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나라가 멸망하고 주왕의 숙부인 기자가 반도 북부 및 요동으로 가서 주나라에게 분봉을 받는데 그 지역은 나중에 중국에서 조선이라고 불린다. 즉 조선은 원래 중국이 붙인 지명이었고 주나라의 제후국으로서 나중에 국명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항은 중국의 역사서인 상서, 사기, 한서에 써 있는데 한국 학자들은 유물로서 고증이 안 되었다는 이유로 부정하지만 기자 조선이 실존했을 가능성은 부여의 존재로 높아진다.
전한의 위만이라는 장수가 기자 조선의 왕에게서 왕위를 찬탈하는데 그 시기와 부여라는 국가가 출현하는 시기가 일치한다. (위만의 찬탈 BC 2세기, 부여의 건국 BC 2세기)
그런데 부여와 은나라에 여러 공통점이 존재하는데 부여의 건국 시기와 함께 이것을 기자 조선 실존의 근거로 볼 수가 있다.
1. 은나라 신화와 동명왕 신화의 난생신화라는 유형
2. 은나라의 갑골 점복과 부여의 우제 점복
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
3. 은력(殷曆)을 사용하는 부여의 역법
以殷正月祭天國中大會連日飮食歌舞名曰迎鼓於是時斷刑獄解囚徒
4. 은나라 탕왕의 自責六事가 부여가 흉년을 왕의 책임으로 하는 풍습과 유사
유목민에게 없는 풍습
舊夫餘俗水旱不調五穀不熟輙歸咎於王或言當易或言當殺麻余死其子依慮年六歳立以為王
이외에도 몇 가지가 있는 것 같지만 중요한 것만 지적하면 위와 같다.
그러니까 기자 조선이 실존했다고 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부여와 은나라의 공통점을 설명하기 어렵고 기자 조선이 멸망한 시점과 부여의 건국 시점이 일치한다는 것도 여기에 설득력을 더한다.
위만에게 찬탈당한 기자 조선의 준왕은 한반도 남부로 망명하여 한왕(韓王)을 칭한다.
그런데 진한은 진시황의 진나라에서부터 망명한 주민들에 의해 출현하여 나중에 신라가 되는데 이것은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와 후한서에 써 있는 것이다.
진한의 '진'이라는 글자도 중국의 진나라와 관계가 있다는 추측도 있다.
신라가 중국계였다는 것은 진한 6부라는 귀족 집단의 성씨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원래 한국에 중국식 성씨가 일반적으로 보급되는 시기는 통일 신라 이후이지만
귀족들은 신라 3대 왕 시기에 이미 중국식 성씨를 쓰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진나라에서 왔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아무튼 한국의 고대사를 알아보면 한국인의 기원이 되는 고대 국가들이 대부분 중국에서 왔고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북방 유목민족과는 아무련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을 지적하면 한국인들은 화를 내는 것 같지만
이것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이유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