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유교가 가진 통치규범에 관한 그 모든 것은 동양전제왕조의 제사장계급의 시뮬라르크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동양역사전체에서 아니 동양이라기 보다는 중국역사내에서 황제라는 것은 이집트의 파라오나 아즈텍황제와 같은 것으로 줄곧 다루어졌으며, 중국에서 그러한 황제라는 것은 파라오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써 신이었다고 인지해야 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는 오로지 황제는 황제일 뿐인 절대적인 존재였고, 죽은 뒤에는 조자 종으로써 추존된 뒤에 대대손손 제사를 받아먹는 우상으로써 섬겨졌던 것이다.
이는 유럽과 이슬람세계에서는 마지막 헬라-이집트계 왕조인 프롤레미(프롤레마이오스)왕조가 로마인들에게 멸망당한 기원전 30년 이후에는 절멸된 체제이자 불역한 종교로써 그 것은 서양세계에서는 참을 수 없는 미개로써 이미 오래전에 규정된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다소 바바릭한 보복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이집트가 최종적으로 이슬람화된 이후에 바로 그러했던 파라오들의 하수인들이던 유학자들과 같은 콥트교도들은 이슬람인들에게 대대손손 보복을 당하게 된다.
이유는 콥트교도들이 행여나 크리스챤인줄 아는 등신들이 있는데, 콥트교회나 정교회는 바로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한 가짜 유대인들인 헬라인새끼들이 컨셉만 가지고 가서 만든 가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방정교회는 사실상 또한 파라오숭배와 같은 동로마황제에 대한 숭배사상으로 변질되었고, 콥트 교회또한 헬라새끼들과의 교잡이 분명한 지점이 있기 때문에 이 것은 이단적인 것이다.
왜냐면 바로 성경에서 가장 증오하는 지명인 바빌론이라는 것이 아랍인들의 바빌로니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헬라인인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의 수도였던 바빌론을 말하는 것이고, 이들 헬라계 왕조들이 바로 또한 이집트 파라오와 마찬가지로 신격화된 지도자를 숭배토록하는 제정일치의 미개한 전제왕조를 세웠기 때문에 그들은 저주받는 것인데, 동로마제국은 형식상으로는 로마제국의 후예를 자청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제정이집트와 헬라제국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소싯적에 프랑스들이 roms적인 것이라고 폄하하던 로마제국적인 타락상인 내시새끼들과 후궁, 첩년에 의해서 아주 더러운 판떼기가 벌어지는 그 것 또한 고대로마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동로마제국과 루마니아새끼들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전제왕조적인 것이라는 것은 아주 좃같은 타락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고, 이는 또한 불과 전세기까지만해도 그들의 지배를 받았던 현대한국인들은 우리가 가진 참된 역사성을 통해서 적어도 지금 세대들은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 것은 민비라던가 임오군란, 세도정치 이러한 단어들로써 유전되는 역사성인 것이다.
콥트교도새끼들이라는 것도 로마제국의 알렉산드리아의 교구를 표방했지만 실은 로마 멸망 이후에 북아프리카와 이집트를 철권으로써 지배했던 반달족새기들과 맞아떨어져 있는 것이고, 그래서 대대손손 박해를 받은 것이다.
반달족들의 만행에 대해서는 그 지역에서는 꽤나 악명높은 사건으로써 천년넘게 기억되는 희대의 폭정으로써 지금도 북아프리카와 이집트의 이슬람사람들에게 역사성으로써 각인되어 있는데, 콥트교 새끼들이 하필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에요.
자 동양으로 다시 와서, 동양전제주의는 때로는 비교적 세속적인 면모를 보일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전제주의적이었고, 황제와 그들이 나라의 제사라고 지내는 황제일가의 조상에 대한 우상숭배외에는 여느 종교를 금지하는 면모를 보였는데, 18세기와 19세기의 그 것이 서양문물의 공격을 받던 청대말기에는 아주 교조적인 입장을 고수하였고, 그래서 수많은 박해자들이 양산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단적으로 비교가 되는 두 케이스가 있는데 중국왕조라고는 해도 여진족이나 몽골족의 북방계지배왕조를 표방하지 않은 명대에는 당시의 카톨릭 사제였던 마테오 리치가 황제와의 접견을 통해서 비록 두 무릎을 꿇는 복종의 표시는 했지만 당시의 명정부는 마테로 리치가 카톨릭교회를 설립하는데 종교교리를 트집잡아서 별다른 태클은 걸지 않았던 반면, 18세기경에 예수회 사제들이 청제국에서 포교를 하려고 할 때에는 천주교의 교의자체가 황제우상을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상들을 불신한다는 명분을 걸어서 포교를 금지하는 케이스가 비교된다.
이 때에 전자의 경우에는 후자의 경우에 비교되어서 마테오 리치의 황제에 권위에 대한 복종의 표시는 단지 세속의 황제에 대한 복종으로써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라는 기독교의 원칙이 위반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될 수있고, 명의 황권에서도 마테오 리치가 어쩌면 내세에서는 황제보다 위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천주라는 존재를 믿을 것을 설파하여도 방치한 것은 당시의 중국황권과 교회간에는 그 것은 세속국가의 중국의 통치인 황제로써 황제는 그상의 종교적인 우상화를 바라지 않는 상태에서 양자는 양립할 수 있었던 반면에 오랑캐새끼들인 미개한 새기들인 여진족 새기들은 그들의 황제가 단지 세속에서뿐 아니라 종교적인 우상으로써도 숭배되기를 바랬기 때문에 청대말에는 기독교와 유교는 양립불과한 것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동양전제화에 대해서 중요한 단서가 있는데, 그 것은 중국의 화인들의 본연적인 부분이라기 보다는 좀 더 미개한 북방계지배계급들이 제사장계급으로 기능하면서 벌어진 것이고, 이 때의 유교는 사실상 그 미개파간전제주의 그 자체로써 통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그러한 북방계들의 지배로 인한 역행, 후퇴로 말미암아서 결코 헤겔적인 시계열에 따른 역사적인 진보가 점진적으로 누적되지 않았고, 지배상황에 따라서 그 것은 되려 시간이 지날수록 심하게 역행하였던 것이다.
단적인 예로써 당대에는 황제의 전제적인 상징으로써의 신격화가 훨씬 덜해서, 네스토리우스교의 교부가 창안에 도달하자 황제가 스스로 그 성직자를 맞이하려고 몸을 낮추어서는 그를 맞이한 기록조차 있는 지경이고, 지금은 티벳불교정도로 열화된 당대의 불교에서는 달라이 라마가 교황격이고, 황제는 단순히 세속적인 지배자를 의미하는 차원까지 당시에만 하더라도 중국은 충분히 합리적인 세속국가였던 것이 후일에는 파간적인 파라오전제황조가 되어 있던 것이고, 그러한 시기에한국왕조역시 곧 그러한 지배구조를 답습하였고, 그 시기가 또한 한국인들에게는 최악의 암흑기였던 것이다.
특히, 신라와 조선의 카운터파트인 당과 청을 비교하면, 신라때의 왕권은 결코 전제주의적이지 않아서 일본의 봉건제나 서양의 봉건제와 같이 사무라이들과 기사들에게 자치를 위임하고, 왕권은 파리나 교토의 주변부만 다스리는 시스템으로써 통일신라시대역시 호족들이 중심이 된 체제로써 그 것은 결코 유교역사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조선왕조처럼 전제화된 적은 절대로 없고, 경주주변부들 역시 집성촌의 후일의 토성을 쓰는 향족들이 대대손손 지배했을 뿐이다.
다만 문무왕이나 무열왕 이런 자들은 프랑스의 왕이나 쇼군들 역시 개개인의 역량과 평판에 따라서 행사할 수 있는 정치력이 틀렸듯이, 무열왕은 다른 대의 왕들보다 많은 정치력을 보유했을 뿐이지 결코 그가 신라의 시스템을 전제화시켰다고 볼 수 없음에도 유교학자새끼들은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이다.
뭐 이를테면 집사부 시중의 권한이 컸다는 부분도 걍 내 상관이 정치센스가 비상하니까 비서도 같이 정치력이 쎄지던 상황이지 그 것은 구조는 아닌 것을 조선왕조적인 전제노예화를 비호하는 구체제 앙시앵레짐학자새기들이 그 것을 체제론적인 것으로 비약한 것이다.
그런데, 그 것이 신라시대는 호족중심의 개망할 체제로써 격하되고, 되려 암흑기인 전제주의의 시대인 조선이 역사적인 진보선상에 있는 것으로 각색하는 것이 저 개새끼들의 근원적인 역사조작인 것이다.
물론 신라시대에는 파라오새끼 제사지낸다고, 농민들 소출의 50~70프로를 삥뜯던 미친 시스템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왕조라는 것은 아주 불역한 파라오왕조로써 왕자신이 제주로써 제사장계급의 수장이며, 사족이라는 것은 또한 제사를 거드는 부나 읽고, 제문이나 낭독하면서, 때로는 시뮬라르크인 유교경전을 가지고 그 개새끼들이 민중들을 걱정해주는 양 하면서, 실제로는 그 제사를 지내는 그 짓거리를 위해서 제수용품을 댄다고 노예들인 신민들의 생산을 극한으로 착취하고, 또한 그 개새끼들 제단짓는 거랑 신격화된 뒈진 왕새끼의 묘역공사, 사당공사 뭐 별의 별 부역에 다 동원되던, 영화 [신의 아들 모세]에서 묘사되는 파라오새끼들 왕실새끼들이랑 귀족새끼들 쳐 먹고 사치할꺼 다 대주고, 거기다가 그 개새끼들 우상숭배하는 동상이나 피라미드짓는다고 좃빨라고 노역을 하던 이스라엘인들과 동급이던 것이 조선민중들이 맞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체제에서는 오로지 데스포티즘에 의한 지배만이 있을 뿐이고, 그러한 그 자체로써 그 것에는 일말의 제민지배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한, 체제에서 신민이라는 것은 피라미드와 같은 종교시설물 공사나 하고, 문명에 따라서는 스스로 제물이 되어서 그 개새끼들의 지배세레모니에 산 제물로서 공양되는 일개 개돼지와 같은 것이 바로 전제체제의 신민인 것이다.
그러한 것들로 간주될 수 있는 사료들이 명백하게 심지어 유네스코유산으로 등재된 실록에서도 빈번하게 관찰됨에도 반일을 명분으로 한 소위 민족주의 사학자라는 실은 유교파간제사장계급이었던 자들로부터 소위 현대적 역사기법을 빙자한 역사한다는 새끼들에 의해서 조선왕조의 그러한 아즈텍의 인신공양문명이나 파라오치하의 이집트와 같은 불역미개한 부분들은 철저하게 각색되었고, 그에 따라서 제사장계급들의 시뮬라르크에 불과한 유교의 파간종교의 면모는 근대적인 행정통치술과 같은 것으로 각색된 것이다.
이 것은 아 다르고 어 다른 문제라서 조금만 말을 돌려도 이렇게 되는 것이지만, 이를 테면 구한말의 흥선대원군이라는 사람이 극심하게 비판받은 것 역시 실은 그가 그러한 전제적인 종교지도자로써 면모보다는 세속적인 지배자로써의 이미지가 더 강해지면서 발생한 종교문제였던 것이다.
그게 사실은 그가 서원을 철폐하면서, 더 이상 유교파간적인 것을 지지하지 않는 듯한 스탠스를 보이다가 또한 한편으로는 유교꼰대적인 스탠스로써 경복궁을 재건하고, 운현궁을 크게 지으니까 만다린새끼들이 그 것에 대해서 반발하기를 그 것은 유교파간적인 명분부분으로 해석되기 보다는 현실적인 세속적인 지배자로써의 현실독재자의 면모에 더 가깝되는 것이 당대의 유교파간엘리트들의 비판점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해서 대원군이라는 개새끼는 아주 교활하게 자신의 정치력을 강화시키면서, 제사장계급들의 의심에 대해서 자신이 정치적으로 타격을 받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천주교박해따위를 한다든가 등으로 그러한 의심을 불식시키는 전형적인 아주 cunt한 파간왕조의 지배자적인 면을 보인 개새끼가 바로 대원군이라는 씹새끼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서 동학도들의 난이 일어나는데, 비슷한 시기의 태평천국의 난을 감안하면 그 것은 종교전쟁이 맞고, 동학도들의 목표는 전제파간왕조인 조선왕조의 면모를 불식시키고, 조금 더 세속적인 의식이 지배하는 나라를 만들려고 한 것이고, 그러하기 때문에 그들은 파라오지배계급이나 브라호만들인 왕가와 양반들로부터는 배척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련의 종교전쟁이 벌어진뒤에야 한국인들은 보다 지금의 인지에 가까운 세속화된 국가관을 지닐 수 있게 되었음에도 되려 현대적인 인지에 맞춰서 과거를 재구성하려는 엘리트들에 의해서 그러한 바뀐 인지의 본질은 잘 다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 것에는 그러한 인지가 형성될 경우에 유학은 상종못할 미개가 되고, 반면 천주교와 기독교의 인류보편적인 가치에 가까운 진보된 면모는 부각이 되는 것에 대한 보수적인 종교인지를 가진 대중의 저항감 또한 그러한 인지의 불형성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러한 인지변화는 일제시대때에 탈아입구를 지향하지만 미처 일본인들조차 갖다 버리지 못한 동양미개적인 부분과 충돌하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신사참배와 관련한 갈등이다.
그러나 동양파간으로써 공통점에 입각해서 본다면, 신사참배에 대한 천도교도들이나 기독교, 천주교들의 저항은 실은 한국유교의 대리자격인 신토교와의 싸움으로써 그 것은 우리 내면의 유교파간적인 것과 근대적인 세속적인 세계관이 충돌한 것이었고, 그 신념은 단지 신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미개로 대표되는 그 신념의 세속에 구현되었을 때의 불역함으로 말미암아서 그 것은 애초에 양립할 수 없는 가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저항감을 후일에 윤보선등 왕당파보수새끼들과 손잡고 나라를 쿠데타로 먹은 박정희새끼가 경제개발이라는 빙자, 돈을 주고 영혼을 산 것이고, 그러한 뒤에 박정희는 가정의례준칙따위를 통해서 유교파간의식으로의 역사의 역행을 모의했던 것이다.
특히, 현대의 제사지내는 노동자계급의 태반이 실은 그들의 노비이거나 종이던 증조부나 고조부들때부터 제사지내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태반은 박정희새끼의 영향을 받아서 본디 그들의 의식속에는 존재치 않던 양반새끼들이나 하던 짓을 지금의 노동계급이나 자영업자등은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 결정적인 증거로써 일제의 창씨개명이전에의 한국민중의 태반은 아예 성자체를 쓰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그러한 연원은 신라시대때에 마침 그 때가 무슬림들이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융기하던 때인데 소시적에 아랍상인들이 신라를 드나들었고, 아랍인들은 성을 쓰지 않으므로 그 때부터 신라인들은 본디 성이 없었다고 볼 여지도 있다.
품일 관창이라는 애도 자기 아비인 품일이라는 놈의 이름만큼은 전해지는 것도 하비의 아들 아지즈라고 쓰는 하비 아지즈 뭐 이런 식의 아랍식 네이밍에서 근원한다고 나는 본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인 연원을 가지고 있다면, 후일 전제지배계급의 지배에 놓이게 된 그들 피지배민들로써는 반감이 생겨서라도 성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뭐 토성이라도 쓰게 된 작자들은 전부 파간왕밑에서 한자리 해 쳐 뭇다고 지랄한거고, 90프로의 착한 사마리아인인 농사짓는 한인들은 그런 더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창씨개면에서 창씨와 관한한 부분만큼은 그 것은 일본 또한 마찬가지인데, 일본인들 또한 본디는 성을 쓰는 법이 없었던 것을 후일 메이지시대때에 서양식 여권이름을 만들어야한다고 존나 말도 안되는 성을 지배계급새끼들이 만들어서는 쳐 붙은 것이다.
그래서, 씨발 뭐 산에 사는 놈 야마다, 밭일 하는 놈 다나카 이딴 성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르치는 화살표는 진짜 한인에게는 성은 없다는 거다. 그러나 그 진짜 한인은 조선왕조따위에서는 천민, 노예로 규정되어서 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따름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제왕조인 인서울레짐에 대해서 지방의 피지배민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끔 된 역사적인 혁신이라는 것은 1979년의 부마항쟁과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나 가능해진 것이었고, 그 전까지는 참정권조차 제한된 지방민은 2등국민에 불과했던 것이다.
체육관 선거라는 것은 그러한 인서울앙시앵레짐새끼들의 그 체육관 선서를 할 수 있는 자들과 그들의 식솔만이 실질적으로 이 나라의 1등 시민인 계급성의 그 것이고, 이 것은 1987년에야 민중들의 줄기찬 항쟁과 김영삼, 김대중등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타파되어서, 그 변화는 이제 겨우 30년 정도의 역사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또한 그 것은 그 1987년혁명 이전 집권세력들인 군사정권의 재유교화와 전제화라는 잔존하는 요소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 현정치의 실정이고, 이 점에 의해서 명백하게 가장 근자에는 전제화된 유사민주주의집권세력인 대통령권에 의해서 한국인들은 지대한 재산상의 그리고 경제자유와 관련한 가치의 실종과 인서울레짐이라는 전제적인 권력의 부패와 타락, 그리고 무능이라는 퇴조를 경험하였던 것이다.
1945년 이전은 제외하고 보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