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원체 이웃나라들로부터 지배만 받아온데다가 나라의 시작부터가 불안정했고(광복 이 후 한국은 아직 100년도 안지난 국가임.) 남,북으로 갈라져있는 탓에 인간들 자체가 이념이나 사상, 가치관 측면에선 극단적으로 미개한 면도 있긴 한데

 

사실 이 미개한건 표현의 자유를 거머쥔 자들이라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임

 

어떠한 방식으로든 서로 표현하고 생각을 공유하면서 답을 찾아갈거거든

 

근데 이 나라는 온라인 상에서의 고소법이 표현과 생각의 공유를 막는 장벽 역할을 하고 있음

 

오프라인에선 나이 따지고 위 아래 구분짓는 미개한 문화가 서로 생각을 공유하는데 있어 걸림돌로 작용하는데

 

온라인 상에선 고소가 무서워서 본인의 생각을 100% 펼칠 수 없음

 

근본적인 문제는 좆같은걸 좆같다고 말하지 못하는 한국 문화인데 말이지.






  • 점.
    17.09.14
    그러게요. 때론 돌려 말하지 않고 팍팍 말하고 싶어요 ㅋ
  • ㆍㆍ
    17.10.29

    프랑스는 어디로? 1934년 10월

     

    이 저작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프랑스의 운명을 선진노동자들에게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프랑스는 증권거래소, 은행, 독점기업, 정부, 국가, 교회 등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이것들은 전부 프랑스의 억압기구일 뿐이다. 우리에게 프랑스는 노동계급과 착취받는 농민이다.

     

    1.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붕괴

    제 1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그리고 나중에 스페인에서 혁명들이 승승장구하며 일어났다. 그러나 오직 러시아에서만 노동계급은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착취자들의 생산수단을 몰수했으며 노동자국가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러시아 이외의 모든 곳에서는 노동계급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부의 오류 때문에 혁명을 철저히 완수하지 못했다. 이 결과 국가권력은 노동계급의 손에서 벗어나 좌익으로부터 우익으로 이동하더니 결국 파시즘의 손에 장악되고 말았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국가권력이 군사독재자의 수중에 들어갔다. 어느 곳에서도 의회는 계급 갈등을 화해시키고 평화를 확보하는데 실패했다. 결국 갈등은 무력에 의해 해결되었다.

    오랫동안 프랑스 인민은 파시즘이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공평히 참정권을 누리는 인민에 의해 모든 문제가 처리되는 공화국에 이들은 살고 있었다. 그러나 1934년 2월 6일 권총, 곤봉, 면도칼 등으로 무장한 수 천명의 파시스트, 왕당파 도당들이 두메르그 정권의 등장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 정권의 보호 아래 파시스트 도당들은 계속 세를 확장하고 무장하고 있다. 그러면 내일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제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도 물론 의회, 선거, 민주적 자유, 또는 이것들의 부스러기가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 예를 든 나라들에서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경우와 같은 계급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프랑스는 독일과 다르다”는 말로 자신을 위로하는 자는 전혀 가망이 없다. 자본주의 체제의 쇠퇴라는 똑같은 법칙은 모든 곳에서 작동하고 있다. 생산수단이 소수 자본가들 손에 있는 이상 사회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위기에서 저 위기로 궁핍에서 처참으로 갈수록 나빠질 뿐이다. 각 나라마다 자본주의의 노쇠와 붕괴는 다양한 형태와 독특한 리듬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과정의 기본 특징은 어디에나 똑같다. 부르주아계급은 이 사회를 완전한 파산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인민에게 빵도 평화도 확보해줄 수 없다. 민주 질서를 더 이상 인정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노동자와 농민의 불만은 경찰의 폭력 행사로 해결되지 않는다. 더욱이 인민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의 행진을 강요하는 것도 종종 불가능하다. 먼저 군대는 붕괴하다가 나중에는 많은 병사들이 인민의 편으로 넘어간다. 금융자본이 노동자들과 싸우도록 훈련된 특별 무장대를 조직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치 개들이 사냥감을 쫓기 위해 훈련을 받는 것과 같다. 자본가들이 통치력을 상실해서 민주적 제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노동계급을 분쇄하고 이들의 조직을 파괴하고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데에 파시즘의 역사적 역할이 있다.

    파시스트들은 주로 소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인적 자원을 구한다. 이 계급은 대자본에 의해서 완전히 파멸 당했다. 지금 같은 사회 체제는 이 계급에게 해결책을 마련해 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다. 이 계급의 불만, 분노, 절망은 파시즘에 의해 대자본으로 향하지 않고 대신 노동계급에게 향하고 있다. 가장 잔악한 적의 손에 소부르주아 계급이 농락당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파시즘이다. 파시즘을 통해 대자본은 중간계급들을 파멸에 빠뜨리고 절망에 빠진 이들이 노동계급과 대적하도록 부추긴다. 이 살인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부르주아 체제는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 이런 사기극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노동계급의 혁명이 이 체제를 전복하는 순간까지 이 사기행각은 계속될 것이다.

     

    2.프랑스 보나파르트 체제의 시작

    프랑스에서 민주주의로부터 파시즘으로의 전환은 그 첫 단계를 지나고 있을 뿐이다. 의회는 존재하지만 기존의 위세를 상실했으며 이것을 다시 회복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2월 6일 사건 이후 완전히 겁에 질린 의회 다수파는 두메르그를 구원자, 해결사로 생각하고 그에게 국가권력을 넘겼다. 이 결과 두메르그 정권은 의회 위에 군림하고 있다. 이 정권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다수파가 아니라 관료집단, 경찰, 군대 등에 직접 의존하고 있다. 두메르그가 공무원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국영 부문 노동자들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고분하고 규율에 복종하는 관료기구를 필요로 한다. 이 토대 위에서만 그는 실각할 위험이 없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파시즘 세력과 기타 극우 떨거지들이 모인 “공통 전선(common front)”에 대해 공포를 가지고 있는 의회 다수파는 두메르그 앞에 머리를 조아릴 수 밖에 없다.

    임박한 헌정 질서 “개혁”, 의회 해산권 등에 대해서 지금 많은 글들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런 모든 문제들은 법적인 흥미 밖에 없다. 정치적 의미에서는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베르사이유궁의 정부를 거치지도 않고 개혁은 성취되었다. 무장한 파시스트 도당들의 등장으로 금융자본은 의회 위에 군림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프랑스 헌정 질서의 핵심이 있다. 이외의 모든 것은 환상, 말장난, 의식적인 기만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두메르그의 역할은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 뻬뗑 원수(Marshal Pétain)나 따르뒤(Tardieu) 같은 인물이 그의 뒤를 잇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나폴레옹 1세나 3세가 했던 역할과 유사할 뿐이다. 보나파르트 체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두 적대 진영의 분쟁을 토대로 관료적-군사적 독재 체제를 구축하여 “나라”를 “구원한다”. 나폴레옹 1세는 부르주아 계급의 격정적인 청년기에 보나파르트 체제를 대표했다. 나폴레옹 3세의 보나파르트 체제는 부르주아 계급이 나이를 먹어 약간 머리가 벗겨질 때 등장했다. 자본주의의 쇠퇴기에 등장한 노쇠한 보나파르트 체제의 인격화가 곧 두메르그이다.

    의회 체제가 보나파르트 체제로 첫 발을 내디딜 때 두메르그 정권이 등장했다.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 그는 오른쪽에 그를 권좌로 밀어 올린 파시스트 및 극우 도당들을 필요로 한다. [청년 애국자], [불 십자가], [왕의 궁전] 등 극우조직들을 서류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해산시키라고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가 몸을 지탱하기 위해 붙잡고 있는 나무를 자르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물론 정권이 좌로 또는 우로 일시적으로 동요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때 이른 파시스트 공세는 정부 상층의 “좌”경화를 촉발할 수 있다. 정권은 일시적으로 두메르그의 손에서 따르뒤가 아니라 에리오의 손으로 넘어갈 수는 있다. 그러나 우선 어느 누구도 파시스트 도당들이 때 이른 쿠데타를 감행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둘째로 정권의 상층이 일시적으로 좌로 선회한다 할지라도 사태의 일반적 경로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다만 양대 계급 사이의 최후 결전이 잠시 미뤄질 수 있을 뿐이다.

    평온한 민주주의 체제로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태는 불가피하게 노동계급과 파시즘 간의 충돌을 불러올 것이다.

     

    3.보나파르트 체제는 오래 버틸것인가?

    지금의 이행기적 보나파르트 체제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결정적인 전투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노동계급에게 얼마나 남아있을까? 당연히 답을 정확히 얘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세가 전개되는 속도를 가늠하기 위해 몇몇 요인들이 분석될 수는 있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무어니 해도 가까운 미래에 급진당이 겪게될 운명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지금 보나파르트 정권의 등장 자체가 노동계급과 파시즘 사이의 내전이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보나파르트 정권은 경찰과 군대를 자신의 주요한 물적 토대로 삼고 있다. 그러나 또한 왼쪽 세력 즉 급진당의 지지도 얻고 있다. 대중 정당인 급진당의 정치 기반은 도시와 농촌의 소부르주아 계급이다. 이 정당의 지도부는 도시와 농촌 대부르주아 계급의 “민주적” 하수인들로 채워져 있다. 이들은 인민에게 조그만 개량들과 민주적 미사여구들을 간간이 선사하면서 말로만 반동세력과 교회의 위협으로부터 인민을 일상적으로 보호해왔다. 그러나 모든 중요한 문제들에 있어서 이들은 대부르주아 계급을 위한 정책만을 시행해 왔다.

    파시즘 그리고 특히 노동계급의 위협에 직면하자 급진당은 의회 “민주주의” 진영에서 보나파르트 진영으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낙타가 기수의 채찍을 맞고 무릎을 꿇는 것과 같이 급진당은 네 무릎을 꿇고 자본주의 반동세력이 자신의 등에 올라타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급진당의 정치적 지지가 없을 경우 두메르그 정권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를 독일과 비교한다면 두메르그 정권과 이후 등장할 가능성이 있는 후계 정권은 브뤼닝, 폰 파펀, 슐라이허 정권과 일치할 것이다. 이 독일의 정권들은 바이마르 공화정과 히틀러 독재 사이에 존재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기는 한다. 독일의 보나파르트 체제는 민주적 정당들이 붕괴하고 나찌당이 엄청난 속도로 세를 불리고 있을 때 등장했다. 독일의 세 보나파르트 정권들은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다. 따라서 자기 발 아래에 절벽을 보면서 노동계급과 파시즘이 걸어 놓은 줄 위에서 곡예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세 정권들은 모두 재빨리 사라졌다. 한편 노동계급 진영은 올바른 투쟁을 하기에는 분열되어 있었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지도부의 연막술, 사기극, 배신극에 농락당했다. 그래서 파시스트 나찌당은 전투 한번 치르지 않고 승리하여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프랑스 파시즘은 아직도 대중적 위세를 얻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보나파르트 체제는 확실하거나 안정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급진당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 두 사실 사이에는 내적인 연관이 존재한다. 정치적 기반의 사회적 성격으로 보면 급진당은 소부르주아 정당이다. 파시즘은 소부르주아 계급을 정복해야만 대중적 위세를 누릴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파시즘은 급진당을 희생시켜야 대중적 위세를 확보할 수 있다. 이미 이 과정은 진행 중이다. 다만 초기 단계에 있을 뿐이다.  

     

    4.급진당의 역할

    지난번 지방 선거에서는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다. 파시즘과 노동계급은 득표율이 상승했으며 가운데 끼인 급진당의 득표율은 하락했다. 그러나 서로의 승패를 가리기에는 득표차가 미미하다. 선거 자체만을 중시한다면 투표 결과는 정치적으로 더 큰 의미를 띠었을 것이다. 그러나 급진당의 득표율 하락은 그 자체보다는 대중의 의식 변화를 나타내는 징후로만 그 의미가 있을 뿐이다.

    즉 급진당의 득표율 하락은 소부르주아 계급의 중심이 두 극단 진영으로 나누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지금 남아있는 의회 통치 체제가 더욱더 잠식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파시즘과 노동계급 세력은 더욱 성장할 것이다. 이 두 진영은 불가피하게 곧 충돌할 것이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소부르주아 계급은 상황이 점진적으로 그리고 평화로이 개선될 것이라고 희망한다. 대부르주아 계급은 급진당을 통해 이 희망을 유지시키고 있다. 그러나 급진당의 이러한 역할은 소부르주아 계급의 경제 상황이 유지 가능하고 견딜만하며 이들의 대대적 파멸이 모면될 때 가능했다. 그리고 이 계급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있을 때까지만 가능했다. 물론 급진당의 강령은 언제나 문서로만 존재했다. 급진당은 노동 대중을 위한 어떠한 진지한 사회 개량도 이룬 적이 없으며 그렇게 할 능력도 없었다. 대부르주아 계급이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행, 증권시장, 언론, 고위관료층, 주요 외교관, 군총참모부 등 권력의 요새들이 대부르주아 계급의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급진당은 자신을 따르는 대중에게 특히 옹색한 지방적 차원에서 시혜를 베풀면서 이들의 환상을 유지시켰다. 그러나 최근의 경제 위기는 이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전쟁 이전에 간간이 닥쳤으나 금방 끝나는 보통 정도의 위기가 아니라 체제 전체를 위협하는 위기가 닥쳤다는 것이 가장 후진적인 농민에게도 명백해졌다. 거대한 사회적 위기는 대담하고 단호한 조치들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어떤 조치들을 취해야 할까? 물론 농민들은 알지 못한다. 어느 누구도 이들에게 응당 이런 것들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의 수준을 너무 높여 놓았다. 따라서 자본주의 자체 때문에 파멸한 대중이 처참한 생존 상태에 빠질 경우 생산수단 자체가 마비되어 버린다. 이 결과 사회 전체가 쇠퇴하고 분해되고 썩기 시작하였다. 자본주의는 노동 대중에게 새로운 개량 조치들을 취해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조그만 떡고물조차 쥐어줄 수 없다. 한때 주었던 것을 빼앗아야 할 상황에 놓여있다. 유럽 전역은 경제적 정치적 반동의 시기에 들어섰다. 대중을 약탈하고 질식시키는 정책은 반동 세력의 변덕이 아닌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 때문에 발생한다. 공허한 정치적 말장난에 속지 않기 위해서 모든 노동자들은 이 기본적 사실을 이해하고 숙지해야 한다.

    민주적 개량주의 정당들이 유럽 전역에서 붕괴하고 정치적 위세를 상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프랑스 급진당에게도 똑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반동세력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 달라디에의 항복과 에리오의 배신이 우연한 또는 일시적인 원인 탓이거나 이 두 한심한 지도자의 근성 부족 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보에 지나지 않는다. 거대한 정치 현상은 항상 심오한 사회적 원인들을 가지고 있다. 민주적 정당들의 쇠퇴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그 원인이 자본주의 자체의 붕괴에 있다. 대부르주아 계급은 급진당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농담할 때가 아니오. 사회당과 눈이 맞아 산을 옮기고 기적을 이룩하겠다는 약속을 수줍게 하고 있는데 그만두시오. 그렇지 않으면 파시스트 도당들을 불러 당신들을 쫓아내겠소. 2월 6일은 첫 경고에 불과하오.” 이 협박조의 말에 급진당 낙타는 네 무릎을 꿇고 조용히 처분만을 기다린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급진당은 이렇게 할 경우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자신을 지지하는 대중이 보는 앞에서 자기 운명을 반동 세력의 운명에 속박시킬 경우 급진당은 자신의 파멸을 재촉할 수 밖에 없다. 지역구 선거에서 표를 잃고 대표권을 상실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급진당의 붕괴는 점점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불가피한 현상은 노동계급 혁명을 가져올 것인가 아니면 파시즘의 승리를 가져올 것인가?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와 파시즘 반동 중 누가 제일 먼저 중간 계급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강령을 제시할 것인가? 그리고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에 나타날 모든 장애물을 분쇄할 능력을 말과 행동으로 증명하면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신뢰를 이들로부터 획득할 것인가?

    바로 이 문제에 앞으로 수십 년 간 프랑스 사회의 운명이 달려있다. 그리고 프랑스의 운명 만이 아니다. 유럽의 운명이 달려있다. 그리고 유럽의 운명 만이 아니다. 전세계의 운명이 달려 있다.

     

    5.“중간 계급”, 급진당, 파시즘

    독일에서 나찌당이 승리하면서 프랑스 “좌익” 정당들과 그룹들 사이에서는 파시즘의 승리를 막기 위해 “중간 계급”과 밀착해야 한다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 르노델이 이끄는 분파는 급진당과 밀착하겠다는 특별한 목적으로 사회당을 탈당했다. 그러나 르노델의 사상은 1848년에나 유효했던 사상이다. 그가 에리오에게 두 손을 내밀었을 때 에리오는 이미 두 손을 극우 지도자 따르뒤와 루이 마랭에게 맡긴 후였다.

    그러나 소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의 운명에 따라 파멸하도록 노동계급이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절대로 안된다. 권력 장악을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파시즘에 대항해 승리하려면 농민과 도시의 소부르주아 계급을 우리 쪽으로 끌어 당겨야 한다. 이것은 성공의 필요조건이다. 문제는 반드시 명확하고 올바르게 제기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중간 계급”의 성격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반적 공식을 이것의 사회적 내용을 검토하지 않고 반복하는 것은 특히 결정적인 시기에 정치 행동을 위해서는 가장 위험하다.

    현대 사회에는 세 계급이 있다: 대부르주아 계급, 노동계급, “중간 계급” 즉 소부르주아 계급.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이 세 계급 사이의 관계가 정세를 결정한다. 대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이 기본 계급이다. 이 두 계급만이 명확하고 일관되고 독자적인 정책을 가질 수 있다. 소부르주아 계급은 이 두 계급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이 계급 내부에는 온갖 잡다한 요소들이 뒤섞여 있다. 이 계급의 최상층은 대부르주아 계급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최하층은 노동계급과 일치하고 심지어는 룸펜노동자의 지위와 맞닿는다. 따라서 소부르주아 계급은 독자적 정책을 가질 수 없다. 항상 대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서 동요할 뿐이다. 최상층은 이 계급을 우로 밀치고 최하층의 억압받고 착취받는 층은 특정 상황에서 좌로 급선회할 수 있다. “중간 계급”의 각 층위들 간의 이러한 모순적 관계때문에 급진당의 정책은 항상 혼란스럽고 철저히 파산적이다. 정치적 기반인 대중을 안심시키기 위해 사회당과 연합하기도 하고 부르주아 계급을 구하기 위해 반동 세력과 전국적으로 연합하는 등 항상 동요한다. 대부르주아 계급 역시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급진당의 동요를 더 이상 허용할 수 없을 때 급진당의 사망이 시작된다.

    도시와 농촌에서 파산한 소부르주아 대중은 참을성을 상실하기 시작한다. 자기 계급의 최상층에 대해서 더욱더 적대적이 되면서 자기 정치 지도부의 파산과 배신을 확신한다.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에서 대부르주아 계급과 다름이 없는 에리오, 달라디에, 쇼땅 등 시장, 변호사, 정치 사업가들과 자기 사이에 깊고 깊은 계곡이 가로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가난에 찌든 농민, 수공업자, 소상인들이 확신하게 된다. 파시즘 세력이 이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소부르주아 계급의 환멸, 초조함, 절망이다. 파시스트 선동가들은 의회 민주주의를 비방하고 욕한다. 민주주의는 출세주의자들과 축재 정치인들을 부양하지만 노동 대중에게는 아무 것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이 선동가들은 은행가, 대상인, 자본가들에게 주먹을 흔들어 보인다. 이들의 말과 행동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소부르주아 대중의 감정과 일치한다. 파시스트 도당들은 대담성을 과시하고 거리에서 경찰을 공격하고 힘으로 의회 의원들을 몰아내려고 한다. 이것이 절망에 빠진 소부르주아 계급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기꾼들이 너무 많은 급진당은 우리를 은행가들에게 팔아 넘겼다. 사회당은 착취를 끝장내겠다고 오랫동안 약속했으나 말에서 행동으로 결코 나가지 않는다. 공산당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오늘은 이렇게 행동하고 내일은 저렇게 행동한다. 파시스트들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지 봐야겠다.”

     

    6.“중간 계급”은 파시즘 진영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가?

    소부르주아 계급은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에 집착한다고 르노델이나 프로싸르 같은 인물들은 상상한다. 그러니 급진당의 꽁무니에 바짝 붙어 있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혼동인가! 민주주의는 정치 형태에 불과하다. 소부르주아 계급은 껍데기가 아니라 속살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즉 자신을 고통과 파멸로부터 보호하고 싶을 뿐이다. 만약 민주주의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 민주주의를 악마에게 주어버려라! 소부르주아 대중 모두는 이렇게 생각한다.

    파시즘의 주요한 사회적 정치적 기반은 소부르주아 계급 하층의 반항심에 있다. 이들은 시, 지역, 국회에서 행세하는 “교육받은” 소부르주아 상층에 반감을 점점 크게 느끼고 있다. 여기에 경제 위기로 파멸한 지식인 청년들의 변호사, 의원, 벼락출세한 장관들에 대한 증오심이 부가되어야 한다. 소부르주아 하층에 속한 지식인들 역시 자기들 위에 군림하는 지식인들에 대해서 반항심을 품고 있다.

    그렇다면 소부르주아 계급이 파시즘으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피하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만약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린다면 부끄러운 숙명주의가 될 것이다.

    정말 불가피한 것은 급진당의 몰락 그리고 급진당의 운명에 목을 걸고 있는 정치 집단들의 몰락일 것이다.

    자본주의 쇠퇴기에는 민주적 개량과 “평온한” 진보를 추구하는 정당이 설 자리가 더 이상 없다. 프랑스의 정세가 어느 쪽으로 나아가든지 급진당은 소멸할 것이다. 소부르주아 대중이 이 정당을 거부하고 불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급진당이 이들을 확실히 배신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측이 현실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모든 의식 있는 노동자는 확신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선거가 있을 때마다 급진당은 패배할 것이다. 당의 기반인 대중과 상층의 겁먹은 출세주의자들 모두 흩어질 것이다. 탈당, 분열, 배신 등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어떤 술수나 동맹도 이 정당을 구할 수 없다. 그리고 르노델과 데아 일당이 이끄는 “당” 역시 지옥으로 끌려 들어갈 것이다. 소위 민주적 방법으로는 부르주아 사회가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다. 이 사실로 인해 급진당의 파멸은 불가피하다. 소부르주아 계급 하층과 상층 사이의 분열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급진당 대중이 어쩔 수 없이 파시즘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이 계급의 가장 절망감에 빠지고 가장 탈계급화한 그리고 가장 열렬한 청년들이 이미 파시즘을 선택했다. 그리고 바로 이들로부터 파시스트 도당들이 주로 형성이 된다. 그러나 도시와 농촌의 기본 대중들은 아직도 선택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커다란 선택을 앞두고 주저하고 있다. 바로 이 주저 때문에 이들은 급진당을 신뢰하지 않지만 선거 때가 되면 계속 이 정당에게 표를 던지고 있다. 그러나 이 주저와 우유부단의 상황은 몇 년이 아니라 몇 달 밖에 지속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전개될 정세는 열병에 걸린 것 같은 격렬한 리듬을 탈 것이다. 소부르주아 계급은 다른 대안에 대해 확신을 가질 때에만 파시즘의 참주선동을 거부할 것이다. 이 대안은 곧 노동계급 혁명의 길이다.

     

    7.소부르주아 계급이 혁명을 두려워하는 것이 사실인가?

    사람들의 속성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의회 백치병 환자들이 있다. 이들은 이렇게 반복해서 외치는 것을 좋아한다: “혁명으로 중간 계급을 무섭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이들은 극단적인 것들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확신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소자산가들은 지금 사업이 잘되고 내일은 더 좋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이상 기존 질서를 선호한다.

    그러나 이 희망이 없어지면 그는 쉽게 분노하고 가장 극단적인 조치들을 위해 몸을 던질 준비가 되어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어떻게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민주 국가를 전복시키고 파시즘을 권력에 앉혔겠는가? 절망한 소부르주아 계급은 파시즘이 대자본에 대항하는 전투적인 세력이라고 생각한다. 말만 앞세우는 노동계급 정당들과는 달리 파시즘은 무력을 사용하여 더 많은 “정의”를 구현할 것이라고 이들은 믿는다. 농민과 수공업자들은 생활 방식이 현실적이다. 이들은 무력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극단 조치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소부르주아 계급이 노동계급 쪽으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틀려도 완전히 틀린 생각이다. 이와 정반대로 소부르주아 하층 대중들은 노동계급 정당들이 의회에만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노동계급 정당들이 투쟁을 끝까지 밀고 가기 위한 힘, 능력, 준비 등을 갖추지 못했다고 믿는다.

    사실이 이렇다면 급진당 대신 노동계급 정당 소속의 급진당 의원 친구들을 의회에 불러들일 필요가 어디 있을까? 반 정도 재산을 몰수당하고 파산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소자산가들이 계산하고 느끼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사회 위기로부터 나오는 농민, 수공업자, 고용인, 하위 관료 등의 심리를 이해하지 않고는 올바른 정책을 입안할 수 없다. 소부르주아 계급은 경제적으로는 종속되어 있고 정치적으로는 원자화되어 있다. 이들이 독자적 정책을 수행할 수가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들에게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줄 “지도자”가 필요하다. 이 개인적 또는 집단적 지도력은 개인이 되었든 정당이 되었든 대부르주아나 노동계급 중 하나만이 제시할 수 있다. 파시즘은 흩어진 대중을 단결시키고 무장시킨다. 모래알 인간들을 전투부대로 조직한다. 따라서 파시즘은 소부르주아 계급에게 자신이 독자적 세력이라는 환상을 불어 넣는다. 소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이 실제로 국가를 장악할 것이라고 상상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환상과 희망이 소부르주아 계급의 머리를 돌게 만든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현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 계급은 노동계급에게서도 지도자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사실은 러시아에서 그리고 부분적으로 스페인에서 증명되었다.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소부르주아 계급은 이 방향으로 나아갔다. 아쉽게도 노동계급 정당들이 주어진 역사적 과업을 완수할 단계에 이르지 못했을 뿐이다.

    소부르주아 계급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노동계급은 이들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이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명확한 행동 강령을 가지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혁명 정당에 의해 결정적이고 가차없는 투쟁을 수행할 준비를 마친 노동계급은 농민과 도시의 소부르주아 계급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권력을 잡기 위해 투쟁하고 있소. 여기 우리의 강령이 있소. 우리는 여러분들과 이 강령의 내용을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소. 대자본가와 그 하수인들에게만 우리는 폭력을 행사할 것이오. 그러나 여러분들과는 우리 강령에 기초한 연합을 원하오.” 농민들은 이런 말을 이해할 것이다.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신뢰만 하면 이들은 노동계급의 편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신뢰감을 불어 넣기 위해서는 모든 애매모호함, 우유부단함, 공허한 미사여구 등을 공동전선에서 전부 몰아내야 한다. 상황을 이해하고 진지하게 혁명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8.급진당과의 연합은 중간계급에 반대하는 연합이 될 것이다

    급진당과의 연합은 “중간 계급”과의 연합이므로 파시즘에 대항하는 장벽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르노델, 프로싸르 등이 진지하게 상상한다. 그러나 이들은 의회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작자들이다. 이들은 대중의 진정한 변화는 무시하고 급진당의 꽁무니를 따라가고 있다. 그런데 급진당은 이미 자기 역할을 다한 지 오래되어 대중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거대한 사회 위기의 시대에 투쟁 계급들 간의 연합이, 낡아빠지고 소멸될 운명에 처한 의회 파벌들 간의 동맹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이들은 믿는다.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의 진정한 연합은 의회에서의 계산 문제가 아니고 혁명적 동력의 문제이다.

    이 계급간 연합은 투쟁 속에서 맺어지고 단련되어야 한다. 절망에 빠진 소부르주아 계급이 의회의 족쇄에서 그리고 “급진당”의 보수적 파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급진당 파벌은 항상 인민을 속여 왔으며 지금은 명확히 배신했다. 이것이 현 정세의 진정한 성격이다. 이런 상황에서 급진당과의 연합은 대중의 경멸을 자초하여 소부르주아 계급을 유일한 구세주인 파시즘에게 안기게 만들 뿐이다. 노동계급 정당은 파산한 정치꾼 정당을 구하려는 가망 없는 노력에 정신을 쏟아서는 안된다. 이와 반대로 모든 힘을 다해 대중이 급진당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을 가속화시켜야 한다. 이 일에 더 많은 열성과 대담함으로 달려들면 들수록 노동계급과 소부르주아 계급의 진정한 연합을 더 확실히 더 빨리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움직이고 있는 계급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들의 꽁무니가 아니라 머리에 자신을 위치시킬 필요가 있다. 역사는 빨리 움직인다. 뒤처지는 자에게 우환이 있을 지어다!

    사회당이 급진당의 정체를 폭로하고 영향력을 약화시켜 붕괴를 촉진시킬 권리가 없다고 프로싸르는 말한다. 그는 사회당 지도자가 아니라 보수 급진당 지도자로 자처하고 있다. 자신의 강령을 믿고 인민 전체를 자신의 깃발로 결집시키려고 노력을 집중하는 당만이 존재할 권리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당이 아니라 의회의 족벌, 출세주의자들의 파벌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대중을 부르주아 계급의 치명적인 영향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노동계급 정당의 권리이자 기본적 의무이다. 이 역사적 임무는 특히 지금 그 중요성이 크다. 급진당이 반동세력을 은폐시키고 인민을 속여 파시즘의 승리를 준비하려고 광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급진당 좌파는 어떤가? 이들은 에리오가 따르뒤에게 투항하는 것처럼 에리오에게 투항하고 있다.

    사회당과 급진당 연합이 “좌익” 정부를 구성하여 파시스트 조직들을 해산시키고 공화국을 구원하는 것이 프로싸르의 계획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과 경찰의 냉소주의가 이렇게 기괴하게 결합된 예를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중에 좀더 자세하게 말하겠지만 노동자 민병대가 지금 필요하다 고 우리가 말할 때 프로싸르와 그의 참모들은 이렇게 반대한다: “물리력이 아닌 이데올로기 수단으로 파시즘에 싸워야 한다.” 급진당에 대한 투쟁을 통해서만 대중의 대담한 투쟁이 가능하며 대중의 대담한 투쟁을 통해서만 파시즘의 기반을 침식할 수 있다고 우리가 말하면 이 신사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오, 달라디에-프로싸르의 경찰정부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소.”

    얼마나 불쌍한 잡담인가! 왜냐하면 급진당은 그동안 정권을 장악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급진당이 비록 두메르그에게 자발적으로 권력을 넘겨준 그 이유는 프로싸르의 도움을 받지 않아서가 아니라 파시즘을 무서워했기 때문이었다. 즉 왕당파의 면도칼로 위협하는 대부르주아 계급을 무서워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노동계급을 더 무서워했기 때문이었다. 노동계급은 파시즘에 대항해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프로싸르 자신은 급진당의 경고에 놀라서 달라디에에게 항복하라고 조언했다. 

    여기서 잠시 가능성이 거의 없는 가정을 해보자. 급진당이 두메르그와의 동맹관계를 끊고 프로싸르와 동맹하기로 동의했다 치자. 그러면 이번에는 경찰의 직접 도움을 받은 파시스트 도당들이 그 수가 세배나 늘어난 채 거리로 나섰을 것이다. 그리고 프로싸르와 함께 급진당은 즉시 탁자 밑으로 기어 들어가거나 내각 화장실에 숨었을 것이다.

    그러면 더 황당한 가정을 하나 더 해보자. 달라디에-프로싸르 정권의 경찰이 “파시스트 도당들을 무장 해제시킨다” 치자. 그러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그리고 누가 경찰을 무장 해제시킬 것인가? 경찰은 왼손으로 파시스트들에게 빼앗은 것을 오른손으로 되돌려 주게 마련이므로 이들도 무장 해제시켜야 한다. 경찰이 파시스트들을 무장 해제시키는 코메디는 파시스트들의 권위를 강화시키기만 했을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에 대항하는 자들이라고 비춰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시스트 도당들이 정치적으로 고립될 때만 이들에 대한 타격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한편 우리의 가정 속에 존재하는 달라디에-프로싸르 정권은 노동계급이나 소부르주아 계급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적 소유의 기초를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은행, 거대 기업, 산업과 수송의 주요 분야 등을 몰수하고 외국 무역을 독점하고 다른 심오한 조치들이 연이어 실행되지 않는 한 농민, 수공업자, 소상인들을 도울 방법이 없다. 달라디에-프로싸르 정권은 수동성, 무능력, 거짓 등을 통해 소부르주아 계급의 항의 태풍을 몰고올 것이고 이로써 이 계급은 파시즘을 지지하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정권이 성립 가능하면 말이다. 그러나 프로싸르는 홀몸이 아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당의 온건파 지롬스키가 10월 24일 [인민]지에 기업연합(cartel)을 부흥시키려는 프로싸르의 시도에 반대하는 글을 실었다. 같은 날에 까쉥은 [인류]지에 급진당과의 동맹을 옹호하는 글을 실었다. 급진당이 “파시스트의 무장 해제”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는 사실을 까쉥은 열성적으로 반겼다. 

    물론 급진당은 모든 세력의 무장 해제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모든 세력에는 노동자 조직들도 포함되어 있다. 당연히 보나파르트 국가는 특히 노동계급에 적대적으로 이 조치들을 시행할 것이다. 물론 “무장 해제된” 파시스트들은 다음날 경찰의 도움으로 두 배나 더 많은 무기를 다시 받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엄중한 현실들을 자꾸 생각하면서 골치를 썩일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모두 뭔가 희망이 필요하다. 그래서 까쉥은 독일의 웰스와 오스트리아의 오토 바우어 뒤를 따르고 있다. 지금 얘기하고 있는 두 신사양반들도 브뤼닝 정권과 돌푸스 정권의 경찰이 무장 해제 조치를 취했을 때 구원의 손길을 느꼈다.

    최근 노선을 180도 전환하여 까쉥은 급진당을 중간 계급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는 급진당을 통해 억압받는 농민들을 본다. 마침내 소자산가들의 신뢰를 상실하기 시작한 의회 출세주의적 급진당 의원들과 동맹만 하면 소자산가들과 동맹을 맺는 것과 같다고 그는 생각한다.

    까쉥은 “민주적” 착취자들에 대한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떠오르는 반발을 길러주고 북돋워 주면서 이 반발을 노동계급과의 동맹으로 인도해야 한다. 이 대신 그는 “공동 전선”의 권위를 빌어 파산한 급진당을 지지하고 이를 통해 가장 착취받는 소부르주아 세력의 반발을 파시즘 확대 쪽으로 인도할 준비를 하고 있다.    

    혁명 정치에서 엉성한 이론은 언제나 잔혹한 복수를 하게 마련이다. 스탈린주의자들에게 “반파시즘”은 파시즘처럼 구체적인 개념이 아니라 커다란 빈 자루에 불과하다. 이 속에 이들은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잡아 넣는다. 이들에게는 달라디에가 좀 전에 파시스트 였던 것과 똑같이 지금 두메르그는 파시스트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두메르그는 소부르주아 계급의 파시스트 분파를 자본주의적으로 착취한다. 마치 에리오가 급진당의 소부르주아 대중을 착취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두 착취체제는 보나파르트 체제 속에 결합되어 있다. 두메르그 역시 나름대로 “반파시스트”이다. 결과가 불투명한 내전 대신 대자본가 계급에 의한 군사적 경찰 독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파시즘도 두려워하지만 노동계급을 더 두려워 하기 때문에 “반파시스트” 달라디에는 두메르그와 동맹을 맺는다. 그러나 두메르그 정권은 파시스트 도당들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기초적인 맑스주의 이론에 의하면 노동계급 정당이 파시즘에 반대하여 급진당과 동맹을 맺는 것은 전적으로 부질없는 짓이다!

    프로싸르와 까쉥의 정치적 몽상이 얼마나 황당하고 반동적인 지를 급진당 자신이 행동을 통해 여실히 보여줄 것이다.

     

    9.노동자 민병대와 그 반대자들

    투쟁하기 위해서는 조직, 신문, 회의 등 투쟁 도구와 수단들을 보존하고 강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파시즘은 이 모든 것들을 직접 그리고 즉시 위협한다. 파시즘은 직접 권력을 장악하기에는 아직도 허약하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조직을 하나 하나 깨부수고 자신의 조직 하나 하나를 단련시켜 노동계급 대오 내에 절망감과 사기저하를 확산시킬 정도로 강력하다.

    따라서 “물리적 투쟁”은 인정될 수 없거나 가망이 없다고 말하면서 두메르그 정권에게 그의 파시스트 근위대를 해산시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파시스트들을 돕는 것이다. 특히 지금 노동계급의 잘못된 희망은 사탕발림이 되어있는 독처럼 위험하다. 노동계급 조직들이 “흐물흐물한 평화주의”를 표방하면 할수록 그만큼 파시스트들은 기고만장해진다. 사태를 관망하며 우물쭈물하는 것, 수동성, 투쟁의지의 결여는 노동계급에 대한 중간 계급의 신뢰를 가장 크게 파괴한다.         

    [인민]지와 특히 [인류]지는 매일 이렇게 말한다: “공동전선은 파시즘에 대항하는 방파제이다.”; “공동전선은 ...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파시스트들은 감히 준동하지 못할 것이다.” 등등. 그러나 이런 말들은 허풍에 불과하다. 노동자, 사회당원, 공산당원들에게 이렇게 똑부러지게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피상적이고 무책임한 언론인이나 웅변가들의 허풍을 듣고 안심하면 안된다. 우리의 목숨과 사회주의의 미래가 걸려있다. 우리가 공동전선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당 공산당 지도자들이 이것을 거부했을 때 우리는 이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공동전선은 다양한 가능성들을 열어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공동전선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오직 대중의 투쟁만이 결정할 뿐이다. [인민]지와 [인류]지를 파시스트들이 공격할 때 공산당 전투부대와 사회당 전투부대가 서로를 도와 줄 경우 공동전선은 그 가치를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이 행동을 위해서 노동계급의 전투부대가 조직되어 훈련받고 무장되어야 한다. [인민]지와 [인류]지는 공동전선의 전능함에 대해서 원하는 만큼 많은 기사를 쓸 수 있다. 그러나 방어조직인 노동자 민병대가 없다면 두 신문은 잘 준비된 파시스트 도당의 공격을 방어할 수 없다.

    그래서 노동자 민병대 창설을 부정하는 자들의 “주장”과 “이론”을 비판적으로 연구할 것을 우리는 제안한다. 그런데 이런 자들은 노동계급 정당인 사회당과 공산당에 많이 있을 뿐더러 커다란 영향력까지 행사하고 있다.

    “대중의 자기방어 조직이 필요하지 민병대는 필요하지 않다.”고 누가 말한다. 그러나 전투부대가 없고 전문화된 중핵이 없고 무기가 없는 “대중의 자기방어”는 무엇인가? 파시즘에 대한 방어 임무를 준비되지 않은 대중에게 넘기는 것은 유다를 사주한 로마 총독 빌라도의 위선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저열한 행위이다. 민병대의 역할을 부인하는 것은 전위의 역할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당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대중의 지지 없는 민병대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그러나 조직된 전투부대 없이는 가장 영웅적인 대중조차 파시스트 도당들에 의해 하나 하나 분쇄될 것이다. 민병대를 자기방어와 대비시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민병대는 자기방어 기구이기 때문이다.

    “민병대 조직을 촉구하면 파시스트들이 자극받는다.”고 어떤 자들은 말한다. 당연히 가장 부정직하고 가장 진지하지 못한 자들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주장이 아니라 모욕이다. 전체 상황으로부터 노동자 조직들을 방어할 필요성이 나온다면 어떻게 민병대 창설을 촉구하지 않을 수 있는가? 아마도 이들은 민병대 창설이 파시스트들의 공격과 정부의 탄압을 “자극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절대적으로 반동적인 주장이다. 계급투쟁이 반동을 “부른다”고 자유주의자들은 언제나 노동자들에게 말해왔다.

    개량주의자들은 맑스주의자들에게 멘셰비키는 볼셰비키에게 이 비난을 반복했다. 최종적으로 환원하자면 이들의 주장은 이러하다: 억압당하는 자들이 저항하지 않는다면 억압자들이 이들을 구태여 때리기까지 하겠느냐. 참으로 심오한 사상이다. 이 사상은 톨스토이와 간디의 철학일 뿐 맑스와 레닌의 철학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인류]지가 “악에 대한 비폭력 저항” 사상을 발전시키기 원한다면 10월 혁명의 상징인 망치와 낫 대신 간디에게 우유를 제공한 경건한 염소를 상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무장은 혁명적 상황에서는 좋지만 지금은 혁명적 상황이 아니다.”라고 누군가 주장한다. 이 심오한 주장은 혁명적 상황이 올 때까지 노동자들이 파시스트들에게 도살되도록 몸을 드러내 놓아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 어제까지만 해도 “제 3기”를 설교했던 자들이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보지 않으려 한다. “평화적”, “정상적”, “민주적” 상황들이 격렬하고 엄중하고 불안정한 상황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무장 문제가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은 혁명적 또는 반혁명적 상황으로 바뀔 수 있다.

    선진 노동자들이 파시스트들에 의해 무고하게 공격당하고 하나 하나 분쇄된다면 반혁명적 상황이 온다. 반면에 하나의 공격에 두 번의 공격으로 저항하고 억압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이들을 자기 주위로 결집시킨다면 혁명적 상황이 온다. 혁명적 상황은 하늘에서 거저 떨어지지 않는다. 혁명 계급과 그 정당이 적극적으로 계급투쟁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 조성된다.

    지금 프랑스의 스탈린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민병대가 독일 노동계급의 패배를 막아주지 못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들은 독일에서의 패배를 전면 부인했으며 독일 공산당의 정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옳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패배의 모든 책임이 독일 노동자 민병대(적색 전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들은 하나의 극악한 오류에서 정반대의 극악한 오류로 나아간다. 민병대 자체가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올바른 정책이 필요하다 . 한편 “최고의 적은 사회 파시즘” 노선, 노동조합의 분열, 민족주의와 폭동주의와의 장난질 등 독일 스탈린주의자들의 정책은 노동계급 전위의 고립과 붕괴를 가져왔다. 완전히 무가치한 전략을 가지고 있는데 민병대가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민병대 조직 자체가 모험주의 행위를 가져오고 적을 자극하고 물리적 투쟁을 정치적 투쟁에 대신한다는 등의 주장은 넌센스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들에는 정치적 비겁만이 배어 있을 뿐이다.

    전위의 강력한 조직인 민병대는 모험주의, 개인적 테러주의, 유혈낭자한 자발적 투쟁의 폭발 등에 대한 아주 확실한 대비책이다.

    동시에 민병대는 파시즘이 노동계급에게 강요하는 내전을 최소화시키는 유일한 진지한 방법이다. “혁명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노동자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조국의 소년”이라는 파시스트 애국자들을 종종 교정시킨다면 새로운 파시스트 도당의 모집은 비교할 수 없이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자신의 논리에 뒤엉킨 전략가들은 더 바보같은 주장들을 가지고 나온다. 10월 23일자 [인류]지의 내용을 문장 그대로 옮긴다: “파시스트들의 권총 발사를 우리의 권총발사로 대응한다면 파시즘이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며 반파시즘 투쟁을 통해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 전체에 대항한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몇 줄 안되는 말로 이보다 더 커다란 혼란과 이보다 더 많은 오류들을 집합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파시스트들의 공격에 대해서 우리를 방어하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이들은 ...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투쟁 자체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존재하는 모든 사회악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들”이기 때문이다.

    파시스트들이 혁명가를 살해하고 노동계급 신문사 건물에 불을 지를 때 노동자들은 한숨을 쉬면서 철학자 신세가 되어야 한다: “아 슬프다! 살인과 방화는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들이다.” 그리고 평온한 마음으로 집으로 가야한다. 숙명주의적 무기력이 맑스의 전투적 이론을 대신한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계급의 적들에게만 유리할 뿐이다. 물론 소부르주아 계급의 몰락은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다. 한편 파시즘의 성장은 소부르주아 계급의 몰락의 산물이다. 반면에 노동계급의 고통의 증대와 반발 역시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그리고 한편 민병대는 계급투쟁 격화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인류]지의 맑스주의자들에게 파시스트 도당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합당한 산물이며 노동자 민병대는 ...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합당한 산물이군? 앞뒤를 분간하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체제 전부를 다루어야 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인간의 머리 위에서? 여러 나라의 파시스트들은 권총으로 시작하여 노동자 조직 “체제” 전부를 파괴시켰다. 나중에 우리 차례가 되어 공격을 하기 위해서 무기를 들고 방어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적들의 무장 공격을 제지할 수 있는가?

    [인류]지는 말로는 방어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대중의 자기방어” 형태만을 고집한다. 민병대는 해롭다. 왜냐하면 전투부대와 대중을 갈라놓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파시스트 무장 도당들은 왜 반동적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지 않고 반대로 잘 조직된 공격을 통해 대중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이들이 대담해지도록 만드는가? 혹시 노동계급 대중이 탈계급화한 소부르주아 대중보다 전투성이 떨어지는가?

    가망없이 논리가 뒤엉키자 [인류]지는 마침내 주저하기 시작한다: 대중의 자기방어는 특별 “자기방어 그룹”의 창설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부당한 민병대 대신 특별 그룹이나 부대가 제안된다. 처음 보기에는 이름 차이 뿐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인류]지가 제안한 이름은 아무 의미도 없다. “대중의 자기방어”는 말할 수 있어도 “자기방어 그룹”은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룹의 목표는 자기방어가 아니라 노동자 조직의 방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이름의 문제가 아니다. [인류]지에 의하면 “자기방어 그룹”은 “폭동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무기 사용을 포기해야 한다. 이 현자들은 노동계급을 아기 취급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손에 면도칼을 들고 있으면 안된다. 더욱이 면도칼은 파시스트 그룹 [왕의 궁전]의 전유물이다. 그리고 이 그룹은 합당한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그리고 면도칼의 도움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전복시켰다. 그건 그렇고 “자기방어 그룹”은 파시스트의 권총 앞에 어떻게 자기방어를 할 것인가? 물론 “이념적으로” 방어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숨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손으로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없으니 발로라도 “자기방어”를 추구해야만 할 것이다. 한편 파시스트들은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노동자 조직들을 공격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무지막지한 패배를 당한다 할지라도 어쨌든 “폭동주의”의 죄는 피할 것이다. “볼셰비키주의”의 깃발 아래 행해지는 이 거짓 잡담은 구역질과 혐오감만을 가져온다.

    지금도 행복하게 기억되는 “제 3기” 동안 [인류]지의 전략가들은 바리케이드 열병에 걸려 매일 거리를 “정복했고” 자신들의 굉장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전부 “사회 파시스트”라고 낙인찍었다. 이때 우리는 이렇게 예언했다: “이 신사양반들은 손가락 끝을 불에 데이면 곧 최악의 기회주의자가 될 것이다.” 이 예언은 지금 완전히 올바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회당 내부에서 민병대를 지지하는 움직임이 커지며 힘을 얻고 있는 이 순간 소위 공산당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전투부대로 조직하려는 선진노동자들의 열망을 식히기 위해 고무호스를 찾아 뛰어간다. 이것보다 더 사기를 저하시키고 더 천벌받을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10.노동자 민병대는 조직되어야 한다

    사회당 대오 내에 이렇게 반대하는 소리가 있다: “민병대는 조직되어야 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 고함지를 필요는 없다.” 일의 실제적인 측면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보호하고자 하는 동지들에 대해서 축하를 드릴 뿐이다. 그러나 민병대가 사방이 둘러싸인 곳에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은 채 조직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것 같다. 지금은 수만의 그리고 나중에는 수십만의 전투 부대원들이 필요하다. 수백만의 남성 여성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민병대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지원자들 주위에 열정적인 공감과 적극적인 지지의 분위기를 조성해야 전투 부대원들이 모일 것이다.

    일이 새어나가지 않게 배려하는 것은 일의 기술적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일을 위한 정치적 캠페인은 모임, 공장, 거리, 광장 등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져야 한다.

    민병대의 기간요원들은 노동현장에 따라 조직된 공장노동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들은 서로를 잘 알며 가장 수준 높은 관료들보다 적들의 도발에 맞서서 자신들의 전투 부대를 더 잘 보호할 수 있다. 대중의 공개적인 참여 없이는 음모적인 총참모부는 위험한 순간에 허공에 매달려 무기력에 빠질 것이다. 모든 노동계급 조직들은 민병대 조직에 몰두해야 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 노동계급 정당과 노동조합의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손에 손을 잡고 이들은 대중을 추동시켜야 한다. 그러면 인민 민병대의 성공은 확실히 보장될 것이다.

    “그렇지만 노동자들이 어디서 무기를 구할 것입니까?”라고 냉정한 “현실주의자” 즉 공포에 질린 속물이 반대한다. “적들은 소총, 대포, 탱크, 독가스, 비행기를 가지고 있지만 노동자들은 기껏해야 몇백 정도의 권총과 주머니칼을 가지고 있을 뿐이오.”

    이 반대의 말 속에는 노동자들을 겁주기 위한 모든 생각이 모여 있다. 그리고 이들 현명한 양반들은 파시스트 도당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국가가 가지고 있는 병기와 동일시한다. 그리고 이들은 국가에 대해서 파시스트 도당들을 무장 해제시키라고 요구한다. 놀라운 논리가 아닌가! 이들의 논리는 두가지 모두 틀렸다. 프랑스에서 파시스트들은 국가를 장악하려면 한참 멀었다. 2월 6일 이들은 국가경찰과 무력으로 충돌했다. 따라서 파시스트들에 대한 직접적 무장 투쟁의 문제가 제기된 마당에 대포와 탱크를 말하는 것이 틀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파시스트들은 우리보다 돈이 많다. 이들이 무기를 구입하는 것은 우리보다 더 쉽다. 그러나 확고한 혁명적 지도력을 인식하고 있을 경우 노동자들은 쪽수, 헌신성, 결의 등의 면에서 더욱 우월하다.

    다른 채널을 활용하면서 동시에 노동자들은 체계적으로 파시스트들을 무장 해제시키면서 스스로 무장할 수 있다.

    이것은 파시즘에 대한 투쟁의 가장 진지한 형태 가운데 하나이다. 노동자의 무기고가 파시스트들의 무기고를 희생시켜 무기로 채워지기 시작하면 은행과 트러스트들은 파시스트들에게 무기 자금을 제공할 때 신중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만 놀란 당국은 노동자들에게 무기 제공처를 더 많이 제공하지 않기 위해 파시스트들을 무장시키는 일을 막기 시작할 것이다. 오직 혁명적 전술만이 부산물로 정부에 의한 “개량”이나 양보조치를 이끌어 낸다는 것을 우리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파시스트들을 무장 해제시킬 것인가? 신문만으로는 안된다. 전투부대가 창설되어야 한다. 정보기구가 설립되어야 한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진지하게 일을 착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수천명의 밀고자들과 우호적인 조수들이 모든 곳에서 자원하여 나타날 것이다. 노동계급의 행동에는 의지가 필요하다.(필자 주: 10월 30일자 [인류]지에서 베이양-꾸뛰리에가 적절하게 증명하고 있다. 즉 정부가 파시스트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일은 무의미하며 오직 대중운동만이 이들의 무장 해제를 가져올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문제는 당연히 “이념적”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인 무장 해제의 문제인 이상 [인류]지가 노동자 민병대의 필요성을 인정하리라고 우리는 믿는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취하는 모든 올바른 행동에 대해서 우리는 언제나 진심으로 환영할 준비가 되어있다. ... 그러나 슬프게도 11월 1일 베이양-꾸뛰리에가 확실히 뒷걸음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파시스트들은 공동전선이 아니라 공동전선의 압력과 통제 하에 두메르그 정권의 경찰에 의해서 무장 해제될 것이다.” 놀라운 아이디어이다. 혁명이 아니라 “이념적” 압력만을 통해서 보나파르트 경찰을 노동계급의 집행기관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니! 평화적 방법으로 가능하다면 누가 무장봉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고 할까? 공동전선의 “압력과 통제 하에” 제르멩-마르뗑이 은행을 국유화하고 마르샹도는 동료 따르뒤를 필두로 하여 반동 음모자들을 감옥에 처넣는다. 혁명적 투쟁 대신 “압력과 통제”를 행사한다는 생각은 베이양-꾸뛰리에의 발명품이 아니다. 오토 바우어, 힐퍼딩, 러시아 멘셰비키 단 등에게서 그가 빌려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의 목적은 노동자들을 혁명적 투쟁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려는 것이다. 사실 적대적인 경찰의 손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손으로 파시스트들을 무장 해제시키는 것이 100배나 더 손쉬운 일이다. 그리고 공동전선이 충분히 강력해져서 권력 장악 전이 아니라 후에 국가기구를 “통제”하면 공동전선은 부르주아 경찰을 몰아내고 대신 노동자 민병대를 수립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파시스트들의 무기가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 프랑스의 경우 조직 노동자는 백만이 넘는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숫자는 적다. 그러나 노동자 민병대 조직을 위해서는 완벽히 충분한 숫자이다. 정당과 노동조합이 회원의 10분의 1만 무장시킨다 하더라도 이미 10만 병력이 된다. 노동자 민병대에 대한 “공동전선” 호소가 나간 이후 앞으로 나설 지원자의 수는 이 숫자를 훨씬 넘어설 것이다. 이 점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 정당과 노동조합의 기부금, 모금, 자발적인 후원금 등은 한 두 달 내로 10만에서 20만의 노동계급 전투원들을 확실히 무장시킬 것이다. 그러면 파시스트 오합지졸들은 즉시 꼬리를 다리 사이에 감추고 전의를 상실할 것이다. 그러면 이후 정세는 비교할 수 없이 더욱 우리에게 유리할 것이다.

    무기 부족을 비롯한 다른 객관적인 이유들을 들면서 지금까지 민병대 창설을 위한 시도가 없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행위이다. 주요한 장애물 아니 유일한 장애물은 노동자 조직의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보수적이고 수동적인 태도이다. 지도자들이 회의론자가 되어 노동계급의 힘을 믿지 않는다. 이들은 대중의 혁명적 에네르기가 아래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마당에 이 에네르기에 출구를 제공하는 대신 모든 종류의 기적에 희망을 두고 있다. 사회당 노동자들은 지도자들이 즉시 정신을 차려 노동자 민병대 창설에 나서도록 강제해야 된다. 아니면 이들이 좀더 젊고 패기에 찬 신진 세력에게 지도자의 자리를 넘겨줄 것을 강요해야 한다.

     

    11.노동계급의 무장

    선전 선동 없는 파업은 생각할 수도 없다.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설득하되 어쩔 수 없을 경우에는 폭력을 사용하는 파업방위대(pickets) 없는 파업 역시 생각할 수 없다. 파업은 계급투쟁의 가장 초보적인 형태로 언제나 “이데올로기적” 방식과 물리적 방식을 적절히 배합한다. 기본적으로 파시즘에 저항하는 투쟁은 파업이 파업방위대를 필요로 하듯이 민병대를 필요로 하는 정치투쟁이다. 파업방위대는 노동자 민병대의 맹아이다. “물리적인” 투쟁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모든 투쟁을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신은 육체가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전쟁이론가 클라우제비츠의 멋진 말을 그대로 옮기면 전쟁은 다른 수단을 가지고 하는 정치행위이다. 이 정의는 내전에도 완벽하게 적용된다. 물리적 투쟁은 정치투쟁의 “다른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두 투쟁 형태를 대치시키는 것은 인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내적 논리에 의해 정치투쟁이 물리적 투쟁으로 변모할 때 이것을 우리 마음대로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혁명정당의 의무는 정치가 공공연한 무장 충돌로 변모할 수 밖에 없음을 제 시간에 예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지배계급이 준비하는 것과 같이 이 순간을 준비하는 것이다.

    파시즘의 폭력에 대한 자기 방어로 노동자 민병대를 창설하는 것은 노동계급을 무장시키는 첫 조치이지 마지막 조치가 아니다. 노동계급과 혁명적 농민을 무장시켜라! 이것이 우리의 구호이다.    

    최종적으로 노동자 민병대는 모든 근로인민을 포괄해야한다. 이 강령은 노동자국가에서만 그 완벽한 실현이 가능할 것이다. 모든 생산수단 그리고 결과적으로 모든 파괴수단 즉 모든 무기와 무기공장들이 노동자국가의 수중에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빈손으로 노동자국가를 건설할 수는 없다. 르노델 같은 정치 환자들만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합헌적 길을 말할 수 있다. 합헌적 길은 파시스트 도당들이 점령하고 있는 참호들 때문에 차단되어 있다. 우리 앞에는 많은 참호들이 놓여있다. 부르주아 계급은 노동계급의 권력장악을 저지하기 위해 경찰과 군대의 도움을 받아 열번 이상의 쿠데타를 기꺼이 기도할 것이다. 사회주의 노동자국가는 승리한 혁명에 의해서만 수립될 수 있다.

    모든 혁명은 경제적 정치적 상황의 전개와 함께 준비된다. 그러나 결국 적대 계급들 간의 공공연한 무장 충돌로 승리 여부가 판가름났다. 혁명의 승리는 오랜 정치선동, 대중에 대한 오랜 교육과 조직의 결과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무장 충돌 역시 이미 오래 전에 준비되어야 한다.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이 투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것을 선진노동자들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해방을 보증하는 무기를 들기 위해 손을 뻗어야 한다.

    지금처럼 중요한 시기에 혁명정당은 노동자들에게 자기무장의 필요성을 쉬지 않고 설교하고 최소한 노동자 전위의 무장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이것이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

    최근 영국노동당의 선거 승리도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전혀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는다. 다음 의회 선거가 노동당을 절대 다수당으로 만든다 치더라도 아니 더 나아가 지금은 개연성이 전혀 없지만 이 정당이 사회주의 혁명의 길로 나아간다 치더라도 즉시 상원, 왕, 은행, 주식시장, 관료집단, 언론 등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면 이 정당의 대오는 두 조각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좀더 급진적 분파인 좌파는 의회에서 소수가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파시스트운동은 유례없는 세를 얻게 될 것이다. 지방의회 선거 결과에 놀라 영국 부르주아 계급은 이미 적극적으로 의회 바깥에서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한편 노동당 지도자들은 의회의 성공으로 노동계급의 걱정을 잠재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영국의 사태들을 장 롱게(Jean Longuet)의 장미빛 안경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사실 노동당 지도자들이 준비가 덜 되어있으면 있을수록 영국 부르주아 계급은 내전을 더욱더 잔인하게 노동계급의 어깨 위에 부담시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급 전부를 무장시킬 무기를 어디서 구한다는 말이요?”라고 다시 한번 자신의 내적 무기력을 객관적 불가능으로 착각하는 회의론자 양반들이 반대를 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했던 질문이 역사상 모든 혁명 전야에 제기되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혁명은 인류 발전의 중요한 단계들을 구분한다.

    노동계급은 무기를 생산, 수송하고 무기고를 세우며 이 건물을 방어하고 군대에 들어가 군대의 모든 장비들을 만든다. 노동계급을 무기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자물통이나 벽이 아니라 복종의 습관, 계급지배의 최면, 민족주의적 해악 등일 뿐이다.

    이러한 심리적 벽들만 파괴시키면 어떤 돌담도 노동계급을 막지 못한다. 노동계급이 무기를 원하기만 하면 무기는 나온다. 혁명정당의 임무는 이 욕망을 일깨우고 이 욕망의 실현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프로싸르와 수백명의 공포에 질린 의회주의자, 신문기자, 노동조합 관료 등이 자신들의 마지막이자 가장 심중한 주장을 내세운다: “최근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비극적인 경험들을 보았을 때 일반적으로 진지한 사람들이 물리적 투쟁의 성공에 희망을 걸 수 있습니까? 오늘날의 기술, 탱크, 독가스, 비행기 등을 생각해보시오” 몇몇의 “진지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배우기를 원치 않으며 공포에 질린 나머지 자기들이 그동안 배웠던 것도 까먹고 있다는 사실을 이 주장은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나라 뿐 아니라 계급 관계들이 제기하는 근본 문제들은 물리적 힘으로 해결된다는 사실을 지난 20년의 역사는 특히 명쾌하게 입증하고 있다. 군사기술의 발전은 전쟁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오랫동안 평화주의자들은 희망해왔다. 그리고 속물들은 지난 수십 년간 군사기술의 발전은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계속 외쳐왔다. 그러나 전쟁과 혁명은 계속된다. 군사기술의 모든 힘을 발견한 지난 번 전쟁 즉 제 1차 세계대전 이래로 승리한 혁명을 포함해 계속 혁명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이 이어졌다.

    프로싸르와 그의 동료들은 낡아빠진 말들을 최근에 발견한 사실인 것처럼 들이민다. 자동소총과 기관총 대신 이번에는 탱크와 폭격기의 가공할 위력을 말한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각각의 군사기계 뒤에는 기술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간들이 존재한다. 역사발전이 사회 앞에 생사의 문제로 도저히 그 성취를 지연시킬 수 없는 혁명적 과업을 제기할 때, 그 승리가 사회의 구원과 직결된 진보적 계급이 존재할 때, 이때에 정치투쟁의 발전은 혁명적 계급 앞에 아주 다양한 가능성들을 열어 놓는다.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적의 군사력을 마비시키고 이들을 혁명의 편으로 획득할 그런 가능성들 말이다. 속물들의 생각에는 이러한 가능성들은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운좋은 우연”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사실 가장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그리고 기본적으로 필연적인 결합 가운데 모든 종류의 가능성들이 모든 위대한 즉 진정으로 대중적인 혁명에서 열린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승리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유리한 가능성을 활용하려면 혁명적 의지, 승리하고자 하는 강철같은 결의, 대담하고 명민한 지도부 등을 보유해야 한다. [인류]지는 말로는 “노동자 무장”에 찬성하면서 행동으로는 포기하고 있다. 이 신문에 의하면 “완전한 혁명적 위기”에만 가능한 구호를 지금 제출하는 것은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냥감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소총에 총알을 장전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너무 신중한” 사냥꾼이 말한다. 그러나 사냥감이 나타났을 때 장전하면 너무 늦다. “완전한 혁명적 위기”에 아무 준비도 없이 노동계급을 동원시키고 무장시킬 수 있다고 [인류]지의 전략가들은 정말 생각하고 있는가? 많은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무기가 수중에 있어야 한다. 군사적 중핵들이 필요하다. 무기를 확보하겠다는 대중의 꺾을 수 없는 욕망이 필요하다. 학교 뿐 아니라 대중의 일상적 투쟁에서도 끊을 수 없는 유대를 위한 부단한 준비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즉시 민병대를 창설하고 동시에 혁명적 노동자 농민 전체의 무장을 주장하는 선전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

     

    12.그러나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에서 패배했는데...

    자본주의 체제 전체가 위기에 처해 있는 지금 의회주의 체제는 무기력에 빠져있다. 이 현상은 너무 명백해서 노동운동 내부의 속류 민주주의자들 즉 르노델, 프로싸르와 이들의 모방자들은 자신들의 화석화된 주장들을 입증하는 단 하나의 현상도 찾아낼 수 없다. 그러자 더욱더 적극적으로 과거 혁명 과정의 모든 패배와 실패를 들춘다. 이들의 사고방식은 이렇다: 순수 의회주의도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무장투쟁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노동자 봉기의 패배는 이제 이들이 아끼고 아끼는 주장이 되었다. 혁명적 방식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속류 민주주의자들의 이론적 정치적 파산은 쇠퇴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방식을 옹호하는 경우보다 더 뚜렷하게 그 모습이 드러난다.

    혁명적 방식이 자동적으로 승리를 보장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정적인 것은 방법 자체가 아니라 이 방법의 정확한 적용 즉 사건의 와중에 제시되는 맑스주의 노선, 강력한 조직, 오랜 경험을 통해 획득된 대중의 자신감, 명민하고 대담한 지도부 등이다. 모든 투쟁의 이슈는 투쟁의 순간과 상태 그리고 계급 역관계에 의존한다. 무장 충돌이 유일한 혁명적 방식이거나 모든 조건에서 효력을 발생하는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하는 것 만큼 맑스주의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은 없을 것이다. 맑스주의는 의회주의적이든 봉기든 어떤 것도 신성시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는 시간과 장소가 있다. 우선 해야 할 말 한마디가 있다:

    의회주의의 길을 가면 사회주의적 노동계급은 갈 곳이 없으며 권력을 장악해본 적도 없고 그 근처에 가까이 가본 적도 없다.

    샤이데만, 허먼 뮐러, 맥다널드 등의 정부는 사회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자본주의의 적들에 대항해서 이 체제를 지키라는 하나의 조건으로만 부르주아 계급은 사민주의자들과 노동당의 정권을 허용했다. 그런데 이들은 이 조건을 꼼꼼하게 충족시켰다. 순수하게 의회적이며 반혁명적 사회주의는 사회주의 내각을 성립시킨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다만 노동자 정당을 이용하여 장관 자리나 차지하는 구역질 나는 배신자들인 밀레랑, 브리앙, 비비아니, 라발, 폴-봉꾸르, 마르께 등을 배출했을 뿐이다.

    반면에 혁명적 방식으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역사적 경험들이 있다. 1917년 러시아, 191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1930년 스페인 등이 그 경우이다. 러시아에서는 강력한 볼셰비키당이 있었는데 이 당은 오랜 기간동안 혁명을 준비했으며 권력을 어떻게 장악하는 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페인의 개량주의 정당들은 혁명을 준비하지도 지도하지도 않았다. 다만 혁명의 격동에 시달렸을 뿐이다.

    자신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권력이 자기들 손에 쥐어지자 놀라자빠진 이들은 이 권력을 마음씨 좋게 부르주아 계급에게 다시 넘겼다. 이렇게 이들은 노동계급의 자신감을 파괴시켰으며 더욱이 노동계급에 대한 소부르주아 계급의 신뢰감을 파괴시켰다. 이들은 파시스트 세력의 성장에 필요한 조건을 준비해 주고 결국 파시즘에 잡아먹혔다.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우리가 인용했듯이 내전은 정치의 계속이되 다른 수단을 통한 정치의 계속이다. 내전의 결과는 10분의 1은 말할 것도 없고 4분의 1은 내전 자체의 발전, 내전의 기술적 수단, 순수한 군사적 지도력에 달려 있으며 10분의 9는 아닐지라도 4분의 3은 정치적 준비에 달려있다.

    이 정치적 준비의 내용은 무엇인가? 대중의 혁명적 응집력, “민주적 노예소유주들”이 자신들에 대해서 관용, 은혜, 신뢰 등을 보일 것이라는 굴종적인 희망에서 대중이 해방되는 것, 공식 여론을 거부하며 부르주아 계급이 근로인민에게 드러내는 비타협적 적대의 10분의 1이라도 부르주아 계급에게 보일 수 있는 법을 아는 혁명적 중핵의 교육 등이 정치적 준비의 내용이다. 이러한 준비와 단련이 없이는 언제나 우리에게 강제로 닥치는 내전은 노동계급에게 가장 불리한 조건 속에서 닥칠 것이고 많은 불투명한 요인들에 우리를 내던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군사적 승리를 쟁취하더라도 권력 장악에 실패할 수도 있다. 계급투쟁이 불가피하게 무장 충돌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미리 알지 못하는 자는 누구든지 눈뜬 장님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무장 충돌과 이 결과를 통해 투쟁하고 있는 적대 계급들의 과거 정책들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 역시 눈 뜬 장님이다.

    오스트리아에서 패배한 것은 봉기의 방법이 아니라 오스트리아-맑스주의이다. 그리고 스페인의 경우는 무원칙한 의회 개량주의이다.

    1918년 오스트리아 사회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이 획득한 권력을 노동계급의 등 뒤에서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겨주었다. 1927년 이 개량주의자들은 승리의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노동자 봉기를 비겁하게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방위대가 봉기대중을 진압하게 만들었다. 이 결과 이 개량주의자들은 파시스트 돌푸스의 승리를 자초했다. 바우어와 그 동료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평화적인 발전을 원하지만 적이 이성을 상실하여 우리를 공격하면 그때는...”

    이러한 사고는 아주 “지혜롭고” 아주 “현실적인”것처럼 보였다. 불행하게도 마르쏘 삐베르가 기대고 있는 모델이 바로 이 오스트리아-맑스주의자들이다. “만약에... 한다면, 그렇다면.” 사실 이런 방식의 사고는 노동자들에게는 하나의 덫이다. 이들을 안심하게 만들고 속이기 때문이다. “만약에”라고 생각하는 것은 투쟁 형태가 부르주아 계급의 선의에 따르며 계급 이해의 비타협성에 따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만약에”에는 “만약에” 우리가 지혜롭고 신중하고 화해적이라면 부르주아 계급 역시 우리에게 진심을 보일 것이며 모든 것이 다 평화롭게 풀릴 것이라는 사고가 깔려있다.

    “만약에”라는 유령을 뒤쫓다가 오토 바우어와 여타 오스트리아 사민주의 지도자들은 수동적으로 반동에 대해 후퇴했다. 그리고 진지를 하나 하나 내주고 대중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다시 후퇴했다. 결국 이들은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마지막 보루에서 결국 이들은 싸움을 인정하고 싸웠으나 패배했다.

    스페인의 경우는 오스트리아와 달랐다. 그러나 패배의 원인은 기본적으로 같았다. 러시아 사회혁명당이나 멘셰비키처럼 스페인 사회당은 공화파 부르주아 계급과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을 막기 위해서였다. 2년 동안 권력을 잡은 사회당은 민족적, 사회적, 농업적 개량주의 조치라는 빵가루를 통해 부르주아 계급이 대중의 눈에서 체면을 차리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가장 혁명적 분자들을 탄압했다.

    결과는 두가지로 나타났다. 노동자 정당이 올바른 정책을 폈을 경우 혁명의 열화 속에서 눈처럼 녹았을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anarcho-syndicalism)가 강화되었고 노동계급의 전투적 부위가 이 세력 주위로 모였다. 한편 사회-카톨릭 세력의 선동이 부르주아-사회주의 정부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능숙하게 이용하였다.

    사회당의 세력이 충분히 잠식되자 부르주아 계급은 전자를 권력에서 몰아내고 전체 전선에서 공세로 돌입했다. 사회당은 가장 불리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사회당의 이전 정책의 결과였다. 부르주아 계급은 이미 우익 쪽에서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무정부적 조합주의 지도자들은 혁명 과정 동안 전문적 혼동주의자들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전형적인 오류들을 이미 저질렀다. 그런데 이들은 배신자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봉기를 지지하지 않았다. 이 운동은 일반적인 성격을 띠지 못하고 이곳 저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정부는 흩어진 노동자 대오 하나 하나에 공격을 가했다. 반동 세력이 강요했던 내전은 결국 노동계급의 패배로 끝났다.

    부르주아 정부에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해서는 안된다는 정치적 결론을 스페인은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 결론 자체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전혀 충분치 못하다. 오스트리아-맑스주의가 가지고 있다고 주장된 “과격주의”는 스페인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내각에 참여하는 정책과 나은 것이 하나도 없다. 두 경향 사이의 차이는 기술적인 것이지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두 경향 모두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충심”에 대해 “충심”으로 보답하기를 기다렸다. 두 경향 모두 노동계급을 재앙으로 내몰았다.

    오스트리아나 스페인이나 패배한 것은 혁명적 방법이 아니다. 혁명적 상황에서 기회주의적 방법이 패배한 것이었다. 이 두가지는 전혀 다르다!

    여기서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에서 코민테른의 정책에 대해서 거론하지는 않겠다. [진실]지 신문철과 최근 몇년 동안에 나온 일련의 팜플렛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예외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공산당들은 “제 3기”와 “사회파시즘” 등 황당한 이론으로 족쇄가 채워져서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당했다. 혁명의 방법들을 “모스크바”의 권위로 파괴하면서 이들은 진정으로 맑스주의적이며 진정으로 볼세비키적인 정책을 봉쇄하였다. 혁명의 근본적 기능은 모든 이론과 방법들을 신속하며 무자비한 검토의 도마 위에 올려놓는 일이다. 따라서 잘못된 이론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 곧 형벌이 따른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페인 노동계급의 패배에 대해서 코민테른은 측정할 수 없는 엄청난 책임을 지고 있다. “혁명적” 정책을 말로 수행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올바른 정책이 필요하다. 이외의 다른 비결을 어느 누구도 아직 찾지 못했다. 

     

    13.공동전선과 권력 쟁취를 위한 투쟁

    사회당과 공산당의 공동전선은 엄청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이미 말한바 있다. 진지하게 이것을 원하기만 한다면 공산당은 내일 프랑스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주오와 일반적으로 노동총동맹의 관료들이 공동전선 밖에 머물면서 “독자성”을 지키고 있는 사실은 우리가 하는 말과 모순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만 그렇다. 대중을 투쟁의 장으로 불러 일으키는 거대한 과업과 거대한 위험의 시대에는 노동계급의 정치조직과 노동조합 조직 사이의 벽은 사라진다. 실업과 파시즘으로부터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법을 노동자들은 알고 싶어한다. 그리고 자본으로부터 독립하는 법을 알고 싶어한다. 주오가 노동자 정책으로부터 “독립”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들은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런데 슬프게도 주오는 부르주아 정책에 대해서는 아주 비독립적이다. 공동전선에서 구성된 노동자 전위가 올바르게 투쟁의 길을 간다면 노동조합 관료들이 설치해 놓은 모든 장애물들은 노동계급의 살아있는 급류에 의해 전부 떠내려갈 것이다. 지금 상황의 열쇠는 공동전선이 쥐고 있다. 만약 이 열쇠가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다면 1917년 볼셰비키당이 막지 않았을 경우 러시아에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체결한 공동전선이 했던 그런 통탄할 역할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 사회당과 공산당에 대해서 특별히 말하지는 않겠다. 공동전선을 위해 두 정당이 독자성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두 노동자 정당은 과거 날카롭게 경쟁했었는데 이들이 상호비방과 당원을 서로 빼앗아 가려는 시도를 포기한 것만으로도 독자적인 정당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지금 존재하는 “원칙의 차이들”을 언급하더라도 사태가 바뀌지는 않는다. 원칙의 차이들이 공공연히 적극적으로 표출되지 않는 한 지금처럼 양 정당에 책임이 막중한 순간에는 원칙의 차이들은 정치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들은 마치 대양의 맨 밑에 가라앉아 있는 보물과도 같은 것이다. 공동전선이 두 당의 통합을 가져올 지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프랑스의 운명에 아주 중요한 시기에 공동전선은 연방주의 원칙으로 창립된 불완전한 정당처럼 움직인다.

    공동전선은 무엇을 원하는가? 지금까지 공동전선은 대중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았다. 파시즘에 반대하는 투쟁이 공동전선의 목표인가? 그러나 지금까지 공동전선은 파시즘에 대항해서 어떻게 싸울 것인지를 설명한 적이 없다. 이외에도 파시즘에 대항하는 순수하게 방어적인 블럭은 두 정당이 다른 모든 일에서 완전한 독자성을 보존할 경우에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다르다. 두 정당의 공적인 활동을 전부 포괄하는 그리고 노동계급의 다수를 획득하려는 두 정당의 상호 경쟁적 투쟁이 배제된 그런 공동전선이 존재하고 있다. 이 상황으로부터 모든 결과들이 유추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사항은 권력 쟁취를 위한 투쟁이다. 공동전선의 목표는 공동전선 정부 즉 사회당-공산당 정부, 블룸-까쉥 정부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이 점을 공개적으로 말해야 한다. 만약 공동전선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대중이 공동전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유일한 조건이 이것이라면 권력 쟁취 구호를 생략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수단으로 권력을 장악할 것인가? 이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공동전선은 의회투쟁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다만 의회의 무기력을 폭로하기 위해 의회를 활용한다. 그리고 대중에게 현 정부가 의회 바깥에 정치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강력한 대중운동을 통해서만 전복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만 의회가 이용될 수 있다.

    권력 쟁취를 위한 투쟁은 반(半)의회적 보나파르트 정권이 제공하는 모든 가능성들을 활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혁명적 방식으로 이 정권을 전복시키고 부르주아 국가를 노동자국가로 대체해야 한다.

    지난 지방의회 선거에서 사회당과 특히 공산당의 득표율이 증대되었다. 그러나 이 자체로는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 붕괴되기 직전 독일공산당도 득표율이 지금보다 훨씬 크게 상승했다. 극좌 또는 극우 정당들의 정책과는 무관하게 새로운 광범위한 피억압 대중이 전체 상황에 의해서 좌로 움직인다. 프랑스 공산당은 표를 더 얻었다. 지금의 보수적 정책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극좌”이기 때문이다. 사회당과 공산당에 더 많은 표를 던지는 것을 통해 대중은 노동계급 정당들이 좌로 움직이도록 원동력을 제공했다. 왜냐하면 대중은 자신들의 정당들보다 훨씬 더 왼쪽에 있기 때문이다. 이 경향에 대해서 더욱더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현상이 있다. 사회당 청년들이다. 청년은 계급 전체 그리고 이 계급의 전위가 보이고 있는 상태를 민감하게 측정하는 풍향계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 공동전선이 수동성으로 인해 수립되지 못하거나 설상가상으로 급진당과 쓸데없는 연애에 돌입한다면 공동전선보다 “좌”에 있는 무정부주의, 무정부적 조합주의 또는 기타 정치적 해체를 상징하는 그룹들이 그 세력을 강화할 것이다. 동시에 재앙의 전조인 대중의 무기력과 무관심이 활개를 칠 것이다.

    반면 공동전선이 파시스트 도당들의 공격에 대해 후위와 좌우위를 확신시키면서 권력 장악을 구호로 내세우며넓은 정치적 공세의 길로 나설 경우 너무도 강력한 반향을 불러 일으켜 가장 낙관적인 예상조차도 상회할 상황을 가져올 것이다.

    거대한 대중운동이 몇겹으로 봉해진 책인 것처럼 생각하는 공허한 사기꾼만이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14.수동성의 강령이 아닌 혁명의 강령을

    대중의 상태가 더 이상 악화되는 것을 막으려면 자본주의적 소유권을 혁명적으로 침해해야 한다.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은 이 기본 사고에서 출발해야 한다. 공동전선의 정치투쟁은 잘 짜여진 이행기 강령(transitional program) 에 기초해야 한다. 노동자 농민 정부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을 보장할 그런 조치들의 체계가 바로 이행기 강령이다.

    지금 강령은 양심을 편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혁명적 행동을 지도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죽은 문자에 불과하다면 강령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예를 들어 벨기에 노동자당은 모든 “국유화” 조치들을 담고 있는 드만(de Man)의 휘황찬란한 계획을 채택했다. 그러나 당 강령의 실현을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이 강령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파시스트들의 강령은 황당하고 거짓이며 선동적이다. 그러나 파시즘은 권력을 잡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가장 과학적인 강령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전위가 국가를 장악하기 위해 대담한 투쟁을 전개하지 않는다면 이 강령의 가치는 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회 위기는 정치적으로 표현하면 권력의 위기이다. 사회의 옛 주인은 파산했다. 새로운 주인이 필요하다.

    만약 혁명적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지 않는다면 파시즘이 불가피하게 권력을 손에 넣을 것이다!

    “중간 계급들”을 위한 이행기 요구들이 실린 강령은 중간 계급의 진정한 요구에 부응하며 또 한편 사회주의를 향한 발전의 요구에 부응한다면 자연스럽게 중요하게 부각될 것이다.(필자 주: [해방된 학교]에서 쎄라 동지는 농민 각 층의 경제 상황과 이들의 정치 경향을 묘사하는 흥미있는 설문지를 실었다. 공립학교 교사들은 농촌에서 공동전선의 대체될 수 없는 인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다가올 시기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껍질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소규모의 실험과 소규모의 실험실을 운용하기에 지금 시기는 너무도 불리하다. 혁명적 교사들은 사회당에 들어가 그 혁명적 분파를 강화시키고 이 분파를 농민 대중과 연결시켜야 한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건데 무게 중심은 특별한 강령에 있지 않다. 중간 계급은 많은 강령들을 보아왔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강령이 실현될 것이라는 자신감이다. “이번에는 노동계급 정당들이 뒤로 물러설 것 같지 않군”이라고 농민들이 말하는 순간 사회주의 대의는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 위해서 모든 장애물을 분쇄할 준비가 확실히 되어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투쟁의 수단들은 발명될 필요가 없다. 세계 노동계급 운동의 전체 역사가 이것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부각시키는 노동계급 언론의 집중된 캠페인, 유약한 의회 의원들이 아니라 인민의 지도자들에 의한 의회에서의 진정 사회주의적 연설, 혁명적 목적을 위한 모든 선거 투쟁 활용, 대중들이 연설하는 연사의 말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 순간 필요한 구호와 지시사항들을 전달받는 반복되는 모임, 노동자 민병대의 창설과 강화, 반동 파시스트 도당들을 거리에서 몰아내는 잘 조직된 시위, 항의 파업, 결의에 찬 계급투쟁의 깃발 아래 노동조합 평회원의 단결과 세력 증대, 군대를 인민의 대의로 획득하는 끈질기고 면밀하게 계산된 활동, 더 광범위한 파업, 좀더 강력한 시위, 도시와 농촌의 근로 대중에 의한 총파업, 보나파르트 정권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 노동자 농민 권력 쟁취를 위한 투쟁 등이 이런 수단들이다.

    승리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아직도 있다. 파시즘은 아직 대중운동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급진당의 불가피한 붕괴는 보나파르트 정권의 대중기반이 협소해지고 있으며 두 극단 진영이 성장하고 있으며 이 두 진영에 의한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전은 몇년의 문제가 아니라 몇달의 문제이다. 이 기간의 길이는 어느 누구에 의해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세력들 간의 투쟁에 달려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동계급과 그 공동전선에 달려있다.

    혁명의 잠재 역량은 파시즘과 전체 반동의 연합 세력보다 훨씬 더 크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회의론자들을 노동자 대오로부터 가차없이 추방해야 한다. 대중의 깊은 마음 한 가운데에서 하나 하나의 대담한 말, 하나 하나의 진정한 혁명적 구호에 대한 활기있는 메아리가 울리고 있다. 대중은 투쟁을 원하고 있다.

    현재 역사에서 가장 진보적인 단 하나의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의회주의자들과 신문기자들 사이의 연합 정신이 아니라 억압자에 대한 피억압 인민의 합당하며 창조적인 증오심이다. 대중 특히 그 가장 깊은 부위로 우리의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이들의 열정과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 필요하다. 비겁의 동의어이며 거대한 역사적 전환기에 배신에 해당되는 거짓 “신중론”을 거부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자 공동전선은 프랑스 혁명가 당통(Danton)의 생각을 모토로 삼아야 한다: 대담해야한다, 언제나 대담해야한다, 그리고 더 많이 대담해야한다. 지금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고 대담하고 두려움없이 끝까지 이것으로부터 모든 실천적인 결론들을 끌어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회주의의 승리를 보장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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