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세계적인 선진국 중 하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보다는 약간 뒤쳐져 있는것 또한 사실이다.
그 이유는 다른게 아니라 과거 중상주의와 식민지 개척 정책이 대세이던 17~18세기 초중반에 일본은 쇄국정책과 억상책으로 시대를 역행하는 정책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당시의 유럽은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 발견 및 개척 그리고 자국의 상공업을 발전시키는 중상주의 정책으로 자국에 막대한 금과 은을 유입시키고 있었고 그것으로 자국의 상업과 공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일본은 정확히 그 반대로 갔다.
1500년대 후반부터 들어온 천주교에 의해 막부의 기득권이 위협받게 되자 (천주교 역시 일본에서 처음 전도가 시작되었을때 "인간은 신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 라는 말로 시작했다. 게다가 불교가 주류 종교였던 일본에서 유일신을 주장하는 천주교는 불교에게도 심각한 위협이었다) 일본은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게 된다.
특히 포르투갈 상인들 또한 일본에서 천주교를 전파하는데에 적극적이었고 일본은 천주교에 대한 무력탄압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자 일본에서는 시마바라의 난이라고 하는, 천주교 신자인 영주, 사무라이, 농민, 상공인계급이 연합한 대봉기가 발생하게 되고 이 봉기는 도와주러 와야할 포르투갈군대가 어찌된 이유에서인지 지원을 안와서 패배했지만 일본은 이것은 계기로 해외세력 자체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게 되고 천주교신자들을 대량학살함과 동시에 쇄국정책을 국시로 지정하게 된다.
더욱이 시마바라의 난에서 포르투갈과 무역을 하는 상인들도 가담했던 이유에서인지 억상책 즉 상업을 억제하고 농업을 중시하는 경제정책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이때가 하필이면 유럽에서는 위에서 말한 중상주의와 식민지개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대였다는걸 고려하면 일본의 이러한 방침은 시대를 역행하는 시대착오적인 어리석은 행위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유럽에 비하면 경제측면에서 약간 뒤쳐지게 된다. 그 증거로 1800년대 초반쯤에 유럽에서는 어지간한 나라에는 상공인과 금융가 계급뿐만이 아니라 변호사 회계사 의사 언론인 같은 근대적 화이트칼라 계급도 초보적 단계로나마 생겨났고 근대적인 대학 등의 교육기관까지 있었지만 일본에는 이런것들이 없었고 상인계급과 금융가계급 그리고 규모가 큰 메뉴팩처 까지만 있었던 것이다.
그 덕분인지 일본의 근대화 즉 시민혁명은 1868년으로 훨씬 늦어지게 된다. 유럽에서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에 비하면 무려 70년 가량이나 늦어진 것이다.
일본이 만약 17세기에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대외정책에 더욱 적극적이고 개방적으로 나갔다면 일본 또한 마찬가지로 1800년대 초반에 시민혁명이 일어날 정도로 즉 메이지유신이 무려 60년 빨리 일어낳 정도로 훨씬 발전했을 것이며 한일합방도 빨라져서 조선의 문명개화와 근대화도 더욱 앞당겨졌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동화정책도 지속되어서 지금쯤 우리는 현대 헬조선이라는 최악의 지옥이 아닌, 일본의 조선현에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일본은 1940년대에 들어가면 1946년부터 조선인 대상으로 의무교육과 조선인 참정권 부여까지 실시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는 점을 유의하자)
그것도 더욱 철저히 100% 서구화된 일본의 조선현에서 살고 있었을 가능성도 무시못한다.
이렇듯 일본이 막부시절 실시한 쇄국정책과 억상책은 일본의 발전을 유럽에 비하면 약간 지연시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일본은 대단한 저력과 잠재력을 지녔던 문명선진국이라는게 다시 한번 드러나는 증거들이 곳곳에 있다.
그 중 하나가 임진왜란 쯔음에 일본에서는 이미 노예제가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인구의 무려 절반이 노비였고 갑오경장 이후에도 30%의 인구가 노비였다는걸 생각하면 일본의 노예제는 엄청나게 빨리 폐지된것이고 이는 시대를 앞서나간 발전이다. 시민대혁명의 고향인 프랑스에서 농노제가 폐지된것이 대혁명 시기에 이르러서 였다는걸 감안하면 쇄국정책과 억상책 이전의 일본은 서구를 앞서나간 발전경로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억상책 즉 상업에 대한 온갖 규제와 제한 그리고 막부정부의 질서없고 일관되지 못한 통화정책 등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상업은 꾸준히 발전해나가고 있었다. (억상책이 없었을 경우 그보다 훨씬 더 빨리 발전할 수 있었을 가능성은 일단 배제하고 말이다. ) 그 덕분에 겐로쿠 호황이라는 막부 시절의 최고의 호황 역사시기까지 맞이할 수 있었다. 일본의 동아시아에서 제일 앞서나가는 상업은 막부의 억상책과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발전해나간 것이다.
만약 일본이 쇄국정책과 억상책이 아닌 개방정책과 식민지 개척 정책 그리고 중상주의정책을 적극 추진했더라면 일본의 상공업은 어느 수준까지 놀라운 수준으로 발전했을지 짐작이 가지 않은가?
또한 쇄국정책시기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난학 (서양의 과학 기술 의학 등등의 당시의 서양학문의 총체)을 들이고 스키타 겐파쿠가 사형수의 시체를 해부하고 해부학을 일본에서 번역 정립했으며 일본의 독서율은 백성들의 절반 가량이 되었다는 것은 일본의 학문적 기술적인 개방정과 발전정도가 아시아에서 그때도 이미 최고급이었다는 것을 의문의 여지없이 보여준다.
조선은 500년내내 상업이란 상업은 아예 없었고 오직 유교탈레반 근본주의 하나와 기껏 들어온 서구기술들도 왕의 권위를 해치니 오랑캐의 해괴한 물질이니 하며 배척한 결과 근대화도 지들 스스로의 힘으로 못하고 일본을 통해서야 겨우겨우 할 수 있었고 스스로 근대화를 추진하거나 조금이라도 외래문물을 들여오려고한 개화파들은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것을 그것도 외래문물과 체제변화의 가장 큰 수혜자들이 될 조선의 피지배층들에 의해서 개화파 선각자들이 죽임을 당했다는걸 고려해본다면 아무리 일본이 쇄국정책과 억상책으로 유럽보다 발전이 약간 뒤쳐졌다한들 조선이라는 진화가 되다말은 미개인들이 우글거리는 야만국과는 비교가 안될정도로 훨씬 앞서나간 국가였고 지금도 그렇다는것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즉 이렇게 해서 일본은 서구보다 약간 뒤쳐졌으면서도 놀라운 저력과 잠재력을 가진 문명선진국이었고 문명선진국이며 조선 따위의 쓰레기 미개국과 비할바가 절대 아니라는걸 알 수 있다. 일본의 놀랍고 위대한 저력은 일본 한곳에만 머물지 않고 이웃국가인 조선과 대만까지도 퍼져서 조선,대만의 문명개화와 발전까지도 주도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