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공산주의자2018.06.11 15:39

진화와 변증법

버넘 동지는 자신이 진화론자이며 우리 변증법 옹호자들만큼 사회와 국가형태의 발전 과정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항변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다아윈 이래 모든 교육받은 사람들은 자신을 "진화론자"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진정한 진화론자라면 진화론을 자신의 사고 형식에 적용시켜야 한다. 진화론 자체가 아직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에 창시된 초보 논리학은 진화 과정들을 분석하는 데 확실히 불충분하다. 헤겔의 논리학은 진화의 논리학이다. "진화"의 개념 자체가 대학 교수들과 자유주의 저술가들에 의해서 완전히 타락하고 근본 정신이 희석되어 이제는 평화적인 "진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사실 진화는 적대적 세력들의 투쟁을 통해 진행되며 일정 시점에서 변화의 완만한 축적은 사물의 껍질을 깨뜨리고 파국과 혁명을 가지고 온다. 이것을 이해하고 있으며 진화의 일반법칙들을 사고 자체에 적용하는 것을 배운 사람들은 속류 진화론자와 구별되는 변증법 옹호자이다. 피아노 연주자가 손가락 운동을 하듯이 혁명 투사에게는 변증법적 사고가 필요하다. 그런데 변증법적 사고는 모든 문제들을 움직이지 않는 범주들이 아니라 과정으로서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반면에 속류 진화론자들은 특정 영역에 대해서만 진화를 인정하는 선에서 머문다. 그리고 이외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는 "상식"이라는 뻔한 말들만 늘어놓는 것에 만족한다.

미국의 자유주의자는 소련의 존재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서 소련 관료집단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최소한 독소불가침조약이 있기 전까지는 소련 체제가 대체로 "진보적인 것"이며 관료집단의 혐오스러운 특징들은 ("이것들은 원래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점차 탈각되어 평화적이며 고통이 없는 "진보"가 보장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소련의 내부 모순들과 동력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소련을 도매금으로 넘기는 점에서 속류 쁘띠부르조아 급진주의자는 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와 비슷하다. 스탈린이 히틀러와 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를 점령한 후 이제 핀란드를 점령하자 속류 급진주의자들은 승리했다.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을 동일시하는 방법론이 그 올바름을 증명받았다! 그러나 점령군 당국이 점령지 인민들에게 지주와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라고 권유했을 때 이들은 이 가능성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편 관료적-군사적 방식으로 수행된 사회의 혁명적 조치들은 우리의 변증법과 퇴보한 노동자국가라는 소련의 사회성격에 대한 우리의 규정을 반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 규정의 올바름을 논란의 여지없이 입증시켰다. 이러한 맑스주의 분석의 승리를 참을성 있는 선동으로 활용하는 대신에 이들은 범죄행위에 속하는 경박함을 드러내며 사건들이 우리의 예상을 거부했으며 우리의 분석은 더 이상 적용될 수 없으며 새로운 용어들이 필요하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무슨 용어들이 필요한 것일까? 그러나 이들은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소련의 방어

우리는 철학에서 시작하여 이제 사회학으로 논의의 초점을 옮겼다. 그런데 이 두 영역에서 소수파의 두 지도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은 반(反) 맑스주의적 입장을 취했으며 또 한 명은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음이 명백해졌다. 이제 정치 특히 소련 방어의 문제를 다룰 경우에도 이와 똑같은 정도의 커다른 놀라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소수파는 우리 강령의 입장인 "무조건적 소련 방어"가 "애매하고 추상적이며 시대에 뒤진(!?)" 것임을 발견했다. 불행하게도 이들은 미래의 어떤 "조건들" 속에서 혁명의 성과들을 기꺼이 방어할 것인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들의 새로운 입장에 최소한 약간의 논리를 부여하기 위해 애를 쓴다. 이 결과 적군(赤軍) 과 비밀경찰을 도구로 하여 소련 관료집단이 추구한 국제정책을 그동안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지지한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혔다! 사실 이미 오랫동안 우리는 소련 관료집단을 봉기를 통해 타도할 필요성을 특히 공개적으로 천명한 이후 조건적으로라도 관료집단의 국제정책을 방어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소수파의 잘못된 노선은 지금 우리가 수행해야 할 임무들을 갈갈이 파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과거 노선마저 거짓으로 윤색하고 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실렸으며 이미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 버넘과 섁트먼은 환멸을 느낀 지식인 집단을 "포기한 희망들의 동맹(The League of Abandoned Hopes)"이라고 재치있게 표현한 후 자본주의 국가와 소련이 군사적으로 대결할 때 이 한심한 동맹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집요하게 물었다. 이들은 이렇게 썼다: "따라서 히틀러나 일본 또는 영국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는 소련을 방어하는 문제에 대해 우리는 훅(Hook), 이스트먼, 리용(Lyons) 등이 확실하게 자신의 입장을 선언할 것을 이 기회를 빌어 요구한다 등등 " 버넘과 섁트먼은 어떠한 "조건"도 내걸지 않았고 어떠한 "구체적인" 상황들을 명시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확실한" 대답을 요구했다. 이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썼다: "이 동맹 역시 입장을 취하기를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중립을 선언할 것인가? 한마디로 스탈린주의 체제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 체제와 관계 없이 제국주의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소련을 방어할 것인가?" (강조는 인용자) 놀라자빠질 내용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강령이 선언하는 바이다. 1939년 1월 버넘과 섁트먼은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인 방어 입장을 지지했으며 "스탈린주의 체제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 체제와 관계없이" 무조건적인 방어를 한다고 완벽하게 표현했었다. 그러나 이 글은 스페인 혁명이 완전히 종결된 이후에 작성되었다. 스페인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이 보여준 범죄적 정치행동은 폴란드나 핀란드에서의 경우와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 했다고 캐넌 동지는 아주 올바르게 표현했다. 전자의 경우 소련 관료집단은 교수형 집행인이 되어 사회주의 혁명의 목을 매달았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관료적 방식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촉진시키고 있다.

그런데 버넘과 섁트먼은 "포기한 희망들의 동맹"이 선언한 입장으로 왜 갑자기 돌아섰는가? 왜? "사건들의 구체성" 때문이라고 섁트먼은 지극히 추상적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이것은 설명다운 설명이 아니다. 그러나 설명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스페인 공화군 진영에 참여함으로써 소련은 전세계 부르조아민주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폴란드와 핀란드에서 스탈린의 행동은 똑같은 민주주의자들로부터 미친듯한 비난을 받았다. 버넘과 섁트먼은 전세계 민주주의자들의 여론에 동조했을 뿐이다. 이것이 진짜 설명이다. 온갖 시끄러운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소수파의 입장은 당내에서 "좌파" 쁘띠부르조아들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이 사실은 불행하게도 논란의 여지가 없이 명확하다. 버넘과 섁트먼은 포기한 희망들의 동맹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뭔가 `참신한' 것을 통해 운동에 공헌하고 있으며 `새로운 경험들에 비추어 자신들을 다시 평가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전제들'을 재검토할 것을 거부하는 `교조주의자'(`보수주의자'? - 필자)는 아니라는 것 등을 믿으며 이 점에 대해서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가련한 자기기만인가! 이들의 어느 누구도 새로운 사실들을 드러내거나 현재나 미래에 대해서 새로운 이해를 첨가하지 않았다." 이 두 동지들은 참으로 멋지게 글을 인용하고 있다! "후퇴하고 있는 지식인"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 우리가 새로운 장(章 )을 하나 덧붙여야 하지 않을까? 섁트먼 동지의 이러한 노력에 협력할 것을 나는 제안하는 바이다

노동계급의 대의에 무조건적으로 헌신하고 있는 버넘과 섁트먼 과 같은 뛰어난 동지들이 포기한 희망들의 동맹의 별로 무섭지도 않는 신사분들에게 그렇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니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순수하게 이론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런 현상은 버넘이 올바르지 못한 방법론을 보유하고 있으며 섁트먼이 방법론 자체를 경시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올바른 방법론은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수월하게 만든다. 또한 모든 새로운 결론들을 이전의 결론들과 연속적으로 연결시키기 때문에 이 결론들은 쉽게 기억에 남는다. 정치적 결론들이 경험적으로 도출되거나 일관되지 못한 결론들이 일종의 장점으로 선언된다면 맑스주의의 정치 체계는 반드시 인상주의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다. 너무나 많은 측면에서 인상주의는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의 특징이다. 사태의 급격한 전환은 경험주의자-인상주의자들을 놀라게 한다. 그래서 이들은 과거 자신들이 어떤 내용의 글을 썼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전에 새로운 표현을 구사하려는 불타는 열망을 드러낸다.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

소수파는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에 대해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아마 약간 수정만 하면 보르디가(Bordiga), 베레컨(Vereecken), 스니블릿(Sneevliet), 페너 브락크웨이(Fenner Brockway), 마르쏘 삐베르(Marceau Pivert) 등과 같은 기회주의자들도 이 문서에 서명할 것이다. 그러나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은 결코 이 문서에 서명할 수 없다. 소련 관료집단의 특징들과 소련군이 "침략"했다는 사실들만을 담고 있는 이 문서는 소련 사회의 성격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 글은 핀란드와 소련을 같은 수준에 놓으면서 한치의 여지도 없이 "양국 정부와 군대들을 모두 비난하며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결의문의 필자들은 뭔가 문제가 있다고 알아채리고서는 글 내용과 아무런 논리적 연관도 없이 느닷없이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이 전망을 적용(!)시킬 경우 당연히(이 "당연히"란 말은 얼마나 멋진 말인가) 제4인터내셔널은 핀란드와 소련의 각기 다른 경제관계들을 고려하게(!) 될 것이다." 단어 하나 하나가 진주처럼 빛난다. "구체적인" 것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구체적인" 상황이란 군사적 상황, 대중의 정서, 양국의 서로 반대되는 경제체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구체적인" 상황들이 어떻게 "고려될 " 것인지에 대해서 이 결의문은 조금도 암시하고 있지 않다. 소수파가 전쟁과 관련하여 "양국 정부와 군대들 모두"를 똑같이 반대한다면 어떻게 군사적 상황과 사회체제의 차이들을 "고려할 "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스탈린주의자들의 의심할 여지없는 죄악을 벌주기 위해 이 결의문은 모든 색조의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과 같이 핀란드에 진주한 적군이 대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노동자들에 의한 생산수단의 통제를 도입하면서 자본가들을 몰수하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내일이면 스탈린 일당은 핀란드 노동자운동의 목을 조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가장 날카로운 형태의 계급투쟁을 대대적으로 촉진시키고 있으며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소수파 지도자들은 현재 핀란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구체적인" 상황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추상적 개념들과 고상한 감정에 기초하여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전쟁은 내전에 의해 보완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군은 현재 주어진 상황에서 핀란드의 소농 및 노동자들과 같은 편이 되어 있다. 한편 핀란드 군대는 유산계급, 보수적 노동 관료층,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핀란드의 빈곤층에게 적군이 일깨우고 있는 희망은 국제혁명이 개입되지 않는 한 환상으로 끝날 것이다. 이들과 적군 사이의 협력관계는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스탈린 일당은 곧 핀란드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총부리를 돌릴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것을 모두 알고 있으며 핀란드 인민에게 공개적으로 경고하는 바이다. 그러나 지금 핀란드 영토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구체적인" 내전에서 제4인터내셔널의 "구체적인" 투사들은 어떤 "구체적인" 입장을 취해야만 하는가? 스탈린주의자들이 스페인 사회주의혁명의 목을 조르고 있는 동안 제4인터내셔널 투사들은 이들과 똑같이 공화국 진영에서 싸웠다. 그렇다면 핀란드에서도 스탈린주의자들이 자본가들을 몰수하는 행위를 더욱더 지지하면서 이들과 같은 진영을 형성해야 한다.

소수파의 발명가들은 과격한 어조로 자기 입장의 결함을 은폐한다. 이들은 소련의 정책을 "제국주의적"이라고 딱지 붙인다. 과학에 대단한 공헌을 하고 있다! 지금부터 금융자본의 대외정책과 대대적인 파괴적 정책을 제국주의라고 말해야 한다. 이러한 용어 사용은 의미를 명확히 하고 노동자들에게 계급적 교육을 시키는 일도 크게 도와줄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매우 성급한 스탠리 동지는 스탈린 관료집단이 동시에 독일 금융자본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고 고함지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한 문제를 다른 문제로 바꿔치기하고 구체적인 상황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대체할 때에나 나올 수 있다. 금융자본의 정책을 지지하는 자들은 모두 제국주의자들인가? 이러한 사고는 변증법이 아니라 상식에 의존하는 자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이다.

만약 내일 영국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인도인들에게 히틀러가 무기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면 독일의 혁명적 노동자들은 파업이나 태업 등으로 이 구체적인 히틀러의 행동에 반대해야 하는가? 아니다. 이와 반대로 독일 노동자들은 인도인들이 가능하면 빨리 무기를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이 점이 스탠리 동지에게 아주 명확하게 이해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가상적인 예가 될 뿐이다. 다만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파시스트 정부가 특정 상황 속에서는 (바로 다음 순간에 목을 졸라 죽이기 위해) 일국의 혁명운동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예를 사용했을 뿐이다. 가령 어떤 상황에서도 히틀러는 프랑스의 노동자혁명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소련의 관료집단은 가상이 아니라 실제로 핀란드의 혁명운동을 촉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물론 내일 이 운동을 정치적으로 목졸라 죽이기 위해 지금 이런 행동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스탈린 지배집단에 의해 촉진되고 파괴되고 목졸려 죽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특정 사회혁명운동을 제국주의라는 잡동사니 주머니 속에 집어넣는 것은 이론적 정치적 빈곤을 드러낼 뿐이다.

"제국주의" 개념을 고무줄 늘이듯이 늘이는 것은 참신한 시도조차 되지 못한다. 현재 부르조아 민주주의 국가들의 민주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부르조아들도 소련의 정책을 제국주의적이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자본가 계급의 목적은 너무도 명확하다. 즉 자본주의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과 소련의 팽창정책 사이의 사회적 모순을 지워버린다. 소유의 문제를 은폐해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을 통해 진짜 제국주의를 돕는 것이다. 그러면 섁트먼을 비롯한 다른 동지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목적으로 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새로운 용어 사용법은 객관적으로 제4인터내셔널의 맑스주의적 용어로부터 이들을 멀어지게 하면서 "민주주의자들"의 용어 사용법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한다. 슬프게도 이러한 상황은 소수파가 쁘띠부르조아 여론의 압력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사진 및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왼쪽의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용량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