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트로츠키주의자2017.04.20 21:15

<보론> "일국 사회주의" 이론

자급자족 경제(autarky)의 반동적 경향은 쇠잔한 자본주의가 자신에게 부여된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지 못하면서 반사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즉 사적 소유와 일국적 차원의 경제운영이라는 족쇄로부터 경제를 해방시키고 전 세계적 차원의 계획을 통해 경제를 재조직하라는 역사적 과업에 대한 무기력한 반응인 것이다.

단명했던 제헌의회의 승인을 받기 위해 인민위원 소비에트가 제출한「피착취 근로 인민의 권리 선언문」에서 레닌은 새로운 소비에트 체제의"기본 과업"을 이렇게 규정했다: "사회주의 사회를 조직하고 모든 나라에 사회주의의 승리를 실현시킨다." 이로써 혁명의 국제적 성격이 새로운 정권의 기본 문서에 새겨졌다. 당시에 어느 누구도 이와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1924년 4월 레닌이 죽은 지 3개월 후 스딸린은 「레닌주의의 기초」라는 팜플렛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부르주아 계급을 타도하는 일은 한 나라의 노력만 있으면 된다. 이 점은 우리 혁명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최종적인 승리, 사회주의 생산의 조직을 위해서는 어느 한 나라 특히 우리처럼 농민국가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여러 선진국 노동계급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 이 글에 대한 논평은 따로 필요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이 실린 팜플렛은 시중에 유통되기도 전에 회수되었다.

유럽 노동계급의 대대적인 패배와 소련이 이룩한 아주 적은 첫 경제적 성공은 1924년 가을 스딸린의 머리 속에 이 생각을 불어 넣었다: 소련 관료집단의 역사적 임무는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논쟁이 진행되었는데 이것이 피상적인 사람들에게는 학구적인 것으로 보인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이 논쟁은 제3 인터내셔널의 퇴보를 알렸으며 이후 제4 인터내셔널을 준비하는 성격을 띠었다.

한때 공산주의자였으며 현재 백위군 망명객인 페트로프(Petrov)의 이름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소련이 국제혁명에 의존해야 한다는 이론을 행정기구의 젊은 세대들이 얼마나 격렬하게 반대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우리가 행복한 삶을 건설할 수 없다는 생각이 어떻게 가능한가?"; 마르크스가 우리와 견해가 다르다면 그것은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러시아 볼셰비키주의자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등등. 1920년대 중반의 논쟁을 회상하면서 페트로프는 이렇게 덧붙인다: "지금 생각하면 일국 사회주의 이론은 스딸린의 발명품이 아니었다." 완전히 옳은 말이다! 이 이론은 당시 관료집단의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들에게 사회주의의 승리는 곧 관료집단의 승리를 의미했다.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 전통과 단절하는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스딸린은 자신의 무지를 드러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레닌이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 법칙(law of uneven development of capitalism)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알지 못했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어록에서 그의 이 말은 아주 상위에 놓여야 할 것이다. 발전의 불균등성은 인간 역사 전체에 걸쳐 특히 자본주의 역사에서 관철되고 있다. 솔른초프(Solntzev)는 러시아의 젊은 역사가이며 경제학자인데 좌익반대파의 일원이라는 죄목으로 소련 관료집단의 감옥에서 고문으로 죽었다. 대단한 재능과 도덕적 능력을 가졌던 그는 1926년 마르크스의 불균등 발전 이론에 대해 아주 훌륭한 이론 연구를 하였다. 물론 그의 연구 결과는 소련에서 출판될 수 없었다. 비록 정반대 이유이긴 하지만 역시 출판금지가 내려진 것은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고 우리의 뇌리에 잊혀진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 폴마르(Vollmar)의 저작이다. 그는 이미 1878년에 러시아가 아니라 독일에 "고립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전망을 이론화했다. 스딸린에 의하면 레닌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불균등 발전 "법칙"을 폴마르는 이미 언급하고 있었다.

게오르크 폴마르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회주의는 무조건적으로 경제가 발전한 사회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것만이 문제라면 사회주의는 경제발전 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에서 가장 강력하게 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영국은 의심할 여지없이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나라이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사회주의는 아주 부차적일 뿐이다. 반면 경제적으로 영국에 비해 덜 발달한 독일에서는 사회주의가 이미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여 낡은 사회 전체가 이미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사태의 발전을 결정하는 역사적 요인들의 다양함을 언급하면서 그는 계속 주장한다: "수많은 세력들의 상호관계가 작용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인간 운동은 두 나라의 경우에서도 시간과 형태가 동일할 수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모든 나라에 대해서 말한다면 너무도 당연한 결론이 나온다‥‥‥ 사회주의도 이와 똑같은 법칙을 존중한다‥‥‥‥ 모든 문명국에서 동시에 사회주의가 승리한다는 가정은 절대적으로 배제된다. 역시 같은 이유로 어느 사회주의 국가의 예를 나머지 모든 문명국이 즉시 그리고 불가피하게 모방한다는 가정은 성립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그는 결론을 내린다: "고립된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로 논의가 결론 지워진다. 이 현상이 유일한 가능성은 아니더라도 가장 커다란 개연성(probability)을 가지고 있음을 지금까지 증명했다고 나는 믿는다." 레닌이 8세 아동이었을 때 나온 이 저작은 1924년 가을에 나오기 시작한 소련의 아류 이론가들의 글보다 불균등 발전 법칙에 대해 훨씬 더 정확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 폴마르는 사실 이류 이론가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주제와 관련해서 엥겔스의 사상을 풀어서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엥겔스가 자본주의 불균등 발전 법칙을 "알지 못했다고" 스딸린은 말한다.

"고립된 사회주의 국가"는 더 이상 역사적 가정이 아니며 독일이 아닌 러시아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또한 사회주의 국가의 고립은 세계 자본주의의 상대적 우위와 세계 사회주의의 상대적 열세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립된 "사회주의" 국가에서 국가가 사멸한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하려면 장구한 세월이 필요할 것이며 이 과정은 국제혁명의 과정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한편 베아트리스-시드니 웹 부부는 우리에게 이렇게 확인시켜 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고립된 사회주의 국가가 건설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시조인 두 사람 모두 외국무역의 독점과 같은 강력한 무기를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노 부부의 글을 읽으면서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국가가 상업은행, 기업, 철도, 상선 등을 접수하는 것은 수출산업 부문을 포함한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것 만큼이나 사회주의 혁명에게 필요한 조치이기 때문이다. 외국무역의 독점은 수출과 수입의 물리적 도구들을 국가가 장악하는 것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외국무역의 독점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덧붙이면 폴마르는 아주 올바르게 외국무역의 독점을 "고립된 사회주의국가"의 가장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한다. 웹 부부에 의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비밀을 폴마르로부터 배웠음에 틀림없다. 물론 폴마르가 애초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로부터 이 비밀을 배우지 않았다면 말이다. 일국 사회주의 "이론"에 대해 사실 스딸린 자신도 상세히 설명하거나 이론적 기초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 이론은 무미건조하고 비역사적인 사고 방식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천연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사회주의 사회가 소련이라는 지리적 테두리 내에서 건설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천연자원이 풍부하다는 논지를 확대하면 지구의 인구가 현재보다 12분의 1로 줄어들면 사회주의가 전 세계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이론의 실제 목적은 인민의 의식 속에 훨씬 구체적인 사고체계를 주입시키는 것이었다. 즉 혁명은 완전히 완성되었다; 사회 내부의 모순들은 꾸준히 완화될 것이다;쿨락은 서서히 사회주의로 성장할 것이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관계없이 사회 발전은 전반적으로 평화적이고 계획에 의거할 것이다 등등. 부하린은 이 이론에 기초를 제공하기 위해 다음 사실이 공고하게 증명되었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우리 조국 내부의 계급적 차이와 기술적 후진성 때문에 망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빈약한 기술적 기반을 가지고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 사회주의 성장 속도는 대단히 느릴 것이다; 거북이 걸음처럼 기어갈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사회주의를 기필코 건설할 것이다." "사회주의를 이렇게 빈약한 기술적 기반을 가지고도 건설한다"는 사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청년 마르크스의 천재적 직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낮은 기술 수준으로는 "궁핍만이 일반화될 것이고 생활 필수품에 대한 투쟁이 다시 시작되며 모든 넌센스들이 부활할 수밖에 없다."

1926년 4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좌익반대파는 거북이 걸음 이론에 대한 수정안을 이렇게 제출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우리가 원하는 자의적인 속도를 가지고 소련이 사회주의로 나아갈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 오류이다. 소련의 산업과 선진 자본주의 산업의 격차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좁힐 경우에만 사회주의로의 전진은 보장될 것이다." 당연히 스딸린은 자신의 의도에 충실하여 이 수정안이 일국 사회주의 이론에 대한 "위장된" 공격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국내 산업발전의 속도를 국제 산업발전 상황과 연결시키려는 의도 자체를 단도직입적으로 거부했다. 전원회의의 속기록에는 그가 한 말이 한 글자도 빠지지 않은 채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국제적 요인을 여기에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은 모두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문제를 이해하지 못해 혼란된 경우가 아니라면 의식적으로 문제를 혼동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결국 좌익반대파의 수정안은 거부되었다.

그러나 강력한 적들이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단히 빈약한 기반을 가지고 거북이 걸음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환상은 비판의 화살을 오래 견디지 못하였다. 같은 해 제15차 당 대회는 언론에 귀뜸도 하지 않은 채 "상대적으로(?) 최단 시기 내에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산업발전 수준을 따라잡거나 추월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시인했다. 이로써 좌익반대파의 논지는 "추월당했다." 그러나 어제 거북이 걸음 이론을 내놓았던 인물들은 이 구호를 제출함으로써 관료집단이 그렇게도 미신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국제적 요인의 포로가 되었다. 이렇게 8개월 만에 스딸린주의 이론의 최초이자 가장 순수한 버전이 파산했다.

1927년 3월 불법으로 배포된 좌익반대파의 문서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회주의는 모든 영역에서 자본주의를 반드시 "추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 일반이 아니라 독일, 영국, 미국과 비교한 소련의 경제발전이다; '최단 시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5개년 계획을 계속 실시해도 소련은 서방 선진국의 수준에 한참 못미칠 것이다;이 기간에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 자본주의가 수십 년의 기간 동안 새로이 호황을 누릴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소련이라는 후진국에서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농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상황이 실제 벌어진다면 이 시대 전체를 자본주의 쇠퇴의 시대라고 진단한 우리가 오류를 범했다고 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비에트 공화국은 파리 코윈보다 더 광범위하고 더 큰 성과를 올렸으나 어쨌든 노동계급 독재의 제2차 실험에 지나지 않았다고 증명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 시대 전체를 결정적으로 재평가하고 국제혁명의 고리로서 10월 혁명의 의미를 재평가해야 할 심각한 근거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어느 정도 완결된 재건기를 경과한 후 ‥‥‥ 자본주의 국가들은 비교할 수 없이 더 날카로운 형태로 국내외에서 전쟁 이전의 모순들을 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노동계급 혁명이 일어나야 할 근거이다; 우리가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전체는 부분보다 일반적으로 더 크다; 따라서 더 작은 사실이 아니라 더 커다란 사실은 유럽과 세계혁명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부분은 전체와 함께 갈 때에만 승리할 수 있다;‥‥‥ 유럽의 노동계급은 소련이 기술 수준에서 유럽과 미국을 따라잡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더 적은 시간으로 국가권력 장악으로 도약할 수 있다; ‥‥‥ 한편 우리는 소련의 노동생산성과 나머지 세계 노동생산성의 격차를 체계적으로 좁혀야 한다; 우리가 이 측면에서 전진할수록 낮은 가격의 제품과 결과적으로 군대를 동원한 서방 자본주의 세계의 개입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 소련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수준을 더 높일수록 유럽의 노동자 혁명은 더 앞당겨질 것이며 이 혁명은 소련에게 세계적 수준의 기술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유럽과 세계 사회주의 건설의 일부분인 소련의 사회주의 건설은 더욱 가열차게 전진할 것이다." 당지도부는 다른 문서들과 마찬가지로 이 문서에 대해서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다만 좌익반대파에 대한 제명과 체포가 뒤따랐을 뿐이다.

거북이 걸음 이론이 포기된 후 이 이론과 결부된 쿨락의 사회주의로의 전화 이론도 포기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 행정력을 동원한 쿨락의 일소는 일국 사회주의론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었다. 계급들이 "근본적으로“ 일소되었으므로 사회주의도 "근본적으로” 달성되었다는 것이다(1931년). 핵심적으로 말하면 이 정식은 "대단히 빈약한 기초" 위에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사상을 부활시켰다. 우리의 기억으로는 바로 이때에 어느 관변 언론인이 어린애에게 줄 우유가 없는 것은 젖소가 부족하기 때문이지 사회주의 체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노동생산성에 대한 관심은 더 이상 1931년의 마취제 같은 정식에 기댈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정식은 완벽한 농촌 집단화에 의해 야기된 경제적 황폐를 보상하기 위한 도덕률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타하노프 운동과 관련하여 갑자기 스딸린이 이렇게 선언했다: "인민이 거지생활을 하면서라도 물질적 평등을 이루면 사회주의가 강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보다 더 높은 노동생산성에 기반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 완전히 옳은 말이다! 그러나 바로 이때 공산주의청년동맹 대회가 1936년 4월에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청년동맹이 그나마 가지고있던 정치적 권리마저 박탈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동시에 공산주의청년동맹의 새로운 강령이 채택되었는데 소련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이렇게 단정적으로 규정하였다: "전국의 경제는 사회주의화되었다." 동시에 등장했으나 내용은 정반대인 두 선언들의 모순을 좁혀보려는 시도를 어느 누구도 하지 않았다. 선언 하나 하나는 순간의 요구에 부응하여 선포된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감히 비판할 엄두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회의 대변인은 새로운 강령이 공산주의청년동맹에게 아주 필요하다는 주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구(舊)강령은 러시아가 '세계 노동자 혁명을 통해서만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반레닌주의적인 심대한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오류이다. 이것은 뜨로츠키주의자의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스딸린은 이 반레닌주의적 뜨로츠키적 견해를 1924년 4월에 여전히 옹호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레닌이 참여한 정치국이 꼼꼼하게 검토한 후 부하린 명의로 제출된 1921년 강령이 15년이 지난 후에 "뜨로츠키주의자"의 견해로 돌변하여 정반대로 개정되어야 했다는 사실은 아직 해명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논리적인 주장도 이해관계가 개입되면 무기력하다. 자국 노동계급으로부터 독립한 관료집단은 소련이 세계 노동계급의 투쟁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불균등 발전 법칙에 의하여 생산력과 자본주의 소유관계 사이의 모순이 세계에서 가장 약한 고리를 끊었다. 후진 러시아 자본주의는 세계 자본주의의 파산에 대해 맨 처음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불균등 발전 법칙은 역사 전체에 걸쳐서 결합 발전(combined development) 법칙으로 보완되었다.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의 붕괴는 노동계급 독재를 가져왔다. 즉 후진국이 선진국을 멀찌감치 앞서서 혁명을 성취한 것이다. 그러나 후진국에서 사회주의적 소유형태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기술과 문화의 낮은 수준을 극복해야 했다. 세계적 생산력의 높은 수준과 자본주의 소유형태 사이의 모순에 의해서 탄생한 10월 혁명은 러시아에서 낮은 일국적 생산력과 사회주의 소유형태 사이의 모순을 발생시켰다.

물론 소련의 고립은 우려한 것처럼 직접적으로 위험한 상황을 낳지는 않았다. 자본주의 세계는 너무도 무질서와 마비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잠재력을 완전히 활용할 수 없었다. “숨쉴 수 있는 여지”는 비판적인 낙관주의가 감히 희망할 수 있는 기간보다 더 긴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제국주의 세력의 개입전쟁으로 인해 세계로부터 고립되었으며 1913년부터 외국무역량이 4배 또는 5배나 감소했기 때문에 자본주의 토대 위에서 세계 경제의 자원을 활용하는 것조차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내전에 의해 지출된 엄청난 군사비용 때문에 생산7?이 지극히 불리하게 할당되었고 대중의 생활수준은 매우 느리게 개선될 뿐이었다. 그러나 고립과 후진성의 더 극악한 결과는 관료주의라는 문어(octopus)로 나타났다.

혁명에 의해서 시행된 법적·정치적 조치들은 후진 경제에 진보적인 영향을 미쳤으나 또 한편 이 조치들은 후진성에 의해 효과가 더 적었다. 소련이 자본주의 세계에 의해 포위되는 상황이 길수록 사회체제의 퇴보는 더욱 깊이 진행된다. 소련이 계속 고립되면 일국적 공산주의로의 전진이 아니라 자본주의로의 후퇴가 불가피하다.

부르주아 계급이 평화적으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로 성장할 수 없듯이 사회주의 국가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평화적으로 통합될 수 없다. “일국"이 평화적으로 사회주의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혁명이라는 세계적 차원의 격동이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대세를 이루고 있다. 소련 내부에서도 격동은 불가피하다. 관료집단이 계획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쿨락을 일소할 수밖에 없었듯이 노동계급은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에서 관료집단을 일소하지 않을 수 없다. 관료집단의 묘비명은 "여기에 일국 사회주의가 편히 쉬고 있노라”가 될 것이다.


1. 소련의 "친구들"

사상 처음으로 어느 강력한 정부가 해외에서 품위있는 우익이 아니라 좌익과 극좌익 언론을 자극하고 있다. 위대한 혁명에 대한 인민 대중의 공감이 소련 관료집단에 의해 이용되도록 아주 능숙하게 요리되고 있다. 소련에 "공감하는" 서방의 언론은 자기도 모르게 소련 지배층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내용을 퍼뜨릴 권리를 잃고 있다. 크렘린궁이 싫어할 책들은 악의적으로 언급이 회피되고 있다. 대신 요란하고 평범한 소련 옹호자들의 저작들이 많은 나라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책 전체에서 공식적인 소련의 "친구들"이생산한 저작들을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세련된 외국의 아류보다는 조야한 러시아 원저작을 택해 비판했다. 코민테른의 저작을 비롯한 소련의 "친구들"의 저작들 중에서 가장 조야하고 저속한 부분을 양으로 따지면 엄청난 분량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정치에서 담당하는 역할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이 주제에 대해 몇 페이지를 할애하고자 한다.

현재 사상의 보물창고에 주요하게 기여한 저작은 웹의 저서 『소비에트 공산주의』라고 선언되고 있다. 그 동안 소련이 성취한 결과와 이 결과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말하는 대신 웹 부부는 1,200 페이지에 걸쳐 소련 행정부서들이 계획하고 제시하는 내용들과 법전에서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이들의 결론은 이렇다: 프로젝트, 계획, 법 등이 실행에 옮겨지면 공산주의는 소련에서 실현될 것이다. 이것이 이 저작의 내용인데 다 읽고 나면 우울한 느낌 밖에 남는 것이 없다. 소련 행정부서들의 보고서나 소련 언론의 기념식 기사들을 재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련 관료집단에 대한 우정은 노동계급 혁명에 대한 우정이 아니라 반대로 이 혁명에 대한 예방책이다. 물론 웹 부부는 공산주의 체제가 언젠가는 지구 전역에 확산될 것이라고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떻게,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폭력혁명을 통해서 아니면 평화적인 침투를 통해서, 아니면 의식적인 모방을 통해서 등의 문제들은 우리들이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이런 외교적 외양을 갖춘 응답 거부나 실제로 애매모호한 응답 등은 소련의 “친구들”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으며 이 우정의 실제 대가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만약 혁명의 문제에 대해 대답하기가 지금보다 한없이 어려웠을 때인 1917년 이전에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모든 사람이 회피했다면 소비에트 국가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영국의 소련의"친구들"은 우정이 담긴 기금을 다른 대상에 할애했을 것이다.

웹 부부는 가까운 미래에 유럽 혁명을 기대하는 것을 뭔가 허영에 들뜬 망상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일국 사회주의 이론의 올바름을 편안하게 증명할 자료를 얻고 있다. 10월 혁명을 완벽하고 더욱이 불쾌한 놀라움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잘난 권위의식을 가지고 이들은 다른 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필요성에 대해 연설을 늘어놓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실제로 웹 부부와 우리의 논쟁은 소련에 공장을 건설하고 집단농장에 광물 비료를 주어야 할 필요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영국에서 혁명을 준비할 필요가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이 혁명이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학식이 풍부한 이 노년 사회학자들은 대답한다:"우리도 모릅니다." 물론 이들은 이 문제 자체가 “과학"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레닌은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는 보수적 부르주아 특히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Fabians)에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그의 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인명사전을 보면 그가 평생 웹 부부에 대해서 변함없는 격렬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1907년 그는 웹 부부에 대해 처음 글을 쓰면서 이들을 “영국 노동운동의 혁명기에 탄생한 차티즘(Chartism)을 단순히 유치한 것으로 묘사하려고 애쓰는" "영국 속물주의의 난해한 찬양자들"로 보았다. 그러나 차티즘이 없었다면 파리 코뮌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역사적 사건이 없었다면 10월 혁명도 없었을 것이다. 웹 부부는 소련을 행정기구와 관료적 계획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차티즘, 공산주의, 10월 혁명을 소련에서 찾지 않았다. 오늘날 이들에게 혁명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정말 "단순히 유치한 행위"가 아니면 자신들에게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사건에 불과하다.

기회주의자들에 대한 논쟁에서 레닌은 잘 알려져 있듯이 살롱의 예절에 대해 문제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그의 독설적인 형용사들 예를 들어 "부르주아 계급의 하수인들", "배신자들", "지배계급의 장화나 핥는 녀석들" 등은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전도사였던 웹 부부에 대한 오랫동안 면밀하게 계산된 평가에 근거한 것이었다.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현존하는 것에 대한 숭배와 전통적인 품위를 의미한다. 어쨌든 최근 몇 년간 이들의 견해가 갑자기 변화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자국의 부르주아 계급을 지지했고 나중에 왕으로부터 파스필드(Passfield) 경이란 칭호를 받은 웹은 단일한 그리고 외국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과정에서 아무 것도 버리지 않았으며 아무 것도 바꾸지 않았다. 시드니 웹은 식민지 장관 즉 영국 제국주의의 주요한 간수장이었는데 바로 이때 소련 관료집단과 친분을 갖게 되었으며 소련 행정부서의 자료들을 받아서 이것을 기초로 두권짜리 자료집을 만들었다.

1923년이 되어도 웹 부부는 볼셰비키주의와 짜르주의 사이에서 별반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문명의 쇠퇴](1923년)를 참고해보라. 그러나 이제 이들은 스딸린 정권의 "민주주의"를 완전히 인정했다. 이들의 모습에는 조금의 모순도 없다. 혁명적 노동자 계급이 "교육받은" 집단의 활동의 자유를 금지하자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분노하였다. 그러나 소련 관료집단이 노동계급의 행동의 자유를 금지하자 이들은 이 조치를 당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사실 노동당의 노동관료 집단의 기능이 아니었던가! 예를 들어 웹 부부는 소련에서 자유로운 비판이 완벽히 허용되고 있다고 맹세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유머 감각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공식적인 의무의 일부로서 법의 일부가 되었으며 그 방향과 한계를 정확하게 예상할 수 있는 악명높은 관료집단의 "자기비판"을 이들은 아주 진지하게 언급한다.

단순 소박함일까? 엥겔스나 레닌은 시드니 웹을 단순 소박하다고 보지 않았다. 차라리 품위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이미 들어선 정권이 무엇이며 그곳의 주인들이 자신을 환대하는 문제이다. 웹 부부는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을 극단적으로 거부하였다. 이들은 좌익반대파의 파괴공작으로부터 10월 혁명의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들이 부름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정체를 완전하게 드러내는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다. 파스필드 경인 시드니 웹은 노동당 정부 시절 장관으로 있으면서 필자가 영국 비자를 신청했을 때 이를 거부하였다. 그는 당시 소련에 대한 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론적으로는 소련을 외부 침략으로부터 방어하는 체 했지만 실제로는 대영제국을 방어하고 있었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그는 자기 이익에 충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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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나 그림에 정통하지 못한 많은 소부르주아들에게 공식적으로 등록된 소련 "친선클럽"은 보다 고상한 정신적 이해관계를 과시하는 일종의 자격증이라고 할 수 있다. 프리메이슨(Freemason)지부나 평화주의자 회원 자격은 "소련의 친구들" 서클 회원자격과 아주 공통점이 많다. 왜냐하면 회원자격을 획득할 경우 동시에 두 가지 삶 즉 일상적 관심사를 다루는 서클 생활과 영혼을 고상하게 만드는 휴가생활이 모두 가능하다. 때때로 "친구들"은 소련을 방문한다. 이들은 트랙터, 탁아소, 공산주의 소년소녀단, 행진, 낙하산 소녀 등 한마디로 새로운 귀족층을 제외한 모든 것을 기억 속에 저장시킨다. 이들 중 가장 좋은 부류는 자본주의 반동에 대한 적대감으로 새로운 귀족층을 외면한다. 앙드레 지이드(Andre Gide)는 이 점을 솔직하게 시인한다: "소련에 대한 어리석고 부정직한 공격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소련을 완고하게 방어한다." 그러나 적들의 어리석음과 부정직 때문에 자기 눈을 맹목적으로 감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어쨌든 노동대중에게는 명확한 눈을 가진 친구들이 필요하다.

부르주아 급진주의자들과 사회주의적 부르주아들이 마치 전염병을 앓는 것처럼 소련 지배층에 공감하는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강령상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직업 정치가들 대다수는 이미 성취된 또는 쉽게 성취될 수 있는 "진보"에 대해 우호적이다. 세상에는 혁명가들보다는 개량주의자들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있고 현실에 화해하지 않으려는 자들보다는 적응하려는 자들이 훨씬 많다. 대중이 운동에 나서는 예외적인 시기에만 혁명가들은 고립에서 벗어나 전면에 나서며 이때 개량주의자들은 물에서 나온 물고기 신세가 된다.

1917년 4월 이전이나 한참 뒤까지 노동계급 독재가 러시아에서 가능하다는 사고를 소련 지배층 모두는 황당하다고 간주했다. 당시에 이 "황당한 생각"은 ‥‥ 뜨로츠키주의로 불리웠다. 수십 년 동안 외국의 소련 "친구들" 구세대는 러시아 멘세비키들을 현실 정치가(Realpolitiker)라고 보았다. 멘세비키들은 자유부르주아지와 함께 하는 "인민전선"을 주창했으며 노동계급 독재를 터무니 없는 미친 생각으로 간주하여 거부했다. 그러나 노동계급 독재가 이미 성취되었고 심지어는 관료적으로 더럽혀졌을 때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 아주 다른 문제이다. 이 점은 소련 "친구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이들은 소비에트 국가에 경의를 표할 뿐 아니라 적들에 대해 이 국가를 옹호하기조차 한다. 물론 과거를 동경하는 자들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세력에 대해 반대한다. 이 "친구들"이 프랑스인, 영국인, 벨기에인 그리고 다른 나라의 개량주의자들처럼 활발한 애국자일 경우 소련의 방어에 대해 관심을 표시하면서 자기들이 부르주아 계급과 연대하고 있는 사실을 아주 편리하게 숨긴다. 반면에 이들이 어제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회애국주의자들처럼 별 의도 없이 소련의 패배를 위해 일할 수밖에 없을 경우에는 소련과 프랑스의 동맹관계로 인해 자기들이 히틀러나 슈스니크(Schussnigg)와 한 패가 되기를 희망한다. 레옹 블룸은 볼셰비키주의가 영웅적 투쟁을 벌일 시기에 볼셰비키의 적이었으며 10월 혁명을 공개적으로 괴롭히려는 명확한 목적으로 『인민주의자』지(Le Populaire)를 창간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소련 관료집단의 진짜 범죄를 폭로하는데 단 한 줄도 할애하려 하지 않는다. 기독교 성서에 나오는 모세는 여호와의 얼굴을 보고 싶어 안달했는데 하느님의 뒷부분만 보면서 절을 하도록 허용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명예로운 개량주의자들은 이미 달성된 사실에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인지라 혁명의 성과 중에서 관료적으로 퇴보한 뒷 부분만을 이해하고 시인할 수 있다.

현재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본질은 개량주의자들과 같다. 원숭이 춤과 얼굴 찡그리기를 오랫동안 실천한 후에 갑자기 이들은 기회주의의 엄청난 장점들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이들 특유의 무지에 합당한 활력을 가지고 기회주의를 부여잡았다. 크렘린궁 지배층에 대해 노예처럼 그리고 계산 속을 가지고 머리를 조아리는 바람에 이들은 혁명적 주도성을 발휘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에 대해 이빨을 드러내고 짖는 것 밖에 할 수가 없다. 더욱이 주인의 채찍질을 받으면서도 꼬리를 흔들어댄다. 위험의 시간이 다가오면 사방으로 흩어질 가장 매력이 없는 이들은 우리를 노골적인 "반혁명분자"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 신경쓸 이유가 있을까? 역사는 비록 준엄하지만 가끔 웃기는 연극을 동반하는 법이다.

소련의 "친구들" 중 좀더 정직하고 눈이 열린 자들은 최소한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나눌 때는 소련의 태양에 흑점이 있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변증법적 분석 대신에 숙명적인 분석에 의존하는 이들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느 정도의" 관료적 타락은 역사적으로 불가피하다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정말 그렇군! 그러나 이 타락에 대한 저항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지 않는다. 필연은 반동적인 결말과 진보적인 결말을 가지고 있다. 필연의 양끝에서 줄을 잡아당기는 인물들과 정당들은 결국 바리케이드의 반대편에서 서로 모습을 나타낸다고 역사는 가르치고 있다.

소련의 "친구들"의 마지막 주장은 반동 세력들이 소련에 대한 어떤 비판도 이용해 먹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하다! 이들은 심지어 필자가 쓴 이 책을 이용하여 뭔가를 해보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언제 있었던가? 『공산당 선언』은 봉건 반동세력들이 자유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을 화살로 이용한다는 사실을 경멸조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반동세력들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자기 길을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우리의 길도 막지 못할 것이다. 물론 코민테른의 신문은 소련에 대한 우리의 비판이 소련에 대한 제국주의 세력의 군사적 개입을 준비하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자본주의 정부들은 우리의 저작으로부터 소련 관료집단의 타락상을 알고 짓밟힌 10월 혁명의 원칙들을 복수하기 위해 즉시 징벌 원정을 준비할 것이다! 코민테른의 논쟁가들은 날카로운 칼 대신 마차의 끌채나 더 무딘 도구로 무장하고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의 비판은 사물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부르주아 계급의 눈에 소련 외교의 보수적 성격을 더욱 부각시킬 따름이다.

그러나 노동계급과 노동계급을 진실로 옹호하는 지식인들은 소련에 대한 우리의 비판을 부르주아 계급과는 다르게 이해한다. 우리의 저작은 이들에게 혁명에 대한 의구심과 불신이 아니라 권력을 노동계급의 손에서 빼앗아 간 자들에 대한 의구심과 불신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애초 우리의 목표이다. 진보의 원동력은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기 때문이다.

THE REVOLUTION BETRAYED  LEON TROT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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