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민족성개조
18.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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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교훈: 마지막 경고

 

■ 이 글은 이미 스페인 내전이 1년 이상 계속되면서 차츰 그 결과가 드러나고 있을 때 작성된 매우 총괄적인 스페인 내전 분석이다.

이 시기에 스탈린주의자는 후퇴하고 있던 부르주아 공화주의 세력과 손잡고 인민전선 내부에서 지배권을 획득하고 있었다. 스탈린주의자는 인민전선 내부의 혁명주의 세력, 특히 통일노동자당을 반(反)혁명 트로츠키주의자로 체계적으로 박해하고, 그 지도자를 체포하여 모스크바 재판과 같은 구경거리를 제공했다. 통일노동자당의 최고지도자 안드레스 닌은 스탈린주의자에 의해 고문당한 뒤 학살되었다.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은 이를 혐오하면서도 스탈린주의자들을 계속 추종했다.

스페인혁명의 가장 큰 교훈은 제국주의 시대에 혁명을 민주주의 단계에 국한시키는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파괴하고 혁명세력을 피비린내 나는 탄압으로 내몰아 결국 혁명 자체를 결정적으로 약화시키고, 민주주의 체제의 붕괴와 군사적 파시스트 체제의 수립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아직 스페인 내전의 결과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트로츠키는 이 씁쓸한 진실을 정확하게 예상하고, 그 교훈을 철저히 하려고 했다.

이와 함께 트로츠키는 '스페인에서 가장 정직한 정치조직인 중도주의 정당 통일노동자당의 붕괴가 주는 주요한 교훈'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혁명의 격동적 과정에서는 정치적으로 성실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제로 혁명을 지도하고, 기회주의적 · 반동적 경향을 분쇄, 전선을 통일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통일노동자당에게는 이럴만한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그 때문에 통일노동자당은 맨 먼저 스탈린주의에 희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트로츠키는 제4인터내셔널 스페인 지부에 대한 교훈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 스페인을 뒤흔든 거대한 혁명적 열광에도 불구하고 제4인터내셔널 스페인 지부는 대중적 기반을 획득하지 못하고, 스페인혁명에 거의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혁명기에는 비록 소수파라도 올바른 강령을 가졌다면 급속히 다수파가 될 수 있다는 트로츠키의 확신은 스페인혁명에서는 전혀 실증되지 않았다. 이 문제는 나중에 트로츠키가 남긴 미완성 논문 '계급과 당과 지도부一왜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패배했는가'의 주요 테마가 된다.

 

스페인의 볼셰비키주의와 멘셰비키주의

모든 총참모부는 미래의 거대한 전쟁에 대비하여 에티오피아, 스페인, 극동지역의 군사작전을 면밀히 연구하고 있다. 혁명의 참모부는 다가오는 세계혁명의 뜨거운 번갯불인 스페인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주의 깊게 연구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만 우리는 다가오는 사태에 기습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공화주의 진영 안에서一불균등한 힘을 가진一세 가지 이데올로그가 싸우고 있다. 멘셰비키주의, 볼셰비키주의, 무정부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부르주아 공화주의 정당들은 독자적인 사상이나 독자적인 정치적 의미도 없었으며, 개량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의 등에 올라탐으로써만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게다가 스페인의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 지도자들은 그 원칙을 거부하기 위해 별 짓을 다했으며, 사실상 그 원칙의 중요성을 무위로 돌려버렸다. 실제로는 이른바 공화주의 진영 안에서 두 가지 원칙이 우열을 다뤘다一멘셰비키주의와 볼셰비키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사회당과 스탈린주의자들, 즉 첫 번째와 두 번째 경우의 멘셰비키에 따르면, 스페인혁명은 오직 그 '민주주의적' 임무의 해결만을 요구했으며, 때문에 '민주주의적' 자본가계급과 공동전선을 맺는 것이 절대 필요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노동자계급의 시도는 죄다 미성숙할 뿐만 아니라 파멸적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의사일정에 오른 것은 혁명이 아니라 반란자 프랑코에 대항하는 투쟁이다.

그렇지만 파시즘은 봉건 반동이 아니라 부르주아 반동이다. 부르주아 반동에 대항하는 성공적인 투쟁은 노동자혁명의 힘과 방법에 따라서만 수행될 수 있다. 부르주아적 사상의 한 지류인 멘셰비키주의는 이런 사실을 어렴풋이도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다.

정력적인 제4인터내셔널 지부를 통해서만 뚜렷하게 표현되는 볼셰비키 관점은 연속혁명 이론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즉, 연속혁명 이론은 반(半)봉건적 토지 소유제의 청산처럼, 순전히 민주주의적인 문제들도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 없이는 해결될 수 없으며, 이것은 다시 사회주의혁명을 의제로 올려놓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바로 혁명의 첫 단계 중에 스페인 노동자는 스스로 민주주의적인 문제들뿐만 아니라 순전히 사회주의적 문제들도 실제로 제기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요구는 실제로 민주주의혁명의 방어가 아니라 거부를 의미한다. 인구의 대다수를 이루는 농민은 토지관계의 전복을 통해서만 파시즘에 대항하는 강력한 보루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지주는 상업, 산업, 은행 자본가들, 그리고 이들에 의지하는 부르주아 지식인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노동자계급 정당은 농민대중과 행동을 같이할 것인가, 자유주의 자본가계급과 행동을 같이 할 것인가의 기로에 직면하게 된다. 농민과 자유주의 자본가계급을 동시에 동일한 연합 내에 포괄하는 데에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그것은 농민을 속이고, 결국 노동자를 고립시키는 자본가계급을 돕기 위해서이다. 토지혁명은 자본가계급에 대항해서만, 따라서 노동계급독재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다. 제3의 중간적 유형은 없다.

이론적 관점에서 볼 때, 스탈린의 스페인 정책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레닌주의의 기초를 완전히 무시한다는 점이다. 몇 십 년을 지체한 끝에一도대체 몇 십 년인가!ㅡ코민테른은 멘셰비키주의 이론을 완전히 복구시켰다. 그보다 더한 것은 코민테른이 이 이론을 더 '일관되게', 게다가 더 불합리하게 만들려고 기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1905년의 문턱에 있던 제정 러시아에서 '순전히 민주주의적인 혁명' 정식은 어쨌든 1937년의 스페인에서보다 그지없이 많은 주장들로 지지되었다. 멘셰비키주의의 ‘자유주의적 노동정책’[자유주의적 노동정책 : 레닌이 혁명 전의 반동기에 멘셰비키 청산주의자의 정책을 가리켜 빈번하게 사용한 말.]이 요즘 스페인에서 스탈린주의의 반동적인 반(反)노동정책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결코 놀랍지 않다.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의 희화화인 멘셰비키 이론은 자기 자신의 희화화로 바뀌었다.

 

인민전선 ‘이론’

그렇지만 코민테른의 스페인 정책이 이론적 ‘오류’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물정 모르는 것이다.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따르지 않는다. 아니 실제로는 어떤 이론도 따르지 않는다. 다만, 소비에트 관료집단의 경험적 이해를 따를 뿐이다. 소비에트의 냉소주의자들은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디미트로프[게오르기 디미트로프(Georgi Dimitrov, 1882~1949) : 조판공 출신의 불가리아공산당의 지도자. 코민테른 집행위원. 1933년, 독일여행 중에 나찌에 의해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의 범인으로 체포. 1934~43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세계대회 의장으로서 ‘반(反)파시즘 인민전선’을 제창했으며, 1946~49년 불가리아 수상이었다.]의 인민전선 ‘철학’을 비웃는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을 속이기 위해 제멋대로 쓸 수 있는 이런 신성한 정식을 선전할 다수의 중핵을 거느리고 있다. 이들 중에는 성실한 자가 있는가하면 사기꾼, 얼간이, 허풍선이들도 있다. 루이스 피셔[루이스 피셔(Louis Fischer, 1896-1970) : 미국에서 활약한 저널리스트. 〈이브닝 포스트〉, 〈네이션〉의 기자. 1923~36년, 소비에트 특파원으로서 소비에트에 관한 다수의 기사를 집필했다. 1920년대의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논쟁에서 스탈린을 지지했다. 레닌에 관한 전기를 집필하기도 했다.]는 무지와 독선, 편협한 합리주의, 혁명에 대한 선천적인 무관심 때문에 이 본때 없는 무리들 가운데 가장 역겨운 대표자이다. “진보세력의 통합!”, “인민전선 사상의 승리!”, “반(反)파시스트 대오의 통일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의 맹공격!” … 『공산당 선언』이 90년 전에 쓰였다고 믿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인민전선의 이론가들은 본질적으로 산수의 첫 번째 규칙, 즉 덧셈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을 전부 다 더하면, 각각의 개별적인 숫자보다 더 크다. 이것이 이들이 알고 있는 지식의 전부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산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적어도 역학 하나는 더 필요하다. 힘의 평행사변형의 법칙은 정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평행사변형에서 합력(合刀)은 분력(分刀)이 서로 다를수록 더 작아진다. 정치적 동맹자들이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경향이 있다면, 합력은 0과 같아질지도 모른다.

노동자계급의 다양한 정치그룹들이 블록을 맺는 것은 공통의 실천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때로는 꼭 필요하다. 일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이러한 블록은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가까운 이해관계를 가진 피억압 소부르주아 대중을 끌어당길 수 있다. 이러한 블록의 합력은 그 구성 부분들의 각각의 힘을 합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으로 입증될 수 있다. 반대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정치적 동맹은 현 시대에 각자의 이해가 기본적인 문제들에서 180도로 다르기 때문에 보통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힘을 마비시킬 수 있을 뿐이다.

노골적인 강제력이 거의 효과가 없는 내전은 참가자들에게 최고의 자기희생 정신을 요구한다. 노동자 농민은 자신의 해방을 위해 싸울 경우에만 승리를 확신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을 자본가계급의 지도부에 종속시키는 것은 내전에서 노동자계급의 패배를 지레 보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단순한 진실은 결코 순수한 이론적 분석의 산물이 아니다. 반대로, 이것들은 적어도 1848년부터 시작된 역사적 경험 전체로부터 얻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결론을 표현한다. 부르주아 사회의 현대사는 온갖 종류의 인민전선 즉, 근로자를 속이기 위한 매우 다양한 정치적 연합들로 가득 차 있다. 스페인의 경험은 이 범죄와 배신의 사슬에서 새로운 비극적 고리 일 뿐이다.

 

자본가계급의 그림자와 맺은 동맹

정치적으로 매우 놀라운 것은 스페인 인민전선은 실제로 힘의 평행사변형조차 없었다는 사실이다. 자본가계급의 자리에는 그 그림자뿐이었다. 스페인 자본가계급은 스탈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를 매개로 인민전선에 참여하라고 귀찮게 조르지 않고도 노동자계급을 자신에게 종속시켰다. 온갖 정치적 색조를 띤 착취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공공연하게 프랑코 진영으로 넘어갔다. ‘연속혁명’ 이론 없이도 스페인 자본가계급은 그 출발점이 어떻든 혁명적 대중운동이 토지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적대적으로 향하고, 따라서 민주주의적 조치로 이 운동에 전혀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공화주의 진영에는 아사냐 씨, 콤파니스 씨 등등 유산계급의 보잘것없는 부스러기들밖에 남지 않았다. 이들은 자본가계급의 정치적 변호인이지만 자본가계급 자체는 아니다. 유산계급은 모든 것을 군사독재에 걸고 나서도, 동시에 ‘공화주의’ 지역의 사회주의 대중운동을 마비시키고, 혼란에 빠뜨린 뒤에 교살하기 위해 어제까지의 자기의 정치적 대리인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스페인 자본가계급을 조금도 대표하지 않는 좌익 공화주의자들은 노동자 농민은 더 더욱 대표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대표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동맹자들一사회주의자, 스탈린주의자, 무정부주의자一덕분에 이 정치적 허깨비들은 혁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떻게? 매우 간단하다. ‘민주주의혁명’의 원칙, 즉 사적 소유의 신성불가침성을 구체화함으로써 그렇게 했다.

 

 

인민전선의 스탈린주의자들

스페인 인민전선의 출현 이유와 그 내적 역학은 아주 분명하다. 은퇴한 부르주아 좌파 지도자들의 임무는 대중의 혁명을 저지하고, 그 결과 잃어버린 착취자들의 신뢰를 자신의 힘으로 되찾는 것에 있었다 : “우리 공화주의자들이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다면, 왜 프랑코를 필요로 하는가?” 아사냐와 콤파니스의 이해는 이런 중심점에서 스탈린의 이해와 완전히 일치했다. 당시 스탈린은 ‘무정부상태’로부터 ‘질서’를 지킬 능력이 있음을 행동으로 입증함으로써 프랑스와 영국 자본가계급의 신뢰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스탈린은 노동자를 앞서서 막아줄 엄호물로서 아사냐와 콤파니스가 필요했다 : 물론 스탈린 자신은 사회주의에 찬성하지만, 공화주의 자본가계급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아사냐와 콤파니스는 혁명가의 권위를 가진, 경험 많은 사형집행인으로서 스탈린이 필요했다. 그가 없었다면, 이 오합지졸들은 노동자를 공격할 능력도, 용기도 결코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오래 전에 계급투쟁의 진로에서 이탈한 제2 인터내셔널의 고전적 개량주의자들은 모스크바의 지원 덕분에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했다. 덧붙이자면, 이런 지원은 모든 개량주의자들이 아니라 가장 반동적인 개량주의자들에게만 주어졌다. 사회당의 얼굴마담인 카바예로는 노동귀족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네그린과 프리에토는 항상 자본가계급 쪽으로 기울어졌다. 네그린은 모스크바의 도움으로 카바예로를 자기편으로 삼았다. 인민전선의 포로인 좌익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모두 지키려고 했다. 정말로 그랬다. 그러나 인민전선의 헌병들에 맞서 대담하게 대중을 동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노력은 결국 비탄과 통곡으로 되돌아왔다. 그 결과, 스탈린주의자들은 명백히 부르주아적인 사회당 극우파와 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좌익一통일노동자당, 무정부주의자, ‘좌익’ 사회주의자들一바꿔 말하면, 매우 미미하게라도 혁명적 대중의 압력을 반영했던 중도주의 그룹들에 대한 탄압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자체로 매우 의미심장한 이런 정치적 사실은 동시에, 지난 몇 년 사이에 코민테른이 타락한 정도를 보여준다. 나는 일찍이 스탈린주의를 관료적 중도주의라고 규정했다. 객관적 사태는 이 규정의 올바름을 나타내는 일련의 확실한 증거들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시대에 뒤떨어진 것임에 분명하다. 보나파르트주의적 관료집단의 이해는 이제 더 이상 중도주의자의 우유부단, 동요와 화해할 수 없게 되었다. 자본가 계급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스탈린주의 도당은 국제 노동귀족 가운데서 가장 보수적인 그룹들과만 동맹을 맺을 수 있다. 이것은 국제무대 에서 스탈린주의의 반(反)혁명적 성격을 결정적으로 새기는 행위였다.

 

스탈린주의의 반(反)혁명적 오만

이것은 우리에게 비교도 안될 만큼 더 강력한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의 조직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적으로나 지도부의 역량에서나 매우 보잘것없는 스페인공산당이 어떻게, 그리고 왜 권력의 모든 통제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는가라는 수수께끼의 해답에 곧바로 이르게 한다. 스탈린주의자들이 권력을 소비에트의 무기들과 간단히 맞바꾼 것이라는 통상적인 설명은 너무나 피상적이다. 모스크바는 군수품의 답례로 스페인의 금괴를 받았다. 자본주의 시장법칙에 따르면, 이것으로 다 된 것이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권력을 얻기 위해 덤으로 어떤 일을 저질렀는가?

통상적인 대답은 군수물자 제공을 통해 대중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권위를 높인 소비에트 정부가 ‘협력’의 조건으로 혁명가들에 대한 과감한 조치를 요구했고, 그 결과 자신의 진로를 방해할 위험한 적수들을 제거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기는 하지만 문제의 한 측면, 그것도 가장 중요하지 않은 한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소비에트의 군수물자 제공이 만들어낸 ‘권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공산당은 여전히 극소수파였으며, 계속 커져가는 노동자 측의 미움을 받았다. 다른 한편, 모스크바가 조건을 정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 발렌시아 정부가 이런 조건에 동의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사모라, 콤파니스, 네그린뿐만 아니라 수상으로 재직 중인 카바예로도 모두 어느 정도는 모스크바의 요구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왜? 바로 이 신사양반들 자신이 혁명을 부르주아적 범위 안에 붙들어 두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도, 무정부주의자도 스탈린주의 강령에 진지하게 반대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본가계급과의 결별을 두려워했다. 이들은 노동자의 모든 혁명적 공격을 몹시 두려워했다.

군수품과 반(反)혁명적 최후통첩 때문에 스탈린은 이 모든 그룹들에게 구세주였다. 스탈린은 이들이 바랐던 대로 프랑코에 대한 군사적 승리를 보장해주는 동시에 혁명의 경과에 대한 모든 책임으로부터 이들을 해방시켜주었다. 이들은 모스크바가 자신들을 위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복구시킨 다음에 이를 다시 이용하기를 바라면서 자신들이 썼던 사회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라는 가면을 서둘러 벽장 속에 넣어두었다. 끝마무리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이 신사양반들은 이때부터 스탈린과 군사 협정을 맺을 필요성을 내세워 노동자에 대한 배신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또, 스탈린의 입장에서는 공화주의 부르주아들과 동맹을 유지할 필요성을 내세워 자신의 반(反)혁명 정책을 정당화했다.

이런 폭넓은 관점에서만 우리는 아사냐, 네그린, 콤파니스, 카바예로, 가르시아 올리베르 등과 같은 정의와 자유의 옹호자들이 게페우(GPU)의 범죄에 대해 보여준 천사 같은 관용의 전모를 알 수 있게 된다. 이들의 단언처럼, 만약 이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면, 그것은 혁명가들의 목숨과 노동자의 권리 말고는 비행기와 탱크의 대가를 치를 다른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테러라는 수단을 제외하면 자신의 ‘순전히 민주주의적인’, 즉 반(反)사회주의적인 강령을 실현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자 농민이 자신의 혁명의 길에 들어서면,一공장과 토지를 장악하고, 옛 소유주들을 내쫓고, 각 지방에서 권력을 장악 하면一부르주아 반(反)혁명은一민주주의자나 스탈린주의자나 파시스트를 막론한一거짓말과 기만으로 보완된 철저한 유혈 탄압 외에는 이 운동을 저지할 다른 수단이 없다. 계속 이 방법을 밀어붙이는 스탈린주의 도당의 오만함은 아사냐, 콤파니스, 네그린과 이들의 좌익 동맹자들은 감당할 수 없는 방법을 주저 없이 적용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있다.

 

스탈린은 자기 나름대로 연속혁명론의 올바름을 뒷받침한다.

이렇게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강령이 공화주의세력 영역에서 서로 맞섰다. 한편에는,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사적 소유를 지키려는 강령, 프랑코로부터 가능한 한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강령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에 의해 사적 소유를 철폐하려는 강령이 있었다. 첫 번째 강령은 노동귀족, 소부르주아 상층 집단, 특히 소비에트 관료집단을 매개로 해서 자본주의의 이해를 표현했다. 두 번째 강령은 혁명적 대중운동의 경향을 충분히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강력하게 마르크스주의의 언어로 옮긴 것이다. 혁명 앞에는 유감스럽게도, 소수의 볼셰비키와 혁명적 노동자계급 사이에 인민전선이라는 반(反)혁명적 장벽이 버티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기의 공급자인 스탈린의 공갈협박 때문에 인민전선 정책이 결정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물론 공갈협박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공갈협박이 먹힌 이유는 혁명 자체의 내적 조건에 내재해 있었다. 6년 동안, 혁명의 사회적 배경은 반(半)봉건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소유 체제에 대항하는 대중들의 증대하는 공격이었다. 자본가계급을 프랑코의 품으로 달려들게 만든 것은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라도 이 사적 소유를 지킬 필요성이었다. 공화주의 정부는 자본가계급에게 ‘민주주의적’ 방법으로 사적 소유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지만, 특히 1936년 7월에 그 완전한 파산을 드러냈다. 소유 전선의 상황이 군사 전선의 상황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것이 되자, 무정부주의자를 포함한 모든 색조의 민주주의자들은 스탈린에게 굴복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자신의 무기고에서 프랑코의 방식 외에는 다른 방식을 찾을 수 없었다.

‘트로츠키주의자’, 통일노동자당 당원,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좌익 사회주의자 들들볶기; 추잡한 비방; 문서 위조; 스탈린주의 감옥에서 자행된 고문; 매복 살인들一이 모든 것이 없었다면 공화주의 깃발 아래에서 부르주아 체제는 두 달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게페우(GPU)는 오 직 다른 세력들에 비해 더 일관되게, 즉 극도의 비열함과 잔인함으로 노동자계급에 대항하여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방어했기 때문에 결국 상황의 지배자가 되었다.

‘민주주의자’ 케렌스키는 사회주의혁명과의 투쟁에서 처음에는 코르닐로프의 군사독재에서 지지를 얻으려고 했으며, 나중에는 왕당파 크라스노프 장군의 군용열차를 타고 페테르부르크에 입성하려고 했다. 이에 반해서, 볼셰비키들은 민주주의혁명을 끝까지 수행하기 위해 ‘민주주의적’ 허풍선이와 수다쟁이들의 정부를 타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 인해 볼셰비키들은 이 과정에서 온갖 종류의 군사(또는 ‘파시스트’)독재 수립 기도를 끝장냈다.

스페인혁명은 혁명적 대중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파시스트 반동의 방식을 통하는 것 말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거꾸로, 파시즘에 대항하는 진정한 투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노동자혁명의 방식을 통하는 것 말고는 불가능하다. 스탈린은 게페우라는 보나파르트적 수단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면서 ‘트로츠키주의’(노동자혁명)에 대한 전쟁을 수행했다. 이것은 코민테른이 채택한 낡은 멘셰비키 이론, 즉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시점이 따로 분리된 독립적인 두 역사적 사건으로 바꿔버리는 이론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단호하게 논박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사형집행인들의 임무는 자기 나름대로 연속혁명론의 올바름을 확증한다.

 

무정부주의자의 역할

무정부주의자는 스페인혁명에서 어떤 독자적 입장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들 모두는 볼셰비키주의와 멘셰비키주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무정부주의 노동자는 본능적으로 볼셰비키의 길(1936년 7월 19일과 1937년 5월시기)로 접어들고 싶어 했다. 반면에, 그 지도자들은 전력을 다해 대중을 인민전선 진영, 즉 부르주아체제 쪽으로 몰아갔다.

무정부주의자는 스스로를 자신의 노동조합 즉, 평화적 시기의 판에 박힌 일상에 절어 있던 조직 에 한정하려고 함으로써, 그리고 노동조합의 테두리 밖에서, 대중들 사이에서, 정당들 사이에서, 정부기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무시함으로써 혁명의 법칙과 그 임무에 대한 치명적인 몰이해를 드러냈다. 만약 무정부주의자가 혁명가였다면, 이들은 무엇보다도 노동조합을 접해본 적도 없는 가장 억압받는 계층을 포함하여, 도시와 농촌의 모든 근로자 대표를 접합시킬 소비에트의 창설을 촉구했을 것이다. 혁명적 노동자는 당연히 이 소비에트들 안에서 지도적 지위를 차지할 것이다. 스탈린주의자는 결국 보잘것없는 소수파가 되었을 것이며, 노동자계급은 자신이 가진 무적의 힘을 확신했을 것이다. 공중에 붕 떠버린 부르주아 국가기관은 강력한 일격만으로도 충분히 분쇄되었을 것이다. 사회주의혁명은 강력한 추진력을 얻었을 것이다. 프랑스 노동자계급은 레옹 블룸이 노동자혁명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오는 것을 방해하도록 오랫동안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모스크바의 관료집단도 그렇게 땅땅거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 제기한 가장 어려운 문제들은 이미 해결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대신에, 노동조합 안에서 ‘정치‘를 은폐하려고 하는 무정부적 조합주의자는 결국 전 세계와 스스로의 허를 찌르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마차의 다섯 번째 바퀴임을 드러냈다. 그러나 다섯 번째 바퀴는 불필요하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용도 폐기될 것이다. 가르시아 올리베르와 그 패거리들이 스탈린과 그 똘마니들이 노동자에게서 권력을 빼앗는 것을 도왔음에도 불구하고 무정부주의자 자신이 인민전선 정부에서 쫓겨났다. 이때에도 이들은 승리자 쪽에 달라붙어 자신의 헌신을 확신시키는 것 이상을 하지 않았다. 대자본가계급에 대한 소부르주아 계급의 두려움, 힘센 관료에 대한 열등한 관료의 두려움을 이들은 공동전선(희생자와 사형집행인 사이의)의 신성함, 자신의 독재를 포함한 어떠한 독재도 용납하기 어렵다는 등의 애절한 말로 은폐했다. “어쨌든 우리는 1936년 7월에 권력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 “어쨌든 우리는 1937년 5월에 권력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 무정부주의자는 스탈린-네그린 일당에게 혁명에 대한자신들의 배신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 보상할 것을 구걸했다. 이 얼마나 메스꺼운 광경인가!

“우리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독재에도 반대했기 때문에 권력을 잡지 않았다”는 따위의 자기 합리화는 그 자체로 무정부주의가 완전히 반(反)혁명적 교의라는 최종적인 선고와 같다. 권력 장악을 포기하는 것은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착취자들에게 권력을 자진해서 맡기는 것이다. 모든 혁명의 핵심은 새로운 계급을 권력에 올려놓음으로써, 이 계급이 자신의 강령을 실현할 수 있게 한다는 데에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전쟁을 수행하고 나서 승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권력 장악을 준비하지 않고 대중을 봉기로 이끄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정부주의자가 권력을 장악한 다음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체제를 수립하는 것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물론 이들의 강령이 실현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의 얘기지만 말이다. 그런데 무정부주의 지도자들 스스로가 자기 강령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렸다. 이들은 “어떠한 독재에도”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라一실제로 이들은 불평을 늘어놓고 칭얼대면서 스탈린-네그린의 독재를 지지했고, 여전히 지지하고 있다一이들이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더라도, 그 원칙과 용기를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에 권력을 외면했다. 이들은 모든 것, 즉 “고립”, “참여”, “파시즘”을 두려워했다. 이들은 스탈린도 두려워했다. 네그린도 두려워했다. 프랑스와 영국도 두려워했다. 이 떠버리들은 무엇보다도 혁명적 대중들을 무서워했다.

권력 장악의 포기는 필연적으로 모든 노동자 조직을 개량주의의 수렁에 처박고, 자본가계급의 장난감으로 바꿔버린다. 사회의 계급구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권력 장악이라는 목표에 반대하는 무정부주의자는 결국 혁명이라는 수단에도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국노동자연맹(CNT)과 이베리아 무정부주의연합(FAI)의 지도자들은 자본가계급이 1936년 7월에 이름뿐인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자본가계급이 일거에 잃어버렸던 것을 조금씩 되찾는 것도 도왔다. 1937년 5월에 이들은 노동자의 봉기를 방해함으로써 자본가계급의 독재를 구했다. 요컨대, 무정부주의는 완전히 비(非)정치적 이기를 바랐지만, 실제로는 비(非)혁명적이고, 더 결정적인 순간에는 반(反)혁명적 임이 드러났다.

1931~37년의 중대한 시험 뒤에도 크론슈타트에 대한 케케묵은 반동적 헛소리를 계속 되풀이하며,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볼셰비키주의의 필연적 결과”라고 단언하는 무정부주의 이론가들은 단지 이를 통해 자신들이 혁명에 영원히 쓸모없는 존재임을 보여줄 뿐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본질적으로 사악한 것이고, 스탈린주의는 그 정통적 계승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 세계에서 스탈린주의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가? 왜 스탈린주의 깡패들은 트로츠키주의를 자신의 주적으로 간주하는가? 왜 우리의 견해나 행동방식 에 가까운 모든 사람들(두루티, 안드레스 닌, 란다우 등)에 대해 스탈린주의 깡패들은 잔혹한 보복을 취할 수밖에 없는가? 다른 한편, 왜 스페인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은 게페우(GPU)가 모스크바와 마드리드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있을 때, 카바예로-네그린 정부의 장관, 즉 자본가계급과 스탈린의 종복으로 복무했는가? 왜 지금도 무정부주의자는 파시즘과 싸운다는 핑계로 파시즘과 싸울 능력이 없음을 증명한 혁명의 사형집행인들인 스탈린-네그린의 자발적 포로로 남아 있는가?

무정부주의 의 변호인들은 크론슈타트와 마흐노[네스토르 마흐노(Nestor Makhno, 1884~1934) :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내전 초기에 농민부대를 이끌고 우크라이나의 백군과 독일 점령군에 맞서 투쟁했다. 1921년, 적군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했다.]를 방패막이로 삼는 것을 통해서는 아무도 속일 수 없다. 크론슈타트 사건과 마흐노에 대한 투쟁에서 우리는 농민의 반(反)혁명으로부터 노동자혁명을 지켰다. 스페인 무정부주의자는 노동자혁명으로부터 부르주아 반(反)혁명을 지켰으며, 지금도 지키고 있다. 무정부주의와 스탈린주의는 스페인혁명에서 같은 편 바리케이드에 섰다. 반면에, 노동자대중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와 함께 그 반대편에 섰다. 그 어떤 궤변도 이런 사실을 역사의 기록에서 지워버릴 수 없다. 이것이 노동자계급의 의식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진실이다!

 

통일노동자당의 역할

통일노동자당의 이력이라고 더 나은 것은 아니다. 확실히 이론적인 면에서 통일노동자당은 연속혁명 정식에 근거하려고 했다(이 때문에 스탈린주의자들이 통일노동자당 당원들을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혁명은 이론적 고백에 만족하지 않는다. 무정부주의자를 포함하여 개량주의 지도자들에 맞서 대중을 동원하는 대신에, 통일노동자당은 이 신사양반들에게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납득시키려고 했다. 통일노동자당 지도자들의 모든 글과 연설은 이 소리굽쇠에 따라 조율되었다. 무정부주의 지도자들과 다투지 않기 위해 이들은 전국노동자연맹 내부에 독자적인 세포를 조직하지 않았으며, 통상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격렬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공화국 군대 안에서 혁명적 활동을 수행하지 않았다. 대신에 ‘자신의’ 노동조합, ‘자신의’ 의용군을 조직했다. 이 의용군은 ‘자신의’ 건물들을 지키거나, ‘자신의’ 전선 구간만을 지켰다.

통일노동자당은 계급으로부터 혁명적 전위를 고립시킴으로써 전위를 무력화시키고, 계급을 지도부 없이 방치했다. 정치적으로 줄곧 볼셰비키주의보다 인민전선에 훨씬 더 가까웠던 통일노동자당은 인민전선에 좌익적 외피를 씌워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노동자당이 잔혹하고 비열한 탄압에 희생된 것은 인민전선이 자신의 좌익을 서서히 내치는 것 이외에는, 사회주의혁명을 압살시킨다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의도와는 반대로 통일노동자당은 결국 혁명정당 건설의 도중에 있어 주요한 장애물임이 판명되었다.

네덜란드 혁명적사회주의노동자당의 지도자인 스네블리트처럼, 관념적이고 외교적인 패거리들이 제4 인터내셔널에 대해 져야 하는 책임은 실로 막중하다. 이들은 어중간한 조치, 우유부단함, 애매함, 한마디로 자신의 중도주의로 통일노동자당을 노골적으로 지지했다. 혁명은 중도주의를 몹시 싫어한다. 혁명은 중도주의를 폭로하고 괴멸시킨다. 말이 난 김에 덧붙이자면, 혁명은 중도주의의 동료나 변호인들의 신용을 떨어뜨린다. 이것이 스페인혁명의 가장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이다.

 

무장의 문제

모스크바의 무기를 얻기 위해서는 원칙과 양심을 대가로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으로 스탈린에 대한 투항을 정당화하려는 사회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는 단지 거짓말을, 그것도 아주 서툴게 하는 것뿐이다.

물론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살인이나 날조 없이 빠져나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목표는 그에 상응하는 수단을 요구한다. 1931년 4월 이래, 즉 모스크바가 군사적으로 개입하기 훨씬 전부터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는 노동자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가능한 일을 다 했다. 스탈린은 이들에게 이 일을 끝까지 추진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들은 스탈린과 같은 정치적 목적을 추구했다는 이유만으로 스탈린의 공범자가 되었다.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이 혁명가와 조금이나마 닮은 데가 있었다면, 모스크바의 최초 공갈협박에 사회주의적 공세를 계속할 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반(反)혁명적 조건을 세계 노동자계급 앞에 폭로하는 것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모스크바 관료집단이 사회주의혁명이나 프랑코 독재 가운데 하나를 공개적으로 선택하도록 강제했을 것이다. 테르미도르 관료집단은 혁명을 두려워하고 증오한다. 그러나 파시스트 도당에 교살당하는 것도 무서워한다. 게다가 관료집단은 노동자에게 의존한다. 모든 징후가 모스크바는 무기를, 그것도 될 수 있는 한 더 적당한 가격으로 제공하지 않을 수 없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세상은 스탈린주의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 1년 반에 걸친 내전 사이에 수많은 비(非)군수 공장들을 군수생산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스페인의 군수산업을 강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었으며,또 그렇게 해야 했다. 이 일은 스탈린과 그의 스페인 동맹자들이 똑같이 노동자 조직의 주도권을 두려워했다는 이유만으로 수행되지 않았다. 강력한 군수산업은 노동자에게 맡겨진 강력한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민전선의 지도자들은 모스크바에 의지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바로 이 문제에서 인민전선의 배신적 역할이 매우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인민전선은 자본가계급이 스탈린과 한 배신 거래의 책임을 노동자 조직에게 떠넘겼다. 물론 무정부주의자가 소수파로 남아있는 한, 이들은 지배블록이 모스크바나 모스크바의 정신적 지도자인 런던과 파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 어떠한 의무라도 지려는 것을 곧바로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전선에서 가장 뛰어난 투사였다면, 이들은 내놓고 배신행위나 배신자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해야 했다. 이들은 대중에게 실제 상황을 설명하고, 부르주아 정부에 대항하여 대중을 동원하고, 마침내 권력을 장악하고, 게다가 모스크바의 무기를 수중에 넣기 위해 나날이 자신의 힘을 증가시킬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런데 인민전선이 없을 때에도 소비에트가 무기를 일절 제공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또 소비에트 연방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지금까지 무기를 제공한 외국의 서슬 푸른 후원자 덕택으로 혁명이 승리를 거둔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대체로 반(反)혁명이 외국의 후원을 받았다. 소비에트에 대한 프랑스, 영국, 미국, 일본 등 군대의 간섭 경험을 상기시켜야겠는가?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외부의 군사적 지원 없이도 국내의 반동세력과 외국의 간섭세력을 물리쳤다. 혁명은 무엇보다도 대담한 사회강령 덕택에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이 강령이야말로 대중이 자기 세력권에서 무기를 몰수하고, 적의 군대를 해체시킬 가능성을 제공한다. 적군(赤軍)은 프랑스, 영국, 미국의 군수물자를 빼앗고, 외국 원정군을 바다로 쫓아버렸다. 벌써 이것을 잊어버렸는가?

만약 무장한 노동자와 농민의 선두에, 즉 이른바 공화주의 스페인의 선두에 자본가계급의 겁쟁이 하수인들이 아니라 혁명가들이 있었다면, 무장의 문제가 결코 최우선시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식민지 모로코의 리프족[리프족(Riffians) : 모로코 북부의 리프산맥에 살고 있는 베르베르인.]과 무쏠리니의 병사들을 포함한 프랑코의 군대는 혁명의 감화에 결코 면역되지 않았다. 사회주의혁명이라는 대화재에 둘러싸인 파시즘의 병사들은 그 수가 미미해졌을 것이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부족했던 것은 무기나 군사적 ‘천재’들이 아니다. 부족했던 것은 바로 혁명정당이었다!

 

승리의 조건

착취자들의 군대에 대항하는 내전에서 대중이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은 그 본질에 있어서 지극히 단순하다.

 

1. 혁명 군대의 전사들은 케케묵은(‘민주주의적’) 착취형태의 재건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완전한 사회적 해방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해야 한다.

2. 적의 후방뿐만 아니라 혁명 군대의 후방에 있는 노동자, 농민들도 같은 사실을 인식하고 이해해야 한다.

3. 적군의 최전선과 아군의 최전선, 그리고 양군 후방에서 선전은 사회혁명의 정신으로 완전히 충만해야 한다. ‘우선 승리하고, 그 다음에 개혁을!’이라는 구호는 성경에 나오는 왕부터 스탈린에 이르기까지 모든 억압자와 착취자의 구호이다.

4. 정책은 투쟁에 참가하는 계급과 계층에 의해 결정된다. 혁명적 대중은 자신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곧바로 표현하는 국가기구를 가져야 한다. 오직 노동자, 병사, 농민 대표들의 소비에트만이 그러한 기구 역할을 할 수 있다.

5. 혁명 군대는 자신이 장악한 지역에서 좀 더 긴급한 사회혁명 조치를 선포할 뿐만 아니라 즉시 실행해야 한다 : 수중에 있는 식량, 제품 등의 비축 분을 몰수하여 궁핍한 사람들에게 인도하고, 노동자, 특히 투사 가족들을 위해 은신처와 집을 재분배하고, 농민을 위해 토지와 농업 비축량을 몰수하고, 구 관료집단을 대신하여 노동자 통제와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해야 한다.

6. 사회주의혁명의 적들, 즉 착취분자와 그 앞잡이들은 ‘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로 가장하고 있더라도 군대에서 가차 없이 쫓아내야 한다.

7. 각 부대의 지휘부에는 혁명가와 투사로서 흠잡을 데 없는 권위를 가진 인민위원이 배치되어야한다.

8. 모든 부대에는 노동자 조직이 추천한 가장 헌신적인 투사들의 중핵이 굳게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 이들 중핵은 전투의 최전선에 선다는 단 하나의 특권을 갖는다.

9. 처음에는 사령부에 많은 이질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분자들이 포함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들의 시험, 재시험, 체질(sifting)은 전투 경험, 인민위원의 추천, 동료 투사들의 증명에 근거하여 수행되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혁명적 노동자의 대오에서 끌어올린 지휘관들의 맹훈련을 시작해야 한다.

10. 내전의 전략은 군사기술의 규칙을 사회혁명의 임무와 결합시킨 것이어야 한다. 선전에서만이 아니라 군사작전에서도 제각기 다른 적군(敵軍) 부대들의 사회적 구성(부르주아 의용병인가, 동원된 농민인가, 또는 프랑코 군대의 경우처럼 식민지 노예인가)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작전 수행 경로를 선택하면서는 해당 지역의 사회적 구조(산업지역인가, 혁명적인 농촌지역인가 아니면 반동적인 농촌지역인가, 피억압 민족의 지역인가 등)를 엄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혁명적 정책이 전략을 좌우한다.

11. 혁명정부와 노동자, 농민의 집행위원회 모두 군대와 근로대중의 완전한 신뢰를 획득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12. 대외정책의 주요한 목적은 전 세계의 노동자, 피착취 농민, 피억압 민족들의 혁명적 의식을 일깨우는 것이어야 한다.

 

 

스탈린이 패배의 조건을 보증했다

살펴본 것처럼, 승리의 조건은 아주 간단명료하다. 이것들을 통틀어 사회주의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런 조건들이 스페인에서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기본적인 이유는 혁명정당의 부재 때문이다.

스탈린이 정치국, 인민위원, 세포, 게페우 등 볼셰비키주의의 외면적 경험을 스페인의 토양에 이식하려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형식들에서 그 사회적 내용을 없애버렸다. 그는 볼셰비키 강령을 폐기했으며, 게다가 대중의 혁명적 주도권의 필수적 형태인 소비에트도 폐기했다. 그는 볼셰비키주의의 기법을 부르주아 소유권을 위해 유용하게 사용했다. 그는 관료적 편협함에서 ‘인민위원’만으로도 승리를 보증할 수 있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사적 소유의 인민위원들은 오직 패배를 보증할 능력밖에 없음이 판명되었다.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최상의 군사적 자질을 발휘했다. 나라의 경제 활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에서, 그리고 정치적, 문화적 수준에서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혁명의 첫째 날, 1917년 초의 러시아 노동자계급을 능가하고 있었다. 승리로 가는 길에 노동자계급 자신의 조직이 주요 장애물 로 버티고서 있었다.

스탈린주의 지휘부는 자신의 반(反)혁명적 역할에 맞게 청부업자, 출세주의자, 탈계급분자 등 대체로 모든 유형의 사회적 쓰레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른 노동자 조직의 대표자들一구제불능의 개량주의자, 무정부주의 공론가, 통일노동자당의 무기력한 중도주의자들一은 툴툴거리고, 앓는 소리를 하고, 머뭇거리고, 술책을 썼지만 결국에는 스탈린주의자와 타협했다. 이들의 이런 행동이 합쳐진 결과, 사회혁명 진영一노동자와 농민一이 자본가계급,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그림자에 종속됐다는 것이 드러났다. 짜낼 수 있는 대로 다 짜낸 혁명은 그 성격이 완전히 탈각되었다.

대중들의 영웅적 행위도, 개별 혁명가들의 용기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령이나 행동계획도 없이 대중은 제멋대로 방치되었으며 동시에, 혁명가들은 여전히 분열되어 있었다. ‘공화주의’ 군대의 지휘관들은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것보다 사회혁명을 분쇄하는데 더 관심이 있었다. 병사들은 자기 지휘관들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으며, 대중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다. 농민은 옆으로 피했으며, 노동자들은 지쳐버렸다. 패배가 연이어졌으며, 급속도로 사기가 저하되었다. 이 모든 것은 내전 초기부터 어렵지 않게 예견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구원을 자신의 임무로 삼음에 따라 인민전선은 스스로에게 군사적 패배를 선고했다. 볼셰비키주의를 거꾸로 세움에 따라 스탈린은 혁명의 무덤을 파는 자 역할을 완전하게 수행했다.

스페인의 경험은 스탈린이 10월 혁명이나 러시아 내전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다시 한 번 증명한다는 것을 부연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의 굼뜨고 편협한 사고방식은 1917~21년의 격렬한 사태 전개에 구제불능일 정도로 뒤처졌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밝힌 1917년의 연설이나 글에 그의 최근 테르미도르적 ‘교의’가 전부 박혀 있었다. 이 점에서 1937년 스페인의 스탈린은 볼셰비키당의 1917년 3월 협의회의 스탈린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1917년에 단지 혁명적 노동자를 두려워했을 뿐이지만 1937년에는 이들을 압살했다. 기회주의자가 사형집행인이 되었다.

 

 

‘후방의 내전’

그러나 결국 카바예로와 네그린 정부에 대해 승리를 거두려면, 공화주의 군대의 후방에서 내전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一민주주의적 속물은 공포에 떨며 이렇게 소리친다. 마치 여태까지 공화주의 스페인에서는 내전이 없었다는 듯이, 그것도 가장 비열하고 가장 배신적인 전쟁一노동자와 농민에 대항하는 소유자와 착취자들의 전쟁이 없었다는 듯이. 이 중단되지 않은 전쟁은 혁명가의 체포와 살해, 대중운동의 압살, 노동자의 무장해제, 부르주아 경찰의 무장, 노동자 파견대를 무기와 지원군 없이 전선에 유기하기, 마지막으로 군수산업의 발전에 대한 인위적 제한 등으로 나타난다.

전선에 잔혹한 타격을 준 각각의 이런 행위는 자본가계급의 계급적 이해에 따른 직접적인 군사적 반역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적’ 속물들一스탈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를 포함한一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내전을 ‘인민전선의 통일’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기 때문에 당연하고 불가피한 전쟁으로 간주했다. 심지어는 전선에 아주 가까이 인접해있는 지역에서도 그랬다. 반면에, ‘공화주의’ 반(反)혁명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내전은 같은 속물들의 눈에는 ‘반(反)파시스트세력의 통일’ …을 분열시키는 범죄적이고, ‘파시스트’적이며, 트로츠키주의적인 전쟁으로 비쳤다. 수많은 노만 토마스[노먼 토머스(Norman Thomas, 1884-1968/69) : 미국사회당 지도자. 1928~48년 미국사회당의 대통령후보.], 애틀리 수상[클레멘트 아틀리(Clement Attlee, 1883-1967) : 영국노동당의 지도자. 맥도날드의 뒤를 이어 1945~50년 수상 역임.], 오토 바우어, 지롬스키[장 지롬스키(Jean Zyromsky, 1890~?) : 프랑스사회당 좌파의 지도자, 친(親)스탈린주의적 당료그룹을 이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말로[앙드레 말로(Andre Malraux, 1901-1976) : 프랑스의 작가. 1923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이주. 그 후, 중국의 광동혁명에 참가. 1928년에 광동혁명을 그린 소설 〈정복자〉를 발표. 1933년에 상해쿠데타를 그린 〈인간의 조건〉을 발표.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국 의용군 항공장교로 활약. 이를 바탕으로 1937년에 르포르타주 〈희망〉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드골(de Gaulle)파의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 전후, 드골과 협 력, 정보장관, 문화담당 국무장관을 역임했다.]나 듀란티[월터 듀란티(Walter Duranty, 1884-1957) : 〈뉴욕 타임즈〉의 모스크바 특파원. 스탈린에 의한 반대파 탄압을 호의적으로 보도했다.]와 루이스 피셔 같은 보잘것없는 거짓말쟁이 행상들은 이런 비열한 말들을 전 세계에 퍼뜨리고 있다. 그 사이에 인민전선 정부는 마드리드에서 발렌시아로, 다시 발렌시아에서 바르셀로나로 퇴각하고 있다.

사실이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사회주의혁명만이 파시즘을 분쇄할 수 있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계급의 성공적인 봉기는 지배계급이 최악의 어려움에 꽉 잡혀 옴짝달싹못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지만 민주주의적 속물들은 노동자계급의 봉기를 용납할 수 없는 증거로 바로 이런 어려움을 끌어다댄다. 이 민주주의적 속물들이 자신의 해방시간을 알려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노동자계급은 영원히 노예로 남을 것이다. 온갖 가면을 쓰고 있는 반동적 속물들을 곧 알아보고, 그 가면에 관계없이 그들을 경멸하도록 노동자에게 가르치는 것은 혁명가의 첫 번째 이자, 최고의 임무이다.

 

결과

공화주의 진영에 대한 스탈린주의자의 독재는 그 본질상 수명이 길지 않다. ‘인민전선’ 정책에서 유래하는 패배가 다시 한 번 스페인 노동자 계급으로 하여금 혁명적 공격에 나서게 하여 이번에야말로 성공을 거둔 다면, 스탈린주의 도당은 강철 빗자루로 일소될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이 혁명의 무덤을 파는 일을 매듭짓는다면,一유감스럽게도 그 가능성 이 있다一이 경우에도 그는 감사받지 못할 것이다. 스페인 자본가계급은 사형집행인으로서의 그를 필요로 했던 것이지, 보호자나 가정교사로서 그를 필요로 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스페인 자본가계급의 눈에는 한편으로는 런던과 파리, 다른 한편으로는 베를린과 로마가 모스크바보다 훨씬 더 지불능력이 있는 회사로 보인다. 스탈린 자신은 결정적 파국에 앞서 스페인에서 자신의 흔적을 감추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는 패배의 책임을 자신의 가장 가까운 동맹자들에게 떠넘기고 싶어 할 것이다. 이런 다음에 리트비노프가 프랑코에게 외교관계를 다시 맺자고 구걸할 것이다. 이런 것은 모두 이미 여러 차례 보아온 것이다.

그렇지만 프랑코 장군에 대한 이른바 공화주의 군대의 완전한 승리조차 ‘민주주의’의 승리를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와 농민은 두 번, 즉 1931년 4월과 1936년 2월에 부르주아 공화주의자와 그 좌익 대리인들을 권력에 앉혔다. 두 번 다 인민전선의 영웅들은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위험한 부르주아 대표들에게 인민의 승리를 넘겨주었다. 인민전선의 장군들이 쟁취한 세 번째 승리는 이들의 트레이드마크인 노동자와 농민 뒤에서 맺는 파시스트 자본가계급과의 협정을 의미할 것이다. 이러한 체제는 아마 왕정이나 가톨릭교회의 공공연한 지배는 없을지 모르지만 군사독재의 한 변종에 다름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화주의의 부분적 승리는 영국-프랑스의 ‘사심 없는’ 중재를 통해 교전 중인 양 진영을 화해시킬 목적으로 이용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변종의 경우에도 ‘민주주의’의 마지막 단편들은 미아하(공산주의자!) 장군과 프랑코(파시스트!) 장군의 형제적 포옹에 억압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다시 한 번 반복하자 : 승리는 사회주의혁명이나 파시즘 둘 중 하나에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비극이 마지막 순간에 희극에 길을 열어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인민전선의 영웅들이 자신의 마지막 수도를 버리지 않으면 안될 때, 이들은 증기선이나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에 인민에게 ‘좋은 추억’을 남기기 위해 일련의 ‘사회주의적’ 개혁 조치를 선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의 노동자는 영웅적 혁명을 파멸시킨 당들을 증오하고 경멸하면서 기억할 것이다.

스페인의 비극적 경험은 훨씬 거대한 사태에 앞서 세계의 모든 선진 노동자에게 보내는 끔찍한一아마 마지막일지도 모르는一경고이다. 마르크스는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이 기관차는 반(半)혁명적 또는 1/4만 혁명적인 당들의 생각보다 더 빠르게 전진한다. 뒤처지는 자들은 누구든지 기관차 바퀴 밑으로 떨어진다. 그 결과一이것이 가장 큰 위험 이다一기관차 자체도 종종 파괴 된다.

혁명의 문제를 끝까지, 그 구체적인 최종 결론에 이를 때까지 심사숙고해야 한다. 정책은 혁명의 기본법칙, 즉 전투태세를 갖춘 계급의 운동에 맞춰야 한다. 스스로를 ‘인민’전선이나 그 밖의 온갖 종류의 전선이라 부르는, 겉만 번지르르한 소부르주아 그룹들의 선입견이나 두려움에 맞춰서는 안 된다. 혁명 중에 최소한의 저항노선은 최대한의 재앙노선이다. 자본가계급으로부터의 ‘고립’을 두려워하는 것은 대중으로부터의 고립을 초래할 뿐이다. 노동귀족들의 보수적 편견에 순응하는 것은 노동자와 혁명에 대한 배신이다. 지나친 ‘신중함’은 가장 파멸적인 경솔함이다. 이것이 스페인에서 가장 성실한 정치조직 즉, 중도주의 통일노동자당의 파멸이 가르쳐주는 주된 교훈이다. 런던사무국의 당과 그룹들은 역사의 마지막 경고로부터 필수적인 결론을 도출하고 싶어 하지 않거나, 그렇게 할 수 없다. 같은 이유로 이들은 스스로 파멸한다.

그 대신에 새로운 혁명가 세대가 지금 패배의 교훈을 배우고 있다. 이 세대는 투쟁 속에서 제2 인터내셔널의 수치스러운 명성을 확인했다. 이들은 제3 인터내셔널의 몰락의 깊이를 재봤다. 이들은 무정부주의자를 그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판단하는 법을 배웠다. 이것은 무수한 투사들의 희생을 대가로 치른 더할 나위 없이 귀한 위대한 수업이다! 혁명 중핵들은 지금, 오직 제4 인터내셔널의 기치 하에서만 결집하고 있다. 패배의 굉음 속에서 태어난 제4 인터내셔널은 노동자들을 승리로 이끌 것이다.

1937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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