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다.
뭐..주말에 할 일이 없어서 도서관에 자주 다녔어. 책 좀 보다가 또 사람들과 수다떨다가 당구를 치기도 하고 뭐 그런 재미가 있었거든.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게 재미있어서 주말에도 특별한 일 없으면 거의 도서관에 나갔었다.
당시 과에 있는 예비역 형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이 분이 소아마비를 앓아서 혼자서 걷기가 힘들었다. 뭐 못 걸을 거는 아니지만 누군가 옆에서 지탱해주면 더 편하게 걸을 수 있어서 내가 옆에서 많이 보조다리 역할을 했거든.
아무래도 소아마비다 보니 사람 마음이 위축되어서인지 여자를 통 만나지를 않았는데 그때 마침 어떤 여자와 얘기를 하고 있더라? 호기심에 나도 가서 인사를 나누었는데..영문과라고 하더라고. 도서관 로비에 서성이다가 어떻게 알게 되는 사람들 있잖아? 목례 정도는 하고 다니는.
암튼 남자라서 일단 여자 얼굴을 스캔해보니 영 상태가 좋지는 않더라고..그래서 관심은 식었는데 말이지..
내가 영문학에 소양이 있다기보다 혹시 그런 잡지를 알라나 모르겠는데 예전에 '시사영어연구'와 '영어세계'라는 유명한 일종의 영어-유학 잡지가 있었어. 우리 집은 못살았는데 누나가 헛바람이 들어서인지 그 잡지가 상당히 비싸고 수준도 높아서 사실 누나는 전혀 읽지 않았는데도 그걸 꽤 오래 구독을 했어...
당시만 해도 읽을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나는 그 잡지를 몇 번-몇 십번씩 읽었고 그 잡지에 보면 영시가 꽤 많이 나오거든. 물론 단편소설같은 것도 꽤 있지만 암튼 그러다보니 내가 영시에 대해서 조금은 아는 체를 할 수 있게 된 거지. 뭐 로버트 브라우닝이라든가 뭐 이런 사람들 시중에서 몇 개 유명한 시는 대충 외울 정도는 되었음.
그리고 영문과생들이 지금도 보는지 모르겠는데 당시에는 노튼 영문학이라고 해서 영시나 소설을 모은 일종의 앤솔로지인데 이거 엄청 두껍다..내 기억으로는 700-800페이지 정도?
영문과생들은 그게 필독서라도 그거 갖고다니면 무조건 영문과였지..
암튼 그래서 덕택에 몇몇 얘기를 나누고 정리하고 헤어졌는데..
그 여자 책상에 가보니..무슨 시험지철같은 것으로 좌석을 엄청나게 확장해놨더라. 이거 무슨 말인지 모를 수도 있겠는데 한마디로 좌석 주변으로 철을 이어붙여서 주변 사람들과 완전격리시켰다는 것.
뭐 열심히 공부하는가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당시만 해도 좌석이 널럴하던 터여서 사실 나도 내 전용좌석이 있었어..암튼 그 자리에 가서 있는데
다음날 보니 내 좌석에 커피캔이 하나 놓여있는거다!
아. 이게 뭘까 우리 과 여학생들은 절대로 이런 짓을 안 하거든. 그런다고 형들이나 남자동기들이 이럴 리도 없고 엄청 신경쓰이면서 기분이 좋은데 누군지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를 않는거야..
커피캔 중에서는 제일 싼..아마도 레쓰비나 뭐 그런 류였는데 그래도 기분이 그게 어디냐?
다음날에도 또 레쓰비가 놓여있고..
그 다음날에도 또..
누군지는 모르겠고..혹시 그 영문과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기는 했는데 일단 나는 몇 마디 나눈 거에 불과한데다 사실 그 여자에 대한 호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뭐 그 여자는 아니겠지..생각한건데
이게 한 일주일 정도 그러더니 말이야.
다음주가 되니까 내가 좌석을 비우면 그 때마다 커피캔이 놓여있는거야..
와..씨발 이러면 말이지 은근히 소름이 끼쳐요. 그리고 이게 조금 소문이 나면서 우리 과 애들이 내 책상을 주시하고 있던 모양이더라고.
그러더니 결국 애들이 알아냈는데 영문과 걔가 내 책상에다가 커피를 갖다놓는거래..뭐 대학생들이 화제가 없잖냐? 그러니까 이게 소문이 난 거에요..
그때가 조금 있으면 1학기 기말고사를 보게 되는 5월 말 정도 되었을거야. 근데 사실 말이지. 나는 그 여학생이 조금도 마음에 안 들었다고..정말 그냥 일종의 성의상 응대를 해준 건데 계속 레쓰비가 올라오니 좀 신경이 쓰이기도 하고 기분이 좀 나쁘더라.
사람 심리가 간사해서 내가 호감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진짜 입이 벌어졌을텐데 전혀 안 그런 사람이 계속해서 갖다주니까 그러더란 말이지.
결국 나는 작정하고 그 여자를 불러내야겠다고 해서 그 여자가 있는 책상으로 갔어. 그런데 엄청 열심히 공부(또는 하는 척)하고 있더라? 그리고 그 철..아마 알거야 노란 종이철 있지? 거기에 온갖 낙서같은 것이 잔뜩 있는데 어떤 건 영어로도 쓰여져 있고 어떤 건 한글로도 적혀져 있더라고..뭐 영문과니까 그렇겠지? 생각했어. 암튼 불러내서 내가 얘기를 했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댁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는 거는 아니고 또 우리 과애들 사이에서 계속 커피를 갖다주는 사람이 있다고 속닥거린다. 또 학생이라 경제적 부담도 있을테니 더 이상 커피 갖다주지 말라. 이렇게 말했지.
아 그러니까 알았다고 하더라? 그래서 뭐 이젠 이렇게 정리되나 싶었지.
근데 다음날 되니까 또 내 책상에 레쓰비가 있는거야..
아 씨발 이러니까 소름이 좀 끼치잖아? 그래서 내가 그 여자 책상으로 갔지. 근데 거기에 영문과생의 필독서 노턴영문학 한권만 있고 애가 없는거야..그래서 내가 좀 기다렸어. 나 있나없나 흘끔거리다가 커피를 갖다놓는 모양이니까 어디 멀리 가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근데 안 돌아오더라고. 그래서 뭐 기다리면서 심심해서 노턴 영문학 책을 살짝 펼쳐봤어. 근데 그거 아냐? 노턴 영문학 책은 다 갖고 다니는데 실제로 읽은 애들이 없어요. 뭐 학교에서 수업하는 챕터 몇 장만 보통 줄 그어져있고 그냥 새하얘..하긴 노턴영문학 다 읽었으면 그건 영문학자지 뭐.
근데 내가 얘기한 워즈워스와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에 약간 낙서가 있는거야..
뭐 워낙에 유명한 시니까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 순간 노란 종이철에 있는 낙서가 떠올라서 그 낙서롤 보는데..
와..거기에 있는 영어낙서가 바로 그 두 사람의 시인거야..그걸로 온통 종이철에 낙서를 해놨어..그 순간 소름이 쫙 끼치더라고..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전율같은 게 일더라고..
그런데 그 순간..이 여자애가 바로 내 옆에 딱 다가서더라고..
(재미있다면 2편 푼다) 추천 없으면 여기서 정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