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트로츠키주의자2017.04.20 21:45

새로운 혁명적 격동과 제 4인터내셔널의 임무 (1936년 7월)

 

1. 6월 파업은 프랑스와 벨기에의 정세에 새로운 시기를 열고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들 나라에서 계급투쟁의 격화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적절한 시기에 영국을 포함한 유럽의 상당한 지역에 그리고 어쩌면 유럽 바깥에도 대중운동의 상승을 가져올 것이다. 이 결과 스페인 혁명은 현재 고립상태에서 벗어나 있다.

2. 위기와 반동의 시기에 도시와 농촌의 노동계급 대중이 겉으로는 수동성을 보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분노와 투쟁에 대한 적극성을 축적해왔음을 가를 6월 파업은 보여주었다. 이 파업은 노동자 투쟁에 대한 도시 소부르조아 계급과 농민 다수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체제 전체의 극단적인 불안정, 지배계급의 자신감 결여, 레옹 블룸과 파시스트 들라로크 사이에서 보인 이들의 동요 역시 드러내 주었다. 전체 노동계급의 투쟁 적극성, 소부르조아 계급 하층부의 격렬한 불만, 금융자본 진영 내부의 혼란 등 세가지 조건은 노동계급 혁명의 전제조건 을 충족시키고 있다. 

3. 대중의 전투적 공세는 이번에도 역시 총파업 의 특성을 띠고 있다. 부분적 노동조합적 요구는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노동자들에게는 부르조아 계급과 그 국가에 대항하여 가능한 한 많은 노동자들을 분기시키고 단결시키는 필요한 수단이었다. 총파업은 혁명투쟁의 시기를 열면서 부분적 노동조합적 요구들을 아직 명확히 표현되지 않은 계급 전체의 임무와 결합시킬 수밖에 없다. 바로 이 결합에 총파업의 위력이 있으며 전위와 폭넓은 계급대중의 결합이 보장된다.

4. 우리 조직의 프랑스 지부는 최근 몇 년 동안 총파업을 선전의 중심에 놓아왔다. 노동계급의 이름을 걸고 존재하는 다른 정당이나 그룹과는 달리 프랑스의 볼셰비키-레닌주의 그룹은 제때에 상황을 준혁명적이라고 평가하고, 브레스트와 뚤롱에서 터져나온 파업이 내포하는 징후적 의미를 올바로 이해했다. 그리고 기회주의 및 사회애국주의 세력(사회당, 공산당, 노동총연맹)의 끊임없는 공격과 마르쏘 삐베르 등 중도주의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동을 통해 총파업을 준비했다. 비옥한 토양에서는 한줌의 씨가 큰 수확을 올린다. 따라서 사회 위기와 대중의 분노의 조건 속에서 물리적 자원은 빈약하나 올바른 구호로 무장한 소규모 그룹은 혁명의 경로에 의심의 여지없는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볼셰비키-레닌주의 그룹에 대한 자본가 계급 전체, 사회당, 공산당, 노동조합 등이 보유한 언론의 맹렬한 비난과 레옹 블룸의 경찰과 판사들의 탄압은 이 진실을 외부적으로 확인시키고 있다.

5. 프랑스와 벨기에의 어느 공식 노동자 조직도 이 투쟁을 원하지 않았다. 파업은 노동조합과 양대 정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터져나왔다. 이미 성취된 사실에 직면해서야 공식 지도자들은 즉시 파업을 압살하기 위해 파업을 “인정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부분적 요구를 건 구호 하에 비교적 “평화로운” 운동의 문제만 존재했다. 그러나 권력을 향한 공공연한 투쟁이 전개되는 때가 되면 1917년 러시아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들이 그랬던 것처럼 제 2 제 3 인터내셔널의 기구들이 노동계급에 반대하여 부르조아 계급의 하수인이 될 것이다. 이 점은 한순간도 의심할 수 없다. 프랑스와 벨기에의 사태는 다시 한번 논란의 여지없이 노동계급 혁명의 세계정당인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필요성을 증명하고 있다.

6. 그러나 거대한 6월 파업의 물결이 가져온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결과는 기존 노동자 조직들의 예외적으로 급격한 성장이다. 이 사실은 역사적 예를 보더라도 완벽히 이해될 수 있다. 1917년 2월 혁명 후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열병에 걸린 것처럼 급성장했다. 이들 사회애국주의 조직들은 이 혁명이 전쟁기간에 터져 나오기를 원치 않았었다. 그리고 독일사민당은 1918년 11월 혁명 직후 급격하게 성장했다. 이 정당 역시 혁명을 반대했었다. 노동계급 전체 앞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파산을 폭로시키기 전 이들 기회주의 정당들은 잠시 폭넓은 대중의 피난처가 된다. 프랑스의 사회당 특히 “공산당”의 급격한 성장은 이 나라 혁명 위기의 확실한 징후이며 동시에 제 2 제 3 인터내셔널의 사망을 예비하고 있다.

프랑스 노동조합의 유례없는 급격한 성장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겉으로는 개량주의-스탈린주의 노동조합 지도부(주오, 라카몽 등)의 비중과 중요성을 증대시키지만 수백만 노동자들의 새로운 유입은 보수적 노동조합 기구의 토대 자체를 침식한다.

7. 거대한 대중운동은 이론과 강령에 대한 최상의 시험대이다. 6월 파업은 초좌익, 종파주의 이론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이론들은 노동조합이 유효성을 “넘겨 생존”하고 있으며 다른 조직들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기존의 보수적 노동조합에 대항해 새로운 “진정한” 노동조합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혁명기에는 경제적 요구와 사회개혁 입법을 위한 투쟁은 소멸되기는커녕 유례없는 정도로 폭발한다. 노동조합으로 몰려드는 수십, 수백만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일상적 활동을 파괴하고 보수적인 기구를 뒤흔든다. 그리고 혁명정당으로 하여금 노동조합에 자신의 분파를 건설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며 노동조합의 지도적 역할을 위한 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한다. 기존의 노동조합에서 체계적이며 성공적인 작업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혁명정당은 자신의 노동조합을 수립할 능력도 없다. 이 모든 시도들은 실패로 끝나게 마련이다.

8. 제 2 제 3 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지금 자본주의는 모든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거나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올릴 능력을 이미 상실했다. 금융자본은 물가상승, 공개적 비공개적 인플레, 세금 등으로 사회개혁의 비용을 노동자와 소부르조아 계급에게 전가시킨다. “민주” 또는 파시스트 국가에서 지금 시행되고 있는 “경제개입정책”의 핵심은 인민의 생활과 문화 수준을 낮추면서 썩어빠진 자본주의를 살리는 데에 있다. 사적 소유체제의 틀 내에서는 다른 어떤 방법도 불가능하다. 프랑스 및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권과 벨기에 연립정권의 정책은 의도적인 기만술과 신기루에 지나지 않으며 노동대중에게 새로운 절망을 예비할 뿐이다.

9. 썩어가고 있는 자본주의하에서 소부르조아 계급의 완전한 절망적 위치는 다음을 의미한다: 레옹 블룸, 반더벨드, 디미트로프, 까쉥 등의 창피스러운 “사회적 조화” 이론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도 불안정하고 기만적인 노동계급을 위한 사회개혁은 도시와 농촌의 소부르조아 계급의 파멸을 가속화시키고 이들을 파시즘의 품으로 밀어넣는다. 노동계급과 소부르조아 대중의 진지하고 심오하며 영속적인 단결은 소부르조아 대중을 착취하는 급진당과의 의회연합과는 반대로 혁명 강령 즉 노동계급에 의한 국가권력 장악 그리고 모든 근로대중을 위한 소유관계의 혁명으로만 가능하다. 부르조아 계급과의 연합인 “인민전선”은 혁명을 저지하고 제국주의에게 안전판을 제공하는 장치일 뿐이다.

10. 소부르조아 계급과 노동계급의 연합을 위한 첫번째 조치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부르조아 급진당, 벨기에 카톨릭 정당과 자유당 등과의 연합을 파기하는 것이다. 사회당과 공산당의 모든 노동자에게 경험에 의거하여 이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의 가장 중심적 임무이다. 개량주의와 스탈린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은 지금 단계에서 무엇보다도 부르조아 계급과의 연합을 파기시키는 투쟁이다. 착취자와의 사기적인 연합에 반대하여 노동자들의 진실된 단결을! 부르조아 정당은 인민전선에서 꺼져라! 자본주의 정당 출신의 장관들을 몰아내자!

11. 지금은 다가올 혁명의 전개 속도를 추측만 할 수 있다. 전쟁의 패배, 농민 문제, 볼셰비키 정당 등 예외적인 상황 덕분에 러시아 혁명은 8개월만에 절대주의의 타도에서 노동계급에 의한 권력장악까지 혁명적 상승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이 짧은 시기도 4월 무장 시위, 7월 뻬쩨르부르그의 패배, 8월 코르닐로프의 반혁명 쿠데타 시도 등의 사건이 있었다. 스페인 혁명은 이미 5년동안 밀물과 썰물을 겪으면서 계속되고 있다. 이 기간동안 스페인 노동자와 빈농은 그렇게도 멋진 정치적 본능을 보여주었으며 거대한 투쟁 에네르기, 헌신, 영웅적 행위를 전개하여 지도부가 조금만이라도 정치상황과 노동계급의 전투적 투쟁에 부응했더라면 국가권력은 이미 오래 전에 노동계급의 손에 들어갔을 것이다. 스페인 자본주의의 진정한 구원자는 자모라, 아자냐, 길 로블레스가 아니라 사회당, 공산당, 무정부주의 조직의 지도자들이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12. 프랑스와 벨기에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레옹 블룸의 정당이 진짜 사회당이라면 총파업에 기반하여 내전 없이 최소한의 혼란과 희생으로 6월에 이미 부르조아 계급을 타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블룸의 정당은 썩어빠진 급진당의 동생 격인 부르조아 정당이다. 또한 “공산”당이 공산주의와 공통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파업의 첫날부터 자신의 범죄적인 오류를 교정하고 급진당과의 치명적인 연합을 파기하고 노동자들에게 공장위원회와 소비에트 수립을 촉구했을 것이다. 이 결과 노동계급 독재로 나아가는 가장 짧고도 가장 확실한 가교인 이중권력 상황을 전국에 조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공산당은 프랑스 제국주의의 도구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스페인, 프랑스, 벨기에의 운명의 열쇠는 혁명적 지도력 에 있다.

13. 똑같은 결론이 국제정책의 교훈 특히 소위 “반전투쟁”으로부터 도출된다. 사회애국주의자들, 중도주의자들 그것도 특히 프랑스의 양반들은 국제연맹에 머리를 조아리는 자신들을 합리화한다. 대중이 투쟁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특히 이디오피아에 대한 이탈리아의 강도적 침략에 대항하여 대중이 무역금수 조치에 동참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맥스튼 같은 평화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무기력을 숨기기 위해 이와 똑같은 주장을 한다. 6월 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 대중이 자기 조직의 지도자들에 의해 속거나, 최면상태에 빠지거나 지체되거나 마비되고 사기저하가 되었기 때문에, 오직 이 이유 때문에 제국주의자들의 국제적 도발에 대응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특히 명확해진다. 만약 소련의 노동조합들이 이탈리아에 대한 무역금수에 제때 동참하는 모범을 보였다면 이 운동은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피할 수 없는 힘으로 유럽 전체와 세계를 뒤덮었을 것이고 단번에 모든 제국주의자들에게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관료집단은 모든 혁명적 주도력을 금지하고 억압하여 에리오, 레옹 블룸, 국제연맹 앞에 코민테른이 쓰러져 항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노동계급의 국내정책과 똑같이 국제정책의 문제도 혁명적 지도력 의 문제이다.

14. 진정한 대중운동은 모두 폭풍처럼 혼탁한 대기를 정화시키고 동시에 모든 종류의 허구와 애매함을 파괴시켜 버린다. 6월 상황에 비추어 노동계급의 이해를 배신하는데 이미 충분히 단합된 힘을 보인 두 인터내셔널을 “통합하자”는 구호는 애처롭고 경멸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언제나 동요하다가 가장 최악의 정책만을 택하는 런던사무국(2.5 인터내셔널)의 동종요법도 마찬가지이다.

동시에 6월 사태는 무정부주의 그리고 소위 “혁명적 조합주의(revolutionary syndicalism)”의 완벽한 파산도 폭로시켰다. 이 두 경향 모두 사태를 예측하거나 준비하지 못했다. 총파업, 공장위원회,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 등에 대한 선전은 전적으로 하나의 정치조직 즉 정당에 의해서 수행되어져 왔다. 달리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확고하게 결집된 전위에 의해 고무되거나 지도되지 않는다면 노동계급의 대중조직은 무기력, 우유부단, 방향상실 등에 빠질 뿐이다. 혁명정당의 필요성은 새로운 힘으로 증명되고 있다.

15. 따라서 혁명투쟁의 모든 임무는 하나의 임무로 필연적으로 집약된다. 우리 시대의 임무와 가능성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 새로운 진정으로 혁명적인 지도부의 건설이 바로 이것이다. 대중운동에 대한 직접적 개입, 명확한 결론으로 이끄는 대담한 계급적 구호, 독립적인 깃발, 타협주의자들에 대한 단호한 거부, 배신자들에 대한 무자비함 --- 바로 여기에 제 4 인터내셔널의 길이 있다. 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창립할” 시간이 되었는 지에 대한 논의는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황당하다. 인터내셔널은 무슨 조합처럼 “창립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 건설되는 것이다. 6월 사태는 이것의 “시기적절함”을 논의하는 현학자들에 대한 대답이다. 더 이상 논의할 여지가 없다.

16. 부르조아 계급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다. 새로운 사회적 투쟁이 지금 의도적으로 대자본의 사령부에 의해 준비되고 있다. 이것은 처음부터 노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도발이나 일련의 도발의 성격을 띨 것이다. 동시에 “해체된” 파시스트 조직들이 맹렬한 준비를 하고 있다. 프랑스, 벨기에, 스페인에서 자본과 노동 두 진영의 충돌은 절대적으로 불가피하다. 인민전선의 지도자들이 계급 갈등을 “화해시키고” 혁명투쟁에 찬물을 끼얹으면 끼얹을수록 두 진영의 충돌은 가까운 미래에 더 폭발적이고 격동적일 것이며 더 많은 희생을 야기시킬 것이며 그만큼 노동계급은 파시즘에 대항해서 방어할 능력이 없어질 것이다.

17. 제 4 인터내셔널의 지부들은 이 위험을 명확하게 직시하고 있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노동계급에게 이 위험을 경고한다. 이들은 전위에게 스스로를 조직하고 투쟁에 대비하도록 가르친다. 동시에 이들은 책임을 완전히 회피하는 술수를 경멸적으로 거부한다. 앞으로 다가올 수개월과 수년간 자신들에게 가해질 타격이 아무리 심하다 할지라도 이들은 투쟁 대중과 자신의 운명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들은 모든 투쟁에 최대의 명확성과 조직력을 부여하기 위해 모든 투쟁에 참여한다. 이들은 지치지 않고 공장위원회와 소비에트를 촉구한다. 이들은 운동에 의해서 배출된 최량의 지도적 노동자들과 결합하여 이들과 손을 맞잡고 새로운 혁명적 지도부를 건설한다.

모범과 비판을 통해 이들은 기존의 정당 내부에 혁명 분파의 성립을 촉진하며 이 분파를 투쟁과정에서 더욱 가깝게 견인하며 제 4 인터내셔널의 길로 추진시킨다.

전선의 맨 앞에서 살아있는 투쟁에 참여하고 노동조합 내부에서 투쟁하며 정당을 건설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동시에 진행되며 서로를 보충한다. 노동자에 의한 생산 통제, 노동자 민병대, 노동자 무장, 노동자 농민 정부, 생산수단의 사회화 등 모든 투쟁 구호는 노동자, 농민, 병사 소비에트의 수립과 불가분 연관되어 있다.

18. 대중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이 순간 프랑스의 볼셰비키-레닌주의 그룹이 즉시 계급 적들의 관심과 증오심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이것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모든 종류의 속물들에게 종파주의로 비추어지는 볼셰비키주의는 대중운동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비타협성과 최대의 예민성을 결합시키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비타협성은 선진노동자의 의식으로부터 상투성, 관성, 우유부단 등을 제거하여 최대의 대담성으로 전위를 교육시키고 이들을 무자비한 대중투쟁에 개입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에 다름아니다.

19. 제 4 인터내셔널의 조직만큼 가혹한 압박을 받는 조직은 세계혁명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교황과 짜르 ...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 경찰”등의 세력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전제 짜르보다 세계혁명의 길에서 훨씬 더 위협적이고 배신적인 장애물이다. 코민테른은 10월 혁명의 권위와 레닌의 깃발로 자신의 사회애국주의 및 멘셰비키주의 정책을 감추고 있다. 소련 비밀경찰이라는 세계조직은 “우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찰과 손을 맞잡고 제 4 인터내셔널 파괴공작을 이미 진행하고 있다. 전쟁이 발발할 경우 호엔쫄른 왕가의 장군들이 사회민주주의 도살자들과 함께 당시 룩셈부르크, 리이프크네히트와 이들의 지지자들에 대해 가한 맹렬한 탄압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악한 탄압을 제국주의와 스탈린주의 연합세력이 혁명적 국제주의자들에게 가할 것이다.

20. 제 4 인터내셔널 지부들은 수행해야할 임무의 거대함, 적들의 명렬한 증오심, 수의 왜소함에 기죽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투쟁하는 대중들은 아직 스스로 의식은 못해도 자신들의 공식 지도자들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가까이 있다. 다가올 격동이 노동자 운동에 충격을 가해 더욱 급격하고 심대한 조직 재편이 이루어질 것이다. 프랑스 사회당은 노동계급의 대오로부터 축출될 것이다. 공산당의 연이은 조직 분열사태가 확실히 예견되고 있다. 노동조합에는 볼셰비키주의의 구호에 귀를 기울이는 강력한 좌파운동이 수립될 것이다. 형태는 다르지만 같은 과정들이 혁명적 위기에 돌입한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날 것이다. 혁명적 전위 조직의 고립은 해소될 것이다. 볼셰비키주의의 구호는 대중의 구호가 될 것이다. 다가올 시대는 제 4 인터내셔널의 시대가 될 것이다.              

후기

“프랑스, 벨기에, 스페인에서 자본과 노동 두 진영의 충돌은 절대적으로 불가피하다. 인민전선의 지도자들이 계급 갈등을 ‘화해시키고’ 혁명투쟁에 찬물을 끼얹으면 끼얹을수록 두 진영의 충돌은 가까운 미래에 더 폭발적이고 격동적일 것이며 더 많은 희생을 야기시킬 것이며 그만큼 노동계급은 파시즘에 대항해서 방어할 능력이 없어질 것이다.”(윗 글의 제 16 단락) 그간에 전개된 사태는 이 테제들이 출판되기도 전에 이 예측의 올바름을 입증시켰다.

스페인의 7월은 프랑스의 6월이 제시한 교훈들을 예외적으로 강력한 힘으로 심화시키고 보충하고 있다. 지난 5년간 벌써 두번째로 부르조아 급진당과 노동자 정당들 사이의 연합은 혁명을 나락의 가장자리까지 끌고갔다. 인민전선은 혁명에 의해서 제기된 임무 가운데 단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임무들은 단 하나의 임무 즉 부르조아 계급의 제거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결국 인민전선은 부르조아 민주주의 체제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파시스트의 쿠데타를 자극하고 있다. 노동자와 농민에게 의회적 환상을 달콤하게 유포시키고 이들의 투쟁력을 마비시켜 인민전선은 파시즘의 승리를 위한 좋은 조건을 만들고 있다. 부르조아 계급과의 연합정책은 수십년의 파시스트 테러통치는 아닐지라도 수년 간의 고통과 희생을 노동계급에게 강요할 것이다.

인민전선 정부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완벽한 무능력을 드러내고 있다. 부르조아 급진당이 무장한 파시스트들보다 무장한 노동자들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에 내각이 위기를 연이어 맞고 있다. 내전은 계속 질질 끌고 있다. 스페인 내전의 직접적인 결과가 무엇이든 그것은 프랑스와 다른 나라의 인민전선에 대해 죽음의 타격을 가하고 있다. 급진당과의 연합은 전쟁부 장관 달라디에의 엄호 하에 프랑스 총사령부의 군사쿠데타를 합법적으로 준비시킬 것이다. 이 점을 프랑스 노동자들은 모두 명확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부르조아 국가기구가 유지되고 있는 한 파시스트 도당들의 행정적 해체 조치는 스페인의 예가 보여주고 있듯이 거짓이며 사기이다. 오직 무장 노동자들만이 파시즘에 저항할 수 있다. 노동계급에 의한 국가권력의 장악은 부르조아 국가기구에 대한 무장봉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기구를 분쇄하고 노동자, 농민, 병사 소비에트가 이것을 대체하는 것은 사회주의 혁명 강령 실현의 필요조건이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노동계급과 소부르조아 계급은 고통과 결핍 그리고 새로 터질 전쟁으로부터 구출될 수 없을 것이다.

 

인민전선의 문제 (1936년 7월 27일)

 

동지들,

스페인의 상황이 어떻게 결말이 나든 (그리고 나는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말이 날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프랑스 뿐 아니라 모든 곳에서 제 4 인터내셔널의 발전을 위해 역사적 중요성을 가질 것입니다.

인민전선의 문제는 지금 모든 노동자들 앞에 아주 명확하게 제기되었습니다. 프랑스 사회당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이렇게 묻습니다( 예를 들어 형편없는 양반인 모리스 빠즈가 [인민]지에 실은 글을 읽어보십시오): “2월부터 정권을 잡고 있는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부의 지도자들은 도대체 왜 반동적 군대를 처리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 참 멍청한 실수로군!” 등등. 그러나 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문제는 “실수”의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계급적 이해관계의 문제입니다. 부르조아 계급이 자신의 좌파와 노동자 조직들 간의 연합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을 때 과거 어느 때보다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장교단을 필요로 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소유관계를 보호하는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실수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는 정부가 아니라 단순히 내각에 불과합니다. 진짜 정부는 총사령부, 은행 등에 있었습니다. 프랑스 급진당은 노동자들이 장교단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허용한다는 조건 하에서 연합을 체결하도록 허가받았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요구를 제시하면서 계속 투쟁하면 궁극적으로는 국가기구 전체가 노동자들을 압살할 것입니다.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 양반들은 인민전선을 노동계급 전술의 풍부한 한 형태라고 봅니다. 이들이 인민전선의 계급적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들이 아무 쓸모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급진당은 단순히 인민전선의 우익으로 간주되고 있으나 사실 이 정당은 지배계급을 대표하여 인민전선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당을 통해서 금융자본은 인민전선과 노동계급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이 문제가 스페인의 경우보다 더 명확하고 날카롭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달라디에는 군대를 자기의 통제하에 유지하고 있습니다. 파시스트 건달 장교 몇 명을 직위 해제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장교단 전체가 노동계급에 대해서 철저히 적대적입니다. 이들을 직위 해제시키려면 “군대를 해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가 바로 가까이 침략을 준비하고 있다! 급진당을 포함하여 부르조아 계급은 어느 누구도 장교단을 직위 해제시키도록 허용할 수 없습니다. “공산당” 역시 이런 사태가 일어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들이 소련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장교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일 바로 이 장교단이 인민전선 즉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리고 군사독재를 실시하여 소련에 반대하여 히틀러와 동맹을 맺을 것입니다. 재앙으로 가득한 지금 시기에 사태가 전개될 때마다 기회주의 정치의 범죄적 결과는 10배나 증대되어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는 올해 초에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 지도자 마우린과 닌이 자행한 범죄의 정도를 더욱 명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생각이 있는 노동자는 누구든지 이런 양반들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고 물을 것입니다: “당신네들은 아무 것도 예상하지 못했습니까? 어떻게 인민전선 강령에 서명하고 우리가 아자냐와 그의 동료들에게 신뢰를 보내도록할 수 있었습니까? 우리에게 급진당 부르조아들에 대한 가장 커다란 불신을 주입시켜야 했던 것 아닙니까? 이제 우리는 당신들의 오류 때문에 피를 흘려야 합니다.” 노동자들은 닌과 그의 친구들에게 특히 강한 분노를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몇년 전만해도 인민전선 정치를 정확하게 분석하여 인민전선을 매 단계마다 구체성과 명확성으로 폭로하는 경향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닌 자신은 무지로 오류를 범했다고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지도자로서는 궁색한 핑계에 지나지 않을뿐더러 그 자신이 서명한 문서들을 최소한 한번 이상 읽어보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의 사태는 중도주의 조직들을 희생시켜 다른 모든 곳처럼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제 4 인터내셔널에게 새롭고 거대한 가능성들을 열어줄 것입니다. 런던사무국이 지금의 조건 속에서 충분한 힘을 보유하여 11월 “평화 대회”에 자기 회원들만 부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의심할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대회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하여 결코 열리지 않을 지도 모르는 이 쓸모없는 인간들의 대회에 어떤 권위를 부여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대중에게로 얼굴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루거나 무슨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보수주의 관성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마비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채 대중조직들에게 침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 대중 앞에서 우리는 조직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허황된 중도주의자들과 어떠한 타협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이들과 우리 사이에 경계선을 명확히 하여 한마디로 어떤 범죄적 화해도 범해서는 안됩니다.

동지애를 보내며,

레온 트로츠키

 

 

제 4부: 맑스주의와 중도주의

 

편집자 서문

“불간섭” 프랑스에서 1936년 7월은 대중투쟁이 잠잠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내전이 막 터질 참이었다. 7월 17일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이 무장봉기를 시작했다. 곧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되었다: “프랑스의 인민전선 정부가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할 것인가?”

사회당과 공산당 평당원들은 스페인의 반파시즘 투쟁을 지원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스페인 공화국 정부에 대해서 대단한 공감을 보내며 지원을 약속하던 블룸은 “불간섭” 정책을 채택했다. 이 정책은 8월 15일 유럽의 강대국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러나 “불간섭”이라는 가면을 쓴 채 무쏠리니와 히틀러는 파시스트들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적 지원을 자행했다. 반면 프랑코에 저항하던 스페인 노동자들에 대한 무기공급이 봉쇄당했다.

1936년 가을이 되자 블룸은 스페인 정책으로 빈번히 공격받게 되었다. “불간섭” 정책의 주창자로서 그는 히틀러 정권의 금융부처와 협상하여 독일 식민지의 반환에 대해 독일 대표로서 영국과 협상할 것을 합의했다. 공산당 당수 토레즈는 자본주의 정부의 수반으로서 그가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조야한 술수에 대해 종종 비난을 퍼부었으나 결국 다른 공산당 지도자들과 함께 블룸 정부의 스페인 정책을 지지했다.

1936년 가을의 국내 상황도 국외 상황만큼이나 블룸 정권을 괴롭혔다. 9월 블룸 정권은 프랑화를 약 25%나 평가절하했으며 자신이 약속했던 개혁의 이행을 중단했다. 노령연금액 인상과 물가임금연동제를 연기시켰으며 공공사업에 대한 지출을 줄였다.

스탈린이 지배를 강화하다. 1936년 9월 스페인 사회당의 좌파 지도자 라르고 카발레로가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의 수상이 되었으며 공산당을 내각에 참여시켰다.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의 지도자이자 과거 트로츠키주의자였던 안드레스 닌은 카탈로니아의 법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은 11월 정부에서 쫒겨났다.

스페인의 군사적 생산적 자원들이 노동자와 농민의 손에 있었다면 프랑코의 공세는 저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노동자국가의 수립과 사회주의 혁명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반면 스탈린의 정책은 사적소유권을 주장하고 인민전선 정부의 반(反)노동자적 정책을 고무시키는 것을 통해 혁명세력의 패배를 보장하였다.

스탈린은 스페인 뿐만 아니라 소련에서 반대세력에 대한 공격의 수위를 한층 높이고 있었다. 1936년 8월 고참 볼셰비키 지도자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프는 제 1차 모스크바 조작 재판 후 처형되었다. 1937년 1월과 1938년 3월에 각각 제 2차 제 3차 재판이 열려 더많은 고참 볼셰비키들이 조작 재판에 의해 총살당했다. 스페인과 소련에서 자행된 혁명가들에 대한 스탈린의 범죄행각은 당연히 혁명대오에 비관주의와 사기침체를 증폭시켰다. 이미 프랑스의 선진노동자들은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의 정책에 실망하고 있었다.

인민전선의 붕괴. 개혁 대신 탄압이 계속 강화되자 블룸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가 계속 떨어졌다. 1937년 3월 끌리쉬에서 반파시스트 노동자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하여 4명이 살해당했다. 6월 중순 블룸은 강대국 정부들에게 심화되고 있는 금융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 호소가 거부되자 그는 수상직을 사임했다. 급진당의 까미유 쇼땅이 후임으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경제를 회복시키거나 산업생산의 급락을 해결할 수 없었다. 또 다른 파업의 물결이 빠리 지역의 산업과 수송 그리고 공공 서비스 전부를 사실상 마비시키자 1938년 1월 그 역시 사임했다.

파업의 물결은 굿리치 타이어 공장을 점거하고 있던 파업노동자들에 대한 경찰의 진입으로 시작되었다. 곧 3만명의 노동자가 결집하여 파업노동자들에 대한 자발적인 연대를 표시하며 경찰을 애워쌌다.

인민전선의 붕괴가 계속되자 급진당의 인민전선 내부의 비중이 점점 높아졌다. 1월부터 3월까지 지속된 쇼땅의 새 내각에서 사회당은 협의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자 블룸이 잠시 수상직을 다시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이미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침략하여 합병해버렸다. 이 사태 역시 국내 위기를 촉발시켜 프랑스 자본가들은 노동강도의 강화와 산업의 군사화를 촉진시키는 핑계로 이 사태를 이용하려했다. 이에 대해 노동자들은 주로 항공과 자동차 공업분야에서 다시 반격에 나섰다.

이때 블룸의 보좌관 직을 사임한 마르쏘 삐베르와 같은 좀더 전투적인 지도자들에 의해 노동계급에 대한 공산당의 영향력은 도전받고 있었다. 사회당은 삐베르의 당직을 정지시키고 그의 분파를 금지시켰다.

전쟁의 위협과 1938년 총파업. 프랑스 부르조아 계급은 제 1차 세계대전 후에 누렸던 유럽의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하고자 했으나 그 소망을 전혀 실현시킬 수 없었다. 독일 군비강화의 악령이 지배계급을 공포에 빠뜨렸다. 그러나 달라디에는 독일의 군사적 우위 이외에 걱정거리가 또 있었다. 1930년대 내내 프랑스 노동자들은 전쟁이 강요하는 희생보다 더 적은 희생에 대해서 거듭 전투적으로 반대하며 나셨다.

나찌가 체코의 독일인 지역인 슈데텐 지역을 침공할 준비를 하자 프랑스 정부는 영국 수상 챔벌린의 화급한 외교 노력을 지지하였다. 이 노력은 뮌헨에서 열린 4대 강대국 회의로 절정에 도달했다. 1938년 9월 30일 달라디에, 챔벌린, 히틀러, 무쏠리니는 뮌헨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에서 독일의 슈데텐 점령이 승인되었다. (이 회담이 열리기 전 트로츠키는 이렇게 예상했다: 프랑스와 영국이 체코를 독일에 넘길 경우 스탈린은 히틀러와 강화조약을 맺을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1939년 8월 23일 독소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7월 달라디에는 이미 “전시국가조직”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제시한 바 있었다. 11월 뮌헨 조약 이후 그는 이렇게 경고했다: 탄약제조산업에서 주당 44시간 노동제를 강제하려는 시도는 국가에 대한 범죄행위로 간주될 것이다; 반전 논의를 자행하는 노동자들은 2년 징역형에 처한다; 핵심산업의 노동자들은 전근되거나 다른 형태의 군복무에 종사해야 한다.

이에 대한 노동자의 예상된 반격은 드렝 무기공장의 점거파업으로 시작되어 자연발생적으로 자동차, 금속, 광산 분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저항은 노동총연맹 지도부에 의해 효과적으로 차단되었으며 이 범죄행위는 공산당과 사회당의 지지를 받았다.

공장위원회의 선동과 조직에 기초한 총파업을 촉구하는 대신에 노동총연맹은 상징적 1일 파업 그것도 시위나 점거가 없는 파업을 촉구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파업 종결 후 모든 선동과 조직을 중지하라고 촉구했다.

약 2백만 노동자가 11월 30일 파업을 준수했으나 수송과 통신분야는 정상근무에 들어갔다. 공산당이 투쟁의 승리를 선언했으나 투쟁의 상승세를 이어갈 모든 가능성은 아무 것도 없었던 1일 휴업으로 사그러들었다. 고용주들만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수많은 노동자 활동가들을 해고하거나 투쟁에 연루시켜 처벌했다.

프랑스 노동자운동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1938년 11월 30일의 패배로부터 일어서지 못했다. 이 패배를 상징하듯 1937년 5백만 가까이 자랑하던 노동조합원 총수가 1939년 전쟁 발발 시에는 2백만으로 줄었다.

스페인 혁명의 결말. 1939년 2월 프랑스와 영국은 스페인 공화파 세력이 스페인의 3분의 1을 점령하고 있었으나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을 승인했다. 6년 전 독일 파시즘의 승리는 파시즘의 위협에 대해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경계심을 각인시키고 이들의 급진화를 증폭시키면서 투쟁에 대한 준비를 시켰다. 그러나 스페인 파시즘의 승리는 스페인 노동자와 농민의 영웅적 투쟁을 자신의 투쟁으로 간주했던 프랑스 노동자들을 낙담으로 몰고갔다.

노동자농민사회당. 11월 30일의 패배 이후 반동의 득세와 혁명운동의 쇠퇴가 명확해졌다. 그러나 멀리 멕시코에서 트로츠키는 프랑스 혁명세력을 강화시킬 방안을 계속 모색했다. 사회당이 혁명좌파 경향을 축출하면서 1938년 6월 노동자농민사회당(PSOP)이 창당되었다. 트로츠키는 이 정당의 혁명 세력화 가능성을 모색했다. 새 정당은 마르쏘 삐베르가 주도했으며 잘 알려진 지식인 다니엘 게렝도 참여하고 있었다. 삐베르는 혁명좌파 세력을 전부 재결집시킬 수 없었으나 새 정당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뮌헨 회의로 인한 위기로 당원의 반을 잃었으나 그 수는 아직도 7천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정당의 구성원은 다양했으나 노동계급의 비중이 충분하여 혁명 중핵을 양성하기 위한 중요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중핵은 높은 수준의 정치적 훈련과 노선을 제공받을 경우 새로운 노동자 전위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었다.

제 4 인터내셔널의 지부인 국제주의노동자당(POI)내에서 장 루가 주도하던 일파는 두 정당이 통합할 것을 제안했다. 트로츠키는 이 제안을 지지했으나 새 정당의 두 지도자들을 설득시키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노동자농민사회당 지도부는 루 그룹 성원들의 개인 자격 입당을 인정해 주었다. 이 부분적 통합으로 게렝이 주도하던 당내 좌파는 강화되었다. 이에 대해 다수파 지도자 삐베르는 사회당 관료들이 1935년 볼셰비키-레닌주의 그룹을 축출하고 1938년 삐베르 분파를 축출하던 당시와 똑같은 경고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축출 사태 직전에 제 2차 세계대전이 먼저 발발하면서 노동자농민사회당은 공중분해되었다.

이로써 프랑스 혁명운동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트로츠키의 마지막 노력은 끝이 났다. 이로부터 약 1년 후 그는 스탈린 비밀경찰의 자객에 의해 멕시코에서 암살당했다. 프랑스 혁명운동에 대한 트로츠키의 노력은 실망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시기 그가 남긴 저작들은 오늘날까지 프랑스와 전세계 혁명가들을 교육시키고 고무시켜왔다.

 

프랑스의 정세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1938년 12월 8일)

 

제국주의 프랑스는 확실히 위기에 돌입했다. 의회체제는 명백하게 운을 다했다. 프랑스는 파시스트 독재 아니면 사회주의 공화국 둘 중의 하나로 전환될 수 밖에 없다. 제 3의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1936년 프랑스 노동자들의 혁명운동은 거대한 절정에 도달했다. 백치들은 파업운동이 “인민전선”의 활동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대중의 점증하는 투쟁과 이에 기인한 혁명의 “위험”이 스페인처럼 인민전선의 성립을 자극했다.

여러 번의 혁명을 경험했던 나라에서도 혁명은 순진한 환상과 단순한 자신감으로 시작된다: 새로운 세대는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 한다. 1917년 2월 러시아의 입헌민주당,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의 소위 “연립정권”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인민전선은 첫단계에 돌입한 혁명의 움직임을 제지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프랑스의 개량주의 관료집단들 즉 사회당, 공산당,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1917년 러시아의 경우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막강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스탈린은 러시아의 인민전선을 제압했던 10월 혁명의 이름으로 프랑스의 인민전선을 지원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혁명정당은 러시아의 경우보다 비교할 수 없이 허약했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프랑스의 인민전선 연합정권은 1936년의 혁명운동을 둔화시키고 어느 정도 기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얼마나 확실히 그리고 어느 시점까지? 미리 여기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확실하게 오랜 시간동안이라면 이미 가망없이 균열을 보이고 있는 인민전선은 확실히 파기되고 반동세력의 독재가 프랑스의 권좌에 오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확고하게 예측할 수 있듯이 인민전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억압되고 있는 운동이 스스로 활로를 찾는다면 사회주의의 승리를 실현시킬 수 있고 실현시킬 것이다. 제 3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계급의 공식 지도자이자 인민전선의 수립자인 주오, 레옹 블룸, 토레즈와 그의 동료들은 의회민주주의의 무덤을 파는 진짜 인부들이다. 현재 이들 완전히 썩어빠진 제 3공화국의 “기둥들”만큼 파시즘의 승리를 돕는 자들은 없다. 제국주의 민주주의의 “위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너무 늦다. 이것은 이미 운이 다했고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노동계급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다.

이 위험을 사소하게 보아 넘기는 것은 범죄 행위이다. 그러나 프랑스 노동계급의 힘, 그 투쟁전통, 그 혁명적 임기응변의 능력을 사소하게 보아 넘기는 것 역시 이와 못지 않은 범죄 행위이다. 수백만의 혁명분자들이 노동계급 내부 깊숙히 퍼져있다. 제 4인터내셔널의 프랑스 지부는 진지한 중핵들을 교육시키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임박한 위험은 노동계급 한 부위 한 부위를 차례로 좌로 나아가게 만들 것이다. 제 4 인터내셔널 대회는 혁명 강령을 진보적 분자들에게 제시했다. 이들이 결여한 것은 공동 연결망, 중앙집중적 조직, 기술적 물질적 수단 등이다.

프랑스의 혁명적 노동자들을 국제적 공감과 적극적 지지의 분위기로 감싸는 것이 필요하다. 파시즘은 내전을 준비하고 있다. 모든 전쟁에서 하나의 중요한 신경은 자금이다. 제 4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에 자금지원이 필요하다. 자유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모든 우호세력은 프랑스의 진보적 노동자들을 지원할 의무가 있다.

너무 늦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이 아직 늦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에는 강력한 파시스트 정당이 없다. 프랑스에서 파시즘은 권력을 잡은 후에도 히틀러만큼 큰 조직을 거느리지 못할 것이다. 프랑스의 전통과 풍습이 이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훨씬 더 적은 조직이 프랑스에서 절망적이며 기죽은 소부르조아 대중을 반동 쿠데타로 이끌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현재 프랑스 파시즘의 조직적 허약성은 혁명정당의 손에 주어진 대단히 중요한 카드이다. 파시스트 쿠데타를 기도할 시간이 확실히 무르익기 전 몇 개월 아니면 1년 어쩌면 2년의 시간이 우리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시간동안 나이 어린 혁명정당조차 기적을 이룰 수 있다. 경고를 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프랑스에 임박한 파시즘의 재앙에 대해 국제 캠페인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이 재앙이 제 2 그리고 제 3 인터내셔널 정당들에 의해 준비되고 있다고 이해하고 이것을 대중에게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프랑스의 혁명전위에게 용기, 대담성, 주도성을 불어넣는 것이 필요하다. 미래를 내다보면서 다가오는 위험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프랑스에서 미국 노동계급을 포함한 세계 노동계급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다. 단 하루도 허비하지 않고 모든 노력을 다할 필요가 있다. 영웅적 행위는 영웅적 수단을 요구한다!

 

결정적인 순간(1938년 12월 14일)

 

원하든 원치 않든 지구가 계속 축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매일 확인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급투쟁의 법칙들은 우리가 인식하든 않든 독립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인민전선의 정치에도 불구하고 작동하고 있다. 계급투쟁은 인민전선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체코의 경험 후 이제 프랑스의 차례가 왔다: 가장 둔하고 후진적인 사람들도 뭔가를 배울 새로운 기회를 가지고 있다.

인민전선은 정당들의 연합이다. 모든 연합은 즉 모든 지속적인 정치연합은 필요상 연합 정당들 가운데에서 좀더 온건한 강령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 인민전선은 애초부터 사회당과 공산당이 급진당의 통제하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었다. 프랑스 급진당은 제국주의 부르조아 계급의 좌익을 대표하고 있다. 급진당의 깃발에는 “애국”과 “민주주의”가 새겨져 있다. “애국”은 프랑스 제국의 방어를 의미한다. “민주주의”는 아무 의미도 없지만 소부르조아 계급을 제국주의의 전차에 결박시키는 데에 소용이 있을 뿐이다. 약탈적 제국주의를 말로만의 민주주의로 단합시키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급진당은 다른 어떤 정당보다 대중에게 거짓말과 배신을 선사할 수밖에 없다.

에리오-달라디에의 정당이 프랑스의 모든 정당들 가운데 가장 부패했으며 출세주의자, 돈에 쉽게 매수되는 개인, 증권시장의 증권 조작꾼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종류의 모험주의자들의 온상이라고 과장없이 말할 수 있다. 인민전선의 정당들이 급진당의 강령적 내용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실제로는 노동자와 농민을 부르조아 계급 가운데 가장 부패한 집단의 제국주의 강령에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인민전선의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동계급과 소부르조아 계급과의 연합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지독한 거짓말을 상상하기는 불가능하다! 급진당은 소부르조아가 아니라 대부르조아 계급의 이해를 표현하고 있다. 이 정당의 핵심적 특징은 제국주의에 의한 소부르조아 계급의 착취를 시행하는 정치기구라는 것이다. 급진당과의 연합은 결과적으로 소부르조아 계급이 아닌 이 계급의 착취자와의 연합이다. 소부르조아 계급에게 급진당으로부터 해방되는 법, 급진당의 멍에를 영원히 벗어던지는 법을 가르치는 것만이 노동자와 농민의 진정한 연합을 달성하는 길이다. 한편 인민전선은 이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나가고 있다: 이 “전선”에 참여하면서 사회당과 공산당은 급진당을 책임지고 대중에 대한 이 정당의 착취와 배신행위를 도와주고 있다.

1936년 사회당, 공산당, 무정부적조합주의 조직은 강력한 혁명운동을 둔화시키고 해산시키는 것을 통해 급진당을 도와주었다. 대자본은 지난 2년 반동안 당시의 공포로부터 약간 회복되었다. 혁명의 브레이크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에 인민전선은 이제 부르조아 계급에게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 제국주의는 자신의 국제정책에 있어서도 방향을 바꾸었다. 소련과의 연합은 가치가 거의 없는 큰 도박이라고 인정되고 독일과의 연합은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급진당은 금융자본의 명령을 받았다: 사회당, 공산당과의 연합을 파기하라. 항상 그렇듯이 이들은 아무런 주저 없이 이 명령을 실행에 옮겼다.

이렇게 노선을 바꿀 때 급진당 내부에 아무런 반대의 움직임도 없었다는 사실은 다시 한번 이 정당이 핵심은 제국주의적이되 말로만 “민주적”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급진당 정권은 “민주주의 국가들과의 공동전선”에 대한 코민테른의 모든 교훈들을 거부하고 파시스트 독일과 화해했으며 지나가는 길에 1936년 운동의 부산물인 모든 “사회입법”을 되가져가 버렸다. 이 모든 것은 계급투쟁의 엄격한 법칙에 따라 일어났으며 이 사태가 예상될 수 있었고 실제로 예상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소부르조아 맹인들에 지나지 않는 사회당, 공산당 지도자들은 이러한 사태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무엇이라고?”라는 공허한 외침으로 자신들의 혼란을 은폐했을 따름이었다. 기존 체제를 도와 노동운동을 저지하여 “공화국” 즉 제국주의 부르조아 계급에게 막대한 기여를 한 이들 애국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은 이제 아무런 예식도 없이 쫒겨났다! 이들이 쫒겨난 이유는 부르조아 계급에게 모든 서비스를 다 했다는 그 자체 때문이다. 계급투쟁에서 고마움은 요인이 된 적이 전혀 없다.

배반당한 대중의 불만은 현재 엄청나다. 이번 일로 자신들의 신용을 확실히 잃는 일을 막기 위해서 주오, 블룸, 토레즈는 뭔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에 대해 주오는 “총파업” 그리고 “팔짱낀” 항의를 선언한다. 합법적이고 평화적이며 완전히 거부감이 없는 항의를 말이다! “이것도 24시간 짜리에 불과합니다”라고 그는 부르조아 계급을 향해 공손한 미소를 지으면서 설명한다. 질서는 위배되지 않을 것이며 노동자들은 “존엄한” 평정을 유지할 것이며 지배계급의 머리에서 머리카락 하나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오는 이렇게 보증한다: “은행가, 기업가, 장군 여러분들 나를 모릅니까? 내가 1914-1918년 전쟁에서 당신들을 구해준 사실을 잊고 있습니까?” 이에 대해 블룸과 토레즈는 노동총연맹의 말을 재청한다: “오직 평화적이며 소규모의 지배계급에 공감하는 애국적 항의에 불과합니다!”

한편 중요한 산업분야의 노동자들을 군대로 편제시키고 군대를 준비시킨다. 팔짱낀 항의에 돌입한 노동계급에 대해 부르조아 계급은 인민전선 덕분에 공포에서 탈출한 뒤이므로 팔짱낀 채 복수할 결심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인민전선에 의해서 조성된 노동계급 대중의 사기저하를 활용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파업은 패배를 가져올 뿐이다.

프랑스 노동계급은 최근에 공장점거를 포함한 열화와 같은 파업물결을 이루어 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다음 단계는 국가권력 장악을 의제로 제기하는 진정한 혁명적 파업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국내적 위기 그리고 임박한 파시즘과 전쟁 앞에서 이들에게 다른 길을 어느 누가 제시할 수 있겠는가. “팔짱 낀” 24시간 짜리 희극적 파업이 지나면 상황이 호전되는 것이 아니라 악화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이 있는 노동자들은 누구나 알고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위의 노동자들은 실업, 벌금, 징역 등으로 이에 대한 값비싼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위험을 앞두고 있다. 무엇을 위해서? 질서는 결코 위반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오는 맹세한다. 빈곤, 민주주의, 식민지 그리고 이들과 함께 고통, 높은 생활비, 반동, 전쟁의 위협 등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대중은 커다란 희생을 감내할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희생을 통해 이루려는 목표, 투쟁 방식, 적과 아군 등을 명확히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노동자 조직의 지도자들은 대중을 오도하고 혼란시키기 위해서 모든 짓을 다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급진당은 진보, 민주주의, 평화 등의 대표로서 인민전선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미화되었다. 급진당에 대한 노동자들의 신뢰는 크지 않았다. 이 점은 당연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사회당, 공산당, 노동조합 조직들에 대해서 신뢰를 보인 한도 내에서 급진당에게도 신뢰를 주었다 . 그런데 항상 그렇듯이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채 급진당과의 연합이 이루어진 상층부에서 균열이 발생했다. 대중은 마지막 순간까지 무지를 강요받았다. 더 나쁜 것은 부르조아 계급이 노동계급 대중을 기습하도록 대중에게 거짓정보가 주어진 것이었다. 그런데도 대중은 투쟁 준비를 했다. 자신이 쳐놓은 그물에 갇힌 채 “지도자들은” 대중에게 --- 웃지마세요! --- “총파업”을 촉구했다. 누구에 대항해서? 어제의 “아군”을 위해서. 무엇을 위해? 아무도 모른다. 기회주의는 언제나 모험주의라는 괴상망칙한 탈을 쓴다. 핵심 성격상 총파업은 혁명투쟁의 무기이다. 총파업에서 노동계급은 하나의 계급으로서 계급의 적에 대항해서 결집한다. 총파업의 사용은 인민전선의 정치와는 전혀 상극이다. 왜냐하면 인민전선은 부르조아 계급과의 연합 즉 노동계급을 부르조아 계급에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뿐만 아니라 사회당과 공산당의 빌어먹을 관료들은 노동대중을 부르조아 계급과의 밀실협상의 단순한 보충적 도구로만 바라본다. 이들은 결정적인 투쟁의 문제일 때에만 의미를 갖는 희생을 단순한 시위를 위해 감내하라고 제안한다. 마치 의회 내의 연합을 위해 대중이 자기들 멋대로 좌로 우로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결론적으로 주오, 블룸, 토레즈는 파업의 패배를 보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다했다. 이들 자신이 부르조아 계급만큼이나 파업을 두려워한다. 동시에 이들은 대중 앞에 알리바이를 제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개량주의자들의 습관적 전술이다: 대중투쟁이 패배하도록 꾸민 후에 이들은 패배를 대중의 탓으로 돌리거나 거두지도 않은 승리를 자신들의 탓으로 돌린다. 모험주의라는 동종요법으로 보강된 이 기회주의가 노동자에게 패배와 모욕감만을 가져다 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1936년 6월 9일 우리는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라고 말했다. 그 이후의 사건들이 이 진단을 틀린 것으로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문제는 좀더 복잡하다. 프랑스의 객관적 상황은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혁명적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심도 할 수 없다. 프랑스 제국주의의 국제적 상황이 위기를 맞고 있다. 이와 함께 국내적 차원에서 프랑스 자본주의 역시 그러하다. 국가의 금융 위기에다 민주주의의 정치적 위기 그리고 부르조아 계급의 극단적 혼란상태는 과거의 방식으로는 해소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1905년 레닌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혁명은 모든 혁명적 상황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객관적 변화에 주관적 변화가 결합되어야한다. 즉 위기의 시기에 저절로 ‘붕괴’하지 않는 기존의 정부를 ‘붕괴하도록’ 제압할 수 있는 정도의 강력한 위력으로 혁명적 대중행동을 수행할 수 있는 혁명적 계급의 능력에 달려있다.” 그렇다. 혁명은 모든 혁명적 상황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주관적 요인 즉 혁명계급의 혁명적 공세가 제때에 객관적 요인을 돕지 않는다면 혁명적 상황은 반혁명적으로 변한다. 최근의 역사는 이 사실을 비극적인 일련의 예들을 통해서 확증했다.

1936년의 거대한 파업은 프랑스 노동계급이 혁명투쟁을 할 준비가 되어있으며 이미 투쟁의 길에 들어섰음을 증명했다. 이런 의미에서 “혁명이 시작되었다.”고 선언할 권리가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혁명이 모든 혁명적 상황으로부터 나오지 않듯이”, 모든 혁명의 시작 이 이후의 중단없는 발전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젊은 세대를 투쟁의 장으로 던져올리는 혁명의 시작은 언제나 환상, 순진한 희망과 믿음으로 채색되어있다. 좀더 결정적인 전진을 이루기 위해 혁명에게는 반동세력의 가혹한 타격이 필요하다.

블룸, 주오, 토레즈 등이 돕지 않아 필연적으로 프랑스 부르조아 계급이 시위와 점거파업에 대해 경찰과 군사적 조치로 대응했더라면 혁명운동은 좀더 빨리 더 높은 수준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이 의심의 여지없이 일정에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부르조아 계급은 인민전선의 도움을 받아 파업노동자들의 공세에 블룸 정권으로 대응했다. 그런데 이 정권이 노동자들에게는 자신의 또는 거의 자신의 정권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노동총연맹과 코민테른은 이 배신행위를 모든 힘을 다해 지원했다.

국가권력 장악 투쟁을 지도하려면 지배계급을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적이 아군으로 위장했기 때문에 적을 알아보지 못했다. 더욱이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정당, 노동조합, 소비에트 등 투쟁의 도구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노동자들로부터 이런 도구들이 강탈당했다. 노동자 조직의 지도자들이 부르조아 권력을 에워싸서 벽을 구축하여 이 권력을 위장하고 알아볼 수 없으며 난공불락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시작된 혁명은 저지당하고 사기침체를 겪었다.

이때 이후 2년 반 동안의 시간은 차례로 인민전선의 무기력, 허구, 공허함을 드러냈다. 노동대중에게 “인민”정부로 보였던 것이 단순히 제국주의 부르조아 계급의 가면이었음이 드러났다. 이제 이 가면은 폐기되었다. 부르조아 계급은 노동계급이 충분히 현혹 당했고 약화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혁명의 임박한 위험은 지났다고 생각하고 있다. 달라디에 정부는 부르조아 계급의 계획에 따르면 좀더 강력하고 좀더 실제적인 제국주의 독재정부로 나아가는 피할 수 없는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부르조아 계급의 이러한 진단은 옳은가?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위험은 지났는가? 다시 표현하면 혁명은 정말로 기약 없는 먼 미래로 미루어졌는가? 그러나 어떤 것도 이 점을 증명하지 못한다. 이런 유형의 주장은 기껏해야 서두름과 서투름일 뿐이다. 현재 의 위기가 끝났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어쨌든 부르조아 계급의 이익에 낙관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투쟁의 전선에 제일 먼저 나서고 제일 나중 물러서는 혁명정당의 도리가 아니다.

이제 부르조아 “민주주의”는 가장 강력하고 가장 부유한 착취국과 노예보유국의 특권이 되었다. 프랑스가 이 나라들에 속하지만 이 나라들 가운데에서 가장 허약한 고리이기도하다. 이 나라의 허약한 경제적 비중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이 나라의 세계적 지위와 어울리지 않는다. 피할 수 없는 역사의 타격을 제국주의 프랑스가 지금 받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2, 3년간 혁명적 상황의 근본 요인들은 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반대로 크게 강화되었다. 이 나라의 국내외 상황은 악화되었다. 전쟁의 위험은 가까이 있다. 혁명에 대한 부르조아 계급의 두려움이 적어지기는 했으나 위기를 해결할 방도가 없다는 일반적인 의식은 증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적 요인” 즉 노동계급의 투쟁하려는 의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 문제는 객관적인 영역이 아니라 주관적인 영역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선험적인 조사로 해결될 수 없다. 결국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살아있는 행동 즉 투쟁의 실제 경로이다. 그러나 “주관적인 요인”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정말이지 존재하기는 한다. 비록 필자가 프랑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지난번 “총파업”의 경험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11월 후반부와 12월 초순에 있었던 프랑스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금 자세히 분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심지어는 가장 일반적인 자료조차 우리의 관심을 끄는 문제를 연구하는데 충분하다. 최소한 서류상으로 5백만 노동자를 보유하고 있는 노동총연맹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2백만 정도의 노동자가 시위용 파업에 참가한 것은 패배이다. 그러나 이미 제시한 정치적 상황과 무엇보다도 파업의 주도적 “조직가들”이 동시에 주요한 파업파괴자들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2백만의 숫자는 프랑스 노동자들의 투쟁정신을 증명한다. 바로 전에 있었던 일들, 예를 들어, 열화와 같은 모임과 시위, 군대 및 경찰과의 대치, 파업, 11월 17일에 시작되어 공산당, 사회당, 노동조합 평회원들의 적극적 참가와 함께 증가하는 경향이 있었던 공장점거 등에 의해 이 결론은 더욱 명백해진다. 노동총연맹은 확실히 사태에 대한 장악력을 잃고 있다. 11월 25일 노동조합 관료들은 11월 30일 즉 5일 뒤에 “비정치적” 평화 파업을 촉구했다.

다른 말로 하면 더욱더 투쟁성을 강화한 진정한 운동을 발전시키고 확대시키고 일반화시킨 대신 주오 일당은 이 혁명운동을 전혀 소득이 없는 항의행동으로 맞바꾸었다 . 자연발생적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부르조아 계급만큼이나 자신들이 그렇게 두려워했던 운동을 당국과의 말이 필요없는 협조관계를 이루면서 마비시키고 청소시키기 위해 하루가 한달과 같은 순간에 관료들에게는 5일간의 지연이 필요했다. 주오 일당이 운동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지 않았다면 달라디에의 경찰 및 군사적 조치들은 이렇다할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철도, 군수, 금속 그리고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노동계급 선진부위의 “총파업” 불참 또는 낮은 참여는 이들의 무관심 때문이 결코 아니었다. 파업 전 2주일동안 이 분야 노동자들은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특히 달라디에의 조치들이 있은 후에 바로 이 분야의 노동자들은 다른 노동자들보다 시위나 소득 없는 항의 정도가 아니라 권력 장악이 문제의 핵심이란 사실을 이해했다. 반면에 가장 후진적인 또는 사회적 관점에서 덜 중요한 부위의 노동자들이 시위-파업에 참여한 것은 나라의 심대한 위기와 함께 근로대중에게는 수년간의 허약한 인민전선 정책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에네르기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혁명의 결정적이고 확실한 패배 이후에도 가장 후진적 노동자들이 공세를 취한 반면 철도와 금속 등의 노동자들이 수동적인 상태로 머물렀다는 것을 물론 역사는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예는 러시아에서 1905년 10월 봉기가 진압된 후 일어났다. 그러나 이 상황은 노동자 선진부위가 파업, 직장폐쇄, 시위, 경찰 및 군대와의 대치, 봉기 등 10월 이전에 있었던 오랜 동안의 투쟁으로 기력을 소진한 결과였다. 그러나 프랑스 노동자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1936년 운동은 노동자 전위의 역량을 어떤 정도든 소진시키지 않았다. 인민전선의 기만술이 물론 특정 부위 노동자들의 일시적 사기저하를 초래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은 다른 부위 노동자들의 저항과 참을성 상실의 증대에 의해 균형이 이루어졌다. 동시에 1938년 뿐 아니라 1936년의 운동도 노동계급 전체에게 아주 소중한 경험을 제공했으며 공식 조합 관료들과는 독립적인 수 천명의 지역 노동자 지도자들을 양성했다. 이 지도자들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이해하고 이들을 다른 지도자들과 연결시키고 이들을 혁명적 강령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투쟁현장에서 대중의 맥박을 우리보다 훨씬 더 잘 느낄 수 있는 프랑스의 동지들에게 멀리서 전술에 대한 조언을 할 의도는 조금도 없다. 다만 대중의 투쟁 의지를 포함한 계급역관계에 대한 유일하고 진지하며 확실한 척도는 행동 이라는 사실이 과거 어느 때보다 모든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에게 명백해졌다. 제 2, 제 3 인터내셔널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은 전위의 직접적 개입을 추동하는데 도움을 주는 한에서만 혁명적 가치가 있다. 전위 추동의 근본 구호들은 제 4 인터내셔널의 강령 안에 있다. 이 구호들은 다른 어느 곳에 비해서 프랑스에서 더욱 그 적합성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 동지들에게는 엄청난 정치적 책임이 부과되어 있다. 모든 역량과 도덕적 물질적 수단을 다하여 제 4 인터내셔널의 프랑스 지부를 돕는 것이 국제혁명전위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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