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오래 전부터 안남미 또는 인디카 쌀을 경험했고, 맛이 없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버렸다고. 그렇다. 한국인은 100년도 더 전에 안남미를 만났다. 쌀과 콩은 자꾸만 일본으로 넘어가고, 풍년과 흉년을 자연이 결정하던 시절에 안남미는 한국에 들어왔다.
안남미는 1901년에 이미 한국에 들어와 보통 사람들에게 풀렸다. 대한제국은 식량 확보와 쌀값 안정을 위해, 쌀의 이출을 금하는 방곡령을 내림과 동시에 무관세 쌀 수입 조치를 병행하기도 했다. 안남미는 외국 상사가 탐낼 만한 수입품이었다. 쌀만큼 확실히 팔릴 상품이 또 어디 있겠는가.
대한제국이 망하고는 더했다. 조선은 노골적으로 일본을 위한 쌀 생산지가 됐다. 부족한 쌀과 기타 곡물은 만주에서 수입한 좁쌀과 동남아시아에서 수입한 안남미로 때웠다. 당시 언론에 따르면 1924년 현재 만주산 좁쌀은 3년 전보다 약 40배가 더 수입되었고, 안남미 수입은 약 25배 더 늘어났다. 그만큼 조선 쌀과 조선 콩이 일본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이렇게 들어온 안남미는 소작민에게 돌아가는 쌀이기도 했다. 소출의 대부분을 지주에게 뜯긴 조선인 소작농은 자신이 쥔 얼마 되지 않는 조선 쌀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대신 조선 쌀에 견주어 4분의 1 아래이던 안남미를 사 먹었다. 만주산 좁쌀도 섞어 먹었다.
식민지의 도시민은 도시민대로 안남미의 장난에 맞닥뜨려야 했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는 안남미를 둘러싼 도시 미곡상의 농간이 극에 달한 20년간이기도 했다. 수법은 뻔하다. 조선 사람이 좋아하는 조선 쌀에다가 안남미를 섞어 파는 것이다. 도시민 안정이 곧 체제 안정과 직결됨을 잘 아는 일제는 부정 미곡상 단속에 순사가 아니라 형사를 동원했다. 조선어 언론은 못된 미곡상을 가리켜 “간상(奸商)”, 곧 “간악한 장사치”라는, 언론이 쓸 수 있는 극한 표현을 가져다 붙였다.
조선사가 안남미 맛을 해쳤다
해방되고 나서도, 모자란 쌀은 역시 베트남-버마-태국 쌀로 메꾸는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꼭 베트남 쌀이 아니어도 그냥 ‘안남미’였다. 가끔 들어오는 대만 쌀이 안남미보다 인기가 있었다. 대만 쌀은 자포니카 쌀이니까. 대만은 일제시대 전통적으로 먹던 인디카 쌀밥이 자포니카 쌀밥으로 바뀐 곳이다.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도 안남미 도입 양상은 비슷하다. 1970년대에는 정부가 정부미에 미국 캘리포니아산 쌀을 섞어 방출하기도 했다. 이때의 캘리포니아산 쌀 또한 요즘과는 달리 인디카 쌀이었다. 그 당시 소비자들은 정부미도 싫었고, “캘리포니아산 안남미”도 싫었다. 한국인이 육종하고도, 한국인이 맛없다고 버린 통일벼 또한 인디카의 형질을 지닌 벼다.
한국인은 그 동안 맛을 볼 틈 없이 안남미를 먹기만 했다. 품질 낮은 싸구려 인디카 쌀과 인디카 쌀 조리법에 대한 무지가 함께였다. 다만 살아남기 위해 안남미를 먹었다. 내 쌀을 제국 본토에 빼앗기고 먹는 쌀이 안남미였다. 1990년대까지도 2000년대까지도 그 잔상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