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잔트가르
15.10.15
조회 수 327
추천 수 10
댓글 4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을 공동개최했던 것이 2002년이었다. 그 해 6월 한 달 동안 붉은 옷을 입은 응원단이 거리를 뒤덮었다. 사람들은 모두 “아 대한민국”을 외쳤다. 사람들이 외친 것은 국호였지만, 그것이 어떤 국가주의의 표현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거기에 배타적 감정 같은 것은 없었다. 이방인들을 차별하거나 폄하하려는 생각도 없었다. 한국 사람이 아닌 사람도 그 대열에 끼어들고 싶어 했으며, 그렇게 끼어든 사람을 막는 사람도 없었다. 거기에는 오직 대범하다고 말해야 할 ‘행복의 표현’이 있었다. 일상의 근심을 잠시 잊어버리고 인간관계의 속박에서 풀려난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해방된 생명력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서로서로 다른 사람 안에서도 억압을 이겨낸 생명력을 확인하고 그 개화를 축하했다. 사람들은 제 옆에 있는 사람을, 낯모르는 사람이라도 서로 껴안았다. 이 순결한 열광은 열광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기쁘게 했다. 나와 똑같은 사람들의 생명력이, 다시 말하면 바로 나의 생명력이 거기서 꽃피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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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2002년 바로 그 해에 어느 칼럼의 첫머리에서 목격담의 형식으로 썼던 글을 놓고, 몇 개의 문장을 빼고 다른 문장을 덧붙이기도 하면서, 회고담의 형식으로 다시 고쳐 쓴 것이다. 내가 10년도 더 전에 썼던 글을 이런 방식으로 다시 돌이켜보는 것은 그 칼럼의 끝에 썼던 한 문단이 갑자기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 거리의 공동체가 4·19 이후 조국의 민주화를 향한 오랜 항쟁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나도 이 의견에 적극 동의한다. 지난 80년대의 6월 항쟁 때도 이 응원인파 못지않은 물결이 거리를 덮었다. 우리에게는 우리 힘으로 압제에서 나라를 구한 역사적 기억이 있으며, 이 기억 속에서 우리는 나와 이웃의 힘을 믿는다. 우리 선수들의 악착같은 투지도, 패한 경기에도 주눅들지 않는 응원단의 정신력도 서로의 힘을 긍정하는 이 믿음이 없이는 성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옆 사람을 끌어안는 우리에게서 거대한 문화 하나가 솟아나고 있다. 이 문화와 역사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분명하게 “이 문화와 역사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썼는데, 어떤 희망을 표현한다기보다는 예언을 한다는 것이 당시 내 속마음이었다. 이제 그 예언은 헛말이 되어버린 것 같다. 문화는 거기서 더 성숙하지 못한 것 같고 역사는 거꾸로 되돌아간 것 같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나이에 들어선 젊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세대를 가리켜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3포세대라고 부른다. 연애를 포기했다는 것은 지금 이 시간의 행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며, 결혼을 포기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행복을 가능한 행복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겨를도 욕망도 없다는 뜻이며, 출산을 포기했다는 것은 미래에도 내내 행복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뜻이다. 자기 세대의 특징을 ‘포기’로 표현해야 하는 젊은이들은 한국을 가리켜 ‘헬조선’이라고 부른다. 그들에게 이 나라는 지옥이나 다름없다.

저 2002년의 ‘아 대한민국’과 2015년의 ‘헬조선’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두 시점 사이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이 그 차이를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을 연도별로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최근에 일어난 몇 가지 사건이 그 전체를 요약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와 고영주 방송문화진흥위원회 이사장의 공산주의자 감별사건, 그리고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국가지원단체인 한 기관의 공공연한 검열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건들은 각기 따로따로 일어난 것이지만 공통된 성격을 지닌다.

고영주씨가 민주화 운동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던 정치인들을 지칭해 ‘변형된 공산주의자’ ‘전향한 공산주의자’ 같은 말을 사용할 때, 이는 어떤 개인에 대한 명예훼손이나 모욕을 넘어 민주화운동 전체에 대한 폄훼인 것을 모를 사람이 없다. 이를 우연한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일베 등에 의해 산발적으로 머리를 내밀던 민주화운동에 대한 모욕적 언사가 한 국가기관 대표자인 공인을 통해 토론불가의 공식적 표현이 되는 현장을 우리가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검열 또한 그렇다. 이는 인간의 상상력에 새로운 창을 열고 삶의 전망에 새로운 길을 내려는 예술활동까지 단일한 목소리로 통제하려는 의도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위에 역사교과서의 국정화가 있다. 지난해에 우익수구 인사들이 앞장서 만들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던 한 역사교과서의 예에 비추어볼 때, 국정 역사교과서가 어떤 내용을 담게 될지는 불을 보듯이 뻔하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의 역사 전체를 모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통합의 미명을 빌려 토론 자체를 불순한 것으로 여기는 어떤 감수성을 형성하려 할 것이다. 토론이 없는 곳에서는 저항은커녕 이의제기도 용납되지 않는다.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에는 프랑스 복고왕정 시대의 한 풍속도가 나온다. 대혁명으로 빼앗겼던 권력을 탈환한 귀족들은 토론하지 않는 방식으로 토론을 금지시킨다. 소설의 주인공 줄리앙 소렐은 천민 출신이지만 뛰어난 두뇌로 부상하는 새로운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 된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그 시대 최고권력자의 한 사람으로 그려진 라몰 후작의 비서로 일하며 수많은 귀족들을 만난다. 소렐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토론을 개시하려 하지만 귀족과 고관대작들은 접시에 코를 박고 묵묵부답하며 음식을 먹을 뿐이다. 그들은 지금 권력을 장악하고 있지만, 자기들의 몰락이 임박했으며, 토론이 그 몰락에 속도를 덧붙일 것임을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감을 가진 자만이 먼저 말을 걸고 먼저 토론을 시작한다.
?

사람들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사는 세계를 지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지옥은 진정한 토론이 없기에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곳이다. ‘아 대한민국’과 ‘헬조선’ 사이에서 사라진 것은 토론과 그에 따른 희망이다. 지옥에 대한 자각만이 그 지옥에서 벗어나게 한다. ‘헬조선’은 적어도 이 지옥이 자각된 곳이다. 그래서 나는 내 예언을 철회할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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