 보호로 정리된다.

    하나의 체계처럼, 올바른 정치노선은 이를 정교화하여 적용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이 당에 없다면 전혀 상상할 수도 없다. 어떤 자극에 영향 받아 이 문제나 다른 문제에 대해 관료적 지도부가 올바른 노선의 자국에 발부리를 채일지도 모르지만, 이 노선이 실제로 계속 수행되었을지, 아니면 내일 다시 중단되지 않았을지는 전혀 보장할 수 없다. 당 독재라는 상황에서 인류 역사에서 어떤 정치조직도 행사한 적이 없는 거대한 권력이 지도부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도부가 노동자적, 공산주의적 방식을 유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각각의 관료적 왜곡, 각각의 잘못된 조치는 전체 노동자계급에게 즉각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 사이에 탈(脫)레닌주의 지도부는 의식적인 노동자 민주주의를 사활을 걸고 보증하는 것에 우선하여 부르주아 사이비 민주주의를 위해 노동자 독재를 더욱 적대시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이것은 레닌이 마지막 생애 중에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충분한 역사적 범위에서, 그리고 그 모든 구체적인 일상적 양상 속에서 이 문제를 심사숙고했다. 첫 번째 와병을 이기고 복귀한 레닌은 특히 당내에서 성장한 관료주의에 섬뜩해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중앙통제위원회를 제안했다. 레닌이 기대했던 것의 정반대를 의미한 중앙통제위원회는 이제 존재하지도 않는다. 레닌은 승리자의 역사에서 패배자의 도덕을 타락시키거나 채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점을 당에 상기시켰다. 그는 힘 있는 자리에 있는 공산주의자가 하급자에 대해 난폭한 행동을 하거나(오르조니키제의 주먹다짐 사건), 계획적인 불법을 다룬 모든 기사에 불같이 화를 냈다. 그는 스탈린의 무례함에 대해, 배반행위의 의형제이자, 모든 권력을 휘두르면서 당을 파괴하는 끔찍한 도구가 된 내부의 도덕적 야만성에 대해 당에 경고했다. 이것은 레닌이 문화나 문화적 발전 一 부하린이 제시하는 저속하고 어리석은 계획이 아니라 아시아적 도덕, 봉건주의와 야성의 유산, 대중의 무지와 지각없는 관료들의 착취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투쟁이라는 의미에서 一 에 대해 열정적으로 호소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최근 5년 동안 정반대 노선을 추구한 당 기구는 부르주아 의회 '민주주의'에 의해 정교화된一사기, 위장, 표리부동 一 특정한 왜곡을 국가기구에 첨가하면서 국가기구를 속속들이 관료적으로 변형시켰다, 그 결과, 지도부는 의식적인 당내 민주주의 대신에 당 관료집단을 강화하기 위해 고안된 레닌주의의 날조와 각색, 공산주의자와 노동자에 대한 끔찍하고 과도한 권력 남용, 당의 선거기관에 대한 기만적인 조작, 부르주아 파시스트 권력이라고 허풍 떨었는지도 모르지만 결코 노동자당이라고 자랑하지는 않은 토론에 적용된 방식(폭력배 선발, 명령에 따라 휘파람 불고 야유하기, 연설자를 연단에서 끌어내리기, 이와 비슷한 혐오 행위), 특히 최근 기구와 당 사이의 관계에서 전선(全線)에 걸친 동지적인 결속과 의식의 부재를 낳고 형성시켰다.

    당 기관지는 흥미를 끄는 폭로를 가장하여 아르테몹스크, 스몰렌스크 등지의 사례를 발표했다. 중앙위원회는 반(反)부패 투쟁을 호소했다. 그리고 이것은 문제를 소멸시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여태껏 논의된 적조차 없다.

    처음부터 광범위한 당 서클은 단지 일부만이 발표되었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一일반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드러난 것만 다뤘다. 거의 모든 지역이 크든 적든 나름의 '스몰렌스크' 사건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사건이 일어난 첫째 날도, 심지어 첫해도 아니었다. '자기비판' 시기 훨씬 전에 치타, 헤르손, 블라디미르, 그리고 다른 많은 지역에서 결국 즉시 사라졌을 뿐인 사건이 터졌다. 어떠한 감시도 받지 않고, 암암리에 드러난 지역위원회의 서기들 100%가 자기 가족과 수행원 유지비에 거액을 낭비했다. 매번 이러한 사건이 폭로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잘 알려진 범죄가 명백히 자리를 잡았다. 때로는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 천 명의 당원이 잠자코 있었다. 이들은 대개 1~2년이나 3년까지 침묵을 지켰다. 이런 상황이 신문에서 평범하게 언급되었다. 그러나 결론을 내린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반대파의 문서에서 매우 사려 깊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언급된 것을 정말로 반복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요한 결론을 끌어내지도 않고 스몰렌스크 등지의 폭로는 당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이 흐트러진 당을 환기시키는 센세이션에 그쳤다.

    사태의 핵심은 기구가 당에서 독립하면 할수록 기구 추종자들은 서로 더욱 의지한다는 사실에 있다. 상호보험은 국부적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관료체제의 기본적 특성이다. 일부 기구 추종자는 혐오감을 주는 행위에 빠지지만 나머지는 침묵을 지킨다. 그렇다면 당의 대중은 어떠한가? 당의 대중은 겁을 집어먹었다. 그렇다, 10월혁명을 성취한 레닌의 당에서 노동자 공산주의자는 이러한 것을 숨김없이 큰소리로 말하는 것을 꺼리고, 이러한 100% 기구 추종자는 건달, 착복자, 불량배다. 이것이 '스몰렌스크' 폭로의 근본적 교훈이다. 이 교훈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혁명가가 아니다.

    용어의 사회적 의미에서 아르테몹스크, 스몰렌스크 등 사건의 영웅은 누구인가? 그는 당의 적극적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더 이상 노동자 독재의 기수가 아닌 관료다. 이데올로기적으로 그는 고갈되었으며, 도덕적으로 거리낌이 없다. 그는 특권이 있으며, 대개의 경우 아주 교양 없으며, 술고래, 방탕자, 불량배인 책임을 지지 않는 관료다. 요컨대,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조사관(데리모르다[Derjimorda]) 타입의 사람이다(당에서 계속 숨긴 민족문제에 대한 레닌의 편지를 보라). 그러나 우리의 영웅은 나름의 '특이한 버릇'이 있다 : 빗발치는 발길질과 구타, 국가자원을 낭비하거나 뇌물 받기, 소비에트 조사관은 '신의 뜻'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건설'을 두고 맹세한다. 아래로부터 그에게 지시하려고 시도한 경우, 그는 오래된 고함 '반란이다!' 대신에 '트로츠키주의자다!'라는 고함을 지른다. 그리고 승리를 거둔다.

    〈프라브다〉지 5월 16일자에 실린 중앙통제위원회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기사는 스몰렌스크 사건에서 끌어낸 다음과 같은 교훈을 담고 있다.

    우리는 당원과 악폐를 알고도 침묵을 지키는 계급의식적인 노동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단호하게 바꿔야 한다.

    '우리의 태도를 바꾼다?' 그렇다면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두 가지 태도를 가질 수 있는가? 그렇다. 이것은 중앙통제위원회 상임간부회의 위원이자, 노동자 농민 감찰기구의 부(副)인민위원인 야코블레프(Yakov-lev)가 인정했다. 범죄에 대해 알고 침묵을 지킨 사람은 그들 자신이 범죄자라고 생각한다. 그 죄책감의 유일한 정상 참작은 자신의 무지에 있거나, 겁을 집어먹은 것에 있다. 그러나 야코블레프는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라 '당원과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를 언급한다. 어떤 압력과 어떤 공포가 노동자 당원으로 하여금 아마도 그들 자신이 선출하고 이들에 대해 책임이 있는 개인들의 범죄에 대해 비열하게 침묵을 지키게 하는 것인가? 이것이 정말로 노동자 독재의 무서움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 공포는 당과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겨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른 계급의 압력과 공포라고 말하려는 것인가? 분명히 그렇다. 왜냐하면 초계급적인 사회적 압력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 당을 압박하는 억압의 계급적 성격을 규정한 바 있다 : 당 기구 추종자들의 결탁; 국가 관료집단, 부르주아 지식인, 소부르주아 계급, 농촌의 쿨락과 당 기구 사이의 무수한 고리의 융합; 국내의 세력 역학에 가해지는 세계 자본가계급의 압력一이 모든 것은 당 기구를 통해 당에 가해지는 압력인 사회적 이중권력을 창출한다. 바로 이것이 최근에 증대되었으며, 당의 노동자 중핵을 위협하기 위해, 반대파를 몰아세우기 위해, 따라서 조직적 방식에 의해 물리적으로 반대파를 몰살시키기 위해 기구가 이용한 사회적 압력이다. 이 과정은 하나이며, 분리할 수 없다.

    일정한 한계 안에서 이질적인 계급적 압력은 당보다는 오히려 기구를 고조시키고, 강화하고, 자신감을 심어준다. 기구는 자기 '권력'의 원동력을 번거롭게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기구는 당에 대한 승리, 레닌주의 노선에 대한 승리를 자신의 현명함 때문이라고 자기도취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저항에 부닥친 적이 없기 때문에 강해지는 압력은 단지 기구의 지배를 위협할 뿐인 곳에서 한계를 뛰어넘어버렸다. 위협은 훨씬 더 영향력 있는 것이다. 꼬리가 머리를 치기 시작하고 있다.

    당원과 계급의식적인 노동자가 압도적 대중 속에서 당 기구 추종자들의 범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리게 하는 이와 같은 상황은 하룻밤 사이나, 일격에 제거될 수도 없고, 우연적으로 생긴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강력한 기구 관료주의의 판에 박힌 수법뿐만 아니라 기구를 중심으로 하여 꽉 달라붙은 거대한 이해관계와 연줄에도 직면해 있다. 게다가 우리는 자기 기구 앞에서 무기력한 지도부를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역사의 법칙과 비슷한 것도 가지고 있다 : 당에 덜 의지하는 지도부는 더욱 기구의 포로가 된다. 반대파가 중앙집중화된 지도부를 약화시키고 싶어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취지의 모든 소문은 터무니없고 근거 없는 것이다. 노동자 노선은 철의 중앙집중주의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나 불행은 바로 현 지도부가 당의 관료 세력이라는 이유에서만 전능하다는 사실에 있다. 즉, 인위적으로 원자화된 당 대중에 대해서는 강력하지만 자신의 기구에 대해서는 무기력하다.

    자신의 중도주의 정책의 결과에서 도피하려는 시도는 '자기비판'이라는 동종요법을 표면화시켰다. 스탈린은 돌연 '노동자혁명을 강화하는 방법인 자기비판'에 대해 말한 마르크스에 의지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 스탈린은 자신이 무단 침입하는 것을 금지시킨 경계에 접근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마르크스의 자기비판이 의미한 것은 무엇보다도 잘못된 환상으로부터 자기해방해야 하는 노동자계급이 이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4계급 블록', 일국사회주의, 보수적인 노동조합 지도자, '우리는 자본가계급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는 슬로건, 동방을 위한 '두 계급' 당, 결국 자신들이 궤멸시킬 때까지 멘세비키주의의 낫으로 중국혁명을 난도질한 최근 3년 동안 스탈린과 부하린이 떠맡긴 다른 반동적 쓰레기가 그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메스인 자기비판이 실제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점에서 바로 종전처럼, 자기비판을 적용하는 것이 금지된다. 스탈린은 다시 한 번 '전력을 다해, 그리고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이와 같은 자기비판과 싸우겠다고 위협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 국제 노동자 전위의 대오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세력이나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 * *


    1927년 전원회의 중에 반대파는 지도부에 반대하여 당에 호소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밝힌 반대파의 연설에 답하여 몰로토프는 '이것은 반란이다!'라고 말했으며, 스탈린은 '이런 중핵은 내전을 통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자기 말을 이해시켰다. 이것은 '초당', '초계급', 지배적 기구의 오만한 성격에 대한 투쟁이 한창일 때 대부분 완성된 편견 없는 정식이었다. 이런 생각은 우리 당과 소비에트 체제의 토대에 깃들어 있는 생각과 정반대다. 관료적 초인의 생각은 현재의 소규모 권력찬탈의 원천이며, 대규모 권력찬탈을 가능하게 할 무의식적인 준비의 원천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최근 5년 동안 위에서 단단히 죄고, 위에서 지명하고, 위에서 부추기고, 선거를 조작하고, 대회와 협의회를 1~2년 또는 4년 동안 일축하고 끝없이 날조하는 '재평가' 과정에서 모습을 갖췄다. 요컨대, '전력을 다해, 그리고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싸우는 중에 구체화했다. 수뇌부에서 이것은 생존 자체와 더욱 크게 충돌하게 된 견해에 대한 필사적 투쟁이었다. 이 투쟁의 근저에서는 대개 자리, 명령할 권리, 특권적 지위를 위한 광신적 도박이 벌어졌다. 그러나 적은 어떤 경우든 같다. 즉 반대파다. 주장과 방법도 같다 : '전력을 다해, 그리고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말할 필요도 없이, 당 기구의 추종자 대부분은 자기 희생할 수 있는 정직하고 헌신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체제에 있다. 그리고 체제는 그 불가피한 결과로 스몰렌스크 같은 사건을 생산한다.

    선의의 관료는 가장 큰 역사적 임무에 대한 해결책을 '우리는 단호하게 바꿔야 한다'는 정식에서 찾는다. 당은 답하여 이렇게 말해야 한다 : '반드시 바뀌어야 하는 사람이 당신은 아니지만, 단호하게 바뀌어야 하는 사람은 당신 자신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제거하고 대체해야 한다.'

    1928년 7월 12일

     

  • 전설의레전드소설책
    17.06.21

    단군 할아버지는 환 ( 환인) 야훼 하느님 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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