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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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주의자.
17.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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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사 제 2권 및 제 3권 서문

러시아는 부르주아 혁명을 너무 늦게 성취했기 때문에 이 혁명을 노동계급 혁명으로 전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말로 하면 러시아는 다른 나라들보다 너무 뒤져서 최소한 일부 분야에서는 이 나라들을 추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일관되지 못한 주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사는 이러한 역설들로 가득하다. 자본주의 영국은 다른 나라들보다 너무 앞섰기 때문에 이들의 뒤를 따라가야 했다. 현학자들은 변증법이 한가한 두뇌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변증법은 모순들을 통해 존재하고 움직이는 사물의 발전과정을 재현할 뿐이다.

본 저서의 제 1권은 짜르 체제를 대신하여 뒤늦게 등장한 민주주의 체제가 생존능력이 전혀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이제 본 저서 제 2권과 3권은 볼세비키당이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을 묘사할 것이다. 여기서도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서술 방식이다. 제시되는 사실 자체에서 독자들은 유추의 근거를 얻게 될 것이다.

필자는 사회학적 일반화를 물론 회피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가르치는 것이 없다면 역사는 아무 가치가 없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원대한 의도, 그 단계들의 연속성, 저지할 수 없는 대중의 압력, 정치 조직들의 완성된 모습, 구호들의 간결함 등은 모두 혁명 일반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 사회에 대한 인식을 증진시킨다. 내적 모순들로 갈가리 찢겨진 사회는 혁명을 통해 그 구조 뿐 아니라 "영혼"도 결정적으로 드러낸다. 러시아 혁명사 전체가 이 점을 입증했다고 볼 수 있다.       

좀더 직접적으로 본 저서는 소련 사회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본 저서의 주제가 시기 적절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10월 혁명은 아직 살아있는 세대의 눈앞에서 벌어졌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둘째, 혁명으로 탄생한 체제는 아직도 살아서 진화 중에 있으며 인류에게 더욱 새로운 수수께끼들을 던지고 있다. 전세계에서 소련의 문제는 단 한순간도 잊혀질 수 없다. 이것이 탄생한 정황을 사전에 검토해야 모든 사물은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커다란 틀 속에서 정치 사건들을 평가하려면 역사적 시야가 꼭 필요하다.

1917년 2월부터 10월까지 8개월간 전개된 혁명을 묘사하는데 3권의 저서가 소요되었다. 그러나 본 저서가 지루하다고 비난한 비평가는 대체로 없었다. 본 저서가 길어진 이유는 소재에 대한 접근방식 때문이다. 손 하나를 찍은 사진은 한 페이지로 족하다. 그러나 손의 조직들을 현미경으로 조사한 결과들을 제시하려면 한 권의 책이 필요하다. 필자는 본 저서가 완벽하다는 환상을 품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많은 경우 카메라보다는 현미경에 가까운 조사 방법을 필자는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자들의 참을성을 과도하게 요구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었다. 이럴 때에는 일부 증인들의 증언, 혁명 참가자의 고백, 일부 부차적인 일화 등을 삭제했다. 그러나 나중에 이것들을 대부분 다시 집어넣은 경우도 자주 있었다. 특히 자세하게 묘사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심할 때가 있었다. 이 때에는 혁명의 과정 자체를 가능하면 구체적으로 보여주자는 욕구가 필자를 지배했다. 특히 실제 경험한 것을 서술할 기회가 필자에게 제공된 만큼 이 특권을 필자는 최대한 활용해야했다.

개인적 연애의 새로운 변종, 우울한 자들의 심적 동요에 대한 이야기, 야망을 가진 자들의 역정 등을 묘사하는 책들이 매년 수십만 권씩 시장에 쏟아져 나온다. 프루스트가 쓴 소설의 여주인공은 섬세하게 묘사된 여러 페이지를 경과한 후에야 자신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느낀다. 그렇다면 최소한 같은 정도의 관심을 집단적 역사 드라마 시리즈에 할애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을 것이다. 특히 이 드라마가 수억 명의 인간을 사회적 무(無)존재의 늪에서 끌어올리고 민족성을 변화시키면서 영원히 모든 인류의 삶에 개입하는 역사 드라마일 경우는 더욱 그럴 것이다.

본 저서 제 1권의 참조사항과 인용문의 정확도에 대해 아직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기는 정말 어려울 것이다. 사실과 글을 인위적이고 일방적으로 선정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편견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이것이 본 저서를 비판하는 자들의 견해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그 자체로는 반박할 수 없겠으나 본 저서에 대해서는 전혀 무의미하다. 특히 본 저서가 채용하고 있는 과학적 서술 방식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특히 필자는 마음놓고 확고히 이렇게 주장한다: 개인적 편견이나 주관성은 역사 서술자의 기질이 아니라 그의 서술 방식에 의해 규정되고 제한되고 시험된다.

순수 심리학파는 역사 사건들을 개별 인물들이나 이들이 속한 그룹의 자유 의지가 중첩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하더라도 역사 서술에 자신들의 변덕을 자유로이 허용할 수밖에 없다. 반면 유물론적 방식은 사회구조가 품고 있는 무거운 사실에서 출발하도록 강요한다. 역사 과정의 근본 원동력은 사회 계급들이다. 정당들은 이 계급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상과 구호는 객관적 이해관계의 거스름돈에 불과하다. 필자의 역사 탐구와 서술은 객관에서 주관으로, 사회에서 개인으로, 근본에서 우연으로 진행한다. 이 때문에 필자의 개인적 변덕은 엄격한 제한을 받는다.

광산 기술자가 탐사되지 않은 지역에서 굴착을 통해 자성이 있는 광석을 발견했다고 치자. 이것은 즐거운 우연이라고 언제나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근거로 광산을 세우자고 건의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기술자가 자석탐지 장치의 바늘 눈금을 보고 광맥이 땅 밑에 숨겨져 있다고 결론 내린 후 이 지역의 여러 지점에서 광석을 발견했다고 치자. 이 경우에는 트집을 아무리 잘 잡는 사람도 이것을 우연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반을 특수와 결합시키는 연구 방식이야말로 확신을 가져다준다.

과학적 객관성의 증거는 역사 서술자의 시각이나 어조가 아니라 서술의 내적 논리 자체에서 찾아야한다. 일화, 증언, 수치, 인용구 등이 역사 서술자의 일반적 사회분석 방향과 일치할 경우 그의 결론이 과학적으로 견고하다고 독자는 크게 확신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본 저서의 객관성은 10월 혁명의 불가피성과 이 혁명이 승리한 이유들을 실제로 드러내는 정도에 달려있다.

대중이 사회의 운명에 직접 개입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혁명이다. 이 점을 독자는 이미 알고 있다. 역사 서술은 혁명 사건들의 뒤에서 일어나는 집단적 의식의 변화들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운동의 "자발성"이라는 자루 속에 모든 것을 처넣는 것을 거부해야한다. 이 추상적인 말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하며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혁명은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이것은 혁명 대중이 혁명의 법칙들을 인식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대중의 의식은 우연히 변화하지 않으며 이론적으로 설명 가능한 객관적 필연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때문에 대중의 의식은 예측 가능하며 지도가 가능하다.

소련의 일부 공식 역사가들은 놀랍게도 우리의 사고가 관념적이라고 비판해왔다. 예를 들어 포크로프스키 교수는 우리가 혁명의 객관적 요인들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2월과 10월 사이에 경제는 극심한 파탄을 겪었다." "이 기간동안 농민들은 ... 임시정부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섰다." 변덕스러운 심리가 아니라 바로 이 "객관적 변화"에서 혁명의 원동력을 찾아야 한다고 포크로프스키는 말한다. 그의 날카로운 표현은 칭찬할만하다. 맑스주의로 빈번히 치부되고 있는 역사에 대한 조잡한 경제적 해석은 조금의 가치도 없다. 이 진실을 그는 드러내고 있다.

혁명 과정에서 대중의 의식이 급진적으로 변화한 것은 당시 발생한 일시적 경제 파탄 때문이 아니라 이전 시기 내내 사회의 기초 자체에 근본적 변화들이 축적되었기 때문이었다. 짜르 체제가 타도되기 직전과 2월에서 10월까지 경제 파탄은 대중의 불만을 심화시키고 키우고 북돋웠다. 이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본 저서에서 충분히 서술되었다. 그러나 빵 배급량이 1.5 파운드에서 0.75 파운드로 줄었기 때문에 2월 혁명 8개월 후에 10월 혁명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대단히 조야한 오류일 것이다. 10월 혁명 이후 몇 년간 대중의 식량 사정은 꾸준히 악화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반전이 일어날 것을 기대한 반혁명 정치가들의 희망은 매번 깨졌다. 대중의 봉기를 "자생적인" 것으로 즉 지도자들이 인위적으로 이용하는 군중의 반란으로 바라보는 자들에게만 이 현상은 수수께끼처럼 보일 것이다. 궁핍만으로 봉기를 설명할 수는 없다. 만약 이 설명이 옳다면 대중은 언제나 봉기를 일으킬 것이다. 사회체제의 파산이 확실히 드러나 대중은 이 궁핍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여기에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사상이 혁명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전망을 이들에게 제시했다. 이 때문에 대중은 봉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새로운 사상이 제시한 원대한 목적을 위해 대중은 두 배 아니 세 배로 악화된 궁핍을 견딜 것이다.     

농민의 봉기를 혁명의 두 번째 "객관적 요인"으로 언급하는 것은 더 명백한 오해이다. 노동계급에게 농민전쟁은 당연히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조건이 있다. 한 계급의 투쟁이 일반적으로 다른 계급의 의식에 외적인 자극을 가할 때에만 이 투쟁은 객관적 요인이 된다. 그런데 농민 봉기 자체의 직접 원인은 농촌의 의식 변화에 있었다. 이 변화의 성격을 해명하기 위해 본 저서는 하나의 장을 할애했다. 혁명은 이름 없는 인민 대중을 통해 성취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한다. 유물론은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역사 서술자의 임무이다. (저자 주: 본 저서 제 2권과 제 3권에서 필자는 포크로프스키와 여러 번 결투를 벌어야했다. 그런데 본 저서가 다 완성된 후에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학자로 완성된 이후에 그는 자유주의 진영에서 맑스주의 진영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귀중한 저서들과 연구의 시작을 통해 최근의 역사 저서들의 내용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유물 변증법을 결코 통달하지 못했다. 다만 그는 대단한 능력과 예외적으로 뛰어난 박식함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대의에 대단히 충실했다. 이것이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 진영의 일부는 간접 증거들의 도움으로 이렇게 비판해왔다: 화해주의 지도자들에게 보인 필자의 "아이러니"는 과도한 주관성의 표현이다; 이것은 과학적 서술의 진가를 해치고 있다. 필자는 이 비판이 설득력이 없다고 감히 주장한다. 스피노자는 "울거나 웃지 말고 이해해야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부적절한 웃음이나 시기 적절하지 못한 눈물을 흘리지 말라는 경고이다. 그러나 역사 서술자라고 해서 울고 웃을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기가 다루고 있는 소재를 올바로 이해할 때에만 이 권리가 허용된다. 인류의 노력과 의도 전체를 무관심의 연기로 뒤덮는 순전히 개인주의적 아이러니는 가장 나쁜 속물 근성이다. 예술 작품과 역사 저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삶의 현상 자체는 깊은 곳에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이것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예술가와 역사가의 임무이다.

일반적으로 주관적 의지와 객관적 현실의 불일치는 삶과 예술에서 비극 뿐 아니라 희극의 원천이다. 다른 어떤 영역보다 특히 정치의 영역은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람과 정당은 오직 상황과의 관계에서만 영웅적이거나 희극적일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이 결정적인 단계로 들어섰을 때 지롱드파의 가장 뛰어난 인물들도 자코뱅파 평회원들에 비해 애처롭고 우스꽝스러웠다. 리용의 공장 감독관으로 존경받던 장-마리 롤랑은 1792년 상황에서는 살아있는 희화(캐리커처)처럼 보인다. 이에 반해 자코뱅파는 상황에 부응한다. 이들은 적대감, 증오, 공포를 유발시킬지언정 아이러니는 유발시키지 않는다.

밀물을 빗자루로 저지하려했던 디킨즈 소설의 여주인공은 수단과 목적이 치명적으로 불일치했기 때문에 코믹한 이미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 여주인공이 혁명에서 화해주의 정당들의 정책을 상징한다고 주장하면 지나친 과장일 것이다. 그러나 이중 권력 체제의 화신이었던 체레텔리는 10월 혁명 후 자유주의 지도자 나보코프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당시 우리의 모든 행동은 조그만 나무 조각으로 자연이 일으킨 파괴적인 홍수를 저지하려는 헛된 시도와 같았다." 이 말은 악의에 찬 풍자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실제로는 화해주의자들이 자신들을 표현한 가장 진실된 말이다. 혁명을 나무 조각으로 저지하려했던 "혁명가들"을 묘사하는데 아이러니를 거부하는 것은 현실을 왜곡하고 현학자들을 위해 객관성을 배신하는 것과 같다.

한때 맑스주의자였다가 왕당파로 변신한 표트르 스트루베는 망명 중에 이렇게 적었다: "볼세비키당만이 혁명을 논리적으로 접근했으며 혁명의 핵심에 충실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혁명을 성공시켰다." 자유주의 지도자 밀류코프도 이와 유사한 발언을 했다: "볼세비키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일단 선택한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화해주의자들의 정책들이 새롭게 시도되고 번번이 실패할 때마다 이 목표는 더 가까워졌다." 그리 알려지지 않은 어느 백군 망명객은 나름의 방식으로 혁명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자코벵파를 이렇게 표현했다: "무쇠와 같은 인간들만이 혁명의 길을 갈 수 있었다...이들은 '직업'자체가 혁명가였으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반란과 봉기의 정신을 삶에 끌어들이는데 두려움이 없었다." 이 말을 볼세비키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더 정당할 것이다. 이들은 시대에 걸맞았으며 시대가 제기한 임무에 걸맞은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가는 길에는 온갖 비방과 욕설이 가해졌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아이러니가 스며들 여지가 없었다.

본 저서 제 1권 서문에서 필자는 왜 자신을 1인칭이 아니라 혁명에 참가한 인물에 합당한 3인칭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한 지를 설명했다. 본 저서 제 2권과 제 3권에도 지켜질 이 문필 형식은 물론 그 자체로는 주관성에 대한 방어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주관성이 개입할 필요가 없게 만든다. 진정으로 이 방식은 주관성을 피하라는 의무를 필자에게 상기시켜준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혁명 과정에서 필자의 역할을 언급한 이러 저러한 발언들을 인용할 지 말아야할 지 오랫동안 주저한 경우가 많았다. 품위를 중시하는 상류 사회의 적절한 어법만이 문제라면 이것들을 전혀 인용하지 않는 것이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이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다수를 장악한 후 필자는 이 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10월 봉기를 조직한 군사혁명위원회의 의장도 역임했다. 필자는 이 사실을 역사에서 삭제하고 싶지도 않고 삭제할 수도 없다. 현재 소련을 지배하고 있는 분파는 최근 몇 년간 다수의 논문과 책을 통해 필자의 활동이 혁명의 이해에 위배되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이 왜 가장 결정적인 몇 년간 가장 책임 있는 직책들을 필자와 같은 "끈질긴" 혁명의 적에게 맡겼는지 이들은 설명할 수 없다. 과거에 대한 이 다툼에 대해 완전히 침묵을 지키는 것은 실제 혁명 과정들을 정사로서 확립하는 임무를 방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임무를 방기해야할 이유가 있을까? 사실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결론을 독자에게 은근히 제시하려는 자만이 사심 없는 체 할 것이다. 사물의 이름을 있는 그대로 부르는 정직함을 필자는 택하겠다.

지금 문제되는 것은 과거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이 점을 숨기지 말아야한다. 어떤 사람의 명성을 공격하는 적은 그의 강령을 공격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명확한 강령의 수립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은 과거 사건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복원시켜야한다. 대의를 위해 투쟁하고 이 대의의 깃발 아래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이 있다. 이것을 보고 그의 개인적 허영 이외에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자는 필자의 연민을 살뿐이다. 이런 자에게 무엇을 설득시킬 수 있겠는가. 어쨌든 본 저서에서 "개인적" 문제들이 정당한 필요 이상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도록 필자는 나름의 조치들을 취했다.

현 소련 정권이 존재하는 동안만 이 정권의 친구가 되는 인물들을 소련의 친구라고 부르는 경우가 자주 있다. 볼세비키당 또는 이 정당의 개별 지도자들을 필자가 비판한다고 이들 중 일부가 비난해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혁명 당시 볼세비키당의 상황에 대해 필자가 제시한 내용을 반박하거나 교정하려 하지 않았다. 필자에 대항해 10월 혁명 당시 볼세비키당의 역할을 방어할 임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소련의 "친구들"에게 경고한다: 본 저서는 혁명이 다 끝난 후 등장한 관료집단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칠 목적이 없다; 다만 혁명이 준비되고 전개되고 승리하는 상황들을 제시하는 목적을 가질 뿐이다. 당의 무죄를 국가탄압으로 방어할 수는 없다.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당은 모순 속에 발전하는 복잡한 유기체일 뿐이다. 이 모순들 그리고 이 가운데 드러난 지도부의 동요와 오류 등을 폭로한다고 해도 역사상 최초로 볼세비키당이 수행한 저 거대한 역사적 임무의 의의는 조금도 훼손되지 않는다.

 

                                                 레온 트로츠키

 

프린키포 섬에서

1932년 5월 13일

 

추신: 비평가들은 본 저서에 대한 맥스 이스트먼의 번역에 이미 찬사를 보냈다. 그는 이 번역을 통해 창조적 문체를 구사하는 재능과 우정어린 세심함을 보였다. 비평가들이 만장일치로 보내는 그에 대한 찬사에 필자는 따뜻한 감사의 마음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레온 트로츠키

 

제 2권

제 1장 "7월 시기": 준비와 시작

1915년에 러시아의 전쟁 비용은 100억 루블이었다. 그리고 1916년에는 190억 루블, 1917년 전반부에는 105억 루블이었다. 이제 1918년 초의 총 부채는 600억 루블에 달해 나라 전체의 재산 약 700억 루블에 거의 맞먹었다. 집행위원회는 "자유 공채"라는 달콤한 이름의 전쟁 공채에 대한 호소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편 정부는 별로 복잡하지 않은 결론에 도달했다: 엄청난 액수의 새로운 외채가 조달되지 않으면 외국 상품에 대한 정부의 주문 대금은 물론이고 국내용 지출도 감당할 수 없다. 무역 수지의 적자폭은 계속 커지고 있었다. 연합국들은 루블화를 방치하기로 결정한 것이 명백했다. 자유 공채 모금을 위한 호소문이 소비에트 기관지 이즈베스티아지 첫 면을 장식한 바로 그날에 정부 기관지 비예스트니크(메신저)지는 루블화의 급락을 보도했다. 지폐 인쇄기는 인플레의 속도를 더 이상 따라 잡을 수 없었다. 품위 있는 오래된 지폐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과거의 구매력에 대한 향수를 아직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케렌스키화"로 명명된 빨간색의 술병 레테르로 대체할 준비가 진행 중이었다. 자본가가 노동자나 나름의 방식으로 이 새로운 화폐를 약간 혐오했다.

정부는 말로만 산업을 통제했다. 그리고 6월말 경에는 이 목적을 위해 육중한 기관들을 설립하기조차 했다. 그러나 경건한 기독교인이 정신과 육체의 갈등에 괴로워하는 것처럼 2월 정부의 말과 행동은 계속해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적절하게 직접 선정된 통제기관들은 자본가 개인들의 이해를 억누르기는커녕 불안한 국가권력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하는 일에 몰두했다. 산업의 행정 및 기술 인력들이 계층으로 나누어졌다. 노동자들의 평등 경향에 겁을 먹은 상층부는 결정적으로 자본가들에게 붙었다. 생산능력이 붕괴되고 있던 공장들은 미리 1년이나 2년간 전쟁 관련 물품에 대한 수주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미 이에 대해 혐오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자본가들 역시 이윤보다는 어려움이 더 많은 생산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금속 생산은 40% 섬유 생산은 20%가 각각 감소했다. 모든 생필품들은 공급이 부족했다. 인플레에다 산업 생산의 감소가 겹쳐 물가는 급등하고 있었다. 몸을 숨긴 채 자기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행정적-상업적 체제를 노동자들은 직접 통제하려했다. 노동자들은 공장 운영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노동장관 스코벨레프는 장황하게 설교했다. 6월 24일 이즈베스티아지는 공장 폐쇄에 관한 새로운 제안을 보도했다. 이와 유사한 소식들이 지방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철도 수송은 산업보다 더 큰 타격을 입었다. 기관차의 절반은 대대적인 수리가 필요했다. 궤도 차량의 대다수는 전선에 징발되어 있었다. 연료가 부족했다. 통신부는 철도 및 사무직 노동자들과 계속 싸우고 있었다. 식료품의 공급은 꾸준히 하락하고 있었다. 뻬쩨르부르그의 밀가루 비축량은 10일이나 15일치 밖에 되지 않았다. 다른 도시들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궤도 차량의 반(半)마비 상태에다가 철도파업이 임박하고 있었다. 기근이 일어날 위험은 계속되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었다. 노동자들이 이것을 바라고 혁명을 일으켰을 리가 없었다.

정치 분야는 최악이었다. 사태가 더 악화될 여지가 없었다. 개인 뿐 아니라 정부, 민족, 계급에게도 최악의 적은 우유부단함이다. 혁명은 역사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가장 무자비한 방법이다. 따라서 혁명 상황에게는 우유부단 자체가 가장 해롭다. 병자의 몸에 칼을 깊숙이 꽂은 외과의사처럼 혁명 정당은 절대로 동요하면 안된다. 그러나 2월 혁명으로 등장한 이중권력은 단호하게 조직되지 못했다. 모든 것이 정부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조건부로 정부를 지지한 자들이 이제 정부를 반대했다. 그리고 반대한 자들은 이제 적이 되었다. 적이었던 자들은 이제 무기를 들었다. 혁명으로 잃을 것이 있는 유산계급들의 사령부인 입헌민주당 중앙위원회는 공공연히 반혁명 세력을 동원시켰다. 모길레프에 위치한 전쟁 총사령부의 장교동맹 중앙위원회는 불만에 찬 지휘관 약 10만 명을 대표하고 있었다. 뻬쩨르부르그에는 카자흐 군대 연합위원회가 있었다. 이 두 조직은 반혁명의 명실상부한 군사 본부였다. 짜르의 의회는 6월 전국 소비에트 대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사적 성격의 회의"를 계속 열기로 결의했다. 의회 임시위원회는 반혁명 세력의 합법적 외피가 되었다. 은행과 연합국 대사관은 반혁명 활동에 널리 돈을 대고 있었다. 이렇게 화해주의자들은 좌와 우에서 위협 당하고 있었다. 불안하게 좌우를 살피면서 정부는 비밀 정치경찰인 공공정보부의 창립에 돈을 대기로 몰래 결의했다. 거의 같은 때인 6월 중순에 정부는 9월 17일을 제헌의회 선거일로 지정했다. 입헌민주당이 정부에 참여하고 있었으나 자유주의 언론은 이 공식 일자에 대해 완고한 반대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나 이 날짜를 진지하게 믿거나 방어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3월의 첫 며칠간 환하게 빛났던 제헌의회의 모습은 이제 빛이 바랬다. 심지어 정부의 연약하지만 좋은 의도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6월 30일에야 정부는 용기를 모아 농촌 귀족을 보호하는 젬스키 나찰니크(저자 주: 지역 농민에 대한 행정권과 사법권을 가진 정부의 관리)를 직위 해제시켰다. 알렉산드르 3세가 채용한 이 관리들은 이름 자체가 이미 전국에 걸쳐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 강요되어 뒤늦은 부분적 개혁은 임시정부의 경멸할만한 비겁함을 확인시키는 일만 했다. 이때쯤 귀족들은 공황 상태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토지 소유주들은 서로 단결하여 정부에 압력을 넣고 있었다. 6월말 의회 임시위원회는 정부에 요구했다: "범죄 분자들"에 의해 자극을 받은 농민들로부터 지주들을 보호할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 7월 1일 모스크바에서 절대 다수의 귀족들을 포괄하는 전국 토지소유주 대회가 열렸다. 이제 정부는 한 번은 농민에게 또 한 번은 지주에게 말로나마 최면을 걸기 위해 온갖 짓을 다했다.

그러나 가장 좋지 못한 것은 전선의 상황이었다. 케렌스키에게 내치의 결정적 카드였던 공세는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가고 있었다. 병사들은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르보프공의 외교관들은 연합국 외교관들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이들은 필사적으로 전쟁 공채가 필요했다. 비난당하고 있던 무기력한 정부는 강인함을 보이기 위해 핀란드 공세를 감행했다. 그리고 가장 지저분한 일을 처리할 때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사회주의자들이 이 일을 맡았다. 동시에 정부는 우크라이나와 갈등을 일으켜 공공연한 결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빛나는 혁명과 케렌스키를 위해 앨버트 토머스가 찬송가를 불러준 때는 이미 한참 전이었다. 라스푸틴 살롱의 향수 냄새를 너무 강하게 맡았던 프랑스 대사 빨레올로그는 7월초 "급진적인" 눌랑에 의해 교체되었다. 기자 끌로드 아네는 신임 대사에게 뻬쩨르부르그를 소개시키는 강연을 했다. 네바강을 가로질러 프랑스 대사관의 반대편에 비보르그 지구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이 대공장 지구는 완전히 볼세비키당의 영역입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곳의 주인입니다." 이 지구에는 약 1만 명의 병사와 1천 문이 넘는 기관총을 보유한 기관총 연대가 있다. 사회혁명당이나 멘세비키당은 이 연대의 병영에 얼씬도 못한다. 이 지구의 나머지 연대들은 볼세비키당을 지지하거나 중립을 지키고 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뻬쩨르부르그를 점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요?" 놀란 채 눌랑은 이렇게 질문했다. "정부가 이 상황을 방치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정부라고 별 수 있나요? 정부는 도덕적 권위 밖에 없는데 이것도 아주 허약한 것 같습니다...."

적절한 배출구를 찾지 못한 대중의 들뜬 분노는 독자 행동, 게릴라식 시위, 산발적 재산 몰수 등으로 소모되었다. 자기들이 수립한 권력이 해결을 거부한 문제들을 부분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동자, 병사, 농민들은 직접 나섰다. 무엇보다도 지도자들의 우유부단이 대중의 신경을 날카롭게 세운다. 소득 없이 기다린 후 이들은 열리지 않은 문을 더욱 끈질기게 두드린다. 아니면 간간이 절망을 분출시킨다. 소비에트 대회 기간에 지방 출신 대의원들은 뻬쩨르부르그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을 거부하기가 거의 힘들었다. 그러나 노동자와 병사들은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자신들에 대해 어떤 감정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 지를 알아낼 기회를 이미 많이 가졌다. 케렌스키에 뒤이어 체레텔리는 뻬쩨르부르그 노동자 병사 다수에게 이방인이었을 뿐 아니라 이미 증오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한편 혁명의 가장자리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은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들이 주로 한 일은 두르노보의 여름 별장에 혁명위원회를 수립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좀더 규율이 잡힌 노동자 부위와 당의 광범위한 부위까지도 참을성을 상실한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6월 18일 시위로 정부는 지지기반이 전혀 없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왜 상부는 바삐 움직이지 않는가?" 화해주의 지도자들 뿐 아니라 볼세비키당의 지도기구들에게도 노동자와 병사들은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인플레 속에서 임금인상 투쟁은 노동자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흥분시켰다. 3만6천의 노동자가 일하는 푸틸로프 대공장에서 이 문제는 6월에 특히 날카롭게 제기되었다. 6월 21일에 이 공장 일부에서 숙련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산발적으로 분노를 표출할 경우 아무 결실이 없다는 것을 당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다음날 볼세비키당이 장악한 주요 노동자 조직들과 70개 공장의 대표들은 회의를 통해 "푸틸로프 노동자들의 대의는 뻬쩨르부르그 노동계급 전체의 대의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동시에 푸틸로프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분노도 억제하라"고 호소했다. 파업은 연기되었다. 그러나 이후 12일이 지나는 동안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공장의 대중은 들끓고 있었으며 출구를 찾고 있었다. 모든 공장에는 갈등이 발생했으며 모든 화살은 정부에게 향했다. 통신부 소속 기관차 노동조합의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선언한다: 참을성도 한계가 있다; 지금과 같은 조건 속에서는 살 수 없다...." 이것은 궁핍과 기아 뿐 아니라 이중성, 딱 부러지지 못함, 거짓 거래에 대한 불평이었다. 이 보고서는 "시민의 의무와 기아에 대한 인내를 끊임없이 설교하는 것"에 특히 강한 분노로 저항하고 있다.

혁명 군대를 수도에 그대로 주둔시킨다는 조건으로 집행위원회는 3월에 권력을 임시정부에게 넘겨주었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이후 주둔군 병사들은 좌로 그리고 소비에트 지도부는 우로 움직였다. 주둔군 병사들에 대한 공격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수도에서 군부대 전체가 전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략적 필요라는 핑계로 혁명 성향이 좀더 강한 군대에서 증원 중대들이 체계적으로 전출되었다. 당연히 혁명 부대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명령 불복종과 명령 불이행을 이유로 부대들이 더욱 많이 해체되고 있다는 소문이 전선에서 수도로 계속 전해졌다. 최고의 군대로 인정받아온 시베리아 명사수 사단들은 강제 해산을 당했다. 수도에서 가장 가까이 주둔한 제 5군의 대대적 명령 불복종 사건으로 87명의 장교와 12,725 명의 병사들이 법정에서 심문을 당했다. 전선, 농촌, 노동자 지구, 병영 등의 불만은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이라는 저장고에 계속 축적되었다. 이들은 계속 들끓고 있었다. 수염을 기른 40대 병사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집으로 보내 달라고 난동을 부렸다. 비보르그 지구의 제 1 기관총 연대, 제 1 수류탄 연대, 모스크바 연대, 제 180 보병 연대 등은 교외 노동자들의 뜨거운 열기를 계속 느끼고 있었다. 병영을 지나다니는 수천 명의 노동자들 가운데에는 볼세비키당의 지치지 않는 선동가들이 적지 않았다. 지저분하고 허물어지고 있는 담벼락에서 즉흥적인 집회가 거의 계속 열리고 있었다. 애국주의 시위가 전선의 공세로 사라지기 전인 6월 22일 집행위원회의 자동차가 "케렌스키여 전진하라!"는 문구를 적은 플래카드를 부착한 채 조심성 없이 삼소네프스키 가도를 달렸다. 그러자 모스크바 연대가 자동차를 멈춘 후 플래카드를 찢어버리고 이 자동차를 기관총 연대에 넘겨버렸다.

일반적으로 병사들은 노동자들보다 더 참을성이 없었다. 전선으로 전출되는 위협에 직접 시달렸으며 정치 전략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이들은 모두 소총을 들고 있었다. 2월 이래로 병사들은 소총의 독자적 위력을 과대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이 많은 노동자 볼세비키 리즈딘은 제 180 예비연대의 병사들이 한 말을 나중에 이렇게 들려주었다: "크쉐신스카야 궁전은 무엇을 하고 있소? 깊이 잠들어 있는 것 아니오? 자, 케렌스키를 몰아냅시다!" 정부에 대한 최후의 행동을 주장하는 결의문들이 연대의 집회에서 계속 채택되고 있었다. 공장 대표단들이 연대에 와서 이렇게 질문했다: 거리로 나설 것인가? 기관총 연대의 병사들은 다른 주둔군에 대표들을 보내 전쟁 지속에 반대하는 봉기를 호소했다. 대표들 가운데 좀더 참을성이 없는 분자들은 이렇게 덧붙였다: 파블로프 연대와 모스크바 연대 그리고 4만 푸틸로프 노동자들이 "내일" 거리로 나선다. 시위를 하지 말라는 집행위원회의 공식 충고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전선과 지방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수도 뻬쩨르부르그는 매순간 조금씩 해체될 위험에 놓였다. 6월 21일 레닌은 프라우다지를 통해 뻬쩨르부르그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다수의 예비연대들이 뻬쩨르부르그를 지지할 때까지 기다려야한다. "여러분의 분노를 이해한다.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의 흥분도 이해한다. 그러나 동지들, 지금은 공격에 나설 때가 아니다." 다음날 레닌보다 "더 좌에" 위치한 볼세비키 지도자들이 사적인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병사와 노동자 대중의 정서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봉기에 나설 때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당들이 공세의 실패로 완전히 신뢰를 잃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다. 그때가 되면 게임은 우리 것이다." 이것은 당시 가장 참을성이 없었던 지구의 조직책 라트시스의 보고 내용이다. 중앙위원회는 더욱 자주 선동가들을 군대와 공장에 보내 설익은 행동을 억제시켜야했다. 머리를 당혹스럽게 저으며 비보르그 지구의 볼세비키들은 친구들에게 이렇게 불평했다: "우리는 소방 호스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거리로 나서자는 병사들의 호소는 단 하루도 멈추지 않았다. 이 가운데 일부는 명백히 도발적이었다. 볼세비키당의 군사기구는 병사와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 군사기구를 들먹이며 거리로 나서라는 호소를 믿으면 안된다. 군사기구는 여러분들을 거리로 부르지 않는다." 그리고 더 끈질기게 이렇게 호소했다: "거리로 나오라는 선동가나 연설가가 있으면 군사기구의 의장과 비서가 서명한 문서를 제시하라고 요구해야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더욱 높이고 있던 크론슈타트의 유명한 야코르니 광장에서는 최후통첩이 연이어 계속 작성되었다. 6월 23일 야코르니 광장의 대의원들은 크론슈타트 소비에트와 상의도 없이 법무부에 요구했다: 뻬쩨르부르그 무정부주의자들을 석방해라;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수병들이 감옥으로 행진할 것이다. 바로 다음날 오라니엔바움의 주둔군 대표들은 법무부에 이렇게 통지했다: 크론슈타트 만큼이나 우리는 두르노보 여름 별장의 체포 사건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병사들은 "벌써 기관총을 청소하고 있다." 부르주아 언론은 협박들을 이렇게 보도한 후 화해주의자들에게 신문을 흔들어대었다. 6월 26일 전선의 수류탄 위병 연대 대표들이 예비 대대로 가서 이렇게 발표했다: "연대는 임시정부를 반대한다. 그리고 권력이 소비에트로 이전될 것을 요구한다. 또한 케렌스키가 시작한 공세를 거부한다. 동시에 집행위원회가 장관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부르주아 편으로 넘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명한다." 한편 집행위원회의 기관지는 대표들의 방문을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다.

크론슈타트 뿐 아니라 헬싱키에 주요 기지를 둔 발트해 함대 전체가 들끓고 있었다. 이 함대의 볼세비키 책임자는 당연히 안토노프-오브쉔코였다. 그는 몇 년 전 청년 장교로 1905년의 세바스토폴 봉기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1905년 혁명 이후 반동기에는 멘세비키였으며 전쟁 중에는 망명-국제주의자였던 그는 빠리에서 트로츠키와 함께 나쉐 슬로보(우리 말)지를 주관했으며 귀국 후 볼세비키가 되었다. 그는 정치노선은 불안했으나 성격은 용감했다. 충동적이고 무질서했으나 주도성과 임기응변에 능했던 그는 여전히 이름이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혁명 과정에서 그는 적지 않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회고록에 이렇게 적고 있다: "당의 헬싱키 위원회는 투쟁을 자제하고 진지하게 이후를 준비할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더욱이 같은 내용의 지시를 중앙위원회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대중이 폭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뻬쩨르부르그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뻬쩨르부르그에서는 매일 매일 폭발물들이 쌓이고 있었다. 제 1 기관총 연대보다 후진적이었던 제 2 기관총 연대는 소비에트 권력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제 3 보병 연대는 14개 증원 중대의 전출을 거부했다. 병영의 집회는 갈수록 달아올랐다. 7월 1일 수류탄 연대의 집회에서 연대 위원회 의장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멘세비키 연설가의 연설은 "공세를 저지하자!", "케렌스키를 타도하자!"는 구호에 시달렸다. 주둔군의 관심은 기관총 연대에 쏠렸다. 7월 시위의 거대한 물결을 일으킨 장본인은 바로 이 연대였다.

2월 혁명의 첫 달부터 제 1 기관총 연대는 두각을 나타냈었다. 봉기가 승리한 직후 오라니엔바움에서 뻬쩨르부르그까지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 행진한 이 연대는 즉시 집행위원회와 충돌했다. 집행위원회가 이 연대를 감사의 말과 함께 다시 오라니엔바움으로 되돌려 보내는 결의문을 통과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대 병사들은 수도를 떠나라는 명령을 딱 잘라 거절했다: "반혁명 세력이 소비에트를 공격하여 구 체제를 회복시킬지도 모른다." 그러자 집행위원회는 명령을 철회하고 수천 명의 기관총 사수들은 기관총과 함께 수도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인민의 저택에 머물면서 자신들이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뻬쩨르부르그의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볼세비키 위원회가 이들을 보살폈다. 위원회의 개입으로 이 연대는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로부터 보급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뻬쩨르부르그에서 존재를 시작된 연대는 파괴할 수 없이 강력해졌다. 6월 21일 기관총 연대는 대중 집회에서 결의문을 제출했다: "전쟁이 혁명적 성격을 가질 때에만 부대가 전선에 배치된다." 7월 2일 연대는 인민의 저택에서 작별 집회를 열고 전선으로 출발하는 "마지막" 증원 중대를 배웅했다. 이 집회에서 루나차르스키와 트로츠키가 배웅 연설을 했다. 이후 정부 당국은 이 우연한 사실에 큰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다. 배웅 연설에 대한 답사는 연대를 대표하여 병사 질린과 고참 볼세비키 하사관 라쉐비치가 했다. 집회의 분위기가 고양되고 케렌스키에 대한 비난과 함께 혁명에 대한 충성 서약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연대의 앞날에 대해 실제적인 제안을 내놓지 않았다. 마지막 며칠간 수도는 사건이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7월 시기"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수하노프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거리 모퉁이, 소비에트, 마린스키 궁전, 인민의 아파트, 공공 광장, 대로, 병영, 공장 등 모든 곳에서 오늘 아니면 내일 벌어질 시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그러나 누가 어디서 어떤 내용으로 시위를 벌일지를 정확히 아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하여간 도시는 폭발 직전에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폭발했다. 정부의 상부가 폭발의 도화선을 제공했다.

트로츠키와 루나차르스키가 연립정부의 파산에 대해 기관총 병사들에게 연설한 같은 날 4명의 입헌민주당 장관들이 내각에서 사임하여 연립정부를 붕괴시켰다. 화해주의 장관들이 우크라이나와 체결한 합의가 사임의 표면적 이유였다. 이 합의는 입헌민주당의 제국주의적 포부에 위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임의 진짜 이유는 화해주의자들이 대중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에 있었다. 왜 하필 이때 사임을 택했는지는 공식적으로 해명되지 않았다. 다만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은 공세의 붕괴에 맞추어 사임을 단행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공세의 패배와 볼세비키당을 사회주의자들이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자유주의자들은 생각했다. 이들의 사임 소문은 즉시 수도 전체에 퍼졌다. 그리고 모든 갈등들을 정치적으로 하나의 구호로 일반화시켰다. 이것은 구호라기보다는 하늘에 대한 외침이었다: "말도 되지 않는 연립정부를 끝장내자!" 지금 병사와 노동자들에게 임금, 빵 가격, 전쟁 등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부르주아 계급 아니면 자기의 소비에트 중 누가 나라를 통치할 것인지가 일차적인 문제였다. 이런 기대에는 환상이 약간 개입되어 있었다. 최소한 대중은 권력이 바뀌면 모든 아픈 문제들이 즉시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옳았다: 권력의 문제는 혁명 전체의 방향을 결정했으며 특히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했다. 그러나 소비에트에 대한 공개적인 사보타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입헌민주당이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상상하면 안된다. 이것은 밀류코프를 결정적으로 과소 평가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는 총칼로만 해결할 수 있는 어려운 상황으로 화해주의자들을 끌고 들어가려고 노력했음이 틀림없었다. 상황은 유혈사태로만 타개할 수 있다. 이것이 당시 밀류코프의 확고한 믿음이었다.

7월 3일 아침 중대와 연대 위원회들의 회의를 해산시킨 후 수천 명의 기관총 병사들은 의장을 선출하고 무장 시위 문제를 즉시 고려할 것을 요구했다. 이 집회는 처음부터 격렬했다. 전선의 문제가 정부의 위기와 결합되었다. 이 집회의 의장은 볼세비키 골로빈이었다. 그는 병사들의 과격함에 제동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군부대 그리고 볼세비키당 군사기구와 사전에 논의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결정을 지연시키는 모든 제안은 병사들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 집회에 무정부주의자 블라이히만이 등장했다. 그는 1917년을 배경으로 등장한 덩치가 작지만 화려한 인물이었다. 사상은 아주 소박했으나 어느 정도 대중에 대한 감각을 지닌 그는 아주 가연성이 있는 제한된 지성에 진실함을 겸비했다. 그의 셔츠는 가슴을 드러내었으며 곱슬머리는 사방으로 날아갔다. 블라이히만은 집회에서 반정도 아이러니컬한 공감을 얻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사실 그를 어느 정도 냉랭하게 그리고 약간 참을성이 없이 대했다. 특히 금속 노동자들은 더 그랬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의 연설에 대해 즐겁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서로 팔꿈치를 치며 연설자가 뼈있는 논평을 하도록 부추겼다. 이들은 그의 기이한 외모, 비논리적인 단호함, 식초처럼 톡 쏘는 유태인계 미국인의 사투리를 단순히 좋아할 뿐이었다. 6월말이 되자 그는 모든 즉흥 집회에서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 마냥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견해가 있었다: 무장 시위가 필요하다. 조직? "거리가 우리를 조직할 것이다." 임무? "아무 정당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짜르를 타도했다. 이와 똑같이 임시정부를 타도해야한다." 이 연설은 당시 기관총 병사들의 감정에 완벽히 부응했다. 그리고 이들만이 아니었다. 공식 지도부의 충고가 맘에 들지 않았던 볼세비키 평당원 다수도 그의 연설에 대해 만족감을 숨기지 않았다. 진보적인 노동자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2월 혁명의 승리 직전에 지도자들은 후퇴할 태세였다; 3월에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으로 8시간 노동제가 쟁취되었다; 4월에는 거리로 나선 연대들 때문에 밀류코프가 정부에서 쫓겨났다. 이 사실들을 기억할수록 대중의 정서는 더 팽팽해지고 참을성을 상실했다.

기관총 병사들의 집회가 폭발 직전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볼세비키당 군사기구는 계속 선동가들을 보냈다. 그리고 곧이어 병사들이 존경하는 군사기구의 지도자 네프스키가 왔다. 병사들은 그의 말을 경청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 끝없는 집회의 정서는 집회의 인자들에 따라 변했다. 당 군사기구의 또 다른 지도자인 포드보이스키가 말했다: "저녁 7시에 어느 기병이 말을 타고 달려와 기관총 병사들이 다시 시위를 결의했다고 전했다. 우리는 크게 놀랐다." 기존의 연대 위원회를 대신하여 중대에서 2명씩 대표가 참여하는 임시 혁명위원회가 선출되었다. 의장은 세마쉬코 소위가 선출되었다. 특별히 임명된 대의원들이 공장과 연대를 돌면서 지원을 호소했다. 그리고 기관총 병사들은 크론슈타트에 사람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공식 조직들 한 단계 밑에서 공식조직들의 보호를 부분적으로 받으며 좀더 들떠 있는 연대와 공장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임시로 맺어졌다. 대중은 소비에트와 결별할 생각이 없었다. 이와 반대로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기를 원했다. 볼세비키당과 결별하기는 더욱 원치 않았다. 그러나 당이 우유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집행위원회에 주먹을 흔들어 보이고 볼세비키당을 약간 밀어서 행동에 나서도록 자극했다. 이렇게 즉흥적인 대의제도가 수립되고 새로운 연줄이 묶이고 새로운 활동 중심이 구축되었다. 물론 이것은 비상설 임시 조직이었다. 상황과 대중의 정서는 너무 빠르고 날카롭게 변화해서 소비에트와 같은 대단히 신축적인 조직들도 따라 잡지를 못했다. 그리고 대중은 순간의 요구에 따라 매번 보조 기구들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즉흥 과정에서 우연적이며 믿을 수 없는 분자들이 갑자기 등장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불에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참을성이 없는 신입 볼세비키당원 일부도 그랬다. 여기에 당연히 경찰의 첩자도 끼어 들었다. 어쩌면 독일 첩자들도 끼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순도 100%의 러시아 비밀경찰도 틀림없이 끼어 들었다. 대중운동의 복잡한 실타래를 어떻게 하나 하나 풀어낼 수 있는가? 사건의 일반적 성격은 최소한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다. 뻬쩨르부르그 대중은 자신의 힘을 느끼면서 주인이 잡은 줄에서 벗어나려는 개처럼 날뛰었다. 이들은 지방이나 전선의 상황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볼세비키당도 이 고삐 풀린 망아지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경험이 이들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공장과 연대를 거리로 불러내면서 기관총 연대의 대의원들은 시위가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이것은 당연했다. 적의 공격에 무기도 없이 노출될 수는 없었다. 더욱이 가장 중요한 것은 위용을 보이는 것인데 무기가 없는 병사는 위용이 없다. 이 순간 모든 연대들과 공장들은 한마음이었다: 시위를 할 바에야 총알을 잔뜩 들고 가자. 기관총 병사들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큰 일을 시작한 이상 될 수 있으면 빨리 밀어붙이려 했다. 군대의 조사 위원회 보고서는 연대의 주요 지도자인 세마쉬코 소위의 활동을 이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공장에서 자동차들을 요구한 후 여기에 기관총을 탑재했다. 그리고 이 무장한 장비를 타우리데 궁전과 다른 지점들에 배치했다. 그리고 시위 코스를 지정한 후 몸소 자기 연대를 병영에서 도시 중심부로 인도했다. 그리고 차를 타고 모스크바 예비연대로 가서 시위에 참여할 것을 설득했다. 그리고 기관총 병사들에게 당 군사기구의 지원을 받아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크쉐신스카야 궁전에 본부를 둔 당 군사기구와 계속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볼세비키당의 지도자 레닌과 함께 논의한 후 당 군사기구를 보호하기 위해 보초들을 보냈다." 보고서는 레닌을 언급하면서 내용의 아귀를 맞추었다. 그러나 이날은 물론이고 이날 이전 며칠동안 레닌은 뻬쩨르부르그에 없었다. 6월 29일부터 그는 핀란드의 방갈로에서 병으로 누워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제외하면 군대 조사위원회 보고서의 압축된 언어는 기관총 연대 병사들의 광적인 시위 준비를 전혀 부족하지 않게 표현하고 있다. 병영의 마당에서도 똑같이 광적인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병사들에게 소총이 지급되고 일부에게는 폭탄이 지급되었다. 공장에서 제공된 트럭에 3대의 기관총들이 각각 설치되었다. 연대는 완전 무장 후에 거리로 나설 계획이었다.

공장에서도 거의 같은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기관총 연대나 이웃 공장에서 대의원들이 도착하여 노동자들을 거리로 불러내었다. 마치 대의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노동자들은 일을 즉각 중지하였다. 르노 공장의 어느 노동자는 이렇게 말한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 여러 명의 기관총 병사들이 뛰어들어와 트럭을 달라고 요청했다. 볼세비키들의 항의가 있었으나 차량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이들은 트럭에 즉시 '막심'(기관총)을 탑재한 후 네프스키 가도를 향해 차를 몰았다. 노동자들을 억제시키는 것이 불가능했다....이들 전부는 작업복 차림을 한 채 작업의자에서 일어나 바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노동자 볼세비키들의 항의는 항상 끈질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의 항의는 푸틸로프 공장에서 가장 길었다. 오후 2시쯤에 기관총 연대에서 대의원들이 도착하여 집회를 소집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약 만 명의 노동자들이 집회에 참여했다. 격려의 외침에 응답하여 기관총 병사들은 7월 4일 전선으로 전출을 명령받았으나 "독일 노동자들이 있는 독일 전선이 아니라 우리 자본가 장관들에 대항하기 위해 거리로 나가는 것"이 결정되었다고 말했다. 감정이 격앙되고 있었다. "자, 움직입시다!"라고 노동자들이 외쳤다. 공장위원회 비서인 어느 볼세비키는 당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반대했다. 그러나 모든 곳에서 항의 발언이 쏟아졌다: "치우시오! 또 연기하려고 하지 마시오. 더 이상 그렇게는 살 수 없소...." 6시에 집행위원회 대표들이 방문했으나 이들은 더 효과가 없었다. 집회는 계속되었다. 수많은 대중의 영원히 계속되는 초조하고 완고한 집회는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탈출구가 없다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집행위원회에 대표단을 보내자는 제안이 있었다. 그래서 집회는 또다시 지연되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집회가 해산되지는 않았다. 이때쯤 일부 노동자와 병사들이 소식을 전해왔다: 비보르그 노동자들이 벌써 타우리데 궁전으로 가고 있다. 이들을 더 지체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들은 나가기로 결정했다. 푸틸로프 공장의 노동자 에피모프는 당 지구위원회에 가서 대책을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당은 시위에 합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위 노동자들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 이들과 함께 가야한다." 이때 위원회의 추딘이 나타나 노동자들이 모든 지구에서 거리로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당원들의 할 일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볼세비키들은 운동에 끌려 들어갔다. 동시에 당의 공식 결정에 완전히 위배되는 행동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오후 7시에 수도의 산업활동은 완전히 정지되었다. 모든 공장의 노동자들은 차례로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줄을 서서 적위대를 무장시켰다. 비보르그 노동자 메텔레프는 이렇게 말한다: "수많은 노동자들 가운데에서 수백 명의 젊은 적위대가 소총을 장전하고 있었다. 다른 노동자들은 탄창을 상자에 차곡차곡 집어넣고 탄띠를 맸다. 또한 배낭과 탄창 상자를 등에 매고 총 끝에 대검을 꽂았다. 무기가 없는 노동자들은 적위대의 무장을 돕고 있었다...." 비보르그 지구의 대동맥인 삼소네프스키 가도는 인파로 가득 했다. 도로의 좌우 편에는 노동자들이 정연히 대오를 이루었다. 가도 한가운데에서 시위대의 중추인 기관총 연대가 행진했다. 기관총을 탑재한 트럭이 각 중대의 선두를 지켰다. 기관총 연대 뒤를 노동자들이 따랐다. 시위대의 후위를 방어하기 위해 모스크바 연대가 뒤따랐다. 모든 부대들 위에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문구를 적은 배너가 펄럭였다. 3월의 장례행렬과 노동절 시위가 아마 숫자는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7월 시위는 훨씬 적극적이고 위협적이었다. 더욱이 시위대의 구성이 더욱 단일했다. 어느 시위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붉은 깃발 아래에서 노동자와 병사들만 행진했다. 관리들의 모자 장식, 대학생들의 반짝이는 단추, '부인 동조자들'의 모자 등은 보이지도 않았다. 이것들은 모두 4개월 전 2월에나 볼 수 있었다. 오늘 시위에는 이런 것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자본의 노예들만이 공동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사방의 거리에는 무장한 병사와 노동자들을 가득 실은 자동차들이 질주했다. 자동차에 탑승한 대의원, 선동가, 정찰대, 전화국 노동자, 대표단 등은 노동자와 연대 병사들에게 시위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이들은 모두 총 끝에 대검을 꽂고 있었다. 대검의 날이 빽빽하게 들어찬 트럭들이 2월 시기를 완벽히 재현했다. 이 광경을 보고 일부는 흥분했지만 일부는 공포에 떨었다. 입헌민주당의 나보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2월에 보았던 정신이 나간 멍청한 짐승 같은 얼굴들이 다시 나타났다." 물론 2월에는 자유주의자들이 공식적으로 표현한 바 영광스러운 무혈 혁명이 있었다. 9시에 7개 연대들은 타우리데 궁전을 향해 이미 행진하고 있었다. 여기에 공장의 시위대와 새로운 부대들이 합류했다. 기관총 연대의 운동은 막강한 전염성을 과시했다. 이렇게 "7월 시기"가 시작되었다.

행진 중에 집회가 열렸다. 이때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노동자 코로트코프에 따르면, "리테이니 가도의 지하실에서 기관총 한 정과 장교가 끌려나왔는데 그는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소문들이 시위대를 앞질러 달려갔다. 공포심이 마치 빛의 광선처럼 사방으로 퍼졌다. 중앙 지구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끔찍한 일들을 전화로 보고했다. 어느 소문에 의하면 밤 8시에 무장한 자동차가 바로 그날 전선으로 떠난 케렌스키를 잡기 위해 바르샤바 역으로 질주했으나 기차는 이미 떠난 후였다. 이 소문은 이후 음모를 증명하기 위해 여러 번 반복되었다. 그러나 누가 무장한 자동차에  타고 있었으며 누가 이들의 신비로운 의도를 알아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날 저녁 무장한 자동차들은 사방으로 질주했다. 따라서 당연히 바르샤바 역 근처에도 갔을 것이다. 케렌스키를 욕하는 말들이 많은 곳에서 들렸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가 완전히 지어낸 이야기였을 것이다.

이즈베스티아지는 7월 3일의 사건들을 이렇게 스케치했다: "오후 5시에 무장을 갖춘 제 1 기관총 연대가 거리로 나왔다. 뒤이어 모스크바 연대, 수류탄 연대, 파블로프스키 연대 등의 일부가 거리로 나왔다. 노동자 군중이 이들과 합류했다....8시에 연대에 소속된 부대들이 뿔뿔이 크쉐신스카야 궁전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철저히 무장하고 있었으며 소비에트 권력을 요구하는 붉은 깃발과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발코니에서 연설이 있었다....10시 30분 타우리데 궁전 앞 광장에서 집회가 열렸다....병사들은 집행위원회에 보낼 대표단을 선출하고 이렇게 요구했다: 부르주아 장관 10명의 경질, 모든 권력의 소비에트 이전, 공세의 중지, 부르주아 언론의 인쇄소 몰수, 토지의 국유화, 생산의 국가통제." 연대 전체를 "연대의 일부"라고 바꾸고 모든 공장 노동자들 대신 "노동자 군중"이라고 바꾼 것을 제외하면 체레텔리와 단의 공식 기관지는 시위의 상황을 왜곡하지 않았다. 특히 이 신문은 시위의 두 중심부인 크쉐신스카야 궁전과 타우리데 궁전을 올바르게 주목했다.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이 운동은 두 적대적인 중심부를 두고 있었다. 볼세비키당의 본부인 크쉐신스카야 궁전에서 이들은 지시, 지도력, 영감을 불어넣는 연설을 기대했다. 소비에트 본부인 타우리데 궁전에서 이들은 요구를 제시하고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을 약간 위협할 생각이었다.

오후 3시 기관총 연대의 두 대의원이 연대의 시위 참여를 알리기 위해 크쉐신스카야 궁전의 볼세비키당 뻬쩨르부르그 협의회에 나타났다. 이것을 예상하거나 원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톰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거리로 나온 연대들은 동지적인 행동을 보이지 못했다. 시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당 중앙위원회를 초대했어야했다. 중앙위원회는 협의회에 이렇게 제안한다: 우선 대중을 저지하기 위해 호소문을 작성하고 다음으로 집행위원회가 권력을 접수하라고 촉구하는 연설문을 준비하자. 새로운 혁명을 원치 않는 한 시위는 안된다." 수년간 강제 중노동에 처해져 당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시킨 노동자 출신의 고참 불세비키인 톰스키는 이후 노동조합 지도자로 유명해졌다. 그는 성격상 대중 행동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저지시키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 그는 레닌의 생각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을 뿐이었다: "새로운 혁명을 원치 않는 한 지금 시위는 안된다." 6월 10일의 평화 시위도 화해주의자들이 음모라고 비난했기 때문에 취소되었다. 협의회의 압도적 다수는 톰스키와 같은 의견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종 격돌은 연기시켜야한다. 전선의 공세는 나라 전체를 대단한 긴장으로 몰아가고 있다. 공세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패배의 모든 책임을 볼세비키당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정부의 시도도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화해주의자들에게 완전히 파멸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협의회의 이름으로 볼로다르스키는 기관총 연대에 응답했다: 연대는 당의 결정에 복종해야한다. 그러자 기관총 연대 대의원들은 항의한 후 회의장을 나가버렸다. 오후 4시 당 중앙위원회는 협의회의 결정을 승인했다. 중앙위원들은 지구와 공장으로 흩어져 대중의 시위를 저지하려고 했다. 같은 내용의 호소문이 다음 날 제 1면에 실리기 위해 프라우다지 사무실에 보내졌다. 이 결정에 노동자-병사, 농민 합동 집행위원회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스탈린이 임명되었다. 볼세비키당의 입장은 확고했다. 중앙위원회는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호소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여러분의 무장 시위를 부추기고 있다."; 따라서 소비에트 정당은 어느 누구도 시위를 호소하지 않고 있다....이렇게 당과 소비에트의 중앙위원회는 시위의 자제를 호소했으나 대중은 말을 듣지 않았다.

저녁 8시 기관총 연대와 뒤이어 모스크바 연대는 크쉐신스카야 궁전에 도달했다. 인기 있는 볼세비키들인 네프스키, 라쉐비치, 포드보이스키 등은 발코니에서 연설하면서 연대들을 병영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발코니 아래에서 대중은 연달아 외쳤다: 꺼져라! 꺼져라! 병사들이 볼세비키당에게 이렇게 외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것은 경고였다. 연대들 뒤에는 공장에서 나온 노동자들이 행진하기 시작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10명의 자본가 장관들을 타도하라!" 이 구호들은 6월 18일 시위의 배너에 아로새겨 있었으나 이제는 대검으로 이루어진 장막 속에서 나왔다. 시위는 이제 거부할 수 없는 막강한 현실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볼세비키당이 비켜서서 방관할 수 있을까? 뻬쩨르부르그 위원회는 협의회, 연대, 공장의 대표들과 함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문제를 다시 고려한다; 시위를 저지시키려는 헛된 시도를 모두 중지한다; 정부의 위기가 인민의 이해를 증진할 수 있도록 정세를 지도한다; 이를 위해 병사와 노동자들은 타우리데 궁전까지 평화 시위를 한 후 거기서 대의원을 선출하고 이들을 통해 요구 사항들을 집행위원회에 제시한다. 회의에 참석한 중앙위원들은 이 전술 전환을 승인했다. 발코니에서 발표된 이 새로운 결정에 대해 대중은 환영의 외침과 "마르세이예즈" 합창으로 응답했다. 이제 이 운동은 당에 의해 승인 받았다. 기관총 사수들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이 연대의 일부는 즉시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로 달려가 주둔군을 설득하려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요새의 공격으로부터 크쉐신스카야 궁전을 보호하려고 했다. 요새와 궁전 사이에는 좁은 크론베르크스키 운하가 놓여있었기 때문에 궁전은 요새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다.

시위대의 주요 대오들은 마치 외국 영토에 들어가듯이 부르주아 계급, 관료, 장교들의 대동맥인 네프스키 가도로 나아갔다. 보도, 창문, 발코니 등에서 수천 개의 눈들이 악의를 품고 시위대를 쳐다보았다. 연대 병사들은 공장 노동자들과 밀착했고 공장 노동자들은 다시 연대 병사들과 밀착한 채 시위 대오는 빽빽이 행진했다. 계속해서 대중이 새로 도착했다. 붉은 색 배경에 금빛 글씨로 모든 배너들은 하나의 목소리로 외쳤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행진은 네프스키 가도를 넘쳐흘렀고 홍수처럼 타우리데 궁전으로 밀려갔다. "전쟁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는 장교들 특히 이들 가운데 상이군 다수의 적대감을 크게 자극했다. 팔을 흔들고 목청을 끝까지 올린 대학생, 여대생, 관리 등이 병사들을 설득하려고 애쓰고 있다: 여러분 뒤에 버티고 있는 독일 첩자들은 빌헬름 황제의 군대를 뻬쩨르부르그로 진군시킨 후 우리의 자유를 질식시킬 것이다. 이 연설가들의 결론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듯이 보인다. 노동자들을 가리키면서 "저들은 스파이들에게 속아넘어갔다."고 관리들이 말한다.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응답은 무뚝뚝한 눈흘김이다. 좀더 관대한 자들은 "저들은 미친놈들 때문에 잘못 되었다!"고 말한다. "저들은 무식한 놈들이야."라고 다른 자들이 동의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오늘 이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든 생각들은 독일 첩자들의 것이 아니었다. 시위대는 귀찮게 조르는 자들을 무례하게 제치고 전진한다. 그러자 네프스키 가도의 애국주의자들은 미쳐 날뛴다. 상이군과 성 조오지 기병대로 주로 구성된 돌격대가 시위대의 일부를 덮쳐 깃발을 탈취하려고 한다. 여기저기서 충돌이 일어난다. 분위기는 가열된다. 총성이 울린다.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창문에서? 아니치킨 궁전에서? 이때 시위대의 누가 허공에 대고 총을 연속해서 발사한다. 금방 거리 전체가 아수라장이 된다. "발칸" 공장의 어느 노동자가 이렇게 말한다: "밤 12시에 공공도서관 근처의 네프스키 가도를 수류탄 연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때 누가 시위대에 발포했다. 총격은 몇 분간 계속되었다. 공포가 뒤따랐다. 노동자들은 샛길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병사들은 총격을 피해 몸을 땅에 바짝 붙인다. 전쟁 학교에서 배운 것이다. 밤 12시 수류탄 연대가 차도에 바짝 엎드려 있는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푸쉬킨, 고골, 네프스키 가도의 가수 등은 이런 일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환상적인 장면은 현실이었다. 죽고 부상당한 병사들이 차도에 엎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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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타우리데 궁전은 자기만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입헌민주당 장관들이 사임했기 때문에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와 농민 소비에트의 집행위원회들은 합동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알맹이 빠진 연립정부를 뒤처리하는 방법을 설교하는 체레텔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만약 들끓고 있던 대중이 정세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뒤처리 비결은 장기적으로 틀림없이 발견되었을 것이다. 기관총 연대가 시위 준비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화로 전해 듣자 지도자들은 분노와 불만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 신문들이 결의문을 통해 상황을 구원할 때까지 노동자와 병사들은 왜 기다릴 수 없는 것일까? 이들은 볼세비키들에게 삐딱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후자에게도 이번 시위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카메네프를 비롯한 볼세비키들은 회의가 끝난 후 공장과 병영을 방문하여 대중이 시위에 나서지 못하게 설득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나중에 화해주의자들은 이 제스처를 군사적 술수라고 해석했다. 늘 그렇듯이 집행위원회는 서둘러 선언문을 채택했다: 어떤 시위도 혁명에 대한 배신행위이다. 그러나 정부의 위기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방법이 나왔다: 집행위원회의 지방 위원들이 소집될 때까지 동강난 내각을 그대로 둔다. 질질 끌면서 동요할 시간을 버는 것이 이들에게는 가장 기발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대중에 대해 투쟁할 때만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화해주의자들은 생각했다. "봉기"에 저항하는 무장을 위해 공식 기구가 즉시 가동되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시위를 봉기라고 불렀다. 지도자들은 모든 곳을 뒤져 정부와 집행위원회를 방어할 군대를 찾았다. 체이제와 최고회의 위원들로부터 서명을 받아 여러 군사 기관들에 명령이 하달되었다: 타우리데 궁전으로 장갑차, 3인치 포, 포탄 등을 보내라. 동시에 거의 모든 연대들이 이 궁전의 방어를 위해 부대를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같은 날 집행위원회 사무국은 수도에 가장 가까이 주둔한 전선의 제 5군에 전보를 보내 "뻬쩨르부르그에 일개 기병 사단, 일개 보병 여단, 장갑차를 보내라"고 명령했다. 집행위원회를 방어할 임무를 맡은 멘세비키 보이틴스키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전모를 밝혔다: "타우리데 궁전을 요새화할 군대들을 모으는데 7월 3일 하루가 전부 걸렸다....최소한 몇 개 중대라도 불러들이는 것이 문제였다....한동안은 동원할 군대가 전혀 없었다. 6명의 병사들이 타우리데 궁전 문에 서있었는데 대중을 저지할 힘이 없었다...." 그는 또 이렇게 적었다: "시위 첫날에 우리 수중에는 100명의 병력 밖에 없었다. 대표들을 모든 연대에 보내 순찰대를 구성할 병사들을 요청했다....그러나 각 연대는 이웃 연대의 눈치만 보고 움직이지를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위를 막아야했기 때문에 전선에서 군대를 호출했다." 미리 악의를 가지고 생각해 냈더라도 화해주의자들에 대한 이보다 더 신랄한 풍자를 고안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수십만의 시위대가 소비에트로 권력을 넘길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비에트 체제의 우두머리이며 따라서 논리적으로 내각의 수상이 될 체이제는 시위대에 저항하기 위해 군대를 찾고 있었다. 민주주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에게 권력이 접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대적인 운동을 민주주의에 대한 무장 괴한들의 공격이라고 비난했다.

한편 같은 시간 타우리데 궁전에서는 소비에트 노동자 부문이 긴 정회 끝에 회의에 들어갔다. 지난 2개월 동안 소비에트 노동자 부문은 공장의 보궐선거로 인해 대의원 구성이 크게 바뀌었다. 이 때문에 볼세비키당이 이 부문을 장악할 것이라고 집행위원회는 우려했다. 이 우려의 근거는 충분했다. 인위적으로 계속 연기되다가 며칠 전에 화해주의자들에 의해 소집이 확정된 이 회의는 우연하게 무장 시위의 날과 일치했다. 신문들은 볼세비키당이 일을 꾸몄다고 보도했다. 노동자 부문에게 연설하면서 지노비에프는 자기 생각을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동맹군인 화해주의자들은 반혁명에 대항해 투쟁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 이들에게 반혁명은 흑백인조 깡패들의 개인적 테러 행위로만 이해된다; 그러나 근로 대중의 저항 구심인 소비에트를 압살하기 위해 유산계급들이 정치적으로 연합하는 것이 반혁명이다. 그의 연설은 정곡을 찔렀다. 처음으로 소비에트에서 소수파가 된 멘세비키들은 이렇게 제안했다: 아무런 결정도 하지 말자; 지구들로 해산하여 질서를 보존하자. 그러나 이 제안은 너무 늦게 나왔다! 무장 노동자와 기관총 사수들이 타우리데 궁전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회장은 크게 술렁거렸다. 이때 카메네프가 연단에 올라가 이렇게 말했다: "볼세비키당은 시위를 촉구하지 않았다. 인민 대중 스스로 거리로 나온 것이다....그러나 대중이 일단 거리로 나온 이상 우리는 그들과 함께 해야한다....현재 우리의 임무는 이 운동에 조직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카메네프는 연설을 마치면서 이렇게 제안했다: 이 운동을 지도하기 위해 25인 위원회를 선출하자. 트로츠키는 재청했다. 체이제는 볼세비키들로 위원회가 구성될 것이 두려워 이 문제를 집행위원회에 넘기자고 헛되이 우겼다. 토론은 더욱 격렬해졌다. 합해보아야 전체 대의원의 3분의 1 밖에 되지 않는다고 마침내 확신한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대회장을 나가버렸다. 회의장 이탈은 이제 민주주의자들이 애용하는 전술이 되고 있었다. 다수파에서 밀려나는 순간부터 이들은 소비에트를 보이코트하기 시작했다. 집행위원회가 권력을 장악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은 반대파의 공석 때문에 276표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25인 위원회 선출 작업이 즉시 시작되었다. 25명 가운데 10명은 소수파를 위해 공석으로 남겨 놓았는데 나중까지 결코 채워지지 않았다. 볼세비키들로 위원회가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적과 동지 모두에게 명백히 전달되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노동자 부문은 앞으로 볼세비키당의 진지가 될 것이다. 거대한 전진의 일보가 아닐 수 없었다! 4월에 볼세비키당은 뻬쩨르부르그 노동자 약 3분의 1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소비에트에서는 전적으로 미미했다. 그러나 7월이 시작된 지금은 노동자 부문의 약 3분의 2를 장악했다. 이것은 대중에게 볼세비키당이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타우리데 궁전으로 나있는 거리들 전부는 배너, 노래, 밴드의 연주를 동반한 노동자 남녀와 병사들의 대오로 꾸준히 채워지고 있었다. 경량의 대포가 함께 행진했다. 자기 사단의 모든 포대는 노동자 편이라고 지휘관이 환희에 차 보고했다. 타우리데 궁전 근처의 대로와 광장은 인파로 가득했다. 궁전 정문의 연단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었다. 일하다가 불필요하게 끌려나온 사람처럼 어두운 표정으로 체이제가 시위대에 다가간다. 그러나 이 인기 있는 소비에트 의장을 대중은 적대적인 침묵으로 대한다. 입을 오랫동안 주름지게 만든 뻔한 말들을 그는 피곤하고 쉰 목소리로 반복한다. 그를 돕기 위해 나온 보이틴스키도 더 좋은 대접은 받지 못한다. 밀류코프가 이렇게 적고 있다: "권력이 소비에트로 이전될 순간이 왔다고 트로츠키가 선언했다. 그의 연설은 큰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밀류코프의 이 문장은 의도적으로 애매하다. 볼세비키들 어느 누구도 "순간이 왔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네바강의 뻬쩨르부르그 쪽에 위치한 작은 공장 뒤플롱의 어느 기계공은 타우리데 궁전 담 밑에서 벌어진 집회에 대해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트로츠키의 연설을 기억한다. 우리 손으로 권력을 잡을 때가 아직은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이 기계공은 역사 교수보다 그 연설의 핵심을 더 정확히 보고하고 있다. 시위대는 노동자 부문이 조금 전에 거둔 승리를 볼세비키 연설가들의 입을 통해 알았다. 이 사실은 이들에게 소비에트 권력의 시작만큼이나 직접적 만족감을 가져다주었다.               

집행위원회 합동회의는 밤 12시 조금 전에 다시 시작되었다. (바로 이때 수류탄 연대는 네프스키 가도에 엎드려 있었다.) 단의 제의에 따라 이렇게 결의되었다: 회의의 결정에 승복하겠다고 미리 약속하는 사람들만 회의에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내용이었다! 멘세비키들은 소비에트를 노동자와 병사의 의회라고 선언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 의회를 화해주의 다수파의 행정기구로 전환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2개월 후에 소수파로 전락하자 화해주의자들은 소비에트 민주주의 원칙을 열정적으로 옹호한다. 그러나 오늘처럼 사회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에는 언제든지 민주주의는 정지된다. 메주라욘치 그룹(역자 주: 당시 저자가 소속되었던 지구간 그룹) 소속의 몇 명은 이 결의문에 항의하여 대회장을 나갔다. 볼세비키들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크쉐신스카야 궁전에 모여있었다. 나중에 메주라욘치 그룹과 볼세비키당은 대회장에 나타나 이렇게 선언했다: 대의원들을 선출한 대중의 의사를 어느 누구도 박탈할 수 없다. 다수파는 이 선언에 침묵을 지켰다. 단의 결의문은 조용히 망각되었다. 회의는 곧 죽을 것 같은 사람의 목숨처럼 질질 끌었다. 지친 목소리로 화해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서로에게 계속 확신시키고 있었다. 체신장관 체레텔리는 우체국 직원들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조금 전에 전신전화국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이들의 정치적 요구도 똑같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타우리데 궁전을 둘러싼 시위대의 대표들은 집행위원회 회의에 출석을 허락할 것을 요구했다. 경악과 적대감 속에 이들의 회의 참석은 허락되었다. 대표들은 이번만은 자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화해주의자들이 회의장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진지하게 믿었다. 입헌민주당 장관들의 사임을 보도한 멘세비키당 및 사회혁명당의 오늘 자 기관지는 부르주아 동맹세력의 음모와 사보타지를 스스로 폭로하지 않았는가? 더욱이 소비에트 노동자 부문은 소비에트 정부를 지지하였다. 더 기다릴 것이 무엇인가? 그러나 희망이 여전히 분노와 뒤섞인 이들의 열렬한 호소는 화해주의 의회의 케케묵은 공기 속에서는 아무런 힘이나 논리도 발휘하지 못했다.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한가지 생각 밖에 없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이 불청객들을 쫓아내자. 이들을 방청석으로 물러나라고 제안하거나 시위대에게 다시 돌아가게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방청석에서는 기관총 연대 병사들이 오직 시간을 끌기 위해 진행 중인 토론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경청하고 있었다. 화해주의자들은 믿을만한 연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은 이렇게 외쳤다: "혁명 인민이 거리에 나와 있다. 그러나 이들은 반혁명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자 유태인 노동자연합(분트)의 지도자 아브라모비치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음모를 목격하고 있다." 혁명에 대해 언제나 분노하는 본능을 지닌 이 보수적 현학자는 명백한 현실을 거부했다. 그리고 이렇게 제안했다: "시위는 우리의 작품이다."라고 볼세비키당은 공개적으로 선언해야한다. 체레텔리는 이렇게 토론을 심화시켰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요구하면서 거리로 나오는 것이 소비에트를 지지하는 행동인가? 소비에트가 그것을 원한다면 권력은 당연히 소비에트로 넘어오게 되어 있다. 소비에트의 의지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어디에도 없다....지금과 같은 시위는 혁명이 아니라 반혁명으로 가는 길을 열어줄 뿐이다." 이 논리를 노동자 대표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상층부 지도자들이 약간 머리가 돌았다고 이들은 생각했다. 마침내 이 회의는 11표의 반대를 제외한 압도적 찬성으로 다시 한번 결의했다: 무장 시위는 혁명 군대의 등에 비수를 꽂는 배신행위이다 등등. 회의는 아침 5시에 정회되었다.

대중은 서서히 지구로 돌아가 다시 모였다. 무장 자동차는 밤새 내내 돌아다니며 연대, 공장, 지구 중심부를 단결시켰다. 2월의 마지막 며칠과 마찬가지로 대중은 밤을 지새면서 하루의 투쟁을 결산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공장, 당, 연대 등 복잡한 조직 체계의 도움을 받아 계속 회의하면서 정세를 평가했다. 이 운동이 도중에 멈출 수는 없다고 지구들은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집행위원회는 권력 문제에 대한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대중은 이것을 동요의 징조로 받아들였다. 결론은 명확했다: 좀더 압력을 가해야한다. 집행위원회가 회의하고 있던 같은 시각에 볼세비키당과 메주라욘치 그룹은 타우리데 궁전에서 오늘을 평가하고 다음날을 예측하는 회의를 가졌다. 지구들에서 올라온 보고에 의하면 오늘 시위는 대중을 결집시키는 것에 그쳤다. 그리고 대중에게 권력의 문제를 솔직하게 제기하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내일은 공장과 연대가 이 문제의 해답을 찾을 것이며 세상의 어떤 힘도 이들을 교외에 붙잡아둘 수 없을 것이다. 회의에서 진행된 토론은 나중에 적들이 주장했듯이 권력 장악으로 대중을 결집시키는 것을 주제로 하지 않았다. 다만 아침에 시위를 취소시킬 것인지 아니면 시위의 선두에 설 것인지가 토론의 주제였다.

밤늦게 아니 새벽 3시에 다수가 부인과 자식을 동반한 채 푸틸로프 공장의 8만 노동자들이 타우리데 궁전에 접근했다. 이 시위는 밤 11시에 시작되었으며 뒤늦게 다른 공장들의 노동자들도 대오에 합류했다.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나르바 대문 앞은 인파로 들끓었다. 그날 밤 지구 전체에서 집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성들이 외쳤었다: "모두 가야한다. 궁전을 감시해야한다." 이때 구세주 교회의 종루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이것을 신호로 기관총이 발사되는 것 같은 총성이 연속으로 울렸다. 그러자 시위대에서 누군가가 종루에 총을 연속으로 발사했다. "고스티니 드보르 가도 근처에서 사관생도 중대와 대학생들이 시위대를 덮쳐 플래카드를 탈취하려했다. 노동자들은 이에 저항했다. 시위 군중이 서로 뒤엉켰다. 누군가가 총을 쏘았다. 이 혼란의 와중에서 나는 머리가 깨지고 옆구리와 가슴이 시위대의 발에 심하게 짓밟혔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노동자 에피모프의 증언이다. 고요한 도시 전체를 가로질러 푸틸로프 노동자들은 마침내 타우리데 궁전에 도착했다. 당시 노동조합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리아자노프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대표단이 집행위원회 출석을 허락 받았다. 배고프고 완전히 지친 노동자들은 거리와 정원 주위에 퍼졌으며 대다수는 즉시 넉자로 뻗어버렸다. 해답을 얻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이들은 생각했다. 새벽 3시 타우리데 궁전 주위에 푸틸로프 노동자들 전부가 땅바닥에 누워있었다. 한편 민주주의 지도자들은 전선에서 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은 2월 혁명과 10월 혁명 사이의 분수령에서 일어난 가장 놀라운 광경 중의 하나였다. 이로부터 12년 전인 1905년에 푸틸로프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성상과 종교 깃발을 들고 1월에 동궁으로 행진했었다. 그 일요일 오후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다. 다음 4개월 동안 또 많은 시간이 지나갈 것이다.                 

푸틸로프 노동자들이 궁전의 정원에 누워있는 침울한 광경은 다음날 계획을 논의하고 있는 볼세비키 지도자들과 조직가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내일 이들은 작업을 거부할 것이다. 그렇다, 밤새 뜬눈으로 세운 이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전화가 와서 지노비에프를 찾았다. 크론슈타트에서 라스콜니코프가 전화를 통해 이렇게 전했다: 내일 아침 일찍 요새의 주둔군이 뻬쩨르부르그를 향해 출발할 것이며 어느 누구도 이것을 막을 수 없다. 이 젊은 해군사관학교 생도는 긴장 속에 전화를 계속 붙잡고 이렇게 묻고 있었다: 중앙위원회가 소비에트와 결별하라고 명령하여 이들의 눈앞에서 나를 파멸시킬까? 푸틸로프 노동자들이 집시 캠프를 차린 광경에 위에 섬 요새의 수병들이 밤잠도 자지 않고 노동자와 병사의 뻬쩨르부르그를 지원할 준비를 하고 있는 광경이 겹쳐졌다. 아니다, 상황은 너무도 명확하다. 동요할 여지가 없다. 트로츠키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비무장 시위를 조직할 수는 없을까? 아니다, 이것도 불가능하다. 무장하지 않을 경우 사관생도 일개 분대가 수만 명의 무기 없는 노동자들을 양떼처럼 해산시킬 수 있다. 병사와 노동자들도 비무장 시위를 함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해답은 단정적이고 확신에 찼다. 회의 참석자들은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다음날도 시위를 계속 하도록 당의 이름으로 대중에게 촉구한다. 전화를 붙들고 지쳐있는 라스콜리니코프를 지노비에프는 서둘러 안심시켰다. 즉시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이 작성되었다: 거리로 나서라! 시위 중지를 명령하는 오후의 중앙위원회 결정은 프라우다지에 실리기 전에 인쇄기에서 찢겨졌다. 그러나 새 결정으로 이것을 대체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 다음날 아침 프라우다지의 제 1면이 하얗게 백지로 남아있을 경우 이것은 다음과 같이 해석되면서 볼세비키당에게 치명적인 해악이 될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두려움에 굴복하여 봉기 촉구를 취소했다; 아니면 정반대로, 봉기를 준비하기 위해 평화 시위 호소를 거두었다. 이 때문에 볼세비키당의 진짜 결정사항은 별도의 유인물로 제작되었다. 이것은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평화적이고 조직된 시위를 통해 여러분의 의지를 회기 중인 집행위원회에 제시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이것은 봉기 촉구가 결코 아니었다.   

 

 

제 2장 "7월 시기": 절정과 패주(敗走)

이때부터 운동은 결정적으로 볼세비키당 뻬쩨르부르그 위원회에 의해 직접 지도되었다. 이 위원회의 주축은 선동가 볼로다르스키였다. 주둔군을 동원시키는 임무는 당의 군사기구에게 떨어졌다. 3월부터 내내 이 기구는 2명의 볼세비키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이들은 이 기구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포드보이스키는 볼세비키당에서 선이 뚜렷한 독특한 인물이었다.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구세대 러시아 혁명가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통제될 수 없는 대단한 활력을 지닌 그는 창조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것이 환상으로 치닫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레닌은 "포드보이스키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우정 어린 빈정거림과 충고의 의미를 가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약점인 넘치는 활력은 주로 권력 장악 이후에 드러났다. 이때에 비로소 그의 넘치는 활력과 장식에 대한 열정이 발휘될 기회와 수단이 풍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권력 장악 과정에서는 낙관적인 단호함, 자기 절제, 피곤을 모르는 활력 때문에 그는 각성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꼭 필요한 지도자가 되었다. 대학교 강사 출신의 네프스키는 포드보이스키보다는 좀더 무미건조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당에 대한 헌신은 그에 뒤지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도 조직가는 아니었으나 그는 소박함, 사교성, 친절한 관심 등으로 병사들을 끌어당겼다. 그는 일년 후에 운이 없이 우연히 소비에트 정권의 통신장관이 되었다. 이 두 지도자 주위로 사이가 가까운 조수, 병사, 젊은 장교들이 모여들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앞으로 전개될 혁명에서 큰 역할을 하게된다. 볼세비키당 군사기구는 7월 4일에 갑자기 혁명의 무대 중심에 섰다. 지휘관의 기능들을 쉽게 통달한 포드보이스키의 휘하에 즉흥적으로 참모부가 형성되었다. 주둔군 모두에게 짤막한 호소와 지시들이 하달되었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 교외에서 수도로 들어오는 다리와 간선도로의 주요 교차로에 장갑차가 배치되어야 했다. 기관총 연대의 병사들은 밤사이에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의 초소에 이미 보초들을 세워놓았다. 오라니엔바움, 표트르호프, 크라스노에 셀로 그리고 기타 수도 인근에 주둔한 병사들은 전화와 특별 전령을 통해 내일의 시위 내용을 전달받았다. 전반적인 정치 지도는 물론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가 장악했다.

기관총 병사들은 아침해가 뜰 무렵에 병영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들은 지쳐 있었으며 7월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덜덜 떨고 있었다. 밤새 내린 비가 병사들 뿐 아니라 푸틸로프 노동자들도 흠뻑 적셨다. 오전 11시가 되어야 시위대는 다시 모였다. 그리고 시위대를 보호하는 군사 대오는 더 늦게 도착했다. 오늘 제 1 기관총 연대는 마지막 병사까지 빠짐없이 시위에 참여한다. 그러나 어제처럼 시위를 주도하지는 못할 것이다. 공장 노동자들이 선두 대오에 나섰다. 더욱이 어제는 지켜보기만 했던 노동자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지도자들이 동요하거나 저항하자 젊은 노동자들이 나서서 공장위원회 당번에게 조업 중지의 신호로 호각을 불게 했다.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이 장악한 발트해 공장에서는 5천 명 가운데 약 4천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오랫동안 사회혁명당의 아성으로 인식되었던 스코로호드 신발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의 정서가 돌변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대의원이었던 어느 사회혁명당원은 며칠동안 공장에 얼굴을 내밀 수 없었다. 모든 공장들이 파업에 들어간 후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시위 지도자들과 집행위원회에 요구 사항을 전달할 대표들을 선출했다. 다시 수십만의 대중이 사방에서 타우리데 궁전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이 가운데 수만 명이 크쉐신스카야 궁전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늘의 시위는 어제보다 훨씬 인상적이었으며 잘 조직되었다. 당의 지도가 눈에 띄게 드러났다. 그러나 감정은 오늘이 더 격했다. 병사와 노동자들은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 나섰다. 정부는 절망에 빠졌다. 시위 둘째 날에 정부의 무기력은 첫날보다 더 명백하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집행위원회는 자기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사방에서 이렇게 보고가 들어왔다: 크론슈타트, 신 표트르호프, 크라스노에 셀로, 크라스나야 고르카 요새 그리고 수도 근교의 중심지역 전부에서 적대적인 군대들이 육지와 바다를 통해 수도로 다가오고 있다; 무장한 병사와 수병들이 음악에 맞추어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볼세비키당의 깃발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일부 연대에서는 장교들도 행진에 동참했다. 마치 2월처럼 부대 전체가 이들의 지휘를 받는 것처럼 보였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내각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네프스키 가도에서 발포가 있었다는 소식이 비서들을 통해 전달되었다. 비서실 본부로 회의장소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회의에는 르보프공, 체레텔리, 법무장관 페레베르제프, 전쟁부 차관 두 명 등이 참석했다. 정부에게 희망이 없는 듯이 보인 순간이 있었다. 볼세비키당을 지지하지 않았던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 세메노프스키 연대, 이즈마일로프스키 연대 등이 '중립'을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궁전 앞 광장에는 정부 본부를 방어하기 위해 상이군과 카자흐 기병 몇백 명이 모였을 뿐이었다." 7월 4일 아침 폴로프체프 장군은 뻬쩨르부르그에서 무장 군중을 전부 일소하겠다고 선언했다. 시민들은 문을 잠그고 꼭 필요할 경우 외에는 거리에 나가지 말라는 엄한 충고를 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위협적인 명령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지구의 모든 군대들을 지휘하는 지구 사령관은 시위대에 저항하여 소규모의 카자흐 부대와 사관생도들을 동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날 이들은 의미 없이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여 유혈충돌을 몇 번 일으켰을 뿐이었다. 동궁을 지키는 제 1 돈 연대 소속의 어느 소위는 곧이어 군대 조사위원회에 이렇게 보고했다: "거리를 지나는 소규모 그룹과 무장 자동차들은 무조건 무장 해제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궁전 밖으로 뛰어나가 가끔 인민을 무장 해제시켰다...." 이 카자흐 소위의 재치 있는 이야기는 역관계를 제대로 묘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투쟁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다. "반란"군은 중대와 대대 단위로 병영에서 나와 거리와 광장을 점령했다. 정부군은 매복을 하거나 소규모 공격에 나섰기 때문에 오히려 반란군처럼 보였다. 정부가 관리하는 군대 전부가 정부에 적대적이거나 기껏해야 중립을 지켰기 때문에 정부군은 반란군이 되고 반란군은 정부군이 되었다. 정부는 집행위원회의 권한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한편 집행위원회의 권한은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권력을 접수할 것이라는 대중의 희망에서 나왔다.

크론슈타트 수병들이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하자 시위는 절정에 이르렀다. 이것은 기관총 연대 대표들이 전날에 크론슈타트 요새를 설득한 결과였다. 뻬쩨르부르그 출신의 무정부주의자 일부의 주도로 집회는 관례에서 벗어나 크론슈타트의 야코르니 광장에서 열렸었다. 크론슈타트의 젊은 영웅 가운데 하나이자 야코르니 광장의 총아인 의과대학생 로샬은 투쟁의 자제를 충고하려고 했다. 그러나 수천 명의 목소리가 그의 연설을 도중에 막아버렸다. 평소에 누렸던 환대를 받지 못하자 그는 연단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볼세비키당이 뻬쩨르부르그에서 시위를 촉구했다는 사실은 밤이 되어서야 크론슈타트에 알려졌다. 이것으로 만사는 해결되었다. 크론슈타트의 사회혁명당 좌파는 시위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요새에는 사회혁명당 우파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전선에서 군대를 집합시키고 있던 케렌스키와 이들은 같은 당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날 밤 크론슈타트 조직의 회의 분위기는 너무도 뜨거워서 임시정부의 인민위원인 소심한 파르체프스키도 시위에 찬성했다. 계획이 마련되고 수송수단이 동원되었다. 수도를 정치적으로 포위하기 위해 무기고에서 2.5톤의 무기와 탄약이 지급되었다. 예인선과 기선에 빽빽이 들어찬 약 1만 명의 수병, 병사, 노동자들은 정오에 네바강의 병목 부분에 도착했다. 강 양쪽으로 내린 이들은 군악대의 연주에 맞추어 소총을 어깨에 맨 채 시위에 나섰다. 수병과 병사 대오 뒤에는 뻬쩨르부르그 및 바실리예프스키 지구 노동자들이 따라왔다. 대오 사이사이에 적위대 중대들이 장갑차를 대동하고 수많은 깃발과 배너들을 위로 나부낀 채 행진에 동참했다.

크쉐신스카야 궁전은 두 발자국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스베르들로프는 키가 작고 여위었으며 타르처럼 시커먼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4월 당협의회에서 기초 조직가로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발코니에 서서 항상 그렇듯이 사무적인 방식으로 지시사항을 우렁찬 저음으로 외치고 있었다: "선두 전진, 간격을 좁히고, 후위는 더 바짝 붙어라." 루나차르스키는 발코니에서 시위대를 맞이했다. 주위의 분위기에 언제나 쉽게 감염되는 그는 외모와 목소리가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그렇게 믿을만하지는 못해도 종종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시위대의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시위대는 누구보다도 레닌의 연설을 듣고 싶어했다. 그는 핀란드의 임시 피난처에서 그날 아침 부름을 받았다. 수병들이 그를 너무 끈질기게 보고싶어 했기 때문에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레닌은 거절할 수 없었다. 레닌이 발코니에 모습을 나타내자 억누를 수 없는 환희의 파도, 진정한 크론슈타트의 파도가 일었다. 항상 그렇듯이 환영의 환호가 끝나기를 초조하게 그리고 당혹스럽게 기다린 후 소음이 가라앉기도 전에 레닌은 연설을 시작했다. 그의 연설은 간단한 몇 개의 표현으로 이루어졌다: 시위대에 대한 인사,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의 구호가 결국에는 승리한다는 자신감의 표현, 확고함과 자제력을 보일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 전부였다. 그의 연설에 시위대는 새로이 환호하며 군악대의 음악에 맞추어 행진했다. 적대 언론은 이후 몇 주일간 온갖 방법으로 레닌의 연설을 비난하고 헐뜯었다.

휴일의 축제 분위기로 시작된 시위는 유혈사태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사이에 묘한 일이 하나 벌어졌다. 크론슈타트의 사회혁명당 좌파 지도자들은 군신장에 도착한 후에야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의 거대한 깃발이 시위대의 선두에 나부끼는 것을 알아차렸다. 크쉐신스카야 궁전에서부터 이 깃발은 시위대의 선두에서 펄럭였다. 라이벌 의식에 사로잡힌 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은 이 깃발을 치우라고 요구했으나 볼세비키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사회혁명당의 전원 철수가 선언되었다. 그러나 지도자를 따르는 수병과 병사들은 하나도 없었다. 사회혁명당 좌파의 정책은 한결같이 어떨 때는 우스꽝스럽고 어떨 때는 비극적인 변덕과 동요 자체였다.

네프스키 가도와 리테이니 가도의 모퉁이에서 시위대의 후위가 갑자기 총격을 받았다.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리테이니 가도와 판텔레이모노프 거리의 모퉁이에서는 더 잔인한 총격이 가해졌다. 크론슈타트의 지도자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적이 어디에 있으며 어느 쪽에서 총을 쏘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불안감이 날카로운 고통처럼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시위 병사들은 사방팔방으로 아무렇게나 소총 사격을 가했다. 여러 명이 죽고 부상당했다. 커다란 어려움 끝에 시위 대오는 다시 질서를 회복했다. 군악대의 음악과 함께 시위대는 다시 전진했다. 그러나 휴일의 축제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모든 곳에 적들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소총을 왼쪽 어깨에서 내려 사격 자세를 취했다."

이날 수도의 여러 곳에서 적지 않은 유혈 충돌이 있었다. 일부는 의심의 여지없이 오해, 혼란, 유탄, 극도의 공포 때문이었다. 이 비극적인 사고들은 혁명의 불가피한 비용이었다. 그리고 혁명은 역사 발전의 불가피한 비용이었다. 그러나 7월 사건들의 일부는 당연히 적들의 유혈 도발로 발생했다. 이 점은 이미 사건 당시에 명백하게 드러났으며 나중에 입증되었다. 포드보이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시위 병사들이 부르주아 계급의 소굴인 네프스키 가도와 인접 지역을 지나갈 때 충돌의 불길한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서 누가 쏘는 지도 알 수 없는 이상한 총격들이 벌어졌다....시위 대오는 맨 처음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안정감과 자제력이 가장 없는 병사들이 무질서하게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의 공식 기관지 이즈베스티아지에 멘세비키 칸토로비치는 노동자 대오에 가해진 총격을 이렇게 묘사했다: "수많은 공장에서 나와 시위에 가담한 6만의 노동자들이 사도바이아 거리를 행진하고 있었다. 이들이 어느 교회를 지나가고 있을 때 종루에서 종이 울렸다. 그리고 이것이 신호인 것처럼 여러 가옥의 지붕에서 소총과 기관총이 발사되었다. 노동자들이 거리의 반대 방향으로 달리자 이번에는 반대 편 지붕에서 총탄이 날아왔다." 2월에 프로토포포프의 "파라오들"이 기관총을 걸어 놓고 총격을 가했던 다락방과 지붕에서 지금은 장교협의 회원들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공포를 조성한 후 시위 부대들끼리 충돌하게 만드는 것이 이들의 의도였다. 이 의도는 일부 성공을 거두었다. 총알이 날아온 가옥들을 수색하자 기관총 좌대가 발견되었으며 가끔 기관총 사수들도 색출되었다.

그러나 유혈사태를 조장한 주요 장본인은 정부군이었다. 시위를 진압하기에는 무기력했으나 도발하는 데에는 적절한 병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위가 한창 진행 중이던 밤 8시쯤에 차량에 대포를 실은 이동식 포대로 무장한 카자흐 기병 2개 중대가 타우리데 궁전의 경비병으로 나타났다. 도중에 이들은 한사코 시위대와 대화하기를 거부했다. 이것 자체가 불길한 징조였다. 이들은 아무 곳에서나 장갑차를 탈취하여 소규모 그룹들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노동자와 병사들이 장악한 거리에 카자흐들이 무기를 들고 설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도전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충돌을 예견하고 있었다. 리테이니 다리 근처에서 카자흐들은 빽빽하게 대오를 구성한 시위대에 다가갔다. 타우리데 궁전에 가는 길에 시위대는 여기에 일종의 장벽을 세웠다. 불길한 침묵이 잠시 흐른 후 인접 가옥들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그리고 충돌이 시작되었다. 노동자 메텔레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카자흐들은 탄창을 상자 째로 소모하고 있었다. 몸을 숨길 곳으로 흩어지거나 총탄이 날아오는 속에서 보도에 단순히 몸을 누인 노동자와 병사들은 사격으로 응수했다." 병사들이 총격을 가하자 카자흐들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바강 가에 설치된 부두까지 총격전을 벌인 이들은 대포 세 발을 발사했다. 이즈베스티아지 역시 대포 발사를 보도했다. 그러나 장거리 소총의 발사에 쫓겨 카자흐들은 타우리데 궁전 쪽으로 후퇴했다. 또 다른 노동자 대오에 맞닥뜨린 이들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들은 대포, 말, 소총 등을 버리고 부르주아들의 가옥 안으로 몸을 숨기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소규모 전투에 해당되는 리테이니 가도의 충돌은 7월 시기의 가장 규모가 큰 무장 충돌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시위 참가자 다수의 회상 속에 남아있다. 기관총 병사들과 함께 거리로 나온 에릭슨 공장의 노동자 부르신은 시위대를 보자마자 "카자흐들이 즉시 소총을 발사했다."고 말한다. "많은 노동자들이 죽은 채 누워있었다. 내가 총을 맞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총알은 한쪽 다리를 관통하고 다른 쪽 다리에서 멈추었다....7월 시기의 기념품으로 나는 목발 하나와 쓸모 없는 다리 하나를 가지고 있다...." 리테이니 가도의 충돌로 7명의 카자흐가 살해되었고 19명이 부상을 당하거나 포탄의 폭발로 나가 떨어졌다. 시위대에서는 6명이 살해되고 약 20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죽은 말의 시체들이 나뒹굴었다.

적들도 흥미로운 증언을 한다. 아침에 시위 병사들에게 게릴라 공격을 가했던 아베린 소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밤 8시 폴로프체프 장군의 명령을 받았다. 2개 중대를 동원하여 2대의 야포를 가지고 타우리데 궁전으로 가라는 것이었다....우리는 리테이니 다리까지 전진했다. 거기에는 무장을 갖춘 노동자, 병사, 수병들이 있었다....선발대를 데리고 나는 이들에게 접근하여 무기를 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나의 명령을 거절한 채 이들은 뒤를 돌아 달아났다. 이들은 다리를 건너 비보르그 지구 쪽으로 사라졌다. 이들을 쫓아가려고 했는데 견장을 달지 않은 작은 체구의 병사가 뒤를 돌아 나에게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총알은 빗나갔다. 이 사격을 신호로 사방에서 무작위로 총알이 날아왔다. 시위 군중이 외쳤다: '카자흐들이 우리에게 총을 쏘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카자흐들이 말에서 내려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포까지 쏘려고 했다. 그러나 시위 병사들이 몰아치듯 소총 사격을 가해왔기 때문에 카자흐기병들은 후퇴하여 도시 중심부로 흩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병사가 이 소위에게 총을 쏘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카자흐기병 장교는 7월의 시위대에게 환영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고 총알세례를 기대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나 수많은 증언에 의하면 최초의 총격은 시위대가 아니라 매복한 적들이 시작했을 가능성이 더 많았다. 아베린 소위와 같은 중대에 소속된 어느 카자흐병사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증언했다: 지구 법원 그리고 나중에는 사무르스키 골목과 리테이니 가도의 가옥들에서 카자흐들에 대한 총격이 시작되었다. 소비에트의 공식 기관지에 따르면 카자흐기병들은 리테이니 다리에 도착하기 전에 어느 석조가옥으로부터 기관총 세례를 받았다. 노동자 메텔레프에 의하면 병사들이 이 석조가옥을 수색하자 거기에 살고 있는 어느 장군의 아파트에서 탄창이 꽂혀있는 2문의 기관총을 비롯한 상당수의 총기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전쟁 중에 장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모든 종류의 무기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래에서 거리를 활보하는 "폭도들"에게 총알 세례를 퍼부으려는 유혹을 틀림없이 크게 받았을 것이다. 물론 이들은 카자흐기병들에게 총격을 가했을 것이다. 반혁명 분자들은 의식적으로 정부군에 총격을 가해 이들이 미친 짓을 하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이것을 시위대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제한적인 권한을 누렸던 장교들은 내전이 벌어지면 온갖 사기행각과 잔인한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다. 상부의 보호와 관대한 지원을 받는 비밀 및 반(半)비밀 장교 조직들이 뻬쩨르부르그에 널려 있었다. 7월 시기 거의 한달 전에 멘세비키 리이버는 비밀 보고서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음모에 관련된 장교들은 영국 대사 부캐넌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 연합국의 외교관들은 러시아에 강력한 권력을 신속히 수립하기 위해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유주의자들과 화해주의자들은 모든 폭력 사태가 "무정부주의-볼세비키들"과 독일 첩자들의 소행이라고 비난했다. 반면 노동자와 병사들은 애국주의 도발자들이 7월의 충돌과 사상에 책임이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했다. 그렇다면 어느 쪽 말이 맞는가? 물론 대중의 판단에 오류가 없을 리 없다. 그러나 대중이 맹목적이며 남의 말에 쉽게 혹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야한 오류일 것이다. 급소를 다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되면 대중은 사실을 수집하여 천 개의 눈과 귀로 계산하고 자신의 경험으로 소문들을 테스트하고 일부는 옳은 것으로 일부는 그른 것으로 판단한다. 대중운동과 관련된 주장들이 서로 다를 때에는 대중 자신의 주장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 이뽈리뜨 떼에느(역자 주: 프랑스의 문예 비평가)는 거대한 대중운동을 연구하면서도 거리 대중의 목소리는 무시한다. 대신 유산계급들이 고립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응접실에서 나누는 공허한 한담을 꼼꼼하게 수집하고 채로 거르는데 시간을 보낸다. 따라서 떼에느처럼 유산계급들에게 아양떠는 여러 나라 작자들의 주장은 과학적 탐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위대는 다시 타우리데 궁전을 에워싸고 집행위원회의 대답을 요구했다. 크론슈타트 수병들이 도착하고 있는 때에 체르노프는 다른 그룹에 의해 시위대 앞으로 불려나왔다. 대중의 분위기를 감지한 이 떠버리기 좋아하는 장관은 이번 한번만은 아주 짤막하게 연설했다. 권력 문제와 관련된 정부의 위기에 대해서는 슬쩍 넘어가면서 그는 내각에서 철수한 입헌민주당을 경멸 조로 언급했다. "차라리 이들이 없는 것이 좋다!"고 그는 외쳤다. 그러나 "그럼 전에는 왜 진작 이렇게 말하지 않았소?"라는 대중의 외침으로 그의 연설은 중단되었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전한다: "체르노프 앞에서 주먹을 흔들어 보이며 목이 쉰 노동자 하나가 맹렬하게 외쳤다: '권력을 주면 잡아야 될 것 아니냐, 이 개자식아.'" 이 하찮은 일화는 7월 정세의 핵심을 조야하게나마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노동자의 분노에 대한 체르노프의 대답은 물론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대답이 크론슈타트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이로부터 2, 3분 지나서 집행위원회의 회의장으로 누가 뛰어들어와 고함을 질렀다: 수병들이 체르노프를 체포하고 그를 죽이려 한다. 도저히 말로 형언할 수 없이 흥분된 집행위원회는 국제주의자들과 볼세비키들로만 구성된 지도적 인물들을 보내 장관을 구출하려했다. 이후 정부 위원회에서 체르노프는 자기가 연단에서 내려오고 있을 때 건물 기둥 뒤에 있는 입구에서 여러 명의 적대적인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나를 에워싸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나를 저지하고 있던 수병들을 어느 의심스러운 인물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그는 근처에 서 있는 자동차 한 대를 가리켰다....바로 이때 타우리데 궁전에서 나온 트로츠키는 내가 탄 자동차 앞쪽에 올라서서 짤막한 연설을 했다." 체르노프의 석방을 제안한 후 트로츠키는 이에 반대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말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나를 자동차로 데리고 온 그룹은 뚱한 표정으로 옆으로 물러섰다. 내 기억으로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체르노프 시민, 당신이 궁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사람은 없습니다.'...이 사건 전체를 생각해보면 음흉한 분자들이 노동자와 병사 대중의 머리 위에서 미리 계획을 세우고 나를 체포했음이 틀림없다."

트로츠키는 자신이 체포되기 일주일 전에 집행위원회 합동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사실들은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확립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나는 깡패 일당이 입구 근처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루나차르스키와 리아자노프에게 이들이 짜르의 비밀 경찰들이며 타우리데 궁전으로 침입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루나차르스키는 앉은 자리에서 말했다: '맞습니다.') ... 1만 명의 군중 속에서도 이들의 모습은 알아볼 수 있다고 나는 말했다." 7월 24일 크레스티 감옥의 독방에 감금된 트로츠키는 이렇게 적었다: "시위대와 충돌하는 극심한 공포 상황을 피하기 위해 체르노프 그리고 그를 체포하려는 자들과 나는 자동차를 타고 시위대를 벗어나야겠다고 맘을 먹었다. 그러나 해군사관생도 라스콜니코프가 극도로 흥분된 채 달려와 나에게 외쳤다: '불가능합니다....체르노프와 같이 차를 타고 사라지면 언론은 크론슈타트 수병들이 그를 체포했다고 내일 보도할 것입니다. 체르노프는 즉시 풀려나야 합니다.' 나팔수가 시위 대중을 침묵시키기 위해 나팔을 분 후 나에게 짤막한 연설 기회를 주었다. 나는 연설을 끝내면서 이렇게 요구했다: '폭력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손을 드시오.' 이 말과 함께 체르노프는 곧바로 방해받지 않고 궁전으로 돌아갔다." 주요한 참가자 2명의 증언을 통해 체르노프 사건의 사실관계는 전부 확인되었다. 그러나 적대 언론들은 케렌스키를 체포하려는 "기도"와 이 사건을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볼세비키당이 무장봉기를 기도했다는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로 거리낌없이 내세웠다. 또한 특히 선동을 통해 트로츠키가 체르노프의 체포를 지시했다는 암시가 널리 유포되었다. 심지어 이 암시는 타우리데 궁전에까지 도달했다. 군대 조사위원회에 보낸 비밀 성명서에서 체르노프는 상당히 정확하게 자신의 30분 짜리 체포를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볼세비키당에 대한 비방이 계속되도록 공개적인 해명을 회피했다. 더욱이 그는 트로츠키를 감옥에 가둔 정부의 장관이었다. 물론 화해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범죄의 표적이 된 체르노프"에 대한 대중의 적대감 때문에 범죄행위가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음흉한 음모자 일당이 생각하지 않았다면 훤한 대낮에 시위 대중 한가운데에서 장관을 체포하는 무례한 모험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자동차 주위의 시위자들 가운데 스스로 맘을 먹고 체르노프를 구출하려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보충적으로 말하면, 어디서 누가 케렌스키를 체포했어도 이것을 슬퍼하는 노동자나 병사는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 장관들에 대한 실제의 그리고 상상의 체포 시도에 대한 대중의 도덕적 공감은 실제로 존재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적대 언론은 크론슈타트 수병들이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알량한 민주주의적 명성이 금이 갈까 두려워 솔직하게 이렇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시위대의 적대감에 장막을 씌운 후 이들은 포위된 타우리데 궁전에서 계속해서 노동자-병사, 농민 소비에트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밤 8시에 폴로프체프 장군은 전화를 걸어 집행위원회의 희망을 다시 살려주었다: 이동식 포대를 보유한 카자흐기병 2개 중대가 타우리데 궁전으로 가고 있다. 마침내 우군이 도착하는구나! 그러나 이번에도 이들의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모든 곳으로 전화를 해보았으나 이들의 극심한 공포는 깊어갈 뿐이었다: 증발한 것처럼 카자흐군대는 말, 안장, 이동식 포대 등과 함께 사라졌다. 저녁때에 "군대를 보내달라는 정부의 호소가 첫 번째 결실"을 맺었다고 밀류코프는 적고 있다. 제 176 연대가 타우리데 궁전 쪽으로 서둘러 오고 있다고 그는 덧붙이고 있다. 대단히 정확한 정보인 것처럼 들리는 그의 말은 묘하게도 내전 첫 시기에 불가피하게 초래되는 상황을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에 두 적대 진영은 막 형성되고 있었다. 실제로 일개 연대는 전투 준비를 갖추고 타우리데 궁전에 도착했다. 등에는 배낭을 매고 외투를 접어 올렸다. 허리띠에는 물통과 반합이 매달려 있었다. 오는 길에 비를 맞아 병사들은 젖어 있었고 피곤한 상태였다. 이들은 크라스노에 셀로에서 출발했다. 이들이 제 176 연대인 것도 맞았다. 그러나 이들은 정부를 구출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메주라욘치 그룹과 연계된 이 연대는 볼세비키 병사인 레빈손과 메드베제프의 지도하에 소비에트에게 권력을 넘겨주기 위해 비를 맞으며 궁전까지 행진했을 뿐이었다.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이 불안해하고 있던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즉시 이렇게 보고를 받았다: 전투 준비를 갖춘 일개 연대가 장교들과 함께 먼 곳에서 도착하였으며 궁전의 창문 밑에서 당연히 필요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군의관 제복을 입은 단은 이 연대의 지휘관에게 다가가 궁전 방어를 위해 보초를 세울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곧 충분한 숫자의 보초가 세워졌다. 단은 만족해하며 이 사실을 최고회의에 전달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은 신문에도 보도가 되었다. 수하노프는 자신의 "혁명 노트"에서 볼세비키 연대가 멘세비키 지도자의 지시에 따른 것을 빈정대고 있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7월 시위의 "황당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였다. 그러나 실제로 사태는 더 단순하기도 하고 더 복잡하기도 했다. 보초를 세우라는 요청을 받고 연대장은 궁전에서 근무를 서고 있던 부관인 젊은 중위 프리고로프스키에게 조치를 취할 것을 지시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이 젊은 중위는 볼세비키였으며 메주라욘치 그룹의 회원이었다. 그는 궁전의 어느 별관에서 소수의 볼세비키들과 망을 보고 있던 트로츠키에게 즉시 충고를 요청했다. 물론 그는 즉시 보초를 세우라고 충고 받았다. 궁전의 입구와 출구에 적보다는 우군을 두는 것이 훨씬 좋기 때문이었다! 정부에 반대하여 시위에 합류하려고 병영을 나온 제 176 연대는 이렇게 해서 본의 아니게 시위대에 대항해 정부를 방어하게 되었다. 볼세비키당이 무장 봉기를 기도했다면 4명의 병사와 함께 프리고로프스키 중위는 집행위원회 전체를 손쉽게 체포했을 것이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을 지지하는 연대의 병사들은 보초의 임무를 성심껏 수행했다.

타우리데 궁전으로 가는 길에 마주쳤던 유일한 장애물인 카자흐기병 중대들이 제거되자 시위대는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장 주요한 장애물은 바로 궁전 안에 있었다. 저녁 6시에 시작된 집행위원회 합동회의에는 54개 공장을 대표하는 90명의 대표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합의에 의해 발언권이 주어진 5명의 연설자들은 집행위원회 선언문들이 시위자들을 반혁명 세력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항의했다.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 깃발에 써진 문구를 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결정한 내용이다....우리는 10명의 자본가 장관들의 사임을 요구한다. 우리는 소비에트를 신뢰한다. 그러나 소비에트가 신뢰하는 자들은 신뢰하지 않는다....즉각 토지를 몰수하고 산업을 통제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를 위협하는 기근에 대해 투쟁할 것도 요구한다...." 또 한 명이 이렇게 덧붙였다: "이것은 집회가 아니라 완벽하게 조직된 시위이다. 토지를 농민들에게 넘길 것을 요구한다. 혁명 군대에 내려진 명령들을 취소하라....입헌민주당이 정부를 나간 상황에 당신들이 누구하고 흥정할 것인지 묻겠다. 권력이 소비에트에 이양되어야한다." 6월 18일 시위의 선전 구호들이 이제는 무장 대중이 제시하는 최후통첩이 되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아직도 너무 무거운 쇠사슬로 유산계급들의 전차에 묶여있었다. 권력을 소비에트로 넘기라고? 그러나 이렇게 하려면 우선 대담하게 전쟁을 중지하고 연합국들과 결별한 후 우리 부르주아 계급과 결별한 채 몇 주일 동안 완전히 고립되어야 한다. 이것은 파멸일 뿐이다. 그럴 수 없다! 책임 있는 민주주의는 모험주의의 길로 들어설 수 없다! 체레텔리는 이렇게 말했다: "뻬쩨르부르그의 분위기로 보아 지금은 어떠한 것도 새로 결정할 수 없다. 따라서 지금 남아 있는 정부를 그대로 인정한 후 2주일 후에 방해받지 않고 작업을 할 수 있는 곳 특히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임시회의를 소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회의는 계속 방해받고 있었다. 푸틸로프 노동자들이 궁전의 문을 노크하고 있었다. 지치고 분노하고 대단히 흥분한 채 이들은 저녁때에 나타났다. "체레텔리 -- 우리는 체레텔리를 원한다!" 3만 명의 푸틸로프 대중은 궁전으로 대표들을 보냈다. 대표들의 등뒤에서 누가 고함을 질렀다: 체레텔리가 자진해서 나오지 않으면 대표들이 그를 끌어내라. 이것은 대중이 직접 나서겠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험악한 상황임에 틀림없었다. 볼세비키들이 서둘러서 개입했다. 나중에 지노비에프는 이렇게 보고했다: "내가 직접 푸틸로프 노동자들을 만나라고 동지들이 제안했다...노동자들의 머리가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빽빽이 모여 있었다. '체레텔리'를 외치는 고함이 계속되었다....나는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체레텔리 대신 나온 사람이 바로 납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 분위기가 바뀌었다. 나는 상당히 긴 연설을 할 수 있었다....결론적으로 나는 이렇게 호소했다: 질서를 완벽히 지키면서 평화롭게 해산하시오; 공격적인 행동에 나서도록 도발하는 놈들은 절대로 무시하시오. 노동자들은 열렬히 박수를 보낸 후 줄을 서서 해산하기 시작했다." 이 일화는 대중이 격렬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폭력 행위에 대한 사전 계획이 없었음을 가능한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7월 시기에 볼세비키당의 실제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궁전 밖에서 지노비에프가 푸틸로프 노동자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있을 때 이들의 대표들은 큰 무리를 이루어 집행위원회 회의장에 난입했다. 이들 중 일부는 소총을 들고 있었다. 집행위원들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뛰어 올랐다. 이 극적인 순간을 수하노프는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집행위원들 중 일부는 용기와 자제력이 부족했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허리띠 없이 짧은 푸른색 블라우스를 입은 어느 노동자는 프랑스 혁명 당시의 평민 모습과 똑같았다. 그는 소총을 들고 있었다. 그는 연단으로 뛰어 올라가 흥분과 분노로 몸을 떨면서 이렇게 말했다: '동지들! 우리 노동자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배신을 참아야 합니까? 당신들은 부르주아 및 지주들과 협잡을 하고 있소....우리 3만 푸틸로프 노동자들이 이곳에 왔소....우리 뜻대로 하겠소!' 체이제의 코앞에는 소총이 춤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단한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용히 몸을 아래로 숙인 후 그는 그 노동자의 떨리는 손에 인쇄된 선언문을 한 장 집어주었다: '동지, 제발 이것을 읽어보시오. 푸틸로프 동지들이 해야할 일이 여기에 써 있소....'" 시위자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혁명의 배신자가 될 것이 선언문의 내용 전부였다. 사실 멘세비키들이 이것 이외에 할 말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당시 선동의 회오리가 이는 모든 곳에서 그랬듯이 타우리데 궁전 담벼락 아래에서도 지노비에프는 선동가의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 대단한 힘을 가진 연설자인 그는 맨 처음에는 높은 테너의 음성으로 사람을 놀라게 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독특한 음색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지노비에프는 타고난 선동가였다. 그는 대중의 정서로 자신을 감염시키고 흥분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대중의 생각과 감정을 약간 장황하기는 하지만 아주 꼭 집어 표현할 줄 알았다. 적들은 그를 볼세비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참주선동가라고 불렀다. 이것은 그의 가장 큰 장점 즉 대중의 마음에 침투하여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능력에 대한 이들의 일상적 찬사였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이론가나 혁명 전략가가 아니라 단순한 선동가였기 때문에 외적인 규율로 강제되지 않으면 지노비에프는 손쉽게 참주선동으로 빠져 들어갔다. 여기서 참주선동은 속물들이 의미하는 바가 아니라 과학적인 의미 그대로를 뜻한다. 그는 순간의 효과를 위해 영속적인 이해를 희생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정세를 측정할 때는 선동에 필요한 재빠른 후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대단히 가치 있는 조언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 이상은 아니었다. 대중 집회를 통해 검증되었으며 대중의 희망과 증오로 가득한 정치 사상으로 무장했을 때 그는 볼세비키당 회의에서 사람들을 정복하고 설득시키고 매혹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적대적인 회의 심지어는 집행위원회에서 그는 가장 극단적이고 폭발력 있는 사상에 넌지시 암시하는 듯한 포장을 입혀 자기를 불신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대단히 가치 있는 결과를 성취하려면 그는 자신이 옳다는 의식 이상의 것이 있어야 했다. 믿을만하고 강력한 사람이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면제해줄 것이라는 최면과 같은 확신이 그에게는 반드시 필요했다. 레닌은 그에게 이 확신을 심어주었다. 문제의 핵심으로 구성된 전략으로 무장되어 있을 때 지노비에프는 거리, 공장, 병영에서 마주친 신선한 감탄, 항의, 요구 등으로 이것을 기민하게 보완했다. 이 순간 그는 레닌과 대중 그리고 가끔 대중과 레닌을 이상적으로 중계했다. 아주 드문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지노비에프는 언제나 그의 스승인 레닌을 추종했다. 그러나 당, 계급,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중요한 순간에 그는 언제나 레닌과 견해를 달리했다. 그는 혁명 선동가였으나 혁명의 근성이 부족했다. 사람의 이성과 감성을 정복할 때에 지노비에프는 지치지 않는 투사였다. 그러나 행동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갑자기 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했다. 이때 그는 대중 그리고 레닌으로부터도 떨어져서 주저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온갖 의문을 다 품으면서 장애물만 보았다. 이때 그의 넌지시 암시하는 듯한 거의 여자와 같은 목소리는 확신을 잃은 채 그의 내적 허약성을 드러냈다. 7월 시기 타우리데 궁전의 담벼락 아래에서 그는 대단히 적극적이고 기발하고 강인했다. 그는 대중의 흥분을 최고조로 상승시켰다. 그러나 이들을 결정적인 행동으로 나서도록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당시 정세와 당의 정책에 일치했다. 이때 지노비에프는 물을 만난 물고기와 같았다.

리테이니 가도의 전투로 시위의 리듬은 급격히 단절되었다. 창문이나 발코니에서 시위를 쳐다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부유한 계층들은 기차역에 운집하여 수도를 떠나고 있었다. 거리의 투쟁은 명확한 목적이 없는 산발적인 작은 충돌이 되었다. 밤에는 시위대와 애국주의자들이 서로 백병전을 벌였으며 무질서하게 서로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소총은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주인을 바꾸었다. 해산된 연대의 병사들이 떼를 지어 이리저리 허둥거렸다. "음흉한 분자들과 밀정들이 병사들에게 붙어서 이들을 무정부주의적 행동으로 부추겼다."고 포드보이스키가 덧붙였다. 지붕에서 총격을 가한 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수병과 병사들이 떼를 지어 가옥의 지하실을 뒤졌다. 수색을 핑계로 여기저기서 약탈이 벌어졌다. 인종학살에 버금가는 살인행위들이 자행되었다. 자기들이 강세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상인들은 노동자들을 잔인하게 공격하여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다. 뉴 레스너 공장의 노동자인 아파나시예프는 이렇게 말한다: "'유태인놈들과 볼세비키놈들을 두들겨 패라! 이들을 수장시켜라!'하고 외치면서 군중은 우리를 공격하고 무섭게 두들겨 팼다." 구타를 당한 노동자 한 명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아파나시예프 자신은 멍이 들고 피를 흘린 채 에카테리닌스키 운하에 처박혀 있었다. 이때 지나가던 수병들이 그를 발견하여 건져 올렸다.

작은 충돌, 사상자, 성과 없는 투쟁, 실제적 목적의 불명확성 등이 운동의 특징이었다.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는 시위 중지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집행위원회는 이 결의문에 즉각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대중은 이것에 대해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이들은 다시 착 가라앉은 채 교외로 되돌아갔으며 다음날 투쟁을 계속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소비에트로 권력을 넘기는" 문제는 보기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이들은 실감했다.

타우리데 궁전에 대한 시위대의 포위는 완전히 풀렸다. 근처의 거리들도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의미도 성과도 없는 긴 연설들과 휴식들이 이어지면서 집행위원회에 대한 감시는 간간이 계속되었다. 나중이 되어서야 화해주의자들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회의장에 인접한 궁전의 방들에서는 공장과 연대의 대표들이 풀이 죽은 채 아직도 죽치고 있었다. 메텔레프는 이렇게 말한다: "밤 12시가 한참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피곤과 배고픔에 짜증난 우리는 알렉산드로프스키 홀을 지나다니면서 어슬렁거렸다....7월 5일 오전 4시에 우리의 기다림은 끝났다....궁전 앞의 열린 문들을 통해 장교와 병사들이 떼를 지어 시끄럽게 몰려들었다." 건물 전체는 "마르세이예즈"의 금속성 소리로 가득했다. 해가 뜨기 전 시간에 이들이 발을 구르고 군악대가 천둥처럼 음악을 울리자 회의장은 크게 흥분되었다. 대표들은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새로운 위험이 닥쳤는가? 그러나 단은 연단에 올라가 있었다....그는 고함질렀다: "동지들 흥분하지 마시오. 위험하지 않습니다. 지금 도착한 연대들은 혁명에 충성하는 부대들입니다." 그렇다, 마침내 믿을만한 군대가 도착했다. 이들은 복도를 점령하고 아직도 궁전에 남아있는 노동자들을 살벌하게 공격했고 이들의 무기를 빼앗았다. 노동자들은 체포되어 끌려갔다. 잘 알려진 멘세비키 쿠친 중위는 야전 군복을 입은 채 연단에 올라갔다. 집행위원회 의장 단은 군악대의 의기양양한 음악에 맞추어 팔을 벌려 그를 영접했다. 기쁨에 목이 멘 채 자신에 찬 눈빛으로 좌파들을 흘끗 본 후 화해주의자들은 서로 손을 잡고 입을 크게 벌려 "마르세이예즈"를 열창했다. 이들의 감동이 쏟아져 내렸다. 많은 것을 관찰하고 이해할 줄 아는 마르토프는 화를 내며 이렇게 투덜거렸다: "반혁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군." 수하노프가 기록한 이 광경의 정치적 의미는 마르토프가 단과 같은 멘세비키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좀더 명확해질 것이다. 단에게 이 사건은 혁명의 최대의 승리였다.

소비에트 다수파의 환희는 샘처럼 용솟음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서야 소비에트 좌파는 이해하기 시작했다: 대중의 진정한 민주주의가 거리에서 시위하고 있을 때 공식 민주주의의 최고 기관은 대단히 고립되어 있었다. 36시간 동안 이 양반들은 교대로 회의장을 빠져나가 전화로 전쟁 총사령부나 전선의 케렌스키와 접촉하려 했다. 그리고 군대와 선동가들을 보내라고 요구하고 호소하고 촉구하고 간청한 후 다시 회의장의 자기 자리로 돌아와 기다렸다. 위험은 지나갔으나 두려움은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충성스러운 군대"의 쿵쿵거리는 오전 5시의 발걸음은 이들의 귀에 해방의 교향곡이었다. 마침내 연단에서는 무장 반란을 운 좋게 진압했다는 둥 이번만은 볼세비키들을 확실히 손볼 필요가 있다는 둥 솔직한 연설들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타우리데 궁전에 도착한 군대는 많은 사람들이 엉겁결에 생각한 것처럼 전선에서 돌아온 군대가 아니었다.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 세메노프스키 연대, 이즈마일로프스키 연대 등 수도의 가장 후진적인 세 부대에서 주로 직접 선정한 분자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6월 3일 이 연대들은 중립을 선언했었고 정부와 집행위원회는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권의 권위를 내세웠으나 허사로 돌아갔었다. 이 병사들은 병영에서 우울하게 앉아서 기다리기만 했다. 7월 4일 오후가 되어서야 정부는 마침내 이들을 움직일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을 발견했다. 레닌이 독일의 첩자라는 것을 2 + 2 = 4처럼 명백하게 증명하는 문서가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에 제시되었다. 이들은 마음이 움직였다. 이 소식이 연대들로 확산되었다. 장교들, 연대 위원회 위원들, 집행위원회의 선동가들이 모든 곳에서 설치고 다녔다. 중립을 지키고 있던 대대들의 정서가 변했다. 동이 틀 무렵 군대가 더 이상 필요 없을 때에 이 부대들은 소집되어 텅 빈 거리를 통해 역시 텅 빈 타우리데 궁전에 파견되었다. 이날 밤 "마르세이예즈"는 이즈마일로프스키 연대의 군악대가 연주했다. 이 연대는 1905년 12월 3일 트로츠키가 의장으로 회의를 하고 있던 최초의 뻬쩨르부르그 노동자 소비에트를 체포한 반동 연대였다. 역사극의 눈 먼 감독은 조금도 애쓰지 않고 매순간 대단히 극적인 효과를 연출한다. 그는 단지 사건의 논리에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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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이 거리에서 사라지자 젊은 혁명정부는 통풍이 걸린 사지를 내뻗었다. 노동자 대표들은 체포되고 무기는 몰수되고 지구들이 포위되었다. 오전 6시쯤에 프라우다지의 편집사무실 앞에 사관생도와 병사들을 가득 실은 자동차가 한 대 멈추어 섰다. 그리고 창틀에는 즉시 기관총이 설치되었다. 이 불청객들이 떠나고 난 사무실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책상 서랍은 박살난 채 열려 있었고 바닥에는 발기발기 찢겨진 원고들이 수북히 쌓였다. 그리고 전화는 줄이 뽑혀져 있었다. 사무실의 보초들과 직원들은 구타를 당하고 체포되었다. 지난 3개월간 노동자들이 모금하여 마련한 인쇄기는 더 가혹한 공격을 받았다. 윤전기, 모노타이프(자동주식기), 리노타이프(주조식자기) 등이 산산조각이 났다. 케렌스키 정권이 활력이 없다고 비난한 볼세비키들은 틀린 것 같았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일반적으로 거리들은 이제 정상을 되찾았다. 군중이나 거리 집회는 거의 사라졌다. 거의 모든 상점들은 문을 열었다." 인쇄기가 파괴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볼세비키들이 찍은 시위 중지 촉구문이 아침에 배포되었다. 카자흐기병들과 사관생도들은 거리에서 수병, 병사, 노동자들을 체포하여 감옥이나 경비실에 보내고 있었다. 상점과 보도에서 사람들은 독일 첩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볼세비키들을 옹호하는 말을 조금이라도 하는 자는 체포되었다. "레닌을 정직한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즉시 경찰서로 끌려가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지식인, 중산층들이 하는 말들을 수하노프는 언제나 세심하게 관찰한다. 그러나 노동자 지구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공장과 작업장은 여전히 닫혀져 있었다. 경계하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군대들이 전선에서 도착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비보르그 지구의 거리들은 공격당할 경우 취할 대책에 대해 논의하는 그룹들로 가득했다. 메텔레프는 이렇게 말한다: "적위대와 공장의 청년들은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로 침투하여 포위된 군대를 지원할 준비를 했다. 이들은 주머니, 신발, 외투 등에 수류탄을 감추고 있었다. 일부는 노를 저어 일부는 다리를 통해 강을 건넜다." 콜로멘스키 지구의 식자공 스미르노프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두데르호프와 오라니엔바움에서 네바강을 따라 해군 사관생도들을 실은 예인선 한 척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오후 2시쯤 상황은 좋지 않은 쪽으로 정리되었다....뒷길로 크론슈타트 수병들이 하나 하나 복귀하는 것이 보였다....볼세비키들이 전부 독일 첩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악랄한 비방이 고개를 쳐들었다...." 역사학자 밀류코프는 만족하며 이렇게 상황을 정리했다: "거리의 정서와 인적 구성은 완전히 바뀌었다. 저녁이 되자 뻬쩨르부르그는 완전히 평온을 되찾았다."

군대가 전선에서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뻬쩨르부르그 군대 본부는 화해주의자들의 정치적 협조를 받아 자신의 의도를 계속 위장했다. 오후에 리이버를 대표로 하는 집행위원 몇 명이 볼세비키 지도자들과 회의를 하기 위해 크쉐신스카야 궁전을 찾았다. 이 방문 하나만 해도 정세의 평화로움을 알 수 있었다. 이때 도달한 합의에 따르면 볼세비키들은 수병들을 크론슈타트로 복귀시키고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로부터 기관총 중대를 철수시키고 순찰대와 장갑차를 철수시켜야 했다. 한편 정부는 볼세비키들에 대한 탄압이나 학살을 용인할 수 없으며 범죄자들을 제외한 모두를 석방시켜야 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오래가지 못했다. 독일의 자금과 전선에서 군대의 도착 등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정부와 케렌스키에 충성하는 부대와 그룹들이 점점 늘어났다. 이들은 대표를 타우리데 궁전이나 지구 본부에 보냈다. 마침내 전선에서 부대들이 대형을 이루어 도착했다. 화해주의 진영의 분위기는 시간이 갈수록 맹렬해졌다. 독일 황제가 보낸 첩자들 손에 피가 묻어 있을 때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한 부대가 전선에서 도착했다. 그러나 현재 부대가 필요 없다는 점이 명백해지자 이들의 존재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다. 스스로 의심받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화해주의자들은 모든 힘을 다해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은 같은 편이고 볼세비키들이 공동의 적이라는 점을 지휘관들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카메네프는 집행위원회 최고위원들에게 몇 시간 전의 합의를 상기시키려했다. 그러자 리이버는 무쇠의 심장을 가진 정치가의 목소리로 응답했다: "이제 역관계는 바뀌었다." 대포는 헌법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라쌀레의 유명한 연설을 리이버가 어디서 주어들은 모양이었다. 라스콜니코프를 우두머리로 한 크론슈타트 대표단은 여러 번 집행위원회 군사위원회에 불려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수위가 높은 요구들이 제시되더니 이제 리이버는 최후통첩을 제시했다: 크론슈타트 수병의 무장 해제에 즉시 동의해야한다.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군사위원회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우리는 트로츠키와 카메네프를 만났다. 리에프 다비도비치(트로츠키)는 크론슈타트 수병을 즉시 그리고 몰래 복귀시키라고 충고했다. 동지들을 병영에 보내 크론슈타트 수병들에게 강제로 무장해제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로 결정되었다." 크론슈타트 수병 대다수는 제때에 복귀했다. 몇몇 부대만이 크쉐신스카야 궁전과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에 남아있었다.

장관 사회주의자들에게 알리고 동의를 구한 후 르보프공은 이미 7월 4일에 폴로프체프 장군에게 명령서를 하달했다: "크쉐신스카야 궁전의 볼세비키들을 체포하고 궁전을 정리한 후 군대를 진주시켜라." 편집 사무실과 인쇄시설이 파괴된 후인 이때 볼세비키당 중앙본부의 운명은 경각에 달려있었다. 본부 요원들을 방어할 태세를 갖추는 것이 필요했다. 당 군사기구는 라스콜니코프를 건물 방어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방식대로 자신의 임무를 통크게 수행했다. 대포를 징발하러 보내고 소형 전함이 네바강 입구에 배치되도록 명령을 내렸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조치를 이렇게 설명했다: "물론 나의 군사적 준비 조치는 자기방어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탄약과 학살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이것만이 아니었다. 네바강 입구에 괜찮은 전함 한 척이 버티고 있으면 임시정부의 결의가 상당히 흔들릴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의 생각은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조치는 불명확했으며 진지하지도 않았다. 7월 5일 오후 5시에 라스콜니코프를 포함한 당 군사기구의 지도자들은 아직도 정세 변화의 정도를 측정하지 못했다. 이때에는 무장 시위가 서둘러 퇴각해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적들이 도발을 일으켜 이것을 강제로 무장 봉기로 변모시킬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군사 지도자들 일부는 우연적이고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이런 저런 조치를 내렸다. 젊은 크론슈타트 지도자들의 조치는 틀림없이 지나쳤다. 그러나 지나친 조치를 취하는 사람들의 도움이 있어야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약간의 경솔함은 틀림없이 모든 위대한 행동의 한 요소이다. 이번에 이 경솔함은 지시를 하는 것으로 그쳤고 이것도 곧 라스콜니코프 자신에 의해 취소되었다. 이때 더욱더 놀라운 소식들이 궁전 안으로 쇄도했다. 네바강 반대편 가옥 창문을 통해 기관총들이 크쉐신스카야 궁전을 겨누고 있는 것을 누가 목격했다. 또 한 명은 장갑차가 일렬로 같은 궁전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또 한 명은 카자흐기병 일개 부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당 군사기구에 소속된 두 명이 협상을 위해 지구 지휘관에게 사절로 보내졌다. 폴로프체프는 사절들을 안심시켰다: 프라우다지 사무소 습격은 승인을 받지 않고 몰래 저질러진 것이다; 당 군사기구에 대한 탄압은 준비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그는 전선에서 충분한 지원군이 오면 곧 이렇게 할 생각이었다.

크론슈타트 수병들이 후퇴하고 있는 동안 발트해 함대 전체는 전진할 준비만 하고 있었다. 이 함대의 주요 부분은 약 7만 명의 수병들을 거느리고 핀란드만에 있었다. 육군 일개 군단도 핀란드에 있었다. 그리고 1만 명의 러시아 노동자들이 헬싱키의 항구 작업장에 있었다. 이것은 상당한 규모의 혁명 무력이었다. 수병과 병사들의 압력은 너무 커서 사회혁명당의 헬싱키 위원회조차 연립정부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 결과 핀란드의 함대와 육군의 모든 소비에트들은 만장일치로 집행위원회의 권력 장악을 요구했다. 자신들의 요구를 지지하기 위해 발트해의 병력은 네바강 하구로 진입할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로 인해 해군 방어선이 약화되어 독일 함대가 크론슈타트와 뻬쩨르부르그를 쉽게 공격할까봐 자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전혀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발트해 함대 중앙위원회는 7월 4일 전함 위원회들의 임시 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에서 의장 디벤코는 해군 차관 두다레프의 서명이 있으며 함대 사령관이 접수한 비밀 명령서 두 편을 낭독했다. 첫 번째 명령서는 뻬쩨르부르그에 구축함 4대를 보내 크론슈타트 쪽에서 수병들이 상륙하지 못하도록 무력으로 봉쇄하라고 베르데레프스키 제독에게 명령했다. 두 번째 명령서는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헬싱키에서 크론슈타트로 전함들이 이동하지 못하게 막을 것이며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전함들을 잠수함을 동원하여 단호히 격침시키라고 함대 사령관에게 요구했다. 양쪽에서 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롭다고 느끼자 함대 사령관은 중앙위원회에 명령서 전보를 넘기고 이렇게 선언했다: 중앙위원회가 명령서를 승인하더라도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 전보의 내용은 수병들을 경악시켰다. 물론 이들은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케렌스키와 화해주의자들을 손 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보기에 이것은 소비에트 내부의 투쟁이었다. 집행위원회 다수파는 소비에트의 정권 장악을 지지하는 핀란드 지역위원회 다수파와 같은 정당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집행위원회 정부를 지지하고 나선 배들을 멘세비키당이나 사회혁명당이 격침시키라고 승인할 리가 없었다. 두다레프 같은 고참 해군 장교가 어떻게 소비에트의 내분에 끼어 들어 이것을 해전으로 비화시킬 수 있겠는가? 어제까지만 해도 대규모 전함들은 혁명의 방어 벽으로 공식 인정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혁명 선전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은 후진적인 구축함 및 잠수함과 대비되었다. 그런데 잠수함의 도움을 받아 전함들을 침몰시키겠다고 정부가 진지하게 생각하다니 말도 되지 않았다!

수병들의 완고한 머리로는 이 명령서들이 도저히 이해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연히 악몽과 같은 이 명령은 3월의 혁명 씨앗이 7월에 수확된 것으로 어쩌면 당연했다. 이미 4월에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수도에 대항하라고 지방에 호소했으며 노동자들에게 대항하라고 병사들에게 호소했고 기관총 사수들에게 대항하라고 기병대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소비에트에서 노동자들보다 병사들에게 대의원 선출에 관한 더 많은 특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금속산업의 대공장들보다 소규모 산발적인 기업들을 우대했다. 과거를 대표한 이들은 모든 후진적인 분자들의 지지를 구했다. 발 밑에서 땅이 꺼지는 상황에 처하자 이들은 이제 후위를 부추겨 전위에 대항시켰다. 정치는 특히 혁명기에는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사면초가에 처하자 화해주의자들은 베르데레프스키 제독을 시켜 선진적인 전함들을 격침시키라고 명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화해주의자들은 불행했다. 자기들이 의존하고 있던 후진 분자들은 선진 분자들을 따라잡으려고 더욱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함의 지휘관들만큼 잠수함의 지휘관들은 두다레프의 명령에 분노했다.

발트해 함대 중앙위원회의 지도자들은 햄릿과 같은 우유부단한 인간형이 전혀 아니었다. 이들은 전함 위원회들과 함께 즉시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크론슈타트 전함들을 격침시키도록 명령을 받은 소함대의 구축함 오르페우스호를 즉시 뻬쩨르부르그로 보낸다; 일단 수도의 상황을 파악한다; 그리고 "해군 차관 두다레프를 체포한다." 이 결정은 전혀 예상 밖이었으나 다음의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 발트해 수병들은 늙은 두다레프를 공공의 적으로 간주한 반면 화해주의자들을 아직도 개인적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1만 명의 크론슈타트 무장 병력이 전함들을 네바강 하구에 정박시킨 지 24시간만에 오르페우스호는 같은 장소에 도착했다. 그러나 "역관계는 바뀌어 있었다." 이 전함의 승무원들은 꼬박 하룻 동안 정박이 허용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서야 발트해 함대 중앙위원회와 전함의 승무원들로 구성된 67명의 수병 대표단은 집행위원회 합동회의에 출석할 수 있었다. 이때 합동회의는 7월 시기의 첫 대차대조표를 정리하느라 골몰해 있었다. 승리자들은 새로운 승리에 흠뻑 취해있었다. 회의의 대변인 보이틴스키는 막판에 거둔 승리를 더 부각시키기 위해 자기만족감에 젖어 허약하게 모욕을 당한 때를 묘사하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를 처음 도우러온 부대는 장갑차 부대였다. 무장 폭도들이 폭력을 행사할 경우 우리는 발포할 의도를 확고히 하고 있었다....혁명의 위협 정도를 간파한 우리는 전선의 부대들에게 기차를 타고 수도로 올 것을 명령하는 명령서를 발부했다...." 이 고위급 회의의 다수는 볼세비키당 특히 수병들에 대한 증오심을 펄펄 풍기고 있었다. 두다레프를 체포하기 위해 무장을 갖추고 발트해 대표단이 도착했을 때 회의장 분위기는 바로 이러했다. 대표단이 결의문을 읽어나가자 승리자들은 난폭하게 고함지르면서 테이블을 주먹으로 크게 치고 발을 동동 굴렀다. 두다레프를 체포하라고? 아니, 이 최상의 용감한 선장은 혁명을 위한 성스러운 임무를 완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당신 수병들, 폭도들, 반혁명 분자들은 혁명의 등에 비수를 꽂다니! 합동회의는 특별 결의문을 채택하여 두다레프와의 연대를 엄숙히 선언했다. 수병들은 놀란 눈을 하고 연설자들과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이 순간이 되어서야 이들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대표단 전부는 체포되어 감옥에서 정치교육을 최종적으로 이수했다! 그리고 이들을 따라갔던 발트해 함대 중앙위원회 의장인 해군 하사관 디벤코도 즉시 체포되었다. 그리고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도록 수도로 소환된 베데레프스키 제독 역시 체포되었다.

7월 6일 아침 노동자들은 조업에 복귀했다.

이제 전선에서 불려온 군대들만이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정보부 요원들은 여권을 조사하면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체포했다. 파괴된 볼세비키당 기관지 대신 발행된 "프라우다지 유인물"을 배포하던 노동자 보이노프는 거리에서 깡패들에게 살해되었다. 정보부 요원들이 살해자 일당인지도 몰랐다. 흑백인조 분자들은 반란을 진압하는데 맛을 들이고 있었다. 약탈, 폭력, 그리고 일부에서는 총격이 도시 여러 부분에서 계속되었다. 하루동안 전선에서 군대들이 계속 대형을 지어 도착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기병 사단, 돈 카자흐연대, 울란 사단, 이즈보르스키 연대, 말로로시스키 연대, 경기병 연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리키가 발행하는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대규모로 도착하고 있는 카자흐기병 사단들은 아주 공격적인 성향을 보였다." 새로 도착한 이즈보르스키 연대는 도시 두 곳에서 기관총 세례를 받았다. 두 경우 모두 기관총은 다락에서 발견되었다. 발포자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도 도착하는 군대를 향해 총격이 가해졌다. 총격이 의도적으로 조성한 광기는 노동자들을 크게 동요시켰다. 경험이 많은 도발자들이 볼세비키당에 대한 반대를 선동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인사 대신 총알세례를 퍼붓고 있다는 것이 명백했다. 노동자들은 도착하는 병사들에게 이 사실을 설명하려고 애를 태웠으나 이들에게 접근이 금지되었다. 2월 시기 이후 처음으로 사관생도와 장교들이 노동자와 병사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있었다.

화해주의자들은 도착하는 연대들을 환희에 차서 환영했다. 엄청난 수의 장교와 사관생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군대 대표자 회의에서 보이틴스키는 입에 침을 바른 듯이 설명했다: "밀리오니 거리를 따라 군대와 장갑차들이 궁전 앞 광장으로 이동하여 폴로프체프 장군의 지휘를 받고 있다. 이들이 우리가 의존해야할 진짜 병력이다." 정치적 외피로 기능하기 위해 4명의 사회주의자들이 지구 사령관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집행위원회의 아브크센티에프와 고츠였으며 임시정부의 스코벨레프와 체르노프였다. 그러나 지구 사령관은 살아남지 못했다. 이후 케렌스키는 백군들에게 이렇게 자랑했다: 7월 시기에 전선에서 돌아오자마자 "우유부단하다"는 이유로 폴로프체프 장군을 해임시켰다.

마침내 오랫동안 연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크쉐신스카야 궁전의 볼세비키당 본부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사회생활에서 그리고 특히 혁명기에 부차적인 사실들은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면서 엄청난 상징적 의의를 부여받는다. 볼세비키당에 대항하는 투쟁 과정에서 레닌이 "몰수한" 크쉐신스카야 궁전은 실제보다 대단히 큰 의미를 부여받았다. 이 궁전의 주인인 궁정 발레리나는 예술보다는 로마노프 왕조 남성들과의 관계 때문에 유명해졌다. 그녀의 개인 궁전은 이 관계의 결실이었다. 이 관계의 기반은 니콜라스 2세가 황태자였을 때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전쟁 전에 사람들은 시기심이 가미된 존경심으로 호화스러움, 말의 박차, 다이아몬드 등을 간직한 채 동궁 반대편에 위치한 이 궁전에 대해 한담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자 사람들은 이 궁전을 좀더 빈번하게 "훔친 물건"이라고 불렀다. 이 궁전에 대한 병사들의 표현은 더 정확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무대에 등장한 이 발레리나는 애국주의를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말이 많은 로지안코는 이 여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최고 사령관 니콜라이 니콜라이예비치 대공은 발레리나인 크쉐신스카야가 대포와 관련된 일에 참여하고 영향을 미친 점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녀를 통해서 여러 기업들이 대포 제조 주문을 받았다." 혁명 후에 버려진 이 궁전이 인민 사이에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당시 혁명이 건물을 수도 없이 필요로 할 때 혁명 정부는 개인 주택에 대해서는 손 하나 대지 않았다. 전쟁을 위해 농민의 말을 징발할 수는 있어도 혁명을 위해 빈 궁전을 징발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민 대중은 생각이 달랐다.

적절한 장소를 찾던 중에 장갑차 예비 사단이 3월 첫 며칠 사이에 크쉐신스카야 저택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이 사단은 궁전을 점령했다. 발레리나의 차고는 아주 좋았다. 이 사단은 건물의 위층을 볼세비키당 뻬쩨르부르그 위원회에게 기꺼이 넘겼다. 볼세비키당이 이 사단과 맺고 있던 우호관계는 기관총 연대와의 우호관계를 보완해주었다. 레닌이 귀국하기 몇 주일 전에 이 궁전이 점령되었는데 이 사실은 처음에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궁전 점령자에 대한 분노는 볼세비키당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서 커져갔다. 레닌이 발레리나의 규방을 차지하고 있다는 둥 궁전의 모든 장식들이 산산조각이 나고 찢겨졌다는 둥 황당한 소식들이 신문에 실렸으나 모두 거짓말에 불과했다. 레닌은 여동생의 검소한 아파트에 머물고 있었다. 발레리나의 장식물들은 건물 관리인에 의해 치워진 후 봉인되었다. 레닌이 귀국할 때쯤 이곳을 방문한 수하노프는 이 궁전을 흥미롭게 묘사했다: "이 유명한 발레리나의 방들은 꽤 이상하고 부적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아한 천장과 벽은 일의 요구에 따라 아무렇게나 놓여진 수수한 가구, 원시적인 탁자, 의자, 벤치 등과 전혀 조화되지 못했다. 대체로 가구는 거의 없었다. 그녀의 동산은 어디에 치워져 있었다...." 장갑차 사단에 대해서는 주도 면밀하게 언급을 피한 채 언론은 레닌이 방어능력이 없는 헌신적인 예술가의 가옥을 무력으로 몰수한 죄를 저질렀다고 보도했다. 이 주제는 주요한 신문들의 사설과 문예란에서 전개되었다. 누더기를 걸친 노동자와 병사들이 벨벳, 비단, 멋진 깔개들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다! 수도의 모든 대저택 응접실에서 귀한 몸들이 도덕적 분노로 몸을 떨었다. 지롱드파는 자코벵파가 9월의 살인, 병영 매트리스의 실종, 농업법에 대한 캠페인 등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입헌민주당과 민주주의자들은 볼세비키당이 인류 도덕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크쉐신스카야 궁전의 윤이 나는 바닥에 가래침을 뱉는다고 비난했다. 왕조와 관계가 있는 발레리나는 야만의 발굽에 의해 짓밟히는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이 궁전에 대한 숭배는 발레리나에게 날개를 달아주었고 이 귀부인은 법원에 고소했다. 법원은 볼세비키당의 퇴거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뻬쩨르부르그 위원회의 잘레쥐스키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궁전 정원의 장갑차들은 충분히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더욱이 기관총 연대와 다른 부대들도 장갑차 사단을 지원할 때를 대비하고 있었다. 5월 25일 발레리나의 변호사가 제출한 고소에 대해 집행위원회 사무국은 "혁명의 이해는 법원의 결정에 승복할 것을 요구한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이 관념적인 경구를 과시했을 뿐 화해주의자들은 감히 행동에 나서지 못했다. 물론 성격상 관념과는 무관한 발레리나는 대단히 고통스러워했다.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 뻬쩨르부르그 위원회, 군사기구는 계속해서 궁전에서 나란히 같이 일했다.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계속 이 궁전으로 모여들었다. 어떤 사람은 이 사무국 저 사무국에 일이 있어서 왔고 다른 사람들은 문서국에 일이 있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병사 프라우다지의 편집 사무실에 일이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회의나 다른 일이 있었다. 회의는 아주 자주 때로는 연속적으로 열렸다. 아래층의 널찍한 홀이나 발레리나의 식당이었을 긴 탁자가 있는 위층 방에서 회의가 열렸다. 중앙위원회의 인상적인 깃발이 위에서 휘날리는 궁전 발코니에서 연설자들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계속 대중집회를 가졌다. 가끔 어두움 속에서 어떤 부대가 건물에 접근했다. 연설자를 요구하는 노동자 군중도 마찬가지였다. 신문 보도에 호기심이 발동한 시민들이 떼를 지어 우연히 발코니 밑에 서 있기도 했다. 결정적인 며칠 동안 적대적인 시위대들이 잠시 건물에 접근하여 레닌의 체포와 볼세비키당의 퇴거를 요구했다. 이 궁전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물결에서 혁명의 끓어오르는 심연이 느껴졌다. 7월 시기에 이 궁전에 대한 관심은 절정에 이르렀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운동의 중심은 타우리데 궁전이 아니라 고전적인 형식의 발코니가 있는 레닌의 아성, 크쉐신스카야 궁전이었다." 시위가 진압되면서 이 궁전의 볼세비키당 본부는 결정적으로 해체되었다.

오전 3시에 이 궁전과 좁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있는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에 뻬쩨르부르그 연대의 예비 대대, 일개 기관총 부대, 세메노프스키 연대의 일개 중대,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의 일개 중대, 볼린스키 연대의 훈련 분대, 2문의 대포, 장갑차 8대를 동원한 일개 부대 등이 접근했다. 오전 7시 지구 사령관의 부관인 사회혁명당의 쿠즈민이 궁전을 비울 것을 볼세비키들에게 요구했다. 궁전 안에 남아있던 120명의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무기를 양도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로 뛰어 달아났다. 정부군이 궁전을 점령했을 때에는 몇 명의 고용인 밖에 없었다. 이제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가 문제였다. 수병들을 지원할 필요에 대비해서 청년 적위대가 비보르그 지구에서부터 요새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 중의 한 명이 이렇게 말한다: "요새의 성벽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수병들이 설치한 대포가 상당수 있었다....이것들은 무시무시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외교적 협상이 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했다. 중앙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스탈린은 화해주의 지도자들에게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행동을 피 흘리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공동의 조치들을 채택하자고 제안했다. 멘세비키 보그다노프와 함께 그는 어려움 없이 전날 리이버가 제시한 최후통첩을 받아들이도록 수병들을 설득시켰다. 정부의 장갑차들이 요새에 접근하자 요새 대표들이 정문에서 나와 이렇게 선언했다: 주둔군은 집행위원회에 복종한다. 수병과 병사들이 포기한 무기들은 트럭에 실려 갔다. 무장이 해제된 수병들은 거룻배를 통해 크론슈타트로 복귀했다. 이 요새의 항복은 7월 운동의 마지막 에피소드였다. 전선의 자전거 여단이 크쉐신스카야 궁전과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를 점령했다. 이 여단은 10월 혁명의 전야에 볼세비키당으로 획득될 것이다.

 

 

제 3장 볼세비키당은 7월에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정부와 집행위원회가 금지한 시위는 거대했다. 시위 둘째 날에 50만 명 이상이 거리로 나왔다. 그러나 7월 시기의 "유혈사태와 치사한 행위"에 해당되는 충분히 강한 표현을 찾을 수 없는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정치적 결과는 논외로 하더라도 인민 대중의 저 놀라운 운동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치명적인 결함이 있더라도 이 운동의 거대한 자발성에는 환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군대 조사위원회의 집계에 따르면 시위 과정에서 29명이 사망하고 114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양측의 사상자 수는 거의 같았다.

이 운동은 볼세비키당과 무관하게 그리고 어느 정도 볼세비키당의 의지에 거역하여 대중의 자발성으로 시작되었다. 이 점을 화해주의자들조차 처음에는 인정했다. 그러나 7월 3일 밤과 다음날에 이들은 공식적으로 이렇게 표명했다: 이 운동은 볼세비키당이 조직한 봉기였다. 케렌스키의 측근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조국방어주의 정당들로 구성된 소비에트 다수파에 대항한 볼세비키당의 조직적 봉기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일어났다." 봉기를 조직했다는 이 비난은 정치투쟁의 방식을 언급하는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6월 동안 이들은 대중에 대한 볼세비키당의 강력한 영향력을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노동자와 병사들의 운동이 볼세비키당의 지도를 거부하면서 터져 나왔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을 뿐이었다.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트로츠키는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대중의 정서를 조성한다는 비난은 잘못되었다. 우리는 단지 대중의 정서를 표현하려 했을 뿐이다." 10월 혁명 후 적들이 출판된 책들 특히 수하노프의 책에서는 이런 주장이 있다: 7월 봉기가 패배하자 볼세비키당은 실제 목표를 은폐하면서 이것이 대중의 자발적 운동이라고 핑계를 댔다. 그러나 수십만 인민을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인 무장봉기의 계획을 보물을 파묻듯이 숨길 수 있을까? 10월에 볼세비키당은 대중에게 아주 공개적으로 봉기를 촉구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봉기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7월 봉기 계획에 대한 증거를 찾아낸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다. 계획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관총 연대 병사들과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요새 주둔군의 동의를 얻어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에 들어갔다. 이것을 화해주의자들은 "점거행위"라고 특별히 우긴다. 그런데 이것이 무장봉기였는가? 섬에 위치한 이 건물은 군사기지라기보다 감옥이었다. 따라서 후퇴하는 병사들에게는 피난처가 되었지만 공격하는 병사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타우리데 궁전으로 향하면서 시위대는 가장 중요한 정부 건물들을 그냥 지나쳤다. 푸틸로프 노동자들의 적위대는 이 건물들을 얼마든지 점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거리, 초소, 광장처럼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를 차지했을 뿐이었다. 다만 이 요새가 크쉐신스카야 궁전과 가까이 있어서 필요하면 궁전을 지원하기 위해 요새를 차지한 것이었다.

볼세비키당은 7월 운동을 시위로 제한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사물의 논리에 의해 이 운동은 시위의 한계를 뛰어넘지 않았는가? 이 정치적 질문은 형사사건의 기소보다 대답하기가 더 어렵다. 7월 시기 직후 레닌은 이 운동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 사건들을 반정부 시위라고 부르는 것이 형식상 가장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보통 시위가 아니었다. 시위보다는 훨씬 거대했으며 다만 혁명에는 미치지 못했다." 대중은 속성상 어떤 생각을 하면 곧장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한다. 대중은 볼세비키당을 신뢰했다. 그러나 노동자들 그리고 특히 병사들은 당의 지도를 받아 투쟁에 나서야한다는 확신이 없었다. 2월과 4월의 경험은 이들에게 정반대를 가르쳤다. 5월에 레닌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볼세비키당보다 100배나 더 혁명적이라고 말했다. 이때 그는 2월과 4월의 경험을 일반화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대중도 자기 경험을 나름대로 일반화했다. 이들은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볼세비키당조차 빈둥거리면서 우리의 행동을 저지시키고 있다."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경우 시위대는 시위 도중에 정부를 청산시킬 준비가 확실히 되어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이 저항할 경우 이들은 무기를 들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런 점에서 7월 시위에는 무장봉기의 요소가 있었다. 그러나 이 투쟁은 목표의 끝까지는 고사하고 중간까지도 진행되지 못했다. 화해주의자들이 모든 것을 혼란시켰기 때문이었다.

본 저서의 제 1권은 2월 체제의 역설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인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혁명 인민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권력을 차지하겠다는 목표도 없었고 이를 위한 투쟁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 의사와는 무관하게 권력을 넘겨받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대중의 의지에 거역해 권력을 제국주의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기려고 했다. 인민은 자유주의자들을 신뢰하지는 않았으나 화해주의자들은 신뢰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이들은 어느 정도 옳았다. 권력 전체를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겨줄 때에도 화해주의자들은 딴 사람 행세를 계속했다. 그리고 이들이 권력을 잡았더라도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권력은 민주주의자들로부터 거의 자동적으로 볼세비키당에게 넘어올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러시아 민주주의는 타고날 때부터 정치적으로 미미한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7월의 시위대는 권력을 소비에트로 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우선 소비에트가 동의해야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대다수와 주둔군의 적극적 분자들이 볼세비키당을 지지한 수도에서조차 소비에트 다수파는 여전히 소부르주아 정당들이었다. 이것은 모든 대의제에 적용되는 관성의 법칙 때문이었다. 하여간 소부르주아 정당들은 부르주아 권력에 대항하는 것은 자기들에게 대항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자신들의 정서와 소비에트의 정책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고 확실히 느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의 현재와 과거가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했다. 대중은 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으나 소비에트의 화해주의 다수파에 신뢰를 보내지는 않았다. 다만 대중은 이 다수파 사기꾼들을 처치하는 방법을 몰랐다. 다수파를 폭력으로 타도할 경우 소비에트는 권력을 잡기는커녕 해체될 것이었다. 대중은 소비에트 구성원을 혁명적으로 교체하는 길을 찾아야했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에 앞서 이들은 직접 행동을 통해 소비에트를 자기 뜻대로 통제하려고 했다.

7월 시위에 대해 두 집행위원회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화해주의자들은 분노에 차서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시위자 "여러분들은 스스로 뽑은 대표들에게 무기를 들이대어 자기 의사를 강요하려했다." 시위대의 병사와 노동자들이 집행위원회 위원들을 대표로 뽑아주지 않은 것처럼 이들은 말한다! 또한 이들은 자기들을 뽑아준 시위 대중이 자기들에게 의사를 강요할 권리가 없는 것처럼 말한다! 의무에 충실하여 인민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잡으라는 것이 대중의 요구가 결코 아닌 것처럼 이들은 강변한다! 어느 이름 없는 노동자가 못이 박힌 주먹을 체르노프에게 흔들어 보이면서 한 말과 똑같이 타우리데 궁전에 운집한 대중은 집행위원회의 귀에다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권력을 줄 때 순순히 받아라!" 이에 대한 응답으로 화해주의자들은 카자흐 기병들을 불렀다. 이들은 피를 흘리지 않고 권력을 넘겨받는 대신 인민에 대항하는 내전을 선택했다. 내전에서 처음으로 총을 쏜 자들은 백군이었다. 그러나 내전의 정치적 조건은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이 조성했다.

권력을 넘겨주려고 했던 바로 그 기관에 의해 무장 공격을 당하자 노동자와 병사들은 목표에 대한 명확한 상을 상실했다. 이 때문에 이들의 막강한 운동으로부터 정치적 중심 축이 빠져나갔다. 이렇게 해서 7월 투쟁은 무장봉기의 도구인 총칼을 가지고 부분적으로 무장봉기가 이루어진 시위가 되었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위로만 달성될 수 있는 목표를 위해 반(半)봉기가 동원되었다.

화해주의자들은 권력을 거부했지만 이것을 자유주의자들에게 완전히 넘기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화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을 두려워했다. 소부르주아는 언제나 대부르주아를 두려워한다. 둘째 화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다칠 것을 두려워했다. 입헌민주당으로만 구성된 정부는 대중에 의해 즉시 타도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밀류코프가 올바르게 지적한대로 "대중의 독자적인 무장 투쟁에 저항하면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자신의 권리를 강화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4월 20일과 21일 시위를 선언하고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을 자기 뜻대로 배치했다." 화해주의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몰래 빼돌리는 소꿉장난을 계속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배너에 새긴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소비에트는 자기 손에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7월에 집행위원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식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선언했다. 7월 4일에 통과된 결의문에서 집행위원회는 이렇게 주장했다: "소비에트가 모든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혁명적 민주주의 세력이 인정한다면 합동집행위원회 전체회의는 이 문제를 결정해야한다." 집행위원회는 소비에트 권력을 촉구하는 시위를 반혁명 봉기라고 선언했다. 이와 동시에 집행위원회는 스스로 최고 권력이 되어 정부의 운명도 결정했다.

7월 5일 동틀 녘에 "충성파 부대"는 타우리데 궁전에 진입했다. 이 부대의 지휘관은 전적으로 집행위원회에 복종하겠고 보고했다. 그러나 정부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없었다! 폭도로 규정된 시위대도 주권을 갖는 집행위원회에 복종하기를 원했다.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를 넘겨주면서 주둔군도 집행위원회에 복종하겠다고 선언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느 누구도 정부에 복종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전선에서 불려온 군대들도 자신들을 전적으로 집행위원회에 복종시켰다. 그런데 왜 유혈사태가 벌어졌는가?

이 충돌이 중세 말경에 일어났다면 서로를 살육하는 양측은 똑같은 성경책을 인용했을 것이다. 형식주의 역사학자들은 이들이 성경 구절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놓고 서로 싸웠다고 나중에 결론 내렸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중세의 수공업자들과 문맹의 농민들은 요한 계시록의 미묘한 문헌상의 차이 때문에 서로를 죽였다. 이상한 열정이 아닐 수 없었다. 러시아의 분리주의 종파들도 두 손가락이나 세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긋는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서로를 전멸시켰다. 그러나 실제로 중세나 지금이나 상징적 표현 이면에는 이해관계의 갈등이 깔려있다. 이것을 찾아낼 줄 알아야한다. 복음서의 똑같은 구절도 일부에게는 농노 신분의 고통을 또 일부에게는 자유를 의미했다.                               

상징적 표현 이면에 이해관계의 갈등이 깔려있는 훨씬 더 신선하고 현대적인 예들이 있다. 1848년 프랑스 6월 혁명에서 바리케이드 양쪽에서는 "공화국 만세!"라는 같은 고함소리가 울렸다. 따라서 소부르주아 관념주의자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6월 혁명은 투쟁 당사자들 가운데 한쪽은 부주의해서 또 한쪽은 성급해서 발생한 오해의 결과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르주아 계급은 부르주아 공화국을 원했고 노동자들은 인민 공화국을 원했다. 정치 구호가 실제 이해관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보다 은폐시키는 경우가 아주 빈번하다.

2월 혁명의 역설적인 성격을 화해주의자들은 맑스주의와 인민주의의 언사로 치장했다. 그러나 실제 계급 관계는 명백히 드러났다. 화해주의 정당들의 이중적 성격만 주목하면 이것을 알 수 있다. 교육받은 소부르주아들은 노동자와 농민의 지도자로 행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귀족 작위를 가진 지주들 그리고 설탕공장 소유주들과 어울려 지냈다. 집행위원회는 하층 계급들의 요구가 공식 국가기구에까지 올라가는 소비에트 체제의 일부였다. 그러나 이 기구는 동시에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외피로 봉사했다. 유산계급들은 집행위원회가 권력을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겨줄 때에만 집행위원회에 "복종했다." 한편 대중은 집행위원회가 노동자 농민의 통치 기구가 될 수 있다고 희망할 때에만 집행위원회에 복종했다. 모순적인 계급적 경향들은 타우리데 궁전에서 뒤섞인 채 집행위원회의 이름으로 정체를 숨겼다. 한쪽은 무의식적으로 집행위원회를 믿었고 또 한쪽은 차가운 계산 속에 집행위원회를 이용했다. 그러나 진실은 이것이었다: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 가운데 누가 나라를 통치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투쟁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권력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은 권력을 잡기에는 너무 허약했다. 그렇다면 7월에 볼세비키당은 권력을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대단히 결정적인 이틀동안 뻬쩨르부르그의 권력은 정부 기관들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이때 집행위원회는 처음으로 자신이 완전히 무기력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볼세비키당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너무 쉬웠을 것이다. 또한 지방의 몇몇 지점에서도 권력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봉기를 억제시킨 볼세비키당은 옳았는가? 수도와 일부 산업 중심지들을 아성으로 구축한 후 나라 전체로 권력을 확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제 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제국주의와 반동세력은 승리했다. 몇 달 밖에 가지 못한 케렌스키 정부는 이들의 승리에 최대의 기여를 했다. 이 정부는 혁명 러시아를 탈진시켰다. 그리고 희망에 차서 혁명으로부터 뭔가 새로운 정치적 메시지를 기다리던 교전국 군대들과 근로 대중의 눈에 러시아 혁명의 도덕적 권위를 손상시켰다. 7월에 권력을 잡아 볼세비키당이 노동계급 혁명의 산고를 4개월 단축했다면 혁명세력은 엄청나게 강화되었을 것이다. 볼세비키당은 덜 소진된 나라를 물려받았을 것이고 유럽에서 혁명의 권위는 덜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독일과 협상한 소비에트 정권은 협상과정에서 엄청난 강점을 누렸을 것이다. 또한 유럽의 전쟁과 평화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7월에 권력을 장악했다면 너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장봉기를 결정하지 않은 당 지도부는 전적으로 옳았다. 권력을 잡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권력을 유지해야하기 때문이다. 10월에 볼세비키당은 권력 장악의 순간이 왔다고 확실히 결정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순간은 권력 장악 후에 닥쳤다. 적의 수많은 공격에 노동계급의 역량은 최대한 긴장되었다. 그런데 7월에 권력을 장악했을 경우 가장 선진적인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조차 이후 닥칠 끝없는 투쟁을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들은 권력을 장악할 수는 있었으나 이것을 집행위원회에 선사했다. 수도의 노동계급은 압도적 다수가 볼세비키당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과 연결되어 있는 2월 혁명의 탯줄을 아직 끊지 못하고 있었다. 다수의 노동자들은 말로 떠들고 시위만 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여전히 품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을 겁주면 이들이 볼세비키당과 같은 정책을 펼 것이라는 환상도 품고 있었다. 계급의 선진부위조차 권력 장악의 경로에 대해 명확한 생각이 없었다. 7월 시위 직후 레닌은 이렇게 적었다: "이후 사건들로 밝혀졌듯이 7월 3일과 4일 당이 저지른 진짜 오류는 딴 곳에 있었다. 소비에트가 정책을 바꾸면 정치가 평화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당은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이 진짜 오류였다. 실제로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화해주의 정책을 통해 부르주아 계급과 이미 꽉 묶여 있었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은 너무나 반혁명적이었기 때문에 평화적인 정치 변화는 완전히 불가능했다."

노동계급은 권력을 장악할 정도로 정치적 통일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투쟁에 대한 결의 정도도 충분치 못했다. 농민으로 구성된 군대는 더 그랬다. 7월 3일과 4일 투쟁을 통해 주둔군은 볼세비키당의 정권 장악을 전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7월 4일 저녁에 애국주의 정당의 편으로 결정적으로 돌아선 중립적 부대들도 있었다. 7월 5일 중립적 연대들은 집행위원회 편이 되었으며 볼세비키당 지지로 기울던 연대들도 중립을 표방하려했다. 전선에서 늦게나마 도착한 군대가 아니라 바로 이 군대들 때문에 정부는 공세를 취할 수 있었다. 순간의 충동에 휩쓸려 7월 4일 저녁 볼세비키당이 권력을 잡았을 경우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은 이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제국주의 외세의 필연적인 공격에 대항해 노동자들이 권력을 방어하는 것을 방해했을 것이다.

전선에 배치된 군대 내부에서는 상황이 더 불리했다. 특히 6월에 시작된 전선의 공세 이후 군대는 평화와 토지 문제에 대해 투쟁해왔다. 따라서 볼세비키당의 구호에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병사의 소위 "자발적" 볼세비키주의는 명확한 강령과 규율을 갖춘 당, 중앙위원회, 당 지도부 등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당시 병사들이 보낸 편지들은 이 점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전선의 어느 병사는 굽은 손으로 이렇게 적고 있다: "장관들과 주요 지도자들은 기억하라. 우리는 정당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단지 미래와 과거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짜르는 당신들을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냈고 감옥에 가두었다. 우리의 뜻을 어기면 여러분들은 대검 위에 앉게될 것이다." 이 글에서 병사들은 자신들을 속이고 있는 상부의 지도자들에 대한 극단적인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자신들이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는 정당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병사들은 계속해서 전쟁과 장교들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고 볼세비키당의 구호를 이용했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봉기를 일으킬 수준은 전혀 아니었다. 수도를 제압하기 위해 정부는 수도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믿을만한 군대들을 선정했다. 이 과정에서 다른 부대들의 적극적인 저항이나 철도 노동자들의 저항도 없었다. 군대는 기차를 이용하여 쉽게 수도로 이송되었다. 군대는 불만에 차 있었고 곧잘 반란을 일으켰으며 쉽게 흥분했다. 그러나 명확한 정치적 내용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쉽게 부서지는 병사 대중의 생각과 행동에 단일한 방향을 제시할 능력이 있는 응집된 볼세비키 중핵은 군대 내에 너무 적었다.

반면 화해주의자들은 전선의 군대가 수도와 후방을 공격하도록 부추기기 위해 악 선동과 비방을 적극 활용했다. 3월에 반동 세력도 소비에트를 공격하기 위해 이 무기를 면밀하게 휘둘렀었다.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전선의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볼세비키당의 말을 듣고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은 증원군을 보내지 않고 있다; 노동자들은 전선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볼세비키들의 말을 듣고 농민이 토지를 지금 몰수하면 병사들에게 돌아갈 토지가 없을 것이다. 전선의 병사와 지주 가운데 누구를 위해 정부가 토지 몰수를 금지하고 있는 지를 이해하려면 병사들은 더 많은 경험이 필요했다.

뻬쩨르부르그와 전선의 군대 사이에는 지방이 있었다. 7월에 볼세비키당이 권력을 장악하기를 거부한 것이 옳았느냐의 문제를 결정하는 데에 7월 사태에 대한 지방의 반응은 아주 중요한 사후적 기준을 제공한다. 대도시 모스크바에서조차 혁명의 맥박은 뻬쩨르부르그에 비해 훨씬 약했다. 볼세비키당 모스크바 위원회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일었다. 부브노프와 같은 당의 극좌파 인물들은 당이 우체국, 전신전화국, 루스꼬예 슬로보(역자 주: 임시정부를 지지한 부르주아 일간지. 10월 혁명 후 반혁명 활동으로 볼세비키 정권에 의해 강제 폐간 당했다.) 의 편집 사무실 등을 장악하자고 제안했다. 이것은 봉기를 일으키자는 것과 같았다. 일반적으로 대단히 온건한 정서를 가지고 있던 모스크바 위원회는 대중이 봉기를 일으킬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여 이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다. 물론 화해주의자가 장악한 소비에트 역시 시위를 거부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위원회는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뻬쩨르부르그와 같은 구호를 가지고 그러나 열정은 한참 못 미친 채 상당수의 노동자들이 스코벨레프스키 광장으로 행진했다. 주둔군은 서로 의견이 달랐다. 개별 부대들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이들 가운데 한 부대만이 완전무장을 했다. 10월 봉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포병 부대의 병사 다비도프스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모스크바는 7월 투쟁을 준비하지 못했으며 시위 지도자들은 시위의 실패 때문에 씁쓸해 했다.

볼세비키당이 이미 소비에트를 장악한 섬유공업의 중심지 이바노보-보즈네젠스크는 임시정부가 무너졌다는 소문과 수도의 소식을 같이 접했다. 집행위원회의 밤 회의에서 예비적 조치로 전신전화국을 점거하자는 결의가 있었다. 7월 6일 공장의 조업은 중지되었다. 4만 명의 노동자들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상당수는 무장을 갖추었다. 뻬쩨르부르그의 시위가 승리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바노보-보즈네젠스크 소비에트는 서둘러 퇴각했다.

리가에서는 수도의 소식에 영향을 받아 7월 6일 밤 볼세비키당을 지지하는 레트인 명사수 부대와 애국주의 대대인 "죽음의 대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결국 후퇴한 쪽은 죽음의 대대였다. 같은 날 밤 리가 소비에트는 소비에트 정부를 지지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로부터 이틀 후 우랄지역의 수도 에카테린부르크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볼세비키당이 상반기에 제출한 소비에트 권력 구호는 이후 개별 지방 소비에트의 강령이 되었다. 이것은 물론 거대한 진전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권력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는 것과 볼세비키당의 깃발 아래 봉기를 일으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일부 지방에서는 수도의 사건이 자극제가 되어 개인적 성격의 격렬한 갈등이 초래되었다.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는 휴가 중인 병사들 일부가 전선으로 가는 기차에 탑승하기를 오랫동안 거부해왔다. 모스크바에서 사관생도들이 파견되어 명령을 강제로 이행시키려하자 2개 연대가 분노를 폭발시켰다. 총격이 벌어지고 사상자가 발생했다. 결국 사관생도들이 항복하면서 이들의 무장이 해제되었다. 정부 기관들은 소리도 없이 증발했다. 세 종류의 군대로 이루어진 징벌대가 모스크바에서 내려왔다. 이후 케렌스키의 전쟁장관이 된 충동적 성격의 베르호프스키 대령은 모스크바 지구 사령관이었다. 고참 멘세비키로 성격상 군대와는 거리가 먼 킨추크는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이었으며 이후 협동조합 회장과 소비에트 정권의 베를린 대사를 지냈다. 이 두 인물이 징벌대의 지도자로 나섰다. 그러나 징벌대가 도착했을 때 반란 병사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은 스스로 위원회를 수립하여 질서를 완전히 회복시키고 있었다.  

같은 날 밤 거의 같은 시간에 키에프에서는 헤트만 폴루보트코의 이름을 딴 연대의 병사들이 전선에 투입되기를 거부했다. 병사 5천 명이 반란을 일으켜 무기를 탈취하고 요새와 지구 본부를 점거한 후 사령관과 민병대장을 체포했다. 여러 시간 공포 상황이 지속된 후 군사당국, 사회단체 위원회, 중부 우크라이나 의회 기관들이 노력을 모아 체포된 자들을 풀어주고 반란군 대다수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변방 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주둔군은 볼세비키당에 우호적이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의 당 조직은 전국에서 시작되고 있는 반동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7월 9일 시위를 조직했다. 8천 명에서 1만 명이 시위에 가담했는데 대다수는 병사였다. 사회혁명당원 크라코베츠키가 지구 사령관으로 있던 이르쿠츠크에서는 대포를 보유한 400명의 징벌대가 크라스노야르스크에 진격했다. 그러나 이중권력 상태에 의해 강요된 이틀간의 회의와 협상 도중 징벌대는 병사들의 선동에 너무 기가 죽어 버렸다. 그러자 인민위원은 서둘러 징벌대를 이르쿠츠크로 되돌려 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대다수의 도청 및 군청 소재지에서는 상황이 훨씬 불리했다. 예를 들어 수도의 소식을 전해들은 사마라의 볼세비키당 조직은 "지지자들이 거의 없었지만 투쟁 지시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어느 당원은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들이 볼세비키들에게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이 투쟁에 동참할 가망은 없었다. 더욱이 병사들은 더욱 믿기 힘들었다. 볼세비키당 조직들의 "동조 세력은 미약했으며 우리는 한줌 밖에 되지 않았다. 노동자 소비에트에서 볼세비키들이 몇몇 있었으나 병사 소비에트에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더욱이 소비에트는 거의 장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방이 이렇게 허약하고 불리하게 반응을 보인 주요한 이유가 있었다. 투쟁 한번 하지 않고 수도의 2월 혁명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새로운 사실과 사상을 소화시키는데 수도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다. 지방에서는 전위가 자기 입장으로 대중을 설득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혁명 과정에서 정책을 수립하는 데에는 대중의 의식이 결정적인 요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설명한대로 대중의 의식은 대부분 지역에서 낮은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볼세비키당이 7월에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동시에 전선의 공세 때문에 당은 시위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공세가 무너지는 것은 절대적인 필연이었다. 이미 공세는 무너지고 있었다. 다만 사람들이 몰랐을 뿐이었다. 만약 당이 조심하지 않으면 정부는 광기 어린 정책의 결과인 공세의 실패 책임을 볼세비키당에게 떠넘길 위험이 다분했다. 공세가 찌그러져 중지될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공세가 무너지면 대중의 정서는 급격히 좌경화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것을 볼세비키당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공세가 무너진 후 당의 대응은 명쾌할 것이었다. 당의 판단은 절대적으로 옳았다. 그러나 사건들은 당의 정치적 계산과 무관하게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번에는 7월 사건으로 볼세비키당이 큰 화를 입게 되었다.

7월 6일 독일군은 전선에서 12 베르스타(역자 주: 1.067 km)에 걸쳐 10 베르스타의 깊이로 러시아군을 밀어붙였다. 러시아군의 공세는 재앙으로 끝났다. 이 사실은 시위에 대한 보복이 절정에 이른 7월 7일 수도에 전해졌다. 이 때문에 볼세비키당에 대한 비방과 보복의 물결이 약간 가라앉거나 최소한 약간의 분별력이 대중에게 생길 때까지 수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때에도 볼세비키당의 최악의 적은 아니었던 스탄케비치조차 수도의 시위 직후 타르노폴 전선이 붕괴된 것은 "석연치 않다"고 말했다. 이들은 사건의 진정한 연결고리들을 보지 못했거나 보려고 하지 않았다. 연합국들의 강요에 의해 시작된 가망이 없는 공세는 군사적 재앙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이와 동시에 혁명에 대한 기대가 배신당한 대중은 분노를 폭발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건들의 진짜 연결고리가 무엇인 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수도의 시위를 공세의 붕괴와 연결시키려는 유혹은 너무 강했다. 애국주의 언론은 공세의 실패를 숨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모든 힘을 다해 과장했다. 심지어는 군사기밀을 드러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사단과 연대의 이름과 이들의 위치가 신문에 실렸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고백한다: "7월 8일부터 신문들은 고의적으로 전선에서 나온 전보들을 노골적으로 밝혔다. 러시아 사회는 지진을 당한 것처럼 진동했다." 볼세비키당을 독일군과 좀더 쉽게 연상시키기 위해 독자들에게 충격, 경악, 귀가 멀 정도의 굉음 등을 제공하는 것이 부르주아 언론의 목적이었다.

수도의 거리 뿐 아니라 전선에서도 도발은 당연히 어느 정도 자기 역할을 했다. 2월 혁명 후 정부는 전선의 군대에 전직 헌병들과 경찰들을 다수 투입했다. 물론 이들은 전투를 원치 않았다. 이들은 독일군보다 러시아군을 더 두려워했다. 과거의 이력을 감추기 위해 이들은 군대 내에 가장 극단적인 정서를 자극했다. 병사를 장교에 대항하도록 부추기고 군대의 규율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큰 소리로 반대했다. 그리고 종종 공개적으로 자기들이 볼세비키라고 밝혔다. 자연스럽게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은  비겁과 악행의 특별 형제단을 구성했다. 이들을 통해 군대 내에 아주 황당한 소문들이 침투하여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 소문에는 극단적인 혁명주의가 흑백인조주의와 결합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들은 공포의 첫 신호를 보냈다. 부르주아 언론은 여러 차례 군대의 사기를 침체시키는 이들의 작업을 언급했다. 군대의 비밀문서에도 언론에 못지 않게 이런 언급들이 빈번히 등장했다. 그러나 최고사령부는 침묵을 지킨 채 흑백인조 앞잡이들이 볼세비키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제 공세가 붕괴하자 이 방법은 합법적으로 이용되었다. 멘세비키당 신문들은 국수주의자들의 아주 지저분한 비방을 뒤질세라 모방했다. "무정부주의 볼세비키당", 독일 첩자, 전직 헌병 등에 대한 시끄러운 언급은 군대의 전반적 상황 및 평화와 관련된 문제들을 당분간 잠재웠다. 르보프공은 공개적으로 이렇게 자랑했다: "독일군이 서남전선을 붕괴시킨 것보다 우리가 레닌 전선을 크게 붕괴시킨 것이 조국에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확신한다...." 침묵을 지켜야할 때를 모르는 점에서 이 정부의 수반은 시종장 로지안코와 똑같았다.

7월 3일과 4일의 시위를 당이 막을 수 있었더라도 타노폴 전선의 붕괴 때문에 시위가 폭발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시위가 며칠만 더 지연되었어도 정세는 크게 변화했을 것이다. 운동은 즉시 영역을 넓혀 지방 뿐 아니라 전선도 상당히 포괄했을 것이다. 정부는 정치적으로 폭로되었을 것이고 후방의 "반역자들"을 비난하기가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모든 측면에서 볼세비키당의 상황은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도 즉시 권력을 장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이것은 자신 있게 확언할 수 있다: 7월 시위가 일주일 뒤에 일어났다면 반동 세력이 그렇게 기세 등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볼세비키당에게 크게 불리하게 작용한 것은 바로 시위의 일자와 공세 붕괴의 날짜가 "석연치 않게 연결"되었다는 점이었다. 전선에서 일어난 분노와 절망의 파도는 수도의 혁명에 대한 환멸의 물결과 마주쳤다. 수도에서 대중이 겪은 투쟁 실패의 교훈은 너무도 격심하여 투쟁을 즉시 재개할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다. 더욱이 무의미한 패배가 초래한 환멸의 감정은 배출구가 필요했다. 따라서 애국주의자들은 이것을 볼세비키당에게 전가시키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4월, 6월, 7월에 정치무대의 주요 세력은 자유주의자, 화해주의자, 볼세비키로 동일했다. 이 모든 단계마다 대중은 부르주아 계급을 정부에서 축출시키려했다. 그러나 각 경우에 대중이 개입한 정치적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4월 시기"의 결과 가장 타격을 입은 세력은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최소한 말로나마 병합 정책은 비난받았다. 입헌민주당은 모욕을 당했다. 외무장관 밀류코프는 정부에서 쫓겨났다. 6월 운동은 결과가 전혀 없었다. 볼세비키당에게 주먹이 올라갔으나 타격은 없었다. 그러나 7월에 볼세비키당은 반역의 비난을 뒤집어쓰고 분쇄되었다. 그리고 식량과 물도 박탈당했다. 4월에는 밀류코프가 강제로 정부에서 쫓겨났으나 7월에는 레닌이 강제로 지하에 몸을 숨겼다.

10주의 시간차를 두고 이렇게 날카로운 변화가 일어난 이유가 무엇일까? 지배계급 내부에서는 자유부르주아 계급 쪽으로 중심 축이 크게 이동했음이 명백했다. 그러나 4월과 7월 사이에 대중의 정서는 볼세비키당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이 두 반대 현상은 서로 긴밀한 의존 관계에 있었다. 노동자와 병사들이 볼세비키당을 더욱 지지하는 만큼 화해주의자들은 부르주아 계급을 더 결사적으로 지지했다. 4월에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영향력 감소를 우려하여 대중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간 후 밀류코프를 배 밖으로 밀쳐버렸다. 물론 그에게 튼튼한 구명보트를 제공은 했다. 7월에 화해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및 장교들과 작당하여 볼세비키당을 공격했다. 이번에도 가장 불안정한 정치 세력인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역관계를 변화시켰다. 이들은 갑자기 부르주아 반혁명 편으로 붙어버렸다.

그렇다면 시위에 참여하여 시위의 책임을 지는 것이 볼세비키당에게 옳았는가? 7월 3일 톰스키는 레닌의 생각을 그대로 표현했다: "새로운 혁명을 원치 않는 이상 새로 시위를 조직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몇 시간 후 대중에게 새로운 혁명을 촉구하지 않으면서 왜 당은 무장 시위의 선두에 섰는가? 교조주의자들은 여기에서 논리의 모순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적 경박성을 발견할 것이다. 수하노프의 시각이 이러했다. 그는 자신의 "혁명 노트"에서 볼세비키당 지도부의 동요를 적지 않게 빈정거렸다. 그러나 대중은 교조주의자들의 충고에 따라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정치적 발전 정도에 따라 필연적으로 행동하게 마련이다. 오직 새로운 혁명만이 정세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볼세비키당 지도부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와 병사들은 아직 이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전선과 지방의 대다수 대중이 공세의 실패로부터 나름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것을 볼세비키당 지도부는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의 선진 대오는 공세를 개시한 정부처럼 모험심에 이끌려 거리로 나오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임무를 대단히 급진적으로 이해를 했다. 다만 이것을 환상적인 투쟁 방법과 결합시켰다. 볼세비키당의 경고는 효과가 없었다. 수도의 노동자와 병사들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정세를 시험할 수밖에 없었다. 무장 시위가 바로 이 시험이었다. 그러나 이 시험은 대중의 의지와는 반대로 전반적인 전투로 돌변하여 결정적인 패배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이 상황에서 당은 방관만 할 수 없었다. 전략적인 도식에 사로잡혀 수수방관하는 것은 대중을 적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았다. 대중의 환상은 전혀 공유하지 않으면서 이들이 최소의 손실로 필요한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중 정당인 볼세비키당은 대중과 같은 입장에 서야했다. 당시 수많은 비판자들에 대해 트로츠키는 신문에 이렇게 응답했다: "정부군의 폴로프체프 장군이 시위대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우리가 방관하지 않은 것에 대해 변명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우리의 개입으로 희생자 수는 늘지 않았고 혼란스러운 무장시위는 정치 봉기로 전환되지 않았다."

7월 시기의 원형은 과거의 모든 혁명에서 찾을 수 있다. 혁명의 7월 시기는 일반적으로 다양한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면 불리한 그리고 파멸적인 결과를 빈번하게 초래했다. 이 단계는 부르주아 혁명의 내적 작동방식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혁명의 승리를 위해 가장 많이 희생하면서 혁명으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얻으려던 노동계급이 실제로는 가장 적게 혜택을 누리기 때문이다. 이 과정의 자연 법칙은 대단히 명확하다.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유산계급은 혁명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 계급은 더 이상의 혁명의 진전을 막기 위해 크게 관심을 갖고 반동 세력에게 의존한다. 혁명으로 타도 당한 계급들의 호의를 얻으려는 조치를 취하는 순간 이 "혁명" 부르주아 계급은 인민 대중의 분노를 촉발시킨다. 심지어는 혁명투쟁 후 대중의 전위가 휴식을 취할 여유를 갖기도 전에 혁명의 결과에 대해 대중은 금방 실망한다. 새로운 공격으로 나설 경우 확실히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거나 불만스러운 현실을 교정할 수 있다고 인민은 상상한다. 이 때문에 이들은 준비, 강령, 예비 지지세력에 대한 계산, 결과에 대한 계산 등이 없이 다짜고짜 새로운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다. 반면 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아 계급은 아래로부터의 격렬한 투쟁이 터지기를 기다린다. 이를 통해 혁명 인민을 확실히 제압할 기회를 가지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보완적인 반(半)혁명의 사회적 심리적 기초이다. 역사상 여러 번 이것은 반혁명 승리의 출발점이 된다.

1791년 7월 17일 군신장에서 라파이에트는 국민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려는 공화파의 평화시위에 발포를 명령했다. 국민의회는 구체제 왕정의 배신을 은폐하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126년 후 러시아의 화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의 배신을 은폐하는데 열중했다. 왕당파 부르주아 계급은 적절한 때에 유혈사태를 초래해 혁명 세력을 영원히 제거하려했다. 승리할 역량이 없다고 판단한 공화파 지도자들은 전투를 거부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타당했다. 심지어 이들은 청원서를 제출한 분파와 자기들을 서둘러 분리시켰다. 이것은 최소한 이들답지 못한 오류였다. 이 때문에 부르주아 공포 정권이 등장하여 자코벵파는 몇 개월간 죽어지낼 수밖에 없었다. 로베스삐에르는 목수 뒤쁠레의 집에 몸을 숨겼다. 데물렝도 숨었다. 당통은 몇 주일을 영국에서 보냈다. 이렇게 해서 왕당파의 도발은 실패했다. 군신장의 학살에도 불구하고 결국 공화파가 승리했다. 이렇게 프랑스 대혁명도 정치적 의미에서나 달력에서나 나름의 "7월 시기"를 경험했다.

이로부터 57년 후에 일어난 1848년 혁명에서 "7월 시기"는 6월에 일어났으며 훨씬 더 거대하고 비극적이었다. 소위 "6월 시기"는 2월 혁명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혁명에서 승리하자 "노동권"을 선언했다. 이것은 1789년 왕당파 부르주아 계급이 수많은 그럴듯한 조치들을 선언한 것과 같았다. 그리고 1914년에 마지막 전쟁을 치른다고 부르주아 계급이 맹세한 것과도 같았다. 자본가들에게 권력을 선사한 노동계급은 이 허영에 찬 "노동권"을 누렸다. 그러나 처참한 초과착취 공장에서 수십만 노동자들은 일당 23 수(sous)의 기아임금을 받았다. 이로부터 몇 주일만에 공화파 부르주아 계급은 말은 그럴듯하게 남발하면서 돈은 수전노처럼 아꼈다. 이들은 국가의 생활보호기금으로 연명하는 "실업자 거지들"에게 모욕적인 말들을 마구 퍼부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2월에는 약속을 남발하면서 6월이 되기 전까지 냉혹한 계산에 입각한 도발을 자행했다. 이것을 보면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도발이 없었다해도 2월의 무기를 그대로 손에 들고 있던 빠리의 노동자들은 멋진 삶을 약속한 강령과 처참한 현실의 격차에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격차로 인해 이들의 굶주린 위장과 배신당한 마음은 매일 갉아 먹혔다. 지배계급 모두가 보는 앞에서 까베냑은 냉혹한 계산을 거의 숨기지도 않은 채 봉기를 일으켰다. 물론 봉기를 피로 물들일 생각이었다! 이 결과 공화파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1만2천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도살당했다. 그리고 2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감옥에 갇혔다. 이로써 지배계급은 자신들이 선언했던 "노동권"에 대한 그나마 남아있던 신념을 전부 정리했다. 계획, 강령, 지도부가 없었던 1848년 6월 운동은 노동계급의 막강하고 억제될 수 없는 반사적 행동같이 보였다. 가장 초보적인 생활필수품도 박탈당하고 혁명의 높은 희망들이 모욕당한 채 봉기 노동자들은 진압되었다. 그리고 이후 비방까지 당했다. 르드뤼-롤렝은 체레텔리의 선배였다. 전자의 추종자인 좌파 민주주의자 플로꽁은 국민의회에서 이렇게 확언했다: 봉기 노동자들은 왕당파와 외국 정부들에게 매수되었다. 그러나 1848년의 프랑스 화해주의자들은 반란 노동자들의 주머니에서 영국과 러시아 금화를 찾아내기 위해 전쟁 분위기를 연출할 필요는 없었다. 이런 식으로 혁명 노동계급을 도살하면서 민주주의자들은 나폴레옹 3세의 독재체제에 길을 내주었다.

1848년 2월 혁명과 6월 시기 사이의 관계는 1870년 9월 봉기와 1871년 3월 빠리 꼬뮌의 거대한 폭발 사이의 관계와 같다. 빠리 노동계급의 3월 봉기는 전략적 계산이 전혀 없었다. 다만 상황이 비극적으로 결합된 채 노동계급의 봉기는 지배계급의 도발에 의해 보완되었다.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은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악의가 자극을 받아서 대단히 기발한 도발을 고안해낸다. 지배 파벌은 무엇보다도 인민의 무장을 해제시키려고 했다. 이에 반해 노동자들은 자기 영토로 만들려고 했던 빠리를 프로이센에 대항해 방어하려고 했다. 노동자들은 국가방위군(역자 주: 빠리 노동자들로 구성된 민병대. 프로이센 군대와 결탁한 부르주아 정부군에 의해 결국 진압되었다)이라는 무장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소비에트와 유사한 조직이었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국가방위군 중앙위원회라는 정치적 지도부를 보유했다. 불리한 객관적 상황과 정치적 오류 때문에 빠리는 전국과 대치했다. 이때 지방은 빠리를 오해하고 음해하고 부분적으로 배신까지 했다. 결국 빠리는 비스마르크와 몰트케에 의해 조종된 베르사이유 정부군의 분노에 찬 손에 함락되었다. 나폴레옹 3세의 타락하고 패배한 장교들은 프로이센 군대의 무거운 장화에 의해 나폴레옹 3세의 품에서 바로 풀려난 부드러운 마리안느(역자 주: 마리안느는 프랑스 공화국에 대한 의인화이다. 프랑스를 여성으로 의인화했다. 부드러운 이라는 형용사를 트로츠키가 사용한 이유는 공화국 군대의 무자비함을 비꼬기 위한 것이다.)에게 꼭 필요한 교수집행인이 되어주었다. 부르주아 혁명의 배신에 저항하여 일어난 노동계급의 반사적 저항은 빠리 꼬뮌에서 노동계급 혁명의 수준까지 고양되었으나 즉시 진압되었다.

1919년 1월 베를린의 스파르타쿠스단의 1주일도 뻬쩨르부르그 7월처럼 중간적인 반(半)혁명이었다. 독일 전체 특히 산업에서 노동계급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독일의 11월 혁명은 자동적으로 국가권력을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에 넘겼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정치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했으며 사회민주주의는 부르주아 체제를 지지했다. 독일 혁명의 노동계급 독자 정당은 정치적으로 러시아의 사회혁명당 및 멘세비키당 수준이었다. 볼세비키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11월 9일 이후 매일 독일 노동자들은 뭔가가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나고 있다는 생생한 느낌을 받았다. 이미 획득한 성과를 유지하고 스스로를 방어하고 사태에 저항해야 한다는 욕구가 매일 증대하고 있었다. 이 방어적 경향이 1919년 1월 투쟁의 바탕이었다. 스파르타쿠스단의 1주일은 전략을 계산하는 당이 아니라 분노한 대중의 압력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투쟁은 베를린 경찰청장의 직위를 유지시키려는 하찮은 문제로 촉발되었다. 그러나 이 투쟁은 새로운 혁명의 시작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었다. 지도부에 참여한 두 조직인 스파르타쿠스단과 독립사민당 좌파는 전혀 준비 없이 상황에 기습당하고 휩쓸렸다. 이들은 원래 의도보다 더 멀리 나아갔으나 끝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스파르타쿠단은 독자적 지도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허약했다. 독립사민당 좌파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들을 취하지 못한 채 회피하고 동요하였다. 이들은 봉기와 장난을 했다. 여기에 외교적 협상까지 가미시켰다.

사상자의 수로 보면 1월의 패배는 프랑스 "6월 시기"의 거대한 수치에 훨씬 못 미쳤다. 그러나 패배의 정치적 중요성은 살해당하고 처형당한 자들의 숫자로만 측정되지는 않는다. 나이 어린 공산당이 물리적으로 목이 잘린 것으로 충분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독립사민당은 고유의 핵심 방식들을 통해 노동계급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는 점을 증명했다. 큰 그림으로 보면 "7월 시기"는 독일에서 여러 번 반복되었다. 1919년 1월의 1주일, 1921년 3월 시기, 1923년 10월의 후퇴 등이 이어졌다. 독일의 이후 역사 전체는 이 사건들의 결과였다. 승리하지 못한 노동계급 혁명은 파시즘에 길을 내주었다.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1931년 5월초에도 스페인의 무혈, 평화, 명예(사용되는 형용사들은 언제나 같다) 혁명은 우리의 눈앞에서 프랑스 달력으로는 "6월 시기" 러시아 달력으로는 "7월 시기"를 준비하고 있다. 마드리드의 임시정부는 상당수가 러시아어에서 번역된 미사여구를 남발하면서 실업과 토지에 대한 기근을 해소할 광범위한 조치들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제의 사회적 환부들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있다. 연립정부의 사회주의자들은 공화파를 도우면서 혁명의 과제를 방기하고 있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분노는 곧 급격히 증대할 것이다. 이것은 전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대중 혁명과 새 지배계급들의 정책 사이의 갈등은 화해할 수 없는 투쟁의 근원이다. 이 투쟁이 전개되면서 4월의 첫 혁명이 매장되거나 두 번째 혁명이 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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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세비키당 지지 대중은 1917년 7월 특정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 정서도 완전히 동질적이지 않았다. 노동자와 병사들 다수는 때때로 전개되고 있는 운동을 결정적 투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5년 후에 쓴 회고록에서 메텔레프는 당시에 벌어진 사건들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 봉기에서 가장 중요한 오류는 화해주의 집행위원회에게 정권을 잡으라고 제안한 것이었다....그렇게 제안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정권을 잡았어야했다. 두 번째 오류는 거의 이틀 동안 거리에서 시위만 벌인 것이었다. 이 대신 우리는 모든 중요한 기관, 궁전, 은행, 기차역, 전신전화국 등을 점거하고 임시정부 구성원 전부를 체포해야했다," 등등. 봉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대꾸의 여지가 없이 올바르다. 그러나 7월 운동을 봉기로 전환시켰을 경우 혁명은 거의 매장되었을 것이다.

대중에게 전투를 촉구한 무정부주의자들은 "2월 혁명도 당 지도부 없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러나 2월 혁명은 몇 세대에 걸친 투쟁에 의해 그 임무가 설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혁명이 끝난 후 이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진영과 권력을 잡을 준비를 한 애국적 민주주의 진영이 존재했다. 반면 7월 운동은 완전히 새로운 역사적 길을 가야만했다. 소비에트 민주주의 세력을 포함하여 부르주아 사회 전체는 이 운동에 대해 화해할 수 없이 적대적이었다. 부르주아 혁명과 노동계급 혁명의 차이를 무정부주의자들은 보지 않았거나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볼세비키당이 7월 운동을 "시기상조"라고 교조적으로 평가한 후 이에 등을 돌렸을 경우 반(半)봉기는 무정부주의, 모험주의, 대중의 분노를 우연히 표현하는 산발적이고 무질서한 지도부에 필연적으로 귀속되었을 것이다. 이 결과 유혈만 낭자할 뿐 소득이 전혀 없는 격동으로 끝났을 것이다. 반면 기관총 연대와 푸틸로프 노동자들의 선두에 서서 전반적 정세에 대한 평가 자체를 무시한 후 결정적 투쟁의 길을 택했을 경우 봉기는 당연히 좀더 과감한 성격을 띠었을 것이다. 볼세비키당의 지도를 받는 노동자와 병사들은 권력을 장악했을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혁명은 진압되었을 것이다. 전국적 차원에서 보면 권력의 문제는 2월처럼 뻬쩨르부르그의 승리로 결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방은 수도를 따라잡지 못했을 것이다. 전선의 군대는 혁명을 이해하거나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철도와 전신전화 시설은 볼세비키당에 저항하는 화해주의자들의 손에 들어갔을 것이다. 케렌스키와 전쟁 총사령부는 전선과 지방의 지지를 받아 정부를 수립했을 것이다. 수도는 봉쇄되었을 것이고 혁명은 와해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케렌스키 정부는 수도에 대항해 상당수의 병사들을 동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봉기는 뻬쩨르부르그 꼬뮌의 비극으로 끝났을 것이다.

7월이라는 역사의 기로에서 볼세비키당은 대중운동에 개입했다. 이 때문에 1848년 6월 시기와 1871년 빠리 꼬뮌의 치명적 위험은 제거되었다. 당이 대담하게 운동의 선두에 섰기 때문에 시위가 무장투쟁으로 전환될 시점에서 대중은 제지되었다. 대중과 당이 겪은 7월의 탄압은 대단히 심각했으나 결정적인 탄압은 아니었다. 보복의 희생자는 수십 명이었지 수만 명이 아니었다. 이 시련에서 노동계급은 머리가 잘리지 않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사망하지도 않았다. 투쟁 중핵들은 온전히 살아남았으며 이 시련을 통해 이들은 많은 것을 배웠다.

2월 혁명으로 볼세비키당이 오랜 세월 쌓아올린 작업은 결실을 보았다. 그리고 당이 교육한 진보적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자기 역할을 다했다. 그러나 이때 당은 대중을 직접 지도할 능력이 없었다. 4월 시기에 당의 구호들은 역동적인 힘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운둥 자체는 당과 무관하게 발전했다. 6월에는 당의 엄청난 영향력이 모습을 드러냈으나 대중은 아직도 적들이 공식으로 촉구한 시위의 한계 속에서 행동하고 있었다. 7월이 되어서야 볼세비키당은 대중의 압력을 받아 자신의 구호 뿐 아니라 조직된 지도력을 가지고 거리에 나와 운동의 기본 성격을 결정했다. 7월 시기에서야 견고히 응집된 전위의 가치가 처음으로 드러났다. 이때 당은 큰 대가를 지불했지만 노동계급의 패배를 미연에 방지했다. 그리고 미래에 전개될 노동계급 혁명을 확실히 지켜낼 수 있었다.            

볼세비키당에게 7월 시기가 의미하는 바를 밀류코프는 이렇게 적었다: "투쟁의 기술적인 시도로 보면 당시의 경험은 당에게 당연히 대단한 가치가 있었다. 투쟁의 어떤 요소들을 다루어야 하는지, 이 요소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부와 소비에트 군대 등이 어느 정도 저항할 것인지를 당은 잘 알 수 있었다....이 실험을 되풀이할 때가 왔을 때 이들은 틀림없이 좀더 체계적이고 의식적으로 이 실험을 수행했다." 그의 말은 7월 이후 볼세비키당 정책의 전개 과정에서 7월 실험이 갖는 의의를 정확하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7월의 이 교훈을 활용하기 전에 당은 몇 주일을 힘겹게 지내야만했다. 이때 근시안적 시각을 가진 적들은 볼세비키당의 역량이 결정적으로 분쇄되었다고 생각했다.

 

 

제 4장 한 달간의 대대적 비방(誹謗)

7월 4일 밤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와 농민 소비에트를 대표한 두 집행위원회의 위원 2백 명은 알맹이 없는 회의를 하면서 앉아 있었다. 이때 의심스러운 소문이 이들의 귀에 들어왔다. 레닌을 독일군 총사령부와 연루시키는 자료가 발견되었으며 신문들이 내일 이 문서들을 공개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사건들의 배후에서 진행되는 끝없는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집행위원회 최고회의의 음울한 예언자들은 궁전 홀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들은 가장 가까운 친구들의 질문에 대해서도 마지못해 그리고 회피하듯 건성으로 대답했다. 일반인들의 출입이 거의 끊긴 타우리데 궁전은 깜짝 놀랐다. "레닌이 독일군 총사령부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놀라움, 경계, 악의에 찬 기쁨 등이 대의원들을 흥분시키고 하나로 결속시켰다. 7월 시위로 인해 볼세비키당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던 수하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혁명과 진짜 관계가 있던 사람들은 이 소문들이 모두 엉터리라는 것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혁명의 이력이 있는 사람은 집행위원회에서 극소수에 불과했다. 소비에트의 지도 기구들에도 혁명의 첫 물결에 우연히 휩쓸린 소위 3월 혁명가들이 대부분이었다. 지방도시의 사무원, 상점주인, 농촌의 촌장 등 지방 출신 대의원들 중에는 흑백인조의 냄새가 확실히 풍기는 자들이 있었다. 이런 자들은 즉시 소문을 듣고 맞장구를 쳤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사실이다! 우리는 원래부터 이것을 알고 있었다!

이 예측하지 못한 돌발 사태에 놀란 지도자들은 시간을 다투었다. 체이제와 체레텔리는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확인되지 않은" 이 놀라운 소문을 신문에 싣지 말라고 제안했다. 편집자들은 타우리데 궁전의 이 "요청"을 감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편집자들 가운데 한 명은 이 요청을 무시했다. 노보예 브렘야(역자 주: [새로운 시대] 1905년에는 흑백인조 기관지였으며 1917년에는 임시정부와 흑백인조를 지지한 일간지. 10월 혁명이 성공한 즉시 소비에트 정권에 의해 강제 폐간 당했다.)지의 막강한 발행인 수보린은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은 노란색 신문지에 지면이 작은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다. 이 신문은 레닌이 독일 정부로부터 지시와 자금을 받은 것을 폭로하는 공식 문서 같은 것을 다음날 아침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이렇게 해서 검열은 풀렸고 하루 내에 온갖 신문에는 이 놀라운 내용이 가득했다. 온갖 사건들로 점철된 1917년의 가장 황당한 에피소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왕이든 아니든 지배계급의 통치자들에 대항해 수십 년을 보낸 혁명정당의 지도자들이 러시아와 전세계에 호엔쫄런 왕가의 고용된 첩자로 묘사되었다. 지금까지 그 예가 없었던 엄청난 규모로 비방의 씨앗이 인민 대중 한가운데에 뿌려졌다. 대중의 압도적 다수는 2월 혁명이 끝나고 나서야 볼세비키당 지도자들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이제 비방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요인이 되었다. 여기서 비방의 작동방식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놀라운 문서의 일차 자료는 에르몰렌코라는 자의 증언이었다. 이 영웅의 이력은 공식 기록에 충분히 나와있다. 러일 전쟁부터 1913년까지 그는 정보국의 요원이었다. 명시되지 않은 이유로 그는 1913년 소위 직급으로 정보국을 나왔다. 1914년 군대에 징집되어 용감하게 독일군에게 체포된 그는 이후 전쟁 포로들 사이에서 경찰 스파이가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포로 수용소의 생활이 싫었고 "친구들의 권유"도 있어서 그는 당연히 애국의 목적으로 독일의 첩자가 되었다. 여기서 그의 인생은 새로운 장을 맞았다. 4월 25일 그는 독일군 당국에 의해 "러시아군 쪽 전선에 투입되었다". 교각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치하고 군사기밀을 보고하고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독일과 러시아의 독자 평화조약을 선동하는 것 등이 그의 임무였다. 독일군의 쉬디츠키 대위와 리이버스 대위는 에르몰렌코와 함께 그의 복무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실제적인 필요보다는 단순히 그의 기분을 높여주기 위해 지나가듯이 이렇게 말했다: 에르몰렌코 외에도 레닌이라는 인물 역시 같은 목적으로 러시아 국내에서 활동할 것이다. 이것이 비방의 기초가 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또는 무엇이 레닌에 대해 증언하라고 에르몰렌코에게 제안했는가? 독일 장교들은 확실히 아니었다. 날짜와 사실들을 단순 대조하면 그의 머리 속에 어떤 생각들이 오고 갔는지를 알 수 있다. 4월 4일 레닌은 유명한 4월 테제를 발표하여 2월 체제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의 지속에 반대하는 무장 시위가 4월 20일과 21일에 일어났다. 이때에는 레닌에 대한 공격이 진짜 태풍처럼 몰아쳤다. 25일 에르몰렌코는 "러시아군 쪽 전선에 투입되었다." 5월 초반부에 그는 정보국 본부와 접촉했다. 신문들은 레닌의 노선이 독일 황제에게 유리하다는 애매한 논리를 유포했다. 이 때문에 레닌은 독일의 첩자라고 생각되었다. 억누를 수 없는 병사들의 "볼세비키주의"와 씨름하고 있던 전선의 장교들과 인민위원들은 레닌이 화제에 오르면 표현이 거칠어졌다. 에르몰렌코는 즉시 이 분위기에 영합했다. 레닌에 대한 말도 되지 않는 황당한 거짓정보를 그가 고안해 냈는지 아니면 누가 그에게 제안했는지 또는 그와 정보국 관리들이 공동 창작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볼세비키당에 대한 비방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긴요했기 때문에 창작되고 유포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내전에서 백위군의 총사령관이 될 참모총장 데니킨 장군은 짜르 비밀경찰과 사고 수준이 비슷했다. 따라서 그는 에르몰렌코의 증언을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나 생각한 체했다. 그래서 그의 증언은 5월 16일 적절한 편지와 함께 전쟁부로 이관되었고 전쟁장관 케렌스키는 아마 체레텔리 그리고 체이제와 이 문제를 논의했을 것이다. 보나마나 케렌스키는 의분을 터뜨렸을 것이고 두 사람은 그를 진정시켰을 것이다. 틀림없이 이 때문에 이 사태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케렌스키는 이렇게 적었다: 독일 총사령부와 레닌의 관계에 대한 에르몰렌코의 증언은 "신뢰하기 어렵다." 에르몰렌코와 데니킨의 보고서는 이렇게 해서 한달 반 동안 처박혀진 채 낮잠을 잤다. 그리고 정보국은 에르몰렌코가 잉여인력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해고했다. 결국 이 소위 양반은 극동지역으로 방랑하면서 양쪽에서 받은 돈을 술로 탕진했다.

그러나 7월의 사건들은 볼세비키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에르몰렌코의 증언을 상기시켰다. 그는 블라고베쉬첸스크에서 서둘러 소환되었다. 그러나 상상력이 워낙 빈약한 그는 아무리 쥐어짜도 원래의 증언에 단 한마디도 첨가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이때에는 법무부와 정보국이 팔을 걷어붙이고 모든 역량을 동원하고 있었다. 정치인, 장군, 헌병, 상인 그리고 모든 종류의 직업에 종사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볼세비키당의 범죄 혐의가 조사되었다. 짜르의 명예로운 비밀경찰은 민주주의 사법부의 신참 대표들보다 훨씬 신중하게 조사를 진행했다. 뻬쩨르부르그 비밀경찰청장을 역임한 존경할만한 글로바초프 장군은 이렇게 적었다: "레닌이 독일의 자금을 받아 반역 행위에 가담했다는 증거는 최소한 나의 재임 기간에는 포착되지 않았다." 뻬쩨르부르그 군사지구 정보과장을 역임한 비밀경찰 간부 야쿠보프는 이렇게 증언했다: "독일 총사령부와 레닌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레닌이 독일로부터 공작금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해서 창당 때부터 볼세비키당을 감시해온 짜르의 비밀경찰 기관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리고 특히 권력을 휘두르면서 뒤지면 결국에는 뭔가가 나오기 마련이다. 공식 직업이 상인인 부르스타인은 "러시아 출신의 유명한 독일 사민주의자 파르부스가 책임자로 있는 스톡홀름의 독일 첩보 기관"에 주목해야 한다고 임시정부에 촉구했다. 부르스타인의 증언에 의하면 폴란드의 혁명가 가네츠키와 코즐로프스키를 통해 레닌은 이 기관과 접촉하고 있었다. 나중에 케렌스키는 이렇게 적었다: "유감스럽게도 합법적으로 공개할 수 없는 비밀경찰의 대단히 중요한 자료들이 가네츠키가 러시아 잠입 도중 국경에서 체포되면서 진본이라는 사실이 확실히 드러났다. 이 자료들은 볼세비키들을 기소하는 법적 자료로 전환될 예정이었다." 케렌스키는 이 자료가 어떻게 전환될 것인지를 미리 알고 있었다!

부르스타인의 증언은 가네츠키와 코즐로프스키가 운영한 뻬쩨르부르그와 스톡홀름 사이의 무역에 관한 것이었다. 가끔 암호로 교신이 이루어진 전시의 상업은 정치와는 관련이 없었다. 그리고 볼세비키당은 이 상업과 관계가 없었다. 좋은 상거래를 나쁜 정치와 결합한 파르부스를 레닌과 트로츠키는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또한 인쇄 매체를 통해 그와 모든 관계를 끊을 것을 러시아 혁명가들에게 호소했다. 그런데 사건들이 쉴 새 없이 벌어지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런 것들을 조사할 시간을 가진 자는 누구였을까? 스톡홀름의 첩보기관은 능히 그러고도 남았다. 그래서 에르몰렌코 소위가 불을 지폈으나 도중에 꺼진 사건이 다른 쪽에서 타올랐다. 물론 여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대단히 중요했던 알렉산드로프 사건의 수사관은 총사령부 정보국장 투르케스타노프공으로부터 이런 대답을 받았다: "부르스타인은 전혀 믿을 수 없다. 그는 양심이라는 조금도 없는 사업가 유형의 인간이어서 무슨 짓이든지 능히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르스타인의 나쁜 평판이 레닌의 평판을 더럽히는데 방해 요소인가? 아니다, 케렌스키는 부르스타인의 증언을 "대단히 진지한" 것으로 주저 없이 인정했다. 이때부터 조사는 스톡홀름의 첩보기관에 집중되었다. 이렇게 해서 두 총사령부를 섬긴 스파이의 폭로와 "전혀 믿을 수 없는" 비양심적 사업가의 발언이 1억6천만 인구의 나라에서 권력을 장악할 혁명정당에 대한 완전히 황당한 비방의 기초를 제공했다.

이때는 케렌스키의 찌그러진 공세는 군사적 재앙으로 변하고 있었으며 수도의 7월 시위는 볼세비키당의 저지할 수 없는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본격적인 조사 이전의 자료들이 어떻게 신문에 버젓이 실리게 되었는가? 이 사건의 주동자 가운데 하나인 검찰총장 바사라보프는 나중에 언론에 솔직하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수도에서 임시정부의 믿을만한 병력이 전무하자 지구 본부는 극약처방으로 주둔군의 심리 변화를 꾀하기로 결정했다. "본부에 가장 가까이 주둔한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의 대표들이 문서의 내용을 접하자 이들은 경악했다. 이것을 직접 관찰한 본부 요원들은 이때부터 정부가 강력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 실험이 성공하자 법무부, 정보국, 총사령부 등의 음모자들은 이 결과를 법무부에 알렸다. 그러나 법무장관 페레베르제프는 이와 관련한 공식 성명서를 발표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다만 현장에 있었던 임시정부 장관들의 "개인적 작업이 방해받지 않도록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일을 추진하는데 법무부 관리들의 이름이 공개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올바르게 판단했다. 센세이션을 일으킬 비방을 유포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인물"이 필요했다. 음모자들은 개인적으로 접촉하여 전혀 어렵지 않게 적임자를 찾았다. 혁명가였으며 제 2차 의회 의원이었던 알렉신스키는 날카로운 음성의 연설가이었으며 음모를 열정적으로 좋아했다. 한때 볼세비키당의 극좌파였던 그는 레닌을 가망 없는 기회주의자라고 생각했다. 1905년 혁명이 실패한 이후 닥친 반동기에 알렉신스키는 특별한 초좌익 그룹을 러시아 국내에 수립한 후 전쟁 발발 때가지 해외에서 이 그룹을 지도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초(超)애국주의 노선을 취한 그는 즉시 모두가 독일 황제의 첩자라고 비난하는 특기를 구사했다. 이 연장선상에서 그는 자기와 같은 유형의 러시아 및 프랑스 애국주의자들과 함께 빠리에서 광범위한 첩보 활동에 종사했다. 그런데 아주 애국주의적이며 별로 엄격하지도 않은 빠리 외신기자협회 즉 연합국과 중립국 기자협회는 특별 결의문을 채택하여 알렉신스키를 "부정직한 비방꾼"으로 선언하고 축출했다. 2월 혁명 후 이 증거를 소지한 채 뻬쩨르부르그에 귀환한 그는 과거의 좌익답게 집행위원회에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관용을 베푸는 경향이 있었던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4월 11일 결의문을 통해 그의 참여를 봉쇄하면서 오명을 씻을 것을 그에게 제안했다. 제안하기는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는 복권되는 것보다는 다른 자들을 먹칠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정보국과 관계를 맺으면서 음모를 꾸미는 본능을 전국에 걸쳐 발휘하였다. 7월 하반기에 그의 점점 넓어지는 비방의 범위는 이미 멘세비키들까지 포괄했다. 결국 멘세비키 지도자 단은 그의 개과천선을 주시하면서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소비에트 기관지 이즈베스티아지(6월 22일자)에 항의문을 실었다: "부정직한 비방꾼으로 공식 선언된 인물의 활동을 마감시킬 때가 왔다." 에르몰렌코와 부르스타인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법과 정의의 여신 테미스가 자신과 여론을 중계해줄 적임자로 알렉신스키보다 더 나은 자를 찾을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은 너무 명백하다. 비방의 폭로 문서들을 장식한 것은 바로 그의 서명이었다.      

한편 이 사건의 배후에서 장관-사회주의자들과 부르주아 장관 네크라소프와 테레쉬첸코는 이 문서들을 언론에 넘기는 것에 항의했다. 법무장관 페레베르제프는 이들이 그와 결별할 용의를 보이자 6월 5일 장관직을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멘세비키들은 자기들이 승리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법무장관이 너무 서둘러 문서들을 폭로하면서 조사를 방해했기 때문에 그를 쫓아냈다고 나중에 케렌스키가 주장했다. 어쨌든 장관이었을 때에는 별 볼일이 없었던 법무장관은 사임하면서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켰다.

같은 날 지노비에프는 집행위원회 사무국 회의에 출석하여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이렇게 요구했다: 레닌의 무죄를 입증하고 그에 대한 비방이 초래할 결과들을 막을 조치를 즉각 취하라. 사무국은 조사위원회 구성을 거부할 수 없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레닌의 매국 행위가 아니라 비방의 근거인 자료들을 조사해야 한다고 위원회는 인식했다." 그러나 조사위원회는 법무부 기관들과 정보국의 시샘을 받았다. 자기 소관 업무에 대한 외부의 개입을 당연히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소비에트 기구들은 필요할 경우 정부 기관들을 무난히 제압해왔다. 그러나 7월 사건 때문에 권력은 우로 크게 기울었다. 더욱이 권한을 위임한 자들의 정치적 이해와 상반되는 임무를 위해 소비에트 조사위원회가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화해주의 지도자들 가운데 좀더 진지한 멘세비키들만이 공식적으로 비방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직접 대답을 회피할 수 없는 모든 경우에 이들은 몇 마디로 자신들의 무죄를 명백히 했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의 머리 위에 걸려 있는 독 묻은 칼을 치우려는 노력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처럼 행동했다. 그렇다, 이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자기들 이익에 대한 배신행위였다. 7월에 주둔군 일부가 볼세비키당 지지를 철회한 것은 바로 레닌에 대한 비방 때문이었다. 화해주의자들이 비방에 저항했더라면 이즈마일로프스키 대대는 집행위원회를 기리며 "마르세이예즈"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볼세비키당 본부가 있는 크쉐신스카야 궁전으로 가지 않았을 경우 병영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멘세비키당의 전반적 정책과 보조를 맞추었던 내무장관 체레텔리는 볼세비키 분파의 압력에 굴복하여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개인적으로는 볼세비키당 지도자들이 간첩행위를 했다고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음모를 꾸미고 무장봉기를 획책한 것은 진정 비난받아야 한다. 그는 뒤이어 볼세비키들을 체포하는 책임을 맡았다. 볼세비키당을 실질적으로 불법화시키는 결의안을 상정하면서 리이버는 7월 13일 이렇게 말했다: "레닌과 지노비에프에 대한 비난은 근거가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런 발언들에 대해 회의장은 음울한 침묵으로 일관했다. 볼세비키당은 이들이 치사하게 문제를 회피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고 애국주의자들은 이들이 도움이 되지 않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17일 집행위원회 합동회의에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연설했다: "우리들 뿐 아니라 여러분들에게도 질식할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저들은 레닌과 지노비에프에게 더러운 비난을 퍼붓고 있다. (목소리: '옳소.' 소란이 일어남. 트로츠키가 연설을 계속한다.) 이 회의장에 이 비방에 동조하는 인물들이 있는 것 같다. 슬그머니 혁명에 가담한 인물들이 여기에 있다. (소란이 일어남. 정숙을 유지시키기 위해 의장은 오랫동안 의사진행용 종을 흔들었다.) ...레닌은 혁명을 위해 30년을 투쟁해왔다. 나는 인민에 대한 억압에 항거해 20년을 투쟁해왔다. 우리는 독일의 군국주의를 증오할 수밖에 없다....혁명가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들만이 우리를 독일 첩자라고 의심할 수 있다. 독일 군국주의에 저항한 죄로 나 자신은 독일 법정에 의해 8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이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 회의장에 참석한 모두 사람들은 우리가 독일의 첩자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확신에 찬 혁명가가 아니라 깡패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박수.)" 이것은 볼세비키당을 반대하는 매체들의 보도였다. 볼세비키당 매체는 이미 폐간되어 있었다. 그러나 회의장에서 소규모에 불과한 좌파가 박수를 쳤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대의원 일부는 증오에 차서 고함을 질렀다. 다수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케렌스키의 직접 하수인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연단에 올라가 정부기관의 공식 비방을 지지하거나 간접적으로 방어하지는 않았다.

모스크바에서는 볼세비키당과 화해주의자들 사이의 투쟁이 일반적으로 좀더 온건하게 전개되었다. 반면 10월에는 그만큼 더 잔인한 투쟁이 벌어졌다. 7월 10일 노동자 소비에트와 병사 소비에트 합동회의는 이렇게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볼세비키당 분파의 간첩행위 주장은 비방이며 반혁명 세력의 음모라는 내용의 선언문을 인쇄하여 도배한다." 정부 기관들에 좀더 의존했던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아직 소집도 되지 않은 조사위원회의 결론을 기다렸다. 7월 5일 레닌은 트로츠키와 대화 도중 이렇게 문제를 제기했다: "저들이 우리 모두를 총살시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극악무도한 비방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의도는 이렇게 밖에 설명될 수 없었다. 레닌은 적이 음모를 끝까지 밀고 갈 능력이 있다고 보고 이들의 손에 농락 당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6일 저녁 케렌스키는 장군들의 제안을 머리에 잔뜩 집어넣은 채 전선에서 도착했다. 그리고 볼세비키당에 대한 단호한 조치들을 요구했다. 새벽 2시에 정부는 "무장봉기" 지도자들 모두를 법정에 세우고 반란에 참여한 연대들을 해산시키기로 결의했다. 수색과 체포를 위해 레닌의 아파트에 들어간 부대는 수색으로 만족해야했다. 거주자가 이미 집을 비우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이때 아직도 뻬쩨르부르그에 있었다. 어느 노동자의 아파트에 피신한 그는 소비에트 조사위원회가 반혁명 세력의 공격 위험을 제거한 후 자신과 지노비에프의 증언을 직접 들을 것을 요구했다. 조사위원회에 보낸 선언문에서 레닌과 지노비에프는 이렇게 적었다: "7월 7일 금요일 아침 의회는 카메네프에게 전문을 보내 조사위원회가 정오에 합의된 아파트에 도착할 것이라고 전했다. 우리는 지금 이 글을 7월 7일 저녁 6시 30분에 쓰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위원회는 도착하지 않았다. 더욱이 위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징후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조사 지연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약속한 조사를 시작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위원회가 최종적으로 보이자 레닌은 확신했다: 화해주의자들은 사건으로부터 손을 뗀 후 이것을 백위군에게 넘겼다. 이때쯤 당의 인쇄소를 박살낸 후 장교와 사관생도들은 볼세비키당의 간첩행위 주장에 항의하는 모든 사람들을 거리에서 두들겨 패고 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레닌은 조사가 아니라 목숨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피신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당국은 크론슈타트의 볼세비키당 신문은 폐쇄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15일에 발행된 이 신문에 레닌과 지노비에프는 자신들을 당국에 넘기는 않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노보에 브렘야 지 일요일판에 실린 전 법무장관 페레베르제프의 편지를 읽으면 레닌과 기타 인물들의 간첩 활동 '사건'이 반혁명 세력의 완전한 조작극임이 확실히 알 수 있다. 볼세비키당에 대한 병사들의 분노(그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를 자극하기 위해 자신이 그 진위를 직접 확인하지 않은 주장들을 유포시켰다고 페레베르제프는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다. 이것이 어제까지 법무장관이었던 자의 고백이다!...지금 이 순간 러시아에는 사법 정의가 보장되지 않고 있다. 우리를 당국에 넘기는 것은 우리에 대한 비난을 내전의 빌미로 삼고 있는 미치광이 반혁명 세력과 밀류코프, 알렉신스키, 페레베르제프 등의 손에 우리를 넘기는 것과 같다." "내전의 빌미"라는 표현은 카알 리이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운명을 기억하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레닌은 미래를 예견할 능력이 있었다.

반동 선동가들은 천 가지 이야기를 말하고 있었다. 레닌은 구축함에 몸을 싣고 있다, 레닌은 잠수함을 타고 독일로 도망쳤다, 등등. 이때 집행위원회 다수파는 레닌이 조사를 회피했다고 서둘러 비난했다. 비난의 정치적 핵심과 이 비난이 조성하고 있는 학살 상황을 무시한 채 화해주의자들은 순수 정의의 옹호자로 등장했다. 이것은 순수 정의에 마음이 열려있는 모든 자들에게 불편이 가장 적은 입장이었다. 7월 13일 집행위원회의 결의문은 레닌과 지노비에프의 행위를 "절대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을 뿐 아니라 볼세비키당 분파에게 당 지도자들을 "즉시 단호히 명확하게 비난할 것"을 요구했다. 볼세비키당 분파는 집행위원회의 요구를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그러나 볼세비키당 대오 특히 최소한 상층부는 레닌의 조사 회피에 동요를 보였다. 그리고 화해주의 진영의 극좌파도 레닌의 피신에 대해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시했다. 그러나 이 분노는 수하노프의 예에서 보듯이 언제나 위선적인 것은 아니었다. 비밀경찰의 자료가 비방임을 수하노프는 처음부터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말도 되지 않는 비난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자료의 신빙성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이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레닌의 조사 회피는 수하노프에게 미스터리로 남았다. "이것은 유례가 없는 완전히 특이한 행위이므로 이해될 수 없었다. 상황이 아무리 불리해도 레닌 이외의 모든 사람은 재판과 조사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렇다, 레닌 이외의 모든 사람은 수하노프 생각대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닌만큼 지배계급들의 격렬한 분노를 자아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레닌은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단 한순간도 혁명가로서 자신의 책임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필요한 결론을 도출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바쳐온 임무의 이름 앞에서 "여론"의 동요를 무시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에게 돈키호테의 만용이나 허세는 거리가 멀었다.

지노비에프와 함께 레닌은 몇 주일을 뻬쩨르부르그 주변에 위치한 세스트로레츠크 근처의 숲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들은 밤 시간을 이용하여 비를 피하기 위해 건초더미를 찾아냈다. 소방수로 위장한 레닌은 기관차를 타고 핀란드 국경을 넘어 뻬쩨르부르그 노동자 출신인 헬싱키 경찰청장의 아파트에 몸을 숨겼다. 나중에 그는 러시아 국경 근처의 비보르그로 거처를 옮겼다. 9월말부터 그는 비밀리에 뻬쩨르부르그에서 살았다. 그리고 봉기의 날에 거의 4개월의 피신을 끝내고 공개석상에 모습을 나타냈다.

반동 세력은 7월에 수치심이 전혀 없이 의기양양하게 비방을 무한정 자행했다. 그러나 8월이 되면 이 공세는 이미 지치기 시작했다. 반동의 공격이 개시된 지 한달 만에 체레텔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이렇게 반복했다: "볼세비키들을 체포한 다음날 나는 이들의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7월 3일부터 5일까지 봉기를 사주한 혐의로 기소된 볼세비키당 지도자들이 독일 총사령부와 관계를 맺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것 이하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것 이상을 말하는 것은 불편했을 것이다. 화해주의 정당들의 신문은 체레텔리의 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동시에 볼세비키당을 독일 군국주의의 보충부대라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따라서 화해주의 신문의 논조는 정치적으로 다른 모든 신문들의 아우성과 일치했다. 다른 신문들은 볼세비키당을 루덴도르프(역자 주: 공식 직함은 독일군 참모차장이었으나 실질적으로 전쟁을 총지휘한 독일군 총사령관이었다.)의 "보충부대"가 아니라 고용된 첩자라고 말했다. 이 합창에서 입헌민주당은 목소리를 가장 크게 냈다. 모스크바의 자유주의 교수 신문인 루스키 베도모스치 지는 편지 한 통을 실었다. 이 편지의 내용에 따르면 프라우다 지의 편집 사무실을 수색하다가 독일어 편지가 한 통 발견되었다. 이 편지에서 가파란다의 어느 남작은 "볼세비키당의 활동을 환영하며 베를린에서는 이 활동을 당연히 크게 기뻐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핀란드 국경의 이 독일 남작은 러시아 애국주의자들이 어떤 내용의 편지를 필요로 하는 지를 잘 알고 있었다. 유산계급의 교양사회에서 발행하는 신문들은 볼세비키의 야만성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문명생활을 방어하면서 이런 편지들을 가득 실었다.  

그러나 교수와 변호사들이 자기 말을 진짜로 믿었을까? 최소한 수도의 지도자들이 자기 말을 진짜로 믿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들의 정치적 지능을 너무 과소 평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원칙에 대한 고려나 심리적 가능성은 고사하고 사업 그리고 무엇보다도 금전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더라도 이들은 자기들의 비난이 얼마나 공허한 지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독일 정부는 사상으로는 아니더라도 금전적으로 볼세비키당을 도울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는 볼세비키당은 실제로 돈이 정말 없었다. 전쟁 중에 해외의 당 중앙은 잔인한 결핍과 고투하고 있었다. 100 프랑은 큰돈이었다. 기관지는 한달 또는 두 달만에 나왔다. 예산을 초과하지 않기 위해 레닌은 글줄의 수를 면밀하게 세고 있었다. 전쟁 중 뻬쩨르부르그 조직의 비용은 몇천 루블 정도였는데 이것도 대부분 비합법 유인물 제작에 나갔다. 2년 반 동안 이 유인물은 뻬쩨르부르그에 30만 부만 배포되었다. 물론 혁명 후에는 당원과 돈이 크게 증가했다. 노동자들은 기꺼이 소비에트와 소비에트 정당들을 위해 스스로 세금을 냈다. 소비에트 제 1차 대회에서 트루도비키 출신 변호사 브람손은 이렇게 보고했다: "소비에트를 위한 헌금, 모든 종류의 회비, 모금, 소득 공제 등은 혁명이 터진 첫날부터 시작되었다....이 헌금을 들고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사람들은 타우리데 궁전을 끊이지 않고 찾아왔다. 대단히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자들은 볼세비키당을 위해 더 열심히 임금에서 일부를 떼어 냈다. 그러나 당의 규모와 금전 영수증이 급속히 증가했지만 프라우다 지는 물리적인 규모로 보면 당 기관지 가운데 가장 왜소했다. 러시아에 귀국한 직후 레닌은 스톡홀름에 있는 라데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외국 정세에 대한 글을 프라우다 지에 쓰시오. 대단히 짧게 그리고 프라우다 지의 정신에 맞게 쓰시오(지면이 대단히 협소합니다. 우리는 지면을 넓히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레닌이 스파르타식으로 근검 절약 체제를 가동했으나 당은 언제나 돈이 모자랐다. 지방 조직을 위해 전시 루블화  2천 내지 3천을 지불하는 것은 중앙위원회에게 큰 문제가 되었다. 전선에 신문을 보내기 위해 노동자들 사이에서 특별 모금을 다시 또 다시 해야했다. 그런데도 볼세비키당 신문은 자유주의 및 화해주의 신문들에 비해 훨씬 더 적게 참호에 배포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불평은 계속되었다. "당신들 신문에 대해서는 소문만 듣고 있소,"라고 병사들이 편지를 보냈다. 4월에는 수도의 당협의회가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에게 인쇄기 구입 부족 액수인 7만5천 루블을 3일 동안 모금해 달라고 호소했다. 모금액은 부족 액수를 초과했다. 당은 마침내 인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7월에 사관생도들에 의해 박살났다. 볼세비키당의 구호들은 대초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었다. 그러나 선전을 위한 물질적 도구는 대단히 부족했다. 볼세비키들의 검소한 사생활은 비방을 당할 이유가 더 적었다. 따라서 독일 정부의 자금을 볼세비키당이 받았다는 주장은 거짓이었다. 그렇다면 볼세비키당이 독일의 첩자 노릇을 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남아있는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레닌이 독일을 통과해 귀국했다는 사실뿐이었다. 레닌이 독일 정부와 친분이 있다는 증거로 경험 없는 대중에게 가장 자주 제시되는 이 사실은 실제로는 정반대를 증명했다. 첩자라면 몸을 숨기고 안전하게 적대국 영토를 지나갔을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해 자신감이 넘치는 혁명가 레닌만이 전시의 애국주의 법칙을 감히 무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법무부는 즐겁지 않은 임무를 수행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법무부가 짜르 체제의 마지막 시기에 훈련된 직원들을 그대로 물려받은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때에는 이름이 전국에 알려진 흑백인조가 자유주의 의원들을 살해해도 이것은 체계적으로 은폐되었다. 반면 키에프의 유태인 상인은 기독교인 소년의 피를 사용하고 있다고 비난받았다. 대단히 중요한 알렉산드로프 사건을 맡은 수사관과 검찰총장 카린스키의 서명과 함께 7월 21일 포고령이 발표되었다. 국가반역죄 혐의로 레닌, 지노비에프, 콜론타이 그리고 기타 다수의 인물들을 기소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는 독일의 사민주의자 헬판트-파르부스도 끼어 있었다. 형법 51조, 100조, 108조가 여기에 적용되었다. 이 조항들은 7월 23일 군대에 의해 체포된 트로츠키와 루나차르스키를 기소하는 데에도 적용되었다. 포고령의 내용에 따르면 볼세비키당 지도자들은 "러시아 시민이면서도 독일과의 예비 협약에 따라 독일을 도울 목적으로 독일 정부의 요원들과 합의하여 러시아군의 전투력 약화를 위해 군대와 후방의 교란에 협력했다. 이들은 이 목적을 위해 독일의 자금으로 국민과 군대 속에서 선전을 조직했으며 전쟁의 즉각 거부를 촉구했다. 같은 목적으로 이들은 1917년 7월 3일부터 5일까지 뻬쩨르부르그에서 무장볼기를 조직했다." 최소한 수도의 교육받은 사람들은 모두 트로츠키가 뉴욕을 출발하여 기선 크리스티아니아호에 몸을 싣고 스톡홀름을 거쳐 뻬쩨르부르그로 귀환한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조사 법정은 그도 독일을 거처 귀국했다고 기소했다. 법무부는 정보국이 제출한 자료들의 확고한 신빙성을 조금도 훼손시킬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정보국은 훌륭한 도덕률을 확산시켜본 적이 결코 없었던 라스푸틴 체제의 하수구였다. 장교, 경찰, 헌병 등의 인간 쓰레기들과 비밀경찰에서 해고된 요원들이 결탁하여 더럽고 어리석고 전능한 기관의 중핵을 구성했다. 전쟁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던 대령, 대위, 소위 등은 이들의 감독 하에 사회와 정부의 모든 부문들을 장악하여 전국에 스파이 봉건체제를 확립했다. 경찰국장을 지냈던 쿠를로프는 이렇게 불평한다: "악명 높은 정보국이 행정에 참여하기 시작하자마자 완전한 재앙이 닥쳤다." 이렇게 말한 쿠를로프 자신도 지저분한 일들을 적지 않게 했다. 이 가운데에는 스톨리핀 수상의 살해에 간접적으로 가담한 일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정보국의 활동은 경험에 입각한 그의 상상력조차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적의 첩보활동에 대한 투쟁이... 아주 허약하게 진행되고 있던" 때에 극악하게 조작된 사건들이 노골적인 협박을 위해 전혀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경우가 빈번했다. 쿠를로프 자신도 이런 사건을 경험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경찰에 근무했을 때 알게된 어느 비밀 요원은 무고하게 사람을 협박한 죄로 해고되었었다. 그런데 다시 활동하고 있는 그의 가명을 다시 듣자 나는 공포에 질려버렸다." 전쟁 전에 공증인이었던 우스티노프는 정보국의 지방 책임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 역시 쿠를로프와 똑같은 표현으로 정보국의 도덕률을 회고록에 묘사한다: "뭔가 할 일을 찾으면서 요원들은 자료를 직접 날조했다."

그가 제시한 예를 통해 정보국의 지적 수준을 확인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더 많다. 2월 혁명에 대해 우스티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러시아는 파멸했다. 독일 돈을 받은 첩자들이 일으킨 혁명에 조국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볼세비키당에 대한 이 애국주의 공증인의 태도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레닌의 과거 활동, 독일 총사령부와 그의 관계, 그가 독일의 자금을 받았다는 사실 등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정보국의 보고서들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레닌을 즉시 교수형에 처해야한다." 그렇다면 케렌스키  자신도 반역자이기 때문에 레닌을 교수형에 처하지 않은 것일까? "특히 놀라우며 전적으로 열 받는 사실은 아무 쓸모 없는 변호사인 사쉬카 케렌스키가 유태인놈들의 지도자라는 사실이다." 케렌스키는 "동지들을 배신한 밀정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고 우스티노프는 증언한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프랑스 장군 앙셀름은 볼세비키당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엄청난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1919년 3월 오데사를 포기했다. 볼세비키당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는가?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볼세비키들은 그 일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여기서는 프리메이슨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정보국의 수준은 이 정도였다.   

2월 혁명 직후 사기, 날조, 협박 등을 일삼는 자들로 구성된 이 기관은 애국주의 사회혁명당원 미로노프를 책임자로 맞이했다. 해외에서 귀국한 그를 "인민 사회주의자" 차장 데미아노프는 이렇게 묘사했다: "미로노프는 겉으로는 인상이 좋아 보인다....그러나 그가 완전한 정상인이 아니더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당연히 비정상일 수 있다. 정보국은 해체된 후 그 건물의 벽들이 염화 제2 수은(승홍)으로 깨끗이 소독되어야한다. 그런데 이 기관의 우두머리로 일하겠다고 동의하는 사람이 정상인일 리가 있겠는가." 혁명 때문에 야기된 행정상의 혼란으로 정보국은 법무장관 페레베르제프의 감독을 받았다.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경박했을 뿐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전혀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데미아노프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법무장관은 "소비에트에서 권위를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처음에는 혁명을 무서워했던 정보국 요원들은 미로노프와 페레베르제프의 보호를 받자 곧 정상으로 돌아와 과거의 활동을 새로운 정치 상황에 적응시켰다. 6월에는 정부 언론의 좌파조차 협박을 포함한 정보국 최고위층의 범죄들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정보국 차장 슈킨과 브로이도 여기에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저질 정보국장 미로노프의 첫 조수들이었다. 7월 사태가 일어나기 일주일 전에 집행위원회는 볼세비키당의 압력을 받아 정부에게 이렇게 요구했다: 소비에트 대표들이 참여하여 정보국에 대한 감사를 즉시 실시해야 한다. 따라서 정보국 요원들은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될 수 있으면 빨리 그리고 강하게 볼세비키당을 공격해야했다. 체포한 자를 3개월 동안 감금할 권리를 정보국에게 부여하는 시기 적절한 법에 르보프공은 이미 서명을 했었다.

비방의 성격과 비방자들의 면면을 파악하면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악명 높은 새빨간 거짓말을 정상적인 사고의 소유자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아니면 어떻게 믿는 체 할 수 있는가? 전쟁, 패배, 파멸, 혁명, 사회투쟁의 처절한 분노 등이 조성한 전반적 사회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정보국의 공작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14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러시아의 지배계급들은 어떤 문제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다. 이들의 통치 기반은 무너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이들의 통제력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사방에서 불행이 닥쳐 이들을 덮쳤다. 이런 상황에서 희생양을 찾지 않고 배겨날 수 있었겠는가? 검찰총장을 역임했던 자바스키는 이렇게 기억한다: "정신이 완전히 멀쩡한 사람도 전쟁의 공포가 닥친 몇 년 동안 전혀 그럴 리가 없는 곳에서 배신이 자행되고 있다고 의심했다. 나의 검찰총장 재임 시에 기소된 사건들의 대다수는 기발한 창작물이었다." 악의에 찬 요원들 뿐 아니라 이성을 상실한 보통 속물들도 사건들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또한 전쟁이 가져온 정신질환은 준혁명적 정세의 열병과 결합하여 더욱 기이한 정신병자들을 만들어냈다. 전쟁에 실패한 장군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연합하여 모든 곳의 모두가 독일의 첩자라고 생각했다. 궁정의 지배 파벌조차 친독일파라고 생각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라스푸틴 파벌이 독일 정부의 지시를 받고 있다고 믿었으며 최소한 그렇게 선언했다. 짜르의 왕후는 독일을 위해 첩보활동을 하고 있다고 널리 그리고 공공연히 비난받았다. 영국의 키츠너경이 러시아 방문 차 탑승한 배를 독일군이 격침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궁정의 일각에서는 이것이 왕후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말할 것도 없이 우익은 재빨리 빚을 갚았다. 자바스키의 말에 따르면 내무차관 벨레츠키는 1916년 초에 자유주의 민족주의 자본가 구츠코프를 "전시에 국가 반역에 근접하는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기소하려했다. 벨레츠키의 직무수행을 폭로하면서 역시 전직 내무차관이었던 쿠를로프는 밀류코프를 의심했다: "조국을 위해 어떤 명예로운 일을 했기에 밀류코프는 그의 저택 수위 앞으로 배달된 우편을 통해 '핀란드' 화폐 20만 루블을 전달받았는가?" "핀란드"에 인용부호를 단 것은 핀란드 화폐가 실제로는 독일 화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밀류코프는 독일을 혐오하는 인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가! 정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야당들 모두는 독일로부터 자금을 받아 당을 운영해왔으며 이것은 일반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1915년 8월에는 의회 해산과 관련하여 소요가 예상되었다. 이때 거의 자유주의자로 알려진 해군장관 그리고로비치는 정부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독일 정부는 선전 공작을 강화하고 있으며 반정부 조직들에게 돈을 소낙비처럼 뿌리고 있다." 그러나 이 암시에 대해 분노한 10월당과 입헌민주당은 이 비난을 좌익적 방향에서 공격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전쟁 초 체이제의 반(半)애국주의 연설에 대해 의회 의장 로지안코는 이렇게 적었다: "이후 사건들은 체이제가 독일 정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주장을 입증할 조그만 증거라도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헛수고일 것이다!

자신의 저서 [제 2차 러시아 혁명사]에서 밀류코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2월 27일 혁명에서 '배후의 어두운 세력'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전적으로 불투명하다. 그러나 이후의 사건들로 판단해보면 이들의 역할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독일 출신의 러시아인 표트르 스트루베는 과거 맑스주의자였다가 지금은 반동 슬라브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좀더 단호하게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독일이 계획하고 행동에 옮긴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자 러시아는 사실상 전쟁에서 철수했다." 밀류코프처럼 스트루베는 여기서 10월 혁명이 아니라 2월 혁명을 말하고 있다. 뻬쩨르부르그 주둔군 대의원들은 병사들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인 유명한 "명령 제 1호"를 작성했다. 이에 대해 로지안코는 이렇게 적었다: "명령 제 1호가 독일의 작품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사단장 바르코프스키 장군은 로지안코에게 말했다: "독일군 참호에서 인쇄된 명령 제 1호 유인물이 엄청난 물량으로 러시아군에게 공급되었다." 짜르 치하에서 국가반역죄로 기소될 뻔했던 구츠코프는 전쟁장관이 되자 이 비난을 서둘러 좌익에게 돌렸다. 그가 군대에 하달한 4월의 명령들은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를 증오하고 적을 위해 일하는 자들이 그들만의 특성인 끈질김을 발휘하여 전투 부대에 잠입했다. 이들은 가능하면 빨리 전쟁을 끝내야한다고 설교하고 있다."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한 4월 시위에 대해 밀류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독일 정부는 두 장관(밀류코프와 구츠코프)을 정부에서 축출시키는 공작을 직접 지시했으며"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볼세비키당으로부터 일당 15루블을 받았다. 독일 정부의 자금이라는 열쇠를 가지고 이 자유주의 역사가는 정치가였던 자신을 괴롭힌 모든 신비들을 풀어헤치고 있다.

애국주의 사회주의자들은 볼세비키당이 독일 지배집단의 첩자는 아니더라도 비자발적 동맹세력이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이들은 우익으로부터도 이와 똑같은 비난을 받았다. 로지안코가 체이제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를 우리는 보았다. 그는 심지어 케렌스키까지 비난했다. "볼세비키당에 남몰래 공감했으며 어쩌면 다른 고려사항들 때문에 임시정부가 볼세비키들의 귀국을 동의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였다." "다른 고려사항들"은 다름 아닌 독일 자금에 대한 편견이었을 것이다. 외국어로 번역된 기묘한 회고록에서 헌병감 스피리도비치는 사회혁명당 지도부에 유태인들이 많은 점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러시아식 이름도 번쩍인다. 예를 들어 미래에 농업장관이 될 독일 첩자 빅토르 체르노프가 바로 이런 경우이다." 이 사회혁명당 지도자를 의심한 사람은 이 헌병감 뿐이 아니었다. 볼세비키당에 대한 7월의 탄압 직후 입헌민주당은 베를린과 연결되어 있다고 의심받은 농업장관 체르노프를 즉시 비난했다. 그래서 이 불행한 애국주의자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잠시 장관직을 사임해야했다. 멘세비키 스코벨레프는 어느 국제 사회주의 회의에 참석하면서 애국주의 집행위원회의 지시를 문서의 형태로 받았다. 1917년 가을 밀류코프는 예비의회 연단에서 이 문서를 꼼꼼히 종합적으로 분석한 후 이것이 "독일에서 작성된 것"임을 증명했다. 화해주의자들의 문서들이 전부 그렇듯이 이 문서 역시 문체가 조잡했다. 사상도 의지도 없이 역사 무대에 늦게 등장한 민주주의자들은 사방을 두려운 눈으로 둘러본 뒤 이 문서에 온갖 유보조항들을 달았다. 이 때문에 이 문장들은 외국어 글을 엉터리로 번역한 것 같았다. 사실 민주주의자들은 서구 나라들의 과거가 투영된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 때문에 루덴도르프가 조금이라도 비난받을 수는 없다.

레닌이 독일을 통해 귀국한 사실은 국수주의 참주선동의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애국주의는 부르주아 정책 수단에 불과했다. 이 점을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이라도 하듯이 부르주아 언론은 처음에는 레닌에게 위선에 찬 호의를 보이다가 그의 강령이 명확해지자 그의 "친독일적 경향"에 대해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토지, 빵, 평화" 등의 구호를 레닌은 독일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는 에르몰렌코가 레닌의 독일 첩자설을 폭로하기 전이었다.

미국에서 러시아로 귀국하던 도중 트로츠키를 비롯한 여러 망명객들은 핼리팩스에서 영국 해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에 대해 뻬쩨르부르그 주재 영국 대사 부캐넌은 도저히 모방할 수 없는 영국-러시아 언어로 언론에 공식 입장을 밝혔다: "크리스티아니아피요르드호에 승선한 러시아 시민들은 핼리팩스에서 억류되었다. 러시아 임시정부의 전복을 위한 독일 정부의 자금 지원과 이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영국 정부에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부캐넌이 이렇게 발표한 날은 4월 14일이었다. 이때는 부르스타인이나 에르몰렌코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이었다. 따라서 외무장관인 밀류코프는 영국 주재 러시아 대사 나보코프를 통해 트로츠키를 석방하고 그의 러시아 귀국을 허용하라고 영국 정부에 요청해야했다. 나보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미국에서 트로츠키의 활동 내용을 알고 있던 영국 정부는 의아해했다. '이것은 악의인가 아니면 무지의 소산인가?' 영국인들은 어깨를 들썩거린 후 이 조치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우리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결국 로이드 조오지 영국 수상은 러시아의 요구에 굴복하여 망명객들을 풀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뻬쩨르부르그 언론을 통해 트로츠키는 영국 대사에게 발표 내용이 근거가 있는 지를 물었다. 이에 부캐넌은 당황하면서 발표 내용을 철회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렇게 발표했다: "러시아 정부가 이들의 신원을 확인할 때까지만 망명객들은 핼리팩스에 억류되었다....이것이 이 사건의 전모이다." 부캐넌은 신사일 뿐 아니라 외교관이기도 했다.

4월 시위로 정부에서 쫓겨난 밀류코프는 6월 초 의회 의원들의 협의회에서 레닌과 트로츠키의 체포를 요구했다. 그리고 이들이 독일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오해의 여지없이 암시했다. 다음날 소비에트 대회에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선언했다: "밀류코프가 이 주장을 충분한 근거로 증명하거나 철회하지 않은 한 그는 부정직한 비방꾼이라는 낙인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자 밀류코프는 레치 지에 이렇게 응답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아직도 체포되지 않았다니 정말 불만스럽다. 이들은 독일의 첩자가 아니라 형법을 충분히 위반했기 때문에 체포되어야한다." 밀류코프는 신사는 아니면서 외교관이었다. 에르몰렌코의 폭로가 있기 전에 이미 트로츠키와 레닌이 체포되어야 한다고 그는 너무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체포를 법적으로 치장하는 것은 기술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이 자유주의 지도자는 비방의 날카로운 칼날이 "법적인"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기 오래 전에 이미 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총무청장인 입헌민주당의 나보코프(위에서 언급한 런던 주재 러시아 대사와는 다른 인물임)는 화려한 에피소드를 들려주고 있다. 이것은 황당한 비방인 독일 자금설의 기능을 가장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정부의 어느 회의에서 다른 문제를 언급하면서 밀류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독일 정부의 돈이 혁명을 촉진시킨 요인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표현은 명백히 순화되었지만 이것은 밀류코프다운 말이었다. 나보코프의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케렌스키는 격노했다. 그는 자신의 서류첩을 탁자 위에 내동댕이치면서 외쳤다: '감히 내 앞에서 밀류코프가 위대한 러시아혁명의 성스러운 대의를 비방했으므로 여기서 단 일분도 지체할 수 없다.'" 비록 약간 과장되었지만 그의 제스처는 그의 성격에 딱 맞았다. 러시아 속담에 의하면 마실 우물물에 침을 뱉어서는 안된다. 10월 혁명으로 화가 났을 때 케렌스키는 이 혁명을 헐뜯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독일 자금설이라는 것을 알았다. 밀류코프가 "성스러운 대의를 비방했다"면 케렌스키에게는 부르스타인이 볼세비키당을 비방하는 성스러운 대의에 동참했다.

왕후, 라스푸틴, 궁정의 파벌, 정부 부처, 전쟁 총사령부, 의회, 자유주의 신문, 케렌스키, 소비에트 지도자 등이 친독일파이며 독일을 위한 첩보활동을 해왔다는 비방은 단절되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사슬이었다. 이 사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비방 자체의 대단한 단조로움이다. 정적들은 자신들의 상상력을 너무 과도하게 자극하지 않겠다고 확고히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천편일률적인 낡은 비방이 어느 때는 이쪽에 또 어느 때는 저쪽에 가해졌다. 그리고 이것의 방향은 언제나 우에서 좌로 일관되게 이동했다. 볼세비키당에 대한 7월의 비방은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결코 아니었다. 단지 심리적 공황 상태와 증오심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리고 부끄러운 사슬의 마지막 고리였다. 또한 판에 박힌 비방의 표현이 새롭고 최종적인 목표로 이동한 결과였다. 이를 통해 과거의 비방꾼과 비방의 희생자들은 마침내 화해를 하면서 단결했다. 지배집단이 그 동안 당한 모든 모욕, 모든 두려움, 모든 원한 등이 이제 좌익의 맨 왼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혁명의 억누를 수 없는 위력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볼세비키당에게 가해졌다. 유산계급들은 볼세비키당을 피와 오물 속에 짓밟기 위해 마지막으로 필사적인 발악을 했다. 그리고 나서야 이들은 권력을 볼세비키당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해서 이리저리 뒤엉킨 비방의 면류관이 볼세비키당의 머리에 씌워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정보국에서 해고된 소위의 폭로는 막다른 골목에 처한 유산계급들의 헛소리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7월의 비방은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독일의 첩자설 자체는 단순한 헛소리가 아니었다. 러시아 국내에서 진행된 독일의 첩보활동은 독일 국내에서 진행된 러시아의 첩보활동보다 비교할 수 없이 잘 조직되어 있었다. 구체제에서는 전쟁장관 수홈리노프가 베를린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사실을 회상하면 독일 첩보조직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독일 간첩들은 궁정과 흑백인조 조직 뿐 아니라 좌익의 대오에도 당연히 침투했다. 오스트리아 정부와 독일 정부는 전쟁 첫날부터 우크라이나와 코카서스 출신 망명객들을 통해 분리주의 경향들과 놀아났다. 1917년 4월에 포섭된 에르몰렌코가 우크라이나 분리운동에 가담하도록 파견되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이미 1914년에 스위스에 체류 중이던 레닌과 트로츠키는 출판물을 통해 오스트리아-독일 군국주의의 미끼에 걸려들고 있던 혁명가들과 결별할 것을 혁명세력에게 요구했다. 1917년 초 트로츠키는 똑같은 경고를 리이프크네히트 추종세력인 독일 사민주의 좌파에게 반복했다. 당시 영국 대사관 요원들은 이들과 관계를 맺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러시아를 약화시키고 짜르를 겁주기 위해서 분리주의자들과 접촉했을 뿐 짜르를 타도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 이 점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증거는 2월 혁명 후 러시아군 참호에 뿌려진 독일 정부의 선언문이었다. 3월 11일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회의에서 낭독된 이 선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영국은 여러분의 짜르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와 등을 돌렸다. 짜르가 영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요구들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은 신이 여러분에게 내려준 짜르를 타도했다. 영국이 이렇게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영국의 결점들과 교묘한 술수들을 짜르가 알아차리고 폭로했기 때문이다." 이 문서의 형식과 내용을 보면 독일 정부의 작품이 틀림없다. 프로이센 출신의 대위를 모방할 수 없듯이 그의 역사철학도 모방할 수 없다. 프로이센의 대위였다가 장군까지 승진한 호프만은 러시아 혁명의 사상과 기초가 영국에 있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밀류코프와 스트루베의 이론보다는 덜 황당하다. 독일은 끝까지 짜르와 단독 평화협정을 희망했으며 영국은 이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짜르를 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나중에 명백해졌다. 이때가 되어서야 독일은 혁명의 파괴력이 러시아를 약화시키기를 희망했다. 레닌이 독일 영토를 통과해 귀국한 사건은 독일이 아니라 레닌의 작품이었다. 물론 멘세비키 마르토프가 이와 비슷한 생각을 맨 처음 제시했다. 독일은 아마 별 주저 없이 이에 동의했을 뿐이었다. 루덴도르프는 볼세비키당이 독일을 구원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7월에 볼세비키당은 악의에 찬 도발로 시작된 예상 밖의 폭력행위가 외부 범죄집단의 소행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이때 트로츠키는 이렇게 적었다: "이 사건에 반혁명 도발과 독일 첩자들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지금 이 문제를 명확히 답하기는 어렵다....제대로 조사해야한다....그러나 지금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흑백인조 깡패들의 활동 그리고 독일, 영국, 또는 100% 러시아의 돈으로 유지되는 비합법 활동 등이 조사를 통해 확실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세 나라가 모든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법적 조사도 폭력사태의 정치적 의미를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뻬쩨르부르그의 노동자와 병사 대중은 매수되지도 않았고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빌헬름 황제, 부캐넌 영국 대사, 밀류코프 등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전쟁, 다가오는 기아, 반동의 꿈틀거림, 정부의 실성, 모험주의 공세, 정치적 불신, 혁명에 대한 노동자와 병사들의 경각심 등이 혁명 운동을 일으켰다...." 전쟁과 두 차례 혁명이 지나간 후 공개된 보관문서, 현재 문서, 회고록 등 모든 자료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렇게 증명하고 있다: 독일 첩자들은 러시아의 혁명 과정에 대한 편견 때문에 단 한순간도 군대와 경찰 간부들의 좁은 시야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들은 단 한순간도 거대 정치 영역으로 상승할 수 없었다. 독일 혁명 자체가 이 점을 명확히 증명하고 있다. 1918년 가을 독일 노동자와 병사들 앞에 소위 전능하다는 호엔쫄런 왕가의 하수인들은 얼마나 불쌍하고 무기력했는가! "레닌을 러시아로 귀국시킬 때 독일 정부가 했던 계산은 완벽히 들어맞았다."고 밀류코프는 말한다. 그러나 루덴도르프 자신은 이 일의 결과를 정반대로 예상하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이 독일을 파멸시킬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레닌의 귀국을 허용한 루덴도르프보다 그의 허락을 받아들인 레닌이 현실을 더 멀리 그리고 더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결국 증명되었다.

루덴도르프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불평한다: "러시아의 정부의 선전공작과 볼세비키당은 독일에 대해 같은 목표를 추구하고 있었다. 영국은 중국에게 아편을 주었고 러시아는 독일에게 혁명을 주었다...." 그는 연합국들이 독일의 혁명세력을 조종했다고 비난했다. 이와 똑같이 밀류코프와 케렌스키는 독일이 러시아 혁명세력을 조종했다고 비난했다. 모욕당한 역사의 이성은 이렇게 잔인하게 스스로에게 비(非)이성을 강요한다! 그러나 루덴도르프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31년 2월 그는 전세계에 이렇게 알렸다: 짜르의 러시아와 독일 제국에 대항하여 국제 금융자본 특히 유태인 금융자본이 연합했다. 이들이 볼세비키당의 배후 세력이다. "미국에서 스웨덴을 거쳐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한 트로츠키는 국제 자본가들의 자금지원을 듬뿍 받고 있었다. 독일의 유태인 솔름센도 볼세비키당에게 자금을 제공했다." (루덴도르프, [인민의 망루], 1931년 2월 15일) 루덴도르프와 에르몰렌코의 증언은 내용이 서로 어긋날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는 일치한다: 독일에서 러시아로 흘러 들어간 자금은 루덴도르프가 아니라 그의 천적인 솔름센이 제공했다. 이 문제 전체를 아름답게 마무리하려면 이 증언이 꼭 필요하다.

루덴도르프, 밀류코프, 케렌스키 등은 비방을 많이 애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것을 발명하지는 않았다. 유태인이자 독일 첩자인 "솔름센"에게는 역사상 선배들이 많았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프랑스 주재 스웨덴 대사였던 페르센 백작은 왕 특히 여왕의 왕권을 열렬히 옹호했다. 그는 스톡홀름 정부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냈다: "프로이센 외무장관 헤르츠베르크의 사절인 유태인 에프라임은 자코벵파에게 자금을 제공하고 있다. 얼마 전에 그는 자금을 건네주라고 정부로부터 60만 파운드를 또 받았다." 온건파 신문 [빠리의 혁명]은 이렇게 암시했다: 공화주의 혁명 와중에 "프로이센 국왕의 첩자인 유태인 에프라임처럼 유럽의 사절들은 들뜨고 변덕이 심한 군중 속으로 침투했다...." 페르센은 이렇게 보고했다: "그들로부터 뇌물을 받은 군중이 아니었다면 자코벵파는 파멸했을 것이다." 만약 볼세비키당이 시위 대중에게 일당을 지급했다면 자코벵파의 모범을 따른 것뿐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군중"을 매수한 자금은 두 경우 모두 독일에서 왔다. 적들의 비방은 놀라울 정도로 방법이 비슷하다. 이것만 아니라면 20세기와 18세기 혁명가들의 유사한 행동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논의를 자코벵파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모든 혁명과 내전의 역사는 언제나 이렇게 증언한다: 위협을 받거나 타도된 지배계급은 불행의 원인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외국의 첩자와 사절로부터 찾는다. 박식한 역사학자 밀류코프나 역사를 피상적으로 읽은 케렌스키나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이들은 반혁명 편에 섰기 때문에 결국에는 파멸했다.

외국 첩자들이 혁명의 승리에 공헌했다는 이론은 대중이 잘못 알고 있는 전형적인 생각들 전부와 똑같이 간접적으로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든 나라들은 다른 나라의 성과들을 대규모로 그리고 대담하게 빌려온다. 더욱이 국경에서 살았거나 귀국한 망명객들이 진보 운동의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대단히 빈번하다. 이 때문에 보수 계층은 새로운 사상과 기관을 이질적으로 느끼면서 이것들을 외국에서 건너온 발명품으로 생각한다. 도시에 저항하는 농촌, 수도에 저항하는 벽촌, 노동자에 저항하는 소부르주아 등은 모두 외국의 문물에 저항하는 토착 세력이라는 외피를 쓰고 자기 이해를 방어한다. 밀류코프는 볼세비키 운동이 "독일"의 사주를 받았다고 말했다. 100년 동안 러시아의 농민은 도시인 복장을 한 사람을 독일인으로 간주했다. 양자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밀류코프의 오류는 정직하지 못했던 반면 농민의 오류는 정직했다는 점이다.

10월 혁명이 성공한 직후인 1918년에 미국 정부의 공보국은 볼세비키당을 독일 정부와 의기양양하게 연관시킨 문서 모음을 출판했다. 비판에는 조금도 견디지 못할 이 조야한 날조를 수많은 교육계층과 통찰력이 있는 자들은 그대로 믿었다. 그러나 여러 나라에서 모았다는 문서의 원본들은 모두 같은 기계에서 제조되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그러나 날조자들은 일반인들에게 예절을 차리지 않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볼세비키당을 폭로하라는 정치적 요구가 비판의 목소리를 잠재울 것이라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날조의 대가로 보수를 두둑이 챙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투쟁의 현장과 큰 바다를 사이에 둔 미국정부는 이 일에 부차적인 관심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정치적 비방이 이렇게 수준이 낮고 단조로운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사회의 두뇌는 경제적이고 보수적이다. 이것이 그 이유이다. 사회의 두뇌는 목표를 위해 필요한 것 이상을 소모시키려 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만들 필요가 없으면 옛 것을 빌린다. 그리고 새로 만들어야할 경우에도 옛 것의 요소와 결합시킨다. 신흥 종교들은 새로운 종교신화를 창조하지 않는다. 다만 과거의 미신을 다시 인격화할 뿐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철학, 법, 윤리 등의 체계들이 창조된다. 개인들 심지어는 천재들도 이들을 길러내는 사회처럼 모순 속에서 발전한다. 대담한 상상력은 사소한 상징에 대한 노예적인 굴종과 공존한다. 과감한 상상력의 비상은 조야한 편견과 화해한다. 셰익스피어는 유구한 과거가 물려준 주제를 바탕으로 창조적 천재성을 발휘했다. 파스칼은 확률론을 발전시켰으나 이것을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했다. 뉴턴은 중력 이론을 발견했으나 요한 계시록을 신봉했다. 마르코니가 교황의 저택에 무선전신을 설치하자 예수의 대리인이라는 교황은 이것을 이용해 교인들에게 신비의 축복을 내렸다. 평상시에 이 모순들은 따분한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다. 그러나 재앙이 닥치면 폭발성을 갖는다. 자신의 물질적 이해가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면 교육받은 유산계급들은 인류가 수레에 끌고 다니는 모든 편견과 혼란을 작동시킨다. 구 러시아의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몰락을 신화로 치장하기 위해 이전에 타도된 계급들로부터 무차별적으로 내용을 빌려왔다. 그렇다고 이들을 너무 비난할 필요는 없다. 케렌스키는 회고록에서 에르몰렌코 이야기를 사건이 일어난 수년 후에 복원시켰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최소한으로 말하더라도 괜한 짓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전쟁과 혁명의 세월들이 목격한 비방은 대단히 따분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변종이 있다. 양이 쌓이면 새로운 질이 나오는 법이다. 자기들끼리 다투던 정당들은 볼세비키당에게 비방을 퍼부을 때에는 서로 단결했다. 이것에 비하면 자기들끼리 다툰 것은 가족 내부의 사소한 싸움처럼 보였다.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이들은 이후의 결정적인 싸움에 대비하는 훈련을 했던 셈이다. 이들은 독일의 첩자라는 비난을 서로에게 퍼부었으나 이 싸움을 극한까지 몰고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7월에는 전혀 달랐다. 볼세비키당에게 공격을 가하기 위해 정부, 법원, 정보국, 전쟁 총사령부, 공무원 사회, 도시자치단체, 소비에트 다수파 정당, 이들의 언론, 이들의 연설자 등이 모두 하나의 거대한 집단으로 뭉쳤다. 이들 사이의 불협화음은 관현악단 악기들의 음질 차이처럼 전체의 효과를 높였을 뿐이었다. 반동 세력과 민주주의 세력은 모두 경멸할 만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엉성하게나마 이들이 연합하여 발명한 비방은 역사적 수준으로 상승했다. 비방은 마치 나이애가라의 폭포수처럼 볼세비키당에게 내리 퍼부어졌다. 이때는 전쟁과 혁명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리고 수백만 혁명 대중은 자기 정당을 권력으로 상승시키고 있었다. 이 정당의 지도자들이 비방의 목표물이 되었다. 이런 배경을 고려하면 과장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17년 7월은 세계역사상 가장 대대적인 비방의 한 달이었다.

 

 

제 5장 반혁명이 고개를 쳐들다

2월 혁명 직후 2개월 동안 국가권력은 공식적으로 구츠코프와 밀류코프의 정부에게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의 권력은 소비에트의 손에 있었다. 그 다음 2개월 동안 소비에트의 실질적 권력은 계속 약화되었다. 대중에 대한 소비에트의 영향력 일부는 볼세비키당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소비에트의 권력 일부는 장관-사회주의자들이 연립정부에 참여하면서 가지고 갔다. 전선에서 공세를 준비하는 순간부터 전쟁 총사령부, 금융자본의 기구들, 입헌민주당 등의 영향력은 자동적으로 증대했다. 병사들이 전선에서 피를 흘리기 전에 집행위원회는 자기 피의 상당부분을 부르주아 계급의 동맥에 수혈시켰다. 연합국 대사관과 정부들은 배후에서 이 모든 것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우방국들은 런던에서 열린 연합국 정부 회의에 러시아 대사를 초청하는 것을 "잊어먹었다." 대사가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키고 나서야 이들은 그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개막회의가 열리기 약 10분전에 초청장이 도착했기 때문에 그가 앉을 자리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프랑스 대표들 사이에 끼어 앉아야 했다. 러시아 임시정부 대사에 대한 이 모욕적인 대접과 입헌민주당의 과시용 내각 사퇴는 모두 화해주의자들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이 두 사건은 모두 7월 2일에 일어났다. 이 사건들 바로 다음에 터진 무장시위에 대해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크게 분노했다. 위의 두 사건이 가한 타격 때문에 이들은 모든 관심을 정반대 방향으로 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합국 정부들과 단결하여 피비린내 나는 공세를 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입헌민주당보다 더 좋은 중개자를 찾기가 어려웠다. 해외에 오래 체류하여 온건한 영국식 자유주의자로 변신한 구 세대 혁명가 차이코프스키는 이렇게 설교했다: "전쟁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연합국들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돈을 줄 리가 없을 것이다." 화해주의자들은 이 주장에 당황해 했지만 그 의미를 십분 이해했다.

역관계는 명백히 인민에게 불리한 쪽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얼마나 불리하게 바뀌었는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었다. 최소한 부르주아 계급의 욕구는 욕구를 만족시킬 기회보다 훨씬 커졌다. 이 불확실성 속에 갈등의 근원이 있었다. 왜냐하면 계급 역관계는 실제 투쟁을 통해 시험되기 때문이다. 혁명의 모든 사건들은 계속 반복되는 힘 겨루기로 결국 환원된다. 그러나 좌에서 우로 권력이 급격히 이동했지만 빈집으로 남아있던 임시정부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결정적인 7월 시기에 르보프공의 정부에 관심을 둔 사람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니콜라스 2세의 타도를 위해 한때 구츠코프와 함께 모의했던 크리모프 장군은 르보프공에게 전보를 보냈다. 이 전보는 시급한 요구로 말을 맺었다: "지금은 말을 행동으로 옮길 때이다." 나중에 다시 등장할 이 장군의 충고는 우스꽝스럽게 들렸다. 정부의 무기력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자유주의자 나보코프는 이렇게 적었다: "7월초에 정부의 권위가 다시 힘을 얻는 것 같은 짧은 순간이 있었다. 볼세비키당의 첫 번째 봉기를 진압한 후가 바로 이 순간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이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유리한 순간을 놓쳐버렸다. 이 기회는 다시 반복되지 않았다." 우익의 다른 대표들도 같은 생각을 말해왔다. 사실 결정적인 순간에 늘 그랬듯이 7월에도 연립정부 내의 각 분파들은 서로 다른 목표를 추구하고 있었다. 화해주의자들은 볼세비키당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에 동의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일이 끝나면 장교, 카자흐 기병, 성조오지 기병대, 돌격대대 등이 화해주의자 자신들을 당연히 제거할 것이었다. 입헌민주당은 볼세비키당 뿐 아니라 소비에트도 완전히 제거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때마다 입헌민주당은 정부에 참여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화해주의자들의 완충작용에도 불구하고 억누를 수 없는 대중의 압력이 이들을 정부에서 쫓아냈기 때문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권력을 잡았어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후 사건들은 이 진실을 확연히 드러내었다. 7월에 이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는 생각은 한참 뒤에 회고하면서 빠져드는 환상에 불과했다. 어쨌든 정부는 7월에 승리했으나 더 힘을 얻지는 못했다. 이와 반대로 정부의 위기는 계속 질질 끌다가 7월 24일이 되어서야 형식적으로 해소되었다. 사실 이 위기는 이후 4개월 동안 지속될 2월 체제의 고통스러운 죽음의 시작에 불과했다.

부르주아 계급과의 미적지근한 우호관계도 다시 살려야 하고 대중의 적대심도 완화시켜야 하는 두 마리 토끼를 놓고 화해주의자들은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이들의 존재 방식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았다. 그리고 이들의 동요는 열병에 걸린 환자가 몸을 이리 저리 비척거리는 중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들의 기본 방향은 급격한 우경화였다. 7월 7일 정부는 일련의 탄압조치들을 공포했다. 같은 날 정부 회의에서 입헌민주당 "친구들"의 불참을 틈타 장관-사회주의자들은 이렇게 제안했다: 6월 전국 소비에트 대회가 선언한 강령을 시행에 옮기자. 그러나 이 조치는 정부를 급격히 붕괴시켰다. 거대 지주이자 토지협회 회장을 역임한 르보프공은 정부가 "대중의 정의감을 해치는" 농업정책을 펴고 있다고 비난했다.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를 빼앗기지 않을까 지주들은 걱정했다. 또한 이들은 화해주의자들이 "이미 내려진 결정을 무시하고 제헌의회를 소집시키려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이제 왕당파 반동의 모든 중심 세력들이 순수 민주주의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다! 정부의 결정에 의해 케렌스키는 기존의 전쟁 및 해군 장관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수상을 겸임했다. 신임 내무장관이 된 체레텔리는 볼세비키들의 체포 문제를 집행위원회에서 답변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에 항의하여 마르토프가 질문을 던지자 체레텔리는 이 오랜 동지에게 간단히 대답했다: 마르토프보다는 레닌을 상대하겠다; 레닌은 어떻게 처리할 지를 알지만 마르토프는 어찌할 수 없다...."볼세비키들의 체포를 책임지겠다." 신임 내무장관은 이목이 집중된 긴장된 회의장에 도전장을 던졌다.

화해주의자들은 우익의 위험을 들먹이며 좌익을 공격하는 자기 행위를 정당화시켰다. 단은 7월 9일 회의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군사 독재가 러시아를 위협하고 있다. 군사독재자의 손에서 대검을 빼앗아야한다. 이 임무를 위해 임시정부를 공안위원회(역자 주: 프랑스 대혁명 당시 자코벵파가 장악한 독재기구.)라고 선언해야한다. 정부에 권한을 무제한 부여해야한다. 좌익의 무정부주의와 우익의 반혁명을 근절시킬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노동자, 병사, 농민에 저항하는 정부가 반혁명의 대검 이외에 다른 대검을 휘두를 수 있는 것처럼 그는 말한다! 253표의 찬성과 47표의 기권으로 집행위원회 합동회의는 이렇게 결의했다: "1. 나라와 혁명이 위험에 처해있다. 2. 임시정부는 혁명을 수호하는 정부이다. 3. 임시정부는 무제한의 권한을 갖는다." 그러나 이 결의문은 빈 수레처럼 소리만 요란했다. 회의에 참석한 볼세비키들은 표결에 불참했다. 이것은 당시 당 지도자들 사이의 견해 차이를 의심의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대중운동은 분쇄되더라도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정부 수반은 귀족에서 급진적 변호사로 바뀌었다. 내무장관은 중노동형을 살았던 인물이 맡았다. 정부는 평민 출신들로 채워졌다. 집행위원회 지도자 케렌스키, 체레텔리, 체르노프, 스코벨레프 등이 정부의 얼굴이 되었다. 그렇다면 "10명의 장관-자본가들을 타도하자"는 6월의 구호가 실현된 것일까? 아니었다. 이 사건은 구호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었을 뿐이다. 장관-자본가들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장관-민주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았다. 연립정부는 죽었다, 연립정부 만세!

이제 희극이 연출되었다. 이 엄숙하게 부끄러운 희극은 궁전 광장에 배치된 기관총 연대의 무장 해제와 함께 시작되었다. 연대들이 줄줄이 해체되었다. 병사들은 소규모 부대로 조직되어 전선의 대오를 채웠다. 40세나 된 병사들이 명령에 복종하면서 참호로 떼지어 밀려들어갔다. 케렌스키 정권을 모두 반대했던 이 병사들은 수만 명이나 되었다. 가을이 되면 이들은 참호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룰 것이다. 동시에 노동자들도 무장이 해제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은 병사들의 경우만큼 순순히 진행되지는 않았다. 장군들의 압력 때문에 사형제도가 전선에서 부활했다. 장군들이 어떻게 압력을 가했는지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사형제도가 부활한 7월 12일에 토지 매매를 제한하는 포고령이 공포되었다. 농민의 압력 때문에 시행된 이 때늦은 미온적 조치는 좌익의 빈정거림과 우익의 분노를 동시에 자아냈다. 체레텔리는 좌익을 압박하기 위해 거리 시위를 전면 금지시켰다. 동시에 그는 우익을 통제하기 위해 불법 체포의 만연에 대해 경고했다. 뻬쩨르부르그 지구 사령관을 해임시킨 케렌스키는 좌익에게는 그가 노동자 조직을 탄압했기 때문에 우익에게는 그가 단호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카자흐 기병들은 부르주아 계급이 장악한 뻬쩨르부르그의 영웅이 되었다. 카자흐 장교 그레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예를 들어 식당과 같은 공공장소에 카자흐가 들어서면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 공연장, 영화관, 식물원 등은 부상당한 카자흐와 살해당한 카자흐의 가족들을 위한 저녁 모금행사를 열었다. 집행위원회 사무국은 체이제를 의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급조했다. "7월 3일과 5일 사이에 혁명의 임무를 완수하면서 산화한 전사들"을 위한 공공 장례 조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화해주의자들은 모욕의 쓴잔을 찌꺼기까지 다 마셔야했다. 장례 행사는 이자키에프스키 대성당에서 예배와 함께 시작되었다. 로지안코, 밀류코프, 르보프공, 케렌스키 등이 관을 들었다. 이들은 줄을 지어 알렉산드로-네프스키 수도원의 장지로 행진했다. 장례 행진의 질서 유지는 민병대가 아니라 카자흐 기병들의 몫이었다. 이날 이들은 뻬쩨르부르그를 완전히 장악했다. 카자흐 기병들에 의해 살해당한 노동자와 병사들은 2월의 열사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몰래 매장되었다.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살해당한 열사들도 같은 취급을 당했었다.

섬을 봉쇄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정부는 크론슈타트 집행위원회에게 라스콜니코프, 로샬, 렘네프 소위 등을 군대 조사위원회에 출두시키라고 명령했다. 헬싱키에서는 처음으로 볼세비키들과 함께 사회혁명당 좌파도 체포되었다. 수상을 역임한 르보프공은 신문에 이렇게 불평했다: "소비에트는 국가의 도덕률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도 독일의 첩자인 레닌주의자들을 일소하지 못했다...." 화해주의자들은 명예를 걸고 국가 도덕률을 입증해야했다. 7월 13일 합동회의에서 집행위원회는 단이 제출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기소된 자는 판결이 날 때까지 집행위원회 위원 자격을 박탈당한다." 이 때문에 볼세비키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케렌스키는 볼세비키당 신문을 전부 폐간시켰다. 지방에서는 토지위원회 위원들이 체포되었다. 이스베스티아 지는 무기력하게 이렇게 흐느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뻬쩨르부르그 거리에는 무정부주의 난동이 일어났었다. 같은 거리에서 오늘은 반혁명 흑백인조들의 연설이 저지되지 않은 채 계속되고 있다."

혁명 연대들이 해체되고 노동자의 무장해제가 완료되자 역관계는 급격히 우로 기울었다. 실질적 권력의 상당 부분은 이제 장군, 산업 그룹, 은행 그룹, 입헌민주당 등이 장악했다. 권력의 나머지 부분은 이전처럼 소비에트에 있었다. 이중권력은 여전했으나 지난 2개월간 지속된 합법과 접촉과 연합으로 유지된 이중권력은 아니었다. 서로 두려워했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필요한 부르주아-군사 세력과 화해주의 세력이 파벌을 형성하여 일촉즉발의 이중권력을 수립했다. 그렇다면 어떤 조치가 더 필요했을까? 바로 연립정부를 부활시키는 조치였다. 밀류코프는 아주 공정하게 이렇게 말한다: "7월 3일과 5일의 봉기 후 연립정부의 필요성은 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잠시동안이지만 전보다 더 강력해지고 중요해졌다."

그러나 이때 예상 밖으로 의회의 임시위원회가 소생하여 구국 정부에 반대하는 과감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제 더 이상 참아 넘길 수가 없었다. 장관 전원은 직책을 케렌스키에게 위임하여 그를 권력의 정점으로 추대했다. 이 순간은 2월 혁명의 전개 과정과 케렌스키의 개인적 운명에 상당한 중요했다. 이합 집산, 사임, 임명 등의 혼란 속에서 움직일 수 없는 기준점 같은 것이 케렌스키로 지정되었다. 이제 모든 일은 그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장관들의 사임으로 입헌민주당 및 자본가들과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입헌민주당은 조건을 제시했다: 장관들은 "전적으로 자신의 양심에" 책임을 진다; 연합국들과 완벽한 동맹관계를 유지해야한다; 군대의 규율을 부활시켜야한다; 제헌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사회 개혁은 있을 수 없다. 제헌의회 선거 요구는 명시되지 않았다. 이것은 "초당파 거국 강령"으로 명명되었다. 이와 비슷한 강령을 상공업 대표들도 제출했다. 집행위원회는 이들과 입헌민주당을 서로 대항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구국 정부에게 "무제한의 권한"을 부여하는 결의문을 집행위원회는 다시 확인했다. 이것은 정부가 소비에트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했다. 같은 날 내무장관의 직권으로 체레텔리는 "토지관계와 관련하여 모든 불법활동을 종식시키는 신속하고도 결정적인 조치들"을 지시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식량공급 장관 페쉐호노프는 "지주에 대한 폭력적이고 범죄적인 시위"를 모두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구국 혁명정부는 무엇보다도 지주 재산 구원 정부로 자신의 임무를 설정했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었다. 거대 자본가인 엔지니어 팔친스키는 상공업부 국장, 연료와 금속 전권행정가, 국방위원회 의장 등 직함을 세 개나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독점 자본을 위해 로비를 열정적으로 벌이고 있었다. 멘세비키 경제전문가 체레바닌은 소비에트 경제부에서 이렇게 불평했다: 민주주의의 고매한 사업들은 팔친스키의 사보타지에 의해 산산조각날 것이다. 입헌민주당에 의해 독일 첩자설의 새로운 표적이 된 농업장관 체르노프는 "명예회복을 위해" 장관직을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6월 18일 사회주의자들이 압도한 임시정부는 포고령을 통해 사회주의자들이 다수파였으나 임시정부에 복종하지 않는 핀란드 의회를 해산시켰다. 세계대전 발발 3주년에 즈음하여 연합국들에게 보내는 엄숙한 메모에서 정부는 연합국의 이해에 충성하겠다는 의례상의 선서를 반복한 후 독일의 첩자들이 일으킨 봉기를 행복하게 진압한 사실을 보고했다. 무한한 가치를 지닌 아첨의 문서였다! 동시에 철도 노동자들의 복무규율 위반을 금지하는 맹렬한 법이 선포되었다. 이렇게 자신의 정치인다운 성숙성을 증명한 후 케렌스키는 입헌민주당의 최후통첩에 응하기로 마침내 결심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입헌민주당의 요구는 "임시정부 참여에 장애물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 베일에 가려진 굴복은 자유주의자들의 성에 차지 않았다. 이들은 화해주의자들의 무릎을 꿇리고 싶어했다. 입헌민주당 중앙위원회는 이렇게 선언했다: 6월 8일 연립정부의 해체 당시 발표된 민주적 상투어로 가득한 정부의 선언문은 인정할 수 없다. 이 선언과 함께 이들은 협상을 중단했다.

이것은 집중된 공격이었다. 입헌민주당은 자본가, 연합국 외교관, 군대의 장군들과 밀접히 연합하여 행동하고 있었다. 군대 본부의 장교동맹 최고위원회는 실질적으로 입헌민주당의 지도를 받아 움직였다. 총사령부를 통해 입헌민주당은 화해주의자들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공격했다. 7월 8일 남서 전선의 사령관 코르닐로프 장군은 후퇴하는 병사들에게 기관총과 대포를 발사하라고 명령했다. 사회혁명당의 테러 조직을 지휘했던 사빈코프는 전선에 파견된 인민위원이었다. 그의 지지를 얻어 코르닐로프는 이 명령 이전에 이미 전선에서 사형제도의 부활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직책을 사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비밀 전보 한 통이 즉시 신문에 실렸다. 코르닐로프는 유명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러자 좀더 조심성이 있으며 피하기를 잘하는 총사령관 브루쉴로프는 훈계조의 편지를 케렌스키에게 보냈다: "일부 망각되었던 프랑스 대혁명의 교훈이 저절로 상기된다...." "인도적인 원칙으로" 군대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한 후 프랑스 혁명가들은 사형제도를 채택했다. 결국 "이들의 승리의 깃발은 전세계의 반을 뒤덮었다." 이것이 그가 얘기한 프랑스 대혁명의 교훈이었다. 그리고 이 장군이 혁명 서적을 통해 배운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7월 12일 정부는 "전시에 군사 임무를 띤 군인의 중죄 일부에 대해" 사형제도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북부 전선의 사령관 클렘보프스키 장군은 3일 후 이렇게 적었다: "병력이 수없이 교체된 부대들은 전투력이 전혀 없다. 이것은 경험을 통해 밝혀졌다. 교체 병력의 근원이 썩어있으면 군대는 건강할 수가 없다." 이 썩어 있는 교체 병력의 근원은 러시아 인민이었다.

7월 16일 테레쉬첸코와 사빈코프가 동석한 가운데 케렌스키는 본부에서 고참 장군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는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가 지휘하고 있던 전선에서 독일군이 본격적으로 공세에 대해 반격을 하고 있었다. 며칠 후 독일군이 구 국경선에서 공세를 멈추자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브루쉴로프, 알렉세이예프, 루즈스키, 클렘보프스키, 데니킨, 로마노프스키 등 회의 참석자들의 이름은 종말을 고하고 있던 시대를 상기시키는 마지막 메아리처럼 들렸다. 4개월 동안 이 고위장성들은 절반은 죽은 목숨이라고 스스로를 간주했다. 이제 이들은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케렌스키를 혁명의 화신으로 간주했다. 혁명이 이들을 그렇게 괴롭혔으므로 이들은 혁명의 화신인 그를 악의에 차서 거리낌없이 꼬집고 때렸다.

총사령부의 수치에 따르면 6월 18일부터 7월 6일까지 남서 전선의 군대는 5만6천명의 병력을 잃었다. 전쟁의 규모에 비하면 대단치 않은 희생이었다! 그러나 2월 혁명과 10월 혁명에서 희생자 수는 이보다 훨씬 적었다. 죽음, 파괴, 재앙 이외에 자유주의자들과 화해주의자들이 공세를 통해 얻은 것이 무엇이었는가? 1917년의 사회적 지진은 지구 표면적의 6분의 1을 바꾸어 놓았고 인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혁명은 잔인하고 무섭다. 이 사실을 미화하거나 부인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혁명의 재앙은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역사 과정 전체와 결부되어 있다.

브루쉴로프는 한달 전에 시작된 공세의 결과를 "완전한 실패"라고 보고했다. 이 원인은 "중대장부터 사령관까지 장교들의 권한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리고 왜 권한을 잃었는지에 대해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앞으로의 전투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봄이 되기 전까지 전투 준비는 불가능하다." 나머지 장군들과 똑같이 병사들에 대한 억압조치들을 주장하면서도 클렘보프스키는 이것들이 진짜 시행 가능한 지를 의심했다. "사형제도? 몇 개 사단 전부를 사형시킬 수 있는가? 군법회의? 그러면 군대의 반은 시베리아로 징역을 갈텐데...." 참모총장은 이렇게 보고했다: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의 5개 연대는 해체되었다; 선동한 자들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모두 약 9만 명의 병사들이 뻬쩨르부르그에서 전근될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은 만족해했다. 수도의 주둔군이 빠져나가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 지를 생각하는 자는 이들 중 하나도 없었다.

알렉세이예프는 말했다: 병사 위원회들은 "해체되어야한다....수천 년을 지속한 군대의 역사는 나름의 법칙들을 창조하였다. 우리는 이 법칙들을 침해하려고 했다. 이 결과가 지금의 대 실패로 나타났다." 그는 역사 법칙을 훈련 교관의 규칙쯤으로 알고 있었다. 루즈스키는 이렇게 자랑했다: "사람들은 오랜 깃발을 성스러운 것으로 알고 따라가다 몰살당했다. 그러나 붉은 깃발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가? 군단 전체를 항복시킨 것뿐이었다." 이 노쇠한 장군은 자신이 1915년 8월 국무회의에서 이렇게 보고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현대 군사기술의 요구를 우리는 따라갈 수 없다. 어쨌든 우리는 독일군을 쫓아갈 수 없다." 클렘보프스키는 악의에 찬 기쁨으로 이렇게 주장했다: 군대는 볼세비키들에 의해 파멸한 것이 아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군대 법규를 도입한 "군대의 생활과 생존조건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파멸했다. 이것은 케렌스키에 대한 직격탄이었다. 데니킨은 장관들을 좀더 단호하게 공격했다: "여러분은 우리의 영광스러운 전쟁의 깃발을 진흙탕에 짓밟았다. 여러분이 양심이 있다면 이것을 다시 들어올릴 것이다...." 그러면 이 공격에 대한 케렌스키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양심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도 그는 이 무례한 장군의 "정직하고 공정한 의견 표명"에 대해 겸허하게 감사했다. 그리고 병사 권리 선언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내가 장관이었다면 결코 공포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먼저 시베리아의 특등사수들을 진압했는가? 복종하지 않는 병사들을 누가 먼저 피를 흘리며 복종시켰는가? 내가 임명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임명한 인민위원들이었다!" 외무장관 테레쉬첸코는 위로의 말로 아양을 떨었다: "우리의 공세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러시아에 대한 연합국들의 신뢰를 상승시켰다." 연합국들의 신뢰를 상승시켰다! 지구가 축을 중심으로 자전하는 것도 이것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클렘보프스키가 열변을 토했다: "현재 장교들은 자유와 혁명의 유일한 방벽이다." 브루쉴로프가 설명했다: "장교는 부르주아가 아니고 가장 진정한 노동자이다." 여기에 루즈스키 장군이 덧붙였다: "장군들도 노동자이다." 병사 위원회를 철폐하고 권한을 구 지휘관들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정치 즉 혁명을 군대에서 몰아내야 한다. 이것이 장군 계급장을 단 노동자들의 강령이었다. 그리고 케렌스키는 이 강령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고 시기만을 문제삼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데니킨 장군도 지금 제안한 조치들을 즉시 시행하라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장군들은 따분하고 평범한 사람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은 속으로 이렇게 말했음에 틀림없었다: "케렌스키 같은 자들에게는 이런 식으로 말해야한다."

이 회의의 결과 총사령부에는 변화가 생겼다. 공세를 반대했던 조심스러운 관료 알렉세이예프 대신 고분고분하고 융통성이 있는 브루쉴로프가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었다. 이제 그가 해임되고 코르닐로프 장군이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교체의 동기는 다양했다. 코르닐로프가 철의 규율을 군대에 도입할 것이라고 입헌민주당은 약속을 받았다. 코르닐로프가 병사 위원회와 인민위원의 친구라고 화해주의자들은 안심되는 말을 들었다. 사빈코프 자신은 코르닐로프가 공화주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보장했다. 자신의 고위직 임명에 대해서 코르닐로프는 정부에 새로운 최후통첩을 제시했다: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만 새로운 직책을 수락하겠다: "양심과 인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총사령부의 보직 임명에 대한 간섭이 없어야한다; 후방에서도 사형제도를 부활시켜야한다." 첫 번째 조건은 어려움이 있었다. "양심과 인민에게만 책임을 진다"는 원칙은 케렌스키가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이 원칙은 경쟁자를 허용하지 않았다. 코르닐로프의 최후통첩은 발행 부수가 가장 많은 자유주의 신문들에 실렸다. 조심스러운 반동 정치인들은 코를 움찔거리면서 불안해했다. 코르닐로프의 최후통첩은 이 카자흐 장군의 단도직입적인 언어로 표현된 입헌민주당의 최후통첩이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의 계산은 정확했다: 그의 터무니없는 요구들과 무례한 어조는 반혁명 세력 전부 그리고 특히 정규군 장교들을 기쁘게 했다. 케렌스키는 겁을 집어먹고 그를 즉시 제거하려했으나 정부 내에서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러자 지지자들의 충고를 받아들인 코르닐로프는 구두 성명으로 이렇게 인정했다: 인민에게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임시정부에게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최후통첩의 나머지 부분들은 약간의 수정 후에 받아들여졌다. 코르닐로프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동시에 군사 엔지니어 필로멘코는 그의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남서 전선의 인민위원이었던 사빈코프는 전쟁부의 총무청장이 되었다. 전자는 우연히 고속 승진한 셈이었고 후자는 출중한 혁명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무슨 짓도 서슴지 않는 골수 모험주의자들이었다. 최소한 필로멘코는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았고 사빈코프는 많은 것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코르닐로프의 고속 승진을 주도했으며 장군과 이들의 밀접한 관계는 이후 사건의 전개에 나름의 역할을 하게된다.

화해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양보하고 있었다. 체레텔리는 "연립정부는 구국 연합이다"라고 주장했다. 공식적으로는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이 결렬되었다. 그러나 배후에서는 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입헌민주당과 뻔히 합의한 후 케렌스키는 서둘러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파조의 조치 즉 그의 일반적 정책의 정신과 일치하면서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조치를 취했다: 그는 모든 직책을 사임하고 수도를 떠났다. 화해주의자들은 망연자실했다. 이 문제에 대해 밀류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과시적 사임으로 그는 적, 경쟁자, 동지 모두에게 증명했다: 개인적 자질과는 무관하게 그는 두 적대 진영 사이에 차지한 위치 하나만으로도 지금 꼭 필요한 존재이다." 그는 게임을 포기했기 때문에 게임에서 승리했다. 화해주의자들은 속으로는 욕하면서도 겉으로는 기도를 드린 후 "케렌스키 동지"에게 몸을 던졌다. 입헌민주당과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장관이 없는 부처들에게 손쉽게 자체 해산을 설득시켰다. 이제 케렌스키는 자기 뜻대로 정부를 새로 구성할 권한을 얻었다.

이미 겁에 잔뜩 질린 집행위원회를 완전히 돌게 만들려는 듯이 전선의 악화 소식이 전해졌다. 독일군은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케렌스키를 몰아내고 있었다. 케렌스키는 화해주의자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의 소비에트 분파는 7월 24일 밤새 내내 회의를 가졌다. 자신의 무기력에 지친 채 147표의 찬성, 46표의 반대, 42표의 기권으로 집행위원회 합동회의는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권한을 케렌스키에게 부여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도 유례없이 강력했다! 같은 시간에 진행된 입헌민주당 대회에서 케렌스키를 타도하자는 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밀류코프는 이 성급함을 억눌렀다. 그리고 지금은 압력을 가하는 정도로 투쟁의 수위를 제한시켜야한다고 암시했다. 그러나 그는 케렌스키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케렌스키를 통해 유산계급들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정부 내에서 소비에트를 몰아내면 나중에 케렌스키를 몰아내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닐 것이다.     

당시 연립정부의 신들은 피에 굶주려 있었다. 7월 7일에 과도정부가 구성되기도 전에 레닌의 체포를 요구하는 포고령이 공포되었다. 이제 연립정부의 부활을 알리기 위해서는 뭔가 확고한 조치가 필요했다. 이미 7월 13일 막심 고리키의 신문에는 임시정부에 대한 트로츠키의 공개 서한이 실렸다: "레닌, 지노비에프, 카메네프에 대한 체포령에서 나를 제외시킬 논리적 근거가 없다. 나도 이 동지들만큼이나 임시정부의 일반 정책을 무자비하게 반대하고 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볼세비키당 신문은 전부 강제 폐간되었기 때문에 이 편지는 고리키의 신문에 실렸다. 새 정부가 구성된 날 밤 트로츠키와 루나차르스키는 뻬쩨르부르그에서 그리고 미래 볼세비키 정부의 총사령관 크릴렌코 소위는 전선에서 각각 체포되었다.

3일간의 위기 후에 탄생한 새 정부는 조산아처럼 왜소해 보였다. 별로 시원치 않은 인물들 가운데에서 뽑힌 이류 삼류의 인물들이 내각을 채웠다. 부수상에는 엔지니어인 네크라소프가 임명되었다. 그는 입헌민주당 좌파로 2월 27일 이렇게 제안한 바 있었다: 권력을 짜르 장군들에게 넘겨서라도 혁명을 진압해야한다. 입헌민주당과 멘세비키당 경계에 머물면서 당적도 개성도 없던 프로코포비치는 상공업장관이 되었다. 부친이 알렉산드르 2세 치하에 "자유주의" 장관을 지낸 자루드니는 검찰총장을 역임한 급진 변호사였다. 그에게는 법무장관 자리가 주어졌다. 농민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 아브크센티예프는 내무장관이 되었다. 멘세비키 스코벨레프는 노동장관으로 유임되었으며 인민사회주의자 페쉐호노프는 식량장관이 되었다. 자유주의자들 역시 이류 인물들을 정부에 제공했는데 이들은 장관이 되기 전이나 후에나 지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약간 예상외로 체르노프는 농업장관으로 복귀했다. 장관직을 사임한 후 다시 복귀한 4일 동안 그는 자신의 명예를 회복할 시간을 가졌다. 밀류코프는 자신의 러시아혁명사에서 체르노프와 독일 정부 사이의 관계가 "해명되지 않았다"고 미지근하게 말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러시아 정보국, 케렌스키, 테레쉬첸코 그리고 기타 인물들의 증언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너무 지나친 감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체르노프의 농업장관 복귀는 사회혁명당 지도부의 명성을 인정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사회혁명당 지도부 내에서 체르노프는 점점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체레텔리는 선견지명이 있어서 정부에 참여하지 않았다. 5월에 그는 자신이 정부에 있으면서 혁명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소비에트에 남아서 정부에 유용한 인물이 되겠다고 작정했다. 이때부터 체레텔리는 실제로 소비에트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하수인이 되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회의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연립정부가 나라의 이익을 침해할 경우 정부에서 우리 동지들을 철수시켜야한다." 얼마 전에 단은 정부에 들어가 자유주의자들을 이용한 후 이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조언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주의자들 자신이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철저히 이용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스스로 알아서 권력에서 물러났다. 체레텔리는 권력을 부르주아 계급에게 완전히 넘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5월 6일의 제 1차 연립정부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소수파였지만 사실상 정세를 주도했다. 7월 24일의 제 2차 연립정부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다수파였지만 자유주의자들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새 정부에서 명목상 약간 우세한 다수파였다. 그러나 실제의 다수파는 의문의 여지없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확신에 찬 투사들이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부르주아 소유권의 확신에 찬 투사들이었다. 민주주의의 문제에서는 상황이 훨씬 덜 명확했다. 예상외로 의욕을 보이고 있지만 같은 정신을 가진 페쉐호노프 장관은 7월 연립정부를 5월 연립정부와 이렇게 비교했다: 5월에 부르주아 계급은 좌익의 지지를 필요로 했다; 반면에 반혁명이 위협하는 지금은 우익의 지지가 필요하다. "우익에서 더욱더 많은 세력을 끌어들일수록 정부를 공격할 세력은 그만큼 적어질 것이다." 이것은 정치 전략의 멋진 규칙을 암시하고 있다: 포위된 성을 방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안에서 성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연립정부의 전략이었다.

반동은 공세로 나선 반면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었다. 2월 혁명의 첫 시기에 겁을 집어먹고 물러났던 계급들과 집단들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은폐되었던 이해관계들이 지금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상인과 투기꾼들은 볼세비키들을 전멸시키고 상거래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모든 규제에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 짜르 치하의 규제조치마저 철폐할 것을 요구했다. 투기를 잡기 위해 애쓰고 있던 식량위원회가 생필품 결핍의 주범이라고 비난받았다. 이들의 증오심은 식량위원회에서 소비에트로 옮아갔다. 멘세비키 경제전문가 그로만은 이렇게 보고했다: 상인들의 투쟁은 "7월 3일과 4일의 사건 후 특히 강력해졌다." 전쟁 패배, 생활비의 앙등, 야간 도둑질 등이 모두 소비에트의 책임이라고 이들은 떠들었다.

왕당파의 음모에 놀라면서도 좌익이 폭발할까 두려운 정부는 8월 7일 짜르와 왕가를 토볼스크로 이사시켰다. 다음날 볼세비키당의 새로운 신문 [노동자와 병사]가 탄압 받았다. 병사 위원회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 소식이 사방에서 도착했다. 7월말 볼세비키당은 당대회를 반(半)합법으로만 소집할 수 있었다. 군대의 총회는 금지되었다. 이제 총회는 지주, 상인, 자본가, 카자흐 추장, 성직자, 성조오지 기병대 등 집에 숨어있던 자들이 열고 있었다. 이들의 목소리는 대담성만 다를 뿐 내용은 동일했다. 항상 공개적으로는 아니지만 이 교향곡의 지휘자는 입헌민주당이 틀림없었다.

8월초에 소집된 상공업 총회에는 가장 중요한 산업 조직들 그리고 주식거래 조직들의 대표 약 300명이 참석했다. 섬유업계의 제왕 리아부쉰스키가 개막연설을 했다. 그는 자신의 본색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임시정부는 권력의 그림자에 불과하다....실제로는 정치 야바위꾼 일당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정부는 세금 징수에 정신이 없는데 주로 상인들과 산업가 계급들에게만 잔인하게 세금을 걷고 있다....낭비벽이 심한 자들에게 우리의 돈을 주는 것이 필요한가? 조국을 구한다는 이름으로 이들의 보호자를 임명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는 위협조로 말을 맺었다: "기아와 빈곤 때문에 뼈만 남은 손으로 인민의 친구들의 모가지를 비틀어야한다!" 공장폐쇄 정책을 일반화시킨 기아로 뼈만 남은 손이라는 표현은 이때부터 혁명의 정치사전에 등록되었다. 그러나 이 표현 때문에 자본가들은 크게 대가를 지불할 것이었다.

각 도에 파견된 인민위원(역자 주: 도에 파견된 인민위원은 짜르 치하 도지사의 권한을 그대로 넘겨받았다.)들의 총회가 뻬쩨르부르그에서 열렸다. 임시정부에 방벽을 제공해야할 임시정부의 이 하수인들은 일치 단결하여 정부에 반대했다. 입헌민주당 중핵들의 지도를 받은 이들은 불행한 내무장관 아브크센티에프를 쥐고 흔들었다. "양다리를 걸칠 수는 없다. 정부는 통치를 해야한다. 허수아비가 아니다." 화해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방어하면서 마지못해 저항했다. 그리고 자기들이 동맹자들과 다투는 것을 볼세비키당이 엿듣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내무장관은 마치 화상을 입은 듯이 총회장 밖으로 바삐 걸어나갔다.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 언론은 서서히 상처 입은 마음과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예상 밖의 폭로 내용들이 이들의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사회혁명당 신문 델로 나로다(인민의 대의)는 전선으로 가는 사관생도 좌파 그룹의 편지를 8월 6일자 신문에 공개했다. 이들은 "사관생도들의 역할에 깜짝 놀랐다....사람들의 얼굴을 체계적으로 두들겨 패고 대대장의 명령만으로 징벌대의 일부가 되어 재판이나 조사도 없이 마구 병사들을 처형했다....원한에 찬 병사들은 은신처에 숨어서 홀로 떨어진 사관생도들에게 저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군대의 건강성을 회복시키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제 반동 세력은 공세를 펴고 정부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라스푸틴 파벌에 속해 있다가 유태인 학살에 가담한 가장 인기 있는 흑백인조들이 8월 7일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체포된 볼세비키들은 크레스티 감옥에 갇혀 있었다. 감옥의 병사들과 수병들은 막 단식투쟁을 시작할 참이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노동자 부문은 이날 트로츠키, 루나차르스키, 콜론타이와 기타 인물들에게 안부 인사를 보냈다.

산업가, 도 인민위원, 노보체르카스크의 카자흐 총회, 애국주의 언론, 장군, 자유주의자 등 모두가 9월 제헌의회 선거를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전쟁이 끝난 후로 연기시키는 것이 가장 좋다고 이들은 판단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정부는 동의할 생각이 없었다. 타협이 이루어졌다. 제헌의회 소집은 11월 28일로 연기되었다.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입헌민주당은 이것을 받아들였다. 이들은 앞으로 남은 3개월 동안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기를 간절히 기대했다. 이렇게 되면 제헌의회의 문제는 다른 차원으로 이전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희망은 더욱더 공개적으로 코르닐로프라는 이름과 연결되었다.

이제 새로운 "총사령관"을 둘러싼 광고가 부르주아 정책의 중심을 차지했다. "최초의 인민 총사령관"의 전기가 총사령부의 적극적 협조 아래 엄청난 분량으로 배포되었다. 전쟁부의 총무청장으로서 사빈코프는 기자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등등."을 말했다. 이때 그가 말한 "우리"는 사빈코프와 케렌스키가 아니라 사빈코프와 코르닐로프였다. 코르닐로프와 관련된 소동은 케렌스키를 긴장시켰다. 총사령부의 장교동맹을 중심으로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문이 더욱더 끈질기게 퍼지고 있었다. 8월의 첫 며칠간 장관들과 사령관들이 개인적으로 만나자 상호 적대감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 "저 경량급 연설가가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에 대해 당연히 이렇게 생각했다: "저 멍청하고 무식한 카자흐가 러시아를 구한다는 모양이군." 그리고 이들의 생각은 나름대로 옳았다. 공장과 철도의 군사화, 후방으로 사형제도의 확대, 뻬쩨르부르그 군사지구의 제압, 수도 주둔군의 군 본부 복종 등을 포함한 코르닐로프의 강령은 화해주의자들에게 알려졌다. 이 공식 강령 외에 표현되지는 않았으나 공식 강령만큼 실체가 있는 강령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좌익 언론은 경고음을 울렸다. 집행위원회는 새로운 총사령관으로 체레미소프 장군을 제시했다. 코르닐로프가 곧 은퇴할 것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반동 세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돈, 쿠반, 트베르 등지의 12개 카자흐 군대 연합 위원회는 8월 6일 회의를 열고 사빈코프의 확고한 도움으로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다음의 사실에 "우렁차고 강력하게" 정부와 인민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영웅-총사령관" 코르닐로프 장군이 해임될 경우 이에 항의하여 전선과 후방의 카자흐 군대들이 일어설 것이다; 이 사태는 우리의 책임이 아닐 것이다. 성조오지 기병대 동맹 회의는 더욱 강력하게 정부를 위협했다: 코르닐로프가 해임될 경우 동맹은 즉시 "성조오지 기사들 전부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이들이 카자흐 기병대들과 연합하도록" 촉구할 것이다. 이 적극적 명령 불복종에 대해 항의하는 장군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부르주아 언론은 내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는 이 결의문을 즐겁게 지면에 게재했다. 육군 및 함대 장교 동맹의 최고위원회는 "우리의 친애하는 지도자 코르닐로프 장군"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모든 정직한 사람들"이 그에게 신뢰를 보낼 것을 촉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당시 모스크바에서 회의 중이던 우익 "공인(公人)"회의는 장교, 성조오지 기병대, 카자흐 기병대 등과 동참한다는 전보를 코르닐로프에게 보냈다: "생각이 있는 모든 러시아인은 희망과 신뢰의 눈으로 그대를 바라보고 있다." 이보다 더 명확한 표현은 찾기 힘들 것이다. 이 회의에는 리아부쉰스키와 트레티아코프와 같은 산업가와 은행가, 알렉세이예프와 브루쉴로프 장군, 성직자 대표들, 교수들, 밀류코프를 대표로 하는 입헌민주당 지도자 등이 참석했다. 농민 지도자 일부가 입헌민주당을 지지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반정도 허구적인 "농민연합"의 대표들도 회의에 참석했다. 기념비적인 인물 로지안코는 볼세비키들을 진압한 카자흐 일개 연대 대표단에게 모두를 대표하여 의장석에서 치사 연설을 했다. 이렇게 러시아의 유산 교육 계급들의 가장 권위 있는 대표들이 구국의 영웅으로 코르닐로프를 공개적으로 추대했다.

이렇게 사전 준비를 마친 후 총사령관은 두 번째로 전쟁부에 출두하여 자신의 구국 강령에 대해 협상을 벌였다. 그의 참모장 루콤스키 장군은 코르닐로프의 방문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기관총 두 정을 보유한 코카서스 기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그는 동궁으로 향했다. 코르닐로프 장군이 동궁에 들어서자 기관총들은 자동차에서 내려졌고 기병대는 만일의 경우 총사령관을 지원하기 위해 궁전 정문에 경비를 섰다." 정부의 수상에 대항하기 위해 총사령관에게 병력의 지원이 필요할지 모른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코카서스 기병대의 기관총은 곧 부르주아 계급의 기관총이었다. 이 계급에게 계속 머리를 조아리는 화해주의자들에게 기관총이 조준되었다. 소비에트로부터 독립한 구국 정부의 지위가 바로 이것이었다!

코르닐로프의 방문 직후 임시정부의 일원인 코코쉬킨은 케렌스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코르닐로프의 강령이 오늘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입헌민주당은 정부에서 철수할 것이다. 기관총을 동원하지 않았을 뿐 입헌민주당도 코르닐로프와 똑같은 최후통첩을 정부에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협박은 도움이 되었다. 임시정부는 서둘러 총사령관의 보고서를 검토하고 원칙적으로 "후방에도 사형제도를 부활시키는 것을 포함하여" 그가 제안한 조치들을 채택할 가능성을 인정했다.

이 반동 진영의 세력 과시에는 당연히 전국교회협의회도 포함되었다. 이 조직의 공식 목적은 국가관료들로부터 정교회를 해방시키는 것이었으나 진짜 목적은 혁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짜르의 타도로 교회의 공식 수장은 공석이었다. 먼 옛날부터 국가가 교회를 보호해왔기 때문에 지금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허공에 붕 뜬 상태였다. 3월 9일의 편지를 통해 교회 최고회의는 성취된 혁명에 당연히 축복을 보낸 후 인민이 "임시정부를 신뢰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미래는 교회에게 위험을 예고하는 듯했다. 정부는 다른 모든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켰다. 성직자들은 완전히 겁을 먹었다. 중국과 국경을 마주한 도시 베르니처럼 같이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성직자로부터 가끔 전보가 날아와 르보프공을 안심시켰다: 그의 정책은 복음서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렇게 혁명에 비위를 맞추었으나 교회는 감히 사건들에 개입할 수 없었다. 이 태도는 무엇보다 전선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교회의 영향력은 두려움이라는 규율이 사라짐과 동시에 전선에서 증발해버렸다. 데니킨은 이렇게 인정하고 있다: "장교단은 군사적 권위와 지휘권을 회복하기 위해 오랫동안 투쟁했다. 그러나 성직자들의 목소리는 혁명 첫날부터 침묵을 지켰다. 또한 병사들의 일상 생활에 대한 이들은 개입은 끝이 났다." 군대 본부와 지휘부의 성직자 회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교회협의회는 주로 교회 내부 특히 교회 상층부의 조직이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교회 관료조직의 경계 내에 머무르지 않았다. 자유주의 사회는 이 조직을 손에 넣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인민에게 정치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입헌민주당은 개혁이 시행된 교회가 자신과 대중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상상했다. 협의회 회의 준비 과정에서 교회의 수장들과 나란히 그리고 심지어 이들보다 앞서 트루베츠코이공, 올스피에프 백작, 로지안코, 사마린, 자유주의 교수들과 작가 등 세속의 다양한 정치색깔을 지닌 정치인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입헌민주당은 협의회 주위에 교회 개혁의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부주의한 행위로 교회의 썩은 구조가 전부 붕괴되지 않도록 부드럽게 물러섰다. 성직자 집단이나 세속 개혁가들이나 국가와 교회의 분리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교회의 수장들은 교회 내부의 일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동시에 미래에 국가가 자신들의 특권, 토지, 수입 등을 보장할 뿐 아니라 교회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하기를 바랬다. 자유 부르주아 계급은 정교회에 대해 기존의 지배적 지위를 계속 보장할 용의가 있었다. 다만 교회가 새로운 방식으로 대중 사이에서 지배계급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방법을 터득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큰 어려움이 생겼다. 데니킨 자신은 슬프게 이렇게 말한다: 러시아 혁명은 "언급할 가치가 있는 단 하나의 대중적 종교운동도 창조하지 못했다." 새로운 부위의 인민이 혁명에 개입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이들이 거의 자동적으로 교회에 그리고 특히 과거에 귀속했던 교회에조차 등을 돌렸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농촌의 사제들은 토지문제에 대한 입장에 따라 어느 정도 개인적 영향력을 여전히 행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도시에서 노동자나 소부르주아는 자신이 일으킨 혁명의 문제들을 성직자들에게 의존해 해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교회협의회 준비는 인민의 완전한 무관심 속에 진행되었다. 대중의 이해와 열정은 성경 구절이 아니라 사회주의 구호를 통해 표현되고 있었다. 역사 무대에 늦게 등장한 러시아는 종교개혁의 시기 뿐 아니라 부르주아 의회 시기조차 건너뛰면서 역사를 축약해서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협의회는 혁명의 만조기에 계획되었으나 혁명의 퇴조기 몇 주일 동안에 열렸다. 이 때문에 협의회는 반동의 색깔을 더 짙게 드러냈다. 협의회의 규약, 회의가 심의한 문제의 범위, 개막식 행사 등은 교회에 대한 각 계급들의 급격한 태도 변화를 증언했다. 우스펜스키 대성당에서 진행된 예배에서 로지안코, 입헌민주당원, 케렌스키, 아브크센티에프 등은 나란히 모습을 보였다. 모스크바 시장인 사회혁명당원 루드너는 환영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인민이 살아있는 한 예수에 대한 신앙은 이들의 영혼 속에 불타오를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들은 러시아 계몽주의 선구자 체르니쉐프스키의 후손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었다.       

협의회는 모든 곳으로 호소문을 배포했다. 그리고 강력한 정부가 들어서기를 기도했으며 볼세비키당을 비난했다. 또한 노동장관 스코벨레프처럼 노동자들에게 엄숙히 명령했다: "노동자들이여, 노력을 아끼지 말고 일할 것이며 조국의 번영에 여러분의 필요를 복종시켜라." 그러나 협의회는 토지문제에 특히 많은 관심을 보였다. 농민운동의 규모에 대해 대주교와 주교들은 지주들 못지 않게 공포심과 원한을 품고 있었다. 교회와 수도원 소유의 토지들에 대한 두려움이 교구의 민주화보다 더 확고하게 이들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신의 노여움과 파문으로 농민들을 위협하면서 협의회 편지들은 "강도질한 토지, 숲, 수확물 등을 즉시 교회, 수도원, 교구, 개인 소유주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황야의 외로운 외침이 아닐 수 없었다! 협의회 회의는 한 주일 한 주일 계속 늘어지더니 10월 혁명 후에야 노고의 정점에 도달했다. 즉 표트르 대제가 200년 전에 철폐한 가부장제를 부활시켰다. (역자 주: 표트르 대제의 개혁 이전에 교회의 수장들은 자신들을 가부장이라고 부르고 법원과 행정체제를 갖추었다. 따라서 이들은 짜르 국가체제의 제 2 선을 이루었다. 표트르 대제는 가부장 직함을 철폐하고 교회를 행정부의 한 부서로 전락시켰다.)   

정부는 나라의 모든 계급들과 사회기관들이 함께 하는 국가협의회를 8월 31일 모스크바에서 개최하기로 7월말에 결정했다. 이 협의회의 참석자들은 정부가 결정하기로 했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나라의 모든 민주적 선거 결과를 정면으로 무시하면서 정부는 유산계급들과 인민의 대표들이 같은 수로 협의회에 참여하도록 미리 준비했다. 이 인위적인 균형을 통해서만 혁명 수호 정부는 체면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전국 대회는 명확한 권한이 없었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협의회는 기껏해야 조언만 할 수 있었다...." 유산계급들은 나중에 권력을 더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인민에게 양보의 모범을 보여주려 했다. 공식적으로 협의회의 목표는 "국가 권력과 전국 모든 단체들의 화해"였다. 부르주아 언론은 연대, 화해, 격려, 나라 전체의 사기 진작 등의 필요성을 얘기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들은 정확히 어떤 목적으로 협의회가 소집되었는지를 말하고 싶지도 않았고 말할 능력도 없었다. 여기에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름 부를 임무가 또다시 볼세비키들에게 떨어졌다.

 

 

제 6장 케렌스키와 코르닐로프 (러시아 혁명에서 등장한 보나파르트 체제의 요소들)

그 동안 쓰여진 많은 글들이 이렇게 주장해왔다: 케렌스키 대신 명확한 두뇌와 강력한 의지를 갖춘 인물이 정부를 이끌었다면 볼세비키당의 권력 장악을 포함한 이후의 불행한 사건들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케렌스키는 명확한 두뇌도 강력한 의지도 없었다. 그렇다면 명확히 규정된 사회계급들이 하필 케렌스키를 지도자로 떠받든 이유는 무엇일까?

혁명의 첫 며칠 동안 기존의 정치 지형은 일소되고 모든 대중은 장밋빛 환상에 취한다. 이 역사적 기억을 새롭게 하려는 듯이 지금 스페인에서 혁명이 진행 중이다. 혁명의 첫 단계에서는 혁명의 적들조차 혁명의 색깔로 자신을 치장하려고 한다. 이들은 가능하면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임박한 변화에 자신들을 적응시키려고 애쓴다. 이 반(半)본능적 욕구 때문에 혁명의 색깔로 자신들을 치장하는 것이다. 이때에 명확한 의미도 없는 온갖 말들이 난무하면서 국민의 단결을 호소한다. 그리고 이때 화해주의가 등장하면서 꼭 필요한 정치적 기능을 수행한다. 소부르주아 관념주의자들은 계급의 차이를 간과하고 판에 박힌 뻔한 말들로 사고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도 모르고 모두가 잘되기를 바란다. 따라서 이들은 혁명의 초기 단계에서는 유일하게 다수의 지도자가 된다. 만약 케렌스키가 명확한 사고와 강력한 의지를 소유했다면 이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는데 전혀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사건들을 되돌아보면서 나온 평가가 아니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볼세비키당이 내린 결론이었다. 7월 사건 후 케렌스키의 감옥에 갇힌 필자는 이렇게 적었다: "케렌스키는 공안 사건의 변호사였다가 트루도비키당(역자 주: 토지개혁을 통해 봉건체제를 타파하고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전을 도모한 정치세력. 입헌민주당을 탈당한 일부 의원들이 창당했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사회혁명당에 합류했다. 정치적 훈련을 전혀 받지 못한 급진주의자인 그는 혁명 첫 시기의 특징인 '온 국민의' 정치적 미(未)분화 상태, 혁명의 희망과 기대를 담은 이상주의 등을 어느 누구보다 완벽하게 표현했다. 토지, 자유, 법, 질서, 세계 평화, 조국 방어, 리이프크네히트의 영웅적 투쟁, 관대한 아량의 러시아 혁명이 세계를 놀라게 해야 한다는 등의 연설들을 통해 케렌스키는 조그만 붉은 비단 손수건을 손에 들고 잠시 흔들었다. 정치적으로 막 각성하고 있는 대중은 이 연설들을 황홀하게 경청했다. 대중은 마치 자신이 연단에서 연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구츠코프로부터 자기를 구출한 구세주로 보고 군대는 케렌스키를 환영했다. 농민들은 그가 트루도비키당의 농민 의원이라는 말을 들었다. 뚜렷한 내용이 없이 말만 급진적으로 늘어놓는 대단히 온건한 그의 사상에 자유주의자들은 공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마구잡이로 모든 계급과 계층을 포괄할 수 있는 시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혁명의 시작과 함께 가라앉았던 계급투쟁은 나중에 내전의 형태로 다시 살아난다. 화해주의자들은 동화 속의 왕자처럼 처음에는 인기를 누리지만 몰락의 씨앗을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다. 프랑스 정부의 공식 기자인 끌로드 아네의 말에 따르면 케렌스키가 급격히 인기를 상실한 이유는 그의 재치의 부족이었다. 이 때문에 케렌스키는 자기 역할과는 "전혀 맞지 않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짜르를 비롯한 귀족들이 앉았던 오페라 특별관람석에 자주 들락거리며 동궁이나 짜르스코에 셀로에서 산다. 그는 짜르의 침대에서 잠을 자는 등 허영이 너무 심하고 이 허영을 너무 드러낸다. 세계에서 가장 소박한 나라에서 이것은 상당한 충격이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전체 상황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해해야 재치를 구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해력이 케렌스키에게는 전혀 없었다. 대중은 그를 신뢰하여 그에게 권력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대중과는 전혀 이질적인 인간이었다. 혁명에 대한 대중의 관점과 정치적 결론을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대중은 그로부터 대담한 조치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아량과 웅변에 대해 대중이 참견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는 체포된 짜르 일가를 극적으로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궁전 주위에서 근무 중인 병사들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판자에서 잠을 자고 형편없는 음식을 먹고 있다. 그러나 짜르는 체포된 후에도 먹다 남긴 고기를 쓰레기통에 던진다." 이것은 "넘치는 아량"과는 무관한 병사들의 진솔한 감정 표현이었다.

오랜 세월의 사슬에서 풀려난 인민은 교육받은 지도자들이 설정해 놓은 경계선을 매번 침해하고 있었다. 4월말 케렌스키는 이에 대해 이렇게 한탄했다: "자유 러시아가 반란 노예들의 나라일 수 있는가?...두 달 전에 죽었어야 했는데 후회가 된다. 위대한 꿈을 가지고 죽었어야했는데." 등등. 이 저질 웅변으로 그는 노동자, 병사, 수병, 농민들을 움직이려했다. 나중에 소비에트 재판정에서 콜착 제독은 수병들과 장교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5월에 케렌스키가 흑해 함대를 순시한 일화를 증언했다. 케렌스키는 연설하는 것으로 자신의 방문 목적이 달성된 것처럼 생각했다: "제독, 보시오. 모든 일이 해결되었소...." 그러나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함대는 해체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케렌스키의 가식, 무례, 허풍 등은 대중에게 더욱 분노를 자아냈다. 전선을 순시하는 동안 그는 기차 안에서 부관에게 짜증스럽게 외쳤다: "빌어먹을 병사 위원회들을 전부 지옥에 보내버려라!" 아마 어느 장군이 들으라고 고의적으로 이렇게 고함을 질렀는지도 몰랐다. 발트해 함대를 방문했을 때 그는 수병중앙위원회가 제독의 전함에 있는 자기 앞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전쟁부 산하기관이 아니라 소비에트 기구인 이 위원회는 이 명령이 거만하다고 생각했다. 위원회 의장 디벤코 수병은 이렇게 대답했다: "케렌스키가 중앙위원회와 대화를 원한다면 직접 우리에게 오라고 해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무례한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수병들과 케렌스키는 전함에서 대화를 나누었으나 결과는 역시 좋지 못했다. 수병들이 볼세비키당을 지지한 전함 [공화국]에서는 특히 더 그랬다. 수병들은 케렌스키에게 질문했다. 의회에서 그가 전쟁 찬성표를 던진 이유가 무엇인가? 밀류코프가 작성한 제국주의 정책 메모에 4월 21일 그는 왜 서명했는가? 짜르가 임명한 상원의원들에게 일년 6천 루블의 연금을 허용한 이유가 무엇인가? 케렌스키는 "적들"이 그에게 던진 이 "간교한" 질문에 대답을 거부했다. 그러자 수병들은 장관의 설명이 "불만족스럽다"고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말없이 군함을 떠났다. 이 급진 변호사는 이빨을 갈면서 "반란 노예들!"이라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수병들은 자부심을 느꼈다: "그렇다, 우리는 노예였고 반란을 일으켰다!"

민주주의 여론에 대한 고자세 때문에 케렌스키는 소비에트 지도자들과 매 순간 작은 갈등을 일으켰다. 이들은 그와 노선이 같았으나 대중의 분위기를 좀더 고려했다. 이미 3월 8일에 대중의 항의에 겁을 먹은 집행위원회는 체포된 경찰관들을 풀어주지 말라고 케렌스키에게 경고했다. 그리고 며칠 뒤 화해주의자들은 짜르 일가를 영국으로 보내려는 그의 계획에 항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2주일이나 3주일 후 집행위원회는 케렌스키와 "집행위원회 사이의 관계를 통제하자"고 그에게 제안했으나 이 관계는 결코 통제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소속 당과도 똑같이 충돌했다. 6월초 사회혁명당 대회의 중앙위원회 선거에서 그는 135표의 찬성과 270표의 반대로 중앙위원회에서 탈락되었다. 당 지도자들은 좌우익 모두에게 우물쭈물 거리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케렌스키 동지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많은 동지들이 그에게 표를 던질 수 없었다." 당의 중앙당직자들이나 직원들은 그가 모든 좋은 것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존경했다. 그러나 대중과 밀착되어 있던 고참 당원들은 그를 신뢰하거나 존경하지 않았다. 연립정부와의 연결고리로서 그는 집행위원회나 사회혁명당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을 뿐이었다.

멘세비키들은 소비에트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아무 조치도 취할 필요가 없는 결정사항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국가기구에서는 인민주의자들이 멘세비키들보다 확실히 우세했기 때문에 케렌스키는 지배적 지위를 차지했다. 그는 반은 입헌민주당원이었고 반은 사회혁명당원이었다. 따라서 정부 내에서 체레텔리나 체르노프처럼 소비에트 대표로서 역할하지 않았고 다만 부르주아 계급과 민주주의 사이의 살아있는 끈이었다. 체레텔리와 체르노프가 연립정부의 한 축을 형성했다면 케렌스키는 연립정부의 화신이었다. 케렌스키가 "개인적 동기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고 체레텔리는 불평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기능은 개인적 야망과 분리될 수 없었다. 이 점을 체레텔리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무장관 체레텔리가 행정조직들에 내려보낸 회람장은 이렇게 요구했다: 도 인민위원들은 지역의 모든 "살아있는 세력들" 즉 부르주아 계급과 소비에트 등에 의존할 것이며 "당의 영향력"에 휘둘리지 말고 임시정부의 임무를 수행하라. 모든 적대 계급들과 정당들 위에 군림하여 자기 자신과 회람장에 의거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이상적인 인민위원은 바로 도나 군의 케렌스키였다. 이 체제의 정점에 케렌스키가 독립적인 러시아 전국 인민위원으로 동궁을 차지하고 있어야했다. 케렌스키가 없었다면 화해주의는 십자가가 없는 교회 첨탑과 같았을 것이다.  

케렌스키가 권력으로 올라선 역정에는 교훈들이 가득하다. 자신이 두려워한 2월 혁명 덕분에 그는 법무장관이 되었다. "반란 노예들"의 4월 시위는 그를 전쟁 및 해양 장관으로 올려놓았다. "독일 첩자들"이 일으킨 7월 투쟁으로 그는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9월초의 대중운동으로 이 정부수반은 최고사령관도 겸임한다. 대중은 케렌스키를 타도하기 전에 그를 권력의 정점으로 올려놓아야 했다. 바로 여기에 화해주의 정부의 모순과 악의적인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케렌스키는 자기에게 권력을 안겨준 대중을 멸시하며 멀리했다. 그러나 유산계급의 유식한 사회가 조금이라도 그를 격려하면 그는 이 격려에 더욱 열렬하게 매달렸다. 뻬쩨르부르그에서 돌아온 모스크바의 입헌민주당 지도자이자 의사인 키쉬킨은 혁명 첫날부터 이렇게 말했다: "케렌스키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나마 지금 가지고 있는 것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역사의 명패에 그의 이름을 금으로 새겨야한다." 자유주의자들의 이러한 칭찬은 케렌스키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잘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부르주아 계급의 발 밑에 단순하게 자신의 명성을 내던질 수도 없었고 그러기를 원치도 않았다. 이와 반대로 그는 모든 계급들이 자기 발 밑에 모이는 것을 더욱더 즐겼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증언한다: "혁명 첫날부터 케렌스키는 부르주아 계급과 민주주의의 연립정부를 출범시키고 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노선은 그의 인생 역정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는 자유주의 변호사와 지하 그룹의 역할 사이를 왔다갔다 해왔기 때문이었다. 영국 대사 부캐넌에게 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소비에트는 자연스럽게 소멸할 것이다." 한편 그는 부르주아 장관 동료들에게 소비에트의 화를 사지 않으려면 자기 말을 들으라고 매 순간 위협했다. 그리고 집행위원회 지도자들과 빈번히 견해가 부딪칠 때마다 자유주의자들의 내각 사퇴라는 가장 끔찍한 재앙을 언급하면서 이들의 기를 죽였다.

케렌스키는 러시아 혁명의 마라(역자 주: 프랑스 대혁명 당시 자코벵파의 최고 지도자. 혁명 도중 왕당파 자객에게 암살 당했다.)가 될 생각이 없다고 누차 반복했다. 이것은 반동 세력에게는 준엄한 조치를 취할 수 없고 "무정부적 혼란"에 대해서는 준엄하게 대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기존 질서를 변화시켜야 할 때에는 폭력을 거부하다가 이것을 방어할 때에는 가장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치폭력을 반대하는 자들의 일반적 도덕이다.

전선에서 공세가 준비되고 있을 때 케렌스키는 유산계급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테레쉬첸코는 "케렌스키의 노고"를 연합국들이 얼마나 높이 사는 가를 모든 사람들에게 떠들었다. 화해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입헌민주당 기관지 레치 지는 전쟁장관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계속 강조했다. 로지안코는 이렇게 인정했다: "이 젊은이는 창조적인 노고와 조국의 복지를 위해 매일 배가된 힘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런 말들을 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은 케렌스키에게 의도적으로 아첨했다. 그러나 이들도 그가 근본적으로 자기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구츠코프가 공세로 나서라고 명령하고 연대들을 해체시키고 병사들을 체포하고 병사총회를 금지시키고 병사들에게 '너'라고 반말하고 이들을 '겁쟁이들'이라고 욕했다면 그 결과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이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이것도 인민이 그를 신뢰했을 때에만 가능했다. 그런데 이 신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소멸했다...."

전선의 공세로 인해 케렌스키는 부르주아 계급의 평판을 크게 얻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인민의 평판은 완전히 실추되었다. 이 때문에 공세가 붕괴하자 케렌스키는 양 진영으로부터 버림받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놀랍게도 그는 "대체할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제 2차 연립정부를 수립할 "유일한 인물"은 케렌스키라고 밀류코프는 말했다. 그러나 그는 "유일하게 필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밀류코프는 케렌스키를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결코 없었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의 광범위한 부위는 자기들의 불행이 모두 케렌스키 탓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갈수록 많았다. 밀류코프에 의하면 "애국주의 진영이 참을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강력한 인물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한때 콜착 제독이 이 역할의 적임자로 제안되었다. 더욱이 강력한 인물을 권좌에 올리는 일은 "협상이나 타협과는 다른 방식으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이것은 쉽게 이해가 된다. 입헌민주당의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민주주의, 인민의 의지, 제헌의회 등에 대한 희망은 이미 물거품이 되었다. 러시아 전국의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압도적 다수를 획득했다...그래서 설득이 아니라 명령을 통해 통치할 인물을 찾으려는 충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혁명의 목을 조를 인물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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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닐로프의 전기와 개인적 속성으로 판단하면 그가 나라의 구원자로 나설만한 특징들을 알아내기는 쉽다. 마르티노프 장군은 전쟁 전에 코르닐로프의 상관이었으며 전쟁 기간에는 오스트리아의 어느 요새에서 그와 함께 포로 생활을 했다. 그는 코르닐로프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일에 대한 애정이 꾸준하며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그의 지적 능력은 보통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또한 그는 식견이 넓지 못했다." 그는 코르닐로프의 두 가지 특성이 개인적 용감성과 사심이 없는 점이라고 생각했다. 장성들 대부분이 군대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자기 목숨을 걱정하는 상황에서 이 특성은 두드러졌다. 그러나 전략적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물질적 도덕적 측면에서 전체 상황을 파악할 능력은 그에게 조금도 없었다. 마르티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더욱이 그는 조직 능력이 부족했다. 또한 격렬한 성미인데다 균형감각이 부족하여 계획적인 활동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전쟁 중 자기 부하의 군사활동 전부를 관찰한 브루쉴로프는 코르닐로프를 대단히 경멸했다: "그는 대담한 게릴라 부대의 대장은 될 수 있으나 그 이상은 어림도 없다...." 코르닐로프가 지휘한 사단을 둘러싼 공식 전설은 부정적인 것들 속에서도 뭔가 밝은 부분을 찾아야 한다는 애국주의 사회 여론의 창작품이었다. 마르티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코르닐로프의 형편없는 관리 능력 때문에 제 48 사단이 파괴되었다. 그는 후퇴를 조직하는 법을 몰랐다. 계속 마음을 바꾸고 시간을 허비한 것이 그의 가장 큰 결함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코르닐로프는 자기가 함정으로 인도한 사단을 운명에 맡기듯이 내버린 채 자기 혼자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4일 낮과 밤을 방황한 끝에 이 불운한 장군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항복했다. 나중에야 그는 탈출할 수 있었다. "러시아로 돌아오자마자 코르닐로프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여러 신문기자들에게 자신의 탈출기를 밝은 색깔로 채색했다." 사정을 잘 아는 목격자들은 그의 전설을 담담하게 교정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지면을 할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틀림없이 이때부터 코르닐로프는 신문을 통해 자기를 선전하는 맛을 들였을 것이다.

혁명 전에 코르닐로프는 흑백인조 성향의 왕당파였다. 그는 포로로 신세였을 때 신문을 읽으면서 빈번하게 이렇게 말했다: "구츠로프와 밀류코프 같은 작자들을 기꺼이 교수형에 처하겠다." 그와 같은 인간에게 보통 그렇듯이 그는 자기 신상에 직접 관련이 있을 경우에만 정치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2월 혁명 후 그는 자신이 공화주의자라고 선언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살아남는 손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마르티노프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러시아 사회 각 계층의 중첩된 이해관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정당이나 개별 정치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했다." 그에게 멘세비키당, 사회혁명당, 볼세비키당은 적대 진영의 한통속이었다. 그에게 이들은 모두 장교들의 지휘권을 침해했고 지주들의 즐거운 장원 생활을 방해했고 상인들의 거래를 훼방놓았으며 공장주들의 상품 생산을 저지한 나쁜 놈들이었다.

이미 3월 2일에 의회 임시위원회는 코르닐로프 장군을 나라의 구원자로 지목했다. 이들은 로지안코의 서명을 받아 전쟁 총사령부에 이렇게 요구했다: "러시아가 전부 알고 있는 이 용감한 영웅"이 뻬쩨르부르그 지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어야한다. 폐위된 짜르는 로지안코의 전보에 "시행에 옮길 것"이라고 적었다. 이렇게 혁명의 수도는 코르닐로프를 자신의 제 1대 붉은 장군으로 맞이했다. 집행위원회의 3월 10일자 보고서는 코르닐로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그는 혁명을 끝장내려는 구식 장군이다." 그러나 혁명의 첫 시기에 이 장군은 자신을 잘 보이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으며 심지어 불평 한마디 없이 왕후를 체포하는 의식도 행했다. 이것은 그의 공적이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에 의해 짜르스코에 셀로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코빌린스키 대령은 회고록에서 코르닐로프가 이중적인 게임을 하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코빌린스키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한다: 왕후에게 인사한 후 "코르닐로프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령, 잠시 나가있게. 나가서 문 밖에 서 있게.' 나는 문을 열고 나왔다. 한 5분 후에 코르닐로프는 나를 다시 불렀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왕후는 손을 나에게 내밀었다...." 코르닐로프가 대령을 그녀의 친구로 소개했음에 틀림없었다. 나중에 짜르와 그의 "간수"인 코빌린스키가 서로 포옹했다는 얘기를 듣게 될 것이다. 코르닐로프는 새로운 직책인 군사 행정가로서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입증시켰다.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은 그의 무능력에 대해 계속 불평을 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가 수도에 머문 시간은 잠시 뿐이었다. 4월에 그는 밀류코프의 힌트를 받아 혁명 후 첫 유혈사태를 개시하려했다. 그러나 집행위원회가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그는 수도 지구 사령관 직책을 사임하고 대신 일개 군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나중에 그는 남서 전선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 전선에서 그는 사형제도의 부활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도망병을 사살한 후 이름표를 붙여 시체를 거리에 전시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지주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농민들에게 가혹한 벌을 가하겠다고 위협했다. 또한 돌격 대대들을 창설하고 적절한 때가 되면 수도에 자신의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이 때문에 장교들과 유산계급들은 그를 즉시 신성한 존재로 바라보았다. 케렌스키가 파견한 인민위원들 다수도 희망은 코르닐로프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몇 주가 지난 후 사단장으로서 형편없는 경험을 한 이 용감한 장군은 해체 상태에 있던 수백만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연합국들은 전쟁의 완전한 승리를 위해 러시아군의 전투를 독려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코르닐로프의 머리는 대단히 복잡했다. 협소한 시야와 정치에 대한 무지 때문에 그는 모험주의자들의 손쉬운 먹이가 되었다. 알렉세이예프 장군 그리고 나중에 베르호프스키는 그를 "사자의 심장과 양의 두뇌를 가진 인간"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개인적 특권은 고집스럽게 방어하면서 자신의 야심과 일치하는 남의 말에는 아주 쉽게 넘어갔다. 코르닐로프에게 우호적이었던 밀류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에게 아첨하는 법을 아는 사람들을 그는 어린애처럼 순진한 마음으로 신뢰했다." 총사령관을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부추긴 자는 자보이코였다. 당번병이라는 빈약한 임무를 맡았던 그는 지주 출신의 이름 없는 인물로 석유 투기꾼이자 모험가였다. 특히 그는 글 솜씨로 코르닐로프를 사로잡았다. 자보이코는 무슨 짓이든지 마다하지 않는 사기꾼의 활달한 문체를 지니고 있었다. 이 당번병은 코르닐로프의 공보담당이 되어 [인민의 전기]를 저술했으며 보고서, 최후통첩 등 그야말로 "강력한 예술적 문체"가 필요한 장군의 모든 문서를 작성했다. 자보이코 옆에 알라딘이라는 제 1대 의원이자 모험가가 따라 붙었다. 그는 몇 년을 해외에서 보냈으며 영국산 파이프를 입에서 떼어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를 국제문제 전문가라고 생각했다. 이 두 인물은 코르닐로프의 오른팔이 되어 반혁명 중심세력과 그의 교류를 도왔다. 그의 왼팔은 사빈코프와 필로멘코가 맡았다. 이들은 모든 수단을 써서 장군의 자기 과대망상증을 지지했다. 동시에 민주주의자들이 도저히 안될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의 설익은 행동을 봉쇄시켰다. 살살 녹는 말을 일삼는 데니킨 장군은 이렇게 적고 있다: "정직한 자와 부정직한 자, 진실한 자와 술수를 꾸미는 자, 정치적 지도자, 군사 지도자, 모험가 등이 그의 주위로 모였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그의 주위로 모인 자들 가운데 정직한 자와 부정직한 자의 정확한 비율을 계산하기는 힘들 것이다. 어쨌든 코르닐로프는 자신이 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는 케렌스키의 노골적인 라이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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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라이벌은 서로를 진정으로 증오했다. 마르티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고참 장군들과의 관계에서 케렌스키는 고자세를 취했다. 겸손하고 열심히 직무를 수행하는 알렉세이예프나 외교적인 성격의 브루쉴로프 등은 그의 이러한 태도를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기 만족적이고 지나치게 예민한 코르닐로프에게는 이 태도가 먹혀들지 않았다.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 변호사를 깔보았다." 이 둘 가운데 약한 성격의 케렌스키는 기꺼이 양보할 생각이 있었으며 이렇게 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했다. 최소한 코르닐로프는 7월말에 정부 쪽에서 장관직을 제의했다고 데니킨에게 말했다. "안될 말이지! 저 신사들은 소비에트와 너무 밀착되어 있다....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나에게 권한을 주면 결정적인 싸움을 벌이겠다."

케렌스키의 기반은 흔들리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그는 말로 위기를 넘길 생각이었다. 그는 회의들을 소집하고 이런 저런 선언들을 남발했다. 7월 21일에 그는 승리했다. 서로 적대적인 민주주의 진영과 부르주아 진영의 머리 위로 부상하여 자신이 꼭 필요한 인물임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곧 케렌스키는 모스크바에서 국정협의회를 소집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 동안 동궁의 밀실에서 논의된 사안들을 널리 공개하겠다는 것이었다. 케렌스키가 지도하지 않으면 나라가 엉망진창이 될 것이라는 것을 모든 국민에게 보여주겠다고 그는 결심했다.

정부의 공식 목록에 의하면 국정협의회는 "정치, 사회, 민주주의, 민족, 상공업, 협동조합 등 분야의 대표들과 민주주의 기관의 지도자들 그리고 군대, 과학기관, 대학교 등의 고위급 대표들과 1대부터 4대까지의 의원들"을 참석시킬 예정이었다. 약 1천5백 명이 참가할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참가한 전체 인원은 2천5백 명이 넘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우익 진영의 이해를 위해서였다. 모스크바의 [사회혁명당 저널]은 자기 당의 정부를 비난하는 글을 실었다. "노동계의 대표가 150명인데 상공업계의 대표는 210명뿐이다. 농민 대표가 100명인데 지주 대표는 100명밖에 초대되지 않았다. 100명의 소비에트 대표에 비해 의원들은 300명이 참석할 것이다...." 케렌스키가 소속된 당의 이 공식 기관지는 이런 협의회가 "정부에게 필요한 지지"를 끌어 모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

화해주의자들은 이빨을 갈면서 협의회에 참석했다.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정직한 노력을 하자고 이들은 서로에게 다짐했다. 그런데 볼세비키들은 어떻게 하나? 민주주의 진영과 유산계급 진영의 대화에 이들이 끼어 드는 것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집행위원회의 특별 결의문은 이렇게 결정했다: 볼세비키당 분파는 소비에트 최고회의의 승인을 얻어야 발언권을 얻을 수 있다. 그러자 볼세비키당은 선언문을 통해 협의회에서 퇴장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의 모든 동작을 감시하고 있던 최고회의는 이 범죄적인 결정을 거둘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볼세비키들은 주저 없이 회의 입장권을 반납했다. 이들은 좀더 의미 있는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의 노동계급이 발언할 차례가 왔다.

혁명의 거의 첫날부터 법과 질서의 주창자들은 때가 있을 때마다 평화로운 "지방"과 소란스러운 뻬쩨르부르그를 비교했다. 모스크바에서 제헌의회를 소집하자는 요구는 부르주아 계급에게서 나왔다. 민족주의적 자유주의 성향의 "맑스주의자" 포트레소프는 뻬쩨르부르그가 "새로운 빠리"로 행세하는 것에 대해 욕을 퍼부어 대었었다. 지롱드파도 구 빠리가 천둥과 번갯불 세례를 당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리고 원래 역할의 83분의 1만 빠리가 수행할 것을 제안했다. 지방 출신의 어느 멘세비키는 6월 소비에트 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보체르카스크 같은 곳이 뻬쩨르부르그보다 러시아의 상황을 훨씬 더 잘 반영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부르주아처럼 화해주의자들은 "국민"의 실제 정서가 아니라 스스로 창조한 위로조의 환상에서 지지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국정협의회를 제안했던 이들은 모스크바의 실제 정치적 박동을 느끼자 잔인하게 실망하게 된다.

8월초의 지주총회부터 계속 이어진 반혁명 세력의 모스크바 회의들은 교회협의회로 끝이 났다. 그런데 이것들로 인해 유산계급들 뿐 아니라 노동자와 병사들도 자극을 받았다. 리아부쉰스키의 협박, 로지안코의 호소, 입헌민주당과 카자흐 장군들의 형제애 등이 모두 모스크바 하층민의 눈앞에서 벌어졌다. 이 모든 것들은 새로운 이야기 거리를 찾는 볼세비키 선동가들에 의해 해석되어 대중에게 제시되었다. 이제 반혁명의 위험이 직접 느껴졌고 심지어 실제 인물의 모습을 띠었다. 그러자 분노의 물결이 작업장과 공장에서 일렁거렸다. 모스크바의 볼세비키당 신문은 이렇게 적었다: "만약 소비에트가 무력하다면 노동자들이 자신의 살아있는 조직 주위로 단결해야한다." 이 조직의 선두에 볼세비키들이 지도부를 장악한 노동조합들이 나섰다. 공장들은 국정협의회에 너무 적대적이었다. 따라서 대중이 제안한 총파업은 모스크바 볼세비키 중핵 대표들 사이에서 거의 반대 없이 채택되었다. 노동조합이 파업을 주도했으나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찬성 364표 반대 304표로 투쟁을 반대했다. 그러나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 소속 노동자 위원회는 이미 파업에 찬성한 상태에서 단지 당의 규율에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노동자 대다수의 의지에 거역하고 있으며 더욱이 오래 전에 선출된 소비에트가 내린 파업 반대 결정은 모스크바 노동자들을 결코 저지할 수 없었다. 41개 노동조합 책임자들의 회의는 하루 항의 파업을 결의했다. 지구 소비에트의 대다수는 볼세비키당과 노동조합의 편을 들었다. 공장들은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재선거를 요구했다. 소비에트는 대중의 정서에 뒤쳐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들과 날카롭게 충돌하고 있었다. 공장위원회와 함께 회의를 소집한 자모스크보레츠키 지구 소비에트는 찬성 175표 반대 4표 기권 19표로 "노동계급의 의지에 거역하는" 대의원들을 소환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파업 전날 밤은 모스크바 볼세비키들에게는 걱정의 밤이었다. 지방은 뻬쩨르부르그의 뒤를 따르기는 했으나 뒤쳐지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7월 시위는 성공하지 못했었다. 주둔군 뿐 아니라 노동자들 대다수는 소비에트에 반대하여 거리로 나서기를 두려워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될까? 이 질문에 다음날 아침이 대답했다. 화해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업은 반동 세력의 연합과 정부에 대항하여 강력한 시위로 발전했다. 이틀 전만 하더라도 모스크바 기업가들의 신문은 자신 있게 이렇게 선언했다: "정부는 뻬쩨르부르그에서 모스크바로 곧 이전되어야한다. 그리고 성스러운 곳들의 목소리와 크렘린궁의 종과 신성한 탑들의 소리를 들어야한다...." 그러나 오늘은 성스러운 곳들의 목소리는 불길한 고요 속에 잠겼다.

볼세비키당 모스크바 위원회의 피아트니츠키는 나중에 이렇게 적었다: "파업은 멋지게 진행되었다. 가로등의 불빛도 전차도 없었다. 철도의 작업장과 기차역은 물론 공장들도 모두 문을 닫았다. 심지어 식당의 웨이터들도 파업에 참여했다." 밀류코프는 이 그림에 날카로움을 더했다: "국정협의회에 참석하는 대표들은 전차도 탈 수 없었고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수도 없었다." 이 자유주의 역사가가 인정하듯이 파업 때문에 협의회 참석이 금지된 볼세비키당의 위력이 한껏 드러났다.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기관지 이즈베스티아 지는 8월 12일 시위의 의의를 적절하게 잘 묘사했다: "소비에트의 결의에도 불구하고....대중은 볼세비키당을 따랐다." 볼세비키당은 5주일 동안 계속 탄압을 받았으며 당 지도자들은 피신 중이거나 감옥에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시내와 교외 노동자 40만 명은 당의 촉구에 따라 파업에 참여했다. 강제 폐간되기 직전 당의 뻬쩨르부르그 기관지 [노동자]는 화해주의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당신들은 뻬쩨르부르그에서 모스크바로 장소를 옮겼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또 어디로 옮길 것인가?"

반동 세력과 정부도 틀림없이 이와 똑같은 질문을 자기들에게 던졌을 것이다. 키에프, 코스트로마, 짜리친 등에서도 하루동안 국정협의회에 항의하는 총파업 또는 부분파업이 벌어졌다. 선동은 전국을 포괄했다. 가장 한적한 벽촌을 포함하여 모든 곳에서 볼세비키당은 이렇게 경고했다: 국정협의회는 "반혁명 음모의 모습을 명확히 드러냈다." 8월말이 되면 이 경고의 의미는 모든 인민의 눈앞에 확연히 드러난다.                           

모스크바의 부르주아 뿐 아니라 국정협의회 참석자들도 대중의 무장시위, 충돌과 전투의 "8월 시기"를 예상했다. 그러나 성조오지 기병대, 장교 부대, 사관생도, 개별 기병대 부대 등이 파업에 대한 복수를 생각하고 있는 마당에 거리로 나서는 것은 위험하다고 노동자들은 생각했다. 주둔군을 거리로 불러낼 경우 이들 가운데 분열이 일어나 도발을 준비하고 있는 반혁명 세력의 일을 덜어줄 것이었다. 볼세비키당은 주둔군의 시위를 촉구하지 않았다. 또한 올바른 전략적 감각을 지닌 노동자들은 스스로 공공연한 충돌을 피했다. 하루 파업은 정세와 완벽히 들어맞았다. 국정협의회에 대한 볼세비키당의 선언문과 마찬가지로 파업은 은폐될 수 없었다. 도시 전체가 암흑에 빠지자 러시아는 전기 배전반을 장악한 볼세비키당의 존재를 보았다. 뻬쩨르부르그 뿐 아니라 모스크바도 소동을 벌였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모스크바에서 가부장들의 온유함이 과시되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모스크바의 노동자 지구들은 갑자기 이빨을 드러내었다." 수하노프는 이 날의 의의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볼세비키당이 참석하지 않은 국정협의회에서 참석자들은 노동계급 혁명의 드러낸 이빨을 의식하며 회의 좌석에 꼼짝 말고 앉아 있어야 했다.    

모스크바의 재치꾼들은 케렌스키가 "왕관을 쓰기 위해서" 모스크바에 왔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코르닐로프는 같은 목적을 위해 전쟁 총사령부에서 출발하여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교회협의회 대표들을 비롯해 수많은 대표들이 그를 영접했다. 환한 붉은 색 외투를 입은 테킨스키 기병대는 코르닐로프를 실은 기차가 도착하자 반달형 칼을 빼어 들고 플랫폼에 두 줄로 늘어섰다. 그가 호신 부대와 대표들을 사열하고 있을 때 환희에 찬 여성들이 이 영웅에게 꽃잎을 뿌렸다. 입헌민주당의 로디체프는 이렇게 외치면서 환영사를 끝냈다: "러시아를 구하시오. 그러면 감사하는 사람들이 귀하에게 보답할 것입니다." 애국주의자들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백만장자 상인의 부인 모로조바는 코르닐로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장교들은 그를 어깨 위로 실어서 사람들 앞으로 데리고 갔다. 총사령관이 역 앞 광장에서 늘어선 성조오지 기병대, 사관생도, 장교 연수학교, 카자흐 기병대 등을 사열하고 있을 때 그의 라이벌이자 전쟁장관인 케렌스키는 모스크바 주둔군의 행진을 사열하고 있었다. 역에서 코르닐로프는 짜르의 계단을 따라 이바르스키 사당으로 갔다. 여기에서 그는 거대한 모피 모자를 쓴 이슬람교도 테킨스키 기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참배를 했다. 카자흐 장교 그레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렇게 극진한 환대를 받자 코르닐로프는 신앙심이 깊은 모스크바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반혁명 세력은 거리를 장악하려 했다. 자동차들은 코르닐로프의 전기와 초상화를 다량으로 배포했다. 이 영웅을 지지할 것을 인민에게 촉구하는 벽보가 벽을 뒤덮었다. 마치 국왕처럼 코르닐로프는 자신의 승용차에서 정치인, 산업가, 금융인 등을 접견했다. 은행 대표들은 나라의 재정 상태를 그에게 보고했다. 10월당의 쉬들로프스키는 의미심장하게 이렇게 적고 있다: "의원들 가운데 밀류코프만이 코르닐로프를 그의 기차 안에서 만났다. 이들의 대화 내용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나중에 밀류코프는 이 대화 내용을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만큼만 들려줄 것이다.

이 순간 군사 봉기가 한창 준비중이었다. 국정협의회가 열리기 며칠 전에 코르닐로프는 리가를 지원한다는 핑계로 4개 기병 사단에게 뻬쩨르부르그 공격 준비를 명령했었다. 군대 본부는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오렌부르그 카자흐 연대를 모스크바에 보냈다. 그러나 케렌스키의 명령으로 이 연대는 도중에 저지 당했다. 코르닐로프 쿠데타 조사위원회 앞에서 나중에 케렌스키는 이렇게 증언했다: "모스크바의 국정협의회 개최 도중에 독재체제가 선언될 것이라고 얘기를 들었다." 국민의 단결을 의기양양하게 외치던 그때 전쟁장관과 총사령관은 서로에 대해 전략적인 대항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가능한 선에서 예의범절은 지켜졌다. 이 두 진영 사이의 관계는 공식적인 우호의 확인과 내전 사이에서 왔다갔다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대중은 7월 경험의 교훈 때문에 투쟁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 당국, 부르주아 신문 편집실 등은 볼세비키당의 봉기가 임박했다는 소문을 열정적으로 유포하고 있었다. 볼세비키당의 뻬쩨르부르그 조직들은 공개 선언문을 통해 적이 도발을 획책할지 모른다고 대중에게 경고했다. 한편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나름대로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볼세비키당을 비롯한 소비에트 정당들로부터 2인씩 구성된 6인 비밀 혁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성조오지 기병대, 장교, 사관생도 등에게 코르닐로프가 행진하는 방향으로 대오를 형성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비밀 명령문이 하달되었다. 7월 사태 이후 병영 출입이 금지되었던 볼세비키들은 이제 자유롭게 출입이 허용되었다. 이들이 없이는 병사들을 획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개의 장에서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볼세비키당 지지대중에 대항하는 강력한 역량을 구축하기 위해 부르주아 계급과 협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밀실에서는 똑같은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이 자기들에 의해 국정협의회 참석이 봉쇄된 볼세비키당과 함께 부르주아의 음모에 저항하는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대중을 준비시키고 있었다. 어제 이들은 항의 파업을 반대했는데 오늘은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투쟁을 준비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 대중은 경멸이 섞인 분노를 표시하면서도 투쟁 촉구에 대해서는 열렬하게 응답했다. 이에 대해 화해주의자들은 기뻐하기보다는 두려워했다. 이 터무니없는 이중성은 거의 정반대 방향으로 공개적인 배신행위를 초래했다. 만약 화해주의자들이 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정책을 추구했더라면 이 이중성은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현상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들은 이 이중성의 결과를 감내하고 있을 뿐이었다.

큰 사건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가 완연했다. 그러나 국정협의회 회의 기간에는 아무도 봉기를 계획하고 있지 않은 것이 명확한 듯했다. 어쨌든 케렌스키가 나중에 증언 과정에서 언급한 소문을 올바른 것으로 확인시켜주는 증거는 공식 문서, 화해주의자들의 문서, 우익 인사의 회고록 등 어디에도 없었다. 큰 사건이 터질 것에 대비한다는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지배하고 있을 뿐이었다. 밀류코프의 증언은 이후 사건들의 진행에 의해 그 올바름이 확인되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코르닐로프 자신은 국정협의회 이전에 이미 8월 27일로 거사 날짜를 잡고 있었다. 물론 이 날짜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정보가 없는 자들이 큰 사건이 터질 날짜를 계속 제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소문이 되어 사방에서 행정당국에 전달되었다. 어느 순간이든지 큰 사건이 곧 터질 것 같았다.

모스크바의 부르주아와 장교들의 흥분된 분위기를 보면 반란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힘을 시험하기 위해 반혁명 시위가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국정협의회 참석자들이 중심이 되어 소비에트에 대항하는 조국수호 지도부를 수립할 개연성이 이것보다 더 컸다. 우익 언론은 공공연히 이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것도 불가능했다. 대중이 파업을 통해 이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결전의 순간을 재촉시킬 생각을 했더라도 파업 때문에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혁명을 기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동자와 병사들이 경계의 눈초리를 번득이고 있다; 반란은 연기되어야한다. 성직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코르닐로프와 합의한 후 계획한 이바르스키 사당으로의 대대적인 행진도 취소되었다.

즉각적인 위험이 없다고 확신하자마자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서둘러서 별일이 없었던 체 했다. 심지어 이들은 볼세비키들의 병영출입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병영은 볼세비키 연설자들을 계속 요구했다. 체레텔리, 단,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킨추크 등은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틀림없이 서로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무어인 오델로는 그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볼세비키들은 오델로의 처지에 빠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들은 자기 과업을 끝까지 밀어붙일 생각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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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계급사회에서 정부의 의지는 하나로 통일되어야한다. 속성상 이중권력은 철저한 분열을 드러낸 사회의 위기를 반영하는 체제이다. 따라서 이 속에는 잠재적 또는 실제적 내전이 도사리고 있다. 이제 이중권력을 원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강력하며 집요한 "철권" 정부가 모두의 소망이었다. 케렌스키의 7월 정부는 무제한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서로를 마비시키고 있던 민주주의 진영과 부르주아 진영 위에 군림하는 "진정한" 권력자를 추대하기로 양 진영은 합의를 보았다. 모든 계급들 위에 군림하며 사회의 운명을 결정하는 권력자의 체제를 보나파르트 체제라고 한다. 코르크에 두 개의 포크를 대칭으로 찔러 놓으면 양쪽으로 크게 흔들릴 수 있지만 핀 위에서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보나파르트 초(超)중재자를 역학으로 표현한 것이다. 국제 정세를 배제하면 이러한 권력의 안정도는 국내에 존재하는 두 적대 계급의 균형에 의해 결정된다. 5월 중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회의 중에 트로츠키는 케렌스키를 "러시아 보나파르트 체제의 중심점"이라고 규정했었다. 이 개념은 실제 인물이 아니라 인물의 역할을 표현했다. 따라서 필자의 이 발언은 추상적으로 들렸다. 다들 기억하고 있듯이 7월초 소속 정당의 지시를 받고 장관들은 모두 사임했다. 케렌스키의 정부 구성을 허용하기 위해서였다. 7월 21일 이 실험은 좀더 과시적 형태로 반복되었다. 두 적대 진영은 케렌스키 속에서 자신의 일부를 보았기 때문에 모두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트로츠키는 감옥에서 이렇게 적었다: "자기 그림자조차 무서워하는 정치인들이 소비에트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소비에트는 감히 권력을 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유산계급들을 전부 대변한 입헌민주당은 아직 권력을 잡을 수 없었다. 따라서 거대한 화해자, 중재자, 중재법원을 찾아야했다."                     

케렌스키는 자기 명의로 인민에게 선언문을 발표했다: "정부의 재구성이 최고 통치행위에 대한 본인의 책임감을 증대시킨다면 정부의 수반인 본인은 이를 주저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보나파르트주의를 순수하게 드러낸 언사이다. 그러나 우익과 좌익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그의 정권은 언사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덩치가 작은 코르시카인 나폴레옹은 나이 어린 부르주아 국가 위로 자신을 상승시켰다. 이를 위해서는 혁명은 이미 근본적 임무 즉 귀족 지주의 토지를 농민에게 넘겨주는 임무를 달성했어야 했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기초 위에 전쟁에 승리하는 군대가 창설되어야 했다. 18세기에 혁명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이 시점부터는 혁명에 대한 반동이 시작되었다. 역사의 강물은 거꾸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반동 때문에 혁명의 근본 성과들이 유실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혁명의 성과들은 방어되어야했다. 성숙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대단히 미숙한 노동계급과 자본가 계급 간의 적대관계는 이미 기초가 뒤흔들린 나라를 극도의 긴장 상태로 몰고 갔다. 이 상황에서 나라의 "재판관"이 반드시 등장해야했다. 나폴레옹은 대부르주아에게는 부자가 될 가능성을, 농민에게는 토지를, 농민의 자식들과 부랑자들에게는 전쟁의 약탈물을 보장했다. 첫 번째 보나파르트의 보나파르트 체제는 토대가 확고했다.

프랑스의 1848년 혁명은 농민에게 토지를 넘겨주지도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이것은 한 사회체제를 다른 사회체제로 교체하는 대혁명이 아니었다. 다만 같은 사회체제 안에서 정치적 인물들을 교체하는 정치혁명에 불과했다. 나폴레옹 3세의 군대는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따라서 고전적 보나파르트 체제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들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체제의 성립에 유리한 조건들이 있었다. 50년 동안 성숙하고 있던 노동계급은 6월에 위협적인 역량을 과시했으나 권력을 장악할 능력은 없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노동계급을 무서워했으며 이 계급을 피로 진압하는 것도 무서워했다. 농민 토지소유주들은 6월 봉기를 무서워했다. 그리고 자기들의 토지를 나누어 가지려는 자들에 대해 국가가 자신들을 보호해주기를 원했다. 마지막으로 약간의 휴지기를 포함하여 20년간 계속된 강력한 경기호황은 부르주아 계급에게 사상 유례없는 부를 가져다주었다. 이 조건들은 아류 보나파르트 체제를 성립시키는데 충분했다.

"계급들 위에" 군림한 비스마르크 역시 여러 번 지적되었듯이 합법주의로 위장된 보나파르트 체제의 요소들을 정책에 담고 있었다. 그는 무기력한 1848년 독일 혁명 직후 권력의 무대에 등장했다. 그리고 독일의 통일과 같은 중대한 국내 문제에 대한 해결책 또는 반(半)해결책을 제시했다. 바로 이 때문에 그의 정권은 안정을 보장받았다. 그는 세 번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했다. 전쟁 배상금도 받아냈다. 자본주의도 강력하게 상승했다. 이 때문에 그는 수십 년을 군림할 수 있었다.

케렌스키는 러시아의 보나파르트가 되려고 했다. 그의 불행은 그가 나폴레옹이나 심지어 비스마르크와 유사하지 않다는 데에 있지 않았다. 역사는 진품이 없으면 대용품이라도 찾아 쓴다. 그러나 러시아의 보나파르트 대용품은 아직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리고 혁명의 역량을 아직 소진하지 않은 거대한 혁명이 그의 앞에 버티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아직도 토지를 보유하지 않은 농민에게 지주의 토지를 얻기 위해 싸우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전쟁은 패배만 가져왔다. 경기호황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산업의 붕괴는 계속 새로운 붕괴를 낳고 있었다. 노동계급은 후퇴했으나 결전을 위해 대오를 정비하고 있을 뿐이었다. 농민은 지주에 대한 마지막 공격을 앞두고 숨을 가누고 있었다. 억압당하던 민족들은 러시아 전제에 대항해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전쟁을 중지시키기 위해 군대는 노동계급과 노동계급 정당에 점점 가까이 이끌리고 있었다. 하층민은 대오를 통일시키고 있었던 반면 상층부는 약화되고 있었다. 여기에는 균형이 존재할 수 없었다. 혁명은 아직도 혈기가 왕성했다. 따라서 보나파르트 체제를 구축하려는 시도는 빈혈에 걸린 사람처럼 힘이 없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의 투쟁에서 보나파르트 체제가 담당한 역할을 봉건 귀족계급과 부르주아 계급 사이의 투쟁에서 절대왕정이 담당한 역할과 비교했다. 두 체제 사이에 유사성은 당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 유사성은 권력의 계급적 내용이 드러나는 순간 사라진다. 두 착취 계급이 착취당하는 대중의 공격에 대항해 자신들을 방어할 필요가 있을 때 구 사회의 주인과 새로운 사회의 주인 사이에 중재자가 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중세 귀족과 농노 사이에는 "공정한" 중재가 불가능했다. 짜르는 지주의 이해를 나이 어린 자본주의의 이해와 화해시키고 있었다. 농민의 눈에 그는 중재자가 아니라 착취 계급들의 대표였을 뿐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보나파르트 체제는 노동계급과 부르주아 계급 사이의 중재자가 아니었다. 사실을 말하면 이 체제는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가장 집중적으로 구현한 체제였다. 인민의 목에 군화 발을 들이대면서 등장한 보나파르트는 토지, 지대, 이윤 등을 보호하는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정권의 특수성은 정권을 방어하는 수단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대문에 서 있는 수위와 달리 경비원은 지붕 꼭대기에 앉아 있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수위와 같다. 보나파르트 체제의 독립성은 외적이고 장식적인 치장이 크게 과장된 것에 불과하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이 걸치고 있던 화려한 망토는 보나파르트 체제를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가들의 두려움을 십분 활용하면서 비스마르크는 모든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는 유산계급들의 변함없는 전권대사였다. 그는 결코 유산계급들을 배신하지 않았다. 다만 노동계급의 압력이 계속 거세었기 때문에 무게가 있는 관료 중재자로 융커계급과 자본가 계급 위에 군림했을 뿐이었다. 이것이 그의 핵심 기능이었다.

소비에트 체제는 노동계급 및 농민과의 관계에서 정부에게 상당한 독립성을 허용한다. 그리고 비록 토론과 갈등이 존재하더라도 이들 사이의 이해가 근본적으로 화해할 수 있는 선에서 이 두 세력을 "중재"한다. 그러나 근본적 이해와 관련되어서 소비에트 국가와 부르주아 국가 사이에 "공정한" 중재자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국내에서 정부는 사회 원인들 때문에 노동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의 투쟁을 "공정하게" 중재하는 시늉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똑같은 원인들 때문에 국제무대에서 소련은 국제연맹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케렌스키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위력은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의 약점들은 전부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나라의 정점에 올려졌으나 그의 무기력은 나라의 기를 죽였을 뿐이었다. 부르주아 계급과 민주주의의 지도자들은 케렌스키에게 "복종한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전능한 중재자 케렌스키는 실제로 밀류코프 그리고 특히 부캐넌에게 복종했다. 케렌스키는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하고 지주들의 토지를 농민의 공격에서 구해주고 사회개혁을 더 좋은 나중으로 미루었다. 혁명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그의 정부는 허약했다.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수 없었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구국 정부"라는 이름은 별 의미가 없었다. 대신 이 정부의 보수적인 부르주아적 성격과 "독립성"은 확연히 증대했다.

케렌스키 정권은 부르주아 통치의 필연적인 형태였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치인들은 이 정권에 대해 불만이 대단히 많았다. 그리고 이들은 그를 될 수 있으면 빨리 제거할 준비를 했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출신의 거국적 중재자를 자기들이 정한 반동적 인물로 갈아치우는 것에 대해 유산계급들은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왜 하필이면 코르닐로프가 선정되었는가? 러시아의 보나파르트는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의 성격과 맞아 떨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후진적이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되어 있고 재능도 없고 쇠퇴하고 있어야 했다. 거의 굴욕적인 패배만 당한 군대 내부에서 인기 있는 장군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코르닐로프는 적합하지 않은 인물들을 하나 하나 제거하는 과정 끝에 남은 마지막 인물이었다.

이렇게 해서 화해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연립정부 내에서 진지하게 연합할 수도 없었고 나라를 구원할 유일한 인물에 대해 동의할 수도 없었다. 혁명의 과업이 완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단결할 수가 없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자들을 신뢰할 수 없었고 민주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을 신뢰할 수 없었다. 케렌스키가 부르주아 계급을 쌍수를 들고 환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코르닐로프는 첫 번째 기회가 닿는 대로 민주주의의 모가지를 비틀겠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이전의 정치과정에 의해 케렌스키와 코르닐로프는 서로 충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현상은 이중권력의 모순이 개인적 야망이라는 폭발적 언어로 번역된 것에 불과했다.

7월초에 뻬제르부르그의 노동계급과 주둔군 사이에는 볼세비키당의 너무 조심스러운 정책에 불만을 가진 성급한 부위가 존재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8월초에 유산계급들 사이에는 입헌민주당 지도자들의 주시하는 기다림을 참지 못한 성급한 부위가 축적되었다. 예를 들면 이 정서는 입헌민주당 대회에서 표현되었다. 일부가 케렌스키의 타도를 요구했다. 한편 좀더 날카로운 정치적인 성급함은 입헌민주당 밖에서 존재했다. 병사들에 대해 끊임없이 두려워했던 군대 지휘부, 인플레의 물 속에서 익사하고 있던 은행들, 지붕이 불타고 있던 지주의 장원들이 바로 이런 경우였다. 이들에게 "코르닐로프 만세!"는 희망, 절망, 복수에 대한 갈망의 구호가 되었다.

코르닐로프의 강령을 케렌스키는 내내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이 강령이 실현될 날짜에 대해 코르닐로프와 말다툼을 벌였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치울 수는 없다." 케렌스키를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밀류코프는 참을성을 상실한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아직도 약간 때가 이르다." 뻬쩨르부르그 대중의 열성에 의해 7월의 반(半)봉기가 일어났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산자들이 참을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8월에 코르닐로프의 봉기가 일어났다. 볼세비키당은 7월의 시위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능하면 이것의 성공을 보장해야했고 어쨌든 이 시도가 전멸로 끝나는 것을 막아야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입헌민주당도 코르닐로프 봉기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한계 내에서 두 사건은 놀랍게 대칭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대칭 속에서도 투쟁의 목표, 방식,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 점은 이후 사태의 전개를 통해 완전히 해명될 것이다.

 

 

제 7장 모스크바의 국정협의회

이미지가 집약된 것이 상징이다. 그렇다면 혁명은 상징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왜냐하면 혁명은 모든 현상들과 모든 관계들을 집약된 형태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혁명이 제시하는 상징성은 규모가 너무 거대하다. 이것이 문제이다. 따라서 개인들의 창조적 예술활동은 이 거대한 상징성을 담아낼 수 없다. 이 때문에 인류의 가장 거대한 대중 드라마인 혁명을 표현하는 예술작품들은 내용이 대단히 빈약하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정협의회는 미리 예정된 대로 실패로 끝났다. 이 회의는 아무 성과도 없었으며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역사가들에게 혁명에 대한 아주 귀중한 인상을 남겼다. 물론 이 인상은 사진의 원판처럼 거꾸로 전달되었다. 빛은 그림자로, 허약함은 강인함으로, 탐욕은 사심 없음으로, 배신은 최고의 용감성으로 비춰졌다. 10주 후 권력을 장악할 가장 강력한 혁명정당은 하찮은 존재로 인식되어 협의회 참석이 거부되었다. 동시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회진화당"(역자 주: 트로츠키가 사회혁명당을 비꼬아서 부른 이름. 사회혁명당은 그 이름과는 달리 사회혁명에는 관심이 없고 자본주의의 점진적 발전을 강령으로 삼고 있었다.)이 진지하게 취급되었다. 케렌스키는 힘과 의지의 화신으로 등장했다. 이미 그 가능성을 소진시킨 연립정부가 미래를 구원할 수단으로 언급되었다. 수백만 병사들이 증오했던 코르닐로프는 군대와 인민의 친애하는 지도자로 환영받았다. 왕당파와 흑백인조들이 제헌의회를 애호한다고 떠들었다. 정치무대에서 곧 사라질 인물들이 마지막으로 가장 훌륭한 역할을 맡는 것에 동의한 것처럼 행동했다. 이들은 모두 있는 힘을 다해 이렇게 외쳤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원했던 것이다! 저들이 막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진작 이렇게 했을 것이다! 이들을 막은 자는 노동자, 병사, 농민, 억압당하던 민족들이었다. 혁명에 대한 이들의 충성심이 표현되는 것을 수천만 "반란 노예들"이 막았다. 이들이 모스크바로 피신하자마자 바로 이들 눈앞에서 파업이 터졌다. "어두운 세력", "무식", "참주선동" 등에 시달린 2천5백 명의 국정협의회 참가자들은 회의장으로 쓰인 극장에 몰려들었다. 그리고 신파조의 환상을 깨지 않기로 말없이 서로 합의했다. 파업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없었다. 이들은 볼세비키라는 단어를 발음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플레하노프는 지나가는 투로 "레닌에 대한 불쾌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마치 완전히 타도된 적을 언급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 국정협의회는 마지막 세세한 사항에 이르기까지 사진 원판처럼 현실을 완전히 거꾸로 치장했다. 반(半)저승세계에 있는 이들은 "나라의 살아있는 세력"이라고 스스로를 포장했다. 인민의 진정한 지도자 레닌은 이들에게 시체에 불과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환하게 불이 밝혀진 국정협의회 회의장은 둘로 확연히 갈라졌다. 오른쪽에는 부르주아 계급의 대표들이 왼쪽에는 민주주의 진영의 대표들이 자리를 잡았다. 관현악단석과 오른쪽 특별관람석에는 제복을 입은 장군들이 다수 앉아있었다. 구 왕정의 인사들이 애호했던 왼쪽 특별관람석에는 연합국과 우방국의 고위 대표들이 앉아있었다....우리가 소속된 극좌 인물들은 관현악단석의 조그만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볼세비키들의 불참 때문에 마르토프의 추종자들이 극좌 세력이 되었다.

오후 4시쯤에 혁명정부의 권력을 상징하듯 케렌스키는 두 명의 젊은 장교, 한 명의 병사, 한 명의 수병을 대동하고 무대에 등장했다. 이들은 케렌스키의 뒤에서 마치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처럼 꼼짝 않고 서있었다. 미리 합의한 대로 케렌스키는 우익의 짜증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공화국이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정부의 이름으로 "러시아 조국의 대표들"을 환영했다. 자유주의 역사가 밀류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최근 며칠간의 영향 때문인지 그의 연설의 전반적 어조는 품위와 자신감보다는 제대로 숨겨지지 않은 공포를 드러냈다. 그는 협박하는 듯한 높은 톤을 사용하여 마음속의 공포를 억누르려했다." 볼세비키들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은 채 케렌스키는 그들이 앉았을 좌석 쪽으로 주먹을 흔들어 보인 후 연설을 시작했다. 정부를 타도하려는 어떤 시도도 "피와 무쇠로 진압될 것이다." 그러자 극장 내의 좌우익 모두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코르닐로프에게 그는 이렇게 협박했다: "누가 어떤 최후통첩을 들이밀든 나는 그자를 최고 권력이자 최고 정부수반인 나의 의지에 복종시킬 것이다." 이 말은 환희에 찬 박수를 받았으나 박수는 좌익에게서만 나왔다. 케렌스키는 계속해서 자기가 "정부 수반"이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사실 그는 자신이 최고 통치자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전선에서 도착한 여러분의 전쟁장관이자 최고 지도자인 본인은 이렇게 말한다...임시정부의 의지와 권력보다 더 높은 의지와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자들은 이 공포탄의 연발사격에 황홀해했다. 이렇게 하면 진짜 총탄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이들은 생각했다.

정부의 수반 케렌스키는 이렇게 확인한다: "인민과 군대의 최상 분자들은 전부 러시아 혁명의 승리를 전선의 승리와 연상시켰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진흙탕에 짓이겨졌다. 저들은 우리의 신념에 침을 뱉었다." 이렇게 그는 전선의 6월 공세를 서정적으로 요약했다. 자신은 어떤 경우에도 전쟁을 완전한 승리로 이끌고자한다. 8월 4일 교황은 평화조약을 제안했다. 이 제안이 러시아의 이해를 침해하면서 평화를 성사시킬 위험성을 언급한 후 케렌스키는 연합국들의 고상한 충성심을 찬양한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막강한 러시아 인민의 이름으로 하나만 말하겠다: 우리는 오직 완전한 승리만 예상했다." 연합국 외교관들이 앉아있던 특별관람석에서 박수갈채가 터지자 아래 층 좌석에 앉아있던 참석자 전원이 일어나 계속 박수를 쳤다. 다만 몇몇 국제주의자들과 노동조합 대표로 참석한 볼세비키 몇 명만이 그대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장교들의 특별관람석에서 누가 이렇게 고함을 지른다: "마르토프, 자리에서 일어서라!" 그러나 마르토프는 연합국들의 사심 없음에 코방귀도 끼지 않을 정도의 줏대가 있었다. 그는 명예로운 인물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일어서고 있던 피억압 민족들에게 케렌스키는 협박이 가미된 주일학교 설교를 했다. "짜르 전제의 쇠사슬에 시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던 우리는 모든 민족들의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피를 쏟았다." 이렇게 그는 다른 민족들이 짊어진 쇠사슬을 자기가 짊어졌다고 자랑하고 있다. 감사하는 마음에 사로잡힌 그는 억압당하고 있는 민족들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여러분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는 정부를 참고 견뎌야 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 속에 있는 이 강력한 불길을 느끼지 못하는가?...여러분 속에 있는 힘, 규율에 복종하겠다는 의지, 자기희생, 노동 등을 느끼지 못하는가?...온 국민의 역량이 단합되는 멋진 광경을 보여주지 않겠는가?" 파업이 벌어지고 있던 날에 그는 이렇게 연설했다. 그리고 이때 코르닐로프의 기병대는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를 구할 것이다." 혁명 정부가 인민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이 헛소리뿐이었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지방출신 대표들 다수는 처음으로 케렌스키를 보았다. 이들은 반은 실망하고 반은 분노한 채 회의장을 나왔다. 이들 앞에는 고문을 당한 듯 창백한 얼굴을 한 젊은 배우가 대사를 암송하는 자세로 서있었다. 그는 누군가를 협박하면서 자신이 권력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옛날 방식으로 심어주려고 애썼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불쌍하다는 느낌만 자아냈다."

다른 장관들의 연설은 연설자 개인의 파산보다는 화해주의 연립정권 자체의 파산을 드러냈다. 내무장관 아브크센티에프가 협의회에 참석한 국민의 대표들에게 제출한 거대한 아이디어는 "순회 인민위원" 제도였다. 공업장관은 자본가들에게 근소한 이윤으로 만족하라고 충고했다. 재무장관은 간접세를 인상하여 유산계급들의 직접세를 인하하겠다고 약속했다. 우익은 이 말들의 함의를 유념하지 않은 채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이에 대해 나중에 체레텔리는 이들이 자기희생에 대한 열정이 없다고 당혹스럽게 지적했다. 농업장관 체르노프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명령받았다. 토지 몰수의 유령이 되어 오른쪽에 앉은 연합국 대표들의 화를 돋우면 문제가 될 것 같아서였다. 국민의 단결을 위해서 농업문제가 없는 체하기로 결정되었다. 화해주의자들은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농민의 진정한 목소리는 연단에서 한번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8월에 농업문제는 전국에 걸쳐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가을에 억누를 수 없는 농민전쟁이 되어 터져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 하루동안 국정협의회는 정회를 했다. 이 날 좌우익 진영은 모두 서로의 세력을 정찰하고 자기 세력을 동원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14일 회의는 극도의 긴장 속에 열렸다. 코르닐로프가 특별관람석에 모습을 드러내자 국정협의회의 절반을 차지한 우익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역시 절반을 차지한 좌익은 거의 일심동체가 되어 의자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장교들의 특별관람석에서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고함과 함께 거친 욕설이 나왔다. 정부 장관들이 나타나자 좌익은 케렌스키에게 길게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밀류코프가 증언하듯이 "우익은 좌석에 앉아 시위하듯이 박수를 거부했다." 서로 적대적인 박수의 충돌 속에 내전의 임박한 전투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한편 무대 위에서는 분열된 회의장의 양측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정부의 감투를 쓴 채 계속 앉아있었다. 총사령관에 대해 비밀리에 군사적 조치를 취한 케렌스키는 자신이 "러시아 인민의 단결"을 구현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그는 이렇게 발표했다: "회의에 참석한 총사령관을 통해 자유와 조국을 위해 용감하게 죽고 있는 우리 군대 전부를 환영하자." 이 군대에 대해 그는 첫날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의 희망은 진흙탕에 짓이겨졌다. 저들은 우리의 신념에 침을 뱉었다." 그러나 신경쓸 것 없다! 상황을 구원하는 말이 발견되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일어나 코르닐로프와 케렌스키에게 열렬히 박수를 보냈다. 온 국민의 단결이 다시 한번 보존되었다!

지배계급들은 역사의 필요에 의해 목이 졸린 채 역사 가면극을 연출했다. 다시 한번 변한 모습으로 인민 앞에 서면 자신들의 비중과 위력이 더욱 부각될 것이라고 이들은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1대부터 4대 의원들 모두가 나라의 양심을 대변하는 인물로 무대 위에서 소개되었다. 한때 그렇게 날카로웠던 서로간의 이견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모든 정당들은 "당과 계급을 초월하는 강령"에 기초하여 이제 어렵지 않게 단결했다. 그런데 이 강령을 기초한 자들은 며칠 전에 코르닐로프에게 환영의 전보를 보낸 공인(公人)들이었다. 무려 1906년에 개원한 제 1대 의회를 대표하여 입헌민주당의 나보코프는 "단독 평화협정의 가능성을 넌지시 비추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 자유주의 정치인은 나중에 회고록에서 자기를 포함한 다수의 입헌민주당 지도자들이 단독 평화협정을 구원의 유일한 길로 생각했다고 말한다. 짜르가 개원한 의회의 나머지 의원들도 똑같이 혁명에게 우선 피의 공물을 요구했다. "장군님! 발언하십시오!" 회의는 이제 결정적인 순간에 도달했다. 케렌스키는 총사령관에게 군사적 상황을 개략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연설을 제한할 것을 끈질기게 그러나 헛되이 주문했었다. 그는 과연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밀류코프는 목격자로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남부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몽고인의 외모를 가진 땅딸막한 체구의 강인해 보이는 인물이 무대 위에 나타났다. 악의가 번뜩이는 그의 작고 검은 눈은 날카롭게 대회장을 훑어보았다. 대회장은 박수갈채로 뒤흔들렸다. 모두가 좌석에서 튀어나오듯이 일어섰다. 그러나 병사들은 예외였다." 착석한 병사들에 대해 우익 참석자들이 욕이 섞인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 "무례한 놈들, 일어서지 못해!" 그러자 좌석에 그대로 앉은 병사 대표들은 "노예 같은 놈들 같으니!"라고 대꾸했다. 고함이 소동으로 바뀌었다. 케렌스키가 요구했다: 모두 조용히 하고 "임시정부 최고 군인"의 연설을 들읍시다. 나라를 구할 생각이 있는 장군답게 날카롭고 끊어지는 명령조로 코르닐로프는 원고를 읽어나갔다. 이것은 모험가 필로멘코의 구술을 모험가 자보이코가 받아 적은 것이었다. 그러나 원고가 제시한 강령 도입부는 원래 의도에 비해 훨씬 온건했다. 명백히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코르닐로프는 주저 없이 군대와 전선의 상황을 가장 암울하게 채색했다. 그의 연설의 핵심은 군사적 전망이었다: "독일군은 이미 리가(역자 주: 북해의 도시. 현재 라트비아의 수도.)를 노크하고 있다. 불안정한 러시아군이 독일군을 리가만(灣)에서 저지하지 않으면 이들이 뻬쩨르부르그로 진격하는 길이 뻥 뚫리게 것이다." 이렇게 말한 후 코르닐로프는 화제를 바꾸어 정부를 공격했다: "군대의 정신과 인식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인물들이 혁명 후 일련의 입법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군대는 자기 목숨에만 몸을 떠는 미친 폭도로 변했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리가는 가망이 없다. 그리고 마치 독일군이 이 방어능력이 없는 도시를 차지하라고 초대라도 하듯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총사령관은 공개적이고 도전적으로 이 사실을 드러냈다. 그리고 뻬쩨르부르그는 어떤가? 코르닐로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의 강령을 실행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면 뻬쩨르부르그를 살릴 수 있다; 그러나 서둘러야한다! 모스크바의 볼세비키당 신문은 이렇게 적었다: "그의 발언은 경고인가 아니면 협박인가? 타르노폴의 패배로 코르닐로프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리가가 함락되면 그는 독재자가 될지도 모른다." 이 암시는 의심이 가장 많은 볼세비키의 의심보다 음모자들의 계획을 훨씬 더 정확하게 표현했다.

코르닐로프에게 베푼 멋진 환영행사에 참석했던 교회협의회는 총사령관을 지지하기 위해 자신의 가장 반동적인 인물인 플라톤 대주교를 연단으로 올려 보냈다. 살아있는 세력의 대표인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우리 군대의 끔찍한 현실을 보고 받았다. 나는 러시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걱정하지 마라, 나의 친애하는 조국이여. 두려워하지 마라, 나의 조국이여....러시아를 구원하는데 기적이 필요하다면 교회의 기도에 응답하여 신은 기적을 행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 토지를 보호하는 일과 관련해서는 이 정교회 주교는 훌륭한 카자흐 기병대를 신보다 더 좋아했다. 그러나 그의 연설의 요지는 이것이 아니었다. 대주교는 이렇게 불평했다: 장관들의 연설에서 "신이라는 말은 실수로라도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 코르닐로프는 혁명정부가 군대의 기상을 죽였다고 비난했다. 이와 똑같이 플라톤은 "신을 사랑하는 우리 러시아 인민의 지도자인 장관들이" 범죄적으로 신앙심이 없다고 비난했다. 라스푸틴의 발밑 먼지에서 몸을 뒹굴었던 성직자들은 이제 대담해져서 공개적으로 혁명정부에게 고해를 했다.

제 12 카자흐 군단의 선언문은 칼레딘 장군이 낭독했다. 그의 이름은 당시 끈질기게 언급되었다. 군대 내에서 그가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고 평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칭찬하는 어느 인물의 말을 인용해보자: "칼레딘은 군중을 즐겁게 해주는 방법도 몰랐고 그럴 의사도 없었기에 브루쉴로프 장군과 결별했다. 그리고 시대 정신에 적응할 줄 모른다는 이유로 지휘관직에서 강제로 물러났다." 5월초에 돈강 지역으로 돌아온 이 카자흐 장군은 돈 군대의 추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래서 역사가 가장 깊고 가장 위용이 있는 카자흐 군대의 추장이 된 그는 카자흐족 특권 상층부의 강령을 제시할 임무가 있었다. 선언문이 반혁명적이라는 비난을 일축한 후 그는 위험한 순간에 볼세비키당에 대항하기 위해 장관-사회주의자들이 카자흐 군대의 도움을 청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런데 이 음울한 장군은 예상 밖으로 민주주의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케렌스키가 감히 큰 소리로 말하지 못했던 공화국이란 말을 그가 천둥 같은 목소리로 발음했기 때문이었다. 회의장의 참석자 대다수는 이 카자흐 장군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리고 체르노프 장관은 더 열성적으로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이 장군은 짜르 전제가 제공할 수 없었던 것을 아주 진지하게 공화국에게 요구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예측했다: 유럽은 카자흐족의 영토가 되던가 아니면 공화국이 될 것이다. 다만 칼레딘은 러시아가 카자흐족의 나라이면서 동시에 공화국이 되는 것에 동의했다. "정부에는 패배주의자가 있을 자리가 없다"고 선언문을 읽은 후 은혜를 모르는 이 장군은 불행한 체르노프 쪽으로 거칠고 무례하게 눈을 돌렸다. 자유주의 언론은 이렇게 보도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체르노프에게 고정되었다. 그러자 그의 머리는 탁자 위에 낮게 숙여졌다." 정치적 입장이 전혀 없었던 칼레딘은 반동 세력의 군사 강령을 완벽하게 전개시켰다: 병사위원회를 철폐한다; 지휘관들의 권한을 회복시킨다; 전선과 후방을 똑같이 취급한다; 병사들의 권리를 재고한다; 즉 이들을 완전히 무시한다. (우익은 박수를 보냈으나 좌익은 항의를 하고 야유의 휘파람까지 불었다.) "평온하고 신중하게 작업을 해야하므로" 제헌의회는 모스크바에서 열려야한다. 국정협의회에서 미리 준비된 이 연설은 총파업 다음날 칼레딘이 낭독했다. 모스크바에서 "평온하게" 작업한다는 그의 표현은 파업 때문에 농담처럼 들렸다. 이 카자흐 공화주의자 장군의 연설은 회의장의 온도를 비등점까지 올렸다. 그러자 케렌스키는 자신의 권위를 즉시 행사했다: "회의 참석자가 정부에게 요구사항들을 피력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왜 그는 국정협의회를 소집했는가? 흑백인조들 중 인기 있는 푸리쉬케비치는 좌석에서 이렇게 고함질렀다: "우리는 정부의 감독관이다!" 유태인 학살들을 조직한 이 작자는 2개월 전까지만 해도 감히 얼굴을 내밀지 못했었다.

민주주의 진영의 공식 선언문은 모든 문제들에 대해 해답을 시도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해답을 하나도 제시하지 못한 끝없이 긴 문서였다. 좌익의 따뜻한 환영을 받은 집행위원회 의장 체이제가 이것을 낭독했다.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만세!"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자신을 결코 지도자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이 겸손한 코카서스인은 틀림없이 당황했을 것이다. 자기를 정당화하는 어조로 민주주의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권력을 추구해본 적이 없으며 권력을 독점할 욕구도 없었다." 나라와 혁명의 이해를 보존할 능력이 있는 세력을 지지하기 위해 이 문서는 준비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철폐할 수 없다. 이것만이 나라를 무정부적 혼란에서 구해왔다. 병사 위원회도 해체할 수 없다. 이것만이 전쟁의 계속을 보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권계급들은 어떤 경우에는 인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야한다. 그러나 지주의 토지는 강제 몰수로부터 보호되어야한다. 민족문제의 해결은 제헌의회까지 연기되어야한다. 반면 좀더 시급한 개혁들을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선언문은 평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정책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이 문서는 부르주아 계급을 만족시키지 못한 채 대중의 분노를 촉발시키기 위해 특별히 준비된 것처럼 들렸다.

회피적이며 무미건조한 연설을 통해 농민 집행위원회의 대표는 청중에게 "토지와 자유" 구호를 상기시켰다. 이 구호를 위해 "최상의 투사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그는 말했다. 모스크바의 어느 신문은 공식 속기록에 빠진 일화를 보도하고 있다: "회의 참석자 전원은 좌석에서 일어나 특별관람석에 앉아있는 슐뤼셀부르크 감옥의 죄수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놀라운 정도로 혁명이 얼굴을 찌푸렸다! "회의 참석자 전원"이 중노동형에 처해진 과거의 정치범 몇 명을 기념하고 있다. 알렉세이예프, 코르닐로프, 칼레딘, 플라톤 대주교, 로지안코, 구츠코프 그리고 핵심적으로 밀류코프 등 짜르 왕정을 지탱한 자들이 감옥에서 목 졸라 죽이지 못했던 인물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교수형 집행인들 또는 교수형 집행인의 동료들은 자기들이 죽인 혁명 열사들의 후광으로 자기들을 치장하려고 했다!

15년 전에 이 회의장의 절반을 차지한 우익 지도자들은 표트르 대제의 슐뤼셀부르크 요새 함락 200주년을 기념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혁명 분파의 잡지 이스끄라 지는 이렇게 적었다: "이 애국주의 기념행사를 생각하면 가슴에 분노가 끓어오른다. 저 저주받은 섬의 요새는 미나코프, 미슈킨, 로가초프, 슈톰베르크, 울리아노프, 게네랄로프, 오시파노프, 체비로프, 안드리우쉬킨 등이 처형된 장소이다. 이 석조 감옥에서 클리멘코는 밧줄로 목을 매어 죽었으며 그라체프스키는 온몸에 등유를 끼얹어 분신 사망했으며 소피아 긴스부르크는 가위로 몸을 찔러 자살했다. 이 감옥 안에서 슈체드린, 유바초프, 코나쉐비치, 포히토노프, 이그나티우스 이바노프, 아론치크, 티호노비치 등이 정신병자가 되었으며 수많은 혁명 정치범들이 탈진, 괴혈병,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애국주의 주연에 빠져라. 왜냐하면 오늘은 그대들이 아직 슐뤼셀부르크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이스끄라 지의 좌우명은 10월당 출신의 어느 중노동 죄수가 푸쉬킨에게 보낸 편지의 한 문장이었다: "불꽃이 불길을 지핀다." 불길이 지펴져서 짜르 왕정과 슐뤼셀부르크 중노동 감옥은 한줌의 재로 변했다. 그런데 오늘 이 국정협의회 회의장에서 어제의 간수들이 혁명이 석방시킨 혁명 정치범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대단히 역설적인 일이 벌어졌다. 간수들과 죄수들이 볼세비키에 대한 공동의 증오심으로 단결한 것이다. 이스끄라 지의 과거 편집장 레닌, 위의 인용문을 쓴 트로츠키, 공화국의 감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반란 노동자들과 순종하지 않는 병사들은 모두 볼세비키였다.

제 3대 의회 의장이었을 당시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자 구츠코프는 좌익 의원들의 국방위원회 참석을 봉쇄했었다. 이 때문에 그는 혁명 후 제 1대 전쟁장관이 되었다. 그는 국정협의회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연설을 했다. 그러나 이 연설에서 아이러니는 절망과 헛되이 싸움을 벌였다. 케렌스키의 연설을 언급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부 대표들은 '극도의 경계심'과 '극도의 공포심'에 젖어있다. 이들은 병적인 심지어 이성을 잃은 절망감으로 절규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이 우리에게 접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경계심과 공포심과 절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치 막 숨이 넘어가는 사람의 고통과 같이 온몸을 관통하는 고통을 우리의 영혼 속에서 이들이 우리와 함께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배하고 명령하고 벌을 용서해주고 벌을 시행했던 자들의 이름으로 모스크바의 이 거대한 상인은 공개적으로 "막 숨이 넘어가는 사람의 고통"과 같은 느낌을 고백하고 있다. "이 정부는 권력의 그림자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옳았다. 그러나 과거에 스톨리핀의 정치 파트너였던 그 자신도 그림자에 불과했다.

국정협의회 개막일에 고리끼가 발행한 신문은 로지안코가 소총 개머리판에 쓰일 목재를 저질로 제공해 팔아먹고 부자가 되었다고 보도했다. 이때는 아직도 이름이 없었으나 미래에 소련의 외교관이 될 카라한의 제보 덕분에 시기에 어울리지 않게 사건이 하나 폭로되었다. 그러나 로지안코는 태연하게 국정협의회 연설을 통해 군수품 제조업자들의 애국주의 강령을 위엄 있게 옹호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러시아의 유일하게 합법적인 그리고 절대적으로 전국 인민의 대의기구인" 의회에게 임시정부가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불행들이 발생했다. 이것은 도를 넘어선 발언처럼 들렸다. 좌익은 웃음을 터뜨렸다. "6월 3일!"이라는 고함이 들렸다. 짜르는 헌법을 허용했다가 1907년 6월 3일에 이것을 짓밟았다. 왕정과 왕정을 지지하는 정당의 이마에 마치 노예선 노예들의 낙인처럼 이 날짜가 찍혔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날짜는 아스라한 기억에 불과했다. 그리고 천둥 같은 묵직한 저음으로 무게와 위엄을 잡고 있는 로지안코도 연단에 서 있는 순간 정치인이 아니라 살아있는 과거의 기념비처럼 보였다.

국내에서 공격을 당하자 정부는 국외에서 오래 전에 도착한 기운을 북돋우는 편지들을 제시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은 "양국 국민을 단결시키고 한 나라만의 목표를 추구하지 않겠다는 공동의 대의가 성공하도록 러시아 정부에게 모든 물질적 도덕적 지원"을 약속하는 안부 전보를 보냈다. 케렌스키는 이것을 낭독했다. 외교관들이 앉아있는 특별관람석을 향해 다시 박수가 쏟아졌다. 그러나 워싱턴에서 날아온 이 전보에 대해 회의장 절반을 차지한 우익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러시아가 국가적 욕심이 없다는 표현은 러시아 제국주의자들이 차지할 것이 거의 없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우는 그 동안 너무 자주 있었다.

화해주의적 민주주의의 공인된 대표인 체레텔리는 소비에트와 병사 위원회를 옹호했다. 그는 패배한 대의를 명예 때문에 방어하는 것 같았다. "자유 혁명 러시아의 사원이 완전히 건설되지 않은 마당에 이 기초들을 제거할 수는 없다." 혁명 후 "인민 대중은 자기 이외에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혁명 후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유산계급들은 화해주의 소비에트의 노력 덕분에 아직도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모든 국가 기능들을 연립정부에 넘긴 것"은 소비에트의 특별한 공헌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이 희생 정신에 의한 공헌을 "민주주의 진영에게서 무력을 동원하여 빼앗아야 하는가?" 그는 자기가 책임진 진지를 투쟁도 하지 않고 적에게 넘긴 것을 공개적으로 자랑하는 지휘관 같았다. 그리고 7월에는 "무정부적 혼란에 맞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누가 나섰는가?" 그러자 "카자흐 기병들과 사관생도들이다"라는 우익의 응답이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이 짧은 응답은 민주주의 진영의 상투어들을 마치 채찍질로 갈라놓은 것 같았다. 협의회에 참석한 부르주아 대표들은 화해주의자들이 자기들을 구출해왔다는 것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은 정치적 감정과는 다르다. 민주주의 진영의 은혜를 입은 부르주아 계급은 즉시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의 역사는 끝났다; 이제 카자흐 기병대와 사관생도들의 역사가 시작될 차례이다.

체레텔리는 권력의 문제를 특히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최근 몇 개월 동안 보편적 선거권에 기초하여 시의회와 도의회 선거가 열렸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이 민주적 자치단체들은 국정협의회에서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의 지도를 받으며 소비에트와 나란히 좌익을 형성했다. 정부가 민주주의 진영에 의존해온 것을 전부 청산하자고 입헌민주당이 계속 우길 생각이라면 제헌의회는 왜 소집하는가? 체레텔리는 이 주장을 개략적으로 제시하기만 했다. 왜냐하면 이 주장을 결론으로 끌고 가면 입헌민주당과의 연립정부는 형식적 민주주의와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혁명 진영이 평화에 대해 말을 너무 많이 한다고 비난하지만 평화의 구호가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아닌가? 부르주아 계급은 이 점을 잘 이해했다. 다만 전쟁을 계속하는 이 수단을 권력과 함께 자기 손에 넣기를 원했다. 체레텔리는 연립정부에 대한 찬가를 부르면서 연설을 끝냈다. 문제들을 해결할 길을 찾지 못했던 이 분열된 회의에서 그의 화해주의 상투어들은 마지막으로 한줄기 희망의 빛을 던졌다. 그러나 체레텔리 역시 이미 허깨비에 불과했다.                

민주주의 진영의 주장에 대해 우익을 대표하여 밀류코프가 응답했다. 역사는 부르주아 계급이 냉철한 정책을 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는 이 계급의 가망이 없을 정도로 냉철한 대표였다. 자기가 쓴 혁명사에서 이 자유주의 지도자는 국정협의회의 자기 연설을 명확하게 묘사했다: "밀류코프는 '혁명적 민주주의'의 오류들을 사실에 입각해 간략하게 개괄하고 요약했다: 민주주의 진영은 '군대의 민주화'에 굴복하여 전쟁장관 구츠코프를 사임시켰다; '찌머발트' 대외정책에 굴복하여 외무장관 밀류코프를 사임시켰다; 노동계급의 유토피아적 요구에 굴복하여 상공업장관 코노발로프를 사임시켰다; 소수민족들의 극단적 요구에 굴복하여 입헌민주당 장관들 나머지를 전부 사임시켰다; 농업문제에서 대중의 직접적 행동에 굴복하여 임시정부의 첫 수상 르보프공을 사임시켰다; 이것은 5번째 굴복이었다." 그는 사건들을 잘 나열했다. 그러나 해결책을 제안할 때가 되자 그의 지혜는 경찰의 강압 조치를 넘어서지 못했다: 볼세비키들의 목을 비틀어야한다. 그는 화해주의자들을 이렇게 꾸중했다: "이렇게 명백한 사실들에 직면하여 온건 민주주의 진영은 볼세비키들 사이에 범죄자들과 반역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자들의 전투적 행동을 단결시키는 근본 사상은 범죄적이라는 점을 아직 인정하지 않았다(박수)."

대단히 순종적인 체르노프는 아직도 연립정부와 혁명 진영을 단결시키는 고리인 것처럼 보였다. 칼레딘, 입헌민주당의 마클라코프와 아스트로프 등 우익의 연설자들 거의 모두는 체르노프를 공격했다. 그런데 그는 아무 말 하지 말라고 미리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방어하지 않았다. 밀류코프는 이 사실을 상기시켰다: 농업장관은 "찌머발트와 키엔탈의 반전회의에 참석하여 가장 극단적인 결의안들을 제출했다." 이 말은 그의 턱에 날린 펀치였다.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하는 정부의 장관이 되기 이전에 체르노프는 찌머발트 좌파 즉 레닌 분파의 문서들에 실제로 서명을 했었다.

밀류코프는 국정협의회에서 다음의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은 처음부터 연립정부에 반대했다; 연립 정부는 "혁명 직후 수립된 정부 즉 구츠코프와 밀류코프의 정부보다 강하기는커녕 더 허약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는 "현 정부가 인명과 재산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을 것 같아 크게 우려한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그리고 논쟁 없이" 정부를 지지하겠다고 밀류코프는 약속한다. 그런데 이 관대한 약속의 배신적 성격은 2주일이 지나면 적절히 명확해질 것이다. 다만 그의 연설은 어떤 열정이나 열렬한 항의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이 연설자는 연단에 올라설 때도 미지근한 박수를 받더니 연설을 끝내고 연단을 내려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체레텔리의 두 번째 연설은 약속, 확언, 아우성의 일색이었다: 소비에트, 병사 위원회, 민주주의 강령, 평화주의 구호 등 모든 것들은 유산계급 여러분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임을 왜 이해하지 못하는가? "전쟁장관 구츠코프와 전쟁장관 케렌스키 가운데 누가 혁명 러시아의 군대를 더 잘 동원할 수 있는가?" 여기서 체레텔리는 레닌의 말을 거의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다만 레닌이 케렌스키의 역할을 배신행위로 낙인찍은 반면 이 화해주의 지도자는 이것을 봉사행위로 간주했다. 체레텔리는 심지어 자기가 볼세비키들에게 대단히 온건한 것을 사과했다: "좌익 무정부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혁명은 경험이 미숙했다(우익의 열렬한 박수갈채)." 그러나 "첫 교훈들을 경험한" 후 혁명은 자신의 오류를 정정했다: "예외적으로 중요한 법이 이미 통과되었다." 바로 이때 모스크바는 두 명의 멘세비키, 두 명의 사회혁명당원, 두 명의 볼세비키로 구성된 6인 위원회에 의해 비밀리에 통제되고 있었다. 우익의 권력장악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화해주의자들은 우익에게 볼세비키들을 분쇄하겠다고 약속하고 있었다.       

국정협의회 마지막 날의 절정은 알렉세이예프 장군의 연설이 장식했다. 그의 권위는 구 장성들의 평범함을 대표했다. 우익의 열렬한 환호에 답하여 니콜라스 2세의 참모총장이자 러시아군의 패배를 조직한 그는 "독일 마르크화가 주머니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면서 부딪치는" 파괴적인 분자들에 대해 연설했다. 군대를 소생시키기 위해서는 규율이 필요하다. 규율을 위해서는 지휘관들의 권위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는 또 다시 규율이 필요하다. "'철의' 규율이든 '의식적인' 규율이든 '진정한' 규율이든...이 세 종류의 규율은 동일한 것이다." 그에게 모든 역사는 하인들의 집안 시중을 통제하는 규제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사 여러분, 민주주의 조직들의 존재(좌익의 웃음)라는 상상에서만 존재하는 장점을 일정 기간 희생시키는 것이 어려운가?(좌익의 소동과 고함)" 이 장군은 무장이 해제된 혁명을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촉구했다. 더욱이 끝까지가 절대로 아니라 "일정 기간!"만 맡겨달라고 했다. 전쟁이 끝나면 이것을 하나도 손상시키지 않고 돌려주겠다고 그는 약속했다. 그리고 그는 썩 나쁘지는 않은 격언으로 연설을 끝마쳤다: "필요한 것은 엉거주춤한 조치가 아닌 확실한 조치이다." 그의 연설은 체이제, 임시정부, 연립정부, 2월 체제 전체에 대한 공격이었다. 엉거주춤한 조치가 아니라 확실한 조치! 이것에 대해 볼세비키들은 기꺼이 동의했다.

그러나 알렉세이예프 장군의 연설은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 출신의 좌익 장교들에 의해 즉시 중화되었다. 이들은 "우리의 최고사령관이자 전쟁 장관"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국정협의회에 참석한 전선 대표들"의 대변인인 구 멘세비키 쿠친 중위는 수백만 병사들을 대표하여 연설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화해주의의 거울 속에서는 자신들의 얼굴을 좀처럼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신문에 실린 루콤스키 장군의 회견 내용을 읽어보았다. 연합국들이 우리를 돕지 않으면 리가는 항복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지금까지 전투의 실패와 패배들을 언제나 숨겨왔던 총사령부는 이제 부정적인 측면을 들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이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전날 똑같은 생각을 표현했던 코르닐로프를 가리키며 좌익은 "부끄러운 줄 알아라!"고 고함을 질렀다. 여기서 쿠친은 유산계급들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부르주아 상층부, 총사령부, 대회장의 우익 전부는 경제, 정치, 군사 등 세 분야 모두에서 패배주의 경향으로 찌들어 있었다. 존경스럽고 냉철한 애국주의자들의 격언은 이것이었다: 상황이 나빠질수록 더 좋다! 그러나 이 화해주의 연설자는 자기 발 밑에 지뢰를 설치하는 자살적인 주제를 서둘러 거두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군대를 소생시킬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실패하면 총사령부도 어쩔 도리가 없다...." 장교들의 좌석에서 "아니다, 구원할 수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쿠친이 다시 "아니다, 그럴 수 없다!"고 응수하자 좌익에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 해서 지휘관들과 병사 위원회들, 좌익과 우익은 회의장에서 서로에 대한 적대감에 겨워 서로 고함을 질렀다. 소위 이들의 단결에 군대의 소생이라는 강령이 달려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또한 이들의 단결이 "정직한 연립정부"의 기초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충돌은 나라를 흔들고 있던 모순들이 약하게 소리를 죽인 채 의회에서 메아리친 것에 불과했다. 보나파르트 중재자의 무대 지시에 따라 좌익과 우익의 연설자들이 번갈아 가면서 최대한 서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교회 교회협의회 조직이 코르닐로프를 지지하면 곧이어 복음주의 기독교 목사들은 임시정부의 편을 들었다. 도의회와 시의회 대표들도 짝을 지어 연설했다. 다수파의 어느 누가 체이제의 선언을 지지하면 소수파의 어느 누구는 의회의 선언을 지지했다.

억압받던 민족들의 대표들은 차례로 정부에게 애국주의 지지를 확실히 약속했다. 그러나 자신들을 더 이상 속이지 말라고 이들은 정부에 호소했다. 이들의 거주지역에서는 과거와 똑같은 관리, 똑같은 법, 똑같은 억압이 존재하고 있었다. "더 이상의 지연은 안된다. 어떤 민족도 약속만으로 살 수 없다. 혁명 러시아는 자신이 "모든 민족들의 계모가 아니라 진짜 어머니임을" 보여야한다. 이 소심한 질책과 겸허한 간청은 회의장의 좌익으로부터도 거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제국주의 전쟁의 정신은 민족문제에 대한 정직한 정책과는 전혀 양립할 수 없었다.

그루지아의 이름을 걸고 멘세비키 첸켈리가 선언했다: "지금까지 카프카즈 산맥 너머의 민족들은 단 한번의 분리주의 운동도 해 본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열렬한 박수를 받은 이 약속은 곧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10월 혁명의 순간부터 첸켈리는 분리주의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현상은 모순이 아니다. 민주주의자들의 애국주의는 부르주아 체제의 틀을 넘어서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과거의 좀더 비극적인 유령들이 무대에 등장했다. 상이 군인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들도 의견이 서로 같지는 않았다. 손과 다리가 잘리고 눈이 보이지 않는 이들도 귀족과 평민으로 나누어졌다. "전국 128개 군사 지구에 배치된 성조오지 기병대 동맹의 막강한" 이름을 걸고 애국주의 감정으로 열이 오른 어느 상이 장교는 코르닐로프를 지지했다(우익의 박수갈채). 전국상이용사동맹은 대표의 목소리를 통해 체이제의 선언을 지지했다(좌익의 박수갈채).

최근 조직된 철도노동자연합 집행위원회는 빅줼이라는 약칭으로 불리었다. 이 조직은 이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운명이었다. 이 조직은 화해주의자들의 선언에 목소리를 보탰다. 온건 민주주의자이자 극단적인 애국주의자인 빅줼의 의장은 철도에 대한 반혁명 세력의 음모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노동자들에 대한 악의에 찬 공격, 대량 해고, 8시간 노동일의 자의적 침해, 체포와 기소 등등. 숨어있지만 막강한 중심부의 지휘를 받고 있는 지하 세력은 굶주린 철도 노동자들의 투쟁을 자극하고 있다. 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국가정보원은 꿈을 꾸고 있고 검찰 수사관들은 깊이 잠에 빠져있다." 그리고 온건파 가운데 온건파인 이 인물은 이렇게 협박하면서 연설을 끝낸다: "반혁명 히드라가 머리를 쳐들면 우리는 적극 나서서 우리 손으로 그놈의 목을 직접 비틀 것이다."    

이때 어느 철도 재벌이 정반대 주장을 늘어놓기 위해 연단에 즉시 올라간다: "혁명의 깨끗한 샘물에 누가 독을 풀었다. 혁명의 이상주의적 목표가 물질적인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우익의 박수갈채)." 이와 유사한 기조로 입헌민주당원이자 지주인 로디체프는 노동자들이 프랑스에서 "부자가 되어라! 라는 부끄러운 구호"를 빌려왔다고 비난한다. 로디체프의 이 표현을 볼세비키들은 그의 의도와는 좀 다르게 곧 크게 유행시킬 것이다. 순수과학자이자 농업은행의 대표 오제로프 교수는 이렇게 외친다: "참호 속의 병사들은 토지 분배가 아니라 전쟁에 골몰해야한다." 이 발언은 놀랍지 않다: 개인소유 토지의 몰수는 농업은행 자본의 몰수를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1915년 1월 1일에 개인토지 소유주들의 부채는 32억 5천만 루블이나 되었다.

우익을 대변하여 총사령부, 공업동맹, 상공회의소, 종마 사육협회 그리고 수백의 유명인사들을 포괄하는 기타 조직의 대표들이 연설했다. 좌익을 대변하여 소비에트, 병사위원회, 노동조합, 민주적 지방자치단체, 먼 곳의 이름 없는 수백 수천만 인민의 협동조합 대표들이 연설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나라의 짧은 지렛대를 잡고 있는 자들이 유리했을 것이다. 체레텔리는 이렇게 설교했다: "재산을 소유한 강력한 자들의 상대적인 비중과 중요성은 특히 이때에 부각된다.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비중은 더욱더 계산하기가 힘들어 지고 있었다. 이것이 문제 중의 문제였다. 비중은 개별 물체들의 내적 속성이 아니라 이들 사이의 상호관계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비중은 인간의 자연적 속성이 아니라 다른 계급들이 강요당하는 특정 계급의 속성일 뿐이다. 그러나 혁명은 지배계급들의 가장 기본적인 이 "속성"을 인정하지 않는 시점까지 도달했다. 바로 이 때문에 짧은 지렛대를 가진 유명한 소수들의 지위가 너무 불편해지고 있었다. 모든 힘을 다해 화해주의자들은 균형을 유지하려했다. 그러나 이미 이들은 권력을 쥐고 있지 않았다. 대중이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긴 팔을 내뻗고 있었다. 거대 지주, 은행가, 자본가 등이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조심스럽게 행동했는가! 그러나 과연 이들이 자기 이익을 지켰는가? 대개는 그렇지 못했다. 이들은 이상주의를 추구할 권리, 문화의 이익, 앞으로 소집될 제헌의회의 특권 등에 대해 연설했다. 중공업계의 지도자 폰 디트마는 "자유, 평등, 박애"를 찬양하는 찬송가를 부르면서 연설을 마쳤다. 이윤의 금속성 바리톤, 지대의 목이 쉰 베이스 등은 어디로 숨었는가? 사심이 없음을 강조하는 너무 달콤한 테너의 멜로디만이 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잠시 이 소리들을 들어 보라. 이 달콤한 시럽 속에는 쓸개즙과 식초가 얼마나 많이 들어있는가! 그런데 예상 밖의 서정적인 이 장식음들은 갑자기 악의에 찬 가성으로 변한다! 전국농업회의소 의장 카파친스키는 앞으로 시행될 농업개혁을 모든 마음으로 지지하면서도 "우리의 순수한 체레텔리"가 무정부적 혼란에 대한 법의 옹호를 주장하는 회람장을 돌린 것에 감사했다. 그러나 토지 위원회는 어떠한가? 이들은 곧바로 농민에게 권한을 넘겨줄 것이다! "마침내 토지가 분배되어 기쁨으로 미칠 것 같은 이 몽매하고 반(半)문맹 상태의 인간들에게 나라의 정의가 시작되는 영광을 부여하겠다!" 이 몽매한 농민에 대한 투쟁을 통해 지주들이 재산을 방어하게 된다면 이것은 자기만을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나중에 이 재산은 자유의 제단에 바쳐질 것이다.

이제 사회적 상징물들은 전부 무대에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케렌스키는 행복한 영감으로 축복을 받았다. 그는 나머지 한 그룹에게도 발언권을 줄 것을 제안한다. "브레쉬코-브레쉬코프스카야, 크로포트킨, 플레하노프 등 러시아 역사에서 탄생한 그룹"을 그는 염두에 두고 있었다. 러시아 인민주의, 러시아 무정부주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등이 구세대 인물을 내세워 발언을 한다. 특히 무정부주의와 맑스주의는 가장 유명한 창시자들을 내세워 발언을 한다.

"러시아 인민 모두가 찌머발트 반전주의와 단연코 결별할 것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지지한다고 크로포트킨은 연설했다. 이 무정부의 사도는 즉시 국정협의회 우익을 지지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 우리는 광대한 영토를 상실하고 배상금을 지불할 위협에 처한다; "그리고, 동지 여러분, 이 모든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 전쟁에서 패배한 국민의 심리적 타격을 우리는 당하게 된다." 전에 국제주의자였던 그는 패배한 국민의 심리적 타격을 독일 국민이 당하기를 선호한다. 그는 정복당한 프랑스가 러시아 짜르 앞에서 머리를 숙인 역사적 사실을 기억했다. 그러나 정복자 프랑스가 미국의 은행가들 앞에서 머리를 숙일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외쳤다: "우리도 같은 굴욕을 당할 것인가? 결코 그럴 수는 없다!" 그는 회의장 전체의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전쟁이 러시아에게 찬란한 전망을 열었다고 말했다: "새로운 사회주의 원칙에 기초하여 새로운 삶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가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다....로이드 조오지 영국 수상은 사회주의 정신에 고취된 연설을 하고 있다....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사회주의에 고취된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형성되고 있다. 불행한 것은 이 사회주의는 국가사회주의라는 것이다." 로이드 조오지와 쁘웽까레가 "불행하게도" 아직 국가적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최소한 크로포트킨은 충분히 정직하게 포기했다. 그는 말했다: "제헌의회의 권리를 하나도 박탈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러시아가 공화국으로 선언되어야 한다는 우리의 소망을 국정협의회가 큰 소리로 표현해야한다. 그러면 제헌의회가 이 문제들에 대해 주권을 가지고 결정해야 한다고 나는 완벽히 인정한다." 그는 연방공화국을 주장했다: "우리는 미국과 같은 연방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바쿠닌의 자유공동체 연합이 의미하는 바였다! 결론으로 그는 이렇게 간청했다: "이 극장에서 더 이상 우익과 좌익으로 양분되지 않을 것이라고 서로 최종적으로 약속을 하자....우리는 모두 하나의 조국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위해 우리는 모두 단결해야한다. 또는 필요하다면 함께 죽어야한다." 지주, 자본가, 장군, 성조오지 기병대 등 찌머발트 반전회의를 반대한 모든 세력은 이 무정부주의 사도에게 합당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자유주의 원칙은 경찰 체제를 동반할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무정부주의는 자유주의에서 경찰을 깨끗이 없애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순수한 산소를 흡입할 수 없듯이 경찰이 없는 자유주의는 사회의 붕괴를 가져올 뿐이다. 자유주의의 그림자인 무정부주의는 대체로 자유주의와 운명을 같이 해왔다. 계급의 모순이 첨예화되면서 자유주의와 함께 무정부주의는 사망했다. 자신의 가르침을 사회 현실이 아니라 사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환원시키는 우를 범하는 모든 종파처럼 무정부주의는 사회모순이 전쟁이나 혁명으로 상승하는 순간 비누방울처럼 터져 버린다. 크로포트킨이 대변한 무정부주의는 국정협의회의 유령들 가운데 가장 허깨비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바쿠닌주의의 아성인 스페인에서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자 그리고 소위 "특수한" 즉 순수한 무정부주의자 등은 정치참여를 거부하면서 실제로는 러시아 멘세비키들의 정책을 반복하고 있다. 국가를 큰소리로 거부하는 이들은 국가가 껍질을 벗는 격동의 순간이 되면 국가의 무력에 겸허하게 복종한다. 노동계급에게 권력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한 후 이들은 "좌파" 부르주아 권력을 자기 희생하듯 지지한다. 살이 썩어 들어가는 의회주의 질병을 저주한 후 이들은 몰래 속류 공화주의자들에게 자기 추종자들의 투표 상자를 건네준다. 스페인 혁명의 결말과는 무관하게 무정부주의는 최소한 이 나라에서 영원히 청산될 것이다.

플레하노프는 대회장 전체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고 연단에 올라섰다. 좌익은 오랜 지도자에게 박수를 보냈으며 우익은 새로운 동지에게 박수를 보낸 셈이었다. 그는 초기 러시아 맑스주의를 대표했는데 이것은 수십 년이 지나면서 정치적 자유의 목표로 자신을 한정했다. 볼세비키들에게는 혁명이 시작되었을 뿐이었으나 플레하노프에게는 혁명이 이미 종료된 뒤였다. 자본가들에게 "노동계급과 화해할 것"을 충고하면서 그는 민주주의자들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상공업 계급의 대표들과 합의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끔찍한 예로 그는 "레닌에 대한 불행한 기억"을 되살렸다. 레닌은 너무도 추락하여 노동계급에게 "즉시 정치권력을 장악할 것"을 촉구했다. 플레하노프가 권력투쟁에 대해 경고할 것이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에 국정협의회는 그가 필요했다. 그는 혁명의 문지방에서 혁명가의 마지막 남은 갑옷을 벗어버렸다.

"러시아 역사"의 대표들이 연설한 그날 저녁 케렌스키는 농업회의소와 종마 사육자 협회의 대표에게 연설할 기회를 주었다. 그의 이름 역시 옛날 공작 가문의 일원인 크로포트킨이었다. 이들의 가보를 믿는다면 이들은 로마노프 가문보다 러시아 왕좌를 차지할 권리가 더 많았다. 이 봉건 귀족은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사회주의를 존중하지만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몰수, 강도행위, 폭력 등을 고려하면 정부는 사회주의자들을 나라의 재건 사업에서 배제시켜야 한다." 이 두 번째 크로포트킨은 명백히 체르노프를 겨냥해 비난했으나 로이드 조오지나 쁘웽까레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처럼 이 왕당파 크로포트킨도 찌머발트, 계급투쟁, 토지 점거 등을 비난했다. 애석하게도 그는 이것을 "무정부 상태"라고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국민적 단결과 전쟁의 승리를 요구했다. 두 크로포트킨이 서로에게 박수를 보냈는지는 불행하게도 기록되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증오심으로 멍이든 이 국정협의회에서 참석자들은 국민적 단결에 대해 너무도 많은 얘기들을 했다. 따라서 최소한 1초 동안은 단결이 현실로 나타나야했다. 이들은 상징적인 악수를 필연적으로 나누어야했다. 멘세비키 신문은 이 사건을 황홀에 찬 말로 이렇게 표현했다: "부블리코프가 연설하는 동안 협의회 참석자들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사건이 일어났다. 부블리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어제 혁명의 고귀한 지도자 체레텔리가 재계에 악수의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이 허공에 떠있지 않았다는 것을 그가 알았으면 한다....'" 부블리코프가 연설을 멈추자 체레텔리는 연단에 올라와 그와 악수를 했다. 열렬한 박수갈채가 터졌다.

국정협의회에서는 박수가 너무 헤펐다. 지금 바로 묘사한 광경이 벌어지기 일주일 전에 거대한 철도왕인 부블리코프는 자본가 총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소비에트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고함질렀다: "우리를 파멸로 몰아넣은 부정직하고 무식한 자들은 모두 꺼져라!" 그리고 그의 말은 모스크바의 공기 속에서 여전히 메아리치고 있었다. 노동조합을 대표해 국정협의회에 참석한 구 맑스주의자 리아자노프는 리용의 대주교 라무레뜨의 키스를 아주 적절하게 회상했다. "그 키스는 국민의회 회기 도중 노동자와 부르주아 계급이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의 두 분파 사이에서 교환되었다. 그런데 이 키스 직후 투쟁은 가장 격렬하게 터져 나왔다." 밀류코프는 평소와는 달리 정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자본가들에게 이 단결은 "진정이 아니었으며 다만 잃을 것이 너무 많은 계급이므로 이들에게 실제로 필요했을 뿐이었다. 부블리코프의 악수는 바로 이런 식의 화해를 의미했다. 진정한 화해는 물론 아니었다."

그렇다면 국정협의회 참석자들 대다수는 악수와 정치적 키스의 위력을 믿었는가? 이들은 스스로를 믿고 있었는가? 아니었다. 이들의 감정은 이들의 계획만큼이나 모순적이었다. 물론 일부 개인들의 연설 특히 지방 출신들의 연설에서 첫 환희, 첫 희망, 첫 환상의 불꽃이 튀기는 했다. 그러나 좌익은 실망하고 사기가 침체했다. 우익은 분노했다. 3월에나 볼 수 있었던 혁명에 대한 환희의 메아리가 국정협의회에서 울려 퍼지는 것은 이혼 법정에 선 부부에게 약혼시절 서로에게 보냈던 애정의 편지가 공개된 것과 같았다. 이미 저승으로 출발한 이 정치인들은 유령의 방식으로 허깨비 체제를 잠시 구가하고 있을 뿐이었다. 죽음과 같은 절망의 차가운 숨이 곧 멸망할 자들의 마지막 행진인 "살아있는 세력" 협의회에 퍼졌다.

협의회가 폐막될 바로 그 무렵, 국가에 대한 단결과 충성의 모범으로 간주되었던 카자흐 집단도 깊이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낸 사건이 터졌다. 소비에트 대표인 카자흐 청년장교 나가이에프는 이렇게 선언했다: 노동자 카자흐들은 칼레딘을 지지하지 않는다; 전선의 카자흐들도 카자흐 지도자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으며 협의회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신문들은 협의회에서 벌어진 사건들 가운데 가장 격렬한 이 사건을 보도했다. 좌익은 열광적으로 나가이에프에게 박수를 보내며 외쳤다: "혁명 카자흐 만세!" 우익은 분노에 차 항의했다: "그 발언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장교들의 좌석에서 소리가 났다: "독일 마르크화!" 애국주의의 마지막 주장인 이 말이 나오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러나 그 효과는 마치 폭탄이 터진 것 같았다. 대회장은 완전히 지옥 같은 소동으로 가득 찼다. 소비에트 대표들은 좌석을 박차고 일어나 장교들의 좌석을 향해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경찰 앞잡이 놈들!"이라는 고함이 들렸다. 의장의 회의 진행 종은 계속 울렸다. "곧 격투가 벌어질 것 같은 순간이었다."    

이 모든 소동에도 불구하고 케렌스키는 폐막 연설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믿고 또 알고 있다...우리는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있으며 우리는 서로를 더 존경하게 되었다...." 2월 체제의 이중성이 이렇게 혐오스럽고 쓸모 없는 수준에 도달한 적은 결코 없었다. 연설의 어조를 계속 유지할 수가 없게 되자 케렌스키는 연설을 마치다가 갑자기 협박과 절망의 하소연을 쏟아냈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묘사한다: "히스테리의 째지는 소리에서 비극적 속삭임으로 하강한 깨진 목소리로 케렌스키는 상상의 적에게 협박을 가했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적을 찾아 회의장을 치열하게 뒤졌다...." 그런데 이 적이 결코 상상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밀류코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케렌스키는 열렬하게 외쳤다: "오늘 러시아 시민들이여, 나는 더 이상 꿈을 쫓지 않을 것이다....나의 마음이 목석이 되리라....인류의 모든 꽃들과 꿈들이여, 말라비틀어져 버려라. (관람석에서 어느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당신의 마음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마음의 열쇠를 멀리 던져버릴 것이다, 친애하는 인민 여러분. 나는 오직 국가만을 생각할 것이다."

회의장은 이번에는 좌우익을 막론하고 모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국정협의회의 사회적 상징은 도저히 봐줄 수 없는 멜로드라마의 독백과 함께 끝이 났다. 마음의 꽃을 옹호하며 터져 나온 그 여성의 목소리는 평화롭고 햇빛이 따사로운 무혈의 2월 혁명이 보낸 구조 요청 신호인 것 같았다. 마침내 국정협의회의 막이 내렸다.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written by Leon Trot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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