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민족성개조
18.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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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I 중국혁명의 개괄과 전망 
동방의 나라들과 코민테른 전체를 위한 그 교훈


볼셰비키주의와 멘셰비키주의, 독일의 좌익과 국제 사회민주주의는 1905년 혁명의 경험, 오류, 경향에 대한 분석에서 명확히 구체화되었다. 오늘날 국제 노동자계급에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중국혁명의 경험에 대한 분석이다.

그렇지만 이 분석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식 문헌은 허둥지둥 사실에 맞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문을 고르는 일에 착수했다. 이로써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불성실함이 완전히 드러났다. 강령 초안은 가능하면 가장 첨예한 중국 문제의 핵심을 무디게 한다. 그러나 중국 문제에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따른 치명적 노선의 요지를 승인한다. 거대한 역사적 과정에 대한 분석은 파산한 도식에 대한 문필적 방어로 대체되어 있다.


1. 식민지 자본가계급의 본질에 대하여

강령 초안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 ‘[식민지 민족 자본가계급과의] 일시적 협정은 자본가계급이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조직을 방해하지 않고, 진정한 반(反)제국주의 투쟁을 수행하는 한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다.’ 설사 심사숙고하여 부수적인 제안으로 덧붙인다고 하더라도 이 정식은 어쨌든 동방의 나라들을 위한 초안의 중심적 선결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주요한 제안은 ‘민족 자본가계급의 영향력으로부터 [노동자 농민의] 해방’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입문서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게다가 경험에 기초하여 평가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여기서 주요한 제안은 단지 부수적 제안에 지나지 않은 반면에, 부수적 제안은 가장 본질적인 것을 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동방의 노동자계급에게 이 정식은 전형적인 멘셰비키적 올가미다.

여기서 ‘일시적 협정‘이 의미한 것은 무엇인가? 자연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모든 것이 ‘일시적이다.’ 우리가 여기서 검토하고 있는 것이 혹시 이번부터 다음번까지의 순전히 실무적인 협정인가? 우리가 매번 아주 명확한 목적에 기여하는 엄격하게 범위를 정한 협정이나, 실무에 한정된 그런 협정을 미리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를테면, 반(反)제국주의 시위를 조직하거나, 외국 조차지의 파업자를 위해 중국 상인들의 도움을 얻으려고 국민당의 청년 학생과 맺는 협정 같은 경우가 그렇다. 이러한 경우는 중국에서도 앞으로 결코 배제되지 않는, 그러나 이 경우에 왜 여기서 ‘자본가계급이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조직을 방해하지 않고, 진정한(!) 반(反)제국주의 투쟁을 수행하는 한, …’이라는 일반적인 정치적 조건이 제시되는가? 자본가계급과의 모든 협정, 즉 주어진 각각의 경우에 적합한 서로 연관이 없고, 실무적이며, 편의주의적인 협정의 유일한 ‘조건’은 조직이나 깃발이 단 하루나 단 한 시 간도 직간접적으로 뒤범벅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에 있다. 또한 빨강과 파랑을 구별하고, 진정한 반(反)제국주의 투쟁을 이끌거나 노동자 농민을 방해하지 않는 자본가계급의 역량 또는 준비성을 일순간도 믿지 않는 것에 있다. 실무적이며, 편의주의적인 협정을 위해 앞서 인용한 것과 같은 조건은 전혀 쓸모가 없다. 거꾸로 이러한 조건은 짧은 ‘협정’ 기간 중에도 중단할 수 없는 우리의 반(反)자본주의 투쟁에 대한 일반적 노선에 위배되는 것으로,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밖에 없다. 오래 전에 말한 것처럼, 우리를 전혀 구속하지 않고, 우리에게 정치적으로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 그런 순전히 실무적인 협정은 해당 시기에 유리하다면, 악마와도 맺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악마에게 통상 기독교로 개종해야 되고, 그 뿔을 노동자 농민에 대해서가 아니라 칭찬할 만한 행위에만 사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이러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악마의 옹호자로 처신하는 것이며, 그의 후견인이 되게 해달라고 악마에게 구걸하는 것이다.

미리 자본가계급을 격찬하는 구실을 하는 터무니없는 조건에 따라 강령 초안은 (그 테제의 외교적이고 부수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 여기에 관련된 것은 바로 장기적인 정치블록이지, 실제적 이유와 엄격히 제한된 실제적 목표가 필요한 특수한 경우의 협정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자본가계급이 ‘진정한‘ 투쟁을 수행하고, 노동자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요구가 의미한 것은 무엇인가? 이런 조건을 자본가계급에게 제시하고, 이들의 공적인 약속을 요구하는 것인가? 자본가계급은 당신이 원하면 어떠한 약속도 할 것이다! 자본가계급은 ‘동조적인’ 당으로 코민테른에 들러붙어 농민인터내셔널에 가입하고, 심지어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 안을 들여다볼 자신의 대의원을 모스크바에 파견할 것이다. 요컨대, 노동자 농민을 더 효과적으로, 더 손쉽게, 더 완벽하게 속일 기회(우리의 도움을 포함하여)를 줄 것은 무엇이든 약속할 것이다―기회가 닿을 때까지 상해에서 시도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다시 말하지만, 이렇게 노동자 대중 앞에서 우리를 자신의 보증인으로 둔갑시킬 목적으로 즉시 동의할 자본가계급에게 정치적 의무를 강요하는 문제가 아니잖은가? 선험적인 ‘사회학적’ 예측, 말하자면, 투쟁하고 방해하지 않을 역량이 있는 전문가인 해당 민족 자본가계급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평가가 지금의 문제인가? 유감스럽게도 가장 최근의, 그리고 가장 새로운 경험이 증명하는 것처럼, 이러한 선험적 예측은 대체로 전문가를 바보로 만든다. 그리고 이들만이 관련된 경우라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

원문이 다루고 있는 문제가 바로 장기적인 정치블록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할 수 없다. 임시적인 실무협정 문제를 강령에 포함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불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미건조한 전술적 결의문 ‘우리의 현재 임무에 대하여’ 하나면 족할 것이다. 이 결의문은 제2차 중국혁명을 파멸시킬 운명이었으며, 미래의 혁명을 파괴시킬 수 있는 국민당에 대한 어제의 태도를 정당화하고 강령적으로 승인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초안의 실제 기초자인 부하린이 제시한 견해에 따르면, 모든 관심을 두어야 할 곳은 바로 식민지 자본가계급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이다. 투쟁 역량이 있고 방해하지 않는 식민지 자본가계급은 자신의 맹세가 아니라 엄격한 ‘사회학적’ 방식으로, 즉 기회주의적 목적에 적합한 수많은 현학적 도식에 의해 검증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이를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식민지 자본가계급에 대한 부하린의 평가로 되돌아가보자. 식민지혁명의 ‘반(反)제국주의적 내용’을 인용하고 나서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은 채) 레닌을 인용하겠다. 부하린은 이렇게 선언한다.

중국의 자유 자본가계급은 객관적으로 몇 달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서 혁명적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이 계급이 지칠 대로 지쳤다. 이것은 1905년 러시아의 자유주의 혁명 유형의 ‘24시간’짜리 정치적 휴가가 결코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다.

레닌은 실제로 피억압 민족과 부르주아 압제민족을 엄격하게 구별하라고 가르쳤다. 이로부터 이례적으로 중요한 결론이 나온다. 이를테면,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 국가의 전쟁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그것이다. 평화주의자에게 이러한 전쟁은 다른 전쟁과 마찬가지다. 공산주의자에게 제국주의 국가에 대한 식민지 국가의 전쟁은 부르주아 혁명전쟁이다.

따라서 레닌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특히 러시아 1905년 혁명의 수준에서 민족해방운동, 식민지 봉기, 피억압 민족의 전쟁을 제기했다. 그러나 레닌은 현재 180도로 돌변한 부하린이 한 것처럼, 결코 민족해방 전쟁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위에 두지 않았다. 레닌은 피억압 부르주아 국가와 부르주아 압제국가의 차이를 강조했다. 그러나 레닌은 마치 민족해방투쟁 중에 있는 식민지 또는 반伴)식민지 국가의 자본가계급이 틀림없이 민주주의 혁명 중에 있는 비(非)식민지 국가의 자본가계급보다 더 진보적이며, 더 혁명적인 것처럼 어디서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또 제기할 수도 없었다. 이것은 이론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니다. 이것에 대한 역사상의 증거도 없다. 예를 들면, 러시아의 자유주의처럼 비참하고, 그 좌익의 절반인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 사회혁명당, 멘셰비키처럼 잡종이었다고 하더라도 중국의 자유주의와 중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더 높은 수준이었다거나 그 러시아 원형보다 혁명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민족자본가계급의 혁명적 성격이 마치 식민지 억압에서 불가피하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처럼 사태를 묘사하는 것은 멘셰비키주의의 근본적 오류를 뒤집어 재연하는 것이다. 멘셰비키주의는 러시아 자본가계급의 혁명적 성격이 봉건주의와 전제주의의 억압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자본가계급의 본질과 정책에 대한 문제는 혁명투쟁을 수행하는 민족의 내적 계급구조 전체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혁명투쟁이 발전하는 역사적 시기, 세계 제국주의 전체 또는 그 특정 분파에 대한 민족 자본가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의존 정도, 마지막으로,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토착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행동 정도와 이 계급의 국제 혁명 운동과의 결합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민주적 또는 민족적 해방운동은 자본가계급에게 그 착취 가능성을 강화 확대시킬 기회를 제공할지도 모른다. 혁명 전장(戰場)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개입은 자본가계급이 착취할 가능성 전체를 빼앗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다.

몇몇 사실을 좀 더 면밀히 관찰해보자.

현재 코민테른을 부추기는 자들은 케렌스키가 제국주의자들과 협력으로 나아간 반면에, 장개석은 ‘반(反)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했다고 끈질기게 반복하고 있다. 그런고로 케렌스키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투쟁해야 했지만, 장개석은 지지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케렌스키주의와 제국주의의 유대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러시아 자본가계급이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의 찬성을 얻어 니콜라이 2세를 ‘폐위’시켰다는 것을 지적할 수도 있다. 밀류코프-케렌스키는 로이드조지-푸앵카레가 수행한 전쟁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로이드조지-푸앵카레도 먼저 짜르에 대한, 그리고 나중에는 노동자농민에 대한 밀류코프-케렌스키의 혁명을 지지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런 점에서 중국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중국의 ‘2월’혁명은 1911년에 일어났다. 이 혁명은 비록 제국주의자들의 직접적인 참여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거대하고 진보적인 사건이었다. 손문(孫文, Sun Yat-sen)은 회고록에서 자신의 조직이 모든 일에서 얼마나 일본, 프랑스,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의 ‘지지’에 의지했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1917년에 케렌스키가 계속 제국주의 전쟁에 참전했다면, 대단히 ‘민족적’이고, 대단히 ‘혁명적’인 중국의 자본가계급은 협상국이 중국의 해방을 도울 것이라는 희망으로 윌슨의 전쟁 개입을 지지했다.

1918년에 손문은 협상국 정부들에 중국의 경제적 발전과 정치적 해방을 원하는 자신의 계획을 전했다. 청(淸) 왕조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중국의 자본가계급이 짜르체제에 대항하는 투쟁에 나선 러시아 자본가계급보다 더 빼어난 혁명적 자질을 보여주었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도 없다. 또한 제국주의에 대한 장개석과 케렌스키의 태도 사이에 원칙적 차이가 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그래도 장개석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전쟁을 수행했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상황을 묘사하는 것은 사실의 외양을 너무 조잡하게 꾸미는 것이다. 제국주의 열강들 가운데 하나의 대리인인 장개석은 중국의 특정 군벌에 대항하는 전쟁을 수행했다.

이것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전쟁을 수행하는 것과 결코 같지 않다. 담평산(譯平山, Tang Ping-shan)도 이를 이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 보고에서 담평산은 장개석이 이끈 국민당 중앙의 정책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국제정책 분야에서는 그 말의 완전한 의미에서 볼 때, 수동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국민당은 영국 제국주의에 대항해서만 싸우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관한 한, 특정 조건 아래에서 이들과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다.(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 회의록, 제1권, 406쪽)

제국주의에 대한 국민당의 태도는 처음부터 혁명적이 아니라 완전히 기회주의적이었다. 국민당은 중국 자본가계급에게 더 유리한 조건에 같은 또는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과 협정을 맺기 위해 특정 제국주의 열강의 대리인들을 분쇄하고 고립시키려고 애썼다. 이것이 전부다. 그러나 핵심은 문제에 대한 정식 전체가 틀렸다는 사실에 있다.

제국주의 ‘일반’에 대한 해당 민족 자본가계급 모두의 태도가 아니라 자국의 당면한 혁명적 역사적 임무에 대한 이 계급의 태도를 측정해야 한다. 러시아 자본가계급은 제국주의 압제국가의 자본가계급이었다. 중국의 자본가계급은 피억압 식민국가의 자본가계급이다. 봉건적 짜르체제의 타도는 구 러시아에서 진보적인 임무였다. 중국에서 제국주의의 굴레를 타도하는 것은 진보적인 역사적 임무이다. 그렇지만 제국주의, 노동자계급, 농민에 대한 중국 자본가계급의 행동은 짜르체제와 혁명적 계급에 대한 러시아자본가계급의 태도보다 더 혁명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비열하고 더 반동적이었다. 이것이 문제를 제기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중국의 자본가계급은 충분히 현실적이고, 실제로 세계 제국주의에 맞서는 진지한 투쟁은 주로 자본가계급 자신에 대한 위협이 될 혁명적 대중의 격변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이해할 정도로 세계 제국주의의 본질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청 왕조에 대한 투쟁이 짜르체제의 타도보다 더 작은 역사적 비중의 임무였다면, 세계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은 훨씬 더 큰 규모의 임무이다. 그리고 우리가 짜르체제를 타도하고 봉건주의를 파괴하려는 자유주의의 준비성과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능력을 믿지 말라고 처음부터 러시아 노동자를 가르쳤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정력적으로 중국 노동자를 똑같은 불신감으로 속속 물들였을 것이다. 식민지 자본가계급의 ‘내재적인’ 혁명적 기질에 대해 스탈린-부하린이 퍼뜨린 생소하고 완전히 잘못된 이론은 본질적으로 중국 정치의 용어로 바꾸어놓은 멘셰비키주의이다. 이것은 억압받는 중국의 처지를 중국 자본가계급의 내적인 정치적 덤으로 바꾸는 데 기여할 뿐이다. 또한 3중으로 억압받는 중국 노동자계급에게 자본가계급의 짐을 추가로 지우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강령 초안의 기초자인 스탈린과 부하린은 장개석의 북벌이 노동자와 농민대중 사이에서 강력한 운동을 불러 일으켰다고 말했다. 이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구치코프(Guchkov)와 슬긴(Shulgin)이 니콜라이 2세의 퇴위각서를 페테르부르크로 가져온 사실이 혁명적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대중의 가장 핍박받는, 피폐한, 겁이 많은 계층을 일깨우지 않았는가? 얼마 전에는 트루도비키(Tmdovik)였지만 각료회의 의장과 총사령관이 된 케렌스키가 병사 대중을 고무하지 못했는가? 이런 사실이 병사 대중을 집회장으로 이끌지 못했는가? 또 농촌이 지주에 대항하여 일어서도록 고무하지 못했는가? 한층 더 광범하게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었다. 《공산당선언》의 표현을 쓰자면, 자본주의의 전체적 활력이 대중을 고무하지도 못하고, 우매한 농촌 생활에서 대중을 구제하지도 못했는가? 또한 노동자부대로 하여금 투쟁에 나서도록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자본주의 전체 또는 특히 자본가계급의 특정 행동의 객관적 역할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평가가 자본주의 또는 자본가계급의 행동에 대한 능동적 계급의 혁명적 태도를 대신할 수 있는가? 기회주의 정책은 언제나 이런 비(非)변증법적이고, 보수적이며, 추수주의적인 ‘객관주의’에 기초해 있다. 거꾸로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 전위가 자본가계급에 대해서 더 독자적 일수록, 또 자본가계급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거나, ‘공동전선’이나 반(反)제국주의 투쟁에 대한 그 준비성이나 혁명적 정신을 과대평가하거나, 자본가계급의 턱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두려고 하지 않을수록, 자본가계급이 그 위치 때문에 하지 않을 수 없는 이런저런 행동의 혁명적 결과가 더 풍성해지고, 더 결정적이게 되며, 덜 의심스럽고, 더 확고해질 것이라고 늘 가르쳤다.

식민지 자본가계급에 대한 스탈린주의와 부하린주의의 평가는 이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또 정치적으로도 비판을 견딜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것처럼, 강령 초안이 신성시하려는 것이 바로 이런 평가다.

* * *

드러나지 않고 비난받지 않은 오류는 언제나 또 다른 오류에 이르거나, 아니면 이를 위한 기초를 닦는다.

어제의 중국 자본가계급이 혁명적 공동전선에 편입했다면, 오늘의 중국 자본가계급은 ‘분명히 반(反)혁명 진영으로 넘어갔다’고 선언될 것이다. 진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도 한번 없이 순전히 행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이런 편입과 변질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 들춰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본가계급이 혁명 진영에 합류하는 것은 경솔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독자적인 계급이해 때문이지 무심결에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따라서 대중을 두려워하는 자본가계급은 혁명을 유기하거나 혁명에 대해 숨겨온 자신의 증오심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그러나 자본가계급은 ‘분명히 반(反)혁명 진영으로’ 넘어갈 수 있다. 즉, 그 근본적인 계급적 열망이 혁명적 수단이나 다른 방법(이를테면, 비스마르크처럼 강경한 방법)으로 만족한 경우에만, 다시 한 번 혁명을 ‘지지’, 아니 적어도 불장난할 필요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1848~71년 시기의 역사를 상기해보자. 러시아 자본가계급은 혁명이 단지 국가두마, 즉 관료집단에 직접적인 압력을 가해 협정을 맺을 수 있게 하는 수단을 부여했기 때문에 기탄없이 1905년 혁명에 등을 돌릴 수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그렇다 하더라도 1914~17년 전쟁이 자본가계급의 기본적 이해를 지키기 위한 ‘현대화된’ 체제의 무능력을 폭로하자, 자본가계급은 다시 혁명 쪽으로 방향을 바꿨으며, 이번에는 1905년보다 더 급격했다.

누가 중국의 1925~27년 혁명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중국 자본주의의 기본적 이해를 만족시켰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오늘날 중국은 1925년 이전과 마찬가지로 정말 실질적인 민족적 단결과 관세 자주권에서 동떨어져 있다. 그러나 통합된 국내시장의 창출과 값싼 외국상품으로부터 국내시장의 보호는 중국 자본가계급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이 문제는 노동자계급과 빈농에 대한 계급지배의 기초를 유지하는 것에 버금간다. 그러나 일본이나 영국 자본가계급에게 중국의 식민지 지위 유지는 마찬가지로 중국 자본가계급에게도 경제 자주권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이다. 이런 이유로 중국 자본가계급의 정책에서 왼쪽으로 향한 지그재그가 적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민족공동전선’을 예찬하는 자들의 많은 유혹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 공산주의자들에게 1924년부터 1927년 말까지 자본가계급과 맺은 동맹은 옳았지만 이제 자본가계급이 분명히 반(反)혁명 진영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말 하는 것은 다시 한 번 다가오는 상황의 객관적 변화와 불가피한 중국 자본가계급의 왼쪽으로 향한 지그재그에 직면해 있는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무장해제시키는 것이다. 이제 전쟁은 이미 강령 초안 기초자들의 기계적 도식을 완전히 뒤집어엎은 장개석의 북벌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 * *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아직도 생생하고, 적지 않은 중요성을 가진 사실, 다시 말해서 짜르 러시아가 억압 민족과 피억압 민족, 즉 대 러시아인과 완전히 식민지 또는 반(半)식민지 지위에 있던 수많은 ‘이방인들’의 조합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문제에 대한 공식적 설명의 원칙적 오류가 더 역력하게, 더 설득력 있게, 더 명백하게 드러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레닌은 짜르 러시아 인민의 민족문제에 가장 큰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부하린 등에 반하여) 자결권과 나란히 분리권을 포함하는 피억압 민족의 투쟁을 지지하는 것은 지배민족 노동자계급의 기초적 의무이기도 하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당은 이것으로부터 짜르체제에 억압받는 민족(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타타르인, 유태인, 아르메니아인 등)의 자본가계급이 러시아 자본가계급보다 더 진보적이고, 더 급진적이며, 더 혁명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역사적 경험은 폴란드 자본가계급―전제주의의 속박과 민족적 억압을 받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이 러시아 자본가계급보다 더 반동적이며, 국가두마에서 언제나 입헌민주당이 아니라 10월당 쪽으로 끌렸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같은 사실이 타타르 자본가계급에게도 적용된다. 유태인은 정말 아무런 권리도 없었다는 사실도 유태인 자본가계급이 러시아 자본가계급보다 훨씬 더 겁이 많고, 더 반동적이며, 더 비열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아니면 에스토니아인, 레트인, 그루지야인, 아르메니아인 자본가계급이 대 러시아인 자본가계급보다 더 혁명적이었을 것인가? 누가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잊을 수 있는가!

아니면 사태가 지난 지금, 볼셰비키주의가―분트(Bund)[분트의 정식 명칭은 리투아니아/폴란드/러시아의 유태인 노동자조합이다.-옮긴이], 아르메니아 혁명연합(Dashnakes), 폴란드사회당(PPS), 그루지야와 다른 지역의 멘셰비키와는 대조적으로―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터지려는 바로 그때, 모든 피억압 민족과 짜르 러시아의 식민지 노동자들에게 자유주의 자본가계급뿐만 아니라 혁명적 소부르주아 정당들과의 모든 조직적 관계를 끊고, 분리하여 자신만의 자주적인 계급조직을 만들고, 이런 정당들에 맞서 투쟁으로 노동자계급을 획득하고, 노동자들을 통해 농민에게 미치는 이 정당들의 영향력에 맞서 싸우라고 촉구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해야 하는가? 이 점에서 우리가 ‘트로츠키주의적’ 오류를 범하지 않았는가? 이런 피억압민족, 그리고 많은 경우 아주 후진적인 민족들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국민당에 상응하는 발전 단계를 뛰어넘지 않았는가?

실제로 폴란드사회당, 아르메니아혁명연합, 분트 등이 전제주의와 민족적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필수적인 다양한 계급의 협력을 위한 ‘독특한’ 형태였다는 이론을 어떻게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가!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어떻게 잊을 수 있는가?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지난 3년의 중국사태―그리고 이것은 지금 심지어 장님도 분명히 알 수 있어야 한다―이전에도 중국의 국내 상황에서 결정적 요인인 외국 제국주의가 중국의 밀류코프와 케렌스키를 결국 그 러시아 원형보다 훨씬 더 비열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우리 당이 발표한 맨 처음 선언이 자본가계급이 더 저급하고 더 비열해지는 더 먼 동쪽으로 갈수록 더 큰 임무가 노동자계급에게 떨어진다고 선언한 것은 이유가 없지 않다. 이 역사적 ‘법칙’은 중국에도 완전히 적용된다.

청산주의자 진영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치인은 우리의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고, 노동자는 자본가계급을 지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자인 우리도 우리의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말한다. 노동자는 부르주아 정치인의 사기에 대해 인민이 알게 해야 한다. 이들의 약속을 믿지 말 것과 오직 자신의 힘, 자신의 조직, 자신의 단결, 자신의 무기만을 믿으라고 가르쳐야한다.(레닌, 《전집》, 제14권 1부, 11쪽)

이 레닌주의 테제는 동방 전체에 필수적인 것이다. 반드시 코민테른의 강령에서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2. 중국혁명의 단계

국민당의 첫 번째 단계는 민족 자본가계급이 '4계급 블록'을 옹호하는 꼬리표를 달고 지배한 시기였다. 장개석의 쿠데타 뒤인, 두 번째 단계는 '좌익' 왕정위의 무한(武漢)정부 형태로 중국의 케렌스키주의가 유사하면서도 '독자적인' 지배를 실험한 시기였다. 멘셰비키와 함께 러시아인민주의자들(Narodniks)이 자신의 단명한 '독재'로 공개적인 이중권력을 형성하는데 일조한 반면에, 중국의 '혁명적 민주주의'는 아직 이 단계에 이르지도 못했다. 역사일반이 명령으로 작동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1925년 이후 국민당이 휘두른 독재 외에는 다른 어떤 '민주주의 독재'도 없으며, 또 없을 것임을 이해하는 것만 남는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국민당이 성취한 중국의 반(半)통일이 조만간 지지를 받든, 다시 나라가 분리 되든 지와 무관하게 사실로 남는다. 그러나 자신의 다른 모든 자원을 소비하고 나서 혁명의 계급적 변증법이 도시와 농촌의 억압받는, 권리를 빼앗긴 수많은 인민들을 지도할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명확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일정에 올린 바로 그때,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독재 슬로건을 제기했다. 이 상투적 처방에 대한 답이 광동備東)봉기였다. 광동봉기는 미성숙, 지도부의 모험주의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단계, 아니 더 정확히는 다가오는 제3차 중국혁명의 막을 걷어 올렸다. 이 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과거 죄악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고 하는 지도부는 작년 말에 극악무도하게 사태를 밀어붙였으며, 광동봉기를 유산시켰다. 그렇지만 이 유산조차 우리에게 어머니라는 유기체와 잉태과정에 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줄 수 있다.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혁명의 근본적 문제들에서 광동사태가 갖는 엄청나고, 정말로 결정적인 의의는 바로 우리가 지금 사실상 거대한 규모로 실시되고 있는 실험실에서의 실험인 역사와 정치에서 보기 드문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건으로 한다. 우리는 이것에 큰 대가를 치렀지만,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만큼 더 그 교훈을 잘 흡수하게 한다.

〈프라브다〉지(제31호)지의 설명에 따르면, 광동봉기의 전투적 슬로 건 가운데 하나는 '국민당을 타도하라!'는 함성이었다. 국민당의 깃발과 휘장은 찢겼으며, 짓밟혔다. 그러나 장개석의 '배신'과 뒤이은 왕정위의 '배신'(자기 계급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우리의 … 환상에 대한 배신) 뒤 에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엄숙한 서약을 발표했다 : '우 리는 국민당의 깃발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광동의 노동자는 국민당의 모든 성향을 불법이라고 선언하면서 국민당을 금지시켰다. 이것은 기본적인 민족적 임무를 해결하기 위해 대자본가계급은 물론이고 소부르주아 계급도 노동자계급의 당과 함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을 정치세력, 당 또는 분파도 만들어낼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면을 지배하는 열쇠는 바로 빈농의 운동을 획득하는 임무가 이미 전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어깨 위에 떨어졌으며, 따라서 직접적으로는 공산당에게 떨어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혁명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과제를 진정으로 해결하는 길은 노동자계급의 수중으로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프라브다〉지는 단명한 광동소비에트정부의 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노동자를 위해 광동 소비에트는 공장위원회를 통해 산업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수립하고 … 대기업, 운송, 은행 에 대한 국유화 포고령을 공표했다.'

이러한 조치에서 더 나아가 '… 노동자들을 위한 모든 대자본가계급의 가옥몰수' 같은 조치도 언급했다.
따라서 권력을 장악한 것은 광동의 노동자였으며, 더욱이 그 정부는 실제로 공산당의 수중에 있었다. 새로운 국가권력의 강령은 광동성 전체에 걸친 모든 봉건재산의 몰수,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의 수립뿐만 아니라 대기업, 은행, 운송의 국유화, 심지어 노동자들을 위해 자본가의 집과 모든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문이 든다: 만약 이런 것이 부르주아 혁명의 방식이라면, 중국의 노동자혁명은 어떨 것 같은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지시가 노동자 독재나 사회주의적 조치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광동이 상해, 한구(漢沽)나 다른 산업 중심지보다 소부르주아적 성격이 더 짙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에 대항하여 일어난 혁명적 전복은 자동적으로 첫 단계 에서부터 상황 전체가 10월혁명이 시작한 것보다 더 급진적인 조치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달은 노동자계급의 독재로 이어졌다. 따라서 그 역설적 등장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은 혁명의 전체적 발전에서뿐만 아니라 중국의 사회관계 에 서도 아주 합법적으로 나온다.

(예컨대, 중국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대규모나 중간 규모의 지주계급은 외국자본을 포함하여 도시자본과 매우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중국에서 자본가계급에 대항하는 봉건 지주계급은 없다. 농촌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공통적이며, 미움을 받는 착취자는 도시 금융자본의 하수인인 쿨락-고리대금업자다. 따라서 토지혁명은 그 성격에서 반(反)부르주아적인 만큼이나 반(反)봉건적이다. 중국에서는 쿨락이 지주에 대항하여 흔히 그 선두에 서서 중농, 빈농과 함께 나아간 우리 10월혁명의 첫 번째 단계와 같은 단계는 사실상 없을 것이다. 중국의 토지혁명은 그 결과가 뜻할 것처럼, 처음부터 소수의 진짜 봉건지주와 관료집단뿐만 아니라 쿨락과 고리대금업자에게도 대항하여 일어날 봉기를 의미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빈농위원회가 10월혁명의 두 번째 단계인 1918년 중반에야 무대에 나타났다면, 반대로 중국에서는 토지혁명이 다시 기운을 차리자마자 이런저런 형태로 무대에 나타날 것이다. 부농에 대한 공세는 중국 10월혁명의 두 번째 단계가 아니라 첫 번째 단계에 나타날 것이다.

그렇지만 토지혁명은 현재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적 투쟁의 유일한 내용이 아니다. 토지의 일괄 분배(당연히 공산당이 끝까지 지지 할 토지혁명)라는 가장 극단적인 토지혁명은 그것만으로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경제의 탈출구가 되지 못할 것이다. 중국은 바로 민족적 단결과 경제적 주권, 즉 전통적인 자주성, 더 정확히는 대외무역의 독점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것은 세계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제국주의 에게 중국은 여전히 오늘의 유럽 자본주의와 내일의 미국 자본주의의 내적 폭발에 대한 안전판을 이루면서, 제국주의의 강화와 현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미래의 자원인 것이다. 이것이 중국의 대중이 직면하고 있는 투쟁의 거대한 범위와 엄청난 격렬함을 미리 결정한다. 그만큼 더 이제는 투쟁 기류의 농도를 빨리 측정했으며, 투쟁 참가자 모두가 느꼈다.

중국 산업에서 차지하는 외국자본의 거대한 역할과 그 약탈을 지키기 위해 '자국'의 무력에 직접적으로 의존하는 방식[중국에 대한 총 외국인 투자는 1931년 현재, 33억 달러로 추정되었다. 이 가운데 78.1%는 기업과 무역회사에 직접 투자되었으며, 21.9%는 중국정부에 차관으로 제공되었다. 외국자본은 중국 면직업의 거의 절반을 통제했다. 또한 철도에 총 6억4,130만 달러를 투자함에 따라 중국 철도의 약 3분 의 1을 직접 통제하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2억 달러 이상의 저당권을 갖고 있었다. 외국 선박은 중국 해외/연안무역의 81.31%를 운반했다. 무역 수치는 1902년 이후 총 30억 달러 이상의 무역역조를 보여준다. 19세기의 아편무역으로 인해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양의 은이 유출되었다.(C. F. Remer: Foreign Investments in China, 뉴욕, 1933년, 58쪽; H. D. Fong: Cotton Industry and Trade In China, 북경, 1932\i; H. D. Fong: China's Industrialization, 1931\i; China Year Book을 보라) 제 1차 세계대전 직전에 러시아에 대한 총 외국인 투자가 38억8,200만 달러였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이런 투자를 보호하기 위해 1927년에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는 총 11,880명에 이르는 해군과 병사들을 주둔시켰다. 또한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함대가 연안과 강을 순찰하면서 정기적으로 주둔했다. 여기에는 순양함, 항공모함, 구축함, 잠수함, 포함이 들어 있었다. 또한 외국 조차지에는 다수의 경찰병력이 있었다. 이런 세력이 1926-27년 중에 모두 증강되었다.]은 중국에서 노동자 통제 강령의 실현 가능성을 우리나라에서보다 더 낮게 만든다. 먼저 외국자본주의 기업, 그 다음에 중국 자본주의 기업에 대한 직접적 몰수는 십중팔구 봉기가 승리를 거둔 뒤 어느 날, 투쟁 경과에 따라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러시아혁명의 "10월' 성과를 미리 결정지은 이런 객관적인 사회-역사적 원인이 중국에서는 더욱 더 두드러진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한편으로, 중국의 자본가계급은 외국 제국주의와 그 군사기구에 직접적으로 의존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중국의 노동자계급은 처음부터 코민테른, 소비에트연방과 긴밀한 유대를 맺어왔기 때문에 중국민족의 양극인 자본가와 노동자는 적어도 러시아에서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비타협적으로 서로 대치해 있다. 중국 농민은 수적으로 러시아 농민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다수를 이루고 있다.[출처가 분명하고 완전한 중국의 인구통계가 없어서 추정이나 부분적인 연구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1931년에 9성(省), 29개 시(市)의 공장노동자수는 총 1,204,318명이었다. 운수, 부두, 건설, 탄광 노동자를 포함한 다른 추정은 총 275만 명을 제시했다. 노동자계급과 반(半)노동자계급을 합쳐 약 1, 500만 명에 가까운 1927년에 중국 전역에 걸쳐 수공업자, 잡 노동에 종사하는 하급 노동자, 심부름꾼, 상점직원, 견습생, 직공은 1,196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이는 1905년에 러시아의 공장 인구가 약 1천만 명으로 추정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저명한 농업경제학자인 진한생(陳翰空)은 전체 인구 가운데 4분의 3을 이루는 농민의 계급 분열에 대해 가장 뛰어난 추정과 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남부의 대표적인 광동지역에서 인구의 74%가 빈농이며, 이들이 토지의 19%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중국 중부의 무석(無親)에서는 전체의 68.9%가 빈농가였으며, 토지의 14.2%를 보유했다. 북부의 보정(保定)에서는 빈농이 65.2%였으며, 25.9%의 토지를 보유했다. 진 교수는 중국 농업 인구의 65%가 토지 기근에 시달렸다고 간주한다. 관련 통계표와 다른 추정은 Chen Han-seng, The Present Agrarian Problem in China, 상해 , 1933년; H. D. Fong, China's Industrialization, 상해, 1931년; Fang Fu-an, Chinese Labour, 1931\i; Lowe Chun-hwa, Facing Labor Issues in China, 상해, 1933년; Proceedings of the Pan-Pacific Trade Union Conference, 한구, 1927년을 보라. ] 그러나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 운명의 해결을 좌우하는 세계적 모순의 결함에 짓눌린 중국농민은 러시아 농민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 이것은 현재, 더 이상 이론적 예측의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측면에서 완벽하게 검증된 사실이다.

제3차 중국혁명의 근본적인 동시에 논쟁의 여지가 없는 이런 사회적, 정치적 전제조건은 민주주의 독재 정식이 그 유용성을 속절없이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극심한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더 정확히는 러시아에 비해 극심한 이 후진성 때문에도 제3차 중국혁명은 '민주주의' 시기를 겪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10월혁명이 경험한 것과 같은 6개월[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의 이른바 민주주의 시기와 사회주의 시기 사이의 차이를 레닌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처음에는 군주제, 지주, 중세적 관습에 대항하여, 그리고 혁명이 여전히 부르주아,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인 한, 전체 농민과 함께 나아갔다. 그 다음에는 부농, 사기꾼, 투기꾼을 포함 하여, 그리고 혁명이 사회주의적인 것이 되는 한,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빈농, 반(半)노동자계급, 모든 피착취자와 함께 나아갔다. 이 두 단계 사이에 인위적으로 만리장성을 쌓으려는 것, 노동자계급의 준비 정도, 빈농과의 단결 정도와 다른 어떤 요인으로 이 두 단계를 분리시키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왜곡하고 속류화 시키며, 자유주의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중세적 관습에 비교하여 자본가계급의 진보적 성격을 언급하는 사이비 학구적 구실 아래 사회주의 노동자계급에 대항하여 반동적 자본가계급을 몰래 옹호하는 것을 의미한다.'(레닌, 〈노동자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전집》, 제28권)](1917년 11월부터 1918년 7월까지)조차도 겪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제3차 중국혁명은 처음부터 도시와 농촌에서 부르주아적 소유권을 가장 결정적으로 뒤흔들고 폐지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전망은 경제와 정치 사이의 상호관계에 관한 현학적이고 도식적인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새로 뿌리를 내렸으며, 이미 10월혁명에 적지 않은 타격을 가한 편견을 대단히 교란시키는 이 불일치에 대한 책임은 '트로츠키주의'가 아니라 불균등 발전 법칙에 지웠어야 한다. 특히 이 경우에는 이 법칙이 주로 적용된다.

볼셰비키 정책을 1925-27년 혁명에 적용했다면, 중국공산당은 확실히 권력을 장악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현학적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야비한 속물주의다. 노동자 농민의 대중운동은 규모면에서 권력을 장악하기에 충분했다.[중국의 조직노동자는 1923년 23만 명에서 1925년 57만 명, 1926년 126만4천 명, 1927년 280 만 명으로 중대했다.(〈범태평양 노동자〉, 제2호, 한구, 1927년 7월 15일자) 1925년 5월 30일 상해에서 영국 경찰의 중국인 학생 학살에 뒤이어 일어난 파업 물결에 80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직접 참여했다. 총파업은 상해와 홍콩을 완전히 마비시켰으며, 홍콩의 파업은 6개월간 지속되었다. 1922년에서야 현대적 조직 형태를 취한 농민운동은 1927년 3월에 972만 명의 농민을 직접 포괄했다. 1926년에 광동성, 호남성, 강서성, 호북성에서 시작된 농민의 독자적인 토지 장악은 1927년 봄에 특히 호남성에서 대규모로 수행되었다.] 마찬가지로 지배계급을 분열시키기에도 충분했다. 민족 자본가계급은 외교사절로 자신의 장개석과 왕정위를 모스크바에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호한민[호한민(胡漢民, 1879-1936) : 손문이 지도하는 중국혁명동맹회 창립에 참가했으며, 손문이 북상(北上)한 후 대원수(大元師)의 직권을 대행했다. 1927년 장개석과 함께 4.12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장개석과 쌍벽을 이루는 국민당의 중진이었으나, 의견 충돌로 장개석 에 의해 남경에 감금당했다.]을 통해 코민테른의 문을 두드렸다. 바로 혁명적 대중에 직면한 자신이 구제 불능일 정도로 약했으며, 이런 자신의 약점을 깨닫고는 스스로를 지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가 민족 자본가계급을 밧줄로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노동자도 농민도 이들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코민테른이 올바른 정책을 추구했다면, 대중을 획득하기 위한 공산당의 투쟁 결과는 미리 결정되었을 것이다. 즉, 농민전쟁이 혁명적 노동자계급을 지지했을 것이고, 또 중국 노동자계급이 공산주의자들을 지지했을 것이다.

만약 북벌 초기에 우리가 해방된 지역에서 소비에트를 조직하기 시작했다면(그리고 대중은 본능적으로 혼신의 힘을 기울여 해방을 열망하고 있었다), 우리는 필요한 기반과 혁명 초기의 호조건을 확보했을 것이고, 우리를 농민봉기를 중심으로 규합시켰을 것이고, 우리 자신의 군대를 조직했을 것이며, 우리는 적군을 붕괴시켰을 것이다. 또한 초기지만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적절한 지도 덕분에 이런 이례적인 시기에 성숙할 수 있었을 것이고, 중국 전역에서 당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상당한 지역에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끔찍한 일 一 틀림없는 역사적 재앙 一 은 바로 지도부 내에서 일어났다. 소비에트연방, 볼셰비키당, 코민테른의 권위는 먼저 공산당의 독자적 정책에 반하여 장개석을 지지하는 데, 그 다음에는 토지혁명의 지도자인 왕정위를 지지하는 데에나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레닌주의 정책의 근거 자체를 짓밟고, 미숙한 중국 공산당의 등뼈를 부러뜨린 뒤였기 때문에, 볼셰비키주의에 대한 중국 케렌스키주의의 승리, 중국 케렌스키에 대한 중국 밀류코프의 승리, 그리고 중국 밀류코프에 대한 영국과 일본 제국주의의 승리가 미리 결정되어 버렸다.

이것과 오직 이것에만 1925-27년 사이에 중국에서 일어난 사태의 의미가 있다.

 

3. 민주주의 독재인가, 노동자계급의 독재인가?

그러나 지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전원회의는 광동봉기 경험을 포함하여 중국혁명의 경험을 어떻게 평가했는가? 향후 전망을 설명했는가? 이 문제에 대해 강령 초안의 상응하는 부분을 해독하는 열쇠인 1928년 2월 전원회의의 결의문은 중국혁명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를 '연속'혁명으로 규정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전형적 입장]. 혁명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를 뛰어 넘으려는 경향과 동시에 혁명을 '연속'혁명으로 평가하는 것은 1905년에 트로츠키가 범한 오류와 비슷하다.

레닌이 지도부를 떠난(1923년) 이후, 코민테른의 이데올로기적 활동은 주로 이른바 반(反)'트로츠키주의' 투쟁, 특히 '연속혁명'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중국혁명의 근본적 문제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의 공식 대표, 즉 특별지시를 받고 파견된 지도자도 어떻게 해서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시베리아로 추방되고, 투옥당하는 것과 똑같은 '오류'를 저지른 것인가? 중국 문제를 둘러싼 투쟁은 약 2년 반 동안 맹위를 떨치고 있다. 반대파가 코민테른의 잘못된 지시에 영향을 받은 중국공산당 구 중앙위원회(진독수[진독수(陳獨秀 Chen Du-hsiu, 1879-1942) : 중국공산당의 창립자이자 지도자. 신해혁명에 참 가했으며, 1915년에 잡지〈신청년〉을 창간했다. 1917년, 신문화운동의 선두에 섰으며, 5.4운동 중에 마르크스주의로 기울었다. 1921년, 중국공산당을 창설하고 총서기에 취임했다. 1925~27년 중국혁명에서 코민테른의 노선을 마지못해 따랐다. 1929년, 좌익반대파를 지지하는 공개편지를 발표하여 제명되었다.])사가 기회주의 정책을 실시했다고 선언하자, 이 평가는 '비방'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잘못이 없다고 선언되었다. 유명한 담평산은 코민테른 집행위원 회 제7차 전원회의의 대체적인 찬성 속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 '트로츠키주의가 출현하자마자, 중국공산당과 공산주의청년동맹은 즉시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하는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의사록, 205쪽)

그러나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1차, 2차로 갈수록 더욱 끔찍한 혁명의 붕괴로 이어진 그 비극적 논리를 펼치자, 이전에는 흠잡을 데 없던 중국공산당 지도부에게 멘셰비키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이들은 24시간 사이에 면직되었다. 동시에 새로운 지도부는 코민테른의 노선을 충분히 반영했다는 포고령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새롭고 진지한 시련이 발생하자마자 중국공산당의 신임 중앙위원회는 이른바 '연속혁명'의 입장으로 빗나가는 죄(이미 살펴본 것처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를 지었음이 드러났다. 코민테른의 대표도 똑같은 방침을 취했다. 이 놀랍고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지시와 혁명의 진정한 역학관계 사이의 크게 벌어진 '협상가격차'를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혼란과 당혹감을 흩뿌리기 위해 1924년에 유포된 1905년의 '연속혁명'이라는 신파를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신화가 중국혁명 문제에서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검토하는 선에서 그칠 것이다.

앞서 인용한 구절을 담은 2월 결의문의 첫 단락은 이른바 '연속혁명' 에 대한 그 부정적 태도의 동기를 보여준다.

중국혁명의 현 시기는 경제적 관점(토지혁명과 봉건적 관계의 폐지)에서든,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투쟁의 관점(중국의 통일과 민족독립의 확립)에서든, 국가의 계급적 본질의 관점(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독재)에서든 아직 끝나지 않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시기다. …

여기에 제시된 동기는 오류와 모순의 연속이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중국혁명이 중국이 사회주의의 길을 따라 발전할 기회를 보증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목표는 혁명이 단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과제의 해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 전개되어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즉 중단 없이 (또는 연속적으로) 계속 발전한 결과, 중국을 사회주의의 발전 쪽으로 이끄는 경우에만 이룩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연속혁명'이라는 용어로 해석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편으로 중국의 비(非)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에 대해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혁명 일반의 연속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러나 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결의문의 주장에 따르면 一 혁명은 토지혁명의 관점에서든,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투쟁의 관점에서든 아직 끝나지 않았다. 따라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현 시기 중국혁명' 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성격에 대해 결론을 내린다. 실제로 '현 시기'는 반(反)혁명의 시기이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필시 중국혁명의 새로운 부활, 또는 제3차 중국혁명은 1925-27년의 제2차 중국혁명이 토지 문제도 민족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성격을 열 것이라고 말할 심산이다. 그렇지만 결국 수정되더라도 이 추론은 중국혁명과 러시아혁명 모두의 경험과 교훈에 대한 총체적 몰이해에 기초해 있다.

러시아의 1917년 2월 혁명은 혁명으로 이끈 국내, 국제 문제 一 농촌의 농노제, 구 관료집단, 전쟁, 경제적 붕괴 一 를 전부 해결하지 못했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뿐만 아니라 우리당 지도부의 상당부위도 이를 출발점으로 삼고, 레닌에게 혁명의 현 시기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시기임을 입증하려고 했다. 그 기본적 동기에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문은 단지 1917년에 레닌이 수행한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위한 투쟁에 반대한 기회주의자들을 모방한 것일 뿐이다.

더욱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분명히 경제적, 민족적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의 계급적 본질의 관점(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독재)'에서도 여전히 성취되지 않은 것 같다. 이것은 단 한 가지만을 의미할 것이다 : 중국에서 '진정한' 민주정부가 실권을 잡지 않는 한, 중국 노동자계급은 권력 장악 투쟁에 나서면 안 된다. 불행히도 이것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나와 있지 않다.

소비에트의 수립은 아마도 노동자혁명으로의 이행 중에만 허용될 것 (스탈린의 '이론')이라는 핑계로 소비에트슬로건이 2년 동안 중국에서 거부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혼란이 더욱 증대되 었다. 그러나 소비에트혁명이 갑자기 광동에서 일어났으며, 참가자들이 바로 이것이 노동자혁명으로의 이행이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이들은 '트로츠키주의'로 기소되었다. 당이 이러한 방식으로 교육받아야 하는가? 최고의 임무를 해결하는데서 이런 방식이 도움이 되는가?

(자기 생각의 전체적 방향과 아무런 관련도 없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문은 가망 없는 입장을 구하기 위해 제국주의에 대한 자신의 최근 주장을 급히 꺼내든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를 뛰어넘으려는 경향은 문제에 대한 이러한 정식화가 반(半)식민지 혁명인 중국혁명의 가장 중요한 민족적 특수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해로운 것처럼 보인다.

이런 무의미한 말이 의미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제국주의의 굴레가 일종의 비(非)노동자 독재에 의해 타도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 민족 자본가계급이나 소부르주아 계급의 '민주주의'를 격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민족적 특수성'을 마지막 순간에 끌어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주장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이 주장의 단 한 가지 '의미'는 이 책의 '식민지 자본가계급의 본질에 대하여'에서 충분히 검토되었다. 이 주제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다.

중국은 여전히 가장 '아시아적인' 형태의 노예제 타파, 민족해방, 조국통일과 같은 기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거대하고, 격렬하고, 잔혹하며, 장기간에 걸친 투쟁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사태의 추이가 보여 준 것처럼, 이것은 바로 앞으로 혁명에서 소부르주아 지도부나 준(準)지도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중국의 통일과 해방은 소련의 생존과 마찬가지로 국제적 임무이다. 이 임무는 노동자 전위의 직접적 지도 아래 학대받는, 굶주린, 혹사당한 대중의 一 반(反)세계 제국주의 투쟁뿐만 아니라 중국에 있는 세계 제국주의의 경제적, 정치적 하수인, '민족' 자본가계급과 그 모든 민주적 사대주의자들을 포함하여 자본 가 계급에 반대하는 一 결사적 투쟁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만이 노동자계급의 독재로 향하는 길이다.

1917년 4월부터 레닌은 '연속혁명' 입장을 채택했다고 자신을 비난한 적수들에게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독재는 부분적으로 이중권력 시기에 실현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중에 이 독재는 노동자계급이 아직 제작소와 공장의 몰수로 나아가지 못했지만 노동자 통제를 실험한 동시에, 농민 전체가 노동자와 함께 토지혁명을 이룬 소비에트 권력의 첫 번째 시기(1917년 11월부터 1918년 7월까지) 중에 더욱 확대되었다고 설명했다. '국가의 계급적 본질'에 관한 한, 사회혁명당-멘셰비키의 민주주의 '독재'는 그것이 줄 수 있는 모든 것 - 이중권력의 유산(流産)을 주었다. 토지 전복에 관하여 혁명은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하고 튼튼한 아이를 낳았지만, 산파 역할을 한 것은 노동자 독재였다. 바꿔 말하면,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독재라는 이론적 정식이 결합시킨 것은 실제 계급투쟁 중에 분리되었다. 속이 텅 빈 반(半)권력의 껍데기는 일시적으로 케렌스키 채레텔리에게 맡긴 반면에, 토지-민주주의 혁명의 실제 핵심은 승리를 거둔 노동자계급의 몫이 되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지도자들은 민주주의 독재의 이런 변증법적 분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를 뛰어넘으려는 것'은 무엇이든 비난함으로써, 또 회람장에 준거하여 역사적 과정을 지도하려고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정치적으로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만약 '민주주의 독재'를 통한 토지 혁명의 완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면, 10월 혁명도 대담하게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를 '뛰어넘었다'고 할 것이다. 어째서 이것은 비난하면 안 되는가?

그렇다면 러시아 볼셰비키주의에서 최고로 표현된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사태 추이가 중국에서는 왜 '트로츠키주의'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가? 의심의 여지없이 러시아에서 20년 동안 볼셰비키주의에 맞서 싸운 마르티노프 같은 자들의 이론을 중국에 적합한 것으로 선언한 똑같은 논리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러시아와의 유사점을 끌어내는 것이 전혀 허용되지 않는가? 우리의 대답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이 유추법에 따라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 슬로건을 배타적으로, 또 통째로 짜 맞췄지만, 유물론적, 역사적 유추가 아니라 형식적, 문필적 유추였다는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유사점은 만약 이것에 접근하는 적절한 길을 발견한다면,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레닌은 이러한 유추를 뛰어나게 사용했다. 게다가 마치 그가 미래 아류들의 중대한 실수를 예측한 것처럼, 사태가 벌어진 가 아니라 그 전에 유추했다. 레닌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임무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권력을 장악한 노동자계급의 10월 혁명을 수백 번이나 옹호해야 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바로 이걸 하기 위해가 레닌의 대답이었다. 사회주의를 위한 러시아의 경제적 미성숙을 탓하며 권력 장악에 반대한 현학자들에게 말을 걸어보면, 이들에게 이러한 미성숙은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레닌, 《전집》, 제18권 2부, 119쪽) 레닌은 1923년 1월 16일, 이렇게 말했다.

이를테면, 이들에게 러시아는 문명국과 분명히 처음으로 이 전쟁 때문에 문명의 소용돌이 속에 말려든 나라들, 동방의 모든 나라들, 비(非)유럽 국가들 사이의 경계선에 서 있던 적도 없다. 一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물론 세계 발전의 일반적 노선을 따라 약해지지만 서유럽 국가들의 선행한 모든 혁명과 다른 혁명을 이루고, 동방의 나라들과 비슷한 점에서 어떤 부분적인 혁신을 낳는 일정한 특이성을 나타낼 수 있으며, 또 나타낼 것이다.(앞의 책, 118쪽)

레닌이 파악한 러시아를 동방의 나라들에 더 가깝게 하는 '특이성'은 바로 초기 단계에 있는 젊은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로 향하는 길에서 봉건적 야만주의를 일소하고, 온갖 쓰레기를 치워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 결과로, 만약 우리가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유사점을 레닌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 '국가의 정치적 본질'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중국에서 민주주의 독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처음에는 손문의 광동에서, 그 다음에는 광동에서 상해로 가는 도중에 전부 다 검증되었다. 이 검증은 상해 쿠데타에 뒤이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지시에 따르면 토지혁명의 조직자이지만, 실제로는 그 사형집행인인 국민당 좌익이 화학적으로 순수한 형태로 나타난 무한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사회적 내용은 다가오는 중국 노동자계급과 빈농의 독재 초기에 채워질 것이다. 지금 중국 자본가계급 뿐만 아니라 중국 '민주주의'의 역할에 맞춰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 슬로건을 제기한다면, 이것은 '민주주의'가 다가오는 전투에서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중요한 사형집행인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이 정말로 논쟁의 여지가 없어진 다음에나 철저히 검증될 것이다 一 지금 이 슬로건을 제기하는 것은 단지 국민당주의의 새로운 변종들을 감추는 수단을 만들어내고, 노동자계급을 교수형에 처할 준비를 하는 것일 뿐이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 사회혁명당-멘셰비키의 경험에 '진정한' 민주주의 독재 슬로건을 대치시키자고 주장한 볼셰비키에 대해 레닌이 간결하게 말한 것을 상기해보자.

지금단지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만을 말하는 사람은 시류에 뒤떨어진 것이고, 이런 사정에 의해 실제로 노동자의 계급투쟁에 대항하여 소부르주아 계급에게 붙어버린다. 이런 사람은 혁명 이전의 고대인 '볼셰비키' 박물관에 처박아야 한다(아니면 누구는 '고참 볼셰비키'의 박물관이라고 부를지도 모르지만).(레닌, 《전집X 제14권 1부, 29쪽)

이 말은 마치 이들이 정말로 방금 말한 것처럼 들리는 듯하다.

물론 이것은 중국공산당에게 권력 장악을 위해 즉각 봉기하라고 촉구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템포는 전적으로 주위 상황에 달려 있다. 단지 전술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패배의 결과를 제거할 수 없다. 혁명은 이제 가라앉고 있다. 중국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 되었으며, 무시무시한 상업/산업공황이 기승을 부리는 반면에, 임박한 혁명적 총공세에 관해 호언장담하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적당히 감춘 결의문은 범죄적인 경솔함일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세 차례의 주요한 패배 때문에 경제 위기가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처형은 단지 정치적으로 약화된 당을 파괴하는 동시에 실제로 이미 짜낼 대로 짜낸 노동자계급을 의기소침하게 했다. 우리는 중국에서 퇴조기, 따라서 당은 그 이론적 기초를 깊이 하고,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교육하며, 노동자계급 운동의 전 분야에 확고한 조직적 연결망을 세우고 강화하며, 농촌 세포를 조직하고, 처음에는 방어적이지만 나중에는 공격적인 노동자 빈농의 전투를 이끌고 부분적으로 결합시킬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무엇이 대중운동의 형세를 변화시킬 것인가? 어떤 상황이 수백만 대중을 선두에 서서 이끌 노동자 전위에게 필요한 혁명적 자극을 줄 것인가? 이것은 예측할 수 없다. 미래가 내적인 과정만으로도 충분할 것인지, 아니면 외부로부터 추가적인 자극이 와야 할 것인지 가르쳐줄 것이다.

직접적으로는 잘못된 지도력에 기인하는 중국혁명의 분쇄가 중국과 외국 자본가계급으로 하여금 지금 중국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끔찍한 경제 위기를 크든 적든 극복하게 할 것이라고 가정할 만한 충분한 근거 가 있다. 물론 이것은 노동자농민의 등에 업혀 수행될 것이다. 이런 '안정' 국면은 그 결과로 한층 더 격렬하지만 더 높은 역사적 무대에서 적과의 충돌로 노동자를 이끌기 위해 그 계급적 자신감을 회복한 노동자를 다시 한 번 모으고 융합시킬 것이다. 새롭게 솟구치는 노동자운동의 물결이 공세를 취할 것이라는 조건에서만 토지혁명의 전망에 대해 진지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가오는 제3차 혁명의 첫 단계는 이미 지난 단계를 축약 수정한 형태, 이를테면 약간 새로운 '민족공동전선'의 모방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형태로 재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첫 단계는 결과적으로 공산당에게 자신의 '4월'테제, 즉 인민대중 앞에 권력 장악을 위한 자신의 강령과 전술을 제출하고 알릴 기회를 충분히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강령 초안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여기[중국]에서 노동자 독재로의 이행은 오직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하는(??) 전 과정을 거친 경우, 일련의 예비적 단계(?)를 지나야만 가능하다.'

바꿔 말하면, 이미 다 겪어온 모든 '단계'는 안중에도 없다. 강령 초안은 여전히 이미 뒤처져있는 것을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바로 꽁무니주의자의 정식을 뜻한다. 이것은 국민당 방침의 기조 속에서 새로운 실험을 위해 문을 활짝 열어놓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잘못을 숨기는 행위는 불가피하게 새로운 오류의 길을 닦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미 그 유용성을 잃어버린 '민주주의 독재'라는 청사진을 가지고 지난 시기에 비해 훨씬 더 빠른 템포로 발전할 새로운 혁명적 고양에 접어든다면, 2차와 마찬가지로 제3차 중국혁명이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4.기회주의의 산물인 모험주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2월 전원회의 결의문의 두 번째 단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체로 공산당의 슬로건 아래, 또 상당한 정도로 공산당의 지도 아래 진행된 노동자 농민의 광범한 혁명운동의 첫 물결은 끝났다. 혁명운동의 몇몇 중심지에서는 노동자 농민운동 일반의 혁명적 중핵과 공산주의자들의 물리적 소멸이라는 노동자 농민에게 가장 가혹한 패배를 안기며 끝났다. (트로츠키의 강조)

'물결'이 높이일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전체 운동이 심지어 소비에트를 대신한 국민당의 푸른 깃발과 지도력에 완전히 제압되었다고 말했다. 공산당이 국민당에 종속되었다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히 혁명운동이 가장 가혹한 패배'로 끝난 이유이다. 이 패배를 인정한 바로 지금, 마치 존재한 적이 없는 것처럼, 마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국민당의 푸른 깃발을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한 적이 없는 것처럼, 과거로부터 국민당을 지우려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다.

과거에 상해든 무한에서든 패배한 적이 없다. 단지 혁명의 '더 높은 단계로의' 이행이 있었을 뿐이다 一 이것이 우리가 배워온 것이다. 이제 이런 이행 전체가 갑자기 '노동자 농민에게 가장 가혹한 패배'인 것이라고 선언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전례가 없는 예측과 평가의 정치적 파산을 어느 정도 감추기 위해 결의문의 결론적인 단락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중국혁명이 청산(?)되었다는 취지의 허위선전을 일삼는 사회민주주의와 트로츠키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이야말로 모든 코민테른 지부들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결의문의 첫 번째 단락에서 '트로츠키주의'가 연속적인 중국혁명의 사상, 즉 부르주아 단계에서 사회주의 단계로 성장하는 바로 이때의 혁명 사상이었다고 들었다. 또 마지막 단락에서는 '트로츠키주의자 들'에 따르면, '중국혁명이 청산되었다'는 것을 듣게 된다. 어떻게 '청산된' 혁명이 연속혁명일수 있는가? 이 점에서 부하린은 의기양양해 있다.

이러한 모순의 전적인, 그리고 맹목적인 무책임성은 단지 모든 혁명적 사상을 그 근저에서 좀먹기만 할뿐이다.

만약 우리가 혁명의 '청산'을 노동자 농민의 공세가 격퇴되어 유혈진압 당했으며, 대중이 퇴각과 침체 상태에 있으며, 다른 많은 주위 사정과는 별도로 또 다른 공격에 앞서 틀림없이 일정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분자적 과정이 대중사이에서 진행 중일 것이며, 전쟁지속 기간이 미리 결정될 수 없다는 사실로 이해할 수 있다면, 만약 '청산'이 이런 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결국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가혹한 패배'와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청산을 글자그대로 중국혁명의 사실상의 제거, 즉 새로운 수준에서 부활할 가능성과 필연성 자체의 실제적 제거로 해해야 하는가? 누구나 이러한 전망에 대해 진지하게 말할 수 있으며, 단두가지 경우에만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다 一 중국이 절단되어 완전히 절멸할 운명이었다는 가정은 어떠한 근거도 없는 억측이다. 다른 경우는 중국의 자본가계급이 자신의 비(非)혁명적인 방식으로 중국의 기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할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것은 자본가계급의 굴레 속으로 공산당을 직접 떠밀었으며, 지금 우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4계급블록' 이론가들의 최신 변종이 아닌가?

역사는 되풀이된다. 1923년 패배의 범위를 이해하지 못한 장님은 1 년 반 동안 우리에게 독일혁명에 대한 '청산주의"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에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 이 교훈도 이들을 전혀 가르치지 못했다. 현재 이들은 이번에 독일을 중국으로 대체하기 위해 자신의 오랜 거수기들을 동원하고 있다. 물론 '청산주의자들'을 찾아야 할 이들의 필요성은 4년 전에 비해 지금 더 급박하다. 왜냐하면 누가 제2차 중국혁명을 '청산'했다면, 그것은 '국민당' 노선의 기초자들일 것이라는 점이 이번에는 너무도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의 강점은 예측하는 능력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반대파는 예측의 올바름을 경험해본 절대적 증거를 지적할 수 있다. 처음에는 국민당 전체에 대해, 그 다음에는 국민당 '좌익'과 무한정부에 대해, 마지막으로 제3차 혁명의 '예탁금', 즉 광동봉기에 대해 반대파는 올바르게 예측했다. 반대파가 한 예측의 이론적 정확성을 더 이상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가?

자본가계급에 대한 항복정책을 통해 이미 1, 2단계 중에 혁명에 가장 가혹한 패배를 초래한 똑같은 기회주의 노선이 제3 단계에 자본가계급에 대한 모험적인 기습정책으로 '성장한' 결과, 결정적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지도부가 스스로 초래한 패배를 뛰어넘으려고 급히 서두르지 않았다면, 제일 먼저 중국공산당에게 승리는 단숨에 얻지 못하며, 무장봉기로 향하는 도중은 여전히 노동자농민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격렬한, 끊임없는, 가차 없는 투쟁을 전개해야 하는 시기임을 설명했을 것이다.

1927년 9월 27일 열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간부회의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자 신문은 혁명군이 스바토프를 점령했다고 전한다. 화룡(和龍)과 엽정(德潮)의 군대가 진군하고 있다는 것이 몇 주 전이다.〈프라브다〉지는 이 군대를 혁명군이라고 부른다. … 그러나 한 가지 묻겠다 : 스바토프를 점령한 혁명군의 행동은 중국혁명 앞에 어떤 전망을 제기하는가? 이 행동의 슬로건은 무엇인가? 그 강령은? 그 조직적 형태는 어떠해야 하는가?〈프라브다〉지가 느닷없이 7월 중에 단 하루 제기한 중국 소비에트 슬로건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우선 국민당 전체에 공산당을 대립시키지 않고, 소비에트와 소비에트 정부를 획득하기 위해 당이 대중 사이에서 선동하지도 않고, 토지혁명과 민족해방 슬로건 아래 대중을 독자적으로 결집시키지도 않고, 지역의 노동자 병사 농민대표 소비에트를 조직하고, 확대하고, 강화하지도 않은 화룡(Ho Lung)과 엽정(Yeh Ting)의 봉기는 그 기회주의적 정책은 제쳐놓더라도, 단지 사이비 공산주의자 마흐노(Makhno)의 재주인 고립된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자신의 고립과도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봉기는 실패했다.

훨씬 더 비극적인 결과만 아니라면 광동봉기는 화룡-엽정 모험의 더 범위가 넓고, 더 심원한 반복이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2월 결의문은 중국공산당 내의 폭동주의적 분위기, 즉 무장봉기 경향과 싸운다. 그렇지만 이 경향이 1925-27년의 기회주의 정책 전체에 대한 반응이며, 수행한 모든 것을 평가하지도 않고, 전술의 근거를 공개적으로 재평가하지도 않고, 분명한 전망도 없이 기회주의뿐만 아니라 폭동주의에 대한 진정한 해독제는 노동자 빈농의 무장봉기에 대한 지도, 권력 장악, 혁명적 독재의 수립이 이제부터 전적으로 중국공산당의 어깨에 걸려있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이해일 수밖에 없다. 만약 중국공산당이 이런 전망에 대한 이해로 철저히 물든다면, 적의 깃발을 공손히 뒤쫓는 것도, 도시에 대한 즉흥적인 군사적 기습이나 무장봉기를 함정에 빠뜨리는 일도 전혀 없을 것이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문은 단계를 뛰어넘는 것을 용납하기 어렵다는 점과 폭동주의의 유해성에 관해 매우 추상적으로 주장하면서, 광동봉기의 계급적 내용을 완전히 무시하고, 광동봉기를 낳은 소비에트 체제를 단명케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의 철저한 무기력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우리 반대파는 광동봉기가 자신의 '명성'을 지키려는 노력 속에서 나온 지도자들의 모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모험조차도 사회 환경 구조가 결정되는 법칙에 따라 발전한다는 것이 명확하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중국혁명의 앞으로의 양상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광동봉기를 주시하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광동봉기 이전에 제출한 위에서 '발 바꾸라'고 내린 순전히 군사적인 명령의 불가피한 결과라는 점을 말하지 않는다. 화룡의 캠페인과 광동봉기 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사정 때문에 一 는 폭동주의의 양육자였다.

우리의 이론적 분석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나 광동봉기가 연속적인 투쟁의 올바르고 정상적인 고리였다고 생각하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게 광동봉기의 계급적 성격 규명을 분명히 하는 것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그렇지만 광동 사태 직후에 전원회의가 열리긴 했지만, 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문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이 없다. 이것은 잘못된 정책을 고집스레 따랐기 때문에 코민테른의 현 지도부가 강령 초안에서 제시한 동방혁명의 청사진을 완전히 뒤엎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1927년 광동봉기는 감히 다루지도 못하고 1905년이나 다른 해의 가상적 오류들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는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가 아닌가?

 

5.소비에트와 혁명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2월 결의문에 등장하는 코민테른 대표 '엔(N) 동지 등'은 '광동에서 봉기 기관으로 선출된 소비에트가 없다'는 점에 대해 책임을 졌다(원문의 강조- 트로츠키). 실제로 이런 책임 뒤에는 아연실색할 승인이 있다.

직접 얻은 문서에 기초하여 작성된 〈프라브다〉지(제31호)의 기사는 소비에트 정부가 광동에서 수립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광동소비에트는 선출된 기관이 아니었다, 즉 소비에트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언급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一 왜냐하면 선출되지 않은 소비에트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의문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이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우리에게 소비에트는 무장봉기를 수행할 필요가 있지만, 때가 되기 전에는 결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 보시라! 봉기 날짜가 정해졌는데도 소비에트는 없다. 선출된 소비에트를 수립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대중은 소비에트가 무엇인지 경험으로부터 알고, 그 형태를 이해하며, 선출된 소비에트조직에 익숙해지기 위해 과거에서 어느 정도 배울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는 이런 징후도 없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슬로건이 전체 운동의 중추 신경이 되어야 하는 바로 그 시기에 트로츠키주의의 슬로건이라고 선언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패배를 건너뛰기 위해 봉기 날짜를 허둥지둥 정하는 동시에 이들은 소비에트도 설립해야 했다. 만약 이 오류가 속속들이 폭로되지 않는다면, 소비에트 슬로건은 혁명의 목을 죄는 올가미로 둔갑할 수 있을 것이다.

생전에 레닌은 멘셰비키에게 소비에트의 근본적, 역사적 임무는 권력 장악을 조직하거나 조직하는 것을 돕는 것이기 때문에 승리한 뒤로는 권력기관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류들 一 추종자도 아닌 一 은 이 로부터 봉기가 정각에 시작될 경우에만 소비에트가 조직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레닌의 폭넓은 일반화를 이들은 사후(事後)에 혁명의 이해를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태롭게 하는 어설픈 처방으로 둔갑시킨다.

1917년 10월에 볼셰비키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하기에 앞서 사회혁명당-멘셰비키 소비에트가 9개월 동안 존속했었다. 12년 전, 혁명적 소비에트가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와 다른 많은 도시들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1905년 소비에트가 수도의 제작소와 공장들을 포괄하기 전에 파업 중에 인쇄노동자대표 소비에트가 모스크바에서 수립되었다. 이보다 몇 달 전인 1905년 5월에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공장의 대중파업은 이미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의 본질적 특징을 전부 가진 지도기관을 수립했다.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수립하는 첫 번째 실험과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 하는 거대한 실험 사이에서 12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갔다. 물론 이러한 기간이 중국을 포함하여 다른 모든 나라들에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중국 노동자들이 레닌의 폭넓은 일반화를 대체한 어설픈 처방에 기초하여 소비에트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혁명적 행동의 변증법을 무력하지만 성가시게 졸라대는 현학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소비에트는 봉기 직전에 수립되어서는 안 된다. 또 직접적인 권력 장악을 슬로건으로 내걸어서도 안 된다 一 왜냐하면 만일 사태가 권력을 장악할 시점에 이른다면, 대중이 소비에트 없이도 무장봉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것은 봉기의 성공을 보증할 예비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다른 조직 형태나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비에트 문제는 부차적인 중요성을 갖게 되고, 조직상의 방법 문제나 단지 명칭의 문제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된다. 소비에트의 임무는 단지 봉기를 촉구하거나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필요한 단계를 거쳐 봉기로 이끄는 것이다. 나중에 대중을 거리에 분산시키지 않고, 또 전위가 계급으로부터 고립되는 일 없이 대중이 점차로 봉기 슬로건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소비에트는 처음에 무장봉기 슬로건이 아니라 부분적인 슬로건으로 대중을 규합한다. 소비에트는 대개, 그리고 주로 파업투쟁과 관련하여 나타난다. 파업투쟁은 혁명적으로 발전할 전망이 있지만 해당 시기에는 단지 경제적 요구에 한정한다. 대중은 소비에트가 자신의 조직이며, 투쟁, 저항, 자기방어, 공격을 위해 집결한 부대임을 감각과 동시에 행동으로 이해해야 한다. 대중은 대체로 하루나 한 번의 행동이 아니라 중단 여부와 관계없이 몇 주, 몇 달, 어쩌면 몇 년의 경험에 근거하여 이를 감지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나라가 혁명적 격변기를 거치고 있으며, 노동자계급과 빈농이 권력을 장악할 전망 一 비록 이것이 다음 단계 중의 전망이라고 할지라도, 또 이 전망이 해당 국면에서 소수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一 을 앞둔 상황에서 아류나 관료적 지도부는 자각하여 떨쳐 일어서는 대중이 소비에트를 수립하지 못하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소비에트에 대한 우리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우리는 소비에트를 폭넓고 유연한 조직형태라고 평가했다. 소비에트는 혁명적 고양의 맨 첫 단계에서 막 깨어난 대중이 접근하기 쉽고, 해당 시기에 이미 권력 장악 임무를 이해할 정도까지 성숙한 노동자 부위의 규모와도 무관하게 노동자계급을 전체로서 결합시킬 수 있는 조직 형태이다.

정말로 문서적 증거가 필요한 것인가? 예를 들면, 이것은 제2차 혁명기 중에 레닌이 소비에트에 대해 말한 것이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 당시의 당명]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자의 영향력을 키우고, 사회민주주의 노동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유형의 일정 정도 비(非)당적인 조직을 크든 적든 혁명적 고양의 순간에 활용하는 것을 결코 마다하지 않는다.(레닌, 《전집》, 제8권, 215쪽)

이런 유형의 문헌적, 역사적 증거는 누구든 풍부하게 인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증거 없이도 문제가 충분히 명확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류들은 소비에트를 당이 권력 장악 직전에 단지 노동자계급을 정렬시킨 것 같은 모양의 열병식 조직으로 개조시킨다. 그러나 바로 이때 우리는 소비에트가 무장봉기라는 직접적 목적을 위해 명령에 따라 24시간 내에 급조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실험은 불가피하게 허구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그리고 권력 장악을 위한 가장 필수적인 조건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은 소비에트 제도의 외면적 의례로 감춰진다. 이것이 소비에트가 단지 의례를 지키기 위해 설립된 광동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것이 아류가 끌려가는 문제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다. 

중국 사태에 대한 논쟁 중에 반대파는 명백한 모순으로 추정되는 다음과 같은 비난을 받았다 : 반대파는 1926년부터 중국에서 소비에트 슬로건을 제기한 반면에, 그 대표는 1923년 가을에 독일에서 소비에트 슬로건에 반대했다. 현학적 정치사상이 이런 비난에서 만큼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낸 대목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중국에서 적시에, 즉 혁명적 고양의 물결이 상승하고 있을 때, 노동자 농민의 독자적 조직인 소비에트수립에 착수할 것을 요구했다.

소비에트의 주요한 의미는 노동자 농민을 국민당 자본가계급과 그 좌익 하수인에 대립시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소비에트 슬로건은 무엇보다도 자멸적이고 수치스러운 '4계급 블록'과 단절하고, 공산당이 국민당으로부터 철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무게중심은 조직형태가 아니라 계급노선에 있음이 드러났다.

1923년 가을, 독일에서는 조직 형태가 유일한 문제였다. 코민테른과 독일공산당 지도부의 극도의 수동성, 후진성, 굼뜸으로 인해 소비에트의 조직을 제때에 촉구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그리고 자발적으로 공장위원회가 1923년 가을 독일의 노동운동을 장악했다. 공산당의 올바르고 대담한 정책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소비에트가 훨씬 더 성공적으로 장악했을 것이다. 그 사이에 상황의 심각성은 가장 예리한 지점에 이르렀다. 시간을 더 지체한다는 것은 결정적으로 혁명적 상황을 놓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침내 봉기가 시간적 여유 없이 일정에 올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비에트 슬로건을 제기하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현학적 어리석음이었을 것이다. 소비에트는 구원의 전능한 힘을 가진 부적이 아니다. 이때 전개된 것과 같은 상황에서 급히 소비에트를 수립하는 것은 단지 공장위원회의 복제였을 것이다. 이 소비에트는 공장위원회의 혁명적 역할을 빼앗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고, 공장위원회는 새로 수립되었지만 여전히 전혀 권위 없는 소비에트에 권리를 양도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날그날의 상황이 중요했다.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이것은 혁명적 행동을 겉만 번드르르한 조직상의 가장 유해한 경쟁으로 대체한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소비에트라는 조직 형태가 대단히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소비에트가 올바른 정치노선을 제때에 반영할 때에만 그렇다. 거꾸로, 소비에트가 날조, 맹목적 숭배의 대상, 하찮은 것으로 바뀐다면, 그만큼이나 쓸모없는 의미만을 지니게 될 것이다. 1923년 가을 막바지에 수립된 독일소비에트는 정치적으로 전혀 보템이 되지 않았을 것이며, 단지 조직적 혼란만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광동의 상황은 훨씬 더 나빴다. 의례를 지키려고 급히 수립된 소비에트는 모험주의적 폭동을 위한 겉치레일 뿐이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모든 일이 끝난 뒤, 광동 소비에트는 단지 종이위에 그려진 고대 중국용을 닮았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썩은 줄을 잡아당기는 정책과 종이용은 우리의 정책이 아니다. 우리는 1923년 9월, 독일로 전보를 보내 소비에트를 급조하는 것에 반대했다. 우리는 1926년 중국에서 소비에트를 수립하는 것에 찬성했다. 우리는 1927년 광동에서 소비에트를 가장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점에서 털끝만한 모순도 없다. 우리는 반대로 혁명운동의 역학관계와 그 조직 형태에 대한 생각을 심도 있게 일치시키고 있다.

최근의 이론과 실천으로 왜곡되고, 혼란스러워졌으며, 흐릿해진 소비에트의 역할과 중요성 문제는 강령 초안에서 조금도 조명되지 않았다.

 

6. 다가오는 중국혁명의 성격 문제

빈농의 지지를 받는 노동자계급의 독재 슬로건은 다가오는 제3차 중국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뿐만 아니라 역사의 요구에 대치되는 사람들의 오류 때문에 우리는 벌써부터 중국이 아직까지 사회주의 혁명을 이룰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는 항의를 듣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에 대한 추상적이고 생기 없는 설명이다. 러시아는 저절로 사회주의를 이룰 만큼 성숙했는가? 레닌에 따르면, 결코 그렇지 않다! 러시아는 늦출 수 없는 국가적 임무를 해결하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으로 노동자계급의 독재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독재 전체의 운명은 결국 세계의 발전 경향에 따라 결정되었다. 물론 이것은 노동자독재의 올바른 정책, 즉 한편으로 노동자농민동맹의 강화와 발전, 국가가 처한 상황에의 전면적 적응, 다른 한편으로 세계의 발전 경향에의 전면적 적응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제로 한다. 이것이 중국에게도 완전한 사실이라고 확신한다.

'우리의 혁명에 대하여'(1923년 1월 16일)라는 제목의 글에서 레닌은 러시아의 특이성은 동방국가들 특유의 발전경향을 따라 나아간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는 '일부 "박식한" 신사양반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사회주의를 이룰 만큼 성숙하지 않다, 우리는 사회주의를 위한 객관적인 경제적 전제조건을 결여하고 있다'는 취지의 유럽사회민주주의의 주장을 '대단히 고리타분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레닌은 자신이 사회주의를 위한 경제적 전제조건이 러시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 장악에 대한 거부가 현학자나 속물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독자적인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한 이런 전제조건의 결여에서 결코 나오지 않는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박식한' 신사양반들을 조롱한다. 이 글에서 레닌은 101번째,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10001번째로 저 인터내셔널 영웅들의 궤변에 답한다 : '이런 움직일 수 없는 생각[러시아는 사회주의를 이룰 만큼 성숙하지 않다]은 … 우리 혁명에 대한 결정적 평가가 아니다.'(레닌, (전집》, 제18권 2부, 118쪽 이하) 이것은 강령 초안의 기초자들이 거부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도 경제적, 문화적으로 미성숙하다 一 물론 러시아에 비해 중국이 더 미성숙하다 一 는 테제는 그 자체로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사실에서 나라의 전체적인 역사적 맥락과 혁명적 상황이 권력 장악을 지시하는데도, 노동자계급은 권력 장악을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구체적, 역사적, 정치적, 실제적 문제는 중국이 '자신의' 사회주의를 이룰 만큼 경제적으로 성숙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중국이 노동자 독재를 이룰 만큼 정치적으로 성숙했는지 여부로 정리될 수 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불균등발전법칙이 없다면 이런 문제는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이 법칙이 존재할 여지가 있는 것이며, 따라서 경제와 정치의 상호관계에 충분히 적용된다. 당시 중국은 노동자독재를 이룰 만큼 성숙했는가? 투쟁의 경험만이 이 문제에 단 정적인 답을 제공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투쟁만이 중국의 실제적 통일, 해방, 부활이 언제, 어떤 조건에서 일어날 것인지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누구나 중국이 노동자 독재를 이룰 만큼 성숙하지 않다고 말함에 따라 제3차 중국혁명이 수년간 늦춰졌다고 단언하고 있다.

물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문이 주장한 것처럼, 봉건적 잔재가 실제로 중국의 경제생활을 지배했다면, 사태는 아주 가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잔재 일반이 지배적이지는 않았다. 이 점에서도 강령 초안은 저지른 오류를 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회적이고 불명료한 방식을 되풀이하고 있다. 초안은 "나라의 경제와 정치적 상부구조 모두에서 중세적, 봉건적 관계의 우세 …'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속속들이 잘못되었다. 우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많은 사람이 관련된 문제라는 것인가? 아니면 나라의 경제에서 지배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인가? 상업자본과 은행자본의 포괄적 역할에 기초한 국내 산업의 이례적인 급성장, 시장에 대한 가장 중요한 농업지역의 완전한 의존, 어느 때보다 크게 증대하고 있는 대외무역의 역할, 도시에 대한 농촌의 전면적 종속 一 이 모든 것은 중국에서 자본주의 관계의 절대적 우세, 직접적 지배를 나타낸다. 농노제와 반(半)농노제라는 사회적 관계가 매우 강력하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것들은 부분적으로 봉건주의 시대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또 부분적으로는 새로 구성 一 생산력의 더딘 발전에 따른 과거의 부활, 농촌의 과잉인구, 상인자본과 고리대자본의 활동 등 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봉건적'(더 정확히는 농노이며, 대체로 전(前)자본주의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본주의 관계가 지배적이다. 오직 이런 자본주의 관계의 지배적 역할 덕분에 우리가 민족혁명에서 노동자 헤게모니의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지를 맞출 수 없다.

어떤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노동자계급의 힘은 노동자계급이 전체 인구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보다 훨씬 더 크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이 경제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경제의 전체적인 자본주의적 체계의 신경중추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는 절대다수의 임금노동자의 실제적 이해를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노동자계급은 비록 인구의 소수를 이룰지라도 (또는 의식적이고 정말로 혁명적인 노동자계급의 전위가 인구의 소수를 이루는 경우에) 자본가계급을 타도하고, 그 결과로 반(半)노동자 대중과 소부르주아 사이에서 많은 동맹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노동자계급의 지배를 위해 결코 미리 앞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며, 이 지배의 조건과 임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노동자독재의 필연성, 정당성, 합법성에 대한 직접적 경험을 통해서만이 지배를 확신할 것이다.
(레닌,《전집》, 제16권, '1919년', 458쪽)

생산에서 차지하는 중국 노동자계급의 역할은 이미 매우 크다. 다음 몇 년 사이에 이 역할은 더욱 커지기만 할 것이다. 사태가 입증한 것처럼,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역할은 거대해질 것이다. 그러나 지도부의 모든 방침은 노동자계급이 지도적 역할을 획득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강령 초안은 중국에서 성공적인 사회주의 건설은 '노동자 독재 아래 있는 나라들이 직접적으로 지원한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당이 항상 러시아와 관련해 인정한 원칙을 지금 중국과 관련해서도 동일하게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중국이 독자적인 사회주의사회 건설을 위한 내적인 힘이 충분하지 않다면, 스탈린-부하린의 이론에 따르면, 중국의 노동자계급은 혁명의 어느 단계에서도 권력을 장악해서는 안 된다. 아니면 정반대의 의미에서 소련이라는 존재가 문제를 해결해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술체계가 소련은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즉 합해서 6억의 인구를 거느린 경제적으로 가장 후진적인 두 나라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정도는 된다는 것이 당연시 된다. 아니면 혹시 독재가 전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연쇄에 포함될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그 고리이자 추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노동자계급의 독재가 중국에서는 '인정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인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러시아의 '특이성'은 정확히 동방국가들의 발전경향을 따라간다는 10 혁명에 대한 레닌의 기본적 정식이다. 따라서 우리는 반(反)트로츠키주의 투쟁을 수행하기 위해 1925년에 도출한 수정주의적 일국사회주의 이론이 새롭고 주요한 혁명적 문제를 다룰 때 마다 사태를 어떻게 왜곡하고 혼란시키는지 알 수 있다.

강령 초안은 이 같은 길을 따라 더 나아간다. 중국과 인도를 '1917년 이전의 러시아'에 대치시키고, '성공적인 사회주의 건설에 충분한 최소한의 산업'을 보유한 나라, 또는 (다른 곳에서 더 분명히, 따라서 더 틀리 게 말한 것처럼) '완전한 사회주의 건설에 … 필요 충분한 물질적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 폴란드('등'?)를 든다.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단지 '필요 충분한' 전제조건이라는 레닌의 표현을 희롱한 것이다. 또한 레닌은 분명히 기술적, 문화적, 국제적 전제조건을 포함하여 정치적, 조직적 전제조건을 열거하기 때문에 이는 기만적이고 용납할 수 없는 사기다. 그러나 주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 이것이 두 경제체제, 두 사회질서 사이의 연속된 세계적 투쟁, 게다가 우리의 경제적 토대가 훨씬 더 약한 투쟁의 문제라면, 완전한 사회주의 건설에 충분한 '최소한의 산업'을 어떻게 선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가?

만약 경제적 지렛대만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소련에서, 그리고 중국과 인도에서는 그만큼 더 세계 자본주의에 비해 훨씬 더 짧은 지렛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세계적 규모로 전개되는 두 체제의 혁명투쟁으로 결정된다. 정치투쟁에서 긴 지렛대는 우리의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우리의 정책이 올바르다면, 우리가 손에 쥐고 있음을 입증할 수 있고, 반드시 입증할 것이다.

게다가 레닌은 '우리의 혁명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일정한 문화적 수준'이 '사회주의' 건설에 필수적이라 말한 뒤에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비록 이 일정한 문화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더라도 말이다.' 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가? 왜냐하면 세계적 규모로 전개되는 두 사회체계, 두 문화 사이의 경쟁, 투쟁으로 결정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본질 자체에서 나오는 레닌의 이런 생각과 완전히 결별하면서 강령 초안은 1917년에 러시아는 정확히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기술 체계', 따라서 문화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초안의 기초자들은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강령에서 말하려고 한다.

모든 문제가 국제적 역학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면, 국민국가('1917년 이전의 러시아') 안에서 '최소한으로 충분한' 기준을 찾으려는 것은 용납 할 수 없고, 불가능하며, 어리석은 짓이다. 이런 잘못되고, 자의적이며, 고립적인 일국적 기준에 정치상의 일국적 협소함, 피할 수 없는 일국-개량주의적이고 사회 애국주의적인 미래의 중대한 실수를 위한 전제조건의 이론적 토대가 존재한다.

 

7. 동방을 위한 '노동자 농민의 두 계급 당'이라는 반동적 관념에 대하여

제2차 중국혁명의 교훈은 코민테른 전체의 교훈이지만, 주로 동방의 모든 나라들을 위한 교훈이다.

중국혁명에서 멘셰비키 노선을 옹호하기 위해 제시된 모든 주장은 우리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인도에게는 틀림없이 3배로 효력이 있을 것이다. 고전적 식민지인 인도에서 제국주의의 굴레는 중국에서 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뚜렷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인도에 잔재하는 봉건적, 노예적 관계는 그지없이 더 뿌리 깊고 현저하다. 그렇다하더라도, 아니 바로 이런 이유로 혁명을 와해시킨 중국에 적용된 방법은 틀림없이 인도에서 더욱 더 치명적인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인도 봉건주의, 영국-인도 관료집단, 영국 군국주의의 타도는 인민대중의 거대하고 굳건한 운동에 의해서만 성취할 수 있다. 대중운동은 바로 강력한 발전, 억누를 수 없는 성질, 국제적 목표와 유대 때문에 지도부의 불명확하고 타협적인 기회주의적 조치를 용인할 수 없다.

코민테른 지도부는 이미 인도에서 적지 않은 오류를 저질렀다. 이런 오류가 중국에서와 같은 규모로 나타날 수 있게 하는 조건이 아직까지 마련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누구나 중국사태의 교훈이 인도와 동방의 다른 나라들에서 주요 정책의 방향을 더 적시에 수정할 여지를 줄 것이 라고 기대할 수 있다.

모든 곳에서, 그리고 언제나처럼, 여기서 우리에게 핵심적 문제는 공산당, 당의 완전한 독립, 당의 비타협적인 계급적 성격의 문제이다. 이런 방침에서 가장 큰 위험은 동방의 나라들에서 이른바 '노동자 농민의 당'을 조직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수많은 근본적 테제를 공공연히 수정한 해로 기록될 1924년부터 스탈린은 '동방국가들을 위한 노동자 농민의 두 계급 당'이라는 정식을 제출했다. 이 정식은 서방에서 '안정'이 한 것처럼, 동방에서 기만적 기회주의에 기여한 것과 똑같은 민족적 억압에 근거해 있었다. 최근에 민족적 억압이 없는 일본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온 전보도 코민테른에 가깝고 우호적인 조직이라고 부르면서 지방적인 '노동자 농민당'의 활동을 자주 언급했다. 마치 이들 당이 거의 우리 '자신의' 조직인 것처럼, 그러나 그 정치적 특징에 대한 어떤 구체적 정의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한 마디로, 불과 조금 전에 국민당에 대해 한 것과 같은 식으로 이들에 대해 쓰고 말한다.

지난 1924년〈프라브다〉지는 이렇게 보도했다 :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이 서서히 노동자 농민당 수립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징후가 있다.'(〈프라브다〉지,1924년 3월 2일자)

한편 스탈린은 동방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이렇게 설교했다.

공산주의자는 민족공동전선에서 노동자와 소부르주아 계급 사이의 혁명적 블록 정책으로 넘어가야 한다. 이러한 나라들에서 이 블록은 국민당과 유사한 단일정당, 즉 노동자 농민당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스탈린,《레닌주의의 문제》,264쪽)

공산당의 독자성(분명히 고래 배 속의 예언자 요나의 그런 '독자성')문제에 대해 아주 작은 '유보조항'을 지키는 것은 기만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만 쓸모가 있었다. 우리는 제6차 대회가 이 분야에서 가장 가벼운 애매함도 치명적이며, 따라서 거부될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확신하고 있다.

지금 이것은 당과 자기 계급이나 다른 계급과 당의 관계라는 근본적 문제에 대한 완전히 새롭고, 전적으로 잘못된, 철저히 반(反)마르크스주의적인 정식의 문제이다.

국민당에 입당할 중국공산당의 필요성은 그 사회적 구성에서 국민당은 노동자 농민의 당이며, 국민당의 10분의 9一이 비율은 수백 번 되풀이되었다一는 혁명적 경향에 속하고,공산당과 협력할 준비가 되어있었다는 근거에서 옹호되었다. 그렇지만 상해와 무한 쿠데타 중에나 그 이후에 국민당의 이런 혁명적 10분의 9가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이들의 흔적을 발견한 사람조차 없다. 그리고 스탈린, 부하린 등 중국에서 계급 협조를 주장한 이론가들은 국민당원의 10분의 9一노동자와 농민, 혁명가, 동조자, 따라서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10분의 9一가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것을 귀찮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스탈린이 설교한 이 '두 계급' 당들 전부의 운명을 이해한다면, 만약 우리가 1919년 러시아공산당 강령은 물론이고 1847년 《공산당 선언》으로부터도 우리를 훨씬 뒤로 내모는 바로 그 개념 자체를 명백히 해야 한다면 말이다.

유명한 10분의 9가 사라진 곳의 문제는 우리가 먼저, 이중합성, 즉 서로 용납되지 않는 두 가지 역사적 노선一노동자 노선과 소부르주아 노선一을 동시 에 표현하는 두 계급 당의 불가능성을 이해하는 경우에만, 둘째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독자적인 농민당, 즉 농민의 이해를 표현하는 당인 동시에 노동자계급이나 자본가계급과도 무관한 당의 실현 불가능성을 이해하는 경우에만, 분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언제나 농민과 노동자계급은 별개의 두 계급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든 이들의 이해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며, 농민은 소유권의 관점에서 볼 때, 노동자계급의 견해를 받아들일 경우에만 공산당에 결합할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볼셰비키주의 역시 이를 받아들였으며, 이렇게 가르쳤다. 노동자계급의 독재 아래에서 노동자 농민의 동맹은 이 테제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 다른 상황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만약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진 별개의 계급이 없었다면, 동맹에 대해서도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동맹은 강철 같은 노동자계급의 독재의 틀 속에 들어가는 정도로만 사회주의 혁명과 양립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독재는 이른바 농민동맹이라는 존재와 양립할 수 없다. 바로 국가적인 온갖 정치 문제해결에 뜻을 두고 있는 모든 '독자적인' 농민 조직은 필연적으로 자본가계급에게 완전히 장악된 도구로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나라에서 스스로를 농민당이라고 부르는 이런 조직들은 실제로 부르주아 정당의 변종들 가운데 하나이다. 노동자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소유주라는 심리를 포기하지 않는 모든 농민은 근본적인 정치 문제에 닥치면 불가피하게 자본가계급을 따를 것이다. 물론 농민에 의존하고 있거나 의존하려고 하며, 가능하다면, 노동자에게도 의존하려고 하는 모든 부르주아 정당은 자신을 위장, 즉 자기에게 적합한 두세 가지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유명한 '노동자 농민의 당'이라는 개념은 농민의 지지를 구하지 않을 수 없지만 노동자를 자기대오로 흡수할 준비가 되어 있기도 한 기만적인 부르주아 정당들을 위해 일부러 만든 것처럼 보인다. 국민당은 이러한 당의 전형적 유형으로 영구히 역사에 기록되었다.

알려진 것처럼, 부르주아 사회는 재산 없고, 불만을 품은, 속아 넘어간 대중이 밑바닥에 있고, 위에는 만족스러운 사기꾼들이 머물도록 지어졌다. 모든 부르주아 정당이 진짜 당이라면, 즉 상당수의 대중을 포용하고 있다면, 똑같은 원칙 위에 세워졌을 것이다. 계급사회에서 착취자, 사기꾼, 독재자는 소수를 이룬다. 따라서 모든 자본가 정당은 그 내적 관계에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부르주아사회 전체의 관계를 재현하고 반영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모든 대중적 부르주아 정당의 하층은 상층보다 더 민주적이고 한층 더 '좌익적'이다. 이는 독일중앙당, 프랑스급진당, 특히 사회민주주의에 들어맞는다. 이런 이유로 '좌익적인' 국민당 일반당원, '압도적 다수',"10분의 9' 등의 정서를 반영하지 못하는 상층은 매우 고지식하고, 용납할 수 없다고 스탈린, 부하린 등이 항상 불평을 나타낸 것이다. 조직적 수단, 지시, 회람장을 통해 제거되어야 할 일시적인, 불쾌한 오해에 대해 이들이 자신의 기괴한 불평을 표출한 것은 실제로 특히 혁명적 시대에 부르주아 정당의 핵심적이고 기본적 특징이다.

이런 관점에서 온갖 기회주의 블록 일반一영국과 중국 모두에서一을 옹호하는 강령 초안 작성자들의 기본적 주장이 판단되어야 한다. 이들에 따르면, 상층과의 우애적 교제는 일반당원을 위해 배타적으로 수행된다. 알려진 것처럼, 반대파는 국민당으로부터 당의 철수를 주장했다.

부하린은 이렇게 말한다. '"왜 문제가 발생하는가? 국민당 지도자들이 우유부단하기 때문인가? 국민당 대중은 어떠한가, 이들은 단지 '짐승 같은 놈들'일 뿐인가? 언제부터 대중조직에 대한 태도가 "최고" 수뇌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따라 결정되었는가!"'(중국혁명의 현 상황)

이러한 주장의 실현성이야말로 혁명정당에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부하린은 이렇게 묻는다 : '국민당 대중은 어떠한가, 이들은 단지 짐승 같은 놈들일 뿐인가?' 물론 이들은 짐승 같은 놈들이다. 어떤 부르주아 정당의 대중도 늘 짐승 같은 놈들이다. 비록 정도가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대중은 짐승 같은 놈들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노동자 농민당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자본가계급을 감추면서 대중을 자본가계급의 지배로 내모는 것을 금지시킨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노동자당을 부르주아 정당에 종속시키는 것을 금지시킨 이유이다. 거꾸로 우리는 전 단계에 걸쳐 노동자당을 부르주아 정당에 대비시켜야한다. 부하린이 부차적, 우발적, 일시적인 것처럼, 역설적으로 말하는 국민당의 '최고' 수뇌부는 실제로 그 사회적 본질에서 국민당의 정수이다. 물론 자본가계급은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당에서도 '수뇌부'에만 속한다. 그러나 이 수뇌부는 자금력, 판단력, 결합력이 강하다. 언제든 제국주의자들의 지원에 의지할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당 내 지도부와 밀접히 결합한 실제 정치력과 군사력에 언제든 의지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수뇌부가 파업에 반대하는 법률에 서명하고, 농민 봉기를 질식시키고, 공산주의자들을 어두운 구석으로 떠밀고, 기껏해야 소부르주아 손문주의가 마르크스주의에 우선한다는 맹세를 강요한 당의 3분의 1만을 인정했다. 이 수뇌부가 고르고 갑옷을 입힌 일반당원은 장군, 매판 자본가, 제국주의자들이 우익의 지주역할을 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처럼 '좌익'의 지주 역할을 했다. 국민당을 부르주아 정당이 아니라 대중투쟁의 중립적 무대로 여기는 것은 진짜 지배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을 감추기 위해서 좌익 일반당원의 10분의 9에 대해 말장난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수뇌부의 힘과 권력을 더해주고, 더 광범한 대중을 '짐승 같은 놈들'로 개조시키려는 수뇌부를 거들고, 가장 유리한 조건에서 상해쿠데타를 준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두 계급 당이라는 반동적 관념에 기초를 두면서 스탈린과 부하린은 중국의 권력이 국민당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좌익'과 함께 공산주의자들이 국민당의 다수파를 획득함으로써 나라의 권력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꿔 말하면,이들은 국민당 대회에서 보통선거를 통해 자본가계급의 수중에서 노동자계급으로 권력이 넘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르주아 정당에서 … 더 관계적이고 이상적인 '당내 민주주의'의 우상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정말로 군대, 관료집단, 언론, 자본이 모두 자본가계급의 수중에 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리고 이것만이 지배정당의 실권을 잡고 있다. 부르주아 '수뇌부'는 감히 군대, 관료집단, 언론, 자본에 반대하지 않는 한에서만 좌익(그리고 이런 부류의 좌익)의 ‘10분의 9’를 용인하거나 용인했다. 이런 강력한 수단을 통해 부르주아 수뇌부는 이른바 '좌익'당원의 10분의 9뿐만 아니라 대중전체도 계속 종속시켰다. 이런 계급블록이론, 국민당이 노동자 농민의 당이라는 이론은 자본가계급을 최상으로 도와준다. 자본가계급이 나중에 대중과 적대적으로 충돌하여 이들을 사살하게 되면, 진정한 두 세력一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一사이의 이 충돌에서 유명한 10분의 9는 그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보잘것없는 민주적 날조는 피비린내 나는 계급투쟁의 현실에 직면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것이 '동방을 위한 노동자 농민의 두 계급 당'의 진짜, 그리고 유일무이한 정치적 메커니즘이다. 다른 것은 없으며,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 * *

마르크스의 계급적 원칙을 폐기한 것으로 추정되는 두 계급 당이라는 개념이 민족적 억압에 자극받은 것일지라도, 우리는 이미 민족적 억압이 전혀 없는 일본에서 '노동자농민의' 잡종에 대해 듣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사태는 동방에 국한되지 않고 있다. '두 계급' 관념은 보편적 견지에 이르려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 미국공산당은 이 영역에서 가장 기괴한 특징을 띠었다. 미국공산당은 이런 수단을 통해 사회혁명의 전차를 몰려는 미국 농부들을 매어두기 위해 부르주아 대통령 후보一'믿을 수 없는' 상원의원 라폴레트一를 지원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책략의 이론가이자 헝가리 농민을 도외시했기 때문에 헝가리혁명을 결딴낸 사람 가운데 하나인 페퍼는 농부들 사이에서 용해시킴으로써 미국공산당을 파멸시키려고 엄청난 노력(아마도 보상을 통해)을 기울였다. 페퍼의 이론은 농업 위기가 농부를 몰락시키고, 이들을 사회혁명의 길로 내모는 반면에, 미국 자본주의의 초과이윤이 미국 노동자계급을 세계의 노동귀족으로 전환시킨다는 것이었다. 페퍼의 개념에 따르면, 주로 이민자로 이루어진 수천 명의 당은 부르주아 정당을 매개로 하여, 따라서 초과이윤 때문에 타락한 노동자계급의 수동성이나 중립성에 직면하여 사회주의혁명을 보증할 두 계급 당을 수립함으로써 농부들과 융합해야 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코민테른 상층지도부 사이에서 지지자와 얼치기 지지자를 얻었다. 결국 양보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칙이 될 때까지 몇 주 동안 쟁점이 어느 쪽으로도 결정이 나지 않은 채 동요했다 (막후의 논평은 트로츠키주의자의 편견이라는 것이었다). 그 창립자가 죽기 전부터 라폴레트 당에서 당을 떼어내기 위해 미국공산당을 올가미밧줄로 잡을 필요가 있었다.

동방을 위해 현대 수정주의가 고안한 모든 것은 나중에 서방에까지 미쳤다. 만약 대서양 한편에서 페퍼가 두 계급 당을 통해 역사에 박차를 가하려고 했다면, 가장 최근에 실린 신문의 긴급보도는 국민당의 경험이 '노동자 농민위원회 에 기초(?!)한 공화국 의회'라는 기괴한 슬로건을 우리 당의 것이라고 속이려 시도한 이탈리아에서 분명히 그 모방자를 발견했다는 것을 알려줄 것이다. 이 슬로건에서 장개석의 진의는 힐퍼딩의 진의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우리가 정말로 그렇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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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우리가 상기할 것이 하나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에 대한 볼셰비키주의의 전체 투쟁사에서 노동자농민당이라는 개념을 쓸어버리는 것이다. 이 투쟁이 없다면 볼셰비키당은 없었을 것이다. 이 역사적 투쟁의 의의는 무엇이었는가? 1909년에 레닌은 사회 혁명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들 강령의 근본 개념은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무력동맹'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결코 아니라 노동자계급과 농민사이에 계급적 심연은 없으며, 이들 사이의 계급적 구별을 명백히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과 구별되는 농민의 소부르주아적 본질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적 개념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레닌,《전집》,제11권,1부,198쪽)

바꿔 말하면, 노동자 농민의 두 계급 당은 러시아 나로드니키의 중심 개념이다. 이 개념에 대한 투쟁 속에서만 농민 가운데에서 노동자전위당이 발전할 수 있었다.

레닌은 1905년 혁명기에 끈기 있게, 그리고 꾸준히 이렇게 반복했다.

농민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쉽게 의심을 거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농민과 따로 조직해야 한다. 농민이 반동 또는 반(反)노동자적 세력으로 표면에 나선다면, 이들과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레닌,《전집》, 제6 권,113쪽. 트로츠키의 강조》

1906년에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마지막 충고는 이것이다 : 도시와 농촌의 노동자와 반(半)노동자는 스스로를 따로 조직하라! 하찮은 정도의 소유자도, 소(小)소유자도, '일하는' 소유자도 믿지 말라 … 우리는 끝까지 농민운동을 지지하지만, 다른 계급의 운동이 사회주의 혁명을 이룰 수 있거나 이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레닌,《전집》,제9권,410쪽)

이런 생각은 레닌의 수많은 크고 작은 저작에서 다시 나타난다. 1908년에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이 다른 계급의 융합이나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당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결코 안 된다. 융합뿐만 아니라 어떠한 종류의 지속적인 협정도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당에게는 치명적일 것이며, 혁명적 민주주의 투쟁을 약화시킬 것이다.(레닌, 전집》,제11권,1부,79쪽.트로츠키의 강조)

누가 노동자농민의 당이라는 개념 자체를 이보다 더 엄하게, 더 가차 없이, 더 통렬하게 비판할 수 있는가?

이에 반해 스탈린은 이렇게 가르친다.

매번[!]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혁명적 반(反)제국주의 블록은 … 틀림없이 공식적으로[?] 단일한 강령으로 묶인 노동자농민의 단일정당이라는 형태를 취할 것이다.(스탈린,《레닌주의의 문제》,265쪽)

레닌은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리고 절대로 당의 융합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스탈린은 레닌에게 단 한 가지를 양보한다 : 스탈린에 따르면, 계급블록은 틀림없이 국민당 같은 노동자농민의 당, '단일정당의 형태'를 취할 것이지만 언제나 의무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적어도 이 양보에 대해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레닌은 10월 혁명기에 이 문제를 비타협적인 태도로 제기했다. 1918년부터 세 차례의 러시아혁명의 경험을 일반화하면서 레닌은 자본주의 관계가 우세한 사회에서는 두 결정적 세력 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一 이 있다는 것을 반복할 기회를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만약 농민이 노동자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자본가계급을 뒤따를 것이다. 중간노선은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레닌,집》,제16권,'1919 년',219쪽)

그러나 '노동자 농민의 당'은 바로 중간노선을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전위가 자신을 농민에 대립시키지 못했다면, 농민의 게걸스러운 소부르주아적 무정형성에 대해 가차 없는 투쟁을 수행하지 못했다면, 불가피하게 사회혁명당이나 약간 다른 '두 계급 당'을 통해 소부르주아 분자들 사이에서 용해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전위는 불가피하게 부르주아 지도부에 종속되었을 것이다. 농민과 혁명적 동맹을 맺기 위해서는 一 이는 까닭 없이 나오지 않는다 一 무엇보다도 먼저 노동자전위, 따라서 노동자계급 전체를 소부르주아 대중과 분리시킬 필요가 있다. 이것은 흔들리지 않는 계급적 비타협성의 정신으로 노동자당을 훈련시킴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젊은 노동자계급, 더 생생하고 더 직접적인 농민과의 '혈연적 유대', 인구 전체에서 차지하는 농민의 더 큰 비율은 '두 계급'이라는 형태의 정치적 연금술에 대한 투쟁의 중요성을 더욱 크게 한다. 서방에서 노동자 농민의 당이라는 개념은 정말로 터무니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동방에서는 치명적이다. 중국, 인도, 일본에서 이 개념은 혁명에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 뿐만 아니라 노동자전위의 가장 초보적인 독자성에도 치명적으로 적대적이다. 노동자농민의 당은 자본가계급의 지지기반, 보호막, 도약판 구실을 할 수밖에 없다.

동방 전체에 근본적인 이 문제에서 현대 수정주의가 단지 혁명 이전시기 구 사회민주주의적 기회주의의 오류를 반복한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사회혁명당에 대한 우리당의 투쟁을 잘못이라고 생각했으며, '동방' 러시아에게는 노동자 농민의 두 계급 당이 꼭 맞았다고 확신하며, 두 당의 융합을 끈질기게 주장했다. 우리가 이들의 충고를 마음에 두었다면,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나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절대로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혁명당이라는 노동자농민의 '두 계급' 당은 제국주의 자본가계급의 하수인이 되었지만, 우리나라가 그렇게 되는 것을 도울 수는 없었다. 즉, 이것은 볼셰비키주의의 수정주의자들 덕분에 다른 식으로, 그리고 '특유한' 중국의 방식으로 국민당이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과 똑같은 역사적 역할을 완수하려는 실패한 시도였다. 동방을 위한 노동자농민의 당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이 없다면, 코민테른의 강령이 아니며, 강령이 될 수도 없다.

 

8. 농민인터내셔널을 지킨 강점이 규명되어야 한다.


주요하지 않지만, 반대파에게 퍼부은 주요한 비난 가운데 하나는 농민에 대한 '과소평가'였다. 이 점에서도 반대파는 국내, 국제적 방침에 따라 자신의 판단을 내리고, 검증을 받았다. 공식 지도자들은 모든 경우에 농민과 관련한 노동자계급의 역할과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유죄를 입증했다. 이 와중에 가장 중대한 전환과 오류가 경제와 정치 분야에서, 그것도 국제적으로 발생했다. 1923년 이후 국내적 오류의 근저에는 국민경제 전체, 그리고 농민과의 동맹의 중요성, 노동자계급의 관리 아래 있는 국영기업에 대한 과소평가가 자리하고 있다. 중국에서 혁명은 토지혁명에서 노동자계급의 지도적, 결정적 역할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파멸했다.

같은 관점에서 처음부터 실험에 지나지 않은 크레스틴테른(Krestintern, 농민인터내셔널의 러시아 약어 : 옮긴이)의 전체 활동을 검토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이 실험은 최대한의 주의와 원칙의 엄수가 요구 되었다. 이런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전체 역사와 생존조건에 의해 농민은 가장 국제적이지 않은 계급이다. 속칭 국민성이라는 것은 바로 농민 속에 그 주요한 원천을 가지고 있다. 농민 가운데서 국제주의의 길을 따라 지도될 수 있는 빈농만이 반(半)노동자 대중이며,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이들만을 지도할 수 있다. 지름길로 가려는 어떠한 시도도 계급을 희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시도는 언제나 노동자계급에게 손해를 끼칠 뿐이다. 농민은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의 영향력으로부터 떼어낼 경우에만,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동맹세력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도자임을 인정하는 경우에만, 국제주의 정책으로 이끌릴 수 있다. 거꾸로, 노동자계급을 따돌리고, 각국 공산당에 관계없이 다양한 나라의 농민을 독자적인 국제조직으로 조직하려는 시도는 미리 실패하게 되어있다. 결국 이러한 시도는 각국에서 벌어지는 노동자계급의 농업노동자와 빈농에 대한 헤게모니 투쟁을 해칠 수밖에 없다.

16세기나 그 이전부터 농민은 전쟁을 일으켰으며, 반(反)혁명뿐만 아니라 모든 부르주아 혁명에서 다양한 농민계층은 거대하고, 이따금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자적인 역할을 수행한 적은 없다. 직간접적으로 농민은 언제나 한 정치세력에 대하여 다른 정치세력을 지지했다. 농민만으로는 국가적인 정치적 임무를 해결할 수 있는 독자적 세력을 구성한 적이 없다. 금융자본 시대에 자본주의 사회의 분열과정은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단계와 비교해 볼 때 엄청나게 가속화되었다. 이것은 농민의 비중이 증대된 것이 아니라 감소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경우에도 농민은 국제적 차원은 고사하고 국내적 차원에서도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한 것만큼 제국주의 시대에 독자적인 정치적 행동을 할 수 없다. 오늘날 미국의 농부들은 인민주의 운동경험이 보여주는 것처럼, 독자적인 전국정당을 결성할 수 없으며, 또 결성하지도 못한 4~5년 전보다 비교도 안 될 만큼 독자적인 정치적 행동을 할 수 없다.

전쟁이 야기한 경제적 쇠퇴에서 유래하는 유럽농업에 대한 일시적이지만 강렬한 자극은 '농민', 즉 자신을 선동적으로 부르주아정당에 대립시키는 부르주아 사이비 농민당의 있을 법한 역할에 관해 환상을 낳았다. 만약 전후 격렬한 농민의 불안정기에 노동자계급과 농민, 농민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시험하기 위해 농민인터내셔널을 조직하는 실험을 여전히 감행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그 잘못된 결점을 들춰내고, 긍정적 측면을 지적하려고 노력하기 위해 5년간의 농민인터내셔널의 경험에 대한 이론적, 정치적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적기이다.

어쨌든 한 가지 결론은 명백하다. 불가리아, 폴란드,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즉, 하고많은 나라들 가운데 하필 후진국들)의 '농민'당 경험, 러시아 사회혁명당의 오랜 경험, 국민당의 새로운 경험(아직도 그 피가 식지 않은),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삽화적 실험, 특히 미국의 라폴레트-페퍼 실험-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 쇠퇴기에 독자적, 혁명적, 반(反) 부르주아적 농민당을 기대하는 것은 자본주의 상승기에 비해 훨씬 더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보여준다.

현 시대의 역사적 상황에서 도시는 농촌을 동일시할 수 없고, 농촌은 도시를 동일시할 수 없다. 도시는 불가피하게 농촌을 이끌고, 농촌은 불가피하게 도시를 따른다. 유일한 문제는 도시계급의 문제가 농촌을 이끌 것이라는 점이다.(레닌, (전집》, 제16권, '1919년', 442쪽)

동방의 혁명에서 농민은 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지만, 이 역할은 지도적이지도 독자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호북성(湖北省), 광동성(廣東省), 또는 뱅골지역의 빈농은 국내는 물론이고 국제적 차원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 단 상해, 광동, 한구(漢沽), 그리고 캘커타 노동자를 지지할 경우에만 그렇다. 이것이 세계로 향하는 혁명적 농민의 유일한 탈출구이다. 호북성의 농민과 갈리치아(Galicia)나 도브루자(Dobrudja)의 농민, 이집트농부와 미국농부사이의 직접적 결합을 벼리려고 시도하는 것은 가망 없는 짓이다.

정치의 본질에서 직접적 목표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것은 불가피하게 흔히 직접적 목표가 추구한 것의 반대인 다른 목표의 도구가 된다. 우리가 농민에 의지하고 있거나 의지하려고 하는 부르주아정당의 사례를 몰랐다면, 자국 공산당의 타격으로부터 보호를 확실히 하기 위해 코민테른 안에서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농민인터내셔널 안에서 길든 짧든 자신을 위해 보험에 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노동조합 분야에서는 퍼셀처럼 영-러위원회를 통해 자신을 지켜야 했는가? 만약 라폴레트가 농민인터내셔널에 등재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단 하나 미국공산당이 끔찍할 정도로 약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는 농민인터내셔널에 등재하지 않았다. 초대받거나 부탁받지도 않은 페퍼는 등재하지도 않은 라폴레트를 얼싸안았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부농의 은행가이자 지도자인 라디치는 자신의 입각에 농민인터내셔널의 출입허가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간 국민당은 농민인터내셔널과 반(反)제국주의동맹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심지어 코민테른의 문을 두드렸으며, 단 한 표의 반대가 먹칠을 했지만 소련공산당 정치국의 축복어린 환영을 받기까지 했다.

이것은 프로핀테른[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의 청산을 지지하는 경향이 매우 강한 시기(그 명칭 자체가 소비에트 노동조합의 규약에서 삭제되었다)인 최근의 주요한 정치적 흐름을 크게 특징짓고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바로는 크레스틴테른[농민인터내셔널]의 명확한 승리에 대해 공식기관지 어디에서도 문제가 제기된 적이 없다.

제6차 대회는 노동자국제주의의 관점에서 농민'인터내셔널'의 활동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지금이 이 길게 이어지는 실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적기이다. 이런저런 형태의 대차대조표는 코민테른 강령에 포함되어야 한다. 현재의 초안은 농민인터내셔널의 '대중'에 대해서든, 실제로 그 존재 자체에 대해서든 일언반구도하지 않는다.

 

결론

우리는 강령 초안의 어느 정도 근본적인 테제들에 대한 비판을 제출했다. 극도의 시간적 압박 때문에 우리는 강령 초안을 다 다루지 못했다.

이 임무를 위해 우리에게 허용된 시간은 불과 2주뿐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가장 긴급한 문제로 제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문제는 최근 당내 투쟁과 혁명에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른바 '토론'에 대한 이전의 경험 덕분에 우리는 그 맥락에서 분리되어 잘못 쓰이고 있는 문구가 '트로츠키주의'를 격파하는 새로운 이론의 강렬한 원천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았다. 지금까지 줄곧 이런 유형의 의기양양한 성공이 계속되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에도 우리를 엄습할지 모르는 저속한 이론적 전갈채찍을 휘두를 가능성을 최대한 침착하게 살피고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강령 초안의 기초자들은 새로운 비판적, 설명적 글을 배포하는 대신에 낡은 형법 제58조를 더 다듬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할 확률이 크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와 같은 주장은 우리에게 더욱 더 타당하지 못하다.

제6차 세계대회는 강령을 채택하는 임무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강령의 기초로서 부하린과 스탈린이 다듬은 초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이글 전체에 걸쳐 입증하려고 했다.

현 시기는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 전체의 생존에서 전환점이다. 이것은 우리당 중앙집행위원회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2월 전원회의의 최근 모든 결정과 조치로 증명된다. 이런 조치는 완전히 불충분하고, 결의문도 모순적이다. 그리고 이것들 가운데 일부는 중국혁명에 대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2월 결의문처럼 철저하게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결의문의 구석구석에는 좌선회 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를 과대평가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우익 분파는 보호하는 반면에, 그 만큼 더 혁명 분파에 대한 절멸 캠페인을 계속 협력해서 벌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 노선이 야기한 곤경 때문에 강제된 이런 좌익화 경향을 무시할 생각은 잠시도 품지 않는다. 모든 진정한 혁명가는 맡은 자리에서 혁명적 레닌주의 노선 쪽으로 향하는 이런 좌익적 지그재그의 징후를 발전시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할 것이다. 이를 촉진하는 과정은 당에 최소한의 어려움과 경련을 동반할 것이 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이로부터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다. 코민테른은 현재 가장 격심한 발전기一신노선이 이질적 요소를 폭발시키는 반면에, 구 노선이 청산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시기一를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강령 초안은 이런 이행적 상황을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반영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러한 시기는 많은 세월 우리 국제당의 활동을 앞서 결정해야 하는 문서를 정교화하기에 그다지 유리하지 않다.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때를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흐려진 물을 맑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혼란을 넘어서야 하며, 모순을 없애야 하며, 신 노선을 명확히 해야 한다.

4년 동안 대회가 소집되지 않았다. 9년 동안 코민테른은 명확한 강령도 없이 지냈다. 현재 유일한 탈출구는 이것이다 : 코민테른 전체의 최고 권한을 빼앗으려는 시도를 단호하게 종식시키기 위해, 강령 초안에 대한 진정한 토론을 인정하고, 절충적 강령에 대비되는 다른 강령, 즉 마르크스-레닌주의 강령에 동의할 수 있게 하는 정상적 체제를 다시 수립하기 위해 오늘부터 1년 안에 제7차 세계대회가 소집되어야 한다. 코민테른, 각국 지부의 모임이나 협의회, 그리고 그 기관지에 대한 질문을 금지해서는 안 된다. 올해 중에 마르크스주의의 쟁기로 경작지 전체를 깊이 일궈야 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만 노동자계급의 국제 당은 통찰력 있는 빛으로 밝게 비추고, 멀리 미래로 믿을 수 있는 빛을 던지는 지침인 강령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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