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를 비롯하여 당시의 언론기관인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이 참여하였고 남자는 담배를 끊고, 여자는 비녀와 가락지를 내면서까지 국채를 갚으려는 국민들의 열망은 뜨거웠다고 전해진다. 그 밖에 일본에 체류 중이던 민원식 등도 1907년 5월 이전에 5전[1], 5월 24일에는 200냥의 기탁금을 기부해왔다.[2] 또한 대구를 비롯하여 한성부, 진주, 평양 등지에서 여성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설립되었다. 이는 국민의 힘으로 국채를 갚으려 했던 유례없는 경제적 운동이었으나, 상위계층과 부자들의 참여가 부족하였다는 한계점이 있었고, 일본제국이 일진회를 조종하고 그 주도자인 양기탁을 구속하는 등 국채보상운동을 저지한 결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착복 논란
그러나 한국통감부는 베델과 양기탁이 돈을 착복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한국통감부는 윤웅렬에게 "보상금 3만원 중 베델과 양기탁이 사취하였으므로 그 반환을 요청한다"는 청원서를 제출토록 사주하였다. 윤웅렬은 이 사주에 따라 국채보상금 반환청구서를 제출하였다.[3] 베델이 모금한 금액 중 2만원을 이자를 조건으로 타인에게 빌려주었다가 이자는커녕 원금도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자 의혹은 사실처럼 확산되었다.
1907년
한국인은 변하지 않는다.
경제가 다시한번 무너지면
또다시 돈을모아서 기업을살리고 나라를 살리자는 운동은 일어난다.
뉘우침이 없고 반성이 결여된 한국인의 미래
절대로 변할수 없는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