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트로츠키주의자.
17.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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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장 농민

농업 문제는 혁명의 깊은 토양이었다. 러시아 사회의 가장 야만적 특징들의 뿌리는 농노제에서 유래한 낡은 토지제도, 지주의 전통 권력, 지방 행정당국/의회와 지주의 유착 등이었다. 그리고 이 야만성의 정점은 라스푸틴 일당이 전횡한 짜르 체제였다. 유구한 역사를 통해 러시아의 아시아적 특성을 지탱해온 농민은 또한 이 체제의 첫 희생자였다.

2월 혁명이 터진 후 첫 몇 주일간 농촌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농민의 가장 활동적인 연령층은 군대에 끌려가 전선의 참호 속에서 고생하고 있었다. 고향에 남은 노년층은 혁명이 반혁명의 보복으로 끝난다는 것을 너무 잘 기억하고 있었다. 농촌은 말이 없었으며 도시는 농촌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나 농민전쟁의 유령은 이미 3월초부터 지주의 보금자리를 떠돌고 있었다. 가장 귀족적인 즉 가장 후진적이고 반동적인 지역들은 진짜 위험이 닥치기도 전에 도와달라고 아우성쳤다. 자유주의자는 지주의 공포를 예민하게 반영했다. 그리고 화해주의자는 자유주의자의 정서를 반영했다. 급진주의 좌파인 수하노프는 혁명 직후 이렇게 주장한다: “앞으로 몇 주일 내에 농업문제를 우격다짐으로 해결하려고 나서는 것은 위험한 발상일 것이다. 더욱이 이렇게 나올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는 평화 문제나 8시간 노동제에 대한 강제적 해결 역시 위험한 시도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어려움 앞에서 몸을 숨기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더 간단한 방법이다. 더욱이 기존의 토지관계를 뒤흔들 경우 봄철의 파종과 도시에 대한 식량공급이 차질을 빚을 것이라고 지주들은 걱정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지방에 전보를 보내 권고했다: “도시에 대한 식량공급을 게을리 할 정도로 농업문제에 몰두하지 말아야 한다.”

많은 지역에서 지주들은 혁명에 겁을 먹고 씨뿌리기를 그만두었다. 식량위기가 이미 전국을 덮친 상황에서 텅 빈 농토는 새 주인을 찾아 절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농민들은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지주들은 새 권력에 거의 기대를 하지 않고 서둘러 재산을 정리했다. 부농들은 매물로 나온 재산들을 게걸스럽게 사들였다. 그리고 자기들이 농민이니까 강제 몰수는 없을 것이라고 속으로 계산했다. 토지 매매의 대다수는 악명 높을 정도로 자의적이었다. 일정 기준 이하의 개인 토지는 몰수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생각에 기초하여 지주들은 소유 토지를 인위적으로 작게 쪼갠 후 가짜 주인을 만들었다. 토지는 외국인, 연합국이나 중립국 시민들에게 빈번히 이전되었다. 부농의 투기와 지주의 속임수 때문에 제헌의회가 소집되면 공유지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것 같았다.

농민들은 이 술수를 알아차리고 정부에 요구했다: 포고령을 선포하여 토지 매매를 중단시켜라. 농민 대의원들은 도시로 몰려들어와 혁명 당국에게 토지와 정의를 요구했다. 정부 장관들이 고상한 논의와 박수 끝에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 복도에는 회색의 농민 대의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일은 자주 벌어졌다. 어느 농민 대의원은 눈물을 흘리며 토지 매매를 중단시킬 법을 선포하라고 장관에게 간청했다. 수하노프가 이 장면을 묘사한다. 흥분하고 창백한 케렌스키는 농민 대의원의 말을 짜증스럽게 가로막은 후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렇게 될 것이요...그렇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볼 필요는 없지 않소.” 이때 옆에 있던 수하노프는 나중에 그의 회고록에 이렇게 덧붙인다: “그가 한 말을 나는 그대로 옮겼다. 케렌스키의 생각은 옳았다: 그 농민은 이 유명한 인민 장관이자 지도자 양반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간청은 하면서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농민과 이 농민의 의심을 제스처로 넘기는 급진파 장관 사이의 짧은 대화는 2월 정권이 몰락할 수밖에 없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농업개혁을 준비하기 위한 기구인 토지위원회 수립 법이 혁명 후 첫 농업장관인 입헌민주당의 싱가레프에 의해 공포되었다. 관료적인 자유주의자 교수 포스트니코프가 위원장을 맡은 중앙 토지위원회는 주로 인민주의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위원장보다 덜 온건하게 인식되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지역 토지위원회는 도, 군, 지구 단위에서 구성되었다. 농촌에서 상당히 느리게 수립된 소비에트는 사설 조직으로 간주되었으나 토지위원회는 정부 기구였다. 그런데 법이 토지위원회의 기능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을수록 위원회에 가하는 농민의 압력은 더 거세었다. 또한 서열이 낮아 농민에 더 가까이 있는 토지위원회일수록 더 빨리 농민운동의 도구가 되었다.

3월말이 다가오자 혁명의 무대에 농민이 등장했다는 놀라운 소식이 처음 수도에 전해졌다. 노브고로드의 인민위원이 전보를 보내왔다: 파나시우크 상등병의 사주로 “지주들이 무조건 체포되었다.” 탐보프 도에서는 휴가 나온 병사들이 주도하여 농민들이 어느 지주의 장원을 약탈했다. 첫 소식들은 물론 과장되었다. 당연히 지주들은 이 갈등들을 과장하여 호소하면서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을 앞질러 말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병사들이 농민운동을 지도했다. 이들은 전선과 도시 병영에서 발휘한 주도력을 농촌으로 가지고 왔다.

카르코프 도의 어느 지구 토지위원회는 4월 5일 토지소유주들의 무기를 수색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은 임박한 내전을 벌써 느끼게 했다. 리아잔 도의 스코핀스키 군에서는 소요가 발생했다. 그 이유를 인민위원은 이렇게 설명한다: 인접한 도의 집행위원회가 토지 임대료 납부를 강제하는 포고령을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제헌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분쟁을 중지하자는 학생들의 선동은 효과가 없었다.” 1905년에 “학생들”은 농민을 동원하여 혁명 노동자들에게 테러를 가했었다. 이것이 당시 사회혁명당의 전술이었다. 그런데 1917년이 된 지금 학생들은 준법과 사회평화를 설교한다. 물론 이들의 노력은 효과가 없다.

심비르스크 도의 인민위원은 좀더 발전한 농민운동을 묘사하고 있다: 지구 및 마을 위원회는 지주들을 체포하여 추방한 후 토지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도 쫓아냈다; 그리고 토지를 점령한 후 자의적으로 토지 임대료를 결정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보낸 대의원들은 농민의 편을 들고 있다.” 동시에 개인 토지소유주들에 대항하여 공동체 농민들의 운동이 시작된다. 개인 토지소유주들은 1906년 11월 9일 스톨리핀이 제정한 법에 따라 농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토지를 소유한 농민의 강력한 계층이었다. “도내의 소요 때문에 씨뿌리기가 위협받고 있다.” 이미 4월에 심비르스크 도의 인민위원은 토지의 국가 소유를 즉시 선포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 제헌의회가 국가 소유의 명확한 내용을 규정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모스크바 바로 외곽의 카쉬르 군 집행위원회가 교회, 수도원, 지주의 장원들을 배상도 하지 않고 점거하도록 농민을 선동하고 있다는 불평도 들려온다. 쿠르스크 도에서는 농민들이 지주의 장원에서 일하는 전쟁포로들을 쫓아내고 심지어 이들을 감옥에 가두고 있다. 농민총회가 끝난 후 펜자 도의 농민들은 토지와 자유에 대한 사회혁명당의 결의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지주들과 최근 체결한 계약을 어기기 시작한다. 동시에 이들은 새 권력기관들을 공격한다. 펜자 도의 인민위원은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3월에 지구 및 군 집행위원회가 수립될 때는 지식인들이 위원회의 다수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지식인 반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4월 중순에는 농민들이 위원회를 독점했다. 그리고 이들은 토지문제와 관련해서는 명백히 법을 무시했다.” 이웃한 카잔 도의 일부 지주들은 임시정부에 탄원한다: 농민들이 노동자들에게 작업을 거부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종자를 훔치고 많은 곳에서는 장원의 가산들을 탈취한다; 또한 우리가 소유한 숲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한다; 폭력을 휘두른다 또는 죽인다는 등의 위협 때문에 도저히 못살겠다. “법원이 없다; 각자 하고싶은 대로 행동한다;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테러를 당한다.” 카잔의 지주들은 이러한 무정부 상태의 장본인이 누구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 “농촌에는 임시정부의 지시 따위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볼셰비키당의 유인물은 널리 배포되고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지시를 대단히 많이 내려보냈다. 3월 20일의 전보에서 르보프공은 인민위원들에게 지역의 권력기관으로 지구위원회를 수립할 것을 제의했다. 또한 이 위원회의 활동에 “지역 토지소유주들과 농촌의 모든 지식인들”을 끌어들이라고 권고했다. 국가기구 전체를 밀실에서 화해하는 방식으로 조직할 것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인민위원들은 곧 “지식인들”이 밀려나고 있다고 울먹였다. 농민들이 군과 지구의 케렌스키들을 불신하고 있음이 명백했다.

유루소프공은 수상과 내무장관을 겸임하고 있던 르보프공의 내무장관 대행이었다. 내무부는 높은 작위를 가진 사람만이 장관을 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내무장관 대행은 4월 3일 이렇게 권고한다: 자의적인 행위는 인정될 수 없다; 특히 모든 자유 가운데에서 가장 달콤한 “토지처분권”은 옹호될 것이다. 이로부터 10일 후 르보프공도 뭔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한 후 인민위원들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법의 전권을 동원하여 모든 폭력과 강탈을 중지시켜야한다.” 이로부터 이틀 후 유루소프공은 도 인민위원들에게 이렇게 지시를 내린다: “무법행위로부터 종마(種馬)농장을 보호할 조치를 취하고 이 조치를 농민들에게 설명하라 등등.” 4월 18일 유루소프공은 심기가 불편하다. 지주들의 장원에서 일하는 전쟁포로들이 과도한 요구들을 제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민위원들에게 전에 짜르의 도지사들이 누렸던 권한에 기초하여 이 무례한 놈들을 징벌하라고 지시한다. 회보, 지시, 전보 명령 등이 상부에서 소낙비처럼 계속 하부로 쏟아 내려온다. 5월 12일 르보프공은 새 전보를 보내 “전국에서 끊이지 않고 있는” 무법행위들을 나열한다: 자의적인 체포와 수색; 직책을 가진 관리 및 장원, 공장, 작업장 관리자 등의 해임; 재산 파괴; 약탈, 명령 불복종, 기물파괴; 관리들에 대한 폭력; 세금 강요; 특정 집단에 대한 폭력 조장 등등. “이러한 행위들은 명백히 불법행위로 어떤 경우에는 무정부적 행위로 간주되어야한다....” 불법에 대한 규정은 명확하지 않으나 결론은 명확하다: “이러한 행위들에 대해 가장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한다.” 도 인민위원은 군청에 명령을 내렸으며 군청은 지구 위원회에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농민들의 저항에 직면하여 이 국가기구들은 모두 무기력 증세를 드러냈다.           

농촌 지역에 가까이 주둔한 군대는 거의 모든 곳에서 농민의 저항에 동조했다. 종종 군대가 투쟁의 주도권을 쥐었다. 이 운동은 지역과 투쟁의 격렬함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했다. 지주가 없는 시베리아에서 농민들은 교회와 수도원의 토지를 장악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성직자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신앙심이 돈독한 스몰렌스크 도의 경우 전선에서 바로 도착한 병사들의 영향으로 신부와 수도승들이 체포되었다. 농민들이 비교할 수 없이 더 급진적 조치를 취할 것이 두려워 지역 단체들은 원하는 것보다 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초 사마라 도의 어느 군 집행위원회는 오를로프-다비도프 백작의 재산을 농민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공공 이사를 임명했다. 케렌스키의 약속과는 달리 토지 매매를 중지시키는 법이 제정되지 않자 농민들은 토지 측량을 막아 나름의 방식으로 토지 매매를 중단시켰다. 지주의 무기 심지어 사냥용 무기마저 몰수하는 행위가 더욱 확산되었다. 민스크 도의 인민위원은 이렇게 불평한다: 농민들은 “농민총회의 결의사항을 법으로 간주한다.” 그렇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농민총회는 지역에서 유일한 진짜 권력이었다. 행동을 요구하는 농민들은 말로만 떠드는 사회혁명당 지식인들과 이렇게 너무 달랐다.       

5월말이 다가오자 멀리 아시아의 대초원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키르기즈 초원이 지주들에 대항해 들고 일어섰다. 과거에 짜르는 이 지역의 가장 좋은 토지만 농민에게 빼앗아 하수인들에게 주었다. 이제 농민들은 빼앗긴 토지의 반환을 요구했다. 아크몰린스크 도의 인민위원은 “이 생각이 초원 지역에 확산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키르기즈 초원의 정반대 쪽에 위치한 리플란드 도에서는 어느 군 집행위원회가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스타알 폰 홀슈타인 자작의 재산에 대한 약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이 사건은 별로 대단하지 않으며 자작이 사회 평화를 해치고 있다고 조사단은 선언했다. 그리고 이렇게 제안했다: 자작을 자작 부인과 함께 뻬쩨르부르그에 보내 임시정부의 재량에 맡기자. 이 갈등은 지역정부와 중앙정부, 하부 사회혁명당원들과 상층 사회혁명당원들 사이에 일어난 수많은 갈등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5월 27일에 제출된 에카테리노슬라프 도의 파블로그라드 군 보고서는 법과 질서를 거의 목가적인 그림으로 제시하고 있다: 토지위원회는 농민에게 모든 오해들을 설명하여 “모든 과격 행위를 미연에 방지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 목가는 몇 주일 밖에 가지 못할 것이다. 5월말 코스트로마의 어느 수도원 원장은 지독하게 불평했다: 농민들은 그가 소유한 뿔 달린 소의 3분의 1을 징발해갔다. 이 존엄한 수도승은 좀더 온유했어야 했다: 그는 곧 나머지 소들과도 작별하게 될 것이다.

쿠르스크 도에서는 농촌 공동체로 귀환을 거부한 개인 토지소유주들에게 박해가 시작되었다. 거대한 토지 혁명인 “검은 분할”의 시간이 다가오자 농민들은 일치 단결하기를 원했다. 내적인 분열은 장애물이 될 지 모른다. 공동체는 한 몸으로 나서야한다. 따라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투쟁은 개별 농민 즉 토지 개인주의자에 대한 폭력을 동반했다.

5월의 마지막 날 사모일로프 병사는 토지세 납부 거부를 사주했다는 죄로 페름 도에서 체포되었다. 그런데 그는 곧 다른 사람들을 체포할 것이다. 카르코프 군의 어느 마을에서 벌어진 종교 행진 도중 그리첸코 농민은 마을 사람들 전부가 보는 앞에서 성 니콜라이 성상을 도끼로 찍어 쓰러뜨렸다. 이렇게 온갖 종류의 항의가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해군 장교이자 지주인 어느 이름 없는 인물은 [백위군의 노트]라는 자신의 글에서 혁명 후 첫 몇 개월간 일어난 농촌의 변화를 흥미 있게 묘사하고 있다. “거의 모든 곳에서 처음에는 부르주아들이 직책에 선출되었다. 모두들 질서 유지에만 골몰했다.” 물론 농민들은 토지를 요구했으나 첫 두 세 달 동안에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모든 곳에서 “우리는 강탈이 아니라 합의를 통해 토지를 갖고 싶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해군 중위인 회고록 필자는 이 안심시키는 말에서 “숨겨진 위협”을 감지했다. 초기에는 폭력에 의존하지 않았던 농민들은 소위 지식인들을 “곧 멸시하기 시작했다.” 이 백위군의 말에 의하면 5월이나 6월까지 농민들은 초조하게 기다려 주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급격히 태도가 달라졌다. 임시 조치에 항의하면서 농민들은 스스로 나서서 요구를 실현시켰다.” 다른 말로 하면 농민들은 2월 혁명에게 약 3개월간의 사회혁명당 어음을 끊어주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스스로의 방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당원인 치네노프 병사는 혁명 후 모스크바에서 고향 오렐을 두 번 방문했다. 5월에 사회혁명당은 지구 위원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다수 지역에서 농민들은 아직 지주에게 임대료를 내고 있었다. 치네노프는 병사, 농업노동자, 빈농으로 구성된 볼셰비키 핵심 조직을 수립했다. 이 조직은 임대료 납부 거부와 무토지 농민에 대한 토지 분배를 선동했다. 이들은 즉시 지주의 초지를 등록시켜 마을에 분배한 후 풀을 베어 건초를 만들었다. “지구위원회의 사회혁명당원들은 우리의 불법 행위에 대해 고함을 질렀으나 자기 몫의 건초는 악착같이 챙겼다.” 마을 대표들이 책임이 두려워 직책을 포기하자 농민들은 좀더 단호한 분자들을 새로 선출했다. 그러나 이들 전부가 볼셰비키당원은 아니었다. 직접 압력을 통해 농민들은 사회혁명당을 분열시켜 혁명 분자들을 관료 및 출세주의 분자들로부터 분리시켰다. 장원의 풀을 베어 건초를 만든 후 농민들은 가을 파종을 위해 휴경지를 분할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 조직은 장원의 곡물창고를 관리하여 남는 곡물을 굶주리는 수도로 보냈다. 이 조직의 결의문은 농민의 정서와 일치했기 때문에 시행에 옮겨졌다. 치네노프는 고향에 볼셰비키당의 선전물들을 가지고 왔다. 농민들은 선전물들의 내용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역의 지식인들과 사회혁명당원들은 내가 독일의 금을 많이 가지고 와서 농민들을 매수할 것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 같은 현상은 규모에 관계없이 일어났다. 농촌 지구에도 밀류코프, 케렌스키 그리고...레닌이 있었다.

스몰렌스크 도에서는 농민 대의원 대회가 끝난 후 사회혁명당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물론 예상대로 대회는 인민에게 토지가 반환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지도자들과 달리 농민들은 이 결정을 진짜 전부 삼켰다. 이때부터 농촌의 사회혁명당원 수는 계속 증가했다. 이 지역의 어느 당 활동가는 이렇게 말한다: “대회에서 사회혁명당을 지지하여 분파에 가담한 자들은 스스로를 사회혁명당원이거나 이와 비슷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도청 소재지에는 사회혁명당이 영향을 미치는 두개 연대가 주둔해 있었다. 지구 토지위원회는 지주의 토지를 쟁기질하고 풀을 베기 시작했다. 그러자 도 인민위원인 사회혁명당원 에피모프는 이에 반대하는 명령을 위협하듯이 내렸다. 그러자 마을의 농민들은 깜짝 놀랐다. 농민들이 곧 정부이며 토지에서 일하는 농민만이 토지를 차지하여 노동의 대가를 누릴 수 있다고 그가 말하지 않았는가? 사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옐린 군에서만 17개 지구 토지위원회 가운데 16개가 지주의 토지를 몰수했다는 이유로 이후 몇 달간 재판정에 선다. 따라서 나름의 방식으로 인민주의 지식인들과 인민 사이의 사랑 행각은 파멸을 향해 다가갔다. 군 전체에서 볼셰비키는 서너 명뿐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영향력은 급속히 확대되어 사회혁명당원들을 몰아내거나 분열시켰다.

5월초에 뻬쩨르부르그에서 전국농민대회가 열렸다. 대의원들은 대체로 농촌의 상층 부위였으며 우연히 대의원 자격을 얻은 경우도 많았다. 이미 말했듯이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대회는 사건의 진행과 대중의 정치적 변화에 계속 뒤 처졌다. 그렇다면 사방으로 널리 흩어진 농민들을 대표하는 조직은 말할 필요도 없이 농촌의 실제 정서에 더욱 뒤 처졌다. 주로 상업적 협동조합이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농민과 연결된 극우 인민주의 지식인 대의원들이 한편에 존재했다. 또 한편에는 농촌의 유복한 상층인 부농, 상점주인, 협동조합 관리자 등이 진짜 “인민”을 대표했다. 사회혁명당은 대회를 압도했다. 더욱이 이 정당의 극우파 인물들이 모든 것을 대표했다. 그러나 이들조차 대의원들 일부의 토지에 대한 탐욕과 “극우” 정치노선에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주 문제에 대해서 이 대회는 대단히 급진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조금의 배상도 없이 모든 토지를 국가소유로 전환시켜 평등하게 경작한다.” 물론 부농은 평등을 지주와의 평등으로 받아들였지 농업노동자와의 평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인민주의자들의 허구적인 사회주의와 농민의 농업 민주주의 사이의 사소한 오해는 나중에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농업장관 체르노프는 농민대회에 부활절 달걀을 선사하려는 욕망에 불탔다. 그래서 토지 매매를 금지하는 포고령을 마련하느라 헛되이 부산을 떨었다. 법무장관 페레베르제프는 어느 정도 자칭 사회혁명당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농민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토지 매매는 방해받지 말아야 한다는 지시를 각 지역에 하달했다. 이에 대해 농민 대의원들이 잡음을 일으켰으나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르보프공의 임시정부는 지주의 토지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임시정부에 손도 대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농민대회 지도자들 역시 자기들의 반동 노선과 토지에 대한 농민의 욕구 사이의 모순을 전혀 해결할 수 없었다.

레닌은 5월 20일 농민대회에서 연설했다. 마치 레닌이 악어 구덩이에 빠진 것 같다고 수하노프는 말한다. “그러나 덩치가 조그마한 농민들은 그의 연설을 주의 깊게 들었다. 이들은 그의 말에 공감했을 가능성이 컸으나 이것을 감히 표현할 수가 없었다.” 볼셰비키당에 대단히 적대적인 병사 부문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처럼 수하노프도 토지문제에 대한 레닌의 전술을 무정부주의로 채색하려고 한다. 이것은 르보프공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지주의 권리에 대한 침해를 언제나 무정부주의로 바라보았다. 이 논리에 의하면 혁명은 대체로 무정부주의와 같다. 그러나 레닌이 이 문제를 제기한 방식은 그의 반대자들이 보기보다 훨씬 심오했다. 농업혁명 그리고 주로 지주의 토지 몰수를 수행하는 기관은 농민 대의원 소비에트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토지위원회는 소비에트의 직속 기관이 되어야했다. 농민 소비에트는 미래 국가권력의 기관 더욱이 대단히 집중된 권력기관인 혁명적 독재의 기관이라고 레닌은 생각했다. 이것은 정부를 포기하는 이론과 실천인 무정부주의와는 대단히 거리가 멀었다. 4월 28일 레닌은 이렇게 말했었다: “가능한 한 가장 조직된 모습으로 토지가 농민에게 즉각 이전될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무정부적인 토지 점거는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헌의회 소집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혁명적 주도력이다; 법은 혁명 투쟁의 결과일 뿐이다. 법이 제정될 때까지 손을 놓고 기다리면서 혁명 열기를 식히면 법도 토지도 얻을 수 없다.” 레닌의 이 단순한 말은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혁명들의 주장이었다.

한달 간의 회의를 마친 후 농민대회는 상설기구로 집행위원회를 선출했다. 여기에는 농촌의 강인한 소부르주아 그리고 교수 또는 장사꾼 유형의 인민주의자들 200명이 모였다. 그리고 집행위원회 지도부에는 얼굴마담들인 브레쉬코프스카야, 차이코프스키, 베라 피그너, 케렌스키 등이 자리잡았다. 의장은 사회혁명당의 아브크센티에프였다. 그는 지방의 유지들이 모이는 연회에나 어울릴 인물이었지 곧 다가올 농민전쟁에 어울릴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이때 이후 더 중요한 문제들은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의 집행위원회와 농민 집행위원회의 합동회의에서 논의되었다. 합동회의는 우익을 크게 강화시켰는데 이들은 입헌민주당과 직접 맞닿아 있었다. 노동자들을 압박하거나 볼셰비키들을 탄압하거나 크론슈타트 독립공화국을 채찍과 전갈로 위협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농민 집행위원회의 2백 개 손 아니 주먹이 장벽을 이루며 치켜 올라갈 것이다. 이들은 밀류코프와 똑같이 볼셰비키들을 “끝장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주의 토지 문제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농민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 및 임시정부와 적대하게 된다. 농민 대회가 해산하기도 전에 불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대회의 결의문들이 지역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면서 농민들이 지주들의 토지와 장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완고한 농민의 머리 속에 말과 행동의 차이를 인식시키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했다.

공포에 질린 사회혁명당은 후퇴의 호각을 불었다. 6월초에 열린 모스크바 당대회에서 이들은 토지의 자의적 점거를 엄중히 비난했다: 제헌의회가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한다. 그러나 이들의 결의문은 농민운동을 조금도 멈추거나 약화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당내에는 지주에 대항하여 농민들과 함께 끝까지 투쟁할 분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꼬여갔다. 아직 공개적으로 탈당을 결심하지 못한 사회혁명당 좌파는 농민들이 법을 우회하거나 최소한 나름대로 법을 해석하도록 도와주었다.

농민운동이 특히 격렬히 달아오른 카잔 도에서 사회혁명당 좌파는 다른 곳보다 더 빨리 결집되었다. 이들의 지도자 칼레가에프는 이후 볼셰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의 소비에트 연립정부에서 농업 인민위원이 되었다. 5월 중순부터 카잔 도에서는 토지가 체계적으로 지구 위원회로 이전되었다. 이 조치는 스파스크 군에서 가장 대담하게 취해졌는데 이곳에는 볼셰비키당원 한 명이 농민 조직을 지도했다. 크론슈타트에서 온 볼셰비키들이 농민들을 선동한다고 도 행정당국은 중앙에 불평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신앙심이 돈독한 수녀 타마라가 “이에 반대한 죄로” 체포되었다.

보레네쥬 도의 인민위원은 6월 2일 이렇게 보고했다: “특히 농업문제와 관련해 도내에서 불법행위를 일삼는 건수가 하루가 지날수록 늘고 있다.” 펜자 도에서도 토지 점거는 더욱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칼루가 도의 어느 지구 토지위원회는 수도원 소유 초지의 절반을 몰수했다. 그리고 수도원장이 불평하자 군 위원회는 이렇게 결의했다: 초지를 전부 몰수한다. 그런데 이렇게 상부 기관이 하부 기관보다 더 급진적인 경우는 자주 있지 않았다. 펜자 도에서 어느 수녀원장은 수녀원 토지를 몰수한다고 울고 있다: “지역 당국은 힘이 없다.”

비아트카 도에서는 농민들이 이후 우크라이나 카자흐 족장 가문이 될 스코로파드스키 가문의 재산을 폐쇄했다. 그리고 “토지 문제가 결정될 때까지” 어느 누구도 이 가문 소유의 숲에 들어가지 말 것과 재산에서 나온 수입은 공공기금으로 쓰일 것을 결의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연이어 토지위원회는 토지 임대료를 5배 내지 6배 인하했을 뿐 아니라 토지문제가 제헌의회에서 해결될 때까지 지주가 아니라 위원회가 임대료를 관리한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농민의 진지한 방식이었으며 제헌의회 소집 때까지 토지문제를 연기하자는 변호사의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사라토프 도에서는 어제만 해도 지주들의 벌채를 금지한 농민들이 스스로 벌채에 나섰다. 특히 지주가 거의 없는 곳에서 농민들은 더욱 빈번하게 교회와 수도원의 토지를 몰수했다. 리플란드에서는 레트인 농업노동자들이 레트인 대대 병사들과 함께 자작들의 토지를 조직적으로 몰수했다.

비테프스크 도의 목재 왕들은 토지위원회의 조치들이 목재산업을 고사시키고 있으며 자신들이 전선의 목재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막고 있다고 큰 소리로 항의한다. 이들 못지 않게 나라를 생각하는 폴타바 도의 지주들은 농민의 소요 때문에 군대에 식량을 공급할 수 없다고 걱정한다. 마지막으로 모스크바의 말 사육 협회는 농민의 토지 몰수가 조국의 종마들에게 거대한 불행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은 이 교회 주교들을 “백치들과 악당들”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그는 이제 카잔 도의 농민들이 수도승들의 토지와 소 뿐 아니라 미사용 빵을 만들 밀가루도 가지고 간다고 정부에 불평한다. 수도에서 두발자국 떨어져 있는 뻬쩨르부르그 도에서는 농민들이 임대 농민들을 쫓아내고 토지를 스스로 관리하기 시작한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뜬 내무장관 대행 유루소프공은 6월 2일 사방에 전보를 보낸다: “내가 그렇게 여러 차례 요구했는데... 다시 지시한다. 가장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 그러나 이 공작은 정확히 어떤 조치를 취하라는 것인지는 까먹고 있다.

러시아 전국에서는 봉건제와 농노제의 깊은 뿌리들이 뽑히는 거대한 과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농업장관 체르노프는 제헌의회 관련 자료들을 집무실에 모으고 있었다. 그는 가장 정확한 농업 관계 자료와 가능한 모든 종류의 통계에 기초하여 개혁을 실시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농민들에게 자신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계속 촉구했다. 그러나 그가 신성한 도표들을 작성하기 훨씬 전에 지주들은 이 “농촌장관”을 쫓아내 버렸다.

 

임시정부가 보관했던 문서들에 기초하여 소장 연구자들은 이 당시 농민운동의 상황을 종합했다. 3월에는 34개 군만이 나름대로 힘있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것이 4월에는 174개 군, 5월에는 236개 군, 6월에는 280개 군, 7월에는 325개 군으로 증가한다. 그러나 이 수치들은 운동의 실제 성장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한 달 한 달이 지날 때마다 군 내부의 운동은 더욱 완강하고 광범위한 대중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다.

3월부터 7월까지의 첫 시기에 농민의 압도적 다수는 지주에 대한 직접 폭력을 여전히 자제하고 있었으며 공공연히 토지를 몰수하지도 않았다. 현재 소련의 농업 인민위원 야코블레프는 위에서 소개한 연구를 주도했었다. 그는 농민들이 부르주아 계급을 신뢰했기 때문에 비교적 평화적인 전술을 택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틀렸다. 농민들은 도시, 행정당국, 문명 사회를 계속 의심해왔다. 더욱이 농민은 르보프공의 정부를 신뢰할 수 없었다. 첫 시기에 농민들이 공개적으로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 합법적 또는 반(半)합법적 압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들은 자신의 투쟁 역량을 충분히 신뢰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정부를 믿지 못했다. 농민들은 상황을 파악하면서 적의 저항을 측정하는 정도에 그쳤다.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지주에게 압력을 가했다. 이들은 말한다: “우리는 강탈하고 싶지 않다. 모든 일을 좋게 해결하고 싶다.” 이들은 초지를 몰수하지 않고 다만 풀을 베어 건초를 만들뿐이다. 또한 지주가 토지를 빌려주도록 강요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임대료는 스스로 정하고 있다. 아니면 토지를 “구입”하되 가격을 스스로 정할 뿐이다. 지주나 자유주의 변호사들을 갸우뚱하게 만든 이 모든 합법적 외양은 정부에 대한 깊은 불신 때문이었다. 농민은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지주를 잘 대해도 토지를 넘겨받지는 못한다. 그러나 폭력은 위험하다. 수를 써보자.” 농민은 지주의 동의하에 토지를 넘겨받는 것을 당연히 선호할 것이다.

야코블레프는 주장한다: “몇 개월 내내 농민들은 지주들에게 대단히 ‘평화적으로’ 투쟁했다. 이 역사상 유례없는 행위는 농민이 부르주아 계급과 부르주아 정부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역사상 유례없다고 선언된 이 평화적 투쟁은 실제로는 모든 농민전쟁의 초기 단계에 등장하는 전형적이면서도 역사적으로 불가피하게 강제된 방식이다. 교회법 이든 세속법 이든 법으로 초기의 반란 행위를 위장하려는 시도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모든 혁명계급의 투쟁방식이었다. 충분한 힘과 자신감을 축적하여 구 사회와 결별하기 전까지는 조심에 조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계급보다 특히 농민에게 더 그랬다. 왜냐하면 최상의 경우에도 농민은 반정도 몽매한 상태에서 전진하면서 도시의 친구들을 불신의 눈으로 쳐다보기 때문이다. 농민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데에는 나름의 합당한 이유들이 있다. 농민운동의 첫 단계에서 도시의 농민 동맹세력은 자유주의 및 급진 부르주아 계급의 하수인들이다. 농민의 요구 일부를 주장하면서도 이 동맹세력은 부르주아 소유권을 보호하기 위해 조심한다. 따라서 농민 봉기를 부르주아 법의 틀 안에 가두려고 최선을 다한다.       

혁명이 터지기 오래 전부터 다른 요인들도 같은 방향으로 작용한다. 귀족 계급 내부에서 화해를 주창하는 자들이 나타난다. 레프 톨스토이는 어느 누구보다 농민의 영혼을 깊이 꿰뚫어 보았다. 그는 악에 대한 비폭력 저항을 주창했는데 이 철학은 농민혁명의 첫 단계에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사고이다. “강탈하지 않고 상호간의 동의를 통해” 모든 것이 해결될 그날을 톨스토이는 꿈꾸었다. 그는 정화된 기독교의 형태로 이 전술을 종교화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톨스토이와 똑같은 전술을 인도에서 실천하고 있다. 다만 그는 톨스토이보다 좀더 실리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성서의 시대 아니 이보다 더 이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야코블레프가 주장한 “역사상 유례없는” 현상들이 온갖 종교적, 민족적, 철학적, 정치적 외피를 뒤집어 쓴 채 존재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917년 러시아 농민 봉기의 특수성은 부르주아 합법성의 하수인들이 자칭 사회주의자 또한 자칭 혁명가였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농민운동의 성격과 리듬을 결정한 것은 이들이 결코 아니었다. 농민은 사회혁명당이 자신을 위해 지주와 화해할 적절한 정치적 수단을 확보해 줄 때까지만 이 정당을 따라갔다. 동시에 이 정당은 농민의 법적 외피가 됨으로써 농민의 이익에 기여했다. 결국 이 정당은 법무장관이었다가 나중에 전쟁장관이 된 케렌스키 그리고 농업장관 체르노프의 정당이었다. 지주와 자유주의자들의 저항 때문에 농민에게 필요한 포고령들이 지연되었다고 지구 및 군 토지위원회의 사회혁명당원들이 설명했다. 그리고 이들은 정부의 “우리 당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농민에게 확신시켰다. 물론 이 변명에 대해 농민은 대답이 없었다. 다만 그는 사회혁명당 지도자들에게 그 소중한 “신뢰감”을 조금도 느끼지 않은 채 투쟁을 통해 이들을 밑에서 밀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열심히 투쟁하여 너무 철저히 도움을 준 나머지 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은 자기 관절이 으드득 소리를 내며 부러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볼셰비키당은 농민의 환상을 공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정당에 대한 농민의 적대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농민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다른 정당들의 속임수를 알아차리고 실망했다. 그리고 볼셰비키당에게 지지를 보냈다. 이 정당은 다른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농업문제에 있어서도 말과 행동이 일치했다. 바로 여기에 이 정당의 강점이 있었다.

사회학의 일반 이론을 통해서는 농민이 지주에 대항해 투쟁할 역량이 있는 지의 여부를 선험적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1905년 혁명과 1917년 혁명 사이에 농업 부문의 자본주의적 경향은 강화되었다. 그리고 부농 계층이 농촌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왔다. 또한 부농이 운영하는 농업 협동조합은 크게 성장했다. 이 모든 것 때문에 다음의 질문에 대해 확신 있는 대답을 하기는 불가능했다: 농민과 지주/귀족 사이의 계층적 갈등과 농민 내부의 계급 갈등 가운데 어느 것이 혁명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 

해외에서 귀국한 레닌은 이 문제에 대해 대단히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4월 14일 이렇게 말했다: “농민운동은 예언에 불과할 뿐 사실이 아니다....농민이 부르주아 계급과 동맹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한다.” 이것은 우연히 던진 생각이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레닌은 수많은 경우에 이 말을 끈질기게 반복했다. 4월 24일의 당 협의회에서 그는 농민을 과소평가 한다고 자신을 비난했던 “고참 볼셰비키들”을 공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노동계급 정당이 농민과 동일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고 희망하는 것은 인정될 수 없다. 농민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우리는 투쟁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농민은 어느 정도 의식면에서는 자본가 편에 서 있다.” 스탈린주의 아류들은 이렇게 주장해왔다: 노동계급과 농민의 이해가 영원히 조화를 이룬다고 레닌이 말했다. 그러나 지금 인용한 레닌의 말은 이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지를 증명하고 있다. 하나의 계층으로서 농민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레닌은 4월에 보다 불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즉 그는 지주, 부르주아 계급, 광범위한 부위의 농민이 안정적인 블록을 형성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농민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려 지금 애쓰는 것은 우리를 밀류코프의 손아귀에 갖다 바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중력의 중심을 농업노동자 대의원 소비에트로 이전해야한다.”

그러나 그의 예상보다 더 유리한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났다. 농민운동은 예언에서 사실로 전화되었다. 그리고 잠시 그러나 엄청난 위력으로 자본주의적 갈등보다 농민의 계층적 유대가 월등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농업노동자 대의원 소비에트는 오직 몇 개 지역 특히 주로 발트해의 몇 개 도에서만 의미 있는 세력이 되었다. 이와 반대로 토지위원회는 농민 전체의 투쟁기구가 되었다. 이들은 묵직한 압박을 가해 토지위원회를 화해의 밀실에서 농업혁명의 도구로 전환시켰다.

커다란 하나의 몸체로 보면 농민은 역사상 마지막으로 러시아에서 혁명의 주체가 되었다. 이 사실은 다시 한번 러시아 자본주의의 허약성과 강인성을 증언한다. 부르주아 경제는 아직까지 중세 농노제의 토지관계를 흡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시에 자본주의가 대단히 발전했기 때문에 농촌의 모든 계층들은 토지소유의 낡은 형태들을 더 이상 참고 인정할 수 없었다. 우선 지주와 농민의 토지는 서로 엉켜있어서 대단히 의식적으로 지주의 권리가 전체 공동체의 이익을 덫에 가두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마을의 토지는 절개지 형태로 어지럽게 소유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최근 들어 토지 공동체와 개별 토지소유주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 모든 것은 미적지근한 입법 조치로는 해결이 불가능했다. 이 결과 토지관계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더욱이 농민은 이것을 농업 이론가보다도 훨씬 더 심각하게 느꼈다. 수 세대에 거쳐 물려받은 삶의 경험은 이들 모두가 같은 결론을 짓게 만들었다: 토지에 대한 상속권과 기타 특권을 철폐해야한다; 토지의 모든 경계를 없애야한다; 역사적 관습을 청산하고 일하는 농민에게 토지를 넘겨야한다. 이것이 바로 농민의 격언 “토지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오직 신의 것이다”의 의미였다. 그리고 이 정신으로 농민은 사회혁명당의 토지 사회화 강령을 해석했다. 그러나 인민주의자들의 모든 이론에도 불구하고 사회혁명당의 강령에는 사회주의적 내용이 전무했다. 역사상 가장 대담한 농업혁명도 그 자체로는 부르주아 경제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농민 각자에게 “토지소유권”을 보장할 사회화는 무제한적 시장관계 때문에 완전한 공상이었다. 멘세비키들은 이 공상을 자유부르주아의 관점에서 비판했다. 반면 사회혁명당 이론이 공상으로 만든 농업혁명에서 볼셰비키들은 진보적 민주주의 경향을 찾아내었다. 이들은 농민이 노동계급과 동맹함으로써 농업혁명을 완수하고 동시에 사회주의 혁명을 도와야 한다고 보았다. 레닌은 이렇게 러시아 농민운동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밝혔다. 이것은 맑스주의에 대한 그의 기여 가운데에서도 가장 위대한 기여에 속한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적었다: “러시아 역사 발전의 연구자요 사회학자로서 (즉 고지에서 사건들의 진행을 관찰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레닌과 트로츠키가 최근 유럽의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보다 푸가초프, 라진, 볼로트니코프 등 17, 18세기의 러시아 역사와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가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를 언급한 것은 일단 논외로 하자. 이것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가 끌어다 놓은 것으로 지금의 논의와 전혀 무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유주의 사회학자로서 주장한 바에 일말의 진실이 있더라도 이 진실은 볼셰비키당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없다. 오직 러시아의 부르주아 계급, 역사무대에서 이들의 뒤늦은 등장, 이들의 정치적 무의미성에 대한 비판이 될 뿐이다. 과거의 거대한 농민운동들이 러시아의 사회적 관계들을 민주화시키지 못한 것은 볼셰비키당의 잘못이 아니다. 이 운동들을 도시가 지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주화는 성취되지 못했다! 1861년의 소위 농민 해방이 공동체 토지의 도둑질, 국가에 대한 농민의 노예화, 신분제도의 완벽한 보존 등을 결과한 것도 볼셰비키당의 잘못이 아니다. 한 가지는 명확하다: 17세기, 18세기, 19세기에 시도조차 되지 못한 거대한 사회변화를 볼셰비키당이 20세기 첫 25년에 수행해야했다. 이 거대한 부르주아 혁명의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볼셰비키당은 구 지배계급들과 구 시대라는 역사적 쓰레기를 우선 치워야 했다. 최소한 이 예비 임무를 볼셰비키당은 대단히 성실하게 성취했다. 이 점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밀류코프도 지금은 이것을 감히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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