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조선을 모르는가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날 아침 한국에서 국제전화가 왔습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생소했지만 아주 반가운 목소리였지요.
“오빠, 나예요, 나, 금자.”
순간 나는 금자가 누구였던가 기억을 더듬느라 머리를 급회전해야 했고, 조그마한 단발머리 소녀를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내 입에서도 나도 모르게 이렇게 탄성이 터졌습니다.
“야, 반갑다야 정말. 너 많이 컸겠다야!”
“오빤? 많이 크긴. 나도 인제 아들이 중학생인데!”
그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무안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를 몰랐지요.
내가 금자를 마지막 본때가 그러니까 전화 받던 때로부터 서른 해도 넘은 그녀가 초등학생이던 때였는데, 그녀에 대한 내 기억은 간혹 내 등에 업히기도 하면서 좋아하던 그 때로 멈춰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아주 옛날에 멈춘 의식으로 오늘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일이 있습니다.
라성에서 [민족통신]을 운영하는 노길남박사는 그의 56번째 방북취재(2013.4.10.~5.8) 중 27차례에 걸쳐 각계각층과 만난 대담과 깊은 관찰을 정리하는 마지막 글(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editorial&wr_id=622)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이번 방문에서 북녘의 각계각층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첫째로 ‘미국과 그 추종세력은 조선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미국은 조선을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왜 미국이 조선을 모를까요?
미국인들은 정치나 문화 등 사회구성의 다른 요소보다는 우선 경제를 어느 사회나 국가의 첫째가는 평가기준으로 삼는 것 같습니다.
조선에 대해 모르는 것은 그 인식의 경제적 기준을 자기경혐이 됐건 주입이 됐건 아주 오래전 시점에 못박아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미국에 이민 온 1970년대, 주변 사람들은 영어를 모르던 우리 부부에게 영어를 배우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텔레비전 안방극장(soft drama)를 보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 유행하던 ‘초원의 작은집’ ‘월튼네 가족’과 더불어 매쉬(M.A.S.H.)를 매회 빠지지 않고 열심히 봤지요.
특히 매쉬는 전쟁시 미군의무부대 주변을 그린 이야기로서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것이 바로 최고조의 심리전 작품이란 사실을 깨달았지만 극중에 나타나는 정겨운 우리 지난 모습들, 종종 터저나오는 우리말로 인해 가장 재미있게 봤던 안방극장이었습니다.
1990년대까지 내가 만난 미국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매쉬가 보여준 상황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오늘까지도 미국인들의 조선에 대한 인식은 60여 년 전의 매쉬상황 그대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런 미국인이 보이는 조선에 대한 반응을 조선 사람들이 볼 때 “몰라도 너무 모른다” 할 수밖에요.
미국만 조선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대부분의 한국 국민들 역시 조선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들의 의식은 매쉬가 보여준 상황에 머물러 있거나 그 시점을 지났다 하더라도 기껏 1990년대 중반의 몇 해를 연이은 천재지변에 의한 ‘고난의 행군’시기에 머물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00년대에 왕래가 제법 빈번했고 발달된 인터넷에 흘러나오는 북에 대한 정보도 홍수 상태인 지금까지도 ‘고난의 행군’시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런 인식현상이 어떻게 나오는 것일까요?
다음으로 조선을 인식함에 있어서 정치사상적인 평가의 기준으로 우리는 어떤 선입견에 의한 판박이의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진보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김민웅성공회대교수가 뉴욕유학시절이던 1980년대 초, 당시 미주동아일보 기자생활을 접고 박사과정을 준비한다는 그를 어느 벗의 소개로 만나 점심을 함께 하면서 세 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무렵에 재미동포사회에서 이산가족찾기가 시작되어 평양을 다녀 온 동포들의 이야기가 매우 큰 화젯거리가 되던 때였기에 우리의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흘렀지요.
들리는 대로는 조선의 경제형편이 좋아서 방문하는 동포들의 경비를 조선정부가 모두 대준다고 했습니다.
굶고 헐벗는다고 알려진 조선이 세계에서 제일 부자인 미국에 사는 동포의 여행경비를 대준다는 것, 그만큼 경제형편이 좋은 것이라는 객관적인 정보나 자료를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찾아보았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는 그런 정보는 흔하게 구할 수 있다면서
“그러나 그런 자료나 정보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런 긍정적인 자료를 인정하면 그것은 바로 김일성주석의 통치의 성과와 체제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일갈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정보를 인정하고 말고 하는 기준이 그 정보의 객관성이나 진위 여부가 아니라 정권이나 체제의 인정여부에 따라야 한다는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너무나 뜻밖의 대답에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왜 김일성주석의 통치를 인정해서는 안 되느냐”는 것과 같은 이어져야 할 물음조차 묻지 않고 다른 이야기 몇 마디 더 나누다 헤어졌습니다.
이런 특정한 선입관에 정보나 자료를 짜깁기하는 지식행태는 비단 그 한 사람 뿐이 아니라 지금 한국과 미국에서 설치는 이른바 진보지식인이나 조선전문가로 행세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행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른바 지식인이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객관’으로 포장한 온갖 정보와 지식을 총 동원하여 꾸며낸 조선에 대한 이야기들이 사실과는 아주 거리가 먼 ‘어떠어떠해야 한다’고 미리 꾸며진 틀에 맞추어 찍어 낸 두부모와 같은 왜곡정보가 우리의 인식을 왜곡시켜 조선을 바로 알지 못하게 합니다.
미국에서는 부시 전대통령이 이란 이라크와 더불어 조선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했을 때 “왜”라는 물음이나 설명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정권 또는 정책유지의 필요에 의해 걸러야 할 틀이어서 그들 나라에 대한 정보와 자료는 모조리 이 틀을 통해 찍어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악으로 규정한 틀에 의해 찍어낸 정보만을 만나게 되는 미국사람이 조선을 바로 알 턱이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조선을 아예 국가로도 인정하지 않는 ‘국가보안법’의 틀에 찍힌 정보만을 만나야합니다.
국가보안법을 없애지 않은 한 한국인이 조선을 바로 알 수 없는 구조입니다.
한국인은 누구나 통일을 말합니다.
엊그제도 어느 학자가 필라델피아에 와서 통일강연을 했다고, 거기 가서 듣고 온 벗이 이야기해줍니다.
그는 꼭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경제적 ‘흡수통일’만이 가능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합니다.
통일의 상대인 조선에 대한 그의 인식이 60여 년 전에 머물러있고 그가 얻은 정보가 국가보안법의 틀에 찍혀나온 것들이라면 통일논의의 자체가 올바르게 나올 턱이 없습니다.
조선이 우리 민족의 일원일진데, 조선을 바로 알지 못하고는 우리 자신의 모습, 민족주체성을 바로 알 수도 내보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 생각하면 한국인들이 보이는 온갖 잡다하고 비루한 모습들이 민족주체성을 바로 깨닫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통일을 이야기함에 있어서나 자기정체성을 이야기함에 있어서나 조선을 바로 앎이 우선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지난날에 머물러있는 우리의 인식시점을 오늘로 전진시켜야 하며 ‘악의 축’이건 ‘국가보안법’이건 어느 정권이나 정책적 필요에 의해 짜인 틀을 벗어나 자유롭고 객관적이며 사실에 바탕을 둔 정보와 자료를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