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shane4862
17.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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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씨 대박난게 사전예약만 200만명 이래요 하하.. 돈을 쓸어담겠네
 

이게 대박인게 pc리니지랑도 연동되고 오리지날 느낌 되게 잘 살렸나봐요 그래서 200만명이나 예약한듯..

사전예약하신분들 추첨해서 갤럭시 s8 도 준다네요

 

링크남겨드릴께요 http://bs1n.io/v.YVryN 하실분들은 예약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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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8장 동궁을 점령하다

    전선의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수도에 도착한 스탄케비치는 케렌스키를 만났다. 이때 케렌스키는 크게 흥분되어 있었다. 볼세비키당의 봉기가 확정적으로 드러난 예비의회에 참석했다가 지금 금방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봉기이다!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모르는가? 그의 말을 듣자 스탄케비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거리는 왜 이렇게 조용하죠? 진짜 봉기라면 이것과 전혀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계속되는 혼란을 끝내야합니다. 이 말에 케렌스키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리고 예비의회의 결의문이 도착하기를 기다릴 뿐이라고 말했다.

    저녁 9시에 정부는 동궁의 말라키테 홀에 모여 볼세비키들을 "확실하고 최종적으로 청산"할 방안을 마련했다. 스탄케비치를 예비의회가 열리고 있는 마린스키 궁전에 보내 결의문이 빨리 통과되도록 작업하기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정부에 대한 반(半) 불신임 결의문이 통과되었다. 스탄케비치는 동궁에 다시 돌아와 분노하며 이 사실을 보고했다. 예비의회의 결의문은 봉기에 반대하는 투쟁을 정부가 아니라 공안 특별위원회가 주도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자 케렌스키는 이 상황에서는 "일분도 더 수상 직책을 유지하지 않겠다"고 열을 내며 선언했다. 화해주의 지도자들은 전화를 통해 즉시 동궁으로 소환되었다. 예비의회 결의문이 케렌스키를 놀라게 한 만큼이나 케렌스키의 사임 가능성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아브크센티에프는 이렇게 이유를 늘어놓았다: 화해주의 지도자들은 예비의회의 결의문이 "전적으로 가상적이며 우연적이라 실제적인 조치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이 결의문의 "문구는 아마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이들은 생각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치가 하찮다는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드러냈다.

    밤에 민주주의 지도자들과 수상 사이에 오고간 이 대화는 봉기가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 비추어보면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2월 체제를 매장시킨 장본인에 속하는 단은 이렇게 요구했다: 정부가 즉각적인 평화협상을 연합국들에게 제안했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밤새 수도 전역에 공고해야한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정부는 그런 충고는 필요 없다고 보고했다. 정부가 화해주의 지도자들과 단호히 결별하기로 작정했다고 믿을 근거는 충분했다. 이에 대해 단은 이렇게 응답했다: 정부는 "반동 참모들"의 영향 때문에 사태를 과장하고 있다. 어쨌든 수상은 사임할 필요가 없다: 예비의회의 불쾌한 결의문은 대중의 정서를 일깨우기 위해 필요했다. 정부가 단의 제안을 따른다면 볼세비키들은 "내일이 되기 전에" 본부를 해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대화를 합당한 아이러니로 묘사하면서 케렌스키는 이렇게 덧붙였다: "대화가 진행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적위대는 정부 청사들을 하나 하나 점령하고 있었다."

    케렌스키가 좌익 친구들과 비중이 대단한 이 회의를 마치기도 전에 그의 우익 친구들이 카자흐 군대 위원회 대표단의 형태로 그를 방문했다. 대표단은 수도에 주둔한 카자흐 3개 연대들의 행동이 자신들의 의지에 달려 있는 체 했다. 그리고 단의 제안과 완전히 반대되는 조건을 케렌스키에게 제시했다: 소비에트에게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 이번에는 볼세비키들을 확실히 일망타진해야한다; 7월처럼 카자흐 기병이 헛되게 희생되는 일이 이번에는 없어야 한다. 이 조건에 완전히 만족한 케렌스키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대표단에게 이렇게 사과했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 아직까지 소비에트 의장 트로츠키를 체포하지 않았다. 대표단은 동궁을 떠나면서 카자흐들이 맡은 바 임무를 다할 것이라고 케렌스키에게 확언했다. 수도의 지구사령부에서 카자흐 연대에 이렇게 명령이 떨어졌다: "조국의 자유, 명예, 영광의 이름으로 중앙집행위원회와 임시정부를 지원하여 러시아를 파멸에서 구하라." 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자신의 독립성을 경계하듯이 지켜온 이 속 좁은 정부는 위험의 순간이 닥치자 이 기구의 등뒤에 숨어버렸다. 간청하는 듯한 명령이 수도와 인근의 사관학교들에도 보내졌다. 철도는 이렇게 지시를 받았다: "전선에서 수도로 들어오는 군대를 싣고 있는 기차를 최우선적으로 보내라; 필요하면 객차들의 운행을 중단시켜라."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정부가 새벽 2시에 해산했을 때 동궁에는 케렌스키와 그의 전쟁부 차관이자 모스크바의 자유주의 상인 코노발로프만 남았다. 수도 지구 사령관 폴코프니코프는 동궁에 도착하여 이렇게 제안했다: 정부에 충성하는 병사들의 도움으로 스몰니를 점령할 원정대를 즉시 보내자. 이 멋진 계획을 케렌스키는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령관은 이렇게 말했다: 그가 의존하는 병력만으로 이 계획을 성사시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이때가 되어서야 케렌스키는 스스로 자백했다: 지난 10일이나 12일 동안 사령관이 볼세비키들과의 투쟁을 위해 모든 준비가 되었다고 말한 것은 "근거가 전혀 없었다." 그는 아무 이유도 없이 이 평범한 대령을 지구 사령관으로 앉혔었다. 그런데 이 사령관은  자기 비서의 보고서에 바탕해서 케렌스키에게 보고했다. 그렇다면 이 보고서의 정치적 군사적 평가만이 케렌스키의 유일한 정보원이었던 것 같았다. 케렌스키가 슬픔에 빠진 채 명상에 잠겨있을 때 수도의 정부위원 로고프스키는 일련의 통신문들을 그에게 주었다: 발트해 함대의 군함 다수가 전투 태세를 갖춘 채 네바강에 들어왔다; 이들의 일부는 니콜라예프스키 교량까지 들어와 이 교량을 점령했다; 봉기군 부대들이 드보르트소비 교량으로 진격하고 있다. 로고프스키는 다음 사항에 대한 케렌스키의 각별한 주의를 요청했다: "볼세비키들이 완벽한 질서를 유지하며 자신들의 계획을 철저히 이행하고 있다; 정부군이 이에 저항하는 곳은 전혀 없다." "정부"군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그의 보고서는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다.

    케렌스키와 코노발로프는 동궁에서 지구 사령부로 달려갔다. 이들은 "단 일분도 허비할 수 없다"고 외쳤다. 사령부의 멋진 붉은 건물은 장교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군대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해 이곳에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민간인들도 군인들 사이에 돌아다니고 있었다. 폴코프니코프의 새로운 보고는 그의 휘하 장교들을 전혀 믿을 수 없다는 점을 케렌스키에게 확신시켰다. 케렌스키는 자기 주위로 "임무에 충성하는 모든 인자들"을 결집시키기로 결심했다. 사람들은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야 자기들이 소속한 교회를 기억한다. 이처럼 케렌스키는 자기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야 자기가 사회혁명당 소속이라는 것을 알고 당에 전화를 걸어 즉시 전투 중대들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당이 소유한 병력에 대한 예상 밖의 호소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하더라도 문제가 있었다. 이 호소는 밀류코프의 말을 빌면 "모든 우익 분자들을 케렌스키로부터 멀리 떨어뜨릴 것이다. 이들은 이미 전부터 그를 싫어했었다." 이미 코르닐로프 반란 때에 명백히 폭로된 케렌스키의 고립은 여기서 좀더 치명적 성격을 띠었다. "그 날 밤 긴 시간들은 나를 고문하듯이 느리게 흘러갔다"고 케렌스키는 자서전에서 밝혔다.

    결국 정부의 지원군은 어느 곳에서도 도착하지 않았다. 카자흐 기병들은 그대로 병영을 지켰다. 카자흐 연대의 대표들은 이렇게 말했다: 병영을 나설 수도 있었으나 이를 위해서는 기관총, 장갑차 그리고 무엇보다 보병이 있어야했다. 케렌스키는 아무 생각 없이 장갑차와 보병을 이들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장갑차 부대들은 그를 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보병은 그에게 전혀 없었다. 그러자 카자흐 연대 대표들은 이렇게 말했다: 연대들은 곧 모든 문제들에 대해 결정하고 "말에 안장을 얹기 시작할 것이다." 사회혁명당의 병력은 살아있다는 징조를 보이지 않았다. 이들이 진짜 존재하고 있는가? 실제와 가상의 경계선은 어디인가? 지구 사령부에 모인 장교들은 최고사령관이자 수상인 케렌스키에 대해 "더욱 도전적인" 태도를 보였다. 장교들 사이에서 그를 체포하자는 말이 나왔다고 케렌스키가 주장하기도 한다. 전과 마찬가지로 사령부 건물에는 경비병이 없었다. 외부인들이 보는 가운데 흥분된 개인적 대화와 공식 협상이 교대로 진행되었다. 절망과 와해의 정서가 사령부에서 동궁으로 스며들어갔다. 사관생도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장갑차 부대원들도 신경이 곤두섰다. 아래에서는 지원이 없었고 위에서는 지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파멸 이외에 다른 길이 있을까?

    오전 5시에 케렌스키는 전쟁부의 총무처장 마니코프스키를 사령부로 호출했다. 트로이츠키 교량에서 마니코프스키 장군은 순찰대의 제지를 받고 파블로프스키 연대의 병영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잠시 설명이 있은 후 그는 풀려났다. 장군은 연대 병사들에게 그가 체포되면 군사행정기구 전체에 차질이 빚어지고 전선의 병사들이 해를 입을 수 있다고 설득했던 것 같다. 거의 같은 시간에 스탄케비치가 타고 있던 자동차는 동궁 근처에서 제지를 받았으나 연대 위원회는 그 역시 풀어주었다.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말한다: "봉기군은 매우 우유부단하게 행동했다. 나의 집에서 동궁으로 전신을 보내 이것을 얘기했다. 그러자 뭔가 착오가 있어서 체포될 뻔했을 것이라는 안심되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진짜 착오는 스탄케비치를 풀어준 것이었다. 이로부터 몇 시간 뒤에 그는 볼세비키들로부터 전화국을 탈환하려고 시도한다.

    케렌스키는 모길레프의 전쟁 총사령부와 프스코프의 북부전선 사령부에 정부에 충성하는 연대들을 즉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직통 전화를 통해 두호닌은 수도로 부대들을 보내는데 필요한 모든 조치가 취해졌으며 일부 부대들은 이미 도착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에게 확신시켰다. 그러나 부대들은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카자흐들은 여전히 "말에 안장을 얹고 있을 뿐이었다." 도시의 상황은 한 시간 한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케렌스키와 코노발로프가 동궁으로 돌아왔을 때 전령이 이들에게 긴급 통신문을 건네주었다! 동궁의 전화는 모두 차단되었고 케렌스키의 집무실 창 밑에 위치한 드보르트소비 교량은 수병으로 구성된 보초병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 동궁 앞 광장은 전과 다름없이 인적이 없었다. "카자흐는 털끝도 보이지 않는다." 케렌스키는 다시 지구 사령부로 서둘러 갔으나 여기서도 반갑지 않은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볼세비키들이 사관생도들에게 궁전을 비우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이들은 대단히 흥분되어 있었다. 장갑차 대오는 하필 이때에 명령을 이행하지 않아 일부 중요한 부대들이 봉기군에게 넘어가는 "손실"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전선에서 군대들이 대형을 이루어 도착한다는 소식은 아직 없었다. 동궁과 지구 사령부로 들어가는 도로에는 경비병이 전혀 없었다. 볼세비키들이 여기까지 침투하지 못한 유일한 이유는 정보 부족이었을 것이다. 저녁부터 장교들로 들끓던 사령부 건물은 급속히 비워지고 있었다. 모두들 자기 방식대로 목숨을 건지고 있었다. 사관생도들의 대표단이 나타났다: 이들은 "어떤 종류이든 지원군이 도착할 희망이 보일 경우에만" 임무를 다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없는 것은 바로 지원군이었다.

    케렌스키는 서둘러 장관들을 지구 사령부로 호출했다. 이들의 대다수는 자동차가 없었다. 현대의 봉기에 새로운 템포를 부여하는 이 중요한 교통수단은 볼세비키들에 의해 접수되었거나 봉기군의 도로 봉쇄로 인해 장관들에게 갈 수가 없었다. 키슈킨만이 도착했으며 시간이 좀 지나 말리안토비치가 도착했다. 이 상황에서 수상이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즉시 밖으로 나가 정부군 대형을 지휘하여 어떤 난관이 있어도 이들을 전진시키는 것이었다. 이외의 다른 행위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케렌스키는 "지붕 없는 멋진 순회용 차량"을 가지고 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건의 연쇄에 새로운 요인이 개입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연합국 정부들 사이의 파괴할 수 없는 연대감이 과시되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수도 탈출 소문이 연합국 대사관에 도달했다." 영국과 미국의 외교사절들은 즉시 자신들의 희망을 표현했다: 수상이 수도를 탈출할 경우 "미국 국기가 게양된 자동차가 그를 태우고 가야한다." 케렌스키는 이 제안이 지나치고 당혹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을 러시아에 대한 연합국들의 연대 행위로 인정했다.

    그러나 미국 대사 데이비드 프랜시스는 즐거운 크리스마스 동화와는 전혀 달리 상황을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러시아인 장교 한 명을 실은 자동차가 미 대사관 소속 자동차 뒤를 대사관까지 따라갔다. 그리고 이 장교는 케렌스키가 전선을 순회할 수 있도록 대사관 소속 자동차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대사관 관리들은 함께 상의한 후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 자동차는 이미 "점거되었으므로" 상황의 논리를 따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미국 외교관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 장교는 미국 국기를 자동차에서 제거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 자동차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바로 이 색채감이 있는 헝겊 쪼가리였기 때문이었다. 프랜시스는 대사관 관리들의 행동을 승인했으나 이들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각기 다른 각도에서 진실을 조명하는 두 증언들을 대조하면 충분히 명확하게 상황이 해명될 수 있다. 케렌스키에게 자동차를 제공한 쪽은 연합국이 아니었고 그가 요청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주재국의 국내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위선적 관행이 외교관들에게 존재한다. 이것에 어느 정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자동차는 "점거되었으며" 미 대사관은 국기의 잘못된 사용에 대해 "항의했다"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이 민감한 문제가 해결된 후 케렌스키는 자기 자동차에 앉았다. 미 대사관의 자동차가 그의 뒤를 따랐다. 케렌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행인들과 병사들이 모두 나를 알아보았다. 늘 그렇듯이 나는 이들에게 경례를 했다. 그러나 약간 조심성 없이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경례를 했다." 약간 조심성 없이 미소를 머금었다!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묘사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해서 2월 체제는 끝이 났다. 수도의 모든 곳에서 무장노동자들이 순찰과 감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미친 듯이 질주하는 자동차를 보고 적위대는 대로로 달려나갔다. 그러나 총을 쏠 용기는 발휘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총기 사용은 아직도 자제되고 있었다. 어쩌면 조그만 미국 국기가 이들의 총격을 저지했을 것이다. 자동차는 성공적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렇다면 임시정부를 방어할 군대가 뻬쩨르부르그에 없었다는 것일까? 사태에 놀란 말리안토비치는 이렇게 질문했다. 영원한 진리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그는 이성으로 해명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한 셈이었다. 이에 대해 코노발로프는 어깨를 들썩이며 아는 바 없다고 대답한 후 참으로 애석하다고 덧붙였다. 그러자 지금 오고 있는 군대는 무엇이냐고 말리안토비치가 끈질기게 물었다. 자전거 대대인 것 같다는 대답이 나왔다. 그러자 말리안토비치 장관은 한숨을 쉬었다. 수도와 인근에 20만 병력이 있었다. 그런데 수상이 미국 국기를 뒤에 대동하고 자동차로 달아나면서 자전거 대대를 만날 예정이라니. 상황은 임시정부에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전선에서 보낸 세 번째 자전거 대대는 페레돌스카야에 정지한 후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 전신을 보내 자신들이 수도로 가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았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장관은 더 깊게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이 대대에 전신을 보내 형제애가 담긴 인사를 하고 즉시 대표들을 보내라고 연락했다. 정부 당국은 이 대대를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했다. 대대 대표단이 같은 날 스몰니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계획에 의하면 수도의 다른 요충들과 똑같이 동궁도 25일 밤에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미 23일에 동궁 점령을 위해 특별 3인조가 구성되어 있었다. 포드보이스키와 안토노프는 이 작전의 핵심 인물이었다. 군대에 소속된 엔지니어 사도프스키는 이 3인조에 포함되었으나 곧 떨어져 나가 주둔군과 관련된 활동에 몰두했다. 그를 대신하여 추드노프스키가 3인조에 합류했다. 그는 5월에 캐나다의 집단수용소에서 트로츠키와 함께 귀국하여 병사로 3개월을 전선에서 보낸 적이 있었다. 라쉐비치 역시 이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는 고참 볼세비키로 오랜 군복무 끝에 지금은 하사관이 되어 있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3년 후 사도프스키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스몰니에 있는 자신의 조그만 방에서 포드보이스키와 추드노프스키는 뻬쩨르부르그의 지도를 놓고 동궁에 대한 최상의 작전 방법에 대해 격렬하게 다투었다. 동궁 지역을 연속 타원형으로 포위하기로 최종 결정되었다. 타원형의 긴 지름은 네바강의 부두가 될 것이었다. 강 이쪽에서 타원형은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 오로라호, 크론슈타트와 해군에서 호출된 전함들로 구성될 것이었다. 카자흐 기병과 사관생도 부대가 뒤에서 공격하는 것을 막거나 마비시키기 위해 혁명 부대들로 구성된 막강한 측면 방어진을 구성하기로 결정되었다.

    전체적으로 이 계획은 목표에 비해 너무 육중했고 복잡했다. 이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마련된 시간은 너무 짧았다. 예상대로 작전은 뒤엉키고 필요한 임무가 수행되지 않는 등 착오가 발생했다. 한쪽에서는 지시가 틀렸고 다른 쪽에서는 지시 내용을 잘못 읽어서 지도자가 늦게 도착했다. 또 한쪽에서는 구출용 장갑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대들을 호출하여 적위대와 통합시키고 진지를 점령하고 이 부대들 전부가 봉기 사령부와 통신을 유지하게 만드는 일은 수도의 지도를 놓고 다툰 지도자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요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임시정부가 타도되었다고 오전 10시쯤에 선언했다. 이때 작전이 얼마나 지연될 지는 작전을 직접 지휘하는 지도자들조차 명확히 알지 못했다. "12시 이전까지" 동궁이 함락될 것이라고 포드보이스키는 약속했다. 이때까지는 군사적 활동이 너무 잘 진행되어 어느 누구도 이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오까지도 동궁 포위 병력은 전부 결집되지 않았다. 크론슈타트 병력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정부군의 동궁 방어 병력이 강화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이 낭비될수록 새로운 지체가 발생했다. 군사혁명위원회의 긴급한 압력을 받아 동궁 점령 시간은 다시 3시로 "확정"되었다. 이 새로운 결정에 의거하여 군사혁명위원회 대변인은 소비에트의 오후 회의에서 다음 몇 분 내에 동궁이 점령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 상황은 그대로였다. 포드보이스키 자신은 극도로 열이 달아 전화를 통해 6시까지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동궁이 점령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보였던 이전의 자신감은 사라지고 있었다. 실제 6시를 알리는 종이 쳤으나 결말을 짓는 작전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스몰니의 촉구에 정신이 나간 포드보이스키와 안토노프는 이제 작전 종료 시간을 정하는 것도 거부했다. 이제 다들 심각하게 우려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전국대회가 개막되는 순간 수도 전체가 군사혁명위원회 소속 병력에 의해 점령되는 것이 정치적으로 필요했다. 일이 이렇게 되면 소비에트 대회의 반대파를 제압하기가 그만큼 쉬울 것이며 이미 성취된 일을 왈가왈부해보았자 소용없기 때문이었다. 대회가 개막될 시간이 되었으나 결국 연기되었다. 다시 정한 시간이 왔으나 동궁은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점령이 지연되면서 동궁은 12시간 이상 봉기의 중심 문제가 되었다.

    이 작전의 주요 지휘부는 스몰니에 있었으며 여기에서 라쉐비치는 모든 끈을 쥐고 있었다. 야전 사령부는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에 있었으며 여기에서는 블라곤라보프가 책임자였다. 오로라호, 파블로프스키 연대의 병영, 수병들의 병영 등에 3개의 하부 작전 지휘부가 있었다. 작전 현장에서는 포드보이스키와 안토노프가 지도자였는데 이들은 명확한 행동의 우선순위를 정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지구 사령부에서도 3인조가 지도 위로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지구사령관인 대령 폴코프니코프, 그의 참모장 바그라투니 장군, 상부에서 특별히 초대된 알렉세이예프 장군이 이들이었다. 이들의 대단한 군사적 자격 여건에도 불구하고 방어 계획은 공격 계획보다 훨씬 불명확했다. 경험이 없는 봉기의 지휘자들이 병력을 신속히 결집하고 정확한 시간에 공격을 가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병력은 충분했다. 반면 방어를 하는 지휘관들은 병력이 없었고 대신 흐릿한 희망만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카자흐 기병 부대가 이들의 결정을 규정할 것이다. 어쩌면 충성스러운 부대들이 인근 주둔군에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케렌스키가 전선에서 부대들을 끌고 올지도 모른다. 폴코프니코프의 정서는 전쟁 총사령부로 그가 보낸 밤 전보로 알 수 있다. 그는 게임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더 비관적인 알렉세이예프는 썩어 문드러진 배를 금방 버리고 도망칠 생각을 했다.

    사관학교의 대표들이 지구 사령부로 보내졌다. 서로 연락을 취하자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군대가 가치나, 짜르스코에, 전선 등에서 곧 도착할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들의 사기를 높이려고 했다. 그러나 사관생도들은 이 희미한 약속들을 별로 믿지 않았다. 그리고 우울한 소문이 사관학교로 파고들었다: "지구 사령부는 공황 상태이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 소문은 사실이었다. 카자흐 장교들이 사령부에 와서 이렇게 제안했다: 미하일로프스키 승마학교에 있는 장갑차들을 장악하자. 그러나 이들은 지구 사령관이 창가의 의자에 앉아 완전히 낙담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승마학교를 점거한다고? "그렇게 하시오. 나는 병력이 전혀 없소. 내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소."

    동궁 방어를 위해 사관생도들을 힘없이 동원하는 일이 계속되고있는 동안 장관들은 회의를 하기 위해 모였다. 동궁 앞의 광장과 주위 도로에 봉기군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모르스카야 거리와 네프스키 가도에는 무장 병사들이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제지하고 승객들을 하차시켰다. 군중은 속으로 이렇게 물었다: "이 병사들은 정부군인가 아니면 군사혁명위원회 소속인가?" 장관들은 인기가 없어서 확실히 혜택을 보았다: 아무도 이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도중에 이들을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우연히 택시에 타고 있다가 체포된 후 낮에 다시 풀려난 프로코포비치를 제외하고 모두 동궁에 모였다.

    경력이 오래된 하인들은 아직도 궁전에 있었다. 이들은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에 놀랄 일이 없었으나 여전히 겁에 질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엄격히 훈련을 받았으며 푸른 제복에 붉은 칼라를 달고 황금빛 노끈으로 치장한 이 구체제의 유물들은 호화스러운 궁전 건물 속에서 질서와 안정감의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 이들만이 경계심이 지배하는 아침에 여전히 자기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환상을 장관들에게 불어넣었을 것이다.

    오전 11시가 되어서야 정부는 한 명을 동궁 방어의 책임자로 마침내 임명했다. 이즈니코프스키 장군은 이미 동틀 녘에 케렌스키가 제의한 이 명예를 거절했다. 베데레프스키 제독은 이 제의에 관심이 더 없었다. 결국 공공 자선부 장관 키쉬킨이 민간인으로 동궁 방어 책임자가 되었다. 그의 임명을 승인하는 상원의 명령서가 즉시 작성되고 모두가 여기에 서명했다. 이들은 기이한 관료적 절차에 몰두할 시간이 얼마든지 있었다. 더욱이 입헌민주당원 키쉬킨이 전선과 후방의 병사들에게 이중으로 증오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자는 하나도 없었다. 한편 키쉬킨은 팔친스키와 루텐베르크를 부관으로 임명했다. 자본가들에 의해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직장폐쇄를 옹호한 팔친스키는 노동자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엔지니어인 루텐베르크는 사빈코프의 부관을 역임한 적이 있었다. 어중이떠중이를 다 끌어들인 사회혁명당도 사빈코프만은 코르닐로프 지지자로 낙인찍어 제명했었다. 반역자로 의심받고 있던 폴코프니코프는 지구 사령관 직책에서 해임되고 그의 자리에 그와 전혀 차이가 없는 하그라투니 장군이 임명되었다.

    수도 전화망으로 연결된 동궁과 지구 사령부의 전화는 끊겼다. 그러나 좀더 중요한 기관들과는 직통전화가 있었다. 특히 지구 사령부와 직통 전화로 연결된 전쟁부와는 통신에 문제가 전혀 없었다. 수도의 일부 기관들도 상황이 서둘러 진행되면서 전화가 끊기지 않았다. 그러나 군사적 의미에서 전화가 연결되었더라도 정부가 얻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도덕적 의미에서 정부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들의 환상은 곧 깨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동궁을 방어하는 지도자들은 전선의 지원군을 기다리면서 수도가 지원군을 보낼 것을 계속 요구했다. 수도의 일부 주민은 이들을 도우려했다. 사회혁명당 중앙위원이자 의사인 파이트는 이 일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몇 년이 지난 후 재판에서 "군대의 번갯불 같은 놀라운 정서 변화"에 대해 말했다. 가장 믿을만한 소식통으로부터 이 연대 저 연대가 정부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들었는데 직접 전화를 걸어 해당 병영에 전화를 하면 모든 부대들이 단호히 지원을 거부했다고 그는 말한다. 이 고참 인민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결과는 당신들도 알고 있다. 방어를 위해 나선 부대가 없어서 동궁은 점령당했다." 사실 번갯불과 같은 빠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고 다만 정부 여당에 대해 남아있던 환상이 번갯불과 같은 속도로 사라졌을 뿐이었다.

    동궁과 지구 사령부가 특히 기대했던 장갑차들은 볼세비키들과 평화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어느 누구도 정부를 지지하지 않았다. 동궁으로 향하는 길에 공병 사관생도들의 반쪽 중대는 희망과 두려움에 사로  잡힌 채 기다리고 있던 두 대의 장갑차와 마주쳤다. 이들은 우군인가 적군인가? 이들은 중립이었으며 양측의 충돌을 막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는 것이 밝혀졌다. 동궁이 보유했던 6대의 장갑차 가운데 하나만 동궁의 재산으로 남아있었다. 다른 다섯 대는 가버리고 없었다. 봉기의 성공에 비례하여 볼세비키들의 장갑차 숫자는 늘어갔다. 그리고 중립을 표방하는 부대는 사라졌다. 심각한 투쟁의 순간에 지지기반을 유실 당하는 것이 평화주의의 운명이다.

    정오가 다가오고 있었다. 동궁 앞의 광활한 광장에는 여전히 인적이 없었다. 이 광장을 채울 지지자가 정부에는 없었다. 군사혁명위원회에 소속된 부대들도 이 광장을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입안한 너무 복잡한 계획을 수행하는데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둔군 부대, 노동자 부대, 장갑차 등은 동궁을 넓게 포위하기 위해 아직도 집결 중이었다. 동궁 지구는 전염병과 직접 접촉을 피하기 위해 널리 검역선이 처진 전염병 지역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광장으로 나 있는 궁전의 정원은 스몰니의 정원처럼 장작으로 쌓여 있었다. 그리고 3인치 짜리 검은 야전 대포가 좌우로 설치되었다. 소총들이 여러 곳에 쌓여있었다. 궁전의 소규모 경비병들이 건물에 바짝 붙어있었다. 정원과 1층에는 오라니엔바움과 표트르호프 사관학교 출신의 소위들이 두 패로 나뉘어 입주해 있었다. 물론 이들은 학교 출신 전부가 아니었다. 또한 6문의 대포로 무장된 콘스탄티노프스키 포병학교의 1개 분대도 입주해 있었다.

    오후에 공병학교의 사관생도 1개 대대가 도착했다. 이들은 도중에 병력의 2분의 1을 상실하여 반쪽 대대가 되어 있었다. 이들이 도착했을 때 상황은 전혀 고무적이지 않았다. 스탄케비치의 말에 의하면 이들은 여기에 오기 전에도 전투력이 부적절했다. 동궁 안에는 식량과 보급품이 부족했다. 이 문제 역시 제 때에 생각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군사혁명위원회 소속 순찰대들이 빵이 가득 실린 트럭을 빼앗았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났다. 사관생도 일부는 보초 근무를 섰다. 그러나 나머지 병력은 활동을 하지 않은 채 불확실성 속에서 식사도 하지 못한 채 굶고 있었다. 지도부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동궁 앞 광장과 강 반대쪽의 부두에 겉으로 보기에 평화스러운 행인들이 소규모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보초를 서고 있는 사관생도들로부터 소총을 빼앗았으며 이들을 권총으로 위협했다.

    사관생도들 가운데에서도 "선동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외부에서 유입되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내부의 말썽꾸러기들이었다. 이들은 오라니엔바움과 표트르호프 사관학교의 학생들 사이에 소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학교의 위원회들은 화이트홀에서 협의회를 개최하여 정부의 대표들이 와서 해명을 하라고 요구했다. 코노발로프를 선두로 모든 장관들이 회의에 참여했다. 논쟁은 한시간이나 지속되었다. 코노발로프는 야유를 받았으며 도중에 발언을 정지 당했다. 농업장관 마슬로프는 오랜 혁명가 자격으로 연설을 했다. 키쉬킨은 사관생도들에게 정부가 가능한 선에서 오래 확고히 버틸 것이라고 설명했다. 스탄케비치의 말에 의하면 사관생도 한 명이 정부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의지를 표현하려했다. 그러나 "동지들이 보인 명백하게 냉담한 태도가 그를 억제했다." 다른 장관들의 연설은 사관생도들을 짜증나게 했다. 이들은 장관들의 말을 가로막고 고함을 지르며 심지어는 휘파람을 불면서 야유를 보냈다. 귀족출신들은 사관생도 대다수의 행동을 이들의 낮은 신분 탓으로 돌렸다. "이들은 모두 농민, 반문맹인, 무식자 출신들이다."

    그러나 포위 당한 동궁에서 진행된 이 회의는 화해로 끝났다. 적극적인 지도력과 상황에 대한 올바른 정보 제공을 약속 받은 후 사관생도들은 남아있기로 동의했다. 방어 지휘관으로 임명된 공병학교의 학생회장은 동궁의 설계도 위에 연필로 부대들의 이름을 곳곳에 적었다. 병력에게 전투 위치가 할당되었다. 창문을 통해 동궁의 광장에 총을 겨눌 수 있는 1층에 대다수의 사관생도들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선제 사격이 금지되었다. 공병학교 1개 대대는 정원에서 포대를 방어하도록 배치되었다. 바리케이드 설치를 위해 분대들이 지정되었다. 각 부대에서 4명씩 차출되어 무장한 후 1개 통신분대가 구성되었다. 포병 분대는 궁전 정문이 돌파될 경우 이것을 계속 방어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정원과 정문 앞에 장작이 엄폐물로 쌓아올려졌다. 어느 정도 질서가 확립되었다. 이제 보초를 서는 사관생도들은 좀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내전 일 단계에는 아직 진정한 군대가 구성되고 단련되지 않는다. 이때에는 실제 전투 대신 처절한 신경전이 벌어진다. 바리케이드 뒤에서 총성이 울리자 사관생도들은 광장에서 물러나 동궁 안으로 들어갔다. 이들이 이렇게 약간이나마 활동하는 모습을 보이자 봉기군은 방어군의 역량과 장비를 크게 과대 평가했다. 적위대와 병사들이 불만을 터뜨렸으나 지도자들은 예비 병력을 확보할 때까지 공격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주로 크론슈타트 수병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몇 시간이 지연되었다. 이 결과 동궁의 병력은 소수나마 증원되었다. 케렌스키가 카자흐 대표단에게 보병 부대의 지원을 약속한 후 카자흐 군대 협의회, 연대 위원회, 연대 총회 등은 회의를 열어 이렇게 결정했다: 볼세비키들을 진압하기 위해 7월에 전선에서 수도로 배치된 우랄스키 연대의 2개 대대와 기관총 부대는 즉시 동궁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보병 지원군이 도착하고 난 후에 들어간다. 그러나 2개 대대도 논쟁을 한바탕 벌인 후에야 동궁으로 들어갔다. 카자흐의 젊은 기병들은 반대했다. "노병들"은 마구간에 젊은 기병들을 가두어야 했다. 이들이 전투를 위한 무장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수염을 기른 노병들은 먼동이 터서 자신들이 더 이상 필요 없을 때가 되어서야 동궁에 나타났다. 이들은 구세주처럼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이들은 뚱한 표정이었다. 궁전 주위에서 싸우는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부가 옳은지 봉기군이 옳은지 이들은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예상외로 성조오지 기사단 기병 40명이 나타났다. 이들은 의족을 한 대위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애국주의 상이병들이 민주주의의 마지막 예비군으로 등장했다....그러나 그래도 이들은 분위기가 한결 나았다. 곧이어 여성 대대 소속의 돌격 중대 역시 도착했다. 이들을 가장 고무시킨 것은 지원군들이 전투도 없이 동궁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동궁을 포위하고 있던 봉기군은 이들의 길을 감히 막을 수도 없었고 막지도 못했다. 따라서 봉기군은 틀림없이 허약하다. 장교들은 말했다: "일이 풀리기 시작하고 있다. 이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자." 이렇게 말하면서 이들은 자신들과 사관생도들을 위로했다. 새로 도착한 병력은 피곤한 병력을 대체했다. 그러나 우랄스키 연대의 병력은 소총을 든 여성 돌격 중대의 "색시들"을 못마땅히 흘끗 쳐다보았다. 진짜 보병은 어디에 있지?

    동궁을 포위하고 있던 봉기군은 확실히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잘못한 것이 없었으나 어쨌든 늦게 도착하고 있었다. 이들은 너무 늦게 호출을 받았다. 밤새 긴장하며 준비를 마친 후 이들은 먼동이 틀 무렵 수도로 가기 위해 배에 올랐다. 구축함 아무르호와 순양함 야스트렙호는 곧장 수도로 향했다. 사관생도들을 무장 해제시키기로 되어있던 오라니엔바움에 해병대를 내려놓은 후 오래된 무장 순양함 짜리아 스보보디호는 필요할 경우 발트해 철도를 포격하기 위해 모르스코이 운하에 정박할 계획이었다. 사회혁명을 시작하기 위해 5천 명의 수병과 병사들이 오전 일찍 코틀린 섬에 상륙했다. 장교들의 객실에는 엄숙한 침묵이 지배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증오하는 대의를 위해 싸우도록 함께 왔다. 부대의 대표위원 볼세비키 플레로프스키는 이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들의 공감에 기대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들이 근무 위치를 지킬 것을 요구한다....우리는 당신들에게 불필요한 불쾌감을 면제시켜줄 것이다." 그러자 이들은 해군 식으로 짤막하게 "예,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모두 자기 위치로 돌아갔다. 지휘관은 함교 위에 올라갔다.

    이들이 탄 군함이 네바강에 도착하자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오로라호의 수병들이 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강 한가운데에 정박한 오로라호에서 군악대가 연주를 시작했다. 안토노프는 새로 도착한 병력에게 짤막한 환영인사를 했다: "저기에 동궁이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저놈을 점령해야합니다." 크론슈타트 병력 가운데 가장 결의에 차고 대담한 분자들이 자동적으로 선정되었다. 소총을 들고 탄띠를 두른 채 검은 웃옷을 입은 이 수병들은 임무를 끝까지 완수할 것이다. 이들은 코노그바르데이스키 대로에 금방 내렸다. 군함을 지킬 경비병만 배에 남았다.

    네프스키 가도의 병력은 이제 충분하고도 남았다. 에카테리닌스키 운하의 교량에는 강력한 초소가 설치되었다. 모이카 교량 위에는 장갑차와 제니스 대포가 동궁을 겨냥하고 있었다. 모이카 교량의 반대편에는 노동자들이 엄폐물 뒤로 기관총을 설치해 놓고 있었다. 모르스카야 가도에는 장갑차 한 대가 근무를 서고 있었다. 네바강과 교량들은 봉기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추드노프스키와 다쉬케비치 소위는 위병 연대에서 병력을 출발시켜 군신장을 점령하도록 명령받았다. 요새의 블라곤라보프는 교량을 건넌 후 군신장의 병력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바로 지금 도착한 수병들은 요새 및 오로라호의 승무원과 연락하기로 되어 있었다. 포대의 사격과 함께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간에 순양함 한 척, 구축함 두 척, 소형 군함 두 척 등 모두 5척의 전함이 발트해 함대에서 수도에 도착했다. 플레로프스키가 이렇게 적고 있다: "기존 병력으로도 승리에 대한 커다란 확신이 있었으나 해군의 증원은 모두의 사기를 올려주었다." 말라키테 홀의 창문으로 밖을 바라본 베르데로프스키 제독은 위용을 갖춘 봉기군의 함대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함대는 동궁 뿐 아니라 그 주위와 수도로 가는 주요 도로들을 압도하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후 4시경에 코노발로프는 전화를 통해 정부에 충성하는 정치 지도자들을 궁전으로 불렀다. 포위된 동궁의 장관들은 최소한이나마 도덕적 지지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초대된 자들 가운데 나보코프만이 모습을 나타냈다. 나머지는 모두 전화로 공감을 표현했다. 트레티아코프 장관은 케렌스키와 운명에 대해 불평했다: 수상 케렌스키는 동료 장관들이 스스로를 방어할 방도도 없이 남겨진 상태에서 줄행랑을 놓았다. 그러나 지원군이 올 것인가? 아마 그럴지도 몰랐다. 그러나 왜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가? 나보코프는 그의 줄행랑에 공감을 표시하고 손목시계를 몰래 보면서 자기도 줄행랑을 놓을 차비를 서둘렀다. 그는 제 시간에 동궁을 빠져나왔다. 6시 직후 마침내 동궁은 군사혁명위원회 군대에 의해 확실히 포위가 되었다. 지원군이나 개인이 궁전을 드나들 틈은 더 이상 없었다.

    코노그바르데이스키 대로, 해군본부 부두, 모르스카야 거리, 네프스키 가도, 군신장, 밀리오니 거리, 드보르트소비 부두 등의 방향에서 포위망은 두꺼워지고 좁혀지고 있었다. 아직도 정부군 손에 있는 동궁 정원의 쇠 울타리, 동궁 광장과 모르스카야 거리 사이의 아치, 에르미따쥐 기도원 옆의 운하, 해군본부의 모퉁이, 동궁 근처의 네프스키 가도 등을 주위로 위압적인 포위망이 쳐졌다. 강의 반대편에서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가 위협하듯 인상을 쓰고 있었다. 6인치 대포를 가진 오로라호는 네바강 가운데에서 동궁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축함들이 강을 순찰하며 위 아래로 운항하고 있었다. 봉기는 거대한 규모의 기동작전처럼 보였다.

    3시간 전에 사관생도들이 자리를 비운 동궁 앞 광장에 장갑차들이 나타나 궁전의 입구와 출구를 점령했다. 장갑차 위에 새겨진 오랜 애국주의 이름은 서둘러 빨간 색으로 칠해진 새로운 이름 아래로 아직도 보였다. 이 강철 괴물들의 보호를 받으며 봉기군은 광장에서 갈수록 자신감을 얻었다. 장갑차 한 대가 동궁의 정문에 접근하여 이곳을 지키고 있는 사관생도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아무 문제없이 철수했다.

    마침내 완벽하게 봉쇄되었으나 동궁 안의 포위된 정부는 여전히 전화로 외부세계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물론 5시에 켁스골름스키 연대의 1개 중대가 이미 전쟁부를 점령했다. 전쟁부를 통해 동궁은 수도의 지구 사령부와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장교 한 명은 봉기군이 살펴볼 생각도 하지 못한 전쟁부의 다락방에 아직도 남아서 남서 전선의 촉수가 되어 몇 시간동안 그대로 근무를 하고있었다. 그러나 전과 마찬가지로 연락이 닿아도 별 소용이 없었다. 북부전선의 응답은 더욱 애매했다. 지원군은 결코 도착하지 않았다. 케렌스키 자신은 마치 잠수부처럼 사라진 것 같았다. 도시에 남아있던 그의 친구들은 그에 대해 갈수록 적게 공감을 표현했다. 장관들은 가슴이 저렸다. 더 이상 얘기할 것도 희망할 것도 없었다. 이들은 서로 의견이 달랐다. 일부는 멍청히 앉아있었고 또 일부는 자동적으로 마루를 왔다갔다했다. 일반화를 하는 경향이 있던 자들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죄인을 찾았다. 죄인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바로 민주주의였다! 자기들을 정부로 보내 엄청난 짐을 안겼으면서 정작 위험한 순간에는 지지를 받지 못하게 만든 것이 바로 민주주의였다. 이번만은 입헌민주당과 사회주의자들의 생각이 완전히 일치했다. 그렇다, 민주주의는 비난받아야한다! 물론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이 두 집단은 자신들에게 가까운 민주협의회 같은 기관에 등을 돌렸었다. 민주주의의 독립성은 진정으로 연립정부의 가장 주요한 사상이었다. 그러나 신경쓸 것 없다: 어려움에 처한 부르주아 정부를 구출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아닌가. 사회혁명당 우파인 농업장관 마슬로프는 노트를 작성했는데 이것을 그는 죽어가고 있는 발언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기 입술로 민주주의를 저주하며 죽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동료들은 서둘러 이 운명적인 의도를 전화로 의회에 전달했다. 물론 그의 죽음은 오직 프로젝트로만 남았다. 그러나 저주는 얼마든지 입에서 터져 나왔다.

    동궁 방어 지휘관의 방이 있는 위층 근처에는 식당이 있었는데 여기서 궁전 하인들이 장교들에게 "신성한 저녁과 포도주"를 제공했다. 이 때문에 잠시 동궁에 갇힌 불편함을 잊을 수 있었다. 장교들은 서열을 파악하여 부러워하듯이 이것을 비교했으며 늦게 승진이 되는 것에 대해 임시정부를 저주했다. 이들은 특히 케렌스키에게 저주를 집중시켰다. 어제 예비의회에서 그는 자기 자리에서 죽겠다고 맹세하다가 오늘은 수녀처럼 옷을 입고 수도를 도망쳤다. 일부 장교들은 봉기군에게 더 이상 저항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점을 장관들에게 증명했다. 활력이 넘치는 팔친스키는 이 장교들을 볼세비키라고 선언하고 체포하려고까지 했다.

    사관생도들은 이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고 싶어했으며 정부가 제공할 수 없는 설명을 요구했다. 사관생도와 장관들이 새롭게 협의하고 있는 동안 키쉬킨이 동궁의 직원 본부에서 안토노프가 서명하고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에 주둔한 자전거 부대의 병사가 병참감 포라델로프에게 전달한 최후통첩을 가지고 왔다: 항복하고 동궁의 방어군을 무장 해제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요새와 전함의 대포가 발사될 것이다; 20분간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이 시간은 너무 짧은 것처럼 보였다. 포라델로프는 10분을 더 연장하는데 성공했다. 정부의 군사문제 담당인 마니코프스키와 베르데레프스키는 이 문제를 단순하게 접근했다: 교전은 불가능하므로 최후통첩을 수용하여 항복하는 것을 생각해야한다. 그러나 민간인 장관들은 완고했다. 결국 이들은 최후통첩에 응답하지 않고 시의회를 수도의 유일한 합법기관으로 인정하고 이 기관에 호소하기로 결정했다. 시의회에 호소하는 것은 졸음 때문에 흐리멍덩해진 민주주의 의식을 일깨우는 최후의 시도였다.     

    저항을 끝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포라델로프는 자신의 해임을 요청했다: "임시정부가 올바른 판단을 할 것인지에 대한 자신감"이 그에게는 없었다. 사임이 수락되기 전에 이미 그는 더 이상 주저할 수가 없었다. 약 30분 후 적위대 1개 부대, 수병, 병사 등이 파블로프스키 연대 소위의 지휘를 받아 동궁의 직원 본부를 저항도 받지 않고 점령했다. 심약한 병참감은 체포되었다. 동궁 전체가 점령되기 전에 이곳이 먼저 점령되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동궁 내부에는 방어망이 전혀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광장에 장갑차들이 도착하기 전에 사관생도들이 공격에 나서서 자신들을 본대로부터 차단하지 않을까 봉기군은 두려워했다.

    직원 본부가 점령된 후 동궁은 더욱 고립감을 느꼈다. 창문이 네바강으로 나있는 말라키테 홀은 오로라호로부터 포격을 받을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이 때문에 장관들은 강 대신 정원으로 창문이 나있는 많은 방 가운데 하나로 몸을 옮겼다. 등불은 모두 소등되었다. 램프 하나만 탁자 위에서 빛을 내고 있었고 창문은 신문지로 가려졌다.

    장관들은 제독에게 물었다: "오로라호가 대포를 발사하면 어떻게 됩니까?" 해군 대포의 위력에 자부심을 느끼며 제독은 즉시 이렇게 외쳤다: "동궁은 전부 무너져 내릴 것이다." 베르데레프스키는 항복을 원했으며 때도 모르고 용감성을 발휘하는 민간인 친구들을 겁주려했다. 그러나 오로라호는 대포를 발사하지 않았고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도 조용했다. 어쩌면 볼세비키들은 위협만 할 뿐 공격에 나서지 않을지도 몰랐다.

    불안정한 폴코프니코프 대신 지구 사령관에 임명된 바그라투니 장군은 이 순간을 이용하여 사임을 선언할 생각이었다. 키쉬킨의 명령에 따라 그는 "사령관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되어 강등되었다. 그리고 즉시 궁전을 떠날 것을 요청 받았다. 정문에서 그는 수병들에게 체포되어 발트해 함대의 병영으로 끌려갔다. 그는 욕을 볼 수도 있었으나 최종 공격 전 포위망을 점검하던 포드보이스키가 이 불행한 장군을 직접 데리고갔기 때문에 화를 피했다.

    동궁 근처의 거리와 부두에서 사람들은 수백 개의 전깃불로 빛을 냈던 궁전이 갑자기 암흑천지가 된 것을 주목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정부 지지자들도 있었다. 케렌스키의 동료인 레데마이스터는 이렇게 적었다: "동궁의 암흑사태는 놀라운 수수께끼였다." 케렌스키의 친구들은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력을 한들 이들이 수수께끼를 해결했을 가능성은 미미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엄폐물로 쌓아올려진 장작더미 뒤에 숨어서 사관생도들은 동궁 앞 광장의 봉기군 대오를 긴장하며 살폈다. 그리고 이들이 움직일 때마다 소총과 기관총을 쏘았다. 이에 봉기군도 대응 사격을 했다. 밤이 되자 총격은 더욱 가열되었다. 첫 사상자들이 발생했으나 몇몇 개인들뿐이었다. 광장, 부두, 밀리오니 거리의 봉기군은 튀어나온 건물이나 빈 공간 또는 벽 등을 엄폐물로 삼아 새로운 상황에 적응했다. 예비 병력 가운데 병사들과 적위대는 밤이 오자 모닥불에 몸을 녹이고 공격을 너무 지체하는 지도자들을 욕했다.

    동궁 안에서 사관생도들은 복도, 계단, 입구, 정원 등에서 전투를 준비했다. 외곽의 보초병은 벽과 울타리에 몸을 바짝 붙여 총탄을 피했다. 이 건물의 수용능력은 수천 명이었으나 사람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 방어선 뒤는 공간이 대단히 넓었으나 텅 비어있었다. 하인들 대부분은 흩어졌거나 몸을 숨기고 있었다. 다수의 장교들은 뷔페 식당에 몸을 숨겼으며 아직도 도망하지 않은 하인들을 불러 계속 포도주를 시켰다. 이 고통스러운 궁전에서 장교들이 술에 취해 있는 것을 사관생도, 카자흐 기병, 상이군, 여성 병사들이 모를 리 없었다. 외부의 공격 뿐 아니라 내부의 붕괴로 종말이 준비되고 있었다.

    포병 분대의 어느 장교가 방어군의 지휘관에게 갑자기 이렇게 보고했다: 콘스탄티노프스키 사관학교 교관의 명령으로 사관생도들이 무기를 정문에 놓고 학교로 복귀하고 있다. 이것은 배신적인 타격이었다! 그러나 교관은 이곳에서 자기 이외에 명령을 내릴 사람이 없다며 이 사실을 부인했다. 사관생도들도 이것을 알고 있었으나 여전히 학교에 남아 있는 교관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학교의 교관은 군사혁명위원회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포병 분대의 다수는 6문의 대포 가운데 4문을 가지고 동궁을 나와버렸다. 네프스키 가도에서 병사 순찰대의 제지를 받은 이들은 저항을 시도했으나 장갑차를 타고 제 시간에 도착한 파블로프스키 연대의 순찰대에 의해 무장이 해제되고 대포 2문과 함께 병영으로 끌려갔다. 다른 2문의 대포는 네프스키 가도와 모이카 가도에 연결된 교량에 설치되어 동궁을 겨냥했다.

    우랄로프스키 연대의 2개 대대는 동지들의 도착을 기다렸으나 헛수고였다. 카자흐 군대 협의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예비의회에 협의회 대표로 참석했던 사빈코프는 알렉세이예프 장군의 협조로 카자흐 기병들을 동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밀류코프가 올바르게 말하고 있듯이 협의회 대표들은 "부대 지휘부가 주둔군을 통제할 수 없듯이 카자흐 연대를 통제할 수 없었다." 모든 측면에서 문제를 고려한 후 카자흐 연대는 이렇게 최종 결정했다: 보병이 지원하지 않으면 전투에 나설 수 없으며 정부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군사혁명위원회의 자원 부대가 되겠다. 동시에 우랄스키 연대는 동궁에 대표들을 보내 2개 대대를 병영으로 복귀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제안은 이 연대 "노병"들의 확고한 정서와 정확히 일치했다. 주위에는 낯선 분자들뿐이었다. 유태인이 다수 끼어있는 사관생도들, 상이용사들, 그리고 여성 돌격대가 바로 이들이었다. 화가 나서 얼굴을 찌푸린 채 카자흐 기병은 안장 가방을 모아 떠날 차비를 했다. 더 이상 논쟁이 필요 없었다. 누가 케렌스키를 방어하기 위해 남아있겠는가? "유태인과 색시들....그러나 러시아 인민은 레닌과 함께 있었다." 이때 카자흐 기병은 이미 봉기군과 접촉을 유지하고 있어서 자유 통행증을 발부 받아 아무도 모르는 출구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것을 동궁의 방어군은 모르고 있었다. 우랄스키 연대가 동궁을 떠난 때는 저녁 9시경이었다. 가망이 없는 대의에 기관총만 맡기고 동궁을 나서는 것에 이들은 동의했다.

    밀리오니 거리로 나있는 같은 입구에서 볼세비키들은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동궁 내부로 잠입해 있었다. 갈수록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 복도에서 사관생도들 옆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항은 소용없다. 봉기군은 도시와 철도역을 점령했다. 지원군은 없다. 동궁에서는 "관성으로 거짓말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합니까? 라고 사관생도들이 물었다. 정부는 직접 명령을 내리기를 거부했다. 장관들은 오랜 결정을 지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머지는 자기 맘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원하면 누구든지 동궁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정부는 의지도 생각도 없었다. 장관들은 수동적으로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말리안토비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거대한 쥐덫 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가끔 함께 있거나 소그룹으로 짧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외롭게 버림받은 사람들과 만났다....우리 주위는 텅 비어 있었다. 우리 내부도 텅 비어 있었다. 여기에서 평온한 무관심의 결과인 혼이 없는 용기가 나왔다."

    안토노프-오브세옌코는 블라곤라보프와 이렇게 합의했었다: 동궁의 포위를 끝낸 후 요새의 깃대에 붉은 등불을 올린다. 이 신호와 함께 오로라호는 동궁을 겁주기 위해 공포탄을 발사한다. 방어군이 완강하게 저항할 경우 요새는 가벼운 대포를 사용하여 진짜 포탄을 동궁에 발사한다. 이때에도 동궁이 항복하지 않으면 오로라호는 6인치 대포에서 진짜 포탄을 발사한다. 이렇게 화력의 강도를 단계적으로 늘리는 이유는 희생자와 파괴를 피할 수 없다면 이것을 극소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단순한 문제를 너무 복잡하게 해결하려다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위험이 있었다. 이 계획의 시행 상 어려움은 너무 명백했다. 우선 붉은 등불이 있어야 했는데 준비되지 않았다. 이것을 찾기 위해 시간을 보낸 끝에 결국 구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것을 깃대에 올려 사방에서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노력이 배가되고 또 배가되었으나 결과는 의심스러웠다. 한편 귀중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어려움은 포대와 관련해서 일어났다. 블라곤라보프의 보고에 의하면 신호만 떨어지면 정오부터 포격이 가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것이 전혀 불가능했다. 정오를 알리는 녹슨 대포 이외에 영구히 설치된 대포가 없었기 때문에 야전 대포를 요새 벽 위까지 올려 놓아야했다. 이 일은 이미 정오쯤 실행에 옮겨졌다. 그러나 포격을 할 사수를 찾아야했다. 7월에 볼세비키당을 지지하지 않았던 포병 중대는 지금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미리 인식되었다. 하루 전날이 되어야 이 중대는 봉기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교량 하나를 지켰다. 이 중대가 뒤에서 봉기군을 공격할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소비에트를 위해 대포를 쏠 의향도 없었다. 그리고 대포 발사 시간이 되자 소위가 이렇게 보고했다: 포가 녹이 슬었다; 압축기에 윤활유가 없다; 포격은 불가능하다. 포가 작동 불가능했을 가능성은 컸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었다. 포병이 책임을 회피하면서 경험이 없는 대표위원을 농락하고 있었다. 안토노프는 불같이 화를 내며 소형 쾌속선을 타고 강을 질주했다. 누가 계획을 사보타지하고 있는가? 블라곤라보프는 그에게 등불, 윤활유, 소위에 대해 말했다. 이들은 모두 대포를 보러 올라갔다. 밤이라 주위가 캄캄했고 최근에 내린 비로 물웅덩이가 여기저기에 있었다. 네바강 반대편에서는 소총 사격이 더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기관총의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 블라곤라보프는 길을 잃어 초조해졌다. 그는 열이 달아 물웅덩이에 빠져 진흙에 걸려 넘어졌다. 안토노프는 칠흑처럼 어두운 정원을 대표위원을 따라 더듬어 갔다. 블라곤라보프는 이렇게 말한다: "약하게 빛을 내는 등불은 둘째치고 안토노프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안경 너머로 나를 조사하듯이 쳐다보았다. 안경이 거의 내 얼굴에 닿았다. 그의 눈에는 놀라움이 숨겨져 있었다." 부주의로 넘어져 시간이 지체된 것을 안토노프는 배신행위의 결과라고 잠시 의심하고 있었다.

    마침내 대포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포병들은 완고했다: 녹이 슬었고...압축기...윤활유. 안토노프는 해군 본부에서 포병들을 데리고 오고 정오를 알리는 낡은 대포를 신호용으로 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포병들은 신호용 대포를 만지작거리면서 의심스럽게 시간을 끌고 있었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전화로  멀리서 명령을 내리지 않고 바로 옆에 있는 지휘관들도 무거운 대포를 사용하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없구나. 포격에 대한 매우 엉성한 이 계획의 이면에는 어쩌면 무거운 대포를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숨어 있었다.

    누군가가 정원의 암흑 속을 뛰어가고 있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오면서 진흙탕에 걸려 넘어지자 욕을 잠깐 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목이 메어 이렇게 외쳤다: "동궁이 항복하여 우리편이 궁전으로 진입했다." 열광적인 포옹이 이어졌다. 포격이 지연되었으나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우리 생각대로 되었어!" 압축기는 즉시 잊혀졌다. 그런데 왜 총성은 계속 울리고 있을까? 일부 사관생도들이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잘못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래도 좋은 소식이었다: 동궁은 아직 점령되지 않았으나 대신 지휘부만 항복했다. 동궁에 대한 포위는 계속되었다.

    행동을 억제할 수 없는 추드노프스키는 오라니엔바움 사관학교의 일부 사관생도들과 비밀리에 합의한 후 협상을 하기 위해 동궁으로 들어갔다. 그는 봉기를 반대했으나 총격전이 벌어지는 위험한 현장에 뛰어들 기회는 결코 놓치지 않았다. 팔친스키는 그를 체포했으나 오라니엔바움 사관생도들의 압력을 받아 그와 일부 사관생도들을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동궁 밖으로 나가면서 성조오지 기병 몇 명도 같이 데리고 갔다. 사관생도들이 예상외로 광장에 나타나자 봉기군 대오는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이들이 항복하기 위해 나왔다는 것을 알자 이들은 크게 기뻐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항복한 병력은 극소수였다. 남아있는 병력은 엄폐물 뒤에서 계속 총을 쏘았다. 봉기군은 응수 사격을 강화시켰다. 정원의 환한 전깃불 때문에 사관생도들을 겨냥하기가 좋았다. 사관생도들은 겨우 전깃불을 껐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손이 다시 불을 켰다. 그러자 사관생도들은 전등에 총을 쏜 후 전기공을 불러 전기를 끊게 했다.

    여성 대대가 갑자기 공격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의 정보에 따르면 전쟁 총사령부의 직원들은 레닌 쪽으로 넘어갔다. 또한 일부 장교들의 무장이 해제되고 러시아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알렉세이예프 장군이 체포되었다. 그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구출되어야한다. 교관은 이 미친 작전을 억제시킬 힘이 없었다. 이들이 공격으로 나서는 순간 정문의 양쪽에 높이 매달려 있던 전등이 갑자기 켜졌다. 전기공을 찾는 장교는 궁전의 하인들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그는 짜르의 시종들이었던 이들 중에 혁명의 첩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궁전의 전기공을 더 크게 의심했다: "네가 필요 없었다면 이미 한참 전에 너를 저 세상으로 보냈을 것이다." 권총으로 위협을 해도 전기공은 도울 힘이 없었다. 그의 배전반은 연결이 끊어졌고 수병들이 발전소를 점령하여 전등을 통제하고 있었다. 여성 병사들은 사격을 견딜 수 없어 대부분 항복했다. 방어군 지휘관은 상병 하나를 보내 정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여성 대대가 공격에 나서다가 "파멸했으며" 동궁은 선동가로 가득하다. 이 공격이 실패한 후 약 10시부터 11시까지 총격이 멈추었다. 봉기군은 포격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예상외로 총격이 멈추자 방어군은 약간 희망을 가졌다. 장관들은 수도와 전국의 자기편을 다시 고무하려고 했다: "프로코포비치를 제외한 정부의 모든 관료들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상황은 유리하다고 판단된다....동궁은 총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소총 사격일 뿐 결과는 미미하다. 적이 약화된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적은 전능하지만 자신의 힘을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부는 전국에 통지문을 보내 봉기군의 최후통첩, 오로라호, 정부만이 권력을 제헌의회에 이양할 수 있다는 점, 동궁에 대한 첫 공격이 격퇴되었다는 것 등을 설명했다. "군대와 인민이 응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어떤 응답을 보일 것인지는 제안하지 않았다.

    한편 라쉐비치는 요새에 두 명의 수병을 포대 사수로 보냈다. 물론 이들은 경험이 풍부하지는 않았으나 최소한 볼세비키들이었으며 압축기에 윤활유가 없이도 포격을 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들이 할 일은 대포를 쏘는 것뿐이었다. 포격의 굉음은 제대로 겨냥된 타격보다 더 중요했다. 안토노프는 포격을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 미리 준비된 단계들은 완벽하게 실행에 옮겨졌다. 플레로프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요새의 신호 포격이 있은 후 오로라호가 천둥과 같은 소리를 내며 대포를 쏘았다. 공포탄에서 나온 쿵 하는 소리와 번쩍거리는 섬광은 실탄보다 훨씬 강력했다. 이 장면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던 행인들은 부두의 화강암 벽에서 급작스럽게 퉁겨 나와 도로 바닥에 넘어진 후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갔다...." 추드노프스키는 즉시 문제를 제기했다: 포위된 자들에게 항복을 권유해야하지 않을까? 안토노프는 즉시 그의 질문에 동의했다. 다시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여성 대대와 사관생도 일부는 포성에 굴복하여 항복했다. 추드노프스키는 이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안토노프는 너무 관대한 이 제안을 즉시 거부했다. 소총을 보도에 내려놓은 후 포로들은 밀리오니 거리를 따라 호송되었다.

    궁전은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이제 결말을 지을 때가 되었다. 명령이 하달되었다. 횟수나 효과가 바로 전보다 못했지만 포격은 시작되었다. 한시간 반이나 두시간 동안 35발의 포탄이 발사되었고 이 가운데 포탄 두 개만 과녁을 맞추고 나머지는 궁전의 회로 만들어진 벽을 손상시켰다. 다른 포탄들은 너무 높이 날아서 파괴할 것이 없었다. 포격 기술의 부족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가? 이들은 동궁의 위용 있는 과녁을 직접 조준하여 네바강을 가로질러 포격하고 있었다. 이것은 큰 기술을 요하지 않았다. 라쉐비치의 포병들조차 파괴와 죽음이 없이 일이 끝날 것을 희망하여 포탄을 높이 발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두 이름 없는 수병이 당시 어떤 동기를 가지고 있었는지 추적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매우 어렵다. 이들은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한 적이 없다. 이들은 측정할 수 없이 넓은 러시아의 대지에서 용해되었는가? 아니면 10월 혁명의 수많은 투사들처럼 이후 내전에서 스러져갔는가?

    첫 포격 직후 팔친스키는 장관들에게 포탄의 파편 하나를 보여주었다. 베르데레프스키 제독은 오로라호에서 발사된 해군용 포탄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것은 공포탄이었다. 이렇게 합의가 되었고 플레로프스키가 증언했으며 나중에 어느 수병이 소비에트 대회에서 보고했다. 그렇다면 제독이 실수했는가 아니면 수병이 실수했는가? 짜르의 궁전에는 유산계급들의 마지막 정부가 기름이 없는 등불처럼 꺼져가고 있었다. 이때 봉기군의 군함에서 한 밤중에 발사된 포탄에 대해 누가 진실을 확인할 수 있겠는가?

    이제 궁전의 방어군은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우랄스키 연대, 상이용사, 여성 대대가 궁전에 도착했을 때 병력은 천 오백 또는 이천으로 상승했다. 이제는 수가 천이나 그 이하로 줄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들은 승리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동궁의 절망적 분위기 속에서 기적은 아니지만 기적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터졌다. 팔친스키의 발표에 따르면 시의회에서 전화가 와서 시민들이 정부를 구출하기 위해 이쪽으로 행진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시네구브에게 명령을 내렸다: "시민들이 오고 있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려라." 그는 이 즐거운 소식을 가지고 계단 위 아래로 그리고 복도로 뛰어다녔다. 오는 길에 그는 결투용 검을 들고 서로 싸우고 있는 술 취한 장교들과 부딪쳐 넘어질 뻔했다. 이들은 물론 피를 흘리고 있지는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사관생도들은 기가 살아 머리를 쳐들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이 소식은 더욱 화려해졌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공무원, 상인, 인민이 성직자를 앞세우고 포위된 동궁을 구출하기 위해 이리로 행진하고 있다. 성직자를 앞세운 인민! "이것은 대단히 아름다울 것이다!" 마지막 남은 활력이 솟구쳤다: "멋지다! 러시아 만세!" 이때까지 동궁을 떠날 생각이었던 오라니엔바움의 사관생도들은 마음을 바꾸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성직자를 앞세운 인민은 매우 늦게 왔다. 동궁의 선동가는 늘어나고 있었다. 곧 오로라호가 대포를 쏠 것이다. 복도에 속삭임이 들린다. 이 속삭임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갑자기 두 번의 폭발음이 들린다. 수병들이 동궁 안으로 진입하여 복도에 두 개의 수류탄을 던지거나 떨어뜨려 두 명의 사관생도를 가볍게 부상시킨다. 수병들은 체포되고 직업이 의사인 키쉬킨이 부상자들에게 붕대를 감아준다.

    노동자와 수병의 내적인 투쟁 결의는 뜨거웠지만 아직 처절하지는 않았다. 봉기군에 비교할 수 없이 허약한 동궁의 방어군은 궁전에 침투한 적의 첩자들을 가혹하게 다룰 수 없었다. 나중에 자기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수병들은 처형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하나 둘이 아니라 떼를 이루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궁전은 체가 알곡을 걸러내듯이 혁명의 첩자들을 걸러내고 있었다. 사관생도들이 침입자들을 덮치면 이들은 스스로 무장 해제를 했다. "비겁한 악당 같은 놈들!"이라고 팔친스키는 경멸조로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겁쟁이가 아니었다. 장교들과 사관생도들이 모여있는 궁전에 침투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동궁 건물의 미로에서, 어두운 복도에서, 어디로 가는 지를 알 수도 없고 어떤 위험이 기다리는 지도 알 수 없는 수많은 문들 속에서 이 대담한 침입자들은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포로의 숫자는 늘어나고 있었으며 새로운 집단들이 쳐들어왔다. 이제 누가 누구에게 항복하고 누가 누구를 무장 해제시키는 지 알 수 없었다. 포격은 계속 굉음을 울렸다.

    동궁에 바로 인접한 지구를 제외하고 수도의 거리는 밤이 늦어서야 활동을 중지했다. 극장과 영화관은 문을 열고있었다. 수도의 존경받고 교육받은 상류층은 자기 정부가 공격을 받고 있었으나 이것을 겉으로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트로이츠키 교량 위에서 레데마이스터는 조용히 자기에게 다가오다가 수병들의 제지를 받은 행인들을 보았다. "평상시와 다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인민의 전당 쪽에서 아는 사람들이 그에게 오고 있었다. 그는 함포 사격의 굉음을 들으며 오페라 돈 카를로스에서 찰리아핀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가창력을 발휘했다는 것을 이들로부터 알았다. 장관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쥐덫인 동궁의 마루를 발로 쾅쾅 구르고 있었다.

    "봉기군이 허약한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한 시간만 더 버티면 지원군이 도착할 것이다. 밤늦게 키쉬킨은 역시 입헌민주당 출신인 재무부 차관 흐루시초프를 전화로 불러 당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요청했다: 군대를 이끌고 케렌스키가 마침내 도착할 아침까지 버티기 위해 정부는 약간의 도움이 필요하다. 키쉬킨은 분노하며 외쳤다: "3백 명의 무장 병력을 우리에게 보낼 수 없는 당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당인가?" 그의 말은 옳았다. 어떤 종류의 당인가? 뻬쩨르부르그 선거에서 수만 명의 지지를 받은 입헌민주당은 부르주아 체제에 치명적인 위험이 닥친 순간에 3백 명의 무장 병력도 동원할 수 없었다. 장관들이 궁전의 서재에서 유물론자 홉스의 책들을 뒤질 생각을 했더라면 이들은 내전에 대한 그의 대화에서 이 구절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부자가 된 상점 주인들은 자기의 일시적 이득 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그리고 자기 재산을 강탈당할 가능성을 생각만 해도 완전히 머리가 돌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용기를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결국 홉스의 책은 짜르의 서재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장관들 역시 역사철학을 연구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키쉬킨의 전화는 동궁에서 걸려온 마지막 전화였다.

    스몰니는 확정적으로 동궁 공격을 마무리지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침까지 동궁을 포위한 채 수도를 계속 긴장 상태로 몰고 갈 수는 없었다. 또한 소비에트 대회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고 봉기의 승리에 의문부호를 찍어서는 안되었다. 레닌은 분노를 담은 쪽지를 작전 지휘부에 보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지휘부에 계속 전화를 걸었다. 포드보이스키는 이렇게 응답했다: 동궁에 대중을 물밀 듯이 진입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공격을 원하는 자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희생자의 숫자와 살아남을 장관과 사관생도들은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러나 작전을 종결해야할 필요성은 너무 컸다. 함포 사격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의 수병이 쪽지를 오로라호에 가지고 갔다. 즉시 궁전에 포격을 가하라.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한 것처럼 보였다. 오로라호의 포병들은 사격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부족한 것은 지도자들의 결단이었다. 지도부는 또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다. 플레로프스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상황 변화의 가능성을 본능적으로 감지했기 때문에 15분만 더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본능"이란 단순한 무력 과시를 통해 사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끈질긴 희망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본능"이 우리를 속이지 않았다. 기다리기로 한 15분이 다 될 무렵에 동궁에서 새 전령이 곧바로 도착했다. 궁전이 점령되었다!

    동궁은 항복하지 않았다. 대신 기습을 당해 점령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방어군의 저항력이 완전히 소진되었을 때 기습 공격이 있었다. 이번에는 비밀 입구가 아니라 사관생도들이 방어하고 있던 문을 통해 수백 명의 봉기군이 복도로 쏟아져 들어왔다. 사기를 잃은 방어군은 이들을 시의회에서 지원 나온 시민들로 착각했다. 그러나 방어군은 이들을 무장 해제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혼란 속에서 상당수의 사관생도들은 도망쳤다. 나머지 병력의 최소한 상당수는 여전히 계속해서 보초를 섰다. 그러나 총검과 소총 사격으로 조성된 공격군과 방어군 사이의 장벽은 마침내 무너졌다.

    에르미따쥐 기도원에 인접한 동궁의 건물은 이미 봉기군으로 넘치고 있었다. 사관생도들은 뒤에서 이들을 공격했다. 복도에서 주마등같은 뒤엉킴과 충돌이 스치고 지나갔다. 모두 완전 무장한 채 격돌했다. 들어 올려진 손은 권총을 쥐고 있었다. 수류탄이 허리띠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총을 쏘거나 수류탄을 던지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방어군과 공격군이 너무 뒤섞여 있어서 이들을 둘로 나눌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궁전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후였다.

    노동자, 수병, 병사들은 줄지어 그리고 무리를 지어 궁전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이들은 바리케이드에 숨어 있던 사관생도들을 던져버리고 정원을 돌파했다. 또한 계단의 사관생도들에 부딪쳐 넘어지고 이들을 뒤로 밀치고 압도하여 위층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봉기군의 또 다른 물결이 뒤에서 닥쳤다. 광장의 인파는 정원으로 밀려들어 계단 위아래와 복도를 뒤덮었다. 더렵혀진 도형무늬 마루에는 매트리스와 빵 덩어리 사이에 사람, 소총, 수류탄 등이 널려있었다. 봉기군은 케렌스키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열광적으로 기뻐하다가 순간적으로 실망감과 고통을 느꼈다. 안토노프와 추드노프스키는 이제 궁전 안에 있었다. 정부는 어디에 있는가? 문 쪽에 있었다. 거기에는 사관생도들이 마지막 저항의 자세로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보초병 책임자가 장관들에게 서둘러 질문했다: 끝까지 저항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까? 아니다, 장관들은 그렇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궁전은 이제 어차피 점령당했으니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 무력에는 항복해야지 별 재간이 있는가. 장관들은 위엄 있게 항복하기를 원했으며 정부 회의를 모방하여 탁자에 앉았다. 방어군 지휘관은 이미 동궁을 넘겨주었으며 사관생도들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협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목숨은 전혀 위협받지 않았다. 안토노프는 정부의 운명에 대한 어떤 협상도 거부했다.

    마지막 문을 지키던 사관생도들의 무장마저 해제되었다. 승자들이 장관실로 난입했다. "봉기군 앞에서 이들의 밀려드는 대오를 저지하기 위해 애쓰면서 몸집이 작고 볼품이 없는 인물이 걸어 들어왔다. 그의 옷은 엉망이었고 테가 넓은 모자는 머리에 비스듬히 올려져 있었다. 안경은 불안하게 그의 코에 걸려있었고 그의 조그만 눈은 승리의 기쁨과 패자에 대한 악의로 빛이 났다." 이 압권의 필치로 패자들은 안토노프를 묘사했다. 그의 옷과 모자가 엉망인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사방이 캄캄한 밤에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에 들어가 물웅덩이를 해치고 간 그를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의 눈에는 승리의 기쁨도 의심의 여지없이 비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패자들에 대한 악의는 전혀 품지 않았다. 안토노프는 군사혁명위원회의 이름으로 이렇게 외쳤다: "임시정부 장관 여러분은 체포되었음을 선언한다." 이때 벽시계는 10월 26일 오전 2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코노발로프는 이렇게 응답했다: "임시정부 장관들은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무력에 복종하고 항복한다." 이렇게 해서 예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준수되었다.

    동궁에 최초로 진입한 부대들 가운데 안토노프는 25명을 선정하여 장관실의 방어를 맡겼다. 정부의 항복 절차가 회의록으로 작성된 후 체포된 장관들은 광장으로 인도되었다. 사상자를 낸 군중 가운데에서 패자들에 대한 악의가 타올랐다. "저들을 죽여라! 총살시켜라!" 개별 병사들이 장관들을 구타하려고 했다. 그러나 적위대가 이들을 진정시켰다: 노동계급의 승리를 더럽히지 말라! 무장 노동자들이 포로들을 둘러싸고 확고한 호송대가 되었다. "앞으로!" 이들은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밀리오니 거리와 트로이츠키 교량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군중이 흥분했기 때문에 이들의 짧은 이동의 순간은 길었으며 위험이 가득했다. 나중에 장관 니키틴은 아주 올바르게 이렇게 적었다: 안토노프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으면 "아주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뻔했다. 이들의 불행을 마무리하듯 교량 위에 있던 포로 행렬은 우연히 사격을 받았다. 이들은 호송대와 함께 보도에 몸을 뉘어야했다. 그러나 아무도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누가 공중에 대고 경고 사격을 한 것 같았다.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의 주둔군 클럽은 공간이 좁았으며 그을음이 많은 등유로 등불이 커져 있었다. 이날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40 내지 50 명의 사람들이 들어찼다. 요새 대표위원이 보는 앞에서 안토노프는 장관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차관을 포함해 모두 18명이었다. 마지막 형식적 절차가 끝나고 포로들은 역사적인 트루베츠코이 성채의 방에 가두어졌다. 방어군은 한 명도 체포되지 않았다. 소비에트 권력에 대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장교와 사관생도들은 석방되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약속을 지킨 자는 몇 명에 불과했다.

    동궁이 점령된 직후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사관생도들의 처형, 여성 대대에 대한 강간, 궁전의 재물에 대한 약탈 등의 소문이 떠돌았다. 그러나 이 모든 우화들은 이미 오래 전에 반박되었다. 그런데도 밀류코프는 자기가 직접 쓴 혁명사에 이렇게 적었다: "총격으로 사망하지 않은 여성 대대 병사들은 볼세비키들에 의해 체포되어 그 날 저녁과 밤에 무섭게 병사들에게 감시당했고 폭력과 처형에 희생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총격이 없었고 양쪽의 정서로 보아서 총격이 있을 수도 없었다. 특히 궁전 내에서 폭력 행위는 더욱 생각하기 힘들었다. 거리의 우연한 분자들과 함께 수백 명의 혁명 노동자들이 소총을 든 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중에 의해 약탈이 시도되었으나 바로 여기에서 승자들의 엄격한 규율이 드러났다. 잔 리이드는 혁명의 극적 일화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목격했다. 그는 동궁에 처음으로 진입한 부대 뒤를 따라 동궁에 들어갔는데 당시를 이렇게 묘사했다: 지하실 창고에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소총 개머리판을 집어넣어 서랍을 비집어 열고 카페트, 아마포, 도자기, 유기 등을 끌어내고 있었다. 전쟁 마지막 해에 강도들이 참호 외투와 높은 털모자(papakhi)로 자신들의 정체를 숨겼듯이 이번에도 병사로 위장하여 강도질을 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약탈이 시작된 직후 누가 이렇게 외쳤다: "동지들, 손을 떼라. 그것은 인민의 재산이다." 병사 한 명이 입구 탁자에 앉아 펜과 종이로 물건들의 내역을 적고 있었으며 권총을 든 적위대 두 명이 그의 뒤에 서있었다. 동궁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수색을 당했고 훔친 물건은 전부 회수되어 목록에 올랐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조그만 상, 잉크병, 단도, 덩어리 비누, 타조 깃털 등을 되찾았다. 사관생도들 역시 면밀하게 조사를 받았다. 이들의 주머니는 훔친 골동품으로 가득했다. 이들은 병사들의 욕과 위협에 노출되었으나 이것이 전부였다. 한편 프리호드코를 우두머리로 하는 궁전 보초병이 조직되었다. 모든 곳에 초소가 세워졌다. 외부인들은 모두 궁전 밖으로 내몰렸다. 몇 시간 후 추드노프스키가 동궁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동궁을 해방시키겠다던 성직자를 앞세운 시민 행렬은 어떻게 되었는가? 소식으로 잠시 사관생도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이 영웅적 시도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시의회는 볼세비키들에 반대하는 세력의 구심점이었다. 네프스키 가도에 위치한 시의회 건물은 가마솥처럼 끓고 있었다. 정당, 분파, 소분파, 그룹, 잔당, 영향력 있는 개인 등이 이곳에서 볼세비키들의 범죄적 모험을 논의하고 있었다. 가끔 이들은 궁전에서 시들고 있던 장관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비난하고 있기 때문에 봉기는 어쩔 수 없이 실패할 것이다. 볼세비키들의 도덕적 고립에 대해 이들은 여러 시간 토론했다. 한편 함포 사격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오전에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된 장관 프로코포비치는 우는 목소리로 시의회에서 이렇게 불평했다: 동지들과 운명을 같이 할 가능성을 박탈당했다. 그는 따뜻한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나 공감이 표현되면서 시간이 흘렀다.

    아이디어와 연설이 어지럽게 쏟아지다가 마침내 실제 계획이 수립되어 전체 회의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필요하다면 정부와 함께 죽기 위해 시의회는 하나가 되어 동궁으로 행진한다. 사회혁명당, 멘세비키, 협동조합 지도자 등은 모두 똑같이 장관들을 구하거나 이들과 함께 죽겠다는 의지에 사로잡혀 있었다. 위험한 일을 일반적으로 피하는 입헌민주당도 이번에는 같이 죽겠다고 결정했다. 우연히 의회에 모습을 나타낸 일부 지방 출신들과 시의회 기자들 그리고 일반인 한 명 등이 약간 웅변조로 시의회와 운명을 같이 하는 허락을 구했다. 허락은 주어졌다.

    시의회의 볼세비키 분파는 무미건조한 조언을 한마디했다: 죽음을 찾아 어두운 거리를 돌아다닐 필요가 무엇인가. 유혈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장관들에게 전화를 해서 항복을 설득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그러나 민주주의자들은 이 충고에 분노했다: 봉기군의 첩자인 이들은 우리의 손에서 권력 뿐 아니라 영웅적으로 죽을 권리마저 박탈하고 있다. 한편 의원들은 역사의 이익을 위해 출석 확인 투표를 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죽음이 영광스럽기는 해도 죽음이 너무 늦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62명의 의원이 이 결정을 비준했다: 그렇다, 동궁의 폐허 속에서 죽을 것이다. 이에 대해 14명의 볼세비키 의원들은 스몰니와 함께 승리하는 것이 동궁과 함께 죽는 것보다 낫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즉시 소비에트 대회에 출석하기 위해 출발했다. 3명의 멘세비키-국제주의자들만이 시의회에 남기로 결정했다: 이들에게는 갈 곳도 목숨을 바칠 대의도 없었다.

    시의회 의원들이 마지막 여정을 시작하려고 할 때 전화가 울려 농민 집행위원회 전원이 이들과 합류할 것이라고 말했다. 끝없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제 완벽하고 명확한 그림이 그려졌다: 수도 모든 계급의 대표들과 함께 1억 농민의 대표들이 미미한 깡패 집단의 손에 죽을 작정을 했다. 출발하기 전에 연설과 박수가 부족하지 않게 터져 나왔다.

    농민 대의원들이 도착한 후 행렬은 마침내 네프스키 가도를 따라 전진했다. 행렬의 선두에는 시장 슈라이더와 장관 프로코포비치가 있었다. 행진 대열에는 농민 집행위원회 의장 아브크센티에프, 멘세비키 우파 지도자 킨추크와 좌파 지도자 아브라모비치 등이 잔 리이드의 눈에 들어왔다. 프로코포비치와 슈라이더는 등불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사관생도들이 우군을 적군으로 혼동하지 않도록 등불을 들기로 전화를 통해 장관들과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수와 함께 프로코포비치는 우산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성직자는 없었다. 사관생도들의 별로 풍부하지 않은 상상력은 조국 역사의 흐릿한 파편 가운데에서 성직자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인민 역시 이 행렬에 불참했다. 이들의 불참이 전체 계획의 성격을 결정했다. 3백 내지 4백 명의 "대표들"은 있었으나 이들을 대표자로 만든 인민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 사회혁명당의 젠지노프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어두운 밤이었고 네프스키 가도의 가로등은 꺼져있었다. 우리는 규칙적인 대오로 행진했으며 우리가 부른 '마르세이예즈'만이 들렸다. 멀리서 대포가 발사되는 소리가 들렸다. 볼세비키들이 계속 동궁을 포격하고 있었다."

    에카테리닌스키 운하에서 수병들의 무장 순찰대가 네프스키 가도를 따라 돌면서 민주주의자들의 행렬을 막고 있었다. "우리는 전진한다. 우리에게 어쩔 것인가?"라고 민주주의자들이 외쳤다. 수병들은 솔직하게 무력을 행사하겠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고 우리를 내버려두시오." 행진 대오의 일부가 이 곳에서 바로 죽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출석 투표로 결정되지 않았었다. 장관 프로코포비치는 연단이 될만한 높은 곳에 기어올라가 "우산을 흔들면서" 행렬 대오에 이렇게 촉구했다: 실제 무력을 행사할지도 모르는 무지몽매하며 속임을 당한 사람들을 유혹하지 말라. 수도의 가을은 비를 빈번히 뿌렸다. "시의회로 돌아가 나라와 혁명을 구할 방법을 논의하자."

    이것은 진짜 지혜로운 제안이었다. 물론 원래 계획은 성취될 수도 없었다. 민주주의 지도자들이 영웅적인 죽음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무장 깡패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이들은 잠시 서 있다가 몸이 추워지자 되돌아가기로 결정했다"고 스탄케비치는 슬픈 어조로 적고 있다. 그 역시 행진에 참여했다. "마르세이예즈" 없이 우울한 침묵 속에서 행진 대오는 네프스키 가도를 따라 시의회 건물로 되돌아갔다. 여기에서 이들은 확실히 "나라와 혁명을 구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동궁의 함락으로 군사혁명위원회는 수도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나 시체에서도 손톱 발톱과 머리카락이 계속 자라듯이 타도된 정부는 자신의 공식 신문을 통해 계속 생명의 신호를 내보냈다. 24일에 임시정부 헤럴드 지는 제복과 코안경을 착용한 추밀원의 은퇴를 알렸는데 25일에는 갑자기 발행이 중단되었다. 물론 아무도 이 사건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26일에 이 신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발행되었다. 첫 페이지에 이 신문은 붉은 글씨로 이렇게 보도했다: "전기가 끊겼기 때문에 10월 25일자는 나오지 못했다." 전기가 끊긴 것을 제외하면 정부는 질서 있게 생명을 누리고 있었고 이제 트루베츠코이 성채에 위치한 정부의 헤럴드 지는 신입 상원의원 12명의 임명 사실을 발표했다. 내무장관의 회보인 "행정 정보"의 칼럼에서 니키틴은 도 정부위원들에게 "수도에는 모든 것이 평온하다. 수도의 사건들에 대한 잘못된 소문에 영향을 받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의 말이 크게 틀린 것은 아니었다. 소리를 통해 정부군에게 공포를 자아낸 함포 사격을 제외하면 혁명의 며칠은 평온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말했더라도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10월 25일에는 정부 인쇄소가 정전되었을 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 중요한 페이지 한 장이 넘겨졌다.

     

     

    제 9장 10월 봉기

    혁명에 대한 물리적인 비유는 너무 자연스럽게 입에 배어서 어떤 표현들은 케케묵은 은유가 되었다: "화산 폭발", "새로운 사회의 탄생", "비등점."...그러나 이 단순한 문학적 이미지 뒤에는 변증법 즉 진화의 논리에 대한 직관적인 파악이 숨겨져 있다.

    무장봉기가 혁명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전체적으로 혁명이 진화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같다. 봉기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이때 축적된 양이 폭발하여 질로 전화된다. 그러나 봉기 자체는 동질적이거나 일체적이지 않다. 봉기에도 역시 나름의 결정적 순간, 내적 위기, 가속의 순간 등이 있다.

    "비등점" 이전 즉 봉기의 전야라는 짧은 기간은 정치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물리학에 의하면 비등점 직전까지 꾸준히 상승한 온도는 갑자기 상승을 멈춘다. 그리고 더 많은 열을 흡수한 후에야 끓어오른다. 일상언어도 이 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평온한 것 같으면서도 에너지가 집중되는 폭발 전야의 상태를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라고 부른다.

    수도의 노동자와 병사들이 압도적 다수로 볼세비키당을 지지했을 때 비등점은 도달된 것처럼 보였다. 레닌이 즉각적 봉기의 필요성을 선언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봉기를 일으키기에는 여전히 뭔가 부족한 것이 있었다. 노동자 그리고 특히 병사들은 혁명 에너지를 더 흡수해야했다.

    대중은 말과 행동에서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단순한 파업은 말할 것도 없고 봉기에는 더욱더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내적 갈등과 세력 재편이 발생한다. 일부는 전진하고 일부는 뒤로 물러난다. 일반적으로 내전의 첫 조치들은 대단히 우유부단하다. 두 적대 진영은 같은 일국적 토양에 고착된 것처럼 보인다. 중간 집단들과 화해의 정서를 가진 환경으로부터 이들은 떨어져 나갈 수 없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 대중을 사로잡자 지도적 집단들은 갑자기 봉기를 주저하기 시작했다. 혁명에서도 전쟁처럼 평화와 평온함의 시기가 있다. 그런데 혁명을 준비하는 비교적 평온한 시기에 형성된 기구들과 기관들은 가장 단련된 정당의 경우에도 봉기의 임무에 부적절하거나 최소한 완전히 적절하지는 못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결정적 순간에는 재편과 변화가 불가피하다. 소비에트 정부 수립을 표결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대의원 전원이 무장봉기가 일정에 올랐다고 생각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소비에트를 봉기 기관으로 전환시키려면 소비에트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는 새로운 노선으로 이들이 방해 없이 인도되어야했다. 성숙된 사회위기의 상황에서 이 작업은 몇 달이나 심지어 몇 주일까지 걸릴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봉기의 마지막 며칠 동안 정해진 노선에서 이탈하거나 소비에트가 봉기 준비를 완료하기 며칠 전에 봉기를 촉구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했다. 또한 봉기 대중의 대오에 혼란을 조성하거나 당과 소비에트의 교류를 24시간만이라도 단절시키는 것 역시 대단히 위험했다.

    레닌은 여러 차례 이렇게 말했다: 당 전체가 중앙위원회보다 좌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중은 당보다 훨씬 좌에 위치해 있다. 전체적으로 혁명에 적용될 경우 이 말은 전적으로 올바르다. 그러나 이 상호관계도 크게 흔들린다. 4월과 6월 그리고 특히 7월초에 노동자와 병사들은 초조하게 당을 결정적 행동의 길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7월 공격 이후 대중은 좀더 조심스러워졌다. 이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이전보다 더 혁명을 원했다. 그러나 이들은 한번 크게 데었기 때문에 또 실패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7월, 8월, 9월 당은 노동자와 병사들을 일상적으로 억제시키고 있었다. 반면 코르닐로프 세력은 이들을 거리로 불러내어 결전을 벌이려 무진 애를 썼다. 이때의 정치적 경험은 지도자 뿐 아니라 대중의 억제 중추를 크게 강화시켰다. 그러나 이 방향으로 선동이 연속해서 성공하면서 이제는 무턱대고 기다리는 태도가 관성으로 정착되어 버렸다. 새로운 방향전환이 선언되었으나 대중은 제대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심리적 방향 전환이 필요했다. 상황의 요구에 혁명 정당이 제대로 부응할수록 봉기는 더 광범위한 대중을 투쟁으로 끌어들인다.

    봉기를 위한 정치적 준비에서 봉기의 실제 문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했다. 이것들은 전국 각지마다 그 형태가 달랐다. 그러나 핵심적 특징은 모든 곳에서 동일했다. 무랄로프는 모스크바의 볼세비키당 군사기구가 권력장악의 필요성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 장악의 방법은 아직도 구체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마지막 연결고리가 결여되어 있었다.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이 한창 전선으로 재배치되고 있을 때 모스크바에서는 파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느 공장위원회의 주도를 통해 소비에트 볼세비키당 분파는 포고령으로 경제투쟁을 해결하는 계획을 제출했다. 이것을 준비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10월 23일이 되어서야 소비에트는 "혁명 포고령 제 1호"를 채택했다: 공장의 노동자와 사무직원들은 지금부터 공장위원회의 동의를 통해서만 고용되고 해고될 수 있다. 이것은 소비에트가 국가권력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 있을 임시정부의 불가피한 저항 때문에 소비에트 주위로 대중을 더욱 결집시켜 공개적인 투쟁을 전개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포고령 입안자들은 판단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결코 시험되지 못했다. 모스크바와 전국에 훨씬 더 확고한 봉기의 동기 즉 새로 탄생한 소비에트 정부를 즉각 지원할 필요성을 뻬쩨르부르그의 혁명이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반동에 대한 혁명 수호를 봉기의 외피로 이용하기 위해 봉기 측은 언제나 적극적으로 나섰다. 혁명정당은 합법적 외피에 관심이 있었다. 다가올 소비에트 전국대회는 핵심적으로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 기관은 주권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반을 주장할 자격이 있는 인민 대중 전체를 위한 기관이었다. 소비에트를 통해 이중권력의 한쪽은 반대쪽에 대해 봉기를 일으킬 생각이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권력 기관인 소비에트 대회에 호소하여 임시정부가 미리 소비에트를 전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 비난은 정세 전체로부터 도출되었다. 정부는 싸움이 없이 굴복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방어할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임시정부는 노동자, 병사, 농민의 최고 기관에 대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케렌스키를 타도할 소비에트 대회에 대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케렌스키를 권력으로 밀어 올린 권력의 기반을 공격했다.

    이 모든 것을 법을 사소하게 따지기 또는 인민에게 무익한 행동으로 간주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일 것이다. 이와 반대로 바로 이것을 통해서 혁명의 기본 사실들은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이 대단히 유리한 상황을 온전히 활용하는 것이 필요했다. 병사는 병영에서 전선의 참호로 끌려가는 것을 당연히 싫어했다. 이 점에 거대한 정치적 목표를 부여하고 주둔군을 소비에트 대회 방어에 동원했기 때문에 혁명 지도자들은 봉기의 날짜에 목매달지 않았다. 봉기의 날짜와 시간을 선택하는 것은 투쟁의 전개 상황에 달려있었다. 운신의 자유는 정부보다 더 힘센 봉기 세력에게 있었다.

    "먼저 케렌스키를 타도한 후 소비에트 전국대회를 개막해야한다." 레닌은 이 말을 계속 반복했다. 그리고 봉기 대신 부르주아 헌법에 의거한 권력 재편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는 우려했다. 봉기의 성격을 완전히 바꾼 새로운 요인 즉 수도의 주둔군과 정부 사이의 격렬한 갈등을 그는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대회가 권력 문제를 결정하여 권력 기관이 되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을 막기 위해 정부는 수도 주둔군을 무력화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주둔군은 소비에트 대회를 기다리지 않고 정부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핵심적으로 봉기는 이미 시작된 셈이었다. 그리고 권력의 외피를 쓴 소비에트 대회를 기다리지 않고 봉기는 시작된 셈이었다. 따라서 봉기 준비를 소비에트 대회 준비와 분리시키는 것은 정치적 오류였다.

    10월 혁명을 2월 혁명과 비교하면 10월 혁명의 특수성이 가장 잘 이해된다. 두 혁명을 비교하기 위해 혁명의 전개 상황이 2월과 10월에 모두 동일했다고 조건적으로 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실제로 상황은 동일했다. 두 혁명이 일어난 곳이 뻬쩨르부르그였을 뿐 아니라 사회 세력, 노동계급, 주둔군 등도 두 혁명의 공통점이었다. 두 혁명 모두 대다수 예비 연대들이 노동계급의 편으로 넘어갔을 때 승리가 가능했다. 그러나 동일한 기본특징들에도 불구하고 두 혁명은 엄청나게 달랐다! 8개월 동안 서로를 보완하면서 뻬쩨르부르그의 두 혁명은 서로 상반된 특징을 통해 봉기 일반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운명을 지닌 것 같았다.

    2월 봉기는 자연발생적이었다고 한다. 앞에서 이 규정에 대한 유보조건들을 전부 그리고 제때에 제시했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은 사실이다: 봉기의 경로는 미리 계획되지 않았으며 공장과 병영은 혁명의 문제에 대해 투표하지 않았다; 봉기를 일으키라고 위에서 대중에게 촉구한 사람도 없었다. 수년동안 축적되었던 대중의 분노가 갑자기 폭발했으며 대중 자신도 이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10월에는 상황이 아주 달랐다. 2월 혁명 후 8개월 동안 대중은 치열하게 정치를 경험했다. 이들은 정세를 규정하는 사태들을 조성했을 뿐 아니라 이들 사이의 연관을 이해하고 있었다. 하나 하나의 투쟁 후에 이들은 그 결과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소비에트 대의제는 인민 정치 생활의 일상적 구조가 되었다. 대중은 투표를 통해 파업, 거리 시위, 연대의 전선 이동 등을 결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봉기의 문제를 독자적으로 결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2월 혁명의 약점들이 이렇게 무한히 소중하고 실제적인 방식으로 극복되었지만 새로운 어려움들이 등장했다.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봉기를 촉구하기 위해서는 공식적으로 소비에트에서 이 문제를 제기해야했다. 그러나 봉기의 문제를 공개 토론의 주제로 삼을 수는 없었다. 적대 세력이 소비에트에서 소수파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 상황에서 봉기를 지도하기 위해 특별한 그리고 가능한 한 위장된 소비에트 기구를 수립하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그러나 이것도 장점과 시간적 지연이라는 단점을 전부 가지고 있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10월 9일 채택된 군사혁명위원회에 대한 결의문은 20일이 되어서야 실행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큰 어려움은 아니었다. 소비에트 다수파의 지위를 이용하여 볼세비키들만의 군사혁명위원회를 수립했다면 사회혁명당 좌파와 일부 무정부주의 그룹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당에 소속되지 않은 대중의 불만을 샀을 것이다. 군사혁명위원회의 볼세비키들은 볼세비키당의 결정에 복종했으나 어느 정도 저항한 후 복종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군사혁명위원회의 사회혁명당 좌파와 무당파 위원들에게 볼세비키당의 규율을 강제할 수는 없었다. 정해진 날짜에 봉기를 일으키자는 결의문을 이들이 사전에 동의하게 만드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더욱이 이들에게 이 문제를 발설하는 것도 대단히 위험했다. 따라서 군사혁명위원회를 통해서는 대중을 봉기로 이끌고 매일 매일 상황을 격화시키고 투쟁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것만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볼세비키당의 이름으로 직접 봉기를 촉구하는 것이 더 간단한 문제해결 방식이 아니었을까? 이 방법은 의심의 여지없이 아주 중대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의 약점도 그만큼 명백했다. 당을 지지하는 수백만 대중은 세 부류로 나눠져 있었다. 첫 번째 부류는 모든 조건 속에서 당과 운명을 같이했다. 이 부류보다 훨씬 수가 많은 두 번째 부류는 당이 소비에트를 통해서 투쟁할 때만 당을 지지했다. 세 번째 부류는 볼세비키당의 다수파 지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소비에트의 결정을 따랐다.

    이 세 부류는 정치적 수준 뿐 아니라 출신 성분도 상당히 달랐다. 볼세비키당을 지지하는 부류는 무엇보다도 공업노동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선두에는 뻬쩨르부르그에서 대대로 노동자로 생활해온 선진노동자들이 있었다. 소비에트를 합법적 외피로 할 때에만 볼세비키당을 지지한 부류는 대다수의 병사들이었다. 볼세비키당이 소비에트 다수파가 되었지만 어쨌든 소비에트를 지지한 부류는 과거에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이었으며 대중과 단절되는 것을 두려워한 보수적 노동자들이었다. 또한 카자흐 기병을 포함한 좀더 보수적인 병사들, 사회혁명당 우파 지도부와 결별하고 당 좌파를 지지한 농민들도 이 부류에 속했다.

    볼세비키당의 힘을 소비에트의 힘과 동일시하는 것은 명백히 오류였다. 후자는 전자보다 훨씬 강력했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이 없었다면 소비에트는 쓸모 없는 무기력한 존재에 불과했다. 이 점은 너무 당연했다. 당과 소비에트의 관계는 혁명기에 불가피한 불일치 즉 볼세비키주의의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과 볼세비키당의 협소한 조직적 장악력 사이에서 나왔다. 올바르게 지렛대를 사용하면 인간의 허약한 팔은 자기 힘보다 몇 배 무거운 물체를 들어올릴 수 있다. 그러나 팔이 없이는 지렛대는 아무 쓸모 없는 막대기에 불과하다.

    9월말에 열린 볼세비키당 모스크바 지역 협의회에서 어느 대의원은 이렇게 보고했다: "예고레프스키에서 볼세비키당의 영향력은 모두에게 미치고 있다....그러나 당 조직 자체는 허약하다. 관리가 전무하다. 정기적인 가입도 당비 징수도 없다." 모든 곳에서 전부 두드러지지는 않았지만 당의 정치적 영향력과 조직력의 불일치는 일반적 현상이었다. 광범위한 대중은 볼세비키당의 구호와 소비에트 조직에 대해 알고 있었다. 9월과 10월이 지나면서 대중은 볼세비키당과 소비에트가 한 몸이라고 생각했다. 소비에트가 볼세비키당의 강령을 실행에 옮길 시간과 방법을 알려주기를 인민은 기다리고 있었다.

    당도 소비에트와 자신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대중에게 체계적으로 교육시켰다. 봉기가 준비되고 있다는 소문이 키에프에서 나돌자 볼세비키당 집행위원회는 즉시 부인하고 나섰다: "소비에트의 촉구가 없이는 어떤 행동도 없을 것이다....소비에트가 없이는 한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다!" 10월 18일 트로츠키는 봉기가 22일로 계획되어 있다는 소문을 부인했다: "소비에트는 선출 기관이므로 노동자와 병사들이 모르는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매일 반복되고 실제 행동으로 입증된 이 노선은 대중의 피와 살이 되었다.

    베레진 소위의 보고에 의하면 모스크바에서 열린 볼세비키당 10월 군사 협의회는 이렇게 말했다: "볼세비키당 모스크바 위원회의 촉구에 응해 군대가 거리로 나설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소비에트가 촉구하면 전부 나설지도 모른다." 그러나 9월에 이미 모스크바 주둔군 90%는 볼세비키당에게 표를 던졌다. 10월 16일 뻬쩨르부르그 협의회에서 당 위원회의 이름으로 보키는 이렇게 보고했다: 모스크바 지구에서 "군대는 소비에트의 촉구에 응하겠지만 당의 촉구에는 응하지 않을 것이다."; 네프스키 지구에는 "모두가 소비에트를 따를 것이다." 볼로다르스키는 뻬쩨르부르그의 정서를 이렇게 요약했다: "일반적 인상으로 보면 거리로 나서는데 열성인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소비에트가 촉구하면 모두 나설 것이다." 올가 라비치는 그의 말을 이렇게 교정했다: "일부는 당이 촉구해도 나서겠다고 말한다." 18일에 열린 뻬쩨르부르그 주둔군 상설협의회에서 대의원들은 자기 연대들이 소비에트의 촉구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고했다. 볼세비키들이 다수 부대의 지도자였으나 당의 이름을 언급하는 대의원은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소비에트의 규율 아래 동정적이며 동요하며 반정도 적대적인 분자들을 단결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병영의 단결이 보존될 수 있었다. 척탄병 연대는 소비에트 대회의 명령으로만 투쟁에 나서겠다고 선언하기조차 했다. 대중의 정서를 측정하면서 선동가와 조직가들은 소비에트와 당의 차이를 항상 언급했다. 이 사실만해도 봉기를 촉구하는 관점에서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운전병 미트레비치는 트럭 분대가 봉기 지지 결의안을 통과시키지 못하자 볼세비키들이 타협안을 통과시켰다고 말한다. 타협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볼세비키당이나 멘세비키당을 위해서는 나서지 않는다. 그러나 소비에트 제 2차 전국대회의 명령은 지체 없이 이행할 것이다." 이 볼세비키들은 군사혁명위원회가 대규모로 수행하고 있는 전술을 트럭 분대에 소규모로 적용시키고 있었다. 미트레비치는 주장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증언은 더욱 설득력이 있다!

    당을 통해 곧바로 봉기를 지도하려는 시도는 어디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다. 섬유공업의 상당한 중심지인 키네쉬마에서 봉기 준비와 관련된 아주 흥미로운 증언이 아직도 남아있다. 모스크바 지역의 봉기가 일정에 오른 후 키네쉬마의 볼세비키당 위원회는 특별 3인조를 선출하여 군사적 역량과 보급품을 평가하고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이 3인조는 어떤 이유에서인가 "통령"이라고 불리었다. 이들의 한 명은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러나 선출된 3인조가 한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예상과 약간 달리 사태가 전개되었다....이 지역의 파업이 우리를 압도했기 때문에 정작 결정적인 사태가 터지자 조직 중심은 파업위원회와 소비에트로 이동되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일어난 일이 지방적 소규모로 이곳에서도 반복되고 있었다.

    당은 소비에트를 움직였고 소비에트는 노동자, 병사 그리고 어느 정도 농민을 움직였다. 그러나 양적 성과는 속도의 저하를 가져왔다. 이 지도체제를 톱니바퀴 시스템으로 비유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비에트라는 중간 단계의 톱니바퀴를 무시하고 당의 톱니바퀴를 곧바로 대중의 거대한 톱니바퀴에 연결시키려고 조급하게 시도했을 경우 당 톱니바퀴의 이빨을 망가뜨릴 위험이 있었다; 또한 이 시도는 충분한 정도로 대중을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레닌은 다른 주제와 관련하여 다른 시기에 이와 같은 비유를 들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체제의 내부 갈등 때문에 유리한 상황을 놓쳐버릴 정반대의 위험도 거의 같은 정도로 존재했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봉기의 가장 유리한 기회는 한정되어 있다. 이 이상적 시점을 미리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봉기는 이 이상적 절정의 시점에 다가가는 도중에 성공할 수도 있고 역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하기 이전 절정의 시점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성공할 수도 있다. 이때는 "순간"이 몇 주일 또는 때때로 몇 달이 될 수도 있다. 볼세비키당은 7월초에 권력을 잡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잡았다 하더라도 유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9월 중순에 이들은 권력을 잡을 수 있다고 희망할 수도 있었고 이것을 유지할 수 있다고 희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0월 이후로 봉기를 지연시켰다면 결코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도 일정 기간 내에서는 지연을 만회할 수 있었을 것이다. 3개월 또는 4개월 동안 즉 대체로 9월에서 12월까지 혁명의 정치적 전제조건은 존재했다고 조건적으로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는 혁명은 무르익었으나 아직 조건이 완전히 유실되지는 않았다. 봉기가 성공할 수 있는 시점의 범위는 봉기 도중보다 봉기 후 확정하기가 더 쉽다. 이 범위 내에서 당은 나름대로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실제적인 문제에서 불가피하며 때로는 대단히 날카로운 이견이 발생했다.

    레닌은 민주협의회 회기 중에 봉기를 일으키자고 제안했다. 9월말에 그는 봉기의 지연이 위험할 뿐 아니라 치명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0월초에 이렇게 적었다: "소비에트 전국대회의 개막 때까지 봉기를 미루는 것은 형식을 가지고 유치하게 장난치는 것이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일 뿐 아니라 혁명에 대한 배신이다." 그러나 볼세비키 지도자들이 형식상의 고려 때문에 봉기를 소비에트 대회에 맞춘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지노비에프는 소비에트 볼세비키 분파의 예비 협의회 소집을 요구했다. 이때 그는 봉기에 대한 공식적인 승인을 추구하지 않았다. 다만 중앙위원회의 봉기 결정에 반대하여 지방 대의원들의 정치적 지지를 기대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이 소비에트에 기대고 소비에트가 소비에트 전국대회에 기댔기 때문에 봉기 일자는 명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레닌은 크게 그리고 정당하게 우려했다.  

    봉기 촉구 일자의 문제는 봉기 촉구의 주체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레닌에게도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봉기를 촉구하는 장점은 너무 명백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지도자들보다 더 일찍 이 경로의 문제점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혁명 현장에서 떨어진 채 피신하면서 그는 이렇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위원회보다 소비에트 최고기구에 의거할 경우 봉기는 더욱 지연될 것이다. 더욱이 레닌은 당 중앙위원회의 정책도 충분히 단호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소비에트든 당이든 봉기 주체의 문제를 선택의 문제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첫 몇 주일동안 그는 당의 독자적 주도력을 결정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문제는 동일한 기초, 동일한 상황, 동일한 목표에 기초한 두 가지 봉기방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큰 차이가 있는 선택이었다.

    알렉산드린카 극장을 포위하고 민주협의회를 체포하자는 레닌의 제안은 다음과 같은 가정에서 나왔다: 봉기는 소비에트가 아니라 곧바로 공장과 병영에 호소하는 당에 의해 주도될 것이다. 다른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계획을 소비에트를 통해 실행한다는 것은 절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당의 지도자들조차 자기 계획에 저항할 것이라는 것을 레닌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미리 이렇게 권고했다: 민주협의회 볼세비키 분파에서 "수를 늘리려 하지 말아라." 상부에서 결의하면 하부가 수를 보장할 것이었다. 레닌의 대담한 계획은 당연히 신속성과 기습성의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어떤 한계 내에서 당을 대중에 대항시킬 위험성이 있었다. 심지어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가 기습을 당해 봉기가 처음 실패했다면 여전히 불안한 볼세비키당의 다수파 지위는 상실될 수 있었다.

    10월 10일의 결의문은 당의 지역 조직들에게 모든 문제들을 실제적으로 임박한 봉기의 관점에서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당 중앙위원회 결의문에는 소비에트를 봉기의 기관으로 인정하는 말이 한 마디도 없었다. 16일의 협의회에서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적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실제 사실들이 보여주고 있다. 당 중앙위원회가 봉기를 시작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레닌의 이 발언은 결코 웅변용이 아니었다. 이것은 당 중앙위원회가 즉시 봉기를 결정하면 복잡한 소비에트의 절차들을 따르면서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레닌이 제안한 결의안이 이렇게 결론 내렸다: "중앙위원회와 소비에트는 제 때에 유리한 봉기의 순간과 봉기를 촉진할 방법을 제시할 것이라고 믿는다." 레닌은 당과 소비에트를 함께 언급하고 봉기의 날짜 문제에 대해 좀더 융통성 있게 표현했다. 이것은 레닌이 당 지도자들을 통해 대중의 저항을 감지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였다.

    다음날 지노비에프 그리고 카메네프와의 논쟁에서 레닌은 전날의 논의를 이렇게 요약했다: "소비에트의 봉기 촉구와 소비에트 방어를 위해 노동자들이 모두 한 몸이 되어 투쟁에 나서겠다고 동의했다." 즉 당의 이름으로 봉기를 촉구할 수 있다는 레닌의 생각에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봉기를 촉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24일 저녁 레닌은 이렇게 적고 있다: "누가 권력을 장악할 것인가? 이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인민의 진정한 대표들에게만 권력을 넘기겠다고 선언할 '다른 어떤 기관' 또는 군사혁명위원회가 권력을 잡을 것이다." 신비한 인용부호로 표시된 "다른 어떤 기관"은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의 음모적 명칭이었다. 여기서 레닌은 봉기가 당 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추진되어야한다는 그의 9월 제안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그의 주장은 약간 달랐다: 소비에트의 합법성 때문에 군사혁명위원회의 정부 타도를 소비에트대회가 인정하지 못할 경우 당 중앙위원회가 봉기 기관이 되어야 한다.

    봉기의 날짜와 방법에 대한 투쟁은 일주일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투쟁에 참여한 모두가 이것의 의미와 중요성을 명확히 인식한 것은 아니었다. 스탈린은 1924년에 이렇게 적었다: "레닌은 소비에트의 등뒤에서가 아니라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의 소비에트를 통해 권력을 장악할 것을 제안했다. 무슨 목적으로 트로츠키는 기이한 정도를 넘어서는 레닌의 전설을 필요로 하는가?" 그리고 다시 그는 이렇게 적었다: "레닌은 블랑끼주의에 조금도 오염되지 않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맑스주의자이다. 이것을 당은 알고 있다." 반면에 트로츠키는 "레닌을 위대한 맑스주의자가 아니라 난장이 블랑끼주의자의 일종으로 묘사하고 있다." 레닌이 블랑끼주의자일 뿐 아니라 난장이라고 내가 묘사했다는 것이다! 누구의 이름으로 봉기를 촉구하고 어떤 기관의 손으로 권력을 장악할 것인가의 문제는 사상으로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 혁명의 일반적 조건이 주어진 경우에는 봉기는 실제적인 기법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 중앙위원회 내부의 이 견해차이는 같은 군사 사상으로 교육을 받았으며 전략적 상황에 대한 평가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대단히 중요한 그러나 특수한 성격의 가장 시급한 문제에 대해 각기 다른 해결 방법을 제시하는 총참모부 소속 장교들의 다툼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맑스주의와 블랑끼주의 문제를 개입시키는 것은 이 두 사상 모두에 대한 이해의 결여를 드러낼 뿐이다.

    포크로프스키 교수는 봉기의 기관으로 당이나 소비에트를 선택하는 문제의 중요성 자체를 부정한다. 그는 병사들이 형식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웃어넘긴다: 이들은 케렌스키를 타도하기 위해 소비에트 대회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재치 있는 이 사고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다: 당으로 충분하다면 무엇 때문에 소비에트를 수립하는가?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소비에트의 합법성을 통해 거의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열망은 전혀 성과가 없었다. 이것은 흥미로운 사항이다. 마지막에 권력은 소비에트가 아니라 명백히 '불법적' 특별 조직에 의해 장악되었다." 포크로프스키는 트로츠키가 소비에트가 아니라 "군사혁명위원회의 이름으로" 케렌스키 정부의 타도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이것은 대단히 예상외의 결론이 아닐 수 없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소비에트의 선출 기관이었다. 봉기에서 군사혁명위원회가 담당한 지도적 역할을 이 교수는 빈정거리고 있다. 그러나 대중이 대단히 경계하며 소중히 여긴 소비에트 합법성을 군사혁명위원회는 전혀 훼손하지 않았다. 인민위원회 역시 특별한 목적으로 수립되었으나 소비에트 권력 기관이 되었고 포크로프스키 자신은 교육 인민부(副)위원으로 일했다.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이 소비에트에 전적으로 복종했기 때문에 봉기는 소비에트 합법성 그리고 어느 정도 이중권력의 전통 내에서 수행될 수 있었다. 수많은 회고록, 혁명 기념 논문, 초기의 역사 시론 등 허다한 문서들에 의해 확인된 이 사실은 의심의 여지없이 인정되었다. 10월 혁명에 대한 최초의 저서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회의들 사이에 본 저서의 필자가 생생한 기억으로 저술한 것이었다. 이 저서는 수년간 당의 역사 교과서가 되었다. 이 저서는 이렇게 말한다: "뻬쩨르부르그의 갈등은 주둔군의 운명에 대한 것이었다." 봉기를 직접 조직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던 사도프스키는 더욱 명확하게 이렇게 표현했다: "10월 운동의 근본 문제는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을 북부전선으로 이동시키는 문제였다." 사태의 경로를 복원시키고 확립하려는 당면 목적으로 집단적 대회에 참석한 봉기의 가장 밀접한 지도자들은 사도프스키의 이 말을 수용했다. 1924년이 지난 후 갑자기 이렇게 알려졌다: 트로츠키는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을 희생시키며 농민 주둔군의 의의를 과대 평가했다. 이것은 그가 농민을 과소 평가했다는 비난을 아주 잘 보완하는 과학적 발견이었다. 포크로프스키 교수를 위시한 다수의 소장 역사학자들은 최근 몇 년간 우리에게 노동계급 혁명에서 노동계급의 중요성을 설명해왔다. 또한 우리가 병사들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에는 노동자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분노했다. 그리고 습자 책의 표현을 반복하는 대신 실제 사건 과정을 분석하는 우리를 비난했다. 포크로프스키는 이 비판의 결과를 이렇게 집약한다: "무장 봉기가 당에 의해 결정된 것을 트로츠키는 아주 잘 알고 있다. 봉기의 핑계는 부차적인 문제라는 것이 완벽히 명확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을 전체 정세의 가장 중심에 놓았다. 마치 주둔군이 아니었다면 봉기를 생각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포크로프스키에게는 봉기에 대한 "당의 결정"만이 중요하다. 그리고 실제로 봉기가 일어난 방식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핑계는 언제든지 마련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주둔군이 볼세비키당으로 획득된 방식을 핑계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봉기의 운명을 요약하는 바로 그 문제가 아닌가! 주둔군의 전선 이동에 대한 갈등이 없이도 노동계급 혁명은 의심의 여지없이 발생했을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말은 옳다. 그러나 이것이 없었다면 봉기의 양상은 달랐을 것이고 당연히 다른 설명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을 얘기하고 있다.    

    적위대의 조직가요 역사가인 말라호프스키는 이렇게 주장한다: 봉기 과정에서 주도성, 결의, 인내력 등을 보인 것은 반 수동적 주둔군이 아니라 무장 노동자였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10월 혁명에서 적위대 부대들은 정부 청사, 우체국, 전신국 등을 점령했으며 전투에서도 선두에 섰다, 등등...." 이 모든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적위대가 이 기관들을 단순히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둔군이 이들과 한편이 되어 이들을 최소한 방해하지 않고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것이 봉기의 운명을 결정했다.

    병사와 노동자 가운데 누가 봉기 과정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너무 낮은 이론 수준으로 떨어져 주장을 할 여지가 거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10월 혁명은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해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이 투쟁의 결과는 최종적으로는 농민에 의해 결정되었다. 전국에 지배적으로 드러난 세력 관계는 뻬쩨르부르그에서 가장 완벽하게 표현되었다. 혁명적 음모, 노동계급의 봉기, 자기 생존을 위한 농민 주둔군의 투쟁 등이 결합하여 혁명은 최소 희생자를 내면서 짧은 공격으로 끝났다. 당은 봉기를 지도했다. 그리고 봉기의 가장 주요한 원동력은 노동계급이었다. 무장 노동자 부대는 봉기의 주먹이었다. 그러나 봉기를 지지한 육중한 농민 주둔군이 투쟁의 결과를 결정했다.

    바로 이 필수적인 문제를 가지고 2월 혁명을 10월 혁명과 비교해야한다. 2월 혁명에서 짜르를 타도하기 직전 주둔군은 양 적대 진영에게 커다란 미지수였다. 병사들 자신은 노동자들의 봉기에 어떻게 반응해야할 지를 몰랐다. 오직 총파업만이 노동자와 병사들을 대대적으로 대치시켰고 행동을 통해 병사들을 시험했으며 병사들이 노동자들 편으로 넘어오게 만들었다. 바로 이 때문에 2월의 5일간 진행된 혁명은 극적이었다.

    임시정부를 타도하기 직전 주둔군의 압도적 다수는 공개적으로 노동자 편이었다. 정부는 전국의 어디에서보다 자신의 청사인 동궁에서 가장 크게 고립되었다. 따라서 정부가 수도에서 도망치려고 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러나 이것은 소용없었다. 적대적인 수도는 이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혁명 연대들을 수도에서 밀어내려다 실패한 정부는 결정적으로 자기 무덤을 팠다.

    봉기 전에 케렌스키가 보인 수동적 정책을 그의 개성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피상적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으며 팔친스키처럼 활력이 있는 인물들이 정부에 있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볼세비키당의 승리가 곧 자신들의 정치적 사망을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전부는 함께 그리고 혼자 전신 마비를 일으켜 케렌스키처럼 일종의 무거운 반(半) 수면상태에 빠졌다. 이 상태에서는 위험이 닥쳐도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을 구출할 수 없었다.

    10월에 노동자와 병사의 동맹은 2월처럼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대치하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미 봉기 이전에 동맹은 이루어져 있었다. 볼세비키당이 총파업을 촉구하지 않은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봉기 이전에 군사혁명위원회는 이미 상황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주둔군 부대들을 전부 알고 있었으며 이들의 정서, 내부 세력 구성 등을 자세하게 읽고 있었다. 이들에 대한 보고서를 형식이 아니라 실제 사실을 표현하는 것으로 매일 보고 받고 있었다. 언제든지 전권을 행사하는 자신의 대표위원을 보낼 수 있었으며 명령서를 든 자전거 부대 병사를 어느 연대에든지 보낼 수 있었다. 또한 부대 위원회를 전화로 소환할 수 있었으며 근무를 서고 있는 중대에 명령할 수도 있었다. 주둔군에게 군사혁명위원회는 음모의 본부가 아니라 국가권력의 본부였다.

    물론 임시정부는 국가기구의 정점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물질적 기반은 이미 허물어져 있었다. 정부와 전쟁 총사령부는 허공에 뜬 존재였다. 전신과 전화 그리고 중앙은행은 계속 정부에 봉사했다. 그러나 이 기관들을 유지할 군사력이 정부에게 없었다. 마치 동궁과 스몰니가 뒤바뀐 것 같았다. 군사혁명위원회는 허깨비 정부를 곤경에 몰아넣었다. 정부는 주둔군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군대를 공격하려는 케렌스키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여 자신의 멸망을 재촉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임무는 여전히 달성되지 않고 있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시계의 스프링과 케이스를 가지고 있었으나 바늘과 숫자 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없으면 시계는 자기 기능을 다할 수 없다. 전신국, 전화국, 은행, 군 총사령부 등이 없으면 군사혁명위원회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위원회는 권력의 진정한 전제조건과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권력 자체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2월 혁명에서 노동자들은 은행과 동궁을 장악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직 군대의 저항을 저지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들은 국가기구의 정점들이 아니라 병사들의 영혼을 사로잡으려고 투쟁했다. 그러나 병사들을 획득하자 나머지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되었다. 경비병 대대들을 넘겨준 짜르는 자신의 궁전이나 군대 사령부를 방어할 시도도 하지 않았다.

    10월에 케렌스키 정부는 병사들의 영혼을 회복할 수 없이 상실한 후 국가기구의 정점들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령부, 은행, 전화국 등은 권력의 겉모습에 불과했다. 이것들이 소비에트에 의해 장악되자 이제 권력은 완전히 장악되었다. 이것이 봉기 직전의 상황이었고 마지막 24시간의 행동 형태들을 결정했다.

    시위, 시가전, 바리케이드 등 봉기를 떠올리는 모든 것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미 해결된 문제를 혁명이 해결할 필요는 없었다. 국가기구를 접수하는 임무는 비교적 적은 숫자의 군대들을 하나의 본부에서 지도하여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 되었다. 병영, 요새, 창고 등 노동자와 병사들이 작동하는 모든 시설들은 이들 자신에 의해 장악될 수 있었다. 그러나 동궁, 예비의회, 지구 사령부, 정부 청사, 사관학교 등은 내부에서 장악될 수 없었다. 이것은 전화, 전신, 전화국, 중앙은행 등도 마찬가지였다. 이 기관들의 종사자들은 전체 역관계에서 비중이 거의 없었으나 자기들 영역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보초병을 통해 이것을 확고히 방어하고 있었다. 외부에서 이 관료적 정점에 침투할 필요가 있었다. 정치적 정복 대신 강제 점령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미 정부가 군사적 기반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이에 저항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따라서 최종 정점들은 충돌이 없이 군사적으로 점령되었다.

    물론 전투 없이 사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동궁은 급습하여 점령되어야했다. 그러나 정부의 저항이 동궁 방어로 귀착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10월 25일이 투쟁의 전 과정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명확히 규정한다. 동궁은 8개월 간 존재하면서 정치적으로 파산된 정권의 마지막 보루였으며 마지막 2주일에 걸쳐 결정적으로 무장이 해제되었다.

    계획과 중앙집중적 지도부를 의미하는 음모적 요소들은 2월 혁명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짜르 체제와 전쟁의 압제에 시달린 혁명 조직들의 허약성과 분산성 때문이었다. 따라서 대중의 역할은 그만큼 컸다. 봉기를 일으킨 분자들은 인간 메뚜기 떼가 아니었다. 이들은 나름의 정치적 경험, 전통, 구호, 이름 없는 지도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봉기 지도부의 분산성은 짜르를 타도할 수는 있었으나 승리자들에게 승리의 과실인 권력을 줄 수는 없었다.

    10월 혁명의 거리가 평온했고 혁명 군중과 전투가 없었기 때문에 혁명의 적들은 10월 혁명이 극소수의 음모요 한줌 밖에 되지 않는 볼세비키들의 모험이라고 말했다. 이 표현은 봉기가 끝난 후 수일, 수개월, 수년간 수없이 되풀이되었다. 야로슬라프스키는 10월 노동계급 혁명의 평판을 개선하기 위해 10월 25일을 이렇게 묘사한다: "군사혁명위원회의 호출로 집결한 뻬쩨르부르그 노동자의 탄탄한 대오는 위원회의 깃발 아래 정렬하여 수도의 거리에 넘쳤다." 이 관변 역사가는 군사혁명위원회가 왜 대중을 거리로 호출했으며 이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약점과 장점이 결합되어 2월 혁명은 전국적 혁명이라고 공식적으로 이상화된 반면 10월 혁명은 음모의 결과라고 간주된다. 그러나 실제로 볼세비키들은 마지막 순간의 권력장악 투쟁을 "음모"로 환원시킬 수 있었다. 이들이 극소수였기 때문이 아니라 정반대로 이들 뒤에 결집되고 조직되고 규율이 잡힌 압도적 다수가 노동자 지구와 병영에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시야를 마지막 봉기의 순간에 한정시키지 않을 경우에만 10월 혁명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2월의 마지막 며칠 간 봉기의 체스 게임은 첫 수부터 적의 항복인 마지막 수까지 전부 펼쳐졌다. 그러나 10월말에는 게임의 주요 부분은 이미 과거의 일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봉기의 날에는 두 수만에 왕을 잡는 상당히 협소한 문제만 남아 있었다. 따라서 혁명의 시기는 주둔군에 대한 갈등이 시작된 10월 9일부터 또는 군사혁명위원회를 수립하는 결의안이 통과된 12일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동전은 이로부터 2주일 이상 끌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군사혁명위원회의 수립부터 동궁의 점령까지 5일에서 6일간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수십만의 노동자와 병사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방어적이었으나 실제로는 공격적인 직접 행동에 나섰다. 봉기군이 의심스러운 합법성과 방어적 웅변이라는 이중권력의 제한조건들을 던져버린 봉기의 마지막 단계는 25일 오전 2시부터 다음날 오전 2시까지 정확히 24시간을 지속했다. 이 기간에 군사혁명위원회는 수도를 정복하고 정부를 점령하기 위해 공공연히 무기를 사용했다. 이 제안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참여 인원은 기껏해야 25,000명이나 30,000명을 넘지 않았다.

    [환관의 밤] 뿐 아니라 국가의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한 책도 저술한 이탈리아의 어느 작가는 1929년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또는 10배 간접적으로 배운 알량한 정보에 기초하여 [쿠데타: 혁명의 테크닉]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의 이름은 말라파르테인데 국가 봉기의 또 다른 전문가인 보나파르트와 이름을 구별하기가 쉽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1917년 러시아의 사회적 정치적 조건과 언제나 연관된 "레닌의 전략"과는 반대로 "트로츠키의 전술은 그 나라의 일반적 조건에 전혀 제한 받지 않았다." 혁명의 사회적 정치적 전제조건에 대한 레닌의 심사숙고에 대해 트로츠키가 이렇게 말했다고 그는 주장한다: "동지의 전략은 유리한 조건들을 너무 많이 요구한다. 그러나 봉기에는 아무런 조건도 필요 없다. 봉기는 스스로 필요조건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이 보다 더 자족적인 모순을 상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말라파르테는 수없이 주장한다: 10월 혁명은 레닌의 전략이 아니라 바로 트로츠키의 전술 때문에 승리했다; 그리고 트로츠키의 전술은 지금도 유럽 국가들의 평화에 위협이 되고 있다. "레닌의 전략은 유럽국가들의 정권에 직접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전술은 정말이지 실제적이며 결과적으로 영원한 위험 요인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쁘웽까레(Poincare)가 케렌스키 대신 임시정부의 수상이 되었더라도 볼세비키의 10월 쿠데타는 똑같이 성공했을 것이다." 정말 트로츠키의 전술이 모든 상황에서 똑같은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면 역사적으로 조건 지워진 레닌의 전략은 무슨 필요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은 헛수고에 불과할 것이다. 이 놀라운 저서가 이미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정치인들은 이 저서를 통해 국가혁명을 퇴치할 방법을 틀림없이 배우고 있는 중일 것이다. 이들 모두에게 성공이 깃들기를 기원한다.

    10월 25일의 순전히 군사적 작전에 대한 비판은 아직 없다. 이 주제에 대한 소비에트 정권의 문헌은 비판이 아니라 순전히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레닌의 아류들의 저술과 비교하면 모순이 가득하지만 수하노프의 비판은 사실에 대한 주의 깊은 태도를 보여줌으로서 우리의 호감을 사고 있다.

    10월 봉기의 조직과정을 평가하면서 수하노프는 2년에 걸쳐 서로 정반대 되는 견해를 제시했다. 2월 혁명에 대한 저서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개인적 회상에 기초하여 언젠가 10월 혁명을 묘사하는 글을 쓸 것이다. 10월 혁명은 마치 악보를 보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야로슬라프스키는 수하노프의 이 논평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뻬쩨르부르그의 봉기는 마치 악보를 보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처럼 볼세비키당에 의해 잘 준비되고 실행되었다." 혁명에 적대적이고 깊이는 없으나 주의 깊은 관찰자인 끌로드 아네는 더욱 강조하여 이렇게 말한다: "11월 7일의 국가혁명은 황홀한 칭찬만을 불러올 뿐이다. 하나의 오차나 분란도 없었다. 정부는 '아야!'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타도되었다." 반면에 10월 혁명을 다루는 그의 두꺼운 저서에서 수하노프는 스몰니가 "몰래 탐색하면서 조심스럽게 체계가 없이" 임시정부를 청산시켰다고 말한다.

    이 두 논평에는 모두 과장이 섞여있다. 그러나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두 평가는 서로 모순적이지만 사실로부터 약간의 지지를 받고 있다. 객관적 관계, 전체적 혁명의 성숙성, 정치 수도로 뻬쩨르부르그가 러시아 전국에서 차지하는 지위, 수도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위치, 혁명 이전 시기 전체에서 당의 역할 그리고 마지막으로 올바른 혁명 지도부 등으로부터 10월 혁명의 계획성이 주로 나왔다. 그러나 군사적 테크닉의 문제들이 남아있다. 여기서는 특정의 실책이 적지 않았다. 이것들을 모두 모으면 맹목적으로 일이 진행되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봉기 며칠 전 스몰니가 전혀 방어되지 않고 있었다는 점에 수하노프는 여러 차례 주의를 환기시킨다. 23일까지도 혁명 본부가 동궁만큼이나 허술하게 방어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주둔군과 유대를 강화하고 적의 모든 군사적 움직임을 추적할 수 있었다는 점 때문에 주로 난공불락의 지위를 확보했다. 정부의 조치가 있기 약 24시간 전에 군사혁명위원회는 군사적 테크닉의 좀더 진지한 조치들을 취했다. 23일 내내 그리고 24일 밤까지 정부는 주도력만 발휘했더라면 군사혁명위원회 본부를 점령할 수 있었다고 수하노프는 확신한다: "5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부대는 스몰니와 이 내부의 모두를 일망타진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부가 결의에 차고 대담해야했다. 그러나 정부의 성격상 이것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둘째로 "500명 병력의 부대"가 있어야했다. 이들을 어디서 구할 수 있었을까? 장교들로 구성된 부대를 만든다고? 8월말에 이들은 음모자로 등장했으나 나이트 클럽에서 처박혀 있었다. 화해주의자들의 전투 중대들은 와해되어 있었다. 사관학교에서는 모든 날카로운 문제들이 내부 갈등을 불러왔다. 카자흐 기병의 경우 상황은 더 나빴다. 다양한 부대들로부터 개인들을 선정하여 부대를 구성했을 경우 이 부대는 구성 작업이 끝나기 전까지 평소보다 10배나 더 많은 노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부대가 있었다 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몰니 지역에서 첫 총성이 울리는 순간 노동자 지구들과 병영들이 충격을 받아 들고일어났을 것이다. 수만 명의 무장 및 반 무장 병력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어느 시간이든 위협받고 있는 혁명의 중심부를 돕기 위해 달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군사혁명위원회를 점령했어도 정부는 구조될 수 없었을 것이다. 스몰니의 벽 밖에는 레닌이 있었으며 그와 통신을 하고 있는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 그리고 뻬쩨르부르그 위원회가 있었다. 두 번째 혁명 본부가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에 세 번째 혁명 본부가 오로라호에 있었으며 각 지구마다 본부가 따로 있었다. 대중은 지도부를 잃지 않았을 것이며 노동자와 병사들은 느리기는 했지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수도를 정복할 결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 예비조치들이 보완적으로 며칠 더 일찍 취해져야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점에서 수하노프의 비판은 정당하다. 혁명의 군사기구는 지연과 태만을 일삼으며 엉성하게 기능했다. 그리고 전체 지도부는 구체적인 기술적 문제보다 정치를 너무 앞세우는 경향이 있었다. 레닌의 실제적인 꼼꼼한 시야가 스몰니에는 크게 필요했다. 다른 지도자들은 아직 이 점에 대해 배워야할 바가 많았다.

    또한 26일 오전보다 25일 아침이나 밤에 동궁을 점령하는 것이 훨씬 용이했을 것이라고 수하노프는 올바르게 주장하고 있다. 동궁과 이웃한 지구 사령부 본부 건물은 보통 사관생도 부대들이 방어하고 있었다. 기습 공격은 거의 확실하게 성공했을 것이다. 케렌스키는 이날 아침 자동차를 타고 아무 주목도 받지 못한 채 도망치고 없었다. 이 사실은 동궁에 대한 진지한 정찰 임무가 수행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것은 명백히 심각한 오류였다.

    임시정부를 감시하는 임무는 물론 너무 늦게 24일에 시작되었고 스베르들로프가 책임자였으며 라쉐비치와 블라곤라보프는 조수였다. 이것이 없이도 임무가 너무 많아 폭발할 지경이었던 스베르들로프가 이 여분의 임무까지 신경을 썼을 지는 의심스럽다. 회의록에 기록된 이 임무와 관련된 결정사항은 숨가쁜 당시의 순간에 망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군사혁명위원회는 정부의 군사적 자원과 특히 동궁의 방어능력을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궁을 포위한 현장 지도자들이 동궁 내부의 병력을 제대로 파악했을지라도 이들은 여전히 사관생도, 카자흐 기병, 돌격 대대 등 지원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두려움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동궁 점령 계획은 대규모 작전으로 상정되었다. 민간인 그리고 반 민간인들이 순전히 군사적 문제를 해결할 때에는 언제나 지나치게 전략적 기발함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쓸데없이 많은 현학성과 함께 이 기발함을 실천하는데 대단히 무기력함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동궁 점령의 여러 오류들은 어느 정도 주요 지도자들의 개인적 특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포드보이스키, 안토노프-오브세옌코, 추드노프스키 등은 영웅들이었다. 그러나 체계와 엄격한 규율의 사고와 이들은 거리가 멀었다. 7월 시기에 너무 충동적이었던 포드보이스키는 봉기의 당면 전망에 대해 훨씬 조심스러웠고 심지어는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근본에 있어서 그는 자신의 성정에 충실했다. 어떠한 실제적 임무에 봉착하든 그는 천성적으로 그 한계를 넘어서고 계획을 확대하고 모든 사람과 사물을 끌어들이고 최소한의 것만으로 충분할 때 최대한을 투입하는 경향이 있었다. 과장된 계획은 그의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안토노프-오브세옌코는 천성적으로 충동적인 낙관주의자였으며 철저한 사전 계산보다는 임기변통에 훨씬 능했다. 하사관 출신인 그는 군사 지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망명객이었던 그는 파리의 신문 나쉐 슬로보 지에 군사 상황에 대한 평론을 실었으며 빈번하게 전략을 추측하는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보인 그의 인상주의적 아마추어 정신은 포드보이스키의 지나친 비약을 중화시킬 수 없었다. 세 번째 지도자 추드노프스키는 몇 개월을 전투가 없는 전선에서 선동가로 보냈다. 이것이 그가 경험한 군사 훈련의 전부였다. 우파 성향이었으나 그는 제일 먼저 전투에 참여했고 언제나 가장 전투가 치열한 곳을 골라 다녔다. 개인적 성향인 대담성과 일반적 의미의 정치적 대담성은 언제나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지는 않는다. 혁명 직후 당분간 그는 뻬쩨르부르그 근처에서 케렌스키의 카자흐 기병과 전투를 벌이다가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우크라이나에서 살해되었다. 말이 많고 충동적인 추드노프스키가 다른 두 지도자들의 결함을 당연히 보완할 수 없었다.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세세하게 확인하는 눈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군사활동의 비결들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찰, 통신, 기동 등에서 약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이 붉은 사령관들은 압도적 우위의 병력을 동궁에 퍼부어 실제적 지도력의 가능성 자체를 제거했다. 엉성하게 입안된 거대 계획은 아무 계획도 아니다. 그렇다고 군사혁명위원회 지도부 가운데 또는 그 주위에 더 유능한 군사 지도자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헌신적이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지도자들을 찾기는 당연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동궁 공격은 지구 전체를 큰 원으로 에워싸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지휘관들의 경험 부족, 통신의 단절, 적위대 부대들의 비숙련성, 정규군의 사기 저하 때문에 이 복잡한 작전은 대단히 느리게 진행되었다. 부대들이 서서히 원을 구성하고 뒤로 예비 병력을 축적하고 있던 바로 그때 사관생도 중대, 카자흐 대대, 성 조오지 기사단, 여성 대대 등이 동궁으로 들어왔다. 포위망이 좁혀지면서 동시에 저항하는 주먹이 형성되고 있었다. 너무 완곡하게 임무에 접근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밤의 대담한 공격이나 낮의 대담한 접근도 이 늘어진 작전보다 사상자를 더 많이 발생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로라호의 대포 사격이 가져다준 사기 진작 조치는 12시간 또는 24시간 전에 시도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순양함은 네바강에서 준비된 채 정박해 있었고 수병들은 대포 기름이 없다고 불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작전 지도자들은 이 문제가 전투 없이 해결될 수 있다고 희망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의원들을 보내 협상을 시도하고 최후통첩을 제시하면서 원래 정해진 공격 시간을 질질 끌고 있었다. 이들은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의 대포들을 점검할 생각을 제 때에 하지 못했다. 대포를 쏘지 않고도 동궁이 항복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사 지도부의 준비성 부족은 모스크바에서 더 명백히 드러났다. 이곳에서 역관계는 너무 유리하여 레닌은 이곳에서 봉기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끈질기게 조언한 바 있었다: "승리는 보장되어 있고 정부의 병력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바로 모스크바에서 봉기는 간격을 두고 이어지면서 8일간 계속 전투를 벌였다. 모스크바 봉기의 최고 지도자의 일인이었던 무랄로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뜨거운 임무를 수행하는데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모든 일에서 확고하고 결의에 차 있지는 않았다. 10대 1이라는 압도적 수적 우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는 전투를 일주일이나 질질 끌었다.... 전투 대중을 지도하는 능력의 부족, 전투 병력의 규율 부족, 시가전의 전술에 대한 지휘관과 병사들의 완벽한 무지 등이 그 이유였다." 그는 사물의 이름을 올바로 부르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가 지금 시베리아에서 유형을 당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모스크바 봉기에서 그는 책임을 남에게 전가할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정치 지도부에 가야할 비난의 대부분을 군사 지도부에 돌리고 있다. 당시 모스크바의 정치 지도부는 아주 불안했으며 화해주의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또한 섬유 및 피혁 노동자인 구 모스크바 노동자들이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보다 훨씬 후진적이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한다. 2월 혁명에서는 모스크바에서 봉기가 필요 없었다. 짜르의 타도는 전적으로 뻬쩨르부르그의 몫이었다. 7월에도 모스크바는 평온했다. 그러나 10월에는 노동자와 병사들이 전투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났다.

    봉기의 기술은 정치가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한다. 볼세비키주의의 엄청난 성장은 의심의 여지없이 군사적 측면에 대한 주의를 약화시켰다. 실제적 문제들을 등한시한다는 레닌의 열정적 책망은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군사 지도부가 정치 지도부보다 훨씬 허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달리 일이 전개될 수 있었을까? 봉기가 성공한 후 상당 개월 동안 새로운 혁명정부는 무력에 의존해야할 모든 상황에서 대단히 엉성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수도의 정부 군사 당국은 혁명의 군사 지도부를 아양떨듯이 높이 평가했다. 동궁이 점령된 직후 전쟁부는 지구 사령부에 직통 전화로 이렇게 말했다: "봉기군은 질서와 규율을 유지하고 있다. 파괴나 유태인 학살 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봉기군의 순찰대들은 거리를 배회하는 병사들을 체포했다....봉기 계획은 의심의 여지없이 사전에 준비되었고 엄격하고 조화롭게 실행에 옮겨졌다." 그러나 수하노프와 야로슬라프스키가 적었듯이 "악보를 보고 연주하듯이"는 결코 아니었고 그렇다고 수하노프가 나중에 확인했듯이 "체계가 없이"도 아니었다. 더욱이 가장 엄격한 비판이 적용되더라도 봉기가 성공했기 때문에 성공 자체가 최대의 칭찬이다.

     

     

    제 10장 노동계급 독재를 위한 소비에트 전국대회

    10월 25일 스몰니에서는 세계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의회가 소집되었다.  누가 아는가 --- 어쩌면 가장 중요하기도 한 의회가 소집되었다.

    화해주의 지식인들의 영향에서 벗어난 지역 소비에트들은 대부분 노동자와 병사들을 대의원으로 선출하여 전국대회에 보냈다. 이들 대다수는 크게 이름이 나지 않았으나 투쟁으로 스스로를 입증했으며 소속 지역에서 지속적인 신뢰를 얻은 인물들이었다. 군대 위원회와 사령부의 방해를 뚫고 대회에 참가한 현역군 대의원들은 거의 일반 병사들이었다. 이들 대다수는 혁명과 함께 정치생활을 시작했으며 8개월 간의 경험으로 정치적 자아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아는 것은 별로 없었으나 대신 확실히 알았다. 대회의 겉모습은 대회에 참가한 구성 분자들의 성격을 보여주었다. 제 1차 대회에서 볼 수 있었던 장교들의 어깨 계급장과 지식인들의 안경이나 넥타이는 거의 사라졌다. 복장과 얼굴색에서 회색이 압도했다. 대의원 전부의 옷은 전쟁 중에 전부 낡아 헤졌다. 도시 노동자 다수는 병사의 외투를 입고 있었다. 참호의 병사 대의원들은 봐 줄만한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면도를 하지 않은 긴 수염, 오래되고 찢어진 참호 외투, 빗질하지 않은 머리에 얹힌 무거운 키 큰 털모자(파파키), 가끔 모자 구멍으로 비어져 나온 면화, 거칠고 풍상을 견딘 얼굴, 무겁고 피부가 갈라진 손, 담배로 노랗게 물든 손가락, 떨어져 나간 단추, 느슨하게 늘어진 허리띠, 주름지고 녹이 슬었으나 기름으로 손질되지 않은 긴 장화. 전국의 대중은 처음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닮은 그리고 손질되지 않은 정직한 대표들을 대회에 보냈다.           

    봉기 중에 소집된 이 소비에트 대회의 통계수치는 매우 불완전하다. 대회 개막 시점에 표결권을 가진 650명의 대의원 가운데 390명은 볼세비키당원이었다. 이들은 당원 전체를 구성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대중의 피와 살이었다. 그리고 대중에게 남은 것은 볼세비키당 노선뿐이었다. 혁명을 의심하며 대회에 참가한 대의원 다수는 수도의 벌겋게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급속하게 정치적으로 성숙되고 있었다.

    멘세비키들과 사회혁명당은 2월 혁명의 정치적 자산을 얼마나 완전히 탕진했는가! 소비에트 6월 전국대회에서 화해주의자들은 전체 832명의 대의원 가운데 600명을 차지했었다. 이제 모든 색조의 화해주의 반대파는 전체 대의원의 4분의 1도 되지 않았다. 멘세비키들은 자기들을 지지하는 소수민족 조직까지 전부 합해도 대의원 수가 80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들의 약 반수는 "좌파"였다. 159명 그리고 다른 보고에 따르면 190명의 사회혁명당 대의원 가운데 약 5분의 3은 좌파였다. 더욱이 우파는 대회 중에 숫자가 계속해서 급격히 줄어들었다. 여러 명부에 따르면 대회 폐막 시에는 전체 대의원 수가 900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 수치는 다수의 고문들을 포함했으나 표결권을 가진 대의원은 전부 포괄하지 않았다. 대의원 등록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고 관련 문서들은 소실되어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대의원들의 소속에 대한 정보는 불완전했다. 어쨌든 볼세비키당의 지배적 지위는 의심의 여지없이 유지되었다.

    대의원들 사이에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505명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넘기는 것에, 86명은 "민주주의" 정부 수립에, 55명은 연립정부 수립에, 21명은 입헌민주당을 제외한 연립정부 수립에 찬성했다. 이 수치 자체가 이때의 역관계를 웅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수치는 화해주의 영향의 잔재를 과장되게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민주주의 정부와 연립 정부를 각각 지지하는 대의원들은 후진적 지구와 중요성이 제일 떨어지는 지역의 소비에트를 대표했다.

    25일 오전 일찍부터 스몰니에서는 정치세력들 각각의 대의원 협의회가 열렸다. 볼세비키당 협의회에는 전투 임무가 없는 대의원들만 참여했다. 소비에트 대회의 개막은 연기되었다: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우선 동궁부터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반대 분파들도 서두를 것이 없었다. 이들은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으나 쉽지가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나갔다. 분파 내에서도 파벌이 생기면서 서로 다투었다. 대회에 불참하자는 결의안이 92표 대 60표로 거부된 후 사회혁명당은 분열되었다. 저녁이 늦어서야 사회혁명당 좌파와 우파는 최종적으로 갈라서서 서로 다른 방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오후 8시에 멘세비키들은 다시 대회 개막을 연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내부에 너무나 다양한 의견들을 가지고 있었다. 밤이 되었다. 동궁의 작전은 질질 끌었다. 그러나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긴장하며 주시하고 있는 인민에게 뭔가 명확한 메시지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했다.

    혁명은 협소한 공간을 활용하는 기술을 가르쳤다. 대의원, 귀빈, 경비 등은 귀족 출신 소녀들이 다니던 수녀원의 졸업식장에 빽빽이 들어찼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게 틈을 내주었다. 마루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경고와 담배를 좀 적게 피우라는 호소는 소용이 없었다. 사람들은 더 많이 몰려들었으며 담배도 두 배나 많이 피웠다. 잔 리이드는 입구 근처에 몰려있는 시끄러운 군중을 뚫고 어렵게 길을 헤쳐 나갔다. 대회장은 난방이 되지 않았으나 공기는 무겁고 뜨거웠다.

    출입문과 측면 출구를 꽉 막은 채 모든 창문턱에 올라앉은 대의원들은 참을성 있게 회기 시작을 알리는 의장의 타종 소리를 기다렸다. 체레텔리, 체이제, 체르노프 등은 모두 연단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화해주의의 2급 지도자들만이 자신들의 장례식이 될 대회에 참석했다. 군의관 제복을 입은 키 작은 단이 집행위원회의 이름으로 저녁 10시 4o분에 회기의 시작을 선포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소비에트 대회는 "예외적인 상황"에서 모였기 때문에 자신(단)은 중앙집행위원회의 지시에 복종하여 정치 연설을 자제할 것이다. 그의 당 동료들은 이때 "장관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동궁에서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중앙집행위원회의 축복이야말로 대의원들이 결코 원치 않았던 것이었다. 이들은 연단을 적대감으로 쳐다보았다. 중앙집행위원들이 아직도 정치적으로 살아있다면 우리와 우리의 혁명 사업과 이들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볼세비키당의 이름으로 모스크바의 대의원 아바네소프가 발의했다: 최고회의가 대의원 비례로 선출되어 볼세비키 14석, 사회혁명당 7석, 멘세비키 3석, 멘세비키-국제주의자 1석 등으로 위원이 배분되어야한다. 우익은 즉시 최고회의 참여를 거부했다. 마르토프의 그룹은 이 문제를 결정하지 못하고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7명의 대의원이 사회혁명당 좌파의 편으로 전향했다. 대회는 시작부터 드러난 이 갈등을 얼굴을 찌푸리며 주시했다.

    아바네소프는 최고회의 위원이 될 볼세비키들의 명단을 발표했다: 레닌,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리코프, 노긴, 스클리안스키, 크릴렌코, 안토노프-오브세옌코, 리아자노프, 무라노프, 루나차르스키, 콜론타이, 스투츠카.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최고회의는 주요 볼세비키 지도자들과 6명(실제로는 7명)의 사회혁명당 좌파로 구성되었다."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봉기에 적극 반대했으나 당의 권위 있는 이름으로, 리코프와 노긴은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대표로, 루나차르스키와 콜론타이는 인기 있는 선동가로, 리아자노프는 노동조합의 대표로, 무라노프는 의회 의원으로 법정에서 용기 있게 처신했던 고참 노동자-볼세비키로, 스투츠카는 라트비아인 조직의 최고 지도자로, 크릴렌코와 스클리안스키는 군대의 대표로, 안토노프-오브세옌코는 뻬쩨르부르그 전투의 지도자로 각각 최고회의에 천거되었다. 스베르들로프의 이름은 빠졌다. 그가 위원 명단을 작성했고 혼란 속에서 아무도 이것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봉기에 반대한 볼세비키당의 지도자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노긴, 리코프, 루나차르스키, 리아자노프 등은 최고회의에 천거되었다는 점은 당시 볼세비키당 도덕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사회혁명당 좌파 중에는 조그만 체구에 몸이 허약했으나 용감한 스피리도노바만이 전국적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그녀는 톰보프스크 농민들을 진압한 자를 암살한 죄로 오랜 세월 중노동형을 겪었었다. 그녀 이외에 "이름" 있는 사회혁명당 좌파는 없었다. 반면 사회혁명당 우파는 이름 이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었다.

    소비에트 대회는 최고회의를 열성적으로 환영했다. 분파들이 모이고 회의하는 동안 아직도 가발과 큰 안경으로 변장을 하고 있던 레닌은 두 세 명의 볼세비키들과 함께 통로에 앉아있었다. 분파 회의를 위해 가는 도중 단과 스코벨레프는 볼세비키 음모자들이 앉아있던 탁자 반대편에서 가만히 멈춘 후 레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마 그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이때는 변장을 풀 시간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주위를 약간 둘러보고 배후에 있는 동안 끈들을 자기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더 좋아했다. 1924년에 출판된 레닌에 대한 회상에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제 2차 소비에트 전국대회의 첫 회의가 스몰니에서 열리고 있었다. 레닌은 그곳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스몰니의 방 어느 곳에 있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이 방에는 가구도 없었고 사람도 거의 없었다. 나중에 누가 마루에 담요를 깔아 놓고 이 위에 쿠션을 두 개 갖다놓았다. 블라디미르 일리치와 나는 같이 나란히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분만에 나는 소환되었다: '단이 연설을 하고 있으므로 응답 연설을 해야한다.'(역자 주: 연설자는 단이 아니라 마르토프였으며 트로츠키는 그의 연설에 응답했다.) 응답 연설 후 나는 다시 블라디미르 일리치 옆에 누웠다. 물론 그는 잠이 들 생각이 없었다. 잠을 자는 것은 물론 불가능했다. 5분이나 10분만에 누군가가 대회장에서 뛰어와 회의 진행 상황을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카메네프가 대회의 의장을 맡았다. 그는 의장을 맡으라고 자연이 지정해준 것 같이 냉담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선언했다: 정부의 조직, 전쟁과 평화, 제헌의회의 소집 등 3가지 안건이 오늘의 일정에 올라있다. 대회장 밖에서 이상한 굉음이 묵직하고 놀랍게 들리면서 대회장의 소음을 깨뜨렸다.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가 대포를 발사하여 오늘의 일정을 비준한 것이었다. 그러자 고압의 전류가 대회장을 관통했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대의원들은 이 대회가 내전 중에 열리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인식했다.

    봉기에 반대했던 로조프스키는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보고를 요구했다. 그러나 군사혁명위원회는 약간 늑장을 부리고 있었다. 그의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대포가 발사되었다. 보고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봉기는 한창 진행 중이었다.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군사혁명위원회의 방으로 들어가 통신을 접수하거나 명령을 하달했다. 전투의 메아리가 마치 불길의 혓바닥처럼 대회장에 날름거렸다. 표결을 하기 위해 올려진 손들이 우뚝 솟은 총검 사이로 보였다. 청색과 회색의 매운 담배 연기가 아름다운 흰색의 궁전 기둥과 샹들리에를 뒤덮었다.

    대포가 발사되고 있는 가운데 두 적대 진영이 설전을 벌이는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마르토프가 발언권을 요구했다. 저울의 추가 흔들리고 있을 때가 그의 순간이었다. 그는 영원히 동요하는 재치 있는 정치가였다. 폐결핵 환자의 거친 목소리로 마르토프는 대포의 금속성 소리에 응수했다: "양측의 군사 작전을 중지시켜야한다....권력의 문제가 음모적 방식으로 결정되기 시작하고 있다. 모든 혁명 정당들은 기정 사실을 제시받고 있다....내전이 반혁명의 폭발을 초래하면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민주주의 진영 전체가 인정하는 정부를 수립해야 위기가 평화롭게 해결될 수 있다." 대의원의 상당수가 이 연설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수하노프는 아이러니를 풍기며 이렇게 말했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가르침이 내포한 정신을 아직 흡수하지 못한 다수의 볼세비키들은 마르토프의 노선이 채택되었을 경우 좋아했을 것이다." 사회혁명당 좌파와 통일 국제주의자의 한 그룹이 평화협상 제안을 지지했다. 우익과 마르토프의 가까운 동료들은 볼세비키들이 이 제안을 거부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들은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 볼세비키들은 루나차르스키를 연단에 올려 보냈다. 그는 평화를 가장 사랑하고 연설자들 가운데 가장 부드러운 인물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볼세비키당 분파는 마르토프의 제안에 대해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적들은 깜짝 놀랐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논평한다: "대중에게 약간 양보하는 것을 통해 레닌과 트로츠키는 동시에 우익의 토대를 침식하고 있다." 마르토프의 제안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마르노프의 그룹은 이렇게 논평했다: "멘세비키들과 사회혁명당이 지금 물러서면 매장 당할 것이다." 따라서 대회가 "민주주의 공동전선을 수립하는 올바른 노선을 취할 것"으로 희망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것은 헛된 희망이었다! 혁명은 결코 대각선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우익은 바로 전에 승인된 평화협상 제안을 즉시 침해했다. 어깨에 대위의 별을 단 제 12군의 대의원인 멘세비키 하라쉬는 이렇게 선언했다: "이 정치 위선자들은 우리가 권력문제를 결정하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우리 등뒤에서 결정되고 있다....동궁에 대한 포격은 이 모험을 선택해온 정당의 관에 못을 박고 있다...." 그러나 그의 도전에 대해 대의원들은 분노하며 웅성거렸다.

    모스크바의 국정협의회에서 전선을 대표하여 연설했던 쿠친 중위는 여기서 군대 조직의 권위를 휘두르려 했다: "이 대회는 시기상조이며 권한을 위임받지도 않았다." 그러자 다 떨어진 참호 외투를 걸친 채 참호의 진흙으로 온몸에 신임장을 두른 대의원들이 고함을 질렀다: "당신은 누구의 이름으로 발언하고 있는가?" 그러자 쿠친은 꼼꼼하게 11개 군대를 나열했다. 그러나 이 말에 속는 대의원은 아무도 없었다. 후방과 마찬가지로 전선에서도 화해주의 장군을 뒤따르는 병사는 없었다. 전선의 그룹은 "이 모험의 결과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 멘세비키 중위는 계속 말했다. 이것은 혁명에 대한 완전한 결별 선언이었다. "지금부터 투쟁의 장은 지역으로 옮겨졌다." 이것은 소비에트에 대항하여 반혁명 세력과 야합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전선 그룹은 이 대회에서 철수한다."

    우익의 대표들은 차례로 연단에 올라갔다. 이들은 지역구와 교회를 잃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은 종루를 지키면서 금이 간 종을 마지막으로 서둘러 울렸다. 제국주의 부르주아 계급과 기회 있을 때마다 화해한 이 사회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은 이제 혁명으로 나선 인민과의 타협을 단호히 거부했다. 이들의 정치적 계산은 폭로되었다. 며칠 지나면 볼세비키들이 무너질 것이라고 이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이들과 결별하고 이들이 타도되도록 도와야한다. 이렇게 하여 최선을 다해 우리의 목숨과 미래를 보장해야한다.

    멘세비키 우파의 분파를 대표하여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의장이었으며 이후 소비에트 정부의 독일 대사가 될 킨추크는 이렇게 선언문을 읽어 내려갔다: "볼세비키당의 군사 음모는 나라를 내전으로 몰고 제헌의회를 파괴할 것이며 군사적 재앙을 가져올 것이고 결국 반혁명의 승리를 초래할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이것이었다: "민주주의의 모든 계층들에 기초한 권력을 수립하기 위해 임시정부와 공개적으로 협상해야한다."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 하나도 없는 이들은 대회가 봉기를 철회하고 케렌스키 체제로 돌아가자고 제안했다. 고성, 외침, 심지어는 쉿 소리 때문에 사회혁명당 우파 대표의 말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의 당 선언문은 볼세비키당과의 "협력 불가능성"을 말하면서 화해주의 중앙집행위원회가 소집하고 개막한 소비에트 전국대회가 권한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우익의 시위에 대해 어느 누구도 겁먹지 않았으며 대신 경계심과 불쾌감만을 느꼈다. 대의원 대다수는 뻐기면서도 편협한 이 지도자들에게 너무 식상했다. 이들은 먼저 말을 늘어놓았고 나중에는 탄압을 통해 혁명을 가로막았다. 단, 킨추크, 쿠친 같은 자들이 우리를 지시하고 명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라트비아인 병사 페테르손은 폐결핵으로 뺨이 붉게 물들었고 적대감이 눈에서 타올랐다. 그는 하라쉬와 쿠친을 사기꾼이라고 선언했다. "혁명은 너무나 수다를 많이 떨었다! 우리는 행동을 원한다! 우리 손으로 권력을 잡아야한다. 사기꾼들을 대회에서 몰아내자. 군대는 이들과 더 이상 같이할 수 없다!" 정열로 긴장된 이 목소리는 모욕만 당한 대의원들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전선의 대의원들이 페테르손을 지지하기 위해 달려나왔다. "쿠친은 4월부터 군대위원회에 앉아있던 소그룹의 견해를 대표할 뿐이다. 군대는 이미 오래 전에 새 선거를 요구했었다." "지금 참호의 병사들은 권력이 소비에트로 넘어가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우익은 여전히 종루를 지키고 있었다. 분트(유태인 노동자연합)의 어느 대표는 이렇게 선언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불행이다." 그리고 임시정부와 함께 죽기 위해 동궁을 비무장으로 행진할 것을 결정했던 시의회 의원들과 대의원들이 합류할 것을 권유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전체적인 웅성거림 속에서 거칠고 표독한 빈정거림이 들렸다." 이 살살 녹이는 말을 일삼는 연설자는 당연히 그의 청중을 잘못 선택했다. 출입구에 있던 대의원, 귀빈, 적위대, 경비병 등이 퇴장하는 대의원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그만해라!"; "배신자들!"; "코르닐로프에게 붙어라!"; "당신들은 인민의 적이다."

    우익이 대회에서 철수했으나 빈 공간은 없었다. 일반 대의원들은 노동자와 병사들에 대항하는 장교들과 사관생도들을 따르지 않았다. 우익 분파의 반이 약간 넘는 70명 정도의 대의원들만이 대회장을 나갔다. 동요하는 대의원들은 대회에서 철수하지 않기로 결정한 중간 그룹들과 함께 자리를 지켰다. 대회 개막 전에는 모든 경향의 사회혁명당이 190명을 넘지 않았으나 다음 몇 시간동안 사회혁명당 좌파만 180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볼세비키당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이 정당에 아직 합류하지 않은 대의원들과 하나가 되었다.

    멘세비키들과 사회혁명당은 어떤 경우에도 임시정부나 일종의 예비의회에 남아있을 준비를 확실히 하고 있었다. 교양 사회와 결별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소비에트는 인민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과 화해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한 소비에트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사회의 주인이라고 상상하는 소비에트를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이후 사회혁명당의 젠지노프는 이렇게 적었다: "볼세비키들은 홀로 남았다. 이 순간부터 이들은 조야한 무력에만 의존하기 시작했다." 도덕적 원칙은 마지막으로 퇴장한 단 그리고 고츠와 함께 의심의 여지없이 굳게 문을 닫았다. 이것은 두 개의 등불을 들고 동궁으로 행진하는 300명의 민주주의자들과 행보를 같이 했으나 볼세비키들의 조야한 무력에 직면하여 굴복하고 말았다.

    평화협상을 지지하는 소비에트 대회의 결의문은 공중에 붕 떠버렸다. 승리한 노동계급과 타협할 가능성을 우익이 만약 인정했다면 이들은 소비에트 대회로부터 서둘러 퇴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르토프는 이 점을 이해 못할 리 없었다. 그는 화해가 가능하다는 생각에 끈질기게 집착했다. 그의 정책은 바로 이것에 목을 매달고 있었다. "우리는 유혈사태를 중지시켜야한다"라고 그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유혈사태는 소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러 대의원들이 고함쳤다. 마르토프는 이렇게 응수했다: "이것은 소문이 아니다. 창문에 가까이 가면 대포가 발사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대회장의 소음이 가라앉으면 창문에 가까이 가지 않더라도 대포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르토프의 선언문은 볼세비키당에게 철저히 적대적이었으나 생기가 없었다. "순수한 군사적 음모를 통해 볼세비키당만이 혁명을 성취했다"고 이 선언문은 비난했다. 그리고 사회주의 정당 모두가 합의할 때까지 소비에트 대회가 정회될 것을 요구했다. 혁명 과정에서 화해할 수 없는 세력들을 화해시키려는 것은 자기 그림자를 잡으려 하는 것보다 더 무익하다!

    이 순간에 대회장에 시의회 볼세비키 분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동궁의 담장 밑에서 죽기를 원치 않았다. 이후 소비에트 공화국의 초대 독일 대사가 될 요페가 이들을 이끌고 있었다. 대의원들은 다시 이들을 즐겁게 환영하면서 빽빽이 들어찬 대회장에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마르토프의 주장에 쐐기를 박는 것이 필요했다. 이 임무는 트로츠키에게 떨어졌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익이 철수한 지금 트로츠키의 입장은 흐물흐물한 마르토프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확고했다." 이 두 적대자는 연단에 나란히 서서 흥분된 대의원들이 사방에서 빽빽이 에워싼 가운데 설전을 주고받았다. 트로츠키는 말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음모가 아니라 봉기이다. 인민 대중의 봉기는 정당화가 필요 없다. 우리는 뻬쩨르부르그 노동자와 병사들의 혁명 역량을 단련시켜왔다. 우리는 대중의 음모가 아니라 봉기 의지를 공개적으로 단련시켜왔다....우리의 봉기는 승리했다. 그런데 마르토프는 승리를 반납하고 타협하라고 말한다. 누구와 타협을 하는가? 나는 묻는다: 우리는 누구와 타협해야하는가? 바로 전에 대회장을 퇴장한 한 줌도 안 되는 자들하고?....우리는 이미 저들의 정체를 지겹게 보지 않았는가. 저들의 지지자는 이제 러시아에 하나도 없다. 이 대회에서 대표되고 있는 수백만 노동자와 농민들을 저들은 언제든지 부르주아 계급에게 팔아 넘길 준비를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그런데도 수백만 대중이 저들과 타협을 해야하는가? 아니다, 여기서 타협은 소용 없다. 지금 퇴장한 자들에게 그리고 이와 비슷한 제안을 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한다: '당신들은 고립된 불쌍한 개인들이다; 당신들은 정치적으로 파산했다; 당신들의 역할은 끝났다; 지금부터 당신들이 원래 있어야할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라!'"

    "그렇다면 우리는 갈 것이다!"라고 마르토프는 대회의 표결을 기다리지 않고 외쳤다. 수하노프는 유감을 표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분노와 허세에 차서 마르토프는 연단에서 내려와 출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비상회의로 나의 멘세비키 분파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허세의 문제가 아니었다. 민주 사회주의의 햄릿인 마르토프는 7월처럼 혁명이 후퇴할 때는 전진하고 지금처럼 혁명이 호랑이처럼 승리를 포획할 때는 뒷걸음쳤다. 우익의 퇴장으로 그는 협상과 타협의 여지를 박탈당했다. 이제 그는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와 같았다. 그는 서둘러 대회를 포기하고 봉기와 결별했다. 수하노프는 최선을 다해 마르토프에 대항했으나 분파는 거의 반으로 쪼개졌다. 마르토프는 14대 12의 표결로 승리했다.

    트로츠키는 화해주의자들을 기소하는 결의안을 다음과 같이 상정했다: 이들은 전선에서 7월 18일의 파멸적 공세를 준비했다; 이들은 인민을 배신한 정부를 지지했다; 이들은 토지 문제에서 농민을 기만하는 지배계급의 행위를 은폐시켜주었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이들은 목적도 없이 전쟁을 질질 끌었다; 부르주아 계급이 경제 붕괴를 심화시키는 것을 이들은 허용했다; 대중의 신뢰를 상실하자 이들은 소비에트 대회 개최에 저항했다; 마지막으로 소비에트 대회에서 소수파로 전락하자 이들은 소비에트와 결별했다.

    여기서 다시 회의는 선언문 발표를 위해 정회되었다. 볼세비키당이 주도하고 있는 최고회의의 인내심은 진정으로 무한했다. 농민 집행위원회 의장은 대회에 나타나 이 "시기상조" 대회를 거부하고 동궁으로 가서 "우리의 뜻을 펴기 위해 보내진 사람들과 함께 죽자"고 농민들에게 촉구했다. 동궁의 폐허 속에서 죽자는 이 촉구는 너무 단조로웠기 때문에 지겨울 정도였다. 오로라호에서 방금 도착한 수병은 이렇게 선언했다: 동궁은 폐허로 변하지 않았다; 순양함은 공포탄을 발사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하던 일을 평화롭게 하십시오." 봉기의 단순하고도 엄중한 의지를 체현하고 있는 검은 수염의 이 훌륭한 수병을 통해 소비에트 대회의 영혼은 휴식을 찾았다. 사고와 감정이 모자이크처럼 뒤죽박죽인 마르토프는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가 소비에트 대회와 결별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번에는 반정도 우호적인 특별 선언이 발표되었다. 캄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혁명당 우파는 대회에서 퇴장했지만 좌파인 우리는 남아있었다." 대회는 남아 있는 대의원들을 환영했다. 그러나 이들조차 혁명공동전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온건 민주주의 세력과의 타협 여지를 완전히 봉쇄한 트로츠키의 날카로운 결의안에 반대했다.

    이번에도 볼세비키들은 양보했다. 이들이 이렇게 많이 양보한 적은 결코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제 정세의 주인이었고 따라서 문구에 일일이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다시 루나차르스키가 연단에 올랐다. "우리에게 지워진 임무의 부담은 의심의 여지없이 막중하다"고 그는 말했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혁명 분자들이 모두 단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볼세비키들이 다른 그룹들을 배척하는 조치를 취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마르토프의 제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비난과 위협을 받았다. 대회에서 퇴장한 자들이 "화해주의 정책마저 포기하고 공개적으로 코르닐로프 반동 진영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 명백하지 않은가?

    볼세비키들은 트로츠키의 결의안을 즉시 표결에 붙이자고 주장하지 않았다. 이들은 소비에트의 기초를 통해 합의를 이루려는 시도를 봉쇄하려 하지 않았다. 실사구시에 입각한 방식은 대포 소리를 반주로 해도 적용될 수 있었다! 마르토프의 제안을 채택한 것과 똑같이 캄코프의 양보안은 화해주의자들의 노고가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드러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멘세비키 좌파와는 달리 사회혁명당 좌파는 대회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봉기를 일으키고 있는 농민들의 압력을 너무 직접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로의 의중을 탐색하는 일이 벌어졌다. 주요 진지들은 점령되었다. 이제 대회는 휴지기에 들어갔다. 기본 포고령을 채택하고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할 것인가? 이것은 불가능했다: 구 정부가 아직도 반정도 암흑에 빠진 동궁의 방에서 앉아있었으며 탁자 위의 단 하나 등불은 신문지로 조심스럽게 가려져 있었다. 오전 2시 직후 최고회의는 30분간 정회를 선언했다.

    붉은 사령관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짧은 지연을 이용하여 완전히 작전에서 성공했다. 회의가 다시 시작되었을 때 대회의 분위기는 새로운 바람을 맞은 듯했다. 연단에서 카메네프는 안토노프로부터 바로 전에 받은 전화통지문을 읽어나갔다. 군사혁명위원회의 군대는 동궁을 점령했다; 케렌스키를 제외하고 독재자 키쉬킨과 함께 임시정부 인물 전원이 체포되었다. 입으로 전해진 소식을 통해 이미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 공식 통지는 대포의 예포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대회장을 흔들었다. 드디어 혁명 계급이 심연을 건너 뛰어 권력을 잡았다. 7월에 크쉐신스카야 궁전에서 몰려난 볼세비키들은 이제 통치자가 되어 동궁에 입성했다. 이제 러시아에는 소비에트 권력만이 존재했다. 환호의 박수갈채와 고함 속에서 승리감, 희망, 우려가 복잡하게 뒤엉키어 표현되었다. 그리고 새로우며 좀더 자신 있는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봉기는 승리했다. 심지어 가장 유리한 역관계 속에서도 놀라 자빠지게 만들 사건이 숨어있다. 그러나 적의 총지휘부가 체포된 이상 승리는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카메네프는 체포된 자들의 이름을 인상 깊게 읽어나갔다. 잘 알려진 이름들은 대의원들의 적대적인 또는 아이러니가 포함된 고함을 촉발시켰다. 러시아의 대외정책을 좌우해왔던 외무장관 테레쉬첸코의 이름은 특히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케렌스키는 어떻게 되었는가? 오전 10시에 그는 가치나 주둔군에게 연설을 했다. 그러나 이것이 별 효과가 없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거기에서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전선으로 갔다."

    혁명의 꽁무니를 뒤쫓던 자들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제 볼세비키당의 행보가 좀더 확고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었다. 사회혁명당 좌파의 누군가가 사회주의자 장관들의 체포를 반대했다. 통일 국제주의자 그룹의 대표가 이렇게 경고했다: "농업장관 마슬로프는 짜르 시절 그가 갇혔던 같은 감옥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짜르 시절이나 마슬로프가 장관이었을 때나 같은 "크레스티" 감옥에 갇혔던 트로츠키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치적 체포는 복수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 이해에 따라 이 문제가 결정된다. 무엇보다도 코르닐로프와 의심의 여지없이 유착한 행위에 대해 임시정부는 기소되고 재판정에 서야한다....사회주의자 장관들은 가택연금에만 처해질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투쟁의 요구에 따라 임시정부 인물들의 체포는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것이 좀더 간단하고 정확했을 것이다. 장관들의 체포는 이들이 저지른 과거의 죄에 대한 벌이 아니었으며 정치적으로 적대 진영의 목을 치는 문제였다.

    그러나 장관들의 체포에 대해 의회에서나 하는 이 조사는 훨씬 더 중요한 다른 사건에 의해 즉시 밀려났다. 케렌스키가 수도에 대항하도록 보낸 제 3 자전거 대대가 혁명 인민의 편으로 넘어왔다! 이 너무 좋은 소식은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사실이었다. 현역군 전체에서 최초로 선발된 이 정예부대는 수도에 도달하기 전에 마음을 바꾸어 봉기를 지지했다. 장관들의 체포에 대한 환희가 약간 억제되었다면 대회는 이제 순수하고도 억제할 수 없는 황홀감에 사로잡혔다.

    짜르스코에 셀로의 볼세비키 대표위원과 자전거 대대의 대표는 함께 연단에 올랐다. 이들은 대회에 보고하기 위해 바로 전에 대회장에 도착했었다: "짜르스코에 셀로의 주둔군은 수도로 진입하는 도로를 지키고 있다." 조국방어주의자들은 소비에트에서 철수했다. "이제 모든 일은 우리 혼자에게 달려 있다." 자전거 부대의 도착 소식을 알자 짜르스코에 셀로의 소비에트는 저항을 준비했으나 이 경계심은 다행히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자전거 부대에는 소비에트 대회의 적이 하나도 없다." 짜르스코에에서는 1개 대대가 더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우호적인 환영이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 대회는 이 보고를 맘껏 즐겼다.

    자전거 부대의 대표는 폭풍이나 회오리바람이나 태풍이 몰아친 것과 같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제 3 대대는 "수도를 방어한다"는 전신 명령을 받고 갑자기 남서전선에서 북부전선으로 보내졌다. 자전거 부대는 "눈을 수건으로 묶인 채" 이동의 이유를 혼란스럽게 추측하며 전진했다. 페레돌스키에서 이들은 역시 수도로 이동 중인 제 5 자전거 대대와 우연히 마주쳤다. 역에서 곧바로 열린 합동회의에서 "형제들에 대한 공격에 동의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들은 임시정부를 따르지 않겠다고 함께 결정했다.

    자전거 부대를 대표하는 병사는 이렇게 말한다: "부르주아 계급과 지주의 앞잡이인 정부에 권력을 넘겨주지 않겠다고 구체적으로 밝히는 바이다!" 혁명이 인민의 일상언어에 도입한 "구체적으로"라는 말은 대회에서 아주 멋있게 들렸다!

    이 연단에서 전선에서 토벌대가 도착할 것이라는 위협이 있은 지 몇 시간이 지났는가? 이제 전선 자신이 "구체적인" 말을 했다. 군대 위원회가 대회를 사보타지 한다고 상상해보자. 일반 병사 대중이 예외적으로만 대의원들을 대회에 보낸다고 상상해보자. 다수의 연대와 사단에서 볼세비키를 사회혁명당과 아직 구별하지 못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나 신경쓸 것이 하나도 없다! 페레돌스키의 목소리는 군대의 반박할 수 없는 진정한 목소리였다. 이 판결에는 항소가 있을 수 없다. 자전거 대대의 취사병이 구겨진 신임장을 지니고 있는 하라쉬 그리고 쿠친 같은 자들보다 전선을 훨씬 잘 대표하고 있었다. 볼세비키들만이 이 점을 제 때에 이해하고 있었다. 이제 대의원들의 정서에 강력한 변화가 일어났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일이 잘 풀리고 있으며 우익이 위협한 공포상황은 별로 무섭지 않으며 지도자들은 다른 모든 일에서도 옳을 것이라고 이들은 느끼기 시작했다."

    불행한 멘세비키들은 이 순간에 자신들을 돌아보았다. 이들은 아직 대회에서 철수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분파 회의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려하고 있었다.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대회에 알리도록 선임된 카펠린스키는 동요하는 그룹들을 끌고 대회에서 퇴장할 생각이었다. 그는 볼세비키들과 결별하는 가장 솔직한 이유를 마침내 큰소리로 말했다: "전선의 군대가 수도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재앙을 맞을 위험이 있다." 그러자 대회장의 사방에서 이렇게 고함이 터져 나왔다: "무엇이라고! 당신들은 아직도 남아있는가? 퇴장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멘세비키들은 조그만 무리를 지어 출구로 향했다. 이들 뒤에서 대의원들은 경멸의 작별인사를 보냈다. 수하노프는 슬퍼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혁명의 무대 전부를 볼세비키당에게 넘기면서 이들의 손을 완전히 자유롭게 해주었다." 이들이 퇴장하지 않았어도 별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사건들의 물결은 이들의 머리 위를 가차없이 덮어버렸다.  

    이제 소비에트 대회가 인민에게 선언문을 발표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회의는 계속해서 특별 선언문들로만 채워졌다. 사건들이 일정을 어그러뜨렸다. 오전 5시 17분 피곤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 크릴렌코가 전보를 손에 들고 연단에 올랐다. 그는 이렇게 알렸다: 제 12군이 대회에 축하 인사를 보내고 북부전선을 지키는 군사혁명위원회의 수립을 알렸다. 임시정부는 군대의 지원을 받으려 했으나 도리어 저항만 받았다. 북부전선의 사령관 체레미소프 장군은 군사혁명위원회에 복종했다. 정부위원 보이틴스키는 사임했으며 후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도에 진입하려던 군대들의 대표단은 차례로 군사혁명위원회에 수도 주둔군에 대한 연대를 선언했다. 리이드는 이렇게 말한다: "아수라장이 연출되었다. 눈물을 흘리고 서로 포옹하는 병사들이 사방에 보였다."

    마침내 루나차르스키는 노동자, 병사, 농민에게 보내는 선언문을 연단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선언문만이 아니었다. 그간의 상황과 제안들을 단지 설명하는 내용으로 채워진 채 서둘러 작성된 이 문서는 새로운 국가기구의 기초를 마련했다. "화해주의 중앙집행위원회의 권한은 소멸되었다. 임시정부는 타도되었다. 소비에트 대회가 권력을 행사한다...." 소비에트 정부는 즉시 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교전국들에게 제안했다. 또한 농민에게 토지를 넘겨주며, 군대를 민주화하고, 생산에 대한 통제정책을 확립하고, 즉시 제헌의회를 소집하고, 러시아의 민족들에게 자결권을 보장했다. "소비에트 대회는 이렇게 결의한다: 지역의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에게 넘어간다." 읽어 내려가는 문구는 하나 하나 박수갈채로 바뀌었다. "병사 여러분, 경계를 풀지 말아야한다! 철도 노동자 여러분, 수도에 대항해 케렌스키가 보내는 군대를 모두 정지시켜야한다!...혁명과 민주적 평화의 운명이 여러분의 손에 달려있다!"

    토지가 언급되자 농민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헌법에 따르면 소비에트 대회는 노동자와 병사 소비에트만을 대표했다; 그러나 개별 농민 소비에트의 대의원들도 대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제 자신들의 요구사항들이 문서에 언급될 것을 요구했다. 이들에게 즉시 투표권이 부여되었다. 뻬쩨르부르그 농민 소비에트의 대표는 선언문을 "두 손과 두 발로" 서명했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농민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베레진은 이렇게 말했다: 전신 설문지에 응답한 68개 농민 소비에트 가운데 반이 소비에트 정부를 나머지 반은 제헌의회 권력을 주장했다. 절반이 임시정부의 관료들로 채워진 지방 소비에트의 정서가 이러하다면 미래의 농민 소비에트 대회가 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겠는가?

    일반 대의원들을 단결시킨 선언문은 그 단호함으로 인해 일부 동조자들을 겁주거나 배척시켰다. 소규모 분파와 잔당들이 다시 대회장을 나갔다. 가장 좌파적인 멘세비키의 어느 그룹이 멘세비키 그룹으로는 세 번째 대회에서 철수했다. 이들은 오직 볼세비키들을 구원하기 위해 철수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철수하지 않으면 볼세비키 당신들은 스스로와 우리와 혁명을 파멸시킬 것이다."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대회에 남아있던 폴란드사회당 당수 라핀스키는 마르토프의 선언문을 근본적으로 지지했다: "볼세비키들은 권력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이다." 통일유태인노동자당은 통일국제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표결에서 기권했다. 그러나 이 "통일" 조직들의 세력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선언문은 반대 2표, 기권 12표를 제외한 거의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제 대의원들은 박수를 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회의는 마침내 약 6시에 끝났다. 회색의 추운 가을 아침이 수도에 다가왔다. 모닥불의 뜨거운 지점들이 거리가 서서히 밝아오자 빛을 잃고 있었다. 소총을 든 노동자와 병사들의 회색으로 물들고 있는 얼굴이 집중되어 보이며 특이한 느낌을 자아냈다. 수도에 점성술사가 있었다면 이들은 하늘에서 불길한 징조를 감지했을 것이다.

    수도의 주민들은 잠에서 깨어나 새로운 정부를 맞이했다. 정치사건의 무대에서 단절된 일반인, 관료, 지식인 등은 밤중에 권력의 물결이 어느 쪽으로 밀려갔는지를 알기 위해 서둘러 신문을 구입했다. 그러나 사건을 추적하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신문들은 음모자들이 동궁을 점령하고 장관들을 체포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지나가는 일화로만 처리되었다. 케렌스키는 전쟁 총사령부로 갔다; 정부의 운명은 전선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소비에트 대회에 대한 보도들은 우익 선언문들의 복사판이 되어 대회에서 철수한 자들만을 열거하고 남아있는 자들의 무기력을 폭로했다. 동궁 점령 전에 쓰여진 정치 사설들은 명쾌한 낙관주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거리에서 떠도는 소문들은 신문의 논조와 전부 일치하지는 않았다. 신문이 무엇이라도 떠들든 장관들은 요새 감옥에 갇혀있었다. 케렌스키의 명령을 받들어 수도로 진입하는 지원군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관료들과 장교들은 걱정 속에 회의를 했다. 신문기자들과 변호사들은 서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편집자들은 생각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응접실의 신탁은 이렇게 말했다: 권력을 찬탈한 자들에 대해 경멸로 일관하자. 상점 주인들은 계속 영업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알 수 없었다. 새 권력은 문을 계속 열라고 명령을 내렸다. 식당들이 문을 열었다. 전차들이 운행을 계속했다. 은행들은 불길한 예감 때문에 영업이 잘 되지 않고 있었다. 증권거래소의 주가 곡선은 급격히 요동치고 있었다. 물론 볼세비키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타도되기 전에 이들은 우리에게 손해를 끼칠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반동 신문기자 끌로드 아네는 이 날을 이렇게 적었다: "승리자들은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것은 아주 정당하다. 떠들기만 좋아하는 자들 가운데 볼세비키들만이 행동으로 나섰다....오늘 이들은 수확을 하고 있다. 멋지다! 이들은 잘했다." 그러나 멘세비키들은 아주 다르게 상황을 진단했다. 단의 신문은 이렇게 적었다: "볼세비키들의 '승리'후 24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역사적 운명은 이미 이들에게 잔인하게 복수하기 시작했다....이들 주위에는 자신들이 조성한 공허함만이 존재한다....이들은 모든 세력들로부터 고립되었다....사무와 기술을 제공하는 기관들 전체가 이들에게 봉사하기를 거부하고 있다....이들은 승리한 바로 그 순간에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

    관료들의 사보타지와 자신들의 경박함에 자극을 받은 자유주의 및 화해주의 세력은 자기들에게는 아무 해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이상하게 믿고 있었다. 이들은 7월 시기의 언어로 볼세비키들에 대해 말하고 글을 썼다. "독일 빌헬름 황제의 첩자", "독일 마르크화가 가득한 적위대의 주머니", "봉기를 지휘하는 독일 장교들"....새 정부는 이들에게 확고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면 이들은 새 정부의 존재를 믿기 시작할 것이다. 이미 26일 밤에 멋대로 기사를 쓰는 신문들에게 압수 처분이 내려졌다. 일부 다른 신문들은 그 다음날 압수 처분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의 신문은 당분간 압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를 통해 사회혁명당 좌파와 볼세비키당의 일부 분자들에게 공식 민주주의와의 연립정부가 근거가 없음을 확신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볼세비키들은 사보타지와 혼란의 와중에도 승리의 성과를 계속 확대시켰다. 밤중에 조직된 임시 군사 사령부가 케렌스키의 공격에 대비하여 수도 방어를 위한 준비를 했다. 파업이 시작된 중앙전화국에 군대의 통신병들이 파견되었다. 자체 군사혁명위원회를 수립하라는 제안이 부대들에 도착했다. 봉기의 승리로 임무에서 해방된 선동가와 조직가들이 그룹으로 형성되어 전선과 지방에 파견되었다. 볼세비키당 중앙 기관지는 이렇게 적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가 활동을 개시했다; 이제 다른 소비에트들이 행동에 나설 차례이다."

    병사들을 대단히 심란하게 만드는 소식이 낮에 도착했다: 코르닐로프가 도망을 쳤다.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테킨치가 지키는 가운데 이 고위급 포로는 비호프에서 살고 있었다. 케렌스키의 사령부는 그에게 상황 정보를 제공했다. 26일 그는 사태가 꼬이고 있다고 판단하고 조금의 제지도 받지 않은 채 자신의 가짜 감옥에서 슬그머니 도망쳤다. 이제 대중은 케렌스키와 코르닐로프가 유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병사들과 혁명 장교들에게 전보를 보내 이 두 최고사령관들을 생포하여 수도로 압송하라고 명령했다. 2월에 타우리데 궁전이 그랬듯이 이제 스몰니는 수도와 국가의 신경 중추가 되었다. 이곳에 통치 기관들이 전부 입주해 있었다. 이곳에서 명령이 내려지고 이것을 받으러 사람들이 이곳에 왔다. 따라서 무기에 대한 요청이 하달되어 적들로부터 압수한 소총과 권총들이 이곳으로 보내졌다. 수도 전역에서 체포된 자들이 이곳으로 보내졌다. 손해를 입은 사람들은 정의를 찾아 이곳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부르주아들과 이들의 겁에 질린 마부들은 스몰니 지역을 피하기 위해 큰 멍에 모양으로 길을 우회했다.

    자동차는 십자가가 달린 보물 구슬이나 홀보다 오늘날의 주권을 더욱 진정하게 상징한다. 이중권력 하에서 자동차는 정부, 중앙집행위원회, 개인 소유주 사이에 분배되었다. 이제 압수된 자동차 전부는 봉기군 진영으로 넘어왔다. 스몰니 지구는 거대한 군대 차고 같았다. 최상의 자동차들은 저질 휘발유 때문에 연기를 뿜었다. 오토바이는 반정도 어둠 속에서 초조하고 위협하듯이 폭폭 소리를 냈다. 장갑차들은 사이렌을 쌕쌕거렸다. 스몰니는 혁명의 공장, 철도, 발전소 같이 보였다.

    이웃한 거리의 보도를 따라 사람들이 꾸준히 밀려들었다. 모닥불이 바깥 정문과 안쪽 정문에서 타고 있었다. 모닥불의 흔들리는 빛을 이용하여 무장 노동자와 병사들이 경계하듯 통행증을 검사하고 있었다. 다수의 장갑차들이 궁전의 정원에서 엔진의 움직임으로 흔들거렸다. 기계든 사람이든 아무 것도 운동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탄띠를 충분하게 보급 받은 기관총이 입구 양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끝없이 길면서도 조명이 희미하여 어두컴컴한 궁전 복도는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 탄성, 고함 등으로 메아리쳤다. 도착하는 사람들과 떠나는 사람들이 넓은 계단 위 아래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이 견고한 인간 용암은 초조한 모습으로 명령하는 개인, 스몰니 노동자, 전령, 대표위원들에 의해 끊어졌다. 이들의 손에 든 위임장이나 명령서가 높이 치켜졌고 소총이 줄에 매달려 이들의 어깨에 걸려있었다. 서류철은 이들의 팔 밑에 끼워져 있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단 한순간도 일을 멈추지 않았다. 대의원, 전령, 자발적 제보자, 헌신적인 동지, 악당 등을 접견했으며 대표위원을 수도의 구석구석에 보냈다. 또한 명령서와 신임장 등에 수많은 인장을 찍었다. 오고가는 문의, 긴급한 통신, 전화벨 소리, 무기의 덜거덕거리는 소리 속에서 이 모든 일들이 진행되었다. 녹초가 된 채 수면이나 음식을 취한 지 오래된 사람들이 면도도 하지 못한 채 더러운 속옷을 그대로 입고는 충혈 된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면서 쉰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거나 미친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이들이 반죽음 상태로 마루에 누워있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이들 주위에 휘몰아치면서 이들을 억제할 수 없게 만든 주위의 혼란이 이들을 살아있게 만든 것 같았다.

    구체제의 모험가, 사기꾼, 최악의 인간 쓰레기 등은 코를 킁킁거리며 스몰니로 들어가는 통행증을 구하려했다. 이들의 일부는 통행증을 구했다. 이들은 행정의 조그만 비밀들을 알고 있었다: 외교적 통신의 열쇠를 누가 가지고 있으며 재무부 명령서를 어떻게 작성하며 휘발유나 타자기를 어디서 구할 수 있으며 최상의 궁중 포도주가 어디에 있다, 등등. 그러나 이들 모두가 포도주 저장고나 총알을 금방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세상이 창조된 이후 이때보다 명령이 많이 내려진 적은 없었을 것이다. 명령은 입, 연필, 타자기, 전화 등으로 계속 내려졌다. 이 수많은 명령들은 반드시 권한이 있는 자가 발동하지도 않았으며 명령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 자에게만 내려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미친 듯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내적 의미가 존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했으며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일은 수행되었다. 구체제의 행정망 대신 새로운 체제의 행정망이 수립되고 있었다. 혁명은 힘을 증대시키고 있었다.

    이날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는 스몰니에서 새 정부 수립 문제를 결정하고 있었다. 회의록은 기록되지 않았거나 기록되었더라도 보존되지 않았다. 아무도 미래의 역사학자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바로 이 회의에서 역사학자들의 골칫거리가 많이 준비되고 있었다. 소비에트 대회의 저녁 회의에서 정부 인선이 있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장관이라는 말은 그 의미가 얼마나 손상된 말인가! 이것은 고위 관직, 의회에서 판치는 야심의 절정 같은 냄새가 났다. 정부를 인민위원 소비에트라고 부르기로 결정되었다. 이 말은 최소한 좀더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민주주의 진영 전체"의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협상이 아무 성과도 없었기 때문에 당과 정부의 인선 문제는 단순화되었다. 사회혁명당 좌파는 점잔을 빼며 반대했다. 케렌스키의 당과 결별했기 때문에 이들은 무엇을 해야할 지 거의 알 수 없었다. 중앙위원회는 레닌의 동의안을 유일 안으로 채택했다: 볼세비키당만의 정부를 구성하자.

    이때 체포된 사회주의자 장관들의 중재자 자격으로 마르토프가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얼마 전에 그는 감옥에 갇힌 볼세비키들을 대신하여 사회주의자 장관들과 중재를 했었다. 정말이지 상황은 크게 역전되었다. 협상을 위해 파견된 중앙위원은 아마 카메네프였을 것이다. 그를 통해 중앙위원회는 사회주의자 장관들이 가택연금에 처해질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러나 이들은 바쁜 와중에 잊혀졌거나 이들 자신이 특권을 거부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트루베츠코이 성채에서 장관들끼리의 연대 원칙을 고수하며 그대로 감금되었다.

    소비에트 대회는 저녁 9시에 회의를 재개했다. "전체적으로 상황은 어제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일은 단순할수록 빨리 처리된다." 이제 대의원이 아닌 수하노프는 일반인의 자격으로 방청석의 빈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이 회의는 평화, 토지, 정부의 문제들을 결정할 예정이었다. 전쟁을 끝내고 토지를 인민에게 넘겨주고 사회주의 독재 정부를 수립하는 문제였다. 카메네프는 낮 시간에 최고회의가 진행시킨 작업을 보고하는 것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케렌스키가 전선에 도입한 사형제도가 철폐되었다; 완전한 선동의 자유가 회복되었다; 정치적 신념으로 투옥된 병사들과 토지위원회 농민들은 석방되었다; 임시정부의 위원들 전원이 해임되었다; 케렌스키와 코르닐로프를 체포하여 압송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대회는 이 조치들을 승인하고 비준했다.

    다시 일부 잔당들이 발언권을 얻어 연단에 섰다. 대의원들은 참을성을 상실하고 이것을 거부했다. 어느 그룹은 "봉기가 패배할 때가 아니라 승리할 때" 대회에서 철수한다고 선언했다. 다른 그룹들은 남아있기로 결정한 사실 자체를 자랑했다. 칼레딘이 북부지역 석탄 공급을 차단하지 못하게 즉시 조치를 하야한다고 도네츠 광부들의 대표가 촉구했다. 그러나 혁명이 이 정도 규모의 조치들을 취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지나야했다. 일정에 오른 첫 번째 문제를 다루는 것이 마침내 가능해졌다.

    대회는 아직 레닌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이제 그에게 평화 문제에 대해 보고하도록 발언권이 주어졌다. 연단에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대회장은 열렬히 환호했다. 전선의 대의원들은 이 신비로운 인물을 모든 힘을 다해 주시했다. 이들은 그를 증오하도록 교육받아왔으며 그를 보지도 않았지만 사랑하게 되었다. "교탁의 가장자리를 잡고 기다린 채 레닌은 조그만 눈을 반짝거리며 대의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몇 분간 계속된 박수의 물결을 잊은 듯했다. 박수가 끝나자 '이제 사회주의 질서를 건설하는 일을 진행합시다'라고 그는 간단히 말했다."

    대회의 회의록은 보존되어 있지 않다. 의회의 속기사는 토론을 기록하도록 초청되었으나 멘세비키 및 사회혁명당과 함께 스몰니를 기피했다. 이것은 소비에트 정권에 대한 첫 번째 사보타지였다. 사건들의 와중에 비서들의 노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대포의 굉음을 배경으로 쓰여졌거나 정치투쟁 과정에서 이빨을 갈면서 쓰여진 신문 보도들뿐이었다. 이것들은 서둘러 작성되었고 편파적이었다. 특히 레닌의 연설들은 크게 손상을 당했다. 연설할 때 말이 빨랐고 문장 구조가 복잡했기 때문에 그의 연설은 좀더 유리한 조건 속에서도 쉽게 기록될 수 없었다. 잔 리이드가 기록한 레닌의 첫 연설은 신문에 의해 보도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연설은 레닌의 정신에 전적으로 부합했기 때문에 리이드가 지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단순하게 꾸밈없이 불굴의 자신감으로 레닌은 소비에트 대회의 연설을 시작했을 것이다: "이제 사회주의 질서를 건설하는 일을 진행합시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쟁을 끝내야했다. 망명지 스위스에서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시키라는 구호를 제시했었다. 이제 승리한 내전을 평화로 전화시킬 때가 되었다. 정부 인선이 완료되는 대로 공포할 선언문 초안을 읽어나가면서 그는 즉시 일을 시작했다. 기술적 준비가 아직도 매우 허약했기 때문에 초안은 대의원들에게 배포되지 못했다. 대회는 레닌이 발음하는 이 문서의 단어 하나하나를 빠지지 않고 흡수했다.

    "10월 24일과 25일 혁명으로 수립되었으며 노동자, 병사, 농민 대의원 소비에트에 기초한 노동자 농민 정부는 정당하고 민주적인 평화협정을 위해 즉각 협상에 나설 것을 모든 교전국 인민과 정부에게 제안한다." 정당한 조건은 병합과 배상을 배제했다. 병합은 유럽이나 해외 먼 나라에 사는 인민들을 강제로 전유하거나 이들의 의지에 반하여 이들을 전유하는 것이었다. "제시된 평화 조건이 최후통첩이 아니므로 소비에트 정부는 평화협정을 위한 다른 조건들도 검토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한다." 가능한 한 빨리 협상을 시작하고 협상 과정에서 어떠한 비밀도 유지하지 말 것만을 그는 요구했다. 이 요구에 응할 경우 비밀 외교를 철폐하고 1917년 10월 25일 이전의 비밀 조약들을 공개하겠다고 소비에트 정부는 약속했다. 러시아 지주와 자본가들의 이윤과 특권 그리고 대러시아인에 의한 소수민족 억압을 목적으로 한 조약의 모든 부분을 "정부는 무조건 그리고 즉시 폐지한다고 선언한다." 평화협상을 위해 최소 3개월의 휴전을 즉각 체결하자고 그는 제안했다. 노동자 농민 정부는 "모든 교전국의 정부와 인민에게...특히 가장 선진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 3국의 의식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동시에 이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근로 인민과 피착취 대중을 모든 노예상태와 착취로부터 해방시키는 임무의 원군"은 바로 이들이라는 점을 자신했다.

    레닌은 선언문의 문구에 대해 간략한 논평을 가하는 것으로 연설을 제한했다. "우리는 교전국 정부들을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럴 경우 평화협정을 체결할 가능성이 지연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는 인민에게 똑같은 내용을 호소할 권리가 있다. 모든 곳에서 인민과 정부의 관계는 다르다. 우리는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한 인민의 개입을 도와야한다." "물론 모든 방법을 통해 병합과 배상 없는 우리의 평화협정 강령을 옹호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조건을 최후통첩으로 제시할 수는 없다. 이렇게 할 경우 정부들은 이 제안을 거부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다른 제안들도 전부 고려할 것이다. "제안들을 고려한다고 해서 반드시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니다."

    3월 14일 화해주의자들이 발표한 선언문은 타국의 노동자들에게 평화의 이름으로 은행가들을 타도하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정작 화해주의자들 자신은 러시아 은행가들을 타도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들과 동맹을 맺었다. "이제 우리는 은행가들의 정부를 타도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타국의 인민들도 같은 행위를 하라고 촉구할 권리를 부여한다. 우리 모두는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아프리카 오지가 아니라 모든 것이 즉시 알려지는 유럽에 살고 있다. 이것을 기억해야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레닌은 일국 혁명을 국제 혁명으로 전화시켜야 승리가 보장된다고 생각했다. "노동자 운동은 대세를 장악하여 평화와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놓을 것이다."

    사회혁명당 좌파는 대표를 보내 이 선언문을 옹호한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문의 "정신과 의미는 우리에게 밀접하며 이해가 잘된다." 통일국제주의자들은 선언문을 지지했으나 전체 민주주의 진영을 포괄하는 정부가 발표할 경우에만 선언문을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폴란드의 멘세비키 좌파를 대표하여 연설한 라핀스키는 이 문서의 "건강한 노동자적 현실주의"를 환영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회민주주의를 대표하여 제르진스키가, 라트비아 사회민주주의를 대표하여 스투츠카가, 리투아니아 사회민주주의를 대표하여 캅수카스는 조건 없이 이 선언문을 지지했다. 볼세비키 가운데 에레메프가 유일하게 반대하면서 이렇게 요구했다: 평화조건은 최후통첩이 되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은 우리가 허약할 뿐 아니라 겁먹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레닌은 단호하게 심지어는 격렬하게 최후통첩 방식을 반대했다: 이렇게 할 경우 "적들이 우리의 비타협성을 방패삼아 진실 전부를 인민에게 숨길 것이다." 그대는 "최후통첩을 제시하지 않을 경우 우리의 무기력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부르주아의 거짓을 정치에서 종식시킬 때가 되었다. "혁명과 전쟁으로 야기된 우리의 피곤함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후 체결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둘러싼 이견들이 잠시 이 일로 미리 모습을 드러냈다.

    이 선언문을 지지하는 대의원들은 대의원 카드를 들라고 카메네프가 요청했다. 리이드는 이렇게 적는다: "한 명의 대의원이 감히 반대하는 손을 들었다. 그러나 주위 대의원들의 갑작스럽고 날카로운 분노에 그의 손은 재빨리 내려갔다." 전 세계 인민과 정부들에 대한 호소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제 일은 끝났다! 모든 대의원들은 이 호소문의 밀접하고 당면한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고 있었다.

    편견이 있었지만 동시에 주의 깊은 관찰자였던 수하노프는 첫 회의 도중 여러 차례 대의원들의 기진맥진을 알아차렸다.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대의원들도 회의, 대회, 연설, 결의문, 시간을 재는 일 등 모두를 지긋지긋해했다. 이 대회가 일을 끝까지 처리할 능력과 방법이 있는 지에 대해 대의원들은 자신할 수 없었다. 임무의 거대함과 적대 진영의 항거할 수 없는 역량 때문에 이번에도 대의원들은 굴복하지 않을까? 동궁의 점령 및 자전거 부대의 전향 소식으로 이들은 자신감의 상승을 느꼈다. 이 두 사실은 여전히 봉기의 역학과 관계가 있었다. 지금에서야  봉기의 역사적 의미가 행동을 통해 명확해졌다. 승리한 봉기는 소비에트 대회의 파괴할 수 없는 초석이 되었다. 이번에 대의원들은 결의문도 아니고 선언문도 아니고 엄청난 의의를 지닌 정부의 통치행위에 대해 표결하고 있었다.

    인민들이여, 들어 보라! 혁명은 여러분에게 평화를 제의한다. 혁명은 조약들을 위반했다고 비난받을 것이지만 이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 피비린내 나는 약탈의 동맹을 분쇄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역사적 공헌이다. 볼세비키들은 감히 이 공헌을 완수했다. 이들만이 감히 이 공헌을 성취할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자부심이 저절로 치솟았다. 눈들이 빛을 냈다. 모두가 좌석에서 일어섰다. 이제 아무도 담배를 피지 않았다. 아무도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최고회의, 대의원, 귀빈, 보초병 등이 봉기와 형제애를 찬양하는 노래에 동참한다. 봉기에 참여하고 이것을 관찰하고 기록한 봉기의 시인 잔 리이드는 이렇게 말했다: "갑자기 집단적 충동으로 우리는 일어섰다. 처음에는 중얼거리듯이 그러나 곧 부드럽고 힘차게 '인터내셔널가'를 합창했다. 백발이 성성한 늙은 병사가 어린애처럼 흐느껴 울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눈을 깜박이며 흐르는 눈물을 급히 다스렸다. 합창의 거대한 음향이 대회장을 흔들고 창문과 출입문을 차고 조용한 하늘로 비상했다." 이 소리를 하늘이 들었는가? 십자가에 못 박힌 유럽의 승강구 뚜껑인 가을의 참호, 파괴된 도시와 마을, 통곡하는 어머니와 부인들에게도 이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까? "일어서라 그대 굶주림의 포로여! 일어서라 그대 대지의 비참한 자여!" 이 노래의 가사에는 제한 조건이 전혀 필요 없었다. 이것은 정부의 포고령과 결합되어 직접 행동의 힘으로 울려 퍼졌다. 이 시간에 대회장에 모인 모두는 자신이 더 위대하고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느꼈다. 혁명의 심장은 전 세계를 뒤덮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우리는 해방을 성취할 것이다...." 독립의 정신, 주도성의 정신, 대담성의 정신 --- 보통 상황에서 피억압 대중에게 박탈된 이 환희의 감정 --- 이제 혁명이 이것들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의 손으로!" 짜르를 무찔렀으며 이제 부르주아 계급을 무찌른 수백만의 전능한 손은 이제 전쟁의 목을 비틀 것이다. 비보르그 지구의 적위대, 얼굴에 흉터가 있는 회색 병사, 중노동형을 수년간 겪은 고참 혁명가, 오로라호의 검은 수염을 한 젊은 수병 --- 이들 전부는 끝까지 이 "마지막이고도 결정적인 투쟁"을 수행하겠다고 맹세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것이다!" 우리는 건설할 것이다! 마음 속에서 우러난 이 열성적인 말에는 곧 전개될 내전의 몇 년과 노동과 궁핍의 5개년 시기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니었던 자가 모든 것이 될 것이다!" 과거의 사건들이 노래로 바뀌었다면 노래가 미래의 사건이 되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이제 참호 외투는 고대 전함의 노 젓는 노예들의 복장 같이 보이지 않았다. 구멍이 뚫리고 면화가 찢어진 높은 털모자는 병사들의 빛나는 눈 위에서 새롭게 보였다. "인류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인류가 고통과 모욕, 전쟁의 피와 오물로부터 일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레닌을 위시한 최고회의 위원들은 모두 일어서서 흥분한 채 환희의 얼굴과 빛나는 눈으로 노래를 불렀다." 회의주의자인 수하노프는 적대 집단의 승리를 무거운 마음으로 뚫어지게 바라보며 이렇게 증언했다: "대의원 속에 합류하여 대회장에 모인 대중 및 지도자들과 하나의 감정과 정서로 혼연일체가 되기를 얼마나 원했던가!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인터내셔널가의 마지막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러나 대회 참석자들 모두는 그냥 서 있었다. 이들은 지금 경험한 사건의 위대성에 매혹된 채 어우러진 인간 집단이었다. 그리고 다수의 눈은 연단에 서 있는 키가 작고 다부진 인물에 정지되어 있었다. 그는 대단히 큰 머리와 높은 광대뼈를 가지고 있었으며 안면의 특징이 단순했다. 그는 면도질 한 턱수염과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조그만 몽고인과 비슷한 눈을 가진 채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4개월 동안 그는 혁명의 현장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살아있는 어떠한 이미지와도 거의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는 신화가 아니었다. 연단에 선 그는 자신의 분신인 --- 이제 "자신"은 얼마나 많은가! --- 동지들과 함께 서서 세계 인민들에게 보내는 평화의 메시지가 담긴 종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당내에서 그의 지위를 잘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 처음으로 그가 혁명, 인민, 세계 인민들에게 의미하는 바를 온전히 실감했다. 이들을 혁명 사상과 실천으로 가르친 사람은 바로 그였다. 이들을 혁명 투사로 기른 사람도 바로 그였다. 대회장 깊은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 지도자를 환영하는 말을 크게 외쳤다. 대회장은 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레닌 만세! 참아 넘긴 걱정과 근심, 극복한 의구심, 주도성의 자부심, 승리의 환희, 거대한 희망 --- 이 모든 것들이 감사와 환희의 화산으로 분출하여 하나가 되었다. 회의주의적 관찰자인 수하노프는 무미건조하게 이렇게 말한다: "의심의 여지없는 열정적인 정서...이들은 레닌을 환영하고 만세를 외치고 공중에 모자를 던져 올렸다. 이들은 전쟁 희생자들을 기념하여 "장례 행진곡"을 불렀다. 그리고 또다시 박수갈채와 외침과 공중 모자 던지기가 반복되었다."

    몇 분 동안 지속된 소비에트 대회의 이 경험은 다음날 덜 압축적이었지만 나라 전체에 의해 반복되었다. 스탄케비치는 회고록에 이렇게 적고 있다: "볼세비키들의 대담한 제스처와 4년 동안 이웃 인민들과 우리를 갈라놓은 철조망 넝쿨을 뛰어넘는 이들의 능력 등은 저절로 엄청난 인상을 남겼다." 부드버그 남작은 스탄케비치보다는 좀더 조야하게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집약적으로 이렇게 일기에 적었다: "레닌 동지의 새 정부는 즉각적인 평화 포고령으로 행동을 개시했다....이것은 병사 대중을 그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천재적 행위이다: 오늘 여러 연대들을 순회하면서 확인한 정서에서 이것을 알았다; 즉각 3개월 간 휴전을 실시하면서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레닌의 전보는 모든 곳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환희의 폭풍을 일으켰다. 이제 전선을 우리편으로 끌어들일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들이 망친 전선을 구출하여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존재에 불과했다.

    3월과 4월에 혁명이 철조망 넝쿨을 넘을 결심이 있었다면 당분간은 군대를 단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군대가 2분의 1이나 3분의 1로 규모가 줄어야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었다면 이들은 자신들의 대외정책을 위한 강력한 고지를 점령했을 것이다. 그러나 용감한 행동의 시간은 10월에만 왔으며 이때 이들은 잠시라도 군대의 일부를 구하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새 정부는 짜르가 일으킨 전쟁과 임시정부의 낭비벽 심한 경박한 행동으로 발생한 부채를 감당해야했다. 다른 정당들에게는 전혀 가망이 없는 이 끔찍한 상황 속에서 볼세비키당만이 나라를 넓은 길로 인도할 수 있었다. 10월 혁명을 통해 나라는 무한한 활력의 원천을 찾아냈다.

    레닌은 다시 연단에 올랐다. 이번에는 토지에 대한 포고령이 담긴 종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타도된 임시정부와 화해주의 정당들을 비난하면서 연설을 시작했다. 이들은 토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질질 끌면서 농민의 봉기를 자초했다. "농촌의 소수민족 학살과 무정부 상태에 대한 이들의 발언은 비겁한 기만술이다. 합리적인 조치가 소수민족 학살과 무정부 상태를 초래한 경우가 언제 어디에 있었는가?" 이 포고령의 초안은 복사되어 배포되지 않았다. 레닌이 들고 있던 거친 초안이 전부였다. 그리고 이 초안은 너무 엉터리로 적혀 있어서 "레닌은 읽다가 더듬거리고 혼란에 빠지다가 아예 읽기를 멈추었다. 연단 주위에 빽빽하게 모인 군중 가운데 누가 그를 돕기 위해 연단에 올랐다. 레닌은 적극적으로 그에게 연단의 공간과 이해할 수 없는 종이쪽지를 넘겨주었다"고 수하노프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평민 대의기관인 소비에트가 보기에 이 다듬어지지 않은 순간도 전개되고 있는 사건의 위대성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못했다.           

    이 포고령의 핵심은 제 1조의 첫 두 줄에 포함되어 있었다: "지주의 토지 재산은 즉시 무효이며 어떠한 배상도 없다. 지주의 토지, 부속 토지, 수도원과 교회의 토지 등은 이것들에 딸린 모든 물건과 재산을 포함하여 제헌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읍의 토지위원회와 군 농민 소비에트가 관장한다. 몰수된 재산은 지역 소비에트가 보호하는 국가재산이다. 일반 농민과 카자흐의 토지는 몰수로부터 보호된다." 포고령 전체는 30줄 이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고르디우스 왕의 매듭을 망치로 끊어버렸다. 기본 문구에 농민들이 직접 만든 광범위한 내용의 훈령이 부가되었다. 농민 소비에트의 기관지 이즈베스티아 지는 8월 19일에 제 1차 농민 소비에트 전국대회에서 농민들이 제시한 242개 훈령을 요약하여 실었다. 사회혁명당이 이 취합된 훈령을 기초했지만 레닌은 주저 없이 이 훈령 전체를 "거대한 토지 개혁을 수행하는 지침으로" 그의 포고령에 포함시켰다.

    이 취합된 훈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토지의 개인소유권은 영원히 소멸된다." "자기 노동으로 토지 경작을 원하는 모든 농민에게 토지이용권이 부여된다." "고용 노동은 허용되지 않는다." "토지이용은 평등해야한다. 노동이나 소비의 기준에 근거하여 지역 사정에 따라 경작자들 사이에 토지가 분배된다."

    지주와의 연립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부르주아 체제가 계속되는 동안에 사회혁명당의 이 훈령은 생기 없는 유토피아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적인 거짓말은 아니었다. 노동계급 지배 하에서도 이것은 전부 실현될 수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정부의 태도로 인해 이것의 운명은 급격히 바뀌었다. 노동자 국가는 이 자기 모순적 강령을 농민들이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시험할 수 있는 기간을 주었다.

    8월에 레닌은 이렇게 적었다: "농민은 자기의 소규모 토지를 보유하고 이것을 평등의 기초로 표준화시키고 주기적으로 다시 표준화시키기를 원한다. 이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행동하도록 내버려두자. 이 문제 때문에 합리적 사회주의자가 빈농과 결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주의 토지가 몰수된다면 농민에 대한 은행의 지배가 침해될 것이다. 농사 기계와 도구가 몰수된다면 자본의 지배가 침해될 것이다.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음과 동시에 나머지 사항들은 실천을 통해 제시될 것이다."

    적들뿐 아니라 동지를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이 볼세비키당의 농민 및 토지 강령의 폭넓은 시야와 어느 정도 교육적인 측면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반대했다: 토지의 평등한 분배는 사회주의와 공통점이 전혀 없다. 볼세비키들이 이 점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와 반대로 포고령의 공표 자체는 레닌의 비판적 경계심을 증언하고 있다. 취합된 훈령은 지주와 농민의 토지 전부가 "국가소유로 전환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본 포고령은 토지의 새로운 소유형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별로 현학적이지 않은 법률학자도 세계 역사적 중요성을 가진 새로운 사회 원리(토지 국유화)가 기본법에 부가된 훈령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동적 엉성함이 없었다. 레닌의 바램은 이것이었다: 아직 탐험되지 않은 역사의 영역에서 선험적으로 당과 소비에트 권력의 손을 묶는 일은 가능하면 없어야한다. 여기에서도 그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대담함을 최대의 조심성과 결합시켰다. 토지가 "전 인민의 소유"로 전환되는 것을 농민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경험을 통해 마련되어야했다. 너무 전진했기 때문에 후퇴가 필요할 경우에 대비하여 이미 차지한 진지를 강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지주의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는 것이 부르주아 반혁명의 저지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쨌든 봉건-왕조적 관계의 복원은 이제 불가능하다.

    노동계급의 권력을 확립하고 이 권력을 성공적으로 보존한 후에야 사회주의 전망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권력은 농민 혁명을 확고하게 지지해야 보존될 수 있다. 토지 분배가 사회주의 정부를 정치적으로 강화시킨다면 이것은 당면 조치로 전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혁명은 농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 새로운 체제만이 그를 교육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 교육은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산업 조직의 도움으로 한 순간이 아니라 한 세대에 걸쳐 진행되어야한다. 포고령과 훈령은 이것을 의미했다: 노동계급 독재는 농민의 이해를 세심하게 배려할 뿐 아니라 소 소유자인 그의 환상에 대해 참을성을 가질 의무가 있다. 농민 혁명에는 상당수의 단계와 전환점이 존재한다는 점이 미리 명확해졌다. 취합된 훈령은 최종적인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농민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출발점에 불과했다. 노동자들은 농민의 진보적 요구들이 실현되도록 도우면서 이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경우 이것을 경고해야했다.

    레닌은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층 인민의 결의문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것을 무시하면 안된다....인민 대중의 창조성에 완전한 자유를 부여해야한다. 핵심적으로 중요한 일은 이것이다: 농민은 이 나라에 지주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완전히 확신해야한다. 그리고 농민이 자신의 모든 문제들을 결정하고 자신의 삶을 설계하도록 보장해야한다." 이것이 기회주의인가? 아니다, 이것은 혁명적 현실주의이다.              

    이 연설에 대한 박수갈채가 끝나기도 전에 사회혁명당 우파의 피아니크는 농민집행위원회로부터 대회장에 도착하여 발언권을 얻은 후 사회주의자 장관들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는 마치 미친 것처럼 탁자를 두드리며 외쳤다: "지난 며칠 간 어떤 혁명에서도 없었던 일이 일어나고 있다. 집행위원회 동지들인 마슬로프와 살라즈킨이 감옥에 갇혀있다. 즉시 이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한다!" 군대의 외투를 걸친 또 한 명의 전령이 "그들의 머리에서 머리카락 하나라도 떨어지면 각오하라"고 위협했다. 대의원들에게 이들은 모두 달나라에서 온 손님 같았다.   

    봉기가 일어날 당시 볼세비키라는 혐의로 감옥에 갇힌 사람의 숫자는 드빈스크에 약 8백 명, 민스크에 약 6천 명, 키에프에 535명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농민위원회의 얼마나 많은 농민들이 감옥에 갇혀있었는가! 마지막으로 최고회의 위원부터 시작해서 이 소비에트 대회의 대의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7월 이후 케렌스키의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다. 임시정부의 동조자들이 드러낸 분노가 대의원들의 심금을 울릴 수 없었던 것은 너무 당연했다. 이들의 악운을 완성하기라도 하듯이 아무도 그 이름을 모르는 트베르의 농민 출신 대의원이 긴 머리와 큰 양가죽 외투를 걸친 채 자리에서 일어나 동서남북에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자기를 뽑아준 농민들의 이름으로 아브크센티에프의 집행위원회 전원을 즉시 체포할 것을 간청했다: "이들은 농민 대의원들이 아니라 입헌민주당원들이다....이들은 감옥에 있어야 마땅하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사회혁명당 우파의 피아니크는 경험이 풍부한 의원이었으며 장관들이 총애하는 인물이었으며 볼세비키를 증오하는 자였다; 트베르의 이름 없는 이 농민은 자기를 뽑아준 농민들을 대신하여 레닌에게 크게 절을 했다. 두 사회계층을 대표하는 자들과 두 혁명을 대표하는 자들이 서로 마주보았다. 피아니크는 2월 혁명을 대표하여 발언했으며 트베르의 농민은 10월 혁명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대회는 양가죽 외투를 뒤집어 쓴 대의원에게 진짜 박수갈채를 보냈다. 집행위원회의 전령들은 욕을 하며 대회장을 나갔다.

    "사회혁명당 분파는 레닌의 결의안을 자기들의 사상의 승리라고 해석하여 환영했다"고 칼레가에프가 선언했다. 그러나 이 문제의 대단한 중요성에 비추어 우리는 이 문제를 분파 협의회에서 논의해야한다. 와해된 사회혁명당 극좌파의 대표인 어느 최대강령주의자는 즉시 이 결의안을 표결에 붙일 것을 요구했다: "혁명 바로 첫날에 수다를 떨지 않고 이러한 조치를 인민의 삶에 도입하는 당을 찬양해야한다." 레닌은 정회가 어쨌든 될 수 있으면 짧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에게 이렇게 중요한 소식은 아침까지 출판되어야한다. 회의 지연 술책은 인정될 수 없다!" 토지에 대한 포고령은 진정으로 새 정권의 기초였을 뿐 아니라 전국을 정복하는 혁명의 무기이기도 했다. 바로 이 순간 대회장의 웅성거림을 뚫고 명령조의 고함이 울려 퍼지는 것을 리이드는 당연히 기록했다: "제 17호실에 15명의 선동가가 즉시 필요하다! 이들은 전선으로 가야한다!" 오전 1시에 마케도니아 주둔 러시아군의 어느 대의원이 이렇게 불평했다: 뻬쩨르부르그의 정부들은 하나같이 자기들을 잊어버리고 있다. 마케도니아 주둔 병사들의 평화와 토지에 대한 포고령 지지는 이 한 명의 대의원을 통해 보장되었다! 여기에서 군대의 정서가 새롭게 시험되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남동 유럽의 구석에 있는 군대가 발언할 차례였다. 여기서 카메네프가 선언했다: 임시정부에 의해 전선에서 수도로 호출된 제 10 자전거 대대가 오늘 아침 수도로 진입했으며 미리 온 대대들과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대회에 충성을 다짐했다. 이 소식에 대한 따뜻한 박수갈채는 소비에트 권력을 입증하는 이러한 소식들이 아무리 많아도 대의원들은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임을 증언했다.

    지역 소비에트는 범죄자들이 유태인이나 소수민족을 학살하는 것을 내버려두지 말아야했다. 이것은 명예로운 일이었다. 이 점을 명시한 선언문이 만장일치로 토론 없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바로 토지법 초안에 대한 표결이 진행되었다. 반대 1표, 기권 8표를 제외한 만장일치로 대회는 새로운 열정으로 구 러시아 문화의 초석이었던 농노제를 끝장내는 포고령을 채택했다. 이때부터 농업 혁명은 합법화되었으며 노동계급 혁명은 강력한 기반을 획득했다.

    정부를 수립하는 마지막 문제가 남아있었다. 카메네프는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가 입안한 제안서를 읽어나갔다. 국가 각종 부처의 운영은 각종 위원회에 할당되었다. 이들은 "노동자, 수병, 병사, 농민, 사무직 노동자 등의 대중 조직과 밀접히 협력하여" 대회가 선언한 강령을 실천해야했다. 정부 권력은 이 위원회 의장들로 구성된 인민위원 소비에트에 집중되었다. 정부 활동에 대한 통제권은 소비에트 전국대회와 대회의 중앙집행위원회에 있었다.

    볼세비키당 중앙위원 7인이 최초의 인민위원 소비에트에 지명되었다. 레닌은 정부 수반으로 부처를 맡지 않았다. 리코프는 내무 인민위원, 밀류틴은 농업 인민위원, 노긴은 상공업 인민위원, 트로츠키는 외무 인민위원, 로모프는 법무 인민위원, 스탈린은 민족문제 인민위원, 안토노프-오브세옌코와 크릴렌코 그리고 디벤코는 군사 및 해군 업무를 주도하는 위원회를 구성했다. 노동 인민위원은 슐리아프니코프, 교육 인민위원은 루나차르스키, 임무가 무거우나 별로 인기 없는 식량 인민위원은 테오도로비치, 우편전신 인민위원은 노동자 글레보프에게 각각 맡겨졌다. 통신 인민위원은 미정이었고 철도 노동자 조직들의 합의 후에 임명될 예정이었다.

    이들 15인 지명자들은 4명이 노동자 출신 11명이 지식인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수감, 유형, 망명생활 등을 겪었다. 이들 가운데 5인은 민주 공화국 하에서도 감옥에 갇혔다. 미래의 수상 레닌은 하루 전에야 민주공화국의 지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프는 인민위원으로 지명되지 못했다. 전자는 새로운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으로 후자는 소비에트 공식기관지 편집장으로 각각 선정되었다. "카메네프가 인민위원들의 명단을 읽어 내려가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특히 레닌과 트로츠키에게는 더욱 그랬다"고 리이드는 적고 있다. 수하노프는 루나차르스키도 박수를 특별히 많이 받았다고 덧붙이고 있다.

    통일국제주의자의 대표인 아빌로프는 한때 볼세비키였으나 이제 고리키의 신문에 글을 쓰는 인물이었다. 그는 정부 인선 명단에 반대하는 긴 연설을 했다. 그는 국내와 국외 정치 분야의 어려움들을 진실 되게 나열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지를 명확히 인식해야한다....새 정부 앞에는 빵과 평화 등 오랜 문제들이 놓여 있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면 정부는 타도될 것이다." 나라에는 곡물이 거의 없다. 이것은 부농들의 손에 들어있다. 곡물과 교환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공업은 하락하고 있다. 연료와 원자재는 부족하다. 곡물을 강제로 징발하는 것은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며 위험한 작업이다. 따라서 빈농 뿐 아니라 부농의 공감을 받을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연립정부가 필요하다.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더 어려울 것이다." 연합국 정부들은 즉각 휴전하자는 소비에트 대회의 제안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평화 협상 제안이 없어도 연합국 대사들은 러시아를 떠날 계획이다. 새 정부는 고립될 것이다. 평화 주도력은 공중에 붕 뜰 것이다. 교전국 인민대중은 아직도 혁명과는 거리가 멀다. 결과는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독일군에 의해 혁명이 전멸되거나 독자 평화협정이 체결될 것이다. 두 경우 모두 평화조약의 조건은 러시아에게 최악의 조건이 될 것이다. 이 어려움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민 대다수"가 필요하다. 불행하게도 민주주의는 분열되어 있다: 좌파 반쪽은 스몰니에 순수 볼세비키 정부를 수립하려고 한다. 우파 반쪽은 시의회에서 공공안전위원회를 조직하고 있다. 혁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양측 모두를 포괄하는 정부를 구성해야한다.

    사회혁명당 좌파의 대표 카렐린도 같은 요지의 연설을 했다. 대회에서 철수한 정당들이 없이는 채택된 강령을 수행할 수 없다. 물론 "볼세비키당이 이들의 철수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회의 강령은 민주주의 진영 전체를 단결시켜야한다. "볼세비키당을 고립시키는 노선을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볼세비키당과 혁명의 운명이 결부되어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파멸은 혁명의 파멸일 것이다. 사회혁명당 좌파가 정부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것은 좋은 목적을 위해서이다. 즉 볼세비키당과 철수한 정당들 사이의 중재를 위해 운신이 자유로와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사회혁명당 좌파의 주요한 임무는 바로 이 중재이다." 사회혁명당 좌파는 시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새 정부의 활동을 지지할 것이다. 동시에 이들은 제안된 정부 인선에 반대한다. 한마디로 이 젊은 정당은 최대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아빌로프와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었으며 막후에서 카렐린을 사주한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트로츠키가 일어서서 볼세비키들만의 정부를 옹호했다. 그는 아주 명확하게 날카로왔으며 절대적으로 옳았다. 그러나 그는 그의 반대자들의 중심 요지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이들의 중심 요지는 관념적 대각선이었다. 3월에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과 화해주의 소비에트 사이에 대각선을 그으려했다. 이제 수하노프는 화해주의적 민주주의와 노동계급 독재 사이에 대각선을 그으려했다. 그러나 혁명은 대각선을 따라 전개되지 않는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저들은 이미 여러 차례 좌익이 고립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우리를 겁주려했다. 며칠 전 봉기 문제가 처음으로 공공연히 제기되었을 때 저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파멸로 가고 있다. 역관계를 정치 신문으로 판단하면 봉기는 우리를 불가피하게 파멸시킬 위험이 있었다. 우리에게 대항하는 세력은 반혁명 도당 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조국방어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의 일 분파인 사회혁명당 좌파는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우리와 용감하게 협력했다. 나머지는 주시하면서 중립을 지켰다. 그런데 이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그리고 모두가 우리를 버릴 것 같았으나 봉기는 승리했다....

    진짜 세력들이 우리에게 반대했다면 거의 유혈도 없이 우리가 승리할 수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 고립된 것은 우리가 아니라 임시정부와 소위 민주주의자들이다. 이들의 동요와 화해주의 정책으로 이들은 진정한 민주주의 대오에서 이탈했다. 우리는 계급 세력들과 연합하여 노동자, 병사, 빈농의 동맹을 수립했다. 바로 여기에 볼세비키당의 위대성이 있다.

    정치 그룹들은 사라진다. 그러나 계급들의 기본 이해는 남는다. 계급의 기본 요구들을 파악하고 충족시킬 능력이 있는 당이 대세를 장악한다....주로 농민으로 구성된 주둔군과 노동계급의 동맹을 우리는 자랑스러워한다. 이 동맹은 투쟁을 통해 단련되었다. 수도의 주둔군과 노동계급은 함께 손잡고 모든 인민들의 혁명 역사에서 고전적인 모범이 되는 위대한 투쟁을 했다.

    아빌로프는 우리 앞에 놓인 엄청난 어려움들에 대해 말했다. 이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연립정부 구성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노선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어떤 연립정부인지를 우리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룹들의 연립인지 계급들의 연립인지 아니면 신문들의 연립인지, 도대체 어느 것인가?...

    민주주의 진영의 분열이 오해의 소산이라고 저들은 말한다. 그러나 케렌스키가 우리에게 대항하여 돌격대를 보냈다. 우리가 부르주아 계급에 대해 가장 결정적인 투쟁을 한 그 순간에 중앙집행위원회가 동의하여 우리의 전화가 끊겼다. 저들이 우리를 계속 공격했다. 이것을 오해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빌로프는 말한다: 빵이 없다, 따라서 조국방어주의자들과 연합해야한다. 그러나 이 연합이 빵의 양을 늘릴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가? 빵의 문제는 행동 강령의 문제이다. 경제 붕괴에 대한 투쟁은 상층 정치연합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명확한 제도를 요구한다.

    아빌로프는 농민과의 연합을 말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면 그는 어떤 농민을 말하고 있는가?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트베르 도의 농민 대표가 아브크센티에프의 체포를 요구했다. 감옥을 농민위원회 위원들로 채운 아브크센티에프와 이 트베르 도의 농민 사이에 선택을 해야한다. 노동계급과 빈농의 동맹을 위해 우리는 부농과의 동맹을 확고히 거부한다. 우리는 아브크센티에프에 반대하여 트베르 농민과 연합한다. 우리는 이들과 떨어지지 않은 채 끝까지 함께 할 것이다.

    연립정부의 그림자를 쫓는 자는 모두 현실과 단절되어 있다. 사회혁명당 좌파는 우리를 반대할수록 대중의 지지를 상실할 것이다. 빈농과 동맹한 노동계급 정당에 반대하는 모든 그룹은 혁명과 단절하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그리고 전 인민이 보는 앞에서 우리는 봉기의 깃발을 올렸다. 이 봉기의 정치노선은 소비에트 대회를 통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다. 저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대회 개막을 기다리지 않고 봉기를 일으켰다. 우리는 기다리려했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기다리려하지 않았다. 반혁명 세력은 꿈을 꾸고 있지 않았다. 우리 당은 소비에트 대회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진짜 가능케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대회가 사관생도들에 포위되었다면 어떻게 권력을 잡을 수 있었겠는가? 이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혁명 세력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후 대회장의 여러분들에게: '여기에 권력이 있으니 잡으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당이 필요했다.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지속되었다)

    온갖 색조의 조국방어주의자들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우리에게 투쟁했으나 우리는 이들을 배제하지 않았다. 우리는 소비에트 대회 전체가 권력을 잡으라고 제안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보고도 우리가 비타협적이라고 연단에서 말하다니! 대단한 왜곡이 아닐 수 없다. 화약의 연기에 둘러싸인 당이 이들에게 와서 '함께 권력을 잡자!'고 말하자 이들은 시의회로 달려가 공공연한 반혁명 분자들과 연합했다! 이들은 혁명의 배신자들이며 우리는 이들과 결코 연합하지 않을 것이다!

    평화를 위한 투쟁에서 화해주의자들과 연합해야한다고 아빌로프는 말한다. 동시에 연합국들이 평화를 원치 않는다고 그는 인정한다....연합국 제국주의자들이 동물성 마가린처럼 흐물흐물한 대의원 스코벨레프를 비웃었다고 아빌로프는 말한다. 그러나 동물성 마가린 민주주의자들과 연합하면 평화의 대의가 확보된다니! 이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평화를 위한 투쟁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연합국과 적대국 정부에 혁명의 도덕적 물질적 역량을 대항시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스코벨레프와 연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테레쉬첸코와 연합하여 연합국 제국주의에 완전히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에 대한 우리의 선언문에서 우리는 동시에 정부와 인민들에게 호소했다. 이것은 순전히 형식적인 균형이다. 물론 우리는 선언을 통해 제국주의 정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이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가 이들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들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우리의 혁명이 유럽 혁명을 촉발시킬 가능성에 우리는 모든 희망을 걸고 있다. 유럽의 봉기 인민들이 제국주의를 제압하지 못하면 우리는 제압 당할 것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러시아 혁명이 서방에서 투쟁의 회오리를 일으키지 않으면 모든 나라의 자본가들이 우리 혁명을 압살할 것이다....."

    좌석에서 어느 누가 "제 3의 길이 있다"고 말한다.

    이에 트로츠키는 이렇게 응수한다: "제 3의 길은 중앙집행위원회의 길이다. 한편으로는 서유럽 노동자들에게 대표들을 보내고 또 한편으로는 카쉬킨 그리고 코노발로프와 동맹한다. 이것은 거짓말과 위선의 길이며 우리는 이 길을 결코 가지 않을 것이다.

    유럽 노동자들이 봉기를 일으키는 날만이 평화조약이 체결되는 날이라고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피억압 인민의 임박한 봉기에 겁을 먹고 부르주아 계급이 서둘러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도 있다. 날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구체적인 형태는 미리 예상할 수 없다. 외국과 국내 정치에서 동일한 원칙을 규정하는 것이 중요하고 필요하다. 국내외의 피억압 인민과 연합하는 것 ---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길이다."

    잔 리이드는 말한다: 대회 대의원들은 "그의 연설을 대대적인 박수갈채로 환영했으며 대담한 자들은 그의 연설에 감명을 받아 인류를 옹호하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때 연설을 들은 볼세비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볼세비키당의 이름으로 하는 공식 연설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의 운명을 국제혁명의 전개에 직접 연계시키는 것에 항의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대회의 극적인 법칙이 수립되었다. 의미 있는 법이 통과되면 짧은 정회가 뒤따랐고 이때 적대 진영의 인물이 갑자기 무대 위에 나타나 항의, 위협, 최후통첩 등을 늘어놓았다. 철도노동조합의 집행위원회인 빅줼의 대표가 즉시 발언권을 요구했다. 그는 권력 문제가 표결에 붙여지기 전에 대회장에 폭탄성 발언을 할 생각이었다. 리이드는 그의 얼굴에서 진정시킬 수 없는 적대감을 보았다. 그는 이렇게 비난하는 것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러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그의 조직은 대회에 초대되지 않았다...."그대를 초대하지 않은 것은 중앙집행위원회이다"라고 사방에서 그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는 계속했다: 대회를 지지한다는 빅줼의 원래 결정은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이미 전신을 통해 전국에 배포된 최후통첩을 그는 서둘러 읽어나갔다: 빅줼은 볼세비키당의 권력 장악을 반대한다; 정부는 "혁명적 민주주의 진영 전체"에 책임을 져야한다; 민주 정부가 구성될 때까지 빅줼만이 철도를 통제할 것이다. 반혁명 군대는 수도로 진입이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러나 전반적인 군대의 움직임은 구 중앙집행위원회의 지시에 따라서만 가능하다. 철도 노동자들에게 탄압을 가할 경우 수도는 식량 공급이 중단될 것이다.

    대회는 이 타격 앞에 털을 곤두세웠다. 철도 노동조합의 우두머리들이 인민의 대표들로 구성된 정부에게 또 하나의 정부가 되어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노동자, 병사, 농민들이 국가의 운영을 맡을 때 빅줼은 이들을 명령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타도된 이중권력을 빅줼은 사소한 현금으로 바꿔치기 하려고 했다. 조합원이 아니라 나라의 경제와 문화에서 차지하는 철도의 엄청난 중요성에 의거하려고 하면서 빅줼의 민주주의자들은 사회투쟁의 근본적 사안들에서 형식 민주주의가 갖는 허약성 전체를 폭로시켰다. 진정으로 혁명은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

    어쨌든 화해주의자들은 이 타격의 순간을 잘못 선택하지는 않았다. 최고회의 위원들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다행히도 빅줼은 철도의 무조건적인 주인이 결코 아니었다. 지구에서 철도 노동자들은 시 소비에트에 속해 있었다. 여기 대회에서도 빅줼의 최후통첩은 저항을 받았다. 타쉬켄트의 대의원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지구의 철도 노동자들 전체는 소비에트로 권력을 넘기는 것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철도 노동자 대의원 하나는 빅줼을 "정치적 시체"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과장이었다. 다수의 철도 사무직의 상층부에 기초한 빅줼은 화해주의자들의 다른 상층 조직들보다 실제 역량을 더 많이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군대 위원회나 중앙집행위원회와 같은 유형에 속한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이 조직의 별은 급속히 지고 있었다. 모든 곳에서 노동자들은 사무직원들과 자신들을 구별하고 있었다. 하급 사무직원들은 상급직원들에 반대하고 있었다. 빅줼의 거만한 최후통첩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 과정을 재촉했다. 아니다, 역장들은 10월 혁명의 기관차들을 저지할 수 없다!

    카메네프는 권위를 가지고 이렇게 선언했다: "이 대회의 법적 권한을 의심할 수는 없다. 이 대회의 정족수는 우리가 아니라 구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정했다....대회는 노동자 병사 대중의 최고 기관이다." 이제 다시 일정으로 단순히 되돌아갈 시간이다!

    인민위원 소비에트는 압도적 다수로 비준되었다. 수하노프의 지나치게 관대한 추산에 따르면 아빌로프의 결의안은 주로 사회혁명당 좌파로 구성된 150표를 얻었다. 그리고 대회는 만장일치로 새로운 중앙집행위원회를 승인했다. 101명의 위원 가운데 62명은 볼세비키, 29명은 사회혁명당 좌파였다. 이후 이 기구는 농민 소비에트 대표들과 재선된 군대 조직의 대표들로 정원을 전부 채울 것이다. 대회에서 철수한 분파들은 비례대표의 원칙 하에 중앙집행위원회에 대의원들을 보낼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제 대회의 의제는 전부 처리되었다!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었다. 정부는 강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오전 5시 15분에 카메네프는 소비에트 체제의 제헌 대회를 폐막시켰다. 기차역으로! 가정으로! 전선으로! 공장과 병영으로! 광산과 한촌으로! 소비에트의 포고령을 통해 대의원들은 노동계급 혁명의 효모를 전국 구석구석에 전파할 것이다.

    이날 아침 옛날 이름을 그대로 가진 채 볼세비키당 중앙기관지 프라우다 지는 이렇게 적었다: "저들은 우리가 권력을 혼자 장악하기를 원했다. 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엄청난 난관들을 우리가 혼자서 해결해야한다는 것이다....좋다! 나라의 목소리에 의존하고 유럽 노동계급의 우정어린 지원을 기대하면서 우리는 혼자 권력을 갖는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했으므로 우리는 철권으로 혁명의 적들과 사보타지 분자들을 처리할 것이다. 저들은 코르닐로프의 독재를 꿈꾸었다....우리는 저들에게 노동계급 독재를 선사할 것이다...."

     

     

    결  론

    러시아 혁명의 단계들은 뚜렷한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수천만 대중을 투쟁으로 끌어들인 진정한 인민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사건들은 마치 중력의 법칙을 따르는 것처럼 서로 연이어 일어났다. 모든 단계에서 역관계는 두 번이나 확인되었다: 우선 대중은 공격력을 증명하였고 다음으로 유산계급은 복수를 시도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고립을 더욱 명확히 드러냈다.

    2월에 수도의 노동자와 병사들은 유산계급들의 애국주의 의지 뿐 아니라 혁명조직들의 정세판단을 거역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대중은 자신들이 정복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 점을 명확히 인식했더라면 이들은 권력을 장악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지도하는 강력하고 권위 있는 혁명정당이 없었다. 이 결과 권력은 사회주의를 보호색으로 뒤집어 쓴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에게 떨어졌다. 멘세비키들과 사회혁명당은 대중의 신뢰를 이용하여 자유부르주아 계급에게 권력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후자는 화해주의자들이 자기에게 슬며시 밀어 넣어준 권력을 연합국 제국주의자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4월에 병사들과 노동자들은 분노하여 어떤 정당의 촉구도 없이 수도의 거리로 나왔다. 이를 통해 화해주의자들이 자신들에게 강제로 들이민 임시정부의 제국주의 정책에 저항했다. 이 무장 시위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러시아 제국주의의 지도자 밀류코프는 정부에서 밀려났다. 화해주의자들은 인민의 전권대사로 정부에 들어갔으나 실제로는 부르주아 계급의 심부름 소년에 불과했다.

    혁명을 초래한 문제들을 단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연립정부는 6월에 전선의 실제적 휴전 상태를 깨고 군대를 공세로 밀어붙였다. 대중이 화해주의자들을 신뢰하는 정도가 이미 하락한 상황에서 이 행위는 2월 체제에 치명타를 가했다. 이로써 제 2의 혁명을 직접 준비하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7월초에 유산계급과 교육받은 계급들의 지지를 전폭적으로 받은 정부는 모든 혁명투쟁을 조국에 대한 배신이자 이적행위로 인정하고 투쟁하는 대중과 조직들을 기소했다. 공식 대중 조직인 소비에트와 사회애국주의 정당들은 모든 힘을 다해 대중의 시위를 반대하고 있었다. 전술적인 이유로 볼세비키당은 노동자와 병사들의 가두 진출을 억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중은 거리로 나왔다. 이 운동은 억제될 수 없었으며 모든 곳에서 일어났다. 정부는 없었으며 화해주의자들은 몸을 숨겼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수도의 정세를 좌우했다. 그러나 이들의 공세는 지방과 전선의 준비 부족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8월말에 유산계급들의 모든 기구와 기관들 즉 연합국의 외교관, 은행, 지주와 자본가 동맹, 입헌민주당, 정부 기구, 장교, 거대 신문 등은 반혁명을 시도했다. 이 반혁명의 조직자는 수백만 병사들을 부리는 장교기구의 최고사령관 코르닐로프였다. 모든 전선에서 특별히 선정된 부대들이 전략적 이유라는 핑계를 대면서 그리고 정부 수반과 비밀리에 합의한 후 수도로 향했다.           

    이 쿠데타의 성공을 위해 수도는 모든 것을 준비한 듯이 보였다. 화해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아 정부는 노동자들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볼세비키당은 계속해서 반동의 공격을 받았다. 혁명 연대들은 수도에서 전출되었다. 수백 명의 특별히 선발된 장교들이 돌격 여단으로 조직되었다. 사관생도 부대 그리고 카자흐 부대들과 결합하여 이들은 막강한 병력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신들이 보호한 것 같았던 이 음모는 혁명 인민과 대치하기도 전에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7월초 대중 무장시위와 이것의 와해는 명제였으며 8월말의 반동 쿠데타는 반대 명제라고 할 수 있었다. 7월 시위는 대중의 독자적 역량을 보여주었다. 8월 쿠데타는 지배집단들의 완벽한 무기력을 드러냈다. 이 상호관계는 새로운 갈등의 불가피성을 드러냈다. 한편 지방과 전선은 수도의 운동에 더욱 공감하고 있었다. 이것이 10월의 승리를 미리 결정했다.

    입헌민주당의 나보코프는 이렇게 적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케렌스키의 마지막 연립정부를 쉽게 타도했는데 이것은 연립정부의 내적 허약성을 드러냈다. 이 허약성의 정도는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조차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연립정부의 붕괴가 그 자신과 그의 계급과 그의 사회적 구조의 허약성 문제라는 것을 그는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7월의 무장 시위에서 투쟁 수위가 상승하여 10월 봉기로 나아간 것과 똑같이 코르닐로프 쿠데타는 10월 마지막 며칠에 걸쳐 케렌스키가 시도한 반혁명의 총 예행 연습인 것 같았다. 작은 미국 국기를 자동차에 달아 정체를 숨긴 후 수도에서 도망한 케렌스키가 볼세비키당에 대항하여 동원한 유일한 부대는 2개월 전에 코르닐로프가 케렌스키를 타도하기 위해 지정했던 바로 그 제 3 기병군단이었다. 군단장은 아직도 카자흐 장군인 크라스노프였다. 군부의 왕당파인 그를 이 직책에 임명한 것은 코르닐로프였다. 그보다 더 적절한 민주주의 방어 투사는 없었다.

    그러나 이 군단은 이름뿐이었다. 군단에는 몇몇 카자흐 대대 밖에 없었는데 이들은 수도 근처에서 적위대를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혁명적 수병들과 연대하여 크라스노프를 볼세비키들에게 넘겨주었다. 케렌스키는 카자흐와 수병들 모두로부터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짜르를 타도한 지 8개월만에 노동자들은 나라의 지도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 자리를 확고히 지켰다.

    러시아의 장군 잘레스키는 분노에 차서 이렇게 적었다: "법원의 수위나 경비가 갑자기 항소법원의 주심 재판관이 되었다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아니면 병원의 잡역부가 병원장이 되고 이발사가 고위 관료가 되고 어제의 소위가 사령관이 되고 어제의 하인이나 일용직 노동자가 시장이 되고 어제의 기차 기름당번이 부서장이나 역장이 되고 어제의 자물통 제조공이 공장장이 되었다고 누가 믿겠는가?"

    "누가 믿겠는가?" 이들은 믿어야했다. 소위가 장군을 패배시키고 일용노동자 출신의 시장이 어제의 상전들의 저항을 진압했으며 기름 당번이 수송을 통제하였고 자물통 제조공이 공장장이 되어 산업을 소생시켰다.

    영국의 격언에 따르면 정권의 가장 주요한 임무는 사람을 제 자리에 임명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1917년의 실험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가? 이 해의 첫 2개월은 왕권 계승의 권리에 따라 나라를 통치하기에 부적합하며 성인의 미이라의 신통함을 믿고 라스푸틴에 복종한 짜르가 러시아를 통치했다. 그리고 다음 8개월은 자유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이 정부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인민에게 이렇게 증명시키려고 했다: 모두가 과거의 자리를 그대로 지키기 위해 혁명이 성취되었다. 이런 자들이 움직이는 그림자처럼 아무 흔적도 없이 나라에서 사라진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10월 25일부터 러시아의 정부 수반은 레닌이었다. 러시아 정치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인 그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하는 지를 알고 있는 조수들에 둘러싸였다. 이들의 가장 악질적인 적들조차 이 점을 인정하고 있다. 주어진 구체적 조건 속에서 이 세 체제 가운데 어느 것이 올바른 인물을 올바른 자리에 임명시킬 능력이 있다고 증명되었을까?

    인류의 역사적 상승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자연, 사회, 인간 자신 속의 맹목적 힘에 대한 의식의 연속적 승리라고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는 지금까지는 자연과의 투쟁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물리학과 화학은 이미 인간이 확실히 물질의 주인이 곧 될 수 있는 지점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사회 관계는 아직도 산호섬의 형태처럼 동물적으로 형성되고 있다. 의회주의는 사회의 표면만을 밝혔을 뿐이며 그것도 상당히 인위적인 빛으로 밝혔다. 식인종과 동굴인에게서 물려받은 왕정과 다른 가보들에 비해 민주주의는 물론 위대한 성과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사회 관계에 존재하는 맹목적 힘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다. 10월 혁명이 최초로 손을 들어 작업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무의식의 깊은 영역에서이다. 지금까지 축적된 결과들만이 지배했던 사회의 기초 자체에 소비에트 체제는 목적과 계획을 부여하려한다.

    혁명이 시작된 지 15년이 지난 지금도 러시아는 보편적 복지의 왕국이 결코 아니다. 이 사실에 대해 혁명의 적들은 매우 만족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맹목적인 적대감 때문이 아니라면 사회주의 마술에 대한 지나친 숭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자본주의가 과학과 기술을 절정으로 올려놓아 인류를 전쟁과 위기의 지옥으로 떨어뜨리는데 100년이 걸렸다. 그런데 혁명의 적들은 사회주의에게 15년만 시간을 주고는 지상낙원을 건설하라고 한다. 우리는 이렇게 하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날짜들을 결코 정하지 않는다. 거대한 변화의 과정은 여기에 상응하는 시간의 규모로 측정되어야한다.

    그러나 혁명은 살아있는 인간들을 불행으로 압도하지 않았는가? 내전의 결과 발생한 온갖 유혈사태는 어찌할 것인가? 혁명의 부정적 결과들이 일반적으로 혁명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가? 이 문제제기는 목적론적이기 때문에 소득이 없다. 난관과 개인적 존재의 슬픔에 직면하여 이렇게 묻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태어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인가? 그러나 지금까지 이 질문에 대해 우울하게 생각에 잠기더라도 사람들은 애를 낳았으며 새 생명은 태어났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도 지구상 인구의 극히 적은 비율만이 자살한다. 사람들은 혁명을 통해 참을 수 없는 난관을 헤쳐나갈 길을 찾고 있다.

    사회혁명의 희생자들에 대해 가장 분노하는 자들은 세계대전의 희생자들에 대한 직접 책임이 없을지언정 이 대규모 인간 살상을 준비하고 미화했으며 최소한 이것을 받아들인 바로 그런 자들이다. 이제 우리가 질문할 차례이다: 전쟁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전쟁이 우리에게 준 것은 무엇이며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무엇인가?

    혁명으로 파멸한 러시아 유산계급들은 혁명이 러시아의 문화수준을 하락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을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별 소득이 없을 것이다. 10월 혁명이 타도한 러시아 귀족문화는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서구의 더 고상한 모델을 피상적으로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러시아 인민은 이것을 향유하지도 못했으며 이 문화는 인류의 문화적 보고에 근본적으로 기여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10월 혁명은 새로운 문화의 기초를 놓았다. 모든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즉시 국제적 의의를 획득한 것이 이 새로운 문화이다. 불리한 조건과 적대 세력의 공격으로 소비에트 체제가 일시적으로 타도될 수 있다고 잠시 가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10월 혁명의 지울 수 없는 자취는 인류의 미래 발전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문명국들의 언어는 러시아의 발전과정을 두 시대로 확연히 구분시켰다. 귀족문화가 세상에 짜르, 소수민족 학살, 매질 등의 야만적 단어를 남겼다면 10월 혁명은 볼세비키, 소비에트, 5개년 계획 등과 같은 단어들을 국제적으로 통용시켰다. 노동계급의 혁명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만으로도 노동계급 혁명은 충분히 정당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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