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노인
18.05.26
조회 수 104
추천 수 1
댓글 0








엄혜진의 인권 이야기

 

나도 프리섹스주의자가 되고 싶다

 

 

여성이라면 한번쯤 프리섹스주의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타자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갇혀버린, 거추장스러운 나의 몸이 가장 저돌적으로 탈출할 수 있는 방식으로, 프리섹스주의는 나에게도 한때 막연한 동경이었다.

 

93년, 학내 활동가들 앞에서 직선간부 출마소견을 밝히는 자리였다. 고심하던 차에 던진 출사표의 서두는 이랬다. "나는 프리섹스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권력 불평등에 맞서 열심히 투쟁하겠다는, 그럴싸한 '정치적'인 선동을 끌어내기 위한 대유법(프리섹스주의=자유주의)이었다. 운동사회의 성적 보수성과 경직성에 대해 의문을 품던 나는 프리섹스주의라는 언급만으로도 내심 만족하면서 우리의 프리섹스주의는 자유주의의 그것과 달라야 하지 않겠냐는 엉성한 견해도 은근히 내비치고 싶었던 듯하다. 평소에 브레지어 안 입고 다니더니, 그게 프리섹스주의냐고 선배들이 진담반, 농담반으로 놀리던 기억이 나는데, 사실 나 스스로도 여성에게 있어 프리섹스주의가 갖는 의미에 대한 깊은 고민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었다. 

 

최근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에서 공개한 사례 중 친분관계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에 대한 논쟁에서 일부 남성들이 보여주고 있는 입장은, 그 동안 내가 분열해왔던 프리섹스주의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던져주는 듯 하다. 자칭 자유주의자들인 이들 남성들은 이 사례의 가해자가 단지 "플레이보이"일 뿐이며, 관계의 진정성 없는 성적 대상화였다고 주장하는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소녀이데올로기에 물든 보수적 여성들"이라고 윽박지른다. 이 사건이 왜 성폭력 사건인가를 강조하기에는 짧은 지면이 아쉽지만, 성폭력과 성애를 구별짓지 못하는 성에 대한 남성 일방적 관점이 난무하고 있는 아찔한 현실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어야겠다. 성녀, 혹은 창녀로 구분되었던 여성들이 이제는 '프리'하게 '섹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있다. '순결이데올로기'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여성주의자도 아니라며 마치 진정한 여성주의자는 모두 섹스를 해야 되는 것처럼 기세 등등 남성들만의 프리섹스주의를 설파한다. 그들은 성적 결정권을 박탈당해왔던 여성들의 양가의 갈등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면서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그들만의 성적 기호와 코드와 방식에 따라 움직이는 프리섹스주의를 찬양한다. 알싸한 석양이 유람선 둥실 떠있는 바다를 홍조로 물들이는 가운데 서로 사랑을 고백하는 날, 그토록 낭만적인 분위기에 신나게 몰입해 가는 남자 친구와 다르게 갇혀진 몸의 굴레를 벗어야 할지 말지를, 먼저 자맥질하곤 하는 이 땅 여성들에게 프리섹스주의는 한번도 그녀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다. 나의 성적 결정권을 보장받고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성적 권력을 누릴 때, 나도 프리섹스주의자가 되고 싶다. 

 

- 엄혜진(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활동가이며,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 멤버입니다)

 

출처

https://sarangbang.or.kr/kr/info/hrinput/hr_content.html?seqnum=1058&page=1&order=1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추천순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수 추천 수 날짜
공지 헬조선 관련 게시글을 올려주세요 73 new 헬조선 9223 0 2015.09.21
13147 [2015 대한민국 혐오 리포트②] 맘충, 급식충… 벌레가 된 사람들 2 new 민족주의진짜싫다 49 1 2018.05.06
13146 생후 하루만에 두살? 한국식 나이 계산법 언제까지 2 new 민족주의진짜싫다 77 1 2018.05.06
13145 삼성 이재용 무죄로 풀려나는 게 싫은 이유 2 new 노인 51 1 2018.05.04
13144 한국의 패션 산업 문제점 new 노인 380 1 2018.04.30
13143 구타유발자에 대한 구타 정당행위로 인정해야 한다.ㅣ newfile 초고등영혼대천재쇼군 82 1 2018.04.30
13142 한국인들이 유대인을 대할 때 이중성 1 new 노인 76 1 2018.05.08
13141 지금 상황에서 친일파들을 모조리 청산 하기 늦은 이유 new 노인 58 1 2018.04.30
13140 한국 비평가들이 마광수를 욕할 자격이 없는 이유 1 new 노인 71 1 2018.04.29
13139 메갈리안, 워마드가 왜 혐오글 올릴까? 5 new 노인 92 1 2018.04.29
13138 ??? : 다수자(한남, 자국민)도 혐오의 피해당사자가 될 수 있다! 모든 혐오에 반대해야한다! 3 new 소수자민주주의 79 1 2018.05.01
13137 한국인들이 백인 극우들 욕할 자격이 없는 이유 1 newfile 노인 78 1 2018.04.29
13136 관라자새끼 잠수탄거냐? 초고등영혼대천재쇼군 저 씹페도새끼 15 new 소수자민주주의 162 1 2018.04.28
13135 PC에 대한 한국인들의 무지 1 new 노인 109 1 2018.04.28
13134 디시 유저 페도 초고등영혼대천재쇼군의 문제점 3 new 노인 55 1 2018.04.28
13133 한 단면을 보고 판단하지 말자 new leakygut 45 1 2018.04.28
13132 종전 선언해도 군대는 간다 11 new 노인 167 1 2018.04.28
13131 오리엔탈리즘 환상에 벗어나야 하는 이유 3 new 노인 104 1 2018.04.27
13130 쓰레기들 오늘도 똥싸냐? 4 new DireK 164 1 2018.05.12
13129 선동도 이만하면 병이다 ㅅㅂ. 3 new 헬조선극혐 96 1 2018.12.16
13128 신안에서 또 강간사건 터졌네 ㅡㅡ 역시 대한민국은 다 뒈져야함. 1 new 젖깔 140 1 2018.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