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John
23.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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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이 버림을 받은 이유는 미국이 장개석을 통수친 것과 상관이 있는 것이다.

 

장개석이 반제국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에 애초에 그는 모스크바 3상회담에서 배제되었다. 애초에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조약에서부터의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이권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뉴욕과 워싱턴의 그러한 성향을 가진 해양계 바이킹 근성을 가진 새끼덜에 의해서 필리핀 다음은 중국 해방이라고 생각했던 여느 미국 시민들의 뜻을 꺾고 미해병대의 다음 경로를 오키나와로 변경했던 것이다.

당시의 미국의 정가에서 의인이라고 할 놈은 상원의원이던 메카시 단 한 놈 뿐으로 그는 정작 바이킹 출신이지만 남부의 땅에 천착했던 사람들의 올곧은 정서를 반영해서 미국의 민주당계 개자슥새끼덜의 소련새끼덜과 야합하고 중국에 대한 지원을 끊는 것들의 더러운 기회주의를 적어도 성토하였다. 

그는 정작 반공주의자로 미국정가에서 찐따당해서는 몰렸는데 반공이라는 것도 애초에 그러한 미국의 언론새끼덜의 프레임이자 정작 옳은 말 하는 사람이나 마녀사냥하는 개수작 프레임인 것이다.

반공이라는 것 또한 행위와 관련해서 심판되어야 할 워딩이지 기실 그 뜻만 놓고 보자면 한국인과 중국인들을 미국의 합당한 우산 밑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 매카시 의원과 같은 의인들에게 기인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김두한 같은 버러지새끼가 반공 운지를 하면 조까튼 쓰레기 새끼가 지랄을 하는 것임은 당연한 것이다.

 

오키나와에서 공고하게 형성된 방어선으로 무리하게 진격하는 댓가로 미해병대들은 투입된 지상군 18만명 중에서 5만명이 사상당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오키나와 전투.jpg

오키나와 단일전투에서 무려 미군 12,281명이 전사당하고, 36,631이 부상당한 희대의 전투이다. 그뿐 아니라 군함 36척이 침몰당하고, 항공기 760기가 손실당한 싸움이다.

게다가 그 전투가 당시의 미해병대의 마지막 전투였기 때문에 더 퍼시픽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태반의 미해병대들은 집에 가기 일보직전에 사망 플래그를 당하고 마는 비극적 작전이기도 하였다.

 

그 정도의 손실이었다면 차라리 상하이 상륙전을 펼치는만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미국의 진격로상에서 패싱된 것이다. 게다가 스틸웰이라는 놈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술적인 의도 때문에 장개석의 XY군을 버마로 끌고가서는 싸그리 소모시켜버렸다.

 

스틸웰이라는 씹새끼가 그 지랄을 한 실질적인 동기는 영국새끼덜에게 매수당해서는 싼 비용으로 버마에서 일본군을 지연시키는 것이고, 영미새끼덜이 한 민족이라는 점 때문에 매수당한 것이다.

이후에 스틸웰은 전쟁 직후에 사망하였다. 위암이라고는 하지만 교살이 의심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스틸웰을 그따구로 움직인 윗선이 아주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당시에 영국과 소련새끼덜마저도 야합중이었다는 것은 오늘날에는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런던이 런던그라드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상황 말이다.

 

오늘날 프로파간다 라인들의 국공내전에 대한 기사들 또한 태반이 날조이다. 국공내전 당시에 미국은 중국을 그닥 잘 지원한 적이 없으며, 태평양 전쟁 당시에 남겨진 미국의 잉여장비는 잘쳐줘봤자 미해병대새끼덜이 쓰던 구식무기들 뿐이고, 그 것을 다시 필리핀에서 오키나와에서 중국으로 실어다줬다는 것조차도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애초에 중국에 미군이 주둔한 적이 없는데 뭐놈의 무기를 공여했다는 것인지 완전히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 베트남까지는 영미군이 진격했지만 그들이 무기를 프랑스군에 넘기지 않고 별도로 하다못해 이쭝런 군에라도 지원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개소리인 것이다.

 

실제로는 영미새끼덜 특히 런던과 뉴욕의 은행가 개자슥새끼덜은 장개석의 경제고문이던 송자문과 공상희를 획책해서는 그들이 국민당의 외환보유고를 싸그리 들고 튀는 것을 획책했을 뿐이다. 송자문이 들고 튄 막대한 외환들은 런던과 파리의 은행권으로 빼돌려졌을 뿐이다. 공상희는 나중에 뉴욕에서 뒈졌고, 뉴욕와 런던의 미국 민주당계 권력들에게 보호되었다.

송자문 또한 뉴욕에서 말년을 보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뒈졌다. 

그 둘이 미국의 민주당계와 런던새끼덜을 위해서 배신한 정황이야 뻔한 것이다.

 

http://m.monthly.chosun.com/client/mdaily/daily_view.asp?idx=11255&Newsnumb=20201111255

[기자수첩] '잘못된 정책'으로 민심 이반 조장한 중국공산당의 경제간첩

 

조선일보 개자슥들이나 이따구 엉터리 기사를 후대에도 만들어내지만 말도 안 되는 개소리인 것이다. 당시에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일본국에서 넘어오는 생필품 경제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점령 지역 화폐를 200:1로 바꿔준 것이 문제라는 관점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일본 경제가 받쳐주던 시절의 법폐와 위폐의 교환비가 문제라서 장개석 정권이 쳐 망했다는 것은 완전히 난센스인 것이다. 되려 위폐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해야 되는 것이다. 

 

국공내전 당시에 국민당 정부가 430만명을 보유하고 있었다라는 것도 모조리 날조이다. 아 그럼 430만명 중에서 XY군 10만명을 빼간 것 때문에 국민당이 망했냐는 말이다. 그나마 미국보다는 국민당군을 지원한 것은 소련이었고, 영화에도 나오는 구형 I-16전투기를 포함해서 82대의 땅크를 꼴랑 지원했다고 칸다.

 

반면에 공산당이 관동군 물자를 인수인계 받은 것은 소총 70만 정, 기관포 1만 4,000정 , 탱크 700대에 달한다. 관동군과 만주국군 숫자가 실제로 2선까지 합치면 그 정도였으므로 소총 70만정은 근거가 있는 수치인 것이다.

 

국민당이 430만명이나 되었지만 망했다는 미국 개자슥새끼덜의 기사는 모조리 날조이고, 국민당이 소련에게서 전쟁발발 초기에 받은 물자가 대략 끽해야 탱크 82대와 소총 8~10만정 남짓이다. 

그리고, XY군은 미국 장비로 무장되었고, 대략 미국새끼덜이 국민당군 10만명 정도를 무장시켰지만 스틸웰이라는 놈이 우리가 무장시킨 군이니까 우리가 쓴다고 빼간 것이 전부이다.

 

국민당이 진짜로 430만명이었고, 공산당은 127만이었는데 장개석이 무능해서 졌다면 그는 역사에 길이남을 희대의 무능쟁이여야 하는 것이다.

 

영미새끼덜의 전쟁프로파간다의 허구성이 그따구인 것이다. 장개석군이 단일 시점에서 소총 430만정을 가져본 적이나 있다는 것은 완전한 날조이다. 있을 수가 없는 개소리나 지껄인 것이다.

430만 대군이 있었으면 일본에 애초에 밀리지도 않았지 말같지도 않은 개소리인 것이다. 우한 전투에서 꼴랑 20만 정도가 양쪽에서 투입되었는데, 430만이 있었으면 20만명을 20번 쳐 넣어도 되는데 말아먹었단 말인가? 

장개석군이 일본군의 대륙타통작전에서 창사에서조차 패하면서 50만명을 날려먹었고, 그 이후에 장개석군의 군세는 잘 잡아봤자 50만명 정도였을 뿐이다.

 

영미 개자슥새끼덜의 개소리와는 다르게 공산당은 70만정의 소총을 받고 127만으로 후일에 증강된 것이 맞지만 국민당군은 되려 숫적 열세로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이다. 

미국의 랜드리스란 애초에 없었다고 보며, 그 모든 것은 뉴욕의 민주당 새끼덜의 정신승리일 뿐이다. 되려 뉴욕의 민주당 새끼덜이 중국에 대한 지원 중단을 결의함으로써 국민당에게 결정적인 타격이 되었을 뿐이다.

상식적으로 당시에 태평양 전쟁에 투입된 미군의 전군을 다 합쳐야 겨우 360만이지만 태반은 후방에 대기하고 있는 병력들까지 합쳐서인 것이다. 오키나와를 공격한 미군 지상군 18만과 필리핀 전역의 15만, 이오지마의 7만명은 중복되는 병력들이고, 그들에게서 국민당군에게 지원이 들어갔다는 것은 숫제 그냥 날조인 것이다.

 

되려 후일에 일본놈들의 전설의 기업가들의 자서전 따위가 만화로 쓰여진 것들을 본인이 접한 것들에 따르면 당시에 지나방면군이던 일본군들이 초기 국민당의 전과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당시에 지나방면군들은 연합군이 중국에 상륙작전을 걸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배편이 없어서 집에도 못 가는 형편이었고, 그래서 후일에 국민당의 협조를 받는 것을 댓가로 국민당을 위해서 싸웠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정보를 취합하면 당시에 영미프 새끼덜은 아시아에서 그들의 식민질서의 재수립을 위해서 애초에 국민당에게 제대로 된 지원을 한 적이 없으며 되려 송자문과 공상희를 꾀어서는 국민당의 전쟁수행능력에 결정적인 타격이 될 당시의 국민당의 금보유고와 외환보유고를 빼돌리도록 하는 공작이나 걸었을 뿐이다.

 

그에 반해서 공산당 새끼덜은 무려 70만정의 소총을 받았고, 120만명의 병력으로 무장한 것이다.

 

이후에 정사화된 모든 전과나 전시 상황들은 싸그리 스파이 라인새끼덜의 날조로 보여진다. 되려 공산당 새끼덜은 철저하게 일본과 싸우지 않으면서 국민당을 이미 1945년 당시부터 숫적으로 앞서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이다.

 


중일전쟁 당시 미국이 중국에게 지원해 준 물자는 이 정도다.[8]

  • M3 경전차 100대

  • 트럭 25,000대

  • 야포 2,053문 - 약간의 105mm와 더 소수인155mm를 제외하면 대다수가 75mm M1 산포였다.

  • 소총 305,000정

  • 기관총 100,000정

  • 철모 146,000개

  • 폭격기 151대

  • 전투기 679대

  • 수송기 120대

  • 훈련기 43대

  • 식량 33,000톤

  • 기타 지원금액 8억 4,500만 달러

 

중일전쟁 당시에 미국이 중국을 지원해준 것은 꼴랑 소총 30만정 정도지만 게중에 다시 10만명을 후려간 것을 고려하자. 실질적으로 장개석군에게 쥐어진 소총은 많이 잡아봤자 20만정이지만 XY군의 예비치장물자까지 고려하면 그 것조차도 의심스러운 것이다. 철모 14만개는 거의 전량이 스틸웰의 XY군을 통해서 회수되었을 뿐이다. 소총 또한 그렇다고 치면 14만정을 뺀 16만정 정도가 장개석이 지휘권을 가진 군대에 공여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다만 공군전력만이 센놀트의 지휘권내에서 일본육상공군과의 제공권 싸움에 온전하게 쓰였을 뿐인 것이다. 미국이 중국에 건네준 공군기가 다 합쳐서 겨우 천대 정도이다. 오키나와에서는 손실된 항공기만 760대이다. 식량 33,000톤이라는 것도 아주 웃긴 수치일 뿐이다.

 

소총 16만정을 받아서 400만명을 무장시켰다면 중국군이 진짜 용자인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중국군은 맨몸으로 총과 싸운 희대의 불멸의 군대로 칭송받아야 한다.

 

솔직히 육군 병장 출신도 알아볼만한 개구라를 쎄리는 것이다. 

 

되려 후일에 본인이 읽은 후대의 일본 우익 계통의 전후 일본사내에서 산전수전을 겪었다는 인간들의 야그에 따르면 정작 미국새끼덜이 중국에 상륙해서 무장해제 하지 않은 지나방면군들이 의도치 않은 활약을 해서 국민당군의 열세가 일시적으로 극복되었다고 한다.

 

국공내전 당시에 공산당군의 병력 우위는 확고한 것이었고, 장개석군이 그에 상응하는 군사나 군사장비를 확보했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거의 없는 편이다. 되려 남방전선의 태반의 물자들은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의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전선쪽으로 네덜란드 군에게 건네지거나 판매되었다. 영국새끼덜이 버마에서 노획한 장비들은 모조리 네덜란드 새끼덜에게 건네졌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의 일본군 장비들은 현지인들에게 일본군들이 남기고 갔다.

 

애초에 동북3성으로의 레이스에서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늦은 순간에 이미 국민당의 열위가 확정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지나방면군들이 활약을 했는데, 그들이 어떠한 식으로 활약했는지조차도 지금도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이다. 당시에 지나방면군들을 중국의 넓은 땅을 커버하기 위한 병참선을 유지할 수송수단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한 장비들이 더 이상 중국내 병참 유지에 필요없게 됨에 따라서 트럭 위주로 편제된 자동차화 사단들로 병력들을 재편해서는 기동전을 펼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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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빗금이 쳐진 라인을 따라서 일본군들이 공로를 개척해가서는 일시적으로 열위였던 군사비를 기동전으로 극복했던 것이다. 되려 영미소련새끼덜의 개소리와는 다르게 국민당이 처음부터 열세인 전쟁이었지만 일본군의 차량화된 장비들로 말미암아서 장춘가지 진격을 달성하고 공산당군을 양분해서는 일시적으로는 우세를 얻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맞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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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동전에 의해서 얻어진 일시적인 승기는 곧 모든 방면에서의 반격으로 이어졌다. 특히 미국 새끼덜은 장개석군이 우세일 때에 휴전을 강요하는 씨발짓까지 저질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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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념과는 다르게 애초에 국공내전은 공산당의 숫적 수세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중국군에 협조한 일본군들의 기동전이 실전경험과 준비태세가 미비했던 공산당군들을 상대로 크게 성공을 거두어서는 동북3성까지 국민당군이 진격했던 것이다. 

 

따라서 숫적으로 열세였던 국민당군은 극적으로 인민해방군들의 전쟁수행의지를 꺾고,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것은 영미와 소련새끼덜의 안배에 어긋난 것이었다. 영미와 소련새끼덜은 애초에 국민당이 패하도록 그 모든 것을 안배했지만 정작 2차 대전의 참혹함에 미안함을 느꼈던 일본군들에 의해서 변수가 일어났던 것이다.

 

일본의 여느 군졸들은 일본의 촌동네에서나 징집된 병사들이었고, 비록 상부의 더러운 명령에 의해서 전쟁을 자행했지만 현지인들에 대해서 전후에까지도 고압적으로 남아있기를 원치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인해서 일본군들은 그들의 장비 따위를 모조리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현지인들에게 넘겨서는 적어도 그들의 적이던 제국주의 연합군 세력들의 명령이나 의향을 거부하였다.

 

당시에 국민당과 공산당군의 기동전에 대한 수행능력을 평가하건데 그러한 수행능력의 대부분은 일본군의 병참능력을 지탱하던 트럭이나 이동수단에 의해서 달성된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리고 일본해군용으로 상해 등 일본점령항구에 비치되었던 연료들이 기능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자면 기동전을 통해서 돌파를 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고, 러시아 육군의 초기 실패로 끝난 것이지만 당시의 공산당 새끼덜의 대부분은 실전경험이라고는 1도 없는 새끼덜이었기 때문에 실전경험으로 충만했던 국민당군과 지나방면군들이 숫적 열세를 극복하고 예기치 않은 성과를 달성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새끼덜의 지속적인 훼방에 의해서 결정적인 공세시기를 놓치고, 결국에는 공산당의 숫자에 압살되는 것이 국공내전의 경과로 보이는 것이다. 애초에 400만 대군이 돌파를 달성했는데 120만 군대에 역으로 쌈싸먹힌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당시에 충칭의 국민당들은 거의 모든 전력을 모아서는 공산당의 연안을 타격했고, 연안이 당시에 국민당에게 점령되었다. 한편 지나방면군들은 난징이 있는 저장성과 장수성에서 진격해서는 장춘까지 밀어붙였는데 결과적으로 국민당과 지나방면군은 일본의 소설 은하영웅전설에서 말하는 쌍두의 뱀으로 진격하는 전략을 거두는 셈이 되면서 공산당새끼덜이 지휘계통에 크나큰 혼란을 주면서 공산당의 초기 패전을 유도한 것이다.

 

공산당새끼덜은 양쪽에서 공격해오는 국민당의 공세에 대해서 우왕좌왕하다가 그 많은 병력의 숫적 우세도 살리지 못하고 박살이 났고, 2차대전 당시의 공산당의 거점이던 연안을 점령당하는 희대의 굴욕을 겪었지만 미군 개자슥 새끼덜의 강제휴전 강요에 의해서 혼란에 빠진 군사들을 수습하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장개석은 그러한 미국 새끼덜의 통수에 의해서 어쩌면 승기를 잡았던 전투를 놓친 것이고, 국공내전에 대한 불개입을 선언한 당시의 미국 민주당 새끼덜의 국회에서의 결의안은 당시에 지나방면군들에 대한 회유공장과 함께 진행된 미국 새끼덜의 제국주의적인 공작이었던 것이다.

 

지나방면군들은 기실 중국에서 국민당을 완전히 대리해서 싸울 의리는 없는 일본인들이었으므로 미국 스파이라인 새끼덜이 그들에게 접근해서는 그냥 일본으로 철수하라고 권유해서는 국민당이 다 이긴 전투에 결정적으로 초를 쳤다고 한다.

미국이 그들에 대한 일본으로의 귀국 수단을 제공한 것은 물론이다.

물론 그러한 권고를 받고도 끝까지 국민당군과 함께 싸웠던 자들도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러한 자들은 모조리 공산당에게 잡혔다면 죽음 뿐인 것으로 기록말살된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상부에서 철군을 독려하는 이상 천상 철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도 한국인 이충성을 비롯한 당시의 일부의 일본군들은 인도네시아군의 편에서 싸웠다. 그러나 이충성이 네덜란드 군에게 잡혀서는 총살을 당했듯이 일본군계 항병들이 현지 정권이나 저항 세력과 연계해서 군사작전을 실행할 경우에는 통상적으로 살인멸구되었다. 그들의 항전 의도는 순전히 적국이던 연합군들과의 적대관계에 의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일부는 또한 당시의 국제사회의 화두이던 반제주의라는 명분에 호응한 것조차 사실인 것이다.

 

김원봉 또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었던 소련새끼덜을 매우 싫어하였고, 그들의 하수인인 중국공산당 또한 혐오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시각은 당시의 아시아인들의 일반적인 견해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날 공산당과 일본군의 전투였다고 하는 백단대전의 진위조차도 의심받는 상황이지만 대놓고 정사라고 우기는 것들이 한국의 우익 개자슥새끼덜인 것이다.

 

한국의 친일개독새끼덜이 조선의용군의 공산당에 협력했다고 카는 2지대와 3지대 등의 존재는 모조리 외삽에 의한 날조이고, 심지어는 해방 이후에 박정희 정권과 김일성 정권의 근현대사에 대한 합의라고 하는 야합에 의해서 정사화된 가짜인 것이다. 

 

당시에 충칭의 김원봉의 지휘권 밑에 있던 조선의용군 1지대외의 다른 군사조직들은 모조리 후대에 외삽되었고 주장된 것이다. 조선의용군 1지대조차도 꼴랑 89명이던 집단을 쪼개서는 화북공산당쪽으로 보냈다는 것도 난센스이지만 장개석의 제자인 김원봉이 미쳤다고 그 지랄을 한단 말인가? 

 

게다가 애초에 아오야마 가즈오의 초안에는 100명 정도의 조선인 독립 부대를 창설하여 조직 중인 '일본, 조선, 대만 반파시스트동맹'의 중앙 집행 위원회가 지도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조선 의용대는 국제 의용군이라고도 불렸다.

 

1938년 우한이 일본군에게 포위 공격당하여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조선의용대는 국민당과 함께 퇴각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포위를 뚫고 퇴각하는 과정에서 조선의용대 4개 지대(구대)는 각기 분산되어 사실상 각 지대 지휘관들이 독자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하면서 부대를 전개하게 되었다. 김원봉은 우한에서 퇴각한 후 자신이 이끌던 조선의용대 본대 94명 병력과 함께 국민당의 수도 충칭에서 머물고 있었다. 나머지 3개 지대는 국민당의 수도인 충칭으로 퇴각하지 않고 중간지대에 머물렀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김원봉 자신이 직접 이끄는 본대를 제외한 나머지 3개 지대에 대한 통제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조선의용대의 김원봉 직계 지대를 뺀 공산당에 합류했다고 카는 3개 지대는 모조리 한국전쟁 이후에 만들어진 외삽 날조인 것이다.

조선인 국제 의용군은 처음부터 끽해야 김원봉의 직계 100명만 인가된 것이 맞고, 그들은 모조리 온전하게 충칭으로 철수했던 것이다.

되려 공산당 새끼덜의 날조에 대해서 후대의 친일개독집단새끼덜이 호응해서는 졸지에 조선의용대를 공산당 새끼덜로 날조한 것에 한국의 우익집단들이 북한의 사이비 논거를 받아들인 것이다.

 

애초에 조선의용대는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인데 연안으로 합류했다는 것부터가 완전한 날조일 뿐이다. 한국으로 치면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대거 북한군으로 이적했다는 수준의 개구라인 것이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6947

『황포군교동학록(黃埔軍校同學錄)』에서 확인되는 한인 입교생의 상황을 살펴보면, 본교의 경우, 3기생(1925. 7∼1926. 1); 이빈(李彬) · 이일태(李逸泰) · 차정신(車廷信) · 장성철(張聖哲) · 유철선(劉鐵仙, 이상 5명),

4기생(1926. 3∼1926. 10); 강평국(姜平國) · 유원욱(柳元郁) · 박효삼(朴孝三) · 박건웅(朴建雄) · 최림(崔林, 金元鳳) · 양검(楊儉) · 전의창(田義昌) · 이우각(李愚慤) · 권준(權晙) · 이집중(李集中) · 왕자량(王子良) · 윤의진(尹義進) · 최영택(崔泳澤) · 김종(金鐘) · 이종원(李鍾元) · 노일룡(盧一龍) · 이기환(李箕煥) · 오세진(吳世振) · 김홍묵(金洪黙) · 백홍(白紅) · 노세방(勞世芳) · 박익제(朴益濟) · 문선재(文善在) · 노건(盧建, 이상 24명),

5기생(1926. 11∼1927. 8); 신악(申岳) · 안유재(安維才) · 장익(張翼) · 김호원(金浩元) · 장흥(張興, 이상 5명), 6기생(1928. 4∼1929. 5); 김정문(金貞文) · 김명산(金明山) · 김은제(金恩濟) · 이춘암(李春岩) · 최문용(崔文鏞) · 오상선(吳尙善) · 노식(魯植) · 신석우(申碩雨) · 김근제(金槿濟, 재학중 사망, 이상 9명)이었다.

이어서 7기생 이후 한인 졸업생은 다음과 같이 밝혀진다. 7기생; 이석(李石), 8기생; 이근호(李根浩) · 나월환(羅月煥), 10기생; 왕중량(王仲良, 羅泰燮) · 고일명(高一鳴, 高時福) · 왕형(王衡, 安椿生) · 왕신호(王信虎) · 조동윤(趙東潤) · 노태준(盧泰俊, 李無雄) · 김동수(金東洙) · 한대원(韓大源) · 김고두(金高斗) · 왕자인(王子仁) · 이의흥(李義興) · 김동일(金東一) · 진동명(陳東明) · 신계서(申繼瑞) · 진국동(陳國東, 金裕哲),

11기생; 장병훈(張炳勳) · 조열광(趙烈光) · 이지강(李志剛, 李相勳) · 진낙삼(陳樂三) · 조황(曹晃, 千暻伊) · 최영빈(崔英賓) · 유장환(劉章煥) · 왕수의(王守義) · 유민(劉敏) · 최양성(崔陽成) · 김병화(金炳華) · 이철중(李鐵重) · 이운산(李雲山, 張致文 · 李雲煥) · 관건(關鍵, 黃載衍) · 엽홍덕(葉鴻德) · 강지산(康志山, 蔣載福) · 이청산(李靑山, 金貞彩) · 오주국(吳柱國, 白贊基) · 이국화(李國華, 韓道源) · 이철부(李鐵夫, 金世雄) · 김해석(金海石, 朴珍守 · 朴景一) · 서홍(徐洪) · 구양군(歐陽軍, 朴基成) · 이현근(李炫瑾),

12기생; 노복선(盧福善) · 김용무(金用楙) · 진경성(陳敬誠, 申松植) · 김태삼(金泰三) · 김철(金鐵), 15기생; 유해준(兪海濬), 16기생; 이규학(李奎鶴) · 김응삼(金應三, 韓道明), 18기생; 송면수(宋冕秀) · 왕영수(王永秀, 閔泳秀), 19기생; 이윤장(李允章), 20기생; 김중진(金重鎭) · 강홍모(姜弘模) · 이건국(李建國) · 장철부(張哲夫), 21기생; 조동린(趙東麟),

22기생; 김영훈(金英勳) · 박위택(朴胃澤) · 김현규(金現奎) · 박천마(朴天馬) · 이시엽(李時燁) · 김중달(金重達) · 김명규(金明奎) · 안창도(安昌道) · 오용필(吳用弼) · 정기엽(鄭基燁) · 장해덕(張海德) · 박윤호(朴允鎬) · 권필현(權必鉉) · 장정근(張定根) · 김정인(金正仁) · 안수성(安秀成) · 김시구(金是九) · 김치삼(金致三) · 이성만(李成滿) · 박성남(朴成男) · 허지수(許志秀) · 서삼철(徐三哲) · 이학서(李鶴瑞) · 김병철(金炳喆) · 김광진(金光進) · 문시욱(文時旭) · 이원곤(李元坤) · 김로(金露) · 김은석(金銀錫) · 강일영(康一永) · 이학률(李學律) · 조동희(趙東熙) · 백현일(白賢一) · 이시봉(李時奉) · 김대위(金大衛) · 김병선(金柄善) · 문창덕(文昌德) · 박재준(朴在俊) · 나태규(羅泰奎) · 한창섭(韓昌燮) · 최용산(崔龍山) · 김용호(金龍浩) · 문창흥(文昌興) · 김은령(金恩嶺) · 김백운(金白雲) · 김일건(金一鍵) · 배호원(裵豪元) · 오귀성(吳貴星) · 문인준(文仁俊) · 이원경(李元敬) · 양치호(楊致昊).

이와 함께 무한분교의 경우는, 박시창(朴始昌) · 진공목(陳公木) · 진갑수(陳甲秀) · 안동민(安東民) · 안자산(安自山) · 사검인(史劍仁) · 왕구(汪炬) · 관추(關秋) · 조국동(趙國棟) · 안동만(安東晩) · 송욱동(宋旭東) · 김준(金俊) · 유광세(劉光世) · 김치정(金致廷) · 이종(李鍾, 이상 정치과) · 유원도(柳源道) · 박태섭(朴泰燮) · 진용학(陳龍鶴) · 백규(白珪) · 이건(李建) · 최승연(崔承淵) · 김희철(金熙喆) · 박우균(朴禹均) · 이춘식(李春植) · 이벽파(李碧波, 이상 포병과) 등이 1927년 무렵 5기생으로 재학하였다.

이들은 유악한국혁명청년회 회원이었으며, 1927년 12월의 이른바 ‘광주봉기(廣州蜂起)’에 참가하여, 대부분 희생되었다. 이외에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 한인으로는 신춘(申春) · 조기석(曺基錫) · 이경수(李京守) · 주열(朱烈) · 최정무(崔鼎武) · 배순명 · 윤호 · 김준 · 박근만 · 박근수 등의 이름이 밝혀진다.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은 공산당과는 철전지 원수나 다름 없는 자들인데 이들의 태반이 연안에 합류했다고 하는 것부터가 날조인 것이다.

더욱이 공산당 휘하의 조선의용군이 이후에 8000여명에 이르렀다는 것은 모조리 북한새끼덜의 역사 날조인 것이지만 한국의 개독우익 친미파새끼덜 또한 그들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상호합의된 역사조작인 것이다.

 

중공새끼덜은 일본과의 교전을 거의 회피했고, 거의 몇 발의 총알조차도 소진하지 않았다가 팩트이다. 백단대전조차도 선전에 의해서 만들어진 싸움이고, 실제로는 대대단위 혹은 중대단위 교전조차 명령으로 억제되었다. 

그러한 중공새끼덜이 8000여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을 무장시켜서는 일본군과 싸우게 했다고? 말이 되는 개소리를 하라는 말이다.

 

게다가 당시에 화중일대는 허난성 대기근으로 군사활동이고 자시고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곳이다. 반면에 화북일대는 이미 장작림 정권 때부터 만주국 계통의 군사들이 공고하게 장악하고 있던 지역으로 애초에 침투가 거의 불가능한 확고한 일본군 점령지였고, 그러한 공간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이 아니고서는 침투가 불가능한 곳이었을 따름이다.

 

 

후일에 조선의용군으로 날조된 것들은 실제로는 중공새끼덜이 동북3성을 접수한 뒤에 장개석의 기습을 맞고나서는 부랴부랴 재편성했던 동북군들이고, 동북군 새끼덜의 태반은 또한 만주국군이나 장작림 군대였던 새끼덜까지도 끌어내서는 재활용된 그야말로 친일파 짱개였던 것들로 구성되었던 것들이다.

심지어 본인은 조선족이면서 소싯적에 참전용사였다는 씹새끼덜과도 한 때에 비즈니스 관계상 만나도 봤는데, 중국의 인민해방군의 고급장교 직위를 달았던 부모가 있는 새끼였다.

 

통념과는 다르게 문화혁명을 통해서 친일파들을 싸그리 솎아냈다는 짱개들의 선전도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다. 동북군들로써 국공내전을 통해서 중국의 통일에 기여했던 군바리들은 당연히 국가유공자 대우를 받았고, 다수의 만주국내의 친일 조선새끼덜이 그 안에 포함되었다.

 

박정희와 장준하와 장도영이 새끼도 만약에 그들이 한국으로 몸을 빼지 못했다면 동북군에나 가담해서는 지금쯤 박근혜 씨발년은 조선족 퍄오진휘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조선족 출신 중공군 영관급인 새끼랑 결혼해서는 낳은 퍄오진휘의 아들노무새끼가 한국에서 외노자로 쳐 일한다고 비자받으러 왔을지도.

 

 

후일에 조선의용대로 날조된 8000마리 버러지새끼덜은 모조리 그러한 종자들이 북한과 중공에서 또한 박정희 새끼가 광복군을 자처했듯이 그들의 행적을 날조한 씹새끼덜인 것들로 김원봉과는 일말의 관련도 없던 한국전쟁 전범새끼덜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황은 되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대를 보유한 정치집단인 민족혁명당만이 되려 한국의 정통 독립운동라인이며, 김원봉이 주장했듯이 임정이라는 것은 애초에 친미라인의 하수인새끼덜이 주장하던 버러지새끼덜인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한 가짜 버러지 친미-친일파새끼덜이 임정이라는 개자슥새끼덜인 것이고, 나아가서 한국 정부의 독립운동가나 북한 정부의 빨치산 투쟁가라는 것들은 모조리 후대의 정권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역사조작와 날조의 거짓말장이새끼덜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그들은 가쓰라-태프트 조약의 산물이었고, 가쓰라-태프트 조약 당시에 일본외무성에 카운터 파트가 되는 조선새끼는 박영효였고, 미국외무성에 카운터 파트가 되는 조선인 화이트 스파이새끼는 서재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박영효-서재필 라인에서 일본육군중장 홍사덕이와 같은 희대의 친일파새끼덜이 탄생하였고, 일본육군과 만주국군이 한국군의 원조가 된 것이다. 반면에 김원봉과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은 군바리들로써는 국군새끼덜과는 철저한 반대편에 있던 자들이다.

 

이승만, 김규식, 민찬호와 같은 새끼덜은 서재필 집단의 2세 집단이던 애초에 친일파이던 놈들이고, 김구 또한 바로 그 이승만 라인의 직계는 아니지만 그 라인에서 상하이에 지부를 열었더 새끼이던 친일파일 뿐이다.

그러한 김구가 당시에 일본과 중국이 수틀릴려고 하자 윤봉길과 이봉창 등을 보내서는 테러를 통해서 일본과 재빠르게 결별하고서는 중국쪽에 붙어먹었던 것이다.

왜냐면 당시에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하면서 미국과도 이미 수틀렸기 때문에 애초에 임정을 이승만과 만들었던 친미파인 김구가 일본편을 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만 국민당과 미국의 2차 대전의 야합이라는 것조차도 실상은 상호신뢰라고는 1도 없는 단지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수준이었고, 김구와 김원봉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김원봉의 눈에 김구라는 새끼는 1931년 이전에는 가쓰라-태프트 조약의 산물들인 친일파새끼덜이라고 봐도 무방한 것들이었던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임정의 해체를 요구하고 민족혁명당만이 정통임을 인정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해방 이후에는 기회주의자새끼덜이던 이승만과 김구가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닥치고 승자의 관점으로 쓰이는 역사에 의해서 김원봉은 졸지에 역적의 무리가 되고, 친일파였던 서재필 라인이던 이승만과 김구는 싸그리 독립운동가가 되는 광범위한 역사조작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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