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공산주의자
17.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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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사 중-2

 

차례

8장: 케렌스키의 계략

9장: 코르닐로프의 쿠데타

10장: 자본가계급이 민주주의진영과 힘을 겨루다

11장: 반동의 공세에 놓인 대중

12장: 상승하는 혁명의 물결

13장: 볼세비키당과 소비에트

14장: 최후의 연립정부

 

제 8장 케렌스키의 계략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정협의회는 정부의 권위에 손상을 입혔다. 밀류코프가 올바르게 말하듯이 "화해나 합의가 불가능한 두 진영으로 나라가 분열되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국정협의회는 부르주아 계급의 사기를 높여주었고 혁명을 말살시키려는 이들의 초조함을 더욱 자극했다. 한편 국정협의회는 대중운동에게 새로운 자극을 가했다. 모스크바의 총파업을 계기로 노동자와 병사들이 좌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이 결과 볼세비키당은 도저히 제압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다.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좌파만이 대중의 지지를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다. 멘세비키당의 뻬쩨르부르그 조직은 시의회 후보 명단에서 체레텔리를 제외시켰다. 이것은 이 조직이 좌로 기울고 있다는 징조였다. 8월 16일 사회혁명당의 뻬쩨르부르그 협의회는 22대 1의 압도적인 표결로 전쟁 총사령부에서 장교동맹을 해체하고 반혁명에 저항하는 단호한 조치들을 취할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8월 18일에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의장 체이제의 반대를 무시하고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문제를 안건에 올렸다. 표결에 앞서 체레텔리는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다: "사형제도가 폐지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대중을 거리로 불러모아 정부를 타도할 것인가?" 이에 대해 볼세비키들은 "그렇다"라고 고함으로 대답했다. "그렇다, 우리는 대중을 결집시켜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자 체레텔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요즘 다시 살아서 머리를 쳐들고 있다." 사실 볼세비키당은 대중과 함께 다시 머리를 쳐들었다. 대중이 머리를 쳐들자 화해주의자들의 머리는 수그러들었다. 사형제도를 폐지하라는 요구는 900대 4의 압도적 표결로 채택되었다. 반대표를 던진 4명은 체레텔리, 체이제, 단, 리이버였다! 이로부터 4일이 지나 멘세비키당과 그 자매 그룹들의 합동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근본 문제들에 대한 체레텔리의 결의안은 마르토프의 결의안을 물리치고 채택되었다. 그러나 사형제도를 즉시 철폐하자는 요구는 토론 없이 통과되었다. 더 이상 압력에 저항할 수 없었던 체레텔리는 침묵을 지켰다.

점점 격화되고 있던 정치적 분위기는 전선의 사건들에 의해 더욱 격화되었다. 8월 19일 독일군은 이크스쿨 근처의 러시아군 전선을 돌파했으며 21일에는 리가를 점령했다. 코르닐로프의 예상이 현실로 나타났다. 이것은 미리 합의라도 한 것처럼 부르주아 공세의 신호탄이 되었다. 부르주아 언론은 "일하지 않으려는 노동자"와 "싸우지 않으려는 병사"에 대한 공격의 강도를 10배나 늘렸다. 혁명은 모든 것에 책임을 졌다: 혁명은 리가를 내주었다; 혁명은 이제 뻬쩨르부르그마저 내주려고 한다. 병사들에 대한 비방은 2.5개월 전만큼이나 격렬하게 전개되었으나 조금의 정당성도 없었다. 6월에 병사들은 공세를 거부했었다: 이들은 독일군의 소극성을 적극성으로 부추겨 전투를 재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리가 전선에서 독일군이 공세로 나오자 병사들은 아주 다른 태도를 보이며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더욱이 제 12군 가운데에서 가장 철저히 혁명 선전을 받은 부위가 독일군의 공세에 가장 적게 흔들렸다.

제 12군 사령관 파르스키 장군은 군대가 "모범적인 대형"을 유지하며 후퇴했고 이것은 갈리시아와 동프로이센 전선의 경우와는 비교도 될 수 없다고 자랑했다. 그의 주장은 근거가 없지 않았다. 정부위원(commissar) 보이틴스키는 이렇게 보고했다: "우리 군대는 적이 공격에 나선 지역에서 명예롭게 그리고 조금의 흠도 없이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적의 공격을 오래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천천히 한 걸음씩 후퇴를 하면서 엄청난 병력을 잃고 있다. 라트비아인 명사수들의 대단한 용기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완전히 지쳤지만 이들의 나머지는 다시 전투에 임했다...." 병사 위원회 의장이자 멘세비키인 쿠친의 보고는 더 열렬하다: "병사들의 기상은 놀랄 정도였다. 위원회 위원들과 장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의 견고성은 유례가 없었다." 같은 군대의 또 다른 대표는 며칠 후 집행위원회 사무국 회의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공격의 중심에는 거의 전적으로 볼세비키들로 구성된 라트비아인 여단이 있었다...전진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 여단은 붉은 깃발을 앞세우고 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대단한 용기를 내어 전진했다." 나중에 스탄케비치는 좀더 누그러뜨려서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병사들을 비난할 태세로 악명 높은 자들이 득실거리는 총사령부도 전투 명령 뿐 아니라 어떤 명령이든 구체적으로 거부된 예를 단 하나도 들 수 없었다." 공식 문서에 따르면 문순트 작전에 투입된 해병대 상륙 부대 역시 눈에 띄게 용감했다. 혁명의 두 중심지인 리가와 뻬쩨르부르그를 직접 방어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병사들 특히 라트비아인 명사수들과 발트해 수병들의 사기는 남다르게 충천했다. "총검을 땅에 박아 놓는다고 전쟁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생각 그리고 평화를 향한 투쟁은 곧 국가권력과 새로운 혁명을 향한 투쟁이라는 볼세비키의 사상은 선진 부대들을 이미 사로잡고 있었다.

장군들의 비난에 겁이 질려 일부 정부위원(commissar)들은 군대의 견고함을 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병사들과 수병들은 명령을 수행하면서 죽어갔다. 이들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만 핵심을 말하자면 러시아군은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겠지만 제 12군은 적의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기습당했다. 병력, 무기, 보급품, 방독면 등 모든 것이 부족했다. 통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부실했다. 러시아제 소총에 일제 탄창이 제공되었기 때문에 공격은 지연되었다. 그리고 전선의 다른 부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리가 함락의 중요성은 총사령부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제 12군에서 드러난 방어 병력과 보급품의 대단히 비참한 상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장교들은 볼세비키주의의 아성인 이 도시를 포기하려 했다. 이 때문에 리가가 고의로 적에게 넘겨졌다는 소문이 볼세비키들에 의해 퍼지기 시작했다. 군대는 이 소문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 도시를 방어하려는 전투나 저항이 없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6년 12월에 이미 루즈키 장군과 브루쉴로프 장군은 리가가 "북부 전선의 불행"이며 병사들을 처형해야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볼세비키 선전의 소굴"이라고 불평했었다. 리가의 노동자와 병사들을 독일군 점령이라는 시련에 내버려두자는 것이 북부 전선에 배속된 다수 장군들의 비밀스러운 소망이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전선의 총사령관이 리가 포기의 명령을 내렸다고 생각한 자는 물론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령관들은 코르닐로프의 연설과 참모총장 루콤스키 장군의 인터뷰 내용을 신문으로 읽고 있었다. 이 때문에 명령을 내릴 필요가 전혀 없었다. 북부 전선의 총사령관인 클렘보프스키 장군은 음모자들의 파벌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리가의 포기를 구국 운동의 신호탄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더욱이 정상적인 조건 속에서도 러시아 장군들은 포기와 후퇴를 선호했다. 리가의 경우 총사령부가 모든 책임을 면제시켜 주었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가 패배를 강요했기 때문에 이들은 적의 공격에 저항하지 않았다. 일부 장군들이 수동적인 사보타지를 통해 방어행위 자체를 저지했는지는 부차적이며 진상이 파악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배신행위가 처벌받지 않는 상황에서 장군들이 구태여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행위를 억제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사고일 것이다.

관찰력이 있는 미국인 기자 쟌 리이드(John Reed)는 불멸의 10월 혁명 연대기를 남겼다. 러시아 유산계급의 상당수가 혁명의 승리보다는 독일군의 승리를 선호했다는 사실을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공공연히 증언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어느 모스크바 상인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차를 마시는 동안 우리는 테이블에 앉아 있던 11명의 사람들에게 '빌헬름 황제와 볼세비키들' 가운데 누가 러시아의 주인이 되는 것이 더 좋은가 하고 물었다. 한 명을 제외한 전원이 빌헬름 황제를 택했다." 그는 북부 전선의 장교들과도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들은 "병사위원회와 함께 일하느니 독일군이 승리하는 것이 솔직히 더 좋다"고 말했다.

볼세비키당과 다른 조직들은 리가의 포기에 대해 정부를 정치적으로 비난했다. 이 비난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는 리가의 포기가 음모자들의 계획에 들어가 있었으며 이들의 스케줄에 확실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점은 코르닐로프가 모스크바 국정협의회에서 행한 연설의 행간을 읽으면 아주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후의 사건들은 이 점을 완전히 해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 내용을 뒷받침할 직접적인 증언들이 존재한다. 증인의 정체 자체가 반박할 수 없는 권위를 부여했다. 밀류코프는 자신의 혁명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코르닐로프는 연설을 통해 '나라를 파멸에서 그리고 군대를 붕괴에서 구출'하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더 이상 연기할 생각이 없는 시점을 언급했다. 이 시점은 그가 예상한 리가의 함락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사건은...애국주의의 열광을 가져올 것이었다... 8월 13일 모스크바 회의에서 코르닐로프가 개인적으로 나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케렌스키 정부와 공개적인 싸움을 벌일 순간은 그의 마음속에 완전히 결정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는 이 날을 8월 27일로 미리 박아놓고 있었다." 이보다 더 명확한 발언이 있을 수 있을까? 뻬쩨르부르그에 진군하여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코르닐로프는 리가를 독일군에게 넘겨주는 날짜를 실제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미리 정할 필요가 있었다. 코르닐로프에게는 리가의 진지를 강화하고 진지한 방어조치들을 취하는 것은 비할 바 없이 더욱 중요한 다른 전투에 대한 계획을 폐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빠리를 함락하기 위해서는 미사를 거행할 필요가 있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라면 리가를 독일군에게 거저 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리가의 함락과 코르닐로프 봉기 사이의 일주일 동안 전쟁 총사령부는 병사들에 대한 비방의 진원지가 되었다. 총사령부의 비방이 러시아 신문에 실리자마자 연합국 언론도 시간을 놓치지 않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러시아의 애국주의 신문들은 더 타임즈(The Times), 르 땅(Le Temps), 르 마땡(Le Matin) 등에 실려있는 러시아군에 대한 경멸과 욕설들을 열렬하게 그대로 실었다. 이에 대해 전선의 병사들은 원한, 분노, 혐오감에 몸을 떨었다. 화해주의자이든 애국주의자이든 가릴 것 없이 정부위원들과 위원회들은 모두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비방에 대한 항의가 사방에서 빗발쳤다. 루마니아 전선, 오데사 군관구, 흑해 함대 등의 집행위원회인 소위 룸체로드가 보낸 편지는 특히 신랄한 비난을 담고 있었다. 이 편지는 "혁명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해 매일 죽어가고 있는 수천 러시아 병사들의 용기와 헌신적인 용감성을 러시아 국민에게 보여줄 것"을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요구했다. 아래로부터의 항의 물결에 직접 영향을 받아 화해주의 지도자들도 수동적 자세를 버렸다. 자신의 정치 동맹자들에 대해 이즈베스티아 지는 이렇게 적었다: "혁명 군대에 대해 부르주아 신문들이 던지지 않는 오물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전쟁 총사령부에 중심을 둔 음모는 병사들을 비방할 필요가 있었다.

리가를 포기한 직후 코르닐로프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탈주병 몇 명을 병사들 앞에서 사살하라고 전보로 명령했다. 정부위원 보이틴스키와 파르스키 장군은 이 명령이 전혀 부당하다고 보고했다. 이에 미칠 듯이 화가 난 코르닐로프는 총사령부의 대표위원회에서 군대의 상황에 대한 허위 보고의 책임을 물어 보이틴스키와 파르스키를 군법에 회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스탄케비치에 의하면 허위 보고의 실제 내용은 "병사들을 비난하지 않은 것"이었다. 실상을 완전히 보여주기 위해서는 같은 날 코르닐로프가 장교동맹 지도위원회에서 볼세비키당 소속 장교들의 명단을 넘길 것을 각 부대 참모부에 명령했다는 사실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입헌민주당의 노보실체프가 우두머리인 장교동맹은 반혁명 음모의 지휘부였다. 이렇게 반혁명 음모의 중심 인물인 코르닐로프를 케렌스키는 "혁명의 최고 군인!"이라고 국정협의회에서 치켜올렸다.

음모를 가리고 있는 커튼을 아주 조금만 들어올리기로 작정한 이즈베스티아 지는 이렇게 적었다: "최고사령부와 아주 가까이 있는 신비의 파벌이 엄청난 도발을 준비하고 있다...." "신비의 파벌"은 코르닐로프와 그의 참모부였다. 다가오고 있는 내전의 번갯불은 오늘과 어제의 행위들을 전부 새롭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기방어를 위해 화해주의자들은 6월 공세 당시 지휘부가 저지른 의심스러운 행위들을 들추기 시작했다. 신문에는 사단과 연대의 참모부가 악의적인 비방을 자행한 내용들이 더욱 자세히 실렸다. 이즈베스티아 지는 이렇게 적었다: "러시아 국민은 7월의 후퇴에 대해 모든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이 기사를 병사, 수병, 노동자들은 열심히 읽었다. 특히 전선의 재앙에 대해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들을 가득 채우고 있던 병사들은 더 그랬다. 이로부터 이틀 후에 이즈베스티아 지는 좀더 공개적으로 이렇게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총사령부는 선언문들을 발표하면서 임시정부와 혁명적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정치게임을 벌이고 있음이 명백하다." 이 보도에서 임시 정부는 총사령부의 음모에 걸려든 죄 없는 희생자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장군들의 음모를 저지할 모든 기회가 있었으나 이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병사들에 대한 배신적인 비방에 대해 룸체로드는 특히 분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 총사령부의 공식 선언문들은...장교들의 용감성은 강조하면서 혁명을 방어하는 병사들의 헌신성을 의도적으로 낮게 보는 것 같다." 룸체로드의 항의문은 8월 22일 신문에 실렸다. 그리고 다음날 장교들을 찬양하는 케렌스키의 특별 명령서가 실렸다. 이 글에 따르면 장교들은 "혁명의 첫날부터 자신들의 권리가 축소되는 것을 참아야 했다." 그리고 이 글은 "이상주의적 구호 밑에 비겁함을 감추고 있는" 병사 대중을 부당하게 모욕하고 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조수들인 스탄케비치, 보이틴스키 그리고 기타 인물들이 병사에 대한 모욕을 항의하고 있는 마당에 케렌스키는 눈에 뜨일 정도로 병사들을 모욕했다. 그리고 전쟁 장관과 수상의 명의로 그는 병사들을 자극하는 명령을 내렸다. 곧이어 케렌스키는 이렇게 인정했다: 이미 7월말에 그는 전쟁 총사령부를 중심으로 한 장교들의 음모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손에 넣고 있었다. 그의 말을 인용해보자: "장교동맹 지도위원회는 적극적 음모자들을 임명했으며 동맹의 회원들은 여러 곳에서 음모를 꾸몄다. 이들은 동맹의 합법적 행위에 필요한 색칠을 가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올바른 말이다. 다만 "필요한 색칠"은 병사들, 위원회, 혁명에 대한 비방의 색칠이었다. 이것이 바로 케렌스키가 8월 23일 내린 명령의 색깔이기도 했다.   

그러면 이 수수께끼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일관된 그리고 심사숙고한 정책이 케렌스키에게 없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나 장교들의 음모를 알고 있으면서 자기 모가지를 음모자들의 칼 밑에 들이밀고 동시에 이들의 위장을 돕는 것은 머리가 완전히 돌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행위였다. 처음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케렌스키의 행위는 사실 쉽게 설명될 수 있다: 그는 2월 혁명의 곤경에 빠진 정부를 타도하려는 음모자들과 이미 같은 패거리가 되어 있었다.

실상을 드러낼 때가 오자 케렌스키는 카자흐 집단, 장교 집단, 부르주아 정치인 집단들로부터 그가 개인 독재체제를 수립하라는 제안을 여러 번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 제안들은 비옥하지 않은 토양에 뿌려진 씨앗과 같았다..." 어쨌든 그의 입장 때문에 반혁명 지도자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와 쿠데타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데니킨의 말에 따르면 공세를 준비하던 6월초에 시작된 "독재에 대한 최초의 대화는 약간 탐색전의 형태를 띠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대화에 케렌스키는 빈번하게 참여했다. 특히 케렌스키는 이런 대화를 통해 자신이 독재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케렌스키에 대해 수하노프는 올바르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지도자가 된다는 하나의 조건 속에서만 코르닐로프 쿠데타 세력에 동참했다." 공세가 붕괴하는 동안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와 다른 장군들에게 그가 성취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약속했다. 루콤스키 장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선을 순회하는 동안 그는 종종 용기를 크게 내어 확고한 권력, 통령(directory)정부, 독재 권력 등에 대해 동행하는 자들과 자주 얘기했다." 그의 성격에 걸맞게 그는 이 대화들에 형체가 없는 너절한 아마추어적인 요소를 끌어들였다. 반면 장군들은 군사적인 정확함을 기하는 경향이 있었다.

장군들의 대화에 케렌스키가 스스럼없이 참여하게 되면서 군사독재는 나름의 합법성을 부여받았다. 아직도 분쇄되지 않은 혁명을 의식하여 이들은 이 군사독재 체제를 "통령 정부"라고 불렀다.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프랑스에서 시작된 이 정부 체제에 대한 역사적 회상이 작용했는지는 여기서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용어상의 위장술 문제를 논외로 하면 통령 정부는 우선 개인적 야심이 정치적 필요에 종속된다는 장점이 확실히 있었다. 통령 정부에서는 케렌스키와 코르닐로프 뿐 아니라 사빈코프나 심지어 필로넨코도 자리를 차지해야했다. 일반적으로 고위직 후보자 자신들이 표현한 바에 따르면 "철의 의지"를 가진 인물들에게 주요한 직책이 마련되어야 했다. 이들은 통령정부가 집단지도체제의 과도기를 거쳐 단독 독재체제로 이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각각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 총사령부와 음모적 흥정을 하기 위해 케렌스키는 급격한 변화를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이미 시작한 정책을 계속 확대시키기만 하면 되었다. 더욱이 그는 장군들의 음모에 적절한 방향을 제시하여 볼세비키당을 분쇄할 뿐 아니라 나름의 한계 내에서 자신의 동맹자이면서도 귀찮은 보호자인 화해주의자들 역시 분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음모자들을 완전히 폭로하지 않은 채 이들을 충분히 겁주어서 자신의 의도대로 이들이 움직이도록 술수를 부렸다. 정부의 수반인 자신이 불법 음모자가 되기 직전까지 케렌스키는 자신을 밀어붙였다. 9월 초 트로츠키는 이렇게 적었다: "우익, 자본가 파벌들, 연합국 대사관들, 그리고 특별히 전쟁 총사령부가 자신에게 강력한 압박을 가하는 것이 케렌스키에게는 필요했다. 이렇게 되면 그는 완전히 자유롭게 자신의 계략을 실천에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케렌스키는 장군들의 반란을 이용하여 자신의 독재를 강화시키려했다."

국정협의회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무제한의 기회에 대한 환상과 함께 개인적 실패가 초래한 굴욕감에 젖어 모스크바에서 뻬째르부르그로 돌아온 케렌스키는 모든 주저들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기로 최종 결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였을까? 모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볼세비키들이었다. 이들은 그가 화려하게 차려놓은 국가적 청사진 밑에 총파업이라는 지뢰를 파묻어 놓았다. 이들을 제압한 후 그는 그를 진지하게 인정하지 않고 그의 제스처를 비웃으며 그의 권력을 권력의 그림자로 생각하고 있는 쿠츠코프와 밀류코프 등 우익 모두를 손 볼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화해주의 선생들, 나라에 의해 선택된 자신을 국정협의회에서조차 교정시키고 지시를 내린 증오스러운 체레텔리 등 "그들"을 확실히 징계할 것이다. 그는 세상 모두에게 확고하고 최종적으로 다음의 사실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그 자신은 위병대 및 카자흐 장교들이 그를 더욱더 공개적으로 부르는 별명인 "히스테리 환자", "사기꾼", "발레리나"가 결코 아니다; 마음의 문을 꼭 잠그고 극장 특별관람석의 아름다운 여성들이 바친 기도도 마다하고 이 열쇠를 바다에 던진 무쇠인간이다.

이 당시 스탄케비치는 케렌스키가 "나라에 만연한 우려와 놀라움에 응답할 새로운 대책을 내놓으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케렌스키는 군대에 징벌을 도입하기로...결심했다. 아마 그는 다른 단호한 조치들을 제시할 준비도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탄케비치는 자기 상관인 케렌스키가 전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한 의도만을 전달받았다. 실제 이때 케렌스키의 생각은 상당히 멀리까지 나가고 있었다. 우선 그는 코르닐로프의 강령을 실천에 옮겨 그의 권위를 무너뜨린 후 부르주아 계급을 자신에게 묶어둘 결심이었다. 구츠코프는 군대를 공세로 동원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케렌스키 자신은 공세를 감행했다. 코르닐로프는 자기 강령을 실천에 옮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케렌스키 자신은 할 수 있다. 모스크바의 총파업은 그의 길에 장애물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그에게 상기시켰다. 그러나 7월 시기는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시 한번 말하면 이 일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만이 필요했다. 좌익의 친구들이 연미복의 꼬리를 잡아끌도록 허용하면 안된다. 무엇보다도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이 혁명 연대들은 소비에트를 항상 감시하지는 않을 "건강한" 부대들로 교체되어야 한다. 이 계획을 집행위원회와 논의할 가능성은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왜 필요한가? 모스크바 국정협의회에서 정부는 독립적 권력이라고 인정되었고 이에 맞게 왕관을 머리에 썼다. 물론 화해주의자들은 정부의 독립성을 자유주의자들을 안심시키는 수단 즉 형식적 의미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케렌스키 자신은 이 형식적 의미를 실제적 의미로 전환시킬 것이다. 우익과도 좌익과도 손을 잡지 않을 것이고 바로 여기에 자신의 힘이 있다고 그가 모스크바에서 선언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제 그는 이것을 행동으로 증명해 보일 것이다!

국정협의회가 끝난 후 케렌스키의 노선과 집행위원회의 노선은 계속 벌어졌다: 화해주의자들은 대중이 두려웠던 반면 케렌스키는 유산계급들이 두려웠다. 대중은 전선의 사형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 반면 코르닐로프, 입헌민주당, 연합국 대사관들은 후방에도 사형제도가 도입될 것을 요구했다.

8월 19일 코르닐로프는 수상에게 전보를 보냈다: "본인이 뻬쩨르부르그 군관구를 지휘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바입니다." 전쟁 총사령부는 공개적으로 수도를 장악하려고 손을 뻗쳤다. 8월 24일 집행위원회는 용기를 내어 정부가 "반혁명 조치들"을 종식시키고 "지체 없이 모든 에너지를 동원하여" 민주개혁을 시행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것은 새로운 목소리였다. 케렌스키는 양자택일을 강요받았다. 민주 조치들을 취할 경우 이 조치들이 별 효력은 없어도 자유주의자들 및 장군들과 결별을 해야할 지도 모른다. 아니면 소비에트와 필연적으로 충돌할 코르닐로프의 반혁명 강령을 수용해야한다.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 입헌민주당, 연합국들과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 그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익과의 공개적 충돌을 피하고 싶었다.

8월 21일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동시에 몇몇의 인물들도 사찰대상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 조치에는 조금의 진지함도 없었으며 케렌스키는 이들을 즉시 풀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코르닐로프 쿠데타에 대한 증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거짓 냄새를 맡도록 유도된 것 같다." 이 증언에 이렇게 덧붙이기만 하면 된다: "우리 자신이 협조하여 유도되었다." 진지한 음모자들 즉 국정협의회의 우익 전체에게 문제는 왕정을 복귀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민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독재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너무도 명확한 사실이었다. 코르닐로프와 그의 동료 장군들 전부가 분노하면서 "반혁명" 즉 왕당파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비난을 거부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였다. 물론 전직 장교, 부관, 시종부인, 흑백인조 조정 중신, 마법사, 수도승, 발레리나 등이 뒤뜰 여기저기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부르주아 계급의 승리는 군사독재의 형태로만 가능했다. 왕정을 복귀시킬 것인가의 문제는 미래에나 생각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것도 라스푸틴의 시종부인들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부르주아 반혁명에 기초해서만 가능했다.

당장 진짜 중요한 것은 코르닐로프의 깃발 아래 부르주아 계급이 결집하여 인민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었다. 이 진영과 연합을 추구하면서 케렌스키는 가짜로 대공들을 체포하면서 좌익의 의심을 해소시키고 자신의 계략을 숨기려는데 더욱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계략은 너무도 뻔히 보이는 것이어서 모스크바의 볼세비키당 신문은 당시 이렇게 적었다: "로마노프 왕가의 골빈 앞잡이들 몇몇을 체포하면서 코르닐로프를 우두머리로 하는 군대 지휘관 파벌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인민을 속이는 짓이다..." 이 때문에도 볼세비키당은 그의 증오를 받았다. 볼세비키들은 모든 것을 보고 있었고 본 것을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결정적 시기에 케렌스키에게 영감과 인도를 제공한 자는 사빈코프였다. 그는 대단한 모험주의자로서 재미 삼아 혁명을 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개인적 테러의 학교에서 훈련을 받아 대중을 경멸했다. 재능과 의지를 겸비했지만 그는 몇 년 동안 유명한 밀정인 아제프의 손에 놀아났다. 회의주의자이자 냉소주의자인 사빈코프는 자신이 케렌스키를 깔 볼 권리가 있다고 믿었는데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오른손으로 케렌스키에게 존경스럽게 경례를 하면서 왼손으로 그의 코를 꿰어 그를 끌고 갔다. 그는 케렌스키에게는 행동하는 인물로 코르닐로프에게는 역사적인 이름을 가진 진정한 혁명가로 자신을 내세웠다. 밀류코프는 사빈코프와 코르닐로프가 처음 만난 때를 묘사하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사빈코프가 제공한 것이었다. 사빈코프는 코르닐로프에게 말했다: "장군, 귀하가 나를 총으로 쏠 상황이 발생하면 귀하는 나를 쏠 것이요. 나는 이것을 알고 있소." 잠시 뜸을 들인 후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내가 귀하를 쏠 상황이 발생하면 나 역시 그렇게 할 것이오." 사빈코프는 문학을 좋아하여 꼬르네이유와 위고의 작품을 접했었다. 그리고 그는 고상한 장르에 이끌렸다. 한편 코르닐로프는 사이비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표현에 신경 쓰지 않고 혁명을 제거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장군 역시 "강력한 예술 스타일"의 매력에 낯설지는 않았다. 테러리스트였던 사빈코프의 말은 흑백인조 출신인 이 장군의 가슴속에 파묻혀 있던 영웅적 원칙을 즐겁게 간지럼 태웠다.

사빈코프 자신의 작품일수도 있으며 그의 영감을 확실히 받은 어느 신문 기사에서 그의 계획은 아주 명확하게 설명되었다. 이 기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아직도 정부위원이었을 때 사빈코프는 임시정부가 나라의 난국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세력들이 개입해야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임시정부 특히 케렌스키의 지휘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철권통치에 의한 혁명독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빈코프는 코르닐로프가 바로 철권이라고 생각했다." 케렌스키는 "혁명"의 얼굴마담이 되고 코르닐로프는 철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기사는 제 3자의 역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수상과 총사령관을 화해시키는 사빈코프 자신이 이 둘을 모두 제거할 생각을 했음이 틀림없다. 표현되지 않은 이 생각은 표면에 아주 가까이 드러났기 때문에 국정협의회 전날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사빈코프를 강제로 사직시켰다. 그러나 이 판에서 늘 그렇듯이 그의 사직은 최종적인 것은 아니었다. 필로넨코가 이렇게 증언한다: "8월 17일 발표에 따르면 사빈코프와 나는 유임될 것이며 코르닐로프 장군, 사빈코프 그리고 내가 공동으로 제출한 보고서의 강령을 수상은 원칙으로 받아들였다." 8월 17일 케렌스키는 사빈코프에게 "후방에서 채택될 조치들에 대한 법 초안을 작성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사빈코프는 이 목적을 위해 아푸쉬킨 장군을 의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사빈코프를 진정 두려워했으나 케렌스키는 자신의 거대한 계획을 위해 그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이 때문에 그를 전쟁부 차관으로 유임시켰을 뿐 아니라 덤으로 해군부 차관으로 임명시켰다. 밀류코프에 따르면 이것은 "볼세비키들을 거리로 불러내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뭔가 명확한 조치들을 정부가 취할 때가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주제에 대해 사빈코프는 "솔직하게 이렇게 말했다: 두 개 연대만 있으면 볼세비키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들의 조직들을 분쇄할 수 있다."

특히 국정협의회가 끝난 후 케렌스키와 사빈코프는 화해주의 소비에트가 코르닐로프의 강령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어제에 전선의 사형제도 철폐를 요구했던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후방으로 사형제도를 확대시킬 경우 배가된 힘으로 들고 일어설 것이다. 따라서 케렌스키의 쿠데타에 저항하는 운동은 볼세비키당이 아니라 소비에트에 의해 지도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도중에 멈출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케렌스키는 이렇게 적고 있다: "8월 22일 사빈코프는 나의 명령을 받고 전쟁 총사령부로 갔다. 무엇보다도(!) 코르닐로프 장군에게 정부가 사용하도록 기병 1개 군단을 준비시키라고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사빈코프는 여론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려고 자신의 임무를 이렇게 묘사했다: "기병 1개 군단을 코르닐로프 장군으로부터 얻기 위해서 갔다. 뻬쩨르부르그에 계엄령을 실시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적대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임시정부를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핀란드를 독일군이 포위하고 이와 함께 봉기가 일어나는 상황에 발맞추어 볼세비키당이 임시정부를 전복시킬 준비를 또다시 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보는 어느 외국의 정보국으로부터 나왔다..." 외국 정보국의 황당한 정보는 다음의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밀류코프에 따르면 정부는 "볼세비키들을 거리로 불러낼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즉 정부가 봉기를 유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군사독재를 확립시키는 포고령이 8월 마지막 며칠 사이에 공포될 것이기 때문에 사빈코프는 이 날짜에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8월 25일 볼세비키당 기관지 노동계급(Proletarian)은 아무런 외적인 이유가 없이 폐간되었다. 이 기관지 대신 나온 신문 노동자(Worker)는 이렇게 선언했다: 노동계급 지는 "리가 전선의 붕괴와 관련하여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자기억제와 평온함을 유지할 것을 촉구한 다음날 폐간되었다. 당이 봉기 유도에 말려들지 말 것을 노동자들에게 촉구하는 것을 막는 자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아주 적절했다. 볼세비키 신문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는 사빈코프였다. 신문을 폐간시킨 행위는 그에게 두 가지 장점이 되었다: 대중의 분노를 사 봉기를 유도할 가능성을 늘리는 것이 하나이고 정부의 고위층에서 나온 봉기 유도 수작을 당이 대중에게 알리는 것을 막는 것이 또 하나였다.     

총사령부의 회의록은 아마 약간 윤색되었겠지만 일반적으로 이때 상황과 관련된 인물들을 정확히 반영했다. 이 회의록에 따르면 사빈코프는 코르닐로프에게 이렇게 알렸다: "라브르 게오르기에비치, 귀하의 요구들은 며칠 지나면 다 충족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과 관련하여 정부는 심각한 파장이 뻬쩨르부르그에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귀하의 요구들이 공개되는 즉시 이것이 신호가 되어 볼세비키들이 거리로 나올 것입니다....계엄령을 선포하는 새 법에 대해서 소비에트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소비에트가 정부에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따라서 명령을 내리셔서 제 3 기병 군단이 8월말 경에 뻬쩨르부르그로 보내져 임시정부의 지휘를 받도록 명령을 내릴 것을 요청합니다. 볼세비키들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가 거리로 나올 경우 우리는 이들을 공격해야 합니다." 케렌스키의 사절인 사빈코프는 공격이 아주 단호하고 무자비해야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코르닐로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이외의 행동은 있을 수 없다." 나중에 자신을 정당화시킬 필요가 생기자 사빈코프는 이렇게 덧붙였다: "...볼세비키가 봉기를 일으킬 때 소비에트가 볼세비키에 의해 장악된 경우에만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조야한 술책이다. 케렌스키의 쿠데타 포고령은 3일이나 4일 지나서 나올 예정이었다. 따라서 문제는 미래 소비에트가 아니라 8월말 당시의 소비에트였다. 오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그리고 볼세비키들이 "적절한 때가 되기 전에" 거리로 나서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합의되었다: 우선 기병 군단을 뻬쩨르부르그에 집결시킨다; 다음에 수도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리고 나서 볼세비키 봉기를 유도할 새 법을 선포한다. 총사령부의 회의록에는 이 계획이 명명백백하게 적혀있다. "뻬쩨르부르그 군관구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새로운 법이 공포되는 정확한 일자를 임시정부가 알 수 있도록 코르닐로프 장군은 전보를 통해 기병 군단이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하는 시점을 사빈코프에게 정확히 전해야한다."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말한다: 음모를 꾸미는 장군들은 "사빈코프와 케렌스키가...총사령부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기를 원한다고 이해했다. 총사령부의 도움만이 필요했다. 이들은 모든 요구와 조건들을 서둘러 합의했다...." 케렌스키에게 충성을 바친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유보조건을 달고 있다: 총사령부는 케렌스키와 사빈코프를 "잘못 연결시켰다." 그러나 케렌스키로부터 정확히 표현된 지시사항을 가지고 사빈코프가 사령부에 도착한 마당에 어떻게 이들을 분리시켜 생각될 수 있는가? 케렌스키 자신은 이렇게 적고 있다: "8월 25일 사빈코프는 총사령부에서 수도에 도착하여 나의 지시에 따라 임시정부가 지휘할 군대가 수도에 도착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8월 26일 저녁에 정부는 후방에 사형제도를 확대하는 법을 채택할 계획이었다. 이와 함께 기병 군단이 단호한 공격으로 나설 것이었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제 단추만 누르면 되었다.

사건들, 문서들, 사건 참여자들의 증언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케렌스키 자신의 자백이 만장일치로 다음의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자기 정부의 일부가 모르는 상태에서 그리고 자기에게 권력을 부여한 소비에트의 등뒤에서 그리고 자신이 소속된 당으로부터 비밀을 지킨 채 수상 케렌스키는 최고위 장군들과 합의하여 군대의 도움으로 정권을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했다. 형법 용어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활동은 명확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최소한 이 활동이 승리하지 못할 때 명확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케렌스키 정책의 "민주적" 성격과 무력의 도움으로 정부를 구하려는 그의 계획 사이의 모순은 피상적으로 관찰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병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계획은 화해주의 정책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이 과정의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로 케렌스키의 개성 뿐 아니라 정국의 특수성으로부터 법칙을 추상해야한다. 이것은 혁명의 상황 속에서 화해주의의 객관적 논리가 드러난 문제이다.

독일 인민의 전권대사였던 프리드리히 에버트는 화해주의자요 민주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이 소속한 독일사민당의 등뒤에서 그리고 호엔쫄런 왕조 장군들의 안내를 받으며 행동에 나섰다. 이 뿐이 아니었다. 1918년 12월초 그는 군사 쿠데타에 직접 참여했다. 이 쿠데타의 목표는 소비에트 최고위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에버트 자신을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 직후 케렌스키가 에버트를 이상적인 정치인이라고 선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케렌스키, 사빈코프, 코르닐로프의 음모가 무위로 돌아가자 케렌스키는 이 음모를 은폐하는 그리 쉽지 않은 작업을 해야했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모스크바 국정협의회가 끝난 후 정부를 전복하려는 시도가 좌익이 아니라 우익으로부터 올 것이라는 점이 나에게는 명확했다." 케렌스키는 총사령부 뿐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이 장군 음모가들에게 보인 공감을 두려워했다.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점이었다: 기병 군단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코르닐로프의 강령을 실천하면서 케렌스키 자신은 이를 통해 총사령부에 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상과 공범인 이중인간 사빈코프는 단순히 정상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지 않았다. 단순히 이것을 위한 것이라면 동궁에서 암호로 전보를 써서 모길레프에 있는 총사령부로 보내기만 하면 되었다. 아니었다, 그는 코르닐로프와 케렌스키를 화해시키고 이들의 계획을 합의시키고 쿠데타가 가능하다면 합법적으로 수행되도록 보장하기 위해 중재자로 갔다. 마치 사빈코프를 통해 케렌스키는 이렇게 말한 것과 같았다: "일을 진행시켜라, 그러나 나의 계획 속에서만 말이다. 그러면 위험을 피할 수 있고 네가 원하는 것은 거의 다 이룰 수 있다." 여기에 사빈코프는 이렇게 힌트를 달았다: "케렌스키의 계획을 넘어 서둘러 나가면 안된다." 세 변수가 결합된 기이한 방정식의 성격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 성격을 이해해야 케렌스키가 사빈코프를 통해서 기병 군단을 총사령부에 요청한 것이 이해될 수 있다. 음모자인 수상은 자신의 합법성을 유지하면서 자신이 음모의 정점에 서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나머지 음모자들에게 이 계획을 전달했다.

사빈코프가 케렌스키로부터 받은 지시 가운데 한 가지만이 어느 정도 우익 음모자들을 공격하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장교동맹 지도위원회의 해산에 관한 조치가 바로 이것이었다. 케렌스키의 정당은 이 조치를 뻬쩨르부르그 협의회에서 요구한 바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명령의 표현 자체이다: "...가능한 선에서 장교동맹을 해체하라." 마치 이 명령의 장식적 성격을 강조하기라도 하듯이 이 명령은 명령의 목록에 제일 먼저 올라가 있었다.

우익의 역습을 예상했기 때문에 케렌스키는 혁명 연대들을 수도에서 철수시키고 동시에 "믿을만한" 군대를 보내달라고 코르닐로프에게 호소했다. 이 사실의 치명적인 의미를 최소한 약간이나마 약화시키기 위해 그는 기병 군단을 수도로 불러들이는 세 가지 신성한 전제 조건을 나중에 언급했다. 코르닐로프가 뻬쩨르부르그 군관구를 지휘하는데 합의하는 대신 케렌스키는 수도와 인접 교외들을 군관구에서 분리시켜 정부가 총사령부의 손아귀에 완전히 장악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케렌스키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잡아먹힐 것이다." 장군들을 자신의 기도에 종속시키려는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케렌스키가 동원할 수 있는 무기는 유보조건이라는 무기력한 속임수 뿐이었다. 세 가지 조건은 이 점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산채로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케렌스키의 욕구는 증명의 여지가 없다. 이외에 다른 두 조건은 단순히 이것이었다: 코카서스 산악 군대로 구성되어 있는 소위 "야만 사단"을 코르닐로프는 수도 원정군단 속에 포함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크리모프 장군이 원정군단을 지휘하지 말아야 한다. 민주주의의 이해를 방어하는 것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이 조건들은 낙타를 꿀꺽 삼키되 모기에 질식당하는 터무니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혁명에 대한 공격을 위장하기 위해서는 비할 바 없이 의도적인 이 조건들을 활용해야했다.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러시아어를 못하는 코카서스 산악군대를 보내는 것은 너무 신중하지 못한 처사였다; 심지어 짜르도 이렇게 할 작정을 못했을 것이다! 크리모프 장군에 대해서 집행위원회는 꽤 명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이 장군이 원정군단을 맡을 경우 발생할 불편을 사빈코프는 공동의 이해를 근거로 총사령부에 설명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소요가 일어날 경우 크리모프 장군이 이것을 진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다. 여론이 그의 이름을 그와 무관한 동기와 결부시킬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정부의 수반이 수도로 군대를 불러모으는데 야만 사단은 부르지 말라, 크리모프는 임명하지 마라 등 요구를 제시했다는 사실 자체는 다음을 증명한다: 케렌스키는 쿠데타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죄가 인정될 수 있다; 이와 똑같이 음모의 전반적 계획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원정군대에 속하는 부대들과 음모를 꾸미는 지위에 있는 중요한 자들에 대해서도 전반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죄를 그가 가지고 있음이 인정된다.

더욱이 이 부차적인 문제들이 어떻든 간에 코르닐로프의 기병 군단은 "민주주의"를 방어하는데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했다. 반면에 군대의 모든 부대들 가운데 이 기병 군단이 혁명에 저항하는 가장 믿을만한 무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케렌스키는 의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좌익과 우익 위로 자신을 추켜세운 케렌스키 자신이 개인적으로 충성하는 부대를 갖는 것은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사태가 증명하듯이 이러한 부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혁명에 저항하는 자들은 코르닐로프의 추종자들뿐이었으며 케렌스키는 이들에게 의존했다.

이 군사적 준비들은 정치적 준비들을 보완했을 뿐이었다. 국정협의회와 코르닐로프 쿠데타 사이에 2주일이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임시정부가 가지고 있었던 전반적 노선은 케렌스키가 우익에 대한 투쟁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우익과 공동전선을 체결하여 인민에 대해 투쟁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점을 증명하는데 충분했을 것이다. 이 반혁명 정책에 대한 집행위원회의 항의를 무시하며 정부는 8월 26일 곡물 가격을 두 배 인상시키는 예상외의 포고령을 지주들에게 안겨주었다. 이것은 대담한 조치였다. 이 조치는 더욱이 로지안코의 구두 요구에 따라 도입되었기 때문에 인민에게 더욱 증오스러웠다. 이 조치로 정부는 굶주린 대중을 의식적으로 투쟁으로 유인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확실히 케렌스키는 엄청난 뇌물로 국정협의회 극우 분파를 획득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2월 혁명의 잔해를 기병을 동원하여 공격하기 전날 밤 "나는 그대들의 것이요!"라고 그는 서둘러 지주들에게 외쳤다.

케렌스키 자신이 임명한 조사위원회에서 있었던 케렌스키의 증언은 치욕이었다. 비록 증인의 자격으로 위원회에 출두했지만 이 정부 수반은 자신이 진짜 피고인들의 우두머리라고 느꼈다. 더욱이 그는 범죄현장에서 잡힌 용의자였다. 이 사태의 내막을 대단히 잘 이해하고 있던 경험이 풍부한 사법부 관리들은 정부 수반의 설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체했다. 그러나 케렌스키가 소속된 당의 당원들을 포함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은 아주 솔직하게 스스로 물었다: 똑같은 기병 군단이 어떻게 쿠데타를 성취하고 동시에 그것을 막을 수 있을까? "사회혁명당원"이 수도를 목조르기 위한 군대를 수도로 들여보내는 것은 너무 무모한 짓이었다. 물론 트로이 군대는 적군을 자기 도시의 성안으로 끌고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나무로 만들어진 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 지를 알지 못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고대 역사가들은 트로이 목마 이야기를 노래한 시인을 반박하고 있다. 파우사니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트로이 군대가 "조금의 이성도 가지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다고 가정할 경우에만 호메로스 시인의 이야기를 믿을 수 있다. 그렇다면 케렌스키의 증언을 듣고 파우사니우스는 무슨 말을 했을까?

 

 

제 9장 코르닐로프의 봉기

8월초에 이미 코르닐로프는 야만 사단과  제 3 기병 군단을 남서전선에서 네벨-노보소콜니키-벨리키 루키 철도 삼각지대로 이동시킬 것을 명령했다. 철도 삼각지대는 뻬쩨르부르그를 공격하는데 가장 유리한 기지였다. 더욱이 그는 이 부대들을 리가를 방어하기 위한 예비 병력으로 위장하여 이동시켰다. 또한 그는 비보르그와 벨로스트로프 사이에 카자흐 기병 1개 사단을 집결시켰다. 벨로스트로프와 뻬쩨르부르그 사이의 거리는 불과 30 킬로미터였다! 수도의 바로 코앞에 이렇게 군대를 집결시킨 후 그는 핀란드에서 있을 지 모르는 작전에 대비하여 병력을 집결시켰다고 변명했다. 이렇게 하여 모스크바 국정협의회 개최 이전부터 기병 4개 사단이 뻬쩨르부르그를 공격하기 위해 진을 치고 있었다. 더욱이 이 사단들은 볼세비키들을 제거하는데 가장 유용한 병력으로 간주되었다. 코르닐로프 파벌 내부에서는 코커서스 사단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 산악 기병들은 누구를 도살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전략적 계획은 단순했다. 남쪽에서 이동 중인 3개 사단은 기차를 통해 짜르스코에 셀로, 가치나, 크라스노에 셀로 등으로 전진할 것이다. "뻬쩨르부르그의 소요 소식이 접수되는 즉시 그리고 9월 1일 아침 이전까지" 이 지점에서 도보로 행군하여 네바강 좌안에 위치한 수도 남부를 점령할 것이다. 핀란드에서 주둔 중인 사단은 이와 동시에 수도 북부를 점령할 것이다.

        장교 동맹을 통해 코르닐로프는 수도의 애국주의 단체들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경험 있는 장교의 지도가 필요한 잘 무장된 2천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임했다. 휴가의 명목으로 전선의 지휘관들을 호출하여 이 병력을 지도하겠다고 코르닐로프는 약속했다. 한편 뻬쩨르부르그 노동자와 병사들의 정서 그리고 혁명분자들의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비밀 경찰조직이 수립되었다. 이 조직의 책임자는 야만 사단의 대령인 하이만이었다. 이 준비는 군사 법규의 틀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전쟁 총사령부의 기구가 활용되었다.

        모스크바 국정협의회는 코르닐로프의 계획을 강화시키는 역할만 했다. 밀류코프는 자기가 이 계획을 연기할 것을 권고했다고 말했다. 케렌스키가 일부 지역에서 어느 정도 인기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충고는 안달이 난 코르닐로프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결국 문제는 케렌스키가 아니라 소비에트였다. 더욱이 밀류코프는 행동하는 인물이 아니라 민간인이었으며 더 나쁜 것은 그의 직업이 교수라는 사실이었다. 은행가, 자본가, 카자흐 장군 등은 코르닐로프를 부추겼다. 교회의 대주교들은 그에게 축복을 내렸다. 군대의 전령 자보이코는 코르닐로프의 승리를 보장했다. 사방에서 안부 전보들이 도착했다. 연합국 대사관들은 이 반혁명 세력의 결집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영국 대사 부캐넌은 음모를 조종할 끈을 많이 쥐고 있었다. 전쟁 총사령부에 배속된 연합국 군사고문들은 그에게 충심으로 공감을 표시했다. 데니킨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특히 영국의 군사고문은 감동적으로 공감을 표시했다." 대사관들 뒤에는 연합국 정부들이 있었다. 8월 23일의 전보를 통해 임시정부의 해외 위원 스바티코프는 빠리로부터 이렇게 보고했다: 이임식 파티에서 프랑스 외무장관 리보는 "케렌스키 측근으로 힘과 활기에 넘치는 인물이 누구냐고 열성적으로 물었다." 그리고 쁘웽까레 대통령은 "코르닐로프에 대해...많은 질문을 했다." 러시아의 전쟁 총사령부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코르닐로프는 계획을 미루고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8월 20일 경에 기병 2개 사단이 뻬쩨르부르그를 향해 더 가까이 배치되었다. 리가가 함락되던 날에 각 군의 모든 연대에서 4명의 장교들이 차출되어 전부 4천 명의 장교들이 "영국식 폭탄 던지기를 연구하기 위해" 총사령부에 모였다. 가장 믿을만한 장교들은 이번에 아예 한꺼번에 "볼세비키들이 장악하고 있는 뻬쩨르부르그"를 쓸어버릴 계획이 진행 중이라는 설명을 시급히 들었다. 같은 날 총사령부의 명령에 의해 기병 2개 사단에게 수류탄 여러 상자가 보급되었다. 시가전에서는 이 무기가 가장 유용하다는 것이었다. 참모총장 루콤스키는 이렇게 적고 있다: "8월 26일까지는 모든 준비가 끝나야 한다는 점에 대해 모두 동의했다."

        코르닐로프의 군대가 수도에 접근함에 따라 조직들이 "수도 내부에 등장하여 스몰니 학원을 점령한 후 볼세비키 지도자들을 체포할 예정이었다."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회의가 있을 때만 스몰니 학원에 나타났던 반면 장관들을 임명했으며 케렌스키가 공동 부의장을 맡고 있는 집행위원회는 이곳에 상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대의를 위해서는 세세한 것들에는 신경 쓸 수도 없고 이것이 가능하지도 않았다. 최소한 코르닐로프는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루콤스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독일의 하수인들과 간첩들 특히 레닌을 교수형에 처하고 다음에는 노동자 농민 소비에트들을 해산시킬 때가 왔다. 그리고 다시는 소집되지 못하게 소비에트를 확실히 해산시켜야한다."

대담하고 결의에 찬 장군으로 군 내부에서 명성을 누리고 있던 크리모프에게 작전의 지휘권을 맡길 생각이 코르닐로프에게는 확고했다. 데니킨은 말한다: "그때 크리모프는 행복했으며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총사령부는 그를 확실히 믿고 있었다. 코르닐로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않고 소비에트 대의원 전원을 교수형에 처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렇게도 행복하고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던 이 장군을 이 특수 작전의 지휘관으로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대단히 적절했다.                 

전선의 독일군은 이 움직임에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이 반란 준비가 절정에 도달한 시점에 사빈코프는 오랜 합의문의 세세한 부분을 다듬고 부차적인 수정을 가하기 위해 총사령부에 도착하였다. 코르닐로프는 이미 오래 전에 케렌스키를 타도하는 행동 개시의 날짜를 2월 혁명 발발 후 6개월 뒤로 잡고 있었다. 이와 똑같은 날짜를 사빈코프는 공동의 적인 볼세비키들을 분쇄하는 날짜로 제시했다. 이 음모는 양쪽에서 각각 진행했으나 양쪽은 모두 이 계획의 공통 요소를 가지고 작업을 진행시키려 했다. 코르닐로프는 이것을 위장술로 이용했고 케렌스키는 자신의 환상을 계속 유지시킬 목적으로 이것을 이용하려했다. 사빈코프의 제안은 총사령부의 의도와 딱 들어맞았다: 정부는 자신의 머리를 내밀었고 사빈코프는 올가미를 머리에 들이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총사령부의 장군들은 손을 비볐다. 이들은 즐거운 낚시꾼처럼 이렇게 외쳤다: "물고기가 입질을 하고 있다!" 코르닐로프는 자기에게 아무런 손해도 되지 않는 제안된 양보를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단 코르닐로프의 군대가 수도에 진입하면 총사령부에 대한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의 명령 불복종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다른 두 조건에도 합의한 후 그는 즉시 이것들을 위반했다: 그는 야만 사단을 선두에 배치시키고 크리모프를 전체 작전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코르닐로프는 사소한 일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볼세비키들은 자신들의 근본 정책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공개적으로 토론했다. 대중정당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정부와 전쟁 총사령부는 볼세비키당이 대중을 억제시켜 이들의 투쟁 의지를 절제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소망은 생각을 낳게 마련이다. 따라서 반동 세력의 정치적 필요는 이들의 정세 전망의 기초가 된다. 모든 지배계급들은 봉기가 임박했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봉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얘기하는 봉기의 날짜는 때에 따라 며칠 빠르거나 늦었다. 부르주아 언론에 따르면 전쟁부 즉 사빈코프는 봉기가 임박했다고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볼세비키 분파가 봉기를 책임지고 있다고 레치 지는 말했다. 모사꾼 밀류코프는 볼세비키당의 봉기 임박설에 아주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가로서의 명예를 걸고 이 황당한 설을 지지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정보국이 이후 공개한 문서들에 따르면 트로츠키의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한 독일의 새로운 자금이 정확히 이때를 맞추어 책정되었다." 이 박식한 역사가는 러시아 정보국과 마찬가지로 망각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독일군 총사령부가 러시아 애국주의자들을 위해 직접 이름을 언급한 트로츠키는 "정확히 이때를 맞추어" 7월 23일부터 9월 4일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지구의 자전 축은 상상의 산물이지만 지구는 여전히 이 축을 따라 자전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코르닐로프의 군사작전은 볼세비키당의 상상 속의 봉기를 축으로 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축은 반동 세력이 봉기를 준비하는 시기에는 충분히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봉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좀더 실질적인 것이 필요했다.

빈버그 장교는 이 군사적 음모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이 작전을 위해 막후에서 진행되고 있던 상황을 드러내는 흥미 있는 노트를 남겼다. 엄청난 규모의 군사적 도발이 준비되고 있다는 볼세비키당의 주장을 그의 노트는 올바른 것으로 확인시켜주고 있다. 심지어 밀류코프조차 사실과 문서들의 증거에 밀려 이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극좌 써클들의 의구심은 정확했다: 공장에서의 선동은 의심의 여지없이 장교 조직들의 임무였다." 그러나 이것도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불평한다: "볼세비키당은 속임수에 걸려들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대중은 볼세비키당의 지시가 없이는 거리로 나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장애물조차 반동세력의 계획 속에 들어있었고 말하자면 미리 장애물의 기능은 정지되어 있었다. 뻬쩨르부르그에 머물고 있는 음모자들의 지도적 기구는 "공화파 쎈터"로 불리었다. 이 기구는 볼세비키당을 대신하여 자기들이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해버렸다. 혁명 봉기를 모방하는 임무는 카자흐 기병 대령 두토프에게 맡겨졌다. "1917년 8월 28일에는 어떤 일이 준비되고 있었는가?"라고 그의 정치적 친구들은 1918년 1월에 질문했다.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 "8월 28일부터 9월 2일 사이에 볼세비키 봉기의 형태로 행동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모든 것은 예상되고 있었다. 이 계획에 대한 전쟁 총사령부 장교들의 고심은 쓸데없는 것이 아니었다.

한편 케렌스키는 사빈코프가 전쟁 총사령부에서 돌아온 후 모든 오해들이 풀렸으며 전쟁 총사령부는 완전히 자신의 계획 속으로 유인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던 이들 전부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행동의 방식 자체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모두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 행복한 순간들은 오래 가지 못했다. 사고가 하나 터져 모든 역사적인 사건들이 그랬듯이 필연의 수문을 열어놓았다. 첫 임시정부의 장관이었던 10월당의 르보프가 케렌스키를 방문했다. 규모가 큰 러시아 정교회 최고회의의 수장으로서 임시정부가 "백치들과 깡패들"로 가득하다고 보고를 했던 자가 바로 그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의 계획이 실제로는 서로에 대해 적대적인 두개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임무가 운명에 의해 그에게 주어졌다.

직업이 없으면서 말하기는 좋아하는 정치꾼인 르보프는 어떤 때에는 전쟁 총사령부에서 또 어떤 때에는 동궁에서 정부의 교체와 구국에 대한 끝없는 대화에 참여해왔다. 이번에는 그는 하나의 제안을 가지고 나타났다. 불만을 가진 전쟁 총사령부의 벼락과 천둥으로 케렌스키를 협박하면서도 친근한 방식으로 자신이 민족 성분에 따라 정부의 장관들을 교체시키는 일을 중재하도록 허용해 달라는 것이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수상 케렌스키는 르보프를 이용하여 전쟁 총사령부와 자신의 공모자인 사빈코프의 충성심을 동시에 시험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독재체제 수립에 대한 계획에 공감을 표현했다. 물론 이 체제에서 그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이었다. 그리고 르보프가 중재를 하도록 격려했다. 여기에는 군사적 술수가 숨어있었다.

케렌스키의 위임장을 받아 어깨가 무거워진 르보프가 다시 전쟁 총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장군들은 그의 임무를 정부가 굴복할 때가 무르익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사빈코프를 통해 케렌스키는 카자흐 일개 군단에 의해 정부가 호위될 경우 코르닐로프의 강령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런데 오늘 케렌스키는 이미 총사령부에 협력하기 위해 내각을 교체하겠다고 제안하고 있었다. 장군들은 올바르게 이렇게 결정했다: "그의 배를 무릎으로 깔아뭉갤 때가 되었다." 따라서 코르닐로프는 르보프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볼세비키당의 임박한 봉기가 "임시정부의 타도, 독일과의 평화조약, 독일에게 발트 함대의 양도"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므로 "최고사령관인 나에게 임시정부가 즉시 권력을 넘기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그리고 코르닐로프는 이렇게 덧붙였다: "...최고사령관이 누가 되든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는 현재 자신의 직책을 누구에게 넘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의 입지는 성조오지 기병대, 장교동맹, 카자흐 군대 위원회의 충성 서약으로 이미 강화된 뒤였다. 볼세비키당의 위협으로부터 케렌스키와 사빈코프가 "안전"을 보장받으려면 이들이 전쟁 총사령부로 와서 자신의 개인적 보호를 받으라고 코르닐로프는 긴급히 요청했다. 그의 당번병인 자보이코는 르보프에게 이 보호의 성격에 대해 확실히 힌트를 주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르보프는 케렌스키가 "임시정부 장관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코르닐로프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친구"로서 열렬히 촉구했다. 마침내 케렌스키는 독재체제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게임이 심각한 국면에 돌입했으며 자신에게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후 그는 먼저 코르닐로프를 직통전화로 불러 사실을 확인하려했다: 르보프가 그의 의사를 정확히 전달했는가? 케렌스키는 자신의 이름 뿐 아니라 르보프의 이름을 걸고 이렇게 질문했다. 이 직통전화의 대화에 르보프는 참석하지 않았다. 마르티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행위는 형사에게는 적절하지만 정부의 대표에게는 부적절했다." 다음날 케렌스키는 이미 결정을 한 것처럼 자신이 전쟁 총사령부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화를 통한 이 직접 대화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경거망동이었다. 민주 정부의 수반과 "공화파" 장군이 마치 침대차의 자리를 흥정하는 것처럼 권력을 넘기는 문제를 서로 흥정하고 있다!

자신에게 권력을 넘기라는 코르닐로프의 요구가 "독재체제와 정부의 재편 등에 대해 이미 오래 전에 공공연히 시작된 대화들의 연장선상"에 불과하다고 밀류코프는 보고 있다. 그는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이 주장을 토대로 총사령부에서 음모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그가 말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다. 코르닐로프가 케렌스키와 음모를 꾸미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요구를 르보프를 통해 케렌스키에게 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코르닐로프는 개인적 음모를 공동의 음모로 은폐하고 있었다. 이 사실도 바뀔 수가 없다. 케렌스키와 사빈코프가 볼세비키당을 전멸시키고 부분적으로는 소비에트도 제거하려고 했던 시점에 코르닐로프는 임시정부마저  제거할 생각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케렌스키가 원치 않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26일 저녁 몇 시간 동안 전쟁 총사령부는 정부가 조금의 저항도 없이 항복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물론 이것은 음모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것은 음모가 막 성공할 것 같았다는 의미였다. 음모가 승리하면 항상 법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길을 찾아내기 마련이다. 전쟁 총사령부에서 외무부를 대표하고 있던 외교관 트루베츠코이는 이렇게 말한다: "이 대화가 끝난 후 나는 코르닐로프 장군을 보았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것이 정부가 귀하의 노선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까?'라는 나의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는 잘못 알고 있었다. 케렌스키로 대표되는 정부가 그와의 만남을 끊은 것이 바로 이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총사령부는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문제는 독재체제 일반이 아니라 코르닐로프 독재였던가? 그렇다면 이들은 케렌스키를 조롱하기 위해서 그에게 법무장관 자리를 제안하고 있었는가? 사실 코르닐로프는 르보프를 통해 케렌스키에게 법무장관직을 주겠다고 제안했었다. 자기 자신을 혁명 자체로 혼동하여 케렌스키는 재무장관 네크라소프에게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나는 그들에게 혁명을 넘겨버릴 수는 없어!" 그리고 사심이 없는 친구인 르보프는 즉시 체포되어 두 명의 보초가 그의 앞에 지키고 있는 가운데 동궁에서 잠을 자지 못하고 밤을 보냈다. 그리고 벽을 사이에 두고 "승리감에 도취된 케렌스키가 알렉산드르 3세의 방에서 이 잘 풀리고 있는 일에 즐거워하며 끝없이 오페라의 빠른 곡조를 흥얼거리는 것"을 이를 갈면서 듣고 있었다. 이 순간 케렌스키는 활력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이 당시 뻬쩨르부르그는 이중의 불안 속에 놓여있었다. 부르주아 언론이 의도적으로 과장하고 있던 정치적 긴장은 폭발할 소지를 안고 있었다. 리가의 함락으로 전선은 수도에 더 가까이 위치했다. 짜르가 몰락하기 한참 전부터 전쟁 때문에 제기된 수도 대피 계획은 이 때문에 새로운 힘을 얻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독일군의 진격보다는 새로운 봉기를 훨씬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수도를 떠나고 있었다. 8월 26일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는 재차 경고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 우리 당의 이름으로 도발을 선동하고 있다." 같은 날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노동조합, 공장위원회 등의 주요 기구들은 어떠한 노동자 조직이나 정당도 어떤 형태가 되었든 시위를 촉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정부가 다음 날 타도될 것이라는 소문은 단 일분도 멈추지 않고 계속 퍼졌다. 부르주아 언론은 이렇게 말했다: "정부 일각에서는 모든 시위를 진압한다는 결정을 만장일치로 채택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시위를 진압하기 전에 우선 시위를 자극하는 모든 조치들을 취했다.

27일 조간신문에는 전쟁 총사령부의 봉기 의도에 대한 소식이 실리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사빈코프의 인터뷰는 이렇게 선언했다: "코르닐로프 장군은 임시정부의 절대적 신임을 얻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2월 혁명 6개월 기념식은 이상하게 조용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시위처럼 보이는 어떤 행위도 피했다. 부르주아들은 소요를 두려워하여 집에 처박혀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 하나 없었다. 군신장에 안치된 2월 혁명 열사들의 무덤은 방치된 것처럼 보였다.

오래 기다려온 구국의 이날 아침 최고사령관 코르닐로프는 전보를 통해 수상 케렌스키로부터 이렇게 명령을 받았다: 모든 임무를 참모장에게 넘기고 즉시 뻬쩨르부르그로 귀환하라.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코르닐로프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그는 "이중의 술수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아차렸다. 자신이 꾸며온 이중의 술수가 발각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코르닐로프는 항복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직통 전화를 통해 사빈코프가 촉구해도 소용이 없었다. 최고사령관은 성명서를 통해 인민에게 호소했다: "공개적으로 행동에 나서도록 강요된 본인 코르닐로프 장군은 이렇게 선언한다: 소비에트 다수파인 볼세비키당의 압력을 받아 임시정부는 독일군 총사령부의 계획과 완전히 일치하는 행동을 하고 있으며 리가 해안으로 독일군 진입이 임박한 상황에서 군대를 살육하면서 나라를 내부에서 뒤흔들고 있다." 권력을 적에게 넘기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코르닐로프 자신은 "명예와 전투의 격전장에서 싸우다 죽기를 더 원한다." 나중에 이 성명서의 주인공에 대해 밀류코프는 존경의 마음을 표하면서 "결연한 태도로 세부 법 조항들을 경멸하면서 자신이 한때 올바르다고 결정한 목표를 향해 직접 나아가는데 익숙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적이 버티고 있는 전선에서 군대를 철수시켜 자신의 정부를 타도하려는 최고사령관을 "세부 법 조항들"에 집착했다고 비난하기는 정말 힘들 것이다.

케렌스키는 자신의 개인적 권위만을 동원하여 코르닐로프를 해임했다. 이때 임시정부는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26일 저녁 장관들이 이미 사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행위는 모든 세력들이 원했던 바였다. 행복한 우연의 일치가 아닐 수 없었다. 전쟁 총사령부와 정부가 결별하기 며칠 전에 루콤스키 장군은 이미 알라딘을 통해 르보프에게 이렇게 암시했었다: "8월 27일이 되기 전에 정부에서 철수하라고 입헌민주당에게 경고하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장관들의 사임으로 정부는 어려운 처지에 놓일 것이고 입헌민주당은 불쾌한 일들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입헌민주당은 이 암시를 확실해 이해했다. 한편 케렌스키 자신은 정부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모든 권력이 나 개인에게 집중되는 조건 속에서만" 코르닐로프의 반란에 저항할 수 있다. 입헌민주당 소속 장관들과 케렌스키를 제외한 나머지 장관들은 사임할 적절한 때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해서 연립정부는 또 하나의 시련을 겪었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입헌민주당 장관들은 미래에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채 때가 되면 사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전통에 걸맞게 입헌민주당은 투쟁이 끝날 때까지 물러나 있다가 그 결과에 따라 결정하기를 원했다. 화해주의자들이 침해할 수 없는 자신들의 자리를 마련해 놓을 것이라고 이들은 확신했다. 이렇게 책임에서 벗어난 뒤 입헌민주당 장관들은 사임한 다른 정당 소속의 장관들과 함께 "개인적 성격"을 띤 일련의 회의에 참여했다. 이렇게 해서 내전을 준비중인 두 진영은 "개인적" 방식으로 정부 수반 주위에서 무리를 이루었다. 이렇게 해서 정부 수반은 모든 가능한 권한을 부여받았지만 실질적 권력은 전혀 없었다.

코르닐로프는 전쟁 총사령부에서 전보를 통해 케렌스키의 명령을 받았다: "뻬쩨르부르그와 교외 지구들로 전진하고 있는 모든 부대들을 가장 최근의 주둔지로 복귀시켜라." 이에 대해 코르닐로프는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명령을 거부한다. 뻬쩨르부르그로 부대들을 계속 전진시킬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군사적 반란이 확실히 시작되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철도 대형을 이룬 3개 기병 사단이 수도로 진군하고 있었다. 뻬쩨르부르그 병사들에 대한 케렌스키의 명령은 다음과 같았다: "자신의 애국심과 인민에 대한 충성심을 공포한 후...코르닐로프 장군은 전선에서 연대들을 철수시켜...이들을 뻬쩨르부르그에 대항시키고 있다." 이 연대들이 자신의 직접 명령으로 전선에서 철수했으며 지금 코르닐로프의 배신 사실을 전해 듣고 있는 수도 주둔군을 쓸어버리기 위해 수도로 진군할 계획이었다는 것을 케렌스키는 지혜롭게도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반란을 일으킨 총사령관은 이에 대해 전보로 재빨리 응답했다: "배신자들은 우리 대오에 있지 않다. 바로 수도에 있다. 이들은 정부의 범죄적인 묵인 하에 독일의 돈을 받기 위해 러시아를 팔아 넘겨왔다." 이렇게 해서 볼세비키당에 퍼부어졌던 비방은 새로운 과녁을 찾았다.

사임한 장관협의회 의장 케렌스키가 오페라에서 불렀던 고양된 야상곡의 음조는 재빨리 사라졌다. 코르닐로프에 대한 투쟁은 어떤 우여곡절을 겪든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케렌스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전쟁 총사령부의 반란 첫째 날 밤 뻬쩨르부르그 병사들과 노동자들 사이에는 사빈코프가 코르닐로프의 반란과 연계되어 있다는 소문이 끈질기게 나돌았다." 이 소문은 사빈코프 다음으로 케렌스키를 반란 공모자로 지명했으며 이 소문은 틀린 것이 없었다. 앞으로 대단히 위험한 내용들이 폭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케렌스키를 사로잡았다.

케렌스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8월 26일 늦은 밤에 전쟁부의 총무청장 사빈코프가 크게 흥분한 채 나의 집무실에 들어왔다. 차려 자세를 취한 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장관님, 코르닐로프의 공모자로 저를 즉시 체포해 주십시오. 그러나 저를 신뢰한다면 제가 반란자들과 공통점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인민에게 증명할 기회를 주십시오'....이 선언에 대한 응답으로 나는 즉시 그를 뻬쩨르부르그의 임시 지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코르닐로프 반란군에 저항해 수도를 방어할 다양한 권한을 그에게 부여했다." 이것에 만족하지 않은 채 케렌스키는 사빈코프의 청을 받아들여 필로넨코를 사빈코프의 부지사로 임명했다. 이로써 반란을 일으키고 동시에 이것을 진압하는 임무는 "통령정부"의 협소한 파벌에 집중되었다.

케렌스키가 이렇게 급하게 사빈코프를 뻬쩨르부르그 지사로 임명한 이유는 자신의 정치적 생존이라는 절박한 필요 때문이었다. 만약 케렌스키가 사빈코프를 소비에트에서 배신했다면 사빈코프는 즉시 케렌스키를 배신했을 것이다. 반면 코르닐로프에 대항하는 투쟁에 적극 나서서 자신의 적법성을 증명할 가능성을 약간의 협박과 함께 케렌스키로부터 부여받은 사빈코프는 케렌스키에 대한 반란 혐의를 벗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뻬쩨르부르그 "지사"는 반혁명에 대항하기보다는 반란 공모의 흔적을 은폐하기 위해서 필요했다. 이제 즉시 공모자들의 우정어린 노고가 시작되었다.

사빈코프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8월 28일 아침 4시에 나는 케렌스키의 호출을 받고 동궁으로 돌아갔다. 거기에는 알렉세이예프 장군과 테레쉬첸코가 있었다. 르보프의 최후통첩이 오해에 불과했다는 점에 대해 우리 4명은 모두 동의했다." 이 새벽 회의의 사회는 사빈코프가 맡았다. 밀류코프는 배후에서 이 회의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이날 중으로 무대 위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코르닐로프가 양의 두뇌를 가졌다고 말한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와 같은 편이었다. 반란 공모자들과 이들의 하수인들은 이 모든 일을 "오해"의 결과라고 선언하려고 마지막 시도를 했다. 즉 공동의 계획을 통해 구출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구출하려고 여론 조작을 공모하기 시작했다. 야만 사단, 크리모프 장군, 카자흐 기병의 대형, 최고사령관직 사임을 거부한 코르닐로프, 수도로 향한 반란군의 전진 등은 모두 "오해"의 세부사항들에 불과했다! 상황이 불길하게 꼬이는 것에 겁을 먹은 케렌스키는 "그들에게 혁명을 넘겨줄 수 없다!"는 고함을 더 이상 지르지 않았다. 알렉세이예프와 함께한 회의를 마치고 케렌스키는 즉시 동궁의 기자실로 들어가 코르닐로프를 반역자로 선언한 자신의 성명서를 신문기사에서 제외시킬 것을 기자들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기자들이 이 조치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명백히 하자 케렌스키는 이렇게 외쳤다: "아 그럴 수가!" 다음날 신문에 실린 이 비참한 에피소드는 이제 가망 없이 일이 꼬인 나라의 최고 책임자의 처참한 모습을 아주 명백하게 드러내었다. 민주주의와 부르주아 계급을 너무도 완벽하게 체현하고 있기 때문에 케렌스키는 이제 정부의 권력과 이에 대한 범죄적 음모자의 모습을 동시에 아주 훌륭히 체현한 인물이 되었다.

28일 아침이 되자 정부와 최고사령관의 분열은 전 인민의 눈앞에서 기정사실이 되었다. 증권거래소는 즉시 이 문제에 개입했다. 코르닐로프가 리가의 함락을 위협하는 연설을 모스크바에서 했을 때 러시아 주식들이 하락했던 반면 그가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모든 주가가 상승했다. 2월 혁명으로 등장한 체제를 극단적으로 폄하하면서 증권거래소는 코르닐로프의 승리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 유산계급들의 분위기와 희망을 한 치의 오차 없이 표현했다.

전날 케렌스키에 의해 코르닐로프 대신 임시 최고사령관이 되도록 명령받은 전쟁 총사령부의 참모총장 루콤스키는 이렇게 응답했다: "코르닐로프 장군의 권한을 넘겨받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군대 내부에 폭발이 일어나 러시아를 멸망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주저 후에 임시정부에 대한 충성을 선언한 코카서스 전선의 사령관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전선의 모든 사령관들은 다양한 차이의 목소리를 내면서 코르닐로프 장군의 요구들을 지지했다. 입헌민주당의 감화를 받은 장교동맹 지도위원회는 군대와 함대의 모든 지휘관들에게 전보를 보냈다: "여러 차례 정치적 무능을 드러낸 임시정부는 도발을 통해 그 이름에 먹칠을 했으므로 더 이상 러시아의 우두머리로 남아있을 수 없다..." 그런데 루콤스키가 바로 장교동맹의 존경스러운 회장이었다. 전쟁 총사령부는 제 3 기병군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크라스노프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케렌스키를 방어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반란은 식은 죽 먹기이다. 모든 것은 준비되었다."

앞에서 소개한 트루베츠코이 공작이 외무부에 보낸 암호 전보문을 보면 반란의 지도자들과 지지자들이 얼마나 상황을 낙관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면 모든 부대의 지휘부, 압도적 다수의 장교들, 최상의 병사들이 모두 코르닐로프를 지지하고 있다. 카자흐 기병 전체, 군사 학교의 대다수, 최상의 전투 부대들이 그를 후방에서 지지하고 있다. 이 물리적 힘에 사회주의자들을 반대하는 반란군에 대한 인민의 도덕적 공감...여기에 조금만 채찍질을 가해도 굴복하는 하층민들의 정부에 대한 무관심...등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3월에 사회주의자를 자처했던 엄청난 수의 인간들은 코르닐로프의 승리와 함께 당연히 우리편으로 넘어올 것이다." 트루베츠코이는 여기에서 전쟁 총사령부의 희망 뿐 아니라 연합국 대사관들의 태도도 함께 표현했다. 뻬쩨르부르그를 점령하기 위해 전진 중인 반란군 가운데에는 영국 군인이 지휘하는 영국제 장갑차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부대는 반란군 가운데 가장 믿을만한 부대라고 가정할 수 있었다. 러시아 주재 영국 군사고문단의 단장 녹스 장군은 미국 대령 라빈즈가 코르닐로프를 지지하지 않자 그를 꾸짖었다: "나는 케렌스키 정부에는 관심이 없다. 너무 허약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강력한 독재체제이다. 카자흐 기병이 필요하다. 인민은 채찍질을 당할 필요가 있다! 독재체제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뿐이다." 각지에서 유래한 이 목소리들은 모두 동궁의 거주자들을 경악시켰다. 코르닐로프 반란은 반드시 성공할 것 같았다. 게임은 완전히 끝났으며 명예로운 죽음만이 남았다고 네크라소프 장관은 친구들에게 알렸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확인시키고 있다: "소비에트의 유명한 지도자 몇 명은 코르닐로프의 승리가 자신들의 운명에 가져올 결과를 예상하고 서둘러 외국 여권을 준비했다."

코르닐로프의 군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 위협적이 되었다. 부르주아 언론은 이 소식들을 허기진 듯이 집어삼켜 확대하고 축적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8월 28일 낮 12시 30분: "코르닐로프 군대가 루가 근처에 집결했다." 오후 2시 30분: "코르닐로프 군대를 실은 새로운 기차 9대가 오레데즈 역을 통과했다. 선두 기차에는 철도 공병대대가 타고 있다." 오후 3시: "루가 주둔군은 코르닐로프 군대에 항복한 후 무기를 전부 넘겨주었다. 반란군은 루가의 역과 관공서를 전부 점령했다." 저녁 6시: "코르닐로프 군대의 대형들이 나르바를 돌파하여 가치나를 5백 미터 남겨놓고 있다. 2개 대형이 가치나 진격에 합류했다." 29일 오전 2시: "뻬쩨르부르그를 33 킬로미터 남겨놓은 안트로프쉬노 역에서 정부군과 반란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양측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밤이 되자 러시아 남부 곡창지대를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로부터 차단시키겠다고 칼레딘이 위협했다는 소식이 도달했다. "전쟁 총사령부", "전선의 사령관들", "영국 대사관", "장교들", "대형들", "철도 대대들", "카자흐 기병들", "칼레딘 장군" 등의 모든 말들이 마치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트럼펫처럼 동궁의 말라치트 홀에 울렸다.

케렌스키 자신은 이 사실을 약간 완화된 형태로 인정하고 있다: "8월 28일에 큰 동요가 있었다. 민주주의 진영 내에서 코르닐로프 군대의 역량에 대한 대단한 의구심과 초조함이 동시에 교차했다." 이 말들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두 진영 가운데 누가 더 강력하고 누가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덜 위험한 가에 대한 추측으로 케렌스키의 마음은 갈가리 찢겨졌다. "우리는 우익 편도 좌익 편도 아니다" --- 이 말들은 국정협의회가 열린 모스크바 극장의 무대에서는 효과적인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이것을 발발 직전에 있는 내전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런 의미일 것이다: 케렌스키 집단은 우익이나 좌익에게 불필요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드라마에 접하자 우리는 절망으로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모든 인민의 눈앞에서 전쟁 총사령부와 정부의 분열이 명백해진 후에도 어느 정도의 화해를 이루려는 노력이 있었다. 이 사실에서 마비의 정도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중재자가 되기를 원했던 밀류코프가 말했다: "중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이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났다." 28일 저녁에 동궁에 나타나 그는 "위법에 대한 엄격한 형식적 견해를 포기할 것을 케렌스키에게 충고했다." 과일의 속과 껍질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해한 이 자유주의 지도자는 이때 충직한 중재자의 역할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다. 8월 13일 밀류코프는 코르닐로프로부터 27일을 거사일로 잡았다는 말을 직접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국정협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요구했다: "최고사령관이 제시한 조치들을 즉시 채택하는 것이 그에 대한 의심, 언어적 위협, 심지에 해임의 빌미가 되어서는 안된다." 27일까지 코르닐로프는 의심을 받지 말아야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동시에 밀류코프는 "자발적으로 그리고 어떠한 주장도 하지 않은 채" 케렌스키를 지지하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교수집행인의 올가미를 생각나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 올가미는 슬프게도 "어떠한 주장도 하지 않은 채 목을 졸라맨다." 이에 대해 케렌스키는 이렇게 인정하고 있다: 중재를 제안한 밀류코프는 "진짜 권력은 코르닐로프에게 있다는 것을 나에게 증명할 아주 좋은 순간을 포착했다." 이 두 사람의 대화는 너무 잘 진행되었다. 결론적으로 밀류코프는 자신의 정치적 친구들에게 케렌스키의 후임으로 알렉세이예프 장군이 임명될 것이고 그에 대해 코르닐로프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주지시켰다. 알렉세이예프는 이 제안을 너그럽게 수용했다.

그리고 밀류코프보다 더 거대한 자가 등장했다. 저녁 늦게 영국 대사 부캐넌은 외무장관에게 선언문을 건네주었다. 이에 따르면 연합국 대표들은 "인류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피하려는 소망에 따라" 도움을 자원한다고 만장일치로 제안했다. 정부와 반란군 장군 사이에 공식적으로 중재를 하겠다는 것은 반란을 지지하고 보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임시정부의 명의로 외무장관 테레쉬첸코는 코르닐로프 반란에 대해 "크나큰 놀라움"을 표시했다. 왜냐하면 정부는 그의 정치 강령의 대부분을 이미 채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고립과 무력감 속에서 케렌스키는 사임한 장관들과 끝없는 회의를 하나 더 소집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안이 없었다. 전적으로 사심이 없는 이 시간 보내기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중에 반란군의 수도 접근에 대한 특히 놀라운 소식이 도착했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네크라소프는 "몇 시간 후면 반란군이 아마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할 것"이라고 전했다. 전직 장관들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정부가 구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추측하기 시작했다. 통령을 임명하자는 생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우익과 좌익 모두 알렉세이예프 장군이 "통령"의 참모진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공감을 표시했다. 입헌민주당의 코코쉬킨은 알렉세이예프가 정부의 수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부의 주장에 따르면 케렌스키는 밀류코프와 대화를 나누면서 다른 인물에게 권력을 양도하는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아무도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알렉세이예프가 정부 수반의 후보가 되는 것을 중심으로 모든 세력이 화해를 했다. 밀류코프의 계획이 막 실현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이때 최대 긴장의 순간에 늘 그렇듯이 누가 극적으로 문을 두드렸다. 바로 옆방에서 "반혁명에 반대하는 투쟁위원회"의 대표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아주 적절한 때에 이곳에 도착했다. 코르닐로프 지지자, 중재자, 굴복자 등으로 구성되어 동궁의 어느 홀에서 진행된 가련하고 비겁하고 배신적인 회의는 반혁명의 가장 위험한 소굴의 하나였다.                    

반혁명에 반대하는 투쟁위원회라는 새로운 소비에트 기구는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와 농민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합동회의에서 수립되었었다. 27일 저녁에 수립된 이 기구는 양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3개 소비에트 정당, 노동조합 중앙,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등이 특별히 선출한 대표들로 조직되었다. 소비에트의 지도적 기구들이 자신들의 나약성을 인정하고 혁명 투쟁을 위해서는 새로운 피가 수혈될 필요성을 인식했다는 점을 이 투쟁위원회는 근본적으로 드러냈다.

반란 장군에 대항해 대중의 지지를 구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한 화해주의자들은 서둘러 왼쪽 어깨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들은 원칙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이 제헌의회 소집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는 자신들의 연설을 전부 그리고 즉시 잊어버렸다. 멘세비키당은 이렇게 선언했다: 민주공화국을 시급히 선포하고 의회를 해산한 후 농업개혁을 도입하라고 정부에게 압력을 가할 것이다. 최고사령관의 반역에 대한 정부의 선언문에서 "공화국"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권력의 문제에 대해서 양 집행위원회는 정부를 잠시 그대로 유지한 채 사임한 입헌민주당 장관들을 대신하여 민주 인사들을 임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가까운 미래에 체이제의 강령을 바탕으로 모스크바 국정협의회에서 단결한 모든 조직들이 총회를 개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밤 12시까지 협상한 후 케렌스키가 정부를 민주적으로 통제하자는 생각을 결연히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의 좌우 모두에서 지지가 사라지고 있다고 느끼자 케렌스키는 모든 힘을 다해 "통령 정부"에 대한 생각을 고수했다. 이 정부가 수립되면 아직도 죽지 않은 그의 꿈인 강력한 권력을 실현할 여지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스몰니 학원에서 아무 성과도 없고 피곤하기만한 토론이 끝난 후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인물인 케렌스키에게 다시 이렇게 호소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는 양 집행위원회의 예비 작업에 동의해야한다. 오전 7시 30분에 체레텔리는 다음과 같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케렌스키는 양보할 생각이 없으며 다만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를 받아 반혁명에 대한 투쟁에서 "모든 국가권력"을 동원하는 것에 동의했다. 밤샘으로 피곤에 지쳐 양 집행위원회는 실의 매듭 구멍만큼이나 공허한 "통령 정부" 안에 마침내 양보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에 투쟁하기 위해 "모든 국가권력"을 동원하겠다고 엄숙하게 약속했지만 전쟁 총사령부에게 평화적으로 항복하는 문제에 대해 밀류코프, 알렉세이예프, 전직 장관 등과 계속 협상을 했다. 그런데 이 협상이 밤 12시 반혁명 반대 투쟁위원회의 문을 노크하는 소리로 방해를 받았다. 이로부터 며칠 후 조국방어위원회의 위원이자 멘세비키인 보그다노프는 케렌스키의 배신에 대해 조심스러우나 확고한 어조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임시정부가 동요하고 있으며 케렌스키의 모험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가 명확하지 않은 때에 밀류코프와 알렉세이예프 장군과 같은 중재자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반혁명 반대 투쟁위원회는 그의 보고를 중단시킨 후 "모든 힘을 다해" 공개적인 투쟁을 할 것을 요구했다. 보그다노프는 계속 보고했다: "우리의 압력을 받아서 정부는 모든 협상을 중단하고 코르닐로프의 어떠한 제안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좌익에 대해 어제 음모를 꾸민 정부 수반이 오늘은 좌익의 정치적 포로가 되었다. 이 일이 일어난 후에 26일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장관직을 사임했던 입헌민주당 장관들은 이제 정부에서 나가겠다고 확정적으로 발표했다. 그렇게 애국적이고 조국에 충성하며 나라를 구하는데 열심인 반란을 케렌스키가 진압하는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사임한 장관들, 고문들, 친구들이 모든 하나하나 동궁을 떠났다. 케렌스키 자신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파괴될 운명에 처한 곳을 우르르 포기하는 행위"였다. 이 일은 8월 28일과 29일 사이의 밤에 일어났다. 이때 케렌스키는 동궁에서 거의 "완벽한 고독" 속에 방안을 거닐었다. 오페라의 대담한 연기는 더 이상 그의 머리 속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진정 초인적인 책임의식이 그 고통스러울 정도로 긴 낮과 밤 동안에 나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주로 케렌스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의식이었다: 모든 것들은 이미 그와 관계없이 이루어졌으며 그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제 10장 부르주아 계급이 민주주의 진영과 힘을 겨루다

8월 28일이 되자 동궁의 인물들은 공포에 질려 열병에 걸린 것처럼 떨었다. 야만 사단의 지휘관 바그라치온 공이 코르닐로프에게 전보로 이렇게 알렸기 때문이었다: "야만 사단의 군인들은 조국에 대한 의무를 수행할 것이며 이들의 최고 영웅인 코르닐로프의 명령에 따라...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흘릴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야만 사단의 진격은 중지되었다. 그리고 8월 31일 바그라치온 자신을 우두머리로 한 특별 대표단이 케렌스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만 사단은 임시정부에 절대 복종할 것이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는 전투 한번 없이 아니 총 한방 쏘지 않고 일어났다. 이렇게 해서 야만 사단은 마지막 피 한 방울은 고사하고 첫 번째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코르닐로프 군대는 무장을 갖추고 뻬쩨르부르그로 진격하려는 시도마저 하지 못했다. 장교들은 이들을 지휘할 생각을 감히 못했다. 정부군은 코르닐로프 군대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무력에 의존할 필요성을 결코 느끼지 못했다. 반란의 음모는 와해되어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격돌한 세력들을 자세히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반란 음모를 주도한 자들은 짜르의 관료들이었다. 물론 이것은 예상 밖의 새로운 발견은 아니었다. 이들은 두뇌가 없어 종교를 믿는 자들이었으며 자신들이 시작한 이 엄청난 게임에서 두 세 수를 앞서서 생각할 능력이 없었다. 코르닐로프는 봉기의 날짜를 몇 주일 앞서 정해 놓았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예측하지 못했으며 제대로 계산한 것도 전혀 없었다. 봉기의 순수한 군사적 준비는 부적절하고 엉성하고 경박하게 진행되었다. 조직이나 지휘부 구성 등과 관련된 복잡한 변화는 봉기 전날에서야 서둘러 시도되었다. 혁명에 첫 타격을 가하기로 계획된 야만 사단은 병력이 전부 합쳐서 1,350명이었으나 소총 600 정, 창 1,000 자루, 기병도 500 자루 등이 부족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5일 전에 코르닐로프는 야만 사단을 군단으로 개편하라고 명령했다. 어떤 전투 교과서라도 반대할 이 조치는 봉급이 많은 장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임이 명백했다. 마르티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부족한 무기들이 프스코프에서 보급될 것이라는 내용의 전보는 반란이 완전히 붕괴된 8월 31일이 되어서야 바그라치온에게 전달되었다." 또한 전쟁 총사령부는 막판이 되어서야 전선에서 교관들을 수도로 보냈다. 반란 병력을 지휘할 임무를 받아들인 장교들에게는 돈과 개인용 자동차가 흔쾌히 제공되었다. 그러나 애국 영웅들은 조국을 구하는데 크게 서두르지 않았던 것 같다. 이틀 후에 총사령부와 수도 사이의 철도 노선이 두절되었다. 또한 영웅들 대다수는 병력을 지휘하기로 한 장소에 도착하지도 않았다.

한편 수도에는 약 2,000 명의 코르닐로프 동조 조직이 있었다. 여기서 반란 음모자들은 맡은 특별 임무에 따라 나뉘어졌다. 장갑차 탈취, 소비에트 지도자 체포 및 살해, 중요 공공기관 점거 등이 특별한 임무에 속했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군사적 의무 동맹 회장인 빈버그는 이렇게 말한다: "크리모프의 병력이 도착할 때쯤에는 혁명 주력 부대는 이미 분쇄되어 무력화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크리모프의 임무는 수도의 치안을 회복시키는 것뿐이 될 것 같았다." 물론 모길레프의 전쟁 총사령부는 이 계획이 허풍이 좀 심하다고 생각했으며 크리모프가 거의 모든 임무를 도맡을 것으로 기대했다. 또한 총사령부는 공화파 거점 지역에서 보내온 부대가 크게 도움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수도의 음모자들은 단 한 순간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찍소리를 내거나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마치 이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빈버그는 이 신비스러운 현상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한다. 국가정보국 국장 하이만 대령은 결정적인 순간에 수도 바깥의 술집에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코르닐로프의 직접 명령을 받으며 수도의 모든 애국주의 단체들의 활동을 지도할 시도린 대령과 국방부의 책임자 두세메띠에르 대령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행방이 묘연했다." 카자흐 기병 대령 두토프는 볼세비키로 "위장하여" 행동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반란 붕괴 직후 이렇게 불평했다: "나는 거리로 뛰어 나와...사람들에게 거리로 나오라고 외쳤으나 따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빈버그의 말에 따르면 반란 조직을 위해 조성된 자금은 반란 주동자들이 유용하여 저녁 식사 파티 비용으로 낭비되었다. 데니킨의 주장에 의하면 시도린 대령은 "핀란드로 도망하면서 10만 또는 15만 루블에 해당되는 남아 있던 반란 자금 전부를 챙겨서 달아났다." 동궁에서 체포되었던 르보프는 반란 직후 이렇게 말했다: 일부 장교들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건네주기로 한 비밀 자금 기부자 한 명이 약속된 장소에 나타났으나 반란자들이 만취하여 돈을 건넬 수가 없었다. 빈버그 자신은 이렇게 생각한다: 진짜 한심스러운 이 "사고들"이 아니었다면 반란 계획은 완전히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이 애국주의 반란은 왜 주정꾼, 낭비벽이 심한 자, 배신자로 들끓었는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모든 임무는 이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있는 중핵들을 동원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인적 구성으로 보면 반란 음모는 가장 우두머리부터 형편없었다. 입헌민주당 우파에 속한 이즈고예프에 따르면, "코르닐로프 장군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장군이었다. 그러나 병사들 사이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최소한 내가 관찰할 기회가 있었던 후방의 군인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그가 얘기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네프스키 가도 인근에서 사는 부유층을 의미했다. 전후방을 막론하고 코르닐로프는 대중에게 이질적이며 적대적이며 증오스러운 인물이었다.

제 3 기병 군단의 지휘관은 크라스노프였다. 그는 왕당파였으며 혁명 직후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의 하수인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신의 놀라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코르닐로프는 대단한 일을 구상했지만 정작 자신은 성공에 대한 신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모길레프의 궁전에서 터키인들과 돌격대에 둘러싸여 지냈다." 결정적인 순간에 수도에 있지 않은 이유를 묻는 프랑스 기자 끌로드 아네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몸에 병이 있었다. 중증 말라리아에 걸려 평소의 활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불행한 사고들은 너무 많았다. 미리 실패가 정해진 일이 늘 이렇다. 반란 음모자들의 정서는 어려움이 없을 때에는 술에 취한 것처럼 절정으로 치달았다가 진짜 장애물이 처음 나타나면 완전히 기가 죽는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코르닐로프의 말라리아가 아니라 훨씬 깊고 더 치명적이어서 치료할 수 없는 그래서 결국 유산계급들의 의지를 마비시키는 질병, 이것이 문제였다.

입헌민주당은 코르닐로프가 로마노프 왕조를 부활시키는 반혁명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을 진지하게 부인해왔다. 마치 구 왕조의 부활이 문제의 핵심인 것처럼 이들은 말한다! 코르닐로프는 "공화주의"를 신봉했지만 여전히 왕당파 루콤스키와 죽이 잘 맞았다. 그리고 그의 "공화주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인민연합 즉 흑백인조의 회장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반란 당일에 그에게 전보를 보냈다: "러시아를 구하는 귀하의 큰 일을 신께서 도와주도록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저는 전적으로 귀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 짜르를 신봉하는 흑백인조 깡패들은 공화국 깃발과 같은 값싼 물건 때문에 자신들의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이들은 코르닐로프의 강령이 그 자신과 그의 과거와 그의 바지에 그려진 카자흐 줄무늬, 그의 재정적 연줄과 출처 그리고 무엇보다도 혁명의 목을 자르려는 그의 무한한 용의에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선언문들을 통해 코르닐로프는 자기를 "농민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반란 계획은 전적으로 카자흐 기병과 야만 사단에 기초하고 있었다. 뻬쩨르부르그를 공격할 병력 가운데 보병 부대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 장군은 농민과 접촉할 창구가 없었으며 이것을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전쟁 총사령부에는 농업 개혁가로 자처하는 "교수" 나부랭이가 물론 있었다. 그는 모든 병사들에게 환상적인 수치의 토지를 약속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주제에 대한 선언문은 하나도 발표되지 않았다. 총사령부의 장군들은 지주를 겁주고 도망치게 만들지 모른다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두려움 때문에 농업에 대한 참주선동을 삼갔다.

이 당시 총사령부의 참모부 주위에서 긴밀하게 상황을 관찰했던 모길레프의 농민 타데우쉬는 이렇게 증언한다: 병사들과 농민들 가운데 코르닐로프의 선언문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들은 말했다: "그는 권력을 탐할 뿐 전쟁을 끝내는 것과 토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해 대중은 2월 혁명 후 6개월 동안 어떻게든 자기 길을 찾아냈다. 코르닐로프는 인민에게 전쟁을 계속 수행할 것 그리고 장군들의 특권과 지주들의 재산을 방어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는 대중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었으며 이들은 그로부터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반란 음모자들은 노동자는 물론 농민 보병에게도 전혀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코르닐로프 일당이 사회에서 배제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바로 이렇게 표현되었다.

총사령부에 상주한 외교관 트루베츠코이 공은 정치적 세력 관계를 면밀히 추적했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많은 경우 옳았으나 한 가지에서는 틀렸다. 그는 인민이 "가장 약한 채찍질에도 굴복한다"는 식으로 억압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대중은 대단한 깊이의 활력과 자기희생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보여주기 위해 채찍질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중의 정서를 이렇게 오판했기 때문에 반란 주동자들의 모든 계산들은 전부 어긋나 버렸다.

반란 음모자들은 하층민, 노동자, 전투의 희생자, 당번 병, 하인, 서기, 운전사, 전령, 요리사, 여자 세탁부, 신호수, 전신 기사, 마부, 택시 운전사 등이 없이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것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반란을 음모했으니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눈에 뜨이지 않지만 수없이 많은 꼭 필요한 인간들이 사회생활의 작은 볼트와 연줄들을 구성했다. 그런데 이들은 전부 소비에트를 지지했으며 코르닐로프를 반대하고 있었다. 혁명은 모든 곳에 존재하면서 침투하여 음모자들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혁명은 모든 곳에 자신의 눈, 귀, 손을 가지고 있었다.

군사 교육이 이상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병사는 장교들이 보든 보지 않든 똑같이 행동해야한다. 그러나 1917년의 러시아 병사들과 수병들은 지휘관 앞에서도 공식 명령을 거부했다. 이 대신 혁명의 명령은 다른 일을 하다가도 즉시 따랐다. 또한 명령이 있기 전에 자발성을 발휘하여 명령의 내용을 수행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수없이 존재하는 혁명의 하인, 대리인, 정보원, 투사 등은 자극이나 감독이 없이도 자기 일을 성실히 수행했다.

공식적으로 반란 음모를 분쇄하는 임무는 정부에게 있었고 집행위원회는 이에 협조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임무는 전혀 다른 채널들을 통해 수행되고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책임의 무게에 짓눌려 케렌스키가 혼자 동궁의 층수를 세고있을 때 군사혁명위원회로 불리기도 한 혁명방어위원회는 엄청난 규모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전보를 통해 철도 노동자, 우편 전신 노동자, 병사들에게 지시사항이 하달되었다. 같은 날 멘세비키 단은 소비에트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군대의 모든 움직임은 혁명방어위원회가 공동 서명한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이런 저런 유보조항들을 제외한다면 이것은 혁명방어위원회가 임시정부의 확고한 이름 하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와 동시에 수도 내에 존재하는 코르닐로프 지지조직들의 소굴을 소탕하는 조치들이 취해졌다. 군사 학교들과 장교 조직들에 대해 수색과 체포가 진행되었다. 혁명방어위원회의 손길은 모든 곳에서 느껴졌다. 수도의 주지사는 인민의 관심을 전혀 또는 거의 받지 못했다.

한편 소비에트 하급 조직들도 상부 조직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았다. 주요한 노력은 노동자 지구들에 집중되었다. 정부가 크게 동요하고 집행위원회와 케렌스키가 지루하게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동안 지구 소비에트들은 더욱 밀접히 단합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의문들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지구간 회의들은 계속된다; 집행위원회 실무진에 대표를 보낸다; 노동자 민병대를 수립한다; 정부위원을 지구 소비에트가 통제한다; 반혁명 선동가들을 구금하기 위해 기동대를 조직한다. 전체적으로 이 결의문들은 상당한 정도 정부의 기능 뿐 아니라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기능마저 지구 소비에트가 대신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상황의 논리에 의해 소비에트 기구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축소시키고 하급 조직들에게 활동공간을 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뻬쩨르부르그 지구 소비에트들이 투쟁 영역으로 진입함에 따라 수도 소비에트의 범위와 방향은 즉시 변화했다. 다시 한번 소비에트 조직 형태의 무한한 생명력이 드러났다. 화해주의 지도자들에 의해 상부 조직이 마비되었으나 소비에트들은 대중의 압력에 의해 결정적 순간에 아래로부터 다시 태어났다.

지구의 볼세비키 지도자들에게 코르닐로프 반란은 예상 밖의 일이 전혀 아니었다. 이들은 미리 예상하고 있었으며 경계심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투쟁 현장에 제일 먼저 나타났다. 8월 27일 합동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소콜니코프는 이렇게 발표했다: 인민에게 위험을 알리고 방어를 준비시키기 위해서 볼세비키당은 필요한 모든 조치를 이미 취해 놓았다; 볼세비키들은 군사적 작업을 집행위원회 기구들과 공조할 의향을 선언했다. 볼세비키당 군사조직의 밤 회의에는 각급 부대의 대의원들이 참여했다. 여기서 반란 음모자 전원의 체포, 노동자 무장, 이들에게 교관의 제공, 대중의 주도에 의한 확실한 수도 방어, 노동자 병사 혁명 정부 수립의 준비 등이 결정되었다. 주둔군의 전체 조직들도 회의를 열었다. 첫 신호와 함께 출동할 수 있도록 병사들의 무장이 촉구되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볼세비키들은 소비에트 소수파였으나 군사혁명위원회의 지도력을 장악하고 있음이 아주 명백했다." 그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군사혁명위원회가 진지하게 행동하기를 원한다면 혁명적 방식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혁명적 행동을 위해서는 "볼세비키들만이 진짜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대중이 이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투쟁이 가열될 경우 언제나 모든 곳에서 좀더 적극적이며 대담한 분자들이 등장했다. 이렇게 자동적으로 혁명 분자들이 선정되면서 볼세비키들의 지위는 높아지고 이들의 영향력은 강화되었다. 또한 이들은 주도력을 장악하여 자신이 소수파인 조직에서도 실제적인 지도력을 행사했다. 지구, 공장, 병영으로 가까이 갈수록 볼세비키들의 지도력은 더욱 완벽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당의 중핵들은 모두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대공장에서 볼세비키들은 보초 체계를 조직했다. 당의 지구위원회에서는 소규모 공장의 대표들이 근무를 섰다. 공장에서 지구를 거쳐 당중앙위원회까지 조직이 연결되었다.

볼세비키들 그리고 이들이 주도하는 조직들의 직접적 압력을 받아 혁명방어위원회는 노동자 지구, 공장, 작업장 등을 방어하기 위해 노동자 조직들을 무장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인식했다. 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이 위원회의 승인뿐이었다. 노동자들이 발간한 신문에 의하면 "적위대에 즉시 참여하려는 열성적인 노동자들이 줄을 이었다." 사격과 무기 사용법에 대한 훈련이 시작되었다. 경험 있는 병사들이 교관으로 참여했다. 29일이 되면 거의 모든 지구에서 적위대가 수립되었다. 4만 정의 소총을 소지한 병력을 전투에 투입할 준비가 되었다고 적위대는 선언했다. 무장을 하지 않은 노동자들은 참호를 파고 판금으로 요새를 구축하고 철조망을 설치하기 위해 작업 중대로 조직되었다. 케렌스키는 공모자 사빈코프와 3일 이상 얼굴을 맞대고 있을 수 없었다. 그를 대체한 신임 수도 주지사 팔친스키는 특별 성명을 통해 이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공병대 작업이 필요하자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개인적 노동으로 몇 시간 동안 거대한 임무를 달성했다. 이들이 없었다면 이 일은 며칠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전임 사빈코프의 모범을 따라 신임 팔친스키는 노동자들이 자기들의 신문으로 유일하게 간주하는 볼세비키당 신문을 억압했다.

거대한 푸틸로프 공장은 표트르호프 지구의 저항 중심이 되었다. 이 공장에서 전투 중대들이 서둘러 조직되었다. 공장의 일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노동자 포병 사단을 구성하기 위해 새로운 대포가 분류되었다. 노동자 미니초프가 이렇게 말한다: "당시 우리는 하루에 16시간 일했다...우리는 약 100 문의 대포를 만들었다."

새로 수립된 빅첼(역자 주: 철도노동조합 전국집행위원회. 화해주의자들이 조직을 장악했다.)은 즉시 전쟁의 세례를 받았다. 철도 노동자들은 코르닐로프의 승리를 두려워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철도에 대한 계엄령을 강령에 포함시켰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도 하부가 상부를 앞질렀다. 철도 노동자들은 코르닐로프 군대를 저지하기 위해 철로를 끊고 바리케이드를 쳤다. 전쟁 경험이 유익하게 활용되었다. 또한 반란 음모의 중심인 모길레프를 고립시키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이 때문에 전쟁 총사령부로 들어가고 나가는 물류가 중단되었다. 체신 노동자들은 전쟁 총사령부의 전보와 명령문 또는 그 복사본을 혁명방어위원회에 보내기 시작했다. 전쟁 몇 년 동안 장군들은 수송과 통신을 기술적 문제로 생각하는데 익숙해 있었다. 이들은 이제 이것들이 정치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정치적 중립과는 거리가 먼 노동조합들은 특별 지시를 받기도 전에 군사 진지들을 점령했다. 철도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을 무장시키고 철길 감시, 철로 해체, 교량 보호 등의 임무를 위해 이들을 파견했다. 열성과 결의에 찬 노동자들은 좀더 관료화되고 온건한 빅첼보다 앞서 행동했다. 금속 노동조합은 수많은 사무 직원들을 혁명방어위원회에 보내 일을 시켰다. 또한 거액의 돈을 비용 기금으로 내놓았다. 운전사 노동조합은 이 위원회에게 기술 및 수송 시설들을 제공했다. 인쇄 노동조합은 인민의 정세 인식을 위해 몇 시간만에 월요일 신문이 나오도록 조치했으며 동시에 반동 신문을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들을 동원했다. 코르닐로프는 발로 땅을 굴렀다. 그러자 땅 속에서 군단들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그의 적이었다.       

서로 이웃한 주둔군의 병영, 거대 철도역, 함대 등 뻬쩨르부르그 전역에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작업이 진행되었다. 혁명 인민은 자기편 인적 자원을 파악하고 노동자들을 무장시키고 철로 순찰대를 내보내고 이웃한 지점들과 스몰니 학원 등에 통신을 유지하면서 바삐 움직였다. 혁명방어위원회의 임무는 노동자들의 감시와 소환이 아니라 이들을 등록시키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이 위원회의 계획은 언제나 미리 준비되었다. 반동 장군들의 반란에 대해 수도를 방어하는 임무가 대중에 의한 반란 음모자 체포 임무로 변했다.

헬싱키에서는 전국 소비에트 조직들이 총회를 열어 혁명위원회를 수립했다. 이 위원회는 주지사, 사령관, 국가정보국 그리고 기타 기관들에 대표를 보냈다.

이때부터 혁명위원회의 서명이 없이는 어떤 명령도 효력이 없었다. 전신과 전화는 통제되었다. 헬싱키 카자흐 기병 연대의 공식 대표들은 주로 장교들이었는데 이들은 중립을 선언하려고 했다. 이들은 은밀한 코르닐로프 지지자들이었다. 두 번째 날이 되자 카자흐 병사들이 위원회에 출두하여 연대 전체가 코르닐로프를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카자흐 기병의 대표들이 처음으로 소비에트 회의에 참여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에도 격심한 계급 갈등은 장교들을 우로 병사들을 좌로 몰고 갔다.

7월의 타격에서 완전히 회복된 크론슈타트 소비에트는 전신을 통해 이렇게 선언했다: "집행위원회가 지시하는 순간 크론슈타트 주둔군은 단 한 명까지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 달려갈 것이다." 당시 이들은 혁명에 대한 방어가 어느 정도까지 자신들의 몰살에 대한 방어가 되는 지를 알지 못했다. 이때까지 이들은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7월 시기에 혁명 세력이 패배한 직후 임시정부는 볼세비키의 소굴인 크론슈타트 성채의 병력을 전부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코르닐로프와 합의한 이 조치는 공식적으로는 "전략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되었다. 지저분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수병들은 이 조치에 저항했다. 코르닐로프의 배신행위를 비난 한 직후 케렌스키는 이렇게 적었다: "전쟁 총사령부가 배신행위를 자행하고 있다는 전설은 크론슈타트에 너무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이 때문에 성채로부터 포대를 제거하려는 모든 시도는 군중의 격렬한 저항을 초래했다." 크론슈타트를 해체하는 방안은 정부에 의해 코르닐로프의 몫으로 넘겨졌다. 그는 한 가지 방식을 생각해냈다: 이 도시를 점령하자마자 크리모프는 포를 갖춘 여단을 오라니엔바움에 파견한다; 해안에서 포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한 후 크론슈타트 주둔군이 성채의 무장을 해제하고 육지로 나오라고 요구한다. 육지로 나온 수병들은 대대적으로 처형될 것이었다. 그러나 크리모프가 정부를 구출하는 임무를 시작하고 있을 때 정부는 크론슈타트 주둔군에게 크리모프로부터 정부를 보호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행위원회는 크론슈타트와 비보르그에 전화통지문을 보내 상당한 병력을 수도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29일 아침이 되자 군대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볼세비키가 장악한 부대들이었다. 집행위원회의 부대 호출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의 승인이 있어야했다. 이보다 약간 일찍 28일 정오에 겸손한 요청처럼 들린 케렌스키의 명령에 따라 오로라 순양함의 수병들은 동궁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일부는 7월 시위에 참여한 죄로 여전히 크레스티 감옥에 있었다. 근무가 없는 시간을 이용하여 수병들이 감옥에 갇힌 크론슈타트 수병들, 트로츠키, 라스콜니코프 그리고 기타 인물들을 면회했다. 방문한 수병들이 물었다: "정부 장관들을 체포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부정적인 답변이 나왔다: "아니다. 아직도 때가 되지 않았다. 케렌스키를 총 받침대로 이용하여 코르닐로프를 저격해야한다. 그리고 나서 케렌스키를 정리하면 된다." 6월과 7월에 이 수병들은 혁명 전략에 대해서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두 달의 짧은 시간 동안 이들은 많은 것을 배웠다. 자신들을 실험하고 의식을 가다듬기 위해 이렇게 질문했을 뿐이었다. 이들은 사건들이 필연적으로 진행하는 방향을 스스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7월 전반부에 이들은 두드려 맞고 비난과 비방을 당했으며 8월말에는 코르닐로프 병력에 대항해 동궁을 방어하는 믿음직한 투사가 되었다. 그리고 10월말에는 오로라 순양함에서 동궁을 포격할 것이다.

수병들은 2월 정권과 결산할 시간을 당분간 연기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자기들 위에 군림하는 코르닐로프 장교들을 쓸데없이 단 하루라도 그대로 둘 생각이 없었다. 7월 시기 이후 정부가 이들에게 강요한 부대 지휘부는 거의 확고하게 코르닐로프 편이었다. 크론슈타트 소비에트는 정부가 임명했던 지휘관을 즉시 제거하고 자신이 원하는 자로 대체했다. 그러나 이제 화해주의자들은 크론슈타트 공화국이 분리 독립한다고 비난의 고함을 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교들의 직위를 해제하는 것으로 모든 곳에서 일이 끝나지는 않았다. 여러 곳에서 유혈충돌이 일어났다.

수하노프는 말한다: "분노에 차고 공포에 질린 비보르그의 수병-병사 군중이 장군들과 장교들을 패 죽이면서 유혈사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군중은 분노에 차있지도 않았으며 공포에 질렸다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29일 아침 쎈트로플롯(Centroflot)은 비보르그 지구 사령관 오라노프스키 장군에게 전보를 보내 전쟁 총사령부의 반란 소식을 병사들에게 전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사령관은 전보 내용을 하루 동안 알리지 않았으며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전달받은 내용이 없다고 말했다. 수병들이 주도한 수색 과정에서 전보가 발견되었다. 은폐 행위가 탄로 나자 사령관은 코르닐로프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수병들은 역시 코르닐로프를 지지한다고 선언한 다른 두 명의 장교와 그를 모두 총살시켰다. 수병들은 발트 함대의 장교들로부터 혁명에 충성한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요구했다. 한편 전투용 범선 표트로파블로프스키의 장교 4명이 서명을 거부하고 코르닐로프 지지를 선언했다. 수병들의 결의로 이들은 즉각 총살당했다.

병사들과 수병들에게 죽음의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뻬쩨르부르그와 크론슈타트 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주둔군들에게도 유혈 충돌이 임박하고 있었다. 갑자가 대담해진 장교들의 목소리와 곁눈질을 통해 병사와 수병들은 전쟁 총사령부의 반란이 성공할 경우 자신들에게 가해질 운명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분위기가 특히 험악한 곳에서 이들은 적의 진로를 서둘러 차단하고 장교들의 유혈 보복을 미리 방지했다. 내전은 나름의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인도주의 법칙과는 다르다고 널리 인정되어왔다.

체이제는 즉시 비보르그와 헬싱키에 전보를 보내 린치 법을 "혁명에 대한 치명타"라고 비난했다. 케렌스키는 헬싱키로 이렇게 전보를 보냈다: "혐오스러운 폭력 행위를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 일반적으로 혁명은 법을 마음대로 주무른다. 이 점을 잊지 않는다면 개별적인 린치 법에 대한 정치적 책임은 전적으로 정부와 화해주의자들에게 있다. 이들은 위험한 순간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혁명 대중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나중에 이들을 다시 반혁명 장교들에게 넘기려고 했다.

모스크바에서 국정협의회가 열리는 동안 케렌스키는 곧 봉기가 일어날 것을 예상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전쟁 총사령부와 결별한 후에도 그는 "병사들이 혁명을 방어하도록 설득해 달라"고 볼세비키당에 요청했다. 그러나 동궁 방어를 볼세비키 수병들에게 요청하면서도 그는 이들의 동지인 7월 시위 구속자들을 풀어주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알렉세이예프가 케렌스키 그리고 감옥에 있는 트로츠키에게 속삭이는 상황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죄수로 꽉 찬 감옥을 휩쓴 흥분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해군 사관생도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임시정부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다.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트로츠키와 같은 혁명가들을 크레스티 감옥에서 계속 썩게 만들다니....우리가 운동 시간에 산책을 하면서 감옥 내를 돌고 있을 때 트로츠키는 말했다: '저들은 정말 겁쟁이들이다. 즉시 코르닐로프를 죄인으로 선언하여 코르닐로프를 죽일 권리가 있다고 혁명 병사들 전부가 느끼게 해야한다.'"

코르닐로프의 군대가 뻬쩨르부르그를 함락시킬 경우 체포된 볼세비키들은 전부 처형되었을 것이다. 선발부대를 이끌고 수도로 입성할 바그라치온 장군에게 크리모프는 특별 명령을 내렸다: "감옥과 구치소에 보초를 세워 지금 체포된 자들이 어떤 경우에도 도망가지 못하게 해야한다." 이것은 4월 시기부터 밀류코프가 사주한 강령과 일치했다: "어떤 경우에도 도망가지 못하게 해야한다." 이 당시 수도의 모든 집회나 회의는 7월 투쟁 구속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대표단들이 연이어 집행위원회를 찾아갔으며 집행위원회는 지도자들을 동궁에 보내 이 문제를 협상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한 케렌스키의 확고함은 대단히 놀랍다. 반란이 일어난 지 하루 반이나 이틀 동안 그는 정부가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반란 장군들이 교수형에 처할 볼세비키들을 감시하는 간수의 역할로 자신을 한정했다.        

따라서 볼세비키당의 지도를 받아 코르닐로프에 대항한 대중이 한 순간도 케렌스키를 신뢰하지 않은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부를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투쟁은 그만큼 더 결연하고 헌신적이었다. 반란군에 대한 저항은 도로, 돌, 공기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왔다. 크리모프가 도착한 루가 역의 철도 노동자들은 기관차가 없다면서 반란군을 실은 기차를 이동시키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카자흐 기병대 대오도 2만 명이나 되는 루가 주둔군에 의해 즉시 포위되었다. 군사적 충돌은 없었으나 반란군에 대한 혁명 방어군의 접촉, 교제, 침투라는 훨씬 더 위험한 일이 벌어졌다. 루가 소비에트는 정부의 코르닐로프 해임 발표문을 인쇄하여 반란군 사이에 널리 배포시켰다. 장교들은 카자흐 병사들에게 선동가들의 말을 믿지 말라고 설득하려했다. 그러나 설득을 해야하는 상황 자체가 나쁜 징조였다.

코르닐로프의 진군 명령을 받아 크리모프는 총검으로 위협하며 30분내에 기관차를 준비시키라고 지시했다. 이 위협은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약간 시간이 지체되기는 했으나 기관차가 제공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기차를 이동시킬 수 없었다. 철도가 손상을 입었을 뿐 아니라 차량들로 너무 혼잡하여 이것들을 전부 치우는데 24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반란군의 사기를 죽이는 선전으로부터 떨어지기 위해 크리모프는 28일 저녁에 군대를 루가에서 몇 킬로미터 이동시켰다. 그러나 선동가들이 즉시 마을에 나타났다. 병사, 노동자, 철도 인부 등이 선동가였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달아날 수는 없었다. 이들은 모든 곳을 헤집고 다녔다. 심지어는 카자흐 기병들도 집회를 갖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선전 공세에 시달린 채 자신의 무능을 저주하면서 크리모프는 헛되이 바그라치온을 기다렸다. 철도 노동자들은 야만 사단의 진군을 정지시키고 있었는데 이 사단 역시 대단히 놀라운 도덕적 공격을 곧 받게 될 것이다.

화해주의자들의 민주주의 진영은 정말 줏대가 없고 겁이 많았다. 그러나 자신들이 다시 부분적으로 의존한 대중의 역량은 이들 앞에 무한한 행동의 원천을 제공했다. 공개적인 투쟁을 통해 코르닐로프 반란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생각했다. 이것은 올바른 사고였다. "화해주의"의 이 노선에 대해 볼세비키당이 반대하지 않은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이 화해주의의 기본이기 때문이었다. 볼세비키당의 요구는 단순했다: 선동가들과 의회 의원들 뒤에서 무장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코르닐로프 연대들에 대한 이 도덕적 행동 방식은 무한한 수단과 방법들을 갑자기 발견했다. 이렇게 해서 회교도 대표단이 야만 사단을 만나도록 보내졌다. 이들은 즉시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이들 가운데에는 짜르에 대항하여 코커서스 지방을 영웅적으로 방어한 그 유명한 샤밀의 손자와 토착 군주들도 있었다. 야만 사단의 병사들은 장교들이 대표단을 체포하는 것을 허용하려하지 않았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손님 환대의 관습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협상이 시작되어 곧 협상의 끝을 향한 출발을 알렸다. 반란을 설명하기 위해서 코르닐로프의 지휘관들은 뻬쩨르부르그에서 시작되었을 독일 첩자들의 반란에 대해 계속 얘기했다. 수도에서 바로 도착한 대표들은 반란의 사실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손에 들은 문서들을 보이면서 크리모프야말로 반란자이며 정부에 대항하여 군대를 일으켰음을 증명했다. 코르닐로프의 장교들은 여기에 대해 무슨 답변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야만 사단의 참모부 차량에 병사들은 "토지와 자유"라는 글이 새겨진 붉은 깃발을 꽂았다. 그러자 참모장이 깃발을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중령 계급을 단 그가 정중하게 설명한 바에 따르면 "철도 신호 깃발과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모부의 병사들은 이 비겁한 설명에 만족하지 않고 그를 체포했다. 코커서스의 야만 사단은 누구를 살육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전쟁 총사령부의 말은 확실히 오류였다.

다음날 아침 코르닐로프가 보낸 대령 한 명이 크리모프의 지휘부에 도착했다. 군단을 집결시키고 즉시 수도로 진군하여 "기습적으로" 수도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그는 전달했다. 전쟁 총사령부는 현실에 눈을 감으려고 아직도 애쓰는 것이 명백했다. 이 명령에 대해 크리모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군단에 속한 부대들이 철길을 따라 뿔뿔이 흩어져 있으며 일부에서는 부대들이 기차에서 내리고 있다; 현재 수하에는 카자흐 기병 8개 대대 밖에 없다; 철도는 파괴되고 과부하가 걸렸으며 바리케이드가 쳐 있기 때문에 걸어서만 진군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수도를 기습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도와 외곽지역에 무장 노동자와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다. 크리모프 자신의 군대조차 "기습적으로" 작전을 펼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이 때문에 사태는 더욱 꼬이고 있었다. 뭔가 불길할 징조를 눈치채고 이들은 설명을 요구했다. 이들에게 코르닐로프와 케렌스키 사이의 갈등을 알리기 위해 병사 집회를 공식 일정에 올리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순간에 크리모프는 명령을 통해 이렇게 전했다: "오늘 저녁 수도에서 반란이 시작되었다는 정보를 총사령부와 수도로부터 받았다...." 이 속임수는 이미 대단히 공개적으로 드러난 정부 타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8월 29일 코르닐로프 자신은 명령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네덜란드 정보국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가) 며칠 후 전선 전체에 대한 동시 다발적인 공격이 시작되어 붕괴되고 있는 러시아군을 패퇴시키려한다; (나) 봉기가 핀란드에서 준비되고 있다; (다) 드네프르강과 볼가강의 교량들이 폭파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라) 볼세비키당의 봉기가 수도에서 조직되고 있다." 이것은 사빈코프가 이미 23일에 언급한 바 있던 그 "정보"였다.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해 네덜란드가 언급되었다. 모든 증거에 의하면 이 문서는 러시아 주재 프랑스 전쟁대표부에서 작성되었거나 대표부의 참여로 작성되었다.         

같은 날 케렌스키는 크리모프에게 이렇게 전보를 보냈다: "수도는 완전히 평온하다. 시위는 하나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귀관의 군단은 수도로 진입할 필요가 없다." 시위는 케렌스키 자신의 군사 포고령에 의해 촉발될 예정이었다. 정부의 이러한 도발을 연기시키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케렌스키가 "시위는 하나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행동은 전적으로 정당했다.

탈출구가 없음을 눈치챈 크리모프는 수하의 8개 카자흐 기병 대대를 이끌고 수도로 접근하려는 애매한 시도를 했다. 이것은 자신의 양심을 깨끗이 하려는 몸짓에 불과했다. 물론 이 행위로부터 나온 이렇다할 성과는 하나도 없었다. 루가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순찰 중인 혁명군 병력을 만나자 크리모프는 전투 시도조차 못하고 군대를 되돌렸다. 제 3 기병군단의 지휘관 크라스노프는 이 완전히 허구적인 "작전"에 대해 나중에 이렇게 적었다: "86개 기병 및 카자흐 대대로 수도를 타격 해야했다. 그런데 우리는 일개 여단과 8개의 허약한 대대로 타격을 가했는데 이 부대들 가운데 반은 장교가 없었다. 주먹 대신 손가락으로 타격을 가한 셈이었다. 결국 손가락만 아플 뿐 상대방은 타격을 느끼지도 못했다." 사실은 손가락으로도 타격이 가해지지 않았다. 아무도 타격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철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반란 부대들은 예정과는 다른 도로로 진군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연대는 다른 사단을 찾았고 포대는 막다른 골목으로 보내졌으며 참모부는 소속 부대와 통신이 되지 않았다. 규모가 큰 철도역에는 모두 소비에트와 노동자 및 군사 위원회가 있었다. 전신 노동자들은 이 조직들에게 모든 사건, 모든 부대의 움직임, 모든 변화들을 전달했다. 또한 이들은 코르닐로프의 전보 명령을 전달하지 않았다. 반란군에게 불리한 정보는 즉시 확대되어 배포되고 벽보로 붙었으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기계공, 신호수, 연료 관리인 등은 선동가가 되었다. 코르닐로프의 부대들이 진군하거나 정지한 것은 바로 이 환경 속에서였다. 상황이 가망이 없음을 곧 눈치챈 지휘부는 진군을 당연히 서두르지 않았다. 이 수동성은 수송체계를 반란군에게 불리하게 만드는 혁명 노동자들을 도왔다. 이렇게 해서 크리모프가 이끄는 군대의 일부는 8개 철도의 역, 측선, 지선 등에 뿔뿔이 흩어졌다. 반란군의 운명을 지도로 추적하면 이들이 철도에서 봉사 술래잡기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8월 30일 밤의 관찰에 기초하여 크라스노프 장군은 이렇게 적고 있다: "거의 모든 곳에서 상황은 한결 같았다. 철도 위에서나 차량 안에서나 말의 안장 위에서나 무장한 기병들은 앉아있거나 서있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에는 병사의 긴 외투를 걸친 활달한 인물들이 일부 있었다." 이 "활달한 인물들"이 곧 다수가 되었다. 반란군과 맞서기 위해 보낸 연대들에서 수많은 대표단들이 수도에서 도착했다. 전투를 하기 전에 이들은 먼저 대화를 나누고 싶어했다. 혁명군은 전투 없이 사태가 해결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희망했다. 이 희망은 올바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카자흐 기병들이 즉시 이들을 만나러 나왔다. 군단의 통신 분대는 기관차를 탈취하여 대표단을 모든 철도로 보냈다. 상황은 모든 부대에게 설명되었다. 집회들은 계속되었고 여기 저기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속았다!"

크라스노프는 말한다: "사단장들 뿐 아니라 연대장들도 자기들 대대와 중대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 지를 몰랐다. 식량과 꼴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모두들 더욱 짜증을 냈다. 주위의 무의미한 모든 혼란을 본 병사들은...자기 부대장과 장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독자 본부를 차린 소비에트 대표단은 이렇게 보고했다: "병사들 사이의 우애행위가 급속히 번지고 있다....군사적 충돌 상황은 종료된 것으로 완전히 자신한다. 모든 쪽에서 대표단들이 오고 있다...." 부대를 지휘하는 일은 장교의 손에서 위원회의 손으로 넘어갔다. 군단 대표 소비에트가 곧 수립되어 40명의 병사로 구성된 대표단이 임명되어 임시정부를 만나기로 예정되었다. 카자흐 기병 병사들은 큰 소리로 이렇게 선언하기 시작했다: 크리모프와 장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수도에서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30일에 스탄케비치는 보이틴스키와 함께 프스코프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도중에 관찰한 바를 전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짜르스코에가 반란군에 의해 점령되었을 것이라고 수도에서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치나에도 아무도 없었다....루가로 가는 길에도 아무도 없었다. 루가는 조용하고 평안했다....군단 참모부가 있을 마을에 도착했으나 역시 아무도 없었다....아침 일찍 카자흐 기병들이 진지를 버리고 수도의 반대 방향으로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반란은 역전되었고 분쇄되었으며 땅으로 꺼져버렸다.

그러나 동궁은 여전히 반란군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케렌스키는 반란군 지휘부와 대화를 시도했다. 그에게는 이 방향이 하층민의 "무정부주의적" 주도성보다는 더 희망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대표들을 크리모프에게 보내 "구국의 이름으로" 그를 수도로 초대하였으며 자신의 명예를 걸고 그의 안전을 보장했다. 사방에서 압박을 받고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크리모프는 물론 이 초대에 서둘러 응했다. 바로 그의 뒤에는 카자흐 기병의 대표단이 따라 붙었다.

전선은 전쟁 총사령부를 지지하지 않았다. 남서 전선만이 어느 정도 진지하게 지지를 시도했다. 데니킨의 참모부는 때를 늦추지 않고 예비조치들을 취했다. 믿을 수 없는 위병들은 카자흐 기병으로 대체되었다. 27일 밤 인쇄기들이 접수되었다. 참모부는 자신감 있는 상황의 주인으로 처신하려고 했으며 심지어는 전선의 병사 위원회가 전신을 이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 환상은 몇 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여러 부대의 대표단이 병사 위원회를 방문하여 지지 의사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장갑차, 기관총, 야전 포대 등이 등장했다. 병사위원회는 즉시 참모부의 활동을 통제했으며 참모부가 적군에 대해 작전을 할 경우에만 주도력을 인정했다. 28일 3시가 되면 남서 전선은 전적으로 병사위원회들의 손에 장악되었다. 데니킨은 질질 눈물을 짜면서 말했다: "이때처럼 나라의 미래가 그렇게 어둡고 우리의 무기력이 그렇게 슬프고 모욕적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다른 전선에서는 사태가 그리 극적이지 않았다: 전선의 사령관이 주위를 둘러보기만 해도 임시정부의 위원에게 우애의 감정이 급류를 이루어 다가가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29일 아침까지 루마니아 전선의 쉐르바초프, 서부 전선의 발루예프, 코커서스 전선의 프르제발스키 장군 등이 충성을 서약하는 전보를 동궁에 보냈다. 클렘보프스키 사령관이 공공연한 반란군 편이었던 북부 전선에는 스탄케비치가 사비츠키라는 자를 그의 부관으로 임명했다.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군사적 충돌의 순간에 전보를 통해 부관으로 임명된 사비츠키는 보병, 카자흐, 당번 병, 심지어는 사관생도 등 누구에게도 자신 있게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심지어 사령관을 체포하는 문제조차 명령이 떨어지면 곧 실행될 정도였다." 클렘보프스키는 별 어려움이 없이 본초-브뤼비치에 의해 대체되었다. 후자는 잘 알려진 볼세비키 친형의 중재로 이후 볼세비키 정부에 참여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남부 전선의 기둥인 돈 카자흐 수장 칼레딘에게는 일이 좀더 잘 풀렸다. 수도에서 들리는 말에 의하면 칼레딘은 카자흐 군대를 동원하고 있으며 전선의 군대가 돈강에서 그와 합류하기 위해 행군 중이었다. 한편 그의 전기작가의 말에 의하면 그는 "철도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에 말을 타고 다니면서....평화로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실제로 칼레딘은 혁명 진영에서 상상한 것보다는 좀더 조심스럽게 처신하고 있었다. 그는 사전에 그에게 알려진 공개적인 봉기의 순간을 택하여 "평화로운" 마을 순찰을 계획했다. 이 결정적인 날에 전보나 기타 통신수단이 그에게 접근하지 않도록 그리고 동시에 카자흐 병력의 정서를 감지하기 위해서였다. 27일 그는 부관인 보가예프스키에게 이렇게 전보를 보냈다: "모든 수단과 힘을 동원하여 코르닐로프를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과 그의 대화는 올바른 의미에서 그에게 수단이나 힘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밀을 경작하는 카자흐들은 코르닐로프를 방어하기 위해 봉기를 일으킬 생각이 없었다. 반란의 붕괴가 명백해지자 소위 돈강 유역 카자흐의 "군대 집단(카자흐의 의회를 이렇게 불렀다)"은 "진짜 세력 역관계가 명확해질 때까지"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전술 덕분에 돈강 유역 카자흐의 수장들은 때를 맞추어 양 진영의 충돌에서 발을 뺄 수 있었다.

뻬쩨르부르그, 모스크바, 돈강 유역, 전선 등 반란군의 대형이 지나가는 여기 저기 그리고 모든 곳에서 코르닐로프의 동조자, 파벌, 우호자 등이 있었다. 이들의 숫자는 전보, 환영 연설, 신문 기사 등으로 판단하면 엄청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겠지만 모습을 드러낼 때가 오자 이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대개의 경우 원인은 개개인의 비겁함이 아니었다. 코르닐로프의 장교들 가운데에는 용감한 인물들이 다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용감성은 적용 지점을 찾을 수 없었다. 대중이 움직이는 순간부터 고립된 개인들은 사건에 접근할 수 없었다. 무게가 있는 산업가, 은행가, 교수, 엔지니어 뿐 아니라 학생들 심지어 전투 장교들조차 밀려나고 한쪽으로 던져지고 팔꿈치로 밀쳐졌다. 이들은 마치 발코니 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건들을 쳐다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신세였다. 데니킨 장군과 함께 이들은 자신들의 모욕적이고 끔찍한 무기력을 저주하는 것 이외에 달리 할 것이 없었다.

8월 30일 집행위원회는 모든 소비에트에 "코르닐로프 군대의 사기가 완전히 꺾였다"는 기쁜 소식을 보냈다. 이들은 코르닐로프가 반란을 위해 가장 사기가 높으며 볼세비키들의 영향력으로부터 가장 잘 보호되어 가장 애국적인 성향이 강한 부대들을 선정했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렸다. 병사들이 장교들을 결정적으로 불신하고 이들을 적으로 인식한 결과 군대의 사기 저하가 초래되었다. 따라서 코르닐로프에 대항하여 혁명을 위해 투쟁한다는 것은 군대의 사기 저하가 더욱 심화되는 것을 의미했다. 볼세비키들이 사기 저하의 주범이라고 비난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반란 장군들은 그리도 엉성하며 힘이 없어서 구체제에 대해서 우연히 승리한 것처럼 보였던 혁명의 저항력을 검증할 기회를 마침내 갖게 되었다. 2월 시기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군인의 허풍을 드러내는 화려한 표현이 반복되어왔다: "강력한 부대를 하나만 주면 놈들에게 본때를 보이겠다." 2월말 하발로프와 이바노프 장군의 경험은 이 허풍 센 군인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와 똑같은 곡조를 민간인 전략가들은 빈번히 읊었다. 10월당의 쉬들로프스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만약 2월에 수도에서 "크지는 않지만 규율과 전투적 기상으로 단결된 부대가 하나만 있었어도 2월 혁명은 며칠만에 진압되었을 것이다." 악명 높은 철도 재벌 부블리코프는 이렇게 적었다: "전선에서 차출된 규율이 잡힌 1개 사단만 있었어도 봉기를 철저히 붕괴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사건들에 참여했던 여러 명의 장교들은 데니킨에게 확언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를 아는 지휘관 밑에 확실한 대대 하나만 있었어도 전체 상황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구츠코프가 전쟁 장관으로 있을 때 크리모프 장군은 후방으로 그를 방문하여 이렇게 제안했다: "1개 사단으로 수도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물론 피를 당연히 흘려야합니다." "구츠코프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이 제안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래에 통령이 될 인물을 위해 나름의 "8월 27일"을 준비하고 있던 사빈코프는 2개 연대만 있으면 볼세비키들을 가루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제 운명은 "인생의 즐거움으로 가득한" 장군을 통해 이 작자들의 영웅적인 계산을 검증할 충분한 기회를 제공했다. 혁명군에게 단 한 발의 총도 쏘지 못한 후 머리를 숙인 채 부끄러움과 모욕감에 젖은 크리모프는 동궁에 도착했다. 케렌스키는 그와 멜로드라마를 연출할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이 드라마에서 그의 특별 효과는 성공이 미리 예약되어 있었다. 수상을 만난 후 전쟁부 집무실로 돌아오는 도중 크리모프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렇게 해서 혁명을 진압하려는 그의 시도는 "피를 흘려야 했다."

동궁의 인물들은 엄청난 난관이 도사리고 있던 상황이 유리하게 끝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 후 이제 좀더 편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중단되었던 평소의 업무에 가능한 빨리 복귀하기로 결정했다. 케렌스키는 스스로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짜르의 장군들과 정치적 유대를 유지하려는 관점에서 보면 그보다 더 나은 적임자는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전쟁 총사령부의 참모장에 그는 알렉세이예프를 선정했다. 그런데 그는 이틀 전만 하더라도 수상이 될 뻔했었다. 처음에는 주저하고 자기 친구들하고 논의한 후 이 장군은 경멸에 찬 인상을 찌푸린 후 자신의 임명을 수락했다. 물론 그의 친구들에게 설명했듯이 이 분쟁을 평화적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니콜라스 2세가 최고사령관이었을 때 참모장을 지낸 그는 이제 케렌스키 정권 하에서도 같은 직책을 누리게 되었다. 이것은 환상적이었다! 이 임명 직후 케렌스키는 그의 환상적인 임명을 이렇게 설명했다: "전쟁 총사령부의 인물들과 친분이 있고 군부의 고위급 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알렉세이예프 만이 군의 지휘권을 코르닐로프로부터 새로운 인물들에게 평화로이 이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였다. 반란자들과 같은 편인 그의 임명은 조금의 가능성만 있었더라도 반란자들의 저항을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사빈코프가 반란이 시작되었을 때 소환되었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알렉세이예프는 반란의 실패 후 참모장으로 발탁되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익과 대화 채널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임 최고사령관 케렌스키는 장군들과 우정을 유지하는 것이 특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혼란이 있은 후에는 확고한 질서를 안착시키는 것이 필요할 것이고 따라서 이중으로 강력한 권력이 필요하다.

한편 전쟁 총사령부에는 이틀 전만 해도 지배했던 낙관적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반란 음모자들은 후퇴할 길을 찾고 있었다. 케렌스키에게 보낸 전보를 통해 코르닐로프는 "전략적 상황으로 보아 강력한 정부가 구성되는 것"이 확실하다는 조건 하에서 최고사령관직을 평화적으로 내놓을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반란 실패자들은 이 거대한 최후통첩에다가 조그만 최후통첩을 덧붙였다: 코르닐로프 자신은 "군대에 없어서는 안될 장군들과 다른 인물들을 체포하는 것은 대체로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즐거워진 케렌스키는 즉시 자신의 적을 만날 조치를 취했다. 그는 라디오를 통해 군사작전의 영역에서 코르닐로프 장군의 명령들을 모두 따를 의무가 있다고 선언했다. 같은 날 코르닐로프 자신은 크리모프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세계 역사상 유일한 종류의 에피소드가 일어났다: 조국에 대한 반역과 배신을 저질러 법정에서 심리를 받을 최고사령관이 군대 지휘를 계속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케렌스키라는 인물의 형편없음이 새로이 드러나자 반란 음모자들의 기대는 즉시 상승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너무 싼값에 넘기는 것을 두려워했다. 코르닐로프는 몇 시간 전에 보낸 전보에서 "이 끔찍하게 험악한 순간에" 내부의 갈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전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한이 절반 정도 회복된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에게 압박을 가하라"는 전갈을 칼레딘에게 전하기 위해 두 사람을 그에게 보냈다. 그리고 동시에 크리모프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상황이 허용한다면 내가 보낸 지시의 정신을 살려 독자적으로 행동하라." 이 지시의 정신은 다름이 아니라 정부를 전복시키고 소비에트 요인들을 교수형에 처하는 것이었다.

신임 참모장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전쟁 총사령부를 장악하기 위해 출발했다. 동궁의 인물들은 이 작전을 진지하게 간주했다. 실제로 코르닐로프는 성 조오지 기병 대대, "코르닐로프" 보병 연대, 1개 테킨스키 기병 연대 등을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 조오지 기병 대대는 반란 시작부터 정부 편으로 넘어가 버렸고 코르닐로프 및 테킨스키 연대들은 아직 반란군에 충성하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으나 일부는 떨어져 나갔다. 전쟁 총사령부에는 대포가 전혀 없었다. 이 상황에서 반란군의 저항은 말도 되지 않았다. 알렉세이예프는 코르닐로프와 루콤스키를 의례상 방문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시작했다. 이 방문 도중 양 측 모두는 신임 최고사령관 케렌스키에 대해 군인들의 어휘인 욕설을 일치된 마음으로 퍼부었다고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알렉세이예프나 코르닐로프나 구국의 행위는 어쨌든 당분간 연기 되어야한다고 생각했음이 명백했다.            

그러나 전쟁 총사령부에서 승자도 패자도 없는 평화조약이 행복하게 맺어지는 동안 수도의 분위기는 대단히 뜨거워지고 있었다. 동궁에서는 인민에게 알릴 안심되는 소식이 모길레프로부터 나오기를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정보를 얻기 위해 알렉세이예프의 옆구리를 계속 찔러대었다. 케렌스키가 신뢰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인 바라노프스키 대령은 전화를 통해 이렇게 불평했다: "소비에트는 들끓고 있다. 권력이 건재함을 과시하고 코르닐로프 일당을 체포해야 이 분위기가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알렉세이예프의 의도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응답했다: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우리가 소비에트의 끈질긴 마수에 완전히 넘어갔다는 나의 두려움은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이 되었다." 익숙한 대명사 "우리"는 케렌스키 파벌을 의미한다. 알렉세이예프는 비난의 화살을 완화시키기 위해 조건부로 자신을 이 파벌에 포함시키고 있다. 바라노프스키 대령도 같은 어조로 대답하고 있다: "소비에트의 끈질긴 마수에 넘어간 우리를 신께서 구원하소서." 혁명 대중이 코르닐로프의 마수에서 케렌스키를 구원하자마자 이 민주주의 지도자는 대중에 대항하기 위해 서둘러 알렉세이예프와 합의했다: "우리는 소비에트의 끈질긴 마수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러나 알렉세이예프는 필요상 주요 반란 음모자들을 체포하는 의례를 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고사령관직에서 제거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인민에게 선언한지 나흘만에 코르닐로프는 아무 반대 없이 조용히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모길레프에 도착한 특별조사위원회 역시 통신부 차관, 여러 명의 참모부 소속 장교들, 도착하지 않은 외교관 알라딘, 장교동맹 지도위원회 위원 전체를 체포했다.

반란이 붕괴된 후 첫 몇 시간동안 화해주의자들은 맹렬한 몸짓을 했다. 심지어 아브크센티에프조차 번갯불처럼 번쩍거렸다. 반란군은 꼬박 3일 동안 아무런 지휘도 없이 전선을 떠나있었다! 집행위원회 위원들이 외쳤다: "반역자들에게 죽음을!" 아브크센티에프는 이 목소리들을 환영했다: 그렇다, 코르닐로프와 그의 추종자들의 요구로 사형이 도입되었다. "사형 제도는 반란자들에게 그만큼 더욱 확실히 적용될 것이다." 이 선언에 열렬한 박수 갈채가 오래 지속되었다.

2주일 전까지만 해도 사형 제도의 복원자라고 칭송하며 코르닐로프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던 모스크바 교회협의회는 이제 전보를 통해 정부에 이렇게 호소했다: "신과 예수 같은 이웃 사랑의 이름으로 잘못을 저지른 코르닐로프의 목숨을 살려주시오." 이밖에 우익은 다른 압력 수단들도 동원하여 반란 음모자들의 목숨을 구하려했다. 그러나 정부는 피를 볼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야만 사단의 대표단이 동궁의 케렌스키를 방문했다. 신임 최고사령관의 일반적인 발언에 대해 병사 가운데 하나가 "반역 지휘관들은 인정 사정없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응답했다. 이때 케렌스키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귀하의 임무는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요. 우리는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 취할 것이요." 왼발을 구르면 대중이 나타났다가 오른발을 구르면 이들이 사라져야 한다고 케렌스키는 생각했던 모양이다.

"우리는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 취할 것이요." 그러나 이들이 한 모든 조치는 의심스럽거나 한심스럽지는 않더라도 불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대중은 틀리지 않았다. 상층부는 코르닐로프 반란을 초래한 조건을 그대로 복원시키는데 관심의 대부분을 쏟았다. 루콤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조사위원회 위원들의 몇몇 질문이 끝나자 이들이 우리에게 대단히 우호적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이들은 원래 반란 음모자들의 동조자요 보조자들이었다. 군사법정의 검사 샤블로프스키는 피고인들에게 사법 정의를 피하는 문제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다. 그러자 전선의 병사 조직들이 항의를 했다. "반란 장군들과 동조자들은 국가와 인민의 죄인으로 취급받지 않고 있다....반란 음모자들은 외부 세계와 통신할 완벽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루콤스키는 이 주장을 올바른 것으로 입증하고 있다: "최고사령관의 참모부는 우리의 관심사들에 대해 정보를 계속 제공했다." 분노한 병사들은 여러 번 장군들을 자신의 법정에서 심판할 충동을 느꼈다. 체포된 반란자들은 비크호프 구치소에 급파된 반혁명적 1개 폴란드 사단의 보호로 즉결 처형을 겨우 면했다.

9월 12일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전쟁 총사령부에서 밀류코프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대부르주아 계급의 행동에 대한 반란 음모자들의 합당한 분노를 담고 있었다. 대부르주아 계급은 처음에는 반란자들의 반란을 부추기고는 반란이 붕괴하자 모른 체했다. 알렉세이예프는 분노가 담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의 일부 계층은 반란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지적으로 동조했을 뿐 아니라 가능한 선에서 코르닐로프를 도왔다는 것을 귀하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장교동맹의 이름으로 알렉세이예프는 반란 실패자들에게 등을 돌린 비쉬네그라즈키, 푸틸로프, 기타 대자본가들에게 "공동의 사상과 준비로 단결했던 인물들의 배고픈 가족들"을 위해 30만 루블을 모금할 것을 요구했다. 이 편지는 공개적인 위협으로 끝을 맺었다: "정직한 언론이 상황에 대한 열정적인 설명을 즉시 시작하지 않을 경우...코르닐로프 장군은 반란 준비활동, 인물 및 그룹들과 나눈 대화, 이들의 역할 등 전부를 법정에서 널리 폭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눈물 젖은 최후 통첩의 실제 결과에 대해서는 데니킨이 이렇게 보고한다: "10월말이 되어서야 이들은 모스크바에서 약 4만 루블을 코르닐로프에게 보냈다." 이 기간에 밀류코프는 일반적으로 정치무대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입헌민주당의 공식 견해에 따르면 그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크림반도에 갔다." 그 동안 격렬한 선동활동을 했으니 이 자유주의 지도자는 확실히 휴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조사위원회의 희극은 10월 볼세비키 봉기 때까지 질질 끌었다. 이후 코르닐로프와 그의 동조자들은 석방되었을 뿐 아니라 케렌스키의 전쟁 총사령부에 의해 모든 필요한 문서들을 제공받았다. 이 탈출한 장군들이 나중에 내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코르닐로프, 자유주의자 밀류코프, 흑백인조의 우두머리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단결시킨 성스러운 목적의 이름으로 수십만 명의 인민이 살해되었고 러시아 남부와 동부는 약탈의 대상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또한 나라의 산업은 거의 완벽히 파괴되었으며 적색 테러가 혁명에 강요되었다. 케렌스키의 법정에서 풀려난 후 코르닐로프는 내전의 전선에서 볼세비키의 포탄에 맞아 곧 사망했다. 칼레딘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돈강 유역 카자흐의 "군대 집단"은 칼레딘 체포 명령을 철회하고 수장으로서의 그의 지위를 복권시킬 것을 요구했다. 여기서도 케렌스키는 자신의 말을 번복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스코벨레프는 군대 집단에 사과를 하도록 노보체르카스크에 파견되었다. 민주 진영의 장관인 그는 칼레딘이 주도한 세련된 빈정거림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카자흐 장군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돈강 유역에서 폭발하고 있던 볼세비키 혁명에 의해 사면초가가 된 그는 몇 달 후 자살했다. 그러자 코르닐로프의 깃발은 데니킨 장군과 콜착 제독의 손에 넘어갔다. 내전의 주요 기간은 이들의 이름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들은 1918년과 이후의 일이다.

 

 

제 11장 반동의 공세에 놓인 대중

혁명의 직접적 원인은 서로 격돌하고 있는 계급들의 심리 변화이다. 사회의 물질적 관계는 이 과정의 통로를 규정할 뿐이다. 집단의식의 변화는 당연히 반정도 은폐된다. 이 변화가 일정 수위에 도달할 때에만 새로운 정서와 사상들은 대중투쟁의 형태로 표면에 드러난다. 대중의 투쟁은 비록 매우 불안정하지만 새로운 사회 균형을 조성한다. 혁명의 진전은 새로운 단계마다 권력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후 즉시 이것을 다시 은폐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문제는 새로 부각된다. 반혁명도 같은 리듬을 가지고 있다. 다만 혁명의 영화와는 정반대로 필름이 돌아갈 뿐이다.

정부와 소비에트 상층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혁명의 과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대중의 깊은 심리 변화를 파악하지 않고는 어느 정당의 진정한 의의나 정치 지도자들의 술수를 이해할 수 없다. 7월에 노동자와 병사들은 패배했다. 그러나 10월의 저지할 수 없는 공세를 통해 이들은 권력을 장악했다. 그렇다면 이 4개월 동안 이들의 머릿속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위에서 비 오듯 쏟아지는 공격을 이들은 어떻게 견디고 살아남았는가?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공개적인 권력 장악 기도에 맞섰는가? 여기에서 독자들은 7월의 패배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제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것이 종종 필요하다. 지금 우리 앞에는 10월의 도약이 놓여있다.   

소련의 관변 역사는 일종의 고무 도장처럼 다음과 같은 견해를 확립했다: 볼세비키당에 대한 탄압과 비방을 결합한 반동의 7월 공격은 노동자 조직들에게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 견해는 실제 사실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당원 수가 감소하고 대중 투쟁이 퇴조한 현상은 물론 몇 주일만 지속했다. 투쟁의 밀물은 대단히 빨리 시작되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대단히 큰 소리를 내며 시작되었다. 그래서 탄압과 퇴조의 순간에 대한 기억을 반 이상 지워버렸다. 승리는 직전의 패배를 언제나 새로이 조명한다. 그러나 지역 당 조직의 회의록 출판에 비례하여 7월 퇴조기의 그림들이 더욱 선명해진다. 7월 이전까지 투쟁은 중단 없이 상승했다. 이에 비례하여 7월의 하강은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역관계가 한쪽에게 명확히 불리하게 작용한 결과가 패배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패배는 언제나 패자에게 불리하게 역관계를 변화시킨다. 왜냐하면 승자의 자신감이 상승하는 반면 패자의 자신감은 감소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기 역량에 대한 이러저러한 어림 계산은 객관적 역관계의 대단히 중요한 요인이다. 뻬쩨르부르그의 노동자와 병사들은 직접 패배를 당했다. 대중은 혁명을 급격하게 전진시키려는 강한 충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객관적인 역관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대중의 투쟁 목표는 혼란과 모순에 빠졌다. 또한 지방과 전선은 여전히 후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들이 결합하여 결국 7월 투쟁은 패배했다. 따라서 패배의 결과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날카롭게 드러난 곳은 바로 수도였다. 그러나 지방이 7월 패배를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는 관변 역사의 빈번한 주장 역시 실제 사실과 크게 어긋난다. 이 주장은 이론적으로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과 문서들의 증언에 의해서도 반박되고 있다. 거대한 문제들이 등장할 때마다 나라 전체는 자기도 모르게 항상 수도를 쳐다보았다. 따라서 수도의 노동자와 병사들의 패배는 특히 지방의 선진 부위에 엄청난 인상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 실망감, 냉담함 등이 편차를 달리했지만 모든 곳에서 관찰되었다.

혁명적 압력의 감소는 무엇보다도 적에 대한 대중의 저항력의 상당한 약화로 드러났다. 수도로 진입한 군대는 노동자와 병사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공식적인 징벌을 수행했다. 이와 동시에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반정도 자원한 패거리들이 거리낌없이 노동자 조직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프라우다 지의 편집실과 볼세비키당 인쇄소가 공격당한 후 금속노동조합 본부도 같은 신세가 되었다. 다음에는 지구 소비에트가 공격 대상이 되었다. 화해주의자들도 반동의 공격으로부터 면제되지 않았다. 10일에는 내무장관 체레텔리를 지도자로 하고 있는 멘세비키당의 기관 한 곳이 공격받았다. 수도에 도착하고 있는 병사들에 대해 단은 대단한 자기 절제력을 발휘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혁명의 폐허 대신 혁명의 새로운 승리를 목격하고 있다." 이 승리는 너무나 멀리 나아가서 멘세비키 프루쉬츠키에 따르면 거리의 행인들조차 노동자처럼 생겼거나 볼세비키로 의심될 경우 언제든지 잔인하게 구타당할 위험이 있었다. 정세가 급변했다는 것을 이것처럼 의심의 여지없이 보여주는 징후가 또 어디 있겠는가!

10월 혁명 직후 "혁명수호 특별위원회(역자 주: Cheka. 1917년에 창설된 최초의 볼세비키 비밀경찰 조직.)"의 유명한 위원이 된 볼세비키당 뻬쩨르부르그 위원회의 라트시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7월 9일. 수도의 모든 인쇄소는 파괴되었다. 우리 신문과 유인물을 인쇄하려는 자는 하나도 없다. 비합법 신문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비보르그 지구는 모든 이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뻬쩨르부르그 위원회와 탄압 당하고 있는 당 중앙위원들이 여기에 모여있다. 르노 자동차 공장의 경비실에는 레닌이 참석한 위원회 협의회가 열렸다. 총파업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위원회 내에서 업무 분담이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총파업을 지지한다. 레닌은 상황을 설명한 후 총파업 취소 동의안을 제출한다....7월 12일. 반혁명이 승리했다. 소비에트는 권력을 박탈당했다. 미친 듯이 날뛰는 사관생도들은 멘세비키들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의 일부는 자신감을 상실했다. 신입 당원들의 행렬이 멈추었다....그러나 아직도 탈당하는 당원들은 없다." 7월 이후 "뻬쩨르부르그 공장들에서 사회혁명당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고 노동자 시스코가 적고 있다. 볼세비키당의 고립은 화해주의자들의 비중과 자신감을 자동적으로 상승시켰다. 7월 16일 바실리예프스키 오스트로프의 대표 한 명이 볼세비키당의 어느 도시 협의회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그가 소속된 지구의 정서는 몇몇 공장들을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충만하다. "발트해 연안 공장들에서는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이 우리를 몰아내고 있다." 여기서 사태는 너무 멀리 나가고 있다: 볼세비키들은 살해된 카자흐 기병들의 장례식에 참여해야 한다고 공장위원회가 선포했으며 볼세비키들은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물론 공식적으로 당원의 이탈은 미미했다. 지구 전체에서 4천명 당원 가운데 공개적으로 탈당한 수는 100명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첫 며칠 동안 훨씬 많은 당원들이 대오에서 말없이 떨어져 나갔다. 노동자 미니초프는 이 사건 직후 이렇게 회상했다: "목숨이 두려워 당원증을 '씹어 삼키고' 당과의 모든 관계를 부인하는 자들이 우리 대오에 있다는 것을 7월 시기가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나 이런 자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슐리아프니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7월 사건과 그 직후 진행된 우리 조직에 대한 폭력과 비방 캠페인은 7월초에 엄청난 규모로 증대하고 있던 우리의 영향력을 정지시켰다....당 자체가 반합법이 되었고 주로 노동조합과 공장위원회에 의존하여 방어투쟁을 전개해야했다."

한편 볼세비키들이 독일 첩자라는 비난은 수도 노동자들에게조차 상당수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요하고 있던 노동자들은 당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당원이 막 되려고 하던 노동자들은 동요했다. 이미 당원이 된 노동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탈퇴했다. 볼세비키 노동자들과 함께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 노동자들도 7월 시위에 큰 역할을 했었다. 그런데 반동의 탄압을 받자 이들은 제일 먼저 자기 당의 깃발과 노선 속으로 도망쳐버렸다. 소속 당의 규율을 무시하고 시위에 참여한 것이 이들에게는 진짜 큰 실수였던 것처럼 보였다. 공식적으로 선언되고 법으로 치장된 비방의 영향을 받아 볼세비키당에 우호적이었던 광범위한 비당원 노동자들도 당에서 멀어졌다.

이 변화된 정치 분위기 속에서 반동의 탄압은 이중의 효과를 가져왔다. 볼세비키당 뻬쩨르부르그 위원회 위원이었으며 가장 고참 당원의 한 명이었던 올가 라비치는 탄압 직후 이렇게 보고했다: "7월 시기는 당 조직을 산산조각 내어 탄압 이후 첫 3주일간 당은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라비치는 대개 당의 공개활동을 염두에 두고 있다. 오랫동안 당 신문은 발행될 수 없었다. 볼세비키당을 도우려는 인쇄소는 찾을 수 없었다. 인쇄소 주인들만 인쇄에 저항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 인쇄소에서 노동자들은 볼세비키당 신문이 인쇄될 경우 일을 그만두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주인은 이미 서명한 인쇄 계약서를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다. 이 때문에 크론슈타트에서 발행한 신문이 당분간 수도에 보급되었다.

이 몇 주일동안 그나마 공개 투쟁의 장에 모습을 보였던 극좌 그룹은 "멘세비키-국제주의자들"이었다. 노동자들은 마르토프의 연설을 열심히 들었다. 혁명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기보다는 그 동안의 성과를 보존하는 투쟁이 필요한 후퇴기에 그의 투쟁 본능은 살아 올랐다. 마르토프의 용기는 비관적 용기였다. 그는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동 세력이 혁명을 완전히 정지시킨 것 같다....러시아 혁명에서 농민과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할 여지가 없다면 명예롭게 투쟁의 장에서 떠납시다. 이 도전을 말없는 포기가 아니라 정직한 투쟁으로 받아들입시다." 이 제안은 단과 체레텔리 같은 멘세비키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들은 노동자와 병사들에 대한 장군과 카자흐 기병들의 승리를 무정부적 혼란에 대한 혁명의 승리로 바라보았다. 고삐가 풀린 채 맹렬하게 계속되고 있는 볼세비키당에 대한 비방과 카자흐 기병 앞에서 화해주의자들은 계속 배를 깔고 굴종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몇 주일 동안 노동자들은 마르토프의 행위를 고귀한 것으로 인정했다.

7월 위기는 수도의 주둔군에게 특히 심한 타격이었다. 정치적으로 병사들은 노동자들보다 한참 뒤떨어져 있었다. 소비에트의 노동자 부문이 볼세비키당으로 넘어간 후에도 병사 부문은 화해주의의 아성이었다. 병사들은 총을 들고 투쟁할 준비가 놀랍게도 잘 되어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시위에서 이들은 노동자들보다 훨씬 공격적이었다. 그러나 공격을 당할 때에는 이들이 훨씬 멀리 후퇴했다. 볼세비키당을 적대하는 물결은 수도의 주둔군 사이에 상당히 높게 일었다. 한때 병사였던 미트레비치는 이렇게 말한다: "7월 패배 후 나는 연대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탄압의 폭풍이 지나가기 전에 살해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7월 시위에 가장 앞장섰으며 따라서 직후 가장 심한 탄압을 받았던 혁명적 연대들에서 볼세비키당의 영향력은 실제로 가장 낮았다. 너무 영향력이 낮았기 때문에 이 연대들에서는 3개월이 지난 후에도 조직을 복구할 수 없었다. 이 부대들은 너무 심한 타격을 받아 기운이 완전히 바닥난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당 군사기구는 단호히 활동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한때 병사였던 미니초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7월 패배이후 당의 상층부 뿐 아니라 일부 지구위원회들도 당 군사기구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크론슈타트에서 당은 250명의 당원을 잃었다. 이 볼세비키 아성의 정서는 크게 나빠졌다. 헬싱키에도 이 정서가 퍼져서 아브크센티에프, 부나코프 그리고 변호사 소콜로프는 이 곳을 방문하여 볼세비키 군함들의 참회를 받았다. 이들의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주요 볼세비키 당원들을 체포하고 공식적으로 비방을 퍼뜨리고 위협을 가하여 이들은 심지어 볼세비키 전함인 표트로파블로프스키에서조차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러나 "선동가들"을 체포하여 넘기라는 이들의 요구는 모든 군함들에 의해 거부당했다.

모스크바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아트니츠키는 이렇게 회상한다: "부르주아 언론의 공격은 모스크바 위원회의 일부 위원들에게조차 공포를 유발시켰다." 7월 패배 후 이 조직은 당원 수가 줄었다. 모스크바의 노동자 라테힌은 이렇게 적고 있다: "죽을 지경으로 진짜 힘들었던 그 당시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자모스크보레츠키 지구 소비에트의 전원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이 회의에는 볼세비키 동지들이 별로 없었다....이 와중에 아주 활동적인 동지 스테클로프가 가까이 다가와서 입을 거의 놀리지 않은 채 이렇게 물었다: '레닌과 지노비에프가 봉인열차를 타고 귀국한 것이 사실이야? 이들이 독일 정부의 돈을 받고 일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야...?' 이 질문을 받자 나의 심장은 고통으로 내려앉았다. 콘스탄티노프 동지도 다가와서 물었다: '레닌은 어디에 있니? 도망쳤다고 하던데....이제 어떻게 하냐?' 이런 식이었다." 이 생생한 그림은 이 당시 선전 노동자들의 경험을 정확히 전달하고 있다. 모스크바의 포병 다비도프스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알렉신스키가 공개한 문서들이 돌면서 여단 내에는 엄청난 혼란이 일었다. 볼세비키당에 가장 충성하던 우리 포대도 이 비겁한 거짓말에 타격을 받아 동요했다....우리는 모든 신념을 잃은 것 같았다."

이 당시 당 중앙위원이었으며 넓은 모스크바 지역의 활동 지도자였던 야코블레바는 이렇게 적고 있다: "7월 패배 이후 지역의 모든 보고 내용들은 한 목소리로 대중의 정서가 급격히 가라앉았으며 당에 대해 명확히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다고 묘사했다. 우리 연설자들이 두들겨 맞은 경우도 상당했다. 당원 수는 급격히 감소했으며 특히 남부의 도들에서는 여러 조직들이 아예 없어졌다." 8월 중순이 되어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당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중 사이에서 정치활동은 계






  • 차라리 책의 요약이나 소개정도로 글을 쓰고, 책 링크를 걸거나 txt로 만들어 읽을 사람은 다운로드할 수 있게 하는게 더 좋을 꺼 같네요.
    글이 너무 길어 여러개에 걸쳐 있고, 홈페이지 형식이라 읽기가 조금 곤란스러운 면이ㅎㅎ
  • 방문자
    17.05.02
    그러게요. 읽으려다가 포기. 
  •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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