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공산주의자2018.06.11 15:32

 

변증법적 유물론의 근본 원리

수바린(Souvarine)처럼 썩을 대로 썩은 회의론자들은 변증법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자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뭔가를 배우려고 하는 "맑스주의자들"이 있다. 이런 맑스주의자들은 [월간 현대](Modern Monthly)의 지면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지금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소수파 내부에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악성 전염병에 걸리지 않도록 청년 동지들에게 경고하는 것이 지금 필요하다.

변증법은 소설같은 허구도 아니며 신비주의도 아니다. 사고 형식의 과학으로서 일상적인 문제들뿐만 아니라 좀더 복잡하고 과정이 장기화된 사물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변증법과 형식논리학 사이의 관계는 고등수학과 하등수학과의 관계와 비슷하다.

여기서 아주 간략하게 문제의 핵심을 제시해 보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순 삼단논법은 "갑"은 "갑"과 같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이 가정은 수많은 인간의 실제 행동과 초보적인 일반화 작업의 공리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갑"은 "갑"과 같지 않다. 이 두 글자를 렌즈로 비추어 보면 이 점은 쉽게 증명된다. 이 두 글자는 크게 다르다. 그러나 여기서 반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글자의 크기나 형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이 글자들은 설탕 1파운드와 같이 같은 양을 나타내는 상징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등등. 그러나 이 반대 의견은 논점을 벗어나고 있다. 실제로 설탕 1파운드는 설탕 1파운드와 결코 같지 않다. 좀더 세밀하게 측정하는 저울은 언제나 이 차이를 보여준다. 다시 여기서 반대 의견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설탕 1파운드는 자기 스스로와 같지 않은가? 그런데 이 의견도 사실과는 다르다. 모든 물체의 크기, 무게, 색깔 등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물체들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여기에 대해서 궤변가는 이렇게 반대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다: 설탕 1파운드는 "특정 순간에" 자기 자신과 같을 수 있다. 이 "공리"의 지극히 의심스러운 실제적 가치는 논외로 치더라도 이 공리는 이론적인 비판에 견딜 수 없다. "순간"이란 말을 정말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만약 이 순간이 극미한 시차라면 설탕 1파운드는 이 "순간"에 어쩔 수 없이 변할 수밖에 없다. 혹시 이 "순간"이란 것이 0시와 같이 순전히 수학적인 추상적 개념은 아닌가? 그러나 모든 것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 존재 자체가 곧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이다. 따라서 시간은 존재의 기본 요소이다. 따라서 "갑"이 "갑"과 같다는 공리는 사물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즉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신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뜻 보면 이러한 "세세한 논리들"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논리들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지금까지 얘기한 "갑"이 "갑"과 같다는 공리는 모든 지식의 출발점인 것처럼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모든 오류의 출발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이 공리는 특정 한도 내에서만 아무 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갑"의 양적인 변화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일에서 무시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공리는 인정될 수 있다. 설탕 1파운드를 거래할 때가 바로 이런 경우에 속한다. 태양의 온도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주 최근까지 달러화의 구매력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특정 한도를 넘어선 양적인 변화는 질적인 변화로 바뀐다. 물이나 등유에 담긴 설탕 1파운드는 더 이상 설탕 1파운드가 될 수 없다. 회사 사장이 가지고 있는 1달러는 단순한 1달러가 아니라 이윤추구의 도구가 된다. 양이 질로 변화하는 결정적인 시점을 제때에 파악하는 것은 사회학을 포함하여 모든 지식 분야가 해결해야할 중요하며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이다.

완전히 똑같은 두 개의 물건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동자들은 누구나 이것을 알고 있다. 원추형 베어링을 정교하게 다듬는 과정에서 약간의 오차는 인정된다. 그러나 이 오차는 정해진 한도를 넘어서면 안된다. 이 오차 허용치 안에 들어오는 원추형 베어링은 모두 같은 것으로 인정된다. 그런데 이 오차 허용치를 넘어서면 양은 질로 나아간다. 즉 원추형 베어링은 품질이 떨어지거나 아주 못쓰게 된다. 과학적 사고는 기술 분야 등과 같은 실제 활동에서 사용되는 사고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갑"이 "갑"과 같다는 공리는 형식 논리의 출발점이다. 모든 것은 언제나 변화한다는 공리는 변증법적 논리의 출발점이다. 이 변증법적 논리에 의해서 정해지는 "오차 허용치"가 개념들을 규정하는 데에 사용된다. "상식"은 변증법적 "오차 허용치"를 체계적으로 초과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 사고 즉 상식은 자본주의, 도덕, 자유 , 노동자국가 등과 같은 개념들을 고정된 추상적 개념으로 보면서 논리를 전개한다. 이 결과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와 같으며 도덕은 도덕과 같다는 식으로 가정한다. 반면에 변증법적 사고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을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분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들 속에서 "갑"은 더 이상 "갑"이 아니며 노동자국가는 더 이상 노동자국가가 되지 않는 결정적인 시점이나 한도를 결정한다.

일반적 사고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현실이 남긴 고정된 흔적에 만족하고자 한다. 바로 여기에 일반적 사고방식이 갖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변증법적 사고는 좀더 면밀한 파악, 교정, 구체화 등을 통해 개념들에게 풍부한 내용과 신축성을 부여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살아 움직이는 현상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개념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준다. 즉 일반적인 의미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특정 발전단계의 자본주의를 제시한다. 일반적인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제국주의 세력들에게 포위된 후진국 러시아의 노동자국가를 제시한다.

변증법적 사고와 일반적 사고의 관계는 움직이는 화상과 정지된 사진의 관계와 같다. 움직이는 화상은 정지된 사진의 법칙을 넘어서지 않는다. 다만 정지된 사진들을 운동의 법칙들에 따라 결합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변증법은 삼단논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삼단논법들을 결합시킨다. 헤겔은 [논리학](Logic)에서 일련의 법칙들을 수립했다. 양의 질로의 전화, 모순을 통한 발전, 가능성의 불가피성으로의 전화 등등. 단순 삼단논법이 좀더 기초적인 작업들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만큼 변증법적 법칙들은 이론적인 사고를 위해 중요하다.

헤겔은 다아윈과 맑스보다 한 세대 앞서 살았던 인물이다. 프랑스 혁명이 사상에 강력한 원동력을 제공한 덕분에 헤겔은 과학의 일반적 발전과정에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비록 천재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첫걸음이었기 때문에 이 첫걸음은 헤겔에 의해서 관념적인 성격을 부여받았다. 그는 관념의 그림자들을 궁극적 현실로 잘못 바라보았다. 그러나 맑스는 이 관념적 그림자들의 운동이 물질세계의 운동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변증법 앞에 유물론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이유는 이 사고 방식의 뿌리가 하늘나라나 "자유의지"라는 심오한 영역이 아니라 객관적 현실 즉 자연에 있기 때문이다. 의식은 무의식에서, 심리학은 생리학에서, 유기 세계는 무기 세계에서, 태양계는 성운으로부터 나왔다. 물질의 모든 발전단계에서 양적인 변화는 질적인 변화로 탈바꿈했다. 변증법적 사고를 비롯한 우리의 모든 사고는 변화하는 물질의 표현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이 물질환경 내에서는 신 , 악마, 불멸의 영혼, 법과 도덕의 영원한 기준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고의 변증법은 자연의 변증법에서 나왔기 때문에 철저하게 물질적 성격을 띤다.

다아윈은 종의 진화를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설명함으로써 유기체 분야 전체에서 변증법의 가장 위대한 승리를 구가했다. 한 원소가 다른 원소로 변모한다는 사실과 원소 주기율표가 발견된 것도 역시 변증법의 위대한 승리를 의미했다.

사회과학에서와 같이 자연과학에서도 분류의 문제는 종과 원소 등의 변모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8세기에 창안된 린네(Linn )식 체계는 종의 불변성에 기초하여 작성되었기 때문에 외형적 특징에 따라 식물들을 묘사하고 분류하는 데에 머물렀다. 식물학의 유아기는 논리학의 유아기와 흡사하다. 왜냐하면 사고 형태들은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처럼 변화 발전하기 때문이다. 종이 불변한다는 사고가 결정적으로 반박되고 식물 진화의 역사와 식물 해부학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진정한 과학적 분류법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다아윈에 비해 맑스는 의식적으로 변증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생산력의 발전과 소유관계의 구조를 통해 인간사회를 과학적으로 분류하는 방식의 기초를 발견하였다. 그는 현재까지도 대학사회에서 풍미하고 있는 사회와 국가에 대한 대개의 분류법 대신 변증법적 유물론에 근거한 분류법을 창안하였다. 노동자국가의 개념과 이 국가의 붕괴 순간은 맑스의 방법론을 통해서만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쉽게 알 수 있듯이 이러한 변증법적 사고에는 "형이상학적"이거나 "현학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자만에 가득 찬 무식한 인물들은 이렇게 오해하고 있다. 변증법적 논리는 현대의 과학 사상을 통해 운동의 법칙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서 변증법적 유물론에 반대하는 투쟁은 까마득한 과거, 쁘띠부르조아의 보수주의, 대학교 분위기에 물든 인물들의 자만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희망의 깜빡거림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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