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공산주의자2018.06.11 15:40

이론에 대한 회의와 절충

[새로운 인터내셔널](New International) 1939년 1월호에서 버넘과 섁트먼 동지는 공동으로 "후퇴하고 있는 지식인"(Intellectuals in Retreat) 이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에는 올바른 사고와 정확한 정치분석들을 많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 결함까지는 안가더라도 근본적으로 부족한 점들이 드러나고 있어서 글의 가치가 손상을 입고 있다. 이 글은 무엇보다도 충분한 이유도 없이 "이론 "의 옹호자로 자처하는 인사들을 겨냥하여 논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다. 의도적으로 이 글은 이론적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스프링이 빠진 벽시계처럼 미국의 "급진" 지식인들은 변증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맑스주의자로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는 변증법을 기각한 이유가 전혀 실려있지 않다. 그러나 이유는 단순하다. "무제한의 기회"가 보장되는 이 나라에서 지식인들은 계급투쟁 원리를 다른 어느 나라 지식인들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거부해왔기 때문이다. 사회 모순을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이론 영역에서 모순의 논리인 변증법을 거부하였다. 정치 영역에서는 영특한 삼단논법을 통해 "공정한" 정치강령의 올바름을 모든 사람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사회는 "합리적인" 조치들을 통해 재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론 영역에서도 "상식" 수준으로 낮추어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이 모든 문제들의 해답을 찾는 데 충분하다고 이들은 생각하였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짬뽕인 실용주의는 미국의 국가철학이 되었다. 맥스 이스트먼(Max Eastman)의 이론적 방법론은 헨리 포드(Henry Ford)의 방법론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두 사람 모두 살아 움직이는 사회를 "공돌이(engineer)"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다만 이스트먼은 플라톤처럼 관념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맥스 이스트먼의 할아버지들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영토를 차지하고 재산을 쌓아 올리는 일에 변증법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변증법에 대해서 미국 지식인들이 경멸을 나타내는 이유는 이렇게 역사적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변해서 미국 자본주의처럼 실용주의 철학은 파산지경에 처해 있다.

사회의 물질적 발전과정과 철학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관계를 "후퇴하고 있는 지식인"의 필자들은 보여주지 않았고 보여줄 수도 없었으며 보여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왜 이런 태도를 보이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버넘과 섁트먼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이 글의 두 저자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일반이론에 대해서 평가를 완전히 달리하고 있다. 한 명은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나머지 한 명은 거부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론은 어떤 방식으로든 실천과 관계있지만 이 관계는 언제나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미 말한 바 있듯이 인간은 종종 일관성이 없이 행동한다. 본 저자들은 모두 상대방이 `철학 이론 '과 정치적 실천 사이에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비일관성은 어떤 경우에는 구체적이고도 결정적인 정치적 이견을 가지고 올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이견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좀더 추상적인 이론에 대한 서로의 견해가 오늘이나 내일의 구체적인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 반드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고 증명한 적은 아직은 없다. 사실 정당, 강령, 투쟁들은 이러한 구체적인 사안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같이 일하면서 좀더 여유가 있으면 좀더 추상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 두 저자는 희망하고 있다. 한편 파시즘, 전쟁, 실업이 인류를 괴롭히고 있다."

이 대단히 놀라운 논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엉터리 방법론으로 가끔 올바른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올바른 방법론으로 정말이지 빈번하게 올바르지 못한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방법론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어느 때이든 좀더 여유가 있으면 방법론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할 일들이 있다는 식이다. 연장이 나쁘다고 조장에게 불평하는 노동자가 조장의 다음과 같은 답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상상해 보자: 나쁜 연장으로도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으며 좋은 연장을 가지고도 많은 사람들은 재료만 낭비할 뿐이다. 이런 대답에 대해서 노동자는 특히 도급제로 삯을 받을 경우 전혀 황당하지 않은 올바른 말로 조장에게 대꾸할 것이다. 노동자는 노동대상을 다루기 어렵기 때문에 좋은 연장의 가치를 인정한다. 반면에 쁘띠부르조아 지식인은 쉽게 바뀌는 말과 피상적인 일반화를 자신의 "연장"으로 삼는다. 그리고는 주요한 사건들이 그의 머리를 강타할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당원이 변증법에 몰두해야 한다고 말할 경우 이것은 당연히 무기력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계급투쟁이라는 학교를 졸업한 노동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변증법적 사고에 도달한다. 변증법이라는 용어는 몰라도 그는 그 방법론과 결론을 즉시 받아들인다. 그런데 쁘띠부르조아에게는 설상가상의 일이 벌어진다. 물론 노동계급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어서 내적인 혁명이 없이도 노동계급의 견해로 넘어가는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분자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학교에서 훈련받은 쁘띠부르조아의 경우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이들의 이론적인 편견들은 이미 학교 걸상에서 완성되었다. 변증법의 도움이 없이도 온갖 지식들을 많이 얻는다면 이들은 변증법이 없이도 세상을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이들은 이론의 도구들을 확인하고 닦고 벼리는 일에 실패하고 협소한 일상적 관계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정도만큼 이들은 변증법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거대한 사건들에 의해서 내동댕이 처질 경우 이들은 쉽게 방향을 잃고 다시 쁘띠부르조아적 사고방식에 빠져든다.

"비일관성"에 기대어 원칙에 위배되는 이론적 동맹을 정당화하는 것은 맑스주의자 답지 못한 행위이다. 비일관성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며 정치에서는 개개의 증상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비일관성은 보통의 경우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일관성을 가질 수 없는 사회 세력들이 존재한다. 오래된 쁘띠부르조아 경향을 벗어 던지지 못한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은 노동자 정당 내부에서 의식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이론적인 타협을 강요당한다.

위에서 인용한 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변증법적 방법론에 대한 섁트먼 동지의 태도는 절충적 회의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 동지는 맑스주의 학교에서 이 질병에 걸리지 않았다. 당연히 모든 종류의 회의에 빠지는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 몹쓸 병을 전염받았다.  

 

경고와 확인

이 글은 너무도 나를 놀라게 하였다. 그래서 즉시 섁트먼 동지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동지와 버넘 동지가 지식인들에 대해 쓴 글을 지금 바로 읽었습니다. 많은 부분들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변증법에 대한 부분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편집자인 동지 개인이 맑스주의 이론에 가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타격입니다. 버넘 동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변증법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점은 아주 명확하며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동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변증법을 인정한다. 그러나 문제될 게 전혀 없다. 이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동지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새로운 인터내셔널] 독자들에게 엄청난 혼란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이스트먼 같은 작자들에게 가장 훌륭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좋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대화를 나누도록 합시다."

현재의 논쟁이 진행되기 몇 달 전인 1월 20일에 나는 이 편지를 썼다. 그런데 3월 5일이 되어서야 답장이 왔다. 내가 왜 이 문제에 대해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의 답장이었다. 3월 9일 나는 섁트먼 동지에게 다시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변증법을 거부하는 동지와 협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나는 조금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변증법이 아주 중요한 쟁점이 되는 그리고 될 수밖에 없는 글을 이런 동지와 공동으로 작성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다고 확인했을 뿐입니다. 논쟁은 정치와 이론의 두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동지의 정치적 비판은 좋습니다. 그러나 동지의 이론적 비판은 충분하지 못합니다. 적극적으로 비판해야할 지점에서 비판을 거두기 때문입니다. 즉 변증법을 거부하는 인사들의 오류는 적어도 이론의 측면에서 보면 변증법을 통해 사물의 논리를 끝까지 전개할 수 없는 무능력과 무의욕의 결과입니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그리고 이 임무는 교육적 측면에서 아주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지는 변증법은 개인적인 문제이며 변증법적 논리가 없이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서 섁트먼 동지는 변증법에 반대하는 버넘동지와 동맹을 맺었다. 이로서 그는 이스트먼, 쿡(Cook) 그리고 많은 인사들이 변증법에 반대하는 투쟁을 시작하더니 결국 사회주의 혁명에 반대하는 정치투쟁을 하는 이유들을 보여줄 가능성을 스스로 박탈했다.

현재 당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선 논쟁은 내가 예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내가 우려할 수 있었던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날카로운 형태로 나의 우려와 경고를 확인해 주었다. 섁트먼 동지의 방법론적 회의주의는 소련의 사회 성격 문제에서 한탄스러운 열매를 맺었다. 꽤 오래 전부터 버넘 동지는 자신의 직관적인 인상을 통해 비노동계급적 비부르조아적 국가를 순전히 경험적으로 이론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결과 응그슬쩍 국가가 계급지배의 기관이라는 맑스주의적 국가론을 청산해 버렸다. 여기에 대해서 그는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이 문제는 좀더 고려해 보아야 한다." 더욱이 그와 버넘 동지는 우리의 "정치적 임무"에 대해서 완전히 견해를 같이하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 일치는 소련의 사회성격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전혀 없다. 독자들은 다시 한번 이 동지들이 변증법에 대해 쓴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버넘은 변증법을 거부한다. 섁트먼은 이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일관성"이라는 하늘이 내린 선물은 이들이 공통된 정치적 결론을 갖는 것을 허용한다. 그런데 이 동지들 모두가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입장은 변증법에 대한 이들의 태도를 조목 조목 반복하고 있다.

이 두 경우 모두 버넘이 주도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실용주의라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섁트먼에게는 방법론이 없다. 그는 버넘의 입장에 자신을 동화시키고 있다. 버넘의 반맑스주의적 개념들에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도 섁트먼은 사회학뿐만 아니라 철학 영역에서도 버넘과 함께 반맑스주의적 연합을 유지하고 있다. 이 두 경우 모두 버넘은 실용주의자로 섁트먼은 절충주의자로 등장하고 있다. 이 현상은 아주 커다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즉 두 개의 서로 다른 사고 영역과 가장 중요한 두 문제에 있어서 버넘과 섁트먼 동지는 완벽히 견해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순전히 이론적인 사고를 해본 적이 없는 동지들마저 놀라게 하는 장점이 있다. 사고 방법은 변증법적이거나 속류적이거나,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존재하며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있다.

지난 1월 우리는 이 두 저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이러한 비일관성은 어떤 경우에는 구체적이고도 결정적인 정치적 견해 차이를 가지고 올 수 있다. 그런데 현재로는 이러한 견해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좀더 추상적인 이론에 대한 견해 일치나 견해 차이가 오늘이나 내일의 구체적인 정치적 사안들에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고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증명한 적이 없다. " 어느 누구도 아직까지 증명한 적이 없다니! 바로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이 두 동지들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같은 "추상적 이론 "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가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에 정확하게 표현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인 바 있었다.

물론 이 두 예 사이의 차이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들이 이론적이 아니라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두 경우 모두 두 동지는 변증법에 대한 거부와 반(半) 거부를 기초로 동맹하였다. 그러나 첫 번째 경우에 이 동맹은 노동자 정당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두 번째 경우에 이 동맹은 자기 정당의 맑스주의 분파에 대항하였다. 말하자면 군사작전의 전선은 바뀌었으나 무기는 그대로인 셈이다.

정말이지 사람들은 자주 일관성을 결여한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어떤 일관성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철학과 논리는 비일관성이 아니라 일관성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버넘은 변증법을 알아보지 못하나 변증법은 그를 알아보아서 그에게 지배력을 넓히고 있다. 섁트먼 동지는 변증법이 정치적 결론을 내리는 일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신의 정치적 결론을 통해 변증법에 대한 그의 경시가 한탄스러운 열매를 맺고 있음을 본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다루는 교과서에 섁트먼의 예를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

작년 제4인터내셔널의 동조자인 영국의 어느 젊은 정치경제학 교수가 나를 방문했다. 사회주의를 실현시키는 방도들을 논의하는 가운데 그는 갑자기 케인즈와 그 밖의 인물들의 정신에 입각한 공리주의 경향을 보였다: "명확한 경제적 목적을 결정하고 이것의 실현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도들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등등.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변증법에 반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겠소." 그는 어느 정도 놀라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변증법이 어느 짝에 쓸모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다시 대답했다: "그러나 경제문제에 대해서 귀하가 말한 것을 가지고 귀하가 어떤 철학 조류에 속하고 있는지를 변증법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만하더라도 변증법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때 이후 이 교수로부터 아무 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 비변증법적 교수는 소련이 노동자국가가 아니며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 방어는 "시대에 뒤진" 견해이며 우리의 조직 운영 방법들이 나쁘다 등등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견해들을 기초로 그가 어떤 일반적 사고 유형에 속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대체로 그가 다른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는지도 예상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변증법적 사고 방법이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교육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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