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트로츠키주의자2017.04.20 20:34

제 9 장 소련의 사회적 관계

소련의 공업 분야에서 국가 소유는 거의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다 농업의 경우 국가 소유의 국영농장은 농지의 10%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집단농장에서는 협동조합이나 그룹소유 (역자 주: group ownership, 몇몇 개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토지를 공동으로 이용하는 소유형태.)가 국가 소유 및 개인 소유와 다양하게 혼재되어 있다 토지는 법적으로 국가의 소유이지만 "영원히" 사용할 수 있도록 집단농장에 이전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룹 소유가 지배적인 형태가 되어 있다 트랙터를 비롯한 정밀기계들은 국가 소유이다 그러나 소형 장비는 집단농장의 소유이다 더욱이 집단농장의 농민들은 집단농장에서 일정 시간 노동한 후 개인적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마지막으로 농민의 10% 이상이 전적으로 개인소유 토지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1934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인구의 28.1%는 국영기업이나 국가기관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가족을 제외한 공업 및 건설업 노동자는 1935년에 750만 명이었다 인구조사가 진행될 당시 집단농장과 수공업 협동조합은 인구의 45.9%를 포괄하였다 학생, 적군 병사, 연금생활자 그리고 기타 직접적으로 국가에 생계를 의존하는 인구는 3.4%였다 모두 합쳐서 인구의 74%는 "사회주의 부문"에 속해 있었고 이 부문은 소련 내 생산수단의 95.8%를 장악하고 있었다. 1934년 개인소유 농민과 수공업자는 아직도 인구의 22.5%나 되었지만 4%를 약간 넘는 생산수단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1934년 이후 인구조사는 실시되지 않았다 다음 인구조사는 1937년에 실시될 계획이다 그러나 의심의 여지없이 지난 2년 동안 개인소유 부문은 더욱더 "사회주의" 부문에 흡수되었다 관변 경제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개인소유 농민과 수공업자는 약 1,700만 명으로 인구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경제적 비중은 인구 비중보다 훨씬 더 낮아졌다. 1936년 4월 당 중앙위원회 비서 안드레예프(Andreyev)는 이렇게 밝혔다: "1936년 사회주의 생산의 비중은 98.5%에 이를 것이다 즉 1.5%만이 아직도 비사회주의 생산부문에 속해 있다." 이 낙관적인 통계수치들은 언뜻 보면 사회주의의 "최종적이고 역전될 수 없는"승리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통계수치 뒤에 도사리고 있는 사회현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재앙이 닥칠지어다!

우선 이 수치들은 약간 과장되어 있다 집단농장 옆에 조성된 개인 텃밭이 "사회주의" 부문으로 집계되어 있는 사실 하나만 지적해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국가적·집단적 소유형태의 의심의 여지없는 절대 우세는 소련의 미래를 위해 중요하다 그러나 더없이 중요한 또 다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즉 농업과 공업의 "사회주의" 부문 내에는 부르주아 경향이 아주 강력하게 위세를 떨치고 있다 이미 성취된 물질적 수준은 모든 분야에서 많은 수요를 창출하고 있으나 이 수요는 충족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경제가 역동적으로 발전하면서 농민과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인구 뿐 아니라 노동계급의 상층부도 소부르주아적 욕구를 표현하고 있다 개인토지 소유자와 집단농장 그리고 농민, 개인 수공업자와 국영기업 등을 단순 대비시킬 경우 이 부르주아적 욕구의 폭발적 위력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욕구는 경제 전체를 뒤덮고 있다 이 욕구는 각자가 가능한 선에서 가장 적게 사회에 기여하는 대신 가장 많은 것을 사회로부터 가지고 가겠다는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말 그대로 사회주의 건설에 투여되는 만큼의 활력과 창의력이 개인 축재자와 소비자들을 통제하는 일에 투여되고 있다 사회적 노동생산성이 매우 낮은 것도 부분적으로는 이것 때문이다 국가 행정기구는 이 원심력적 경향의 팽창에 대해 계속 투쟁하고 있다 그러나 지배층 자체가 합법적·불법적 개인 축재의 주요한 온상이다 새로운 법과 규범들로 위장하고 있기 때문에 부르주아 경향이 통계에 잘 잡히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사회주의" 관료집단이란 말은 노골적인 형용모순인데 괴물처럼 계속 커지고 있는 왜곡된 사회현상을 대표하는 말이 되었다 사회악의 원천인 이 관료집단이야말로 부르주아 경향이 경제생활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뚜렷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새로운 헌법은 관료집단을 국가와 그리고 국가를 인민과 동일시하고 있는데 "‥‥‥국가소유 즉 전 인민의 소유"라는 구절을 보아도 명백히 이 점이 드러난다 그런데 국가와 인민을 동일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야말로 관변 이론이 구사하는 궤변의 바탕이다 마르크스를 필두로 해서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자국가와 관련하여 국가 소유, 인민 소유, 사회주의 소유를 단순 동의어로 보고 있는 것은 완전히 사실이다 물론 역사를 큰 범위로 바라보면 이 용법은 특히 불편할 일이 없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확실히 결과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첫 시기들을 단계로 설정할 때 그리고 특히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경제적으로 낙후한 고립된 사회를 연구할 때 동의어를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조야한 오류의 원천이 될 뿐 아니라 엄연한 기만행위가 된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려면 번데기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인소유는 사회주의 소유가 되기 위해 국가 소유 단계를 필연적으로 거쳐야 한다 그러나 번데기가 나비인 것은 아니다 수많은 번데기들은 나비가 되기 전에 죽는다 사회적 특권과 계층적 분화가 사라지고 국가가 필요 없을 때가 되어야 국가 소유는 "전체 인민"의 소유로 변화된다 다시 말하면, 국가 소유는 국가 소유를 지양하는 만큼 사회주의 소유에 다가간다 그리고 이것의 역도 성립한다: 소비에트 국가가 인민 위에 높이 군림하여 자신을 소유 체제의 수호자로 소유 체제의 탕진자인 인민에 더욱 첨예하게 대립시킬수록 이 국가는 국가 소유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부정한다.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화가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을 가리키며 관영 언론은 "계급이 완벽하게 철폐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고백한다 관료집단이 자신의 수입을 "정신"노동이라는 멋진 범주로 분류하여 그 실체를 숨긴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순수한 학문적 고백은 값어치가 있다 소련에 우호적인 서방의 "친구들"에게는 진실보다 플라톤이 더 귀중한 존재이다 그런데 이들도 옛날의 불평등이 아직 살아남아 있다고 학문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자주 들먹거려지는 "살아남아 있다"는 말은 소련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 전혀 적합하지 못하다 어떤 측면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차이가 완화되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이 차이가 상당히 심화되었다 도시가 팽창하고 있으며 도시에 거주하는 소수 인구의 안락을 도모하는 도시문화가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으로부터 과학 분야 간부들이 새로이 충원되었으나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사이의 사회적 격차는 최근 몇 년 동안 좁혀지기는커녕 오히려 넓어졌다 세련된 도시인과 거치른 농민, 과학의 초능력과 일용노동자의 미숙련 노동 등이 공존하고 있다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일상을 규정하는 천 년이나 오래된 장벽들은 완화된 형태로 보존되어 왔을 뿐 아니라 상당한 정도로 새로이 발전하여 점점 더 완고한 성격을 띠고 있다.

"간부들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악명높은 구호는 스딸린이 원하는 것보다 소련 사회의 성격을 훨씬 더 솔직하게 나타내고 있다 간부들은 근원적으로 지배와 명령의 기관이다. "간부" 숭배는 무엇보다 관료집단, 행정부, 기술 귀족층 등에 대한 숭배를 의미한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간부들을 치켜올리고 개발하는 일도 소비에트 체제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이미 오래 전에 해결한 문제들을 이제야 해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소비에트 간부들은 사회주의라는 깃발을 들고 당당하게 등장하면서 거의 신적인 존경과 높아만 가는 봉급을 요구한다 따라서 "사회주의" 간부층의 개발은 부르주아 불평등을 새로 조장하면서 진행되고 있다.

생산수단 소유의 관점에서 보면 사령관과 가정부 소녀, 복합기업 책임자와 일용 노동자, 인민위원의 아들과 집없는 아동 사이의 차이는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자는 호화 아파트에 살면서 나라의 여러 곳에 여름 별장을 여러 개 가지고 있으며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고 자기 구두 닦는 법을 잊은지 오래 되었다 후자는 칸막이도 없는 나무로 된 막사에서 반 기아상태로 살면서 맨발로 다녀야 하기 때문에 구두를 닦을 필요가 없다 관료들에게는 이 차이가 아무런 관심거리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일용 노동자에게 이 차이는 당연하게도 매우 중요하다.

물론 피상적인 "이론가들"은 부의 분배가 부의 생산에 비해 부차적인 요인이기 때문에 이 현실을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상호작용의 변증법은 이 경우에도 완전히 효력을 나타낸다 장기적으로 보면 생활상의 차이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느냐에 따라 국가 소유 체제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여객선이 집단 소유라고 선언되었는데 승객들은 여전히 일등, 이등, 삼등으로 나누어질 경우 삼등 승객이 느끼는 생활상의 차이는 소유의 법적 변화보다 한없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반면 일등 승객은 커피와 시가(cigar)를 즐기면서 집단 소유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고 편안한 객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계속 생각할 것이다 이 현실에서 발생하는 적대관계는 불안한 집단 소유 체제를 당연히 해체시킬 것이다.

모스크바 동물원에서 어느 조그만 소년이 "저 코끼리는 누구 것이지요?"라는 질문에 "국가 소유예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러니까 일부는 내것이예요"라고 즉시 결론내렸다 이 일화를 소련 언론은 만족스럽게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코끼리가 실제로 분할된다면 값비싼 상아는 선택된 극소수에게 돌아갈 것이고 몇몇은 코끼리 햄을 즐길 것이고 다수는 발굽과 내장으로 만족할 것이다 속아서 자기 몫도 챙기지 못한 소년들은 국가 소유를 자기 소유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집없는 아동들은 국가로부터 훔친 물건만을 "자기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고위 관료는 "짐은 곧 국가이다"라는 공식에서 "국가 소유는 곧 나 개인의 소유이다"라고 쉽게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원의 조그만 "사회주의자" 소년은 아마 이 고위 관료의 아들일 것이다.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사회주의적 관계를 시장의 언어로 번역해보자 소련 인민은 나라의 재화 전체를 소유하고 있는 회사의 주주라고 볼 수 있다 회사의 재산이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면 "주식"은 동등하게 분배되고 따라서 모든 "주주들"에게 같은 배당금이 분배될 권리가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인민은 국가기업에 "주주"와 생산자로 동시에 참여한다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에서는 노동의 대가는 여전히 부르주아 규범에 따라 지불될 것이다 즉 기술 숙련도, 노동강도 등에 따라 지불 액수가 다를 것이다 따라서 인민 각자의 수입은 예를 들어 이론적으로 갑과 을의 두 부분으로 구성될 것이다 갑은 주식에 대한 배당금이고 을은 임금이다 기술수준이 높고 산업의 조직이 더 완벽하면 할수록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갑이 을보다 더 클 것이다 따라서 실생활에서 개인노동의 차이는 수입에 그만큼 더 적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소련의 임금 격차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우보다 더 크다 이 사실로부터 소련 인민의 몫이 균등하게 분배되지 못하고 있으며 배당금 뿐 아니라 임금도 균등하게 지불되지 않고 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미숙련 노동자는 을만 받는다 이것은 자본주의 기업에서 유사한 조건 속에서 그가 받는 최저임금과 같다 그러나 스타하노프 운동원이나 관료는 갑의 2배와 을 또는 갑의 3배와 을을 받는다 더욱이 을도 2배나 3배를 받는다 다시 말하면 수입 격차는 개인의 생산성에 의해 결정될 뿐 아니라 타인의 노동생산물을 은폐된 방식으로 가로채면서 결정된다 소수 특권층 주주들은 다수의 가난한 주주들을 희생시켜 살고 있다.

소련의 비숙련 노동자가 기술과 문화수준이 비슷한 자본주의 기업에서 일할 경우보다 소련에서 더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즉 그가 여전히 소규모 주주라고 가정하면 그의 수입은 갑과 을을 합친 것이다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주주들은 갑의 3배와 을의 2배, 갑의 10배와 을의 15배 등을 받을 것이다 즉 비숙련 노동자가 주식 1주, 스타하노프 운동원이 3주, 전문가가 10주를 갖게 되는 셈이다 더욱이 임금의 비율도 1대 2대 15 정도가 될 것이다 성스러운 사회주의 소유에 대한 찬가는 보통 노동자나 집단농장 농민보다 기업의 책임자나 스타하노프 운동원에게 더욱 감격스럽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보통 노동자들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새로운 귀족층이 아니라 바로 이 다수 노동자들을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닌가!

"소련의 노동자는 임금노예도 아니고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파는 자도 아니다 그는 자유로운 일꾼이다."(『프라우다』) 이 번지르르한 말은 지금 전혀 인정할 수 없는 허풍에 불과하다 공장이 국가 소유가 되면서 노동자의 현실은 법적으로만 바뀌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는 궁핍 속에서 생활하면서 주어진 임금을 받기 위해 주어진 시간에 일을 해야만 한다 과거 노동자가 당과 노동조합에 대해 품었던 희망은 혁명이 성공한 후 그가 창조한 국가로 넘어갔다 그러나 국가라는 도구의 유용한 기능은 기술과 문화수준에 의해 제한되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런데 기술과 문화 수준을 올리기 위해 새로운 국가는 노동자의 근육과 신경을 혹사시키는 옛날 방식에 의존했다 노동자를 노예로 부리는 집단이 등장했다 산업의 관리는 초(超)관료적이 되었다 노동자는 이제 공장 관리에 대한 모든 통제력을 상실했다 도급제의 도입, 각박한 생존조건, 자유로운 거주이전의 금지, 모든 공장생활에 침투한 경찰의 탄압 등으로 노동자는 자기가 "자유로운 일꾼"이라고 느낄 수가 없다 그에게 관료집단은 공장 책임자이며 국가는 고용주에 불과하다 자유로운 노동은 관료적인 국가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다.

필요한 변화를 가하면 위에서 말한 것은 농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당국의 이론에 의하면 집단농장 소유는 사회주의 소유의 특별한 형태이다 집단농장은 "근본적으로 국영기업과 같은 유형이며 따라서 사회주의 소유"라고 『프라우다』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곧 이어서 농업의 사회주의적 발전은 "볼셰비키당이 집단농장을 관리할" 때 보장된다고 덧붙인다 즉 『프라우다』는 경제를 논하다가 갑자기 정치로 초점을 돌리고 있다 결국 사회주의적 관계는 인간 사이의 현실 관계가 아니라 당국의 너그러운 마음 속에서 실현된 셈이다 노동자들은 이 너그러운 마음을 경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실제로 집단농장은 개인경제와 국가경제의 중간단계이다 그리고 여기에 존재하는 소부르주아 경향은 집단농장 농민이 가꾸는 개인 텃밭의 급속한 증대로 아주 만족스럽게 지지받고 있다.

개인적으로 경작되는 농지는 4백만 헥타르에 지나지 않고 집단농장의 1억 8백만 헥타르와 비교하면 전체 농지의 4%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집약농법과 특히 원예농법을 채택하면서 이 왜소한 규모의 농장은 농민에게 가장 중요한 소비재를 제공한다 뿔 달린 소, 양, 돼지의 대다수는 집단농장이 아니라 농민 개인의 소유이다 농민들은 종종 개인 텃밭을 중심 농장으로 변화시키고 이익이 되지 않는 집단농장을 부차적인 지위로 낮추어 버렸다 반면에 다른 곳에 비해 노동의 대가를 후하게 지불하는 집단농장은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면서 부유한 농민층을 탄생시키고 있다 집단농장 내의 원심력은 사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있다 어쨌든 집단농장은 농촌의 경제관계 특히 수입의 분배방식을 법적으로만 변화시켰다 옛날의 오두막집, 채소밭, 헛간 앞마당의 잡일, 농민의 과중한 노동 일과등은 거의 바뀐 것이 없다 그리고 국가에 대한 오랜 관념도 상당한 정도 그대로 남아 있다 물론 국가는 지주나 자본가를 위해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도시인들의 이익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농촌에서 빼앗아가고 있으며 탐욕스러운 관료들이 너무 많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937년 1월 6일 실시할 예정인 인구조사는 이렇게 범주를 설정하고 있다: 노동자; 사무직 노동자; 집단농장 농민; 개인소유 농민 ; 개인 수공업자 ; 자유직업 종사자; 종교인; 기타 비노동 분자 공식 논평에 의하면 소련에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번 인구조사는 다른 사회계급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이 방침은 특권 상류층과 극빈층을 숨기려는 직접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인구조사가 정직하게 진행된다면 사회 범주는 이렇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처럼 생활하는 관료집단의 지배층과 전문가 등; 소부르주아에 해당하는 중하층; 소부르주아적 상층 노동자와 농업귀족; 중간 근로대중; 집단농장의 중간층; 개인소유 농민과 수공업자; 룸펜노동자로 이전하고 있는 하층 노동자와 농민; 집없는 아동, 창녀 등.

소련의 새로운 헌법은 소련에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가 철폐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거짓말이다 새로운 사회분화는 가장 야만스런 형태로 인간에 대한 착취를 부활시키고 있다 이것은 개인 목적으로 인간을 노예로 매입하는 형태이다 새로 실시되는 인구조사의 범주에는 하인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물론 하인은 "노동자"라는 일반 범주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 많은 의문들이 제기된다: 사회주의 시민이 하인(하녀, 요리사, 보모, 여자 가정교사, 자가용 운전사 등)을 부리고 있는가? 부리고 있다면 몇 명을 부리고 있는가?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는가? 방은 몇 개나 소유하고 있는가? 등등 타인노동을 착취하는 자는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다는 과거의 법규가 부활한다면 예상 밖으로 지배층의 최상층부가 소련헌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 하인과 주인 모두에게 완벽한 권리 평등이 확립되었다! 소비에트 체제의 심연 속에는 두 상반된 경향들이 성장하고 있다 부패하고 있는 자본주의와는 달리 생산력이 발달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사회주의의 경제 기반이 마련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관료집단 상층부의 이익을 위해 부르주아 분배 규범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자본주의로의 복귀가 준비되고 있다 소유형태와 분배 규범 사이의 격차가 무한정 계속 벌어질 수는 없다 부르주아 규범이 어떤 형태로든 생산수단을 지배하든가 아니면 분배 규범이 사회주의 소유체제와 일치하든가 둘 중의 하나로 결판이 날 것이다.

관료집단은 이 양자택일의 상황이 인민에게 던져지는 것을 끔찍히 두려워하고 있다 언론, 연설, 통계, 관변문인의 소설과 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헌법 조항 등 모든 것을 동원하여 언제나 모든 곳에서 관료집단은 사회주의 사전에서 빌려온 추상적 낱말들을 활용하여 도시와 농촌의 실제 관계들을 공들여 은폐한다 관변이론이 그렇게도 생동감과 재능이 결핍되어 있으며 거짓투성이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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