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사토리
17.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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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수 6
댓글 7








1910년대는 일제가 너무 강압적으로 통치하니까 그게 싫어서 민족운동 벌인거고

1920년대는 일제의 제도랑 좆선이랑 다른 것에 불만이어서 민족운동 벌인게 아닐까 그 때 자치론도 많이 등장했으니까.

1930년대는 일제가 전쟁 준비,전쟁하느라 뺏어만가니까 열받아서 운동 벌인거 같고

어디서 들은건지 모르겠는데 피지배층의 일반 서민들은 누가 자길 지배하는 것에 대해선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가 잘먹고 잘 살수있게해주는 지배자를 지지하게된다라고 들었던거 같거든? 그러니까 이씨왕조놈들보다 일제 식민지가 훨배 잘살은건 사실이잖아?  자발적으로 창씨개명한 조센진도 꽤 되는것보면 아무래도 내 생각이 그럴싸 하단 말야..

 

또 산미증식계획 그걸로 수탈된 양이 실제 생산량보다 많아서 쌀값이 폭등해서 밥도 못먹었다는거 말야. 당시에 일제의 쌀에대한 공급이 팍 줄다보니 쌀이 너무 비싸져서 조센진들이 생산된 쌀을 생각 없이 너무 많이 팔아서 그런건 아닐까 쌀대신 판 돈으로 고기를 많이 먹었을거고  밥 먹고싶을땐 보리밥이나 잡곡밥 먹었을거니 만주에서 잡곡을 수입해왔겠지? 하여튼 ㅅㅂ 헬조선의 역사교육은 믿을수가없다 다 역사에 이데올로기를 주입시켜서 가르치고있으니






  • ㅁㄹㅇㄴ
    17.03.04
    응 그래서 니 애미 위안부 끌려가고 니 애비 광산노동자로 끌려가서 죽도록 굴리다가 뒤지는 일제강점기가 좋다고? 그럼 북괴 가시든가. 직접 가면 일제강점기 체험을 해볼 수 잇는 영광스러운 기회인데 가지도 않고 똥글이나 싸제끼는 이유가 뭐니?

    그렇게 독재좋고 나치좋고 전범기좋고 전쟁좋아하면 그런 일상이 펼쳐져 있는 북괴나 시리아로 이민가라고. 난 우리나라 스웨덴이나 노르웨이처럼 만들고 싶으니까 독재 빨갱이 새끼는 필요 없어. 자살하든지 이민가든지 빨리 꺼져.
  • 사토리
    17.03.04

    난 일제강점기가 좋았다고 한 적 없었고 심지어 김정은 만세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왜 확대 해석하냐?ㅋㅋㅋㅋ 어떤 미친새끼가 인권 보장 안되는 독재 파시즘 체제를 좋아하냐?  일제강점기 유관순 진실 보고나니 의아해서 비판 받을 생각으로 글 썼더만 이 새끼는 비판 아닌 비난을 했네? 조센진 답다 새꺄? 내가 언제 독재 좋다했었고 나치 좋다했고 전범기 좋다했니?  이상한 새끼네 이거ㅋㅋㅋㅋㅋ 욕구불만이니?  왜 혼자 피해의식 가지며 살아~? 시작부터 부모를 선급하며 욕하는거보니까 니 새끼 수준도 알만하다.. 응으로 시작하는거 급식충들의 전유물로 아는데ㅋㅋㅋㅋㅋㅋ 난 너같은 새끼랑 동급 취급받기싫으니 부모 언급은 안한다~ 그래 니 말이 옳다 옳아 내가 잘못 생각했었구나. 미안해~^^ 

  • 님 애미의 닳고닳아 썩어문드러진 보지구멍에서 에이즈 냄새나는데 어서가서 님 애미 보짓구멍에 자식된 도리로서 시원한 염산 한바가지 부어주시죠^^ 
  • 트로츠키주의자
    17.04.21

    저자 서문

    1. 이 저작의 목적

    소련의 경제적 성공에 대해 자본주의 세계는 일단 모른 척 했다. 이런 행동을 보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사회주의 체제가 인간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증거가 실험적으로나마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의 편에 붙은 박식한 경제학자들도 러시아 공업의 유례없는 빠른 발전속도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이 현상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려한다. 또는 소련의 공업발전이 "농민에 대한 극도의 착취" 때문이라고 말하고 이것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제한하려고 한다. 그러나 중국, 일본, 인도가 일상적으로 농민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는데도 소련의 공업발전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이유는 설명하지 못한다. 자기 견해를 밝힐 좋은 기회가 주어져도 이들의 계급적 한계는 어쩔수없다.     

    그러나 온갖 비방과 은폐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사실은 언젠가 승리하게 마련이다. 모든 문명국들의 서점에는 소련에 관한 책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이 현상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소련의 눈부신 경제발전과 같은 놀라운 현상은 그리 자주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련에 대한 반동적인 증오심에 눈먼 저작들은 급속히 그 수가 감소하고 있다. 소련에 관한 최근의 저서들 가운데 상당수는 열광적이지는 않더라도 호의적인 어조를 보여주고 있다. 갑자기 성공한 소련이 국제적으로 명성을 회복하고 있다는 징표의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소련에 대한 이 우호적인 저서들을 우리는 환영할 뿐이다. 더욱이 파시스트 이탈리아보다 소련을 이상적인 나라로 바라보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일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 저서들을 통해 10월 혁명의 나라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에 대한 과학적 평가를 원한다. 그러나 이들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소련의 친구들"이 지은 저서들은 크게 세 부류로 분류될 수 있다. 우선 이들 논문과 저서의 대부분은 어느 정도 "좌익" 성향을 보이는 아마추어 저널리즘이나 르뽀 성격의 글들이다. 이 부류와 함께 권위를 인정받고자 더 허세를 부리는 저서의 부류가 바로 인도주의적, 서정적, 반전(反戰)주의 "공산주의" 저서들이다. 소련 경제에 대한 도식적인 내용의 저서들이 세 번째 부류에 속한다. 이것들은 과거 독일의 강단사회주의 풍을 이어받고 있다. 루이스 피셔(Louis Fisher)와 두란티(Duranty)는 첫 번째 부류의 저서를 지은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미 고인이 된 바르뷔스(Barbusse)와 로맹 롤랑(Romain Rolland)은 "인도주의적" 친구들에 속한다. 스딸린의 진영으로 넘어가기 전에 전자가 예수의 전기를 후지가 간디의 전기를 저술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지칠 줄 모르는 페이비언(Fabian) 사회주의자 베어트리스 및 시드니 웹(Beatrice and Sidney Webb) 부부는 보수적 현학적 사회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권위자들이다.

    위에 열거한 서 부류의 저서들은 서로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이미 입증된 기정사실에 대해 머리를 조아리고 사람을 마취시키는 일반화를 유독 선호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자기 나라의 자본주의에 반기를 드는 것은 이들에게 너무 무리이다. 따라서 이들은 퇴조기에 접어든 외국의 혁명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는 데에는 아주 적극적이다. 10월 혁명 이전과 이후 몇 년 동안 사회주의가 어떻게 현실로 나타날 것인지를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문제삼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이 소련의 지금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시대의 발전에 발맞추어 나가는 진보적 인물이 될 수 있고 어느 정도 도덕적 평온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혁명에 대해 조금도 기여할 필요가 없다. 이 부류의 관조적이며 낙관적인 저서들은 자본주의에 결코 파괴적이지 않다. 모든 불쾌한 과거의 일을 멀리 밀쳐내어 독자들의 심기를 아주 편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즉시 독서시장에서 호평을 받는다. 교양있는 부르주아들을 위한 볼셰비키주의 또는 좀더 집약적으로 말해 급진파 여행객용 사회주의라고 명명될 수 있는 국제 학파가 이렇게 조용히 형성된다.      

    여기서 이 학파의 생산물을 가지고 논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학파에게는 논쟁의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 학파의 인물들은 문제를 제기하는 듯 하다가 이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는 그런 부류이다. 필자의 본 저서는 미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현재를 파악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미래를 투시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과거를 언급할 것이다. 이 저서는 비판적이다. 단지 기정 사실을 숭배하는 자들은 미래를 준비할 능력이 없다.

    소련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과정은 이미 여러 단계들을 거쳤다. 그러나 체제 내적 균형을 이룰 단계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인간의 연대의식과 모든 욕구의 조화로운 충족에 기초한 무계급 사회 건설,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의 근본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소련에는 사회주의가 털끝만치도 없다. 물론 소련 사회의 모순들은 자본주의의 모순들과 현격히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모순들은 대단히 날카롭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물질적 문화적 불평등, 정부의 탄압, 정치조직들의 존재, 분파 투쟁 등을 통해 이것들이 드러나고 있다. 경찰의 탄압은 정치투쟁을 은폐하고 왜곡시킬 뿐 결코 제거하지는 못한다. 금지된 사상들은 정부의 모든 조치에 영향을 미치면서 그것의 시행을 촉진하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한다. 이 상황에서 탄압을 받으며 전국에서 맹렬하게 전개되고 있는 정치투쟁의 사상과 구호들을 무시한 채 소련을 분석할 수는 없다. 여기서 역사는 살아 움직이는 정치와 직접 만난다.

    편안히 앉아서 입만 놀리는 "좌익" 속물들은 이렇게 충고하는 것을 좋아한다: 소련에서 진행 중인 사회주의 건설에 해롭지 않을 정도로만 체제 비판을 해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소련이 그렇게 나약한 체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련의 적들은 소련의 진정한 친구인 세계 노동자들보다 소련의 상황을 더 잘 파악하고 있다. 제국주의 정부의 총참모부는 소련의 장점과 단점을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계산은 이미 공개된 보도들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소련의 적들은 소련 노동자국가의 약점들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들이 노동자국가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소련의 발전 경향에 대한 비판은 결코 이용할 수 없다. 소련 정부가 공식적으로 소련의 "친구들"이라고 인정하는 인사들의 대다수는 소련에 대한 비판에 적대적이다. 그런데 이 적대감은 소련 체제의 허약성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지 않는다. 소련에 대한 자신들의 공감이 허약하다는 사실을 숨기는 허세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부류의 두려움과 경고를 모두 차분한 마음으로 무시할 것이다. 사태를 결정짓는 것은 환상이 아니라 진실이다. 우리는 가면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고자한다.

    1936년 8월 4일

    후기

    "테러분자들"의 음모에 대한 재판이 모스크바에서 열린다는 소련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기 전에 이 저서는 완성되어 출판사에 보내졌다. 따라서 당연히 재판 과정을 평가할 시간이 없다. 이 저서 한쪽 한쪽은 "테러분자" 재판의 역사적 논리를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베일이 둘러진 재판의 비밀이 소련 당국의 의도적 술책이라는 사실 역시 폭로하고 있다. 이것이 이 저서의 의미를 더욱 값지게 하고 있지 않은가!

                       1936년 9월

     

    제1장 그 동안 무엇이 성취되었는가

    1. 공업 성장의 주요 지수들

    러시아에서 자본가계급은 미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이 결과 전제군주제와 농민의 반봉건적 노예상태를 청산하는 과업 등 민주적 과제들은 노동계급 독재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농민 대중의 선두에 서서 정치권력을 장악한 노동계급은 이 민주적 과제들을 성취하는 것에서 머무를 수 없었다. 부르주아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의 초기 단계와 직접 연관되어 있었다. 이 사실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최근 몇십 년간의 역사는 자본주의가 쇠퇴 단계에 들어선 상황에서 후진국들이 자본주의 종주국들이 달성했던 생산력 수준으로 올라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선진 자본주의 문명국들은 문명화의 길을 걷고 있는 후진국들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러시아 경제는 사회주의 혁명을 가능케 할 정도로 여타 국가들보다 먼저 성숙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적 토대에서는 더 이상 발전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이 나라를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필요조건이었다. 이것이 후진국에서의 결합발전의 법칙(law of combined development)이다. 과거 짜르의 제국이었던 이 나라는 레닌이 말한바 "자본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였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혁명이 성공한 후 1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나라는 유럽과 미국을 "따라잡고 추월하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물론 따라잡아야 추월할 수 있으므로 따라잡는 일이 일차적 과제이다. 다시 말하면 러시아는 자본주의 선진국들이 오래 전에 해결한 기술과 생산력의 문제들을 우선 해결해야 한다.

    이와 다른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가? 구 지배계급의 타도는 야만 상태에서 문명상태로 진입해야 하는 이 나라의 과제를 해결할 것이 아니고 철저히 드러냈을 뿐이다. 이와 동시에 생산수단이 국가의 손에 집중되어 혁명은 새롭고 비교할 수 없이 효과적인 공업성장의 방법들을 가능케 하였다. 아주 짧은 기간에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에 의해 파괴된 생산력을 회복하고 거대 기업들을 새로이 창출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생산방식들을 도입하고 새로운 산업분야들을 정착시킬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계획경제 덕분이었다.

    볼셰비키 당 지도부는 소련에 대한 국제혁명의 즉각적인 지원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 국제혁명이 대단히 늦어지면서 소련은 엄청난 곤란들을 겪게되었다. 그러나 이 상황은 동시에 소련의 내적 저력과 자원의 정도를 드러냈다. 그 동안의 성과가 위대했건 불충분했건 제대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국제적 잣대가 필요하다. 이 저서는 소련의 공업발전 과정에 대한 통계를 수집할 뿐 아니라 역사적 사회학적 해석을 가할 것이다. 그러나 논의의 진전을 위해서 중요한 수학적 데이터를 어느 정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세계 거의 모든 곳에 드러나고 있는 침체와 쇠퇴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소련의 공업은 대단한 규모로 발전하고 있다. 아래에 제시하는 거시적 지표들은 이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이다. 현재 독일의 공업생산량은 열병에 걸린 듯이 급격히 진행된 전쟁 준비 때문에 1927년 수준으로 하락하고 있다. 영국은 보호주의 장벽을 치고 있는데 지난 6년 동안 기껏해야 3퍼센트 내지 4퍼센트 정도 생산량을 늘렸을 뿐이다. 미국의 공업생산량도 약 25퍼센트 정도 하락했고 프랑스의 경우는 30퍼센트 이상 저하했다. 자본주의 국가들 중 가장 높은 생산량 증가를 기록한 나라는 일본으로 현재 미친 듯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으며 이웃 나라들을 약탈하고 있다. 이 나라의 생산량은 거의 40퍼센트나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 예외적인 지수조차도 소련의 극적인 공업성장에 비하면 초라해 보인다. 이 나라의 생산량은 같은 기간에 3.5배 즉 250퍼센트나 증가하였다. 중공업은 1925년부터 1935년까지 10배 이상 증가하였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첫 1년 동안 자본투자량은 54억 루블이었고 1936년에는 320억 루블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루블화는 너무 불안정해 측정 단위로는 부적절하다. 따라서 화폐에 의한 추산은 그만두기로 하자. 그렇다 하더라도 반박의 여지가 전혀 없는 다른 기준들이 존재한다. 1913년 돈(Don) 지역의 석탄생산량은 277만 5천 톤이었는데 1935년에는 712만 5천 톤에 이르렀다. 지난 3년 동안 철강 생산은 2배로 증가하였고 강철과 압연은 거의 2.5배가 증가하였다. 석유, 석탄, 철강의 생산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비교하여 3배에서 3.5배 증가했다. 전기 공급에 대한 계획이 처음 입안된 1920년 당시 러시아 전역에는 10개의 지역발전소가 있었으며 총생산량은 27만 3천 킬로와트였다. 그런데 1935년에는 95개로 발전소의 수가 증가하였고 전기의 총생산량은 435만 5천 킬로와트에 달했다. 1925년 소련은 전기 생산량에서 세계 11위였다. 그러나 1935년에는 독일과 미국 다음으로 최대생산국이 되었다. 석탄생산의 경우에는 10위에서 4위로, 강철생산에 있어서는 6위에서 3위로 도약했다. 그리고 트랙터와 설탕 생산에서는 세계 제1위가 되었다. 공업에서의 엄청난 성취, 처음부터 아주 밝은 전망을 보여준 농업, 구 공업도시들의 비범한 성장과 새로운 도시들의 건설, 노동자 수의 급격한 증가, 문화적 수준의 향상과 문화적 수요의 증대 등은 모두 의심할 여지없이 10월 혁명의 결과였다. 구시대의 예언자들이 인류 문명의 종말을 알리는 징조라고 애써 주장했던 혁명이 이 성과를 올린 것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는 논쟁할 필요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승리했음을 증명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가 아니라 지구 표면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공업지역에서 이것이 증명된 것이다. 그리고 유물론의 언어가 아니라 강철, 시멘트, 전기라는 언어로 승리를 표현하였다. 비록 체제 내부의 어려움,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공세, 지도부의 실책 등으로  소련이 붕괴한다고 할지라도 (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우리는 진심으로 희망한다) 미래에 대한 전조(前兆)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만은 파괴되지 않고 남을 것이다: 오직 노동계급 혁명 덕분에 어느 후진국이 10년 내에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업적을 달성했다.

    이 사실은 또한 노동운동 내 개량주의자들과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개량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을 위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이룬 하찮은 성과와 혁명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겠다고 떨쳐 일어난 인민에 의해서 이루어진 거대한 과업을 비교할 가치가 있겠는가? 단 한순간도 그럴 필요가 없다. 1918년 독일에서 떨쳐 일어선 노동자들은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엄청난 힘을 위임하였다. 만약 이들이 자본주의의 구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 이 힘을 사용하였다면 현재 중부 및 동부 유럽 그리고 아시아의 상당한 부분으로 이루어진 사회주의 체제는 정복당할 수 없는 경제력을 보유했을 것이다. 이 점은 러시아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전 세계 인민들은 새로운 전쟁과 혁명을 통해 개량주의자들이 저지른 역사적 범죄의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것이다.

     

    2. 소련이 이룩한 업적에 대한 비교 평가

    소련 공업의 역동적 통계수치들은 역사상 유례가 없다. 그러나 아직도 발전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소련은 지극히 낮은 수준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고 있다. 반면에 자본주의 나라들은 아주 높은 수준에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다. 지금 이 두 체제 사이의 역관계는 경제성장률로 결정되지 않는다. 물질적 축적, 기술,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노동의 생산성 등에 의해서 표현된 두 진영의 총체적인 힘을 비교하는 것을 통해 결정된다. 지금 열거한 요인들의 통계를 통해 사태를 바라보면 상황은 즉시 바뀐다. 이제는 소련이 지극히 불리한 입장에 놓인다.

    레닌이 제기한 문제 즉 어느 진영이 승리할 것인가의 문제는 한편으로는 소련과 전 세계 혁명적 노동자계급과 또 한편으로는 국제 자본과 소련 내의 반혁명세력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경제 성공에 의해 소련은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에 대비하여 성곽을 구축하고, 공세를 취하고, 스스로를 무장하고, 필요할 경우 후퇴해서 기다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느 진영이 승리할 것인가의 문제는 그 본질에 있어서 군사적 문제일 뿐 아니라 더 커다란 의미에서 경제적 문제이다. 지금 이 순간 소련은 이 문제를 전 세계적 차원에서 해결할 것을 강요받고 있다.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군사적 개입은 위험요소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가 생산하고 있는 값싼 상품들이 소련영토로 유입되면 그 위험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물론 서구의 한 나라에서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할 경우 상호 역관계는 급격히 그리고 근본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에 의한 소련의 고립이 지속되거나 유럽의 노동계급이 투쟁에서 패배하고 계속 후퇴하는 더 나쁜 상황이 전개될 경우 소련 체제의 생존가능성은 최종적으로 노동생산성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시장경제 하에서는 생산비용과 가격으로 표현된다. 동일 상품의 소련 국내 가격과 국제시장의 가격 차이는 이 상호 역관계를 측정하는 주요한 수단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소련 당국은 통계학자들이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조차 금지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기침체와 생산력의 정체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기술, 조직, 노동 숙련도에서 소련을 여전히 훨씬 앞서고 있기 때문이라.

    소련 농업의 고질적 후진성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공업의 발전과 조금이라도 비교할 수 있는 상황은 농업의 어느 분야에도 없다. 예를 들어 몰로토프(Molotov)는 1935년 말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사탕무우 생산에서 소련은 자본주의 나라들보다 아직 한참 뒤져 있다. 1934년 우리는 1헥타르당 8,200파운드의 사탕무우를 생산했다. 1935년에는 우크라이나의 대풍작으로 1헥타르당 13,100파운드를 생산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은 25,000파운드 그리고 프랑스는 30,000파운드가 넘게 생산했다. " 몰로토프의 이 불평은 농업의 모든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곡물생산과 섬유생산 분야 뿐 아니라 특히 목축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적절한 윤작, 종자의 선택, 비료 투입, 트랙터, 콤바인, 우량종 축산농장 등을 통해 농업의 전 분야는 사회주의 농업의 도입으로 거대한 혁명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혁명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곳은 바로 이 매우 보수적인 농업 분야이다. 집단화가 이루어졌으나 아직도 소련 농업의 과제는 서방 자본주의 농업을 따라잡는 것이다. 서방의 농업은 소농 경영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높은 생산성을 보유한 농업체제이다.

    공업에서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투쟁은 선진 기술 채용과 노동력 효율의 제고 등 두 방면으로 진행된다. 단지 몇 년만에 소련이 가장 현대적인 거대 공장들을 건설한 요인은 한편으로는 서방 자본주의의 높은 기술수준의 채용과 또 한편으로는 국내의 계획경제 체제이다. 공업 분야에서 외국의 성과들이 수입되어 흡수되고 있다. 적군의 무장 뿐 아니라 소련의 공업 발전도 객관적 상황에 의해 강요되어 발전 속도가 가속화되었다. 이 상황은 엄청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공업이 영국과 프랑스처럼 구식으로 지지부진할 필요가 없어졌다. 군대는 구식 장비의 운명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급속한 성장은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공업의 각기 다른 요소들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특히 노동력 수준은 선진적인 기술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계획경제의 지도부는 이 과업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다. 이 결과 제품의 생산비용은 대단히 높으며 제품의 품질은 떨어진다.

    석유산업의 총책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련의 유전은 미국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천공(穿孔)에 필요한 생산조직은 뒤떨어져 있다. 노동자들의 숙련도가 충분치 못하다. " 그는 천공장비가 자주 고장을 일으키는 현상을 "부주의, 숙련도의 부족, 기술감독의 부족"으로 설명한다. 몰로토프는 또다시 불평한다:" 건설산업의 생산조직은 대단히 낙후되어 있다‥‥ 도구와 장비들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대개 구닥다리 방식으로 일이 진행된다." 이 고백은 소련의 언론에 널리 소개되고 있다. 소련에 도입된 자본주의 선진기술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생산성을 전혀 발현하지 못하고 있다.

    중공업의 전반적 성공은 대단한 성과이다. 이 성공을 토대로 해서만 산업이 현대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공업의 성공은 기술적 일반적 문화수준을 요구하는 정밀기계의 생산에서 입증된다. 이 분야에서 소련은 아직 대단히 뒤떨어져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질적 양적으로 가장 중요한 성과는 군수산업에서 달성되었다. 육군과 해군은 가장 영향력이 막강한 고객일 뿐 아니라 가장 만족시키기 힘든 고객이다. 그러나 일련의 공개 연설에서 전쟁성(War Department)의 책임자 중의 하나인 보로실로프(Voroshilov)는 끊임없이 불평하고 있다: "적군(赤軍)의 군수품 품질에 대해 항상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조심스러운 발언 뒤에 숨어 있는 불안은 쉽게 감지된다.

    공식 보고서에서 중공업의 총책임자는 이렇게 말한다: "생산된 기계는 품질이 좋아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기계의 가격은 너무 비싸다. " 항상 그렇듯이 그는 기계 생산의 세계적 수준과 소련의 수준을 정확히 비교할 수 있는 데이터를 제시하지 않는다.

    트랙터는 소련 공업의 자랑이다. 그러나 트랙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지수는 상당히 낮다. 지난 산업회계년도에 무려 81퍼센트의 트랙터가 중대한 수리를 거쳐야 했다. 더욱이 이들의 상당수가 밭을 가는 절정기에 다시 고장이 났다. 어느 계산에 의하면 1헥타르당 곡물이 2,000파운드 또는 2,300파운드 생산되어야 기계 및 트랙터 정비소의 비용이 마련된다. 그러나 현재 평균 수확량은 이 수치의 반에도 못 미치고 있다. 결국 국가는 적자를 메우기 위해 수십억 루블을 지원해야 한다.

    자동차 운송 분야의 상황은 더 나쁘다. 미국의 경우 트럭은 1년에 6만 킬로미터에서 8만 킬로미터 그리고 심지어는 10만 킬로미터를 주행한다. 소련의 경우는 이 수치가 7만 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즉 미국의 3분의 1 또는 4분의 1에 불과하다. 매 100대의 기계 중에서 55대만 작동중이다. 나머지는 수리중이거나 수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기계 수리비용은 생산비용의 두 배나 된다. 국가회계국이 다음과 같이 보고하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자동차 운송은 생산비용에 무거운 부담만 지운다. "

    국가 인민위원회(Council of People's Commissars) 의장에 따르면 철도운송량의 증가는 "수도 없이 많은 고장"을 가지고 온다. 이 문제들의 근본 원인은 동일하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낮은 노동숙련도 때문이다. 선로변환기를 잘 유지하기 위한 투쟁은 그 나름대로 영웅적인 행위이다. 선로변환기를 담당하고 있는 일급 여성노동자들은 크레믈린궁의 최고 권력층에 보고를 한다. 최근 몇 년간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수로에 의한 운송은 철도운송에 많이 뒤져 있다. 정기적으로 신문들은 "해상운송의 끔찍한 운영", "선박수리의 지극히 낮은 수준" 등에 대한 통신문을 싣고 있다.

    경공업은 중공업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 소련 공업의 특이한 법칙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소비자 대중에 가까이 있는 제품일수록 품질이 더욱 나쁘다. 『프라우다』지에 의하면 섬유공업의 "불량품 비율은 부끄러울 정도이다.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의 수는 빈약하다. 낮은 질의 제품이 압도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소비하는 제품의 나쁜 품질에 대한 불평은 언론에 주기적으로 등장한다: "엉성한 철제품", "조립이 잘못되었고 마무리 손질이 부주의한 흉칙한 가구", "제대로 된 단추가 없다", "식품공급체계가 절대적으로 불만족스럽다" 등등 끝이 없다.

    공업 발전을 품질에 대한 고려 없이 양적 지수로만 규정짓는다면 그것은 사람의 신체를 가슴둘레는 무시하고 신장으로만 표현하는 것과 거의 같다. 더욱이 소련공업의 특성을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질적인 고려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분야는 급속히 발전하는 반면 다른 분야는 후진성이 여전하다. 이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거대한 자동차공장의 건설은 간선도로의 부족과 엉성한 관리의 대가를 치른다. "도로의 노후화는 끔찍하다. 가장 중요한 간선도로인 모스크바-야로슬라프 간선도로에서 자동차는 시속 10킬로미터밖에 달리지 못한다. "[『이즈베스챠』지] 소련은 여전히 "도로 없이 살았던 원시인들의 관습"을 물려받고 있다고 국가계획위원회(State Planning Commission) 의장이 주장한다.

    도시경제도 상황은 거의 비슷하다. 새로운 공업도시들이 짧은 기간에 건설되었다. 동시에 오래된 도시들은 수십 개나 쇠퇴하고 있다. 수도와 공업의 중심도시들은 성장하고 있으며 스스로를 치장하고 있다. 비싼 극장과 클럽들이 전국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거주지구의 부족은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주택들은 대체로 전혀 손길이 가지 않는다. "건물을 엉터리로 건축하면서 비용은 많이 든다. 우리 주택들은 소모될 뿐 개축되지 않고 있다. 수리는 거의 하지 않으며 하더라도 엉터리로 한다. "(『이즈베스챠』지) 소련 경제 전체는 엄청나게 불균형을 드러내고 있다. 어떤 한계 내에서는 이 현상이 불가피하다. 가장 중요한 분야에서부터 발전될 필요가 있고 과거에도 이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 분야의 후진성은 다른 분야의 효과적인 운영을 크게 해친다. 각 분야의 최대 발전이 아니라 경제 전체의 최대 효율을 보장할 이상적 계획경제의 관점에 의하면 제1차 공업발전의 통계지수는 낮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통계지수가 낮아도 경제 전체 그리고 특히 소비자 대중은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전체 산업의 역동성이 제고될 수 있을 것이다.

    공식 통계에는 자동차의 생산과 수리가 총산업 생산량에 더해진다. 그러나 경제효율의 관점에서 보면 이 수치는 더할 것이 아니라 빼야한다. 이것은 대부분 산업 부문에도 해당된다. 이 때문에 총산업 생산량을 루블화로 추산하는 것은 상대적 의미 밖에 없다. 루블화의 가치가 무엇인지가 일단 확실치 않다. 이 화폐수치 뒤에 무엇이 진짜 도사리고 있는지가 언제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기계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아니면 이 기계의 너무 이른 고장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안정된" 루블화의 추산에 따라 주요산업의 총생산량이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과 비교하여 6배가 증가했다면 톤 단위로 측정된 석유, 석탄, 철강의 실제 생산량은 3배 또는 3배반 증가한 셈이다. 이렇게 생산량 지수가 큰 차이를 나타내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소련 산업이 짜르 시대에는 없었던 새로운 공업 분야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차적인 이유는 통계를 조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관료기구 단위는 사실들을 과장할 조직적 이유를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3. 인구 일인당 생산량

    현재 소련의 일인당 평균 노동생산성은 여전히 매우 낮다. 가장 우수한 제련소의 공장 책임자에 의하면 노동자 일인당 강철과 선철 생산량은 미국 제련소의 평균 생산량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양국의 평균수치는 아마 1 대 5 또는 더 벌어질 것이다. 이 상황에서 소련이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용광로를 "더 잘" 사용한다는 당국의 발표는 의미가 없다. 기술의 기능이란 인간 노동을 절약하는 것 이외의 다른 의미가 없다. 목재와 건설 산업은 금속 산업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 미국 채석장에서 노동자 일인당 채취량은 1년에 5,000톤이며 소련은 500톤이다. 정확히 10 대 1의 비율이다.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숙련 노동자의 부족과 노동의 낮은 조직 정도에 있다. 관료집단은 노동자에게 모든 힘을 다해 일하라고 독려하지만 자신들에게 할당된 노동력은 올바로 활용하지 못한다. 물론 농업은 공업보다 상황이 더욱 나쁘다. 노동생산성이 낮으면 국민소득이 낮고 결국 인민 대중의 생활수준이 낮아진다.

    총공업생산량의 경우 1936년이 되면 소련이 유럽에서 선두를 기록할 것이라는 주장은 소련의 경제성장이 그 자체로도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제품의 질과 생산비용은 계산에서 제외되어 입고 인구의 규모도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나라의 일반적 발전수준과 대중의 생활수준은 최소한 추산으로 하더라도 소비자의 수에 제품의 총량을 나누어야 한다. 그러면 여기서 간단한 산수 계산을 해보자.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목적에 있어서 철도운송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소련의 철도 총연장은 83,000 킬로미터인데 독일의 58,000킬로미터, 프랑스의 63,000킬로미터, 미국의 417,000킬로미터와 비교된다. 이 수치에 의하면 독일은 인구 1만 명당 8.9킬로미터의 철도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프랑스는 15.2킬로미터, 미국은 킷.1킬로미터, 소련은 5.0킬로미터이다. 따라서 철도의 지수에 따르더라도 소련은 문명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에 있다. 지난 5년간 규모가 3배로 늘어난 상선 보유수는 덴마크 및 스페인과 같은 수준에 있다. 여기에다 포장도로의 지극히 낮은 수치를 덧붙여야 한다. 그리고 자동차 보유에서 소련은 인구 1,000명당 0.6대의 자동차를 생산한다. 1934년 영국의 경우는 8대였으며 프랑스는 약 4.5대, 미국은 23대이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 1928년에 36.5대였는데 대공황에 의해 수치가 감소하였다. 그리고 소련은 도로․수로․자동차 운송의 극심한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말의 보유에서도 프랑스나 미국을 능가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종자의 품질에서도 이들 나라에 한참 뒤지고 있다.

    그리고 가장 뛰어난 성과를 올린 중공업에서도 비교 수치들은 소련이 여전히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35년 소련의 석탄생산량은 일인당 0.7톤이었다. 영국은 거의 5톤, 미국은 1913년에 5.4톤이었다가 지금은 거의 3톤, 독일은 약 2톤이다. 강철의 경우 소련은 67킬로그램, 미국은 250킬로그램이다. 선철과 연철의 경우도 비율은 거의 비슷하다. 1535년 소련은 일인당 1딜킬로와트시의 전기를 생산했다. 1934년 영국은 73킬로와트시였으며 프랑스는 363킬로와트시, 독일은472킬로와트시였다.

    경공업의 일인당 지수는 일반적으로 중공업보다 수준이 더욱 떨어진다. 1935년 모직 일인당 생산량은 0.5미터였는데 이것은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8배 내지 10배가 뒤진다. 모직 옷은 소련의 특권층만 입을 수 있다. 날염용 회색 무명 옷감은 일인당 16미터가 생산되었는데 소련 인민은 이것으로 겨울옷을 만들어야한다. 신발의 생산은 일인당 0.5켤레인데 독일은 1켤레가 넘으며 프랑스는 1.5켤레, 미국은 3켤레이다. 그리고 이 수치는 품질 지수를 사상하고 있는데 이것까지 고려하면 소련이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에 비해 훨씬 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여러 켤레의 신발을 보유한 사람의 비율이 소련보다 상당히 높다는 사실은 당연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련은 여전히 맨발로 생활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들 중에 속한다.

    식품생산에도 상황은 유사한데 부분적으로는 더 불리한 여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의심할 여지없는 최근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파이와 과자는 말할 것도 없고 잼, 소시지, 치즈 등을 소련 대중은 전혀 구할 수 없다. 유제품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다. 프랑스와 미국의 경우 인구 5명당 1마리의 암소가 있다. 독일은 인구 6명당 1마리이며, 소련은 인구 8명당 1마리이다. 그런데 우유생산에서 소련의 암소 두 마리는 실제로는 다른 나라의 거의 한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곡류 중 특히 호밀과 감자에서만 소련은 서방 자본주의 국가 대부분이나 미국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가난의 상징인 호밀 빵과 감자가 소련 인구 절대다수의 주식이다.

    종이 소비량은 문화수준을 나타내는 주요한 지수이다. 1935년 소련은 일인당 4킬로그램에 못 미치는 종이를 생산하였다. 미국은 1928년의 48킬로그램에서 현재는 34킬로그램 그리고 독일은 47킬로그램을 소비하고있다. 미국은 인구 일인당 1년에 12자루의 연필을 생산한다. 반면 소련은 4자루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4자루마저 품질이 너무 나빠 품질이 좋은 연필 1자루 또는 기껏해야 2자루에도 미치지 못한다. 입문용 교과서, 종이, 연필의 부족이 학교교육을 마비시키고 있다는 불평이 신문에 곧잘 보도된다. 10월 혁명 10주년을 맞이하여 문맹을 완전히 퇴치하겠다는 소련 당국의 목표는 아직도 성취되지 않고 있다. 좀더 일반적인 고찰로부터 출발할 경우도 문제는 비슷한 정도로 해명될 수 있다. 소련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서방에 훨씬 못 미친다. 소련에는 다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의 자본투자가 진행되고 있다. 이 비율은 25퍼센트에서 30퍼센트에 이르는데 이 결과 대중이 누리는 소득수준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훨씬 낮을 수밖에 없다.

    물론 소련에는 유산계급이 없다. 유산계급의 사치는 일반대중의 과소 소비에 의해 상쇄된다. 그러나 유산계급이 없다고 해도 긍정적인 효과가 별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해악은 자본가계급의 사치가 아니다. 물론 이 계급의 사치 행위는 그 자체로만 보아도 구역질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사치를 부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자본가계급은 사적소유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 결과 경제체제는 무정부성과 정체의 운명에 처해진다. 물론 사치제 소비를 자본가가 독점하고 있다. 그러나 생활필수품의 절대 다수 소비자는 노동대중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소련에는 유산계급이 없지만 특권 권력층은 여전히 존재하여 소비량의 대다수를 독점하고 있다. 이 사실은 나중에 좀더 자세하게 논의하게 될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소련의 일인당 생활필수품 생산량이 낮기 때문에 소련 대중의 생활수준이 자본주의 국가들의 생활수준에 비해서 아직도 뒤떨어진다.

    물론 이 상황의 역사적 책임은 러시아의 어둡고 암울한 과거, 무지와 빈곤의 유산에 있다. 따라서 러시아의 경우 진보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방법 이외의 다른 길이 없었다. 이점을 확신하고 싶다면 한때 짜르 제국에서 가장 선진 지역이었던 발트해 국가들과 폴란드를 보면 된다. 이 국가들은 현재 후진의 수렁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련 체제의 지을 수 없는 강점은 러시아의 천년이나 된 후진성에 대해 집요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더 많은 진보를 위해서는 지금까지 달성된 성과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일차적 조건이다.

    현재 소련은 서방의 기술적 ․문화적 성과들을 수입하고 빌리고 도용하는 가운데 사회주의 체제 건설의 준비 단계를 거치고 있다. 생산과 소비 수치의 비교 평가는 이 준비 단계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가 완전하게 정체하는 상황이 계속될 리는 없다. 그러나 이 상황이 계속되더라도 이 준비 단계는 아직도 역사 시기 전체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앞으로 연구를 진전시키는 데 우리에게 필요한 아주 중요한 첫 번째 결론이다.

     

     

    제 2 장 경제성장과 당 지도부의 좌충우돌

     

    1. "전시 공산주의", "신경제정책", 쿨락에 대한 정책

    소련 경제의 성장곡선이 중단 없이 고르게 상승한 경우는 결코 없었다. 사회주의 정권 성립 후 첫 18년 동안 경제성장 단계를 구분 짓는 격심한 위기가 여러 번 나타났다. 현정권의 정책과 관련하여 소련 경제사를 간략하게 개괄하는 것은 소련 체제를 진단하고 그 미래를 예상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 후 첫 3년은 대단히 잔인한 내전의 시기였다. 이때의 경제활동은 전적으로 전선 유지의 필요성에 바쳐졌다. 문화생활은 구석에 숨어 좋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신 지독한 물질적 결핍의 상황에서 창조적 지성들이 대담하게 자기 영역을 확장하였다. 특히 레닌의 사상은 이 시기의 전형적인 모범이었다. 이때가 소위 "전시 공산주의(1918∼21)" 시기였다. 이 시기의 경제형태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전시 사회주의"와 대단히 유사했다. 이 시기 소련 정부의 경제정책은 주로 군수산업 지원에 바쳐졌다. 그리고 부족한 자원을 군사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도시인구를 생존시키는 데에 바쳐졌다. 전시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적에게 포위 당한 성(城)에서 소비를 체계적으로 통제하는 체제였다.

    그러나 맨 처음 이 정책이 입안되었을 때에는 좀더 광범위한 목적이 있었다. 소련 정부는 이 극심한 통제 체제를 발전시켜 생산과 분배에서 계획경제를 직접 도입하려했다. 다른 말로 하면, "전시 공산주의"를 파괴시키지 않고 서서히 진짜 공산주의에 도달하기를 희망했다. 1919년 3월 채택된 볼셰비키당 강령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련 정부의 현재 과업은 계획되고 조직된 국가 차원의 분배체제를 동요 없이 건설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제품 분배가 상거래를 대체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시 공산주의"의 강령과 점점 갈등을 일으켰다. 전쟁으로 인한 생산수단의 파괴 뿐 아니라 생산자의 이익 억압 때문에 생산은 계속 감소했다. 도시는 곡물과 원자재를 농촌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도시는 과거의 기억에 따라 화폐라고 불리는 얼룩덜룩한 종이쪽지 외에는 농촌에게 줄 것이 없었다. 따라서 농민은 자신의 생산물을 땅속에다 숨겼다. 정부는 이 상황에서 곡물을 징발하기 위해 노동자 무장파견대를 농촌으로 보냈다. 이에 농민은 파종 규모의 축소로 대항했다. 내전이 끝난 직후인 1921년에 산업생산량은 내전 이전의 5분의1로 떨어졌다. 강철 생산은 4,200,000톤에서 183,000톤으로 떨어졌는데 과거 생산량의 23분의 1에 불과했다. 곡물생산량은 801억 파운드에서 573억 파운드(1922년)로 줄었다. 이 해에는 끔찍한 기근이 일어났다. 동시에 외국무역은 27억 루블에서 3천만 루블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소련의 생산력 붕괴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었다. 나라 전체와 국가기구는 멸망 일보직전이었다.

    전시 공산주의의 유토피아적 희망은 이후 많은 측면에서 정당하고 무자비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모든 계산은 서방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자 혁명이 곧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에 근거하였다. 이 전제를 고려하지 않을 경우 볼셰비키당의 이론적 오류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소련이 나중에 제공할 식량과 원자재를 신용담보로 사회주의혁명을 달성한 독일 노동자들이 생산기계 및 완제품 뿐 아니라 수만 명의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 엔지니어, 조직가들을 소련에 제공할 것이다. 이 희망은 당연한 상식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독일에서 노동자 혁명이 성공하였다면 독일 뿐 아니라 소련의 경제발전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너무도 대대적으로 진전되어 오늘날 유럽과 전 세계의 운명은 비교할 수 없이 전도가 양양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사민당 지도자들이 이 역사의 진전을 혼자 힘으로 봉쇄하였다.(역자 주: 1918년 11월 혁명으로 독일의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인민위원회 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이 혁명 정부의 각료들인 사민당 및 독립사민당 지도자들이 소비에트를 해체시키고 제헌의회를 수립시켜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사회주의혁명이 독일에서 성공했더라도 국가 주도의 직접 분배체제가 폐기되고 상거래 분배 방식이 부활되어야 했다. 이 점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농촌에 고립적으로 분산된 수백만의 농민경제단위는 외부세계와 자신들의 경제 관계를 상거래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규정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지적하며 레닌은 시장 부활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상거래에 의한 물자 순환은 농민과 국유화 공업간에 소위 "연결고리"를 마련해줄 것이었다. 이 "연결고리"에 대한 이론적 정식은 아주 단순하다: 국가가 농민의 노동 생산물을 강제 징발하지 않도록 공업은 농촌이 원하는 공업생산물을 적절한 가격으로 공급한다.

    농촌과의 경제 관계를 호전시키는 것이 신경제 정책의 가장 본질적이고 시급한 과제였다. 이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전시 공산주의의 짧은 실험을 통해, 사회화된 공업부문 역시 자본주의적 화폐지불 방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계획경제는 단순히 지적 데이터에만 의존할 수 없다. 수요 공급의 법칙은 상당한 기간에 걸쳐 필요한 물질적 기초로 남아 있을 것이며 경제정책의 오류를 교정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될 것이다. 신경제 정책에 의해 합법화된 시장은 국가가 통제되는 화폐의 도움으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농촌의 자극을 받아 1923년부터 공업이 소생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 과정은 즉시 가속도가 붙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1922년과 1923년에 산업생산량은 두 배로 늘어났고 1926년에 이미 내전 이전의 수준을 회복했다. 즉 1921년에 비해 생산량이 5배 이상 늘었다. 이 정도면 신경제 정책이 공업에 미친 영향을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훨씬 느린 속도이기는 했지만 곡물수확량이 동시에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찍부터 볼셰비키당 내에 존재했던 공업과 농업의 관계에 대한 견해 차이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1923년부터 날카롭게 대립되기 시작했다. 모든 자원이 완전히 고갈된 나라에서 농민들로부터 곡물과 원자재를 빌리지 않고는 공업이 발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농업생산물에 대한 너무도 무거운 "강제 채무"(역자 주: 도시의 생산력이 완전히 파괴된 상황에서 국가의 강제력을 동원하여 농민의 농업생산물을 일시적으로 징발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농민의 노동의욕을 죽여버렸다. 미래의 번영을 확신하지 못하자 농민은 도시에서 온 곡물 징발대에 대항하여 파종을 거부하는 것으로 저항했다. 그렇다고 곡물 징발을 완화할 수도 없었다. 농민의 생산물이 없이는 공업 발전이 지체될 뿐이었기 때문이다. 공업제품을 도시로부터 공급받지 못하자 농민은 스스로 수공업 노동에 종사하여 필요를 충족시키려 하였다. 이 결과 농촌 가내수공업이 부흥하였다. 농업과 공업간의 역동적 균형을 성취하는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농촌에서 얼마나 많은 곡물을 징발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당내에는 이견이 발생하였다. 논쟁은 농촌의 복잡한 사회 구조에 의해 즉시 복잡하게 발전하였다.

    1923년 봄에 열린 당 대회에서 아직도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분파인 "좌익 반대파"의 어느 대표가 불길한 도표의 형태로 공업제품과 농업생산물의 가격 차이를 설명하였다. 이 현상은 당시 처음으로 "가위"라고 이름지어졌다. 이 용어는 곧 거의 국제적 용어가 되었다.(역자 주: 국내에는 협상가격이라는 번역어로 탄생하여 좌익에 퍼졌다.) 공업이 계속 침체할 경우 가위의 날은 점점 벌어져 결국 도시와 농촌간의 관계는 불가피하게 단절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볼셰비키당이 성취한 민주주의 농업혁명과 이 당이 사회주의의 기초를 구축하기 위해 시행한 정책을 농민은 명확히 구분해 바라보았다. 지주와 짜르 소유의 토지를 몰수하여 볼셰비키당은 매년 금화 5억 루블이 넘는 혜택을 농민에게 선사했다. 그러나 국가가 생산하는 공업제품의 가격 때문에 농민은 선사 받은 것보다 훨씬 많은 액수의 생산물을 헌납하고 있었다. 10월 혁명의 단단한 매듭으로 결박된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대차대조표가 매년 수억 루블의 손실을 농민에게 전가했다. 그렇다면 노동계급과 농민의 관계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유산인 농촌경제의 분산적 성격은 10월 혁명이 가져다준 내전의 파괴로 더욱 강화되었다. 혁명 후 10년에 걸쳐 자영농민의 수는 1,600만 명에서 2,50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 현상은 자연스럽게 농민기업 다수의 순수 소비적 성격을 강화시켰다. 이 때문에 농업생산물이 도시로 충분히 유입되지 못했다.

    소상품 경제는 불가피하게 착취자를 탄생시킨다. 농촌의 생산력이 회복되는 것에 비례하여 농민층의 분화가 가속화되었다. 이 사태는 이미 과거의 잘 알려진 전철을 밟았다. 쿨락(역자 주: 타인의 노동을 고용한 부유한 농민)의 성장은 농업의 전반적 성장을 훨씬 앞질렀다. "농촌으로 향하자"는 구호를 내건 정부의 정책은 실제로 쿨락을 위한 것이었다. 농업세는 부농보다 빈농에게 더 무겁게 매겨졌다. 그리고 부농은 국가의 신용 대부 가운데 알짜만 골라 차지했다. 잉여곡물은 주로 농촌의 상층부가 차지하여 빈농은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투기 대상이 되어 도시 부르주아 분자들에게 판매되었다. 당시 당내 지도부의 이론가 부하린은 농민에게 "부자가 되시오"라는 유명한 구호를 던져주었다. 이 구호는 이론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쿨락의 점진적 성장으로 사회주의가 도래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절대 다수의 대중을 희생시켜 극소수 쿨락을 살찌우는 것이었다.

    자신이 내세운 정책의 포로가 되어 당 지도부는 농촌 소부르주아 계급의 요구 앞에서 한 발 한 발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5년 농업부문에서 노동력 고용과 토지 임대가 합법화되었다. 농민층은 소규모 자본가와 고용 노동자로 양극화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공업제품이 부족했기 때문에 국가부문은 농촌시장에서 밀려났다. 쿨락과 소규모 가내수공업자 사이에 마치 땅에서 솟은 것처럼 중간상인이 등장했다. 국영기업은 원자재를 구하기 위해 개인 상인들과 계약을 체결하는 빈도수가 높아졌다. 자본주의는 밀물처럼 상륙하여 모든 곳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소유형태의 혁명은 사회주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단지 제기할 뿐이다. 이 사실을 지각 있는 사람들은 명백히 목격할 수 있었다.

    1925년 쿨락 위주의 정책이 전면화되고 있을 때 스딸린은 토지 국유화를 철폐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어느 기자가 그의 계획에 대해 이렇게 질문했다: "농업 발전을 위해 개별 농민이 경작하는 토지의 재산권을 그에게 십 년간 양도하는 것이 더 수월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스딸린은 이렇게 답변하였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40년간 양도할 수도 있겠지요." 그루지아의 농업 인민위원은 스딸린의 제안에 따라 토지 국유화 철폐 법안을 상정하였다. 이 법의 목적은 농업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농민에게 심어주는 것이었다. 이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1926년 봄 시장에 나온 곡물의 거의 60%가 전체 농민 가운데 6% 밖에 되지 않는 토지 소유 농민의 손에 들어 있었다! 국가는 외국무역은 고사하고 국내소비용 곡물도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다. 수출 규모가 빈약했기 때문에 외국으로부터 공업제품 수입은 고사하고 꼭 필요한 기계류와 원자재도 한계선까지 수입을 감축시킬 수밖에 없었다.

    공업화를 지체시키고 일반 농민 대다수에게 타격을 가한 쿨락 위주의 정책은 1924년부터 1926년 사이 그 정치적 결과를 뚜렷하게 드러내었다. 도시와 농촌의 소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의 정치적 파워를 크게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하급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장악하였다. 관료집단의 자신감과 파워도 증대하였다. 이들은 노동계급에게 점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제 당과 소비에트의 민주주의가 완전히 억압당했다. 쿨락의 정치적 ·경제적 성장은 당 지도부의 두 지도적 인물인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를 경악시켰다. 이들은 당시 노동계급의 두 중심도시인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의 소비에트 의장이었다. 이들의 반응은 의미심장했다. 그러나 당과 국가기구의 관료층은 물론 지방에서도 스딸린에 대한 지지가 굳건했다. 쿨락 위주의 정책은 승리했다. 1926년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추종자들과 함께 1923년의 반대파(Opposition of 1923)에 합류하였다. 이 분파에게는 "뜨로츠키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물론 당 지도부는 "원칙적으로는" 농업집단화 정책을 폐기하지 않았다. 단지 몇십 년간 이 정책을 연기시킨 것뿐이었다. 이후 농업인민위원이 된 야코블레프는 1927년 이렇게 적었다: "농촌의 사회주의적 재건은 오직 집단화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그러나 집단화는 1년, 2년, 3년 아니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달성될 수 없다. 이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집단농장과 집단촌은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상당히 오래 개인소유라는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당시 농민의 8%만이 집단화되어 있었다.

    1923년에 수면 위로 떠오른 소위 "총노선"에 대한 당내 투쟁은 1925년에는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전개되었다. 공업과 농업의 모든 문제들을 망라한 확대 강령에서 좌익반대파는 이렇게 선언했다: "노동계급 독재를 떠받치는 기둥의 하나인 토지 국유화를 폐기하고 침해하는 모든 정치 경향들에 대해 당은 저항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의 기도를 분쇄해야 한다." 이 문제에서 반대파는 승리했다. 토지 국유화에 대한 직접적 공세는 포기되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토지의 소유형태 이상을 내포하고 있었다.

    "개인소유 농업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집단농장의 좀더 빠른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 해마다 체계적인 방식으로 집단농장으로 조직되는 빈농들을 지원하기 위해 상당 액수의 예산이 따로 책정되어야 한다. 소규모 농장을 대규모 집단농장으로 바꾸기 위해 협동조합이 운영되어야 한다." 그러나 광범위한 집단화를 주창하는 강령은 이후 유토피아적이라고 끈질기게 비판되었다. 좌익반대파를 축출하기 위해 소집된 제15차 당 대회에서 이후 국가인민위원회 의장이 될 몰로토프는 거듭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광범위한 농민 대중의 집단화에 관한 빈농의 환상에 빠져들면(!) 안된다. 지금 상황에서 농촌의 집단화는 가능하지 않다." 이 발언은 1927년 말에 나왔다. 당시 당 지도부의 농업 정책과 지금 정책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당 지도부 구성을 위해 동맹한 스딸린, 몰로토프, 리코프, 톰스키, 부하린 등은 "초공업화(super-industrialization)"와 계획경제를 주장한 좌익반대파에 대해 투쟁했다. 1926년 초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반대파로 넘어왔다. 미래 역사가들은 사회주의 정부의 과감한 경제시책을 악의에 찬 불신으로 대했던 이때의 분위기를 적잖이 놀라면서 역사책에 기록할 것이다. 그러나 외부세계의 자극에 의해 공업화는 무계획적으로 급속히 진행되었다. 따라서 모든 경제적 계산은 완전히 무시되었고 이 결과 공업화에 따른 총비용은 엄청난 비율로 증가하였다. 1923년 반대파는 5개년 계획 시행을 지도부에 요구했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로 뛰어내리는" 행위에 공포를 느낀 당 지도부의 소부르주아적 감성은 이 요구를 조소했다. 1927년 4월까지만 해도 스딸린은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드니에페르스트로이(Dnieperstroy)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은 농민이 암소 대신 전축을 사는 것과 같다. 이 의미심장한 비유는 당시 당 지도부의 강령을 집약해서 보여 주었다. 이 당시 전 세계의 부르주아 언론과 이들의 꽁무니를 쫓는 사회민주주의 언론은 당 지도부가 "좌익반대파"의 공업 낭만주의(industrial romanticism)를 공식적으로 비판한 것에 공감을 표했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당내에서 요란한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농민은 점점 더 대담한 파업으로 공업제품의 부족에 응답하고 있었다. 이들은 곡물을 시장에 내놓지도 않고 파종의 규모를 늘리지도 않았다. 당 지도부의 우익은 리코프, 톰스키, 부하린 이었는데 당시 지도부의 논의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업의 발전속도를 늦추는 한이 있어도 곡물 가격을 인상시켜 농촌의 자본주의적 경향을 더 확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정책 기조 하에서 사태를 해결할 유일한 방식은 농업 원자재를 수출하고 이 대금으로 외국의 공산품을 수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농민경제와 사회주의 공업과의 "연결고리"를 확립하는 대신 쿨락과 세계자본주의 사이와 연결고리를 마련하는 행위였다. 이것을 위해 10월 혁명을 성공시킬 필요는 없었다.

    1926년 당 협의회에서 좌익반대파를 대표하여 필자는 이렇게 응답했다: "특히 쿨락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시켜 공업화를 가속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하면 다량의 공업제품이 싼값으로 농민에게 공급될 수 있다. 이 방식을 통해 노동자와 농민 다수는 이익을 볼 것이다‥‥‥‥ 농촌으로 향하자는 구호는 공업에게 등을 돌리자는 의미가 아니다. 이 구호의 진정한 의미는 공업이 농촌을 향하게 하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농촌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 주도의 공업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스딸린은 반대파의 "꿈처럼 황당한 계획"에 대해 호통을 쳤다. 공업이 "서둘러 발전되어 농업과 분리되고, 결국 나라의 경제적 축적의 적당한 속도를 파탄시키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당의 결정들은 계속해서 쿨락의 입지를 수동적으로 강화하는 격언들로 반복되었다. "초공업화론자"들을 최종적으로 분쇄하기 위해 1927년 12월에 열린 제15차 당대회는 "국가자본이 대규모 건설공사에 너무 많이 투입되는 위험"을 경고했다. 당시 당 지도부 분파는 반대파의 노선만을 위험요인으로 간주했다.

    주로 혁명 이전의 기계류로 공장을 가동하고 낡은 도구로 농사를 짓던 소위 회복기가 1927-28 회계년도에 끝나고 있었다.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독립적 공업 건설사업이 진행되어야 했다. 더 이상 어둠 속을 더듬으면서 계획 없이 전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923년과 1925년 사이에 좌익반대파는 사회주의 공업화의 가능성들을 이미 분석한 후 이렇게 일반적 결론을 내렸었다: 자본가 계급으로부터 상속받은 장비를 다 소모시킨 후 소련의 공업은 사회주의 축적의 기반 하에 자본주의에서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고도 성장을 성취할 수 있다. 좌익반대파가 15퍼센트 내지 18퍼센트 정도로 조심스럽게 성장수치를 예상한 것에 대해 당지도부는 미지의 미래를 알리는 황당한 음악이라고 공개적으로 조소하였다. 당시에는 이것이 "뜨로츠키주의"에 대한 투쟁의 본질이었다.

    1927년에 드디어 완성된 5개년 계획의 첫 공식 초안은 구두쇠와 같은 쫀쫀한 계산으로 채워졌다. 공업성장률은 매년 9퍼센트에서 4퍼센트로 감소되도록 계획되었다. 인구 일인당 소비는 5년 동안 겨우 12퍼센트만 증가하도록 계획되었다! 5개년 마지막 해의 국가예산은 국민총소득의 16%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주의를 건설할 의도가 전혀 없었던 짜르의 러시아에서도 국가예산이 국민총소득의 18%를 차지했었다! 이 사실은 5개년 계획의 첫 초안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심하다는 점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이 계획을 입안하는 데 참여했던 공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은 수년 후 외국 세력의 지시에 의해 의식적으로 태업을 했다는 혐의로 엄한 형벌을 받았다. 그들의 계획은 당시 정치국의 "총노선"에 완전히 부응하는 것이었고 상부의 명령으로 작성되었다고 피고인들은 재판 당시 당당하게 증언할 수도 있었다.

    이제 당내 분파들의 투쟁은 5개년 계획 초안이 제출되는 시점에서 산술적 수치로 표현되었다. 좌익반대파의 강령은 이렇게 주장했다:"10월 혁명의 10주년에 하찮고 완전히 비관적인 계획을 제시하는 것은 사회주의 건설을 반대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1년 후 정치국은 생산을 매년 9% 증가시키는 새로운 5개년 계획을 채택하였다. 결국 "초공업주의론자"의 성장수치에 근접하는 끈질긴 경향이 나타났다. 1년이 지난 후 정부의 계획이 또 한번 근본적으로 변화했을 때 국가계획위원회는 제3차 5개년 계획을 입안하였다. 이 계획은 1925년 좌익반대파의 전망과 아주 근접한 경제성장률을 제시하였다. 이 사태는 모든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였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에 근거하여 바라보면 소련의 경제정책사는 그 동안 공식적으로 발표된 전설과는 매우 다르다. 불행하게도 웹 부부와 같은 경건한 연구자들은 이 점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없다.

     

    2. 급선회: "4년 내에 5개년 계획을 완수하자"와 "완벽한 집단화"

    개별 농민기업에 대한 우유부단한 태도, 거대 계획에 대한 불신, 최소 경제개발 속도의 옹호, 국제정세에 대한 무관심과 방기 등이 전부 모여 "일국 사회주의" 이론의 핵심이 되었다. 이 이론은 1923년 가을 독일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이 패배한지 딱 1년 후 처음으로 스딸린이 제시했다. 공업화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 농민과 불화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 세계혁명에 의존하지 말자, 그리고 무엇보다 당 관료집단의 권력을 비판으로부터 보호하라! 농민층의 분화는 좌익반대파의 발명품으로 비난되었다. 위에 언급한 야코블레프는 중앙통계국(Caltral Statistical Bureau)을 해체했다. 이 기구의 통계기록이 쿨락의 경제력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기 때문에 당 지도부의 미움을 산 것이었다. 한편 당 지도부는 평온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생산품의 기근은 끝날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질질 끌고 있다, "경제발전의 평온한 속도가 유지되고 있다", 앞으로 곡물은 좀더 "공평하게" 수매될 것이다 등등. 그러나 세력이 강화된 쿨락은 중농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도시에 대해 곡물봉쇄를 단행했다. 1928년 1월 소련의 노동계급에게 기근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역사는 악의에 찬 농담을 할 줄 안다. 쿨락이 혁명의 목을 죄고 있던 바로 이때 좌익반대파 대표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시베리아 각지로 유형 당했다. 죄목은 쿨락의 유령 앞에서 "공포에 떨었다"는 것이다.

    정부는 쿨락의 곡물봉쇄가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의 표현에 불과한 것처럼 가장했다. 즉 보통의 정치적 동기가 작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쿨락은 어디서 나타났는가? 그러나 쿨락은 당 지도부의 이런 "관념"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가 곡물을 숨긴 이유는 자신에게 제시된 거래조건이 이윤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쿨락은 광범위한 농민층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둘 수 있었다. 쿨락의 태업을 탄압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했다. 정책을 변경해야 했다. 그러나 당 지도부는 정책 전환에 대해 동요하면서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했다.

    당시 아직도 정부 수반이었던 리코프는 1928년 7월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개인 농장을 발전시키는 것은 ‥‥‥ 당의 주요한 과업이다." 그러자 스딸린은 그의 발언을 재청하였다: "개인농장은 이미 효용성을 상실했으며 더 이상 이들을 지원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 당의 노선과 아무 관련도 없다." 이로부터 1년이 채 안되어 당의 노선은 이 발언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졌다. "완벽한 집단화"의 먼동이 지평선에 떠오르고 있었다.

    정책 전환은 이전의 정책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방법론에 근거하지 않은 채 역시 경험적으로 그리고 당 지도부 내부의 암투(暗鬪)를 통해 나타났다. 좌익반대파의 강령은 이보다 1년 전에 이미 이렇게 경고했다. "우파와 중앙파는 좌익반대파에 대한 일반적인 적대감에 기초해 연합했다. 좌익반대파가 제거될 경우 두 분파 사이의 투쟁은 반드시 가속화할 것이다." 사태는 예상했던 대로 전개되었다. 두 분파의 지도자들은 흔히 그렇듯이 좌익반대파의 예상이 적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1928년 10월 19일이 되어야 스딸린은 이렇게 공식 발표했다. "우편향과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우편향에 대한 유화적 태도에 대해 잡담만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투쟁할 때가 되었다." 두 분파는 이제 당내에서 자신들의 지지도를 가늠하고 있었다. 민주주의가 억압당한 당은 어두운 소문과 추측으로 살고 있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당의 공식 언론은 언제나 그랬듯이 당황한 빛은 하나도 없이 이렇게 발표했다: 정부수반 리코프는 "소련 정부의 경제적 난관을 투기대상으로 삼았다", 코민테른 의장 부하린은 "자유부르주아지의 끄나풀이었다" ; 전 러시아 노동조합중앙회 의장 톰스키는 애처로운 노동조합 활동가에 불과하다. 리코프, 부하린, 톰스키는 모두 정치국 정회원이었다. 지금까지 좌익반대파에 대한 투쟁은 전부 우파로부터 나왔었다. 이제 부하린은 스딸린을 이렇게 당당히 비난할 수 있었다: 우파에 대한 투쟁에서 빌어먹을 좌익반대파의 강령 일부가 동원되고 있다.

    어쨌든 정책 전환은 시작되었다. "부자가 되시오"라는 구호와 쿨락의 고통 없는 점진적 성장이 사회주의 건설의 초석이라는 이론은 늦게나마 그러나 그만큼 더욱 단호하게 비난받았다. 이제 공업화는 대세가 되었다. 자기만족적인 정적주의(靜寂主意)는 공포에 질린 호들갑으로 바뀌었다. 레닌이 주창했던, "따라잡고 추월하시오"라는 반쯤 잊혀졌던 구호는 "가능하면 빠른 시간 내에"라는 어구가 붙여지면서 완벽한 문장이 되었다. 당 대회의 원칙으로 이미 확정된 5개년 계획은 목표를 최저 수준으로 잡고 있었다. 이제 이것은 분쇄된 좌익반대파 강령으로부터 전부 빌려온 새로운 계획으로 대체되었다. 어제만 하여도 드니에페르스트로이 발전소 건설은 전축에 비유되었었는데 이제는 가장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계획의 일부가 성공적으로 완수되자 새로운 구호가 제출되었다: "5개년 계획을 4년만에 달성하자." 계획경제의 능력에 대해 깜짝 놀라버린 경험주의자들은 이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결심했다. 인간의 역사에서 종종 나타나듯이 기회주의는 이제 모험주의로 바뀌었다. 1923년부터 1928년까지 정치국은 부하린의 "거북이 걸음" 철학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제는 매년 20% 내지 30%의 경제성장 목표치를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성과를 당연히 완수해야 할 기준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각 분야의 조건적인 상호관계를 인식하지 못했다. 재정적자는 지폐의 남발을 통해 메워졌다.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유통된 은행지폐의 규모는17억 루블에서 55억 루블로 불어났다. 그리고 제2차 5개년 계획의 시작 시점에는 84억 루블로 증가했다. 강요된 공업화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 대중에게 당 지도부는 어떠한 정치적 설득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금화 1루블당 미화 5달러로 자동적으로 계산된 이론상의 화폐 액면가도 무시했다. 신경제 정책이 시작될 때는 기초가 튼튼했던 통화체제는 이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계획 완수 뿐 아니라 정권 유지에도 주요한 위험요소는 농민층이었다.

    1928년 2월 15일 소련 인민은 『프라우다』의 사설을 통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농촌은 그 순간까지 당국에 의해 묘사된 모습이 아니라 축출된 좌익반대파가 제시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어제까지도 쿨락의 존재를 부정했던 언론은 오늘 갑자기 상부 지시에 따라 쿨락을 농촌 뿐 아니라 당내에서도 발견했다. 정교한 기계류를 소유하고 고용노동을 부리고 정부로부터 수십만 푸드(역자 주: 소련의 중량단위로 16.38kg.)의 곡물을 숨기면서 "뜨로츠키주의" 정책을 끊임없이 비난했던 쿨락이 이제는 공산당 세포들을 아주 빈번히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쿨락이 지방 비서직을 장악하여 빈농과 농업노동자의 당원 가입을 금지한 방식들에 대해서 언론은 경쟁하듯이 대서특필했다. 과거의 모든 조건들은 이제 그 성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더하기와 빼기 부호의 위치가 서로 바뀌었다.

    도시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즉시 쿨락의 곡물을 빼앗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은 오직 강제력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쿨락 뿐 아니라 중농의 비축된 곡물을 강탈하는 행위는 공식적으로 "특별조치"라고 불렸다. 이 말은 내일이면 만사가 과거처럼 평온해질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농민은 이렇게 겉만 번지르르한 말을 믿지 않았다. 이들은 옳았다. 곡물을 강제로 징발 당하자 쿨락은 식량 증산의 동기를 가질 수 없었다. 고용 농업노동자들과 빈농들은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농업은 다시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와 함께 국가의 존립이 다시 위태로워졌다. 이 상황에서 모든 수단을 써서라도 "총노선"을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농민의 개별 영농을 여전히 주로 강조하면서도 스딸린과 몰로토프는 소비에트농장과 집단농장이 더욱 빨리 확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급한 식량 확보 문제 때문에 노동자 무장대가 농촌에 파견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에 개별 영농에 대한 시책은 공중에 붕 떠 버렸다. 결국 집단화로 "퇴행"하는 것이 필요했다. 곡물 징발을 위한 일시적 "특별조치"는 예상 밖으로 "쿨락 계급을 일소"하는 시책으로 발전했다. 식량배급보다 횟수가 더 빈번한 정부의 모순적 지시들은 정부가 농민문제에 대해 5개년 계획은 고사하고 5개월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증명했다. 식량위기에 의해 강요된 새로운 계획에 의하면 5년 후에 집단농장은 농민 토지의 70%를 차지하기로 계획되었다. 지난 10년 동안 농업집단화 작업이 농민의 1%에게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새로운 계획의 규모는 엄청났다. 그러나 5개년 계획의 중간지점에서 집단화는 애초의 목표를 훨씬 밑돌았다. 1929년 11월 스딸린은 자신의 정책적 동요를 청산하면서 개별 영농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전국의 촌락, 군, 주에까지 전부" 집단농장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야코블레프는 집단농장은 상당히 오랜 기간 "농민 개인소유라는 바다에 떠 있는 섬"에 불과할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던 그가 이제 농업인민위원이 되어 "쿨락 계급을 일소"하고 "가능한 한 일찍" 집단화를 완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25년 집단농장의 비율은 1.7%에서 3.9%로 증가했다. 그리고 1930년에는 23.6%, 1931년에는 52.7% 1932년에는 61.5%로 증가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농업 집단화가 전체적으로 노골적인 강제력에 의해서 달성되었다고 허튼 소리를 늘어놓는다. 현재 이 주장을 반복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과거에 농민은 토지를 소유하기 위한 투쟁에서 한때는 지주에 대해서 봉기를 일으켰고 또 한때는 미경작 지역에 농장을 일구었다. 그리고 또 어떤 때에는 좁은 토지를 소유한 고통의 대가로 하늘 나라를 약속한 온갖 종파들에게 서둘러 귀의하였다. 대농장을 몰수하고 토지를 잘게 쪼갠 후에 이제 다시 이 조그만 땅뙈기를 커다란 농지로 통합하는 것은 농민, 농업, 사회 전체에게 생사가 걸린 중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이 일반적인 역사적 고찰에 의해 농민문제가 해결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집단화 성공의 진정한 가능성은 농촌 위기의 깊이나 정부의 행정적 열정이 아니라 생산자원에 따라 주로 결정된다. 즉 대규모 농업에 필요한 기계를 제공해줄 공업의 능력에 달린 문제이다. 이 물질적 조건을 당시 소련은 구비하지 못했다. 집단농장은 주로 소농경영에만 적합한 농기구로 갖추어졌다.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급히 추진된 집단화는 경제적 모험주의였다.

    자신이 추진한 정책 전환의 급진적 성격을 나중에야 제대로 인식한 정부는 새로운 정책에 대비한 기초적인 정치적 준비가 없었고 준비를 할 수도 없었다. 농민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의 권력기관들조차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 소유의 가축과 재산이 국가로 접수될 것이라는 소문을 듣자 농민들은 몸이 달아올랐다. 이 소문은 진실과 거리가 멀지도 않았다. 좌익반대파를 희화화하면서 관료집단은 "농촌 마을을 약탈하였다." 농민의 눈에는 집단화는 주로 자기 재산을 접수하는 형태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정부는 말, 소, 양, 돼지 뿐 아니라 새로 부화된 병아리까지 집단화하였다. 어느 외국인의 관찰에 따르면, "정부는 어린애 발에서 모피신발까지 벗겨내면서 쿨락 일소 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러자 농민은 헐값에 소를 팔거나 고기와 가죽을 건지기 위해 가축을 도살했다. 이 현상은 유행병처럼 퍼져 나갔다.

    1930년 1월 모스크바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 안드레예프는 집단화에 대해서 양면 그림을 제시했다: 한편으로는 소련 전역에서 강력하게 진행되고 있는 집단화운동은 "이 운동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장애물을 쓸어버릴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농민은 자신의 농기구와 가축 그리고 종자까지 집단농장에 들어오기 전에 약탈적으로 파는 행위는 "이제 정말 위기 수준에 도달했다." 이 두 일반화는 아무리 서로 모순된다 해도 부정적인 측면에서 집단화가 절망의 유행병을 확산시켰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보여주고 있다. 위에 언급한 외국인 관찰자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완벽한 집단화는 마치 3년 전쟁이 스치고 지나간 것처럼 국가경제를 거의 유례가 없을 정도로 멸망까지 몰고 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2,500만 명 농민의 이기심은 늙은 농부의 낡은 말(馬)과 같았지만 여전히 하나의 세력으로 존재하면서 농업의 유일한 원동력이 되었었다. 이것을 관료집단은 한꺼번에 제거해 버리려 했다. 그것도 농업장비, 농업 지식, 농민의 지지 등 모든 것을 결여한 2만여 집단농장 행정사무실의 지시를 통해 일이 이루어졌다. 이 모험주의의 끔찍한 결과는 곧 모습을 드러냈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후유증을 남겼다. 1930년 835억 파운드에 달했던 곡물수확량은 다음 2년 동안 700억 파운드 이하로 떨어졌다. 이 차이는 그 자체로 보면 큰 재앙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차이는 도시를 보통의 기근 수준으로라도 유지시킬 만큼의 곡물량이었다. 기술영농 분야에서는 상황이 더 나빴다. 집단화가 있기 바로 전에 설탕 생산량은 거의 109억 파운드에 달했다. 그런데 완벽한 집단화가 절정에 달하고 있을 때 사탕무 부족으로 이 수치는 48억 파운드로 떨어졌다. 즉 생산량이 과거의 반 수준에 그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타격은 동물 보유에서 나타났다. 말의 수는 1929년의 3,460만두에서 1934년의 1,560만 두로 55%나 감소했다. 뿔이 달린 소의 경우 3,070만두에서 1,950만두로 40%나 떨어졌다. 그리고 돼지의 수는 55%, 양의 수는 66% 감소했다. 기아, 추위, 전염병, 정부의 탄압 등에 의해 희생된 사람의 수는 불행하게 가축의 도살보다 부정확하게 집계되었지만 수백만에 이르렀다. 이 엄청난 손실에 대한 책임은 집단화 자체가 아니라 집단화 시행 과정에서 사용된 맹목적이고 폭력적일 모험주의에 있었다. 관료집단은 아무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집단농장의 규약은 농민의 개인적 이해와 농장의 복지를 결합시키기 위해 작성되었는데 집단화 저항 촌락들이 잔인하게 황폐화된 이후에야 마침내 공표 되었다.

    농업집단화 정책의 강제적인 성격은 1923∼28년 정책의 결과를 하루빨리 청산하고 새로운 정책을 통해 어느 정도의 위안을 찾으려는 필요에 의해 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화는 좀더 합리적 속도와 좀더 치밀한 형태로 진행될 수도 있었고 실제 그랬어야 했다. 권력과 산업을 한 손에 장악한 관료집단은 나라 전체를 재앙의 근처까지 인도하지 않고도 집단화 과정을 진척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나라의 물질적 ·도덕적 자원에 더욱 조응하는 속도를 채택할 수도 있었다. 1930년 "좌익반대파" 망명 기관지는 이렇게 주장했다: "소련 국내외 상황이 좋을 경우에 농업의 물질적 ·기술적 조건은10년 내지 15년의 기간 동안 철저하게 변모되어 집단화에 필요한 생산기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간에 소련의 정권을 타도할 수 있는 기회는 한번 이상 주어질 것이다."

    이 경고는 과장이 아니었다. 정권 전복의 숨결은 완벽한 집단화운동 기간에 10월 혁명의 영토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 불만, 불신, 원한이 나라 전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통화의 혼란, 안정되었기 때문에 ".관습처럼 자리잡았던" 자유시장 가격의 등귀, 곡물-고기-우유 등 식량에 대한 국가와 농민간 유사 상거래의 징발로의 전환, 집단적 소유 시설에 대한 대중의 약탈과 약탈의 광범위한 은폐에 대해 소련 당국이 벌인 목숨을 건 투쟁, 쿨락의 파괴행위에 대한 당의 순전히 군사적 동원, 식량카드와 기아적 배급제의 복귀, 여권제도의 부활 등은 소련 전역에 걸쳐 이미 오래 전에 끝난 내전 분위기를 부활시켰다. 도시의 공장에 대한 식량과 원자재의 공급은 계절이 바뀔수록 악화되기만 하였다. 참을 수 없이 열악한 작업환경은 노동력 이동, 꾀병, 부주의한 작업, 기계의 고장, 높은 비율의 불량품 생산 그리고 일반적으로 낮은 제품의 품질 등을 가져왔다. 1931년 평균노동생산성은 11.7% 감소했다. 소련 언론에 소개된 몰로토프의 우발적 시인에 의하면 1332년 공업생산력은 계획 목표인 26% 증가에 비해 겨우 8.5% 증가에 그쳤다. 그런데 이 시인이 있은 직후 전세계는 5개년 계획이 4년 3개월만에 완료되었다는 소식을 틀림없이 접했다. 그러나 이것은 통계수치와 여론을 조작하는 관료집단의 냉소주의가 무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주요한 문제가 아니다. 5개년 계획의 운명이 아니라 소련의 체제 운명이 진짜 문제였다.

    그러나 소련은 이 위기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 사실은 대중 속에 깊이 뿌리내린 체제 자체의 장점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소련 외부의 상황도 마찬가지로 유리하였다. 농촌의 경제적 혼란과 내전 와중에서 소련은 외부의 적들을 사방에 두고 근본적으로 마비되어 있었다 농민의 불만이 나라를 뒤덮고 있었다. 불신과 동요로 관료기구와 핵심 간부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이때 소련의 동쪽이나 서쪽에서 적의 공격이 있었다면 이 나라는 치명적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 무역과 공업 위기의 첫 몇 년간 자본주의 세계는 놀란 표정으로 소련의 상황이 악화되기만 기다렸다. 어느 누구도 전쟁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감히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했다. 더욱이 어떤 적대국도 소련 내부의 심각한 사회적 격동의 정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사실 이 사회적 격동은"총노선"을 기념하여 연주된 어용 음악의 굉음 한가운데에서도 소비에트 연방을 뒤흔들고 있었다.

    * * *

    지금까지 소련 경제사에 대한 아주 간략한 개괄을 시도했다. 이 시도는 노동자국가의 실제 발전과정이 성과의 안정된 축적이라는 목가적 그림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보여준다. 과거의 위기로부터 미래에 대한 중요한 징후를 끄집어낼 수 있다. 이외에도 소련 정부의 경제정책과 좌충우돌을 역사적으로 개괄하는 것을 통해 인위적으로 강요된 개인숭배를 분쇄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숭배는 실재와 가식의 성과가 지도자의 출중한 능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동계급 혁명으로 수립된 사회주의 소유체제야말로 그나마 존재하는 성과의 원천이다.

    자본주의에 대비된 새로운 사회체제의 객관적 우월성은 물론 지도자들의 통치방식에서도 저절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 통치방식은 또한 소련의 경제적·문화적 후진성도 동일하게 반영한다. 더욱이 관료집단의 형성 조건인 소부르주아적 편협성도 반영한다. 그러나 이 결론을 통해 소련 지도부의 정책이 부차적으로만 중요하다고 추론하는 것은 아주 서투른 오류이다. 나라 전체의 운명이 소련의 경우만큼 정부의 손에 집중되어있는 체제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자본가 개인의 성공과 실패는 전체는 아니지만 상당히 그리고 때때로 결정적으로 개인의 자질에 달려 있다. 변화된 상황을 감안해도 자본가가 자신의 기업과 맺는 관계를 소련 정부는 국가경제 전체에 대해 맺고 있다. 국가경제의 중앙집중화된 성격 때문에 국가권력은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정부의 정책은 성과의 요약이나 순수 통계수치가 아니라 이 성과들을 달성하는 데 동원된 의식적 예측과 계획된 지도력의 구체적인 역할에 비추어 판단되어야 한다.

    소련 정부가 좌충우돌의 정책을 취한 이유는 상황의 객관적 모순 뿐 아니라 이 모순을 제때에 이해하고 이것을 사전에 예방할 지도력의 부족 때문이다. 당 지도부의 오류를 회계장부의 차원에서 정확히 평가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좌충우돌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규명하면 당 지도부가 총경비의 측면에서 소련 경제에 엄청난 부담을 가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론적 내용이 가장 빈약하고 오류를 가장 많이 저지른 분파가 다른 분파들을 제치고 무제한 권력을 손에 넣게 된 이유와 방법은 이성을 통해 역사를 판단할 경우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이 저서에서 전개될 더 많은 분석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열쇠가 주어질 것이다. 동시에 전제적 지도부의 관료적 방식이 경제적·문화적 요구와 어떻게 더욱 날카로운 모순을 일으킬 것인지 그리고 어떤 필연에 의해 새로운 위기와 불안이 소련의 앞날에 돌출할 것인지를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관료집단이라는 이중적 현상을 다루기 전에 이 문제에 답해야 한다: 지금까지 소련 체제가 달성한 성공의 순 이득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소련에서 정말 사회주의가 달성되었는가? 아니면 더 조심스러운 질문을 이렇게 던질 수도 있다: 특정 발전단계에서 자본주의 사회는 그 동안 이룬 성과를 통해 농노제나 봉건제의 복귀를 완벽하게 봉쇄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룩된 소련의 경제적·문화적 성과는 자본주의 복귀라는 위험을 확실히 봉쇄할 수 있을까?

     

  • 트로츠키주의자
    17.04.21

    제 4 장 노동생산성 향상을 위한 투쟁

    1. 화폐와 계획

    지금까지 국가의 단면도를 통해 소비에트 체제를 검토해 보았다 . 이것은 화폐의 단면도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 국가와 화페의 문제는 서로 공통점이 많다 . 왜냐하면 이 두 존재는 결국 핵심적 문제인 노동생산성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 화폐의 강제력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강제력도 계급사회의 유산이다 . 계급사회는 교회나 세속의 물신 ( 物神 ) 을 통해서만 인간 관계를 규정할 수 있다 . 물신들을 수호하는 임무는 물신 중에서 가장 끔찍한 물신인 국가가 담당한다 .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국가와 화폐가 자취를 감출 것이다 .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이것들은 서서히 사멸하기 시작해야 한다 . 사회주의가 실제로 승리할 때 국가는 반 ( 半 ) 국가로 변화하고 화폐는 마술 같은 힘을 잃기 시작한다 . 이것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온갖 물신들로부터 해방되어 인간 사이에 좀더 투명하고 자유롭고 가치 있는 관계들을 만들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화폐의 " 철폐 ", 임금의 " 철폐 " 또는 국가와 가족의 " 일소 " 와 같은 전형적인 무정부주의적 요구들은 기계적인 사고의 전형이다 . 화폐는 우리 마음대로 " 철폐 " 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국가와 오랜 관습인 가족도 우리 마음대로 " 일소 " 할 수 없다 . 이것들은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다하고 증발하거나 해체되어야 한다 . 사회적 재화가 꾸준히 증가하면 일분 일초의 초과노동에 대한 혐오감과 생활필수품의 부족에 대한 굴욕적인 두려움 등이 사라질 때가 온다 . 이때 화폐라는 물신은 마지막 일격을 받고 쓰러질 것이다 . 인간에게 행복이나 불행을 가져다줄 능력을 잃어버린 후 화폐는 통계 종사자들의 편의와 계획 달성에 필요한 장부 영수증에 지나지 않는다 .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면 이 영수증도 아마 필요 없을 것이다 . 그러나 이와 관련된 문제는 우리보다 지능이 훨씬 뛰어난 후배들의 문제로 넘기자 .

    생산수단과 신용제도의 국유화 , 국내 상업의 협동조합화나 국영기업화 , 외국무역의 독점 , 농업의 집단화 , 상속재산법 등은 화폐의 개인적 축적에 엄격한 제한을 가한다 . 그리고 화폐가 고리대금 자본 , 상업자본 , 공업자본 등으로 전환하는 것을 방해한다 . 그러나 화폐의 기능이 착취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도 노동계급 혁명이 시작되는 시점에 일소되지는 않는다 . 다만 수정된 형태로 상인 - 채권자 - 실업가의 역할을 하는 국가로 이전될 뿐이다 . 동시에 가치 척도 , 교환 수단 , 지불 수단 등과 같은 화폐의 근본 기능들은 그대로 유지될 뿐 아니라 자본주의 때보다 활동의 영역을 더 확장한다 .

    계획경제의 실행은 화폐의 위력을 충분히 과시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그 위력의 한계도 드러내었다 . 러시아는 1 억 7 천만의 많은 인구에 도시와 농촌간의 모순이 심각한 후진국이다 . 따라서 이 나라에서는 선험적인 경제계획은 효험이 입증된 복음이 될 수 없다 . 차라리 그 위력이 목표 달성 과정에서 확인되고 수정되어야 할 대강의 실무적 가정 ( 假定 ) 에 불과하다 . 어쩌면 계획경제에 대한 이런 규칙이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 행정적 과업이 더 " 정확하게 " 달성되면 될수록 경제적 지도력은 그만큼 더 무능하다 . 계획을 통제하고 현실에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두 개의 지렛대가 필요하다 . 우선 정치적 지렛대가 있어야 한다 . 이것은 생산에 이해관계가 있는 대중이 계획경제의 지도과정에 실제로 참여하면서 존재한다 . 따라서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없는 정치적 지렛대는 상상할 수도 없다 . 또한 재정적 지렛대가 있어야 한다 . 이것은 보편적 등가물인 화폐의 도움을 받아 선험적인 계산을 현실에서 검증하는 가운데 존재한다 . 그런데 이것은 안정적인 화폐가 없이는 생각도 할 수 없다 . 소련 경제에서 화폐는 그 역할을 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미 얘기했듯이 더 많은 역할을 해야한다 .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에는 상업과 무역이 일반적으로 축소되기는커녕 정반대로 크게 확대되어야 한다 . 모든 산업 부문은 변모하며 성장한다 . 새로운 산업이 계속 등장한다 . 그리고 모든 산업들은 질적 양적으로 서로의 관계를 규정한다 . 자급자족을 위한 농민경제와 폐쇄적 가족생활 등의 일소는 사회적 교환과정 즉 화폐의 실제 유통과정으로 모든 형태의 노동을 수렴시킬 때 가능하다 . 농민의 안마당이나 개인주택에서 발휘된 노동력은 이제 사회의 모든 교환과정에서 합류한다 .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제품과 서비스가 하나의 교환과정 영역으로 수렴된다 .

    한편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접적 개인적 이해 즉 이기심이 계획경제 내부로 수렴되지 않으면 사회주의는 건설될 수 없다 . 그런데 이들의 이기심은 신뢰성과 신축성을 갖춘 화폐가 있어야 결실을 맺을 수 있다 . 자유롭게 모든 산업에 침투할 수 있는 정확한 가치 척도인 안정적 화폐체계 없이는 노동생산성과 품질은 향상될 수가 없다 . 따라서 자본주의에서나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이행기 경제에서나 금에 기초한 화폐 즉 금태환 화폐만이 진짜 화폐이다 . 이와 다른 형태의 화폐는 대체화폐에 지나지 않는다 . 물론 소련 정부는 거대한 재화를 소유하고 있으며 화폐를 인쇄할 수 있는 도구도 가지고 있다 . 그러나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 행정적 차원에서 상품가격을 국가가 멋대로 조작하더라도 국내 상업이나 외국무역을 위해서는 안정된 화폐가 있어야 한다 . 소련의 화폐는 경제 당국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금본위 화폐가 아니다 . 따라서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화폐처럼 필연적으로 폐쇄성을 띠고 있다 . 세계시장에서 루블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 소련이 독일이나 이탈리아에 비해 좀더 용이하게 화폐의 부정적 측면들을 극복하는 이유의 하나는 국가가 외국무역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주요한 이유는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 자급자족 폐쇄경제라는 골방에서도 소련 경제가 질식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 그러나 우리의 역사적 임무는 단순히 질식을 피하는 데에 있지 않다 . 철저히 합리적이어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를 꽃피울 강력한 경제체제를 건설하는 데에 있다 . 물론 이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가장 높은 성과들을 접하고 흡수할 것이다 .

    기술혁명과 대규모의 실험들을 연속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역동적인 소련 경제는 안정된 가치척도를 수단으로 경제성과를 계속 측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 소련 화폐가 금본위 루블화라면 5 개년 계획의 결과가 지금보다 비교할 수 없이 나을 것이다 . 이것은 이론적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 . 물론 " 불가능한 일을 할 수 " 는 없다 . 그러나 순간 순간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주먹구구식으로 경제를 운영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다 . 이럴 경우 경제 영역에서 더 많은 오류와 손실이 발생할 뿐이다 .

     

    2. " 사회주의적 " 인플레

    소련 통화체제의 역사는 경제적 난관 , 성공 , 실패의 역사일 뿐 아니라 관료집단의 좌충우돌 정책의 역사이기도 하다 .

    신경제 정책 (NEP) 이 시행되면서 1922 년에서 24 년에 걸쳐 루블화가 다시 등장하였다 . 이것은 소비재 분배에 " 부르주아적 권리 규범 " 을 회복시킨 조치였다 . 쿨락 강화 정책이 계속되는 동안 루블화는 정부 당국에게 걱정거리가 되었다 . 이와 반대로 5 개년 계획의 초기에는 모든 인플레 요인들이 통제에서 해제되었다 . 1925 년 초에는 총통화량이 7 억 루블이었으나 1928 년 초에는 소폭으로 증가하여 17 억 루블이 되었다 . 이것은 제 1 차 세계대전 전야에 짜르 체제가 보유하고 있던 통화량과 대충 맞먹는 양이다 . 물론 짜르 하에서는 루블화가 금본위 화폐였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 그런데 1928 년 이후에는 총통화량이 열병에 걸린 것처럼 급속히 증가한다 :20 억 루블 -28 억 루블 -43 억 루블 -55 억 루블 -84 억 루블 ! 84 억 루블은 1933 년 초의 총통화량이다 . 이 해를 기점으로 통화정책이 다시 바뀌어 통화량이 줄어들었다 :69 억 루블 -77 억 루블 -79 억 루블 (1935 년 ). 1924 년에 공식적으로 13 프랑에 교환되었던 루블은 1935 년 11 월이 되자 3 프랑으로 교환되었다 . 과거에 비해 가치가 4 분의 1 이하로 떨어졌다 . 이것은 전쟁의 결과 프랑화가 평가 절하된 정도와 비슷했다 . 과거나 지금이나 루블화의 프랑화 환율은 매우 일시적 성격을 띠고 있다 . 현재 세계시장 가격에 의하면 루블화의 구매력은 1.5 프랑에도 미치지 못한다 . 그러나 평가절하의 규모는 소련의 통화가 1934 년까지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의 빠른 속도로 가치를 상실해 왔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

    경제 모험주의에 한참 경도되고 있던 때에 스딸린은 신경제 정책 즉 시장관계를 " 악마에게나 "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 마치 1918 년처럼 소련 언론은 모두 상거래가 최종적으로 " 사회주의 직접 분배 " 로 바뀐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 식량배급표가 발급되어 새로운 정책의 표상이 되었다 . 동시에 인플레는 소련 체제와는 전혀 같이할 수 없는 현상이라며 완전히 배격되었다 . 1933 년 스딸린은 이렇게 말했다 : " 정부가 상품을 대규모로 통제하여 가격을 안정시켰기 때문에 소련의 화폐가치는 안정되고 있다 ." 이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공언은 이후 전혀 상세히 설명되거나 정책으로 발전되지 않았다 . 부분적으로는 발언의 본질이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 것이다 . 그런데도 그의 발언은 소련 화폐이론의 기본법칙이 되었다 .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발언을 통해 거부한 인플레의 기본법칙이 되었다 . 이후 루블화는 보편적 등가물이 아니라 " 엄청나게 " 많은 상품의 보편적 그림자가 되었을 뿐이다 . 그리고 모든 그림자가 그렇듯이 루블화는 자신을 짧게 또는 길게 만들 권리를 누렸다 . 스탈린의 화폐이론은 현실을 무시한 채 자기위안에만 탐닉했다 . 그의 이론이 의미가 있다면 이것을 말하고 있다 : 소련의 화폐는 기능을 상실했다 ; 가치척도의 기능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 " 안정된 가격 " 은 국가권력에 의해서 정해진다 ; 10 루블 금화 (chervonetz, 역자 주 : 1922 년에 제정되어 1936 년에 폐지되었다 .) 는 계획경제의 관습적인 이름에 불과한 허깨비이다 ; 다시 말하면 루블화는 보편적 배급표이다 . 한마디로 결론을 말하면 이제 사회주의는 " 최종적으로 그리고 역전시킬 수 없을 정도로 " 승리했다 .

    전시공산주의 시절에 횡행했던 가장 유토피아적인 견해가 이제 새로운 경제적 토대 위에 다시 등장했다 . 그런데 불행하게도 새로운 경제 기초의 수준은 과거보다는 약간 높았지만 화폐 유통을 일소하기에는 아직도 불충분했다 . 소련의 지배층은 계획경제가 시행되고 있으므로 인플레는 무서워할 것이 전혀 없다는 생각에 푹 빠졌다 . 나침반이 있으면 배에 물이 새어도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생각과 비슷한 논리였다 . 그러나 현실에서 통화 인플레는 필연적으로 신용 인플레를 초래하면서 가상 수치들이 현실 수치를 대체하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 결국 계획경제가 내부에서 삭아 들어간다 .

    인플레는 근로인민에게 끔찍히 무거운 세금이다 . 이 사실은 말할 나위가 없다 . 인플레의 도움으로 획득된 사회주의의 강점은 지극히 의심스럽다 . 물론 산업은 계속해서 급격히 성장했다 . 그러나 거대한 건설사업의 경제 효율은 통계에만 나타날 뿐 실물 경제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루블화를 장악한 관료집단은 특정 계층과 경제부문들에게 마음 내키는 대로 구매력을 선사했다 . 이 결과 관료집단은 객관적으로 정책의 성공과 실패를 측정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를 스스로 박탈했다 . " 기존 루블화 " 와 합쳐져 서류에만 올라 있는 수치로 인해 정확한 회계는 실종되었다 . 이로 인해 노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관심 저하로 노동생산성이 낮아지고 상품의 질은 더 낮아졌다 .

    제 1 차 5 개년 계획 기간에 이 해악은 위협적 수위에 도달했다 . 1931 년 7 월 스딸린은 유명한 "6 개 조건 " 을 들고 나왔다 . 이것의 최고 목표는 공업제품의 생산비용을 낮추는 것이었다 . 노동생산성에 따른 임금지불 , 생산비용에 대한 회계 도입 등의 내용으로 이루어진 이 조건들은 새로운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 " 부르주아적 권리 규범 " 은 신경제 정책이 시작될 때에 이미 제출되었었고 1923 년 초의 제 12 차 당대회에서 더욱 발전되었다 . 1931 년에 자본투자의 효율이 감소하는 위급 상황이 발생했다 . 이 때가 되어서야 스딸린은 과거에 이미 실행되었던 정책을 새로운 것 인양 다시 천명하였다 . 이후 2 년 동안 언론의 거의 모든 기사들은 이 "6 개 조건 " 의 구원 능력을 언급했다 . 한편 인플레는 계속되었다 . 그리고 인플레가 발생시킨 병의 증세도 당연히 치유될 수 없었다 . 생산시설 파괴자들과 태업자들에 대한 엄한 탄압조치도 사태를 호전시키지 못했다 .

    " 몰개성 " 과 " 균등 " 은 익명의 " 평균 " 노동과 모두에게 비슷한 " 평균 " 임금을 의미한다 . 그런데 소련 당국은 " 몰개성 " 과 " 균등 " 에 대한 투쟁을 선언하였다 . 동시에 관료집단은 신경제 정책을 " 악마에게 " 주어버렸다 . 신경제 정책은 노동력을 비롯한 모든 재화를 화폐를 기준으로 계산한다는 의미였다 . 그런데 이것을 폐기하는 것은 " 몰개성 " 과 " 균등 " 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조장하는 것이었다 . 당시 관료집단의 혼란스러운 방향감각은 지금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정도로 기이하였다 . 한 손으로는 " 부르주아적 분배 규범 " 을 회복시키면서 다른 손으로는 부르주아적 분배 규범을 시행하는 데 필요한 유일한 도구를 폐기시켰다 . 부르주아적 분배 규범 대신 국가의 자의적 계산과 행정조치가 시행되었다 . 가격체계가 완전히 혼란에 빠지자 노동량과 이에 따른 임금 사이의 조응관계가 필연적으로 사라졌다 . 이로써 노동자들의 노동에 대한 관심과 동기도 함께 사라졌다 .

    회계 , 제품의 품질 , 생산비용 , 생산성 등에 대한 엄밀한 당국의 지시사항들도 이제 구름 잡는 일이 되었다 . 그런데 소련의 지도자들은 모든 경제적 난관의 원인이 스딸린의 6 개 조건을 악의로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선언하였다 . 인플레에 대한 아주 조심스러운 언급도 반체제 범죄라고 못박았다 . 학교 교사들에게 비누가 배급되지 않는 사실을 언급하지 말 것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이들이 학교 위생 규정을 어겼다고 가끔 비난했다 .

    루블화의 운명은 당내 분파투쟁의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다 . 좌익반대파 (1927 년 ) 의 강령은 " 화폐의 무조건적 안정 " 을 요구했다 . 이것은 이후 몇 년간 좌익반대파의 중심적 요구가 되었다 . 1932 년 좌익반대파의 망명 기관지는 이렇게 주장했다 : " 아주 엄격한 조치들을 통해 인플레 경향을 저지시키고 화폐를 안정시켜야 한다 . 자본투자를 과감하게 축소하더라도 통화는 안정되어야 한다 ." 거북이 걸음 " 주창자들과 초공업화론자들이 임시로 자리를 바꾼 것 같았다 . 당국이 시장관계를 " 악마에게 " 주어버리겠다고 허풍을 떨자 좌익반대파는 국가계획위원회가 다음과 같은 표어를 내세울 것을 권유하였다 : " 인플레는 계획경제의 매독이다 ."

    * * *

    농업에도 인플레의 해악은 극심했다 . 농민 정책이 쿨락 위주로 시행되고 있을 때 신경제 정책의 기초 위에 협동조합을 통해 수십 년에 걸쳐 농업의 사회주의화가 완수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 협동조합은 구매 , 판매 , 신용의 기관이 되어 장기적으로 농업생산을 사회주의적으로 변모시킬 것이라고 가정되었다 . 이것은 " 레닌의 협동조합 계획 " 이라고 명명되었다 . 그러나 알다시피 실제 과정은 이와 완전히 정반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 즉 국가의 폭력과 통합적 집단화를 통해 쿨락이 청산되었다 . 농촌의 사회주의화를 위한 물질적·문화적 조건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농업 각 부문을 점진적으로 사회주의화하자는 예전의 정책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 농업에서 공산주의가 즉각 실현된 것처럼 집단화가 추진되었다 .

    강제적 농업집단화의 해악은 즉시 나타났다 . 소련 전역에서 가축의 절반 이상이 도살되었다 . 그러나 이보다 더 커다란 해악이 닥쳤다 . 집단농장 농민들이 사회주의 소유형태와 자기 노동의 결과에 완전한 무관심해졌다 . 그러자 당국은 서둘러 기존 정책을 철회하기 시작했다 . 농민에게 닭 , 돼지 , 양 , 소 등을 제공하면서 이것들을 개인재산으로 인정해 주었다 . 그리고 집단농장 옆에 농민 개인의 텃밭을 조성해 주었다 . 집단화의 필름이 이제는 완전히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

    소규모 개인소유를 허용하면서 당국은 농민의 소위 개인주의 경향을 매수하기 위해 타협했다 . 집단농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 따라서 언뜻 보기에는 정책의 후퇴가 부차적인 것처럼 보였다 .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후퇴가 심대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 집단농장의 귀족들을 제외하면 일반 농민의 일상적 필요는 집단농장이 아니라 " 자기 소유 " 텃밭을 통해 더 많이 충족되고 있다 . 농민이 개인 농장에서 기술 영농을 채용하고 과일농장 , 가축종자 농장을 경영할 경우 그의 수입은 집단농장의 노동에 비해 3 배정도 많아지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 이 사실들은 소련 언론에도 보도되고 있다 . 정책의 후퇴를 통해 영세기업 여성 노동력을 포함하여 수천만 명의 노동력은 완전히 야만적으로 낭비되고 있다 . 또한 집단농장의 노동생산성은 지극히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 대규모 집단농장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는 농민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것이 필요했다 . 즉 시장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현물세를 폐지하여 상거래를 회복시켜야했다 . 다시 말하면 너무 일찍 악마에게 주어버린 신경제 정책을 다시 빼앗아 오는 것이 필요했다 . 따라서 어느 정도 안정된 통화회계 체제가 계속된 농업 발전의 필요조건이 되었다 .

     

    3. 루블화의 복권

    잘 알려져 있듯이 지혜의 부엉이는 해가 진 후에나 날아간다 . " 사회주의 " 가격 및 화폐 이론은 인플레 파의 환상이 사라진 후에나 개발되었다 . 이미 언급했듯이 스딸린은 자신도 알 수 없는 내용의 "6 개 조건 " 을 천명했었다 . 이제 그의 의도를 고분고분한 교수님들이 하나의 이론으로 발전시키고 있었다 . 이 결과 시장가격에 대비되는 소비에트 가격이 계획적 또는 지시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혀 새로운 이론이 탄생하였다 . 즉 소비에트 가격은 경제 범주가 아니라 행정 범주이며 사회주의의 이익을 위해 인민의 수입을 재분배하는데 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 그런데 진짜 생산비용을 알지 못한 채 어떻게 가격을 " 지도 " 할 수 있는가 ? 모든 가격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이 아니라 관료집단의 의지를 표현한다면 어떻게 진짜 생산비용을 계산할 수 있는가 ? 교수 양반들은 이 점을 설명하는 일을 까먹었다 . 당국은 인민의 수입 재분배를 위한 세금 , 국가예산 , 신용제도 등 아주 강력한 지렛대들을 실제로 장악했다 . 1936 년 예산 지출 내역에 의하면 경제의 여러 부문에 대한 재정의 직접 지원을 위해 376 억 루블이 책정되었으며 간접 지원을 위한 재원은 이보다 훨씬 많다 . 인민 소득의 계획적 분배를 위해 예산과 신용체제는 아주 유효하다 . 그리고 실제 경제관계들을 상품가격이 정직하게 표현할수록 사회주의의 대의는 더 신장될 것이다 .

    이 주제에 대해 경험은 이미 최종 판결을 내렸다 . " 지도 " 가격은 학자들의 책 속에서나 그럴듯해 보이지 실제 생활에서는 하잘 것 없었다 . 같은 상품에 전혀 다른 범주의 가격들이 책정되었다 . 그리고 이 범주들 사이의 널찍한 틈을 통해 모든 종류의 투기 , 특혜 , 기생행위 등 해악들이 판치기 시작했다 . 그리고 이 해악들은 예외가 아니라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 동시에 10 루블 금화는 안정된 가격을 정직하게 반영하는 대신 자기 그림자에 불과했다 .

    그런데 다시 정책을 급격하게 전환할 필요가 생겼다 . 이제는 계획경제가 성과를 거두면서 난관들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 1935 년 벽두에 빵 배급표는 폐지되었다 . 같은 해 10 월 다른 식량품목들의 배급표가 사라졌다 . 1936 년 1 월 일반 소비재 공업생산품이 배급에서 해제되었다 . 도시와 농촌이 국가와 맺는 경제관계가 화폐로 매개되기 시작했다 . 이제 루블화는 대중의 경제계획에 영향을 미치는 도구가 되었다 . 먼저 소비재의 질과 양으로 이 영향력이 행사된다 . 이와 다른 어떤 방식으로 소련 경제를 합리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

    1935 년 12 월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은 이렇게 발표했다 : " 은행과 산업 사이의 상호관계는 수정되어야 하며 은행은 루블화를 통해 경제 통제력을 장악해야 한다 ." 이제 행정 계획에 대한 미신과 행정 가격에 대한 환상은 깨졌다 . 루블화가 배급표로 바뀌는 것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면 1935 년의 개혁은 사회주의로부터의 이탈이다 . 그러나 실제로 이 관점은 어설픈 오류에 불과하다 . 루블화가 배급표를 대체하는 것은 허구 (fiction) 를 거부하는 것이다 . 부르주아적 분배 규범을 부활시켜 사회주의 건설의 전제조건을 확보할 필요성이 공개적으로 인정되었을 뿐이다 .

    1935 년 1 월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재무인민위원은 이렇게 발표했다 : " 소련의 루블화는 세계 어느 통화보다 안정되어 있다 ." 이 발표를 순전 허풍으로만 간주할 수는 없다 . 소련의 국가예산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매년 수입이 지출보다 증가하고 있다 . 그 자체로는 불충분하지만 외국무역이 예산 균형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 중앙은행의 금 보유고는 1926 년 1 억 6 천 4 백만에서 현재 10 억 루블을 상회하고 있다 . 소련의 금 산출량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 1936 년 현재 소련의 금광산업은 세계 제 1 위를 기록하고 있다 . 시장이 부활되면서 상품 유통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 지폐를 남발하여 발생한 인플레는 1934 년에 정지되었다 . 루블화의 안정도를 나타내는 요소들은 실제하고 있다 . 그러나 재무인민위원의 발표는 과도한 낙관 속에서 나왔다 . 산업생산이 증가하면서 루블화의 가치가 크게 오르고 있다 . 그러나 생산비용이 너무 높은 것이 여전히 치명적 약점이다 . 소련의 노동생산성이 세계에서 가장 높아 결국 화폐가 필요 없을 때 루블화는 가장 안정된 통화가 될 것이다 .

    엄밀한 회계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루블화의 우수성 주장은 더욱 설득력이 약하다 . 금 보유고가 10 억 루블에 달하고 있지만 은행이 발행한 지폐 80 억 루블이 유통되고 있다 . 따라서 금이 통화를 지지하는 비율은 12.5% 에 불과하다 . 그리고 중앙은행이 보유한 금은 통화의 기반이 아니라 전쟁을 위해 비축되고 있는 신성불가침의 존재이다 . 소련 경제가 더 발전할 경우 국내 경제계획을 정확하게 확정하고 외국과의 경제관계를 단순화하기 위해 당국은 금을 통화로 사용할 수 있다 . 이것은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 따라서 자신의 존재를 마감하기 전에 루블화는 다시 한번 순금의 광택을 빛낼지도 모른다 . 그러나 이 상황은 가까운 미래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

    소련이 금본위제로 회귀하는 것은 당분간 불가능하지만 당국은 금 보유고를 늘려 순수 이론적 계산을 통해서나마 통화를 금으로 지지하는 비율을 늘릴 수 있다 . 이 결과 은행의 지폐 발행 규모가 관료집단의 의지가 아니라 객관적 기준에 의해 제한된다면 최소한 루블화의 상대적 안정은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 이렇게만 되어도 소련 경제는 크게 이익을 볼 것이다 . 미래에도 인플레를 계속해서 강력하게 억제한다면 루블화는 금본위제의 이점은 보유하지 못할지라도 지난 기간 관료집단의 주관이 경제에 입힌 깊은 상처를 대부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

     

    4. 스타하노프 운동

    인류문명의 모든 단계에 존재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투쟁이 경제활동이다 . 이와 관련하여 " 모든 경제는 최종적으로는 시간의 경제를 달성하는 문제로 집약된다 " 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 주요한 측면으로만 환원한다면 인간의 역사는 노동시간 절약을 위한 투쟁의 역사에 불과하다 . 사회주의는 착취의 철폐만으로 스스로를 정당화시킬 수 없다 .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본주의의 노동시간보다 더 짧은 노동시간을 보장하는 사회가 진정한 사회주의이다 .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착취의 근절은 한편의 드라마에 불과할 뿐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 . 사회주의적 생산방식을 적용한 첫 번째 역사적 실험은 사회주의가 대단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 그러나 인류문화의 가장 소중한 원자재인 시간을 잘 활용하는 방식을 소련은 결코 배우지 못했다 .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수입한 기술은 시간의 경제를 달성하는 주요한 도구인데 소련의 국경을 넘는 순간 효율성이 떨어진다 . 모든 문명의 결정적 요소인 시간의 경제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련에서 사회주의는 아직 승리하지 못했다 . 다만 승리할 수 있고 승리해야한다는 점을 확실히 과시했을 뿐이다 . 그러나 아직도 승리하지 못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 이와 반대되는 모든 주장들은 무지나 허풍 떠는 사기에 불과하다 .

    올바르게 평가해서 몰로토프는 공식적으로 거짓 발언만을 일삼는 다른 지도자들보다 좀더 솔직하다 . 그는 1935 년 1 월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 " 우리의 평균 노동생산성 수준은 ‥‥‥ 미국과 유럽에 비해 아직도 상당히 뒤져 있다 ." 이 말을 덧붙이면 그의 선언은 더욱 정확할 것이다 : 유럽과 미국에 비해 소련의 노동생산성은 3 배 , 5 배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10 배나 뒤져 있다 ; 그리고 소련의 생산비용은 같은 정도로 더 높다 . 같은 회의에서 몰로토프는 좀더 일반적인 고백을 털어놓았다 : " 소련 노동자들의 평균 문화수준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것보다 여전히 낮다 ." 여기에 이 말을 덧붙여야한다 : 평균 생활수준도 역시 낮다 . 지나가면서 내뱉은 그의 말이 지닌 진실성은 수없이 많은 소련 정부기구의 자부에 찬 성명서와 소련의 외국 " 친구들 " 의 사탕발린 찬사의 분출을 가차없이 논박하고 있다 !

    국방에 대한 우려와 함께 노동생산성 향상이 소련 정부정책의 근간이다 . 소련의 발전 단계마다 이 투쟁은 다양한 성격을 띠었다 . 제 1 차 5 개년 계획 기간 내내 그리고 제 2 차 초기에는 " 돌격대 "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다 . 이것은 선동 , 개인의 모범 , 행정적 압력 그리고 모든 종류의 집단 포상과 특권을 동원한 방식이었다 . 1931 년 스딸린이 6 개 조건을 교시한 이후 시도된 일종의 도급제 (piecework payment) 는 루블화의 허깨비 같은 성격과 가격체계의 이질성 때문에 실패했다 . 관료집단의 변덕이 작용하는 " 프리미엄 체계 " 가 가미된 융통성 있는 노동평가제를 대신해서 생산품을 국가가 직접 분배하는 체제가 실행되었다 . 그러자 엄청난 규모의 특권을 따내기 위해 돌격대 대오에는 특별한 연줄을 가진 사기꾼들이 침투하여 그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 결국 이 체제는 원래 목적과 정반대 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

    물가를 안정시키고 통일시키는 조치는 배급표 제도의 철폐로 시작되었다 . 이로써 도급제 시행의 조건이 마련되었다 . 이 기초 위에서 돌격대 방식은 소위 스타하노프 운동 (Stakhanov movement) 으로 바뀌었다 . 이제 진짜 가치를 지닌 루블화를 손에 넣기 위해 노동자들은 자기가 사용하는 기계에 좀더 관심을 가지고 노동시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 크게 보면 스타하노프 운동은 노동강도의 강화와 노동시간의 연장을 의미했다 . 소위 " 비 ( 非 ) 노동시간 " 에 스타하노프 운동원들은 작업장의 의자와 도구를 정리하고 원자재를 분류하였다 . 그리고 조장들은 조원들에게 교육을 실시했다 . 이런 일들이 진행되면서 7 시간 노동일은 말뿐이고 실제 노동시간은 현재 훨씬 길어졌다 .

    도급제의 비밀은 소련 관료들의 발명품이 아니었다 . 이 제도는 외부적 강제가 가해지지 않으면서 노동자를 옥죄는 제도인데 이것을 마르크스는 " 자본주의 생산 방식에 가장 적합한 제도 " 라고 생각했다 . 소련 노동자들은 도급제에 공감하기는커녕 적대감으로 대했다 . 이 반응은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 사회주의 건설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스타하노프 운동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그런데 특히 관리부문에 있어서 단순한 출세주의자나 사기꾼에 비해 이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는 말하기 힘들 것이다 . 그러나 노동자 대다수는 새로운 임금체계를 봉급 차원에서 평가한다 . 그런데 새로운 임금체계로 인해 월급 봉투는 점점 얇아지고 있다 .

    " 최종적이고 역전시킬 수 없는 사회주의의 승리 " 후에 소련 정부가 도급제로 돌아선 현상은 언뜻 보면 자본주의 생산관계로의 후퇴인 것 같다 . 그러나 실제로는 루블화의 복권에 대해 말한 것을 여기서도 되풀이할 필요가 있다 : 사회주의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조야한 환상을 거부했다 . 변화된 임금 지불 형태는 소련의 현실에 적합하기 때문에 등장했을 뿐이다 . " 법은 경제체제를 결코 능가할 수 없다 ."

    그러나 소련의 지배층은 사회현실을 치장하지 않고는 하루도 견딜 수 없다 . 1936 년 1 월 중앙집행위원회에 제출된 보고서에서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메쥴라우크는 이렇게 말했다 : " 루블화는 노동에 대해 임금을 지불하는 사회주의 (!) 원칙을 실현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고 있다 ." 옛날 왕조 때는 심지어는 공공 화장실까지 왕립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 그러나 노동자국가에서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사회주의가 되지는 않는다 . 루블화는 사회주의 소유형태에 기초하여 노동의 자본주의적 지불 원칙을 실현하는 " 유일한 수단 " 이다 . 이 모순은 이미 우리에게 낯익다 . " 사회주의 " 도급제에 대해 새로운 미신을 만들면서 메쥴라우크는 이렇게 덧붙였다 : " 각자가 능력에 따라 일한 만큼 돈을 받는 것이 사회주의 기본 원칙이다 . " 이 양반들은 이론을 조작하는 데에는 확실히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 루블화를 더 많이 손에 넣기 위해 노동할 경우 사람들은 " 능력에 따라 " 즉 자기의 신경과 근육 상태에 맞추어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몸을 망치면서 일한다 . 도급제는 조건적으로 그리고 엄혹한 필요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 이것을 " 사회주의 기본원칙 " 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새롭고 높은 문화를 주창하는 사회주의 사상을 자본주의라는 낯익은 오물에 냉소적으로 짓이기는 것과 같다 .

    스타하노프 운동을 "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준비 " 라고 치켜세우면서 스딸린은 한술 더 뜬다 . 행정적 편의에 따라 소련 지배층이 채용하고 있는 사고들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 .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인 사회주의에서 노동량과 소비량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점은 확실하다 . 반면 사회주의는 착취의 천재인 자본이 발명한 것보다 더 인간적인 통제를 전제로 한다 . 그러나 현재 소련에서는 자본주의에서 빌려온 기술에 낙후된 인적 자원을 가혹하게 끼워 맞추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 유럽과 미국에 버금가는 노동생산성을 달성하기 위해 도급제 같은 고전적 착취방식이 노골적이고 조야한 형태로 도입되고 있다 . 자본주의 국가의 개량주의 노동조합조차 이 착취형태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 소련 노동자들이 " 자발적으로 " 노동한다는 말은 역사적 전망 속에서 파악할 때만 진실이다 . 그리고 이 말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 노동자가 전제적인 관료집단의 통제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가 거름을 황금으로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 그리고 가장 거대한 생산력인 인간을 소모시키는 가혹한 착취체제를 성스럽게 만들지도 못한다 . 스딸린이 말한바 "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 " 을 준비하는 것은 정반대 방향에서 시작될 것이다 . 즉 야만적 착취방식의 유물인 도급제 철폐를 통해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시작될 것이다 .

    * * *

    스타하노프 운동을 결산하기에는 아직 때가 너무 이르다 . 그러나 이 운동의 특징 뿐 아니라 소련 체제 전체의 특징을 파악하는 작업은 이미 가능하다 . 개개 노동자들의 일부 업적들은 사회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한 현상이므로 의심의 여지없이 아주 흥미롭다 . 그러나 경제전체의 차원에서 가능성이 현실로 전화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아주 멀다 . 생산과정들이 밀접하게 상호 의존하는 상황에서 높은 생산량의 계속적 달성은 몇몇 개인의 노력에 의해 실현될 수 없다 . 개별공장과 기업 사이의 관계에서 생산과정을 재조정하지 않으면 평균 노동생산성은 높아지지 않는다 . 더욱이 수백만 노동자들의 기술수준을 소폭이나마 향상시키는 일은 몇천 명의 기록보유자들을 다그치는 일보다 한없이 더 힘들다 .

    이미 들은 바 있듯이 소련의 지배층조차 소련노동자들의 노동숙련도가 낮다고 가끔 불만을 늘어놓는다 . 그러나 이것은 진실의 반에 불과하다 . 게다가 더 작은 반쪽일 뿐이다 . 러시아 노동자는 주도성과 창조성과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 예를 들어 백 명의 러시아 노동자들을 미국 산업의 조건 속에 이식시키면 몇 개월 아니 몇 주만 지나도 미국 노동자들에 조금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 문제는 전체적 차원에서 노동을 조직하는 일이다 . 새로운 생산 과업 달성에서 노동자들보다 소련의 관리자 집단이 일반적으로 훨씬 능력이 뒤진다 .

    자본주의 국가에서 도입한 새로운 기술을 이용하여 도급제를 실시할 경우 현재 매우 낮은 노동생산성은 체계적으로 향상될 수 있다 .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현상이다 . 그러나 공장의 십장에서 크렘린궁의 지도자에 이르기까지 관리 및 행정 분야가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 스타하노프 운동은 아주 적은 정도로만 이 점을 만족시키고 있다 . 관료집단은 해결할 수 없는 난관을 뛰어넘으려고 무모하게 달려들고 있다 . 도급제 자체가 즉각적인 기적을 가져오지 않으므로 관리집단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동자에게 온갖 압력을 가한다 . 한편에서는 장려금과 허풍이 또 한편에서는 벌칙이 시행된다 .

    스타하노프 운동 초기에는 저항과 태업이 있었다 . 어떤 경우에는 스타하노프 운동원이 살해되어 기술직 요원들과 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다 . 탄압의 가혹함은 저항의 정도가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 " 태업 " 을 관리자들은 정치적 저항이라고 설명했다 . 그러나 대개의 경우 기술적·경제적·문화적 난관에 이 저항의 원인이 있다 . 특히 관료집단 자체가 난관의 대부분을 초래하고 있다 . " 태업 " 은 금방 진압된 것처럼 보인다 . 불평분자들은 위협을 받아 공포에 질렸고 말로 표현을 잘하는 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 여기저기에서 미증유의 성취를 알리는 전보가 날아다녔다 . 운동의 선구자들이 나타나면 지방의 관리자들은 상부의 명령에 충실하여 이들의 작업을 배려해 주었다 . 물론 광산이나 동업조합에 소속된 노동자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 그러나 수십만 노동자들이 갑자기 " 스타하노프 운동원 " 이 되자 관리자들은 완전한 혼란에 빠진다 . 아주 짧은 시간에 생산체제를 정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객관적으로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관리집단은 노동력과 기술을 모두 파괴하고 있다 . 태엽장치가 고장나면 관리자들은 조그만 톱니바퀴에 못을 꽂아 넣는다 . " 스타하노프 " 주간과 10 일 돌격작전 기간이 끝나자 많은 기업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 이 사태는 언뜻 보면 놀랍지만 스타하노프 운동원의 증가가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기는커녕 저하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

    현재 이 운동의 " 영웅적 " 시기는 지난 것처럼 보인다 . 이제 하루하루의 지겨운 일이 시작된다 . 배을 필요가 있다 . 가르치는 자들이 더 많이 배워야 한다 .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배우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부류들이다 . 소련 경제의 모든 동업조합을 저지하고 마비시키는 사회적 동업조합의 이름은 --- 관료집단이다 .

     

     

    제 5 장 소련의 테르미도르 반동

    1. 왜 스딸린은 승리했는가

    소련 역사가들은 이렇게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 중대한 문제들에 대해 관료지배층은 모순에 찬 좌충우돌의 정책을 계속했다 . 이런 현상이 일어난 이유를 " 변화하는 상황 " 으로 설명하거나 정당화해도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 국정을 이끈다는 것은 최소한 어느 정도 예측력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 스딸린 분파는 불가피한 결과들을 조금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 이들은 졸고 있다가 매번 당했다 . 대신 행정적인 반사신경만으로 전개되는 상황에 대응했을 뿐이다 . 정책이 전환될 때마다 등장한 이론들은 모두 상황이 전개된 후 창조되었으며 이전의 교시들을 완전히 무시하였다 . 반박할 수없는 사실들과 문서들에 기초하여 역사가들은 소위 " 좌익반대파 " 가 다수파 지도부보다 나라의 현안을 훨씬 더 정확하게 분석했으며 이후의 사태를 훨씬 정확하게 예측했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그러나 이 주장은 언뜻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 한치의 앞도 내다볼수 없었던 분파가 승리한 반면 예리한 분석력을 지닌 분파는 패배에 패배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합리론적으로만 사고하면서 정치를 논리적인 주장이나 장기 시합으로 바라볼 경우에만 이 모순은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 정치투쟁은 근본적으로 이해집단과 사회세력 간의투쟁이며 단순한 논쟁이 아니다 . 물론 지도부의 자질은 분쟁의 결과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 그러나 결과의 유일한 요인도 아니다 . 그리고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결정적 요인도 되지 못한다 . 더욱이 투쟁하고 있는 세력들은 자기 특성에 맞는 지도부를 요구하게 마련이다 .

    1917 년 2 월 혁명은 케렌스키와 체레텔리를 권좌에 앉혔다 . 이들이 당시 짜르 지배집단보다 " 더 영리하거나 통찰력이 있어서가 " 아니라 최소한 일시적이나마 구체제에 대항해 들고 일어선 혁명 대중을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케렌스키는 레닌을 지하로 피신하게 만들고 다른 볼셰비키당 지도자들을 감옥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 그러나 이것은 그의 개인적 능력이 볼셰비키당 지도자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 오직 당시 노동자와 병사 대다수가 여전히 애국적 소부르주아 계급을 추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우월성 " 이란 말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으나 케렌스키의 개인적 " 우월성 " 은 그가 절대 다수의 대중보다 예측력이 부족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 반면 볼셰비키 당원들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을 결국 제압했는데 이것도 지도자들의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세력 관계 때문에 가능했다 . 노동계급은 불만에 찬 농민대중을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하도록 지도하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 등장했다가 사라져간 혁명 " 지도자들 " 과 " 영웅들 " 의 위력은 이들을 지지한 계급 계층의 성격에 조응했다 . 프랑스 대혁명의 연속 단계들이 이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 구체적 상황과 무관한 개인의 우월성이 아니라 바로 이 계급적 조응이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이들의 개성을 부각시켰다 . 미라보 (Mirabeau), 브리쏘 (Brissot), 로베스피에르 (Robespierre), 바라 (Barras), 보나파르트 (Bonaparte) 등은 두각을 나타내면서 혁명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 그러나 역사의 주연 배우인 이들의 특수한 개인적 자질과 성향에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객관 법칙이 이들의 등뒤에서 작용하고 있었다 .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혁명 이후에는 반드시 반동이나 반혁명이 뒤따랐다 . 이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잘 알고있다 . 물론 반동이나 반혁명이 상황을 혁명 이전으로 완전히 후퇴시킨 것은 아니었다 . 그러나 항상 대중 혁명의 성과 대부분을 거두어 갔었다 . 처음 몰아치는 반동의 희생자는 대개 혁명기에 대중의 선두에 섰던 선구자 , 주도자 , 선동가들이었다 . 대신 투쟁의 제 2 선에 머물렀던 분자들은 혁명 퇴조기에 혁명의 적들과 함께 선두로 떠밀려졌다 . 그리고 반동적 대세를 이용하여 사회의 지배력을 장악했다 . 공개된 정치 현장에서 " 주연 무용수들 " 이 극적인 대결을 벌였지만 배후에는 이미 변화된 계급 역관계와 최근까지 혁명적이었던 대중의 심리 변화가 작용하고 있었다 . 러시아 노동계급의 혁명적 주도성 , 헌신성 , 인민적 긍지 , 볼셰비키당의 혁혁한 활동상은 어디가고 이 모든 것 대신 사악 , 비겁 , 무기력 , 출세주의가 판치고 있는가 ? 어리둥절하여 이렇게 질문하는 많은 동지들에게 라코프스키 (Rakovsky) 는 18 세기 프랑스 대혁명의 실화를 언급하면서 바뵈프 (Babeuf) 의 예를 전해준다 . 그는 아바이 (Abbaye) 감옥에서 풀려난 후 파리 교외의 영웅적 인민들의 변화된 모습에 의아해 했다 . 혁명은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활력을 집어삼키는 엄청난 괴물이다 .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혁명 인민의 신경은 마모되어 소진된다 . 의식은 흔들리고 배짱은 걸레조각이 된다 . 혁명의 파도가 너무 급격하게 휘몰아치기 때문에 활력에 찬 새로운 세력이 혁명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를 메울 시간이 없다 . 기아 , 실업 , 혁명 중핵의 사망 ,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던져진 대중 등 모든 현상들이 파리 교외를 물질적 도덕적 폐허로 만들었다 . 30 년이 지나서야 파리 대중은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회복되어 새로운 봉기를 준비하게 된다 .

    부르주아 혁명의 법칙들은 노동계급 혁명에 " 적용될 수 없다 " 는 주장을 소련 언론은 표어처럼 늘어놓고 있다 . 그러나 이 주장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 러시아 10 월 혁명의 노동계급적 성격은 세계 정세 , 러시아 국내 세력들의 특수한 상호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 그러나 사회계급들은 짜르 체제와 후진적 자본주의의 등장이라는 야만적 상황속에서 형성되었다 . 따라서 계급들은 결코 사회주의 혁명의 요구에 따라 주문되어 형성되지 않았다 . 실제는 이와 정반대였다 . 혁명에 대한 반동이 불가피하게 혁명 대중의 대오에서 일어난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 많은 측면에서 여전히 후진적이었던 러시아 노동계급이 몇 개월 사이에 반봉건 왕조체제에서 사회주의 독재체제로 도약한 역사상 유례없는 상황 때문이었다 . 이 반동은 파도를 타고 연속해서 진행되었다 . 국외 상황과 사건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반동의 조건을 성숙시켰다 . 내전에 대한 제국주의 세력의 반동적 개입이 잇따르면서 혁명을 괴롭혔다 . 혁명은 서구로부터 어떠한 직접적 도움도 구할수 없었다 . 혁명 이후 농촌은 번영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 불길한 궁핍이 아주 오랫동안 농촌을 지배했다 . 더욱이 노동계급의 뛰어난 대표들은 내전 중에 전사하거나 관료사회의 사다리를 몇 번 오르더니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 . 결국 적대 세력들간의 유례없는 팽팽한 긴장 , 희망 , 환상 후에 피로 , 위축 , 혁명에 대한 실망감 등이 지배하는 긴 시기가 이어졌다 . " 인민적 긍지 " 가 썰물처럼 사라진 후 공백을 소심함과 출세주의의 밀물이 메웠다 . 새로운 지배집단이 이 물결을 타고 권력을 장악했다 .

    5 백만 붉은 군대의 동원 해제는 관료지배층의 형성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 내전을 승리로 이끈 사령관들은 지역 소비에트 , 경제 , 교육 등의 분야에서 요직을 차지했다 . 그리고 내전을 승리로 이끈 비상체제를 사회모든 분야에 도입했다 . 이 결과 모든 분야에서 대중은 사회의 실질적 지도 역할에서 점차 배제되었다 .

    노동계급 내부의 반동의 물결은 도시와 농촌 소부르주아 계급에게 커다란 희망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 이들은 이미 신경제 정책을 통해 상승하고 있었는데 이제 더욱 대담해졌다 . 젊은 관료집단은 처음에는 노동계급의 대표로 등장했으나 이제 계급간 분쟁을 중재하는 역할을 스스로 떠맡기 시작했다 .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관료집단의 독립성은 더욱 커져만 갔다 .

    국제정세는 소련 내부의 관료주의 경향을 강력하게 추동시켰다 . 세계노동계급에게 가해지는 자본가계급의 철퇴가 무거울수록 소련 관료집단은 점점 자신감을 얻었다 . 그러나 이 두 사실 사이에는 시기적 인과적 연관이 모두 존재하였다 . 그리고 이 연관은 두가지 방향으로 작동하였다 . 즉 관료지배층은 노동계급의 패배를 조장했으며 노동계급의 패배는 이들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 1923 년 불가리아의 대중봉기가 진압되었으며 독일의 노동자 정당은 굴욕적으로 혁명에서 후퇴하였다 . 1924 년 에스토니아의 봉기 기도는 곧 붕괴했다 . 1926 년 영국 총파업은 노동관료들의 배신으로 끝났다 . 폴란드에서는 필수스키 (Pilsudski) 독재정권의 등장 앞에 폴란드 노동자당이 굴욕적으로 항복했다 . 1927 년 중국혁명은 끔찍한 피의 학살로 끝났다 . 마지막으로 최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패배는 더욱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 이들 일련의 역사적 대재앙으로 세계혁명에 대한 소련 대중의 신념은 사라졌다 . 이로써 관료집단은 구원의 유일한 빛으로 받아들여져 더욱 높은 고지를 점령했다 .

    지난 13 년 동안 세계 노동계급이 패배한 이유를 필자는 여러 저서들을 통해 설명했다 . 이 저서들에서 필자는 대중으로부터 고립된 지극히 보수적인 크렘린 궁의 지도부는 모든 나라의 혁명운동을 파멸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 유럽과 아시아에서 혁명이 연속해서 괘배하자 소련의 국제적 지위는 약화되었다 . 그러나 소련 관료집단의 힘은 크게 강화되었다 . 이 사실은 논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후 사태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지금 얘기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에서 두 사건은 특히 의미가 크다 . 1923 년 후반에 소련 노동자들의 주요 관심사는 독일로 향해 있었다 . 독일의 노동계급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손을 뻗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독일공산당의 공포에 질린 후퇴는 소련의 근로대중에게 매우 커다란 실망을 안겨주었다 . 소련의 관료집단은 즉시 " 연속혁명 (permanent revolution)" 이론 ( 역자 주 : 이 용어는 그동안 영구혁명으로 알려졌ㄷ . 그러나 뜨로츠키는 같은 이름의 저서에서 이 용어가 중단없이 진행되는 혁명 , uninterrupted revolution, 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 즉 부르주아 혁명은 계속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하며 일국 사회주의혁명은 세계적 차원의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 뜨로츠키는 이 용어를 통해 혁명이 영원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 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하고 좌익반대파에게 첫번째 잔인한 타격을 가했다 . 1926 년과 1927 년 사이에 소련의 대중은 다시 새로운 희망을 품었다 . 모든 시선은 이제 중국혁명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동양으로 향했다 . 한편 좌익반대파는 관료집단에 의해 가해진 이전의 타격으로부터 회복되었고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 1927 년 중국혁명은 장개석이라는 사형집행인에 의해 학살당했다 . 코민테른은 그의 손아귀에 중국의 노동자 농민을 문자 그대로 갖다 바쳤다 . 그러자 차가운 실망감이 소련 대중을 엄습했다 . 언론과 집회를 통해 거리낌없이 도발을 자행하던 관료집단은 1928 년 마침내 좌익반대파 구성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를 감행했다 .

    물론 수만 명의 혁명 투사들이 볼셰비키 - 레닌주의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 선진노동자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좌익반대파에 공감하고 있었다 . 그러나 이 공감은 수동적이었다 . 대중은 새로운 투쟁을 통해 상황이 크게 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한편 관료지배층은 이렇게 주장했다 : " 좌익반대파는 국제혁명을 위해 우리를 혁명전쟁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 소동은 이제 그만 ! 우리는 휴식을 취할 권궈를 얻었다 . 우리는 국내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이다 . 여러분의 지도자인 우리를 믿어라 !" 이 휴식의 복음은 공산당 , 군대 , 국가기구 등에 포진한 관료들을 강력히 결속시켰고 피곤에 지친 노동자와 농민대중에게 당연히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 이들은 스스로 이렇게 물었다 : 좌익반대파가 " 연속혁명 " 사상을 위해 소련을 팔아넘기는 것이 아닌가 ? 그런데 실제로 좌익반대파의 투쟁은 소련을 생존시키기 위한 투쟁 그 자체였다 . 코민테른의 잘못된 독일 정책은 10 년 후 히틀러의 승리를 가져왔다 . 즉 전쟁 위험이 서구에서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 그리고 코민테른의 똑같은 정도의 잘못된 중국 정책은 일본 제국주의를 강화시켰고 동방의 위협을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했다 . 그러나 반동기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용기 있는 사상의 결여에 있다 .

    좌익반대파는 고립되었다 . 관료지배층은 때를 놓치지 않고 노동자의 당혹감과 수동성을 최대한 활용했다 . 이들은 노동계급의 후진 부위가 선진 부위에 대항하게 만들었다 . 그리고 더욱 대담하게 쿨락과 소부르주아 동맹군에게 의존했다 . 이후 몇 년에 걸쳐 관료지배층은 노동계급의 혁명 전위를 분쇄했다 .

    그 동안 대중에게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스딸린이 완벽한 전략으로 무장하여 권력의 무대 위에 등장했다고 상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사고이다 . 이런 일은 실제하지 않았다 . 그가 나름의 노선을 모색하고 있을 때 관료지배층은 그를 모색하고 있었다 . 그는 관료지배층이 원하는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 고참 볼셰비키의 권위 , 강인한 성격 , 협소한 안목 , 자신의 유일한 정치기반인 정치기구와의 밀접한 유대 등등 . 그는 갑자기 자기에게 닥친 성공에 우선 놀랐다 . 새 지배집단은 그에게 환영의 손길을 뻗쳤다 . 과거의 혁명 원칙과 대중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기들 집단 내부의 안정을 가져다줄 믿을 만한 조정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 대중의 눈에 그리고 혁명 과정에서 주변적 인물이었던 스딸린은 테르미도르 반동을 주도한 관료집단의 우두머리로 등장했다 .

    새 지배층은 자신의 사상 , 감정 그리고 더 중요하게 자신의 이해관계를 곧 드러냈다 . 현재 관료집단 중 구세대의 절대 다수는 10 월 혁명기에 혁명 반대 진영에 있었다 . 소련 대사들만을 예로 들 경우 트로야노프스키 , 마이스키 , 포템킨 , 수리츠 , 킨추크 등이 혁명에 반대했던 자들이었다 . 혁명에 반대하지 않은 인물들은 기껏해야 투쟁에서 빠져나와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 10 월 당시 볼셰비키 진영에 있었던 현직 관료 대부분은 이렇다할 역할을 하지 않았다 . 소장 관료들은 노땅들에 의해 선택되어 훈련을 받았다 . 종종 부자관계도 있었다 . 이런 부류의 인물들은 10 월 혁명을 수행할 능력은 없었지만 혁명의 결과를 이용하는 일에는 커다란 수완을 발휘했다 .

    10 월 혁명과 테르미도르 반동기 사이에 인물 개개인의 신변은 사태에 확실히 영향을 끼쳤다 . 레닌의 병환과 사망은 의심의 여지없이 지금 상황을 재촉했다 . 레닌이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관료집단은 최소한 첫 몇 년간 좀더 서서히 세력을 확대했을 것이다 . 그러나 이미 1926 년에 레닌의 미망인 크룹스카야는 좌익반대파 성원들과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 레닌이 살아 있다면 지금쯤 감옥에 있을 겁니다 ." 레닌 자신은 이미 앞으로 전개될 사태에 대해 두려움을 느껴 경각심을 고취시켰다 . 그녀는 아직도 이것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 그리고 그녀는 반동의 대세에는 레닌의 전지전능함도 소용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그리고 관료지배층은 좌익반대파보다 더 큰 재물인 볼셰비키당을 장악했다 . 이들은 레닌의 강령을 패배시켰다 . 그는 국가기구가 " 사회의 하인에서 지배자 " 로 변모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그리고 이들은 좌익반대파 , 당 , 레닌 등 모든 적들을 패배시컸다 . 그리고 사상과 논쟁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위력과 비중으로 승리했다 . 관료집단의 납 엉덩이가 혁명의 머리보다 더 무게가 많이 나갔다 . 이것이 소련에서 일어난 테르미도르 반동의 비밀이다 .

     

    2. 볼셰비키당의 퇴보

    볼셰비키당은 10 월 혁명을 준비하였고 노동자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했다 . 또한 소련 국가기구를 창건하고 그 기구의 튼튼한 근간을 구성했다 . 그러나 당의 퇴보 (degeneration) 가 이제 국가기구 관료화의 원인이자결과가 되었다 . 이 과정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것이 필요하다

    볼셰비키당의 운영원리는 민주집중제 (democratic centralism) 였다 . 민주주의와 집중제라는 두 개념의 결합에는 조금의 모순도 없다 . 볼셰비키당은 당의 경계선을 항상 엄격하게 규정했다 . 이것만이 아니었다 . 일단 이 경계선 안에 들어온 당원에게는 당의 정책방향을 규정할 실질적 권리를 부여하는 면밀한 조치를 취했다 . 당내부에서 자유롭게 당정책을 비판하고 지적인 투쟁을 수행하려면 당내 민주주의가 반드시 있어야한다 . 볼셰비키당이 분파활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지금의 사고는 혁명 퇴조기의 미신에 불과하다 . 실제로 볼셰비키당의 역사는 분파투쟁의 역사였다 . 자본주의 세계를 타도하고 자신의 깃발 아래 가장 대담한 투사와 반란자들을 결집시키는 임무를 가진 진정한 혁명조직이 지적 분쟁이나 일시적 분파 없이 살아 움직이고 발전할 수 있겠는가 ? 볼셰비키 지도부의 넓은 시야가 당내 분쟁을 최소화시켰고 분파투쟁의 기간을 단축시켰다 . 그러나 이것이 전부였다 . 끓어 오르는 당내 민주주의가 당 중앙위원회를 지탱하였다 . 당 지도부는 이 지지에 기반하여 필요한 사안을 결정하고 명령을 하달하는 대담성을 발휘하였다 . 모든 결정적 국면에서 명백하게 옳았으므로 당 지도부는 집중제의 한없이 값진 도덕적 자산인 높은 권위를 누렸다.

    특히 권력 장악 이전 볼셰비키당의 내부 조직 체계는 현재 코민테른 지부인 각국 공산당의 체계와 완전히 정반대였다 . 현재의 공산당에서 " 지도자들 " 은 상부에서 임명되며 상부의 명령 한마디에 정책을 완전히 바꾼다 . 그리고 평당원들이 통제하지 못하는 당기구는 이들 위에 거만하게 군림하며 크렘린궁 지도자들에게만 노예처럼 복종한다 . 권력을 장악한 초기의 몇 년간 이미 당기구는 삐걱대고 있었다 . 그러나 당시 스딸린을 비롯한 모든 볼셰비키당원들이 그로부터 10 년 또는 15 년이 지난 후 당의 모습을 담은 필름을 미리보았다면 이것이 어느 비방분자의 작품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 레닌과 그의 동료들의 관심은 다수파 집권층의 악행으로부터 볼셰비키 평당원들을 보호하는 데 끊임없이 집중되었었다 . 그러나 당과 국가기구의 대단히 밀접한 관계와 인적 구성의 중복 때문에 이미 초기 몇 년간 당의 자유와 유연성은 의심의 여지없이 손상당했다 . 여러 난관들의 점점 심각해지면서 당내 민주주의는 이와 비례하여 축소되었다 . 초기에 당은 소비에트의 틀 안에서 정치투쟁의 자유를 보존하려했다 . 그러나 내전은 이 소망에 아주 준엄한 수정을 가했다 . 야당들은 차례로 불법화되었다 . 이 조치는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정신에 명백히 위배되었다 . 그러나 당지도부는 이 조치를 원칙이 아니라 자기방어를 위한 일시적 조치로 간주했다 .

    볼셰비키 당기구의 급속한 성장은 수행할 임무의 새로움과 거대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당내 이견들을 표출시켰다 . 노동자 권력에 도전하는 반동 지하조직들이 다양한 통로를 통해 당에 영향을 미쳤다 . 따라서 유일한 합법 정치조직인 볼셰비키당의 분파투쟁은 격렬해졌다 . 내전이 끝날 무렵 이 투쟁은 너무 날카로와 국가권력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 1921 년 3 월 크론슈타트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 볼셰비키 당원들 상당수가 이 반란에 가담했는데 이때 열린 제 10 차 당대회는 분파를 금지하고 국가권력을 당으로 이전시켰다 . 그러나 이 조치 역시 상황이 호전되자마자 폐기할 특별조치로 간주되었다 . 동시에 중앙위원회는 이 새로운 결정으로 당내 활동이 질식되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했다 .

    그러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필요한 후퇴로 간주되었던 애초의 조치는 관료집단의 취향에 아주 잘 들어맞았다 . 관료집단은 당내 활동을 행정적 편의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 레닌은 건강이 잠시 호전된 1922 년에 이미 당 관료기구의 위협적 성장에 경악했다 . 그리고 당기구를 핵심적으로 장악하면서 국가기구 탈취를 준비하고 있던 스탈린 분파에 대한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 그러나 당내 반동 세력에 대한 레닌의 투쟁은 그가 두 번째 뇌일혈을 일으키고 사망함으로써 중단되었다 .

    지노비에프 , 카메네프와 동맹한 스딸린은 당기구를 평당원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주력하였다 . 중앙위원회의 " 안정 " 을 위한 투쟁에서 스딸린은 동료들 중에서 가장 일관되고 믿을 만한 인물로 판명되었다 . 그는 국제문제에서 손을 뗄 필요도 없었다 . 애초에 이런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새 지배집단의 소부르주아 세계관은 그의 세계관이기도 했다 . 사회주의 건설의 과업은 일국적 행정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 그리고 코민테른을 가능하면 대외정책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필요악 정도로 간주했다 . 그에게 당은 자신의 권력 기구를 수동적으로 지지하는 정도의 가치만 가지고 있었다 .

    일국사회주의 이론과 중앙위원회는 모든 것이고 당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상이 관료집단에 의해 유포되었다 . 이 새로운 이론은 일국사회주의 이론보다 관료집단의 이해에 더 잘 복무했다 . 레닌의 사망을 기화로 관료지배층은 " 레닌의 소집 (Lenin's levy)" 을 선언하였다 . 과거에 당의 문호는 항상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개방되었다 . 노동자 , 점원 , 하급관리 등이 떼를 지어 당으로 몰려들었다 . 이 조치의 정치적 목적은 혁명 전위의 해체에 있었다 . 조직 경험이나 독립성 등이 부족하지만 권위에 복종하는 구래의 습관이 있는 사람들은 이제 당원이 될 수 있었다 . 이 조치는 성공했다 . 관료집단을 노동계급 전위의 통제에서 해방시킴으로써 " 레닌의 소집" 은 레닌이 건설한 당에게 마지막 죽음의 일격이 되었다 . 이제 당기구는 필요한 독자성을 얻었다 . 민주집중제는 관료집중제로 바뀌었다 . 상부와 하부를 막론하고 곧 대대적인 인사태풍이 불어닥쳤다 . 볼셰비키 당원의 주요한 미덕은 복종이라고 선언되었다 . 좌익반대파와 투쟁한다는 명분 하에 혁명가들은 당기구에서 축출되고 대신 전문관료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 볼셰비키당의 역사는 이제 당의 급속한 퇴보의 역사로 돌변했다 .

    좌익반대파 , 중앙파 , 우파의 지도자들이 모두 정치국원이었기 때문에 분파투쟁의 정치적 의미는 베일에 가려졌었다 . 피상적으로만 관찰하면 분파투쟁은 레닌의 " 법통 " 을 차지하려는 개인적 경쟁이었다 . 그러나 철의 독재체제에서는 사회적 갈등은 처음에는 권력을 장악한 당기구들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 프랑스의 경우 테르미도르 반동에 가담한 인물 대다수는 자코뱅 클럽 출신이었다 . 나폴레옹 역시 혁명 초기에는 이 클럽의 회원이었다 . 제 1 집정관 시절과 이후 황제가 되었을 때 그가 가장 충성스러운 하수인들을 모집한 것도 바로 자코뱅 클럽 구회원들로부터였다 . 시대는 변했고 자코뱅파도 변했다 . 20 세기의 자코뱅파인 볼셰비키당도 마찬가지이다 .

    레닌 생전의 정치국원들 중 스딸린 만이 아직도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오랜 망명시절 레닌과 함께 일했는데 저지르지 않은 죄를 뒤집어 쓰고 지금 10 년 징역형을 살고 있다 . 리코프 , 부하린 , 톰스키는 지도부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는데 복종의 대가로서 한가한 직책을 맡고 있다 . 그리고 필자는 현재 망명 중이다 . 레닌의 미망인 크룹스카야도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 . 모든 노력을 했으나 그녀도 테르미도르 반동에 제대로 적응할 수 없었다 .

    현직 정치국원들은 볼셰비키당 역사 내내 주변적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 혁명 초기 몇 년간 이들의 영전을 예상한 자가 있었다면 아마 그가 가장 이 현상을 놀랍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 그리고 이 놀라움에는 가식이 없었을것이다 . 바로 이 때문에 정치국은 언제나 옳으며 어느 누구도 정치국보다 옳을 수 없다는 규칙이 과거 어느 때보다 엄격히 준수되고있다 . 그러나 정치국도 무오류의 스딸린보다 더 옳을 수는 없다 .

    당내 민주주의 회복 요구는 이 시기 내내 모든 반대세력의 구호였다 . 그러나 실현될 수 없는 구호였기에 더욱더 끈질기게 제기되었다 . 이미 언급한 좌익반대파 강령은 1927 년에 " 비판적 노동자를 직접적·간접적 방식으로 탄압하는 것을 중대한 국가적 범죄로 처벌 " 할 조항이 특별법으로 제정되어 형법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 그러자 좌익반대파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조항이 형법에 도입되었다 .

    이제 당내 민주주의는 구세대의 기억 속에나 남아 있다 . 당내 민주주의의 실종은 소비에트 , 노동조합 , 협동조합 , 문화단체 , 체육단체 등의 민주주의 실종과 함께 진행되었다 . 당 간부들의 무제한적 위계질서가 모든 기구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 . 이제 소련은 " 전체주의 " 체제가 되었으며 이 용어가 독일에서 건너오기 몇 년 전에 이미 현실이 되어 있었다 . 라코프스키는 1928 년 이렇게 썼다 : " 독자적 사고 능력이 있는 공산주의자의 의지 , 용기 , 존엄성이 파괴당해 이제 공산주의자는 기계가 되었다 . 이 결과 관료지배층은 제거될 수 없는 과두제로 정착했다 . 이제 당과 계급은 사라졌다 ." 분노에 찬 이 글이 나온 이래 당의 퇴보는 더욱 끝없이 진행되었다 . 비밀경찰 (GPU) 은 당생활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 1936 년 3 월 몰로토프가 프랑스 기자에게 집권 여당 내부에는 분파투쟁이 없다고 자랑하였다 . 그러나 이 현상은 당내 이견이 정치경찰의 자동적 개입으로 해소되기 때문에 나타난다 . 이제 과거의 볼셰비키당은 죽었으며 어떤 힘도 이것을 부활시킬 수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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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의 정치적 퇴보와 함께 평당원의 통제를 받지 않는 당기구가 도덕적으로 부패했다 . 소비에트 부르주아지라는 뜻의 " 소브부어 (sovbour)" 는 특권 관료층을 의미했는데 노동자들의 어휘에 일찌감치 등장했다 . 신경제 정책의 등장과 함께 부르주아 경향은 활동영역을 더 넓혔다 . 1922 년 3 월 제 11 차 당대회에서 레닌은 권력층의 타락 위험을 경고했다 . 피정복자가 정복자보다 문화수준이 더 높을 경우 정복자는 피정복자의 문화를 받아들인다 . 이 경우는 인류 역사에서 적어도 두번 이상 존재했다고 레닌은 말했다 . 러시아 부르주아지와 짜르체제 관료집단의 문화는 확실히 형편없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새로운 지배층은 종종 이 문화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 모스크바에서는 "4,700 명의 책임감 있는 공산주의자들 " 이 국가기구를 운영하고 있다 . " 누가 누구를 지도하고 있는가 ? 공산주의자가 지도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의심스럽다 " 고 레닌은 말했다 . 이후의 당 대회에서 레닌은 병환으로 연설을 할 수 없었다 . 그러나 활동적 삶의 최후의 몇개월간 그의 생각은 관료집단의 억압 , 변덕 , 타락을 노동자들에게 경고하고 이들의 저항을 촉구하는데 바쳐졌다 . 그러나 그는 질병의 첫 징후만을 보았을 뿐이다 .

    크리스티안 라코프스키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인민공화국 의장이었으며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소련 대사를 지냈다 . 그는 1928 년 당시 유형 중에 있던 친구들에게 소련 관료집단에 대한 짤막한 조사보고서를 보내 주었다 . 이것은 이미 이 책에서 여러 번 인용된 바 있는데 현재까지는 이 주제에 대한 가장 훌릉한 자료이다 . 라코프스키는 이 조사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 " 레닌과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는 당지도부의 임무가 아주 명확했다 : (1) 권력층의 특권 , 지위 , 전용상점 등의 부패 (2) 구귀족계급 및 부르주아 잔존세력과 권력층의 화해 (3) 신경제정책의 부패적 영향력 (4) 부르주아지의 도덕과 이데올로기가 가하는 유혹 등 해악적 요인들로부터 당과 노동계급의 보호 . ....... 그러나 당기구는 이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으며 대중의 교육자및 보호자라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 완전히 모자란다는 점을 우리는 정직하게 틀림없이 큰소리로 말해야 한다 . 당 지도부는 실패했으며 파산했다."

    라코프스키 자신이 관료집단의 억압에 굴복하여 자신의 비판적 판단을 철회한 것은 사실이다 . 그러나 70 노인 갈릴레오 역시 자기 신념을 철회했었다 . 종교재판소의 탄압 때문에 이 과학자는 코페르니쿠스 우주 이론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러나 지구가 태양주위로 도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 우리는 60 노인 라코프스키가 진심으로 자기 신념을 철회했다고 믿지않는다 . 왜냐하면 그는 최소한 두번 이상 강요된 전향을 날카롭게 분석했기 때문이다 . 사태의 객관적 전개는 그의 정치비판들의 올바름을 주관적 지조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

    노동계급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면서 여타 계급과의 역관계에 변화를 가져을 뿐 아니라 자기 내부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 국가권력의 행사는 특정 사회집단의 전문영역이 된다 . 이 경우 혜택받은 권력층은 우선 자신의 " 사회 문제 " 를 해결하기 위해 급급하게 된다 . 특히 자신의 역사적 임무의 숭고함을 높이 자각할수록 이 경향은 더욱 강하다 . " 노동자국가는 집권당 성원의 자본주의적 축적을 금지한다 . 이 경우 노동계급의 계층적 분화는 처음에는 각 집단의 기능에 따라 발생하지만 이후에는 사회적 성격을 띤다‥‥‥ " 계속해서 라코프스키는 설명한다 : " 승용차 , 고급 아파트 , 정기 휴가 등의 특권을 누리면서 당 최고수준의 급료를 받는 공산주의자의 사회적 조건은 한달에 기껏해야 50 내지 60 루블을 받으며 석탄광산에서 일하는 공산주의자의 사회적 조건과 아주 다를 수밖에 없다 ." 재물 욕심 , 정부 사업권 획득 , 보급품 확보 등 자코뱅파가 권력을 잡은 후 타락한 이유들을 열거하면서 라코프스키는 바뵈프의 흥미 있는 발언을 인용한다 . 권력을 장악한 자코뱅파의 타락은 이들과 아주 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구귀족 계급의 젊은 여성들에 의해 크게 영향받았다고 그는 말했다 . 바뵈프는 외쳤다 : " 소심한 인민의 자식이여 ,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 귀족계급의 젊은 여성들이 오늘은 당신들을 포옹하지만 내일은 당신들을 목졸라 죽일 것이다 ." 소련 지배층 부인들에 대한 호구조사 통계는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 아주 잘 알려진 소련의 언론인 소스노프스키 (Sosnovsky) 는 소련 관료집단의 도덕수준 형성에 특별한 역할을 한 " 승용 - 여자 요인 " 을 지적한다 . 소스노프스키 역시 라코프스키와 마찬가지로 자기 발언을 철회하고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왔다 . 그렇다고 소련 관료집단의 도덕 수준이 향상된 것은 아니었다 . 이와 반대로 과거 발언을 철회한 것 자체는 심화되고 있는 사기저하를 증거할 뿐이다 .

    소스노프스키의 오랜 신문기사들은 원고의 형태로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다 . 그의 기사들은 새로운 지배층의 일상생활에 대한 잊지 못할 일화들을 싣고 있었다 . 이 일화들은 현재 권력층이 과거 권력층의 도덕에 어느 정도 동화되었는지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 그는 1934 년 마침내 관료집단에게 굴복하였다 . 그러므로 과거의 예를 찾을 것 없이 새로운 예들만을 소련 언론에서 발굴해보자 . 그리고 권력 남용이나 소위 " 비리 " 들보다 합법적이어서 소련 언론에 자주 소개되는 일상사들을 다루어 보자 .

    어느 모스크바 공장의 책임자는 아주 유명한 공산주의자인데 자기 공장의 문화 수준 개선 상황을 『프라우다』에서 자랑하고 있다 . " 어느 기계공이 전화를 건다 :' 책임자님 , 지시의 내용이 무엇이십니까 ? 용광로를 즉시 확인할까요 아니면 기다릴까요 ?' 나는 대답했다 ' 기다려 .'" 기계공은 2 인칭 복수를 쓰면서 책임자에게 아주 공경한 어조로 말한다 . 이에 대해 책임자는 자신의 우수한 지위를 의식하여 2 인칭 단수를 써서 기계공을 마치 하인처럼 대한다 . 이 구역질나는 대화는 문화수준이 있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 그러나 아주 보통인 것처럼 책임자 자신이 『프라우다』에 소개하고있다 ! 그런데 신문 편집자는 이 어투에 반대하지 않는다 . 자신도 그것이 보통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신문 독자들도 반대하지 않는다 . 이미 이런 대접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 우리 역시 놀라지 않는다 . 크렘린궁의 엄숙한 회의에서 " 지도자들 " 과 인민위원들은 자신들의 부하인 공장 책임자들 그리고 훈장을 받기 위해 특별히 초대된 집단농장의 대표들 , 십장 , 여성들에게 똑같은 투로 말하기 때문이다 . 짜르시대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혁명 구호는 사장이나 고위관료들이 하급자에게 쓰는 2 인칭 단수 금지 요구였다 . 이 사실을 어떻게 벌써 잊을 수가 있는가 !

    위에서 소개한 크렘린궁 지도자들의 " 인민 " 에 대한 태도는 마치 주인이 하인에게 대하는 것처럼 오만불손함이 놀라울 지경이다 . 그러나 이 사실은 10 월 혁명의 승리 , 생산수단의 국유화 , 농업의 집단화 , " 쿨락 계급의 해체 " 등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인간 관계 특히 소비에트 위계질서 최상층부의 인간 관계가 사회주의에 걸맞게 높아지기는커녕 많은 측면에서 문화적으로 우수한 자본주의에 비교해도 여전히 훨씬 뒤쳐지고 있음을 실수의 여지없이 증명하고 있다 .

    문화의 영역에서 최근 커다란 후퇴가 있었다 . 그리고 러시아 야만주의 부활의 진정한 원천은 당연히 소비에트판 테르미도르 반동이다 . 이 계기를 통해서 세련된 문화를 갖지 못한 관료집단이 대중의 통제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사회에 군림하게 되었고 대중은 복종과 침묵이라는 잘 알려진 복음을 선사 받았다 .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추상적 반대 개념들을 비교하여 양자의 강점들을 순수이성에 기초하여 재어 볼 생각은 필자에게 결코 없다 . 이 세계에서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변화만이 영원히 지속되는 요소이다 . 볼셰비키당의 독재는 인류 진보의 가장 강력한 도구로 판명되었다 .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어느 시인의 말대로 , " 이성은 비 ( 非 ) 이성이 되고 친절은 짐이 된다 ." 야당 금지는 분파활동 금지로 이어졌다 . 분파활동 금지는 무오류 지도자들에 대한 반대를 금지하는 것으로 끝났다 . 비밀경찰이 제조한 당의 통일성은 관료집단의 전횡을 낳았다 . 이로부터 온갖 종류의 잔악함과 부패가 생겨났다 .

     

    3. 테르미도르 반동의 사회적 기반

    우리는 소련의 테르미도르 반동을 대중에 대한 관료집단의 승리라고 규정했다 . 그리고 이 사건의 역사적 조건들을 밝혔다 . 노동계급의 혁명 전위 가운데 일부는 행정기구에 집어삼켜져 서서히 사기를 잃어갔고 또 일부는 내전으로 전몰하였으며 나머지 일부는 사회의 주요 영역에서 배제되어 압살되었다 . 지치고 실망한 대중은 사회의 정점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 지금까지 열거한 조건들은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왜 관료집단이 사회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운명을 확고하게 장악했는 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 관료집단의 권력의지도 이 현상을 설명하는데 불충분하다 . 새 지배층의 등장에는 깊은 사회적 원인들이 있다 .

    18 세기 자코뱅파에 대한 테르미도르 반동도 대중의 피로와 혁명 중핵의 사기저하에 일부 원인이 있었다 . 그러나 본질적으로 부차적인 이 현상 밑에서는 깊은 유기적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 자코뱅파는 거대한 혁명의 파도로 들어 올려진 하층 소부르주아 계급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 그러나 장기적으로 18 세기 프랑스 대혁명은 생산력의 발전에 조응하여 대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지배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 테르미도르 반동은 이 불가피한 과정의 한 단계에 불과했다 . 소련의 테르미도르 반동은 어떤 사회적 필연을 표현했는가 ? 경찰기구가 승리한 문제에 대해 필자는 이미 예비적으로나마 해답을 제시했었다 . 이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적 조건과 이 과정에서 필요한 국가의 역할에 대한 기존의 분석을 확장시켜야 한다 . 다시 한번 이론적 예언과 현실을 비교해보자 . 국가권력을 장악한 직후 곧바로 개시될 시기에 대해 1917 년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 " 부르주아 계급과 이 계급의 저항을 억압할 필요가 여전히 존재한다 . 그러나 여기에서 억압의 주체는 - 지금까지 언제나 그러했듯이 - 인구의 소수가 아니라 다수이다‥‥‥‥ 이 경우 국가는 사멸을 시작한다 . " 그러면 국가 사멸의 과정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 " 특귄 관료 , 상비군의 사령관 등 특권 소수 지배층의 특별한 기구들 대신 다수 대중이 직접 억압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다 . " 그리고 레닌은 곧이어 격언과도 같은 반박할 수 없는 사고를 개진한다 : " 국가권력의 기능이 다수에 의해 좀더 보편적으로 수행되면 될수록 이 권력에 대한 필요성은 점점 더 줄어든다 ."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철폐되면서 국가에게 주어진 주요한 역사적 임무 즉 절대 다수에 대한 소수의 특권적 소유를 방어할 임무가 없어진다 .

    레닌에 의하면 국가의 사멸은 착취자를 착취한 날 바로 다음 즉 새로운 체제가 경제적·문화적 문제들을 해결할 시간을 갖기 이전에 이미 시작된다 . 이 문제들이 해결될 때마다 국가는 철폐되고 사회주의 체제 내로 해소된다 . 이 해소의 정도는 사회주의 체제의 효율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지표가 된다 . 대체로 이와 같은 사회학적 가설이 제시될 수 있다 : 노동자국가에서 대중이 행사하는 강제력의 강도는 착취의 경향 즉 자본주의로의 복귀 위험과 정비례한다 . 그리고 사회적 연대와 새로운 체제에 대한 대중의 충성심의 정도에 반비례한다 . 따라서 특권 관료와 상비군 사령관을 포함한 관료집단의 역할을 대중은 맡을 수도 맡기를 원치도 않는다 . 이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대중 자신을 억압한 강제력의 특수한 종류이기 때문이다 .

    민주적 소비에트가 원래의 위력과 독립성을 보존하고 있으면서 혁명 후 첫 몇 년간 사용했던 억압과 강제력을 지금도 사용해야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우려를 제기할 만하다 . 그런데 현재 대중 소비에트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으며 강제력의 기능을 스딸린 , 야고다 등에게 넘겨주었다 . 따라서 지금의 상황은 더욱더 심각하다 .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야한다 : 국가가 의연히 그 억압의 위력을 고수하면서 경찰국가의 모습을 띠고 있는 배경에는 어떤 사회적 원인이 버티고 있는가 ? 이 질문의 중요성은 명백하다 .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 따라서 우리는 사회주의 사회 일반에 대한 기존 견해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든가 소련의 공식적 견해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

    이제 어느 모스크바 신문의 최신호에 소개된 소련에 대한 틀에 박힌 정의를 검토해보자 . 이 정의 가운데 하나는 매일 소련 전국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학교 어린이들이 외우고 있다 : " 소련에는 자본가 , 지주 , 쿨락 등 기생적 계급들이 완전히 일소되었고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는 영원히 종식되었다 . 전국 경제는 사회주의화되었고 발전하고 있는 스타하노프 운동은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 조건들을 준비하고 있다 ."( 『프라우다』 1936 년 4 월 4 일자 ) 코민테른이 발행하는 세계신문도 이 주제를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 그러나 착취가 " 영원히 종식되었다 " 면 그리고 소련이 공산주의의 가장 낮은 단계인 사회주의에서 가장 높은 단계인 공산주의로 나아가고 있다면 국가라는 마지막 족쇄를 던져버리는 일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 그런데 현재 소련은 전체주의적 관료체제이다 . 이 엄청난 차이는 머리로 상상하고 이해하기조차 힘들다 !

    이 치명적 모순은 당 운영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 이 경우 문제는 대개 이렇게 정식화될 수 있다 : 1917 년부터 1921 년까지 구 지배계급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 혁명에 대항했으며 전세계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적극 지원 받고 있었다 ; 동시에 무기를 든 쿨락이 나라의 군대와 식량공급을 방해하고 있었다 ; 이 당시 정책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당내에서 공개적으로 두려움 없이 논의하는 것이 가능했는가 ? 한편 제국주의 세력의 간섭이 끝나고 착취계급이 일소되었고 의심할 여지없이 공업화가 성공했으며 농민 절대다수에 대한 집단화가 시행되었다 . 그런데 왜 민주적 절차에 의해 교체되지 않는 지도자들이 존재하며 이들에 대한 단 한마디의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 것일까 ? 당헌에 따라 당 대회 소집을 요구하는 볼셰비키당원이 왜 즉시 출당 조치를 당하며 스딸린의 무오류성에 대한 의구심을 크게 소리내어 표현한 시민이 왜 마치 테러 음모의 가담자인 것처럼 기소되어 유죄선고를 받는가 ? 어디서 이 끔찍하고 괴물 같으며 참을 수 없는 탄압과 경찰력의 강화 현상이 등장했는가 ?

    이론은 언제나 현실에게 지불을 요구할 수 있는 어음이 아니다 . 어떤 이론이 오류로 판명되면 그것을 수정하고 빈틈을 메워야 한다 . 소련의 현실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현격한 차이를 가져온 진짜 사회세력을 우리는 찾아내야 한다 . 현재 소련 지도자들의 권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살아 있는 현실의 뺨을 때리며 모욕하는 공 문구를 반복하면서 어둠 속을 헤맬 수는 없다 . 이제 이 공 문구의 설득력 있는 예를 찾아보자 .

    1936 년 1 월 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인민위원회 의장 몰로토프는 이렇게 선언했다 : " 소련 경제는 사회주의화되었다 ( 박수 ). 이 의미에서 (?) 우리는 계급을 일소시켰다 ( 박수 )." 그러나 과거부터 " 우리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분자들 " 인 구 지배계급들의 잔당이 남아 있다 . 더욱이 집단농장의 농부 , 국가 공무원 , 심지어는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가끔 " 피라미 투기꾼들 " 이 발견된다 . 이들은 " 집단적 재산과 국가 재산을 뜯어먹는 사기꾼 , 소련에 해악을 끼치는 수다장이 등 " 으로 불린다 . 이 결과 독재를 더욱 강화해야한다 . 엥겔스의 견해와는 반대로 노동자국가는 " 잠들어서는 " 안된다 . 반대로 더욱더 경계를 단단히 해야한다.

    소련 정부의 수반인 몰로토프가 제시한 소련의 현재 상황은 너무 참혹하게 자기모순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가장 안심스러운 내용일 것이다 . 사회주의는 소련을 완전히 정복하고 있다 : " 이런 의미에서 " 계급은 철폐되었다 ( 그렇다면 다른 모든 경우에도 계급은 철폐되어 있다 ). 물론 사회 안정은 과거 유물들의 파편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흔들리고 있다 . 여기저기에 흩어진 자본주의 복귀파 몽상가들은 권력과 재산을 박탈당하고 있다 . 따라서 비록 "( 진짜 투기꾼이 아니라 ) 피라미 투기꾼들 " 이나 " 수다장이 " 들과 연합해도 무계급 사회를 타도할 수는 없다 . 모든 일이 최선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 그렇다면 관료집단에 의한 철의 독재는 무슨 소용이 있을까 ?

    반동적 몽상가들이 점차 소멸될 것이라고 우리는 믿어야 한다 . " 피라미 투기꾼들 " 과 " 수다장이들 " 은 초 ( 超 ) 민주적 소비에트에 의해 우습게 제거될 것이다 . 1917 년 레닌은 관료주의적 국가의 부르주아 및 개량주의 이론가들에게 이렇게 응답했다 : "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지 않다 . 개개인의 비리나 권력남용 가능성과 불가피성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 그리고 이 남용들을 억압할 필요성 역시 마찬가지로 부인하지 않는다 . 그러나 ‥‥‥ 이런 조치를 취하기 위한 특별한 억압기구는 필요 없다 . 이것은 무장 인민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 현대 사회에서 문명인이 싸움하는 사람들을 뜯어말리고 여성에 대한 폭행을 막는 것과 같이 아주 단순하고 쉴게 인민들은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 이 말은 마치 레닌이 몰로토프 같은 정부 수반들의 견해를 특별히 예상한 것처럼 느껴진다 . 소련의 공립학교는 레닌 사상을 가르친다 . 그러나 인민위원회는 이렇게 하지 않는 것 같다 . 그렇지 않다면 레닌이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며 비판하는 엉터리 이론을 인민위원회 의장이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용감하게 말할 리가 없을 것이다 . 소련의 창시자와 그의 아류 사이의 모순이 우리 앞에 드러났다 ! 레닌은 관료적 기구가 없이도 착취계급이 일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반면 몰로토프는 계급의 일소 이후에도 왜 관료기구가 인민의 독립성을 질식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 그저 일소된 계급의 " 잔당 " 을 언급할 뿐이다 .

    그러나 " 잔당 " 의 존재를 관료주의의 이유로 제시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 왜냐하면 관료집단을 대표하는 인사들의 자백에 의하면 어제의 적들은 소련 사회에 이미 성공적으로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 1936 년 4 월 당 중앙위원회 비서의 하나였던 포스티세프 (Postyshev) 는 공산주의 청년동맹 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 " 많은 수의 태업 분자들은 ‥‥ 진심으로 과오를 뉘우치고 소련 인민의 대열에 합류했다 ." 농업 집단화가 성공했으므로 " 쿨락의 자식들이 자기 부모들의 과거를 책임질 수 없다 ." 그리고 이보다 더 확실한 발언도 있다 : " 과거 농촌의 착취자였던 쿨락은 다시 과거의 지위를 회복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 출신 성분에 따른 사회활동 제한법을 정부는 철폐했다 . 이 조치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 몰로토프가 전적으로 동의한 포스티세프의 주장이 옳다면 그것은 오직 이 때문이다 : 관료집단은 끔찍한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강제력은 일반적으로 소련에서 전혀 인연이 없다 . 그러나 몰로토프나 포스티세프는 이 거역할 수 없는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 이들은 자기모순에 가득한 자신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더 좋아한다 .

    또한 현실에서 이들은 권력을 거부할 수 없다 . 이 사실을 객관적 언어로 옮기자면 이렇다 : 지금 소련 사회는 국가기구 그리고 제한적인 의미에서 관료집단 없이 운영될 수 없다 .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불쌍한 잔당들 때문이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위력 있는 세력과 정치경향들 때문이다 . 강제력의 기구인 국가가 소련에 존재하는 이유는 지금의 이행기 체제가 여전히 사회 모순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 사회 모순은 모든 사람들에 의해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소비 영역에서 대단히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다 . 그리고 이 영역의 모순은 생산의 영역으로 옮겨갈 위험이 언제나 있다 . 사회주의의 승리가 최종적이거나 역전될 수 없다고 말할 상황이 전혀 아니다 .

    소비재의 결핍과 이에 따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관료집단의 통치 기반이다 . 상점에 물품이 충분히 있으면 구매자는 원할 때는 언제든지 상점에 들러 물건을 살 수 있다 . 그러나 물품이 거의 없을 때 구매자는 줄을 서야 한다 . 이 줄이 아주 길면 질서 유지를 위해 경찰관이 있어야 한다 . 이것이 소련 관료집단이 누리는 권력의 출발점이다 . 관료집단은 누가 어떤 물품을 가져야 하고 누가 줄에서 계속 기다려야 하는지를 " 알고 있다 ."

    언뜻 생각하면 , 물질적·문화적 수준이 올라가면 특권 , " 부르주아 법 " 의 적용 , 이 법의 옹호자들인 관료집단 등이 축소되어야 한다 .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이다 : 생산력의 발전이 모든 형태의 불평등 , 특권 , 이권 등의 극단적인 발호와 관료주의의 성장을 초래했다 . 그러나 이 현상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

    초기에 소련 체제는 의심할 여지없이 지금보다 훨씬 평등했고 관료주의가 덜 기승을 부렸다 .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 빈곤의 평등이었다 . 나라의 자원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대중과 광범위한 특권층이 분리될 수 없었다 . 동시에 임금의 " 평등적 " 성격은 개인의 노동 의욕을 저하시키고 생산력 발전을 저해했다 . 특권을 가능하게 하는 재화의 축적을 위해 소련 경제는 빈곤에서 벗어나 더 높이 성장해야 했다 . 현재의 생산수준으로는 모두에게 모든 생활필수품을 보장할 수 없다 . 그러나 소수에게 상당한 특권을 부여할 정도는 되었고 대중을 자극하기 위해 불평등을 채찍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 경제성장이 소련에서 사회주의적 요소보다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훨씬 강화시킨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

    그리고 다른 이유들이 있다 . 지금 단계에서 자본주의적 임금지불 방식을 강요하는 경제적 요인과 함께 정치적 요인이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 그리고 관료집단은 정치적 요인 그 자체이다 . 불평등을 조장하고 옹호하는 것이 관료집단의 핵심 역할이다 . 맨 처음 관료집단은 노동자국가의 부르주아적 기관으로 등장했다 . 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확립하고 옹호하면서 관료집단은 당연히 자신의 몫을 챙긴다 . 분배할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분배에서 자신을 제외시키는 경우는 결코 없다 . 이렇게 사회적 필요에 의해 등장한 집단이 일정 시점을 경과하면 자신의 사회적 역할보다 더 커다란 권력을 휘두르며 사회 전체로부터 독립적 암적 존재가 된다 .

    이제 소련판 테르미도르 반동의 사회적 의의가 명료해지기 시작하고 있다 . 대중의 빈곤과 문화적 후진성이 손에 커다란 곤봉을 든 통치자의 흉악한 모습을 만들어 내었다 . 자신의 역할을 다하였으나 여전히 권력을 휘두르는 관료집단은 전에는 사회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사회의 주인이 되어 사회와 대중 위에 군림하고 있다 .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중으로부터 사회적 도덕적 독립성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활동과 수입에 대한 어떤 통제도 허용하지 않는다

    관료집단이 " 피라미 , 투기꾼 , 사기꾼 , 수다장이 " 에 대해 의아할 정도로 두려움을 갖는 이유가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다 . 인구 전체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소련 경제는 모든 요소 요소에 사기와 투기 경향을 조성한다 . 한편 새로운 귀족계급이 누리는 특권은 현 체제에 적대적인 " 수다장이들 " 의 말에 대중이 귀기울이게 만든다 . 즉 귓속말로나마 탐욕스럽고 변덕스러운 지배층을 비판하는 자들에게 대중은 관심을 보인다 . 따라서 과거의 유령이나 더 간단히 말해 지난 해에 내려 아직 녹지 않은 눈의 문제가 아니다 . 개인적 축재에 눈먼 강력하고 지속적이며 재생산되는 현재의 세력과 정치경향이 문제이다 . 현재 소련의 미미한 번영의 물결은 이 원심적 경향들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켜 왔다 . 한편 새로운 특권층의 탐욕스런 손에 매질을 가하려는 대중의 욕구가 동시에 성장하였다 . 다시 사회적 갈등은 날카로워지고 있다 . 관료집단이 휘두르는 권력의 원천은 바로 이 상황에 의해 조성되고 있다 . 그러나 이와 똑같은 상황에 의해 관료집단의 권력을 위협하는 세력도 등장한다 .

     

  • 트로츠키주의자
    17.04.21

    제 11 장 소련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1. 보나파르트 체제 :정치적 위기의 산물

    이미 앞에서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수없이 많은 오류를 저지른 관료지배층이 어떻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는가?" 이 문제를 다른 말로 표현해보자: "테르미도르 반동을 주도한 집단의 지적인 빈곤과 이들이 휘두르는 물질적 위력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제 이 문제에 대한 좀더 구체적이고 단정적인 대답을 시도해 보자. 소련 사회는 결코 평온하지 않다. 한 계급·계층에게 죄악이 되는 것은 그 적대 계급·계층에게는 미덕이 된다. 사회주의적 소유형태의 관점에서 보면 관료집단의 정책은 놀라우리만치 모순과 비일관성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이 똑같은 정책은 관료집단의 권력기반을 강화시키는 측면에서는 매우 일관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당국은 쿨락 즉 부농을 지지했는데 이 정책은 사회주의의 미래를 위해서는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소부르주아 계급의 지원을 받은 관료집단은 노동계급 전위부대의 손과 발을 묶고 볼셰비키 좌익반대파를 탄압하는 데 성공했다.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명백한 "오류"인 이 정책은 관료집단에게는 순도 100%의 승리였다. 그러나 급성장한 쿨락이 관료집단을 직접 위협하기 시작하자 관료집단은 쿨락에게 총칼을 들이대었다. 쿨락의 증대된 세력에 깜짝 놀란 관료집단은 반격을 가했는데 이 공격은 쿨락 뿐 아니라 중농도 타격대상으로 삼았다. 이 곁과 제국주의 세력의 개입에 의한 내전만큼이나 경제에 치명적인 손실이 발생했다. 그러나 관료집단은 자신의 정치적 요새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과거의 동맹군을 전멸시키는 데 겨우 성공하자 이들은 모든 힘을 다해 새로운 귀족층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한 일련의 사태는 사회주의 미래에 손상을 입히지 않았는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어쨌든 관료지배층은 권력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소련의 관료집단은 다른 모든 지배계급과 동일하다. 정치 일반의 영역에서 이들은 자신의 지도자들이 가장 조야한 수준의 오류를 범해도 눈을 감아줄 용의가 있다. 이 오류투성이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방어하는 데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치기만 하면 만사형통인 것이다. 새로운 지배집단이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 경계심을 곧추 세우면 세울수록 자신들이 정당하게 얻은 권리를 조금이라도 위협하는 세력들에 대한 가차없는 공격을 그만큼 더 좋아한다. 바로 이 가차없는 무자비함이야말로 새로운 지도자의 자질이 되어야 한다. 이제 스딸린이 정치적 성공을 거둔 비결이 어디에 있는 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료집단의 권력과 자율성에도 한계가 있다. 총사령관이나 심지어는 총서기보다 더 강력한 역사적 요인들이 존재한다. 정확한 회계가 없는 합리적인 경제운영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정확한 회계는 관료집단의 자의적 성격과 양립할 수 없다. 안정적인 루블화를 복권시키려면 "지도자들"의 자의가 통화정책에 개입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관료집단의 전제정치는 생산력의 발전에 점점 커다란 모순으로 작용하고 있다. 유럽의 절대왕정이 당시 확립되고 있던 부르주아적 시장 질서와 화해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루블화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절대적 필요가 관료집단의 정치를 억누르고 있다. 그러나 화폐 회계는 국민총생산의 분배를 둘러싼 다양한 세력들의 투쟁에 좀더 공개적인 성격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식량배급표가 시행되던 시기에 무관심의 대상이었던 임금 수준은 이제 노동자들에게는 아주 결정적인 사안이 되고 있으며 이와 함께 노동조합의 문제도 새로 제기되고 있다. 노동조합 관료들을 상부에서 지명하는 관행은 일반 노동자들의 점점 더 커다란 저항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도급제 하에서는 노동자들이 공장 관리자들의 정확한 주문에 대해 직접적인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스타하노프 운동원들은 생산조직의 문제점들에 대해 더욱 크게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공장 책임자와 엔지니어를 임명하는 관행이었던 관료의 친·인척 등용은 더욱 참을 수 없는 일이 되고 있다. 협동조합과 국가의 상거래는 과거보다 더 크게 제품 구매자에게 의존하고있다. 집단농장과 개인소유 농민들은 꼼꼼한 계산을 통해 국가와 거래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지방 관료들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지도자가 상부에 의해 빈번하게 임명되는 현상을 이들은 더 이상 비굴하게 좌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화폐 회계를 통해 가장 비밀스러운 영역에 속하는 관료들의 합법적·불법적 수입 내역이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정치활동이 철저하게 억압당하고 있는 나라에서 화폐 유통은 반체제 세력들을 동원하는 중요한 지렛대가 되고 있으며 소련판 "계몽" 절대주의(enlightened absolutism)의 종말 시점을 예측해주고 있다.

    공업이 성장하고 농업이 국가계획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당국의 과업은 대단히 복잡한 성격을 띠게 된다. 그리고 제품의 품질 문제가 전면에 제기된다. 그러나 관료주의는 품질의 개선을 가능하게 하는 창의성과 책임의식을 파괴한다. 관료주의의 궤양은 거대공업에서는 그리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협동조합, 경공업, 식품공업, 집단농장, 소규모 지방공업 등 인민의 생활에 가장 가까운 경제부문들을 파괴하고 있다.

    자본주의 기술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 소련에 도입되는 과정에서 관료집단의 진보적인 역할이 모습을 드러냈다. 혁명이 다져 놓은 집단적 소유의 기반 위에 자본주의 선진 기술의 도입, 모방, 이전, 접목 등 거치른 작업이 수행되었다. 기술, 과학, 예술 분야에서 자본주의의 성과들이 이식되면서 소련은 신조어를 발명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관료적 명령으로 서방의 유형을 그대로 모방한 거대한 공장들이 건설될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 모국에 비교해서 이 공장들은 세 배나 더 많은 비용을 잡아먹는다. 그러나 경제발전이 진척되면 될수록 품질 문제가 점점 중대 사안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마치 그림자처럼 관료집단의 통제에서 벗어난다. 소련의 제품들은 (품질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회색 상표를 부착한 것처럼 보인다. 국유화 경제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다 같이 민주주의, 비판의 자유, 창의성을 발휘해야 품질 개선이 가능하다. 그러나 당연히 이 필요조건들은 두려움, 거짓말, 아첨이 지배하는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기술과 문화를 독창적으로 창조하는 문제는 품질 개선의 문제보다 더 복잡하고 규모가 크다. 투쟁은 모든 사물의 아버지라고 어느 고대 철학자가 말했다. 생각이 자유롭게 투쟁하는 것이 불가능한 곳에서는 어떠한 새로운 가치도 창조될 수 없다. 물론 자유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이 혁명 독재의 핵심이다. 따라서 혁명의 시기에는 문화 창조의 좋은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 다만 문화 창조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새로운 환경을 제공했을 뿐이다. 노동계급 독재는 독재의 성격을 지양하는 정도에 따라 인간의 천재성에 더 넓은 공간을 마련해 준다. 국가가 사멸하는 것과 비례하여 사회주의 문화가 융성할 것이다. 그러나 이 단순하지만 제거될 수 없는 역사법칙은 현재 소련의 정치체제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다.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추상적인 정책적 요구가 아니며 추상적인 도덕률은 더욱 아니다. 이것은 사회 발전의 사활을 결정하는 문제이다.

    새로운 국가가 사회 전체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국가의 강제력이 사멸하는 과정은 갈수록 고통스럽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단순한 귀신이 아니다. 특정 기능들이 특정 기구들을 만들었다. 대체로 관료집단은 국가의 기능보다는 이 기능이 가지고 오는 재물에만 관심이 있다. 따라서 관료지배층은 국가라는 강제기구를 강화시키고 영구화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권력과 수입을 보장하기 위해 이들은 수단과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정세가 자신에게 불리할수록 이들은 인민의 선진층에 대해 더욱 가차없는 폭압을 자행한다. 카톨릭 교회처럼 관료집단은 자신의 권력이 쇠퇴하자 무오류의 교리를 제시했다. 그러나 로마교황이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이 교리를 신격화시켰다.

    끈질기게 도를 더해가는 스딸린의 신격화는 우스꽝스러운 모든 요소에도 불구하고 체제를 지탱하는데 더없이 필요한 요소이다. 오류를 범할 수 없는 초능력의 심판관 또는 황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제1 집정관이 관료집단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이 지배집단은 자신의 지배권력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자를 지도자로 세운다. 지도자의 "강인한 성격"은 서방의 아마추어 문학 애호가들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지위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거리끼지 않는 계층의 집단적 압력을 전부 합한 것에 불과하다. 이들 각자는 "짐은 곧 국가이다(L'etat --- c'est moi)"라고 생각하고 있다. 스딸린에게서 이들은 자기 모습을 본다. 그러나 스딸린 역시 이들 하나 하나에게서 자기 모습의 일부를 본다. 스딸린은 관료집단의 인격화이다. 실제로 관료집단은 그의 정치적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사회의 양대 계급이 사회의 지배권을 놓고 서로 우위를 가릴 수 없이 격렬한 투쟁을 벌이는 시기가 있다. 이때 국가권력은 사회 위에 군림하여 이 계급들로부터 완전한 독자성을 보유한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이 국가권력은 특권계급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자유만을 부여받았다. 이 역사적 순간에 케사르 체제(Caesarism) 또는 이것의 부르주아 형태인 보나파르트 체제가 등장한다. 정치적으로 원자화된 사회 위에 경찰과 장교집단을 버팀대로 삼아 군림하면서 어떤 세력의 통제도 받지 않는 스딸린 체제는 보나파르트 체제의 변종에 불과하다. 그러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새로운 유형의 보나파르트 체제이다.

    케사르 체제는 사회 내부의 투쟁으로 흔들리고 있던 노예제 사회에 기초하여 등장하였다. 보나파르트 체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중대 국면에 등장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무기 중의 하나이다. 스딸린 체제는 이 체제의 변종이다. 그리고 조직력과 무장력을 겸비한 소련의 지배층과 비무장 근로대중 사이의 적대관계로 분열된 노동자국가에 기초하고 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보나파르트 체제는 보통선거권이나 비밀선거권을 허용해도 아주 잘 운영된다. 이 체제의 민주적 의례는 국민투표이다. 때때로 시민들은 이렇게 질문받는다: 지도자를 지지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그리고 이 유권자들은 자신의 양 어깨 사이에 권총의 총구가 겨누어져 있음을 느낀다. 시골뜨기 출신의 정치 아마추어 같은 나폴레옹 3세 이래 이 방식은 대단히 발전했다. 국민투표에 기초한 보나파르트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소련 관료지배층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였다. 결국 이것은 이 체제의 모습을 완성하는 왕관인 셈이다.

    소련의 보나파르트 체제는 노동계급의 세계혁명이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등장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똑같은 이유로 파시즘이 등장했다. 소련에서는 무제한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관료집단이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있으며 서방에서는 파시즘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있다. 이 두 현상은 동일한 원인의 산물이다. 즉 역사가 제기한 문제들을 세계 노동계급이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이 결론은 처음에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불가피할 뿐이다. 스딸린 체제와 파시즘 체제는 사회적 기초는 판이하지만 동일한 현상이다. 이 두 체제의 특징은 지독히 비슷하다. 유럽 혁명운동의 성공으로 이 두 체제는 즉시 뒤흔들릴 것이다. 국제혁명에 등을 돌린 스딸린 관료집단은 자기 이익에 일치하는 행동을 실행에 옮긴 것 뿐이다. 단지 자신을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뿐이다.

     

    2. "계급의 적"에 대한 관료집단의 투쟁

    소비에트 정권 초기에 당은 관료주의에 대해 투쟁했다. 관료집단이 국가를 운영했지만 당은 여전히 관료집단을 통제했다. 불평등이 필요 이상으로 증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매우 경계를하면서 당은 항상 관료집단과 공개적으로 또는 비공개적으로 투쟁하였다. 스딸린 분파의 역사적 역할은 이 이중 구조를 깨뜨리고 당을 관료집단의 휘하에 두고 이후 국가기구마저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 결과가 지금의 전체주의 체제이다. 관료집단에게 매우 중요한 이 역사적 역할을 스딸린 자신이 수행했기 때문에 스딸린의 정치적 승리는 보장되었다.

    결성 후 10년 동안 좌익반대파는 당을 타도하고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당의 이념을 장악하는 강령을 버리지는 않았다. 이 분파의 구호는 혁명이 아니라 개혁이었다. 그러나 관료집단은 민주 개혁에 대항해 자기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어떤 혁명도 수행할 용의가 있었다. 1927년 투쟁이 특히 치열했을 때 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스딸린은 좌익반대파에 대해 이렇게 선언하였다: "내전을 통해서만 좌익반대파 간부들을 제거할 수 있다!" 당시 스딸린의 이 협박은 유럽 노동계급의 패배 때문에 인해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따라서 개혁의 길은 이제 혁명의 길로 바뀌었다.

    당과 소비에트 조직에 대한 계속적인 숙청은 대중의 불만이 명확하게 정치 노선으로 표현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탄압은 사상을 죽일 수 없으며 단지 지하로 내몰 수 있을 뿐이다. 공산주의자 뿐 아니라 비당원 시민도 흔히 두 가지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공식 사고체계이며 또 하나는 비밀 사고체계이다. 첩자질과 소문 퍼뜨리기로 소련 전역의 사회적 관계들은 침해당하고 있다. 관료집단은 자신의 적을 언제나 사회주의에 대한 적으로 포장한다. 법적 날조행위는 관행이 되었는데 이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들에게 자의적으로 죄를 뒤집어 씌운다. 총살형에 처한다는 협박을 통해 나약한 사람들로부터 자백을 강제로 받아내고 이것을 토대로 좀더 강인한 사람들을 법정에 내세운다.

    1936년 6월 5일 『프라우다』는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에 대해 논평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설교하고 있다: "소련에서 계급은 철폐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계급 세력들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어리석음이며 동시에 범죄행위이다.‥‥‥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면 "적대적인 계급세력"은 누구인가? 여기에 대해 『프라우다』는 이렇게 답변한다: "반혁명 그룹들의 잔당, 모든 색조의 백위군, 특히 뜨로츠키-지노비에프 파벌이다." 뜨로츠키-지노비에프 파벌(!)이 저지른 "첩자질, 음모, 테러행위"를 불가피하게 언급한 후 이 스딸린의 기관지는 이렇게 약속한다: "인민의 적인 뜨로츠키 파벌의 파충류들과 포악한 자들을 미래에 반드시 때려누이고 제거할 것이다.이들이 아무리 변장을 잘해도 우리는 이 일을 해내고야 말 것이다." 이 위협은 소련의 언론에 일상적으로 반복되고 있는데 비밀경찰의 작업과 병행되고 있다. 1918년 이래 당원으로 있으면서 내전에 참여하였고 이후 소련의 농업전문가이자 우익반대파의 일원이었던 페트로프(Petrov)는 1936년 유형지에서 탈출하여 어느 자유주의자 망명신문에 글을 실었다. 그는 소위 뜨로츠키주의자들을 이렇게 특징짓고 있다: "좌익이라고? 심리적으로는 마지막 남은 진정한 열정적인 최후의 혁명가들이다. 음험한 협상을 하지 않으며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였다. 대단히 존경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보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 이들은 세상이 대난(大難)을 겪고 있다고 허풍떨고 있었다." 그들의 "사상"은 논외로 하자. 그러나 우익 인사가 좌익에 대해 내린 이 도덕적 정치적 평가는 아주 훌륭한 증거가 아닌가? 비밀경찰의 대령과 장군들이 제국주의 첩자이며 반혁명 분자라고 낙인찍으며 심문하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진정하고 열정적인 최후의 혁명가들"이다.

    볼셰비키 좌익반대파에 대한 관료집단의 증오심은 히스테리로 발전하였다. 이 히스테리는 부르주아 출신에 대한 사회적 제한을 해제하는 조치와 관련하여 특별히 날카로운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부르주아 출신들의 고용, 일, 교육과 관련된 유화적인 포고령은 구지배계급의 저항은 신질서가 안정되는 것과 비례하여 소멸한다는 당국의 사고에서 나왔다. 1936년 1월 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몰로토프는 이들에 대한 제한 조치가 더 이상 필요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지독한 "계급의 적"은 평생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한 사람들이란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특히 이들은 지노비에프나 카메네프와 같이 레닌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로부터 시작된다. 부르주아 계급과 구별되는 "뜨로츠키주의자"들은 『프라우다』에 의하면 "무계급 사회주의 사회의 특징들이 더 뚜렷하게 드러날수록" 더 절망한다. 이 철학의 정신착란적 성격은 새로운 사회관계들을 낡은 정식으로 은폐해야 할 필요에서 나온다. 그러나 당연히 사회적 적대관계의 진정한 변화를 은폐할 수는 없다. 한편 "신사" 계층의 창조는 부르주아 계급의 좀더 야망있는 자식들에게 출세할 수 있는 넓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따라서 이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는 것은 조금도 위험하지 않다. 반면 이 조치는 대중 특히 청년 노동자들 사이에서 대단히 위험스런 불만을 조성한다. 바로 이 때문에 "파충류와 포악한 자들"에 대한 일소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노동계급 독재의 칼날은 원래 구부르주아 계급의 특권을 부활시키려는 자들에게 가해졌으나 이제는 관료집단의 특권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고 있다. 이제 공격을 당하는 쪽은 노동계급의 적들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전위부대이다. 과거 정치경찰은 볼셰비키 당원 가운데 특히 헌신적이고 자기희생적인 분자들로부터 충원되었으나 이제는 관료집단의 가장 타락한 분자들로 구성되고 있다.

    혁명가들을 박해하는 과정에서 테르미도르 반동의 주동자들은 자신의 과거를 생각나게 하고 미래를 두렵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모든 증오심을 퍼붓고 있다. 감옥,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벽촌, 급격히 늘어나는 강제 수용소 등은 볼셰비키당의 가장 강인하고 진실한 최우수 당원들을 가두고 있다. 심지어 시베리아의 독방 감옥에서도 좌익반대파 성원들은 여전히 수색, 우편물 금지, 굶주림 등의 박해를 받고 있다. 저항을 깨뜨리고 전향을 유도하려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유형중인 남편과 부인은 강제로 분리되고 있다. 그러나 전향하는 사람들도 구제되지는 않는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럽거나 끄나풀이 암시만 주어도 이들은 갑절로 벌을 받아야 한다. 친척들이 유형수들을 도와주는 것조차 범죄이다. 상호부조는 모의죄로 처벌받는다.

    이 상황에서 자기방어의 수단은 단식투쟁 밖에 없다. 비밀경찰은 이에 대해 강제 급식을 시키거나 아예 죽도록 내버려 둔다. 최근 수백 명의 러시아인 또는 좌익반대파의 외국인 성원들이 총살, 단식투쟁, 자살 등으로 사망하였다. 지난 12년 동안 당국은 좌익반대파가 마침내 근절되었다고 수십 번이나 전 세계에 선언했다. 그러나 1935년 12월과 1936년 상반기에 걸쳐 진행된 "숙청"에서 수십만 명의 당원들이 제명되었다. 이들 중에는 수만 명의 "뜨로츠키주의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이들 중 가장 적극적인 분자들은 즉시 체포되어 감옥과 강제수용소에 처넣어졌다. 제명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일자리를 제공하지 말라고 스딸린이 직접 『프라우다』 지면을 통해 지방 당국에게 조언했다. 국가가 유일한 고용주인 나라에서 일자리를 주지 말라는 것은 서서히 굶어 죽게 내버려두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옛날의 원리는 당국에 의해 복종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새로운 원리로 바뀌었다. 보나파르트 체제가 시작된 1923년 이래 얼마나 많은 볼셰비키들이 제명, 체포, 유형, 사형 등에 처해졌는지는 스딸린 정치경찰의 문서들을 검토하면 그 정확한 숫자가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관료집단이 붕괴하기 시작할 때 이들 중 얼마나 많은 숫자가 지하활동에 가담했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2백만의 당원을 거느린 당에서 2만 내지 3만의 반대파가 어느 정도의미가 있을까? 단순한 수치 비교는 이 문제의 경우 별 의미가 없다. 격화되는 정치 상황에서는 10명의 혁명가만 있어도 일개 연대가 인민의 편으로 넘어을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군 당국은 아주 작은 지하서클이나 개인들도 지독히 두려워 한다. 이 반동적인 군당국의 두려움은 스딸린 관료집단 전체에 확산되어 있다. 이들이 자행하는 탄압과 가증스러운 비방의 광적인 성격이 이로써 충분히 설명된다.

    소련에서 관료집단의 탄압을 끝까지 견디었던 빅토르 세르쥬는 혁명에 대한 충성과 혁명 파괴세력에 대한 적대감을 품으며 고문의 고통을 견디고 있는 혁명가들의 놀라운 소식을 서방에 전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조금도 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단어 하나 하나를 조심스럽게 선택하고 있다. 내가 한 말 하나 하나의 진실을 비극적인 증거와 피해자의 이름으로 증명할 수 있다. 다수의 순교자들과 반대자들은 현재 대개의 경우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 이들 중에서 특히 심정적으로 나에게 가까운 영웅적인 혁명가들이 소수 존재한다. 이들은 활력, 통찰력, 인내, 위대한 시대의 정치사상인 볼셰비키주의에 대한 헌신 등으로 다른 어떤 분자들보다 소중한 사람들이다. 소비에트 공화국의 창건자인 레닌과 뜨로츠키의 동지들인 수천 명의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은 체제의 퇴보에 저항하며 사회주의의 원칙을 수호하고 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노동계급의 권리를 방어하고 있다. 이들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희생을 전부 치르고 있다. 이것만이 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투쟁이다‥‥‥‥ 여러분들에게 감옥에 있는 사람들의 소식을 전한다. 이들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이들이 혁명의 새로운 여명을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 서방의 혁명가들은 이들을 믿을 수 있다. 감옥 안에서나마 혁명의 불꽃은 계속 타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여러분을 믿고 있다. 여러분과 우리는 세계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그리고 노동계급 독재의 해방 정신을 부활시키기 위해 이들을 방어해야 한다. 이 결과 미래에 소련은 도덕적 위대성과 노동자의 신뢰를 다시 회복할 것이다. "

     

    3. 새로운 혁명의 불가피성

    국가의 사멸에 대해 논하면서 레닌은 "만약 분노, 저항, 봉기 등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사라져서 인민을 억압할 필요가 전혀 없다면" 사회생활의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관습은 모든 강제성을 완전히 상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 "만약"에 있다. 현재 소련 체제는 모든 곳에서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저항은 억압당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격렬하다. 관료집단은 강제력 행사의 기구일 뿐 아니라 저항을 촉발하는 끊임없는 원천이다. 탐욕스러우며 거짓말을 예사로 하는 냉소적인 지배집단의 존재 자체가 불가피하게 인민의 분노를 은밀하게 불러일으키고 있다. 노동자의 물질적 상황이 개선되어도 당국에 대한 이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노동자들이 점점 더 긍지를 갖고 정치 일반의 문제에 대해 자신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경우 이들은 관료집단과 공공연하게 투쟁하게 될 것이다.

    "연구"와 "기술 획득"의 필요성, "교양의 자발적 습득" 그리고 다른 멋진 일들에 대해서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을 "지도자들"은 아주 좋아한다. 더욱이 이들은 선거나 그밖의 방식으로 교체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무식하고 교양이 전혀 없다. 진지하게 연구하지도 않으며 사회생활에서 거만하며 충실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이 집단이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을 보호하는 듯이 생색을 내며 협동조합 상점뿐만 아니라 음악 작곡에 대해서까지 명령을 내리려고 설치는 것은 더욱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권력을 빼앗은 이 집단의 굴욕적인 지배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소련 인민은 더 높은 문화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

    관료집단이 노동자국가를 집어삼킬 것인가 아니면 노동계급이 이들을 쓸어 없애 버릴 것인가? 이 문제에 소련의 운명이 달려 있다. 소련의 노동자 절대 다수는 아직까지도 관료집단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다. 농민 대중 역시 이들에 대해 건강한 인민의 증오심을 품고 있다.농민과 달리 노동자들은 공개적으로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결과 저항하는 농촌 마을들을 혼란과 무기력 속에 빠뜨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억압 때문만은 아니다. 노동계급은 관료집단을 타도하면 자본주의를 복귀시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국가와 계급 사이의 관계는 속류 "민주주의자들"이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계획경제가 없다면 소련은 수십 년 후퇴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관료집단은 계속해서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체제를 붕괴시켜 혁명의 성과를 완전히 무위로 돌릴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노동자들은 현실적이다. 관료지배층 그리고 최소한 자신들과 가까이 있는 하급 관료집단을 이들은 현실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즉 당분간 관료집단이 노동계급이 달성한 혁명의 성과 중 일부만이라도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노동자들은 다른 대안을 찾아내는 순간 이 부정직하고, 버릇이 없으며, 믿을 수 없는 혁명의 파수꾼을 몰아낼 것이 틀림없다. 바로 이 때문에 서방이나 동방에서 혁명의 아침은 한번 더 도래해야 한다.

    크렘린궁의 친구들이나 하수인들은 노동자의 정치투쟁이 눈에 드러나지 않으면 체제가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관료집단의 안정은 일시적일 뿐이다. 대중의 불만이 깊은 골을 파고 있는 상황에서 젊은 세대들은 이 "계몽 절대주의"의 멍에를 특히 괴롭게 느끼고 있다. 그리고 계몽의 성격보다는 절대주의의 성격이 더 강한 것이 소련의 관료집단이다. 관료집단의 히스테리는 비판적 사고가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점점 더 감시의 눈을 불길하게 치켜뜬다. 이와 동시에 "지도자"의 은덕에 대한 칭송의 노래가 참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이 현상은 국가기구와 사회가 점점 더 분리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사회 내부의 모순이 꾸준하게 격화되어 국가에 대해 강한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살펴본 사실들에 의해 도출되는 결론이다. 대중의 체제 저항 압력이 분출되는 것은 필연적일 것이다.

    권력층의 대표자들에 대한 테러행위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현상은 현재 상황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명석하지만 일말의 양심도 없는 레닌그라드의 독재자 키로프(Kirov)는 관료집단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암살은 테러행위의 가장 잘 알려진 경우이다. 그러나 테러행위자들은 보나파르트 체제의 과두집단을 타도할 능력이 전혀 없다. 물론 개별 관료들은 테러주의자의 권총이 자기 심장을 겨누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테러행위를 빙자하여 관료들은 자신들의 폭력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정적들을 테러행위의 가담자로 몰아 제거할 음모를 꾸미기도 한다.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그리고 기타 볼셰비키 인사들이 바로 이렇게 제거되었다. 테러행위는 참을성이 없고 쉽게 절망하는 개인들의 무기이다. 그리고 관료집단의 자식 세대들 자신이 가장 자주 의거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짜르시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암살은 의심할 여지없이 폭풍 전야의 징후이며 공공연한 정치적 위기의 시작을 예고한다.

    관료집단은 이 위험을 느끼고 있으며 이에 대한 예방책을 강구하고 있다. 새로운 헌법의 도입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흔히 역사에서 그렇듯이 관료주의적 독재체제는 "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약화시켰을 뿐이다. 새로운 헌법은 보나파르트 체제를 폭로하면서 동시에 이 체제에 대한 투쟁을 반합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은폐물을 제공했다. 선거 시기에 관료집단의 분파들이 경쟁할 경우 정치투쟁의 가능성이 좀더 커질 수 있다. 스딸린에 의하면 새로운 헌법은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권력기관"에 대한 채찍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보나파르트 체제에 대한 채찍으로 변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징후들은 문화수준이 높은 인민 세력과 과두 관료집단이 불가피하게 충돌할 것임을 똑같이 예견하고 있다. 이 위기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책은 없다. 스스로 발톱을 자른 악마는 없었다. 소련의 관료집단은 자신의 지위를 싸우지 않고 선선히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태의 진행은 명백히 혁명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인민 대중에 의한 강력한 압력과 이 경우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국가기구의 이완으로 권력층의 저항은 생각보다 훨씬 약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가설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쨌든 관료집단은 혁명세력의 힘에 의해서만 타도될 수 있다. 그리고 혁명세력의 공세가 강하고 대담할수록 충돌과정에서 발생하는 희생자는 더 적을 것이다. 혁명을 준비하면서 유리한 역사적 상황에서 대중을 지도하는 과업은 바로 제4인터내셔널 소련 지부의 몫이다. 현재 이 지부는 매우 허약하며 지하활동을 강요받고 있다. 그러나 당의 비합법 존재도 존재인 것은 틀림없다. 다만 어려운 상황의 존재방식일 뿐이다. 정치무대에서 퇴장하고 있는 계급들에 대해서는 억압이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 1917년에서 1923년까지의 혁명적 독재기가 이것을 완벽히 증명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일반 정세가 이런 식으로 지속될 경우 이미 존재이유가 소멸한 관료집단이 혁명적 전위에 대한 폭력적 탄압을 통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료집단이 자기 무덤을 파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혁명은 1917년 10월 혁명과 같은 사회혁명은 아니다.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변화시키고 특정 소유형태를 다른 소유형태로 대체하는 혁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면 봉건체제를 대체하여 부르주아체제를 등장시킨 사회혁명 뿐 아니라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파괴시키지 않은 채 구지배집단을 일소한 정치혁명도 있었다. 1830년과 1848년의 프랑스 혁명과 1917년 2월의 러시아 혁명 등은 이런 예에 속한다.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의 타도는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겠으나 그 자체로는 정치혁명의 테두리 내에 머물 것이다.

    노동계급의 혁명에 의해 탄생한 국가가 생존한 경우는 소련이 처음이다. 따라서 이 국가가 거쳐야 할 발전 단계는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앞길을 전혀 알 수가 없다. 소련의 이론가들과 창건자들은 완전하게 대중에 의해 통제되고 신축성이 있는 소비에트 체제가 사회의 경제적·문화적 발전과 함께 평화적으로 해체와 사멸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현실은 이론보다 더욱 복잡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후진국의 노동계급이 첫 번째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할 운명을 타고 났다. 이 역사적 특권을 관료집단의 절대주의에 대항하는 제2차 보완 혁명으로 되갚아야 한다는 사실이 모든 증거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새로운 혁명의 강령은 혁명 당시의 상황, 나라의 발전 수준, 국제 정세에 따라 주로 결정된다. 강령의 기본 내용들은 이미 명확해졌으며 이 책 전체를 통해 소련 체제의 모순을 분석하면서 객관적 추론으로 이미 제시되었다.

    문제는 한 지배집단을 또 다른 지배집단으로 대체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경제와 문화를 운영하고 인도하는 방법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관료적 전제체제는 소비에트 민주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 비판의 자유를 회복시키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거를 실시하는 것이 나라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이다. 이것은 볼셰비키당을 비롯한 소비에트 내 정당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회복시키고 노동조합을 부활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업 활동에서 민주주의를 도입한다는 것은 근로대중의 이해에 부합하도록 기존 계획을 근본적으로 수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문제를 자유로이 논의하는 것을 통해 관료적 오류와 좌충우돌의 결과 발생하는 전체비용이 감소될 수 있다. 소비에트 궁전, 새로운 극장, 전시용 지하철 등 실속은 없으면서 비용만 많이 드는 사업들은 노동자 주택단지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점차 소멸되어야 한다. "부르주아 분배 규범"은 엄격하게 필요한 영역 내로 제한되고 사회적 부의 증대와 함께 사회주의적 평등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군대 내의 계급은 즉시 철폐되어야 한다. 훈장의 번쩍거리는 쇠조각은 도가니 속에 집어 넣어질 것이다. 청년은 자유롭게 숨쉬고 비판하고 오류를 범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을 것이다. 과학과 예술은 쇠사슬로부터 풀려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외정책은 혁명적 국제주의의 전통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지금 10월 혁명의 운명은 유럽 및 전세계의 운명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소련의 문제는 이제 스페인 반도, 프랑스, 벨기에 등지에서 결정되고 있다. 이 책이 출판되는 시점에는 마드리드의 성벽 아래에서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보다 상황이 비교할 수 없이 명확해질 것이다. 배신적인 "인민전선(people's front)" 정책을 통해 소련 관료집단이 스페인과 프랑스의 반동세력에게 승리를 보장할 경우 그리고 코민테른이 이 방향으로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경우 소련은 파멸의 벼랑으로 내몰릴 것이다. 관료집단에 대한 노동자의 봉기가 아니라 부르주아 반혁명이 대세가 될 것이다. 개량주의자들과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공동 사보타지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의 노동계급이 권력으로 향하는 길을 찾을 경우 소련의 역사는 새로운 지평을 맞이할 것이다. 유럽 혁명의 첫 승리는 전기충격처럼 소련의 대중을 일깨워 이들의 독립적 정치행동을 고양시킬 것이다. 그리고 1905년과 1917년의 전통을 일깨우고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의 지위를 침식할 것이다. 10월 혁명이 제3인터내셔널에게 중요했던 만큼이나 이 새로운 상황은 제4 인터내셔널에게 중요할 것이다. 오직 이 전망을 통해서만 인류 역사상 첫 노동자국가는 사회주의의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 트로츠키주의자
    17.04.21

     

    [16. A Letter to James Cannon] 제임스 캐넌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버넘 동지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새로운 논문 러시아어 판을 어제 동지 앞으로 우송했습니다. 변증법을 논의의 지배적인 주제로 삼은 것에 대해 동지들 모두가 만족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당원들 특히 청년 당원들에게 이론 교육을 개시하고 이들이 경험주의와 절충주의에 대해 혐오감을 갖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1940년 1월 9일

    레온 트로츠키

     

    [17. A Letter to Farrell Dobbs] 패럴 답스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라이트 동지가 번역하도록 보낸 논문에서 나는 두 가지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관료적 보수주의(bureaucratic conservatism) 문제입니다. 전에 이곳에서 동지와 이 문제를 약간 토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의 정치적 경향인 관료적 보수주의는 특정 사회계층 다시 말하면 특권을 누리고 있는 노동관료층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나타냅니다. 자본주의 국가 특히 제국주의 국가들과 더욱더 높은 정도로 소련에 이러한 사회계층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노동자당 다수파가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되는 "관료적 보수주의"의 사회계층적 뿌리를 찾는 것은 어리석은 정도를 넘어서서 황당무계합니다. 관료주의와 보수주의는 객관적 사회조건에 의해서 결정되거나 일부 지도자들의 개인적 특성에 의해 현실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분파가 존재하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분파는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개인들의 집단을 의미합니까? 이러한 설명이 가능하다면 이 설명은 정치적 설명이 아니라 심리적 설명입니다. 예를 들어 캐넌 동지가 관료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면 다수파는 이 동지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이 특성에도 불구하고 캐넌 동지를 지지한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파투쟁의 사회적 토대 문제를 소수파 지도자들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 캐넌 동지를 "옹호"하는 나를 헐뜯기 위해 소수파 지도자들은 프랑스 지부 지도자였던 몰리니에(Molinier)를 한때 내가 옹호한 것이 오류였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물론 개인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오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이 점은 결코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의 주장에는 깊이가 없습니다. 나는 몰리니에의 잘못된 이론들을 결코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의 개인적 특성이었습니다. 그가 보인 잔인함, 규율 위반, 개인적 재산 축적 등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베레컨과 같은 일부 동지들은 조직이 그와 즉시 결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나는 조직이 몰리니에에게 규율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1934년 몰리니에는 당 강령을 "네 개의 구호(four slogans)"로 대체하려고 애쓰면서 이것에 기반하여 신문을 제작했습니다. 이때 나를 포함한 여러 동지들이 그에 대한 제명조치를 제안했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에게 보인 나의 인내력에 대해서 각자 견해를 달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몰리니에의 개인적 이해가 아니라 당원 교육의 차원에서 이렇게 행동했습니다. 많은 동지들은 제명과 조직 분리 또는 이렇게 하겠다는 위협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일종의 극약처방인 셈인데 우리 조직의 지부들이 코민테른의 악습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필드, 와이스보드, 그외 여러 미국 동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몰리니에의 경우에도 나는 좀더 인내를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몇몇 경우에는 나의 설득이 성공했지만 또 다른 여러 경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운동 대오 내 일부 의심스러운 인사들에 대해 내가 보인 인내심에 대해 나는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이들을 "옹호"하는 행위가 원칙을 버리면서까지 동맹을 추구하는 경우로 나아간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버넘 동지를 제명할 것을 제안하면 나는 열성적으로 반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맑스주의에 저항하는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가장 강력한 사상투쟁을 수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940년 1월 10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18. A Letter to John Wright] 잔 라이트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섁트먼 동지의 팜플렛에 대한 동지의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섁트먼의 이 글은 분파적 감정에 의해 그의 약점이 증폭된 결과물입니다. 그에게는 노동계급적 관점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는 문필계의 그림자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노동계급과 맑스주의에 얼굴을 향하고 있을 때는 그의 그림자는 유용합니다. 현실과 그의 그림자는 대체로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당내 노동계급 경향 다수파와 맑스주의에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 결과 그의 글을 구성하고 있는 단어 하나 하나는 사실과 사상을 전혀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완전히 말도 안되는 글을 좀더 면밀하게 분석하기 위해서 다시 며칠의 시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수파 동지들 다수를 포함하여 당원들 전부에게 섁트먼의 글이 문장마다 맑스주의와 볼셰비즘으로부터 한심스럽게 결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1940 년 1 월 13 일

    레온 트로츠키

     

    [19. A Letter to James Cannon] 제임스 캐넌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섁트먼의 공개서한은 그 내용이 참으로 한심합니다. 가치가 있다면 단 한가지 입니다. 즉 그의 정치노선의 진면모를 내가 폭로하도록 강요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의 편지에 대한 답장은 이미 구술시켰으며 약간 다듬기만 하면 완성됩니다. 불행하게도 버넘 동지에게 보낸 편지보다 더 짧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1940년 1월 16일

    레온 트로츠키

     

    [20. A Letter to William Warde] 윌리엄 와드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동지는 우리 운동의 방법론 문제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비교적 몇 안되는 동지 가운데 한 명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내 논쟁에 동지가 개입하는 것이 아주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원들 특히 청년 당원들이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서 아주 치열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중이라고 여러 동지들의 편지가 밝히고 있습니다. 이 관심을 올바르게 유도할 수 있는 동지들이 당내에 변증법적 유물론 사상을 증진시키는 목적으로 순수하게 이론적인 그룹을 형성할 때가 되었다고 동지는 생각지 않습니까? 라이트 동지, 걸런드 동지와 함께 동지는 이 주제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있습니다. 동지들이 전국위원회 선전부의 지도를 받아 이 그룹의 초동 핵심을 형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나의 제안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내는 막연한 성격의 제안입니다. 책임있는 당 기구에게 이 제안을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1940년 1월 16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21. A Letter to Joseph Hansen] 조지프 핸슨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섁트먼의 편지에 대한 나의 글이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이틀동안만 다듬으면 됩니다. 그리고 동지가 인용한 부분을 활용하려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더 중요한 문제를 말하고 싶습니다. 소수파 지도자들 중 일부는 조직을 분리하는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을 박해받는 소수파로 위장하려고 합니다. 이들의 심리상태를 아주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계획입니다. 대체로 다음과 같이 그들에게 답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수파가 자행할 앞으로의 탄압을 벌써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미래에 누가 소수파가 되든 소수파에 대한 권리를 서로 보장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러한 보장은 4개 조항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1) 분파활동의 자유 (2) 공동행동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한 분파활동의 무제한적 자유 (3) 공식 출판물의 내용은 새로운 당대회에 의해서 결정된다 (4) 소수파는 원한다면 내부 토론집을 발간할 수 있으며 다수파와 함께 하는 공동 토론집도 발간할 수 있다."

    기나긴 토론과 당대회를 끝낸 후 즉시 당내 토론집을 계속 발간하는 일은 규칙이 아니라 일종의 예외 조치이며 한탄할만한 예외 조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관료가 전혀 아닙니다. 부동의 규칙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조직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변증법론자입니다. 당대회의 결정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중요한 소수파가 존재한다면 조직을 분리하는 것보다 당대회 후에도 토론을 허용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새로 임명되는 전국위원회의 감독 아래 당원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을 위해 심포지엄 특별자료집을 발간할 것을 소수파에게 제안하는 선까지 양보할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아직도 폭발하지 않은 소수파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이들이 조직을 분리할 명분을 제공하지 않기 위해 이 방향으로 가능한 선에서 많은 양보를 해야 합니다.

    쌍방의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토론을 연장할 경우 지금 상황에서는 당원들의 교육에 도움이 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수파는 문서의 형식으로 이 제안들을 공식적으로 전국위원회에 제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제안들에 대한 소수파의 반응이 어떻든 당에게는 무조건 이익이 될 뿐입니다.  

    1940년 1월 18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22. From a Scratch ? To the Danger of Gangrene] 긁힌 상처가 도져 몸이 썩어 들어가다  

    현재 진행중인 당내 논쟁은 나름의 내적 논리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 각 분파는 자신의 사회적 토대와 정치적 모습에 걸맞게 상대 분파의 가장 약한 지점들을 공략하려고 애쓰고 있다. 적대 분파 지도자들의 미리 결정된(a priori) 계획이 아니라 바로 이 내적 논리가 논쟁의 흐름을 결정하고 있다. 격화되고 있는 논쟁에 대해 지금 한탄하는 것은 사후 약방문일 뿐 논쟁 결과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조직이 보낸 염탐꾼들이 이 과정에서 행사하는 역할은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당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논쟁의 분위기를 흐트리고 사상 투쟁을 조직 분리로 이끌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이 신사 양반들이 누구인 지를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이 보이고 있는 논쟁에 대한 열정은 지나치며 거짓꾸밈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사상과 주장을 얘깃거리와 비방으로 바꿔치기하고 있다. 이들은 모든 분파의 공동 노력을 통해 정체가 폭로되고 당에서 제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원칙에 입각한 사상투쟁은 끝까지 진행되어 지금까지 제기된 좀더 중요한 문제들이 진지하게 해명되어야 한다. 당의 이론 수준을 높일 수 있도록 논쟁이 활용될 필요가 있다.

    현재 탄생한 지 얼마되지 않는 제4인터내셔널 뿐만 아니라 미국 지부의 당원들 중 상당수는 쇠퇴기의 코민테른이나 제2인터내셔널 출신들이다. 이 조직들은 당원들을 잘못 가르친 형편없는 학교들이었다. 많은 수의 당원들이 탄탄한 이론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논쟁을 통해서 드러났다. 뉴욕 지부는 맑스주의 이론과 강령을 가볍게 수정하려는 시도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려는 힘찬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다수가 이 수정주의자들을 지지하였다. 이 경우를 예로 드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미국 지부와 제4인터내셔널 전체가 진지하게 혁명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정직한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한 이 현상은 불행하기는 하지만 교정이 가능하다. 이들은 배우고자 하는 욕망과 의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편이 아니다. 당이 노동조합과 노동자 운동 일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당의 중핵들은 이론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여기서 중핵이라는 것은 "당기구"가 아니라 당원 전체를 말한다. 당원 모두는 노동자군대의 장교임을 스스로 인식해야 한다. "

    언제부터 철학의 전문가가 되었습니까?" 소수파 당원들은 다수파 지도자들에게 빈정거리듯이 이렇게 묻는다. 그러나 이 빈정거림은 대상을 완전히 잘못 찾았다. 무의식적 역사과정 즉 노동계급이 공산주의 사회의 기반을 통해 사회를 재건하려는 본능적이며 원초적인 운동을 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과학적 사회주의이다. 노동자들의 심리 속에 존재하는 이러한 유기적인 경향들은 위기와 전쟁의 시대인 지금 가장 빠르게 살아나고 있다. 진행되고 있는 논쟁은 당내 쁘띠부르조아 경향과 노동계급 경향 사이의 충돌이라는 사실을 의문의 여지없이 드러내었다. 당 강령을 "구체적인" 문제라는 작은 동전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에서 쁘띠부르조아 경향은 자신의 혼란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반대로 노동계급 경향은 모든 부분적인 문제들을 통일된 이론의 수준으로 연관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의식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적용시키려는 다수파 동지들 개개인의 노력 정도가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동지들이 대체로 노동계급적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바로 이 이유로 인해 "혁명의 대수(algebra of the revolution)"인 변증법을 체득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알기로 소수파 동지들은 "변증법"이라는 말만 나와도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이 가치없는 방법은 아무 짝에도 소용이 되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경험에 의하면 역사과정의 변증법은 자기를 냉소하는 자들을 잔인하게 벌주었다.

    "레온 트로츠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이란 제목으로 섁트먼 동지가 작성한 논문은 걱정스러운 증상을 드러내고 있다. 섁트먼 동지는 논쟁을 통해 뭔가를 배우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의 오류들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으며 이를 통해 당의 불충분한 이론적 수준 뿐만 아니라 쁘띠부르조아 경향의 특이한 편견들을 이용하고 있다.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이러저러한 중심축으로 묶어내는 이 동지의 능력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이 능력 때문에 섁트먼 동지는 재능있는 문필가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능력 하나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경향을 자기 것으로 삼느냐가 진정 중요한 문제이다. 이 동지는 문학과 언론에 정치가 반영되는 현상에 몰두해 있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실제 과정, 대중의 생활, 노동계급 내 각 부위들 간의 상호관계 등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나는 이 동지의 정말 뛰어난 논문들을 몇편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 노동계급 또는 그 전위의 생활을 파헤친 그의 평론은 단 한편도 보지 못했다.

    그의 한계는 제한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하고싶은 말이 있다. 섁트먼의 개인적인 결함뿐만 아니라 역사적 조건들의 특수한 결합으로 인해 노동운동 외부에서 성장한 혁명세대 전체의 운명이 이 현상 속에 체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소중한 분자들이 혁명에 대한 헌신성에도 불구하고 퇴보할 위험성에 대해 나는 과거 연설과 글을 통해 밝힌 바 있다. 한때 존재했던 사춘기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은 이제 결함으로 자리잡았다. 결함은 질병을 유발한다. 그리고 질병은 그대로 내버려두면 치명적인 정도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당의 발전에 의식적으로 새로운 장을 열 필요가 있다. 제4인터내셔널의 선전가들과 문필가들은 자신의 의식에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한다. 쁘띠부르조아 경향에 등을 돌리고 노동자들에게 향할 수 있도록 전환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현재 당내 위기의 원인을 노동계급 부위의 보수화로 보거나 위기의 해결책을 쁘띠부르조아 동맹의 승리를 통해 찾아보려는 시도만큼 당에게 위험한 오류는 없을 것이다. 사실 현재 위기의 핵심은 쁘띠부르조아 부위의 보수화에 있다. 이들은 순전히 선전 학교만을 졸업하였으며 계급투쟁의 길로 나아가는 경로를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위기는 이러한 분자들이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최후의 몸부림을 치는 과정에서 나왔다. 소수파 동지 모두는 확고한 욕구만 있다면 혁명운동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분파로서 이들의 생명은 그 운명을 다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투쟁에서 섁트먼은 자기 번지 수를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있다. 이런 경우에 늘 그렇듯이 그의 강점들은 멀리 후퇴한 채 그의 약점들만이 특별히 완성된 표현을 누리고 있다. 말하자면 그의 "공개서한"은 그의 약점들을 그 정수만 모아놓은 것이다.

    섁트먼은 한가지 조그마한 것 즉 자신의 계급적 입장을 빠뜨리고 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는 유별나게 좌충우돌하고 있다. 그는 아무 연관도 없이 역사적 일화들을 짬뽕하는 것으로 계급적 분석을 대체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유일한 목적은 자신의 어제와 오늘의 입장이 다르다는 사실을 은폐하여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는 데에 있다. 맑스주의 역사, 볼셰비키당사, 러시아 좌익반대파의 역사 등에 대해서도 그는 같은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오류와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그가 기대고 있는 모든 역사적 비유들은 차라리 그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오류를 범하는 것보다 오류를 교정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섁트먼의 정신적 좌충우돌을 하나하나 추적함에 있어서 나는 독자들의 인내력을 요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단순히 오류들과 모순들을 폭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노동계급의 입장을 쁘띠부르조아의 입장과 대비시키고 맑스주의 입장을 절충주의 입장과 대비시킬 것을 약속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 모두가 논쟁으로부터 뭔가를 배우게 될 것이다.  

     

    "과거의 예들"

    섁트먼은 화가 나서 이렇게 묻는다: "타협할 줄 모르는 혁명가였던 우리가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쁘띠부르조아 경향으로 탈바꿈할 수 있단 말인가?"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이 경향이 작년(!) 또는 제작년에 소수파 지도자들을 통해 어떻게 드러났는가?"(1940년 1월 [당내 토론집] 제2권 제7호 11쪽) 과거에는 왜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영향에 우리가 굴복하지 않았는가? 스페인 혁명 기간에 왜 우리는 기타 등등. 이것이 섁트먼이 꺼낸 마지막 비장한 주장이다. 이 주장에 대해 그는 예외적인 중요성을 두면서 그 주제를 목청을 바꾸어 가면서 계속 반복하고 있다. 바로 이 주장을 이용하여 내가 그를 반박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에게는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다.

    트로츠키가 10번 가운데 9번 아니 어쩌면 100번 가운데 99번 옳다고 소수파 문서 [전쟁과 관료적 보수화]는 인정한다. 대단히 관대하면서도 제한적인 이러한 양보의 의도를 나는 너무 잘 이해하고 있다. 실제로 내가 범한 오류의 정도는 훨씬 더 크다. 그런데 이 문서가 작성된 지 2주 내지 3주가 지난 후 섁트먼은 이렇게 주장했다:

    (ㄱ) 지난 10년 동안 섁트먼 자신은 트로츠키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트로츠키는 자신에게 제공된 정보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ㄴ) 트로츠키는 노동계급 경향을 쁘띠부르조아 경향과 그리고 볼셰비키 경향을 멘셰비키 경향과 구별할 능력이 없다.

    (ㄷ) 트로츠키는 대중에 의한 혁명 대신 "관료적 혁명"이라는 황당한 개념을 주창하고 있다.

    (ㄹ) 트로츠키는 폴란드, 핀란드 등과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올바른 해답을 제시할 능력이 없다.

    (ㅁ)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에 투항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ㅂ) 트로츠키는 민주집중제의 의미를 이해할 능력이 없다, 기타 등등 한이 없다.

    한마디로 하면 특히 섁트먼 자신이 관련되어 있는 사안들에서 내가 100번 중 99번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그는 지난 2주 내지 3주 동안 새로이 발견했다. 그의 이러한 최근 주장도 과장되어 있다. 다만 지난 번 주장과 방향이 정반대일 뿐이다. 어쨌든 내가 그의 쁘띠부르조아 편향을 발견한 것보다 훨씬 더 갑자기 그는 내가 대중에 의한 혁명을 "관료적 혁명"으로 바꿔치기하는 경향을 발견했다.

    섁트먼 동지는 지난 해 동안 아니 심지어 지난 2년 내지 3년 동안 당내에 "쁘띠부르조아 경향"이 존재해 왔다는 증거를 제시할 것을 나에게 요청했다. 그가 더 먼 과거를 들추지 않기를 원하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 그럴 경우 자기의 주장이 공격을 받을 근거는 그만큼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대로 지난 3년에 한정하여 증거를 제시해 보겠다. 지금부터 관심을 집중해 주기 바란다. 나에게 무지막지하게 공격을 가하는 인사들의 웅변적인 질문에 대해서 나는 몇 가지 문서들을 정확히 인용하면서 담담히 답하겠다.  

     

    1.

    1937년 5월 25일 나는 미국 사회당 내의 볼셰비키-레닌주의 분파의 정책에 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뉴욕에 보냈다: " 최근의 두 문서를 인용하겠다:(ㄱ) 당대회에 대한 `맥스(Max)'의 개인적 편지 (ㄴ) 그가 작성한 `혁명적 사회당 창당을 위해'라는 제목의 논문. 이 논문의 제목만 보아도 그가 잘못된 전망을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사회당의 지난 당대회를 포함한 그간의 정황을 보면 사회당은 `혁명적' 정당이 아니라 영국의 독립노동당과 비슷한 어떠한 전망도 결여한 한심스러운 중도주의 정당으로 이행하고 있다.

    미국 사회당이 제2 내지 제3인터내셔널 계열의 어떤 정당보다도 혁명적 맑스주의 입장에 `더 가깝다'는 확신은 완전히 말도 안되는 찬사이다. 미국 사회당은 성격이 유사한 유럽의 정당들인 스페인의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 영국의 독립노동당, 독일의 사회주의노동자당 등보다 더 후진적인 정당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노먼 타머스를 중심으로 한 사회당 지도부의 부정적인 강점들을 폭로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당의 전쟁 관련 결의문이 `이 당이 과거 채택한 다른 어떤 결의문에 비해서 우수하다'고 주장해서는 절대 안된다. 이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전쟁 관련 결의안이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순전히 문구에만 집착한 평가일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결의문은 역사적 사건, 정치상황, 결의문 자체의 시급한 필요성 등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위에서 언급한 두 문서에서 섁트먼은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 좌파에 대해 지나치게 근접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이것은 혁명가에게는 대단히 위험한 증상이다! 유럽의 전쟁에 대해 노먼 타머스가 보인 "급진적인" 입장을 그가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기회주의자들은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더 급진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 법칙에 유념하면 섁트먼과 그의 동맹자들이 우리를 "스탈린주의에 투항"한다고 비난하는 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섁트먼처럼 뉴욕 브랑스구에 들어앉아 있으면 미국의 쁘띠부르조아들보다 크렘린궁의 스탈린주의자들에게 더 비타협적으로 대항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보신에 훨씬 도움이 되며 더 쉽다. 안타까운 일이다.  

     

    2.

    섁트먼의 말에 의하면 나는 논쟁에 참여하고 있는 분파들의 계급구성 문제를 억지로 끌어들였다. 이 점에 대해서도 최근의 경우를 검토해 보자.

    1937년 10월 3일 나는 뉴욕에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당생활의 `평상' 시기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 당원들이 상황이 급격히 변화하여 일반적 정식이나 유창한 펜을 가지고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뛰어난 자질들을 발휘한다. 이 경우 노동자들의 삶과 이들의 실천적인 능력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재능있는 노동자 당원은 자기확신과 정치적 능력을 발휘한다. 나는 이 말을 수백번이나 반복한 바 있다.

    조직 발전의 첫단계에서 지식인들이 당을 주도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 상황은 재능이 있는 노동자 당원들을 교육시키는 데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 다음 당대회에서 당 지부와 중앙의 각급 위원회에 가능하면 많은 수의 노동자 당원들을 포함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주요 당기구에서의 활동은 노동자 당원에게 높은 수준의 정치학교가 된다.

    그런데 어려움이 있다. 모든 조직이 고참 위원들을 보유하고 있어서 부차적이며 분파적이며 개인적인 고려사항들이 위원 후보자 선정에 너무 커다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종류의 문제에 대해서 섁트먼 동지가 관심이나 흥미를 보이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3.

    섁트먼 동지에 의하면 나는 에이번 동지의 분파가 쁘띠부르조아 출신 성분들을 유난히 많이 보유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에 의하면 이것은 인위적인 문제제기일 뿐만 아니라 어떤 사실적인 근거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1937년 10월 10일 섁트먼이 캐넌과 노선을 같이하였을 때 에이번은 분파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자기 입으로 공식적으로 말한 바 있다. 이때 나는 캐넌 동지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진짜 공장노동자는 당원 중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노동계급적 분자들은 매우 필요한 촉매 역할을 하며 우리가 이러한 분자들의 높은 수준에 대해 자랑스러워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당은 비노동계급적 분자들에 의해서 압도되어 혁명적 성격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위적인 방식으로 지식인의 당내 유입을 막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조직활동을 공장, 파업, 노동조합 등에 실천적으로 맞추는 것이 문제해결의 올바른 방식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우리는 모든 공장에 같은 정도의 역량을 투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부 조직들이 지역에 위치한 두 세 공장을 선정하여 모든 역량을 이곳에 집중할 수는 있습니다. 한 공장에 두세 명의 노동자들을 획득한다면 이곳에 우리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동자가 아닌 당원 다섯명으로 구성된 지원팀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자가 아닌 당원들을 노동조합에 투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노동자들을 동지로 획득할 경우 노동조합 내 선동, 선전활동과 관련하여 지원팀을 구성하여 일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반드시 명심해야 할 규율이 있습니다. 노동자들에게 지시를 내려서는 안되며 이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이들에게 건설적인 제안들을 제시하며 객관적 사실, 사상, 공장신문, 특별 유인물 등을 통해 이들을 무장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협력은 노동자 동지들뿐만 아니라 확실한 재교육이 필요한 비노동자 동지들 모두에게 엄청난 교육적 효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지는 유태인 비노동자 당원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당이 이들을 폐쇄된 분위기에서 끌어내어 공장노동자들과 일상적인 활동을 통해 연결되도록 한다면 이들은 대단히 중요한 촉매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당내에 좀더 건강한 분위기를 조성할 것이 확실합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즉시 일반적인 규칙 하나를 제정할 수 있습니다. 즉 3개월에서 6개월 사이에 노동자를 당원으로 획득하지 못하는 당원은 별로 훌륭한 당원이 아니라는 규칙이 이것입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정책을 진지하게 수립하고 이 정책의 실제적인 결과들을 매주 확인한다면 우리는 커다란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지식인과 사무직 노동자들이 소수의 공장노동자들을 짓눌러 침묵시켜 당을 아주 지적인 토론클럽이기는 하나 노동자들이 있을 곳이 전혀 못되는 그런 조직으로 변모시킬 위험을 피할 수 있습니다.

    청년 조직을 운영하고 확대시키는 일도 마찬가지의 규칙들이 구체적으로 확립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청년들을 혁명투사가 아니라 아마추어 혁명가로 만들어 낼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이 편지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확해진다. 즉 독소불가침조약 이 체결되고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 점령한 바로 다음날 당내에 쁘띠부르조아적 편향이 존재할 위험이 있다고 내가 말한 적이 전혀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 사건이 있기 2년도 더 거슬러 올라가서 지속적으로 나는 이런 취지의 발언들을 해왔다. 그리고 당시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에이번 분파를 주로 염두에 두면서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당의 분위기를 일소하기 위해 뉴욕 지부에 소속된 유태인 출신의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이 습관적인 보수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진정한 노동운동 속으로 해소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현재 진행중인 논쟁보다 2년도 더 전에 쓰여진 위 편지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소수파 지도자들이 쓴 모든 글들보다 증거의 가치가 더 크다. 소수파 지도자들은 내가 "캐넌 파벌"을 옹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동기에 대해서 온갖 내용의 글들을 쓴 바가 있다.  

     

    4.

    당내 쁘띠부르조아 분자들 특히 학구적이며 문필활동에 종사하는 동지들에게 섁트먼 동지가 약하게 나온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전혀 비밀이 아니었다. 듀이 위원회(Dewey Commission)가 열리던 당시 1937년 10월 14일 나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캐넌, 섁트먼, 와드 동지들에게 보냈다:

    " 노동자 그룹들이 이 위원회에 대폭 들어와서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나는 끈질기게 주장했습니다. 와드, 섁트먼 그 밖의 동지들은 나의 견해에 동의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들과 함께 우리는 이 계획을 현실로 옮길 수 있는 실제 가능성들을 타진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계속 문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었으며 우연히 섁트먼 동지가 나의 견해에 반대한다는 소식만 들었습니다. 왜 반대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섁트먼은 이유를 결코 털어놓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외교적인 언사를 사용해서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말로는 나의 견해에 동의한다고 하면서 일시적인 자유주의 동맹자들의 대단히 민감한 정치적 감성을 자극하는 것을 그가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명확하게 인식되었다. 이런 일에 관한 한 섁트먼은 자신의 예외적인 "섬세함"을 입증하고 있다.  

     

    5.

    1938년 4월 15일 나는 뉴욕 지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이스트먼의 편지가 실려서 약간 놀랐습니다. 편지가 실린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표지에 그의 편지가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고 [하퍼즈 잡지](Harper's)에 실린 그의 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우리의 공식 이론지인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간행 취지를 손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보고 우리가 원칙보다 친분을 더 앞세운다고 해석할 것입니다."  

     

    6.

    1938년 6월 1일 나는 섁트먼 동지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동지가 왜 유진 라이언즈에게 관용을 베풀며 심지어는 친근함을 베푸는지 이곳에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는 동지가 주최하는 만찬과 백위군(White Guards) 주최 만찬에서 똑같이 연설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소위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좀더 독립적이고 단호한 정책을 펴기를 호소했다. 이들은 사회주의 혁명에 반대하면서도 노동계급과 "우호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 이렇게 할 경우 이들은 부르조아 여론으로부터 자신들의 가치를 2배나 인정받기 때문이다.  

     

    7.

    지금의 논쟁이 시작되기 거의 1년 전인 1938년 10월 6일 나는 당의 신문이 노동자들에게 기조를 맞추어야 할 필요성을 이렇게 글로 표현한 바 있다:

    "이 관점에서 [사회주의자의 호소]가 나타내는 태도는 아주 중요하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아주 좋은 맑스주의적 신문이지만 정치행동을 돕는 진정한 도구는 아니다. 나는 이 신문의 편집부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하고 싶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글은 확실히 불평조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말한 바 있듯이 섁트먼 동지는 당원들의 계급적 구성이나 신문의 독자들보다 이미 오래 전에 끝난 투쟁의 개별적인 문필적 일화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8.

    변증법적 유물론과 관련하여 이미 언급한 바 있는 1939년 1월 20일자 편지에서 나는 다시 섁트먼 동지가 쁘띠부르조아 문필계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사회주의자의 호소]는 스탈린주의 정당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정당은 현재 모순덩어리 입니다. 이 정당은 반드시 둘로 쪼개질 것이며 이 결과 탈당한 당원들은 우리쪽으로 획득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정당에 우리의 정치적 관심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매일 그리고 매시간 이 정당이 보이고 있는 모순들을 추적해야 합니다. 편집진의 누군가가 책임을 맡아서 대부분의 시간을 스탈린주의 정당의 사상과 행동을 추적해야 합니다. 이 정당 내부에 논쟁을 촉발시킬 수도 있고 가능하면 동요하는 당원들의 편지들을 우리 신문에 공개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트먼이나 라이언즈와 같은 양반들의 글을 싣는 것보다 1천 배나 더 중요합니다. 이스트먼의 최근 글은 의미도 없을 뿐더러 오만합니다. 이 글을 동지가 왜 당 신문에 실었는지 나는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동지가 개인적으로 이 인사들을 초대하여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한정된 지면을 더럽히는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까무러칠 지경입니다. 이러한 인사들과의 토론은 일부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에게는 흥미거리인지 몰라도 혁명가들에게는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사회주의자의 호소]를 재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확신합니다. 이스트먼, 라이언즈와 같은 인사들에게는 좀더 거리를 두고 대신 노동자들과 스탈린주의 정당에 대해서는 좀더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최근의 사태들은 섁트먼이 이들 인사들과 거리를 둔 것이 아니라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9.

    1939년 5월 27일 나는 당원들의 계급적 구성과 연관시켜 다시 [사회주의자의 호소]의 성격에 대해서 이렇게 편지를 썼다:

    "회의록을 보니 동지가 [사회주의자의 호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신문기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 신문은 아주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를 위한 신문이지 노동자의 신문은 아닙니다.

    이 신문은 여러 편집기자들이 분담을 하면서 글을 싣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주 훌륭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면서 노동자들을 신문에 참여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편집기자들 각자는 노동자들을 위해 발언을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노동자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신문은 문필의 관점에서는 뛰어나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신문쟁이들에게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어떻게 생활하며 투쟁하며 경찰과 충돌하며 위스키를 마시는지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당의 혁명적 도구로서 이 신문은 아주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재능있는 편집진의 공동노력을 통해서 신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스스로 발언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이 신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이고도 용기 있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물론 이것은 신문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 기조의 문제입니다. 쁘띠부르조아 청년 당원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들은 아주 훌륭하며 당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자기들 사이에서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노동자 현장 속으로 침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직 확실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직도 나의 일관된 견해입니다. 다시 한번 제안합니다: 쁘띠부르조아 출신 당원이 일정기간 예를 들어 3개월에서 6개월 사이에 노동자 당원을 획득하지 못하면 후보당원으로 강등되고 다시 3개월이 지나도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 제명되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조치가 부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은 전체적으로 아주 필요한 건강한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주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노동자들과 연계를 이룰 수 없는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을 제명시키자는 엄혹한 조치를 제안했을 때 나는 캐넌 분파를 "옹호"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오직 당을 퇴보의 수렁으로부터 구해내고자 했을 뿐이었다.  

     

    10.

    당원들의 회의적인 목소리에 접한 나는 여기에 대해서 논평하면서 1939년 6월 16일 캐넌 동지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전쟁 전야의 상황, 민족주의의 발호 등은 우리 운동의 발전에 자연스럽게 방해물로 작용하고 있으며 우리 대오 내의 사기저하에 깊은 원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당의 구성이 쁘띠부르조아적인만큼 당은 부르조아 공식 여론의 변화에 더 많이 의존합니다. 이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용기있고 적극적으로 노동자 대중들에게 향할 필요성을 이 주장으로 보충하고자 합니다. 동지의 글이 드러내고 있는 비관적인 논리 전개는 물론 부르조아 공식 여론의 애국적 민족주의적 압력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파시즘이 프랑스에서, 영국에서 승리한다면 ' 과 같은 생각말입니다. 파시즘의 승리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숨이 넘어가는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의 쁘띠부르조아 분파가 부르조아 여론에 기대고 있다는 문제는 현재의 논쟁이 있기 여러 달 전에 이미 제기되었었다. 소수파 동지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내가 인위적으로 끌어들인 문제가 전혀 아니다.

    * * *

    소수파 지도자들이 과거에 보인 쁘띠부르조아적 경향의 예들을 제시하라고 섁트먼 동지는 요구했다. 나는 이 요구에 답하는 과정에서 소수파 지도자들 가운데 섁트먼 동지를 특별히 지목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과거의 예들은 아직도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섁트먼과 내가 서로 주고 받은 편지들 중 "과거의 예"로서 더욱 흥미있는 것이 있다. 이것들은 다른 문제와 관련하여 곧 공개하겠다.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기억이 희미하거나 오류가 발생하는 부분들은 다수파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다른 동지들에게도 불리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섁트먼 동지는 아마 충분히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섁트먼 동지의 이름이 이들의 편지에서 계속 반복되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다른 동지들이 어쩌다 한두번 오류를 범한 반면에 섁트먼 동지의 오류들은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섁트먼 동지는 내가 당내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의 존재를 "갑작스럽게" 그리고 "예상외로" 들추어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실과 완전히 다르다. "쁘띠부르조아 소수파"에 대한 나의 글은 지난 3년 아니 사실은 지난 10년 동안 뉴욕 지부와 교환한 편지 내용을 요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점을 증명했으며 지금도 해당 문서들을 손에 들고 증명할 수 있다. 그런데도 섁트먼 동지는 "과거의 예들"을 요구하면서 뭔가를 과시하려고 하고 있다. 나는 그에게 "과거의 예들"을 제시했다. 이것들은 섁트먼의 주장을 확실하게 논박하고 있다.  

     

    맑스주의에 대항하는 철학 동맹

    핀란드, 라트비아, 인도, 아프가니스탄, 발루키스탄 등과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내가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대신 변증법적 유물론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는 것이 소수파 동지들의 주장이다. 이 동지들은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는 모양이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 주장은 소수파 동지들 일부의 수준을 특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사상에 대한 기본적 의리와 이론에 대한 이들의 태도를 특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1937년 1월 멕시코에 도착한 직후 내가 기차에서 섁트먼, 와드 동지들과 함께 처음으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내용은 무엇보다도 지속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선전해야할 필요성에 맞추어졌다. 이 사실을 말하는 것이 지금의 주제와 그리 어긋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운동의 미국지부가 사회당과 분립한 후 나는 가장 강력하게 가능하면 빨리 이론지를 발간할 것을 주장했었다. 당원들 특히 새로운 당원들에게 변증법적 유물론을 교육시킬 필요를 유념했기 때문이었다. 부르조아계급이 노동자들에게 체계적으로 속류 경험주의를 주입시키고 있는 미국의 경우 다른 어떤 곳보다 먼저 우리 운동을 적절한 이론적 수준으로 올려놓는 일을 시급히 추진해야 한다고 나는 글을 통해 주장했다. 섁트먼이 버넘 동지와 공동으로 작성한 글 "후퇴하고 있는 지식인"에 대해서 나는 1939년 1월 20일 섁트먼 동지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변증법에 대한 글의 내용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편집자로서 동지가 개인적으로 맑스주의 이론에 가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공격이었습니다. 좋습니다!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토론해 보기로 합시다."

    이로써 이미 1년 전에 나는 섁트먼의 절충주의 경향에 대항하여 공개적으로 투쟁하겠다는 의도를 그에게 공개적으로 알렸다. 당시에는 소수파의 등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다. 어쨌든 맑스주의에 대항하는 철학 동맹이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에 대항하는 정치 동맹의 기초가 되리라고는 나는 꿈도 꾸지 못했다.

    이제 표면으로 떠오른 당내의 견해 차이는 당원들의 계급적 구성과 중핵의 이론적 교육에 대한 나의 염려를 확인시켜 주었다. 도대체 기존의 나의 생각을 바꾸거나 "인위적으로" 이론 문제를 논쟁에 끌어들일 필요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다만 이 점은 덧붙이고 싶다. 제4인터내셔널의 한 지부 내에서(!) 맑스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투쟁하겠다는 생각을 정당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 --- 이것은 약간 창피스러운 감을 나에게 주고 있다.

    자신의 "공개 서한"에서 섁트먼은 빈슨 던 동지가 지식인의 후퇴에 대한 자기 글에 대해 만족감을 표시했다고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나도 이 글에 대해 칭찬한 바 있다: "많은 부분들은 아주 훌륭하다." 그러나 러시아 속담이 말하듯이 타르 한 숫가락이 꿀 한통을 망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이 한 숫가락의 타르인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 할애한 부분은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너무도 황당한 개념들을 선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 개념들은 이제 명확해지고 있듯이 정치 동맹의 기반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이 글을 꼬투리로 삼고 있다는 섁트먼의 끈질긴 주장이 있으므로 다시 한번 문제되는 글의 부분 중 핵심적인 구절을 인용하겠다:

    " 변증법적 유물론의 좀더 추상적인 교리에 대한 동의나 이견이 반드시 오늘이나 내일의 구체적인 정치적 쟁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 어느 누구도 아직 증명한 적이 없다. 그리고 정당, 강령, 투쟁은 이러한 구체적인 쟁점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새로운 인터내셔널], 1939년 1월호, 제7쪽) 이 인용문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혁명가답지 못한 " 정당, 강령, 투쟁은 구체적인 쟁점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라는 표현이다. 어떤 정당이며 어떤 강령이며 어떤 투쟁이란 말인가? 모든 정당과 강령이 한꺼번에 뭉뚱거려져 있다. 노동계급의 정당은 다른 모든 정당들과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구체적인 쟁점들"에 기초를 전혀 두고 있지 않다. 근본에 있어서 노동계급 정당은 부르조아 흥정꾼들이나 쁘띠부르조아 누더기꾼들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사회혁명을 준비하여 새로운 물질적 도덕적 기초 위에 인류를 소생시키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부르조아 여론의 압력과 경찰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노동자 혁명가 특히 지도자는 명확하고 넓으며 완벽하게 심사숙고한 세계관을 구비해야 한다. 통일된 맑스주의적 사상의 기초 위에서만 "구체적인" 문제들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섁트먼의 배신이 시작된다. 작년에 나는 이 배신의 징조가 단순한 오류이기를 희망했었다. 그러나 이제 명확히 드러났듯이 그의 논리는 철저한 이론적 배신 그 자체이다. 섁트먼은 버넘의 생각을 그대로 추종한다. 그래서 변증법적 유물론이 젊은 혁명정당의 정치행위에 영향을 미친다고 "어느 누구도 아직 증명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맑스주의가 노동계급의 투쟁에 소용이 있다고 "어느 누구도 아직 증명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결과 노동계급의 정당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배우고 옹호할 동기가 조금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맑스주의와 과학적 방법론 일반을 포기하는 것이며 경험주의에 불쌍하게 굴복하는 것이다. 이 논리는 섁트먼과 버넘 그리고 버넘을 통해서 부르조아 "과학" 신봉자들과 섁트먼이 철학 동맹을 맺었음을 의미한다. 내가 작년 1월 20일자 편지에서 지적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이었다. 그

    런데 3월 5일 섁트먼은 이렇게 대답했다: "동지가 언급한 문제의 글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만약 글을 다시 쓴다면 동지가 주장한 내용에 비추어 여기(!) 저기(!)에서 표현을 달리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지의 비판의 핵심에 대해서는 견해를 같이할 수 없습니다."

    이 답장은 심각한 상황에서 섁트먼이 늘상 반응하는 방식과 똑같다. 즉 그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에서 후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는 인상만은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분파투쟁의 열에 들떠 그는 "과거에 했던 것을 내일 다시 또다시 하겠다"고 약속한다.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부르조아 "과학"에 투항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맑스주의를 더 이상 고수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섁트먼은 드디어 이러저러한 정치 동맹의 효용을 나에게 설명한다.(어떠한 근거로 이런 설명을 하는지는 조금 후에 보도록 하자.) 그러나 나는 지금 이론적 배신의 치명적인 해를 말하고 있다. 동맹은 그 내용과 상황에 따라 정당화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론적 배신은 어떠한 동맹에 의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섁트먼은 자신의 글이 순전히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나는 그 글 전체가 아니라 맑스주의를 기각하고 있는 그 글의 일부 내용만을 문제삼고 있다. 물리학 교과서가 물질운동의 첫 번째 원인이 하느님이라는 내용의 문장을 한 두 개만 싣고 있을지라도 나는 이 교과서의 저자가 반(反) 계몽주의자라고 결론을 내릴 권리가 있다.

    섁트먼은 비판에 대해서 답을 하는 대신에 관계없는 일들로 관심을 돌림으로서 비판의 논지를 흐리고 있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철학 영역에서 버넘과 동맹을 맺고 있다'는 트로츠키 동지의 주장을 인정한다고 치자. 그러면 이 동맹이 레닌이 보그다노프와 맺은 동맹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왜 후자의 동맹은 원칙에 부합하며 나와 버넘의 동맹은 무원칙하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정말 듣고 싶다." 좋다. 나는 곧 두 동맹의 정치적 성격이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다른 것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맑스주의 방법론이다. 두 동맹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섁트먼 동지는 묻고 있는가? 레닌은 이론적으로 정당 일반과 볼셰비키 정당을 혼동하지 않았다. 그는 기질적으로 그러한 혐오스러운 발언을 할 능력이 없다. 그 뿐만 아니라 진지한 볼셰비키는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이제 이해가 됩니까, 섁트먼 동지? 섁트먼은 명확한 대답에 "관심이 있다"고 빈정거리듯이 약속했다. 내가 믿건데 대답은 주어졌다. 그러나 나는 그가 "관심"을 갖기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추상과 구체 : 경제와 정치

    섁트먼의 한탄스러운 글 가운데 가장 한탄스러운 부분은 "전쟁의 성격과 국가"라는 제목의 장(章 )이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 묻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입장은 무엇인가? 간단하다. 전쟁에 가담하는 국가의 계급적 성격 특히 이 국가에 지배적인 소유형태를 추상적으로 규정짓는 것을 통해 특정 전쟁에 대한 정책을 직접 연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책은 국제사회주의혁명의 이해와 관련시켜 전쟁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나와야만 한다." (앞의 글 제 13쪽. 강조는 인용자) 얼마나 뒤죽박죽인가! 궤변이 얼마나 얼키고 설켜 있는가! 우리의 정책을 국가의 성격으로부터 직접 연역할 수 없다면 왜 비직접적으로는 연역할 수 없는 것일까? 전쟁의 성격에 대한 분석은 구체적인데 왜 국가의 성격에 대한 분석은 추상적인가? 공식적으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욱 올바를 것이다: 소련에 대한 우리의 정책은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추상적인 규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어진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국가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통해서만 연역될 수 있다. 섁트먼의 모든 논지에 깔린 궤변의 기초는 아주 단순하다: 경제적 하부구조가 상부구조의 사건들을 즉시 규정하지 않으므로 그리고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실천적인 과업을 해결하는 데 불충분하므로 따라서 경제와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검토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섁트먼 자신의 신문쟁이식 속어로 말하면 "살아있는 사건들의 현실"만 검토하면 된다."(앞의 글 제 14쪽)

    버넘과 자신의 철학 동맹을 정당화하기 위해 섁트먼은 이런 주장을 유포한 바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우리의 정치를 즉시 규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정치적 과업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제 이 주장은 맑스주의 사회학과 관련되어 단어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소유형태가 국가의 정책을 즉시 규정하지 않으므로 "구체적인 정치적 과업들"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맑스주의 사회학을 일반적으로 폐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주장을 맑스주의의 다른 분야와 관련지어 계속하지 않는가? 노동가치 법칙이 "직접적으로", "즉시" 가격을 결정하지 않으므로, 자연도태 법칙이 새끼돼지의 출생을 "직접적으로", "즉시" 결정하지 않으므로, 중력의 법칙이 술취한 경관을 "직접적으로", "즉시"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게 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맑스, 다아윈, 뉴튼 등 모든 "추상적 개념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저서들이 서가에서 먼지나 맞도록 내버려두자. 그렇다면 이 주장은 모든 과학을 엄숙하게 매장하자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직접적이고 " "즉시 연관되는" 원인에서부터 좀더 멀고 깊은 원인들을 밝혀내고 , 온갖 다양하고 요지경같은 현상들로부터 이 현상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원동력을 밝혀내는 과정이 곧 과학발전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노동가치 법칙은 "즉시"는 아니지만 어쨌든 가격을 결정한다. 뉴딜정책의 파산과 같은 "구체적인" 현상들은 궁극적으로 분석하면 "추상적인" 가치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다. 루즈벨트는 이것을 모르지만 맑스주의자는 이것을 알지 못하면 구체적인 현실을 분석하는 데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곧바로는 아니지만 일련의 직접적인 요인들과 이 요인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소유형태는 정치뿐만 아니라 도덕을 결정한다.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무시하려드는 노동계급 정치인은 결국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다가 계단에서 굴러 코를 부러뜨리는 술 취한 경찰관과 같은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섁트먼은 추상과 구체의 구별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구체적인 사건들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두뇌는 추상적 개념들을 가지고 사고한다. 심지어는 "지금 여기에 있는", "주어진", "구체적인" 개는 추상적 개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개에게 손가락을 향하는 "순간" 이 개는 자신의 꼬리를 내리면서 모습을 변화하기 때문이다. 구체성이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다. 어떤 경우에 구체적인 것은 다른 경우에는 주어진 목적에 맞지 않게 불충분하게 규정되어 추상적이 된다. 주어진 필요에 따라 충분히 "구체적인" 개념을 얻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추상적인 개념들을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으로 연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동화상을 스크린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움직이지 않는 정물사진을 연결시킬 필요가 있는 것과 같다.

    구체는 추상의 결합이다.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결합이 아니라 주어진 현상의 운동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그런 결합이다.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대비시켜 섁트먼이 호소하고 있는 "국제사회주의혁명의 이해"는 이 주어진 경우에 모든 추상적 개념들 중에서도 가장 애매모호하다. 결국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어떤 구체적인 방법으로 혁명의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는가? 사회주의혁명의 과업은 노동자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기억하는 것은 그리 빗나간 대답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주의혁명을 얘기하기 전에 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 자본가 국가와 노동자국가들과 같은 "추상적 개념들"을 구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결과적으로 필요하다.

    국가소유가 "그 자체로는", "자동적으로", "직접적으로", "즉시" 크렘린궁의 정책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섁트먼은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낭비시키고 있다. 경제적 "하부구조"가 정치, 법, 철학, 예술 등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방식 문제는 맑스주의 서적들에 풍부하게 존재한다. 경제가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시 작곡가의 창조력과 심지어는 판사의 판결을 결정한다는 견해는 모든 나라의 부르조아 교수들이 자신들의 지적 무능력을 감추기 위해 한도 끝도 없이 유포시켜온 맑스주의의 우스꽝스러운 모조품에 불과하다.

    소련의 사회적 기초와 크렘린궁의 정책 사이의 상호관계라는 즉시 우리에게 제기되는 문제로 초점을 옮겨보자. 이미 17년 동안 우리는 공개적으로 10월 혁명에 의해서 수립된 사회적 기초와 국가 "상부구조"의 경향 사이에 드러나고 있는 점증하는 모순을 사실로서 확립해왔다. 이 사실을 딴 일에 정신을 팔고 있는 섁트먼에게 상기시키고자 한다. 소련 관료집단이 노동계급과 점점 독립된 세력이 되면서 소련 국내외의 다른 계급들과 집단들에게 점점 의존하고 있는 현상을 우리는 매 단계마다 추적하였다. 이미 확립된 이 사항과 관련하여 섁트먼이 덧붙이고자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비록 경제가 직접적으로 즉시 정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며 최종적으로만 그러할지라도 경제는 정치를 확실히 규정한다. 부르조아 교수들과 그 제자들에 대항하여 맑스주의자들은 바로 이 진리를 확신한다. 소련 관료집단이 노동계급으로부터 더욱더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과정을 우리는 분석하고 폭로해왔다. 동시에 이 "독립성"의 객관적 사회적 한계 즉 외국무역 독점에 의해서 보완되고 있는 국가소유에 한시도 눈을 뗀 적이 없다.

    놀라자빠질 일이다! 소련 관료집단에 대해 정치혁명을 수행하자는 구호를 섁트먼은 계속 지지하고 있다. 이 구호의 의미를 그가 진지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10월 혁명에 의해서 수립된 사회적 기초가 "자동적으로" 국가의 정책에 반영된다고 우리가 주장한다면 왜 관료집단에 대한 혁명이 필요한 것일까? 반면에 소련이 더 이상 노동자국가가 아니라면 정치혁명이 아니라 사회혁명이 필요할 것이다. (ㄱ) 노동자국가인 소련의 성격 (ㄴ) 국가의 사회적 기초와 관료집단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적대관계 등에서 도출되는 구호를 섁트먼은 결과적으로 계속 지지한다. 그러나 이 구호를 계속 외치면서 그는 이 구호의 이론적 기초를 공격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정치가 과학적 "추상적 개념들"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하려는 행위가 아닐까?

    부르조아 지식인들이 우스꽝스럽게 왜곡시키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 투쟁한다는 구실 아래 섁트먼은 사적 관념론 (historical idealism)에 문을 활짝 열어 재낀다. 소유형태와 국가의 계급적 성격은 정부의 정책을 분석하는 그에게는 관심 밖이다. 그에게 국가 자체는 성별이 없는 동물로 보인다. 닭털로 만든 침대 위에 두 발을 확고히 내딛고 이미 1940년이나 된 지금 이렇게 기세좋게 설명한다: 소련에는 국가소유체제가 존재하고 있지만 동시에 관료집단에 의한 보나파르트적 더러움과 반동적인 정치도 존재하고 있다. 얼마나 새로운 사상인가! 섁트먼은 자신이 갓난 애기방에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섁트먼이 동맹을 맺다 -- 이번에는 레닌과 함께

    섁트먼은 소련의 사회 성격에 관한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 그런데 이것을 위장하기 위해 소위 노동조합 논쟁 중 1920년 12월 30일 레닌이 나에게 가한 비판적 언사에 의존한다: "트로츠키 동지는 노동자국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추상일 뿐이다. 소련은 실제로는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국가이다. 노동조합으로 포괄적으로 조직된 노동계급은 자신의 이익을 방어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노동자조직을 활용하여 노동자가 국가에 저항하여 자신의 이익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가 국가를 지키도록 이 조직을 활용해야 한다." 이 인용문을 가리키며 섁트먼은 내가 1920년의 "오류"를 반복했다고 선언하는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러나 성급한 나머지 소련의 사회 성격과 관련된 그의 인용문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12월 30일에 행한 자신의 연설에 대해서 레닌은 1월 19일에 이렇게 썼다: "`소련은 실제로는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국가이다'라고 나는 말한 바 있다. 논쟁 보고서를 읽으면서 당시 내가 틀렸다는 것을 지금 알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노동자국가는 추상적 개념이다. 실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 특징을 구비한 노동자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1)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 인구의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다. (2) 관료적으로 왜곡된 노동자국가이다.'" 이것을 통해 두 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 국가에 대한 정확한 사회학적 규정을 대단히 중시한 나머지 레닌은 논쟁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중에도 자신의 오류를 정정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섁트먼은 소련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대해서 너무도 관심이 없어서 20년이 지난 지금 레닌의 오류나 그가 이 오류를 정정한 내용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기서 레닌이 나에 대해서 얼마나 정확하게 비판을 가했는지는 문제삼지 않겠다. 다만 그가 비판을 잘못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국가의 정의에 대해서 그와 나 사이에는 이견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문제가 아니다. 국가 즉 사회 성격 문제에 대해 위 인용문에서 레닌이 한 말은 며칠 후에 주요한 정정을 가한 그의 말과 관련지을 경우 그 이론적 표현은 절대적으로 올바르다. 그러나 레닌의 규정을 섁트먼이 어떻게 황당하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한 번 보기로 하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20년 전에 레닌이 `노동자국가'를 추상적 개념이라고 말한 것이 가능한 것처럼 `퇴보한 노동자국가' 역시 추상적 개념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앞의 글 제 14쪽) 섁트먼이 레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20년 전에 "노동자국가"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추상적 개념 즉 실재하지 않는 존재라고는 조금도 생각될 수 없었다. 다만 "노동자국가" 규정은 그 자체로는 올바르지만 특정 과업과 관련되어서는 불충분했을 뿐이다. 즉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의 이익을 방어하는 과업의 측면에서만 추상적이며 불충분했다. 그러나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해서 소련을 방어하는 경우에 이 규정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1920년에도 의심의 여지없이 올바랐으며 노동자들이 이 노동자국가를 방어하는 것은 의무이다.

    여기에 대해서 섁트먼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노동조합 문제와 관련하여 소련에 어떤 종류의 노동자국가가 존재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처럼 현재의 전쟁과 관련하여 소련 국가기구의 퇴보 정도를 확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정권의 퇴보 정도는 국가소유의 존재라는 추상적인 전거에 의해서 확정될 수 없으며 살아있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현실(!)을 관찰하는 것을 통해서만 확정될 수 있다." 왜 1920년에는 소련의 성격이 노동조합 즉 국가의 특정 내부 문제와 연관되어서 제기되었으며 왜 오늘날 그것이 소련의 방어 즉 국가의 운명 전체와 연관되어 제기되고 있는지를 이 글을 통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전자의 경우 노동자국가는 노동자와 대비되는 개념이었으며 후자의 경우 노동자국가는 제국주의 세력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비가 두 다리로 어기적거리는 것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레닌이 대비시킨 것을 섁트먼은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섁트먼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문제는 딴 곳에 있다. 즉 그는 소련 국가기구의 퇴보 정도에만 관심이 있다. 즉 이 체제를 질적인 측면이 아니라 양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있다. 즉 퇴보하고 있는 것이 노동자국가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를 전혀 문제삼지 않고 있다. 그가 퇴보의 "정도"를 우리보다 더 정확하게 파악한 흔적은 없다. 그러나 파악했다고 치자. 그러면 이렇게 순전히 양적인 평가가 어떻게 노동자국가인 소련을 방어한다는 우리의 노선을 기각시킬 수 있는가?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한 그의 주장은 도저히 앞뒤를 분간할 수 없다. 사실 그는 절충주의자로서의 면모에 충실하다. 그래서 에이번과 버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소련 국가기구의 퇴보 "정도"를 문제로 삼고 있다. 그와 우리 사이의 쟁점은 "살아있는 사건들로 구성된 현실"에 의해서 결정되는 정도의 문제가 전혀 아니다. 그가 애용하는 이 말은 얼마나 정확하고 "과학적이며", "구체적이며", "실험적인" 용어인가! 진짜 쟁점은 이러한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로 변모되었는 가에 있다. 즉 비록 퇴보하기는 했지만 소련이 아직도 노동자국가인지 아니면 새로운 유형의 착취체제로 변모되었는 가에 쟁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근본 쟁점에 대해서 섁트먼은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해답을 제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의 주장은 다른 맥락에서 다른 내용을 가지고 명백히 오류를 범한 레닌의 주장을 말로만 흉내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레닌은 자신의 오류를 정정하며 이렇게 선언한다: "소련은 단순한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관료적으로 기형화된 노동자국가이다." 그런데 섁트먼은 이렇게 선언한다: "소련은 퇴보한 노동자국가일 뿐만 아니라 "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웅변을 늘어놓는 그와 청중들은 모두 입을 헤벌린 채 할말을 잃고 서로를 쳐다보기만 한다.

    "퇴보한 노동자국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 강령은 소련의 방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주 적절한 정도의 구체성을 가지고 해답을 내리고 있다. 즉 (1) 1920년에 소비에트 체제의 "관료적 기형화" 특징들로 나타났던 것들이 이제는 소비에트를 집어삼킨 독립적 관료체제가 되었다; (2) 소련 내부와 국제적 차원에서 사회주의를 실현시킬 과업과는 양립할 수 없는 관료집단의 독재는 소련의 경제생활을 심대하게 기형화시켜 왔다; (3) 그러나 생산수단의 국가소유에 기초한 계획경제 체제는 기본적으로 유지되어 왔으며 계속해서 인류의 거대한 성과로 남아있다. 소련이 제국주의 세력과의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 관료집단의 독재체제 뿐만 아니라 국가 계획경제 체제 역시 청산될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는 제국주의 세력들의 영향권으로 분할될 것이다. 그리고 제국주의 체제는 새로이 안정되어 세계노동계급의 투쟁 역량을 약화시킬 것이다.

    "관료적" 기형화가 관료적 독재체제로 발전한 상황에서 소련의 노동조합도 국가와 똑같은 퇴보를 겪었다. 따라서 1920년의 경우와 비교할 때 지금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의 이해를 방어하는 것은 전혀 비현실적이라고 우리는 결론내린다. 노동자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관료집단을 타도할 필요가 있다. 이 과업은 오직 소련에 비합법 볼셰비키정당을 수립하는 것을 통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그러나 소련 정치체제의 퇴보는 아직도 국가 계획경제 체제를 파괴시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해서 소련을 방어하고 관료집단에 대한 소련 노동계급의 투쟁을 지원하는 것이 세계노동계급의 임무라고 우리는 결론내린다.

    소련에 대한 지금까지의 규정에서 추상적인 구석이 어디에 있는지 섁트먼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구체적인 수정을 그는 제안하는가? 변증법이 "진실은 언제나 구체적" 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면 이 법칙은 비판에 대해서도 똑같은 효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노선에 대해서 단순히 추상적이라고 딱지를 붙이는 것만 가지고는 안된다.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지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판 자체는 아무런 알맹이도 없게 된다. 추상적이라고 생각되는 노선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거나 변화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섁트먼은 이 노선을 공백으로 채우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안된다. 공백은 아무리 허풍스러워도 모든 추상들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이다. 즉 이 공백 속에는 아무 내용이나 들어가 앉을 수 있다. 따라서 계급 분석을 대체한 이러한 이론적 공백이 인상주의자와 모험주의자들을 불러들인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집약된 경제"

    레닌은 "정치는 집약된 경제이며" 이런 의미에서 "정치는 경제를 지배한다"고 말했다. 이 말을 받아 섁트먼은 내가 오직 "경제" (생산수단의 국가소유 ) 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며 "정치"를 무시한다고 훈계한다. 그러나 레닌을 활용하려는 이 두 번째 노력은 첫 번째 노력보다 더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 이 경우 섁트먼의 오류는 정말이지 엄청나다! 레닌이 한 말의 의미는 이렇다: 경제 과정, 과업, 이해 등이 의식적이고 일반화된("집약된") 성격을 획득할 경우 바로 이 사실로 인해 이러한 것들은 정치 영역으로 들어가며 정치의 핵심적 내용을 구성한다. 이런 의미에서 집약된 경제로서의 정치는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원자화되고 무의식적이며 일반화되지 못한 경제활동을 지배한다.

    심대하고 전면적으로 경제를 "집약하는" 정도 즉 경제과정의 진보적 경향들을 표현하는 정도에 따라 정치노선의 올바름은 한치의 오차없이 결정된다. 이것이 맑스주의자의 관점이다. 우리가 정치노선을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소유형태와 계급관계의 분석에 기초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이론적 기초 위에서만 "상부구조"의 요인들을 좀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적대 분파의 "관료적 보수주의"를 비판할 경우 우리는 즉시 이러한 현상의 사회적 즉 계급적 뿌리를 찾으려고 한다. 이와 다른 방법을 채택할 경우 우리는 시끄럽기만 한 맑스주의 모방자 또는 "관념적(Platonic)" 맑스주의자로 낙인찍힐 것이다.

    "정치는 집약된 경제이다"라는 명제는 크렘린궁의 관료집단에게도 적용된다. 그렇지 않다면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정책은 일반적 법칙의 예외로서 "집약된 경제"가 아니라 관료집단의 자유의지가 발현된 경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관료집단의 이해에 의해 굴절된 채 표현되고 있는 소련정부의 정치를 국유화 경제로 환원시키려는 우리의 시도에 대해 섁트먼은 미친듯이 저항하고 있다. 그는 소련에 대한 자신의 정치노선을 경제의 의식적인 일반화로부터가 아니라 "살아움직이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현실" 즉 주먹구구, 즉흥, 공감과 반감 등으로부터 도출한다. 그는 이러한 인상주의적 정책을 사회학적으로 근거를 삼는 우리의 정책과 대치시키면서 우리가 정치를 무시한다고 동시에 비난하고 있다. 이것은 도저히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섁트먼의 허약하고 변덕스러운 정치도 마찬가지로 경제의 "집약된" 표현임에 확실하다. 다만 애석한 것은 그의 정치가 탈계급적 쁘띠부르조아의 경제를 집약되게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르조아 전쟁과의 비교

    섁트먼은 우리에게 이렇게 상기시킨다: 부르조아 전쟁들은 한때는 진보적이었으며 또 다른 때에는 반동적임으로 전쟁에 가담하는 국가를 계급적으로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하기보다는 애매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부르조아 전쟁들은 부르조아 체제가 모두 진보적이었을 때에만 진보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봉건적 소유체제에 저항하여 부르조아 소유체제가 진보적이며 건설적인 요인이었을 때에만 진보적이었다. 부르조아 전쟁들은 부르조아 소유체제가 진보에 걸림돌이 되었을 때 반동적인 성격으로 변화했다. 소련과 관련하여 섁트먼은 생산수단의 국가소유가 진보에 걸림돌이 되었으며 이 소유체제가 다른 나라들로 확대되었을 경우 이것이 경제적 반동을 가져온다고 말하고자 하는가? 물론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생각들을 논리적인 결론까지 이끌지 않고 있을 뿐이다.

    민족부르조아 전쟁의 예는 정말이지 아주 유익한 교훈을 제시한다. 그러나 섁트먼은 이 교훈을 아무 관심없이 흘려버리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통일 독일공화국을 위해 노력했다. 1870 1871년의 보불전쟁에서 이들은 독일 통일을 위한 투쟁을 지지하였다. 이 투쟁이 왕조적 이해에 영합하는 기생집단들에 의해 이용되고 왜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프로이센이 알사스-로렌 지방을 합병하자 맑스와 엥겔스가 즉시 프로이센에 대해 반대했던 사실을 섁트먼은 지적한다. 그러나 이 지적은 우리의 관점을 더욱더 명확하게 설명하는 데 일조할 뿐이다. 이 경우는 두 부르조아 국가들 간의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두 국가는 모두 계급적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 경우 두 적대국가 가운데 누가 "덜 해로운가"를 결정할 선택권을 역사가 허용한다면 이 결정은 보완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내려질 수밖에 없다. 독일의 경우 경제적 문화적 공간인 민족부르조아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 시기에 민족국가는 진보적인 요인이었다. 이런 한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호엔쫄런 왕가와 이 왕가와 연합한 대토지 귀족들(junkers)이 중심세력을 형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을 지지했다. 그런데 알사스-로렌 지방의 합병은 독일은 물론이고 프랑스에 관해서도 민족국가의 원칙을 침해했으며 보복전쟁의 기반을 조성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맑스와 엥겔스는 프로이센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이를 통해 이들은 부르조아 생산관계가 지배하는 양 국가들 사이에서 경제력이 더 우수한 프랑스에 대항해서 경제력이 더 열등한 독일의 이해에 봉사하는 위험을 피했다. 만약 1870년에 프랑스가 노동자국가였다면 이들은 전쟁 초기부터 프랑스를 지지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이 계급적 조건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정치 행동을 결정했을 경우에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반복하기에 창피한 사족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오래된 부르조아 국가들의 경우 민족적 과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인류는 발전하는 생산력과 너무 협소한 민족국가라는 틀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순에 의해 고통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유럽의 경우 민족국가의 경계선을 벗어던지고 사회주의 소유체제에 기초한 계획경제를 건설하는 것이 국제노동계급의 과제이다. "사회주의 유럽합중국을 건설하자"는 우리의 구호가 바로 이 과제를 표현하고 있다. 핀란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폴란드에서도 토지소유주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그 자체로 진보적인 요인이다. 여기서 크렘린궁 관료집단이 채용한 관료적 몰수방식들은 독일 통일에서 호엔쫄런 왕가가 왕조적 방식들을 채용한 것과 정확히 똑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반동적 방식에 의해 반동적 소유형태를 방어하는 것과 관료적 방식을 통해 진보적 소유형태를 도입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할 필요가 있을 경우 우리는 이 두 선택을 같은 차원에 두지 않고 덜 해로운 쪽을 선택한다. 이 점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호엔쫄런 왕가에 투항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스탈린 관료집단에 "투항"하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불전쟁에서 호엔쫄런 왕가가 수행한 역할은 왕조의 일반적 역사적 역할이나 존재이유 중 어느 것도 정당화시킬 수 없었다. 이 사실은 덧붙일 필요조차 없다.  

     

    상황적 패배주의 노선 즉 콜룸부스와 달걀

    이론적 공백의 도움을 받아 특히 중요한 문제에 대해 "살아움직이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현실"을 가지고 섁트먼이 어떻게 자기 주장을 펴는지를 이제 확인해보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크렘린궁의 국제정책을 결코 지지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전쟁이란 무엇인가? 다른 수단들을 통하여 계속되는 정치행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지한 적이 없고 지금도 지지하고 있지 않은 국제정책을 계속하는 형태인 전쟁을 왜 지지해야 하는가?"(앞의 글 15쪽) 이 주장의 완벽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노골적인 삼단논법을 동원하여 그는 우리에게 완벽한 패배주의 노선을 채택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콜룸부스와 달걀처럼 단순한 일이다! 크렘린궁의 국제정책을 지지해본 적이 없으므로 소련을 결코 지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확실히 말하지 않는가?

    섁트먼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독소불가침조약 이전에 그리고 적군의 폴란드 점령 이전에 크렘린궁의 국내 및 국제정책을 거부했다; 따라서 작년에 발생한 "살아움직이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현실"도 우리 노선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과거 소련을 방어했다면 이것은 순전히 일관되지 못한 정책의 결과일 뿐이다 등등. 그러나 그는 제4인터내셔널의 현재 정책뿐만 아니라 과거 정책까지 수정하고 있다. 우리가 스탈린에 반대하므로 소련에 대해서도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이 결론은 스탈린이 오랫동안 견지해왔던 것으로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은 소련에 대해 이적행위를 하는 것과 같다고 그는 주장해왔다. 차이가 있다면 섁트먼은 오직 최근에 와서야 이 견해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크렘린궁의 정책에 대한 그의 거부는 완벽하고도 확실한 패배주의 노선을 낳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렇다고 확실히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섁트먼은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좀 전에 인용한 글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만약 제국주의 세력이 10월 혁명의 마지막 성과를 압살하고 러시아를 식민지의 집합체로 변모시킬 의도로 소련을 침공한다면 우리는 소련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한다. 이것이 과거 우리의 노선이었으며 지금도 소수파의 노선이다." (앞의 글 15쪽) 이런, 이런, 이런! 크렘린궁의 국제정책은 반동적이다; 전쟁은 이 반동적 정치의 연장이다; 우리는 반동적 전쟁을 지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잔악한 제국주의 세력이 소련을 "침공하고 " 러시아를 식민지로 변모시킬 목적을 추구하고 있는 특별한 "상황에서" 섁트먼은 소련을 "무조건적으로" 방어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말이 되는가? 논리는 어디로 도망갔는가? 버넘의 모범을 따라 섁트먼도 논리를 종교와 그 밖의 다른 박물관 소장품들의 영역으로 격하시킨 것인가?

    이렇게 논리가 뒤죽박죽된 상황의 열쇠는 "우리는 크렘린궁의 국제정책을 한 번도 지지한 적이 없다"는 발언이 추상적이라는 데에 있다. 이 발언은 해부되고 구체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현재 국내정책 뿐만 아니라 국제정책에 있어서도 관료집단은 자신의 기생적 이해를 최우선에 둔다. 이런 한에서 우리는 이들 정책에 대항해 죽음을 불사하고 투쟁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매우 왜곡된 형태로나마 관료집단의 정책은 노동자국가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이 노동자국가의 이해를 우리는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옹호한다. 그래서 관료집단이 (나름의 방식으로!) 국가소유와 외국무역 독점을 지키고 짜르시대에 발생했던 부채의 지불을 거부할 때 우리는 이것을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련과 제국주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건들이 무엇이든 간에 그리고 이러 저러한 정부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관료집단의 반동적 정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계급의 역사적 성과들을 무조건 방어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인 것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문제는 소련의 계급적 성격으로 집약된다.

    레닌은 패배주의 노선을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으로부터 도출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자본주의 체제와 그 지배계급의 특정 발전단계로부터 도출했다. 사회와 국가의 계급적 성격으로부터 전쟁의 성격이 정확하게 결정된다. 따라서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우리의 노선을 결정할 때 민주주의, 왕정, 침략, 국가방어 등과 같은 "구체적인" 상황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그는 권유하였다. 여기에 반대하여 섁트먼은 패배주의 노선을 특정 상황으로부터 도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패배주의 노선은 소련과 핀란드의 계급적 성격에 관심이 없다. 관료집단의 반동적 특징들과 "침략행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프랑스, 영국, 미국 등이 핀란드에 비행기와 총포를 보내 핀란드 지배계급을 지원한다고 해도 이 상황은 섁트먼의 노선을 결정하는 데 아무 관계가 없다. 만약 영국 군대가 핀란드에 진주하면 섁트먼은 체임벌린의 혓바닥 밑에 온도계를 들이밀고 그의 의도를 파악하려들 것이다. 크렘린궁의 제국주의 정책으로부터 핀란드를 구출하는 목적만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덤으로 "10월 혁명의 마지막 성과들"을 타도할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이다. 온도계가 가리키는 지점에만 온전히 의거하여 그는 소련 패배주의에서 소련 방어주의로 노선을 전환할 용의가 있다. 추상적 원칙들을 "살아움직이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현실"로 대체한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이미 우리가 확인했지만 섁트먼은 과거의 예들을 검토하자고 끈질기게 주장한다: 과거 언제 어디서 소수파 지도자들은 쁘띠부르조아적 기회주의를 드러냈는가?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제시한 증거를 보충하기 위해서 스페인혁명과 관련하여 방어주의 및 방어주의 방식들에 대해 우리가 교환한 두통의 편지를 공개하겠다. 1937년 9월 18일 섁트먼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나에게 보냈다: " `스페인 하원에 우리 동지 한 명이 의원으로 있다면 그는 네그린 정권의 국방예산안에 대해 반대표를 던질 것입니다.'라고 동지는 말합니다. 혹시 글자가 잘못되었으면 몰라도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현재 스페인 내전에서 제국주의 전쟁의 요소가 지배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대신 쇠퇴하고 있는 부르조아 민주주의와 파시즘과의 대결이 지배적인 것이라면 반(反) 파시즘 투쟁에 군사적 지원을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스페인 하원에서 반파시즘 정권의 국방예산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후에스카 전선에 있는 우리 동지가 사회주의자 동지로부터 왜 볼셰비키-레닌주의자 의원이 하원에서 전선에 보낼 소총을 구입하기 위해서 백만 페세타를 쓰겠다는 네그린의 제안에 반대표를 던질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 동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그가 이렇다할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 (강조는 필자)

    이 편지는 나를 놀라게 하였다. 스페인 내전에서 "제국주의 전쟁의 요소"가 지배적이지 않다는 순전히 부정적인 기초하에 섁트먼은 배신적인 네그린 정권에 대해 신임을 표명할 용의를 보였다.

    1937년 9월 20일 나는 그에게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네그린 정부의 국방예산안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은 그에게 정치적 신임을 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범죄행위가 될 것입니다. 무정부주의적 노동자들에게 우리의 반대표를 어떻게 설명하느냐고요? 아주 간단합니다: 네그린 정부의 전쟁 수행과 전쟁 승리 능력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의 확신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정부가 부자들을 보호하고 가난한 인민을 굶기는 정부라고 비난합니다. 정부는 타도되어야 합니다. 이 정부를 대체할 능력이 없는 한에서 우리는 이 정부의 명령 하에서 내전을 치룹니다. 그러나 모든 경우를 이용하여 우리는 이 정부에 대한 불신임을 공공연히 표현합니다. 이 정부에 대항해서 대중들을 정치적으로 추동하고 이 정부의 타도를 준비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외의 다른 노선은 모두 혁명에 대한 배신행위가 될 것입니다."

    내가 보낸 이 답장의 어조는 섁트먼의 기회주의적 입장이 나에게 끼친 놀라움을 미약하게 밖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단편적인 오류들은 물론 피할 수 없다. 그러나 2년 반이 지난 지금 이 편지는 섁트먼의 정치 경향에 대해 새로운 진실을 밝히고 있다. 파시즘에 대항하여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방어하기 때문에 부르조아 정부에 대한 신임을 거부할 수 없다고 섁트먼은 생각하고 있다. 이 사고를 소련에 적용하면 결론은 반대로 나온다. 즉 소련 정부를 신임할 수 없으므로 노동자국가를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경우 역시 사이비 급진주의는 기회주의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계급적 기준의 기각

    다시 한번 맑스주의의 근본원리로 돌아가 보자. 맑스주의 사회학에서 국가, 정당, 철학, 문예사조 등과 같이 주어진 현상을 분석하는 출발점은 계급 규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것만 가지고는 불충분하다. 계급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발전단계를 경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 다른 조건에 놓이며 다른 계급들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현상을 완벽하게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2차적 또는 3차적 요인들을 계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인들은 구체적인 분석 목적에 따라 부분적으로만 또는 전부 계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맑스주의자의 경우 분석할 대상을 계급적으로 규정하지 않고서는 분석 자체가 불가능하다.

    뼈와 근육의 구조만 연구해서는 동물에 대한 해부는 완벽할 수 없다. 그러나 뼈와 근육의 구조를 무시하려는 해부학 논문은 공허할 것이다. 전쟁은 사회 즉 사회 지배계급의 기관이 아니라 기능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기관 즉 국가를 연구하지 않고 그 기능을 연구하고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조직 즉 사회의 일반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회의 기관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의 뼈와 근육은 생산력과 계급(소유 )관계이다. 기능인 전쟁이 그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 즉 국가와는 무관하게 "구체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고 섁트먼은 주장하고 있다. 너무도 기괴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 근본적 오류는 역시 같은 정도의 노골적인 오류에 의해서 강화되고 있다. 기능을 기관과 분리시킨 후 기능 그 자체를 연구하는 섁트먼은 자신의 약속과는 달리 추상에서 구체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체를 추상 속에 해소시켜 버린다. 제국주의 전쟁은 금융자본의 기능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독점자본이라는 특수한 자본주의에 기초하여 특정 발전단계에 놓인 자본이 곧 금융자본이다. 이 규정은 근본적인 정치적 결론을 도출하기에 충분히 구체적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용어를 소련에 대해서도 적용하기 위해서 이 용어의 범위를 고무줄처럼 늘어뜨린 섁트먼은 자기가 딛고 서 있는 이론적 기초마저 허물어 버린다. 그는 제국주의를 금융자본의 확대뿐만 아니라 노동자국가의 확대에도 적용한 것을 피상적으로나마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그는 두 국가 즉 노동자국가와 제국주의국가의 사회구조적 차이를 추상적이라고 선언하면서 무시한다. 이렇게 맑스주의와 숨바꼭질을 하면서 섁트먼은 구체적인 분석을 추상적이라고 낙인찍고 추상적인 분석을 구체적이라고 위장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이론을 무지막지하게 가지고 노는 행태는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하나의 예외도 없이 미국의 모든 쁘띠부르조아들은 모든 형태의 영토 점령을 "제국주의적"이라고 낙인찍고 있다. 특히 지금 미국이 영토를 점령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지 않은 틈을 타서 말이다. 그러나 금융자본이 특정 순간에 영토병합에 몰두해 있거나 아니면 핀란드를 다른 나라의 병합으로부터 "방어하는 일"에 몰두해 있거나 간에 금융자본의 국제정책이 제국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 이들은 독실한 신자의 경건한 분노로 몸을 떨면서 화들짝 놀라 자빠진다. 당연히 소수파 지도자들은 정치적 목적이나 정치적 수준에 있어서 보통 쁘띠부르조아들과는 다르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들은 공통의 사상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쁘띠부르조아는 자신의 사회적 기초와 정치적 사건들을 분리시키려고 애쓴다. 현실에 대한 계급적 접근방식과 쁘띠부르조아의 사회적 지위 및 이데올로기 사이에는 유기적인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폴란드에 대해서

    크렘린궁의 관료집단이 나름의 관료적 방식을 통해 폴란드의 사회주의 혁명에 추동력을 제공했다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노동계급의 "관료적 혁명"이 어쩌면 가능하다고 내가 주장한 것으로 섁트먼은 윤색하고 있다. 이것은 부정확할 뿐만 아니라 의리마저 없는 행태이다. 나의 표현은 엄격하게 제한된 것이었다. "관료적 혁명"이 아니라 관료적 추동력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이 추동력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어쨌든 서부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대중들은 이 추동력을 감지했으며 이것의 의미를 이해했으며 기존 소유관계의 전면적인 전복을 달성하기 위해 이것을 이용했다. 제때에 이러한 추동력을 감지하지 못하고 이것을 이용하기를 거부하는 혁명정당은 쓰레기통에 던져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향하고 있는 이 추동력은 소련의 관료집단이 노동자국가의 경제체제에 자신의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만 가능했다. 소련군 점령지 내의 계급투쟁과 러시아 10월 혁명의 위력을 통해서만 우크라이나 및 벨로루시 대중들은 이 "추동력"을 혁명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운동의 고립적 성격과 소련 관료집단의 막강한 물리력만이 이 혁명적 대중운동을 재빨리 목졸라 죽일 수 있었다. 노동자국가, 피억압 대중, 보나파르트 관료집단 등 세 요인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폴란드 사태에 대해 한담을 늘어놓는 일을 자제하는 것이 가장 좋았을 것이다.

    서부 우크라이나와 서부 벨로루시의 국회 선거에서 제시된 선거강령은 당연히 크렘린궁의 명령에 의해서 나왔다. 그러나 이 강령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대단히 중요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지역들의 소련에의 편입; 농민을 위한 지주토지의 몰수; 대공업과 은행의 국유화. 우크라이나의 민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 단일국가로 통일되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현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미래에 전개될 독립 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의 생각은 올바르다. 그리고 선거강령의 다른 두 요소들이 진보적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동지는 우리 대오에 없을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소련의 사회적 기초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으로 하여금 사회혁명적 강령을 택하도록 강제한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길을 찾던 중 섁트먼은 전혀 사회적 변화가 없는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를 자기 주장의 예로 들고 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주장이 아닌가! 소련 관료집단이 언제나 모든 곳에서 부르조아 계급의 생산수단을 몰수하기를 원한다거나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록 히틀러와 동맹을 체결했지만 소련의 관료집단은 동부 폴란드에서 일어난 체제의 전복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소련의 관료집단만이 이런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경우 관료집단은 폴란드 내 소련군 점령지역을 소련 영토로 편입시킬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섁트먼은 이 체제 전복 현상을 인식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이 현상을 설명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체면을 세우려고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폴란드령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에서는 민족적 억압이 계급착취를 심화시키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은 토지를 스스로 접수하기 시작하였고 이미 도망하고 있던 지주들도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등등. (같은 글 16쪽) 그런데 섁트먼에 의하면 소련군은 이 사태와 전혀 관계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즉 소련군은 이 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주한 "반혁명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히틀러가 장악한 서부 폴란드의 노동자 농민 대중은 왜 혁명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동부 폴란드에서는 주로 지주들과 자본가들이 줄행랑을 쳤는데 왜 서부 폴란드에서는 주로 혁명가, "민주주의자", 유태인들이 줄행랑을 쳤을까? 섁트먼은 이 차이점을 곰곰히 생각할 겨를이 없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으므로 "관료적 혁명"이란 황당한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일이 그에게는 우선 급하다. 그는 마치 신생아실에 들어가 갓 태어난 아기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의 비유가 너무 과한 것일까?

    멘셰비키들은 크렘린궁의 대외정책에 대해 섁트먼보다 더 "화해불가능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들의 빠리 망명 기관지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소련군이 명령받은 지역에 채 진주하기도 전에 농촌 전역에서 혁명적 농민 자치를 위한 기본 기관인 농민위원회가 등장했다." 물론 소련군 당국은 이러한 위원회들을 자신들이 도시 중심지에 수립한 관료적 기관들에 부속시키는 조치를 시급히 서둘렀다. 그러나 이들 기관들은 농민위원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위원회가 없이는 농민혁명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멘셰비키 지도자 단(Dan)은 10월 19일 이렇게 썼다: "모든 목격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에 의하면 소련군과 소련 관료집단의 등장은 이들 점령지역들 뿐만 아니라 이들 너머 지역까지 사회 소요와 사회변혁의 추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추동력"이란 말은 내가 아니라 눈과 귀를 가지고 있는 "모든 목격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이 먼저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은 더 나아가 "이 추동력에 의해서 일어난 물결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독일을 강타할 뿐만 아니라 어떤 정도로든 다른 국가들에게 밀려들어갈 것이다"라고 짐작했다.

    또 다른 멘셰비키는 이렇게 쓰고 있다: "크렘린궁은 거대한 혁명의 냄새가 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피하려고 시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래 전에 이미 사라져야 했을 반봉건 농경소유관계가 존재하는 동부 폴란드에 적군이 진주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격렬한 농민운동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소련군의 진주와 함께 농민들은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위원회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이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섁트먼의 말에 의하면 소련군의 철수가 아니라 진주와 함께 이런 사태가 촉발되었다. 내가 멘셰비키들의 말을 인용하는 이유는 이들이 정보를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정보소식통은 이들에게 친분이 있는 폴란드인 및 유태인 망명자들이며 이들은 현재 프랑스에 모여 있다. 특히 이들은 프랑스 부르조아들에게 투항했기 때문에 스탈린주의에 투항했다고 의심할 건덕지가 없다. 따라서 이들이 소련 관료집단을 옹호하기 위해 거짓정보를 흘릴 이유는 없다.

    더욱이 멘셰비키들의 증언은 부르조아 언론의 보도로 그 진실이 확인되고 있다:

    "소련군이 진주한 폴란드 영토의 농민혁명은 자생적인 운동의 위력을 보여왔다. 소련군이 즈브루치강을 건넜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농민들은 지주들의 토지를 서로 나누어 갖기 시작했다. 토지는 먼저 소농들에게 분배되었으며 이런 방식으로 농토의 약 30%가 몰수되었다." ([뉴욕 타임즈], 1940년 1월 17일자)

    이제 섁트먼은 내가 전혀 새로운 주장을 꺼내 놓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이미 다음과 같이 한 말을 새로운 주장인양 드리밀고 있다: 동부 폴란드에서 토지를 농민들이 몰수한 사실이 소련 관료집단의 정책 일반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물론 그렇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평가가 달라야 한다고 제안한 바 없다.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아 소련 당국은 노동계급을 혼란시키고 사기를 죽였다. 이 결과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이 촉진되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을 위해 전쟁을 활용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졌다. 이러한 범죄행위들에 비교해서 이 두 지방의 사회적 격변은 물론 부차적인 중요성밖에 없으며 크렘린궁 관료집단의 일반적으로 반동적인 성격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더욱이 이들 지방의 사회적 격변은 폴란드의 예속을 대가로 하고 있다. 그러나 소수파의 주장을 통해 이 문제는 정책 일반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이 정책일반이 구체적으로 굴절된 문제로 되어버렸다. 갈리시아와 서부 벨로루시의 농민들에게 농민혁명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반동적인 관료집단에 의해서 추동되었다는 이유로 제4인터내셔널이 이 격변을 보이코트할 수는 없었다. 노동자와 농민의 편에 서서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소련군의 편에 서서 이 사건에 동참하는 것이 우리의 무조건적인 임무였다. 동시에 크렘린궁 정책의 일반적으로 반동적인 성격과 이 성격이 소련군 점령지에 미칠 위험을 쉬지 않고 대중들에게 경고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 두 과업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같은 과업의 두 측면을 결합할 줄 아는 것 --- 바로 이것이 볼셰비키의 정치이다.  

     

    다시 한번 핀란드에 대해서

    폴란드의 사태를 이해하는 기이한 통찰력을 드러낸 후 섁트먼은 배가된 권위를 가지고 핀란드 사태에 대해 나에게 공격을 가하고 있다. 나의 글 "쁘띠부르조아 소수파"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은 내전에 의해서 보완되기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내전에서 현재 소련군은 핀란드의 소농 및 노동자와 같은 편을 이루고 있다. " 이 대단히 조심스러운 표현도 칼날 같은 섁트먼 재판관의 승인을 얻지는 못했다. 핀란드 사태에 대한 나의 평가는 이미 그를 뒤흔든 후였다. "편지" 16쪽에서 섁트먼은 "핀란드에 대한 동지의 놀랄만한 발언에 대해서는 폴란드의 경우보다 근거를 찾기가 더 어렵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그가 논리를 끝까지 추구하여 나름의 결론을 이끌지 못하고 놀라기만 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애석함을 느낄 뿐이다.

    발트해 국가들에 대해서 크렘림궁은 자신의 과업을 전략적 소득을 얻는 것으로 한정했다. 즉 짜르제국의 일부였던 이들 나라에 설치한 전략적 군사기지들이 이후 이 나라들이 소련 영토로 편입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계산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발트해 국가들에 대해서 외교적 위협으로 달성한 이러한 성공에 비해 핀란드에서는 이 계획이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 저항에 대해서 화해조치를 취할 경우 소련 관료집단의 "위신 "과 발트해 국가들에서의 성공은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원래 계획과는 반대로 크렘린궁은 무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로부터 사고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크렘린궁은 핀란드 부르조아지를 겁주어서 이들이 양보를 하도록 만들 것인가 아니면 이 이상의 조치를 취할 것인가? 당연히 이 질문에 대한 "자동적인" 해답은 있을 수가 없었다. 일반적 경향들에 비추어 구체적인 사태전개에 따라 대응을 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소수파 지도자들은 이렇게 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핀란드에 대한 소련의 군사작전은 11월 30일에 시작되었다. 바로 이날 틀림없이 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에 소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핀란드 공산당은 핀란드의 근로인민을 향해 라디오 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선언서는 이렇게 선포했다: "핀란드 역사상 두 번째로 핀란드 노동계급은 유산계급의 지배에 대해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1918년에 있었던 노동자와 농민의 첫 투쟁은 자본가와 지주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근로인민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핀란드의 부르조아 정부를 겁주려는 시도는 전혀 없으며 핀란드 국내에 봉기를 촉발시켜 소련군의 침공을 내전으로 보완하려는 계획만이 이루어졌음이 이 선언서 하나만으로도 명백했다.

    12월 2일에 발표된 소위 인민정부의 선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핀란드 각지에서 인민은 이미 봉기에 착수했으며 민주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선언문의 이 주장은 명백한 거짓이다. 그렇지 않다면 봉기가 시도된 장소들이 언급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부에서 준비된 고립된 봉기들이 실패로 끝났으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상황을 자세하게 밝히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간주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어쨌든 "봉기들"에 대한 소식은 봉기의 촉구를 의미했다. 더욱이 선언문은 "다가올 전투 과정에서 혁명적 노동자 농민의 대오에서 배출된 자원군에 의해서 확대될 첫 핀란드 군단"의 구성에 대한 정보를 실었다. 이 "군단"에 속한 병력이 1천명이 되었던 1백명이 되었든 크렘린궁의 정책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군단"의 의미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동시에 전보들은 국경지역 농민에 의한 대지주 소유 토지의 몰수를 보도했다. 소련군이 처음으로 진군한 기간 동안 바로 이러한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심할 근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전보들의 내용이 조작되었더라도 선언서는 농민혁명을 촉구하는 의도를 완전히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은 내전에 의해서 보완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선언할 정당성은 나에게 충분히 있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12월초에 나는 이러한 사실들의 일부분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 상황 속에서 이 사건의 내적 논리를 이해함으로써 단편적인 사실들을 통해 나는 이 투쟁의 전체 방향에 대해서 필요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러한 반(半) 선험적인 결론이 없이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관찰자는 될 수 있어도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인자는 결코 될 수 없다. 그런데 "인민정부"의 호소는 왜 즉각적인 대중적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는가?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부르조아지뿐만 아니라 농민 최상층부와 노동관료들에 의해서 지원받고 있는 반동적인 군대에 의해서 핀란드가 완전히 장악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크렘린궁의 정책이 핀란드 공산당을 무의미한 요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셋째, 소련 정부는 핀란드 근로대중에게 혁명적 열정을 불어넣어줄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1918년부터 1920년 사이 우크라이나에서조차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라는 호소에 농민들은 아주 느리게 반응했다. 왜냐하면 지역 소비에트의 권력이 아직 미약했고 백군의 군사적 성공이 있을 때마다 농민들에 대한 가차없는 형벌이 가해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농민혁명을 일으키라는 호소에 핀란드의 빈농들이 반응을 늦게 보인 이유는 그만큼 더 당연한 셈이다. 농민들이 행동을 개시하기 위해서는 소련군이 제대로 군사적 승리를 거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준비가 엉망이었던 첫 진공에서 적군(赤軍) 은 실패만 기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이 봉기한다는 것은 전혀 말도 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단계에서 핀란드에서 독자적인 내전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소련 관료집단이 내전을 촉발하는 조치들을 통해서 군사작전을 보완할 것이라고 나는 정확하게 계산하여 말했다. 최소한 핀란드 군대가 전멸될 때까지 나의 이 계산은 적군 점령지와 인근지역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 1월 17일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핀란드 정보소식통은 국경지방 중 한 곳이 핀란드 망명자 부대에 의해서 침략을 받았으며 문자 그대로 동족상잔의 살육이 자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담은 전보를 전하고 있다. 이것이 내전의 양상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적군이 핀란드 안으로 새로이 진군할 경우 전쟁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평가는 전쟁의 단계마다 그 올바름이 틀림없이 확인될 것이다. 섁트먼은 사태 분석은 물론이요 약간의 예상조차 할 능력이 없다. 그는 고상한 분노에만 자신을 한정하고 있으며 이 이유 때문에 전쟁이 진전하는 매 단계마다 더욱 깊이 무지의 늪 속에 빠져들고 있다.

    "인민정부" 수립 촉구는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를 더불어 촉구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섁트먼은 고함을 지른다. 소련에도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핀란드에서는 이것이 어디서 나온다는 말인가? 애석하게도 섁트먼은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소련에서는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는 이미 완성된 지 오래되었다. 부르조아지를 통제하면서 소련은 국유화 생산관리체제로 이행했다. 노동자에 의한 관리에서 지금은 관료집단에 의한 지령경제 단계로 나아갔다. 노동자에 의한 새로운 생산의 통제는 이제 관료집단에 대한 통제를 의미한다. 이것은 관료집단을 타도하는 봉기의 성공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다. 한편 핀란드에서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는 아직까지 토착 부르조아지를 몰아내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부르조아지가 남긴 권력의 공백을 관료집단이 채우겠다고 제안하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더욱이 동부 폴란드나 핀란드를 인민위원들을 수입해서 통치할 것을 시도할 만큼 크렘린궁이 그렇게 어리석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소련 관료집단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일은 점령지의 근로대중 가운데 새로운 행정기구를 끌어내는 일이다. 이 과업은 여러 단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첫 단계는 농민위원회와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 위원회이다.

    쿠지넨의 강령이 "공식적으로 부르조아 `민주주의' 강령이다"라는 사실을 섁트먼은 꼭 부여잡고 있다. 그렇다면 크렘린궁은 핀란드를 소련의 틀 속으로 끌어들이기보다 그곳에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확립시키는 일에 더 관심이 있다고 섁트먼은 주장하고 싶은 것일까? 그는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소련은 스페인을 연방 안으로 끌어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따라서 크렘린궁의 관료집단은 노동자혁명에 대항하여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확실히 보장할 능력을 과시해야 했다. 이것이 이들이 스페인에서 처한 문제의 실체였다. 이 과업은 스페인 혁명이라는 특정 국제 상황에서 소련 관료집단의 이해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크렘린궁은 프랑스, 영국, 미국 등에게 자신의 유용성을 과시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행동이 증명하듯이 이들은 즉시 또는 두 단계를 거쳐 핀란드를 소련의 일부로 만들고자 확실히 결정하였다. 쿠지넨 정부의 강령은 "공식" 입장에서 보더라도 1917년 11월 볼셰비키당의 강령과 다르지 않다. 내가 "백치" 쿠지넨의 선언문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사실을 섁트먼은 확실히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크렘린궁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있으며 소련군의 지원을 받고 있는 "백치" 쿠지넨은 사태의 내적 논리(변증법) 을 끝까지 사고하기를 거부하며 겉으로 영리한 척하는 많은 소수파 인사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정치적 요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놀라운 분석의 결과 섁트먼은 이번에 소련에 대해 패배주의 노선을 공공연히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자신이 계속해서 "자기 계급의 이해에 충실한 사람"으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어서 우리는 기쁘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멘셰비키 지도자 단은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할 경우 세계노동계급은 "이 폭거에 대해 명확히 패배주의 노선을 택해야 한다"(Sozialisticheski Vestnik, 19 20호, 43쪽)고 11월 12일자 멘셰비키 기관지에 밝힌 바 있다. 케렌스키 임시정부 시절 단은 열렬한 조국방어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심지어 그는 짜르체제 하에서도 패배주의 노선을 주창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그가 "자기 계급의 이해에 충실한 사람"이 아닌 것은 물론 아니다. 문제는 어떤 계급이 자기 계급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핀란드의 사태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현지에 더 가까이 있으며 허구를 사실로 바꿔치기할 수 없는 단과 섁트먼은 지금까지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구체적인 정치적 결론 "의 문제에서 섁트먼은 단과 정확히 "똑같은 계급에 충실한 사람"임이 증명되었다는 사실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 맑스주의 사회학에 의하면 이 계급은 쁘띠부르조아이다. 이 점을 소수파 지도자들은 양해하기 바란다.  

     

    "동맹" 이론

    당내의 노동계급 경향,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 맑스주의 방법론에 대항하여 버넘, 에이번과 맺은 동맹을 정당화하기 위해 섁트먼은 혁명운동의 역사에 대해서도 한 말씀을 하셨다. 그의 말에 의하면 특히 그는 위대한 혁명전통을 젊은 세대에게 전수하기 위해 혁명운동의 역사를 연구했다는 것이다. 목표 자체는 아주 훌륭하다. 그러나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방법론이 요구된다. 그런데도 섁트먼은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과학적 방법론을 희생시켰다. 그가 들고 있는 역사적 예들은 철저하게 생각된 것이 아니며 완전히 거짓이다.

    모든 협조적 관계가 전부 동맹인 것은 아니다. 장기화된 동맹으로 변모되지 않았으며 그럴 의도도 없는 일시적이며 사안적인 동맹들이 종종 존재한다. 한편 같은 당에 적을 두고 있는 것은 동맹이라고 전혀 간주할 수 없다. 버넘 동지와 우리는 같은 국제정당에 소속되어왔으며 계속 끝까지 이 상태가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이것은 동맹이 아니다. 두개의 정당은 공동의 적에 대항해서 장기간의 동맹을 체결할 수 있다. "인민전선 " 정책이 바로 이런 경우였다. 같은 당의 가깝지만 이질적인 경향들이 제3의 분파에 대항하여 동맹을 체결할 수도 있다.

    당내에 존재하는 동맹들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 문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1) 동맹이 대항하는 세력이 누구인가? (2) 동맹 내의 세력관계는 어떠한가? 예를 들어 당내의 국수주의 경향에 대항하기 위해 국제주의자와 중도주의자 간에 맺는 동맹은 흔쾌히 인정될 수 있다. 이 경우 동맹의 결과는 국제주의자들의 강령의 명확함, 이들의 응집력과 규율 등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특성들은 세력관계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수적인 우위보다 더 중요한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섁트먼은 레닌이 보그다노프와 동맹을 맺은 사실을 들어 자신의 동맹을 정당화하고 있다. 레닌은 보그다노프에게 이론적인 측면에서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았다고 나는 이미 말한 바 있다. 이제 "동맹"의 정치적 측면을 검토해보자. 사실 레닌과 보그다노프의 경우는 동맹이 아니라 같은 조직 내에서 협조관계를 이룬 것에 불과하다. 이 사실을 무엇보다 먼저 말할 필요가 있다. 당시 볼셰비키 분파는 독립적으로 존재했다. 자기 조직 내의 다른 경향들에 대해서 레닌이 보그다노프와 "동맹"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보그다노프의 이론적 편향에 대항하여 레닌은 볼셰비키 화해주의자들(두브로빈스키, 라이코프 등등)과 동맹을 형성하기조차 하였다. 레닌과 관련하여 핵심적인 문제는 "분파"라고 불리웠지만 독자적 정당의 모든 특징들을 가진 조직 내에서 그가 보그다노프와 상종하는 것이 가능했냐는 것이다. 만약 섁트먼이 소수파를 하나의 독립된 조직으로 보지 않는다면 레닌-보그다노프 "동맹"을 얘기하는 것은 전혀 논리에 닿지 않는다.

    그러나 예를 잘못드는 경우는 여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볼셰비키 분파-당은 당시 이미 자유부르조아지의 쁘띠부르조아 하수인임을 완전히 드러낸 멘셰비키에 대항해서 투쟁하고 있었다. 소위 "관료적 보수주의"라고 비난하는 문제보다 이 측면은 훨씬 더 심각한 측면이었다. 섁트먼은 "관료적 보수주의"를 자행하는 분파의 계급적 뿌리를 규정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레닌이 보그다노프와 체결한 것은 쁘띠부르조아 기회주의에 대항한 노동계급 경향과 종파주의적 중도주의 경향 사이의 협력관계였다. 여기서 계급적 경계는 명확하다. 이것을 "동맹"이라고 한다면 이 동맹은 정당한 것이었다.

    이후 이 "동맹"의 역사는 나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섁트먼이 인용한 바 고리끼에서 보내는 편지에서 레닌은 정치적 문제들을 순수한 철학적 문제들과 분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섁트먼은 잊어버리고 있지만 레닌의 이러한 희망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견해 차이는 철학의 고상한 문제에서 줄줄이 이어져 가장 시사적인 문제에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이 "동맹"이 볼셰비즘을 기각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즉 레닌이 완성된 강령, 올바른 방법론 , 탄탄하게 응집된 분파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분파 내에서 보그다노프 그룹은 소규모의 불안정한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다.

    섁트먼은 자기 당의 노동계급 경향에 대항하여 버넘 그리고 에이번과 동맹을 맺었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동맹 내의 세력관계는 섁트먼에게 완전히 불리하다. 에이번은 자기 분파를 소유하고 있다. 버넘은 섁트먼의 도움을 받아 볼셰비즘에 염증이 난 지식분자들을 결집하여 분파와 비슷한 것을 구성할 수 있다. 섁트먼은 독자적 강령, 독자적 방법론 , 독자적 분파 중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소수파 "강령"의 절충적 성격은 동맹 내의 모순적인 경향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 동맹이 붕괴될 경우 섁트먼은 당과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결과만을 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동맹의 붕괴는 불가피하다.

    계속해서 섁트먼은 1917년 레닌과 나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나와 레닌은 오랜 상쟁 끝에 결합했으며 따라서 당시 우리의 과거 견해차이들을 들추는 것은 올바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예는 그가 에이번에 대항해서 캐넌과 동맹할 때 이미 써먹은 바가 있으므로 그 설득력이 약간 감소되었다. 그러나 이 불쾌한 전례는 논외로 치더라도 비유는 완전히 잘못되었다. 볼셰비키당에 합류할 때 나는 레닌식 당건설 방식의 올바름을 완전히 그리고 기꺼이 인정했다. 동시에 볼셰비즘의 결연한 계급적 경향은 올바르지 못한 나의 예상을 교정시킨 후였다. 1917년 당시 내가 "연속혁명"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지 않은 이유는 이후 혁명의 전개과정에 의해서 이 문제가 올바른 것으로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공동활동의 기초는 주관적이거나 일시적인 협력관계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혁명 그 자체에 의해서 마련되었다. 이것은 탄탄한 기초이다. 더욱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맹"이 아니라 부르조아 계급과 이 계급의 쁘띠부르조아 하수인들에 대항하여 단일한 당으로 통일을 이룬 것이었다. 당내에서 레닌과 나의 10월 동맹은 봉기문제와 관련하여 동요를 보인 쁘띠부르조아 경향에 대해 투쟁하였다.

    1926년 내가 지노비에프와 동맹을 체결한 것을 섁트먼이 언급하고 있으나 이 예도 역시 피상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당시의 투쟁은 몇몇 등을 돌린 개인들의 심리적 특징인 "관료적 보수주의"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관료집단, 이 집단의 특권, 이 집단의 자의적인 당운영과 반동적인 정책에 대항한 것이었다. 동맹관계가 허용할 수 있는 차이점의 허용범위는 적의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동맹 내의 세력관계 역시 전혀 달랐다. 1923년 반대파는 나름의 강령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핵들은 섁트먼이 마치 스탈린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듯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것이 전혀 아니라 주로 노동자였다. 우리의 요구에 따라 지노비에프-카메네프 그룹은 특별 문건을 통해 1923년의 반대파는 모든 근본적인 문제들에서 올바랐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우리가 각기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견해를 같이한 것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에 통합은 결코 성사되지 못했다. 두 그룹들은 독자적인 분파로 남아있었다. 일부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1923년 반대파는 1926년 반대파에게 원칙적인 양보를 한 것이 사실이다. 나는 반대표를 던져 양보에 반대했으며 지금도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이러한 양보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은 상황은 오류였다. 그러나 대체로 공공연히 반대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우리는 비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양측은 모두 논란이 있었던 문제들에 대해서 나의 견해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1923년 반대파 내에서 1천명 중 999명 이상은 나를 지지했으며 지노비에프나 라덱을 지지하지 않았다. 두 그룹 사이의 이러한 관계 때문에 이러저러한 부분적인 오류는 있었으나 모험주의 비슷한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섁트먼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동맹을 맺은 자들 중 과거에 옳았던 자가 누가였으며 언제 어디서 옳았던가? 왜 섁트먼은 먼저 에이번을 지지하다가 캐넌을 지지했으며 이제 다시 에이번을 지지하고 있는가? 과거의 쓰디쓴 분파투쟁에 대한 섁트먼 자신의 설명은 책임있는 정치인의 것이 아니라 보모의 것이다: 캐넌은 약간 잘못했으며 섁트먼도 약간 잘못했으며 모두 다 약간 잘못했으며 이제는 우리 모두가 약간씩 옳다. 누가 어떤 점에서 잘못했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다. 과거의 정치적 궤적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어제는 평가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이라는 유기체에서 그는 떠다니는 콩팥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역사상의 예들을 찾으면서 섁트먼은 자신의 현 동맹이 실제로 닮고 있는 한가지 예는 피하고 있다. 소위 1912년 8월 동맹이 이것이다. 나는 이 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이 동맹을 만들었다. 정치적으로 나는 멘셰비키들과 모든 근본문제들에서 견해를 달리했다. 그리고 나는 초좌익 볼셰비키들인 소환파와도 동의하지 않았다. 일반적 정치경향을 놓고 보자면 나는 볼셰비키들에게 훨씬 더 가까웠다. 그러나 나는 레닌식 "조직운영"에 반대했다. 혁명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탄탄히 결집된 중앙집중주의 정당이 필수적이라는 진리를 당시 아직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의 노동계급 경향에 대항하는 온갖 잡탕들과 일시적인 동맹을 수립했다.

    8월 동맹에서 청산주의자들은 나름의 분파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소환파도 분파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고립되어 있었다. 생각이 같은 사람들은 있었으나 분파로 구성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문서들은 내가 작성했다. 이 당시 동맹이 발표한 문서들은 원칙적인 차이점들을 피하면서 "구체적인 정치문제들"에 대해 만장일치를 가장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았다. 과거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레닌은 8월 동맹에 대해서 가차없는 비판을 퍼부었으며 가장 매몰찬 타격은 나에게 가해졌다. 내가 정치적으로 멘셰비키나 소환파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한 나의 정책은 모험주의라는 것을 그는 증명했다. 이 비판은 가혹했으나 사실이었다.

    "정상을 참작하는 상황"으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나의 과업은 볼셰비키들에 대해서 우익이나 초좌익 분파들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당 전체를 단결시키는 데에 있었다. 볼셰비키들도 8월 대회에 초청받았다. 그러나 레닌이 완벽히 올바르게도 멘셰비키와 통합하는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에 나는 멘셰비키와 소환파들로 구성된 자연스럽지 못한 동맹에 소속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정상참작용 상황은 이것이었다: 진정한 혁명정당으로서 볼셰비즘이라는 현상 자체는 당시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실천에서는 볼셰비즘의 볼 자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나의 죄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의심할 여지없이 혁명적 전망을 올바르게 조망한 연속혁명론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시 특히 조직영역에서 쁘띠부르조아 혁명가의 구태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멘셰비즘에 대한 화해주의와 레닌식 중앙집중주의에 대한 불신을 질병으로 가지고 있었다. 8월 대회가 끝난 직후 8월 동맹은 그 구성부분들로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원칙적으로 뿐만 아니라 조직적으로도 동맹의 바깥에 존재하였다.

    27년 전 레닌과 똑같이 오늘 나는 섁트먼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자 한다: "동지의 동맹은 무원칙합니다." "동지의 정책은 모험주의입니다."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섁트먼이 내가 한때 내렸던 결론과 똑같은 결론을 내렸으면 하는 희망을 진심으로 털어놓고자 한다.  

     

    투쟁 중에 있는 분파 "

    1923년 반대파의 지도자" 트로츠키가 캐넌이 이끄는 관료적 분파를 지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섁트먼은 놀라움을 표시한다.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서도 섁트먼은 다시 역사적 전망의 결여를 드러내고 있다. 자신들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소련 관료집단이 볼셰비키 중앙집중주의 원칙을 활용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이 과정에서 이들은 이러한 원칙을 완전히 정반대의 것으로 변화시켰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볼셰비즘의 방법론을 가치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레닌은 당을 노동계급의 규율과 가혹한 중앙집중주의 정신으로 교육시켜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쁘띠부르조아 분파들과 파벌들로부터 수없이 공격을 받아왔다. 그러나 볼셰비키식 중앙집중주의는 심대하게 진보적인 요인이 되었으며 결국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현재 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 소수파의 투쟁은 특권 관료집단에 대한 1923년 러시아 반대파의 투쟁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이 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다만 현재 소수파의 투쟁은 볼셰비키 중앙집중주의에 대한 멘셰비키들의 투쟁과는 정말이지 크게 닮은 점이 있다.

    소수파에 의하면 캐넌과 그의 그룹은 "관료적 보수주의라고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유형의 정치적 경향" 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수적인 노동관료집단은 민족 부르조아지의 이윤을 나누어 갖는 주주인바 이들의 지배는 부르조아 국가의 직접적 내지 간접적 지원없이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통치는 비밀경찰, 군대, 법원 등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소련 관료집단이 스탈린을 지지하는 이유는 바로 그가 이들의 이해를 다른 어떤 누구보다도 잘 옹호한다는 데에 있다. 노동조합 관료들은 그린과 루이스를 지지한다. 능력있고 수완있는 관료들로서 이들의 악덕이 노동귀족의 물질적 이해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노동자당 내의 "관료적 보수주의"는 어떤 기초 위에 가능한가? 물론 물질적인 기초가 아니라 관료적 경향을 보이고 있는 인사들이 모임으로서 보수주의가 형성되었다고 섁트먼은 생각하고 있다. 이에 비해서 적대 진영인 소수파에는 개혁가, 제안가, 역동적인 정신에 충만한 인사들만이 모여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수파는 "관료적 보수주의"의 사회적 기초 즉 객관적 기초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모든 주장은 순전한 심리상태 그 자체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각이 있는 모든 동지들은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캐넌 동지가 진짜 관료적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죄를 짓는 것은 가능하다; 물론 멀리 떨어져 있는 내가 이것을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관료적 "특권들"에 대해 조금도 관심이 없는 전국위원회 다수 동지들과 당원들 다수가 그를 지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지는 캐넌 동지의 관료적 경향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이러한 경향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캐넌 동지는 자신의 개인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 결함보다 훨씬 더 중요한 다른 장점들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진지한 당원 동지들의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나도 이들의 생각에 동의한다.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자신들의 불만과 비판의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모든 정당에 수천 내지 수만건이나 존재하는 서로 연관도 없는 일화들과 사건들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 내용을 객관적으로 확증하기가 불가능하다. 소수파의 문서들이 말하고 있는 모든 이야기 속에 담긴 비판들을 무조건 인정할 의도가 나에게는 전혀 없다. 그러나 어느 한 사건에 대해서는 내가 실제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목격자이므로 내 생각을 밝혀보고자 한다. 캐넌 동지와 그의 그룹이 비판이나 검토도 없이 이행기 강령을 받아들였다고 소수파 지도자들은 피상적으로 주장한다. 이 강령을 구체적으로 작성하는 일에 대해 내가 캐넌 동지에게 보낸 1938년 4월 15일자 편지를 보자:

    "동지에게 이행기 강령 초안과 노동당에 대한 짤막한 소견을 이미 보냈습니다. 동지가 이곳 멕시코를 방문하지 않았다면 이 초안은 결코 작성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동지 여러분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들을 많이 배웠으며 이를 통해 초안의 내용이 좀더 명확하고 구체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

    당시 토론에 참여한 당사자이기에 섁트먼은 당시의 상황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

    쁘띠부르조아 서클에서는 소문, 개인적 추측, 단순한 한담거리들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을 수 없다. 당적 유대가 아니라 개인적 연분으로 묶여있으며 사건들을 계급적으로 접근하는 습관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수파의 대표들만이 나를 방문했으며 이로 인해 나는 진실의 거리에서 멀어졌다는 소문이 입과 입을 통해 퍼졌다. 그러나 동지 여러분들, 이런 황당한 소문을 믿어서는 안된다! 나는 일반적으로 저서를 쓸 때와 같은 방법으로 정치 관련 정보들을 얻는다. 정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행위는 모든 정치인에게 필수적인 부분이다. 만약 잘못된 정보를 진짜 정보와 구분할 능력이 나에게 없다면 나의 판단들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에이번 분파에 소속된 20명 이상의 동지들과 알고 지낸다. 이들 중 여러 동지들은 나의 저술작업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이들의 거의 모두는 소중한 당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쁘띠부르조아 분위기, 계급투쟁 경험의 부족, 노동계급운동과의 꼭 필요한 유대의 결여 등으로 나름의 결함들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긍정적인 자질들 덕분에 이들은 제4인터내셔널의 일부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들의 부정적인 자질들 덕분에 이들은 모든 분파들 중 가장 보수적인 분파에 속해 있다.

    "`반(反) 지성적' 태도가 당원들의 머릿속에 강제로 주입되고 있다."고 "관료적 보수주의"를 비판하는 문서가 불평하고 있다.(당내 토론집 제2권, 제6호, 1040년 1월 6일, 12쪽) 이러한 주장은 순전히 인위적이다. 문제는 노동계급 진영으로 완전히 넘어간 지식인들이 아니라 우리 당을 쁘띠부르조아 절충주의로 몰고가려는 분자들에게 있다. 이 문서는 또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반드시 건강하지는 못한 편견들에 아부하는 반(反) 뉴욕지부 선전들이 유포되고 있다." 이 문서가 말하는 편견들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마 반유태주의인 것 같다. 그러나 만약 우리 당내에 반유태주의적 또는 여타의 인종주의적 편견들이 존재한다면 이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가차없는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막연히 암시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그러나 뉴욕지부의 유태인 지식인들과 반(半) 지식인들에 대한 문제는 사회계급적 문제이지 민족적 문제가 아니다. 뉴욕에는 유태인 노동계급이 많이 존재하고 있으나 에이번 분파는 이들을 조직 기반으로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분파의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은 유태인 노동자들에게 다가가는 길을 찾을 능력이 없음을 증명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환경에 만족하고 있다.

    당이 한 시기에서 다른 시기로 이행함에 따라 과거 진보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분자들이 새로운 과업에 제때 적응하지 못하고 난관에 봉착하여 긍정적인 자질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인 자질들만을 발휘한 예가 역사에는 한 번 이상 있어왔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와 반대의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에이번 분파의 현재 역할이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 분파 내에서 섁트먼은 언론을 담당하고 버넘은 이론을 담당하고 있다. 섁트먼은 끈질기게 주장한다: "지금 진행 중인 당내 논쟁에서 `에이번 분파의 문제'를 주입하는 것이 얼마나 거짓인 지를 캐넌 동지는 알고 있다. 최소한 지난 몇 년 동안 `에이번 그룹'과 같은 문제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모든 지도급 동지들과 많은 수의 당원들 역시 마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현실을 왜곡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섁트먼 자신이라는 점을 감히 말하고자 한다. 나는 약 10년 동안 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의 관계들을 추적해왔다. 다른 무엇보다도 뉴욕지부의 구체적 계급구성과 특별한 역할이 나에게는 명확히 인식되었다. 내가 터어키의 프린키포에 있을 때에도 전국위원회에게 뉴욕의 쁘띠부르조아적이며 쓸모없는 말다툼 현장에서 잠시 벗어나 지방의 공업중심지로 당본부를 옮기라고 충고한 바 있었다. 이것을 섁트먼은 기억할지 모르겠다. 멕시코에 도착하자 나는 영어에 더 익숙해질 기회를 얻었으며 미국 동지들의 잦은 방문 덕택에 당내 그룹들의 사회계급적 구성과 정치적 심리를 좀더 생생하게 파악할 기회를 가졌다. 지난 3년간의 개인적이고도 세세한 관찰을 기초로 나는 주장하는 바이다. 에이번 분파는 "역동적"이지는 않지만 정적으로라도 계속 그 존재를 유지해왔다.

    정치적 경험을 별로 가지지 못한 에이번 분파의 동지들은 그들의 사회계급적 특성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들에 대한 그들의 접근방식에 의해 쉽게 구별된다. 이들 동지들은 언제나 자기가 소속한 분파의 존재를 공식적으로는 부인한다. 이들 중 일부가 스스로를 해체하고 당의 원류에 합류하려고 시도한 적이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이들에게 무리한 행위였으며 모든 핵심적인 문제들에서 이들은 하나의 그룹으로 당에 대항했다. 이들은 원칙적인 문제들 특히 당의 사회계급적 구성을 변화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지도적 인사들의 연합, 개인적 갈등, 그리고 일반적으로 당 "총사령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것이 바로 에이번 파벌의 특징이다. 나는 이들 많은 동지들에게 지속적으로 경고한 바 있었다. 즉 인위적으로 조성한 환경에 깊숙이 빠져들다 보면 조만간 새로운 분파적 폭발이 반드시 일어나 이들을 산산조각 낼 것이라고 말이다.

    소수파 지도자들은 캐넌 분파의 노동계급적 구성에 대해 비꼬는 듯이 그리고 폄하하여 말한다. 이들의 눈에는 이 우연적인 "사소한 일"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눈먼 쁘띠부르조아적 냉소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제2차 당대회에서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는 분열했다. 당시 많은 수의 멘셰비키 대의원들 중 노동자는 3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후 이들 3명은 모두 볼셰비키 쪽으로 넘어왔다. 이 사실을 레닌이 하나의 징후로서 대단히 중요하게 본 것을 멘셰비키들은 조소했다. 이들은 세 명의 노동자들이 "성숙"하지 못해서 볼셰비키 쪽으로 넘어갔다고 자기들 식으로 설명해버렸다. 그러나 이제 다들 알고 있듯이 레닌이야말로 올바랐다.

    우리 미국 당의 노동계급 분자들이 "정치적으로 후진적"이라면 "선진적인" 분자들의 첫 번째 임무는 노동계급 당원들의 수준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왜 소수파는 이들 노동자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는가? 왜 이 일을 "캐넌 파벌"에게 넘겼는가?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가? 소수파의 일원이 되기에 이들 노동자 당원들은 자질이 충분하지 못한가? 아니면 소수파는 노동자들에게 맞지 않는 그런 집단인가?

    당의 노동계급 분자들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멍청할 것이다. 노동자들은 점차적으로만 명확한 계급의식을 획득한다. 노동조합은 기회주의적 편향을 노동자들에게 주입할 문화적 매개물을 언제나 만들어낸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당은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당원들에게 자주 이렇게 주지시켜야 한다: 노동계급의 후진층을 교육하기 위해서 이들의 정서에 적응하는 일이 노동조합의 보수적 관료들의 정치에 영합하는 것으로 변질되어서는 안된다. 당이 새로운 발전단계에 접어들 때마다 그리고 당원의 수가 늘어나 당활동 방식이 복잡해질 때마다 새로운 가능성뿐만 아니라 새로운 위험도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가장 혁명적인 조직에서 훈련되었을 경우에도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노동자들은 당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갖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 당의 단계에서 이것은 전혀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현재 비노동계급적 소수파는 비노동계급적 청년당원들의 다수를 잡아끌면서 우리의 이론 , 우리의 강령, 우리의 전통을 수정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캐넌 파벌"과의 싸움에서 편의를 도모하려고 가볍게 저지르고 있다. 지금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아니라 바로 쁘띠부르조아 소수파 지도자들이 당을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다. 미래에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당을 등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 단호하게 쁘띠부르조아 소수파들에 대한 투쟁을 수행해야 한다.

    더욱이 노동조합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지들이 현재 저지르고 있거나 미래에 저지를 오류들은 현재 미국 노동계급이 우리 당에 가하는 압력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노동계급은 우리의 계급이다. 우리는 노동계급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압력은 동시에 우리의 주요한 역사적 임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소수파의 오류들은 다른 계급의 압력을 반영하고 있다. 이 계급과 이데올로기적으로 결렬하는 것은 미래에 있을 우리의 혁명적 성공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이다.

    청년 당원들에 대한 소수파의 논리는 철저하게 잘못되어 있다. 물론 노동계급 청년들을 획득하지 않고서는 혁명정당은 발전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현재 거의 전적으로 쁘띠부르조아 청년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는 사회민주주의적 즉 기회주의적 정치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 청년당원들의 지도자들은 의심한 여지없는 미덕과 능력들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들은 쁘띠부르조아 연합주의 정신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이 이러한 환경과 결별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노동계급 사이에서 일상적인 어려운 일들을 수행하기 위해 거창한 직책 없이 파견되지 않는다면 이들은 영원히 혁명운동에서 사라질 것이다. 다른 모든 문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청년 문제에 있어서도 섁트먼은 불행하게도 철저히 잘못된 입장을 견지해왔다.  

     

    오류는 이제 바로잡아야 한다!

    섁트먼은 나의 정치적 입장을 "캐넌 파벌"을 옹호하기 위해 동원되는 정도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오류를 통해 내가 프랑스의 "몰리니에 파벌"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철저히 잘못된 노선으로 추락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내가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강령과 무관하게 이들 개인들과 그룹들을 지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몰리니에를 예로 드는 이유는 문제를 더욱 애매하게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의도를 밝혀보겠다. 몰리니에는 우리의 강령에서 후퇴해서가 아니라 당과 자기 분파를 지탱하려는 목적으로 무원칙하게 자의적으로 모든 종류의 재정적 모험들을 감행해서 비판을 받았다. 그는 매우 열정적인 동지이며 의심할 여지없이 실제 능력들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몰리니에 뿐만 아니라 당의 이익을 위해서도 노동계급의 규율에 입각하여 그를 설득하고 재교육시킬 모든 가능성들을 타진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를 반대하는 많은 동지들이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결점들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의 장점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의 반대자들에게 조직을 섣불리 분리할 것이 아니라 그를 계속해서 시험해야 한다고 힘이 닿는 데까지 설득했다. 우리의 프랑스 지부가 불안정한 초기 단계에 있을 때 내가 몰리니에를 "옹호"했던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다.

    오류를 저지르거나 규율을 어기는 동지들에 대해서 인내심을 가지면서 혁명적 정신으로 이들을 재교육시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 방법을 나는 몰리니에에게만 적용하지 않았다. 커트 랜도, 필드, 와이스보드, 오스트리아의 프라이, 프랑스의 트렝트 등과 여타 많은 동지들에게 나는 이 방법을 구사했다. 많은 경우에 나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몇몇의 경우에 나는 소중한 동지들을 구출할 수 있었다.

    어쨌든 나는 원칙 문제에서는 몰리니에에게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가 우리의 강령이 아니라 "네 가지 구호"에 기초하여 신문을 발간할 것을 결정하고 이 계획을 독자적으로 추진하려고 했을 때 나는 그가 즉시 제명될 것을 주장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은 감추지 않겠다.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나는 다시 한번 몰리니에와 그의 그룹을 인터내셔널의 원칙 속에 시험하고 이들이 자신들의 오류를 확신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나의 시도는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러나 적절한 상황하에서는 다시 이 방법을 포기하지 않겠다. 몰리니에에 대해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인사들 중에는 베레컨과 스니블릿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제4인터내셔널과 결별한 후 다시 몰리니에와 한편이 되었다. 아주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많은 동지들은 내가 옛날 문서들을 뒤적이면서 "가망없는 동지들"에게 그렇게도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보고 동지애로 나무라곤 했다. 상황에 따라 사람은 변하는 것이며 따라서 몇몇의 심각한 오류들을 저지른다고 사람들을 "가망이 없다"고 재빨리 선언하지는 않겠다고 나는 이들에게 대답했다.

    섁트먼이 자신과 당의 일부 동지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가는 것이 명확해졌을 때 나는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기회가 닿는다면 즉시 뉴욕으로 날아가서 그와 72시간동안 연달아 토론을 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가 이런 기회를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할 수 없겠냐고 물었다. 이 편지에 대해서 섁트먼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가 결정할 문제이다. 미래에 내가 소장한 문서들을 볼 동지들이 이 경우에도 내가 "오류"를 저질렀다고 판단하고 어쩌면 몰리니에를 과도하게 "옹호"한 나의 오류와 연관시켜 나의 행동을 해석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결코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상황하에서 국제 노동계급 전위당을 조직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과업이다. 원칙을 버리면서 개개인들을 획득하려고 설치는 것은 물론 범죄행위에 해당된다. 그러나 출중하지만 오류를 범한 동지들을 다시 우리 강령 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모든 가능한 수단들을 동원하는 것을 나의 임무라고 생각해 왔으며 지금도 나의 임무로 생각하고 있다.

    섁트먼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잘못 이용한 노동조합 논쟁으로부터 나는 레닌의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섁트먼은 이 말을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오류는 작은 것으로 시작하면서 점점 커진다. 견해 차이들은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다. 모든 사람들은 가끔 사소한 부상을 입는다. 그러나 이 부상이 세균에 감염되면 치명적인 질병이 뒤따를 수 있다." 레닌은 1921년 1월 23일 이 말을 했다.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 좀더 자주 오류를 범한다. 오류를 계속 저지르고 혁명적 대의보다 더 큰 야망을 품는 것은 노동계급 혁명가의 임무가 아니다. 제 시간에 오류를 중단하는 것이 혁명가의 임무이다. 이제 섁트먼 동지는 오류를 더 이상 범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꽤 곪은 그의 긁힌 상처는 그의 몸을 썩어들어가는 화농으로 발전할 것이다.  

    1940년 1월 24일

    멕시코의 코요아칸에서

     

    [23. A Letter to Martin Abern] 마튼 에이번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그렇다면 조직이 분리되겠군" 하고 동지가 말했다는 소식을 캐넌 동지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그는 1939년 12월 28일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동지가 작성한 문서는 이미 당내에 널리 배포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소수파 지도자 동지 두 명만이 이 문서에 대해서 명확한 논평을 내렸을 뿐입니다. 에이번 동지는 이 글의 제목과 첫 몇 단락을 읽고난 후 골드먼 동지에게, `그렇다면 조직이 분리되겠군'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캐넌 동지를 믿을만한 동지로 알고 있으며 그가 한 말의 진실을 의심할 이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동지는 그의 말이 "거짓말이다"라고 말합니다. 격렬한 투쟁 과정에서 이런 종류의 오해는 어느 쪽의 악의가 없이도 아주 자주 일어나는 법입니다. 오랜 경험을 통해 나는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캐넌 동지의 말이 진실인지를 확인하려는 노력을 했느냐고 동지는 나에게 묻고 있습니다. 나는 전혀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내가 사적인 편지에서 동지의 발언을 사실로 인정하고 유포했다면 의리를 저버린 행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지가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고되었다"는 표현이 들어있는 나의 서한들을 공개했습니다. 결국 동지가 스스로 한 말을 확인하고 부인할 완전한 가능성을 열어두었습니다. 당내 토론에서는 이러한 확인 방식이 가장 좋다고 믿습니다.

    동지가 보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과거 동지들이 자행했던 많은 거짓 발언들을 나는 그동안 무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동지의 공개서한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주목할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등등. 그렇다면 "많은 거짓 발언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누가 거짓 발언을 했다는 것입니까? "다른 무엇보다도"는 또 무엇입니까? 어떤 종류의 내용을 의미합니까? 동지의 이런 표현들은 경험없는 동지들에게 일종의 애매한 암시로 이해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까? 나의 글 가운데 "많은 거짓 발언들"과 "다른 어떤 것들"이 있다면 정확하게 이 내용들을 밝히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만약 이런 거짓 발언들을 내가 하지 않았다면 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표현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많은 거짓 발언들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면 어떻게 "무시할 "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이 말은 동지의 당에 대한 무관심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다면 조직이 분리되겠군"하고 말한 부분을 동지 스스로 딱잘라 부인하니 반갑습니다. 나는 동지가 편지에서 보인 힘찬 부인 의사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동지의 부인은 공식적인 것은 아니다; 동지는 캐넌 동지가 인용한 내용을 부인하고 있다; 동지는 나와 마찬가지로 조직 분리 행위를 제4인터내셔널에 대한 비열한 배신행위라고 보고 있다.  

    1940년 1월 29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멕시코

     

    [24. Two Letters to Albert Goldman] 앨버트 골드먼 동지에게 보내는 2 통의 편지   

    골드먼 동지,

    동지의 2월 5일자 편지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에이번 동지의 조직 분리 발언을 내가 공개한 이유는 에이번 동지를 비롯한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의 명확한 발언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수파 지도자 동지들의 소위 숨겨진 의도가 아니라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등시민"에 대한 우스갯 소리를 이미 들었습니다.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에게 이렇게 묻고자 합니다: 다수파 그룹을 "캐넌 파벌" 또는 "보수적 관료들" 등으로 부른다면 소수파 동지들은 자신들을 이등시민의 지위로 격하시키려는 것인가? 모든 쁘띠부르조아 분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이들의 대단히 예민한 감성입니다. 이 점을 덧붙이고자 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섁트먼이 자신의 공개서한을 통해 나를 이등시민으로 만들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의 정신분석적 추측이 아니라 그의 사상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일련의 오류들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끝에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서로를 히스테리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분파적 히스테리를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해 대항 분파들이 아주 음험하고 기괴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인상입니다. 내가 캐넌 동지와 서한을 주고 받는 것을 음모를 숨기기 위한 위장이라고 이들이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도 기가 막혀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쁘띠부르조아 히스테리에 대한 가장 좋은 치료약은 맑스주의적 객관화 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변증법, 맑스주의 사회학, 소련의 사회 성격, 전쟁의 성격 등에 대해 토론을 진행시킬 것입니다. 조직 분리를 유도하겠다는 황당하고도 범죄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원들의 중요한 부위가 우리의 주장을 확신하여 쁘띠부르조아적 입장에서 노동계급적 입장으로 넘어오는 것을 돕기 위해서 입니다.  

    1940년 2월 10일

    동지적 애정을 보내며

    레온 트로츠키

     

    동지,

    소수파 대회는 전국 규모의 소위원회(caucus)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대회가 개최되었다고 해서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조직 분리를 위한 잘못된 길을 새로이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조직 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수파 내부에는 조직 분리 문제에 대해 두 세 가지 경향이 확실히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소수파 대회의 목적이 이러한 경향들을 통일시키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기초를 바탕으로 통일을 하겠습니까? 어쩌면 일부 지도자들은 필사적인 감정 속에 조직 분리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수파가 당의 단합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의식적으로 조직 분리 세력의 시도를 어렵게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동지가 속한 소위원회 아니면 전국위원회의 공식적 다수파 아니면 정치위원회가 당의 단합 문제만을 담은 서한을 소수파 대회에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서한에는 소련의 사회 성격이나 전쟁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소수파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포기해야 당에 남을 수 있다고 잘못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이 당과 제4인터내셔널에 대해 진정으로 헌신하며 규율을 준수할 경우 이들은 우리와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40년 2월 19일

    레온 트로츠키

     

    [25. Back to the Party!] 당으로 복귀합시다  

    동지들,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아직도 우리의 이론적 또는 정치적 주장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의 일관되지 못한 주장이 다수파 동지들의 글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이제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게릴라전으로 이행한 것 같습니다. 게릴라전은 패배한 많은 군대들의 운명입니다. 골드먼 동지는 2월 12일자 회람을 통해 소수파의 새로운 전투 방식을 적절하게 묘사했습니다. 이 새로운 방식의 가장 기묘한 예를 맥다널드 동지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자유지(紙)(Liberty) 에 기고한 글을 그는 섬세하기보다는 용감하게 공격했습니다. 이 글에서 나는 소련의 모순적 성격과 적군의 "진보적 역할 "을 분석했는데 이 내용을 그는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크론슈타트 봉기를 분석한 논리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당파평론지](Partisan Review)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최소한 부르조아 언론을 상대할 때는 내가 "실제로는" 소수파, 섁트먼 또는 자기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입장과 모순되며 스탈린주의에 투항하는 나의 선언문들은 캐넌 동지를 도우려는 목적으로 당내 토론집에만 실리고 있다는 사실 역시 새로이 발견했습니다. 맥다널드 동지의 새로운 발견들을 좀더 명확하게 표현하자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부르조아 언론에 영합하고 자유지의 독자들이 보기 좋은 글을 쓸 때는 트로츠키는 섁트먼과 똑같이 그리고 자기와 비슷한 입장을 가진 글을 쓴다; 그러나 당에 대해서 글을 쓸 때에는 지독하게 소수파를 비판한다. 당파평론지는 정신분석에 대해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맥더날드 동지가 자신에 대해 정신분석을 해보면 아마 자기의 무의식을 발견했다고 인정할 것입니다.

    소련의 모순적 성격 그리고 적군의 모순적 역할을 소수파 동지들이 모든 글과 연설에서 분석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이들이 이 문제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이 결과를 모든 경우에 올바르게 적용할 것을 요구할 뿐입니다. 자유지에 실린 나의 글은 소련의 사회 성격이 아니라 스탈린의 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익명의 글이 멕시코의 부르조아 언론에 실렸습니다. 이 글은 내가 스탈린의 대외정책을 승인하고 있으며 스탈린과 화해를 추구하고 있다고 "트로츠키 측근 소식통들"을 인용하며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들이 미국 언론에도 유포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스탈린주의에 투항했다고 맥다널드 부류들이 끔찍하게 심각한 비난을 가했을 것이고 이 내용을 멕시코 언론이 나름의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세계 부르조아 언론이 당내 토론을 악용하는 사례를 막기 위해서 나는 국제정치에서 스탈린의 역할을 폭로하는 데 초점을 맞춘 글을 자유지에 실었던 것입니다. 이 글은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해 사회학적 분석을 전혀 가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에 당시 좀더 시급하다고 생각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언제나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순간에 필요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아마 이 글의 내용이 소수파의 주장과 일치하는 부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파의 주장이라는 것도 실제로는 맥다널드 동지가 등장하기 훨씬 전에 우리가 골백번이나 주장한 내용의 복사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좀더 심각한 문제들을 다루어 봅시다. 나에게 보낸 에이번 동지의 편지는 조직을 분리하겠다는 의지를 아주 확실하게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직을 분리하겠다는 그의 근거는 정말이지 한심하면서 동시에 경악스럽습니다. 이 표현은 그대로 나의 감정을 가장 누그러뜨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캐넌 파벌"이 당대회에서 다수파가 된다면 에이번과 그의 동료들은 "이등"시민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에이번은 와이스보드, 피일드, 오울러 등과 같이 일등시민들 가운데 일등시민이 되어 자기 왕국을 갖기를 더욱더 원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당내에서 일등 이등 "시민들"을 결정할 수 있습니까? 당만이 이것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당이 어떻게 이런 결정들을 할 수 있느냐고요?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토론을 누가 주도했습니까? 에이번과 그의 부관들이 했습니다. 이 동지들이 글이나 말을 제한당한 적이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이번의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당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당과 제4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신망을 잃었습니다. 이들이 소중한 동지들이란 점에서 이러한 현상은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동지들은 이제 당활동을 열심히 진지하게 수행하는 것을 통해서만 잃었던 신망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간, 인내심, 확고한 의지 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제4인터내셔널의 원칙들을 가지고서 당을 설득하는 작업에 대해 에이번은 희망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따라서 조직을 분리하려는 경향은 일종의 조직 이탈행위가 됩니다. 에이번 동지의 논리가 너무도 한심스러운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또한 경악스럽기까지 합니다! 노동계급적 다수파에 대한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의 경멸감을 기저에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수파는 아주 능력있는 집필가, 연설가, 조직가들이며 다수파는 소양도 없고 소수파를 액면 그대로 평가할 능력도 없다. 그러니 고상한 인간들로 새로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 더 낫다!

    제3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우리 좌익반대파는 하나의 분파로 남아있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스탈린주의 다수파는 우리를 박해했고 합법적 표현수단들을 박탈했습니다. 가장 지독한 비방을 자행했으며 소련 국내에서는 우리 동지들을 체포하고 총살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자 당원들과 분리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일말의 가능성이 존재할 때까지 우리는 분파임을 자부했습니다. 제3인터내셔널의 부패한 전체주의적 관료집단의 모든 만행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제4인터내셔널이야말로 전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정직한 혁명조직입니다. 우리 당"기구" 는 강제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완벽한 당내 민주주의를 통해 모든 문제가 결정되며 모든 동지들이 평가됩니다. 다수파 동지들이 오류를 범한다면 소수파 동지들이 점진적으로 이들을 올바른 길로 교육할 수 있습니다. 다음 당대회 이전에는 안되더라도 그 이후에는 가능합니다. 소수파는 새 당원들을 조직하여 이후 다수파가 될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에 대한 약간의 믿음, 노동자들이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에게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현재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스스로가 구축한 환경 속에서 히스테리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이들은 부르조아 여론에는 영합하면서 제4인터내셔널의 발전에는 영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인내력 부족은 계급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즉 노동자에 대한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의 경멸감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에이번 동지가 표현한 조직 분리 경향이 너무도 경악스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에이번 동지는 증오심을 가지고 사태를 평가하고 미래를 조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 증오심은 정치에서는 혐오스러운 감정입니다. 에이번 동지의 태도와 그의 조직 분리 움직임은 소수파의 건전한 동지들 모두에게 혐오감만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동지들, 당으로 복귀합시다! 에이번 동지가 가리키는 길은 막다른 골목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4인터내셔널 이외의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1940년 2월 21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멕시코

     

    [26. "Science and Style"] " 과학과 문체 "  

    동지들,

    버넘 동지의 글 "과학과 문체"를 받았습니다. 결국 곪은 상처가 터지고 말았군요. 이 글은 우리에게 중요한 정치적 이익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버넘은 약간 "현대화된" 예들을 들면서 40년도 더 전에 러시아에서 스트루베가 그리고 더 큰 규모로 75년 전에 뒤링이 독일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바를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글은 미국 "급진파"의 이론적 후진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과학적" 관점으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문체"에 관한한 나는 이스트먼의 문체를 더 좋아한다고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이 글은 이론의 측면에서는 전혀 재미가 없습니다: 버넘 교수가 1천1번째로 변증법을 반박했지만 이것은 과거의 반박들과 비교해서 가치있는 구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이 글은 논란의 여지없이 중요합니다. 소수파에게 이론적 영감을 제공해주는 버넘이 에이번의 과거 동료였던 마스티만큼이나 과학적 사회주의와 멀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섁트먼은 보그다노프의 철학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보그다노프는 볼셰비즘과 명확히 결별한 이후에도 이 글의 철학적 수준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을 보였습니다. 따라서 이 글이 보그다노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나처럼 당은 에이번과 섁트먼 동지에게 이렇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버넘의 "과학"과 "문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핀란드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일회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건들의 진정한 동인들을 드러내는 국제적 상황의 변화는 즉시 이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온갖 편향들을 반박할 것 입니다. 그러나 이제 "과학과 문체"가 등장한 이상 에이번과 섁트먼 동지는 이 불쌍한 글 자체가 아니라 과학, 맑스주의, 정치, "도덕" 등과 관련된 버넘의 사상 전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책임을 질 수 있습니까? 조직 분리를 준비하고 있는 동지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즉 사상 전반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한 명의 "지도자"의 이름과 자신들이 단 일주일 또는 핀란드전쟁 기간 동안만이 아니라 수년 동안 연상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종기는 이제 물러 터졌습니다. 핀란드와 캐넌 동지에 대해서만 약간 토론하고 싶다는 말을 에이번과 섁트먼 동지는 더 이상 반복할 수 없습니다. 이 동지들은 맑스주의와 제4인터내셔널을 가지고 더 이상 숨바꼭질을 할 수 없습니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버넘이 "반동적"이라고 선언하는 맑스, 엥겔스, 프란츠 메링,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의 전통을 계승할 것입니까 아니면 전(前) 맑스주의적 쁘띠부르조아 사회주의의 최신판인 버넘의 사상을 받아들일 것입니까?

    이러한 수정주의가 과거에 정치적으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부르조아 체제가 숨이 넘어가는 고통을 겪고 있는 시대에 버넘주의의 정치적 결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욱 직접적이며 반혁명적일 것입니다. 에이번 동지, 섁트먼 동지, 동지들은 발언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견해를 밝히십시오!  

    1940년 2월 23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멕시코    

     

    [27. A Letter to James Cannon] 제임스 캐넌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동지의 2월 20일자 편지에 대한 답장입니다. 소수파 대회는 이제 끝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지는 편지에서 구체적인 전술문제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동지의 즉각적인 전술은 최소한 51%는 이 대회의 결과에 달려있다고 믿습니다.

    소수파 전원이 조직 분리를 준비하고 있으며 단 한 명도 우리 쪽으로 획득할 수 없을 것이라고 동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전제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소수파 동지들이 클리블런드 대회를 소집하기 전 이미 우리의 제의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때 노선을 급격히 전환시켜서 화해 조치들을 더욱 열정적으로 펼 필요가 있었습니다. 조직 분리를 찬성하는 여론에 대비하여 새로운 인터내셔널 한 호를 출간할 필요가 있다고 동지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는 동지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수파 대회는 2월 24 25일에 열렸으며 당대회는 4월초까지는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화해를 제의하고 소수파의 조직 분리 의사를 비난하고 새로운 인터내셔널 새로운 호를 발간할 시간을 동지는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당의 단합을 위해 다수파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습니다. 이 사실을 제4인터내셔널 다른 지부들에게 알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야 합니다. 국제집행위원회 소집을 우리 3명 모두가 제안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대단히 중요한 기구의 모든 구성원들을 시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수파 동지들 다수가 드러내고 있는 조급함을 아주 잘 이해합니다. 이 조급함은 아주 빈번하게 이론적 무관심과도 연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의 사태는 국제적으로 제4인터내셔널 전체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옳아도 주관적 평가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객관적 사실에도 근거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이 점을 다수파 동지들은 상기해야 합니다.  

    1940년 2월 27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28. A Letter to Joseph Hansen] 조지프 핸슨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스페인 혁명과 관련하여 내가 인용한 편지를 섁트먼은 자신이 아니라 캐넌과 카터가 썼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동지들의 서명을 숨기거나 왜곡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의 경우 섁트먼 동지의 서명만이 있습니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수파 동지들도 섁트먼과 같은 오류를 저지를 수 있었지만 이런 오류들을 체계적으로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오류들을 기반으로 분파의 강령을 삼지도 않았습니다. 나의 글은 이것만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전부입니다.

    에이번과 버넘은 내가 자신들의 말을 미리 "확인"도 하지않고 인용한다고 화를 내고 있습니다. 이 선언들을 모두 공개하여 이 발언들을 자기들 입에서 나온 것으로 완벽히 확인하거나 부인하는 상황을 이들은 싫어하고 있습니다. 이 대신 5명에서 7명 정도의 제 3자와 한두 명의 속기사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이곳에서 구성하여 그쪽으로 보냈으면 하는 것이 이들의 의도인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이렇게 도덕적인 소동을 일으키고 있을까요? 여러 번에 걸쳐 버넘은 변증법을 종교와 동일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특별한 경우와 관련하여 나에게 보고된 내용을 나는 그의 발언으로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인용된 문장대로는 말하지 않았다고 발뺌하고 있습니다. 끔찍한 일이군요! 이것이 볼셰비키의 냉소주의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에이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조직 분리를 준비하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골드먼에게는이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군요. 이것은 비방이요, 거짓입니다!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혼란에 처한 쁘띠부르조아들은 (과학적이 아닌) 도덕적인 고뇌에 빠져듭니다. 도덕 문제를 다룬 나의 글은 이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바 입니다. 그런데 우리 당 내부에도 이와 똑같은 현상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들 새로운 도덕론자들은 이스트먼에 대해서 그리고 레닌의 유언장에 대해서 내가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이야말로 경멸할만한 위선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시 좌익반대파는 공산당의 때이른 조직 분리를 피하기 위해 모든 공개적인 활동을 중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이스트먼은 레닌의 유언장을 자기 맘대로 공개했던 것입니다. 그 유명한 영러 노동조합 위원회(Anglo-Russian Trade Union Committee), 중국 혁명, 그리고 심지어는 지노비에프 분파의 탄생 등 주요한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에 이 짓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좌익반대파는 시간을 벌기 위해 전술을 구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스탈린, 지노비에프, 카메네프의 삼두체제는 반대파 당원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스트먼이 공개한 레닌의 유언장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이들은 최후통첩을 나에게 보냈습니다: 삼두체제가 작성한 선언문에 서명을 하지 않으면 즉시 이 문제에 대해서 당내투쟁을 전개하겠다. 당시 그 문제는 절대적으로 반대파에게 불리했습니다. 따라서 이 최후통첩을 받아들여 정치국이 작성한 선언문에 내가 서명하기로 반대파 중앙이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필요를 추상적인 도덕적 문제로 변모시키는 것은 쁘띠부르조아 사기꾼들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은 망해도 좋으니 정의여 영원하라! 기꺼이 이렇게 선언하면서 자기들은 맘대로 하고 싶은 짓을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기들이 혁명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과 비교하면 멘셰비키들은 진짜 영웅들이었습니다.  

    1940년 2월 29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29. Three Letters to Farrell Dobbs] 패럴 답스 동지에게 보내는 3 통의 편지  

    동지,

    소수파의 열병에 걸린 듯한 급격한 정치적 진화과정을 이곳에서 제대로 파악하기는 당연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소수파 동지들은 뒤에 퇴로로 남겨진 다리들을 모두 서둘러 불태우고 배수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처럼 느껴집니다. 버넘의 글 "과학과 문체"는 예상 외의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섁트먼, 에이번, 그리고 그 밖의 동지들이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현상은 대단히 실망스러울 뿐입니다. 이것은 이론적,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당의 단합을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판단하기로는 이들은 당의 단합이라는 미명 하에 조직을 분리하고자 합니다. 섁트먼은 "역사적 전례들"을 찾고 있습니다. 아니 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발명하고 있습니다. 볼셰비키당 내부에서 좌익반대파는 독자적 신문을 발행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당은 수십만의 당원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당내 토론은 이들 수십만의 당원들을 설득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토론을 당지도부 내로 한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당의 최종 결정은 두 소규모 그룹이 아니라 수십만의 당원들에게 달려있었습니다. 이 사실때문에 다수파와 소수파 신문이 공존했더라도 그 위험성이 적었습니다. 현재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비교적 적은 수의 당원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당내 토론은 언제나 풍부함을 넘어설 정도로 활발했습니다. 최소한 다음 시기까지 서로의 이견은 명확히 확인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수파가 독자적으로 신문이나 잡지를 발행하는 것은 당원 설득용이 아니라 당 바깥에서 다수파를 깍아내리는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회주의노동자당과 같은 혁명적 선전조직의 동질성과 응집력은 대중정당의 경우보다 더 탄탄해야 합니다. 같은 당에 속한 두 개의 독자 조직이 다른 이론 , 다른 강령, 다른 구호, 다른 조직 원칙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입니다. 이 상황을 숨기기 위해 완전히 거짓으로 당의 단합을 외치는 것을 제4인터내셔널은 인정해서도 안되고 인정할 수도 없다고 동지는 주장합니다. 동의합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공개적인 조직 분리가 위선적인 단합보다는 천배나 더 바람직할 것입니다.

    또한 한 나라에 두 조직을 둔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소수파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상적 상황은 두 경우에만 일시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두 조직 모두 또는 한 조직의 정치적 성격이 명확하지 않아서 이 문제를 제4인터내셔널이 결정할 시간이 필요한 경우가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노동자-농민 사회당(PSOP)에 대한 입당전술과 같은 사안처럼 이견이 아주 날카롭고 제한적으로 존재했을 경우 두 조직의 존재를 인정한 경우가 두 번째입니다. 그러나 현재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상황은 이 두 경우와 완전히 다릅니다. 진지한 전통을 가진 통일된 정당이었다가 이제는 두 분파가 서로 투쟁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중 한 분파는 계급적 구성과 외부 압력 때문에 몇 달동안 우리의 이론 , 우리의 강령, 우리의 정치, 우리의 조직방식에 대해 화해할 수 없이 대립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만약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따라 함께 활동할 것을 두 분파 모두 동의할 경우 공동의 실천을 통해 반대 분파의 최상 분자들을 설득하여 획득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소수파가 독자적인 출판물을 발행하는 독자 조직이 될 경우 버넘의 노선만이 지배할 것입니다. 이럴 경우 제4인터내셔널은 이러한 조직의 불가피한 퇴보를 노동자들에게 숨기면서 이 조직에게 자신의 명함을 빌려줄 이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이것이 나의 의견입니다. 차라리 소수파가 완전히 딴 살림을 차리도록 강제한 후 공개적으로 대중에게 가장 날카로운 정도로 경고하는 것이 제4인터내셔널에게 이익이 됩니다.

    따라서 당대회는 소수파에게 명확한 선택을 요구할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소수파가 당 내부에서 중대한 활동을 수행할 권리를 보장받고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기초하여 진정한 당내 단합을 도모하던가 노동계급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이며 명확한 결별을 하던가 양자택일 하도록 해야합니다. 이 결정은 오래 전에 국제집행위원회가 내렸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기구는 현재 존재하지 않습니다.  

    1940년 3월 4일

    레온 트로츠키

     

    추신 : 소수파의 클리블런드 대회가 채택한 당의 단합 관련 결의문을 지금 받았습니다. 소수파의 일반당원들은 조직 분리를 원치 않는 것 같습니다.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정치활동이 아니라 순수한 문필활동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당원들이 조직 분리에 동참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당의 단합에 대한 결의문이라는 이름으로 당의 분리에 대한 결의문을 제출했습니다. 결의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볼셰비키당의 소수 분파들은 독자적인 정치신문을 발행했다." 언제 그랬다는 것입니까? 무슨 신문말입니까?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조직 분리의 의도를 위장하기 위해 추종당원들이 오류를 범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소수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글솜씨에만 모든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신문이 다수파의 신문보다 월등할 것이라고 서로 확신시키고 있습니다. 쁘띠부르조아 분파로서 지식인과 능력있는 문필가들을 더 많이 보유했던 러시아 멘셰비키들도 언제나 이런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희망은 모두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유창한 문필력은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충분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화강암처럼 탄탄한 이론적 기반, 과학적 강령, 정치적 사고의 일관성, 확고한 조직원칙 등이 있어야 합니다. 소수파는 이런 것들을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혀 반대되는 특징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내가 동지의 견해에 완전히 동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외부세계에 버넘의 이론 , 섁트먼의 정치노선 , 에이번의 조직방식을 제시하려거든 당과 제4인터내셔널이 책임지지 않도록 독자적인 이름을 내걸어야 합니다.    

     

    동지,

    이 편지를 받을 때에는 당대회가 진행 중일 것이며 조직 분리가 불가피한 것인지를 동지가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럴 경우 에이번 동지 문제는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소수파가 기존의 입장에서 후퇴할 경우에 대비하여 전에 했던 제안들을 다시 주장하겠습니다. 전국위원회의 토론과 결정사항에 대한 비밀들을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며 지금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도 아닙니다. 당원들의 약 40%는 에이번이 가장 훌륭한 조직가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 소수파가 당에 남아 있게 될 경우 에이번이 자신의 월등한 조직능력을 증명하거나 스스로 타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전국위원회 내부사항은 전국위원회 전체나 이 위원회 산하 정치위원회 또는 서기국만이 공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임 전국위원회 첫 회의는 이러한 내용을 우선 결정해야 합니다. 한편 서기국은 비밀과 관련된 조항들을 당헌에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조치에도 불구하고 비밀이 누설될 경우 공식적으로 조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에이번이 누설자라면 공개적인 경고조치를 받아야 합니다. 그가 다른 사항을 위반하면 서기국에서 축출되어야 합니다. 일시적인 결점들이 있더라도 이러한 조치들은 뉴욕 지부의 조직가인 에이번을 서기국의 통제 바깥에 두는 것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더없이 유리합니다.

    동지가 현재 서기국의 구성인사들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조직 분리가 뒤따를 경우 아마 가장 훌륭한 서기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파가 당에 남아있을 경우는 다수파 동지들만이 서기국을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5명의 서기국 국원 가운데 3명은 다수파 2명은 소수파를 대표하게 될 것입니다.

    소수파가 조직 분리를 망설일 경우 비공식적으로 이들이 다음 사항들을 알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섁트먼은 정치위원회 뿐만 아니라 편집진에도 배치할 의향이 있다; 심지어는 에이번을 서기국에 포함시킬 의향도 있다; 이와 같은 수준의 다른 조치를 취할 용의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소수파가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되는 것만은 인정할 수 없다.  

    * * *

    국제집행위원회 위원인 르브렁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이 동지는 참 기이합니다! 자본주의 체제가 숨이 넘어가고 있으며 전쟁이 발발했으며 곧 조직이 불법화될 상황에서 볼셰비키당의 집중주의가 포기되고 무제한적인 민주주의가 시행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뒤죽박죽입니다! 그러나 이런 동지들의 민주주의란 순전히 개인적 의미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겠다. 르브렁과 잔슨은 특정 원칙에 입각해서 그리고 특정 조직의 대표들로서 국제집행위원회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동지는 원칙을 버리고 자기들이 속한 조직을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이 "민주주의자들"은 집단적 규율을 전혀 도외시하는 완전한 보헤미안(Bohemian)으로 행동했습니다. 국제대회가 열릴 경우 이 동지들은 가장 가혹한 비판을 받으며 직위에서 해제될 것입니다. 이 동지들도 이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들은 민주주의라는 미명을 들먹이며 자신들이 제거될 수 없는 원로원 의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인들의 말에 의하면 전시에는 전시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것은 제4인터내셔널의 지도적 기구를 각 지부들의 실제 세력관계에 맞게 반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거될 수 없는 원로원 의원들의 허세보다도 이 경우 더 많은 민주주의가 존재합니다. 이 문제가 논의에 오를 경우 이 편지의 내용을 르브렁의 편지에 대한 나의 답장으로 인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40년 4월 4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동지,

    당대회에 대한 동지와 핸슨 동지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판단해 보건데 당의 단합을 위해 동지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이런 조건 하에서도 소수파가 조직을 분리한다면 모든 노동자들은 이들이 얼마나 볼셰비즘의 원칙에서 멀어져 있으며 당내 노동계급 다수파에 대해 얼마나 적대적인 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동지들이 내린 결정의 세세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더 많은 정보가 입수 되는대로 좀더 구체적으로 판단할 것입니다.  

    상징 논리학(symbolic logic), 버트런드 러쎌 등의 논리에 대해 버넘이 쓴 논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글을 걸런드가 썼습니다. 이 글에 관심을 갖기를 권합니다. 이 글은 매우 날카롭습니다. 소수파가 당내에 남아있고 버넘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편집진에 유임될 경우 이 글은 "우호적" 표현들을 사용하여 아마 다시 집필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징논리학에 대한 논지는 아주 진지하고 훌륭합니다. 특히 미국 독자들에게는 아주 유용하리라 생각됩니다. 웨버 동지 역시 자신의 마지막 논문의 중요한 부분을 이 주제에 할애했습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실리기 위해 이 부분을 그가 독립된 글로 다시 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옹호하는 이론적 캠페인을 이제 체계적으로 진지하게 계속해야 합니다.  

    캐넌의 팜플렛 "노동계급 정당을 향한 투쟁"은 아주 훌륭합니다. 진정 노동자 지도자다운 글입니다. 그간의 논쟁은 이 글보다 더 수준높은 글을 생산하지 못했어도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었습니다.  

    1940년 4월 16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30. Petty-Bourgeois Moralists and the Proletarian Party] 쁘띠부르조아 도덕론자들과 노동계급 정당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의 토론은 철저했으며 민주적이었다.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충만한 가운데 당대회는 준비되었다. 소수파는 당대회에 참여함으로써 이 대회의 정통성과 권위를 인정하였다. 소수파가 당대회 이후 계속해서 자신의 견해를 펼 수 있도록 다수파는 모든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소수파는 당과 독자적으로 대중에게 호소할 수 있는 자유를 요구하였다. 다수파는 당연히 말도 안되는 이 요구를 거부하였다. 한편 당이 모르게 소수파는 수상한 음모를 멋대로 꾸미더니 결국 당과 제4인터내셔널 전체의 노력으로 발간되었던 기관지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전용하였다. 더욱이 기관지 편집진 5명 가운데 2명을 다수파는 소수파에게 할당하기로 동의한 바 있었다. 그러나 지식인 "귀족"들이 노동자당의 소수파로 머물 수 있겠는가? (버넘) 교수를 노동자와 같이 취급하는 것이 결국 "관료적 보수주의" 아니던가!

    나에 대한 최근의 반론에서 버넘은 사회주의가 "도덕적 이상(moral ideal)"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물론 이것은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19세기 초 도덕은 "진정한 독일사회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활동 초기부터 이 경향을 비판하였다.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혁명당은 유물론적 사회주의에 대항하여 "도덕적 이상"을 내세웠다. 도덕을 등에 업은 자들이 정치판에서는 흔한 사기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유감스럽게도 입증되었다. 1917년 이들은 부르조아와 외부 제국주의 세력의 손에 노동자들을 완전히 팔아넘겼다.

    쁘띠부르조아 교수나 신문쟁이가 고고한 도덕 기준을 말하기 시작하면 돈지갑을 잘 간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오랜 정치경험이 나에게 가르쳐준 바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 현상이 일어났다. "도덕적 이상"의 미명 하에 쁘띠부르조아 지식인이 이론지라는 노동자당의 지갑을 턴 것이다. 이들 발명가, 도덕론자, 민주주의 옹호자들의 조직방식의 아주 조그만 실제 예를 여기서 엿볼 수 있다.

    "먹물" 쁘띠부르조아에게 당내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자신이 원하는대로 말하고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체제가 바로 이것이다. "먹물" 쁘띠부르조아에게 "관료주의"란 무엇인가? 노동자의 다수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결정과 규율을 강제하는 체제가 바로 이것이다. 노동자 여러분, 이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쁘띠부르조아 소수파는 혁명적 맑스주의에 대항하여 노동계급 다수파로부터 조직을 분리해 나갔다. 버넘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자신의 벌레먹은 "과학"과 합치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섁트먼은 혁명적 맑스주의가 "실제 과업"의 측면에서 보면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이 두 신사의 반맑스주의 동맹에 에이번은 자신이 간수하고 있던 조그마한 둥지를 서둘러 결합시켰다. 이제 이 신사양반들은 당으로부터 훔친 잡지를 "혁명적 맑스주의" 기관지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것이 이데올로기 약장수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독자들은 이 편집자들에게 자신들의 유일한 강령적 작업 즉 버넘의 "과학과 문체"를 출판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만약 이들이 현란한 상표로 엉터리 상품을 판매하는 돌팔이를 닮을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면 스스로이 글을 출판한 의무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은 이 글에서 도대체 어떤 종류의 "혁명적 맑스주의"가 깃들어 있는지를 스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신사양반들은 감히 이 짓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버넘은 자신의 너무도 노골적인 글과 결의문들을 자기 가방 속에 감추는 일에 능하다. 섁트먼은 주변머리가 없어서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옹호하는 변호사 역을 자청해왔다.

    훔친 기관지의 맨 첫 번째 "강령적" 글들은 이 새로운 반맑스주의 집단의 경망스러움과 공허함을 이제 완전히 드러내고 있다. 이 집단은 "제3진영(Third Camp)"이라는 이름을 달고 등장하고 있다. 이 새로운 이름의 정체는 무엇인가? 자본주의 진영과 노동계급 진영이 있다. 그렇다면 쁘띠부르조아들의 안식처인 "제3진영" 이 존재하는가? 논리를 보건데 제3진영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쁘띠부르조아들은 자기 "진영"을 현란한 말로 치장하고 있다. 이제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프랑스와 영국이 한 진영을 그리고 히틀러와 스탈린이 또 다른 진영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섁트먼을 동반한 버넘의 제3진영이 있다. 이들에게 제4인터내셔널은 히틀러 진영에 속해 있다.(스탈린은 이것을 이미 오래 전에 발견했었다.) 그래서 새로운 위대한 구호가 등장한다: 운명의 장난에 고통받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혼란된 평화 애호가들이여, "제3" 진영의 깃발 아래 모이시오!

    그러나 정말 큰 문제가 있다. 서로 싸우고 있는 제1진영과 제2진영은 부르조아 세계를 전부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 중립 내지 반중립 국가들은 어디에 속하는가? 미국은? 이탈리아와 일본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인도는? 중국은? 중국과 인도의 혁명적 노동자들이 아니라 피억압국인 중국과 인도 말이다. 학교 아동에게나 걸맞는 3 진영 이론은 아주 사소한 것 즉 인류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식민지 세계 를 빠뜨리고 있다!

    인도는 영국 편에 서서 제국주의 전쟁에 가담하고 있다. 인도의 볼셰비키주의자들이 아니라 인도에 대해서 가져야할 우리의 입장은 영국에 대한 입장과 같아야 하는가? 섁트먼과 버넘 외에 두 개의 제국주의 진영만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면 어디에 인도를 포함시켜야 하는가? 인도가 대영제국의 긴요한 일부이고 제국주의 전쟁에 가담하고 있더라도 그리고 간디를 비롯한 다른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배신적인 정책이 존재하더라도 인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영국에 대한 입장과 전혀 다르다. 이것이 맑스주의자가 해야할 말이다. 우리는 영국에 대항하여 인도를 옹호한다. 그렇다면 비록 스탈린이 히틀러와 동맹을 맺고 있을 지라도 소련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독일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왜 다를 수가 없는가? 해체할 가능성 밖에 남아있지 않은 반동적 사회형태에 비해 발전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더 진보적 사회형태를 왜 옹호할 수 없는가? 우리는 후자를 옹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옹호해야만 한다! 훔친 기관지의 이론가들은 계급적 분석을 기계적 이론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 대체품은 사이비 균형감각으로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제국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대단한 욕을 해대며 나찌에 굴복하고 있는 자신들의 행태를 위장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섁트먼과 그의 동료들은 "제3진영" 의 허풍쟁이 말로서 미국 쁘띠부르조아 여론에 대한 자신들의 투항을 위장하고 있다. 마치 제3진영이 쁘띠부르조아, 노동조합, 인도, 소련 등에 대해서 올바른 정책을 세울 의무가 없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제3진영" 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당, 클럽, 잃어버린 희망의 동맹, "인민전선 ", 이들 중 도대체 어느 것인가?

    며칠 전만 해도 섁트먼은 언론에 자신을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소개했다. 만약에 이것이 트로츠키주의라면 최소한 나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다. 버넘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섁트먼의 생각과 나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 나는 적극적으로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협력관계를 맺어왔다. 그리고 이론에 대한 섁트먼의 경망스러운 태도, 허세나 부리는 쁘띠부르조아 현학자 버넘에 대한 그의 무원칙한 영합에 대해 편지들을 보내 항의했었다. 그러나 당시 버넘과 섁트먼은 모두 당과 제4인터내셔널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압력은 이들을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만들어 놓았다. 이들이 편집한 잡지에 대한 나의 태도는 다른 모든 쁘띠부르조아 맑스주의 위조품들에 대한 나의 태도와 다를 수 없다. 그들의 "조직방식"이나 정치적 "도덕"은 나에게 경멸감을 일으킬 뿐이다.

    노동계급의 적들이 의식적으로 섁트먼을 조종하여 해당행위를 사주했더라도 그의 행위는 그간의 실제 행위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반맑스주의자들과 연합하여 맑스주의에 대항했다. 그는 노동자들에 대항해서 쁘띠부르조아들이 뭉쳐 함께 분파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당내 민주주의를 활용하기를 거부하였으며 다수의 노동계급 당원들을 설득하는 정직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세계대전의 상황 속에서 조직 분리를 획책했다. 이 모든 일들을 마무리짓기 위해 그는 이 조직 분리에 치사하고 더러운 스캔들의 베일을 덮어 우리의 적들이 우리를 공격할 빌미들을 제공하였다. "민주주의자들"이란 바로 이런 작자들이다! 그들의 "도덕"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

    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소용없을 것이다. 이들은 파산했다. 불안정한 지식인들의 배신행위와 이들의 민주주의자 사촌들의 값싼 빈정거림에도 불구하고 제4인터내셔널은 앞으로 전진할 것이다. 그리고 당의 성격, 당 강령에 대한 충성심, 혁명적 규율 등의 의미를 이해할 능력이 있는 노동계급 혁명가들 가운데 진정으로 선발된 자들을 결집하고 교육할 것이다. 선진 노동자 여러분! 쁘띠부르조아 "제3진영" 에 대해서 단 한푼어치의 신뢰도 주지맙시다!  

    1940년 4월 23일

     

    [31. Balance Sheet of the Finnish Events] 핀란드 사태에 대한 대차대조표  

    이들은 예상할 수 없었다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 체결된 불가침조약을 "우리가" 이미 예상했었다고 섁트먼과 버넘은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련군의 동부 폴란드 점령은? 핀란드 침략은? 아니다. "우리는" 이 사건들을 예상할 수 없었다. 개연성도 전혀 없고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이 사건들이야말로 우리 정치노선의 완전한 대변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고 섁트먼, 버넘 등은 주장한다. 히틀러와 부활절 초코렛 과자를 만들기 위해 스탈린이 그와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었다는 인상을 받고 이들은 고민에 빠졌다. 이들은 이 동맹을 "예상했다". (언제? 어디서?) 그러나 이 동맹의 이유와 목적은 예상할 수 없었다.

    노동자국가는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끼인 채 어느 한 쪽에 대항하여 어느 한 쪽과 조약들을 체결할 권리를 전술로서 행사할 수 있다. 이들은 이 사실을 인정한다. 당연히 이 조약들은 노동자국가가 외부의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 경제적 전략적 고지를 점령하고 상황이 허락한다면 자체 기반을 확대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퇴보한 노동자국가는 나름의 관료적 방식으로 이러한 목적들을 달성하려고 시도하며 이러한 시도들은 언제나 세계노동계급의 이해와 모순을 일으킨다. 그러나 히틀러와 맺은 동맹으로부터 될 수 있으면 많은 것을 얻으려는 소련의 시도에 대해서 그렇게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의외의 측면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의 운수없는 정치가들인 섁트먼과 버넘이 "이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하나의 문제를 끝까지 철저하게 사고하지 않았다는 것 뿐이다. 1939년 여름 영불 합동 대표단과 질질 끈 협상 과정에서 소련은 공개적으로 발트해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이 요구를 거절하자 스탈린은 협상을 중단하였다. 히틀러와 합의를 볼 경우 스탈린이 최소한 발트해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 사건을 통해 명백해졌다. 정치적으로 성숙된 사람들은 바로 이 관점에서 문제를 접근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이렇게 물었다: 스탈린은 이 과제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그가 군사력에 의존할까? 등등. 그러나 사건들의 이후 전개과정은 스탈린보다는 히틀러에게 훨씬 더 많이 달려 있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구체적인 사건들은 예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실제 사건들의 전개방향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예상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퇴보한 노동자국가였기 때문에 소련은 제2차 제국주의 세계전쟁의 전야에 대단히 국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히틀러와 맺은 스탈린의 조약은 독일의 공격으로부터 소련을 지키고 일반적으로 소련이 전쟁에 끌려들어가지 않도록 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폴란드를 점령하는 동안 히틀러는 자신의 동쪽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반면 히틀러의 허가를 받고 스탈린은 동부 폴란드를 침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의 서부 국경을 히틀러의 공격에 대비하여 약간이나마 보충적으로 튼튼히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일련의 사건들의 결과 소련은 독일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로 인해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로부터 더욱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되었으며 히틀러에 대한 스탈린의 종속은 크게 증대되었다.

    폴란드 분할 사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연장되어 진행되었다. 히틀러는 그의 "친구" 스탈린에게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점령하겠다는 계획을 넌지시 비추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탈린은 이 계획을 듣고 식은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발트해와 핀란드를 독일이 완전히 지배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로 인해 레닌그라드는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되었다. 다시 한번 스탈린은 자신의 동맹자에 대한 보충적인 안전보장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안전보장책이 바로 적군의 핀란드 침공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핀란드 지배계급의 심각한 저항에 직면했다. "군사적 유람여행"은 의외로 오래 끌었다. 한편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주요한 전쟁터로 될 위험성이 있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략준비를 마친 히틀러는 스탈린이 핀란드와 빨리 평화조약을 맺을 것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자신의 계획을 축소하고 핀란드를 소비에트화하려는 기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유럽 북서부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두드러진 특징들이다.  

     

    제국주의 전쟁에 걸려든 작은 나라들

    세계전쟁이 일어난 조건 속에서 작은 나라들의 운명을 "민족독립", "중립" 등의 관점에서 제기하는 것은 제국주의 세력이 발명한 신화에 속는 것이다. 문제는 세계지배에 있다. 소련의 생존문제는 사건들이 진행되면서 결말나게 마련이다. 현재는 뒷전으로 물러나 있는 소련의 생존 문제는 일정 시점에서 전면에 등장할 것이다. 약소국들은 이미 강대국들에게 놀아나는 졸(卒) 에 지나지 않는다. 약소국들은 제한적인 의미만의 자유 즉 강대국들 중에 자기 주인을 선택하는 자유만을 가지고 있다.

    현재 노르웨이에서는 두 정부 즉 남부에서 독일군의 호위를 받고 있는 친나찌 정부와 북부에서 왕을 모시고 있는 구사민주의 정부 사이에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노르웨이 노동자들이 파시스트 정부에 대항하여 "민주" 진영을 지지해야 했는가? 스페인의 경우처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언뜻 보기에 긍정적인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이 노선은 가장 조야한 오류가 될 것이다. 스페인의 경우 고립된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경우 외부 제국주의 세력들의 개입은 그 중요성이 아무리 크다해도 역시 부차적인 성격 밖에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노르웨이에서는 두 제국주의 진영이 직접 충돌하고 있으며 두 노르웨이 정부는 이들 손에 든 보조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적 차원에서 우리는 연합군이나 독일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두 세력의 일시적인 도구에 불과한 노르웨이 정부들 중 어느 쪽을 지지할 이유나 정당성이 조금도 없다.

    바로 이와 똑같은 노선이 핀란드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세계 노동계급의 전략적 관점에서 보면 노르웨이와 마찬가지로 핀란드 부르조아의 소련에 대한 저항은 자주적인 국가안보를 위한 행위가 아니다. 영국, 프랑스, 미국의 군사기지로 완전히 변모하기보다는 차라리 소련에 대한 모든 저항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핀란드 정부에 의해서 이 점은 가장 잘 증명되었다. 핀란드나 노르웨이의 자주적 국가안보, 민주주의 수호 등과 같은 부차적인 요인들은 그 자체로 아무리 중요해도 한없이 더욱 강력한 세계적 세력들의 싸움 속에 얽혀 있으며 이 싸움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부차적인 요인들을 무시하고 근본적인 요인들에 맞추어 우리의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전쟁에 대한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적 테제는 이미 6년 전에 이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해답을 제시하였다. 테제는 이렇게 언명하고 있다: "국가안보라는 사고는 특히 민주주의 수호라는 사고와 함께 등장할 경우에 아주 빠르게 약소국과 중립국(스위스, 특히 벨기에,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 노동자들을 속이기 위해 활용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 말하고 있다: "신이 버린 스위스 마을 출신인 로버트 그림같은 쁘띠부르조아 돌대가리들만이 세계대전이 스위스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진지하게 믿을 수 있다." 그와 똑같이 어리석은 버넘과 섁트먼 등 쁘띠부르조아들도 세계대전이 핀란드를 방어하는 수단이며 소련군의 핀란드 침공과 같은 전술적 사건에 기초하여 노동계급의 전략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루지아와 핀란드

    대자본가에 대항하는 파업투쟁을 벌이면서 때때로 노동자들은 매우 버젓한 쁘띠부르조아 기업들을 파산시킨다. 이와 똑같이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군사적 투쟁을 벌이거나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군사적인 안전보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심지어 완전히 건강하고 혁명적인 노동자국가조차 이러저러한 약소국들의 독립을 유린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국내 또는 국제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계급투쟁의 가혹한 성격에 대해 민주주의적 속물들은 눈물을 흘릴 것이며 이것은 올바른 일일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급 혁명가가 눈물을 흘린다면 꼴불견일 것이다.

    1921년 소비에트 공화국은 제국주의 세력의 코카서스지역 침략의 관문인 그루지아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소비에트 연방으로 편입시켰다. 민족자결권의 원칙에서 보면 이 무력침공에 반대하는 많은 말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혁명의 영역을 확대하는 관점에서 보면 농민국가에 대해 군사침략을 감행한 것은 전혀 의심스러운 행위가 아니었다. 적들에 의해 포위된 노동자국가의 자기방어를 위해 강제로 다른 국가를 소비에트화시키는 행위는 정당화되었다. 사회주의혁명 수호는 형식적 민주주의 원칙보다 앞선다.

    오랫동안 세계 제국주의 세력은 그루지아 합병 문제를 소련에 대항하여 세계여론을 동원하는 구호로 이용했다. 제2인터내셔널은 이 캠페인의 선두에 섰다. 연합국은 소련에 대해 새로이 군사개입을 시도할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다.

    이와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세계 부르조아계급은 소련의 핀란드 침공을 이용하여 소련에 대항하는 세계여론을 동원했다. 이 경우에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민주적 제국주의 세력의 전위로 나섰다. 전쟁에 놀라 정신없이 도망치는 쁘띠부르조아의 불행한 "제3진영" 이 이제 이들의 뒤꽁무니를 쫓고 있다.

    그러나 군사개입과 관련한 이러한 주목할만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소련이 1921년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결코 아니라는 심오한 차이점도 존재한다. 전쟁에 대한 제4인터내셔널의 1934년 테제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소련 관료체제의 흉칙스러운 발달과 근로인민의 처절한 삶은 세계 노동계급에게 소련의 매력을 극히 감소시켰다." 10월 혁명의 요람인 레닌그라드에 아주 가까운 핀란드에게도 소련의 현 체제는 매력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소련-핀란드 전쟁은 이 사실을 생생하고 완벽하게 드러내었다. 그러나 이 사실로 인해 소련을 제국주의 세력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다. 소련이 관료집단의 손아귀에서 구출되어야 한다는 결론만이 가능하다.  

     

    "내전이 어디서 발생했는가?"

    "그러나 트로츠키 동지가 약속했던 핀란드 내전은 어느 지역에서 일어났는가?"라고 현재 "제3진영" 의 지도자이며 과거 우리 당의 소수파 지도자였던 인사들은 묻는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약속한 바가 없다. 소련-핀란드 전쟁이 비화할 경우 발생가능한 사태들의 하나를 분석했을 뿐이었다. 소련군이 핀란드의 개별 기지들을 점령하거나 핀란드 전역을 완전히 점령하는 것이나 가능성은 같았다. 개별 기지들의 점령은 부르조아 체제의 유지를 의미했다. 완전한 점령은 노동자와 빈농을 내전에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사회혁명을 의미했다. 소련과 핀란드 사이에 진행된 초기의 외교 협상들은 소련이 핀란드 문제를 다른 발트해 국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해결할 시도를 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그러나 핀란드의 저항은 군사적 조치들을 통해 목적을 달성시킬 것을 소련에게 강요했다. 스탈린은 핀란드를 소비에트화 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장 광범위한 핀란드 대중에게 전쟁을 정당화시킬 수 있었다. 정부 수반으로 소련이 쿠지넨을 임명한 행위는 핀란드가 발트해 국가들이 아닌 폴란드의 운명을 따를 것임을 암시했다. "제3진영" 의 아마추어 글쟁이들이 어떻게 펜을 휘두르든 스탈린은 내전을 부추겨서 소유관계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점을 이해했다.

    핀란드 전쟁이 강대국들의 전면전으로 치닫지 않을 경우 그리고 스탈린이 외부 세력의 위협에 의해 후퇴를 강요당하지 않을 경우 그는 핀란드를 소비에트화하지 않을 수 없다고 나는 여러 번 구체적으로 밝힌 바 있다. 핀란드에 대한 스탈린의 과업은 그 자체로는 동부 폴란드를 소비에트화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그런데 군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더욱더 어려웠다. 핀란드는 폴란드보다 전쟁에 대해 대비를 더 확실히 해놓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민족적 관점에서 보면 이 과업은 더욱더 힘들었다. 핀란드는 러시아로부터 민족독립을 쟁취하려는 오랜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동부 폴란드의 우크라이나인과 백러시아인은 폴란드에 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에 대해 이들이 저항할 이유는 그만큼 더 적었다. 그러나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스탈린의 과업은 어떤 경우보다 달성하기가 더 힘들었다. 핀란드의 부르조아 계급은 나름의 방식으로 농업 쁘띠부르조아를 육성함으로써 전(前) 자본주의적 농업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핀란드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승리했을 경우 핀란드 소농과 노동자의 도움을 어느 정도 얻어서 소유관계를 전복하는 것은 완전히 가능했을 것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왜 이러한 구도를 실천에 옮길 수 없었을까? 소련에 반대하는 부르조아 여론이 엄청나게 동원되기 시작했으며 영국과 프랑스가 군사개입을 진지하게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역시 대단히 중요한 사항으로 히틀러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핀란드 영토로 진입할 경우 음모와 기습에 기초한 히틀러의 스칸디나비아 계획이 직접 위협을 받게 될 것이었다. 연합국과 히틀러 양자의 압박을 받아 샌드위치가 된 스탈린은 핀란드의 소비에트화를 포기하고 이 대신 개별 전략 기지들을 점령하는 것으로 군사행동을 한정했다.

    놀라서 도망치는 "제3진영" 은 이렇게 논리를 뜯어 맞추고 있다: 트로츠키는 소련의 계급적 성격으로부터 핀란드 내전을 추론했다; 그런데 내전이 일어나지 않은 이상 소련은 노동자국가가 아니다. 사실 사회학적으로 소련을 규정하는 것을 통해 핀란드의 내전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곧바로 "추론 "할 필요는 없었다. 동부 폴란드의 경험에 근거하는 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소련군의 점령 후 일어난 동부 폴란드의 소유관계 전복은 10월 혁명을 통해 탄생한 노동자국가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구체적 상황 속에서 자기생존을 도모하고자 노력하는 소련 관료집단은 동부 폴란드의 소유관계를 전복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유사한 상황 속에서 이들이 핀란드에서도 똑같은 행동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심할 근거는 전혀 없었다. 이것이 내가 지적한 내용의 전부였다. 그러나 사태가 진전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혁명과 마찬가지로 전쟁은 급격하게 상황을 변화시킨다. 소련군의 군사적 움직임이 중지되면서 핀란드 내전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특정 조건을 바탕으로 해서만 미래에 대한 예측은 가능하다. 그리고 예측이 구체적일수록 이 조건 역시 더욱더 구체적이 된다. 예측은 약속된 날짜에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어음이 아니다. 예측은 사태 전개의 명확한 경향만을 개괄적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다른 차원의 세력과 경향들이 상황의 지배요인이 되기 시작하면서 이 예측된 경향과 함께 작동한다. 구체적인 사건들을 정확하게 예측하려는 사람들은 점장이를 찾아가야 한다. 맑스주의자의 예측은 방향을 파악하는 경우에만 도움이 된다. 나의 예측이 여러 가능한 변종들의 하나일 뿐이며 특정 조건들 속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나는 여러번 말한 바 있었다. 핀란드의 운명은 현재 일시적으로 동부 폴란드가 아니라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의 운명을 걷고 있다. 그러나 별로 대단치도 않은 이 개별적인 사실을 "제3진영" 지도자들은 마치 구원의 돌처럼 꼭 부여잡고 있다. 이런 모습은 무미건조한 현학자들의 특허품이다.  

     

    소련 방어

    스탈린의 핀란드 침공이 소련의 방어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소련의 정치는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권력, 명성, 돈에 관심이 있다. 소련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훨씬 더 열심히 방어한다. 따라서 소련과 세계 노동계급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신들의 이익을 방어한다. 핀란드 전쟁의 전 과정을 통해 이 사실은 너무도 명료하게 드러났다. 소련의 핀란드 침공은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에게는 하나의 정치적 연관고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행위에 대해 우리는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조금의 책임도 질 수 없다.

    곱절이 아니라 세곱절로 악명높은 코민테른은 스탈린과 연대하여 그의 정책을 방어하며 책임지면서도 그가 어떤 범죄를 저지르든 신경쓰지 않는다. 세계 제국주의 세력이 소련을 분쇄하여 10월 혁명의 조국에 자본주의를 복귀시키고 이 나라를 식민지로 변모시키는 것을 우리는 절대 허용할 수 없다. 코민테른과 우리 정책의 성격은 전혀 다르다. 바로 이 사실이 우리가 소련을 방어하는 근거인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소련의 패배를 주창하는 자들 즉 소련의 패배를 모험주의적으로 부르짖는 자들은 연합국이 핀란드에 개입할 경우 소련 패배 입장을 소련 방어 입장으로 전환시킬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를 통해 이들은 논리적 난관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시도는 경멸스러운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전쟁 상황에서는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 즉시 정책을 돌변시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핀란드 전쟁이 결정적인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연합국 총사령부는 무르만스크 철도를 공습하는 것을 통해서만 핀란드를 진지하고 재빠르게 원조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전략의 관점에서 이것은 올바른 결론이었다. 연합국 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는 문제는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이 문제가 매달려 있는 실에는 "제3진영" 의 원칙적 입장 역시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우리는 전쟁에 참가하고 있는 기본 계급진영에 따라 우리의 입장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결론은 제3진영의 결론보다 훨씬 더 믿음직스럽다.  

     

    이미 차지한 진지를 적에게 넘겨주지는 않는다

    패배주의 노선은 이러저러한 범죄를 저지른 정부를 벌주는 것이 아니라 계급 역관계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이다. 전쟁에 대한 맑스주의 노선은 추상적인 도덕적 감상적 고려가 아니라 다른 체제들과 상호관계에 있는 특정 체제를 사회계급적으로 평가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는 이탈리아의 아비시니아 침공에 대해 아비시니아를 지지했다. 네구스가 무솔리니에 비해서 정치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식민지 억압에 대항해 후진국을 방어하는 것을 통해 세계 노동계급의 주요한 적인 제국주의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소련판 네구스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방어한다. 첫째, 소련의 패배는 제국주의에게 새로이 거대한 자원들을 제공하고 자본주의 체제의 숨이 곧 넘어갈 것같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오랫동안 연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기생적 관료집단이 제거될 경우 소련의 사회적 기초는 무제한적인 경제적 문화적 진보를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본주의적 기초는 더욱 쇠퇴하는 것 이외에 다른 가능성들을 보이고 있지 않다.

    우리의 소련 방어 노선을 가장 시끄럽게 비판하는 자들의 정체를 가장 잘 드러내는 현상이 있다. 이들은 스탈린이 혁명적 볼셰비키당을 파괴시키고 있을 때, 스페인의 노동자혁명을 교살하고 있을 때, "인민전선 "과 "집단안보"라는 미명 하에 세계 사회주의혁명을 배반하고 있을 때 계속해서 소련을 노동자국가로 간주했다. 이 모든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들은 노동자국가인 소련을 방어할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똑같은 스탈린은 "민주적" 핀란드를 침공하였다. 그러자 공산주의자, 노동자, 농민에 대한 스탈린의 모든 범죄행위들을 은폐하고 승인한 제국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들의 부르조아 여론이 하늘높이 스탈린을 비난했다. 이런 일이 있자마자 우리의 노선을 근본적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은 즉시 "맞아, 소련의 핀란드 침공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라고 즉시 선언해버렸다. 그리고 루즈벨트를 그대로 따라서 소련에 대한 도덕적 무역금수 조치를 선언했다.

    가방끈이 긴 도사 버넘은 소련을 방어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히틀러를 방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논리는 모순적인 현실을 2차원적 삼단논리의 틀 속으로 우겨넣으려는 쁘띠부르조아적 우둔함의 아주 근사한 표본에 지나지 않는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 이후 소비에트 공화국을 지지함으로써 노동자들이 호언쫄른 왕조를 지지했는가? 그런가 아닌가? 전쟁에 대한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적 테제는 이 문제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소련이 이러저러한 제국주의 국가와 맺은 조약은 소련의 혁명정당에게 어떠한 정치적 제한도 가하지 않는다고 확고하게 이 테제는 명시하고 있다. 개별적인 외교적 동맹이 그 자체로 아무리 정당해도 세계 사회주의혁명의 이해는 이것보다 더 중요하다. 소련을 방어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버넘과 그의 동료들보다 히틀러와 스탈린에 대항해서 더욱더 진지하게 투쟁한다.

    버넘과 섁트먼이 독불장군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 자본주의의 악명높은 똘만이 레옹 주오(Leon Jouhaux)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소련을 방어한다"는 사실에 대해 역정을 내고 있다. 하기야 그가 역정을 내지 않으면 어느 누가 역정을 내랴! 그러나 소련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그가 대표로 있는 프랑스 노동총동맹(CGT)에 대한 태도와 동일하다: 언제나 노동자들을 속이고 배신하는 레옹 주오와 같은 악당들이 노동총동맹을 대표하고 있을 지라도 우리는 자본가계급에 대항하여 노동총동맹을 방어한다. 러시아 멘셰비키들도 이렇게 고함지른다: "제4인터내셔널은 계속해서 소련을 노동자국가라고 인정함으로써 막다른 골목에 처해있다!" 이 신사양반들은 바로 제2인터내셔널의 회원들이다. 전형적인 부르조아 시장인 후이스만스나 레옹 블렁과 같은 저명한 배신자들이 현재 제2인터내셔널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1936년 6월의 예외적으로 유리한 혁명적 상황에서 배신행위를 저질러 지금의 세계대전을 가능하게 만든 자들이다. 멘셰비키들은 제2인터내셔널 정당들을 노동자 정당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관료적 배신자들이 우두머리로 있다는 이유로 소련을 노동자국가로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이 거짓논리는 뻔뻔스럽고 냉소적이다. 스탈린, 몰로토프 등을 위시한 소련 관료집단은 블렁, 주오, 씨트린느, 토마스 등과 비교해서 더 좋거나 더 나쁘지도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하나이다: 스탈린과 그의 동료들은 사회주의 체제로 발전할 수 있는 소련의 경제적 기초를 착취하고 파괴시키는 반면에 블렁 등은 자본주의 사회의 철저하게 썩은 기초에 집착하고 있을 뿐이다.

    노동자국가는 인정사정 없는 역사의 실험실로부터 등장했을 뿐이며 손가락으로 코를 후비며 반성하듯이 후각을 의심하는 "사회주의자" 교수양반의 상상물이 아니다. 노동계급이 달성한 성과들은 적대 세력들의 압력에 의해서 왜곡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 모두를 방어하는 것이 혁명가의 임무이다. 이미 차지한 진지들을 방어할 수 없으면 새로운 진지들을 결코 정복할 수 없는 법이다.  

    1940년 4월 25일

     

    [32. A Letter to James Cannon] 제임스 캐넌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버넘의 탈당은 과거 우리 당의 소수파 인사들에 대한 우리의 분석과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아주 훌륭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인사들의 탈당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1940년 5월 28일

    레온 트로츠키

     

    [33. A Letter to Albert Goldman] 앨버트 골드먼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버넘은 변증법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변증법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와 같습니다. 그가 섁트먼에게 가한 타격은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원칙에 입각한 또는 그렇지 못한 동맹에 대한 아주 중요한 교훈을 이들은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이번도 참 불쌍합니다. 4년전 그는 성부(聖父) 마스티와 복사(服事) 스펙터를 자기 파벌의 보호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세속화된 카톨릭 신자 버넘과 그의 변호사 섁트먼을 대상으로 똑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옛날에는 우리의 예상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수년 혹은 수십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제 사건이 진행하는 속도는 열병에 걸린 환자처럼 너무 빨라서 바로 다음날 우리의 예상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섁트먼도 불쌍하게 되었습니다!  

    1940년 6월 5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34. On the " Workers " Party] " 노동자 " 당에 대해서  

    질문 : 사회주의노동자당 다수파와 소수파는 조직을 분리할만큼 정치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보십니까?  

     

    트로츠키 : 이 경우에도 문제를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변증법"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물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차이들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조직을 분리할만큼 크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쁘띠부르조아 써클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노동계급과 멀어지는 경향을 소수파가 보였다면 이 사소한 정치적 차이는 완전히 다른 가치,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소수파는 노동계급과는 이질적인 다른 사회계급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다수파는 조직 분리를 피하기 위해서 모든 조치들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소수파는 결국 조직을 분리했습니다. 이것은 소수파의 내적 사회적 감정이 우리와 함께 일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노동계급이 아니라 쁘띠부르조아 경향입니다. 드와이트 맥다널드의 글을 보면 이 점을 새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노동계급 혁명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어느 누구도 강제적으로 혁명정당에 참여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참여하면 당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인민에게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자고 촉구할 용기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임감을 우리는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론은 우리의 정치적 행동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도구는 맑스주의 이론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이것보다 더 좋은 도구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노동자는 자기 연장에 대해서 대단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연장이 가장 좋은 것이라면 아주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이 연장을 버리지도 않으며 있지도 않는 황당한 연장을 찾지도 않습니다.

    버넘은 속물 지식인입니다. 그는 하나의 당에 들어갔다가 탈당하고 또 다른 당에 들어갑니다. 노동자는 이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혁명정당에 가입하여 인민들에게 사상을 전파하고 이들의 행동을 촉구할 때 이 행위는 전쟁에 나선 장군의 행동과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인민을 어디로 인도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총포가 질이 떨어짐으로 더 좋은 총포가 발명되기까지 10년은 기다려야 한다. 따라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느 장군이 이렇게 말한다면 사람들이 이 장군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버넘이 바로 이런 논리를 가지고 있는 장군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많은 실업자들의 존재, 전쟁 등은 여전히 우리의 현실로 남아있습니다. 이 현실은 연기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연기한 것은 버넘 혼자입니다.

    드와이트 맥다널드는 속물은 아니지만 약간 멍청합니다.

    그가 쓴 글을 여기에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회에 기여하려면 지식인은 자신이나 남을 속여서는 안된다. 가짜 동전으로 알면서 진짜 동전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수년과 수십 년에 걸쳐 배운 것을 위기의 순간에 잊어서는 안 된다."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여기 그의 글을 다시 인용합니다:

    "모든 이론 , 정부, 사회체제 등에 대해 회의를 하고 대중의 혁명 투쟁에 헌신하는 등 회의와 헌신 모두를 가지고 앞으로 다가올 험난한 세월을 맞이해야한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내세울 수 있다."

    소위 "노동자"당의 지도자 중의 한 명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노동자가 아니라 "지식인"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이론에 대해서 회의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론을 연구하고 수립하면서 우리는 이 위기의 시대를 준비해 왔습니다. 우리의 방법론은 맑스주의입니다. 그런데 위기가 다가오자 맥다널드는 "모든 이론을 회의하라"고 말합니다.그리고 맑스주의를 다른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하지 않은 채 혁명에 헌신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새로운 이론은 그 자신의 회의적인 이론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론없이 어떻게 행동할 수 있습니까? 대중의 투쟁은 무엇이며 혁명가는 무엇입니까? 그의 글 내용 전체는 경악스러울 따름입니다. 이러한 인사를 지도자로 허용할 수 있는 당은 진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시 그의 글을 인용합니다: "그렇다면 파시즘이라는 맹수의 성격은 무엇인가? 트로츠키는 보나파르트주의라는 낮익은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느 파벌이 한 계급을 다른 계급과 싸우도록 이간질시키면서 권력을 유지한다. 그래서 국가권력은 일시적으로 독자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전체주의 체제들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미 근본적인 경제적 사회적 구조를 변화시켜 버렸다. 과거의 형태들을 조작했을 뿐만 아니라 이것들의 내적 생명력을 파괴시켜 버렸다. 그렇다면 나찌 관료집단은 새로운 지배계급인가? 파시즘은 자본주의와 비견되는 새로운 사회형태인가? 이것도 역시 진실이 아닌 것 같다."

    여기서 그는 새로운 이론을 발명하고 파시즘을 새로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모든 이론에 대해서 회의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업에 사용하고 있는 연장은 중요하지 않지만 일에 대해서는 헌신해야 한다고 노동자들에게 말합니다! 이런 말에 대해서 노동자들은 아주 거치른 말로 반응할 것입니다.

    그의 글은 실망한 지식인을 아주 특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전쟁과 앞으로 다가올 끔찍한 시대가 패배와 희생을 가져올 것으로 생각하고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회의주의를 전파하기 시작하면서도 회의와 혁명적 헌신이 통일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혁명이 합리적이며 가능한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혁명에 헌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효과적인 이론이 없이는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론적 회의주의를 전파하는 자는 반역자입니다.

    우리는 파시즘의 여러 요소들을 분석했습니다:

    1. 국가권력에 가장 커다란 독자성을 부여하기 위해 계급들의 적대관계를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파시즘은 옛날 보나파르트주의와 공통된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후자는 부르조아 사회의 상승기에 존재한 반면 전자는 부르조아 사회의 쇠퇴기에 등장하는 국가권력이라는 점을 우리는 언제나 강조해왔다.

    2. 사적 소유를 제거하지 않은 채 새로운 기술과 사적 소유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부르조아 계급의 시도가 파시즘이다. 파시즘의 "계획경제"는 사적 소유를 제한하는 동시에 구출하려는 시도이다.

    3. 일국 내에 존재하는 새로운 현대 기술의 생산력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뛰어 넘으려는 시도가 파시즘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기술은 일국 내로 제한될 수가 없다. 결과는 전쟁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요소들을 우리는 이미 분석했다.

    버넘과 마찬가지로 드와이트 맥다널드도 당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그가 약간 더 게으르므로 버넘보다 나중에 탈당할 것입니다.

    한때 버넘은 "좋은 재목"이라고 간주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의 노동계급 정당은 당에 기여할 모든 지식인들을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 운동을 위해 디에고 리베라를 구하려고 나는 여러 달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사실 모든 인터내셔널들이 이런 종류의 경험을 거쳤습니다. 제1인터내셔널은 아주 변덕스러웠던 시인 프라일리그라트(Freiligrath)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제2 제3인터내셔널은 막심 고리끼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제4인터내셔널은 리베라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모든 경우에 이들은 우리와 결별했습니다.

    물론 버넘은 우리 운동에 좀더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캐넌 동지는 그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글솜씨가 있으며 깊지는 않지만 재빠른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면서 이것에 대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 이것을 잊어버립니다. 저술가는 잊어버릴 수 있지만 노동자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인사들을 활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무쏠리니 역시 한때는 "좋은 재목"이었습니다!  

    1940년 8월 7일

    코요아칸

    [35. A Letter to Albert Goldman] 앨버트 골드먼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드와이트 맥다널드가 편집하는 잡지 [당파 평론 ] 8월호에 실린 그의 글을 읽어 보았는지요.

    이 사람은 속물 지식인 버넘의 제자였습니다. 버넘이 탈당한 후 그는 "과학"을 대표하는 유일한 사람으로 섁트먼의 당에 남았습니다.

    파시즘과 관련하여 그는 우리의 노선을 서투르게 해적질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분석을 자기가 새로이 발견한 것처럼 위장하고 일부 뻔한 말들을 우리 것인 양 위장시켜놓고는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의 글 전체는 전망과 균형을 결여하고 있으며 기본적인 지적 정직성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버넘의 고아인 그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냉철하며 회의적인 눈으로 맑스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들을 다시 검토해야한다." 266쪽에 이 글이 나옵니다. 불쌍한 "노동자당"은 이 "검토 "기간 동안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물론 드와이트 맥다널드의 연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연구 결과는 버넘과 같이 탈당하는 것일 겁니다.

    그 글의 마지막 4줄은 탈당을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이론 , 정부, 사회체제 등에 대해 회의를 하고 대중의 혁명 투쟁에 헌신하는 등 회의와 헌신 모두를 가지고 앞으로 다가올 험난한 세월을 맞이해야 한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우리 자신을 지식인으로 내세울 수 있다."

    이론적 회의에 기초한 혁명활동은 내적 모순의 가장 후진적인 형태입니다. 혁명투쟁의 법칙들을 이론적으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대중의 혁명투쟁에 헌신 "할 수 없습니다. 혁명적 헌신은 이 헌신이 합리적이며 합당하다는 확신 즉 이 헌신이 혁명 목표에 조응한다는 확신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확신은 계급투쟁에 대한 이론적 통찰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모든 이론에 대한 회의"는 운동을 개인적으로 포기하기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섁트먼은 이런 와중에도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총서기"로서 그는 너무 바빠서 쁘띠부르조아 속물들로부터 "맑스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들"을 방어할 수가 없습니다.  

    1940년 8월 9일

    레온 트로츠키

    [36. A Letter to Chris Andrews] 크리스 앤드루즈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크리스 동지,

    당이 채택한 반(反) 평화주의 입장을 평가한 동지의 글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입장에는 두 가지 커다란 장점들이 있습니다. 첫째, 핵심내용이 혁명적이며 우리 시대의 성격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모든 문제들은 비평의 무기뿐만 아니라 총칼의 비평에 의해서 결정될 것입니다. 둘째, 동지의 글은 종파주의를 완전히 제거했습니다. 사건들과 대중들의 정서에 대비시켜 우리 노선의 신성함을 추상적으로 확인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불쌍한 "노동 행동"지 8월 12일자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강제 징집에 대한 루이스의 투쟁에 우리는 100%의 지지를 보낸다." 우리는 단 1%도 루이스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조국을 완전히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방어하고자 애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문지원병 제도는 군사적 관점에서 낡아빠졌을 뿐만 아니라 계급적 관점에서 보아도 대단히 위험합니다. 노동자 절대 다수는 이렇게 이해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강제징집을 찬성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찬성은 "노동계급의 무장화"를 매우 혼란스럽고 모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종파주의자들은 이 거대한 역사적 변화를 전적으로 거부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강제징집이라고 ? 좋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이 제도를 시행할 것이다."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이것은 출발점으로서 아주 훌륭합니다.  

    1940년 8월 17일

    레온 트로츠키

     

    In Defence of Marxism [written by Leon Trot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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