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는 쓸모없는 언어다.
한국인은 좌뇌가 없는 민족이며, 문명사회 건설에 맞지 않는다.
한국어를 가지고 제대로된 지적인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번역투로 이야기해야만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해서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은 문명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추상화 능력이
'0' 제로에 가깝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전혀 논리적인 방식으로 의사소통하지 않는다.
한국인들끼리의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어떤 관습적인 상황에서 전형적으로 쓰는 어구나 분위기나 감정, 혹은 '기'를 전달하여야 한다.
심지어 유행어나 처음 보는 동작 같은 것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의사소통의 성패를 좌우한다.
특히 요즘처럼 복잡한 시대에 이런 한국인들의 의사소통 방식은
재앙으로까지 작용한다.
한국인들의 뇌에는 아예 좌뇌가 없고 우뇌만 있는 모양이다.
마치 기독교인들이 머리는 없고 가슴만 있듯이 말이다.
그래서 조금 지적인 한국인들은 외국서적의 번역투로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한국어 자체가 논리적인 방식의 메세지 전달에는 너무나 약하고,
간혹 그런 방식으로 문장을 구성하더라도 어쩐 일인지 받아들이는 한국인들이
문장을 논리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한국인은 어떤 단어가 출현했나에 의해 좌우되는 단편적인 인상만으로 언어를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조어나 연결어 같은 것에 잘 신경쓰지 않는다.
게다가 한국인들은 타인의 말을 잘 귀담아 듣지도 않는다.
한국인의 이런 특성은 전쟁을 많이 겪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뭔가 논리적인 방식으로 의미를 전달하기보다는 귀에다 대고
"야!"라고 소리치는 것이 우선인 상황을 숱하게 겪었을 것이다.
하기야 당장에 적이 쳐들어오는데,
'적이 어느 방향에서, 언제 어느쪽으로 지금 쳐들어오고 있어.'하는 식으로
6하원칙으로 말하기보다, 그냥 도망가! 라던지 야! 라고 소리쳐버리는 것이
훨씬 중요했을지도 모르겠다.
난 한국에서 30년 이상을 살아왔는데 그간 한국에서의 삶을 돌아보면
마치 전쟁같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박사학위 소지자의 글이나 특정 분야 전문가의 칼럼 조차도
논리적으로 쓰여지기 보다는 현학적인 단어로 점철되어
글 전체적으로는 어떤 '분위기'나 감정을 인상적으로 전달하는데만 중점을 둔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분위기나 감정 조차도 그 시기에 이미 담론으로 형성된 어떤 집단적인 주장에 해당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건 페미니즘을 옹호하거나, 옹호하지 않거나, 둘중 하나의 분위기를 형성해야만 한다. 마치 국어시간에 미리 주어진 주제에 맞추어 작문을 하듯 말이다.
기존의 이원적 구도를 벗어난 새로운 주제를 구성하는 것은 대개 실패한다.
헤겔 식으로 말하자면 변증법에 있어서의 정반합에 있어서 정과 반의 작용만 존재할 뿐, 영원히 합이 존재하지 못하는게 한국인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헤겔의 변증법이야말로 논리의 기본 구조이고, 문명 발달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지성의 발달 과정은 정말로 변증법에 따라서 일어난다. 어떤 논리적인 새로운 의미있는 주장도 모두 변증법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헤겔의 변증법이야말로 한국인들과는 영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한국인은 논리적인 방식의 사고를 전혀 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지적인 사람들은 절대로 한국에 맞지 않는다고 나는 단언한다.
만일 당신이 지적인 사람이라면, 한국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어떤 권위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만 한다.
고시나 시험을 본 후에 취득하는 자격증 같은 권위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보다 덜 떨어진 사람들에게 밟히거나 밀려나는 모욕을 겪게될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바퀴벌레처럼 야근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열심히' 일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이런 관습이 여태껏 그들 문명을 망쳐온 거라고는 생각을 안한다.
그들은 질이 아니라 양으로 승부한다.
그래서 온전하게 일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도태된다.
한국 문명은 서구 문명처럼 실력주의(meritocracy)에 토대를 두지 않았다.
한국 문명은 최대한 근사하게 표현하더라도 성과주의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조금 저속하게 표현하면 '빚좋은 개살구'라고밖에 할 수 없는 원리에 의해 돌아간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실력이 있거나 머리가 좋으면 오히려 도태되는 희한한 현상을 겪는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 없거나 질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오히려 한국에서 잘 살 수 있다. 한국이 살기 좋은 나라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는 내 생각에 이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이 조금이라도 지적인 사람이거나 아니면 '직업의식' 따위를 바라면서 일하기를 원하거나, 아니면 조금이라도 일을 제대로 해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자격증을 따길 권한다.
권위주의적인 분위기 하에서는 먼저 권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자격증을 따는 과정이 당신의 지적 능력을 변별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는 인생을 건 도박에 참여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아무런 생산적인 가치도 없다.
한국의 그런 시험은 수험자의 지적 능력 따위를 평가하는게 아니다.
여기에도 한국사회 특유의 정량주의가 나타난다. 시험은 다시말해 당신의 체력과 암기력이라고 말해지는 어떤 일정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의 어떤 특수한 국면과, 당신의 운을 측정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 내의 모든 자격증 시험이 그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소모적인 경쟁을 '노력'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제정신을 가졌거나 조금이라도 고상한 가치를 자기 삶에 구현해오려고 해온 사람들은 이런 경쟁에 참여하지 않으며, 역시 이런 정량적인 형태의 노력에 끌리는 자들도 별볼일 없는 유전자를 타고난 자들일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논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면, 논리적인 방식의 사고를 하는 인종은?
서구인들과 중국인은 논리적인 사고를 한다.
그들의 뇌는 먼저 추상적인 사고를 하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문장을 만든 후 말하는 것 같다.
심지어 인도인도 한국인보다는 훨씬 논리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나는 인도의 성자들의 전기를 읽어본 적이 있다.
예를들어 마하리쉬나 마하라지 같은 힌두교 성자의 전기를 읽어보라.
그들은 종교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품는 제자들에게
진리를 관념적인 언어화해서 끝까지 풀어서 설명해주면서 설득한다.
반면 한국인의 종교인들은 닥치고 믿으라고 하거나,
선불교라는 미명하에 하는 것이라고는 '할!'이라고 고함치는 것 밖에 없다.
한국인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뱉는다.
그것은 동물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기싸움과 같다.
앞서 나는 한국인은 어떤 단어가 출현했나에 의해 좌우되는 단편적인 인상만으로 언어를 해석하는 경향이 있고, 조어나 연결어 같은 것에 잘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어는 종종 청자에 의해 화자가 말한 의도와는 정반대의 뜻으로
이해될 때가 있다.
사실 언어란 것은 한두개의 조사나 연결어에 의해서 전혀 다른 반대의 뜻이 될 수도 있는건데 한국어는 그런 부분이 잘 발달되지 않은 측면도 있고,
한국인들 자체가 애초에 그런것을 신경쓰지 않고 내뱉는다.
한국인들은 또한 효율성을 좋아하기 때문에 축약어나 유행어가 엄청나게 발달했다.
문명 건설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하위문화에 해당하는 것들 말이다.
한국어만큼 논리적인 면이 발달되지 않아 보이는 언어가 있는데 그것은 일본어다.
일본인은 어떻게 보면 한국인보다도 감성적 사고를 한다.
하지만 그 대신에 일본 문명은 철저하게 자기 색깔을 버리고 서구화된 문명을 건설했기 때문에 그런 면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문제는 한국인이다.
한국인은 언어가 발달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질과 양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노래가 나오는 초코파이 선전 수준으로 압도적이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문명(아니 문명처럼 보이는 집단체)를 건설했는가가 의아할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 노래에 나오듯이 '정'이라는 것이 조직 문화에도 스며있는데, 난 실제로 그런 직장에 다닌 적이 있다. 처음에는 정으로 굴러가는가 싶더니만 나중에는 사분오열되서 싸우고 지랄하는 바람에 질려서 나와버렸다. 이렇게 문명사회에는 안맞는 것이 한국인이다.
예를 들어서 한국에서 군대나 직장에서 지식이 전수되는 과정을 보면 언어가 아닌 암묵지의 형태로 전달되는 면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물론 그럴때도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말을 듣고 그대로 이행하면 반드시 낭패를 본다. 왜냐하면 말은 그저 하급자를 갈구기 위한 의도로 내뱉은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효율성을 대단히 좋아하게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줄 것을 기대한다.
재미있게도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어떤 지시를 하지 않고 아웃풋만을 바라는 상사들 밑에서 일을 하게 된다.
한국인들은 하급자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지 않는다. 그저 식당에 간 손님처럼 가만히 앉아서 아웃풋이 빨리 나오기만을 닥달한다. 요리를 주문한 손님과 비슷하다.
그것은 로봇을 사놓고 프로그래밍하지 않은채 자동으로 주인의 심리를 읽어서 일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사람을 고용한다는 것은 돈을 주고 그 사람에게 내가 원하는 일을 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에게는 그런 의식이 없다.
오로지 자기가 돈을 준 만큼 '감정적으로 편해질 것을' 기대하는게 한국인 오너들의 심리다. 하지만 내가 말하건대 이것은 애초에 사업 마인드가 아니다.
심지어 어떤때는 음식을 주문하지도 않고 요리를 기다리는 손님처럼 하급자에게 시키지도 않은 일을 알아서 해오기를 바랄 때도 있다. 가끔 그들은 기존에 있던 요리가 아닌 새로운 요리를 주문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맛을 막연히 묘사할 뿐이다.
한국인들은 사업적 리더쉽이 없고, 애초에 사업이라는 추상적인 개념 자체가 그들에게는 맞지 않는다.
사업이란 어떤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유물적인 수준에서 반복 구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한국인에게 있어 사업이란 그런 개념이 아닌 것이다.
내생각에 한국인에게 있어 사업이란 그냥 품앗이의 연장에 불과하지 않나 생각한다.
사장이 어떤 아이디어를 고안하고, 그 아이디어에 따라 상품을 만들거나 제공한다.
그러면 그 아이디어에 해당하는 것을 하급자에게 가르쳐야 자신이 세운 회사의 일원이 늘어나는 것 아닌가? 그런데 한국인은 이런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직원을 고용하면 사장 자신의 아이디어는 말하지 않고 직원이 어떤 아이디어를 들고 와주기를 내심 바란다. 그 회사는 웃기게도 직원의 회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간혹 직원이 자신의 아이디어대로 상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내면,
또 이번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장은 그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결국, 직원은 사장의 아이디어를 '알아맞춰야' 하기 때문에,
사장의 아이디어를 읽어내는 독심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이 이런 것이다.
한국인들은 술을 좋아하지만, 막상 술자리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이 잘 이루어지는 것은 또 아니라는 것은 또 하나의 정말 커다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난 술을 잘 못하지만 직장을 다니면서 억지로 술을 마시려고
많이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대로 끝까지 술자리에 참석해봤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 여전히 한국인들이 무얼 원하는지는 여전히 모호했다.
술자리에 같이 끝까지 참석하더라도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닌 것이다. 나중에야 짐작이 가게 된 것이지만, 한국인들이 원하는 것은 그냥 자신과 같이 저열해지는 것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야 연대감 같은게 생기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술자리는 순진한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커뮤니케이션 같은 고차원적인 것을 위한 것이 아니란 거다.
어쩌면 술이 사람들을 친해지게 만들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분업화된 문명 사회에서 국가 단위가 아닌 개개인이 연대감을 가져야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들의 술자리란 그냥 품앗이 전후에 함께 마시는 막걸리와 같은 정서적 개념이다.
난 이성간에는 술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굳이 일하는 동료 사이에 술이라는 것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내가 단언하건대, 한국인들이 아무리 진지하게 술자리의 필요성과 그 의의를
옹호하더라도 난 그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술자리에는 업무를 위한 전혀 아무런 기능이 없다.
내가 대학시절 동아리를 들었을 때, 선배들이 요구했던 행동이 있다.
그것은 아주 쉽지만 단순한 것이었다.
캠프파이어를 하는데, 모닥불에다가 같이 소변을 보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그들은 서로의 소변을 섞으면서 연대감을 얻는 것이다.
단지 그뿐이다. 그들의 그 의식에는 그런 단순한 의미밖에는 없었다.
내 말은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술자리의 의미도 역시 커뮤니케이션 같은 고차원적인 것 따위는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감정적인 연대의 의미 외에는 없다. 그런데 그런 것은 업무에 전혀 불필요하다.
한국인들의 술자리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끝까지 참석해보았자 아무런 의미있는 대화도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내가 이 문명과 민족에게 30년에 가깝도록 교육을 받은게 속은 것이었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나아지거나 앞서가기 위해서 특별히 노력하지 않은게 사실이다. 나에게는 나 자신의 임의적인 노력보다는, 내가 받아온 교육의 원리들과 자신의 고유한 특질이 자동적으로 만들어내는 결과를 보고 싶은 심리가 있었다.
그것은 타인에게 도움을 줄 의향이 있는 것이 아니면 특별히 이익을 취할 필요가 없다는 내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밟지 않으면, 밟히는 분위기라는 것은, 거기에는 아무런 시스템이 없다는 뜻이다.
어쩌면 정치인들의 말대로 한국의 교육은 지나치게 좌편향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의 실업계는 지나치게 우편향적이다.
그러한 갭은 정말 쉽게는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다.
생에 대한 한이나 독기 외의 정상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이상하게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 한국 문명이며,
내가 한국사회를 문명이라기보다는 그냥 집단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순진한 나는 이 사회와 문명을 믿었지만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었고, 그것은 나를 믿었던 부모에게도 실망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가진 상처다.
나의 문제가 이 사회와 문명을 믿었던 것이었다는 것을 일깨워 준건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다. 아이들은 선생들과 어른의 말을 믿었지만, 오히려 순종했기 때문에 그대로 몰살당했다.
말그대로, 이것은 문명이 아니라, 집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