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간단한 물레방아조차 카피를 못하면서..
물소뿔로 만든 조잡한 활 기술이 세계 최고였다고 자뻑하는 센징들(현실은 몽골 유목민들은 모두 가지고 있었던 합성궁 기술이 조센 국궁.)
간단한 물레방아조차 카피조차 못하면서 무슨 자력 근대화를 운운하는지..www
핵미개하다ㅋㅋㅋ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history&no=1763413&page=2
한국인은, '우리 나라가 서양의 문물을 수입했다면 자력으로 근대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인은, 500년의 세월동안,
일본이나 중국에 있던 물방아를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자력으로 물레방아(수차)조차 양산할 수 없었다.
이하는 한국에 있고, 물레방아 도입을 목표로 한 고생의 기록이다. 눈물없이는 읽을 수가 없다.
1429 세종 11년 12월 3일 일본의 물레방아가 굉장하다고 보고함.
1430 세종 12년 9월 27일 물레방아를 만들려고 한다
1431 세종 13년 5월 17일 '중국이나 일본도 물레방아의 이익을 얻고 있지만 우리 조선에는 그것이 없다'라고 기술.
1431 세종 13년 11월 18일 일본과 중국의 물레방아 연구의 기술을 봄.
1431 세종 13년 12월 25일 물레방아 도입을 시도한다.
1451 문종 원년 11월 18일 20년에 걸친 물레방아의 도입 실패.
1488성종 19년 6월 24일 물레방아 도입 시도(성공 여부 불명)
1502연산군8년 3월 4일 물레방아 도입 시도(성공 여부 불명)
1546 명종 원년 2월 1일 물레방아 도입의 시도. 류큐(오키나와)와 중국으로부터 복건식 물레방아 수입.
이후 백년간 물레방아의 기술이 없음. 반면, 이웃한 일본에서는, 포르투갈로부터 총포 전래 후 3년째에는 벌써 양산 체제.
재현된 삼중 수차(일본 야마나시 현 야마나코코의 화(花)의 도공원)
일본 삼연三連수차의 예.(각자의 크기는 4.7m, 4m, 4m정도.)
이연二連수차의 예
한국은 이런 수차가 있는지?
일본의 수차(물레방아)
1650 효종 원년 5월 15일 물레방아 도입의 시도 30년 기술 없음 한편 이웃의 일본에서는, 총양산 10만정
1679 숙종 5년 3월 3일 물레방아를 만들게 했다고 기록함. 그리고 70년 기술 없음.
1740 영조 16년 4월 5일 물레방아등이 없어졌다. '효종대왕상반료심수차지제어외방, 금무견존자(孝宗大王嘗頒遼瀋水車之制於外方, 今無見存者)'
1740 영조 16년 11월 20일 물레방아를 만들게 했다고 기술함.(18세기 시점에서 일부러 기록에 남겼다)
1764 1763-64년의 조센 통신사「일동장유가」(정성(淀城)의 물깃기를 통해 물방아의 감상)
'그 구조의 교묘함은 본받아 만들고 싶을 정도다.'라고 기술함.
1795 정조 19년 2월 18일 물레방아지제에 대해 활발히 나온다. 즉 시작중.
1811 순조 11년 3월 30일 이때 기술로 "물레방아는 필요한가?」";;;
라고 쓰여져 있어 전혀 보급되어 있지 않은 것을 읽어낼 수 있다.;;;
한국인이 물레방아의 기술을 도입하려고 고심하고 있었던 것에 관계해서는,
1880년대가 되어도 김홍집(金弘集)이,
'조선에는 관개 설비가 없다.물레방아도 없다'
라고 미개성을 한탄하고 있다.
즉, 박단생(朴端生)이 1429년에 일본에 오고 물방아를 보고 나서
500년 가깝운 시간동안에, 물방아를 자력으로 만들어, 실용화할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
조선 통신사 曰 수차 쓰고 위생적이고 감자 재배하는 일본인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
깨끗한 우물물도 없어, 더러운 강에서 세탁물을 씻고 있던 한국인이
수도물의 물을 마실 수 있게 된 것은,
일본 통치시대에 일본의 기술이 강제적으로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1900년대 이후의 청계천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
일본 통치시대전에 한국에 도입된 전철도, 기술자도 일본인이다.
역사 교과서에 대하고, 조선시대의 미개성을 전혀 가르치지 않고,
마치 일본과 동등함 것 같은 한국 정부의 역사 왜곡으로,
'일본에 지배되지 않으면 더 발전하고 있었다' 등의 망상을 한다.
서울의 지하철도 일본인 기술자가 만들어 한국 정부에 표창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