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john
1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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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wikipedia.org/wiki/Jurchen_language

 

writing system for Jurchen language was developed in 1119 by Wanyan Xiyin. A number of books were translated into Jurchen, but none have survived, even in fragments. Surviving samples of Jurchen writing are quite scarce.

 

여진어는 1119년에 완얀시인이라는 놈이 만들었다. 몇가지의 책들이 여진어로 번역되었고, 그러나 그 어느것도 존속하지못하였고, 단지 부분만이 남아있다. 살아있는 여진어에 대한 샘플들을 극히 희박하다.

 

 

The two most extensive resources on the Jurchen language available to today's linguists are two dictionaries created during the Ming Dynasty by the Chinese government'sBureau of Translators (Siyi Guan)[3][4][5] and the Bureau of Interpreters (会同馆, Huitong Guan). Both dictionaries were found as sections of the manuscripts prepared by those two agencies, whose job was to help the imperial government to communicate with foreign nations or ethnic minorities, in writing or orally, respectively.

 

두가지의 가장 방대한 여진어에 대한 소스가 오늘날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명대에 한족 정부의 통역관에 의해서 발간된 Siyi Guan과 Huitong Guan 이라는 번역관련책이다. 두 사전은 두명의 그들의 제국정부가 외국이나 소수민족과 글 혹은 말로 소통하는 것을 돕는 두명의 통역관의 메뉴스크립트에서 발견된 것이다.

 

Although the Bureau of Translators' multilingual dictionary (华夷译语, Hua-Yi yiyu, 'Sino-Barbarian Dictionary') was known to Europeans since 1789 (thanks to Jean Joseph Marie Amiot), a copy of the Hua-Yi yiyu with a Jurchen section was not discovered until the late 19th century, when it was studied and published by Wilhelm Grube in 1896. Soon research continued in Japan and China as well. It was this dictionary which first made serious study of the Jurchen language possible. This dictionary contained translation of Chinese words into Jurchen, given in Jurchen characters and in phonetic transcription into Chinese characters (rather imprecise, since the transcription was done by means of Chinese characters).

 

통역관들의 여러 언어에 대한 (사전이 비록 1789년(18세기)에 유럽에 알려졌음에도, Hua-Yi yiyu(중국-야만인사전)내에서 jurchen새끼들 언어에 관한 섹션은 19세기까지 발견되지 않다가 1896년에야 윌헴 그루브에 의해서 연구되고 (연구성과가) 발간되었다.

(중국-야만인사전은 여진새끼들 외에도 여러 언어를 기록했는데, jurchen새끼들꺼는 발견이 안되다가 19세기에나 발견되었다는뜻.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인지하는 것은 그 19세기이후에 서양학자들이 복원한 말일 뿐이라는 것임)

 

곧, 일본과 중국학자들의 연구가 계속되었다. 이 사전은 인하여 첨으로 여진어가 연구가능하게 해되었다. 사전내용에는 중국어를 여진으로 번역한 것도 있었고, 주어진 여진어에 중국어로 음성기호를 적은 것도 있다.(다만 음성기호라는 것이 한어로 적힌 거라서 다소 부정확하다.)

 

 

Due to the scarcity of surviving Jurchen-language inscriptions, the overwhelming majority of primary documentary sources on the Jurchen people available to modern scholars are in Chinese.[15] Therefore, when names of Jurchens, or Jurchen terms, are written in English, the same writing convention is usually followed as for Chinese words, that is, the English spelling is simply the Romanization (Pinyin or Wade–Giles, as the case may be) of the Modern Standard Mandarin pronunciation of the Chinese characters that were used to render the Jurchen name or word. This standard presentation does not attempt to reconstruct the original Jurchen pronunciation of the word, or even the 12th-century Chinese pronunciation of the Chinese characters (even though more-or-less hypothetical Middle Chinese pronunciation of Chinese characters can be looked up in specialized dictionaries and databases,[16] and reconstructing pronunciation of some Jurchen words is attempted by some authors as well.[17]) Thus, for example, the Jurchen name of the firstJin emperor is written in Chinese as 完颜阿骨打, and appears in English scholarship as Wanyan Aguda (using Pinyin) or Wan-yen A-ku-ta (using the Wade–Giles system).

 

살아있는 주르첸어 글귀의 희박한 때문에 현대 학문차원에서 가능한 여진어에 관한 주요 소소는 문서 소스의 주류는 중국어로 죄다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어로 적힌 여진어이름이나 여진어 단어라 하더라도 일반적으로는 중국어식을 따른 것이다, 그 것은 한어에 관한 현대 표준 만다린 발음의 간체의 로마화한 영어식 스펠에 의해서 렌더링되어 있다는 것이다.(한마디로 1700s 이래에 여진어는 복원불가라는거다. 겨우 텍스트로 뜻은 이해할 수 있지만, 뭐 로제타스톤으로 이집트상형문자 번역하는 수준이고, 발음체계에 대해서는 걍 현대식으로 발음하는 거란다.)

 

 

https://en.wikipedia.org/wiki/Manchu_language

 

In 1635 Hong Taiji renamed the Jurchen people and Jurchen language as "Manchu".

Manchu began as a primary language of the Qing dynasty Imperial court, but as Manchu officials became increasingly sinicized, many started losing the language. Trying to preserve the Manchu identity, the imperial government instituted Manchu language classes and examinations for the bannermen, offering rewards to those who excelled in the language. Chinese classics and fiction were translated into Manchu, and a body of Manchu literature accumulated. [18] As the Yongzheng Emperor (reigned 1722–1735) explained, "If some special encouragement … is not offered, the ancestral language will not be passed on and learned."[19] Still, the use of the language among the bannermen was in decline throughout the 1700s. Historical records report that as early as 1776, the Qianlong Emperor was shocked to see a high Manchu official, Guo'ermin, not understand what the emperor was telling him in Manchu, despite coming from the Manchu stronghold of Shengjing (now Shenyang).[20] By the 19th century even the imperial court had lost fluency in the language. The Jiaqing Emperor (reigned 1796 to 1820) complained about his officials being good neither at understanding nor writing Manchu.[19]

 

1635년에 홍타이지가 여진인과 여진어를 만주로 개명한다.

만주어는 청왕조의 황실에서는 주요 언어가 되었으나 만주관료들은 급속도로 중국화되었고, 대부분은 그들의 언어를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만주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시도로써 황실은 만주어 교실과 팔기들에 대한 시험을 하는 기관을 만들어서 만주어를 잘 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는 하였다.

(만주어 기관에서)중국 고전과 소설들이 만주로 번역되엇고, 만주어 문학이 축척되었다.(정부기관주도로만 만주어문학이 형성되었다는 뜻)

 

옹정제가 설명했듯이, "만약 어떤 특별한 장려가 제공되지 않는다면, 그 선조어는 살아남지 못하고, 배워지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가 흘러가는 동안에 팔기만주인들 사이에서 만주어의 사용은 줄어들고 있었다. 1776년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건륭제는 한 고위만주관리인 Guo'ermin이라는 새끼가 만주인 소굴인 지금의 센양에서 온 놈임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만주어로 말하는 것을 전혀 이해못하는 것에 쇼크를 받고 있다.

19세기에는 황실마저 만주어를 상실하고 있었다. 가경제(1796~1820)는 그의 관료들이 만주어를 잘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쓰지도 못하는 것에 불평하고 있다.

 

 

=>여진어는 17세기에 만주어로 명명됨. 그런데, 17세기 바로 그 시점부터 급속도로 상실되었고, 18세기에는 거의 멸망일보직전됨.

그러나, 적어도 청황실이 존재하는 이상은 완전히 멸망취급당하지는 않았다고 함.

 

 

The modern custodians of the language are the Xibe (or Sibe) who live near the Ili valley in Xinjiang and were moved there by the Qianlong Emperor in 1764. Modern Xibe is very close to Manchu, although there are a few slight differences in writing and pronunciation. Xibe is taught as a second language by the Ili Teachers' College (Yili Normal College) in the Ili Kazakh Autonomous Prefecture of northern Xinjiang. Occasional television broadcasts in Xibe language are made in Qapqal Xibe Autonomous County, and about 1,300 copies of the world's only newspaper in Xibe language, Qapqal News, appear twice a week.

 

그 이후에는 존나 만주어사용자는 극히 줄어서 21세기에는 마지막 20명도 안되는 만주어구사자가 뒤져나감.

모던 Xibe(시보족어)가 만주어랑 매우 비슷한데, 시보족이 출간하는 시보소수민족신문인 찹찰 뉴스가 1300부정도 매주 2회정도 출간되고 있음.(이게 아마도 만주어랑 가장 비슷한 현대에 존재하는 살아있는 만주어잔류라고 그러는 듯.)

 

물론 그 것도 발음pronunciation이랑 쓰기writing가 조금 다르고, 상기했지만 만주어 발음은 지금은 한어로 기반한 것밖에 없어서, 현대 간자체 북경어식으로 발음하고, 있을 뿐인 학자들에 의한 복원어가 여진-만주어임.   

 

 

 

https://en.wikipedia.org/wiki/Balhae

 

In the confusion of uprising by the Khitan people against the Tang, Dae Jung-sang, a former Goguryeo official[2][3] who was a leader of a remnant of Goguryeo, allied with Geolsa Biu, a leader of the Mohe people, and rose against the Tang in 698 as Go. After Dae Jungsang’s death, his son, Dae Jo-yeong, a former Goguryeo general[4][5] succeeded his father. Geolsa Biu died in battle against the Tang army led by the general Li Kaigu. Dae jo Yeong managed to escape outside of the Tang controlled territory with the remaining Goguryeo and Mohe soldiers. He successfully defeated a pursuing army sent by Wu Zetian at the Battle of Tianmenling. which enabled him to establish the state of Balhae in the former region of Yilou as King Go.

 

 

https://en.wikipedia.org/wiki/Mohe_people

 

The MoheMalgal, or Mogher were a Tungusic people in ancient Manchuria. They are sometimes[when?] considered[by whom?] the ancestors of the Jurchens, modern-day Manchus and other Tungusic peoples.

 

모헤, 말갈 혹은 모거는 고대만주의 퉁구스인들이다. 그들은 때때로 여진이나 현대 만주과 다른 퉁구스인들의 조상으로 간주된다.

 

그 윗 내용은 발해가 애초에 고려인과 퉁구스인들의 결합으로 생성되었다는 것이고, 고려인인 대중상과 퉁구스인이 100프로 확신되는 말갈족 추장 걸사비우의 연합체가 바로 발해라네.

걸사비우는 당과의 전투에서 뒤졌지만 대조영이가 살아남은 고구려병사들과 말갈병사들을 이끌고 당영역을 벗어나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는데, 그 것이 바로 후일 발해인 것임.

 

 

 

다만 여기서 이런거지. 고구려를 Korean(고려인)으로 볼 수 있다고해도, 이 때의 고려인이라는 것은 고구려계 북방인이고, 반면에 남쪽사람들은 han韓이라는 것이지.

 

후일 고려인 왕실에 의해서 역사는 다소 수정을 가해진 듯하고, 삼한일통의 개념이 삼국통일로 바뀐 흔적은 역력하다.

즉, 김춘추나 김유신등에 있어서, 통일이라는 것은 삼한일통이었고, 고구려영토는 어디까지나 이방인들의 땅을 먹은 것에 불과하였는데, 후일 고려인들이 집권하면서 역사를 수정했다라는 것이다.

 

삼한일통은 백제, 신라, 가야를 가르치며, 그 것은 웅진시대(476~538)와 사비시대(538~660)인 백제와 신라의 마지막 마립간이나 다름없는 소지마립간(재위:479~500, 신라초대나 다름 없는 법흥왕의 장인)의 시대가 거의 겹친다는 점에서 백제의 금강시대와 초기신라는 사실상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성립하는 점에서 삼한문명을 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왕조순환적인 역사관을 극복하였을 때에 백제왕조가 곧 웅진, 사비시대라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고, 그 것은 단지 한반도최초의 중앙집권왕조라고 말하는 방식마저 유교사관적인 제사상의 위계인 조상숭배상의 항렬적인 관점이다.

 

왕궁터나 불사등의 고고학적인 점이나 실제로 존재한 것에 대한 기록을 확실히 참조하자면, 금강유역에서 백제이전과 이후는 현격하므로 그 의미는 훨씬 더 중요한 것이고, 왕조로서의 백제의 의미만 생각해서는 안되고, 그 것은 금강문명 그 자체로써 금강문명의 최초국가가 백제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지야하고, 또한 비슷한 관점에서 백제와 신라는 단지 결혼동맹을 한 것이 아니라 금강문명의 수립이 곧바로 형산강문명의 수립과 형산강권역에서 최초 왕조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관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속지적인 삼한이라는 땅은 470년경을 기점으로 동서양국구도로 정립되었고, 그에 따라서 6세기와 7세기에는 그들간의 투쟁이 도출된 것이다.

 

조금 더 통합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그 것은 삼남한인들의 우르와 키시(둘 모두 수메르문명의 주요 도시국가)와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반면에 광개토라는 놈과 장수왕이라는 놈이 세운 나라인 고구려는 남쪽의 농경인들에게는 북방의 별개의 국가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당연합군과 고구려의 전쟁이라는 국제적인 전쟁에 휘발렸기 때문에 신라는 부득이하게 이민족강역을 흡수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신라가 고구려영토를 상실했다고 하는 통일파시즘적인 관점보다는 순서에 입각한 올바른 관점인 것 같다.

 

그러나, 이는 곧 삼한인들의 고려인들에 대한 복속을 요구하게 되고, 그 반작용으로써 10세기 이후에는 거꾸로 고려인들에 의해서 삼한인들이 지배를 받는다. 그러한 관계 이후에는 비록 통일왕조를 지향하지만, 실은 여진-몽골계 이민족이 세운 조선왕조가 등장, 구체제전제적인 관점에서 고려인과 삼한인을 모두 아우르려는 권위주의적 전제주의를 표방하게 되는 것이다.

 

 

 

즉, 북방계의 존재를 전향적으로 인지한다고해도, 애초에 지금의 북한과 동북3성 남부에는 고려인들로 간주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한수이남에는 한인들이 있고, 이들은 애초에 별개의 민족이다.

 

고려인들의 문명은 압록-대동강 문명이고, 반면에 한인들의 문명은 금강문명 혹은 한-금강문명 혹은 금강-형산강문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성은 전제적인 왕조에 의해서, 둘 모두 똑같이 복속된 신민노예로 취급되는 과정에서 동등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납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북한문명과 남한문명은 분명히 나당연합군에 의한 군사정복활동 이전에는 별개의 근본을 가진 것으로 보는 것이 맞고, 꽃제비들이 동북3성에서 구걸질하고 뭐 패악질도 치는거 보면, 애초에 북한인은 그짝 지역과 오랜동안 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

 

반면에 같은 삼남내에서의 동서구도는 백제와 신라가 애초에 결혼동맹을 했듯이, 처음부터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러한 가운데에서 존재한 통합성내에서의 지역성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객관적으로 보면, 한인들이 통일신라를 통해서 고려인들을 대략 300년이 채 안되게 복속시켰고, 거꾸로 후삼국시대 이후에는 고려인들이 삼한인들을 대략 300년 정도 복속시킨다. 그러한 이후에는 몽골제국의 탄생이라고하는 위도상 먼 북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서, 고려의 지배계급은 몽골계로 대체된 것으로 보이며, 여진계인 이성계가 개성에서 집권할 수 있었던 배경역시 몽골계지배계급에 의해서 이미 형성된 것이다.

 

조선왕조가 토착성을 강조하게 되는 것은 구한말 당시의 엘리트들이 동국사따위를 발간하던 왕조말기의 일이고, 유교윤리를 통한 전제적 지배구조의 확립이라는 지배방식자체는 이미 금(=대진)나라와 원나라에 의해서 제시된 방식이다. 그러므로, 그 것은 현격하게 이민족지배계급에 의한 지배방식인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Jin_dynasty_(1115%E2%80%931234)

 

The Jin dynasty, officially known as the Great Jin, lasted from 1115 to 1234 as one of the last dynasties in Chinese history to predate the Mongol invasion of China. Its name is sometimes written as Kin or Jinn in English to differentiate it from an earlier Jìn dynasty of China whose name is identically spelled using the Latin alphabet.[2] It is also sometimes called the "Jurchen dynasty" or the "Jurchen Jin", because its founding Emperor Taizu of Jin (reign 1115–1123) was of WanyanJurchen descent.

The Jin emerged from Taizu's rebellion against the Liao dynasty (907–1125), which held sway over northern China until the nascent Jin drove the Liao to theWestern Regions, where they became known as the Western Liao. After vanquishing the Liao, the Jin launched an over hundred-year war against the Song dynasty(960–1279), which was based in southern China. Over the course of their rule, the Jurchens of Jin quickly adapted to Chinese customs, and even fortified the Great Wall against the rising Mongols. Domestically, the Jin oversaw a number of cultural and technological advancements, like the development of gunpowder and the revival of Confucianism.

 

유교의 부활이라는 것 자체가 금나라때에 시도된 거란다. 그 이전의 중국에는 불교가 대세였고, 당대와 송대까지만해도 말이다.

그리고, 금의 지배계급들이 몽골에 흡수되면서, 유교지배사상은 곧 원에서도 채택되었고, 조선의 유교화라는 것 역시 이러한 연장선에 있는 거란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의 통치술조차 애초에 몽골-여진계 왕조식의 통치기법이고, 그러한 체제내에서 제시된 것이 고려인이건 삼한인이건 그 것은 조선인시민으로써는 대등하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그 것은 지배복속된 피지배민족으로써의 동등성을 의미한다. 즉 똑같은 노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1940년대의 공간사에서 고려인들은 북한, 한인들은 남한으로써 따로 독립하게 된 것은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Korean이라는 명칭은 더 이상 한인들에게는 부적절하며, korean이 고려인과 삼한인을 합친 개념으로 된다는 것 자체가 유교지배계급인 인서울앙시앵레짐들의 관점이다.

 

나는 Korean은 북한고려인으로, 그리고 한인은 Han이라는 진짜 이름을 찾는 것이 맞다고 보며, 우리나라 역시 Hankook혹은 Hankuk으로써 따로 다뤄져야하며, 고대사차원에서도 Guguryeo는 Korean들의 나라지, Han들의 나라인 Hankook韓國이 아니라고 봐야 된다는 관점이다.

그러한 관점이야 말로 구체제에서 기인하는 통일파시즘적인 관점인 것이다.

 

즉, 고구려-발해-고려는 북한고려인들의 역사이고, 신라-백제-가야는 Hankook으로써 한인들 국가이며, 그들의 이러한 자연적인 경계를 벗어난 통치는 통치를 받게 되는 입장에서는 가증스러운 정복이 된다.

 

 

 

그러나 한인들이 그간 군사정권이나 전제왕조하에서 어떤 식으로 사관을 세뇌받았던가?

뭐 한갖 가증스러운 정복자인 징기스칸이나 아구다, 이런 새끼들이 뭐 위대한 새끼라는 관점을 세뇌받고, 철저하게 정복자들의 논리를 답습받은 결과가 한반도전체에는 하나의 국가밖에 존재할 수 없다는 전제주의적 사고로 귀결된 것이다. 

 

그러한 사고를 벗어나서, 지배하는 쪽도 지배당하는 쪽도 지배와 피지배는 참으로 불편한 동거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인권과 상호존중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입각했을 때에 반도양국제는 당연한 귀결이며, 서로는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먼 시점에서는 전혀 다른 역사성을 지닌 켈트족의 스코틀랜드와 앵글로색슨족의 잉글랜드가 하나의 체제에서 결합하듯이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의 통일관은 구제체로부터 기인하는 통일전제주의 혹은 통일전체주의 혹은 통일파시즘이 맞다는 것이고, 이러한 한계를 지니고, 한쪽이 복속당하는 것은 나는 절대적으로 불합리하다고 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Shilla, Baekjae=>Han계 dynasty

Korea 혹은 Corea 그리고 Balhae=>Korean계 혹은 Goguryeo계 dynasty

 

Joseon 혹은 Chosun plus late-Korea era.=>Babarian 씹새끼들 지배정복시대.

 

이고, 따라서 Joseon era는 dark ages 라는 것이고, 지금의 인서울지배계급은 Korean Empire(고려제국)의 지배계급으로부터 기인하는 독자적인 지배계급이 아니라 노예마스터적인 Joseon dark ages의 지배계급인 사대주의자 혹은 매국노새끼들이라는 것이다.

 

 

 

사대주의와 매국은 사실은 똑같은 말이에요. 영어로는 둘 다 traitor지. 배신자새끼가 매국한 놈이고, 그런데 프랑스의 나치매국노가 갸들은 전쟁에서 졌으니까 매국노 반역자가 된 거지만, 갸들이 이겼으면 지들 스스로를 좀 더 모더레이트하게 부를 거잖아. 그게 바로 사대에요.

즉 프랑스의 독일사대주의자가 되는거지. 실은 씨발 나치추종자 트레이터개새끼가 말이다.

 

결론은 그 두 언어가 다른 뜻이 아닌데 병용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국인은 여전히 사리에 밝지 않고, 걍 생각이 없다는거에요.

 

즉 사대주의자가 중화질서 혹은 북경질서추종자인 배신자새끼인 것이지. 뭐 대구까지 포함시켜. 씨발. 알게 뭐냐. 뭐 나도 경상도 살지만 경상도새끼들 마인드 뭐 배신자새끼들 마인드지 뭐.

 

 

https://en.wikipedia.org/wiki/Jin_dynasty_(1115%E2%80%931234)

 

의 글은 좀 자세히 읽어봐라. 생각할게 많을거다.

 

The Jin dynasty was officially known as the "Great Jin" at that time. Furthermore, the Jin emperors referred to their state as Zhongguo (中國) like some other non-Han dynasties.[3] Non-Han rulers expanded the definition of "China" to include non-Han peoples in addition to Han people whenever they ruled China.[4] Jin documents indicate that the usage of "China" by dynasties to refer to themselves began earlier than previously thought.[5]

 

당시에는 대진으로 알려진 금왕조에서 진 황제들은 그들의 나라의 이름이 중궈로 불리기를 원했고, 그 것은 비한족 지배자들이 지나라는 개념을 그들 비한족들을 포함한 개념으로 확장시키기를 원하던 경향이었어요.

 

그러한 점에서 여진지배계급인 조선역시 Hangguo라는 개념을 끌고 나오는 것이지. 그리고, 여기에 스리슬몃 지들도 끼워넣는거야. 그래서, 여진족이 전주 이씨로 둔갑하는 것이지.

 

 

In the early 1180s, Emperor Shizong instituted a restructuring of 200 meng'an units to remove tax abuses and help Jurchens. Communal farming was encouraged. The Jin Empire prospered and had a large surplus of grain in reserve. Although learned in Chinese classics, Emperor Shizong was also known as a promoter of Jurchen language and culture; during his reign, a number of Chinese classics were translated into Jurchen, the Imperial Jurchen Academy was founded, and the imperial examinations started to be offered in the Jurchen language.[16] Emperor Shizong's reign (1161–1189) was remembered by the posterity as the time of comparative peace and prosperity, and the emperor himself was compared to the mythological rulers Yao and Shun.[16] 

 

 

세종이라는 놈이 농업을 장려하고, 언어와 문화를 장려하는 점도 거의 조선과 빼박이지. 다만 그 대상이 금에서는 여진어인 Jurchen language인 것에 반해서, 그 것이 한반도에서는 일본의 히라카나가 암클정도로 불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서울지배계급이 보기에는 왜색이 강한 한반도남부님에게 창작, 공급한 언어는 북방어체계와 한어의 한자를 차용한 것이 아니라 히라가나적인 알파벳요소를 전격차용했다는 점이 틀릴 뿐, 조선왕조의 세종이 금세종을 답습하려 한 점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E%88%EB%9D%BC%EA%B0%80%EB%82%98

 

히라가나는 여성이 많이 썼다고 한다. 그래서 온나데(일본어: 女手; 일본어: おんなで)라고 불린 적도 있다. 이런 이유로 히라가나는 여자들만 쓰는 글이라 하여, 오랫동안 일본의 공용 문서에선 가타카나와 한자(칸지)만이 사용되었다. 현재 일본 철도의 역명판에는 히라가나와 칸지가 적혀 있다. 히라가나는 헤이안 시대부터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 한글이 암클로 불리던 점 역시 온다데인 히라가나를 많이 참조한 점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이고, 20세기까지도 아니 지금도 중부지방의 엘리트들은 남쪽사람들에 대해서 문화우월적인 관점을 취할 때에 '왜색이 강하다' 따위의 term을 지금도 쓰고 있다.

물론 그 것은 왜와 한이 고대로부터 아주 교역이 활발했다라고 하는 점 따위로부터 기인하는 국뽕적인 요소와 결부지어지기 보다는 순전히 상대적으로 남쪽인들이 그리보인다는 차별적인 정서인 것이다.

씨발 존나 농사지어서 쳐 진상하기 바쁜데, 왜랑 교류하기는 뭘해 씨발.

 

존나게 농사나 짓고, 아니면 머슴질이나 한 것이 한인의 참역사제. ㅋㅋㅋㅋㅋㅋ 뭐 가야때 잠시 흥했던가 그게 뭐 수천년전 일인데, 뭐 가야는 그래서 더 왜색이 강했다고 할려고, 임라일본부설 받아들이고, 그게 씨발 인서울엘리트들 생각수준이라는거다.

 

 

그럼 씨발 지금은 일본년들 데리고 사는 놈도 구한말보다는 10배는 늘었을텐데, 씨발 부산떼서 일본주지 왜? 물론 나는 일본어를 잘 할 자신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뭐 경상도는 왜색이 강하고, 전라도는 왕서방이랑 썪인거 같다 이 지랄하는 거부터가 인서울식 인종차별주의라는기다. 그런데, 또 역사를 논하면 왜 씨발 니는 인종차별하냐고 물타기 지랄지랄. 아주 답없는 노답새끼들이제.

 

북조선고려인들과 남조선한인들이 대등하니까 별개의 역사성이 있다는건데, 아 이새끼 지역차별하네 이러면서 지들의 전제적인 요소를 물타기하면서 지랄지랄. ㅋㅋㅋㅋㅋㅋ

 

아, 네 아갈파이터들이랑 싸우면 전 백전백패입네다요. 걍 나는 이 글을 쓸 뿐.






  • R.Strauss
    16.10.21

    확실히 고려말 원나라화 되기 전과 후의 고려 지배층은 혈통을 떠나 사상과 이념적으로 분리해서 보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긴 하네요.

    다만 한인이라는 사람들이 옛날 부터 벼농사 지어 진상했다는 개연성이 부족해 보여요. 제 부모님 고향이 충남 바닷가인데, 사실 생존을 위해 먹고만 살려면 지금도 어로나 잠수없이 갯벌에서 채집하는 걸로도 거의 식생활 절반이상을 커버 칠 수 있는 정도거든요. 요즘은 아마 밀조개가 대박일 듯 한데.

    삼면이 바다인 반도에서 본격적인 농경의 발전은 몇가지 계기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최소 아래 조건 중 하나 이상이 충족되는 경우라고 봅니다.

    첫째, 농사를 지어 줄 노예제도의 활성화
    둘째, 농업생산물에 대한 국가의 강제할당적 수탈
    세째, 인구증가로 인해 해안가 어로와 채취만으로 생존이 어려워짐
    마지막으로 화폐경제가 활성화 되어 잉여생산물의 화폐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

    말씀 하신대로 470년경 중앙집권적 전제왕국으로서의 신라, 백제가 정립되었다는데는 별 이견이 없지만 그 전에 위의 조건들 중 하나라도 성립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그리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남한지역에서 농사의 활성화는 제 생각엔 전제왕국 정립 후 500년 이후로 보는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네요.

    또한 제가 본 한반도의 인류라는 다큐를 보니, BC 5000 년경에 신석기와 불을 이용해 제작한 3-4인용의 통나무배가 발굴되었고, 고래뼈들이 주거지 지역에서 다른 동물들의 뼈들과 함게 발견된 것을 근거로 당시에도 근해에서 고래잡이가 가능했었고, 좀 더 후에는 열도를 오갈 수 있는 정도였을 거라 추정하더군요. 산동반도나 요녕반도는 지금도 해류를 잘 타면 콜라 패티병으로 만든 뗏목으로도 건널 정도라고 하니, 바닷가에서 살던 고대인들의 바다와 항해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을 과소평가하는 건 좀 오류 같습니다. 유목민들만 해도 사방 아무 표식이 없는 대초원에서 길을 잡는 건 결국 해와 별에 대한 천문학적 지식으로 찾는 것이기도 했고요.

    헬조선의 사학계는 국뽕과 강단사학을 막론하고 중국식 전제왕국의 성립시기가 민족의 우월성의 지표가 되는 기이한 역사인식이 있어서, 존님이 말하는 삼한인들은 기본적으로 농경족이 아니라 해양족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자명한 걸 무시하고, 여전히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미신에 빠져 지금도, 단군왕조가 은나라보다 앞섰고 요서도 헬조선 부동산이네, 환웅왕조가 기원전 5000년부터 있어서 중국역사 따위 발라 버리네, 고구려가 요동땅 몇평을 더 가졌네로 시작해, 너네 아파트 몇평이냐를 자랑으로 알고 따지는 미개함이 계속 되는 듯.

    저는 다만 사리에 비추어 삼한인이 기본적으로 해양족이었을 거라는 추론을 하지만 존님이 삼한인이 농경족이라고 보시는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요는 서울새끼들이 남쪽에 왜색이 짙네, 짱개 피랑 섞였네 라고 지랄하는 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남쪽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확실하지만, 저는 팩트에는 이런 말들이 가깝다고 보고, 이를 오히려 강점으로 활용할 방법을 찾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 거지요.
     

  • john
    16.10.21

    아니 쌀농사에 관한 것은 상대적인 것이고, 스트라우스님의 견해에 공감함.

     
    쌀농사보급에 관한 것은 두가지 이벤트가 있음. 하나는 고려조때의 향, 소, 부곡이고, 하나는 조선세종대의 일임.
    부곡은 분명히 쌀생산노예들의 행정구역이며, 쌀농사는 삼한보다는 고려, 조선조에 확실히 강제되었던 것 같음. 그 것은 정서적으로 군사정권이 어떤 식으로 농업을 프로파간다해서 지금의 대한민국조차 농업프로파간다를 펼치는 지를 감안하면 분명히 전대보다는 후대의 일임.
     
    하나더는 금강문명성립이후에 동진으로부터의 문물수입인데, 쌀농사는 의외로 매우 늦게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봄.
  • R.Strauss
    16.10.21
    확실히 국가적 수탈과 노예의 증가가 상관관계가 있는 거군요.
  • john
    16.10.21


    그리고, 저도 해안가사람이지만, 식량고갈은 아니었을거라고 봅니다. 일제시대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해안가에는 물고기가 풍부하다고 한 기록이나 당시의 부산포의 규모나 창원, 마산, 울산, 장승포에 대한 이야기가 실전되는 지역사람입장으로써, 조선왕조는 해금령따위를 핑계로 부산앞바다에서 고등어도 제대로 못 잡게 했을거라고 봅니다. 창원같은 곳은 나름대로 어항으로 발전가능성이 있는 곳인데도, 불과 얼마전만해도 완전히 낙후된 동네였고, 진해도 마찬가지고, 전라도 사람들은 그래도 조운에 필요하다는 핑계로 배를 가지고 어느정도 조업한 것 같지만, 거제도같은 곳에서 노인들이 어떻게 물고기를 잡냐를 보면, 천상 배도 없어서 낚시로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쿠로시오해류를 따라서 움직이는 엄청난 물고기들의 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엘 못 나가서 겨우 갯벌에서 그 물고기들 떼가 오는 것을 낚시로 낚았다는 겁니다.
    뭐 경상도에도 조선초기에는 조운이 있었지만, 곧 육로로 충주로 운반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 씨발 어로도 못하게 하는 아주 개새끼같은 것들이 인서울 개새끼들이고, 그 개새끼들이 그런 질서에서 부를 축척하는 방법이 땅가지고 갑질하는거죠. 포경도 일본인들이 들어오고나서 고대이후에 중지되었다가 재개된 것입니다.
  • R.Strauss
    16.10.21

    완전 동감입니다. 피지배층을 농사든, 부동산이든 땅에 묶어 놓는 게 가장 확실하고 쉬운 수탈방법이죠.

     

    그러고 보면 제 외조부가 일제시대부터 어선을 건조 하시다가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 어선 건조 기술을 일본인들에게 전수 받았을 가능성이 높겠네요.

  • 노인
    18.02.18

    한국의 식생활 변천사에서 고려시대 때 숟가락으로 찐쌀 먹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최소 고려 시대 때 쌀농사 시작하지 않았는 가 추측 하고 있음

    그 전까지는 곡식을 빻아 먹어서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92211.html
     
    아무튼 금강문화는 과소평가할게 아닌 것 같지만.
  • R.Strauss
    16.10.21
    존님도 기타게시판에 귀양 오셨군요, ㅎㅎ. 저는 강제로 한번 옮겨졌다가 다시 재업한 후, 2페이지로 넘어 가면서 자발적으로 이동했습니다. 유머, 자유 게시판 따위는 메인에서 링크 되는데 핼조선의 근원을 알아보자는 글들이 쓰레기통으류 보내지는 거 보면 운영자 새끼가 양재동놈 맞는 듯.
  • john
    16.10.21
    그 자체가 특정 개인(나자신)을 찍기 위한 것이라고 상당히 느끼고 있음.
  • 조선머더뻐커
    17.01.29
     
    중국을 지배하기전 지배이후 홍타이때  이후 쇠락하기까지 , 지리적으로 만주에 살았던 만주인들의 인구는 얼마나되었을까요 ~ 고딩때 배운기억으로는 30만도안되는 인구로 명나라를 점령했다? 라고 배운기억이 가물가물해서요 . 머릿수가 너무 적어서 언어가 소실된게 아닐련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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