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Bobby
17.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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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그냥 멍청 하게 뒤지기 싫으면 얼른 떠라 ㅋㅋ 

 

중국놈들 노예되는거는 금방이다 문제인 취입한지가 벌써100일인데 이정도 스피드면 일년안에 

 

뭔 일이 생길줄 모른다 

 

링크 둘게 여기다가 가서 봐바 그냥 개 죽음 

 

https://www.youtube.com/watch?v=CL1mewkukuc






  • 박군
    17.08.21
    주한미군 철수 발언한 사람 경질 되었더군요...
  • 제 11장: 이중권력

    무엇이 이중권력의 핵심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저술에서 이 문제는 한번도 해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중권력은 사회위기의 뚜렷한 특징이며 러시아의 1917년 혁명에서 가장 뚜렷하게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 혁명에만 특수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사회에는 적대 계급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권력이 없는 계급은 권력을 가진 계급의 지배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왜곡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두개 이상의 권력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들 사이의 관계는 정치구조의 성격을 직접 규정한다. 단일권력은 정치 안정의 필요조건이다. 그리고 지배계급이 자신의 경제적 정치적 구조를 사회 전체의 유일한 선택으로 강요하는데 성공할 경우 단일권력은 유지된다.

    호엔쫄런 왕조의 형태로든 공화국 형태로든 독일의 융커(대지주 계급)와 자본가 계급은 동시에 독일 사회를 지배했다. 이 두 지배계급은 서로 날카롭게 갈등을 일으킨 경우가 가끔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중권력이 아니다. 이들의 사회기반이 같아서 이들 사이의 갈등이 국가기구를 분열시킬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이중권력은 계급갈등이 화해할 수 없을 때에만 등장한다. 따라서 혁명기에만 등장할 수 있으며 혁명의 기본적 구성요소의 하나가 된다.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권력이 이동하면서 혁명은 정치적으로 작동한다. 무력을 동반한 권력의 타도는 보통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어떤 계급도 하룻밤 사이에 심지어는 하룻밤 혁명으로 피지배 계급에서 지배계급으로 격상되지 않는다. 이 계급은 혁명 이전부터 구 지배계급에 대해 아주 독자적인 태도를 확립하고 있어야 한다. 더욱이 불만을 가지고 있으나 독자적 역할을 할 수 없는 중간 계급 계층들의 희망을 자기에서 집중시켜야 한다. 새로운 사회체제를 수립하도록 부름 받은 계급은 혁명 직전의 시기에 사회의 주인은 아니지만 국가권력의 상당 부분을 이미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혁명이 준비된다. 물론 이때 공식 국가기구는 여전히 구 지배계급의 손에 있다. 이것이 모든 혁명에서 이중권력의 초기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중권력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다. 자신이 원치 않았던 혁명으로 권력에 올라선 새로운 계급은 실제로는 이미 낡은 그래서 역사적으로 시효가 지난 계급이다. 이 결과 이 계급은 공식적으로 권력을 넘겨받기도 전에 벌써 새로운 과제를 해결할 능력을 상실한 계급이 된다. 그런데 이 계급이 권력으로 밀려 올라간 순간 충분히 성숙하여 권력을 도모하는 적대 계급과 마주칠 때가 있다. 이 때는 불안정한 이중권력보다 더 불안한 권력이 정치혁명으로 수립된다. 어쨌든 이중권력의 “무정부 상태”를 새로운 단계 단계마다 극복하는 것이 혁명 또는 반혁명의 과제이다.                      

    일반적으로 이중권력은 두 적대 계급에 의해 권력이 균형 있게 양분될 가능성을 전제하기는커녕 배제한다. 이것은 헌법으로 인정되는 권력이 아니라 혁명에 의해 조성되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균형이 파괴되어 상부구조인 국가가 이미 쪼개진 상황이 이중권력이다. 이때가 되면 두 적대 계급은 시효가 지난 정부기구와 막 형성되고 있는 정부기구 즉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정부기구를 하나씩 꿰어찬다. 그리고 이 정부기구들은 시시때때로 서로를 밀치며 경쟁한다. 투쟁 과정에서 형성되는 계급의 상호관계에 따라 각 계급이 휘두르는 권력의 양이 결정된다.

    본성 상 이 상태는 안정적일 수 없다. 사회는 한 계급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안정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지배계급 또는 두 반(半)지배계급들을 통해 사회는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애쓴다. 권력의 양분 상태는 내전의 전조이다. 그러나 두 적대계급이 이 극단으로 치닫기 전에 특히 제 3 세력의 개입을 두려워할 때 이들은 상당 기간 이중권력을 감내하고 심지어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체제는 폭발을 피할 수 없다. 내전은 영토를 놓고 싸우기 때문에 이중권력의 모습을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한다. 자신의 아성을 구축한 두 세력은 나라의 영토를 전부 차지하려고 애쓴다. 이 결과 두 적대 세력은 서로를 계속해서 침략하는 형태로 이중권력을 감내하다가 이 가운데 하나가 결정적으로 세를 굳힌다.          

    17세기의 영국 혁명은 나라를 완전히 파괴한 거대한 혁명이었다. 따라서 내전 형태로 이중권력이 급격히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모습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왕정은 귀족과 주교 등 특권 계급 또는 이 계급 상층부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 그리고 이 계급과 밀착한 대지주들이 연합하여 왕정에 도전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아성인 런던이 지지하는 장로의회(Presbyterian Parliament)가 부르주아 계급의 정부였다. 이 두 권력 사이의 장기화된 투쟁은 마침내 공개적인 내전으로 해결된다. 두 권력의 중심부인 런던과 옥스퍼드는 각각 자신의 군대를 조직한다. 이로써 이중권력은 영토를 차지한 내전의 형태를 띤다. 물론 내전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영토 경계선은 수시로 변한다. 마침내 의회군이 승리하고 왕은 체포되어 운명을 기다린다.

    이제 장로 부르주아 계급의 단일권력이 수립될 조건이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왕의 권력이 깨지기 전에 의회군은 스스로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변모한다. 이 군대는 자기 대오에 독립파(Independents) 즉 수공업자와 농민 등 신앙심이 투철하고 결의에 찬 소부르주아 계급을 결집시킨다. 그리고 단순한 무장집단으로서 뿐 아니라 치안방위군(Praetorian Guard) 그리고 부유한 대부르주아 계급에 반대하는 새로운 계급의 정치적 대표가 되어 사회에 강력히 개입한다. 그리고 이에 조응하여 군대는 총사령부 위에 군림하는 새로운 국가기관 즉 병사 장교 대의원(“선동가들”) 위원회를  수립한다. 이렇게 이중권력의 새로운 시기가 도래한다. 한쪽에는 장로의회 또 한쪽에는 독립파 군대가 서로 대항하면서 이중권력을 형성한다. 그리고 공개적인 투쟁이 계속된다. 부르주아 계급의 군대는 크롬웰의 평민 “모범군”을 무찌르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투쟁은 독립파의 칼에 장로의회가 난도당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제 장로의회는 잔당만 남아 유명무실해지고 크롬웰의 독재가 수립된다. 그러나 다시 혁명의 극좌파인 수평파(Levellers)가 군대의 하부를 지휘하여 군대 귀족에 대항, 평민 정권을 수립하려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이중권력은 계속 발전하지 못한다. 소부르주아 계급의 최하층인 수평파가 권력을 잡기에는 역사적 조건이 무르익지 않았다. 크롬웰이 수평파를 제거하면서 결코 안정적이지 않은 새로운 정치적 균형을 수립한다. 이 균형은 수년을 지속한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제 3 신분의 상층부는 제헌의회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 대의기구는 왕의 특권을 전부 폐지하지 않은 채 권력을 장악한다. 이 시기에 이중권력의 쌍방은 명확히 구분된다. 루이 16세가 바렌느로 도망하는 것으로 이중권력 상황은 끝난다. 그리고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이 상황은 공식적으로 청산된다.

    1791년에 제정된 제 1차 프랑스 헌법은 입법부와 행정부의 완전한 독립이라는 허구에 기초하였다. 이것은 혁명 인민으로부터 이중권력 상황을 은폐했거나 은폐하려고 시도했다. 이때 이중권력의 한 축은 혁명 인민의 바스띠유 감옥 점령 이후 국민의회를 확고히 장악한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축은 성직자, 관료, 군대의 상층부에 여전히 의존하면서 반동 외국들의 혁명 개입을 희망한 낡은 왕정이었다. 이 자기 모순적 체제는 내부에 파괴의 싹을 불가피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 모순은 유럽의 반동 강대국들이 프랑스 혁명에 개입하여 부르주아 계급을 제거하던가 아니면 왕과 왕정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으로만 해결될 수 있었다. 결국 혁명 빠리와 반동 코블렌츠가 힘을 겨루어야 했다.

    그러나 전쟁과 단두대 이전에 꼬뮌(인민자치위원회)이 빠리의 혁명 무대에 등장한다. 제 3 신분 가운데 도시 최하층민의 지지를 받았던 꼬뮌은 점점 대담해지면서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의 공식 대표들과 권력을 다투었다. 이렇게 새로운 이중권력이 형성되었다. 이중권력의 징후는 대부르주아와 중부르주아가 행정부와 자치도시들에서 권력을 확고히 장악한 1790년에 이미 나타났다. 가발과 비단 승마바지의 유산계급들이 나라의 운명을 독단하고 있던 정치무대에 사회의 밑바닥 평민들이 등장하여 정치에 개입했다. 이들의 노력은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며 또 얼마나 지독하게 비방을 받았는가! 교양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짓밟혀온 사회의 밑바닥이 꿈틀거리며 생명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인간의 머리가 딱딱한 땅을 비집고 올라와 노동으로 딱딱하게 거칠어진 손을 뻗치며 목은 쉬었으나 용감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혁명의 사생아인 빠리의 구(區)들은 자기의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들은 즉시 지배계급의 눈에 들어왔다. 이들을 모르는 체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구는 소(小)구로 다시 재편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계속 법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아래로부터 신선한 피를 계속 수혈 받았다. 그리고 법을 무시하고 무권리와 빈곤에 찌든 빈민들에게 정치 활동의 문을 열어주었다. 동시에 봉건소유제를 방어하는 부르주아 법에 대항해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지방의 자치도시들은 이들을 옹호했다. 이렇게 하여 이등 국민 밑에서 삼등 국민이 들고 일어선다.

    빠리의 소구들은 처음에는 꼬뮌과 대치했다. 당시 꼬뮌은 여전히 품위 있는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1792년 8월 10일 대담한 공격으로 소구민들은 꼬뮌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혁명 꼬뮌은 입법의회 그리고 이후 국민공회에 저항했다. 입법의회와 국민공회는 혁명이 제기한 문제들과 속도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다만 사건을 기록할 뿐이었다. 빠리의 구 한가운데에서 일어나 가장 후진적인 농촌마을의 지지를 받은 새로운 계급의 활기, 대담성, 의견의 완전일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구민들이 꼬뮌을 장악하자 꼬뮌은 새로운 봉기를 통해 국민공회를 장악했다. 혁명의 단계마다 대항권력이 극명하게 구분된 이중권력이 등장하여 우익 권력은 방어투쟁을 좌익 권력은 공세투쟁을 통해 강력한 단일권력을 확립하려고 애를 썼다. 혁명과 반혁명에서 독재체제 수립을 위한 요구는 이중권력의 참을 수 없는 모순에서 나온다. 이중권력은 내전을 통해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이행한다. 권력이 새로운 계급 계층에게 넘어가는 혁명의 거대한 단계들은 각 단계에 조응하는 대의기관을 동반하지 않는다. 대의기관은 마치 뒤늦은 그림자처럼 혁명의 폭풍 뒤에 천천히 따라올 뿐이다. 물론 장기적으로 하층민의 혁명 독재는 국민공회의 독재와 연합한다. 그러나 어떤 국민공회인가? 어제까지만 해도 테러로 이 대의기구를 장악했던 지롱드파는 제거되었다. 대신 새로운 사회 세력의 지배를 위해 국민공회는 축소되고 개조되었다. 이렇게 이중권력의 단계들을 통해 프랑스 혁명은 4년을 경과하면서 절정에 도달한다. 그리고 테르미도르 9일의 반동 이후 다시 이중권력의 단계들을 통해 하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상승 단계 때와 똑같이 하강 단계마다 먼저 내전이 벌어진다. 이 방식을 통해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세력 균형을 찾는다.

    라스푸틴의 관료들과 싸우기도 하고 협동하기도 하면서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은 전쟁 중에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엄청나게 강화시켰다. 짜르 체제의 패배를 활용하고 도시와 농촌의 단체들 그리고 군산위원회 등을 통해 이들은 거대한 권력을 장악했다. 엄청난 국가의 자원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부르주아 계급의 아성들은 짜르에 버금가는 정부였다. 전쟁 중에 짜르의 장관들은 이렇게 불평했다: 르보프공이 군대에 보급품, 식량, 의약품 등을 공급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병사 이발소까지 차리고 있다. 1915년 크리보쉐인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이 상태를 중지시키거나 그에게 권력을 전부 넘기거나 둘 중에 하나 밖에 없다.” 이로부터 1년 반이 지나 르보프가 “권력 전부”를 접수할 것이라고 그는 상상도 못했다. 다만 권력은 짜르가 아니라 케렌스키, 체이제, 수하노프에 의해 제공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권력을 접수받은 지 이틀만에 새로운 이중권력이 성립했다. 어제는 자유주의자들의 반(半)정부였다가 오늘은 공식적으로 합법성을 부여받은 임시정부가 한 축을 이루었다. 그리고 공인 받지는 않았으나 훨씬 더 실세인 근로대중의 정부 소비에트가 또 한 축을 이루었다. 이 순간부터 러시아 혁명은 세계 역사적 의의를 지닌 사건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2월 혁명으로 등장한 이중권력의 특수성은 무엇인가? 17세기와 18세기의 혁명에서 이중권력은 적대 세력들에게 일시적으로 강요된 투쟁의 자연스러운 단계였다. 여기서 각 세력은 자신의 단일권력으로 이중권력을 대체하려했다. 그런데 1917년 혁명에서는 공식 민주주의 세력이 의식적으로 이중권력을 수립해 놓고 모든 힘을 다해 권력 장악을 회피했다. 언뜻 보면 적대 계급들의 권력장악 투쟁이 아니라 한 계급의 자발적인 “양보”로 이중권력이 성립한 것 같다. 러시아 “민주주의” 세력은 스스로 권력에서 물러나는 것을 통해 이중권력의 모순을 청산하려했다. 우리가 표현한 바 2월 혁명의 역설은 바로 이 현상을 두고 한 말이었다.

    러시아의 경우는 1848년 독일 부르주아 계급이 왕정에 대해 보인 태도와 유사하다. 그러나 완전히 유사하지는 않다. 독일 부르주아 계급은 합의를 통해 왕정과 권력을 나누어 가지려 진지하게 노력했다. 이를 통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완전히 왕정에 넘겨주지도 않았다. “프로이센 부르주아 계급은 명목상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구 정부 세력이 아무 조건 없이 복종하여 자신의 전능을 충성스럽게 따를 것이라고는 단 한순간도 생각하지 않았다.” (맑스와 엥겔스)

    1917년 러시아 민주주의 세력은 봉기의 순간부터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것을 부르주아 계급과 나누려고 했을 뿐 아니라 국가기구 전부를 통째로 넘기려했다. 20세기의 첫 25년에 러시아의 공식 민주주의 세력은 19세기 독일의 자유부르주아 계급보다 훨씬 완벽하게 정치적으로 스스로를 해체했다. 그리고 이 현상은 역사의 법칙에 전적으로 부합한다. 같은 시기 노동계급의 급성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크롬웰의 지지기반인 수공업자들 그리고 로베스삐에르의 지지기반인 하층민과 똑같이 이제 러시아 노동계급은 혁명을 철저히 수행할 지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좀더 깊이 관찰하면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이중권력은 권력 실세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노동계급만이 유일하게 새로운 권력을 주장할 수 있었다. 노동자와 병사들을 불신하면서 이들에게 의존했던 화해주의자들은 왕과 예언자의 이중 장부를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의 이중권력은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의 진짜 이중권력을 숨기면서 동시에 반영할 뿐이었다. 이로부터 몇 달 뒤 볼셰비키들이 화해주의자들을 몰아내고 소비에트의 선두에 설 때 이 숨겨진 진짜 이중권력은 표면으로 드러나고 10월 혁명의 전조가 된다. 이때까지는 혁명은 정치적 반사의 세계에 살고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변명으로 굴절된 이중권력은 계급투쟁의 단계가 아니라 계급투쟁을 억제하는 원칙이 되었다. 이중권력이 모든 이론적 논의의 중심이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모든 사물은 나름대로 소용이 있다: 2월 이중권력의 반사경 같은 성격 때문에 두 체제의 투쟁을 통해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낸 이중권력의 시기가 더 잘 이해된다. 햇빛이 반사되어 흐릿하게 비치는 달빛이 햇빛에 대한 중요한 결론들을 이끌게 해주는 것과 같다.

    17세기와 18세기 혁명의 주역이었던 도시 대중과 비교하면 러시아 노동계급은 비교할 수없이 더 성숙했다. 이것이 러시아 혁명의 근본적 특수성이다. 이 결과 반정도 허깨비 같은 이중권력의 역설이 나왔다. 그리고 이 결과 나중에 성립한 진짜 이중권력은 부르주아 계급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문제는 간단했다: 부르주아 계급이 구 국가기구를 실제로 장악하여 자기 목적에 맞게 약간 개조하면서 소비에트를 무용지물로 만들던가 소비에트가 새로운 국가의 기초를 형성하여 구 국가기구 뿐 아니라 이것이 봉사했던 계급들의 지배를 청산하던가 둘 중의 하나였다.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첫 번째 해결책을 찾았고 볼셰비키는 두 번째 해결책을 찾았다. 프랑스의 혁명가 마라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피억압 계급은 자신이 시작했던 혁명을 끝까지 수행할 지식, 기술, 지도력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러나 20세기의 러시아 혁명에서 피억압 계급인 노동계급은 이 세 가지 모두로 무장되었다. 이 때문에 볼셰비키는 승리했다.

    러시아 혁명이 승리한지 일년만에 같은 상황이 독일에서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계급 역관계는 러시아와 달랐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대신 소비에트를 청산하는 쪽으로 혁명을 이끌었다. 룩셈부르크와 리이프크네히트는 소비에트 독재로 혁명을 이끌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승리했다. 독일의 힐퍼딩과 카우츠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막스 아들러 등은 소비에트 체제를 민주주의와 “결합시켜” 노동자 소비에트를 헌법에 포함시킬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이 실현되었다면 잠재적 또는 실제적 내전이 국가 정치체제의 구성부분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보다 더 신기한 유토피아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제안은 독일의 전통에서 유일한 변명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 1848년 혁명에서 위르템베르크 민주주의자들은 공작이 국가를 대표하는 공화국을 원했다.

    맑스주의 국가이론에 의하면 정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활발한 논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이중권력 현상은 맑스주의 이론과 모순되는가?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이런 질문이 된다: 공급과 수요에 의한 가격 등락은 노동가치론과 모순이 되는가?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는 자기희생 행위는 생존투쟁 이론을 반박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 현상들을 통해 같은 법칙들이 좀더 복잡하게 결합하고 있을 뿐이다. 국가는 계급지배의 조직이다. 혁명은 지배계급의 타도이다. 그렇다면 한 계급으로부터 다른 계급으로의 권력 이동은 반드시 자기 모순적인 국가 상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중권력을 성립시킬 수밖에 없다. 계급 역관계는 선험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수학적 양이 아니다. 구 체제가 타도되어 균형을 잃어버리면 투쟁을 통해서만 새로운 역관계가 확립될 수 있다. 이것이 혁명이다.

    이중권력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1917년 사건들을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탐구를 통해 우리는 당시 사건들의 핵심에 도달한다. 정당들과 계급들의 극적인 투쟁은 바로 이중권력의 문제를 축으로 전개되었다. 오직 이론적 고지에서만 이 현상을 완전히 관찰하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제 12장: 집행위원회

    2월 27일 타우리데 궁전에서 “노동자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러나 이 조직의 실체는 그 이름과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소비에트의 원조는 1905년 혁명의 노동자 소비에트였다. 이 조직은 총파업 과정에서 수립되었으며 대중투쟁을 직접 대표했다. 파업 지도자들은 소비에트 대의원이 되었다. 따라서 대의원들은 삶과 죽음이 오락가락 하는 투쟁에 의해 걸러지고 단련되었다. 그리고 이 조직의 집행위원회는 투쟁을 진전시키기 위해 소비에트에 의해 선출되었다. 무장봉기를 일정에 올린 조직이 바로 이 집행위원회였다.

    그러나 1917년 2월 혁명에서는 노동자들이 소비에트를 수립하기도 전에 군대의 봉기가 먼저 승리했다. 그리고 혁명이 성공한 후 집행위원회는 소비에트보다 먼저 그리고 공장이나 병영과는 독자적으로 결성되고 선언되었다.

    이 현상은 급진주의자들의 주도력이 모범적으로 성공한 고전적인 예이다. 이들은 혁명 투쟁에서는 팔짱을 끼고 있다가 혁명의 성과는 자기 것으로 가로채려 했다. 이때 노동자들의 진짜 지도자들은 아직 가두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들은 반동기구의 무장을 해제하고 혁명을 무장시키면서 혁명의 확실한 승리를 확보했다. 타우리데 궁전에서 일종의 노동자 소비에트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 가운데 시야가 넓은 일부는 놀라면서 우려를 표시했다. 1916년 가을 친위 쿠데타를 예상하면서 자유 부르주아들은 쿠데타가 성공할 경우 새로 즉위하는 짜르에게 제시할 예비 정부를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따라서 급진 지식인들은 2월 혁명이 승리할 순간에 이미 예비 정부를 구성해 놓고 있었다. 이들은 한때 노동자 운동에 접근하면서 이 전통으로 자기들의 정체를 숨기려고 애썼었다. 그래서 이들은 혁명이 성공하자 자기들을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모든 역사 특히 인민혁명의 역사를 가득 장식하는 반(半)의도적인 속임수의 한 예였다. 과거와 급격히 단절하는 혁명이 터지면 구 지배계급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는 방법을 터득해야할 “교육받은” 계층은 대중의 영웅적 투쟁과 관련된 이름이나 상징은 어떤 것이든지 즐겁게 잡아채어 자기 것으로 위조한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가져간다. 따라서 이름은 진짜를 사칭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특히 영향력 있는 집단들의 이해에 부합할 경우는 더 그렇다. 처음 생길 때부터 집행위원회는 막강한 권위를 누렸다. 이것은 1905년 소비에트가 계속되고 있다는 착각에 근거했다. 진짜 소비에트가 막 생겨나 혼란스러운 첫 회의를 열었을 때 집행위원회는 엉겁결에 인준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소비에트 대의원들과 그 정책에 대단히 보수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혁명의 진정한 대표들을 걸러내는 삶과 죽음의 투쟁은 끝났으며 봉기는 과거지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승리에 취해 혁명의 성과를 누리며 좀더 편하게 살 궁리를 하고 긴장을 풀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칼날 같아야할 이성도 느슨해져 있었다. 소비에트는 혁명의 승리를 재단에 모셔놓는 기관이 아니라 새로운 봉기를 위한 투쟁과 준비의 기관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지도부도 물갈이되어야했다. 이를 위해서는 앞으로 몇 달 동안 새로운 갈등과 투쟁이 필요했다. 이 측면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우리는 이 문제를 전혀 논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생 당시의 상황 때문에만 집행위원회와 소비에트가 온건 화해주의를 표방한 것은 아니었다. 일시적 상황보다 더 깊고 더 끈질긴 원인들이 작용했다.

    당시 뻬쩨르부르그에는 15만 명의 병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보다 최소한 4배나 많은 노동자들이 이 도시에 거주했다. 그러나 소비에트에는 노동자 대의원 두 명마다 병사 대의원은 다섯 명이 있었다. 대의원 규정은 매우 가변적이었으며 언제나 병사들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었다. 노동자들은 천 명당 한 명의 대의원을 소비에트에 보냈으나 아주 작은 군대 단위도 두 명의 대의원을 보내는 경우가 빈번했다. 병사의 회색 군복이 소비에트의 분위기를 규정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선출한 민간인 외에 적지 않은 수가 개인적인 초대를 받거나 연줄에 의해 또는 단순히 침투능력 때문에 소비에트에 출석했다. 급진 성향의 변호사, 의사, 학생, 기자 등이 의심스러운 집단들을 대표하거나 단순히 개인적 야망으로 소비에트에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나 이렇게 명백히 왜곡된 소비에트를 지도자들은 차라리 환영했다. 이들은 공장과 병영의 뻑뻑한 진국을 교양 있는 속물들의 미적지근한 물로 희석시키는 것을 전혀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주의자들, 모험가들, 자칭 구세주들, 전문 허풍선들은 말이 없는 노동자들과 결심이 서지 않은 병사들을 상당한 기간 동안 권위로 눌렀다.

    뻬쩨르부르그의 상황이 이러했다면 전혀 투쟁이 없이 혁명이 성공한 지방은 어떨지 상상이 간다. 나라 전체는 병사들로 우글거렸다. 키에프, 헬싱키, 티플리스 등의 주둔군은 뻬쩨르부르그만큼 규모가 컸다. 사라토프, 사마라, 탐보프, 옴스크 등에는 7만에서 8만의 병사들이 주둔했다. 야로슬라프, 에카테리노슬라프, 에카테린부르그 등에는 6만 명이 기타 도시들에는 5만, 4만, 3만 명의 병사들이 주둔했다. 각 지역마다 소비에트 대표 방식이 달랐지만 모든 곳에서 병사들은 특권을 누렸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자초한 결과였다. 이들은 병사들을 만나기 위해 최대한 양보를 했다. 그리고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장교들을 만나기 위해 최대한 양보를 했다. 병사들에 의해 처음 대의원으로 선출된 하급장교들 외에도 특히 지방에서는 사령부 참모진도 특별한 대표권을 누렸다. 이 결과 군대는 다수의 소비에트에서 압도적 우위를 누렸다. 나름대로 정치노선을 갖기 전에 병사 대중은 자기 대의원들을 통해 소비에트의 성격을 먼저 규정했다.

    대의기구는 자기를 선출한 대중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혁명이 터진지 이틀 째 되는 날에는 특히 더했다. 정치성이 허약한 병사들이 대의원들을 선출했으나 이들은 종종 병사나 혁명과 무관한 경우가 많았다. 모든 종류의 지식인들과 반(半)지식인들이 병영 뒤에 숨어 있다가 병사들의 대의원이 되어 극단적 애국자로 모습을 드러냈다. 따라서 병영의 정서와 병사 대의원들로 채워진 소비에트의 정서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했다. 혁명이 승리한 후 스탄케비치 장교가 소속된 대대의 병사들은 그를 불신과 퉁명스러움으로 대했다. 그러나 그가 군대의 규율이라는 민감한 문제에 대해 병사 소비에트에서 연설했을 때는 호평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자문했다: 소비에트의 정서는 대대의 정서보다 왜 이렇게 부드럽고 친근할까? 이 생각이 없는 놀라움은 하층의 정서가 상층으로 전달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시 한번 증명했다.

    그리고 이미 3월 3일 병사와 노동자들의 집회는 이렇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는 자유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즉시 타도하고 스스로 권력을 잡아라! 이번에도 이 움직임은 비보르그 지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대중의 마음에 이보다 더 이해하기 쉽고 가까운 요구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 선동은 곧 중단되었다. 조국방어주의자들이 날카롭게 반발했을 뿐 아니라 소비에트 지도부 다수가 이미 3월초 이중권력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볼셰비키들 외에는 아무도 권력의 문제를 제대로 제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비보르그 지도자들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은 단 한순간도 새 정부를 자신들의 정부로 인정하고 신뢰를 보낸 적이 없었다. 다만 이들은 병사들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이들을 너무 날카롭게 반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한편 계산이 빠른 농민은 새 지주들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러나 병사인 농민은 이제 막 정치 경험을 시작했기 때문에 자기가 뽑은 대표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병사 대표들은 집행위원회의 권위 있는 지도자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후자는 자유부르주아 계급의 박동을 경청하였다. 이렇게 하부가 상부를 경청하는 상황이 당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하층의 정서는 결국 표면으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인위적으로 무시되었던 권력의 문제는 비록 위장된 형태로나마 계속 제기되었다. 도시와 지방은 이중권력에 대한 불만을 집행위원회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병사들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알 수 없다.” 3월 16일 발트해와 흑해 함대의 대표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임시정부가 집행위원회와 보조를 맞출 경우 임시정부를 인정하겠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임시정부를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생각은 더욱더 큰 소리로 터져 나왔다. 172 예비연대는 이렇게 결의한다: “군대와 인민은 소비에트의 지시만 따른다. 소비에트의 결정에 반대되는 임시정부의 지시는 따르지 않는다.” 만족감과 걱정을 동시에 느끼면서 집행위원회는 현실을 인정했다. 반면 임시정부는 이빨을 갈면서 참았다. 이들이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3월초 모든 주요 도시와 공업 중심지에서 소비에트가 수립되었다. 이곳들을 중심으로 다음 한두 주에 걸쳐 전국 소비에트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4월과 5월이 되어야 마을 단위로 소비에트가 모습을 나타낸다. 처음에는 군대만 농민의 이름으로 발언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실제적으로 국가기구로 격상되었다. 다른 도시와 지방의 소비에트들은 수도 소비에트의 지도를 받아 임시정부에 대한 조건부 지지 결의문을 채택했다. 첫 몇 개월 동안 수도 소비에트와 지방 소비에트의 관계는 원만했다. 그러나 정세로 보아 국가기구가 명백히 필요했다. 짜르가 타도된 지 한달 만에 구성원이 불완전하고 일방적이었지만 전국소비에트 협의회가 열렸다. 185개 출석 소비에트 가운데 3분의 2는 지방 소비에트였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병사 소비에트였다. 전선의 군대 대표들과 함께 군대 대의원들은 대개 장교였으며 소비에트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쟁을 완전한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연설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볼셰비키들이 온건한 정도를 넘어서서 조심스럽게 행동했지만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성토가 있었다. 이 협의회는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16명의 보수적인 지방 대표들을 첨가시켰다. 이제 집행위원회는 국가기구의 성격을 적법하게 부여받았다.

    이로 인해 우익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제부터 이들은 지방 소비에트들의 보수적 노선을 언급하면서 자기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분자들을 겁주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대의원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는 결의문이 3월 14일에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실행되지 못했다. 이제는 지역 소비에트 대신 전국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모든 것을 결정했다. 이로써 집행위원회 공식 지도자들은 거의 부동의 지위를 차지했다. 임시정부 핵심들과 사전 합의를 거친 후 집행위원회 핵심들은 가장 중요한 결정들을 내렸다. 이제 소비에트는 한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지도자들은 소비에트를 하나의 회의 정도로 치부했다: “총회에서 정책이 나오지는 않는다. ‘전원 회의’들은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수하노프) 만족한 지도자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권한을 위임했기 때문에 소비에트는 이제 할 일을 다했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곧 틀렸음이 증명된다. 대중은 참을성이 있다. 그러나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찰흙이 아니다. 더욱이 혁명의 시대에 이들은 빨리 배운다. 여기에 혁명의 원동력이 있다.

    이후에 전개되는 사건들을 더 잘 이해하려면 두 정당의 성격을 잠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정당들은 처음부터 긴밀하게 정치적으로 연합했고 소비에트, 민주적 자치도시, 소위 혁명적 민주주의 대회 등을 장악했다. 심지어 압도적 다수의 쪽수가 꾸준하게 줄어들었으나 이들은 제헌의회 때까지 다수를 유지했다. 이미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태양이 비추는 언덕 꼭대기의 저녁놀처럼 제헌의회는 이 정당들이 누렸던 과거의 권력을 마지막으로 반영했다.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은 너무 늦게 세상에 나왔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를 수호할 세력이 될 수 없었다. 같은 이유로 러시아 민주주의 세력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자처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미 19세기에 민주주의 이념은 자신의 가능성을 소진시켰다. 때문에 20세기를 앞둔 시기에 급진 지식인들은 대중에게 다가가려면 자신을 사회주의로 치장해야했다. 노동계급과 자본가 계급 정당의 사이에 샌드위치가 된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바로 이 역사적 배경 속에서 등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각각 나름의 뿌리와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멘세비키의 세계관은 맑스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역사적 후진성 때문에 러시아의 맑스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항하기보다 자본주의 발전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곰팡내 나는 “인민주의” 지식인들을 부르주아적 의미에서 서구화시키기 위해 역사의 신은 알맹이가 빠진 노동계급 혁명이론을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이 과정에서 멘세비키들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부르주아 지식인들 가운데 좌파였던 이들은 의회와 노동조합에서 합법활동에 열중하고 있던 노동계급의 온건파 상층부와 부르주아 계급을 연결시켜 주었다.

    반면 사회혁명당은 이론적으로 맑스주의에 가끔 투항하면서도 이것에 대항했다. 이들은 비판이성의 인도 하에 지식인, 노동자, 농민을 연합시킨 정당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이 정당의 경제 이론은 역사적으로 축적된 다양한 성과들이 소화되기 힘들게 뒤섞인 잡탕이었다. 이것은 급격히 자본주의 발전을 겪고 있는 나라의 농민들이 처한 모순을 반영했다. 사회혁명당에게 당면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도 사회주의 혁명도 아니라 단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사회적 내용(토대)을 정치적 개념(상부구조)으로 대체했다. 즉 토대의 진정한 변화 없이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의 중간 지점에 자기 노선을 확정하고 두 양대 계급의 중재자로 나섰다. 2월 혁명 후 사회혁명당은 이 목적에 대단히 가까이 접근한 것처럼 보였다.

    1905년 혁명 당시부터 이들은 농민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1917년의 첫 몇 달간 농촌의 지식인들은 모두 인민주의의 전통 노선인 “토지와 자유”를 자기 노선으로 채택했다. 언제나 도시의 정당이었던 멘세비키들에 비해 사회혁명당은 농촌에서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지지기반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이들은 도시까지 장악했다. 소비에트에서 이들은 병사 부문을 통해 그리고 첫 민주적 자치도시들에서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이 정당의 역량은 무한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정당은 정치적 변태에 불과했다. 자기가 무엇을 위해 투표하는 지를 아는 소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지지하는 정당은 정확한 의미에서 정당이 아니다. 이것은 전세계 아기들이 공통으로 내뱉는 옹알이가 진정한 언어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2월 혁명의 설익고 혼란스러운 모든 것을 사회혁명당은 전부 엄숙히 표현했다. 혁명 이전에 이미 입헌민주당이나 볼셰비키당에게 표를 던져야할 이유를 상속받은 사람들을 제외한 모두는 사회혁명당에게 표를 던졌다. 이때 입헌민주당은 유산계급들의 폐쇄된 공간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볼셰비키들은 여전히 극소수였으며 대중에 의해 오해되고 심지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사회혁명당에게 표를 던지는 것은 혁명 일반에 표를 던지는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표를 던지는 것 이상의 의무를 이 정당은 강요하지 않았다. 사회혁명당은 도시에서 병사들이 농민을 대표하는 정당과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욕구, 노동자 후진층이 병사들과 좀더 가까이 하려는 욕구, 소도시 사람들이 병사와 농민들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는 욕구 등을 표현했다. 당시 사회혁명당 당원증은 혁명 기관들에 입장할 수 있는 임시 극장표였다. 이 표는 좀더 진지한 성격의 표로 대체될 때까지만 유효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 이 거대한 정당을 누군가가 거대한 허깨비 정당이라고 불렀다. 이 표현은 참으로 적절하다.

    1905년 혁명부터 멘세비키들은 러시아 혁명의 부르주아적 과제로부터 자유주의자들과 동맹을 맺을 필요성을 추론했다. 그리고 이 동맹을 농민과의 동맹보다 더 우위에 놓았다. 이들은 농민을 불안한 동맹 세력으로 보았다. 이와 반대로 볼셰비키들은 자유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하는 노동자 농민 동맹을 혁명이론의 토대로 삼았다. 그런데 2월 혁명에서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밀접한 정치동맹을 체결한 후 자유부르주아 계급과 연대했다. 따라서 현실은 볼셰비키들의 구도와 완전히 정반대가 되었다. 이 결과 공식 정치무대에서 볼셰비키들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이 정치현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는 사물의 법칙과 완전히 일치한다. 사회혁명당의 구호는 농촌에서 완벽한 지지를 누렸다. 그러나 이 정당은 농민 정당이 결코 아니었다. 이 정당의 정책을 규정하고 장관과 관료들을 배출한 핵심들은 봉기를 일으킨 농민 대중보다는 도시의 자유주의 및 급진 정치권과 훨씬 더 밀접했다. 3월부터 쏟아져 들어온 출세주의자들로 인해 이 정당의 핵심 부위는 공룡처럼 덩치가 커졌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정당의 구호를 내세운 농민 봉기가 확산되자 죽을 것 같은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이 신판 “인민주의자들”은 농민들이 잘되기를 바랬으나 공산주의 사상이 농민들을 사로잡는 것은 원치 않았다. 농민 봉기를 보고 사회혁명당 지도부가 공포에 떤 것은 노동자들의 공세에 멘세비키들이 공포에 떤 것과 정확히 맥을 같이했다. 피억압 인민 운동이 유산계급들을 크게 위협하는 것을 이 민주주의자들은 대단히 무서워했다. 이제 이 위협이 현실적인 힘으로 위력을 발휘하자 민주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주의 반동 진영에 합류했다. 사회혁명당은 대지주 르보프공의 임시정부와 연합하고 대신 농민혁명과 관계를 끊었다. 이것은 멘세비키들이 구츠코프, 테레쉬첸코, 코노발로프 등 자본가 및 은행가들과 동맹을 맺은 후 노동계급 운동과 관계를 끊은 것과 똑같았다. 이제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서로 동맹을 맺고 유산계급과 연합하기 위해 노동계급 및 농민과 각각 단절했다.

    지금까지의 관찰을 통해 두 민주주의 정당의 사회주의가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그렇다고 이들의 민주주의 신조가 진정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신조의 정체는 사회주의의 가면으로 위장된 무혈 민주주의였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자유부르주아 계급에 대해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면서 민주주의를 진전시켰다. 따라서 민주주의 정당들은 자유부르주아 계급과 연합한 후 노동계급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것이 민주적 화해주의자들과 볼셰비키당 사이에 벌어지게 될 잔인한 투쟁의 사회적 뿌리였다.

    지금까지 개략적으로 설명한 과정들을 적나라한 계급 분석으로 환원하면 대체로 이런 역사적 결론이 나온다: 자유부르주아 계급은 대중의 지지를 획득할 능력을 이미 상실했다. 따라서 이들이 혁명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했다. 이 모순 때문에 참정권을 가진 부르주아 계급은 자식들과 어린 동생들을 두게 되었다. 전자는 노동자에게 후자는 농민에게 향했다. 이들은 노동자와 농민을 자기에게 밀착시키려고 애쓰면서 자신들이 사회주의자들이며 부르주아 계급에 적대적이라고 진심으로 뜨겁게 증명했다. 이런 방식으로 이들은 대중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곧 이들의 영향력은 원래의 의도를 한참 초월해버렸다. 그러자 부르주아 계급은 즉시 자기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을 감지하고 경고를 발했다. 그러자 이 계급의 자식들이자 어린 동생들인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가장의 소환에 적극 응답했다. 그리고 서로간의 이견을 서둘러 봉합하고 단결한 후 대중을 버리고 부르주아 체제를 구원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이 결과 이 정당들이 누렸던 대중적 영향력은 급속히 무너졌다. 그러나 멘세비키당보다 사회혁명당은 더 그랬다. 중요한 고비 때마다 이들이 모두 삼류 입헌민주당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볼셰비키당은 인식했다. 그런데 입헌민주당에게 사회혁명당은 삼류 볼셰비키당처럼 보였다. (물론 두 경우 모두 이류는 멘세비키당이었다.) 이 정당들의 불안정한 대중적 영향력과 사상의 무정형성은 이 정당들의 지도자들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사회혁명당 지도자들 모두의 특징은 미완결성, 피상성, 감상적 불안정성이었다. 정치적 예리함과 계급 관계에 대한 뛰어난 이해력으로 보면 가장 유명한 사회혁명당 지도자들보다 볼셰비키 평당원들이 더 나았다. 이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안정된 정치적 자질을 구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혁명당은 도덕적 의무감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도덕적 허세를 부리면서도 이들은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나 사안에서는 치사한 협잡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은 대중의 안정된 지지, 명확한 이론, 진정한 도덕적 뿌리가 없는 중간계급 정당의 특징이다.

    멘세비키당-사회혁명당의 동맹에서 쪽수는 후자가 월등했지만 주도권은 전자에게 있었다. 이것은 도시가 농촌을 지배하고, 도시 소부르주아가 농촌 소부르주아를 지배하고, “맑스주의” 지식인이 러시아 역사의 빈곤함에 자부심을 가진 러시아 토종 지식인을 지배하는 현상의 정치적 표현이었다.

    혁명이 승리로 끝난 후 첫 몇 주일간 수도에 실제 본부를 둔 좌익 정당은 하나도 없었다. 사회주의 정당들의 이름난 지도자들은 모두 해외에 있었다. 그리고 제 2선 지도자들은 극동의 유형지에서 수도로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이 때문에 혁명 현장에 있던 임시 지도자들은 행동거지를 조심하면서 기다려야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단합했다. 그 당시 몇 주일동안 자신의 노선을 끝까지 밀고간 주요 그룹들의 지도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이 결과 소비에트 내부에서 정당들은 아주 평온한 관계를 유지했다. 똑같은 “혁명적 민주주의”가 뉘앙스만 약간씩 달리하고 있었다. 3월 19일 유형지에서 체레텔리가 도착하자 소비에트 지도부는 급격히 우경화 하여 임시정부와 전쟁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역시 유형지에서 돌아온 카메네프와 스탈린의 영향으로 볼셰비키당도 3월 중반에 급격히 우경화 했다. 소비에트 다수파와 소수파 정당들 사이의 정치적 차이는 4월초가 되면 3월초보다 더 적었다. 본격적인 정치적 분화는 약간 나중에 시작되었다. 이것이 시작된 날짜를 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레닌이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한지 하루가 지난 4월 4일이 바로 이날이었다.

    멘세비키당 내부에는 각기 다른 경향들을 주도하는 출중한 인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혁명 지도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플레하노프, 자술리치, 도이치 등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오랜 선생들이 주도한 극우파는 짜르 체제하에 이미 애국주의 노선을 취했었다. 맑스주의자에 합당한 정치 생명력을 상실한지 너무 오래된 플레하노프는 어느 미국 신문에 이렇게 썼다: “전쟁 중인 지금 러시아에서 파업을 포함한 노동계급의 투쟁은 범죄행위이다.” 당내에 광범위하게 분포된 고참 멘세비키인 마르토프, 단, 체레텔리 등은 짐머발트 반전회의 진영에 가담하여 전쟁을 반대했다. 그러나 사회혁명당 좌파와 마찬가지로 멘세비키 좌파의 국제주의는 대개 짜르의 전쟁 정책에 대한 단순한 민주주의적 반대에 불과했다. 짐머발트 반전주의자 대다수는 2월 혁명이 터지자 전쟁을 혁명 방어 투쟁으로 인식하여 전쟁을 지지했다. 이 노선을 가장 당당하게 들고 나온 자가 체레텔리였다. 그는 단을 비롯한 다른 멘세비키들을 이 노선으로 결집시켰다. 전쟁이 터질 당시 프랑스에 망명해 있었던 마르토프는 5월 9일에야 러시아로 귀국했다. 1914년 초 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독일 절대주의에 반대한 프랑스의 좌익 가운데 게드, 쌍바 등은 조국의 부르주아 공화국에 대한 방어를 주창했다. 마르토프는 2월 혁명 후 멘세비키들이 이들과 같은 노선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렇게 하여 그는 혁명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 멘세비키 좌파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체레텔리와 단의 조국방어 정책에 반대했다. 그러나 동시에 멘세비키 좌파와 볼셰비키의 화해도 반대했다. 당내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다수를 장악하고 있던 체레텔리의 정책은 멘세비키당의 공식노선이 되었다. 혁명 전의 애국주의자들이 혁명 후의 애국주의자들과 연합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플레하노프는 한술 더떠서 완전한 국수주의 노선을 주창하면서 멘세비키당과 소비에트 바깥에서 자기 그룹을 이끌었다. 멘세비키당을 떠나지 않은 마르토프의 분파는 자체 신문이나 정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거대한 역사적 행동이 필요한 때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마르토프는 가망 없이 허우적대다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1905년 혁명과 마찬가지로 1917년 혁명에서도 이 대단히 능력 있는 인물은 이렇다할 역할을 하지 못했다.    

    멘세비키당 의원단의 의장 체이제는 거의 자동적으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의장이 되었으며 나중에 소비에트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직무에 자기 양심을 모두 바치려고 노력하면서도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자신감 부족을 천진난만한 익살로 위장했다. 그는 고향의 영향을 그대로 성격에 반영했다. 산이 많은 그루지아는 노동자의 수는 대단히 적었으나 햇빛, 포도원, 농민, 군소 군주들은 많은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아주 광범위한 성향의 좌익 지식인들을 배출했다. 이들은 융통성이 있었으며 흥분을 잘하는 기질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압도적 다수는 소부르주아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지역은 4차까지 열린 의회에 언제나 멘세비키 의원들을 보냈다. 이들은 멘세비키 의원단에서 지도자 역할을 했다. 그루지아는 러시아 혁명의 지롱드파였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 혁명의 지롱드파가 연방주의를 표방한 반면 20세기 러시아의 지롱드파는 처음에는 통일 러시아를 나중에는 분리주의를 주창했다.

    그루지아 지롱드파가 배출한 가장 저명한 인물은 의심의 여지없이 체레텔리였다. 그는 제 2차 의회 의원이었는데 유형지에서 돌아오자마자 멘세비키당 뿐 아니라 소비에트 다수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론가는 물론이고 신문기자도 아니었던 그는 훌륭한 웅변가였다. 따라서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배출되는 급진주의자의 전형이었다. 일상적 시기에 태어났다면 그는 의회라는 물 속의 물고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혁명의 시대에 태어나서 청년기에 맑스주의의 물맛을 약간 보았다. 그는 멘세비키들 가운데 유일하게 혁명의 와중에서 넓은 시야를 견지하고 일관된 정책을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이 때문에 그는 2월의 이중권력 체제를 파괴하는데 어느 누구보다 크게 기여했다. 체이제는 체레텔리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다만 그의 교조적 솔직함에 가끔 크게 놀라기도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유형지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던 혁명가 체레텔리는 이 교조적 솔직함 때문에 부르주아 계급의 보수파와 손을 잡았다.

    마지막 의회에서 멘세비키 의원이었다는 이유로 스코벨레프는 새롭게 인기를 누렸다. 그는 젊은 외모 때문에 부유층 가정의 연극 무대에서 정치인 배역을 맡은 학생처럼 보였다. 그는 “과도함”을 억제하고 지역 갈등을 조용하게 해결하면서 이중권력의 새는 틈을 메우는 역할을 전문적으로 했다. 그리고 5월의 연립정부에서는 불행하게 노동장관이 되었다.

    단은 멘세비키 사이에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당내의 고참 활동가였으며 언제나 마르토프의 오른팔로 인식되었다. 일반적으로 멘세비키당은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쇠퇴기에 드러냈던 피와 살, 전통, 정신 등을 먹고 성장했다. 따라서 단은 독일사민당의 행정가였던 에버트의 축소판이었다. 독일의 단인 에버트는 개량주의자로서 자기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1년 후 러시아의 에버트인 단은 그렇지 못했다. 단이 에버트보다 못나서가 아니라 러시아의 전반적 정치상황이 독일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 다수파의 주역인 제 1 바이올린 주자가 체레텔리였다면 귀를 찢는 날카로운 클라리넷 주자는 대단한 폐활량과 충혈된 눈을 가진 리이버였다. 그는 유태인 노동자연합(분트) 출신의 멘세비키로 오랜 혁명 경력을 자랑했다. 대단히 진지하면서도 대단히 쉽게 흥분했던 그는 웅변술이 대단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비타협적 애국자요 강철같은 정치인으로 자신을 부각시키는데 열성이었다. 한편 그는 볼셰비키들을 문자 그대로 미친 듯이 증오했다.

    초좌익 볼셰비키였던 보이틴스키도 멘세비키 지도자였다. 그는 1905년 혁명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중노동 징역형에 처해졌다. 3월에 애국주의를 표방하면서 볼셰비키당과 단절하고 멘세비키 대오에 합류한 그는 예상대로 볼셰비키 전문 킬러가 되었다. 다만 과거 동료었던 볼셰비키들을 리이버만큼 잘 괴롭히지는 못했다. 후자처럼 쉽게 흥분하는 기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회혁명당 인민주의자들의 지도부 역시 집다한 분자들의 집합체였다. 다만 이들의 수준은 멘세비키들보다 훨씬 낮았다. 사회혁명당의 극우파는 소위 인민사회주의자들이었는데 고참 망명가 차이코프스키가 지도자였다. 그는 플레하노프와 똑같이 군사적 국수주의를 표방했으나 재능과 경력에 있어서는 그보다 한참 모자랐다. 그와 함께 브레쉬코-브레쉬코프스카야가 있었다. 사회혁명당원들은 그녀를 “러시아 혁명의 할머니”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는 러시아 반혁명의 할머니가 되려고 열성적으로 자신을 강제했다. 이미 정년을 넘긴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은 젊은 시절부터 인민주의자들에게 약점을 잡혔다. 테러 분자가 되기에는 마음이 약했던 그는 전쟁을 변명 삼아 거의 50년간 자기가 가르친 사상을 전부 부인하고 연합국을 지지했다. 러시아의 이중권력도 비난했다. 그러나 이것이 국가라서 비난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단일권력이 아니라서 비난했다. 그러나 나이 많은 인물들은 주로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나중에 내전이 터지자 차이코프스키는 처칠의 돈을 받은 백군 정부 하나를 주도하여 볼셰비키들과 대항했다.

    사회혁명당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인물은 케렌스키였다. 그는 사회혁명당 내부가 아니라 위에서 존재했는데 정당 경력이 전혀 없었다. 이 행운아를 우리는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이중권력 시기에 그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약점들을 결합시키는 장점을 보여주었다. 그는 정식으로 사회혁명당에 입당했으나 정당 일반에 대한 그의 경멸감은 여전했다. 그는 자신을 나라에 의해 직접 선택받은 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사회혁명당은 거대한 그리고 전국적인 허깨비 정당일 뿐이었다. 따라서 이 집단에서 케렌스키가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주 적절했다.

    이후 농업장관과 제헌의회 의장이 될 체르노프는 구 사회혁명당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동시에 그는 이 정당에 영감, 이론, 지도를 제공했다. 교육을 잘 받았다기보다는 많은 것을 읽은 이 인물은 상당하지만 정리되지 않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인용문들을 무한정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것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러시아 청년들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이들은 그로부터 배운 것은 별로 없었다. 이 잡학 지도자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딱 하나 있었다: 그는 누구를 어디로 인도하고 있는가? 도덕론과 시로 장식된 체르노프의 절충적 표현들은 잠시 동안 대단히 잡다한 대중을 결집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는 자신의 정당 건설 방법을 레닌의 “종파주의”와 대비시켰다. 그리고 스스로 만족스러워 했는데 이것은 그에게 딱 맞는 행위였다.

    체르노프는 레닌보다 5일 늦게 해외에서 귀국했다. 영국은 처음에는 약간 주저하다가 그를 억류하지 않고 보내주었다. 소비에트가 베푼 온갖 환영 행사들에서 소비에트의 최대 정당을 대표한 그는 연설도 가장 길게 했다. 반정도 사회혁명당원이었던 수하노프는 그의 연설을 이렇게 논평했다: “나뿐 아니라 많은 수의 사회혁명당원 애국자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너무 재미없게 말을 줄줄 이어갔다. 눈을 반쯤 감았다 눈알을 굴렸다 하면서 목적이나 계획이 전혀 없이 말을 무한정 이어갔다.” 혁명 과정에서 체르노프가 수행했던 모든 활동들은 그의 첫 귀국 연설과 똑같았다. 좌파의 입장에 서서 케렌스키와 체레텔리를 반대하려고 그는 여러 번 애를 썼다. 그러나 모두에게 공격을 받자 싸움 한번 없이 항복했다. 그리고 망명 시절 주창했던 반전주의를 청산한 후 접촉위원회 그리고 나중에는 연립정부에 참여했다. 그의 모든 행위는 부적절했다. 따라서 그는 모든 사안들을 회피했다. 표결 때마다 기권하는 것이 그의 정치활동 방식이었다. 4월에서 10월에 이르기까지 사회혁명당보다 그의 권위가 더 빨리 와해되었다. 체르노프와 케렌스키는 서로 다른 점도 많았고 서로를 증오했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뿌리는 똑같이 혁명 이전 시기에 있었다. 러시아 사회는 축 늘어진 채 기력을 상실했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대중을 교도하고 보호하는 은인의 역할을 수행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의 말을 경청하고 이해하면서도 이들로부터 깨닫는 능력이 전혀 없었다. 다만 무기력과 허세가 가득했을 뿐이었다. 체르노프와 케렌스키는 이 구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대중의 정서와 욕구로부터 올바른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면 혁명 정치인이 될 수 없다.

    한편 아브센티에프는 사회혁명당에 의해 농민소비에트 집행위원장, 내무장관, 예비의회 의장 등 최고의 혁명 직책으로 상승되었다. 그러나 그는 혁명 지도자의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변종에 불과했다. 오렐 여자신학교의 매력 있는 언어선생 --- 이것이 그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전부였다. 물론 그의 정치활동은 그의 개인적 매력보다 훨씬 지독한 해악을 끼쳤다.

    고츠는 주로 배후에서 소비에트의 지배 파벌과 사회혁명당 분파를 크게 조종했다. 유명한 혁명 가문 출신의 테러 분자였던 그는 자신의 아주 가까운 정치 동료들보다는 허세가 덜했고 좀더 진지했다. 그러나 소위 “실제적인” 그의 성격 때문에 그는 주로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면서 큰 문제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넘겼다. 그는 웅변가나 문필가가 아니었다. 그의 최대의 자산은 수년간 중노동 징역형을 살면서 얻은 개인적 권위였다.

    이제 사회혁명당 인민주의자들의 지도급 인물들은 전부 언급되었다. 이들 밑에는 전혀 우연하게 이 당과 인연을 맺은 필리포프스키와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그가 2월 혁명의 와중에서 왜 그렇게 유명해졌는지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었다. 해군 장교였던 그가 입고 있었던 제복이 근사했던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것 같다.

    집행위원회를 주도한 두 정당들의 공식 지도자들과 함께 적지 않은 수의 “재야인사들”, 독불장군들, 과거 이런 저런 단계에서 운동에 참여했던 개인들, 봉기가 있기 오래 전에 운동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 그리고 이제는 승리한 혁명의 깃발 아래 서둘러 운동에 복귀하여 천천히 아무 당이나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다. 모든 근본 문제들에서 “재야인사들”은 소비에트 다수파의 노선을 따랐다. 첫 며칠간 이들은 심지어 지도적 역할까지 맡았다. 그러나 유형지와 해외에서 돌아오는 지도자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당에 소속되지 않은 이들은 제 2선으로 물러났다. 이제 정치가 모습을 갖추어갔고 당원들은 나름의 권리를 누리기 시작했다.

    집행위원회를 공격한 적들은 반동 진영에 몰려 있었다. 이들은 집행위원회 내부에 비(非)러시아인들이 “너무 많다”고 과장되게 지적했다. 유태인, 그루지아인, 레트인, 폴란드인 등등. 사실 집행위원회 위원들 전체에서 비러시아인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최고회의, 각급 위원회, 연설가 집단 등에서 아주 높은 지위를 차지한 것은 사실이었다. 피억압 민족들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도시에 집중적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혁명 대오에 떼거지로 몰려들었다. 따라서 구세대 혁명가들 가운데 비러시아인의 수가 특히 많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들의 경험은 언제나 수준이 높지는 않았으나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대체할 수 없이 귀중했다. 그러나 소비에트와 혁명과정 전체의 정책을 “너무 많은” 비러시아인들의 탓으로 설명하는 것은 전혀 말도 되지 않는다. 이 경우에 민족주의는 진짜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인민을 또다시 경멸한다. 민족주의는 거대한 민족적 각성으로 인민들이 떨쳐 일어나는 시기에 이들을 외부 세력의 우연한 손에 쥐어진 나무토막으로 정도로만 간주한다. 그렇다면 비러시아인들은 혁명기에 어떻게 수백만 러시아인들보다 훨씬 기적적인 능력을 가졌는가? 심대한 역사적 변화의 순간 한 나라의 다수 민족은 어제까지만 해도 가장 억압받았던 소수민족들을 압박하여 자기 이익을 위해 활용한다. 소수민족들은 새로운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 동안 억눌린 욕구를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기꺼이 다수 민족의 압박에 호응한다. 소수민족들이 혁명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이 이들을 활용할 뿐이다. 지배층이 시작한 모든 거대한 개혁들은 이 점을 잘 보여주었다. 표트르 1세(대제)는 기존의 관례에서 크게 이탈하여 비러시아인들과 외국인들을 등용하였다. 따라서 그의 정책은 일국적 차원을 넘어섰다. 당시 독일 변두리의 영주나 네덜란드의 선장은 러시아인 사제나 모스크바 귀족보다 러시아의 발전에 필요한 요구에 훨씬 더 잘 부응했다. 사실 러시아인 사제는 오래 전에 그리스인들에 의해 질질 끌려 다녔으며 모스크바 귀족은 러시아를 창립한 외국 부족들을 조상으로 두었으면서도 외국인들이 나라를 너무 쥐고 휘두른다고 불평했다. 어쨌든 1917년의 비러시아인 지식인들은 소비에트 다수파 정당들 내에서 소속 민족의 인구비례에 걸맞게 존재했다. 이것은 러시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의 비러시아인들은 러시아의 방어와 단결에 특별한 열정을 보였다.

    이로써 민주주의 세력의 최고 권력기관인 집행위원회의 면모를 전부 살펴보았다. 애초의 환상들은 없앴으나 편견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두 정당들은 특히 말을 행동으로 옮길 능력이 없는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한 세기의 질곡을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의 기초를 놓을 혁명의 선두에 섰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의 모든 활동은 고통스러운 모순의 길고 긴 연속에 불과했다. 결국 이들은 대중의 혁명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내전의 비극을 초래했다.

    노동자, 병사, 농민들은 혁명 사건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들은 자기들이 수립한 소비에트가 혁명을 초래한 해악들을 즉시 제거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모두 소비에트로 뛰어갔다. 여기에서 이들은 고통 보따리들을 전부 풀어놓았다. 고통 보따리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들은 필요한 결정들이 빨리 내려질 것을 요구했으며 도움을 얻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정의가 구현되기를 기다렸으며 배상을 요구했다. 의뢰인, 불평인, 청원인, 폭로인 등은 마침내 자신들이 적대 권력을 몰아내고 자기 권력을 수립했다고 생각하면서 소비에트의 문을 두드렸다. 이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인민은 소비에트를 신뢰한다; 인민은 무장했다; 따라서 소비에트는 주권기관이다. 이들의 생각은 당연히 옳았다. 병사, 노동자, 병사의 부인, 소상인, 서기, 부모 등의 인간 물결이 끊이지 않고 소비에트의 문을 열고 닫았다. 그리고 찾고, 질문하고, 눈물을 흘리고, 요구하고 행동을 강제했다. 심지어는 구체적인 행동을 명시하였다. 이렇게 해서 소비에트는 진정한 혁명정부로 변모되었다. 물론 인민의 혁명적 압력에 모든 힘을 다해 저항한 우리의 친구 수하노프는 이렇게 불평한다: “이것은 소비에트 자체의 이익과는 전혀 무관했다. 최소한 소비에트의 계획에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저항은 성공할 수 있을까? 슬프게도 그는 곧 이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기능도 없고 할 일도 없는 공식 정부기구를 소비에트는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자동적으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공식 정부기구에 앉아 있으면서 구 권력에 항복할 것을 주장하던 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수하노프는 슬픈 모습으로 이렇게 고백한다: “현실을 인정하고 다른 행정기능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마린스키 궁전(구 정부청사)이 정부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허구를 유지해야 한다.” 전쟁과 혁명의 불길로 인해 파괴된 나라에서 이들이 바쁘게 한 일은 인민이 근본적으로 타도한 정부의 권위를 속임수로 유지시키는 것이었다. 혁명은 죽어도 허구는 영원히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 사기꾼들이 문밖으로 몰아낸 진짜 권력은 창문을 통해 계속 기어 들어와 이들을 기습하였다. 이때마다 이들의 모습은 비참하거나 우스꽝스러웠다.

    2월 28일 밤 집행위원회는 짜르를 지지하는 언론을 폐쇄시키고 신문 발행 허가제도를 공포했다. 그러자 그동안 남의 입을 틀어막았던 반동들이 가장 크게 저항했다. 며칠 후 집행위원회는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는 문제에 다시 부딪쳐야했다: 반동 신문들의 발행을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견이 표출되었다. 수하노프같은 교조주의자들은 언론의 절대적 자유를 주창했다. 이에 대해 체이제는 처음에는 반대했다: 철천지원수들의 손에 쥐어진 무기를 어떻게 그냥 내버려두는가? 그런데 이 문제를 임시정부에 넘기자고 제안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임시정부는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식자 노동자들은 소비에트의 명령만 따랐다. 3월 5일 집행위원회는 이렇게 확정했다: “우익 언론은 폐쇄되었으며 새로운 신문의 발행은 소비에트가 허가한다.” 그러나 집행위원회는 부르주아 세력의 압력에 굴복하여 3월 10일 이 결의문을 철회했다. “이들이 제 정신을 차리는데는 3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수하노프는 기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근거가 허약한 기쁨이었다! 언론은 사회 위에 군림할 수 없다: 혁명 중에 언론의 존재는 혁명의 진전 자체를 반영한다. 혁명이 내전의 성격을 띠면 경쟁 세력들은 자기 영역 내에 적대적 언론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기들이 장악한 병기고, 철도, 인쇄시설 등을 적들에게 내주지 않는 것과 똑같다. 혁명 투쟁에서 언론은 일종의 무기일 뿐이다. 당연히 표현의 권리는 생존의 권리에 종속된다. 사실 혁명은 생존의 권리마저 자기 밑에 둔다. 혁명정부는 자신의 강령이 천박할수록 그리고 과거와 긴밀히 얽혀있어서 보수적일수록 반동 세력에게 더 큰 관용과 자유를 베풀고 더 “아량을 보인다”. 그리고 이의 역도 성립한다: 혁명 권력은 수행해야할 임무가 거대할수록 그리고 파괴해야할 기득권이 많을수록 자기 손에 더욱더 많은 힘을 결집시키고 독재를 더욱더 노골적으로 행사한다. 좋든 나쁘든 인류는 이 혁명 법칙을 통해 지금 여기까지 전진해왔다. 언론을 통제하려는 소비에트의 결정은 옳았다. 그렇다면 왜 이 올바른 결정을 그렇게 쉽게 포기했는가? 진지한 투쟁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는 평화와 토지 문제 심지어 공화국 문제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켰다. 권력을 보수 부르주아에게 넘긴 뒤였기 때문에 집행위원회는 우익 언론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고 이에 저항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몇 개월 후 정부는 소비에트의 지지를 받아 좌익 언론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 신문들은 하나 하나 폐간되었다.

    3월 7일 모스크바에서 케렌스키는 열변을 토했다: “짜르는 내 손안에 있다. 나는 러시아 혁명의 마라(역자 주: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벵파의 지도자. 혁명 신문 [인민의 벗]을 발행하며 혁명을 계속 전진시키다가 반동의 자객에게 암살 당했다.)는 결코 되지 않을 것이다. 니콜라스 2세는 나의 감독 하에 영국으로 보내질 것이다....” 유한 부인들은 이 연설에 호응하여 꽃을 던졌고 학생들은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혁명 인민은 술렁거렸다. 제대로 된 혁명은 폐위된 왕이 국경선을 넘어 도망가는 것을 방치해 본 적이 없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계속 요구했다: 로마노프 왕족들을 체포해라. 그러자 집행위원회는 이 문제를 가볍게 처리하면 큰일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비에트가 로마노프 왕족의 문제를 처리하기로 결정되었다. 이것은 임시정부를 신뢰할 수 없다는 공개 선언이었다. 집행위원회는 철도를 책임지는 모든 조직에게 짜르를 통과시키지 말라고 명령했다. 짜르의 기차가 철길에 그대로 정지해 행방이 묘연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집행위원회의 위원인 노동자 그보스데프는 멘세비키 우파였는데 니콜라스 2세를 체포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 때문에 케렌스키는 찌그러졌고 그와 함께 임시정부도 찌그러졌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이에 항의하여 사임하지는 않고 말없이 가만히 복종하기만 했다. 3월 9일 체이제는 집행위원회 보고를 통해 임시정부가 짜르를 영국에 보내는 생각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짜르 일가는 이제 동궁에 가택연금 되었다.

    이렇게 집행위원회는 자신의 베개 밑에 있던 권력을 다시 훔쳤다. 그러나 전선에서 끈질긴 요구가 계속 올라왔다: 짜르를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 감옥에 집어넣어라!

    혁명은 입법 조치 뿐 아니라 혁명 대중 스스로의 몰수 행위를 통해 소유권을 바꾸어왔다. 역사상 어떤 농민혁명도 이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 적이 없다: 법적 개혁은 언제나 대중의 혁명적 행동에 뒤진다. 그러나 농촌에 비해 도시에서는 강제 몰수가 미미했다. 부르주아 혁명은 부르주아 소유관계를 뿌리뽑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적들의 건물을 사회적 목적을 위해 대중이 전유하지 않은 혁명 역시 없었다. 2월 혁명이 승리한 직후 정당들은 지하활동을 청산하고 공개의 장에 나타났다. 노동조합들이 결성되었다. 집회가 계속 열렸다. 모든 지구에 소비에트가 수립되었다. 이 모든 활동에는 본부가 필요했다. 단체들은 짜르 장관들이 소유했던 여름 별장이나 짜르의 발레리나들이 기거했던 궁전 등 사용되고 있지 않는 건물들을 몰수했다. 구 소유주들은 불평했다. 또는 정부가 스스로 이 문제에 개입했다. 그러나 공식 정부는 껍데기에 불과했고 몰수자들이 실세였다. 따라서 검사들이 집행위원회에 호소하여 발레리나의 짓밟힌 권리를 회복시키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필요했다. 다만 짜르 왕족들은 발레리나의 별로 복잡하지도 않은 기능에 대해 인민을 희생시키면서 너무 후하게 값을 지불해왔다. 물론 접촉위원회의 개입이 필요했다. 장관들이 회의를 열었다. 집행위원회 사무국(局, bureau)도 회의를 열었다. 대표단이 몰수자들에게 보내졌다. 이 일은 수개월을 질질 끌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좌익’이므로 소유권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법적 침해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강제 몰수에는 결연히 반대한다.” 이와 같은 속임수를 동원하여 혁명에 불만을 가진 “좌익”분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정치적 파산을 은폐해왔다. 진정한 혁명정부라면 시기 적절한 건물 징발 포고령을 통해 혼란스러운 몰수를 당연히 최소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좌익 화해주의자들은 권력을 사적 소유권의 광신도들에게 넘겼다. 그리고 혁명이 법을 존중해야 한다는 요지의 설교를 대낮에 대중 앞에서 할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뻬쩨르부르그의 공기는 이런 종류의 관념주의를 허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빵을 타기 위해 늘어선 줄은 혁명에게 최후의 자극을 가했다. 이것 역시 새로운 정권에게는 가장 시급한 위험 요인이었다. 소비에트의 첫 회의에서 식량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임시정부는 수도의 주민들을 먹여 살릴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들을 기아로 굴복시키는 것을 별로 싫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임무는 소비에트에게 떨어졌다. 소비에트는 부르주아 계급의 경제 및 행정 기구에서 일을 했던 경제 및 통계 전문가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고르먼이나 체레바닌과 같이 대부분 우파 멘세비키였거나 볼셰비키였다가 극우로 선회한 바자로프나 아빌로프였다. 그러나 임무에 착수하자마자 투기를 제압하고 시장을 재조직하기 위해서는 극단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이들은 판단했다. 소비에트는 일련의 회의들을 통해 “군사적 사회주의” 조치들을 채택했다. 이제 모든 곡물상점들은 공공소유로 전환되었다. 빵 가격이 확정되었다. 공업제품에 대해서도 비슷한 가격이 책정되었다. 국가가 산업을 통제했다. 농민과의 상품 교환도 국가가 통제했다.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경악하여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다른 제안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 급진적 해결책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후 접촉위원회는 당혹스럽게 이 내용들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정부는 이 조치들을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르보프공과 구츠코프와 코노발로프는 자기들과 자기 동맹자들에게 통제나 징발 등 어떤 제한 조치도 강요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소비에트의 모든 경제 조치들은 국가기구의 수동적 저항 때문에 산산조각이 났다. 따라서 지역 소비에트들이 이 조치들을 독자적으로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었다. 식량 공급과 관련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유일한 실제적 조치는 엄격한 배급제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육체노동 종사자에게는 1.5 파운드의 빵을 나머지에게는 1 파운드의 빵을 배급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이 제한 조치는 수도 주민의 식량 지출액에 거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빵 1 파운드나 1.5 파운드나 생명을 부지하는 데에는 차이가 없었다. 일상적인 영양실조는 여전히 계속될 전망이었다. 몇 개월이 아니라 몇 년간 혁명은 쪼그라드는 위장에 허리띠를 더 졸라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련을 견디어 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기아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이었다. 32개월의 전쟁으로 불거진 경제적 난관들은 새 정부의 문과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수송의 마비, 원자재의 부족, 장비의 상당한 노후화, 위험수위에 다다른 인플레, 상업의 마비 등 모든 난관들이 대담하고 발빠른 조치들을 요구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이 문제들을 경제적으로 접근하면서 정치적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들이 직면한 모든 경제 문제들은 이중권력을 부정했다. 모든 결정사항들에 서명하는 이들의 손가락은 불에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하루 8시간 노동제 투쟁은 계급 역관계를 크게 시험했다. 봉기는 성공했으나 총파업은 계속되었다. 노동자들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정권이 교체되면 생활이 곧바로 달라져야 한다. 이 때문에 새 정부의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즉시 불안을 느꼈다. 애국주의 정당들과 신문들은 “병사는 병영으로 노동자는 작업장으로!”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러면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요?” 라고 노동자는 묻는다. 이에 대해 멘세비키들은 “당분간만 그렇소.”라고 당혹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알고있다: 지금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부르주아 계급은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들을 처리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집행위원회는 혁명이 승리하여 혁명투쟁에서 노동계급의 지위가 충분히 보장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리고 3월 5일을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이 작업장으로 복귀하는 날로 정했다. 노동자들은 작업장으로 돌아가시오! 자유주의자이든 사회주의자이든 교육받은 계급들의 뻔뻔한 이기주의가 명백히 드러났다. 현실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터져 나와 봉기가 승리했다. 그런데 이들은 혁명을 승리로 이끈 수백만 노동자 병사들이 이제 유순하게 과거의 생활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역사 서적을 읽은 이들은 과거의 혁명도 이렇게 결말이 났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틀렸다. 과거에도 이런 적은 한번도 없었다. 노동자들이 돼지우리로 다시 갇힌 경우는 패배와 기만 등의 우회로를 한참 겪은 후였다. 마라는 정치혁명이 잔인하게 왜곡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공식 역사가들에 의해 엄청난 비방을 당했다. 1792년 8월 10일의 혁명이 있기 한달 전에 그는 이렇게 썼다: “혁명은 최하층 계급들 그리고 무산자들에 의해서만 성취되고 유지된다. 이들을 뻔뻔한 부자들은 하층민이라고 부르고 로마인들은 늘 그랬듯이 냉소하면서 프롤레타리아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혁명이 무산자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가? “혁명운동은 처음에는 어느 정도 성공하다가 마침내 정복된다. 지식, 기술, 수단, 무기, 지도자, 명확한 행동계획 등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험, 기민함, 술수 등을 가진 음모자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된다.” 케렌스키가 러시아 혁명의 마라가 되기를 원치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러시아의 거물 자본가 아우어바하는 분노하며 이렇게 말한다: “하층민들은 혁명을 부활절의 축제 같이 생각했다. 예를 들어 하인들은 며칠 동안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빨간 리본을 단 채 산보를 하고 자동차를 타고 아침에 집에 와서 세수한 후 다시 재미를 보러 나갔다.” 혁명의 풍기 문란 행위를 비방하는 이 자본가는 하인의 행위를 부르주아 유한 마담의 일상과 비교한다. 대단히 주목할만한 묘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빨간 리본을 다는 것은 비교에서 제외된다. 그렇다. 피억압자들은 혁명을 휴일 또는 휴일 전야로 인식한다. 혁명으로 흥분한 하인은 피할 수 없는 모욕적이고 괴로운 일상의 노예 노동에서 벗어나려고 제일 먼저 시도한다. 노동계급은 승리의 상징으로 빨간 리본을 다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할 수도 없었고 그럴 의도도 없었다. 그랬다면 혁명은 남을 위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뻬제르부르그 공장들은 노동자들의 불만으로 술렁거렸다. 상당수의 작업장들은 소비에트의 결의를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물론 노동자들은 작업장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조건으로 조업에 복귀할 것인가? 이들은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요구했다. 그러자 멘세비키들은 1905년 혁명에서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제를 강제로 도입하려다가 패배한 경험을 언급했다. “반동 세력과 자본가들 모두에 대항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는 너무 버겁다.” 이것이 멘세비키들의 핵심 사고였다. 이들은 미래에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계급과 단절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순전히 이론적인 인정은 이들의 행동을 전혀 속박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 단절을 강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멘세비키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웅변가나 기자들의 열띤 말이 아니라 근로 대중의 독립된 행동에 밀려 반동 진영에 합류한다. 따라서 이들은 모든 힘을 다해 노동자와 농민의 경제투쟁을 반대하려고 애썼다. 이들은 이렇게 설교했다: “사회문제들은 노동계급에게 제일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정치 자유를 획득해야한다.” 그러나 추상적인 자유가 무엇인지 노동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은 우선 자신의 근육과 신경에게 약간의 자유를 부여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때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멘세비키들이 8시간 노동제가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고 설명하던 3월 10일 바로 그 날에 소비에트와 공식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던 제조업 협회는 8시간 노동제를 도입하고 공장 및 작업장 위원회의 수립을 허용할 의향이 있다고 선언했다. 공업 자본가들은 소비에트의 민주주의 전략가들보다 더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고용주들은 노동자들과 얼굴을 늘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뻬쩨르부르그 공장의 반 이상 그리고 대공장의 다수가 이미 8시간 노동을 끝내고 집단적으로 작업장을 떠나고 있었다. 소비에트와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거절한 것을 고용주들은 허용했다. 자유주의 신문은 살살 녹는 말로 1917년 3월 10일 러시아 자본가들의 제스처를 1789년 8월 4일 프랑스 귀족들의 제스처와 비교했다. 그런데 이 비교는 이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역사적 진실에 훨씬 가까웠다: 18세기말의 봉건세력과 똑같이 20세기초 러시아 자본가들도 필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지금은 일시적으로 양보하되 미래에는 모든 것을 다시 확실히 되돌리고 싶어했다. 입헌민주당의 어느 기자는 솔직히 인정했다: “멘세비키들에게는 불행하지만 볼셰비키들은 이미 테러를 통해 제조업 협회가 8시간 노동제를 즉시 도입하도록 강제했다.” 물론 이것은 사실 거짓말이었으나 내용으로 보면 진실이었다. 이 테러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노동자 볼셰비키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 투쟁을 주도했다. 2월의 결정적 순간과 똑같이 압도적 다수의 노동자들은 이들을 따랐다.

    멘세비키에 의해 장악된 소비에트는 자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얻어진 노동자들의 이 거대한 승리를 착잡한 감정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망신을 당한 이 지도자들은 더 전진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강제되었다. 이들은 제헌의회 소집보다 먼저 러시아 전역에 8시간 노동제를 선언하자고 임시정부에 제안해야했다. 그러나 정부는 자본가들과 합의를 이미 끝낸 후 이 제의를 거부했다. 이들은 소비에트가 이렇다할 집요함이 없이 제시한 이 제의를 더 좋은 날을 기다리면서 거부했다.

    모스크바에서도 똑같은 투쟁이 벌어졌으나 똑같은 결과를 쟁취하는 데에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여기에서도 소비에트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무릅쓰고 조업재개를 요구했다. 어느 대공장에서는 파업 종료를 반대하는 결의안이 7천 대 6의 표차로 통과되었다. 다른 공장들도 거의 같은 반응을 보였다. 3월 10일 소비에트는 즉시 조업을 재개할 것을 다시 촉구했다. 그러자 대부분의 공장에서 조업은 재개되었으나 노동시간 단축 투쟁이 모든 곳에서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직접 행동을 통해 지도자들을 교정시켰다. 오랜 거부 끝에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3월 21일 8시간 노동제 도입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자본가들은 즉시 소비에트의 선언을 이행했다. 지방에서는 4월까지 이 투쟁이 계속되었다. 거의 모든 곳에서 소비에트는 이 투쟁에 저항했다가 나중에야 노동자의 압력에 굴복하여 자본가들과 협상에 들어갔다. 그리고 자본가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경우 독자적으로 8시간 노동제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억압체제는 크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대해 임시정부는 고의적으로 개입을 회피했다. 자유주의자들의 지도하에 노동자들에 대한 맹렬한 투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노동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병사들을 이간질시키기로 결정되었다.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것은 전선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전시에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참호에서도 시간을 계산하는가?... 유산계급들은 일단 참주선동을 시작하면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 선동은 열을 띠면서 참호로 퍼졌다. 이 선동은 주로 얼치기 사회주의자 장교들에 의해 곧바로 수행되었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병사 피레이코는 회상한다. “그러나 이들이 장교였기 때문에 선동 효과는 크게 약화되었다. 모든 병사들은 장교들이 과거에 자기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너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비방하는 이 선동은 수도에게 가장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주둔군 막사에서 자본가들과 입헌민주당은 선동의 기회와 수단을 무진장 찾아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3월말이 되자 횡단보도, 전차, 모든 공공장소에서 노동자와 병사들이 격렬한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심지어 주먹싸움까지 벌어졌다. 노동자들은 이 술수를 알아차리고 능숙하게 이것을 피했다. 사실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진실을 알리기만 하면 되었다. 전쟁으로 자본가들이 거두어들이는 엄청난 이윤을 수치로 설명하고 기계 소리가 귀를 찢는 공장을 병사들에게 보이고 용광로의 살인적인 열기를 이들이 느끼게 해주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산재 희생자가 발생하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되었다. 노동자들의 주도하에 주둔군 병사들은 정기적으로 공장을 찾았고 특히 병기공장을 찾았다. 병사들은 공장을 보고 노동자들의 말을 직접 들었다. 노동자들은 증명해 보이고 설명했다. 이 방문은 노동자와 병사의 연대를 획기적으로 증대시키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노동자들과의 흔들릴 수 없는 연대를 표시하는 군대의 수많은 결의문들을 사회주의 신문들이 보도했다. 4월 중순이 되면 노동자와 병사의 다툼은 신문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부르주아 신문은 침묵을 지켰다. 경제투쟁의 승리 후 노동자들은 정치적 도덕적 승리도 함께 거두었다.

    8시간 노동제 투쟁과 관련된 사건들은 혁명의 전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제 노동자들은 몇 시간 자유를 얻어 신문과 책도 읽고 회의에도 참가하고 소총 사격연습도 했다. 노동자 민병대가 수립되는 순간 사격연습은 일상화되었다. 더욱이 이 투쟁으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은 소비에트 지도자들을 좀더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멘세비키당의 권위는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볼셰비키당의 영향력은 공장에서 더욱 커졌으며 병영에서도 부분적으로 확대되었다. 병사들은 좀더 꼼꼼해지고 생각이 깊어졌으며 사물을 냉철하게 주시했다. 이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의 뒤를 밟으면서 공작을 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참주선동의 기만적 술수는 역작용을 일으켰다. 이 결과 노동자와 병사들은 서로 반목하고 거리를 두는 대신 연대를 더욱 두텁게 했다.

    “접촉위원회”의 그럴듯한 간판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소비에트, 소비에트 지도자들, 자신에 대한 이들의 감시 행위를 증오했다. 이 증오심은 단박 드러났다. 소비에트는 순전히 정부기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이것도 임시정부가 대중을 억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때 정부의 요청에 따라 수행했다. 따라서 집행위원회는 활동비용으로 소액의 지원금을 정부에 요청했다. 그러자 정부는 이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소비에트의 반복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설 단체”에게 국가의 자원을 허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소비에트는 대항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소비에트의 재정은 노동자들에 의해 마련되었다. 이들은 혁명의 필요를 위해 쉬지 않고 모금을 했다. 당시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상호 친선의 예의를 지켰다. 전국소비에트 협의회는 이중권력이 허구라고 선언했다. 케렌스키는 병사 대의원들에게 정부와 소비에트는 완벽히 단결하고 있다고 확신시켰다. 체레텔리, 단 등 소비에트의 핵심 지도자들도 이중권력의 존재를 한사코 부인했다. 이 거짓말을 통해 이들은 거짓말에 바탕을 둔 권력을 강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 권력은 첫 주부터 비척거렸다. 조직적 연합을 위해 지도자들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이들은 우연히 등장한 온갖 종류의 대의기구들을 대중에 대항하게 만들었다. 병사들을 노동자들에 대항하게 만들고 새로운 의회, 도의회, 협동조합 등이 소비에트에 대항하게 만들고 지방이 수도에 대항하게 만들고 마지막으로 관료들이 인민에 대항하게 만들었다.

    소비에트 형태라고 특별히 신비로운 영험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비에트도 모든 대의기구의 결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이러한 결점들을 최소화시키는 데에 소비에트의 강점이 있다.

    소비에트 이외의 대의기구는 대중을 원자화시키기 때문에 혁명기에는 대중의 의지를 대단히 비효율적으로 그것도 대단히 지연시키면서 반영한다. 이후 사건들은 이 주장의 진실성을 곧 증명할 것이다. 모든 혁명적 대의기구 가운데 소비에트는 가장 유연하며 가장 직접적이며 투명하다. 그러나 이것도 여전히 대의기구이다. 주어진 순간에 대중이 투입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수행할 수는 없다. 소비에트는 대중이 자기 오류를 이해하고 교정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이 기능 때문에 소비에트는 혁명의 발전을 보장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가? 지도자들 가운데 단 한 명도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후 수하노프는 이렇게 주장했다: “나의 계획에 의하면 권력을 잠시만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겨주고 민주주의가 강화되면 곧 확실히 다시 넘겨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고는 어쨌든 단순하기도 하지만 사건이 지나간 다음의 회고 타령에 불과하다. 당시 이런 계획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체레텔리는 집행위원회의 동요를 종식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최소한 이 조직에 체계를 부여했다. 그는 공공연히 이렇게 선언했다: 강력한 부르주아 권력이 없으면 혁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세력은 자유부르주아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선에서 그쳐야한다; 부주의한 행위로 이들을 반동 진영으로 밀치지 말아야한다; 역으로 이들이 혁명의 성과를 지지하는 한 이들을 지지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체레텔리의 이 어정쩡한 체제는 사회주의자들이 의회에서 야당 역할을 하는 부르주아 공화국을 성립시켰을 것이다.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의 곤란 중의 곤란은 전반적인 계획의 부재가 아니었다. 당면한 행동 강령의 부재가 진짜 어려움이었다. 화해주의자들은 대중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압력”을 행사하여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민주적 정책을 유도하겠다. 인민 대중의 압력으로 지배계급이 양보를 한 경우는 역사상 여러 번 있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압력”은 지배계급을 권력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무기가 민주주의 세력에게는 없었다. 이들은 권력을 자발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겼다. 이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킬 경우에는 민주주의 세력이 권력을 잡겠다고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반납하겠다고 위협했다. 따라서 압력을 행사할 핵심 지렛대는 부르주아 계급에게 있었다. 아무 힘도 없는 정부가 어느 정도 진지한 소비에트 지도자들의 모든 조치에 대항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4월 중순이 되면 완전히 자유주의자들에게 의존하는 핵심 지도자들에게 집행위원회는 너무 큰 기구가 되었다. 따라서 “사무국(bureau)”이 구성되어 조국방위주의자 우파가 이것을 장악했다. 이제 큰 틀의 정치는 이 조그만 사무국에서만 진행되었다. 이제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잘 짜여진 것처럼 보였다. 체레텔리는 소비에트에서 무한한 재량권을 누리고 있었다. 케렌스키는 점점 상승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아래에서 대중이 최초의 경고음을 울린다. 케렌스키의 그룹과 가깝게 지냈던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썼다: “정치작업의 권한을 조국방위주의 정당들로만 선정된 사무국이 장악한 바로 이 순간에 대중 통제력은 이들의 손에서 미끄러져 나갔다. 대중은 이들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놀라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놀라운 현상이 아니었다. 사물의 법칙에 딱 들어맞을 뿐이었다.              

     

    제 13장: 군대와 전쟁

    혁명 몇 개월 전에 군대의 규율은 이미 크게 무너져 있었다. 이 당시 장교들이 늘어놓은 불평들의 예는 너무나 많았다: 병사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병사들이 말(馬), 군용 물품, 심지어는 무기들도 함부로 취급한다; 군용 기차에서 난동이 벌어지고 있다 등등. 사태가 모든 곳에서 똑같이 심각하지는 않았으나 모든 곳에서 똑같이 파멸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혁명이라는 커다란 충격이 가해졌다.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의 봉기는 장교 없이 장교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결정적인 순간에 지휘관들은 모두 머리를 처박고 숨었다. 10월당 의원 쉬들로프스키는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의 장교들과 2월 27일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의회에 대한 이들의 생각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귀족 출신의 왕당파 장교들이 현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어쩌면 반정도 위선이 결합된 무지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쉬들로프스키는 말한다: “바로 다음날 연대 전체가 군악대를 앞세우고 대형을 이루어 거리를 행진하는 것을 보았다. 대오는 아주 질서정연했다. 그런데 장교는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이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 물론 몇 개 중대는 장교들과 함께 타우리데 궁전에 도착했다. 그러나 좀더 정확히 말하면 병사들은 장교들을 끌고 다녔다. 물론 이 의기양양한 행진에서 장교들은 자기들이 포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도 체포된 몸으로 이 광경을 본 클라인미헬 백작부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장교들은 도살장으로 떠밀려 가는 양떼와 같았다.”

    2월 봉기는 병사와 장교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다만 원래 있었던 분열을 표면에 드러냈을 뿐이었다. 병사들의 입장에서 왕정에 대한 봉기는 곧 군 지휘부에 대한 봉기였다. 당시 장교복을 입고 있었던 입헌민주당의 나보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2월 28일 아침부터는 외출이 위험했다. 병사들이 장교들의 견장을 잡아뜯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새로운 권력의 첫날 병영의 모습이었다.

    집행위원회는 우선 병사들과 장교들의 화해를 촉진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병사들이 기존 지휘부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했다. 수하노프는 말한다: 장교들이 소속 연대로 복귀하는 것은 “전면적인 혼란과 무지몽매하고 기강이 무너진 병사들의 독재”에 대항해 군대를 보호하는 행위이다. 이 혁명가들은 자유주의자들과 똑같이 장교가 아니라 병사를 두려워했다. 반면에 노동자들은 “무지몽매한” 병사들과 똑같이 똑똑한 장교들이 진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병사와 장교의 화해는 일시적일 뿐이었다.

    봉기 후 부대로 복귀한 장교들에 대한 병사들의 반응을 장교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병사들은 규율을 어기고 장교의 허락 없이 그리고 대개 장교의 명령을 무시하고 병영을 나갔다. 장교들이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거대하게 자신들을 해방시켰다. 장교들도 이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장교들이 병사들을 거리로 인도하여 이들의 봉기를 도왔는가?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고 덜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혁명이 승리로 끝나자 장교들은 자기들도 혁명에 참가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과연 얼마나 진실한가? 그리고 얼마나 오래 갈까?” 그런데 스탄케비치 자신은 “좌익”성향의 장교이면서 병사들을 거리로 인도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그의 고백은 그만큼 더 의미심장하다.

    28일 아침 삼프소니에프스키 가도에서 어느 공병사단 사령관이 병사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모두가 증오하는 정부가 타도되었다. 대신 르보프공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다. 따라서 전과 같이 장교들의 명령을 따라야한다. 이제 모두 각자의 위치로 복귀하라.” 그러자 몇몇 병사들이 외쳤다: “기꺼이 명령에 따르겠습니다.”(저자 주: 이 말은 군대에서 병사들이 명령을 받았을 때 하는 관습적인 대답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병사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게 전부야?”

    이때 노동자 카유로프는 이 광경을 보고 열이 받았다. 그는 “내가 한 마디 합시다.”라고 말한 후 허락도 기다리지 않고 병사들에게 질문했다: “3일 동안 뻬쩨르부르그 거리에는 노동자들의 피가 흘렀다. 지주 한 놈을 다른 지주 한 놈으로 교체하기 위해서 이런 희생을 했는가?” 카유로프의 질문은 정곡을 찔렀다. 이 질문은 앞으로 몇 달간의 투쟁을 한 마디로 요약했다. 장교에 대한 병사의 적대감은 지주에 대한 농민의 적대감이 굴절된 형태였다.

    지방의 장교들은 제때에 상부의 지시를 받아 수도의 혁명에 대해 같은 목소리를 냈다: “나라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시던 폐하께서 너무 지나치게 정사를 돌보셨다. 그래서 정부의 짐을 동생에게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크림 반도의 벽촌서 근무하던 어느 장교는 병사들의 반응이 “니콜라스나 미하일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라고 얼굴에 써 있었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이 장교는 다음날 혁명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게 되자 병사들의 표정이 갑자기 달라졌다고 한다. 이들의 질문, 제스처, 눈빛 등은 “생각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는 이들의 무지몽매하고 혼란스러운 머리 속에 누군가가 장기간 끈질긴 작업을 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장교들은 아무 노력 없이 뻬쩨르부르그에서 온 최근의 전보를 머리 속에 입력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투박하지만 정직하게 혁명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를 정하면서 못이 박힌 손바닥에다 혁명을 저울질했다. 혁명에 대한 두 집단의 태도는 이렇게 차이가 컸다! 

    한편 전쟁 총사령부는 혁명의 승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이 소식이 전선에 퍼지는 것을 막기로 결정했다. 총사령관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모든 전선의 사령관들에게 명령했다: “갱단”(그는 혁명 대표단을 이렇게 불렀다)이 관할 지역에 들어오면 이들을 즉시 체포하여 군법회의에 회부하라. 다음날 그는 “전하” 니콜라이 니콜라이예비치 대공의 이름으로 “후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 즉 혁명을 중지시킬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총사령부는 최대한 늦게까지 현역군에게 혁명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짜르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 아니라 혁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여러 전선에서 혁명 소식을 차단하는 혁명 검역이 실시되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도착한 모든 편지들은 전달이 금지되었고 신병들의 부대 배치가 연기되었다. 이렇게 구 체제는 영겁의 시간에서 며칠을 도둑질했다. 3월 5일이나 6일이 되어서야 혁명 소식은 전투 지역에까지 도달했다. 소식의 내용은 위에서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공이 군통수권자로 임명되었다; 짜르는 조국을 위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외에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많은 참호에서 그리고 어쩌면 대다수의 참호에서 혁명 소식은 뻬쩨르부르그에서 도착하기 전에 독일군에 의해 먼저 퍼졌다. 총사령부가 혁명 소식을 은폐하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 병사들에게 너무 명백히 드러났다. 혁명 소식이 전해진 이틀 후 장교들은 가슴에 붉은 리본을 달았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들을 전혀 신뢰할 수 없었다.

    흑해 함대의 사령관은 이렇게 말한다: 뻬쩨르부르그의 혁명 소식은 처음에는 병사들에게 이렇다할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수도에서 사회주의 신문이 도착하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에 병사들의 정서가 변했다. 집회가 열리기 시작했고 범죄 선동가들이 숨은 틈에서 기어 나왔다.” 이 해군 제독은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이해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정서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신문이 아니었다. 신문은 혁명의 정도에 대한 병사들의 의구심을 없애고 이들이 지휘부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진짜 생각을 표현하도록 도왔을 뿐이었다. 흑해 함대 사령부의 정치노선은 이 해군 제독의 말 한마디에 특징적으로 드러나 있다: “함대 장교들의 대다수는 짜르가 없으면 조국이 망한다고 생각했다.” 민주주의자들도 자기들이 “무지몽매한” 수병들에게 이 밝은 빛을 비추지 않으면 조국이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육군과 해군의 지휘부는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한 부류는 자기 직책을 고수한 채 혁명에 귀를 기울이고 사회혁명당원으로 등록했다. 나중에 이들의 일부는 심지어 볼셰비키당에 기어들어 오려고 했다. 다른 부류는 한동안 목에 계속 힘을 주면서 새 질서에 저항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 격렬한 투쟁을 일으키다가 병사들의 대세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이 분화는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혁명 때마다 모습을 드러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왕정에 조금의 흔들림 없이 충성했던 장교들 가운데 한 명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혁명에 대항해 싸웠다.” 그러나 이들은 병사들의 항명보다는 동료 장교들의 항복에 의해 더 크게 타격을 입었다. 크게 보았을 때 구 지휘부의 대다수는 밀려났거나 제압되었고 극히 일부분만이 재교육을 받고 혁명에 합류했다. 결국 좀더 극적인 방식으로 장교들은 출신 계급의 운명을 따른 셈이었다.

    군대는 언제나 자기가 모시는 사회를 그대로 닮는다. 다만 사회 관계를 응축된 형태로 표현하여 이 관계의 긍정적 부정적 특징 모두를 극단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이 일반 사회와 다르다. 전쟁 중에 러시아는 위대한 지휘관을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을 고려하면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과도한 모험주의, 과도한 무식, 과도한 이기심, 음모, 출세주의, 탐욕, 무능력, 선견지명의 결여, 개인의 목숨 심지어는 안위와 건강까지 희생할 수 있는 지식과 재능과 욕구의 결여” 등이 총사령부의 특징이라고 총사령부 소속의 잘레스키 장군이 말했다. 첫 총사령관이었던 니콜라이 니콜라이예비치의 특징은 큰 키에 위엄 있는 무례함이 전부였다. 날카로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평범한 늙은 군대 서기인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인내심 하나로만 다른 장군들을 제압했다. 코르닐로프는 대담한 소장파 지휘관이었으나 그를 존경하는 자들조차 그가 약간 단순하다고 생각했다. 케렌스키의 전쟁장관 베르호프스키는 나중에 코르닐로프를 사자의 심장과 양의 두뇌를 겸비한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브루쉴로프 장군과 콜착 제독은 다른 장군들에 비해 교양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것 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데니킨은 근성이 없지는 않았으나 책을 5권이나 6권만 읽은 대단히 평범한 장군이었다. 이들 다음에는 유데니치, 드라고미로프, 루콤스키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프랑스어를 구사하거나 못하거나 술을 적당히 마시거나 지나치게 마시는 것 외에 범인과 다를 바 없었다.                             

    봉건 러시아처럼 부르주아 및 민주주의 러시아도 장교단에 대표들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은 수만 명의 소부르주아 청년들을 장교, 군대 서기, 군의관, 공병장교로 합류시켰다. 이들은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확고히 생각하고 있었지만 광범위한 개혁조치들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대체로 반동 지휘부를 추종한 이들은 짜르가 있을 때에는 두려움으로 혁명 후에는 확신을 가지고 반동 세력에 복종했다. 후방의 민주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에 복종한 것과 같은 식이었다. 화해주의 장교들은 이후 화해주의 정당과 같이 불행한 운명을 맞이했다. 다만 전선은 후방보다 천 배나 날카롭게 매사가 진행되었다. 집행위원회는 애매한 입장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으나 병사들 앞에서 장교들이 애매한 입장을 고수하기는 쉽지 않았다.

    민주주의 장교들과 귀족 장교들 사이의 악감정과 갈등은 군대를 소생시키기는커녕 붕괴시키는데 일조 했다. 구 러시아에 의해 성격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군대는 완전히 봉건적이었다. 겸손하고 생각이 없는 농민 청년일 뿐 개인 의식에 아직 눈뜨지 않은 병사, 이것이 장교들이 생각하는 모범적인 병사였다. 이것이 러시아 군대의 “민족” 전통이었다. 이것을 수보로프 전통이라고 하는데 원시 농업, 농노제, 농촌 공동체에 기초하고 있었다. 18세기에 수보로프 원수는 이 군대를 지휘하며 군사적 기적들을 창조하고 있었다. 귀족의 시각으로 인민을 사랑한 톨스토이는 자기가 창조한 플라톤-카라타예프를 통해 구 러시아 병사의 전형을 이상화했다. 이 병사는 혹독한 자연, 폭정, 죽음에 불평 한마디 없이 복종했다([전쟁과 평화]).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개인주의의 찬란한 승리를 가져다준 프랑스 혁명은 동시에 수보로프식 용병술을 퇴출시켰다. 프랑스 혁명 후  러시아 혁명 발발까지 즉 19세기 전부와 20세기초까지 짜르의 군대는 봉건 군대였기 때문에 계속 패배했다. “민족”전통에 기초한 러시아 군 지휘부는 병사의 개성을 경멸하고 수동적 관료주의 정신에 찌들어 있었다. 또한 군사학에 대해서는 완전히 깡통이었으며 군사적 영웅주의 즉 자기희생의 원칙을 전혀 지키지 않은 대신 치사하게 군대의 재산이나 훔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우월 의식을 드러내는 외양, 특권계층의 예식, 억압 체제, 심지어 특별한 은어 즉 병사가 장교에게 사용하게 되어있는 경멸할만한 노예적 표현 등에 장교의 권위가 기초하고 있었다. 짜르의 원수들은 말로만 혁명을 인정하면서 임시정부에 충성을 서약했다. 그리고 자기들이 저지른 죄악을 무너진 왕정 탓으로만 돌렸다. 니콜라스 2세가 역사 전체의 속죄양으로 선언되는 것을 이들은 정중하게 승인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였다! 인민 대중을 고귀한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것이 혁명의 도덕적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억압하여 특권을 누렸던 짜르의 장군들이 혁명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선의 사령관에 임명된 데니킨은 민스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혁명을 전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혁명을 군대에 도입하고 참주 선동을 일삼는 것은 나라를 망칠 뿐이다.” 고위 장성들의 멍청함이 전형적으로 드러난 예가 아닐 수 없다! 잘레스키 장군의 말에 의하면 하위 장성들의 요구는 단 하나였다: “제발 간섭만 말아달라.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 전부이다.” 그러나 혁명은 이들을 간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특권 계급이었기 때문에 얻을 것은 없어도 잃을 것은 많았다. 이들은 장교 특권 뿐 아니라 토지마저 내놓아야할 처지였다. 임시정부에 충성하여 자신들을 보호한 후 반동 장교들은 소비에트에게 치열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혁명이 병사 대중 그리고 자기들 장원에까지 침투하자 이들은 볼셰비키당은 말할 것도 없고 케렌스키, 밀류코프, 심지어 로지안코까지 지독한 배신자라고 생각했다.

    해군의 일상조건은 육군의 경우보다 더욱 가혹하였다. 따라서 내전의 씨앗은 해군에서 더 크게 자랐다. 강철 벙커에 강제적으로 몇 년간 감금되는 수병들의 생활은 음식의 문제에서조차 노예선 노예들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로 이들 옆에는 대부분 특권 계급 출신으로 해군 복무를 소명으로 여기는 장교들이 있었다. 이들은 조국, 짜르,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리고 수병을 군함의 가장 쓸모 없는 부분으로 여겼다. 서로 이질적이며 극도로 폐쇄적인 두 세계가 가까이 접촉하면서 서로를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 함대의 군함들은 군함 건조와 보수를 위해 노동계급이 밀집된 공업도시들을 항구 기지로 사용했다. 더욱이 군함의 공병 및 기계 병과에는 상당수의 숙련 노동자들이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함대는 혁명의 어뢰였다. 모든 나라의 혁명과 군대 봉기에서 수병들은 가장 폭발성이 강했다. 이들은 거의 언제나 첫 기회가 오자마자 과감하게 장교들과 충돌했다. 러시아 수병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크론슈타트 해군 기지에서는 혁명의 승리와 동시에 수병들이 장교들에게 유혈 보복을 벌였다. 장교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공포에 질린 듯이 수병들에게 혁명의 소식을 숨겼었다. 당연히 수병들이 증오했던 비렌 제독은 보복의 첫 희생자에 포함되었다. 다수의 지휘부 장교들이 수병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체포되지 않은 장교들은 무기를 압수 당했다.

    헬싱키와 스베아보르그에서 네페닌 제독은 3월 4일까지도 봉기의 소식을 숨겼다. 그는 이 동안에도 병사와 수병들을 탄압하겠다고 협박했다. 따라서 혁명의 소식을 접한 병사와 수병들의 봉기는 그만큼 더 격렬했다. 봉기는 하루 밤과 낮 동안 계속되었다. 다수의 장교들이 체포되었다. 가장 증오스러운 장교는 얼음이 꽁꽁 언 바다 밑으로 처넣어졌다. “무지몽매한 병사들”에게 결코 관대하지 않은 수하로프도 이렇게 썼다: “함대 장교들과 헬싱키 군 당국의 잔혹행위를 스코벨레프가 올바르게 묘사했다면 장교들에 대한 과격한 행동이 이렇게 드물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육군에서도 병사들은 장교들에게 여러 차례 유혈 보복을 했다. 맨 처음에는 장교들의 잔혹한 병사 구타에 대한 복수였다. 병사들은 원한에 사무친 학대를 수없이 당했기 때문이었다. 1915년에 채찍질이 규율을 유지하는 체벌로 군대에 공식 도입되었다. 가장인 경우가 종종 있었던 병사들이 장교의 재량에 의해 채찍질을 당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보복은 과거의 잔악 행위에 대한 복수만은 아니었다. 전국소비에트 협의회에서 어느 병사 대의원은 이미 3월 15일이나 17일에 현역군에 체벌 도입 명령이 떨어졌다고 보고했다. 전선에서 돌아온 어느 의회 의원의 말에 따르면 장교가 없는 틈을 타 카자흐 병사들이 그에게 말했다: “여기에 명령서가 있소.(이것은 그 유명한 명령 제 1호였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어제 이것이 도착했소. 그리고 오늘 장교가 나의 턱을 후려갈겼소.” 군대의 볼셰비키들은 화해주의자들만큼이나 분주하게 병사들의 보복행위를 제지했다. 그러나 유혈 보복은 발사된 총이 자동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불가피했다. 자유주의자들은 2월 혁명을 무혈혁명이라고 부를 근거가 없었다. 구태여 근거가 있다면 혁명에 가담하지 않은 자기들이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권력을 잡았다는 것뿐이었다.

    일부 장교들은 붉은 리본에 대해 격렬한 갈등을 조장했다. 병사들에게 이것은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했다. 이 과정에서 숨스키 연대의 지휘관이 살해되었다. 새로 도착한 지원군 병사들에게 리본을 달지 말라고 명령한 어느 지휘관은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위병 막사에 감금되었다. 장교 숙소에서 아직도 철거되지 않은 짜르의 초상화에 대해서도 종종 싸움이 벌어졌다. 장교들이 아직도 왕정에 충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개의 경우 이들은 혁명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짜르의 초상화를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 초상화 뒤에 구 체제의 귀신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상부의 치밀한 계획이 아니라 병사들의 경련과 같은 운동에 의해 군대에 새로운 체제가 들어섰다. 규율 유지와 관련된 장교의 권한은 폐지되지도 제한되지도 않았다. 다만 3월의 첫 몇 주일간 저절로 없어졌을 뿐이었다. 흑해 함대 사령관이 말했다: “규율 유지와 관련된 장교의 권한 자체가 없어졌다.” 바로 이것이 인민혁명이 진정 승리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규율을 강제할 권한이 없어진 군대 지휘부는 완전히 파산했다. 뛰어난 관찰력과 군사문제에 대한 관심을 보인 장교 스탄케비치는 지휘부의 파산을 의기소침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과거의 규율에 따라 훈련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쟁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훈련은 병사의 인내심과 복종심을 시험했을 뿐이었다.” 물론 장교들은 자기들의 파산상태를 혁명의 탓으로 돌리려했다.

    재빨리 잔인하게 보복을 가한 병사들은 동시에 순진한 어린애처럼 쉽게 남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자기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망각한 채 장교들에게 인간의 정을 베풀기도 했다. 신부이자 자유주의 의원인 필로멘코는 병사들에게 혁명사상의 기수이자 혁명의 보호자로 잠시 인식되었다. 교회의 낡은 사상은 우습게도 새로운 신념과 결합되었다. 병사들은 그를 머리에 이고 썰매 위에 그를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는 나중에 환희에 겨워 목이 멘 채 의회에서 말했다: “작별 인사를 끝낼 수 없었다. 병사들이 나의 손과 발에 입을 맞추었다.” 이 의원은 의회가 군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군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혁명이었다. 그리고 우연하게 유명해진 인물들에게 눈부신 광선을 반사시킨 것도 혁명이었다.

    전쟁장관 구츠코프는 수십 명의 장군들을 해임시켜 군 상층부를 상징적으로 정화시켰다. 그러나 이 조치는 병사들을 결코 만족시키지 못했다. 다만 고위급 장교들이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이들은 지위를 잃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장교 대다수는 대세에 거스르지 않기로 작정하고 혁명에 대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주머니 속에서는 주먹을 꽉 쥐었다. 병사들과 일상적으로 대면해야했던 중간급 및 하급 장교들에게는 상황이 더 나빴다. 여기에는 정화 조치가 없었다. 법적 조치를 강구하기 위해 어느 포병 중대의 병사들은 집행위원회와 의회에 편지를 보냈다: “형제들, 우리 내부의 적인 중대장 반체하자를 해임할 것을 겸허하게 요청합니다.” 그러나 청원에 대해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중대장에 대한 항명, 축출, 심지어는 체포 등 강구할 수 있는 수단은 전부 동원했다. 그리고 나서야 군 지휘부는 정신을 차리고 체포되거나 구타당한 장교들을 해임했다. 그리고 병사들을 징벌하려고 했으나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냥 넘어가는 일이 자주 있었다. 장교들은 이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병사들의 지위는 명확하게 개선되거나 확정되지 않았다.

    군대의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던 다수의 장교들은 총사령부에 전반적 정화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것만이 군대의 전투력을 소생시킬 수 있다고 이들은 말했다. 병사들도 의회 의원들에게 이에 못지 않은 설득력 있는 주장을 폈다: “전에는 불만이 있을 때 장교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가? 장교들의 태도는 예전과 같을 것이다.” 어느 의원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 질문은 군대 전체의 운명과 미래를 미리 말하고 있었다.

    전국의 모든 병과와 연대에서 상황이 이와 비슷했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차이는 상당했다. 발트해 함대의 수병들은 혁명의 소식을 듣자마자 장교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이들 바로 옆에 위치한 헬싱키 주둔군에서는 장교들이 4월초에 이미 병사 소비에트의 주도 그룹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위압적인 장군이 사회혁명당의 이름으로 연설하고 있었다. 증오심과 신뢰감이 이렇게 다양하게 공존했다. 그러나 군대는 마치 통신장비와 같이 병사들과 수병들의 정치적 정서를 하나의 주파수로 수렴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급격하고 결정적인 변화를 고대하고 있는 동안만은 군대의 규율이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전선에서 도착한 어느 소비에트 대의원이 말했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억압, 노예상태, 무식, 모욕 등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병사들이 인식하는 순간 선동이 시작되었다.” 인간 대다수에게 코뿔소의 가죽을 씌우지 않은 자연은 병사들에게도 신경계통을 부여했다. 혁명은 자연이 저지른 부주의를 이따금 상기시킨다.

    전선은 물론이고 후방에서도 우연한 핑계거리가 쉽게 갈등을 불렀다. 병사들은 “모든 시민들과 똑같이” 극장, 집회, 연주회 등에 참석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다수의 병사들은 이것을 공짜로 극장에 입장할 수 있는 권리로 해석했다. 그러나 전쟁부는 “자유”를 추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봉기를 수행한 인민이 플라톤주의나 칸트주의의 관념론에 빠질 리가 없었다.  

    주둔군 부대나 연대에서 규율의 낡은 피부는 때와 장소를 달리하여 여러 방식으로 갈라졌다. 어느 지휘관은 자기 연대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문이 배포되고 외부의 선동가가 도착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저항할 수 없이 거대한 깊이와 규모의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자유주의 의원 야누쉬케비치는 전선에서 돌아온 후 이렇게 상황을 일반화했다: 농민으로 구성된 “신참” 부대에서 규율이 가장 크게 무너졌다. “좀더 혁명적인 연대에서는 병사와 장교의 사이가 아주 좋다.” 사실 규율은 부농들로 구성된 특권 기병대, 노동자와 지식인의 비율이 높은 포병 및 기계화 부대의 두 축으로 유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토지를 소유한 카자흐들은 가장 끝까지 규율을 유지했다. 얻을 것은 하나도 없고 잃을 것은 많은 농민혁명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혁명 후 두 번 이상 카자흐 사단들이 농민을 토벌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규율은 날짜와 속도의 차이를 두었을 뿐 붕괴하고 있었다.

    맹목적인 투쟁에는 밀물과 썰물이 있었다. 장교들은 상황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병사들은 다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일시적 소강상태 즉 휴전이 발효중인 몇 주일 또는 며칠간 구체제 군대를 붕괴시키고 있던 사회적 증오심은 더욱 격화되었다. 빈번하게 이것은 달아오른 대기의 벼락처럼 작렬했다. 모스크바의 어느 원형극장에서 병사와 장교를 망라한 상이용사들의 집회가 열렸다. 병사 상이용사는 장교들을 비난하는 연설을 시작했다. 그러자 장교 상이용사들은 발을 구르고 지팡이와 목발을 두드리며 항의했다. 그러자 연설 중인 병사가 말했다: “장교 여러분, 채찍과 주먹으로 병사들을 모욕한 지 얼마나 지났소?” 부상당하고 포탄에 의해 정신 이상을 일으키고 신체가 찢겨진 병사들과 장교들은 마치 마주보는 두 벽처럼 대치했다. 다수의 상이 병사들과 역시 소수의 상이 장교들이 목발을 짚은 채 마주 보았다. 원형극장의 이 끔찍한 광경은 임박한 내전의 격렬함을 예고하는 듯했다.

    군대와 나라 전체를 휘감고 있던 동요와 모순은 하나의 영원한 문제인 전쟁을 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그리고 흑해에서 카스피해 너머 페르시아의 깊은 곳까지 측정할 수 없이 긴 전선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선 곳곳에 68개 보병 군단과 9개 기병 군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앞으로 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전쟁은 어떻게 될 것인가?

    군대는 혁명 전에 보급문제를 상당히 보강해 놓았었다. 전쟁에 필요한 국내 생산은 증대되었고 무르만스크와 아르항겔스크를 통한 전쟁 물자의 수입 특히 연합국으로부터 대포의 수입도 증대되었다. 전쟁의 첫 몇 년간에 비해 이제 소총, 대포, 탄창 등은 비교할 수 없이 보급이 원활했다. 보병 사단들이 새로 증편되고 있었다. 공병대도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것에 근거하여 상당수의 불행한 사령관들은 전쟁 승리 직전에 혁명이 터져 모든 것을 망쳤다고 증명하려고 나중에 무진 애를 썼다. 12년 전에 쿠로파트킨과 리네비치는 이와 유사한 근거로 위테 때문에 러시아가 일본에 승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상 1917년에 러시아는 승리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적었다. 탄약은 증대되었지만 1916년 말 식량은 대단히 부족했다. 티푸스와 괴혈병이 전투보다 더 많이 희생자를 앗아갔다. 수송체계의 붕괴 하나 때문에 대규모 군대 재조직 전략은 전부 취소되었다. 더욱이 짐을 끄는 말이 대단히 부족하여 대포를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딴 곳에 있었다. 군대의 사기가 완전히 절망적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군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전투의 패배, 후퇴, 지휘부의 부패 등으로 군대는 철저히 무너지고 있었다. 나라의 신경체계를 바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군대의 붕괴는 행정 조치로 정지될 수 없었다. 벌레가 기어다니는 고깃덩어리를 보고 구역질을 느끼듯이 탄창 더미를 보고 병사들은 구역질을 느꼈다. 모든 것이 전부 필요 없고 가치 없는 것 같았고 모든 것이 기만과 도적질처럼 보였다. 장교는 그에게 확신을 줄만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심지어 그의 턱을 주먹으로 갈겨야 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도 없었다. 장교 자신이 우선 상부에 의해 속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욱이 병사들 앞에서 상관에 대한 수치심을 빈번히 느꼈다. 군대는 치유불능 상태로 병들어 있었다. 군대는 혁명의 승패를 결정할 수는 있었으나 전쟁은 수행할 수 없었다. 장교나 병사 어느 누구도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군대도 인민도 전쟁을 원치 않았다.

    물론 특별한 종류의 생활을 누리고 있던 군 고위 당국은 대규모 작전, 춘계 공세, 다다넬스 해협의 점령 등에 대해 단순히 습관상 지껄이고 있었다. 크림 반도에서는 다다넬스 해협의 점령을 위해 대규모 군대가 준비되었다. 최고 정예 부대들이 해협을 포위하기 위해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게시판에는 써 있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위병 연대들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혁명 발발 2일전인 2월 25일 군대의 훈련을 시작한 한 장교의 말에 의하면 증원군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동요하지 않는 푸른색, 엷은 갈색, 회색의 눈동자들에는 전투에 대한 의욕이 조금도 없었다.... “이들의 생각과 열망은 오직 하나 즉 평화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런 증언은 수없이 많다. 혁명은 이미 썩어가고 있던 것을 표면으로 드러냈을 뿐이었다. “전쟁을 끝내라!”는 구호는 이 때문에 2월 혁명 중 가장 주요한 구호의 하나였다. 이 구호는 여성 시위대, 비보르그 지구 노동자들, 친위병 연대에서 터져 나왔다. 3월초 의회 의원들이 전선을 순시했을 때 특히 나이 많은 병사들은 계속 질문했다: “토지에 대해서는 무슨 말이 오가고 있습니까?” 의원들은 토지 문제는 제헌의회에서 결정할 것이라고 피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 모두가 품고 있었으나 표현하지 못한 것을 밝히는 목소리가 울렸다: “글쎄, 토지는 내가 살아있지 않으면 필요 없지요.” 먼저 평화 그리고 다음에 토지! 이것이야말로 혁명을 일으킨 병사들의 원래 강령이었다.

    3월말 가까이 전국소비에트 협의회가 열렸다. 여기서 애국심을 자랑하는 연설들이 빈번히 울려 퍼졌다. 이때 참호의 병사들을 대표하는 대의원들 가운데 하나가 전선의 병사들이 혁명을 맞이하는 태도를 아주 진지하게 보고했다: “모든 병사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을지 모른다.’” 참호의 병사들은 대의원에게 협의회에서 이렇게 말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이와 마찬가지로, 동지여러분, 우리는 전쟁이 끝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현실의 살아있는 목소리였다. 특히 평화에 대한 갈망이 더욱 그랬다. 어쩔 수 없다면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위에 있는 자들이여, 빨리 서둘러 평화를 가져다주시오.

    전혀 부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 있던 프랑스 전선의 러시아 군대도 같은 감정에 휩싸여 동일한 붕괴의 단계들을 밟고 있었다. 중년의 어느 문맹 농민 병사는 자기 장교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짜르가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모두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짜르가 우리를 전쟁터로 내몰았는데 또다시 참호에서 썩어야 한다면 자유는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외부에서 주입되지 않은 병사들의 진정한 혁명철학이었다. 어느 선동가도 이처럼 단순하고도 설득력 있는 말을 생각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반(半)자유주의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을 애국적 봉기로 치장하려했다. 3월 2일 밀류코프는 프랑스의 기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러시아의 전쟁 승리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이 말에서 위선은 자기기만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그리고 위선이 자기기만보다 더 컸다. 차라리 정직한 반동들이 상황을 더 정확히 파악했다. 비록 반동적 증오심이 가득 담긴 언어이기는 했지만 독일 범슬라브주의자이며 그리스정교회 루터파이자 맑스주의 왕당파였던 폰 스트루베는 혁명의 진짜 원천을 더 정확히 규정했다: “인민 특히 병사 대중은 애국심 때문에 혁명에 나서지 않았다. 이들은 폭동을 통해 징집해제를 노렸으며 전쟁 연장에 곧바로 대항했다. 즉 혁명은 전쟁을 중지시키기 위해 일어났다.”

    이 말에는 진실과 함께 비방도 섞여있다. 봉기를 통한 징집해제는 전쟁의 직접적 결과였다. 혁명은 징집해제를 재촉하지 않았고 중지시켰을 따름이었다. 혁명 전에 아주 빈번했던 탈주는 혁명이 일어난 후 첫 몇 주일동안 아주 뜸했다. 군대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혁명이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병사들은 전선을 지키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전선을 버릴 경우 새 정부가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이들은 생각했다.

    3월 23일 정예 보병 사단장은 이렇게 보고한다: “러시아군은 방어를 할 뿐 공격은 할 수 없다고 병사들은 확실히 믿고 있다.” 고참 혁명가이자 이후 볼셰비키 정권에서 총사령관을 맡았던 크릴렌코 해군 소위는 당시 병사들의 확고한 전쟁관을 증언했다: “전선은 지키되 공격은 하지 않는다.” 좀더 엄숙하지만 전적으로 진실한 언어로 표현하면 이것은 혁명으로 얻어진 자유를 방어하겠다는 노선이었다.

    “총검을 땅에 박을 수는 없다!” 당시 애매하고 모순적인 정서에 사로잡혀 있던 병사들은 볼셰비키들의 말도 빈번히 거부했다. 아마 볼셰비키들의 솜씨 없는 연설을 듣고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볼셰비키들은 혁명 방어에 관심이 없어서 정부의 평화조약 체결을 막을 수도 있다. 사회애국주의 신문들과 선동가들은 이 생각을 병사들 속에 더욱더 깊이 심어놓았다. 그러나 볼셰비키들의 연설을 때때로 막기는 했으나 병사들은 혁명 첫날부터 공세는 결단코 거부했다. 이것은 적절한 압력을 가하면 해소될 수 있는 일종의 오해라고 수도의 정치가들은 생각했다. 이 결과 전쟁 선동이 크게 고조되었다. 수백만 부의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부르주아 신문들은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한다”는 관점에서 혁명을 조명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갈수록 대담하게 화해주의자들은 같은 곡조를 흥얼거렸다. 혁명이 터질 당시 군대 내에서 매우 미약했던 볼셰비키들의 영향력은 파업에 대한 벌로 전선에 배치된 수 천명의 노동자들이 다시 공장으로 복귀하자 더 약화되었다. 따라서 평화에 대한 욕구가 가장 강렬한 전선은 이 욕구를 공개적이고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자신들을 위로하는 환상을 찾고 있던 지휘관들과 인민위원들은 실제 상황을 속일 수 있었다. 당시의 신문기사들과 연설들은 빈번하게 주장했다: 병사들이 공세를 거부한 이유는 이들이 “병합과 배상 없는 평화”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해주의자들은 열심히 주장했다: 방어는 공세를 허용하며 때때로 이것을 필요로 한다. 이들은 이 현학적인 문제가 주요 이슈인 것처럼 착각했다! 공세는 전쟁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기다리면서 전선을 지키는 것은 정전을 의미했다. 병사들이 주창한 방어 전쟁의 이론과 실천은 독일과의 평화조약을 의미했다. 지금 이것은 공공연히 표현되지는 않았으나 나중에 병사들은 아주 공개적으로 이것을 요구했다. “우리를 건드리지 않으면 우리도 너희들을 건드리지 않겠다.” 이것 이외에 군대가 전쟁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병사들은 공세의 주장에 여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다. 왜냐하면 공세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반동 장교들이 병사들을 확고히 제압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대화 중에 “독일군에게는 총검을, 총 개머리판은 내부의 적에게”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여기서 총검은 방어적인 의미였다. 참호의 병사들은 다다넬스 해협은 생각도 못했다. 평화에 대한 욕구는 땅 밑에 흐르는 강력한 물길이 되어 곧 표면으로 솟아오를 참이었다.

    밀류코프는 군대 내에 부정적인 징후가 “관찰되고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혁명 후 오랫동안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러시아군은 연합국이 자기에게 내린 과제인 공세를 개시할 능력이 있었다. 그는 역사학자의 특성을 드러내며 이렇게 썼다: “볼셰비키들의 선전은 곧바로 전선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혁명 후 1개월 또는 1개월 반 동안 군대는 건강했다.” 그는 문제 전체를 선전의 수준에서 조망한다. 마치 이것이 역사 과정 전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볼셰비키당이 진짜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정당에 대해 뒤늦게 투쟁하면서 사실을 왜곡했다. 앞에서 이미 군대의 실상은 충분히 파악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혁명 후 첫 몇 주일간 또는 첫 며칠간 지휘관들이 군대의 전투력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었는지를 알아보자.

    3월 6일 북부 전선의 총사령관 루즈키 장군은 집행위원회에 이렇게 보고한다: 병사들의 완벽한 항명이 시작되고 있으므로 인기 있는 인물들이 군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전선에 파견되어야 한다.

    흑해 함대의 총사령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혁명 첫날부터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전쟁은 패배했다는 것이 명확했다.” 또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콜차크도 같은 생각이라고 밝혔다. 병사들의 폭력으로부터 자기 참모장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는 전선 사령관직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국 근위대 사령관 이그나티에프 백작은 3월 나보코프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전쟁은 이미 끝났다. 우리는 더 이상 싸울 능력도 의지도 없다. 이것을 명확히 이해해야한다. 머리가 있는 인간이라면 전쟁을 고통 없이 끝내는 방법을 생각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재앙이 닥칠 것이다....” 동시에 구츠코프는 자기가 이런 편지들을 천 통씩이나 받고 있다고 나보코프에게 말했다. 피상적으로 매우 희망에 찬 보고서들은 아주 드물었는데 대부분 자체 보완 설명에 의해 모순을 일으켰다. 제 2군 사령관 다닐로프는 이렇게 말한다: “승리하려는 군대의 의욕은 일부 연대에서는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그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기강이 해이해졌다....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1개월에서 3개월까지 공세를 연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리고는 예상치 않은 보완 설명이 뒤따른다: “증원군의 50%만이 도착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군대의 규모가 축소되고 규율이 동일하게 해이해진다면 공세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용감한 제 51 보병 사단장은 이렇게 보고한다: “우리 사단은 방어 능력이 확실히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즉시 이렇게 덧붙인다: “병사 및 노동자 대의원들의 영향력으로부터 군대를 구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 182 사단장은 군단장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하루가 지날수록 사소한 일들에 대한 병사들의 오해가 증대하고 있다. 이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병사들은 더욱더 신경질적이 되고 있고 장교들은 더 그렇다.”

    이 산발적인 증언들은 얼마든지 있다. 3월 18일 총사령부에서는 군대의 실상을 논의하는 고위 장성들의 회의가 열렸다. 총사령부 중앙기관들의 결론은 전부 일치했다: “예비군들 사이에 소요가 있기 때문에 전선의 병력 손실을 보충할 증원군이 부족하다. 군대는 병들어 있다. 장교들과 병사들의 관계를 조정하는데 아마 2개월 또는 3개월이 걸릴 것이다.” 이 질병은 호전되지 않고 악화될 뿐이라는 것을 장군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은 장교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군대가 술렁이며 탈주 충동이 상당하다는 것을 주목했다. “군대의 전투력은 하락했으며 현재 공세 가능성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은 이렇다: “춘계로 예정된 공세를 그대로 진행하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불가능하다.”

    일주일 일주일이 지나면서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으며 유사한 증언들은 끝없이 증가하고 있다. 3월말 제 5군 사령관 드라고미로프 장군은 루즈키 장군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전투 기상이 떨어졌다. 공세에 대한 욕구가 병사들에게는 없다. 이뿐 아니라 방어를 단순히 고집하는 성향도 하락하여 전쟁의 성공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군대의 모든 부위들에 확산된 정치는 군대 전체에 오직 한가지 욕구만 조성했다: 전쟁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자.”

    반동 지휘부의 기둥 가운데 하나인 루콤스키 장군은 새로운 상황에 불만을 품은 채 어느 군단의 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그의 말에 의하면 규율은 포병 및 공병 사단에만 존재했다. 이 사단들에는 정규군 장교와 병사의 수가 많았다. “3개 보병 사단은 모두 완전히 붕괴하고 있다.”     

    혁명이 가져다준 희망으로 줄어들었던 탈주 사태는 실망이 퍼지면서 다시 증가했다. 알렉세이예프 장군의 보고에 의하면 4월 1일부터 7일까지 일주일 사이에 약 8천 명의 병사들이 북부 및 서부 전선에서 탈주했다. 그는 구츠코프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군대의 ‘뛰어난’ 규율에 대한 무책임한 보고들을 진짜 황당한 마음으로 읽었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것은 독일군을 속이지 못할 것이며 우리에게는 치명적인 자기기만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보고서들은 볼셰비키들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점은 주목할 만하다. 장교들의 대다수는 이 기이한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들은 군대의 붕괴 원인이 신문, 선동가, 소비에트 등 일반적으로 “정치” 즉 2월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일이 잘 풀린 것이라고 희망한 낙관주의자 장교들을 개인적으로 만날 수는 있었다. 새 정부를 불편하지 않게 하려고 현실로부터 의도적으로 눈을 감은 자들은 더 많았다. 반면에 특히 최고위 장성들 사이에는 상당수가 군대의 붕괴 징조를 의식적으로 과장하여 정부가 결단을 내릴 것을 유도하려했다. 그러나 이들은 결단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밝히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본적인 그림은 의심의 여지없이 명확하다. 군대가 병들어 있음을 알아챈 혁명은 군대 붕괴의 무자비한 과정을 시간이 갈수록 더욱 잔인하게 명확한 정치형태로 위장했다. 평화에 대한 타오르는 갈망과 군 지휘부와 국가 지배계급들 일반에 대한 병사 대중의 적대감을 혁명은 논리적 결론으로 이끌고 갔다.   

    4월 중반에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군대의 정서를 정부에 보고했다. 보고 회의에서 그는 과장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보코프는 이렇게 썼다: “두려움과 절망이 나를 크게 사로잡았던 당시를 나는 지금도 잘 기억한다.” 혁명 후 첫 6주 후에 있었음에 틀림없는 이 보고 회의에 밀류코프는 참석했을 것이다. 사실 동료 장관들 그리고 이들을 매개로 사회주의자 친구들을 겁주려는 생각으로 알렉세이예프를 소환한 것은 바로 그였을 가능성이 많다.

    실제로 구츠코프는 보고 회의 후에 집행위원회 대표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렇게 불평했다: “독일군과의 파멸적인 우애가 시작되었다. 직접적인 항명의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 명령이 이행되기 전에 군대 조직과 총회에서 먼저 논의되고 있다. 이런 저런 연대들은 적극적인 작전에 대해 얘기도 듣지 않으려 한다. 평화가 내일 올 것이라고 희망하면 (여기서 구츠코프는 지혜롭게 이렇게 덧붙인다) 누가 오늘 목숨을 버리려 하겠는가.” 이로부터 전쟁장관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평화에 대해 크게 떠드는 것을 중지해야한다.” 그러나 혁명은 인민에게 말도 못하고 간직했던 생각을 크게 말하도록 가르쳤다. 따라서 그의 생각은 혁명을 중지시키자는 것과 같았다.

    물론 병사는 전쟁 바로 첫날부터 죽거나 싸우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대포를 끄는 말이 무거운 대포를 진흙탕 속에서 끌고 싶지 않은 것처럼 죽음과 전쟁을 원치 않았다. 말과 같이 그는 저들이 자기에게 매어 놓은 짐을 벗어 던질 수 있을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의지와 전쟁 사이에는 아무 연결고리가 없었다. 그러나 혁명이 그에게 이것을 보여주었다. 수백만 병사들에게 혁명은 개인적 삶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의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에 대한 권리를 의미했다. 총알과 포탄으로부터 자기 생명을 보호할 권리 그리고 같은 의미에서 장교의 주먹으로부터 자기 얼굴을 보호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했다. 군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근본적 심리변화 과정은 앞에서 말했다. 이것은 병사들이 개인적 권리에 눈뜨는 것을 의미했다. 이 개인적 권리에 대한 각성은 종종 혼란스러운 형태를 띤 채 활화산처럼 분출했다. 교육받은 유산 계급들은 이 현상을 나라에 대한 배신행위라고만 규정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열화와 같은 연설, 열정적인 저항, 장교들에 대한 유혈 보복은 몰개성적이며 선사(先史)적 재료인 병사 대중이 진정하게 국민이 되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대중은 개인적 권리를 물밀듯이 요구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은 이것을 증오했다. 하지만 이 현상은 2월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에서 나왔을 뿐이었다. 개인적 권리의 촉진이 부르주아 혁명의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2월 혁명의 유일한 내용은 아니었다. 농민과 농민의 자식인 병사 외에 노동자들도 이 혁명에 참여했다. 노동자는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이 한 개인임을 느꼈고 전쟁을 증오했다. 또한 전쟁에 대항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전쟁터에 끌려갔다. 그에게 혁명은 권력을 정복한다는 명백한 사실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상이 부분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의미했다. 왕정의 타도는 그에게 첫 단계에 불과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목적을 향해 급히 나아갔다. 그에게 문제는 병사와 농민들이 자기와 함께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병사는 물었다: 내가 살아있지 않으면 토지는 무슨 소용이냐? 극장의 닫혀진 문을 보며 그는 노동자와 함께 반복해서 질문했다: 자유로 향한 열쇠가 지배자의 손에 있다면 자유가 무슨 소용인가? 2월 혁명의 측량할 수 없는 혼돈 속에서 10월 혁명의 강철과 같이 날카로운 광선이 이미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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