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공산주의자
18.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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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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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애 중 40년이 넘게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는 맑스주의 사상과 조직을 옹호하고 발전시키는 데 전념하였다. 성년에 이르자마자 그는 짜르체제와 부르조아 세계 전체에 대항하여 맑스주의를 방어하였다. 제1차 세계 제국주의 전쟁 와중에 그는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애국주의자들과 수정주의자들에 대항해 혁명적 국제주의를 옹호했다. 러시아 혁명 와중에 그는 레닌과 함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에 대항하여 볼셰비즘의 강령을 옹호하였다. 1917년 10월 혁명이 승리한 후 그는 제국주의 세력들의 간섭에 의해 발발한 내전의 전선에서 적군(Red Army)의 지휘자로 노동자국가를 방어하는 데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날카로운 논리와 열정을 발휘하여 정치 논쟁의 영역에서 지도적 선전가로서 맑스주의 원칙들을 옹호했다. 레닌과 함께 그는 제3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 코민테른)을 창립하여 전세계에 맑스주의 사상과 조직을 전파-확대하였다.

그러나 맑스주의를 옹호한 트로츠키의 가장 거대한 투쟁들은 레닌이 사망한 이후에 전개되었다. 러시아 공산당 내부에서 관료적 반동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트로츠키는 좌익반대파(Left Opposition)을 조직하여 스탈린-카메네프- 지노비에프 삼두동맹의 쁘띠부르조아적 정치노선에 대항하여 볼셰비키 강령을 옹호하였다. 곧이어 알마아타로 추방당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스탈린 파벌에 의한 수정주의 경향의 증대에 대항하여 계속 투쟁하였다. 국외로 추방당한 후 망명지 터어키에서 그는 국제적 차원의 공산주의 좌익반대파(Communist Left Opposition) 를 조직하였다. 1933년 스탈린 일당이 장악한 제3인터내셔널이 독일에서 투쟁도 하지 않고 파시즘에 투항하자 트로츠키는 제4인터내셔널의 창립을 촉구했다. 이후 세계 노동계급 혁명투쟁을 이끈 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1938년에 창립되었다.

스탈린의 자객에 의해 암살당하기 전 마지막 10년 동안 그는 파시즘, 부르조아 민주주의 여론, 온갖 다양한 쁘띠부르조아 노선 {제3인터내셔널의 극악한 스탈린주의, 제2인터내셔널의 노쇠한 사회개량주의, 무기력한 중도주의, 초좌익주의, 무정부주의적 노동조합주의(anarcho-syndicalism)} 등에 대항하여 맑스주의를 옹호했다. 저작을 통해 그는 모든 종류의 반(反) 맑스주의 경향들을 분석-비판하였다. 제2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으로 절정에 달한 전세계적 반동기에 트로츠키는 혁명적 사회주의의 위대한 옹호자로 굳세게 일어섰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을 전후하여 전개된 맑스주의를 옹호하는 그의 마지막 투쟁은 제4인터내셔널 미국 지부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고 타계급의 이데올로기적 물리적 압박에 시달리자 제4인터내셔널 미국 지부인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의 일부 지도적 당원들이 "우리 운동의 이론적 기초, 정치원칙, 조직방식 등을 거부하고 타도하려고 시도하였다."(본문 [버넘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그러나 이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볼셰비키당을 비롯한 혁명활동의 경험에 기초하여 트로츠키가 이들의 시도를 이미 이렇게 예견하고 경고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제국주의 전쟁의 발발로 인해 당대오의 위기는 불가피하게 촉진될 것이다; 부르조아 여론의 공격에 당내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당내 노동계급 경향은 이러한 위기에 대비해야한다. 트로츠키는 이 위기의 첫 징후를 간파하고 그 성격과 이후 발전경로를 예견했으며 당내 위기로 시작된 분파투쟁에서 노동계급 다수파를 지도하였다.

트로츠키의 본 저작 [맑스주의를 옹호하며(In Defense of Marxism)]는 사회주의노동자당을 시험하고 단련시킨 투쟁을 소상하게 밝히면서 맑스주의 사상에 기여한 트로츠키의 가장 성숙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맑스주의를 옹호하는 이 마지막 전투에서 트로츠키는 자신의 모든 역량과 의지를 쏟아부었다. 이 저작에 실린 그의 마지막 편지는 1940년 8월 17일에 작성되었다. 이 날짜는 그가 스탈린의 자객에 의해 살해되기 불과 3일 전이었다.

[긁힌 상처가 도져 몸이 썩어들어가다](From a Scratch -- To the Danger of Gangrene)라는 제목의 글에서 트로츠키는 미국 트로츠키운동 내부에 쁘띠부르조아적 편향을 가진 분자들이 이미 오랫동안 존재해 왔음을 증명하였다. 이 경향은 그동안 조직적으로 그리고 공개 정치 영역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제2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발발을 전후하여 결국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당내에 쁘띠부르조아 반대파가 등장하여 맑스주의를 공격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소련의 사회 성격 문제였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1917년 11월 7일 러시아 혁명이 승리한 이후부터 러시아 혁명과 이 혁명의 산물인 소비에트체제의 성격 문제는 모든 나라 노동운동 대오의 혁명적 경향과 비혁명적 경향 사이에 날카로운 분리선을 그어왔다. 소련에 대한 노선은 언제나 진정한 혁명적 경향과 부르조아 세계의 압력에 동요하고 후퇴하고 투항하는 모든 색조의 정치적 경향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잣대가 되어왔다. 멘셰비즘, 사회민주주의, 무정부주의, 조합주의, 중도주의, 스탈린주의 등이 바로 후자를 대표하여 왔다.

소련 문제에 대한 당내 논쟁은 곧 혁명의 모든 근본 문제들을 이 논쟁 속으로 끌여들였다.

1939년 8월 22일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자 즉시 소위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소련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선전의 포화가 터져나왔다. 동시에 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의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의 동요가 본격화되었다. 독소불가침조약이 선언된 바로 그날 당 정치위원회(Political Committee) 회의에서 소수파 지도부의 일원인 맥스 섁트먼(Max Shachtman)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동의안을 제출하였다: "정치위원회 다음 회의는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독소불가침조약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이후 정세 발전전망을 논의한다." 섁트먼은 소련을 방어해야 한다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으나 이 동의안은 소수파 이론가 제임스 버넘(James Burnham)의 입장에 그가 근접하고 있음을 암시하였다. 이전까지 그는 버넘의 노선에 반대해 왔다. 이보다 2년 전에 당 정치위원 버넘은 제4인터내셔널의 기본노선에 의문을 표시하는 문건들을 발표했었다. 소련에 대한 제4인터내셔널의 기본 노선은 다음과 같았다: 후진국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은 세계혁명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서 고립되었다; 이 결과 비노동계급 세력이 소련 사회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이 세력을 대변하는 스탈린 일당의 통치로 인해 소련의 노동자 국가는 퇴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정치권력은 비노동계급 세력을 대표하는 스탈린 관료집단에 의해서 장악되었으나 소련의 경제적 토대는 여전히 집단적 국가소유를 유지하고 있다; 이 결과 소련의 노동자 계급과 근로인민은 이 10월 혁명의 성과를 여전히 누리고 있다; 완전고용, 의식주의 보장, 무료 교육 및 의료 서비스 등이 이것이다; 따라서 소련은 여전히 노동자국가이며 세계 노동계급은 제국주의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10월 혁명의 성과가 남아있는 소련을 무조건 방어해야 한다. 제4인터내셔널의 이 기본 입장이 이들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제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예고한 독소불가침조약은 기존 노선을 반대하는 세력이 조직의 노선에 반기를 들도록 만들면서 조직내 일대 위기를 촉발시켰다.

이로부터 일주일 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이와 동시에 지금까지 숨을 죽였던 당내 쁘띠부르조아 경향이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었다. 9월 3일에 열린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섁트먼은 그 다음 주 전국위원회(National Committee) 정기회기를 시작하고 의안으로 러시아 문제를 재고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동의안을 제출하였다. 당내 다수파는 동의안에 찬성하고 소수파가 자신의 입장을 문건으로 제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동시에 다수파는 트로츠키가 자신의 견해를 표명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부여받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소수파는 이 동의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이 행위는 트로츠키에 대한 소수파의 적대감을 단적으로 드러내었다.

9월 5일 버넘은 전국위원회 총회에 [전쟁의 성격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문건을 제출하였다. 이 글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어떤 의미에서도 소련을 노동자국가로 간주할 수는 없다. 소련의 전쟁 참여는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에 전적으로 종속될 것이다. 따라서 (이 전쟁은) 소련에 그나마 남아있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방어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할 것이다." 그리고 "세계 노동계급의 모든 혁명적 잠재력은 소진되었고 사회주의 운동은 파산했으며 자본주의 체제는 이제 새로운 착취계급의 등장을 통해 `관료적 집산주의(bureaucratic collectivism)'로 변모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로부터 일주일 후 트로츠키는 편지를 통해 이 선언의 진정한 의미를 철저히 폭로하기 시작했다.

트로츠키는 분파투쟁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작성한 문건 [전쟁에 돌입한 소련]에서 버넘의 입장을 상세히 해부하였다. 이 문건은 제 시간에 도착하여 전국위원회 총회에서 토론되었다. 쁘띠부르조아 소수파는 당시 아직도 공개적인 분파는 아니었다. 그런데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이탈리아의 브루노 알(Bruno R.) 등이 주장한 논거가 소수파의 논거와 유사하였다. 따라서 트로츠키는 이들의 주장들을 활용하여 소수파를 비판했다. 이 문서는 버넘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담고 있었다. 즉 이들은 러시아 문제와 관련하여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에 도전하는 것은 곧 과학적 사회주의의 근본 원칙에 대한 도전과 같다고 경고하였다.

쁘띠부르조아 소수파는 세 그룹의 결합체였다. 버넘은 소수파의 지도적 이론가로서 이 분파의 반맑스주의적 성격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하였다. 에이번(Abern)이 거느린 파벌은 겉으로는 트로츠키의 노선에 동조한다고 주장하면서 버넘의 노선을 거부하였다. 이 두 지도적 인사들의 중간에 위치한 섁트먼은 맑스주의 사상에 대해 온갖 의문과 유보를 표시했으며 이 태도를 트로츠키와 버넘의 노선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했다.

따라서 에이번과 섁트먼의 파벌은 아직 버넘의 노선에 동조할 태세가 아니었다. 이들은 여전히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에 충성하는 체 했다. 결국 이 두 그룹은 버넘과 작당하여 그룹의 실체를 은폐하면서 이후 분파 결성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즉 맑스주의의 근본원칙을 검토하기를 거부하고 논쟁이 직접적인 "구체적" 사안들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로서 이들은 무원칙한 동맹의 공통분모를 찾아내었다.

9월 30일 개최된 전국위원회 총회에서 자신의 문건에 대해서 발언할 차례가 오자 버넘은 온화한 표정으로 이 문건의 내용을 철회한다고 선언했다. 대신 그의 변호사 섁트먼은 반대파의 공동강령에 대한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것은 "독소불가침조약이 제기한 구체적 문제들에 대한 시급한 해답"을 내리는 것으로 논쟁을 제한하여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한 근본적인 논쟁을 회피하고 연기시키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적군(赤軍) 의 폴란드 침공은 "제국주의 정책"에 기초한 행위로서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 방어노선을 수정"할 필요성을 제기했다고 이 결의안은 주장했다.

이 때 에이번 파벌은 무원칙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어 "소련의 사회 성격과 스탈린주의의 역할에 대한 기존 입장을 재확인하고" 트로츠키의 문건 [전쟁에 돌입한 소련]의 "정치적 결론을 인정한다"는 당내 다수파의 동의안과 섁트먼의 결의안 양자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소수파는 트로츠키의 정세관 그리고 캐넌이 주도하고 있다고 이들이 주장한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의 "조직 방식"에 대해 다른 입장을 보였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와 그의 지지자들은 완전히 원칙을 벗어난 이 동맹이 반맑스주의적 경향을 그 내부에 숨기고 있다고 간파했다. 섁트먼이 제출한 결의안의 이론적 근원은 너무도 명백했다.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한 의문부호는 버넘의 입장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에 불과했다. 섁트먼이 적군의 행동을 "제국주의 정책에 기초한 행위"였다고 낙인찍었을 때 그는 이미 버넘의 입장을 그대로 반복한 셈이었다. 셔먼 스탠리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와 자신의 문서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하여 다시 또다시]에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못을 박았다: 맑스주의자는 "제국주의"를 금융자본의 팽창주의 정책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전국위원회 총회는 소수파의 결의안이 "부분적으로는 당의 기본 입장을 수정하려는 시도이며 또 부분적으로는 소련 문제에 대한 우리의 기존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려는 동지들의 입장을 은폐하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트로츠키의 문건 [전쟁에 돌입한 소련]의 입장을 공식으로 채택했다.

이에 대해 소수파는 미국 전역에 걸쳐 조직을 꾸리기 시작했으며 제4인터내셔널의 다른 지부들에게도 지지를 구했다. 뉴욕 지회의 다수파는 일련의 당원총회를 개최하여 기본적인 쟁점들을 표면으로 드러내려고 계속 시도하였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두 번째 문건 [다시 또다시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하여]에서 버넘 추종자들이 유포하고 있는 주장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 논쟁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동지들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맑스주의의 수정은 사실은 `비부르조아적', `비노동계급적' 새로운 국가 유형을 제시하려는 동지들의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 제4인터내셔널의 입장을 지지하는 캐넌의 연설 속기록과 버넘의 입장을 은폐하고 자기가 제출한 총회 결의안의 매우 불안정한 입장을 지지하려는 섁트먼의 연설 속기록은 모두 트로츠키에게 보내졌다. 속기록을 읽자 트로츠키는 즉시 섁트먼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트로츠키는 자신의 글 [전쟁에 돌입한 소련]의 입장에 동의한다고 말하면서 이 문제를 대충 얼버무린 섁트먼의 수정주의 노선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당내 다수파는 이후 몇 주 동안 [당내 토론집]에 글들을 실어 이견의 근본 성격을 더욱 명확하게 폭로했다. 그러나 소수파는 원칙문제에 대한 논쟁을 끈질기게 회피하였다. 그러자 트로츠키는 소수파의 변명성 주장들을 파헤쳐 곪은 상처 즉 버넘의 이론적 지도력을 터뜨려 더 이상의 감염증세를 막아야 할 때라고 결심하였다. 두 번째로 나온 그의 글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쁘띠부르조아 소수파]의 유명한 첫 문단은 이렇게 선언하였다:

사물에 대해 그 성격에 걸맞는 이름을 정확히 붙일 필요가 있다. 이제 분파투쟁을 수행하고 있는 두 분파의 입장이 완전히 드러났으므로 전국위원회(National Committee) 소수파는 전형적인 쁘띠부르조아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말해야만 한다. 사회주의 운동 내부의 어느 쁘띠부르조아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현재 소수파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이론에 대한 경멸적 태도, 절충주의적 경향, 조직의 전통에 대한 경시, 객관적 진실을 희생하면서 개인적인 "독립"을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 일관성이 결여된 초조함, 한 입장에서 다른 입장으로 즉시 돌변하고자 하는 용의, 혁명적 중앙집권주의에 대한 이해의 결여와 적대감, 파벌적 연대와 개인적 관계들을 당의 규율에 대신하려는 경향.

이러한 말들은 소수파의 거짓을 가차없이 난도질하는 수술칼과 같이 날카로웠다. 이로서 제4인터내셔널의 지도자인 그는 분파투쟁이 가져올 모든 결과들을 이제 확연하게 제기하였다. 이 글은 주로 버넘의 입장을 비판하기 위해서 작성되었으며 이론적 정치적 결론을 도출한 버넘의 방법론을 제4인터내셔널 전체에 폭로하였다. 변증법을 거부하고 강령적 방법론을 대체하는 버넘과 섁트먼의 행위가 불가피하게 잘못된 정치적 결론들을 도출하고 있음을 트로츠키는 보여주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잘 모르는 노동자 당원들을 위해 이 글에서 그는 명확한 언어로 이 방법론의 근본적인 사상들을 개략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버넘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쁘띠부르조아 소수파를 계속 분석했다. 버넘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고 이것을 방어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이 편지는 작성되었다. 이제 추종세력을 상실할 두려움에 처한 버넘은 트로츠키의 집중포화에 대해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 없었다. 더욱이 트로츠키의 논지는 이미 그의 급소를 강타한 후였다. 이후 버넘이 자신의 사직서에서 고백했듯이 트로츠키는 버넘의 정치적 행로를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버넘이 제4인터내셔널과 공개적으로 결렬하기 이전부터 지니고 있던 신념들을 비판하였다.

그렇다면 소수파 당원들 다수는 왜 이 시점에서 버넘과 결별하고 맑스주의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는가? 대답은 자명했다. 전쟁이 세계를 집어삼키는 상황에서 이들을 짓누르고 있던 사회적 압력 때문이었다. 당시 스탈린의 침공에 맞서고 있던 핀란드에 대한 동정과 소련에 대한 극악한 증오감정이 미국과 영국을 휩쓸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을 방어하는 노선은 목숨을 걸고 원칙을 지키려는 진짜 혁명가의 몫이었다.

이때 섁트먼은 트로츠키를 공격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며 버넘을 옹호했다. 트로츠키가 사용한 방법론인 변증법적 유물론이 당시의 정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아무 쓸모가 없다는 버넘의 주장에 동조하여 그는 폴란드와 핀란드의 사태들을 이용하여 트로츠키의 정세분석 내용을 깍아내렸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긁힌 상처가 도져 몸이 썩어들어가다]라는 글을 통해 반격에 나섰다. 이 글에서 그는 버넘의 변호사 역을 자청하는 섁트먼의 역할과 그의 정치이력을 강력하고 신랄하게 분석하여 공격의 주된 목표물인 버넘에 대한 공격을 보강하였다. 그러자 이제 버넘도 가만히 앉아 당하고 있을 수 없는 형국이 되었다. 그는 트로츠키의 공개서한에 대한 답장으로 [과학과 문체]라는 악명높은 글을 작성했다. 그러나 소수파는 이 글을 내부 문건으로 처리하여 등사판으로 찍어내었을 뿐 트로츠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결코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과학과 문체]는 소수파의 반맑스주의적 경향과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버넘이 드디어 트로츠키가 피어올린 연기를 못견디고 굴 밖으로 나오자 분파투쟁은 전환점을 맞았다. 이제 버넘의 명확한 반격으로 제4인터내셔널 차원의 분파투쟁이 그 실체를 드러내면서 이 위기의 본질이 수정주의와 맑스주의 사이의 투쟁에 있음이 증명되었다. 미국과 영국 지배계급에 의한 반소(反蘇) 히스테리가 절정에 달한 때에 작성된 버넘의 글은 트로츠키가 변증법적으로 오랫동안 이해하고 짐작하고 있던 당의 잠재적 위기를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이제 트로츠키는 분파투쟁과 관련된 자신의 임무를 달성한 셈이었다. 즉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제4인터내셔널 내부의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이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에 위기를 불러일으켰으며 이들이 과학적 사회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들에 대해 도전하고 있음을 제4인터내셔널 전체에 증명한 것이었다. 버넘이 [과학과 문체]를 작성하자 트로츠키는 2월 23일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경고하였다:

"종기는 이제 물러 터졌습니다. 핀란드와 캐넌 동지에 대해서만 약간 토론하고 싶다는 말을 에이번과 섁트먼 동지는 더 이상 반복할 수 없습니다. 이 동지들은 맑스주의와 제4인터내셔널을 가지고 더 이상 숨바꼭질을 할 수 없습니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버넘이 "반동적"이라고 선언하는 맑스, 엥겔스, 프란츠 메링,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의 전통을 계승할 것입니까 아니면 전(前) 맑스주의적 쁘띠부르조아 사회주의의 최신판인 버넘의 사상을 받아들일 것입니까?" 그리고 에이번과 섁트먼이 자신들의 입장을 확실히 밝힐 것을 권유했다: "버넘의 "과학"과 "문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에이번 동지, 섁트먼 동지, 동지들은 발언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견해를 밝히십시오!" 그러나 이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에이번과 섁트먼은 버넘의 사상, "과학", "문체"를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이 제4인터내셔널로부터 조직을 분리해 나갈 준비를 할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졌다. 이에 대해 당내 다수파는 당의 단합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혁명정당의 단합과 당에 대한 충성심 고취는 당의 가장 중요한 자산에 속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다수파는 두 가지 목표를 두었다: (1) 소수파의 동요하는 당원들을 최대한 당에 남아있도록 설득하는 것 (2) 제4인터내셔널 각국 지부들에게 조직이 분리될 경우 그 책임은 전적으로 소수파에 있음을 확증시키는 것. 트로츠키는 제임스 캐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의 단합을 위해 다수파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습니다. 이 사실을 제4인터내셔널 다른 지부들에게 알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야 합니다. 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의 사태는 국제적으로 제4인터내셔널 전체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옳아도 주관적 평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모든 객관적인 사실들은 소수파가 맑스주의를 거부했기 때문에 조직을 분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결국 조직의 분리를 막을 수 없었으나 사회주의노동자당과 제4인터내셔널 내부에서 벌어졌던 당시의 논쟁은 트로츠키운동 사상 가장 완전한 논쟁이었다. 모든 견해를 발표할 자유가 완벽히 주어졌다. 소수파는 다수파가 되어 당의 지도력을 장악할 모든 기회를 제공받았다. 1939년 12월 19일자 편지에서 트로츠키는 다수파에게 이렇게 말했다: "결국 소수파로 남더라도 당에 대한 규율과 충성심을 간직해야 합니다. 당에 대한 진정한 충성심을 교육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캐넌 동지는 언젠가 편지를 통해 이것의 필요성을 아주 정확하게 밝힌 바 있습니다." 트로츠키 지지자들은 당대회에서 결국 다수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다수파는 소수파 당원들를 제명시키거나 지도부나 주요 직책에 소수파의 몫을 할애하지 않거나 이들에게 정치적 견해를 버릴 것을 요구하는 등 어떠한 종파주의적 행태도 저지르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소수파의 세력에 걸맞는 당기구 직책을 제안하고 당의 지도력을 획득할 자유를 부여하면서 민주집중제의 원칙을 지켜줄 것을 요구했을 뿐이었다. 더욱이 당내 토론집을 통해 논쟁을 계속 진행할 것에도 동의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트로츠키의 지도를 받은 다수파의 행동은 노동계급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볼셰비키 전술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와 관련하여 트로츠키는 분파투쟁의 결과를 [쁘띠부르조아 도덕론자들과 노동계급 정당]이라는 글에서 제시했다.

1940년 4월 5일에 끝난 사회주의노동자당 당대회에서 다수파는 제4인터내셔널 강령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했다. 4월 16일 정치위원회 회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동의안이 제출되었다: "본 위원회는 당대회의 결정을 받아들이며 규율에 입각하여 이 결정을 행동에 옮길 의무가 있다." 그러나 소수파는 이 동의안에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다수파는 이들을 제명시키지 않고 기다렸다. 그리고 최후 순간까지 제4인터내셔널 지부들이 다수파의 행동을 알 수 있도록 명확한 조치가 취해졌다. 버넘과 그의 지지자들은 "당대회의 결정에 따를 의향"을 보일 때까지 당원 자격이 정지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소수파가 이미 딴 곳에 사무실을 차린 뒤였다. 이들은 "노동자당"을 창당하고 공개 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당 기관지인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훔쳐서 자기들의 기관지로 만들어버렸다. 당시의 상황은 트로츠키의 [쁘띠부르조아 도덕론자들과 노동계급 정당]에 기술되어 있다. 이 글은 [핀란드 사태에 대한 대차대조표]와 함께 분파투쟁의 정치적 교훈들을 간결하게 싣고 있다.

버넘은 고립된 개인이 결코 아니었다. 당내에 지지자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 급진주의자였던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이 당 바깥에 아주 많이 포진되어 있었다. 이들 중 가장 이름있는 인사들은 시드니 후크, 맥스 이스트먼, 루이스 코리, 루이스 해커 등이었다. 버넘의 선배인 이들은 이미 맑스주의를 잔뜩 수정해 놓은 지 오래였다. 이론적 기초부터 시작하여 정치적 결론까지 수정주의는 맑스주의를 크게 훼손시켰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수바린, 빅터 세르쥬, 브루노 알 등이 맑스주의를 배신한 국제 결사단에 속해 있었다.

트로츠키가 자신의 문건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쁘띠부르조아 소수파]에서 지적했듯이 버넘과 섁트먼은 [새로운 인터내셔널] 1939년 1월호에 실린 글 [후퇴하고 있는 지식인]에서 이 경향을 분석하려고 애를 쓴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부질없는 것으로 끝났다. 버넘과 섁트먼 모두 혁명운동에서 이탈한 이들의 대열에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후크, 이스트먼, 코리 등이 이들이 걸어갈 길을 미리 닦아 놓은 셈이었다. 사실 쁘띠부르조아 소수파는 자신들이 미리 비판한 바 있는 "포기한 희망들의 동맹(League of Abandoned Hopes)"으로부터 자신들의 주장, 사상, 격려, 영감을 수혈받았다.

이들 배신자 대부분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철학적 투쟁을 통해 수정주의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자신과 남들로부터 맑스주의에 반대하는 정도를 숨기기 위해 애썼다. 자신들의 이견이 "순전히 철학적일 뿐이며" 이러한 추상적 이견이 자신들의 구체적 정치노선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고 이들은 힘주어 강조하였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논리와 철학은 정치와 유기적인 연관이 없었다. 따라서 맑스주의 철학인 변증법적 유물론은 구체적인 정당, 강령, 투쟁 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버넘과 섁트먼은 공동으로 작성한 [후퇴하고 있는 지식인]에서 이 태도를 처음으로 명확히 표현하였다. 이 태도는 분파투쟁 과정에서 공동의 노력으로 유지되었다. 버넘은 [과학과 문체]에서 맑스주의에 대한 화해할 수 없는 적대감을 드러내었다. 그는 트로츠키가 변증법을 정치 논쟁에 도입하여 논쟁을 오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버넘에 따르면, "변증법이 정치의 기초가 된다는 것은 전혀 말도 되지 않는다." 버넘과 섁트먼은 여기서 이스트먼과 후크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었다. 종교와 헤겔 형이상학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맑스주의가 청산하고 이 대신 자신의 "상식적" 방법론을 채용해야 한다고 이스트먼은 이미 오래 전에 주장한 바 있었다.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 후크는 "누군가에 의해 발명된 변증법적 유물론의 정치적 의의"에 냉소를 보였다.

이렇게 논리를 정치노선과 유리시키면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맑스주의의 이론적 기초로 인정하지 않는 입장은 맑스주의 사상 및 전통과 무관하였다. 맑스주의는 통일되고 일관된 포괄적인 세계관이다. 헤겔의 관념적 변증법과 구별되는 변증법적 유물론은 맑스주의의 사고 방법론으로 핵심은 혁명적 변화의 논리이다. 이 논리의 근본법칙들은 자연, 사회, 정신 과정의 점진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단절과 질적인 비약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실 점진적 변화와 질적인 비약을 통해 사물은 그 대립물로 변모한다.

왜 부르조아 사상가들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혐오하는가? 역사의 논리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사회생활의 점진적인 변화 내부에 사회혁명의 씨와 뿌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진적 변화들이 축적되는 과정에서 질적인 비약이 일어나 과거와 커다란 단절을 의미하는 혁명이 등장한다. 따라서 변증법에 따르면 사회혁명과 정치혁명은 역사의 우연적인 탈선이나 회피할 수 있는 우회로가 아니라 계급사회의 발달순환에 있어서 물질적으로 야기되고 법칙에 의해서 결정되는 단계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르조아 이론가들과 이들의 쁘띠부르조아 그림자들에게 변증법은 가장 무시무시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즉 변증법적 유물론은 우리 시대 계급투쟁의 논리적 진화과정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자본주의가 왜 제국주의적 정치와 전쟁을 낳는 반동적 독점자본주의로 변모되었으며 국제노동계급에 의한 사회혁명이 왜 독점자본주의를 타도할 수밖에 없으며 사멸과정에 있는 자본주의가 왜 살아움직이는 사회주의로 변모될 수밖에 없는 가를 증명하고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사회생활이나 정치사상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계급투쟁을 발생시키고 그 과정을 지배하며 그 결과를 결정하는 일반법칙들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이 말했으며 본문에 소개된 트로츠키의 글들이 반복하고 있듯이, "혁명 이론이 없이는 혁명 활동이 있을 수 없다." 즉 과학적 사회주의의 핵심인 변증법적 유물론이 없이는 노동계급의 일관된 혁명적 정치활동이 있을 수 없다.

바로 이것이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이 갖는 의의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운동의 적인 배신적 쁘띠부르조아 사상가들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혐오하고 반대하는 이유이다. 맑스주의 논리를 연구하고 통달해야 혁명을 옹호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 반면 맑스주의의 논리적 기초들에 대해 무관심이나 반대로 일관할 경우 맑스주의와 담을 쌓는 결과 밖에 나오지 않는다. 버넘, 섁트먼, 후크, 이스트먼 등 철학 이론과 정치적 실천에 대해 "상식"을 높이 외치는 자들이 바로 후자의 경우에 속했다. 트로츠키가 예측했듯이 이들이 변증법적 유물론에 적대적이었다는 것은 이들이 결국 사회주의를 버리고 부르조아 사상에 굴복했음을 의미하였다. 겉으로 보기에 정치노선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철학 논쟁에서 이들이 보인 맑스주의에 대한 적대감은 결국 이들이 선언한 정치 강령에서 그 결실을 보았다. 확실히 논리와 철학은 실제 현실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역사는 맑스주의 방법론을 정치 실천과 유리시키려는 시도에 대해 가장 강력한 반대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지도하에 볼셰비키당은 맑스와 엥겔스가 변증법적 방법론을 통해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 ]에서 설명하고 예측한 바를 정치 행동을 통해 실현시켰다. 볼셰비키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통해 맑스주의 이론과 혁명 활동의 조화로운 결합을 가장 적극적인 의미에서 증명하였다. 이와 반대로 후크, 이스트먼, 버넘, 섁트먼의 이후 정치 역정은 가장 부정적인 의미에서 맑스주의 방법론의 올바름을 입증시켰다. 이스트먼과 버넘은 맑스주의와 사회주의를 조금도 개의치 않고 기각했다. 후크와 섁트먼은 미국 사민주의 우파의 대변인이 되어 제국주의 정책을 지지하였다.

이들 가운데 버넘은 가장 빨리 그리고 철저하게 부르조아 진영으로 투항하였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을 사임하고 새로운 "당"을 창당한 후 한달이 지나자 그는 다시 냉소적으로 사임서를 자기가 창당한 당에 제출하였다. 이로부터 몇 달 후 그는 [경영혁명]이라는 저작에서 세계정치에 대해 새로운 주장을 들고 나왔다. 그의 저작은 대기업, 관료사회, 쁘띠부르조아 지식인 사회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트로츠키는 나찌군대의 임박한 공격에 대비하고 역사상 첫 노동자국가를 방어하자고 계급의식을 지닌 노동자들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이때 버넘은 곧 등장할 경영사회의 대표인 히틀러와 스탈린이 독소불가침조약으로 세력을 규합하여 1939년 8월 "자본주의 체제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기도를 하고 있다는 가설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 "구체적인" 정치 가설은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에게 "치명적인 해를 가하는" 것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이후 버넘은 가장 광신적인 반소 이념가로 등장했다. [세계 정치권력을 향한 투쟁](1947년), [서양의 자살](1964년) 등의 저작을 통해 그는 전세계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에 맞서 무장 성전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버넘이 제국주의를 충심으로 옹호한 것에 반해 섁트먼은 서서히 표류하면서 제국주의와 타협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사회주의자"라는 딱지를 그대로 유지하는 선에서 우익으로 돌아섰다.

1939년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그와 버넘이 공동으로 실은 글에서 이들은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이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를 반대하는 쪽으로 퇴행하는 현상을 이렇게 분석하였다: "이들 지식인들이 걸린 주요한 지적 질병은 속류 반스탈린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 질병은 스탈린의 조작과 숙청이 모든 사람에게 혐오감을 일으키면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 질병에 걸린 지식인들은 냉철한 사회분석 대신 정신적 충격의 결과, 과학적이고 정치적인 분석 대신 도덕적 분노를 실은 글들을 주로 생산해왔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한 직후 섁트먼 자신이 이 질병에 희생되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엄혹한 순간에 소련을 방어할 것을 거부하였다. 이에 대한 변명으로 그는 "관료적 집산주의자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어 소련을 지배하고 있다는 기존의 이론을 빌렸다. 그는 퇴보한 노동자국가를 자본주의도 아니며 사회주의도 아닌 채 민주적 자본주의에도 훨씬 못미치는 "새로운 형태의 계급사회"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1917년 러시아와 1959년 쿠바에서 일어난 혁명들이 반자본주의적이며 동시에 반사회주의적이라고 설명했다.

이 이론은 스탈린 일당이 지배하고 있던 소련의 매우 모순적인 현실을 오도하였다. 러시아 10월 혁명의 승리는 자본주의적 소유관계를 철폐하고 계획경제와 외국무역 독점을 러시아의 경제 운영 방식으로 정착시켰다. 이것은 그 근본에서 사회주의적 업적이었다. 그러나 정치구조에서 스탈린 일당이 지배한 반사회주의적 전체주의 정치체제는 노동계급과 근로인민을 모든 정치결정 과정에서 배제하면서 이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정치권력의 소유를 사회 성격의 가장 주요한 결정인자로 봄으로서 섁트먼은 맑스주의적 사적유물론의 원칙과 결별했다. 트로츠키가 지적한 바대로 사적유물론은 지배적 생산관계에 기초한 소유형태를 사회성격의 결정적인 기준으로 본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는 사보이 왕정, 무쏠리니의 파시즘, 현대 의회공화정 내내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했다. 반면 소련은 레닌과 트로츠키는 물론 스탈린과 그의 후계자들이 수립한 정권 내내 핵심적으로 노동계급에게 고유한 집단적 소유체제를 유지해 왔다.

후기자본주의 국가체제를 이렇게 자의적으로 이론화한 후 섁트먼과 그의 추종자들은 세계적 차원에서 양대 적대계급의 위에 군림한 "제3진영" 에서 급속히 탈락하여 제국주의 정책을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으로 추락했다. 전후 냉전체제가 심화되자 섁트먼은 급속히 우경화의 길을 걸었다. 자신의 노동자당을 독립사회주의동맹으로 변모시킨 후 그는 1958년 사회당에 입당하여 당내 우익의 대변인이 되었다. 쿠바 침공(피그만 사건), 월남전 개입, 월맹지역 폭격 등 제국주의 미국의 군사도발 때마다 그는 "자유세계"를 전체주의 체제로부터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미국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68세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당시 미국 민주당의 험프리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추락을 마감하였다.

1940년 이후 버넘과 섁트먼의 정치 역정은 트로츠키의 예측대로 진행되었다. 맑스주의를 기각하고 노동자국가에 대한 방어 노선을 포기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제국주의 세력에 영합하는 결과를 나타낼 것이라고 그가 정확히 비판했던 대로 섁트먼은 사이비 사회주의자의 외피를 쓰고 민주적 자본주의를 지지했고 버넘은 극우 반동적 자본주의를 지지했을 뿐이었다. 자신의 혁명적 사회주의 이력에 대체로 충실했던 유일한 소수파 지도자는 마튼 에이번(Martin Abern)이었다. 그러나 그도 탈당 후 정치활동에서 활력을 상실한 후 1949년 사망하였다.

한편 1939 40년의 폴란드와 핀란드 사태에 대해 트로츠키가 가한 유물변증법적 방법론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동구의 사태들을 분석한 제4인터내셔널에게 유용한 전례를 제공하였다. 그는 소련 관료집단의 반동적 목표와 적군에 의해 점령된 지역에서 발생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전복이 갖는 혁명적 의의를 면밀하게 구분하였다. 전후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온 동구의 국가들 역시 소련 관료집단의 하수인들이 정치권력을 지배했으나 경제적 토대는 진보적인 집단적 소유체제로 변모하였다. 이 나라들은 기형적 노동자국가(deformed workers' state)라고 규정되었다. 퇴보한 노동자국가인 소련과 달리 이들 소련 위성국들은 애초부터 심각한 관료적 통치로 정치 구조가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1. A Letter to James P. Cannon] 제임스 캐넌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캐넌 동지,

제2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번역까지 하자면 최소한 일주일은 걸릴 것입니다. 이 글의 기본 논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습니다:

1.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한 우리의 규정은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독소불가침조약 때문에 이 규정이 바뀌어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2. 소련의 사회 성격은 소련이 부르조아 민주주의국가 또는 부르조아 파시즘국가와 맺는 우호관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만약 독소불가침조약으로 소련의 사회 성격이 바뀐다고 생각할 경우 인민전선 시대가 도래했다는 스탈린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한다. 3. 소련이 더 이상 퇴보한 노동자국가(degenerated workers' state)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우리의 정치적 결론에 어떤 내용이 덧붙여져야 하는지를 명확히 말해야 한다.

4. 소련의 사회 성격 문제는 우리 시대의 역사 발전 과정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스탈린의 소련은 후진적이고 동시에 자본주의 세계체제로부터 고립되어 기형화된 노동자국가 즉 이행기 체제이다. 이것이 아니면 스탈린체제, 파시즘체제, 루즈벨트의 뉴딜체제 등 "관료적 집산주의 체제, bureaucratic collectivism"([세계의 관료화, La Bureaucratisation du Monde], 1939년 빠리, 부르노 알, Bruno R.)가 자본주의를 대신하여 새로운 사회구성체가 되어야 한다. 소련이 노동자국가이다 아니다 또는 소련 관료집단이 계급이다 아니다 등 용어에 대한 논쟁과 실험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소련이 모종의 자본주의 국가이며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새로운 착취계급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공연히 또는 암묵적으로 세계노동자계급의 모든 혁명적 잠재력은 소진되었고 사회주의운동이 파산했으며 자본주의 체제가 새로운 착취계급이 지배하는 "관료적 집산주의"로 변모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셈이다.

이러한 결론의 심각성은 자명합니다. 이 결론은 세계노동자계급과 인류 전체의 운명과 관련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강령, 전략, 전술과 절대적으로 모순되는 이러한 역사 개념을 순전히 용어의 실험을 통해 도출할 권리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제국주의가 발생시킨 세계대전으로 인해 사회주의혁명의 전망은 시급한 현실 문제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대전의 결과 소련 스탈린주의 체제가 세계사회주의혁명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발생한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으로 모두에게 밝혀질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위와 같이 모험주의적 비약을 통해 새로운 이론을 발명하는 것은 사회주의 혁명의 과제를 흐리는 이중적인 범죄행위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급하게 써내려 가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지금 말한 생각들이 불충분하게 개진되어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면 좀더 완벽한 테제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1939년 9월 12일

동지적 인사를 드리며

레온 트로츠키

 

[2. The USSR in War] 전쟁에 돌입한 소련

독소불가침조약과 소련의 사회 성격

독일과 소련 사이에 불가침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도 소련을 노동자국가로 간주하는 것이 가능한가? 소련의 미래 발전 전망은 다시 또다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한 현상이 전혀 아니다. 노동자국가라는 역사적 실험을 우리는 현재 처음으로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국가는 여태까지 한 번도 분석 대상이 되어 본 적이 없다. 이미 말한 바 있듯이 소련의 사회 성격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흔히 발생하고 있다. 이 오류의 근원은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을 강령이라는 추상적 기준(programmatic norm)과 혼동하는 데에 있다. 구체적 사실은 추상적 기준으로부터 이탈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구체적 사실이 이 추상적 기준을 무효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와 반대로 구체적 사실은 추상적 강령의 유효성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재확인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역사상 첫 노동자국가인 소련의 퇴보를 설명해왔고 이 입장을 재차 천명한 바 있다. 소련은 노동자국가가 진정으로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며(추상적 기준) 특정 역사적 상황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 수 있는지(구체적 현실)를 좀더 확연하게 보여주었을 뿐이다. 구체적 현실과 추상적 기준 사이의 모순은 우리에게 이 기준을 거부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이와 정반대로 혁명적 방식을 통해 이 기준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투쟁하라고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다. 임박한 소련에서의 혁명에 대한 우리의 강령은 한편으로는 객관적 역사적 현실인 소련을 평가하면서 결정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노동자국가라는 기준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소련에 관한 한 모든 것은 끝났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금 단계에서 구해내고 보존하며 더 발전시킬 노동자국가의 요소들을 명확히 지적할 뿐이다.

소련과 독일 사이에 막 체결된 불가침조약을 가지고 소련의 사회 성격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고 증명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코민테른의 입장에 서 있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코민테른의 과거 입장에 서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노동자국가의 역사적 임무는 미국과 서유럽 등 제국주의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련이 민주주의 체제 대신 독일 파시즘 체제와 조약을 맺은 행위는 일종의 "배신 "이며 이로서 소련은 노동자국가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조약은 소련 관료집단의 퇴보 정도와 소련이 코민테른을 비롯하여 국제노동계급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경멸감을 측정하는 척도를 하나 더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독소불가침조약은 소련의 사회 성격을 다시 평가할 근거가 결코 될 수 없다.  

 

평가의 차이는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용어의 차이에 불과한가

그러면 소련 문제를 추상적-사회학적 측면이 아니라 구체적-정치적 측면에서 접근해보자. 우선 소련의 관료집단이 새로운 "계급"이며 현재의 소련이 계급착취가 이루어지고 있는 특수한 사회체제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이 가정으로부터 어떤 정치적 결론이 새로 도출되는가? 이미 오래 전부터 제4인터내셔널은 근로인민이 혁명적 봉기를 통해 관료집단을 타도해야 한다고 선언해왔다. 그런데 관료집단을 착취"계급" 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와 다른 어떤 노선도 제안하지 않고 있다. 관료집단 타도의 목표는 소비에트의 정치적 지배를 다시 회복하고 소비에트로부터 이들 관료집단을 축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노선을 비판하는 좌익 인사들은 이와 다른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세계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합심하는 것이 새로 생명을 되찾은 소비에트의 임무이다. 따라서 관료집단의 타도는 국가소유와 계획경제의 보존을 전제로 깔고 있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생산수단의 배분과 경제계획의 내용 전체는 관료집단이 아니라 생산자들의 이해에 의해 결정될 경우 근본적으로 그 성격이 바뀔 것이다. 이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기생적인 관료집단의 타도가 국가소유를 보존하는 것에 그치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에 발생할 소련 혁명을 정치혁명(political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이 노선을 비판하는 씰리가(Ciliga), 브루노(Bruno) 등은 이 혁명을 사회혁명(social revolution)이라고 부르고 싶어한다. 이들이 맞다고 치자. 그러면 이러한 용어 변화는 핵심적으로 어떤 차이를 가지고 오는가? 우리가 나열한 혁명의 임무에 이들은 어떠한 새로운 내용도 덧붙이지 못한다.

우리의 비판자들은 우리가 오래 전에 확립한 사실들을 대체로 인정한다. 그리고 소련 관료집단과 근로인민의 사회적 위치, 관료집단의 국제적 역할 등에 대한 평가에서도 이들과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들은 우리의 분석에 도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반대로 이것에 전적으로 기반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이것에 자신들의 견해를 한정하고 있기까지 한다. 이들이 우리에게 가하는 유일한 비판은 우리가 필요한 "결론 "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이러한 결론들은 순전히 용어상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퇴보한 노동자국가를 노동자국가라고 부르기를 거부한다. 이들은 전체주의적 관료집단을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관료집단에 대항하는 혁명은 정치혁명이 아니라 사회혁명이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용어의 승리가 허용되자마자 이들은 애매한 입장에 놓인다. 이 순전히 용어의 승리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할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확인하자

따라서 이들이 정치적 임무에 대해서 우리와 연대하는 한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이들과 결별하는 것은 엄청난 넌센스가 될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순전히 이론적이며 심지어는 용어적인 차이들을 무시할 경우 우리는 스스로를 장님으로 만드는 꼴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차이점들은 시간이 지나 뼈와 살을 갖추게 되면서 완전히 상반된 정치적 결론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깔끔한 주부가 거미줄이나 쓰레기가 집안에 쌓이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듯이 혁명정당은 애매함, 혼동, 불명확함을 허용할 수 없다. 우리 집안부터 깨끗하게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예를 들기 위해서 테르미도르 반동 문제를 회상해보자. 우리는 소련에서 테르미도르 반동이 준비되고 있을 뿐 완성되지는 않았다고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그러나 나중에 좀더 정확하게 그리고 좀더 주도면밀하게 연구한 결과 테르미도르 반동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우리가 저지른 오류에 대한 공개적인 수정은 우리 대오에 조금의 놀라움이나 두려움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소련의 사태를 우리는 언제나 핵심적인 측면에서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련 내 반동 세력의 전진이 조직 전체 차원에서 연구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적 비유를 좀더 정확하게 적용하는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일부 동지들은 "소련의 방어" 문제에 대해 서로의 견해 차이들을 명확히 하고자 애쓰고 있다. 이 문제는 곧 다루도록 하겠다. 그러나 이에도 불구하고 생각을 좀더 명확하게 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에 기초하여 일치된 견해에 도달하기를 희망한다.  

 

관료집단은 암과 같은 혹인가 아니면 새로운 장기(臟器 )인가

현재 소련의 관료집단은 자본주의 사회의 부르조아 관료들 또는 노동관료들과 비슷한 점이 거의 없다고 우리의 비판자들은 여러 번 주장해왔다. 그리고 파시스트 관료집단들보다 새롭고 훨씬 더 강력한 사회집단이라고 주장해왔다. 이것은 아주 올바른 견해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측면에 대해 눈을 감아본 적이 없다. 그러나 소련의 관료집단을 "계급"이라고 규정할 경우 이 계급이 과거 어떤 유산계급과도 닮은 점이 전혀 없다고 즉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새로운 규정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련 관료집단을 빈번히 카스트(caste)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집단은 폐쇄성, 자의적인 통치, 그리고 흔히 인도의 지배계급이 주장하듯 자신들의 선조는 브라만의 신성한 입술에서 나오고 일반대중은 브라만의 음부에서 나왔다고 믿는 지배계급의 거만 등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 이 특징을 우리는 카스트라는 용어를 통해 강조한다. 그러나 이 용어도 엄격하게 과학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용어의 임시성이 모든 사람에게 명확하게 인식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용어들에 비해 좀더 나을 뿐이다. 소련의 관료집단을 누가 인도의 브라만과 같은 수준에 놓을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사용되어온 사회과학 용어들은 퇴보하고 있으며 안정된 사회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소련 관료집단이라는 새로운 사회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소련의 관료집단을 관료집단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용어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특이성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우리는 당분간 이 용어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용어상으로만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제기될 수 있다: 관료집단이 사회라는 유기체 위에 일시적으로 돋아난 혹인가 아니면 이미 역사적으로 없어서는 안되는 장기(臟器) 로 변모되었는가? 암과 같은 혹은 역사적 상황들의 "우연적인" (즉 일시적이고 특수한) 뒤엉킴으로 발생할 수 있다. 착취계급을 포함한 모든 사회계급이 그렇듯이 사회라는 유기체의 장기는 생산 과정에 깊이 뿌리박힌 내적 요구들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내리지 못한다면 이 논쟁은 무의미한 말장난이 될 뿐이다.  

 

관료집단의 퇴보 초기

모든 지배계급은 자신이 주도한 착취체제의 생산력이 새로운 수준으로 올라갔을 경우에만 역사적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소련의 경제체제는 경제발전의 강력한 추진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추진력의 원천은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계획경제의 시작에 있었다. 즉 관료집단이 경제의 주도권을 쥐었기 때문에 생산력이 발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와 정반대로 관료집단은 소련의 기술적 문화적 발전에 가장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이 진실은 소련경제가 20여 년 동안 선진자본주의 기술과 생산체계를 이식하고 동화하는 데 몰두했다는 사실 때문에 가려져 있었다. 좋든 싫든 이 과정은 모든 자발성과 창조적 욕구를 압살하는 관료주의적 절차에 맞추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의 수준이 높아지고 경제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요건들의 성격이 복잡해질 수록 관료체제가 조성한 장애는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되었다. 끊임없이 격화되는 모순들로 인해 정치적 격동이 계속 이어졌고 사회 모든 분야의 가장 창조적인 분자들이 체계적으로 제거되었다. 따라서 관료집단은 "지배계급"으로 확립되기도 전에 경제발전의 요구와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을 일으키게 되었다. 관료집단은 새로운 경제체제에 반드시 필요한 주체가 아니라 노동자국가의 기생적인 혹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실만이 지금까지 소련에서 발생한 현상들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  

 

관료집단의 전횡과 몰락에 필요한 조건들

소련의 관료집단은 그동안 역사상 존재해왔던 지배계급들의 결함들을 전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배계급에게 걸맞는 역사적 임무는 가지고 있지 않다. 소련의 관료적 퇴보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현대사회 일반법칙의 표현이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의해 포위된 후진 혁명국의 조건 속에서 이 일반법칙이 특이하고도 예외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굴절되어 나타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소비재가 품귀를 이루고 이로 인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 의해 소비재의 분배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경찰관이 탄생했다. 이 경찰관이 곧 관료집단이다. 외부로부터의 적대적인 압력은 이 경찰관에게 나라의 "파수꾼" 역할을 맡을 것을 강요하고 있다. 이로서 관료집단은 전권을 행사하며 나라의 재화를 이중적으로 약탈하고 있다.

소련의 후진성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포위가 관료집단의 전횡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다. 그러나 이 조건들은 일시적일 뿐이며 세계 사회주의혁명의 승리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부르조아 경제학자들까지도 미국이 계획경제를 운용할 경우 국민총소득이 일 년 동안 2천억 달러로 급격히 상승할 수 있다고 계산한 바 있다. 이 결과 미국 인구 전체가 기본적인 욕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삶의 안락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이들은 결론내렸다. 그리고 세계 사회주의혁명은 관료화 현상의 보충적인 원인인 제국주의 세력의 위협을 제거할 것이다. 국민총소득의 엄청난 부분을 군비에 쏟아붓는 현상이 제거되면 대중들의 생활수준과 문화수준은 더욱 상승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조성되면 경찰관-분배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관료집단은 저절로 몰락할 것이다. 거대한 협동조합인 행정체계가 국가권력을 재빨리 대체할 것이다. 이로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의 중간에 위치한 새로운 지배계급이나 새로운 착취체제는 존재할 여지를 상실할 것이다.  

 

사회주의혁명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자본주의와 부르조아계급의 붕괴는 현재 극단적인 수준까지 도달했다. 이 체제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 생산력은 계획에 따라 조직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과업을 누가 달성할 것인가? 노동계급일까 아니면 정치인, 행정가, 기술자들로 구성된 "인민위원"이라는 지배계급일까? 노동계급에게 더 이상의 희망을 걸 수는 없음을 역사가 이미 증명했다고 좌익의 일부에서는 주장한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물질적인 전제조건은 이미 마련되었으나 노동계급은 제1차 세계대전을 막을 "능력을 결여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파시스트들이 정치적 성공을 거두는 것도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체제를 막다른 골목에서 구해낼 "능력을 결여"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소련의 관료화 역시 민주적인 절차들을 통해 노동계급이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한" 결과라는 것이다. 스페인 혁명은 세계노동계급이 보는 앞에서 파시스트들과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의해서 압살당했다. 이러한 사건들의 종착역은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세계노동계급의 완전한 무능력에 의해서 공공연히 준비된 것이다. 이것이 이들의 논지이다. 만약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노동계급이 사회주의혁명을 달성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 인정될 경우 생산력을 국유화하는 시급한 과업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성취되어야할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뻔한 이치이다. 그러면 누가 이 과업을 달성할 것인가? 전세계적으로 쇠퇴한 부르조아계급 대신 지배계급이 될 신 관료집단이 이 과업을 수행할 것이다. 이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러한 논지는 말싸움에 만족하지 못하는 "좌익들"에 의해서 전개되기 시작하고 있다.  

 

임박한 전쟁과 현대사회의 운명

이제 새로운 상황들이 전개되면서 이 논지는 아주 구체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다. 이것은 인류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논란의 여지없이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전쟁은 노동계급에게 새롭고 결정적인 시험대가 되고 있다.

우리는 이 전쟁이 노동자혁명을 촉발할 것이라고 확고히 믿고 있다. 따라서 이 전쟁은 소련에서 관료집단을 타도시킬 것이며 1918년보다 훨씬 높은 경제적 문화적 기반을 토대로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소생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경우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계급"인지 아니면 노동자국가의 기생적 혹인지는 자동적으로 판가름날 것이다. 세계혁명의 과정 속에서 소련 관료집단은 일회적인 퇴행현상(an episodic relapse)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전쟁이 혁명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쇠퇴를 가져온다면 다른 대안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즉 독점자본주의는 더욱 부패할 것이고 국가와 더욱 강력하게 융합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민주주의가 그나마 남아 있는 곳도 전체주의로 대체될 것이다. 노동계급이 사회의 지도력을 장악할 능력이 없을 경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보나파르트적 파시스트 관료집단으로부터 새로운 착취계급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체제는 모든 징후로 보아 문명의 쇠락을 의미할 것이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후 소련과 같이 특권 관료집단에게 사회의 지배력을 넘겨주는 경우 이와 유사한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관료적 퇴행현상이 러시아라는 특정 국가의 후진성이나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포위상태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주도계급이 될 수 없는 노동계급의 선천적 무능력에 기인한다고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결론짓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의 소련은 자신의 근본적 특징들을 통해 국제적 규모의 새로운 착취체제의 등장을 알리는 선구자가 되었다.

우리는 현재 소련의 명칭에 대한 용어상의 논쟁으로부터 한참 벗어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비판자들은 이에 대해 항의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사회체제가 다른 사회체제로 대체되는 문제는 필요한 역사적 전망을 가져야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를 끝까지 추구할 경우 결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스탈린주의 체제는 부르조아 사회를 사회주의사회로 변모시키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끔찍한 퇴행의 결과이던가 아니면 새로운 착취사회의 첫 단계이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관료집단은 당연히 새로운 착취계급이 될 것이다. 이 예측이 아무리 당혹스러워도 어쩔 수 없다. 세계노동계급이 자신의 역사적 과업을 달성할 실제 능력을 보유하지 못할 경우 자본주의 사회의 내적 모순에 기반한 사회주의 강령은 허황된 백일몽(유토피아) 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럴 경우 전체주의 관료사회의 피착취계급인 노예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새로운 "최소"강령이 필요할 것이 뻔하다.

그러나 현재 사회주의혁명의 전망을 기각시킬 논란의 여지없고 인상에 깊이 남는 객관적 자료가 존재하는가? 이것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관료적 집산주의" 이론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직후 독일의 "좌파 공산주의자" 휴고 우르반스(Hugo Urbahns)는 자본주의 대신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라는 새로운 역사 시대가 임박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새로운 체제의 첫 예로 그는 이탈리아, 소련, 독일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이론을 가지고 정치노선 상의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한때 제4인터내셔널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의 "좌파 공산주의자" 브루노 알(Bruno R.)은 최근 "관료적 집산주의(bureaucratic collectivism)" 체제가 자본주의를 곧 대신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1939년, 빠리, [세계의 관료화, La Bureaucratisation du Monde], 350쪽) 새로운 관료집단은 지배계급이 되어 근로인민을 집단적으로 착취하며 노동계급은 전체주의 착취자들의 노예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브루노 알은 소련의 계획경제, 파시즘,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루우즈벨트의 "뉴딜체제" 등을 같은 성격의 체제로 분류하고 있다. 이 모든 체제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같은 특징들을 공유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이러한 특징들은 현대경제의 집단적 경향에 의해서 나타난다. 심지어 레닌조차 10월 혁명 이전에 이미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들었다: 생산력의 거대한 집중, 독점자본과 국가의 더욱 밀접한 융합, 이 융합의 결과로 인한 노골적인 독재정치. 생산력의 집중화와 집단화는 혁명과 반혁명 정치를 모두 규정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혁명, 테르미도르반동, 파시즘, 미국식 "개량주의"를 하나로 뭉뚱거릴 수는 없다. 브루노 알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굴종의 결과 생산력의 집단화 경향이 "관료적 집산주의"의 형태를 나타낸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집단화 현상 그 자체는 논란의 여지없이 올바르다. 그러나 이 집단화의 한계는 어디에 있으며 집단화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이행기에 나타나는 기형적 현상이자 복합적 사회요인의 불균등 발전(uneven development)의 결과를 가지고 브루노 알은 관료집단을 지배계급으로 하는 독립적인 사회구성체가 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주요한 역사적 현상에 대한 쓸데없는 용어 싸움을 브루노 알은 이론의 수준으로 격상시키려 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그러나 이 이유 때문에 그의 오류를 드러내는 것은 더욱 손쉬운 작업이 된다.

허다한 초좌익들처럼 브루노 알은 스탈린주의 체제를 근본핵심에 있어서 파시즘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으로 보면 소련의 관료집단은 파시즘의 지배 방식들을 채용했다. 반면에 "부분적" 국가개입 조치에 아직도 자신을 한정하고 있는 파시스트 관료집단은 완벽한 국유화로 나아가고 있으며 곧 이 과정을 완결시킬 것이라고 그는 전망하고 있다. 그의 첫 번째 주장은 전적으로 올바르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의 "반(反) 자본주의"가 부르조아계급을 철폐하는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그의 두 번째 주장은 완전히 틀렸다. 개량적 조치들이 혁명과 다른 정도만큼이나 국가개입과 국유화의 "부분적" 조치들은 계획된 국가경제와 전혀 다르다. 이 하늘과 땅 차이는 현실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무쏠리니와 히틀러는 유산계급의 이해를 "조정하고 " 자본주의 경제를 "통제하고 " 있을 뿐이다. 더욱이 이런 조치들은 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노동계급이 역사상 가장 거대한 소유관계 혁명을 가져온 덕분에 소련의 관료집단은 경제 전체를 통솔하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소련의 관료집단은 파시스트 관료들과 성격이 전혀 다르다. 이 차이점은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그러나 양 극단에 있는 파시즘 체제와 스탈린주의 체제가 어느 날 브루노 알의 말대로 "관료적 집산주의"라는 동일한 착취체제가 되었다고 치자. 그러나 당연히 이 체제는 인류를 막다른 골목에서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사적 소유라는 반동적 소유체제 그리고 똑같이 반동적인 개별국가(national state)체제에 의해 자본주의의 위기가 야기된다.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여러 파시스트 국가들이 정말이지 일국적 차원에서 계획경제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고 치자. 그리고 노동계급 혁명운동의 발전과정은 어떠한 정교한 계획도를 가지고도 도저히 예측할 수 없지만 어떻든 이 운동이 장기간 존재하지 않는다고 치자. 그러나 세계지배를 위한 전체주의 국가들의 싸움은 계속되고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전쟁은 계획경제의 성과들을 집어삼키고 문명의 기반을 파괴할 것이다. 전쟁의 결과 일부 전승국들이 전세계를 전체주의 체제로 통일할지도 모른다는 버트런드 러쓸(Bertrand Russell)의 생각은 옳다. 그러나 이 매우 의심스러운 가정이 현실로 나타나도 군사적인 "세계통일"은 베르사이유 조약만큼이나 불안정하다. 새로운 세계대전은 여러 나라에서 터지는 봉기와 개별적 평화조약들로 그 절정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결국 문명의 무덤을 파게 될 것이다. 세계 사회주의혁명만이 인류가 구원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주관적인 소망이 아니며 객관적 현실에 의해서 그 올바름이 증명되고 있다. 세계혁명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인류는 또다시 야만상태로 떨어지는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노동계급과 그 지도부

계급 대중과 계급 지도부 사이의 관계는 곧바로 다른 글을 통해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가장 필수적인 문제만을 살펴보도록 하자. 정치는 경제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반영"에 불과하다고 속류 맑스주의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지도부가 계급 대중의 상태를 직접 그리고 단순하게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지도부는 억압받는 계급 대중 위에 군림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지배계급의 압력에 굴복한다. 예를 들어 미국 노동조합 지도부는 노동계급이라기보다는 부르조아계급을 "반영한다". 부르조아계급의 압력에 대항할 수 있는 진정한 혁명 지도부의 건설과 육성은 달성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과업이다. 가장 후진적인 나라였던 러시아는 특정 상황 속에서 가장 시야가 넓고 용기있는 지도부를 건설했다. 이것은 역사 변증법이 가장 찬란하게 실현된 경우이다. 반면에 자본주의가 가장 오래 존속한 영국의 노동계급은 심지어 오늘날에도 가장 멍청하고 노예근성이 강한 지도부를 가지고 있다.

1914년 7월에 드러난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는 전쟁 첫날부터 노동계급 지도부에게 격심한 위기를 가져다주었다. 이때 이후 25년이 경과하면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은 우리 시대의 과업을 달성할 수 있는 지도부를 건설하지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험은 이러한 지도부가 건설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 사실이 지도부가 퇴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제기될 수 있다: 객관적 역사의 필연이 노동계급 전위당의 의식에 의해서 장기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까? 지금 벌어지는 전쟁과 이 전쟁이 빚어낼 수밖에 없는 심대한 충격 속에서 노동계급을 정치권력 장악의 길로 인도할 진정한 혁명적 지도부가 건설될 것인가?

강령의 내용뿐만 아니라 조직의 존립 그 자체를 통해 제4인터내셔널은 이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했다. 그러나 실망하고 공포에 질린 사이비 맑스주의 조류의 대표들은 이와 반대로 지도부의 파산이 곧 노동계급의 무능력을 "반영"할 뿐이라는 가정에 기반하여 자신들의 논리를 전개한다. 이들 모두가 이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는 말할 것도 없고 초좌익주의자, 중도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은 패배의 책임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은 채 이 책임을 노동계급에게 전가한다. 정확히 어떤 조건들 속에서 노동계급이 사회주의혁명을 달성할 능력을 갖게 될 지에 대해서는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말하는 자가 없다.

패배의 진정한 원인이 노동계급의 사회계급적 특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로 인정될 경우 현대사회는 미래가 없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쇠퇴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계급은 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이 미래의 어느 날 혁명적 과업을 수행한 수준으로 상승할 것이라고 기대할 근거는 없다. 처절한 자본주의의 혼란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고자 하는 노동계급의 원초적인 충동과 수명이 다한 노동조합 지도부의 보수적이며 애국적이며 전적으로 부르조아적인 성격 사이에는 깊은 모순이 존재한다. 이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있다. 우리는 화해할 수 없는 두 방향의 사고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전체주의 독재 --- 격심한 위기의 산물 그리고 불안정한 체제

10월 혁명은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며 이미 오래 전에 예견되고 있었다. 그리고 혁명 이후 사태의 전개 과정 역시 이 예견의 올바름을 입증하였다. 소련 관료집단의 퇴보 역시 이 예견을 논박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느 맑스주의자도 러시아의 고립된 노동자국가가 무한정 지탱하리라고는 조금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우리는 체제의 퇴보보다 붕괴를 예상했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두 가지 결과를 구태어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두 가능성이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퇴보는 특정 단계에서 붕괴라는 피할 수 없는 결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소련이든 히틀러의 독일이든 전체주의 체제의 핵심 특징은 그 체제의 일시적 성격에 있다. 노골적인 독재체제는 일반적으로 대단히 심각한 사회 위기의 산물이며 그 징후였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따라서 이 체제는 전혀 안정적이지 못하다. 심각한 위기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전체주의 국가는 단지 일시적으로만 사회모순을 억압할 수 있을 뿐 영원히 지탱될 수가 없다. 스탈린의 대대적인 숙청은 소련 사회가 관료집단을 거부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단히 설득력 있는 증거이다.

브루노 알은 다름이 아니라 스탈린의 숙청작업을 보고 관료집단이 지배계급이 되었다고 결론내렸다. 놀라 자빠질 일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지배계급만이 그런 대규모의 조치들을 취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급"이 아니었던 짜르가 자신의 몰락을 앞두고 대규모 숙청을 치밀하게 자행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임박한 죽음의 고통을 드러내는 것과 같이 스탈린은 대대적인 숙청 사기극을 자행했다. 이것은 스탈린 관료집단이 안정된 지배계급으로 변신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를 증언하고 있다. 치욕스런 멸망을 몇 달이나 몇 년 앞둔 시점에서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을 새로운 지배계급이라고 부른다면 우스꽝스럽지 않을까? 이 문제를 명확히 하는 것을 통해서만 동지들이 용어상의 실험이나 너무 성급한 일반화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세계혁명과 소련의 소생을 향하여

25년이라는 세월은 세계노동계급의 전위당이 혁명적으로 재무장을 하기에는 너무 짧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리고 제국주의 세력에 둘러싸인 고립된 후진국 러시아에서 소비에트체제를 그대로 보존하기에는 이 25년이 너무도 긴 시간이라는 것이 역시 증명되었다. 이제 인류는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을 통해 이에 대한 대가를 치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기본 과업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이 과업이 아직 달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노동계급의 한 부대인 러시아 볼셰비키들이 혁명의 승리를 통해 이 과업을 어떻게 달성해야 할지를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지난 25년은 거대한 혁명적 자산과 미래의 무한한 약속을 보여주고 있다.

제2차 세계 제국주의 전쟁은 달성되지 않은 노동계급의 과업을 더 높은 역사적 단계에서 제시하고 있다. 이 전쟁은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성 뿐만 아니라 이 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능력을 시험하고 있다. 이 시험의 결과는 노동자혁명의 시대인 현대를 평가하는 데 당연히 결정적인 의의를 지닐 것이다. 모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을 전후하여 사회주의 혁명이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승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노동계급이 모든 전선에서 패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현대와 이 시대의 역사 원동력에 대한 개념들을 수정해야 하는 문제가 당연히 제기되어야 한다. 이것은 소련이나 스탈린 강도집단에 대한 평가를 현실적 필요가 없는 것으로 규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후 몇십년에 대한 역사적 전망을 재검토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인류는 사회혁명과 사회주의 시대에 들어섰는가 아니면 이와 반대로 전체주의 관료체제라는 쇠퇴된 사회의 시대에 들어섰는가?

휴고 우르반스나 브루노 알과 같은 도식주의자들은 이중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이들은 소련이 이미 최종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갖추고 있는 사회라고 선언한다. 둘째 이들은 소련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이행기 사회이면서 이 사회가 장기간 존속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세계노동계급이 지금의 시기와 전쟁을 경험한 후 사회의 주인이 될 능력이 없다고 판명될 경우 사회주의혁명에 대한 모든 희망은 공염불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보다 더 좋은 사회주의혁명의 조건을 예상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어느 누구도 지금보다 더 좋은 상황을 예측하거나 규정할 수 없다. 실망감과 피로감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따라서 노동계급이 혁명적 잠재력을 박탈당했으며 당면한 시대에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할 모든 열망을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권리가 맑스주의자에게는 조금도 없다. 경제와 문화를 아주 철저하게 변화시키는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 25년은 역사의 잣대로 보면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한 시간의 길이도 되지 않는다. 한시간이나 하루에 걸쳐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평생의 경험과 분석을 통해 설정한 목표를 버리는 사람을 도대체 무엇에 써먹겠는가? 1907년에서 1917년까지 러시아의 가장 어두운 반동기에 우리는 1905년 러시아 노동계급이 보여준 혁명적 잠재력을 출발점으로 삼아 미래를 준비했다. 세계적인 반동기에 우리는 1917년 러시아 노동계급이 보여준 혁명적 잠재력을 출발점으로 삼아 미래 혁명을 준비해야 한다. 제4인터내셔널이 자신을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세계정당이라고 이름 붙인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의 노선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세계혁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이 사실 자체를 통해 소련이 진정한 노동자국가로 소생하도록 정치행동을 조직해 나간다.

 

대외정책은 국내정책의 연장이다

우리는 소련의 어떤 것들을 방어해야 하는가? 자본주의를 닮고 있는 측면들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닮고 있는 측면들을 방어해야 한다. 독일에서 지배 관료집단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나야 한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따라서 이 노선은 자본주의 소유체제의 즉각적 타도를 유일한 목표로 삼고 있다. 소련의 경우 관료집단 타도를 통해 국가소유를 보존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가 된다. 오직 국가소유를 보존하기 위해서만 우리는 소련을 방어한다.

관료집단의 기생성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집단농장의 귀족층 사이에 존재하는 사적 소유의 경향에 대항하여 소련 노동자들은 국가소유를 방어해야 한다. 우리 대오에서 이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나 결국 대외정책은 국내정책의 연장이다. 10월 혁명의 성과들을 보존하기 위해 관료집단과 비타협적으로 투쟁한다면 대외정책에서도 똑같은 노선을 걸어야 한다. 물론 브루노 알은 "관료적 집산주의"가 이미 전세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국가소유를 위협하지 않는다고 우리를 확신시킨다. 왜냐하면 히틀러와 챔벌린(?)은 스탈린만큼이나 국가소유의 보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슬프게도 부르노 알의 확언은 소용이 없다.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히틀러는 틀림없이 자본가들로부터 몰수한 모든 재산들을 다시 이들에게 돌려주겠다고 나설 것이다. 그리고 전후 협상에서 소련을 희생시키기 위해 영국인, 프랑스인, 벨기에인 등에게 재산을 되돌려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독일의 군대를 위해 소련의 가장 중요한 국영기업을 독일이 관리하겠다고 나설 것이다. 현재 히틀러는 스탈린의 동맹자이다. 그러나 스탈린의 도움에 힘입어 서부전선에서 승리할 경우 히틀러는 다음 차례로 총구를 스탈린에게 향하고 소련을 집어삼키려 할 것이다. 챔벌린 역시 비슷한 상황에서 히틀러처럼 행동할 것이다.

 

소련 방어와 계급투쟁

소련 방어의 문제에서 흔히 오류가 발생한다. 이 오류는 "방어"의 방법들을 잘못 이해하면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한다. 소련의 방어는 크렘린의 관료집단에게 화해를 구하고 이들의 정책을 받아들이며 관료집단 동맹자들의 정책에 대해 유화조치를 취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다른 모든 문제처럼 이 문제에서도 우리는 국제계급투쟁에 전적으로 기초한다.

최근 프랑스의 소규모 정기간행물 [무엇을 할 것인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실렸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 패배를 주장하는 만큼이나 소련의 전쟁 패배를 주장한다. 즉 소련을 방어한다면 소련의 제국주의 동맹세력에 대해서 패배를 주창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잡지는 "민주주의 국가들"이 소련의 동맹국이 될 것이라고 계산했다.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된 지금 상황에서 이 현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들의 분석방법은 완전히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소련과 동맹을 맺고 있거나 곧 동맹을 맺을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쟁 패배를 주창하지 않는 것은 이들 나라의 노동자들이 자신을 억압하는 정부의 편을 들라고 권유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전쟁 패배 노선 일반을 포기하는 것과 동일하다. 제국주의 전쟁 상황에서 제국주의 세력의 전쟁 패배 노선을 포기하는 것은 사회주의 혁명을 "소련 방어"라는 이름 하에 포기하는 것과 같다. 이 노선은 결국 소련을 붕괴와 몰락으로 이끌 것이다.

코민테른의 "소련 방어" 노선은 이들이 어제까지 주창한 "반(反) 파시즘 투쟁"과 마찬가지로 노동자계급의 독립적 정치를 포기하는 노선이다. 이 노선을 따르면 노동계급은 항상 부르조아들끼리의 싸움에서 조연 역할을 해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 일부 동지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스탈린과 그의 동맹자들의 도구가 되기를 원치 않으므로 소련의 방어 노선을 포기한다. 그러나 이 노선은 이들이 "소련 방어"의 문제에서 기회주의자들과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기회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제국주의 식민지 인민의 이익을 방어하듯이 소련을 방어한다. 흔히 그렇듯이 우리는 제국주의 세력들끼리의 싸움에서 어느 한 편을 지지하지 않는다. 제국주의 세력의 심장부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도 국제계급투쟁의 방법을 활용한다.

우리는 여당이 아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들뿐만 아니라 소련에서도 화해할 수 없는 반대당이다. 우리의 과업 중의 하나는 "소련 방어"이다. 그런데 이 과업을 부르조아 정부나 소련 정부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선동을 통해 대중들을 교육함으로써 달성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무엇을 방어하고 무엇을 타도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면서 이것을 달성한다. 이 "방어" 노선은 즉시 기적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기적을 이루는 체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극소수의 혁명가들일 뿐이다. 우리의 영향권 안에 있는 노동자들이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적들로부터 기습을 당하지 않게 하는 데 우리의 목적이 있다. 그리고 대중을 혁명으로 이끄는 이들의 작업을 준비시키는 데에 있다.

소련 방어는 곧 세계혁명을 준비하는 작업이다. 혁명의 이해에 거스르지 않는 방법들만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 전술적 과업이 전략적 과업과 맺는 관계처럼 소련의 방어는 세계혁명의 과업과 연결되어 있다. 전술은 전략 목표에 종속되며 결코 후자와 모순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적군(Red Army) 점령지 문제

지금 이 순간에도 적군이 점령한 지역의 상황이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곳에서 날아드는 전보의 내용들은 교전 당사자들의 무성한 거짓말 때문에 서로 모순되고 있다. 그러나 틀림없이 실제 상황은 대단히 불안정하다. 점령지의 대부분은 틀림없이 소련 영토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점령지는 어떤 소유 형태를 나타낼 것인가?

히틀러와 맺은 조약에 의거하여 소련 당국이 점령지의 사적 소유권(rights of private property)을 그대로 두고 파시스트 정권의 조치를 모방하여 경제를 "통제"하는 일로 스스로를 제한한다고 잠시 가정해보자. 이러한 소련 정부의 양보정책은 대단히 원칙적인 성격을 띨 것이고 소련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출발점이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는 소련의 사회 성격을 새로 평가하는 출발점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련 영토가 될 이들 점령지에서 소련 정부가 대지주의 재산을 몰수하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할 가능성이 더욱 크다. 관료집단이 아직까지 사회주의 강령에 충실해서가 아니다. 점령지에서 정치권력 그리고 부가적 특권들을 토착 구지배계급과 공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않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적절한 비유가 저절로 떠오른다. 나폴레옹은 군사독재를 통해 프랑스 혁명의 전진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폴란드를 점령했을 때 그는 농노제 폐지 법령을 공포하였다. 나폴레옹이 농민들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고 있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가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보나파르트 체제가 봉건적 소유관계가 아니라 부르조아 소유관계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이 조치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탈린의 보나파르트 체제가 자본주의 소유가 아니라 국가소유에 기반하고 있는 한 적군에 의한 폴란드 점령은 자본주의 소유를 철폐하지 않을 수 없다. 점령지의 사회체제를 소련의 체제와 일치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 조치는 "착취자를 착취하는" 혁명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다만 군사적-관료적 방식으로 수행되고 있을 뿐이다. 이 새로운 점령지에서 대중의 독립적 정치행동을 호소할 경우 경찰의 가차없는 탄압이 반드시 뒤따를 것이다. 각성한 혁명 대중들을 관료집단이 지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호소가 없이는 스탈린 체제가 보다 나은 새로운 체제로 변화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 호소가 대단히 조심스러운 어투를 사용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까지는 사태의 어느 한 측면만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다른 측면도 당연히 존재한다. 히틀러와 군사협정을 맺어 폴란드를 점령하려고 소련정부는 오랫동안 소련과 전세계 노동대중을 기만했으며 지금도 계속 기만하고 있다. 이 결과 코민테른의 대오를 완전히 혼란에 빠뜨렸다. 우리의 주요한 정치적 과제는 이 지역 저 지역에서 소유관계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만이 아니다. 이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세계노동계급의 의식과 조직의 변화이다. 그리고 이들이 과거의 투쟁성과를 보존하고 새로운 성과를 쟁취할 능력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이 측면은 혁명활동에서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소련 관료집단의 정치는 전체적으로 순전히 반동적이며 세계혁명의 주요한 장애물로 등장했다.

그러나 소련정부와 코민테른에 대한 전반적인(general) 평가가 점령지의 국유화 조치 자체가 진보적이라는 특정(particular) 사실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내일이라도 히틀러가 유럽 동부에 무력을 집중시켜 동부 폴란드에 "(부르조아적) 법과 질서"를 회복시킬 경우 선진노동자들은 히틀러에 대항하여 소련 보나파르트 정권이 확립한 새로운 소유형태를 방어해야 한다.  

 

우리는 노선을 바꾸지 않는다!

이미 말했듯이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진보적인 조치이다. 그러나 이 조치의 진보성은 상대적이다. 이 조치의 중요도는 다른 모든 요인들의 총합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사회주의적" 조치로 위장한 채 관료적 전제와 기생성을 앞세운 소련의 영토 확대는 소련 관료집단의 권위를 강화시키고 노동자혁명을 관료적 조치로 대체할 수 있다는 환상들을 만들어 낸다. 이 점을 무엇보다도 강조해야 한다. 이 해악은 폴란드에서 진행되고 있는 스탈린의 진보적 조치의 미덕을 훨씬 압도한다. 소련 및 점령지의 국유화 조치들이 진정 사회주의 체제의 기반이 되기 위해서는 소련의 관료집단을 타도해야 한다. 결국 우리의 강령은 모든 측면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전쟁과 함께 전개된 여러 사태들은 우리를 당혹 속에 몰아넣지 못했다. 이것들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련의 체제 자체와 소련의 대외정책이 서로 날카로운 모순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용어의 장난 즉 소련이 노동자국가다 아니다 등의 논쟁이 이 모순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지는 못한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현실 속의 관계들과 모순들을 출발점으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우리는 소련의 관료집단에게 어떠한 역사적 임무도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는 소련이 새로운 지역들을 점령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지금도 그렇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옹호한다. 그리고 벨로루시인들이 원한다면 벨로루시의 독립을 옹호한다. 동시에 적군이 점령한 폴란드에서 제4인터내셔널 동지들은 지주와 자본가를 몰수하고 농민들에게 농토를 분배해주고 소비에트와 노동자위원회 등을 조직하는 일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한편 이들은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고 선거 시기에는 관료집단으로부터 소비에트와 공장위원회가 완전히 독립할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소련의 관료집단과 이들의 현지 하수인들의 성격을 폭로하는 혁명적 선전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동쪽으로 화살을 돌려 적군이 점령한 지역들을 침략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제4인터내셔널 동지들은 소련 정부에 대한 기존의 노선을 조금도 바꾸지 않은 채 히틀러에 대한 군사적 저항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워야 한다. 노동자들은, "히틀러가 스탈린을 타도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 작업은 우리의 몫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히틀러와의 군사 대결에서 혁명적 노동자들은 적군 병사들과 가능한 선에서 가장 밀접한 동지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 무기를 들고 있는 동안 히틀러에게 타격을 가하면서 동시에 다음 단계 어쩌면 아주 가까운 다음 단계에서 스탈린 타도를 준비하는 혁명적 선전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소련 방어"는 "조국을 위해! 스탈린을 위해!"라는 구호를 외치는 소련 정부의 공식 방어노선과는 하늘과 땅 차이이다. 우리 식 소련 방어는 "사회주의를 위해! 세계혁명을 위해! 스탈린을 타도하자!" 등의 구호 하에 수행된다. 이 두 종류의 "소련 방어" 정책이 대중의 의식에 혼동을 가져오지 않기 위해 구체적인 상황에 맞는 구호를 채택하는 법을 정확히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엇을 우리가 방어하며 어떻게 그것을 방어하며 누구에 대항하여 그것을 방어하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과업에 대해 우리 자신이 명확한 사고를 가지고 있지 못하면 우리의 구호는 대중들 사이에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결론

현재 소련에 대한 우리의 원칙적 입장을 바꿀 이유는 전혀 없다. 전쟁은 다양한 정치현상들을 가속적으로 발전시킨다. 어쩌면 소련의 혁명적 소생을 가속화시킬 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한 소련의 최종적 퇴보 과정을 가속화시킬 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전쟁이 소련 내부에 미치는 변화들을 면밀히 편견없이 추적하여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적군 점령지에서의 과업은 소련 국내에서의 과업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점령지의 과업은 극단적으로 날카로운 형태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소련에 대한 일반적인 과업들을 더욱 명확하게 할 것이다.

도대체 우리가 소련의 무엇을 방어하며(국가소유와 계획경제체제) 누구에 대항하여 가차없는 투쟁을 수행하는지(기생적인 관료집단과 코민테른) 노동자들이 명확히 알 수 있도록 구호를 선택해야 한다. 소련 관료집단의 타도는 소련 내 생산수단의 국가소유 보존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단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소련의 국가소유 보존은 세계 노동계급 혁명의 이해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사실 역시 단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  

1939년 9월 25일

 

[3. A Letter to Sherman Stanley] 셔먼 스탠리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스탠리 동지,

오브라이언 동지가 다수파에 합류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동지는 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동지의 편지는 이상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동지의 예전 글들에 비해서 이 편지는 모순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전국위원회(National Committee) 전원회의(plenum)에 관한 문서들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수파의 결의안이나 맥스 섁트먼 동지의 결의안도 그 내용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동시에 동지는 당에 "대재앙"이 임박했다고 확신하고 있소. 그런데 왜 "대재앙"입니까? 화해할 수 없는 두 입장이 제출된 것은 "대재앙"이 아니라 끝까지 정치투쟁을 수행해야 할 필요성을 나타낼 뿐입니다. 제출된 두 결의안이 제4인터내셔널 강령에 대해 뉘앙스(어감) 를 달리하고 있을 뿐 입장이 같다면 어떻게 이것이 동지의 말대로 무원칙한 노선 이탈 즉 대재앙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뉘앙스의 문제라면 다수파가 자신들이 원하는 어휘들을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소수파가, "다수파 당신네들이 원하는 뉘앙스를 택했으므로 이것은 대재앙을 예고하고 있소."라고 외칠 경우 이것이야말로 비정상적인 행위가 될 것입니다. 어느 편의 대재앙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동지는 스스로 "여타 파벌들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나에게 확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동지는 내가 보낸 논문 중 "한 페이지가 어떤 이유인지 빠져 있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책임있는 동지들에 대한 악의에 찬 의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한 페이지는 이곳의 비서진이 유감스럽게도 실수를 해서 빠진 것입니다. 번역을 할 수 있게 이미 새로 완전한 사본을 보냈습니다.

퇴보한 "노동자 제국(workers EMPIRE)"에 대한 동지의 주장은 별로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10월 혁명이 성공한 첫날부터 적들은 볼셰비키들이 "짜르식 영토확장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비방했습니다. 심지어 제대로 된 노동자국가(sound workers state)도 영토를 확장하려는 경향을 가지게 마련입니다. 이 노동자 국가가 영토를 확장할 경우 지리적 경계들은 대체로 짜르의 영토 확장 경계들을 답습하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혁명이 지리적 경계까지 바꿀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크렘린궁의 관료집단을 우리가 반대하는 이유는 영토확장이나 영토확장의 지리적 방향 때문이 아닙니다. 관료적이며 반혁명적인 영토확장 방식을 반대할 뿐입니다. 동시에 맑스주의자인 우리는 역사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짜르, 히틀러, 챔벌린 등 어느 누구도 점령지에서 자본주의적 소유를 철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점령지에서 소련 관료집단이 실시하고 있는 사적 소유 철폐라는 대단히 진보적인 조치는 다른 이유에 의해 강제되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즉 10월 혁명은 아직도 관료집단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압살되지 않았으며 관료집단은 특정 상황에서 제국주의 적들에 대항하여 진보적인 조치들을 취할 입장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진보적인 조치들은 관료집단의 전반적인 반혁명적 활동에 비하면 훨씬 덜 중요합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우리는 관료집단을 타도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동지들은 스탈린-히틀러의 불가침조약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스탈린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 합니다.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세력이 미약하며 마음대로 즉시 크렘린 관료집단을 타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일부 동지들은 순전히 말을 통해서라도 만족감을 느끼려 합니다. 그래서 숙청당한 관료에게 스탈린이 레닌훈장을 박탈하듯이 소련에게 노동자국가라는 이름을 박탈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약간 유치합니다. 맑스주의자의 사회분석은 히스테리적인 반응과는 절대적으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939년 10월 8일

동지적인 애정을 보내며

트로츠키

 

[4. Again and Once More on the Nature of the USSR] 소련의 사회성격에 대해서 다시 또다시

정신분석학과 맑스주의

일부 동지들 그리고 브루노 알과 같은 과거 동지들은 제4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진행되었던 토론과 이 결과 도출된 결정사항들을 까먹어 버렸다. 그러면서 소련에 대한 나의 견해들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에 가담한 바 있다. 그래서 소련을 노동자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하기가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소련이 노동자국가가 아니라면 자신이 일생을 바친 대의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등등. 대단히 명민한 정신분석학의 시조 프로이트(Freud)라면 이런 식의 말을 늘어놓는 사이비 정신분석가들에게 귓방망이를 날렸을 것이다. 내 자신은 이런 폭력을 행사할 천성이 결코 없다. 그러나 나를 이런 식으로 비판하는 사이비 정신분석가들은 대단히 주관적이며 감상적인 인물들임을 독자 여러분들에게 감히 확신시키고자 한다.

스탈린 정권의 비열하고 냉소적인 행동은 모든 정도를 초월할 정도로 지독하다. 그래서 사회주의 혁명가들 모두에게 혐오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혐오감은 거부반응을 필요로 한다. 이에 대해 즉각 행동으로 나설 힘이 없을 경우 참을성이 없는 혁명가들은 인위적인 방식으로 이에 대항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개인적인 테러행위가 하나의 전술로 채택된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자주 나타나는 행위는 강한 어조의 표현, 모욕, 저주 등이다. 그리고 어떤 동지들은 "용어(terminological)" 테러에 의존하여 보상을 받고자 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런 행위를 백분 이해하지만 관료집단을 계급으로 규정하는 것은 정말이지 쓸데없는 짓이다. 만약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이 계급이라면 이 집단은 역사의 사산아가 아니라 당당한 적자가 될 것이다. 약탈적인 기생행태가 "착취행위"라고 한다면 관료집단은 특정 경제체제를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지배계급이며 역사적 전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참을성이 없는 혐오감이 맑스주의 이론의 규율과 스스로 단절하면서 이제 막다른 골목으로 나아가고 있다!

깡패들이 경찰의 추적을 피해 자동차를 몰며 험한 길을 달아나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사고가 나고 이들은 체포되었다. 이제 감정이 격한 자동차 정비공이 이들이 타고 달아났던 자동차를 검사하고 있다. 차체는 찌그러졌고 차바퀴는 제멋대로 비뚜러졌다. 그리고 엔진도 일부 파손되었다. 이것을 보고 그는, "이것은 자동차가 아니야. 괴물이야."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기술이나 과학의 측면에서는 가치가 전혀 없지만 깡패들의 행동에 대한 정비공의 정서적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괴물같은" 이 물체를 정비공이 고쳐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이 괴물이 손상된 자동차라고 생각한 후 고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그는 일을 시작하기 위해 어느 부품이 상태가 좋으며 어느 부품이 도저히 고칠 수 없는지를 결정한 후 일을 시작할 것이다.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자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소련을 바라볼 것이다. 관료집단이라는 깡패들이 노동자국가를 "괴물"로 변모시켰다고 말할 권리가 그에게는 완전히 있다. 그러나 일단 격한 반응을 거두고 정치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에는 자기 앞에 놓인 소련이 손상당한 노동자국가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노동자국가의 엔진인 경제는 손상을 입었지만 계속해서 작동하고 있으며 일부 부품들만 교체하면 완전히 원상 회복이 가능하다. 물론 이것은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충분히 고려할 가치가 있는 비유이다.  

 

"반혁명적인 노동자국가"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외친다: "소련을 노동자국가라고 계속해서 인정할 경우, 반혁명적인 노동자국가라는 새로운 범주를 설정해야 한다." 이 논리는 훌륭한 강령적 기준을 지극히 부정적인 현실에 대비시켜 우리의 상상력에 충격을 가하려 한다. 그러나 1923년 이래 소련이 국제적으로 더욱더 반혁명적인 역할을 자행한 바를 매일 보지 않았는가? 중국 혁명, 1926년 영국의 총파업, 그리고 아주 최근의 스페인 혁명을 잊었단 말인가? 완전히 반혁명적인 노동자 인터내셔널이 두 개나 존재하고 있다. 우리를 비판하는 인사들은 이러한 "범주"를 잊어버린 모양이다. 프랑스, 영국, 미국의 노동조합은 자국 부르조아계급의 반혁명적인 정치를 완전히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노동조합의 진보적인 조치들을 지지하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자본가 계급에 대항해서 이들 조직들을 방어하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면 반혁명적인 노동자국가에 대해서는 왜 똑같은 태도를 보일 수 없는가? 결국 노동자국가는 국가권력을 장악한 노동조합과 같다. 노동자국가와 노동조합에 대해서 상이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설명할 수는 있다. 노동조합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현실로 인정하는 실체이다. 반면에 노동자국가를 실재하는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하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강령적 "범주"로만 이해하는 한계에서 우리가 탈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세력이라고 ?"

현재 소련이 자신의 영향권을 확장하는 현상을 보고 소련을 제국주의 세력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우선 제국주의라는 용어의 사회적 내용을 확실히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예노동에 기초한 로마의 "제국주의", 봉건적 토지 소유관계에 기초한 제국주의,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의 제국주의, 짜르 왕정의 제국주의 등이 역사적으로 존재했었다. 권력, 권위, 재력을 확대하려는 경향은 의심의 여지없이 소련 관료집단의 원동력이다. 이것은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가장 넓게 규정짓는 요소이다.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왕정, 과두정, 지배계층, 중세 신분계급 등은 모두 이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특히 맑스주의 서적에서는 제국주의가 금융자본의 팽창정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제국주의라는 용어는 이제 매우 정확히 규정된 경제적 내용을 가지고 있다. 소련 관료집단이 추구하는 대외정책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은 채 그저 "제국주의적"이라고 규정해서는 안된다. 만약 이럴 경우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의 정책을 독점자본의 정책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 두 현상은 팽창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해 모두 군사력을 이용하고 있다. 이것이 공통점이라면 유일한 공통점이다. 이렇게 두 현상을 동일하다고 인정할 경우 남는 것은 혼란뿐이다. 그리고 이 혼란은 맑스주의자보다는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자에게나 어울린다.  

 

짜르 제국주의 정책의 연장

현재 소련은 폴란드의 새로운 분할에 가담하고 있으며 발트해, 발칸반도,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등지로 손을 뻗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소련은 짜르의 제국주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의 정책을 제국주의적이라고 규정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 역사지리적 논리는 다른 어떤 논리들과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없다. 짜르 제국의 영토에서 성공한 노동자혁명은 애초부터 발트해 국가들을 정복하고자 시도했고 한때 정복한 적이 있다. 그리고 루마니아와 페르시아를 침공하려 했으며 어떤 때에는 군대를 바르샤바까지 진주시켰다(1920년). 이 혁명의 팽창은 짜르 제국의 팽창과 지리적으로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혁명이 지리적 조건들까지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멘셰비키들은 볼셰비키들이 짜르의 외교정책을 똑같이 물려받아 제국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이미 말한 바 있다.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은 지금도 기꺼이 이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논리를 그대로 모방할 이유는 전혀 없다.  

 

제국주의 세력의 하수인이라고 ?

그러나 소련의 팽창정책 자체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소련이 독일 제국주의를 원조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선 확실히 할 것이 있다. 심지어 완전히 건강한 노동자국가도 특정 상황에서는 이러 저러한 제국주의 국가를 지지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세계제국주의의 고리로부터 탈피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은 프랑스와 영국에 대항하여 일시적으로 독일 제국주의를 강화시켰다. 고립된 노동자국가는 적대적인 제국주의 세력들 사이에서 책략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책략이란 일시적으로 어느 제국주의 국가를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 대항해서 지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정 순간에 어느 쪽을 지지하는 것이 더 이익이 되며 덜 위험한지를 정확히 아는 것은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계산과 예측의 문제이다. 이러한 책략이 불가피하게 야기할 약점은 고립된 노동자국가가 이 책략을 통해 계속 생존할 수 있다는 점에 의해서 보상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책략을 써야하는 상황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소련 정부는 노동자국가를 살리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희생시켰다. 이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우크라이나에 대해 배신행위를 저질렀다고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계급의식을 보유한 모든 노동자들은 이 희생이 상황에 의해서 강요되었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폴란드 문제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스탈린 정권은 폴란드를 희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식으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었다. 이와 반대로 스탈린은 냉소적으로 폴란드 병합을 자랑했고 이로서 전세계 피억압 계급과 민족들의 가장 기본적인 민주적 감정을 건드렸다. 이 결과 소련의 국제적 입장은 대단히 약화되었다. 적군 점령지역이 집단적 소유로 탈바꿈한 경제적 효과도 이 정책이 가져온 해악의 10분의 1도 보상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소련의 대외정책은 제국주의 "우방"국들의 이익을 야바위꾼처럼 거들어주는 일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로서 부차적이며 일시적인 이익을 위해 세계노동운동의 근본 이해가 희생되고 있다. "민주주의 체제의 방어"라는 구호로 5년 동안 노동자들을 속인 후에 소련은 현재 히틀러의 약탈 정책을 덮어주는 일에 골몰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소련이 제국주의 국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스탈린과 코민테른은 현재 제국주의의 가장 가치있는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다.

제국주의 세력들에게 포위당한 퇴보한 노동자국가, 그리고 이 노동자국가를 지배하고 있는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의 정책, 바로 이것이 소련의 대외정책을 정확히 규정한 말이다. 이것은 "(소련의) 제국주의 정책"만큼 발음하기가 좋지도 않고 짧지도 않지만 대신 더 정확한 규정이다.  

 

"차선책"

적군이 동부 폴란드를 점령하는 것이 나찌 군대가 이 지역을 점령하는 것보다 더 낫다. 그러나 이 차선책도 히틀러가 더 커다란 해악을 미치도록 스탈린이 보장한 대가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어떤 집에 불을 놓거나 놓는 것을 도운 후에 생존자들을 종으로 삼기 위해 집안에 있는 10명 중 5명의 목숨을 구해주고 나중에 종으로 만들었다면 10명 모두를 태워 죽인 것보다는 더 나은 행위이다. 그러나 이 방화범이 인명을 구조했다고 메달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메달이 그래도 수여되어야 한다면 메달을 수여한 후 곧바로 이 자를 사형시켜야 한다. 빅토르 위고의 어느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말이다.  

 

"무장한 선교사들"

사람들은 총칼을 든 선교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로베스삐에르가 한때 말한 적이 있다. 즉 군사적 폭력을 통해 혁명 사상과 제도를 다른 민족에게 강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 올바른 사고는 다른 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혁명을 돕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입이 혁명적 국제정책의 일환이라고 세계 노동자들이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혁명군대가 진주하는 나라의 근로인민이 이 군사적 개입을 원해야 한다. 적극적 국제연대는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조건이다. 그런데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이론은 당연히 이것마저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만든다. 스탈린 정권은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국제노동계급의 생각과 정서와는 완전히 별개로 군사적 개입의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한다. 이 때문에 최근에 달성된 소련의 외교적 "성공들"은 소련의 이익을 아주 망쳐버렸으며 국제노동계급에게 극심한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두 전선에서의 봉기

그렇다면 소련과 적군 점령지역에 대한 방어 노선은 올바른가? 이렇게 어느 동지들은 묻는다. 스탈린과 히틀러 모두에게 대항하는 폴란드 노동자-농민의 봉기를 촉구하는 것이 더 올바르지 않을까? 당연히 이것은 아주 매력적인 선택이다. 만약 혁명이 독일과 소련 그리고 양국 점령지에서 동시에 일어난다면 많은 문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책은 가장 유리한 상황에만 기초할 수는 없다. 혁명이 스탈린을 타도하기 전에 히틀러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럴 경우 제4인터내셔널의 동지들은 스페인에서 프랑코에 대항하여 공화군과 함께 전투를 벌인 것처럼 히틀러의 군대에 대항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가 스탈린은 물론 히틀러로부터 완전히 독립되기를 충심으로 원한다. 그러나 이 독립이 쟁취되기 전에 우크라이나를 히틀러가 점령하려 한다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 제4인터내셔널의 입장은 명확하다. 히틀러에 대항해서 스탈린이 지배하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방어해야 한다.  

 

"무조건 소련을 방어하라"

"무조건" 소련을 방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소련 관료집단에게 어떠한 조건도 제시하지 않은 채 소련을 방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전쟁의 동기와 원인에 관계없이 제국주의 세력의 위협에 직면한 소련의 사회체제를 방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동지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내일 적군이 인도를 침공하여 그곳의 혁명운동을 진압할 경우 이 조치를 지지해야 하는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은 일관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우선 왜 인도가 예로 들먹거려지는지를 모르겠다.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더 단순 명료하다: 만약 적군이 소련 관료집단에 대항하는 노동자파업이나 농민의 항거를 위협한다면 우리가 적군을 지지할 것인가? 대외정책은 대내정책의 연장이다.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의 도구인 적군의 모든 행동을 우리가 지지하겠다고 약속한 적은 결코 없었다. 노동자국가인 소련 그리고 노동자국가에 속하는 것들만을 방어한다고 약속했을 뿐이다.

능란한 궤변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적군이 달성하는 "작업"의 성격에 관계없이 적군이 인도의 봉기 대중에게 패배한다면 결과적으로 소련이 약화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인도 혁명운동의 압살에 적군이 일조할 경우 적군이 일시적으로 이 운동에 의해 패배하는 경우보다 소련의 사회체제는 비교할 수 없이 더 많은 해를 입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적군이 오직 보나파르트 반동집단의 도구로서 행동하며 언제 어디서 소련의 사회체제를 방어하는지를 제4인터내셔널은 모든 경우에 알아낼 것이다.

반동적인 지도자가 이끄는 노동조합이 특정 산업분야에서 흑인의 고용을 반대하는 파업을 조직한다고 치자. 이런 수치스러운 파업을 우리가 지지할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나 파업 상황을 이용하여 고용주가 노동자의 조직적 자기방어 기구인 노동조합을 압살하려고 시도한다고 상상해보자. 이럴 경우 반동적인 지도자의 유무에 관계없이 당연히 노동조합을 방어할 것이다. 이와 똑같은 정책을 소련에 적용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기본 규칙

모든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자 정당은 전쟁 기간에 권력 장악을 목표로 계급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이것은 자국이 소련과 동맹관계에 있든 적대관계에 있든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제4인터내셔널의 확고한 규칙이다. 동시에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은 소련이나 식민지 혁명의 이해를 방어하는 일에서 눈을 떼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정말로 필요할 경우 파업, 태업과 같은 가장 단호한 행동들을 조직해야 한다. 제4인터내셔널이 이 규칙을 정한 이후 강대국들 간의 동맹관계는 근본적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이 규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내일 당장 프랑스와 영국이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위협할 경우 영국과 프랑스 노동자들은 군대와 보급품의 이동을 저지하기 위해 가장 단호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러나 상황의 논리에 의해 히틀러가 스탈린에게 군수품을 보내야 할 경우 독일 노동자들은 파업이나 태업 등 방해공작을 가할 이유가 없다. 어느 누구도 이와 다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맑스주의에 대한 수정?

[전쟁에 돌입한 소련]이라는 글에서 필자는 "관료적 집산주의"가 등장할 가능성이 이론상 존재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일부 동지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는 이것이 맑스주의에 대한 완전한 수정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오해이다. 맑스주의자에게 역사적 필연은 숙명론과 아무 관계가 없다. 사회주의는 "저절로" 실현되지 않으며 오직 살아 움직이는 세력, 계급, 정당들의 투쟁의 결과 실현된다. 노동계급은 역사적 진보를 대표하며 반면에 부르조아 계급은 반동과 쇠퇴를 체현한다는 점에서 노동계급은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승리를 확신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반동 세력이 사태를 장악한다면 사회는 어떤 성격을 띨 것인가?

맑스주의자들은 수많은 경우에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했다: 사회주의가 실현되지 않을 경우 인류는 야만상태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승리하는 "경험"을 접한 후 우리는 이렇게 수천 번이나 반복해서 외쳤다: 공산주의가 아니면 파시즘뿐이다. 실제로 사회주의는 일반적인 역사적 구도에 의한 예측보다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하고 이질적이며 모순된 경로를 통해 실현될 수밖에 없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국가의 사멸에 대해서 얘기한 바 있으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관료적 퇴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한 적이 없다.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러한 퇴보를 관찰하고 분석하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맑스주의의 수정인가?

사회주의 혁명이 지연될 경우 고질적인 실업, 쁘띠부르조아의 궁핍화, 파시즘,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떠한 새로운 전망도 열어주지 못한채 인류를 멸망시키는 전쟁과 같은 야만적인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명해 왔다. 인류가 사회주의로 나아가지 못할 경우를 이론적으로 인정한다면 새로운 "야만상태"는 어떤 정치적 사회적 모습을 띨 것인가? 우리는 맑스보다도 더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설명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파시즘과 소련의 퇴보는 신야만상태의 사회적 정치적 형태들을 개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회주의냐 아니면 전체주의적 노예상태이냐 하는 문제는 이론적으로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선동에 있어서도 엄청나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 제기를 통해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은 더욱 절박해지기 때문이다. 차라리 "비자본주의적"이며 "비노동자적"인 새로운 국가 유형을 제시하는 동지들이야말로 맑스주의를 수정하고 있다. 필자의 대안은 이들 동지들이 스스로 논리적인 결론을 내리게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 동지들은 스스로의 결론에 놀라서 필자를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한다. 필자는 이 비난을 우정어린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혁명을 낙관할 권리가 있다

[전쟁에 돌입한 소련]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증명하려고 했다: 비노동자적이며 비자본주의적 착취체제인 "관료적 집산주의"는 국제노동계급의 완전한 패배와 쇠퇴를 전망하고 있으며 가장 심오한 비관적 역사관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전망을 가질 진정한 이유들이 존재하는가? 우리 계급의 적들에게도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부질없는 짓은 아니다.

잘 알려진 주간 잡지 [빠리 석간](Paris Soir)은 1939년 8월 31일자 발간호에서 프랑스 대사 꿀롱드르(Coulondre)가 8월 25일 히틀러와 가진 마지막 회견 내용을 싣고 있다. 이 회견은 시사하는 바가 아주 많다. (정보의 근원은 꿀롱드르 자신이었다) 히틀러는 스탈린과 맺은 조약("현실적인 조약")에 대해 자랑하면서 프랑스와 독일 군대가 서로 피를 흘릴 것이라며 "유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꿀롱드르는 이렇게 이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중적인 책략을 멋지게 구사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진정한 승리자는 트로츠키입니다. 이 점을 진지하게 고려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에 대해 히틀러 총통이 대답했다: "알고 있소. 그런데 왜 프랑스와 영국은 폴란드에게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부여했소? 등등"

이 신사 양반들은 혁명의 유령에게 개인의 이름을 붙여주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외교관계가 단절된 바로 이 순간 이 점은 극적인 대화의 핵심이 아니다. 뼈 속까지 오싹해진 제국주의 민주주의 국가의 외교 사절 꿀롱드르는 히틀러에게 이렇게 겁준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혁명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에 대해 히틀러는 이미 오래 전에 결정된 문제인 것처럼 이렇게 말한다: "나도 알고 있소."

아주 놀랄만한 대화 내용임에 틀림없다! 꿀롱드르와 히틀러는 둘 다 유럽에 등장한 야만상태를 대표하고 있다. 동시에 이들은 자신들의 야만체제가 사회주의 혁명에 의해서 전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 세계의 모든 자본주의 지배자들은 이런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의 완전한 사기침체는 계급 역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노동계급은 어리며 아직도 유약한 혁명 지도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르조아 계급의 지도부는 발밑이 이미 썩어 들어가고 있다. 스스로 피할 수 없는 전쟁의 초입에 이들 신사 양반들은 미리 자신들의 사회체제가 붕괴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혁명의 성공을 낙관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은가!  

1939년 10월 18일

 

 

[5. The Referendum and Democratic Centralism] 당원 전체 투표와 민주집중제

국민투표를 통해 전쟁 문제를 결정할 것을 우리는 요구한다. 이 요구는 제국주의 국가기구의 중앙 통치력을 마비시키거나 약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원 전체의 투표를 통해 당의 문제들을 결정하는 것이 정상적인 방법인가? 이 질문에 대해 부정적인 대답을 내릴 수밖에 없다.

당원 전체 투표를 지지하는 동지들은 당 전체의 결정이 지부 결정의 산술적 총합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한결같이 동의한다. 그런데 지부들은 불가피하게 조직력과 경험에 있어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당대회에서 지부를 대표하는 대의원들이 지부의 정해진 입장에 따라 투표하도록 강제되어야 한다는 견해에 역시 이들 동지들은 동의한다. 그렇다면 이들 동지들은 전당대회가 당의 최고 의결기구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전당대회 대신 지부의 표결 내용을 합해서 당의 행동을 결정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 당의 집중제는 실종된다. 당원 전체 투표 방식을 받아들일 경우 가장 경험이 풍부하여 넓은 전망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가장 선진적인 지부들이 가장 후진적이며 경험이 부족한 지부들과의 표 대결에서 밀린다.

당연히 우리는 각 지부와 세포조직이 모든 문제들을 전면적으로 검토하고 이에 의거하여 표결하는 행위를 지지한다. 그러나 동시에 지부 대의원들은 전당대회에 제출되는 모든 주장들을 견주어 보고 자신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투표할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만약 대의원들이 자신들을 선출한 지부 다수파의 견해에 반대되는 결정을 했을 경우 전당대회가 끝나면 지부로 돌아가 자신들의 입장이 올바르다는 것을 설득시켜야 한다. 이렇게 하지 못할 경우 그는 정치적 신뢰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신뢰를 상실해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당원 전체 투표를 통해 당의 중앙기구가 강제되거나 지부 다수파에 의해서 지부 대의원의 정치적 의사가 강제되는 제도보다는 훨씬 낫다. 하나의 조직인 당이 완전히 파괴되는 비극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39년 10월 21일

 

[6. A Letter to Sherman Stanley] 셔먼 스탠리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스탠리 동지에게,

동지의 10월 11일자 편지에 대한 답장이 이렇게 늦었습니다.

(1) 러시아 문제에 관한한 "심각한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없다"고 동지는 말하고 있습니다. 동지의 말이 맞다면 왜 당내 다수파가 장악하고 있는 전국위원회(National Committee)에 대항하여 지독히 경계하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까? 전국위원회의 소수파는 이 문제가 심각하고 시급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 발발 순간인 지금 이 문제가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동지 자신의 견해를 소수파의 견해와 같은 것으로 보면 안됩니다.

(2) 나의 견해가 맥스 섁트먼(Max Shachtman) 동지의 견해와 충돌하지 않는다는 동지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두 가지 근본적인 사항에서 충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ㄱ) 소련의 사회 성격 (ㄴ) 소련의 방어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 섁트먼 동지는 물음표를 던지고 있습니다. 즉 당의 기존 입장을 거부하면서도 새로운 입장을 공표하기를 미루고 있습니다. 혁명정당은 이런 식으로 같은 문제에 대해 두 가지 입장을 허용할 수는 없습니다. 소련 영토나 독일 또는 영국에 대항하여 적군이 새로 점령한 영토를 방어하는 문제에 관해서 섁트먼 동지는 스탈린과 히틀러 모두에 대항하는 혁명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 추상적인 입장은 구체적 상황에서는 이들 영토를 방어하는 노선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제 항공우편으로 전국위원회에 보낸 나의 새로운 논문은 이 문제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3) 진지한 토론만이 문제점을 명확하게 한다는 동지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다수파의 견해와 섁트먼 동지의 견해를 동시에 표결에 붙이는 것은 문제를 명확하게 드러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4) 동지는 편지에서 주요한 사안은 소련 방어 문제가 아니라 다수파의 "당 운영(internal regime)"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우리 운동이 시작한 때부터 다수파에 대한 이런 비난을 들어왔습니다. 표현 방식은 약간씩 다르고 구성 분파들도 다르지만 많은 수의 동지들은 항상 "다수파의 당 운영" 방식을 반대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이 동지들은 우리 조직이 사회당에 입당한 전술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곧 입당전술이 아니라 당 운영 방식이 "주요한 사안"이 되었습니다. 이제 소련 방어 문제에 있어서도 똑같은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5) 사회당 입당 전술은 우리 당의 발전과정에서 필요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술을 구사한 다수파 지도부의 "당 운영" 방식도 당의 정체 현상을 드러낸 반대파에 비해 옳았습니다.

(6) 전쟁 초기인 지금 소련 방어 문제에 대해서 날카로운 대립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최소한 지난 10년 동안 수없는 논쟁과 토론을 통해 소련 방어 입장은 올바른 것으로 확립되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입장이 영원히 변치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도부의 어느 동지가 기존의 결정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 문제를 당 전체에 공개하기 전에 주요 당기구 내부에 새로운 연구나 토론을 촉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명확하게 자신의 입장을 내놓는 것이 당에 대한 의무입니다. 더욱이 정교화된 새로운 결론이 아니라 의심을 나타내는 형태로 문제를 드러내야 합니다. 물론 당 규약에 의하면 당원 모두와 심지어 정치위원도 이런 권리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권리가 그동안 당 운영의 개선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올바르게 행사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7) 주도성이 부족하다 등의 식으로 전국위원회가 과거 자주 비난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전국위원회는 해야될 일들 가운데 하지 못한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비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과정에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즉 동지들은 주도성이 결여된 소속 지부의 활동에 대한 불만을 전지전능 해야하는 전국위원회에 대한 비난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8) 현재 전국위원회는 "보수적 행태"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강령적 결정이 나기까지 기존의 결정을 방어하는 것이 전국위원회의 임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수적 행태"는 당이라는 조직을 보존해야 할 필요에 의해 나온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9) "당 운영" 방식에 대해 불만을 가진 동지들은 지난 시기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안에 대해 올바르지 못한 정치적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당은 잘못된 정책이 아니라 올바른 정책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정책이 틀린 것으로 판명날 경우 정책을 주도한 동지들은 정책이 아니라 전반적 당 운영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유혹에 빠집니다. 좌익반대파와 제4인터내셔널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 수백 번이나 반대해 왔습니다. 베레컨(Vereecken), 스니블릿(Sneevliet), 심지어 몰리니에(Molinier) 같은 동지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틀린 것으로 밝혀지자 제4인터내셔널의 전반적 문제는 이러저러한 결정사항이 아니라 당운영 전반에 있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10)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현재 소수파 지도부를 베레컨, 스니블릿과 같은 동지들과 연상시킬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소수파 지도부 동지들이 매우 뛰어나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우호적인 방식으로 함께 일해나가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일부 동지들이 추종 분파들의 지지를 업고 과거와 같은 오류를 매번 범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니 마음이 심란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토론을 통해 이런 오류가 분석되고 당 전체의 입장으로 단호하게 비난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당은 현재 엄청난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원칙한 정치 행동은 명확히 비판받아야 합니다.  

1939년 10월 22일

동지애를 전하며

트로츠키

추신 : 이 편지는 전국위원회의 다수파와 소수파 특히 섁트먼 동지 결의안을 지지하는 동지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이 편지의 사본을 캐넌 동지와 섁트먼 동지에게도 보냅니다.

 

[7. A Letter to James Cannon] 제임스 캐넌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캐넌 동지에게,

동지의 10월 24일자 편지를 읽은 후 2가지 사항이 명확하게 정리되었습니다: (1) 아주 심각한 사상투쟁이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에서도 이것은 필요하다; (2) 이 사상투쟁을 조직의 분리, 숙청, 출당처분 등을 예상하고 진행하는 것은 당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치지는 않더라도 지극히 편견에 사로잡힌 사고입니다.

예를 들어 굴드 동지는 당원회의에서, "동지들이 나를 출당시키려 하고 있군요."라고 선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발언에 대해서 다른 동지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나라면 이런 의심에 찬 굴드 동지의 발언에 대해 즉각 아주 강력한 어조로 항의하겠습니다. 이러한 소문과 진상 등에 대해서 조치를 취할 특별규율위원회(special control commission)를 소집할 것을 제안합니다. 다수파 동지들이 출당처분 등의 위협을 소수파에게 가할 경우 견책이나 중경고를 받도록 표를 던지겠습니다.

당에는 새로운 당원들과 제대로 교육을 거치지 않은 청년 동지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중대한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진지한 교육 토론을 거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이들이 중앙위원회로부터 강등, 권위 상실, 자격박탈, 출당처분 등 개인적인 굴욕을 당할 것을 생각한다면 진지한 토론이 불가능할 것이며 지도부의 권위마저 손상됩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지도부가 쁘띠부르조아적인 관념이나 조직적 편견에 대해서 가차없는 투쟁을 전개하되 동시에 토론의 활성화와 소수파의 존립을 보장한다면 결과는 사상적 승리 뿐만 아니라 지도부의 권위 강화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견이 존재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상층부의 화해와 타협"이 이루어진다면 물론 이것은 당에 대한 범죄행위에 해당합니다. 나같으면 소수파 지도부에게 진지한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방식과 정치적 협력에 대해 합의나 타협을 하도록 제안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ㄱ) 양측 모두 위협, 개인적 굴욕 등에 해당하는 발언을 해서는 안된다. (ㄴ) 양측 모두 토론 과정에서 성실하게 협력할 것을 의무로 한다. (ㄷ) 위협, 위협에 대한 소문, 주장된 위협에 대한 소문, 사임 등 모든 기만적 술책에 대해서 전국위원회나 특별위원회가 낱낱이 조사한다. 그리고 이런 사항들은 토론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등등.

만약 소수파가 이런 합의 내용에 동의한다면 동지는 토론을 엄격한 질서 속에 진행할 수 있을 것이며 주도권을 행사하는 강점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만약 소수파가 이런 합의 내용을 거부한다면 동지는 당원회의가 있을 때마다 소수파에 대한 제안사항들을 공개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소수파의 불평이 근거없으며 다수파의 "당 운영" 방식이 올바르다는 것이 증명될 것입니다.

지난 번 전당대회는 아주 좋지 않은 시기에 열려 도중에 결렬되었습니다.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토론은 전당대회가 끝난 후 시간이 약간 흐른 후에나 가능합니다. 따라서 성탄절을 전후하여 새로 전당대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요한 강령적 입장을 당원 전체의 투표에 회부하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이러한 방식은 지부들을 중심으로 조직이 분리되는 결과를 촉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제시한 합의안을 기초로 소수파에게 새로 전당대회를 열자고 제안할 수 있다고 봅니다. 소수파의 조직적 존립을 보장하면서 두 가지 주요한 강령적 내용을 가지고 대회가 진행되면 되기 때문입니다.

전당대회 개최에는 많은 비용이 듭니다. 그러나 현재의 토론과 이것이 가져올 당의 위기를 종결시킬 방법이 이것 이외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1939년 10월 28일

트로츠키

추신 : 물론 모든 심각하고 날카로운 토론은 당원의 이탈, 사임, 출당처분 등을 야기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부의 최상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상황의 논리에 의해 이런 사태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당원 모두가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결과가 지도부의 원하는 바가 결코 아니며 토론의 전제도 아니라는 점도 이들이 확신해야 합니다. 이 점은 내가 보기에 가장 결정적인 사항입니다.    

 

 

 

 

[8. A Letter to Max Shachtman] 맥스 섁트먼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섁트먼 동지에게,

동지는 10월 15일 뉴욕 지부 전체 당원회의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이 연설의 사본을 받았습니다. 물론 최대한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았습니다. 제4인터내셔널의 기본 문서들에서 표현된 우리의 공동 입장들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보여지는 훌륭한 생각들과 표현들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동지가 우리의 기존 입장을 "불충분하고 부적절하며 시대에 뒤진" 것으로 공격한 점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설명이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이론적 가설과 예상이 아니라 전개되는 사건들의 구체적 모습들이다"(17쪽) 라고 동지는 말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동지는 사건들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서 아주 추상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 사건들이 상황을 변화시키며 이것이 우리의 정치활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동지는 과거의 예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동지에 의하면 우리는 제3인터내셔널의 퇴보(18쪽) 를 "보았고 예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독일에서 히틀러가 승리하고 난 다음에야 제4인터내셔널을 선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이 예는 표현이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제3인터내셔널의 퇴보뿐만 아니라 소생의 가능성도 예상했습니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 독일의 상황을 목격한 후 비로소 코민테른이 파멸의 과정을 걷고 있으며 어떤 요인도 이 조직을 소생시킬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우리는 기존의 입장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즉 우리는 제3인터내셔널에 대항하여 제4인터내셔널의 창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에 대해서는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제3인터내셔널은 당이었으며 정치적 생각과 방식에 기초한 사람들의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단은 너무나 맑스주의에서 이탈했으므로 우리는 이 집단을 소생시킬 모든 희망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이데올로기적인 집단일 뿐만 아니라 계속 존속하는 복잡한 사회적 제도들의 집합체입니다. 관료 지배집단의 정치사상이 10월 혁명의 사상과 거의 정반대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혁명을 통해 소련을 소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가 아직 포기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동지는 지금 이 입장을 포기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까? 내가 확신컨대 동지는 이렇게 믿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건들의 "구체적인 모습"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무엇입니까?

이 점과 관련하여 동지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의 민족 독립 구호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동지가 이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지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본 입장은 소련연방공화국의 분리주의 경향을 반대하는 것이었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19쪽) 알겠습니다.

동지는 우리가 이전에 비해 근본적인 "정책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하고 있군요. 그러나 (1)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독립 구호는 히틀러-스탈린 조약 이전에 제안되었습니다. (2) 이 구호는 소련 관료집단의 혁명적 타도라는 우리의 일반적 구호를 민족문제에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같은 논리로 동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소련 정부에 대한 전복행위를 반대하는 것이 우리의 기본입장이었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본적 입장을 이미 수년 전에 바꾸었습니다. 이 입장과 관련하여 동지가 지금 어떤 새로운 수정을 제안할지 정말이지 알 수 없습니다. 동지는 적군이 1920년 폴란드와 그루지아에 진주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자, 상황이 과거와 같다면 당내 다수파는 폴란드, 핀란드, 발트해 국가들에 적군이 진주하는 것을 환영해야 한다고 나는 제안합니다 " (20쪽) 연설 내용 가운데 결정적인 이 부분에서 동지는 1920년과 1939년 사이에 뭔가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었다고 확언하고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제3인터내셔널은 파산했으며 소련 국가기구는 퇴보했습니다. 그리고 좌익반대파는 조직적으로 발전하여 제4인터내셔널을 창립했습니다. 1920년과 1939년 사이에 "사건들의 구체적 모습"은 정확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은 왜 우리가 군사정책을 포함하여 소련 관료집단의 정책에 대한 기존 입장을 근본적으로 수정했는지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1920년 당시 우리는 적군의 군사 행동뿐만 아니라 소련 비밀경찰(GPU)의 행동까지 지지했습니다. 이 사실을 동지는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국가기구를 평가할 때 적군과 비밀경찰은 원칙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이 두 조직은 활동을 통해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기구가 중복되어 있습니다. 1918년 이후 몇 년 동안 반혁명 분자들과 제국주의 첩자들에 대한 체카(Cheka)비밀경찰의 투쟁을 우리는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1927년 비밀경찰이 볼셰비키들을 체포, 추방, 총살했을 때 우리는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상황 변화는 독소불가침 조약이 체결되기 최소한 11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동지가 냉소적으로 "1920년에 우리 모두가 채택한 입장을 똑같이 반복하기를 심지어(!) 다수파조차 거부하고 있다 "(20쪽)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내가 꽤 놀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입장을 1923년부터 수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객관적인 사태변화에 대체로 발맞추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1933년과 1934년에 걸쳐 결정적으로 크게 변화했습니다. 우리 기존 정책과 관련하여 동지가 제안하는 새로운 근본적인 변화들이 무엇인지를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1920년에 견지한 입장으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특히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 방어 노선을 기각해야할 필요성을 동지는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동지는 우리의 기존 노선이 스탈린의 모든 외교적 군사적 행동을 무조건 지지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소중한 섁트먼 동지. 이것은 "사건들의 구체적 모습"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습니다. 1927년에 이미 우리는 중앙위원회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사회주의 조국을 위해서? 그렇다. 스탈린의 노선을 위해서? 아니다!" ([거짓을 일삼는 스탈린 일당, The Stalin School of Falsification] 177쪽) 그리고 소위 "끌레망쏘에 대한 테제(thesis on Clemenceau)"가 진정한 소련 방어를 위해서 노동계급의 전위당이 스탈린 정권을 제거하고 노동자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선언했음을 동지는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테제는 자그마치 1927년에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5년 후 소련에서 정권의 변화는 오직 정치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 이를 통해 관료집단이 소련을 방어하는 것과 구별하여 우리는 소련을 노동자국가이기 때문에 방어한다는 근본적인 노선 차이를 부각시켰습니다. 그런데 동지는 우리의 과거 노선을 스탈린의 모든 군사적 외교적 조치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4인터내셔널 창립뿐만 아니라 좌익반대파의 활동 개시 이래 우리가 견지한 노선 전부를 끔찍하게 왜곡하는 행위입니다.

소련에 대한 우리의 노선은 스탈린 관료집단의 행동, 술수, 범죄행위 등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소련이라는 노동자국가와 세계혁명의 이익에 의해 규정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인 방어 노선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소련의 국가소유에 대한 방어 노선을 세계혁명의 이익에 종속시킨다는 나의 표현을 동지는 연설 말미에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소련의 방어와 국제혁명의 이익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모순을 결연히 반대한다는 것이 우리의 기존 노선이었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전자를 후자에 종속시킨다고는 결코 이해한 적이 없습니다. 종속시킨다는 말은 이 양자 사이에 모순이나 모순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37쪽) 그리고 이 논리로부터 동지는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인 방어 노선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이 논리는 최소한 두 가지 오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소련의 국가소유에 대한 방어가 어떻게 그리고 왜 세계혁명의 이익과 "모순"된다는 것입니까? 우리 소련 방어 노선이 아닌 스탈린 관료집단의 소련 방어 노선이 세계혁명의 이익과 모순을 일으킨다고 동지는 무의식중에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모든 경우에 모든 측면에서 이것은 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방어 노선은 소련 관료집단의 정책에 의해 규정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오해입니다. 그러나 동지는 묻습니다. 모순이 없다면 왜 종속시킬 필요가 있을까? 여기에 두 번째 오해가 있습니다. 부분을 전체에 종속시킨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소련의 방어를 세계혁명의 이해에 종속시킵니다. 1918년 부하린은 독일에 대한 혁명전쟁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레닌은 대체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 독일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면 지는 것을 무릅쓰고라도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독일 혁명은 러시아 혁명보다 더 중요하다. 독일에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는 데 필요하다면 (잠시) 러시아 노동자 정부를 희생해야 한다." 지금 시점에서 시카고에서 파업을 전개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비합리적입니다. 그러나 전국적 차원의 총파업을 돕는 일이라면 시카고 노동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계급 전체의 이익에 종속시켜서 파업을 촉구해야 합니다. 만약 소련이 독일과 동맹하여 전쟁에 돌입했다면 독일 혁명은 확실히 즉시 소련의 방어에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노동자들에게 혁명에 나서지 말 것을 우리가 충고해야 합니까? 코민테른이라면 당연히 이런 식의 충고를 던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다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소련 방어를 세계혁명의 이해에 종속시켜야 한다."

동지의 주장에 대해 나는 [소련의 사회성격에 대해서 다시 또다시]라는 최근의 글에서 답변을 시도했습니다. 이 글은 동지의 연설문 사본을 읽기 전에 이미 작성되었습니다.

우리와 공동의 투쟁 경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새로운 당원들을 동지는 수만 명 거느리고 있습니다. 동지의 연설이 이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 같아 걱정입니다. 이들은 소련 관료집단을 최소한 국제무대에서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방어했다고 생각할 것이며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불가침조약을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건의 전개에 의해서 기습을 당했으며 이제 우리의 기존 입장을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사실과 다릅니다! 지도력, 보수적 조직운영 행태, 당 운영 방식 등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거나 토론한 동지의 연설 내용과는 별도로 다시 우리는 소련 방어 문제에 대해서 입장을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제4인터내셔널 전체뿐만 아니라 미국 지부의 이익을 위해 이 사항을 꼼꼼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진짜 위험은 방어할 가치가 있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 방어 노선에 있지 않습니다. 소련을 파시스트 국가들과 동일시하면서 민주적 제국주의 세력들에게 이익을 주는 정치 경향들을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진짜 위험한 일입니다. 모든 정치 경향들을 하나로 뭉뚱거린 후 볼셰비키주의나 맑스주의를 스탈린주의와 타협하도록 시도하는 경향들을 지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합니다. 경험적인 구체성에서가 아니라 일반적 경향에 있어서 사건들의 전개상황을 예상한 조직은 우리밖에 없습니다. 전쟁의 시작 때문에 노선을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조직의 강점입니다. "올바른 당 운영" 방식을 확립하기 위한 분파투쟁에 휩싸여 일부 동지들은 다음과 같이 계속 외칩니다: "우리는 기습당했다! 우리의 기존 노선은 틀린 것으로 증명되었다! 새로운 노선을 즉흥적으로 수립해야 한다! 등등" 이 동지들은 내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올바른 당 운영 방식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규정해 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동지들의 사고는 매우 잘못되었으며 아주 위험합니다.  

1939년 11월 6일

뜨거운 동지애를 담아서,

트로츠키

이 편지 사본을 캐넌 동지에게도 보냅니다.

추신 : 이 편지는 내가 영어로 불러준 것을 동지들이 교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잘 다듬은 논문에 비해서 표현이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이해를 바랍니다.    

 

[9. A Letter to James Cannon] 제임스 캐넌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캐넌 동지에게,

소수파 지도자들은 원칙에 입각하여 분파투쟁을 수행하자는 동지의 제안을 아직까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동봉한 글에 대해 이들이 어떻게 반응을 보일지는 뻔할 것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글에는 기본적인 측면에서 올바른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없습니다. 트로츠키는 당활동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판단일 것입니다. 쁘띠부르조아 경향 모두가 소수파와 견해를 같이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노동자 회원들 전부가 다수파와 동조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이 글이 결코 자신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고 덮어씌우고 있다"는 식의 주장들을 늘어놓을 것이 확실합니다.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요구하면서 소수파 지도자들은 제국주의 전쟁 시대의 요리책에서 요리법들을 찾아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요리책을 저술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원칙에 입각한 접근방법들을 찾아낼 경우 어떠한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정확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문제들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이것은 가능합니다. 핀란드 문제에서 소수파 지도자들은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을 능력이 없음을 확실히 증명했습니다.

구성원의 성격이 완전히 같은 분파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노동자 정당이나 분파에서도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어떤 성격의 그룹이 조직이나 분파 전체의 성격을 주도하느냐 입니다. 이 글은 소수파 지도자들의 생각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당연합니다. 비판적인 분석에 견딜 수 없는 소수파의 견해들은 확고한 형태도 없으며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글은 소수파 지도자들이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고 "낙인찍지" 않습니다. 다만 이들의 생각들을 끝까지 전개시켰을 뿐입니다. 물론 나는 당내 투쟁을 옆에서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투쟁의 일반적인 특징들은 옆에서 보면 더 잘 보이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1939년 12월 15일

동지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잡으며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멕시코

 

[10. A Petty-Bourgeois Opposition in the Socialist Workers Party]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쁘띠부르조아 소수파  

 

이론에 대한 회의와 절충

[새로운 인터내셔널](New International) 1939년 1월호에서 버넘과 섁트먼 동지는 공동으로 "후퇴하고 있는 지식인"(Intellectuals in Retreat) 이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에는 올바른 사고와 정확한 정치분석들을 많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 결함까지는 안가더라도 근본적으로 부족한 점들이 드러나고 있어서 글의 가치가 손상을 입고 있다. 이 글은 무엇보다도 충분한 이유도 없이 "이론 "의 옹호자로 자처하는 인사들을 겨냥하여 논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다. 의도적으로 이 글은 이론적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스프링이 빠진 벽시계처럼 미국의 "급진" 지식인들은 변증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맑스주의자로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는 변증법을 기각한 이유가 전혀 실려있지 않다. 그러나 이유는 단순하다. "무제한의 기회"가 보장되는 이 나라에서 지식인들은 계급투쟁 원리를 다른 어느 나라 지식인들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거부해왔기 때문이다. 사회 모순을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이론 영역에서 모순의 논리인 변증법을 거부하였다. 정치 영역에서는 영특한 삼단논법을 통해 "공정한" 정치강령의 올바름을 모든 사람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사회는 "합리적인" 조치들을 통해 재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론 영역에서도 "상식" 수준으로 낮추어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이 모든 문제들의 해답을 찾는 데 충분하다고 이들은 생각하였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짬뽕인 실용주의는 미국의 국가철학이 되었다. 맥스 이스트먼(Max Eastman)의 이론적 방법론은 헨리 포드(Henry Ford)의 방법론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두 사람 모두 살아 움직이는 사회를 "공돌이(engineer)"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다만 이스트먼은 플라톤처럼 관념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맥스 이스트먼의 할아버지들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영토를 차지하고 재산을 쌓아 올리는 일에 변증법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변증법에 대해서 미국 지식인들이 경멸을 나타내는 이유는 이렇게 역사적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변해서 미국 자본주의처럼 실용주의 철학은 파산지경에 처해 있다.

사회의 물질적 발전과정과 철학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관계를 "후퇴하고 있는 지식인"의 필자들은 보여주지 않았고 보여줄 수도 없었으며 보여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왜 이런 태도를 보이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버넘과 섁트먼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이 글의 두 저자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일반이론에 대해서 평가를 완전히 달리하고 있다. 한 명은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나머지 한 명은 거부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론은 어떤 방식으로든 실천과 관계있지만 이 관계는 언제나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미 말한 바 있듯이 인간은 종종 일관성이 없이 행동한다. 본 저자들은 모두 상대방이 `철학 이론 '과 정치적 실천 사이에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비일관성은 어떤 경우에는 구체적이고도 결정적인 정치적 이견을 가지고 올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이견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좀더 추상적인 이론에 대한 서로의 견해가 오늘이나 내일의 구체적인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 반드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고 증명한 적은 아직은 없다. 사실 정당, 강령, 투쟁들은 이러한 구체적인 사안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같이 일하면서 좀더 여유가 있으면 좀더 추상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 두 저자는 희망하고 있다. 한편 파시즘, 전쟁, 실업이 인류를 괴롭히고 있다."

이 대단히 놀라운 논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엉터리 방법론으로 가끔 올바른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올바른 방법론으로 정말이지 빈번하게 올바르지 못한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방법론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어느 때이든 좀더 여유가 있으면 방법론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할 일들이 있다는 식이다. 연장이 나쁘다고 조장에게 불평하는 노동자가 조장의 다음과 같은 답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상상해 보자: 나쁜 연장으로도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으며 좋은 연장을 가지고도 많은 사람들은 재료만 낭비할 뿐이다. 이런 대답에 대해서 노동자는 특히 도급제로 삯을 받을 경우 전혀 황당하지 않은 올바른 말로 조장에게 대꾸할 것이다. 노동자는 노동대상을 다루기 어렵기 때문에 좋은 연장의 가치를 인정한다. 반면에 쁘띠부르조아 지식인은 쉽게 바뀌는 말과 피상적인 일반화를 자신의 "연장"으로 삼는다. 그리고는 주요한 사건들이 그의 머리를 강타할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당원이 변증법에 몰두해야 한다고 말할 경우 이것은 당연히 무기력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계급투쟁이라는 학교를 졸업한 노동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변증법적 사고에 도달한다. 변증법이라는 용어는 몰라도 그는 그 방법론과 결론을 즉시 받아들인다. 그런데 쁘띠부르조아에게는 설상가상의 일이 벌어진다. 물론 노동계급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어서 내적인 혁명이 없이도 노동계급의 견해로 넘어가는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분자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학교에서 훈련받은 쁘띠부르조아의 경우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이들의 이론적인 편견들은 이미 학교 걸상에서 완성되었다. 변증법의 도움이 없이도 온갖 지식들을 많이 얻는다면 이들은 변증법이 없이도 세상을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이들은 이론의 도구들을 확인하고 닦고 벼리는 일에 실패하고 협소한 일상적 관계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정도만큼 이들은 변증법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거대한 사건들에 의해서 내동댕이 처질 경우 이들은 쉽게 방향을 잃고 다시 쁘띠부르조아적 사고방식에 빠져든다.

"비일관성"에 기대어 원칙에 위배되는 이론적 동맹을 정당화하는 것은 맑스주의자 답지 못한 행위이다. 비일관성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며 정치에서는 개개의 증상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비일관성은 보통의 경우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일관성을 가질 수 없는 사회 세력들이 존재한다. 오래된 쁘띠부르조아 경향을 벗어 던지지 못한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은 노동자 정당 내부에서 의식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이론적인 타협을 강요당한다.

위에서 인용한 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변증법적 방법론에 대한 섁트먼 동지의 태도는 절충적 회의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 동지는 맑스주의 학교에서 이 질병에 걸리지 않았다. 당연히 모든 종류의 회의에 빠지는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 몹쓸 병을 전염받았다.  

 

경고와 확인

이 글은 너무도 나를 놀라게 하였다. 그래서 즉시 섁트먼 동지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동지와 버넘 동지가 지식인들에 대해 쓴 글을 지금 바로 읽었습니다. 많은 부분들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변증법에 대한 부분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편집자인 동지 개인이 맑스주의 이론에 가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타격입니다. 버넘 동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변증법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점은 아주 명확하며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동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변증법을 인정한다. 그러나 문제될 게 전혀 없다. 이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동지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새로운 인터내셔널] 독자들에게 엄청난 혼란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이스트먼 같은 작자들에게 가장 훌륭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좋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대화를 나누도록 합시다."

현재의 논쟁이 진행되기 몇 달 전인 1월 20일에 나는 이 편지를 썼다. 그런데 3월 5일이 되어서야 답장이 왔다. 내가 왜 이 문제에 대해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의 답장이었다. 3월 9일 나는 섁트먼 동지에게 다시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변증법을 거부하는 동지와 협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나는 조금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변증법이 아주 중요한 쟁점이 되는 그리고 될 수밖에 없는 글을 이런 동지와 공동으로 작성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다고 확인했을 뿐입니다. 논쟁은 정치와 이론의 두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동지의 정치적 비판은 좋습니다. 그러나 동지의 이론적 비판은 충분하지 못합니다. 적극적으로 비판해야할 지점에서 비판을 거두기 때문입니다. 즉 변증법을 거부하는 인사들의 오류는 적어도 이론의 측면에서 보면 변증법을 통해 사물의 논리를 끝까지 전개할 수 없는 무능력과 무의욕의 결과입니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그리고 이 임무는 교육적 측면에서 아주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지는 변증법은 개인적인 문제이며 변증법적 논리가 없이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서 섁트먼 동지는 변증법에 반대하는 버넘동지와 동맹을 맺었다. 이로서 그는 이스트먼, 쿡(Cook) 그리고 많은 인사들이 변증법에 반대하는 투쟁을 시작하더니 결국 사회주의 혁명에 반대하는 정치투쟁을 하는 이유들을 보여줄 가능성을 스스로 박탈했다.

현재 당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선 논쟁은 내가 예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내가 우려할 수 있었던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날카로운 형태로 나의 우려와 경고를 확인해 주었다. 섁트먼 동지의 방법론적 회의주의는 소련의 사회 성격 문제에서 한탄스러운 열매를 맺었다. 꽤 오래 전부터 버넘 동지는 자신의 직관적인 인상을 통해 비노동계급적 비부르조아적 국가를 순전히 경험적으로 이론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결과 응그슬쩍 국가가 계급지배의 기관이라는 맑스주의적 국가론을 청산해 버렸다. 여기에 대해서 그는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이 문제는 좀더 고려해 보아야 한다." 더욱이 그와 버넘 동지는 우리의 "정치적 임무"에 대해서 완전히 견해를 같이하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 일치는 소련의 사회성격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전혀 없다. 독자들은 다시 한번 이 동지들이 변증법에 대해 쓴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버넘은 변증법을 거부한다. 섁트먼은 이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일관성"이라는 하늘이 내린 선물은 이들이 공통된 정치적 결론을 갖는 것을 허용한다. 그런데 이 동지들 모두가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입장은 변증법에 대한 이들의 태도를 조목 조목 반복하고 있다.

이 두 경우 모두 버넘이 주도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실용주의라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섁트먼에게는 방법론이 없다. 그는 버넘의 입장에 자신을 동화시키고 있다. 버넘의 반맑스주의적 개념들에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도 섁트먼은 사회학뿐만 아니라 철학 영역에서도 버넘과 함께 반맑스주의적 연합을 유지하고 있다. 이 두 경우 모두 버넘은 실용주의자로 섁트먼은 절충주의자로 등장하고 있다. 이 현상은 아주 커다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즉 두 개의 서로 다른 사고 영역과 가장 중요한 두 문제에 있어서 버넘과 섁트먼 동지는 완벽히 견해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순전히 이론적인 사고를 해본 적이 없는 동지들마저 놀라게 하는 장점이 있다. 사고 방법은 변증법적이거나 속류적이거나,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존재하며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있다.

지난 1월 우리는 이 두 저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이러한 비일관성은 어떤 경우에는 구체적이고도 결정적인 정치적 견해 차이를 가지고 올 수 있다. 그런데 현재로는 이러한 견해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좀더 추상적인 이론에 대한 견해 일치나 견해 차이가 오늘이나 내일의 구체적인 정치적 사안들에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고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증명한 적이 없다. " 어느 누구도 아직까지 증명한 적이 없다니! 바로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이 두 동지들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같은 "추상적 이론 "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가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에 정확하게 표현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인 바 있었다.

물론 이 두 예 사이의 차이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들이 이론적이 아니라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두 경우 모두 두 동지는 변증법에 대한 거부와 반(半) 거부를 기초로 동맹하였다. 그러나 첫 번째 경우에 이 동맹은 노동자 정당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두 번째 경우에 이 동맹은 자기 정당의 맑스주의 분파에 대항하였다. 말하자면 군사작전의 전선은 바뀌었으나 무기는 그대로인 셈이다.

정말이지 사람들은 자주 일관성을 결여한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어떤 일관성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철학과 논리는 비일관성이 아니라 일관성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버넘은 변증법을 알아보지 못하나 변증법은 그를 알아보아서 그에게 지배력을 넓히고 있다. 섁트먼 동지는 변증법이 정치적 결론을 내리는 일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신의 정치적 결론을 통해 변증법에 대한 그의 경시가 한탄스러운 열매를 맺고 있음을 본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다루는 교과서에 섁트먼의 예를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

작년 제4인터내셔널의 동조자인 영국의 어느 젊은 정치경제학 교수가 나를 방문했다. 사회주의를 실현시키는 방도들을 논의하는 가운데 그는 갑자기 케인즈와 그 밖의 인물들의 정신에 입각한 공리주의 경향을 보였다: "명확한 경제적 목적을 결정하고 이것의 실현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도들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등등.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변증법에 반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겠소." 그는 어느 정도 놀라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변증법이 어느 짝에 쓸모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다시 대답했다: "그러나 경제문제에 대해서 귀하가 말한 것을 가지고 귀하가 어떤 철학 조류에 속하고 있는지를 변증법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만하더라도 변증법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때 이후 이 교수로부터 아무 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 비변증법적 교수는 소련이 노동자국가가 아니며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 방어는 "시대에 뒤진" 견해이며 우리의 조직 운영 방법들이 나쁘다 등등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견해들을 기초로 그가 어떤 일반적 사고 유형에 속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대체로 그가 다른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는지도 예상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변증법적 사고 방법이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교육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근본 원리

수바린(Souvarine)처럼 썩을 대로 썩은 회의론자들은 변증법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자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뭔가를 배우려고 하는 "맑스주의자들"이 있다. 이런 맑스주의자들은 [월간 현대](Modern Monthly)의 지면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지금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소수파 내부에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악성 전염병에 걸리지 않도록 청년 동지들에게 경고하는 것이 지금 필요하다.

변증법은 소설같은 허구도 아니며 신비주의도 아니다. 사고 형식의 과학으로서 일상적인 문제들뿐만 아니라 좀더 복잡하고 과정이 장기화된 사물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변증법과 형식논리학 사이의 관계는 고등수학과 하등수학과의 관계와 비슷하다.

여기서 아주 간략하게 문제의 핵심을 제시해 보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순 삼단논법은 "갑"은 "갑"과 같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이 가정은 수많은 인간의 실제 행동과 초보적인 일반화 작업의 공리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갑"은 "갑"과 같지 않다. 이 두 글자를 렌즈로 비추어 보면 이 점은 쉽게 증명된다. 이 두 글자는 크게 다르다. 그러나 여기서 반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글자의 크기나 형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이 글자들은 설탕 1파운드와 같이 같은 양을 나타내는 상징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등등. 그러나 이 반대 의견은 논점을 벗어나고 있다. 실제로 설탕 1파운드는 설탕 1파운드와 결코 같지 않다. 좀더 세밀하게 측정하는 저울은 언제나 이 차이를 보여준다. 다시 여기서 반대 의견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설탕 1파운드는 자기 스스로와 같지 않은가? 그런데 이 의견도 사실과는 다르다. 모든 물체의 크기, 무게, 색깔 등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물체들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여기에 대해서 궤변가는 이렇게 반대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다: 설탕 1파운드는 "특정 순간에" 자기 자신과 같을 수 있다. 이 "공리"의 지극히 의심스러운 실제적 가치는 논외로 치더라도 이 공리는 이론적인 비판에 견딜 수 없다. "순간"이란 말을 정말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만약 이 순간이 극미한 시차라면 설탕 1파운드는 이 "순간"에 어쩔 수 없이 변할 수밖에 없다. 혹시 이 "순간"이란 것이 0시와 같이 순전히 수학적인 추상적 개념은 아닌가? 그러나 모든 것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 존재 자체가 곧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이다. 따라서 시간은 존재의 기본 요소이다. 따라서 "갑"이 "갑"과 같다는 공리는 사물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즉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신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뜻 보면 이러한 "세세한 논리들"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논리들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지금까지 얘기한 "갑"이 "갑"과 같다는 공리는 모든 지식의 출발점인 것처럼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모든 오류의 출발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이 공리는 특정 한도 내에서만 아무 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갑"의 양적인 변화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일에서 무시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공리는 인정될 수 있다. 설탕 1파운드를 거래할 때가 바로 이런 경우에 속한다. 태양의 온도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주 최근까지 달러화의 구매력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특정 한도를 넘어선 양적인 변화는 질적인 변화로 바뀐다. 물이나 등유에 담긴 설탕 1파운드는 더 이상 설탕 1파운드가 될 수 없다. 회사 사장이 가지고 있는 1달러는 단순한 1달러가 아니라 이윤추구의 도구가 된다. 양이 질로 변화하는 결정적인 시점을 제때에 파악하는 것은 사회학을 포함하여 모든 지식 분야가 해결해야할 중요하며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이다.

완전히 똑같은 두 개의 물건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동자들은 누구나 이것을 알고 있다. 원추형 베어링을 정교하게 다듬는 과정에서 약간의 오차는 인정된다. 그러나 이 오차는 정해진 한도를 넘어서면 안된다. 이 오차 허용치 안에 들어오는 원추형 베어링은 모두 같은 것으로 인정된다. 그런데 이 오차 허용치를 넘어서면 양은 질로 나아간다. 즉 원추형 베어링은 품질이 떨어지거나 아주 못쓰게 된다. 과학적 사고는 기술 분야 등과 같은 실제 활동에서 사용되는 사고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갑"이 "갑"과 같다는 공리는 형식 논리의 출발점이다. 모든 것은 언제나 변화한다는 공리는 변증법적 논리의 출발점이다. 이 변증법적 논리에 의해서 정해지는 "오차 허용치"가 개념들을 규정하는 데에 사용된다. "상식"은 변증법적 "오차 허용치"를 체계적으로 초과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 사고 즉 상식은 자본주의, 도덕, 자유 , 노동자국가 등과 같은 개념들을 고정된 추상적 개념으로 보면서 논리를 전개한다. 이 결과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와 같으며 도덕은 도덕과 같다는 식으로 가정한다. 반면에 변증법적 사고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을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분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들 속에서 "갑"은 더 이상 "갑"이 아니며 노동자국가는 더 이상 노동자국가가 되지 않는 결정적인 시점이나 한도를 결정한다.

일반적 사고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현실이 남긴 고정된 흔적에 만족하고자 한다. 바로 여기에 일반적 사고방식이 갖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변증법적 사고는 좀더 면밀한 파악, 교정, 구체화 등을 통해 개념들에게 풍부한 내용과 신축성을 부여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살아 움직이는 현상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개념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준다. 즉 일반적인 의미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특정 발전단계의 자본주의를 제시한다. 일반적인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제국주의 세력들에게 포위된 후진국 러시아의 노동자국가를 제시한다.

변증법적 사고와 일반적 사고의 관계는 움직이는 화상과 정지된 사진의 관계와 같다. 움직이는 화상은 정지된 사진의 법칙을 넘어서지 않는다. 다만 정지된 사진들을 운동의 법칙들에 따라 결합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변증법은 삼단논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삼단논법들을 결합시킨다. 헤겔은 [논리학](Logic)에서 일련의 법칙들을 수립했다. 양의 질로의 전화, 모순을 통한 발전, 가능성의 불가피성으로의 전화 등등. 단순 삼단논법이 좀더 기초적인 작업들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만큼 변증법적 법칙들은 이론적인 사고를 위해 중요하다.

헤겔은 다아윈과 맑스보다 한 세대 앞서 살았던 인물이다. 프랑스 혁명이 사상에 강력한 원동력을 제공한 덕분에 헤겔은 과학의 일반적 발전과정에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비록 천재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첫걸음이었기 때문에 이 첫걸음은 헤겔에 의해서 관념적인 성격을 부여받았다. 그는 관념의 그림자들을 궁극적 현실로 잘못 바라보았다. 그러나 맑스는 이 관념적 그림자들의 운동이 물질세계의 운동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변증법 앞에 유물론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이유는 이 사고 방식의 뿌리가 하늘나라나 "자유의지"라는 심오한 영역이 아니라 객관적 현실 즉 자연에 있기 때문이다. 의식은 무의식에서, 심리학은 생리학에서, 유기 세계는 무기 세계에서, 태양계는 성운으로부터 나왔다. 물질의 모든 발전단계에서 양적인 변화는 질적인 변화로 탈바꿈했다. 변증법적 사고를 비롯한 우리의 모든 사고는 변화하는 물질의 표현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이 물질환경 내에서는 신 , 악마, 불멸의 영혼, 법과 도덕의 영원한 기준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고의 변증법은 자연의 변증법에서 나왔기 때문에 철저하게 물질적 성격을 띤다.

다아윈은 종의 진화를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설명함으로써 유기체 분야 전체에서 변증법의 가장 위대한 승리를 구가했다. 한 원소가 다른 원소로 변모한다는 사실과 원소 주기율표가 발견된 것도 역시 변증법의 위대한 승리를 의미했다.

사회과학에서와 같이 자연과학에서도 분류의 문제는 종과 원소 등의 변모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8세기에 창안된 린네(Linn )식 체계는 종의 불변성에 기초하여 작성되었기 때문에 외형적 특징에 따라 식물들을 묘사하고 분류하는 데에 머물렀다. 식물학의 유아기는 논리학의 유아기와 흡사하다. 왜냐하면 사고 형태들은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처럼 변화 발전하기 때문이다. 종이 불변한다는 사고가 결정적으로 반박되고 식물 진화의 역사와 식물 해부학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진정한 과학적 분류법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다아윈에 비해 맑스는 의식적으로 변증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생산력의 발전과 소유관계의 구조를 통해 인간사회를 과학적으로 분류하는 방식의 기초를 발견하였다. 그는 현재까지도 대학사회에서 풍미하고 있는 사회와 국가에 대한 대개의 분류법 대신 변증법적 유물론에 근거한 분류법을 창안하였다. 노동자국가의 개념과 이 국가의 붕괴 순간은 맑스의 방법론을 통해서만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쉽게 알 수 있듯이 이러한 변증법적 사고에는 "형이상학적"이거나 "현학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자만에 가득 찬 무식한 인물들은 이렇게 오해하고 있다. 변증법적 논리는 현대의 과학 사상을 통해 운동의 법칙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서 변증법적 유물론에 반대하는 투쟁은 까마득한 과거, 쁘띠부르조아의 보수주의, 대학교 분위기에 물든 인물들의 자만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희망의 깜빡거림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소련의 사회 성격

버넘 동지는 소련이 "노동자국가도 아니며 부르조아국가도 아니다"라고 규정한다. 이것은 순전히 부정적인 규정으로서 역사발전의 고리에서 강제로 떼내어져 허공에 매달린 규정이다. 그리고 사회학의 어떤 요소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모순적인 역사 현상 앞에서 실용주의적으로 이론적 투항을 한 것과 같다.

버넘 동지가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를 탐구했을 것이다: (1) 소련은 어떤 역사 과정을 통해 탄생했는가? (2) 그동안 이 체제는 어떤 변화들을 겪었는가? (3) 이 변화들은 양적인 단계에서 질적인 단계로 나아갔는가? 즉 이 변화들은 새로운 착취계급에 의한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지배체제를 탄생시켰는가? 이 문제들에 답했더라면 버넘은 소련이 여전히 퇴보한 노동자국가라는 성립가능한 이 단 하나의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변증법은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마술의 열쇠가 아니며 구체적인 과학적 분석을 대신할 수도 없다. 그러나 변증법은 이 분석을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이끌어 준다. 그래서 주관주의와 스콜라주의라는 사막에서 무미건조하게 방황하는 것을 확실하게 막아준다.

브루노 알은 소련과 파시스트 국가들을 "관료적 집산주의"라는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소련, 이탈리아, 독일 등에서 정권은 모두 관료들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나라의 경제 영역에는 계획의 원리가 존재한다. 어느 경우에는 사적 소유가 청산되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사적 소유가 제한되었다, 등등. 따라서 역사적 기원이 서로 다르고 구체적인 비중이 서로 다르고 계급적 의미도 서로 다른 일부 외적인 특징들이 상대적으로 비슷하다는 근거가 마련된다. 그리고 이 결과 이 나라들의 사회체제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 이런 분석 방식은 어떠한 계급적 성격도 고려하지 않은 채 "통제 경제", "중앙집중적 국가"라는 범주를 창안하는 부르조아 교수의 분석 방식과 완전히 동일하다. 브루노 알과 그의 추종자들 또는 버넘과 같은 반(半) 추종자들은 사회 분류법의 영역에서 헤겔, 다아윈, 맑스의 확실한 전세대에 속하는 린네와 기껏해야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소련의 사회 성격은 "중요하지 않다"며 우리 정책의 방향은 "전쟁의 특징"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절충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아마 브루노 알과 같은 부류보다 더 나쁘고 더 위험한 자들일 것이다. 이들에게는 전쟁이 마치 사회를 초월한 독립적 현상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성격이 지배계급의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지배계급은 국가의 성격을 결정짓는 사회적 요인이다. 이 동지들이 거대한 사건들의 충격 속에서 맑스주의의 근본 원리마저 이렇게 쉽게 잊어버릴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변증법적 사고를 거부하는 소수파 이론가들이 소련의 모순적 성격 앞에서 한탄스럽게 굴복하는 것은 하등 놀랄 일이 아니다. 혁명에 의해서 구축된 사회적 기초와 혁명의 퇴보로 인해 등장한 지배집단의 성격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은 아주 크다. 그러나 이 모순은 반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일 뿐만 아니라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관료집단을 타도하고자 하는 우리의 투쟁은 이 모순에 근거하고 있다. 보나파르트 파벌인 관료집단을 타도하기 위해 소련의 사회적 기초를 희생할 필요가 있다고 일부 초좌익들은 확신하고 있다. 이들은 황당무계의 최종 단계에 이미 도달했다! 10월 혁명에 의해 건설된 사회적 기초를 무시한 채 이들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소련이 파시스트 국가라고 확신하고 있다.  

 

진화와 변증법

버넘 동지는 자신이 진화론자이며 우리 변증법 옹호자들만큼 사회와 국가형태의 발전 과정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항변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다아윈 이래 모든 교육받은 사람들은 자신을 "진화론자"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진정한 진화론자라면 진화론을 자신의 사고 형식에 적용시켜야 한다. 진화론 자체가 아직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에 창시된 초보 논리학은 진화 과정들을 분석하는 데 확실히 불충분하다. 헤겔의 논리학은 진화의 논리학이다. "진화"의 개념 자체가 대학 교수들과 자유주의 저술가들에 의해서 완전히 타락하고 근본 정신이 희석되어 이제는 평화적인 "진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사실 진화는 적대적 세력들의 투쟁을 통해 진행되며 일정 시점에서 변화의 완만한 축적은 사물의 껍질을 깨뜨리고 파국과 혁명을 가지고 온다. 이것을 이해하고 있으며 진화의 일반법칙들을 사고 자체에 적용하는 것을 배운 사람들은 속류 진화론자와 구별되는 변증법 옹호자이다. 피아노 연주자가 손가락 운동을 하듯이 혁명 투사에게는 변증법적 사고가 필요하다. 그런데 변증법적 사고는 모든 문제들을 움직이지 않는 범주들이 아니라 과정으로서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반면에 속류 진화론자들은 특정 영역에 대해서만 진화를 인정하는 선에서 머문다. 그리고 이외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는 "상식"이라는 뻔한 말들만 늘어놓는 것에 만족한다.

미국의 자유주의자는 소련의 존재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서 소련 관료집단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최소한 독소불가침조약이 있기 전까지는 소련 체제가 대체로 "진보적인 것"이며 관료집단의 혐오스러운 특징들은 ("이것들은 원래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점차 탈각되어 평화적이며 고통이 없는 "진보"가 보장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소련의 내부 모순들과 동력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소련을 도매금으로 넘기는 점에서 속류 쁘띠부르조아 급진주의자는 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와 비슷하다. 스탈린이 히틀러와 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를 점령한 후 이제 핀란드를 점령하자 속류 급진주의자들은 승리했다.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을 동일시하는 방법론이 그 올바름을 증명받았다! 그러나 점령군 당국이 점령지 인민들에게 지주와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라고 권유했을 때 이들은 이 가능성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편 관료적-군사적 방식으로 수행된 사회의 혁명적 조치들은 우리의 변증법과 퇴보한 노동자국가라는 소련의 사회성격에 대한 우리의 규정을 반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 규정의 올바름을 논란의 여지없이 입증시켰다. 이러한 맑스주의 분석의 승리를 참을성 있는 선동으로 활용하는 대신에 이들은 범죄행위에 속하는 경박함을 드러내며 사건들이 우리의 예상을 거부했으며 우리의 분석은 더 이상 적용될 수 없으며 새로운 용어들이 필요하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무슨 용어들이 필요한 것일까? 그러나 이들은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소련의 방어

우리는 철학에서 시작하여 이제 사회학으로 논의의 초점을 옮겼다. 그런데 이 두 영역에서 소수파의 두 지도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은 반(反) 맑스주의적 입장을 취했으며 또 한 명은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음이 명백해졌다. 이제 정치 특히 소련 방어의 문제를 다룰 경우에도 이와 똑같은 정도의 커다른 놀라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소수파는 우리 강령의 입장인 "무조건적 소련 방어"가 "애매하고 추상적이며 시대에 뒤진(!?)" 것임을 발견했다. 불행하게도 이들은 미래의 어떤 "조건들" 속에서 혁명의 성과들을 기꺼이 방어할 것인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들의 새로운 입장에 최소한 약간의 논리를 부여하기 위해 애를 쓴다. 이 결과 적군(赤軍) 과 비밀경찰을 도구로 하여 소련 관료집단이 추구한 국제정책을 그동안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지지한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혔다! 사실 이미 오랫동안 우리는 소련 관료집단을 봉기를 통해 타도할 필요성을 특히 공개적으로 천명한 이후 조건적으로라도 관료집단의 국제정책을 방어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소수파의 잘못된 노선은 지금 우리가 수행해야 할 임무들을 갈갈이 파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과거 노선마저 거짓으로 윤색하고 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실렸으며 이미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 버넘과 섁트먼은 환멸을 느낀 지식인 집단을 "포기한 희망들의 동맹(The League of Abandoned Hopes)"이라고 재치있게 표현한 후 자본주의 국가와 소련이 군사적으로 대결할 때 이 한심한 동맹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집요하게 물었다. 이들은 이렇게 썼다: "따라서 히틀러나 일본 또는 영국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는 소련을 방어하는 문제에 대해 우리는 훅(Hook), 이스트먼, 리용(Lyons) 등이 확실하게 자신의 입장을 선언할 것을 이 기회를 빌어 요구한다 등등 " 버넘과 섁트먼은 어떠한 "조건"도 내걸지 않았고 어떠한 "구체적인" 상황들을 명시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확실한" 대답을 요구했다. 이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썼다: "이 동맹 역시 입장을 취하기를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중립을 선언할 것인가? 한마디로 스탈린주의 체제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 체제와 관계 없이 제국주의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소련을 방어할 것인가?" (강조는 인용자) 놀라자빠질 내용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강령이 선언하는 바이다. 1939년 1월 버넘과 섁트먼은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인 방어 입장을 지지했으며 "스탈린주의 체제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 체제와 관계없이" 무조건적인 방어를 한다고 완벽하게 표현했었다. 그러나 이 글은 스페인 혁명이 완전히 종결된 이후에 작성되었다. 스페인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이 보여준 범죄적 정치행동은 폴란드나 핀란드에서의 경우와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 했다고 캐넌 동지는 아주 올바르게 표현했다. 전자의 경우 소련 관료집단은 교수형 집행인이 되어 사회주의 혁명의 목을 매달았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관료적 방식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촉진시키고 있다.

그런데 버넘과 섁트먼은 "포기한 희망들의 동맹"이 선언한 입장으로 왜 갑자기 돌아섰는가? 왜? "사건들의 구체성" 때문이라고 섁트먼은 지극히 추상적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이것은 설명다운 설명이 아니다. 그러나 설명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스페인 공화군 진영에 참여함으로써 소련은 전세계 부르조아민주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폴란드와 핀란드에서 스탈린의 행동은 똑같은 민주주의자들로부터 미친듯한 비난을 받았다. 버넘과 섁트먼은 전세계 민주주의자들의 여론에 동조했을 뿐이다. 이것이 진짜 설명이다. 온갖 시끄러운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소수파의 입장은 당내에서 "좌파" 쁘띠부르조아들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이 사실은 불행하게도 논란의 여지가 없이 명확하다. 버넘과 섁트먼은 포기한 희망들의 동맹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뭔가 `참신한' 것을 통해 운동에 공헌하고 있으며 `새로운 경험들에 비추어 자신들을 다시 평가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전제들'을 재검토할 것을 거부하는 `교조주의자'(`보수주의자'? - 필자)는 아니라는 것 등을 믿으며 이 점에 대해서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가련한 자기기만인가! 이들의 어느 누구도 새로운 사실들을 드러내거나 현재나 미래에 대해서 새로운 이해를 첨가하지 않았다." 이 두 동지들은 참으로 멋지게 글을 인용하고 있다! "후퇴하고 있는 지식인"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 우리가 새로운 장(章 )을 하나 덧붙여야 하지 않을까? 섁트먼 동지의 이러한 노력에 협력할 것을 나는 제안하는 바이다

노동계급의 대의에 무조건적으로 헌신하고 있는 버넘과 섁트먼 과 같은 뛰어난 동지들이 포기한 희망들의 동맹의 별로 무섭지도 않는 신사분들에게 그렇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니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순수하게 이론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런 현상은 버넘이 올바르지 못한 방법론을 보유하고 있으며 섁트먼이 방법론 자체를 경시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올바른 방법론은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수월하게 만든다. 또한 모든 새로운 결론들을 이전의 결론들과 연속적으로 연결시키기 때문에 이 결론들은 쉽게 기억에 남는다. 정치적 결론들이 경험적으로 도출되거나 일관되지 못한 결론들이 일종의 장점으로 선언된다면 맑스주의의 정치 체계는 반드시 인상주의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다. 너무나 많은 측면에서 인상주의는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의 특징이다. 사태의 급격한 전환은 경험주의자-인상주의자들을 놀라게 한다. 그래서 이들은 과거 자신들이 어떤 내용의 글을 썼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전에 새로운 표현을 구사하려는 불타는 열망을 드러낸다.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

소수파는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에 대해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아마 약간 수정만 하면 보르디가(Bordiga), 베레컨(Vereecken), 스니블릿(Sneevliet), 페너 브락크웨이(Fenner Brockway), 마르쏘 삐베르(Marceau Pivert) 등과 같은 기회주의자들도 이 문서에 서명할 것이다. 그러나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은 결코 이 문서에 서명할 수 없다. 소련 관료집단의 특징들과 소련군이 "침략"했다는 사실들만을 담고 있는 이 문서는 소련 사회의 성격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 글은 핀란드와 소련을 같은 수준에 놓으면서 한치의 여지도 없이 "양국 정부와 군대들을 모두 비난하며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결의문의 필자들은 뭔가 문제가 있다고 알아채리고서는 글 내용과 아무런 논리적 연관도 없이 느닷없이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이 전망을 적용(!)시킬 경우 당연히(이 "당연히"란 말은 얼마나 멋진 말인가) 제4인터내셔널은 핀란드와 소련의 각기 다른 경제관계들을 고려하게(!) 될 것이다." 단어 하나 하나가 진주처럼 빛난다. "구체적인" 것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구체적인" 상황이란 군사적 상황, 대중의 정서, 양국의 서로 반대되는 경제체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구체적인" 상황들이 어떻게 "고려될 " 것인지에 대해서 이 결의문은 조금도 암시하고 있지 않다. 소수파가 전쟁과 관련하여 "양국 정부와 군대들 모두"를 똑같이 반대한다면 어떻게 군사적 상황과 사회체제의 차이들을 "고려할 "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스탈린주의자들의 의심할 여지없는 죄악을 벌주기 위해 이 결의문은 모든 색조의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과 같이 핀란드에 진주한 적군이 대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노동자들에 의한 생산수단의 통제를 도입하면서 자본가들을 몰수하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내일이면 스탈린 일당은 핀란드 노동자운동의 목을 조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가장 날카로운 형태의 계급투쟁을 대대적으로 촉진시키고 있으며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소수파 지도자들은 현재 핀란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구체적인" 상황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추상적 개념들과 고상한 감정에 기초하여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전쟁은 내전에 의해 보완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군은 현재 주어진 상황에서 핀란드의 소농 및 노동자들과 같은 편이 되어 있다. 한편 핀란드 군대는 유산계급, 보수적 노동 관료층,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핀란드의 빈곤층에게 적군이 일깨우고 있는 희망은 국제혁명이 개입되지 않는 한 환상으로 끝날 것이다. 이들과 적군 사이의 협력관계는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스탈린 일당은 곧 핀란드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총부리를 돌릴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것을 모두 알고 있으며 핀란드 인민에게 공개적으로 경고하는 바이다. 그러나 지금 핀란드 영토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구체적인" 내전에서 제4인터내셔널의 "구체적인" 투사들은 어떤 "구체적인" 입장을 취해야만 하는가? 스탈린주의자들이 스페인 사회주의혁명의 목을 조르고 있는 동안 제4인터내셔널 투사들은 이들과 똑같이 공화국 진영에서 싸웠다. 그렇다면 핀란드에서도 스탈린주의자들이 자본가들을 몰수하는 행위를 더욱더 지지하면서 이들과 같은 진영을 형성해야 한다.

소수파의 발명가들은 과격한 어조로 자기 입장의 결함을 은폐한다. 이들은 소련의 정책을 "제국주의적"이라고 딱지 붙인다. 과학에 대단한 공헌을 하고 있다! 지금부터 금융자본의 대외정책과 대대적인 파괴적 정책을 제국주의라고 말해야 한다. 이러한 용어 사용은 의미를 명확히 하고 노동자들에게 계급적 교육을 시키는 일도 크게 도와줄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매우 성급한 스탠리 동지는 스탈린 관료집단이 동시에 독일 금융자본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고 고함지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한 문제를 다른 문제로 바꿔치기하고 구체적인 상황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대체할 때에나 나올 수 있다. 금융자본의 정책을 지지하는 자들은 모두 제국주의자들인가? 이러한 사고는 변증법이 아니라 상식에 의존하는 자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이다.

만약 내일 영국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인도인들에게 히틀러가 무기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면 독일의 혁명적 노동자들은 파업이나 태업 등으로 이 구체적인 히틀러의 행동에 반대해야 하는가? 아니다. 이와 반대로 독일 노동자들은 인도인들이 가능하면 빨리 무기를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이 점이 스탠리 동지에게 아주 명확하게 이해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가상적인 예가 될 뿐이다. 다만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파시스트 정부가 특정 상황 속에서는 (바로 다음 순간에 목을 졸라 죽이기 위해) 일국의 혁명운동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예를 사용했을 뿐이다. 가령 어떤 상황에서도 히틀러는 프랑스의 노동자혁명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소련의 관료집단은 가상이 아니라 실제로 핀란드의 혁명운동을 촉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물론 내일 이 운동을 정치적으로 목졸라 죽이기 위해 지금 이런 행동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스탈린 지배집단에 의해 촉진되고 파괴되고 목졸려 죽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특정 사회혁명운동을 제국주의라는 잡동사니 주머니 속에 집어넣는 것은 이론적 정치적 빈곤을 드러낼 뿐이다.

"제국주의" 개념을 고무줄 늘이듯이 늘이는 것은 참신한 시도조차 되지 못한다. 현재 부르조아 민주주의 국가들의 민주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부르조아들도 소련의 정책을 제국주의적이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자본가 계급의 목적은 너무도 명확하다. 즉 자본주의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과 소련의 팽창정책 사이의 사회적 모순을 지워버린다. 소유의 문제를 은폐해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을 통해 진짜 제국주의를 돕는 것이다. 그러면 섁트먼을 비롯한 다른 동지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목적으로 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새로운 용어 사용법은 객관적으로 제4인터내셔널의 맑스주의적 용어로부터 이들을 멀어지게 하면서 "민주주의자들"의 용어 사용법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한다. 슬프게도 이러한 상황은 소수파가 쁘띠부르조아 여론의 압력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조직 문제"

소수파 동지들은 더욱 빈번하게 이렇게 말한다: "러시아 문제는 그 자체로는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당 운영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당운영 방식의 변화는 지도부의 교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캐넌과 그의 협력자들을 지도적 직책에서 밀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섁트먼과 여타 동지들이 노선 변화의 이유로 제시한 "사건들의 구체성" 보다 "캐넌 분파"에 반대하는 경향이 먼저 존재했다. 여러 시끄러운 소수파의 목소리들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동시에 이러한 목소리들은 과거 시간과 이유를 달리하며 지도부 반대 투쟁을 수행한 바 있다. 그리고 원칙에 기반한 투쟁의 근거가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소위 "당운영 문제"로 화두를 돌렸었다. 몰리니에, 스니블릿, 베레컨, 여타 많은 동지들이 했던 행동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러한 전례들이 아무리 혐오스럽다 할지라도 이것들을 언급하지 않은 채 그냥 지나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조직 문제"로 분파투쟁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 단순한 "책략"의 문제라고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아니다. "러시아 문제"뿐만 아니라 당건설 방식 등 일반적 정치문제들에 대한 접근방식 그 자체에 쟁점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록 대단히 혼란스럽게나마 소수파의 진실된 속마음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또한 러시아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계급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소수파의 사고방법에 쟁점이 이루어질 부분이 더 많다. 우리는 이 사실을 증명하려 한 바 있다. 소수파는 현재 쁘띠부르조아 정서와 경향에 의해서 좌지우지되고 있다. 모든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용주의를 택한 버넘과 절충주의를 택한 섁트먼의 경우에서 노동계급 이외의 다른 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영향을 우리는 명확히 보았다. 에이번(Abern) 동지를 비롯한 그 밖의 소수파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언급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에이번 동지는 원칙에 입각한 토론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조직 문제"에 자신의 주장을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에이번 동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이와 반대로 버넘과 섁트먼은 소수파의 아마추어라면 에이번은 의심할 여지없는 프로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거 공산당에서 탈퇴하여 미국 내 "좌익반대파"의 독자적 존재를 시작한 전통 깊은 그룹을 에이번 동지가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별의별 이유로 다수파를 비판하며 불만을 토로하는 동지들 모두는 이 그룹에 결집되어 있다.

모든 심각한 분파 투쟁은 언제나 궁극적으로는 계급투쟁의 상황을 반영한다. 다수파는 애초부터 소수파가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 매여있다고 확언하였다. 이와 반대로 소수파는 자신의 쁘띠부르조아적 성격 때문에 적대 분파인 다수파의 사회계급적 뿌리를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소수파는 현재 아주 결정적인 시기에 당을 마비시키고 있는 격렬한 분파 투쟁을 시작했다. 이러한 분파 투쟁이 정당성을 인정받고 무자비한 비난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당내에 아주 진지하고 깊은 기초가 확립되어야 한다. 맑스주의자에게 이 기초는 오직 계급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격렬한 투쟁을 개시하기 전에 소수파 지도자들은 이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했다: 전국 위원회 다수파는 어떤 비노동계급적 영향력을 반영하고 있는가? 그러나 소수파는 이러한 계급적 평가를 내리려는 시도를 해본 적이 조금도 없다. "보수주의", "오류들", "나쁜 방법론들" 그리고 이것들과 비슷한 내용의 심리적, 지적, 기술적 결함들만을 볼 뿐이다. 소수파는 소련의 사회 성격에 관심이 없는 것과 아주 똑같이 반대 분파의 계급적 성격에 관심이 없다. 이것만 해도 현학적 경향과 신문쟁이류의 인상주의 색조가 결합된 소수파의 쁘띠부르조아적 성격이 충분히 증명된다.

분파 투쟁에 어떤 계급이나 계층이 반영되어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싸우는 분파들의 역사를 따질 필요가 있다. 소수파의 몇몇 동지들은 현재 진행 중인 분파 투쟁이 옛날의 분파 투쟁들과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 생각은 이들이 당의 역사에 대해서 얼마나 피상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 소수파의 근간은 3년 전에 마스티(Muste)와 스펙터(Spector)를 주위로 결집한 핵심 당원들이다. 다수파의 핵심은 캐넌을 중심으로 결집한 핵심 당원들 그대로이다. 주요한 인물 중에서 섁트먼과 버넘 만이 편을 바꾸었을 뿐이다. 그러나 개인들의 편바꿈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두 분파의 전반적 성격을 바꾸지는 못한다. 여기서 분파 투쟁의 역사적 궤적을 소개하고 싶지는 않다. 관심있는 독자들은 조지프 헨슨(Joseph Hansen)동지가 쓴 "조직 방식과 정치적 원칙(Organizational Methods and Political Principles)"이라는 논문을 읽어보기 바란다. 이 글은 모든 측면에서 훌륭한 글이다.

우연적, 개인적, 일화적 측면들을 모두 없애고 현재의 분파들을 근본적 정치유형들로 환원시킨다면 당연히 에이번 동지와 캐넌 동지 사이의 투쟁이 가장 일관되게 진행되었다. 쁘띠부르조아적 계급구성과 함께 오랜 개인적 연줄로 결합되어 가족과 같은 특성을 가진 선전 그룹을 에이번이 대표하고 있다. 이에 반해 캐넌은 형성 과정에 있는 노동자 정당을 대표하고 있다. 그동안 있어왔던 오류와 실수들을 논외로 한다면 이 투쟁에서 역사적 정당성은 전적으로 캐넌 진영에 있다.

소수파 동지들이 문제들을 진지하게 끝까지 사고해 보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은 채 "지도부는 파산했다", "정치적 예상은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사건들의 전개에 대응하지 못했다", "구호들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등 격렬하게 비난했을 때 이들은 근본적으로 당 청산주의자들이었다. 새로운 임무와 새로운 당 관계들 앞에서 오래 된 선전그룹이 보이는 불편함과 공포심 때문에 이런 한심스러운 태도가 나온 것이다. 개인적 연줄이 내포한 감상적인 정서가 의무감과 규율감에 길을 내주지 않으려고 한다. 옛날의 파벌적 연줄을 청산시키고 선전그룹의 최상 분자들을 노동자 정당 안으로 해소시키는 것이 현재 당의 임무이다. "문제의 핵심은 러시아 문제가 아니다. 캐넌보다 에이번이 당을 지도할 경우 더 편안함을 느낀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라고 감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당에 대한 충성심을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바로 어제 내가 이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에이번 그룹의 동지들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수천 번 이 결론을 말한 바 있다. 언제나 나는 이 그룹의 쁘띠부르조아적 구성을 강조했었다. 노동자들을 당원으로 끌어들일 능력이 없는 쁘띠부르조아 당원들을 당원 후보의 자격으로 강등시킬 것을 끈질기게 반복해서 제안한 바 있었다. 이후 연속되는 사건들이 증명했듯이 개인적 편지, 대화, 충고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타인의 경험을 통해 배우는 사람은 정말이지 아주 드물다. 당내 노동계급 부위와 쁘띠부르조아 부위 그리고 이 두 부위가 차례로 발전한 두 시기 사이에 적대적 대립이 축적되고 표면에 드러나면서 격렬한 분파 투쟁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 지부와 인터내셔널 전체에 이 문제에 대한 입장표명을 요구하는 방법만이 현재 남아있는 가장 명확하며 최종적인 해결책이다. 러시아 속담에 의하면, "친구 사이는 친구 사이이고 임무는 임무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소수파가 쁘띠부르조아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면 당의 통합은 불가능한 것일까? 쁘띠부르조아적 경향을 어떻게 노동계급적 경향과 화해시킬 것인가?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제기하는 것은 일면적이고 비변증법적이며 잘못된 판단을 가져온다. 현재 진행 중인 논쟁에서 소수파는 명확하게 쁘띠부르조아적 특징들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소수파의 특징이 이것뿐이라는 것은 아니다. 소수파 동지들의 대다수는 노동계급의 대의에 깊이 헌신하고 있으며 배울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오늘 쁘띠부르조아적 환경에 묶여 있다면 내일은 노동계급의 환경에 묶일 수 있다. 일관되지 못한 동지들은 경험을 통해 일관성을 더욱 연마할 수 있다. 당이 수천 명의 노동자들을 조직 안으로 끌어들이면 심지어는 전문적인 분파 활동가도 노동계급의 규율에 따라 스스로를 교육시킬 수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하도록 이들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조직 분열, 축출 등과 같은 위협적인 발언을 금지하면서 논쟁을 진행하자는 캐넌 동지의 제안이 절대 올바르며 적절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당이 전체적으로 소수파의 노선을 추종할 경우 완전히 파멸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 점은 확실하다. 현재 소수파는 맑스주의적 지도력을 당에게 제공할 능력이 없다. 현재 다수파는 노동계급에 대한 당의 임무를 소수파보다 더욱 일관되고 진지하며 깊이 있게 대변하고 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다수파는 분파 투쟁을 조직 분열로 몰고가려고 하지 않는다. 올바른 사상은 승리하게 마련이다. 소수파의 건강한 분자들도 역시 조직의 분열을 원치 않는다. 과거 경험에 의하면 제4인터내셔널로부터 이탈한 모든 종류의 급조된 그룹들은 정체와 파멸의 운명을 맞았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다음 당대회를 구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당대회는 소수파의 반맑스주의적 발명품들을 거부하고 당의 단합을 보장할 것이다.  

1939년 12월 15일    

 

[11. A Letter to John Wright] 잔 라이트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핸슨 동지에게 보낸 동지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당내 쁘띠부르조아 소수파에 대해서 단호하고도 비타협적인 이론적 정치적 투쟁을 전개할 필요성을 주장한 동지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나의 최근 논문이 항공우편으로 내일 그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이 글에서 나는 소수파의 편향을 다수파 동지들 보다 더욱 날카롭게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타협없는 이론적 투쟁은 아주 조심스럽고 지혜로운 조직적 전술과 함께 진행되어야 합니다. 다음 당대회에서 현재 소수파가 다수파가 되어 당기구를 장악해도 절대 조직을 분리해서는 안됩니다. 이질적이며 불안정한 소수파가 조직을 분리시킬 빌미를 조금도 주면 안됩니다. 결국 소수파로 남는다 하더라도 당에 대한 규율과 충성심을 간직해야 합니다. 당에 대한 진정한 충성심을 교육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캐넌 동지는 언젠가 편지를 통해 이것의 필요성에 대해서 아주 정확하게 밝힌 바 있습니다.

현재 소수파가 다수파를 구성한다 하더라도 그 수명은 몇 달 못갈 것입니다. 그러면 당내 노동계급 경향은 엄청나게 강화된 권위를 획득하여 다시 다수파가 될 것입니다. 대단히 단호하면서 한편으로 냉철한 이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현재 당내 노동계급 경향은 이러한 면모를 보여야 합니다.  

1939년 12월 19일

최대의 동지적 애정을 보내며,

레온 트로츠키

추신 : (1) 특히 가장 중요한 뉴욕 지부 당원들의 계급 구성이 아주 불리합니다; (2) 사회당 청년부 출신 당원들이 특히 경험이 부족합니다. 이 두 요인으로부터 나쁜 결과가 나왔습니다. 과거로부터 유래한 이러한 어려움들을 긴급 처방으로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단호함과 참을성이 요구됩니다.    

 

[12. A Letter to Max Shachtman] 맥스 섁트먼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최근의 논문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쁘띠부르조아 소수파]의 사본을 보냅니다. 이 글을 보면 알겠지만 소수파의 편향은 아주 결정적입니다. 동지는 바리케이트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동지는 모든 쁘띠부르조아 및 반(反) 맑스주의 분자들에게 우리의 원칙, 강령, 전통에 대항해 싸우도록 용기를 북돋우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 동지를 설득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쁘띠부르조아 수정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맑스주의적 분파와 협력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한다면 동지는 앞으로 몇 년 동안 동지의 일생에서 가장 커다란 오류를 범했다는 사실을 한탄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동지와 48시간이나 72시간동안 중단 없이 토론하기 위해서 즉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싶습니다. 이 문제들을 나와 함께 토론하기 위해서 동지가 여기에 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아주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만약 동지가 여기로 올 필요성을 느낀다면 참으로 기쁘겠지만  

1939년 12월 20일

레온 트로츠키

 

[13. Four Letters to the National Committee Majority] 전국위원회 다수파 동지들에게 보내는 4 통의 편지   

동지들,

전국위원회 소수파는 [사회주의 호소](Socialist Appeal)와 [새로운 인터내셔널](New International)에 논쟁과 관련된 자신들의 글이 실릴 것을 요구했습니다. 나는 이 요구에 지지를 보낼 의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특히 버넘 동지의 이러한 요구에 대해 동지들이 아주 진지하게 반대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사회주의 호소]는 특별 토론위원회 산하의 토론의 장이 아닙니다. 당과 전국위원회 소관사항입니다. 당내 토론집에 대해 소수파는 다수파와 같은 정도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식 당 출판물들은 당과 제4인터내셔널의 견해가 바뀔 때까지 기존의 견해를 옹호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식 출판물에서 토론을 전개하는 것은 전국위원회 다수파가 정한 한계 내에서만 가능합니다. 이 점은 너무도 자명하여 논의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불셰비키 당은 소수파에게 영구적으로 토론의 자유를 법적으로 부여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관행이 버넘 동지의 발명품인 것도 아닙니다. 바로 프랑스 사회당이 당헌을 통해 이러한 권리들을 오랫동안 보장했습니다. 이러한 관행은 시기심이 많은 문필가 집단이나 의회 파벌들의 정서에 전적으로 부합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파벌들이 연합하여 당내 노동계급 경향들을 굴복시키는 것을 결코 저지하지 못합니다.

노동계급 전위당의 조직체계는 혁명 투쟁의 적극적인 요구들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조직의 퇴보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겠다는 소극적인 목적에 종속되면 안됩니다. 당이 사회주의 혁명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당헌 조항들이 아무리 지혜로 충만해도 당은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직의 측면에 대해서 말하자면 버넘 동지는 혁명 정당의 개념에 대해 완전히 무지합니다. 사소하면서도 아주 의미있는 다이즈 위원회(Dies Committee)와 관련하여 그는 정치적 측면에서 이 특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두 측면 모두에 대해 그는 순전히 소극적인 방식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소련의 사회성격 문제에 대해서 그가 순전히 소극적인 규정을 내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혐오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갖는 것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사회주의 혁명과 관련한 모든 실천적 결론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버넘 동지는 이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린 실천적 결론이 무엇이냐고요?

첫째, 당의 강령을 당이 인정하지 않는 모든 발명품들과 같은 위치에 놓음으로써 당을 파괴하려는 시도가 지금 소수파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시도를 당 전체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째, 전국위원회는 [새로운 인터내셔널] 한 호 전체를 토론을 위해 열어놓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당의 입장은 무엇이며 이 입장을 수정하려는 시도가 어느 선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독자들이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종 입장은 반대파가 아니라 다수파가 내린다는 사실도 독자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것을 제안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셋째, 만약 당내 토론집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당대회 의안과 관련된 논문을 특별히 모아서 발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토론에는 최대한 진실하되 쁘띠부르조아 및 무정부주의 정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1939년 12월 26일

레온 트로츠키

 

동지들,

논쟁과 관련이 있는 소수파의 논문들을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사회주의 호소]에 게제할 것을 버넘과 섁트먼 동지는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전한 이 소식은 일단 나를 놀라게 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나는 이렇게 스스로 질문했습니다. 이 두 동지가 자신들의 입장에 대해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전혀 놀라게 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논지는 대단히 조잡합니다. 그리고 논지들 사이의 모순은 날카롭습니다. 이 동지들은 다수파가 혁명 전통과 맑스주의 원칙을 대표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들은 이론 투쟁에서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섁트먼과 에이번뿐만 아니라 버넘도 이렇게 느끼고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널리 알리고자 안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설명은 아주 간단합니다: 민주적인 여론 앞에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이스트먼과 같은 자들, 훅과 같은 자들 그리고 여타 분자들에게 자신들이 다수파에 비해 질이 그리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외치고 싶어 안달하고 있습니다. 특히 버넘 동지에게는 이러한 내적 필요가 특히 절대적입니다. 이것은 10월 혁명 전야에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 그리고 애국전쟁 물결의 압력 하에 많은 "국제주의자들"이 보인 것과 똑같은 내적 투항입니다. 이들 동지들이 드러내고 있는 모든 개별적 특이성, 우연, 오해, 오류 등을 추상한다면 지금 당내에는 처음으로 애국주의적 타락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여러 동지들은 이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 지도부나 삐베르(Pivert) 분파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자들과 같이 이 두 동지들은 자신들이 "트로츠키주의자들" 만큼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널리 알리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이들의 소망이 공공연히 선언된 후에야 이 두 동지의 정체가 명확하게 인식되었습니다.

이렇게 사정을 말하는 이유는 이 두 동지들에게 결코 양보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에 힘을 더 보태고 싶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조건하에서 우리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당의 판결을 기다려야 하며 이 판결이 민주적 애국적 판사들에게 선언될 때까지 이 판결에 대해서 항소해서는 안된다.

나는 이 문제를 전에는 너무 추상적으로 즉 이론 투쟁의 측면에서만 고려하였습니다. 이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골드먼 동지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정치 상황을 더 넓게 보면 당내의 민주적 애국적 분자들의 성급한 개입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소수파는 다수파와 마찬가지로 토론에서 자신들의 힘에만 기대어야 합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수파 내부에 존재하는 개별 분자들을 실험하고 우리쪽으로 끌어오는 것이 사태 해결에 좀더 효율적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결과는 당을 위해 좀더 바람직할 것이다.

언젠가 엥겔스는 화가 끝까지 난 쁘띠부르조아들의 정서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정서는 현재 소수파 대오에서 적게나마 감지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들의 많은 부분은 볼셰비키 전통이라는 최면술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전통을 결코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으며 공개적으로 이 전통에 대해 감히 도전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섁트먼과 에이번은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며 이제 이들은 화가 끝까지 난 쁘띠부르조아의 정서를 공공연히 즐기고 있습니다. 스탠리 동지의 최근 논문들과 편지들에서 이런 인상을 받았습니다. 스탠리 동지는 자기비판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당의 강령과 전통을 공격하는 모든 영감들이 그의 뇌리에 각인되자마자 이것들이 선언되고 인쇄될 가치가 있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쁘띠부르조아적 자기만족감이 폭발하도록 촉발한 점에서 섁트먼과 에이번의 죄악은 특히 무겁습니다.  

1939년 12월 27일

레온 트로츠키

추신 : 스탈린주의 첩자들이 토론을 격화시키고 조직의 분리를 촉발시키기 위해 우리 대오 내에서 활동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특별히 이 관점에서 여러 잡다한 분파에 소속된 "투사들"의 정체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동지들,

[전쟁과 관료적 보수주의](The War and Bureaucratic Conservatism] 그리고 [러시아 문제에 대한 논란에서 무엇이 쟁점인가](What Is at Issue in the Dispute on the Russian Question)라는 제목의 소수파 논문 두 편을 받았습니다. 전자는 이미 검토를 마쳤으며 지금 후자를 검토하고 있는 중입니다. 얼마나 한심한 글입니까! 올바른 사고를 표현하거나 올바른 사고를 올바른 지점에 위치시킨 문장을 하나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머리도 명석하고 심지어는 재능이 있는 동지들이 명백히 틀린 입장을 가지고 골몰하더니 이제는 스스로를 더욱더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에이번 동지는 "조직 분리"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회당에 입당하는 전술과 관련된 토론 과정 때와 마찬가지로 상대편에게 겁을 위한 것일 것입니다. 아니면 정치적 자살을 감행하기를 그는 정말 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경우라면 이들 소수파의 정치를 우리가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을 이들은 당연히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 경우라면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다 큰 어른이 자살하겠다는 데 막을 수 있겠습니까.

버넘의 대응은 모든 맑스주의자들에 대한 무지막지한 도전에 해당됩니다. 변증법이 일종의 종교이며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면 이 해독으로부터 자기 당을 구하는 투쟁을 어떻게 그가 거부할 수 있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지금 버넘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맑스주의 이론지의 편집자인 버넘은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해 냉소적인 경구를 던지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제4인터내셔널의 여론이 호락호락 놓아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버넘의 반맑스주의적 개념들이 당과 제4인터내셔널 앞에 철저히 드러날 때까지 나는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 공개서한의 러시아어 편이라도 내일 모래까지는 보내겠습니다.

동시에 위 두 논문에 대한 분석 논문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문제에 대해 이들이 견해를 달리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은 아주 훌륭합니다.

정말 낡아빠진 이 두 문서를 읽느라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에 이가 갈립니다. 이 글들에 드러난 오류들은 너무도 기본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맑스주의의 근본원리](the ABC of Marxism)에 실린 지금 필요한 주장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할 지경입니다.  

1940년 1월 3일

레온 트로츠키

 

동지들,

지금부터 2주일도 더 전에 섁트먼에게 보낸 편지 사본을 동봉합니다. 이 편지에 대해 그는 답장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무원칙한 투쟁이 그에게 남긴 심정이 이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반맑스주의자 버넘과 동맹을 하고는 이 동맹에 대해 비판한 나의 편지들에 대해 답장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이 사실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이 그의 병 증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이유로 그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을 보냅니다.  

1940년 1월 4일

레온 트로츠키

 

[14. A Letter to Joseph Hansen] 조지프 핸슨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흥미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필요하거나 합당할 경우 조직 분리 문제를 다룬 우리의 편지들과 라이트 동지의 편지들을 묶어서 케넌 동지가 출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격심한 분파투쟁에도 불구하고 당의 단합을 이루고자 하는 우리의 결연한 의지를 이 편지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라이트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볼셰비키 분파가 소수파가 되더라도 당의 규율을 준수해야 한다고 견해를 밝혔으며 케넌 동지도 이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답장을 했습니다. 이 두 인용문들은 이 문제에 관해서 가장 결정적인 부분입니다.

쁘띠부르조아 소수파에 대한 논문에서 핀란드 사태를 언급한 바가 있는데 몇 마디만 더 언급하겠습니다. 핀란드와 폴란드 사이에 원칙적인 차이가 있습니까? 아니면 없습니까? 적군이 폴란드에 개입하면서 내전이 벌어졌습니까? 아니면 아닙니까? 분트 그리고 폴란드 사회당 망명객들과 친분이 있어서 사태를 잘 파악하고 있는 멘셰비키 신문들은 적군이 영토 내로 진군하자 혁명의 물결이 적군을 둘러쌌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폴란드뿐만 아니라 루마니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련 관료집단은 핀란드 전쟁에서 핀란드 내부 세력들의 내전을 통해 자기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려 합니다. 이점은 아주 명백합니다. 그래서 크렘린궁은 핀란드에 쿠지넨(Kuusinen)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핀란드 적군의 창설 움직임, 대토지가 몰수된 적군 점령지에서 보인 핀란드 빈농들의 "열성" 등에 대한 정보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내전의 시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전의 확대는 전적으로 적군의 핀란드 영내 진입에 달려있었습니다. 인민의 "열성"은 충분히 달아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마너하임(Mannerheim) 이라는 교수집행인의 칼날 아래에서 노동자 농민의 독자적 봉기들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초기에 적군이 후퇴하면서 내전의 움직임이 필연적으로 중지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방어하기 위해서 제국주의자들이 핀란드의 자본가 계급을 효과적으로 지원한다면 이후 핀란드 내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군의 증원군이 좀더 성공적으로 핀란드 영토에 침투한다면 이 침략이 진행되는 정도와 마찬가지로 내전이 필연적으로 전개될 것입니다. 이럴 가능성은 다른 가능성보다 더욱 높습니다.

모든 군사적 사건들, 순전히 전술적인 흥미밖에 없는 승리와 패배들을 미리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들이 사태발전의 일반적인 "전략적" 경로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소수파는 원칙에 입각한 정책 대신에 순전히 상황적이며 인상주의적인 정책을 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폴란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핀란드 내전은 제한되고 반정도 억눌린 성격을 가질 것이며 다음 단계에서 내전은 핀란드 인민 대중과 소련 관료집단 사이의 내전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소수파 만큼이나 명확하게 알고 있으며 따라서 공개적으로 대중들에게 이 가능성을 경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과정을 벌어지는 그대로 분석할 뿐 첫 번째 단계를 두 번째 단계와 동일시하지는 않습니다.)  

1940년 1월 5일

모든 동지들에게 애정을 보내며,

레온 트로츠키

 

 

 

 

[15. An Open Letter to Comrade Burnham] 버넘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  

동지,

내가 알기로 동지는 쁘띠부르조아 소수파에 대한 나의 논문에 대해 논평했습니다. 그리고 나와 변증법에 대해 토론할 의향이 없으며 오직 "구체적인 문제들"만 논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동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미 오래 전에 종교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전에 맥스 이스트먼도 이와 똑같은 심경을 피력한 적이 있었습니다.  

 

논리를 종교와 동일시 하는 관점은 타당한가

맑스, 엥겔스, 레닌의 변증법은 종교의 영역에 속한다고 동지가 암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주장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시 언급하자면 변증법은 진화의 논리입니다. 공장의 도구실이 모든 부서에 필요한 도구들을 공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논리는 인간의 모든 지식 영역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동지는 대체로 논리를 종교적 편견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소수파의 자기모순적인 글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 한탄스러운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논리가 종교적 편견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논리를 동지는 받아들이겠습니까? 내가 알고 있기로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 논리와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는 변하지 않는 사물과 현상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과학 사상은 모든 현상들의 기원, 변화, 붕괴를 연구합니다. 다아윈주의, 맑스주의, 현대 물리학, 화학 등 과학의 발전이 우리의 사고 형식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동지는 주장하고 있습니까?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든 것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삼단논법만이 변화하지 않으며 영원하다고 동지는 주장하고 있습니까? 성요한 복음서는, "태초에 말이 있었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태초에 이성 즉 삼단논법으로 표현된 이성이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성 요한에게 삼단논법은 하나님이 가진 여러 필명(筆名) 중의 하나입니다. 삼단논법이 기원도 발전과정도 없는 불변의 것이라면 이것은 신의 계시물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그러나 논리 형식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적응과정에서 발전한다고 인정할 경우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진행된 논리의 발전과정을 누가 분석하고 체계화시켰는지를 알려주기 바랍니다. 이 문제를 동지는 명확히 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논리인 변증법을 종교와 동일시하는 동지의 관점은 인간 사고의 근본적 문제들에 대한 동지의 완전한 무지와 피상적인 인식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혁명가가 종교에 대항해 싸울 의무가 없습니까?

그러나 뻔뻔스러움을 넘어선 동지의 빈정거림이 사실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이것도 동지에게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종교는 현실의 지식으로부터 가상의 지식으로, 좀더 나은 삶을 위한 투쟁으로부터 저승에서 보상받는다는 거짓 희망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합니다. 이 사실을 동지도 인정하리라 희망합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입니다. 종교에 대항하여 투쟁하지 못하는 어느 누구도 혁명가라는 이름을 부여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동지가 변증법을 종교의 변종이라고 본다면 변증법에 대항 투쟁을 거부할 명분과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동지의 말에 따르면 동지는 종교 문제에 신경을 끈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지는 동지 자신만을 위해 종교에 대한 신경을 껐습니다. 그러나 동지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종교에서 해방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면 우리 혁명가들은 종교 문제에 대해서 결코 신경을 "끌" 수 없습니다. 변증법이 종교라면 우리 당 내부에서 이 아편에 대한 투쟁을 포기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어쩌면 동지는 종교가 정치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암시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혹시 종교를 신봉하면서도 동시에 일관된 공산주의자이며 혁명 투사가 될 수 있다고 암시하고 싶은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렇게 성급한 주장은 감히 펴지 못할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후진 노동자들의 종교적 편견에 대해 가장 배려깊은 자세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 강령을 위해 투쟁하기를 원한다면 그를 당원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당은 유물론과 무신론의 정신을 그에게 끈질기게 교육시킬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동지가 동의한다면 내가 알기로 이론 문제들에 대해 관심이 있는 우리 당 절대 다수 동지들의 "종교"에 대한 투쟁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습니까? 동지는 확실히 문제의 이 가장 중요한 측면을 간과해왔습니다.

자본가 계급의 식자층 사이에는 개인적으로 종교와 결별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무신론은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혼자서 이런 생각을 간직하면서도 공개적으로는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당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태도를 갖는 것이 가능합니까? 맑스주의의 철학 기초들에 대해 나와 토론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변증법에 대한 동지의 경멸에는 당에 대한 경멸 역시 깃들어 있습니다.

개인적인 대화 가운데 나온 말을 가지고 논쟁을 일삼고 있다고 항변하지 마십시요. 공개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거부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고 반대의 변을 늘어놓지 마십시요.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동지의 날개돋친 말은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동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 강령의 이론적 기초를 구성하는 사상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표명해 왔습니다. 이 사실은 모든 당원들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섁트먼과 공동으로 저술했으며 당 이론지에 발표된 "후퇴하고 있는 지식인"이란 논문에서 동지가 변증법적 유물론을 거부하고 있음이 명백하게 확인되었습니다. 동지가 도대체 왜 이런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당이 알아야 할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제4인터내셔널 이론지의 편집자가 마치 건네진 담배 한 가치에 대해서, "고맙습니다만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문제인 것처럼, "변증법적 유물론을 전적으로 거부한다."라고 단순히 선언하는 것에 그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잘 갖추어진 도구실이 생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과 똑같이 올바른 철학사상 즉 올바른 사고방법의 문제는 혁명정당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물질적 지적 방법들을 가지고 구 체제를 옹호하는 것은 아직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방법들을 먼저 비판적으로 분석하지 않고서 구 체제가 타도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가능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이 사고의 근간들 자체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면 올바른 길을 지적하는 것이 동지의 기본 의무입니다. 이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동지의 행동은 진정한 "과학" 사상을 파악할 능력이 결여된 노동자 조직에 대해 학자가 보이는 교만한 태도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보다 나쁜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교훈적인 예들

기회주의 심지어는 부르조아 반동 진영으로의 투항은 아주 빈번하게 변증법의 거부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노동자 정당 내 여러 경향들의 투쟁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은 변증법을 맑스주의의 가장 허약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들은 노동자들이 정치적 차이보다 철학적 차이를 증명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을 이용해 먹습니다. 이 오래부터 알려진 사실은 그간의 모든 경험들에 의해 입증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위대하며 뛰어난 모든 혁명가들 특히 맑스, 엥겔스, 레닌, 룩셈부르크, 프란츠 메링 등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바탕 위에 서있었습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폄하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들 모두가 과학과 종교를 구별할 능력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버넘 동지, 너무 건방지지 않습니까? 베른슈타인, 카우츠키, 프란츠 메링의 예는 매우 교훈적입니다. 베른슈타인은 변증법을 "스콜라주의", "신비주의"라고 명백히 거부했습니다. 카우츠키는 섁트먼 동지와 같이 변증법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습니다. 반면에 메링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지치지 않고 선전하고 옹호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철학과 문학의 모든 발명품들을 파악하며 지치지 않고 관념론 , 신칸트주의, 공리주의 그리고 기타 모든 형태의 신비주의 등을 폭로했습니다. 이 세 사람의 정치적 운명은 아주 잘 알려져 있습니다. 베른슈타인은 잘난 체나 하는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자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카우츠키는 중도주의자에서 저속한 기회주의자로 변신했습니다. 그러나 메링은 공산주의 혁명가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스트루베 , 불가코프, 베르다예프 등 세명의 매우 저명한 강단 맑스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맑스주의 철학을 거부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반동과 그리이스 정교회 진영으로 넘어갔습니다. 미국에서는 이스트먼, 시드니 훅 그리고 이들의 친구들이 변증법을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의 동반자에서 자본가 계급의 동반자로 변절할 때 변증법에 대한 반대 입장을 위장막으로 이용했습니다. 이와 유사한 예들은 다른 나라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외인 것처럼 보이는 플레하노프의 예는 실제로는 규칙을 증명할 뿐입니다. 플레하노프는 뛰어난 변증법적 유물론의 선전가였습니다. 그러나 평생 실제 계급투쟁에 참여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실천과 유리되었습니다. 1905년 혁명과 이후 발발한 세계대전은 그를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 진영으로 던져 넣으면서 그가 실제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부인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세계대전 중에 그는 국제관계 영역에서 칸트의 정언적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인 "남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의 주창자로 공공연히 등장했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 그 자체가 사람을 혁명가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플레하노프의 예가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한편 섁트먼은 리이프크네히트가 감옥에 있으면서 변증법적 유물론에 반대하는 유작을 남겼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에게는 온갖 생각들이 머리에 들어차고 이것들은 타인과의 교제로 인해 제지될 기회가 없습니다. 리이프크네히트는 그 자신을 포함하여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이론가로 간주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계노동운동에서 영웅적 행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변증법을 반대하는 어느 미국인이 이와 비슷한 자기희생과 독립성을 보인다면 우리는 그를 응당 혁명가로 대접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변증법적 방법론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만약 리이프크네히트가 자유의 몸이 되었다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최종 결론을 내렸을지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자신의 저술을 출판하기 전에 의심의 여지없이 그는 프란츠 메링과 로자 룩셈부르크 같이 좀더 능력있는 친구들에게 이것을 검토하도록 의뢰했을 것입니다. 이들의 충고로 그가 원고를 불속으로 집어던졌을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론 영역에서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친구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그가 이 저술을 출판하기로 결정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메링, 룩셈부르크, 레닌 등이 이 행위를 문제삼아 그가 당에서 제명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어느 누가 이런 어리석은 제안을 했을 경우 이들은 리이프크네히트를 대신해서 단호하게 개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그와 철학적 동맹을 맺기는커녕 그의 이론적 오류들로부터 단호하게 거리를 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섁트먼 동지의 행동은 이와 아주 다르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플레하노프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뛰어난 이론가였다. 그러나 결국 기회주의자가 되었다. 리이프크네히트는 뛰어난 혁명가였다. 그러나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말을 청년당원들을 교육하는 자리에서 했습니다! 이 주장이 어떤 의미라도 가지고 있다면 아마 변증법적 유물론이 혁명가에게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리이프크네히트와 플레하노프의 예들을 이렇게 인위적으로 역사적 맥락에서 떼어놓고 섁트먼은 작년 그의 논문에 담긴 견해를 강화하고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방법론이 비일관성이라는 신의 선물에 의해 정치와 유리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는 방법론에 달려있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의 견해입니다. 두 "예외들"을 잘못 해석하는 것을 통해 섁트먼은 규칙을 뒤집으려고 시도합니다. 이것이 맑스주의 "지지자"의 주장이라면 적들로부터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맑스주의에 대한 수정은 맑스주의에 대한 철저한 청산으로 이행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것 이상입니다. 모든 사상과 모든 방법론에 대한 청산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대안이 무엇입니까?

물론 변증법적 유물론은 영원하며 변할 수 없는 철학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비변증법적 사고입니다. 과학적 사고가 좀더 발전하면 좀더 심오한 사상이 탄생할 것입니다. 이 사상을 위해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기초를 제공할 뿐입니다. 그러나 맑스와 같은 사람이 매년 또는 10년마다 탄생하지 않을 바에야 이 철학혁명이 쇠퇴하고 있는 부르조아 체제 내에 달성되리라고 기대할 근거는 없습니다. 노동계급의 죽고 사는 임무는 세계를 새로이 해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이 세계를 개조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당분간 행동하는 위대한 혁명가들을 기대할 수는 있어도 새로운 맑스의 탄생을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사회주의 문화의 기반 속에서만 인류는 과거의 사상적 유산을 검토할 필요를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지식 창조의 영역에서도 사회주의 문화를 습득한 후손들은 우리를 월등히 능가할 것입니다. 소련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범죄집단입니다. 모든 생활 영역에서 불평등을 더욱더 조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민의 지식 활동을 비밀경찰의 한없는 돌대가리 수준으로 저하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과 달리 노동계급이 운이 좋다고 합시다. 그러면 전쟁과 혁명의 현 시기에 맑스주의를 능가하여 특히 변증법적 유물론을 초월하여 논리학을 전진시킬 새로운 이론가나 쟁쟁한 이론가 집단이 탄생할 것입니다. 그러면 말할 나위도 없이 모든 선진노동자들은 이들 새로운 선생님들로부터 배우게 될 것이며 구세대의 사람들은 스스로 재교육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날 때까지 이것은 미래에 대한 멋진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혹시 내가 틀린 것이 아닐까요?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해 변증법적 유물론 체계를 대체할 저술들에 대해 동지는 나의 관심을 촉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저술들이 실재한다면 확실히 동지는 변증법이라는 아편에 대한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술들은 현재 존재하지 않습니다. 맑스주의 철학의 평판에 손상을 가하려는 동지는 아직도 이를 대체할 어떤 것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젊은 아마추어 의사가 수술용 칼을 사용하는 외과의사와 논쟁하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이 젊은이는 해부학, 신경학 등이 아무 소용이 없으며 이것들의 많은 부분은 제대로 해명되지 않았고 불완전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보수적 관료들"만이 이러한 사이비 과학 등에 의거하여 수술용 칼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이 외과의사는 무책임한 젊은 의사에게 수술실을 떠나라고 요구할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버넘 동지, 우리 역시 과학적 사회주의 철학에 대한 값싼 비방에 굴복할 수 없습니다. 이와 반대로 이 문제가 분파 투쟁 과정에서 내내 쟁점으로 부상했으므로 모든 당원들 특히 청년 당원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대오 내에 부르조아 회의주의가 침투하는 것을 경계하시오. 아직까지 사회주의는 맑스주의 이상가는 과학적인 세계관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과학적 사회주의 방법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진지하게 연구하십시오! 맑스, 엥겔스, 플레하노프, 레닌, 프란츠 메링 등을 연구하십시오. 이것은 캐넌 동지의 보수적 행태를 지적하는 편향되고 메마른 그리고 약간 우스꽝스러운 논문들을 연구하는 것보다 100배 이상 더 중요합니다. 청년 당원들이 혁명 투쟁을 위한 진지한 이론적 기초를 가득 머리 속에 채울 계기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현재의 논쟁이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도록 노력합시다.  

 

잘못된 정치"현실주의 "

그러나 동지의 경우는 변증법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련의 사회성격에 대한 당의 입장을 지금 바꾸려고 시도하지 않겠다고 동지는 결의안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동지는 당헌상으로는 아니더라도 이론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세 살먹은 어린애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지의 이 말 자체는 훨씬 더 황당하고 해로운 의미를 또 하나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동지는 정치를 맑스주의 사회학과 분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사용하지 않고 국가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고 합시다.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분석하지 않은 채 올바르게 정치노선을 결정할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맑스주의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소수파 지도자들은 소련의 계급적 성격에 대해서는 서로 견해를 달리합니다. 그러나 소련의 대외정책이 그 성격상 "제국주의적"임에 틀림없고 소련을 "무조건" 방어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명확한 강령입니다!) 소수파 "파벌"이 당대회에서 소련의 사회성격을 문제로 제기하는 것은 진짜 범죄행위입니다. 그런데 이미 소수파 동지들은 서로 견해를 달리하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즉 각기 다르게 투표할 것에 동의했습니다. 영국 정부 내에서도 이런 전례가 있습니다. 각료들이 "견해를 달리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 즉 다르게 투표한다는 전례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네 국가의 성격을 잘 인식하고 있으며 부차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견해를 달리할 수 있는 사치를 누릴 여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당의 소수파 지도자들은 이들보다 훨씬 불리한 상황에 있습니다. 즉 부차적인 문제들에 대해 동맹하기 위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견해를 달리할 사치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맑스주의이며 원칙에 입각한 정치라면 무원칙한 연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소련의 계급적 성격에 대해서 토론하기를 거부하고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집착하는 것을 통해 동지는 스스로 현실 정치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자기기만은 지난 50년간 노동운동 내 분파투쟁의 역사를 동지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결과입니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든 원칙적인 분파투쟁에서 맑스주의자들은 사상과 강령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정정당당하게 당을 대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 속에서만 "구체적인" 문제들이 올바른 위치와 균형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반면에 모든 색조의 기회주의자들 특히 원칙에 입각한 논쟁에서 몇번의 패배를 당한 기회주의자들은 언제나 맑스주의적 계급 분석을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평가와 대립시켰습니다. 그런데 늘상 그렇듯이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평가는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압력 속에서 작성되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의 분파투쟁들에서 이러한 역할 분담은 지속되었습니다. 소수파는 사실 새로운 것이라고는 하나도 고안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소수파는 이론 영역에서 수정주의 전통과 정치 영역에서 기회주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습니다.

베른슈타인은 영국에 있는 동안 앵글로-색슨족이 발명한 경험주의와 공리주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철학들은 가장 형편없는 부류에 속하는 것들이죠 ! 이 철학들의 영향을 받아 그는 지난 세기말에 수정주의적인 시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가차없이 반박당했습니다. 그러자 독일의 기회주의자들은 갑자기 철학과 사회학으로부터 물러났습니다. 당대회와 당기관지를 통해 이들은 "구체적인 정치문제들"을 일반적인 원칙 문제들로 바꿔치기하는 맑스주의적 "현학들"에 대해 끊임없이 비난을 가했습니다. 지난 세기말과 현세기 초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남긴 기록들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동지는 프랑스 사람들이 말하듯이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지배하는 정도에 스스로 놀랄 것입니다.

러시아 맑스주의 운동의 발전에 [이스크라]가 수행한 위대한 역할을 동지는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크라]는 노동운동 내의 소위 "경제주의" 그리고 인민주의(나로드니키, 사회혁명당)경향에 대해 투쟁하면서 출범했습니다. [이스크라]는 이론 영역에서만 맴돌고 있음에 반해 "경제주의자" 자신들은 노동운동의 구체적인 측면을 지도하려고 한다는 것이 "경제주의자들"의 주요한 논지였습니다. 사회혁명당의 주요한 논지는 이렇습니다: [이스크라]가 변증법적 유물론 학파를 창시하려는 반면에 우리는 짜르 전제를 타도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정말이지 나로드니키 테러분자들은 자신들의 말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손에 폭탄을 들고는 자기 목숨을 희생시켰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당시 우리는 이렇게 논박했습니다: "특정 상황에서는 폭탄도 아주 좋다. 그러나 우선 우리의 논리를 명료하게 해야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은 폭탄을 가지고 출발한 당이 아니라 변증법적 유물론을 가지고 출발한 당에 의해서 주도되었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경험입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같은 당에 있을 때 당대회 준비기간과 당대회 기간은 언제나 의제에 대한 격렬한 투쟁으로 들끓었습니다. 먼저 레닌은 짜르 체제의 성격에 대한 정리, 혁명의 계급적 성격 분석, 우리가 경과하고 있는 혁명 단계에 대한 평가 등과 같은 문제들을 의제에 올릴 것을 제안하곤 했습니다. 이에 대해 멘셰비키 지도자 마르토프와 단은 언제나 이렇게 반대했습니다: 우리는 사회학회가 아니라 정당에 몸담고 있습니다; 짜르 경제체제의 계급적 성격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치적 임무들"에 대해서 합의에 도달해야 합니다. 나는 기억을 통해 이렇게 인용하고 있지만 실수할 위험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논란들은 매년 반복되어 판에 박혔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오류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이 경험으로부터 뭔가를 배웠습니다.

"구체적인 정치 문제들"에 대해 집착한 자들에게 레닌은 언제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 정치는 상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칙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전술은 전략에 종속된다; 노동자들을 특수한 문제에서 일반적인 문제로 인도하고 이들에게 현대 사회의 성격과 이 사회 기본 세력들의 성격을 가르치는 데에 모든 정치투쟁의 일차적인 관심이 있다. 멘셰비키들은 자신들의 불안정한 연합으로 인해 야기되는 원칙상의 차이점들을 응그슬쩍 무마해야할 필요를 언제나 시급히 느꼈습니다. 반면에 레닌은 원칙적인 문제들을 단도직입적으로 솔직히 제기했습니다. 지금 소수파가 철학과 사회학에 반대하여 "구체적 정치문제들"을 옹호하는 주장은 단의 주장을 뒤늦게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고문서 보관소에나 들어가 있어야 할 정도로 낡은 맑스주의 정치 원칙만을 섁트먼이 존중하다니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버넘 동지는 스스로 맑스주의 이론에서 "구체적인 정치문제들"로 논쟁을 전환하자는 호소를 하는 데 참으로 어색하고 들립니다. 소련의 사회성격 문제를 제기하여 나로 하여금 국가의 계급적 성격이 결정되는 방법론 문제를 제기하도록 부추긴 사람이 바로 동지였기 때문입니다. 동지가 스스로 결의안을 철회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분파적 술수는 객관성이 전혀 없습니다. 동지는 사회학적 전제로부터 정치적 결론들을 끌어냅니다. 물론 지금은 일시적으로 이 사회학적 전제를 서류가방에 슬쩍 집어넣고 숨기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섁트먼 동지는 사회학적 전제가 없이 똑같은 정치적 결론을 도출하면서 동지의 결론에 동조합니다. 에이번 동지 역시 숨겨진 전제를 이용하여 "조직적" 연합의 근거로 삼습니다. 소수파 진영의 실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동지는 반(反) 맑스주의자로 자처합니다. 섁트먼과 에이번은 관념적(Platonic) 맑스주의자로 자처합니다. 누가 더 저질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재 논쟁의 변증법

소수파가 은폐된 전제들과 전제의 결여를 외교적으로 숨기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 "보수주의자들"은 당연히 이렇게 응답합니다: 출발점으로 어떤 계급적 전제들을 택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밝힐 경우에만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결실있는 논쟁이 가능하다. 동지가 인위적으로 선택한 쟁점들에만 논쟁을 제한할 필요를 우리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문제들로서 소련 함대의 스위스 침략 또는 뉴욕 브랑스(Bronx)구에 출몰하는 마녀의 꼬리 길이 등을 논의하자고 누가 제안할 경우 나는 스위스가 바다에 접해있는지 그리고 마녀가 존재하는지 등의 문제들을 미리 제기할 정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심각한 논쟁은 특수적인 심지어는 우연적인 것에서 일반적이며 근본적인 것으로 발전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논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나 동기는 논쟁 당사자들이 어떤 증상을 보이기 때문에 흥미를 끌 수 있을 뿐입니다. 결국 논쟁이 발전하면서 제기하는 문제들만이 실제 정치적 의의를 지닙니다. "관료적 보수성"을 비난하고 싶어하며 자신들의 "역동적인 기상"을 과시하고자 하는 지식인에게 변증법, 맑스주의, 국가의 성격, 집중주의 등과 관련된 문제들은 "인위적으로" 제기된 것처럼 보이며 논쟁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논쟁은 논쟁 당사자인 개인과 파벌의 주관적인 논리와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나름의 객관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논쟁의 핵심입니다. 논쟁의 객관적인 과정은 미리 생각되어진 논리적 계획이 아니라 반대되는 경향들의 살아있는 투쟁을 통해서 결정됩니다. 논쟁의 변증법적 성격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각기 다른 계급들의 압력을 반영하는 데에 논쟁의 유물론적 기반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역사 과정 전체와 같이 현재 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의 논쟁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법칙들에 따라 전개되고 있습니다. 버넘 동지가 이진리를 인정하거나 말거나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이 법칙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맑스주의에 대항하는 "과학" 과 강령에 대항하는 "실험들"

동지는 다수파 동지들의 "관료적 보수주의"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난은 이 "보수주의"를 뒷받침하는 특정 사회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한 공허할 뿐입니다. 그리고 동지는 스스로 제출한 문건에서 보수적 정치가 "비판적이며 실험적 정치 --- 한마디로 표현하면 과학적 정치"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32쪽) 얼핏보면 거만한 투와 함께 해롭지도 않고 별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폭로입니다. 맑스주의 정치도 아니며 노동자 정치도 아니며 "실험적인", "비판적인", "과학적인" 정치라고 동지는 말합니다. 우리 대오에서는 참으로 듣기 힘든 허세가 넘치며 의도적으로 어려운 말을 왜 씁니까? 나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동지는 부르조아 여론에 영합하고 있으며 섁트먼과 에이번은 동지의 생각에 영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러한 용어 선택이 입증하고 있습니다. 광범위한 부르조아 지식인 사회에서 맑스주의는 더 이상 유행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맑스주의를 말하는 사람은 변증법적 유물론자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릅니다. 망신살이 낀 이 말을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러면 이 말을 무엇으로 대체할까요? "과학" 그리고 첫 철자가 대문자로 된 바로 그 과학이란 말로 대체하면 됩니다. 과학은 "비판"과 "실험"에 근거하고 있다고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너무도 확고하며, 너무도 관용적이며, 너무도 비종파적이며, 너무도 교수다운 매력이 이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을 쓰면 어떤 민주적인 살롱(salon)에서도 환영받을 수 있습니다.

동지 자신이 한 말을 다시 한번 읽어보기 바랍니다: "보수적인 정치 대신 대담하고 융통성이 있으며 비판적이고 실험적인 정치 --- 한마디로 표현해서 과학적 정치를 내세워야 합니다." 이 이상 더 좋은 표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야말로 모든 쁘띠부르조아 경험주의자들, 모든 수정주의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정치 모험주의자들이 "편협한", "제한된", "교조적인", "보수적인" 맑스주의에 대항해 사용해온 말입니다.

뷔퐁(Buffon)이 한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문체는 곧 사람이다. 정치 언어는 사람뿐만 아니라 당 자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언어 선택은 계급투쟁의 한 요소입니다. 무기력한 현학자만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느 누구도 아니고 동지 자신이 변증법과 유물론뿐만 아니라 맑스주의란 말을 스스로 문건에서 삭제하고 있습니다. 동지는 이런 말들로부터 초월해 있습니다. 동지는 "비판적", "실험적" 과학을 추구하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똑같은 이유로 동지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대외정책을 표현하기 위해서 "제국주의"라는 말을 선택했습니다. 이 발명품은 동지와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좀더 덜 "종파주의적인", 좀더 덜 "종교적인", 좀더 덜 엄격한 표현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일치입니까! 이를 통해 동지는 제4인터내셔널이 사용하는 너무 당혹스러운 표현으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동지는 실험을 하고 싶습니까? 그러나 노동자 운동은 풍부한 경험 그리고 동지가 좋아하는 풍부한 실험을 보유한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중하게 터득한 경험은 명확한 사상 즉 동지가 그렇게도 사용하기를 꺼려하는 맑스주의라는 결정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동지에게 실험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기 전에 당은 이렇게 물어볼 권리가 있습니다: 실험을 할 때 어떤 방법을 사용할 것입니까? 지난 시기 공업 발전과 그동안 진행된 수없이 많은 실험들의 필요한 결론들을 소화하지 않은 자에게 헨리 포드가 자기 공장에서 실험할 권리를 부여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공장의 실험실은 대량생산 설비로부터 면밀하게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체없는 "과학"의 깃발 아래 수행되는 동지의 실험은 노동운동 분야에서는 무당이나 하는 형편없는 실험입니다. 이것은 더욱더 허용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노동운동의 과학은 맑스주의입니다. 정체나 이름도 없는 사회과학, 대문자로 시작하는 바로 그 과학은 이스트먼과 같은 부류들이나 멋대로 수행하라고 내 버려두겠습니다.

동지는 이스트먼과 논쟁한 적이 있으며 어떤 문제들에 있어서는 당을 위해 논쟁을 잘 수행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논쟁할 때 동지는 동지가 속한 집단의 대표로서 논쟁에 참여했습니다. 계급의 적인 자본가 계급의 하수인으로 논쟁에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지는 섁트먼과 공동으로 작성한 논문에서 이 하수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뚜렷이 드러내었습니다. 놀랍게도 동지는 이스트먼, 훅, 라이언즈 등과 같은 인사들에게 놀랍게도 [새로운 인터내셔널] 지면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견해를 선전하라고 초대했습니다. 이들이 변증법 문제를 제기하여 이 문제에 대한 동지의 외교적인 침묵을 깨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지는 이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논쟁이 있기 오래 전인 작년 1월 20일자 섁트먼 동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스탈린주의 정당들 내부의 사태 전개를 면밀히 추적해야할 시급한 필요성을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나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스탈린주의 정당의 내부 사태를 파악하는 것은 이스트먼, 라이언즈와 그 밖의 인사들이 자기 개인적 노력의 결과물들을 발표하도록 초청하는 것보다 1천 배나 더 중요합니다. 이스트먼의 내용없고 거만한 마지막 논문에 왜 당 공식출판물의 지면을 할애했는지 약간 의아스러웠습니다. 그는 하퍼즈 잡지(Harper's Magazine), 현대 월간(Modern Monthly), 상식(Common Sense) 등과 같은 부르조아 언론의 지면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동지가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넓지도 않은 지면을 이들이 더럽히도록 초청했다는 사실에 나는 완전히 놀라자빠질 지경입니다. 이 논쟁을 계속 유지시키는 것은 쁘띠부르조아 지식인 일부에게는 흥미거리를 제공해줄 지 몰라도 혁명 분자들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일입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사회주의 호소]를 어느 정도 개편해서 이스트먼, 라이언즈 등과 같은 작자들과는 좀더 많은 거리를 두고 노동자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스탈린주의 정당들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나의 확신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섁트먼 동지는 나의 편지에 대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뿐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동지가 초청한 맑스주의의 적들이 동지의 초청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해결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좀더 면밀하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동지는 섁트먼의 지지를 받아 우리 당 기관지에 우정어린 글들을 보내도록 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을 초청했습니다. 또 한편으로 역시 같은 섁트먼의 지지를 받아 동지는 변증법과 소련의 계급적 성격에 대해서 나와 논쟁할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지는 동맹군 섁트먼과 함께 부르조아 반(半) 야당 세력에게 어느 정도 관심을 표명하면서 소속한 당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맑스주의는 존중될 사상이지만 반대 세력들 간의 훌륭한 동맹은 맑스주의보다 더욱더 의미있다고 에이번 동지는 오래 전에 결론내렸습니다. 한편 섁트먼 동지는 더욱더 추락하여 재치있는 경구나 던지면서 자기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여간 괴롭지 않을 것입니다. 일정 시점에 이르면 그는 다시 심기일전하여 상승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나는 희망합니다. 그의 "실험적" 분파 정치가 최소한 "과학"에 기여하는 것으로 결말이 나기를 희망합니다.  

 

"무의식적인 변증법론자"

다아윈에 대한 나의 말을 근거로 삼아 섁트먼은 동지가 "무의식적인 변증법론자"라고 말했다고 나는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 애매한 칭찬은 약간의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 무의식적으로 변증법을 이용합니다. 일정량의 소금은 수프의 맛을 좋게 하며 소금을 좀더 치면 맛이 엉망이 된다는 것을 주부들은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맹 상태의 농민 아낙네는 수프를 만드는 데 양질전화라는 헤겔의 법칙을 받아들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이와 같은 예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심지어는 동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뿐만 아니라 헤겔의 변증법에 따라 실천적인 결론을 도출합니다. 네발 달린 짐승과 새는 영양분도 풍부하고 맛도 좋다는 것을 여우는 알고 있습니다. 산토끼, 집토끼, 암탉 등을 보면 여우는 이 동물들이 맛있고 영양가 있는 부류에 속한다고 결론내리고 뒤쫓습니다. 여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읽은 적이 없지만 이 경우 완벽한 삼단논법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우가 늑대처럼 자기보다 덩치가 큰 동물을 만나면 양이 질로 변한다고 재빨리 결론을 내리고는 도망칩니다. 확실히 여우의 다리는 완전히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헤겔의 논리학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예들은 형식논리와 변증법을 모두 포함한 사고 방법이 이성의 자의적인 구성물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에 실재하고 있는 상호관계의 표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주만물은 "무의식적인" 변증법론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자연의 모든 상호관계는 여우와 인간의 의식이라는 언어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의식형태들을 일반화하여 이것들을 논리적(변증법적) 범주들로 전환시켜 주위 세계를 더욱 깊게 탐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자연과 사회를 지배하는 변증법의 가장 완성된 표현은 헤겔과 맑스에 의해서 성취되었습니다. 다아윈은 자신의 논리 방법들을 검증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연과학 영역에서 보인 그의 천재적인 경험주의는 변증법적 일반화의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다른 논문에서 이미 말했듯이 이런 의미에서 다아윈은 "무의식적 변증법론자" 였습니다. 그러나 다아윈의 가치는 변증법에 이르지 못한 그의 무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종의 기원을 설명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엥겔스는 맑스와 같이 자연도태 이론의 위대성을 즉시 인정했지만 다아윈의 협소한 경험주의에 대해 안달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다아윈은 죽을 때까지 맑스가 전개한 사회학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다아윈이 변증법이나 유물론을 언론에서 공격했다면 맑스와 엥겔스는 다아윈의 권위가 사상적 반동을 위장하지 않도록 배가된 힘으로 그를 공격했을 것입니다.

동지가 "무의식적 변증법론자"라고 섁트먼은 변호사처럼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의식적이란 말에 방점이 주어져야 합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격하시키면서 동지와의 동맹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섁트먼의 (역시 부분적으로 무의식적인) 목적입니다. 실제에 있어서 섁트먼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의식적인" 변증법론자와 "무의식적인" 변증법론자 사이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아서 구태어 이것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이 논리를 통해 섁트먼은 맑스주의 방법론을 깍아 내리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악의 정도는 이 정도를 이미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무의식적인 또는 반의식적인 변증법론자들이 아주 많이 존재합니다. 이들 중 일부는 방법론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정치에 변증법적 유물론을 아주 뛰어나게 적용했습니다. 이런 동지들을 공격하는 것은 명백히 현학적인 돌대가리짓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동지의 경우는 다릅니다. 동지는 맑스주의 방법론으로 당을 교육시킬 임무를 지닌 당 이론지의 편집자입니다. 그러나 동지는 무의식적인 변증법론자가 아니라 변증법에 의식적으로 대항하고 있습니다. 섁트먼이 주장하듯이 동지가 정치 문제에서 변증법을 충실히 적용했다 하더라도 즉 동지가 변증법적인 "본능"을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동지에 대해서 투쟁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지의 변증법적 본능은 다른 개인적인 자질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없지만 의식적인 변증법적 방법론은 어느 정도 당원들 모두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변증법과 다이즈씨

어쩌면 동지는 변증법적 본능을 소유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것의 사실 여부를 판단할 의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본능도 현실과 무관한 학자적 관행과 지적인 오만함으로 인해 거의 질식되어 있습니다. 노동자의 계급적 본능은 상대적으로 쉽게 문제들에 대한 변증법적 해결 방법을 받아들입니다. 쁘띠부르조아 정신을 의식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통해서만 노동계급과 유리된 지식인은 맑스주의 정치로 올라설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섁트먼과 에이번은 동지가 이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을 힘이 닿는한 막고 있습니다. 버넘 동지, 이들은 동지를 지지하는 것을 통해 동지에게 아주 커다란 해악을 끼치고 있습니다.

"분파적 방종의 동맹"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연합으로 힘을 얻어 동지는 철학, 사회학, 정치, 조직 등의 영역에서 오류에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지의 오류들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동지는 하나 하나의 문제를 접근할 때 다른 문제들과 이것이 갖는 연관성을 끊어버리고 특히 사회적 요인들과 국제적 경험을 이것으로부터 분리시킵니다. 동지는 변증법적 방법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풍부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지는 정치에서는 마치 마술사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다이즈 위원회(Dies Committee)의 문제에서 동지의 이해할 수 없는 논리는 핀란드 문제의 경우처럼 아주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의회 기구를 활용하고자 하는 나에 대해 동지는 이 문제가 원칙적인 고려가 아니라 동지에게만 알려진 어떤 특별한 상황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동지는 이 특별한 상황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사실 특별한 상황은 별 것이 아닙니다. 부르조아 여론에 동지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특별한 상황입니다. 부르조아 민주주의 분파 모두는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으며 다이즈 위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체제의 이해를 위해 체제의 너무나 적나라한 억압 기구들로부터 창피스럽게 관심을 딴 쪽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순한 노동분업입니다! 낡은 사기술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나 새로운 상황에서 효과를 발휘해야 합니다! 동지가 막연하게 지칭하고 있는 노동계급의 일 분파 특히 아주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일 분파는 동지처럼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영향력 하에 있습니다. 노동관료의 편견에 물들지 않은 보통 노동자들은 자기 계급의 적들에게 향해진 모든 대담한 혁명적 언사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환영할 것입니다. 지배계급의 기구가 반동적이면 반동적일수록 이 기구에 가해지는 혁명적 언사들은 더욱더 노동자들을 만족시킵니다. 이것은 역사의 경험에 의해서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두려움에 질려 즉시 뒤로 후퇴한 다이즈 자신이 동지의 입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싸움을 피한 채 숨는 것보다는 적이 후퇴하도록 만드는 것이 언제나 더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섁트먼이 화가 나서 나에게 항의의 몸짓을 하는 것이 눈에 선합니다: "소수파는 다이즈 위원회에 대한 버넘의 견해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 문제는 분파적 성격을 띠지 않았다." 등등. 물론 다 알고 있습니다. 소수파 전원이 다이즈 위원회 불참 전술을 지지했어야 했는데 이것만이 제대로 성사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사되었어도 전혀 사태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의미없는 일화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다만 모두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견해를 공공연히 표현한 소수파 지도자 한 사람이 불참 전술을 지지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종교"에 대해 논쟁을 일삼은 역사 시대보다 동지가 더 진보했다면 제4인터내셔널 전체는 기권을 가장 혁명적 정치라고 생각한 역사 시대보다 더 진보했습니다. 동지의 방법론 결여 이외에도 동지는 스스로가 정치적 지혜를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경우를 통해 드러내었습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혁명가라면 긴 논쟁을 할 필요없이 적이 활짝 열어준 문을 지나가면서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이용했을 것입니다. 동지와 함께 다이즈 위원회 불참을 선언한 소수파 성원들의 숫자는 적지 않습니다. 이들 동지들에게 특별 강좌를 베풀 필요가 있습니다. 지식인 집단의 사이비 급진주의적 기권주의는 혁명적 전술의 기본적 진실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정치문제들"

소수파는 자신이 특별히 강하다고 생각하는 영역 즉 일상적인 혁명정치 영역에서 정확하게 가장 커다란 약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동지에게 더욱 적절하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폴란드, 발트해 국가들, 핀란드 등에 관한 문제에서 동지와 반대파 전부는 거대한 사태들에 직면하여 무능력을 확연히 드러내었습니다. 소련군이 점령한 폴란드에서 히틀러와 스탈린에 대항하는 동시다발적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섁트먼은 자신의 논리를 개진했습니다. 그는 현자의 돌(a philosopher's stone)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아주 멋진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 생각을 현실로 옮길 기회를 섁트먼이 결여했다는 사실이 너무 아쉬울 뿐입니다. 동부 폴란드의 선진노동자들은 이렇게 올바르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련군 점령 지역에서 히틀러와 스탈린에게 반대하는 동시다발적 봉기는 아마 미국 뉴욕의 브랑스(Bronx)구에서는 아주 편리하게 준비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준비 작업이 더욱 어렵습니다. 지금부터 곧 다가올 봉기 사이에 해야할 임무를 다룬 `구체적 정치문제'에 대해 버넘과 섁트먼으로부터 해답을 듣고 싶습니다." 한편 소련군 총사령부는 점령지의 폴란드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토지와 공장을 점령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이 촉구는 소련군대의 지지 속에 점령지역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모스크바 신문들은 노동자와 빈농들의 한없는 "열성"에 대한 보도를 지면이 넘치게 실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불신을 가지고 이러한 보도들을 접근해야 합니다. 언제나 거짓말은 충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사실에 눈을 감는 것은 허용될 수 없습니다. 폴란드 지주를 이중적인 적으로 간주한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핍박당한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지주에게 복수하고 자본가들을 몰아내라는 촉구는 이들의 기상을 고조시켰음에 틀림없습니다.

제4인터내셔널이 아니라 프랑스의 부르조아 민주주의와 연대를 맺고 있는 멘셰비키의 빠리 기관지는 단언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군의 진주는 혁명의 파도를 몰고 왔으며 이 메아리는 루마니아의 농민대중들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이 기관지의 전보는 특별한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유태인 분트, 폴란드 사회당 그 밖의 조직들의 지도자들은 소련에게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폴란드에서 도망을 나왔으며 멘셰비키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동부 폴란드의 볼셰비키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은 완전히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노동자 농민과 함께 이들의 선두에 서서 지주와 자본가에 대한 투쟁을 수행해야 합니다; 대중들이 아무리 소련 관료집단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들과 유리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짜르에 대해서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대중들로부터 러시아 혁명가들이 유리되지 않은 것과 똑같은 경우입니다(피의 일요일, 1905년 1월 22일); 투쟁 과정에서 대중들을 교육시키고 소련 관료집단에 대한 이들의 소박한 희망에 대해 이들에게 경고하십시오; 그러나 대중들로부터 유리되어서는 안되며 이들 진영에서 투쟁해야 합니다; 이들의 투쟁을 확대하고 심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이 투쟁에 가능한한 최대한 독립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오직 이 방법을 통해서만 스탈린에 대항하는 봉기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폴란드의 이후 사태는 이 정책의 올바름을 완전히 확인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정책은 특히 스페인에서 펼쳤던 과거 우리의 정책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입니다.

폴란드와 핀란드의 상황 사이에는 원칙적인 차이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정책을 바꾸어야 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나 소수파는 폴란드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이제 핀란드를 마치 구원의 새로운 닻인양 부여잡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핀란드에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가? 트로츠키는 내전을 말하고 있는데 신문에는 아무런 보도도 없다," 등등. 소수파에게 핀란드 문제는 원칙적으로 서부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 문제와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각각의 문제는 고립되어 사태의 일반적 과정과 무관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사태의 전개에 의해 혼란에 빠지자 소수파는 매번 우연적, 부차적, 일시적, 상황적 요인들에 기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핀란드에 내전이 발발하지 않았다는 항의는 결국 소수파가 실제 내전이 발발할 경우 우리 정책을 따를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까? 그렇습니까, 아닙니까? 그렇다면 소수파는 폴란드에 대한 자신의 기존 입장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폴란드에 내전이 발발했지만 이들은 개입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탈린과 히틀러에 대한 동시다발적 봉기가 일어나기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버넘 동지, 동지와 동지의 동맹세력은 이 문제를 끝까지 숙고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핀란드 내전에 대한 나의 주장은 어떻습니까? 핀란드와 소련 사이에 군사적 분쟁이 일어날 시초에 이미 소련이 혹시 "소규모" 응징 원정을 통해 헬싱포르스(Helsingfors) 정부를 갈아치우고 다른 발트해 국가들과 같은 관계를 핀란드와 유지할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련 지도부가 테리요키(Terrijoki)에 쿠지넨(Kuusinen) 정권을 수립한 사실은 이들이 다른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전보는 핀란드 "적군"의 창설을 보도했습니다. 당연히 이 사태는 위로부터 소규모 정부가 구성된 경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쿠지넨의 강령이 발표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대토지가 빈농들에 의해서 분할되었다는 전보가 언론에 등장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 전보들은 소련 관료집단이 내전을 조직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당연히 이것은 특별한 종류의 내전입니다. 즉 인민 대중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아닙니다. 그리고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는 핀란드 혁명정당의 지도하에 진행되는 경우도 아닙니다. 외부 세력의 총칼을 통해 내전이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소련 관료집단이 전 과정을 장악하고 있는 내전입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폴란드 사태를 논의할 때 이 문제들을 모두 다룬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전의 문제입니다. 하층민과 빈곤층에게 호소하며 이들이 부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이들을 몰아내거나 체포하라고 촉구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행동들을 내전이라는 말 이외에 어떻게 달리 묘사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소수파 지도자들은 이렇게 반대합니다: "그러나 결국 핀란드 내전은 발발하지 않았다. 이것은 트로츠키 동지의 예상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군의 패배와 후퇴때문에 핀란드 내전은 물론 마너하임(Mannerheim)의 총칼 하에 진행될 수 없다고 나는 대답합니다. 이 사실은 나의 논지가 아니라 섁트먼의 논지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 초기 몇 단계에게 군대의 규율이 여전히 강한 상황에서는 봉기를 조직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그동안의 사태전개가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테리요키보다는 뉴욕 브랑스구로부터 두 전선에 걸쳐 봉기를 조직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적군의 첫 두 분견대가 패배할 것을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크렘린궁에 의해 숙청당해 머리가 잘린 적군 총사령부와 크렘린궁을 지배하고 있는 스탈린 관료집단은 우둔함과 사기 침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약점의 정도를 우리는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군사적인 사건으로 우리의 정치노선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첫 시도가 실패로 끝날 경우 소련 관료집단은 핀란드에 대해서 더 이상의 공세를 완전히 기피할지도 모릅니다. 그럴 경우 소수파의 세계정세 전반에 대한 시각을 혼란시키고 있는 문제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반면에 스칸디나비아에 거점을 두고 있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이 핀란드에 대해 군사 원조를 제공한다면 핀란드 문제는 소련과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전쟁 속에 잠겨 겉으로 나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럴 경우 심지어 소수파의 다수 동지들조차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을 유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소수파는 이 두 변종 즉 소련의 공세 중단 또는 소련과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전쟁 발발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소수파는 소련의 핀란드 침략이라는 분리된 문제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봅시다. 만약 지금 예상하고 있는 바대로 두 번째 공세가 좀더 잘 준비되고 수행된다면 적군의 핀란드 영토 진주는 내전의 문제를 다시 일정에 올려놓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치스럽게 실패했던 첫번째 시도보다도 훨씬 더 큰 규모로 내전이 진행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정책은 이 문제 자체가 일정에 올라 있는 이상 완전히 유효합니다. 그런데 적군이 핀란드에 성공적으로 진군하고 내전이 진행된다면 소수파는 무엇을 제안할 것입니까? 소수파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루 하루 한사건한사건에 매달리고 사설의 개별 문구에 매달리면서 강령의 겉모습이나마 갖추려고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경험주의자와 인상주의자의 약점은 언제나 "구체적인 정치문제들"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론적 당황과 기권주의

소수파의 모든 동요와 소동이 아무리 모순적이라 할지라도 이론의 정점에서부터 가장 사소한 정치적 사건에 이르기까지 소수파의 두 가지 일반적 특징이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통일된 개념의 결여입니다. 소수파 지도자들은 사회학을 변증법적 유물론으로부터 분리하고 정치를 사회학으로부터 분리합니다. 정치 영역에서는 폴란드에서의 임무를 스페인의 경험으로부터 분리하고 핀란드에서의 임무를 폴란드에서의 입장과 분리합니다. 이로서 역사는 일련의 예외적인 사건들로 변모합니다. 여기서 말 그대로 맑스주의의 해체, 이론적 사고의 해체, 정치의 개별적 구성 요소들로의 해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경험주의와 이것의 배다른 형제인 인상주의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소수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버넘 동지, 변증법의 반대자요 경험주의자로서 자신의 경험주의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동지가 소수파의 이데올로기적 지도력을 행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소수파의 모든 동요와 소동 가운데에서 첫 번째 특징과 긴밀히 연관된 두 번째 일반적 특징이 있습니다. 늘상 그렇듯이 초급진적 수사라는 위장막에 감추어진 경향 즉 적극적인 행동을 꺼리는 경향, 스스로를 투쟁으로부터 제외시키려는 경향, 기권주의 경향이 이것입니다. 동지는 폴란드에서 히틀러와 스탈린을 그리고 핀란드에서 스탈린과 마너하임을 타도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동지는 똑같이 양쪽 진영을 거부합니다. 다시 말하면 동지는 내전을 포함한 투쟁에서 기권하고 있습니다. 동지가 핀란드에서 내전이 발발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우연적이며 상황적인 주장에 불과합니다. 내전이 전개되면 소수파는 폴란드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른 채 할 것입니다. 아니면 소련 관료집단이 그 성격상 "제국주의적"임으로 "우리는" 이 더러운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할 것입니다. 말로는 "구체적인" 정치적 임무를 외쳐대면서 소수파는 실제로 역사 과정 밖에 자신을 위치시킵니다. 버넘 동지, 다이즈 위원회에 대한 동지의 입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수파의 기권주의와 당혹감을 극명하게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동지의 지도 원칙은 언제나 같습니다: "고맙습니다만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어느 개인, 당, 심지어는 계급도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쁘띠부르조아가 특히 대사건에 직면하여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불가피하며 다시 말하면 선천적인 조건입니다. 지식인들은 당혹한 상태를 "과학"이라는 말로 표현하려고 합니다. 소수파의 모순적인 강령은 지식인의 허풍스러운 말로 표현되었을 뿐 쁘띠부르조아의 당혹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노동계급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쁘띠부르조아와 집중주의

조직 영역에 대한 동지의 견해는 이론 영역이나 정치 영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조적, 경험적, 비혁명적입니다. 등잔불을 손에 든 채 스톨버그(Stolberg)같은 사람이 어떠한 극단적인 행위도 없으며 테르미도르와 반혁명도 없는 이상적인 혁명을 찾아 돌아다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지는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자기 머리에서 생각난 것은 무엇이든지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장하고 관료적 퇴보로부터 당을 보호하는 이상적인 당내 민주주의를 찾고 있습니다. 당은 자유로운 개성을 주장하는 장이 아니라 노동자혁명의 도구라는 사소한 사실을 동지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또한 승리한 혁명만이 당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자체와 현대 문화 전체를 퇴보로부터 막아낼 수 있다는 사실도 간과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직의 미국 지부가 너무 과도한 집중주의로 몸살을 앓고 있지는 않습니다. 말을 꺼내기조차 우스운 주장이 될 것입니다. 몸살은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이 민주주의를 기괴하게 남용하고 왜곡하는 데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당내 위기의 뿌리입니다.

노동자는 하루 종일 공장에 매여 있기 때문에 당을 위해서 보낼 시간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모임에서 그는 가장 중요한 사항들을 배우려고 합니다. 상황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이에 따른 정치적 결론이 이것입니다. 가장 명확하고 가장 정확한 방식으로 현실을 평가하고 사건들을 면밀히 추적하는 지도자들을 그는 소중히 여깁니다. 노동계급으로부터 유리된 쁘띠부르조아 특히 비계급적 분자들은 인위적이며 폐쇄된 환경 속에서 무기력한 생활을 영위합니다. 이들은 정치나 그 대체물을 맛보는 데 충분한 시간이 있습니다. 이들은 약점들을 잡아내고 당 "지도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관련된 모든 종류의 토막 뉴스나 한담들을 주고받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모든 "비밀"을 제공하는 지도자를 찾습니다. 토론은 이들의 타고난 환경입니다. 이들에게는 민주주의가 아무리 많이 주어져도 여전히 모자랍니다. 말싸움을 통해 이들은 제4차원을 추구합니다. 이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악순환 속을 헤매다가 소금물로 갈증을 해소합니다. 소수파의 조직 강령을 동지는 알고 싶습니까? 당내 민주주의의 제4차원을 미친 듯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논쟁더미로 정치를 매장시키고 지식인 집단의 무정부주의더미로 집중주의를 매장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몇 천 명의 노동자들이 당에 가입하면 이들은 쁘띠부르조아 무정부주의자들을 확실하게 정리시킬 것입니다. 이런 일이 더 빨리 일어날수록 그만큼 더 좋습니다.  

 

결론

왜 내가 소수파의 다른 지도자들이 아니라 동지에게 편지를 보냈는지 동지는 알고 있습니까? 동지는 소수파 연합의 이데올로기적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에이번 동지의 분파는 강령과 깃발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위장막이 필요합니다. 한때 섁트먼이 위장막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리고는 스펙터와 함께 마스티가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섁트먼이 추종하는 동지 차례가 되었습니다. 동지의 사상을 나는 노동계급 내 부르조아적 영향력의 표현으로 간주합니다.

일부 동지들에게는 이 편지의 어조가 너무 날카로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한 자제하려고 최대한 애를 썼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우리 운동의 이론적 기초, 정치원칙, 조직방식 등을 거부하고 폄하하고 타도하려는 시도에 당이 직면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최근 논문을 읽은 후 에이번 동지가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직의 분리를 의미하는군." 이 반응은 당과 제4인터내셔널에 대한 헌신성을 에이번 동지가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는 서클에나 어울리는 인물입니다. 어쨌든 조직의 분리를 위협한다고 할지라도 견해 차이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 결과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맑스주의자들에게 문제는 조직의 분리가 아니라 당을 교육시키는 것입니다. 당면한 당대회가 가차없이 수정주의자들을 격퇴하기를 나는 간절히 희망합니다.

사회학을 변증법적 유물론으로부터 유리시키고 정치를 사회학으로부터 유리시키려는 시도를 통해 소수파 지도자들은 맑스주의와 결별했으며 쁘띠부르조아 경험주의의 전달장치가 되었다고 당대회는 단호히 선언해야 합니다. 당은 결연히 그리고 완벽하게 맑스주의 사상과 볼셰비즘의 정치적 조직적 방법들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하고 자신의 공식 출판물 편집진을 이 사상과 방법을 전파하고 수호하는 데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당은 미래에 당출판물의 지면을 맑스주의 사상에 뭔가 새로운 내용을 덧붙일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당원들에게 당연히 확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맑스주의를 가지고 숨바꼭질을 하거나 이것을 경솔하게 우롱하는 행위를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의 정치는 계급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 정당, 이데올로기 경향들에 대한 계급적 분석이 없이는 올바른 정치 노선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소련에 대한 정책을 개별 사건으로부터 도출하는 한편 소련의 계급적 성격과 유리시키려는 시도에 대해 당은 저속한 기회주의라고 비난해야 마땅합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붕괴 현상은 쁘띠부르조아들을 격렬한 불만 속에 가두면서 이 계급의 하층이 좌로 움직이도록 합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혁명세력에게 커다란 기회와 동시에 심각한 위험을 제공합니다. 제4인터내셔널은 과거와 완전히 단절하고 결정적으로 노동계급의 입장으로 넘어온 쁘띠부르조아 분자들만을 원합니다.

이들의 이론적 정치적 변모는 과거의 환경과 완전히 결별하고 노동자들과 긴밀한 유대를 확립하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특히 당을 위해 노동대중을 당원으로 가입시키고 교육하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노동계급의 환경에 적응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증명된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은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당원 자격에서 지지자의 지위로 강등되어야 합니다.

계급투쟁을 통해 검증되지 않은 당원들은 책임있는 지위를 맡을 수 없습니다. 부르조아 환경에서 넘어온 분자가 아무리 재능이 있고 사회주의에 헌신하더라도 노동계급의 교사가 되기 전에는 노동계급의 학교에 가야 합니다. 청년 지식인들은 지식인 청년의 지도자로 올라설 것이 아니라 힘든 실천적 작업을 하기 위해 노동계급의 중심지에서 몇 년을 보내야 합니다.

당의 계급적 구성은 당의 계급적 강령과 일치해야 합니다. 제4인터내셔널 미국 지부는 노동계급적 성향을 유지하지 못할 경우 존재를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 * *

버넘 동지! 이러한 원칙들의 기반 위에서 우리가 합의에 도달한다면 어려움이 없이 우리는 폴란드, 핀란드, 그리고 심지어는 인도에 대해서도 올바른 정책을 수립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동지가 관료주의나 보수주의의 어떠한 현상들에 대해서도 투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을 맹세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현재 당내의 위기를 종식시키는 데 필요한 조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1940년 1월 7일

볼셰비키로서 인사를 드리며,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16. A Letter to James Cannon] 제임스 캐넌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버넘 동지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새로운 논문 러시아어 판을 어제 동지 앞으로 우송했습니다. 변증법을 논의의 지배적인 주제로 삼은 것에 대해 동지들 모두가 만족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당원들 특히 청년 당원들에게 이론 교육을 개시하고 이들이 경험주의와 절충주의에 대해 혐오감을 갖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1940년 1월 9일

레온 트로츠키

 

 

[17. A Letter to Farrell Dobbs] 패럴 답스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라이트 동지가 번역하도록 보낸 논문에서 나는 두 가지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관료적 보수주의(bureaucratic conservatism) 문제입니다. 전에 이곳에서 동지와 이 문제를 약간 토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의 정치적 경향인 관료적 보수주의는 특정 사회계층 다시 말하면 특권을 누리고 있는 노동관료층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나타냅니다. 자본주의 국가 특히 제국주의 국가들과 더욱더 높은 정도로 소련에 이러한 사회계층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노동자당 다수파가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되는 "관료적 보수주의"의 사회계층적 뿌리를 찾는 것은 어리석은 정도를 넘어서서 황당무계합니다. 관료주의와 보수주의는 객관적 사회조건에 의해서 결정되거나 일부 지도자들의 개인적 특성에 의해 현실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분파가 존재하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분파는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개인들의 집단을 의미합니까? 이러한 설명이 가능하다면 이 설명은 정치적 설명이 아니라 심리적 설명입니다. 예를 들어 캐넌 동지가 관료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면 다수파는 이 동지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이 특성에도 불구하고 캐넌 동지를 지지한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파투쟁의 사회적 토대 문제를 소수파 지도자들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 캐넌 동지를 "옹호"하는 나를 헐뜯기 위해 소수파 지도자들은 프랑스 지부 지도자였던 몰리니에(Molinier)를 한때 내가 옹호한 것이 오류였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물론 개인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오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이 점은 결코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의 주장에는 깊이가 없습니다. 나는 몰리니에의 잘못된 이론들을 결코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의 개인적 특성이었습니다. 그가 보인 잔인함, 규율 위반, 개인적 재산 축적 등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베레컨과 같은 일부 동지들은 조직이 그와 즉시 결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나는 조직이 몰리니에에게 규율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1934년 몰리니에는 당 강령을 "네 개의 구호(four slogans)"로 대체하려고 애쓰면서 이것에 기반하여 신문을 제작했습니다. 이때 나를 포함한 여러 동지들이 그에 대한 제명조치를 제안했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에게 보인 나의 인내력에 대해서 각자 견해를 달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몰리니에의 개인적 이해가 아니라 당원 교육의 차원에서 이렇게 행동했습니다. 많은 동지들은 제명과 조직 분리 또는 이렇게 하겠다는 위협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일종의 극약처방인 셈인데 우리 조직의 지부들이 코민테른의 악습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필드, 와이스보드, 그외 여러 미국 동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몰리니에의 경우에도 나는 좀더 인내를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몇몇 경우에는 나의 설득이 성공했지만 또 다른 여러 경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운동 대오 내 일부 의심스러운 인사들에 대해 내가 보인 인내심에 대해 나는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이들을 "옹호"하는 행위가 원칙을 버리면서까지 동맹을 추구하는 경우로 나아간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버넘 동지를 제명할 것을 제안하면 나는 열성적으로 반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맑스주의에 저항하는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가장 강력한 사상투쟁을 수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940년 1월 10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18. A Letter to John Wright] 잔 라이트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섁트먼 동지의 팜플렛에 대한 동지의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섁트먼의 이 글은 분파적 감정에 의해 그의 약점이 증폭된 결과물입니다. 그에게는 노동계급적 관점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는 문필계의 그림자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노동계급과 맑스주의에 얼굴을 향하고 있을 때는 그의 그림자는 유용합니다. 현실과 그의 그림자는 대체로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당내 노동계급 경향 다수파와 맑스주의에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 결과 그의 글을 구성하고 있는 단어 하나 하나는 사실과 사상을 전혀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완전히 말도 안되는 글을 좀더 면밀하게 분석하기 위해서 다시 며칠의 시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수파 동지들 다수를 포함하여 당원들 전부에게 섁트먼의 글이 문장마다 맑스주의와 볼셰비즘으로부터 한심스럽게 결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1940 년 1 월 13 일

레온 트로츠키

 

[19. A Letter to James Cannon] 제임스 캐넌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섁트먼의 공개서한은 그 내용이 참으로 한심합니다. 가치가 있다면 단 한가지 입니다. 즉 그의 정치노선의 진면모를 내가 폭로하도록 강요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의 편지에 대한 답장은 이미 구술시켰으며 약간 다듬기만 하면 완성됩니다. 불행하게도 버넘 동지에게 보낸 편지보다 더 짧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1940년 1월 16일

레온 트로츠키

 

[20. A Letter to William Warde] 윌리엄 와드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동지는 우리 운동의 방법론 문제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비교적 몇 안되는 동지 가운데 한 명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내 논쟁에 동지가 개입하는 것이 아주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원들 특히 청년 당원들이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서 아주 치열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중이라고 여러 동지들의 편지가 밝히고 있습니다. 이 관심을 올바르게 유도할 수 있는 동지들이 당내에 변증법적 유물론 사상을 증진시키는 목적으로 순수하게 이론적인 그룹을 형성할 때가 되었다고 동지는 생각지 않습니까? 라이트 동지, 걸런드 동지와 함께 동지는 이 주제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있습니다. 동지들이 전국위원회 선전부의 지도를 받아 이 그룹의 초동 핵심을 형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나의 제안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내는 막연한 성격의 제안입니다. 책임있는 당 기구에게 이 제안을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1940년 1월 16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21. A Letter to Joseph Hansen] 조지프 핸슨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섁트먼의 편지에 대한 나의 글이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이틀동안만 다듬으면 됩니다. 그리고 동지가 인용한 부분을 활용하려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더 중요한 문제를 말하고 싶습니다. 소수파 지도자들 중 일부는 조직을 분리하는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을 박해받는 소수파로 위장하려고 합니다. 이들의 심리상태를 아주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계획입니다. 대체로 다음과 같이 그들에게 답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수파가 자행할 앞으로의 탄압을 벌써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미래에 누가 소수파가 되든 소수파에 대한 권리를 서로 보장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러한 보장은 4개 조항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1) 분파활동의 자유 (2) 공동행동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한 분파활동의 무제한적 자유 (3) 공식 출판물의 내용은 새로운 당대회에 의해서 결정된다 (4) 소수파는 원한다면 내부 토론집을 발간할 수 있으며 다수파와 함께 하는 공동 토론집도 발간할 수 있다."

기나긴 토론과 당대회를 끝낸 후 즉시 당내 토론집을 계속 발간하는 일은 규칙이 아니라 일종의 예외 조치이며 한탄할만한 예외 조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관료가 전혀 아닙니다. 부동의 규칙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조직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변증법론자입니다. 당대회의 결정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중요한 소수파가 존재한다면 조직을 분리하는 것보다 당대회 후에도 토론을 허용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새로 임명되는 전국위원회의 감독 아래 당원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을 위해 심포지엄 특별자료집을 발간할 것을 소수파에게 제안하는 선까지 양보할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아직도 폭발하지 않은 소수파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이들이 조직을 분리할 명분을 제공하지 않기 위해 이 방향으로 가능한 선에서 많은 양보를 해야 합니다.

쌍방의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토론을 연장할 경우 지금 상황에서는 당원들의 교육에 도움이 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수파는 문서의 형식으로 이 제안들을 공식적으로 전국위원회에 제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제안들에 대한 소수파의 반응이 어떻든 당에게는 무조건 이익이 될 뿐입니다.  

1940년 1월 18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22. From a Scratch ? To the Danger of Gangrene] 긁힌 상처가 도져 몸이 썩어 들어가다  

현재 진행중인 당내 논쟁은 나름의 내적 논리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 각 분파는 자신의 사회적 토대와 정치적 모습에 걸맞게 상대 분파의 가장 약한 지점들을 공략하려고 애쓰고 있다. 적대 분파 지도자들의 미리 결정된(a priori) 계획이 아니라 바로 이 내적 논리가 논쟁의 흐름을 결정하고 있다. 격화되고 있는 논쟁에 대해 지금 한탄하는 것은 사후 약방문일 뿐 논쟁 결과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조직이 보낸 염탐꾼들이 이 과정에서 행사하는 역할은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당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논쟁의 분위기를 흐트리고 사상 투쟁을 조직 분리로 이끌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이 신사 양반들이 누구인 지를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이 보이고 있는 논쟁에 대한 열정은 지나치며 거짓꾸밈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사상과 주장을 얘깃거리와 비방으로 바꿔치기하고 있다. 이들은 모든 분파의 공동 노력을 통해 정체가 폭로되고 당에서 제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원칙에 입각한 사상투쟁은 끝까지 진행되어 지금까지 제기된 좀더 중요한 문제들이 진지하게 해명되어야 한다. 당의 이론 수준을 높일 수 있도록 논쟁이 활용될 필요가 있다.

현재 탄생한 지 얼마되지 않는 제4인터내셔널 뿐만 아니라 미국 지부의 당원들 중 상당수는 쇠퇴기의 코민테른이나 제2인터내셔널 출신들이다. 이 조직들은 당원들을 잘못 가르친 형편없는 학교들이었다. 많은 수의 당원들이 탄탄한 이론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논쟁을 통해서 드러났다. 뉴욕 지부는 맑스주의 이론과 강령을 가볍게 수정하려는 시도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려는 힘찬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다수가 이 수정주의자들을 지지하였다. 이 경우를 예로 드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미국 지부와 제4인터내셔널 전체가 진지하게 혁명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정직한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한 이 현상은 불행하기는 하지만 교정이 가능하다. 이들은 배우고자 하는 욕망과 의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편이 아니다. 당이 노동조합과 노동자 운동 일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당의 중핵들은 이론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여기서 중핵이라는 것은 "당기구"가 아니라 당원 전체를 말한다. 당원 모두는 노동자군대의 장교임을 스스로 인식해야 한다. "

언제부터 철학의 전문가가 되었습니까?" 소수파 당원들은 다수파 지도자들에게 빈정거리듯이 이렇게 묻는다. 그러나 이 빈정거림은 대상을 완전히 잘못 찾았다. 무의식적 역사과정 즉 노동계급이 공산주의 사회의 기반을 통해 사회를 재건하려는 본능적이며 원초적인 운동을 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과학적 사회주의이다. 노동자들의 심리 속에 존재하는 이러한 유기적인 경향들은 위기와 전쟁의 시대인 지금 가장 빠르게 살아나고 있다. 진행되고 있는 논쟁은 당내 쁘띠부르조아 경향과 노동계급 경향 사이의 충돌이라는 사실을 의문의 여지없이 드러내었다. 당 강령을 "구체적인" 문제라는 작은 동전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에서 쁘띠부르조아 경향은 자신의 혼란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반대로 노동계급 경향은 모든 부분적인 문제들을 통일된 이론의 수준으로 연관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의식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적용시키려는 다수파 동지들 개개인의 노력 정도가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동지들이 대체로 노동계급적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바로 이 이유로 인해 "혁명의 대수(algebra of the revolution)"인 변증법을 체득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알기로 소수파 동지들은 "변증법"이라는 말만 나와도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이 가치없는 방법은 아무 짝에도 소용이 되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경험에 의하면 역사과정의 변증법은 자기를 냉소하는 자들을 잔인하게 벌주었다.

"레온 트로츠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이란 제목으로 섁트먼 동지가 작성한 논문은 걱정스러운 증상을 드러내고 있다. 섁트먼 동지는 논쟁을 통해 뭔가를 배우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의 오류들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으며 이를 통해 당의 불충분한 이론적 수준 뿐만 아니라 쁘띠부르조아 경향의 특이한 편견들을 이용하고 있다.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이러저러한 중심축으로 묶어내는 이 동지의 능력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이 능력 때문에 섁트먼 동지는 재능있는 문필가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능력 하나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경향을 자기 것으로 삼느냐가 진정 중요한 문제이다. 이 동지는 문학과 언론에 정치가 반영되는 현상에 몰두해 있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실제 과정, 대중의 생활, 노동계급 내 각 부위들 간의 상호관계 등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나는 이 동지의 정말 뛰어난 논문들을 몇편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 노동계급 또는 그 전위의 생활을 파헤친 그의 평론은 단 한편도 보지 못했다.

그의 한계는 제한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하고싶은 말이 있다. 섁트먼의 개인적인 결함뿐만 아니라 역사적 조건들의 특수한 결합으로 인해 노동운동 외부에서 성장한 혁명세대 전체의 운명이 이 현상 속에 체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소중한 분자들이 혁명에 대한 헌신성에도 불구하고 퇴보할 위험성에 대해 나는 과거 연설과 글을 통해 밝힌 바 있다. 한때 존재했던 사춘기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은 이제 결함으로 자리잡았다. 결함은 질병을 유발한다. 그리고 질병은 그대로 내버려두면 치명적인 정도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당의 발전에 의식적으로 새로운 장을 열 필요가 있다. 제4인터내셔널의 선전가들과 문필가들은 자신의 의식에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한다. 쁘띠부르조아 경향에 등을 돌리고 노동자들에게 향할 수 있도록 전환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현재 당내 위기의 원인을 노동계급 부위의 보수화로 보거나 위기의 해결책을 쁘띠부르조아 동맹의 승리를 통해 찾아보려는 시도만큼 당에게 위험한 오류는 없을 것이다. 사실 현재 위기의 핵심은 쁘띠부르조아 부위의 보수화에 있다. 이들은 순전히 선전 학교만을 졸업하였으며 계급투쟁의 길로 나아가는 경로를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위기는 이러한 분자들이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최후의 몸부림을 치는 과정에서 나왔다. 소수파 동지 모두는 확고한 욕구만 있다면 혁명운동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분파로서 이들의 생명은 그 운명을 다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투쟁에서 섁트먼은 자기 번지 수를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있다. 이런 경우에 늘 그렇듯이 그의 강점들은 멀리 후퇴한 채 그의 약점들만이 특별히 완성된 표현을 누리고 있다. 말하자면 그의 "공개서한"은 그의 약점들을 그 정수만 모아놓은 것이다.

섁트먼은 한가지 조그마한 것 즉 자신의 계급적 입장을 빠뜨리고 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는 유별나게 좌충우돌하고 있다. 그는 아무 연관도 없이 역사적 일화들을 짬뽕하는 것으로 계급적 분석을 대체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유일한 목적은 자신의 어제와 오늘의 입장이 다르다는 사실을 은폐하여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는 데에 있다. 맑스주의 역사, 볼셰비키당사, 러시아 좌익반대파의 역사 등에 대해서도 그는 같은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오류와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그가 기대고 있는 모든 역사적 비유들은 차라리 그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오류를 범하는 것보다 오류를 교정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섁트먼의 정신적 좌충우돌을 하나하나 추적함에 있어서 나는 독자들의 인내력을 요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단순히 오류들과 모순들을 폭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노동계급의 입장을 쁘띠부르조아의 입장과 대비시키고 맑스주의 입장을 절충주의 입장과 대비시킬 것을 약속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 모두가 논쟁으로부터 뭔가를 배우게 될 것이다.  

 

"과거의 예들"

섁트먼은 화가 나서 이렇게 묻는다: "타협할 줄 모르는 혁명가였던 우리가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쁘띠부르조아 경향으로 탈바꿈할 수 있단 말인가?"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이 경향이 작년(!) 또는 제작년에 소수파 지도자들을 통해 어떻게 드러났는가?"(1940년 1월 [당내 토론집] 제2권 제7호 11쪽) 과거에는 왜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영향에 우리가 굴복하지 않았는가? 스페인 혁명 기간에 왜 우리는 기타 등등. 이것이 섁트먼이 꺼낸 마지막 비장한 주장이다. 이 주장에 대해 그는 예외적인 중요성을 두면서 그 주제를 목청을 바꾸어 가면서 계속 반복하고 있다. 바로 이 주장을 이용하여 내가 그를 반박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에게는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다.

트로츠키가 10번 가운데 9번 아니 어쩌면 100번 가운데 99번 옳다고 소수파 문서 [전쟁과 관료적 보수화]는 인정한다. 대단히 관대하면서도 제한적인 이러한 양보의 의도를 나는 너무 잘 이해하고 있다. 실제로 내가 범한 오류의 정도는 훨씬 더 크다. 그런데 이 문서가 작성된 지 2주 내지 3주가 지난 후 섁트먼은 이렇게 주장했다:

(ㄱ) 지난 10년 동안 섁트먼 자신은 트로츠키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트로츠키는 자신에게 제공된 정보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ㄴ) 트로츠키는 노동계급 경향을 쁘띠부르조아 경향과 그리고 볼셰비키 경향을 멘셰비키 경향과 구별할 능력이 없다.

(ㄷ) 트로츠키는 대중에 의한 혁명 대신 "관료적 혁명"이라는 황당한 개념을 주창하고 있다.

(ㄹ) 트로츠키는 폴란드, 핀란드 등과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올바른 해답을 제시할 능력이 없다.

(ㅁ)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에 투항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ㅂ) 트로츠키는 민주집중제의 의미를 이해할 능력이 없다, 기타 등등 한이 없다.

한마디로 하면 특히 섁트먼 자신이 관련되어 있는 사안들에서 내가 100번 중 99번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그는 지난 2주 내지 3주 동안 새로이 발견했다. 그의 이러한 최근 주장도 과장되어 있다. 다만 지난 번 주장과 방향이 정반대일 뿐이다. 어쨌든 내가 그의 쁘띠부르조아 편향을 발견한 것보다 훨씬 더 갑자기 그는 내가 대중에 의한 혁명을 "관료적 혁명"으로 바꿔치기하는 경향을 발견했다.

섁트먼 동지는 지난 해 동안 아니 심지어 지난 2년 내지 3년 동안 당내에 "쁘띠부르조아 경향"이 존재해 왔다는 증거를 제시할 것을 나에게 요청했다. 그가 더 먼 과거를 들추지 않기를 원하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 그럴 경우 자기의 주장이 공격을 받을 근거는 그만큼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대로 지난 3년에 한정하여 증거를 제시해 보겠다. 지금부터 관심을 집중해 주기 바란다. 나에게 무지막지하게 공격을 가하는 인사들의 웅변적인 질문에 대해서 나는 몇 가지 문서들을 정확히 인용하면서 담담히 답하겠다.  

 

1.

1937년 5월 25일 나는 미국 사회당 내의 볼셰비키-레닌주의 분파의 정책에 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뉴욕에 보냈다: " 최근의 두 문서를 인용하겠다:(ㄱ) 당대회에 대한 `맥스(Max)'의 개인적 편지 (ㄴ) 그가 작성한 `혁명적 사회당 창당을 위해'라는 제목의 논문. 이 논문의 제목만 보아도 그가 잘못된 전망을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사회당의 지난 당대회를 포함한 그간의 정황을 보면 사회당은 `혁명적' 정당이 아니라 영국의 독립노동당과 비슷한 어떠한 전망도 결여한 한심스러운 중도주의 정당으로 이행하고 있다.

미국 사회당이 제2 내지 제3인터내셔널 계열의 어떤 정당보다도 혁명적 맑스주의 입장에 `더 가깝다'는 확신은 완전히 말도 안되는 찬사이다. 미국 사회당은 성격이 유사한 유럽의 정당들인 스페인의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 영국의 독립노동당, 독일의 사회주의노동자당 등보다 더 후진적인 정당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노먼 타머스를 중심으로 한 사회당 지도부의 부정적인 강점들을 폭로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당의 전쟁 관련 결의문이 `이 당이 과거 채택한 다른 어떤 결의문에 비해서 우수하다'고 주장해서는 절대 안된다. 이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전쟁 관련 결의안이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순전히 문구에만 집착한 평가일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결의문은 역사적 사건, 정치상황, 결의문 자체의 시급한 필요성 등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위에서 언급한 두 문서에서 섁트먼은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 좌파에 대해 지나치게 근접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이것은 혁명가에게는 대단히 위험한 증상이다! 유럽의 전쟁에 대해 노먼 타머스가 보인 "급진적인" 입장을 그가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기회주의자들은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더 급진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 법칙에 유념하면 섁트먼과 그의 동맹자들이 우리를 "스탈린주의에 투항"한다고 비난하는 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섁트먼처럼 뉴욕 브랑스구에 들어앉아 있으면 미국의 쁘띠부르조아들보다 크렘린궁의 스탈린주의자들에게 더 비타협적으로 대항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보신에 훨씬 도움이 되며 더 쉽다. 안타까운 일이다.  

 

2.

섁트먼의 말에 의하면 나는 논쟁에 참여하고 있는 분파들의 계급구성 문제를 억지로 끌어들였다. 이 점에 대해서도 최근의 경우를 검토해 보자.

1937년 10월 3일 나는 뉴욕에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당생활의 `평상' 시기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 당원들이 상황이 급격히 변화하여 일반적 정식이나 유창한 펜을 가지고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뛰어난 자질들을 발휘한다. 이 경우 노동자들의 삶과 이들의 실천적인 능력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재능있는 노동자 당원은 자기확신과 정치적 능력을 발휘한다. 나는 이 말을 수백번이나 반복한 바 있다.

조직 발전의 첫단계에서 지식인들이 당을 주도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 상황은 재능이 있는 노동자 당원들을 교육시키는 데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 다음 당대회에서 당 지부와 중앙의 각급 위원회에 가능하면 많은 수의 노동자 당원들을 포함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주요 당기구에서의 활동은 노동자 당원에게 높은 수준의 정치학교가 된다.

그런데 어려움이 있다. 모든 조직이 고참 위원들을 보유하고 있어서 부차적이며 분파적이며 개인적인 고려사항들이 위원 후보자 선정에 너무 커다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종류의 문제에 대해서 섁트먼 동지가 관심이나 흥미를 보이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3.

섁트먼 동지에 의하면 나는 에이번 동지의 분파가 쁘띠부르조아 출신 성분들을 유난히 많이 보유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에 의하면 이것은 인위적인 문제제기일 뿐만 아니라 어떤 사실적인 근거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1937년 10월 10일 섁트먼이 캐넌과 노선을 같이하였을 때 에이번은 분파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자기 입으로 공식적으로 말한 바 있다. 이때 나는 캐넌 동지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진짜 공장노동자는 당원 중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노동계급적 분자들은 매우 필요한 촉매 역할을 하며 우리가 이러한 분자들의 높은 수준에 대해 자랑스러워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당은 비노동계급적 분자들에 의해서 압도되어 혁명적 성격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위적인 방식으로 지식인의 당내 유입을 막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조직활동을 공장, 파업, 노동조합 등에 실천적으로 맞추는 것이 문제해결의 올바른 방식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우리는 모든 공장에 같은 정도의 역량을 투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부 조직들이 지역에 위치한 두 세 공장을 선정하여 모든 역량을 이곳에 집중할 수는 있습니다. 한 공장에 두세 명의 노동자들을 획득한다면 이곳에 우리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동자가 아닌 당원 다섯명으로 구성된 지원팀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자가 아닌 당원들을 노동조합에 투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노동자들을 동지로 획득할 경우 노동조합 내 선동, 선전활동과 관련하여 지원팀을 구성하여 일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반드시 명심해야 할 규율이 있습니다. 노동자들에게 지시를 내려서는 안되며 이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이들에게 건설적인 제안들을 제시하며 객관적 사실, 사상, 공장신문, 특별 유인물 등을 통해 이들을 무장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협력은 노동자 동지들뿐만 아니라 확실한 재교육이 필요한 비노동자 동지들 모두에게 엄청난 교육적 효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지는 유태인 비노동자 당원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당이 이들을 폐쇄된 분위기에서 끌어내어 공장노동자들과 일상적인 활동을 통해 연결되도록 한다면 이들은 대단히 중요한 촉매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당내에 좀더 건강한 분위기를 조성할 것이 확실합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즉시 일반적인 규칙 하나를 제정할 수 있습니다. 즉 3개월에서 6개월 사이에 노동자를 당원으로 획득하지 못하는 당원은 별로 훌륭한 당원이 아니라는 규칙이 이것입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정책을 진지하게 수립하고 이 정책의 실제적인 결과들을 매주 확인한다면 우리는 커다란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지식인과 사무직 노동자들이 소수의 공장노동자들을 짓눌러 침묵시켜 당을 아주 지적인 토론클럽이기는 하나 노동자들이 있을 곳이 전혀 못되는 그런 조직으로 변모시킬 위험을 피할 수 있습니다.

청년 조직을 운영하고 확대시키는 일도 마찬가지의 규칙들이 구체적으로 확립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청년들을 혁명투사가 아니라 아마추어 혁명가로 만들어 낼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이 편지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확해진다. 즉 독소불가침조약 이 체결되고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 점령한 바로 다음날 당내에 쁘띠부르조아적 편향이 존재할 위험이 있다고 내가 말한 적이 전혀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 사건이 있기 2년도 더 거슬러 올라가서 지속적으로 나는 이런 취지의 발언들을 해왔다. 그리고 당시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에이번 분파를 주로 염두에 두면서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당의 분위기를 일소하기 위해 뉴욕 지부에 소속된 유태인 출신의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이 습관적인 보수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진정한 노동운동 속으로 해소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현재 진행중인 논쟁보다 2년도 더 전에 쓰여진 위 편지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소수파 지도자들이 쓴 모든 글들보다 증거의 가치가 더 크다. 소수파 지도자들은 내가 "캐넌 파벌"을 옹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동기에 대해서 온갖 내용의 글들을 쓴 바가 있다.  

 

4.

당내 쁘띠부르조아 분자들 특히 학구적이며 문필활동에 종사하는 동지들에게 섁트먼 동지가 약하게 나온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전혀 비밀이 아니었다. 듀이 위원회(Dewey Commission)가 열리던 당시 1937년 10월 14일 나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캐넌, 섁트먼, 와드 동지들에게 보냈다:

" 노동자 그룹들이 이 위원회에 대폭 들어와서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나는 끈질기게 주장했습니다. 와드, 섁트먼 그 밖의 동지들은 나의 견해에 동의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들과 함께 우리는 이 계획을 현실로 옮길 수 있는 실제 가능성들을 타진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계속 문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었으며 우연히 섁트먼 동지가 나의 견해에 반대한다는 소식만 들었습니다. 왜 반대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섁트먼은 이유를 결코 털어놓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외교적인 언사를 사용해서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말로는 나의 견해에 동의한다고 하면서 일시적인 자유주의 동맹자들의 대단히 민감한 정치적 감성을 자극하는 것을 그가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명확하게 인식되었다. 이런 일에 관한 한 섁트먼은 자신의 예외적인 "섬세함"을 입증하고 있다.  

 

5.

1938년 4월 15일 나는 뉴욕 지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이스트먼의 편지가 실려서 약간 놀랐습니다. 편지가 실린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표지에 그의 편지가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고 [하퍼즈 잡지](Harper's)에 실린 그의 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우리의 공식 이론지인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간행 취지를 손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보고 우리가 원칙보다 친분을 더 앞세운다고 해석할 것입니다."  

 

6.

1938년 6월 1일 나는 섁트먼 동지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동지가 왜 유진 라이언즈에게 관용을 베풀며 심지어는 친근함을 베푸는지 이곳에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는 동지가 주최하는 만찬과 백위군(White Guards) 주최 만찬에서 똑같이 연설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소위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좀더 독립적이고 단호한 정책을 펴기를 호소했다. 이들은 사회주의 혁명에 반대하면서도 노동계급과 "우호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 이렇게 할 경우 이들은 부르조아 여론으로부터 자신들의 가치를 2배나 인정받기 때문이다.  

 

7.

지금의 논쟁이 시작되기 거의 1년 전인 1938년 10월 6일 나는 당의 신문이 노동자들에게 기조를 맞추어야 할 필요성을 이렇게 글로 표현한 바 있다:

"이 관점에서 [사회주의자의 호소]가 나타내는 태도는 아주 중요하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아주 좋은 맑스주의적 신문이지만 정치행동을 돕는 진정한 도구는 아니다. 나는 이 신문의 편집부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하고 싶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글은 확실히 불평조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말한 바 있듯이 섁트먼 동지는 당원들의 계급적 구성이나 신문의 독자들보다 이미 오래 전에 끝난 투쟁의 개별적인 문필적 일화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8.

변증법적 유물론과 관련하여 이미 언급한 바 있는 1939년 1월 20일자 편지에서 나는 다시 섁트먼 동지가 쁘띠부르조아 문필계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사회주의자의 호소]는 스탈린주의 정당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정당은 현재 모순덩어리 입니다. 이 정당은 반드시 둘로 쪼개질 것이며 이 결과 탈당한 당원들은 우리쪽으로 획득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정당에 우리의 정치적 관심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매일 그리고 매시간 이 정당이 보이고 있는 모순들을 추적해야 합니다. 편집진의 누군가가 책임을 맡아서 대부분의 시간을 스탈린주의 정당의 사상과 행동을 추적해야 합니다. 이 정당 내부에 논쟁을 촉발시킬 수도 있고 가능하면 동요하는 당원들의 편지들을 우리 신문에 공개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트먼이나 라이언즈와 같은 양반들의 글을 싣는 것보다 1천 배나 더 중요합니다. 이스트먼의 최근 글은 의미도 없을 뿐더러 오만합니다. 이 글을 동지가 왜 당 신문에 실었는지 나는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동지가 개인적으로 이 인사들을 초대하여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한정된 지면을 더럽히는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까무러칠 지경입니다. 이러한 인사들과의 토론은 일부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에게는 흥미거리인지 몰라도 혁명가들에게는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사회주의자의 호소]를 재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확신합니다. 이스트먼, 라이언즈와 같은 인사들에게는 좀더 거리를 두고 대신 노동자들과 스탈린주의 정당에 대해서는 좀더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최근의 사태들은 섁트먼이 이들 인사들과 거리를 둔 것이 아니라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9.

1939년 5월 27일 나는 당원들의 계급적 구성과 연관시켜 다시 [사회주의자의 호소]의 성격에 대해서 이렇게 편지를 썼다:

"회의록을 보니 동지가 [사회주의자의 호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신문기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 신문은 아주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를 위한 신문이지 노동자의 신문은 아닙니다.

이 신문은 여러 편집기자들이 분담을 하면서 글을 싣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주 훌륭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면서 노동자들을 신문에 참여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편집기자들 각자는 노동자들을 위해 발언을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노동자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신문은 문필의 관점에서는 뛰어나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신문쟁이들에게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어떻게 생활하며 투쟁하며 경찰과 충돌하며 위스키를 마시는지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당의 혁명적 도구로서 이 신문은 아주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재능있는 편집진의 공동노력을 통해서 신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스스로 발언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이 신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이고도 용기 있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물론 이것은 신문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 기조의 문제입니다. 쁘띠부르조아 청년 당원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들은 아주 훌륭하며 당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자기들 사이에서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노동자 현장 속으로 침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직 확실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직도 나의 일관된 견해입니다. 다시 한번 제안합니다: 쁘띠부르조아 출신 당원이 일정기간 예를 들어 3개월에서 6개월 사이에 노동자 당원을 획득하지 못하면 후보당원으로 강등되고 다시 3개월이 지나도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 제명되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조치가 부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은 전체적으로 아주 필요한 건강한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주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노동자들과 연계를 이룰 수 없는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을 제명시키자는 엄혹한 조치를 제안했을 때 나는 캐넌 분파를 "옹호"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오직 당을 퇴보의 수렁으로부터 구해내고자 했을 뿐이었다.  

 

10.

당원들의 회의적인 목소리에 접한 나는 여기에 대해서 논평하면서 1939년 6월 16일 캐넌 동지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전쟁 전야의 상황, 민족주의의 발호 등은 우리 운동의 발전에 자연스럽게 방해물로 작용하고 있으며 우리 대오 내의 사기저하에 깊은 원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당의 구성이 쁘띠부르조아적인만큼 당은 부르조아 공식 여론의 변화에 더 많이 의존합니다. 이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용기있고 적극적으로 노동자 대중들에게 향할 필요성을 이 주장으로 보충하고자 합니다. 동지의 글이 드러내고 있는 비관적인 논리 전개는 물론 부르조아 공식 여론의 애국적 민족주의적 압력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파시즘이 프랑스에서, 영국에서 승리한다면 ' 과 같은 생각말입니다. 파시즘의 승리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숨이 넘어가는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의 쁘띠부르조아 분파가 부르조아 여론에 기대고 있다는 문제는 현재의 논쟁이 있기 여러 달 전에 이미 제기되었었다. 소수파 동지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내가 인위적으로 끌어들인 문제가 전혀 아니다.

* * *

소수파 지도자들이 과거에 보인 쁘띠부르조아적 경향의 예들을 제시하라고 섁트먼 동지는 요구했다. 나는 이 요구에 답하는 과정에서 소수파 지도자들 가운데 섁트먼 동지를 특별히 지목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과거의 예들은 아직도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섁트먼과 내가 서로 주고 받은 편지들 중 "과거의 예"로서 더욱 흥미있는 것이 있다. 이것들은 다른 문제와 관련하여 곧 공개하겠다.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기억이 희미하거나 오류가 발생하는 부분들은 다수파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다른 동지들에게도 불리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섁트먼 동지는 아마 충분히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섁트먼 동지의 이름이 이들의 편지에서 계속 반복되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다른 동지들이 어쩌다 한두번 오류를 범한 반면에 섁트먼 동지의 오류들은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섁트먼 동지는 내가 당내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의 존재를 "갑작스럽게" 그리고 "예상외로" 들추어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실과 완전히 다르다. "쁘띠부르조아 소수파"에 대한 나의 글은 지난 3년 아니 사실은 지난 10년 동안 뉴욕 지부와 교환한 편지 내용을 요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점을 증명했으며 지금도 해당 문서들을 손에 들고 증명할 수 있다. 그런데도 섁트먼 동지는 "과거의 예들"을 요구하면서 뭔가를 과시하려고 하고 있다. 나는 그에게 "과거의 예들"을 제시했다. 이것들은 섁트먼의 주장을 확실하게 논박하고 있다.  

 

맑스주의에 대항하는 철학 동맹

핀란드, 라트비아, 인도, 아프가니스탄, 발루키스탄 등과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내가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대신 변증법적 유물론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는 것이 소수파 동지들의 주장이다. 이 동지들은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는 모양이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 주장은 소수파 동지들 일부의 수준을 특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사상에 대한 기본적 의리와 이론에 대한 이들의 태도를 특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1937년 1월 멕시코에 도착한 직후 내가 기차에서 섁트먼, 와드 동지들과 함께 처음으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내용은 무엇보다도 지속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선전해야할 필요성에 맞추어졌다. 이 사실을 말하는 것이 지금의 주제와 그리 어긋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운동의 미국지부가 사회당과 분립한 후 나는 가장 강력하게 가능하면 빨리 이론지를 발간할 것을 주장했었다. 당원들 특히 새로운 당원들에게 변증법적 유물론을 교육시킬 필요를 유념했기 때문이었다. 부르조아계급이 노동자들에게 체계적으로 속류 경험주의를 주입시키고 있는 미국의 경우 다른 어떤 곳보다 먼저 우리 운동을 적절한 이론적 수준으로 올려놓는 일을 시급히 추진해야 한다고 나는 글을 통해 주장했다. 섁트먼이 버넘 동지와 공동으로 작성한 글 "후퇴하고 있는 지식인"에 대해서 나는 1939년 1월 20일 섁트먼 동지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변증법에 대한 글의 내용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편집자로서 동지가 개인적으로 맑스주의 이론에 가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공격이었습니다. 좋습니다!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토론해 보기로 합시다."

이로써 이미 1년 전에 나는 섁트먼의 절충주의 경향에 대항하여 공개적으로 투쟁하겠다는 의도를 그에게 공개적으로 알렸다. 당시에는 소수파의 등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다. 어쨌든 맑스주의에 대항하는 철학 동맹이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에 대항하는 정치 동맹의 기초가 되리라고는 나는 꿈도 꾸지 못했다.

이제 표면으로 떠오른 당내의 견해 차이는 당원들의 계급적 구성과 중핵의 이론적 교육에 대한 나의 염려를 확인시켜 주었다. 도대체 기존의 나의 생각을 바꾸거나 "인위적으로" 이론 문제를 논쟁에 끌어들일 필요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다만 이 점은 덧붙이고 싶다. 제4인터내셔널의 한 지부 내에서(!) 맑스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투쟁하겠다는 생각을 정당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 --- 이것은 약간 창피스러운 감을 나에게 주고 있다.

자신의 "공개 서한"에서 섁트먼은 빈슨 던 동지가 지식인의 후퇴에 대한 자기 글에 대해 만족감을 표시했다고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나도 이 글에 대해 칭찬한 바 있다: "많은 부분들은 아주 훌륭하다." 그러나 러시아 속담이 말하듯이 타르 한 숫가락이 꿀 한통을 망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이 한 숫가락의 타르인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 할애한 부분은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너무도 황당한 개념들을 선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 개념들은 이제 명확해지고 있듯이 정치 동맹의 기반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이 글을 꼬투리로 삼고 있다는 섁트먼의 끈질긴 주장이 있으므로 다시 한번 문제되는 글의 부분 중 핵심적인 구절을 인용하겠다:

" 변증법적 유물론의 좀더 추상적인 교리에 대한 동의나 이견이 반드시 오늘이나 내일의 구체적인 정치적 쟁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 어느 누구도 아직 증명한 적이 없다. 그리고 정당, 강령, 투쟁은 이러한 구체적인 쟁점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새로운 인터내셔널], 1939년 1월호, 제7쪽) 이 인용문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혁명가답지 못한 " 정당, 강령, 투쟁은 구체적인 쟁점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라는 표현이다. 어떤 정당이며 어떤 강령이며 어떤 투쟁이란 말인가? 모든 정당과 강령이 한꺼번에 뭉뚱거려져 있다. 노동계급의 정당은 다른 모든 정당들과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구체적인 쟁점들"에 기초를 전혀 두고 있지 않다. 근본에 있어서 노동계급 정당은 부르조아 흥정꾼들이나 쁘띠부르조아 누더기꾼들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사회혁명을 준비하여 새로운 물질적 도덕적 기초 위에 인류를 소생시키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부르조아 여론의 압력과 경찰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노동자 혁명가 특히 지도자는 명확하고 넓으며 완벽하게 심사숙고한 세계관을 구비해야 한다. 통일된 맑스주의적 사상의 기초 위에서만 "구체적인" 문제들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섁트먼의 배신이 시작된다. 작년에 나는 이 배신의 징조가 단순한 오류이기를 희망했었다. 그러나 이제 명확히 드러났듯이 그의 논리는 철저한 이론적 배신 그 자체이다. 섁트먼은 버넘의 생각을 그대로 추종한다. 그래서 변증법적 유물론이 젊은 혁명정당의 정치행위에 영향을 미친다고 "어느 누구도 아직 증명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맑스주의가 노동계급의 투쟁에 소용이 있다고 "어느 누구도 아직 증명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결과 노동계급의 정당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배우고 옹호할 동기가 조금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맑스주의와 과학적 방법론 일반을 포기하는 것이며 경험주의에 불쌍하게 굴복하는 것이다. 이 논리는 섁트먼과 버넘 그리고 버넘을 통해서 부르조아 "과학" 신봉자들과 섁트먼이 철학 동맹을 맺었음을 의미한다. 내가 작년 1월 20일자 편지에서 지적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이었다. 그

런데 3월 5일 섁트먼은 이렇게 대답했다: "동지가 언급한 문제의 글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만약 글을 다시 쓴다면 동지가 주장한 내용에 비추어 여기(!) 저기(!)에서 표현을 달리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지의 비판의 핵심에 대해서는 견해를 같이할 수 없습니다."

이 답장은 심각한 상황에서 섁트먼이 늘상 반응하는 방식과 똑같다. 즉 그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에서 후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는 인상만은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분파투쟁의 열에 들떠 그는 "과거에 했던 것을 내일 다시 또다시 하겠다"고 약속한다.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부르조아 "과학"에 투항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맑스주의를 더 이상 고수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섁트먼은 드디어 이러저러한 정치 동맹의 효용을 나에게 설명한다.(어떠한 근거로 이런 설명을 하는지는 조금 후에 보도록 하자.) 그러나 나는 지금 이론적 배신의 치명적인 해를 말하고 있다. 동맹은 그 내용과 상황에 따라 정당화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론적 배신은 어떠한 동맹에 의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섁트먼은 자신의 글이 순전히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나는 그 글 전체가 아니라 맑스주의를 기각하고 있는 그 글의 일부 내용만을 문제삼고 있다. 물리학 교과서가 물질운동의 첫 번째 원인이 하느님이라는 내용의 문장을 한 두 개만 싣고 있을지라도 나는 이 교과서의 저자가 반(反) 계몽주의자라고 결론을 내릴 권리가 있다.

섁트먼은 비판에 대해서 답을 하는 대신에 관계없는 일들로 관심을 돌림으로서 비판의 논지를 흐리고 있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철학 영역에서 버넘과 동맹을 맺고 있다'는 트로츠키 동지의 주장을 인정한다고 치자. 그러면 이 동맹이 레닌이 보그다노프와 맺은 동맹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왜 후자의 동맹은 원칙에 부합하며 나와 버넘의 동맹은 무원칙하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정말 듣고 싶다." 좋다. 나는 곧 두 동맹의 정치적 성격이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다른 것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맑스주의 방법론이다. 두 동맹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섁트먼 동지는 묻고 있는가? 레닌은 이론적으로 정당 일반과 볼셰비키 정당을 혼동하지 않았다. 그는 기질적으로 그러한 혐오스러운 발언을 할 능력이 없다. 그 뿐만 아니라 진지한 볼셰비키는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이제 이해가 됩니까, 섁트먼 동지? 섁트먼은 명확한 대답에 "관심이 있다"고 빈정거리듯이 약속했다. 내가 믿건데 대답은 주어졌다. 그러나 나는 그가 "관심"을 갖기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추상과 구체 : 경제와 정치

섁트먼의 한탄스러운 글 가운데 가장 한탄스러운 부분은 "전쟁의 성격과 국가"라는 제목의 장(章 )이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 묻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입장은 무엇인가? 간단하다. 전쟁에 가담하는 국가의 계급적 성격 특히 이 국가에 지배적인 소유형태를 추상적으로 규정짓는 것을 통해 특정 전쟁에 대한 정책을 직접 연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책은 국제사회주의혁명의 이해와 관련시켜 전쟁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나와야만 한다." (앞의 글 제 13쪽. 강조는 인용자) 얼마나 뒤죽박죽인가! 궤변이 얼마나 얼키고 설켜 있는가! 우리의 정책을 국가의 성격으로부터 직접 연역할 수 없다면 왜 비직접적으로는 연역할 수 없는 것일까? 전쟁의 성격에 대한 분석은 구체적인데 왜 국가의 성격에 대한 분석은 추상적인가? 공식적으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욱 올바를 것이다: 소련에 대한 우리의 정책은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추상적인 규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어진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국가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통해서만 연역될 수 있다. 섁트먼의 모든 논지에 깔린 궤변의 기초는 아주 단순하다: 경제적 하부구조가 상부구조의 사건들을 즉시 규정하지 않으므로 그리고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실천적인 과업을 해결하는 데 불충분하므로 따라서 경제와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검토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섁트먼 자신의 신문쟁이식 속어로 말하면 "살아있는 사건들의 현실"만 검토하면 된다."(앞의 글 제 14쪽)

버넘과 자신의 철학 동맹을 정당화하기 위해 섁트먼은 이런 주장을 유포한 바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우리의 정치를 즉시 규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정치적 과업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제 이 주장은 맑스주의 사회학과 관련되어 단어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소유형태가 국가의 정책을 즉시 규정하지 않으므로 "구체적인 정치적 과업들"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맑스주의 사회학을 일반적으로 폐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주장을 맑스주의의 다른 분야와 관련지어 계속하지 않는가? 노동가치 법칙이 "직접적으로", "즉시" 가격을 결정하지 않으므로, 자연도태 법칙이 새끼돼지의 출생을 "직접적으로", "즉시" 결정하지 않으므로, 중력의 법칙이 술취한 경관을 "직접적으로", "즉시"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게 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맑스, 다아윈, 뉴튼 등 모든 "추상적 개념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저서들이 서가에서 먼지나 맞도록 내버려두자. 그렇다면 이 주장은 모든 과학을 엄숙하게 매장하자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직접적이고 " "즉시 연관되는" 원인에서부터 좀더 멀고 깊은 원인들을 밝혀내고 , 온갖 다양하고 요지경같은 현상들로부터 이 현상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원동력을 밝혀내는 과정이 곧 과학발전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노동가치 법칙은 "즉시"는 아니지만 어쨌든 가격을 결정한다. 뉴딜정책의 파산과 같은 "구체적인" 현상들은 궁극적으로 분석하면 "추상적인" 가치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다. 루즈벨트는 이것을 모르지만 맑스주의자는 이것을 알지 못하면 구체적인 현실을 분석하는 데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곧바로는 아니지만 일련의 직접적인 요인들과 이 요인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소유형태는 정치뿐만 아니라 도덕을 결정한다.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무시하려드는 노동계급 정치인은 결국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다가 계단에서 굴러 코를 부러뜨리는 술 취한 경찰관과 같은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섁트먼은 추상과 구체의 구별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구체적인 사건들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두뇌는 추상적 개념들을 가지고 사고한다. 심지어는 "지금 여기에 있는", "주어진", "구체적인" 개는 추상적 개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개에게 손가락을 향하는 "순간" 이 개는 자신의 꼬리를 내리면서 모습을 변화하기 때문이다. 구체성이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다. 어떤 경우에 구체적인 것은 다른 경우에는 주어진 목적에 맞지 않게 불충분하게 규정되어 추상적이 된다. 주어진 필요에 따라 충분히 "구체적인" 개념을 얻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추상적인 개념들을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으로 연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동화상을 스크린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움직이지 않는 정물사진을 연결시킬 필요가 있는 것과 같다.

구체는 추상의 결합이다.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결합이 아니라 주어진 현상의 운동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그런 결합이다.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대비시켜 섁트먼이 호소하고 있는 "국제사회주의혁명의 이해"는 이 주어진 경우에 모든 추상적 개념들 중에서도 가장 애매모호하다. 결국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어떤 구체적인 방법으로 혁명의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는가? 사회주의혁명의 과업은 노동자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기억하는 것은 그리 빗나간 대답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주의혁명을 얘기하기 전에 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 자본가 국가와 노동자국가들과 같은 "추상적 개념들"을 구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결과적으로 필요하다.

국가소유가 "그 자체로는", "자동적으로", "직접적으로", "즉시" 크렘린궁의 정책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섁트먼은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낭비시키고 있다. 경제적 "하부구조"가 정치, 법, 철학, 예술 등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방식 문제는 맑스주의 서적들에 풍부하게 존재한다. 경제가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시 작곡가의 창조력과 심지어는 판사의 판결을 결정한다는 견해는 모든 나라의 부르조아 교수들이 자신들의 지적 무능력을 감추기 위해 한도 끝도 없이 유포시켜온 맑스주의의 우스꽝스러운 모조품에 불과하다.

소련의 사회적 기초와 크렘린궁의 정책 사이의 상호관계라는 즉시 우리에게 제기되는 문제로 초점을 옮겨보자. 이미 17년 동안 우리는 공개적으로 10월 혁명에 의해서 수립된 사회적 기초와 국가 "상부구조"의 경향 사이에 드러나고 있는 점증하는 모순을 사실로서 확립해왔다. 이 사실을 딴 일에 정신을 팔고 있는 섁트먼에게 상기시키고자 한다. 소련 관료집단이 노동계급과 점점 독립된 세력이 되면서 소련 국내외의 다른 계급들과 집단들에게 점점 의존하고 있는 현상을 우리는 매 단계마다 추적하였다. 이미 확립된 이 사항과 관련하여 섁트먼이 덧붙이고자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비록 경제가 직접적으로 즉시 정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며 최종적으로만 그러할지라도 경제는 정치를 확실히 규정한다. 부르조아 교수들과 그 제자들에 대항하여 맑스주의자들은 바로 이 진리를 확신한다. 소련 관료집단이 노동계급으로부터 더욱더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과정을 우리는 분석하고 폭로해왔다. 동시에 이 "독립성"의 객관적 사회적 한계 즉 외국무역 독점에 의해서 보완되고 있는 국가소유에 한시도 눈을 뗀 적이 없다.

놀라자빠질 일이다! 소련 관료집단에 대해 정치혁명을 수행하자는 구호를 섁트먼은 계속 지지하고 있다. 이 구호의 의미를 그가 진지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10월 혁명에 의해서 수립된 사회적 기초가 "자동적으로" 국가의 정책에 반영된다고 우리가 주장한다면 왜 관료집단에 대한 혁명이 필요한 것일까? 반면에 소련이 더 이상 노동자국가가 아니라면 정치혁명이 아니라 사회혁명이 필요할 것이다. (ㄱ) 노동자국가인 소련의 성격 (ㄴ) 국가의 사회적 기초와 관료집단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적대관계 등에서 도출되는 구호를 섁트먼은 결과적으로 계속 지지한다. 그러나 이 구호를 계속 외치면서 그는 이 구호의 이론적 기초를 공격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정치가 과학적 "추상적 개념들"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하려는 행위가 아닐까?

부르조아 지식인들이 우스꽝스럽게 왜곡시키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 투쟁한다는 구실 아래 섁트먼은 사적 관념론 (historical idealism)에 문을 활짝 열어 재낀다. 소유형태와 국가의 계급적 성격은 정부의 정책을 분석하는 그에게는 관심 밖이다. 그에게 국가 자체는 성별이 없는 동물로 보인다. 닭털로 만든 침대 위에 두 발을 확고히 내딛고 이미 1940년이나 된 지금 이렇게 기세좋게 설명한다: 소련에는 국가소유체제가 존재하고 있지만 동시에 관료집단에 의한 보나파르트적 더러움과 반동적인 정치도 존재하고 있다. 얼마나 새로운 사상인가! 섁트먼은 자신이 갓난 애기방에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섁트먼이 동맹을 맺다 -- 이번에는 레닌과 함께

섁트먼은 소련의 사회 성격에 관한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 그런데 이것을 위장하기 위해 소위 노동조합 논쟁 중 1920년 12월 30일 레닌이 나에게 가한 비판적 언사에 의존한다: "트로츠키 동지는 노동자국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추상일 뿐이다. 소련은 실제로는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국가이다. 노동조합으로 포괄적으로 조직된 노동계급은 자신의 이익을 방어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노동자조직을 활용하여 노동자가 국가에 저항하여 자신의 이익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가 국가를 지키도록 이 조직을 활용해야 한다." 이 인용문을 가리키며 섁트먼은 내가 1920년의 "오류"를 반복했다고 선언하는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러나 성급한 나머지 소련의 사회 성격과 관련된 그의 인용문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12월 30일에 행한 자신의 연설에 대해서 레닌은 1월 19일에 이렇게 썼다: "`소련은 실제로는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국가이다'라고 나는 말한 바 있다. 논쟁 보고서를 읽으면서 당시 내가 틀렸다는 것을 지금 알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노동자국가는 추상적 개념이다. 실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 특징을 구비한 노동자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1)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 인구의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다. (2) 관료적으로 왜곡된 노동자국가이다.'" 이것을 통해 두 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 국가에 대한 정확한 사회학적 규정을 대단히 중시한 나머지 레닌은 논쟁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중에도 자신의 오류를 정정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섁트먼은 소련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대해서 너무도 관심이 없어서 20년이 지난 지금 레닌의 오류나 그가 이 오류를 정정한 내용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기서 레닌이 나에 대해서 얼마나 정확하게 비판을 가했는지는 문제삼지 않겠다. 다만 그가 비판을 잘못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국가의 정의에 대해서 그와 나 사이에는 이견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문제가 아니다. 국가 즉 사회 성격 문제에 대해 위 인용문에서 레닌이 한 말은 며칠 후에 주요한 정정을 가한 그의 말과 관련지을 경우 그 이론적 표현은 절대적으로 올바르다. 그러나 레닌의 규정을 섁트먼이 어떻게 황당하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한 번 보기로 하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20년 전에 레닌이 `노동자국가'를 추상적 개념이라고 말한 것이 가능한 것처럼 `퇴보한 노동자국가' 역시 추상적 개념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앞의 글 제 14쪽) 섁트먼이 레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20년 전에 "노동자국가"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추상적 개념 즉 실재하지 않는 존재라고는 조금도 생각될 수 없었다. 다만 "노동자국가" 규정은 그 자체로는 올바르지만 특정 과업과 관련되어서는 불충분했을 뿐이다. 즉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의 이익을 방어하는 과업의 측면에서만 추상적이며 불충분했다. 그러나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해서 소련을 방어하는 경우에 이 규정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1920년에도 의심의 여지없이 올바랐으며 노동자들이 이 노동자국가를 방어하는 것은 의무이다.

여기에 대해서 섁트먼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노동조합 문제와 관련하여 소련에 어떤 종류의 노동자국가가 존재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처럼 현재의 전쟁과 관련하여 소련 국가기구의 퇴보 정도를 확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정권의 퇴보 정도는 국가소유의 존재라는 추상적인 전거에 의해서 확정될 수 없으며 살아있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현실(!)을 관찰하는 것을 통해서만 확정될 수 있다." 왜 1920년에는 소련의 성격이 노동조합 즉 국가의 특정 내부 문제와 연관되어서 제기되었으며 왜 오늘날 그것이 소련의 방어 즉 국가의 운명 전체와 연관되어 제기되고 있는지를 이 글을 통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전자의 경우 노동자국가는 노동자와 대비되는 개념이었으며 후자의 경우 노동자국가는 제국주의 세력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비가 두 다리로 어기적거리는 것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레닌이 대비시킨 것을 섁트먼은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섁트먼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문제는 딴 곳에 있다. 즉 그는 소련 국가기구의 퇴보 정도에만 관심이 있다. 즉 이 체제를 질적인 측면이 아니라 양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있다. 즉 퇴보하고 있는 것이 노동자국가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를 전혀 문제삼지 않고 있다. 그가 퇴보의 "정도"를 우리보다 더 정확하게 파악한 흔적은 없다. 그러나 파악했다고 치자. 그러면 이렇게 순전히 양적인 평가가 어떻게 노동자국가인 소련을 방어한다는 우리의 노선을 기각시킬 수 있는가?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한 그의 주장은 도저히 앞뒤를 분간할 수 없다. 사실 그는 절충주의자로서의 면모에 충실하다. 그래서 에이번과 버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소련 국가기구의 퇴보 "정도"를 문제로 삼고 있다. 그와 우리 사이의 쟁점은 "살아있는 사건들로 구성된 현실"에 의해서 결정되는 정도의 문제가 전혀 아니다. 그가 애용하는 이 말은 얼마나 정확하고 "과학적이며", "구체적이며", "실험적인" 용어인가! 진짜 쟁점은 이러한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로 변모되었는 가에 있다. 즉 비록 퇴보하기는 했지만 소련이 아직도 노동자국가인지 아니면 새로운 유형의 착취체제로 변모되었는 가에 쟁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근본 쟁점에 대해서 섁트먼은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해답을 제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의 주장은 다른 맥락에서 다른 내용을 가지고 명백히 오류를 범한 레닌의 주장을 말로만 흉내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레닌은 자신의 오류를 정정하며 이렇게 선언한다: "소련은 단순한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관료적으로 기형화된 노동자국가이다." 그런데 섁트먼은 이렇게 선언한다: "소련은 퇴보한 노동자국가일 뿐만 아니라 "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웅변을 늘어놓는 그와 청중들은 모두 입을 헤벌린 채 할말을 잃고 서로를 쳐다보기만 한다.

"퇴보한 노동자국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 강령은 소련의 방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주 적절한 정도의 구체성을 가지고 해답을 내리고 있다. 즉 (1) 1920년에 소비에트 체제의 "관료적 기형화" 특징들로 나타났던 것들이 이제는 소비에트를 집어삼킨 독립적 관료체제가 되었다; (2) 소련 내부와 국제적 차원에서 사회주의를 실현시킬 과업과는 양립할 수 없는 관료집단의 독재는 소련의 경제생활을 심대하게 기형화시켜 왔다; (3) 그러나 생산수단의 국가소유에 기초한 계획경제 체제는 기본적으로 유지되어 왔으며 계속해서 인류의 거대한 성과로 남아있다. 소련이 제국주의 세력과의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 관료집단의 독재체제 뿐만 아니라 국가 계획경제 체제 역시 청산될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는 제국주의 세력들의 영향권으로 분할될 것이다. 그리고 제국주의 체제는 새로이 안정되어 세계노동계급의 투쟁 역량을 약화시킬 것이다.

"관료적" 기형화가 관료적 독재체제로 발전한 상황에서 소련의 노동조합도 국가와 똑같은 퇴보를 겪었다. 따라서 1920년의 경우와 비교할 때 지금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의 이해를 방어하는 것은 전혀 비현실적이라고 우리는 결론내린다. 노동자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관료집단을 타도할 필요가 있다. 이 과업은 오직 소련에 비합법 볼셰비키정당을 수립하는 것을 통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그러나 소련 정치체제의 퇴보는 아직도 국가 계획경제 체제를 파괴시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해서 소련을 방어하고 관료집단에 대한 소련 노동계급의 투쟁을 지원하는 것이 세계노동계급의 임무라고 우리는 결론내린다.

소련에 대한 지금까지의 규정에서 추상적인 구석이 어디에 있는지 섁트먼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구체적인 수정을 그는 제안하는가? 변증법이 "진실은 언제나 구체적" 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면 이 법칙은 비판에 대해서도 똑같은 효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노선에 대해서 단순히 추상적이라고 딱지를 붙이는 것만 가지고는 안된다.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지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판 자체는 아무런 알맹이도 없게 된다. 추상적이라고 생각되는 노선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거나 변화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섁트먼은 이 노선을 공백으로 채우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안된다. 공백은 아무리 허풍스러워도 모든 추상들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이다. 즉 이 공백 속에는 아무 내용이나 들어가 앉을 수 있다. 따라서 계급 분석을 대체한 이러한 이론적 공백이 인상주의자와 모험주의자들을 불러들인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집약된 경제"

레닌은 "정치는 집약된 경제이며" 이런 의미에서 "정치는 경제를 지배한다"고 말했다. 이 말을 받아 섁트먼은 내가 오직 "경제" (생산수단의 국가소유 ) 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며 "정치"를 무시한다고 훈계한다. 그러나 레닌을 활용하려는 이 두 번째 노력은 첫 번째 노력보다 더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 이 경우 섁트먼의 오류는 정말이지 엄청나다! 레닌이 한 말의 의미는 이렇다: 경제 과정, 과업, 이해 등이 의식적이고 일반화된("집약된") 성격을 획득할 경우 바로 이 사실로 인해 이러한 것들은 정치 영역으로 들어가며 정치의 핵심적 내용을 구성한다. 이런 의미에서 집약된 경제로서의 정치는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원자화되고 무의식적이며 일반화되지 못한 경제활동을 지배한다.

심대하고 전면적으로 경제를 "집약하는" 정도 즉 경제과정의 진보적 경향들을 표현하는 정도에 따라 정치노선의 올바름은 한치의 오차없이 결정된다. 이것이 맑스주의자의 관점이다. 우리가 정치노선을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소유형태와 계급관계의 분석에 기초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이론적 기초 위에서만 "상부구조"의 요인들을 좀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적대 분파의 "관료적 보수주의"를 비판할 경우 우리는 즉시 이러한 현상의 사회적 즉 계급적 뿌리를 찾으려고 한다. 이와 다른 방법을 채택할 경우 우리는 시끄럽기만 한 맑스주의 모방자 또는 "관념적(Platonic)" 맑스주의자로 낙인찍힐 것이다.

"정치는 집약된 경제이다"라는 명제는 크렘린궁의 관료집단에게도 적용된다. 그렇지 않다면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정책은 일반적 법칙의 예외로서 "집약된 경제"가 아니라 관료집단의 자유의지가 발현된 경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관료집단의 이해에 의해 굴절된 채 표현되고 있는 소련정부의 정치를 국유화 경제로 환원시키려는 우리의 시도에 대해 섁트먼은 미친듯이 저항하고 있다. 그는 소련에 대한 자신의 정치노선을 경제의 의식적인 일반화로부터가 아니라 "살아움직이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현실" 즉 주먹구구, 즉흥, 공감과 반감 등으로부터 도출한다. 그는 이러한 인상주의적 정책을 사회학적으로 근거를 삼는 우리의 정책과 대치시키면서 우리가 정치를 무시한다고 동시에 비난하고 있다. 이것은 도저히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섁트먼의 허약하고 변덕스러운 정치도 마찬가지로 경제의 "집약된" 표현임에 확실하다. 다만 애석한 것은 그의 정치가 탈계급적 쁘띠부르조아의 경제를 집약되게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르조아 전쟁과의 비교

섁트먼은 우리에게 이렇게 상기시킨다: 부르조아 전쟁들은 한때는 진보적이었으며 또 다른 때에는 반동적임으로 전쟁에 가담하는 국가를 계급적으로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하기보다는 애매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부르조아 전쟁들은 부르조아 체제가 모두 진보적이었을 때에만 진보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봉건적 소유체제에 저항하여 부르조아 소유체제가 진보적이며 건설적인 요인이었을 때에만 진보적이었다. 부르조아 전쟁들은 부르조아 소유체제가 진보에 걸림돌이 되었을 때 반동적인 성격으로 변화했다. 소련과 관련하여 섁트먼은 생산수단의 국가소유가 진보에 걸림돌이 되었으며 이 소유체제가 다른 나라들로 확대되었을 경우 이것이 경제적 반동을 가져온다고 말하고자 하는가? 물론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생각들을 논리적인 결론까지 이끌지 않고 있을 뿐이다.

민족부르조아 전쟁의 예는 정말이지 아주 유익한 교훈을 제시한다. 그러나 섁트먼은 이 교훈을 아무 관심없이 흘려버리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통일 독일공화국을 위해 노력했다. 1870 1871년의 보불전쟁에서 이들은 독일 통일을 위한 투쟁을 지지하였다. 이 투쟁이 왕조적 이해에 영합하는 기생집단들에 의해 이용되고 왜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프로이센이 알사스-로렌 지방을 합병하자 맑스와 엥겔스가 즉시 프로이센에 대해 반대했던 사실을 섁트먼은 지적한다. 그러나 이 지적은 우리의 관점을 더욱더 명확하게 설명하는 데 일조할 뿐이다. 이 경우는 두 부르조아 국가들 간의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두 국가는 모두 계급적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 경우 두 적대국가 가운데 누가 "덜 해로운가"를 결정할 선택권을 역사가 허용한다면 이 결정은 보완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내려질 수밖에 없다. 독일의 경우 경제적 문화적 공간인 민족부르조아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 시기에 민족국가는 진보적인 요인이었다. 이런 한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호엔쫄런 왕가와 이 왕가와 연합한 대토지 귀족들(junkers)이 중심세력을 형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을 지지했다. 그런데 알사스-로렌 지방의 합병은 독일은 물론이고 프랑스에 관해서도 민족국가의 원칙을 침해했으며 보복전쟁의 기반을 조성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맑스와 엥겔스는 프로이센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이를 통해 이들은 부르조아 생산관계가 지배하는 양 국가들 사이에서 경제력이 더 우수한 프랑스에 대항해서 경제력이 더 열등한 독일의 이해에 봉사하는 위험을 피했다. 만약 1870년에 프랑스가 노동자국가였다면 이들은 전쟁 초기부터 프랑스를 지지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이 계급적 조건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정치 행동을 결정했을 경우에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반복하기에 창피한 사족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오래된 부르조아 국가들의 경우 민족적 과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인류는 발전하는 생산력과 너무 협소한 민족국가라는 틀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순에 의해 고통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유럽의 경우 민족국가의 경계선을 벗어던지고 사회주의 소유체제에 기초한 계획경제를 건설하는 것이 국제노동계급의 과제이다. "사회주의 유럽합중국을 건설하자"는 우리의 구호가 바로 이 과제를 표현하고 있다. 핀란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폴란드에서도 토지소유주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그 자체로 진보적인 요인이다. 여기서 크렘린궁 관료집단이 채용한 관료적 몰수방식들은 독일 통일에서 호엔쫄런 왕가가 왕조적 방식들을 채용한 것과 정확히 똑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반동적 방식에 의해 반동적 소유형태를 방어하는 것과 관료적 방식을 통해 진보적 소유형태를 도입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할 필요가 있을 경우 우리는 이 두 선택을 같은 차원에 두지 않고 덜 해로운 쪽을 선택한다. 이 점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호엔쫄런 왕가에 투항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스탈린 관료집단에 "투항"하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불전쟁에서 호엔쫄런 왕가가 수행한 역할은 왕조의 일반적 역사적 역할이나 존재이유 중 어느 것도 정당화시킬 수 없었다. 이 사실은 덧붙일 필요조차 없다.  

 

상황적 패배주의 노선 즉 콜룸부스와 달걀

이론적 공백의 도움을 받아 특히 중요한 문제에 대해 "살아움직이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현실"을 가지고 섁트먼이 어떻게 자기 주장을 펴는지를 이제 확인해보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크렘린궁의 국제정책을 결코 지지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전쟁이란 무엇인가? 다른 수단들을 통하여 계속되는 정치행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지한 적이 없고 지금도 지지하고 있지 않은 국제정책을 계속하는 형태인 전쟁을 왜 지지해야 하는가?"(앞의 글 15쪽) 이 주장의 완벽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노골적인 삼단논법을 동원하여 그는 우리에게 완벽한 패배주의 노선을 채택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콜룸부스와 달걀처럼 단순한 일이다! 크렘린궁의 국제정책을 지지해본 적이 없으므로 소련을 결코 지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확실히 말하지 않는가?

섁트먼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독소불가침조약 이전에 그리고 적군의 폴란드 점령 이전에 크렘린궁의 국내 및 국제정책을 거부했다; 따라서 작년에 발생한 "살아움직이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현실"도 우리 노선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과거 소련을 방어했다면 이것은 순전히 일관되지 못한 정책의 결과일 뿐이다 등등. 그러나 그는 제4인터내셔널의 현재 정책뿐만 아니라 과거 정책까지 수정하고 있다. 우리가 스탈린에 반대하므로 소련에 대해서도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이 결론은 스탈린이 오랫동안 견지해왔던 것으로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은 소련에 대해 이적행위를 하는 것과 같다고 그는 주장해왔다. 차이가 있다면 섁트먼은 오직 최근에 와서야 이 견해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크렘린궁의 정책에 대한 그의 거부는 완벽하고도 확실한 패배주의 노선을 낳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렇다고 확실히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섁트먼은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좀 전에 인용한 글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만약 제국주의 세력이 10월 혁명의 마지막 성과를 압살하고 러시아를 식민지의 집합체로 변모시킬 의도로 소련을 침공한다면 우리는 소련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한다. 이것이 과거 우리의 노선이었으며 지금도 소수파의 노선이다." (앞의 글 15쪽) 이런, 이런, 이런! 크렘린궁의 국제정책은 반동적이다; 전쟁은 이 반동적 정치의 연장이다; 우리는 반동적 전쟁을 지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잔악한 제국주의 세력이 소련을 "침공하고 " 러시아를 식민지로 변모시킬 목적을 추구하고 있는 특별한 "상황에서" 섁트먼은 소련을 "무조건적으로" 방어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말이 되는가? 논리는 어디로 도망갔는가? 버넘의 모범을 따라 섁트먼도 논리를 종교와 그 밖의 다른 박물관 소장품들의 영역으로 격하시킨 것인가?

이렇게 논리가 뒤죽박죽된 상황의 열쇠는 "우리는 크렘린궁의 국제정책을 한 번도 지지한 적이 없다"는 발언이 추상적이라는 데에 있다. 이 발언은 해부되고 구체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현재 국내정책 뿐만 아니라 국제정책에 있어서도 관료집단은 자신의 기생적 이해를 최우선에 둔다. 이런 한에서 우리는 이들 정책에 대항해 죽음을 불사하고 투쟁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매우 왜곡된 형태로나마 관료집단의 정책은 노동자국가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이 노동자국가의 이해를 우리는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옹호한다. 그래서 관료집단이 (나름의 방식으로!) 국가소유와 외국무역 독점을 지키고 짜르시대에 발생했던 부채의 지불을 거부할 때 우리는 이것을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련과 제국주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건들이 무엇이든 간에 그리고 이러 저러한 정부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관료집단의 반동적 정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계급의 역사적 성과들을 무조건 방어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인 것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문제는 소련의 계급적 성격으로 집약된다.

레닌은 패배주의 노선을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으로부터 도출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자본주의 체제와 그 지배계급의 특정 발전단계로부터 도출했다. 사회와 국가의 계급적 성격으로부터 전쟁의 성격이 정확하게 결정된다. 따라서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우리의 노선을 결정할 때 민주주의, 왕정, 침략, 국가방어 등과 같은 "구체적인" 상황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그는 권유하였다. 여기에 반대하여 섁트먼은 패배주의 노선을 특정 상황으로부터 도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패배주의 노선은 소련과 핀란드의 계급적 성격에 관심이 없다. 관료집단의 반동적 특징들과 "침략행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프랑스, 영국, 미국 등이 핀란드에 비행기와 총포를 보내 핀란드 지배계급을 지원한다고 해도 이 상황은 섁트먼의 노선을 결정하는 데 아무 관계가 없다. 만약 영국 군대가 핀란드에 진주하면 섁트먼은 체임벌린의 혓바닥 밑에 온도계를 들이밀고 그의 의도를 파악하려들 것이다. 크렘린궁의 제국주의 정책으로부터 핀란드를 구출하는 목적만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덤으로 "10월 혁명의 마지막 성과들"을 타도할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이다. 온도계가 가리키는 지점에만 온전히 의거하여 그는 소련 패배주의에서 소련 방어주의로 노선을 전환할 용의가 있다. 추상적 원칙들을 "살아움직이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현실"로 대체한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이미 우리가 확인했지만 섁트먼은 과거의 예들을 검토하자고 끈질기게 주장한다: 과거 언제 어디서 소수파 지도자들은 쁘띠부르조아적 기회주의를 드러냈는가?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제시한 증거를 보충하기 위해서 스페인혁명과 관련하여 방어주의 및 방어주의 방식들에 대해 우리가 교환한 두통의 편지를 공개하겠다. 1937년 9월 18일 섁트먼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나에게 보냈다: " `스페인 하원에 우리 동지 한 명이 의원으로 있다면 그는 네그린 정권의 국방예산안에 대해 반대표를 던질 것입니다.'라고 동지는 말합니다. 혹시 글자가 잘못되었으면 몰라도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현재 스페인 내전에서 제국주의 전쟁의 요소가 지배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대신 쇠퇴하고 있는 부르조아 민주주의와 파시즘과의 대결이 지배적인 것이라면 반(反) 파시즘 투쟁에 군사적 지원을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스페인 하원에서 반파시즘 정권의 국방예산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후에스카 전선에 있는 우리 동지가 사회주의자 동지로부터 왜 볼셰비키-레닌주의자 의원이 하원에서 전선에 보낼 소총을 구입하기 위해서 백만 페세타를 쓰겠다는 네그린의 제안에 반대표를 던질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 동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그가 이렇다할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 (강조는 필자)

이 편지는 나를 놀라게 하였다. 스페인 내전에서 "제국주의 전쟁의 요소"가 지배적이지 않다는 순전히 부정적인 기초하에 섁트먼은 배신적인 네그린 정권에 대해 신임을 표명할 용의를 보였다.

1937년 9월 20일 나는 그에게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네그린 정부의 국방예산안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은 그에게 정치적 신임을 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범죄행위가 될 것입니다. 무정부주의적 노동자들에게 우리의 반대표를 어떻게 설명하느냐고요? 아주 간단합니다: 네그린 정부의 전쟁 수행과 전쟁 승리 능력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의 확신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정부가 부자들을 보호하고 가난한 인민을 굶기는 정부라고 비난합니다. 정부는 타도되어야 합니다. 이 정부를 대체할 능력이 없는 한에서 우리는 이 정부의 명령 하에서 내전을 치룹니다. 그러나 모든 경우를 이용하여 우리는 이 정부에 대한 불신임을 공공연히 표현합니다. 이 정부에 대항해서 대중들을 정치적으로 추동하고 이 정부의 타도를 준비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외의 다른 노선은 모두 혁명에 대한 배신행위가 될 것입니다."

내가 보낸 이 답장의 어조는 섁트먼의 기회주의적 입장이 나에게 끼친 놀라움을 미약하게 밖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단편적인 오류들은 물론 피할 수 없다. 그러나 2년 반이 지난 지금 이 편지는 섁트먼의 정치 경향에 대해 새로운 진실을 밝히고 있다. 파시즘에 대항하여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방어하기 때문에 부르조아 정부에 대한 신임을 거부할 수 없다고 섁트먼은 생각하고 있다. 이 사고를 소련에 적용하면 결론은 반대로 나온다. 즉 소련 정부를 신임할 수 없으므로 노동자국가를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경우 역시 사이비 급진주의는 기회주의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계급적 기준의 기각

다시 한번 맑스주의의 근본원리로 돌아가 보자. 맑스주의 사회학에서 국가, 정당, 철학, 문예사조 등과 같이 주어진 현상을 분석하는 출발점은 계급 규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것만 가지고는 불충분하다. 계급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발전단계를 경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 다른 조건에 놓이며 다른 계급들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현상을 완벽하게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2차적 또는 3차적 요인들을 계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인들은 구체적인 분석 목적에 따라 부분적으로만 또는 전부 계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맑스주의자의 경우 분석할 대상을 계급적으로 규정하지 않고서는 분석 자체가 불가능하다.

뼈와 근육의 구조만 연구해서는 동물에 대한 해부는 완벽할 수 없다. 그러나 뼈와 근육의 구조를 무시하려는 해부학 논문은 공허할 것이다. 전쟁은 사회 즉 사회 지배계급의 기관이 아니라 기능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기관 즉 국가를 연구하지 않고 그 기능을 연구하고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조직 즉 사회의 일반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회의 기관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의 뼈와 근육은 생산력과 계급(소유 )관계이다. 기능인 전쟁이 그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 즉 국가와는 무관하게 "구체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고 섁트먼은 주장하고 있다. 너무도 기괴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 근본적 오류는 역시 같은 정도의 노골적인 오류에 의해서 강화되고 있다. 기능을 기관과 분리시킨 후 기능 그 자체를 연구하는 섁트먼은 자신의 약속과는 달리 추상에서 구체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체를 추상 속에 해소시켜 버린다. 제국주의 전쟁은 금융자본의 기능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독점자본이라는 특수한 자본주의에 기초하여 특정 발전단계에 놓인 자본이 곧 금융자본이다. 이 규정은 근본적인 정치적 결론을 도출하기에 충분히 구체적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용어를 소련에 대해서도 적용하기 위해서 이 용어의 범위를 고무줄처럼 늘어뜨린 섁트먼은 자기가 딛고 서 있는 이론적 기초마저 허물어 버린다. 그는 제국주의를 금융자본의 확대뿐만 아니라 노동자국가의 확대에도 적용한 것을 피상적으로나마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그는 두 국가 즉 노동자국가와 제국주의국가의 사회구조적 차이를 추상적이라고 선언하면서 무시한다. 이렇게 맑스주의와 숨바꼭질을 하면서 섁트먼은 구체적인 분석을 추상적이라고 낙인찍고 추상적인 분석을 구체적이라고 위장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이론을 무지막지하게 가지고 노는 행태는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하나의 예외도 없이 미국의 모든 쁘띠부르조아들은 모든 형태의 영토 점령을 "제국주의적"이라고 낙인찍고 있다. 특히 지금 미국이 영토를 점령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지 않은 틈을 타서 말이다. 그러나 금융자본이 특정 순간에 영토병합에 몰두해 있거나 아니면 핀란드를 다른 나라의 병합으로부터 "방어하는 일"에 몰두해 있거나 간에 금융자본의 국제정책이 제국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 이들은 독실한 신자의 경건한 분노로 몸을 떨면서 화들짝 놀라 자빠진다. 당연히 소수파 지도자들은 정치적 목적이나 정치적 수준에 있어서 보통 쁘띠부르조아들과는 다르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들은 공통의 사상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쁘띠부르조아는 자신의 사회적 기초와 정치적 사건들을 분리시키려고 애쓴다. 현실에 대한 계급적 접근방식과 쁘띠부르조아의 사회적 지위 및 이데올로기 사이에는 유기적인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폴란드에 대해서

크렘린궁의 관료집단이 나름의 관료적 방식을 통해 폴란드의 사회주의 혁명에 추동력을 제공했다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노동계급의 "관료적 혁명"이 어쩌면 가능하다고 내가 주장한 것으로 섁트먼은 윤색하고 있다. 이것은 부정확할 뿐만 아니라 의리마저 없는 행태이다. 나의 표현은 엄격하게 제한된 것이었다. "관료적 혁명"이 아니라 관료적 추동력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이 추동력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어쨌든 서부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대중들은 이 추동력을 감지했으며 이것의 의미를 이해했으며 기존 소유관계의 전면적인 전복을 달성하기 위해 이것을 이용했다. 제때에 이러한 추동력을 감지하지 못하고 이것을 이용하기를 거부하는 혁명정당은 쓰레기통에 던져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향하고 있는 이 추동력은 소련의 관료집단이 노동자국가의 경제체제에 자신의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만 가능했다. 소련군 점령지 내의 계급투쟁과 러시아 10월 혁명의 위력을 통해서만 우크라이나 및 벨로루시 대중들은 이 "추동력"을 혁명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운동의 고립적 성격과 소련 관료집단의 막강한 물리력만이 이 혁명적 대중운동을 재빨리 목졸라 죽일 수 있었다. 노동자국가, 피억압 대중, 보나파르트 관료집단 등 세 요인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폴란드 사태에 대해 한담을 늘어놓는 일을 자제하는 것이 가장 좋았을 것이다.

서부 우크라이나와 서부 벨로루시의 국회 선거에서 제시된 선거강령은 당연히 크렘린궁의 명령에 의해서 나왔다. 그러나 이 강령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대단히 중요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지역들의 소련에의 편입; 농민을 위한 지주토지의 몰수; 대공업과 은행의 국유화. 우크라이나의 민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 단일국가로 통일되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현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미래에 전개될 독립 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의 생각은 올바르다. 그리고 선거강령의 다른 두 요소들이 진보적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동지는 우리 대오에 없을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소련의 사회적 기초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으로 하여금 사회혁명적 강령을 택하도록 강제한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길을 찾던 중 섁트먼은 전혀 사회적 변화가 없는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를 자기 주장의 예로 들고 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주장이 아닌가! 소련 관료집단이 언제나 모든 곳에서 부르조아 계급의 생산수단을 몰수하기를 원한다거나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록 히틀러와 동맹을 체결했지만 소련의 관료집단은 동부 폴란드에서 일어난 체제의 전복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소련의 관료집단만이 이런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경우 관료집단은 폴란드 내 소련군 점령지역을 소련 영토로 편입시킬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섁트먼은 이 체제 전복 현상을 인식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이 현상을 설명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체면을 세우려고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폴란드령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에서는 민족적 억압이 계급착취를 심화시키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은 토지를 스스로 접수하기 시작하였고 이미 도망하고 있던 지주들도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등등. (같은 글 16쪽) 그런데 섁트먼에 의하면 소련군은 이 사태와 전혀 관계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즉 소련군은 이 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주한 "반혁명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히틀러가 장악한 서부 폴란드의 노동자 농민 대중은 왜 혁명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동부 폴란드에서는 주로 지주들과 자본가들이 줄행랑을 쳤는데 왜 서부 폴란드에서는 주로 혁명가, "민주주의자", 유태인들이 줄행랑을 쳤을까? 섁트먼은 이 차이점을 곰곰히 생각할 겨를이 없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으므로 "관료적 혁명"이란 황당한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일이 그에게는 우선 급하다. 그는 마치 신생아실에 들어가 갓 태어난 아기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의 비유가 너무 과한 것일까?

멘셰비키들은 크렘린궁의 대외정책에 대해 섁트먼보다 더 "화해불가능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들의 빠리 망명 기관지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소련군이 명령받은 지역에 채 진주하기도 전에 농촌 전역에서 혁명적 농민 자치를 위한 기본 기관인 농민위원회가 등장했다." 물론 소련군 당국은 이러한 위원회들을 자신들이 도시 중심지에 수립한 관료적 기관들에 부속시키는 조치를 시급히 서둘렀다. 그러나 이들 기관들은 농민위원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위원회가 없이는 농민혁명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멘셰비키 지도자 단(Dan)은 10월 19일 이렇게 썼다: "모든 목격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에 의하면 소련군과 소련 관료집단의 등장은 이들 점령지역들 뿐만 아니라 이들 너머 지역까지 사회 소요와 사회변혁의 추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추동력"이란 말은 내가 아니라 눈과 귀를 가지고 있는 "모든 목격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이 먼저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은 더 나아가 "이 추동력에 의해서 일어난 물결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독일을 강타할 뿐만 아니라 어떤 정도로든 다른 국가들에게 밀려들어갈 것이다"라고 짐작했다.

또 다른 멘셰비키는 이렇게 쓰고 있다: "크렘린궁은 거대한 혁명의 냄새가 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피하려고 시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래 전에 이미 사라져야 했을 반봉건 농경소유관계가 존재하는 동부 폴란드에 적군이 진주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격렬한 농민운동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소련군의 진주와 함께 농민들은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위원회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이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섁트먼의 말에 의하면 소련군의 철수가 아니라 진주와 함께 이런 사태가 촉발되었다. 내가 멘셰비키들의 말을 인용하는 이유는 이들이 정보를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정보소식통은 이들에게 친분이 있는 폴란드인 및 유태인 망명자들이며 이들은 현재 프랑스에 모여 있다. 특히 이들은 프랑스 부르조아들에게 투항했기 때문에 스탈린주의에 투항했다고 의심할 건덕지가 없다. 따라서 이들이 소련 관료집단을 옹호하기 위해 거짓정보를 흘릴 이유는 없다.

더욱이 멘셰비키들의 증언은 부르조아 언론의 보도로 그 진실이 확인되고 있다:

"소련군이 진주한 폴란드 영토의 농민혁명은 자생적인 운동의 위력을 보여왔다. 소련군이 즈브루치강을 건넜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농민들은 지주들의 토지를 서로 나누어 갖기 시작했다. 토지는 먼저 소농들에게 분배되었으며 이런 방식으로 농토의 약 30%가 몰수되었다." ([뉴욕 타임즈], 1940년 1월 17일자)

이제 섁트먼은 내가 전혀 새로운 주장을 꺼내 놓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이미 다음과 같이 한 말을 새로운 주장인양 드리밀고 있다: 동부 폴란드에서 토지를 농민들이 몰수한 사실이 소련 관료집단의 정책 일반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물론 그렇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평가가 달라야 한다고 제안한 바 없다.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아 소련 당국은 노동계급을 혼란시키고 사기를 죽였다. 이 결과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이 촉진되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을 위해 전쟁을 활용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졌다. 이러한 범죄행위들에 비교해서 이 두 지방의 사회적 격변은 물론 부차적인 중요성밖에 없으며 크렘린궁 관료집단의 일반적으로 반동적인 성격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더욱이 이들 지방의 사회적 격변은 폴란드의 예속을 대가로 하고 있다. 그러나 소수파의 주장을 통해 이 문제는 정책 일반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이 정책일반이 구체적으로 굴절된 문제로 되어버렸다. 갈리시아와 서부 벨로루시의 농민들에게 농민혁명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반동적인 관료집단에 의해서 추동되었다는 이유로 제4인터내셔널이 이 격변을 보이코트할 수는 없었다. 노동자와 농민의 편에 서서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소련군의 편에 서서 이 사건에 동참하는 것이 우리의 무조건적인 임무였다. 동시에 크렘린궁 정책의 일반적으로 반동적인 성격과 이 성격이 소련군 점령지에 미칠 위험을 쉬지 않고 대중들에게 경고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 두 과업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같은 과업의 두 측면을 결합할 줄 아는 것 --- 바로 이것이 볼셰비키의 정치이다.  

 

다시 한번 핀란드에 대해서

폴란드의 사태를 이해하는 기이한 통찰력을 드러낸 후 섁트먼은 배가된 권위를 가지고 핀란드 사태에 대해 나에게 공격을 가하고 있다. 나의 글 "쁘띠부르조아 소수파"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은 내전에 의해서 보완되기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내전에서 현재 소련군은 핀란드의 소농 및 노동자와 같은 편을 이루고 있다. " 이 대단히 조심스러운 표현도 칼날 같은 섁트먼 재판관의 승인을 얻지는 못했다. 핀란드 사태에 대한 나의 평가는 이미 그를 뒤흔든 후였다. "편지" 16쪽에서 섁트먼은 "핀란드에 대한 동지의 놀랄만한 발언에 대해서는 폴란드의 경우보다 근거를 찾기가 더 어렵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그가 논리를 끝까지 추구하여 나름의 결론을 이끌지 못하고 놀라기만 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애석함을 느낄 뿐이다.

발트해 국가들에 대해서 크렘림궁은 자신의 과업을 전략적 소득을 얻는 것으로 한정했다. 즉 짜르제국의 일부였던 이들 나라에 설치한 전략적 군사기지들이 이후 이 나라들이 소련 영토로 편입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계산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발트해 국가들에 대해서 외교적 위협으로 달성한 이러한 성공에 비해 핀란드에서는 이 계획이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 저항에 대해서 화해조치를 취할 경우 소련 관료집단의 "위신 "과 발트해 국가들에서의 성공은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원래 계획과는 반대로 크렘린궁은 무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로부터 사고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크렘린궁은 핀란드 부르조아지를 겁주어서 이들이 양보를 하도록 만들 것인가 아니면 이 이상의 조치를 취할 것인가? 당연히 이 질문에 대한 "자동적인" 해답은 있을 수가 없었다. 일반적 경향들에 비추어 구체적인 사태전개에 따라 대응을 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소수파 지도자들은 이렇게 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핀란드에 대한 소련의 군사작전은 11월 30일에 시작되었다. 바로 이날 틀림없이 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에 소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핀란드 공산당은 핀란드의 근로인민을 향해 라디오 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선언서는 이렇게 선포했다: "핀란드 역사상 두 번째로 핀란드 노동계급은 유산계급의 지배에 대해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1918년에 있었던 노동자와 농민의 첫 투쟁은 자본가와 지주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근로인민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핀란드의 부르조아 정부를 겁주려는 시도는 전혀 없으며 핀란드 국내에 봉기를 촉발시켜 소련군의 침공을 내전으로 보완하려는 계획만이 이루어졌음이 이 선언서 하나만으로도 명백했다.

12월 2일에 발표된 소위 인민정부의 선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핀란드 각지에서 인민은 이미 봉기에 착수했으며 민주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선언문의 이 주장은 명백한 거짓이다. 그렇지 않다면 봉기가 시도된 장소들이 언급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부에서 준비된 고립된 봉기들이 실패로 끝났으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상황을 자세하게 밝히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간주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어쨌든 "봉기들"에 대한 소식은 봉기의 촉구를 의미했다. 더욱이 선언문은 "다가올 전투 과정에서 혁명적 노동자 농민의 대오에서 배출된 자원군에 의해서 확대될 첫 핀란드 군단"의 구성에 대한 정보를 실었다. 이 "군단"에 속한 병력이 1천명이 되었던 1백명이 되었든 크렘린궁의 정책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군단"의 의미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동시에 전보들은 국경지역 농민에 의한 대지주 소유 토지의 몰수를 보도했다. 소련군이 처음으로 진군한 기간 동안 바로 이러한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심할 근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전보들의 내용이 조작되었더라도 선언서는 농민혁명을 촉구하는 의도를 완전히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은 내전에 의해서 보완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선언할 정당성은 나에게 충분히 있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12월초에 나는 이러한 사실들의 일부분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 상황 속에서 이 사건의 내적 논리를 이해함으로써 단편적인 사실들을 통해 나는 이 투쟁의 전체 방향에 대해서 필요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러한 반(半) 선험적인 결론이 없이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관찰자는 될 수 있어도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인자는 결코 될 수 없다. 그런데 "인민정부"의 호소는 왜 즉각적인 대중적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는가?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부르조아지뿐만 아니라 농민 최상층부와 노동관료들에 의해서 지원받고 있는 반동적인 군대에 의해서 핀란드가 완전히 장악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크렘린궁의 정책이 핀란드 공산당을 무의미한 요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셋째, 소련 정부는 핀란드 근로대중에게 혁명적 열정을 불어넣어줄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1918년부터 1920년 사이 우크라이나에서조차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라는 호소에 농민들은 아주 느리게 반응했다. 왜냐하면 지역 소비에트의 권력이 아직 미약했고 백군의 군사적 성공이 있을 때마다 농민들에 대한 가차없는 형벌이 가해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농민혁명을 일으키라는 호소에 핀란드의 빈농들이 반응을 늦게 보인 이유는 그만큼 더 당연한 셈이다. 농민들이 행동을 개시하기 위해서는 소련군이 제대로 군사적 승리를 거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준비가 엉망이었던 첫 진공에서 적군(赤軍) 은 실패만 기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이 봉기한다는 것은 전혀 말도 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단계에서 핀란드에서 독자적인 내전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소련 관료집단이 내전을 촉발하는 조치들을 통해서 군사작전을 보완할 것이라고 나는 정확하게 계산하여 말했다. 최소한 핀란드 군대가 전멸될 때까지 나의 이 계산은 적군 점령지와 인근지역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 1월 17일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핀란드 정보소식통은 국경지방 중 한 곳이 핀란드 망명자 부대에 의해서 침략을 받았으며 문자 그대로 동족상잔의 살육이 자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담은 전보를 전하고 있다. 이것이 내전의 양상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적군이 핀란드 안으로 새로이 진군할 경우 전쟁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평가는 전쟁의 단계마다 그 올바름이 틀림없이 확인될 것이다. 섁트먼은 사태 분석은 물론이요 약간의 예상조차 할 능력이 없다. 그는 고상한 분노에만 자신을 한정하고 있으며 이 이유 때문에 전쟁이 진전하는 매 단계마다 더욱 깊이 무지의 늪 속에 빠져들고 있다.

"인민정부" 수립 촉구는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를 더불어 촉구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섁트먼은 고함을 지른다. 소련에도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핀란드에서는 이것이 어디서 나온다는 말인가? 애석하게도 섁트먼은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소련에서는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는 이미 완성된 지 오래되었다. 부르조아지를 통제하면서 소련은 국유화 생산관리체제로 이행했다. 노동자에 의한 관리에서 지금은 관료집단에 의한 지령경제 단계로 나아갔다. 노동자에 의한 새로운 생산의 통제는 이제 관료집단에 대한 통제를 의미한다. 이것은 관료집단을 타도하는 봉기의 성공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다. 한편 핀란드에서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는 아직까지 토착 부르조아지를 몰아내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부르조아지가 남긴 권력의 공백을 관료집단이 채우겠다고 제안하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더욱이 동부 폴란드나 핀란드를 인민위원들을 수입해서 통치할 것을 시도할 만큼 크렘린궁이 그렇게 어리석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소련 관료집단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일은 점령지의 근로대중 가운데 새로운 행정기구를 끌어내는 일이다. 이 과업은 여러 단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첫 단계는 농민위원회와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 위원회이다.

쿠지넨의 강령이 "공식적으로 부르조아 `민주주의' 강령이다"라는 사실을 섁트먼은 꼭 부여잡고 있다. 그렇다면 크렘린궁은 핀란드를 소련의 틀 속으로 끌어들이기보다 그곳에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확립시키는 일에 더 관심이 있다고 섁트먼은 주장하고 싶은 것일까? 그는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소련은 스페인을 연방 안으로 끌어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따라서 크렘린궁의 관료집단은 노동자혁명에 대항하여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확실히 보장할 능력을 과시해야 했다. 이것이 이들이 스페인에서 처한 문제의 실체였다. 이 과업은 스페인 혁명이라는 특정 국제 상황에서 소련 관료집단의 이해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크렘린궁은 프랑스, 영국, 미국 등에게 자신의 유용성을 과시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행동이 증명하듯이 이들은 즉시 또는 두 단계를 거쳐 핀란드를 소련의 일부로 만들고자 확실히 결정하였다. 쿠지넨 정부의 강령은 "공식" 입장에서 보더라도 1917년 11월 볼셰비키당의 강령과 다르지 않다. 내가 "백치" 쿠지넨의 선언문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사실을 섁트먼은 확실히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크렘린궁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있으며 소련군의 지원을 받고 있는 "백치" 쿠지넨은 사태의 내적 논리(변증법) 을 끝까지 사고하기를 거부하며 겉으로 영리한 척하는 많은 소수파 인사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정치적 요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놀라운 분석의 결과 섁트먼은 이번에 소련에 대해 패배주의 노선을 공공연히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자신이 계속해서 "자기 계급의 이해에 충실한 사람"으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어서 우리는 기쁘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멘셰비키 지도자 단은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할 경우 세계노동계급은 "이 폭거에 대해 명확히 패배주의 노선을 택해야 한다"(Sozialisticheski Vestnik, 19 20호, 43쪽)고 11월 12일자 멘셰비키 기관지에 밝힌 바 있다. 케렌스키 임시정부 시절 단은 열렬한 조국방어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심지어 그는 짜르체제 하에서도 패배주의 노선을 주창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그가 "자기 계급의 이해에 충실한 사람"이 아닌 것은 물론 아니다. 문제는 어떤 계급이 자기 계급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핀란드의 사태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현지에 더 가까이 있으며 허구를 사실로 바꿔치기할 수 없는 단과 섁트먼은 지금까지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구체적인 정치적 결론 "의 문제에서 섁트먼은 단과 정확히 "똑같은 계급에 충실한 사람"임이 증명되었다는 사실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 맑스주의 사회학에 의하면 이 계급은 쁘띠부르조아이다. 이 점을 소수파 지도자들은 양해하기 바란다.  

 

"동맹" 이론

당내의 노동계급 경향,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 맑스주의 방법론에 대항하여 버넘, 에이번과 맺은 동맹을 정당화하기 위해 섁트먼은 혁명운동의 역사에 대해서도 한 말씀을 하셨다. 그의 말에 의하면 특히 그는 위대한 혁명전통을 젊은 세대에게 전수하기 위해 혁명운동의 역사를 연구했다는 것이다. 목표 자체는 아주 훌륭하다. 그러나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방법론이 요구된다. 그런데도 섁트먼은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과학적 방법론을 희생시켰다. 그가 들고 있는 역사적 예들은 철저하게 생각된 것이 아니며 완전히 거짓이다.

모든 협조적 관계가 전부 동맹인 것은 아니다. 장기화된 동맹으로 변모되지 않았으며 그럴 의도도 없는 일시적이며 사안적인 동맹들이 종종 존재한다. 한편 같은 당에 적을 두고 있는 것은 동맹이라고 전혀 간주할 수 없다. 버넘 동지와 우리는 같은 국제정당에 소속되어왔으며 계속 끝까지 이 상태가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이것은 동맹이 아니다. 두개의 정당은 공동의 적에 대항해서 장기간의 동맹을 체결할 수 있다. "인민전선 " 정책이 바로 이런 경우였다. 같은 당의 가깝지만 이질적인 경향들이 제3의 분파에 대항하여 동맹을 체결할 수도 있다.

당내에 존재하는 동맹들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 문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1) 동맹이 대항하는 세력이 누구인가? (2) 동맹 내의 세력관계는 어떠한가? 예를 들어 당내의 국수주의 경향에 대항하기 위해 국제주의자와 중도주의자 간에 맺는 동맹은 흔쾌히 인정될 수 있다. 이 경우 동맹의 결과는 국제주의자들의 강령의 명확함, 이들의 응집력과 규율 등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특성들은 세력관계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수적인 우위보다 더 중요한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섁트먼은 레닌이 보그다노프와 동맹을 맺은 사실을 들어 자신의 동맹을 정당화하고 있다. 레닌은 보그다노프에게 이론적인 측면에서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았다고 나는 이미 말한 바 있다. 이제 "동맹"의 정치적 측면을 검토해보자. 사실 레닌과 보그다노프의 경우는 동맹이 아니라 같은 조직 내에서 협조관계를 이룬 것에 불과하다. 이 사실을 무엇보다 먼저 말할 필요가 있다. 당시 볼셰비키 분파는 독립적으로 존재했다. 자기 조직 내의 다른 경향들에 대해서 레닌이 보그다노프와 "동맹"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보그다노프의 이론적 편향에 대항하여 레닌은 볼셰비키 화해주의자들(두브로빈스키, 라이코프 등등)과 동맹을 형성하기조차 하였다. 레닌과 관련하여 핵심적인 문제는 "분파"라고 불리웠지만 독자적 정당의 모든 특징들을 가진 조직 내에서 그가 보그다노프와 상종하는 것이 가능했냐는 것이다. 만약 섁트먼이 소수파를 하나의 독립된 조직으로 보지 않는다면 레닌-보그다노프 "동맹"을 얘기하는 것은 전혀 논리에 닿지 않는다.

그러나 예를 잘못드는 경우는 여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볼셰비키 분파-당은 당시 이미 자유부르조아지의 쁘띠부르조아 하수인임을 완전히 드러낸 멘셰비키에 대항해서 투쟁하고 있었다. 소위 "관료적 보수주의"라고 비난하는 문제보다 이 측면은 훨씬 더 심각한 측면이었다. 섁트먼은 "관료적 보수주의"를 자행하는 분파의 계급적 뿌리를 규정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레닌이 보그다노프와 체결한 것은 쁘띠부르조아 기회주의에 대항한 노동계급 경향과 종파주의적 중도주의 경향 사이의 협력관계였다. 여기서 계급적 경계는 명확하다. 이것을 "동맹"이라고 한다면 이 동맹은 정당한 것이었다.

이후 이 "동맹"의 역사는 나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섁트먼이 인용한 바 고리끼에서 보내는 편지에서 레닌은 정치적 문제들을 순수한 철학적 문제들과 분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섁트먼은 잊어버리고 있지만 레닌의 이러한 희망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견해 차이는 철학의 고상한 문제에서 줄줄이 이어져 가장 시사적인 문제에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이 "동맹"이 볼셰비즘을 기각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즉 레닌이 완성된 강령, 올바른 방법론 , 탄탄하게 응집된 분파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분파 내에서 보그다노프 그룹은 소규모의 불안정한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다.

섁트먼은 자기 당의 노동계급 경향에 대항하여 버넘 그리고 에이번과 동맹을 맺었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동맹 내의 세력관계는 섁트먼에게 완전히 불리하다. 에이번은 자기 분파를 소유하고 있다. 버넘은 섁트먼의 도움을 받아 볼셰비즘에 염증이 난 지식분자들을 결집하여 분파와 비슷한 것을 구성할 수 있다. 섁트먼은 독자적 강령, 독자적 방법론 , 독자적 분파 중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소수파 "강령"의 절충적 성격은 동맹 내의 모순적인 경향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 동맹이 붕괴될 경우 섁트먼은 당과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결과만을 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동맹의 붕괴는 불가피하다.

계속해서 섁트먼은 1917년 레닌과 나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나와 레닌은 오랜 상쟁 끝에 결합했으며 따라서 당시 우리의 과거 견해차이들을 들추는 것은 올바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예는 그가 에이번에 대항해서 캐넌과 동맹할 때 이미 써먹은 바가 있으므로 그 설득력이 약간 감소되었다. 그러나 이 불쾌한 전례는 논외로 치더라도 비유는 완전히 잘못되었다. 볼셰비키당에 합류할 때 나는 레닌식 당건설 방식의 올바름을 완전히 그리고 기꺼이 인정했다. 동시에 볼셰비즘의 결연한 계급적 경향은 올바르지 못한 나의 예상을 교정시킨 후였다. 1917년 당시 내가 "연속혁명"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지 않은 이유는 이후 혁명의 전개과정에 의해서 이 문제가 올바른 것으로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공동활동의 기초는 주관적이거나 일시적인 협력관계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혁명 그 자체에 의해서 마련되었다. 이것은 탄탄한 기초이다. 더욱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맹"이 아니라 부르조아 계급과 이 계급의 쁘띠부르조아 하수인들에 대항하여 단일한 당으로 통일을 이룬 것이었다. 당내에서 레닌과 나의 10월 동맹은 봉기문제와 관련하여 동요를 보인 쁘띠부르조아 경향에 대해 투쟁하였다.

1926년 내가 지노비에프와 동맹을 체결한 것을 섁트먼이 언급하고 있으나 이 예도 역시 피상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당시의 투쟁은 몇몇 등을 돌린 개인들의 심리적 특징인 "관료적 보수주의"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관료집단, 이 집단의 특권, 이 집단의 자의적인 당운영과 반동적인 정책에 대항한 것이었다. 동맹관계가 허용할 수 있는 차이점의 허용범위는 적의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동맹 내의 세력관계 역시 전혀 달랐다. 1923년 반대파는 나름의 강령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핵들은 섁트먼이 마치 스탈린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듯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것이 전혀 아니라 주로 노동자였다. 우리의 요구에 따라 지노비에프-카메네프 그룹은 특별 문건을 통해 1923년의 반대파는 모든 근본적인 문제들에서 올바랐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우리가 각기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견해를 같이한 것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에 통합은 결코 성사되지 못했다. 두 그룹들은 독자적인 분파로 남아있었다. 일부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1923년 반대파는 1926년 반대파에게 원칙적인 양보를 한 것이 사실이다. 나는 반대표를 던져 양보에 반대했으며 지금도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이러한 양보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은 상황은 오류였다. 그러나 대체로 공공연히 반대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우리는 비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양측은 모두 논란이 있었던 문제들에 대해서 나의 견해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1923년 반대파 내에서 1천명 중 999명 이상은 나를 지지했으며 지노비에프나 라덱을 지지하지 않았다. 두 그룹 사이의 이러한 관계 때문에 이러저러한 부분적인 오류는 있었으나 모험주의 비슷한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섁트먼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동맹을 맺은 자들 중 과거에 옳았던 자가 누가였으며 언제 어디서 옳았던가? 왜 섁트먼은 먼저 에이번을 지지하다가 캐넌을 지지했으며 이제 다시 에이번을 지지하고 있는가? 과거의 쓰디쓴 분파투쟁에 대한 섁트먼 자신의 설명은 책임있는 정치인의 것이 아니라 보모의 것이다: 캐넌은 약간 잘못했으며 섁트먼도 약간 잘못했으며 모두 다 약간 잘못했으며 이제는 우리 모두가 약간씩 옳다. 누가 어떤 점에서 잘못했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다. 과거의 정치적 궤적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어제는 평가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이라는 유기체에서 그는 떠다니는 콩팥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역사상의 예들을 찾으면서 섁트먼은 자신의 현 동맹이 실제로 닮고 있는 한가지 예는 피하고 있다. 소위 1912년 8월 동맹이 이것이다. 나는 이 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이 동맹을 만들었다. 정치적으로 나는 멘셰비키들과 모든 근본문제들에서 견해를 달리했다. 그리고 나는 초좌익 볼셰비키들인 소환파와도 동의하지 않았다. 일반적 정치경향을 놓고 보자면 나는 볼셰비키들에게 훨씬 더 가까웠다. 그러나 나는 레닌식 "조직운영"에 반대했다. 혁명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탄탄히 결집된 중앙집중주의 정당이 필수적이라는 진리를 당시 아직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의 노동계급 경향에 대항하는 온갖 잡탕들과 일시적인 동맹을 수립했다.

8월 동맹에서 청산주의자들은 나름의 분파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소환파도 분파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고립되어 있었다. 생각이 같은 사람들은 있었으나 분파로 구성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문서들은 내가 작성했다. 이 당시 동맹이 발표한 문서들은 원칙적인 차이점들을 피하면서 "구체적인 정치문제들"에 대해 만장일치를 가장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았다. 과거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레닌은 8월 동맹에 대해서 가차없는 비판을 퍼부었으며 가장 매몰찬 타격은 나에게 가해졌다. 내가 정치적으로 멘셰비키나 소환파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한 나의 정책은 모험주의라는 것을 그는 증명했다. 이 비판은 가혹했으나 사실이었다.

"정상을 참작하는 상황"으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나의 과업은 볼셰비키들에 대해서 우익이나 초좌익 분파들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당 전체를 단결시키는 데에 있었다. 볼셰비키들도 8월 대회에 초청받았다. 그러나 레닌이 완벽히 올바르게도 멘셰비키와 통합하는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에 나는 멘셰비키와 소환파들로 구성된 자연스럽지 못한 동맹에 소속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정상참작용 상황은 이것이었다: 진정한 혁명정당으로서 볼셰비즘이라는 현상 자체는 당시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실천에서는 볼셰비즘의 볼 자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나의 죄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의심할 여지없이 혁명적 전망을 올바르게 조망한 연속혁명론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시 특히 조직영역에서 쁘띠부르조아 혁명가의 구태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멘셰비즘에 대한 화해주의와 레닌식 중앙집중주의에 대한 불신을 질병으로 가지고 있었다. 8월 대회가 끝난 직후 8월 동맹은 그 구성부분들로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원칙적으로 뿐만 아니라 조직적으로도 동맹의 바깥에 존재하였다.

27년 전 레닌과 똑같이 오늘 나는 섁트먼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자 한다: "동지의 동맹은 무원칙합니다." "동지의 정책은 모험주의입니다."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섁트먼이 내가 한때 내렸던 결론과 똑같은 결론을 내렸으면 하는 희망을 진심으로 털어놓고자 한다.  

 

투쟁 중에 있는 분파 "

1923년 반대파의 지도자" 트로츠키가 캐넌이 이끄는 관료적 분파를 지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섁트먼은 놀라움을 표시한다.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서도 섁트먼은 다시 역사적 전망의 결여를 드러내고 있다. 자신들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소련 관료집단이 볼셰비키 중앙집중주의 원칙을 활용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이 과정에서 이들은 이러한 원칙을 완전히 정반대의 것으로 변화시켰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볼셰비즘의 방법론을 가치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레닌은 당을 노동계급의 규율과 가혹한 중앙집중주의 정신으로 교육시켜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쁘띠부르조아 분파들과 파벌들로부터 수없이 공격을 받아왔다. 그러나 볼셰비키식 중앙집중주의는 심대하게 진보적인 요인이 되었으며 결국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현재 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 소수파의 투쟁은 특권 관료집단에 대한 1923년 러시아 반대파의 투쟁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이 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다만 현재 소수파의 투쟁은 볼셰비키 중앙집중주의에 대한 멘셰비키들의 투쟁과는 정말이지 크게 닮은 점이 있다.

소수파에 의하면 캐넌과 그의 그룹은 "관료적 보수주의라고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유형의 정치적 경향" 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수적인 노동관료집단은 민족 부르조아지의 이윤을 나누어 갖는 주주인바 이들의 지배는 부르조아 국가의 직접적 내지 간접적 지원없이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통치는 비밀경찰, 군대, 법원 등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소련 관료집단이 스탈린을 지지하는 이유는 바로 그가 이들의 이해를 다른 어떤 누구보다도 잘 옹호한다는 데에 있다. 노동조합 관료들은 그린과 루이스를 지지한다. 능력있고 수완있는 관료들로서 이들의 악덕이 노동귀족의 물질적 이해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노동자당 내의 "관료적 보수주의"는 어떤 기초 위에 가능한가? 물론 물질적인 기초가 아니라 관료적 경향을 보이고 있는 인사들이 모임으로서 보수주의가 형성되었다고 섁트먼은 생각하고 있다. 이에 비해서 적대 진영인 소수파에는 개혁가, 제안가, 역동적인 정신에 충만한 인사들만이 모여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수파는 "관료적 보수주의"의 사회적 기초 즉 객관적 기초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모든 주장은 순전한 심리상태 그 자체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각이 있는 모든 동지들은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캐넌 동지가 진짜 관료적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죄를 짓는 것은 가능하다; 물론 멀리 떨어져 있는 내가 이것을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관료적 "특권들"에 대해 조금도 관심이 없는 전국위원회 다수 동지들과 당원들 다수가 그를 지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지는 캐넌 동지의 관료적 경향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이러한 경향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캐넌 동지는 자신의 개인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 결함보다 훨씬 더 중요한 다른 장점들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진지한 당원 동지들의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나도 이들의 생각에 동의한다.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자신들의 불만과 비판의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모든 정당에 수천 내지 수만건이나 존재하는 서로 연관도 없는 일화들과 사건들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 내용을 객관적으로 확증하기가 불가능하다. 소수파의 문서들이 말하고 있는 모든 이야기 속에 담긴 비판들을 무조건 인정할 의도가 나에게는 전혀 없다. 그러나 어느 한 사건에 대해서는 내가 실제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목격자이므로 내 생각을 밝혀보고자 한다. 캐넌 동지와 그의 그룹이 비판이나 검토도 없이 이행기 강령을 받아들였다고 소수파 지도자들은 피상적으로 주장한다. 이 강령을 구체적으로 작성하는 일에 대해 내가 캐넌 동지에게 보낸 1938년 4월 15일자 편지를 보자:

"동지에게 이행기 강령 초안과 노동당에 대한 짤막한 소견을 이미 보냈습니다. 동지가 이곳 멕시코를 방문하지 않았다면 이 초안은 결코 작성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동지 여러분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들을 많이 배웠으며 이를 통해 초안의 내용이 좀더 명확하고 구체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

당시 토론에 참여한 당사자이기에 섁트먼은 당시의 상황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

쁘띠부르조아 서클에서는 소문, 개인적 추측, 단순한 한담거리들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을 수 없다. 당적 유대가 아니라 개인적 연분으로 묶여있으며 사건들을 계급적으로 접근하는 습관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수파의 대표들만이 나를 방문했으며 이로 인해 나는 진실의 거리에서 멀어졌다는 소문이 입과 입을 통해 퍼졌다. 그러나 동지 여러분들, 이런 황당한 소문을 믿어서는 안된다! 나는 일반적으로 저서를 쓸 때와 같은 방법으로 정치 관련 정보들을 얻는다. 정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행위는 모든 정치인에게 필수적인 부분이다. 만약 잘못된 정보를 진짜 정보와 구분할 능력이 나에게 없다면 나의 판단들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에이번 분파에 소속된 20명 이상의 동지들과 알고 지낸다. 이들 중 여러 동지들은 나의 저술작업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이들의 거의 모두는 소중한 당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쁘띠부르조아 분위기, 계급투쟁 경험의 부족, 노동계급운동과의 꼭 필요한 유대의 결여 등으로 나름의 결함들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긍정적인 자질들 덕분에 이들은 제4인터내셔널의 일부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들의 부정적인 자질들 덕분에 이들은 모든 분파들 중 가장 보수적인 분파에 속해 있다.

"`반(反) 지성적' 태도가 당원들의 머릿속에 강제로 주입되고 있다."고 "관료적 보수주의"를 비판하는 문서가 불평하고 있다.(당내 토론집 제2권, 제6호, 1040년 1월 6일, 12쪽) 이러한 주장은 순전히 인위적이다. 문제는 노동계급 진영으로 완전히 넘어간 지식인들이 아니라 우리 당을 쁘띠부르조아 절충주의로 몰고가려는 분자들에게 있다. 이 문서는 또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반드시 건강하지는 못한 편견들에 아부하는 반(反) 뉴욕지부 선전들이 유포되고 있다." 이 문서가 말하는 편견들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마 반유태주의인 것 같다. 그러나 만약 우리 당내에 반유태주의적 또는 여타의 인종주의적 편견들이 존재한다면 이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가차없는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막연히 암시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그러나 뉴욕지부의 유태인 지식인들과 반(半) 지식인들에 대한 문제는 사회계급적 문제이지 민족적 문제가 아니다. 뉴욕에는 유태인 노동계급이 많이 존재하고 있으나 에이번 분파는 이들을 조직 기반으로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분파의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은 유태인 노동자들에게 다가가는 길을 찾을 능력이 없음을 증명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환경에 만족하고 있다.

당이 한 시기에서 다른 시기로 이행함에 따라 과거 진보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분자들이 새로운 과업에 제때 적응하지 못하고 난관에 봉착하여 긍정적인 자질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인 자질들만을 발휘한 예가 역사에는 한 번 이상 있어왔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와 반대의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에이번 분파의 현재 역할이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 분파 내에서 섁트먼은 언론을 담당하고 버넘은 이론을 담당하고 있다. 섁트먼은 끈질기게 주장한다: "지금 진행 중인 당내 논쟁에서 `에이번 분파의 문제'를 주입하는 것이 얼마나 거짓인 지를 캐넌 동지는 알고 있다. 최소한 지난 몇 년 동안 `에이번 그룹'과 같은 문제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모든 지도급 동지들과 많은 수의 당원들 역시 마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현실을 왜곡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섁트먼 자신이라는 점을 감히 말하고자 한다. 나는 약 10년 동안 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의 관계들을 추적해왔다. 다른 무엇보다도 뉴욕지부의 구체적 계급구성과 특별한 역할이 나에게는 명확히 인식되었다. 내가 터어키의 프린키포에 있을 때에도 전국위원회에게 뉴욕의 쁘띠부르조아적이며 쓸모없는 말다툼 현장에서 잠시 벗어나 지방의 공업중심지로 당본부를 옮기라고 충고한 바 있었다. 이것을 섁트먼은 기억할지 모르겠다. 멕시코에 도착하자 나는 영어에 더 익숙해질 기회를 얻었으며 미국 동지들의 잦은 방문 덕택에 당내 그룹들의 사회계급적 구성과 정치적 심리를 좀더 생생하게 파악할 기회를 가졌다. 지난 3년간의 개인적이고도 세세한 관찰을 기초로 나는 주장하는 바이다. 에이번 분파는 "역동적"이지는 않지만 정적으로라도 계속 그 존재를 유지해왔다.

정치적 경험을 별로 가지지 못한 에이번 분파의 동지들은 그들의 사회계급적 특성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들에 대한 그들의 접근방식에 의해 쉽게 구별된다. 이들 동지들은 언제나 자기가 소속한 분파의 존재를 공식적으로는 부인한다. 이들 중 일부가 스스로를 해체하고 당의 원류에 합류하려고 시도한 적이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이들에게 무리한 행위였으며 모든 핵심적인 문제들에서 이들은 하나의 그룹으로 당에 대항했다. 이들은 원칙적인 문제들 특히 당의 사회계급적 구성을 변화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지도적 인사들의 연합, 개인적 갈등, 그리고 일반적으로 당 "총사령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것이 바로 에이번 파벌의 특징이다. 나는 이들 많은 동지들에게 지속적으로 경고한 바 있었다. 즉 인위적으로 조성한 환경에 깊숙이 빠져들다 보면 조만간 새로운 분파적 폭발이 반드시 일어나 이들을 산산조각 낼 것이라고 말이다.

소수파 지도자들은 캐넌 분파의 노동계급적 구성에 대해 비꼬는 듯이 그리고 폄하하여 말한다. 이들의 눈에는 이 우연적인 "사소한 일"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눈먼 쁘띠부르조아적 냉소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제2차 당대회에서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는 분열했다. 당시 많은 수의 멘셰비키 대의원들 중 노동자는 3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후 이들 3명은 모두 볼셰비키 쪽으로 넘어왔다. 이 사실을 레닌이 하나의 징후로서 대단히 중요하게 본 것을 멘셰비키들은 조소했다. 이들은 세 명의 노동자들이 "성숙"하지 못해서 볼셰비키 쪽으로 넘어갔다고 자기들 식으로 설명해버렸다. 그러나 이제 다들 알고 있듯이 레닌이야말로 올바랐다.

우리 미국 당의 노동계급 분자들이 "정치적으로 후진적"이라면 "선진적인" 분자들의 첫 번째 임무는 노동계급 당원들의 수준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왜 소수파는 이들 노동자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는가? 왜 이 일을 "캐넌 파벌"에게 넘겼는가?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가? 소수파의 일원이 되기에 이들 노동자 당원들은 자질이 충분하지 못한가? 아니면 소수파는 노동자들에게 맞지 않는 그런 집단인가?

당의 노동계급 분자들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멍청할 것이다. 노동자들은 점차적으로만 명확한 계급의식을 획득한다. 노동조합은 기회주의적 편향을 노동자들에게 주입할 문화적 매개물을 언제나 만들어낸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당은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당원들에게 자주 이렇게 주지시켜야 한다: 노동계급의 후진층을 교육하기 위해서 이들의 정서에 적응하는 일이 노동조합의 보수적 관료들의 정치에 영합하는 것으로 변질되어서는 안된다. 당이 새로운 발전단계에 접어들 때마다 그리고 당원의 수가 늘어나 당활동 방식이 복잡해질 때마다 새로운 가능성뿐만 아니라 새로운 위험도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가장 혁명적인 조직에서 훈련되었을 경우에도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노동자들은 당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갖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 당의 단계에서 이것은 전혀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현재 비노동계급적 소수파는 비노동계급적 청년당원들의 다수를 잡아끌면서 우리의 이론 , 우리의 강령, 우리의 전통을 수정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캐넌 파벌"과의 싸움에서 편의를 도모하려고 가볍게 저지르고 있다. 지금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아니라 바로 쁘띠부르조아 소수파 지도자들이 당을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다. 미래에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당을 등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 단호하게 쁘띠부르조아 소수파들에 대한 투쟁을 수행해야 한다.

더욱이 노동조합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지들이 현재 저지르고 있거나 미래에 저지를 오류들은 현재 미국 노동계급이 우리 당에 가하는 압력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노동계급은 우리의 계급이다. 우리는 노동계급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압력은 동시에 우리의 주요한 역사적 임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소수파의 오류들은 다른 계급의 압력을 반영하고 있다. 이 계급과 이데올로기적으로 결렬하는 것은 미래에 있을 우리의 혁명적 성공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이다.

청년 당원들에 대한 소수파의 논리는 철저하게 잘못되어 있다. 물론 노동계급 청년들을 획득하지 않고서는 혁명정당은 발전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현재 거의 전적으로 쁘띠부르조아 청년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는 사회민주주의적 즉 기회주의적 정치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 청년당원들의 지도자들은 의심한 여지없는 미덕과 능력들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들은 쁘띠부르조아 연합주의 정신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이 이러한 환경과 결별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노동계급 사이에서 일상적인 어려운 일들을 수행하기 위해 거창한 직책 없이 파견되지 않는다면 이들은 영원히 혁명운동에서 사라질 것이다. 다른 모든 문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청년 문제에 있어서도 섁트먼은 불행하게도 철저히 잘못된 입장을 견지해왔다.  

 

 

 

[23. A Letter to Martin Abern] 마튼 에이번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그렇다면 조직이 분리되겠군" 하고 동지가 말했다는 소식을 캐넌 동지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그는 1939년 12월 28일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동지가 작성한 문서는 이미 당내에 널리 배포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소수파 지도자 동지 두 명만이 이 문서에 대해서 명확한 논평을 내렸을 뿐입니다. 에이번 동지는 이 글의 제목과 첫 몇 단락을 읽고난 후 골드먼 동지에게, `그렇다면 조직이 분리되겠군'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캐넌 동지를 믿을만한 동지로 알고 있으며 그가 한 말의 진실을 의심할 이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동지는 그의 말이 "거짓말이다"라고 말합니다. 격렬한 투쟁 과정에서 이런 종류의 오해는 어느 쪽의 악의가 없이도 아주 자주 일어나는 법입니다. 오랜 경험을 통해 나는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캐넌 동지의 말이 진실인지를 확인하려는 노력을 했느냐고 동지는 나에게 묻고 있습니다. 나는 전혀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내가 사적인 편지에서 동지의 발언을 사실로 인정하고 유포했다면 의리를 저버린 행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지가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고되었다"는 표현이 들어있는 나의 서한들을 공개했습니다. 결국 동지가 스스로 한 말을 확인하고 부인할 완전한 가능성을 열어두었습니다. 당내 토론에서는 이러한 확인 방식이 가장 좋다고 믿습니다.

동지가 보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과거 동지들이 자행했던 많은 거짓 발언들을 나는 그동안 무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동지의 공개서한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주목할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등등. 그렇다면 "많은 거짓 발언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누가 거짓 발언을 했다는 것입니까? "다른 무엇보다도"는 또 무엇입니까? 어떤 종류의 내용을 의미합니까? 동지의 이런 표현들은 경험없는 동지들에게 일종의 애매한 암시로 이해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까? 나의 글 가운데 "많은 거짓 발언들"과 "다른 어떤 것들"이 있다면 정확하게 이 내용들을 밝히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만약 이런 거짓 발언들을 내가 하지 않았다면 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표현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많은 거짓 발언들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면 어떻게 "무시할 "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이 말은 동지의 당에 대한 무관심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다면 조직이 분리되겠군"하고 말한 부분을 동지 스스로 딱잘라 부인하니 반갑습니다. 나는 동지가 편지에서 보인 힘찬 부인 의사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동지의 부인은 공식적인 것은 아니다; 동지는 캐넌 동지가 인용한 내용을 부인하고 있다; 동지는 나와 마찬가지로 조직 분리 행위를 제4인터내셔널에 대한 비열한 배신행위라고 보고 있다.  

1940년 1월 29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멕시코

 

[24. Two Letters to Albert Goldman] 앨버트 골드먼 동지에게 보내는 2 통의 편지   

골드먼 동지,

동지의 2월 5일자 편지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에이번 동지의 조직 분리 발언을 내가 공개한 이유는 에이번 동지를 비롯한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의 명확한 발언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수파 지도자 동지들의 소위 숨겨진 의도가 아니라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등시민"에 대한 우스갯 소리를 이미 들었습니다.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에게 이렇게 묻고자 합니다: 다수파 그룹을 "캐넌 파벌" 또는 "보수적 관료들" 등으로 부른다면 소수파 동지들은 자신들을 이등시민의 지위로 격하시키려는 것인가? 모든 쁘띠부르조아 분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이들의 대단히 예민한 감성입니다. 이 점을 덧붙이고자 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섁트먼이 자신의 공개서한을 통해 나를 이등시민으로 만들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의 정신분석적 추측이 아니라 그의 사상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일련의 오류들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끝에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서로를 히스테리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분파적 히스테리를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해 대항 분파들이 아주 음험하고 기괴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인상입니다. 내가 캐넌 동지와 서한을 주고 받는 것을 음모를 숨기기 위한 위장이라고 이들이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도 기가 막혀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쁘띠부르조아 히스테리에 대한 가장 좋은 치료약은 맑스주의적 객관화 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변증법, 맑스주의 사회학, 소련의 사회 성격, 전쟁의 성격 등에 대해 토론을 진행시킬 것입니다. 조직 분리를 유도하겠다는 황당하고도 범죄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원들의 중요한 부위가 우리의 주장을 확신하여 쁘띠부르조아적 입장에서 노동계급적 입장으로 넘어오는 것을 돕기 위해서 입니다.  

1940년 2월 10일

동지적 애정을 보내며

레온 트로츠키

 

동지,

소수파 대회는 전국 규모의 소위원회(caucus)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대회가 개최되었다고 해서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조직 분리를 위한 잘못된 길을 새로이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조직 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수파 내부에는 조직 분리 문제에 대해 두 세 가지 경향이 확실히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소수파 대회의 목적이 이러한 경향들을 통일시키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기초를 바탕으로 통일을 하겠습니까? 어쩌면 일부 지도자들은 필사적인 감정 속에 조직 분리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수파가 당의 단합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의식적으로 조직 분리 세력의 시도를 어렵게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동지가 속한 소위원회 아니면 전국위원회의 공식적 다수파 아니면 정치위원회가 당의 단합 문제만을 담은 서한을 소수파 대회에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서한에는 소련의 사회 성격이나 전쟁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소수파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포기해야 당에 남을 수 있다고 잘못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이 당과 제4인터내셔널에 대해 진정으로 헌신하며 규율을 준수할 경우 이들은 우리와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40년 2월 19일

레온 트로츠키

 

[25. Back to the Party!] 당으로 복귀합시다  

동지들,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아직도 우리의 이론적 또는 정치적 주장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의 일관되지 못한 주장이 다수파 동지들의 글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이제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게릴라전으로 이행한 것 같습니다. 게릴라전은 패배한 많은 군대들의 운명입니다. 골드먼 동지는 2월 12일자 회람을 통해 소수파의 새로운 전투 방식을 적절하게 묘사했습니다. 이 새로운 방식의 가장 기묘한 예를 맥다널드 동지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자유지(紙)(Liberty) 에 기고한 글을 그는 섬세하기보다는 용감하게 공격했습니다. 이 글에서 나는 소련의 모순적 성격과 적군의 "진보적 역할 "을 분석했는데 이 내용을 그는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크론슈타트 봉기를 분석한 논리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당파평론지](Partisan Review)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최소한 부르조아 언론을 상대할 때는 내가 "실제로는" 소수파, 섁트먼 또는 자기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입장과 모순되며 스탈린주의에 투항하는 나의 선언문들은 캐넌 동지를 도우려는 목적으로 당내 토론집에만 실리고 있다는 사실 역시 새로이 발견했습니다. 맥다널드 동지의 새로운 발견들을 좀더 명확하게 표현하자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부르조아 언론에 영합하고 자유지의 독자들이 보기 좋은 글을 쓸 때는 트로츠키는 섁트먼과 똑같이 그리고 자기와 비슷한 입장을 가진 글을 쓴다; 그러나 당에 대해서 글을 쓸 때에는 지독하게 소수파를 비판한다. 당파평론지는 정신분석에 대해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맥더날드 동지가 자신에 대해 정신분석을 해보면 아마 자기의 무의식을 발견했다고 인정할 것입니다.

소련의 모순적 성격 그리고 적군의 모순적 역할을 소수파 동지들이 모든 글과 연설에서 분석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이들이 이 문제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이 결과를 모든 경우에 올바르게 적용할 것을 요구할 뿐입니다. 자유지에 실린 나의 글은 소련의 사회 성격이 아니라 스탈린의 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익명의 글이 멕시코의 부르조아 언론에 실렸습니다. 이 글은 내가 스탈린의 대외정책을 승인하고 있으며 스탈린과 화해를 추구하고 있다고 "트로츠키 측근 소식통들"을 인용하며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들이 미국 언론에도 유포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스탈린주의에 투항했다고 맥다널드 부류들이 끔찍하게 심각한 비난을 가했을 것이고 이 내용을 멕시코 언론이 나름의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세계 부르조아 언론이 당내 토론을 악용하는 사례를 막기 위해서 나는 국제정치에서 스탈린의 역할을 폭로하는 데 초점을 맞춘 글을 자유지에 실었던 것입니다. 이 글은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해 사회학적 분석을 전혀 가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에 당시 좀더 시급하다고 생각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언제나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순간에 필요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아마 이 글의 내용이 소수파의 주장과 일치하는 부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파의 주장이라는 것도 실제로는 맥다널드 동지가 등장하기 훨씬 전에 우리가 골백번이나 주장한 내용의 복사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좀더 심각한 문제들을 다루어 봅시다. 나에게 보낸 에이번 동지의 편지는 조직을 분리하겠다는 의지를 아주 확실하게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직을 분리하겠다는 그의 근거는 정말이지 한심하면서 동시에 경악스럽습니다. 이 표현은 그대로 나의 감정을 가장 누그러뜨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캐넌 파벌"이 당대회에서 다수파가 된다면 에이번과 그의 동료들은 "이등"시민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에이번은 와이스보드, 피일드, 오울러 등과 같이 일등시민들 가운데 일등시민이 되어 자기 왕국을 갖기를 더욱더 원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당내에서 일등 이등 "시민들"을 결정할 수 있습니까? 당만이 이것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당이 어떻게 이런 결정들을 할 수 있느냐고요?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토론을 누가 주도했습니까? 에이번과 그의 부관들이 했습니다. 이 동지들이 글이나 말을 제한당한 적이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이번의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당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당과 제4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신망을 잃었습니다. 이들이 소중한 동지들이란 점에서 이러한 현상은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동지들은 이제 당활동을 열심히 진지하게 수행하는 것을 통해서만 잃었던 신망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간, 인내심, 확고한 의지 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제4인터내셔널의 원칙들을 가지고서 당을 설득하는 작업에 대해 에이번은 희망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따라서 조직을 분리하려는 경향은 일종의 조직 이탈행위가 됩니다. 에이번 동지의 논리가 너무도 한심스러운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또한 경악스럽기까지 합니다! 노동계급적 다수파에 대한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의 경멸감을 기저에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수파는 아주 능력있는 집필가, 연설가, 조직가들이며 다수파는 소양도 없고 소수파를 액면 그대로 평가할 능력도 없다. 그러니 고상한 인간들로 새로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 더 낫다!

제3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우리 좌익반대파는 하나의 분파로 남아있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스탈린주의 다수파는 우리를 박해했고 합법적 표현수단들을 박탈했습니다. 가장 지독한 비방을 자행했으며 소련 국내에서는 우리 동지들을 체포하고 총살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자 당원들과 분리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일말의 가능성이 존재할 때까지 우리는 분파임을 자부했습니다. 제3인터내셔널의 부패한 전체주의적 관료집단의 모든 만행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제4인터내셔널이야말로 전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정직한 혁명조직입니다. 우리 당"기구" 는 강제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완벽한 당내 민주주의를 통해 모든 문제가 결정되며 모든 동지들이 평가됩니다. 다수파 동지들이 오류를 범한다면 소수파 동지들이 점진적으로 이들을 올바른 길로 교육할 수 있습니다. 다음 당대회 이전에는 안되더라도 그 이후에는 가능합니다. 소수파는 새 당원들을 조직하여 이후 다수파가 될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에 대한 약간의 믿음, 노동자들이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에게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현재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스스로가 구축한 환경 속에서 히스테리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이들은 부르조아 여론에는 영합하면서 제4인터내셔널의 발전에는 영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인내력 부족은 계급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즉 노동자에 대한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의 경멸감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에이번 동지가 표현한 조직 분리 경향이 너무도 경악스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에이번 동지는 증오심을 가지고 사태를 평가하고 미래를 조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 증오심은 정치에서는 혐오스러운 감정입니다. 에이번 동지의 태도와 그의 조직 분리 움직임은 소수파의 건전한 동지들 모두에게 혐오감만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동지들, 당으로 복귀합시다! 에이번 동지가 가리키는 길은 막다른 골목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4인터내셔널 이외의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1940년 2월 21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멕시코

 

[26. "Science and Style"] " 과학과 문체 "  

동지들,

버넘 동지의 글 "과학과 문체"를 받았습니다. 결국 곪은 상처가 터지고 말았군요. 이 글은 우리에게 중요한 정치적 이익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버넘은 약간 "현대화된" 예들을 들면서 40년도 더 전에 러시아에서 스트루베가 그리고 더 큰 규모로 75년 전에 뒤링이 독일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바를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글은 미국 "급진파"의 이론적 후진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과학적" 관점으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문체"에 관한한 나는 이스트먼의 문체를 더 좋아한다고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이 글은 이론의 측면에서는 전혀 재미가 없습니다: 버넘 교수가 1천1번째로 변증법을 반박했지만 이것은 과거의 반박들과 비교해서 가치있는 구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이 글은 논란의 여지없이 중요합니다. 소수파에게 이론적 영감을 제공해주는 버넘이 에이번의 과거 동료였던 마스티만큼이나 과학적 사회주의와 멀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섁트먼은 보그다노프의 철학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보그다노프는 볼셰비즘과 명확히 결별한 이후에도 이 글의 철학적 수준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을 보였습니다. 따라서 이 글이 보그다노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나처럼 당은 에이번과 섁트먼 동지에게 이렇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버넘의 "과학"과 "문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핀란드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일회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건들의 진정한 동인들을 드러내는 국제적 상황의 변화는 즉시 이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온갖 편향들을 반박할 것 입니다. 그러나 이제 "과학과 문체"가 등장한 이상 에이번과 섁트먼 동지는 이 불쌍한 글 자체가 아니라 과학, 맑스주의, 정치, "도덕" 등과 관련된 버넘의 사상 전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책임을 질 수 있습니까? 조직 분리를 준비하고 있는 동지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즉 사상 전반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한 명의 "지도자"의 이름과 자신들이 단 일주일 또는 핀란드전쟁 기간 동안만이 아니라 수년 동안 연상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종기는 이제 물러 터졌습니다. 핀란드와 캐넌 동지에 대해서만 약간 토론하고 싶다는 말을 에이번과 섁트먼 동지는 더 이상 반복할 수 없습니다. 이 동지들은 맑스주의와 제4인터내셔널을 가지고 더 이상 숨바꼭질을 할 수 없습니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버넘이 "반동적"이라고 선언하는 맑스, 엥겔스, 프란츠 메링,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의 전통을 계승할 것입니까 아니면 전(前) 맑스주의적 쁘띠부르조아 사회주의의 최신판인 버넘의 사상을 받아들일 것입니까?

이러한 수정주의가 과거에 정치적으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부르조아 체제가 숨이 넘어가는 고통을 겪고 있는 시대에 버넘주의의 정치적 결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욱 직접적이며 반혁명적일 것입니다. 에이번 동지, 섁트먼 동지, 동지들은 발언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견해를 밝히십시오!  

1940년 2월 23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멕시코    

 

[27. A Letter to James Cannon] 제임스 캐넌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동지의 2월 20일자 편지에 대한 답장입니다. 소수파 대회는 이제 끝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지는 편지에서 구체적인 전술문제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동지의 즉각적인 전술은 최소한 51%는 이 대회의 결과에 달려있다고 믿습니다.

소수파 전원이 조직 분리를 준비하고 있으며 단 한 명도 우리 쪽으로 획득할 수 없을 것이라고 동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전제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소수파 동지들이 클리블런드 대회를 소집하기 전 이미 우리의 제의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때 노선을 급격히 전환시켜서 화해 조치들을 더욱 열정적으로 펼 필요가 있었습니다. 조직 분리를 찬성하는 여론에 대비하여 새로운 인터내셔널 한 호를 출간할 필요가 있다고 동지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는 동지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수파 대회는 2월 24 25일에 열렸으며 당대회는 4월초까지는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화해를 제의하고 소수파의 조직 분리 의사를 비난하고 새로운 인터내셔널 새로운 호를 발간할 시간을 동지는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당의 단합을 위해 다수파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습니다. 이 사실을 제4인터내셔널 다른 지부들에게 알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야 합니다. 국제집행위원회 소집을 우리 3명 모두가 제안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대단히 중요한 기구의 모든 구성원들을 시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수파 동지들 다수가 드러내고 있는 조급함을 아주 잘 이해합니다. 이 조급함은 아주 빈번하게 이론적 무관심과도 연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의 사태는 국제적으로 제4인터내셔널 전체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옳아도 주관적 평가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객관적 사실에도 근거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이 점을 다수파 동지들은 상기해야 합니다.  

1940년 2월 27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28. A Letter to Joseph Hansen] 조지프 핸슨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스페인 혁명과 관련하여 내가 인용한 편지를 섁트먼은 자신이 아니라 캐넌과 카터가 썼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동지들의 서명을 숨기거나 왜곡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의 경우 섁트먼 동지의 서명만이 있습니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수파 동지들도 섁트먼과 같은 오류를 저지를 수 있었지만 이런 오류들을 체계적으로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오류들을 기반으로 분파의 강령을 삼지도 않았습니다. 나의 글은 이것만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전부입니다.

에이번과 버넘은 내가 자신들의 말을 미리 "확인"도 하지않고 인용한다고 화를 내고 있습니다. 이 선언들을 모두 공개하여 이 발언들을 자기들 입에서 나온 것으로 완벽히 확인하거나 부인하는 상황을 이들은 싫어하고 있습니다. 이 대신 5명에서 7명 정도의 제 3자와 한두 명의 속기사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이곳에서 구성하여 그쪽으로 보냈으면 하는 것이 이들의 의도인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이렇게 도덕적인 소동을 일으키고 있을까요? 여러 번에 걸쳐 버넘은 변증법을 종교와 동일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특별한 경우와 관련하여 나에게 보고된 내용을 나는 그의 발언으로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인용된 문장대로는 말하지 않았다고 발뺌하고 있습니다. 끔찍한 일이군요! 이것이 볼셰비키의 냉소주의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에이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조직 분리를 준비하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골드먼에게는이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군요. 이것은 비방이요, 거짓입니다!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혼란에 처한 쁘띠부르조아들은 (과학적이 아닌) 도덕적인 고뇌에 빠져듭니다. 도덕 문제를 다룬 나의 글은 이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바 입니다. 그런데 우리 당 내부에도 이와 똑같은 현상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들 새로운 도덕론자들은 이스트먼에 대해서 그리고 레닌의 유언장에 대해서 내가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이야말로 경멸할만한 위선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시 좌익반대파는 공산당의 때이른 조직 분리를 피하기 위해 모든 공개적인 활동을 중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이스트먼은 레닌의 유언장을 자기 맘대로 공개했던 것입니다. 그 유명한 영러 노동조합 위원회(Anglo-Russian Trade Union Committee), 중국 혁명, 그리고 심지어는 지노비에프 분파의 탄생 등 주요한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에 이 짓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좌익반대파는 시간을 벌기 위해 전술을 구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스탈린, 지노비에프, 카메네프의 삼두체제는 반대파 당원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스트먼이 공개한 레닌의 유언장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이들은 최후통첩을 나에게 보냈습니다: 삼두체제가 작성한 선언문에 서명을 하지 않으면 즉시 이 문제에 대해서 당내투쟁을 전개하겠다. 당시 그 문제는 절대적으로 반대파에게 불리했습니다. 따라서 이 최후통첩을 받아들여 정치국이 작성한 선언문에 내가 서명하기로 반대파 중앙이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필요를 추상적인 도덕적 문제로 변모시키는 것은 쁘띠부르조아 사기꾼들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은 망해도 좋으니 정의여 영원하라! 기꺼이 이렇게 선언하면서 자기들은 맘대로 하고 싶은 짓을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기들이 혁명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과 비교하면 멘셰비키들은 진짜 영웅들이었습니다.  

1940년 2월 29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29. Three Letters to Farrell Dobbs] 패럴 답스 동지에게 보내는 3 통의 편지  

동지,

소수파의 열병에 걸린 듯한 급격한 정치적 진화과정을 이곳에서 제대로 파악하기는 당연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소수파 동지들은 뒤에 퇴로로 남겨진 다리들을 모두 서둘러 불태우고 배수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처럼 느껴집니다. 버넘의 글 "과학과 문체"는 예상 외의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섁트먼, 에이번, 그리고 그 밖의 동지들이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현상은 대단히 실망스러울 뿐입니다. 이것은 이론적,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당의 단합을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판단하기로는 이들은 당의 단합이라는 미명 하에 조직을 분리하고자 합니다. 섁트먼은 "역사적 전례들"을 찾고 있습니다. 아니 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발명하고 있습니다. 볼셰비키당 내부에서 좌익반대파는 독자적 신문을 발행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당은 수십만의 당원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당내 토론은 이들 수십만의 당원들을 설득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토론을 당지도부 내로 한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당의 최종 결정은 두 소규모 그룹이 아니라 수십만의 당원들에게 달려있었습니다. 이 사실때문에 다수파와 소수파 신문이 공존했더라도 그 위험성이 적었습니다. 현재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비교적 적은 수의 당원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당내 토론은 언제나 풍부함을 넘어설 정도로 활발했습니다. 최소한 다음 시기까지 서로의 이견은 명확히 확인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수파가 독자적으로 신문이나 잡지를 발행하는 것은 당원 설득용이 아니라 당 바깥에서 다수파를 깍아내리는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회주의노동자당과 같은 혁명적 선전조직의 동질성과 응집력은 대중정당의 경우보다 더 탄탄해야 합니다. 같은 당에 속한 두 개의 독자 조직이 다른 이론 , 다른 강령, 다른 구호, 다른 조직 원칙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입니다. 이 상황을 숨기기 위해 완전히 거짓으로 당의 단합을 외치는 것을 제4인터내셔널은 인정해서도 안되고 인정할 수도 없다고 동지는 주장합니다. 동의합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공개적인 조직 분리가 위선적인 단합보다는 천배나 더 바람직할 것입니다.

또한 한 나라에 두 조직을 둔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소수파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상적 상황은 두 경우에만 일시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두 조직 모두 또는 한 조직의 정치적 성격이 명확하지 않아서 이 문제를 제4인터내셔널이 결정할 시간이 필요한 경우가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노동자-농민 사회당(PSOP)에 대한 입당전술과 같은 사안처럼 이견이 아주 날카롭고 제한적으로 존재했을 경우 두 조직의 존재를 인정한 경우가 두 번째입니다. 그러나 현재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상황은 이 두 경우와 완전히 다릅니다. 진지한 전통을 가진 통일된 정당이었다가 이제는 두 분파가 서로 투쟁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중 한 분파는 계급적 구성과 외부 압력 때문에 몇 달동안 우리의 이론 , 우리의 강령, 우리의 정치, 우리의 조직방식에 대해 화해할 수 없이 대립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만약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따라 함께 활동할 것을 두 분파 모두 동의할 경우 공동의 실천을 통해 반대 분파의 최상 분자들을 설득하여 획득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소수파가 독자적인 출판물을 발행하는 독자 조직이 될 경우 버넘의 노선만이 지배할 것입니다. 이럴 경우 제4인터내셔널은 이러한 조직의 불가피한 퇴보를 노동자들에게 숨기면서 이 조직에게 자신의 명함을 빌려줄 이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이것이 나의 의견입니다. 차라리 소수파가 완전히 딴 살림을 차리도록 강제한 후 공개적으로 대중에게 가장 날카로운 정도로 경고하는 것이 제4인터내셔널에게 이익이 됩니다.

따라서 당대회는 소수파에게 명확한 선택을 요구할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소수파가 당 내부에서 중대한 활동을 수행할 권리를 보장받고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기초하여 진정한 당내 단합을 도모하던가 노동계급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이며 명확한 결별을 하던가 양자택일 하도록 해야합니다. 이 결정은 오래 전에 국제집행위원회가 내렸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기구는 현재 존재하지 않습니다.  

1940년 3월 4일

레온 트로츠키

 

추신 : 소수파의 클리블런드 대회가 채택한 당의 단합 관련 결의문을 지금 받았습니다. 소수파의 일반당원들은 조직 분리를 원치 않는 것 같습니다.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정치활동이 아니라 순수한 문필활동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당원들이 조직 분리에 동참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당의 단합에 대한 결의문이라는 이름으로 당의 분리에 대한 결의문을 제출했습니다. 결의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볼셰비키당의 소수 분파들은 독자적인 정치신문을 발행했다." 언제 그랬다는 것입니까? 무슨 신문말입니까?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조직 분리의 의도를 위장하기 위해 추종당원들이 오류를 범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소수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글솜씨에만 모든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신문이 다수파의 신문보다 월등할 것이라고 서로 확신시키고 있습니다. 쁘띠부르조아 분파로서 지식인과 능력있는 문필가들을 더 많이 보유했던 러시아 멘셰비키들도 언제나 이런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희망은 모두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유창한 문필력은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충분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화강암처럼 탄탄한 이론적 기반, 과학적 강령, 정치적 사고의 일관성, 확고한 조직원칙 등이 있어야 합니다. 소수파는 이런 것들을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혀 반대되는 특징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내가 동지의 견해에 완전히 동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외부세계에 버넘의 이론 , 섁트먼의 정치노선 , 에이번의 조직방식을 제시하려거든 당과 제4인터내셔널이 책임지지 않도록 독자적인 이름을 내걸어야 합니다.    

 

동지,

이 편지를 받을 때에는 당대회가 진행 중일 것이며 조직 분리가 불가피한 것인지를 동지가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럴 경우 에이번 동지 문제는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소수파가 기존의 입장에서 후퇴할 경우에 대비하여 전에 했던 제안들을 다시 주장하겠습니다. 전국위원회의 토론과 결정사항에 대한 비밀들을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며 지금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도 아닙니다. 당원들의 약 40%는 에이번이 가장 훌륭한 조직가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 소수파가 당에 남아 있게 될 경우 에이번이 자신의 월등한 조직능력을 증명하거나 스스로 타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전국위원회 내부사항은 전국위원회 전체나 이 위원회 산하 정치위원회 또는 서기국만이 공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임 전국위원회 첫 회의는 이러한 내용을 우선 결정해야 합니다. 한편 서기국은 비밀과 관련된 조항들을 당헌에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조치에도 불구하고 비밀이 누설될 경우 공식적으로 조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에이번이 누설자라면 공개적인 경고조치를 받아야 합니다. 그가 다른 사항을 위반하면 서기국에서 축출되어야 합니다. 일시적인 결점들이 있더라도 이러한 조치들은 뉴욕 지부의 조직가인 에이번을 서기국의 통제 바깥에 두는 것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더없이 유리합니다.

동지가 현재 서기국의 구성인사들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조직 분리가 뒤따를 경우 아마 가장 훌륭한 서기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파가 당에 남아있을 경우는 다수파 동지들만이 서기국을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5명의 서기국 국원 가운데 3명은 다수파 2명은 소수파를 대표하게 될 것입니다.

소수파가 조직 분리를 망설일 경우 비공식적으로 이들이 다음 사항들을 알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섁트먼은 정치위원회 뿐만 아니라 편집진에도 배치할 의향이 있다; 심지어는 에이번을 서기국에 포함시킬 의향도 있다; 이와 같은 수준의 다른 조치를 취할 용의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소수파가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되는 것만은 인정할 수 없다.  

* * *

국제집행위원회 위원인 르브렁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이 동지는 참 기이합니다! 자본주의 체제가 숨이 넘어가고 있으며 전쟁이 발발했으며 곧 조직이 불법화될 상황에서 볼셰비키당의 집중주의가 포기되고 무제한적인 민주주의가 시행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뒤죽박죽입니다! 그러나 이런 동지들의 민주주의란 순전히 개인적 의미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겠다. 르브렁과 잔슨은 특정 원칙에 입각해서 그리고 특정 조직의 대표들로서 국제집행위원회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동지는 원칙을 버리고 자기들이 속한 조직을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이 "민주주의자들"은 집단적 규율을 전혀 도외시하는 완전한 보헤미안(Bohemian)으로 행동했습니다. 국제대회가 열릴 경우 이 동지들은 가장 가혹한 비판을 받으며 직위에서 해제될 것입니다. 이 동지들도 이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들은 민주주의라는 미명을 들먹이며 자신들이 제거될 수 없는 원로원 의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인들의 말에 의하면 전시에는 전시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것은 제4인터내셔널의 지도적 기구를 각 지부들의 실제 세력관계에 맞게 반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거될 수 없는 원로원 의원들의 허세보다도 이 경우 더 많은 민주주의가 존재합니다. 이 문제가 논의에 오를 경우 이 편지의 내용을 르브렁의 편지에 대한 나의 답장으로 인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40년 4월 4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동지,

당대회에 대한 동지와 핸슨 동지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판단해 보건데 당의 단합을 위해 동지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이런 조건 하에서도 소수파가 조직을 분리한다면 모든 노동자들은 이들이 얼마나 볼셰비즘의 원칙에서 멀어져 있으며 당내 노동계급 다수파에 대해 얼마나 적대적인 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동지들이 내린 결정의 세세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더 많은 정보가 입수 되는대로 좀더 구체적으로 판단할 것입니다.  

상징 논리학(symbolic logic), 버트런드 러쎌 등의 논리에 대해 버넘이 쓴 논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글을 걸런드가 썼습니다. 이 글에 관심을 갖기를 권합니다. 이 글은 매우 날카롭습니다. 소수파가 당내에 남아있고 버넘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편집진에 유임될 경우 이 글은 "우호적" 표현들을 사용하여 아마 다시 집필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징논리학에 대한 논지는 아주 진지하고 훌륭합니다. 특히 미국 독자들에게는 아주 유용하리라 생각됩니다. 웨버 동지 역시 자신의 마지막 논문의 중요한 부분을 이 주제에 할애했습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실리기 위해 이 부분을 그가 독립된 글로 다시 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옹호하는 이론적 캠페인을 이제 체계적으로 진지하게 계속해야 합니다.  

캐넌의 팜플렛 "노동계급 정당을 향한 투쟁"은 아주 훌륭합니다. 진정 노동자 지도자다운 글입니다. 그간의 논쟁은 이 글보다 더 수준높은 글을 생산하지 못했어도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었습니다.  

1940년 4월 16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30. Petty-Bourgeois Moralists and the Proletarian Party] 쁘띠부르조아 도덕론자들과 노동계급 정당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의 토론은 철저했으며 민주적이었다.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충만한 가운데 당대회는 준비되었다. 소수파는 당대회에 참여함으로써 이 대회의 정통성과 권위를 인정하였다. 소수파가 당대회 이후 계속해서 자신의 견해를 펼 수 있도록 다수파는 모든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소수파는 당과 독자적으로 대중에게 호소할 수 있는 자유를 요구하였다. 다수파는 당연히 말도 안되는 이 요구를 거부하였다. 한편 당이 모르게 소수파는 수상한 음모를 멋대로 꾸미더니 결국 당과 제4인터내셔널 전체의 노력으로 발간되었던 기관지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전용하였다. 더욱이 기관지 편집진 5명 가운데 2명을 다수파는 소수파에게 할당하기로 동의한 바 있었다. 그러나 지식인 "귀족"들이 노동자당의 소수파로 머물 수 있겠는가? (버넘) 교수를 노동자와 같이 취급하는 것이 결국 "관료적 보수주의" 아니던가!

나에 대한 최근의 반론에서 버넘은 사회주의가 "도덕적 이상(moral ideal)"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물론 이것은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19세기 초 도덕은 "진정한 독일사회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활동 초기부터 이 경향을 비판하였다.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혁명당은 유물론적 사회주의에 대항하여 "도덕적 이상"을 내세웠다. 도덕을 등에 업은 자들이 정치판에서는 흔한 사기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유감스럽게도 입증되었다. 1917년 이들은 부르조아와 외부 제국주의 세력의 손에 노동자들을 완전히 팔아넘겼다.

쁘띠부르조아 교수나 신문쟁이가 고고한 도덕 기준을 말하기 시작하면 돈지갑을 잘 간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오랜 정치경험이 나에게 가르쳐준 바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 현상이 일어났다. "도덕적 이상"의 미명 하에 쁘띠부르조아 지식인이 이론지라는 노동자당의 지갑을 턴 것이다. 이들 발명가, 도덕론자, 민주주의 옹호자들의 조직방식의 아주 조그만 실제 예를 여기서 엿볼 수 있다.

"먹물" 쁘띠부르조아에게 당내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자신이 원하는대로 말하고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체제가 바로 이것이다. "먹물" 쁘띠부르조아에게 "관료주의"란 무엇인가? 노동자의 다수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결정과 규율을 강제하는 체제가 바로 이것이다. 노동자 여러분, 이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쁘띠부르조아 소수파는 혁명적 맑스주의에 대항하여 노동계급 다수파로부터 조직을 분리해 나갔다. 버넘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자신의 벌레먹은 "과학"과 합치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섁트먼은 혁명적 맑스주의가 "실제 과업"의 측면에서 보면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이 두 신사의 반맑스주의 동맹에 에이번은 자신이 간수하고 있던 조그마한 둥지를 서둘러 결합시켰다. 이제 이 신사양반들은 당으로부터 훔친 잡지를 "혁명적 맑스주의" 기관지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것이 이데올로기 약장수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독자들은 이 편집자들에게 자신들의 유일한 강령적 작업 즉 버넘의 "과학과 문체"를 출판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만약 이들이 현란한 상표로 엉터리 상품을 판매하는 돌팔이를 닮을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면 스스로이 글을 출판한 의무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은 이 글에서 도대체 어떤 종류의 "혁명적 맑스주의"가 깃들어 있는지를 스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신사양반들은 감히 이 짓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버넘은 자신의 너무도 노골적인 글과 결의문들을 자기 가방 속에 감추는 일에 능하다. 섁트먼은 주변머리가 없어서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옹호하는 변호사 역을 자청해왔다.

훔친 기관지의 맨 첫 번째 "강령적" 글들은 이 새로운 반맑스주의 집단의 경망스러움과 공허함을 이제 완전히 드러내고 있다. 이 집단은 "제3진영(Third Camp)"이라는 이름을 달고 등장하고 있다. 이 새로운 이름의 정체는 무엇인가? 자본주의 진영과 노동계급 진영이 있다. 그렇다면 쁘띠부르조아들의 안식처인 "제3진영" 이 존재하는가? 논리를 보건데 제3진영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쁘띠부르조아들은 자기 "진영"을 현란한 말로 치장하고 있다. 이제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프랑스와 영국이 한 진영을 그리고 히틀러와 스탈린이 또 다른 진영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섁트먼을 동반한 버넘의 제3진영이 있다. 이들에게 제4인터내셔널은 히틀러 진영에 속해 있다.(스탈린은 이것을 이미 오래 전에 발견했었다.) 그래서 새로운 위대한 구호가 등장한다: 운명의 장난에 고통받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혼란된 평화 애호가들이여, "제3" 진영의 깃발 아래 모이시오!

그러나 정말 큰 문제가 있다. 서로 싸우고 있는 제1진영과 제2진영은 부르조아 세계를 전부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 중립 내지 반중립 국가들은 어디에 속하는가? 미국은? 이탈리아와 일본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인도는? 중국은? 중국과 인도의 혁명적 노동자들이 아니라 피억압국인 중국과 인도 말이다. 학교 아동에게나 걸맞는 3 진영 이론은 아주 사소한 것 즉 인류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식민지 세계 를 빠뜨리고 있다!

인도는 영국 편에 서서 제국주의 전쟁에 가담하고 있다. 인도의 볼셰비키주의자들이 아니라 인도에 대해서 가져야할 우리의 입장은 영국에 대한 입장과 같아야 하는가? 섁트먼과 버넘 외에 두 개의 제국주의 진영만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면 어디에 인도를 포함시켜야 하는가? 인도가 대영제국의 긴요한 일부이고 제국주의 전쟁에 가담하고 있더라도 그리고 간디를 비롯한 다른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배신적인 정책이 존재하더라도 인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영국에 대한 입장과 전혀 다르다. 이것이 맑스주의자가 해야할 말이다. 우리는 영국에 대항하여 인도를 옹호한다. 그렇다면 비록 스탈린이 히틀러와 동맹을 맺고 있을 지라도 소련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독일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왜 다를 수가 없는가? 해체할 가능성 밖에 남아있지 않은 반동적 사회형태에 비해 발전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더 진보적 사회형태를 왜 옹호할 수 없는가? 우리는 후자를 옹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옹호해야만 한다! 훔친 기관지의 이론가들은 계급적 분석을 기계적 이론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 대체품은 사이비 균형감각으로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제국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대단한 욕을 해대며 나찌에 굴복하고 있는 자신들의 행태를 위장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섁트먼과 그의 동료들은 "제3진영" 의 허풍쟁이 말로서 미국 쁘띠부르조아 여론에 대한 자신들의 투항을 위장하고 있다. 마치 제3진영이 쁘띠부르조아, 노동조합, 인도, 소련 등에 대해서 올바른 정책을 세울 의무가 없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제3진영" 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당, 클럽, 잃어버린 희망의 동맹, "인민전선 ", 이들 중 도대체 어느 것인가?

며칠 전만 해도 섁트먼은 언론에 자신을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소개했다. 만약에 이것이 트로츠키주의라면 최소한 나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다. 버넘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섁트먼의 생각과 나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 나는 적극적으로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협력관계를 맺어왔다. 그리고 이론에 대한 섁트먼의 경망스러운 태도, 허세나 부리는 쁘띠부르조아 현학자 버넘에 대한 그의 무원칙한 영합에 대해 편지들을 보내 항의했었다. 그러나 당시 버넘과 섁트먼은 모두 당과 제4인터내셔널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압력은 이들을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만들어 놓았다. 이들이 편집한 잡지에 대한 나의 태도는 다른 모든 쁘띠부르조아 맑스주의 위조품들에 대한 나의 태도와 다를 수 없다. 그들의 "조직방식"이나 정치적 "도덕"은 나에게 경멸감을 일으킬 뿐이다.

노동계급의 적들이 의식적으로 섁트먼을 조종하여 해당행위를 사주했더라도 그의 행위는 그간의 실제 행위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반맑스주의자들과 연합하여 맑스주의에 대항했다. 그는 노동자들에 대항해서 쁘띠부르조아들이 뭉쳐 함께 분파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당내 민주주의를 활용하기를 거부하였으며 다수의 노동계급 당원들을 설득하는 정직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세계대전의 상황 속에서 조직 분리를 획책했다. 이 모든 일들을 마무리짓기 위해 그는 이 조직 분리에 치사하고 더러운 스캔들의 베일을 덮어 우리의 적들이 우리를 공격할 빌미들을 제공하였다. "민주주의자들"이란 바로 이런 작자들이다! 그들의 "도덕"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

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소용없을 것이다. 이들은 파산했다. 불안정한 지식인들의 배신행위와 이들의 민주주의자 사촌들의 값싼 빈정거림에도 불구하고 제4인터내셔널은 앞으로 전진할 것이다. 그리고 당의 성격, 당 강령에 대한 충성심, 혁명적 규율 등의 의미를 이해할 능력이 있는 노동계급 혁명가들 가운데 진정으로 선발된 자들을 결집하고 교육할 것이다. 선진 노동자 여러분! 쁘띠부르조아 "제3진영" 에 대해서 단 한푼어치의 신뢰도 주지맙시다!  

1940년 4월 23일

 

[31. Balance Sheet of the Finnish Events] 핀란드 사태에 대한 대차대조표  

이들은 예상할 수 없었다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 체결된 불가침조약을 "우리가" 이미 예상했었다고 섁트먼과 버넘은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련군의 동부 폴란드 점령은? 핀란드 침략은? 아니다. "우리는" 이 사건들을 예상할 수 없었다. 개연성도 전혀 없고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이 사건들이야말로 우리 정치노선의 완전한 대변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고 섁트먼, 버넘 등은 주장한다. 히틀러와 부활절 초코렛 과자를 만들기 위해 스탈린이 그와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었다는 인상을 받고 이들은 고민에 빠졌다. 이들은 이 동맹을 "예상했다". (언제? 어디서?) 그러나 이 동맹의 이유와 목적은 예상할 수 없었다.

노동자국가는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끼인 채 어느 한 쪽에 대항하여 어느 한 쪽과 조약들을 체결할 권리를 전술로서 행사할 수 있다. 이들은 이 사실을 인정한다. 당연히 이 조약들은 노동자국가가 외부의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 경제적 전략적 고지를 점령하고 상황이 허락한다면 자체 기반을 확대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퇴보한 노동자국가는 나름의 관료적 방식으로 이러한 목적들을 달성하려고 시도하며 이러한 시도들은 언제나 세계노동계급의 이해와 모순을 일으킨다. 그러나 히틀러와 맺은 동맹으로부터 될 수 있으면 많은 것을 얻으려는 소련의 시도에 대해서 그렇게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의외의 측면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의 운수없는 정치가들인 섁트먼과 버넘이 "이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하나의 문제를 끝까지 철저하게 사고하지 않았다는 것 뿐이다. 1939년 여름 영불 합동 대표단과 질질 끈 협상 과정에서 소련은 공개적으로 발트해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이 요구를 거절하자 스탈린은 협상을 중단하였다. 히틀러와 합의를 볼 경우 스탈린이 최소한 발트해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 사건을 통해 명백해졌다. 정치적으로 성숙된 사람들은 바로 이 관점에서 문제를 접근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이렇게 물었다: 스탈린은 이 과제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그가 군사력에 의존할까? 등등. 그러나 사건들의 이후 전개과정은 스탈린보다는 히틀러에게 훨씬 더 많이 달려 있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구체적인 사건들은 예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실제 사건들의 전개방향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예상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퇴보한 노동자국가였기 때문에 소련은 제2차 제국주의 세계전쟁의 전야에 대단히 국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히틀러와 맺은 스탈린의 조약은 독일의 공격으로부터 소련을 지키고 일반적으로 소련이 전쟁에 끌려들어가지 않도록 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폴란드를 점령하는 동안 히틀러는 자신의 동쪽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반면 히틀러의 허가를 받고 스탈린은 동부 폴란드를 침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의 서부 국경을 히틀러의 공격에 대비하여 약간이나마 보충적으로 튼튼히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일련의 사건들의 결과 소련은 독일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로 인해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로부터 더욱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되었으며 히틀러에 대한 스탈린의 종속은 크게 증대되었다.

폴란드 분할 사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연장되어 진행되었다. 히틀러는 그의 "친구" 스탈린에게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점령하겠다는 계획을 넌지시 비추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탈린은 이 계획을 듣고 식은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발트해와 핀란드를 독일이 완전히 지배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로 인해 레닌그라드는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되었다. 다시 한번 스탈린은 자신의 동맹자에 대한 보충적인 안전보장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안전보장책이 바로 적군의 핀란드 침공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핀란드 지배계급의 심각한 저항에 직면했다. "군사적 유람여행"은 의외로 오래 끌었다. 한편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주요한 전쟁터로 될 위험성이 있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략준비를 마친 히틀러는 스탈린이 핀란드와 빨리 평화조약을 맺을 것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자신의 계획을 축소하고 핀란드를 소비에트화하려는 기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유럽 북서부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두드러진 특징들이다.  

 

제국주의 전쟁에 걸려든 작은 나라들

세계전쟁이 일어난 조건 속에서 작은 나라들의 운명을 "민족독립", "중립" 등의 관점에서 제기하는 것은 제국주의 세력이 발명한 신화에 속는 것이다. 문제는 세계지배에 있다. 소련의 생존문제는 사건들이 진행되면서 결말나게 마련이다. 현재는 뒷전으로 물러나 있는 소련의 생존 문제는 일정 시점에서 전면에 등장할 것이다. 약소국들은 이미 강대국들에게 놀아나는 졸(卒) 에 지나지 않는다. 약소국들은 제한적인 의미만의 자유 즉 강대국들 중에 자기 주인을 선택하는 자유만을 가지고 있다.

현재 노르웨이에서는 두 정부 즉 남부에서 독일군의 호위를 받고 있는 친나찌 정부와 북부에서 왕을 모시고 있는 구사민주의 정부 사이에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노르웨이 노동자들이 파시스트 정부에 대항하여 "민주" 진영을 지지해야 했는가? 스페인의 경우처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언뜻 보기에 긍정적인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이 노선은 가장 조야한 오류가 될 것이다. 스페인의 경우 고립된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경우 외부 제국주의 세력들의 개입은 그 중요성이 아무리 크다해도 역시 부차적인 성격 밖에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노르웨이에서는 두 제국주의 진영이 직접 충돌하고 있으며 두 노르웨이 정부는 이들 손에 든 보조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적 차원에서 우리는 연합군이나 독일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두 세력의 일시적인 도구에 불과한 노르웨이 정부들 중 어느 쪽을 지지할 이유나 정당성이 조금도 없다.

바로 이와 똑같은 노선이 핀란드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세계 노동계급의 전략적 관점에서 보면 노르웨이와 마찬가지로 핀란드 부르조아의 소련에 대한 저항은 자주적인 국가안보를 위한 행위가 아니다. 영국, 프랑스, 미국의 군사기지로 완전히 변모하기보다는 차라리 소련에 대한 모든 저항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핀란드 정부에 의해서 이 점은 가장 잘 증명되었다. 핀란드나 노르웨이의 자주적 국가안보, 민주주의 수호 등과 같은 부차적인 요인들은 그 자체로 아무리 중요해도 한없이 더욱 강력한 세계적 세력들의 싸움 속에 얽혀 있으며 이 싸움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부차적인 요인들을 무시하고 근본적인 요인들에 맞추어 우리의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전쟁에 대한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적 테제는 이미 6년 전에 이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해답을 제시하였다. 테제는 이렇게 언명하고 있다: "국가안보라는 사고는 특히 민주주의 수호라는 사고와 함께 등장할 경우에 아주 빠르게 약소국과 중립국(스위스, 특히 벨기에,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 노동자들을 속이기 위해 활용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 말하고 있다: "신이 버린 스위스 마을 출신인 로버트 그림같은 쁘띠부르조아 돌대가리들만이 세계대전이 스위스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진지하게 믿을 수 있다." 그와 똑같이 어리석은 버넘과 섁트먼 등 쁘띠부르조아들도 세계대전이 핀란드를 방어하는 수단이며 소련군의 핀란드 침공과 같은 전술적 사건에 기초하여 노동계급의 전략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루지아와 핀란드

대자본가에 대항하는 파업투쟁을 벌이면서 때때로 노동자들은 매우 버젓한 쁘띠부르조아 기업들을 파산시킨다. 이와 똑같이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군사적 투쟁을 벌이거나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군사적인 안전보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심지어 완전히 건강하고 혁명적인 노동자국가조차 이러저러한 약소국들의 독립을 유린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국내 또는 국제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계급투쟁의 가혹한 성격에 대해 민주주의적 속물들은 눈물을 흘릴 것이며 이것은 올바른 일일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급 혁명가가 눈물을 흘린다면 꼴불견일 것이다.

1921년 소비에트 공화국은 제국주의 세력의 코카서스지역 침략의 관문인 그루지아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소비에트 연방으로 편입시켰다. 민족자결권의 원칙에서 보면 이 무력침공에 반대하는 많은 말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혁명의 영역을 확대하는 관점에서 보면 농민국가에 대해 군사침략을 감행한 것은 전혀 의심스러운 행위가 아니었다. 적들에 의해 포위된 노동자국가의 자기방어를 위해 강제로 다른 국가를 소비에트화시키는 행위는 정당화되었다. 사회주의혁명 수호는 형식적 민주주의 원칙보다 앞선다.

오랫동안 세계 제국주의 세력은 그루지아 합병 문제를 소련에 대항하여 세계여론을 동원하는 구호로 이용했다. 제2인터내셔널은 이 캠페인의 선두에 섰다. 연합국은 소련에 대해 새로이 군사개입을 시도할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다.

이와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세계 부르조아계급은 소련의 핀란드 침공을 이용하여 소련에 대항하는 세계여론을 동원했다. 이 경우에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민주적 제국주의 세력의 전위로 나섰다. 전쟁에 놀라 정신없이 도망치는 쁘띠부르조아의 불행한 "제3진영" 이 이제 이들의 뒤꽁무니를 쫓고 있다.

그러나 군사개입과 관련한 이러한 주목할만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소련이 1921년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결코 아니라는 심오한 차이점도 존재한다. 전쟁에 대한 제4인터내셔널의 1934년 테제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소련 관료체제의 흉칙스러운 발달과 근로인민의 처절한 삶은 세계 노동계급에게 소련의 매력을 극히 감소시켰다." 10월 혁명의 요람인 레닌그라드에 아주 가까운 핀란드에게도 소련의 현 체제는 매력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소련-핀란드 전쟁은 이 사실을 생생하고 완벽하게 드러내었다. 그러나 이 사실로 인해 소련을 제국주의 세력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다. 소련이 관료집단의 손아귀에서 구출되어야 한다는 결론만이 가능하다.  

 

"내전이 어디서 발생했는가?"

"그러나 트로츠키 동지가 약속했던 핀란드 내전은 어느 지역에서 일어났는가?"라고 현재 "제3진영" 의 지도자이며 과거 우리 당의 소수파 지도자였던 인사들은 묻는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약속한 바가 없다. 소련-핀란드 전쟁이 비화할 경우 발생가능한 사태들의 하나를 분석했을 뿐이었다. 소련군이 핀란드의 개별 기지들을 점령하거나 핀란드 전역을 완전히 점령하는 것이나 가능성은 같았다. 개별 기지들의 점령은 부르조아 체제의 유지를 의미했다. 완전한 점령은 노동자와 빈농을 내전에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사회혁명을 의미했다. 소련과 핀란드 사이에 진행된 초기의 외교 협상들은 소련이 핀란드 문제를 다른 발트해 국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해결할 시도를 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그러나 핀란드의 저항은 군사적 조치들을 통해 목적을 달성시킬 것을 소련에게 강요했다. 스탈린은 핀란드를 소비에트화 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장 광범위한 핀란드 대중에게 전쟁을 정당화시킬 수 있었다. 정부 수반으로 소련이 쿠지넨을 임명한 행위는 핀란드가 발트해 국가들이 아닌 폴란드의 운명을 따를 것임을 암시했다. "제3진영" 의 아마추어 글쟁이들이 어떻게 펜을 휘두르든 스탈린은 내전을 부추겨서 소유관계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점을 이해했다.

핀란드 전쟁이 강대국들의 전면전으로 치닫지 않을 경우 그리고 스탈린이 외부 세력의 위협에 의해 후퇴를 강요당하지 않을 경우 그는 핀란드를 소비에트화하지 않을 수 없다고 나는 여러 번 구체적으로 밝힌 바 있다. 핀란드에 대한 스탈린의 과업은 그 자체로는 동부 폴란드를 소비에트화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그런데 군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더욱더 어려웠다. 핀란드는 폴란드보다 전쟁에 대해 대비를 더 확실히 해놓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민족적 관점에서 보면 이 과업은 더욱더 힘들었다. 핀란드는 러시아로부터 민족독립을 쟁취하려는 오랜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동부 폴란드의 우크라이나인과 백러시아인은 폴란드에 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에 대해 이들이 저항할 이유는 그만큼 더 적었다. 그러나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스탈린의 과업은 어떤 경우보다 달성하기가 더 힘들었다. 핀란드의 부르조아 계급은 나름의 방식으로 농업 쁘띠부르조아를 육성함으로써 전(前) 자본주의적 농업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핀란드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승리했을 경우 핀란드 소농과 노동자의 도움을 어느 정도 얻어서 소유관계를 전복하는 것은 완전히 가능했을 것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왜 이러한 구도를 실천에 옮길 수 없었을까? 소련에 반대하는 부르조아 여론이 엄청나게 동원되기 시작했으며 영국과 프랑스가 군사개입을 진지하게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역시 대단히 중요한 사항으로 히틀러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핀란드 영토로 진입할 경우 음모와 기습에 기초한 히틀러의 스칸디나비아 계획이 직접 위협을 받게 될 것이었다. 연합국과 히틀러 양자의 압박을 받아 샌드위치가 된 스탈린은 핀란드의 소비에트화를 포기하고 이 대신 개별 전략 기지들을 점령하는 것으로 군사행동을 한정했다.

놀라서 도망치는 "제3진영" 은 이렇게 논리를 뜯어 맞추고 있다: 트로츠키는 소련의 계급적 성격으로부터 핀란드 내전을 추론했다; 그런데 내전이 일어나지 않은 이상 소련은 노동자국가가 아니다. 사실 사회학적으로 소련을 규정하는 것을 통해 핀란드의 내전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곧바로 "추론 "할 필요는 없었다. 동부 폴란드의 경험에 근거하는 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소련군의 점령 후 일어난 동부 폴란드의 소유관계 전복은 10월 혁명을 통해 탄생한 노동자국가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구체적 상황 속에서 자기생존을 도모하고자 노력하는 소련 관료집단은 동부 폴란드의 소유관계를 전복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유사한 상황 속에서 이들이 핀란드에서도 똑같은 행동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심할 근거는 전혀 없었다. 이것이 내가 지적한 내용의 전부였다. 그러나 사태가 진전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혁명과 마찬가지로 전쟁은 급격하게 상황을 변화시킨다. 소련군의 군사적 움직임이 중지되면서 핀란드 내전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특정 조건을 바탕으로 해서만 미래에 대한 예측은 가능하다. 그리고 예측이 구체적일수록 이 조건 역시 더욱더 구체적이 된다. 예측은 약속된 날짜에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어음이 아니다. 예측은 사태 전개의 명확한 경향만을 개괄적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다른 차원의 세력과 경향들이 상황의 지배요인이 되기 시작하면서 이 예측된 경향과 함께 작동한다. 구체적인 사건들을 정확하게 예측하려는 사람들은 점장이를 찾아가야 한다. 맑스주의자의 예측은 방향을 파악하는 경우에만 도움이 된다. 나의 예측이 여러 가능한 변종들의 하나일 뿐이며 특정 조건들 속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나는 여러번 말한 바 있었다. 핀란드의 운명은 현재 일시적으로 동부 폴란드가 아니라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의 운명을 걷고 있다. 그러나 별로 대단치도 않은 이 개별적인 사실을 "제3진영" 지도자들은 마치 구원의 돌처럼 꼭 부여잡고 있다. 이런 모습은 무미건조한 현학자들의 특허품이다.  

 

소련 방어

스탈린의 핀란드 침공이 소련의 방어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소련의 정치는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권력, 명성, 돈에 관심이 있다. 소련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훨씬 더 열심히 방어한다. 따라서 소련과 세계 노동계급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신들의 이익을 방어한다. 핀란드 전쟁의 전 과정을 통해 이 사실은 너무도 명료하게 드러났다. 소련의 핀란드 침공은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에게는 하나의 정치적 연관고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행위에 대해 우리는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조금의 책임도 질 수 없다.

곱절이 아니라 세곱절로 악명높은 코민테른은 스탈린과 연대하여 그의 정책을 방어하며 책임지면서도 그가 어떤 범죄를 저지르든 신경쓰지 않는다. 세계 제국주의 세력이 소련을 분쇄하여 10월 혁명의 조국에 자본주의를 복귀시키고 이 나라를 식민지로 변모시키는 것을 우리는 절대 허용할 수 없다. 코민테른과 우리 정책의 성격은 전혀 다르다. 바로 이 사실이 우리가 소련을 방어하는 근거인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소련의 패배를 주창하는 자들 즉 소련의 패배를 모험주의적으로 부르짖는 자들은 연합국이 핀란드에 개입할 경우 소련 패배 입장을 소련 방어 입장으로 전환시킬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를 통해 이들은 논리적 난관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시도는 경멸스러운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전쟁 상황에서는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 즉시 정책을 돌변시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핀란드 전쟁이 결정적인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연합국 총사령부는 무르만스크 철도를 공습하는 것을 통해서만 핀란드를 진지하고 재빠르게 원조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전략의 관점에서 이것은 올바른 결론이었다. 연합국 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는 문제는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이 문제가 매달려 있는 실에는 "제3진영" 의 원칙적 입장 역시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우리는 전쟁에 참가하고 있는 기본 계급진영에 따라 우리의 입장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결론은 제3진영의 결론보다 훨씬 더 믿음직스럽다.  

 

이미 차지한 진지를 적에게 넘겨주지는 않는다

패배주의 노선은 이러저러한 범죄를 저지른 정부를 벌주는 것이 아니라 계급 역관계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이다. 전쟁에 대한 맑스주의 노선은 추상적인 도덕적 감상적 고려가 아니라 다른 체제들과 상호관계에 있는 특정 체제를 사회계급적으로 평가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는 이탈리아의 아비시니아 침공에 대해 아비시니아를 지지했다. 네구스가 무솔리니에 비해서 정치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식민지 억압에 대항해 후진국을 방어하는 것을 통해 세계 노동계급의 주요한 적인 제국주의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소련판 네구스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방어한다. 첫째, 소련의 패배는 제국주의에게 새로이 거대한 자원들을 제공하고 자본주의 체제의 숨이 곧 넘어갈 것같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오랫동안 연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기생적 관료집단이 제거될 경우 소련의 사회적 기초는 무제한적인 경제적 문화적 진보를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본주의적 기초는 더욱 쇠퇴하는 것 이외에 다른 가능성들을 보이고 있지 않다.

우리의 소련 방어 노선을 가장 시끄럽게 비판하는 자들의 정체를 가장 잘 드러내는 현상이 있다. 이들은 스탈린이 혁명적 볼셰비키당을 파괴시키고 있을 때, 스페인의 노동자혁명을 교살하고 있을 때, "인민전선 "과 "집단안보"라는 미명 하에 세계 사회주의혁명을 배반하고 있을 때 계속해서 소련을 노동자국가로 간주했다. 이 모든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들은 노동자국가인 소련을 방어할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똑같은 스탈린은 "민주적" 핀란드를 침공하였다. 그러자 공산주의자, 노동자, 농민에 대한 스탈린의 모든 범죄행위들을 은폐하고 승인한 제국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들의 부르조아 여론이 하늘높이 스탈린을 비난했다. 이런 일이 있자마자 우리의 노선을 근본적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은 즉시 "맞아, 소련의 핀란드 침공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라고 즉시 선언해버렸다. 그리고 루즈벨트를 그대로 따라서 소련에 대한 도덕적 무역금수 조치를 선언했다.

가방끈이 긴 도사 버넘은 소련을 방어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히틀러를 방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논리는 모순적인 현실을 2차원적 삼단논리의 틀 속으로 우겨넣으려는 쁘띠부르조아적 우둔함의 아주 근사한 표본에 지나지 않는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 이후 소비에트 공화국을 지지함으로써 노동자들이 호언쫄른 왕조를 지지했는가? 그런가 아닌가? 전쟁에 대한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적 테제는 이 문제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소련이 이러저러한 제국주의 국가와 맺은 조약은 소련의 혁명정당에게 어떠한 정치적 제한도 가하지 않는다고 확고하게 이 테제는 명시하고 있다. 개별적인 외교적 동맹이 그 자체로 아무리 정당해도 세계 사회주의혁명의 이해는 이것보다 더 중요하다. 소련을 방어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버넘과 그의 동료들보다 히틀러와 스탈린에 대항해서 더욱더 진지하게 투쟁한다.

버넘과 섁트먼이 독불장군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 자본주의의 악명높은 똘만이 레옹 주오(Leon Jouhaux)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소련을 방어한다"는 사실에 대해 역정을 내고 있다. 하기야 그가 역정을 내지 않으면 어느 누가 역정을 내랴! 그러나 소련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그가 대표로 있는 프랑스 노동총동맹(CGT)에 대한 태도와 동일하다: 언제나 노동자들을 속이고 배신하는 레옹 주오와 같은 악당들이 노동총동맹을 대표하고 있을 지라도 우리는 자본가계급에 대항하여 노동총동맹을 방어한다. 러시아 멘셰비키들도 이렇게 고함지른다: "제4인터내셔널은 계속해서 소련을 노동자국가라고 인정함으로써 막다른 골목에 처해있다!" 이 신사양반들은 바로 제2인터내셔널의 회원들이다. 전형적인 부르조아 시장인 후이스만스나 레옹 블렁과 같은 저명한 배신자들이 현재 제2인터내셔널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1936년 6월의 예외적으로 유리한 혁명적 상황에서 배신행위를 저질러 지금의 세계대전을 가능하게 만든 자들이다. 멘셰비키들은 제2인터내셔널 정당들을 노동자 정당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관료적 배신자들이 우두머리로 있다는 이유로 소련을 노동자국가로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이 거짓논리는 뻔뻔스럽고 냉소적이다. 스탈린, 몰로토프 등을 위시한 소련 관료집단은 블렁, 주오, 씨트린느, 토마스 등과 비교해서 더 좋거나 더 나쁘지도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하나이다: 스탈린과 그의 동료들은 사회주의 체제로 발전할 수 있는 소련의 경제적 기초를 착취하고 파괴시키는 반면에 블렁 등은 자본주의 사회의 철저하게 썩은 기초에 집착하고 있을 뿐이다.

노동자국가는 인정사정 없는 역사의 실험실로부터 등장했을 뿐이며 손가락으로 코를 후비며 반성하듯이 후각을 의심하는 "사회주의자" 교수양반의 상상물이 아니다. 노동계급이 달성한 성과들은 적대 세력들의 압력에 의해서 왜곡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 모두를 방어하는 것이 혁명가의 임무이다. 이미 차지한 진지들을 방어할 수 없으면 새로운 진지들을 결코 정복할 수 없는 법이다.  

1940년 4월 25일

 

[32. A Letter to James Cannon] 제임스 캐넌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버넘의 탈당은 과거 우리 당의 소수파 인사들에 대한 우리의 분석과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아주 훌륭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인사들의 탈당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1940년 5월 28일

레온 트로츠키

 

[33. A Letter to Albert Goldman] 앨버트 골드먼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버넘은 변증법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변증법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와 같습니다. 그가 섁트먼에게 가한 타격은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원칙에 입각한 또는 그렇지 못한 동맹에 대한 아주 중요한 교훈을 이들은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이번도 참 불쌍합니다. 4년전 그는 성부(聖父) 마스티와 복사(服事) 스펙터를 자기 파벌의 보호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세속화된 카톨릭 신자 버넘과 그의 변호사 섁트먼을 대상으로 똑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옛날에는 우리의 예상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수년 혹은 수십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제 사건이 진행하는 속도는 열병에 걸린 환자처럼 너무 빨라서 바로 다음날 우리의 예상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섁트먼도 불쌍하게 되었습니다!  

1940년 6월 5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34. On the " Workers " Party] " 노동자 " 당에 대해서  

질문 : 사회주의노동자당 다수파와 소수파는 조직을 분리할만큼 정치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보십니까?  

 

트로츠키 : 이 경우에도 문제를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변증법"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물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차이들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조직을 분리할만큼 크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쁘띠부르조아 써클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노동계급과 멀어지는 경향을 소수파가 보였다면 이 사소한 정치적 차이는 완전히 다른 가치,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소수파는 노동계급과는 이질적인 다른 사회계급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다수파는 조직 분리를 피하기 위해서 모든 조치들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소수파는 결국 조직을 분리했습니다. 이것은 소수파의 내적 사회적 감정이 우리와 함께 일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노동계급이 아니라 쁘띠부르조아 경향입니다. 드와이트 맥다널드의 글을 보면 이 점을 새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노동계급 혁명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어느 누구도 강제적으로 혁명정당에 참여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참여하면 당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인민에게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자고 촉구할 용기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임감을 우리는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론은 우리의 정치적 행동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도구는 맑스주의 이론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이것보다 더 좋은 도구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노동자는 자기 연장에 대해서 대단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연장이 가장 좋은 것이라면 아주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이 연장을 버리지도 않으며 있지도 않는 황당한 연장을 찾지도 않습니다.

버넘은 속물 지식인입니다. 그는 하나의 당에 들어갔다가 탈당하고 또 다른 당에 들어갑니다. 노동자는 이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혁명정당에 가입하여 인민들에게 사상을 전파하고 이들의 행동을 촉구할 때 이 행위는 전쟁에 나선 장군의 행동과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인민을 어디로 인도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총포가 질이 떨어짐으로 더 좋은 총포가 발명되기까지 10년은 기다려야 한다. 따라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느 장군이 이렇게 말한다면 사람들이 이 장군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버넘이 바로 이런 논리를 가지고 있는 장군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많은 실업자들의 존재, 전쟁 등은 여전히 우리의 현실로 남아있습니다. 이 현실은 연기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연기한 것은 버넘 혼자입니다.

드와이트 맥다널드는 속물은 아니지만 약간 멍청합니다.

그가 쓴 글을 여기에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회에 기여하려면 지식인은 자신이나 남을 속여서는 안된다. 가짜 동전으로 알면서 진짜 동전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수년과 수십 년에 걸쳐 배운 것을 위기의 순간에 잊어서는 안 된다."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여기 그의 글을 다시 인용합니다:

"모든 이론 , 정부, 사회체제 등에 대해 회의를 하고 대중의 혁명 투쟁에 헌신하는 등 회의와 헌신 모두를 가지고 앞으로 다가올 험난한 세월을 맞이해야한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내세울 수 있다."

소위 "노동자"당의 지도자 중의 한 명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노동자가 아니라 "지식인"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이론에 대해서 회의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론을 연구하고 수립하면서 우리는 이 위기의 시대를 준비해 왔습니다. 우리의 방법론은 맑스주의입니다. 그런데 위기가 다가오자 맥다널드는 "모든 이론을 회의하라"고 말합니다.그리고 맑스주의를 다른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하지 않은 채 혁명에 헌신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새로운 이론은 그 자신의 회의적인 이론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론없이 어떻게 행동할 수 있습니까? 대중의 투쟁은 무엇이며 혁명가는 무엇입니까? 그의 글 내용 전체는 경악스러울 따름입니다. 이러한 인사를 지도자로 허용할 수 있는 당은 진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시 그의 글을 인용합니다: "그렇다면 파시즘이라는 맹수의 성격은 무엇인가? 트로츠키는 보나파르트주의라는 낮익은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느 파벌이 한 계급을 다른 계급과 싸우도록 이간질시키면서 권력을 유지한다. 그래서 국가권력은 일시적으로 독자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전체주의 체제들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미 근본적인 경제적 사회적 구조를 변화시켜 버렸다. 과거의 형태들을 조작했을 뿐만 아니라 이것들의 내적 생명력을 파괴시켜 버렸다. 그렇다면 나찌 관료집단은 새로운 지배계급인가? 파시즘은 자본주의와 비견되는 새로운 사회형태인가? 이것도 역시 진실이 아닌 것 같다."

여기서 그는 새로운 이론을 발명하고 파시즘을 새로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모든 이론에 대해서 회의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업에 사용하고 있는 연장은 중요하지 않지만 일에 대해서는 헌신해야 한다고 노동자들에게 말합니다! 이런 말에 대해서 노동자들은 아주 거치른 말로 반응할 것입니다.

그의 글은 실망한 지식인을 아주 특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전쟁과 앞으로 다가올 끔찍한 시대가 패배와 희생을 가져올 것으로 생각하고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회의주의를 전파하기 시작하면서도 회의와 혁명적 헌신이 통일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혁명이 합리적이며 가능한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혁명에 헌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효과적인 이론이 없이는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론적 회의주의를 전파하는 자는 반역자입니다.

우리는 파시즘의 여러 요소들을 분석했습니다:

1. 국가권력에 가장 커다란 독자성을 부여하기 위해 계급들의 적대관계를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파시즘은 옛날 보나파르트주의와 공통된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후자는 부르조아 사회의 상승기에 존재한 반면 전자는 부르조아 사회의 쇠퇴기에 등장하는 국가권력이라는 점을 우리는 언제나 강조해왔다.

2. 사적 소유를 제거하지 않은 채 새로운 기술과 사적 소유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부르조아 계급의 시도가 파시즘이다. 파시즘의 "계획경제"는 사적 소유를 제한하는 동시에 구출하려는 시도이다.

3. 일국 내에 존재하는 새로운 현대 기술의 생산력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뛰어 넘으려는 시도가 파시즘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기술은 일국 내로 제한될 수가 없다. 결과는 전쟁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요소들을 우리는 이미 분석했다.

버넘과 마찬가지로 드와이트 맥다널드도 당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그가 약간 더 게으르므로 버넘보다 나중에 탈당할 것입니다.

한때 버넘은 "좋은 재목"이라고 간주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의 노동계급 정당은 당에 기여할 모든 지식인들을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 운동을 위해 디에고 리베라를 구하려고 나는 여러 달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사실 모든 인터내셔널들이 이런 종류의 경험을 거쳤습니다. 제1인터내셔널은 아주 변덕스러웠던 시인 프라일리그라트(Freiligrath)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제2 제3인터내셔널은 막심 고리끼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제4인터내셔널은 리베라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모든 경우에 이들은 우리와 결별했습니다.

물론 버넘은 우리 운동에 좀더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캐넌 동지는 그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글솜씨가 있으며 깊지는 않지만 재빠른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면서 이것에 대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 이것을 잊어버립니다. 저술가는 잊어버릴 수 있지만 노동자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인사들을 활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무쏠리니 역시 한때는 "좋은 재목"이었습니다!  

1940년 8월 7일

코요아칸

[35. A Letter to Albert Goldman] 앨버트 골드먼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드와이트 맥다널드가 편집하는 잡지 [당파 평론 ] 8월호에 실린 그의 글을 읽어 보았는지요.

이 사람은 속물 지식인 버넘의 제자였습니다. 버넘이 탈당한 후 그는 "과학"을 대표하는 유일한 사람으로 섁트먼의 당에 남았습니다.

파시즘과 관련하여 그는 우리의 노선을 서투르게 해적질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분석을 자기가 새로이 발견한 것처럼 위장하고 일부 뻔한 말들을 우리 것인 양 위장시켜놓고는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의 글 전체는 전망과 균형을 결여하고 있으며 기본적인 지적 정직성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버넘의 고아인 그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냉철하며 회의적인 눈으로 맑스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들을 다시 검토해야한다." 266쪽에 이 글이 나옵니다. 불쌍한 "노동자당"은 이 "검토 "기간 동안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물론 드와이트 맥다널드의 연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연구 결과는 버넘과 같이 탈당하는 것일 겁니다.

그 글의 마지막 4줄은 탈당을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이론 , 정부, 사회체제 등에 대해 회의를 하고 대중의 혁명 투쟁에 헌신하는 등 회의와 헌신 모두를 가지고 앞으로 다가올 험난한 세월을 맞이해야 한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우리 자신을 지식인으로 내세울 수 있다."

이론적 회의에 기초한 혁명활동은 내적 모순의 가장 후진적인 형태입니다. 혁명투쟁의 법칙들을 이론적으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대중의 혁명투쟁에 헌신 "할 수 없습니다. 혁명적 헌신은 이 헌신이 합리적이며 합당하다는 확신 즉 이 헌신이 혁명 목표에 조응한다는 확신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확신은 계급투쟁에 대한 이론적 통찰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모든 이론에 대한 회의"는 운동을 개인적으로 포기하기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섁트먼은 이런 와중에도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총서기"로서 그는 너무 바빠서 쁘띠부르조아 속물들로부터 "맑스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들"을 방어할 수가 없습니다.  

 

1940년 8월 9일

레온 트로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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