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트로츠키주의자.
17.04.25
조회 수 229
추천 수 1
댓글 0








저자 서문

1917년 첫 2개월 동안 러시아는 여전히 로마노프 왕조의 나라였다. 그러나 8개월 후 볼셰비키들은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1917년이 시작되었을 때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들의 지도자들이 권좌에 올랐을 때 이들은 국가반역죄로 기소된 상태에 있었다. 역사상 이렇게 모든 일이 순식간에 바뀐 경우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1억5천만 인구의 나라에서 이런 일이 있어났다는 것을 기억하면 더욱 그렇다. 1917년의 사건들에 대해 우리의 생각이 어떠하건 이것들을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다른 모든 역사서술과 마찬가지로 혁명역사의 서술은 무엇보다도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매우 불충분하다. 서술을 제대로 하자면 어떤 일이 왜 일어났으며 왜 이렇게만 일이 일어났는지 즉 그 이유와 필연이 명확히 설명되어야 한다. 역사 사건들을 일련의 모험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또 어떤 미리 정해진 도덕률에 따라 꿰어 맞추어서도 안된다. 이것들은 자신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 이 법칙을 밝히는 것이 역사서술자의 임무이다.

역사 사건에 대중이 직접 개입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혁명의 가장 명확한 특징이다. 평상시에는 왕정이든 민주정이든 국가가 인민 위에 군림한다. 그리고 역사는 정치 전문가들 즉 왕, 각료, 관료, 의원, 기자 등에 의해 창조된다. 그러나 대중이 구체제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결정적인 순간이 온다. 그러면 이들은 정치의 각축장에 자신들의 접근을 막는 장벽들을 부순다. 그리고 이것들을 뛰어 넘어 기존의 대표기구들을 쓸어 없애버린다. 그리고 스스로 개입하여 새로운 체제의 기초공사를 시작한다. 이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도덕가들의 판단에 맡겨두자. 다만 우리는 사건의 객관적 과정에 의해 주어진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것이다. 우리에게 혁명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대중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창조하는 영역으로 힘있게 들어서는 역사이다.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사회에서 계급들은 서로 대항하며 투쟁한다. 그러나 혁명의 시작과 끝 사이에 도입되는 사회의 경제적 토대와 계급적 기반의 변화들은 혁명의 전개과정 자체를 설명하는데 충분하지 않다. 혁명은 짧은 시차를 두고 오래된 제도들을 뒤집고 새로운 제도들을 창조한다. 그리고 다시 이것들을 뒤집는다. 혁명 이전에 이미 형성된 계급들의 빠르고 강렬하고 격렬한 심리변화에 의해 혁명 사건들의 원동력이 직접 결정된다.

사회는 자신의 제도들을 기계공이 연장을 바꾸는 방식으로 필요에 따라 바꾸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와 반대로 사회는 자기에게 매달리는 제도들을 영원히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수십 년 동안 진행되는 반체제 세력의 비판은 대중의 불만을 배출시키는 안전밸브에 불과하다. 이것은 사회구조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필요조건이다. 예를 들어 짜르체제에 대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비판이 원칙적으로 이와 같았다. 대중의 불만에 덮어 씌워진 보수주의의 멍에를 벗기고 대중을 봉기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정당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적으로 예외적인 조건들이 성립되어야 한다.

혁명 시기에는 대중의 견해와 정서가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이 변화는 인간 심리의 융통성과 기동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반대로 깊이 뿌리 박힌 보수주의 심리로부터 나온다. 새로운 객관적 상황들이 재앙이 되어 인민의 머리 위로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바로 그 순간까지 인간의 사상과 관계들은 고질적으로 객관적 상황에 뒤쳐져 있다. 바로 이 상황이 혁명 시기에 볼 수 있는 사상과 열정의 폭발적 운동을 창조한다. 이것은 경찰관의 눈에는 "선동가들"의 활동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대한 것을 배후에 깔고 있다.

대중은 사회 재건의 준비된 계획을 가지고 혁명에 돌입하지 않는다. 다만 구체제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날카로운 감각으로 혁명에 돌입할 뿐이다. 계급 대중의 지도적 부위만이 정치 강령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도 혁명의 시험과 대중의 승인을 거쳐야한다. 혁명의 근본적 정치과정은 대중이 사회위기로부터 도출되는 문제들을 서서히 이해하는 데에 있다. 즉 연속적으로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면서 대중이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서는 데에 있다. 혁명의 각 단계들은 지도적 정당들의 변화에 의해서 확인되는데 정당 내의 더 과격한 분파가 항상 덜 과격한 분파를 밀치고 등장한다. 이것은 혁명운동의 파도가 객관적인 장애물에 부딪치지 않는 한 대중이 왼쪽으로 운동을 더욱더 압박하는 현상을 표현한다. 그런데 객관적 장애물이 혁명의 전진을 가로막을 때 반동이 시작된다. 즉 혁명 대중의 다양한 부위들이 상황 전개에 대해 실망감을 표출하고 혁명에 대한 환멸을 증대시킨다. 이와 함께 반혁명 세력의 입지가 강화된다. 최소한 이것이 과거 혁명들의 일반적 경향이다.

대중 자신의 정치적 과정들을 연구한 기초 위에서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당들과 지도자들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혁명과정의 독립적 요인은 아닐지라도 매우 중요한 요인임에 틀림없다. 지도 조직이 없다면 대중의 혁명 에너지는 피스톤 실린더 안에 들어가지 않은 증기처럼 산지사방으로 흩어질 뿐이다. 그러나 역시 원동력은 피스톤이나 실린더가 아니고 증기에게 있듯이 혁명의 원동력은 대중에게서 나온다.

혁명 시대에 나타나는 대중의 의식 변화를 연구하는 데 이런 저런 어려움이 등장한다. 이것은 당연하다. 억압받는 계급들은 공장, 군대의 막사, 농촌의 마을, 도시의 거리 등 관심이 안가는 장소에서 역사를 만든다. 더욱이 이들은 사물들을 글로 적는 일에 전혀 익숙하지가 않다. 사회적 갈등이 높은 시기에는 명상에 잠기고 반성할 여지가 거의 없다. 모든 뮤즈 여신들 특히 언론을 관장하는 인민 성향의 뮤즈 여신은 엉덩이가 튼튼하기는 해도 혁명이라는 썰매의 요동과 충격을 견디기 어렵다. 따라서 격동의 시기에는 글들이 남아나기 힘들다. 그러나 역사가의 상황이 가망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역사 기록들은 불완전하고 흩어져 있으며 우연히 여기저기에 발견된다. 그러나 벌어지는 사건들의 조명을 받아 이 단편적인 기록들은 숨겨진 역사과정의 방향과 리듬을 추측할 수 있게 만든다. 좋든 나쁘든 혁명정당은 대중 의식의 변화를 계산하여 전술을 수립한다. 볼셰비키주의의 역사는 이러한 계산이 거칠게나마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 계산이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는 혁명 지도자에게 가능하다면 혁명이 지난 후 역사가가 이 계산을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대중의 의식이 변화하는 과정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관념주의자들과 절충주의자들이 아무리 소동을 벌인들 의식은 객관적 조건들에 의해 결정된다. 러시아라는 나라, 그 경제와 계급들 그리고 그 국가기구를 형성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그리고 다른 국가들이 러시아에 가한 작용 속에서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의 전제조건들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러시아라는 후진국이 노동계급을 권력의 주인으로 올려놓은 첫 나라라는 사실은 대단히 이해하기 힘들다. 이 때문에 이 후진국의 특이성 즉 이 나라가 다른 나라들과 다른 점들 속에서 이 이해하기 힘든 현상을 해명해야 한다.

본 저서의 첫 몇 장들은 러시아 사회와 그 내부 세력들의 발전과정을 짧게나마 훑어볼 것이다. 이를 통해 러시아의 역사적 특이성과 이 특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상대적 비중이 다루어질 것이다. 이 첫 장들의 불가피한 도식적 서술 때문에 독자들이 이 책을 멀리하지 않기를 감히 희망한다. 본 저서를 계속 읽다 보면 러시아 내부 세력들을 살아 움직이는 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본 저서는 필자 개인의 회상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혁명 과정에 필자가 참여했다 하더라도 엄격히 고증된 문서들에 기초하여 서술해야할 의무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술에 꼭 필요하다면 혁명 참가자인 필자는 제 3인칭으로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문학적 장치만이 아니다. 자서전이나 회고록에 불가피하게 드러나는 주관적 목소리는 역사 저서에는 인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쟁에 참여했다는 사실 때문에 필자는 혁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투쟁에 참여한 세력들의 심리 뿐 아니라 사건들의 내적 관련들을 필자는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그러나 이 혜택은 하나의 조건이 지켜질 때만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사소한 사항이건 중요한 문제이건, 사실과 관련된 문제이건 행위의 동기와 정서의 문제이건, 필자가 자신의 기억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 하나의 조건이다. 필자가 역사서술자라는 임무를 유념하는 한 이 조건이 지켜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필자의 정치적 입장이 또 하나의 문제로 남는다. 그러나 필자는 혁명에 참여했을 때나 역사서술자로 있는 지금이나 똑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독자는 필자의 정치적 견해를 공유할 의무가 없다. 이 점을 필자는 전혀 숨기지 않겠다. 그러나 역사서가 특정 정치적 입장을 옹호해서는 안되며 내적 기초가 탄탄한 혁명의 실제과정에 대한 묘사가 되어야 한다고 독자가 요구할 권리는 없다. 역사서의 지면을 통해 역사 사건들이 완벽한 필연성을 가지고 전개될 때, 이 때만 역사서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소위 역사가의 "중립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중립성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해본 적이 없다. 혁명을 하나의 "덩어리" 즉 전체로 간주해야 한다는 자주 인용되는 끌레망쏘(역자 주: Georges Clemenceau,1841~1929, 프랑스 제 3 공화국의 수상. 1917년부터 1920년까지 수상직에 있었음. 제 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 승리에 기여했으며 전후 베르사이유 조약을 기초함)의 말은 기껏해야 이 문제를 재치 있게 회피할 뿐이다. 각 세력들의 분리와 상호투쟁이 핵심인 혁명이라는 사물을 어떻게 하나의 덩어리로 간주할 수 있는가? 그의 경구는 부분적으로는 너무 주관이 강해 자기주장이 난무하는 역사서를 저술했던 자기 선조들이 부끄러워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선조들의 그늘 앞에서 당혹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현재 프랑스의 반동적 경향의 따라서 인기 있는 역사가 중의 하나가 마들렝(Madelin)이다. 그는 사교계 응접실에서 하는 것처럼 조국의 근대적 탄생을 가져온 프랑스 대혁명을 비방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역사가는 적에게 포위 당한 도시의 성벽 위에 서서 포위 당한 쪽과 포위한 쪽을 동시에 조망해야한다." 오직 이 방식을 통해서만 "화해적인 중립성"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자기가 성벽에 올라서서 두 적대 진영을 바라볼 때 반동세력의 정찰병으로서만 그렇게 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가 과거 전쟁 중인 적대 진영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것은 좋다. 그러나 혁명 시기에는 성벽 위에 올라서 있는 것 자체가 아주 위험하다. 더욱이 상황이 험악하게 돌아갈 경우 "화해적인 중립성"을 주창하는 자들은 보통 방안에 앉아서 어느 쪽이 이기는 지를 기다렸다가 이긴 쪽에 붙는 것이 보통이다.

진지하며 안목이 있는 독자는 이 위험천만한 중립성을 원치 않을 것이다. 이 중립성이라는 놈은 컵 밑바닥에는 반동적 성향의 증오심을 가득 가라앉힌 채 컵의 위쪽 부분에만 화해의 단맛을 가지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놈이다. 현명한 독자는 차라리 과학적 양심을 원할 것이다. 이것은 공감과 적대감을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사실들을 정직하게 연구하고 사실들 사이의 진정한 관련들을 찾아낸다. 그리고 사실들의 움직임을 통해 인과법칙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자의 지지를 구한다. 이것이야말로 유일하게 가능한 역사적 객관주의이며 그 자체로 충분한 역사서술 방식이다. 왜냐하면 역사서술자 자신의 좋은 의도는 자기만이 보증할 수 있는 반면 그의 노력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역사과정 자체의 필연법칙은 모두에게 이 서술방식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본 저서를 위해 동원한 자료는 여러 정기간행물, 신문, 잡지, 회고록, 보고서 등이다. 이것들은 부분적으로는 원고의 형태로 존재하지만 대다수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혁명역사연구소에서 간행한 것들이다. 본문에서 특정 출판물을 일일이 언급하는 것은 독자들을 귀찮게 할뿐이므로 생략했다. 필자가 특별히 자주 사용한 자료 가운데에는 집단적 역사서의 성격을 띤 저서가 있다. 두 권으로 구성된 [10월 혁명사에 대한 시론집](1927년, 모스크바-레닌그라드)이 바로 이것이다. 여러 저자들이 참여한 이 책의 각 부분들은 특별히 귀중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사실관계 자료들을 풍부히 포함하고 있다.

본 저서에 언급된 날짜들은 모두 구력에 의한 것이므로 국제적으로 그리고 현재 소련에서 사용되고 있는 신력보다 13일이 늦다. 혁명 당시에 사용되었던 구력을 사용해야할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에 이런 조치를 취했다. 물론 구력을 신력으로 바꾸는 수고도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수고를 없애는 것 말고도 다른 좀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를 타도한 혁명은 2월 혁명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그러나 신력으로 바꿀 경우 3월 혁명이 된다. 임시정부의 제국주의 정책에 저항한 무장 시위는 "4월 시기"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그러나 신력으로는 5월이 된다. 다른 사건들과 날짜를 제외하더라도 10월 혁명은 신력으로 11월에 일어났다. 다 알고 있듯이 달력이란 역사 사건들로 채색되어있다. 따라서 역사가는 단순한 산수 계산으로 혁명 연표를 다룰 수는 없다. 구력을 타도하기 전에 혁명은 먼저 구력에 집착해 있던 구제도들을 타도해야 했다는 점을 독자들은 선심으로 기억할 것이다.

 

레온 트로츠키

프린키포에서,

1930년 11월 14일.

 

 

제 1장: 러시아 사회 발전의 특이성

 

러시아 역사의 근본적이면서도 가장 일관된 특징은 사회 발전의 느린 속도이다. 이 결과가 경제의 후진성, 사회형태의 원시성, 문화수준의 낙후성으로 나타났다.

이 나라의 광활하고도 거친 대평원은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아시아 민족들의 이동에 자신을 열어주었다. 이 대평원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민족들은 불리한 자연조건에 의한 오랜 후진성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유목민족에 대한 이들의 투쟁은 17세기 끝까지 계속되었다. 겨울 추위와 여름 가뭄을 가져오는 바람에 대해 이들은 아직도 힘겹게 싸우고 있다. 사회 발전의 기초인 농업은 집약농업이 아니라 조방농업으로 발전했다. 북쪽에서 이들은 숲을 베어내고 불태웠으며 남쪽에서는 태초 그대로의 광활한 초원지역을 침입했다. 자연 정복은 깊고 철저히 진행되기보다는 느슨하게 산지사방으로 전개되었다.       

서쪽의 야만 민족들은 로마문화의 폐허 위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는 오래된 수많은 돌이 건축재료로 즉시 이용될 수 있도록 널려있었다. 반면 동쪽의 슬라브족은 황량한 평원에서 문화 유산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차라리 자신들이 만든 문화가 선조의 문화보다 수준이 더 높았다. 서유럽 민족들은 자연이 만든 국경을 인정하고 이 안에서 경제적 문화적 결절점인 상업도시들을 건설했다. 반면에 동쪽 대평원의 민족들은 사람들이 모이는 징조가 나타나는 순간 숲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거나 광활한 초원 위로 퍼져나갔다. 서쪽 농민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부위는 도시민, 수공업자, 상인이 되었다. 동쪽 농민의 적극적이고 대담한 부위는 더러는 상인이 되었으나 대부분은 카자흐(역자 주: 타타르족과 슬라브족의 혼혈 종족. 유목생활을 하며 러시아 제국 시절 반동적 군대를 제공하는 대신 독립적 특권을 일부 누렸다.)와 변방 개척민이 되었다. 서쪽에서는 치열한 사회분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동쪽에서는 이 과정이 지연되거나 국경의 확장에 의해 묽어졌다. 표트르 대제와 동시대인이었던 이탈리아의 비코(Vico)는 이렇게 적었다: “기독교인인 모스크바의 짜르는 머리가 느려터진 민족을 통치하고 있다.” 모스크바 사람들의 “느려터진” 머리는 경제발전의 느린 속도, 사회 발전의 낙후성에 따른 계급 관계의 미분화, 내부 역사발전의 일천함을 반영하였다.

이집트, 인도, 중국의 고대문명들은 생산력이 낮았다. 그러나 공예품의 정교함과 맞먹는 수준으로 사회 관계들을 발전시킬 자족적 특성과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러시아는 지리, 사회, 역사에 있어서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위치했다. 따라서 서유럽 뿐 아니라 동방의 아시아와도 뚜렷이 구분되었다. 그리고 각기 다른 시기에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이면서 한때는 전자에 또 한때는 후자에 접근했다. 동방은 러시아에게 타타르족(역자 주: 칭기즈칸을 따라 동유럽과 서아시아를 침략한 몽고계, 터어키계 유목민족)의 야만성을 멍에로 씌웠다. 이 멍에는 러시아 국가 구조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서방은 동방보다 더 위협적인 적이었으나 동시에 스승이기도 했다. 러시아는 동방의 사회형태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방의 군사적 경제적 압력에 끊임없이 적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역사가들은 러시아에 봉건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후의 연구를 통해 봉건적 관계가 존재했다고 무조건적으로 인정된 것 같다. 더욱이 러시아 봉건제도의 근본 요소들은 서방의 것들과 같았다. 그러나 봉건시대의 존재는 더 많은 과학적 연구에 의해 확립되어야 했다. 이 사실만으로도 러시아 봉건제도의 불충분한 발달, 미분화, 문화적 업적의 빈곤 등이 충분히 입증된다.

후진국은 선진국의 물질적 지적 성과를 흡수한다. 그러나 이 성과를 노예처럼 비굴하게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또한 선진국의 모든 발전 단계들을 그대로 반복하지도 않는다. 비코와 최근 그의 추종자들은 순환적 반복적 역사관을 제창했다. 그러나 이 역사관은 오래된 전(前)자본주의 문화권들의 반복적 순환현상들을 관찰한 결과에 불과하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 발전의 첫 실험들을 관찰한 결과이다. 계속 새로 존재하는 유럽인의 식민지들은 문화적 단계들을 일부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 현상은 문화발전 자체의 지방적이며 일회적인 특성과 긴밀히 결합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런 조건들을 극복한다. 자본주의는 인간 발전의 보편성과 영속성을 준비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실현한다. 이로써 후진국은 선진국의 발전 형태를 반복하지 않는다. 후진국은 선진국을 뒤따르도록 강요당한다. 그러나 선진국과 같은 순서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역사적 후진성의 특권은 진짜 존재한다. 특정 시점에서 최신 성과들을 바로 받아들이면서 후진국은 발전의 중간단계들을 건너뛴다. 야만인은 활을 내던지고 즉시 소총을 무기로 사용한다. 중간단계에 해당하는 무기들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아메리카에 정착한 유럽인들은 처음부터 역사를 다시 시작하지 않았다. 독일과 미국은 영국을 경제적으로 추월했는데 이것은 두 나라가 자본주의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 영국 석탄산업 그리고 맥도널드(역자 주: 영국 노동당 당수로 최초로 영국의 수상이 되었다. 노동운동 내부에서 자본의 부관으로 기능하는 노동조합 관료들의 계급적 이익을 대표하는 서구 개량주의의 시조.)일당의 두뇌는 보수적 무질서를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영국이 너무 오랫동안 자본주의의 선구자였기 때문에 드러난 현상이다. 말하자면 과거의 보복인 셈이다. 후진국의 발전 과정은 역사의 다양하고 개별적인 과정들을 필연적으로 특이하게 결합한다. 이 결과 무계획성, 복잡성, 결합성 등이 일반적 특징으로 드러난다.

물론 중간단계들을 건너뛸 가능성이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 가능성은 장기적으로 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능력에 달려있다. 더욱이 후진국은 자신의 토착 원시문화에 외국문화를 도입하면서 아주 빈번하게 외국문화가 원래 가지고 있던 품질을 떨어뜨린다. 이렇게 흡수과정 자체는 자기 모순적이다. 예를 들어 표트르 대제는 서구의 기술과 훈련의 일부 요소들 특히 군사적 공업적 요소들을 러시아에 도입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러시아 생산조직의 기본 형태인 농노제는 더 강화되었다. 선진문화의 산물이 틀림없는 유럽의 군비와 신용대부는 봉건적 짜르 체제를 강화시켰다. 그리고 이 강화된 체제는 러시아의 발전을 지연시켰다.

역사의 법칙은 현학자의 도식과는 전혀 무관하다. 발전의 불균등성은 역사의 가장 일반적인 법칙이다. 그러나 이것은 후진국의 역사발전에 가장 날카롭고 복잡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외세의 압력에 직면하여 후진국의 문화는 도약을 강요받는다. 따라서 보편 법칙인 발전의 불균등성에서 결합발전(combined development) 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법칙이 따라 나온다. 즉 역사의 각 단계들이 겹치게 되면서 현대적인 형태들이 낡은 형태들과 혼합된다. 이 법칙의 유물론적 내용 전체를 받아들인다면 러시아 또는 이류, 삼류 아니 십류 문화국의 어떤 역사도 이 법칙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러시아는 부강한 유럽 제국의 압력을 받았다. 이 결과 서방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인민의 부를 국가적 목적을 위해 집어삼켰다. 러시아 인민은 이중의 빈곤을 강요당했고 유산 지배계급의 경제 기반은 약화되었다. 러시아 국가는 지배계급의 지지가 필요했으나 동시에 이 계급의 성장을 강제하고 자신의 의지에 복종시켰다. 이 결과 관료적 특권계급들은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었다. 이 결과 러시아는 아시아 전제군주제와 근접하였다. 16세기 초 짜르가 공식 채택한 비잔틴 전제체제는 신 귀족계급의 도움을 받아 봉건 보이야르(역자 주: Boyars, 표트르 대제 이전까지 존재했던 러시아 구 귀족계급)를 제압하였다. 그리고 농민을 국가의 노예로 만들어 신 귀족계급을 제압했다. 그리고 이 기초 위에 뻬쩨르부르그를 수도로 절대주의 제국을 건설했다. 16세기  말에 수립된 농노제는 17세기에 그 형태가 완성되었으며 19세기에 꽃을 피운 후 1861년이 되어서야 법적으로 폐기되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러시아 국가발전의 후진성이 전부 드러난다.

귀족계급 다음으로 성직자계급도 짜르 전제체제를 수립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역할은 비굴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러시아 교회는 서방 카톨릭교회처럼 거대한 절정을 결코 맞지 못했다. 전제체제의 정신적 시녀 역할에 만족한 후 이것을 자신의 겸손함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주교와 대주교들은 세속 권력의 부관이 되어야 그나마 권위를 누릴 수 있었다. 교회의 수장인 대주교는 짜르가 바뀌면서 함께 바뀌었다. 뻬쩨르부르그 시기에 국가에 대한 교회의 종속성은 더 심화되었다. 20만 명에 달하는 신부와 수도승은 실제로는 국가관료집단의 일부가 되어 일종의 복음경찰이 되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교회는 신앙, 토지, 수입 등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그리고 진짜 경찰의 보호를 받아 이것을 방어했다.

슬라브족 애호주의(Slavophilism)는 후진국의 구세주 사상이다. 이 사상은 러시아 인민과 교회는 철저히 민주적인데 러시아 국가기구는 표트르 대제가 강요한 독일 관료주의에 불과하다는 사고에 기초하였다. 이 사상을 맑스는 이렇게 평가했다: “독일의 멍청이들은 프랑스 계몽주의의 감화를 받은 프레드릭 2세의 압제에 대해 프랑스 사람들을 비난했다. 후진국 노예들은 선진국 노예들이 자기들을 훈련시키는 것이 항상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이 짧은 논평은 슬라브족 애호주의자들의 낡아빠진 철학 뿐 아니라 최근 “인종주의자들”의 언행도 완벽하게 논박한다.

상업과 수공예의 중심지인 진정한 중세 도시는 러시아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러시아 봉건시대 뿐 아니라 러시아 역사 전체의 빈곤을 가장 우울하게 표현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수공업은 농업과 분리되지 못한 채 가내공업을 통해 그대로 유지되었다. 러시아의 구 도시들은 상업, 행정, 군사, 장원의 필요에 따라 건설되었다. 따라서 생산 중심지가 아니라 소비 중심지였다. 노브고로트는 한자동맹의 도시와 성격이 같았으며 타타르족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 도시조차 상업도시였을 뿐 공업도시는 아니었다. 넓은 지역에 걸쳐 농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규모의 중개무역업이 정말 필요했다. 그러나 유목민들과 거래하는 상인들이 이 역할을 맡을 수는 없었다. 서방에서는 농촌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던 수공업 길드, 상공업 중소 자본가들이 이 역할을 맡았다. 더욱이 러시아의 주요 무역로는 국경을 넘었다. 따라서 오랜 옛날부터 무역의 주도권은 외국 상업자본에게 있었다. 이 결과 러시아는 일종의 반(半)식민지가 되었고 러시아 무역인들은 서방 도시와 러시아 농촌 사이에 다리를 놓은 중개인에 불과했다. 이런 종류의 경제 관계는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와 더욱 발전하여 제국주의 전쟁에서 그 특징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었다.

러시아 도시의 낮은 비중은 무엇보다도 아시아식 국가기구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봉건관료적 정교회를 부르주아 사회의 요구에 걸맞는 현대화된 기독교로 대체시키는 종교개혁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국가기구에 저항하는 투쟁은 농민 종파들의 선을 넘지 못했는데 구신도(Old Believers) 종파는 이들 가운데 가장 강력했다.

프랑스 대혁명보다 15년 앞서서 러시아 우랄지역에는 카자흐, 농민, 노동자-농노 등의 운동인 푸가초프 반란이 터졌다. 이 위협적인 인민봉기가 혁명으로 전환되려면 상공업 부르주아 계급이 존재해야 했다. 도시 산업에 기초한 민주주의가 지도하지 않는 농민전쟁은 혁명으로 전환될 수 없었다. 이것은 농민 종파가 종교개혁의 절정에 도달할 수 없는 것과 똑같았다. 푸가초프 반란으로 귀족계급의 이익을 지켜주는 관료적 절대주의는 강화되었다. 즉 원래 운동의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위협받는 순간에 구체제는 자신의 정당성을 다시 입증시켰을 뿐이었다.       

표트르 대제가 시작한 러시아의 유럽화는 그 다음 세기에는 더욱더 지배계급 귀족들의 요구가 되었다. 1825년 귀족계급의 지식층은 이 요구를 정치적으로 일반화하면서 짜르의 권한을 제한하는 군사적 음모를 꾸몄다. 유럽 자본주의가 압력을 가하자 존재하지 않는 상공업 부르주아 계급을 진보적 귀족층이 대신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이들은 자유주의 체제를 통해 자신들의 계급지배를 안정시키고 강화시키려 했다. 따라서 농민을 자극하는 것을 가장 무서워했다. 이 결과 군사적 음모는 대중운동으로 확대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뛰어난 능력을 지녔으되 대중으로부터 고립된 군대 장교들의 시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들은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하고 이 시도를 포기했다. 제까브리스트(12월당) 봉기의 의의는 이 정도에 불과했다.   

공장을 소유했던 지주들은 농노제를 임금노동으로 대체하는 것을 찬성한 최초의 지주 분파였다. 러시아산 곡물 수출이 점점 늘어나자 농노제 해체의 흐름이 추진력을 얻었다. 1861년 자유주의 지주층의 지지를 업고 귀족 관료층은 농업개혁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힘없는 자유부르주아 계급이 겸허하게 들러리를 섰다. 짜르 체제는 러시아의 근본문제인 농업문제를 아주 인색하게 도둑놈처럼 해결했다. 다음 10년간 프로이센 왕정이 독일의 근본문제인 국가통일 문제를 해결했던 방식보다 더 짜게 굴었다. 이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어느 계급의 문제를 다른 계급이 대신 해결해주는 경우는 후진국에 늘 있는 결합발전의 한 방식이다.

러시아 공업의 역사와 성격에서 결합발전의 법칙은 가장 의심의 여지없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늦게 시작된 러시아의 공업은 선진국의 발전과정을 반복하지 않고 이 발전과정 자체에 스스로를 투여하여 자신의 후진성에 선진국의 최신 성과들을 접목시켰다. 전반적으로 러시아의 경제 발전은 수공업 길드와 공장제 수공업의 시기를 건너뛰었다. 이와 똑같이 공업의 각 부문들은 서방에서 수십 년이 걸린 기술단계들을 일련의 예외적인 도약들을 통해 건너뛰었다. 이 덕분에 러시아의 공업은 한순간에 예외적으로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1905년 혁명과 제 1차 세계대전 사이에 러시아의 공업생산은 거의 두 배로 늘었다. 이 현상 때문에 러시아 역사가들 일부는 “러시아의 후진성과 느린 발전속도라는 통념을 버려야 한다(저자 주: 포크로프스키 교수가 이렇게 주장했다.)”고 결론 내릴 충분한 근거를 확보한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 이 급속한 성장의 잠재력은 후진성 자체에 있었다. 그리고 이 후진성은 구체제의 청산 직전 뿐 아니라 지금도 유감스럽게 유산으로 남아있다.

일국 차원에서 경제수준의 기본조건은 노동생산성이다. 그런데 이 노동생산성은 나라의 경제 일반에서 차지하는 개별 공업부문들의 상대적 비중에 달려있다. 제 1차 세계대전 전야에 짜르의 러시아는 번영의 정점에 도달했는데 일인당 국민소득은 미국보다 8배에서 10배까지 적었다. 이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러시아에서 경제 인구의 5분의 4는 농업에 종사했다. 반면 미국에서는 농업인구 1인당 공업인구는 2.5인이었다. 그리고 덧붙일 필요가 있는 사실이 더 있다. 제 1차 세계대전 전야에 러시아는 1백 평방킬로미터의 땅에 철도의 길이가 0.4 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독일은 11.7 킬로미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7 킬로미터였다. 다른 비교지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경제분야에서 결합발전 법칙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혁명 직전까지 러시아 농민의 토지경작은 일반적으로 17세기의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공업은 기술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측면에서 선진국의 수준에 도달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선진국들을 추월했다. 100명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한 영세기업은 1914년 미국의 경우 전체 공업인구의 35%를 차지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이 비율은 17.8%에 불과했다. 100명에서 1000명 사이의 노동자를 둔 기업들의 상대적 비중은 두 나라가 동일했다. 그러나 1000명이 넘는 노동자를 둔 거대기업은 미국의 경우 전체 공업인구의 17.8%를, 러시아의 경우 41.4%를 차지했다! 가장 중요한 공업지구의 경우 이 비율은 더 높았다. 뻬쩨르부르그 지구에서 이 수치는 44.4%이었으며 모스크바 지구의 경우 심지어 57.3%까지 되었다. 러시아를 영국이나 독일과 비교해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 필자가 1908년 최초로 확인한 이 사실은 러시아의 경제적 후진성이라는 통념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실은 러시아의 후진성을 부인하기보다 변증법적으로 완성하고 있다.

공업자본과 은행자본의 결합 수준도 역시 러시아가 가장 높았다. 그리고 은행자본이 공업자본을 지배하듯이 서유럽 자본시장은 러시아 공업자본을 지배했다. 금속, 석탄, 석유 등 중공업은 거의 전부 외국 금융자본의 손안에 있었다. 한편 외국 금융자본은 자기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 러시아에 종속적인 중간단계 은행들을 탄생시켰다. 경공업도 같은 처지였다. 외국인들은 일반적으로 러시아 주식의 약 40%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업의 주요부문들에서 이 비율은 더 높았다. 과장이 전혀 없이 러시아의 은행, 공장, 생산설비의 지배적인 주식은 해외에 있었으며 영국, 프랑스, 벨기에는 독일에 비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러시아 주식을 손에 넣고 있었다.   

러시아 자본가 계급의 사회 성격과 정치적 모습은 러시아 공업의 유래와 구조에 의해 결정되었다. 공업의 극단적인 집중도(集重度) 하나만 보아도 이 사실은 확인된다. 이 때문에 자본가 지도층과 대중 사이에는 중간계층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에 덧붙여 주요 공업, 은행, 수송 관련 기업들의 소유주는 외국인이었다. 이들은 투자 이윤을 실현시켰을 뿐 아니라 러시아 의회에 정치적 영향력까지 행사했다. 그래서 러시아 의회체제의 발전을 촉진하기는커녕 저해했다. 프랑스 정부의 부끄러운 짓거리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러시아 자본가계급의 정치적 고립과 반(反)인민적 성격은 근본적으로 이 때문이었다. 러시아 역사의 여명기에 자본가 계급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성취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부르주아 혁명을 주도할 시간이 다가왔으나 너무 늙어서 힘을 쓸 수 없었다.

러시아 사회의 일반적 발전 과정에 조응하여 러시아 노동계급이 배출된 수원지는 공예-길드가 아니라 농업이었으며 도시가 아니라 농촌이었다. 여러 시대를 거쳐 형성된 영국의 노동계급은 전통의 짐을 그대로 지고 다녔다. 반면 러시아 노동계급은 환경, 끈, 관계 등의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과거와 날카롭게 단절하여 도약했다. 짜르 국가의 집중된 억압 때문에 러시아 노동자들은 혁명 사상의 가장 대담한 결론들을 쉽게 받아들였다. 이것은 마치 후진국이 자본주의 생산조직의 최신 발명품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과 똑같았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자신의 일천한 역사를 영원히 반복하고 있었다. 금속산업 특히 뻬쩨르부르그의 경우 세습 노동계급의 한 부위가 형성되면서 농촌과 완전히 단절했다. 그러나 우랄지역에서는 반(半)노동자 반(半)농민이 지배적이었다. 농촌으로부터 모든 공업지구들로 신선한 노동력이 유입되면서 노동계급의 기본 수원지인 농민층은 노동계급과 연대를 계속 새롭게 했다.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무능력은 노동계급 및 농민과의 관계에서 직접 발생했다. 노동계급은 일상생활에서 자본가 계급에게 적대적이었으며 자기 문제를 아주 일찍 일반화하는 법을 배웠다. 당연히 자본가 계급은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지도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자본가계급은 농민도 지도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본가계급은 지주들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으며 어떤 종류든 소유관계의 혁신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에 혁명이 늦게 터진 이유는 사회발전의 느린 속도 뿐 아니라 사회구조에도 존재했다.

영국은 인구가 5백5십만이 넘지 않았을 때 부르주아 청교도 혁명을 완수했다. 그런데 이 가운데 50만이 런던에 거주하고 있었다. 대혁명 시기에 프랑스의 경우 2천5백만 인구 가운데 빠리의 인구는 50만에 불과했다. 20세기초 러시아 인구는 1억5천만이었으며 이 가운데 3백만 이상이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에 살고 있었다. 이 비교 수치에 엄청난 사회적 차이가 숨어있다. 17세기 영국 뿐 아니라 18세기 프랑스에는 현대적 의미로 노동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1905년 러시아의 농촌과 도시의 모든 공업 분야에서 노동계급은 1천만을 넘었다. 여기에 부양가족을 포함시키면 2천5백만이 넘는다. 즉 부르주아 대혁명 시기 프랑스의 전체 인구보다 많았다. 크롬웰 군대의 주축이었던 억센 수공업자와 자영농민, 빠리의 평민, 뻬쩨르부르그의 공업노동자로 이어지면서 혁명은 사회체제, 투쟁 방식, 정치 목표 등을 크게 변화시켰다.

1905년 혁명은 1917년의 두 혁명이었던 2월 및 10월 혁명의 서막이었다. 서막에는 극의 모든 요소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습을 보였을 뿐 실제 연극 과정에 모두 동원되지는 않았다. 러일전쟁은 짜르 체제를 뒤흔들었다. 대중운동을 배경으로 자유부르주아 계급은 짜르 왕정에 반대하여 구체제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노동계급은 자본가 계급에 반대하여 독자적으로 소비에트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역사상 최초로 등장했다. 토지 점거를 목표로 농민봉기가 광활한 러시아 전국에서 일어났다. 농민 뿐 아니라 군대의 혁명적 부위 역시 소비에트를 지지했다. 투쟁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소비에트는 공공연히 짜르와 국가권력을 다투었다. 그러나 이때 모든 혁명세력은 처음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했을 뿐 경험과 자신감이 부족했다. 체제를 뒤흔드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며 그것을 전복시켜야 한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자유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이 혁명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듯이 혁명으로부터 후퇴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인민운동 내에 민주적 지식인들을 상당수 끌고 들어갔었다. 그런데 이 계급이 이제 인민과 자신 사이에 확실한 분리선을 그었다. 이 때문에 짜르는 군대 내에 왕당파 부대들을 혁명파와 분리시켰다. 그리고 이들은 노동자 농민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손쉽게 자행했다. 갈비뼈가 몇 개 부러지기는 했어도 짜르 체제는 1905년 혁명을 겪으면서 생기 있고 튼튼하게 살아남았다.

이 서막과 본격적인 드라마를 가르는 11년의 역사는 계급 역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이 기간동안 짜르 체제는 역사발전의 요구와 더욱 날카롭게 갈등을 일으켰다. 부르주아 계급은 경제적으로 더 강력해졌다. 그러나 알다시피 이 계급의 권력은 공업의 상대적 집중도와 외국 자본의 더욱 강화된 지배력에 기초하고 있었다. 1905년을 교훈 삼아 부르주아 계급은 보수성과 의심증을 더욱 키워갔다. 과거에도 미미했던 중소 부르주아 계급의 상대적 비중은 더 낮아졌다. 일반적으로 말해 민주적 지식층은 사회적 기반을 전혀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었으나 독자적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자유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이 계층의 종속성은 이미 크게 높아져 있었다. 이 상황에서 젊은 노동계급만이 농민에게 강령, 깃발, 지도력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막중한 임무가 부여된 노동계급에게는 한가지 요소가 시급히 필요했다. 인민대중을 혁명으로 금방 나서게 지도할 특별한 혁명조직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905년의 소비에트는 1917년에 거대하게 성장했다. 소비에트는 러시아의 후진성이 낳은 자식일 뿐 아니라 결합발전의 산물이다. 공업이 가장 발전한 독일에서 노동계급이 1918-1919년의 혁명 절정기에 소비에트 이외의 다른 조직형태를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이 점을 입증한다.

1917년 혁명의 시급한 임무는 관료적 짜르 체제의 타도였다. 그러나 과거 부르주아 혁명들과는 달리 이제 혁명의 결정적인 원동력은 집중된 공업의 기초 하에 새로운 조직과 새로운 투쟁방법으로 무장한 새로운 계급이었다. 여기서 결합발전 법칙은 극단적인 형태로 등장한다: 부패한 봉건 국가기구의 타도를 시작으로 하여 몇 달만에 혁명은 노동계급과 공산당을 국가권력의 정점으로 상승시켰다.

애초의 임무를 보았을 때 러시아 혁명은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정치 민주주의의 문제를 새로운 방법으로 제기했다. 노동자들이 병사와 농민을 일부 포함시킨 채 나라 전역에 소비에트를 건설하는 동안 부르주아 계급은 계속해서 물건값을 흥정하고 있었다. 즉 제헌의회 소집 문제를 따지고 있었다. 본 저서를 통해 이 문제는 완전하게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다만 지금은 혁명 사상과 투쟁형태의 역사적 연속과정 속에 소비에트의 위치를 규정하는 것으로 논의를 제한하겠다.

17세기 중엽 영국의 부르주아 혁명은 종교개혁의 외양을 띠고 일어났다. 자기 나름의 기도서에 따라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권리를 갖기 위한 투쟁은 왕, 귀족, 교회의 수장, 로마 카톨릭 교황에 대한 투쟁과 동일시되었다. 장로교도들과 청교도들은 자기의 세속적 이익을 신의 섭리가 흔들림 없이 보호하고 있다고 깊게 확신하고 있었다. 새로운 계급들의 투쟁 목표들은 이들의 의식 속에 성경 구절 그리고 교회에서의 예배방식과 분리될 수 없었다. 신대륙의 이주자들은 피로 봉해진 이 전통을 대서양 건너까지 가지고 갔다. 앵글로-색슨족이 기독교를 해석할 때 뿜어내는 엄청난 박력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성경이라는 마술 책으로 17세기 사람들은 자기 용기를 정당화시켰다. 그런데 똑같은 이 마술 책으로 영국의 “사회주의자” 장관들은 자신들의 비겁함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프랑스는 종교개혁의 물결을 건너뛰었다. 카톨릭교회는 부르주아 혁명 때까지 국가제도로 살아남았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혁명은 성경 본문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추상어를 통해 부르주아 사회건설의 임무를 표현하고 정당화시켰다. 현재 프랑스의 지배자들은 자코벵주의를 대단히 증오하고 있다. 그러나 로베스삐에르의 금욕적인 근엄한 노력 덕분에 이들은 지금도 자신들의 보수적 통치를 구체제를 폭발시켰던 구호인 민주주의로 은폐할 수 있다.  

거대한 혁명들 하나 하나는 부르주아 사회의 새로운 단계를 확정했다. 그리고 사회 계급들의 새로운 의식형태도 탄생시켰다. 프랑스가 종교개혁을 건너 뛴 것과 똑같이 러시아 역시 형식적 민주주의를 건너뛰었다. 자신의 성격을 혁명 시대 전체에 뚜렷이 남기게 될 러시아의 혁명정당은 혁명의 임무를 성경책 또는 “순수” 민주주의라는 세속화된 기독교가 아니라 사회계급의 물질적 관계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소비에트 체제는 이 관계를 가장 단순하게 거짓 없이 투명하게 표현했다. 근로인민의 통치가 역사상 처음으로 소비에트 체제를 통해 실현되었다. 이 체제가 가까운 장래에 겪을 역사적 풍파는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종교개혁이나 순수 민주주의가 당시 대중의 의식에 깊이 새겨진 것처럼 소비에트 체제도 대중의 의식 속에 깊이 새겨졌다.  

 

  제 2장 전시(戰時)의 짜르 체제

러시아가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동기와 목적은 전부 자기 모순적이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근본적으로 세계 지배를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의 범위는 러시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그러나 터어키 해협, 갈리시아, 아르메니아에서 러시아가 벌인 전쟁들은 국지전이었으며 그 목적은 주요 교전국들의 이해에 부응하는 정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달성될 수 있었다.

동시에 러시아는 하나의 강대국으로서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의 싸움에 끼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바로 전까지 상점, 공장, 철도, 자동화기, 비행기 등 서방의 문물을 국내로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똑같았다. 러시아 역사를 연구하는 학파가 최근에 성립했다. 그런데 이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 사이에 빈번하게 논쟁들이 벌어졌다. 이 논쟁들의 쟁점은 러시아가 추진했던 제국주의 팽창정책의 시기적절성 여부이다. 그러나 이 논쟁들은 스콜라주의 식으로 대단히 비현실적이다. 왜냐하면 이 논쟁들은 국제무대에서 러시아를 고립된 독립적 요인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러시아는 세계체제의 고리에 불과했다.

인도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영국의 식민지로 이 전쟁에 참여했다. 중국의 참전은 형식적으로는 “자발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주인들끼리의 싸움에 노예 하나가 끼어 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의 참전 이유는 프랑스와 중국의 참전 이유 사이에 위치했다. 참전을 통해 러시아는 선진 자본주의국가들과 동맹하여 이들의 자본을 수입하고 이자를 지불할 권리를 샀다. 즉 동맹국들로부터 특혜를 받는 자본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터어키, 페르시아, 갈리시아 그리고 일반적으로 자신보다 더 허약하고 후진적인 국가들을 억압하고 강탈할 권리도 함께 샀다. 러시아 자본가 계급의 이중적 제국주의는 자신보다 더 강한 국가들의 하수인이라는 근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의 매판자본가는 민족자본가 계급의 고전적인 유형으로 외국 금융자본과 중국 경제 사이의 중개인이다. 세계 강대국의 순위에서 제 1차 세계대전 전에 러시아는 중국보다 한참 높았다. 전쟁 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러시아의 순위가 어떠했을 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전제 체제와 부르주아 계급은 모두 매판자본주의의 특징들을 더욱 명확히 가지고 있었다. 즉 외국 제국주의 세력과 연줄을 맺어 이들에게 봉사했으며 이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혁명이 승리했기 때문에 이들의 지원을 받고도 살아남지 못했다. 반(半)매판자본의 러시아 자본가 계급은 세계제국주의와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몇 퍼센트의 수수료를 받으면서 고용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하수인과 똑같았다.

전쟁의 도구는 군대이다. 민족 신화에서 군대는 남의 나라 군대에 의해 절대로 정복될 수 없다. 당연히 러시아 지배계급도 짜르 군대를 신화로 포장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군대는 반(半)야만 민족, 이웃 약소국, 붕괴 와중의 나라에 대해서만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럽의 전쟁터에서는 연합 세력의 일부가 될 수 있을 뿐이었다. 이 군대는 광대한 영토, 산산이 흩어져 있는 인구, 다니기 힘든 도로의 도움을 통해서만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농노들로 구성된 이 군대의 거장은 수보로프였다.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군사기술의 시대를 연 프랑스 대혁명은 수보로프 식 군대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농노제의 절반이 폐지되고 국민 징병제가 도입되어 러시아 군대는 현대화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식 현대화에 불과했다. 부르주아 혁명을 아직 완수하지 못한 나라의 온갖 모순들을 군대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짜르 군대가 서구의 모델에 따라 창설되고 무장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도 내용보다는 형식에서 그랬다. 낙후된 농촌문화의 산물인 병사는 현대 군사기술을 습득할 수 없었다. 지휘관들은 지배계급의 무식, 경박성, 거짓 등의 악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시의 요구들이 집중적으로 제기되기도 전에 이들의 무능력은 공업과 수송 분야에서 계속 드러났다. 전쟁 첫날에 군대는 무장을 제대로 갖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기도 신발도 없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러일전쟁은 짜르 군대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1905년 혁명의 패배와 함께 도래한 반혁명 시기에 짜르 왕정은 의회의 도움으로 군대의 창고에 군수품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특히 천하무적이라는 신화에 누더기 깁듯이 여기 저기에서 많은 개선을 이루었다. 그러나 1914년에 이 군대는 새롭고 훨씬 무거운 시험에 직면했다.

군수물자와 자금 면에서 러시아는 동맹국들에게 노예처럼 종속된 존재에 불과하다. 이 사실이 전쟁과 함께 갑자기 드러났다. 이것은 러시아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전반적으로 종속되어 있음을 군사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동맹국들의 지원이 상황을 호전시키지는 않는다. 탄약의 부족, 적은 수의 탄약생산 공장, 탄약수송용으로는 너무도 빈약한 철도망 등으로 러시아의 후진성은 곧바로 패배라는 익숙한 단어로 번역되었다. 전쟁 패배로 러시아 자유부르주아 계급은 선배들이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으며 후배들인 자기들이 역사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전쟁의 첫날은 수모의 첫날이었다. 일련의 부분적인 군사적 재앙 후 1915년 봄에 대규모적인 후퇴가 불가피했다. 장군들은 자신들의 범죄적 무능력을 민간인들에게 전가시켰다. 광활한 토지가 무참하게 황무지로 변했다. 인간 메뚜기 떼가 채찍질을 당해 떼거지로 후방으로 밀려들었다. 겉으로 드러난 대대적인 패배와 후퇴는 곧 심리적인 대규모 패배와 후퇴가 되었다.

동료 장관들이 전선의 상황에 대해 걱정스럽게 질문하자 전쟁 장관 폴리바노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광활해서 건널 수 없는 대평원, 지나다닐 수 없는 진흙탕 도로, 성스러운 러시아의 수호자 성 니콜라스 미를리키스키의 은총을 신뢰할 뿐입니다.”(1915년 8월 4일 회의) 이로부터 일주일 후 루즈키 장군은 같은 장관들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 지금 요구되는 군사 기술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독일군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군대의 일시적 정서가 아니었다. 스탄케비치 장교는 공병대 엔지니어의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독일군과의 대적은 가망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 군대는 어떻게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전술조차 패배의 원인이 될 뿐이다.” 이런 증언은 수없이 많다. 러시아 장군들이 멋을 내며 신나게 했던 유일한 일은 나라의 인적 자원을 시체로 만드는 것이었다. 쇠고기와 돼지고기도 병사의 시체보다는 훨씬 더 경제적으로 처리된다.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직속의 야누슈케비치, 짜르 직속의 알렉세이예프 등 무능한 지휘관들은 새로 동원령을 내려 병사들로 전선의 모든 틈을 메웠다. 그리고 실제 전투력이 있는 병사들이 필요한 경우에는 숫자상의 대단한 병력을 제시하며 자신들과 동맹국들을 위로했다. 약 1천5백만 병사들이 동원되어 신병훈련소, 부대 막사, 병력이동소 등을 꽉 채웠다. 이들은 한 군데에 몰려 있으면서 몸에 도장이 찍히고 옆에 있는 병사들의 발을 밟았다. 그리고 서로 거칠게 굴면서 욕을 퍼부었다. 이 인간의 무리가 전선에서 가상의 규모였다면 후방에서는 진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약 5백5십만 병사들이 전사자, 부상자, 포로로 집계되었다. 탈영병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이미 1915년 7월 장관들은 이렇게 되풀이 외쳤다: “불쌍한 러시아여! 과거에 승리의 포효로 전세계를 호령했던 러시아의 군대조차 ... 겁쟁이와 탈영병의 무리임이 드러났다.”

장관들조차 장군들의 “후퇴할 때의 용감성”에 대해 음흉한 농담을 던졌다. 그리고 키에프에 안치된 성인들의 유골을 이전할 것인지 말 것인지 등 하찮은 문제들을 논의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골 이전 문제에 대해 짜르는 이전이 불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독일군은 유골들을 건드릴 생각을 감히 못할 것이다. 건드리면 자기들만 손해볼 것이다.” 그러나 정교회의 종교회의는 이미 유골 이전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들은 말했다: “우리가 이곳을 버릴 경우, 가장 소중한 것은 가지고 간다.” 이 일화는 십자군 전쟁 때의 일이 아니다. 러시아군의 패배 소식이 무선 전신으로 전해지던 20세기의 일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에 대한 러시아 군대의 승리는 후자보다는 전자에 그 원인이 있었다. 해체되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정은 이미 오래 전에 장의사를 구한다는 간판을 내걸었었다. 장의사의 자격요건은 요구하지도 않았다. 과거에 러시아는 자체 붕괴를 겪고 있던 터어키, 폴란드, 페르시아 등을 패배시켰었다.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군의 남서 전선은 대단한 승리들을 기록하여 다른 전선들과는 매우 달랐다. 이 전선에서 등장한 몇몇 장군들은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당연히 증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패배를 거듭한 지휘관의 숙명주의에 찌들어있었다. 10월 혁명의 승리 후 이어진 내전 시기에 이들 가운데 일부는 백군의 “영웅들”로 모습을 나타냈다.

전쟁 패배의 책임을 물을 인물을 찾느라 모두가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들은 유태인들 전부가 간첩활동을 하고 있다고 싸잡아 비난했으며 독일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사령부는 헌병 대령 미야소예도프를 독일 스파이로 몰아 사형 명령을 내렸다. 물론 그는 독일 스파이가 아니었다. 이들은 속이 빈 칠칠맞은 전쟁 장관 수호믈리노프를 반역죄로 체포했다. 물론 반역죄에 대한 근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국의 외무장관 그레이는 러시아 의회대표단 단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시에 전쟁 장관을 반역죄로 기소한다면 귀하의 정부는 정말 대담합니다.” 총사령부와 의회는 짜르의 내각을 친독파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모두 동맹국들을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증오했다. 프랑스 사령부는 자기 병사들을 아끼기 위해 러시아 병사들을 전투에 투입했다. 영국군은 천천히 전투에 참여했다. 뻬쩨르부르그의 응접실과 전선의 사령부에서는 부드럽게 이런 농담이 나돌았다: “영국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모두 흘리며 싸우겠다고 맹세했다 ... 그런데 이 피는 러시아 병사의 피이다.” 이런 농담들은 군 조직 체계의 아래로 스며들어 전선의 참호에 도달했다. 장관, 의원, 장군, 기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자!” 그러자 참호에 웅크리고 있던 병사들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최후의 피 한 방울은 나의 피를 말하는 것이다.”

전쟁 기간 통틀어 러시아군은 국지전에 참여했던 어떤 군대보다 병력 손실이 컸다. 약 2백5십만 명의 병사가 사망했는데 이 수치는 동맹국 전체 병력 손실의 40%에 해당되었다. 전쟁 첫 몇 달 동안 러시아 병사들은 아무 생각 없이 또는 거의 생각 없이 포화에 희생되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경험은 늘어났다. 이것들은 무식한 지휘관 밑의 하급병사들이 겪는 쓰라린 경험이었다. 이들은 밑창도 없는 신발을 신고 목적도 없는 작전에 투입되거나 저녁 식사를 먹지 못한 횟수를 모두 확인하면서 장군들의 혼란스러운 정신상태를 측정했다. 사람과 사물의 피범벅 속에서 이 상황을 일반화시킨 “엉망진창”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 말은 병사들의 더 생생한 은어로 대체되었다.

농민으로 구성된 보병은 해체 속도가 가장 빨랐다. 일반적으로 공업노동자의 비율이 높은 포병은 혁명 사상을 비교할 수 없이 빠르게 받아들인다. 1905 혁명은 이 점을 입증시켰다. 이와 반대로 1917년에는 포병이 보병보다 혁명사상을 수용하는데 더 보수적이었다. 보병 사단을 통해 마치 채에 걸러지는 모래처럼 경험이 더 미숙하고 덜 훈련된 대중이 스쳐 지나갔다. 바로 이 때문에 보병은 혁명 사상에 더 적극적이었다. 더욱이 포병은 보병보다 전투에서 사상자가 훨씬 더 적었기 때문에 애초의 간부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전문화 부대들에도 똑같은 현상이 목격되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포병도 혁명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갈리시아 전선에서 후퇴하던 중 총사령관의 비밀명령이 떨어졌다: 탈영과 기타 범죄를 저지른 병사들에게 채찍질을 가해라. 피레이코 병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놈들은 가장 하찮은 위반사항에 대해서도 채찍질을 가했다. 허락 없이 몇 시간 자리를 비우는 것이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었다. 때때로 이들은 병사들의 오기를 키우기 위해 채찍질을 가했다.” 1915년 9월 17일에 이미 쿠로파트킨은 그의 글에서 구츠코프의 말을 인용했다: “병사들과 하급장교들은 열성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지쳐있으며 계속되는 후퇴 속에서 승리에 대한 신념을 상실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간에 이 내무장관은 부상에서 회복중인 3만의 병사가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규율이라고는 전혀 없는 난폭한 군중이다. 소동을 일으키고 경찰과 싸우고(최근에 경찰 한 명이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체포된 사람들을 구출하는 등 나쁜 짓을 일삼고 있다. 소요가 발생하면 이들 모두는 당연히 군중과 한패가 될 것이다.” 피레이코 병사는 또 이렇게 적고 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전쟁이 끝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누가 승리할 것이며 어떤 평화조약이 체결될 지는 관심 밖이다. 군대는 무조건 평화를 원했다. 전쟁에 지쳤기 때문이다.”

자원 간호원으로 일하던 관찰력이 예민한 여성 페오도르첸코는 병사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그들의 마음까지 읽었다. 그리고 흩어진 종이쪽지에 꼼꼼하게 그 내용들을 적어 내려갔다. 이렇게 해서 소책자 [전시의 인민]이 출판되었다. 폭탄, 엉킨 철조망, 질식시키는 독가스, 권력자들의 치사스러움 등이 오랜 시간에 걸쳐 수백만 농민의 의식을 형성했다. 또한 인민의 뼈와 함께 낡아빠진 편견들도 삐걱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이 전반적인 분위기를 이 소책자는 잘 묘사하고 있다. 병사들이 직접 생각해낸 수많은 표어들 속에 임박한 혁명의 구호들이 이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1916년 12월 루즈키 장군은 리가(Riga)지구는 북부전선의 불행이라고 불평했다. 이곳은 “드빈스크와 마찬가지로 혁명에 대한 선전활동이 벌집처럼 활발한 곳이다.” 브루쉴로프 장군은 이 점을 확인시켰다: “리가 지구로부터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한 채 도착하고 있다; 병사들은 공격명령을 거부하고 있다. 이들은 한 중대장을 총검 끝으로 들어올렸다. 여러 병사들을 총살시킬 필요가 있었다, 등등.” 장교들과 가까이 접촉했으며 전선을 방문했던 로지안코도 이렇게 인정했다: “혁명 발발 오래 전에 이미 군대의 최종적 붕괴는 시작되고 있었다.”

전쟁 초기에 혁명 분자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흔적도 없이 군대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군대 내의 불만이 일반화되자 이들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체포된 파업노동자들이 전선에 투입되면서 선동가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그리고 전투의 패배와 전선에서의 후퇴로 인해 병사 대중은 이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느 비밀경찰 요원이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후방의 군대 그리고 특히 전방의 군대에는 봉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는 분자들이 가득하다. 이들 외에 다른 병사들도 형벌을 거부할 지도 모른다.” 뻬쩨르부르그주(州)의 헌병 사령부는 토지협회의 대표가 보낸 보고서를 토대로 1916년 10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군대 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장교와 병사의 관계는 대단히 긴장되어 있으며 유혈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다. 도처에 탈영병이 수천 명씩 존재한다. 군대를 밀착하여 관찰한 사람은 누구든지 병사들이 전의를 완벽히 상실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이 보고서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종류의 통신문들은 믿기 어렵지만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역 복무 후 귀환하고 있는 의사들 다수가 이와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후방의 정서는 전방의 정서에 호응했다. 1916년 10월 입헌민주당 회의에서 대의원 다수는 이렇게 언급했다: “모든 계층 그리고 특히 농촌의 마을과 도시빈민들이” 전쟁의 승리에 대해 관심과 신념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1916년 10월 30일 보고서 요약문에서 경찰청장은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전쟁에 지쳐 있으며 무조건적인 조속한 평화가 오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면 의원, 경찰관, 장군, 토지협회 대표, 의사, 전직 헌병 등은 모두 혁명 때문에 군대가 애국심을 상실했다, 볼셰비키들이 확실한 전쟁의 승리를 도둑질해갔다고 주장한다.     

 

입헌민주당은 전쟁 승리를 노래하는 합창단의 의심의 여지없는 주역이었다. 1905년에 혁명과의 의심스러운 유대관계를 재빨리 청산한 자유주의는 이후 반혁명 시기 초기에 제국주의 깃발을 높이 들어올렸다. 매사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부르주아 계급이 사회의 지배권을 확실히 넘겨받으려면 봉건적 쓰레기가 일소되어야한다; 그러나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는 성취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이 상황에서 러시아 자본가 계급이 세계시장의 최고 지위를 보장받으려면 왕정 및 귀족계급과 동맹해야한다. 세계적 차원의 재앙은 여러 곳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따라서 막상 재앙이 닥치자 가장 책임이 큰 당사자들조차 이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짜르의 대외정책에 영감을 제공한 자유주의는 이 재앙을 준비하는데 의심의 여지 없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1914년에 제 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 터지자 러시아의 부르주아 지도자들은 이것을 자기들의 전쟁이라고 크게 환영했다. 이들로서는 이 반응은 당연했다. 1914년 7월 26일 의회의 엄숙한 회기 중 입헌민주당의 의원단 대표는 이렇게 발표했다: “전쟁과 관련하여 어떠한 조건이나 요구사항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적을 정복하려는 확고한 결의를 제창할 뿐이다.” 다른 참전국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도 온 국민의 일치단결은 공식 입장이 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애국심 고취 행사가 열리고 있을 때 사회자 벤켄도르프 백작은 외교관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보라! 베를린에서 터질 것이라고 예언되었던 그대들의 혁명이 여기에서 터지고 있다!” 프랑스 공사 빨레올로그는 설명했다: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 명백하다.” 환상을 절대적으로 배격하는 것 같은 전쟁의 혹독한 상황에서도 이들은 환상을 키우고 전파하는 것이 자기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이 환상에서 깨어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된 직후 입헌민주당 중앙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이때 변호사이자 지주이면서 포용력이 있는 로디초프가 이렇게 외쳤다: “저런 바보들을 데리고 승리할 수 있다고 정말 믿습니까?” 이후 사건들은 바보들과 함께 해서는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증명했다. 자유부르주아 계급은 승리에 대한 신념을 절반 이상 상실했다. 이들은 전쟁 패배의 대세를 이용하여 짜르의 측근파를 숙청하고 짜르와 협상을 강제하려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주요한 도구는 짜르 내각을 친독파로 몰고 이들이 독일과 단독평화조약을 꾸미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었다.

1915년 봄 무기도 지급 받지 못한 러시아 병사들이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고 있었다. 이때 동맹국들의 압력을 받아 정부는 군대의 개선을 위해 개인기업의 창의성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목적을 위해 소집된 특별회의에는 관료들과 영향력 있는 기업가들이 참석했다. 전쟁 초에 등장한 토지 및 자치도시 협회들, 1915년 봄에 설립된 군사-산업 위원회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부르주아 계급의 버팀목이었다. 이런 조직들의 지지를 받은 러시아 의회(두마)는 부르주아 계급과 짜르를 좀더 자신감 있게 중재하도록 부추겨졌다.

그러나 이 광범위한 정치적 전망은 당시 중요한 문제들에 집중된 관심을 분산시키지 못하였다. 중앙저수지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특별회의로부터 수억 그리고 수 십억 루블에 이르는 돈이 산업에 물을 대주고 수없이 많은 욕구들을 채워주었다. 의회와 언론은 1914년과 1915년의 전쟁 이윤을 일부 공개했다. 리아부쉰스키 가문의 모스크바 직물회사는 75%, 트베르 회사는 111%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콜추긴 구리회사는 1천만 루블의 기초자본금에서 1천2백만 루블이 넘는 이윤을 챙겼다. 이 분야에서 애국심을 가진 자들은 후한 보상을 즉시에 누렸다.

시장에 대한 모든 종류의 투기와 도박은 광란의 수준에 육박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엄청난 이윤이 생성되었다. 수도에서는 빵과 연료가 부족했다. 그런데도 궁정 보석상 파베르제는 이렇게 장사가 잘된 적이 없다고 뻐겼다. 그리고 궁정의 시종부인 비루보바는 1915-1916년 겨울에 가장 훌륭한 가운들이 귀부인들을 장식했으며 가장 많은 다이아몬드가 구입되었다고 말한다. 후방의 영웅들, 합법적 도망병들, 전선에 있기에는 너무 늙었으나 삶의 쾌락을 누리기에는 충분히 젊은 품위 있는 인간들로 나이트클럽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재앙이 닥쳤지만 대공들도 이들과 함께 노는 일에는 뒤지지 않았다. 돈을 너무 많이 쓰는 것을 무서워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하늘에서 금이 소낙비처럼 계속 쏟아져 내렸다. “상류사회”는 손과 주머니를 내밀었다. 귀족부인들은 치마를 높이 펼쳤다. 모두 핏빛 진흙탕 속에서 철썩거리고 돌아다녔다. 은행가, 장관, 실업가, 짜르와 대공이 총애하는 발레리나, 정교회의 주교와 대주교, 궁정 시종부인, 자유주의 의원, 전선과 후방의 장군, 급진파 변호사, 저명한 관리, 수많은 조카와 특히 조카딸 등 모두가 한통속으로 돈과 향락을 움켜쥐고 집어삼켰다. 축복 받은 황금 소나기가 멈출 것을 두려워하듯 모두들 날뛰고 있었다. 그리고 때도 되지 않은 평화조약은 부끄러운 짓이라고 이들은 모두 열을 냈다.

공통의 이익, 겉으로 드러난 전쟁의 패배, 국내 정치의 불안정이 내포하는 위험성 등이 지배계급의 파벌들을 단결시켰다. 전쟁 전야에 분열되었던 의회는 1915년 애국심으로 단결한 후 야당을 결성하여 “진보 동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동맹의 공식 목적은 “전쟁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당연히 선언되었다. 좌익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트루도비키(역자 주: 지주에 대항하여 농민의 이익을 옹호한 정당. 그러나 소심한 인민주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이 정당은 자본주의의 철폐를 주창하지는 않았다. 케렌스키가 의회 의원으로 있을 때 소속된 정당이었다.), 우익에서는 흑백인조가 이 동맹에 불참했다. 이들을 제외한 의회 내 모든 정파들 즉 입헌민주당, 진보당, 10월당의 세 그룹, 중앙파, 민족당의 일부 등이 이 동맹에 참여하거나 지지를 표명했다.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회교도인, 유태인 등 민족주의 정파들도 여기에 참여했다. 국민에게 책임지는 내각을 수립하라는 요구로 짜르를 경악시키지 않기 위해 이 동맹은 “국민의 신뢰를 누리는 정치인으로 구성된 단합된 정부”를 요구했다.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쉐르바토프공은 진보 동맹을 “사회혁명의 위험에 직면하여 결성된 일시적 정치연합”이라고 묘사했다. 이 점을 인식하는 데에는 대단한 통찰력이 요구되지 않았다. 입헌민주당 따라서 야당연합의 지도자 밀류코프는 입헌민주당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화산 위를 걸어가고 있다.... 정치적 사회적 긴장은 극단적인 수위에 도달했다.... 무심코 던진 성냥이 끔찍한 대형 화재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정부가 좋든 나쁘든 어느 때보다도 지금은 강력한 정부가 필요하다.”

전쟁 패배의 부담을 안은 짜르가 양보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희망은 너무 컸다. 따라서 8월에 자유주의 신문에는 “국민의 신뢰를 얻는 내각”의 예상 명단이 실렸다. 이 명단에 따르면 의회 의장 로지안코는 수상(다른 신문에는 토지협회 회장 르보프공이 수상이었다), 구츠코프는 내무장관, 밀류코프는 외무장관이었다. 혁명이 일어날까 두려워 이들은 짜르와 정치연합을 체결하기 위해 자신들을 내각에 입각시켰다. 이들 대부분 1년 후 “혁명정부”의 각료로 등장한다. 역사는 두 번 이상 이렇게 기이한 짓을 해왔다. 다만 이번의 경우 역사의 기이한 행위는 너무나 수명이 짧았다.

짜르가 임명한 고레미킨 내각의 장관들 대다수는 입헌민주당 만큼이나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진보 동맹과의 합의를 선호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최고통치자, 군대, 자치도시, 도의회(젬스트보), 귀족, 상인, 노동자 등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정부는 제대로 역할을 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 이런 정부는 명백히 언어도단이다.” 쉐르바토프공은 1915년 8월 자신이 내무장관으로 있던 내각을 이렇게 평가했다. 외무장관 사조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무대장치를 제대로 하더라도 한군데 빈틈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러면 입헌민주당이 맨 먼저 타협안을 들고나올 것이다. 밀류코프는 부르주아 가운데 아마 가장 위대한 인물이고 사회혁명을 무엇보다 두려워한다. 이외에도 입헌민주당원 대다수는 혁명으로 자기 자본이 날아갈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밀류코프 자신은 진보 동맹이 “어느 정도 양보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양측은 협상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으며 모든 것이 철저히 기름칠이 된 것처럼 보였다. 고레미킨 수상은 오랜 세월과 훈장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철저히 저자세를 고수하는 관료였다. 그는 대단한 참을성을 제 1 책략으로 하고 전쟁은 “나의 임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모든 불평들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는 제 2 책략을 가진 늙은 냉소주의자였다. 그는 8월 29일 전쟁 사령부로 짜르를 알현하였다. 그리고 모두가 자기 위치를 찾아야 하며 시끄러운 의회는 9월 3일 해산될 것이라는 내용의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짜르의 의회 해산 포고령이 낭독되자 누구 하나 항의하지 않았다. 의원들은 짜르 “만세”를 부르고 해산했다.

짜르 정부는 스스로 고백했듯이 어느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의회를 해산시킨 후 1년 반을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러시아 군대의 일시적인 승리가 당연히 정세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이 유리한 정세는 황금 소나기로 강화되었다. 물론 전선의 승리는 곧 패배로 바뀌었지만 후방의 이윤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대중의 불만이 크게 분열되어 있었다는 점이 짜르 정부가 유지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었다. 모스크바 비밀경찰국장은 “전쟁이 끝난 후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부르주아 계급이 우경화 했다고 보고했다. 전쟁 중에는 혁명이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군사산업위원회의 일부 지도자들이 노동자들에게 던진 추파”에 대해 자본가들은 무엇보다도 놀랐다.  헌병 대령 마르티노프는 맑스주의 문헌들을 전문적으로 읽어서 뭔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정세가 유리하게 일부 개선된 이유가 “사회계급들의 꾸준한 분화 때문이다. 이것이 계급간의 날카로운 이해관계의 모순을 은폐했다. 이 모순은 특히 지금 강하게 느껴진다.”라고 일반적인 결론을 내렸다.

1915년 9월 짜르의 의회 해산 조치는 노동자가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에게 던져진 단도직입적인 도전장이었다. 이때 자유주의 의원들은 별로 열성적이지 않은 “짜르 만세”를 외치며 항의 한번 하지 않고 스스로 해산했다. 그러나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의 노동자들은 이 조치에 항의하여 파업에 돌입했다. 이것은 썰렁한 자유주의자들을 더욱 썰렁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짜르의 가족회의에 초대받지 않은 제 3자가 끼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러면 짜르에게 만세를 부르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 좌익으로부터 약한 불평을 들은 후 자유주의자들은 자주 사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합법적 영역에만 머물고 애국적 의무만 달성하여 짜르 관료들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든다. 어쨌든 새로운 내각 명단은 당분간 한쪽에 조용히 모셔놓아야 했다.

당시 정세는 자동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1916년 5월 의회는 다시 소집되었다. 그러나 소집의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의회는 혁명을 촉구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회기를 통해 달리 말할 것도 없었다. 로지안코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회기는 힘없이 진행되었다. 의원들은 등원하다가 말기를 반복했다. ... 계속적인 투쟁은 아무 소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는 아무 것도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부정부패는 증대하고 있었다. 나라는 붕괴되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혁명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혁명 외에 이 계급이 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이 때문에 1916년 짜르는 자기가 사회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가을이 되자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전쟁이 전혀 가망이 없음이 모두에게 명백해졌다. 대중의 분노는 어느 순간에든 터져 올라올 것 같았다. 지난번과 같이 짜르 정부를 친독파라고 공격한 후 독자적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할 방안을 모색해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자유주의자들은 생각했다. 진보 동맹의 지도자 프로토포포프 의원은 1916년 가을 스톡홀름에서 독일 외교관 바부르크와 협상에 들어갔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유주의자들의 의중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의회 의원단은 프랑스와 영국을 친선 방문했다. 동맹국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후진국 러시아를 주요한 경제 식민지로 삼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동맹국들은 전쟁을 통해 러시아의 진을 전부 짜내려 했다. 동맹국들의 의중을 자유주의 의원들은 너무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연합국들이 승리하는 동시에 러시아가 패배한다면 러시아는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유산 지배계급은 연합국들과의 너무 가까운 관계를 피하고 독일과의 독자 평화조약 체결을 모색하여 구국의 길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적대관계를 이용해야했다. 프로토포포프와 바부르크의 회담은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 이 회담은 연합국들에게 위협을 가해 양보조치들을 끌어내려는 포석과 독일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포석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프로토포포프는 짜르의 외교관들과 합의하여 행동에 나섰다. 이 회담은 스웨덴 주재 러시아 대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 뿐이 아니었다. 그는 의회 의원단 전원의 동의를 얻었다. 부수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은 이 정찰 행위를 통해 꽤 중요한 국내 정책을 펴고 있었다. 이들은 짜르에게 암시를 보냈다: “우리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슈튀르머(역자 주: 1916년 1월부터 11월까지 짜르 내각의 수상)보다 더 조건도 좋고 믿을만한 단독 평화조약을 이끌어내겠습니다.” 프로토포포프 즉 그를 밀고 있는 세력의 구상은 단순했다: 러시아 정부는 동맹국들에게 전쟁을 끝낼 수밖에 없으며 만약 동맹국들이 평화협상을 거부한다면 러시아 자신이 독일과 단독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다고 “몇 달 전에 미리” 통보한다. 10월 혁명이 성공한 후 스스로 작성한 자백서에서 프로토포포프는 당연히 이렇게 밝혔다: “러시아의 모든 합리적인 사람들 그리고 이들 중 ‘인민자유’당(입헌민주당)의 모든 지도자들도 러시아가 계속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프로토포포프는 협상을 끝내고 귀국한 후 자초지종을 짜르에게 보고했다. 짜르는 독일과의 단독 평화조약에 완전히 공감했다. 다만 그는 자유주의자들을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덧붙이자면 프로토포포프는 진보 동맹과 결별한 후 짜르 친위 세력의 일원이 되었다. 이 멋쟁이 양반은 짜르와 왕후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행보를 취했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아마 내무장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자유주의 진영을 배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토포포프의 배신적 행위는 탐욕, 비겁함, 배신을 특징으로 한 자유주의 대외정책의 일반적 성격을 확인시켰을 뿐이었다.

11월 1일 의회는 다시 소집되었다. 국내 정세는 참을 수 없는 긴장상태에 도달했다. 의회가 중대한 조치를 발표할 것이라고 기대되었다. 뭔가 행동이 필요했다. 아니면 최소한 뭔가 말하는 것이 필요했다. 진보 동맹은 의회에서 짜르의 실정을 폭로해야하는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의사당 의석에서 정부의 주요 조치들을 평가한 후 밀류코프는 조치 하나 하나가 발표될 때마다 이렇게 물었다: “정부의 조치들은 어리석음의 소산인가 아니면 일부러 나라를 망치려는 국가반역 행위인가?” 다른 의원들도 정부의 정책에 거세게 항의했다. 정부의 조치를 옹호하는 의원은 거의 없었다. 이에 대해 정부는 늘 그렇듯이 이렇게 응답했다: 의원들의 연설은 공개가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연설문들은 백만 부 규모로 복사되어 널리 읽혀졌다. 후방 전방 할 것 없이 모든 정부 부서에는 금지된 연설문 복사판이 나돌았다. 그리고 연설문을 복사한 사람에 따라 빈번하게 내용이 덧붙여졌다. 11월 1일 의회의 토론 내용은 전국적으로 그 반향이 너무 커서 연설 당사자들은 후환이 두려워 벌벌 떨었다.

1905년 혁명을 진압한 두르노보의 영감을 받은 강인한 극우 관료 일개 그룹이 이 순간을 이용하여 짜르에게 특별조치를 청원했다. 이 경험이 풍부한 관리들은 진지한 경찰학교에서 훈련받았기 때문에 정세를 멀리까지 내다볼 줄 알았다. 그리고 이들이 청원한 조치들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면 그것은 구체제의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청원자들은 부르주아 자유주의 야당에게 추호도 양보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 흑백인조 극우분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너무 멀리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직에 있는 이 반동들은 흑백인조들의 저속한 생각을 경멸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너무 허약하고 분열되어 있으며 솔직히 말해 너무 별 볼일 없는 인간들이다. 이들의 집권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며 불안한 것”이 문제였다. 이 반동들의 지적에 의하면 주요 야당인 “입헌민주당”의 허약함은 그 이름에 표현되어 있다. 즉 이 정당의 정치 핵심은 부르주아적인데 이름에는 민주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상당한 정도 자유주의 지주들의 정당이기도 하지만 이 정당은 짜르 정부의 의무적 토지보상제(역자 주: 1861년 농노해방령에 의해 농민들에게 일정량의 토지가 유상으로 분배되었다. 농민들에게 분배된 토지를 소유했던 지주들은 국가로부터 금전적인 보상을 받았다.)에 서명했다. 짜르의 친위부대인 이들 비밀 고문관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상징을 사용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남의 카드 한 벌에서 빼낸 트럼프 카드가 아니었다면(즉 짜르의 권위주의 정책이 아니었다면) 입헌민주당은 자유주의 변호사, 교수, 정부의 관리들로 구성된 다수 회원의 협회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가는 이와 다르다고 이들은 지적한다. 이들은 혁명정당들의 의의를 인정하되 분노로 이를 갈면서 인정한다: “혁명 정당들의 위험성과 힘은 이들이 사상, 돈(!), 잘 준비된 조직 대중을 보유하고 있는 데에서 나온다.” 혁명정당들은 “농민의 압도적 다수의 공감을 기대할 수 있다. 농민은 혁명 지도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토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바로 그 순간 노동계급을 뒤따를 것이다.” 이 상황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국민에게 책임지는 내각은 어떤 정책을 취할 것인가? “우익 정당들이 완전하게 파괴될 것이다. 처음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질 중간 정당들(중앙당, 자유보수당, 10월당, 입헌민주당의 진보분파)은 서서히 영향력을 잠식당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운명이 입헌민주당을 위협할 것이다... 그리고 혁명 군중, 꼬뮌, 짜르 왕조의 멸망, 대대적으로 학살되는 유산계급에 뒤이어 마지막으로 농민 산적대가 등장할 것이다.” 여기서 경찰의 분노는 일종의 역사적 비전으로 상승하고 있다.

이들이 제시한 정책의 적극적인 부분은 과거부터 일관되게 존재해왔던 것으로 새로운 내용은 전혀 없었다: 짜르 전제를 가차없이 옹호하는 정부의 수립, 의회의 철폐, 두 수도에 대한 계엄령 선포, 반란 진압군의 편성. 이 정책의 핵심들은 혁명 직전 마지막 몇 달간 정부 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두르노보가 1905년 겨울에 휘두른 권력을 전제로 했을 때만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권력은 1917년 가을쯤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현실을 인식하여 짜르 체제는 몰래 그리고 부분으로 나누어서 인민의 목을 졸라 죽이려했다. 무조건 짜르와 왕후에게 충성을 바치는 “우리 사람들”로 장관들이 바뀌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은 특히 배신자 프로토포포프의 경우 하찮은 인간들에 지나지 않았다. 의회는 철폐되지 않았으나 다시 해산되었다. 뻬쩨르부르그에 대한 계엄령은 유보되어 결국 혁명은 승리했다. 그리고 반란 진압군 자체가 반란에 가담해 버렸다. 이 모든 것이 2개월 또는 3개월 후에 명백해졌다.

이때 자유주의 진영은 상황을 구출하기 위해 최후의 노력을 쏟고 있었다. 참정권을 누리는 부르주아 계급의 모든 조직들은 야당의 11월 의회 연설들을 일련의 새로운 선언문을 통해 지지했다. 이 선언문 가운데 가장 무례한 것은 12월 9일자 자치도시연합의 결의문이었다: “무책임한 범죄자들과 광신도들이 러시아의 패배, 치욕, 그리고 노예화를 준비하고 있다.” 의회는 “국민에게 책임지는 정부가 구성될 때까지 해산하지 말 것”이 촉구되었다. 심지어는 관료집단과 엄청난 재산가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국무회의조차 국민의 신뢰를 얻고 있는 인사들이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귀족연합조차 이와 비슷한 내용을 촉구했다. 즉 이끼가 잔뜩 낀 돌들도 정부 정책을 반대하며 아우성을 부린 셈이었다. 그러나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짜르는 권력의 마지막 남은 쪼가리들을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

주저와 지연 끝에 마지막 의회의 마지막 회기가 1917년 2월 14일에 소집되었다. 혁명 발발 2주일 전이었다. 시위가 예상되었다. 입헌민주당의 기관지 [레치](역자 주: 연설이라는 의미이다)는 시위를 금지하는 뻬쩨르부르그 군단장 하발로프 장군의 담화문과 “암흑 세력”의 “위험하고 나쁜 충고”를 노동자들에게 경고하는 밀류코프의 편지를 실었다. 파업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평화스러운 분위기에서 개원했다. 권력의 문제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는 체하면서 의회는 중요한 그러나 여전히 실무적인 식량 공급 문제에 몰두했다. 로지안코가 나중에 회상했듯이 분위기는 무기력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의회의 무력감과 아무 소득 없는 투쟁에 대한 피로감을 동시에 느꼈다.” 진보 동맹이 “말로 그리고 오직 말로만 행동할 것”이라고 밀류코프는 계속 반복했다. 2월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 의회는 이런 상태였다.

 

제 3장 노동계급과 농민

러시아 노동계급은 전제국가의 정치환경 속에서 정치투쟁의 걸음마를 배웠다. 불법파업, 지하 서클, 불법성명서, 거리 시위, 경찰 및 군대와의 대치 등이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훈련시켰다. 급격히 발전하고 있던 자본주의와 천천히 진지들을 내주고 있는 절대주의가 합동으로 노동자 정치학교를 세워주었다. 거대기업에 의한 노동자의 집중, 격심한 국가탄압, 젊고 패기 넘치는 노동계급의 추진력 등으로 서구에서 대단히 희귀한 정치파업이 러시아에서는 노동자 투쟁의 기본 메뉴가 되었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파업 통계는 러시아 정치사의 매우 인상적인 지표이다. 책의 내용을 통계수치로 도배할 수는 없다. 그러나 1903년부터 1917년까지 러시아에서 발생한 정치파업 통계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단순하게 상황을 드러내는 이 통계는 공장감독 대상기업만 조사대상으로 하고 있다. 농업은 물론이고 철도, 광산, 기계 및 일반 영세기업들은 여러 이유로 인해 통계 대상에서 빠져있다. 그러나 이 결함에도 불구하고 시기별 파업빈도를 나타내는 그래프는 변화가 뚜렷하다.

러시아는 자궁 속에 거대한 혁명이 들어앉아 있는 나라이다. 이 나라의 정치 체온을 잴 수 있는 유일한 그래프가 눈앞에 드러난다. 공장감독 대상기업들이 고용한 노동자의 수는 1905년에는 1백5십만, 1917년에는 2백만이었다. 노동계급의 비중이 이렇게 적은 후진국에서 파업운동은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폭발력을 보인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허약성, 농민운동의 분산성 및 맹목성 때문에 노동계급의 혁명파업은 막 깨어나고 있는 인민이 절대주의 갑옷에 내려치는 철퇴가 된다. 여러 번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를 두 번 파업에 참가한 것으로 계산하면 1905년 정치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는 1백84만3천명이다. 러시아의 정치 역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이 수치를 통해 혁명이 발발한 해를 알 수 있다.

연도        정치파업 참여 노동자 수(단위: 1천명)

1903 ..... 87

1904 ..... 25

1905 ..... 1,843

1906 ..... 651

1907 ..... 540

1908 ..... 93

1909 ..... 8

1910 ..... 4

1911 ..... 8

1912 ..... 550

1913 ..... 502

1914(첫6개월) ..... 1,059

1915 ..... 156

1916 ..... 310

1917(1월과 2월) ..... 575

(저자 주: 1903년과 1904년의 경우는 모든 파업을 의미한다. 당연히 경제파업이 지배적이었다.)

공장감독 기록에 의하면 러일전쟁의 첫해인 1904년에는 전부 합해 겨우 2만5천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했다. 1905년에는 정치파업과 경제파업을 합쳐 2백86만3천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전년에 비해 무려 115배나 많은 수치이다. 이 놀라운 사실 자체는 이렇게 제안한다: 노동계급은 정세의 흐름에 따라 즉흥적으로 그리고 유례없는 혁명활동을 전개할 동력을 가진 계급이다; 이 계급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대오 내에서 투쟁과 거대한 임무의 차원에 적합한 조직을 만들어낸다. 이 조직이 바로 소비에트였다. 소비에트는 1905년 첫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탄생하여 총파업과 국가권력 장악의 기관이 되었다.

1905년 12월 봉기에서 패배한 후 노동계급은 다음 2년간 투쟁의 성과를 방어하는 영웅적인 투쟁을 벌인다. 이 2년은 파업통계가 말해 주듯이 혁명과 직접 관련이 있는 기간이지만 혁명의 퇴조기였다. 파업통계에 의하면 1908년부터 1911년까지는 반혁명이 승리한 시기이다. 반혁명의 승리와 함께 들이닥친 경제위기는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린 노동계급을 탈진상태에 빠뜨린다. 추락의 깊이는 상승의 높이와 대칭을 이룬다. 러시아 사회의 격동은 이 단순한 수치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0년에 시작된 경기호황은 노동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이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1912년부터 1914년까지의 통계는 1905년부터 1907년까지의 통계를 거의 되풀이하고 있으나 흐름은 정반대이다.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곡선이 움직이고 있다. 이제 노동자의 수도 늘어나고 투쟁경험도 쌓였다. 이 새로운 그리고 더 높은 역사의 기초 위에 새로운 혁명공세가 시작된다. 1914년 첫 6개월간의 정치파업 수치는 1905년 혁명 절정기에 기록된 수치에 접근한다. 그러나 전쟁의 발발로 이 과정은 급격히 교란된다. 전쟁 첫 몇 개월간 노동계급은 지배계급의 전쟁 선동에 이렇다할 정치적 대처를 하지 못하고 무기력에 빠진다. 그러나 1915년 봄이 되면 이 증상은 과거지사가 된다. 정치파업의 새로운 순환이 시작되고 이 순환은 1917년 2월 병사와 노동자의 봉기로 절정에 이른다.

대중투쟁의 급격한 하강과 상승 때문에 몇 년이 지난 후 러시아 노동계급은 이전과는 전혀 달라져서 거의 알아볼 수가 없다. 2, 3년 전 만해도 단 한 건의 자의적인 경찰 공격에 대해서도 만장일치로 파업에 돌입하던 공장들이 지금은 완전히 혁명의 색깔을 상실하고 저항 한번 없이 가장 극악한 범죄행위도 참아 넘긴다. 거대한 패배는 상당한 기간 무기력을 초래한다. 의식적인 혁명분자들은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다. 아직도 전부 없어지지 않은 편견과 미신이 다시 살아난다. 이 시기에 농촌 마을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회색 빛 인구가 노동계급의 대오를 희석시킨다. 이때 회의주의자들은 혁명의 불가능성을 확신하며 고개를 젓는다. 회의가 확신으로 변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된다. 1907년부터 1911년까지의 시기가 바로 이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대중은 패배의 심리적 상처를 극복한다. 새로운 정세 또는 새로운 경기의 흐름이 새로운 정치투쟁의 순환을 개시한다. 혁명분자들은 다시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대중을 만난다. 이제 투쟁은 더 높은 차원에서 다시 시작된다.

멘셰비키주의는 혁명의 퇴조기와 반동기에 그 모습을 완성했다. 러시아 노동계급의 두 으뜸가는 정치경향을 이해하려면 이 사실을 유념해야한다. 이 경향은 혁명과 결별한 노동자의 얇은 부위를 주요 정치기반으로 삼았다. 반면에 볼셰비키주의는 반동기에 잔인하게 분쇄된 후 전쟁이 터지기 전 몇 해 동안 새로운 혁명의 파도 위로 급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쉬지 않는 투쟁, 저항, 계속적인 조직활동을 수행할 준비가 된 가장 열성적이며 대담한 분자는 바로 레닌 주위로 결집된 분자, 조직, 인물들이다.” 러시아 경찰청은 이렇게 말하면서 전쟁 전 몇 년간의 볼셰비키 혁명 활동을 개략적으로 묘사했다.

1914년 7월 외교관들이 유럽을 십자가에 매달고 마지막 못을 박아 전쟁의 재앙을 준비하고 있을 때 뻬쩨르부르그는 혁명의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프랑스의 대통령 뿌엥까레는 가두투쟁의 마지막 메아리와 애국주의 시위의 첫 웅성거림이 들리는 가운데 알렉산드르 3세의 무덤에 화환을 증정했다.

전쟁이 없었다면 1912년에서 1914년까지의 대중적 정치공세가 곧바로 짜르 체제의 전복을 가져왔을까? 이 질문에 확신을 가지고 답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불가피하게 혁명은 터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단계들을 거치면서 혁명이 진행되었을까? 혁명이 또 패배하지는 않았을까? 농민을 투쟁으로 인도하고 군대의 공감을 획득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 이런 방향들로는 추측만이 가능하다. 어쨌든 전쟁은 처음에 투쟁을 후퇴시켰다. 그러나 다음 시기에 더욱 강력하게 투쟁을 추진시켜 압도적인 승리를 가능케 했다.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첫 북소리에 혁명운동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투쟁에 좀더 적극적인 노동자들이 전선으로 끌려갔다. 혁명분자들은 공장에서 전선으로 내몰렸다. 파업에 대해 가혹한 벌이 내려졌다. 노동자 신문들은 전부 강제 폐간되었으며 노동조합은 목이 졸렸다. 수십만의 여성, 소년, 농민 등이 공장으로 밀려들어왔다. 제 2 인터내셔널의 정치적 파산과 함께 발발한 전쟁은 정치적으로 노동자들을 대단히 혼란시켰다. 그리고 막 등장한 공장통제위원회(factory administration)가 공장의 이름으로 애국심을 고취시키면서 상당수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좀더 대담하고 결의에 찬 혁명 성향의 노동자들은 침묵을 강요받고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침묵을 강요당한 소규모 혁명서클에서 혁명사상은 아주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 당시 “볼셰비키”라고 자기를 감히 소개하는 노동자는 아무도 없었다. 체포당할 수도 있었으며 후진 노동자들에게 몰매를 맞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회의 볼셰비키 의원단에는 믿을만한 인물들이 별로 없었을 뿐더러 전쟁 발발의 순간에 당의 노선을 선전할 임무를 완수할 수준도 아니었다. 멘셰비키 의원들과 함께 “인민의 문화 복지를 공격하는 세력이 어디서 나타나든 대적하겠다”고 약속하는 선언문을 발표했을 뿐이었다. 이 저자세를 의회는 박수로 환영했다. 레닌은 해외에서 러시아군의 패배와 이로 인한 국내의 혁명을 주창했다(혁명적 패배주의). 그러나 그의 선언을 공개적으로 대변한 당 조직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볼셰비키 가운데 애국주의자의 비율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미했다. 러시아의 전쟁 승리를 주창한 인민주의자나 멘셰비키와는 대조적으로 1914년 볼셰비키는 전쟁에 반대하는 대중 선동을 연설과 유인물로 전개했다. 의회 의원단은 곧 평정을 되찾아 혁명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짜르 정권은 고도로 발달된 비밀경찰 조직을 통해 이들의 활동을 면밀히 추적하고 있었다. 당의 뻬쩨르부르그 위원회 위원 7인 가운데 3인은 전쟁 전야에 비밀경찰에 고용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통해 당시의 상황이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 이렇게 짜르 체제는 혁명운동과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11월에 볼셰비키 의원들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당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1915년 2월 볼셰비키 의원단은 국가반역죄로 재판을 받았다. 기소된 볼셰비키 의원들은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의원단의 이론적 지도자 카메네프는 레닌의 혁명적 패배주의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노선을 가지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중앙위원회 의장 페트로프스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의원들에 대한 중형 선고에 노동자들이 전혀 항의하지 못했다고 경찰청은 만족스럽게 보고했다.

마치 전쟁이 노동계급을 새로 만들어낸 것처럼 보였다. 상당한 정도 이것은 사실이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노동계급의 인적 구성은 거의 40%나 바뀌어 있었다. 혁명활동의 연속성이 갑자기 단절되었다. 볼셰비키 의원단을 포함하여 전쟁 전의 모든 당 조직들은 갑자기 후위로 물러나고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혁명세력의 침묵, 애국주의 함성 그리고 어느 정도 왕당파의 함성 밑에서는 새로운 폭발의 분위기가 서서히 대중 사이에 축적되고 있었다.

1915년 8월 짜르의 장관들은 서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독일을 이롭게 하기 위해 자행되고 있는 국가반역 행위, 배신행위, 태업 등을 모든 곳에서 노동자들이 이 잡듯이 찾아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전선의 패배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찾아내는데 아주 열성적이다.” 당시 대중은 정치현실에 각성하고 있었으며 비판적 시각을 키우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진심으로 그리고 일부는 자기보호를 위한 의도로  “조국 방위” 입장을 채택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출발점에 지나지 않았다. 노동자의 불만은 더욱 골이 깊어졌으며 작업반장, 흑백인조 노동자, 정부의 하수인 등을 침묵시켰다. 그리고 노동자 볼셰비키들이 머리를 들고 대담하게 나서게 했다.

대중은 비판에서 행동으로 나아간다. 이들의 분노는 맨 처음 식량 공급에 대한 항의로 표출되면서 때로는 지역차원의 봉기로까지 상승한다. 공장에서 군복무의 짐을 지고 있는 노동자들보다 여성, 노인, 소년들이 시장이나 광장에서 더 대담하고 독자적인 투쟁으로 나선다. 5월에 모스크바에서는 대중운동이 독일인에 대한 학살로 변질된다. 이 만행을 저지른 자들은 대부분 경찰이 보호하는 도시의 인간쓰레기들이다. 그러나 공업도시 모스크바에서 이런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노동자들이 불만에 찬 소읍의 인민에게 자신의 구호와 규율을 강제할 정도로 충분히 각성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던 식량 공급에 대한 항의투쟁은 전쟁의 최면을 깨고 파업투쟁의 길을 열었다.

미숙련 노동력의 공장 유입과 전쟁 이윤에 대한 탐욕스러운 각축은 모든 곳에서 노동조건의 하락을 가져오고 가장 야만적인 착취방법들을 등장시켰다. 생활비의 증가는 자동적으로 실질 임금을 하락시켰다. 경제파업은 이에 대한 대중의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특히 이 투쟁이 전쟁의 개시로 유보되어왔기 때문에 그 규모는 폭풍우와 같이 거세었다. 파업은 집회, 정치선언문의 채택, 경찰과의 대치 그리고 빈번하게 발포와 희생자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투쟁은 주로 도시중심부의 섬유공업지구에서 일어났다. 6월 5일 경찰은 코스트로마의 방직공들에게 연속해서 발포했다. 4명의 사망자와 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8월 10일 군대는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노동자들에게 발포했다. 16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섬유노동자의 투쟁에 동조하여 지역 대대의 일부 병사들이 참여했다. 이 발포사건에 항의하여 전국 여러 곳에서 항의 파업이 일어났다. 이와 병행하여 경제투쟁이 진행된다. 섬유노동자들이 종종 맨 앞에서 행진한다.

1914년 첫 6개월간의 투쟁에 비교하면 이 운동은 위력과 구호의 명확함에 있어서 큰 후퇴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경험 없는 대중이 투쟁에 나선 반면 지도적 노동자들이 완벽하게 해체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쟁 발발 후 발생한 이 첫 파업투쟁에서 뒤이어질 거대한 투쟁의 메아리를 느낄 수 있다. 법무장관 흐보스토프는 8월 16일 이렇게 말했다: “지금 노동자들이 무장시위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아직 이들이 조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레미킨은 더욱 집약적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노동자 지도부에게는 조직이 없다. 이것이 이들의 문제이다. 볼셰비키 의원 5명의 체포로 조직이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내무장관은 이렇게 덧붙였다: “볼셰비키 의원들을 사면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들은 운동의 중심이므로 가장 위험하다.” 이 인간들은 최소한 누가 진짜 적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

짜르 내각은 극도의 절망감에 빠져 있었으며 자유주의적 양보조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이들은 노동자 혁명의 두뇌 즉 볼셰비키를 강력하게 탄압하는 것이 과거 어느 때만큼이나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때 대부르주아 계급은 멘셰비키와 협조하려 했다. 파업운동의 범위에 놀란 자유주의 기업가들은 선출된 노동자 대표들을 군사산업위원회에 포함시켜 노동자들에게 애국주의 규율을 강제하려했다. 내무장관은 구츠코프가 입안한 이 계획을 반대하기가 아주 어렵다고 불평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모든 일은 애국의 깃발 아래 그리고 국방의 이익에 맞추어 진행되고 있다.” 경찰 역시 사회애국주의자들에 대한 체포를 회피했다.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 파업과 혁명투쟁의 “과도함”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반동의 동조자가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은 어떠한 봉기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비밀경찰은 확신했다. 사회애국주의자들의 영향력에 너무 커다란 신뢰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군사산업위원회 선거에서 정열적인 금속노동자 구보즈데프가 주도한 조국방위주의자들은 소수파로 판명이 났다. 그는 혁명 후 수립된 연립정권에서 노동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조국방위주의자들은 자유부르주아와 관료들의 지지를 받았다. 볼셰비키들이 군사산업위원회 선거 보이코트를 주도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패배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조국방위주의자들은 산업애국주의 기관들의 노동자 대표들을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에게 강요하는데 성공했다. 멘셰비키의 입장은 이 위원회의 기업가들에게 행한 멘셰비키 대표의 연설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관료주의 권력이 물러나도록 요구하고 대신 여러분들이 현재의 사회구조를 물려받아야 한다.” 이 새로운 정치적 유대는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혁명 후에 이 관계는 잘 익은 과실을 가져다줄 것이었다.  

전쟁은 지하혁명운동을 무섭게 황폐화시켰다. 의원단이 체포된 후 볼셰비키당에게는 중앙 집중화된 조직이 하나도 없었다. 지역위원회는 간간이 존재했으나 노동자지구들과의 관계가 종종 끊어졌다. 분산된 그룹, 서클, 고립된 개인들만이 활동했다. 그러나 소생하는 파업운동은 공장에서 이들에게 어느 정도 투쟁의지와 힘을 불어넣었다. 이들은 서서히 서로를 찾아내어 노동자지구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지하운동도 소생했다. 경찰청 문서는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전쟁이 시작된 후 사회민주주의 지하조직의 압도적 다수파였던 레닌주의자들은 뻬쩨르부르그, 모스크바, 하리코프, 키에프, 툴라, 코스트로마, 블라디미르주(州), 사마라 등 중심부에서 전쟁 중지, 정권 타도, 공화국 수립 등을 요구하는 혁명 유인물을 상당 분량 발행해왔다. 그리고 이 혁명 작업은 노동자 파업과 소요사태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었다.”

노동자들의 전통적인 동궁 학살 기념행진은 전년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기념식이 1916년 1월 9일에는 광범위한 파업을 촉발시켰다. 이 해에 파업운동의 규모는 배로 늘었다. 경찰과의 대치는 대규모 장기화 파업에서 일상사가 되었다. 군대와 대치했을 때 노동자들은 눈에 띄게 이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비밀경찰은 이 우려할만한 현상을 두 번 이상 목격했다.

전쟁 산업은 규모가 팽창하면서 주위의 모든 자원들을 집어삼키고 자신의 기초까지 무너뜨렸다. 평화시의 산업들은 소멸하기 시작했다. 모든 계획에도 불구하고 산업에 대한 통제시책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관료집단은 강력한 군사산업위원회의 반대에 맞설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 책임을 자본가에게 넘겨주기도 거부했다. 혼란이 증대했다. 숙련 노동자들은 비숙련 노동자로 대체되었다. 폴란드의 광산과 공장은 독일의 손에 넘어갔다. 전쟁 첫해에 러시아 산업능력의 5분의 1이 사라졌다. 섬유생산의 약 75%를 포함해 무려 국내총생산의 50%가 군대와 전쟁의 필요에 투입되었다. 과부하가 걸린 수송수단은 공장에 필요한 연료와 원자재를 공급할 수 없었다. 전쟁은 경상국민소득 전체를 집어삼켰을 뿐 아니라 나라의 기본 자본재를 심각하게 갉아먹기 시작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에게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 했다. 이 성향은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정부는 늘 그렇듯이 모든 파업에 대해 가혹한 탄압으로 일관했다. 이 모든 것이 노동자의 사고를 특수에서 일반으로 그리고 경제에서 정치로 인도했다: “동시에 파업해야한다.” 이렇게 총파업 사상이 탄생했다. 대중의 급진화 과정은 파업 통계에 가장 설득력 있게 반영되어있다. 1915년에 정치파업 참여 노동자들은 경제파업의 경우보다 2.5배가 적었다. 1916년에는 2배가 적었다. 1917년 첫 몇 달에는 정치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수가 경제파업의 경우보다 6배나 많았다. 뻬쩨르부르그의 역할은 단 하나의 수치에 잘 드러나 있다: 전쟁 기간에 정치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의 72%가 이 도시 출신이다!

이 투쟁의 불길 속에서 낡아빠진 수많은 관념들이 불에 타버린다. “짜르 폐하에 대한 무례함과 공공연한 모욕의 모든 경우를” 법에 따라 처리할 경우 “칙령 103조에 따라 진행될 재판의 수는 유례없이 상승할 것이다”라고 “고통스럽게” 비밀경찰은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대중의 의식은 자신의 행동보다 한참 뒤쳐진다. 전쟁의 끔찍한 압력과 나라의 파괴는 투쟁을 극도로 가속화시킨다. 이 결과 농촌 마을이나 도시의 소부르주아 가족 내에서 갖게 된 수많은 견해와 편견들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은 혁명과 함께 이것들을 뿌리친다. 2월 혁명의 첫 단계에 이 사실은 강하게 그 진실성을 입증한다.

1916년 말이 되면 물가는 급격히 올라간다. 인플레와 수송의 마비에 실제 물건의 품귀현상이 추가되었다. 생필품에 대한 인민의 수요는 이때쯤이면 반으로 줄어들었다. 노동운동의 투쟁 곡선은 급격히 상승한다. 10월에는 투쟁이 결정적인 국면에 이르고 모든 형태의 불만이 하나로 모인다. 뻬쩨르부르그는 2월 혁명의 도약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른다. 공장에서는 집회의 물결이 넘실거린다. 집회의 주제는 식량 공급, 높은 생활비, 전쟁, 정부이다. 볼셰비키 유인물이 배포된다. 정치파업이 시작된다. 즉흥적으로 준비된 시위가 공장 정문에서 시작된다. 일부 공장의 노동자들과 병사들이 서로 동지가 된다. 발트 함대의 혁명적 수병들에 대한 재판이 정치파업의 폭풍을 몰고 온다. 일부 병사들이 경찰에 발포한 사실을 프랑스 대사가 슈튀르머 수상에게 상기시킨다. 슈튀르머는 대사를 진정시킨다: “그런 놈들은 가차없이 없앨 겁니다.” 군사적 임무를 띠고 뻬쩨르부르그 공장에 배치된 상당한 숫자의 노동자들이 전선으로 보내진다. 한 해가 폭풍과 천둥으로 끝난다.

지금과 1905년 상황을 비교하면서 경찰청장 바실리예프는 아주 불안한 결론을 내린다: “반정부 정서는 아주 멀리까지 나아갔다. 위에서 언급한 소요기간 중에 광범위한 대중에게 목격된 어떤 정서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갔다.” 바실리예프는 주둔군에 희망을 걸지 않는다. 심지어는 경찰관들도 완전히 믿을 수 없다. 정보부는 총파업 구호가 소생하고 테러가 소생할 위험성을 보고한다. 전선에서 온 병사와 장교들은 현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무엇을 기다릴 것인가? 이런 저런 놈들을 왜 없애지 못하는가? 우리가 여기 있다면 생각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을텐데,” 등등. 금속노동자 출신이자 볼셰비키 중앙위원인 슐리아프니코프는 당시 노동자들의 신경이 얼마나 날카로운 상태에 있었는지를 이렇게 묘사한다: “때때로 휘파람 또는 어떤 소음이든 충분했다. 노동자들은 이것을 공장을 멈추는 신호로 받아들이곤 했다.” 이 사실은 정치적 증상의 측면에서나 심리적 사실로서나 대단히 중요하다: 혁명은 거리로 나서기 전에 이미 대중의 신경 속에 존재한다.

지방의 주(州)들도 같은 단계를 경과하고 있다. 다만 그 과정이 더딜 뿐이다. 운동의 규모가 커지고 투쟁 의지가 높아감에 따라 투쟁의 중심은 섬유노동자로부터 금속노동자로 경제파업에서 정치파업으로 지방의 주들에서 뻬쩨르부르그로 이동된다. 1917년 첫 몇 달간 정치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의 숫자는 57만5천명으로 이중 대다수는 수도에서 나왔다. 1월 9일 저녁 경찰이 새로 공격에 나섰으나 15만 명의 노동자들은 수도에서 피의 일요일 기념 파업에 돌입했다. 대중의 정서는 긴장되어 있었다. 금속노동자들이 선두에 섰다. 노동자들은 모두 후퇴할 수 없다고 느꼈다. 모든 공장에서 주로 볼셰비키 주위로 적극적인 중핵이 형성되고 있었다. 2월 첫 2주일간 내내 파업과 집회가 계속되었다. 2월 8일 푸틸로프 공장에서 경찰은 “광석 찌꺼기와 낡은 쇠 덩어리의 우박 세례”를 받았다. 의회가 개원하는 14일에는 약 9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모스크바에서도 여러 공장들이 조업을 중지했다. 16일 당국은 뻬쩨르부르그에 빵 배급 카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새로운 조치는 대중의 신경을 거슬렸다. 19일 대부분 여성인 군중이 식료품 상점에 모여서 빵을 요구했다. 하루 후 이 도시의 여러 곳에서 빵집들이 털렸다. 이런 사건들이 바로 며칠 후에 터질 혁명의 소리 없는 번갯불이었다.

러시아 노동계급의 혁명적 대담성은 이들에게만 그 원인이 있지 않았다. 노동계급은 전체 인민의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인민의 막강한 지지가 없었다면 노동계급은 자신의 투쟁에 충분한 넓이를 부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인민의 선두에 설 정도의 충분한 지위를 부여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지지는 농업문제로 인해 노동계급에게 보장되었다.

1861년 농노제의 폐지로 농민은 늦게나마 반 정도의 해방을 누렸다. 이 당시 농업의 생산력 수준은 200년 전과 똑같았다. 농업개혁 과정에서 어느 정도 도난 당하기는 했지만 오랜 전통의 공유지는 보존되었으며 옛날의 경작방식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상황은 자동적으로 농촌의 과잉인구와 격심한 위기를 초래했다. 동시에 이것은 삼포제 농업방식의 위기이기도 했다. 이 상황은 17세기가 아니라 19세기에 발생했다. 즉 발전한 화폐경제가 트랙터만이 부응할 수 있는 요구를 나무쟁기에게 요구한 셈이었다. 이 때문에 농민은 더욱 답답하게 막다른 골목에 갇혔다고 느꼈다. 여기서도 개별적으로 진행되었던 역사의 과정들이 하나로 결합되었으며 이 결과 극단적으로 첨예한 모순을 낳았다. 학식을 갖춘 농학자와 경제학자는 오랜 토지에 합리적인 경작방식을 도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농업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설교해왔다. 즉 이들은 지주, 토지관리인, 짜르를 그대로 둔 채 더 높은 수준의 기술과 문화로 도약할 수 있다고 농민에게 말했다. 그러나 어떤 경제체제도 자신의 가능성들을 소진할 때까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경제체제 가운데 가장 발전속도가 느린 농업경제체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농민은 좀더 집약적인 재배방식으로 전환할 것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이 방식으로 나아가기 전에 농민은 삼포제 농경지를 넓히려는 마지막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도는 당연히 지주 소유의 토지를 농민 소유로 전환시켜야 성공할 수 있었다. 화폐와 시장의 따가운 채찍질을 받으면서 농토의 협소함에 질식하고 있던 농민은 지주를 이번 기회에 아주 확실히 없애려 했다.

1905년 혁명 직전에 유럽 러시아에서 경작 가능한 토지의 총면적은 2억8천만 데시아틴(역자 주: 1 데시아틴은 2.702 영국식 에이커이다.)으로 추산되었다. 이 가운데 공유지는 약 1억4천만 데시아틴이었고 짜르 소유지가 5백만 데시아틴, 교회 소유지가 2백5십만 데시아틴이었다. 개인소유지 가운데 7천만 데시아틴이 3만 명의 대지주 소유였는데 대지주 한 명이 500 데시아틴이 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7천만 데시아틴이 대체로 1천만 농민 가족들의 것이 되었어야 할 농지였다. 이 농지 통계야말로 최종적으로 완벽한 농민전쟁 강령이었다.

1905년 혁명은 지주를 없애지 못했다. 모든 농민들이 들고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농촌운동은 도시운동과 동시에 일어나지 않았다. 농민 병사들은 동요했으며 마침내 봉기 노동자들을 진압할 충분한 병력을 제공했다. 세메노프스키 방위군 연대가 모스크바 봉기를 진압하자마자 짜르는 자신의 전제적 권리와 지주 소유지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러나 패배한 혁명이 농촌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오래된 농지에 대한 국가 보상제도를 철폐하고 넓은 시베리아를 식민지로 개척하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지주들은 소작료에 대해 상당히 양보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토지를 대규모로 팔기 시작했다. 혁명의 이러한 과실들은 부유한 농민의 것이 되었는데 이들은 지주의 농토를 빌리거나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승리한 반혁명이 도입한 가장 주요한 개혁인 1906년 11월 9일의 법은 농민으로부터 자본주의적 농민이 등장할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대다수 농민의 의지에 반하여 소수의 농민에게 공유지의 일부를 개인적으로 소유하도록 허용한 이 법은 공유지에 떨어진 자본주의 포탄이었다. 스톨리핀 수상은 정부 농민정책의 핵심을 “강한 농민을 지지하는 정책”이라고 묘사했다. 이 정책의 핵심은 농민의 상층부가 공유지를 소유하게 만들어 이들이 정부를 지지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농민이 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과제를 제시하는 것은 쉽지만 성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농민문제를 부농 육성문제로 바꿔치기 하려는 시도를 통해 반혁명은 결국 자신의 목을 분질렀다.

1916년 1월 1일까지 250만 자영 농민이 1천7백만 데시아틴의 토지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또 다른 2백만 자영 농민이 1천4백만 데시아틴의 농지를 자기들에게 넘길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로서 개혁이 대대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영 농민 대다수는 자활 능력이 전혀 없었으며 자연도태의 대상에 불과했다. 후진적 지주가 자신의 넓은 토지를 그리고 소농이 조그만 땅뙈기를 파는 상황이 되자 이 토지들을 주로 구입하는 새로운 농민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했다. 농업은 의심의 여지없는 자본주의 호황을 맞았다. 러시아의 농산물 수출액은 1908년 10억 루블에서 1912년 15억 루블로 증가했다. 이것은 농민의 상당수가 노동자가 되고 상층부 농민들이 더욱더 많은 곡물을 시장에 내놓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농민의 전통적 공동체 관계를 대체하기 위해 아주 빠르게 자발적 협동체제가 발전했다. 이 새로운 관계는 몇 년 동안 농민대중 속에 아주 깊이 침투했다. 그리고 즉시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이상향이 되었다. 그러나 협동조합의 진정한 권력은 부농에게만 있었다.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협동체제는 이들의 이익에 봉사했을 뿐이었다. 나로드니크(인민주의) 지식인들은 농민의 협동체제에 자신들의 주요한 역량을 집중시켜 마침내 인민에 대한 사랑을 확고한 부르주아적 방식으로 전환시켰다. 이렇게 해서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반(反)자본주의적” 사회혁명당과 최상의 부르주아 정당인 입헌민주당의 정치연합이 준비되었다.

겉으로는 짜르의 농업정책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자유주의 세력은 농촌공동체를 자본주의적으로 파괴하는 과정을 커다란 희망으로 지켜보았다. 자유주의자 트루베츠코이 공작은 이렇게 적었다: “농촌에는 아주 강력한 소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고 있다. 이 계급의 전체적 모습과 핵심 성격은 단결된 귀족사회 또는 사회주의 몽상이라는 두 이상향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이 멋진 메달은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파괴된 농촌공동체로부터 “아주 강력한 부르주아 계급” 뿐 아니라 대항 세력도 등장했기 때문이다. 생활 유지가 불가능한 토지를 내다 파는 농민의 숫자는 전쟁이 시작될 즈음 1백만에 달했다. 이것은 5백만 이상의 인구가 노동계급으로 합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절대빈곤의 좁은 농토에 붙어있을 수밖에 없는 수백만의 농민거지들이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화약이 되었다. 이 결과 일찍부터 러시아의 부르주아적 발전을 저지했던 농민들 사이에 이 모순들이 계속 재생산되고 있었다. 구(舊)지주의 지지자로 설정된 이 새로운 농촌부르주아 계급은 기본 대중과 대립했다. 구지주들이 인민 전체에 대립한 것과 똑같았다. 이 계급은 짜르 체제를 지지하는 버팀목이 되기 전에 우선 자신들이 정복한 진지를 지킬 자기만의 질서가 필요했다. 이 상황에서 농업문제가 계속해서 의회에서 날카로운 이슈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의회 내 모든 세력은 농업문제가 아직 최종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느꼈다. 농민 출신 의원 페트리첸코는 의회 연단에서 이렇게 선언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오래 논의를 하더라도 새로운 지구를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토지를 양도해야한다.” 이 농민은 볼셰비키도 사회혁명당도 아닌 우익 왕당파 의원이었다.

노동자의 파업운동과 함께 1907년 말에 가라앉았던 농민운동은 1908년 부분적으로 소생했으며 다음 몇 년간 강력하게 성장했다. 물론 투쟁은 상당한 정도 농촌공동체 안으로 이전되었다. 이것이 바로 반동 세력이 정치적으로 바라던 바였다. 공유지를 분할하는 과정에서 농민들 사이에 무장충돌이 빈번히 일어났다. 그러나 지주에 대항하는 투쟁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농민들은 빈번하게 지주의 장원, 수확물, 건초더미에 불을 질렀으며 공동체 농민의 의지에 반해 잘려나간 개인소유 토지도 점령했다.

이 상황에서 전쟁이 터졌다. 정부는 농촌으로부터 약 1천만명의 일꾼과 약 2백만 마리의 말을 가지고 가버렸다. 허약한 자영농민은 더 허약해졌다. 토지에 씨를 뿌릴 수 없는 농민의 수가 늘어났다. 전쟁 발발 2년째가 되자 중농들 역시 파산하기 시작했다. 전쟁에 대한 농민의 적대감은 개월이 지나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1916년 10월 뻬쩨르부르그 헌병국은 이렇게 보고했다: 농촌은 전쟁의 승리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이 보고서는 보험설계사, 교사, 상인 등의 말에 기초하고 있었다. “모두가 기다리면서 이렇게 안달이 나서 묻는다: 언제 이 빌어먹을 전쟁이 끝나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모든 곳에서 정치문제들이 토론되고 있으며 지주와 상인에 대항하는 결의문들이 채택되고 있다. 여러 조직들의 중핵이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불만을 통일적으로 수렴하는 구심은 없다. 그러나 러시아 전역에 매일 매일 늘어나는 협동조합을 통해 농민이 단결할 것이라고 가정할 이유는 있다.” 이 말에는 과장이 섞여있다. 어떤 경우 헌병은 약간 앞서나갔다. 그러나 기본 사항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올바로 보고하고 있었다.

농민들이 자기에게 계산서를 들이밀 것이라고 유산계급은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끔찍한 생각을 몰아냈다. 어쨌든 이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를 희망하였다. 이 주제에 대해 캐묻기 좋아하는 러시아 주재 프랑스 대사 빨레올로그는 전쟁 기간 중에 전농업장관 크리보쉰, 전수상 코코프셰프, 대지주 보브린스키 백작, 의회 의장 로지안코, 대기업가 푸틸로프 그리고 여타 저명인사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 가운데에서 그에게 드러난 사실은 이것이었다: 근본적인 토지개혁을 시행하려면 최소한 15년에 걸쳐 30만 명의 측량사가 동원되어야한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자영농민의 수는 3천만 명으로 늘어날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사전 계산들은 의미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지주, 관리, 은행가의 눈에는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것이 마치 원을 동일 면적의 정사각형으로 만드는 것과 같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학적 엄밀성은 농민과는 완전히 무관했다. 농민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우선 지주들을 몰아내고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 지를 보자.

그러나 전쟁 중에 농촌은 비교적 평온했다. 적극적 분자들이 전선으로 끌려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마다 병사들은 토지문제를 잊지 않았다. 참호 속에서 농민 병사의 미래 계획은 화약냄새로 찌들어있었다. 그러나 총기를 다룰 줄 알고 난 후에도 이 농민 병사들은 혼자 힘으로 자신들만의 농업민주혁명을 결코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도부가 필요했다. 세계역사상 처음으로 농민은 노동자에게서 자신의 지도자를 찾게될 운명이었다. 바로 이점에서 러시아 혁명과 이전의 모든 혁명들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완벽히 차이가 난다.

영국에서는 농노제가 14세기말에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러시아에 농노제가 수립되기 2백년 전 그리고 농노제가 폐지되기 450년 전의 일이다. 한번의 종교개혁과 두 번의 혁명을 통해 농민소유 토지의 몰수과정은 19세기까지 질질 끌었다. 이 나라의 자본주의적 발전은 외부의 압력이 없었다. 따라서 노동계급이 정치투쟁에 눈을 뜨기 훨씬 전에 자영농민을 청산시킬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절대왕정, 귀족계급, 교회 수장들에 대한 투쟁을 통해 다양한 층위의 부르주아 계급이 여러 번에 걸쳐 18세기초까지 급진적인 농업혁명을 완료했다. 이 격변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자영농민은 부르주아 체제의 버팀목이 되었으며 1871년에는 부르주아 계급이 빠리 꼬뮌을 진압하도록 도와주었다.

독일에서는 부르주아 계급이 농업문제를 혁명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입증했다. 그래서 이 계급은 1848년 농민을 배신하여 이들을 지주에게 넘겨주었다. 마치 약 300년 전에 루터가 농민전쟁 중에 농민을 배신하여 이들을 영주들에게 넘겨준 것과 같았다. 반면 19세기 중반에 독일 노동계급은 너무나 허약하여 농민의 지도부가 될 수 없었다. 이 결과 성장할 시간이 영국보다는 짧았지만 독일 자본주의는 미완성 부르주아 혁명을 시발로 발전하면서 농업을 자신의 이익에 종속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얻었다.

러시아의 1861년 농업개혁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무기력한 부르주아 계급의 요구에 따라 귀족과 관료 왕정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 농노해방 조치는 러시아의 강요된 자본주의적 변모와 결합하여 농업문제를 불가피하게 혁명의 문제로 전환시켰다.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은 프랑스 모델, 아니면 덴마크 모델, 아니면 미국식 모델에 따라 농업개혁이 이루어지기를 꿈꾸었다. 어쨌든 러시아 식만 아니면 되었다. 그러나 이 계급은 프랑스 역사나 미국의 사회구조를 제때에 공부하는 일을 게을리 했다. 과거 혁명투쟁의 이력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지식인층은 결정적인 순간에 혁명적 농민이 아니라 자유부르주아 계급과 지주 쪽에 붙었다. 이 상황에서 노동계급만이 농민혁명의 선두에 설 수 있었다.

후진국의 결합발전 법칙에 의하면 후진적인 요소들은 가장 현대적인 요인들과 기이하게 결합한다. 이 법칙은 농업문제에 봉착한 러시아에서 가장 완성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근본적인 수수께끼에 열쇠를 제공했다. 오랜 러시아 역사의 야만적 유산인 농업문제가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해결되었거나 해결될 수 있었다면 러시아 노동계급은 아마 1917년에 국가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비에트 국가체제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완전히 별개인 두 역사 과정 즉 (1) 부르주아 사회발전의 여명기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운동인 농민전쟁과 (2) 부르주아 발전의 쇠퇴를 알리는 노동자 봉기, 이 두 역사 과정이 서로 합쳐지고 침투해야했다. 이것이 바로 1917년 혁명의 핵심내용이다.         

 

제 4장 짜르와 황후

역사를 연구하는 일에 사회 및 역사 분석 대신 전혀 무관한 심리연구가 빈번히 애용되기도 한다. 본 저서는 무엇보다도 이런 경향을 무조건 멀리할 것이다. 대신 역사의 거대한 살아 움직이는 힘이 가장 크게 부각될 것이다. 이 역사의 거대한 동력은 그 성격상 개인의 한계를 초월한다. 짜르 왕정도 이 역사의 동력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 동력은 개인들을 통해 작용한다. 그리고 왕정의 작동원리는 개인과 분리될 수 없다. 역사 발전의 과정 중에 짜르는 혁명과 마주쳤다. 따라서 역사발전의 한 고리인 짜르의 개인적 특성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정당하다. 더욱이 최소한 부분적이나마 짜르 개인의 영역이 끝나고 집단적 역사가 진행되는 부분을 엄밀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종종 이 개인의 영역은 생각보다 훨씬 좁다. 개인의 “특성”은 역사발전의 더 높은 법칙이 개인에게 남긴 흔적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필자는 이 장에서 이 진실을 조명하려고 한다.

니콜라스 2세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거대한 제국은 물론 혁명까지 물려받았다. 그런데 그는 제국은 고사하고 지방의 도나 군을 통치할 자질을 단 하나도 물려받지 못했다. 궁전 대문 앞으로 갈수록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역사의 저 거대한 파도에 대해 이 마지막 로마노프는 멍청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가 살고 있는 시대와 이 시대에 대한 그의 인식 사이에는 투명한 그러나 결코 침투할 수 없는 어떤 매질이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짜르 측근들은 10월 혁명의 승리 후 종종 이렇게 회상했다: 그의 치세 중 가장 비극적 순간은 만주 여순항에서 러시아군이 일본군에게 항복했을 때, 발트 함대가 쓰시마 해협에서 일본 함대의 공격을 받고 침몰했을 때, 이로부터 10년 후 러시아군이 갈리시아 전선에서 후퇴했을 때, 그리고 다시 2년 후 그가 왕좌에서 쫓겨나기 직전 측근들 모두가 침울함, 경악, 충격을 느낀 때였다; 그러나 짜르는 자기 혼자만 평정을 유지했다. 주위에 천둥이 울리고 번갯불이 번쩍거릴 때 그는 평소와 똑같이 자신이 러시아 전역을 순회한 전체 길이를 물었다. 그리고 사냥이나 공식 회의 때에 있었던 일화들을 회상하였고 하루 일과의 사소한 일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를 수행한 어느 장군은 이렇게 물었다: “거의 믿을 수 없는 대단한 절제력, 황태자 시절의 교육, 신이 모든 것을 예정한다는 믿음, 불충분한 상황인식, 이 가운데 무엇이 그를 그렇게 평온하게 만든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질문 속에 이미 반 이상 들어있다. 소위 “황태자 시절의 교육” 즉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단순히 외부에서 강제된 훈련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것의 핵심은 기질적인 무관심, 정신력의 빈곤, 의지력의 허약함이었다. 훈련의 결과라고 일부가 인정했던 짜르의 무관심은 실제로는 그의 타고난 기질이었다.

짜르의 일기는 이 점을 가장 잘 입증하고 있다. 정신적 공허함의 우울한 기록이 매해 매일 일기장을 지겹게 채우고 있다. “산보를 오래 했으며 까마귀 두 마리를 사냥했다. 낮의 햇빛 속에 차를 마셨다.” 산책과 보트 타기. 그리고 다시 까마귀 사냥. 그리고 다시 차 마시기.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의식적 행위라기보다는 생리 작용의 수준에 가깝다. 교회 예식에 대한 회상은 음주 파티와 같은 격조로 기록되고 있다.

의회가 개원을 앞두고 나라 전체가 격동에 휩싸여 있을 때 짜르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4월 14일. 얇은 셔츠를 입고 산보를 나갔고 노젓기도 다시 했다. 발코니에서 차를 마셨다. 스타냐는 우리와 함께 식사와 승마를 즐겼다. 책을 읽었다.” 독서의 주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영국의 감상적 애정소설? 아니면 경찰청의 보고서? “4월 15일. 위테 수상의 사직서를 받다. 마리, 드미트리와 식사를 했다. 이들을 궁전까지 태워주었다.”

의회 해산을 결정하는 날, 자유주의자 클럽은 물론이고 내각도 두려워 벌벌 떨고 있을 때 짜르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7월 7일. 금요일. 아주 바쁜 아침이었다. 관리들과 30분 늦게 아침을 먹었다... 폭풍 때문에 푹푹 찌는 날이었다. 우리는 함께 산보했다. 고레미킨 수상을 영접했다. 의회 해산 포고령에 서명했다! 올가, 페티아와 식사를 했다. 저녁 내내 책을 읽었다.” 의회 해산을 언급한 문장 끝의 감탄부호가 그나마 가장 강렬한 감정 표현이었다. 해산된 의회의 의원들이 세금 납부를 거부할 것을 촉구했다. 일련의 군대 봉기가 스베아보르그, 크론슈타트, 군함 선상, 육군 부대 등에서 일어났다. 고위 관료들에 대한 혁명 테러는 유례없는 규모로 다시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짜르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7월 9일. 일요일. 결국 일이 터졌다! 의회가 오늘 폐쇄되었다. 미사 후 아침식사에 동석한 사람들은 뚜렷하게 침울한 표정이었다.... 날씨는 좋았다. 산보 중에 어제 가치나에서 오신 미샤 숙부를 만났다. 저녁 식사 때까지 그리고 저녁시간 내내 조용히 바빴다. 카누를 타고 노를 저었다.” 그는 카누 위에서 노를 저었다. 이 사항은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저녁시간 내내 무슨 일로 바빴는지는 적혀있지 않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아주 중요한 시기를 그가 어떻게 기술했는지 좀더 살펴보자: “7월 14일. 옷을 입고 해수욕장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 즐겁게 해수욕을 했다.” “7월 15일. 두 번 목욕했다. 날씨가 아주 더웠다. 우리 두 명만 저녁식사를 했다. 폭풍우가 지나갔다.” “7월 19일. 아침에 목욕을 했다. 농장에 갔다. 블라디미르 숙부, 차긴이 우리와 점심을 먹었다.” 봉기와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잘하는 짓이다!” 이외에는 거의 언급이 없다. 평정을 잃지 않는 무관심이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이 무관심은 의식적인 냉소로까지는 결코 나아가지 못했다.

“오전 9시 30분 카스피 연대 막사로 말을 타고 갔다... 산보를 오래 했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해수욕을 했다. 차를 마신 후 르보프공과 구츠코프를 영접했다.” 두 자유주의자들을 예상치 않게 영접한 것은 스톨리핀이 야당 지도자들을 내각에 참여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미래 임시정부의 수반이 될 르보프공은 이 알현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슬픔에 잠긴 국왕이 우리를 맞이할 것을 예상했었다. 그러나 그는 짙은 자주색 셔츠를 입은 채 즐겁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짜르의 시각은 하급 경찰관의 시각보다 나은 것이 조금도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후자는 현실감이 더 뛰어났으며 미신에 덜 짓눌렸을 것이라는 점뿐이었다. 몇 년간 니콜라스가 구독하여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받았던 유일한 신문은 국가예산으로 메슈체르스키공이 발행한 주간지였다. 그는 비열하고 뇌물을 받는 언론인으로 반동 관료 파벌에 속했다. 그는 자기 집단에서도 경멸의 대상이었다. 두 번의 전쟁과 두 번의 혁명을 거치면서도 짜르의 시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의 의식과 사건들 사이에는 항상 무관심이라는 매질이 채워져 있었다. 그는 숙명론자로 인식되었는데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숙명주의는 자기 “별자리”에 대한 적극적 신념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진정 자신을 운이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숙명주의는 역사발전에 저항하여 수동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태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의 자의적 성격과 함께 했다. 그런데 그의 자의적 성격은 심리적 동기로는 하찮으나 그 결과는 엄청났다. 위테 백작은 이렇게 적었다: “--나는 그것을 원한다. 따라서 그것은 존재해야한다.-- 이 표어는 이 허약한 통치자의 모든 활동 속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치세의 특징은 죄 없는 피가 목적 없이 대단히 많이 흘려진 것이었다. 이 모든 일들은 오직 그의 나약함 때문이었다.”

니콜라스는 때때로 그의 반미치광이 고조부 바울과 비교된다. “축복받은” 아들 알렉산드르와 내통한 친위 세력에 의해 바울은 목 졸려 살해되었다.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를 불신하는 경향, 전능한 권력을 쥐고 있으나 능력이 없는 사람의 특징인 예민한 감성, 자포자기, 소위 천민 취급을 당하는 왕이라는 자의식 등에서 이 두 로마노프는 똑같았다. 그러나 바울은 니콜라스와 비교할 수 없이 화려한 인물이었다. 아무리 무책임해도 그의 호언장담에는 기발한 상상력이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스에게는 모든 것이 흐릿했다. 날카로운 구석은 전혀 없었다.

그는 불안감 뿐 아니라 배신적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아첨꾼들은 그가 신하들을 부드럽게 다루었기 때문에 그를 주술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짜르는 해고하기로 결심한 관리들에게만 특별한 애정을 베풀었다. 총애를 받은 장관은 귀가하여 자신의 사직을 요청하는 편지를 받고는 했다. 자신의 무능과 미미한 영향력에 대해 짜르는 이런 식으로 복수했다.

재능 있는 인물과 출중한 모든 것에 대해 그는 차가운 적대감으로 대했다. 완전히 평범하고 머리가 빈 사람, 성자 같은 탁발승, 성자 등 자기처럼 무능한 인물들과 같이 있을 때만 그는 안심이 되었다. 그는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상당히 날카로운 종류의 자부심이었다. 다만 이것은 조금의 자발성도 없는 수동적인 것으로 시기심과 자기방어의 성격이 강했다. 그는 계속해서 전임자보다 무능한 신임장관으로 내각을 교체했다. 두뇌와 패기를 가진 인물은 사면초가의 위기와 같은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불렀다. 마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외과의사를 부르는 것과 똑같았다. 위테 그리고 나중에 스톨리핀을 임명했을 때가 바로 이런 경우였다. 짜르는 어설프게 감춘 적대감으로 이 두 인물을 대했다. 그리고 위기가 사라지면 곧바로 자기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유한 두 수상들을 서둘러 해임했다. 그가 신임 장관을 선택하는 과정은 너무도 체계적이었다. 짜르 치하 마지막 의회 의장 로지안코는 혁명이 이미 문을 두드리고 있던 1917년 1월 7일 짜르에게 감히 이렇게 말했다: “폐하, 폐하 주위에 믿을만한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은 모두 제거되었거나 은퇴했습니다. 이제 평판이 좋지 않은 자들만 남았습니다.”

짜르 내각과 공통의 언어를 찾으려는 자유부르주아 계급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지치지 않고 항상 시끄러운 로지안코는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 짜르를 뒤흔들어보려고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짜르는 주장이나 무례함에 대해서는 응답을 하지 않고 조용히 의회를 해산할 준비를 했다. 한때 짜르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후 라스푸틴 살해사건의 공범이었던 드미트리 대공은 자기 동료인 유수포프공에게 이렇게 불평했다: 총사령부에 있으면서 짜르는 시간이 지날수록 주위 사람들에게 더 무관심했다. 누군가가 짜르에게 정신능력을 마비시키는 마약을 먹이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유주의 역사학자 밀류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마시는 술의 양을 계속 늘리면서 짜르는 정신적 도덕적 냉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것은 모두 상상이나 과장에 지나지 않았다. 짜르에게는 마약이 필요 없었다. 그의 피에는 치명적인 “마약”이 이미 녹아 있었다. 그의 증상은 혁명 직전의 전쟁과 내치의 위기 등 거대한 사건들 때문에 특히 두드러지게 보일 뿐이었다. 일종의 심리치료사였던 라스푸틴은 짜르가 “속이 텅 비었다”고 짤막하게 말한 바 있었다.

더욱이 이 둔하고 평온하고 “교육을 잘 받은” 인간인 짜르는 잔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잔인성은 역사적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반 뇌제나 표트르 대제가 보였던 적극적 잔인성이 아니었다. 니콜라스 2세는 이들처럼 역사적 목표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의 잔인성은 역사의 무대에서 한참 늦게 태어나 자신이 멸망할 것을 두려워하는 비겁한 잔인성에 지나지 않았다. 짜르가 되자마자 니콜라스는 노동자들에게 발포한 파나고리치 연대를 “멋진 사람들”이라고 칭찬했다. 단발 여학생을 채찍질하는 방법과 유태인 학살 때 자기방어력이 없는 유태인의 머리를 깨는 방법이 실린 책을 그는 항상 “만족스럽게 읽었다.” 검은 양처럼 마음이 악한 이 왕은 영혼을 다 바쳐 인간 쓰레기의 대명사인 흑백인조 깡패들을 가까이 했다. 국가 예산으로 이들에게 돈을 듬뿍 주었을 뿐 아니라 이들의 무용담을 즐겨 들었다. 이들 중 누가 야당 의원 살해에 우연히 연루되면 사면조치를 내렸다. 1905년 혁명 때 정부를 대표해 앞장서서 혁명을 진압했던 위테는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흑백인조 우두머리들의 쓸데없는 잔인한 기행의 소식을 듣자 짜르는 이들의 행위를 승인하거나 옹호했다.” 발트해 연안국의 어느 총독은 “저항하지 않는 사람들을 재판 없이 마음대로 처형하는” 리히터라는 이름의 중위가 저지른 만행을 자신이 중지시킬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짜르는 그가 올린 보고서 여백에 “참으로 멋진 인물이군!”이라고 적었다. 잔악 행위에 대한 이런 식의 격려사를 그는 수없이 남발했다. 의지, 목적, 상상력 중 어느 하나도 갖추지 못한 이 “주술사”는 고대와 현대의 어떤 폭군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인간이었다.  

한편 왕후는 짜르에게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어려움이 많아질수록 이 영향력은 도를 더했다. 짜르와 왕후는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 부부의 결속도는 상황의 압박을 받을 경우 개인이 집단에 의해 어느 정도 보완되는 가를 잘 보여준다. 그러면 먼저 왕후에 대해서 살펴보자.

전쟁 기간 중 프랑스의 러시아 대사 모리스 빨레올로그는 뻬쩨르부르그에 있었다. 그는 프랑스의 학자들과 시종부인들에게 세련된 심리치료를 베풀었다. 그는 러시아의 마지막 왕후를 이렇게 치밀하게 묘사했다: “도덕적 불안감, 고질적인 우수, 무한한 동경, 간간이 드러나는 기복이 심한 활력, 저승에 대한 고뇌의 상념, 미신에 대한 집착 등은 왕후에게 명확히 드러나는 특성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러시아인의 특징이 아닌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이 사카린같이 달콤한 거짓말 속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발트해 연안국의 호족 출신으로 러시아의 장관과 주지사가 된 인물들에 대해 러시아의 풍자가 살티코프는 “러시아의 영혼을 가진 독일인”이라고 말했다. 이 표현에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러시아 인민과 조금의 유대감도 없는 외국인들이 “진정한 러시아” 행정관의 가장 순수한 교양을 구비하고 있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다.

그런데 빨레올로그의 말대로 러시아의 정신을 그렇게도 완벽하게 자기 것으로 동화시킨 왕후를 왜 러시아 인민은 그렇게 공공연히 증오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자신의 새로운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독일 여성은 일종의 냉정한 분노로 러시아 봉건시대의 모든 전통과 뉘앙스를 흡수했다. 그런데 러시아 봉건시대는 모든 봉건체제 가운데 문화적으로 가장 빈약하고 조야했으며 러시아 인민은 이 봉건체제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었다. 따라서 독일 헤센주(州) 출신의 이 공주는 문자 그대로 전제의 악마에게 혼을 빼앗긴 셈이었다. 독일의 벽촌에서 살다가 비잔틴 전제의 정점에 올라선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정점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자신의 새로운 운명에 적합한 신비주의와 마술을 찾아냈다. 구체제의 해악이 노골적으로 드러날수록 그녀는 자신의 소명을 더욱 고지식하게 믿었다. 그녀는 강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감정을 격앙시켰다. 이 결과 그녀는 의지가 박약한 짜르를 보완하고 지배했다.

혁명이 터지기 1년 전인 1916년 3월 17일, 고문을 당한 것처럼 격렬한 고통을 겪고 있던 러시아가 패배와 파멸의 구렁텅이 속에서 몸을 비틀고 있을 때 황후는 총사령부의 짜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관용, 책임 내각 등 ... 또는 그들이 원하는 어떤 것도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의회가 아니라 폐하의 전쟁, 폐하의 평화조약, 폐하의 명예 그리고 조국의 명예가 되어야 합니다. 의회는 이 문제들에 대해 발언할 권리가 조금도 없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대단히 철저한 정치 강령이었다. 이렇게 그녀는 계속 동요하는 짜르에게 채찍질을 가했다.

니콜라스가 허수아비 총사령관의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총사령부로 출발한 후 왕비는 공공연히 내정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장관들은 마치 그녀가 섭정인 것처럼 그녀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녀는 의회, 장관들, 총사령부 장군들, 전세계 그리고 어느 정도는 짜르에게까지 맞서서 짜르의 소수 친위 세력과 음모를 꾸몄다. 1916년 12월 6일 왕후는 짜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 폐하는 프로토포포프를 유임시키고 싶다고 언젠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트레포프 수상이 어떻게 폐하의 뜻을 거스를 수 있습니까? 탁자를 주먹으로 치세요. 굴복하면 안됩니다. 보스가 되어야 합니다. 폐하의 굳건하고 귀여운 왕후와 우리 친구 라스푸틴의 말에 복종하세요. 우리를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3일 후에 다시 편지를 보냈다: “폐하가 옳다는 것을 폐하는 아십니다. 머리를 높이 쳐드세요. 트레포프와 함께 일하려면 그에게 명령을 내려야 합니다....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세요.” 이런 말들은 지어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진본으로 증명된 편지들의 내용이다. 더욱이 이런 말들을 누가 지어내기는 힘들다.

12월 13일 왕후는 짜르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책임 내각에 대해 모두가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허용될 수 없습니다. 매사가 조용해지고 개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백성들은 폐하의 손길을 원합니다. 여러 해 동안 백성들은 저에게 똑같은 말을 해왔습니다: ‘러시아는 채찍의 맛을 느끼고 싶다.’ 이것이 그들의 본성입니다!” 영국의왕조인 윈저(Windsor)가문의 교육을 받았으며 비잔틴 왕후의 관을 머리에 쓴 이 정통 헤센 여자는 러시아 정신의 “화신”이면서 동시에 천성적으로 이것을 경멸하고 있다. 왕정이 붕괴의 나락으로 추락하기 꼭 2개월 15일 전에 이 여자는 짜르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러시아 인민의 본성은 채찍질을 원합니다.            

성격의 강인함과는 대조적으로 왕후의 지적 능력은 남편보다 더 낮았다. 그녀는 멍청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짜르보다 더 좋아했다. 짜르 부부는 그들의 시종부인인 비루보바와 가까우면서도 오랜 친분을 유지했다. 이것은 짜르 부부의 정신적 수준을 어느 정도 가늠하게 해준다. 비루보바는 자신을 바보라고 묘사했다. 이것은 겸손함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사물을 정확한 보는 눈을 가진 위테는 “대단히 평범한, 어리석은, 뻬쩨르부르그의 젊은 여자이다. 비스킷 반죽의 거품만큼이나 하잘 것 없는 존재”라고 그녀를 묘사했다. 나이 많은 관료들과 대사들과 은행가들은 아양떨면서 그녀와 놀아났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기 호주머니에 들어올 돈은 잊지 않는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수준의 여자와 짜르 부부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런 저런 일들에 대해 그녀의 의견을 묻고,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그녀를 언급하는 편지를 썼다. 비루보바는 의회 심지어는 내각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짜르 부부에게 행사했다.

그러나 비루보바 자신도 “친구”의 도구에 불과했다. 그의 권위는 그녀와 짜르 부부를 모두 능가했다. 왕비는 짜르에게 편지를 썼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 견해일 뿐입니다. 우리 친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친구”의 견해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결정력을 가지고 있다. 이로부터 몇 주 후 왕비는 이렇게 애써 주장했다: “...저는 확고합니다. 그러나 저의 말 즉 우리 친구의 말을 들어보세요.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를 믿어주세요.... 폐하는 나쁜 신하들의 말을 따르고 있어서 지도가 필요합니다. 마음이 여린 어린아이와 같은 폐하, 폐하 때문에 저는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신이 보낸 사람이 폐하께서 해야 할 일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이 보낸 친구는 바로 그레고리 라스푸틴이었다.

“....우리 친구의 기도와 도움이면 ... 모든 일이 잘될 겁니다.”

“그가 아니었으면 모든 일은 이미 오래 전에 끝장났을 겁니다. 저는 이 점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짜르 니콜라스와 왕후 알렉산드라의 치세 내내 점쟁이들과 미치광이들이 러시아 전국 뿐 아니라 외국에서 궁정으로 수입되었다. 일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점쟁이 주위로 짜르 직속 관리들이 모여 강력한 상원을 형성하고 있었다. 백작부인 직함을 가진 편협한 할머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료한 관리, 장관 전부를 매수한 은행가들이 조정에 들끓었다. 최면술사와 마술사의 공인되지 않은 경쟁을 정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시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음모를 꾸미는 성자 가운데 성자인 라스푸틴에게 서둘러 접근했다. 위테는 이 지배집단을 “나병환자처럼 더러운 짜르의 친위 세력”이라고 불렀다. 이들 때문에 그는 두 번이나 발가락을 채였다.

왕조가 인민으로부터 고립되고 자신이 불안감을 느낄수록 짜르는 저 세상으로부터 도움이 필요했다. 좋은 날씨를 부르기 위해 어떤 야만인들은 지붕의 기와를 끈에 매달아 공중에 대고 흔든다. 짜르 부부는 아주 다양한 목적을 위해 이 기와를 사용했다. 짜르의 전용기차에는 크고 작은 성상과 온갖 종류의 부적이 가득한 예배당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것들을 짜르는 먼저 일본군에게 그리고는 독일 포병에게 흔들어 대었다.

조정에 모이는 인간들의 수준은 세대가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해방자”로 불리었던 알렉산드르 2세 때 대공들은 진심으로 가문의 귀신과 마녀들의 존재를 믿었다. 알렉산드르 3세 때에도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다만 좀더 조용하게 미신 행위들이 유행했을 뿐이었다. “나병환자처럼 더러운 짜르의 친위 세력”은 언제나 존재했으며 다만 인적 구성과 방식만이 짜르가 바뀔 때마다 달랐다. 니콜라스 2세는 야만적인 중세의 미신마저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 한편 지난 몇십 년간 나라는 계속 변화하여 문제들은 더 복잡해졌으며 문화수준은 더 높아졌다. 따라서 짜르 주위로 모여든 인간들의 문화수준은 일반인들보다 훨씬 뒤 처져 있었다.

짜르 왕정은 외부의 강제 때문에 새로운 사회세력들에게 양보조치들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전혀 현대화되지 못했다. 이와 반대로 자기 안으로 계속 파고 들어갈 뿐이었다. 적대감과 두려움의 압력이 커짐에 따라 조정의 중세적 미신은 더 힘을 발휘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라 전체를 뒤덮는 구역질나는 악몽이 연출되었다.

1905년 11월 첫 혁명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짜르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토볼스키도(道)에서 우리는 신이 보낸 사람 그레고리를 알게되었다.” 그는 시베리아의 농민 라스푸틴이었다. 그의 머리에는 말을 훔친 벌로 구타를 당한 흉터가 그대로 있었다. 적당한 순간에 나타난 이 “신이 보낸 사람”은 곧 보조역할을 해줄 관리들을 찾아냈다. 아니 그들이 그를 찾아낸 셈이었다. 이렇게 왕후를 꽉 잡는 그리고 그녀를 통해 짜르를 꽉 잡는 새로운 친위 파벌이 형성되었다.

고위 관직의 임명과 계약의 체결을 모두 라스푸틴 파벌이 좌지우지한다는 소문이 1913년과 1914년 사이의 겨울부터 뻬쩨르부르그에 공공연히 나돌았다. “장로” 자신은 서서히 국가기관이 되었다. 그의 신변은 철저히 보호되었으며 서로 경쟁하는 장관들에 의해 그만큼 조심스럽게 접근되었다. 경찰청의 스파이들은 시간마다 그의 동태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가 고향 마을 포크로프스키를 방문하면서 거리에서 술에 취해 자기 아버지와 피 터지게 싸운 내용도 전부 기록되었다. 이 일이 벌어진 1915년 9월9일 그는 친근한 내용의 전보 두통을 하나는 짜르스코에 셀로 궁전의 왕비에게 또 하나는 총사령부의 짜르에게 보냈다. 서사시 같은 언어로 경찰 스파이들은 매일 이 친구의 향락을 기록했다. “오늘 새벽 5시에 그는 만취된 채 돌아왔다.” “25일과 26일 밤 어느 여배우는 라스푸틴과 밤을 보냈다.” “아스토리아 호텔에 짜르의 침실시종의 부인인 어느 여배우와 그가 도착했다.” ... 그리고 바로 옆에 이렇게 적었다: “밤 11시 경 짜르스코에 셀로에서 자택으로 돌아왔다.” “쉬___ 공주와 만취한 채 집에 왔다가 함께 금방 나갔다.” 다음날 아침이나 저녁에 짜르스코에 셀로로 가다. 이 장로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이유를 묻는 스파이의 동정적인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왔다: “의회를 소집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서 그는 선뜻 결정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크게 취하여 아침 5시에 자택에 도착했다.” 이렇게 수년 수개월간 멜로디의 조성은 세 가지뿐이었다: “많이 취한,” “무지무지 취한,” “완전히 취한.” 현병감 고르바초프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이 보고서들을 전부 정리하여 서명했다.

라스푸틴의 영향력은 짜르의 마지막 6년 동안 지속되었다. 라스푸틴과 뻬쩨르부르그 생활을 조금 같이 했으며 후에 그를 죽인 유스포프공은 이렇게 말한다: “뻬쩨르부르그에서 그의 생활은 계속되는 향락 그 자체였다. 노예선의 노예가 풀려나 갑자기 출세한 후 술에 취해 부리는 온갖 추태였다.” 의회 의장 로지안코는 이렇게 적었다: “이 무뢰한에게 당한 딸들의 엄마들이 나에게 보낸 편지가 수북히 쌓여있다.” 그러나 뻬쩨르부르그 대주교 피티림 그리고 거의 문맹인 대주교 바르나바는 라스푸틴 때문에 높은 성직에 올랐다. 정교회 최고종교회 의장 사블러는 라스푸틴 덕분에 직책을 오랫동안 유지했다. 코코프세프 수상은 “장로”를 영접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해임되었다. 라스푸틴은 슈튀르머를 수상으로, 프로토포포프를 내무장관으로, 정교회 최고종교회 의장으로 라에프 등 많은 인물들을 임명했다. 프랑스 대사 빨레올로그는 라스푸틴을 만나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를 보자마자 그를 포옹하고 이렇게 외쳤다: “진짜 현인이 여기 계셨군요!” 이렇게 그는 프랑스의 국익을 위해 왕후의 마음을 사려고 했다. “장로”의 재정 대리인을 맡은 유태인 시마노비치도 나이트클럽의 도박꾼이자 고리대금업자로서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는 라스푸틴을 통해 완전한 사기꾼 도브로볼스키를 법무부 관료로 만들었다.

새로운 공직 임명과 관련하여 왕후가 짜르에게 편지를 보낸다: “옆에 공직 예정자들의 명단을 조그맣게 만들어 두세요. 우리 친구가 폐하께서 이 일을 프로토포포프와 상의하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로부터 이틀 후에 다시 편지를 썼다: “슈튀르머가 수상으로 며칠 더 있어도 좋다고 우리 친구가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프로토포포프는 우리 친구를 아주 경애합니다. 그는 축복받을 겁니다.”

경찰 스파이들이 라스푸틴이 소비한 술병과 여자의 수를 계산하고 있던 날에 왕후는 짜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슬픔을 토로한다: “라스푸틴이 여자들에게 키스하는 등의 행위에 대해 사람들이 비난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읽어보십시오. 사도들도 인사로 모든 사람들에게 키스를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에 대한 언급도 경찰 스파이들을 전혀 설득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편지에서 왕후는 한술 더 뜬다: “저녁기도를 하면서 우리 친구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유대교 법학자들과 바리세인들이 스스로 완벽한 체하면서 얼마나 예수를 핍박했습니까... 맞아요, 정말이지 자기 나라에서 예언자 행세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친위 파벌은 언제나 라스푸틴을 예수와 비교했다. 이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역사의 위협적 힘 앞에 너무 놀란 짜르 부부에게 비인격 신과 쓸모 없는 예수의 그림자는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들에게는 “신의 아들”이 재림해야했다.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고 고통스러워했던 짜르 부부는 자기들 모습을 한 예수를 라스푸틴에게서 찾아냈다.

구체제의 상원의원 타간세프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라스푸틴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인간이 다시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 말에는 타간세프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진실이 담겨져 있다. 사회 밑바닥을 구성하는 반(反)사회적 기생 집단의 극단적인 행동을 패거리 행위라고 한다. 그렇다면 라스푸틴의 횡포는 사회 최정상에서 왕을 끼고 한 패거리 행위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제 5장 무혈 쿠데타에 대한 논의

지배계급은 혁명을 막아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 하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짜르와 측근 파벌을 제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은 그렇게 하고 싶었으나 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의지가 박약했으며 정치 목표에 대한 신념이 없었다. 친위 쿠데타를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때 혁명이 이들을 집어삼켰다. 혁명 직전까지 조성되었던 귀족, 관료집단, 부르주아 계급들 간의 상호관계를 좀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잠시 시간을 할애하자.

유산 지배계급은 이해관계, 관습, 비겁함의 측면에서 짜르 체제를 완전히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라스푸틴이 없는 짜르를 원했다. 그러자 짜르는 “지금의 나를 그대로 인정할지어다”라고 이들에게 응답했다. 품위 있는 책임 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해 왕후는 라스푸틴이 건넨 사과 하나를 총사령부의 짜르에게 보냈다. 그리고 짜르가 강한 의지를 갖도록 이 사과를 먹으라고 재촉했다. 그리고 이렇게 간청했다: “기억하세요, 무슈 필립(프랑스의 돌팔이 약장수이자 최면술사)도 폐하께서 헌법을 허용하지 말 것을 진언했습니다. 헌법을 허용하면 폐하와 러시아는 끝장입니다.... 표트르 대제, 이반 뇌제, 바울 황제가 되세요. 놈들을 폐하의 발 밑에 짓이겨야 합니다!”

두려움, 미신, 인민에 대한 악의적인 소외감 등이 참으로 역겹게 혼합된 심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권력의 정점에 있는 짜르 일가가 외롭지 않을 수도 있었다. 라스푸틴은 귀족 부인들을 정말이지 끌고 다녔다. 그리고 주술행위가 귀족 사회 전체에 창궐했다. 그러나 두려움에서 시작된 신비주의는 이들을 단결시키기는커녕 분열시키기만 했다. 각자는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를 방어한다. 귀족가문들은 자기가 섬기는 성인이 영험하다고 강변하면서 서로 경쟁한다. 뻬쩨르부르그 사회의 정점에 서있는 짜르 일가는 마치 페스트에 걸린 것처럼 불신과 적대감의 검역선에 둘러 처져 있었다. 시종부인 비루보바는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존경하는 분들에 대한 악감정이 주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깊이 느껴왔다. 그리고 이 감정이 대단한 규모로 확대될 것이라고 느꼈다.”

전쟁의 자줏빛 배경과 발 밑에서 똑똑히 들리는 사회 격동의 굉음 속에서도 특권층은 삶의 쾌락을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탐욕스럽게 환락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더욱더 자주 이들의 연회에 해골이 나타나 손가락의 조그만 뼈를 흔들었다. 왕후 “알릭스”의 혐오스러운 성격, 짜르의 배신적인 나약함, 탐욕스러운 바보 비루보바, 머리에 흉터가 그대로 드러난 시베리아의 예수 라스푸틴 등 때문에 자신들이 이 모든 고통을 겪고 있다고 이들은 느끼기 시작했다. 견디기 힘든 불길한 징조들이 파도처럼 지배계급을 덮쳤다. 주변에서 중심까지 공포의 전율이 몰아쳐 지배계급을 오그라들게 만들었으며 짜르스코에 셀로의 증오스러운 짜르의 측근 파벌을 고립시켰다. 대체로 아주 기만적인 회상을 통해 비루보바는 당시 상층부의 정서를 아주 명확하게 표현했다: “...100번이나 뻬쩨르부르그 사회가 왜 이런가? 하고 내 자신에게 물었다. 이들은 모두 정신병이나 전시에 맹렬하게 퍼지는 유행병에 걸리기라도 했는가?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모두가 비정상적으로 흥분되어 있었다.” 머리가 돈 사람들 속에는 로마노프 왕가 전체, 탐욕스럽고 거만하고 모두가 증오하는 대공들과 대공부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죽을 것같은 공포에 질려 이들은 자기 주위를 포위하며 좁혀 들어오는 포위망 바깥으로 몸을 비틀고 나오려 했다. 이들은 비판적인 귀족들에게는 머리를 조아리고 짜르 부부에 대해서는 가십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이들과 주위 사람들을 충동질했다. 존엄스러운 짜르의 삼촌들이 짜르에게 보내는 충고의 편지는 예절을 갖추었다. 그러나 행간에는 분노의 으르렁거림과 이빨 가는 소리가 들렸다.

10월 혁명 직후 프로토포포프는 자신이 자세하게 알지 못했던 당시 상층부의 정서를 자못 화려하게 표현했다: “혁명 전에는 최상층 계급들조차 야당이 되었다. 호화 살롱과 클럽에서 정부의 정책은 가혹하고 적대적으로 비판되었다. 짜르 일가의 관계들은 분석되고 토론되었다. 국가 수반에 대한 사소한 일화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시가 지어졌다. 많은 대공들이 공개적으로 이런 모임에 참석했다. 그리고 이들의 지위 때문에 일반인들은 우스개 이야기들과 악의에 찬 과장된 이야기들을 대단히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시성 행위가 위험하다는 생각은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최상층 부위의 뇌리에 떠올랐다.”

짜르의 조정이 친독파이며 심지어 독일과 직접 내통한다는 비난 때문에 짜르의 측근 파벌에 대한 소문들은 특히 민감하게 받아들여졌다. 시끄러울 뿐 깊이가 없는 로지안코는 단정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라스푸틴의 야망이 내포하는 연관과 유추는 논리적으로 너무 명백하다. 따라서 독일군 사령부와 라스푸틴 파벌 사이의 협력관계에 대해서 최소한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논리적” 명백성을 단순히 말하기만 했으므로 이 증언의 단정적 목소리는 그 효과가 크게 약화된다. 혁명이 끝난 후에도 라스푸틴 파벌이 독일군 사령부와 내통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소위 “친독일 성향”은 달랐다. 물론 이것은 독일인 왕비, 슈튀르머 수상, 클라인미헬 백작부인, 궁내 장관 프레데릭스 백작 그리고 독일이름의 다른 신사들의 민족적 공감이나 러시아 인민에 대한 냉담성의 문제는 아니었다. 늙은 여자 모사꾼 클라인미헬의 냉소적인 회고록은 대단히 명쾌하게 다음의 사실들을 증명하고 있다: 유럽 모든 나라의 귀족계급들은 자기 민족을 초월하는 국제적 성향을 지녔다; 이들은 가문의 유대관계, 상속재산, 인민에 대한 경멸, 오랜 성채와 최신 유행의 온천장과 해수욕장 그리고 조정에서 이루어지는 범유럽적 간음행위 등으로 서로 결속되어 있었다. 프랑스 공화국의 아첨꾼 변호사들에 대한 유럽 왕족들의 천성적인 반감, 독일 정권의 진정한 (봉건적) 러시아 정신에 대해 독일인이든 슬라브인이든 반동세력들이 가지고 있는 공감 등은 클라인미헬이 열거한 내용보다 훨씬 더 실재했다. 독일 정권의 왁스칠한 콧수염, 주임상사 식의 군대식 언동, 자신감에 찬 어리석음 등에 대해 유럽반동세력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열거한 내용들은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내통의 위험은 상황의 논리 자체로부터 나왔다. 왜냐하면 짜르에게는 독일과의 단독 평화조약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는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황이 위험해질수록 그는 이 탈출구를 더 줄기차게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곧 드러나겠지만 자유주의 지도자들은 짜르를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들이 직접 독일과 단독 평화조약을 체결할 기회를 독점적으로 누리고자 했다. 바로 이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은 맹렬하게 국수주의를 선동하면서 인민을 속이고 짜르 조정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짜르의 측근 파벌은 이렇게 민감한 문제에 대해 감히 성급하게 입장을 정할 수가 없었다. 대체로 애국주의 목소리를 흉내내도록 이들은 강요당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들은 독일과 단독 평화조약을 체결할 조건을 모색하고 있었다.

물론 라스푸틴 파벌에 속한 전 경찰청장 쿠를로프 장군은 라스푸틴이 독일과 연계가 있었다거나 독일에 동정적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러나 그는 곧 이렇게 덧붙인다: “독일과의 전쟁이 러시아로서는 가장 큰 불행이며 정치적으로도 전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슈튀르머의 견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이 흥미로운 견해를 가진 슈튀르머가 독일에 대항하여 전쟁을 하고 있는 적대국 러시아의 수상이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짜르의 마지막 내무장관 프로토포포프는 장관 임명 직전 스톡홀름에서 독일의 외교관 와부르크와 협상을 벌이고 그 결과를 짜르에게 보고했다. 쿠를로프에 따르면 라스푸틴 자신은 “독일과의 전쟁이 러시아에게는 거대한 불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후는 1916년 4월 5일 짜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 친구 라스푸틴이 독일과 내통하고 있다는 말을 그들은 감히 꺼낼 수도 없습니다. 그는 예수처럼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며 관대합니다. 어떤 종파에 속하든 훌륭한 기독교인은 그렇게 행동해야합니다.” 물론 거의 언제나 술에 취해 있던 이 좋은 기독교인은 사기꾼, 고리대금업자, 귀족의 뚜쟁이 뿐 아니라 적의 진짜 스파이들로부터도 아첨을 받았다. 이런 종류의 “내통”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야당 애국지사들은 문제를 좀더 직접적이고 폭넓게 제기했다. 즉 이들은 왕후에게 직접 국가반역죄를 물었다. 한참 뒤에 쓴 회고록에서 데니킨 장군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군대에서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왕후가 독일과의 단독 평화조약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다느니 영국 원수 키츠너의 여행을 왕후가 독일에게 일러바쳤다는 등 온갖 소문이 떠돌고 있다. 짜르와 혁명에 대한 군대의 태도 형성에 이 소문들은 대단히 큰 역할을 했다.” 혁명 후 알렉세예프 장군이 왕비의 국가반역죄에 대한 심문에서 “애매하게 그리고 마지못해” 대답한 것을 데니킨은 언급하고 있다: 문서들을 검토하던 중 왕후가 모든 전선의 군대 배치상황을 담은 지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냈다; 이 사실은 알렉세예프 장군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데니킨은 이렇게 덧붙인다: “그는 이에 대해 말 한마디하지 않은 채 화제를 바꾸었다.” 왕후가 그 신비의 지도를 가지고 있었든 그렇지 않았든 운이 나쁜 장군들은 확실히 자신들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왕후에게 떠넘기려했다. 조정의 반역죄에 대한 비난은 무능한 총사령부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퍼지면서 군대 내로 잠입했다.

사실 짜르는 왕후에게 모든 사실들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만약 왕후 자신이 독일 황제 빌헬름에게 군사비밀과 심지어는 연합국 사령관들의 머리까지 갖다주었다면 짜르 부부를 타도하는 것 외에 무슨 일이 더 남아있었겠는가? 그리고 군대의 통수권자이며 독일을 반대하는 정당의 우두머리인 니콜라이 니콜라이예비치 대공이 친위 쿠데타의 수장으로 선택되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임무로 보았을 때 당연하지 않았겠는가? 라스푸틴과 왕후의 주장을 받아들인 짜르가 대공의 군대 통수권을 박탈하고 스스로 총사령관의 직책을 장악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왕후는 군대 통수권을 위임받는 조카와 삼촌의 만남 자체를 두려워했다. 왕후는 총사령부의 짜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분, 조심하셔야 합니다. 니콜라샤가 폐하로부터 어떤 약속이나 다른 어떤 양보를 받아내도록 허용하면 안됩니다. 그레고리가 그와 그의 패거리로부터 폐하를 구한 사실을 기억하세요...러시아를 위한다는 미명으로 그들이 무엇을 모의했는 지를 기억하세요. 그들은 폐하를 물러나게 만들고 저를 수도원에 집어넣을 계획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소문이 아닙니다. 오를로프는 필요한 문서들을 전부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짜르의 동생 미하일 대공은 로지안코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후 알렉산드라 페오도로브나가 얼마나 해로운 지를 왕가 전체는 알고 있다. 그녀와 나의 형 주위에는 반역자들만이 모여있다. 정직한 사람들은 모두 그들 곁을 떠났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무엇을 할 것인가?

로지안코가 “왕후 제거 작업”을 주동할 것을 대공부인 마리아 파블로브나는 주장했다. 그것도 자기 아들들이 보는 앞에서 주장했다. 로지안코는 이 대화를 없었던 일로 할 것을 제안했다. 그렇지 않으면 짜르에 대한 충성 선서에 따라 대공부인이 의회 의장에게 왕후를 제거할 것을 제안했다고 자신이 직접 짜르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재치가 빠른 궁내 장관 로지안코는 왕후 살해 문제를 응접실의 한담으로 바꾸어 놓았다.

가끔은 내각도 짜르와 심하게 충돌하였다. 혁명 발발 1년 6개월 전이었던 1915년에 이미 지금도 믿을 수 없는 대화들이 내각 회의에서 오갔다. 전쟁장관 폴리바노프: “인민에 대한 유화정책만이 상황을 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서있는 불안한 제방은 대홍수라는 대재앙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해양장관 그리고로비치: “군대가 우리를 신뢰하지 않으며 변화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비밀이 아닙니다.” 외무장관 사조노프: “짜르의 인기와 권위는 상당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내무장관 쉐르바토프공: “지금 상황에서 내각은 러시아를 통치할 능력이 없습니다....독재 아니면 유화정책 밖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1915년 8월 21일 회의록).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어떤 조치도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어느 정책도 달성이 불가능했다. 짜르는 독재를 결행할 의지가 없었다. 그리고 유화정책도 거부했다. 그리고 통치능력이 없는 내각의 사직서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기록 책임을 맡은 고위관리는 장관들의 연설 내용에다 짤막한 논평을 달고 있다: 당연히 우리는 가로등 기둥에 목을 매달아야 한다.

이런 정서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임박한 혁명을 막는 유일한 수단으로 친위 쿠데타의 필요성이 관료집단 내에서도 논의되었다. 이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 대화들에 참여한 어떤 인물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눈을 감고 대화를 나누었을 경우 필사적인 혁명가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러시아 남부에서 군대에 대해 특별 사찰 중인 어느 헌병 대령은 자신의 보고서에 어두운 전망을 제시했다: 짜르와 왕후가 독일과 내통하고 있다는 선전 때문에 군대는 친위 쿠데타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런 내용의 대화들이 공공연히 장교회의에서 나오고 있는데 총사령부는 전혀 제지도 하지 않고 있다.” 프로토포포프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총사령부의 상당수가 쿠데타에 공감하고 있었다: 일부 개인들은 소위 진보연합의 주요 지도자들과 접촉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혁명 이후 악명을 떨친 콜착 제독은 그의 군대가 적군에 의해 패퇴한 후 소비에트조사위원회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야당의원 다수와 나는 접촉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의 연설을 환영했다. 왜냐하면 짜르에 대해 나는 부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친위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그는 제공받지 못했다.

라스푸틴이 살해되고 이 사건에 연루된 대공들이 수도에서 추방된 이후 상류사회는 더 큰 목소리로 친위 쿠데타의 필요성을 떠들었다. 라스푸틴 살해와 관련하여 드미트리 대공이 궁중에서 체포되었을 때 여러 연대의 장교들이 그에게 다가와 결정적인 행동 계획들을 제안했다. “그러나 물론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고 유스포프공이 전하고 있다.

연합국의 외교관들 그리고 어쨌든 영국 대사는 이 음모의 부속물로 간주되었다.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의 음모가 일자 영국 대사는 1917년 1월 짜르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했다. 그는 이미 영국 정부의 사전 승인을 얻은 후였다. 니콜라이는 주의 깊고 정중하게 영국 대사의 말을 경청하고는 감사의 말을 표현했다. 그리고 곧 다른 문제들에 대해 얘기했다. 프로토포포프는 니콜라이에게 영국 대사 부캐넌과 진보연합 지도자들 사이의 관계를 보고했다. 그리고 영국 대사가 감시 대상자에 포함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이 제안을 승인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대사를 감시하는 일이 “국제적 관례와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한편 전 경찰청장 쿠를로프 장군은 거리낌없이 “정보부가 입헌민주당 지도자 밀류코프와 영국 대사의 관계를 매일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국제적 관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결례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친위 쿠데타 음모는 전혀 발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쿠데타 음모가 있었는가? 이것을 증명할 물증은 하나도 없다. “음모”라는 말 자체가 너무 범위가 넓었다. 음모가 되기에는 너무 많은 집단이 포함되었다.  친위 쿠데타에 대한 생각은 혼란스러운 해결책 또는 절망의 구호로 뻬쩨르부르그 상류사회의 정서가 되어 공중에 나돌아 다녔을 뿐이었다. 결국 이 음모는 실제 계획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했다.

18세기 러시아의 상류 귀족들은 두 번 이상 왕위 계승에 실제 개입하여 불편한 황제들을 독살시키거나 목 졸라 죽였다. 1801년 바울 황제는 음모의 마지막 희생자였다. 따라서 친위 쿠데타가 러시아 왕조의 전통에 위배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와 반대로 전통의 일관된 부분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귀족들은 강력한 의지를 느끼지 못했다. 이들은 짜르와 왕후를 목 졸라 죽이는 영광을 부르주아 계급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후자의 지도자들 역시 의지가 더 강하지는 못했다.

혁명 이후 음모의 핵심으로 자유부르주아 구츠코프와 테레쉬첸코 그리고 이들과 가까웠던 크리모프 장군이 두 번 이상 언급되었다. 구츠코프와 테레쉬첸코는 자신들이 음모를 꾸몄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불명확하게 확인해 주었을 뿐이었다. 남아프리카의 보어 전쟁에서 영국에 대항한 보어군에 자원 입대했으며 결투를 자주 했던 구츠코프는 박차를 단 자유주의자로 “사회의 견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음모를 꾸미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부각되었음에 틀림없었다. 말많은 밀류코프 교수는 절대로 적합하지 않았다! 의심의 여지없이 구츠코프는 어느 방위군 연대가 사회혁명을 저지하는 짧고도 날카로운 일격을 가할 것이라고 두 번 이상 상상했다. 위테는 회고록에서 자기가 혐오한 구츠코프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불편한 술탄을 타도한 터키 소장 장교들의 방법들을 숭상했다. 그러나 구츠코프는 터키 소장 장교들의 대담함을 과시할 기회를 젊었을 때 누리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훨씬 나이를 먹어버렸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스톨리핀의 하수인이었던 이 인물은 러시아와 터키의 차이를 간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친위 쿠데타가 진짜 혁명을 막는 수단이 아니라 혁명의 눈사태를 가져오는 마지막 움직임이 되지 않을까? 치료약이 병 자체보다 더 파멸적이지 않을까?

2월 혁명과 관련된 문헌들은 친위 쿠데타에 대한 준비가 확고히 입증된 사실인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2월에 쿠데타는 실행되고 있었다.” 데니킨은 3월에 쿠데타가 진행될 예정이었던 것처럼 말한다. 이 두 인물은 모두 “계획”을 말한다. 이동 중에 있는 짜르의 전용기차를 멈춘 후 그의 하야를 요구한다. 그가 거부할 것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럴 경우 짜르를 “신체적으로 제거”한다, 등등. 밀류코프는 이렇게 덧붙인다: “혁명의 발발을 예상하면서 짜르 제거 계획에 참여하지 않은 진보연합 지도자들은 ‘정확히’ 그 준비상황을 알고 있지 못했다. 이들은 쿠데타가 성공할 경우 상황을 가장 올바르게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소수의 모임에서 논의했다.” 최근 몇 년간 일부 맑스주의적 역사 연구도 쿠데타가 실제로 준비되었다는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고 있다. 이 예를 보더라도 신화가 역사과학에서 얼마나 쉽고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는 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음모의 가장 주요한 증거로 로지안코의 화려한 이야기가 빈번히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음모가 없었다는 사실을 증언할 뿐이다. 1917년 1월 크리모프 장군이 전선에서 돌아와 지금 상태로는 전쟁이 계속될 수 없다고 의회 의원들 앞에서 불평했다: “만약 여러분들이 짜르 제거라는 극단 조치를 결정한다면 우리는 여러분들을 지지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결정한다면! 그러자 10월당의 쉬들로프스키가 화를 내면서 고함을 질렀다: “짜르가 러시아를 파멸시키고 있는데 그를 동정하거나 살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서 벌어진 시끄러운 논쟁 중에 브루쉴로프의 진짜 또는 상상의 말들이 보도되고 있다: “짜르와 러시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면 나는 러시아를 선택합니다.” 만약 필요하다면! 젊은 백만장자 테레쉬첸코는 짜르를 살해하자는 확고한 입장을 들고 나왔다. 입헌민주당의 슁가레프는 이렇게 말했다: “장군님 말이 맞다. 타도가 필요하다...그러나 누가 타도를 결행할 것인가?”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누가 결행할 것인가? 이것이 로지안코가 증언한 내용의 핵심이었다. 그 자신은 짜르 타도에 반대했다. 이 논쟁이 있은 후 몇 주 동안 이 계획은 확실히 조금의 진전도 보지 못했다. 이들은 짜르의 전용기차를 멈추는 것에 대해 얘기를 했다. 그러나 누가 이 작전을 실행할 것인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나이가 어렸을 때 러시아 자유주의는 돈과 공감으로 혁명 테러주의자들을 지원했다. 폭탄을 터뜨려 짜르를 자기 품으로 끌어들일 것을 희망했기 때문이었다. 이 존경받는 신사들 중 어느 누구도 자기 목숨을 거는 일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그러나 개인적 두려움이 아니라 계급적 두려움이 역사발전에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지금 상황은 나쁘다. 그러나 더 나빠질 수 있다. 이것이 이들의 논리였다. 어쨌든 구츠코프, 테레쉬첸코, 크리모프가 쿠데타 쪽으로 진지하게 움직였다면 즉 그것을 실제적으로 준비하고 필요한 인력과 수단을 동원하였다면 이 사실은 혁명 후에 명확히 그리고 정확하게 입증되었을 것이다. 쿠데타에 가담한 자들 특히 거사를 실현시키는데 필요했을 많은 수의 적극적인 청년들은 “거의” 성사된 행위에 대해 이후 침묵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월 혁명 이후 이 거사에 가담한 행위는 그들에게 확실히 좋은 직장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는 전혀 없었다. 크리모프와 구츠코프가 애국심에 충만한 한숨을 쉬면서 포도주와 궐련을 즐기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상의 단계로 일이 진전되지 않았음이 아주 명백하다. 귀족계급의 경박한 야당 인사들이나 대부르주아 계급의 거물급 야당 인사들이나 신의 뜻이 예정한 불길한 역사과정을 행동으로 수정할 의지가 없었다.

혁명은 짜르와 함께 의회도 쓸어 없앴다. 의회의 개인적인 회의에서 1917년 5월 웅변을 가장 잘하면서도 가장 텅빈 자유주의자 마클라코프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후세가 이 혁명을 저주한다면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제때에 이 혁명을 막을 수 없었던 우리도 저주할 것이다!” 이로부터 시간이 좀 지나서 국외로 망명하게 될 케렌스키는 마클라코프처럼 이렇게 한탄했다: “그렇다, 참정권이 부여된 러시아가 그렇게도 많이 말하고 그렇게도 많이 준비했던(?) 위로부터의 쿠데타를 제때에 성사시키기에는 너무도 행동이 굼떴다. 러시아는 자생적인 폭발 즉 혁명을 저지하기에는 너무 행동이 느렸다.”

혁명이 정복당할 수 없는 힘을 폭발시킨 후에도, 왕조의 얼굴마담만이라도 “제때에” 바뀌었다면 혁명이 저지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식자층의 바보들은 계속 생각했다. 따라서 케렌스키와 마클라코프의 외침은 당시의 전체적인 상을 완성하는 역할을 한다.

 

“거대한” 친위 쿠데타를 감행하기에는 의지들이 부족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조그마한 혁명을 수행하자는 계획이 나왔다. 자유주의 음모가들은 왕정의 주연배우는 감히 제거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공들은 주연배우인 짜르에게 외우지 못한 대사를 속삭여주는 자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라스푸틴 제거가 왕정을 구하는 마지막 수단이라고 이들은 생각했다.

로마노프 왕조의 여자와 결혼한 유스포프공은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과 왕당파 의원 푸리슈케비치를 이 일에 끌어들였다. 이들은 또한 자유주의자 마클라코프를 끌어들이려 애썼다. 살해사건에 “전 러시아적”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유명한 변호사는 이 제안을 지혜롭게 거절했지만 음모가들에게 독특한 방식의 독약을 제공했다! 음모가들은 로마노프 왕조의 자동차가 라스푸틴의 시체를 옮기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것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침내 대공들도 쓸모가 있게 되었다. 나머지는 악취미 인간들을 위해 짜여진 영화 시나리오처럼 수행되었다. 12월 16일과 17일 밤 라스푸틴은 조그만 파티에 참여하도록 유인되었다. 그리고 유스포프공의 소규모 가옥에서 그는 살해되었다.

극소수로 구성된 짜르 친위 파벌과 신비주의 숭배자들을 제외하고 지배계급들은 모두 라스푸틴의 살해를 구원의 행위로 환영했다. 대공은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짜르의 표현에 따르면 그의 손은 농민(비록 예수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농민!)의 피로 묻혀졌다. 대공은 당시 뻬쩨르부르그에 있던 모든 왕족들의 공감 어린 방문을 받았다. 왕후의 유일한 자매인 세르게이 대공 미망인은 살해자들을 위해 기도 드리며 이들의 애국적 행위에 축복을 보낸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라스푸틴을 언급하는 것도 금지되었던 신문들은 환희에 찬 기사를 실었다. 극장에서 사람들은 살해자들을 기리는 데모를 시도했다. 행인들은 거리에서 서로 축하했다. 유스포프공은 이렇게 말한다: “가정에서, 장교 회의에서, 식당에서 사람들은 우리의 건강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우리를 위해 만세를 불렀다.” 노동자들이 라스푸틴 살해의 소식을 접했을 때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된다. 그러나 그들의 만세는 왕조 재생의 희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라스푸틴 파벌은 세인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 상황을 주시했다. 이들은 짜르, 왕후, 짜르의 딸들과 비루보바 등이 모르게 라스푸틴의 시체를 매장했다. 대공들에 의해 살해된 말 도둑 출신의 성스러운 친구의 시체 위에 서 있었을 경우 짜르 일가는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일개 농민의 죽음에 짜르 일가가 애도하다니 말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매장된 후에도 라스푸틴은 평화를 찾지 못했다. 나중에 혁명과 함께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 로마노프가 가택 연금에 처해졌을 때 짜르스코에 셀로의 병사들이 라스푸틴의 무덤을 파고 관을 열었다. 시체의 머리에는 알렉산드라, 올가, 타티아나, 마리아, 아나스타샤, 아니아의 서명이 있는 성상이 놓여져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임시정부는 사신을 보내 시체를 뻬쩨르부르그로 이송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군중이 이 시도에 저항하자 사신은 그 자리에서 시체를 불태우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의 살해 후 왕정은 전부 합쳐 10주일 밖에 지탱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도 짜르의 시간임에는 틀림없었다. 라스푸틴은 가고 없었으나 그의 그림자는 여전히 짜르를 지배했다. 음모가들의 모든 기대와는 달리 짜르 부부는 살해사건 후에도 특별한 의지를 가지고 라스푸틴 파벌의 가장 경멸스러운 인간들을 승진시키기 시작했다. 라스푸틴 살해에 대한 복수인 마냥 악명 높은 악당이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여러 명의 대공들이 수도에서 추방당했다. 프로토포포프가 심령술을 배워 라스푸틴의 귀신을 부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절망의 올가미가 구체제의 목을 더 옭아매었다.

라스푸틴의 살해는 거대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살인범들과 이들을 부추긴 자들이 계산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거대한 역할을 했다. 즉 위기를 약화시키기는커녕 악화시켰을 뿐이었다. 궁중, 총사령부, 공장, 농민의 오두막집 등 모든 곳에서 사람들이 살해사건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결론은 스스로 나 있었다: 나병환자처럼 더러운 짜르 친위 세력에 대해 대공들조차 독과 권총에 의존해야했다. 시인 블로크는 라스푸틴 살해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그를 죽인 총알은 왕조 지배층의 심장부를 가격했다.”

 

로베스삐에르는 입법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절대왕정에 대한 프랑스 귀족들의 반대는 왕정을 약화시키면서 부르주아 계급을 분기시키고 이후 인민대중을 분기시켰다. 동시에 로베스삐에르는 이렇게 경고했다: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서 혁명은 프랑스만큼 빨리 진행될 수 없다; 다른 나라의 특권계급들이 프랑스 귀족들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 혁명을 주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탄할만한 분석을 내리면서도 로베스삐에르는 다음과 같은 인식의 오류를 범했다: 절대왕정에 대한 프랑스 귀족계급의 무분별한 반대는 다른 나라들에게 확실한 교훈을 남겼다. 1905년에 그리고 특히 1917년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들은 로베스삐에르와는 달리 이렇게 증언했다: 전제 그리고 반봉건 체제 즉 귀족계급에 저항하는 혁명은 첫 단계에서 비록 일관되지는 못하나마 귀족, 왕족 등 특권 최상층의 진정한 협력을 얻는다. 이 놀라운 역사 현상은 사회계급 이론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이론의 조잡한 해석에 모순을 일으킬 뿐이다.

사회의 모든 적대관계가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 혁명은 터진다. 그러나 이 상황은 구체제의 계급들 즉 해체될 수밖에 없는 계급들에게도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생물에 대한 유추를 그 가치보다 더 높이 사주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자연에서 탄생의 행위는 어느 순간이 되면 어미와 새끼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이 점은 말할 가치가 있다. 특권계급들이 기존 체제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들이 누렸던 기존의 사회적 지위가 사회의 생존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지배 관료집단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귀족계급은 자신이 모든 적대감의 초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관료집단을 비난한다. 그러면 관료집단은 귀족계급을 비난하고 이 양자가 함께 또는 따로 자신들의 불만을 자기 권력의 원천인 왕정의 정점에 퍼붓는다.

귀족의 세습기관들에 봉직하다가 잠시 내각에 입각한 쉐르바토프공은 이렇게 말했다: “사마린과 나는 둘 다 우리 도에서 귀족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지금까지 아무도 우리가 좌익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으며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짜르와 내각이 모든 합리적인 사회(우리는 혁명적 음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귀족, 상인, 자치도시, 도의회, 심지어는 군대 등과 근본적으로 의견을 달리하는 그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위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의견을 원치 않는다면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자신들이 겪는 모든 불행의 이유는 왕정의 맹목이나 이성 상실에 있다고 귀족계급은 생각한다. 구 사회를 새로운 사회와 화해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특권층은 믿을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귀족계급은 자신의 종말을 인정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죽을 것 같은 피로감을 구체제의 가장 성스러운 권력인 왕정에 대한 반대로 전환시킨다. 역사는 귀족계급의 상층부를 버릇없는 자식으로 키웠으며 이들은 혁명에 직면하여 두려움을 참을 수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이 귀족들의 반대는 격렬하면서도 무책임하다. 귀족의 불만은 비체계적이고 일관되지 못한다. 미래가 없는 계급의 저항이기 때문이다. 등불은 꺼지기 전에 환하면서도 그을음이 많은 빛으로 확 타오르다 꺼진다. 귀족도 이런 식으로 체제 저항의 빛을 내고 사라진다. 이로서 이들은 자신의 철천지 원수인 인민에게 커다란 봉사를 한다. 이것이 바로 구체제 붕괴의 변증법이다. 이 변증법은 사회계급 이론과 일치한다. 이 뿐이 아니다. 이 이론으로만 이 변증법이 설명될 수 있다.

 

제 6장 구체제 멸망의 격심한 고통

혁명의 첫 번째 문제는 짜르 왕정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이 이 문제를 해결할 시간을 갖기도 전에 짜르 체제는 나무에 매달린 썩은 과일처럼 건드리자마자 붕괴했다. 이 붕괴의 순간들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구 지배계급에 대한 지금까지의 상세한 묘사는 미완성으로 남을 것이다.

짜르는 모길레프의 총사령부에 있었다. 딱히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뻬쩨르부르그의 혼란을 외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총사령부에서 짜르와 함께 있던 궁중 사관(史官) 두벤스키 장군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여기에는 조용한 삶이 시작된다. 모든 것은 과거 그대로이다. 짜르가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우연적이고 외적인 원인들만이 어떤 변화를 야기할 뿐이다...” 2월 24일 왕후는 항상 그랬듯이 영어로 짜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케드린스키(케렌스키를 의미했다) 의원은 끔찍한 내용의 연설을 했으므로 교수형에 처해야 합니다. 전시의 법이 그렇습니다. 하나의 모범이 될 것입니다. 모두가 폐하의 확고한 의지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2월 25일 전쟁장관이 보낸 전보가 도착했다. 수도에서 파업이 일어나고 노동자들 사이에 혼란이 조성되고 있으나 적절한 조치들이 취해졌기 때문에 심각한 사태는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이런 내용이었다: “이런 일은 늘 있던 일입니다!”

짜르에게 양보하지 말 것을 언제나 주문했던 왕후는 여기에서도 확고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26일 니콜라스의 흔들리는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그녀는 이렇게 전보를 쳤다: “도시는 조용합니다.” 그러나 저녁때 보낸 전보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에서 일이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편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들에게 파업하지 말라고 말씀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파업할 경우 벌로 전선에 보내질 것이라고 경고해야 합니다. 발포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질서뿐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게 막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다, 큰 것이 필요 없다. 질서만 있으면 된다. 가장 중요한 일은 노동자들이 교외에서 분노하고 무력감을 느끼게 하면 된다.

27일 아침 이바노프 장군은 독재적 권한을 위임받아 성조오지 대대와 함께 전선에서 수도로 복귀한다. 그러나 짜르스코에 셀로를 점령한 직후에 자신의 임무를 발표할 예정이다. 차례가 돌아와 자신도 나중에 군사독재를 시행한 데니킨 장군이 이렇게 회상한다: “그보다 더 부적합한 인물을 상상하기는 힘들 것이다. 살이 축 늘어진 노인에 불과한 그는 정세를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위력, 활력, 의지, 근엄함 등 어느 것도 없는 인물이다.” 이바노프 장군이 선택된 이유는 그가 1905년 혁명 당시 노동자들을 진압했으며 이보다 11년 전에는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반란을 진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그에게 흔적을 남겼다. 진압군을 지휘했던 그는 이제 힘없는 노인이었으며 진압되었던 노동자들은 강력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북부와 서부 전선의 병력은 뻬쩨르부르그로 진군할 것을 명령받았다. 시간이 충분하다고 모두들 생각했음이 명백했다. 이바노프 자신도 사태가 곧 정상화될 것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뻬쩨르부르그의 친구들에게 줄 식료품을 모길레프에서 구입하라고 부관에게 명령해야겠다고 한가하게 생각했다.

2월 27일 오전 로지안코는 짜르에게 이렇게 끝맺는 새 전보를 보냈다: “조국과 왕조의 운명이 결정될 최후의 시간이 왔습니다.” 짜르는 조정(朝廷) 장관 프레데릭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배불뚝이 로지안코 놈이 또다시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을 잔뜩 써서 나에게 보냈어. 수고스럽게 답장을 보낼 필요가 없어.”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는 답장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같은 날 정오쯤 총사령부는 파블로프스키, 볼린스키, 리토프스키,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들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믿을만한 군대를 전선에서 수도로 복귀시킬 필요가 있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하발로프 장군으로부터 받았다. 한 시간 후 전쟁부에서 대단히 안심되는 전보가 날아왔다: “일부 부대에서 오늘 아침 시작된 소요사태는 군무에 충실한 중대와 대대들에 의해 확고하고 열정적으로 진압되고 있다...곧 평온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러나 저녁 7시 직후 전쟁장관 벨라예프는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군무에 여전히 충실한 몇몇 부대만으로는 반란을 진압하기 어렵다.” 그리고 “도시 여러 지구에서 동시에 공격하도록” 진짜 믿을만한 부대들을 충분한 규모로 빨리 보낼 것을 요청했다.

한편 내각의 장관들은 모든 불행의 근원이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는 반미치광이 내무장관 프로토포포프를 해임할 적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하발로프 장군은 비밀리에 정부가 준비한 포고령을 발동했다: 폐하의 명령에 따라 뻬쩨르부르그에 계엄령을 실시한다. 여기서도 뜨거운 것을 차가운 것과 섞으려는 어리석은 행동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의도적인 것은 거의 아니었고 실제로 아무 소용도 없었다. 시장 발카는 풀과 솔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계엄령 포고문을 도시 전역에 붙일 수가 없었다. 이 관료들에게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이들은 이미 저승에 있었다.

짜르의 마지막 내각의 대표 그림자는 70세가 된 골리친공이었다. 그는 전에 왕후가 관할하는 자선단체들을 운영하다가 전쟁과 혁명의 시기에 그녀에 의해 수상으로 승진되었다. 자유주의자 놀데 남작의 묘사에 의하면 이 “성격 좋은 러시아의 신사, 이 늙은 약골” 골리친은 왜 이 골치 아픈 직책을 맡았느냐고 친구들이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즐거운 추억거리를 하나 더 만들기 위해서.” 어쨌든 그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당시 최후의 짜르 내각이 어떤 분위기였는지를 로지안코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내각이 회의를 하고 있던 마린스키 궁전으로 군중이 몰려오고 있다는 첫 소식을 접하자 모든 건물에 소등 조치가 취해졌다. 혁명 군중이 내각을 그냥 지나치기를 정부는 원했다. 그러나 소문은 거짓이었다; 군중은 공격하지 않았다; 그래서 건물의 모든 등불이 다시 켜지자 어느 장관은 “스스로 놀랄 정도로” 탁자 밑에 숨어 있었다. 골리친 자신이 어떤 종류의 추억을 만들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로지안코의 감정 역시 최고로 상승해 있지 않았던 것 같았다. 전화로 내각과 교신하려고 그는 한참 애썼으나 허사였다. 결국 이 의회 의장님은 다시 골리친에게 전화를 건다. 그러자 후자가 이렇게 응답한다: “나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미 사임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자 로지안코는 그의 충실한 비서의 말에 따르면 힘없이 팔걸이 의자에 앉아 얼굴을 양손으로 덮었다. ... “하느님, 이렇게 끔찍할 수가!...정부가 없이...무정부 상태...피...” 이렇게 말하고 그는 소리를 죽여 부드럽게 흐느꼈다. 짜르 정권의 노쇠한 그림자가 목숨을 다하자 로지안코는 불행, 삭막함, 부모를 여윈 듯한 감정에 휩싸였다. 자신이 혁명을 “대표”해야 한다는 다음 날의 생각과는 한참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  

골리친의 전화 응답은 다음의 사실로 설명된다: 27일 저녁 내각은 자력으로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고 명확히 인정했다; 따라서 짜르에게 인민의 신뢰를 얻고 있는 인물을 수상으로 임명할 것을 건의했다. 짜르는 골리친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상황에서 수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짜르는 내각이 반란 진압을 위한 “가장 단호한 조치들”을 취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것은 말이 쉬울 뿐이었다.

다음날 28일에는 기가 드센 왕후조차 낙담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니콜라스에게 전보를 보낸다: “파업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상당수의 부대들이 혁명의 편으로 넘어갔습니다. 알릭스.”

방위군과 주둔군 모두가 봉기를 일으키자 왕정에 대한 미련에 미쳐있는 이 헤센주 출신의 여인은 “양보조치가 필요하다.”고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짜르도 “배불뚝이 로지안코”가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을 전보로 보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니콜라스는 가족과 합류하기로 결정한다. 짜르를 불편하게 느낀 총사령부 참모들이 그를 부드럽게 밀어낸 결과일 수도 있다.

짜르의 전용기차는 처음에는 별 탈없이 여행했다. 도의 유지들과 도지사들이 그를 맞이하기 위해 역에 나왔다. 짜르는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멀리 떨어진 채 습관이 된 왕실 전용 객차의 수행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따라서 그는 다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위기를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28일 오후 3시 혁명이 이미 그의 운명을 결정한 뒤에도 그는 비야즈마에서 왕후에게 전보를 보냈다: “아주 좋은 날씨. 당신이 건강하고 평온하기를 비오. 전선에서 많은 부대들이 이리로 보내지고 있소. 부드러운 사랑을 당신에게. 니키” 왕후조차 주장하는 양보조치 대신 부드러운 사랑을 보낸 짜르는 전선에서 군대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아주 좋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 후 짜르는 혁명의 폭풍과 대면하게 된다. 그의 기차가 비셔 역에 도착하자 철도 노동자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기차의 진행을 중지시켰다: “교량이 손상되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이러한 변명은 상황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조정의 대신들이 발명한다. 니콜라스는 볼로고에를 경유하여 니콜라예프스키 철도로 계속 여행하려고 했다. 아니면 수행원들이 그렇게 하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도 노동자들이 기차의 통과를 허용하지 않았다. 뻬쩨르부르그에서 날라온 전보들보다 이 일은 사태의 심각성을 훨씬 강하게 피부로 느끼게 해주었다. 짜르는 총사령부를 떠난 후 수도로 갈 수가 없었다. 철도의 하찮은 “졸들”을 가지고 혁명은 왕에게 “장군받아라”하고 외쳤다!

기차에서 짜르를 수행한 궁정 사관 두벤스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비셔 역 사건이 일어난 그 한밤중은 역사적인 밤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헌법 인정 문제가 결론이 났음이 완전히 명백해진 것처럼 보인다; 헌법은 확실히 제정될 것이다....임시정부 각료들과의 협상만 남았다고 모두 말하고 있다.” 열차의 통행을 막기 위해 아래로 내려진 신호기 저편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증대하고 있었다. 그러자 신호기를 대면하면서 프레데릭스 백작, 돌고루키공, 로이히텐베르크 백작 등 고위 귀족들 모두가 헌법 제정을 찬성한다. 이들은 더 이상 투쟁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협상을 통해 1905년처럼 적들을 속이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짜르의 전용기차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왕후는 하루바삐 돌아올 것을 호소하는 내용의 전보를 계속 짜르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보낸 전보들은 모두 파란 연필로 “수취인 행방불명”이라고 쓰여진 채 우체국에서 반송되었다. 전보 담당 사무원은 짜르의 소재를 알 수 없었다.

방위군 및 주둔군 연대들은 음악과 깃발을 앞세우고 타우리데 궁전으로 행진했다. 클라인미헬 백작부인의 말에 의하면 아주 갑자기 혁명적 성향을 보인 시릴 블라디미로비치의 지휘 아래 방위군 일개 중대가 행진하고 있었다. 보초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상황을 잘 아는 병사들이 궁전을 포기하고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자기 목숨을 구하고 있었다”고 비루보바는 말한다. 혁명 병사들의 무리가 궁전 주위를 배회하면서 대단한 호기심으로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소위 혁명 지도부가 이 궁전의 용도를 결정하기도 전에 하급 병사들은 이 곳을 관람용 박물관으로 바꾸고 있었다.

위치가 확인이 안된 짜르는 푸스코프로 방향을 돌려 루지키 장군이 지휘하는 북부전선의 사령부로 향했다. 수행원들은 이런 저런 제안을 했다. 짜르는 어쩌지도 못하고 어물쩍거리고 있었다. 혁명이 분 단위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을 때 짜르는 하루와 일주일 단위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폐위되기 전 마지막 몇 달의 짜르를 시인 블로크는 이렇게 묘사했다: “완고하면서도 의지가 박약하였고 초조하면서도 매사에 느린 인간이었다. 사람을 믿지 못해 긴장된 말을 조심스럽게 내뱉는 모양을 보아 그는 더 이상 자기 운명의 주인이 아니었다. 그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고 단 하나의 명확히 의식적인 조치도 취하지 못하여 권력을 쥔 부하들의 손아귀에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2월의 마지막 며칠과 3월의 첫 며칠간 그의 긴장, 의지 박약, 조심성, 불신감 등은 얼마나 더 컸겠는가!

마침내 니콜라스는 증오스러운 로지안코에게 전보를 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결국 전보는 수취인에게 도착하지 못했다. 이 전보에서 짜르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외무, 전쟁, 해양 장관직을 겸임하고 로지안코가 수상이 되어 새 내각을 구성하는 안을 제시했다. 짜르는 여전히 “그들과” 협상하기를 원했다. “상당수의 부대들”이 뻬쩨르부르그로 향하고 있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이바노프 장군은 아무 어려움 없이 짜르스코에 셀로에 도착했다. 철도 노동자들은 성조오지 대대와 충돌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다. 나중에 장군은 자신에게 무례하게 구는 하급 병사들에게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무례하게 굴면 되냐고 여러 번 핀잔을 주었다고 고백했다. 결국 그는 병사들이 무릎 꿇도록 만들었다. 이 “독재자”가 짜르스코에 셀로에 도착하자마자 지구 행정당국은 그에게 이렇게 통보했다: 성조오지 대대와 군대의 충돌은 짜르 가족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이들은 자기 목숨이 두려웠다. 그래서 이바노프가 기차에 내리지 말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라고 충고했다.

이바노프 장군은 뻬쩨르부르그에 있는 다른 “독재자” 하발로프 장군에게 10개의 질문을 담은 전보를 보냈다. 그리고 그는 간략한 답장을 받았다. 가치가 있는 내용이므로 모두 인용하겠다.

1.군대의 규율을 따르고 있는 병력과 반란 병력의 수는 각각 얼마인가? 해군부 건물에 방위군 4개 중대, 기병과 카자흐병 5개 대대, 포병 2개 중대 등이 나의 지휘를 따르고 있다. 나머지 병력은 혁명 편으로 넘어갔거나 동조하고 있거나 중립을 지키고 있다. 병사들은 혼자 또는 무리를 지어 배회하면서 장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있다.

2.어느 철도역들이 방어되고 있는가? 모든 역들은 혁명 세력에 점령당했고 이들의 엄중한 방어 하에 있다.

3.도시의 어느 지구에 질서가 회복되었는가? 도시 전체가 혁명으로 넘어갔다. 전화는 불통이다. 도시 각 지구간의 통신이 두절되었다.

4.도시 각 지구를 누가 통치하고 있는가?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5.모든 정부 부처는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 장관들은 혁명 세력에 의해 체포되었다.

6.현재 귀하의 지휘를 받는 경찰 병력은 어느 정도인가? 전혀 없다.

7.전쟁부의 어느 기술 보급 부처가 귀하의 통제를 받고 있는가? 전혀 없다.

8.식료품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 있는가? 전혀 없다. 2월 5일 도시 안에는 5백6십만 파운드의 밀가루가 창고에 있었다.

9.반란군에게 넘어간 무기, 대포, 군수품은 어느 정도인가? 포병의 모든 시설을 혁명군이 장악하고 있다.

10.귀하의 지휘를 받고 있는 병력과 참모는 누구인가? 지구 참모부장은 나의 지휘를 받고 있으나 다른 지구 행정기구들과 연락이 전혀 되지 않고 있다.

상황을 명확히 확인한 이바노프 장군은 “드노(역자 주: 바닥이란 뜻의 러시아어)”역에서 하차하지 않고 참모들과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합의했다”. 참모부의 주요 인물 루콤스키 장군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독재 권한을 가진 이바노프 장군의 원정은 공개적인 모욕 만 당했다.”

그러나 이 모욕은 매우 조용하게 가해졌기 때문에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혁명의 파도에 가라앉았다. 아마 독재자 이바노프 장군은 식료품을 뻬쩨르부르그의 친구들에게 배달했을 것이며 왕후와 오랜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왕후는 병원에서의 자기 희생적 봉사활동을 언급했다. 그리고 군인들과 사람들이 자신의 희생을 감사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이때 모길레프를 경유해서 프스코프에 소식이 전달되었다. 갈수록 암울한 내용들이었다. 짜르의 경호대원들은 왕실 가족들에 의해 이름이 모두 기억되고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이들은 의회에 출석하여 반란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장교들을 체포할 수 있게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부제독 쿠로프스키는 크론슈타트의 반란을 진압할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 충성을 확인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부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독 네페닌은 발트 함대가 의회의 임시위원회를 인정했다고 전보를 쳤다. 모스크바 총사령관 므로조프스키는 이렇게 전보를 보냈다: “병력의 대다수는 포병과 함께 혁명 편으로 넘어갔다. 도시 전체가 이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시장과 그의 보좌관들은 시청을 떠났다.” 떠났다는 것은 도망쳤다는 의미였다.               

이 모든 사항은 3월 1일 저녁 짜르에게 전달되었다. 밤늦게까지 짜르 주위의 인물들은 책임 내각이 필요하다고 그를 어르기도 하고 주장을 펴기도 했다. 마침내 새벽 2시 짜르는 이를 허가했고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것으로 혁명의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명령이 떨어졌다: 뻬쩨르부르그로 이송되고 있는 병력들은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라. 루즈키는 동이 트자 이 희소식을 로지안코에게 전하기 위해 급히 서둘렀다. 그러나 짜르의 시간은 사태의 전개보다 한참 늦었다. 타우리데 궁전에서 이미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 병사, 노동자 대표들에 파묻힌 로지안코는 루즈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귀하의 제안은 불충분합니다. 이제는 왕조의 존립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모든 곳에서 군대는 의회의 편을 들고 있습니다. 인민은 폐하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가 섭정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군대는 세자의 왕위 계승이나 섭정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혁명을 저지하려고 로지안코가 둘러대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짜르의 양보조치는 너무 늦게 내려졌다: “혼란상태는 너무 극에 달해서 나(로지안코)는 오늘밤 임시정부를 구성하지 않을 수 없다. 불행하게도 짜르의 폐위 포고령은 너무 늦었다....” 이렇게 장엄하게 선언한 의회 의장은 골리친 앞에서 흘린 눈물을 이제 확실히 거두었다. 짜르는 로지안코와 루즈키의 대화 내용을 파악한 후 머뭇거렸다. 그리고 그 내용을 다시 읽은 후 상황을 주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제 장군들이 경고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그들에게도 약간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그날 밤 전선의 사령관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투표를 실시했다. 현대의 혁명이 전보의 도움으로 성취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의 첫 충동과 반응이 기록을 통해 역사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3월 1일과 2일 밤 전선의 사령관들 사이에 오간 대화는 비교할 수 없이 귀중한 문서이다. 짜르가 폐위되어야 하는가? 서부 전선 사령관 에버트 장군은 루즈키 장군과 브루쉴로프 장군 다음으로 견해를 밝히겠다고 말했다. 루마니아 전선 사령관 사하로프 장군은 자기가 견해를 밝히기 전에 다른 전선 총사령관들이 견해를 밝힐 것을 요구했다. 오랜 지연 후 이 용감한 사령관은 짜르에 대한 자신의 따뜻한 마음이 “비열한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흐느끼면서” 그는 “더 비열한 요구들”을 피하기 위해 짜르가 하야해야한다고 조언했다. 에버트 군무국장은 항복의 필요성을 상당히 합리적으로 이렇게 설명했다: “수도의 상황에 대한 정보가 군대 내로 퍼졌다. 이에 따른 의문의 여지없는 혼란을 막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다. 수도의 혁명을 진압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 코카서스 전선의 니콜라스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무릎을 구부리고 짜르에게 “최상의 조치”로 하야를 간청했다. 알렉세이예프 장군과 브루쉴로프 장군 그리고 네페닌 제독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청원하였다. 루즈키도 비슷한 내용의 견해를 밝혔다. 이렇게 해서 장군들은 존경하는 짜르의 정수리에 7개의 총구를 예의를 갖추어 들이댔다. 새로운 권력과 화해할 시간이 낭비되는 것을 이들은 두려워했다. 그리고 자기 휘하의 군대도 그만큼 두려워했다. 이들은 진지를 적에게 넘겨주는 일에 익숙했지만 군 최고 통수권자 짜르에게는 아주 단호하게 만장일치의 조언을 했다: 저항하지 말고 왕위에서 내려와라. 이들이 있는 곳은 멀리 떨어진 뻬쩨르부르그가 아니라 군대가 있는 전선이었다.

상황을 참작한 이 보고사항들을 들은 후 짜르는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닌 왕좌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로지안코에게 보내는 적절한 내용의 전보가 작성되었다: “나의 모국 러시아의 진정한 안녕과 구원을 위해 내가 치를 수 없는 희생은 없다. 따라서 나는 왕좌에서 물러나고 나의 아들이 뒤를 잇게 할 용의가 있다. 그가 성년이 될 때까지 나의 동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가 섭정이 될 것이다. 니콜라스.” 그러나 이 전보는 전달되지 못했다. 수도에서 구츠코프 의원과 슐긴 의원이 짜르가 있는 프스코프로 출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짜르는 전보를 다시 자신에게 돌려보낼 것을 명령했다. 당연히 그는 너무 값싼 항복을 두려워했으며 위안의 소식 아니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기적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3월 2일과 3일 밤 12시에 두 의원을 맞이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더 오래 상황을 끌 수가 없었다. 의외로 짜르는 아들과 떨어질 수가 없다고 선언하며 동생에게 왕위를 넘기는 하야문에 서명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모호한 희망을 품고 있었는가? 이와 동시에 상원에 보내는 포고령에도 그는 서명했다. 이를 통해 그는 르보프공을 수상으로, 니콜라스 니콜라이예비치를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왕실 가족에 대한 왕후의 의심은 올바른 것으로 드러난 것처럼 보였다: 증오스러운 “니콜라샤”가 음모꾼들과 함께 권력에 복귀했다. 구츠코프는 혁명 세력이 최고사령관을 인준할 것으로 진지하게 믿었다. 그리고 니콜라이예비치도 자신의 임명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그는 며칠동안 애국적 의무를 완수하자는 일종의 명령과 호소를 공포할 것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혁명은 조금의 힘도 들이지 않고 그를 제거했다.

자유의사라는 외양을 보존하기 위해 퇴위는 오후 3시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었다. 짜르의 원래 결정이 그 시간에 있었다는 것을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 동생이 아니라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오후의 “결정”은 좀더 상황이 좋아질 것을 기대해서 철회되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아무도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짜르는 증오스러운 의원들 앞에서 체면을 유지하려고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의원들은 역사적인 행위가 조작되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인민을 속였다. 왕정은 평소 모습을 간직한 채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짜르에 이어 권력을 계승한 자들도 원래 모습에 충실했다. 이들은 아마도 이 묵인 행위를 정복당한 자에 대한 정복자의 아량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무뚝뚝한 기존의 문체에서 약간 벗어나 니콜라스는 3월 2일 이렇게 일기를 썼다: “아침에 루즈키의 방문을 받았다. 그리고 전신을 통해 그가 로지안코와 나누었던 긴 대화문을 읽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뻬쩨르부르그의 상황은 너무나 악화되어 의원들로 구성된 내각도 속수무책이다. 노동자 위원회를 통해 사회민주당이 반대하기 때문이다. 내가 퇴위할 필요가 있다. 루즈키는 이 대화 내용을 총사령부의 알렉세이예프 장군 그리고 모든 전선의 사령관들에게 전달했다. 12시 30분에 응답이 도착했다. 러시아를 구하고 군대를 전선에 묶어두기 위해 나는 이 조치에 동의했다. 그래서 그들은 총사령부에서 퇴위 성명서의 원문을 보냈다. 저녁때 뻬쩨르부르그에서 구츠코프와 슐긴이 도착했다. 이들과 이 문제로 대화를 나누었으며 이들에게 수정하고 서명된 문서를 건네주었다. 새벽 1시에 무거운 마음으로 프스코프를 떠났다. 반역, 비겁함, 속임수가 나를 둘러싸고 있다.”

니콜라이의 쓰라린 마음은 근거가 없지 않았다. 2월 28일까지만 해도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전선의 사령관들 앞으로 이렇게 전보를 보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충성 서약을 이행하고 현역 군인들의 의무를 다해야한다. 이것은 짜르와 조국에 대한 우리의 신성한 의무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이틀 후 알렉세이예프는 사령관들에게 자신들의 “서약과 의무에 대한 충성”을 파기하도록 호소했다. 총사령부의 참모들 가운데 짜르를 위해 행동한 장군은 하나도 없었다. 이들은 모두 서둘러 혁명의 배를 탔다. 그리고 이 배에서 편안한 방을 찾기를 기대했다. 장군들과 제독들은 모두 짜르의 리본을 제거하고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 리본을 착용했다. 곧이어 혁명에 대한 새로운 충성선서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어느 부대 지휘관에 대한 소식이 돌았다. 유일하게 올바른 영혼이었다. 그러나 그의 심장마비가 상처받은 왕당파적 감정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공무원들이 군인들보다 더 많은 용기를 보여줄 의무는 당연히 없었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자기 목숨을 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정의 시계는 혁명의 시계와 일치하지 않았다. 이것은 결정적이었다. 3월 3일 동틀 녘에 루즈키는 수도에서 온 직접 전보에 의해 다시 소환되었다: 로지안코와 르보프공은 그가 짜르의 퇴위를 지연시킬 것을 요구했다. 퇴위 결정은 이번에도 너무 늦은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새 정부는 알렉세이를 왕으로 인정할 수 있으나 미하일은 절대 인정될 수가 없다고 은근히 말했다. 그러나 누가 알렉세이를 인정한다는 것일까? 전날 밤에 도착한 의원들이 여행의 목적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고 루즈키는 약간의 악의와 함께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의원들은 정당했다. 궁내 장관 로지안코는 루즈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예상도 못한 가운데 한번도 본적 없는 병사들의 반란이 터졌다.” 마치 평생 병사들의 반란만 관찰해온 것처럼 그는 말했다. “미하일을 새 황제로 선언하는 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며 제거될 수 있는 모든 것이 가차없이 제거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 말은 정말이지 모든 것을 휘몰고 흔들고 구부리고 비틀고 있다!

장군들은 말없이 이 새로운 혁명의 “비열한 허세”를 꾹 참았다. 알렉세이예프 만이 사령관들에게 보내는 전보문에서 자신의 기분을 약간 안심시켰다: “좌익 정당들과 노동자 대의원들이 의회 의장에게 강력히 압력을 가하고 있다. 따라서 로지안코의 말에는 솔직함이나 진실성이 조금도 없다.” 당시 장군들에게 제공되지 못한 것은 진실뿐이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짜르는 다시 마음을 바꾸었다. 프스코프에서 모길레프에 도착하여 그는 전 최고사령관 알렉세이예프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고 이것을 뻬쩨르부르그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내용이었다. 명백히 그는 이것이 장기적으로 더 희망이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데니킨의 일기에 따르면 알렉세이예프는 이 전보를 가지고 갔으나 ... 보내지는 않았다. 군대와 나라에 이미 공개된 두 성명서로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불협화음은 짜르, 그의 측근, 의회 자유주의자 등 모두가 혁명의 진전보다 늦게 사고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3월 8일 모길레프를 마지막으로 떠날 때 짜르는 이미 공식적으로 체포상태에 있었다. 이때 그는 군대에 호소하는 말을 이렇게 끝맺었다: “지금 평화를 생각하고 그것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조국의 반역자요 배신자이다.” 짜르와 주위 인물들이 친독일 성향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비난을 없애려는 자극 받은 시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효과도 없었다: 이 호소문을 공포할 용기가 있는 자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한 치세가 끝났다. 이 치세는 악운, 실패, 불행, 사악한 행위 등의 연속이었다. 대관식 중에 발생한 호징카의 재앙(역자 주: 짜르의 대관식에 모인 군중 가운데 다수가 밟혀 죽은 사건.), 파업노동자와 반란 농민들에 대한 발포, 러일전쟁, 1905년 혁명의 잔인한 진압, 수많은 처형, 형벌 목적의 원정, 대대적인 소수민족 학살과 박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계대전 참전이라는 미친 그리고 경멸할만한 정책 등이 그의 치세에 꼬리를 물었다.

짜르스코에 셀로에 도착하자 짜르와 그의 가족은 궁전에 가두어졌다. 비루보바의 말에 의하면 여기서 짜르는 부드럽게 말했다: “인간에게는 정의가 없다.” 그러나 비록 늦게 나타날지언정 역사의 정의는 존재한다. 이 사실을 그의 말이 논란의 여지없이 증명하고 있다.

 

최후의 로마노프 부부와 프랑스 대혁명 당시 부르봉 부부 사이의 유사성은 아주 명백하다. 이 점은 문학에서 언급된 바 있었으나 지나가는 투로 그랬을 뿐 그로부터 어떤 법칙이 유추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유사성은 처음 볼 때 느껴지는 것처럼 우연적인 것은 결코 아니며 유추의 소중한 재료가 된다.

비록 125년의 시차를 두었으나 짜르와 프랑스 왕은 어떤 순간에는 같은 배역을 맡은 두 배우인 것 같았다. 수동성, 참을성, 복수심에 불타는 배신적 성격은 두 지배자의 뚜렷한 특징이었다. 다만 루이 16세는 의심이 스민 친절함으로 니콜라스는 상냥함으로 이것을 감추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 두 왕은 모두 직무로 과부하가 걸린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전혀 쓸모 없는 권력의 일부분이라도 포기할 생각이 없는 인간이었다. 이들이 쓴 일기는 문체 또는 문체의 결여에 있어서 유사하면서 똑같이 음울한 정신적 빈곤을 드러내고 있다.

오스트리아 여자 마리 앙뜨와네뜨도 독일 헤센의 여자 알렉산드라와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신체 뿐 아니라 도덕에서도 두 여왕은 모두 두 국왕 위에 서있다. 마리 앙뜨와네뜨는 알렉산드라 페오도로브나에 비해 덜 경건했으며 후자와는 달리 쾌락을 열정적으로 쫓았다. 그러나 두 여자 모두 인민을 경멸했으며 양보조치를 허용한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었으며 자기 남편을 깔보고 그의 용기를 불신했다. 다만 앙뜨와네뜨는 경멸을 알렉산드라는 연민을 드러내며 그랬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회고록의 저자들은 뻬쩨르부르그 혁명 시기를 회상하면서 니콜라스 2세가 일개 시민이었다면 좋은 기억을 남겼을 것이라고 필자에게 확신시킨다. 그러나 이들은 오래 전에 나돌았던 루이 16세에 대한 판에 박힌 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의 말은 역사나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에 조금도 도움되지 않는다.

첫 혁명이 낳은 비극적 사건들의 절정기에 짜르는 우울해 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즐거운, 활기찬 조그마한 인간인 짜르가 자줏빛 셔츠를 입고” 르보프공을 맞이했다. 이 때문에 그는 분노했다. 인식은 못한 채 르보프공은 1790년 구베르뇌르 모리스가 루이 16세에 대해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 상황에서 잘먹고 잘마시고 잘자면서 웃음을 터뜨리고 귀뚜라미처럼 명랑하게 지내는 그런 인간에게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왕정이 무너지기 3개월 전 알렉산드라 페오도로브나는 이렇게 예언했다: “모든 일이 가장 잘 풀리고 있다. 우리 친구 라스푸틴의 꿈은 너무 의미가 깊어!” 그녀의 이 말은 왕정이 무너지기 1개월 전에 마리 앙뜨와네뜨가 한 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정신의 생기를 느껴. 우리는 곧 행복하고 안전할 것이라고 뭔가가 나에게 말해주고 있어.” 이들은 모두 익사하면서 무지개 꿈을 꾸었다.

이러한 유사성의 일부 요소들은 물론 우연적이며 역사의 일화로서만 흥미롭다. 그러나 역사의 거대한 힘에 의해 인물에게 접합되고 직접 강요되는 특성들은 이것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욱 중요하다. 이 특성들은 개인의 특성과 역사의 객관적 요인 사이의 상호관계를 명쾌하게 드러낸다.

프랑스의 어느 반동 역사가는 루이 16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소망하는 법을 몰랐다. 이것이 그의 가장 두드러진 성격이었다.” 이 말은 니콜라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었다. 이들은 소망하는 법을 몰랐으며 다만 소망하지 않는 법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망이 없이 패배한 역사적 대의의 마지막 대표들이 “소망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대개 그는 남이 하는 말을 듣고 미소짓고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그가 내뱉는 첫 말은 보통 ‘아닙니다’ 정도였다.” 이것은 까뻬 왕조의 루이 16세에게 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니콜라스의 방식은 완전히 루이 16세를 표절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왕관을 눈을 가릴 정도로 눌러쓰고” 몰락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어쨌든 탈출할 수 없는 몰락의 구렁텅이로 눈을 뜬 채 걸어가는 것은 더 쉬운 일이었을까? 이들이 왕관을 머리 뒤통수로 재낀 채 상황을 맞이했다면 무슨 뾰쪽한 수가 있었을까?

전문 심리연구가는 니콜라스와 루이, 알렉산드라와 앙뜨와네뜨 그리고 이들의 궁정 대신들이 표현한 서로 유사한 말들을 모아서 선집을 만들어야 한다. 선집을 구성할 재료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유물론적 심리학을 지지하는 매우 유익한 역사적 증언이 될 것이다. 물론 동일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유사한 상황이 만들어낸 유사한 짜증들은 유사한 반사작용을 불러일으킨다. 짜증이 강력할수록 이 짜증은 개인적 특이성을 극복하고 보편성을 획득한다. 간지러움을 태우면 사람들은 각기 다르게 반응한다. 그러나 빨갛게 달아오른 쇠를 갖다대면 동일하게 반응한다. 증기망치는 구체와 육면체를 똑같이 납작한 금속판으로 만든다. 마찬가지로 너무 거대하고 어쩔 수 없는 사건들의 충격은 모든 저항을 분쇄하고 “개인”의 경계를 없앤다.

루이와 니콜라스는 격동의 세월을 견딘 왕조의 마지막 후손이었다. 잘 알려진 이들의 온화함,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유지되는 평정과 “유쾌함”은 이들의 내적 동력의 빈약성, 신경 표출의 허약성, 정신적 재능의 빈곤 등이 잘 길들여져 표현된 것이었다. 도덕적 고자인 이들은 상상력과 창조력을 완전히 결여했다. 이들은 자신의 왜소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지능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재능과 의미를 갖춘 모든 것에 대해 시기심이 결합된 적대감을 보였다. 이 두 인물은 심오한 국내 위기와 인민의 혁명적 각성에 대면할 운명을 타고났다. 이 두 인물은 새로운 사상의 침투와 적대 세력들의 조류에 저항했다. 우유부단, 위선, 거짓 등은 두 인물의 개인적 약점이기보다는 세습적 지위를 확고히 부여잡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의 표현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부인들은 어떠했는가? 헤센이라는 시골 출신의 공주 알렉산드라는 강력한 나라의 무한 권력을 누리는 전제 군주와 결혼했기 때문에 앙뜨와네뜨보다 더 높이 꿈의 정점으로 들어올려졌다. 앙뜨와네뜨는 좀더 경박했다. 알렉산드라의 개신교적 편협함은 러시아 교회의 슬라브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 두 여성은 나름의 고매한 임무에 대한 생각들을 잔뜩 가지고 있었다. 운이 따르지 않는 통치와 점점 높아 가는 인민의 불만은 진취적이지만 동시에 닭대가리를 가진 이 두 여성의 환상 세계를 무자비하게 파괴했다. 자기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이국 인민에 대해 이들이 심장을 갉아먹는 적대감과 원한을 더욱 크게 가졌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적대 국가에 약간의 배려를 베풀기를 원했던 장관들에 대한 이들의 증오심도 여기서 나왔다. 또한 조정 대신들로부터의 소외감과 충족되지 않는 기대감을 자극했던 남편에 대한 계속된 짜증 역시 이 때문에 발생했다.

심리학 경향을 지닌 역사가와 전기작가들은 거대한 역사의 힘이 개인을 통해 굴절된 곳에서 뭔가 순수하게 개인적이고 우연적인 것을 빈번히 찾는다. 이것은 최후의 짜르를 “불행하게” 태어났다고 생각한 신하들의 잘못된 견해와 동일하다. 짜르도 자기가 불행한 별 밑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그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낡은 목표들과 그의 시대가 조성한 새로운 역사적 조건 사이의 모순에서 나왔을 뿐이다. 제우스는 자신이 파멸시키고자 하는 인간들을 먼저 미치게 만들었다고 고대인들은 말했다. 이들은 미신의 형태로 심오한 역사적 통찰을 요약한 셈이었다. 괴테는 이성이 비(非)이성으로 변한다고 말했다. 이와 똑같은 생각이 역사 변증법의 비인격체 제우스에 대해서도 표현되었다. 역사 변증법은 시효를 넘긴 제도들의 “이성”을 거두어들인다. 그리고 이 제도들을 옹호하는 자들을 실패의 운명으로 몰아넣는다. 로마노프 왕조와 까뻬 왕조의 역할에 대한 대본은 역사 드라마의 일반적 발전법칙에 의해 쓰여졌다. 오직 해석상의 미묘한 차이만이 배우들의 몫으로 떨어졌을 뿐이었다. 루이와 마찬가지로 니콜라스의 불행은 개인적 사주팔자가 아니라 관료적 왕정의 사주팔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절대주의의 마지막 자손이었다. 허약한 왕조에서 배출된 이들의 도덕적 빈곤은 니콜라스에게 특히 극악한 성격을 부여했다.

독자들은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할 지도 모른다: 알렉산드르 3세가 술을 좀 덜 마셨다면 상당히 더 오래 살았을 것이고 혁명은 아주 성격이 다른 짜르와 마주쳤을 것이며 그와 루이 16세와의 유사성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 의견은 위에서 말한 것을 조금도 반박하지 않는다. 역사 과정은 개인의 의의를 부인하거나 개인에게서 우연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만약 부인한다면 그것은 허세가 될 것이다. 필자는 허세를 부릴 생각이 전혀 없다. 다만 모든 특이성을 보유한 역사상의 개인이 심리적 특성만 줄줄이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뿐이다. 개인은 정해진 사회조건 속에서 배출되어 이것에 반작용하는 살아있는 실체이다. 자연과학자는 장미꽃을 피운 토양의 요소들과 공기의 특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장미가 그 향기를 잃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사회적 뿌리를 드러내더라도 개인이 풍기는 향기나 악취는 제거되지 못한다.

알렉산드르 3세가 장수했을 가능성에 대한 생각은 바로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게 해준다. 알렉산드르 3세가 1904년 일본과의 전쟁에 걸려들지 않았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1905년에 일어났던 첫 번째 혁명은 지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 지연시킬 수 있었을까? “1905년 혁명” 즉 노동대중의 최초의 힘 자랑이자 절대주의에 대한 최초의 타격이 두 번째 공화국 혁명과 세 번째 노동계급 혁명의 단순한 도입부가 될 수도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흥미로운 추측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이 니콜라스 2세의 성격 때문에 터진 것이 아님은 어떤 경우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알렉산드르 3세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는 것도 어떤 경우든 의심할 수 없다. 봉건체제에서 부르주아 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격렬한 사회혼란이 없었던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점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점을 바로 어제에 중국에서 목격했고 오늘 이것을 다시 인도에서 목격하고 있다. 우리가 말한 수 있는 것 전부는 이것이다: 왕정의 이러한 저러한 정책, 왕의 이러한 저러한 개성 등은 혁명을 재촉하거나 지연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혁명의 외적 과정에 어떤 자취를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이다. 혁명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 몇 달, 몇 주, 며칠간 가망 없이 패배하는 상황에서 엄청난 분노와 무기력한 완고함으로 짜르 체제는 자신을 방어하려고 애를 썼다! 니콜라스가 의지가 박약했다면 왕후가 이것을 보완했다. 라스푸틴은 자기보존을 위해 미친 듯이 싸운 지배파벌의 도구에 불과했다. 심지어 이 좁은 공간 속에서도 과거와 과거의 마지막 발악이 라스푸틴 파벌과 짜르의 개성은 하나로 결합시켰다. 혁명과 마주친 짜르스코에 셀로 상층 그룹의 “정책”은 독약을 먹고 허약해진 맹수의 반사작용에 지나지 않았다. 대평원에서 자동차로 늑대를 뒤쫓으면 늑대는 마침내 포기하고 무기력하게 누워버린다. 그러나 이놈의 목에 줄을 매달려고 하면 늑대는 사람을 찢어발길 태세로 덤벼든다. 아니면 최소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다. 늑대에게 다른 대안이 있는가?

자유주의자들은 짜르에게 대안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상상했다. 최후의 짜르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은 이렇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참정권을 부여받은 부르주아 계급과 제 때에 합의했다면 혁명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짜르는 양보조치에 대해 완고하게 움츠러들었다. 운명이 칼날 위에 서 있어서 일분 일분이 계산되고 있을 마지막 순간에조차 그는 계속 질질 끌면서 운명과 흥정을 하며 마지막 가능성들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었다. 이 모든 것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왕정을 구하는 방법을 그렇게 정확하게 알고있던 자유주의자들은 자기를 구하는 방법은 알고있지 못했다. 얼마나 불행한 일이었던가!

짜르 체제가 양보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자기보존에 필요할 때는 양보조치가 허용되었다. 크림 전쟁의 패배 후 알렉산드르 2세는 농민의 반쪽 해방 그리고 토지행정, 법원, 언론, 교육기관 등의 분야에서 일련의 자유주의적 개혁을 실시했다. 짜르 자신은 이 개혁의 지도사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농민들이 아래로부터 해방을 시도하기 전에 위에서 이들을 해방시킨다. 첫 혁명의 물결에 떠밀려 니콜라스 2세는 반쪽 헌법을 허용했다. 자본주의 발전의 장을 넓히기 위해 스톨리핀은 농촌공동체를 해체시켰다. 그러나 짜르 체제는 계급사회와 왕정의 토대를 보존할 수 있을 경우에만 부분적 개혁조치를 허용했다. 그러나 개혁의 결과들이 한도를 넘어 체제 자체를 위협하자 왕정은 개혁 정책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르 2세는 통치 후반기에 전반기의 개혁조치들을 전부 철회시켰다. 알렉산드르 3세는 반(反)개혁의 길로 더 멀리 나아갔다. 1905년 10월 니콜라스 2세는 혁명 앞에서 후퇴하였다. 그리고 혁명의 산물인 의회를 나중에 해산시켰다. 그리고 혁명의 힘이 약화되자마자 쿠데타를 일으켰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이 시작된 후 75년 동안 어떨 때는 지하에서 어떨 때는 지상에서 역사적 세력들의 투쟁이 벌어졌다. 이 결과 짜르의 개인적 특성을 훨씬 초월하여 왕정은 전복되었다. 이 과정의 역사적 틀 내에서만 짜르 개인, 그의 성격, 그의 “생애”는 의미가 있다.

가장 전제적 군주조차도 자신의 자의적인 자취를 역사 사건에 남기는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가 없다. 언제나 자기 모습대로 사회를 만드는 특권 계급들의 왕관을 쓴 대리인일 뿐이다. 이 계급들이 아직 자기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때 왕정은 강력하고 자신감을 발휘한다. 이때에는 자신의 손에 믿음직한 권력기구를 쥐고 행정기구의 권력을 무제한으로 즐긴다. 왜냐하면 좀더 재 능있는 인물들이 아직 적대 진영으로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군주는 개인적으로든 강력한 총신의 중재를 통해서든 거대하고 진보적인 역사적 임무의 대리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구사회의 태양이 마침내 서쪽으로 기울 때는 상황이 전혀 달라진다. 특권 계급들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위치에서 벗어나 기생적인 혹의 위치로 격하된다. 자신들의 지도적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에 이들은 임무에 대한 의식과 권력에 대한 자신감을 모두 상실한다. 이로써 자신에 대한 불만족은 왕정에 대한 불만으로 비화하고 왕정은 고립된다. 사멸하는 왕조에 충성하는 인물들이 줄어든다. 이들의 수준도 하락한다. 한편 위험은 증대한다. 새로운 세력들이 밀고 올라온다. 왕정은 창조적인 주도력을 완전히 상실한다. 그리고 자신을 방어하고 반격하고 후퇴한다. 이제 왕정의 활동은 단순 반사작용에 불과하다. 로마노프 왕조의 반(半)아시아적 전제 체제도 이 운명에서 탈출할 수 없었다.         소위 수직 단면도를 통해 짜르 체제의 고통을 바라보자. 니콜라스는 과거에 뿌리를 둔 가망 없이 죽을 운명에 처한 파벌의 중심 축이다. 역사적으로 명맥을 유지해온 왕정을 수평 단면도로 바라보자. 니콜라스는 왕조 사슬의 마지막 고리이다. 그의 가장 가까운 선조들 역시 가족, 계층 그리고 관료적 집단 속에 통합되어 있었다. 다만 니콜라스보다 더 넓은 범위의 집단 속에 있었을 뿐이었다. 이들은 다가오고 있는 운명에 거역하여 구체제를 보존하기 위해 다양한 통치 방식과 조치들을 구사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니콜라스에게 성숙한 혁명을 배태하고 있는 혼란스러운 제국을 물려주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멸망으로 가는 각기 다른 길 이외에 그가 선택할 길은 없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영국식 왕정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템즈강 위의 의회체제는 평화적인 진화의 과정 속에서 탄생했는가? 아니면 한 명의 왕이 발휘한 “자유로운” 선견지명의 열매였는가? 어느 것도 아니었다. 영국식 의회체제는 여러 시대를 통해 진행된 투쟁의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한 명의 왕은 목이 잘려 네거리에 버려졌다.

위에서 언급한 로마노프 왕조와 까뻬 왕조 사이의 역사적-심리적 대조는 영국의 첫 혁명 시대에 영국의 국왕 부부에 대해서도 적절히 적용될 수 있다. 회고록 작가들과 역사가들이 루이 16세와 니콜라스 2세에게 부여했던 특성들의 조합은 기본적으로 찰스 1세에게도 해당되었다. 몬테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따라서 찰스는 수동적이 되었으며 저항할 수 없는 경우에는 항복했다. 그리고 이 항복을 대단히 꺼려하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그는 조금의 인기나 신뢰도 얻지 못했다.” 찰스 스튜어트를 연구한 또 다른 역사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어리석지는 않았으나 성격이 확고하지 못했다....그의 사악한 운명은 그의 왕비인 루이 13세의 여동생 앙리에따와 결부되어 있었다. 그녀는 찰스보다 절대주의 사상에 더 열렬했다.” 일국 혁명에 의해 압살된 최초의 국왕 부부의 특징들을 여기서 자세하게 얘기할 수는 없다. 영국 인민의 증오심은 무엇보다도 프랑스 여성이자 카톨릭 교도인 왕비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로마와 음모를 꾸미고 아일랜드 반란자들과 비밀 접촉을 하고 있으며 프랑스 조정과 술수를 꾸민다고 비난받았다. 이 점만은 특이한 사항으로 언급될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은 어쨌든 여러 시대에 걸쳐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영국은 부르주아 문명의 선구자였다. 다른 나라의 압박에 시달리기는커녕 다른 나라들을 자신의 멍에 아래 더욱더 강하게 종속시켰다. 이 나라는 전세계를 착취했다. 이 때문에 국내의 모순은 완화될 수 있었으며 보수주의는 토대를 확고히 축적할 수 있었고 기생 지배계층, 신사계급, 왕정, 상원, 국가교회 등의 형태로 풍요와 안정의 두터운 완충장치들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부르주아 영국이 누린 독점적인 역사발전의 특권 덕분에 신축성과 결합된 보수주의는 이 나라 제도의 도덕적 근간이 되었다. 러시아의 교수 밀류코프나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자 오토 바우어 등 유럽대륙의 다양한 속물들은 지금까지도 이 사실에 대해 열광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영국은 전세계에서 압박을 받고 있다. 그리고 과거 누렸던 특권적 지위의 마지막 자원들을 낭비하고 있다. 이 나라의 보수주의는 신축성을 상실하고 있으며 심지어 노동당 지도자들의 매개를 통해 노골적 반동으로 나아가고 있다. 인도 혁명에 대면하여 노동당의 최초 수상인 “사회주의자” 맥도널드는 니콜라스 2세가 러시아 혁명에 대항하여 동원한 조치들 이외에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할 것이다. 영국은 혁명이라는 거대한 지진의 충격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 나라 보수주의의 마지막 잔재, 이 나라의 세계 지배, 이 나라의 현재 국가기구 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맹인만이 이 점을 보지 못할 것이다. 맥도널드는 니콜라스 2세만큼이나 이 충격에 대해 갈팡질팡하면서 맹목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도 역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개인의 역할에 대한 문제가 풍부하게 예시되고 있다.

러시아는 유럽 선진국들의 꽁무니를 쫓아 늦게 발전을 시작했으며 경제적 기초가 허약하기 그지없다. 이 나라가 어떻게 “신축성을 보유한 보수주의”를 특히 교수양반들의 자유주의와 이것의 좌익적 그림자인 개량적 사회주의를 위해 발전시킬 수 있는가? 러시아는 너무나 뒤져 있었다. 그래서 세계 제국주의가 이 나라를 손에 넣었을 때 러시아는 정치 및 역사 과정을 너무 짧은 기간에 통과해야 했다. 만약 니콜라스가 자유주의자들과 합의해 슈튀르머를 밀류코프로 교체시켰다면 사건은 약간 달리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그대로였을 것이다. 루이 16세가 혁명의 제 2 단계에서 정신을 차리고 지롱드파를 권좌 위로 밀어 올린 것이 바로 이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루이 16세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지롱드파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쌓이고 있던 사회모순들은 표면으로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 과정에서 정화 작업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인민은 공개의 장에서 그 동안 참아냈던 모든 불행, 고통, 분노, 열정, 희망, 환상과 목표 등을 쏟아내었다. 인민 대중의 압력 앞에서 왕정과 자유주의자들의 상층 야합은 하루살이에 불과했다. 이들은 물론 사건들의 전개 순서에 영향을 미치고 행동의 횟수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혁명의 드라마 그리고 이것의 중요한 절정에는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제 7장 5일간

(1917년 2월 23일부터 27일까지)

2월 23일은 국제 여성의 날이었다. 사회민주주의 운동권은 늘 그랬듯이 이 날을 집회, 연설, 유인물 배포 등으로 기념할 생각이었다. 이날이 혁명을 시작하는 첫날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날 파업을 촉구한 조직은 하나도 없었다. 더욱이 대단히 전투적인 볼세비키당 비보르그 지구위원회 노동자들은 모두 파업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 지구위원회의 지도자 카유로프는 대중의 정서가 아주 긴장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어떤 파업도 공공연한 전투로 급격히 상승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전투적 투쟁으로 돌입하기에는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당은 역량이 충분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병사들 사이에서 지지자들을 별로 확보하지 못했다. 이들은 파업을 촉구하기보다 미래의 혁명 투쟁을 준비해 나가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2월 23일 전야에 비보르그 지구위원회의 방침이었으며 모두들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3일 아침 이 방침은 지켜지지 않았다. 여러 공장의 여성 섬유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이들은 금속노동자들에게 대표들을 보냈다. 카유로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볼세비키들은 마지못해 지원에 동의했으며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 소속 노동자들도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대대적인 파업이 일어나면 모든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 이들의 선두에 서야한다.” 카유로프는 이렇게 하기로 결심했고 비보르그 위원회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리로 나서자는 생각이 오랫동안 노동자들 사이에서 무르익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로 나서는 순간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랐다.” 그의 증언을 유념해야한다. 왜냐하면 혁명 사건들의 역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위가 일어날 경우 노동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병사들이 동원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진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지금은 전시였다. 공안당국은 농담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반면 전시의 “예비역” 병사는 정규군의 고참 병사와는 다르다. 예비역 병사들이 정말 막강할까? 혁명운동권에서 이 문제는 추상적으로 많이 논의되었다. 왜냐하면 2월 23일에 절대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공격이 시작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점은 모든 자료에 기초하여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제한된 전망을 가진 시위에 대한 논의가 기껏해야 전부였다.

이렇게 2월 혁명은 혁명조직들의 저항을 극복하고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노동계급의 가장 억압받고 핍박받은 여성 섬유노동자들이 스스로 합의하여 선두에 나섰다. 물론 이들 중에는 병사의 부인들이 많이 있었다. 너무 길게 늘어선 빵 배급 줄이 혁명을 촉발시킨 마지막 자극이 되었다. 이날 남녀 모두 합쳐 약 9만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다. 데모, 집회, 경찰과의 대치 과정에서 전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위는 대규모 공장들이 밀집한 비보르그 지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뻬쩨르부르그 쪽으로 옮아갔다. 비밀경찰의 증언에 의하면 다른 곳에서는 파업이나 시위가 없었다. 이날 경찰을 돕기 위해 군대가 투입되었으나 이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이들과 대치하지 않았다. 노동자가 아닌 경우를 포함한 여성의 무리는 빵을 요구하며 시의회 건물로 몰려갔다. 그러나 이것은 염소 수컷에게 젖을 달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도시 여기저기에 붉은 깃발이 등장했다. 깃발의 구호는 노동자들이 왕정이나 전쟁이 아니라 빵을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해서 국제 여성의 날은 열정적으로 그러나 사상자 없이 성공적으로 지나갔다. 그러나 이 날이 배태하고 있던 것을 밤이 되도록 추측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다음날 이 운동은 없어지기는커녕 두 배나 커진다. 2월 24일 뻬쩨르부르그 공업노동자의 약 반수가 파업에 참가한다. 아침에 노동자들은 공장에 출근한다. 이들은 조업에 나서는 대신 집회를 연다. 그리고 도시 중심지로 행진한다. 이 운동에 다른 노동자 지구들과 인민의 다른 부위들이 합류한다. “전제 타도!”, “전쟁 타도!”의 커다란 구호 소리에 묻혀 “빵을 달라!”는 구호는 들리지 않는다. 네프스키 가도로 시위는 계속된다. 혁명가를 부르는 밀집된 노동자 대중이 먼저 나타나고 학생의 푸른 모자가 간간이 섞인 잡다한 도시민들이 등장한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 공감을 표시했으며 전쟁병원의 병사들이 손에 아무 것이나 들고 흔들며 우리를 환영했다.” 시위 노동자들에 대한 환자 병사들의 공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를 명확히 인식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카자흐 기병들이 시위 군중에게 가볍지만 줄기찬 공격을 가했다. 이들이 타고 있던 말의 입은 게거품으로 뒤덮여 있었다. 시위대는 이들이 통과하도록 대오를 열어 길을 비켜주다가 다시 닫았다. 시위 군중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카자흐 병사들이 발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말이 퍼졌다. 노동자들의 일부는 카자흐 병사들에게 개인적으로 접촉했다. 그러나 욕을 퍼부으며 반정도 술에 취한 채 대구경 소총을 든 기마 병사들이 곧 이어 나타났다. 이들은 군중 속으로 헤집고 들어와 총검으로 시위 군중의 머리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굳게 대오를 닫았다. “이들은 발포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 이들은 발포하지 않았다.

어느 자유주의 상원의원은 서있는 전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면 이것이 그 다음날 벌어진 일이었던가? 어쩌면 그는 기억을 잘못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전차 일부는 유리창이 깨져 있었고 일부는 선로에 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전쟁 전야인 1914년 7월을 회상하고 있었다. “과거에 시도되었던 것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상원의원의 눈은 그를 속이지 못했다. 혁명의 연속성은 명확했다. 역사는 전쟁으로 끊어진 혁명의 실타래를 다시 들어 올려 묶고 있었다.

그날 하루 종일 군중의 무리들이 도시 여기 저기에서 쏟아져 나왔다. 경찰은 이들을 끈질기게 뒤쫓았다. 그리고 경기병과 가끔은 보병이 이들을 저지하자 이들은 한군데로 몰렸다. “경찰 타도!”의 함성과 함께 카자흐 부대에 대한 “만세!”의 함성이 점점 더 자주 들렸다. 이것은 의미심장했다. 경찰에게 군중은 격렬한 증오심을 드러냈다. 이들은 휘파람, 돌, 얼음 조각 등으로 기마경찰을 물리쳤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로 노동자들은 병사들에게 접근했다. 병사들의 막사, 초소, 순찰로, 대오 주위에 남녀 노동자 무리들이 병사들과 친근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파업의 확산과 병사에 대한 노동자의 개인적 접촉은 새로운 단계를 의미했다. 이것은 모든 혁명에서 불가피하게 등장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매번 새로워 보일 뿐 아니라 다른 모습을 띤다. 이 단계에 대해 글을 읽고 쓴 적이 있는 사람들도 이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날 의회에는 의원들이 모였다. 이들은 얼마나 많은 군중들이 즈나멘스키 광장과 네프스키 가도 전부 그리고 이웃한 도로들을 메웠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혀 유례가 없는 사건 즉 혁명적이지만 결코 애국주의적이지 않은 군중이 “만세!”의 함성으로 카자흐 부대와 밴드를 앞세운 연대들을 환영한 일들을 말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이오?”라는 어느 의원의 질문에 누가 이렇게 대답했다: “경찰이 한 여성을 가죽채찍으로 때리자 카자흐 병사들이 개입하여 경찰을 몰아냈습니다.” 실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군중은 이렇게 일이 실제 벌어졌으며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이 믿음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지 않았다. 과거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따라서 승리의 보증수표가 될 것이었다.

에릭슨 공장은 비보르그 지구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공장 가운데 하나였다. 이 공장의 노동자 2천5백여 명은 아침 집회를 끝내고 삼프슨니에프스키 가도로 진출했다. 그리고 좁은 장소에서 카자흐 부대와 마주쳤다. 카자흐 장교들은 처음에는 말의 가슴을 들이밀어 군중 속으로 돌진했다. 이들 뒤에서는 가도 전체를 덮으며 병사들이 빠른 속도로 말을 타고 돌진했다.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조심스럽게 길게 대열을 형성하며 장교들이 뚫은 좁은 공간으로 말을 몰았다. 카유로프는 이렇게 회상한다: “이들 중 일부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 명은 노동자들에게 선의의 윙크를 보냈다.” 이 윙크는 의미가 없지 않았다.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는 이 호의적인 신호를 받자 노동자들은 대담해졌다. 그리고 이 대담성은 카자흐 병사들을 전염시켰다. 그러자 더 많은 병사들이 윙크를 보냈다. 장교들은 규율을 엄히 세우려고 애썼다. 그러나 병사들은 공공연히 규율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군중과 함께 행진했다. 군중을 해산시킬 이들의 임무는 이렇게 방기되었다. 이 상황은 세 번 또는 네 번 반복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병사들과 군중의 관계는 더 가까워 졌다. 카자흐 병사들은 개별적으로 노동자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이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규율은 최소한으로 유지되고 있었으며 언제든지 깨질 위험이 있었다. 그러자 카자흐 장교들은 서둘러 순찰 병사들을 노동자들과 분리시켰다. 시위대 해산 작전은 포기되었다. 대신 시위대가 가도 중앙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도 가장자리에 병사들을 일렬로 세운 방패막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규율을 겉으로 지키면서 병사들은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이들이 탄 말의 배 밑으로 “뛰어들어” 대오에 합류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혁명은 나아갈 길을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다. 카자흐 병사가 탄 말의 배 밑으로 뛰어들어 승리를 향한 첫 발을 내디뎠다. 이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묘사한 사람의 눈 역시 대단했다. 그는 혁명 과정의 모든 굴곡을 인상적으로 묘사했다. 이것은 당연했다. 그는 지도자였다. 그는 2천명이 넘는 노동자들의 선두에 서 있었다. 적군의 채찍과 총탄을 주시하는 지휘관의 눈은 날카로울 수밖에 없다.

혁명으로 맨 먼저 넘어간 부대는 카자흐 부대였던 것 같다. 이들은 봉기를 진압하고 징벌을 강제하는 오래된 부대였다. 그러나 카자흐 부대가 다른 부대보다 더 혁명적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와 반대로 이 토지소유주들은 자기들이 기른 말을 타면서 카자흐 문화의 특이성을 매우 자랑하면서 평원의 농민들을 경멸했으며 노동자들을 불신하는 등 보수적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전쟁이 가져온 변화는 이들에게 더 날카롭게 반영되었다. 더욱이 이들은 이리저리 호출되었고 파견되었으며 인민과 대치하는 등 언제나 긴장했다. 따라서 이들은 제일 먼저 시험에 처해졌다. 이들은 지금 모든 일에 염증이 났으며 집으로 가고 싶어했다. 그래서 이들은 윙크를 보낸 것이었다: “그래 할 수 있으면 열심히 해봐! 방해는 놓지 않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징후에 불과했다. 군대는 여전히 군대였다. 규율의 오랏줄로 묶여있었으며 오랏줄은 짜르의 손에 있었다. 노동대중은 무장되지 않았다. 대중 지도자들은 결정적인 위기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짜르 내각은 무엇보다도 이 날을 수도에서 소요가 일어난 날로 기록했다. 파업? 시위? 그러나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다. 모든 대책은 세워져 있다. 지시사항들은 전부 하달되었다. 평상시의 업무로 복귀하라.

그렇다면 지시사항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23일과 24일 28명의 경찰관이 시위대에 의해 폭행 당했다. 이 수치는 정확해서 대단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도 지구 지휘관이자 독재자에 가까운 하발로프 장군은 발포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시위대에 친절을 베풀어서가 아니었다. 발포명령을 포함한 모든 것이 미리 준비되고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들은 혁명이 터질 정확한 순간을 알지 못했다. 이들은 기습을 당한 셈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혁명 진영과 짜르 정부 모두 혁명의 순간에 대비해 몇 년간 꼼꼼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볼세비키들에게 1905년 혁명 이후 모든 활동은 두 번째 혁명에 대한 준비작업이었다. 그리고 정부 활동의 대단히 많은 부분도 새로운 혁명을 저지하는데 바쳐졌다. 1916년 가을 특히 정부는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 혁명을 대비하고 있었다. 1917년 1월 중반까지 하발로프의 지휘 아래 정부 위원회는 새로운 봉기를 진압할 아주 정교한 계획을 완성해놓고 있었다. 뻬쩨르부르그는 6개의 경찰지구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경찰지구는 다시 하위 단위인 라욘(rayon)으로 나누어졌다. 예비역 방위군 사령관 체비킨 장군은 국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연대는 각 라욘에 배치되었다. 6개 경찰지구에는 특별지휘부에 의해 경찰, 헌병, 군대가 통합 배치되었다. 카자흐 기병대는 대규모 작전을 위해 체비킨 자신이 직접 지휘했다. 작전 순서는 다음과 같이 계획되었다: 경찰의 단독 작전이 먼저 진행되고 다음으로 채찍을 든 카자흐 기병대가 나선다; 진짜 필요할 때만 군대가 소총과 자동소총으로 무장하여 작전에 투입된다. 1905년 경험에 의해 입안된 바로 이 계획이 2월 혁명 내내 시행되었다. 문제는 예측의 부족이나 계획 자체의 결함이 아니었고 인적 자원에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계획 전체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다.

공식적으로 이 계획은 15만 병력의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약 1만 명만이 진짜 동원 가능한 병력으로 계산되었다. 3천5백의 경찰 병력 외에도 사관학교 생도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거는 희망은 확고했다. 왜냐하면 당시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은 거의 예비역 부대로만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당시 전선에 배치된 방위군 연대들에 부속된 14개 예비역 대대가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의 주력이었다. 이와 함께 주둔군은 예비역 보병 1개 연대, 예비역 자전거 1개 대대, 예비역 장갑차 1개 사단, 공병과 포병 소규모 부대 그리고 돈 카자흐 2개 연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대단한 병력이었다. 아니 너무 많은 병력이었다. 불어난 예비역 부대들은 훈련을 거의 하지 못했거나 훈련에서 면제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군대 전체가 이런 상태에 있었다.

하발로프는 자신이 입안한 계획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실행에 옮겼다. 혁명 첫날인 23일에는 경찰력만이 동원되었다. 그 다음날에는 대부분의 경우 기병 부대만 거리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채찍과 총검만 사용하도록 명령받았다. 보병과 총포는 상황에 따라 사용될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25일이 되자 파업은 확산되었다. 정부의 수치에 따르면 24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노동자의 가장 후진적 부위들이 선진 부위를 따르고 있다. 이미 상당수의 소규모 사업장들이 파업 중이다. 거리의 전차는 멈추었고 기업들은 문을 닫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들도 파업에 동참한다. 정오가 되면 수만의 군중이 카잔 대성당과 주변 거리들로 쏟아져 나온다. 가두 집회를 조직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무장한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한다. 알렉산드르 3세 기념비 주위에 모인 군중에게 연설이 행해진다. 기마경찰이 발포한다. 연설자 한 명이 총에 맞아 부상을 입고 쓰러진다. 군중 가운데에서 누가 총에 쏘아 경감이 살해되고 경찰청장을 비롯한 여러 경찰관들이 부상을 당한다. 헌병들에게 병, 폭약, 수류탄이 던져진다. 전쟁은 군중에게 이 기술을 가르쳤다. 병사들은 경찰에 대해 무관심 그리고 때때로는 적대감을 표출한다. 이 감정이 흥분과 함께 재빨리 군중 사이에 퍼진다. 알렉산드르 3세 기념비 옆에서 경찰이 발포하자 카자흐 기병대가 기마 “파라오”라는 별명이 붙은 기마경찰에 연속으로 발포했다. 그러자 후자는 급히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혁명군중을 격려하기 위해 지어낸 소문이 아니었다. 구체적인 사항들은 전달자들에 따라 달랐지만 이 사건은 여러 경로를 통해 그 진실이 확인되었다.

당시 진정한 지도자였던 볼세비키 노동자 카유로프는 당시 있었던 사건 하나를 이렇게 전한다. 카자흐 부대가 보이는 쪽에서 시위대가 기마경찰의 채찍질에 흩어진다. 그러나 카유로프 자신과 여러 명의 노동자들이 도망가는 군중 틈에 끼이는 대신 모자를 벗고 카자흐 병사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한다: “카자흐 형제들, 평화롭게 요구를 성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도와주시오. 파라오들이 우리 굶주린 노동자들을 취급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소. 우리를 도와주시오!” 손에 모자를 들고 의식적으로 겸손한 자세를 취한 것은 얼마나 정확한 심리 계산인가! 모방할 수 없는 모습이 아닌가! 가두전과 혁명이 승리한 역사에는 이러한 즉흥적 투쟁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이것들은 거대한 사건들의 소용돌이 속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사건들의 껍데기 즉 일반화는 역사가들의 손에 넘겨진다. 카유로프는 계속 이렇게 전한다: “카자흐 병사들은 특이하게 서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길을 비켜서기도 전에 경찰을 향해 돌진한다.” 이로부터 몇 분이 지난 후 기차역 정문 근처에서 군중은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기병도로 경감을 살해한 카자흐 병사를 헹가래치고 있었다.

곧 경찰은 완전히 군중의 눈에서 사라진다. 이제 이들은 비밀리에 활동을 시작한다. 이때 칼을 꽂은 소총을 아래로 향한 채 병사들이 나타난다. 노동자들이 이들에게 걱정스럽게 묻는다: “동지들, 경찰을 도우려고 온 것은 아니지요?” 그러자 거칠게 “옆으로 물러서!”라는 대답이 나온다. 다른 노동자의 똑같은 질문도 똑같은 대답을 얻을 뿐이다. 병사들은 기분이 좋지 않다. 신경이 날카로운데 자신들의 아픈 곳을 정확히 건드리는 질문을 참아낼 수가 없다.

한편 기마경찰의 무장을 해제시키자는 구호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경찰은 잔인하여 제압할 수 없다. 이들은 증오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증오심을 가득 간직하고 있다. 이들을 혁명의 편으로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을 무자비하게 패고 죽여라. 그러나 병사들은 다르다. 군중은 이들과 적대를 피하고 우호적 관계를 만든다. 그리고 이들을 설득시키고 동지로 만들어 이들과 단결할 이런 저런 방법들을 찾는다. 카자흐 부대에 대한 좋은 소문들은 아마 약간 과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군중의 태도는 조심스럽기만 하다. 기병은 군중의 머리 높이 앉아있다. 그의 영혼은 말의 네 다리 위로 솟아있어 시위 군중의 영혼과 거리가 있다. 위로 올려보아야 할 사람은 항상 더 높은 것처럼 그리고 더 위협적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이에 비해 보병은 보도에서 군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기 때문에 더 가깝고 대하기가 쉽다. 대중은 보병들 가까이 접근하여 이들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자신의 뜨거운 입김으로 이들을 감싸려 한다. 노동자와 병사의 관계에서는 여성 노동자가 커다란 역할을 한다. 이들은 병사의 대열에 남자보다 더 대담하게 접근한다. 그리고 이들의 소총을 잡고 호소하고 거의 명령한다: “총검을 내려놓고 우리와 합류하세요.” 병사들은 흥분되고 부끄러워서 서로 근심 어린 눈길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동요한다. 어느 병사가 먼저 결심을 하고 죄책감 속에 다가오는 군중 어깨 위로 총검을 들어올린다. 시위의 장애물이 걷혀진다. 기쁨에 찬 감사하는 마음의 “만세”가 공기를 뒤흔든다. 병사들은 군중에 의해 둘러싸인다. 모든 곳에서 주장하는 소리, 야단치는 소리, 호소하는 소리들이 들린다 -- 혁명은 이렇게 한 발짝 또 전진한다.

총사령부에서 니콜라스 2세는 하발로프에게 전보로 명령을 내린다: “내일 당장” 소요사태를 진압해라. 짜르의 의지는 하발로프가 세운 “계획”의 제 2 단계와 일치했다. 짜르의 전보는 자극제에 불과했다. 내일은 군대가 자기 할 말을 할 것이다. 너무 늦지 않았을까? 아직도 알 수 없다. 혁명의 문제는 제기되었을 뿐 아직 해답을 얻지 못했다. 카자흐 부대의 관대함, 일부 보병 대오의 동요 등은 혁명의 앞길을 밝혀주는 일회적 사건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것들은 예민한 혁명의 거리에서 1천의 메아리로 반복될 것이다. 이것들은 혁명 군중에게 영감을 불어넣기에는 충분하지만 혁명을 승리로 이끌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정반대의 사건들도 있기 때문에 특히 그렇다. 대구경 소총을 든 기마 보병대가 오후에 나타나 군중 일부의 권총 사격에 응답하여 고스키니 드보르 근처에서 시위대에 처음으로 발포했다. 총사령부에 보낸 하발로프의 보고서에 따르면 3명이 살해되고 10명이 부상을 입었다. 심각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동시에 하발로프는 징병대장에 등록된 노동자들이 28일 전까지 공장에 복귀하지 않으면 전선에 투입될 것이라는 위협적인 성명서를 발표했다. 3일의 여유를 준 최후통첩이었다. 그러나 장군은 자기와 왕정이 타도되고 이 결과 협상이 진행되도록 만드는데 필요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혁명에게 허용했다. 그러나 이 사실은 혁명이 승리한 후에야 밝혀진다. 25일 저녁 시점에서 그 다음날 어떤 일이 준비되고 있는지 아무도 추측할 수 없었다.

혁명운동의 내적 논리를 좀더 명확하게 파악해보자. 2월 23일 “여성의 날” 깃발 아래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의 오래 성숙되고 저지되었던 봉기가 시작되었다. 봉기의 첫 걸음은 파업이었다. 3일에 걸쳐 파업은 확대되어 실제적으로 총파업으로 발전했다. 이것만이 대중에게 확신을 불어넣었으며 이들은 전진을 계속했다. 더욱 공격적이 되면서 파업은 시위와 하나가 되었다. 시위를 통해 혁명 대중은 군대와 대치하였다. 이로써 혁명의 문제는 전체적으로 수준이 상승하면서 무장을 준비할 단계로 나아갔다. 혁명의 첫 며칠동안 상당수의 개별적인 승리들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혁명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지 못했으며 단지 승리의 징후를 드러냈을 뿐이었다.

며칠에 걸쳐 확산된 봉기는 한 단계 한 단계 상승하면서 계속해서 성공할 때만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 상승을 멈추면 상황은 위험해진다. 그리고 시간을 오래 끌수록 혁명은 치명타를 입는다. 더욱이 개별적인 승리로는 불충분하다. 대중이 제 때에 승리의 사실을 알고 이것의 가치를 이해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손에 잡힐 정도로 가까이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승리는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패배로 변할 수 있다. 역사에서 이런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다.

투쟁의 범위와 강도로 보면 첫 3일은 중단 없는 상승기였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혁명운동은 승리의 징후에 불과한 것으로는 불충분한 단계에 도달했다. 적극적인 대중 전체가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경찰에 대항해 쉽게 승리했다. 마지막 2일 동안 군대가 사건에 끌려 들어왔다. 두 번째 날에 기병이 세 번 째 날에는 보병이 투입되었다. 군대는 길을 막고 대중을 밀치고 한곳으로 몰아넣었다. 때때로 군중에게 아량을 베풀 뿐 결코 발포하지 않았다. 군대 지휘관들은 기존의 계획을 잘 바꾸지 않았다. 이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과소 평가한 것이 이유의 일부였다. 반동세력의 잘못된 현실인식은 혁명지도자들의 잘못된 현실인식을 부추겼다. 군대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도 이유의 일부였다. 그러나 바로 3일째 되는 날에 터져 나온 투쟁의 위력과 짜르의 명령은 정부가 군대를 진지하게 지휘하도록 만들었다. 노동자들 특히 그 선진 부위는 이 점을 이해했다. 기마 보병은 이미 전날에 발포했었다. 이제 혁명 진영과 반동 진영은 명확하게 문제의 본질에 접근했다.

26일 밤 약 100명이 도시의 여러 곳에서 체포되었다. 이들은 여러 혁명조직에 속했는데 이들 중에는 볼세비키당 뻬쩨르부르그 위원회 5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드디어 정부가 공세로 나섰다. 오늘은 무슨 일이 벌어질까? 어제의 발포 사건 후 어떤 느낌으로 노동자들은 잠에서 깨어날 것인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군대였다. 이들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불확실성과 격심한 우려의 안개 속에서 2월 26일의 해가 떴다.

볼세비키당 뻬쩨르부르그 위원회의 체포 때문에 이 도시의 활동 전체는 비보르그 지구 노동자들의 지도에 달려 있었다. 어쩌면 이 상황은 정당한 지도 몰랐다. 당의 상층 지도부는 가망 없이 반응이 느렸다. 25일 아침이 되어서야 볼세비키 중앙위원회 집행부는 전국 총파업을 촉구하는 유인물을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유인물은 발행되지 못했다. 만약 발행되었다면 그 순간에 이미 뻬쩨르부르그 총파업은 무장봉기에 돌입한 상태였을 것이다. 지도부는 이 운동을 위에서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이들은 주저했으며 사태를 주도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녔다.

투쟁은 공장에 가까울수록 더 단호하다. 그러나 26일 노동자 지구들에도 우려의 빛이 역력하다. 배고프고 지치고 추위에 노출된 채 비보르그 지도자들은 거대한 역사적 임무를 어깨에 지고 있었다. 이들은 도시 경계 밖에 있는 채소밭에서 회의를 갖는다. 보고 들은 정보를 교환하고 투쟁 과정을 계획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무슨 계획이 나올 것인가? 시위를 재개한다? 군대가 발포하고 있는데 비무장 시위로 충분할까? 이 문제는 이들 마음 속 깊이 박힌다. “한가지는 명백한 것 같다. 봉기는 붕괴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미 우리에게 친근한 카유로프의 목소리가 들린다. 처음 듣기에는 그의 목소리가 전혀 아닌 것 같다. 폭풍이 닥치기 전에 기압계는 크게 떨어진다.

대중과 가장 가까이 있는 혁명가들조차 주저하고 있던 시간에 혁명운동은 참여자들이 생각한 것보다 이미 한참 앞서 나가 있었다. 전날인 25일 저녁에 비보르그 지구는 벌써 완전한 봉기 상태에 들어갔다. 경찰서는 파괴되었다. 경찰관 일부는 살해되었다. 이들의 다수는 줄행랑을 놓았다. 도시 군사령부는 도시 다수 지역과의 교신이 차단 당했다. 26일 아침 비보르그 지구 뿐 아니라 리트에이니 가도에 이르기까지 페스키 지구도 봉기에 돌입했다. 최소한 경찰보고서는 상황을 이렇게 보고 있었다. 혁명가들은 거의 인식하지 못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경찰의 판단은 옳았다. 노동자들의 위협이 있기 전에 경찰관 대부분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공장지구 경찰관들의 도망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군대가 최후의 결정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장 대담한 혁명가들조차 봉기가 “붕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봉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을 뿐이었다.

2월 26일은 일요일이었다. 공장이 가동되지 않았기 때문에 파업의 정도로 대중의 힘을 측정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지난 며칠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집회를 열 수 없었다. 아침에 네프스키 가도는 한산했다. 이 시간에 왕후는 짜르에게 이렇게 전보를 보냈다: “도시는 평온합니다.”

그러나 이 평온은 오래가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서서히 결집하여 교외지구에서 도시 중심부로 이동하고 있다. 이들은 다리에서 저지 당한다. 그러자 무리를 지어 강 위를 건넌다. 아직 2월이므로 네바강은 탄탄한 얼음 다리이다. 얼음 위의 군중에게 발포해보았자 이들을 저지할 수 없다. 시위 대중은 도시가 변모되어 있음을 목격한다. 치안 민병대, 저지선, 기마 순찰대 등이 온 곳에 깔려 있었다. 특히 네프스키 가도로 가는 길목은 경계가 철통같았다. 이따금 매복 병사의 발포가 귀를 울린다. 사상자의 수가 늘어간다. 여기 저기서 구급마차가 쏜살같이 달린다. 누가 발포하고 있으며 총알이 어디서 날아오는 지를 언제나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하다: 잔인하게 교훈을 체득한 후 경찰은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들은 창문, 발코니 문, 건물기둥 뒤, 다락방 등에서 총을 쏜다. 추측이 쉽게 난무하고 전설이 된다. 시위자들을 협박하기 위해 다수 병사들이 경찰복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소문이 돈다. 프로토포포프가 수많은 건물의 다락방에 기관총 초소들을 배치해 놓았다고 한다. 혁명이 승리한 후 구성된 위원회는 이런 초소들을 찾지 못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날 경찰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군대가 결정적으로 싸움에 투입된다. 이들은 엄격한 발포 명령을 하달 받는다. 그리고 하사관연대 학교의 훈련분대들은 진짜 발포한다. 공식 수치에 따르면 이날 40명이 살해되고 같은 수가 부상당했다. 군중이 싣고 가거나 인도해간 숫자는 물론 이 수치에서 제외된다. 투쟁은 이제 결정적 단계에 도달한다. 납 총탄 앞에 대중이 굴복하여 다시 교외지구로 되돌아갈 것인가? 아니다. 이들은 굴복하지 않는다. 자체 동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뻬쩨르부르그의 관료들, 자본가들, 자유주의자들은 공포에 떨었다. 이날 의회 의장 로지안코는 전선에 배치된 믿을만한 군대가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나중에 그는 “다시 생각한 후” 전쟁장관 벨라예프에게 총탄이 아니라 소방호스의 찬물로 봉기 대중을 해산시킬 것을 권유했다. 하발로프 장군과 협의한 후 벨라예프는 그럴 경우 군중이 “흥분할 것이므로” 결과는 정반대가 될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렇게 자유주의자와 관료 상층부는 시위대에 더운 물을 퍼부을지 아니면  차가운 물을 퍼부을 지에 대해 논의했다. 이 날 작성된 경찰보고서는 소방호스가 부적절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순찰대에 대한 대중의 엄청난 저항이 소요의 일반적 현상이다. 해산을 종용하자 군중은 순찰대에게 도로에서 파헤친 돌과 얼음 덩어리를 던졌다. 경고 사격이 허공을 갈라도 군중은 해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너털웃음으로 응답했다. 군중 한가운데로 총을 쏘자 시위대는 흩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근처 집 마당으로 몸을 피한 후 총격이 멈추자마자 다시 거리로 나왔다.” 이 경찰 보고서는 대중의 저항의식이 대단히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군대나 훈련병들에 대해 군중이 자발적으로 돌과 얼음 덩어리로 공격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것은 봉기 대중의 심리나 군대에 대한 이들의 전술과 너무 모순되었을 것이다. 살육을 보충적으로 정당화시킨 글이기 때문에 경찰 보고서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개개 사실들도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올바로 특히 놀랄 정도로 생생하게 보고되고 있다: 대중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낙관적인 밝은 표정으로 저항하고 있다, 연속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이들은 물러서지 않고 있다, 이들은 자기 목숨이 아니라 보도, 돌, 얼음 덩어리에 집착하고 있다. 군중은 격렬히 분노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과감하다. 왜냐하면 발포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대한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혁명 대중은 승리를 기대하고 있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를 원하고 있다.            

군대에 대한 대중의 압력은 증대하고 있다. 정부 당국은 이 압력에 대항하고 있다.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은 사태의 방향을 결정한다. 봉기에 대해 병사 대중이 우호적 중립을 지킬 수 있었던  3일의 기간은 끝났다. 왕정은 군대에게 명령을 내린다: “적들에게 발포하라!” 그러자 노동자들은 이렇게 외친다: “당신들의 형제 자매에게 발포할 수 없다!” 이것뿐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봉기에 나서자!” 거리, 광장, 다리, 막사 정문 등에서 병사들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해 때로는 극적으로 때로는 평범하게 그러나 언제나 필사적인 투쟁이 계속된다. 이 투쟁, 남성 여성 노동자와 병사들 사이의 날카로운 대치, 지속적으로 울리는 소총과 기관총 소리. 이 가운데에서 정권, 전쟁,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다.

군대의 발포는 대중 지도자들에게 불안감을 증대시켰다. 운동의 균형추가 위험하게 기우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혁명이 승리하기 12시간 전인 26일 저녁, 비보르그 위원회 회의는 파업을 끝내자는 토론을 했다. 이것은 놀라운 현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억할 것이 있다. 승리하기 전날보다 승리한 다음날에 승리를 인정하는 것이 훨씬 쉬운 법이다. 그리고 대중의 정서는 사건들의 영향과 소식에 의해 빈번히 변한다. 침체의 분위기는 금방 열광의 분위기로 변한다. 카유로프와 추구린 같은 진짜 대중 지도자들은 대단한 개인적 용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끔 대중에 대한 책임감이 이들을 짓누른다. 이와 반대로 투쟁 중인 노동자들은 훨씬 적게 동요한다. 정보가 빠삭한 경찰 첩자 슈르카노프는 볼세비키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시위대의 정서를 당국에 보고했다. 그의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군대는 시위대를 진압하지 않았고 병사 개개인은 경찰의 공격을 마비시키는 행동을 했다. 이 때문에 군중은 면책권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 이틀동안 이들은 거리를 활보했다. 그리고 혁명 진영은 ‘전쟁 타도!’, ‘짜르 타도!’의 구호를 내걸었다. 이제 대중은 혁명이 시작되었으며 자신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군대가 자기들 편이기 때문에 당국이 운동을 진압할 수 없다. 군대가 곧 혁명의 편에 설 것이기 때문에 결정적 승리의 순간이 가까이 다가왔다. 시동이 걸린 혁명운동은 가라앉기는커녕 끊임없이 전진하여 완벽한 승리와 국가에 대한 혁명으로 나아갈 것이다.” 압축성과 명확성의 측면에서 대단한 글이 아닐 수 없다! 이 보고서는 대단히 가치 있는 역사적 문서이다. 물론 승리한 노동자들은 이 작자를 살려두지 않았다.

슈르카노프와 같은 경찰 첩자들은 대단히 많았다. 이들은 특히 뻬쩨르부르그에서 많이 활동했다. 그런데 이들은 어느 누구보다 혁명의 승리를 두려워했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 나름의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볼셰비키 회의 때마다 슈르카노프는 가장 극단적인 투쟁방식을 옹호했다. 비밀경찰 보고서에서 그는 시위대에 대한 총격을 크게 강화하여 사태를 과감히 결정지을 것을 제안했다. 이 목적을 위해 그는 노동자들의 높은 자신감을 과장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그는 옳았다. 이후의 사건들이 그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혁명과 반동 두 진영의 지도자들은 추측하고 동요했다. 왜냐하면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역관계를 선험적으로 미리 추정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겉모습들은 역관계를 측정할 수 있는 잣대가 결코 되지 못했다. 대중의 현재 의식과 사회관계의 낡은 형태들 사이에는 날카로운 모순이 존재한다. 바로 이것이 혁명적 위기의 가장 주요한 특징이다. 새로 조성되는 역관계가 신기하게 노동자와 병사들의 의식에 각인 되고 있었다. 새로운 역관계를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전화시킨 것은 혁명 대중의 공세에 대한 정부의 공세였다. 노동자는 목이 말라 병사의 눈을 명령하듯 응시했다. 이것을 병사들은 걱정과 무기력으로 외면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 표정은 병사가 더 이상 자기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는 암시였다. 노동자는 병사에게 더 대담하게 다가갔다. 적대감보다는 죄책감으로 병사는 무뚝뚝하게 대답을 거부했다. 또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감추기 위해 더욱더 뻣뻣한 체했다. 이렇게 해서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다. 병사는 본래의 모습을 확실히 벗어 던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의 변한 모습을 즉시 알아보지는 못했다. 혁명이 병사들을 취하게 했다고 당국은 말했다. 그러나 반대로 병사들은 군대 막사의 아편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결전의 날 2월 27일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날 밤에 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그 일회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26일의 사건 전부를 새로운 빛으로 조명하고 있다. 저녁때가 다가오자 제국 방위군에 소속된 파블로프스키 연대의 제 4 중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어느 경감의 보고서에는 반란의 원인이 딱 잘라 제시되고 있다: “네프스키 가도 근무 중 같은 연대 소속의 훈련병 분대가 군중에게 발포했다. 이에 대한 분노가 반란의 원인이었다.” 누가 이 사실을 제 4 중대에 알렸는가? 우연히 그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오후 2시쯤 노동자 몇 명이 파블로프스키 연대의 막사에 뛰어갔다. 네프스키 가도의 발포에 대해 이들은 서로 다투어서 병사들에게 알렸다. “네프스키 가도에서 당신들과 똑같은 군복의 병사들이 우리에게 발포하고 있다고 동료들에게 알리시오.” 이것은 뜨끔한 문책이었으며 열렬한 호소였다. “모든 병사들은 이 말을 듣자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혁명의 씨앗이 뿌리 내릴 곳을 제대로 찾은 셈이었다. 6시쯤에 제 4 중대는 상관의 허락도 없이 어느 하사관의 인솔로 막사를 떠났다. 그 하사관은 누구인가? 그의 이름은 그와 똑같이 영웅적인 수십만의 전사들과 함께 영원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제 4 중대는 네프스키 가도로 행진하여 훈련병 분대를 귀대시켰다. 이 행위는 벌레가 기어다니는 고기 덩어리 식사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의 반란이 결코 아니었다. 이것은 고귀한 혁명적 자발성이었다. 막사로 돌아가는 길에 이 중대는 기마경찰의 일개 부대와 마주쳤다. 병사들은 이들에게 발포했다. 경찰 한 명과 말 한 마리가 살해되었다. 경찰 또 한 명과 말 또 한 마리는 부상을 당했다. 거리에 몰아치는 혁명의 폭풍 속에서 반란 병사들의 이후 행적은 알 수가 없다. 이 중대는 막사로 돌아가 연대 전체를 선동했다. 그러나 연대의 무기를 누가 이미 숨긴 후였다. 일부 소식통들에 의하면 이들은 소총 30정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는 이들을 곧  포위했다. 파블로프스키 연대 병사 19명은 체포되어 요새 감옥에 갇혔다. 나머지는 항복했다. 다른 정보에 따르면 이날 저녁 장교들은 병사 21명이 소총을 분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주 위험한 누출사고였다! 이 21명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동정하고 옹호할 병사들을 밤새 찾아 다녔다. 혁명의 승리만이 이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노동자들은 이 병사들로부터 사건의 자초지종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었다. 이것은 내일의 전투를 위해서는 썩 나쁘지 않은 징조였다.

나보코프는 유명한 자유주의 지도자였다. 그의 솔직한 회고록은 가끔 그가 속한 당과 계급 자체의 일기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어둡고 경계가 삼엄한 거리를 따라 어떤 곳을 방문한 후 새벽 1시에 귀가하고 있었다. 그는 “어두운 예감으로 마음이 가득 차 지극히 불안했다”. 어느 건널목에서 그는 파블로프스키 연대의 도망병을 한 명 만났다. 이 두 사람은 서둘러 서로를 지나쳤다. 이들은 서로 할 말이 없었다. 노동자 지구와 병사의 막사에서 일부는 보초를 서거나 대화를 나누었고 일부는 야영 할 때와 같이 선잠을 잤거나 다음 날에 대해 열병에 걸린 듯한 지독한 꿈을 꾸었다. 이곳에서 파블로프스키 연대의 도망병은 쉴 곳을 찾았다.

 

2월 혁명에서 대중투쟁의 기록은 정말이지 찾기 힘들다. 10월 혁명의 빈약한 투쟁 기록보다 더욱 그렇다. 10월에 당은 봉기를 매일매일 지도했다. 신문 기사, 선언문, 보고서 등 투쟁의 외적인 연속성은 최소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2월의 경우는 달랐다. 대중 지도부는 거의 없었다. 신문들은 파업 때문에 발간될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중은 스스로 역사를 창조했다. 거리의 투쟁들을 재구성하여 생생하게 복원시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최소한 사건들의 일반적 연속성과 내적 순서를 재구성 해내기만 해도 좋을 것이다.

아직도 권력기구를 쥐고 있었던 정부는 좌익 정당들보다 더 상황을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자도 별로 나을 것은 없었다. 26일의 “성공적인” 군대의 발포 이후 정부의 장관들은 잠시 용기를 가졌다. 접수된 정보에 따르면 27일 아침 일찍 프로토포포프는 “노동자들 일부가 업무에 복귀할 생각을 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보고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어제의 발포와 시련은 대중의 기를 전혀 꺽지 못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겉으로 보기에는 손실에 비해 성과가 더 컸다. 시위대는 거리로 몰려나와 적들과 충돌했다. 병사들의 팔을 잡아당겼다. 말의 배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공격하다 흩어졌다. 건널목에 시체를 남기고 몇몇 총기를 집어들었다. 소식을 전하고 소문을 들었다. 이 경험을 통해 봉기 대중은 수없이 많은 눈, 귀, 안테나를 가진 집단이 된다. 밤에 노동자 지구로 돌아온 후 이들은 하루의 인상을 정리하고 사소하고 우연한 일은 솎아버린다. 그리고 나름대로 깊이 계산한다. 27일 밤 이 계산은 경찰 첩자 슈르카노프가 당국에 제출한 보고서의 내용과 일치했다.

아침에 노동자들은 다시 공장으로 줄지어 들어갔다. 그리고 공개 집회에서 투쟁의 재개를 결의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비보르그 지구 노동자들은 강한 결의를 보였다. 그러나 다른 지구들 역시 아침 집회가 열기로 가득했다. 투쟁을 계속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총파업으로 대규모 노동자들이 혁명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시위대는 군대와 충돌했다. 오늘의 계속된 투쟁은 무장봉기를 촉구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내용을 명확히 표현하지 못했다. 무장봉기는 사태의 전개 속에서 불가피하게 도출되었다. 혁명정당이 무장봉기를 촉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혁명 지도력의 10분의 9는 대중의 정서를 감지하는 데에 있다. 규모가 훨씬 클 뿐 카유로프가 카자흐 병사의 눈썹 움직임을 감지한 것과 같다. 대중의 정서를 누구보다 잘 감지한 것이 레닌의 위대함이었다. 그러나 이때 레닌은 뻬쩨르부르그에 없었다. 합법 반합법 “사회주의” 지도부인 케렌스키, 체이드제, 스코벨레프 그리고 기타 인물들 모두 경고를 보내며 대중의 공세에 반대했다. 슐리아프니코프, 잘루츠키, 몰로토프 등 볼세비키당 중앙 지도부는 놀랄 정도로 무기력했으며 주도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사실 노동자 지구들과 병사의 막사들은 방치되어 있었다. 볼세비키당과 정치적으로 가까운 어느 사회민주주의 조직이 26일 군대에 대해 최초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것의 내용은 조직의 동요를 드러내고 있었다. 더욱이 이 선언문은 인민의 편에 설 것을 군대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이 글은 27일 아침 도시의 모든 지구에 배포되었다. 그러나 조직의 지도자 유레네프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혁명은 너무 빨리 전개되어 우리가 제출한 구호들은 사태에 이미 훨씬 처져 있었다. 유인물이 군대에 침투했을 때 군대는 이미 혁명의 편으로 넘어온 후였다.” 2월 혁명에서 가장 훌륭한 노동자 지도자의 하나인 추구린의 요구에 따라 볼세비키당 중앙의 슐리아프니코프는 27일 아침 병사들에게 호소하는 글을 작성했다. 이 글이 공개되고 배포되었는가? 기껏해야 혁명이 끝난 후 나왔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글은 2월 27일의 사건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지도부는 사태에 더욱 처져 있었다. 이것은 당시의 일반적 법칙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아무도 봉기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던 이 봉기는 스스로를 일정에 올렸다. 노동자들의 생각은 전부 군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병사들을 우리편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날 두서없는 선동은 더 이상 먹히지 않았다. 비보르그 지구 노동자들은 모스크바 연대의 막사 근처에서 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했다. 장교나 상사가 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힘든 일이었겠는가? 노동자들은 잔인한 총격을 받고 흩어졌다. 예비군 연대의 막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여기서도 장교의 기관총 총격으로 노동자와 병사들은 만날 수 없었다. 노동자 지도자들은 화가 나서 총을 찾았다. 그리고 당에게 총을 요구했다. 그러자 이런 대답이 나왔다: “병사들이 총을 가지고 있다. 가서 가지고 와라.” 이것은 노동자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총을 입수하는 방법이었다. 오늘 한꺼번에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투쟁의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왔다. 기관총이 봉기를 싹 쓸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봉기가 기관총을 손에 넣을 것인가? 혁명은 기로에 놓여 있었다.

볼세비키당 뻬쩨르부르그 중앙의 우두머리였던 슐리아프니코프는 자신이 총포나 권총을 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이들을 병사 막사로 보냈던 사실을 회상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노동자와 병사 사이의 유혈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리고 선동에 모든 것을 걸었다. 즉 근면과 모범을 통해 병사들을 정복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이 출중한 지도자가 했던 당시의 말을 확인하거나 부인하는 다른 증언은 아직 없다. 그런데 그의 말은 지도자의 선견지명이 아니라 책임 회피를 드러냈다. 봉기를 지도할 수 없다면 무기가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지도자들에게는 더 손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일정 시점에서 모든 혁명의 운명은 군대의 보수적 성향이 깨지는 것에 달려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군대는 수가 많으며 규율과 무장력이 뛰어나며 올바른 지도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 군사력에 대항하여 비무장이거나 거의 비무장인 대중이 승리하기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격심한 사회 위기는 군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 혁명이 반드시 승리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승리할 가능성이 진정한 인민혁명의 조건들과 함께 존재한다. 그러나 군대는 저절로 또는 단순한 선동으로 봉기를 지지하지 않는다. 군대는 이질적인 분자들의 조합으로 적대 세력들이 징벌의 공포에 의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결정적인 순간 직전에 혁명 병사들은 자신의 역량과 영향력을 알지 못한다. 물론 근로 대중도 이질적인 분자들의 집단이다. 그러나 이들은 반동의 무장력과 결정적으로 대치하기 전에 자기 역량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를 군대와는 달리 수없이 많이 갖는다. 파업, 집회, 시위 등은 투쟁 행위일 뿐 아니라 역량의 잣대이기도 하다. 파업에 대중 전체가 참여하지는 않는다. 모든 파업 노동자들이 투쟁 의지가 충천한 것도 아니다. 투쟁이 가장 첨예한 순간에는 가장 대담한 분자들만 거리로 나선다. 주저하고 피곤하고 보수적인 분자들은 집에서 쉰다. 여기서 혁명투사들은 저절로 걸러진다. 대중은 사건들의 채로 걸러지면서 최상의 분자들을 결집시킨다. 군대는 그렇지 않다. 혁명에 공감하든 동요하든 적대적이든 병사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장교가 휘두르는 강제적 규율에 모두 구속된다. 병사들은 매일 매일 제 1열과 제 2열로 명령에 따라 구분된다. 이들이 어떻게 반항적인 병사와 복종하는 병사로 나누어질 수 있겠는가?

병사들은 혁명의 편이 되기 전에 심리가 서서히 변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점진적 변화에는 자연에서와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 그러면 이 순간은 언제 오는가? 어느 부대는 부대 전체 차원에서 인민의 편에 가담할 준비가 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담하는데 필요한 자극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혁명 지도부는 군대가 자기편으로 넘어올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한 끝에 이들을 획득할 기회를 놓칠 수가 있다. 조건이 성숙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반란 직후 반동세력이 군대를 장악할지도 모른다. 병사들은 가슴속에 불타던 희망을 상실한다. 이들은 규율의 멍에에 다시 복종한다. 그리고 노동자들과 새로 대치할 경우 이들과 거리를 두고 봉기 반대세력에 속한다. 이 과정에서 생각할 수 없거나 측량하기 어려운 많은 분자들, 많은 경향들, 집단적 암시와 자기 암시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복잡한 물질적 심리적 힘들의 엉클어짐 가운데에서 하나의 결론이 명쾌하게 도출된다: 봉기 세력이 진짜 봉기를 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막사로 돌아가서 보고해야 하는 단순한 시위가 아닌 목숨을 건 투쟁이다; 우리들이 합류하면 인민이 승리할 수 있고 이 승리는 우리의 면책권을 보장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개선시킨다. 이 결론을 병사 집단이 확신하고 실감하면 할수록 이들은 총검을 내려놓고 상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총검을 들고 혁명 인민의 편으로 넘어올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 달리 표현하면 혁명 세력은 유혈사태를 포함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를 잡아챌 준비가 확실히 되어있어야 한다. 이 때에만 병사들의 수동적 보수적 정서가 무너진다. 그리고 최고의 투쟁의지는 병사들의 총칼을 반드시 혁명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시위대는 길을 막는 병사들을 밀치며 계속 행진한다. 병사들은 대오를 이루어 시위대의 길을 막는다. 이때 양자는 서로 대면한다. 혁명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 중요한 시간 중에도 더욱 결정적인 일분 일초가 있다. 병사들은 회색 장벽을 이루며 어깨와 어깨를 서로 붙인다. 그러나 이미 이들은 동요하고 있다. 장교가 자신의 마지막 남은 의지력을 동원하여 “발사!”의 명령을 내릴 때가 결정적인 순간 중의 순간이다. 군중의 아우성, 공포와 위협의 고함소리 등이 장교의 명령 소리를 덮어 버리지만 완전히 죽이지는 못한다. 병사의 소총이 동요한다. 군중은 밀친다. 이때 장교는 가장 의심이 가는 병사에게 권총을 겨눈다. 결정적인 일분은 이제 결정적인 일초에 의해 좌우된다. 병사들이 자기도 모르게 지도자라고 인정하는 가장 대담한 병사가 살해당하고 이 죽은 병사의 소총으로 상병이 군중에 발포하는 순간 병사들의 장벽은 굳세게 유지되며 소총 대열에서 저절로 불이 뿜어져 나온다. 이 순간 시위대는 골목과 뒤뜰로 흩어진다. 그러나 1905년부터 지금까지 이와 정반대로 상황이 전개된 경우도 대단히 많았다! 장교가 지도적 병사를 살해하기 위해 권총 방아쇠를 당기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카유로프와 추구린 같은 지도자를 가진 군중 가운데 누가 총을 쏘아 장교가 쓰러진다. 바로 이 순간이 시가전의 운명 뿐 아니라 하루 전체 또는 봉기 전체의 운명을 결정한다.

슐리아프니코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봉기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주지 않으면 군대와 충돌하지 않을 것이며 노동자들의 생명은 보호받는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실행될 수 없었다. 대중은 군대와 충돌하기 전에 이미 경찰과 무수히 충돌했다. 증오의 대상인 파라오들의 무장 해제와 함께 시가전은 시작되었다. 증오스러운 경찰의 권총은 봉기 대중의 수중에 들어갔다. 군대의 소총, 기관총, 대포 등에 비해 권총은 거의 장난감 같은 무기이다. 그러나 이 위력적인 무기들이 진짜 적의 수중에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무기를 요구했다. 이것은 심리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봉기에서도 심리적 과정은 물리적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 병사들의 소총을 손에 넣기 전에 먼저 파라오들의 권총을 빼앗아야 한다.

이 당시 병사들의 정서는 노동자들에 비해 더 수동적이었으나 그 깊이는 결코 뒤지지 않았다.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의 주력은 수천 명으로 구성된 예비군 대대들이었다. 이 점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전선에서 죽어나가는 병사들을 대체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대부분 가장인 이들은 전투가 패배하여 국토가 유린되면 전선의 참호로 배치될 예정이었다. 이들은 당연히 전쟁보다는 고향의 농장에 있고 싶어했다. 이들은 짜르의 궁전에서 일어나는 추잡한 사건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왕정에 대해 조금의 애착도 없었다. 이들은 독일군과 전투하기를 원치 않았다. 당연히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과도 충돌할 생각이 없었다. 이들은 수도의 지배계급을 증오했다. 왜냐하면 지배계급은 전쟁 중에도 사치와 쾌락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둔군 가운데에는 혁명을 경험한 노동자들도 있었다. 이 경험 있는 노동자 출신 병사들은 모든 정서를 일반화해서 표현할 수 있었다.

가슴 깊이 숨어있지만 아직 표출되지 못한 혁명적 불만을 공개적인 반란 또는 최소한 항명과 반란 행위로 유도하는 것이 당면 임무였다. 투쟁 3일째에 병사들은 봉기에 대한 우호적 중립 태도를 완전히 버렸다. 노동자와 병사들의 충돌은 그 우연적인 파편들만이 지금 전해지고 있다. 어제 노동자들은 파블로프스키 연대 병사들에게 소속 훈련병 분대의 행동을 열렬하게 불평했다. 이 내용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러한 장면, 대화, 질책, 호소 등은 도시의 모든 구석에서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었다. 이제 병사들은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이들은 어제 발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럴 것이다. 노동자들은 항복하거나 후퇴할 생각이 없다. 총탄 세례 속에서도 이들은 여전히 대오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여성들 즉 부인, 모친, 여동생, 애인 등도 같이 투쟁하고 있다. 그렇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이들이 그렇게 자주 속삭였던 바로 그 순간이다: “우리 모두 함께 투쟁할 수만 있다면...” 다가오는 또 다른 하루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두려움, 느껴지는 극도의 고통, 자신들을 살인자로 만든 놈들에 대한 숨막히는 증오심, 이 정서들이 병사들을 지배하는 순간 군대 막사에서 공공연한 분노의 첫 목소리들이 울려나온다. 그리고 영원히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분노의 목소리들에 의해 군대 전체는 안도와 환희 속에 자신의 진정한 역할을 인식한다. 로마노프 왕조가 멸망할 그날이 이렇게 러시아 대륙에 밝아왔다.

불굴의 지도자 카유로프의 집에서 아침 회의가 열렸다. 40명이 넘는 공장대표자 가운데 다수는 계속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다수였을 뿐 전부는 아니었다. 어느 정도 다수였는지 알 수 없어 아쉽다. 그러나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기록을 남길 시간이 있을 리 없었다. 어쨌든 이 결정은 이미 너무 늦었다. 병사들이 봉기했으며 감옥 문이 열렸다는 황홀한 소식에 회의가 중단되었다. 경찰 첩자 슈르카노프는 회의 참석자 전원에게 입맞춤을 했다. 이 입맞춤은 배신자 유다의 입맞춤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참석자들은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지는 않았다.

군대들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차례로 막사 밖으로 불려 나오기 전 아침 일찍부터 예비역 방위군 대대들이 차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전날 파블로프스키 연대 제 4 중대의 행동이 계승되었다. 문서, 기록, 회고록 등은 인류 역사의 이 거대한 사건을 희미하게 조명하고 있을 뿐이다. 억압받는 대중은 창조적 행동의 절정으로 상승할 때조차 자기 얘기가 거의 없다. 그리고 글도 제대로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나중에 터지는 압도적인 승리의 환희와 열광이 그나마 남아있던 기억도 지워버린다. 그러면 그나마 남아있는 기록들이라도 확인해보자.

볼린스키 연대의 병사들이 처음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아침 7시 어느 대대장이 전화를 통해 하발로프 장군에게 이 위협적인 소식을 전했다: 훈련병 분대 즉 봉기 진압의 신뢰받는 선봉 부대가 막사 밖으로 행진하기를 거부했다. 이 부대의 지휘관은 살해되었거나 병사들 앞에서 총으로 자결했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후자는 곧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이 부대는 막사 뒤편의 다리들을 불태웠다. 이를 통해 서둘러서 봉기를 확대시키려했다. 봉기의 승리만이 이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웃한 리토프스키,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들의 막사로 달려가 병사들을 “불러냈다”. 마치 파업노동자들이 이 공장 저 공장으로 달려가 노동자들을 불러내는 것과 같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 하발로프는 이렇게 보고를 받았다: 볼린스키 연대가 소총을 반납하라는 장군의 명령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더 놀라운 것은 “노동자들과 합류한 후” 리토프스키 및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들과 함께 정치경찰의 막사를 파괴했다. 이로써 파블로프스키 연대 병사들의 어제 실험이 헛되지 않았다. 봉기는 마침내 지도자들을 찾아냈으며 동시에 행동 계획도 찾아냈다.

27일 이른 아침까지 노동자들은 봉기가 승리할 가망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승리는 훨씬 뭔 미래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실제로 승리는 이미 10분의 9 정도 성취되어 있었다. 노동자들이 병사들의 막사에 가한 혁명적 압력은 이미 거리로 진출한 병사들의 혁명 운동과 맞아 떨어졌다. 낮 시간에 이 두 막강한 물결은 하나로 합류하여 구체제의 벽, 지붕 그리고 기초 전체를 깨끗이 쓸어가 버렸다.

추구린은 볼세비키 중앙 본부에 제일 먼저 나타난 노동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손에 소총을 들고 어깨에 탄띠를 매고 “몰골은 형편없었으나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띤 채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그렇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소총을 든 병사들이 우리 진영으로 넘어오고 있다! 일부에서는 노동자들이 병사들과 뒤섞여 막사에 들어가 소총과 탄창을 받았다. 비보르그 노동자들은 가장 대담한 병사들과 함께 대강의 행동 계획을 짰다: 무장 경찰이 진을 치고 있는 경찰서를 점령한다; 경찰 전부의 무장을 해제시킨다; 경찰서에 잡혀 있는 노동자들과 감옥의 정치범들을 모두 석방시킨다; 도시 안에 주둔하는 정부에 충성하는 군대를 모두 격퇴시킨다; 소극적인 군대 및 다른 지구의 노동자들과 결합한다.

모스크바 연대는 내부 분란을 겪은 후 봉기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정부에 충성하는 지휘관들은 병사 대중들과 무기력하게 분리되었다. 그리고 몸을 숨기거나 서둘러 부대 깃발을 바꾸었다. “병기” 공장의 노동자 코롤레프는 이렇게 회상한다: “2시에 모스크바 연대가 막사 밖으로 행진할 때 우리는 이미 무장을 마친 후였다...우리는 소총과 권총을 각각 한 자루씩 들었다. 그리고 나타난 병사들을 하나로 모았다. (이들 중 일부는 우리가 지휘를 맡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경찰서를 공격하기 위해 티흐빈스카야 거리로 출발했다.” 노동자들은 병사들에게 “당면 임무”를 지시하는 일이 전혀 어렵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승리했다는 즐거운 보고들이 계속 이어졌다. 우리 장갑차들이 나타났다! 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가운데 장갑차들이 지구들을 질주하며 항복하지 않은 모든 자들에게 공포를 퍼뜨리고 있다. 이제 카자흐 병사가 탄 말의 배 밑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혁명은 이제 위풍 당당하게 행진하고 있다.

정오 경에 뻬쩨르부르그는 다시 전투의 격전장이 되었다. 소총과 기관총들이 모든 곳에서 소리내어 불을 토했다. 누가 어디서 총을 쏘고 있는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가지는 확실했다: 과거와 미래가 서로에게 총질하고 있었다. 목표물도 없이 쏘는 총들이 많았다. 어린 소년들이 생각지도 않은 권총을 손에 넣어 여기 저기서 쏘고 있었다. 병기고는 파괴되었다. “브라우닝 권총 수만 자루가 반출되었다고 한다.” 지방법원과 경찰서의 불타는 건물에서 연기 기둥이 올라갔다. 일부에서는 충돌과 작은 전투가 진짜 전투로 변하고 있었다. 삼프소니에프스키 대로에서는 노동자들이 자전거 부대 막사에 도착했다. 자전거 부대 병사 일부는 정문에 몰려 있었다. 병사들은 노동자들에게 “동지들, 물러나시지.”라는 말과 함께 미소를 지으며 침묵을 지켰다. 어느 시위 참가자의 증언에 의하면, “선한 미소는 아니었다.” 한편 장교들은 노동자들에게 물러나라고 거칠게 명령했다. 10월 혁명 때와 같이 2월에도 기병과 함께 자전거 부대는 군대의 가장 보수적인 부위였다. 노동자와 혁명 병사 무리가 곧 울타리 주위로 모였다. “의심스러운 대대를 우리가 직접 끌어내야 한다!” 장갑차를 부르러 보냈다고 누가 보고했다. 기관총을 보유한 자전거 부대를 제압할 방법이 장갑차 이외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갑차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힘들다. 이들은 대단히 성미가 급했는데 이것은 옳았다. 양측에서 총을 쏘았다. 그대로 서있는 판자 울타리가 병사들과 혁명군중을 갈라놓고 있었다. 군중이 공격에 나서서 울타리를 무너뜨릴 결심이었다. 이들은 울타리 일부를 무너뜨렸고 나머지는 불을 질렀다. 울타리가 없어지자 약 20동의 막사가 눈에 들어왔다. 자전거 부대 병사들은 이 가운데 두세 동에 모여있었다. 빈 막사들에 즉시 불이 질러졌다. 이로부터 6년 후 카유로프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불타오르는 막사들, 이들 주위 울타리의 붕괴, 기관총과 소총의 사격, 포위 군중의 흥분된 얼굴, 돌진하고 있는 트럭 한 대에 가득 실린 무장 혁명가들 그리고 마침내 번쩍이는 포구를 뽐내는 장갑차의 도착 등은 기억에 남을만한 대단한 장면이었다.” 낡은 짜르 체제, 봉건제, 교회 체제, 경찰국가 러시아 등이 불타 무너지고 있었다. 막사와 울타리는 불길, 연기, 기관총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수십, 수백, 수천 명의 카유로프들이 환호했다.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자전거 부대 병사들과 장교들의 바리케이드에 장갑차가 도착하여 포탄을 몇 발 갈겼다. 부대 지휘관이 살해되었다. 견장과 다른 장식들을 떼어내면서 장교들은 막사 옆의 채소밭을 가로질러 도망쳤다. 나머지는 항복했다. 이것은 아마 27일의 가장 커다란 승리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군대의 반란은 이제 유행병처럼 번져나갔다. 소문을 듣지 못한 부대만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저녁때가 되자 1905년 모스크바 봉기를 무참히 진압한 악명이 높은 세메노프스키 연대도 봉기에 합류했다. 11년은 헛되지 않았다. 경기병(輕騎兵) 부대와 함께 이 연대의 병사들은 밤늦게 이즈마일로프스키 연대 병사들에게 봉기에 참여하라고 “소리쳐 불렀다.” 이즈마일로프스키 연대의 병사들은 지휘관들이 자물쇠로 잠근 막사 안에 감금되어 있었다. 이 연대는 1905년 12월 3일 역사상 최초의 소비에트를 포위하고 대의원들을 체포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가장 후진적인 연대였다.

15만 병력의 수도 주둔군은 수가 줄어들면서 사라지고 있었다. 밤이 되면 이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연대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아침 소식을 전달받은 후 하발로프는 계속 저항했다. 천 명의 합동연대에게 가장 극단적인 명령을 내려 내보냈다. 그러나 이 연대의 운명은 대단한 미스터리로 남았다. 혁명이 승리한 후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하발로프는 이렇게 말한다: “그날 뭔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용감하고 결의에 찬 장교(쿠티에포프 대령을 의미했다)의 지휘 아래 연대는 출동한다. 그러나 ...결과가 없다.” 이 연대 다음으로 출동한 중대들도 역시 흔적 없이 사라졌다. 하발로프 장군은 궁전 광장에 예비군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탄창이 없었고 이것을 구할 데도 없었다.” 이것은 임시정부의 조사위원회에서 하발로프가 직접 증언한 말이다. 반란군을 징벌하기 위해 보낸 연대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들은 부대 밖으로 행진하자마자 봉기에 흡수되었다. 이 사실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노동자, 여성, 청년, 반란군 등이 하발로프 군대를 사면에서 포위해 모여들었다. 이 연대를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같은 편으로 만들기 위해 군중과 함께 움직이도록 길을 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무리를 지어 다니며 모든 것에 침투하는 대중은 이제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군중과 싸우는 것은 밀가루 반죽으로 울타리를 세우는 것처럼 허망한 일이었다.

더욱더 많은 수의 부대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리고 반란군을 진압하고 전화국, 리토프스키 성곽, 마린스키 궁전, 기타 성스러운 장소들을 지킬 믿을만한 부대를 보내라는 요구가 들어왔다. 하발로프는 크론슈타트 요새에 있는 정부에 충성하는 군대에게 수도로 진군할 것을 전화로 명령했다. 그러나 요새 사령관은 요새 병사들의 반란이 우려된다고 대답했다. 봉기가 이웃 주둔군으로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하발로프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 장군은 겨울궁전을 요새로 전환시키려 했거나 하는 체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현 불가능했기 때문에 금방 폐기되었다. 마지막 남은 몇 줌의 “충성스러운” 부대는 해군본부로 보내졌다. 마침내 여기서 이 독재자는 아주 중요하고 시급한 임무에 몰두했다: 그는 두 건의  정부 포고령을 공표하기 위해 인쇄작업을 명령했다. “신병으로 인한” 프로토포포프의 은퇴와 뻬쩨르부르그의 포위를 명령하는 포고령이었다. 후자의 포고령은 정말 서둘러 인쇄해야 했다. 왜냐하면 몇 시간 후 하발로프의 군대는 “포위”를 풀고 해군본부를 떠나 귀대했기 때문이었다. 이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은 그러나 전혀 막강하지 않은 장군은 27일 저녁까지 체포되지 않았다. 이것은 무지의 소치였다. 그러나 다음날 그는 조금의 문제도 없이 체포되었다.

멸망의 위험 앞에서 난공불락 러시아 제국이 동원한 저항이 이것뿐이었는가? 그렇다. 인민을 압살한 그간의 경험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게 혁명에 대비한 계획이 작성되었다. 그러나 이 정도가 전부였다. 나중에 모든 일이 종결되고 정신을 차리자 짜르 주위의 인물들은 이렇게 설명했다: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의 특이한 성격 때문에 2월 인민혁명이 쉽게 승리했다. 그러나 이후 혁명이 계속 전개되면서 이 주장은 반박되었다. 물론 1917년이 시작될 때 짜르의 친위 파벌은 수도 주둔군을 개선하는 제안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짜르는 이 제안에 쉽게 동의해 주었다. 왜냐하면 그간의 노고로 보아 기병 방위군은 뻬쩨르부르그 부대 막사에서 휴식을 취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그가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선에서 온 대표들이 공손하게 상황을 보고하자 그는 기병 방위군 4개 연대 대신 해군 방위군 3개 함대를 수도에 주둔시키라고 지시했다. 프로토포포프는 이렇게 말했다: “주둔군 교체는 짜르의 동의도 없이 명령에 따라 배신적으로 이루어졌다...수병들은 노동자들로부터 징집되었기 때문에 군대 내에서 가장 혁명적인 분자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틀린 말이었다. 방위군 특히 기병의 최고위 장교들은 전선에서 너무 만족스럽게 경력을 쌓고 있었기 때문에 후방 복귀를 원치 않았다. 이외에도 이들은 징벌 작전에 투입될 가능성을 두려워했음에 틀림없다. 이 부대는 수도에서 행진이나 하다가 전선에서 쓰디쓴 경험을  했다. 이 결과 이 부대는 성격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이 부대를 지휘하여 징벌 작전에 투입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전선의 사건들이 곧 증명했듯이 이때 기병 방위군은 나머지 기병들과 다른 점이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수도로 전근된 해군 방위군은 2월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 이미 구체제는 완전히 썩어 제대로 남아있는 기둥은 하나도 없었다.

2월 27일 군중은 피를 흘리지 않고 수도의 여러 감옥에서 모든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이들 가운데에는 1월 26일 체포된 군사산업위원회의 애국적 그룹, 40시간 전 하발로프에 의해 체포된 볼세비키 뻬쩨르부르그위원회 위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감옥 정문에서 곧바로 정치 분열이 일어났다. 멘세비키-애국주의 인물들은 의회로 향했다. 거기에서 이들의 역할과 지위가 정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볼세비키들은 노동자와 병사들의 지구로 향했다. 이들과 함께 수도 장악의 임무를 완료하기 위해서였다. 적에게 숨쉴 틈을 주지 말아야한다. 다른 어떤 사업보다도 혁명 사업은 끝을 봐야한다.

반란군을 타우리데 궁전으로 인도할 생각을 누가 했는지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반란군의 이 정치적 행진은 전체 상황에 의해 규정되었다. 대중기반이 없는 모든 과격분자들은 자연스럽게 반체제 정보의 구심점인 타우리데 궁전으로 향했다. 아마 이들은 27일 갑자기 활력을 주입 받아서 반란군의 안내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명예로운 역할이었으며 이제 전혀 위험하지 않은 역할이었다. 위치로 보아 포템킨 궁전은 혁명의 중심부가 되기에 아주 적합했다. 타우리데 공원은 방위군의 막사들과 일련의 군사기관들이 포함된 군사지구와 거리 하나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오랫동안 이 지역은 정부와 혁명가들에 의해 왕정의 군사적 중심부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변했다. 병사들의 반란이 방위군 막사 구역에서 시작된 후였다. 반란군은 거리 하나만 건너면 바로 타우리데 궁전의 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타우리데 궁전에서 한 블록 지나면 네바강이었다. 네바강을 건너면 혁명의 용광로 비보르그 노동자지구였다. 노동자들은 알렉산드르 다리를 건너거나 교각 상판이 올라가 있어서 건널 수 없으면 강의 얼음 위를 걸어가 방위군 막사나 타우리데 궁전에 도달할 수 있었다. 뻬쩨르부르그 북동 삼각지는 방위군 막사, 포템킨 궁전, 거대한 공장 등 서로 기원이 다른 시설들이 가까이 몰려 있는 이질적 지점으로 혁명의 각축장이 되었다.

타우리데 궁전에는 이미 여러 쎈터가 수립되었거나 엉성하게나마 수립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중에는 봉기 지휘부도 있었다. 이것은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실수로 혁명과 연계를 가졌거나 봉기가 일어날 동안 잠만 자고 있던 혁명 장교들은 혁명이 승리한 후 서둘러 스스로 또는 다른 사람들의 부탁으로 “혁명에 봉사하기 위해” 현장에 도착한다. 이들은 심오한 생각으로 상황을 파악한 후 비관적으로 고개를 흔든다. 무기도 없는 시끄러운 병사 대중은 전투태세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 대포, 기관총, 통신장비, 지휘관 등 어느 것도 변변히 없다. 적이 강력한 일개 연대만 동원하면 이 오합지졸들은 싹쓸이 될 것이다! 물론 당장은 혁명 군중이 거리를 장악하고 있어서 계획된 전술을 운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밤이 되면 노동자들이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주민들은 조용해질 것이고 도시 중심부는 텅 비어버릴 것이다. 막사에 남아있는 강력한 일개 연대를 동원하여 하발로프가 공격을 가한다면 상황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사고는 혁명의 모든 단계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두 번 이상 용감한 대령들이 친구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나에게 강력한 일개 연대만 준다면 단 2초만에 모든 것을 정리할텐데!” 그리고 곧 보게 되겠지만 이들 중 일부는 이런 시도를 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하발로프처럼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연대는 용감한 장교의 지휘를 받아 출동한다. 그러나...결과는 전혀 없다.”

그렇다. 어떻게 결과가 있을 수 있겠는가? 가장 믿을만한 무력은 경찰, 헌병, 일부 연대 소속의 훈련병 부대뿐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8개월 후인 10월에 성조오지 대대와 사관학교 생도들이 증명한 바와 똑같이 이 부대들도 진짜 대중의 공격 앞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2백만 도시 대중과 장기 필사항전을 벌일 충성파 연대를 왕정은 어디서 구할 수 있었겠는가? 말만 거창하게 떠버리는 대령들에게 혁명은 자기방어 능력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대단히 무질서하기 때문이다. 어디를 보아도 목표가 없는 인간들의 움직임, 서로 충돌하는 경향들, 인간의 소용돌이, 갑자기 귀가 먹은 것처럼 놀란 표정의 사람들, 단추도 없는 참호 외투를 걸친 군인들, 과격한 동작의 학생들, 소총이 없는 병사들, 병사가 없는 소총들, 허공에 총을 쏘는 소년들, 천 개의 목소리를 가진 야단법석, 황당한 소문의 폭풍, 잘못 작동된 경고음, 거짓 축제소동 등등. 이 모든 혼란 위에 칼 한 자루만 휘두르면 모든 것이 흩어지고 흔적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조야한 착각에 불과하다. 혼란은 피상적일 뿐이다. 혼란의 표면 밑에서 대중은 새로운 축을 중심으로 결집한다. 수많은 대중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아직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혐오스러운 것들에 대한 쓰디쓴 증오심으로 가득 차있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으며 끔찍했던 역사의 눈사태로 기억에 남아있다.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혁명 대중을 지금 해산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한 시간 후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홍수는 첫 번째 홍수보다 훨씬 더 맹렬하고 파괴적일 것이다. 2월 이후 뻬쩨르부르그의 분위기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거대한 용광로와 같았다. 따라서 옆에 있거나 근처에 접근하는 적대적 군대는 이 용광로의 불길에 그슬려 비틀리고, 자신감을 상실하고, 마비되고, 싸움 한번 하지 못한 채 승리한 군중의 자비를 구한다. 내일 성조오지 기사 대대와 함께 짜르의 명령으로 전선에서 도착한 이바노프 장군은 이 사실을 직접 확인하게 될 것이다. 5개월 후와 8개월 후 똑같은 운명이 코르닐로프 장군과 케렌스키에게 닥칠 것이다.

봉기 직전 첫 며칠간 카자흐 병사들은 혁명 대중의 설득에 귀를 가장 열심히 기울인 것처럼 보였다. 이들이 가장 학대받는 병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봉기가 진행되자 기병은 다시 한번 자신의 보수적 평판을 입증하여 보병보다 보수적이었다. 27일까지 기병은 사태를 관망한 채 중립을 표방했다. 하발로프는 기병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은 여전히 기병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대공들의 궁전과 겨울궁전 반대편 네바강 섬에 위치한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는 수수께끼였다. 성벽 안에 숨어있는 요새 주둔군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전혀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이 요새에는 뻬쩨르부르그 시민에게 정오을 알리기 위해 발사되는 오래된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것을 제외하면 포대에 확고히 설치된 대포는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야전 대포가 성벽에 설치되어 알렉산드르 다리를 겨누고 있다. 이 무기들은 무엇을 과녁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 타우리데 궁전의 봉기 지도부는 이 요새에 대해 밤새 고민했다. 그리고 요새는 혁명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침이 밝아오자 수수께끼는 풀렸다: “장교들을 해치지 않는다면” 요새는 타우리데 궁전의 봉기 지도부에게 항복할 것이다. 요새의 장교들은 상황을 분석했다. 항복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장교들은 불가피한 상황을 서둘러 차단했다.

27일 저녁이 되자 병사, 노동자, 학생 그리고 여타 다양한 대중의 물결이 타우리데 궁전으로 흐르고 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지시를 내리고 정보를 제공할 사람들을 대중은 이 궁전에서 찾을 생각이었다. 모든 방향에서 탄약이 한아름 궁전 안으로 운반되어 탄약고로 용도가 바뀐 방에 저장된다. 밤이 되자 혁명 지도부가 일을 시작한다. 기차역을 지킬 부대를 보낸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은 어디든지 정찰대를 보낸다. 병사들은 열성적으로 말 한마디 없이 비록 대단히 비체계적으로나마 새로운 정부의 명령을 따른다. 그러나 이들은 언제나 문서로 된 명령을 요구한다. 군대 사령부의 일부 또는 군대의 민간인 직원들이 새 정부의 지도부를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옳았다. 혼란 속에 즉시 질서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 태어난 소비에트와 혁명 지도부에게는 아직 인장이 없었다. 혁명은 아직도 관료 행정기구를 구비하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이것은 마련될 것이다. 이것이 너무 잘 마련되는 것이 슬플 뿐이다.

혁명은 반동분자를 색출하기 시작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나중에 질책하듯이 말한다: “자의적으로” 도시 전역에서 체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혁명 전체가 자의적이다. 체포된 사람들이 타우리데 궁전으로 물결처럼 흘러 들어간다. 수상, 장관, 경찰관, 비밀정보원, “친독일파” 백작부인, 헌병 장교의 무리들이다. 프로토포포프와 같은 정치인들은 자수한다. 더 안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백작부인이 나중에 이렇게 말한다: “절대주의를 칭송하는 노래로 가득했던 방은 이제 훌쩍거리는 울음소리와 한숨만이 가득하다. 체포된 장군이 대단히 지친 듯 가까이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의원 여러 명이 친절하게 차를 대접한다. 영혼이 심하게 흔들린 장군은 흥분되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백작부인, 위대한 나라의 멸망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한편 멸망할 의사가 전혀 없는 이 위대한 나라는 과거의 인물들을 무시하고 행진한다. 장화로 쿵쿵 땅을 울리고 소총의 개머리판을 쩔렁쩔렁 부딪친다. 함성으로 공기를 가르고 발을 구르며 전진한다. 혁명은 언제나 무례하다. 지배계급이 제때에 좋은 예절을 인민에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혁명은 아직도 얼굴에서 피와 땀을 씻어 내지 못했다. 타우리데 궁전은 혁명의 임시 야전사령부, 정부청사, 탄약고, 감옥, 요새가 되었다. 이 소용돌이 속에 대담한 적들이 잠입했다. 변장한 헌병 대위가 구석에서 노트를 작성하는 것이 우연히 적발되었다. 물론 역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반란군들을 군사법정에 세우기 위해서였다. 병사들과 노동자들은 그를 당장 처치하려했다. 그러나 “참모부”의 누가 개입해서 손쉽게 이 헌병을 군중이 없는 곳으로 인도했다. 이때 혁명은 아직도 성격이 좋았다. 신뢰하며 친절했다. 일련의 긴 배신, 사기, 피비린내 나는 시련을 겪은 후에야 혁명은 무자비해진다.

승리한 혁명의 첫 날 밤은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기차역과 다른 장소들의 급조된 책임자들은 개인적 연줄의 지식인, 혁명 출세가, 서로 아는 사람들로 두서없이 선정되었다. 노동자 출신의 하사관들이 이런 일에는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감투를 쓴 책임자들은 신경이 날카로웠다. 사방에서 위험을 감지했다. 병사들을 귀찮게 굴고 타우리데 궁전에 계속 전화를 걸어 증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타우리데 궁전의 혁명 참모부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전화를 걸고 증원군을 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도착하지 않았다. 이 궁전의 밤 근무 참모부의 일인이 이렇게 말했다: “명령을 받고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그리고 명령도 없이 행동한다.”

노동자 지구들은 명령 없이 행동한다. 혁명의 진정한 지도자들은 공장 밖으로 노동자들을 인도하고 경찰서를 접수하고 병사들을 “큰소리로 부르고” 반혁명 아성들을 파괴했다. 이들은 타우리데 궁전, 혁명 참모부, 행정본부로 서둘러 가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빈정거림과 불신감으로 그쪽에 대고 고개를 흔든다: “자기들이 잡지도 않은 사냥감을 죽기도 전에 나누려고 용감한 놈들이 빨리도 모여드는군.” 다른 좌익 정당들의 가장 훌륭한 노동자들 뿐 아니라 노동자 볼세비키들은 거리에서 낮을 보내고 밤은 지구본부에서 보내면서 병사들의 막사와 연락을 유지하고 내일의 일을 준비한다. 승리의 첫 날 밤 이들은 5일 동안의 낮과 밤을 꼬박 세워 했던 같은 일들을 계속하고 확대시킨다. 모든 혁명의 초창기가 그렇듯이 이들은 혁명의 아직 굳지 않은 어린 뼈들이다.

나보코프는 이미 입헌민주당 지도부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합법적 탈영병으로 총사령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27일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한 후 오후 3시까지 일했다. 그는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저녁에 모르스카야 가도에서 총성이 울렸다. 그는 이 총성을 자기 아파트에서 들었다. 장갑차가 거리를 질주했으며 병사들과 수병들이 옆 걸음으로 벽에 기대어 달려가고 있었다. 이 존엄한 자유주의자는 자기 집 현관 옆 창문으로 이들을 관찰했다. “전화가 계속 울렸다. 내 기억으로는 친구들이 낮에 일어났던 일을 전해주었다.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이 인물은 곧 혁명(!) 임시정부 수립에 가담하여 총무청장 감투를 쓸 것이다. 내일은 알지도 못하는 노인이 거리에서 그에게 다가갈 것이다. 그 노인은 회계사나 교사일 것이다. 그는 몸을 숙이고 모자를 벗어들고는 나보코프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인민을 위해 하신 모든 일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나보코프는 적당한 자부심으로 이 때의 일을 훗날 얘기할 것이다.

 

제 8장 누가 2월 봉기를 지도했는가?

혁명으로 타격을 입은 계급들의 변호사들과 언론인들은 상당한 양의 잉크를 낭비하면서 이후 이렇게 주장했다: 2월 사건은 기본적으로 여성들의 반란이었으며 이어서 병사들의 반란으로 지지를 받아 혁명으로 치장되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도 바스띠유 감옥의 함락이 반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그 사건이 혁명이라고 공손하게 그에게 설명했다. 혁명으로 잃는 것이 있는 자들은 혁명을 진짜 이름으로 불러줄 기분이 좀처럼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악의에 찬 반동들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혁명이란 단어는 모든 족쇄와 편견들로부터 해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류의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모든 시대의 특권계급들과 이들의 하수인들은 자기들을 타도한 혁명을 과거의 혁명들과 대비하여 군대의 반란이나 소동 또는 군중 폭동으로 격하시키려고 애써왔다.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나야 하지만 아직도 버젓이 주역 행세를 하고 있는 계급들은 전혀 독창적이지 않다.

2월 27일 혁명 직후 이 혁명을 터키 청년장교들의 군사쿠데타에 비유하려는 자들이 있었다. 이미 알고 있듯이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 상층부는 이런 성격의 쿠데타를 적지 않게 꿈꾸어 왔었다. 그러나 이런 성격 규정은 너무도 가망이 없다. 심지어 어느 부르주아 신문조차 이 규정을 진지하게 반대했다. 젊은 시절에 맑스를 연구했던 경제학자 투간-바라노프스키는 러시아의 좀바르트(역자 주:Werner Sombart, 1863~1941, 독일의 경제사학자. 초기에는 맑스주의자였으나 이후 극우 진영으로 전향했다.)라고 할 수 있다. 그는 3월 10일자 일간 증권거래소 신문(Birzhevoe Vedomosti)에 이렇게 적었다:

“청년 장교들의 터키 혁명은 군대의 승리한 봉기였으며 군대 지도자들에 의해 준비되고 수행되었다. 병사들은 장교들의 계획을 공손히 실행에 옮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2월 27일 왕정을 타도한 러시아의 방위군 연대들은 장교들의 지도가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군대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봉기를 시작했다; 장군들이 아니라 병사들이 의회로 몰려들었다. 병사들은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장교들의 명령을 공손히 이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똑같은 근로인민 계급인 노동자들을 자신들의 피를 나눈 형제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농민들과 노동자들은 러시아 혁명을 수행한 두 사회계급이다.”

그의 말은 고치거나 보완할 필요가 전혀 없다. 혁명 이후 전개된 사건들은 이 말의 올바름을 확인하고 강화시켰을 뿐이다. 뻬쩨르부르그에서 2월의 마지막 날은 혁명 승리의 첫날이었다. 황홀, 포옹, 환희의 눈물, 감정의 복받침이 터져 나온 날이었다. 동시에 적들에 대한 마지막 타격의 날이기도 했다. 거리에서는 여전히 총소리가 들렸다. 프로토포포프의 반동 경찰인 파라오들이 인민의 승리를 알지 못하고 건물 지붕 위에서 여전히 총을 쏘고 있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밑에서 혁명 대중은 다락방, 가짜 창문, 교회 첨탑 등 짜르의 무장 귀신들이 아직도 숨어있을 곳에 총을 쏘고 있었다. 오후 4시쯤 이들은 과거 국가기구의 마지막 잔당들이 피신해 있던 해군성을 점령했다. 혁명 조직들 그리고 즉흥적으로 조직된 그룹들이 도시 전역에서 반동분자들을 체포하고 있었다. 슐뤼쎌부르크 중노동 감옥은 총 한방 쏘지 않고 접수되었다. 더욱더 많은 수의 연대들이 수도와 주변 지역들에서 혁명에 가담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의 함락은 뻬쩨르부르그 봉기의 메아리에 불과했다. 노동자와 병사들의 정서는 똑같았다. 다만 이 도시에서는 이 정서가 좀더 불명확하게 표현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약간 왼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뻬쩨르부르그보다 이곳에서 혁명조직들은 힘이 더 약했다. 네바강의 뻬쩨르부르그에서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모스크바의 급진 지식인들은 회의를 소집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2월 27일이 되어서야 모스크바의 공장과 작업장들이 파업을 시작했고 시위가 이어졌다. 장교들은 막사의 병사들에게 군중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으므로 진압해야 한다고 말했다. 쉬쉴린 병사는 이렇게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쯤 병사들은 군중 시위의 의미를 정반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오후 2시경이 되자 여러 연대의 병사들이 시의회 건물에 도착하여 혁명에 동참하는 방법을 물었다. 다음날 파업은 확대되었다. 군중은 깃발을 들고 시의회로 몰려들었다. 무랄로프는 자동차 중대의 병사였다. 그는 거대한 덩치에 성격 좋고 용감한 고참 볼세비키였으며 정원을 가꾸는 원예가였다. 그는 시의회에 처음으로 완벽하고 규율이 잡힌 부대를 데리고 왔다. 이 부대는 전신국을 비롯한 중요 거점들을 점령했다. 8개월 후 무랄로프는 모스크바 군사지구의 군대를 지휘하게 된다. 감옥의 문도 열렸다. 무랄로프는 석방된 정치범을 가득 실은 트럭을 몰고 있었다. 어느 경찰이 그에게 경례를 한 후 유태인들도 석방하는 것이 좋겠냐고 물었다. 중노동 감옥에서 바로 석방된 후 죄수복을 갈아입지도 않고 제르진스키(역자 주: 폴란드 사민당을 창당하고 러시아 혁명에 적극 가담한 혁명가. 소비에트 정부에서 혁명수호위원회 체카의 초대 위원장이었다. 이후 스탈린을 지지하였으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비에트가 이미 수립된 시의회 건물에서 연설했다. 3월 1일 사탕공장 노동자들이 깃발을 들고 포병 여단의 막사에 찾아와 병사들과 어울렸다. 포병 병사 도로페브에 의하면 이때 많은 노동자와 병사들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도시 중심부에서 저격병이 몇 번 사격을 가했으나 대체로 무장 충돌이나 사상자는 없었다. 뻬쩨르부르그가 모스크바를 대신해 미리 희생을 했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이미 혁명이 완수된 3월 1일에 지방 도시들에서도 혁명이 시작되었다. 트베르에서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병사들의 막사까지 행진한 후 병사들과 함께 도시 거리를 행진했다. 이때 그들은 아직도 “인터내셔날”이 아닌 “라 마르세이에즈”(역자 주: 프랑스 혁명 당시의 대표적 혁명가요. 지금은 프랑스 국가가 되었다.)를 부르고 있었다. 니즈니-노브고로트에서는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시의회 건물 주위에 모였다. 이 건물은 대다수 도시에서 뻬쩨르부르그의 타우리데 궁전과 같이 혁명의 구심이 되었다. 시장이 연설한 후 노동자들은 붉은 깃발을 앞세우고 행진하였고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저녁이 되자 주둔군의 21개 부대 가운데 18개 부대가 자발적으로 혁명의 편으로 넘어갔다. 사마라와 사라토프에서는 집회가 열리고 노동자 소비에트가 수립되었다. 하리코프에서는 경찰청장이 기차역에서 혁명의 소식을 접한 후 자기의 객차에 올라서서 흥분된 군중에게 모자를 들어 있는 힘을 다해 이렇게 외쳤다: “혁명 만세, 만세!” 하리코프에서 에카테리노슬라프로 혁명 소식이 전해졌다. 시위대 맨 앞에는 경찰부청장이 큰 걸음으로 행진했다. 그리고 마치 성인들의 기일에 있는 대규모 행진 때처럼 기병들의 기다란 칼을 손에 쥐고 있었다. 왕정이 소생할 기미가 없다는 것이 최종적으로 명확해지자 이들은 조심스럽게 정부 건물에 걸려 있는 짜르의 초상화를 내리고 다락방에 이것을 감추기 시작했다. 이런 종류의 일화들은 진짜이기도 하고 상상의 소산이기도 했는데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었다. 이들은 아직도 혁명을 농담처럼 가볍게 다루었다. 그러나 노동자와 병사들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프스코프, 오렐, 리빈스크, 펜자, 카잔, 짜리친 그리고 다른 지방 도시들에 대해서는 [연대기]지가 3월 2일자로 이렇게 보도했다: “봉기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혁명에 가담했다.” 이 묘사는 간략했지만 당시의 상황을 올바로 말하고 있다.

혁명 소식은 근처 도시로부터 농촌 마을로 부분적으로는 행정당국에 의해 그러나 대개는 장터, 노동자, 휴가를 맡아 고향에 온 병사 등을 통해 조금씩 전해졌다. 농촌 마을들은 도시들보다 혁명을 더 천천히 그리고 덜 열성적으로 받아들였으나 도시에 못지 않게 깊게 혁명의 정서를 느끼고 있었다. 이들에게 혁명의 문제는 전쟁과 토지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뻬쩨르부르그가 혁명을 성취했다는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닐 것이다. 러시아의 나머지 도시들과 시골들은 혁명을 추종했다. 뻬쩨르부르그를 제외한 어떤 곳에서도 반동세력과의 충돌은 없었다. 구체제를 위해 싸움을 벌일 계층, 정당, 기관, 부대 등은 어디에도 없었다.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이 기병 방위군으로 대체되었거나 이바노프가 전선에서 믿을만한 여단을 이 도시로 이동시켰다면 왕정은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반동들은 때늦게 항변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근거가 대단히 미약하다. 니콜라스 2세를 위해 전투를 벌일 준비가 된 여단이나 연대는 전선이고 후방이고 전혀 없었다.

혁명은 러시아 전체 인구의 약 75분의 1을 보유한 뻬쩨르부르그의 주도성과 역량으로 수행되었다. 이 가장 거대한 민주주의 행위가 대단히 비민주적 방식으로 성취되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라 전체는 이미 성취된 결과를 받아들였다. 제헌의회가 소집될 전망이 있었다고 해도 사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국 차원의 대의기구인 제헌의회를 소집하는 날짜와 방식은 뻬쩨르부르그 봉기의 승리가 탄생시킨 기관들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은 일반적으로 그리고 특히 혁명 시대에 민주적 조직들의 기능에 대해 통찰력을 제공한다. 혁명은 언제나 민주주의적 법치에 대한 물신 숭배에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 그리고 혁명이 더 깊고, 더 대담하고, 더 민주적일수록 이 타격은 더욱 가차없이 가해졌다.

특히 프랑스 혁명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절대 왕정의 극단적인 권력집중화 현상이 이후 혁명의 수도 빠리가 나라 전체를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 견해는 피상적이다. 혁명이 중앙집중적 경향을 보이는 것은 타도된 왕정을 모방하기 때문이 아니다. 혁명이 수립한 새로운 사회는 억누를 수 없는 요구들을 내세운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는 편협한 지역주의와 화해할 수 없다. 결국 새로운 사회의 요구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중앙집중적 경향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수도는 나라 전체의 의지를 자신에게 집중시킨 것처럼 혁명에서도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수도가 가장 명확하고 철저하게 새로운 사회의 기본적인 경향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지방은 자신의 요구가 이미 실현되었기 때문에 수도가 택한 조치들을 받아들일 뿐이다. 도시가 떠맡는 혁명 초기의 주도적 역할은 민주주의 원칙을 침해하지 않는다. 다만 민주주의를 역동적으로 실현시킬 따름이다. 거대한 혁명에서 이 역동적 사건의 리듬은 형식적 대의민주주의와 리듬을 같이 탄 적이 한번도 없다. 지방은 중심 도시의 활동을 뒤늦게 따라갈 뿐이다. 혁명은 번갯불과 같이 빨리 진행된다. 이 빠른 속도는 혁명적 의회주의를 크게 위협한다. 이 위기는 민주주의 방식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모든 진정한 혁명에서 전국적 대의 기구는 혁명의 역동성과 언제나 충돌했다. 혁명의 주요한 현장은 나라의 수도이다. 17세기 영국, 18세기 프랑스, 20세기 러시아 혁명들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 수도의 역할은 관료적 중앙집중주의의 전통이 아니라 주도적 혁명 계급의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 이 계급의 전위는 당연히 가장 중심적인 도시로 집중한다. 이 점은 부르주아 혁명이나 노동자 혁명이나 차이가 없다.

2월 혁명의 승리가 완전히 확인되었을 때 사람들은 희생자의 숫자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뻬쩨르부르그의 사상자는 1443명이었다. 이 가운데 869명은 군인이었으며 이들 가운데 60명은 장교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어느 전투와 비교해보아도 사상자의 숫자는 정말로 적다. 자유주의 언론은 2월 혁명을 무혈혁명이라고 선언했다. 애국주의 정당들이 기분 좋게 서로를 용서할 때에는 아무도 이 선언의 진위를 가리려고 애쓰지 않았다. 승리한 모든 것 심지어는 승리한 봉기조차 옹호하는 앨버트 토머스는 “가장 밝고 휴일 같은 가장 피를 적게 흘린 러시아 혁명”에 대해 글을 썼다. 물론 그는 이 혁명이 프랑스 증권시장의 손아귀에 계속 놀아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는 예외가 아니었다. 1789년 6월 27일 미라보는 이렇게 외쳤다: “이 위대한 혁명은 사악한 짓거리와 눈물이 없이 성공할 것이다. 얼마나 다행스러운가!...역사는 너무 오랫동안 포식동물의 행동을 모방했다....이제 우리가 진정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것도 당연하다.” 국민의회에서 삼부회가 열렸을 때 앨버트 토머스의 선배들은 이렇게 적었다: “혁명은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끝났다.” 그러나 그때는 혁명의 초기였다. 당연히 피가 흐르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2월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도 2월 무혈혁명의 신화는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그래서 권력이 저절로 조화에 의해 자기들의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치장하려는 자유부르주아의 필요에 부응했다.

2월 혁명은 무혈혁명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혁명 당시 뿐 아니라 혁명 후 첫 시기까지 희생자가 아주 적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 대중이 수세기에 걸쳐 당해왔던 억압, 박해, 경멸, 사악한 공격에 대한 앙갚음이 혁명으로 나타났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어떤 곳에서는 수병과 병사들이 가장 사악한 장교들에게 즉시 복수를 했다. 그러나 이런 행위의 발생 건수는 과거의 온갖 피비린내 나는 모욕들에 비하면 처음에는 아주 적었다. 지배계급은 자신이 생산하지 않은 좋은 것들을 항상 독차지해왔다. 이와 똑같이 이제 이들은 모든 것을 되돌리고 자기들이 성취하지 않은 혁명의 과실을 전부 차지하기를 원했다. 이 사실을 한참 나중에 확신한 후에야 대중은 지배계급에 대한 아량을 거두었다.             

투간-바라노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2월 혁명은 노동자들과 병사로 둔갑한 농민들에 의해 달성되었다. 그의 말은 맞다. 그러나 여전히 큰 문제가 하나 있다: 누가 이 혁명을 지도했는가? 누가 노동자들을 일어서게 만들었는가? 누가 병사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는가? 혁명 승리 후 이 문제는 정당들 사이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보편적 정식으로 아주 단순하게 정리되었다: 지도세력이 없이 혁명은 저절로 일어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구체제 속에서 평화롭게 통치하고, 판결을 내리고, 유죄 선고하고, 변호하고, 교역하고, 군대를 지휘하다가 오늘 신체제에서는 서둘러서 혁명과 화해한 신사양반들이 많다. 이들은 수많은 전문 정치인들 및 과거 혁명가들과 함께 이 “자연발생적 혁명” 사상을 가장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특히 혁명이 일어나는 동안 잠자고 있었던 과거의 혁명가들은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고 싶어했다.

혁명이후 벌어진 내전에서 백군 사령관 데니킨 장군은 자기의 신기한 저서 [러시아 소요들의 역사]에서 2월 27일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 결정적인 날에 지도자는 없었고 오직 혁명분자들만 있었다. 이들의 위협적인 경향은 혁명의 목표, 계획, 구호 등 어느 것도 표방하지 않았다.” 이 장군은 문필에 대한 열정이라도 있다. 그러나 박식하다는 역사학자 밀류코프는 혁명에 대한 탐구의 깊이가 이 장군에 비해 조금도 깊지 않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이 자유주의 지도자는 혁명을 일으키려는 자들은 독일 총사령부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그러나 혁명이 자유주의자들을 권력에 앉히자 상황이 좀더 복잡해졌다. 이제 밀류코프의 임무는 독일 호엔쫄런 왕가가 혁명을 사주했다는 식으로 혁명을 비하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반대로 혁명가들이 혁명을 지도하지 않았다고 말하여 이들의 명예를 박탈하는 것이 그의 새로운 임무가 되었다. 따라서 자연발생적이며 비인격적인 혁명 이론을 자유주의자들은 심혈을 기울여 짜내었다. 반(半)자유주의자요 반(半)사회주의자인 대학강사 스탄케비치는 나중에 최고사령부의 인민위원이 되었다. 그의 생각을 밀류코프는 인정하고 공감하면서 이렇게 인용하고 있다: “대중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내적인 부름에 따라 스스로 움직였다...어떤 구호를 가지고 병사들이 거리로 나섰는가? 이들이 뻬쩨르부르그를 정복하고 지방법원을 불태웠을 때 누가 이들을 지도했는가? 정치사상, 혁명 구호, 음모, 반란 등 어느 것도 이들을 움직이지 못했다. 혁명은 구체제의 모든 것을 갑자기 태워버린 자연발생적인 운동에 지나지 않았다.” 자연발생성은 여기서 거의 신비로운 색채를 띠고 있다.

그러나 스탄케비치는 동시에 가장 값어치 나가는 증언을 하고 있다: “1월말 나는 아주 은밀한 서클에서 케렌스키를 우연히 만났다....인민봉기의 가능성을 서클의 성원들은 모두 명확히 부정했다. 그리고 일단 불이 붙은 대중운동이 극좌의 방향으로 발전하여 전쟁 수행에 대단한 난관을 조성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케렌스키 서클의 입장은 입헌민주당의 노선과 본질적으로 같았다. 따라서 이들이 혁명을 지도하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사회혁명당 대표 젠지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혁명은 천둥처럼 하늘에서 떨어졌다. 솔직히 말하자. 오랜 세월 혁명을 위해 일했으며 언제나 이것을 기다렸던 혁명가들에게도 혁명은 예상 밖으로 즐겁게 도래했다.”

멘세비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느 부르주아 망명 언론은 2월 21일 전차에서 혁명정부의 장관이 될 스코벨레프를 만난 일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하나인 이 사회민주주의자는 혼란이 약탈로 변질되고 있기 때문에 군중을 진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한 후 그의 패거리는 한달 후에 자기들이 혁명을 지도했다고 떠들었다.” 이 말에는 약간 진한 감정이 배어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합법적 사회민주주의자인 멘세비키들의 혁명에 대한 입장을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중에 볼세비키가 된 사회혁명당 좌파의 최근 지도자 스티슬라프스키는 2월 봉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당 사람들이 마치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처녀들처럼 졸고 있을 때 혁명은 갑자기 찾아왔다.” 이들이 처녀들과 얼마나 닮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이들이 모두 깊은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볼세비키들은 어떠했는가? 이들의 상황은 앞에서 일부 확인되었다. 지하 볼세비키 조직의 주요 지도자는 노동자 출신 쉴리아프니코프와 잘루츠키 그리고 학생 출신 몰로토프였다. 해외에 당분간 체류했고 레닌과 긴밀한 협력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쉴리아프니코프는 중앙위원회 정치국 3인 가운데 정치적으로 가장 성숙하고 활발했다. 그러나 그의 회고록은 혁명이 3인에게는 너무 벅찬 일이었음을 무엇보다 잘 증명한다. 혁명이 터질 마지막 순간까지 이들은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이 혁명의 징후이며 수많은 징후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무장봉기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보르그 노동자 지구의 지도자인 우리의 친구 카유로프는 딱 잘라 이렇게 주장한다: “당 중앙의 지도는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뻬쩨르부르그 위원회는 이미 체포되었고 중앙위원회 의장 쉴리아프니코프 동지는 다음 날에 대해 어떤 지침도 제시할 수 없었다.”

지하조직들의 허약함은 경찰 습격의 직접적 결과였다. 전쟁 초에 만연했던 애국주의적 호전 분위기 속에 경찰의 공격은 파괴력이 컸다. 이 때문에 혁명조직을 포함하여 모든 조직들은 자신의 사회적 기반인 대중보다 사태에 뒤떨어졌다. 1917년 초 볼세비키 지하조직은 탄압과 고립에서 회복되지 못했다. 반면 대중은 애국주의 히스테리에서 벗어나 혁명적 분노로 정서가 급격히 바뀌었다.

혁명 지도부의 당시 상황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억할 것이 하나 있다. 가장 권위 있는 혁명가들인 좌익 정당 지도자들은 해외에 있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감옥과 유형지에 있었다. 정당이 구체제에 위험한 존재일수록 혁명 발발의 순간에 그 지도부는 더욱 잔인하게 제거된 것처럼 보였다.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들의 의원단 대표는 당원이 아닌 과격파 케렌스키였다. 사회혁명당의 공식 대표 체르노프는 해외에 있었다. 체이드제와 스코벨레프는 멘세비키 의원단의 대표였다. 멘세비키 지도자 가운데 마르토프는 해외에 있었으며 단과 쩨레텔리는 유형지에 있었다. 혁명의 이력을 가진 상당수의 사회주의 지식인들은 인민주의와 멘세비키 주위에 결집했다. 이들은 일종의 정치 지도부를 구성했으나 혁명의 승리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볼세비키는 의원단이 없었다. 짜르 당국에 의해 혁명의 조직중심으로 인정된 5명의 노동자 출신 의원들은 전쟁 첫 몇 달 사이에 체포되었다. 레닌은 지노비에프와 함께 해외에 있었다. 카메네프와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실제적인 지도자 스베르들로프, 라이코프, 스탈린 역시 유형지에 있었다. 폴란드의 사회민주주의자 제르진스키는 나중에 볼세비키가 되었는데 중노동형을 받고 있었다. 당시 우연히 남아있던 지도자들은 권위적인 상관들의 명령에 따라 무조건 움직이는데 익숙했던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자신들이 혁명 상황에서 지도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이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볼세비키당이 봉기 당시 권위 있는 지도부를 제대로 제공할 수 없었다면 다른 조직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 때문에 2월 혁명의 자연발생성에 대한 확신은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확신은 심대한 오류이거나 최소한 무의미한 견해이다.

수도의 투쟁은 한두 시간이 아니라 무려 5일간 지속되었다. 지도자들은 이 운동을 막으려고 애썼다. 대중은 이에 대해 더 거센 압력을 가하며 앞으로 전진했다. 이들은 낡은 국가기구와 대항하고 있었다. 이 국가기구의 전통적 위용 뒤에는 막강한 권력이 존재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의회의 자유부르주아, 토지 및 도시 협회, 군산복합조직, 학계, 대학, 고도로 발전한 언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공격에 애국주의적 저항을 감행한 두 개의 강력한 사회주의 정당 등이 버티고 있었다. 이들에 대해 대중은 저항했다. 봉기 대중에 가장 가까이 있던 조직은 볼세비키당이었다. 그러나 지도부가 없었고 당원들은 흩어져 있었던 허약한 비합법 중핵 조직에 불과했다. 이 상황에서 전혀 예상 밖으로 혁명이 터졌다. 그런데 소위 지도자들이 보기에 이 운동은 가라앉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갑자기 다시 살아나 막강하게 위력을 발휘하면서 승리를 움켜쥐었다.

그렇다면 이 운동의 유례없는 공격력과 통제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구체제에 대한 대중의 원한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원한 하나만으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전쟁 기간 내내 혁명적 인적 자원이 소모되었지만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은 과거에 위대한 혁명을 경험했다. 지도부가 없었으며 상층부의 저항에 직면하였지만 노동자들은 공격력과 통제력으로 역관계를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계산하고 있었으며 전략적 시야를 견지하고 있었다.

전쟁 전야에 노동 계급의 혁명적 부위는 볼세비키들을 따르고 있었으며 자신의 뒤를 따르는 대중을 지도하고 있었다. 전쟁의 시작과 함께 상황은 급격히 변했다: 노동자의 보수적 부위가 머리를 쳐들고 상당수의 대중을 애국주의 물결 속에 끌고 들어갔다. 혁명 분자들은 고립되었고 이들의 목소리는 억눌렸다. 그러나 전쟁 과정에서 처음에는 서서히 그러나 전선의 패배 이후 더 빨리 그리고 더 급진적으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적극적인 불만이 대중 전체를 사로잡았다. 물론 애국주의의 잔재가 남아있기는 했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잔머리 굴리고 겁먹은 그런 애국주의는 아니었다. 지배계급은 국내의 모든 문제들을 전쟁 승리 이후에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쟁 자체와 그 희생자, 그 공포, 그 치욕 등은 대중의 장년층 뿐 아니라 청년층도 구체제에 대항하게 만들었다. 그것도 새로운 예리함으로 대항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결론은 보편적이었으며 대중을 하나로 단결시켜 막강한 동력을 창조했다.

군대의 수는 불어나 수백만의 노동자와 농민을 대오로 끌어들였다. 누구든 자기 주변 사람들을 군대에서 볼 수 있었다: 아들, 남편, 형제, 친척 등. 전쟁 전처럼 군대가 인민과 단절된 상황은 끝났다. 사람들은 훨씬 더 자주 병사들을 만났다. 전선으로 배웅하고 휴가 나왔을 때는 함께 지냈다. 거리와 전차에서 전선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병원을 방문했다. 노동자 지구, 군대 막사, 전선 그리고 어느 정도 농촌 마을 역시 대화의 통로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병사들의 생각과 감정을 알았다. 이들은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전쟁, 전쟁으로 떼돈 번 사람들, 장군들, 정부, 짜르와 왕후 등이 대화의 소재였다. 병사들은 빌어먹을 전쟁을 되뇌었다. 노동자들은 빌어먹을 정부를 되뇌었다. 병사는 노동자에게 왜 수도에서 가만히 있기만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면 노동자는 맨손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1905년에는 군대 때문에 발가락이 부러졌다고 말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함께 즉시 들고일어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그렇지, 모두 함께 즉시 들고일어나자고 외쳤다. 이런 종류의 대화는 전쟁 전에는 두 명 사이에 은밀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곳에서 모든 경우에 그리고 최소한 노동자 지구에서는 거의 공개적으로 진행되었다.

짜르의 정보부는 가끔 상황을 아주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었다. 혁명이 발발하기 2주일 전 크레스티아니노프라는 이름의 어느 정보원은 교외의 노동자 지구를 가로지르는 전차에서 엿들은 대화를 보고했다. 대화를 나누는 병사가 소속된 연대는 작년 가을 노엘 공장의 노동자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대신 경찰에게 발포한 후 8명이 중노동형에 처해졌다. 이 대화는 아주 공개적으로 진행되었다. 왜냐하면 노동자 지구에서는 경찰과 첩자들이 신분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복수를 할 것이다’라고 병사가 결론을 내렸다.” 이 보고서는 계속된다: “어느 숙련 노동자가 그에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려면 모두가 단결되도록 조직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 병사는 응답했다:‘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조직을 시작했다....우리들은 이미 충분히 많은 피를 마셨다. 병사들이 참호에서 고통 당하는 동안 후방인 여기에서는 사람들이 배를 불리고 있다!’... 특별한 소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1917년 2월 10일. 크레스티아니노프.” 비교할 바 없이 우수한 첩자의 서사시이다. “특별한 소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소요는 그것도 곧 일어나게 된다. 이 전차 속의 대화는 소요사태가 제지될 수 없을 정도로 임박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봉기의 자연발생성에 대해 스티슬라프스키가 신기한 예를 들면서 설명한다: “2월 27일 장교연합”이 혁명 직후 결성되어 볼린스키 연대를 거리로 나오도록 누가 먼저 유도했는지를 알아보려고 설문지 조사를 했다. 이때 결정적인 행동을 유도한 7명의 이름을 적은 7장의 답장을 접수했다. 주도력의 일부는 정말이지 병사들에게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봉기를 주도한 인물이 시가전에서 사망하여 그의 이름이 영원히 묻혀 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없는 주도성은 여전히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일은 막사 담벼락 바깥에서 벌어졌다. 방위군 대대들의 봉기는 자유주의자들과 합법적 사회주의자들이 완전히 놀랄 정도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봉기가 없었다면 볼린스키 연대는 거리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이 카자흐 부대와 대치한 사건을 어느 변호사가 자기 사무실 창문에서 목격하여 의원에게 전화로 전했다. 그런데 이 일화는 노동자와 카자흐 병사에게는 개인과 무관한 일회적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즉 공장의 메뚜기가 막사에서 나온 메뚜기와 부딪친 것과 같았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윙크를 한 카자흐 병사와 카자흐 병사가 “우호적으로 윙크를 보냈다”고 즉시 판단한 노동자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군대와 인민이 상호 침투하는 과정은 계속 진행되었다. 노동자들은 군대의 체온이 결정적인 수위까지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즉시 알아 차렸다. 바로 이 인식이 승리를 확신한 대중의 공격력에 정복당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부여했다.

여기서 2월의 사건들을 관찰한 후 그 결과를 요약한 어느 자유주의 관료의 날카로운 시각을 소개해야한다: “운동이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고 병사들이 스스로 거리로 나섰다. 대개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 생각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결국 ‘자연발생적으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자연발생성 이론은 자연과학의 경우보다 사회과학에서 더 우스꽝스럽다. 어느 혁명지도자의 이름이 운동에 붙어있지 않다고 해서 이 운동이 개인들과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름이 없을 뿐이다.” 이 시각은 밀류코프가 독일의 첩자니 러시아 인민의 자연발생성이니 하고 떠드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진지하다. 이 관료는 전직 검사 자바스키인데 그는 상원의원의 신분으로 혁명을 맞이했다. 법정의 경험을 통해 그는 외국 첩자들의 명령이나 자연발생적 과정으로는 봉기가 일어나지는 않는다고 인식한 것 같다.

자바스키는 혁명 과정을 실험실의 열쇠구멍을 통해 보는 것처럼 통찰하게 만드는 두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2월 24일에 금요일 지배계급 상층부의 어느 누구도 혁명이 임박했음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상원의원이 타고 있던 전차가 리테이니 가도에서 골목길로 들어서는 지점에서 갑자기 돌면서 차체가 심히 요동쳤다. 이 결과 창문들이 덜컹 소리를 낼 정도로 흔들거렸고 창문 하나는 깨져버렸다. 전차는 멈추어 섰다. 차장은 승객 전부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말했다: “이 전차는 더 이상 갈 수 없습니다.” 그러자 승객들이 차장을 욕하면서 차에서 내렸다. “나는 아직도 승객의 욕에 대해 답변을 하지 못한 그 차장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화가 났지만 말을 못하고 입을 꼭 다문 근엄한 표정이 꼭 늑대와 같았다.” 보이는 모든 곳에서 전차는 운행을 중지 당하고 있었다. 이 근엄한 차장은 이 자유주의 관료에게 “늑대와 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전쟁 중인 제국의 수도 뻬쩨르부르그에서 관료들을 싣고 가는 전차를 혼자서 정지시켜야 한다는 높은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왕정의 전차를 “이 전차는 더 이상 갈 수 없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정지시킨 것은 바로 이 차장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관료들을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바쁜 와중에 헌병 장군과 자유주의 상원의원을 구별하지도 않았다. 리테이니 가도의 차장은 역사의 의식적 요인이었다. 그리고 그를 미리 혁명의식으로 교육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지방법원이 불타고 있었다. 이때 자바스키와 같은 부류의 어느 자유주의 법률가가 한방 가득히 보관되어 있던 판결문과 공증 문서들이 불길로 사라지고 있다고 거리에서 말하면서 유감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동자 옷을 입은 근엄한 모습의 노인이 화를 내면서 이렇게 반박했다: “당신들의 보관 문서가 없어도 우리는 집과 토지를 나누어 가질 수 있어.” 아마 이 일화는 문필의 방식으로 세련되게 다듬어졌을 것이다. 군중 속에는 이렇게 필요한 내용으로 반박할 수 있는 노인 노동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지방법원의 화재와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왜 이 건물을 불태우지? 그러나 이런 종류의 “과격행위들”을 자행한다고 비난하면서 이들에게 으름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짜르 경찰 뿐 아니라 혁명의 화재 속에 재산 공증문서들이 불타는 것을 두려워한 자유주의 법률가들에 이들은 대항했다. 이 행위를 통해 이들은 대중을 필요한 사상으로 무장시키고 있었다. 이름도 없으며 근엄한 표정을 짓는 공장과 거리의 이 정치인들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혁명사상으로 교육되어야 했다.

2월의 마지막 날들을 기록하면서 비밀경찰도 이 운동이 상층의 계획된 지도부가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즉시 이렇게 덧붙였다: “노동계급은 일반적으로 혁명의식으로 선전된 상태에 있었다.” 이 평가는 정곡을 찌르고 있다. 혁명 대중에 의해 체포되어 혁명가들이 비운 감옥을 다시 채울 때까지 혁명을 방해했던 이 반동 전문가들은 자유주의 지도자들보다 상황을 훨씬 더 면밀하게 관찰했다.

신비로운 자연발생성 이론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봉기를 일으키려면 상황을 정확히 평가하고 적을 공격할 순간을 결정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대중이나 이들의 지도부가 역사적 사건들을 검토하고 이것들을  평가할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추상적 대중이 아니라 뻬쩨르부르그 노동자와 일반적으로 러시아 노동자라는 구체적 대중이 봉기를 위해서 필요했다. 이들은 방위군의 세메노프스키 연대에 의해 압살된 1905년 혁명, 1905년 12월 모스크바 봉기를 경험했다. 1905년의 경험을 곱씹어보고, 자유주의자들과 멘세비키들의 입헌주의 환상을 비판하고, 혁명의 전망을 소화하고, 수백 번 군대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군대 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면밀하게 주시하는 노동자들 즉 자신의 관찰로부터 혁명적 결론들을 추론해 내고 이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 봉기 대중 사이에 흩어져 있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거에 혁명 선전에 의해 획득되었거나 최소한 영향을 입은 진보적 병사들이 주둔군 내부에 있어야 했다.

모든 공장, 모든 길드, 모든 중대, 모든 술집, 모든 군대 병원, 모든 이동 중인 부대, 심지어는 모든 인구가 빠져나간 농촌 마을에도 혁명 사상의 점진적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모든 곳에서 특히 노동자들 가운데에서 사건들을 해석해내는 분자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대중은 질문한다: “무슨 소식이 있소?” 그리고 이들에게 필요한 말이 나올 것을 기다렸다. 이 지도자들은 종종 혼자 남겨졌다. 여러 경로를 통해 입수된 혁명적 일반화의 파편들로 이들은 스스로를 훈련시켰다. 자유주의 신문의 행간을 통해 자신에게 필요한 내용을 이들은 혼자서 연구했다. 이들의 계급적 본능은 정치 상황에 의해 잘 다듬어졌다. 그리고 이들이 비록 자신의 사상을 끝까지 밀고 나가 필요한 결론을 내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사상은 끊임없이 끈질기게 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경험, 비판, 주도성, 자기희생의 요소들이 대중에게 흘러 들어가 겉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의식적 과정이 되어 혁명운동의 내적 동력을 결정적으로 창조했다. 자유주의와 구체제에 의해 길들여진 거들먹거리는 사회주의 정치인들은 대중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개미집이나 벌집에서 일어나는 본능적인 과정으로 본다. 그러나 노동계급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던 사고는 교육받은 계급의 조그마한 사상들보다 훨씬 대담하고 훨씬 투시력이 강하며 훨씬 의식적이었다. 더욱이 이 사상은 더 과학적이었다: 맑스주의 방법론으로 상당히 비옥해졌다; 이뿐 아니라 혁명의 각축장에 자신의 모습을 곧 드러낼 대중의 살아있는 경험을 자양분으로 공급받아 더욱 비옥해졌다. 사상은 객관적 과정을 정확히 반영하고 이 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이 과정을 지도할 수 있을 때 과학성을 획득한다. 성경의 묵시록에서 영감을 얻어 라스푸틴의 환상을 믿은 정부 상층부의 사상에 과학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는가? 아니면 후진국 러시아가 자본주의 강대국의 쟁탈전에 끼어 들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동시에 의회체제를 수립할 수 있다고 희망한 자유주의자들의 사상이 과학성에 입각하고 있었는가? 아니면 어릴 때부터 이미 노쇠한 자유주의에 굴종하고 적응하면서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은유법들을 가지고 상상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독립성을 유지한 지식인들의 지적인 삶이 과학성에 입각하고 있었는가? 진실을 말하자면 바로 이 반동 세력의 사상에 정신적 무기력, 유령, 미신과 허구의 왕국 아니면 “자연발생성”의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2월 혁명에 대한 자유주의 철학을 완전히 뒤집을 권리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권리가 있다: 공적 사회 즉 지배계급, 지배층, 지배집단, 지배정당, 지배파벌 등의 다층 상부구조물은 하루하루 무기력과 관성으로 연명하면서 낡아빠진 유물로 자기 배를 채우고 진화의 저항할 수 없는 요구를 듣지 못하고 환상으로 자신들에게 아양떨고 아무 것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노동계급 내부에서는 지배자들에 대한 증오심 뿐 아니라 이들의 무기력증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독자적으로 깊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혁명 봉기와 그 승리가 완성시킨 경험과 창조적 의식이 축적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2월 혁명을 지도했는가?” 라는 이 질문에 아주 명확히 대답할 수 있다: 대부분 레닌의 볼세비키당이 교육시킨 의식적이며 훈련된 노동자들이 혁명을 지도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사실을 즉시 덧붙여야 한다: 이 지도력은 봉기의 승리를 보장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전위에게 혁명의 지도력을 즉시 부여하기에는 불충분했다.                     

 

 

제 9장 2월 혁명의 역설(逆說)

봉기는 승리했다. 그러나 왕정으로부터 빼앗은 권력을 봉기는 누구 손에 넘겨주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2월 혁명의 핵심 문제에 마주친다: 왜 그리고 어떻게 권력이 자유부르주아의 손에 넘어갔는가?

의회와 부르주아 “사회”는 2월 23일에 시작된 선동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유주의 의원들과 애국주의 언론인들은 과거처럼 응접실에 모여 트리에스테와 피우메의 영토 분쟁 문제(역자 주:Trieste and Fiume,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접경지역. 제 1차 세계대전 직후 전승국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었으나 지금은 각각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의 영토로 확정되었다.)에 대해 논의했다. 그리고 다다넬스 해협을 러시아가 차지해야할 필요성을 확인했다. 짜르가 의회 해산 포고령에 이미 서명한 후에도 의회의 위원회는 식량문제를 시 당국에 넘기는 문제를 아직도 서둘러 고려하고 있었다. 방위군 대대들의 봉기가 있기 12시간도 남지 않았을 때 슬라브족 상호원조회는 모임에서 연례보고서를 평화롭게 듣고 있었다. 어느 의원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모임이 끝난 후 걸어서 귀가하고 있을 때가 되어서야 생기가 넘치던 거리가 무서운 침묵과 공허감으로 덮여 있는 것을 보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 무서운 침묵과 공허감은 구 지배계급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으며 이들의 권력을 계승할 자유부르주아 계급의 마음도 함께 짓누르고 있었다.

26일이 되자 혁명운동의 심각성은 정부와 자유주의자들에게도 명백해졌다. 이날 내각의 장관들과 의원들은 혁명운동과 어떻게 타협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나중에 자유주의자들은 이 논의를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프로토포포프의 증언에 의하면 의회 동맹의 지도자들은 인민의 신뢰를 누리고 있는 인물들 중심으로 새 내각을 구성할 것을 전과 마찬가지로 요구했다: “이 조치는 아마 인민을 진정시킬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26일에 혁명의 전진은 일시 정지되었고 잠시 정부는 자신의 입지가 강화되었다고 느꼈다. 의회 의장 로지안코는 수상 골리친을 방문하여 그의 사임을 설득했다. 그러자 수상은 니콜라스 2세의 서명은 있으나 날짜는 적혀져 있지 않은 의회해산 포고령 문서 서류철을 가리켰다. 이 문서에 그는 날짜를 적어 넣어 포고령을 발효시켰다. 혁명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정부가 이런 조치를 취할 수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지배 관료들은 오래 전에 이미 확고한 답을 내리고 있었다. “우리가 동맹을 형성하고 말고는 노동자 운동과는 관계가 없다. 우리는 이 운동을 다른 수단을 통해 통제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내무부가 이 운동을 통제해왔다.” 이것은 1915년 고레미킨이 한 말이었다. 의회해산 조치에 대해 의원들이 조금이라도 대담하게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정부 관료들은 믿고 있었다. 다시 1915년 8월로 돌아가자. 불만을 품은 의회를 해산시키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면서 내무장관 쉐르바토프공(公)은 이렇게 말했었다: “의회는 의회해산 조치를 즉각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의원들 절대다수는 겁쟁이들이어서 목숨을 건지기 위해 벌벌 떠는 놈들에 불과하다.” 이것은 내무장관의 점잔하지 못한 표현이지만 크게 보면 어쨌든 올바른 말이었다. 따라서 자유주의 진영의 반대에 대해 관료들은 자기들의 입지가 대단히 확고하다고 느꼈다.

27일 아침이 되자 운동이 다시 상승했다. 의회는 놀란 가운데 정기 회기를 열고 있었다. 의원들 다수는 이때서야 의회가 이미 해산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로 전날에 장관들과 협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소식은 더욱 놀랍게 받아들여졌다. 로지안코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의회는 법에 복종했다. 그리고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황을 돌파할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해산하지 않거나 불법적인 회기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의원들은 개인적인 회합에서 서로의 무기력을 고백했다. 온건파 자유주의자 쉬들로프스키는 이후 악의에 찬 즐거움으로 이렇게 기억했다: 케렌스키의 동료가 될 극좌파 입헌민주당 당원 네크라소프는 “군사독재를 수립하여 전권을 인민 일반에게 양도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의회의 개인적 회합에 불참한 진보연합 지도자들은 상황을 타개할 실제적 방안을 시도했다. 이들은 뻬쩨르부르그에 미하일 대공을 불러 이렇게 제안했다: 대공이 직접 독재체제를 수립하여 정부의 개인용 직원들의 사임을 “강제하고” 전보를 보내 짜르에게 책임 내각을 “허락할” 것을 요구하라. 방위군 연대들의 봉기가 처음 시작되고 있을 시간에 자유부르주아들은 왕조 독재자의 도움으로 봉기를 진압하려는 최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동시에 혁명을 희생시키면서 왕정과 합의하려고 했다. 로지안코는 이렇게 불평하고 있다: “대공의 주저 때문에 유리한 순간이 지나가 버렸다.”

급진 지식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대단히 쉽게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 속성이 있다. 타우리데 궁전에서 정치적 역할을 맡기 시작한 비당원 사회주의자 수하노프의 증언이 이 속성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상당한 분량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들은 그 잊을 수 없는 날 아침에 발생한 정치 소식의 기본 내용을 나에게 전해주었다: 의회해산 포고령이 공포되었다; 의회는 해산을 거부하고 임시위원회를 선출했다.” 이것이 타우리데 궁전을 거의 떠나지 않고 의원 친구들과 계속 길게 대화를 나눈 수하노프의 증언이다. 밀류코프도 자신이 저술한 혁명사에서 로지안코에 뒤이어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선언한다: “의원들은 연설을 통해 차례로 의회 해산을 열렬히 비난했다. 그리고 의회가 뻬쩨르부르그를 떠나지 않는다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의회가 국가기구로서 ‘해산하지 않는다’는 결의안은 전해진 얘기와는 달리 채택되지 않았다.” “해산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리 늦었어도 의회 스스로 어떤 조치를 취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뻬쩨르부르그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일에 대해 손을 털고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수하노프가 전해진 말의 진위를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믿은 것은 정상을 참작하면 이해가 된다. 짜르의 포고령에 굴복할 수 없다는 내용의 혁명적 결의문을 의회가 채택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은 의회 출입 기자들에 의해 급히 소식지에 실렸다. 이 소식지는 당시 총파업 때문에 유일하게 인쇄되어 유포된 신문이었다. 봉기가 그날 승리했기 때문에 의원들은 오류를 서둘러 정정할 이유가 없었다. “좌익”친구들의 환상을 유지시킬 의향이 의원들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사실 국외로 추방될 때까지 이 문제를 정확히 해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일화는 부차적이지만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2월 27일 의회의 혁명적 역할은 진짜 신화에 불과했다. 급진 지식인들은 혁명에 대해 환희와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사태를 끝까지 해결할 능력이 대중에게 있다고 믿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아 계급에게 될 수 있으면 재빨리 기대려는 열성을 드러냈다. 따라서 이 일화는 무엇이든지 쉽게 믿어버리는 급진 지식인의 정치적 속성이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다행히 의회 다수파 의원들의 회고록에는 의회가 혁명을 맞이한 방식이 보존되어 있다. 입헌민주당 우파에 속하는 만시레프공의 이야기에 의하면 27일 아침 의회에 모인 많은 의원들 가운데 최고회의 의원, 정당 지도자, 진보연합 지도자들은 한 명도 없었다. 소위 의회 지도자들은 의회 해산과 봉기의 승리를 이미 알고 있었으며 가능하면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이들은 미하일 대공과 함께 독재체제 수립에 대한 협상을 벌이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만시레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탄식과 당혹감이 의회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심지어 생기 있는 대화도 사라졌다. 의원들은 자기 자리에 앉아서 한숨을 쉬고 ‘올 것이 왔군’ 등의 짤막한 말을 내뱉기도 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진짜 솔직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이것이 의원들 가운데 한숨 소리가 가장 컸던 이 대단히 온건한 의원의 고백이다. 오후 2시에 지도자들이 의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최고회의의 서기가 즐거운 그러나 근거가 없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소요는 곧 진압될 것입니다. 조치들이 이미 취해졌기 때문입니다.” “조치들”이란 독재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협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의회는 의기소침했으며 진보연합 지도자의 말을 기다렸다. 밀류코프는 선언했다: “지금은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소요의 정도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군대, 노동자, 사회조직들이 어느 편에 가담할지도 알 수 없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상황 판단을 위한 시간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이 너무 이릅니다.” 2월 27일 오후 2시가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시간이 너무 일렀다.” “정보를 수집한다”는 것은 손을 털고 투쟁의 결과를 기다리자는 의미였다. 그러나 밀류코프는 연설을 아직 끝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아무 것도 끝낼 생각이 없이 무슨 일이든지 시작했다. 이때 케렌스키가 아주 흥분해서 의사당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엄청난 수의 인민과 병사들이 타우리데 궁전으로 몰려오고 있으며 이들은 의회의 정권 장악을 요구할 생각이라고 그는 선언한다. 정권을 장악하라니! 이 급진파 의원은 엄청난 수의 인민이 바로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사실 봉기가 진압되었으면 하고 내심 희망하고 있는 의회에게 정권 장악을 맨 처음 요구한 사람은 바로 케렌스키 자신이었다. 케렌스키의 말에 “의원들 모두 당혹감과 실망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말을 끝내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이때 놀란 표정의 의회 직원이 뛰어들어와 그의 말을 가로챈다: 병사의 선발대가 이미 궁전에 도착했으며 이들을 입구에서 보초들이 막았으나 보초 대장은 크게 부상을 당한 것 같다. 이로부터 일분 후 병사들이 궁전에 들어섰다. 병사들이 의회에 인사하기 위해 그리고 충성을 다짐하기 위해 왔다고 나중에 연설과 기사들이 선언한다. 그러나 바로 지금 모든 의원들은 극도의 공포심에 가득하다. 이들은 곧 익사할 것 같다. 지도자들은 서로 귓속말을 나눈다. 우리는 숨쉴 틈을 가져야 한다. 누군가가 그에게 제안한 그대로 로지안코는 서둘러서 임시위원회 구성을 제안한다. 이에 동조하는 고함이 나온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의사당을 될 수 있으면 빨리 빠져나가기를 원한다. 표결에 부칠 시간이 없다. 다른 의원들만큼 놀란 의장 로지안코는 위원회 구성 문제를 원로위원회에 회부할 것을 제안한다. 아직도 의사당에 남아 있는 의원들 몇몇이 한번 더 고함을 질러 동의를 표한다. 대다수 의원들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짜르에 의해 해산 당한 의회가 봉기의 승리에 대해 보인 첫 번째 반응이 이것이었다.

이때 혁명은 같은 건물의 덜 화려한 곳에서 또 다른 기관을 수립하고 있었다. 혁명 지도자들은 이 기관을 발명할 필요가 없었다. 1905년 소비에트의 경험은 영원히 노동자의 의식 속에 새겨져 있었다. 전시에조차 운동이 상승하면 언제나 소비에트 사상은 자동적으로 부활했다. 소비에트의 역할에 대한 평가가 볼세비키와 멘세비키 사이에 달랐고 사회혁명당은 소비에트에 대해 일관된 평가를 내놓지 못했다. 그러나 조직 형태는 모두에게 논란의 여지없이 명확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멘세비키들은 군사산업위원회 회원들과 함께 타우리데 궁전에서 우파를 포함한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운동의 지도자들, 멘세비키 의원단의 지도자 체이드제와 스코벨레프 등을 만났다. 그리고 곧바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임시 집행위원회”를 수립했다. 이 임시집행위원회는 이날 하루동안 주로 과거 혁명가들로 위원들이 채워졌다. 이들은 대중적 기반이 없었으나 여전히 과거의 “명망”을 가지고 있었다. 볼세비키들도 포함된 집행위원회는 노동자들에게 즉시 대표를 선출할 것을 요구했다. 같은 날 저녁 타우리데 궁전에서 첫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밤 9시에 소집되어 집행위원회 위원들을 승인했다. 그리고 모든 사회주의 정당들의 공식 대표들로 집행위원회 위원들을 보강했다. 그러나 수도에서 승리한 노동계급의 대표들이 개최한 첫 회의의 의의는 이것이 아니었다. 이 회의에서 반란을 일으킨 연대의 대표들이 인사차 연설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완전한 백발의 병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봉기의 충격을 극복하지 못한 듯 혓바닥을 제대로 놀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어느 웅변가도 찾아낼 수 없는 말을 찾아냈다. 이들의 연설은 혁명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에 속했다. 혁명은 이제 처음으로 자기의 위력을 실감했다. 자기가 불러일으킨 수많은 대중을 느꼈으며 앞으로 성취해야할 장엄한 임무와 성공의 자부심을 자각했다. 오늘보다 더 아름다울 내일에 대한 생각으로 혁명은 심장이 멈출 정도로 즐거워했다. 혁명은 아직 자기에게 맞는 의례를 갖추지 못했다. 거리는 연기로 덮여 있었으며 대중은 새 혁명가요를 아직 배우지 못했다. 회의는 마치 홍수를 만난 강처럼 질서 없이 계속되었다. 소비에트는 자신에 대한 열정 속에 목이 막혔다. 혁명은 막강했으나 아직은 어린애처럼 순진했다.

첫 회의는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로 주둔군 병사들과 노동자들을 통합시키기로 결정했다. 누가 먼저 이 결의안을 제안했는가? 혁명의 운명을 결정한 노동자와 병사의 형제애가 메아리로 울려 여러 곳 또는 모든 곳에서 이 결의안이 나왔을 것이다. 수립된 순간부터 소비에트는 집행위원회를 통해 주권기관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임시식량위원회를 선출하여 반란군 병사들과 일반 주둔군의 식량을 책임을 지도록 한다. 그리고 함께 활동할 임시혁명지도부를 조직한다. 당시에는 모든 것에 임시라는 딱지가 붙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구 권력기관의 관료들로부터 재정을 분리시키기 위해 소비에트는 중앙은행, 재무부, 조폐공사, 인쇄청 등을 혁명 방위군을 통해 접수하기로 결정한다. 소비에트의 임무와 기능은 대중의 압력을 받아 끊임없이 증대한다. 이제 소비에트는 의심의 여지없는 혁명의 중심부이다. 지금부터 노동자, 병사 그리고 곧이어 농민들도 오직 소비에트에만 의존한다. 이들의 눈에 소비에트는 모든 희망과 권위의 초점이 되어 혁명의 화신이 된다. 그리고 유산 지배계급들은 분해서 이를 갈면서도 분쟁 해결을 위해 보호와 조언을 소비에트에서 구할 것이다.

승리의 첫 기간에 새로운 혁명 권력은 대단한 속도와 억누를 수 없는 힘으로 스스로를 수립시킨다. 그러나 이때 소비에트의 정점에 선 사회주의자들은 진짜 자기들의 “상전”을 찾기 위해 경계의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본다. 이들은 권력이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어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바로 여기에 새로운 체제의 정치적 난관이 존재했다: 권력의 끈 하나는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방으로 또 하나는 부르주아 정당들의 본부로 연결되어 있었다.

승리가 수도에서 완전히 확보된 오후 3시에 의회의 원로위원회는 진보연합 소속 정당들, 체이드제, 케렌스키 등으로 구성된 “의원 임시위원회”를 선출했다. 체이드제는 사양했고 케렌스키는 몸을 꼬았다. 이 인선은 이 위원회가 의회 공식기구가 아니라 사적인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신중하게 표현했다. 진보연합 지도자들은 마지막까지 한가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책임을 회피하고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은 무엇일까? 이 위원회의 임무는 모호한 내용으로 아주 면밀히 규정되었다: “질서를 회복시키고 기관 및 인사들과 협상을 진행한다.” 이들이 회복시키려는 질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그리고 어떤 기관들과 협상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곰의 몸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곰이 죽지 않고 크게 부상만 입고 있다가 우리를 갑자기 물어뜯으면 어쩐다? 밀류코프가 인정했듯이 27일 밤 11시가 되어서야 “혁명운동의 범위 전체가 명확해졌다. 임시위원회는 이후 취할 조치들을 결정했다. 그리고 짜르 정부의 손에서 떨어진 권력을 자기 손으로 잡았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이름도 의원 위원회에서 의회 위원회로 바뀌었다. 공문서 위조야말로 나라의 합법적 승계를 가장 잘 보장한다. 그러나 밀류코프는 한가지 가장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이날 수립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의회 임시위원회보다 먼저 등장했다; 그리고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의회임시위원회 회의에 나타나 의회가 권력을 접수할 것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이 우정어린 압력은 효과를 발휘했다. 곧 밀류코프는 의회 위원회의 결정 사항을 설명했다: 정부(즉 의회위원회)는 짜르에 충성하는 군대를 봉기 부대들에게 보내 “수도의 거리에서 실제 전투에 돌입하겠다고 위협했다.” 실제로 정부에게는 군대가 없었으며 혁명은 이미 완료된 후였다. 나중에 로지안코는 자기들이 권력을 사양했을 경우 “의원들은 체포되어 반란군에 의해 마지막 한 명까지 모두 살해되었을 것이며 권력은 즉시 볼세비키들에게 돌아갔을 것이다.”라고 회고록에 적었다. 물론 이 말은 궁내장관이자 의회 의장님의 존엄한 인품에 전적으로 어울리는 부적절한 과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의회의 정서를 오차 없이 반영하고 있다. 강권으로 권력을 장악할 경우 의회는 자기가 정치적 강간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정서 때문에 결정은 쉽게 나지 않았다. 특히 로지안코는 호통을 치면서도 동요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문제를 제시했다: “이것은 반란인가 아닌가?” 왕당파 의원 슐긴은 자신의 보고서에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한다: “반란은 전혀 없습니다; 충성스러운 신하처럼 권력을 접수하십시요...짜르의 장관들이 도망쳤다면 누군가가 이들을 대신해야합니다...두 가지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진정된다 --- 짜르가 새로운 내각을 임명한다, 우리는 그에게 권력을 이양한다; 아니면 사태가 진정되지 않는다; 이 경우 우리가 권력을 잡지 않으면 이미 공장에서 후레자식들을 선출한 다른 놈들이 권력을 잡을 것이다....” 반동 신사가 노동자들에게 퍼붓는 저질 비방에 대해 화를 낼 필요는 없다: 혁명은 이미 이 신사들 전부의 꼬리를 발로 꽉 밟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의 의도는 명백하다: 만약 왕정이 승리한다면 우리는 왕정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에 혁명이 승리하면 우리는 혁명을 약탈할 것이다.

회의는 오래 지속되었다. 민주주의 지도자들은 결정을 근심스럽게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밀류코프가 로지안코의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비에트 대표들에게 접근한 후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결정이 났다, 우리가 권력을 잡을 것이다....” 수하노프는 열광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가 우리라고 말했을 때 우리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그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듯이 나는 새로운 상황이 조성되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자연의 변덕에 완전히 몸을 맡긴 채 혁명의 소나기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혁명의 배가 무시무시한 폭풍과 배의 심한 요동 가운데에서도 돛을 올리고 안정과 정상을 되찾았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에 노예처럼 의존하는 현상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것치고는 대단히 화려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의 말은 치명적인 정치적 전망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의 권력 장악이 국가라는 배에 안정성을 부여할 리가 없다. 반대로 그 순간부터 혁명 지도부의 부재, 엄청난 혼란, 대중의 배신감, 전선의 붕괴, 이후 내전의 극단적인 원한 등 모든 부정적인 현상들의 원천이 될 것이었다.

 

과거를 살펴보면 부르주아 계급에게 권력을 넘긴 현상은 아주 규칙적으로 반복된 것처럼 보인다: 과거의 모든 혁명에서 바리케이드에서 싸운 쪽은 노동자, 도제 그리고 부분적으로 학생들이었으며 병사들은 이들 편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혁명 직후 탄탄한 부르주아 계급은 창문을 통해 아래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조심스럽게 주시한 후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1917년 2월 혁명은 과거 혁명들과는 뚜렷하게 달랐다. 비교할 수 없이 수준이 높은 혁명의 사회적 성격과 혁명 계급의 정치수준, 봉기 대중의 자유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적대적인 불신, 승리의 순간에 곧이어 대중의 무력에 기초해 수립된 새로운 혁명 권력기관인 소비에트 등은 이 혁명의 뚜렷한 특징이었다. 이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고립되었으며 무력도 갖추지 못한 자유부르주아 계급에게 권력이 넘어간 현상은 설명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혁명에 의해 조성된 계급 역관계를 좀더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자기가 무너뜨린 권력을 장악하는 대신 대부르주아 계급에게 이 권력을 넘기도록 객관적으로 강요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계급은 혁명이 자기에게 권력을 넘길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혁명으로 자기에게 넘어온 권력이 자기의 사회적 존재를 치명적으로 위협할 것으로 예상했다. 로지안코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온건 정당들은 혁명을 원치 않았을 뿐 아니라 두려워했다. 특히 인민의 자유당 즉 ‘입헌민주당’은 온건 정치그룹의 좌파이며 따라서 어느 정당보다 혁명정당들과 접촉면을 많이 유지했다. 그런데도 입헌민주당은 다가올 혁명의 재앙을 누구보다 걱정하고 있었다.” 1905년의 경험은 자유부르주아 계급에게 너무도 인상 깊게 이렇게 암시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승리는 왕정과 부르주아 계급에게 똑같이 위험하다. 2월 봉기의 과정은 이 예상을 확인시켰을 뿐이었다. 당시 혁명 대중의 정치사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로대중과 부르주아 계급 사이의 경계선은 이 봉기를 통해 화해할 수 없이 그어졌다.

대학강사 스탄케비치는 진보연합의 우군이었으므로 자유주의 진영과 가까웠다. 자신들이 저지하는데 실패한 혁명 이튿날 자유주의자들의 정서를 그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이들은 축하하고 혁명에 찬사를 보냈으며 자유 투사들에게 ‘만세’를 불렀으며 자기들도 붉은 색 리본으로 장식하고 붉은 깃발 아래 행진했다....그러나 이들의 영혼 속에 그리고 자기들끼리의 대화에서 이들은 공포심으로 몸을 떨었다. 그리고 미지의 길을 가는 적대 분자들의 포로가 된 것처럼 느꼈다. 뚱뚱하고 풍채가 좋은 로지안코는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겉으로는 웅장한 품위를 보존했으나 그는 창백한 얼굴에 굳어진 표정으로 깊은 고통을 담은 절망감을 드러냈다. 이 표정으로 그는 단정치 못한 병사들 사이로 타우리데 궁전의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짜르 정부와의 투쟁에서 의회를 지지하기 위해 이 궁전에 도착했다. 그러나 실제로 의회는 혁명 첫날부터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의회 임시위원회의 모든 의원들과 그 주위의 인물들도 로지안코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진보연합의 대표들이 자기 집에 틀어박혀 무기력한 절망감에 소리내어 울었다는 소문이 있다.”

이 살아있는 증언은 계급 역관계에 대한 어떤 사회과학적 연구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 이름 없는 병사들이 “누구의 명령에 따른 것인지는 기록되지 않았는데” 구체제의 관료들을 체포하여 의회로 데리고 오자 로지안코 자신은 무기력한 분노에 몸을 떨었다고 자백했다. 이 궁내장관이자 의회 의장은 자신과 견해는 당연히 다르지만 어쨌든 자기 진영의 사람들을 감시하는 감옥의 간수와 같았다. 이 “자의적인” 체포 행위에 충격을 받은 그는 체포된 장관 쉐글로비토프를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그러나 병사들은 증오의 대상인 이 관료를 그에게 넘기는 것을 거칠게 거부했다. 로지안코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권위를 보이려 하자 병사들은 이 포로를 둘러싼 후 대단히 도전적이며 무례한 표정으로 자기들이 손에 든 소총을 가리켰다. 그리고 곧 이들은 쉐글로비토프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데리고 가버렸다.” 의회를 지지한다고 궁전에 온 연대들이 실제로는 의회를 폐지시켰다고 스탄케비치는 주장한 바 있었다. 로지안코의 증언은 그의 주장을 가장 확실히 증명하고 있다.

소비에트는 처음부터 권력을 장악했다. 이 점은 누구보다 의원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진보연합의 지도자이자 10월당 의원인 쉬들로프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우체국, 전신국, 무선국, 뻬쩨르부르그의 모든 기차역, 모든 인쇄소 등을 소비에트가 장악했기 때문에 소비에트의 허가 없이는 전보를 보내고 뻬쩨르부르그를 떠나고 호소문을 인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계급 역관계에 대한 이 의문의 여지없는 묘사에 하나의 사소한 교정을 가할 필요가 있다: 소비에트가 전신국, 기차역, 인쇄소 등을 “장악”한 것은 이곳의 노동자와 직원들이 소비에트의 지시만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와 의회 지도자들 사이의 협상이 절정에 다다랐다. 이때 일어난 하나의 사건은 쉬들로프스키의 탄식을 아주 잘 설명한다. 짜르의 전용기차가 여기 저기를 방황한 후 프스코프에 정지했다. 이에 대한 통지문이 도착하여 이들의 합동회의는 중단되었다. 이 통지문은 로지안코에게 전보를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 전능한 의회 의장은 혼자서 전신국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여기 있는 병사와 노동자 대표들이 호위대를 붙여주거나 나와 함께 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신국에서 나는 체포될 것이다.  당신들이 권력과 주권을 가지고 있다. 물론 당신들은 나를 체포할 수 있다...어쩌면 당신들이 우리 모두를 체포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로지안코가 대표로 있는 의회 임시위원회가 권력을 “접수”한지 24시간도 채 안된 3월 1일에 이 조그만 사건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어떻게 권력의 주인이 되었을까? 이들은 혁명을 두려워했고 혁명에 저항했으며 혁명을 진압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들에게 완벽히 적대적인 대중이 대단한 과감성과 단호함으로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따라서 봉기의 승리로 탄생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는 자연스럽게 모두가 의문의 여지없이 인정하는 정세의 주인이었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누구의 허락을 받고 어떻게 정부를 구성했는가?

이제 권력을 넘겨준 쪽의 얘기를 들어보자. 2월 정세에 대해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람들은 의회를 중심으로 모이지 않았다. 이들은 의회를 정치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운동의 중심으로 삼는데 관심도 없었고 생각도 없었다.” 수하노프 자신은 모든 힘을 쏟아 의회 위원회가 권력을 접수하도록 애를 썼다. 이런 점에서 그의 이 증언은 놀라울 따름이다. 3월 1일의 협상에 대해 수하노프는 이렇게 덧붙인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권력을 부르주아 정부에 넘기거나 넘기지 않을 재량을 완벽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밀류코프는 확실히 이해했다.” 이 말보다 더 단도직입적인 표현이 있을 수 있을까? 이 말보다 정세를 더 명확히 드러낼 수 있는 표현이 있을까? 그런데도 수하노프는 당시 객관적인 상황과 자기 생각과는 정반대로 즉시 이렇게 덧붙인다: “부르주아 권력만이 짜르 체제를 대체할 수 있다...우리는 이 원칙에 입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봉기는 실패하고 혁명은 붕괴할 것이다.” 로지안코 없이는 혁명이 붕괴한다!

사회세력의 살아있는 관계는 여기서 선험적인 도식과 판에 박힌 용어로 대체되고 있다. 이것이 지식인이 구사하는 교조주의의 정수이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이 교조주의는 결코 허구가 아니었다. 이것은 눈가리개를 한 채 아주 현실적인 정치적 기능을 수행했다.

지금까지 수하노프의 말을 인용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수립된 직후 이 기관에 영감을 불어넣은 인물은 집행위원회 의장 체이드제가 아니라 바로 이 수하노프였기 때문이다. 체이드제는 정직하고 시야가 편협한 시골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수하노프는 일반적으로 혁명 지도자의 자질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반(半)인민주의자, 반(半)맑스주의자, 정치인이기보다는 진솔한 관찰자, 혁명가이기보다는 기자, 기자이기보다는 합리화를 좋아하는 그는 혁명사상을 지지할 능력만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혁명사상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기 전까지만 지지했다. 그는 전시에는 수동적인 국제주의자였다. 그리고 혁명 바로 첫날에 가능하면 빨리 권력과 전쟁을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길 필요가 있다고 결심했다. 최소한 논리적으로 정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점에서 그는 이론가였다. 이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이 그에게는 물론 없었다. 어쨌든 그는 이론가로서는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위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났다. 그러나 그의 최고의 능력은 대단히 다채롭지만 동질적인 우애조합의 본성들(자기 능력에 대한 불신, 대중에 대한 두려움,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커다란 존경심)을 교조주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에 있었다. 레닌은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소부르주아 계급을 가장 잘 대표하는 인물이 수하노프이다. 이 묘사는 그에 대해 베풀 수 있는 최상의 찬사였다.

여기서 소부르주아의 새로운 유형이 문제로 제기된다. 공업, 상업, 은행의 직원들처럼 자본의 이해에 복무하는 기능인들을 한편으로 하고 노동자 조직의 관료들을 또 한편으로 하는 신중간 계층이 등장했다. 독일의 유명한 사회민주주의자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지난 세기말에 이 계층의 이름으로 맑스의 혁명사상을 수정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이 어떻게 권력을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겨주었는가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정치 고리에 중간 고리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즉 수하노프 유형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신중간 계층의 기자와 정치인들이 바로 이 중간고리이다. 이들은 대중에게 부르주아 계급이 적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대중을 이 적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이들은 무엇보다도 두려워했다. 이 혁명의 성격(노동자 혁명)과 이 혁명이 탄생시킨 권력의 성격(부르주아 권력) 사이의 모순은 혁명 대중과 자본가 계급 사이에 장벽을 형성하는 이 신중간 소부르주아 계층의 모순적 성격으로 설명될 수 있다. 정세가 계속 전개되면서 이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새로운 유형이 담당하는 정치적 역할이 확연히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지금은 이 유형에 대해 몇 마디만 말하고자 한다.

처음에는 혁명 계급의 소수만이 봉기에 참여한다. 그러나 다수의 지지 또는 최소한 공감을 통해 이 소수의 힘이 나온다. 적의 공격에 맞서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소수는 좀더 혁명적이고 자기희생적인 분자들을 배출한다. 따라서 2월 투쟁에서 노동자 출신 볼세비키들이 선두에 선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승리가 확보되고 승리의 정치적 기반이 강화되기 시작하는 순간 상황이 바뀐다. 승리한 혁명의 조직과 기관을 운영할 지도부의 선거는 직접 손에 무기를 들고 싸운 소수보다 훨씬 광범위한 대중을 끌어들이고 이들에게 어려운 과제를 제시한다. 시의회나 도의회 또는 나중에 제헌의회와 같은 일반 민주주의 기관 뿐 아니라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와 같은 계급 기관에도 이것은 그대로 적용된다. 절대다수의 노동자, 멘세비키, 사회혁명당, 무당파 대중 등은 볼세비키가 짜르 체제와 직접 투쟁할 당시 이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이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한 노동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동시에 모든 노동자들은 자신들과 부르주아 계급 사이에 날카로운 분리의 선을 그었다. 이 사실은 혁명이 승리한 후의 정치상황을 결정했다. 노동자들은 짜르 뿐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에도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을 대표로 선출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3개 사회주의 정당들의 차이를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모든 곳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지식인들 때문에 볼세비키당보다 지식인을 훨씬 더 많이 보유했다. 따라서 이 두 정당은 즉시 엄청난 수의 선동가 집단을 운영할 수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정당들은 심지어 작업장과 공장 선거에서조차 절대 다수당이 되었다. 그리고 이 경향은 정치적으로 막 각성하고 있던 군대에 의해 비교할 수 없이 막강한 동력이 제공되었다. 봉기 5일째에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은 노동자들을 따랐다. 혁명이 승리한 후 군대는 소비에트 선거를 실시했다. 병사들은 짜르를 지지하는 장교들에 반대하여 혁명을 지지하고 이 입장을 크게 외칠 수 있는 인물들을 신뢰하고 대표로 선출했다. 이들은 자원 입대 병사, 서기, 외과의사 조수, 지식인 출신의 젊은 장교, 군대의 하급 관료 등으로 신중간 계층의 최하층 부위였다. 이들 거의 전부는 3월에 사회혁명당에 입당했다. 이들의 중간적인 사회적 위치와 제한된 정치적 시야는 사회혁명당의 지적 무정형성에 의해 완벽하게 표현되었다. 따라서 주둔군의 소비에트 대표들은 병사 대중보다 비교할 수 없이 온건하고 부르주아적이었다. 그러나 병사 대중은 이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앞으로 전개될 혁명의 몇 개월 동안 이 차이점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한편 노동자들은 피로 결성한 노동조합을 강화하고 좀더 영구적으로 혁명을 무장시키기 위해 가능하면 병사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반정도 밖에 성숙하지 않은 사회혁명당원들이 병사 소비에트 대표들의 압도적 다수였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혁명당과 이 정당의 동맹인 멘세비키당의 권위를 노동자들이 보는 앞에서 상승시킬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두 화해주의 정당들은 소비에트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였다. 심지어 비보르그 노동자 지구 소비에트에서도 초기의 주도권은 노동자 멘세비키 당원들에게 있었다. 이 당시 볼세비키당은 혁명의 심연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서도 볼세비키 당원들은 영향력이 없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임무를 명확히 설정하지도 못했다.

이렇게 해서 2월 혁명의 역설이 초래되었다. 권력은 (부르주아)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의 손에 있었다. 이들은 블랑끼 식의 소수 정예 쿠데타로 우연히 권력을 장악하지 않았으며 승리한 혁명 대중이 이들에게 공개적으로 권력을 넘겨주었다. 대중은 부르주아 계급을 신뢰하거나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 귀족, 관료들을 구별하지도 못했다. 대중은 자기가 소지한 무기를 소비에트에만 맡겼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너무 쉽게 소비에트를 장악했기 때문에 한가지 문제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며 대중의 증오를 받고 있으며 혁명에 철저히 적대적인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넘겨받을 것인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렇게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의 정치강령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므로 “사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강령을 포기해야만 한다.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이라는 선물을 받기만 한다면 왕정, 전쟁, 토지 등의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자기를 놀리기라도 하듯이 계속 부르주아 계급을 자기 계급의 적이라고 지칭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의 예배에 순전히 불경(不敬)스러운 행위가 도입되었다. 계급투쟁은 결론적으로 국가 권력에 대한 투쟁이다. 혁명의 기본 성격은 계급투쟁을 결론까지 끌고 가는 것이다. 혁명은 권력 장악을 위한 직접적 투쟁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권력이 없으며 자기 힘으로 권력을 잡을 능력이 없는 적대 계급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았다. 정반대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권력을 이 적대 계급이 갖도록 하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이것은 진정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 현상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왜냐하면 똑같은 현상이 벌어진 1918년 독일혁명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류는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주도한 “신중간 계층”의 거대하고 좀더 성공적인 배신 행위를 아직 목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화해주의자들은 자신의 행위를 이렇게 교조적으로 설명했다: 이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므로 사회주의자들은 권력을 장악하여 스스로 타락해서는 안된다 --- 부르주아 계급이 책임을 지고 권력을 갖도록 만들어라. 이것은 아주 단호한 논리처럼 들렸다. 그러나 실제로 소부르주아 계급은 재산, 교육, 참정권을 획득한 시민 권력에 대한 자신의 아부를 위장하기 위해 이 거짓 단호함을 사용했다. 대부르주아 계급의 권력에 대한 권리를 소부르주아 계급은 계급 역관계와는 무관한 장자상속권으로 인정했다. 소상인이나 교사는 기차역이나 극장에서 대부르주아 로쓰차일드 가문의 사람이 지나가면 그에 대한 존경심으로 길옆으로 물러선다. 이 본능적인 동작과 기본적으로 거의 같은 경우가 러시아에서도 연출되었다. 부르주아 혁명이므로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이 교조적인 주장은 소부르주아 자신이 한 개인으로서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의식을 보상해 주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기에게 배달된 권력을 유지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두 달 후에 명백해졌다. 그러자 화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교조주의적) “사회주의적” 편견을 던져버리고 부르주아와 함께 하는 연립내각에 손쉽게 참여했다. 이것은 부르주아 계급을 몰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구해주기 위한 행위였다. 이 행위는 부르주아 계급의 의지에 반해서가 아니라 명령에 가까운 요구에 응해서 이루어졌다. 부르주아 계급은 민주주의자들이 권력에 동참하지 않을 경우 권력을 손에서 떨어뜨리겠다고 위협했다.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거부하는 두 번째 주장 역시 첫 번째 주장만큼이나 전혀 진지하지 않았다. 다만 좀더 실제적인 외양을 띠고 있었다. 우리의 친구 수하노프는 러시아 민주주의 세력의 “분산성”을 최대한 활용했다: “당시 민주주의자들은 안정적인 또는 영향력이 있는 직종별 또는 자치도시 조직이나 정당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거의 농담처럼 들린다!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사회주의자 수하노프가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사실 1905년의 경험 덕분에 소비에트는 마치 땅속에서 솟아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리고 갑자기 수립되었다. 그리고 이 권력기관과 경쟁하기 위해 나중에 등장한 조직들(시 자치정부, 협동조합 그리고 부분적으로 노동조합)보다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속성상 분산적인 농민은 과거 어떤 때와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하게 조직되어 있었다. 전쟁은 농민을 군대로 집합시켰다. 그리고 혁명은 군대에게 정치적 성격을 부여했다! 자그마치 8백만 농민이 중대와 대대로 단합되었다. 이들은 언제든지 즉시 혁명 정신으로 대표들을 선출하고 전화 한 통화로 투쟁에 동원될 수 있었다. 이것이 “분산성”이란 말인가?

권력의 문제에 대한 군대의 태도를 민주주의자들이 예상하지 못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전쟁에 지친 전선의 병사들이 제국주의 부르주아 계급을 지지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화해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권력을 준비하기 위해 무대 뒤쪽에서 보낸 혁명 승리 후 이틀 또는 삼일 동안 이 문제는 완전히 결정되었다. 즉 군대 전체가 소비에트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수하노프도 이렇게 인정하고 있다: “3월 3일경에 혁명은 완수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모든 힘을 다해 권력을 자유주의자들 쪽으로 밀어보냈다. 이들은 권력이 자신들의 손에 집중되면 될수록 그것을 더 두려워했다.

그러나 왜 그랬는가? 어떻게 이 민주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두려워할 수 있었는가? 이들은 역사상 어떤 민주주의도 누리지 못한 대중의 직접적 지지를 누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더욱이 이 대중은 상당한 경험, 규율, 무기 등을 보유했고 소비에트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어떻게 이 전능하고 겉으로 보기에 정복될 수 없는 민주주의자들이 권력을 두려워할 수 있었는가? 이 겉으로 보기에 복잡한 수수께끼는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의 지지기반인 대중을 신뢰하기는커녕 두려워했다; 자신에게 보인 대중의 정치적 신뢰가 안정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소위 “무정부 상태”를 두려워했다; 즉 자신들이 권력을 잡을 경우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대세의 허수아비에 불과함을 스스로 증명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 민주주의자들은 자기의 촉수가 대중에게 향해있었기 때문에 인민 봉기의 순간에 인민의 지도자가 아니라 부르주아 질서의 좌파로 부름을 받았다고 느꼈다. 이 민주주의자들은 자기의 진짜 역할을 대중 뿐 아니라 자신으로부터도 숨기려 했다. 그래서 자칭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자신이 진짜 사회주의자인 것처럼 생각했다. 이 자기도취가 없었다면 이들은 자기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3월 1일 저녁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대표들인 체이드제, 스테클로프, 수하노프 그리고 기타 인물들은 새 정부를 지지할 조건들을 논의하기 위해 의회 임시위원회 회의에 모습을 나타냈다. 민주주의자들은 전쟁, 공화제, 토지, 8시간 노동일 등의 강령적 문제들을 간단히 무시하고 단 하나만 요구했다: 좌익 정당들에게 선동의 자유를 부여하라. 이 요구는 모든 인민과 시대의 이해를 초월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자기 손에 모든 권력을 쥐고 있으며 선동의 자유를 누구에게든 부여할 수 있는 힘을 자기만 가지고 있는 사회주의자들이 “적대 계급”에게 권력을 넘겨주면서...선동의 자유를 약속하라고 요구했다! 로지안코는 전신국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체이드제와 수하노프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권력을 가지고 있고 우리 모두를 체포할 수 있다.” 그러자 체이드제와 수하노프는 이렇게 대답한다: “권력을 가지세요. 다만 선동행위를 했다고 우리를 체포하지는 마세요.” 화해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의 협상들과 일반적으로 당시 타우리데 궁전에서 벌어졌던 좌익과 우익의 상호관계의 일화들을 연구하면 이런 인상을 받는다: 인민의 역사극이 전개되는 거대한 무대에서 지방의 배우들이 무대 한쪽의 빈 구석을 이용하여 쉬는 시간을 틈타 주연 배우들의 옷을 재빨리 갈아입은 후 음악이 곁들여진 가벼운 연극을 공연하고 있다.

정확히 평가하자면 부르주아 계급의 지도자들은 사태가 이렇게 전개될 것을 결코 예상하지 못했다. 혁명 지도자들의 노선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이들은 혁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들은 그런 경우에도 판단 착오를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혁명 지도자들과 같이 판단 착오를 일으켰을 것이다. 그런데도 부르주아 지도자들이 권력을 거부할까 두려워 수하노프는 위협조의 최후통첩을 제시했다: “우리 아니면 아무도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해결책은 한가지 밖에 없다 --- 우리가 제시한 조건에 동의하라.” 다른 말로 하면 이렇다: 당신들의 강령을 받아들여라; 그러면 우리는 당신들에게 약속한다; 우리에게 권력을 준 대중을 막아주겠다. 대세를 잘도 막는 인물들이다!         

밀류코프는 깜짝 놀랐다. 수하노프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그는 만족감과 즐거운 놀라움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대표들은 자신들이 제시한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것이 “최후” 조건이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밀류코프는 마음이 넓어져서 다음과 같은 말과 함께 이들의 머리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렇다, 1905년이래 이 나라 노동운동이 얼마나 발전했는지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도 이 운동의 발전에 대해 생각을 해왔다...” 나중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때에도 독일 외교관은 밀류코프와 같은 성격 좋은 악어의 위선적 어조로 우크라이나 의회 대표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후자의 정치인다운 성숙함을 칭찬했다. 그리고 곧 이들을 잡아먹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계급에게 잡아먹히지 않았다. 이것은 밀류코프나 수하노프의 잘못이 아니다. 근로계급의 지지를 받지 못한 부르주아 계급이 이들의 등뒤에서 권력을 접수했기 때문이었다. 권력과 함께 껍데기 뿐인 지지를 그나마 간접적으로 받았으니 어떻게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잡아먹을 수 있었겠는가. 대중에 의해 높이 떠받들어진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부르주아 계급에게 신임장을 전달했다. 이 형식적 민주주의의 작동을 해부하면 이중의 선거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여기서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중간 고리 즉 입헌민주당을 선출하는 기술적인 역할을 한다.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화해주의자들은 대중의 신임을 배신하여 대중의 적대 계급에게 권력 접수를 촉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좀더 깊이 사회과학적으로 해석하면 이 문제는 이렇게 설명된다: 일상적 상황에서 대단한 허세와 자기만족감을 과시한 소부르주아 정당들은 혁명으로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다; 그러자 곧 자신들의 무능력을 무서워하여 서둘러서 권력을 자본의 대표들에게 넘겼다. 신중간 계층의 무한한 나약성 그리고 대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이들의 모욕적 종속성이 이 굴종 행위를 통해 확연히 드러났다. 민주주의자들은 자기 손에 든 권력은 어쨌든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실감했거나 막연히 느꼈다. 동시에 좌익이나 우익에게 권력을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거나 막연히 느꼈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과격한 대표들에게 내일 권력을 넘겨주느니 지금 확고한 자유주의자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 객관적 사회적 조건의 관점에서 보면 화해주의자들의 심리와 행동이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의 배신자라는 딱지를 결코 뗄 수 없다.

사회주의자들에게 보낸 신뢰를 통해 노동자와 병사들은 예상치도 않게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거세시켰다. 이들은 당혹감과 놀라움에 사로잡혔으나 당장 해결책이 나올 리 없었다. 배신자들은 대중 위에 군림하면서 이들이 즉시 반박할 수 없으나 이들의 정서나 의도와 모순되는 주장들을 늘어놓았다. 배신자들의 거짓주장으로 대중의 귀는 멍멍해졌다. 2월 혁명의 순간에도 대중의 혁명적 경향은 소부르주아 정당들의 화해주의 경향과 조금도 일치하지 않았다. 노동계급과 농민은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을 화해주의자가 아니라 짜르, 자본가, 지주에 대한 반대자로 인식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표를 던져주었다. 그러나 이 투표 행위를 통해 대중은 자신과 자신의 정치적 목표 사이에 분리의 장벽을 세웠다. 이제 이들은 스스로가 세워 올린 이 장벽을 붕괴시키지 않고는 한발도 전진할 수 없었다. 2월 혁명이 들춰낸 계급관계 속에는 바로 이 놀라운 가짜가 숨어 있었다.

이 근본적인 역설에 보충적인 역설이 즉시 부가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의 손에서 권력을 넘겨받겠다고 동의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의 조건을 제시했다: 자기들 손에서 짜르가 권력을 되가져가겠다고 동의해야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왕당파 의원 슐긴은 구츠코프와 함께 짜르의 전용기차가 정지한 프스코프로 가서 로마노프 왕조를 구하는 입헌군주제를 협상한 적이 있었다. 이제 이 문제는 타우리데 궁전의 두 위원회 사이에서 중심 의제가 되었다. 권력을 넘겨주기 위해 그에게 온 민주주의자들에게 밀류코프는 로마노프 왕조가 더 이상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고 조언했다: 물론 니콜라스 2세는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 그러나 황태자 알렉세이는 미하일 대공의 섭정을 거치면 나라의 복지를 충분히 보장할 군주가 될 수 있다. 이 주장을 민주주의자들에게 확신시키려고 밀류코프는 열심히 노력했다: “황태자는 병약한 아이이고 대공은 완전히 어리석은 사람이다.” 여기서 자유주의 왕당파 쉬들로프스키가 섭정이 될 미하일 대공을 묘사한 내용을 보자: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는 국사에 개입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지금 경마에 모든 열정을 바치고 있다.” 이 권유의 말이 대중에게 반복된다면 특히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다.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루이 16세는 바렌느로 도망했다. 그러자 혁명가 당통은 자코벵 클럽에서 마음이 여리면 왕이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와 반대로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은 마음이 여리면 입헌군주제의 최적격자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좌익” 얼간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계산된 마구잡이 주장이었다. 또한 이 얼간이들에게 걸맞지 않는 약간 조야한 주장이었다. 자유주의 속물들의 넓은 바닥에서 미하일 대공이 “골수 친영국파”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그가 경마에 대해서 그런지 아니면 의회체제에 대해서 그런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이들의 주요 논지는 “권력의 관습적 상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없다면 인민은 무정부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자 민주주의자들은 이 주장을 경청하더니 정중하게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을 설득시키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공화국 선포를 요구한다고? 아니다. 이 문제를 미리 결정하지 말아달라는 것뿐이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내세운 조건의 제 3항은 이렇다: “임시정부는 미래 정부의 형태를 규정할 어떤 조치도 미리 취하지 말아야 한다.” 밀류코프는 왕정을 최후통첩으로 제시했다. 이제 민주주의자들은 절망에 빠졌다. 이때 대중이 이들을 도와주었다. 타우리데 궁전의 회의에서 노동자 뿐 아니라 병사들 가운데 짜르의 존속을 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짜르를 강제로 인정하게 만들 수단도 없었다. 그런데도 밀류코프는 대세를 거슬러 좌익 동맹세력의 머리 위에서 왕좌와 왕조를 구하려고 애썼다. 자신의 혁명사에서 그는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3월 2일이 저물 무렵 미하일 대공의 섭정에 대한 나의 선언은 “상당히 영향력을 증가시켰다”. 자유주의자들의 군주제 유지 술수가 대중에게 미친 영향을 로지안코는 밀류코프보다 훨씬 더 다채롭게 채색하고 있다. 구츠코프는 미하일 대공의 섭정을 위해 니콜라스 2세의 양위 포고령을 가지고 프스코프에 도착했다. 이 순간 그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따라 기차역에서 철도 상점으로 걸어가서 그 동안 일어난 일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짜르의 양위 포고령을 낭독한 후 “미하일 황제 만세!”를 외쳤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로지안코에 따르면 이 웅변가는 즉시 노동자들에 의해 체포된 후 처형 위협을 당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주둔한 연대 소속 보초 중대의 도움으로 그는 아주 어렵게 구출되었다.” 로지안코는 언제나 약간 과장을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의 핵심은 제대로 묘사했다. 러시아는 너무도 과격하게 왕정을 토해내었기 때문에 이것이 인민의 목구멍 아래로 다시 내려갈 수는 없었다. 혁명 대중은 새로운 짜르를 생각도 못하게 막았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임시위원회 위원들은 하나 하나 미하일 대공의 섭정 제안을 피해갔다. 그리고 “제헌의회가 수립될 때까지”만 이 제안을 유보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이후의 사태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밀류코프와 구츠코프만 끝까지 왕정을 고집하면서 자신들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이것을 입각 조건으로 계속 제시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밀류코프가 없는 부르주아 정부는 불가능하며 부르주아 정부가 없으면 혁명 권력은 다시 대중의 손아귀로 들어갈 것이라고 민주주의자들은 생각했다. 말다툼과 설득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3월 3일 아침 회의에서 “대공이 하야하도록 설득”시키려는 확신이 임시위원회에서 완전히 승리할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대공을 벌써부터 짜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입헌민주당 좌파 네크라소프는 하야 문안을 작성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밀류코프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자 열렬한 논쟁이 더 진행된 후 마침내 이렇게 결정되었다: “양측은 대공 앞에 각자의 견해를 제출한다. 다만 더 이상의 논쟁 없이 최종 결정은 대공에게 맡긴다.” 이렇게 해서 왕조의 법도에도 맞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봉기에 의해 타도된 형에 뒤이어 왕좌에 오를 “완전히 어리석은 사람”이 예상치도 않게 혁명 국가의 형태 문제를 해결하는 초(超)심판관이 되었다. 아무리 믿기 힘들어도 사실은 어쩔 수 없다. 이제 국가의 운명을 놓고 도박판이 벌어졌다. 왕좌를 위해 마구간을 차고 나오도록 대공을 유인하려고 밀류코프는 그에게 이렇게 확신시켰다: 뻬쩨르부르그 외부에서 군대를 집결시키면 새로운 왕권을 방어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자마자 밀류코프는 왕당파 쿠데타를 계획으로 제시한 셈이었다. 자신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적지 않은 찬반 의견들을 들은 후 대공은 생각할 시간을 줄 것을 요청했다. 로지안코를 다른 방으로 부른 후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물었다: 새로운 권력자들이 그의 왕관 뿐 아니라 목숨도 보장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이 궁내장관은 이렇게 대답했다: 왕과 함께 죽을 필요가 있을 때에만 약속할 수 있다. 이 대답은 대공을 전혀 만족시키지 못했다. 로지안코와 포옹한 후 방을 나와 의원들을 만나자 미하일 로마노프는 “대단히 확고하게” 그에게 제시된 고상하지만 위험한 직위를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이때 협상 과정에서 민주주의 양심의 화신이었던 케렌스키는 의자에서 귀신에 홀린 것처럼 뛰어 올라 이렇게 말했다: “폐하, 폐하는 고상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릴 것이라고 맹세했다. 밀류코프는 무미건조하게 이렇게 논평한다: “케렌스키의 호언장담은 대공이 내린 결정의 무미건조한 산문과는 영 조화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기는 불가능하다. 이 막간극은 진정으로 어떤 정감을 느낄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고대 원형극장의 구석에서 공연된 가벼운 연극(vaudeville)을 앞에서 비유한 바 있다. 여기에 이렇게 덧붙일 필요가 있다: 무대가 헝겊 막으로 양분되었다; 한쪽에서는 혁명가들이 자유주의자들에게 혁명을 구해달라고 구걸하고 있다; 또 한쪽에서는 자유주의자들이 왕정에게 자유주의를 구해달라고 구걸하고 있다.

이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대표들은 진짜 당혹스러웠다: 교양이 있고 시야가 넓은 밀류코프가 낡아빠진 군주제를 완고하게 고집하다니; 더욱이 로마노프 가문의 누구를 왕으로 앉히지 않는다면 권력을 포기하겠다니;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밀류코프의 군주제 사상은 교조주의도 낭만도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이것은 공포에 떠는 유산계급의 노골적인 계산의 결과였다. 이 계산의 노골성에는 이 계산의 가망 없는 허약성이 확연히 드러났다. 역사학자 밀류코프는 프랑스 부르주아 혁명의 지도자 미라보의 예를 정말이지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미라보 역시 혁명을 왕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다. 미라보 역시 유산계급의 일원이었다. 그의 정치적 계산 역시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사유 재산을 상실할 두려움에 직면하여 그는 상황을 구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좀더 신중한 정책은 재산 소유를 군주제로 위장하는 것이었다. 마치 군주제가 자신을 교회로 위장한 것과 똑같았다. 1789년에 프랑스의 군주제 전통은 여전히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 주위의 모든 유럽 국가들이 왕정이었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왕정을 고수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의 부르주아 계급은 인민과 공통의 지반을 가지고 있었다. 인민의 편견을 인민의 이익에 대항시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여러 나라에서 왕정이 이미 폐지되었으며 러시아 왕정은 1905년에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입었다. 1월 9일 피의 일요일 사건 후 가폰 신부는 짜르 그리고 그의 “뱀과 같은 자손들”을 저주했다. 1905년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공개적으로 공화제를 위해 투쟁했다. 왕정은 오랫동안 농민의 왕당파적 정서에 의존했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의 군주제 유지 사상을 농민의 왕당파적 정서로 위장했다. 그런데 이 정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나중에 코르닐로프를 필두로 등장한 반혁명 군부쿠데타는 비록 위선적이지만 그만큼 더 강력하게 짜르 권력을 부정했다. 인민 가운데에 왕당파의 뿌리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1905년 혁명은 왕정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가한 반면 또 한편으로 “선진” 부르주아 계급의 불안한 공화국 경향도 영원히 침몰시켰다. 서로 충돌한 이 두 과정은 서로를 보완했다. 2월 혁명의 첫 순간에 자신이 침몰하고 있다고 느낀 부르주아 계급은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했다. 이 계급에게 군주제가 필요했던 것은 자신과 인민이 군주제에 대해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왕관을 쓴 허깨비 이외에 인민의 신념에 대항시킬 것이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교육받은” 계급들은 합리적 국가를 선언하는 세력이 아니라 봉건제도를 방어하는 세력으로 혁명의 각축장에 들어섰다. 인민이나 자기 계급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자 이들은 자기 위에 군림하는 군주제를 버팀대로 삼았다. 아르키메데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받침대를 제공한다면 막대기를 가지고 지구를 움직이겠다. 밀류코프는 지주에 대한 토지몰수를 막기 위해 받침대를 찾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느꼈다: 자유주의자들의 승인을 구하는 데에 급급한 길들여진 민주주의자들보다 굳은살이 박힌 러시아의 장군들 그리고 정교회의 위계질서가 나에게 훨씬 더 가깝다. 혁명을 붕괴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재치 있게 혁명을 속이기로 확고히 결심했다. 그는 많은 것을 허용할 용의가 있었다: 병사들의 시민적 자유, 민주적 자치도시, 제헌의회. 그러나 단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 그들이 군주제라는 아르키메데스의 받침대를 그에게 주어야만 한다. 장군들, 누더기를 기운 관료집단, 교회의 수장들, 재산 소유주들 그리고 혁명에 불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왕정이 서서히 수립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군주제의 상징”을 시작으로 삼은 후 대중이 혁명에 싫증을 내는 순간 왕당파의 재갈로 대중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는 시간을 벌기만을 원했다. 입헌민주당의 다른 지도자 나보코프는 미하일 대공이 왕위을 받아들였다면 아주 유리한 고지가 점령되었을 것이라고 나중에 설명했다: “전쟁 동안에나마 제헌의회 소집이라는 치명적인 의제는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을 명심해야 한다. 2월과 10월 사이에 제헌의회 소집 날짜는 대단한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리고 이 기간에 입헌민주당은 제헌의회 소집을 지연시키고자 했다. 다만 겉으로는 자신의 의도를 단호히 부인했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제헌의회 소집 연기를 위한 정책을 끈질기고 완고하게 밀고 나갔다. 슬프게도 이들은 이 정책의 동맹세력을 찾을 수 없었다. 의지할 것은 자기들뿐이었다. 왕정이라는 위장술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하일 대공이 왕정 유지 기도에 동참하지 않자 밀류코프는 지푸라기 하나도 잡을 수 없는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                                                   

 

 

제 10장 새로운 권력

뒤늦게 역사 무대에 등장한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은 근로 인민과 단절되어 이들보다 외국 금융자본과 훨씬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승리한 혁명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따라서 혁명의 결과 성립한 권력을 차지할 정당성을 자기 이름으로는 조금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정당성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혁명은 기존의 상속권 뿐 아니라 새로운 권리 주장에 대해서도 철저히 따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임시위원회 의장 로지안코는 대중에게 이 정당성을 강변할 처지가 전혀 아니었는데도 대중 봉기 며칠만에 벌써 혁명을 성취한 나라의 우두머리가 되어 대중 앞에 등장했다.

알렉산드로 2세의 시종, 기병 근위대 장교, 자기 고장 귀족들의 우두머리, 니콜라이 2세의 시종장 등을 지낸 그는 골수 왕당파, 부유한 지주, 농업 관료, 10월당(Octobrist Party) 당원, 의회(듀마) 의원이었다. 그리고 지배파벌에 의해 “청년터키당원”으로 낙인 찍혀 미운 살이 배긴 구츠코프가 의회 의장직을 사임하자 그의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로지안코 시종장을 통해 의회는 좀더 쉽게 짜르의 환심을 얻을 수 있으리라 희망했다. 사실 로지안코는 자기 역할을 해냈다. 그는 왕정에 대한 충성심이 모두에게 충만하다는 점을 짜르에게 확신시켰다. 그리고 왕위 계승자에게 알현할 명예를 구걸한 후 그에게 “러시아에서 체구가 가장 크고 뚱뚱한 인물”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권모술수에 가득한 온갖 광대 짓에도 불구하고 짜르가 헌법을 허용하게 만드는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황후는 자신의 편지에 로지안코를 불한당이라고 규정했다. 전쟁 중에 그는 당연히 짜르를 상당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개인적인 보고를 할 때 짜르를 곤경에 몰아넣기도 했을 뿐 아니라 지루한 권고, 애국 충정에 어린 비판, 비관적인 예언 등으로 그의 귀를 따갑게 한 적도 있었다. 라스푸틴은 로지안코를 적으로 간주했다. 조정의 패거리들과 가까웠던 쿠를로프는 로지안코의 “명백한 개인적 한계와 결합된 거만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위테는 생색을 내듯이 그에 대해 좋게 말했다: “어리석기보다는 분별력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가장 중요한 재능은 그의 지성이 아니라 목소리에 있다 --- 그는 빼어난 저음을 지니고 있다.” 맨 처음 로지안코는 소방호스로 혁명의 불을 끄려했다. 골리친 백작의 정부가 도망하자 눈물을 짰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이 그에게 정부를 이끌 것을 제의하자 처음에는 공포에 질려 사양했으나 나중에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만 이것도 짜르의 충성스런 신하로서 군주의 잃어버린 개인 재산을 될 수 있으면 빨리 회복시키기 위해서 뿐이었다. 물론 이 기회가 결코 오지 않은 것은 로지안코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의 도움으로 반란군 앞에서 천둥 같은 자신의 저음을 발휘할 큰 기회가 그에게 제공되었다. 이미 2월 27일 근위대 대위 출신인 로지안코는 타우리데궁에 도착한 기병 연대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 전사들이여 나의 충고를 듣거라. 나는 노인이므로 여러분들을 속이지 않는다. 여러분 장교들의 지시에 따라라. 그들은 여러분들에게 나쁜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의회와 완전히 합의한 내용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성스러운 러시아 만세!” 이것은 근위대 장교들에게는 불쾌하지 않은 혁명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런 혁명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고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지안코는 병사들과 노동자들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체이제와 기타 소비에트 대의원들을 독일의 첩자로 간주했다. 그리고 혁명의 선두에 서있는 동안 몇 분에 한번씩 소비에트가 자기를 체포하지 않을까 계속 두리번거렸다.                   

로지안코는 약간 우스꽝스럽기는 해도 우연한 현상은 결코 아니었다. 빼어난 저음을 가진 이 시종장은 러시아의 두 지배계급인 지주와 부르주아 계급 그리고 이들을 추종하는 진보적 사제 집단이 하나로 결합된 인물이었다. 그는 아주 독실한 신자였으며 찬송가를 부르는 데에는 전문가였다. 그리고 자유 부르주아 계급은 그리스정교회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든 교회와의 연합이 왕정과의 연합만큼 법과 질서 유지에 똑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음모자, 반란군, 폭군 살해자 등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존경스러운 왕당파 로지안코는 당시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임시위원회의 다른 인물들도 그와 다를 바 없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타우리데궁에 모습을 한번도 나타내지 않았다. 상황이 충분히 안정되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들 가운데 아주 지혜로운 자들은 혁명의 불길 주위를 발끝으로 조용히 걸어다녔다. 연기에 목이 맨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혁명의 불길이 타 타서 가라앉으면 뭔가를 시도해 보아야지. 권력 접수에 동의하면서도 임시위원회는 내각을 금방 구성하지는 않았다. 밀류코프의 말대로 “정부 구성의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시위원회는 주요 정부 부처를 책임질 장관직에 의원들을 임명하는 것으로 활동을 제한했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후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내무장관에 카롤로프를 임명했다. 그는 평범한 인물이었으나 다른 인물들에 비해 그나마 용기가 좀더 있었기 때문에 이 직책에 임명되었다. 3월 1일 그는 공개경찰, 비밀경찰, 정치경찰에 속한 모든 경찰 간부들에 대한 체포를 명령했다. 그러나 이 사나운 혁명적 몸짓은 전혀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경찰관들은 혁명 대중에 의해 이미 체포되고 있었으며 감옥이 학살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였기 때문이었다. 이 과시하는 듯한 내무장관의 조치를 반동 세력이 자신들의 고난의 첫걸음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시간이 좀 지난 다음이었다.

뻬쩨르부르그 주둔군 사령관에는 엥겔하트 대령이 임명되었다. 그는 기병 근위대 장교 출신으로 경주마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짜르의 지시에 따라 전선에서 군대를 끌고 수도를 평정하기 위해 도착한 “독재자” 이바노프를 엥겔하트는 체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참모장으로 반동 장교를 앉혔다. 이것은 모두 친구들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법무장관는 모스크바 자유주의 법조계의 스타 마클라코프가 임명되었다. 웅변 능력이 있으나 속이 텅 빈 그는 반동 관료들에게 자신이 혁명 덕분에 장관직에 임명된 것이 아님을 맨 먼저 주지시켰다. 그리고 “집무실에 바로 도착한 심부름꾼 소년을 흘끗 보며” 그는 프랑스어로 이렇게 말했다: “위험은 왼쪽에 있다.” 이 신사 양반들이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위해 노동자와 병사들이 구태여 프랑스어를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임시위원회 수반으로 로지안코가 저음을 발휘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혁명 정부의 수반이 될 후보 자격은 그로부터 저절로 소멸되었다. 왕정과 유산계급 사이의 중재를 맡은 사람은 유산자와 혁명 사이의 중재에는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무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소비에트의 대항 구심으로 의회를 살리려고 그는 끈질기게 애를 썼다. 그리고 자본가-지주의 반혁명 동맹을 결집시키려는 모든 시도의 중심에 그는 언제나 모습을 드러낸다. 독자들은 그의 이름을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듣게 될 것이다. 

3월 1일 임시위원회는 내각 구성을 착수했다. 내각은 의회가 1915년 이후 나라의 신임을 누리는 인물들이라고 짜르에게 천거한 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모두 대지주, 실업가, 의회의 야당 의원, 진보 블록의 지도자 등이었다. 단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면 노동자와 병사들이 성취한 혁명은 혁명정부의 내각 구성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단 하나의 예외는 케렌스키였다. 로지안코와 케렌스키는 공식적으로는 2월 혁명의 정치 스펙트럼 전부를 양극에서 포괄한 것처럼 보였다.   

케렌스키는 어느 정도 혁명 전권 대사의 성격을 띠고 정부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혁명과는 별로 관련이 없었다. 지방 출신 변호사로서 정치 사건들을 변호했다는 것이 그가 혁명과 맺고 있던 관련의 전부였다. 그는 혁명가가 아니었으며 혁명 주위를 어슬렁거렸을 뿐이었다. 법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제 4차 의회에 진입한 케렌스키는 트루도비키(Trudoviks)라는 흐릿한 특징 없는 의회 분파의 수장이 되었다. 이 분파는 자유주의와 인민주의의 잡종 교배로 결실을 맺은 영양가 없는 조직이었다. 그는 이론적 준비나 정치훈련을 거치지 못했다. 사고 능력과 정치적 의지도 없었다. 이것 대신 예민한 감성, 불같은 성질, 지성이나 의지보다 신경을 자극하는 웅변술 등이 있었다. 의회에서 그의 연설은 급진적 장광설이었으며 이것이 발휘될 기회는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케렌스키는 인기는 없었으나 최소한 악명은 누릴 수 있었다. 전쟁 중에 애국주의를 표방했던 그는 자유주의자들과 똑같이 혁명을 나라의 파멸로 간주했다. 혁명이 터진 후 그는 거짓 인기를 누려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자 겨우 혁명을 사실로 인정했다. 그에게 혁명은 당연히 새로운 권력을 의미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이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므로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케렌스키는 이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다른 이유가 없다면 그가 입각할 기회가 철저히 봉쇄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생각하고 있던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혁명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며 부르주아 혁명 역시 그가 생각하고 있던 사회주의에 전혀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 확신은 대단히 옳았다. 의회 임시위원회는 이 급진적 의원을 소비에트에서 떼어 내야겠다고 결정했다. 이것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마클라코프가 고사한 법무장관 자리를 그에게 주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었다. 케렌스키는 의회 의사당 복도에서 친구들을 불러 세우고 이렇게 물어보았다: 장관직을 수락할까 말까? 그러나 그가 장관직을 수락하리라는 것을 그의 친구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당시 케렌스키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던 수하노프는 이후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자기가 설정한 어떤 임무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임무를 인식하지 못한 자들에 대해 무지하게 화를 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수하노프를 비롯한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장관직을 수락할 것을 권고했다: 그가 장관이 되면 우리는 훨씬 안전할 것이다 --- 약아 빠진 자유주의자들이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 지를 말해줄 사람이 우리에게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케렌스키 자신이 열망하고 있는 일을 하도록 은근히 부추기면서도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공식적으로 그의 장관직을 임명을 거부했다. 수하노프가 케렌스키에게 상기시켰듯이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자기 구성원의 입각을 반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것은 “위험성이 다분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는 단순히 이렇게 응답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권력은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차지해야 한다.” 이것은 수하노프 자신이 한 말이다. 그는 단순성과 냉소성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혼합된 인간이었다. 권력 문제를 미스테리로 몰고 가는데 명수였던 이 인물은 이렇게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다: 이미 3월 2일에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권력을 공식적으로 접수할 분위기였다; 사실 2월 27일 저녁 이후 권력은 사실상 이 기관의 것이었다; 다만 노동자와 병사들의 등뒤에서 이들이 모르게 그리고 이들의 의지에 반하여 소비에트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부르주아 계급을 위해 권력을 혁명 대중의 손에서 빼앗아 버렸다. 수하노프의 표현에 의하면 민주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이 거래는 혁명에 대한 범죄행위라는 법적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것은 인민의 주권과 권리에 대항한 진짜 비밀 음모이기 때문이다.              

입각하고 싶어하는 케렌스키의 조급함에 대해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이렇게 속삭였다: 사회주의자들이 모든 권력을 의회 의원들에게 넘긴 상태에서 이것의 작은 부분을 다시 회수하는 것은 창피스럽다. 케렌스키가 의원의 신분으로 입각하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신사 양반들은 모든 상황에서 가장 거짓된 그리고 가장 엉클어진 해결책을 찾아내는 아주 확실한 본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급진적 의원이 아니라 승리한 혁명의 대표로 정부에 참여하고 싶어했다. 자기 소망을 달성하는 길에 버티고 있는 장애물을 우회하기 위해 그는 자기가 속하고 있다고 말했던 당의 승인을 구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이 부의장직을 맡고 있던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지도자들에게 미리 말 한마디 없이 그는 불쑥 소비에트 전체회의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전체회의는 아주 혼란스러운 회의였다. 케렌스키는 특별 발표를 위해 발언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일부는 조리가 없다고 또 일부는 격앙되었다고 평가한 연설을 했다. 물론 두 평가는 서로 모순되지 않았다. 연설에서 그는 대의원들이 개인적으로 비밀을 지켜줄 것을 요구하며 혁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법무장관직을 수락할 용의를 좀더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또한 정치범이 완전히 사면되고 짜르 관료들이 기소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당연히 경험도 없고 지도자도 없는 전체회의에서 커다란 박수갈채를 받기 위해서였다. 슐리아프니코프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이 코메디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케렌스키에게 대단한 분노와 혐오감을 느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를 반대하지 않았다. 권력을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겨준 이상 사회주의자들은 대중 앞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입각 문제는 표결에 붙여지지 않았다. 케렌스키는 박수갈채를 자신의 입각에 대한 승인으로 받아들였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판단은 옳았다. 소비에트는 사회주의자들의 입각에 당연히 호의적이었다. 한 순간도 인정할 수 없는 부르주아 정부가 청산되는 과정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케렌스키는 인민 주권이라는 공식 입장을 업신여기며 3월 2일 법무장관직을 수락했다. 10월당의 쉬들로프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자신의 입각을 매우 기뻐했다. 임시 위원회 집무실에 있는 팔걸이 의자에 누워 그는 러시아에서 사법 정의를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열정적으로 말했다. 나는 그 때를 똑똑히 기억한다.” 몇 달 후에 볼세비키들을 기소하면서 케렌스키는 자신의 말을 증명했다.

너무 단순한 계산과 국제 전례에 의거하여 자유주의자들은 이 어려운 때에 멘세비키 체이제를 노동장관으로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제의를 딱 잘라 거절했다. 그는 케렌스키보다 우둔했으나 좀더 진지한 인간이었다.

입헌민주당의 의심의 여지없는 지도자 밀류코프는 공식적으로 임시정부의 수반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정부의 핵심이었다. 같은 당에서 일했으나 나중에 그와 결별한 나보코프는 자신의 글에 이렇게 적었다: “거의 무한한 지식과 폭넓은 지성으로 밀류코프는 내각의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출중한 인물이었다.” 수하노프 역시 그를 개인적으로는 러시아 자유주의를 붕괴시킨 장본인으로 비난했으나 자신의 글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당시 밀류코프는 부르주아 정치계의 영혼이자 두뇌였다....그가 아니었다면 혁명의 첫 단계에 부르주아 정책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약간 찬양하는 투이기는 해도 이런 평가들은 밀류코프가 어떤 부르주아 정치인 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의 강점과 약점은 단순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풍부하고 우아하게 정치 언어를 사용하여 막다른 골목에 처한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의 운명을 표현했다. 밀류코프가 자유주의를 파멸시켰기 때문에 멘세비키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밀류코프를 파멸시켰다고 말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제국주의적 목적을 위해 신(新)슬라브주의를 드러내었지만 밀류코프는 언제나 부르주아 “서구인”이었다. 그의 정당의 목표는 언제나 러시아에서 유럽 문명의 승리였다. 그러나 그는 전진하면 할수록 서구 민족들이 걸었던 혁명 경로들을 두려워했다. 따라서 그의 “서구주의”는 서구에 대한 무기력한 부러움으로 귀착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새로운 사회를 창조했다. 독일 부르주아 계급이 뒤를 이었으나 오랜 기간 철학이라는 멀건 죽을 먹으며 살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인들은 “사변의 세계”라는 말을 고안했는데 이 말은 영어나 프랑스어에는 없다. 영국과 프랑스가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을 때 독일은 이 세계를 머리 속으로 생각만 했다. 그러나 비록 정치활동에는 빈약했지만 독일 부르주아 계급은 고전철학을 창조했다. 이것은 결코 가벼운 성취가 아니었다. 그런데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은 독일의 경우보다 훨씬 늦게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물론 러시아는 독일어 “사변철학”을 자기 말로 그것도 여러 변종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러시아의 정치적 무기력과 치명적인 철학적 빈곤을 더 명확히 드러낼 뿐이었다. 러시아는 기계 뿐 아니라 사상도 수입했다. 전자에 대해서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두려움이라는 검역선을 둘러쳤다. 밀류코프는 자기 계급의 이 특성을 정치적으로 표현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는 모스크바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였으며 상당한 학구적 저서들의 저자였다. 또한 자유주의 지주들과 좌익 지식인들의 연합체인 입헌민주당의 창립자였다. 따라서 러시아 자유주의 정치인 대다수의 참을 수 없는 특징인 반(半)귀족적 반(半)지적 정치 아마추어 행태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밀류코프는 자기 소임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며 이것만이 그를 다른 부르주아 정치인들과 구별시켰다.

1905년 이전에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의 성향을 당혹스럽게 생각했다. 처음에는 인민주의 색채로 나중에는 맑스주의 색채로 이들은 자기 성향에 보호색을 뒤집어 씌웠다. 상당수의 청년 실업가들을 포함한 부르주아 계급의 광범위한 층은 사회주의에 대해 꽤나 천박하고 부끄럽게 굴종했다. 이 현상은 휘하에 수백만 노동자를 집중시킬 정도로 일찍 등장했으나 인민 전체의 지도세력이 되기에는 너무 늦게 등장한 계급의 자신감 결여에서 비롯되었다. 턱수염을 기른 아버지, 부유한 농민과 상점주인 등은 돈이나 벌 줄 알았지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이 없었다. 이들의 아들들은 혁명 직전의 지적 격동기에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이들은 사회 진출을 준비하면서 천천히 자유주의 깃발을 들었다. 그러나 이미 이 깃발은 선진국에서는 빛이 바랬고 누더기가 되어 반은 색이 지워져 있었다. 당분간 이들은 자기 영혼 일부와 심지어는 수입 일부를 혁명가들에게 헌납했다. 인문, 사회, 과학 분야의 대표들은 특히 더 그랬다. 이들의 상당수는 청년기에 사회주의에 공감했다. 그러나 밀류코프 교수는 이 시기를 전혀 경험하지 않았고 유기적으로 부르주아였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1905년 혁명 당시 밀류코프는 잘 길들여지고 훈련된 사회주의 정당들의 도움으로 혁명 대중을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전적으로 기각하지는 않았다. 위테는 이렇게 말한다: “1905년 10월 입헌 내각을 구성할 때 나는 입헌민주당에게 ‘혁명의 꼬리를 자를 것’을 호소했다. 이들의 대답은 내가 군대 없이 일할 수 없듯이 자기들도 혁명 군대 없이는 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핵심을 말하자면 이 대답에는 속임수가 들어있다: 자기 주가를 높이기 위해 입헌민주당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혁명 대중으로 위테를 겁주었다. 1905년 혁명은 밀류코프에게 이렇게 확신시켰다: 지식인 사회주의 그룹들은 자유주의에 대해 강한 공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의 진짜 동력인 대중은 부르주아 계급에게 자기 무기를 결코 헌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무장을 잘할수록 그만큼 더 위험하다. 밀류코프는 붉은 깃발은 사실 붉은 누더기라고 선언하면서 혁명 대중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은 안도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시작하지 않은 사회주의에 대한 로맨스를 끝냈다. 소위 지식인들이 인민으로부터 고립되었다는 주장은 러시아 언론의 전통적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지식인”이라고 말했을 때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모든 “교육받은 자들” 즉 유산계급을 의미한다. 1905년 혁명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인민으로부터의 고립은 곧 재앙이라고 가르쳤다. 이때 이후 “교육받은” 계급의 이념적 나팔수들은 심판의 날 즉 멸망의 날을 항상 예상해왔다. 정치의 시급함에 구애받지 않는 어느 자유주의 작가이자 철학자는 대중에 대한 이 두려움을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 발작증과 같은 무아경의 힘으로 표현했다: “무엇을 표방하든 인민과 결합할 생각을 하면 안된다 --- 정부의 모든 탄압보다 이것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 감옥과 총칼을 사용하여 인민의 잔인성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유일한 존재인 정부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이런 정치적 감성을 가지고 있는 자유주의자들이 혁명으로 들고 일어선 나라의 인민을 지도할 꿈을 꿀 수 있겠는가? 밀류코프의 모든 정책에는 절망의 도장이 찍혀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는 순간 그의 당은 위기를 대적하기보다는 피할 생각을 하고 있다.

밀류코프의 저술은 무겁고 장황하고 지루하다. 그는 웅변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장식을 부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만약 그의 구두쇠 정책이 위장술을 필요로 하지 않았거나 최소한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아 객관적 위장술을 보유했다면 그의 웅변가 기질은 장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전통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기만술과 이기주의의 정수인 프랑스의 공식 정책은 전통과 수사(修詞)라는 막강한 동맹군을 가지고 있다. 이 둘은 서로를 보완하여 어떤 부르주아 정치인도 감싸 보호한다. 심지어 대소유 계급의 따분한 서기에 불과한 프웽까레(Poincaré)도 이것들의 도움으로 위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영광스러운 선조가 없는 것은 밀류코프의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위치한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이기주의 정책을 시행하도록 그가 강요받은 것도 그의 잘못은 아니다.

사회혁명당의 소콜로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케렌스키에게 공감을 느꼈다. 그러나 처음부터 밀류코프에게는 가식이 없으면서도 기이한 큰 반감을 느꼈다. 이 존경할만한 사회개혁가가 왜 그렇게 인기가 없었는지 전에도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케렌스키에 대한 경탄과 밀류코프에 대한 혐오감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를 속물들이 알았다면 이들은 더 이상 속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보통 자본가들은 밀류코프를 싫어했다. 왜냐하면 그는 러시아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핵심을 너무 가식 없이 따분하게 그리고 환상을 유포하지 않은 채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밀류코프라는 거울을 통해 자본가는 자신이 무미건조하며 이기심 밖에 없으며 더욱이 겁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흔히 그렇듯이 자기의 못난 얼굴은 탓하지 않고 거울을 탓했다.

한편 자유 부르주아 계급의 불쾌한 우거지상을 보고 밀류코프는 조용히 그리고 자신 있게 말했다: “평범한 인간들은 바보야.” 그는 이 말을 전혀 짜증을 내지 않고 담담히 그리고 애무하듯이 표현했다. 마치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들은 지금은 나를 이해 못하지만 신경 쓸 필요 없다; 왜냐하면 나중에는 이해하게 될 것이니까. 그는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며 상황의 논리에 복종하여 자신을 따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이들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실은 그의 생각이 올바름을 입증했다. 2월 혁명 이후 우파를 포함한 모든 부르주아 정당들은 밀류코프를 비방하고 욕하면서도 그를 따라갔다.

그러나 수하노프 같이 사회주의로 자신을 치장하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추종하는 자들에게는 상황이 아주 달랐다. 이들은 평범한 속물이 아니었다. 자기의 소규모 직종에 대해 전문적 능력을 구비한 정치꾼 이었다. 이들은 똑똑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자기들이 원하는 바와 실제 도달한 목표가 너무 차이가 나서 사람들 눈에 금방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오류를 범했으나 개의치 않고 머리를 계속 굴리면서 목표한 바를 밀고 나갔다. 이런 자들을 끌고 가기 위해서는 이들이 진정한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고 속이는 것이 필요했다. 심지어는 이들이 너무 자기 주장이 강하고 명령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비난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면 이들은 기분이 좋아져서 기꺼이 조수의 역할에 만족한다. 밀류코프가 “평범한 인간들은 바보야” 라는 말한 것도 자칭 사회주의자들과 대화를 하면서였다. 이 말은 이들을 은근하게 추켜 올려주었다: “나와 당신들만이 똑똑한 인간들이다.” 사실 바로 이 순간에 밀류코프는 이 민주주의자들이 낚시 바늘을 물도록 미끼를 던진 것이었다. 이 낚시 바늘에 이들은 곧 줄줄이 매달려 그에게 길을 내주었다.

밀류코프는 개인적 인기가 없어서 정부의 우두머리가 될 수 없었다. 대신 의회에서 전문적으로 맡았던 분야를 그대로 활용하여 외무장관이 되었다.

혁명 정부의 전쟁장관은 모스크바의 대기업가 구츠코프였다. 젊었을 때 모험주의 성향의 자유주의자였던 그는 1905년 혁명의 패배기에 스톨리핀 휘하에서 대자본가들의 신뢰를 누리는 대변인이 되었다. 입헌민주당이 장악했던 제 1차 및 제 2차 의회가 해산되면서 1907년 6월 3일 내각이 바뀌었다. 새 내각의 선거법 개정으로 구츠코프의 10월당은 정치적 이득을 보았다. 이 정당은 이후 두 차례 의회의 다수당이 되었으며 1917년 2월 혁명까지 계속 이 지위를 유지했다. 테러범에 의해 암살된 스톨리핀의 기념비 제막식이 1911년 키에프에서 있었다. 이때 구츠코프는 화환을 비석에 놓으면서 땅을 보고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것은 자기 계급의 이름으로 하는 제스처였다. 의회에서 그는 러시아가 “군사적 위력”을 발휘하는 문제에 주력하면서 밀류코프와 보조를 맞추어 전쟁을 준비했다. 군산(軍産)중앙위원회 의장의 지위로 구츠코프는 기업가들을 짜르에 대한 애국적 반대파로 규합했다. 그러나 로지안코를 비롯한 진보블럭의 지도자들이 군수물자 계약을 통해 전쟁 특수의 몫을 챙기는 것은 허용했다. 혁명 추천장에는 무혈혁명의 기도에 대한 전설 비슷한 것이 그의 이름을 빛내 주었다. 더욱이 전직 경찰청장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는 짜르에 대한 개인적인 대화에서 최고 수준의 모욕적 수식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아마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츠코프는 예외가 아니었다. 경건한 황후도 구츠코프를 증오해서 편지에다 그에 대한 거친 욕을 마구 해대었다. 그리고 그가 “높은 나무 가지에” 매달려 교수형에 처해지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황후는 이 똑같은 높은 지위에 다른 사람들도 매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1905년 혁명을 압살한 스톨리핀을 기리며 땅에 머리를 굽힌 이 작자는 1917년 2월 혁명과 함께 전쟁장관이 되었다.

농업장관에는 입헌민주당의 싱가레프가 임명되었다. 그는 이후 의회 의원이 되었는데 지방에서 병을 고치는 의사였다. 당내에서 그와 가까웠던 인물들은 그를 정직한 범인이라고 평했다. 나보코프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전국 차원의 정치계보다는 소도시나 시골에나 어울리는 지방의 지식인”이었다. 청년기의 끝없는 급진주의는 그를 떠난 지 오래되었다. 요즘 그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이것이었다: 정치인에 합당한 성숙성을 유산계급들에게 보여야 한다. 과거 입헌민주당의 강령은 “정당한 배상을 통한 토지의 몰수”를 주장했었다. 그러나 지주들은 어느 누구도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전쟁으로 인플레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은 더욱 그랬다. 그래서 싱가레프는 농업문제에 대한 결정을 미루는 것을 그의 주요 임무로 간주했다. 그리고 입헌민주당이 소집을 원치 않고 있는 제헌의회 신기루로 농민들을 혹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토지 문제와 전쟁 문제 때문에 2월 혁명은 파멸할 운명이었다. 싱가레프는 이 운명을 자기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실현시켰다.

재무장관직은 테레쉬첸코라는 젊은이에게 주어졌다. 타우리데궁에서 사람들은 모두 놀라 물었다: “어디서 그 친구를 데리고 왔소?” 정통한 소식통에 의하면 그는 설탕공장, 장원, 삼림 등 금화 8천만 루블에 상당하는 재산을 보유한 부자였다. 그는 키에프의 군산위원회 의장으로 프랑스어 발음이 좋고 무엇보다도 발레 애호가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니콜라이 2세를 타도했을 그 위대한 음모에 그가 거의 참가할 뻔했으며 구츠코프가 총애하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음모가 성사되는 것을 막은 혁명이야말로 테레쉬첸코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러시아 수도의 거리에서 혁명이 진행되고 있던 2월의 5일 동안 여러 번 우리 앞에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간 귀족 출신의 자유주의자가 있었다. 짜르 치하에서 장관을 지낸 부친을 둔 나보코프는 자족적인 올바름과 무미건조한 이기심의 상징에 가까웠다. 봉기의 결정적인 며칠간 그는 법원 안에서 또는 자기 집안에서 “따분하고 걱정되는 마음으로” 소일했다. 그는 이제 임시정부의 총무청장 그리고 실제로는 무임소 장관이 되었다. 10월 혁명 이후 베를린에 망명한 그는 백군의 유탄에 맞아 살해되었다. 그러나 그는 임시정부 시절에 대한 꽤 흥미로운 회고록을 남겼다. 이것이 그나마 그가 이룩한 공적이라고 인정하자.

그런데 우리는 수상을 언급하는 것을 까먹었다. 임시정부의 수상은 짧은 임기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도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거의 멀어져 있었다. 3월 2일 타우리데궁의 회의에서 새로 수립된 정부를 추천하면서 밀류코프는 르보프공(公)을 “짜르 정권에 의해 그렇게도 핍박을 받은 러시아 사회의식의 화신”으로 묘사했다. 나중에 자신의 혁명사에서 밀류코프는 르보프공을 “임시위원회 다수에게 개인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정부의 수반이라고 묘사한다. 역사가 밀류코프는 이 저술을 통해 수상을 선택한 정치인 밀류코프의 책임을 면제시키려 애쓰고 있다. 사실 르보프공은 오랫동안 입헌민주당의 우파였다. 제 1차 의회가 해산된 후 비보르그 지구 의원들이 잘 알려진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이들은 분노한 자유주의자들의 예식으로 인민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납세를 거부합시다!” 그런데 이 회의에 참석했던 르보프공은 이들이 작성한 호소문에 서명은 하지 않았다. 나보코프에 의하면 비보르그 지구에 도착한 즉시 르보프공은 병이 났다. 그의 병은 “감정 상태 때문이었다.” 그는 혁명적 흥분에는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건강을 가졌음에 틀림없었다. 마음이 넓은 것처럼 보이는 정치적 무관심 때문에 이 온건한 인물은 자기 조직 내에서 많은 수의 좌익 지식인, 혁명가 출신 인사, 사회주의적 애국자, 징용회피자 등을 전부 받아들였다. 이들은 관료들처럼 서로 화합해서 일은 잘했으나 뇌물은 받지 않았다. 더욱이 이들은 르보프공이 인기가 있는 인물인 것처럼 만들었다. 보통 자본가들에게 공작에다 부자에다 자유주의자라면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짜르도 르보프공을 수상으로 점찍어 놓았다. 한마디로 2월 혁명정부의 수상 자리는 빛나는 자리이면서도 대단히 속이 빈 자리였다. 로지안코가 이 자리를 차지했더라면 다른 것은 고사하고 이 자리를 좀더 화려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러시아 국가의 전설적인 역사는 [연대기]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슬라브 부족들의 대표단이 스칸디나비아의 군주들에게 가서 이렇게 요청했다: “우리 땅에 와서 우리의 군주가 되어 주십시오.” 사회민주주의의 불쌍한 대표들은 이 역사적 전설을 사실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이 일은 9세기가 아니라 20세기에 일어났다. 그리고 이런 차이가 있었다: 이들은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의 군주들이 아니라 자기 나라 공작들에게 간청했다. 노동자와 병사들의 봉기가 승리하여 혁명정부가 등장했으나 이 정부를 채운 자들은 아주 부유한 지주들과 기업인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은 정치 아마추어들이었다. 이들에게는 강령이 없었으며 더욱이 수상은 약간의 자극도 아주 싫어하는 공작이 맡았다.

한편 연합국 대사관, 부르주아 및 관료들의 살롱, 광범위한 중부르주아 그리고 소부르주아 일부는 새 정부의 구성에 만족해했다. 르보프공, 10월당의 구츠코프, 입헌민주당의 밀류코프 등 이름만 들어도 안심이 되었다. 케렌스키의 입각은 연합국 대표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그를 별로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좀더 시야가 넓은 자들은 왜 그가 끼었는지 이해했다. 러시아어의 은유법을 아주 좋아했던 프랑스 대사 빨레올로그는 이렇게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어차피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났으니 어쩔 수 없다; 밀류코프 같은 믿을만한 자들이 있으면 성깔 있는 놈 한둘은 차라리 도움이 될 뿐이다.

그러나 노동자와 병사 대오에서는 정부의 구성이 즉시 적대감 또는 기껏해야 말문이 막힐 정도의 황당함을 가져왔다. 밀류코프나 구츠코프라는 이름은 공장이나 병영에서 환영의 목소리를 단 하나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에 대한 증언은 수없이 많다. 권력이 짜르로부터 공작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접한 병사들의 부루퉁한 경계심을 므티슬라비스키 장교가 보고하고 있다: 겨우 이것 때문에 우리가 피를 흘렸나? 케렌스키의 내부 그룹에 속한 스탄케비치는 자신이 지휘하는 공병대대의 모든 중대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최상의 선택이라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열광하여 새 정부를 선전하며 돌아다녔다. “그러나 병사들은 냉담했다.” 그가 케렌스키의 이름을 말하자 그제서야 병사들은 “진정한 만족감으로 얼굴이 환해졌다.” 이때쯤 수도의 부르주아 여론은 케렌스키를 혁명의 중심 영웅으로 이미 만들어 놓은 뒤였다. 노동자들보다는 병사들이 케렌스키를 부르주아 정부의 대항 중심으로 보고 싶어했다. 그리고 왜 그만 정부에 참여했는지 궁금해할 뿐이었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대항 중심이 아니라 얼굴 마담에 불과했다. 그는 밀류코프와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마그네슘 섬광과 같이 번쩍 하는 인상을 풍기는 것이 밀류코프와 달랐을 뿐이었다.

새 정권이 들어선 후 나라의 진짜 정치지형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왕당파 반동들은 숨어서 상황을 보고 있었다. 혁명의 물결이 가라앉는 첫 순간에 온갖 종류와 성향의 유산계급들은 입헌민주당으로 모여들었다. 이 정당은 공개 정치의 무대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지 않는 유일한 정당으로 갑자기 부상했으며 동시에 극우 정당이 되었다.

대중은 떼를 지어 사회주의 정당들에게 몰려들었다. 이들은 이 정당들을 소비에트와 동일시했다. 후방의 대규모 주둔군 병사들과 노동자들 뿐 아니라 잡다한 도시의 소시민들 즉 기술공, 잡상인, 하급관료, 마차꾼, 수위, 모든 종류의 하인 등이 임시정부와 그 기구들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고 더 친근하고 더 가까이 하기 쉬운 권위 있는 정치집단을 찾고 있었다. 농민 대표들이 갈수록 타우리데궁에 모습을 나타냈다. 소비에트가 마치 혁명의 개선문인양 대중은 소비에트로 몰려들었다. 소비에트의 경계를 넘어선 모든 것은 혁명으로부터 멀어져서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현실이 그러했다. 소비에트의 경계 밖에는 유산계급들의 세계가 존재했다. 이곳에서는 모든 정치적 색깔들이 회색이 도는 분홍색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로 대중 전부가 소비에트를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혁명을 통해 정치적으로 깨어난 모든 근로 대중이 한꺼번에 소비에트를 찾지도 않았다. 혁명이 자기를 돌볼 것이라고 모든 피억압 대중이 즉시 믿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다수의 의식 속에 막연한 희망만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의 열성 분자들은 모두 소비에트로 모여들었다. 혁명기에는 활동이 모든 것을 제압한다. 더욱이 대중의 활동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비에트의 기반은 계속 확대되고 있었다. 이것만이 혁명의 진정한 기반이었다.

타우리데궁에는 의회와 소비에트의 두 조직이 존재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처음에는 좁은 비서실들에 몰려있었다. 이곳을 통해 인간의 물결이 멈추지 않고 흘러 들어왔다. 의회 의원들은 호화스러운 집무실에서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두 조직을 갈라놓은 장벽은 곧 혁명의 홍수로 무너져 내렸다.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우유부단했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저항할 수 없이 퍼져나갔다. 한편 의회는 궁전의 뒤뜰로 밀려났다. 새로운 계급 역관계는 모든 곳에 길을 내고 있었다.

타우리데궁의 의원나리들, 연대 장교들, 참모부 지휘관들, 공장 철도 전신전화국의 책임자들과 관리자들, 지주들, 장원의 관리인들은 모두 혁명의 첫 며칠간 대중의 의심스럽고 지치지 않는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중의 눈에 소비에트는 자신들을 억압해왔던 모든 자들에 대한 불신의 조직된 표현이었다. 식자공들은 자신들이 식자를 했던 논문의 글들을 시기심을 가지고 살폈다. 철도노동자들은 군사용 기차들을 근심스럽고 감시하는 눈초리로 주시했다. 전신전화국의 노동자들은 전보의 내용들을 다시 읽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장교가 움직일 때마다 의심스럽게 눈을 주었다. 노동자들은 흑백인조에 소속된 관리자들을 공장에서 쫓아내고 자유주의 관리자를 불러 감시했다. 의회는 혁명 첫 시간부터 그리고 임시정부는 출범 첫날부터 상층 계급의 불만과 반대의견, “지나친 조치들”에 대한 항의, 걱정스러운 논평, 우울한 예감 등의 물살이 계속 밀려드는 저수지가 되었다.

구(舊)정부의 해골이 퀭한 눈을 한 관공서 건물들을 소심하게 바라보며 사회주의를 자칭하는 소부르주아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부르주아 계급이 없이는 국가기구를 우리 혼자 운영할 수는 없다.” 이 문제는 혁명이 목을 잘라버린 체제에 일종의 자유주의 머리를 다시 올려놓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새 정부의 장관들은 짜르 체제가 소유했던 집무실에 들어가 타자기, 전화, 심부름 꾼, 속기사, 서기 등의 기구를 소유하였다. 그러나 이 기구는 전혀 작동이 되지 않고 있음을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곧이어 케렌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전역에 정부의 권력은 물론 문자 그대로 경찰관 하나 남아있지 않은 무정부 상태 3일째에 임시정부는 권력을 잡았다.” 수백만 인민의 선두에 선 노동자 병사 대의원들의 소비에트들은 구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는 아무 쓸모 없었다. 물론 이것은 무정부 상태의 한 요소에 불과했다. 케렌스키는 경찰관이 사라졌다는 말을 하면서 나라의 권력 공백 상태를 요약했다. 장관 가운데 가장 좌익적인 이 인물의 신앙고백을 통해 우리는 정부 정책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

주 정부 총독 자리는 르보프공의 명령에 따라 주 의회 의장이 대신했다. 물론 이들은 전임자들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이들은 총독조차 자코벵파라고 간주한 중세 지주들이었다. 군의 우두머리도 역시 군 의회 의장이 맡았다. “인민위원(commissar)”이란 새 이름을 가졌지만 인민은 옛날의 적들이 자리를 그대로 차지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밀튼이 장로교파의 소심한 종교개혁에 대해 얘기한 것과 유사하다: “새로운 장로들은 옛날 사제의 확대판에 불과하다.” 주와 지구 정부의 인민위원들은 타자기, 통신 수단, 총독과 경찰청장의 비서 등을 접수했으나 곧 자신들이 진짜 권력을 상속받지 못했음을 알았다. 주와 군 단위의 진짜 생활은 소비에트를 주위로 몰려 있었다. 이렇게 이중권력 체제가 위에서 아래로 지배했다. 그러나 중앙과 달리 지방의 주에서는 소비에트 지도자인 사회혁명당원과 멘세비키들이 약간 단순했으며 따라서 상황이 이들에게 강요한 권력을 중앙처럼 전부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 결과 주 인민위원의 활동은 주로 직무 수행이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내용의 불평을 문서로 제출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 내각으로 구성된 정부가 수립된 지 이틀이 지났으나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이 권력을 획득하기는커녕 상실했다고 느꼈다. 혁명 이전에 라스푸틴 일당의 황당한 전횡이 있었지만 이들이 휘두른 진정한 권력은 한계가 있었다. 정부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영향력이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가 전쟁에 참여한 것 자체가 왕정보다는 부르주아 계급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주요한 요인이 있었다. 짜르는 부르주아 계급에게 공장, 토지, 은행, 주택, 언론 등의 소유를 보장해주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서 짜르 정부는 부르주아 계급의 정부였다. 2월 혁명은 상황을 양극단의 방향으로 변화시켰다. 국가권력의 외적 소지품들은 엄숙하게 부르주아 계급의 손으로 넘어갔으나 동시에 이들이 혁명 이전에 누렸던 실제 지배력의 몫은 줄어들었다. 르보프공이 의장이었던 지방 의회의 종업원들과 구츠코프가 의장으로 있었던 군산위원회의 종업원들은 혁명이 진행되면서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의 이름으로 농촌, 전선, 도시, 소읍 등을 지배했다. 이들은 로브포와 구츠코프를 내각에 임명시켰으며 이들이 일할 조건을 규정했다. 이제 내각은 이들이 고용한 관리인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에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부르주아 정부를 수립시켰으면서도 성경의 이야기처럼 신이 자신의 창조 결과들을 좋다고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급히 서둘러 자신과 자신의 창조물 사이에 거리를 더 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했다: 새 정부는 민주주의 혁명에 진정 복무할 경우에만 소비에트의 지지를 받을 것이다. 물론 임시정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공식 민주주의 세력의 지지 없이는 자신은 한시간도 버틸 수 없다. 그러나 이 지지는 좋은 행실에 대한 보상으로만 약속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좋은 행실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민주주의 세력은 좋은 행실을 보일 생각을 바로 전에 거부하고 임시정부에게 이 소임을 떠맡겼다. 문제는 복잡했다. 임시정부는 어느 한계 내에서 반쪽 짜리 권력을 행사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항상 조언을 해줄 수도 없었다. 대중의 불만을 표현하는 저항이 소비에트 대오 내부의 어디서 터져 나올지 추측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사회주의자들이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가장했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때가 성숙하지 않은 요구들을 제출하여 대중을 분노케 하고 안 그래도 어려운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경우에만”이라는 애매한 표현은 10월 혁명이 승리하기 전까지 계속 등장했다. 이 표현은 2월 혁명으로 탄생한 잡종 정권에 내재된 거짓을 법적으로 상징하는 말이었다.

임시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특별위원회를 선출했다. 예절을 차리기는 했으나 우스꽝스럽게도 이 위원회의 명칭은 “접촉위원회”였다. 이렇게 해서 혁명 권력은 상호 설득의 원칙에 기초해 수립되었다. 신비주의 작가 메레주코프스키는 이러한 정권의 전례를 구약성서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 왕들은 예언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예언자들처럼 성서의 예언자들은 최소한 계시를 직접 하늘로부터 받았다. 따라서 왕들은 이 계시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단일 주권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예언자들은 전혀 딴판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제한된 지식으로 예언할 뿐이었다. 더욱이 자유주의 장관들은 소비에트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체이제, 스코벨레프, 수하노프 등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정부가 양보를 하라고 수다스럽게 제안을 늘어놓았다. 장관들은 이것을 거부했다. 그러면 이들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다시 돌아가 정부 장관들의 권위로 소비에트의 생각을 바꾸어 놓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다시 장관들을 만나 다시 처음부터 설득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복잡한 과정은 이렇다할 결실을 전혀 맺지 못했다.

접촉위원회는 불평으로 가득했다. 소비에트의 묵인 하에 군대가 소요를 일으키자 특히 구츠코프는 울음을 터뜨렸다. 가끔 이 혁명정부의 전쟁장관은 “말 그대로... 눈물을 쏟거나 최소한 가식 없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는 아주 올바르게 이렇게 생각했다: 신의 계시로 왕이 된 자(장관)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예언자(소비에트)의 임무이다.

3월 9일 참모총장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전쟁장관에게 전보를 보냈다: “소비에트의 말을 그대로 들어주면 독일이 곧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구츠코프는 눈물을 흘리며 이 전보에 응답했다: “슬프게도 정부에게는 진짜 권력이 없다; 군대, 철도, 우편, 전신 등은 소비에트의 수중에 있다. 임시정부는 소비에트가 허용할 때까지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단순한 현실이다.”

몇 주일이 이렇게 지나갔으나 개선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4월 초 의회 시찰단이 소비에트 대표들과 같이 전선으로 향했다. 이때 임시정부는 이빨을 갈면서 의원들에게 소비에트 대표들과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 시찰 여행 내내 의원들은 자신들이 호송 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안 그래도 이들은 상황을 다 알고 있었다: 호송을 받지 않으면 병사들에게 접근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기차에서 좌석도 구할 수 없다. 만시레프공의 회고록에 실린 따분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구츠코프가 참모들과 나눈 편지들과 함께 2월 정세의 핵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당시의 상황을 어느 반동이 재치 있게 이렇게 표현했다: “구 정부는 감옥에 있고 신 정부는 가택연금 중이다.”

그러나 소비에트 지도자들의 애매한 지지 이외에 임시정부는 어떠한 지지도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인가? 유산계급들은 어디로 갔는가? 이것은 대단히 근본적인 질문이다. 과거 짜르 왕정과 연합했던 유산계급들은 혁명 직후 서둘러 새로운 축으로 결집했다. 전국 자본가들의 연합체인 직종산업위원회는 3월 2일 의회 임시위원회의 임시정부 수립을 환영했다. 그리고 자신이 의회 위원회의 “뜻을 전적으로 따를 것”이라고 선언했다.

지방의 각급 의회들도 같은 노선을 채택했다. 왕정의 주축이었던 귀족연합회도 3월 10일 웅변적인 비겁함이 담긴 언어로 러시아 인민 전체가 “러시아의 유일한 합법적 권력인 임시정부 주위로 단합할 것”을 촉구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유산계급들의 모든 단체들과 기관들은 이중권력을 비난하고 사회 혼란의 책임을 소비에트에 전가하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조심스러웠으나 시간이 갈수록 대담하게 소비에트를 비난했다. 고용주들에 이어 서기들, 전문직업 단체들, 공무원들까지 이 비난에 가세했다. 참모부가 조작한 비난 전보, 호소, 결의문 등이 군대에서 나왔다. 자유주의 언론은 “단일권력 수립”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후 몇 개월 동안 이 움직임은 소비에트의 머리에 불어닥친 불 폭풍이 되었다. 이 모든 저항의 움직임은 대단히 인상적인 것처럼 보였다. 엄청난 수의 기관, 저명한 이름, 결의문, 언론의 기사, 단호한 어조 등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압력에 약한 머리들에게 당연히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유산계급들의 이 위협적인 힘의 과시 뒤에는 아무런 실체가 없었다. 어느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자가 이렇게 질문했다: 재산 소유권의 힘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재산 소유권은 인간 사이의 관계일 뿐이다. 법과 국가라는 강제력의 체계를 통해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지지를 받을 경우는 이것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현재 정세의 핵심은 구 국가의 갑작스러운 붕괴 그리고 이에 따른 재산 소유권 제도 전체에 대한 대중의 의구심이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공장소유주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사장들은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일 뿐이었다. 지방의 지주들은 도시의 사장들보다 더 불안했다. 이들은 뚱한 표정에 복수심을 가득 담은 농민들과 직접 얼굴을 마주했다. 또한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존재를 잠시 인정했는데 그나마 이것도 날아가 버렸다. 재산 소유주들은 자신의 재산을 사용하거나 보호할 가능성이 박탈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재산 소유주가 아니었다. 따라서 자신을 보호해야하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정부를 조금도 지지할 수 없는 겁에 질린 속물들에 불과했다. 이들은 곧 정부의 허약함에 욕을 해대었으나 이것은 자신들의 운명에 대한 욕일 뿐이었다.

당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와 임시정부의 공동활동의 목적은 이것인 듯했다: 혁명기에 국가운영의 기예는 수다 떨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데에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것을 의식적 계획으로 채택한 듯했다. 연합국에 대한 충성 서약 이외에 모든 조치들은 연기되어야 한다고 이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밀류코프는 동료들에게 비밀조약들의 내용을 알려주었다. 케렌스키는 이것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오직 그리스정교회의 주교장만이 분노의 폭풍을 일으키며 이 조약들을 “약탈과 사기”라고 불렀다. 그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언행을 잘했는데 이름은 임시정부 수상과 같은 르보프였다. 그의 반응에 대해 밀류코프는 생색을 내듯 미소를 지었다(“평범한 인간들은 바보야”). 그리고 집무를 계속하자고 조용히 제안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제헌의회가 가장 가까운 시일 내에 소집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정확한 일자는 의도적으로 명시되지 않았다. 정부 형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나온 것이 없었다. 이들은 여전히 왕정의 낙원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정부 선언의 진짜 내용은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할 것이며 “연합국들과의 합의들을 흔들리지 않고 수행하겠다”는 약속에 있었다. 인민의 생존과 관련된 가장 위협적인 문제들에 관한 한 혁명은 선언을 하기 위해서만 성취된 것 같았다: 모든 것은 과거와 똑같다. 민주주의자들은 연합국들이 임시정부를 인정한 것에 거의 신비로움에 가까운 큰 의미를 부여했다. 소규모 상인의 신용을 은행이 인정할 때까지 그는 별 볼일 없는 존재이다. 이와 같이 연합국들이 임시정부를 인정했으니 이제 임시정부는 진정한 실체가 되었다는 투였다. 그러자 집행위원회도 침묵을 지키며 3월 6일 제국주의 국가들의 선언을 인정했다.

이로부터 일년이 지난 후 수하노프는 이렇게 슬퍼한다: “민주주의의 공식 기구 어느 하나도 임시정부의 선언에 공식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 유럽국가들은 우리의 혁명을 탄생 때부터 우습게 보았다.”

마침내 3월 8일 임시정부의 실험실에서 사면 포고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미 감옥의 문은 전국에서 혁명 인민에 의해 열리고 난 후였다. 그리고 정치 망명자들은 집회, 만세, 군대의 연설, 화환 등과 함께 꾸준히 귀국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면 포고령은 정부 청사에서 늦게 울려 퍼진 메아리 같았다. 그리고 12일에는 사형제도의 철폐가 선언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4개월 후 사형제도는 다시 군대에서 부활했다. 케렌스키는 정의를 유례없이 높은 수준으로 올려놓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열정을 발휘하는 순간에 노동자 병사 대표들을 법정의 일원으로 도입하는 집행위원회의 결의문을 실천에 옮겼다. 이 조치는 혁명의 박동이 느껴지는 유일한 가시적 현상이었다. 그리고 이 조치는 사법부 내시들의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이상 나아가지는 못했다. 케렌스키 산하 법무부의 중요한 관료이자 “사회주의자”인 데미아노프 변호사는 구 정부의 관료들을 그대로 유임시키는 원칙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혁명정부의 정책은 어느 누구도 불필요하게 자극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임시정부 전체의 지도지침이었다. 유산계급들과 심지어는 짜르의 관료들을 화나게 만드는 것을 임시정부는 가장 두려워했다. 짜르 체제의 판사와 검사는 모두 유임되었다. 물론 대중은 열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소비에트의 소관이었다. 대중은 임시정부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로운 바람은 위에서 언급한 흥분 잘하는 르보프 주교장만이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주교회에 앉아있는 “백치들과 악당들”에 대해 공식 보고서를 제출했다. 임시정부 장관들은 그의 톡 쏘는 보고를 약간의 경악감 속에 청취했다. 그러나 주교회는 계속 국가기관으로 그리고 그리스정교회는 계속 국가종교로 남았다. 주교회의 구성원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혁명은 어느 누구하고도 말다툼하면 안된다!  

두 명 내지 세 명의 짜르들을 충실하게 보좌한 하인들로 구성된 국무위원회의 위원들은 계속 존재하거나 최소한 봉급을 계속 타먹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곧 상징적인 의의를 획득했다. 공장과 병영에서 요란한 항의가 일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이에 대해 걱정했다. 국무위원회의 운명과 봉급 문제를 놓고 임시정부는 2번의 회의를 가졌으나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왜 이 존경해야할 분들을 불편하게 하는가? 그리고 이중에는 좋은 친구들이 많지 않은가?

라스푸틴이 임명한 장관들은 여전히 감옥에 있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서둘러 이들에게 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조롱이거나 저승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나 정부는 비록 감옥에 갇혀 있을망정 자기 전임자들을 화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상원의원들은 계속해서 장식이 화려한 의원 복장을 하고 의사당에서 졸았다. 그리고 케렌스키가 새로 임명한 좌익 상원의원 소콜로프가 프록 코트를 입고 감히 입장하자 그를 조용히 의사당에서 몰아냈다. 짜르 시절의 이 의원님들은 2월 혁명을 화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혁명정부가 이빨 빠진 개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카알 맑스는 독일 3월 혁명의 실패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정치계 최상층만 개혁했을 뿐 이 밑에 있는 모든 부위들 즉 구 관료집단, 구 군대, 구 사법부 등 절대주의에 봉사하기 위해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나이가 먹은 부위들을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다.” 맑스가 실패의 원인으로 꼽은 바로 이 요인을 케렌스키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구원의 요인으로 만들고자했다. 그리고 멘세비키 맑스주의자들은 맑스가 아니라 케렌스키의 편을 들었다.

정부가 주도성과 혁명적 템포를 보여준 유일한 영역은 주식 보유에 관한 입법이었다. 이 개혁 포고령은 3월 17일 선언되었다. 주식 보유에 관한 민족적 종교적 제한은 이로부터 3일만에 폐기되었다. 구 정부에서 주식 거래를 금지 당해 고통을 당했던 자들이 새 정부기구에는 적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일을 요구하며 참을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양쪽 귀가 다 먹은 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전시이므로 조국의 이익을 위해 모두가 희생해야 한다. 더욱이 이것은 소비에트의 소관이다. 이들이 노동자들을 진정시키라고 내버려두자.

더 위협적인 것은 토지문제였다. 정말 뭔가 조치를 취해야했다. 예언자들의 말에 자극을 받아 농업장관 싱가레프는 지역 토지위원회 수립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 기구의 임무와 기능은 분별력 있게도 규정하지 않았다. 이 위원회가 자기들에게 토지를 주어야 한다고 농민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지주들은 이 위원회가 자기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농민의 올가미는 다른 어떤 올가미보다 더 잔인하게 2월 혁명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정부의 공식 입장이 편리를 볼 수 있도록 혁명을 야기한 모든 문제들은 제헌의회로 이월되었다. 민주주의자들은 인민 전체의 의지에 부응하여 미하일 대공을 국가수반으로 앉히는데 실패했다. 그렇다면 이 흠잡을 것 하나 없는 민주주의자들이 인민 전체의 의지를 예측하리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당시 전국 차원에서 진행된 대의제도 정착을 위한 준비는 엄청난 관료적 강압과 의도적인 지연으로 방해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제헌의회는 신기루에 불과했다. 봉기로 혁명이 승리한지 한 달이 거의 다된 3월 25일이 되어서야 정부는 선거법 제정을 위한 굼뜬 특별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열리지도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으로 일관한 자신의 [혁명사]에서 밀류코프는 혼동된 듯이 이렇게 말한다: 여러 어려움 때문에 “특별회의의 작업은 첫 정부에서 진행되지 못했다.” 회의의 구성과 기능에서 어려움은 내재해 있었다. 더 좋은 때 즉 전쟁에서 승리하고 평화가 정착된 후 또는 코르닐로프 쿠데타 때까지 제헌의회 소집을 연기하는 것이 이들의 유일한 속셈이었다.

세상에 너무 늦게 등장한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은 혁명을 죽도록 증오했다. 그러나 이 증오에는 힘이 없었다. 결국 자신의 시간을 기다려 술수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 혁명을 타도하거나 목조를 수가 없게 되자 부르주아 계급은 이것이 굶어 죽기를 기대했다.               






정렬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24 역사 러시아혁명사 4 3 공산주의자 2017.04.26 145
223 역사 러시아혁명사 3 트로츠키주의자. 2017.04.26 139
222 정보 자유는 인간 사회에서 만든 고차원적 계념입니다. 1 진보인류 2017.04.26 101
역사 러시아 혁명사 트로츠키주의자. 2017.04.25 229
220 역사 연속혁명론 1 트로츠키주의자. 2017.04.25 39
219 게임 리니지1 핸드폰으로 나오네요? 1 file shane4862 2017.04.22 154
218 역사 러시아혁명사. 트로츠키주의자. 2017.04.22 29
217 역사 러시아 혁명사 트로츠키주의자. 2017.04.22 93
216 역사 한국인과 북방 유목민은 일절 "털끝 만큼도" 관계 없다 5 Uriginal 2017.03.19 489
215 역사 스탈린주의 관료도당이 주도한 소련의 문화적 타락 9 공산주의자 2017.03.15 246
214 역사 일제 식민지때말야 7 사토리 2017.03.04 808
213 정보 사람을 300이상 죽인 식인악어 - 구스타프 일베츙 2017.02.10 777
212 언어 원서를 큰 소리로 빠르게 읽어야 하는 간단한 이유 4 file 박군 2017.02.02 796
211 언어 영어를 어느 정도 읽을 줄 아는 사람을 위한 꿀팁하나 떨구고 갑니다. 4 박군 2017.01.29 967
210 언어 언어와 어휘의 습득 과정은 패턴속에서 이루어진다 17 박군 2016.12.24 998
209 역사 역사갤러리> 명나라 황제가 '조선'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6 ghjjbv 2016.12.23 490
208 역사 요즘 역사, 한국사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6 Uriginal 2016.12.22 443
207 역사 조선 유명 성리학자의 이야기.jpg 2 file 잭잭 2016.12.13 451
206 역사 (조선왕조 시대의 실상) 기근과 홍수 및 함경도에서의 반란에 대한 보고 4 볼온한개인주의자 2016.12.07 407
205 역사 조선왕조가 자력근대화가 가능했다고 씨부리는 진보좌파 병신새끼들에 대한 반박 9 볼온한개인주의자 2016.12.07 508
1 5 -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