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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②/이성을 무너뜨린 선동의 드라마
양극단의 초인과 군중이 엮어낸 파시즘… 감정적 도취를 위한 복제예술 난무
(사진/군중과 함께 만들어내는 대형 스펙터클. 히틀러의 선동은 군중들을 기마민족의 청동시대로 끌고 들어갔다)
“숭고는 설득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취시킨다.” 수사학에 관한 롱기누스의 저서 <숭고론>에 나오는 말이다. 실제로 고대의 정치는 ‘말’로 이루어졌다. 그 시절 정치가들은 대중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단상에 올라 현란한 말솜씨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제 편으로 끌어들이곤 했다. 가령 시저가 피살된 후 행해졌다는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의 연설을 생각해 보라. 언제부터인가 ‘수사학’이 문체에 관한 학문이 되었지만, 원래 그것은 말하는 기술, 즉 말로써 대중을 열광의 상태에 빠뜨려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술이었다. 물론 오늘날 ‘수사학’이란 말엔 늘 경멸이 붙어다니지만 이를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고대 직접민주주의 시대에 수사학은 참정권을 가진 시민이라면 누구나 배워야 할 교양이었다.
집단적 환각, 그들은 청동시대로 갔다
“설득하지 않는다. 도취시킨다.” 이것이 바로 수사학의 힘이자 동시에 함정이다. 즉 논리적 설득을 바탕에 깔지 않고 감정적 도취로 논증을 대신하는 순간, 수사학은 곧바로 대중선동의 기술로 전락한다. 파시스트들은 이를 알고 있었다. 가령 무솔리니는 마치 로마의 위대한 장군(=두체)을 연상시키는 제스처와 어법으로 집회장의 대중을 도취시켰다. 이 집단적 환각상태 속에서 그는 대중을 그 찬란하고 영광스러웠던 고대 로마로 되돌려 보냈다. 히틀러 역시 그 신경질적인 연기로 집회장에 모인 대중을 위대한 북방 기마민족의 정복신화라는 가상현실 속으로 몰아넣었다. 뜨거운 감동은 합리적 논증을 간단하게 압도하는 법. 도취의 뜨거움 속에서 인류가 어렵게 쌓아온 냉철한 합리성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이때 인류는 졸지에 공격적 리비도로 가득 찬 청동시대로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사진/진정한 웅변가는 고약한 선동가와 구별된다. 욕설과 고함으로 유대인을 저주하는 히틀러)
말의 힘, 그러니까 ‘도취’가 그 자체로서 나쁜 것은 아니다. 이미 고대인들은 진정한 ‘웅변가’(orator)와 고약한 ‘선동가’(rhetor)를 구별할 줄 알았다. 가령 집회장에 모인 대중 앞에서 “I have a dream”이라고 차별 없는 세상의 꿈을 노래하던 마틴 루터 킹과, 유대인에게 증오와 경멸과 저주를 퍼붓던 히틀러. 이 두 사람의 연설은 모두 대중의 마음을 휘저어놓았으나, 우리는 이 연설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 차이는 어떤 것일까? 한마디로 진정한 ‘웅변가’는 결코 논증을 배제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행동의 힘이 결여된 차가운 논증에 그것이 마땅히 가져야 할 에너지를 되돌려주려 할 뿐이다. 반면 ‘선동가’는 논증을 싫어한다. 그는 정서적 감동으로 논증을 대신한 뒤 그걸로 곧바로 대중을 움직이려 든다.
하지만 이 차이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아마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두 선동가의 차이일 것이다. 히틀러 독재 시절, 나치들이 사용하는 어휘의 변화를 일기 형식으로 분석한 <제3제국의 언어>라는 책으로 유명한 빅토르 클렘퍼러에 따르면, 무솔리니는 제법 수사학적 기교도 있고 최소한 ‘문장’을 만들 줄 아는데, 히틀러의 연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욕설과 고함소리로 가득 차 있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었다고 한다. 즉 무솔리니의 연설이 그래도 ‘말’처럼 들린다면, 히틀러의 연설은 ‘말’이 아니라 히스테리 환자의 발작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그래도 무솔리니에게 문학적 소양이 있었다면, 히틀러는 애초에 문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연설은 ‘언어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연극적 현상’이었다. 연단 위에 선 그는 1인극을 하는 연극배우에 가깝다. 실제로 그는 바이로이트 바그너 축제를 할 때 직접 무대연출에 간섭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가 굳이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대중은 그의 요란한 몸짓과 현란한 제스처만 보고도 열광을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클렘퍼러가 길바닥에서 흘러나오는 히틀러 연설의 중계방송 속에서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몇개의 욕설과 거기에 응답하는 대중의 함성뿐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언어의 정서표현적 기능이 반(反)합리성, 비(非)논리성의 극단으로까지 흐르다 보니 논리를 담는 매체인 언어 자체가 사라지는 ‘언어 파괴’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사진/차별없는 세상을 꿈꾼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무솔리니의 문학과 히틀러의 종합예술
고대 수사학의 전통을 물려받은 무솔리니의 선동이 문학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면, 히틀러의 선동은 종합예술, 즉 군중과 함께 만들어내는 대형 스펙터클이었다. 가령 한밤중에 거대한 스타디움 벽의 둘레에 설치된 탐조등들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빛을 쏘아올린다. 그러면 그 빛의 기둥들에 둘러싸인 대중은 마치 대리석 열주가 늘어선 고대 신전 안에 들어온 듯한 환영에 빠지게 된다. 또 그 빛기둥이 스타디움 안의 대중을 그 밖의 잡종들로부터 구별해주면, 이 선민들은 하늘로 뻗어올라가는 그 빛기둥들 안에서 하늘에 있는 신적인 것과 직접 연결되는 접신(接神)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런 식의 군중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물론 여러 유능한(?)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가령 올림픽 스타디움, 총통관저, 나치당사, 집회장 등 고대의 로마를 옮겨놓은 듯한 이 거대한 세트를 만드는 데에는 슈페어와 같은 건축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선동’하면 생각나는 사람은 물론 이 모든 정치 스펙터클을 총지휘했던 선전상 괴벨스다. 재미있게도 그는 독일의 영화제작자들에게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를 보여주며, “그것을 보고 좀 배우라”고 했다 한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영화라는 미디어 그 자체에서 혁명적 가능성을 본다. 원작 없이 무한히 기술복제가 가능한 영화는 예술에 늘 따라다니던 종교적 흔적, 즉 예술작품의 아우라(신비한 광휘)를 파괴하므로 그 자체로 진보적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소비에트의 혁명적 영화, 가령 트레차코프의 영화 실험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게다. 하지만 그는 이 매체가 가진 또다른 가능성을 보지 못한 듯하다. 사실 영화만큼 파시즘의 대중선동에 긴요하게 사용된 매체도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아우라’를 파괴한다는 이 복제예술이 나치 독일에선 외려 지도자에게 정치적 아우라를 씌우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지 않았던가.
대화와 지성을 외면한 파시즘의 초상
가령 오늘날 감탄과 파시스트 육체미학이라는 비난을 함께 받고 있는 레니 리이펜슈탈. 오늘날 스포츠 기록영화에 사용되는 기법은 대부분 이 여인이 제작한 베를린올림픽 기록영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의 영화를 보면 선수들의 육체를 얼마나 완벽하게 이상화했던지 대체 기록영화인지 예술영화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다. 그 완벽한 이상화의 기법은 물론 지도자에게 초인의 아우라를 씌우는 데에도 적합하였다. 가령 히틀러가 오픈카를 타고 연도의 군중을 사열할 때, 그는 카메라를 군중의 등 뒤에 위치시킨다. 그러면 차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군중의 머리 위로 불쑥 솟아오른 지도자의 상반신만이 (마치 여호와의 신이 수면을 운행하듯이) 군중의 숲을 헤치고 앞으로 조용히 미끄러져 나간다. 군중집회 때엔 운동장 정면에 걸린 거대한 나치 깃발 뒤에 숨어, 고공촬영으로 좌우 양편으로 도열한 군중 사이로 외롭게 걸어오는 천재의 모습을 잡는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군중의 숲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지도자. 마치 좌우로 갈라진 홍해 바다를 건너는 모세처럼 보인다. 민족의 구세주….
‘얼굴 없는 군중 대 극성스런 초인의 콘트라스트.’ 이것이 파시스트 선동의 기본구도다. 이 초대형 키치예술은 파시스트 독재의 미학적 이미지, 즉 “지도자는 번거로운 의회의 매개 없이 군중의 의지를 직접 대변한다”는 생각의 그림이다. 또 그것은 “진리는 지도자의 입에서 군중에게 직접 전달된다”는 파시스트 반지성주의의 그림이기도 하다. 원래 군중과 천재의 굳건한 결합 속에는 대화(=의희)와 지성(=지식인)이 끼여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얼굴 없는 군중과 극성스런 천재, 극단적 몰개성과 극단적 초개성, 마조히스트 군중과 사디스트 초인의 이 행복한 결합. 그것이 바로 파시즘의 초상이다.
진중권/ 자유기고가
http://legacy.h21.hani.co.kr/h21/data/L991101/1p7mb104.html
파시즘은 드라마를 먹고 자란다
히틀러유겐트(사진 위)와 유사성 논란을 불렀던 삼족오소년소녀대 발대식 모습.
얼마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해프닝이 있었다. 어느 단체에서 고구려 기상을 되살리기 위해 소년소녀단을 창단했다고 한다. 21세기에 민족의 기상을 계승하려고 스카웃을 조직한다는 발상도 우습지만, 디지털 시대 소년 소녀들에게 준(準)군사적 디자인의 제복을 입히는 획일성의 취향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난히 민족주의적인 한국 대중이 고구려의 얼을 이어나가겠다는 데 시비를 걸 것 같지는 않고, 아이들에게 유니폼 좀 입혔다고 그게 국가주의적인 한국 대중의 취향을 거스를 것 같지도 않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고구려의 얼을 계승하겠다는 장한 소년 소녀들이 입고 있는 제복이 공교롭게도 1930년대 독일에서 히틀러유겐트가 입었던 유니폼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게 아닌가. 게다가 아이들의 팔에는 완장이 채워져 있는데, 또다시 공교롭게도 그 색깔이 빨간색. 거기에는 하얀색 동그라미 안에 검은색으로 삼족오가 그려져 있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이 히틀러 유겐트의 깃발이다. 듣자 하니 행사 리허설에서는 오른팔을 43도로 치켜올리는 나치식 경례까지 등장했단다.
누리꾼들이 삼족오소년소녀대와 히틀러유겐트의 유사성을 지적하자, 주최 측에서는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한 누리꾼들에게 한때 법적 대응도 검토했지만 행사를 망치고 싶지 않아 그만뒀다”고 발끈했다. 나치가 무슨 인간 별종인 줄 아나보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 나치 역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저 넘쳐흐르는 조국애와 민족애를 주체 못해 유니폼을 입고 군사적 혹은 준군사적 집단을 이루기를 좋아했을 뿐. 정치적 파시즘은 보통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가진 이런 심정적 파시즘의 토양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히틀러유겐트
물론 이 소년소녀대를 만든 이들은 그것을 ‘스카웃’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 독일에서도 어린 시절 히틀러유겐트 대원이었던 노인들은 그 시절을 ‘피크닉’ 비슷한 것으로 기억한다. 어른들이야 거기에 심각한 의미를 부여해도, 어린 시절에 같은 또래 아이들이 모여 함께 거리를 행진하고 자연으로 나가 텐트 치고 야영하는 것처럼 신나는 게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독일의 노인들 중에는 히틀러유겐트를 유년기의 모험과 낭만으로 기억하며 거기에 진한 향수까지 드러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고구려 삼족오 대축제’의 홈페이지는 이런 인사말로 방문객을 맞는다. “삼족오는 우리 문화이자 역사입니다. 역사가 지금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하늘과 강물이, 황금사슴이 ‘잃어버린 역사’의 회복을 부르짖습니다. 당신이 바로 역사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뜻과 힘을 모아 잊혀진 고구려의 역사를 다시 찾아야 할 때입니다. 미래강국 COREA의 건설을 위해 역사를 새로 쓰는 일, 그것은 살아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고귀한 의무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말이 그리 도발적으로 들리지 않지만, 오늘날 서구에서 이런 어법은 ‘극우파’의 언사로 간주된다. 나치도 ‘모두 뜻과 힘을 모아’ 잊혀진 북방 기마민족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으려 했다. 그게 바로 우수한 아리아 인종의 민족서사다. 히틀러가 한 일도 패전국 독일을 미래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역사를 새로 쓰는 일이 아니었던가. 나아가 남의 허락도 없이 자기들 멋대로 설정한 국가적 목표를 남에게 ‘가장 고귀한 의무’로 덮어씌우려 드는 고질병 역시 우익 전체주의자들이 잘 고치지 못하는 버릇이다.
로고스에서 뮈토스로의 퇴행
“수고 많으셨습니다. KBS, MBC, SBS! 1500년 동안 깊이 잠들어 있던 삼족오를 깨워줘 고맙습니다. 몰염치한 중국의 동북공정이, 일본의 독도공정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자존심과 역사의식을 분연히 일깨워줘 너무도 고맙습니다!” 홈페이지의 인사말은 3개 방송사에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마도 MBC의 ‘주몽’, KBS의 ‘대조영’, SBS의 ‘연개소문’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모양이다. ‘고구려 역사기념관’과 ‘삼족오소년소녀대’라는 현실이 드라마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현실이다.
영화를 보고 나온 어린이들은 영화가 끝나도 온몸에 영화를 흠뻑 뒤집어쓴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스파이더맨’을 봤다고 하자. 그들은 영화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두 손바닥을 벽에 대고 거기에 들러붙는 흉내를 내려 할 것이다. 나이가 어릴수록 가상과 현실, 허구와 실재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어린아이만의 일일까.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헤켈의 가설은 인간사회에도 적용돼 인류의 유년기에는 성인들도 둘을 구별하지 못했다. 바로 신화의 시대다.
문자의 등장과 더불어 신화(mythos)의 시대도 저물고 이제 이성(logos)의 시대가 시작됐다. 하지만 역사는 늘 일직선으로 발전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어서, 가끔은 이성에서 신화로 퇴행하는 변괴가 일어나기도 한다. 1930년대 유럽에서 일어난 것이 바로 그 현상이다. 문화사적 관점에서 볼 때, 파시즘은 인간의 정신이 로고스에서 다시 뮈토스로 퇴행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나치들은 대중의 머리에서 냉철한 비판적 역사의식을 지우고, 그 빈자리에 뜨거운 감동을 주는 북방 기마민족의 신화를 채워넣으려 했다.
지난해 열린 ‘고구려 삼족오 대축제’(왼쪽)와 고구려 쌍영총 고분벽화의 ‘삼족오’.
역사냐 신화냐
“역사의식을 분연히 일깨워줘 너무도 고맙습니다!” 홈페이지의 인사말은 매우 징후적이다. 아무리 역사를 표방해도 드라마는 ‘역사’일 수 없고 그저 ‘허구’일 뿐이다. 따라서 드라마에서 발견되는 오류와 왜곡들은 그것들이 의도된 게 아닌 한 그냥 너그럽게 봐줘야 한다. 대신 드라마를 보고 ‘역사의식’을 얻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드라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재미’ 혹은 ‘감동’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식’을 그것도 ‘분연히’ 일깨워줘 고맙다는 말이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삼족오는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동물이고, 고구려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발견되는 문양이다. 또 고구려에서 삼족오를 국가의 상징으로 사용했다는 근거도 실은 없다. 게다가 삼족오는 “1500년 동안이나 깊이 잠들어 있던” 것. 우리 민족에게 이른바 ‘정체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 삼족오가 없었던 그 1500년 동안에 형성된 것일 게다. 따라서 삼족오를 되살려 민족의 상징으로 삼자는 주장은 사실 로고스에 속하는 냉철한 ‘역사적 의식’이 아니라, 뮈토스에 해당하는 ‘신화적 의식’이다.
신화 속에서 허구와 실재는 하나가 된다. 허구에서 나와 현실이 된 삼족오소년소녀대는 바로 이 신화적 의식의 산물이다. 일찍이 그리스의 정신이 뮈토스에서 로고스로 바뀔 때, 그리하여 철학이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싸울 때, 철학자들은 종종 이성을 가지고 신화를 비웃곤 했다. 삼족오 문양을 간판에 그려넣은 광화문 어느 삼계탕집의 간판은 “만약 말(馬)들이 신상을 만든다면 신을 말의 형상으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철학자 아낙사고라스의 말처럼 신화 파괴적이다. 어쨌든 그 간판이 행사하는 시각적 도발에는 모종의 통쾌함이 있다.
미디어가 역사 의식을 바꾼다
최근에 일어난 고구려 드라마 붐, 그 결과 생긴 삼족오 해프닝은 대중의 의식이 로고스에서 뮈토스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구텐베르크 은하의 끝에서 문자가 소리와 그림으로 변해가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더불어 다시 찾아온 영상문화와 구술문화는 로고스적 사유가가 등장하기 이전의 그리스 사회를 닮았다. 아직 역사도 없고 철학도 없고 경전도 없던 시절에는, 시와 조각과 건축 같은 ‘이미지’로 구현된 신들의 이야기가 곧 역사이자 철학이자 종교였다. 역사의식을 드라마로 대체해버리는 상황. 비슷하지 않은가?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의 뮈토스는 나치의 것처럼 위험하지는 않다는 점. 중국은 10배가 넘는 인구를, 일본은 10배가 넘는 경제력을, 러시아는 10배가 넘는 영토를 갖고 있다. 때문에 한국판 신화는 독일의 것처럼 나라 밖으로 뻗어나갈 수 없고 고작해야 나라 안의 ‘자위’에 그칠 뿐이다. 게다가 한국의 뮈토스는 공격적이라기보다 방어적 성격의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공정에 허구로나마 맞서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대적할 수 없는 상대에게 늘 ‘주관적 승리’를 거두는 아Q의 애처로움마저 있다.
문자와 함께 인간은 역사시대로 접어든다. 문자문화의 몰락과 더불어 역사주의의 시대도 저물어가고 있다. 역사 이전과 역사 이후는 문자 대신 영상과 구술을 주요한 소통 매체로 삼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래서일까? 역사시대에 뒷전으로 밀려났던 역사 이전의 뮈토스가 역사시대의 종언과 함께 역사 이후에 부활하고 있다. 최근 일어난 고구려 붐의 가장 큰 원인은 동북공정이나 독도공정이 아니라, 어쩌면 이 미디어의 변화가 대중에게 끼친 의식의 변화에 있는지도 모른다.
http://legacy.h21.hani.co.kr/h21/data/L991101/1p7mb104.html
기마민족설은 전체주의와 일절 관계 없고 오히려 민족의식의 고양을 위해 강제로라도 주입해야 할 것이 성스럽고 우월한 북방 기마민족으로서의 한민족 정체성이다.
이것이 여기 새끼들이 원하는 것인 것 같은데 철저히 실행해야 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