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노인
17.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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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발발
맥아더가 만주를 폭격했다면? 그것도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면? 과연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까?

20세기는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기억되는 전쟁의 세기다. 한국전쟁은 제한전쟁이었다. 세계대전으로의 확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계사의 시각에서 보면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다. 대신 한반도 안에서 치러진 전쟁이라는 사실은 전쟁의 밀도, 야만의 강도, 그리고 구토의 정도를 크게 했다.

 

노회한 맥아더, 전쟁 확대에만 골몰

여전히 전쟁의 상처는 깊다. 60년이 지났지만, 전쟁의 트라우마가 한반도를 배회한다.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수만 가지 시선이 있다. 여기서 만주 폭격론을 재검토하는 이유는 그것이 전쟁을 이해하는 또 다른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만주 폭격을 둘러싼 대립은 곧 트루먼과 맥아더의 전쟁으로 표현된다. 이 전쟁은 대통령과 장군의 대결, 그것만은 아니다. 트루먼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행정부는 한국전쟁 초기부터, 이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걱정했다. 그래서 전쟁의 성격을 ‘제한된 국지적 도발’로 규정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처음부터 한국전쟁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더 큰 전쟁을 원했다. 그가 꿈꾸는 전쟁은 중국 공산당 정부로 상징되는 아시아 공산주의에 맞서는 십자군 전쟁이었다.

맥아더, 문제적 인물이다. 한국에서 맥아더는 여전히 이데올로기다. 그는 누구인가?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의 나이 일흔 살이었다. 그는 언제나 1등이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전선에서 최연소 사단장을 지냈다. 또 최연소 웨스트포인트 교장, 최연소 육군참모장, 최연소 소장, 최연소 대장 등 그의 경력 앞에는 수많은 ‘최연소’ 기록이 붙었다. 1918년 처음 ‘별’을 달았고, 잠깐의 전역 기간을 제외한다 해도 거의 30년을 장군으로 지낸 ‘만년 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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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오른쪽 사진 가운데)에게 ‘제한된 국지적 도발’로서의 한국전쟁은 성에 차지 않았다. 그가 꿈꾼 한국전쟁은 아시아 공산주의에 맞서는 십자군 전쟁이었다. 반면 스탈린(왼쪽 사진)은 한국전쟁의 확전을 원치 않았다. 한겨레 자료


맥아더 편에는 장제스의 재기를 바라는 노회한 중국 로비스트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념 빼면 시체인 미 공화당 반공주의자들이 강력한 동맹군이었고, <타임>과 <라이프>를 소유한 헨리 루스 같은 든든한 후원자도 있었다. 루스 같은 이들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환호했다. 드디어 미국과 중국이 대결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중국 공산당을 무찌를 기회가 온 것이다.

역사에서 그들은 패배했다. 만주 폭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문제를 둘러싼 전투의 과정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진짜 전쟁만큼이나 치열한 전투였다.

한국전쟁이 발생한 초기 미국은 다급한 나머지 장제스의 군대를 투입하는 방안을 실제로 검토했다. 그러나 애치슨 국무장관 등은 이러한 제안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장제스를 밀어주는 행위가 전쟁을 크게 만들 위험성이 있고, 그것은 미국 외교정책을 망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합리적 이성을 가진 미국의 당국자들은 장제스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장제스가 1949년 1월21일 그동안 모아놓은 금괴를 챙겨 대만으로 도망갈 때까지, 미국은 장제스 정권에 총 25억달러 규모의 지원을 했다. 그러나 미국이 지원한 돈은 장제스 정권의 ‘부패의 아가리’에 족족 들어갔다. 무기는 부패의 사슬을 거쳐 공산군 차지가 됐다. 장제스의 행적을 아는 사람들이 그의 재기를 어떻게 믿겠는가.

한국전쟁 초기 제한전쟁론을 생각하던 워싱턴 입장에서 맥아더의 호언은 언제나 눈엣가시였다. 인천상륙작전은 그런 점에서 맥아더를 살렸다. 맥아더는 성공 확률이 5천분의 1로 평가되던 이 작전을 성공시켰다. 맥아더의 담대함이 빛을 발하던 순간이었다. 만약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 직후에 은퇴했다면, 그는 영원한 전설로 남았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맥아더에게 십자군 원정의 야망을 다시 한번 불러일으켰다. 과도한 욕심은 현실 판단의 시야를 흐리게 했다. 맥아더는 중공군을 얕잡아봤다. 중국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입만 열면 중국과의 전쟁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오판은 나중에 그의 무능을 증명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반면 마오쩌둥은 이미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 전쟁이 곧 자신의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인민군이 남침한 직후 미국이 7함대를 대만해협에 보냈을 때, 마오쩌둥은 해전이나 공중전으로 미군과 붙는 것보다 한반도 땅 위에서 맞붙는 게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공군은 대만해협을 건너는 대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걸어서 건넜다.

 

 

장제스 군대 투입 계획을 워싱턴서 제동

미군은 패배했다. 압록강에서의 참패는 인천상륙작전의 승리를 덮을 만큼 컸다. 결국 한국전쟁의 솜씨 좋은 구원투수, 매슈 리지웨이 장군이 8군의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리지웨이는 한국전쟁을 새로운 국면으로 돌려세웠다. 그는 중공군에 쫓겨 서울을 다시 내주면서 황급히 도망치던 국면을 일시에 정비하고, 한반도의 허리에서 팽팽한 교착 국면을 이어갔다. 리지웨이의 승리는 맥아더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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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초기 미국은 원자폭탄 활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물론 그 계획이 실행됐다면 전장이 동북아와 동유럽으로 확대됐을 개연성은 충분했다. 한겨레 자료


맥아더는 또 다른 전쟁에 승부를 걸었다. 트루먼과의 마지막 일전이다. 맥아더는 1951년 3월24일 한국을 방문했을 때, 또다시 중국을 모욕했다. 입버릇처럼 하던 발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점이 좋지 않았다. 그 발언은 조심스럽게 중국과 평화협상을 모색하던 트루먼 행정부의 노력에 찬물을 끼얻는 결과를 가져왔다.
트루먼은 맥아더의 해고를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명분은 맥아더가 제공했다. 그즈음 공화당 대표 조지프 마틴과의 서신 교환에서 맥아더는 “장제스의 군대를 활용해서 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야 한다”며 “이러한 생각에 반대하는 세력과 최대한 강경하게 맞설 것”이라고 썼다. 맥아더는 이 편지를 공개해도 좋다고 말했다.

4월5일 마틴이 편지를 공개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는 직격탄이었다. 그즈음 도쿄 주재 다른 나라 대사관들은 본국에 맥아더의 확전 의사를 보고하느라 바빴다. 이런 정보를 접한 트루먼 대통령은 책상을 내리치면서 “이런 매국노가 있나?”라며 혀를 찼다고 한다.

4월11일 맥아더는 해임됐다.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맥아더가 도쿄를 떠날 때 25만 명의 일본 사람들이 미·일 양국의 국기를 흔들며 눈물을 흘렸다. 미국에 도착해서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뉴욕을 지날 때, 그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노회한 장군은 자신의 해임 관련 청문회에서 연설을 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군가의 가사를 인용하며 소회를 밝혔다. 여기에는 공화당의 욕심도 작용했다. 그들은 청문회가 맥아더를 위한 무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무대에서 ‘겁쟁이 대통령에게 모함을 받고 배신당한 위대한 애국자’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맥아더와 공화당은 군중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전사자가 늘어나고, 전선은 교착되고, 민주당 정부가 중공에 타협적 자세를 취하는 상황에 미국인이 실망한 것은 사실이다. 이런 심리는 이미 1950년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의 패배로 확인됐다.

그러나 맥아더와 공화당이 간과한 것이 있다. 미국 국민은 아시아에서 더 큰 규모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맥아더와 공화당은 그것을 몰랐다. 사흘 내내 이어진 청문회는 맥아더의 오판과 독선, 그리고 자기과시의 면모를 들춰내는 계기가 됐다. 워싱턴의 합동참모, 국방부 고위 관료, 한국전쟁 참전 관계자들 모두 맥아더의 오판으로 압록강에서 당한 쓰라린 패배의 기억을 강조했다. 맥아더는 청문회에서 장제스의 군대가 “약 50만 명의 정예부대”이며 전투력 면에서 “중국 공산군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런 주장에 수긍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맥아더는 결국 졌다. 트루먼은 역사의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근거를 남긴 반면, 맥아더는 1952년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잊혀진 사람’이 됐다. 대통령은 그의 부관 출신이면서 언제나 맥아더가 가진 반대의 덕목을 지녔던 아이젠하워에게 돌아갔다. 노회한 장군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맥아더의 오판·무능 까발린 청문회

만약 맥아더 세력이 승리해서 만주를 폭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아가 원자폭탄을 터트렸다면? 원자폭탄은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절대무기지만, 가장 사용하기 힘든 무기이기도 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 서구의 문명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양심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가 승리에 대한 집착을 능가할 만큼, 핵폭탄의 피해는 과학이 아니라 도덕적 판단 대상이 됐다. 한국전쟁 당시는 1949년 8월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을 한 이후였기 때문에, 핵전쟁의 공포도 무시할 수 없었다.

워싱턴에서는 한국전쟁 초기부터 원자폭탄 사용이 거론됐지만, 당시 미 국방부는 한국전쟁이 핵무기를 사용할 만큼의 절박성이 있는지 결론내리지 않았다. 이후 중공군이 개입하고 전세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원자폭탄의 사용 가능성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1950년 11월30일 트루먼 대통령도 기자회견에서 원자폭탄의 사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리고 맥아더가 1951년 2월11일 워싱턴에 보고한 내용에는 ‘적의 주요 보급로에 원자력 방사능 폐기물을 설치해서 만주 지역과 한반도를 영원히 분리하겠다’는 구상이 들어가 있었다.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생각이었다.

물론 원자폭탄은 끝내 투하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만약 투하되었다면, 맥아더 신봉자들의 생각처럼 한국전쟁의 조기 승리로 이어졌을까?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동북아 정세, 전쟁에 대한 중국의 인식, 이 모든 것을 고려해보면, 원자폭탄은 중국의 전쟁 의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한다면 수류탄으로 대응하겠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인도 총리 네루를 만났을 때는 “중국 인구가 얼만데”라며 미국의 원자폭탄을 ‘종이호랑이’로 비유했다. 일본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패배의 조종이었지만, 만약 중국에 떨어졌다면 그것은 새로운 전쟁의 시작을 알렸을 것이다.

무엇보다 스탈린의 생각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스탈린은 어떻게 해서든지 3차 세계대전을 피하려 했다. 전후 소련 체제의 안정과 미국과의 국력 격차를 고려한 선택이었다.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입장에서 미국의 발목을 한반도에 묶어 유럽에서의 대결을 피하고, 그 과정에서 동유럽 사회주의를 강화할 시간을 벌게 해주었다.

발칸반도가 3차 대전 전장 됐을 가능성 커

하지만 한국전쟁이 동북아 전쟁으로 확대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미국과의 전면전을 다소 꺼렸던 스탈린도 더는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기 어렵게 된다는 뜻이다. 당시 동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야심찬 유럽 부흥계획인 마셜플랜으로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티토의 경우 분명한 탈스탈린 노선을 견지하며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스탈린은 3차 세계대전의 전장으로 발칸반도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1950년 6월 “발칸 대신 한국에서 전쟁이 났다”는 평가가 분명 있었다. 새로운 전장으로 베를린은 너무 직접적이고, 대만이나 일본 침공은 역부족이었다. 만주 폭격 명령이 떨어졌다면 한반도와 발칸반도의 역사도 조금 뒤바뀌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렇게 되면 우파가 불안한 승리를 거둔 그리스에서도 다시금 내전의 불길이 타올랐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3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한국전쟁은 어떻게 되었을까? 휴전협상은 미루어졌을 것이다. ‘비기기 위해 죽어야 하는 전쟁’이라는 누군가의 넋두리처럼, 38선을 중심으로 지루한 살상의 밀고 당기기를 계속했을 것이다. 3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미국과 소련의 집중력이 분산됐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만큼 내전의 광폭함은 심해졌을 것이다. 승패를 가리지도 못하면서 누구도 매듭을 짓지 못하는 전쟁, 그렇게 되었다면 아찔한 뿐이다. 야만의 기억들은 지금도 충분하다. 그 전쟁이 몇 년 더 지속되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6506.html






  • 1950년에 시작한 헬반도 내의 전쟁이 만주까지 확대되는 건 뻔하고 당시 소련이 건재했던 걸 감안하면 쉽게 결론이 나질 않겠죠. 다만 좋은 건 헯나도가 완전히 쑥대밭되고 센징이들도 적어도 반 정도는 벌멸되었다는 장점 아닌 장점이 있겠죠,
  • 이거는 단정짓기 어려운 문제인 게, 중국군 또한 생각보다는 전쟁 준비가 부족했고 당시에 진격에 대해 상당히 의문을 가지고 있었어서 맥아더가 전력적으로 유용한 고려를 통해 북한 잔존 세력에 대해 제한적인 만주 폭격을 했을 경우 진군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소련의 경우 애초부터 미국과의 갈등을 피하고 싶어했고, 김일성이 무려 110번이나 남침 허용을 요구한 끝에야 마지못해 허가했을 정도라 직접개입여부는 불투명하구요.
     
    그렇지만 사실 맥아더가 한국전쟁에서 보여준 모습들은 그리 유능했다고 할 수 없고, 중국군의 개입 시점에서도 유엔 - 한국 동맹군대의 전력이 분명히 우위에 있었으나 맥아더의 졸전과 잘못된 군사배치로 인해 밀려 내려왔죠. 그런 점에서는 확전의 가능성을 높게 잡기도 하네요.
     
    진짜 아쉬운 건, 만주 폭격보다는 우월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맥아더의 잘못된 군사배치로 인해 압록강을 사수하지 못했고 결국 북헬의 성립이 이뤄졌다는 것이지요.
  • 인해전술이라고는 하지만 중국군의 남하 당시 유엔 + 한국군의 총병력 수는 72만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공격 시점에서 중국 + 북한 동맹군보다 수만명 더 많은 정도로 병력 수와 군사장비의 우위는 이쪽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중국군 지휘관들은 국공내전 등을 통해 실전경험이 풍부했고 방위선의 취약점에 전력을 집중시키는 형태의 공격을 가해 무너트렸는데, 대부분의 평가는 중국군 쪽의 지휘가 우수했다는 쪽이더군요.
  • 씹센비
    17.07.10
    맞아요. 한국전쟁에 대한 전문적인 책들도 보면,
    중공군은 애초에 인해전술이 주요 전술이 아니었고, 산악 지대를 조용히 넘어가서 남한군 선봉의 후방으로 침투한 뒤에 포위 섬멸했다더군요.(개마고원 일대에서 벌어졌던 전투)
    또한 가짜 포나 가짜 전차 등도 만들어서 기만 전술을 쓰기도 했답니다.
    인해전술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1950년 12월의 장진호 전투에서 자신들 보다 월등히 많은 중공군 병력들을 맞아 싸웠던 미군 제1해병사단 대원들이 한 것이랍니다.
  • 노인
    17.07.10
    오히려 피도 마를 날이 없을 정도였다면 1962년에 일어난 중국과 인도의 전쟁이겠죠 
  • 씹센비
    17.07.10
    그땐ㅋㅋㅋ진짜
    네루의 자존심을 짓밟은..
  • 노인
    17.07.10

    지금은 전쟁은 일어나지 않지만 여전히 중국과 인도 국경 사이에 영토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저번에는 중국이 남티베트라고 불리는 곳을 돌려달라고 하다가 또 인도랑 다툼

  • 씹센비
    17.07.10
    ㅇㄱㄹㅇ
    카슈미르 분쟁에도 중공이 끼여 있던데ㄷㄷ
  • 노인
    17.07.10

    IMG_7920.JPG

     

    중국으 카슈미르 지역 중 악사이친이라는 지역이 영토 안에 있죠(중국과 인도와 전쟁하면서 얻어낸 땅임)

    아무튼 인도,파키스탄,중국끼리 잘 싸우는 듯
  • 노인
    17.07.09
    누가 그러는데 맥아더 집안은 대대로 전쟁광이였다고 하네요
  • 씹센비
    17.07.10
    국공내전에서도 활약한 것으로 알려진 주덕(주더), 팽덕회(펑더화이) 등의 유능한 장군들도 참전했다지요.
  • 당시 주더 등의 수기에 따르면, 미군의 군사배치와 행동이 생각보다 졸전이라 놀랐다는 기록도 있더군요. 

    이 부분은 맥아더가 실제로는 그다지 유능하지 못했고, 정치 군인으로서의 행동으로 인해 전선을 그르쳤다는 결론이 나오지만요.
  •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교차하는 한반도는 항상 열강의 싸움터였다. 멀리는 임진왜란이 명과 조선 vs 일본의 전쟁이었고
    구한말 청일전쟁 러일전쟁은 대륙세력인 청러와 해양세력인 일본, 동맹국인 영국과의 전쟁이었지.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최신예 전함을 일본에게 팔았고 발트함대에게 식량과 물을 공급하지 않았으며 수에즈 운하 통과도 불허했다. 결국 지칠대로 지친 러시아해군은 쓰시마해협에서 대패하고 러일전쟁은 끝나게 되지.
    625는? 이제 한국에서 손뗀 일본 영국 대신에 미국이..그리고 중국이 새로운 플레이어가 참전한 거다. 결국 전쟁은 항상은 러/중/북과 남/일/미-영 간에 일어난 것이며 위치상 한국이 중요한 포인트가 된 것이지. 유럽에서는 그리스가 한국과 아주 비슷한 역사를 지녔음. 

    그래서 한국의 최상위권 세력들이 매국세력이 된 거임. 왜냐하면 독자적인 근대화가 불가능하고 세력간의 교차점이기 때문에 과연 어떤 세력에 붙어야하는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했거든. 그러다보니 기회주의자가 준동하게 되고 이들 기회주의자가 한국을 지배한 게 한국의 역사임.
    지금도 한국의 엘리트 세력은 이번 장관청문회를 보면 알겠지만 여야 할 것없이 미국쪽에 전부 다 커넥션을 갖고 있다. 본인이 유학을 했거나 자식이 유학을 했거나 영주권자이거나 시민권자이다. 심리적으로 그들은 미국과 이익을 같이 한다. 한국에 있는 흙수저는 그냥 적당히 털어먹으면 되는 대상이야. 사실 어느 나라 막론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쥬는 어느 정도 존재하는데 특히 한국에 이게 없는 이유가 최상류층 입장에서는 한국은 '잠재적 조국'이지 실질적 조국이라고 할 수 없거든. 대륙세력이 밀어닥치면 버리고 떠났다가 해양세력이 밀고오면 다시 돌아와서 살아야 하는 그런 곳임..그러니까 이들의 사고체계에는 미국, 특히 미국의 금수저 집단과 이익을 공유하지 한국의 흙수저 집단과 이익을 공유하지는 않는다고. 미국의 경우도 금수저와 흙수저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갭이 있어. 하지만 그들은 최소한 미국영토를 포기하거나 그럴 생각은 절대로 없고 그런 탓에 흙수저집단에게 어느 정도 양보하는 것이 이익이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어.
    하지만 한국은 그게 아니거든. 솔직히 언제 밀려날지 모르는 곳이고 핵이 언제 터질지 알 수 없고 미국 대신 중국이 한반도를 지배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이 한국의 흙수저들에게까지 이익의 일부를 공유할 생각을 갖기 힘든 거야.

    그러다보니 한국을 모국으로 여기고 죽이되든 밥이되든 이곳을 지키겠다는 상류층들은 별로 없고 전쟁이 터지면 순순히 물러났다가 나중에 미국과 함께 들어오려는 애들이 대부분이라고. 그리고 얘들은 오랜 경험으로 세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항상 주시하고 알고 있지. 크게 보면 미중간의 대립구도인데..그래도 얘들은 대부분 당분간은 중국이 압도해도 결국은 미국이 이기리라고 예측하고 있다. 중국이 미국을 압도한다는 것은 정말 현실적으로 힘들거든. 지적인 파워에서 너무나 차이가 나서 이걸 극복하기는 적어도 예측가능한 시간내에는 불가능하지..
    어떻게 보면 친중민주당 vs 친미친일새누리당 구도인데 둘 다 외세를 등에 업고 있는 상황이지..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내가 보기에는 없어. 민족주의가 거하게 부딪치는 동북아 정세상 미군이 빠지면 한국 vs 중국 vs 일본 간에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고 열전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크지. 결국 전쟁이 벌어지면 미국이 어떻게든 개입하고 정리할 수밖에 없고 말이지.
    아마도 유일한 방법은 테크놀로지가 극한적으로 발달하면서 기본소득 등으로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사고가 보편화되지 않는 이상 동북아는 전운이 그치지 않을거야.

  • 극동아시아에서 전근대나 제국주의 시절처럼 현 상태 이상으로 강력한 영토팽창을 추구하는 강대국은 이제 없는 것 같지만.
    따라서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 = 오천년북방계단일선민족국민국뽕마약퇴치
     
    미개한망국인들이 요동낙랑지역의 재식민화를 깨끗하게 포기하고 요동낙랑지역으로 사민, 이주했던 이들의 국가를 인정하면 애꿎은 외국청년들까지 죽일 방아쇠는 당겨지지 않는.
    아무튼 요동낙랑지역으로 사민, 이주했던 이들의 국가는 이제 미개한반도를 침공할 능력이 없는 것 같은데 미개한망국인들만 여전히 야욕에 불타고 있는 것 같지만.
  • 씹센비
    17.07.10
    에이... 전쟁 확대는 아니었을 걸요?
    당시 소련이 아무리 중공 편이라도 그렇게 함부로 미국 및 서방 세계와 맞다이를 쳤을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오히려 중공이 이를 악물고 혼자 달려들었으면 달려들었지, 전쟁이 유럽이나 타 지역으로까지 더 커지진 않았을 겁니다. 잘하면 큰 승리를 맛 보았을 수도 있는 것이라서...
  • 중공도 개입하지 않으려 했을 가능성이 다분한하긴 한데, 사실 이 경우에 대해서는 엇갈리는 말이 너무나 많고 아이젠하워도 바보라 그런 명령을 내린 건 아니라서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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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80 반일 오타쿠 공괌이에 대해 아무도 옹호 안해주는데 16 new 安倍晴明 96 5 2017.06.13
27279 리아트리스나 레가투스, 탈조센선봉장 등 개념인들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6 new 여기는(쌩지옥) 296 7 2017.06.09
27278 복지지출 지금처럼 늘면 2060년에 재정파탄난다. 16 newfile 달마시안 194 0 2017.06.08
27277 연애의목적 16 new 서호 244 3 2017.06.01
27276 노력만 하면 된다는 자들에 대한 반박글 16 new 노인 224 3 2017.05.31
가상역사 : 맥아더가 더 나아가 만주를 폭격했다면? 16 newfile 노인 127 1 2017.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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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73 한국인 고유의 문화 - 생일빵 16 newfile 혐한 237 2 2017.05.27
27272 개한민국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나라인지 알아보자 16 new 생각하고살자 321 1 2017.05.27
27271 헬조선 지방과 농촌에 살기 싫은 이유 16 new 노인 435 2 2017.05.21
27270 마지막 계약의 날이 온다, 곧 몰락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16 new 블레이징 427 8 2017.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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