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민족성개조
18.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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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 내전

 

|서문|

새로운 정부가 취임하자마자 장군들은 정부 전복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934년 10월 오비에도에 대한 맹공격을 지휘했던 프랑코는 아사냐에 의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카나리아 제도 사령부로 전근되었다. 그는 이 직책을 맡기 전에 이미 몰라 장군의 사령부에서 군대의 왕당파 음모론 자들과 동맹을 맺었다.

4월, 몰라 장군은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20일 정도 걸릴 쿠데타 준비를 촉구하는 비밀 회람장을 돌렸다. 몰라는 이렇게 말했다 : '이는 강력하고 잘 조직된 적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분쇄하기 위하여 매우 격렬할 수밖에 없을 군사행동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파시스트]

운동에 서약하지 않는 정당, 사회단체, 노동조합의 모든 지도자는 투옥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반란이나 파업운동을 교살시키기 위해 일벌백계로 다스려질 것이다.‘

토지개혁의 느린 속도에 불만을 가진 에스트레마두라의 시골사람들은 넓은 면적의 토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농민에 반대하여 치안대를 보냈다.

좌익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익에 대해서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한 인민전선은 4월에 국회 표결을 통해 공화국 대통령인 알카라 사모라를 해임하고, 5월에 아사냐로 그를 대체했다. 동시에 카사레스 키로하가 수상이 되었다.

그 사이에 프랑코는 비밀리에 북아프리카로 가 쿠데타를 준비했다. 여기에서 모로코 용병을 지휘하고 파시스트 반란을 시작했다.

파시스트 반란은 7월 17일 시작되었다. 18일에서 21일 사이에 본토의 주둔군이 부화뇌동했다. 파시스트는 첫 주에 바스크 지방을 제외하고 대략스페인의 3분의 1一주로북서부지역一을장악했다.

카사레스 키로하와 그의 보수적 후임자인 마르티네스 바리오가 낙오하자, 아사냐는 내전에서 공화국을 이끌 수상 자리에 평범한 화학 교수인 호세 히랄(Jose Giral)을 앉혔다. 이 세 번째 정부도 지난날들과 마찬가지로 전부 부르주아 정당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그런데도 사회당, 공산당, 무정부주의 연합의 주요 지도자들은 인민전선을 지지하기로 서약했다. 이 정권은 히랄이 타르고 카바예로로 대체되고, 사회당과 공산당이 직접 내각에 참여한 9월까지 지속되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 페데 리카 몬체니(Federica Montseny), 후안 페이로(Juan Peiro), 후안 로페스 산체스(Juan Lopez Sanchez) 등으로 대표된 무정부주의자는 마드리드 포위공격 중인 11월에 정부에 입각했다. 동시에 공화주의 정부는 마드리드를 피해 수도를 발렌시아로 옮겼다.

무정부주의 노동자들로부터 바르셀로나 전화교환소를 빼앗으려고 공산당이 고무한 시도가 1937년 5월 2일 일어났다. 뒤이어 15일에 카바예로가 실각했으며, 17일에 후안 네그린이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통일노동자당이 진압된 뒤인 1937년 10월, 네그린은 중앙정부를 다시 바르셀로나로 옮겼다.

공산당은 공화주의 자유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굳이 시도하지 않았던 일, 즉 통일노동자당을 진압함에 따라 더 이상 부르주아 정부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네그린과 지금은 전쟁장관이 된 프리에토는 스탈린주의자가 여전히 정부기구에서 절대적으로 강력했지만 공산당 권력을 제한시키려는 책략을 쓰기 시작했다. 1937년 10월, 프리에토는 장교들의 정당 집회 참석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주로 스탈린주의자가 차지하고 있던 군대의 인민위원 직책을 상당수 없애버렸다.

또한 네그린은 국회의원이 단지 16명뿐인 공산당이 요구한 새로운 국회선거를 거절했다.

1937년 12월부터 1938년 2월까지 테루엘(Teruel)에서는 계속 전투가 벌어졌다. 파시스트에게서 시(市)를 빼앗은 공화국 군대는 그 뒤 곧 흑독한 희생을 치르고 다시 시(市)를 내주었다. 파시스트는 마지막으로 시(市)에 재진입 했을 때, 1만 명의 공화주의자가 죽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공산당은 패배에 책임이 있는 프리에토의 축출 캠페인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프리에토는 4월 8일 해임되었지만 공산당은 카탈로니아와 발렌시아에서 파시스트의 진군을 막지 못했다. 동시에 파시스트인 알론소 베하 (Alonso Vega) 장군은 지중해 연안의 비나로스 시(市)를 점령했다. 이 승리는 6월 14일 카스텔론(Castellon)의 함락으로 공고화되었으며, 공화국은 오래도록 둘로 갈렸다.

공화국의 마지막 주요 공격인 에브로 전투는 7월 24~25 일 밤에 시작되었다. 공화파의 진격은 8월 2일 봉쇄되었다. 그 뒤 파시스트는 상실했던 기반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국제여단은 11월 이후에 스페인에서 철수했다.

1938년 말에 공화국의 산업생산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거의 완전한 파시스트 해군의 봉쇄 때문이지만, 대부분은 스탈린주의자가 통제한 경찰의 박해로 인해 무정부주의 노동자 대오가 사기저하에 빠졌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통일노동자당의 지도자들은 체포된 뒤 1년도 더 지난 10월에 재판에 회부되었다. 카바예로와 다른 저명한 인물들은 통일노동자당을 옹호하는 증언을 했지만, 스탈린주의자들은 정반대의 증언을 했다.

12월 23일, 파시스트는 1939년 1월 26일 바르셀로나를 장악한 카탈로니아에 대한 최후 공격을 시작했다. 대략 50만 명을 헤아리는 피난민이 프랑스 국경을 넘어 피신했다. 아사냐와 콤파니스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공화주의 정부 인사들은 이들과 함께 도망쳤다.

전쟁 내내 공화국에 무기를 팔려고 하지 않았던 프랑스와 영국은 2월 27일 프랑코 정부를 공식 인정했다. 그러나 공화주의자는 여전히 스페인의 3분의 1을 지키고 있었다.

바로 이때, 마드리드의 카사도(Casado) 대령이 이끈 '공화국' 장교단은 공화주의 정부 몰래 프랑코와 독자적인 화해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카사도는 계속 저항할 것을 주장하는 마드리드의 공산당 신문을 금지시켰다. 이때 공산당은 급진화된 노동자계급의 생명을 빼앗으며, 부르주아 군대가 공화주의 정부에 등을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저항할 것을 주장한 소수세력이었다. 공산당이 특별 지원하기 위해 선발한 고참 직업장교인 호세미이하 메난트[호세 미아하 메난트(Jose Miaja Menant, 1878-1958): 공화파 장군, 스페인공산당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내전 종료 직전, 파시스트에 항복할 것을 호소하는 특별 성명을 발표했다.]장군은 마드리드에서 항복을 위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해보려는 배신적 노력으로 카사도와 결합했다. 3월 4일 한밤중에 음모자들은 마드리드 라디오방송국에서 네그린 정부를 부정하고, 프랑코와의 화해를 제의하는 성명을 낭독했다. 카사도는 정부인사와 공산당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렸다. 공산당의 최고지도자, 남아있던 러시아 고문단과 함께 네그린은 이 기회에 스페인에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3월 6일 프랑스로 도망쳤다.

그 사이에 마드리드에서는 카사도에 충성한 부대와 공산당이 지휘한 부대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공산당은 주도권을 상실한 지역의 지휘관들보다 우세했지만 지도자가 없었다. 그 결과, 카사도는 이들을 마드리드에서 축출했으며, 프랑코와 협상을 개시했다.

사기를 꺾는 이 마지막 배신은 공화국을 끝장냈다. 파시스트는 무더기로 해산되기 시작한 공화국 군대의 저항을 받지 않고 무혈의 마지막 진군을 시작했다. 이 진군은 1939년 3월 28일 끝났다.

 

트로츠키의 망명에 대한 주석

스페인 내전이 터진지 한 달 만에 소비에트 정부는 세 번의 대규모 모스크바 재판의 첫 무대를 통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 재판의 주요 피고(궐석한)는 제국주의자의 지원으로 소련에서 자본주의를 부활시키려 한다고 비난받은 트로츠키였다. 스스로를 변호하려는 트로츠키의 노력은 노르웨이 정부에 의해 재빠르게 억압되었다. 노르웨이 정부는 소비에트의 압력에 굴복했으며,1936년 말까지 트로츠키를 억류했다. 1937년 1월, 트로츠키는 마지막 망명지인 맥시코에 도착했다. 제3부의 '아바스통신사와의 인터뷰' 이후의 글은 모두 멕시코시 교외의 코요아칸에서 작성되었다. 1940년 8월 스탈린이 보낸 첩자에 의해 암살되기까지 트로츠키는 이곳에서 살았다. 제3부의 글들은 대부분 제4 인터내셔널 운동 내에서 일어난 스페인에 관한 내부논쟁을 촉진하려고 작성된 것이다.

 

 

국제서기국에 보내는 편지

一프랑스좌익반대파 기관지 〈시류에 저항하며〉 편집부에 보내는 편지

 

■ 이 글은 내전 발발로 스페인 정세가 급변하자 재차 스페인에서 제4 인터내셔널의 임무와 통일노동자당의 오류를 분명히 한 편지이다. 이 편지는 원래 내부용이었는데, 1936년 8월 프랑스의 주류파 트로츠키주의 기관지 〈노동자 투쟁〉에 게재되었으며, 이로 인해 트로츠키, 국제서기국과 통일노동자당 지도부와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스페인 사태는 그 결과가 어떤 식이든(나는 바람직한 결과를 기대하고 있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모든 나라에서 제4 인터내셔널의 발전에 있어 역사적인 중요성을 갖게 될 것이다.

인민전선의 문제는 지금 모든 노동자 앞에 완전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다. 많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이렇게 자문하고 있다(예를 들어, 불쌍한 모리스 파즈[모리스 파즈(Maurice Paz, 1896-1985): 프랑스 변호사로 초창기 좌익반대파였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발행된 잡지〈시류에 저항하며〉에 관계했다. 1929년 터키에 망명 중인 트로츠키를 방문하기도 했지만, 반대파의 전망을 비현실적이라고 간주하며 반대파와 결별했다. 프랑스사회당에 입당, 그 지도자가 되었다.]가 쓴 〈르 포풀레르〉(Le Populaire, 프랑스사회당의 기관지)의 기사를 보라) : "2월 이래로 권력을 잡고 있는 스페인 인민전선의 지도자들은 왜 군대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인가? 이런 중대한 실수가 어디 있는가! 등." 이런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중대한 실수"의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계급적 이해의 문제인 것이다. 부르주아 좌익과 노동자 조직의 동맹 체결이 부득이하다면, 자본가계급은 그 대항세력인 장교집단을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이때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사유재산의 보호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중대한 실수가 아니었다!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부는 정부가 아니라 그저 내각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정부는 총사령부나 은행 등에 있었다. 프랑스급진당(프랑스의 소부르주아 정당)은 장교단에 손을 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노동자계급과의 동맹 체결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노동자가 이들의 요구를 계속 억누름에 따라, 국가기구 전체는 마침내 그 머리를 조아릴 것이다.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APists)은 인민전선이 노동자계급의 전술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인민전선의 계급적 성격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기 때문이다. 급진당은 인민전선의 우익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급진당은 프랑스에서는 지배계급을 대표하고 있다. 그리고 급진당을 통해서 프랑스의 금융자본은 인민전선 안에서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에 대해서도 그 지배를 유지하고 있는 이 문제는 스페인보다 프랑스에서 더 명확하고 더 첨예하게 제기되고 있다. 달라디에는 군대를 계속 자기의 보호 하에 두고 있다. 파시스트적 허풍을 떠는 6명의 장교를 해임시키는 문제가 아니다 : 장교단 전체가 철저하게 노동자계급에 적대적이다. 만약 이들을 해임시키기를 원하면, "군대를 혼란을 빠뜨릴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가 바로 가까이에 와 있다! 급진 자본가계급을 포함한 자본가계급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장교단에 손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공산당"도 장교단에 손을 대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장교단과 함께 소비에트 연방을 "방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일 이 장교단은 인민전선, 무엇보다도 노동자계급을 공격할 것이다. 그 다음에 군사독재를 수립하고, 소비에트 연방에 대항하여 히틀러와 동맹을 체결할 것이다. 재앙이 넘쳐나는 현대와 같은 시대에는 사태가 바뀔 때마다 기회주의 정책의 범죄적인 결과가 10배나 더 격렬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또한 올해 초, 통일노동자당 지도자인 마우린과 닌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분별력 있는 노동자라면 이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고, 또 물을 것이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예측하지 못한 것인가? 어떻게 당신들은 급진 자본가계급을 철저히 불신하도록 가르치는 대신에, 인민전선 강령에 서명하고 우리의 신뢰를 아사냐와 그 동료들에게 줘버렸는가? 지금 당신들의 오류 때문에 우리의 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노동자들은 닌과 그의 동료들에 대해 각별한 분노를 느껴야 한다. 왜냐하면 몇 년 전에 인민전선 정책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제공하고, 그 각 단계를 구체화하고 명백하게 설명한 경향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닌은 몰랐다는 핑계一모든 지도자의 가증스런 핑계一를 댈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적어도 한번은 문서를 읽고 서명해야 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사태는 스페인과 프랑스는 물론이고 모든 지역의 제4 인터내셔널을 위해 새롭고 커다란 가능성을 열어젖힐 것이다一바로 중도주의 경향들을 제물로 삼으면서 말이다. 현재의 상황 속에서 런던사무국이 11월의 '평화대회'에 실제 소속 회원들만은 소집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상당히 의심스럽다. 어쨌든 우리는 햇빛을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르는 이 대회에 참여를 약속하거나 대회에 어떠한 권위를 제공하는 것에도 흥미가 없다.

우리는 거대한 대중에게로 방향을 돌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어떠한 수단을 통해서라도, 그리고 보수적인 완고함에 영향을 받거나 마비되는 일 없이 대중조직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이 대중들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독자성을 지켜야 하며, 허영심 강한 중도주의자와의 어떠한 타협도 멀리하며, 이들과 우리 사이의 경계를 없애지도 않을 것이다. 요컨대, 범죄적인 화해는 일절 피해야 한다.

 

진심에서 우러난 인사를 담아

 

1936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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