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트로츠키주의자2017.04.21 10:20

 

[16. A Letter to James Cannon] 제임스 캐넌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버넘 동지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새로운 논문 러시아어 판을 어제 동지 앞으로 우송했습니다. 변증법을 논의의 지배적인 주제로 삼은 것에 대해 동지들 모두가 만족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당원들 특히 청년 당원들에게 이론 교육을 개시하고 이들이 경험주의와 절충주의에 대해 혐오감을 갖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1940년 1월 9일

레온 트로츠키

 

[17. A Letter to Farrell Dobbs] 패럴 답스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라이트 동지가 번역하도록 보낸 논문에서 나는 두 가지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관료적 보수주의(bureaucratic conservatism) 문제입니다. 전에 이곳에서 동지와 이 문제를 약간 토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의 정치적 경향인 관료적 보수주의는 특정 사회계층 다시 말하면 특권을 누리고 있는 노동관료층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나타냅니다. 자본주의 국가 특히 제국주의 국가들과 더욱더 높은 정도로 소련에 이러한 사회계층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노동자당 다수파가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되는 "관료적 보수주의"의 사회계층적 뿌리를 찾는 것은 어리석은 정도를 넘어서서 황당무계합니다. 관료주의와 보수주의는 객관적 사회조건에 의해서 결정되거나 일부 지도자들의 개인적 특성에 의해 현실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분파가 존재하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분파는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개인들의 집단을 의미합니까? 이러한 설명이 가능하다면 이 설명은 정치적 설명이 아니라 심리적 설명입니다. 예를 들어 캐넌 동지가 관료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면 다수파는 이 동지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이 특성에도 불구하고 캐넌 동지를 지지한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파투쟁의 사회적 토대 문제를 소수파 지도자들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 캐넌 동지를 "옹호"하는 나를 헐뜯기 위해 소수파 지도자들은 프랑스 지부 지도자였던 몰리니에(Molinier)를 한때 내가 옹호한 것이 오류였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물론 개인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오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이 점은 결코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의 주장에는 깊이가 없습니다. 나는 몰리니에의 잘못된 이론들을 결코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의 개인적 특성이었습니다. 그가 보인 잔인함, 규율 위반, 개인적 재산 축적 등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베레컨과 같은 일부 동지들은 조직이 그와 즉시 결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나는 조직이 몰리니에에게 규율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1934년 몰리니에는 당 강령을 "네 개의 구호(four slogans)"로 대체하려고 애쓰면서 이것에 기반하여 신문을 제작했습니다. 이때 나를 포함한 여러 동지들이 그에 대한 제명조치를 제안했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에게 보인 나의 인내력에 대해서 각자 견해를 달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몰리니에의 개인적 이해가 아니라 당원 교육의 차원에서 이렇게 행동했습니다. 많은 동지들은 제명과 조직 분리 또는 이렇게 하겠다는 위협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일종의 극약처방인 셈인데 우리 조직의 지부들이 코민테른의 악습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필드, 와이스보드, 그외 여러 미국 동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몰리니에의 경우에도 나는 좀더 인내를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몇몇 경우에는 나의 설득이 성공했지만 또 다른 여러 경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운동 대오 내 일부 의심스러운 인사들에 대해 내가 보인 인내심에 대해 나는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이들을 "옹호"하는 행위가 원칙을 버리면서까지 동맹을 추구하는 경우로 나아간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버넘 동지를 제명할 것을 제안하면 나는 열성적으로 반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맑스주의에 저항하는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가장 강력한 사상투쟁을 수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940년 1월 10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18. A Letter to John Wright] 잔 라이트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섁트먼 동지의 팜플렛에 대한 동지의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섁트먼의 이 글은 분파적 감정에 의해 그의 약점이 증폭된 결과물입니다. 그에게는 노동계급적 관점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는 문필계의 그림자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노동계급과 맑스주의에 얼굴을 향하고 있을 때는 그의 그림자는 유용합니다. 현실과 그의 그림자는 대체로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당내 노동계급 경향 다수파와 맑스주의에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 결과 그의 글을 구성하고 있는 단어 하나 하나는 사실과 사상을 전혀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완전히 말도 안되는 글을 좀더 면밀하게 분석하기 위해서 다시 며칠의 시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수파 동지들 다수를 포함하여 당원들 전부에게 섁트먼의 글이 문장마다 맑스주의와 볼셰비즘으로부터 한심스럽게 결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1940 년 1 월 13 일

레온 트로츠키

 

[19. A Letter to James Cannon] 제임스 캐넌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섁트먼의 공개서한은 그 내용이 참으로 한심합니다. 가치가 있다면 단 한가지 입니다. 즉 그의 정치노선의 진면모를 내가 폭로하도록 강요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의 편지에 대한 답장은 이미 구술시켰으며 약간 다듬기만 하면 완성됩니다. 불행하게도 버넘 동지에게 보낸 편지보다 더 짧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1940년 1월 16일

레온 트로츠키

 

[20. A Letter to William Warde] 윌리엄 와드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동지는 우리 운동의 방법론 문제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비교적 몇 안되는 동지 가운데 한 명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내 논쟁에 동지가 개입하는 것이 아주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원들 특히 청년 당원들이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서 아주 치열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중이라고 여러 동지들의 편지가 밝히고 있습니다. 이 관심을 올바르게 유도할 수 있는 동지들이 당내에 변증법적 유물론 사상을 증진시키는 목적으로 순수하게 이론적인 그룹을 형성할 때가 되었다고 동지는 생각지 않습니까? 라이트 동지, 걸런드 동지와 함께 동지는 이 주제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있습니다. 동지들이 전국위원회 선전부의 지도를 받아 이 그룹의 초동 핵심을 형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나의 제안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내는 막연한 성격의 제안입니다. 책임있는 당 기구에게 이 제안을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1940년 1월 16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21. A Letter to Joseph Hansen] 조지프 핸슨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섁트먼의 편지에 대한 나의 글이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이틀동안만 다듬으면 됩니다. 그리고 동지가 인용한 부분을 활용하려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더 중요한 문제를 말하고 싶습니다. 소수파 지도자들 중 일부는 조직을 분리하는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을 박해받는 소수파로 위장하려고 합니다. 이들의 심리상태를 아주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계획입니다. 대체로 다음과 같이 그들에게 답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수파가 자행할 앞으로의 탄압을 벌써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미래에 누가 소수파가 되든 소수파에 대한 권리를 서로 보장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러한 보장은 4개 조항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1) 분파활동의 자유 (2) 공동행동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한 분파활동의 무제한적 자유 (3) 공식 출판물의 내용은 새로운 당대회에 의해서 결정된다 (4) 소수파는 원한다면 내부 토론집을 발간할 수 있으며 다수파와 함께 하는 공동 토론집도 발간할 수 있다."

기나긴 토론과 당대회를 끝낸 후 즉시 당내 토론집을 계속 발간하는 일은 규칙이 아니라 일종의 예외 조치이며 한탄할만한 예외 조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관료가 전혀 아닙니다. 부동의 규칙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조직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변증법론자입니다. 당대회의 결정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중요한 소수파가 존재한다면 조직을 분리하는 것보다 당대회 후에도 토론을 허용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새로 임명되는 전국위원회의 감독 아래 당원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을 위해 심포지엄 특별자료집을 발간할 것을 소수파에게 제안하는 선까지 양보할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아직도 폭발하지 않은 소수파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이들이 조직을 분리할 명분을 제공하지 않기 위해 이 방향으로 가능한 선에서 많은 양보를 해야 합니다.

쌍방의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토론을 연장할 경우 지금 상황에서는 당원들의 교육에 도움이 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수파는 문서의 형식으로 이 제안들을 공식적으로 전국위원회에 제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제안들에 대한 소수파의 반응이 어떻든 당에게는 무조건 이익이 될 뿐입니다.  

1940년 1월 18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22. From a Scratch ? To the Danger of Gangrene] 긁힌 상처가 도져 몸이 썩어 들어가다  

현재 진행중인 당내 논쟁은 나름의 내적 논리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 각 분파는 자신의 사회적 토대와 정치적 모습에 걸맞게 상대 분파의 가장 약한 지점들을 공략하려고 애쓰고 있다. 적대 분파 지도자들의 미리 결정된(a priori) 계획이 아니라 바로 이 내적 논리가 논쟁의 흐름을 결정하고 있다. 격화되고 있는 논쟁에 대해 지금 한탄하는 것은 사후 약방문일 뿐 논쟁 결과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조직이 보낸 염탐꾼들이 이 과정에서 행사하는 역할은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당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논쟁의 분위기를 흐트리고 사상 투쟁을 조직 분리로 이끌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이 신사 양반들이 누구인 지를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이 보이고 있는 논쟁에 대한 열정은 지나치며 거짓꾸밈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사상과 주장을 얘깃거리와 비방으로 바꿔치기하고 있다. 이들은 모든 분파의 공동 노력을 통해 정체가 폭로되고 당에서 제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원칙에 입각한 사상투쟁은 끝까지 진행되어 지금까지 제기된 좀더 중요한 문제들이 진지하게 해명되어야 한다. 당의 이론 수준을 높일 수 있도록 논쟁이 활용될 필요가 있다.

현재 탄생한 지 얼마되지 않는 제4인터내셔널 뿐만 아니라 미국 지부의 당원들 중 상당수는 쇠퇴기의 코민테른이나 제2인터내셔널 출신들이다. 이 조직들은 당원들을 잘못 가르친 형편없는 학교들이었다. 많은 수의 당원들이 탄탄한 이론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논쟁을 통해서 드러났다. 뉴욕 지부는 맑스주의 이론과 강령을 가볍게 수정하려는 시도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려는 힘찬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다수가 이 수정주의자들을 지지하였다. 이 경우를 예로 드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미국 지부와 제4인터내셔널 전체가 진지하게 혁명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정직한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한 이 현상은 불행하기는 하지만 교정이 가능하다. 이들은 배우고자 하는 욕망과 의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편이 아니다. 당이 노동조합과 노동자 운동 일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당의 중핵들은 이론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여기서 중핵이라는 것은 "당기구"가 아니라 당원 전체를 말한다. 당원 모두는 노동자군대의 장교임을 스스로 인식해야 한다. "

언제부터 철학의 전문가가 되었습니까?" 소수파 당원들은 다수파 지도자들에게 빈정거리듯이 이렇게 묻는다. 그러나 이 빈정거림은 대상을 완전히 잘못 찾았다. 무의식적 역사과정 즉 노동계급이 공산주의 사회의 기반을 통해 사회를 재건하려는 본능적이며 원초적인 운동을 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과학적 사회주의이다. 노동자들의 심리 속에 존재하는 이러한 유기적인 경향들은 위기와 전쟁의 시대인 지금 가장 빠르게 살아나고 있다. 진행되고 있는 논쟁은 당내 쁘띠부르조아 경향과 노동계급 경향 사이의 충돌이라는 사실을 의문의 여지없이 드러내었다. 당 강령을 "구체적인" 문제라는 작은 동전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에서 쁘띠부르조아 경향은 자신의 혼란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반대로 노동계급 경향은 모든 부분적인 문제들을 통일된 이론의 수준으로 연관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의식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적용시키려는 다수파 동지들 개개인의 노력 정도가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동지들이 대체로 노동계급적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바로 이 이유로 인해 "혁명의 대수(algebra of the revolution)"인 변증법을 체득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알기로 소수파 동지들은 "변증법"이라는 말만 나와도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이 가치없는 방법은 아무 짝에도 소용이 되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경험에 의하면 역사과정의 변증법은 자기를 냉소하는 자들을 잔인하게 벌주었다.

"레온 트로츠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이란 제목으로 섁트먼 동지가 작성한 논문은 걱정스러운 증상을 드러내고 있다. 섁트먼 동지는 논쟁을 통해 뭔가를 배우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의 오류들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으며 이를 통해 당의 불충분한 이론적 수준 뿐만 아니라 쁘띠부르조아 경향의 특이한 편견들을 이용하고 있다.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이러저러한 중심축으로 묶어내는 이 동지의 능력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이 능력 때문에 섁트먼 동지는 재능있는 문필가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능력 하나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경향을 자기 것으로 삼느냐가 진정 중요한 문제이다. 이 동지는 문학과 언론에 정치가 반영되는 현상에 몰두해 있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실제 과정, 대중의 생활, 노동계급 내 각 부위들 간의 상호관계 등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나는 이 동지의 정말 뛰어난 논문들을 몇편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 노동계급 또는 그 전위의 생활을 파헤친 그의 평론은 단 한편도 보지 못했다.

그의 한계는 제한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하고싶은 말이 있다. 섁트먼의 개인적인 결함뿐만 아니라 역사적 조건들의 특수한 결합으로 인해 노동운동 외부에서 성장한 혁명세대 전체의 운명이 이 현상 속에 체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소중한 분자들이 혁명에 대한 헌신성에도 불구하고 퇴보할 위험성에 대해 나는 과거 연설과 글을 통해 밝힌 바 있다. 한때 존재했던 사춘기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은 이제 결함으로 자리잡았다. 결함은 질병을 유발한다. 그리고 질병은 그대로 내버려두면 치명적인 정도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당의 발전에 의식적으로 새로운 장을 열 필요가 있다. 제4인터내셔널의 선전가들과 문필가들은 자신의 의식에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한다. 쁘띠부르조아 경향에 등을 돌리고 노동자들에게 향할 수 있도록 전환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현재 당내 위기의 원인을 노동계급 부위의 보수화로 보거나 위기의 해결책을 쁘띠부르조아 동맹의 승리를 통해 찾아보려는 시도만큼 당에게 위험한 오류는 없을 것이다. 사실 현재 위기의 핵심은 쁘띠부르조아 부위의 보수화에 있다. 이들은 순전히 선전 학교만을 졸업하였으며 계급투쟁의 길로 나아가는 경로를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위기는 이러한 분자들이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최후의 몸부림을 치는 과정에서 나왔다. 소수파 동지 모두는 확고한 욕구만 있다면 혁명운동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분파로서 이들의 생명은 그 운명을 다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투쟁에서 섁트먼은 자기 번지 수를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있다. 이런 경우에 늘 그렇듯이 그의 강점들은 멀리 후퇴한 채 그의 약점들만이 특별히 완성된 표현을 누리고 있다. 말하자면 그의 "공개서한"은 그의 약점들을 그 정수만 모아놓은 것이다.

섁트먼은 한가지 조그마한 것 즉 자신의 계급적 입장을 빠뜨리고 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는 유별나게 좌충우돌하고 있다. 그는 아무 연관도 없이 역사적 일화들을 짬뽕하는 것으로 계급적 분석을 대체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유일한 목적은 자신의 어제와 오늘의 입장이 다르다는 사실을 은폐하여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는 데에 있다. 맑스주의 역사, 볼셰비키당사, 러시아 좌익반대파의 역사 등에 대해서도 그는 같은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오류와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그가 기대고 있는 모든 역사적 비유들은 차라리 그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오류를 범하는 것보다 오류를 교정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섁트먼의 정신적 좌충우돌을 하나하나 추적함에 있어서 나는 독자들의 인내력을 요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단순히 오류들과 모순들을 폭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노동계급의 입장을 쁘띠부르조아의 입장과 대비시키고 맑스주의 입장을 절충주의 입장과 대비시킬 것을 약속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 모두가 논쟁으로부터 뭔가를 배우게 될 것이다.  

 

"과거의 예들"

섁트먼은 화가 나서 이렇게 묻는다: "타협할 줄 모르는 혁명가였던 우리가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쁘띠부르조아 경향으로 탈바꿈할 수 있단 말인가?"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이 경향이 작년(!) 또는 제작년에 소수파 지도자들을 통해 어떻게 드러났는가?"(1940년 1월 [당내 토론집] 제2권 제7호 11쪽) 과거에는 왜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영향에 우리가 굴복하지 않았는가? 스페인 혁명 기간에 왜 우리는 기타 등등. 이것이 섁트먼이 꺼낸 마지막 비장한 주장이다. 이 주장에 대해 그는 예외적인 중요성을 두면서 그 주제를 목청을 바꾸어 가면서 계속 반복하고 있다. 바로 이 주장을 이용하여 내가 그를 반박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에게는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다.

트로츠키가 10번 가운데 9번 아니 어쩌면 100번 가운데 99번 옳다고 소수파 문서 [전쟁과 관료적 보수화]는 인정한다. 대단히 관대하면서도 제한적인 이러한 양보의 의도를 나는 너무 잘 이해하고 있다. 실제로 내가 범한 오류의 정도는 훨씬 더 크다. 그런데 이 문서가 작성된 지 2주 내지 3주가 지난 후 섁트먼은 이렇게 주장했다:

(ㄱ) 지난 10년 동안 섁트먼 자신은 트로츠키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트로츠키는 자신에게 제공된 정보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ㄴ) 트로츠키는 노동계급 경향을 쁘띠부르조아 경향과 그리고 볼셰비키 경향을 멘셰비키 경향과 구별할 능력이 없다.

(ㄷ) 트로츠키는 대중에 의한 혁명 대신 "관료적 혁명"이라는 황당한 개념을 주창하고 있다.

(ㄹ) 트로츠키는 폴란드, 핀란드 등과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올바른 해답을 제시할 능력이 없다.

(ㅁ)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에 투항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ㅂ) 트로츠키는 민주집중제의 의미를 이해할 능력이 없다, 기타 등등 한이 없다.

한마디로 하면 특히 섁트먼 자신이 관련되어 있는 사안들에서 내가 100번 중 99번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그는 지난 2주 내지 3주 동안 새로이 발견했다. 그의 이러한 최근 주장도 과장되어 있다. 다만 지난 번 주장과 방향이 정반대일 뿐이다. 어쨌든 내가 그의 쁘띠부르조아 편향을 발견한 것보다 훨씬 더 갑자기 그는 내가 대중에 의한 혁명을 "관료적 혁명"으로 바꿔치기하는 경향을 발견했다.

섁트먼 동지는 지난 해 동안 아니 심지어 지난 2년 내지 3년 동안 당내에 "쁘띠부르조아 경향"이 존재해 왔다는 증거를 제시할 것을 나에게 요청했다. 그가 더 먼 과거를 들추지 않기를 원하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 그럴 경우 자기의 주장이 공격을 받을 근거는 그만큼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대로 지난 3년에 한정하여 증거를 제시해 보겠다. 지금부터 관심을 집중해 주기 바란다. 나에게 무지막지하게 공격을 가하는 인사들의 웅변적인 질문에 대해서 나는 몇 가지 문서들을 정확히 인용하면서 담담히 답하겠다.  

 

1.

1937년 5월 25일 나는 미국 사회당 내의 볼셰비키-레닌주의 분파의 정책에 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뉴욕에 보냈다: " 최근의 두 문서를 인용하겠다:(ㄱ) 당대회에 대한 `맥스(Max)'의 개인적 편지 (ㄴ) 그가 작성한 `혁명적 사회당 창당을 위해'라는 제목의 논문. 이 논문의 제목만 보아도 그가 잘못된 전망을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사회당의 지난 당대회를 포함한 그간의 정황을 보면 사회당은 `혁명적' 정당이 아니라 영국의 독립노동당과 비슷한 어떠한 전망도 결여한 한심스러운 중도주의 정당으로 이행하고 있다.

미국 사회당이 제2 내지 제3인터내셔널 계열의 어떤 정당보다도 혁명적 맑스주의 입장에 `더 가깝다'는 확신은 완전히 말도 안되는 찬사이다. 미국 사회당은 성격이 유사한 유럽의 정당들인 스페인의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 영국의 독립노동당, 독일의 사회주의노동자당 등보다 더 후진적인 정당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노먼 타머스를 중심으로 한 사회당 지도부의 부정적인 강점들을 폭로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당의 전쟁 관련 결의문이 `이 당이 과거 채택한 다른 어떤 결의문에 비해서 우수하다'고 주장해서는 절대 안된다. 이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전쟁 관련 결의안이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순전히 문구에만 집착한 평가일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결의문은 역사적 사건, 정치상황, 결의문 자체의 시급한 필요성 등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위에서 언급한 두 문서에서 섁트먼은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 좌파에 대해 지나치게 근접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이것은 혁명가에게는 대단히 위험한 증상이다! 유럽의 전쟁에 대해 노먼 타머스가 보인 "급진적인" 입장을 그가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기회주의자들은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더 급진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 법칙에 유념하면 섁트먼과 그의 동맹자들이 우리를 "스탈린주의에 투항"한다고 비난하는 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섁트먼처럼 뉴욕 브랑스구에 들어앉아 있으면 미국의 쁘띠부르조아들보다 크렘린궁의 스탈린주의자들에게 더 비타협적으로 대항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보신에 훨씬 도움이 되며 더 쉽다. 안타까운 일이다.  

 

2.

섁트먼의 말에 의하면 나는 논쟁에 참여하고 있는 분파들의 계급구성 문제를 억지로 끌어들였다. 이 점에 대해서도 최근의 경우를 검토해 보자.

1937년 10월 3일 나는 뉴욕에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당생활의 `평상' 시기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 당원들이 상황이 급격히 변화하여 일반적 정식이나 유창한 펜을 가지고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뛰어난 자질들을 발휘한다. 이 경우 노동자들의 삶과 이들의 실천적인 능력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재능있는 노동자 당원은 자기확신과 정치적 능력을 발휘한다. 나는 이 말을 수백번이나 반복한 바 있다.

조직 발전의 첫단계에서 지식인들이 당을 주도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 상황은 재능이 있는 노동자 당원들을 교육시키는 데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 다음 당대회에서 당 지부와 중앙의 각급 위원회에 가능하면 많은 수의 노동자 당원들을 포함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주요 당기구에서의 활동은 노동자 당원에게 높은 수준의 정치학교가 된다.

그런데 어려움이 있다. 모든 조직이 고참 위원들을 보유하고 있어서 부차적이며 분파적이며 개인적인 고려사항들이 위원 후보자 선정에 너무 커다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종류의 문제에 대해서 섁트먼 동지가 관심이나 흥미를 보이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3.

섁트먼 동지에 의하면 나는 에이번 동지의 분파가 쁘띠부르조아 출신 성분들을 유난히 많이 보유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에 의하면 이것은 인위적인 문제제기일 뿐만 아니라 어떤 사실적인 근거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1937년 10월 10일 섁트먼이 캐넌과 노선을 같이하였을 때 에이번은 분파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자기 입으로 공식적으로 말한 바 있다. 이때 나는 캐넌 동지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진짜 공장노동자는 당원 중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노동계급적 분자들은 매우 필요한 촉매 역할을 하며 우리가 이러한 분자들의 높은 수준에 대해 자랑스러워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당은 비노동계급적 분자들에 의해서 압도되어 혁명적 성격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위적인 방식으로 지식인의 당내 유입을 막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조직활동을 공장, 파업, 노동조합 등에 실천적으로 맞추는 것이 문제해결의 올바른 방식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우리는 모든 공장에 같은 정도의 역량을 투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부 조직들이 지역에 위치한 두 세 공장을 선정하여 모든 역량을 이곳에 집중할 수는 있습니다. 한 공장에 두세 명의 노동자들을 획득한다면 이곳에 우리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동자가 아닌 당원 다섯명으로 구성된 지원팀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자가 아닌 당원들을 노동조합에 투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노동자들을 동지로 획득할 경우 노동조합 내 선동, 선전활동과 관련하여 지원팀을 구성하여 일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반드시 명심해야 할 규율이 있습니다. 노동자들에게 지시를 내려서는 안되며 이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이들에게 건설적인 제안들을 제시하며 객관적 사실, 사상, 공장신문, 특별 유인물 등을 통해 이들을 무장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협력은 노동자 동지들뿐만 아니라 확실한 재교육이 필요한 비노동자 동지들 모두에게 엄청난 교육적 효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지는 유태인 비노동자 당원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당이 이들을 폐쇄된 분위기에서 끌어내어 공장노동자들과 일상적인 활동을 통해 연결되도록 한다면 이들은 대단히 중요한 촉매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당내에 좀더 건강한 분위기를 조성할 것이 확실합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즉시 일반적인 규칙 하나를 제정할 수 있습니다. 즉 3개월에서 6개월 사이에 노동자를 당원으로 획득하지 못하는 당원은 별로 훌륭한 당원이 아니라는 규칙이 이것입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정책을 진지하게 수립하고 이 정책의 실제적인 결과들을 매주 확인한다면 우리는 커다란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지식인과 사무직 노동자들이 소수의 공장노동자들을 짓눌러 침묵시켜 당을 아주 지적인 토론클럽이기는 하나 노동자들이 있을 곳이 전혀 못되는 그런 조직으로 변모시킬 위험을 피할 수 있습니다.

청년 조직을 운영하고 확대시키는 일도 마찬가지의 규칙들이 구체적으로 확립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청년들을 혁명투사가 아니라 아마추어 혁명가로 만들어 낼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이 편지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확해진다. 즉 독소불가침조약 이 체결되고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 점령한 바로 다음날 당내에 쁘띠부르조아적 편향이 존재할 위험이 있다고 내가 말한 적이 전혀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 사건이 있기 2년도 더 거슬러 올라가서 지속적으로 나는 이런 취지의 발언들을 해왔다. 그리고 당시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에이번 분파를 주로 염두에 두면서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당의 분위기를 일소하기 위해 뉴욕 지부에 소속된 유태인 출신의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이 습관적인 보수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진정한 노동운동 속으로 해소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현재 진행중인 논쟁보다 2년도 더 전에 쓰여진 위 편지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소수파 지도자들이 쓴 모든 글들보다 증거의 가치가 더 크다. 소수파 지도자들은 내가 "캐넌 파벌"을 옹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동기에 대해서 온갖 내용의 글들을 쓴 바가 있다.  

 

4.

당내 쁘띠부르조아 분자들 특히 학구적이며 문필활동에 종사하는 동지들에게 섁트먼 동지가 약하게 나온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전혀 비밀이 아니었다. 듀이 위원회(Dewey Commission)가 열리던 당시 1937년 10월 14일 나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캐넌, 섁트먼, 와드 동지들에게 보냈다:

" 노동자 그룹들이 이 위원회에 대폭 들어와서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나는 끈질기게 주장했습니다. 와드, 섁트먼 그 밖의 동지들은 나의 견해에 동의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들과 함께 우리는 이 계획을 현실로 옮길 수 있는 실제 가능성들을 타진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계속 문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었으며 우연히 섁트먼 동지가 나의 견해에 반대한다는 소식만 들었습니다. 왜 반대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섁트먼은 이유를 결코 털어놓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외교적인 언사를 사용해서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말로는 나의 견해에 동의한다고 하면서 일시적인 자유주의 동맹자들의 대단히 민감한 정치적 감성을 자극하는 것을 그가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명확하게 인식되었다. 이런 일에 관한 한 섁트먼은 자신의 예외적인 "섬세함"을 입증하고 있다.  

 

5.

1938년 4월 15일 나는 뉴욕 지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이스트먼의 편지가 실려서 약간 놀랐습니다. 편지가 실린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표지에 그의 편지가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고 [하퍼즈 잡지](Harper's)에 실린 그의 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우리의 공식 이론지인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간행 취지를 손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보고 우리가 원칙보다 친분을 더 앞세운다고 해석할 것입니다."  

 

6.

1938년 6월 1일 나는 섁트먼 동지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동지가 왜 유진 라이언즈에게 관용을 베풀며 심지어는 친근함을 베푸는지 이곳에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는 동지가 주최하는 만찬과 백위군(White Guards) 주최 만찬에서 똑같이 연설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소위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좀더 독립적이고 단호한 정책을 펴기를 호소했다. 이들은 사회주의 혁명에 반대하면서도 노동계급과 "우호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 이렇게 할 경우 이들은 부르조아 여론으로부터 자신들의 가치를 2배나 인정받기 때문이다.  

 

7.

지금의 논쟁이 시작되기 거의 1년 전인 1938년 10월 6일 나는 당의 신문이 노동자들에게 기조를 맞추어야 할 필요성을 이렇게 글로 표현한 바 있다:

"이 관점에서 [사회주의자의 호소]가 나타내는 태도는 아주 중요하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아주 좋은 맑스주의적 신문이지만 정치행동을 돕는 진정한 도구는 아니다. 나는 이 신문의 편집부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하고 싶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글은 확실히 불평조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말한 바 있듯이 섁트먼 동지는 당원들의 계급적 구성이나 신문의 독자들보다 이미 오래 전에 끝난 투쟁의 개별적인 문필적 일화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8.

변증법적 유물론과 관련하여 이미 언급한 바 있는 1939년 1월 20일자 편지에서 나는 다시 섁트먼 동지가 쁘띠부르조아 문필계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사회주의자의 호소]는 스탈린주의 정당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정당은 현재 모순덩어리 입니다. 이 정당은 반드시 둘로 쪼개질 것이며 이 결과 탈당한 당원들은 우리쪽으로 획득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정당에 우리의 정치적 관심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매일 그리고 매시간 이 정당이 보이고 있는 모순들을 추적해야 합니다. 편집진의 누군가가 책임을 맡아서 대부분의 시간을 스탈린주의 정당의 사상과 행동을 추적해야 합니다. 이 정당 내부에 논쟁을 촉발시킬 수도 있고 가능하면 동요하는 당원들의 편지들을 우리 신문에 공개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트먼이나 라이언즈와 같은 양반들의 글을 싣는 것보다 1천 배나 더 중요합니다. 이스트먼의 최근 글은 의미도 없을 뿐더러 오만합니다. 이 글을 동지가 왜 당 신문에 실었는지 나는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동지가 개인적으로 이 인사들을 초대하여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한정된 지면을 더럽히는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까무러칠 지경입니다. 이러한 인사들과의 토론은 일부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에게는 흥미거리인지 몰라도 혁명가들에게는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사회주의자의 호소]를 재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확신합니다. 이스트먼, 라이언즈와 같은 인사들에게는 좀더 거리를 두고 대신 노동자들과 스탈린주의 정당에 대해서는 좀더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최근의 사태들은 섁트먼이 이들 인사들과 거리를 둔 것이 아니라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9.

1939년 5월 27일 나는 당원들의 계급적 구성과 연관시켜 다시 [사회주의자의 호소]의 성격에 대해서 이렇게 편지를 썼다:

"회의록을 보니 동지가 [사회주의자의 호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신문기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 신문은 아주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를 위한 신문이지 노동자의 신문은 아닙니다.

이 신문은 여러 편집기자들이 분담을 하면서 글을 싣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주 훌륭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면서 노동자들을 신문에 참여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편집기자들 각자는 노동자들을 위해 발언을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노동자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신문은 문필의 관점에서는 뛰어나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신문쟁이들에게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어떻게 생활하며 투쟁하며 경찰과 충돌하며 위스키를 마시는지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당의 혁명적 도구로서 이 신문은 아주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재능있는 편집진의 공동노력을 통해서 신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스스로 발언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이 신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이고도 용기 있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물론 이것은 신문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 기조의 문제입니다. 쁘띠부르조아 청년 당원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들은 아주 훌륭하며 당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자기들 사이에서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노동자 현장 속으로 침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직 확실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직도 나의 일관된 견해입니다. 다시 한번 제안합니다: 쁘띠부르조아 출신 당원이 일정기간 예를 들어 3개월에서 6개월 사이에 노동자 당원을 획득하지 못하면 후보당원으로 강등되고 다시 3개월이 지나도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 제명되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조치가 부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은 전체적으로 아주 필요한 건강한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주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노동자들과 연계를 이룰 수 없는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을 제명시키자는 엄혹한 조치를 제안했을 때 나는 캐넌 분파를 "옹호"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오직 당을 퇴보의 수렁으로부터 구해내고자 했을 뿐이었다.  

 

10.

당원들의 회의적인 목소리에 접한 나는 여기에 대해서 논평하면서 1939년 6월 16일 캐넌 동지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전쟁 전야의 상황, 민족주의의 발호 등은 우리 운동의 발전에 자연스럽게 방해물로 작용하고 있으며 우리 대오 내의 사기저하에 깊은 원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당의 구성이 쁘띠부르조아적인만큼 당은 부르조아 공식 여론의 변화에 더 많이 의존합니다. 이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용기있고 적극적으로 노동자 대중들에게 향할 필요성을 이 주장으로 보충하고자 합니다. 동지의 글이 드러내고 있는 비관적인 논리 전개는 물론 부르조아 공식 여론의 애국적 민족주의적 압력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파시즘이 프랑스에서, 영국에서 승리한다면 ' 과 같은 생각말입니다. 파시즘의 승리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숨이 넘어가는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의 쁘띠부르조아 분파가 부르조아 여론에 기대고 있다는 문제는 현재의 논쟁이 있기 여러 달 전에 이미 제기되었었다. 소수파 동지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내가 인위적으로 끌어들인 문제가 전혀 아니다.

* * *

소수파 지도자들이 과거에 보인 쁘띠부르조아적 경향의 예들을 제시하라고 섁트먼 동지는 요구했다. 나는 이 요구에 답하는 과정에서 소수파 지도자들 가운데 섁트먼 동지를 특별히 지목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과거의 예들은 아직도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섁트먼과 내가 서로 주고 받은 편지들 중 "과거의 예"로서 더욱 흥미있는 것이 있다. 이것들은 다른 문제와 관련하여 곧 공개하겠다.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기억이 희미하거나 오류가 발생하는 부분들은 다수파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다른 동지들에게도 불리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섁트먼 동지는 아마 충분히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섁트먼 동지의 이름이 이들의 편지에서 계속 반복되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다른 동지들이 어쩌다 한두번 오류를 범한 반면에 섁트먼 동지의 오류들은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섁트먼 동지는 내가 당내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의 존재를 "갑작스럽게" 그리고 "예상외로" 들추어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실과 완전히 다르다. "쁘띠부르조아 소수파"에 대한 나의 글은 지난 3년 아니 사실은 지난 10년 동안 뉴욕 지부와 교환한 편지 내용을 요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점을 증명했으며 지금도 해당 문서들을 손에 들고 증명할 수 있다. 그런데도 섁트먼 동지는 "과거의 예들"을 요구하면서 뭔가를 과시하려고 하고 있다. 나는 그에게 "과거의 예들"을 제시했다. 이것들은 섁트먼의 주장을 확실하게 논박하고 있다.  

 

맑스주의에 대항하는 철학 동맹

핀란드, 라트비아, 인도, 아프가니스탄, 발루키스탄 등과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내가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대신 변증법적 유물론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는 것이 소수파 동지들의 주장이다. 이 동지들은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는 모양이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 주장은 소수파 동지들 일부의 수준을 특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사상에 대한 기본적 의리와 이론에 대한 이들의 태도를 특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1937년 1월 멕시코에 도착한 직후 내가 기차에서 섁트먼, 와드 동지들과 함께 처음으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내용은 무엇보다도 지속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선전해야할 필요성에 맞추어졌다. 이 사실을 말하는 것이 지금의 주제와 그리 어긋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운동의 미국지부가 사회당과 분립한 후 나는 가장 강력하게 가능하면 빨리 이론지를 발간할 것을 주장했었다. 당원들 특히 새로운 당원들에게 변증법적 유물론을 교육시킬 필요를 유념했기 때문이었다. 부르조아계급이 노동자들에게 체계적으로 속류 경험주의를 주입시키고 있는 미국의 경우 다른 어떤 곳보다 먼저 우리 운동을 적절한 이론적 수준으로 올려놓는 일을 시급히 추진해야 한다고 나는 글을 통해 주장했다. 섁트먼이 버넘 동지와 공동으로 작성한 글 "후퇴하고 있는 지식인"에 대해서 나는 1939년 1월 20일 섁트먼 동지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변증법에 대한 글의 내용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편집자로서 동지가 개인적으로 맑스주의 이론에 가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공격이었습니다. 좋습니다!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토론해 보기로 합시다."

이로써 이미 1년 전에 나는 섁트먼의 절충주의 경향에 대항하여 공개적으로 투쟁하겠다는 의도를 그에게 공개적으로 알렸다. 당시에는 소수파의 등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다. 어쨌든 맑스주의에 대항하는 철학 동맹이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에 대항하는 정치 동맹의 기초가 되리라고는 나는 꿈도 꾸지 못했다.

이제 표면으로 떠오른 당내의 견해 차이는 당원들의 계급적 구성과 중핵의 이론적 교육에 대한 나의 염려를 확인시켜 주었다. 도대체 기존의 나의 생각을 바꾸거나 "인위적으로" 이론 문제를 논쟁에 끌어들일 필요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다만 이 점은 덧붙이고 싶다. 제4인터내셔널의 한 지부 내에서(!) 맑스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투쟁하겠다는 생각을 정당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 --- 이것은 약간 창피스러운 감을 나에게 주고 있다.

자신의 "공개 서한"에서 섁트먼은 빈슨 던 동지가 지식인의 후퇴에 대한 자기 글에 대해 만족감을 표시했다고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나도 이 글에 대해 칭찬한 바 있다: "많은 부분들은 아주 훌륭하다." 그러나 러시아 속담이 말하듯이 타르 한 숫가락이 꿀 한통을 망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이 한 숫가락의 타르인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 할애한 부분은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너무도 황당한 개념들을 선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 개념들은 이제 명확해지고 있듯이 정치 동맹의 기반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이 글을 꼬투리로 삼고 있다는 섁트먼의 끈질긴 주장이 있으므로 다시 한번 문제되는 글의 부분 중 핵심적인 구절을 인용하겠다:

" 변증법적 유물론의 좀더 추상적인 교리에 대한 동의나 이견이 반드시 오늘이나 내일의 구체적인 정치적 쟁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 어느 누구도 아직 증명한 적이 없다. 그리고 정당, 강령, 투쟁은 이러한 구체적인 쟁점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새로운 인터내셔널], 1939년 1월호, 제7쪽) 이 인용문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혁명가답지 못한 " 정당, 강령, 투쟁은 구체적인 쟁점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라는 표현이다. 어떤 정당이며 어떤 강령이며 어떤 투쟁이란 말인가? 모든 정당과 강령이 한꺼번에 뭉뚱거려져 있다. 노동계급의 정당은 다른 모든 정당들과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구체적인 쟁점들"에 기초를 전혀 두고 있지 않다. 근본에 있어서 노동계급 정당은 부르조아 흥정꾼들이나 쁘띠부르조아 누더기꾼들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사회혁명을 준비하여 새로운 물질적 도덕적 기초 위에 인류를 소생시키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부르조아 여론의 압력과 경찰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노동자 혁명가 특히 지도자는 명확하고 넓으며 완벽하게 심사숙고한 세계관을 구비해야 한다. 통일된 맑스주의적 사상의 기초 위에서만 "구체적인" 문제들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섁트먼의 배신이 시작된다. 작년에 나는 이 배신의 징조가 단순한 오류이기를 희망했었다. 그러나 이제 명확히 드러났듯이 그의 논리는 철저한 이론적 배신 그 자체이다. 섁트먼은 버넘의 생각을 그대로 추종한다. 그래서 변증법적 유물론이 젊은 혁명정당의 정치행위에 영향을 미친다고 "어느 누구도 아직 증명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맑스주의가 노동계급의 투쟁에 소용이 있다고 "어느 누구도 아직 증명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결과 노동계급의 정당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배우고 옹호할 동기가 조금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맑스주의와 과학적 방법론 일반을 포기하는 것이며 경험주의에 불쌍하게 굴복하는 것이다. 이 논리는 섁트먼과 버넘 그리고 버넘을 통해서 부르조아 "과학" 신봉자들과 섁트먼이 철학 동맹을 맺었음을 의미한다. 내가 작년 1월 20일자 편지에서 지적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이었다. 그

런데 3월 5일 섁트먼은 이렇게 대답했다: "동지가 언급한 문제의 글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만약 글을 다시 쓴다면 동지가 주장한 내용에 비추어 여기(!) 저기(!)에서 표현을 달리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지의 비판의 핵심에 대해서는 견해를 같이할 수 없습니다."

이 답장은 심각한 상황에서 섁트먼이 늘상 반응하는 방식과 똑같다. 즉 그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에서 후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는 인상만은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분파투쟁의 열에 들떠 그는 "과거에 했던 것을 내일 다시 또다시 하겠다"고 약속한다.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부르조아 "과학"에 투항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맑스주의를 더 이상 고수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섁트먼은 드디어 이러저러한 정치 동맹의 효용을 나에게 설명한다.(어떠한 근거로 이런 설명을 하는지는 조금 후에 보도록 하자.) 그러나 나는 지금 이론적 배신의 치명적인 해를 말하고 있다. 동맹은 그 내용과 상황에 따라 정당화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론적 배신은 어떠한 동맹에 의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섁트먼은 자신의 글이 순전히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나는 그 글 전체가 아니라 맑스주의를 기각하고 있는 그 글의 일부 내용만을 문제삼고 있다. 물리학 교과서가 물질운동의 첫 번째 원인이 하느님이라는 내용의 문장을 한 두 개만 싣고 있을지라도 나는 이 교과서의 저자가 반(反) 계몽주의자라고 결론을 내릴 권리가 있다.

섁트먼은 비판에 대해서 답을 하는 대신에 관계없는 일들로 관심을 돌림으로서 비판의 논지를 흐리고 있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철학 영역에서 버넘과 동맹을 맺고 있다'는 트로츠키 동지의 주장을 인정한다고 치자. 그러면 이 동맹이 레닌이 보그다노프와 맺은 동맹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왜 후자의 동맹은 원칙에 부합하며 나와 버넘의 동맹은 무원칙하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정말 듣고 싶다." 좋다. 나는 곧 두 동맹의 정치적 성격이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다른 것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맑스주의 방법론이다. 두 동맹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섁트먼 동지는 묻고 있는가? 레닌은 이론적으로 정당 일반과 볼셰비키 정당을 혼동하지 않았다. 그는 기질적으로 그러한 혐오스러운 발언을 할 능력이 없다. 그 뿐만 아니라 진지한 볼셰비키는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이제 이해가 됩니까, 섁트먼 동지? 섁트먼은 명확한 대답에 "관심이 있다"고 빈정거리듯이 약속했다. 내가 믿건데 대답은 주어졌다. 그러나 나는 그가 "관심"을 갖기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추상과 구체 : 경제와 정치

섁트먼의 한탄스러운 글 가운데 가장 한탄스러운 부분은 "전쟁의 성격과 국가"라는 제목의 장(章 )이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 묻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입장은 무엇인가? 간단하다. 전쟁에 가담하는 국가의 계급적 성격 특히 이 국가에 지배적인 소유형태를 추상적으로 규정짓는 것을 통해 특정 전쟁에 대한 정책을 직접 연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책은 국제사회주의혁명의 이해와 관련시켜 전쟁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나와야만 한다." (앞의 글 제 13쪽. 강조는 인용자) 얼마나 뒤죽박죽인가! 궤변이 얼마나 얼키고 설켜 있는가! 우리의 정책을 국가의 성격으로부터 직접 연역할 수 없다면 왜 비직접적으로는 연역할 수 없는 것일까? 전쟁의 성격에 대한 분석은 구체적인데 왜 국가의 성격에 대한 분석은 추상적인가? 공식적으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욱 올바를 것이다: 소련에 대한 우리의 정책은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추상적인 규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어진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국가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통해서만 연역될 수 있다. 섁트먼의 모든 논지에 깔린 궤변의 기초는 아주 단순하다: 경제적 하부구조가 상부구조의 사건들을 즉시 규정하지 않으므로 그리고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실천적인 과업을 해결하는 데 불충분하므로 따라서 경제와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검토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섁트먼 자신의 신문쟁이식 속어로 말하면 "살아있는 사건들의 현실"만 검토하면 된다."(앞의 글 제 14쪽)

버넘과 자신의 철학 동맹을 정당화하기 위해 섁트먼은 이런 주장을 유포한 바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우리의 정치를 즉시 규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정치적 과업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제 이 주장은 맑스주의 사회학과 관련되어 단어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소유형태가 국가의 정책을 즉시 규정하지 않으므로 "구체적인 정치적 과업들"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맑스주의 사회학을 일반적으로 폐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주장을 맑스주의의 다른 분야와 관련지어 계속하지 않는가? 노동가치 법칙이 "직접적으로", "즉시" 가격을 결정하지 않으므로, 자연도태 법칙이 새끼돼지의 출생을 "직접적으로", "즉시" 결정하지 않으므로, 중력의 법칙이 술취한 경관을 "직접적으로", "즉시"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게 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맑스, 다아윈, 뉴튼 등 모든 "추상적 개념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저서들이 서가에서 먼지나 맞도록 내버려두자. 그렇다면 이 주장은 모든 과학을 엄숙하게 매장하자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직접적이고 " "즉시 연관되는" 원인에서부터 좀더 멀고 깊은 원인들을 밝혀내고 , 온갖 다양하고 요지경같은 현상들로부터 이 현상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원동력을 밝혀내는 과정이 곧 과학발전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노동가치 법칙은 "즉시"는 아니지만 어쨌든 가격을 결정한다. 뉴딜정책의 파산과 같은 "구체적인" 현상들은 궁극적으로 분석하면 "추상적인" 가치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다. 루즈벨트는 이것을 모르지만 맑스주의자는 이것을 알지 못하면 구체적인 현실을 분석하는 데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곧바로는 아니지만 일련의 직접적인 요인들과 이 요인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소유형태는 정치뿐만 아니라 도덕을 결정한다.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무시하려드는 노동계급 정치인은 결국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다가 계단에서 굴러 코를 부러뜨리는 술 취한 경찰관과 같은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섁트먼은 추상과 구체의 구별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구체적인 사건들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두뇌는 추상적 개념들을 가지고 사고한다. 심지어는 "지금 여기에 있는", "주어진", "구체적인" 개는 추상적 개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개에게 손가락을 향하는 "순간" 이 개는 자신의 꼬리를 내리면서 모습을 변화하기 때문이다. 구체성이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다. 어떤 경우에 구체적인 것은 다른 경우에는 주어진 목적에 맞지 않게 불충분하게 규정되어 추상적이 된다. 주어진 필요에 따라 충분히 "구체적인" 개념을 얻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추상적인 개념들을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으로 연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동화상을 스크린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움직이지 않는 정물사진을 연결시킬 필요가 있는 것과 같다.

구체는 추상의 결합이다.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결합이 아니라 주어진 현상의 운동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그런 결합이다.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대비시켜 섁트먼이 호소하고 있는 "국제사회주의혁명의 이해"는 이 주어진 경우에 모든 추상적 개념들 중에서도 가장 애매모호하다. 결국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어떤 구체적인 방법으로 혁명의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는가? 사회주의혁명의 과업은 노동자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기억하는 것은 그리 빗나간 대답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주의혁명을 얘기하기 전에 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 자본가 국가와 노동자국가들과 같은 "추상적 개념들"을 구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결과적으로 필요하다.

국가소유가 "그 자체로는", "자동적으로", "직접적으로", "즉시" 크렘린궁의 정책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섁트먼은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낭비시키고 있다. 경제적 "하부구조"가 정치, 법, 철학, 예술 등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방식 문제는 맑스주의 서적들에 풍부하게 존재한다. 경제가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시 작곡가의 창조력과 심지어는 판사의 판결을 결정한다는 견해는 모든 나라의 부르조아 교수들이 자신들의 지적 무능력을 감추기 위해 한도 끝도 없이 유포시켜온 맑스주의의 우스꽝스러운 모조품에 불과하다.

소련의 사회적 기초와 크렘린궁의 정책 사이의 상호관계라는 즉시 우리에게 제기되는 문제로 초점을 옮겨보자. 이미 17년 동안 우리는 공개적으로 10월 혁명에 의해서 수립된 사회적 기초와 국가 "상부구조"의 경향 사이에 드러나고 있는 점증하는 모순을 사실로서 확립해왔다. 이 사실을 딴 일에 정신을 팔고 있는 섁트먼에게 상기시키고자 한다. 소련 관료집단이 노동계급과 점점 독립된 세력이 되면서 소련 국내외의 다른 계급들과 집단들에게 점점 의존하고 있는 현상을 우리는 매 단계마다 추적하였다. 이미 확립된 이 사항과 관련하여 섁트먼이 덧붙이고자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비록 경제가 직접적으로 즉시 정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며 최종적으로만 그러할지라도 경제는 정치를 확실히 규정한다. 부르조아 교수들과 그 제자들에 대항하여 맑스주의자들은 바로 이 진리를 확신한다. 소련 관료집단이 노동계급으로부터 더욱더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과정을 우리는 분석하고 폭로해왔다. 동시에 이 "독립성"의 객관적 사회적 한계 즉 외국무역 독점에 의해서 보완되고 있는 국가소유에 한시도 눈을 뗀 적이 없다.

놀라자빠질 일이다! 소련 관료집단에 대해 정치혁명을 수행하자는 구호를 섁트먼은 계속 지지하고 있다. 이 구호의 의미를 그가 진지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10월 혁명에 의해서 수립된 사회적 기초가 "자동적으로" 국가의 정책에 반영된다고 우리가 주장한다면 왜 관료집단에 대한 혁명이 필요한 것일까? 반면에 소련이 더 이상 노동자국가가 아니라면 정치혁명이 아니라 사회혁명이 필요할 것이다. (ㄱ) 노동자국가인 소련의 성격 (ㄴ) 국가의 사회적 기초와 관료집단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적대관계 등에서 도출되는 구호를 섁트먼은 결과적으로 계속 지지한다. 그러나 이 구호를 계속 외치면서 그는 이 구호의 이론적 기초를 공격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정치가 과학적 "추상적 개념들"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하려는 행위가 아닐까?

부르조아 지식인들이 우스꽝스럽게 왜곡시키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 투쟁한다는 구실 아래 섁트먼은 사적 관념론 (historical idealism)에 문을 활짝 열어 재낀다. 소유형태와 국가의 계급적 성격은 정부의 정책을 분석하는 그에게는 관심 밖이다. 그에게 국가 자체는 성별이 없는 동물로 보인다. 닭털로 만든 침대 위에 두 발을 확고히 내딛고 이미 1940년이나 된 지금 이렇게 기세좋게 설명한다: 소련에는 국가소유체제가 존재하고 있지만 동시에 관료집단에 의한 보나파르트적 더러움과 반동적인 정치도 존재하고 있다. 얼마나 새로운 사상인가! 섁트먼은 자신이 갓난 애기방에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섁트먼이 동맹을 맺다 -- 이번에는 레닌과 함께

섁트먼은 소련의 사회 성격에 관한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 그런데 이것을 위장하기 위해 소위 노동조합 논쟁 중 1920년 12월 30일 레닌이 나에게 가한 비판적 언사에 의존한다: "트로츠키 동지는 노동자국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추상일 뿐이다. 소련은 실제로는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국가이다. 노동조합으로 포괄적으로 조직된 노동계급은 자신의 이익을 방어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노동자조직을 활용하여 노동자가 국가에 저항하여 자신의 이익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가 국가를 지키도록 이 조직을 활용해야 한다." 이 인용문을 가리키며 섁트먼은 내가 1920년의 "오류"를 반복했다고 선언하는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러나 성급한 나머지 소련의 사회 성격과 관련된 그의 인용문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12월 30일에 행한 자신의 연설에 대해서 레닌은 1월 19일에 이렇게 썼다: "`소련은 실제로는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국가이다'라고 나는 말한 바 있다. 논쟁 보고서를 읽으면서 당시 내가 틀렸다는 것을 지금 알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노동자국가는 추상적 개념이다. 실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 특징을 구비한 노동자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1)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 인구의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다. (2) 관료적으로 왜곡된 노동자국가이다.'" 이것을 통해 두 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 국가에 대한 정확한 사회학적 규정을 대단히 중시한 나머지 레닌은 논쟁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중에도 자신의 오류를 정정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섁트먼은 소련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대해서 너무도 관심이 없어서 20년이 지난 지금 레닌의 오류나 그가 이 오류를 정정한 내용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기서 레닌이 나에 대해서 얼마나 정확하게 비판을 가했는지는 문제삼지 않겠다. 다만 그가 비판을 잘못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국가의 정의에 대해서 그와 나 사이에는 이견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문제가 아니다. 국가 즉 사회 성격 문제에 대해 위 인용문에서 레닌이 한 말은 며칠 후에 주요한 정정을 가한 그의 말과 관련지을 경우 그 이론적 표현은 절대적으로 올바르다. 그러나 레닌의 규정을 섁트먼이 어떻게 황당하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한 번 보기로 하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20년 전에 레닌이 `노동자국가'를 추상적 개념이라고 말한 것이 가능한 것처럼 `퇴보한 노동자국가' 역시 추상적 개념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앞의 글 제 14쪽) 섁트먼이 레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20년 전에 "노동자국가"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추상적 개념 즉 실재하지 않는 존재라고는 조금도 생각될 수 없었다. 다만 "노동자국가" 규정은 그 자체로는 올바르지만 특정 과업과 관련되어서는 불충분했을 뿐이다. 즉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의 이익을 방어하는 과업의 측면에서만 추상적이며 불충분했다. 그러나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해서 소련을 방어하는 경우에 이 규정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1920년에도 의심의 여지없이 올바랐으며 노동자들이 이 노동자국가를 방어하는 것은 의무이다.

여기에 대해서 섁트먼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노동조합 문제와 관련하여 소련에 어떤 종류의 노동자국가가 존재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처럼 현재의 전쟁과 관련하여 소련 국가기구의 퇴보 정도를 확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정권의 퇴보 정도는 국가소유의 존재라는 추상적인 전거에 의해서 확정될 수 없으며 살아있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현실(!)을 관찰하는 것을 통해서만 확정될 수 있다." 왜 1920년에는 소련의 성격이 노동조합 즉 국가의 특정 내부 문제와 연관되어서 제기되었으며 왜 오늘날 그것이 소련의 방어 즉 국가의 운명 전체와 연관되어 제기되고 있는지를 이 글을 통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전자의 경우 노동자국가는 노동자와 대비되는 개념이었으며 후자의 경우 노동자국가는 제국주의 세력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비가 두 다리로 어기적거리는 것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레닌이 대비시킨 것을 섁트먼은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섁트먼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문제는 딴 곳에 있다. 즉 그는 소련 국가기구의 퇴보 정도에만 관심이 있다. 즉 이 체제를 질적인 측면이 아니라 양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있다. 즉 퇴보하고 있는 것이 노동자국가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를 전혀 문제삼지 않고 있다. 그가 퇴보의 "정도"를 우리보다 더 정확하게 파악한 흔적은 없다. 그러나 파악했다고 치자. 그러면 이렇게 순전히 양적인 평가가 어떻게 노동자국가인 소련을 방어한다는 우리의 노선을 기각시킬 수 있는가?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한 그의 주장은 도저히 앞뒤를 분간할 수 없다. 사실 그는 절충주의자로서의 면모에 충실하다. 그래서 에이번과 버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소련 국가기구의 퇴보 "정도"를 문제로 삼고 있다. 그와 우리 사이의 쟁점은 "살아있는 사건들로 구성된 현실"에 의해서 결정되는 정도의 문제가 전혀 아니다. 그가 애용하는 이 말은 얼마나 정확하고 "과학적이며", "구체적이며", "실험적인" 용어인가! 진짜 쟁점은 이러한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로 변모되었는 가에 있다. 즉 비록 퇴보하기는 했지만 소련이 아직도 노동자국가인지 아니면 새로운 유형의 착취체제로 변모되었는 가에 쟁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근본 쟁점에 대해서 섁트먼은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해답을 제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의 주장은 다른 맥락에서 다른 내용을 가지고 명백히 오류를 범한 레닌의 주장을 말로만 흉내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레닌은 자신의 오류를 정정하며 이렇게 선언한다: "소련은 단순한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관료적으로 기형화된 노동자국가이다." 그런데 섁트먼은 이렇게 선언한다: "소련은 퇴보한 노동자국가일 뿐만 아니라 "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웅변을 늘어놓는 그와 청중들은 모두 입을 헤벌린 채 할말을 잃고 서로를 쳐다보기만 한다.

"퇴보한 노동자국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 강령은 소련의 방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주 적절한 정도의 구체성을 가지고 해답을 내리고 있다. 즉 (1) 1920년에 소비에트 체제의 "관료적 기형화" 특징들로 나타났던 것들이 이제는 소비에트를 집어삼킨 독립적 관료체제가 되었다; (2) 소련 내부와 국제적 차원에서 사회주의를 실현시킬 과업과는 양립할 수 없는 관료집단의 독재는 소련의 경제생활을 심대하게 기형화시켜 왔다; (3) 그러나 생산수단의 국가소유에 기초한 계획경제 체제는 기본적으로 유지되어 왔으며 계속해서 인류의 거대한 성과로 남아있다. 소련이 제국주의 세력과의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 관료집단의 독재체제 뿐만 아니라 국가 계획경제 체제 역시 청산될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는 제국주의 세력들의 영향권으로 분할될 것이다. 그리고 제국주의 체제는 새로이 안정되어 세계노동계급의 투쟁 역량을 약화시킬 것이다.

"관료적" 기형화가 관료적 독재체제로 발전한 상황에서 소련의 노동조합도 국가와 똑같은 퇴보를 겪었다. 따라서 1920년의 경우와 비교할 때 지금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의 이해를 방어하는 것은 전혀 비현실적이라고 우리는 결론내린다. 노동자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관료집단을 타도할 필요가 있다. 이 과업은 오직 소련에 비합법 볼셰비키정당을 수립하는 것을 통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그러나 소련 정치체제의 퇴보는 아직도 국가 계획경제 체제를 파괴시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해서 소련을 방어하고 관료집단에 대한 소련 노동계급의 투쟁을 지원하는 것이 세계노동계급의 임무라고 우리는 결론내린다.

소련에 대한 지금까지의 규정에서 추상적인 구석이 어디에 있는지 섁트먼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구체적인 수정을 그는 제안하는가? 변증법이 "진실은 언제나 구체적" 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면 이 법칙은 비판에 대해서도 똑같은 효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노선에 대해서 단순히 추상적이라고 딱지를 붙이는 것만 가지고는 안된다.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지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판 자체는 아무런 알맹이도 없게 된다. 추상적이라고 생각되는 노선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거나 변화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섁트먼은 이 노선을 공백으로 채우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안된다. 공백은 아무리 허풍스러워도 모든 추상들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이다. 즉 이 공백 속에는 아무 내용이나 들어가 앉을 수 있다. 따라서 계급 분석을 대체한 이러한 이론적 공백이 인상주의자와 모험주의자들을 불러들인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집약된 경제"

레닌은 "정치는 집약된 경제이며" 이런 의미에서 "정치는 경제를 지배한다"고 말했다. 이 말을 받아 섁트먼은 내가 오직 "경제" (생산수단의 국가소유 ) 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며 "정치"를 무시한다고 훈계한다. 그러나 레닌을 활용하려는 이 두 번째 노력은 첫 번째 노력보다 더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 이 경우 섁트먼의 오류는 정말이지 엄청나다! 레닌이 한 말의 의미는 이렇다: 경제 과정, 과업, 이해 등이 의식적이고 일반화된("집약된") 성격을 획득할 경우 바로 이 사실로 인해 이러한 것들은 정치 영역으로 들어가며 정치의 핵심적 내용을 구성한다. 이런 의미에서 집약된 경제로서의 정치는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원자화되고 무의식적이며 일반화되지 못한 경제활동을 지배한다.

심대하고 전면적으로 경제를 "집약하는" 정도 즉 경제과정의 진보적 경향들을 표현하는 정도에 따라 정치노선의 올바름은 한치의 오차없이 결정된다. 이것이 맑스주의자의 관점이다. 우리가 정치노선을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소유형태와 계급관계의 분석에 기초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이론적 기초 위에서만 "상부구조"의 요인들을 좀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적대 분파의 "관료적 보수주의"를 비판할 경우 우리는 즉시 이러한 현상의 사회적 즉 계급적 뿌리를 찾으려고 한다. 이와 다른 방법을 채택할 경우 우리는 시끄럽기만 한 맑스주의 모방자 또는 "관념적(Platonic)" 맑스주의자로 낙인찍힐 것이다.

"정치는 집약된 경제이다"라는 명제는 크렘린궁의 관료집단에게도 적용된다. 그렇지 않다면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정책은 일반적 법칙의 예외로서 "집약된 경제"가 아니라 관료집단의 자유의지가 발현된 경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관료집단의 이해에 의해 굴절된 채 표현되고 있는 소련정부의 정치를 국유화 경제로 환원시키려는 우리의 시도에 대해 섁트먼은 미친듯이 저항하고 있다. 그는 소련에 대한 자신의 정치노선을 경제의 의식적인 일반화로부터가 아니라 "살아움직이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현실" 즉 주먹구구, 즉흥, 공감과 반감 등으로부터 도출한다. 그는 이러한 인상주의적 정책을 사회학적으로 근거를 삼는 우리의 정책과 대치시키면서 우리가 정치를 무시한다고 동시에 비난하고 있다. 이것은 도저히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섁트먼의 허약하고 변덕스러운 정치도 마찬가지로 경제의 "집약된" 표현임에 확실하다. 다만 애석한 것은 그의 정치가 탈계급적 쁘띠부르조아의 경제를 집약되게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르조아 전쟁과의 비교

섁트먼은 우리에게 이렇게 상기시킨다: 부르조아 전쟁들은 한때는 진보적이었으며 또 다른 때에는 반동적임으로 전쟁에 가담하는 국가를 계급적으로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하기보다는 애매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부르조아 전쟁들은 부르조아 체제가 모두 진보적이었을 때에만 진보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봉건적 소유체제에 저항하여 부르조아 소유체제가 진보적이며 건설적인 요인이었을 때에만 진보적이었다. 부르조아 전쟁들은 부르조아 소유체제가 진보에 걸림돌이 되었을 때 반동적인 성격으로 변화했다. 소련과 관련하여 섁트먼은 생산수단의 국가소유가 진보에 걸림돌이 되었으며 이 소유체제가 다른 나라들로 확대되었을 경우 이것이 경제적 반동을 가져온다고 말하고자 하는가? 물론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생각들을 논리적인 결론까지 이끌지 않고 있을 뿐이다.

민족부르조아 전쟁의 예는 정말이지 아주 유익한 교훈을 제시한다. 그러나 섁트먼은 이 교훈을 아무 관심없이 흘려버리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통일 독일공화국을 위해 노력했다. 1870 1871년의 보불전쟁에서 이들은 독일 통일을 위한 투쟁을 지지하였다. 이 투쟁이 왕조적 이해에 영합하는 기생집단들에 의해 이용되고 왜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프로이센이 알사스-로렌 지방을 합병하자 맑스와 엥겔스가 즉시 프로이센에 대해 반대했던 사실을 섁트먼은 지적한다. 그러나 이 지적은 우리의 관점을 더욱더 명확하게 설명하는 데 일조할 뿐이다. 이 경우는 두 부르조아 국가들 간의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두 국가는 모두 계급적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 경우 두 적대국가 가운데 누가 "덜 해로운가"를 결정할 선택권을 역사가 허용한다면 이 결정은 보완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내려질 수밖에 없다. 독일의 경우 경제적 문화적 공간인 민족부르조아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 시기에 민족국가는 진보적인 요인이었다. 이런 한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호엔쫄런 왕가와 이 왕가와 연합한 대토지 귀족들(junkers)이 중심세력을 형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을 지지했다. 그런데 알사스-로렌 지방의 합병은 독일은 물론이고 프랑스에 관해서도 민족국가의 원칙을 침해했으며 보복전쟁의 기반을 조성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맑스와 엥겔스는 프로이센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이를 통해 이들은 부르조아 생산관계가 지배하는 양 국가들 사이에서 경제력이 더 우수한 프랑스에 대항해서 경제력이 더 열등한 독일의 이해에 봉사하는 위험을 피했다. 만약 1870년에 프랑스가 노동자국가였다면 이들은 전쟁 초기부터 프랑스를 지지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이 계급적 조건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정치 행동을 결정했을 경우에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반복하기에 창피한 사족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오래된 부르조아 국가들의 경우 민족적 과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인류는 발전하는 생산력과 너무 협소한 민족국가라는 틀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순에 의해 고통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유럽의 경우 민족국가의 경계선을 벗어던지고 사회주의 소유체제에 기초한 계획경제를 건설하는 것이 국제노동계급의 과제이다. "사회주의 유럽합중국을 건설하자"는 우리의 구호가 바로 이 과제를 표현하고 있다. 핀란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폴란드에서도 토지소유주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그 자체로 진보적인 요인이다. 여기서 크렘린궁 관료집단이 채용한 관료적 몰수방식들은 독일 통일에서 호엔쫄런 왕가가 왕조적 방식들을 채용한 것과 정확히 똑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반동적 방식에 의해 반동적 소유형태를 방어하는 것과 관료적 방식을 통해 진보적 소유형태를 도입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할 필요가 있을 경우 우리는 이 두 선택을 같은 차원에 두지 않고 덜 해로운 쪽을 선택한다. 이 점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호엔쫄런 왕가에 투항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스탈린 관료집단에 "투항"하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불전쟁에서 호엔쫄런 왕가가 수행한 역할은 왕조의 일반적 역사적 역할이나 존재이유 중 어느 것도 정당화시킬 수 없었다. 이 사실은 덧붙일 필요조차 없다.  

 

상황적 패배주의 노선 즉 콜룸부스와 달걀

이론적 공백의 도움을 받아 특히 중요한 문제에 대해 "살아움직이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현실"을 가지고 섁트먼이 어떻게 자기 주장을 펴는지를 이제 확인해보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크렘린궁의 국제정책을 결코 지지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전쟁이란 무엇인가? 다른 수단들을 통하여 계속되는 정치행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지한 적이 없고 지금도 지지하고 있지 않은 국제정책을 계속하는 형태인 전쟁을 왜 지지해야 하는가?"(앞의 글 15쪽) 이 주장의 완벽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노골적인 삼단논법을 동원하여 그는 우리에게 완벽한 패배주의 노선을 채택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콜룸부스와 달걀처럼 단순한 일이다! 크렘린궁의 국제정책을 지지해본 적이 없으므로 소련을 결코 지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확실히 말하지 않는가?

섁트먼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독소불가침조약 이전에 그리고 적군의 폴란드 점령 이전에 크렘린궁의 국내 및 국제정책을 거부했다; 따라서 작년에 발생한 "살아움직이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현실"도 우리 노선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과거 소련을 방어했다면 이것은 순전히 일관되지 못한 정책의 결과일 뿐이다 등등. 그러나 그는 제4인터내셔널의 현재 정책뿐만 아니라 과거 정책까지 수정하고 있다. 우리가 스탈린에 반대하므로 소련에 대해서도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이 결론은 스탈린이 오랫동안 견지해왔던 것으로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은 소련에 대해 이적행위를 하는 것과 같다고 그는 주장해왔다. 차이가 있다면 섁트먼은 오직 최근에 와서야 이 견해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크렘린궁의 정책에 대한 그의 거부는 완벽하고도 확실한 패배주의 노선을 낳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렇다고 확실히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섁트먼은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좀 전에 인용한 글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만약 제국주의 세력이 10월 혁명의 마지막 성과를 압살하고 러시아를 식민지의 집합체로 변모시킬 의도로 소련을 침공한다면 우리는 소련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한다. 이것이 과거 우리의 노선이었으며 지금도 소수파의 노선이다." (앞의 글 15쪽) 이런, 이런, 이런! 크렘린궁의 국제정책은 반동적이다; 전쟁은 이 반동적 정치의 연장이다; 우리는 반동적 전쟁을 지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잔악한 제국주의 세력이 소련을 "침공하고 " 러시아를 식민지로 변모시킬 목적을 추구하고 있는 특별한 "상황에서" 섁트먼은 소련을 "무조건적으로" 방어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말이 되는가? 논리는 어디로 도망갔는가? 버넘의 모범을 따라 섁트먼도 논리를 종교와 그 밖의 다른 박물관 소장품들의 영역으로 격하시킨 것인가?

이렇게 논리가 뒤죽박죽된 상황의 열쇠는 "우리는 크렘린궁의 국제정책을 한 번도 지지한 적이 없다"는 발언이 추상적이라는 데에 있다. 이 발언은 해부되고 구체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현재 국내정책 뿐만 아니라 국제정책에 있어서도 관료집단은 자신의 기생적 이해를 최우선에 둔다. 이런 한에서 우리는 이들 정책에 대항해 죽음을 불사하고 투쟁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매우 왜곡된 형태로나마 관료집단의 정책은 노동자국가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이 노동자국가의 이해를 우리는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옹호한다. 그래서 관료집단이 (나름의 방식으로!) 국가소유와 외국무역 독점을 지키고 짜르시대에 발생했던 부채의 지불을 거부할 때 우리는 이것을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련과 제국주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건들이 무엇이든 간에 그리고 이러 저러한 정부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관료집단의 반동적 정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계급의 역사적 성과들을 무조건 방어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인 것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문제는 소련의 계급적 성격으로 집약된다.

레닌은 패배주의 노선을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으로부터 도출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자본주의 체제와 그 지배계급의 특정 발전단계로부터 도출했다. 사회와 국가의 계급적 성격으로부터 전쟁의 성격이 정확하게 결정된다. 따라서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우리의 노선을 결정할 때 민주주의, 왕정, 침략, 국가방어 등과 같은 "구체적인" 상황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그는 권유하였다. 여기에 반대하여 섁트먼은 패배주의 노선을 특정 상황으로부터 도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패배주의 노선은 소련과 핀란드의 계급적 성격에 관심이 없다. 관료집단의 반동적 특징들과 "침략행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프랑스, 영국, 미국 등이 핀란드에 비행기와 총포를 보내 핀란드 지배계급을 지원한다고 해도 이 상황은 섁트먼의 노선을 결정하는 데 아무 관계가 없다. 만약 영국 군대가 핀란드에 진주하면 섁트먼은 체임벌린의 혓바닥 밑에 온도계를 들이밀고 그의 의도를 파악하려들 것이다. 크렘린궁의 제국주의 정책으로부터 핀란드를 구출하는 목적만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덤으로 "10월 혁명의 마지막 성과들"을 타도할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이다. 온도계가 가리키는 지점에만 온전히 의거하여 그는 소련 패배주의에서 소련 방어주의로 노선을 전환할 용의가 있다. 추상적 원칙들을 "살아움직이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현실"로 대체한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이미 우리가 확인했지만 섁트먼은 과거의 예들을 검토하자고 끈질기게 주장한다: 과거 언제 어디서 소수파 지도자들은 쁘띠부르조아적 기회주의를 드러냈는가?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제시한 증거를 보충하기 위해서 스페인혁명과 관련하여 방어주의 및 방어주의 방식들에 대해 우리가 교환한 두통의 편지를 공개하겠다. 1937년 9월 18일 섁트먼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나에게 보냈다: " `스페인 하원에 우리 동지 한 명이 의원으로 있다면 그는 네그린 정권의 국방예산안에 대해 반대표를 던질 것입니다.'라고 동지는 말합니다. 혹시 글자가 잘못되었으면 몰라도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현재 스페인 내전에서 제국주의 전쟁의 요소가 지배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대신 쇠퇴하고 있는 부르조아 민주주의와 파시즘과의 대결이 지배적인 것이라면 반(反) 파시즘 투쟁에 군사적 지원을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스페인 하원에서 반파시즘 정권의 국방예산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후에스카 전선에 있는 우리 동지가 사회주의자 동지로부터 왜 볼셰비키-레닌주의자 의원이 하원에서 전선에 보낼 소총을 구입하기 위해서 백만 페세타를 쓰겠다는 네그린의 제안에 반대표를 던질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 동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그가 이렇다할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 (강조는 필자)

이 편지는 나를 놀라게 하였다. 스페인 내전에서 "제국주의 전쟁의 요소"가 지배적이지 않다는 순전히 부정적인 기초하에 섁트먼은 배신적인 네그린 정권에 대해 신임을 표명할 용의를 보였다.

1937년 9월 20일 나는 그에게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네그린 정부의 국방예산안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은 그에게 정치적 신임을 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범죄행위가 될 것입니다. 무정부주의적 노동자들에게 우리의 반대표를 어떻게 설명하느냐고요? 아주 간단합니다: 네그린 정부의 전쟁 수행과 전쟁 승리 능력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의 확신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정부가 부자들을 보호하고 가난한 인민을 굶기는 정부라고 비난합니다. 정부는 타도되어야 합니다. 이 정부를 대체할 능력이 없는 한에서 우리는 이 정부의 명령 하에서 내전을 치룹니다. 그러나 모든 경우를 이용하여 우리는 이 정부에 대한 불신임을 공공연히 표현합니다. 이 정부에 대항해서 대중들을 정치적으로 추동하고 이 정부의 타도를 준비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외의 다른 노선은 모두 혁명에 대한 배신행위가 될 것입니다."

내가 보낸 이 답장의 어조는 섁트먼의 기회주의적 입장이 나에게 끼친 놀라움을 미약하게 밖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단편적인 오류들은 물론 피할 수 없다. 그러나 2년 반이 지난 지금 이 편지는 섁트먼의 정치 경향에 대해 새로운 진실을 밝히고 있다. 파시즘에 대항하여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방어하기 때문에 부르조아 정부에 대한 신임을 거부할 수 없다고 섁트먼은 생각하고 있다. 이 사고를 소련에 적용하면 결론은 반대로 나온다. 즉 소련 정부를 신임할 수 없으므로 노동자국가를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경우 역시 사이비 급진주의는 기회주의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계급적 기준의 기각

다시 한번 맑스주의의 근본원리로 돌아가 보자. 맑스주의 사회학에서 국가, 정당, 철학, 문예사조 등과 같이 주어진 현상을 분석하는 출발점은 계급 규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것만 가지고는 불충분하다. 계급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발전단계를 경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 다른 조건에 놓이며 다른 계급들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현상을 완벽하게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2차적 또는 3차적 요인들을 계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인들은 구체적인 분석 목적에 따라 부분적으로만 또는 전부 계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맑스주의자의 경우 분석할 대상을 계급적으로 규정하지 않고서는 분석 자체가 불가능하다.

뼈와 근육의 구조만 연구해서는 동물에 대한 해부는 완벽할 수 없다. 그러나 뼈와 근육의 구조를 무시하려는 해부학 논문은 공허할 것이다. 전쟁은 사회 즉 사회 지배계급의 기관이 아니라 기능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기관 즉 국가를 연구하지 않고 그 기능을 연구하고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조직 즉 사회의 일반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회의 기관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의 뼈와 근육은 생산력과 계급(소유 )관계이다. 기능인 전쟁이 그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 즉 국가와는 무관하게 "구체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고 섁트먼은 주장하고 있다. 너무도 기괴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 근본적 오류는 역시 같은 정도의 노골적인 오류에 의해서 강화되고 있다. 기능을 기관과 분리시킨 후 기능 그 자체를 연구하는 섁트먼은 자신의 약속과는 달리 추상에서 구체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체를 추상 속에 해소시켜 버린다. 제국주의 전쟁은 금융자본의 기능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독점자본이라는 특수한 자본주의에 기초하여 특정 발전단계에 놓인 자본이 곧 금융자본이다. 이 규정은 근본적인 정치적 결론을 도출하기에 충분히 구체적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용어를 소련에 대해서도 적용하기 위해서 이 용어의 범위를 고무줄처럼 늘어뜨린 섁트먼은 자기가 딛고 서 있는 이론적 기초마저 허물어 버린다. 그는 제국주의를 금융자본의 확대뿐만 아니라 노동자국가의 확대에도 적용한 것을 피상적으로나마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그는 두 국가 즉 노동자국가와 제국주의국가의 사회구조적 차이를 추상적이라고 선언하면서 무시한다. 이렇게 맑스주의와 숨바꼭질을 하면서 섁트먼은 구체적인 분석을 추상적이라고 낙인찍고 추상적인 분석을 구체적이라고 위장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이론을 무지막지하게 가지고 노는 행태는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하나의 예외도 없이 미국의 모든 쁘띠부르조아들은 모든 형태의 영토 점령을 "제국주의적"이라고 낙인찍고 있다. 특히 지금 미국이 영토를 점령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지 않은 틈을 타서 말이다. 그러나 금융자본이 특정 순간에 영토병합에 몰두해 있거나 아니면 핀란드를 다른 나라의 병합으로부터 "방어하는 일"에 몰두해 있거나 간에 금융자본의 국제정책이 제국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 이들은 독실한 신자의 경건한 분노로 몸을 떨면서 화들짝 놀라 자빠진다. 당연히 소수파 지도자들은 정치적 목적이나 정치적 수준에 있어서 보통 쁘띠부르조아들과는 다르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들은 공통의 사상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쁘띠부르조아는 자신의 사회적 기초와 정치적 사건들을 분리시키려고 애쓴다. 현실에 대한 계급적 접근방식과 쁘띠부르조아의 사회적 지위 및 이데올로기 사이에는 유기적인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폴란드에 대해서

크렘린궁의 관료집단이 나름의 관료적 방식을 통해 폴란드의 사회주의 혁명에 추동력을 제공했다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노동계급의 "관료적 혁명"이 어쩌면 가능하다고 내가 주장한 것으로 섁트먼은 윤색하고 있다. 이것은 부정확할 뿐만 아니라 의리마저 없는 행태이다. 나의 표현은 엄격하게 제한된 것이었다. "관료적 혁명"이 아니라 관료적 추동력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이 추동력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어쨌든 서부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대중들은 이 추동력을 감지했으며 이것의 의미를 이해했으며 기존 소유관계의 전면적인 전복을 달성하기 위해 이것을 이용했다. 제때에 이러한 추동력을 감지하지 못하고 이것을 이용하기를 거부하는 혁명정당은 쓰레기통에 던져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향하고 있는 이 추동력은 소련의 관료집단이 노동자국가의 경제체제에 자신의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만 가능했다. 소련군 점령지 내의 계급투쟁과 러시아 10월 혁명의 위력을 통해서만 우크라이나 및 벨로루시 대중들은 이 "추동력"을 혁명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운동의 고립적 성격과 소련 관료집단의 막강한 물리력만이 이 혁명적 대중운동을 재빨리 목졸라 죽일 수 있었다. 노동자국가, 피억압 대중, 보나파르트 관료집단 등 세 요인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폴란드 사태에 대해 한담을 늘어놓는 일을 자제하는 것이 가장 좋았을 것이다.

서부 우크라이나와 서부 벨로루시의 국회 선거에서 제시된 선거강령은 당연히 크렘린궁의 명령에 의해서 나왔다. 그러나 이 강령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대단히 중요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지역들의 소련에의 편입; 농민을 위한 지주토지의 몰수; 대공업과 은행의 국유화. 우크라이나의 민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 단일국가로 통일되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현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미래에 전개될 독립 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의 생각은 올바르다. 그리고 선거강령의 다른 두 요소들이 진보적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동지는 우리 대오에 없을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소련의 사회적 기초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으로 하여금 사회혁명적 강령을 택하도록 강제한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길을 찾던 중 섁트먼은 전혀 사회적 변화가 없는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를 자기 주장의 예로 들고 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주장이 아닌가! 소련 관료집단이 언제나 모든 곳에서 부르조아 계급의 생산수단을 몰수하기를 원한다거나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록 히틀러와 동맹을 체결했지만 소련의 관료집단은 동부 폴란드에서 일어난 체제의 전복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소련의 관료집단만이 이런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경우 관료집단은 폴란드 내 소련군 점령지역을 소련 영토로 편입시킬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섁트먼은 이 체제 전복 현상을 인식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이 현상을 설명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체면을 세우려고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폴란드령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에서는 민족적 억압이 계급착취를 심화시키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은 토지를 스스로 접수하기 시작하였고 이미 도망하고 있던 지주들도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등등. (같은 글 16쪽) 그런데 섁트먼에 의하면 소련군은 이 사태와 전혀 관계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즉 소련군은 이 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주한 "반혁명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히틀러가 장악한 서부 폴란드의 노동자 농민 대중은 왜 혁명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동부 폴란드에서는 주로 지주들과 자본가들이 줄행랑을 쳤는데 왜 서부 폴란드에서는 주로 혁명가, "민주주의자", 유태인들이 줄행랑을 쳤을까? 섁트먼은 이 차이점을 곰곰히 생각할 겨를이 없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으므로 "관료적 혁명"이란 황당한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일이 그에게는 우선 급하다. 그는 마치 신생아실에 들어가 갓 태어난 아기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의 비유가 너무 과한 것일까?

멘셰비키들은 크렘린궁의 대외정책에 대해 섁트먼보다 더 "화해불가능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들의 빠리 망명 기관지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소련군이 명령받은 지역에 채 진주하기도 전에 농촌 전역에서 혁명적 농민 자치를 위한 기본 기관인 농민위원회가 등장했다." 물론 소련군 당국은 이러한 위원회들을 자신들이 도시 중심지에 수립한 관료적 기관들에 부속시키는 조치를 시급히 서둘렀다. 그러나 이들 기관들은 농민위원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위원회가 없이는 농민혁명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멘셰비키 지도자 단(Dan)은 10월 19일 이렇게 썼다: "모든 목격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에 의하면 소련군과 소련 관료집단의 등장은 이들 점령지역들 뿐만 아니라 이들 너머 지역까지 사회 소요와 사회변혁의 추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추동력"이란 말은 내가 아니라 눈과 귀를 가지고 있는 "모든 목격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이 먼저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은 더 나아가 "이 추동력에 의해서 일어난 물결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독일을 강타할 뿐만 아니라 어떤 정도로든 다른 국가들에게 밀려들어갈 것이다"라고 짐작했다.

또 다른 멘셰비키는 이렇게 쓰고 있다: "크렘린궁은 거대한 혁명의 냄새가 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피하려고 시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래 전에 이미 사라져야 했을 반봉건 농경소유관계가 존재하는 동부 폴란드에 적군이 진주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격렬한 농민운동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소련군의 진주와 함께 농민들은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위원회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이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섁트먼의 말에 의하면 소련군의 철수가 아니라 진주와 함께 이런 사태가 촉발되었다. 내가 멘셰비키들의 말을 인용하는 이유는 이들이 정보를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정보소식통은 이들에게 친분이 있는 폴란드인 및 유태인 망명자들이며 이들은 현재 프랑스에 모여 있다. 특히 이들은 프랑스 부르조아들에게 투항했기 때문에 스탈린주의에 투항했다고 의심할 건덕지가 없다. 따라서 이들이 소련 관료집단을 옹호하기 위해 거짓정보를 흘릴 이유는 없다.

더욱이 멘셰비키들의 증언은 부르조아 언론의 보도로 그 진실이 확인되고 있다:

"소련군이 진주한 폴란드 영토의 농민혁명은 자생적인 운동의 위력을 보여왔다. 소련군이 즈브루치강을 건넜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농민들은 지주들의 토지를 서로 나누어 갖기 시작했다. 토지는 먼저 소농들에게 분배되었으며 이런 방식으로 농토의 약 30%가 몰수되었다." ([뉴욕 타임즈], 1940년 1월 17일자)

이제 섁트먼은 내가 전혀 새로운 주장을 꺼내 놓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이미 다음과 같이 한 말을 새로운 주장인양 드리밀고 있다: 동부 폴란드에서 토지를 농민들이 몰수한 사실이 소련 관료집단의 정책 일반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물론 그렇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평가가 달라야 한다고 제안한 바 없다.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아 소련 당국은 노동계급을 혼란시키고 사기를 죽였다. 이 결과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이 촉진되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을 위해 전쟁을 활용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졌다. 이러한 범죄행위들에 비교해서 이 두 지방의 사회적 격변은 물론 부차적인 중요성밖에 없으며 크렘린궁 관료집단의 일반적으로 반동적인 성격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더욱이 이들 지방의 사회적 격변은 폴란드의 예속을 대가로 하고 있다. 그러나 소수파의 주장을 통해 이 문제는 정책 일반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이 정책일반이 구체적으로 굴절된 문제로 되어버렸다. 갈리시아와 서부 벨로루시의 농민들에게 농민혁명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반동적인 관료집단에 의해서 추동되었다는 이유로 제4인터내셔널이 이 격변을 보이코트할 수는 없었다. 노동자와 농민의 편에 서서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소련군의 편에 서서 이 사건에 동참하는 것이 우리의 무조건적인 임무였다. 동시에 크렘린궁 정책의 일반적으로 반동적인 성격과 이 성격이 소련군 점령지에 미칠 위험을 쉬지 않고 대중들에게 경고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 두 과업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같은 과업의 두 측면을 결합할 줄 아는 것 --- 바로 이것이 볼셰비키의 정치이다.  

 

다시 한번 핀란드에 대해서

폴란드의 사태를 이해하는 기이한 통찰력을 드러낸 후 섁트먼은 배가된 권위를 가지고 핀란드 사태에 대해 나에게 공격을 가하고 있다. 나의 글 "쁘띠부르조아 소수파"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은 내전에 의해서 보완되기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내전에서 현재 소련군은 핀란드의 소농 및 노동자와 같은 편을 이루고 있다. " 이 대단히 조심스러운 표현도 칼날 같은 섁트먼 재판관의 승인을 얻지는 못했다. 핀란드 사태에 대한 나의 평가는 이미 그를 뒤흔든 후였다. "편지" 16쪽에서 섁트먼은 "핀란드에 대한 동지의 놀랄만한 발언에 대해서는 폴란드의 경우보다 근거를 찾기가 더 어렵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그가 논리를 끝까지 추구하여 나름의 결론을 이끌지 못하고 놀라기만 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애석함을 느낄 뿐이다.

발트해 국가들에 대해서 크렘림궁은 자신의 과업을 전략적 소득을 얻는 것으로 한정했다. 즉 짜르제국의 일부였던 이들 나라에 설치한 전략적 군사기지들이 이후 이 나라들이 소련 영토로 편입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계산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발트해 국가들에 대해서 외교적 위협으로 달성한 이러한 성공에 비해 핀란드에서는 이 계획이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 저항에 대해서 화해조치를 취할 경우 소련 관료집단의 "위신 "과 발트해 국가들에서의 성공은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원래 계획과는 반대로 크렘린궁은 무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로부터 사고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크렘린궁은 핀란드 부르조아지를 겁주어서 이들이 양보를 하도록 만들 것인가 아니면 이 이상의 조치를 취할 것인가? 당연히 이 질문에 대한 "자동적인" 해답은 있을 수가 없었다. 일반적 경향들에 비추어 구체적인 사태전개에 따라 대응을 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소수파 지도자들은 이렇게 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핀란드에 대한 소련의 군사작전은 11월 30일에 시작되었다. 바로 이날 틀림없이 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에 소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핀란드 공산당은 핀란드의 근로인민을 향해 라디오 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선언서는 이렇게 선포했다: "핀란드 역사상 두 번째로 핀란드 노동계급은 유산계급의 지배에 대해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1918년에 있었던 노동자와 농민의 첫 투쟁은 자본가와 지주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근로인민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핀란드의 부르조아 정부를 겁주려는 시도는 전혀 없으며 핀란드 국내에 봉기를 촉발시켜 소련군의 침공을 내전으로 보완하려는 계획만이 이루어졌음이 이 선언서 하나만으로도 명백했다.

12월 2일에 발표된 소위 인민정부의 선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핀란드 각지에서 인민은 이미 봉기에 착수했으며 민주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선언문의 이 주장은 명백한 거짓이다. 그렇지 않다면 봉기가 시도된 장소들이 언급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부에서 준비된 고립된 봉기들이 실패로 끝났으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상황을 자세하게 밝히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간주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어쨌든 "봉기들"에 대한 소식은 봉기의 촉구를 의미했다. 더욱이 선언문은 "다가올 전투 과정에서 혁명적 노동자 농민의 대오에서 배출된 자원군에 의해서 확대될 첫 핀란드 군단"의 구성에 대한 정보를 실었다. 이 "군단"에 속한 병력이 1천명이 되었던 1백명이 되었든 크렘린궁의 정책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군단"의 의미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동시에 전보들은 국경지역 농민에 의한 대지주 소유 토지의 몰수를 보도했다. 소련군이 처음으로 진군한 기간 동안 바로 이러한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심할 근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전보들의 내용이 조작되었더라도 선언서는 농민혁명을 촉구하는 의도를 완전히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은 내전에 의해서 보완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선언할 정당성은 나에게 충분히 있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12월초에 나는 이러한 사실들의 일부분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 상황 속에서 이 사건의 내적 논리를 이해함으로써 단편적인 사실들을 통해 나는 이 투쟁의 전체 방향에 대해서 필요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러한 반(半) 선험적인 결론이 없이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관찰자는 될 수 있어도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인자는 결코 될 수 없다. 그런데 "인민정부"의 호소는 왜 즉각적인 대중적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는가?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부르조아지뿐만 아니라 농민 최상층부와 노동관료들에 의해서 지원받고 있는 반동적인 군대에 의해서 핀란드가 완전히 장악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크렘린궁의 정책이 핀란드 공산당을 무의미한 요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셋째, 소련 정부는 핀란드 근로대중에게 혁명적 열정을 불어넣어줄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1918년부터 1920년 사이 우크라이나에서조차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라는 호소에 농민들은 아주 느리게 반응했다. 왜냐하면 지역 소비에트의 권력이 아직 미약했고 백군의 군사적 성공이 있을 때마다 농민들에 대한 가차없는 형벌이 가해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농민혁명을 일으키라는 호소에 핀란드의 빈농들이 반응을 늦게 보인 이유는 그만큼 더 당연한 셈이다. 농민들이 행동을 개시하기 위해서는 소련군이 제대로 군사적 승리를 거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준비가 엉망이었던 첫 진공에서 적군(赤軍) 은 실패만 기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이 봉기한다는 것은 전혀 말도 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단계에서 핀란드에서 독자적인 내전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소련 관료집단이 내전을 촉발하는 조치들을 통해서 군사작전을 보완할 것이라고 나는 정확하게 계산하여 말했다. 최소한 핀란드 군대가 전멸될 때까지 나의 이 계산은 적군 점령지와 인근지역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 1월 17일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핀란드 정보소식통은 국경지방 중 한 곳이 핀란드 망명자 부대에 의해서 침략을 받았으며 문자 그대로 동족상잔의 살육이 자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담은 전보를 전하고 있다. 이것이 내전의 양상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적군이 핀란드 안으로 새로이 진군할 경우 전쟁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평가는 전쟁의 단계마다 그 올바름이 틀림없이 확인될 것이다. 섁트먼은 사태 분석은 물론이요 약간의 예상조차 할 능력이 없다. 그는 고상한 분노에만 자신을 한정하고 있으며 이 이유 때문에 전쟁이 진전하는 매 단계마다 더욱 깊이 무지의 늪 속에 빠져들고 있다.

"인민정부" 수립 촉구는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를 더불어 촉구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섁트먼은 고함을 지른다. 소련에도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핀란드에서는 이것이 어디서 나온다는 말인가? 애석하게도 섁트먼은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소련에서는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는 이미 완성된 지 오래되었다. 부르조아지를 통제하면서 소련은 국유화 생산관리체제로 이행했다. 노동자에 의한 관리에서 지금은 관료집단에 의한 지령경제 단계로 나아갔다. 노동자에 의한 새로운 생산의 통제는 이제 관료집단에 대한 통제를 의미한다. 이것은 관료집단을 타도하는 봉기의 성공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다. 한편 핀란드에서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는 아직까지 토착 부르조아지를 몰아내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부르조아지가 남긴 권력의 공백을 관료집단이 채우겠다고 제안하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더욱이 동부 폴란드나 핀란드를 인민위원들을 수입해서 통치할 것을 시도할 만큼 크렘린궁이 그렇게 어리석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소련 관료집단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일은 점령지의 근로대중 가운데 새로운 행정기구를 끌어내는 일이다. 이 과업은 여러 단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첫 단계는 농민위원회와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 위원회이다.

쿠지넨의 강령이 "공식적으로 부르조아 `민주주의' 강령이다"라는 사실을 섁트먼은 꼭 부여잡고 있다. 그렇다면 크렘린궁은 핀란드를 소련의 틀 속으로 끌어들이기보다 그곳에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확립시키는 일에 더 관심이 있다고 섁트먼은 주장하고 싶은 것일까? 그는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소련은 스페인을 연방 안으로 끌어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따라서 크렘린궁의 관료집단은 노동자혁명에 대항하여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확실히 보장할 능력을 과시해야 했다. 이것이 이들이 스페인에서 처한 문제의 실체였다. 이 과업은 스페인 혁명이라는 특정 국제 상황에서 소련 관료집단의 이해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크렘린궁은 프랑스, 영국, 미국 등에게 자신의 유용성을 과시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행동이 증명하듯이 이들은 즉시 또는 두 단계를 거쳐 핀란드를 소련의 일부로 만들고자 확실히 결정하였다. 쿠지넨 정부의 강령은 "공식" 입장에서 보더라도 1917년 11월 볼셰비키당의 강령과 다르지 않다. 내가 "백치" 쿠지넨의 선언문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사실을 섁트먼은 확실히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크렘린궁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있으며 소련군의 지원을 받고 있는 "백치" 쿠지넨은 사태의 내적 논리(변증법) 을 끝까지 사고하기를 거부하며 겉으로 영리한 척하는 많은 소수파 인사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정치적 요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놀라운 분석의 결과 섁트먼은 이번에 소련에 대해 패배주의 노선을 공공연히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자신이 계속해서 "자기 계급의 이해에 충실한 사람"으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어서 우리는 기쁘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멘셰비키 지도자 단은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할 경우 세계노동계급은 "이 폭거에 대해 명확히 패배주의 노선을 택해야 한다"(Sozialisticheski Vestnik, 19 20호, 43쪽)고 11월 12일자 멘셰비키 기관지에 밝힌 바 있다. 케렌스키 임시정부 시절 단은 열렬한 조국방어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심지어 그는 짜르체제 하에서도 패배주의 노선을 주창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그가 "자기 계급의 이해에 충실한 사람"이 아닌 것은 물론 아니다. 문제는 어떤 계급이 자기 계급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핀란드의 사태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현지에 더 가까이 있으며 허구를 사실로 바꿔치기할 수 없는 단과 섁트먼은 지금까지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구체적인 정치적 결론 "의 문제에서 섁트먼은 단과 정확히 "똑같은 계급에 충실한 사람"임이 증명되었다는 사실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 맑스주의 사회학에 의하면 이 계급은 쁘띠부르조아이다. 이 점을 소수파 지도자들은 양해하기 바란다.  

 

"동맹" 이론

당내의 노동계급 경향,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 맑스주의 방법론에 대항하여 버넘, 에이번과 맺은 동맹을 정당화하기 위해 섁트먼은 혁명운동의 역사에 대해서도 한 말씀을 하셨다. 그의 말에 의하면 특히 그는 위대한 혁명전통을 젊은 세대에게 전수하기 위해 혁명운동의 역사를 연구했다는 것이다. 목표 자체는 아주 훌륭하다. 그러나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방법론이 요구된다. 그런데도 섁트먼은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과학적 방법론을 희생시켰다. 그가 들고 있는 역사적 예들은 철저하게 생각된 것이 아니며 완전히 거짓이다.

모든 협조적 관계가 전부 동맹인 것은 아니다. 장기화된 동맹으로 변모되지 않았으며 그럴 의도도 없는 일시적이며 사안적인 동맹들이 종종 존재한다. 한편 같은 당에 적을 두고 있는 것은 동맹이라고 전혀 간주할 수 없다. 버넘 동지와 우리는 같은 국제정당에 소속되어왔으며 계속 끝까지 이 상태가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이것은 동맹이 아니다. 두개의 정당은 공동의 적에 대항해서 장기간의 동맹을 체결할 수 있다. "인민전선 " 정책이 바로 이런 경우였다. 같은 당의 가깝지만 이질적인 경향들이 제3의 분파에 대항하여 동맹을 체결할 수도 있다.

당내에 존재하는 동맹들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 문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1) 동맹이 대항하는 세력이 누구인가? (2) 동맹 내의 세력관계는 어떠한가? 예를 들어 당내의 국수주의 경향에 대항하기 위해 국제주의자와 중도주의자 간에 맺는 동맹은 흔쾌히 인정될 수 있다. 이 경우 동맹의 결과는 국제주의자들의 강령의 명확함, 이들의 응집력과 규율 등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특성들은 세력관계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수적인 우위보다 더 중요한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섁트먼은 레닌이 보그다노프와 동맹을 맺은 사실을 들어 자신의 동맹을 정당화하고 있다. 레닌은 보그다노프에게 이론적인 측면에서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았다고 나는 이미 말한 바 있다. 이제 "동맹"의 정치적 측면을 검토해보자. 사실 레닌과 보그다노프의 경우는 동맹이 아니라 같은 조직 내에서 협조관계를 이룬 것에 불과하다. 이 사실을 무엇보다 먼저 말할 필요가 있다. 당시 볼셰비키 분파는 독립적으로 존재했다. 자기 조직 내의 다른 경향들에 대해서 레닌이 보그다노프와 "동맹"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보그다노프의 이론적 편향에 대항하여 레닌은 볼셰비키 화해주의자들(두브로빈스키, 라이코프 등등)과 동맹을 형성하기조차 하였다. 레닌과 관련하여 핵심적인 문제는 "분파"라고 불리웠지만 독자적 정당의 모든 특징들을 가진 조직 내에서 그가 보그다노프와 상종하는 것이 가능했냐는 것이다. 만약 섁트먼이 소수파를 하나의 독립된 조직으로 보지 않는다면 레닌-보그다노프 "동맹"을 얘기하는 것은 전혀 논리에 닿지 않는다.

그러나 예를 잘못드는 경우는 여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볼셰비키 분파-당은 당시 이미 자유부르조아지의 쁘띠부르조아 하수인임을 완전히 드러낸 멘셰비키에 대항해서 투쟁하고 있었다. 소위 "관료적 보수주의"라고 비난하는 문제보다 이 측면은 훨씬 더 심각한 측면이었다. 섁트먼은 "관료적 보수주의"를 자행하는 분파의 계급적 뿌리를 규정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레닌이 보그다노프와 체결한 것은 쁘띠부르조아 기회주의에 대항한 노동계급 경향과 종파주의적 중도주의 경향 사이의 협력관계였다. 여기서 계급적 경계는 명확하다. 이것을 "동맹"이라고 한다면 이 동맹은 정당한 것이었다.

이후 이 "동맹"의 역사는 나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섁트먼이 인용한 바 고리끼에서 보내는 편지에서 레닌은 정치적 문제들을 순수한 철학적 문제들과 분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섁트먼은 잊어버리고 있지만 레닌의 이러한 희망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견해 차이는 철학의 고상한 문제에서 줄줄이 이어져 가장 시사적인 문제에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이 "동맹"이 볼셰비즘을 기각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즉 레닌이 완성된 강령, 올바른 방법론 , 탄탄하게 응집된 분파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분파 내에서 보그다노프 그룹은 소규모의 불안정한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다.

섁트먼은 자기 당의 노동계급 경향에 대항하여 버넘 그리고 에이번과 동맹을 맺었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동맹 내의 세력관계는 섁트먼에게 완전히 불리하다. 에이번은 자기 분파를 소유하고 있다. 버넘은 섁트먼의 도움을 받아 볼셰비즘에 염증이 난 지식분자들을 결집하여 분파와 비슷한 것을 구성할 수 있다. 섁트먼은 독자적 강령, 독자적 방법론 , 독자적 분파 중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소수파 "강령"의 절충적 성격은 동맹 내의 모순적인 경향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 동맹이 붕괴될 경우 섁트먼은 당과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결과만을 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동맹의 붕괴는 불가피하다.

계속해서 섁트먼은 1917년 레닌과 나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나와 레닌은 오랜 상쟁 끝에 결합했으며 따라서 당시 우리의 과거 견해차이들을 들추는 것은 올바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예는 그가 에이번에 대항해서 캐넌과 동맹할 때 이미 써먹은 바가 있으므로 그 설득력이 약간 감소되었다. 그러나 이 불쾌한 전례는 논외로 치더라도 비유는 완전히 잘못되었다. 볼셰비키당에 합류할 때 나는 레닌식 당건설 방식의 올바름을 완전히 그리고 기꺼이 인정했다. 동시에 볼셰비즘의 결연한 계급적 경향은 올바르지 못한 나의 예상을 교정시킨 후였다. 1917년 당시 내가 "연속혁명"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지 않은 이유는 이후 혁명의 전개과정에 의해서 이 문제가 올바른 것으로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공동활동의 기초는 주관적이거나 일시적인 협력관계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혁명 그 자체에 의해서 마련되었다. 이것은 탄탄한 기초이다. 더욱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맹"이 아니라 부르조아 계급과 이 계급의 쁘띠부르조아 하수인들에 대항하여 단일한 당으로 통일을 이룬 것이었다. 당내에서 레닌과 나의 10월 동맹은 봉기문제와 관련하여 동요를 보인 쁘띠부르조아 경향에 대해 투쟁하였다.

1926년 내가 지노비에프와 동맹을 체결한 것을 섁트먼이 언급하고 있으나 이 예도 역시 피상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당시의 투쟁은 몇몇 등을 돌린 개인들의 심리적 특징인 "관료적 보수주의"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관료집단, 이 집단의 특권, 이 집단의 자의적인 당운영과 반동적인 정책에 대항한 것이었다. 동맹관계가 허용할 수 있는 차이점의 허용범위는 적의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동맹 내의 세력관계 역시 전혀 달랐다. 1923년 반대파는 나름의 강령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핵들은 섁트먼이 마치 스탈린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듯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것이 전혀 아니라 주로 노동자였다. 우리의 요구에 따라 지노비에프-카메네프 그룹은 특별 문건을 통해 1923년의 반대파는 모든 근본적인 문제들에서 올바랐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우리가 각기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견해를 같이한 것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에 통합은 결코 성사되지 못했다. 두 그룹들은 독자적인 분파로 남아있었다. 일부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1923년 반대파는 1926년 반대파에게 원칙적인 양보를 한 것이 사실이다. 나는 반대표를 던져 양보에 반대했으며 지금도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이러한 양보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은 상황은 오류였다. 그러나 대체로 공공연히 반대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우리는 비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양측은 모두 논란이 있었던 문제들에 대해서 나의 견해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1923년 반대파 내에서 1천명 중 999명 이상은 나를 지지했으며 지노비에프나 라덱을 지지하지 않았다. 두 그룹 사이의 이러한 관계 때문에 이러저러한 부분적인 오류는 있었으나 모험주의 비슷한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섁트먼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동맹을 맺은 자들 중 과거에 옳았던 자가 누가였으며 언제 어디서 옳았던가? 왜 섁트먼은 먼저 에이번을 지지하다가 캐넌을 지지했으며 이제 다시 에이번을 지지하고 있는가? 과거의 쓰디쓴 분파투쟁에 대한 섁트먼 자신의 설명은 책임있는 정치인의 것이 아니라 보모의 것이다: 캐넌은 약간 잘못했으며 섁트먼도 약간 잘못했으며 모두 다 약간 잘못했으며 이제는 우리 모두가 약간씩 옳다. 누가 어떤 점에서 잘못했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다. 과거의 정치적 궤적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어제는 평가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이라는 유기체에서 그는 떠다니는 콩팥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역사상의 예들을 찾으면서 섁트먼은 자신의 현 동맹이 실제로 닮고 있는 한가지 예는 피하고 있다. 소위 1912년 8월 동맹이 이것이다. 나는 이 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이 동맹을 만들었다. 정치적으로 나는 멘셰비키들과 모든 근본문제들에서 견해를 달리했다. 그리고 나는 초좌익 볼셰비키들인 소환파와도 동의하지 않았다. 일반적 정치경향을 놓고 보자면 나는 볼셰비키들에게 훨씬 더 가까웠다. 그러나 나는 레닌식 "조직운영"에 반대했다. 혁명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탄탄히 결집된 중앙집중주의 정당이 필수적이라는 진리를 당시 아직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의 노동계급 경향에 대항하는 온갖 잡탕들과 일시적인 동맹을 수립했다.

8월 동맹에서 청산주의자들은 나름의 분파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소환파도 분파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고립되어 있었다. 생각이 같은 사람들은 있었으나 분파로 구성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문서들은 내가 작성했다. 이 당시 동맹이 발표한 문서들은 원칙적인 차이점들을 피하면서 "구체적인 정치문제들"에 대해 만장일치를 가장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았다. 과거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레닌은 8월 동맹에 대해서 가차없는 비판을 퍼부었으며 가장 매몰찬 타격은 나에게 가해졌다. 내가 정치적으로 멘셰비키나 소환파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한 나의 정책은 모험주의라는 것을 그는 증명했다. 이 비판은 가혹했으나 사실이었다.

"정상을 참작하는 상황"으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나의 과업은 볼셰비키들에 대해서 우익이나 초좌익 분파들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당 전체를 단결시키는 데에 있었다. 볼셰비키들도 8월 대회에 초청받았다. 그러나 레닌이 완벽히 올바르게도 멘셰비키와 통합하는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에 나는 멘셰비키와 소환파들로 구성된 자연스럽지 못한 동맹에 소속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정상참작용 상황은 이것이었다: 진정한 혁명정당으로서 볼셰비즘이라는 현상 자체는 당시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실천에서는 볼셰비즘의 볼 자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나의 죄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의심할 여지없이 혁명적 전망을 올바르게 조망한 연속혁명론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시 특히 조직영역에서 쁘띠부르조아 혁명가의 구태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멘셰비즘에 대한 화해주의와 레닌식 중앙집중주의에 대한 불신을 질병으로 가지고 있었다. 8월 대회가 끝난 직후 8월 동맹은 그 구성부분들로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원칙적으로 뿐만 아니라 조직적으로도 동맹의 바깥에 존재하였다.

27년 전 레닌과 똑같이 오늘 나는 섁트먼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자 한다: "동지의 동맹은 무원칙합니다." "동지의 정책은 모험주의입니다."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섁트먼이 내가 한때 내렸던 결론과 똑같은 결론을 내렸으면 하는 희망을 진심으로 털어놓고자 한다.  

 

투쟁 중에 있는 분파 "

1923년 반대파의 지도자" 트로츠키가 캐넌이 이끄는 관료적 분파를 지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섁트먼은 놀라움을 표시한다.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서도 섁트먼은 다시 역사적 전망의 결여를 드러내고 있다. 자신들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소련 관료집단이 볼셰비키 중앙집중주의 원칙을 활용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이 과정에서 이들은 이러한 원칙을 완전히 정반대의 것으로 변화시켰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볼셰비즘의 방법론을 가치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레닌은 당을 노동계급의 규율과 가혹한 중앙집중주의 정신으로 교육시켜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쁘띠부르조아 분파들과 파벌들로부터 수없이 공격을 받아왔다. 그러나 볼셰비키식 중앙집중주의는 심대하게 진보적인 요인이 되었으며 결국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현재 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 소수파의 투쟁은 특권 관료집단에 대한 1923년 러시아 반대파의 투쟁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이 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다만 현재 소수파의 투쟁은 볼셰비키 중앙집중주의에 대한 멘셰비키들의 투쟁과는 정말이지 크게 닮은 점이 있다.

소수파에 의하면 캐넌과 그의 그룹은 "관료적 보수주의라고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유형의 정치적 경향" 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수적인 노동관료집단은 민족 부르조아지의 이윤을 나누어 갖는 주주인바 이들의 지배는 부르조아 국가의 직접적 내지 간접적 지원없이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통치는 비밀경찰, 군대, 법원 등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소련 관료집단이 스탈린을 지지하는 이유는 바로 그가 이들의 이해를 다른 어떤 누구보다도 잘 옹호한다는 데에 있다. 노동조합 관료들은 그린과 루이스를 지지한다. 능력있고 수완있는 관료들로서 이들의 악덕이 노동귀족의 물질적 이해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노동자당 내의 "관료적 보수주의"는 어떤 기초 위에 가능한가? 물론 물질적인 기초가 아니라 관료적 경향을 보이고 있는 인사들이 모임으로서 보수주의가 형성되었다고 섁트먼은 생각하고 있다. 이에 비해서 적대 진영인 소수파에는 개혁가, 제안가, 역동적인 정신에 충만한 인사들만이 모여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수파는 "관료적 보수주의"의 사회적 기초 즉 객관적 기초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모든 주장은 순전한 심리상태 그 자체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각이 있는 모든 동지들은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캐넌 동지가 진짜 관료적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죄를 짓는 것은 가능하다; 물론 멀리 떨어져 있는 내가 이것을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관료적 "특권들"에 대해 조금도 관심이 없는 전국위원회 다수 동지들과 당원들 다수가 그를 지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지는 캐넌 동지의 관료적 경향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이러한 경향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캐넌 동지는 자신의 개인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 결함보다 훨씬 더 중요한 다른 장점들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진지한 당원 동지들의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나도 이들의 생각에 동의한다.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자신들의 불만과 비판의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모든 정당에 수천 내지 수만건이나 존재하는 서로 연관도 없는 일화들과 사건들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 내용을 객관적으로 확증하기가 불가능하다. 소수파의 문서들이 말하고 있는 모든 이야기 속에 담긴 비판들을 무조건 인정할 의도가 나에게는 전혀 없다. 그러나 어느 한 사건에 대해서는 내가 실제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목격자이므로 내 생각을 밝혀보고자 한다. 캐넌 동지와 그의 그룹이 비판이나 검토도 없이 이행기 강령을 받아들였다고 소수파 지도자들은 피상적으로 주장한다. 이 강령을 구체적으로 작성하는 일에 대해 내가 캐넌 동지에게 보낸 1938년 4월 15일자 편지를 보자:

"동지에게 이행기 강령 초안과 노동당에 대한 짤막한 소견을 이미 보냈습니다. 동지가 이곳 멕시코를 방문하지 않았다면 이 초안은 결코 작성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동지 여러분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들을 많이 배웠으며 이를 통해 초안의 내용이 좀더 명확하고 구체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

당시 토론에 참여한 당사자이기에 섁트먼은 당시의 상황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

쁘띠부르조아 서클에서는 소문, 개인적 추측, 단순한 한담거리들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을 수 없다. 당적 유대가 아니라 개인적 연분으로 묶여있으며 사건들을 계급적으로 접근하는 습관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수파의 대표들만이 나를 방문했으며 이로 인해 나는 진실의 거리에서 멀어졌다는 소문이 입과 입을 통해 퍼졌다. 그러나 동지 여러분들, 이런 황당한 소문을 믿어서는 안된다! 나는 일반적으로 저서를 쓸 때와 같은 방법으로 정치 관련 정보들을 얻는다. 정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행위는 모든 정치인에게 필수적인 부분이다. 만약 잘못된 정보를 진짜 정보와 구분할 능력이 나에게 없다면 나의 판단들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에이번 분파에 소속된 20명 이상의 동지들과 알고 지낸다. 이들 중 여러 동지들은 나의 저술작업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이들의 거의 모두는 소중한 당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쁘띠부르조아 분위기, 계급투쟁 경험의 부족, 노동계급운동과의 꼭 필요한 유대의 결여 등으로 나름의 결함들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긍정적인 자질들 덕분에 이들은 제4인터내셔널의 일부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들의 부정적인 자질들 덕분에 이들은 모든 분파들 중 가장 보수적인 분파에 속해 있다.

"`반(反) 지성적' 태도가 당원들의 머릿속에 강제로 주입되고 있다."고 "관료적 보수주의"를 비판하는 문서가 불평하고 있다.(당내 토론집 제2권, 제6호, 1040년 1월 6일, 12쪽) 이러한 주장은 순전히 인위적이다. 문제는 노동계급 진영으로 완전히 넘어간 지식인들이 아니라 우리 당을 쁘띠부르조아 절충주의로 몰고가려는 분자들에게 있다. 이 문서는 또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반드시 건강하지는 못한 편견들에 아부하는 반(反) 뉴욕지부 선전들이 유포되고 있다." 이 문서가 말하는 편견들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마 반유태주의인 것 같다. 그러나 만약 우리 당내에 반유태주의적 또는 여타의 인종주의적 편견들이 존재한다면 이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가차없는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막연히 암시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그러나 뉴욕지부의 유태인 지식인들과 반(半) 지식인들에 대한 문제는 사회계급적 문제이지 민족적 문제가 아니다. 뉴욕에는 유태인 노동계급이 많이 존재하고 있으나 에이번 분파는 이들을 조직 기반으로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분파의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은 유태인 노동자들에게 다가가는 길을 찾을 능력이 없음을 증명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환경에 만족하고 있다.

당이 한 시기에서 다른 시기로 이행함에 따라 과거 진보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분자들이 새로운 과업에 제때 적응하지 못하고 난관에 봉착하여 긍정적인 자질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인 자질들만을 발휘한 예가 역사에는 한 번 이상 있어왔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와 반대의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에이번 분파의 현재 역할이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 분파 내에서 섁트먼은 언론을 담당하고 버넘은 이론을 담당하고 있다. 섁트먼은 끈질기게 주장한다: "지금 진행 중인 당내 논쟁에서 `에이번 분파의 문제'를 주입하는 것이 얼마나 거짓인 지를 캐넌 동지는 알고 있다. 최소한 지난 몇 년 동안 `에이번 그룹'과 같은 문제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모든 지도급 동지들과 많은 수의 당원들 역시 마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현실을 왜곡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섁트먼 자신이라는 점을 감히 말하고자 한다. 나는 약 10년 동안 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의 관계들을 추적해왔다. 다른 무엇보다도 뉴욕지부의 구체적 계급구성과 특별한 역할이 나에게는 명확히 인식되었다. 내가 터어키의 프린키포에 있을 때에도 전국위원회에게 뉴욕의 쁘띠부르조아적이며 쓸모없는 말다툼 현장에서 잠시 벗어나 지방의 공업중심지로 당본부를 옮기라고 충고한 바 있었다. 이것을 섁트먼은 기억할지 모르겠다. 멕시코에 도착하자 나는 영어에 더 익숙해질 기회를 얻었으며 미국 동지들의 잦은 방문 덕택에 당내 그룹들의 사회계급적 구성과 정치적 심리를 좀더 생생하게 파악할 기회를 가졌다. 지난 3년간의 개인적이고도 세세한 관찰을 기초로 나는 주장하는 바이다. 에이번 분파는 "역동적"이지는 않지만 정적으로라도 계속 그 존재를 유지해왔다.

정치적 경험을 별로 가지지 못한 에이번 분파의 동지들은 그들의 사회계급적 특성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들에 대한 그들의 접근방식에 의해 쉽게 구별된다. 이들 동지들은 언제나 자기가 소속한 분파의 존재를 공식적으로는 부인한다. 이들 중 일부가 스스로를 해체하고 당의 원류에 합류하려고 시도한 적이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이들에게 무리한 행위였으며 모든 핵심적인 문제들에서 이들은 하나의 그룹으로 당에 대항했다. 이들은 원칙적인 문제들 특히 당의 사회계급적 구성을 변화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지도적 인사들의 연합, 개인적 갈등, 그리고 일반적으로 당 "총사령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것이 바로 에이번 파벌의 특징이다. 나는 이들 많은 동지들에게 지속적으로 경고한 바 있었다. 즉 인위적으로 조성한 환경에 깊숙이 빠져들다 보면 조만간 새로운 분파적 폭발이 반드시 일어나 이들을 산산조각 낼 것이라고 말이다.

소수파 지도자들은 캐넌 분파의 노동계급적 구성에 대해 비꼬는 듯이 그리고 폄하하여 말한다. 이들의 눈에는 이 우연적인 "사소한 일"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눈먼 쁘띠부르조아적 냉소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제2차 당대회에서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는 분열했다. 당시 많은 수의 멘셰비키 대의원들 중 노동자는 3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후 이들 3명은 모두 볼셰비키 쪽으로 넘어왔다. 이 사실을 레닌이 하나의 징후로서 대단히 중요하게 본 것을 멘셰비키들은 조소했다. 이들은 세 명의 노동자들이 "성숙"하지 못해서 볼셰비키 쪽으로 넘어갔다고 자기들 식으로 설명해버렸다. 그러나 이제 다들 알고 있듯이 레닌이야말로 올바랐다.

우리 미국 당의 노동계급 분자들이 "정치적으로 후진적"이라면 "선진적인" 분자들의 첫 번째 임무는 노동계급 당원들의 수준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왜 소수파는 이들 노동자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는가? 왜 이 일을 "캐넌 파벌"에게 넘겼는가?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가? 소수파의 일원이 되기에 이들 노동자 당원들은 자질이 충분하지 못한가? 아니면 소수파는 노동자들에게 맞지 않는 그런 집단인가?

당의 노동계급 분자들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멍청할 것이다. 노동자들은 점차적으로만 명확한 계급의식을 획득한다. 노동조합은 기회주의적 편향을 노동자들에게 주입할 문화적 매개물을 언제나 만들어낸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당은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당원들에게 자주 이렇게 주지시켜야 한다: 노동계급의 후진층을 교육하기 위해서 이들의 정서에 적응하는 일이 노동조합의 보수적 관료들의 정치에 영합하는 것으로 변질되어서는 안된다. 당이 새로운 발전단계에 접어들 때마다 그리고 당원의 수가 늘어나 당활동 방식이 복잡해질 때마다 새로운 가능성뿐만 아니라 새로운 위험도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가장 혁명적인 조직에서 훈련되었을 경우에도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노동자들은 당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갖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 당의 단계에서 이것은 전혀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현재 비노동계급적 소수파는 비노동계급적 청년당원들의 다수를 잡아끌면서 우리의 이론 , 우리의 강령, 우리의 전통을 수정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캐넌 파벌"과의 싸움에서 편의를 도모하려고 가볍게 저지르고 있다. 지금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아니라 바로 쁘띠부르조아 소수파 지도자들이 당을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다. 미래에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당을 등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 단호하게 쁘띠부르조아 소수파들에 대한 투쟁을 수행해야 한다.

더욱이 노동조합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지들이 현재 저지르고 있거나 미래에 저지를 오류들은 현재 미국 노동계급이 우리 당에 가하는 압력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노동계급은 우리의 계급이다. 우리는 노동계급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압력은 동시에 우리의 주요한 역사적 임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소수파의 오류들은 다른 계급의 압력을 반영하고 있다. 이 계급과 이데올로기적으로 결렬하는 것은 미래에 있을 우리의 혁명적 성공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이다.

청년 당원들에 대한 소수파의 논리는 철저하게 잘못되어 있다. 물론 노동계급 청년들을 획득하지 않고서는 혁명정당은 발전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현재 거의 전적으로 쁘띠부르조아 청년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는 사회민주주의적 즉 기회주의적 정치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 청년당원들의 지도자들은 의심한 여지없는 미덕과 능력들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들은 쁘띠부르조아 연합주의 정신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이 이러한 환경과 결별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노동계급 사이에서 일상적인 어려운 일들을 수행하기 위해 거창한 직책 없이 파견되지 않는다면 이들은 영원히 혁명운동에서 사라질 것이다. 다른 모든 문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청년 문제에 있어서도 섁트먼은 불행하게도 철저히 잘못된 입장을 견지해왔다.  

 

오류는 이제 바로잡아야 한다!

섁트먼은 나의 정치적 입장을 "캐넌 파벌"을 옹호하기 위해 동원되는 정도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오류를 통해 내가 프랑스의 "몰리니에 파벌"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철저히 잘못된 노선으로 추락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내가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강령과 무관하게 이들 개인들과 그룹들을 지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몰리니에를 예로 드는 이유는 문제를 더욱 애매하게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의도를 밝혀보겠다. 몰리니에는 우리의 강령에서 후퇴해서가 아니라 당과 자기 분파를 지탱하려는 목적으로 무원칙하게 자의적으로 모든 종류의 재정적 모험들을 감행해서 비판을 받았다. 그는 매우 열정적인 동지이며 의심할 여지없이 실제 능력들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몰리니에 뿐만 아니라 당의 이익을 위해서도 노동계급의 규율에 입각하여 그를 설득하고 재교육시킬 모든 가능성들을 타진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를 반대하는 많은 동지들이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결점들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의 장점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의 반대자들에게 조직을 섣불리 분리할 것이 아니라 그를 계속해서 시험해야 한다고 힘이 닿는 데까지 설득했다. 우리의 프랑스 지부가 불안정한 초기 단계에 있을 때 내가 몰리니에를 "옹호"했던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다.

오류를 저지르거나 규율을 어기는 동지들에 대해서 인내심을 가지면서 혁명적 정신으로 이들을 재교육시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 방법을 나는 몰리니에에게만 적용하지 않았다. 커트 랜도, 필드, 와이스보드, 오스트리아의 프라이, 프랑스의 트렝트 등과 여타 많은 동지들에게 나는 이 방법을 구사했다. 많은 경우에 나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몇몇의 경우에 나는 소중한 동지들을 구출할 수 있었다.

어쨌든 나는 원칙 문제에서는 몰리니에에게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가 우리의 강령이 아니라 "네 가지 구호"에 기초하여 신문을 발간할 것을 결정하고 이 계획을 독자적으로 추진하려고 했을 때 나는 그가 즉시 제명될 것을 주장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은 감추지 않겠다.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나는 다시 한번 몰리니에와 그의 그룹을 인터내셔널의 원칙 속에 시험하고 이들이 자신들의 오류를 확신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나의 시도는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러나 적절한 상황하에서는 다시 이 방법을 포기하지 않겠다. 몰리니에에 대해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인사들 중에는 베레컨과 스니블릿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제4인터내셔널과 결별한 후 다시 몰리니에와 한편이 되었다. 아주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많은 동지들은 내가 옛날 문서들을 뒤적이면서 "가망없는 동지들"에게 그렇게도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보고 동지애로 나무라곤 했다. 상황에 따라 사람은 변하는 것이며 따라서 몇몇의 심각한 오류들을 저지른다고 사람들을 "가망이 없다"고 재빨리 선언하지는 않겠다고 나는 이들에게 대답했다.

섁트먼이 자신과 당의 일부 동지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가는 것이 명확해졌을 때 나는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기회가 닿는다면 즉시 뉴욕으로 날아가서 그와 72시간동안 연달아 토론을 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가 이런 기회를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할 수 없겠냐고 물었다. 이 편지에 대해서 섁트먼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가 결정할 문제이다. 미래에 내가 소장한 문서들을 볼 동지들이 이 경우에도 내가 "오류"를 저질렀다고 판단하고 어쩌면 몰리니에를 과도하게 "옹호"한 나의 오류와 연관시켜 나의 행동을 해석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결코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상황하에서 국제 노동계급 전위당을 조직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과업이다. 원칙을 버리면서 개개인들을 획득하려고 설치는 것은 물론 범죄행위에 해당된다. 그러나 출중하지만 오류를 범한 동지들을 다시 우리 강령 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모든 가능한 수단들을 동원하는 것을 나의 임무라고 생각해 왔으며 지금도 나의 임무로 생각하고 있다.

섁트먼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잘못 이용한 노동조합 논쟁으로부터 나는 레닌의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섁트먼은 이 말을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오류는 작은 것으로 시작하면서 점점 커진다. 견해 차이들은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다. 모든 사람들은 가끔 사소한 부상을 입는다. 그러나 이 부상이 세균에 감염되면 치명적인 질병이 뒤따를 수 있다." 레닌은 1921년 1월 23일 이 말을 했다.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 좀더 자주 오류를 범한다. 오류를 계속 저지르고 혁명적 대의보다 더 큰 야망을 품는 것은 노동계급 혁명가의 임무가 아니다. 제 시간에 오류를 중단하는 것이 혁명가의 임무이다. 이제 섁트먼 동지는 오류를 더 이상 범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꽤 곪은 그의 긁힌 상처는 그의 몸을 썩어들어가는 화농으로 발전할 것이다.  

1940년 1월 24일

멕시코의 코요아칸에서

 

[23. A Letter to Martin Abern] 마튼 에이번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그렇다면 조직이 분리되겠군" 하고 동지가 말했다는 소식을 캐넌 동지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그는 1939년 12월 28일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동지가 작성한 문서는 이미 당내에 널리 배포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소수파 지도자 동지 두 명만이 이 문서에 대해서 명확한 논평을 내렸을 뿐입니다. 에이번 동지는 이 글의 제목과 첫 몇 단락을 읽고난 후 골드먼 동지에게, `그렇다면 조직이 분리되겠군'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캐넌 동지를 믿을만한 동지로 알고 있으며 그가 한 말의 진실을 의심할 이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동지는 그의 말이 "거짓말이다"라고 말합니다. 격렬한 투쟁 과정에서 이런 종류의 오해는 어느 쪽의 악의가 없이도 아주 자주 일어나는 법입니다. 오랜 경험을 통해 나는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캐넌 동지의 말이 진실인지를 확인하려는 노력을 했느냐고 동지는 나에게 묻고 있습니다. 나는 전혀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내가 사적인 편지에서 동지의 발언을 사실로 인정하고 유포했다면 의리를 저버린 행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지가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고되었다"는 표현이 들어있는 나의 서한들을 공개했습니다. 결국 동지가 스스로 한 말을 확인하고 부인할 완전한 가능성을 열어두었습니다. 당내 토론에서는 이러한 확인 방식이 가장 좋다고 믿습니다.

동지가 보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과거 동지들이 자행했던 많은 거짓 발언들을 나는 그동안 무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동지의 공개서한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주목할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등등. 그렇다면 "많은 거짓 발언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누가 거짓 발언을 했다는 것입니까? "다른 무엇보다도"는 또 무엇입니까? 어떤 종류의 내용을 의미합니까? 동지의 이런 표현들은 경험없는 동지들에게 일종의 애매한 암시로 이해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까? 나의 글 가운데 "많은 거짓 발언들"과 "다른 어떤 것들"이 있다면 정확하게 이 내용들을 밝히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만약 이런 거짓 발언들을 내가 하지 않았다면 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표현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많은 거짓 발언들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면 어떻게 "무시할 "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이 말은 동지의 당에 대한 무관심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다면 조직이 분리되겠군"하고 말한 부분을 동지 스스로 딱잘라 부인하니 반갑습니다. 나는 동지가 편지에서 보인 힘찬 부인 의사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동지의 부인은 공식적인 것은 아니다; 동지는 캐넌 동지가 인용한 내용을 부인하고 있다; 동지는 나와 마찬가지로 조직 분리 행위를 제4인터내셔널에 대한 비열한 배신행위라고 보고 있다.  

1940년 1월 29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멕시코

 

[24. Two Letters to Albert Goldman] 앨버트 골드먼 동지에게 보내는 2 통의 편지   

골드먼 동지,

동지의 2월 5일자 편지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에이번 동지의 조직 분리 발언을 내가 공개한 이유는 에이번 동지를 비롯한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의 명확한 발언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수파 지도자 동지들의 소위 숨겨진 의도가 아니라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등시민"에 대한 우스갯 소리를 이미 들었습니다.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에게 이렇게 묻고자 합니다: 다수파 그룹을 "캐넌 파벌" 또는 "보수적 관료들" 등으로 부른다면 소수파 동지들은 자신들을 이등시민의 지위로 격하시키려는 것인가? 모든 쁘띠부르조아 분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이들의 대단히 예민한 감성입니다. 이 점을 덧붙이고자 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섁트먼이 자신의 공개서한을 통해 나를 이등시민으로 만들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의 정신분석적 추측이 아니라 그의 사상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일련의 오류들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끝에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서로를 히스테리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분파적 히스테리를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해 대항 분파들이 아주 음험하고 기괴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인상입니다. 내가 캐넌 동지와 서한을 주고 받는 것을 음모를 숨기기 위한 위장이라고 이들이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도 기가 막혀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쁘띠부르조아 히스테리에 대한 가장 좋은 치료약은 맑스주의적 객관화 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변증법, 맑스주의 사회학, 소련의 사회 성격, 전쟁의 성격 등에 대해 토론을 진행시킬 것입니다. 조직 분리를 유도하겠다는 황당하고도 범죄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원들의 중요한 부위가 우리의 주장을 확신하여 쁘띠부르조아적 입장에서 노동계급적 입장으로 넘어오는 것을 돕기 위해서 입니다.  

1940년 2월 10일

동지적 애정을 보내며

레온 트로츠키

 

동지,

소수파 대회는 전국 규모의 소위원회(caucus)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대회가 개최되었다고 해서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조직 분리를 위한 잘못된 길을 새로이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조직 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수파 내부에는 조직 분리 문제에 대해 두 세 가지 경향이 확실히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소수파 대회의 목적이 이러한 경향들을 통일시키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기초를 바탕으로 통일을 하겠습니까? 어쩌면 일부 지도자들은 필사적인 감정 속에 조직 분리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수파가 당의 단합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의식적으로 조직 분리 세력의 시도를 어렵게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동지가 속한 소위원회 아니면 전국위원회의 공식적 다수파 아니면 정치위원회가 당의 단합 문제만을 담은 서한을 소수파 대회에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서한에는 소련의 사회 성격이나 전쟁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소수파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포기해야 당에 남을 수 있다고 잘못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이 당과 제4인터내셔널에 대해 진정으로 헌신하며 규율을 준수할 경우 이들은 우리와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40년 2월 19일

레온 트로츠키

 

[25. Back to the Party!] 당으로 복귀합시다  

동지들,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아직도 우리의 이론적 또는 정치적 주장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의 일관되지 못한 주장이 다수파 동지들의 글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이제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게릴라전으로 이행한 것 같습니다. 게릴라전은 패배한 많은 군대들의 운명입니다. 골드먼 동지는 2월 12일자 회람을 통해 소수파의 새로운 전투 방식을 적절하게 묘사했습니다. 이 새로운 방식의 가장 기묘한 예를 맥다널드 동지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자유지(紙)(Liberty) 에 기고한 글을 그는 섬세하기보다는 용감하게 공격했습니다. 이 글에서 나는 소련의 모순적 성격과 적군의 "진보적 역할 "을 분석했는데 이 내용을 그는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크론슈타트 봉기를 분석한 논리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당파평론지](Partisan Review)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최소한 부르조아 언론을 상대할 때는 내가 "실제로는" 소수파, 섁트먼 또는 자기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입장과 모순되며 스탈린주의에 투항하는 나의 선언문들은 캐넌 동지를 도우려는 목적으로 당내 토론집에만 실리고 있다는 사실 역시 새로이 발견했습니다. 맥다널드 동지의 새로운 발견들을 좀더 명확하게 표현하자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부르조아 언론에 영합하고 자유지의 독자들이 보기 좋은 글을 쓸 때는 트로츠키는 섁트먼과 똑같이 그리고 자기와 비슷한 입장을 가진 글을 쓴다; 그러나 당에 대해서 글을 쓸 때에는 지독하게 소수파를 비판한다. 당파평론지는 정신분석에 대해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맥더날드 동지가 자신에 대해 정신분석을 해보면 아마 자기의 무의식을 발견했다고 인정할 것입니다.

소련의 모순적 성격 그리고 적군의 모순적 역할을 소수파 동지들이 모든 글과 연설에서 분석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이들이 이 문제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이 결과를 모든 경우에 올바르게 적용할 것을 요구할 뿐입니다. 자유지에 실린 나의 글은 소련의 사회 성격이 아니라 스탈린의 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익명의 글이 멕시코의 부르조아 언론에 실렸습니다. 이 글은 내가 스탈린의 대외정책을 승인하고 있으며 스탈린과 화해를 추구하고 있다고 "트로츠키 측근 소식통들"을 인용하며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들이 미국 언론에도 유포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스탈린주의에 투항했다고 맥다널드 부류들이 끔찍하게 심각한 비난을 가했을 것이고 이 내용을 멕시코 언론이 나름의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세계 부르조아 언론이 당내 토론을 악용하는 사례를 막기 위해서 나는 국제정치에서 스탈린의 역할을 폭로하는 데 초점을 맞춘 글을 자유지에 실었던 것입니다. 이 글은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해 사회학적 분석을 전혀 가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에 당시 좀더 시급하다고 생각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언제나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순간에 필요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아마 이 글의 내용이 소수파의 주장과 일치하는 부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파의 주장이라는 것도 실제로는 맥다널드 동지가 등장하기 훨씬 전에 우리가 골백번이나 주장한 내용의 복사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좀더 심각한 문제들을 다루어 봅시다. 나에게 보낸 에이번 동지의 편지는 조직을 분리하겠다는 의지를 아주 확실하게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직을 분리하겠다는 그의 근거는 정말이지 한심하면서 동시에 경악스럽습니다. 이 표현은 그대로 나의 감정을 가장 누그러뜨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캐넌 파벌"이 당대회에서 다수파가 된다면 에이번과 그의 동료들은 "이등"시민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에이번은 와이스보드, 피일드, 오울러 등과 같이 일등시민들 가운데 일등시민이 되어 자기 왕국을 갖기를 더욱더 원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당내에서 일등 이등 "시민들"을 결정할 수 있습니까? 당만이 이것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당이 어떻게 이런 결정들을 할 수 있느냐고요?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토론을 누가 주도했습니까? 에이번과 그의 부관들이 했습니다. 이 동지들이 글이나 말을 제한당한 적이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이번의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당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당과 제4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신망을 잃었습니다. 이들이 소중한 동지들이란 점에서 이러한 현상은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동지들은 이제 당활동을 열심히 진지하게 수행하는 것을 통해서만 잃었던 신망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간, 인내심, 확고한 의지 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제4인터내셔널의 원칙들을 가지고서 당을 설득하는 작업에 대해 에이번은 희망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따라서 조직을 분리하려는 경향은 일종의 조직 이탈행위가 됩니다. 에이번 동지의 논리가 너무도 한심스러운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또한 경악스럽기까지 합니다! 노동계급적 다수파에 대한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의 경멸감을 기저에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수파는 아주 능력있는 집필가, 연설가, 조직가들이며 다수파는 소양도 없고 소수파를 액면 그대로 평가할 능력도 없다. 그러니 고상한 인간들로 새로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 더 낫다!

제3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우리 좌익반대파는 하나의 분파로 남아있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스탈린주의 다수파는 우리를 박해했고 합법적 표현수단들을 박탈했습니다. 가장 지독한 비방을 자행했으며 소련 국내에서는 우리 동지들을 체포하고 총살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자 당원들과 분리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일말의 가능성이 존재할 때까지 우리는 분파임을 자부했습니다. 제3인터내셔널의 부패한 전체주의적 관료집단의 모든 만행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제4인터내셔널이야말로 전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정직한 혁명조직입니다. 우리 당"기구" 는 강제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완벽한 당내 민주주의를 통해 모든 문제가 결정되며 모든 동지들이 평가됩니다. 다수파 동지들이 오류를 범한다면 소수파 동지들이 점진적으로 이들을 올바른 길로 교육할 수 있습니다. 다음 당대회 이전에는 안되더라도 그 이후에는 가능합니다. 소수파는 새 당원들을 조직하여 이후 다수파가 될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에 대한 약간의 믿음, 노동자들이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에게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현재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스스로가 구축한 환경 속에서 히스테리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이들은 부르조아 여론에는 영합하면서 제4인터내셔널의 발전에는 영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인내력 부족은 계급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즉 노동자에 대한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의 경멸감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에이번 동지가 표현한 조직 분리 경향이 너무도 경악스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에이번 동지는 증오심을 가지고 사태를 평가하고 미래를 조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 증오심은 정치에서는 혐오스러운 감정입니다. 에이번 동지의 태도와 그의 조직 분리 움직임은 소수파의 건전한 동지들 모두에게 혐오감만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동지들, 당으로 복귀합시다! 에이번 동지가 가리키는 길은 막다른 골목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4인터내셔널 이외의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1940년 2월 21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멕시코

 

[26. "Science and Style"] " 과학과 문체 "  

동지들,

버넘 동지의 글 "과학과 문체"를 받았습니다. 결국 곪은 상처가 터지고 말았군요. 이 글은 우리에게 중요한 정치적 이익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버넘은 약간 "현대화된" 예들을 들면서 40년도 더 전에 러시아에서 스트루베가 그리고 더 큰 규모로 75년 전에 뒤링이 독일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바를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글은 미국 "급진파"의 이론적 후진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과학적" 관점으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문체"에 관한한 나는 이스트먼의 문체를 더 좋아한다고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이 글은 이론의 측면에서는 전혀 재미가 없습니다: 버넘 교수가 1천1번째로 변증법을 반박했지만 이것은 과거의 반박들과 비교해서 가치있는 구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이 글은 논란의 여지없이 중요합니다. 소수파에게 이론적 영감을 제공해주는 버넘이 에이번의 과거 동료였던 마스티만큼이나 과학적 사회주의와 멀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섁트먼은 보그다노프의 철학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보그다노프는 볼셰비즘과 명확히 결별한 이후에도 이 글의 철학적 수준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을 보였습니다. 따라서 이 글이 보그다노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나처럼 당은 에이번과 섁트먼 동지에게 이렇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버넘의 "과학"과 "문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핀란드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일회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건들의 진정한 동인들을 드러내는 국제적 상황의 변화는 즉시 이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온갖 편향들을 반박할 것 입니다. 그러나 이제 "과학과 문체"가 등장한 이상 에이번과 섁트먼 동지는 이 불쌍한 글 자체가 아니라 과학, 맑스주의, 정치, "도덕" 등과 관련된 버넘의 사상 전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책임을 질 수 있습니까? 조직 분리를 준비하고 있는 동지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즉 사상 전반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한 명의 "지도자"의 이름과 자신들이 단 일주일 또는 핀란드전쟁 기간 동안만이 아니라 수년 동안 연상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종기는 이제 물러 터졌습니다. 핀란드와 캐넌 동지에 대해서만 약간 토론하고 싶다는 말을 에이번과 섁트먼 동지는 더 이상 반복할 수 없습니다. 이 동지들은 맑스주의와 제4인터내셔널을 가지고 더 이상 숨바꼭질을 할 수 없습니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버넘이 "반동적"이라고 선언하는 맑스, 엥겔스, 프란츠 메링,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의 전통을 계승할 것입니까 아니면 전(前) 맑스주의적 쁘띠부르조아 사회주의의 최신판인 버넘의 사상을 받아들일 것입니까?

이러한 수정주의가 과거에 정치적으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부르조아 체제가 숨이 넘어가는 고통을 겪고 있는 시대에 버넘주의의 정치적 결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욱 직접적이며 반혁명적일 것입니다. 에이번 동지, 섁트먼 동지, 동지들은 발언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견해를 밝히십시오!  

1940년 2월 23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멕시코    

 

[27. A Letter to James Cannon] 제임스 캐넌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동지의 2월 20일자 편지에 대한 답장입니다. 소수파 대회는 이제 끝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지는 편지에서 구체적인 전술문제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동지의 즉각적인 전술은 최소한 51%는 이 대회의 결과에 달려있다고 믿습니다.

소수파 전원이 조직 분리를 준비하고 있으며 단 한 명도 우리 쪽으로 획득할 수 없을 것이라고 동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전제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소수파 동지들이 클리블런드 대회를 소집하기 전 이미 우리의 제의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때 노선을 급격히 전환시켜서 화해 조치들을 더욱 열정적으로 펼 필요가 있었습니다. 조직 분리를 찬성하는 여론에 대비하여 새로운 인터내셔널 한 호를 출간할 필요가 있다고 동지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는 동지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수파 대회는 2월 24 25일에 열렸으며 당대회는 4월초까지는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화해를 제의하고 소수파의 조직 분리 의사를 비난하고 새로운 인터내셔널 새로운 호를 발간할 시간을 동지는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당의 단합을 위해 다수파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습니다. 이 사실을 제4인터내셔널 다른 지부들에게 알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야 합니다. 국제집행위원회 소집을 우리 3명 모두가 제안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대단히 중요한 기구의 모든 구성원들을 시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수파 동지들 다수가 드러내고 있는 조급함을 아주 잘 이해합니다. 이 조급함은 아주 빈번하게 이론적 무관심과도 연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의 사태는 국제적으로 제4인터내셔널 전체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옳아도 주관적 평가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객관적 사실에도 근거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이 점을 다수파 동지들은 상기해야 합니다.  

1940년 2월 27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28. A Letter to Joseph Hansen] 조지프 핸슨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스페인 혁명과 관련하여 내가 인용한 편지를 섁트먼은 자신이 아니라 캐넌과 카터가 썼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동지들의 서명을 숨기거나 왜곡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의 경우 섁트먼 동지의 서명만이 있습니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수파 동지들도 섁트먼과 같은 오류를 저지를 수 있었지만 이런 오류들을 체계적으로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오류들을 기반으로 분파의 강령을 삼지도 않았습니다. 나의 글은 이것만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전부입니다.

에이번과 버넘은 내가 자신들의 말을 미리 "확인"도 하지않고 인용한다고 화를 내고 있습니다. 이 선언들을 모두 공개하여 이 발언들을 자기들 입에서 나온 것으로 완벽히 확인하거나 부인하는 상황을 이들은 싫어하고 있습니다. 이 대신 5명에서 7명 정도의 제 3자와 한두 명의 속기사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이곳에서 구성하여 그쪽으로 보냈으면 하는 것이 이들의 의도인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이렇게 도덕적인 소동을 일으키고 있을까요? 여러 번에 걸쳐 버넘은 변증법을 종교와 동일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특별한 경우와 관련하여 나에게 보고된 내용을 나는 그의 발언으로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인용된 문장대로는 말하지 않았다고 발뺌하고 있습니다. 끔찍한 일이군요! 이것이 볼셰비키의 냉소주의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에이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조직 분리를 준비하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골드먼에게는이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군요. 이것은 비방이요, 거짓입니다!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혼란에 처한 쁘띠부르조아들은 (과학적이 아닌) 도덕적인 고뇌에 빠져듭니다. 도덕 문제를 다룬 나의 글은 이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바 입니다. 그런데 우리 당 내부에도 이와 똑같은 현상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들 새로운 도덕론자들은 이스트먼에 대해서 그리고 레닌의 유언장에 대해서 내가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이야말로 경멸할만한 위선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시 좌익반대파는 공산당의 때이른 조직 분리를 피하기 위해 모든 공개적인 활동을 중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이스트먼은 레닌의 유언장을 자기 맘대로 공개했던 것입니다. 그 유명한 영러 노동조합 위원회(Anglo-Russian Trade Union Committee), 중국 혁명, 그리고 심지어는 지노비에프 분파의 탄생 등 주요한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에 이 짓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좌익반대파는 시간을 벌기 위해 전술을 구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스탈린, 지노비에프, 카메네프의 삼두체제는 반대파 당원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스트먼이 공개한 레닌의 유언장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이들은 최후통첩을 나에게 보냈습니다: 삼두체제가 작성한 선언문에 서명을 하지 않으면 즉시 이 문제에 대해서 당내투쟁을 전개하겠다. 당시 그 문제는 절대적으로 반대파에게 불리했습니다. 따라서 이 최후통첩을 받아들여 정치국이 작성한 선언문에 내가 서명하기로 반대파 중앙이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필요를 추상적인 도덕적 문제로 변모시키는 것은 쁘띠부르조아 사기꾼들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은 망해도 좋으니 정의여 영원하라! 기꺼이 이렇게 선언하면서 자기들은 맘대로 하고 싶은 짓을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기들이 혁명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과 비교하면 멘셰비키들은 진짜 영웅들이었습니다.  

1940년 2월 29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29. Three Letters to Farrell Dobbs] 패럴 답스 동지에게 보내는 3 통의 편지  

동지,

소수파의 열병에 걸린 듯한 급격한 정치적 진화과정을 이곳에서 제대로 파악하기는 당연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소수파 동지들은 뒤에 퇴로로 남겨진 다리들을 모두 서둘러 불태우고 배수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처럼 느껴집니다. 버넘의 글 "과학과 문체"는 예상 외의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섁트먼, 에이번, 그리고 그 밖의 동지들이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현상은 대단히 실망스러울 뿐입니다. 이것은 이론적,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당의 단합을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판단하기로는 이들은 당의 단합이라는 미명 하에 조직을 분리하고자 합니다. 섁트먼은 "역사적 전례들"을 찾고 있습니다. 아니 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발명하고 있습니다. 볼셰비키당 내부에서 좌익반대파는 독자적 신문을 발행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당은 수십만의 당원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당내 토론은 이들 수십만의 당원들을 설득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토론을 당지도부 내로 한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당의 최종 결정은 두 소규모 그룹이 아니라 수십만의 당원들에게 달려있었습니다. 이 사실때문에 다수파와 소수파 신문이 공존했더라도 그 위험성이 적었습니다. 현재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비교적 적은 수의 당원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당내 토론은 언제나 풍부함을 넘어설 정도로 활발했습니다. 최소한 다음 시기까지 서로의 이견은 명확히 확인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수파가 독자적으로 신문이나 잡지를 발행하는 것은 당원 설득용이 아니라 당 바깥에서 다수파를 깍아내리는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회주의노동자당과 같은 혁명적 선전조직의 동질성과 응집력은 대중정당의 경우보다 더 탄탄해야 합니다. 같은 당에 속한 두 개의 독자 조직이 다른 이론 , 다른 강령, 다른 구호, 다른 조직 원칙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입니다. 이 상황을 숨기기 위해 완전히 거짓으로 당의 단합을 외치는 것을 제4인터내셔널은 인정해서도 안되고 인정할 수도 없다고 동지는 주장합니다. 동의합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공개적인 조직 분리가 위선적인 단합보다는 천배나 더 바람직할 것입니다.

또한 한 나라에 두 조직을 둔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소수파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상적 상황은 두 경우에만 일시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두 조직 모두 또는 한 조직의 정치적 성격이 명확하지 않아서 이 문제를 제4인터내셔널이 결정할 시간이 필요한 경우가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노동자-농민 사회당(PSOP)에 대한 입당전술과 같은 사안처럼 이견이 아주 날카롭고 제한적으로 존재했을 경우 두 조직의 존재를 인정한 경우가 두 번째입니다. 그러나 현재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상황은 이 두 경우와 완전히 다릅니다. 진지한 전통을 가진 통일된 정당이었다가 이제는 두 분파가 서로 투쟁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중 한 분파는 계급적 구성과 외부 압력 때문에 몇 달동안 우리의 이론 , 우리의 강령, 우리의 정치, 우리의 조직방식에 대해 화해할 수 없이 대립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만약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따라 함께 활동할 것을 두 분파 모두 동의할 경우 공동의 실천을 통해 반대 분파의 최상 분자들을 설득하여 획득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소수파가 독자적인 출판물을 발행하는 독자 조직이 될 경우 버넘의 노선만이 지배할 것입니다. 이럴 경우 제4인터내셔널은 이러한 조직의 불가피한 퇴보를 노동자들에게 숨기면서 이 조직에게 자신의 명함을 빌려줄 이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이것이 나의 의견입니다. 차라리 소수파가 완전히 딴 살림을 차리도록 강제한 후 공개적으로 대중에게 가장 날카로운 정도로 경고하는 것이 제4인터내셔널에게 이익이 됩니다.

따라서 당대회는 소수파에게 명확한 선택을 요구할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소수파가 당 내부에서 중대한 활동을 수행할 권리를 보장받고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기초하여 진정한 당내 단합을 도모하던가 노동계급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이며 명확한 결별을 하던가 양자택일 하도록 해야합니다. 이 결정은 오래 전에 국제집행위원회가 내렸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기구는 현재 존재하지 않습니다.  

1940년 3월 4일

레온 트로츠키

 

추신 : 소수파의 클리블런드 대회가 채택한 당의 단합 관련 결의문을 지금 받았습니다. 소수파의 일반당원들은 조직 분리를 원치 않는 것 같습니다.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정치활동이 아니라 순수한 문필활동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당원들이 조직 분리에 동참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당의 단합에 대한 결의문이라는 이름으로 당의 분리에 대한 결의문을 제출했습니다. 결의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볼셰비키당의 소수 분파들은 독자적인 정치신문을 발행했다." 언제 그랬다는 것입니까? 무슨 신문말입니까?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조직 분리의 의도를 위장하기 위해 추종당원들이 오류를 범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소수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글솜씨에만 모든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신문이 다수파의 신문보다 월등할 것이라고 서로 확신시키고 있습니다. 쁘띠부르조아 분파로서 지식인과 능력있는 문필가들을 더 많이 보유했던 러시아 멘셰비키들도 언제나 이런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희망은 모두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유창한 문필력은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충분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화강암처럼 탄탄한 이론적 기반, 과학적 강령, 정치적 사고의 일관성, 확고한 조직원칙 등이 있어야 합니다. 소수파는 이런 것들을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혀 반대되는 특징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내가 동지의 견해에 완전히 동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외부세계에 버넘의 이론 , 섁트먼의 정치노선 , 에이번의 조직방식을 제시하려거든 당과 제4인터내셔널이 책임지지 않도록 독자적인 이름을 내걸어야 합니다.    

 

동지,

이 편지를 받을 때에는 당대회가 진행 중일 것이며 조직 분리가 불가피한 것인지를 동지가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럴 경우 에이번 동지 문제는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소수파가 기존의 입장에서 후퇴할 경우에 대비하여 전에 했던 제안들을 다시 주장하겠습니다. 전국위원회의 토론과 결정사항에 대한 비밀들을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며 지금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도 아닙니다. 당원들의 약 40%는 에이번이 가장 훌륭한 조직가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 소수파가 당에 남아 있게 될 경우 에이번이 자신의 월등한 조직능력을 증명하거나 스스로 타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전국위원회 내부사항은 전국위원회 전체나 이 위원회 산하 정치위원회 또는 서기국만이 공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임 전국위원회 첫 회의는 이러한 내용을 우선 결정해야 합니다. 한편 서기국은 비밀과 관련된 조항들을 당헌에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조치에도 불구하고 비밀이 누설될 경우 공식적으로 조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에이번이 누설자라면 공개적인 경고조치를 받아야 합니다. 그가 다른 사항을 위반하면 서기국에서 축출되어야 합니다. 일시적인 결점들이 있더라도 이러한 조치들은 뉴욕 지부의 조직가인 에이번을 서기국의 통제 바깥에 두는 것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더없이 유리합니다.

동지가 현재 서기국의 구성인사들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조직 분리가 뒤따를 경우 아마 가장 훌륭한 서기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파가 당에 남아있을 경우는 다수파 동지들만이 서기국을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5명의 서기국 국원 가운데 3명은 다수파 2명은 소수파를 대표하게 될 것입니다.

소수파가 조직 분리를 망설일 경우 비공식적으로 이들이 다음 사항들을 알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섁트먼은 정치위원회 뿐만 아니라 편집진에도 배치할 의향이 있다; 심지어는 에이번을 서기국에 포함시킬 의향도 있다; 이와 같은 수준의 다른 조치를 취할 용의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소수파가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되는 것만은 인정할 수 없다.  

* * *

국제집행위원회 위원인 르브렁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이 동지는 참 기이합니다! 자본주의 체제가 숨이 넘어가고 있으며 전쟁이 발발했으며 곧 조직이 불법화될 상황에서 볼셰비키당의 집중주의가 포기되고 무제한적인 민주주의가 시행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뒤죽박죽입니다! 그러나 이런 동지들의 민주주의란 순전히 개인적 의미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겠다. 르브렁과 잔슨은 특정 원칙에 입각해서 그리고 특정 조직의 대표들로서 국제집행위원회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동지는 원칙을 버리고 자기들이 속한 조직을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이 "민주주의자들"은 집단적 규율을 전혀 도외시하는 완전한 보헤미안(Bohemian)으로 행동했습니다. 국제대회가 열릴 경우 이 동지들은 가장 가혹한 비판을 받으며 직위에서 해제될 것입니다. 이 동지들도 이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들은 민주주의라는 미명을 들먹이며 자신들이 제거될 수 없는 원로원 의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인들의 말에 의하면 전시에는 전시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것은 제4인터내셔널의 지도적 기구를 각 지부들의 실제 세력관계에 맞게 반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거될 수 없는 원로원 의원들의 허세보다도 이 경우 더 많은 민주주의가 존재합니다. 이 문제가 논의에 오를 경우 이 편지의 내용을 르브렁의 편지에 대한 나의 답장으로 인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40년 4월 4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동지,

당대회에 대한 동지와 핸슨 동지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판단해 보건데 당의 단합을 위해 동지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이런 조건 하에서도 소수파가 조직을 분리한다면 모든 노동자들은 이들이 얼마나 볼셰비즘의 원칙에서 멀어져 있으며 당내 노동계급 다수파에 대해 얼마나 적대적인 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동지들이 내린 결정의 세세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더 많은 정보가 입수 되는대로 좀더 구체적으로 판단할 것입니다.  

상징 논리학(symbolic logic), 버트런드 러쎌 등의 논리에 대해 버넘이 쓴 논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글을 걸런드가 썼습니다. 이 글에 관심을 갖기를 권합니다. 이 글은 매우 날카롭습니다. 소수파가 당내에 남아있고 버넘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편집진에 유임될 경우 이 글은 "우호적" 표현들을 사용하여 아마 다시 집필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징논리학에 대한 논지는 아주 진지하고 훌륭합니다. 특히 미국 독자들에게는 아주 유용하리라 생각됩니다. 웨버 동지 역시 자신의 마지막 논문의 중요한 부분을 이 주제에 할애했습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실리기 위해 이 부분을 그가 독립된 글로 다시 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옹호하는 이론적 캠페인을 이제 체계적으로 진지하게 계속해야 합니다.  

캐넌의 팜플렛 "노동계급 정당을 향한 투쟁"은 아주 훌륭합니다. 진정 노동자 지도자다운 글입니다. 그간의 논쟁은 이 글보다 더 수준높은 글을 생산하지 못했어도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었습니다.  

1940년 4월 16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30. Petty-Bourgeois Moralists and the Proletarian Party] 쁘띠부르조아 도덕론자들과 노동계급 정당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의 토론은 철저했으며 민주적이었다.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충만한 가운데 당대회는 준비되었다. 소수파는 당대회에 참여함으로써 이 대회의 정통성과 권위를 인정하였다. 소수파가 당대회 이후 계속해서 자신의 견해를 펼 수 있도록 다수파는 모든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소수파는 당과 독자적으로 대중에게 호소할 수 있는 자유를 요구하였다. 다수파는 당연히 말도 안되는 이 요구를 거부하였다. 한편 당이 모르게 소수파는 수상한 음모를 멋대로 꾸미더니 결국 당과 제4인터내셔널 전체의 노력으로 발간되었던 기관지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전용하였다. 더욱이 기관지 편집진 5명 가운데 2명을 다수파는 소수파에게 할당하기로 동의한 바 있었다. 그러나 지식인 "귀족"들이 노동자당의 소수파로 머물 수 있겠는가? (버넘) 교수를 노동자와 같이 취급하는 것이 결국 "관료적 보수주의" 아니던가!

나에 대한 최근의 반론에서 버넘은 사회주의가 "도덕적 이상(moral ideal)"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물론 이것은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19세기 초 도덕은 "진정한 독일사회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활동 초기부터 이 경향을 비판하였다.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혁명당은 유물론적 사회주의에 대항하여 "도덕적 이상"을 내세웠다. 도덕을 등에 업은 자들이 정치판에서는 흔한 사기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유감스럽게도 입증되었다. 1917년 이들은 부르조아와 외부 제국주의 세력의 손에 노동자들을 완전히 팔아넘겼다.

쁘띠부르조아 교수나 신문쟁이가 고고한 도덕 기준을 말하기 시작하면 돈지갑을 잘 간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오랜 정치경험이 나에게 가르쳐준 바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 현상이 일어났다. "도덕적 이상"의 미명 하에 쁘띠부르조아 지식인이 이론지라는 노동자당의 지갑을 턴 것이다. 이들 발명가, 도덕론자, 민주주의 옹호자들의 조직방식의 아주 조그만 실제 예를 여기서 엿볼 수 있다.

"먹물" 쁘띠부르조아에게 당내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자신이 원하는대로 말하고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체제가 바로 이것이다. "먹물" 쁘띠부르조아에게 "관료주의"란 무엇인가? 노동자의 다수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결정과 규율을 강제하는 체제가 바로 이것이다. 노동자 여러분, 이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쁘띠부르조아 소수파는 혁명적 맑스주의에 대항하여 노동계급 다수파로부터 조직을 분리해 나갔다. 버넘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자신의 벌레먹은 "과학"과 합치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섁트먼은 혁명적 맑스주의가 "실제 과업"의 측면에서 보면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이 두 신사의 반맑스주의 동맹에 에이번은 자신이 간수하고 있던 조그마한 둥지를 서둘러 결합시켰다. 이제 이 신사양반들은 당으로부터 훔친 잡지를 "혁명적 맑스주의" 기관지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것이 이데올로기 약장수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독자들은 이 편집자들에게 자신들의 유일한 강령적 작업 즉 버넘의 "과학과 문체"를 출판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만약 이들이 현란한 상표로 엉터리 상품을 판매하는 돌팔이를 닮을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면 스스로이 글을 출판한 의무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은 이 글에서 도대체 어떤 종류의 "혁명적 맑스주의"가 깃들어 있는지를 스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신사양반들은 감히 이 짓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버넘은 자신의 너무도 노골적인 글과 결의문들을 자기 가방 속에 감추는 일에 능하다. 섁트먼은 주변머리가 없어서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옹호하는 변호사 역을 자청해왔다.

훔친 기관지의 맨 첫 번째 "강령적" 글들은 이 새로운 반맑스주의 집단의 경망스러움과 공허함을 이제 완전히 드러내고 있다. 이 집단은 "제3진영(Third Camp)"이라는 이름을 달고 등장하고 있다. 이 새로운 이름의 정체는 무엇인가? 자본주의 진영과 노동계급 진영이 있다. 그렇다면 쁘띠부르조아들의 안식처인 "제3진영" 이 존재하는가? 논리를 보건데 제3진영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쁘띠부르조아들은 자기 "진영"을 현란한 말로 치장하고 있다. 이제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프랑스와 영국이 한 진영을 그리고 히틀러와 스탈린이 또 다른 진영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섁트먼을 동반한 버넘의 제3진영이 있다. 이들에게 제4인터내셔널은 히틀러 진영에 속해 있다.(스탈린은 이것을 이미 오래 전에 발견했었다.) 그래서 새로운 위대한 구호가 등장한다: 운명의 장난에 고통받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혼란된 평화 애호가들이여, "제3" 진영의 깃발 아래 모이시오!

그러나 정말 큰 문제가 있다. 서로 싸우고 있는 제1진영과 제2진영은 부르조아 세계를 전부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 중립 내지 반중립 국가들은 어디에 속하는가? 미국은? 이탈리아와 일본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인도는? 중국은? 중국과 인도의 혁명적 노동자들이 아니라 피억압국인 중국과 인도 말이다. 학교 아동에게나 걸맞는 3 진영 이론은 아주 사소한 것 즉 인류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식민지 세계 를 빠뜨리고 있다!

인도는 영국 편에 서서 제국주의 전쟁에 가담하고 있다. 인도의 볼셰비키주의자들이 아니라 인도에 대해서 가져야할 우리의 입장은 영국에 대한 입장과 같아야 하는가? 섁트먼과 버넘 외에 두 개의 제국주의 진영만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면 어디에 인도를 포함시켜야 하는가? 인도가 대영제국의 긴요한 일부이고 제국주의 전쟁에 가담하고 있더라도 그리고 간디를 비롯한 다른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배신적인 정책이 존재하더라도 인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영국에 대한 입장과 전혀 다르다. 이것이 맑스주의자가 해야할 말이다. 우리는 영국에 대항하여 인도를 옹호한다. 그렇다면 비록 스탈린이 히틀러와 동맹을 맺고 있을 지라도 소련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독일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왜 다를 수가 없는가? 해체할 가능성 밖에 남아있지 않은 반동적 사회형태에 비해 발전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더 진보적 사회형태를 왜 옹호할 수 없는가? 우리는 후자를 옹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옹호해야만 한다! 훔친 기관지의 이론가들은 계급적 분석을 기계적 이론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 대체품은 사이비 균형감각으로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제국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대단한 욕을 해대며 나찌에 굴복하고 있는 자신들의 행태를 위장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섁트먼과 그의 동료들은 "제3진영" 의 허풍쟁이 말로서 미국 쁘띠부르조아 여론에 대한 자신들의 투항을 위장하고 있다. 마치 제3진영이 쁘띠부르조아, 노동조합, 인도, 소련 등에 대해서 올바른 정책을 세울 의무가 없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제3진영" 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당, 클럽, 잃어버린 희망의 동맹, "인민전선 ", 이들 중 도대체 어느 것인가?

며칠 전만 해도 섁트먼은 언론에 자신을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소개했다. 만약에 이것이 트로츠키주의라면 최소한 나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다. 버넘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섁트먼의 생각과 나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 나는 적극적으로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협력관계를 맺어왔다. 그리고 이론에 대한 섁트먼의 경망스러운 태도, 허세나 부리는 쁘띠부르조아 현학자 버넘에 대한 그의 무원칙한 영합에 대해 편지들을 보내 항의했었다. 그러나 당시 버넘과 섁트먼은 모두 당과 제4인터내셔널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압력은 이들을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만들어 놓았다. 이들이 편집한 잡지에 대한 나의 태도는 다른 모든 쁘띠부르조아 맑스주의 위조품들에 대한 나의 태도와 다를 수 없다. 그들의 "조직방식"이나 정치적 "도덕"은 나에게 경멸감을 일으킬 뿐이다.

노동계급의 적들이 의식적으로 섁트먼을 조종하여 해당행위를 사주했더라도 그의 행위는 그간의 실제 행위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반맑스주의자들과 연합하여 맑스주의에 대항했다. 그는 노동자들에 대항해서 쁘띠부르조아들이 뭉쳐 함께 분파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당내 민주주의를 활용하기를 거부하였으며 다수의 노동계급 당원들을 설득하는 정직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세계대전의 상황 속에서 조직 분리를 획책했다. 이 모든 일들을 마무리짓기 위해 그는 이 조직 분리에 치사하고 더러운 스캔들의 베일을 덮어 우리의 적들이 우리를 공격할 빌미들을 제공하였다. "민주주의자들"이란 바로 이런 작자들이다! 그들의 "도덕"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

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소용없을 것이다. 이들은 파산했다. 불안정한 지식인들의 배신행위와 이들의 민주주의자 사촌들의 값싼 빈정거림에도 불구하고 제4인터내셔널은 앞으로 전진할 것이다. 그리고 당의 성격, 당 강령에 대한 충성심, 혁명적 규율 등의 의미를 이해할 능력이 있는 노동계급 혁명가들 가운데 진정으로 선발된 자들을 결집하고 교육할 것이다. 선진 노동자 여러분! 쁘띠부르조아 "제3진영" 에 대해서 단 한푼어치의 신뢰도 주지맙시다!  

1940년 4월 23일

 

[31. Balance Sheet of the Finnish Events] 핀란드 사태에 대한 대차대조표  

이들은 예상할 수 없었다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 체결된 불가침조약을 "우리가" 이미 예상했었다고 섁트먼과 버넘은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련군의 동부 폴란드 점령은? 핀란드 침략은? 아니다. "우리는" 이 사건들을 예상할 수 없었다. 개연성도 전혀 없고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이 사건들이야말로 우리 정치노선의 완전한 대변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고 섁트먼, 버넘 등은 주장한다. 히틀러와 부활절 초코렛 과자를 만들기 위해 스탈린이 그와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었다는 인상을 받고 이들은 고민에 빠졌다. 이들은 이 동맹을 "예상했다". (언제? 어디서?) 그러나 이 동맹의 이유와 목적은 예상할 수 없었다.

노동자국가는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끼인 채 어느 한 쪽에 대항하여 어느 한 쪽과 조약들을 체결할 권리를 전술로서 행사할 수 있다. 이들은 이 사실을 인정한다. 당연히 이 조약들은 노동자국가가 외부의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 경제적 전략적 고지를 점령하고 상황이 허락한다면 자체 기반을 확대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퇴보한 노동자국가는 나름의 관료적 방식으로 이러한 목적들을 달성하려고 시도하며 이러한 시도들은 언제나 세계노동계급의 이해와 모순을 일으킨다. 그러나 히틀러와 맺은 동맹으로부터 될 수 있으면 많은 것을 얻으려는 소련의 시도에 대해서 그렇게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의외의 측면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의 운수없는 정치가들인 섁트먼과 버넘이 "이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하나의 문제를 끝까지 철저하게 사고하지 않았다는 것 뿐이다. 1939년 여름 영불 합동 대표단과 질질 끈 협상 과정에서 소련은 공개적으로 발트해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이 요구를 거절하자 스탈린은 협상을 중단하였다. 히틀러와 합의를 볼 경우 스탈린이 최소한 발트해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 사건을 통해 명백해졌다. 정치적으로 성숙된 사람들은 바로 이 관점에서 문제를 접근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이렇게 물었다: 스탈린은 이 과제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그가 군사력에 의존할까? 등등. 그러나 사건들의 이후 전개과정은 스탈린보다는 히틀러에게 훨씬 더 많이 달려 있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구체적인 사건들은 예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실제 사건들의 전개방향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예상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퇴보한 노동자국가였기 때문에 소련은 제2차 제국주의 세계전쟁의 전야에 대단히 국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히틀러와 맺은 스탈린의 조약은 독일의 공격으로부터 소련을 지키고 일반적으로 소련이 전쟁에 끌려들어가지 않도록 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폴란드를 점령하는 동안 히틀러는 자신의 동쪽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반면 히틀러의 허가를 받고 스탈린은 동부 폴란드를 침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의 서부 국경을 히틀러의 공격에 대비하여 약간이나마 보충적으로 튼튼히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일련의 사건들의 결과 소련은 독일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로 인해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로부터 더욱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되었으며 히틀러에 대한 스탈린의 종속은 크게 증대되었다.

폴란드 분할 사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연장되어 진행되었다. 히틀러는 그의 "친구" 스탈린에게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점령하겠다는 계획을 넌지시 비추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탈린은 이 계획을 듣고 식은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발트해와 핀란드를 독일이 완전히 지배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로 인해 레닌그라드는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되었다. 다시 한번 스탈린은 자신의 동맹자에 대한 보충적인 안전보장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안전보장책이 바로 적군의 핀란드 침공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핀란드 지배계급의 심각한 저항에 직면했다. "군사적 유람여행"은 의외로 오래 끌었다. 한편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주요한 전쟁터로 될 위험성이 있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략준비를 마친 히틀러는 스탈린이 핀란드와 빨리 평화조약을 맺을 것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자신의 계획을 축소하고 핀란드를 소비에트화하려는 기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유럽 북서부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두드러진 특징들이다.  

 

제국주의 전쟁에 걸려든 작은 나라들

세계전쟁이 일어난 조건 속에서 작은 나라들의 운명을 "민족독립", "중립" 등의 관점에서 제기하는 것은 제국주의 세력이 발명한 신화에 속는 것이다. 문제는 세계지배에 있다. 소련의 생존문제는 사건들이 진행되면서 결말나게 마련이다. 현재는 뒷전으로 물러나 있는 소련의 생존 문제는 일정 시점에서 전면에 등장할 것이다. 약소국들은 이미 강대국들에게 놀아나는 졸(卒) 에 지나지 않는다. 약소국들은 제한적인 의미만의 자유 즉 강대국들 중에 자기 주인을 선택하는 자유만을 가지고 있다.

현재 노르웨이에서는 두 정부 즉 남부에서 독일군의 호위를 받고 있는 친나찌 정부와 북부에서 왕을 모시고 있는 구사민주의 정부 사이에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노르웨이 노동자들이 파시스트 정부에 대항하여 "민주" 진영을 지지해야 했는가? 스페인의 경우처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언뜻 보기에 긍정적인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이 노선은 가장 조야한 오류가 될 것이다. 스페인의 경우 고립된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경우 외부 제국주의 세력들의 개입은 그 중요성이 아무리 크다해도 역시 부차적인 성격 밖에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노르웨이에서는 두 제국주의 진영이 직접 충돌하고 있으며 두 노르웨이 정부는 이들 손에 든 보조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적 차원에서 우리는 연합군이나 독일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두 세력의 일시적인 도구에 불과한 노르웨이 정부들 중 어느 쪽을 지지할 이유나 정당성이 조금도 없다.

바로 이와 똑같은 노선이 핀란드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세계 노동계급의 전략적 관점에서 보면 노르웨이와 마찬가지로 핀란드 부르조아의 소련에 대한 저항은 자주적인 국가안보를 위한 행위가 아니다. 영국, 프랑스, 미국의 군사기지로 완전히 변모하기보다는 차라리 소련에 대한 모든 저항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핀란드 정부에 의해서 이 점은 가장 잘 증명되었다. 핀란드나 노르웨이의 자주적 국가안보, 민주주의 수호 등과 같은 부차적인 요인들은 그 자체로 아무리 중요해도 한없이 더욱 강력한 세계적 세력들의 싸움 속에 얽혀 있으며 이 싸움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부차적인 요인들을 무시하고 근본적인 요인들에 맞추어 우리의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전쟁에 대한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적 테제는 이미 6년 전에 이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해답을 제시하였다. 테제는 이렇게 언명하고 있다: "국가안보라는 사고는 특히 민주주의 수호라는 사고와 함께 등장할 경우에 아주 빠르게 약소국과 중립국(스위스, 특히 벨기에,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 노동자들을 속이기 위해 활용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 말하고 있다: "신이 버린 스위스 마을 출신인 로버트 그림같은 쁘띠부르조아 돌대가리들만이 세계대전이 스위스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진지하게 믿을 수 있다." 그와 똑같이 어리석은 버넘과 섁트먼 등 쁘띠부르조아들도 세계대전이 핀란드를 방어하는 수단이며 소련군의 핀란드 침공과 같은 전술적 사건에 기초하여 노동계급의 전략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루지아와 핀란드

대자본가에 대항하는 파업투쟁을 벌이면서 때때로 노동자들은 매우 버젓한 쁘띠부르조아 기업들을 파산시킨다. 이와 똑같이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군사적 투쟁을 벌이거나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군사적인 안전보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심지어 완전히 건강하고 혁명적인 노동자국가조차 이러저러한 약소국들의 독립을 유린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국내 또는 국제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계급투쟁의 가혹한 성격에 대해 민주주의적 속물들은 눈물을 흘릴 것이며 이것은 올바른 일일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급 혁명가가 눈물을 흘린다면 꼴불견일 것이다.

1921년 소비에트 공화국은 제국주의 세력의 코카서스지역 침략의 관문인 그루지아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소비에트 연방으로 편입시켰다. 민족자결권의 원칙에서 보면 이 무력침공에 반대하는 많은 말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혁명의 영역을 확대하는 관점에서 보면 농민국가에 대해 군사침략을 감행한 것은 전혀 의심스러운 행위가 아니었다. 적들에 의해 포위된 노동자국가의 자기방어를 위해 강제로 다른 국가를 소비에트화시키는 행위는 정당화되었다. 사회주의혁명 수호는 형식적 민주주의 원칙보다 앞선다.

오랫동안 세계 제국주의 세력은 그루지아 합병 문제를 소련에 대항하여 세계여론을 동원하는 구호로 이용했다. 제2인터내셔널은 이 캠페인의 선두에 섰다. 연합국은 소련에 대해 새로이 군사개입을 시도할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다.

이와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세계 부르조아계급은 소련의 핀란드 침공을 이용하여 소련에 대항하는 세계여론을 동원했다. 이 경우에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민주적 제국주의 세력의 전위로 나섰다. 전쟁에 놀라 정신없이 도망치는 쁘띠부르조아의 불행한 "제3진영" 이 이제 이들의 뒤꽁무니를 쫓고 있다.

그러나 군사개입과 관련한 이러한 주목할만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소련이 1921년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결코 아니라는 심오한 차이점도 존재한다. 전쟁에 대한 제4인터내셔널의 1934년 테제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소련 관료체제의 흉칙스러운 발달과 근로인민의 처절한 삶은 세계 노동계급에게 소련의 매력을 극히 감소시켰다." 10월 혁명의 요람인 레닌그라드에 아주 가까운 핀란드에게도 소련의 현 체제는 매력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소련-핀란드 전쟁은 이 사실을 생생하고 완벽하게 드러내었다. 그러나 이 사실로 인해 소련을 제국주의 세력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다. 소련이 관료집단의 손아귀에서 구출되어야 한다는 결론만이 가능하다.  

 

"내전이 어디서 발생했는가?"

"그러나 트로츠키 동지가 약속했던 핀란드 내전은 어느 지역에서 일어났는가?"라고 현재 "제3진영" 의 지도자이며 과거 우리 당의 소수파 지도자였던 인사들은 묻는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약속한 바가 없다. 소련-핀란드 전쟁이 비화할 경우 발생가능한 사태들의 하나를 분석했을 뿐이었다. 소련군이 핀란드의 개별 기지들을 점령하거나 핀란드 전역을 완전히 점령하는 것이나 가능성은 같았다. 개별 기지들의 점령은 부르조아 체제의 유지를 의미했다. 완전한 점령은 노동자와 빈농을 내전에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사회혁명을 의미했다. 소련과 핀란드 사이에 진행된 초기의 외교 협상들은 소련이 핀란드 문제를 다른 발트해 국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해결할 시도를 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그러나 핀란드의 저항은 군사적 조치들을 통해 목적을 달성시킬 것을 소련에게 강요했다. 스탈린은 핀란드를 소비에트화 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장 광범위한 핀란드 대중에게 전쟁을 정당화시킬 수 있었다. 정부 수반으로 소련이 쿠지넨을 임명한 행위는 핀란드가 발트해 국가들이 아닌 폴란드의 운명을 따를 것임을 암시했다. "제3진영" 의 아마추어 글쟁이들이 어떻게 펜을 휘두르든 스탈린은 내전을 부추겨서 소유관계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점을 이해했다.

핀란드 전쟁이 강대국들의 전면전으로 치닫지 않을 경우 그리고 스탈린이 외부 세력의 위협에 의해 후퇴를 강요당하지 않을 경우 그는 핀란드를 소비에트화하지 않을 수 없다고 나는 여러 번 구체적으로 밝힌 바 있다. 핀란드에 대한 스탈린의 과업은 그 자체로는 동부 폴란드를 소비에트화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그런데 군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더욱더 어려웠다. 핀란드는 폴란드보다 전쟁에 대해 대비를 더 확실히 해놓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민족적 관점에서 보면 이 과업은 더욱더 힘들었다. 핀란드는 러시아로부터 민족독립을 쟁취하려는 오랜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동부 폴란드의 우크라이나인과 백러시아인은 폴란드에 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에 대해 이들이 저항할 이유는 그만큼 더 적었다. 그러나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스탈린의 과업은 어떤 경우보다 달성하기가 더 힘들었다. 핀란드의 부르조아 계급은 나름의 방식으로 농업 쁘띠부르조아를 육성함으로써 전(前) 자본주의적 농업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핀란드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승리했을 경우 핀란드 소농과 노동자의 도움을 어느 정도 얻어서 소유관계를 전복하는 것은 완전히 가능했을 것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왜 이러한 구도를 실천에 옮길 수 없었을까? 소련에 반대하는 부르조아 여론이 엄청나게 동원되기 시작했으며 영국과 프랑스가 군사개입을 진지하게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역시 대단히 중요한 사항으로 히틀러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핀란드 영토로 진입할 경우 음모와 기습에 기초한 히틀러의 스칸디나비아 계획이 직접 위협을 받게 될 것이었다. 연합국과 히틀러 양자의 압박을 받아 샌드위치가 된 스탈린은 핀란드의 소비에트화를 포기하고 이 대신 개별 전략 기지들을 점령하는 것으로 군사행동을 한정했다.

놀라서 도망치는 "제3진영" 은 이렇게 논리를 뜯어 맞추고 있다: 트로츠키는 소련의 계급적 성격으로부터 핀란드 내전을 추론했다; 그런데 내전이 일어나지 않은 이상 소련은 노동자국가가 아니다. 사실 사회학적으로 소련을 규정하는 것을 통해 핀란드의 내전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곧바로 "추론 "할 필요는 없었다. 동부 폴란드의 경험에 근거하는 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소련군의 점령 후 일어난 동부 폴란드의 소유관계 전복은 10월 혁명을 통해 탄생한 노동자국가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구체적 상황 속에서 자기생존을 도모하고자 노력하는 소련 관료집단은 동부 폴란드의 소유관계를 전복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유사한 상황 속에서 이들이 핀란드에서도 똑같은 행동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심할 근거는 전혀 없었다. 이것이 내가 지적한 내용의 전부였다. 그러나 사태가 진전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혁명과 마찬가지로 전쟁은 급격하게 상황을 변화시킨다. 소련군의 군사적 움직임이 중지되면서 핀란드 내전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특정 조건을 바탕으로 해서만 미래에 대한 예측은 가능하다. 그리고 예측이 구체적일수록 이 조건 역시 더욱더 구체적이 된다. 예측은 약속된 날짜에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어음이 아니다. 예측은 사태 전개의 명확한 경향만을 개괄적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다른 차원의 세력과 경향들이 상황의 지배요인이 되기 시작하면서 이 예측된 경향과 함께 작동한다. 구체적인 사건들을 정확하게 예측하려는 사람들은 점장이를 찾아가야 한다. 맑스주의자의 예측은 방향을 파악하는 경우에만 도움이 된다. 나의 예측이 여러 가능한 변종들의 하나일 뿐이며 특정 조건들 속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나는 여러번 말한 바 있었다. 핀란드의 운명은 현재 일시적으로 동부 폴란드가 아니라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의 운명을 걷고 있다. 그러나 별로 대단치도 않은 이 개별적인 사실을 "제3진영" 지도자들은 마치 구원의 돌처럼 꼭 부여잡고 있다. 이런 모습은 무미건조한 현학자들의 특허품이다.  

 

소련 방어

스탈린의 핀란드 침공이 소련의 방어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소련의 정치는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권력, 명성, 돈에 관심이 있다. 소련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훨씬 더 열심히 방어한다. 따라서 소련과 세계 노동계급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신들의 이익을 방어한다. 핀란드 전쟁의 전 과정을 통해 이 사실은 너무도 명료하게 드러났다. 소련의 핀란드 침공은 보나파르트 관료집단에게는 하나의 정치적 연관고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행위에 대해 우리는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조금의 책임도 질 수 없다.

곱절이 아니라 세곱절로 악명높은 코민테른은 스탈린과 연대하여 그의 정책을 방어하며 책임지면서도 그가 어떤 범죄를 저지르든 신경쓰지 않는다. 세계 제국주의 세력이 소련을 분쇄하여 10월 혁명의 조국에 자본주의를 복귀시키고 이 나라를 식민지로 변모시키는 것을 우리는 절대 허용할 수 없다. 코민테른과 우리 정책의 성격은 전혀 다르다. 바로 이 사실이 우리가 소련을 방어하는 근거인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소련의 패배를 주창하는 자들 즉 소련의 패배를 모험주의적으로 부르짖는 자들은 연합국이 핀란드에 개입할 경우 소련 패배 입장을 소련 방어 입장으로 전환시킬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를 통해 이들은 논리적 난관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시도는 경멸스러운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전쟁 상황에서는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 즉시 정책을 돌변시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핀란드 전쟁이 결정적인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연합국 총사령부는 무르만스크 철도를 공습하는 것을 통해서만 핀란드를 진지하고 재빠르게 원조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전략의 관점에서 이것은 올바른 결론이었다. 연합국 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는 문제는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이 문제가 매달려 있는 실에는 "제3진영" 의 원칙적 입장 역시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우리는 전쟁에 참가하고 있는 기본 계급진영에 따라 우리의 입장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결론은 제3진영의 결론보다 훨씬 더 믿음직스럽다.  

 

이미 차지한 진지를 적에게 넘겨주지는 않는다

패배주의 노선은 이러저러한 범죄를 저지른 정부를 벌주는 것이 아니라 계급 역관계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이다. 전쟁에 대한 맑스주의 노선은 추상적인 도덕적 감상적 고려가 아니라 다른 체제들과 상호관계에 있는 특정 체제를 사회계급적으로 평가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는 이탈리아의 아비시니아 침공에 대해 아비시니아를 지지했다. 네구스가 무솔리니에 비해서 정치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식민지 억압에 대항해 후진국을 방어하는 것을 통해 세계 노동계급의 주요한 적인 제국주의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소련판 네구스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방어한다. 첫째, 소련의 패배는 제국주의에게 새로이 거대한 자원들을 제공하고 자본주의 체제의 숨이 곧 넘어갈 것같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오랫동안 연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기생적 관료집단이 제거될 경우 소련의 사회적 기초는 무제한적인 경제적 문화적 진보를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본주의적 기초는 더욱 쇠퇴하는 것 이외에 다른 가능성들을 보이고 있지 않다.

우리의 소련 방어 노선을 가장 시끄럽게 비판하는 자들의 정체를 가장 잘 드러내는 현상이 있다. 이들은 스탈린이 혁명적 볼셰비키당을 파괴시키고 있을 때, 스페인의 노동자혁명을 교살하고 있을 때, "인민전선 "과 "집단안보"라는 미명 하에 세계 사회주의혁명을 배반하고 있을 때 계속해서 소련을 노동자국가로 간주했다. 이 모든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들은 노동자국가인 소련을 방어할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똑같은 스탈린은 "민주적" 핀란드를 침공하였다. 그러자 공산주의자, 노동자, 농민에 대한 스탈린의 모든 범죄행위들을 은폐하고 승인한 제국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들의 부르조아 여론이 하늘높이 스탈린을 비난했다. 이런 일이 있자마자 우리의 노선을 근본적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은 즉시 "맞아, 소련의 핀란드 침공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라고 즉시 선언해버렸다. 그리고 루즈벨트를 그대로 따라서 소련에 대한 도덕적 무역금수 조치를 선언했다.

가방끈이 긴 도사 버넘은 소련을 방어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히틀러를 방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논리는 모순적인 현실을 2차원적 삼단논리의 틀 속으로 우겨넣으려는 쁘띠부르조아적 우둔함의 아주 근사한 표본에 지나지 않는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 이후 소비에트 공화국을 지지함으로써 노동자들이 호언쫄른 왕조를 지지했는가? 그런가 아닌가? 전쟁에 대한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적 테제는 이 문제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소련이 이러저러한 제국주의 국가와 맺은 조약은 소련의 혁명정당에게 어떠한 정치적 제한도 가하지 않는다고 확고하게 이 테제는 명시하고 있다. 개별적인 외교적 동맹이 그 자체로 아무리 정당해도 세계 사회주의혁명의 이해는 이것보다 더 중요하다. 소련을 방어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버넘과 그의 동료들보다 히틀러와 스탈린에 대항해서 더욱더 진지하게 투쟁한다.

버넘과 섁트먼이 독불장군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 자본주의의 악명높은 똘만이 레옹 주오(Leon Jouhaux)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소련을 방어한다"는 사실에 대해 역정을 내고 있다. 하기야 그가 역정을 내지 않으면 어느 누가 역정을 내랴! 그러나 소련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그가 대표로 있는 프랑스 노동총동맹(CGT)에 대한 태도와 동일하다: 언제나 노동자들을 속이고 배신하는 레옹 주오와 같은 악당들이 노동총동맹을 대표하고 있을 지라도 우리는 자본가계급에 대항하여 노동총동맹을 방어한다. 러시아 멘셰비키들도 이렇게 고함지른다: "제4인터내셔널은 계속해서 소련을 노동자국가라고 인정함으로써 막다른 골목에 처해있다!" 이 신사양반들은 바로 제2인터내셔널의 회원들이다. 전형적인 부르조아 시장인 후이스만스나 레옹 블렁과 같은 저명한 배신자들이 현재 제2인터내셔널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1936년 6월의 예외적으로 유리한 혁명적 상황에서 배신행위를 저질러 지금의 세계대전을 가능하게 만든 자들이다. 멘셰비키들은 제2인터내셔널 정당들을 노동자 정당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관료적 배신자들이 우두머리로 있다는 이유로 소련을 노동자국가로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이 거짓논리는 뻔뻔스럽고 냉소적이다. 스탈린, 몰로토프 등을 위시한 소련 관료집단은 블렁, 주오, 씨트린느, 토마스 등과 비교해서 더 좋거나 더 나쁘지도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하나이다: 스탈린과 그의 동료들은 사회주의 체제로 발전할 수 있는 소련의 경제적 기초를 착취하고 파괴시키는 반면에 블렁 등은 자본주의 사회의 철저하게 썩은 기초에 집착하고 있을 뿐이다.

노동자국가는 인정사정 없는 역사의 실험실로부터 등장했을 뿐이며 손가락으로 코를 후비며 반성하듯이 후각을 의심하는 "사회주의자" 교수양반의 상상물이 아니다. 노동계급이 달성한 성과들은 적대 세력들의 압력에 의해서 왜곡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 모두를 방어하는 것이 혁명가의 임무이다. 이미 차지한 진지들을 방어할 수 없으면 새로운 진지들을 결코 정복할 수 없는 법이다.  

1940년 4월 25일

 

[32. A Letter to James Cannon] 제임스 캐넌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버넘의 탈당은 과거 우리 당의 소수파 인사들에 대한 우리의 분석과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아주 훌륭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인사들의 탈당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1940년 5월 28일

레온 트로츠키

 

[33. A Letter to Albert Goldman] 앨버트 골드먼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버넘은 변증법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변증법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와 같습니다. 그가 섁트먼에게 가한 타격은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원칙에 입각한 또는 그렇지 못한 동맹에 대한 아주 중요한 교훈을 이들은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이번도 참 불쌍합니다. 4년전 그는 성부(聖父) 마스티와 복사(服事) 스펙터를 자기 파벌의 보호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세속화된 카톨릭 신자 버넘과 그의 변호사 섁트먼을 대상으로 똑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옛날에는 우리의 예상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수년 혹은 수십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제 사건이 진행하는 속도는 열병에 걸린 환자처럼 너무 빨라서 바로 다음날 우리의 예상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섁트먼도 불쌍하게 되었습니다!  

1940년 6월 5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34. On the " Workers " Party] " 노동자 " 당에 대해서  

질문 : 사회주의노동자당 다수파와 소수파는 조직을 분리할만큼 정치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보십니까?  

 

트로츠키 : 이 경우에도 문제를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변증법"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물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차이들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조직을 분리할만큼 크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쁘띠부르조아 써클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노동계급과 멀어지는 경향을 소수파가 보였다면 이 사소한 정치적 차이는 완전히 다른 가치,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소수파는 노동계급과는 이질적인 다른 사회계급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다수파는 조직 분리를 피하기 위해서 모든 조치들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소수파는 결국 조직을 분리했습니다. 이것은 소수파의 내적 사회적 감정이 우리와 함께 일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노동계급이 아니라 쁘띠부르조아 경향입니다. 드와이트 맥다널드의 글을 보면 이 점을 새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노동계급 혁명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어느 누구도 강제적으로 혁명정당에 참여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참여하면 당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인민에게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자고 촉구할 용기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임감을 우리는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론은 우리의 정치적 행동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도구는 맑스주의 이론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이것보다 더 좋은 도구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노동자는 자기 연장에 대해서 대단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연장이 가장 좋은 것이라면 아주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이 연장을 버리지도 않으며 있지도 않는 황당한 연장을 찾지도 않습니다.

버넘은 속물 지식인입니다. 그는 하나의 당에 들어갔다가 탈당하고 또 다른 당에 들어갑니다. 노동자는 이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혁명정당에 가입하여 인민들에게 사상을 전파하고 이들의 행동을 촉구할 때 이 행위는 전쟁에 나선 장군의 행동과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인민을 어디로 인도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총포가 질이 떨어짐으로 더 좋은 총포가 발명되기까지 10년은 기다려야 한다. 따라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느 장군이 이렇게 말한다면 사람들이 이 장군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버넘이 바로 이런 논리를 가지고 있는 장군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많은 실업자들의 존재, 전쟁 등은 여전히 우리의 현실로 남아있습니다. 이 현실은 연기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연기한 것은 버넘 혼자입니다.

드와이트 맥다널드는 속물은 아니지만 약간 멍청합니다.

그가 쓴 글을 여기에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회에 기여하려면 지식인은 자신이나 남을 속여서는 안된다. 가짜 동전으로 알면서 진짜 동전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수년과 수십 년에 걸쳐 배운 것을 위기의 순간에 잊어서는 안 된다."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여기 그의 글을 다시 인용합니다:

"모든 이론 , 정부, 사회체제 등에 대해 회의를 하고 대중의 혁명 투쟁에 헌신하는 등 회의와 헌신 모두를 가지고 앞으로 다가올 험난한 세월을 맞이해야한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내세울 수 있다."

소위 "노동자"당의 지도자 중의 한 명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노동자가 아니라 "지식인"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이론에 대해서 회의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론을 연구하고 수립하면서 우리는 이 위기의 시대를 준비해 왔습니다. 우리의 방법론은 맑스주의입니다. 그런데 위기가 다가오자 맥다널드는 "모든 이론을 회의하라"고 말합니다.그리고 맑스주의를 다른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하지 않은 채 혁명에 헌신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새로운 이론은 그 자신의 회의적인 이론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론없이 어떻게 행동할 수 있습니까? 대중의 투쟁은 무엇이며 혁명가는 무엇입니까? 그의 글 내용 전체는 경악스러울 따름입니다. 이러한 인사를 지도자로 허용할 수 있는 당은 진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시 그의 글을 인용합니다: "그렇다면 파시즘이라는 맹수의 성격은 무엇인가? 트로츠키는 보나파르트주의라는 낮익은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느 파벌이 한 계급을 다른 계급과 싸우도록 이간질시키면서 권력을 유지한다. 그래서 국가권력은 일시적으로 독자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전체주의 체제들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미 근본적인 경제적 사회적 구조를 변화시켜 버렸다. 과거의 형태들을 조작했을 뿐만 아니라 이것들의 내적 생명력을 파괴시켜 버렸다. 그렇다면 나찌 관료집단은 새로운 지배계급인가? 파시즘은 자본주의와 비견되는 새로운 사회형태인가? 이것도 역시 진실이 아닌 것 같다."

여기서 그는 새로운 이론을 발명하고 파시즘을 새로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모든 이론에 대해서 회의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업에 사용하고 있는 연장은 중요하지 않지만 일에 대해서는 헌신해야 한다고 노동자들에게 말합니다! 이런 말에 대해서 노동자들은 아주 거치른 말로 반응할 것입니다.

그의 글은 실망한 지식인을 아주 특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전쟁과 앞으로 다가올 끔찍한 시대가 패배와 희생을 가져올 것으로 생각하고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회의주의를 전파하기 시작하면서도 회의와 혁명적 헌신이 통일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혁명이 합리적이며 가능한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혁명에 헌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효과적인 이론이 없이는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론적 회의주의를 전파하는 자는 반역자입니다.

우리는 파시즘의 여러 요소들을 분석했습니다:

1. 국가권력에 가장 커다란 독자성을 부여하기 위해 계급들의 적대관계를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파시즘은 옛날 보나파르트주의와 공통된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후자는 부르조아 사회의 상승기에 존재한 반면 전자는 부르조아 사회의 쇠퇴기에 등장하는 국가권력이라는 점을 우리는 언제나 강조해왔다.

2. 사적 소유를 제거하지 않은 채 새로운 기술과 사적 소유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부르조아 계급의 시도가 파시즘이다. 파시즘의 "계획경제"는 사적 소유를 제한하는 동시에 구출하려는 시도이다.

3. 일국 내에 존재하는 새로운 현대 기술의 생산력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뛰어 넘으려는 시도가 파시즘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기술은 일국 내로 제한될 수가 없다. 결과는 전쟁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요소들을 우리는 이미 분석했다.

버넘과 마찬가지로 드와이트 맥다널드도 당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그가 약간 더 게으르므로 버넘보다 나중에 탈당할 것입니다.

한때 버넘은 "좋은 재목"이라고 간주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의 노동계급 정당은 당에 기여할 모든 지식인들을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 운동을 위해 디에고 리베라를 구하려고 나는 여러 달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사실 모든 인터내셔널들이 이런 종류의 경험을 거쳤습니다. 제1인터내셔널은 아주 변덕스러웠던 시인 프라일리그라트(Freiligrath)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제2 제3인터내셔널은 막심 고리끼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제4인터내셔널은 리베라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모든 경우에 이들은 우리와 결별했습니다.

물론 버넘은 우리 운동에 좀더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캐넌 동지는 그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글솜씨가 있으며 깊지는 않지만 재빠른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면서 이것에 대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 이것을 잊어버립니다. 저술가는 잊어버릴 수 있지만 노동자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인사들을 활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무쏠리니 역시 한때는 "좋은 재목"이었습니다!  

1940년 8월 7일

코요아칸

[35. A Letter to Albert Goldman] 앨버트 골드먼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드와이트 맥다널드가 편집하는 잡지 [당파 평론 ] 8월호에 실린 그의 글을 읽어 보았는지요.

이 사람은 속물 지식인 버넘의 제자였습니다. 버넘이 탈당한 후 그는 "과학"을 대표하는 유일한 사람으로 섁트먼의 당에 남았습니다.

파시즘과 관련하여 그는 우리의 노선을 서투르게 해적질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분석을 자기가 새로이 발견한 것처럼 위장하고 일부 뻔한 말들을 우리 것인 양 위장시켜놓고는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의 글 전체는 전망과 균형을 결여하고 있으며 기본적인 지적 정직성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버넘의 고아인 그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냉철하며 회의적인 눈으로 맑스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들을 다시 검토해야한다." 266쪽에 이 글이 나옵니다. 불쌍한 "노동자당"은 이 "검토 "기간 동안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물론 드와이트 맥다널드의 연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연구 결과는 버넘과 같이 탈당하는 것일 겁니다.

그 글의 마지막 4줄은 탈당을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이론 , 정부, 사회체제 등에 대해 회의를 하고 대중의 혁명 투쟁에 헌신하는 등 회의와 헌신 모두를 가지고 앞으로 다가올 험난한 세월을 맞이해야 한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우리 자신을 지식인으로 내세울 수 있다."

이론적 회의에 기초한 혁명활동은 내적 모순의 가장 후진적인 형태입니다. 혁명투쟁의 법칙들을 이론적으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대중의 혁명투쟁에 헌신 "할 수 없습니다. 혁명적 헌신은 이 헌신이 합리적이며 합당하다는 확신 즉 이 헌신이 혁명 목표에 조응한다는 확신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확신은 계급투쟁에 대한 이론적 통찰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모든 이론에 대한 회의"는 운동을 개인적으로 포기하기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섁트먼은 이런 와중에도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총서기"로서 그는 너무 바빠서 쁘띠부르조아 속물들로부터 "맑스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들"을 방어할 수가 없습니다.  

1940년 8월 9일

레온 트로츠키

[36. A Letter to Chris Andrews] 크리스 앤드루즈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크리스 동지,

당이 채택한 반(反) 평화주의 입장을 평가한 동지의 글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입장에는 두 가지 커다란 장점들이 있습니다. 첫째, 핵심내용이 혁명적이며 우리 시대의 성격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모든 문제들은 비평의 무기뿐만 아니라 총칼의 비평에 의해서 결정될 것입니다. 둘째, 동지의 글은 종파주의를 완전히 제거했습니다. 사건들과 대중들의 정서에 대비시켜 우리 노선의 신성함을 추상적으로 확인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불쌍한 "노동 행동"지 8월 12일자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강제 징집에 대한 루이스의 투쟁에 우리는 100%의 지지를 보낸다." 우리는 단 1%도 루이스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조국을 완전히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방어하고자 애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문지원병 제도는 군사적 관점에서 낡아빠졌을 뿐만 아니라 계급적 관점에서 보아도 대단히 위험합니다. 노동자 절대 다수는 이렇게 이해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강제징집을 찬성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찬성은 "노동계급의 무장화"를 매우 혼란스럽고 모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종파주의자들은 이 거대한 역사적 변화를 전적으로 거부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강제징집이라고 ? 좋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이 제도를 시행할 것이다."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이것은 출발점으로서 아주 훌륭합니다.  

1940년 8월 17일

레온 트로츠키

 

In Defence of Marxism [written by Leon Trot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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