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서술된 바 연인원 200만 명이 동원 된 독립운동이죠
그런데 일제 추산은 연인원 100만명 입니다
저는 솔직히 일제측 추산에 신뢰가 더 갑니다
왜냐? 일제 입장에서는 그걸 막아야 하는 입장이니
수를 정확하게 파악을 해야 동원 할수 있는 군이나 경찰력을 계산 할수 있거든요
그냥 양보해서 중간지점인 150만이라고 칩시다
그런데 3.1 운동 당시 조선의 인구가 2000만 가량 되거든요
그중에 200만이니 정말 전국적으로 큰 규모 였다 라고 볼수 있는데요
여기서 짚어 볼 점은 이렇습니다
연인원 이라는 개념과 기간이죠
노가다 꾼 10명이 주택을 짓습니다 무려 365일 동안 기간이 걸렸죠
그러면 이걸 연인원으로 3650 명이 동원 되었다고 표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3650명의 연인원이 동원된 공사에 참가한 사람이 10명이라고 얘기하지는 않아요
그중에 누군가는 몸이 아파서 안나오거나 도중에 그만두고 다른 인력으로 대체 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시위라는 것 특징이 하던 사람이 또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 이건 다들 아실겁니다
애초에 안나가는 사람은 끝까지 안나가요
그리고 3.1 운동은 대략 2개월 간의 독립만세운동이었습니다
3.1일에 시작되서 그날 끝난게 아니라 2개월 동안 전국 주요 지역에서 일어난 집회 거기에 동원된 인원을 다 연인원으로 계산해서 150만 정도라는 거죠
자 그리고 또 살펴 볼 점은 3.1 운동기간에 고종의 장례식이 있었고 그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간 인원이 엄청나게 많았다고 합니다
고종의 장례식 에 대략 50여만이 몰렸다고 하는데요
이게 3.1 운동 연인원에 포함되니 3.1 운동 전체 규모가 커지는 거죠
또 이 점도 봅시다 3.1 운동 당시 주요 집회는 전국에 있는 장터에서 집중 적으로 일어 납니다
이런 경우 시위 인원이랑 장터에 장보러 온 인원이랑 섞여서 정확한 추산이 어렵습니다 뻥 튀기가 되기 싶죠
당시에 전국에서 일어난 주요 대규모 집회의 현황을 보면 최대가 거의 3천여명 수준 이었습니다
무슨 장터에 3천여명 정도가 집회 했다 이게 10개 미만으로 기록 된 주요 집회에 랭크 될 정도이니
그 이상의 큰 규모의 집회는 없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그리고 이거 종교적인 문제인데요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일제의 진압으로 인해 학교와 병원 관공서 교회 등이 많이 불타서 없어 졌는데요
학교 관공서 병원 등과 달리 파괴된 교회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죠 절대적으로 많았어요
이 말은 교회 신도들이 3.1 운동의 핵심 세력이었다
라고도 볼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당시에 신식 교육을 접한 청년들이 많이 가담 했다는 것도 아실텐데요
당시에 신식교육이 이뤄졌던 학교는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 계열의 학교가 대부분 이었습니다
그때 들어와서 설립된 교회와 병원 학교가 지금 까지도 한국에 많이 남아 있는거 아시죠? 엄청 많아요
저는 그래서 이 3.1 운동이 종교적 분쟁 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기독교는 유일신 사상이에요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만을 섬기는 거죠
그런데 당시의 일본의 종교는 신도 입니다
지금도 일본은 불교보다 신도가 더 인원이 많고 세력이 강합니다 신도 라고 하면 쉽게 말해 신사 아시죠?
야스쿠니 신사 이런 곳을 말합니다
제가 무속인이거든요 우리나라에서는 힘 없는 무속신앙 샤머니즘이 일본에서는 가장 강성한 종교에요
이 신도 (샤머니즘 ) 의 성향은 좋든 나쁘든 간에 신이란 신은 다 모시고 본다는 거죠 도움이 된다면요
우리 무당도 그래요 예수 모시는 무당 아가동자 모시는 무당 산신 용왕신 부처님 모시는 무당 그냥 죽은 정치인 모시는 무당 등 다양해요
일본에는 심지어 죽은 고양이를 모시는 신사도 있더라고요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고 신사를 많이 짓고 신사 참배를 강요 했습니다 믈론 삼일 운동 당시에는 그렇게 집중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았다만
일본은 종교적으로도 조선인을 완벽하게 포섭하려고 했죠 그들이 말한 내선일체 그 방법중에서도 종교적으로 합일 하는게가장 효과적이니까요
우리나라가 불교를 받아 들인것도 백성들을 단결시키기 위한 것이였죠
위와 같은 이유로 저는 삼일운동을 기독교 세력이 일본제국의 종교적 영토 확대를 저지 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