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트로츠키주의자2017.04.21 10:06

저자 서문

1. 이 저작의 목적

소련의 경제적 성공에 대해 자본주의 세계는 일단 모른 척 했다. 이런 행동을 보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사회주의 체제가 인간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증거가 실험적으로나마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의 편에 붙은 박식한 경제학자들도 러시아 공업의 유례없는 빠른 발전속도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이 현상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려한다. 또는 소련의 공업발전이 "농민에 대한 극도의 착취" 때문이라고 말하고 이것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제한하려고 한다. 그러나 중국, 일본, 인도가 일상적으로 농민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는데도 소련의 공업발전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이유는 설명하지 못한다. 자기 견해를 밝힐 좋은 기회가 주어져도 이들의 계급적 한계는 어쩔수없다.     

그러나 온갖 비방과 은폐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사실은 언젠가 승리하게 마련이다. 모든 문명국들의 서점에는 소련에 관한 책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이 현상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소련의 눈부신 경제발전과 같은 놀라운 현상은 그리 자주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련에 대한 반동적인 증오심에 눈먼 저작들은 급속히 그 수가 감소하고 있다. 소련에 관한 최근의 저서들 가운데 상당수는 열광적이지는 않더라도 호의적인 어조를 보여주고 있다. 갑자기 성공한 소련이 국제적으로 명성을 회복하고 있다는 징표의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소련에 대한 이 우호적인 저서들을 우리는 환영할 뿐이다. 더욱이 파시스트 이탈리아보다 소련을 이상적인 나라로 바라보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일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 저서들을 통해 10월 혁명의 나라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에 대한 과학적 평가를 원한다. 그러나 이들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소련의 친구들"이 지은 저서들은 크게 세 부류로 분류될 수 있다. 우선 이들 논문과 저서의 대부분은 어느 정도 "좌익" 성향을 보이는 아마추어 저널리즘이나 르뽀 성격의 글들이다. 이 부류와 함께 권위를 인정받고자 더 허세를 부리는 저서의 부류가 바로 인도주의적, 서정적, 반전(反戰)주의 "공산주의" 저서들이다. 소련 경제에 대한 도식적인 내용의 저서들이 세 번째 부류에 속한다. 이것들은 과거 독일의 강단사회주의 풍을 이어받고 있다. 루이스 피셔(Louis Fisher)와 두란티(Duranty)는 첫 번째 부류의 저서를 지은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미 고인이 된 바르뷔스(Barbusse)와 로맹 롤랑(Romain Rolland)은 "인도주의적" 친구들에 속한다. 스딸린의 진영으로 넘어가기 전에 전자가 예수의 전기를 후지가 간디의 전기를 저술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지칠 줄 모르는 페이비언(Fabian) 사회주의자 베어트리스 및 시드니 웹(Beatrice and Sidney Webb) 부부는 보수적 현학적 사회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권위자들이다.

위에 열거한 서 부류의 저서들은 서로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이미 입증된 기정사실에 대해 머리를 조아리고 사람을 마취시키는 일반화를 유독 선호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자기 나라의 자본주의에 반기를 드는 것은 이들에게 너무 무리이다. 따라서 이들은 퇴조기에 접어든 외국의 혁명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는 데에는 아주 적극적이다. 10월 혁명 이전과 이후 몇 년 동안 사회주의가 어떻게 현실로 나타날 것인지를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문제삼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이 소련의 지금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시대의 발전에 발맞추어 나가는 진보적 인물이 될 수 있고 어느 정도 도덕적 평온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혁명에 대해 조금도 기여할 필요가 없다. 이 부류의 관조적이며 낙관적인 저서들은 자본주의에 결코 파괴적이지 않다. 모든 불쾌한 과거의 일을 멀리 밀쳐내어 독자들의 심기를 아주 편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즉시 독서시장에서 호평을 받는다. 교양있는 부르주아들을 위한 볼셰비키주의 또는 좀더 집약적으로 말해 급진파 여행객용 사회주의라고 명명될 수 있는 국제 학파가 이렇게 조용히 형성된다.      

여기서 이 학파의 생산물을 가지고 논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학파에게는 논쟁의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 학파의 인물들은 문제를 제기하는 듯 하다가 이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는 그런 부류이다. 필자의 본 저서는 미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현재를 파악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미래를 투시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과거를 언급할 것이다. 이 저서는 비판적이다. 단지 기정 사실을 숭배하는 자들은 미래를 준비할 능력이 없다.

소련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과정은 이미 여러 단계들을 거쳤다. 그러나 체제 내적 균형을 이룰 단계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인간의 연대의식과 모든 욕구의 조화로운 충족에 기초한 무계급 사회 건설,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의 근본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소련에는 사회주의가 털끝만치도 없다. 물론 소련 사회의 모순들은 자본주의의 모순들과 현격히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모순들은 대단히 날카롭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물질적 문화적 불평등, 정부의 탄압, 정치조직들의 존재, 분파 투쟁 등을 통해 이것들이 드러나고 있다. 경찰의 탄압은 정치투쟁을 은폐하고 왜곡시킬 뿐 결코 제거하지는 못한다. 금지된 사상들은 정부의 모든 조치에 영향을 미치면서 그것의 시행을 촉진하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한다. 이 상황에서 탄압을 받으며 전국에서 맹렬하게 전개되고 있는 정치투쟁의 사상과 구호들을 무시한 채 소련을 분석할 수는 없다. 여기서 역사는 살아 움직이는 정치와 직접 만난다.

편안히 앉아서 입만 놀리는 "좌익" 속물들은 이렇게 충고하는 것을 좋아한다: 소련에서 진행 중인 사회주의 건설에 해롭지 않을 정도로만 체제 비판을 해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소련이 그렇게 나약한 체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련의 적들은 소련의 진정한 친구인 세계 노동자들보다 소련의 상황을 더 잘 파악하고 있다. 제국주의 정부의 총참모부는 소련의 장점과 단점을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계산은 이미 공개된 보도들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소련의 적들은 소련 노동자국가의 약점들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들이 노동자국가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소련의 발전 경향에 대한 비판은 결코 이용할 수 없다. 소련 정부가 공식적으로 소련의 "친구들"이라고 인정하는 인사들의 대다수는 소련에 대한 비판에 적대적이다. 그런데 이 적대감은 소련 체제의 허약성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지 않는다. 소련에 대한 자신들의 공감이 허약하다는 사실을 숨기는 허세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부류의 두려움과 경고를 모두 차분한 마음으로 무시할 것이다. 사태를 결정짓는 것은 환상이 아니라 진실이다. 우리는 가면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고자한다.

1936년 8월 4일

후기

"테러분자들"의 음모에 대한 재판이 모스크바에서 열린다는 소련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기 전에 이 저서는 완성되어 출판사에 보내졌다. 따라서 당연히 재판 과정을 평가할 시간이 없다. 이 저서 한쪽 한쪽은 "테러분자" 재판의 역사적 논리를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베일이 둘러진 재판의 비밀이 소련 당국의 의도적 술책이라는 사실 역시 폭로하고 있다. 이것이 이 저서의 의미를 더욱 값지게 하고 있지 않은가!

                   1936년 9월

 

제1장 그 동안 무엇이 성취되었는가

1. 공업 성장의 주요 지수들

러시아에서 자본가계급은 미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이 결과 전제군주제와 농민의 반봉건적 노예상태를 청산하는 과업 등 민주적 과제들은 노동계급 독재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농민 대중의 선두에 서서 정치권력을 장악한 노동계급은 이 민주적 과제들을 성취하는 것에서 머무를 수 없었다. 부르주아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의 초기 단계와 직접 연관되어 있었다. 이 사실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최근 몇십 년간의 역사는 자본주의가 쇠퇴 단계에 들어선 상황에서 후진국들이 자본주의 종주국들이 달성했던 생산력 수준으로 올라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선진 자본주의 문명국들은 문명화의 길을 걷고 있는 후진국들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러시아 경제는 사회주의 혁명을 가능케 할 정도로 여타 국가들보다 먼저 성숙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적 토대에서는 더 이상 발전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이 나라를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필요조건이었다. 이것이 후진국에서의 결합발전의 법칙(law of combined development)이다. 과거 짜르의 제국이었던 이 나라는 레닌이 말한바 "자본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였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혁명이 성공한 후 1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나라는 유럽과 미국을 "따라잡고 추월하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물론 따라잡아야 추월할 수 있으므로 따라잡는 일이 일차적 과제이다. 다시 말하면 러시아는 자본주의 선진국들이 오래 전에 해결한 기술과 생산력의 문제들을 우선 해결해야 한다.

이와 다른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가? 구 지배계급의 타도는 야만 상태에서 문명상태로 진입해야 하는 이 나라의 과제를 해결할 것이 아니고 철저히 드러냈을 뿐이다. 이와 동시에 생산수단이 국가의 손에 집중되어 혁명은 새롭고 비교할 수 없이 효과적인 공업성장의 방법들을 가능케 하였다. 아주 짧은 기간에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에 의해 파괴된 생산력을 회복하고 거대 기업들을 새로이 창출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생산방식들을 도입하고 새로운 산업분야들을 정착시킬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계획경제 덕분이었다.

볼셰비키 당 지도부는 소련에 대한 국제혁명의 즉각적인 지원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 국제혁명이 대단히 늦어지면서 소련은 엄청난 곤란들을 겪게되었다. 그러나 이 상황은 동시에 소련의 내적 저력과 자원의 정도를 드러냈다. 그 동안의 성과가 위대했건 불충분했건 제대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국제적 잣대가 필요하다. 이 저서는 소련의 공업발전 과정에 대한 통계를 수집할 뿐 아니라 역사적 사회학적 해석을 가할 것이다. 그러나 논의의 진전을 위해서 중요한 수학적 데이터를 어느 정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세계 거의 모든 곳에 드러나고 있는 침체와 쇠퇴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소련의 공업은 대단한 규모로 발전하고 있다. 아래에 제시하는 거시적 지표들은 이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이다. 현재 독일의 공업생산량은 열병에 걸린 듯이 급격히 진행된 전쟁 준비 때문에 1927년 수준으로 하락하고 있다. 영국은 보호주의 장벽을 치고 있는데 지난 6년 동안 기껏해야 3퍼센트 내지 4퍼센트 정도 생산량을 늘렸을 뿐이다. 미국의 공업생산량도 약 25퍼센트 정도 하락했고 프랑스의 경우는 30퍼센트 이상 저하했다. 자본주의 국가들 중 가장 높은 생산량 증가를 기록한 나라는 일본으로 현재 미친 듯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으며 이웃 나라들을 약탈하고 있다. 이 나라의 생산량은 거의 40퍼센트나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 예외적인 지수조차도 소련의 극적인 공업성장에 비하면 초라해 보인다. 이 나라의 생산량은 같은 기간에 3.5배 즉 250퍼센트나 증가하였다. 중공업은 1925년부터 1935년까지 10배 이상 증가하였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첫 1년 동안 자본투자량은 54억 루블이었고 1936년에는 320억 루블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루블화는 너무 불안정해 측정 단위로는 부적절하다. 따라서 화폐에 의한 추산은 그만두기로 하자. 그렇다 하더라도 반박의 여지가 전혀 없는 다른 기준들이 존재한다. 1913년 돈(Don) 지역의 석탄생산량은 277만 5천 톤이었는데 1935년에는 712만 5천 톤에 이르렀다. 지난 3년 동안 철강 생산은 2배로 증가하였고 강철과 압연은 거의 2.5배가 증가하였다. 석유, 석탄, 철강의 생산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비교하여 3배에서 3.5배 증가했다. 전기 공급에 대한 계획이 처음 입안된 1920년 당시 러시아 전역에는 10개의 지역발전소가 있었으며 총생산량은 27만 3천 킬로와트였다. 그런데 1935년에는 95개로 발전소의 수가 증가하였고 전기의 총생산량은 435만 5천 킬로와트에 달했다. 1925년 소련은 전기 생산량에서 세계 11위였다. 그러나 1935년에는 독일과 미국 다음으로 최대생산국이 되었다. 석탄생산의 경우에는 10위에서 4위로, 강철생산에 있어서는 6위에서 3위로 도약했다. 그리고 트랙터와 설탕 생산에서는 세계 제1위가 되었다. 공업에서의 엄청난 성취, 처음부터 아주 밝은 전망을 보여준 농업, 구 공업도시들의 비범한 성장과 새로운 도시들의 건설, 노동자 수의 급격한 증가, 문화적 수준의 향상과 문화적 수요의 증대 등은 모두 의심할 여지없이 10월 혁명의 결과였다. 구시대의 예언자들이 인류 문명의 종말을 알리는 징조라고 애써 주장했던 혁명이 이 성과를 올린 것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는 논쟁할 필요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승리했음을 증명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가 아니라 지구 표면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공업지역에서 이것이 증명된 것이다. 그리고 유물론의 언어가 아니라 강철, 시멘트, 전기라는 언어로 승리를 표현하였다. 비록 체제 내부의 어려움,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공세, 지도부의 실책 등으로  소련이 붕괴한다고 할지라도 (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우리는 진심으로 희망한다) 미래에 대한 전조(前兆)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만은 파괴되지 않고 남을 것이다: 오직 노동계급 혁명 덕분에 어느 후진국이 10년 내에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업적을 달성했다.

이 사실은 또한 노동운동 내 개량주의자들과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개량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을 위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이룬 하찮은 성과와 혁명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겠다고 떨쳐 일어난 인민에 의해서 이루어진 거대한 과업을 비교할 가치가 있겠는가? 단 한순간도 그럴 필요가 없다. 1918년 독일에서 떨쳐 일어선 노동자들은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엄청난 힘을 위임하였다. 만약 이들이 자본주의의 구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 이 힘을 사용하였다면 현재 중부 및 동부 유럽 그리고 아시아의 상당한 부분으로 이루어진 사회주의 체제는 정복당할 수 없는 경제력을 보유했을 것이다. 이 점은 러시아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전 세계 인민들은 새로운 전쟁과 혁명을 통해 개량주의자들이 저지른 역사적 범죄의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것이다.

 

2. 소련이 이룩한 업적에 대한 비교 평가

소련 공업의 역동적 통계수치들은 역사상 유례가 없다. 그러나 아직도 발전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소련은 지극히 낮은 수준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고 있다. 반면에 자본주의 나라들은 아주 높은 수준에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다. 지금 이 두 체제 사이의 역관계는 경제성장률로 결정되지 않는다. 물질적 축적, 기술,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노동의 생산성 등에 의해서 표현된 두 진영의 총체적인 힘을 비교하는 것을 통해 결정된다. 지금 열거한 요인들의 통계를 통해 사태를 바라보면 상황은 즉시 바뀐다. 이제는 소련이 지극히 불리한 입장에 놓인다.

레닌이 제기한 문제 즉 어느 진영이 승리할 것인가의 문제는 한편으로는 소련과 전 세계 혁명적 노동자계급과 또 한편으로는 국제 자본과 소련 내의 반혁명세력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경제 성공에 의해 소련은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에 대비하여 성곽을 구축하고, 공세를 취하고, 스스로를 무장하고, 필요할 경우 후퇴해서 기다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느 진영이 승리할 것인가의 문제는 그 본질에 있어서 군사적 문제일 뿐 아니라 더 커다란 의미에서 경제적 문제이다. 지금 이 순간 소련은 이 문제를 전 세계적 차원에서 해결할 것을 강요받고 있다.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군사적 개입은 위험요소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가 생산하고 있는 값싼 상품들이 소련영토로 유입되면 그 위험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물론 서구의 한 나라에서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할 경우 상호 역관계는 급격히 그리고 근본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에 의한 소련의 고립이 지속되거나 유럽의 노동계급이 투쟁에서 패배하고 계속 후퇴하는 더 나쁜 상황이 전개될 경우 소련 체제의 생존가능성은 최종적으로 노동생산성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시장경제 하에서는 생산비용과 가격으로 표현된다. 동일 상품의 소련 국내 가격과 국제시장의 가격 차이는 이 상호 역관계를 측정하는 주요한 수단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소련 당국은 통계학자들이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조차 금지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기침체와 생산력의 정체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기술, 조직, 노동 숙련도에서 소련을 여전히 훨씬 앞서고 있기 때문이라.

소련 농업의 고질적 후진성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공업의 발전과 조금이라도 비교할 수 있는 상황은 농업의 어느 분야에도 없다. 예를 들어 몰로토프(Molotov)는 1935년 말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사탕무우 생산에서 소련은 자본주의 나라들보다 아직 한참 뒤져 있다. 1934년 우리는 1헥타르당 8,200파운드의 사탕무우를 생산했다. 1935년에는 우크라이나의 대풍작으로 1헥타르당 13,100파운드를 생산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은 25,000파운드 그리고 프랑스는 30,000파운드가 넘게 생산했다. " 몰로토프의 이 불평은 농업의 모든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곡물생산과 섬유생산 분야 뿐 아니라 특히 목축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적절한 윤작, 종자의 선택, 비료 투입, 트랙터, 콤바인, 우량종 축산농장 등을 통해 농업의 전 분야는 사회주의 농업의 도입으로 거대한 혁명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혁명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곳은 바로 이 매우 보수적인 농업 분야이다. 집단화가 이루어졌으나 아직도 소련 농업의 과제는 서방 자본주의 농업을 따라잡는 것이다. 서방의 농업은 소농 경영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높은 생산성을 보유한 농업체제이다.

공업에서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투쟁은 선진 기술 채용과 노동력 효율의 제고 등 두 방면으로 진행된다. 단지 몇 년만에 소련이 가장 현대적인 거대 공장들을 건설한 요인은 한편으로는 서방 자본주의의 높은 기술수준의 채용과 또 한편으로는 국내의 계획경제 체제이다. 공업 분야에서 외국의 성과들이 수입되어 흡수되고 있다. 적군의 무장 뿐 아니라 소련의 공업 발전도 객관적 상황에 의해 강요되어 발전 속도가 가속화되었다. 이 상황은 엄청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공업이 영국과 프랑스처럼 구식으로 지지부진할 필요가 없어졌다. 군대는 구식 장비의 운명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급속한 성장은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공업의 각기 다른 요소들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특히 노동력 수준은 선진적인 기술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계획경제의 지도부는 이 과업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다. 이 결과 제품의 생산비용은 대단히 높으며 제품의 품질은 떨어진다.

석유산업의 총책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련의 유전은 미국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천공(穿孔)에 필요한 생산조직은 뒤떨어져 있다. 노동자들의 숙련도가 충분치 못하다. " 그는 천공장비가 자주 고장을 일으키는 현상을 "부주의, 숙련도의 부족, 기술감독의 부족"으로 설명한다. 몰로토프는 또다시 불평한다:" 건설산업의 생산조직은 대단히 낙후되어 있다‥‥ 도구와 장비들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대개 구닥다리 방식으로 일이 진행된다." 이 고백은 소련의 언론에 널리 소개되고 있다. 소련에 도입된 자본주의 선진기술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생산성을 전혀 발현하지 못하고 있다.

중공업의 전반적 성공은 대단한 성과이다. 이 성공을 토대로 해서만 산업이 현대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공업의 성공은 기술적 일반적 문화수준을 요구하는 정밀기계의 생산에서 입증된다. 이 분야에서 소련은 아직 대단히 뒤떨어져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질적 양적으로 가장 중요한 성과는 군수산업에서 달성되었다. 육군과 해군은 가장 영향력이 막강한 고객일 뿐 아니라 가장 만족시키기 힘든 고객이다. 그러나 일련의 공개 연설에서 전쟁성(War Department)의 책임자 중의 하나인 보로실로프(Voroshilov)는 끊임없이 불평하고 있다: "적군(赤軍)의 군수품 품질에 대해 항상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조심스러운 발언 뒤에 숨어 있는 불안은 쉽게 감지된다.

공식 보고서에서 중공업의 총책임자는 이렇게 말한다: "생산된 기계는 품질이 좋아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기계의 가격은 너무 비싸다. " 항상 그렇듯이 그는 기계 생산의 세계적 수준과 소련의 수준을 정확히 비교할 수 있는 데이터를 제시하지 않는다.

트랙터는 소련 공업의 자랑이다. 그러나 트랙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지수는 상당히 낮다. 지난 산업회계년도에 무려 81퍼센트의 트랙터가 중대한 수리를 거쳐야 했다. 더욱이 이들의 상당수가 밭을 가는 절정기에 다시 고장이 났다. 어느 계산에 의하면 1헥타르당 곡물이 2,000파운드 또는 2,300파운드 생산되어야 기계 및 트랙터 정비소의 비용이 마련된다. 그러나 현재 평균 수확량은 이 수치의 반에도 못 미치고 있다. 결국 국가는 적자를 메우기 위해 수십억 루블을 지원해야 한다.

자동차 운송 분야의 상황은 더 나쁘다. 미국의 경우 트럭은 1년에 6만 킬로미터에서 8만 킬로미터 그리고 심지어는 10만 킬로미터를 주행한다. 소련의 경우는 이 수치가 7만 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즉 미국의 3분의 1 또는 4분의 1에 불과하다. 매 100대의 기계 중에서 55대만 작동중이다. 나머지는 수리중이거나 수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기계 수리비용은 생산비용의 두 배나 된다. 국가회계국이 다음과 같이 보고하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자동차 운송은 생산비용에 무거운 부담만 지운다. "

국가 인민위원회(Council of People's Commissars) 의장에 따르면 철도운송량의 증가는 "수도 없이 많은 고장"을 가지고 온다. 이 문제들의 근본 원인은 동일하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낮은 노동숙련도 때문이다. 선로변환기를 잘 유지하기 위한 투쟁은 그 나름대로 영웅적인 행위이다. 선로변환기를 담당하고 있는 일급 여성노동자들은 크레믈린궁의 최고 권력층에 보고를 한다. 최근 몇 년간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수로에 의한 운송은 철도운송에 많이 뒤져 있다. 정기적으로 신문들은 "해상운송의 끔찍한 운영", "선박수리의 지극히 낮은 수준" 등에 대한 통신문을 싣고 있다.

경공업은 중공업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 소련 공업의 특이한 법칙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소비자 대중에 가까이 있는 제품일수록 품질이 더욱 나쁘다. 『프라우다』지에 의하면 섬유공업의 "불량품 비율은 부끄러울 정도이다.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의 수는 빈약하다. 낮은 질의 제품이 압도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소비하는 제품의 나쁜 품질에 대한 불평은 언론에 주기적으로 등장한다: "엉성한 철제품", "조립이 잘못되었고 마무리 손질이 부주의한 흉칙한 가구", "제대로 된 단추가 없다", "식품공급체계가 절대적으로 불만족스럽다" 등등 끝이 없다.

공업 발전을 품질에 대한 고려 없이 양적 지수로만 규정짓는다면 그것은 사람의 신체를 가슴둘레는 무시하고 신장으로만 표현하는 것과 거의 같다. 더욱이 소련공업의 특성을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질적인 고려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분야는 급속히 발전하는 반면 다른 분야는 후진성이 여전하다. 이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거대한 자동차공장의 건설은 간선도로의 부족과 엉성한 관리의 대가를 치른다. "도로의 노후화는 끔찍하다. 가장 중요한 간선도로인 모스크바-야로슬라프 간선도로에서 자동차는 시속 10킬로미터밖에 달리지 못한다. "[『이즈베스챠』지] 소련은 여전히 "도로 없이 살았던 원시인들의 관습"을 물려받고 있다고 국가계획위원회(State Planning Commission) 의장이 주장한다.

도시경제도 상황은 거의 비슷하다. 새로운 공업도시들이 짧은 기간에 건설되었다. 동시에 오래된 도시들은 수십 개나 쇠퇴하고 있다. 수도와 공업의 중심도시들은 성장하고 있으며 스스로를 치장하고 있다. 비싼 극장과 클럽들이 전국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거주지구의 부족은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주택들은 대체로 전혀 손길이 가지 않는다. "건물을 엉터리로 건축하면서 비용은 많이 든다. 우리 주택들은 소모될 뿐 개축되지 않고 있다. 수리는 거의 하지 않으며 하더라도 엉터리로 한다. "(『이즈베스챠』지) 소련 경제 전체는 엄청나게 불균형을 드러내고 있다. 어떤 한계 내에서는 이 현상이 불가피하다. 가장 중요한 분야에서부터 발전될 필요가 있고 과거에도 이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 분야의 후진성은 다른 분야의 효과적인 운영을 크게 해친다. 각 분야의 최대 발전이 아니라 경제 전체의 최대 효율을 보장할 이상적 계획경제의 관점에 의하면 제1차 공업발전의 통계지수는 낮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통계지수가 낮아도 경제 전체 그리고 특히 소비자 대중은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전체 산업의 역동성이 제고될 수 있을 것이다.

공식 통계에는 자동차의 생산과 수리가 총산업 생산량에 더해진다. 그러나 경제효율의 관점에서 보면 이 수치는 더할 것이 아니라 빼야한다. 이것은 대부분 산업 부문에도 해당된다. 이 때문에 총산업 생산량을 루블화로 추산하는 것은 상대적 의미 밖에 없다. 루블화의 가치가 무엇인지가 일단 확실치 않다. 이 화폐수치 뒤에 무엇이 진짜 도사리고 있는지가 언제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기계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아니면 이 기계의 너무 이른 고장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안정된" 루블화의 추산에 따라 주요산업의 총생산량이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과 비교하여 6배가 증가했다면 톤 단위로 측정된 석유, 석탄, 철강의 실제 생산량은 3배 또는 3배반 증가한 셈이다. 이렇게 생산량 지수가 큰 차이를 나타내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소련 산업이 짜르 시대에는 없었던 새로운 공업 분야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차적인 이유는 통계를 조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관료기구 단위는 사실들을 과장할 조직적 이유를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3. 인구 일인당 생산량

현재 소련의 일인당 평균 노동생산성은 여전히 매우 낮다. 가장 우수한 제련소의 공장 책임자에 의하면 노동자 일인당 강철과 선철 생산량은 미국 제련소의 평균 생산량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양국의 평균수치는 아마 1 대 5 또는 더 벌어질 것이다. 이 상황에서 소련이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용광로를 "더 잘" 사용한다는 당국의 발표는 의미가 없다. 기술의 기능이란 인간 노동을 절약하는 것 이외의 다른 의미가 없다. 목재와 건설 산업은 금속 산업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 미국 채석장에서 노동자 일인당 채취량은 1년에 5,000톤이며 소련은 500톤이다. 정확히 10 대 1의 비율이다.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숙련 노동자의 부족과 노동의 낮은 조직 정도에 있다. 관료집단은 노동자에게 모든 힘을 다해 일하라고 독려하지만 자신들에게 할당된 노동력은 올바로 활용하지 못한다. 물론 농업은 공업보다 상황이 더욱 나쁘다. 노동생산성이 낮으면 국민소득이 낮고 결국 인민 대중의 생활수준이 낮아진다.

총공업생산량의 경우 1936년이 되면 소련이 유럽에서 선두를 기록할 것이라는 주장은 소련의 경제성장이 그 자체로도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제품의 질과 생산비용은 계산에서 제외되어 입고 인구의 규모도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나라의 일반적 발전수준과 대중의 생활수준은 최소한 추산으로 하더라도 소비자의 수에 제품의 총량을 나누어야 한다. 그러면 여기서 간단한 산수 계산을 해보자.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목적에 있어서 철도운송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소련의 철도 총연장은 83,000 킬로미터인데 독일의 58,000킬로미터, 프랑스의 63,000킬로미터, 미국의 417,000킬로미터와 비교된다. 이 수치에 의하면 독일은 인구 1만 명당 8.9킬로미터의 철도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프랑스는 15.2킬로미터, 미국은 킷.1킬로미터, 소련은 5.0킬로미터이다. 따라서 철도의 지수에 따르더라도 소련은 문명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에 있다. 지난 5년간 규모가 3배로 늘어난 상선 보유수는 덴마크 및 스페인과 같은 수준에 있다. 여기에다 포장도로의 지극히 낮은 수치를 덧붙여야 한다. 그리고 자동차 보유에서 소련은 인구 1,000명당 0.6대의 자동차를 생산한다. 1934년 영국의 경우는 8대였으며 프랑스는 약 4.5대, 미국은 23대이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 1928년에 36.5대였는데 대공황에 의해 수치가 감소하였다. 그리고 소련은 도로․수로․자동차 운송의 극심한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말의 보유에서도 프랑스나 미국을 능가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종자의 품질에서도 이들 나라에 한참 뒤지고 있다.

그리고 가장 뛰어난 성과를 올린 중공업에서도 비교 수치들은 소련이 여전히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35년 소련의 석탄생산량은 일인당 0.7톤이었다. 영국은 거의 5톤, 미국은 1913년에 5.4톤이었다가 지금은 거의 3톤, 독일은 약 2톤이다. 강철의 경우 소련은 67킬로그램, 미국은 250킬로그램이다. 선철과 연철의 경우도 비율은 거의 비슷하다. 1535년 소련은 일인당 1딜킬로와트시의 전기를 생산했다. 1934년 영국은 73킬로와트시였으며 프랑스는 363킬로와트시, 독일은472킬로와트시였다.

경공업의 일인당 지수는 일반적으로 중공업보다 수준이 더욱 떨어진다. 1935년 모직 일인당 생산량은 0.5미터였는데 이것은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8배 내지 10배가 뒤진다. 모직 옷은 소련의 특권층만 입을 수 있다. 날염용 회색 무명 옷감은 일인당 16미터가 생산되었는데 소련 인민은 이것으로 겨울옷을 만들어야한다. 신발의 생산은 일인당 0.5켤레인데 독일은 1켤레가 넘으며 프랑스는 1.5켤레, 미국은 3켤레이다. 그리고 이 수치는 품질 지수를 사상하고 있는데 이것까지 고려하면 소련이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에 비해 훨씬 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여러 켤레의 신발을 보유한 사람의 비율이 소련보다 상당히 높다는 사실은 당연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련은 여전히 맨발로 생활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들 중에 속한다.

식품생산에도 상황은 유사한데 부분적으로는 더 불리한 여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의심할 여지없는 최근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파이와 과자는 말할 것도 없고 잼, 소시지, 치즈 등을 소련 대중은 전혀 구할 수 없다. 유제품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다. 프랑스와 미국의 경우 인구 5명당 1마리의 암소가 있다. 독일은 인구 6명당 1마리이며, 소련은 인구 8명당 1마리이다. 그런데 우유생산에서 소련의 암소 두 마리는 실제로는 다른 나라의 거의 한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곡류 중 특히 호밀과 감자에서만 소련은 서방 자본주의 국가 대부분이나 미국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가난의 상징인 호밀 빵과 감자가 소련 인구 절대다수의 주식이다.

종이 소비량은 문화수준을 나타내는 주요한 지수이다. 1935년 소련은 일인당 4킬로그램에 못 미치는 종이를 생산하였다. 미국은 1928년의 48킬로그램에서 현재는 34킬로그램 그리고 독일은 47킬로그램을 소비하고있다. 미국은 인구 일인당 1년에 12자루의 연필을 생산한다. 반면 소련은 4자루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4자루마저 품질이 너무 나빠 품질이 좋은 연필 1자루 또는 기껏해야 2자루에도 미치지 못한다. 입문용 교과서, 종이, 연필의 부족이 학교교육을 마비시키고 있다는 불평이 신문에 곧잘 보도된다. 10월 혁명 10주년을 맞이하여 문맹을 완전히 퇴치하겠다는 소련 당국의 목표는 아직도 성취되지 않고 있다. 좀더 일반적인 고찰로부터 출발할 경우도 문제는 비슷한 정도로 해명될 수 있다. 소련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서방에 훨씬 못 미친다. 소련에는 다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의 자본투자가 진행되고 있다. 이 비율은 25퍼센트에서 30퍼센트에 이르는데 이 결과 대중이 누리는 소득수준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훨씬 낮을 수밖에 없다.

물론 소련에는 유산계급이 없다. 유산계급의 사치는 일반대중의 과소 소비에 의해 상쇄된다. 그러나 유산계급이 없다고 해도 긍정적인 효과가 별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해악은 자본가계급의 사치가 아니다. 물론 이 계급의 사치 행위는 그 자체로만 보아도 구역질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사치를 부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자본가계급은 사적소유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 결과 경제체제는 무정부성과 정체의 운명에 처해진다. 물론 사치제 소비를 자본가가 독점하고 있다. 그러나 생활필수품의 절대 다수 소비자는 노동대중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소련에는 유산계급이 없지만 특권 권력층은 여전히 존재하여 소비량의 대다수를 독점하고 있다. 이 사실은 나중에 좀더 자세하게 논의하게 될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소련의 일인당 생활필수품 생산량이 낮기 때문에 소련 대중의 생활수준이 자본주의 국가들의 생활수준에 비해서 아직도 뒤떨어진다.

물론 이 상황의 역사적 책임은 러시아의 어둡고 암울한 과거, 무지와 빈곤의 유산에 있다. 따라서 러시아의 경우 진보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방법 이외의 다른 길이 없었다. 이점을 확신하고 싶다면 한때 짜르 제국에서 가장 선진 지역이었던 발트해 국가들과 폴란드를 보면 된다. 이 국가들은 현재 후진의 수렁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련 체제의 지을 수 없는 강점은 러시아의 천년이나 된 후진성에 대해 집요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더 많은 진보를 위해서는 지금까지 달성된 성과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일차적 조건이다.

현재 소련은 서방의 기술적 ․문화적 성과들을 수입하고 빌리고 도용하는 가운데 사회주의 체제 건설의 준비 단계를 거치고 있다. 생산과 소비 수치의 비교 평가는 이 준비 단계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가 완전하게 정체하는 상황이 계속될 리는 없다. 그러나 이 상황이 계속되더라도 이 준비 단계는 아직도 역사 시기 전체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앞으로 연구를 진전시키는 데 우리에게 필요한 아주 중요한 첫 번째 결론이다.

 

 

제 2 장 경제성장과 당 지도부의 좌충우돌

 

1. "전시 공산주의", "신경제정책", 쿨락에 대한 정책

소련 경제의 성장곡선이 중단 없이 고르게 상승한 경우는 결코 없었다. 사회주의 정권 성립 후 첫 18년 동안 경제성장 단계를 구분 짓는 격심한 위기가 여러 번 나타났다. 현정권의 정책과 관련하여 소련 경제사를 간략하게 개괄하는 것은 소련 체제를 진단하고 그 미래를 예상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 후 첫 3년은 대단히 잔인한 내전의 시기였다. 이때의 경제활동은 전적으로 전선 유지의 필요성에 바쳐졌다. 문화생활은 구석에 숨어 좋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신 지독한 물질적 결핍의 상황에서 창조적 지성들이 대담하게 자기 영역을 확장하였다. 특히 레닌의 사상은 이 시기의 전형적인 모범이었다. 이때가 소위 "전시 공산주의(1918∼21)" 시기였다. 이 시기의 경제형태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전시 사회주의"와 대단히 유사했다. 이 시기 소련 정부의 경제정책은 주로 군수산업 지원에 바쳐졌다. 그리고 부족한 자원을 군사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도시인구를 생존시키는 데에 바쳐졌다. 전시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적에게 포위 당한 성(城)에서 소비를 체계적으로 통제하는 체제였다.

그러나 맨 처음 이 정책이 입안되었을 때에는 좀더 광범위한 목적이 있었다. 소련 정부는 이 극심한 통제 체제를 발전시켜 생산과 분배에서 계획경제를 직접 도입하려했다. 다른 말로 하면, "전시 공산주의"를 파괴시키지 않고 서서히 진짜 공산주의에 도달하기를 희망했다. 1919년 3월 채택된 볼셰비키당 강령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련 정부의 현재 과업은 계획되고 조직된 국가 차원의 분배체제를 동요 없이 건설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제품 분배가 상거래를 대체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시 공산주의"의 강령과 점점 갈등을 일으켰다. 전쟁으로 인한 생산수단의 파괴 뿐 아니라 생산자의 이익 억압 때문에 생산은 계속 감소했다. 도시는 곡물과 원자재를 농촌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도시는 과거의 기억에 따라 화폐라고 불리는 얼룩덜룩한 종이쪽지 외에는 농촌에게 줄 것이 없었다. 따라서 농민은 자신의 생산물을 땅속에다 숨겼다. 정부는 이 상황에서 곡물을 징발하기 위해 노동자 무장파견대를 농촌으로 보냈다. 이에 농민은 파종 규모의 축소로 대항했다. 내전이 끝난 직후인 1921년에 산업생산량은 내전 이전의 5분의1로 떨어졌다. 강철 생산은 4,200,000톤에서 183,000톤으로 떨어졌는데 과거 생산량의 23분의 1에 불과했다. 곡물생산량은 801억 파운드에서 573억 파운드(1922년)로 줄었다. 이 해에는 끔찍한 기근이 일어났다. 동시에 외국무역은 27억 루블에서 3천만 루블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소련의 생산력 붕괴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었다. 나라 전체와 국가기구는 멸망 일보직전이었다.

전시 공산주의의 유토피아적 희망은 이후 많은 측면에서 정당하고 무자비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모든 계산은 서방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자 혁명이 곧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에 근거하였다. 이 전제를 고려하지 않을 경우 볼셰비키당의 이론적 오류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소련이 나중에 제공할 식량과 원자재를 신용담보로 사회주의혁명을 달성한 독일 노동자들이 생산기계 및 완제품 뿐 아니라 수만 명의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 엔지니어, 조직가들을 소련에 제공할 것이다. 이 희망은 당연한 상식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독일에서 노동자 혁명이 성공하였다면 독일 뿐 아니라 소련의 경제발전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너무도 대대적으로 진전되어 오늘날 유럽과 전 세계의 운명은 비교할 수 없이 전도가 양양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사민당 지도자들이 이 역사의 진전을 혼자 힘으로 봉쇄하였다.(역자 주: 1918년 11월 혁명으로 독일의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인민위원회 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이 혁명 정부의 각료들인 사민당 및 독립사민당 지도자들이 소비에트를 해체시키고 제헌의회를 수립시켜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사회주의혁명이 독일에서 성공했더라도 국가 주도의 직접 분배체제가 폐기되고 상거래 분배 방식이 부활되어야 했다. 이 점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농촌에 고립적으로 분산된 수백만의 농민경제단위는 외부세계와 자신들의 경제 관계를 상거래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규정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지적하며 레닌은 시장 부활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상거래에 의한 물자 순환은 농민과 국유화 공업간에 소위 "연결고리"를 마련해줄 것이었다. 이 "연결고리"에 대한 이론적 정식은 아주 단순하다: 국가가 농민의 노동 생산물을 강제 징발하지 않도록 공업은 농촌이 원하는 공업생산물을 적절한 가격으로 공급한다.

농촌과의 경제 관계를 호전시키는 것이 신경제 정책의 가장 본질적이고 시급한 과제였다. 이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전시 공산주의의 짧은 실험을 통해, 사회화된 공업부문 역시 자본주의적 화폐지불 방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계획경제는 단순히 지적 데이터에만 의존할 수 없다. 수요 공급의 법칙은 상당한 기간에 걸쳐 필요한 물질적 기초로 남아 있을 것이며 경제정책의 오류를 교정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될 것이다. 신경제 정책에 의해 합법화된 시장은 국가가 통제되는 화폐의 도움으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농촌의 자극을 받아 1923년부터 공업이 소생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 과정은 즉시 가속도가 붙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1922년과 1923년에 산업생산량은 두 배로 늘어났고 1926년에 이미 내전 이전의 수준을 회복했다. 즉 1921년에 비해 생산량이 5배 이상 늘었다. 이 정도면 신경제 정책이 공업에 미친 영향을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훨씬 느린 속도이기는 했지만 곡물수확량이 동시에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찍부터 볼셰비키당 내에 존재했던 공업과 농업의 관계에 대한 견해 차이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1923년부터 날카롭게 대립되기 시작했다. 모든 자원이 완전히 고갈된 나라에서 농민들로부터 곡물과 원자재를 빌리지 않고는 공업이 발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농업생산물에 대한 너무도 무거운 "강제 채무"(역자 주: 도시의 생산력이 완전히 파괴된 상황에서 국가의 강제력을 동원하여 농민의 농업생산물을 일시적으로 징발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농민의 노동의욕을 죽여버렸다. 미래의 번영을 확신하지 못하자 농민은 도시에서 온 곡물 징발대에 대항하여 파종을 거부하는 것으로 저항했다. 그렇다고 곡물 징발을 완화할 수도 없었다. 농민의 생산물이 없이는 공업 발전이 지체될 뿐이었기 때문이다. 공업제품을 도시로부터 공급받지 못하자 농민은 스스로 수공업 노동에 종사하여 필요를 충족시키려 하였다. 이 결과 농촌 가내수공업이 부흥하였다. 농업과 공업간의 역동적 균형을 성취하는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농촌에서 얼마나 많은 곡물을 징발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당내에는 이견이 발생하였다. 논쟁은 농촌의 복잡한 사회 구조에 의해 즉시 복잡하게 발전하였다.

1923년 봄에 열린 당 대회에서 아직도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분파인 "좌익 반대파"의 어느 대표가 불길한 도표의 형태로 공업제품과 농업생산물의 가격 차이를 설명하였다. 이 현상은 당시 처음으로 "가위"라고 이름지어졌다. 이 용어는 곧 거의 국제적 용어가 되었다.(역자 주: 국내에는 협상가격이라는 번역어로 탄생하여 좌익에 퍼졌다.) 공업이 계속 침체할 경우 가위의 날은 점점 벌어져 결국 도시와 농촌간의 관계는 불가피하게 단절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볼셰비키당이 성취한 민주주의 농업혁명과 이 당이 사회주의의 기초를 구축하기 위해 시행한 정책을 농민은 명확히 구분해 바라보았다. 지주와 짜르 소유의 토지를 몰수하여 볼셰비키당은 매년 금화 5억 루블이 넘는 혜택을 농민에게 선사했다. 그러나 국가가 생산하는 공업제품의 가격 때문에 농민은 선사 받은 것보다 훨씬 많은 액수의 생산물을 헌납하고 있었다. 10월 혁명의 단단한 매듭으로 결박된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대차대조표가 매년 수억 루블의 손실을 농민에게 전가했다. 그렇다면 노동계급과 농민의 관계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유산인 농촌경제의 분산적 성격은 10월 혁명이 가져다준 내전의 파괴로 더욱 강화되었다. 혁명 후 10년에 걸쳐 자영농민의 수는 1,600만 명에서 2,50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 현상은 자연스럽게 농민기업 다수의 순수 소비적 성격을 강화시켰다. 이 때문에 농업생산물이 도시로 충분히 유입되지 못했다.

소상품 경제는 불가피하게 착취자를 탄생시킨다. 농촌의 생산력이 회복되는 것에 비례하여 농민층의 분화가 가속화되었다. 이 사태는 이미 과거의 잘 알려진 전철을 밟았다. 쿨락(역자 주: 타인의 노동을 고용한 부유한 농민)의 성장은 농업의 전반적 성장을 훨씬 앞질렀다. "농촌으로 향하자"는 구호를 내건 정부의 정책은 실제로 쿨락을 위한 것이었다. 농업세는 부농보다 빈농에게 더 무겁게 매겨졌다. 그리고 부농은 국가의 신용 대부 가운데 알짜만 골라 차지했다. 잉여곡물은 주로 농촌의 상층부가 차지하여 빈농은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투기 대상이 되어 도시 부르주아 분자들에게 판매되었다. 당시 당내 지도부의 이론가 부하린은 농민에게 "부자가 되시오"라는 유명한 구호를 던져주었다. 이 구호는 이론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쿨락의 점진적 성장으로 사회주의가 도래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절대 다수의 대중을 희생시켜 극소수 쿨락을 살찌우는 것이었다.

자신이 내세운 정책의 포로가 되어 당 지도부는 농촌 소부르주아 계급의 요구 앞에서 한 발 한 발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5년 농업부문에서 노동력 고용과 토지 임대가 합법화되었다. 농민층은 소규모 자본가와 고용 노동자로 양극화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공업제품이 부족했기 때문에 국가부문은 농촌시장에서 밀려났다. 쿨락과 소규모 가내수공업자 사이에 마치 땅에서 솟은 것처럼 중간상인이 등장했다. 국영기업은 원자재를 구하기 위해 개인 상인들과 계약을 체결하는 빈도수가 높아졌다. 자본주의는 밀물처럼 상륙하여 모든 곳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소유형태의 혁명은 사회주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단지 제기할 뿐이다. 이 사실을 지각 있는 사람들은 명백히 목격할 수 있었다.

1925년 쿨락 위주의 정책이 전면화되고 있을 때 스딸린은 토지 국유화를 철폐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어느 기자가 그의 계획에 대해 이렇게 질문했다: "농업 발전을 위해 개별 농민이 경작하는 토지의 재산권을 그에게 십 년간 양도하는 것이 더 수월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스딸린은 이렇게 답변하였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40년간 양도할 수도 있겠지요." 그루지아의 농업 인민위원은 스딸린의 제안에 따라 토지 국유화 철폐 법안을 상정하였다. 이 법의 목적은 농업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농민에게 심어주는 것이었다. 이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1926년 봄 시장에 나온 곡물의 거의 60%가 전체 농민 가운데 6% 밖에 되지 않는 토지 소유 농민의 손에 들어 있었다! 국가는 외국무역은 고사하고 국내소비용 곡물도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다. 수출 규모가 빈약했기 때문에 외국으로부터 공업제품 수입은 고사하고 꼭 필요한 기계류와 원자재도 한계선까지 수입을 감축시킬 수밖에 없었다.

공업화를 지체시키고 일반 농민 대다수에게 타격을 가한 쿨락 위주의 정책은 1924년부터 1926년 사이 그 정치적 결과를 뚜렷하게 드러내었다. 도시와 농촌의 소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의 정치적 파워를 크게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하급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장악하였다. 관료집단의 자신감과 파워도 증대하였다. 이들은 노동계급에게 점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제 당과 소비에트의 민주주의가 완전히 억압당했다. 쿨락의 정치적 ·경제적 성장은 당 지도부의 두 지도적 인물인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를 경악시켰다. 이들은 당시 노동계급의 두 중심도시인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의 소비에트 의장이었다. 이들의 반응은 의미심장했다. 그러나 당과 국가기구의 관료층은 물론 지방에서도 스딸린에 대한 지지가 굳건했다. 쿨락 위주의 정책은 승리했다. 1926년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추종자들과 함께 1923년의 반대파(Opposition of 1923)에 합류하였다. 이 분파에게는 "뜨로츠키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물론 당 지도부는 "원칙적으로는" 농업집단화 정책을 폐기하지 않았다. 단지 몇십 년간 이 정책을 연기시킨 것뿐이었다. 이후 농업인민위원이 된 야코블레프는 1927년 이렇게 적었다: "농촌의 사회주의적 재건은 오직 집단화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그러나 집단화는 1년, 2년, 3년 아니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달성될 수 없다. 이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집단농장과 집단촌은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상당히 오래 개인소유라는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당시 농민의 8%만이 집단화되어 있었다.

1923년에 수면 위로 떠오른 소위 "총노선"에 대한 당내 투쟁은 1925년에는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전개되었다. 공업과 농업의 모든 문제들을 망라한 확대 강령에서 좌익반대파는 이렇게 선언했다: "노동계급 독재를 떠받치는 기둥의 하나인 토지 국유화를 폐기하고 침해하는 모든 정치 경향들에 대해 당은 저항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의 기도를 분쇄해야 한다." 이 문제에서 반대파는 승리했다. 토지 국유화에 대한 직접적 공세는 포기되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토지의 소유형태 이상을 내포하고 있었다.

"개인소유 농업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집단농장의 좀더 빠른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 해마다 체계적인 방식으로 집단농장으로 조직되는 빈농들을 지원하기 위해 상당 액수의 예산이 따로 책정되어야 한다. 소규모 농장을 대규모 집단농장으로 바꾸기 위해 협동조합이 운영되어야 한다." 그러나 광범위한 집단화를 주창하는 강령은 이후 유토피아적이라고 끈질기게 비판되었다. 좌익반대파를 축출하기 위해 소집된 제15차 당 대회에서 이후 국가인민위원회 의장이 될 몰로토프는 거듭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광범위한 농민 대중의 집단화에 관한 빈농의 환상에 빠져들면(!) 안된다. 지금 상황에서 농촌의 집단화는 가능하지 않다." 이 발언은 1927년 말에 나왔다. 당시 당 지도부의 농업 정책과 지금 정책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당 지도부 구성을 위해 동맹한 스딸린, 몰로토프, 리코프, 톰스키, 부하린 등은 "초공업화(super-industrialization)"와 계획경제를 주장한 좌익반대파에 대해 투쟁했다. 1926년 초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반대파로 넘어왔다. 미래 역사가들은 사회주의 정부의 과감한 경제시책을 악의에 찬 불신으로 대했던 이때의 분위기를 적잖이 놀라면서 역사책에 기록할 것이다. 그러나 외부세계의 자극에 의해 공업화는 무계획적으로 급속히 진행되었다. 따라서 모든 경제적 계산은 완전히 무시되었고 이 결과 공업화에 따른 총비용은 엄청난 비율로 증가하였다. 1923년 반대파는 5개년 계획 시행을 지도부에 요구했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로 뛰어내리는" 행위에 공포를 느낀 당 지도부의 소부르주아적 감성은 이 요구를 조소했다. 1927년 4월까지만 해도 스딸린은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드니에페르스트로이(Dnieperstroy)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은 농민이 암소 대신 전축을 사는 것과 같다. 이 의미심장한 비유는 당시 당 지도부의 강령을 집약해서 보여 주었다. 이 당시 전 세계의 부르주아 언론과 이들의 꽁무니를 쫓는 사회민주주의 언론은 당 지도부가 "좌익반대파"의 공업 낭만주의(industrial romanticism)를 공식적으로 비판한 것에 공감을 표했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당내에서 요란한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농민은 점점 더 대담한 파업으로 공업제품의 부족에 응답하고 있었다. 이들은 곡물을 시장에 내놓지도 않고 파종의 규모를 늘리지도 않았다. 당 지도부의 우익은 리코프, 톰스키, 부하린 이었는데 당시 지도부의 논의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업의 발전속도를 늦추는 한이 있어도 곡물 가격을 인상시켜 농촌의 자본주의적 경향을 더 확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정책 기조 하에서 사태를 해결할 유일한 방식은 농업 원자재를 수출하고 이 대금으로 외국의 공산품을 수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농민경제와 사회주의 공업과의 "연결고리"를 확립하는 대신 쿨락과 세계자본주의 사이와 연결고리를 마련하는 행위였다. 이것을 위해 10월 혁명을 성공시킬 필요는 없었다.

1926년 당 협의회에서 좌익반대파를 대표하여 필자는 이렇게 응답했다: "특히 쿨락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시켜 공업화를 가속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하면 다량의 공업제품이 싼값으로 농민에게 공급될 수 있다. 이 방식을 통해 노동자와 농민 다수는 이익을 볼 것이다‥‥‥‥ 농촌으로 향하자는 구호는 공업에게 등을 돌리자는 의미가 아니다. 이 구호의 진정한 의미는 공업이 농촌을 향하게 하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농촌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 주도의 공업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스딸린은 반대파의 "꿈처럼 황당한 계획"에 대해 호통을 쳤다. 공업이 "서둘러 발전되어 농업과 분리되고, 결국 나라의 경제적 축적의 적당한 속도를 파탄시키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당의 결정들은 계속해서 쿨락의 입지를 수동적으로 강화하는 격언들로 반복되었다. "초공업화론자"들을 최종적으로 분쇄하기 위해 1927년 12월에 열린 제15차 당대회는 "국가자본이 대규모 건설공사에 너무 많이 투입되는 위험"을 경고했다. 당시 당 지도부 분파는 반대파의 노선만을 위험요인으로 간주했다.

주로 혁명 이전의 기계류로 공장을 가동하고 낡은 도구로 농사를 짓던 소위 회복기가 1927-28 회계년도에 끝나고 있었다.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독립적 공업 건설사업이 진행되어야 했다. 더 이상 어둠 속을 더듬으면서 계획 없이 전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923년과 1925년 사이에 좌익반대파는 사회주의 공업화의 가능성들을 이미 분석한 후 이렇게 일반적 결론을 내렸었다: 자본가 계급으로부터 상속받은 장비를 다 소모시킨 후 소련의 공업은 사회주의 축적의 기반 하에 자본주의에서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고도 성장을 성취할 수 있다. 좌익반대파가 15퍼센트 내지 18퍼센트 정도로 조심스럽게 성장수치를 예상한 것에 대해 당지도부는 미지의 미래를 알리는 황당한 음악이라고 공개적으로 조소하였다. 당시에는 이것이 "뜨로츠키주의"에 대한 투쟁의 본질이었다.

1927년에 드디어 완성된 5개년 계획의 첫 공식 초안은 구두쇠와 같은 쫀쫀한 계산으로 채워졌다. 공업성장률은 매년 9퍼센트에서 4퍼센트로 감소되도록 계획되었다. 인구 일인당 소비는 5년 동안 겨우 12퍼센트만 증가하도록 계획되었다! 5개년 마지막 해의 국가예산은 국민총소득의 16%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주의를 건설할 의도가 전혀 없었던 짜르의 러시아에서도 국가예산이 국민총소득의 18%를 차지했었다! 이 사실은 5개년 계획의 첫 초안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심하다는 점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이 계획을 입안하는 데 참여했던 공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은 수년 후 외국 세력의 지시에 의해 의식적으로 태업을 했다는 혐의로 엄한 형벌을 받았다. 그들의 계획은 당시 정치국의 "총노선"에 완전히 부응하는 것이었고 상부의 명령으로 작성되었다고 피고인들은 재판 당시 당당하게 증언할 수도 있었다.

이제 당내 분파들의 투쟁은 5개년 계획 초안이 제출되는 시점에서 산술적 수치로 표현되었다. 좌익반대파의 강령은 이렇게 주장했다:"10월 혁명의 10주년에 하찮고 완전히 비관적인 계획을 제시하는 것은 사회주의 건설을 반대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1년 후 정치국은 생산을 매년 9% 증가시키는 새로운 5개년 계획을 채택하였다. 결국 "초공업주의론자"의 성장수치에 근접하는 끈질긴 경향이 나타났다. 1년이 지난 후 정부의 계획이 또 한번 근본적으로 변화했을 때 국가계획위원회는 제3차 5개년 계획을 입안하였다. 이 계획은 1925년 좌익반대파의 전망과 아주 근접한 경제성장률을 제시하였다. 이 사태는 모든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였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에 근거하여 바라보면 소련의 경제정책사는 그 동안 공식적으로 발표된 전설과는 매우 다르다. 불행하게도 웹 부부와 같은 경건한 연구자들은 이 점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없다.

 

2. 급선회: "4년 내에 5개년 계획을 완수하자"와 "완벽한 집단화"

개별 농민기업에 대한 우유부단한 태도, 거대 계획에 대한 불신, 최소 경제개발 속도의 옹호, 국제정세에 대한 무관심과 방기 등이 전부 모여 "일국 사회주의" 이론의 핵심이 되었다. 이 이론은 1923년 가을 독일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이 패배한지 딱 1년 후 처음으로 스딸린이 제시했다. 공업화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 농민과 불화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 세계혁명에 의존하지 말자, 그리고 무엇보다 당 관료집단의 권력을 비판으로부터 보호하라! 농민층의 분화는 좌익반대파의 발명품으로 비난되었다. 위에 언급한 야코블레프는 중앙통계국(Caltral Statistical Bureau)을 해체했다. 이 기구의 통계기록이 쿨락의 경제력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기 때문에 당 지도부의 미움을 산 것이었다. 한편 당 지도부는 평온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생산품의 기근은 끝날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질질 끌고 있다, "경제발전의 평온한 속도가 유지되고 있다", 앞으로 곡물은 좀더 "공평하게" 수매될 것이다 등등. 그러나 세력이 강화된 쿨락은 중농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도시에 대해 곡물봉쇄를 단행했다. 1928년 1월 소련의 노동계급에게 기근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역사는 악의에 찬 농담을 할 줄 안다. 쿨락이 혁명의 목을 죄고 있던 바로 이때 좌익반대파 대표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시베리아 각지로 유형 당했다. 죄목은 쿨락의 유령 앞에서 "공포에 떨었다"는 것이다.

정부는 쿨락의 곡물봉쇄가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의 표현에 불과한 것처럼 가장했다. 즉 보통의 정치적 동기가 작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쿨락은 어디서 나타났는가? 그러나 쿨락은 당 지도부의 이런 "관념"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가 곡물을 숨긴 이유는 자신에게 제시된 거래조건이 이윤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쿨락은 광범위한 농민층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둘 수 있었다. 쿨락의 태업을 탄압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했다. 정책을 변경해야 했다. 그러나 당 지도부는 정책 전환에 대해 동요하면서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했다.

당시 아직도 정부 수반이었던 리코프는 1928년 7월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개인 농장을 발전시키는 것은 ‥‥‥ 당의 주요한 과업이다." 그러자 스딸린은 그의 발언을 재청하였다: "개인농장은 이미 효용성을 상실했으며 더 이상 이들을 지원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 당의 노선과 아무 관련도 없다." 이로부터 1년이 채 안되어 당의 노선은 이 발언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졌다. "완벽한 집단화"의 먼동이 지평선에 떠오르고 있었다.

정책 전환은 이전의 정책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방법론에 근거하지 않은 채 역시 경험적으로 그리고 당 지도부 내부의 암투(暗鬪)를 통해 나타났다. 좌익반대파의 강령은 이보다 1년 전에 이미 이렇게 경고했다. "우파와 중앙파는 좌익반대파에 대한 일반적인 적대감에 기초해 연합했다. 좌익반대파가 제거될 경우 두 분파 사이의 투쟁은 반드시 가속화할 것이다." 사태는 예상했던 대로 전개되었다. 두 분파의 지도자들은 흔히 그렇듯이 좌익반대파의 예상이 적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1928년 10월 19일이 되어야 스딸린은 이렇게 공식 발표했다. "우편향과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우편향에 대한 유화적 태도에 대해 잡담만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투쟁할 때가 되었다." 두 분파는 이제 당내에서 자신들의 지지도를 가늠하고 있었다. 민주주의가 억압당한 당은 어두운 소문과 추측으로 살고 있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당의 공식 언론은 언제나 그랬듯이 당황한 빛은 하나도 없이 이렇게 발표했다: 정부수반 리코프는 "소련 정부의 경제적 난관을 투기대상으로 삼았다", 코민테른 의장 부하린은 "자유부르주아지의 끄나풀이었다" ; 전 러시아 노동조합중앙회 의장 톰스키는 애처로운 노동조합 활동가에 불과하다. 리코프, 부하린, 톰스키는 모두 정치국 정회원이었다. 지금까지 좌익반대파에 대한 투쟁은 전부 우파로부터 나왔었다. 이제 부하린은 스딸린을 이렇게 당당히 비난할 수 있었다: 우파에 대한 투쟁에서 빌어먹을 좌익반대파의 강령 일부가 동원되고 있다.

어쨌든 정책 전환은 시작되었다. "부자가 되시오"라는 구호와 쿨락의 고통 없는 점진적 성장이 사회주의 건설의 초석이라는 이론은 늦게나마 그러나 그만큼 더욱 단호하게 비난받았다. 이제 공업화는 대세가 되었다. 자기만족적인 정적주의(靜寂主意)는 공포에 질린 호들갑으로 바뀌었다. 레닌이 주창했던, "따라잡고 추월하시오"라는 반쯤 잊혀졌던 구호는 "가능하면 빠른 시간 내에"라는 어구가 붙여지면서 완벽한 문장이 되었다. 당 대회의 원칙으로 이미 확정된 5개년 계획은 목표를 최저 수준으로 잡고 있었다. 이제 이것은 분쇄된 좌익반대파 강령으로부터 전부 빌려온 새로운 계획으로 대체되었다. 어제만 하여도 드니에페르스트로이 발전소 건설은 전축에 비유되었었는데 이제는 가장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계획의 일부가 성공적으로 완수되자 새로운 구호가 제출되었다: "5개년 계획을 4년만에 달성하자." 계획경제의 능력에 대해 깜짝 놀라버린 경험주의자들은 이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결심했다. 인간의 역사에서 종종 나타나듯이 기회주의는 이제 모험주의로 바뀌었다. 1923년부터 1928년까지 정치국은 부하린의 "거북이 걸음" 철학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제는 매년 20% 내지 30%의 경제성장 목표치를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성과를 당연히 완수해야 할 기준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각 분야의 조건적인 상호관계를 인식하지 못했다. 재정적자는 지폐의 남발을 통해 메워졌다.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유통된 은행지폐의 규모는17억 루블에서 55억 루블로 불어났다. 그리고 제2차 5개년 계획의 시작 시점에는 84억 루블로 증가했다. 강요된 공업화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 대중에게 당 지도부는 어떠한 정치적 설득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금화 1루블당 미화 5달러로 자동적으로 계산된 이론상의 화폐 액면가도 무시했다. 신경제 정책이 시작될 때는 기초가 튼튼했던 통화체제는 이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계획 완수 뿐 아니라 정권 유지에도 주요한 위험요소는 농민층이었다.

1928년 2월 15일 소련 인민은 『프라우다』의 사설을 통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농촌은 그 순간까지 당국에 의해 묘사된 모습이 아니라 축출된 좌익반대파가 제시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어제까지도 쿨락의 존재를 부정했던 언론은 오늘 갑자기 상부 지시에 따라 쿨락을 농촌 뿐 아니라 당내에서도 발견했다. 정교한 기계류를 소유하고 고용노동을 부리고 정부로부터 수십만 푸드(역자 주: 소련의 중량단위로 16.38kg.)의 곡물을 숨기면서 "뜨로츠키주의" 정책을 끊임없이 비난했던 쿨락이 이제는 공산당 세포들을 아주 빈번히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쿨락이 지방 비서직을 장악하여 빈농과 농업노동자의 당원 가입을 금지한 방식들에 대해서 언론은 경쟁하듯이 대서특필했다. 과거의 모든 조건들은 이제 그 성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더하기와 빼기 부호의 위치가 서로 바뀌었다.

도시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즉시 쿨락의 곡물을 빼앗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은 오직 강제력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쿨락 뿐 아니라 중농의 비축된 곡물을 강탈하는 행위는 공식적으로 "특별조치"라고 불렸다. 이 말은 내일이면 만사가 과거처럼 평온해질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농민은 이렇게 겉만 번지르르한 말을 믿지 않았다. 이들은 옳았다. 곡물을 강제로 징발 당하자 쿨락은 식량 증산의 동기를 가질 수 없었다. 고용 농업노동자들과 빈농들은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농업은 다시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와 함께 국가의 존립이 다시 위태로워졌다. 이 상황에서 모든 수단을 써서라도 "총노선"을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농민의 개별 영농을 여전히 주로 강조하면서도 스딸린과 몰로토프는 소비에트농장과 집단농장이 더욱 빨리 확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급한 식량 확보 문제 때문에 노동자 무장대가 농촌에 파견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에 개별 영농에 대한 시책은 공중에 붕 떠 버렸다. 결국 집단화로 "퇴행"하는 것이 필요했다. 곡물 징발을 위한 일시적 "특별조치"는 예상 밖으로 "쿨락 계급을 일소"하는 시책으로 발전했다. 식량배급보다 횟수가 더 빈번한 정부의 모순적 지시들은 정부가 농민문제에 대해 5개년 계획은 고사하고 5개월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증명했다. 식량위기에 의해 강요된 새로운 계획에 의하면 5년 후에 집단농장은 농민 토지의 70%를 차지하기로 계획되었다. 지난 10년 동안 농업집단화 작업이 농민의 1%에게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새로운 계획의 규모는 엄청났다. 그러나 5개년 계획의 중간지점에서 집단화는 애초의 목표를 훨씬 밑돌았다. 1929년 11월 스딸린은 자신의 정책적 동요를 청산하면서 개별 영농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전국의 촌락, 군, 주에까지 전부" 집단농장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야코블레프는 집단농장은 상당히 오랜 기간 "농민 개인소유라는 바다에 떠 있는 섬"에 불과할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던 그가 이제 농업인민위원이 되어 "쿨락 계급을 일소"하고 "가능한 한 일찍" 집단화를 완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25년 집단농장의 비율은 1.7%에서 3.9%로 증가했다. 그리고 1930년에는 23.6%, 1931년에는 52.7% 1932년에는 61.5%로 증가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농업 집단화가 전체적으로 노골적인 강제력에 의해서 달성되었다고 허튼 소리를 늘어놓는다. 현재 이 주장을 반복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과거에 농민은 토지를 소유하기 위한 투쟁에서 한때는 지주에 대해서 봉기를 일으켰고 또 한때는 미경작 지역에 농장을 일구었다. 그리고 또 어떤 때에는 좁은 토지를 소유한 고통의 대가로 하늘 나라를 약속한 온갖 종파들에게 서둘러 귀의하였다. 대농장을 몰수하고 토지를 잘게 쪼갠 후에 이제 다시 이 조그만 땅뙈기를 커다란 농지로 통합하는 것은 농민, 농업, 사회 전체에게 생사가 걸린 중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이 일반적인 역사적 고찰에 의해 농민문제가 해결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집단화 성공의 진정한 가능성은 농촌 위기의 깊이나 정부의 행정적 열정이 아니라 생산자원에 따라 주로 결정된다. 즉 대규모 농업에 필요한 기계를 제공해줄 공업의 능력에 달린 문제이다. 이 물질적 조건을 당시 소련은 구비하지 못했다. 집단농장은 주로 소농경영에만 적합한 농기구로 갖추어졌다.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급히 추진된 집단화는 경제적 모험주의였다.

자신이 추진한 정책 전환의 급진적 성격을 나중에야 제대로 인식한 정부는 새로운 정책에 대비한 기초적인 정치적 준비가 없었고 준비를 할 수도 없었다. 농민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의 권력기관들조차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 소유의 가축과 재산이 국가로 접수될 것이라는 소문을 듣자 농민들은 몸이 달아올랐다. 이 소문은 진실과 거리가 멀지도 않았다. 좌익반대파를 희화화하면서 관료집단은 "농촌 마을을 약탈하였다." 농민의 눈에는 집단화는 주로 자기 재산을 접수하는 형태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정부는 말, 소, 양, 돼지 뿐 아니라 새로 부화된 병아리까지 집단화하였다. 어느 외국인의 관찰에 따르면, "정부는 어린애 발에서 모피신발까지 벗겨내면서 쿨락 일소 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러자 농민은 헐값에 소를 팔거나 고기와 가죽을 건지기 위해 가축을 도살했다. 이 현상은 유행병처럼 퍼져 나갔다.

1930년 1월 모스크바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 안드레예프는 집단화에 대해서 양면 그림을 제시했다: 한편으로는 소련 전역에서 강력하게 진행되고 있는 집단화운동은 "이 운동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장애물을 쓸어버릴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농민은 자신의 농기구와 가축 그리고 종자까지 집단농장에 들어오기 전에 약탈적으로 파는 행위는 "이제 정말 위기 수준에 도달했다." 이 두 일반화는 아무리 서로 모순된다 해도 부정적인 측면에서 집단화가 절망의 유행병을 확산시켰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보여주고 있다. 위에 언급한 외국인 관찰자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완벽한 집단화는 마치 3년 전쟁이 스치고 지나간 것처럼 국가경제를 거의 유례가 없을 정도로 멸망까지 몰고 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2,500만 명 농민의 이기심은 늙은 농부의 낡은 말(馬)과 같았지만 여전히 하나의 세력으로 존재하면서 농업의 유일한 원동력이 되었었다. 이것을 관료집단은 한꺼번에 제거해 버리려 했다. 그것도 농업장비, 농업 지식, 농민의 지지 등 모든 것을 결여한 2만여 집단농장 행정사무실의 지시를 통해 일이 이루어졌다. 이 모험주의의 끔찍한 결과는 곧 모습을 드러냈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후유증을 남겼다. 1930년 835억 파운드에 달했던 곡물수확량은 다음 2년 동안 700억 파운드 이하로 떨어졌다. 이 차이는 그 자체로 보면 큰 재앙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차이는 도시를 보통의 기근 수준으로라도 유지시킬 만큼의 곡물량이었다. 기술영농 분야에서는 상황이 더 나빴다. 집단화가 있기 바로 전에 설탕 생산량은 거의 109억 파운드에 달했다. 그런데 완벽한 집단화가 절정에 달하고 있을 때 사탕무 부족으로 이 수치는 48억 파운드로 떨어졌다. 즉 생산량이 과거의 반 수준에 그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타격은 동물 보유에서 나타났다. 말의 수는 1929년의 3,460만두에서 1934년의 1,560만 두로 55%나 감소했다. 뿔이 달린 소의 경우 3,070만두에서 1,950만두로 40%나 떨어졌다. 그리고 돼지의 수는 55%, 양의 수는 66% 감소했다. 기아, 추위, 전염병, 정부의 탄압 등에 의해 희생된 사람의 수는 불행하게 가축의 도살보다 부정확하게 집계되었지만 수백만에 이르렀다. 이 엄청난 손실에 대한 책임은 집단화 자체가 아니라 집단화 시행 과정에서 사용된 맹목적이고 폭력적일 모험주의에 있었다. 관료집단은 아무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집단농장의 규약은 농민의 개인적 이해와 농장의 복지를 결합시키기 위해 작성되었는데 집단화 저항 촌락들이 잔인하게 황폐화된 이후에야 마침내 공표 되었다.

농업집단화 정책의 강제적인 성격은 1923∼28년 정책의 결과를 하루빨리 청산하고 새로운 정책을 통해 어느 정도의 위안을 찾으려는 필요에 의해 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화는 좀더 합리적 속도와 좀더 치밀한 형태로 진행될 수도 있었고 실제 그랬어야 했다. 권력과 산업을 한 손에 장악한 관료집단은 나라 전체를 재앙의 근처까지 인도하지 않고도 집단화 과정을 진척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나라의 물질적 ·도덕적 자원에 더욱 조응하는 속도를 채택할 수도 있었다. 1930년 "좌익반대파" 망명 기관지는 이렇게 주장했다: "소련 국내외 상황이 좋을 경우에 농업의 물질적 ·기술적 조건은10년 내지 15년의 기간 동안 철저하게 변모되어 집단화에 필요한 생산기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간에 소련의 정권을 타도할 수 있는 기회는 한번 이상 주어질 것이다."

이 경고는 과장이 아니었다. 정권 전복의 숨결은 완벽한 집단화운동 기간에 10월 혁명의 영토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 불만, 불신, 원한이 나라 전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통화의 혼란, 안정되었기 때문에 ".관습처럼 자리잡았던" 자유시장 가격의 등귀, 곡물-고기-우유 등 식량에 대한 국가와 농민간 유사 상거래의 징발로의 전환, 집단적 소유 시설에 대한 대중의 약탈과 약탈의 광범위한 은폐에 대해 소련 당국이 벌인 목숨을 건 투쟁, 쿨락의 파괴행위에 대한 당의 순전히 군사적 동원, 식량카드와 기아적 배급제의 복귀, 여권제도의 부활 등은 소련 전역에 걸쳐 이미 오래 전에 끝난 내전 분위기를 부활시켰다. 도시의 공장에 대한 식량과 원자재의 공급은 계절이 바뀔수록 악화되기만 하였다. 참을 수 없이 열악한 작업환경은 노동력 이동, 꾀병, 부주의한 작업, 기계의 고장, 높은 비율의 불량품 생산 그리고 일반적으로 낮은 제품의 품질 등을 가져왔다. 1931년 평균노동생산성은 11.7% 감소했다. 소련 언론에 소개된 몰로토프의 우발적 시인에 의하면 1332년 공업생산력은 계획 목표인 26% 증가에 비해 겨우 8.5% 증가에 그쳤다. 그런데 이 시인이 있은 직후 전세계는 5개년 계획이 4년 3개월만에 완료되었다는 소식을 틀림없이 접했다. 그러나 이것은 통계수치와 여론을 조작하는 관료집단의 냉소주의가 무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주요한 문제가 아니다. 5개년 계획의 운명이 아니라 소련의 체제 운명이 진짜 문제였다.

그러나 소련은 이 위기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 사실은 대중 속에 깊이 뿌리내린 체제 자체의 장점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소련 외부의 상황도 마찬가지로 유리하였다. 농촌의 경제적 혼란과 내전 와중에서 소련은 외부의 적들을 사방에 두고 근본적으로 마비되어 있었다 농민의 불만이 나라를 뒤덮고 있었다. 불신과 동요로 관료기구와 핵심 간부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이때 소련의 동쪽이나 서쪽에서 적의 공격이 있었다면 이 나라는 치명적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 무역과 공업 위기의 첫 몇 년간 자본주의 세계는 놀란 표정으로 소련의 상황이 악화되기만 기다렸다. 어느 누구도 전쟁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감히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했다. 더욱이 어떤 적대국도 소련 내부의 심각한 사회적 격동의 정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사실 이 사회적 격동은"총노선"을 기념하여 연주된 어용 음악의 굉음 한가운데에서도 소비에트 연방을 뒤흔들고 있었다.

* * *

지금까지 소련 경제사에 대한 아주 간략한 개괄을 시도했다. 이 시도는 노동자국가의 실제 발전과정이 성과의 안정된 축적이라는 목가적 그림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보여준다. 과거의 위기로부터 미래에 대한 중요한 징후를 끄집어낼 수 있다. 이외에도 소련 정부의 경제정책과 좌충우돌을 역사적으로 개괄하는 것을 통해 인위적으로 강요된 개인숭배를 분쇄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숭배는 실재와 가식의 성과가 지도자의 출중한 능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동계급 혁명으로 수립된 사회주의 소유체제야말로 그나마 존재하는 성과의 원천이다.

자본주의에 대비된 새로운 사회체제의 객관적 우월성은 물론 지도자들의 통치방식에서도 저절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 통치방식은 또한 소련의 경제적·문화적 후진성도 동일하게 반영한다. 더욱이 관료집단의 형성 조건인 소부르주아적 편협성도 반영한다. 그러나 이 결론을 통해 소련 지도부의 정책이 부차적으로만 중요하다고 추론하는 것은 아주 서투른 오류이다. 나라 전체의 운명이 소련의 경우만큼 정부의 손에 집중되어있는 체제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자본가 개인의 성공과 실패는 전체는 아니지만 상당히 그리고 때때로 결정적으로 개인의 자질에 달려 있다. 변화된 상황을 감안해도 자본가가 자신의 기업과 맺는 관계를 소련 정부는 국가경제 전체에 대해 맺고 있다. 국가경제의 중앙집중화된 성격 때문에 국가권력은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정부의 정책은 성과의 요약이나 순수 통계수치가 아니라 이 성과들을 달성하는 데 동원된 의식적 예측과 계획된 지도력의 구체적인 역할에 비추어 판단되어야 한다.

소련 정부가 좌충우돌의 정책을 취한 이유는 상황의 객관적 모순 뿐 아니라 이 모순을 제때에 이해하고 이것을 사전에 예방할 지도력의 부족 때문이다. 당 지도부의 오류를 회계장부의 차원에서 정확히 평가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좌충우돌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규명하면 당 지도부가 총경비의 측면에서 소련 경제에 엄청난 부담을 가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론적 내용이 가장 빈약하고 오류를 가장 많이 저지른 분파가 다른 분파들을 제치고 무제한 권력을 손에 넣게 된 이유와 방법은 이성을 통해 역사를 판단할 경우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이 저서에서 전개될 더 많은 분석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열쇠가 주어질 것이다. 동시에 전제적 지도부의 관료적 방식이 경제적·문화적 요구와 어떻게 더욱 날카로운 모순을 일으킬 것인지 그리고 어떤 필연에 의해 새로운 위기와 불안이 소련의 앞날에 돌출할 것인지를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관료집단이라는 이중적 현상을 다루기 전에 이 문제에 답해야 한다: 지금까지 소련 체제가 달성한 성공의 순 이득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소련에서 정말 사회주의가 달성되었는가? 아니면 더 조심스러운 질문을 이렇게 던질 수도 있다: 특정 발전단계에서 자본주의 사회는 그 동안 이룬 성과를 통해 농노제나 봉건제의 복귀를 완벽하게 봉쇄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룩된 소련의 경제적·문화적 성과는 자본주의 복귀라는 위험을 확실히 봉쇄할 수 있을까?

 

사진 및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왼쪽의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용량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