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트로츠키주의자2017.04.20 20:02

제 10 장 새로운 헌법을 통해 바라본 소련

1. "능력에 따른" 일과 개인 재산

1936년 6월 11일 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새로운 소련 헌법의 초안을 승인하였다. 이 초안은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이라고 스딸린이 선언했다. 그리고 그의 선언은 일상적으로 모든 언론 매체를 통해 반복되었다. 물론 헌법 초안이 마련된 과정만 보아도 그의 선언에 대해 의구심을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동안 언론이나 집회에서는 이 거대한 개혁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더욱이 1936년 3월 1일 이미 스딸린은 미국인 로이 하워드와 인터뷰를 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올해 말에는 반드시 새로운 헌법을 채택할 것이다. " 이것을 보면 스딸린은 새로운 헌법이 언제 채택될지를 너무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까지 일반대중 가운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이 그다지 완전하지 못한 민주적 방식으로 마련된 셈이다. 물론 같은 해 6월에 소련 인민이 "숙고"할 수 있도록 초안이 공개되었다. 그러나 세계 육지의 6분의 1이나 되는 이 넓은 영토에서 중앙위원회의 설립을 감히 비판할 공산주의자나 당의 제안을 거부할 비당원 시민을 찾는 일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헌법에 대한 논의는 결국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만든 스딸린에게 감사의 결의문을 보내는 것으로 모아졌다. 물론 결의문의 내용과 문체는 구헌법 체제 하에서 철저하게 준비되었다.

"사회구조"라고 제목이 달린 제1절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 노동한 만큼 소비한다'는 사회주의 원칙이 소련에서 실현되었다." 이 내적 논리도 갖추어지지 않은 넌센스는 스딸린의 연설과 신문 기고문에서 선정되어 면밀하게 준비된 국가기본법의 내용이 되었다. 믿거나 말거나 이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은 법초안자들의 이론적 수준이 완벽하게 낮다는 것과 지배층의 거짓된 모습이 헌법에 가득차 있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이 새로운 "원칙"의 기원을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공산주의 사회를 특징적으로 말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이 유명한 말을 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 " 이 정식의 두 구성부분은 분리될 수 없다. 자본주의적이 아니라 공산주의적 의미에서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는 것"은 일이 더 이상 괴로운 의무가 아니라 각 개인의 필요가 되었으며 사회는 개인에게 일을 하도록 어떤 강제도 행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병자나 장애인만이 일하기를 거부할 것이다. 스스로에게 어떤 폭력도 가하지 않고 가지고 있는 육체적·정신적 능력을 발휘하여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면 사회 성원들은 높은 기술수준 덕분에 사회가 필요한 재화를 충분히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는 모두에게 "각자의 필요에 따라" 굴욕적인 통제가 없이 관대하게 이 노동생산물을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양면적인 그러나 분리할 수 없는 공산주의 정식은 풍요, 평등, 인격의 전면화, 높은 수준의 문화적 훈련을 전제로 하고 있다.

모든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소련은 공산주의 사회라기보다는 후진적인 자본주의 사회에 훨씬 가깝다. 따라서 재화를 "각자 필요에 따라" 모두에게 분배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소련은 인민에게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도록 허용할 수가 없다. 따라서 도급제를 시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도급제의 원리는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서 가능하면 많은 노동량을 빼내고 가능하면 적게 생산물을 나누어 주어라." 물론 소련에서 절대적 의미에서 자신의 "능력" 즉 육체적 정신적 잠재력을 능가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세련되고 잔인한 착취방식도 자연이 설정한 한계를 넘을 수는 없다. 채찍을 맞으며 일하는 나귀조차 "능력에 따라" 일한다. 그렇다고 채찍이 나귀의 사회적 원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소련에서조차 임금노동은 굴욕스러운 노예의 징표를 달고 있다. "각자 노동한 만큼" 임금을 지불하는 것은 실제로는 육체노동 특히 미숙련 노동을 희생시키면서 정신노동이 이익을 보는 임금지불 방식인데 다수에게는 불공평, 억압, 강제를 극소수에게는 특권과 "행복한 삶"을 가져다 준다.

노동과 분배의 부르주아 규범이 아직도 소련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대신 헌법 기초자들은 이 공산주의 원칙을 둘로 잘라서 두 번째 구성부분을 시기가 정해지지않은 미래로 연기하고 첫 구성부분은 이미 성취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여기에다 기계적으로 자본주의 도급제 원리를 접합시켰다. 그리고 이것을 전부 "사회주의 원칙"이라고 이름붙이고 이 거짓에 근거하여 헌법을 만들었다!

경제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조항은 의심의 여지없이 제 10조이다. 이 조항은 대부분 조항들과 달리 관료집단의 침해에 대해 가정용품, 소비제품, 편의품, 일상용품 등 인민의 개인 재산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정용품"을 제외하고 이런 종류의 재산에 붙어 있는 탐욕과 시기심을 제거하면 이것은 공산주의에서 보호될 뿐 아니라 사상 유례없이 증대될 것이다. 물론 문화수준이 높은 사람이 부담을 느끼며 사치품을 좋아할 지는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안락을 보장하는 문명의 성과들을 그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공산주의의 첫 과제는 모든 사람에게 안락한 삶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에서 개인 재산은 여전히 공산주의적 측면이 아니라 소부르주아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농민과 가난한 도시인의 재산은 관료집단의 터무니 없는 자의적 행위의 표적이 되고 있다. 하급 관료들은 빈번하게 이 방식을 통해 자신들의 상대적 안락을 보장받는다. 농촌에서도 이제 물질적 상황이 개선되었으므로 개인의 재산을 몰수할 필요는 없어졌다. 그리고 정부는 노동생산성을 올리는 자극제인 개인의 재산 축적을 옹호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농민, 노동자, 사무직 노동자의 오두막집, 소, 가재도구나 물품이 법으로 보호됨으로써 관료의 공회당, 여름 별장, 자동차, 그리고 기타 "개인 소비재와 편의품"이 합법화되고 있다. 이것은 관료집단에게는 사소한 일이 아니다. 물론 이 물품들은 모두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 노동한 만큼 소비한다"는 "사회주의적" 원칙에 따라 관료 자신이 벌어들인 것이다. 관료의 승용차는 새로운 기본법에 의하여 농민의 마차보다 더 효과적으로 보호받을 것이 틀림없다.

 

2. 소비에트와 민주주의

정치분야에서 새로운 헌법이 구헌법에 비해 두드러지는 점은 계급과 산업그룹 별로 선거가 이루어진 기존의 소비에트 체제가, 원자화된 개인들이 소위 "보편, 평등, 직접"의 원칙에 기초하여 선거를 치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로 회귀한 것이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 노동계급 독재를 법적으로 청산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헌법의 기초자들에 의하면 자본가가 없으면 노동자도 없으며 따라서 국가도 노동자국가에서 전체 인민의 국가로 변모했다. 이 주장은 겉으로 보면 상당히 매력이 있는데 19년 늦었거나 시대에 대단히 앞선 생각이다. 자본가를 몰수하면서 노동계급은 계급으로서 자신을 해소하는 작업에 들어섰다. 그러나 원칙적인 청산이 아니라 실제로 사회 내부로 해소되는 과정은 좀더 긴 시간을 요하는 과업이다. 그리고 새로운 국가가 자본주의의 기본 사업들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을 때는 이 시간이 더욱 길어진다. 소련의 노동계급은 농민, 기술 인텔리, 관료집단과 아직까지 매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노동계급은 사회주의의 승리가 달성될 때까지 투쟁할 유일한 계급이다. 새로운 헌법은 노동계급이 경제적으로 사회 속에 해소되기 오래 전에 이미 정치적으로 "인민" 속으로 해소되기를 원한다.

헌법 기초자들은 물론 약간 동요하다가 국가를 전처럼 소비에트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나폴레옹 제국이 계속 공화국으로 불린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고려에서 나온 조야한 술수에 불과하다. 소비에트는 본래 계급지배의 기관이며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지방자치를 위해 민주적 선거에 의해 성립되는 단체들은 시, 듀마, 젬스트보, 아니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될 수 없다.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성립된 의회는 한참 늦은 지각 의회이거나 그것의 우스꽝스런 형태에 지나지 않을 뿐 소비에트의 가장 높은 기관은 결코 아니다. 소비에트 제도의 역사적 권위를 빌리기 위해 헌법 기초자들은 새로운 행정 기본단위들이 원래 이름을 갖지않도록 조심하고 있다.

경제와 문화의 일반적 상태에 의해 노동계급이 나라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이 충분히 보장되어 있다면 노동자와 농민이 정치적 권리를 평등하게 소유하고 있어도 국가의 사회적 성격은 파괴되지 않는다. 확실히 사회주의는 이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인구의 소수에 불과하고 정치적 지배력을 장악하지 않았는데도 정치체제가 사회주의로 발전한다면 이것은 국가의 강제력 자체가 소멸되고 대신 문화적 훈련이 사회주의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거의 불평등이 철폐되려면 국가의 강제적 기능들이 명확히 약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새로운 헌법은 전혀 말이 없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이 이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국가의 강제적 기능들은 더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헌법은 인민에게 소위 표현, 언론, 집회,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보장들의 각론에서는 무거운 재갈이나 족쇄가 채워져 있다. 언론의 자유는 선거에 의해 뽑히지 않은 중앙위원회 비서가 잔인한 사전 검열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물론 비잔틴 제국에 등장했던 비굴한 아양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유언장"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레닌의 수많은 논문, 연설, 편지들은 새로운 헌법 하에서도 계속 공개되지 않고 자물쇠가 채워진 금고 속에 낮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레닌의 저작들은 새 지도자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레닌의 경우에도 이러한데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과학, 문학, 예술에 대한 조야하고 무식한 통제는 계속될 것이다. "집회의 자유"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특정 집단들이 미리 준비된 결의문을 채택하도록 당국에 의해 소집될 자유를 의미할 것이다. 구헌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헌법에서도 수백 명의 외국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망명권"을 믿고 국내에 들어왔다가 감옥과 집단수용소에 갇힐 것이다. 이들의 죄목은 지도자의 무오류에 대항한 범죄이다. "자유"에 관한 한 모든 것은 과거와 다름없을 것이다. 소련의 언론조차도 이 점에 대해서만은 어떠한 환상도 대중에게 유포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새로운 헌법의 주요 목표는 "독재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라고 선언되고 있다.그러나 누구의 독재이며 누구에 대한 독재인가?

당국이 이미 말했듯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정치적 평등이 주어질 조건은 계급모순의 철폐로 준비되었다. 이제 계급독재는 "인민"독재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독재의 담지자가 계급모순으로부터 해방된 인민이라면 독재는 해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보다도 관료집단의 해소를 의미한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내용이다. 어쩌면 당국이 실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아주 조심스럽게 새로운 헌법의 기초자들은 레닌이 작성한 당 강령을 가리키며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 강령이 말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 정치적 권리의 박탈과 자유에 대한 모든 제한 조치들은 일시적 조치일 뿐이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가 사라질 객관적 가능성이 커질수록 이 임시조치들의 필요성도 같은 정도로 점점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권리의 박탈"을 철폐하여 정치적 권리를 회복시킨다는 것은 곧 "모든 자유에 대한 제한"을 철폐하는 것이다. 소련이 사회주의에 도달했다면 농민은 노동자와 평등하게 권리를 누리고 부르주아 출신의 시민 일부에게도 정치적 권리들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구의 100%에게 실질적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계급이 일소되면 관료집단과 독재 뿐 아니라 국가도 사멸한다. 그러나 신중하지 못한 누가 이 논리를 제시했다고 하자. 그러면 비밀경찰은 새로운 헌법에서 그를 수많은 강제수용소 가운데 한 곳에 보낼 적절한 근거를 찾을 것이다. 계급은 철폐되었다. 소비에트는 이름만 있을 뿐 실제하지 않는다. 그런데 관료집단은 아직도 있다.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정치적 권리의 평등은 실제로는 관료집단 앞에서 똑같이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현실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비밀투표의 도입도 역시 중요한 사항이다. 새로운 정치적 평등이 이미 달성된 사회적 평등과 조응한다고 생각한다면 풀리지 않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렇다면 왜 투표가 앞으로는 비밀에 의해 보호받아야 하는가? 사회주의 국가의 인민은 정확히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으며 누구의 모략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가? 소련의 구헌법은 선거권을 불평등하게 부여했을 뿐 아니라 공개투표를 실시하여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 적들을 통제하였다. 이제 반혁명분자 소수를 위해 비밀투표가 도입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비밀투표 실시는 확실히 인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취해진 조치이다. 그러나 짜르, 귀족, 부르주아지를 최근에 타도한 사회주의 인민 때문에 누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가? 관료집단에게 아양을 떠는 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에는 바르뷔스, 루이스 피셔, 두란티, 웹(Webb) 등등의 모든 저술들보다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밀투표는 피착취자들을 착취자의 테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시행된다. 부르주아 계급은 대중의 압력을 받고 마침내 이 개혁을 시행하였다.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자신의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부르주아 독재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을 해소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착취자의 테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구로부터 소련 인민을 보호하는 것이 필요한가? 대답은 명확하다: 관료집단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필요하다. 스딸린은 정직하게 이 점을 인정했다. 왜 비밀선거가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그는 정확히 이렇게 대답했다: "소련 인민이 선출하고 싶은 사람에게 표를 던질 수 있는 안전한 자유를 부여하고 싶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인류는 오늘날 "소련 인민"이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표를 던질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이 권위있는 인물의 말을 듣고 확실히 알았다. 이로부터 새로운 헌법이 소련 인민에게 장차 원하는 사람을 뽑을 수 있는 권리를 정말로 부여할 것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성급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지금 우리는 이 문제의 다른 측면에 정신이 쏠려 있다. 정확히 누가 인민에게 자유로운 투표권을 주거나 빼앗을 수 있는가? 스딸린이 대표로서 말하고 행동하는 관료집단이 바로 소련 인민에게 이 권리를주거나 빼앗을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다. 스딸린은 자신의 정체를 폭로함으로써 국가와 당의 정체 역시 폭로했다. 왜냐하면 인민이 원하는 사람을 뽑을 수 없게 하는 체제의 도움으로 당 총서기의 직위를 차지하고 있는 자가 바로 스딸린이기 때문이다. "소련 인민에게 선거의 자유를 부여하고 싶다"는 말은 구헌법과 새로운 헌법을 다 합친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이 부주의한 말 한마디에 진짜 헌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헌법은 종이 위가 아니라 실제 살아 움직이는 세력들의 투쟁에 의해 작성된다.

 

3. 민주주의와 당

소련 인민에게 "선출하고 싶은 사람에게 표를 던질" 자유를 주겠다는 약속은 정치적 정식이라기보다는 시적인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당의 중앙과 지방의 지도자들이 후보자들을 제시하고 이들 중에서 "대표"를 선출할 권리만 인민에게 있다. 물론 소비에트 정권 초기에 볼셰비키당도 정치활동을 독점했다. 그러나 이 두 현상을 동일하게 보는 것은 겉모습을 현실과 혼동하는 것과 같다. 야당의 활동을 금지한 것은 내전, 제국주의세력의 경제 봉쇄와 군사적 개입, 기아 등의 상황 때문에 강요된 것이었다. 집권당은 당시 노동계급의 진정한 전위부대였으며 당 내부에서는 제한없는 활발한 정치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당내 그룹과 분파의 투쟁은 어느 정도 정당들 사이의 투쟁을 대신하고 있었다. 현재 사회주의가 "최종적으로 역전될 수 없이" 승리한 상황에서 분파를 구성하는 것은 집단수용소에 보내지거나 총살형에 처해지는 범죄가 되었다. 야당의 금지는 일시적인 필요조치에서 이제 하나의 원칙으로 격상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헌법이 출간되는 바로 그 순간에 공산주의 청년동맹은 정치 문제를 다룰 권리를 박탈당했다. 더욱이 소련 시민은 18세부터 참정권을 부여받지만 1936년까지 존재했던 공산주의 청년동맹의 가입 연령제한선(23세)은 이제 완전히 철폐되었다. 정치는 대중의 통제를 받지 않는 관료집단의 독점물이라고 최종 선언되었다.

새로운 헌법에 명시된 당의 역할에 대한 로이 하워드의 질문에 대해 스딸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계급이 없고 계급 사이의 장벽이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소규모 계층 사이의 차이는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계급이 없다고 해놓고 계급 사이의 장벽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하다니!) 정당들이 설립되고 서로 투쟁할 객관적 근거가 없다. 계급이 없는데 여러 개의 정당이 존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정당은 계급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전부 틀리다. 스딸린에 의하면 계급은 모두 동질성을 갖추고 있다. 계급간의 경계는 아주 명확히 그리고 영원히 구분되어 있다. 계급의 의식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엄격하게 조응한다 등등. 이렇게 해서 정당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마르크스의 가르침은 우스꽝스러운 몰골을 띠게 되었다. 행정 명령의 편의를 위해 정치의식이 역사 과정에서 배제되어 있다. 실제로 계급은 내부 구성이 이질적이다. 그리고 계급 내부의 적대에 의해서 찢겨져 있다. 경향, 그룹, 정당 등이 계급 내부에서 진행하는 투쟁을 통해서만 공동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 약간의 유보조항을 달면 "당이 계급의 일부이다"라고 인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계급은 많은 구성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미래를 바라보는 진보 그룹과 과거를 회상하는 반동 그룹이 있다. 따라서 같은 계급이 여러 개의 정당을 만들 수도 있다. 같은 이유 때문에 하나의 정당이 각기 다른 계급들의 부분들로 구성될 수도 있다. 하나의 계급에 조응하는 하나의 정당은 정치역사상 존재해 본 적이 없다. 물론 경찰이 강요하는 겉모습을 현실과 혼동하지 않을 경우에만 이 말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이질성이 적은 계급이다. 그러나 노동귀족이나 노동관료 등 "소규모 계층"의 존재로 인해 기회주의 정당들이 등장하여 부르주아 계급지배의 무기로 전화한다. 스딸린주의 사회학에서 노동귀족과 노동대중 사이의 차이가 "기본적"인지 아니면 "약간 그런 성격이 있는 것"인지는 알수 없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결별하여 제3인터내셔널을 창립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바로 이 차이에서 나왔다. 소련 사회에서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사회는 최소한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이질적이고 복잡한 구성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여러 정당들이 활동할 비옥한 토양을 제공할 수 있다. 신중하지 못하게 이론 영역에 뛰어들면서 스딸린은 자신이 원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입증했다. 그의 논지에 의하면 소련에는 다른 정당들이 존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단 하나의 정당도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정치도 일반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법칙을 통해 스딸린은 자신이 총서기 직을 맡고 있는 정당을 옹호하는 "사회학적" 결론을 이끌고 있다.

부하린은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접근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소련이 자본주의로 다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사회주의로 전진할 것인가의 문제는 소련 내부에서는 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미 일소된 적대 세력들이 정당을 구성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사회주의가 승리한 나라에서 자본주의 세력들은 정당을 구성할 능력이 없는 우스꽝스러운 돈키호테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현존하고 있는 정치세력들은 사회주의 지향 또는 자본주의 지향의 범주 속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다른 문제들이 있다. 어떻게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이냐 그리고 어떤 속도로 나아갈 것이냐 등등. 길을 선택하는 것은 목표를 선택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누가 길을 선택할 것인가? 정당이 성립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정말로 사라졌다면 정당활동을 금지할 이유가 없다. 정말 당 강령에 따라 "자유에 대한 어떤 종류의 제한"도 철폐해야 할 때가 되었다.

로이 하워드가 가질 자연스런 의구심을 해소시키기 위해 스딸린은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후보자 명단은 공산당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사회단체들이 제출할 것이다. 그러면 후보는 수백 명이 됩니다‥‥그러면 수없이 많은 사회단체들을 통해 소규모 계층 하나하나가 자신의 특별한 이해를 반영할 수 있다( 혹시 표현한다는 말을 쓰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이 궤변은 다른 궤변만큼이나 설득력이 없다. 소련의 사회단체인 노동조합, 협동조합, 문화단체 등은 "소규모 계층"들의 이해를 조금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단체들은 모두 하나같이 똑같은 위계체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과 같이 대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단체의 경우도 적극적 역할은 언제나 상층 특권집단이 독점적으로 행사하고 있으며 결국 최종 결정은 "당"이 내린다. 즉 관료집단이 이 단체들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헌법은 대중이 투표로 선택할 후보자를 폰티우스(Pontius)에서 빌라도(Pilate)로 바꾸었을 뿐이다. (역자 주: 폰티우스 빌라도는 예수의 처형을 승인한 유태인 출신 로마총독이었다.)

기본법은 당이 정치활동을 독점하는 체계에 완벽한 정밀성을 부여하였다. 정치체제와 관련된 헌법 조항인 126조는 모든 남성과 여성이 노동조합, 협동조합, 청년단체, 체육단체, 국방단체, 문화단체, 기술단체, 과학단체 등에 가입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 집중체인 당은 모든 인민의 권리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라 소수가 누리는 특권에 속하는 문제이다. "‥‥‥‥ (관료지배층이 보기에) 가장 활동적이고 의식적인 시민들은 공산당으로 통일되어 있다‥‥‥‥당은 모든 사회 및 정부 기구의 지도적 중핵을 형성하고 있다." 이 놀라울 정도로 정직한 발언이 바로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결국 관료집단에게 철저히 통제되어있는 하부기관인 "사회단체"의 정치적 역할이 얼마나 허구에 지나지 않는 지를 이 문구가 전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당들 사이의 투쟁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혹시 일당 내에 존재하는 분파들이 이러한 민주적 선거에 모습을 나타낼 수 있지 않을까? 당내 분파의 문제에 대한 어느 프랑스 언론인의 질문에 대해 몰로토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내에 ‥‥ 특별 분파들을 구성하려는시도가 있어 왔다‥‥‥‥그러나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한 지 이미 몇년이 지났다. 그래서 공산당은 실제로 하나의 통일적인 단위가 되었다." 이 발언은 계속되는 숙청과 집단수용소의 존재에 의해 가장 잘 증명되었다. 몰로토프의 논평에 따르면 민주주의 절차는 완벽하게 명쾌하다. 빅토르 세르쥬(Victor Serge)가 묻는다: "요구를 제출하거나 비판적인 견해를 표현한 모든 노동자가 감옥에 갇힌다면 10월 혁명이 남긴 것이 무엇인가? 감옥에 다 집어놓고 나서 하고 싶은 대로 비밀투표를 실시하면 되겠지!" 사실이다. 히틀러조차 비밀투표를 침해하지는 않았다.

계급과 당의 관계에 대해 헌법 기초자들은 머리카락을 가르듯이 세세하게 이론적으로 논의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학적 문제가 아니라 물질적 이해관계의 문제이다. 소련에서 모든 것을 독점하는 집권당은 관료집단의 정치기구이므로 관료집단은 이제 얻을 것은 하나도 없고 잃을 것 밖에 없다. 이들은 자기 혼자만을 위해 정당활동의 "비옥한 토양"을 보존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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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마그마가 아직 식지 않은 나라에서 특권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마치 얼치기 도둑이 금시계를 훔쳐서 크게 당하는 것처럼 특권을 보유하면서 크게 당하고 있다. 소련의 지배층은 부르주아들이 대중을 두려워하는 것과 똑같이 대중에 대한 두려움을 배우고 있다. 스딸린은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아 관료지배층의 점점 증대되는 특권을 "이론적으로" 합리화하고 있다. 그리고 대중의 불만을 강제수용소로 다스리고 있다. 이런 방식이 계속 작동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스딸린은 가끔 관료집단에 대항해 "인민"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관료집단은 그의 행위를 암묵적으로 승인하고 있다. 국가기구를 집어 삼키고 있는 부패를 최소한 부분적이나마 척결하기 위해 비밀투표에 의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그는 배우고 있다.

이미 1928년에 라코프스키는 표면에 드러나고 있던 관료들의 조직적 부정에 대해 많은 예를 들고 있다: "비리 스캔들이 퍼지고 있는 가운데서 가장 특징적이며 가장 위험한 현상은 일반대중보다 특히 평당원들이 더 수동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권력층에 대한 두려움이나 단순히 정치적인 무관심으로 인해 이들은 이런 사건들에 대해 항의도 하지 않고 그냥 모른체 하고 있다. 아니면 단순히 흔자서 불평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 이때 이후 이미 8년이 지났는데 상항은 비교할 수 없이 더 나빠졌다. 정치기구의 부패는 모든 곳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이제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국가는 더 이상 사회주의 건설의 도구가 아니며 지배층의 권력, 수입, 특권의 원천에 불과하다. 스딸린은 개혁을 실시하는 동기를 암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로이 하워드에게 말했다. "전혀 효율성이 없는 기구들이 적지 않다‥‥‥‥ 소련의 비밀투표는 대단히 비효율적인 권력기구를 대중이 채찍질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질 것이다." 대단히 놀라운 고백이다! 관료집단이 자신의 손으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했는데 이제 ‥‥‥ 채찍이 필요하다니! 이것이 헌법을 개정해야 하는 동기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동기가 또 있다.

소비에트를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헌법은 노동자를 일반대중 속으로 해소시켜 버렸다. 물론 정치적으로 소비에트는 이미 오래 전에 의의를 상실했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적 적대관계가 증대하고 있으며 새로운 세대가 각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비에트는 다시 소생할지도 모른다. 활기차고 많은 것을 요구하는 공산주의자 청년들이 점점 많이 참여하고 있는 도시 소비에트가 관료집단에게는 물론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다. 도시에서는 사치와 결핍의 대비가 너무도 뚜렷하게 눈에 보인다. 관료집단의 첫번째 관심은 노동자와 적군 소비에트를 제거하는 것이다. 농촌에 흩어진 인구는 불만을 가지고 있어도 처리하기가 훨씬 쉽다. 집단농장의 농민들을 도시 노동자에게 대항하도록 부추길 수 있으며 어느 정도 성공을 기대할 수도 있다. 관료 반동집단이 도시와 투쟁하기 위해 농촌에 의존하는 경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새로운 헌법은 대부분 부르주아 국가들의 민주헌법보다 정말 우월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우월한 측면도 10월 혁명이 탄생시킨 기본 문서들에 물을 타서 멀겋게 만든 것에 불과하다. 그동안 성취된 경제적 성과들에 대한 평가도 현실을 왜곡하고 거짓 전망을 수립하거나 단순히 허풍을 떠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관한한 헌법 전체에는 월권과 냉소의 분위기가 철저히 스며들어 있다.

새로운 헌법은 사회주의 원칙에서 부르주아 원칙으로 엄청나게 후퇴하고 있는 현실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관료지배층의 의도에 맞게 자르고 꿰맨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국제연맹을 위해 세계혁명 전망을 포기하고, 부르주아 가족을 부활시키며, 민병대를 상비군으로 대체하고, 군대에서 계급과 훈장을 부활시키고, 불평등을 증대시키는 등 관료집단의 정치 궤적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특별 계급"인 관료집단의 절대주의를 법적으로 강화시키면서 새로운 헌법은 새로운 유산계급의 탄생을 위한 정치적 전제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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