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허핑턴포스트에 기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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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피해 경험을 증언한 베트남 할머니들.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응우옌티바이, 레티히에우, 팜티언, 하티낌응옥, 팜티하인, 응우옌티카인, 응우옌티떰, 하티찐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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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와 소녀들은 왜 한명씩 참호 속에 들어갔는가
“네 사람이, 한 명씩 돌아가며 내게 그 짓을 했어요.”
“참호에 한 명씩 집어넣고, 이틀 낮 이틀 밤을 가둬놓고, 연속적으로 강간을 했어요.”
베트남 중부 빈딘성에서 만난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이다.
“너무 무서웠어. 너무 독악했어. 지금도 나는 여전히 당신들 한국 사람이 무서워.”
“따이한? 아이고, 나는 몰랐어요. 당신들이? 한국 사람인 줄 알았으면 안 만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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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을 만나러 베트남으로 간 우리 일행은 그들에게는 두려움과 기피 대상인?
‘따이한’, 그들의 기억에 두려움과 독악함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따이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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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히에우(1935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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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워요 무서워요, 날 어디로 끌고 가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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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워.”
“옷을 벗기고, 난 너무 무서웠어.” 할머니는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심장이 뛰어서 약을 먹었다고 한다.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계속 “지금 너무 떨려서 말 못하겠어. 나 잡아가면 어떻게 해. 어디로 끌고 갈까봐 너무 무서워. 심장이 막…. 내가 안정을 취해야지, 안정을 취해야지. 한국.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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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좀 살려주세요. 저렇게 아이들도 있는데…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어. 총소리가 나고, 내가 애를 셋을 안고 있었어. 서너 명의 한국군이 들어와서 나를 잡고 머리에다 총을 댔어. 애들은 마당에 내동댕이쳐지고, 나를 뒷집으로 끌고 가서 강간했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너무 무서워서 눈을 감고 있었는데 한국군들이 내 옷을 벗겨서 내 얼굴을 가렸어. 아이고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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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티낌응옥(1935년생), 하티찐(1929년생)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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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숲이 흔들렸어요. 누군가 외쳤어요. 한국군이다. 한국군이다. 숲이 흔들린 것이 아니라 한국 군인들이 온몸에 풀과 나무로 위장을 하고 오고 있었던 거예요. 잡히지 않으려고 도망을 쳤지만 결국 잡히고 말았어요. 언니와 올케, 나 이렇게 세 사람이 함께 잡혔어요.” 두 자매와 올케는 한국군에게 잡혀 뚜이프억현의 푸꽝촌 한국군 부대가 있는 곳으로 끌려갔다.
“우리 셋을 베트콩 잡으러 가자며 따로따로 끌고 나갔어요. 그런데 풀숲으로 끌고 갔어요. 베트콩 잡으러 간 것이 아니라 강간하러 간 거죠. 한 사람은 이쪽 풀숲에, 다른 한 사람은 다른 풀숲에 끌고 가 강간했어요. 그러고는 다시 언덕으로 끌고 가서는 비시(VC, 베트콩)! 비시! 하고 소리쳤어요.”?동생이 증언을 계속하는 동안 언니는 큰 눈을 끔뻑끔뻑할 뿐이었다. “저항도 할 수 없었어요. 막을 수도 없었어요. 한국군들은 키도 크고 덩치도 컸거든요. 혼이 다 달아나서 한국군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생각도 안 나요.” 강간을 당한 뒤 세 여자는 2박3일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그때 응옥 할머니는 서른 살이 넘은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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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인 찐 할머니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그 풀숲에서 두 명의 병사가 내게 덤벼들었어요. 바지와 웃옷을 벗으라고 하더니, 낄낄거리고 웃고, 나를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고 하면서 희롱했어요. 그리고 강간했어요. 한 명이 하고, 그다음 한 명이 하고. 그러고 나서도 나를 돌려보내지 않고 나를 끌고 베트콩을 찾으러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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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옌티카인(1936년생), 응우옌티떰(1954년생)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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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 한국군이 말했어요. 우리는 무서워서 그대로 굳어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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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길로 일곱 명의 마을 여자들은 묶인 채 끌려갔고, 가다가 마을이 나타나면 다시 수색을 해서 한 명을 다시 묶어서 끌고 갔다. 도착한 곳은 고보이 한국군 기지였다. 빈 건물에 여성들을 감금하고, 한 명씩 여자들을 불러내 눈을 가리고 뒤통수에 총을 겨눈 채 한국 군인들은 소리쳤다.
“너 베트콩이지!” 그러면 여자들은 있는 힘껏 머리를 세 번 흔들었다. 그것이 끝나면 강간을 하고 풀어줬다. 그리고 그다음 사람도, 또 그다음 사람도….?2박3일 동안 계속 반복해서 강간을 당했다.?하룻밤에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일곱, 여덟 번은 끌려 나간 것 같다고 한다.
“(함께 끌려간) 엄마는 너무 늙어서 강간을 당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무지하게 많이 맞았어요. 그때 우리도 많이 맞았어요. 총 개머리판으로 계속 맞으면서 강간도 당하고 그랬어요. 풀려날 때 걸음을 걸을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그러나 살아서 풀려난다는 것이 너무 기뻐서 있는 힘을 다해서 걸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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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묵묵히 있던 언니가 입을 열었다. “나는 나이가 많아서 결혼도 한 뒤였는데,?막내는 너무 어려서 그 일을 당해서 계속 하혈을 했어요.?엄마가 이것저것 약을 구해서 먹이기도 하고, 몸에 바르기도 했지만 낫지를 않았어요. 엄마가 딸들 때문에 너무 고통을 겪었어요. 슬퍼하고 아파하고, 너무 걱정을 하니까 엄마 앞에서는 울지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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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티바이(1948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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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힌 사람은 모두가 노인과 여자들이었어요. 우리는 모두 손을 위로 들고 흔들며 없다고 했어요.” 갑자기 할머니는 목소리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낮추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노인들을 땅굴 위로 올라오라고 했어요. 골라낸 것이죠. 땅굴에 남은 어린 사람은 결국 나 혼자였어요.?혼자 남은 내게 한국 군인들은 ‘그 짓’을 했어요.?너무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했어요.” 할머니는 한국 군인들의 강간행위를 ‘그 짓을 했다’고 표현을 했다.
손으로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이며 “한국군 4명이 들어왔어요. 너무 무서워서 소리도 지를 수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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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씩 돌아가며 내게 그 짓을 했어요. 마지막 네 번째는 내가 혼절을 해서 축 늘어져 있으니까 무서워서 그냥 달아나버렸어요. 엄마도 나를 도울 수 없었어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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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티하인(1951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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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한국군에게 구타당하고, 고문당하고 그래서 폐가 손상이 된 것 같아요. 고문후유증으로 인해 신경계통의 질환도 있어요.”
“그곳에 목욕탕이 있었는데, 목욕하러 들어갔을 때 한국군이 들어왔어요. 있는 힘 다해서 저항을 했지만 군인이 입을 막았어요. 그 짓을 하는데 이겨낼 수 없었어요. 그곳에서 2개월 지내는 동안 세 번을 강간당했어요. 다 다른 군인들이었어요.” 팜티하인은 강간뿐만 아니라 전기고문과 구타, 발길질 등의 고문도 계속 당했다. 이후에도 푸깟현 감옥, 다시 꾸이년 감옥에서 투옥 생활을 하다 1968년 12월에야 풀려났다.
“70년께에 결혼을 했는데, 남편한테도 혁명활동 한 것, 강간당한 것을 숨겼어요. 그때 스무 살쯤 되었는데 어떻게 남편한테 말해요. 지금도 몰라요. 자식들도 몰라요. 나랑 같이 수감되었던 사람들만 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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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그때 생각을 떠올리거나 하면 그날부터 악몽을 꾼다. 밥도 먹을 수가 없고, 온몸이 아파온다. 전쟁이 끝나고 40여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고통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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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티언(1951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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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년시의 팜티언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군이 팜티언 할머니에게 한 범죄는 명백히 지휘부의 명령 없이는 불가능한, 조직적인 강간이라는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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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꾸이년의 고보이 평야에서 체포되어 뚜이프억현 프억선의 한국군 기지로 끌려갔다. 기지에는 일렬로 나란히 참호가 만들어져 있었고,?그 참호 속에 한국군이 1인씩 들어가 있었는데, 그 속에 끌고 온 여성들을 집어넣었다.
“내가 잡혀간 날 주민들 30~40명이 함께 잡혀갔어요. 그런데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격리를 했어요. 아이가 있거나 나이가 많은 여자들은 따로 모아놓고,?처녀이거나 소녀이거나 아이가 없는 여자들은 참호 속에 한 명씩 넣었어요.”
우리가 할머니 집을 방문했을 때 남편과 할머니가 함께 우리를 맞이했는데,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할머니께 남편이 옆에 있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괜찮다고, 남편도 다 알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괜찮지 않았다. 한국 군인에게 강간당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할머니도 다른 할머니들과 똑같은 모습을 보였다. 누가 들을까봐 목소리는 아주 작아졌고, 몸은 잔뜩 웅크렸다. 결국 남편도 괴로움에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참호 속에 있던 그 군인에게 2박3일 동안 연속해서 죽을 때까지 강간당했어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낮에는 두 번, 밤에는 세 번 정도였던 것 같아요. 한국군이 옷을 벗으라고 하고 강간하고, 다시 옷을 입으면 벗으라 하고 강간하고, 또 옷을 입으면? 계속 반복했어요. 쌍꺼풀이 없는 눈이었고, 잘생기고 젊은 병사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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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3일 동안 강간을 당한 뒤 풀려날 때 할머니는 걸음을 제대로 못 걸었다고 한다. 1970년 2월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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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올까 두려운 한국군…사죄와 보상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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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군인들에게 강간과 고문, 성폭력을 당한 이들은 전쟁이 끝난 뒤 마을 사람들로부터 놀림과 따돌림을 마주해야 했다. 언니와 올케와 함께 성폭력 피해를 입었던?하티낌응옥 할머니는 전쟁이 끝나고 마을 사람들에게 희롱과 조롱을 당했다. 마을 사람들은 “몇 개 했어?” 하면서 놀리기도 하고, 사람들한테 할머니가 있는 곳에는 가지 말라 하면서 따돌렸다.?그래서 할머니는?한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입이 쓰고 소름이 끼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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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티바이 할머니도 전쟁이 끝나고 계속 그 일이 연상되었고, 악몽을 꿨다. “생각만 하면 너무 무서워서. 지금 얘기할 때도 너무 무서워요.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어요. 절에 다니면서 기도했어요. 이 재난에서 나를 탈출하게 해달라고 계속 기도했어요.” 그뿐만 아니라 할머니는?한국군이 다시 올까봐 무섭다고 했다. 사죄를 요구하고 싶지만 한국 군인들이 다시 올까봐 무섭다며 할머니가 여기 살고 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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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연상되는 것만 봐도 공포가 재발되었다.?팜티언 할머니는 만약 우리가 한국 남자였으면 못 만났을 것이라고 한다.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보는데, 할머니는 한국 드라마도 무서워서 못 본다고 한다. 그만큼 ‘한국’은 할머니에게 ‘독악’ ‘공포’의 연상이고 상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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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몰라? 한국 정부가 인정 안 해? 내가 직접 증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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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한테 오라고 해. 한국 정부가 오면 다 내가 이야기해줄게. 한국 정부에게 말하는 것은 안 무서워. 그때가 무서운 거지. 베트남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당했는지 다 이야기해줄 테니까 정부보고 오라고 해.” 하티낌응옥 할머니는 한국 정부와 한국 사람들에게 할 말이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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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티낌응옥 할머니는 한국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다. “나는 한국 정부에 사죄하고 배상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어요. 사실을 말할 권리가 있어요. 그때 일만 우리에게 배상해서는 안 돼요. 그때 그 일로 우리가 현재까지 이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당하고 있는 고통에 걸맞은 배상을 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