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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iginal
17.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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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②/이성을 무너뜨린 선동의 드라마 
양극단의 초인과 군중이 엮어낸 파시즘… 감정적 도취를 위한 복제예술 난무

104-1.jpg(사진/군중과 함께 만들어내는 대형 스펙터클. 히틀러의 선동은 군중들을 기마민족의 청동시대로 끌고 들어갔다)

“숭고는 설득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취시킨다.” 수사학에 관한 롱기누스의 저서 <숭고론>에 나오는 말이다. 실제로 고대의 정치는 ‘말’로 이루어졌다. 그 시절 정치가들은 대중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단상에 올라 현란한 말솜씨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제 편으로 끌어들이곤 했다. 가령 시저가 피살된 후 행해졌다는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의 연설을 생각해 보라. 언제부터인가 ‘수사학’이 문체에 관한 학문이 되었지만, 원래 그것은 말하는 기술, 즉 말로써 대중을 열광의 상태에 빠뜨려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술이었다. 물론 오늘날 ‘수사학’이란 말엔 늘 경멸이 붙어다니지만 이를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고대 직접민주주의 시대에 수사학은 참정권을 가진 시민이라면 누구나 배워야 할 교양이었다.

 

집단적 환각, 그들은 청동시대로 갔다

 

“설득하지 않는다. 도취시킨다.” 이것이 바로 수사학의 힘이자 동시에 함정이다. 즉 논리적 설득을 바탕에 깔지 않고 감정적 도취로 논증을 대신하는 순간, 수사학은 곧바로 대중선동의 기술로 전락한다. 파시스트들은 이를 알고 있었다. 가령 무솔리니는 마치 로마의 위대한 장군(=두체)을 연상시키는 제스처와 어법으로 집회장의 대중을 도취시켰다. 이 집단적 환각상태 속에서 그는 대중을 그 찬란하고 영광스러웠던 고대 로마로 되돌려 보냈다. 히틀러 역시 그 신경질적인 연기로 집회장에 모인 대중을 위대한 북방 기마민족의 정복신화라는 가상현실 속으로 몰아넣었다. 뜨거운 감동은 합리적 논증을 간단하게 압도하는 법. 도취의 뜨거움 속에서 인류가 어렵게 쌓아온 냉철한 합리성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이때 인류는 졸지에 공격적 리비도로 가득 찬 청동시대로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105-1.jpg(사진/진정한 웅변가는 고약한 선동가와 구별된다. 욕설과 고함으로 유대인을 저주하는 히틀러)

말의 힘, 그러니까 ‘도취’가 그 자체로서 나쁜 것은 아니다. 이미 고대인들은 진정한 ‘웅변가’(orator)와 고약한 ‘선동가’(rhetor)를 구별할 줄 알았다. 가령 집회장에 모인 대중 앞에서 “I have a dream”이라고 차별 없는 세상의 꿈을 노래하던 마틴 루터 킹과, 유대인에게 증오와 경멸과 저주를 퍼붓던 히틀러. 이 두 사람의 연설은 모두 대중의 마음을 휘저어놓았으나, 우리는 이 연설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 차이는 어떤 것일까? 한마디로 진정한 ‘웅변가’는 결코 논증을 배제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행동의 힘이 결여된 차가운 논증에 그것이 마땅히 가져야 할 에너지를 되돌려주려 할 뿐이다. 반면 ‘선동가’는 논증을 싫어한다. 그는 정서적 감동으로 논증을 대신한 뒤 그걸로 곧바로 대중을 움직이려 든다.

하지만 이 차이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아마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두 선동가의 차이일 것이다. 히틀러 독재 시절, 나치들이 사용하는 어휘의 변화를 일기 형식으로 분석한 <제3제국의 언어>라는 책으로 유명한 빅토르 클렘퍼러에 따르면, 무솔리니는 제법 수사학적 기교도 있고 최소한 ‘문장’을 만들 줄 아는데, 히틀러의 연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욕설과 고함소리로 가득 차 있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었다고 한다. 즉 무솔리니의 연설이 그래도 ‘말’처럼 들린다면, 히틀러의 연설은 ‘말’이 아니라 히스테리 환자의 발작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그래도 무솔리니에게 문학적 소양이 있었다면, 히틀러는 애초에 문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연설은 ‘언어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연극적 현상’이었다. 연단 위에 선 그는 1인극을 하는 연극배우에 가깝다. 실제로 그는 바이로이트 바그너 축제를 할 때 직접 무대연출에 간섭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가 굳이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대중은 그의 요란한 몸짓과 현란한 제스처만 보고도 열광을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클렘퍼러가 길바닥에서 흘러나오는 히틀러 연설의 중계방송 속에서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몇개의 욕설과 거기에 응답하는 대중의 함성뿐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언어의 정서표현적 기능이 반(反)합리성, 비(非)논리성의 극단으로까지 흐르다 보니 논리를 담는 매체인 언어 자체가 사라지는 ‘언어 파괴’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105-2.jpg(사진/차별없는 세상을 꿈꾼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무솔리니의 문학과 히틀러의 종합예술

 

고대 수사학의 전통을 물려받은 무솔리니의 선동이 문학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면, 히틀러의 선동은 종합예술, 즉 군중과 함께 만들어내는 대형 스펙터클이었다. 가령 한밤중에 거대한 스타디움 벽의 둘레에 설치된 탐조등들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빛을 쏘아올린다. 그러면 그 빛의 기둥들에 둘러싸인 대중은 마치 대리석 열주가 늘어선 고대 신전 안에 들어온 듯한 환영에 빠지게 된다. 또 그 빛기둥이 스타디움 안의 대중을 그 밖의 잡종들로부터 구별해주면, 이 선민들은 하늘로 뻗어올라가는 그 빛기둥들 안에서 하늘에 있는 신적인 것과 직접 연결되는 접신(接神)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런 식의 군중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물론 여러 유능한(?)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가령 올림픽 스타디움, 총통관저, 나치당사, 집회장 등 고대의 로마를 옮겨놓은 듯한 이 거대한 세트를 만드는 데에는 슈페어와 같은 건축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선동’하면 생각나는 사람은 물론 이 모든 정치 스펙터클을 총지휘했던 선전상 괴벨스다. 재미있게도 그는 독일의 영화제작자들에게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를 보여주며, “그것을 보고 좀 배우라”고 했다 한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영화라는 미디어 그 자체에서 혁명적 가능성을 본다. 원작 없이 무한히 기술복제가 가능한 영화는 예술에 늘 따라다니던 종교적 흔적, 즉 예술작품의 아우라(신비한 광휘)를 파괴하므로 그 자체로 진보적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소비에트의 혁명적 영화, 가령 트레차코프의 영화 실험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게다. 하지만 그는 이 매체가 가진 또다른 가능성을 보지 못한 듯하다. 사실 영화만큼 파시즘의 대중선동에 긴요하게 사용된 매체도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아우라’를 파괴한다는 이 복제예술이 나치 독일에선 외려 지도자에게 정치적 아우라를 씌우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지 않았던가.

 

대화와 지성을 외면한 파시즘의 초상

 

가령 오늘날 감탄과 파시스트 육체미학이라는 비난을 함께 받고 있는 레니 리이펜슈탈. 오늘날 스포츠 기록영화에 사용되는 기법은 대부분 이 여인이 제작한 베를린올림픽 기록영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의 영화를 보면 선수들의 육체를 얼마나 완벽하게 이상화했던지 대체 기록영화인지 예술영화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다. 그 완벽한 이상화의 기법은 물론 지도자에게 초인의 아우라를 씌우는 데에도 적합하였다. 가령 히틀러가 오픈카를 타고 연도의 군중을 사열할 때, 그는 카메라를 군중의 등 뒤에 위치시킨다. 그러면 차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군중의 머리 위로 불쑥 솟아오른 지도자의 상반신만이 (마치 여호와의 신이 수면을 운행하듯이) 군중의 숲을 헤치고 앞으로 조용히 미끄러져 나간다. 군중집회 때엔 운동장 정면에 걸린 거대한 나치 깃발 뒤에 숨어, 고공촬영으로 좌우 양편으로 도열한 군중 사이로 외롭게 걸어오는 천재의 모습을 잡는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군중의 숲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지도자. 마치 좌우로 갈라진 홍해 바다를 건너는 모세처럼 보인다. 민족의 구세주….

‘얼굴 없는 군중 대 극성스런 초인의 콘트라스트.’ 이것이 파시스트 선동의 기본구도다. 이 초대형 키치예술은 파시스트 독재의 미학적 이미지, 즉 “지도자는 번거로운 의회의 매개 없이 군중의 의지를 직접 대변한다”는 생각의 그림이다. 또 그것은 “진리는 지도자의 입에서 군중에게 직접 전달된다”는 파시스트 반지성주의의 그림이기도 하다. 원래 군중과 천재의 굳건한 결합 속에는 대화(=의희)와 지성(=지식인)이 끼여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얼굴 없는 군중과 극성스런 천재, 극단적 몰개성과 극단적 초개성, 마조히스트 군중과 사디스트 초인의 이 행복한 결합. 그것이 바로 파시즘의 초상이다.

진중권/ 자유기고가h21taillogo.gif

 

http://legacy.h21.hani.co.kr/h21/data/L991101/1p7mb104.html

 

 

파시즘은 드라마를 먹고 자란다

히틀러유겐트(사진 위)와 유사성 논란을 불렀던 삼족오소년소녀대 발대식 모습.

얼마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해프닝이 있었다. 어느 단체에서 고구려 기상을 되살리기 위해 소년소녀단을 창단했다고 한다. 21세기에 민족의 기상을 계승하려고 스카웃을 조직한다는 발상도 우습지만, 디지털 시대 소년 소녀들에게 준(準)군사적 디자인의 제복을 입히는 획일성의 취향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난히 민족주의적인 한국 대중이 고구려의 얼을 이어나가겠다는 데 시비를 걸 것 같지는 않고, 아이들에게 유니폼 좀 입혔다고 그게 국가주의적인 한국 대중의 취향을 거스를 것 같지도 않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고구려의 얼을 계승하겠다는 장한 소년 소녀들이 입고 있는 제복이 공교롭게도 1930년대 독일에서 히틀러유겐트가 입었던 유니폼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게 아닌가. 게다가 아이들의 팔에는 완장이 채워져 있는데, 또다시 공교롭게도 그 색깔이 빨간색. 거기에는 하얀색 동그라미 안에 검은색으로 삼족오가 그려져 있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이 히틀러 유겐트의 깃발이다. 듣자 하니 행사 리허설에서는 오른팔을 43도로 치켜올리는 나치식 경례까지 등장했단다. 

누리꾼들이 삼족오소년소녀대와 히틀러유겐트의 유사성을 지적하자, 주최 측에서는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한 누리꾼들에게 한때 법적 대응도 검토했지만 행사를 망치고 싶지 않아 그만뒀다”고 발끈했다. 나치가 무슨 인간 별종인 줄 아나보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 나치 역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저 넘쳐흐르는 조국애와 민족애를 주체 못해 유니폼을 입고 군사적 혹은 준군사적 집단을 이루기를 좋아했을 뿐. 정치적 파시즘은 보통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가진 이런 심정적 파시즘의 토양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히틀러유겐트 

물론 이 소년소녀대를 만든 이들은 그것을 ‘스카웃’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 독일에서도 어린 시절 히틀러유겐트 대원이었던 노인들은 그 시절을 ‘피크닉’ 비슷한 것으로 기억한다. 어른들이야 거기에 심각한 의미를 부여해도, 어린 시절에 같은 또래 아이들이 모여 함께 거리를 행진하고 자연으로 나가 텐트 치고 야영하는 것처럼 신나는 게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독일의 노인들 중에는 히틀러유겐트를 유년기의 모험과 낭만으로 기억하며 거기에 진한 향수까지 드러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고구려 삼족오 대축제’의 홈페이지는 이런 인사말로 방문객을 맞는다. “삼족오는 우리 문화이자 역사입니다. 역사가 지금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하늘과 강물이, 황금사슴이 ‘잃어버린 역사’의 회복을 부르짖습니다. 당신이 바로 역사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뜻과 힘을 모아 잊혀진 고구려의 역사를 다시 찾아야 할 때입니다. 미래강국 COREA의 건설을 위해 역사를 새로 쓰는 일, 그것은 살아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고귀한 의무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말이 그리 도발적으로 들리지 않지만, 오늘날 서구에서 이런 어법은 ‘극우파’의 언사로 간주된다. 나치도 ‘모두 뜻과 힘을 모아’ 잊혀진 북방 기마민족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으려 했다. 그게 바로 우수한 아리아 인종의 민족서사다. 히틀러가 한 일도 패전국 독일을 미래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역사를 새로 쓰는 일이 아니었던가. 나아가 남의 허락도 없이 자기들 멋대로 설정한 국가적 목표를 남에게 ‘가장 고귀한 의무’로 덮어씌우려 드는 고질병 역시 우익 전체주의자들이 잘 고치지 못하는 버릇이다.

로고스에서 뮈토스로의 퇴행 

“수고 많으셨습니다. KBS, MBC, SBS! 1500년 동안 깊이 잠들어 있던 삼족오를 깨워줘 고맙습니다. 몰염치한 중국의 동북공정이, 일본의 독도공정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자존심과 역사의식을 분연히 일깨워줘 너무도 고맙습니다!” 홈페이지의 인사말은 3개 방송사에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마도 MBC의 ‘주몽’, KBS의 ‘대조영’, SBS의 ‘연개소문’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모양이다. ‘고구려 역사기념관’과 ‘삼족오소년소녀대’라는 현실이 드라마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현실이다. 

영화를 보고 나온 어린이들은 영화가 끝나도 온몸에 영화를 흠뻑 뒤집어쓴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스파이더맨’을 봤다고 하자. 그들은 영화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두 손바닥을 벽에 대고 거기에 들러붙는 흉내를 내려 할 것이다. 나이가 어릴수록 가상과 현실, 허구와 실재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어린아이만의 일일까.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헤켈의 가설은 인간사회에도 적용돼 인류의 유년기에는 성인들도 둘을 구별하지 못했다. 바로 신화의 시대다. 

문자의 등장과 더불어 신화(mythos)의 시대도 저물고 이제 이성(logos)의 시대가 시작됐다. 하지만 역사는 늘 일직선으로 발전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어서, 가끔은 이성에서 신화로 퇴행하는 변괴가 일어나기도 한다. 1930년대 유럽에서 일어난 것이 바로 그 현상이다. 문화사적 관점에서 볼 때, 파시즘은 인간의 정신이 로고스에서 다시 뮈토스로 퇴행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나치들은 대중의 머리에서 냉철한 비판적 역사의식을 지우고, 그 빈자리에 뜨거운 감동을 주는 북방 기마민족의 신화를 채워넣으려 했다. 

 

지난해 열린 ‘고구려 삼족오 대축제’(왼쪽)와 고구려 쌍영총 고분벽화의 ‘삼족오’.

역사냐 신화냐 

“역사의식을 분연히 일깨워줘 너무도 고맙습니다!” 홈페이지의 인사말은 매우 징후적이다. 아무리 역사를 표방해도 드라마는 ‘역사’일 수 없고 그저 ‘허구’일 뿐이다. 따라서 드라마에서 발견되는 오류와 왜곡들은 그것들이 의도된 게 아닌 한 그냥 너그럽게 봐줘야 한다. 대신 드라마를 보고 ‘역사의식’을 얻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드라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재미’ 혹은 ‘감동’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식’을 그것도 ‘분연히’ 일깨워줘 고맙다는 말이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삼족오는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동물이고, 고구려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발견되는 문양이다. 또 고구려에서 삼족오를 국가의 상징으로 사용했다는 근거도 실은 없다. 게다가 삼족오는 “1500년 동안이나 깊이 잠들어 있던” 것. 우리 민족에게 이른바 ‘정체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 삼족오가 없었던 그 1500년 동안에 형성된 것일 게다. 따라서 삼족오를 되살려 민족의 상징으로 삼자는 주장은 사실 로고스에 속하는 냉철한 ‘역사적 의식’이 아니라, 뮈토스에 해당하는 ‘신화적 의식’이다. 

신화 속에서 허구와 실재는 하나가 된다. 허구에서 나와 현실이 된 삼족오소년소녀대는 바로 이 신화적 의식의 산물이다. 일찍이 그리스의 정신이 뮈토스에서 로고스로 바뀔 때, 그리하여 철학이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싸울 때, 철학자들은 종종 이성을 가지고 신화를 비웃곤 했다. 삼족오 문양을 간판에 그려넣은 광화문 어느 삼계탕집의 간판은 “만약 말(馬)들이 신상을 만든다면 신을 말의 형상으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철학자 아낙사고라스의 말처럼 신화 파괴적이다. 어쨌든 그 간판이 행사하는 시각적 도발에는 모종의 통쾌함이 있다. 

미디어가 역사 의식을 바꾼다 

최근에 일어난 고구려 드라마 붐, 그 결과 생긴 삼족오 해프닝은 대중의 의식이 로고스에서 뮈토스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구텐베르크 은하의 끝에서 문자가 소리와 그림으로 변해가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더불어 다시 찾아온 영상문화와 구술문화는 로고스적 사유가가 등장하기 이전의 그리스 사회를 닮았다. 아직 역사도 없고 철학도 없고 경전도 없던 시절에는, 시와 조각과 건축 같은 ‘이미지’로 구현된 신들의 이야기가 곧 역사이자 철학이자 종교였다. 역사의식을 드라마로 대체해버리는 상황. 비슷하지 않은가?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의 뮈토스는 나치의 것처럼 위험하지는 않다는 점. 중국은 10배가 넘는 인구를, 일본은 10배가 넘는 경제력을, 러시아는 10배가 넘는 영토를 갖고 있다. 때문에 한국판 신화는 독일의 것처럼 나라 밖으로 뻗어나갈 수 없고 고작해야 나라 안의 ‘자위’에 그칠 뿐이다. 게다가 한국의 뮈토스는 공격적이라기보다 방어적 성격의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공정에 허구로나마 맞서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대적할 수 없는 상대에게 늘 ‘주관적 승리’를 거두는 아Q의 애처로움마저 있다. 

문자와 함께 인간은 역사시대로 접어든다. 문자문화의 몰락과 더불어 역사주의의 시대도 저물어가고 있다. 역사 이전과 역사 이후는 문자 대신 영상과 구술을 주요한 소통 매체로 삼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래서일까? 역사시대에 뒷전으로 밀려났던 역사 이전의 뮈토스가 역사시대의 종언과 함께 역사 이후에 부활하고 있다. 최근 일어난 고구려 붐의 가장 큰 원인은 동북공정이나 독도공정이 아니라, 어쩌면 이 미디어의 변화가 대중에게 끼친 의식의 변화에 있는지도 모른다. 

 

http://legacy.h21.hani.co.kr/h21/data/L991101/1p7mb104.html

 

 

 

 

 

기마민족설은 전체주의와 일절 관계 없고 오히려 민족의식의 고양을 위해 강제로라도 주입해야 할 것이 성스럽고 우월한 북방 기마민족으로서의 한민족 정체성이다.

이것이 여기 새끼들이 원하는 것인 것 같은데 철저히 실행해야 하지 않나.






  • Uriginal
    17.09.03
    여기 새끼들 좌빨들 모임인데 좌빨들이 좋아하는 진중권이 쓴 글에도 죽창 찌르네 이 새끼들 완전히 박정희 찬양자들 아닌가. 박정희가 좋아할만한 역사관에 열광하네.
  • 아무튼 조선족 고구려족이 기본적으로 중국에 흡수소멸된 중국계 소수족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도록 하고 시라흉노설까지 논파하면 북방민족주의자들이 설 자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가 하는.


  • 2. 청년에 대한 관료집단의 억압

    상승하는 계급의 젊은 세대는 모든 혁명정당의 가장 주요한 지지층이다. 부패한 정치세력은 청년들의 지지를 구할 능력을 상실한다. 정치 전선에서 차례로 후퇴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정당들은 청년층을 혁명이나 파시즘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다. 지하에서 활동할 당시 볼셰비키당은 항상 청년 노동자들의 당이었다. 그러나 멘세비키당은 속물적 품위를 지키려는 노동자계급 상층부가 지지 기반이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 항상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볼셰비키당을 경멸하였다. 혁명은 이들의 오류를 가차없이 드러내었다. 혁명의 결정적 국면에서 청년들은 성숙한 연령층 그리고 심지어 노년층도 이끌었다.

    10월 혁명은 소련의 새로운 세대에게 역사적 진보를 향한 충동을 강렬하게 심어주었다. 혁명은 청년들이 단번에 보수적 생활양식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자유로운 몸이 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구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인간 사회 역시 형태를 바꿀 수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커다란 비밀 즉 변증법의 첫 비밀을 이들에게 보여주었다. 우리 시대의 사건들을 바라볼 때 불변적 인종유형 이론은 얼마나 어리석은 이론인가! 소련은 수십 인종들이 섞여 있는 거대한 인종 전시장이다. 따라서 "슬라브인의 영혼"이라는 신비주의는 소련의 현실 속에서 산산이 조각 난다.

    그러나 청년의 진보를 향한 역사적 충동은 아직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다. 물론 경제 영역에서 청년의 활동은 아주 활발하다. 현재 소련에는 23세 이하의 청년 노동자가 7백만 명에 이른다. 공업에서 314만 명, 철도에서 70만 명, 건설업종에서 70만 명이 일하고 있다. 새로 건설된 대공장에는 노동자의 반수가 청년이다. 집단농장에는12만 명의 공산주의 청년동맹 회원들이 일하고 있다. 최근 건설공사장, 벌목현장, 석탄광산, 금광 등의 현장에는 공산주의 청년동맹 회원들이 수십만 명 동원되었다. 그리고 북극해, 사할린, 아무르 등지에는 이들의 이름을 딴 신도시들이 건설되고 있다. 새로운 세대는 돌격대원, 모범노동자, 스타하노프 운동원, 십장, 하급행정요원 등으로 일하고 있다. 청년세대는 공부에 열중하고 있으며 이중 많은 수가 아주 열정적으로 탐구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체육 분야에서도 이들은 경제 옆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특히 고공 낙하, 사격술 등 가장대담하고 호전적인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진취적이며 대담한 청년들은 모든 종류의 위험한 원정에 나서고 있다.

    잘 알려진 북극탐험가 슈미트(Schmidt)는 최근 이렇게 말했다:"우리 청년의 다수는 난관이 기다리는 곳에서 일할 용의가 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모든 분야에서 혁명 이후 세대들은 아직 구세대의 보호를 받고 있다. 이들은 작업대상, 작업방식 등과 관련하여 상부의 명령을 밭고 있다. 명령의 가장 높은 형태인 정치는 전적으로 소위 "고참세대(Old Guard)"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그리고 청년들에 대한 열성적인 자화자찬의 연설을 통해 이 고참세대는 경계심을 풀지 않으면서 정치를 독점하고있다.

    엥겔스는 국가가 사멸되지 않는 사회주의 사회를 구상한 적이 없다. 국가의 사멸은 경찰을 동원한 모든 종류의 억압을 교육받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자치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 과업을 젊은 세대들이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청년들은 새롭고 자유로운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모든 국가주의 쓰레기를 일소할 것이다." 레닌 역시 이 주제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 (이들은) 민주공화정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국가주의를 제거할 것이다." 엥겔스와 레닌은 사회주의 건설의 전망을 대개 이렇게 제시했다: 국가권력을 정복한 "고참" 세대는 국가를 일소하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고 다음 세대는 이 작업을 완료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소련 인구의 43%는 10월 혁명 이후 태어났다. 23세를 두 세대를 가르는 경계선 연령으로 본다면 소련 인구의 50% 이상은 아직도 이 경계선에 아래에 있다. 결국 인구의 반은 소비에트 체제 이외의 정치체제를 체험한 적이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새로운 세대는 엥겔스의 말대로 "자유 상태에서" 자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소련 정부는 관료지배층을 위대한 혁명세대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끊임없이 증대되는 억압 속에서 청년들은 숨쉬고 있다. 공장, 집단농장, 군대 막사, 대학, 교실 그리고 탁아소는 아니더라도 유치원에서마저 지도자에 대한 개인적 충성과 무조건적 복종이 소련 인민의 영광이라고 선언된다. 최근 발명된 교육 관련 격언들과 경구들은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로부터 모방한 것처럼 들린다. 아니면 괴벨스 자신이 스딸린의 조수들에게 이것들을 대다수 모방했는지 모른다.

    학생들의 학교 및 사회생활은 형식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 수많은 죽도록 따분한 모임들, 피할 수 없는 명예회장님의 훈화, 경애하는 지도자들을 칭송하는 구호 제창, 어른들과 똑같이 속과 전혀 다른 발언을 남발하는 미리 짜여진 목청 높은 토론회 등을 아동들은 참아내야 한다. 극소수 순수한 아동들은 엄하게 다스려진다. 비밀경찰은 소위 "사회주의 학교"에 끄나풀들을 들여보내 배움의 장에 배신과 밀고의 구역질나는 부패상을 도입하고 있다. 당국이 강요하는 낙관주의에도 불구하고 학교생활을 짓누르는 억압, 거짓, 지루함 속에서 생각이 깊은 교사들과 아동들은 글을 통해 몰래 일상적으로 느끼는 공포감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계급투쟁과 혁명 경험이 없는 새로운 세대들은 소비에트 민주주의 속에서 과거의 경험들과 현재의 교훈들을 의식적으로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만 이들은 사회생활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성숙할 것이다. 독립적 사고와 마찬가지로 독립적 성격은 비판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사고를 교환하고 오류를 범하고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 뿐 아니라 타인의 오류도 교정하는 초보적인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자신들의 문제들을 포함한 모든 문제들은 이들 대신 어디선가 미리 결정되어진다. 결정된 사항들을 실행에 옮기고 결정을 내린 사람들을 칭송하는 것이 이들이 할 수 있는 활동의 전부이다. 모든 비판적 언사는 관료집단에 의해 질식된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며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모든 자들은 체계적으로 제거되거나 억압된다. 수백만 청년들 가운데 단한 명의 거물급도 탄생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학, 과학, 문학, 스포츠, 체스게임 등에 몰입하면서 청년들은 미래의 거대한 행동들을 준비한다.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 전혀 준비가 안된 구세대와 경쟁하면서 이들을 필적하거나 압도한다. 그러나 정치 영역에서는 구세대에게 짓눌려 지낸다. 따라서 이들의 미래는 세 가지 가능성 밖에 없다. 관료집단에 들어가 출세를 도모하던가 말 한마디 없이 억압을 감내하면서 경제, 과학, 또는 좁은 개인적 관심의 영역에 몰입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하활동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면서 자아를 단련할 수 있다. 그러나 관료의 길은 극소수에게만 열려 있다. 마찬가지로 극소수만이 저항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중간층은 아주 다양하고 이질적이다. 그러나 엄혹한 억압상황 속에서 이 집단은 대단히 의미 있으면서 은폐된 과정을 밟게 되는데 크게 보아 이과정의 행방이 소련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내전의 시기는 금욕을 강요했는데 신경제정책을 거치면서 탐욕은 아닐지라도 쾌락을 추구하는 시기로 이행했다. 그러나 제1차 5개년 계획 시기에는 또다시 금욕주의가 강요되었다. 그러나 이 금욕주의는 청년과 대중에게만 강요되었다. 이미 지배층은 개인적 번영을 누릴 지위를 확고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차 5개년 계획 시기에는 금욕주의에 대한 급작스러운 거부반응이 당연히 나타났다. 개인주의적 출세욕이 대중 특히 청년에게 널리 퍼졌다. 그러나 개인적 복지와 번영은 대중과는 무관하며 지배층에 아부하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한편 관료집단은 의식적으로 거수기 정치인과 출세주의자들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솎아내기도 한다.

    1935년 4월 공산주의청년동맹대회의 주요 연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익에 대한 탐욕, 속물적인 인색함, 저열한 이기주의는 소련 청년의 속성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이 발언은 도급제, 생산장려금, 훈장 등을 통한 "번영과 품위를 갖춘 생활"이라는 지배적 구호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금욕주의가 아니다. 정반대로 기독교의 금욕주의에 아주 적대적이다. 즉 현세에 집착하는 점에서 사회주의는 모든 종교에 대단히 적대적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현세의 가치를 추구하는 여러 단계들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는 번영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러한 관심의 부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어떤 세대도 자신의 처지를 뛰어넘어 비약할 수는 없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저열한 이기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성공의 척도인 바지와 넥타이 보유 수는 "속물적 인색함"만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단계가 피할 수 없다고 가정하자. 좋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여전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장관계의 부활은 개인적 번영의 기회를 당연히 열어놓고 있다. 공학에 대한 소련 청년들의 많은 관심은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공학자들이 의사나 교사보다 비교할 수 없이 높은 소득을 누리기 때문이다. 이 경향이 지적인 억압, 사상적 반동, 상부의 출세주의 의식 장려와 결합되면 소위 "사회주의 문화"는 가장 극단적인 반사회적 이기주의를 가져온다.

    그러나 청년들을 전적으로 또는 지배적으로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이들에 대한 조야한 비방이 될 것이다.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관대함, 동정심, 진취성을 겸비하고 있다. 출세주의는 상부에서 이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에 불과하다. 이들의 깊은 내면에는 영웅주의에 기초한 정형화되지 않은 경향들이 숨쉬고 있으며 이것들이 발현될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즉 새로운 종류의 애국심이 자라는 토양을 이룬다. 이 심리적 분위기는 당연히 아주 깊으며 진지하고 역동적이다. 그러나 이 애국심에서도 젊은 세대와 구세대를 분리하는 골이 존재한다.

    건강하고 젊은 허파는 테르미도르 반동과 결부된 위선의 공기를 숨쉬기 어렵다. 따라서 이 반동은 아직도 혁명의 옷을 입고 자신을 치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 선전포스터와 일상 현실의 뚜렷한 격차는 공식 공산주의 경전에 대한 신념을 침식하고 있다. 상당수 청년들은 자신들이 표현하는 정치에 대한 경멸감과 반사회적 생활양식에서 긍지를 느낀다. 대개의 경우 이 무관심과 냉소는 현 체제에 대한 불만과 독립된 생활을 영위하려는 숨겨진 욕구의 첫 형태에 불과하다. 한편 수십만 청년 "백위군"과 "기회주의자" 그리고 또 한편으로 "볼셰비키∼레닌주의자"가 공산주의청년동맹과 당에서 제명되고 체포되고 유형 당하는 현상은 의식적인 정치적 저항의 샘이 좌우익을 막론하고 아직 고갈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특히 지난 몇 년간 이 샘물은 새로운 위력으로 분출하고 있다. 그러나 참을성이 없고 뜨거운 피가 흐르는 불안정한 부류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감정이 유린되자 테러를 통한 복수를 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이 대체로 소련 청년의 정치적 분위기이다.

    개인적 테러의 역사는 소련의 발전과정의 특정 단계들을 명확하게 구별짓고 있다. 소비에트 권력의 초기, 아직 내전이 끝나지 않았을 때 백위군과 사회혁명당원들은 혁명정부에 대해 테러를 자행했다. 그러나 구지배계급이 구체제의 복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자 테러도 곧 사라졌다. 최근까지 충격적으로 기억되고 있는 쿨락의 테러는 언제나 지방에 한정되었고 소련 정부에 대한 게릴라 투쟁이 이것을 측면에서 지원하기 위해 벌어졌다. 최근 테러의 폭발은 구지배계급이나 쿨락이 아니라 전적으로 청년, 공산주의청년동맹, 당의 대오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아주 빈번히 지배층의 자식들도 테러에 가담하고 있다. 문제 해결에는 완전히 무력하지만 개인적 테러는 아주 중요한 징후를 드러낸다. 관료집단과 대중 특히 청년 사이의 날카로운 모순이 이것을 통해 특징적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난관, 고공 낙하, 북극 탐험, 과시하는 듯한 무관심, "낭만적 깡패 행위", 테러 분위기, 개인적 테러 등은 모두 구세대의 참을 수 없는 억압에 대한 젊은 세대의 폭발을 준비하고 있다. 전쟁은 의심할 여지없이 증대되는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안전판이 된다. 그러나 이 안전판도 오래가지 못한다. 전쟁을 통해 청년들은 지금 완전히 결여된 투쟁적 성격과 자신의 사회적 권위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고참 세대" 대다수에 대한 평판은 회복할 수 없이 상처를 입을 것이다. 기껏해야 전쟁은 관료집단에게 어느 정도 유예기간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이후에 전개될 정치적 분쟁은 그만큼 더 날카로운 양상을 띨 것이다.

    물론 소련에서 발생하고 있는 근본적 정치문제를 세대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청년들 중에 수십만의 완벽한 예스맨이 존재하듯이 구세대에도 공개적이든 모습을 숨기고있든 관료집단에 대한 적대세력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러나 관료집단에 대한 공격이 좌익과 우익 어느 쪽에서 시작되든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억압받고 불만 높은 청년층이 주요한 지원세력으로 등장할 것이다. 물론 관료집단은 이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지배적 지위를 위협하는 모든 것에 대해 일반적으로 대단히 민감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미리 자신의 진지를 확고히 구축하기 위해 이들은 젊은 세대의 공격을 막을 참호와 콘크리트 성곽을 구축한다.

    이미 말했듯이 1936년 4월 크렘린궁에서 공산주의청년동맹 제10차 대회가 열렸다. 5년 동안 대회가 한번도 열리지 않은 사실이 규약 위반이라는 것을 설명할 필요를 물론 어느 누구도 느끼지 않았다. 더욱이 참석자가 엄선된 이 대회가 청년의 정치적 권리를 철저히 박탈하는 목적만을 위해서 열렸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새로 개정된 규약은 이 단체가 법적으로 소련의 사회생활에 참여할 권리조차 박탈했다. 따라서 이 단체의 유일한 활동영역은 교육과 문화 훈련 분야에 한정되었다. 이 단체의 총비서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연설을 통해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 산업과 재정에 대한 계획, 생산비 감소, 경제회계, 농산물 파종, 그리고 다른 중요한 국가적 문제들을 마치 우리가 결정하는 것처럼 수다 떠는 짓은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이 마지막 말을 계속 되풀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결정하는 것처럼!" "수다 떠는 행위를 그만 두어야 한다!"는 거만한 말투는 극도로 복종적인 대회 참석자들에게조차 전혀 열광적 반응을 끌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소련의 법률이 정치적 성숙에 도달하는 나이를 18세로 보고 이 나이의 청년 남녀에게 모든 선거권을 부여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이 조치는 너무도 충격적이다. 더욱이 공산주의청년동맹의 나이 제한이 규약에 의하면 23세로 되어 있으나 이 단체 회원의 3분의 1은 실제로 이보다 나이가 더 많다. 그런데 이들이 교육과 문화 영역에서만 활동을 펼쳐야 한다니! 그리고 이 단체의 마지막 대회가 된 이 대회는 두 개의 개혁안을 동시에 채택했다. 첫째, 나이 제한의 완화로 23세 이상의 사람도 회원이 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선거권을 가진 사람의 수가 늘어났다. 둘째, 일반적 정치사안뿐 아니라 현안 경제문제에 대해서도 단체가 개입할 권한을 박탈당했다. 과거에는 이 단체 회원일 경우 나이가 많아지면 자동적으로 당적이 옮겨졌으나 이제는 연령제한의 폐지로 이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 이 단체가 그나마 가지고 있던 정치적 권리도 완전히 박탈되었고 정치적 권리를 이 단체가 보유하고 있다는 허세마저 완전히 없어졌다. 이 조치가 내려진 주요한 이유는 이 단체를 이미 숙청이 적절히 진행된 당의 명령에 노예처럼 복종하게 만드는 데 있다. 이 조치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같은 근원에서 출발하였다: 젊은 세대에 대해 관료집단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토론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배제하기 위해 자신들이 스딸린의 명확한 지시를 수행하고 있다고 스스로 공개했던 대회의 연사들은 놀라울 정도로 정직하게 개혁의 목적을 설명했다: "우리에게 제2의 당은 필요 없다."공산주의 청년동맹이 확실히 질식되지 않으면 제2의 당이 될 위험이 있다고 지배층이 보고 있음이 이 주장을 통해 드러났다. 이 위험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내비치기 위해서 또 다른 연사가 경고조로 이렇게 선언하였다: "바로 뜨로츠키가 반레닌주의적 반볼셰비키적 제2당의 창설을 청년들에게 참주선동 하였다 등등." 이 연사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언급은 케케묵었다. 실제로 필자는 "당시" 정부의 관료화가 심화될 경우 청년층과의 단절이 불가피할 것이고 제2당이 탄생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다: 그간의 사태들은 이 경고의 올바름을 입증해 주었고 이 경고를 실제적 강령의 내용으로 격상시켰을 뿐이다. 타락하고 있는 당은 출세주의자들에게만 매력이 있다. 정직하고 독립적인 사고를 가진 청년들은 비잔틴제국 스타일의 노예근성, 허풍, 특권과 변덕에 대한 은폐, 별로 능력도 없는 관료들의 자화자찬 등에 대해 구역질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관료들은 능력부족으로 하늘의 별을 딸 수 없어서 몸의 이곳저곳에 별을 달고 다닌다. 이제 청년에 의한 제2당의 건설은 12년이나 13년 전처럼 "위험요소"가 아니라 10월 혁명의 대의를 더욱 전진시킬 유일한 수단으로 역사적 필요성을 인정받았다. 공산주의청년동맹의 규약 개정은 경찰기구의 새로운 협박으로 개악되었지만 청년의 정치적 성숙을 제어할 수 없으며 관료집단에 대한 이들의 적대적 저항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거대한 정치적 소요가 발생할 경우 청년은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하는가? 어느 깃발 아래에서 이들은 자신의 대오를 형성할 것인가? 청년들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해서 확실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 모순적 경향들이 이들의 마음을 주름지게 하고 있다. 결국 주요 대중의 동맹관계는 세계적 중요성을 가진 역사적 사건들에 의해 판가름날 것이다. 즉 전쟁, 파시즘의 새로운 성공, 또는 이와 반대로 서방에서 노동계급 혁명의 승리 등이 사태를 결정할 것이다. 어쨌든 모든 권리들을 박탈당한 청년들이 거대한 폭발력을 가진 역사적 물결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관료집단은 발견하게 될 것이다.

    1894년 당시 젊은 짜르 니콜라스 2세의 입을 빌어 러시아 전제체제는 젬스트보(역자 주: 토지 소유주들의 박탈된 권한을 일부 회복시키기 위해 1864년 알렉산드로 2세가 창설한 군 단위 의회)의 환상을 깨버렸다. 당시 젬스트보는 정치에 참여할 꿈을 소심하게 꾸고 있었는데 이들에 대해 짜르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대답했다: "부질없는 환상!" 1936년 관료집단은 젊은 세대의 아직도 명확하지 않은 요구들에 대해 더 거만한 투로 고함질렀다: "수다 좀 그만 떨어라!" 이 발언 역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니콜라스 2세 정권과 마찬가지로 스딸린 정권도 이 말에 대한 보답을 확실히 받을 것이다.

     

    3. 민족과 문화

    민족문제에 대한 볼셰비키당의 정책은 10월 혁명의 승리를 보장했을 뿐 아니라 이후 국내의 분열적 경향과 적대적인 환경 가운데에서도 소련 체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국가의 관료주의적 퇴보는 민족문제에 맷돌처럼 짓누르는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레닌이 1923년 봄에 예정된 제12차 당 대회에서 관료집단과 특히 스딸린에 대해 첫 투쟁을 구상을 한 것도 바로 이 민족문제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대회가 열리기 전에 레닌은 병환으로 투쟁을 계속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당시 투쟁을 위해 준비했던 문서들은 아직도 검열관에 의해 공개되지 않고 있다.

    혁명으로 떨쳐 일어난 민족들의 문화적 요구들은 가장 광범위한 자치를 통해서만 만족될 수 있다. 동시에 산업은 소련의 모든 구성 부분들을 일반적으로 중앙집중적 계획에 복종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성공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와 문화는 장벽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문화적 자치의 경향과 경제적 중앙집중주의경향은 자연히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양자 사이의 모순이 화해 불가능한 것은 전혀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단 한번으로 족한 비법이 있을 수 없으나 이해 당사자인 대중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끈질긴 의지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통치과정에 대중이 실제로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만 각각의 새로운 단계에서 경제적 중앙집중주의의 올바른 요구와 민족문화의 살아 있는 중력 사이에 필요한 한계를 설정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각 민족의 의지가 관료집단의 의지로 완전히 대체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관료집단은 경제와 문화를 행정적 편의와 자신의 구체적 이해를 도모하는 방향에서 접근한다.

    경제 영역과 마찬가지로 민족 정책의 영역에서도 소련의 관료집단은 계속해서 진보적 과업을 일부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과도한 비용을 낭비하고 있다. 특히 소련의 후진 민족들에 대한 사업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이 후진 민족들은 현존하는 타민족들의 우수한 문화적 성과들을 필요에 의해 흡수, 모방, 동화해야한다. 관료집단은 이 후진 민족들을 위해 부르주아 그리고 심지어는 소부르주아 문화의 기본적 혜택들을 누리도록 다리를 놓아주고 있다. 많은 영역들과 민족들에 대해서 소련의 정권은 상당한 정도로 과거 피터 대제와 그의 동료들이 이룩한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 다만 피터 대제 당시 성립했던 구모스크바 공국과 다른 민족과의 관계가 이제는 대규모로 그리고 빠른 속도로 확립되고 있을 뿐이다.

    소련의 각급 학교에서 수업은 현재 80개 이상의 언어로 진행되고 있다. 이들 다수를 위해서 새로운 알파베트를 개발하거나 지극히 귀족적인 아시아의 알파베트를 좀더 민주적인 라틴 알파베트로 대체하는 것이 필요했다. 신문도 같은 숫자의 언어로 각각 발행되고 있다. 신문은 사상 처음 농민과 유목민에게 인간 문화의 기본 개념을 전달해 주고 있다. 짜르 제국의 광대한 영토 내에서 이제 토착산업이 등장하고 있다. 오래된 반(半)부족 문화는 트랙터에 의해 파괴되고있다. 문자해독이 가능해지면서 과학 영농과 의학이 발달하고 있다. 새로운 인간집단을 육성하는 이 작업의 의의는 진실로 대단하다. 혁명이 역사의 기관차라고 마르크스가 말했는데 그는 옳았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기관차조차 기적을 이룩할 수는 없다. 공간의 법칙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운동에 가속도를 붙일 수 있을 뿐이다. 수천만 성인들에게 알파베트와 신문이나 단순한 위생 법칙들을 도입시켜야 할 필요는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를 건설하는 길이 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서부 시베리아의 오이로트족은 목욕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러나 이제 "많은 마을에 목욕탕이 있어서 가끔 목욕을 하기 위해 30킬로미터를 여행한다"고 언론은 전하고 있다. 이 극단적인 예는 가장 낮은 수준의 문화를 소개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문화적 성과들의 수준을 진실되게 표현하고 있다. 물론 후진 지역뿐 아니라 선진 지역에서도 혁명의 문화적 성과는 크다. 문화의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 정부 대표는 집단농장에서 "쇠침대, 벽시계, 뜨개 속옷, 스웨터, 자전거 등"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농촌의 상층부가 이미 오래 전에 서방의 농민대중이 흔하게 사용하고 있던 물품들을 지금에야 사용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매일 연설과 신문을 통해서 "사회주의 문화교류"를 주제로 교시들이 발표되고 있다. 그러나 이 행동들은 그 핵심에 있어서 국영상점이 사람을 끌 수 있게 외관을 깨끗하게 치장하고, 필요한 도구와 충분한 종류의 물건을 구비하며, 사과를 썩지 않게 조치하고, 스타킹과 짜깁기 면을 갖추고, 점원에게 고객에게 깍듯하게 잘 대해주도록 교육하는 정도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자본주의 교역의 일상 방식들을 체득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결코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이 과정이 사회주의적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는 전혀 말할 수 없다.

    잠시 법과 제도 등을 제쳐두고 기본대중의 일상생활을 살펴보자. 그리고 의도적으로 자신은 물론 타인들을 속이지 말자. 그렇다면 관습이나 문화에 있어 짜르시대 그리고 부르주아 러시아의 유산이 맹아적 사회주의의 성장을 압도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주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대중 자신들인데 이들은 생활수준이 조금만 높아지면 서방의 모델을 모방하려고 모든 수를 쓴다. 소련의 젊은 점원 그리고 종종 노동자 역시 옷과 행동거지에서 공장에서 우연히 접촉하는 미국의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을 모방하려고 애쓴다. 제조업과 사무직 여성 노동자들도 외국 여자 관광객을 뚫어지게 관찰하여 그녀의 양식이나 예절 등을 배우려고 애쓴다. 이 일에서 성공하는 운좋은 소녀는 완전히 모방의 대상이 된다. 처지가 괜찮은 여성 노동자는 구식단발머리보다는 "파마"를 좋아한다. 청소년들은 "서양댄스 써클"에 열성적으로 가입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모든 현상들은 진보에 속한다. 그러나 이 현상들이 드러내는 사실은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우월성이 아니라 소부르주아 문화가 가부장적 생활양식을, 도시가 농촌을, 중심지가 벽촌을, 서방이 동방을 압도하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한편 소련의 특권층은 자본주의 국가의 상류층을 모방한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유행을 선도하는 자들은 외교관, 복합기업의 책임자, 엔지니어 등이다. 이들은 업무 때문에 미국과 유럽에 자주 출장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대중 사이에 유행하는 풍자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상류층 "만 명"은 전혀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소련에서 취향이 가장 고상한 대사들도 자본주의 문명 앞에 자신들의 고유한 스타일이나 독자적인 특징들을 조금이라도 선보일 수 없었다. 이들은 외적인 화려함을 경멸하고 초연함을 유치할 수 있을 만큼 내적 안정감이 없다. 이들의 주요한 야망은 가능하면 가장 완벽한 부르주아 속물을 닮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대개의 경우 새로운 세계의 대표자가 아니며 단지 벼락부자처럼 느끼고 행동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선진국들이 이미 오래 전에 수행했던 문화적 과업을 소련이 이제 수행한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의 반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이 이루어낸 새로운 사회적 관계가 부적절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 덕분에 러시아라는 후진국이 가장 선진적인 나라의 수준에 도달할 가능성을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서방보다 훨씬 짧은 시간 동안 자본주의 선진국 수준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문화수준이 가속도로 발전하는 것에 대한 설명은 간단하다. 부르주아 선구자들은 기술을 발명하고 이것을 경제와 문화 영역에 적용하는 것을 배워야 했다. 반면 소련은 이것들을 이미 완성된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생산수단의 사회화 덕분에 이 성과들을 부분적으로 그리고 서서히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그리고 대규모로 도입한다.

    군사 당국은 특히 농민과의 관계에서 군대가 문화의 전달자가 된 것을 여러 번 기념하였다. 부르주아 군국주의가 주입하려는 "문화"의 특별한 종류에 대해 우리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면 진보적 관습이 군대를 통해서 많이 대중에게 침투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과거에는 사병들과 하사관들이 혁명운동 특히 농민운동에서 대개 봉기의 선두에 섰다. 소련 정부는 군대뿐 아니라 국가기구 전체와 당, 공산주의청년동맹, 노동조합 등을 통해 인민의 일상생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기술, 위생, 예술, 스포츠 등의 기존 모델들이 원산지에서 발전하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한없이 짧은 시간에 소련에서 이용되는 이유는 국가적 소유형태, 정치적 독재, 계획적 행정 방식 때문이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가속화된 문화 발전을 성취한 것만 해도 10월 혁명의 역사적 정당성은 주장될 수 있다. 왜냐하면 지난 25년간 쇠퇴한 부르주아 체제는 지구상의 후진국 단 하나도 문화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노동계급은 훨씬 더 의미가 있는 과업들을 달성하면서 혁명을 성취하였다. 현재 노동계급은 아무리 정치적으로 억압을 받고 있어도 다수는 여전히 공산주의 강령을 버리지 않았고 강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규모의 희망도 버리지 않았다. 관료집단은 노동계급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정책의 방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모든 정책을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와 문화 영역의 모든 조치들은 실제 역사적 내용이나 대중의 생활에서의 진정한 의의에 관계없이 지금까지 해결되지 못한 "사회주의 문화"의 정복이라고 선포되고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외모를 단정히 하는데 필요한 가장 간단한 물건들을 들어보지도 못했던 수백만 대중이 화장비누와 치솔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아주 위대한 문화사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비누, 칫솔 그리고 고위층 "부인들"이 요구하는 향수가 사회주의 문화는 아니다. 특히 문명의 사소한 산물에 지나지 않는 이 물품들을 인구의 15%만이 이용할 수 있다. 이것을 사회주의 문화라고 하기에는 과장이 너무 심하다.

    소련 언론에서 그렇게도 많이 떠드는 "인간 개조"는 현재 극에 달해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인간이 발전해야 사회주의적 개조가 이루어지는 것일까? 러시아인들은 독일의 거대한 종교개혁이나 프랑스의 대혁명을 경험하지 못했다. 17세기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의 개혁과 혁명을 잠시 논외로 하면 독일과 프랑스의 두 용광로로부터 부르주아 개성이 출현하였다. 그것은 인간성 일반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일보 진전이었다. 1905년과 1917년 혁명을 통해 러시아 대중의 개성은 처음 눈떴으며 낙후된 환경 속에서나마 응결되었다. 즉 러시아인은 압축된 형태와 가속화된 템포로 서방 부르주아 종교개혁과 혁명에 버금가는 인성교육을 거쳤다. 그러나 이 작업이 채 끝나기도 훨씬 전에 러시아 자본주의 태동기에 등장한 러시아 혁명은 계급투쟁의 과정 속에서 사회주의로 도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소련 문화의 모순들은 이 도약이 잉태한 경제적·사회적 모순들을 반영하고 굴절할 뿐이다. 이 상황에서 각성된 개성은 경제뿐 아니라 가족생활과 서정시에서도 어느 정도 소부르주아적 특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관료집단 자신은 가장 극단적이고 때때로 통제되지 않는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담지자가 되었다. 도급제, 토지의 개인적 소유, 생산 장려금, 훈장수여 등을 통해 경제적 개인주의의 발전을 허용하고 권장하면서 동시에 관료집단은 정신문화 영역에 존재하는 개인주의의 진보적 측면들을 가차없이 억압하고 있다. 비판적 안목, 개인적 견해의 발전, 개인적 존엄성의 배양 등은 개인주의의 진보적 측면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것들을 관료집단은 여지없이 질식시키고 있다.

    특정 민족집단의 문화발전 수준이 상당하면 할수록 그리고 이 집단이 사회와 개인의 문제들을 좀더 밀접하게 다루면 다룰수록 이것들에 대한 관료집단의 억압은 더 무겁고 참을 수 없게 느껴진다. 색깔과 규격이 똑같은 경찰 곤봉이 소련 내 모든 민족의 지적 활동을 통제할 경우 민족문화의 고유성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게 된다.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그루지아, 티우르크 등의 신문이나 책들은 관료집단의 명령을 해당 언어로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중적 창조성의 모델이라는 미명 아래 모스크바 언론은 매일 러시아 언어로 관료집단 지도자들을 칭송하는 타민족 어용시인들의 송가를 출판하고 있다. 물론 이런 시들은 재능의 빈곤과 노예근성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는 형편없는 시들이다.

    다른 민족의 문화와 똑같이 경찰국가의 통치하에서 고통을 겪어온 대러시아 문화는 혁명 이전에 형성된 구세대의 업적에 주로 기대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청년은 마치 쇠철판이 머리를 짓누르는 것처럼 억압당하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집권적 경찰기구가 대러시아 민족을 비롯해 모든 민족들을 억압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소련 출판물의 90%가 러시아어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이 비율이 대러시아 인구의 상대적 비중과 비교해 너무 크지만 또 한편 러시아 문화가 보유한 독자적 비중 그리고 후진 민족과 서방을 연결해주는 중재자로서 이 문화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 영향력을 더 정확히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측면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다른 영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러시아 출판사들의 과도하게 높은 비율은 대러시아인들이 다른 민족들을 희생시켜 전제적 특권을 실제로 누리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럴 가능성이 많다. 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에 대해 아주 딱 잘라 명확하게 대답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실제 현실에서 이 문제는 각기 다른 문화들간의 협력, 경쟁, 상호발전보다는 관료집단의 최종적 자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렘린궁이 모든 권한의 집합소이고 지방이 중앙과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기 때문에 관료주의는 불가피하게 전제적 대러시아 문화라는 외피를 쓸 수밖에 없다. 이 결과 다른 민족들은 이 중재자 문화를 자신의 언어로 칭송하는 문화적 권리만을 가지고 있다.

    * * *

    소련 당국의 문화정책은 경제정책의 좌충우돌과 행정적 편의에 의해 멋대로 바뀐다. 그러나 하나의 특징은 변함이 없다: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일국 사회주의" 이론과 동시에 이전에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노동자 문화" 이론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 이론의 반대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노동계급 독재체제는 엄격한 의미에서 영구적 체제가 아니라 이행기 체제에 지나지 않는다; 부르주아 계급과는 달리 노동계급은 장기간 사회를 지배할 의도가 전혀 없다; 새로운 지배계급인 노동계급의 현세대는 부르주아 문화의 가치 있는 모든 것을 동화하는 과업에 자신의 임무를 주로 한정한다; 노동계급이 노동계급으로 남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즉 노동계급이 과거 억압의 흔적들을 짊어지고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이 계급은 과거의 역사적 전통을 뚫고 새로운 천지를 창조할 가능성이 그만큼 적어진다; 새로운 창조력이 발현할 가능성은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사회 내에 용해되어 사라질 때에만 활짝 열린다. 다른 말로 하면 부르주아 문화는 노동자 문화가 아니라 사회주의 문화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실험실의 방법을 통해 창조된 "노동자 예술" 이론에 대한 논쟁에서 필자는 이렇게 주장했다: "문화는 산업의 성과를 자양분으로 해서 자란다. 따라서 문화가 성장하고 세련되고 복잡성을 띠기 위해서는 물질적 여지가 넘쳐흘러야 한다." 기본적 경제문제들의 가장 성공적으로 해결되어도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역사적 원리가 완전히 승리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민족들의 기초 하에 과학적 사상이 전진하고 새로운 예술이 발전할 때만 사회주의라는 역사적 씨앗은 줄기를 생성시킬 뿐만 아니라 꽃도 피운다. 이 의미에서 예술 발전은 모든 시대의 생존능력과 의의를 확증하는 가장 높은 시금석이다." 이 관점은 논쟁이 진행될 당시 지배적 견해였는데 당국의 담화문에서 갑자기 이것이 "적대 계급에 투항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노동자계급의 창조력에 대한 "불신"을 표현한 것이라고 선언되었다. 이로써 스딸린과 부하린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후자는 오래지 않아 "노동자 문화"의 복음 선교자가 되었으나 전자는 이 문제들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이 두 인물은 어쨌든 사회주의로의 길은 "거북이 걸음"으로 발전할 것이고 노동계급은 자신의 문화를 창조할 시간을 수십 년 갖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 문화의 성격에 대한 이들의 사고는 애매할 뿐 아니라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지도 못했다.

    그러나 제1차 5개년 계획의 폭풍우는 거북이 걸음 전망을 뒤엎었다. 1931년 끔찍한 기근이 닥쳐오기 바로 전에 이 나라는 이미 "사회주의로 진입했다." 그래서 당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작가와 미술가들이 노동자 문화를 창조할 수 있기 전 또는 이 문화의 의미 있는 모델을 처음 수립하기도 전에 당국은 노동계급이 무계급 사회에 용해되어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이제 노동계급이 자신의 문화를 창조할 가장 필요한 조건인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어용 예술가들이 인정하는 것만이 남았다. 어제의 개념들은 즉시 망각의 늪으로 던져졌다. "사회주의 문화"가 즉시 모든 것을 지배했다. 이 문화의 끔찍한 내용 일부는 이미 앞에서 소개되었다.

    정신적 창조력은 자유를 요구한다. 자연을 기술에 그리고 기술을 계획에 복종시켜 자연자원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 목적보다 훨씬 높은 목적이 있다: 인류의 창조력을 모든 억압, 한계, 굴욕적 의존으로부터 즉시 해방시키는 것이 인류 최고의 목적이다. 이 목적이 실현되면 개인간의 관계, 과학, 예술 등은 외부의 어떠한 "계획"이나 강제의 그림자도 알지 못할 것이다. 정신적 창조력이 어느 정도 개인적이고 어느 정도 집단적인가는 전적으로 예술의 창조 주체인 인간이 결정할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행기 체제는 이와 전혀 다르다. 노동계급 독재체제는 미래의 문화가 아니라 과거의 야만상태를 반영할 뿐이다. 따라서 반드시 정신적 창조활동에 대해서 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활동에 엄격한 제한을 가해야 한다. 혁명의 강령은 애초부터 이 한계들을 일시적 악이라고 간주했다. 새로운 체제가 강화되는 것과 비례하여 모든 제한들이 차례로 철폐되어 자유에 길을 내줄 의무가 있다. 어쨌든 내전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던 해에 혁명 지도부는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혁명정부는 정치적 고려에 따라 창조적 자유에 대해 제한을 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과학, 문학, 예술 분야에서 사령관이 되어 명령을 내려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인식하고 있었다. 레닌은 "보수적" 예술 취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술 문제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아주 조심스러워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무능력을 적극적으로 자백했다. 당시 예술 및 교육 인민위원이었던 루나차르스키(Lunacharsky)는 모든 종류의 모더니즘을 장려했는데 그의 행위에 대해 레닌은 종종 당혹스러움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사적인 대화를 통해 톡톡 쏘는 발언을 했을 뿐 자신의 예술 취향을 법으로 만들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새로운 시기가 전개될 1924년 필자는 다양한 예술 그룹 및 경향들과 맺는 국가의 관계를 이렇게 정식화했다: "이들 모두에게 혁명에 봉사하는 예술활동을 할 것이냐 아니면 혁명에 거역하는 예술활동을 할 것이냐를 절대절명의 조건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예술적 자치의 영역에서는 완전한 자유가 부여되어야 한다."

    노동계급 독재체제는 혁명의 열기에 사로잡힌 대중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고 세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던 실험, 모색, 투쟁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두려움도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방식들을 통해서만 새로운 문화 시대가 준비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 년의 역사 가운데 처음으로 대중은 모든 영역에서 활기를 띠고 있었으며 자유롭고 대담하게 사고하고 있었다. 예술의 모든 젊은 힘은 감동으로 떨리고 있었다. 이 첫 몇 년 동안 희망과 용기가 충천하면서 사회주의 입법의 완벽한 모델들이 수립되었을 뿐 아니라 혁명문학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이 탄생했다. 동시에 기술수단이 빈약했지만 소련의 영화는 현실에 대한 접근방식의 신선함과 활력으로 전 세계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좌익반대파에 대한 투쟁 과정에서 문학 학교들은 하나하나 질식되어 죽었다. 그리고 문학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모든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거세 과정이 반 이상 무의식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정도는 더 심각했다. 현 지배층은 정신적 창조행위 뿐 아니라 이것의 발전과정마저 정치적 차원에서 금지할 임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명령을 내리되 동의는 구할 필요가 없다는 이 방식은 강제수용소, 과학 영농, 음악 분야 등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철학, 자연과학, 역사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건축, 문학, 극 예술, 발레 등에도 군대의 명령처럼 당 중앙기관의 지시 사항들이 익명으로 인쇄되어 배포되고 있다.

    자기가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 직접 봉사하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관료집단은 미신과 같은 공포심을 가지고있다. 이들이 자연과학과 생산영역을 연결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은 크게 보아서 틀린 것이 없다. 그러나 과학자들에게 단기적 실용성에만 주목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실용성 있는 발견을 포함하여 발명의 가장귀중한 원천을 행정적 위협으로 봉쇄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모든 발명과 발견은 예상하지 못한 길을 헤매는 과정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자, 수학자, 문헌학자, 군사이론가 등은 관료집단의 명령행정을 통해 쓰디쓴 경험을 체득하였다. 그래서 이제는 광범위한 일반화를 극구 피한다. 대개 무식한 출세주의자인 어떤 "공산주의 교수"가 레닌이나 심지어 스딸린의 저작에서 별 관계도 없는 문구를 인용하여 이들의 일반화된 결론을 불순한 것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자기 생각을 보호하고 과학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머리 위에 강요되는 억압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관료집단의 정책은 한없이 더 큰 해악을 가져왔다. 언론인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학자, 역사학자, 심지어는 통계학자까지도 자신의 작업이 당 노선의 일시적인 좌충우돌과 간접적으로라도 모순을 일으키지 않도록 머리를 싸맨다. 소련 경제, 국내외 정책에 대해서는 "지도자"의 연설문에서 인용한 뻔한 말들로 모든 논지를 방어하고 난 후에야 글을 쓸 수 있다. 특히 글을 쓰기 전에 글의 모든 부분이 아무 문제가 없으며 당국이 좋다고 판단하도록 증명하는 일을 먼저 착수해야 한다. 당국의 견해에 100% 동조할 경우 이후에 발생할 불쾌한 사건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결과 가장 무거운 벌을 받아야 한다: 글의 독창성이 거세되고 무미건조함이 글 전체를 지배한다.

    마르크스주의가 소련의 공식 국가 사상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12년 동안 경제학, 사회학, 역사학, 철학 등의 분야에서 세인의 관심을 끌고 외국어로 번역될 가치가 있는 저서는 단 한 권도 나오지 않았다. 소위 마르크스주의 저작이라는 것들이 미리 승인을 받은 케케묵은 생각들을 반복하고 현재의 통치 상황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오래된 인용구들을 여기저기에 옮겨 놓은 형식적인 집적물에 불과하다. 이런 책들이 수백만 권 국가기구를 통해 배포된다.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아교와 아첨과 기타 끈적거리는 물질로 제작된 책자들일 뿐이다. 뭔가 가치 있거나 독창적인 것을 말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감옥에 갇혀 있거나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 한편 소련의 모든 사회 분야가 발전하면서 거대한 과학적 문제들이 속속 제기되어 창조적인 노력을 목마르게 찾고 있다! 이론 작업에 반드시 필요한 양심은 더럽혀지고 짓밟히고 있다. 심지어 레닌 전집의 주석까지도 수석 편집인들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판이 바뀔 때마다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예를 들어 "지도자들"의 이름은 확대되고 반대파 인사들의 이름은 비방 받으며 이들의 이론적·정치적 궤적은 은폐된다. 당사와 혁명사 교과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실은 왜곡되고 중요 문서는 은폐되거나 위조되며 명성은 창조되거나 파괴된다. 지난 12년 동안 지도자의 책이 계속해서 내용을 바꾸는 것만 비교 분석해도 관료지배층의 사고와 양심이 얼마나 타락해 왔는지를 한치의 오차 없이 추적할 수 있다.

    이에 못지 않은 재앙이 예술 분야의 서적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유파들의 투쟁은 지도자들의 의지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 왔다. 이 유파들에게 일종의 강제수용소가 생겨났다. 세라피모비치나 글라드코프 같이 재능은 없으면서 "올바른 사상이 박힌" 작가들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다. 예술적 양심 때문에 자신의 작품에 필요한 만큼의 흠집을 낼 수 없는 재능 있는 작가들은 부끄러움도 없이 지도자들의 인용구들을 외우고 있는 어용 교수나 강사들의 사냥감이 되고 있다. 가장 출중한 화가들은 자살하거나 아주 먼 옛날의 사건에서 소재를 찾거나 아예 침묵을 지킨다. 진실이 담긴 매우 훌륭한 내용의 책들은 밀수품 신세가 되어 책방 카운터 밑에서 불쑥 튀어나와 마치 우연하게 세상에 나온 것처럼 느껴진다.

    소련 예술의 일대기는 일종의 순교자 열전이다 『프라우다』 사설에서 "형식주의(formalism)"에 반대하는 교시가 실린 후 작가, 미술가, 무대감독, 심지어 오페라 가수들이 줄줄이 굴욕적인 참회를 마치 전염병이 돈 것처럼 해댔다. 차례차례 이들은 자신의 과거 죄를 참회하고 철회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바뀔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여 이 "형식주의"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규정하는 일은 피했다. 당국은 과거 예술행적을 철회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불편한 현상을 장기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 새로운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스딸린이 시인 마야코프스키에 대해 몇 마디 찬사를 늘어놓자 그의 문학적 평가가 몇 주 내로 바뀌었으며 교과서가 개정되고 거리의 이름이 바뀌었고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새로운 오페라에 대해 고위 청중이 소감을 말하자 이것이 즉시 작곡가들을 위한 지시사항으로 돌변했다. 어느 작가회의에서 공산주의청년동맹의 비서는 이렇게 말했다:. "스딸린 동지의 암시는 모두에게 법과 같다." 그러자 참석자 모두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물론 이중의 몇몇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문학에 대한 조롱을 완성하기라도 하듯 러시아어 작문도 제대로 못하는 스딸린이 문체의 고전이라고 선언되었다. 이 노예적 굴종과 경찰의 통치에 가끔 자발적이지 않은 코메디가 연출되기는 하지만 뭔가 지극히 비극적 구석이 있다. 당국의 공식 입장은 이렇다: 문화는 사회주의적 내용을 가지고 있되 민족적 형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문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행복한(!)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어느 누구도 불충분한 경제적 토대를 가지고 문화를 발전시킬 수는 없다. 예술은 미래를 예측하는 힘이 과학보다 훨씬 뒤떨어진다. 어쨌든 "미래의 건설상을 묘사하라",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지적하라", "인류를 교정하라" 등의 당국의 주문은 철물점의 가격표나 기차시간표와 같은 정도로만 창조적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

    예술은 민족적 형태를 띠면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접근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다. 『프라우다』는 예술가들에게 이렇게 지시 내린다: "인민이 원하지 않는 것은 심미적 가치가 없다." 옛날 인민주의자들(Narodnik)은 대중을 혁명적으로 교육하는 과업에 기예를 발휘해야 할 임무를 거부한 채 테러에 의존했었다. 이들의 엘리트주의 공식은 인민이 어떤 예술을 원하고 원치 않는지를 결정할 권리가 관료집단에게 있는 상황에서 더욱 반동적 성격을 띤다. 관료집단은 자신이 선택하여 책을 출판하면서 독자들에게 선택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결국 관료집단의 이해를 반영하고 이들이 인민대중에게 매력적 존재로 비치게 만드는 예술 형태를 찾아내는 것이 핵심 중에 핵심이다.

    그러나 이것은 헛된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관료집단 자신이 이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1차 5개년 계획도 제2차 5개년 계획도 10월 혁명이 촉발한 문학의 부흥을 재현하지 못하고있다." 이 말은 아주 온건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적 몇몇 예외에도 불구하고 테르미도르 반동 시기는 예술사에 평범한 재능의 예술인, 어용 예술인, 아첨꾼 예술인이 판을 쳤던 시기로 뚜렷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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