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나도한마디
1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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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 "타인은 지옥이다" 공감

 

사르트르의 문학 작품에서 강박적인 관념으로 자주 나오는 것이 수치심이다. 그는 언제나 남의 시선을 참을 수가 없다. 누군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고 한없이 수치스럽게 만든다. 「존재와 무」에서는 54페이지나「시선」의 고찰에 할애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수치심은 인간의 존재 양식의 한 중요한 국면이다. 심리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사르트르의 존재론(ontologie)은 곧 수치론(hontologie)이다.』라고 까지 말했다. 수치심이란 무엇일까? 수치심은 근본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수치를 느끼는 것은 타자의 시선속에서 이다. 혼자 마음속으로 수치를 느꼈다 하더라도 그것은 타인의 시선을 가상적으로 상정하고서이다.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열쇠 구멍으로 남의 방을 들여다 보다가 들키는 사람의 예를 제시한다. 이 수치스러운 상황은 주체가 갑자기 대상의 위치로 전락하는 반전의 메카니즘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나는 열쇠구멍을 통해 어느 방을 몰래 들여다보고 있다. 나는 단지 그 방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만을 지각할 뿐, 나 자신을 의식하지 못한다. 나는 주체(sujet)이고 방안의 풍경은 대상(objet)이다. 나는 방안을 바라보는 주체로서만 존재하며, 나 자신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나는 세계의 중심이며, 물론 수치심도 없다. 이때 갑자기 발소리가 나며 누군가 가까이 온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바라보여지는 순간 나는 내 행동이 상스러웠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워진다. 이때까지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타인의 시선에 의해 나는 열쇠 구멍에 눈을 대고 구부리고 있는 추악한 모습의 내 자신을 본다. 자신을 의식하지 않던 나는 타인의 존재에 의해 나를 대상(objet)으로 의식하고, 나의 행동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파악한다. 타자는 이처럼 나와 나 자신을 연결하는 필요불가결의 매개자이다. 「나는 남에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의 나 자신을 부끄러워 한다.」(j'ai honte de moi tel que j'apparais autrui)(E.N. p.276) 다시 말하면 나는 나의 기초를 나 자신의 외부에 가지고 있다. 그런데 타자에게 있어서 나는 주체가 아니고 대상이다. objet는 대상, 객체, 또는 물체로 해석되는 단어이다. 타자가 나를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주체(sujet)인 타자가 나를 그 대상인 객체로 본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그때의 나는 물질성(즉자 존재)을 띄게 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남이 나를 볼 때 그는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우선 물건으로 본다는 얘기이다. 누군가 나를 바라보면 나는 내가 물체인 듯이 느끼게 된다. 그의 시선은 절대 주체이고, 나는 한갓 객체에 불과하게된다. 내가 내 주위의 모든 사물을 바라보듯이, 나도 그렇게 사물처럼 바라보여진다는 것을 나는 안다. 타자에게 있어서 나는 마치 책상 위에 있는 잉크병 처럼 앉아 있고, 바람에 휘날리는 나무처럼 열쇠구멍에 매달려 있다.


타자의 시선 앞에서 왜 나는 우선 물체로 보이는가? 그것은 우리의 의식을 지향성으로 파악한 현상학적 존재론 속에 이미 구조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우리의 의식은 매 순간 자기에게서 몸을 빼내 대상을 향해가는 초월성이다. 그러므로 주체인 나의 의식 앞에 놓인 것은 모두 대상(객체)이다. 하나의 주체 앞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다. 그리고 하나의 대상 앞에는 결코 대상이 있을수 없다. 예를 들어보자. 하나의 돌맹이는 그 안에 의식이 들어있지 않은 즉자존재이므로 다른 것을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주체인 나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 돌맹이 앞에 또 하나의 다른 돌맹이가 놓였다고 해도 새로 놓인 돌맹이는 원래 있던 돌맹이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돌맹이에는 다른 사물을 대상으로 삼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주체인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만 대상이 될 뿐, 다른 대상(물체)에 의해서는 대상이 되지 않는다.

 

「나의 대상성은 세계의 대상성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mon objetivit ne saurait elle-m me d couler pour moi de l'objetivit du monde)(E.N. p.314)는 말의 의미가 그것이다. 세계는 나에 의해서 구성되고, 나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내가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세계는 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세계는 저 혼자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나에 의해 존재가 부여된 세계가 거꾸로 나의 존재를 정립해 줄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이 없이 물건만 있는 방에 들어갔을 때 나는 대상이 아니지만, 그 방안에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나는 그의 대상이 된다. 사람이 없는 방에 서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편안하게 있을수 있지만 누군가 있는 방에서는 왠지 불편하고 마음이 불안하다. 그것은 내가 그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타인 앞에서 우선 대상(물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의식의 초월성 때문이다. 한편, 내가 타인을 바라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타인에 의해 바라보임을 당한다」( tre-vu-par-autrui)는 것은, 현재 나를 보고 있는 그 주체도 언젠가 「나의 의해 바라보일 수」있는 존재, 다시 말해서 나의 대상으로 되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뜻한다. 따라서 타인이란 이 세계를 벗어난 독자적 의식이 결코 아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을 대상성으로 만들 수 있는 기능은 우리의 신체 중에서 유일하게 두 눈에 집중되어 있다. 시선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시선이란 생물학적으로 말해 보면 두 개의 안구가 하나의 대상을 향해 초점을 맞추는 행위이다. 눈은 다른 몇 개의 신체기관과 마찬가지로 대상을 지각하는 감각기관이다. 그런데 유독 시선만은 좀 특이한 데가 있다. 가령 한 젊은이가 일자리를 부탁하기 위해 어느 직장의 실력자를 만났다고 하자. 자신이 그의 마음에 드는지 어쩐지 몰라 불안해하는 젊은이에게 이 실력자가 상대방을 꿰뚫어 보는듯한 냉혹한 시선을 보냈다고 치자. 이때 젊은이는 갑자기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후줄근하게 느껴진다. 자신은 준수한 용모도, 높은 학벌도, 좋은 집안도, 탁월한 실력도 없다. 상대방의 시선은 자신의 이런 모든 즉자적 상태를 순간적으로 너무나 잔인하게,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시선은 그저 단순한 시선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상대방에 대한 냉혹한 평가이다. 그것은 비수처럼 상대방을 찌르고, 그의 존재의 권리마저 문제삼는다. 너무나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시선 앞에서 초라한 젊은이는 『과연 내가 살 가치가 있는 놈일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소설 「구토」의 주인공 로깡땡이 부빌 시립 미술관에서 느낀 열등감도 그런것이었다. 이 도시의 명사를 그린 초상화의 인물은 더 할 수 없이 아름답다. 머리는 약간 뒤로 제쳐져 있고, 장갑 낀 손은 진주빛 회색 바지 옆으로 내려져 있으며, 실크 햍을 썼다. 거기엔 흠잡을 곳이 하나도 없고 천한 구석이라고는 없다. 부드러운 손, 넓은 어깨, 신중한 우아함, 그리고 약간의 환상적인 분위기에, 주름살 없는 얼굴이 깨끗하기 그지없다. 보일듯 말듯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감돌고 있으나, 회색 눈은 웃지 않는다. 로깡땡은 그에게서 어떤 흠을 찾아내려던 생각을 포기하고 돌아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초상화의 인물이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제서야 로깡땡은 알아차린다. 자기가 그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전혀 이 인물에게 타격을 가하지 않는데, 반대로 「그의 평가는 비수처럼 그의 가슴을 찌르고 마침내 그의 존재의 권리마저 문제로 삼는다.」(Mais son jugement me transper ait comme un glaive et mettait en question jusqu' mon droit d'exister.)(La Naus e, p.122)

 

여기서 나의 살 권리마저 문제로 삼는 상대방의 그 평가는 다름 아닌 시선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시선을 포착했을 때, 나는 더 이상 그의 눈을 지각하지 못한다. 두 눈은, 거기, 내 지각의 영역 안에 있지만, 현상학적인 용어로 그저 순수한 제시(pr sentation) 일 뿐, 나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두 눈은 중립적이고, 내 관심의 밖이고, 정립의 대상이 아니다. 이때 나는 그 눈이 아름다운지 미운지, 또는 그 색깔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게 된다. 시선은 그의 두 눈을 덮어 가리운다. 우리가 남의 눈을 볼 때, 그것은 시선과 시선의 마주침이다. 내가 남의 눈을 보는 것은 「내가 바라보임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은, 그것이 어떤 성질을 가졌든지간에, 순전히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타인의 시선은 우선 나에게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매개물이다. 「딴 사람이 나를 보므로, 나는 나 자신을 본다.」(je me vois parce qu'on me voit)(E.N. p.318) 이때 타인이 나를 경탄의 시선으로 본다면 나는 나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 시선에 의해 사물 상태로 굳어진 나의 즉자성을 혐오하기 보다는 오히려 매혹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즉 공모적 의식을 갖게될 것이다. 그러나 그 시선이 나를 혐오스러운 물체로 만든다면 그 체험은 아주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것이 수치심이다. 수치심이란, 내가 남에 의해 바라보이고 평가되는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다.(la honte, […] elle est reconaissance de ce que je suis bien cet objet qu'autrui regarde et juge).(E.N. p.319)

 

내 자유가 나에게서 빠져나가 한갓 주어진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나는 못내 부끄럽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를 가질 수 있고, 여러 측면의 나를 인식할 수 있지만, 그 많은 견해와 인식은 다 무용지물이다. 나는 그저 남이 알고 있는 모습의 나일 뿐이다. 이때 남이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이란, 「과거에 그러했던」모습도 아니고, 「앞으로 될」모습도 아닌 「지금 현재」의 모습이다. 다시 말하면 시간성 속에서 무화(無化) 운동을 계속하는 대자의 존재가 아니라 마치 영화속의 스톱 모션처럼 현재의 순간에 화석처럼 굳어진 즉자의 양식으로서이다. 나의 존재를 이처럼 순간적으로 화석화시키는 것이 타인의 시선이다. 뭔가 남몰래 은밀한 일을 하다가 들킬 때를 생각해 보자. 가령 손님상에 내놓을 음식이 잔뜩 준비된 주방에서 나는 먹음직스럽게 생긴 장식용 과일을 남몰래 집어 먹으려 한다. 손을 뻗쳐 그것을 집어 입 가까이에 가지고 가려는 순간 누가 들어와 그 모습을 본다. 누가 보지 않고 넘어갔다면 나는 음식을 몰래 집어 먹는 행위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결코 상세하게 의식할 수 없다. 그러나 남에게 들킨 그 순간, 바로 그 때의 내 자세, 다시 말해서 고개를 약간 뒤로 제치고 입 가까이에 손을 갖다 대고 있는 나의 모습이 마치 사진처럼 내 머리 속에 인각된다.

 

나는 그의 시선에 의해 마치 석고상 같은 즉자 존재가 된다. 지금 이 순간의 내 모습으로 고정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만 있으면 된다. 의자에 있는 나의 모습이 조각품처럼 굳어지기 위해서는 남의 시선이 그것을 포착하기만 하면 된다. 직전의 자기 존재를 끊임없이 무화시키면서, 자기 몸에서 자기를 빼내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는 대자의 탈자(脫自)운동은 더 이상 유동적인 운동이 아니라 단단하게 굳은 즉자가 된다. 다시 말하면, 즉자가 대자를 둘러싸 단단한 고체를 형성한다. 이처럼 타인의 시선은 대자를 딱딱하게 굳혀 즉자로 만든다. 사르트르가 타인의 시선을 메두사의 시선에 비유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희랍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는 머리칼이 하나하나 뱀으로 되어 있는 흉칙한 괴물이다. 이 괴물을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돌로 변한다. 타인의 시선 또한 우리를 돌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던가? 남의 시선은 나에게 명령을 내리고, 나를 비판한다. 나를 꿰뚫어 보고 나를 나의 정확한 자리에 위치시키고, 나를 객관화한다. 막연히 자신을 사실 이상으로 높이 평가했던 나는 남의 차가운 시선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며, 그것이 한갓 과대망상이었다는 냉정한 객관성을 되찾게 된다. 사르트르는 보들레르의 죄의식도 타인의 시선과의 관련 속에 파악한다. 남들이 그에게 부과한 규범으로서의 선(善) 때문에 보들레르는 죄의식을 느꼈는데, 그 절대적 선이란 다름 아닌 타인의 시선이라는 것이다.

그가 절대적으로 죄인이어야 한다면 […] 어떤 절대적 선(善)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선은 사랑의 대상도 아니고 완전히 추상적인 명령도 아니다. 그것은 시선이다. 남에게 명령을 내리고 남을 단죄하는 그런 시선 말이다.(S'il doit tre absolument coupable, […] il faut qu'il y ait un Bien absolu. Pour lui, ce Bien n'est ni un objet d'amour, ni tout fait un imp ratif abstrait. Il se confond avec un regard. Un regard qui commande et qui condamne.)(Baudelaire, p.70)

 

앞에서 우리는 수치스러운 행위의 예를 둘 들었다. 열쇠 구멍으로 남의 방안을 들여다 보는 행위, 그리고 몰래 음식을 집어 먹는 행위였다. 그러나 수치심은 반드시 수치스러운 행위에서만 촉발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단순히 자기가 대상(물체)이 되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즉자 존재로 전락했고, 나의 존재를 남에게 의존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수치스럽게 한다.(La honte pure n'est pas sentiment d' tre tel ou tel objet r pr hensible ; mais en g n ral, d' tre un objet, c'est- -dire de me reconna tre dans cet tre d grad , d pendant et fig que je suis pour autrui.)(E.N. p.349) 나의 존재가 나의 밖에 있다는 것을 느낄 때, 그리해서 나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수치스럽다. 사르트르는 수치심을 기독교의 원죄에 비유한다. 원죄는 프랑스어로 p ch originel, 혹은 chute originelle이다. chute originelle은 직역하면 「원초적인 추락」이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고 하늘 나라에서 지상으로 떨어졌다는 의미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원초적인 추락」은 인간이「세계 속에 사물들의 한 가운데에 떨어졌고,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해 타자의 매개가 필요하다」(je suis ≪tomb ≫dans le monde, au milieu des choses, et que j'ai besoin de la m diation d'autrui pour tre ce que je suis.)(E.N. p.349)는 뜻이다. 벌거벗은 몸에 대한 수치심이야 말로 사르트르적인 원초적 수치심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상징적 예이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의 무방비 상태의 대상성(물체성)을 의미한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자신의 물체성을 가리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남에게 보이지 않는 채 자기는 남을 바라볼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순수 주체가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최초의 죄를 저지른 후「자기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성경 이야기야말로 옷의 이러한 기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은 단순히 나를 대상성으로 만드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나에게서 세계를 훔쳐가고, 내게서 그 소유를 박탈한다. 예컨대 내가 공원의 벤치에 앉아있다고 생각해 보자. 벤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잔디가 있고, 잔디밭을 죽 따라 의자들이 놓여있다. 한 남자가 의자 곁을 지나간다. 나는 이 남자를 바라본다. 그때 나는 이 남자를 하나의 물체이며 동시에 사람으로 파악한다. 이 물체가 하나의 사람이라고 내가 확인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가 만일 커다란 인형에 불과했다면 나는 평상시에 사물들을 시간-공간적으로 배치했던 그 범주를 사용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잔디 옆 2m20cm의 거리의 의자 옆에 얼마큼의 무게를 가지고 서 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때 그 인형과 다른 물체들과의 관계는 순전히 부가적(덧셈의) 관계일 것이다. 잔디나 의자에 덧붙여 다른 사물이 하나 더 놓여졌다는 의미이다. 그것을 치워 버린다고 해서 잔디나 의자 같은 다른 사물들의 관계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 인형의 출현으로 세계의 사물들 사이에 아무런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물들은 나를 중심으로 모이고 종합되어 도구성의 총체를 이룰 뿐 그 인형에 대해서는 무관심의 관계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형이 아니고 사람일 때 문제는 달라진다. 의자와 그 사람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덧셈의 관계가 아니다. 내 세계 안의 사물들이 이 특별한 대상 주위로 재편성된다. 물론 잔디는 여전히 그로부터 2m20cm 거리에 떨어져 있다. 그러나 잔디와 그 남자 사이의 거리는 무심하고 상호적인 그런 관계가 아니다. 그 남자가 걸어서 좀더 잔디에 가까이 갈 수도 있고, 멀리 떨어질 수도 있다. 이 때까지 나의 세계였던 이 공원 안은 그 남자를 중심으로 하는 그의 세계로 재편되고 있다. 그 남자와 잔디는 내게 있어서 똑같은 대상이지만, 그 두 대상이 서로 새롭게 맺는 관계는 내게 있어서 매우 특이하다. 그것은 우선은 내가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다. 왜냐하면 내 눈앞에 그렇게 주어져 있으므로. 그러나 또 한편, 그것은 완전히 나에게서 벗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관계의 기본 축은 그 남자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이 세계 안의 중심이 아니며, 잔디와 그 남자 사이에 펼쳐지는 거리는 내가 설정했던 거리를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내 세계 안의 사물들 사이에 내가 설정했던 관계는 해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해체를 수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이처럼 내 세계 안에 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것은 이 세계의 해체의 요인이 된다. 사물들은 내게서부터 도망쳐 이 사람에게로 간다. 사르트르는 타인의 의식에 의해 붙잡힌 세계가 나에게서 도망가고 나의 행동의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빠져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방식을 지칭하기 위해 출혈(h morragie)(E.N. p.319)이라는 말을 썼다. 타인의 출현에 의해 나는 이 세계에 대한 영주권을 박탈당하고, 큰 위험을 느낀다. 혼자인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최고 군주인줄 알았는데 남이 나를 앞질러 갔다.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다가 동생을 보게된 어린아이의 시샘을 상상해 보기 바란다. 이런 식으로 타인의 존재는 나의 세계를 훔쳐간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고, 모든 것이 여전히 나를 위해 있건만, 모든 것은 보이지 않게 내게서 도망가고, 새로운 대상을 향해 간다. 세계 안의 타인의 출현은 온세계의 미끄러짐과 중심의 이동을 의미하고, 내가 중심으로 있던 세계가 내 발밑에서부터 꺼져 들어가고 있음을 뜻한다.(L'apparition d'autrui dans le monde correspond donc un glissement fig de tout l'univers, une d centration du monde qui mine par en dessous la centralisation que j'op re dans le m me temps.)(E.N p.313)

 

타인은 내게서 나의 세계를 앗아갈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게 위협적인 존재이다. 그것은 나를 죽음에 몰아넣을 만한 위협이고 내 가능성을 죽이는 것이다. 사람이 없는 숲 속을 혼자 걸어 가는데 뒤에서 나뭇가지가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면 그것은 단순히 누군가 거기에 있다는 그런 태평스러운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치명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상처를 입을만한 육체를 갖고 있다는 것, 도망칠 곳이 없는 이 자리에서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보지 못하고 보임을 당할 뿐이다. 미셀 푸코는「감시와 처벌」에서 이처럼 보고, 보이는 관계가 결국 권력의 관계라는 것을, 중앙 망루가 있는 원형 감옥의 구조를 통해 상세하게 분석한바 있다. 생명의 위협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타인의 존재는 내 가능성의 잠재적인 죽음을 뜻한다. 만일 내가 누군가에게 쫓겨서 도망치다가 길이 꼬부라지는 모퉁이를 발견했다고 치자. 이 모퉁이는 나를 숨겨주는 가능성도 되지만, 상대방이 나를 찾아내 사로잡을 가능성도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타인에 대항하여 행해지는 모든 행위는 거꾸로 나에 대항하여 타인이 쓸 수 있는 도구가 된다. 따라서「타인은 내 가능성들의 숨겨진 죽음이다」(Autrui, cest la mort cach e de mes possibilit s)(E.N. p.323).


이러한 모든 것들은 수치심에 의해 체험된다. 그런데 수치심에 대한 나의 반응은, 나를 대상으로 포착하는 상대방을 이번에는 내 쪽에서 대상으로 포착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타자가 내게 대상으로 보이는 순간부터 그의 주체성은 단순한 대상의 성질이 되고만다. 그의 주체성은 아래로 굴러 떨어져(전락) 원칙적으로 나와는 상관없는 대상적 성질의 총체가 된다. 대상으로 변한 타자(Autrui-object)는 물론 인간이므로 그 안에 의식, 다시 말해서 무의 구멍이 패여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내가 보기에 속이 빈 상자 이상의 것이 아니다. 이쯤 되면 「나는 나를 다시 찾은 것이다.」(je me r cup re)(E.N. p.349) 「자기 회수」(동사는 se r cup rer, 명사는 r cup ration)라는 용어도 사르트르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써, 이처럼 남에게 빼앗겼던 자기 존재를 자기가 다시 거둬들인다는 뜻이다. 상대방을 대상으로 간주할 때 왜 나는 나의 존재를 회수하는가? 그것은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대상은 다른 대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타자가 한갓 대상에 불과하다면 그 앞에 있는 나는 결코 대상이 될 수 없다. 이 책상 앞에 앉아있는 나는 결코 책상의 대상일 수가 없다. 나는 엄연히 주체로써 나의 완전한 주관성을 소유할 수 있다.


여기서 대타관계의 투쟁적 양상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상대방의 냉혹한 시선에 위축만 될 것이 아니라 나도 온갖 경멸과 차가운 평가의 시선을 그에게 던지는 것이다. 타인에게 있어서 나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인데, 이처럼 나의 주체성을 거부하고, 나를 물체로 규정하는 타인을 나도 대상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 중요한 것은 남에게도 중요한 법이다. 내가 타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스럽게 되기를 시도하는 동안 타인 역시 나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내가 남을 예속시키고자 하는 동안에는 남도 나를 예속시키려 한다. 마치 상대방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우는 두 맹수처럼 두 대자의 시선은 날카롭게 부딪치며 상대방을 꺾으려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그것이 우리를 더욱 더 절망적으로 만든다.

 

왜 그런가? 내가 상대방의 시선을 노려본 순간 상대방의 시선은 사라지고, 거기에는 두 눈만 남았다. 이 순간에 타자는 하나의 즉자존재가 되어버리고, 그 즉자존재는 나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나는 그 즉자존재를 소유한다. 나의 목표는 달성된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나의 대상성의 열쇠를 쥐고 있는 존재를 내가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수천 가지 방법으로 나의 자유를 느끼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왜냐하면 내 손에 남겨진 존재는 주체로서의 타자가 아니라 한갖 물체로서의 타자(autrui-objet)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하나의 대상(물체)은 다른 존재를 대상으로 만들 수도 없지만, 동시에 다른 존재의 자유를 인정해 줄 수도 없다. 나의 실망은 크다. 나는 타인의 자유를 내 것으로 소유하려 했고 마침내 그것을 소유했다고 믿은 순간 그 자유가 내 시선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 것이다. 내가 남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일 뿐이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관계를 남녀간의 사랑이나 사디스트의 행위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나는 사랑하는 여자를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 나의 자유를 숨기고 그녀의 노예인 듯이 행동한다.

 

만일 내가 온전한 자유의 주체라면 나는 그녀를 대상으로 취급하게 되고, 대상이 된 그녀는 자신의 주체성이나 자유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녀의 주체성 또는 자유이지, 한갓 물건으로 전락해 버린 대상성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은 동시에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녀를 사랑하는 나는 그녀도 나를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쓴다. 마침내 그녀도 나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나를 사랑하게 될 때까지 그녀는 완전한 자유였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녀는 자신의 자유를 내팽개쳤다. 다시 말하면 주체가 아니라 객체, 대상, 물체로 전락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온전한 자유를 소유하기를 원했지 생명 없는 물체를 원한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기 전의 그녀는 자유였지만,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그 자유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사랑은 얻었지만 내 손에 남겨진 것은 그녀의 자유가 아니라 사물같은 즉자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사랑은 영원한 실패이다. 사디스트가 성공하는 순간도 그의 실패의 순간에 다름아니다. 자백을 강요하며 고문을 가하는 한 취조관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사디스틱한 취조관인 그의 목적은 그가 고문을 가하는 대상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혐의자가 자기 자유의사로 어떤 정보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원하는 것은 타자의 자유이다. 그런데 그는 타자의 자유를 포획하기 위해 타자의 신체를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고문자는 혐의자에게 신체적 고통을 가한다. 타인의 자유는 그의 신체와 일치하므로, 고문자는 그의 신체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의 자유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목적이 성취된 순간 신체는 이미 수단의 자격을 상실한다. 「신체는 거기에 있으나, 이제는 아무 소용없이 거기에 있다.」그것은 이제 사디스트를 당혹하게 하는 육체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타인과의 관계는 이처럼 영원한 실패의 관계이다. 서로가 타자에 의해서 대상화되지 않으려고 긴장하고 있고, 타자에 대해 단단히 무장을 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성공도 휴식도 없다. 홉스(Hobbes)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직 죽음에 의해서만 종식되는, 힘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대타존재의 본래적인 의미는 갈등이다. 타인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은 공허한 거짓말이다. 우리가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타자에 대한 우리의 모든 행동은 그의 자유에 대한 침해이다.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건, 그것은 이미 타인이 존재하고 있는 세계, 다시 말해서 내가 타인에 대해 잉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죄의식은 거기에서 유래한다. 그것이 사르트르식의 원죄 의식이다.「원죄란, 이미 타인이 존재하는 세계 속에 내가 솟아났다는 사실이다. 타인과의 관계가 그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들은, 나의 죄의식이라는 이 원초적 테마의 다양한 변주에 불과할 뿐이다.」(Ainsi, le p ch originel, c'est mon surgissement dans un monde o il y a l'autre et, quelles que soient mes relations ult rieures avec l'autre, elles ne seront que des variations sur le th me originel de ma culpabilit .)(E.N p.481)

 

타인은 이처럼 나를 물체로 만드는 사람, 나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사람, 나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람, 나의 세계를 빼앗아 가는 사람이다. 이것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희곡 「밀폐된 방」에 나오는 그 유명한 대사는 사르트르의 대타존재 개념을 한마디로 압축해 보여주고 있다. 타인이 곧 나의 지옥이다.

 

나를 삼킬듯한 이 시선들…[…] 아! 당신들은 둘뿐이었는가? 나는 훨씬 많은 줄 알았다. 이것이 지옥이다. 전에는 생각조차 못했었지... 당신들도 알겠지, 유황, 화형의 장작더미, 화형의 쇠꼬챙이…! 아! 웃기는 얘기야. 쇠꼬챙이 같은 것은 필요없어!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야. (Tous ces regards qui me mangent …[…] Ha ! vous n' tes que deux! Je vous croyais beaucoup plus nombreuses. (Il rit) Alors, c'est a l'enfer. Je n'aurais jamais cru… Vous vous rappelez : le soufre, le b cher, le gril… Ah! quelle plaisanterie. Pas besoin de gril : l'enfer, c'est les Autres.)(Huis Clos in Th tre, p.181-182

[출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 ⑩ 타인들






  • 공감의 희열  사르트르가 본것을 님도 보셧다는 이야기겟죠? 그리고 다수는 보기 힘들거나 못본것을 님은 보신것이고 그래서 희열이라고 그리고 행복이라고 쓰신듯... 사르트르는 님을 선택하신듯. 저는 아무리 읽어도 진전없는 무한반복임

  • 아니요. 꼭 그런식으로 꼬아서 남을 판단할 필요가 있나요? 이궁.. 앞부분만 읽었군요? 좀 길긴하지만 읽어보면 다 쉬운문장들입니다. 저는 사르트르가 느낀것을 공감한것 뿐이에요 ㅎㅎㅎ 많은 이들이 공감할 내용인것 같아서 그냥 올린거에요. 제가 특별하다고 올린게 아니요
  • 님도 누군가와 헬조선을 공감하려고 이곳에 온것 아닌가요? 제 요지는 그것입니다. 공감의 희열이란것도 행복이란것..힘을 얻는다는것. 사르트르의 타인이란 글을 읽고 공감했으면 한거구요. 앞부분 사르트르가 순전한 예로써만  든 변태스런 내용만읽고 그걸 제가 봤다고 결론내리는건 오류입니다.ㅎㅎㅎㅎ 오류는 위험한 거에요 조심하세요
  • 예전에 한번 책추천에 관련해 덧글 단적이 잇었는데  누군가 책을 추천해줘서 그 책들을  제가 읽엇는데 앞부분 30페이지 정도를 무한반복하는 경우의 책들이 제법 있엇엇죠. 그런데 재미있는게 그 책을 친구를 추천해 해주었더니 그 친구는 몇일만에 다 읽고 저에게 추천해줘서 고맙다고한경우가 더러 잇었었죠.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엇죠. 혹시나 내가 책을 선택하는것이 아니라 책이 사람을 선택하는것은 아닌가 하구요.  저는 님글을 서너번을 읽는데 잘 안들어오네요. 님은 공감을 하고 좋아서 올리는데 전 공감을 할수가 없으니......사르트르가 님을 선택한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거죠.^^ 많은 사람들이 사르트르의 책을 읽겟지만 모두가 공감할수 잇는것은 아니죠. 어쩌면 지적수준이 아주 높아도 사르트르 책을 읽을수 없는 사람들도 있을듯 한데요. (참 공감할수 없다는 것이 동감못한다거나 반대한다거나 가 아니구요 정말로 책을 읽을수 없는 그런 상태요.) 공감을 햇다는것은 사르트르가 본것을 님도 본것이고 거기서 오는 충만감 희열감일텐데.....모두가 그런 것들을 가질수 잇다면 좋을텐데....그래서 제가 봤을때는 님은 사르트르의 선택을 받은 사람인것이죠.   
  • 미안합니다. ㅜㅜ 
  • 인간이란것이 이상하네요. 오해가 있엇으리라 생각하고 풀어 올리면서 반응이 없더라도 상관없겟지 또는 이런면으로 이해가 되엇겟지라고 생각해야지 햇는데.  그러면 미안합니다란 표현이 있건 없건 상관없는것인데 막상 그것을 보니 풀려서 다행이다 싶은게..... 인간의 삶을 뛰어넘는다면 이심전심으로 느끼고 넘어가야하는데  생각처럼 쉽지 안네요. 충분히 오해할수 있고 오해의 여지가 있게 쓴것이 문제죠. 제가 예전부터 이런 커뮤니케이션에서 문제가 약간 있엇는데 시간이 흘렀는데 여전한가보네요. 여기서 그것이나 고쳐야겟네요^^
  • 아무튼 타인으로써 '나'가 있지만.

    공감의 희열지옥이지만.

    아무튼 추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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