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은 대부분 노예였다.
조선에서 부모가 자식을 낳는 이유는 자식을 위해서가 아닌 노후대책을 위해서 낳은 것이다. 유사 이래로 농경사회 때부터 조선에서 이는 당연하다시피한 일이었는데 그것은 농사를 아무리 열심히 지어도 척박한 토지, 미개한 농경기술, 지배층의 수탈, 화폐경제의 미발달 등으로 인해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정도로만 먹고 살 수 있었으며 저축이란 건 꿈도 못꿨기 때문에 자신의 노동력이 부족해지는 노후에는 누군가 새로운 노동력을 공급해주지 않으면 그저 굶어죽을 운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반도에서는 10대 초중반에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 조혼풍습이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노동력이 딸리기 시작하는 30대가 되었을 때 자기 자식이 10대 후반~20대 초반이 되어 농사를 지어 자기를 먹여살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남아선호사상이 당연시 되었던 것은 딸은 어릴 때 밥만 축내면서 커서도 노동력을 공급하지 못하기 때문에 노후대책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아살해가 만연화 되었고 만약 운좋게 살아남은 여아라도 타집안에 눈치보며 시집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남자집안에 떠넘겨진 여자는 당연히 그 집안의 귀한 음식을 축내는 존재였으므로 구박받는 것이 당연했고, 애라도 못 가지는 날에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으니 쫓겨나는 것이 당연했다. 또한 노총각은 어쨋든 집안에 노동력을 공급했기에 상대적으로 구박받는 일이 적었으나 시집도 못가고 밥만 축내는 노처녀는 죽어야 마땅한 존재였다.
그리하여 자식들 중 일부는 이런 좆같은 구조에 대한 반발심과 어쩌다가 흉년이 닥치면 부모 먹일 것은 커녕 자기 입에 풀칠하는 것도 곤란했기에 '고려장'이란 것을 하게 된다. 고려장은 단지 고려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삼국사기의 '손순 설화', 1882년 한국을 방문한 그리피스의 저작 '은둔의 나라 한국', 영국 여류 역사학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책에도 묘사될 만큼 조선반도에서 유사 이래로 이어져오던 합리적이고 유구한 전통이었다. 단지 고려시대 때 활발하게 행해졌다는 뜻이다.
고려장이 활발해질수록 노후대책으로서의 자식을 생산하는 빈도도 자연스레 줄어들게 되고, 인구감소로 인하여 지배층이 착취할 것이 적어지고 사회 혼란이 오는 등의 문제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넘어갔다고 해서 생산성이 늘어난 것도 아니고, 착취가 덜 심해진 것도 아닌데 왜 고려장 풍습이 덜 행해졌을까? 그것은 바로 조선시대 지배층들이 중국에서의 유교를 변형시키고 짜집기하여 지네들 마음대로 고쳐서 '충', '효'란 것이 인간이라면 꼭 따라야 할 도리이고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설파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교의 창시자 공자의 육예(六藝)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였다.)
즉 자기네 마음대로 변형시켜놓고 유교의 본국인 중국보다 더 유교적이란 표현을 사용하곤 했다.
'충'이란 것은 지배층의 착취를 정당화시키고, 노예로서 지배층에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을 강화시켰으며 '효'는 고려장 등의 조선반도 전통을 억제하여 조선반도의 노예사이클을 원상태로 회복시키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머리에 피가 마르기도 전에 결혼하여 자식을 생산한 후 바로 농경의 노동력으로 투입되어 노동력을 더 공급하지 못할 때까지 죽어라 노동해서 입에 풀칠하고, 늙어서는 자식에게 의존하는 그런 인생사이클을 반복하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층들이 경제발전을 오히려 바라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상태유지가 계속 되어야만 조선의 노예사이클이 계속적으로 무한반복될 수 있었고, 혹여나 노예들이 여유가 생겨 교육을 받거나 여유생산분을 가져 자주사상을 가지게 되면 아무 능력 없기는 마찬가지인 지배층들이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선 지배층들은 신기술 개발이나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하던 사람을 변절자라고 생각하고 다 제거해버렸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장영실이 파직당하고 죽임 당한 것이고, 정약용이 귀양살이 하다가 죽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