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전에 역사적 사건 하나에 대해 간단히 언급을 하나 해야겠습니다.
테르미도르 반동 : 1794년 7월, 프랑스 대혁명을 영도하여 승리로 이끈 급진파 혁명세력인 산악파 정부와 그들이 실시한 혁명적 독재가 쿠데타로 무너진 사건. 봉건적 질서가 완벽히 깨지고 부르주아지들과 그들의 질서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더는 혁명적 독재가 필요없어진 부르주아지들과 대중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혁명적 독재가 무너지고 입헌적 자유정부가 설립되었고 이 시점 이후 잠시의 혼란을 거친 뒤 부르주아적 질서와 체제의 발전이 더욱 가속화했음. }}
일제시대 초기 총독부 혁명정부가 폭군 고종을 독살 방식으로 처단한 것을 계기로 대중소요가 일어났는데 바로 흔히들 잘 아는 3.1 만세 사건 입니다.
한일합방 직후 양반과 유생 계급 그리고 아직까지 봉건의 미망에 사로잡혀서 반문명화 폭동을 일으키는 수많은 무지몽매한 피지배층 벌레떼들을 억누르고 부르주아 혁명의 성과를 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부르주아적 질서에 맞게 법, 제도, 관습 등등을 원활히 바꾸기 위해서 총독부는 무단통치 라는 이름의 혁명적 독재체제로 정부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총독부의 혁명적 독재는 그들의 의도대로 봉건적 반동을 억누르고 신분철폐 등의 성과물을 지키고 기존 봉건적 특권층인 양반들의 특권을 박탈했으며 토지조사사업 등으로 봉건적 경제체제를 근대적 시장경제로 전환시키고 무당치료, 면신례 등의 각종 봉건적 구습과 미신 등을 타파하는 등등의
봉건 질서를 깨부수는데에 전력을 기울여 혁혁한 성과를 올렸지만 문제는 봉건 질서가 깨어지고 반혁명세력의 봉건적 폭동이 점점 줄어듬에 따라 점차 혁명적 독재의 정당성이 약해지고 그 독재를 참을 수 있는 한도가 끝에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찰나에 피지배층들에게 아직까지 남아 있던 봉건적 의식이 고종 처단 사건과 겹치면서 3.1 사건이 터져버린 겁니다.
고종 처단 자체는 분명히 총독부 혁명정부의 혁명적 조치였고 역사의 진보 그 자체였지만 이것이 아이러니하게도 테르미도르의 반동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어버린거죠.
이 3.1 테르미도르 반동을 주도한 세력들이 대부분 조선의 유산계급 즉 부르주아에 속한다는 것이 참 의미심장하군요. (이들 또한 분명히 총독부 혁명정부가 설립한 부르주아적 체제의 수혜자들이죠.)
이 이후 무단통치 라는 혁명적 독재가 무너지고 문화통치 라는 이름의 입헌적 자유정부와 유사한 형태로 총독부가 국정운영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프랑스의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성직자 및 교회 등의 봉건적 구습에 대한 공격이 중단되었듯이
조선의 3.1 사건 이후에도 무당치료나 잡종 종교의식 등에 대한 공권력 규제가 중단됩니다.
하지만 문화통치 라는 이름의 입헌적 자유체제가 시작되었다는건 나름 의미가 있고
따라서 일제시대도 프랑스 대혁명 등을 비롯한 모든 시민혁명과 똑같이 혁명적 독재 ->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라는 패턴을 밟았다고 보면 됩니다. 그 기점이 바로 3.1 만세 사건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