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jeiJ_CIddkw]
1980년대까지 한국이 아시아의 필로폰 생산지였음.
1980년대까지 똥푸산이 한국의 마약생산 및 소비기지였지만 88올림픽 이후에 쳐 망함. 소싯적에 서동 사창가, 완월동, 해운대 룸싸롱 등등 죄다 필로폰 빨고 쎅크스 하던 곳.
지금은 필로폰 생산업자들 죄다 동남아로 빠짐. 멸망.
근자에는 MZ 병신새끼덜 약빨이 버러지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카는데 죄다 인천항으로 수도권으로 들어간다고 칸다.
imf도 어떠한 의미에서는 똥푸산 금융권인 부산은행과 경남은행 새끼덜이 기업사채, 어음을 닥치고 인수하다가 부채를 터뜨린 것이다. 핵 쳐 맞을 도시는 서울이 아니라 부산이라고도 할 수 있음. 부산보지년들이 1970년대에는 서울년들 못지 않게 해댕긴다고 캤다는데, 당시에 온천장과 명륜동에 요정있던 시절. 그 씨발 것들이 모조리 마약 빨고 씹대주던 년들인 것이다.
전쟁과 테러로 전국토가 엉망이 되고 산업기반이 모두 무너져내린 와중에도 꽤 흥청댔다는데, 마션은 영국제 "싱가Singer"마선, 애기들 분유는 네덜란드산, 아이들 작난감은 홍콩제에서부터, TV, 냉장고, 녹음기, 카메라 등등 당시 값비싼 전자제품들까지 무지막지하게 팔려나갔다고 함. 오토바이를 팔던 혼다를 비롯해서, 일본의 이런저런 종합회사들이 월남에서 돈을 아주 갈퀴째로 쓸어갔다고 하더라고.
https://laodong.vn/photo/nhin-lai-nhung-bao-vat-trong-doi-song-cua-nguoi-sai-gon-730494.ldo ... 자체 생산된 소비재 품목들도 품질이 상당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정도임. 잡지, 만화책 등 미디어도 꽤 활기가 있었던 것 같고, 음악 산업의 규모도 꽤 컸다고 전해짐.
심지어 70년대 미군, 한국군이 월남에서 철수하던 시기에는 월남산 영화도 꽤 흥행하고 있었고, 자동차까지 LaDalat라고 국산화를 시도하기까지 했음. 그래봤자 프랑스 시트로엥 물건을 조립생산한 수준이지만... 식생활도 당시 기준으론 육류소비량이 꽤 만만찮은 수준이었다 함. 아 고려인삼, 삼양라면(지금도 베트남에서 신라면 진라면 삼양라면은 영락없는 사치품임) 등 한국의 값비싼 당시 고부가가치 특산품이 잔뜩 들어간 수출 콘테이너의 주요 destination도 월남 캄란항, 사이공항이었음.
변변한 산업기반이 있을 리 만무했던 (무역수지 적자가 1:10 이상 수준이었다고) 자유월남 경제가 단순히 미국 원조만으로 잘 살았다? 전혀 말이 안되는거고...
당시 아시아 마약업계의 홍콩이나 다름없던 곳이, 다름아닌 사이공이었음. 그 암흑산업의 대부노릇을 하던 놈이 다름아닌 당시 대통령 "응우옌 반 티우, 원문소阮文紹"란 놈. 대만으로 망명길에 사금고 금괴만 15톤 이상을 실어갔다는 설이 돌 정도였다는디. 한편 사이공이나 플레이쿠에서 근무하던 미군들도 부업이 베트남 현지에서 생산, 유통되는 마약을 미국으로 부치는 일일 정도였다지?
당시 1인당 GDP 수준이 고작 두자리 숫자 단위였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당시 사이공에서 데까세기 하던 교민들 말에 의하면 간단한 월남국수 한그릇이 몇달러 하는 등 물가가 작난이 아니게 비쌌다고 하는데, 마약 등등의 지하경제에 기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수준의 경기(景気)로 들끓었다는 얘기.
1975년 월맹군의 최종 공세때 사이공 근교, 비엔호아 코앞의 수언록까지 쳐들어왔을때만 해도, "설마 사이공만큼은 넘어가겠나?"라고 생각했던 교민들이 태반이었다고... 그래서 월남철수작전때 투입됐던 군인들, 대사관 직원들이 미련이 남았던 교민 설득에 참 많이 애를 먹었다고 전해짐.
그 다음 월맹이 사이공을 점령하고나서도, 재교육캠프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감방에서 죽어나갔다지?
(지금은 한국보다 외려 북한쪽이 마약 경제에 찌들어 있는 정반대 입장이라지만...)
부산이 그렇게 흥하기 시작했던 시기가, 마약경제로 흥청대던 샤이공이 침몰하던 시기와 맞물리는 것 같음. 뭐 UN산하 "월남 난민 보호소"도 90년대까지 부산에 있었잖아? 뭘 의미하겠어?
한국에도 그 당시 소위 "응우옌"씨들이 난민신분으로 꽤 많이 귀화했던 것 같음. 말을 안해서 그렇지. 70년대 말인가 충무로에 응우옌 부부가 술집을 운영했다는 기록도 있고,
20년전 내 기억으로 서울 월계동인가 석계동인가 성북동인가? 거기 분식점에서 오렌지를 통에 담가서 쥬스를 팔았는데 (한국에서 흔한 방식이 아니었음. 설탕물에 과일 담가서 쥬스 만드는 방식은 동남아 행상에 흔함), 아지매가 말을 잘 못했어. 또 얼굴이 영락없이 그쪽 사람 얼굴이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