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맥과 기자에 대해 조사하다 보니 우연히 '韓'이라는 명칭도 여기에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료에 근거해서 나름대로 자신의 논리를 갖추고 쓰는 글이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의 독자 연구에 의한 추측이니 맹신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밝혀 둔다.
일단 자신은 기자(조선에 온 것은 어쩌면 기자 본인은 아니고 기자와 관계된 세력일 가능성도 있다)가 조선에서 국가를 형성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고 본다.
기자에 대해서는 유물로 증명되지는 않지만 문헌으로는 실재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자료가 많다.
단군은 실존성은 커녕 삼국유사에 기재된 신화조차 후대에 고려 말기에 유행하던 각종 설화를 시조 신화로 바꿔쳤거나 아예 창작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중국 문헌이나 삼국사기에 단군신화와 관련된 기사가 전혀 없고, 고구려 벽화에도 단군신화를 암시하는 그림이 전혀 없는 것이다.(고구려 벽화에는 단군신화는 커녕 복희씨, 신농씨, 여와 같은 중국신화에 관련된 그림이 많다)?
그리고 동명왕 신화나 주몽신화는 단군신화와 구조적으로 판이하게 다르고, 오히려 은나라 시조신화와 유사성이 깊다(이것도 부여와 고구려가 기자 계통이라는 증거라고 본다).
삼국지 동이전을 보면 부여에 소의 발굽으로 점을 친다는 기록이 있는데(有軍事亦祭天殺牛觀蹄以占吉凶蹄解者?凶合者?吉有敵諸加自?下??擔糧?食之) 이것은 은나라의 갑골문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부여의 제천행사인 영고는 12월에 있는데 이것을 교과서에서는 "수렵사회의 전통"에 관계된다고 설명하는데 근거가 없다.
은나라의 정월에 영고를 지낸다고 삼국지 동이전에 기재되어 있다. (以殷正月祭天國中大會連日?食歌舞名曰迎鼓於是時斷刑獄解囚徒)
부여가 은나라의 달력을 사용했다는 증거인데, 정부는 이 사실을 은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고구려에 대해서 구당서는 기자의 풍습을 가지고 있으며 기자신에 제사를 지낸다고 기재하고 있다. (頗有箕子之遺風/其俗多淫祀事靈星神日神可汗神箕子神)
그러나 일본의 학계에서는 예맥, 부여, 고구려를 퉁구스 민족으로 보는 것이 정설인 것 같은데, 일단 역사시대에서 퉁구스 민족으로 대표되는 집단이 숙신이고 숙신이 나중에 읍루, 물길, 말갈 여진으로 명칭이 바뀌어 가다가 청나라 시대에 와서 만주족이라고 불리게 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의 대표적인 풍습인 변발이 진서(晉書) 숙신전이라는 사료에 나오는데(俗皆編髮以布作?徑尺餘以蔽前後) 이와 달리 고구려 벽화를 보면 고구려인은 다 상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위만이 조선에 들어올 때 상투를 했다는 것도 교과서에서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의 대표적인 풍습인 개고기는 농경민의 전형적인 풍습이고 유목민에게 있어서는 금기라는 것은 인류학적인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각종 중국 문헌에 부여, 고구려와 퉁구스계통의 언어가 다르다고 일관해서 기록하고 있다.
其人形似夫餘, 言語不與夫餘句麗同 (삼국지 읍루전)
?婁, 古肅愼之國也. 在夫餘東北千餘里, 東濱大海, 南與北沃沮接, 不知其北所極. 土地多山險. 人形似夫餘, 而言語各異 (후한서 읍루전)
勿吉國在高句麗北, 舊肅愼國也. … 言語獨異 (위서 물길국전)
勿吉國在高句麗北, 一曰靺鞨. … 言語獨異 (북사 물길국전)
그리고 예맥계통이 전형적인 농경민이라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作城柵皆員有似牢獄 감옥처럼 생긴 성책을 만들었다. (삼국지 부여전)
國中有古穢城本穢貊之城也 나라 안에 옛 예성이 있고 원래 예맥의 성이다. (진서 부여전)
정착 생활의 증거
有麻布蠶桑作??候星宿豫知年??約不以珠玉?寶 밤에 별을 보고 풍흉을 예지한다. (삼국지 예전)
命有司?年自春三月至秋七月出官穀以百姓家口多少賑貸有差至冬十月還納以爲?式內外大悅 진대법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농경
한나라 이후의 기록만 보고 예맥이 처음부터 한반도 북부, 만주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알타이어족설이랑 이것 때문에 예맥이 퉁구스계라는 오해가 생긴 것 같다), 선진시대 문헌을 보면 맥족(선진시대 문헌은 예라는 글자가 안 나오는데 맥이 예를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된다)은 서주시대에 중국 대륙의 산서성, 섬서성, 하북성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況乎兼相愛,交相利,則與此異,古者聖王行之。何以知其然?古者禹治天下,西?西河漁竇,以泄渠孫皇之水;北?防原?,注后之邸,呼池之竇,??底柱,鑿?龍門,以利燕、代、胡、?與西河之民 (묵자 겸애)
평등한 사랑은 옛 성왕들께서 이미 실행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옛날 우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 서쪽으로는 서하西河와 흑수黑水에 수문을 만들어 섬서陜西성의 현포(弦蒲澤)의 물을 빼고 북쪽으로는 원수(原)와 고수(?)를 막아 소여기 昭餘祁와 호타하?池 호수를 흘러들게 했으니 저주산을 적시고 용문산(하남성 낙양)까지 물길을 뚫어 연나라, 대나라, 호족, 맥족과 서하의 백성들을 이롭게 했다.
貊國在漢水東北。地近于燕,滅之。 (산해경)
맥국은 한수 동북쪽에 있다. 가까이에 있는 연(燕)이 멸했다.
*한수(漢水)=면수(沔水)=호북성~섬서성
溥彼韓城,燕師所完,以先祖受命,因時百蠻。
王錫韓侯,其追其貊,奄受北國,因以其伯。(시경 한혁)
넓은 한성(韓城)을 연나라 백성이 쌓다. 조상의 명을 받들어 수많은 오랑캐의 주인이 되다.
주나라 왕이 한후(韓侯)에게 추족, 맥족을 하사하여 북쪽을 맡아 제후가 되다.
*한성(韓城)=현재 하북성 고안현
이것을 보면 맥족이 선진시대에는 중국 대륙의 중북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의 연(燕)이나 한(韓)은 전국칠웅이 아니고 그 전의 서주의 제후국인데 나중에 맥족이 연에 쫓겨서 한반도 북부, 만주로 간 것 같다.
여기서부터는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맥족이 기자 세력과 연합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준왕이 위만에게 패하고 한반도 남부로 도주하는데
侯淮??號稱王爲燕亡人衛?所攻奪?其左右宮人走入海居韓地自號韓王其後絶滅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漢時屬?浪郡四時朝謁(삼국지 한전)
初朝鮮王準?衛?所破乃?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韓王準後絶滅馬韓人復自立?辰王(후한서 한전)
준왕이 한왕을 자칭하는 것은 주나라 제후국인 한국과 관계가 있을 것 같다고 본다.
요약
1. 단군신화는 허구이거나 후대에 유행한 설화의 일종이라고 생각된다.
2. 기자조선(또는 은주시대에 이주한 기자세력)은 실존했을 거라고 생각되고 예맥, 부여, 고구려와 깊은 관계에 있다고 생각된다.
3. 예맥은 원래 중국에 있었고 주나라 제후인 韓의 통치를 받았다.
4.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한반도 남부에서 나라를 세울 때 한왕을 자칭한 것은 주나라 제후인 韓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고 개인적으로 추측한다.
이상의 추측이 객관성을 가진다면 한국인들의 정체성과 민족주의를 철저하게 때려 부수는데 효과가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단군의 애비는 환인.... 그리고 환인은 불교 용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