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내용은 강명관이라는 사람이 쓴 <조선의 뒷골목 풍경> 을 읽다가 나온 부분인데, 감명 깊어서 퍼왔음..
"먼저 금속 활자로 물꼬를 터 보자. 뜬금없이 웬 금속 활자인가 하고 의아할 텐데, 사실 다른 이유는 없다. 하나의 예로 들겠다는 말이다. 금속 활자가 세계에 자랑할 민족의 문화 유산이라는 것은 한국인들 누구나 안다. 초등 학교 때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 우리 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이야기이다. 누가 부인하겠는가. 매스컴에서는 행여 그 각인이 마모될까 끊임없이 덧새겨 준다. 금속 활자는 한민족의 우수성을 보여 주는 신성한 표징이 되었다.
나는 이 표징을 오랜 세월 믿어 왔다. 그런데 최근 그 표징에 약간의 의문을 표하게 되었다. 문득 세계 최초라는 점 외에 고려의 금속 활자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뭇 놀랐다. 따지고 보면 미심쩍은 것이 한둘이 아니다. 금속 활자가 세계적 문화 유산이라고 자랑하는 근거는 단 하나다. 실물이 남아 있는 '직지심경(1377년)' 을 증거로 삼더라도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 인쇄술보다 80여 년을 앞서 발명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 금속 활자의 중요성은 구텐베르크 활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구텐베르크 활자의 중요성은 어디에 있는가? 금속은 마모되지 않는다. 마모되지 않는 활자에 부가된 가동성, 이것으로 인해 책의 대량 인쇄, 곧 지식의 무한 복제가 가능해짐으로써 소수에 의한 지식 독점이 해체되고 지식의 보편화가 시작된 것이다. 영국 BBC 방송국에서 지난 천 년 간 가장 영향략이 큰 역사 인물 100명을 선정했을 때 구텐베르크가 1위를 차지한 것은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럼 한국의 금속 활자는 어떠한가. 최초의 금속 활자 인쇄물인 '상정고금예문' 은 불과 28부를 찍었을 뿐이다. 세종 때 만들어진 금속 활자 인쇄물은 보통 수십 부, 많이 찍으면 2~3백 부 정도의 소량 인쇄였다. 대량 인쇄가 필요한 경우, 금속 활자 인쇄가 아닌 목판 인쇄를 선택하였다. 조선조의 금속 활자는 구텐베르크 활자와는 달리 애당초 대량 인쇄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조의 금속 활자 인쇄는 속도가 빠르지도 않았다. 세종 때 한 번 개량되었다고는 하지만, 조판 • 인쇄는 여전히 수작업에 의지하였다. 활자판에 먹을 칠하고 그 위에 종이를 얹어 솜망치로 두드린 뒤 한 장씩 떼어 내는 방식은 조선조가 종언을 고할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이에 반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포도주 압착기를 이용한 반기계식이었다. 어느 쪽이 인쇄 속도가 빠르며, 대량 인쇄에 유리하겠는가?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 활자는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우리의 금속 활자는 13세기 초 발명된 이후 조선조가 종언을 고할 때까지 민간의 주된 인쇄 수단이 되지 못했다. 조선 시대에는 민간에서 상업용 인쇄를 위해 금속 활자를 제작한 경우는 없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국의 금속 활자는 지식의 대중적 • 보편적 확산에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 물론, 어떤 변화도 초래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못한다. 변화가 있었다면 있었다. 세종조의 금속 활자 인쇄술은 사대부 계급의 지적 수준을 높여 지배 질서의 완성에 기여했다.
구텐베르크 활자와 한국의 금속 활자는 금속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달랐다. 무엇보다 구텐베르크와 한국의 금속 활자는 각각 표음 문자와 표의 문자를 채택하였다는 점에서 근원적으로 길이 달랐다. 알파벳 자모를 쓰는 구텐베르크 활자는 극단적으로 말해 1면을 인쇄할 수 있을 정도의 활자만 있으면 책 한 권을 인쇄할 수 있었으나, 한국의 금속 활자는 한 번 주조할 때 적어도 10만 자, 보통 20~30만 자를 주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국가에서만 금속 활자를 제작 • 사용했던 것은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표음 문자인 한글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한글 창제와 금속 활자의 상용화는 모두 세종조에 이루어졌으나, 기묘하게도 세종은 한글 금속 활자를 만들지 않았다. 물론 한글 활자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한문 서적의 언해에 필요한 소수에 불과했다. 애초 국문 서적 인쇄를 위한 대량의 한글 활자는 만들어진 것이 없었다. 위정자들은 대중을 위한 지식의 보급이라는 문제 자체를 생각하지도 못했다. 금속 활자는 한자 활자였고, 오로지 소수를 위한 책만을 찍었으니, 지식의 보편화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금속 활자의 최초성에만 주목했지, 어떤 현실적인 압력이 금속 활자를 탄생시켰는지, 금속 활자가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했는지, 궁극적으로 금속 활자가 사회 변화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등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로지 세계에 자랑한 위대한 민족의 업적이란 말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사라는 흐름 속에서 금속 활자의 의미를 규명해야 할 것인데, 세계 최초란 허울 아래 서양의 금속 활자와 견주어 가당치도 않은 자랑만 늘어놓고 있으니, 정말 이상한 일 아닌가.
금속 활자를 꼬투리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민족' 이란 이름이다. '민족의 세계적 문화 유산' 이란 명제에서 '민족' 이란 어휘가 모든 것을 은폐해 버리고 말았다. 금속 활자가 민족이란 언어의 광휘를 빌려 찬란한 빛을 발하면서, 우리가 금속 활자 출현에서 정말 심각하게 따져야 할 모든 문제들은 어둠 속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민족' 이란 단어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