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무슬림 이주자들의 기원
프랑스 노동시장은 19세기 중엽부터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며 이민자 공급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나폴레옹의 전쟁으로 인하여 성인 남자 중 적지 않은 비율이 희생된 것도 한 이유로 보입니다.
이에 따라 프랑스의 외국인 수는 1851년 38만 명(1.1%), 1881년 100만 명(2.7%), 1911년 120만 명(3%)에 이르렀습니다.
프랑스의 노동력 부족은 2차 대전 종전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1945년 프랑스 정부는 이민청을 설립하고 스페인의 계절 농업 노동자들을 가족과 함께 정착시키는 프로그램을 운영할 정도였습니다.
이민 대상은 점차 북아프리카 지역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되었으나 비유럽 지역 이민자들은 프랑스에서 최하층으로 분류되었으며 정상적 시민으로 취급받지 못 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북아프리카 이주민들이 거주하는 극악한 조건의 판자촌이 대규모로 형성된 비동빌레(Bidonvilles)는 사회적 혐오의 대상으로 떠오를 정도였으며 퐁피두 대통령은 급기야 비동빌레 판자촌의 철거를 명령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법은 철거민에게 대체 주택이 제공되어야 철거가 가능하였으나 비동빌레 북아프리카인들에게는 예외였습니다. 결국 홈리스로 전락한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대규모로 발생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이들 북아프리카 이주민에 대한 인종적 혐오가 1970년대 초부터 급격히 커졌는데, 1971년에는 파시스트들이 북아프리카 노동자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여 여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1972년에는 경찰관에 의해 북아프리카 이주민이 사살되는 일도 있었으나 해당 경찰관은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1973년에는 무려 32명의 북아프리카인들이 인종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한편 반이민 운동은 1970년대 극우파 학생들이 주도하였는데 이들은 야만적 이민을 즉각 중단하고 신질서를 세워야 한다는 신파시스트 그룹으로 성장합니다.
신파시스트 그룹 중 일부는 풀뿌리 운동으로 이민 반대 운동을 이어나갔고 이들이 1972년 장 마리 르펜이 세운 국민전선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국민전선은 특히 피에 누아르 Pieds-Noirs(1962년 알제리에서 귀환한 프랑스 사람들) 밀집 지역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반 이민 정당이 또 다른 형태의 이주민들을 기반으로 성장한 것은 참 아이러니한 사실입니다.
국민전선은 1997년 툴롱을 비롯한 남부 4개 도시의 시정부를 장악하고 전국 유권자의 15% 지지를 얻으며 급부상하였습니다. 1997년 1차 의회 선거에서는 400만 명이 지지를 받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 유권자들은 국민전선을 대안 세력으로 인식하기보다는 기성 정치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표를 주었다고(protest vote)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2년 당 대표이자 창립자인 장 마리 르펜이 프랑스 대통령 선거 1차 투표에서 16.9%를 얻고 2위를 차지하며 결선 투표에 진출하자 프랑스 일반 유권자들과 주요 기성 정당의 관계자들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공화국 연대라는 구호하래 좌우합작이 성사되어 시라크 대통령은 재임에 성공하였습니다.
한편 국민전선은 2002년 대선을 정점으로 한동안 내리막 길을 걸었습니다. 2007년 대선에서는 브루노 메그레가 지지자를 이끌고 탈당하면서 국민전선의 지지율이 하락하였습니다.
2005년 방리유(교외지역) 소요 사태
한편 2005년 10월 27일 북아프리카 무슬림들 집단 거주 지역인 Clichy-sous-Bois에서 두 명의 무슬림 10대 소년들이 경찰에 쫓기다가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사실 이 두 명은 경찰을 피해 변전소에 숨어들어갔다가 감전되어 사망하였습니다.
이로부터 3주 동안 파리 외곽(방리유)의 무슬림 밀집 지역에서는 무슬림 청년들의 자동차, 학교, 체육관 등에 대한 무차별적 방화와 파괴가 이어졌습니다. 사태는 600여 명이 체포되고 나서야 안정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북아프리카계 무슬림 청년들은 프랑스에서 태어난 이민 2, 3 세대로 이전 세대의 궁핍과 어려움과는 거리가 먼 유년 시절을 보냈으나 전통적 가치관을 유지하고 있는 부모 세대와도 연결 고리도 작았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경제가 성장은커녕 경제난으로 실업률이 10%를 넘고 청년 실업률은 25%에 육박하자 무슬림 청년들의 일자리 찾기는 더 힘들어졌습니다. 무슬림 젊은이들의 실업률은 무려 45%에 달하였습니다.
무슬림 청년들은 절대적으로 궁핍한 시절을 겪은 적은 없으나 실업이 일상화되고 희망이 사라지면서 점점 범죄의 길로 빠져들었고 프랑스 감옥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인구의 8% 남짓인 무슬림들이지만 프랑스 감옥 내 수감자 비중은 최소 50%에서 70%에 이른다는 추정 통계(원칙적으로 인종별 통계 조사가 금지임)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방리유 소요 사태 당시 내무장관을 맡으며 강경한 대책을 밀어붙여 인기를 얻은 사람이 사르코지 전 대통령으로 결국 대선에서 승리합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anta_croce&logNo=220561608950&isFromSearchAddView=true
프랑스의 대외정책은 완전히 좌충우돌입니다. 사르코지 시절에는 리비아에 개입을 했고 올랑드 대통령은 시리아의 일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ISIS가 아닌 수니 반군 조직을 의미)을 지지하거나 사우디, 카타르같이 지하드 전사들에게 자금을 대주는 석유부국들과 연대하고 있습니다.
https://m.blog.naver.com/santa_croce/220561238874
그렇다면 2015년 파리 연쇄 테러의 원인도 여기에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