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난 처음에는 좀 아집을 못 버려서 니가 허수아비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나도 뭔가 위화감이 있었고, 특히 내가 알고 있는 사료적인 진실과 뭔가가 심각하게 불일치하는 것 같다.
여기서의 사료적인 진실이란 너도 아는 거지만.
대부분의 고려및 신라에 관한 기록및 한국문명권에서 창조된 기록유산들은 조선조의 것이다. 거진 99.99프로. 팔만대장경정도 빼고.
뭐 정작 팔만대장경도 다 만들 쯤에는 조선조로 왕조가 바뀐 것 같지만.
둘째, 향찰은 극히 자료가 적다.
셋째, 한자어는 신라대와 고려대에 그다지 잘 정착하지 못했다. 이 것은 첫번째 주장과도 상통하는 것인데, 신빙성은 조금 떨어지지만 기록상으로는 당식 manner를 완벽하게 익힌 최치원이는 신라골품제내에서는 거의 찐따를 당한 사실이나 고려때에조차 애새끼들이 한자를 못 써서 임금이 받아쓰기했다는 기록은 있다.
자, 여기서 아주 근원적인 의문이 나와. 왜냐면 귀족들이나 상류들 새끼들이 계급적인 집단폐쇄성을 위해서 별도의 언어사용그룹이 될 수 있는데, 이 때의 언어는 뭐 일반대중과의 접점은 전혀 없는 것이 될 수 있지. 예를 들면 프랑스어를 사용한 러시아지배계급들처럼 말이다.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반절의 당운이 당대에 채택된 것이라는 상식조차 거부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즉, 타당한 질문은 그렇다면 왜 당운이 사용되는 신라조의 한자어기록물은 극히 적냐는 것이다. 그 것은 그 것들이 신라때에 전혀 채택되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엘리트계급 전체가 아닌 당에 파견되는 사신이나 당에 임용된 자들과 같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 외에는 전혀 애초에 신라라는 미개 한인 문명이 한자조차 제대로 도입했냐는 문제라는 거다.
그 것은 고려조차 그렇다는 것이고.
즉, 애초에 설문해자와 같은 책 자체를 조선지배계급이 가져다가는 당어를 복원해서는 제정러시아의 귀족들마냥 폐쇄고립어로 쓴 것 같고, 그러한 차원에서 조선조한문문학의 양적인 문제의 스펙트럼을 극복해야 될 것 같고, 그게 당어라고해서 당나라 때의 한반도 정권인 신라와 결부되는 그 것부터도 의심해 봐야 하는거다.
즉, 그 것은 사대적인 조선지배계급들이 본디 여진-몽골계나 몽골계 권문세족으로써 조선지배계급이 대다수의 한인들에게 둘러쌓인 고립된 처지에서 그들의 집단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자어고문체계로부터 아주 요상한 시스템을 만든 것 같고, 애초에 한국식 한자어가 당대발문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들 그 것들은 귀족새끼들의 고립정체성과 관련된 아주 특별한 목적에 의해서 그들이 선민사상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 만큼 그 것들은 한국인들의 언어발전과정과는 전혀 무관한 그들만의 세계로 이해될 필요가 있는데, 정작 그 것들이 오래된 기원으로 가야 하는 근거가 없고, 대부분의 한자어 문학들은 조선조이후에 발생했다는 거다.
그렇다면, 최치원이 좌절을 느끼던 신라때에는 한자어를 제대로 쓰기나 했을까? 이 것이 비관스럽다는거다.
되려 신라조에는 걍 이런 것 같애. 최치원이 좀 당에서 배웠다고 그러니까 신라귀족들 까막눈들이 경북사투리로 '씨발 좃까네.' 그런 반응밖에 못 얻었고,애초에 그렇다면 당운에 의한 한자가 신라에 별루 들어가니나 했냐면 씨발 존니 비관적임이라는 기다.
심지어 애초에 그렇다면 삼한이나 신라조의 예서한자는 왜 있냐면, 그 것은 통치용의 관어로써조차 채택된 적이 없고, 명문이라는 것은 걍 무덤에 지방이나 써주고, 뭐 그러던 용도였던 것 같다는거다.
그래서, 고대왕들의 묘지에는 분명히 한자가 발견되지만, 그 것을 바탕으로 한자어가 과연 신라조나 고려중기이전에 별루 쓰였는지는 존니 의문이라는 것임. 관명따위가 한자어로 발견 되는 것도 현실적인 행정업무를 위한 것 보다는 명문을 써주기 위해서 대충 비슷한 발음인 한자어를 아주 특수한 제사장계급에게서만 존니 물어물어서 쓴 것 같다. 그러한 것은 조셍징들의 제사질에서도 발견되는 행태이다.
그러니까 국강상광개토대왕 묘문 이런거 한자로 쓸 때는 걍 중국업자 데려다가 물어서 쓰고, 걍 그렇게 중국의 좋은 글자로 이름 써서 보내주는게 명복빌어주는 거라고 생각했던 종교적인 용도 그 이상을 고대에서 생각하기 어렵고, 통치자료도 별루 발견되지 않는다는 거다.
민정문서따위는 존나 단순한 몇가지 한자로 쓸 수 있으니까 썻다손쳐도 뭐 하나, 둘, 셋, 넷 이랑 밭떼기랑 논이랑 장정수랑 가스나수랑 뽕나무 뭐 그런거적는데, 한일, 두이, 석삼, 밭전, 그런 존니 초딩한자만 정착되었고, 그 이상이 없는 상황이라는거다.
한국문명의 최초의 소설이 언제꺼지? 구운몽이잖아. 김만중(1637~1692년)의 생애는 심지어 임진왜란보다 뒤에요.
즉, 겨우 당음한자어가 조선조에 집중적으로 보급되는 추이라면, 되려 한자어를 굳이 당식으로 리컨스트럭트한 짓거리는 조선조 엘리트들이 평양의 중국과 거래하는 천민상인들과 차별적으로 놀려고 그 지랄을 한 것 같으며, 특히 설문해자와 같은 책이 한국유학자들에게 언제 연구되었을지를 조금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예의 훈민정음을 만든 집현전 학자들이나 훈구파들이 또한 그 책들을 읽고는 당조고음을 때아닌 시대에 재건해서 썼을 가능성도 무시못한다는 거다.
그렇게 본다면, 인서울지배계급의 아주 좃같은 폐쇄성만이 도출되며, 한국문명은 역시나 그다지 발전못한 쌀먹이들의 원시공동체사회라는 것이 토지측량과 토지사유화가 일어난 일본총독부의 그 행정이전까지는 줄곧 다수의 한국 commoner들은 그러한 공동체사회에서 아주 특수한 문화행태를 공유하는 북방계지배계급의 착취짓을 떠안으면서, 원시공산공동체사회인 마을이라는 것에 소속되어서 거기서 한 번 태어나면 거기서 뒤지는 그런 인생을 산 것 같아요.
그러므로, 반절의 단일화? 그런 것조차 역시나 조선과 결부짓지 않고는 안 될 것 같다.
되려 일본의 히라카나를 고려한다면, 신라때는 一라고 적고 하나라고 읽고, 일이라는 당운은 없었던 것 같다. 아니면 당나라 유학파들같은 극소수만 알고 있거나.
다시 말하지만, 신라새끼들이나 고려새끼들은 너무 촌동네 병신들이라서 고려중기까지도 상위1프로 금수저새끼들조차 지방호족새끼들이 개성에 올라가면 한자 저게 뭐하는 건지 첨보는 새끼들도 있는 판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러한 판에서 한자어 문학이라는 것도 전무했고, 뭐 존니 단순한 한자로 민정문서나 작성했다는 게 신라-고려왕조의 한자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운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조차 훈민정음 만들려고 하면서 설문해자와 같은 거 몇 개 보고는 뭐 대충 배워나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그보다 조금 전 세대인 권근이나 정도전은 원대의 과거시험 따위에 응시하려고 하던 아주 특수한 새끼들이거나 팍스 몽골리카에 대응하던 카운터파트가 되던 몽골계 지배계급으로 간주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