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여기 새끼들이 반발하며 기어 오르는 거 상대하다 보면

딱 수준이 김운회의 범쥬신론인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

john부터가 조선=여진=쥬신 범알타이 만선사 지껄이고 있고 네임드 타령하는 좆목 씹새끼들이 그 주장 죽어라고 지지하며 조금이라도 반대하면 피를 토하고 몸을 뒤트는 거 보면 딱 답이 나오지

하여간 찢어 죽일 새끼들






  • ☆ 졸열 사마님 등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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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0.29

    제 6장 1949년 중국혁명

     

    "트로츠키의 유산"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가디언]지의 글들은 핵심적으로 이렇게 주장한다: "역사는 모택동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데이빗슨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혁명은 식민지 후진국 혁명의 모델이다. 모택동 사상의 위대한 등불이 이 나라들에서 혁명의 길을 밝혀주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우선 모택동에 대해 널리 유포된 잘못된 생각을 하나 검토하자. 이에 따르면 그는 위대한 노동계급 지도자로서 언제나 노동계급 독재를 위해 투쟁했으며 그를 저지하기 위해 애쓴 유소기와 같은 배신자들과는 달랐다는 것이다. 전에 연재된 글에서 데이빗슨은 이렇게 썼다: "1927년 코민테른은 당시 중국공산당 당수였던 진독수 그리고 장국도가 모두 무시하거나 반대했지만 모택동이 독자적으로 실행에 옮긴 정책을 주장했다." 이 주장만큼 진실에서 거리가 먼 것도 없을 것이다. 우선 진독수는 자신이 격렬히 반대했던 모스크바의 명령들을 불행하게도 실행에 옮겼을 뿐이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수천 명의 중국 동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스탈린의 명령을 거부할 정도의 노동계급적 줏대가 없었다.

    둘째, 장개석 장군이 1926년부터 1927년 사이에 북부의 군벌들을 정벌할 때 코민테른이 내린 지시를 모택동은 거부했다. 이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모스크바는 모든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대중투쟁을 억제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1926년 10월 26일에 스탈린은 전보를 보내 농민운동을 억제시켜서 지주인 경우가 종종 있었던 국민당 장군들을 소외시키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때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모택동에게 명령했다: 핵심 지역인 호남성에서 이 투쟁 억제 명령을 실행에 옮겨라. 그는 즉시 자신의 고향인 호남성으로 내려가 명령과는 정반대의 정책을 실행하여 수만 명의 농민들이 농민협회를 수립하고 지주에게 속한 토지를 몰수하여 재분배하도록 만들었다. 농민들의 이 거대한 투쟁 물결로 인해 국민당 군대는 재빨리 북부로 진격하는데 크게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이 투쟁은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국민당 장군들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 모택동의 정책은 공산당 지도부의 정책보다 언제나 더 전투적이지만은 않았다. 1924년 가을에 그는 당 정치국에서 축출되었다. 국민당 우파와 너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정책에 대해 "항의"하는 모택동의 일반적 방식은 현장에 내려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정책을 실행하는 것이었다. 1927년 3월 31일자 코민테른 전보는 상해의 공산당과 노동조합들에게 명령했다: 상해에 당도한 장개석의 군대에 대해 총을 겨누지 말고 숨겨라. 장개석은 무장이 해제당한 중국공산당 소속 노동자들을 도살했다. 결국 이 명령은 수만 명의 공산당 투사들을 학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진독수는 이 자살적 명령에 대해 격렬히 항의했으나 명령을 따랐다. 그러나 모택동은 결코 항의하지 않았다.

    1930년에 모택동은 "농민 소비에트" 지역의 토지개혁에 대해 다시 당 지도부와 갈등을 일으켰다. 당시 공산당 당수였던 왕명은 모택동의 "부농 노선"을 비난했다. 왜냐하면 모택동은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촉구했기 때문이었다. 부농의 토지를 전부 몰수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도 똑같은 몫의 토지를 분배해 주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것은 중농 노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부농들은 일반적으로 급진적 폭력 투쟁을 거부하고 점진적 해결책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토지와 자본을 축적할 기회가 더 크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봉건 지주계급을 과격하게 제거해서 가장 많은 이익을 보는 쪽은 중농이다. 역사적으로 토지의 "공평한(black) 분배"를 강령으로 제시한 것은 바로 중농이었다. 이들은 1917년 여름과 가을에 러시아의 농민 봉기를 주도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농촌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은 채 취할 수 있는 가장 과격한 토지개혁 노선이라는 사실이다. 게릴라 전쟁은 단순히 극빈 농민들 뿐 아니라 농민 일반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고립되고 장비가 빈약한 게릴라들은 농민으로부터 배신당할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현대의 효과적인 무기들에 비해 농민의 유일한 무기는 이들의 압도적인 숫자이다. 그리고 이 무기를 이용하려면 단결이 필요하다. 따라서 모든 게릴라 운동이 계급투쟁을 농촌에 도입하는 대신 중농 또는 부농의 지지를 받는 정책을 택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맑스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이 유일하게 일관된 혁명 계급이라고 주장하며 게릴라 노선을 반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반일(反日) 공동전선" 시기

    그러나 모택동은 그저 명민한 게릴라 지도자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서서히 그는 스탈린주의의 핵심을 명확히 이해하게 되었다. 노동자와 빈농을 관료적으로 통제하면서 부르주아 계급에 굴종하는 것이 바로 스탈린주의의 핵심이었다. 그는 대장정 직후 국민당과의 제 2차 "공동전선"을 열렬히 주장하면서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코민테른 제 7차 세계대회는 제 3기 초좌익 노선을 폐기하고 인민전선 노선을 채택했다.

    코민테른 대회 직후인 1935년 8월 1일에 중국공산당은 모든 애국적 계급들에게 공산당과 손을 잡고 일본에 대항하자고 호소했다. 새로운 인민전선 정책에 부응하여 모택동은 부농과 중농의 지지를 얻기 위해 농업정책을 현대화하는 새로운 지침을 내놓았다. 1935년 12월 25일 중국공산당 정치국의 성명서는 이렇게 말했다:

    "소비에트 인민공화국은 부농에 대한 정책을 변경한다; 봉건적 착취가 자행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스스로 경작하든 일꾼을 사서 경작하든 부농의 토지는 몰수되지 않는다. 토지가 균등하게 분배될 때는 부농은 빈농이나 중농과 똑같은 몫을 분배받을 권리를 갖는다."

    바로 여기에서 진짜 부농 노선이 드러났다. 이로부터 6개월 후 이 노선은 당 중앙위원회의 성명서를 통해 확장되었다: "일본에 대해 저항하는 군인들과 일본에 반대하는 사업에 종사하는 애국자들 모두의 토지는 몰수되지 않을 것이다." 이로 인해 대지주도 아들을 적군에 입대시키기만 하면 간단히 자기 토지를 그대로 가질 수 있었다.

    이 토지 정책은 정치 차원에서도 반복되었다. "노동자 농민 소비에트 정부"는 "소비에트 인민 공화국"이 되었고 이 정부는 이렇게 선언했다:

    "'인민 공화국'은 광범위한 소부르주아 계급들이 대중과 단결하는 것을 자신의 영토에서 인정한다. 소부르주아 혁명 계급 전부는 소비에트 정부에서 투표하고 선출될 권리를 부여받는다."

    한편 1936년 가을에 명령이 하달되어 인민공화국이 장악한 지구의 하부 단위에서는 "공산당"이란 당명을 금지하고 대신 "반일민족해방협의회"를 조직 이름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부르주아 계급에게 굴종할 의사를 밝힌 후에 중국공산당은 1937년 2월 10일에 국민당에 전보를 보내 공동전선을 제안했다. (최근 몇 년간 모택동주의자들은 공동전선만 강조할 뿐 당을 등한시한 자들에 대항하여 "위대한 조타수" 모택동이 쓴 저작들을 칭송해왔다. 그러나 "애국적 공동전선"에 참여하는 것은 대중에 대한 노골적인 배신이었다. 물론 모든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 민족해방투쟁이 제 2차 세계대전에 의해 휩쓸리기 직전까지만 중국의 반일 투쟁을 확고히 지지했다. [역자 주: 중국의 반일 투쟁이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자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 교전국들은 중국을 지원하여 중국의 투쟁을 제국주의 전쟁의 일부로 만들었다. 이때 중국의 반일 투쟁을 지지하는 것은 제국주의 교전국 한편을 지지하는 것이 되어 사회주의 혁명 투사의 강령이 될 수 없었다.]) 공산당의 제안에 대해 국민당은 "공산주의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되면 공산당의 제안을 수용하겠다고 새로이 제안했다: 적군과 소비에트 정부를 해체하고 공산주의 선전 일체를 중지하며 계급투쟁에 대한 선동을 포기한다. 이 제안을 중국공산당은 수용했다. 그러나 공산당 장악 지역을 국민당의 통치 하에 통합시키고 국민당 군대가 공산당 군대를 흡수한다는 약속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고 문서상으로만 합의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모택동의 계급협조주의 노선은 가능한 선에서 더욱 노골화되었다. 그는 스탈린의 "4계급 동맹"을 "신(新)민주주의" 구호로 이름만 바꾸었다. 이것은 "반혁명 및 배신자들에 대한 모든 혁명 계급들의 독재"로 규정되었다. 데이빗슨은 신민주주의 노선을 좀 더 그럴듯하게 치장하여 이 중간 단계는 내전이 끝날 때까지만 지속되고 이후에 "혁명은 즉시 그리고 중단 없이 사회주의와 노동계급 독재의 제 2 단계로 이행 한다"([가디언]지, 1973년 4월 25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모택동은 이런 얘기는 꺼내본 적도 없다:

    "중국혁명의 과정은 두 단계로 분리되어야한다: (1) 민주주의 혁명; (2) 사회주의 혁명....이 식민지 반식민지 혁명의 제 1 단계 또는 제 1 조치에 대해 말하면 사회적 성격상 이것은 여전히 근본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다. 이 단계에서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 여전히 객관적으로 요구된다....

    중국혁명은 오직 두 단계로만 성취될 수 있다: 첫 단계는 신민주주의이고 두 번째 단계는 사회주의이다. 더욱이 첫 단계의 기간은 상당히 길 것이고 하룻밤 만에 결코 달성될 수 없다." -- "신민주주의에 대하여", 1940년 1월

    이 시기의 다른 문서에서 모택동은 이 점을 더욱 명확하게 설명했다:

    "왜 우리는 혁명의 지금 단계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부르는가? 혁명의 목표가 부르주아 계급 일반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의 억압에 향해있기 때문이다. 혁명 강령은 사적 소유를 철폐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적 소유 일반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 혁명의 결과는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따라서 '토지를 경작자에게' 정책은 노동계급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책이다....

    신민주주의 정부 체제에서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정책이 채택될 것이다. 우선 노동자의 이해가 보호될 것이다. 8시간에서 10시간까지의 노동일... 노동조합의 권리들. 또 한편으로 국가, 개인, 협동조합 등에 속한 기업들의 합당한 이윤이 보장될 것이다....중국 경제에 이익이 된다면 외국인의 투자도 환영한다...." -- "연립정부에 대하여", 1945년 4월

    데이빗슨 동지가 주장하는 사회주의로의 "중단 없는 이행"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차원에서 이 "신민주주의"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반일 공동전선"기간 동안 강제된 토지 정책을 검토하기만 하면 된다. 이 정책은 다음과 같은 "진보적" 조치들을 포함했다:

    "대부분의 지주들은 일본에 반대하고 있으며 일부 계몽된 지주들도 민주주의 개혁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따라서 당의 정책은 봉건적 착취를 감소시켜 농민에게 도움을 줄 뿐 봉건적 착취 전부를 청산하는 것은 아니다....

    ....지주의 민사적 정치적 토지적 경제적 권리들을 보호할 뿐 아니라 지대와 이자를 지불하도록 농민에게 충고한다." -- "반일 투쟁지역의 토지 정책에 대한 중앙위원회 결정", 1942년 1월

    모든 혁명 계급들의 혁명공동독재라는 신비하면서도 완전히 반(反)맑스주의적 개념에 대해 모택동은 아주 구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즉 두려움없이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애국자 장개석과 함께 진짜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이 정부에서 국민당은 정부의 다수파가 될 것이고 군대의 압도적 다수를 장악할 것이다. 이 계획은 1946년 1월 "정치협의회"에서 작성되어 중국공산당에 의해 수용되었다. 정부는 전적으로 장개석이 임명하는 40명의 인사들로 구성될 것이고 이 가운데 절반은 국민당 그리고 나머지는 공산당을 포함한 다른 정당들에 의해 채워질 것이다. 국민당 군대는 90개 사단으로 그리고 공산당 군대는 18개 사단으로 그 규모가 각각 제한될 것이다. 이 합의안이 결코 현실화되지 못한 원인은 국민당의 일부 특히 군부가 공산당과의 타협에 반대한 데에 있었다.

    이렇게 1920년대 말부터 1940년대 말까지 20년에 걸쳐 모택동은 중국 자본가 계급 그리고 심지어는 가끔 봉건주의 분자들과 화해를 빈번히 시도했다. 동시에 그는 멘셰비키의 2 단계 혁명이론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상을 주장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경우처럼 공산당이 청산되고 수십만 명의 투사들이 살해되는 일은 중국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국민당 정부는 너무 부패하여 장개석은 연립정부를 수립할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국 부르주아 계급은 언제나 그렇게 나약하지만은 않았다. 상해 학살 직후 장개석은 국민당의 통치를 안정화시킬 수 있었고 1927년부터 1936년까지 그는 공산당이 장악한 지역들 대부분을 체계적으로 점령할 수 있었다.

     

    신민주주의인가 아니면 연속혁명인가?

    이제 중국혁명의 두 번째 측면을 살펴보자: 역사는 누가 옳다고 증명했는가? 데이빗슨은 트로츠키의 주장을 인용한다: 1917년 4월 레닌이 명확히 기각한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노선을 스탈린이 중국에서 소생시키려는 시도는 완전히 틀렸다:

    "민주주의 독재 정식은 그 효용성을 가망 없이 오래 전에 상실했다....중국의 엄청난 후진성 아니 좀 더 정확히 표현하여 러시아에 비교하여 중국의 엄청난 후진성 때문에 제 3차 중국혁명은 '민주적' 시기를 경과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러시아에서 1917년 11월부터 1918년 7월까지 있었던 6개월 동안의 민주적 시기도 중국에는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처음부터 도시와 농촌에서 부르주아 소유체제를 가장 단호하게 뒤흔들고 철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레닌 사후의 제 3 인터내셔널], 1928년

    데이빗슨은 "트로츠키의 이 빗나간 예상에 비해 모택동의 신민주주의 이론은 올바른 것으로 입증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역사상의 사실들을 살펴보자: 첫째, 모택동의 반복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장개석과 연립정부를 결코 구성할 수 없었다. 둘째, 내전 말기에 공산당이 전국을 점령했을 때 중국 자본가 계급의 상당 부분은 장개석과 함께 대만으로 도망갔고 이를 통해 "신민주주의"의 핵심인 부르주아 계급은 중국 본토에서 제거되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 직후 중국의 소유관계가 변화했다는 점이다. 1947년 10월 10일이 되어서야 모택동은 국민당 정부 타도 구호를 제출했다. 이 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민당 군대가 공산당의 연안 지역을 점령하자 모택동은 국민당과의 타협은 불가능하며 "신민주주의 유형"의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고 인식했다. 바로 이때부터 중국공산당은 스탈린의 명확한 명령을 거부하며 독자적인 권력 장악에 들어갔다. 장개석을 타도하겠다고 공산당이 결정하자마자 논리적 결론에 따라 1930년에 모택동이 추구했던 "부농 노선"과 유사한 농업개혁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정책은 1942년부터 1947년까지 실시했던 자신감 없는 지대 인하와 적군이 강제하는 지대 징수 조치보다 훨씬 급진적이었다.

    더욱이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선포 직후 중국공산당은 "연립정부"를 수립했다. 이 정부는 "민주적" 소부르주아 정치인들이 몇 명 포함되기는 했으나 확실히 공산당에 의해 장악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권력이 의심의 여지없는 적군의 군사적 지배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본가 계급의 상당수는 이미 대만으로 도망가고 없었다.

    정권수립 이후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 공산당은 중공업을 국가소유로 운영하기 시작했으며 일부 제조업체들은 국가가 통제하고 감시하는 가운데 사적 소유권이 계속 인정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정책은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 전쟁 때문에 1952년 초에 시작하여 국내 자본가들에 대한 일련의 조치들이 시행되었다.

    데이빗슨 동지, 어디에서 민주적 단계가 확장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는가? 중국혁명의 과정 전체는 모택동의 완전히 환상적인 공상주의를 극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반복적으로 민주적 부르주아 정부를 수립하려는 욕구를 선언했으나 혁명의 결과 확립된 소유관계는 노동자국가의 소유관계였다.

     

    농민이 노동자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가?

    추산에 따르면 1949년에 노동자는 중국공산당 당원 전체의 5%에 불과했다. 공산당은 압도적으로 농민과 소부르주아 지식인의 정당이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혁명정당의 지도를 받는 노동계급만이 노동계급 독재를 수립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제 3차 중국혁명"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우선 중국혁명은 트로츠키가 예상한 패턴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한다. 모든 혁명기에 발생하는 격렬한 계급 양극화 과정에서 농민은 자본가 계급을 따르는 부위와 노동계급을 따르는 부위로 분열된다. 농민 혼자서는 자본가 착취 계급의 결연한 저항을 타도할 사회적 위력이 없다. 더욱이 사회주의 소유형태를 확립하는데 필요한 단결된 계급적 이해도 농민에게는 없다. 맑스주의 이론은 이 점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1949년 중국혁명은 농민이 압도적 다수를 구성한 정당의 지도를 통해 그리고 소부르주아 군사 관료집단이 지도한 군대에 의해 성취되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다음과 같은 맑스주의 강령의 핵심에 모순되지 않았다: 후진국에서 부르주아 혁명의 민주적 과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수단은 농민의 지지를 받아 노동계급이 자신의 계급 지배를 실현하는 것이다.

    농민에 기초한 중국공산당이 혁명에서 승리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의 사회적 위력에 기초하여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하는 노동계급이 중국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진행된 제 2차 중국혁명 와중에서 중국의 노동계급은 패배와 패배를 거듭하면서 기가 꺾였으며 엄청난 인적 손실을 겪었다. 그리고 이후 중국공산당의 정책은 노동계급의 투쟁을 의도적으로 억제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고려해야할 중국혁명의 근본적인 측면은 1949년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1917년 러시아혁명의 승리로 수립된 건강한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기형적 노동자국가를 수립했다는 것이다. 이 체제에서 노동계급은 국가권력에서 배제되었다. 1949년 이래로 국가권력은 공산당 상층부, 인민해방군, 국가 관료집단 등에 의해 강력히 통제된 스탈린주의 관료-군사 계층의 것이었다. 중국 정부의 경제 정책은 "대약진 운동"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듯이 연이어 실패했다. 그리고  참주선동적인 "노동계급 문화대혁명"의 시기에조차 노동자 통치의 민주적 형태들은 수립되지 못했다. 이 현상은 중국에서 계급이 완전히 철폐되는 사회주의 건설의 유일한 방도는 군사-관료집단을 타도하는 정치혁명뿐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1940년대 말 장개석 정권은 너무도 부패하여 스스로 타도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무단, 북경, 광동 등의 국민당 군대는 내전 말에 총 한방 쏘지도 않고 항복해버렸다. 더욱이 미국의 지배계급은 국민당 정권의 부패와 무능에 너무 실망한 나머지 1948년과 1949년 시기에 국민당 정권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중단했다. 마지막으로 소련이 만주를 점령하자 무기가 대단히 부족했던 공산당 군대는 갑자기 현대적인 일본 무기를 다량 공급받게 되었다. 이 특별한 상황들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만약 중국 노동계급이 제 4 인터내셔널이라는 자신의 깃발로 투쟁했고 국민당의 부르주아 정권이 저절로 와해되지 않았다면, 모택동의 농민군은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문화대혁명"의 신화가 바랬고 관료집단이 중국정부를 다시 직접 장악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중국이 소련, 동유럽 국가들, 쿠바, 북베트남 등처럼 기형적 노동자국가라는 점을 이해하기는 훨씬 쉽다. 그러나 오직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들만이 모택동 정권 초기부터 이 입장을 견지해왔다.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 1955년 당 대회의 결의문은 중국혁명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혁명 내내 모택동 일당은 혁명 과정 자체를 자의적으로 규제하고 제한했다. 농업개혁은 '단계들에 따라서' 진행되었고 한국전쟁 기간 동안과 이후 미 제국주의의 공격이 정권에 대한 지주들의 반대를 자극했을 때에야 완료되었다....제 2차 중국혁명 와중과 이후에 패배와 패배를 거듭했기 때문에 그리고 도시 특히 노동계급을 농촌의 군사적 투쟁에 종속시키고 이를 통해 독립적 정치세력인 노동계급의 등장을 봉쇄한 중국공산당의 의도적인 정책 때문에 중국 노동계급은 기가 꺾였다. 이때를 틈타 중국의 스탈린주의자들은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군사력으로 지지까지 받으면서 정치 중핵들과 지식을 보유한 유일한 조직이라고 대중은 인식하게 되었다." -- "제 3차 중국혁명과 그 여파", 1955년 10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기가 없을 때에도 대중에게 진실을 말할 용기가 있는 정당이다. 그리고 제국주의 공격으로부터 혁명의 성과를 방어할 수 있고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진전시킬 수 있도록 연속혁명의 작동방식을 이해하는 정당이 필요하다. 모택동주의자들은 "진보적 자본가 계급"과 "공동전선"을 체결할 반동적 환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소위 "문화대혁명"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열광하고 있다. 이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할 역사적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을 스스로 증명해왔다. 이 임무의 성취는 맑스, 레닌, 트로츠키의 혁명 전통을 진정하게 계승하고 있는 제 4 인터내셔널 투사들의 몫이 될 것이다.        

         

     

    제 7장 모택동의 중국:  스탈린을 추종하다가 결국 닉슨과 손을 잡다

     

    자금성에 출몰하는 명조와 청조 황제의 귀신들은 황제 타도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불충한 후계자에 대해 자기들도 그런 적이 있으므로 공감하면서 틀림없이 껄껄 웃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자기들과 다르지 않은 새로운 왕조가 북경에 수립되어 중국 인민을 통치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귀신들의 피상적 인식과는 달리, 과학적 인식론으로 무장한 맑스주의자는 중국의 사태를 비교할 수 없이 깊이 인식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모택동의 궁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음모는, 자본주의에서 이탈한 채 고립된 후진국에 대한 제국주의 세계질서의 압력 때문에 발생하고 그 결과가 결정된다. 모택동의 관료집단이 아무리 기이하고 개인적인 특성을 드러내더라도 이들의 운명은 중국 혁명 그리고 사회주의 미래의 운명과 떨어질 수 없이 얽혀 있다.

    모택동의 소부르주아 민족주의 관료집단은 대대적인 농민 봉기를 통해 중국에서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기형적 노동자국가를 수립했다. 이들은 중국을 옛날처럼 위대한 강국으로 회복시키려고 결심했다. 1950년대에 이들은 미 제국주의의 위협 때문에 소련 진영에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소련의 통치자들은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허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점이 더욱 명백해지자 중국의 관료집단은 소련 진영에서 이탈했다. 그리고 중국을 후진국에서 강대국으로 변모시키려는 열망에 불탔다. 바로 이 열망이 1960년대 말 문화혁명이라는 격렬한 분파투쟁을 폭발시켰다. 이 투쟁을 통해 다시 권력을 장악한 모택동은 소련에 대항하여 중국을 미 제국주의의 반(半)동맹국으로 변모시켰다.

     

    공상적 모험주의의 경제 논리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진행된 대약진 운동은 실패했고 이 때문에 모택동은 조용히 지도자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실각은 문화혁명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중국은 농업이 대단히 후진적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의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53년-1956년) 기간 동안 정통 스탈린주의 공업화 정책은 이 나라에 적용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객관적 상황 때문에 대약진 운동이 실시되었다.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은 경제 잉여의 상당량을 대규모의 현대적 중공업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증가하는 도시 노동계급에게 필요한 식량과 공업 원료는 강제 집단화를 통해 농민에게서 짜내야했다. 이 때문에 농업 생산 총량과 식량 소비는 크게 감소되어야했다. 공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1930년대에 러시아의 식량 소비는 15% 하락했으며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농민들은 대대적인 기근에 시달렸다.

    극도로 빈곤한 중국은 소련의 급격한 경제성장 모델을 채용할 수 없었다. 1953년 중국의 일인당 식량 생산량은 1929년 소련에 비해 절반 밖에 되지 않았다. 1930년대 소련에서 강요된 식량 생산 축소가 그대로 적용되었을 경우 중국은 문자 그대로 대대적인 기근에 처했을 것이다. 중국의 빈곤과 정통 스탈린주의 공업화 모델 사이의 갈등은 1956년에 절정에 달했다. 이때 급격히 팽창하고 있던 중공업 투자는 소비재와 원자재의 품귀를 초래하여 인플레를 유발시켰다. 스탈린처럼 계획을 밀어붙이는 대신 중국 관료집단은 제 1차 5개년 계획을 포기하고 긴축정책을 실시했다. 1957년에 투자는 실질적으로 감소했으며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해고되어 다시 농촌으로 돌아갔다.

    스탈린주의 체제에서 흔히 그렇듯이 경제 긴축정책은 정치 자유화를 초래하여 백화제방 캠페인이 벌어졌다. 그러나 활짝 핀 꽃의 향기는 관료집단에게 전혀 맘에 들지 않았다. 백화제방 캠페인이 드러낸 사회 불만의 규모와 깊이는 모택동 정권을 크게 긴장시켰다. 이제 국가의 권위를 다시 내세우고 더 가혹한 규율을 강제하면서 대중에게 국가적 목표를 강요해야한다고 관료집단은 판단했다.

    농업 집단화의 모순적 상황 역시 대약진 운동을 초래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스탈린의 러시아와는 달리 중국의 경우 1956년까지 농업 집단화는 상당히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중국공산당은 지주에게 승리하여 토지를 평등하게 분배하여 농민들 사이에 상당한 도덕적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대중은 공산당의 시책에 자발적으로 호응했다. 농민들은 협동조합에서 생산의 규모와 방식을 둘러싸고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협동조합을 책임지는 지역 당 간부들은 생산량 극대화의 압력에 시달렸다. 생산량 극대화를 위해서는 농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재투자하고 노동시간을 더 투입해야했다. 이 때문에 당 간부들은 농민의 지지 없이 농업 생산을 확대해야했는데 이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이 결과 협동조합을 실질적인 국영농장으로 전환하여 농민들이 국가의 시책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당원들의 압력이 거세졌다.

    이 요인들이 결합하여 1958년의 대약진 운동으로 나타났다. 대약진 정책의 핵심은 협동조합들을 수천 가구를 포괄하는 자급자족형 거대생산단위(인민공사)로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인민공사는 엄청난 규모의 노동력을 해방시킬 것이며 이 노동력으로 수공업 방식으로나마 공업을 성장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소형 용광로처럼 원시 기술로 중공업 제품을 생산하며 수자원 절약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할 경우 급격한 공업화의 토대가 마련될 것이었다. 이것이 대약진 운동 초기의 판단이었다. 이제 인민공사의 구성원이 된 농민들은 생산량에 따라서만 임금을 받으며 자기의 토지나 생산물에 대한 권리가 전혀 없는 농촌노동자가 되었다. 대약진 운동을 선전하기 위해 천년왕국이 곧 도래하여 모두가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종교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몇 년 만 지나면 중국은 서방의 생산력 수준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고 15년 이내에 완전한 사회주의가 성취될 것이라고 공산당은 자신 있게 떠들었다. 간단히 말해 몇 년 만 영웅적으로 희생하면 농민들은 지상낙원에서 살 수 있다는 장밋빛 청사진이 제시되었다.

    이 운동이 실제로 경제성장을 가속화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저변에 깔린 "공산주의 전망"은 반동적 공상주의였다. 선진 노동자국가들의 국제적 분업으로 일반적 궁핍이 해소될 때 공산주의 체제가 수립될 수 있다. 그러나 수백만 농민의 원시적인 노동을 통해 즉 빈곤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을 통해 공산주의가 성취된다는 것이 중국식 "공산주의"인 대약진 운동의 사상이었다. 대대적인 빈곤 속에서는 기생적 관료집단을 낳은 경제적 기초는 물론 반혁명을 통해 중국이 자본주의 착취질서로 복귀할 가능성은 그대로 남을 것이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라고 황당하게 떠벌리면서도 "시커먼 심보로 범죄를 마구 저지르는 배신자들의 반(反)당 파벌"이 새로 발각되고 이들의 직책이 박탈당할 때마다 이들이 자본주의 복귀를 음모해왔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급적 착취의 물질적 기초인 일반화된 궁핍이 해소되어 계급들이 사라지는 것이 사회주의 체제이다. 노동계급은 사회주의의 유일한 담지자이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은 궁핍과 억압의 희생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문화혁명의 물질적 기초인 인류 최고의 기술적 성취를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자들에게 공산주의는 1백 명의 농민을 1대의 트랙터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택동주의자들에게 공산주의는 1대의 트랙터도 없이 1백 명의 농민들이 뼈 빠지게 노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약진 운동은 사상 유래 없는 규모로 노동 군사화를 시도했다. 관료집단은 체력이 소진될 때까지 농민들을 부려먹었다. 이 때문에 강제 노동으로 생산을 독려하는 지옥과 같은 현실이 나타났다. 결국 당 중앙위원회는 지역 당 간부들에게 이렇게 지시해야했다:

    "어떤 경우에도 8시간의 수면, 4시간의 식사와 재충전 등 12시간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며 이 시간은 절대 줄일 수 없다."-- [북경 평론]지, 1958년 12월 3일

    대약진 운동이 중국과 소련 진영의 역사에서 대단히 특이한 경제 붕괴를 초래했다. 이것이 이 운동에 대한 일반적 평가이다. 생산 하락의 정확한 규모는 밝혀지지 않았다. 중국 정권은 1960년부터 1963년까지의 경제 통계들을 공개한 적이 없다. 이 사실 자체가 재앙의 정도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합리적 추산에 의하면 식량 생산은 1958년부터 1960년까지 15%에서 20%까지 하락했다([시사 현장]지, 1964년 1월). 그리고 1959년부터 1962년까지 공업 생산은 30%에서 40%까지 하락했다([계간 중국]지, 1970년 4월-6월).

    대약진 운동이 초래한 재앙의 정확한 원인들에 대해서는 주장들이 다양하다. 물론 악천후가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만 모택동주의자들은 오직 이 이유 때문에 대약진 운동이 실패했다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자기들이 한껏 부풀린 통계를 스스로 믿으면서 관료집단은 1959년에 실제 파종면적을 축소했다. 인민공사 책임자들은 여유 노동력을 가구 단위의 강철 제련과 관개공사 등 화려한 프로젝트에 투입했다. 이 때문에 기본적 농사일에 투입되는 노동력이 너무 적었다. 생산 목표치를 달성하려는 열광 속에서 제품의 품질은 완전히 도외시되었다. 가구 단위로 생산된 강철은 대부분 사용이 불가능했으며 새로 개간되었다고 보고된 토지의 절반 이상은 농사가 불가능했다. 지역 인민공사 단위로 자급자족 정책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면화 등 특정 지리적 조건에만 경작이 가능한 작물이 모든 곳에서 재배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소련의 원조가 1960년에 갑자기 중단되어 중공업 생산이 크게 하락했다.

    그러나 경제적 재앙의 근본 원인은 농민의 경제적 이해를 완전히 무시한 채 엄격한 노동군사화를 실시한 데에 있었다. 이것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농민들은 농사짓기를 거부했다. 이를 통해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방식으로 인민공사에 대한 반발을 표현했다. 대약진 운동 실패의 핵심 원인은 농민의 생산 동기를 무시한 데에 있다고 관료집단 스스로가 인정했다. 이 때문에 정권은 대약진 운동을 후퇴시키고 농민의 개인주의적 욕구에 크게 양보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대약진 운동은 모택동 정권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내전을 지도하고 평등한 토지 분배 정책을 시행하면서 공산당이 쌓아 올린 도덕적 권위는 한 순간에 무너졌다. 1960년 이후 농민은 사회적 이상이나 미래의 풍요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현금 수입에 의해서만 움직였다.

     

    모택동의 강등과 대후퇴 운동

    대약진 운동은 재앙으로 끝났으며 이 책임은 오로지 모택동에게 있었다. 더욱이 당 지도자들 가운데 유독 그만이 이 운동을 계속 옹호했다. 심지어 그는 가두 단위로 뒤뜰에서 소형 용광로로 강철을 생산하는 운동을 옹호하면서 철도가 부족하여 이 강철들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당 지도부는 농민의 경제적 이해를 완전히 도외시했기 때문에 대약진 운동이 실패했다고 인정했다. 이에 대해 모택동은 지역 당 간부들의 "오류"와 "직권 남용" 등이 운동을 실패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약진 운동의 전제들을 결코 기각하지 않았다.

    대대적인 기아를 초래한 정책을 계속 옹호했기 때문에 모택동은 관료집단의 다른 분파들로부터 공격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국방장관 팽덕회는 소련을 지지했던 정통 스탈린주의자였다. 그는 1959년에 모택동이 대중을 소외시키고 경제 혼란을 부추기며 소련과 불필요한 마찰을 초래하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모택동에 대한 대원수 팽덕회의 전면전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숙청되어 모든 공직이 박탈되었다. 그러나 그의 공격으로 모택동의 당내 지위는 크게 손상당했다.

    1959년부터 1961년 사이에 대약진 운동의 재앙적 결과들은 더욱 두드러졌다. 이 때문에 당 간부 대오에서 모택동의 권위는 크게 상실되었으며 그는 중앙 지도부에서 조용히 축출되었다. 그리고 모택동의 오랜 제 2 인자였던 유소기를 비롯하여 주은래, 당서기 등소평, 팽진 등의 파벌이 지도부를 장악했다. 모택동과 그의 지지자였던 임표, 진보대 등은 광범위한 당 지도부의 좌파로 위상이 축소되었다. 중앙 지도부의 교체는 대중에게 비밀로 붙여졌다. 그러나 팽진의 부하였던 우한, 등도 등은 거의 노골적으로 모택동을 공격했다. 이 공격은 이후 문화혁명의 빌미가 되었다.

    대약진 운동의 재앙에서 회복하기 위해 유소기 정권은 농업 및 공업 생산과 관련하여 부하린의 경제정책을 수용했다. 인민공사는 해체되고 약 20가구로 구성된 최소 집단생산 단위인 "생산 여단"이 조직되었다. 자유 시장, 개인 텃밭, 개인의 가축 소유 등이 장려되었다. 1962년에 운남성의 개인 곡물 생산량은 집단 생산량보다 더 많았다. 1964년에 귀주성과 사천성에는 집단 경작 면적보다 개인경작 면적이 더 넓었다.

    1961년에 정부는 공업시설의 신규 건설을 전면 금지했다. 공업 생산 증대의 속도는 농민과 생산 여단이 달성하는 자유시장의 잉여와 일치되도록 계획되었다. 중국의 상황에서 공업 발전을 농민 시장의 증대에 맞추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대단히 반(反)노동계급적인 정책이었다. 1964년 중국의 지도적인 경제계획가인 보이보는 애너 루이즈 스트롱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도시인구를 2천만 명 줄일 생각이다(스트롱 저, [중국에서 온 편지들]).

    시장경제로의 복귀는 공산당의 대중적 권위의 급격한 하락과 결합하여 관료집단 내부에 강력한 분열을 초래했다. 개인적 탐욕, 출세주의, 협소한 기득권과 지역적 패권주의 등이 만연했다. 문화혁명 기간에 이런 보도도 있었다: 1962년 상해를 비롯한 지역 당들은 곡물이 남아돌았던 몇몇 성의 하나였던 절강성에 곡물 수송을 요청했다. 그러자 절강성 당 제 1서기는 이렇게 대답했다: "절강성은 상해의 식민지가 아니다....남아도는 곡물로 돼지를 먹여야한다"([계간 중국]지, 1972년 10월-12월). 이 대답은 이 시기 관료 분파들 간의 관계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모택동은 관료집단 내부에서 나라를 구원해야한다는 공상주의 분파를 대표하고 있었다. 따라서 규율, 단결, 국민적 목적의식 등이 당 간부들 사이에서 점점 해이해지자 그는 크게 낙담했다. 1962년 사회주의교육위원회라는 압력단체를 만들어 모택동은 당 간부들의 소명의식을 회복시키고 농민 개인주의의 경제정책을 억제하려했다. 그러나 관료주의 관성의 위력에 비해 사회주의교육위원회의 노력은 거의 무기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문화혁명과 관련하여 1961년부터 1965년까지 모택동의 정책과 유소기의 중앙지도부의 정책은 상당 부분 일치했다.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택동은 농업 집단화를 강화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나 동시에 도시 인구의 농촌 복귀 등 노동계급보다 농민의 사회적 비중을 강화하는 정책을 확고히 지지했다. 그는 독립적 사회집단인 노동계급을 청산하고 이들을 농촌 대중 속에 해소시키려고 언제나 노력했다.

    노동계급과 관련하여 모택동과 유소기의 태도 사이에는 이렇다 할 차이가 없었다. 문화혁명 기간에 모택동은 "노동자-농민"체제를 옹호했으나 이것은 대단히 인기가 없었으며 경제에 해악을 가져왔다. 1963년에 유소기가 도입한 대단히 반(反)노동계급적인 이 정책의 골자는 농한기에 농민이 공업 생산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정규직 노동자들보다 보수가 적었고 사회보장 혜택이 없었다. 또한 노동조합에 가입할 권리가 없었다. 한편 노동조합에 속한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자-농민"에 의해 대체되어 강제로 농촌으로 실려 갔다! 이 체제는 모택동의 공산주의 "이상"과 아주 잘 들어맞았다. 동시에 국가의 축적을 증대시키기 위해 노동자의 임금을 억제시키는 데 효과가 있었다. 이 체제는 문화혁명 기간에 노동자들의 반발을 초래한 가장 큰 요인이었다. 모택동 일당은 이 체제를 옹호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농민"체제를 방어하기 위해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한 계약직 노동자조직들을 탄압했다.

    또한 1965년 이전의 대외정책에서 모택동과 유소기 지도부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는 증거 역시 없다.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에 대항하는 캠페인을 조직한 것은 모택동이 아니라 유소기와 등소평이었다. 현재 적극적으로 조직 활동을 벌이고 있는 모택동주의자들 다수는 모택동이 조용히 지도부에서 밀려난 후 유소기와 등소평 일당이 벌인 "반(反)수정주의" 운동에 고무 받아 모택동주의로 획득되었다. 이들은 이 점을 잘 생각해 보아야한다.

     

    미국의 품에 안기는 인도네시아와 월남

    1962년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모택동은 이렇게 폭로했다: 1940년대 말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이 티토의 노선을 추종할지 모른다고 의심했다; 모택동 자신은 스탈린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을 뿐 중국공산당의 독립성은 결코 희생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냉전으로 인해 소련 미국의 양극화와 특히 한국전쟁 때문에 중국은 소련 진영에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에 중국공산당은 소련 진영 내부에서 독자 경향을 수립하려고 노력하면서,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는 노선으로 동유럽 공산당들을 획득하려고 적극 작업했다. 그리고 이 활동은 중요한 부산물을 남겼다. 모택동 정권의 독자 노선 노력에 긴장한 소련은 1956년 헝가리 혁명을 압살하기로 결정했다. 독자 노선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던 이 행위를 소련은 이후 국제적으로 정당화시켰다.

    미국의 아이젠하워와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평화공존을 협약한 "캠프 데이비드의 정신"은 소련이 중국의 팽창을 통제하는 것에 부분적으로 기초하고 있었다. 이 협약을 실행에 옮기면서 초래된 중소분쟁의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1958년 흐루시초프는 중국이 대만해협의 섬들에 대해 군사적 압력을 중단하도록 노력했다; 소련은 중국에 대한 핵무기 생산 지원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1960년 중국과 인도가 국경분쟁을 일으켰을 때 소련은 인도를 지지하는 "중립"을 선언했다. 중국이 더욱 강경하게 소련을 정치적으로 비난하자 1960년 소련은 중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모두 중단했다. 아마 이것이 중국과 소련이 공식적으로 관계를 단절한 시점일 것이다.

    소련 진영에서 이탈한 후 중국의 대외정책은 두 초강대국에 대항해 "제 3 세계" 국가들을 결집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드골의 프랑스도 제 3 세계에 포함시켰다! 이 시기에 중국의 외교는 일시적인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1965년에 제 3 세계는 갑자기 중국 외교관들에게 접근 금지구역이 되었다. "중국 우호국들" 다수가 군부 쿠데타로 무너졌다. 특히 북경을 방문하던 중에 가나 대통령 느루마는 본국의 쿠데타로 실각했다. 이 우익 쿠데타들의 여파로 반(反)소 토론장으로 예상되었던 아프리카-아시아 회의는 취소되었다. 그러나 중국에게 진짜 엄청난 타격은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났다. 이 나라에서 수하르토의 친미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수하르노가 타도되었고 중국에 우호적이었으며 국가권력을 장악하지 않은 최대 공산당인 인도네시아공산당은 물리적으로 궤멸되었다.

    1965년에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휩쓴 우익 쿠데타들은 한 가지 진실을 증명했다. 미 제국주의의 위력은 실제 군사력에 있을 뿐 아니라 전 세계 유산계급과의 유기적 유대에도 있다는 사실이 이것이었다. 계급투쟁이 일정한 수위 이상으로 끓어오르면 식민지 부르주아 계급은 북경 또는 모스크바와의 불장난 우호관계를 청산하고 이 시대 자본주의 질서의 주요 파수꾼인 미국 지배계급의 품에 안긴다.

    제 3 세계에 대한 중국의 거대한 전략이 인도네시아 노동자 농민의 시체더미 밑에 깔려 엉망진창이 되자마자 새로운 위협이 중국을 압박했다: 미국이 월남전의 수위를 높인 것이다. "제 3 세계"가 중국을 제국주의의 위험에서 전혀 보호하지 못하고 이제 중국의 발밑에서 미 제국주의가 폭격을 자행했다. 이 위협 앞에서 중국 관료집단은 격렬하게 분열했다. 유소기, 팽진, 인민해방군 참모총장 요지청 등의 분파는 소련과의 관계 악화를 중지한 후 월남에 대해 소련과 일종의 군사적 공동전선을 체결하고 싶어했다. 모택동과 임표의 분파는 소련과의 단절을 더욱 가속화하고 문밖에서 한국전쟁 같은 것이 일어나는 것을 무엇보다도 막으려했다.

    어떤 의미에서 문화혁명의 첫 전투는 인민해방군 최고지휘부에서 일어났다. "프로정신" 대 "정치"의 미명 아래 벌어진 이 싸움은 실제로는 월남전과 소련과의 군사적 동맹 문제로 일어났다. 요지청은 월남에 대한 대대적인 지상군 개입을 적극 준비하고 싶어 했다. 사실 그가 "인민의 전쟁"을 촉구한 것은 월남전을 낮은 수준의 게릴라전쟁으로 전환시켜 열기를 식힌 후 중국이 또 다른 한국전쟁에 끌려들어가는 것을 막자는 의도였다. 자기의 직속 부하 요지청에 대한 국방장관 임표의 승리는 중국 제일이라는 군사적 고립주의의 승리였다.

    그리고 1966년 초반에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 한때 중국을 지지했던 일본공산당이 월남전과 관련하여 공산주의 강대국들의 군사적 공동전선을 중재하려했다. 월남전과 관련하여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이 공동으로 발표한 성명서는 소련의 "수정주의"를 비난하지 않음으로써 중소 군사협력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막판에 모택동은 이 합의문을 거부하고 공개적으로 당 지도자들 특히 이 합의문의 협상 대표였던 팽진을 공격했다. 모택동은 소련과의 연대를 드러냄으로써 미국의 의심을 자초하는 위험은 피할 작정이었다. "수정주의"에 대해 투쟁한다는 미명 하에 그는 미 제국주의에게 이렇게 알렸다: 미국이 중국을 직접 공격하지 않을 경우 다른 나라들에게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가장 극악한 탄압이 발생해도 중국은 개입하지 않는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중국의 유화 노선은 문화혁명으로부터 후퇴한 우경화 노선 이상이었다. "소련 사회제국주의"에 대한 자신의 "주요 모순"을 더 잘 해결하기 위해 모택동은 미 제국주의와의 동맹을 체결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문화혁명"의 가장 핵심적인 목적 가운데 하나였다.

    분파적 대립과 국내외 정책 사이에는 명확한 연관성이 있었다. 유소기의 중앙지도부는 관료집단이 출세주의와 동물적 보신주의에 빠져 경제가 농민의 손수레 속도로 아주 느리게 성장하는 것을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소련의 전반적 군사 헤게모니 속에 들어가 보호를 받는 계획이 수립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모택동과 임표는 중국을 최대의 강대국으로 만들 결심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관료집단과 대중을 동원하고 옥죄어 중국의 물질적 후진성을 최단 시일 내에 극복해야했다.

     

    문화혁명: 반(反)노동계급적 반(反)문화적 캠페인

    대중 동원을 통해 국가를 구원한다는 열정을 기초로 하여 중국이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물질적 조건을 창출하려는 시도가 바로 문화혁명이었다. 이를 위해 모택동 일당은 갈수록 보수적이며 자기 이해에만 집착하는 행정 관료집단을 숙청해야했다. 그리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택동은 인민해방군 장교들과 평민 출신 청년 학생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친소 화해주의 경향들이 숙청만 되면 군대의 장교단은 모택동 분파에 자연스럽게 합류할 것이었다. 장교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지역 차원의 기득권보다는 중국 국가의 장기적 이해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이와 더불어 이들은 대중의 직접 압력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군비 지출을 위해 경제 잉여를 더 많이 짜내기를 원했다. 중국의 청년 학생층은 주로 미래의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중국 정부를 상속받을 것이고 따라서 거대하고 강력한 정부와 근면-검소한 인민을 원했다. 야망을 품은 소부르주아 학생층의 기득권은 소부르주아 관료층의 미래에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공상적 이상을 쉽게 수용하였고 일상적 관심에만 매몰되어 이상의 실현을 막는 사회 세력을 공격했다.

    임표와 인민해방군 지휘부의 지지를 받아 1966년 모택동은 주요 반대파 지도자들인 유소기, 등소평, 팽진 등을 지도부에서 손쉽게 밀어냈다. 이때 문화혁명은 아직 거리에 모습을 보이기 전이었다. 그러나 관료집단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것은 극소수 지도부를 제거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결국 이 작업은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확고히 뿌리 내린 관료들이 문화혁명에 저항한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홍위병 "노동계급 혁명가들"이 바리케이드 반대편에 서 있는(!) 중국 노동계급과 대결했을 때 일어난 현상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소위 노동계급 문화대혁명에 대해 중국의 대중이 환상을 가졌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이 노동계급에게 더 나은 생활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곧 명백해졌다. "경제주의"를 퇴치한다는 구호를 통해 급진 모택동주의자들은 임금을 억제하고 노동 강도를 강화하겠다고 나섰다. 1966년에 다수의 노동자 투쟁이 폭발했으며 1967년 1월 상해 총파업과 전국에 걸친 철도 파업으로 이 투쟁은 절정에 달했다. 이 사건은 중국 노동계급과 스탈린주의 관료집단 사이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충돌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철도 노동자들은 중국 사회에서 자신의 사회적 위력을 가장 명확히 의식한 노동계급 부위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독자적인 주택단지와 학교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화혁명은 이들을 특히 가혹하게 취급했다. 정상적인 운행 이외에 엄청난 규모의 홍위병 부대들을 전국에 실어 날라야했다. 또한 이들은 하루의 장시간 노동을 마친 후 모택동 사상을 연구해야했다. 노동 시간이 늘어나자 기존의 안전 규정은 침해되었다. 이들이 이 문제를 제기하자 홍위병들은 "모택동 사상을 따르지 않는 기존의 안전 규정"을 공격했다([시사 현장]지, 1967년 5월 19일). 말할 나위도 없이 홍위병들은 모택동 사상이 물리법칙보다 더 강력하다고 믿었다! 상해의 철도 노동조합은 늘어난 노동시간을 줄이거나 늘어난 시간만큼 봉급을 인상하는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다른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12월에 상해의 지방정부는 전반적인 봉급 인상을 허용했다. 그런데 북경의 모택동 지도부가 임금 인상을 백지화시켰다. 이에 대해 상해와 중국의 철도 노동자들은 즉시 작업을 중지했다.

    홍위병과 인민해방군은 상해의 지방정부를 타도하고 파업을 분쇄하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상해 인민 모두에게 보내는 편지"([일간 상해 해방]지, 1967년 1월 5일)는 "혁명의 목표를 이해하고 생산을 촉진시켜라"라는 명령으로 시작했다. "편지"는 계속해서 반(反)당 분자들이 노동자들에게 작업을 중지하고 북경으로 집결하도록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것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관료들에 대항해 "노동계급" 혁명을 지도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로부터 나오기에는 이상한 내용의 선전이었다. 결국 철도 파업을 진압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며, 대학생들이 비숙련 파업 파괴 인력으로 투입되어야했다.

    1967년 1월 이후 홍위병이 공격을 가하자 관료들은 노동자들로 구성된 또 다른 "홍위병"을 자체 조직하여 자기 방어를 시작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홍위병이 사태를 장악하면 하루 12시간에 일주일 내내 일하고 또 8시간을 모택동 사상 연구에 바쳐야 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리고 중국 전역의 도시에서 터진 가두 전투에서 급진 모택동주의자들은 승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중이 "참여"하기는 했지만 문화혁명은 관료집단 내부의 투쟁이었다. 이것은 모택동-임표의 분파 대 원자화된 보수적 당 기구 사이의 싸움이었다. 이 와중에서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관료 파벌들에 의해 조직되어 냉소적으로 활용되었다.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모택동 분파의 공상적-군국주의적 민족주의와 자기 직책을 유지하려는 온갖 관료들의 출세주의 사이의 싸움에서 어느 쪽도 지지할 수 없었다.

    문화혁명은 중국사회를 잘못 양극화시켜 관료주의에 대항하고 있다고 믿는 주관적 혁명가인 청년 학생들과 생활수준을 수호하려는 노동자들을 대치시켰다. 중국의 트로츠키주의 조직이 개입할 수 있었다면 이 조직의 임무는 이 잘못된 구분선을 가로질러 관료집단 전체에 반대하는 진정한 공산주의 분파를 건설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홍위병에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해야했다: 첫째, 노동자들의 공산주의 계급의식은 종교적 신비주의(모택동의 영혼이 당신의 영혼을 사로잡았는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민주적 기관들을 통해 중국사회를 진정으로 통치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

    둘째, 사회주의 사상은 병영 금욕주의를 제거해야한다.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의 물질적 복지에 진정한 관심이 있으며 빈곤과 끝없는 노동을 미화하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의 공산주의 사회는 중국 인민의 의지력과 희생만으로는 건설될 수 없다. 이것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노동계급 혁명이 승리하여 중국 노동계급을 지원해야 가능하다. 그러나 이 혁명들은 중국 스탈린주의자들의 대외정책으로 방해받고 있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가장 중심적인 임무는 중국 국가의 위력과 권위를 활용하여 세계 사회주의혁명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반(反)노동계급적인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권들에 대한 지원을 즉각 중단하고 비록 소련이 관료집단에 의해 통치되고 있지만 이 나라와 즉시 군사적 동맹을 맺어야한다. 이 동맹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월남전 때문에 대단히 시급하게 요청되고 있다.

    급진 모택동주의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현직 관료들을 방어하는 투쟁에 끌려들어간 노동자들에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해야한다: 노동자들의 물질적 이해는 관료집단 내부의 "온건" 타락 분자들을 지원한다고 증진되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 정부가 중국 경제를 통제하고 보수적 관료집단의 억압적인 통제를 대체해야한다.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 정부는 군사적 목적에 필요한 잉여를 창출하고 농민을 공업 노동력으로 흡수하기 위해 임금 인상을 억제시켜야만 할 것이다. 노동계급의 독재는 궁핍한 농민들의 바다에 둘러싸인 소수의 귀족적 노동계급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 중국 인민의 물질적 조건의 근본적 개선은 선진 노동자국가들이 제공하는 자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국제혁명을 통해 중국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장기적인 전망일 필요가 없다. 아시아의 공업 강대국이며 대단히 의식적인 노동계급과 취약한 사회구조를 가진 일본의 사회주의 혁명을 촉발시킬 엄청난 동력이 중국의 노동자혁명으로 제공될 것이다. 일본과 중국의 상호보완적이며 계획적인 발전은 중국 인민의 빈곤을 효과적으로 퇴치할 것이다. 이것들이 문화혁명 기간에 중국 노동자와 학생들에게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제시했어야 할 정치 강령이다.

     

    누가 승리했는가?

    현직 관료들이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홍위병에 대항하면서 급진 모택동주의자들의 문화혁명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자 모택동 지도부는 문화혁명의 경로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결국 이 운동을 청산하게 될 조치를 취했다. 1967년 1월에는 홍위병의 "권력 장악"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가 동원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민해방군 장교단이 온갖 개인적 사회적 연줄 등으로 중국의 나머지 관료들과 연결되면서 관료집단의 피와 살이 되었다. 홍위병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조건으로 인민해방군 지휘부는 현직 행정 관료들에 대한 대대적 숙청의 중단과 이들의 복권을 요구했다. 이것은 소위 "온건한 간부 정책"이었다. 관료집단을 보호하는 인민해방군의 역할은 문화혁명의 공식 강령이 바뀌면서 정식화되었다. 1966년에 문화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이것은 파리 코뮌을 모델로 한 정치체제를 수립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1967년에 이것은 "혁명 반란군"(홍위병), 인민해방군, "혁명 간부"(현직 관료들) 등의 소위 "삼각 동맹"으로 바뀌었다.

    인민해방군과 홍위병의 진짜 관계는 1967년 8월 그 유명한 우한 사건으로 드러났다. 두 홍위병 집단 사이의 분파 투쟁에서 군대 지휘관은 당연히 우파를 지지했다. 모택동의 사절 몇 명이 북경에서 내려와 좀 더 급진적인 분파를 지지하자 군대 지휘관은 이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거의 반란에 가까운 이 행위로 그는 직위 해제되었다. 그러나 우한 사건의 주요 등장인물들의 운명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반란을 시도한 지휘관 전사도는 지금 권력으로 복귀했으며 모택동의 두 사절은 "초좌익 분자"로 낙인찍혀 숙청되었다.

    우한 사건으로 모택동 지도부는 인민해방군 지휘부에 일시적으로 대항했다. 이때 문화혁명은 무정부주의적 폭력의 절정에 다다랐으며 영국 영사관이 불에 탔다. 1967년 말에는 홍위병을 탄압하라는 인민해방군 지휘부의 압력은 저항할 수 없이 강했다.

    1968년 1월 28일자 [일간 해방군]지는 인민해방군이 "일반적으로 좌파를 지지하지만 어느 특정 분파는 지지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홍위병을 분쇄하겠다는 거의 노골적인 위협이었다. 이 글은 계속해서 "소부르주아 분파주의"를 공격했다. 거의 같은 때에 문화혁명의 지도력이 청년 학생들로부터 노동자, 농민, 병사들로 바뀌었다고 주은래가 주장했다. 1968년 내내 "소부르주아 분파주의", "무정부주의", "종파주의" 등에 대한 공격들이 "친자본주의 노선", "수정주의" 등에 대한 공격들을 압도했다.

    그리고 이 투쟁은 열대 과일 망고로 끝났다. 1968년 8월 모택동은 직접 개입하여 홍위병이 최초로 등장한 북경 청화대의 학생 홍위병 집단들 사이의 분파투쟁을 해결했다. 그러나 자기 성에 찰 정도로 분쟁이 해결되지 않자 그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러분은 나를 실망시켰다. 더욱이 여러분은 중국의 노동자, 농민, 병사 등도 실망시켰다"([극동경제평론]지, 1968년 8월 29일). 그리고 이 발언과 함께 문화혁명은 끝장이 났다. 모택동의 발언이 있은 후 48시간 내에 인민해방군 장교들이 지휘하는 중국 최초의 "모택동 사상 노동자-농민 선전대"가 청화대에 도착하여 홍위병들을 해산시켰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모택동은 이 선전대에 직접 망고를 선물했다. 전국에서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홍위병이 탄압받았다. 이에 저항하는 활동가들은 모택동을 "실망시키는" 자들의 보편적 운명을 맞이하여 농민들과 노동하면서 사상을 "고쳐먹도록" 농촌으로 보내졌다.

    모택동 분파는 문화혁명에서 승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간부들로 행정 관료들을 대체하고 여기저기에 젊은 광신도들을 박아 놓으면서 대중에게 혁명에 대한 열성을 불어넣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반대로 대중이 문화혁명을 거부하자 현직 관료들의 저항이 강화되었다. 일단 군대가 간접적으로 동원되자 모택동은 관료적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인민해방군 장교들과 급진 청년 학생들 위에서 군림하여 이들의 분쟁을 조정하면서 자기 권력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9년 소위 "승리자 당 대회"인 제 9차 중국공산당 당 대회가 열렸을 때 현직 관료들은 대부분 자리를 보존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앙위원회 구성을 통해 증명되었다. 중앙위원회의 평균 연령은 61세였고 당 평균 경력은 25년이었다. 문화혁명 이전에 사망하거나 숙청되지 않은 자들 가운데 1945년에 선출된 중앙위원들의 3분의 2가 1969년 중앙위원회에 재선되었다! 그리고 1969년 중앙위원회에는 모택동과 함께 대장정에 참여했던 고참들의 비율이 상승했으며, 인민해방군 장교들의 비율은 45%로 급상승했다. 순진한 모택동주의 열성파는 소위 반(反)관료주의 "혁명"의 이런 결과를 인정하기 힘들 것이다!

    임표 분파의 몰락과 함께 문화혁명은 최종적으로 막을 내렸다. 임표는 일련의 명백히 파산적인 정책들과 연관되었다. 국내 경제정책과 관련하여 그는 1969년에 생산 목표 달성 운동을 시작하기를 원했으며 "농민의 합당한 수입을 박탈했다"고 비난받았다([극동경제평론]지, 1973년 연감). 임표가 대약진 운동을 다시 추진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문화혁명에 대해 대중은 엄청난 불만을 드러냈고 기존의 생활수준을 방어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정권에 얼마든지 대항하려 했다. 이 상황에서 1969년에 대약진 운동을 다시 추진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사실 문화혁명 이래로 중국 경제는 1965년에 비해 시장지향성, 소득 불평등, 지역성 등이 더욱 두드러졌다. 모택동/주은래 정권은 크나큰 경제적 희생은 더 이상 요구되지 않을 것이라고 대중에게 확신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경제 정책에 대한 거의 모든 공식 성명서들은 농민이 개인 텃밭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계의 농촌이 세계의 도시를 정복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던 모택동은 대외정책에서도 똑같이 실패했다. 1960년대 후반부에 중국이 미국/소련에 대항하여 "제 3 세계"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고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정치적 백치일 것이다. 문화혁명 때문에 중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월남전에도 불구하고 1968년까지 미국의 대외정책은 중국에 대항하여 소련과 동맹을 맺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중국 정권은 외교적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객관적 조건들 때문에 우경적 대외정책을 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임표는 모택동이 미국의 닉슨과 화해를 시도하자 이에 반대하여 그와 결별했는지도 모른다.

    군대에 정치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임표는 새로 등장한 모택동/주은래 분파에 대항하여 정치투쟁을 시작했음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 투쟁에서 패배했다. 지금 모택동 일당이 주장하고 있듯이 그가 군부 쿠데타를 계획했을 가능성도 확실히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 임표가 모택동과 주은래에게 무슨 짓을 했든 죽은 지금 그의 시체는 이 나쁜 짓을 보상하고도 남았다. 왜냐하면 그는 문화혁명의 실패와 함께 드러난 모든 나쁜 결과들에 대한 책임을 질 완벽한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숙청된 "친자본주의 노선주의자" 관료가 권력에 복귀할 때마다 그를 탄압한 자는 임표가 되었다. 주은래가 영국 영사관의 화재 사건에 대해 영국에 사과했을 때에도 임표가 주동자였다고 발표되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문화혁명의 희생자들이 승리자들을 갈아치우는 것 같다. "권력의 제 2 인자로 친자본주의 노선을 주장했던" 등소평조차 이제 모택동과 함께 나란히 권력을 향유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혁명은 중국공산당을 크게 분열시킨 것이 확실하다. 제 10차 당 대회는 비밀리에 그리고 아주 신속하게 끝났다. 이것은 내부 투쟁이 심각하다는 징후이다. 당내 민주주의를 조금이나마 형식적으로 허용하면 서로 잡아 죽이는 분파투쟁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이다. 무명의 왕홍문이 제 3 인자로 부상한 것은 아마도 급진 모택동주의자들에게 던져진 떡고물일 것이다. 이들은 분파 투쟁 때마다 언제나 승리하는 쪽에 등장하는 주은래를 크게 불신하고 있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왕홍문은 당 간부들 사이에 이렇다 할 지지 기반이 없기 때문에 얼굴마담에 불과할 것이다. 모택동이 죽으면 문화혁명은 공식 토론회로 보일 정도로 후계 싸움이 피터지게 벌어질 것이다. 물론 중국 노동계급은 모택동 후계자의 문제를 생략하고 자신의 민주적 계급 지배를 확립할 수도 있다.

     

    모택동과 브레즈네프를 타도하자!

    중국과 소련의 공산주의 단결을 성취하자!

    문화혁명 이래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중국의 대외관계에서 일어났다. 소련과 중국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어 1970년에는 실제로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중국과 소련의 국경은 세계에서 가장 무기가 많이 배치된 국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모택동/주은래 정권은 현재 미국 닉슨 대통령과 새롭게 연애하고 있는 중인데 이 정책은 중국의 가장 주요한 적으로 간주되고 있는 소련을 겨냥한 것임이 명백하다. 소련에 대항하여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중국의 시도는 지난 일 년 동안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다. 소련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도록 중국은 유럽 나토군의 강화를 촉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8월 3일자 [북경 평론]지는 [런던 타임즈]지에 보낸 찰폰트 경의 편지를 지지하는 듯이 인용하고 있다. 그의 편지는 나토군의 확대를 촉구하고 있다:

    "최근 찰폰트는 [타임즈]지에 다수의 글을 발표하면서 소련의 위협이 유럽의 안보에 미치는 악영향을 폭로하고 서구 국가들의 방위 협력 강화를 호소하고 있다."

    외교 전선에서 일시적인 무드의 변화는 늘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미 제국주의가 소련과 맺고 있는 객관적인 관계는 미국이 중국과 맺고 있는 관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소련은 경제와 군사 면에 있어서 중국보다 월등하고 미국과 군사적으로 맞먹는 강대국이다. 따라서 세계의 반(反)자본주의 정권들의 핵심이며 미 제국주의의 주요한 객관적 장애물은 바로 소련이다. (미국이 봉쇄한 쿠바에 중국이 물자를 지원할 수 있었을까?) 이와 반대로 소련은 제국주의 세력의 개입이 없을 경우 대규모 전쟁에서 중국을 제압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은 다른 강대국과 연합해야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초강대국 사이의 삼각관계는 소련에 대항하여 미국과 중국이 동맹하는 쪽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나 초강대국 사이의 정치는 역사적 경험으로 보아 이성에 입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이 미국과 동맹한 후 중국을 공격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소련과 중국 사이의 전쟁은 사회주의 대의를 위해서는 엄청난 후퇴가 될 것이다. 제국주의가 직접 개입하든 않든 1970년 국경 분쟁의 확대판인 이 전쟁이 터진다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양측 모두의 패배와 양국에서 노동계급의 정치혁명을 주장해야한다. 그러나 미국이 소련이나 중국 어느 한쪽과 동맹하여 전쟁에서 승리한 후 패전국에 자본주의를 복귀시킬 상황까지 갈 수 있다면 미 제국주의에 의해 직접 공격을 당하는 기형적 노동자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군사적 방어를 주장해야한다.

    중소분쟁의 초점은 시베리아 국경이다. 18세기에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와 당시 만주의 국가였던 청나라 사이에 맺어진 조약이 양국 사이의 서로 모순되는 영토 주장의 법적 근거가 되고 있다. 그리고 청나라는 민족적 권리를 주장하는 데 빈틈이 없었다고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두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이 왜 자본주의 강대국과 동맹하며 인구도 별로 없는 땅덩어리를 두고 서로 전쟁을 벌이려는지 사회주의 운동에 새로 입문한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현상은 자본주의 강대국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자국가도 제국주의 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까? 두 스탈린주의 국가 사이의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경제적 동기가 있는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소련과 중국은 서로의 존재 때문에 정치적으로 위협받고 있다. 왜냐하면 이 두 강대국은 노동계급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노동계급을 무조건 억압하는 것을 통해서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고립된 관료집단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이 러시아와 영토 분쟁을 하지 않는 티토, 좌파의 트로츠키부터 우파의 부하린까지 러시아 내부의 모든 반대 세력, 자기 분파 가운데에서 독자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는 분자 등을 가혹하게 적대했던 것과 똑같이 흐루시초프/브레즈네프는 유소기/모택동을 적대해왔다. 노동자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주장을 전파할 국가권력을 가지고 있는 경쟁국은 반(反)노동계급적이며 안정성이 허약한 기형적 노동자 국가의 정권을 이중적으로 위협한다.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소련의 관료집단이 퇴보한 근본 원인은 후진국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의 일국적 한계와 고립에 있었다. 관료집단의 퇴보로 "일국 사회주의"라는 민족주의적 이론이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이 이론은 관료적 지배 파벌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허위의식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공산주의" 정권들은 노동계급의 국제주의를 거만하게 떠벌이고 있지만 동시에 자기 나라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자기의 신성한 임무라고 진정으로 믿고 있다. 소련에게 올바르게 적용되는 이 분석은 중국은 물론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 이류 민족주의 관료집단들에게도 적용된다.

    시베리아를 둘러싼 국경분쟁에서 현재 소련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핵무기의 절대적 우위 외에도 소련군은 재래식 전쟁에서도 중국의 인적 자원으로 상쇄할 수 없는 우위를 가지고 있다. 중국과 국경을 면한 소련 영토는 중국 영토보다 인구가 훨씬 조밀하다. 그리고 중국의 북쪽 국경에 거주하고 있는 터키어 민족들은 수백 년에 걸쳐 자신들에게 강요된 한족 국수주의를 증오해왔으며 소련에 공감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소련은 자본주의 강대국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브레즈네프는 시베리아의 유전과 가스전에 외국자본이 진출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이것은 순전히 재정적인 고려에서 나온 발상이 아니다. 미국과 일본이 시베리아에 자본을 투자할 경우 시베리아가 소련 영토로 남는 것이 이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군사적 우위는 중국의 핵무기 개발로 급격히 침식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이 보복할 수 있는 핵무기 능력을 더 많이 보유하기 전에 예방 차원에서 중국에 핵 공격을 감행하라는 압력이 브레즈네프 정권에 가해지고 있다. 현재 소련 당국은 특히 시베리아 주민들을 대상으로 "황인종 야만주의"라는 인종주의를 유포하면서 전쟁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런던 [이코노미스트]지의 특파원은 8월 25일-31일자 보도에서 시베리아 학교 선생의 말을 인용했다:

    "러시아어로 방송되는 중국의 라디오방송은 이렇게 위협했다: 중국이 시베리아 남부를 점령하면 러시아인들을 전부 죽이고 러시아 여자 애들은 결혼감으로 남겨 놓을 것이다."

    만약 모스크바와 북경에 혁명적 노동자 정부가 존재한다면, 시베리아를 둘러싼 분쟁은 러시아와 중국 노동자들의 이익을 중심으로 쉽게 해결될 것이다. 시베리아에는 중국인의 이민이 허용될 것이고 이 지역은 급격한 경제발전을 위해 양국 공동으로 관리될 것이다. 더욱이 소련과 중국에 단결된 혁명적 노동자 정부가 존재하기 때문에 일본의 사회주의 혁명이 촉발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중국과 시베리아 개발을 위해 일본의 경제 자원이 투입될 것이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입장에 처해 있다. 이것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알고 있다. 우선 이들은 제국주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려고 하며 또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강대국들과 가능하지도 않은 공존을 시도한다. 더욱이 이들은 자신들의 기생적 정권을 필연적으로 타도할 세계혁명을 두려워한다. 집단적 소유형태에 기초한 관료적 정권인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은 노동자 권력이 국제적으로 확산되어야 장기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민족주의 정책을 통해 중국과 소련의 관료집단은 노동계급 독재를 침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은 국내 반혁명이나 제국주의 공격으로 자신들이 타도되는 조건을 조성하고 있다. 러시아의 10월 혁명 이후 제국주의의 가장 중요한 패배에 해당되는 중국 혁명은 이제 핵전쟁에 의해 치명적으로 위협받고 있다. 이 전쟁은 제국주의 국가와의 전쟁이 아니라 소련이라는 강력한 기형적 노동자국가와의 전쟁이다.

    모택동 및 브레즈네프의 반동 정권을 타도하는 것을 통해서만 소련과 중국의 노동자들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막을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세계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중국과 소련 노동자 국가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통합을 성취할 수 있다.

     

    소련과 중국의 노동계급 정치혁명으로 반(反)제 공산주의 진영을 단결시키자!

    노동계급 국제혁명을 통해 러시아와 중국 혁명을 방어하자!

     

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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