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트로츠키주의자2017.04.19 18:45

제 8 장 소련의 대외정책과 군대

 

1. "세계혁명"에서 "현상유지"로

대외정책은 언제 어디서나 국내정책의 연장이다. 왜냐하면 같은 지배계급이 이 정책을 실행에 옮길 뿐 아니라 똑같은 역사적 목표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소련의 지배세력인 관료집단의 퇴보는 국내정책 뿐 아니라 대외정책의 목적과 방법도 변화시켰다. 1924년 가을 처음 선언된 일국 사회주의 "이론"은 이미 소련의 대외정책을 국제혁명 강령으로부터 분리시켰다. 그러나 관료집단은 코민테른과 단절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했을 경우 코민테른은 좌익반대파의 세계조직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련 내의 계급 역관계를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반대로 크렘린궁의 지배 파벌은 노동계급 국제주의를 포기하면 할수록 코민테른이라는 방향타를 더 확고히 장악했다. 조직의 이름은 그대로 이지만 새로운 목적에 봉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목적을 추구하려면 새로운 인물이 있어야 했다. 1923년 가을부터 코민테른의 역사는 일련의 궁정쿠데타, 위로부터의 숙청, 제명조치 등을 통해 소련 공산당은 물론 산하 각국 공산당의 진용을 완전히 물갈이하는 역사가 되었다. 현재 코민테른은 소련의 지도부가 언제 어떻게 우왕좌왕하든 소련의 대외정책에 봉사하는 충실한 하수인 기구로 전락했다.

소련 관료집단은 과거와 단절했을 뿐 아니라 과거의 가장 중요한 교훈들을 이해할 능력을 스스로 박탈했다. 국제 노동계급 특히 유럽 노동계급의 직접적 후원 없이 또 식민지 민족들의 혁명운동이 없이는 소련의 혁명정권은 12개월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교훈의 하나이다. 군사 강대국인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끝까지 소련을 공격하지 못한 오직 하나의 이유는 이 나라들의 노동계급이 뜨거운 혁명적 숨결을 지배계급의 등짝 바로 뒤에서 뿜었기 때문이다. 1919년 4월 흑해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는 소련 남부의 군사개입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1919년 9월 영국 정부는 자국 노동운동의 직접적 압력에 직면하여 소련 북부에서 원정군을 철수시켰다. 1920년 적군이 바르샤바 근처에서 후퇴하는 풍전등화의 상황에서도 강력한 혁명적 파도는 연합국의 폴란드 지원과 적군 압살을 막아주었다. 커즌 경(Lord Curzon)은 1923년 소련에게 위협적인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손은 결정적 순간에 영국 노동자 조직들의 저항 때문에 묶이고 말았다. 이 명료한 사건들은 특이한 에피소드가 아니다. 소련이 직면했던 최초의 가장 어려운 시기의 정세를 전체적으로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러시아 국외에서 혁명이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혁명 승리에 대한 희망은 일부 결실을 맺었다.

이 시기에 소련 정부는 부르주아 정부들과 일련의 조약을 체결했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 1920년 에스토니아와의 조약, 1920년 10월 폴란드와 체결한 리가 평화조약, 1922년 4월 독일과 체결한 라팔로 조약 등을 비롯해 부차적인 외교적 합의들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 정부 지도부 전체나 일부 인사가 들 부르주아 정부들을 "평화의 친구들"이라고 선전하거나 독일, 폴란드, 에스토니아 공산당에게 이 조약들을 조인한 부르주아 정부들을 선거 때에 지지하도록 촉구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더욱이 이 문제는 대중을 혁명 의식으로 교육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소련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조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마치 파업노동자들이 자본가가 강요하는 가장 잔악한 조건을 인정하고 협약문서에 조인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독일사회민주당은 이 조약을 조인한 독일 정부를 지지하는 표시로 위선적 선거 "불참"을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볼셰비키당은 이 행위를 독일정부라는 산적의 약탈 행위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고 독일사회민주당의 정치적 행동을 비난하였다. "동등한 권리"를 추구한다는 형식으로 소비에트 공화국은 4년 후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독일 정부와 라팔로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만약 독일공산당이 이 조약을 구실 삼아 독일 정부의 외교정책을 신임했다면 이 당은 즉시 코민테른으로부터 제명조치를 당했을 것이다. 불가피한 상황에서 소련정부가 제국주의 정부와 상업적·외교적·군사적 협상에 임하더라도 이것이 해당 자본주의 국가 노동계급의 투쟁을 제한하거나 약화시키면 안된다는 것이 볼셰비키당의 원칙이었다. 왜냐하면 소련 노동자국가의 안보를 세계혁명의 성장만이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네바 회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외무 인민위원 치체린(Chicherin)은 미국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소련의 헌법 일부를 "민주적"으로 개정할 것을 제안했다. 이 소식을 접한 레닌은 1922년 1월 23일자 공식 서한에서 치체린이 즉시 요양소에 입소할 수 있도록 그의 귀국을 긴급히 권유하였다 예를 들어 당시 소련이 거짓과 허풍으로 가득한 켈로그 조약(Kellogg Pact)을 받아들이고 코민테른의 정책을 약화시켜 "민주적" 제국주의 국가들의 호의를 사자고 제안하는 자가 있었다면 레닌은 그를 즉시 정신병원에 수감하도록 조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조치는 정치국에서 어떤 저항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소련 지도부는 국제연맹, 집단안보체제, 중재재판소, 군축 등 모든 종류의 평화주의적 환상에 대해 특히 비타협적이었다. 이것들은 새로운 전쟁이 발발할 때 근로대중을 홀리는 방식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레닌이 초안을 마련하고 1919년 당대회에서 채택된 당강령은 이 주제에 대해 이렇게 단호하게 선언했다: "전세계 노동계급의 압력 특히 개별 국가에서 노동계급의 승리는 착취자들의 저항을 강화시킨다. 이 상황에서 착취자들은 국제연맹과 같은 기구를 통해 자본가 국제연대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가 국제연대기구들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 지구상 모든 인민의 착취를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나라에서 노동계급의 혁명운동을 즉각 탄압하려고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이 결과 불가피하게 각국의 혁명전쟁은 내전이 된다. 그리고 노동자국가에서 노동자들은 자기 방어를 조직하고 피억압 인민들은 제국주의의 멍에에 저항해 투쟁한다. 따라서 평화주의 구호,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국제적 군비축소, 중재재판소 등은 반동적 유토피아일 뿐 아니라 근로인민에 대한 노골적 기만행위에 불과하다. 이 기만술을 통해 제국주의 세력은 노동계급의 무장을 해제시키려한다. 그리고 노동계급이 착취자들을 무장 해제시키는 임무로부터 등을 돌려 다른 일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한다." 볼셰비키당 강령의 이 구절들은 현재 소련의 대외정책과 코민테른 노선의 파멸적 결과를 미리 예상한 셈이다. 지구상의 구석구석에는 지금도 소련과 코민테른의 평화주의 "친구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소련에 대한 제국주의 세력의 군사개입과 경제봉쇄가 실패로 끝나자 소련에 대한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적 군사적 압력은 두려워했던 것보다 상당히 약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미래에 일어날 전쟁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난 제 1차 세계대전을 유럽은 아직도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의 참화로 인한 사회위기는 지배계급 모두를 정신 나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상 유례없는 경제위기가 닥쳐 전세계 제국주의 지배계급은 의기소침하였다. 소련이 내전, 기근, 전염병에 다시 시달리는 와중에서 제1차 5개년 계획 시기의 시련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전반적 정세 덕분이었다. 국내 상황이 명백히 좋아진 제2차 5개년 계획의 첫 몇 년간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회복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전쟁에 대한 희망, 의욕, 열망, 준비가 새로이 힘을 얻었다. 이제 소련에 대한 제국주의 연합군의 공격 가능성은 너무도 확연히 느껴진다. 왜냐하면 소련은 고립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낙후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산수단의 국유화에도 불구하고 노동생산성이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아직도 훨씬 뒤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 세계 노동계급의 주력부대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신감과 신뢰할 지도부 모두를 결여했기 때문이다. 10월 혁명을 통해 이 혁명의 지도자들은 세계혁명의 서곡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혁명의 전개과정은 일시적이며 독자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 새로운 역사적 단계에서 10월 혁명은 세계정세에 깊이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드러났다. 다시 한번 사태는 명확해졌다. "결국 누가 승리할 것인가?"라는 역사적 문제는 일국의 국경 내에서 결정될 수 없다. 그리고 일국 내의 혁명적 성공과 실패는 이 문제가 세계차원에서 결정될 조건을 준비할 뿐이다.

인민 대중을 통제하고, 잠에 빠지게 만들고, 분열시켜 약화시키고, 무제한 지배하기 위해 이들에 대해 새빨간 거짓말을 자행하는 등 소련의 관료지배층은 대단한 경험을 축적하였다. 이 측면에 대해 관료집단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이들은 대중을 혁명적으로 교육시킬 모든 능력을 상실했다. 국내 기층 인민의 독립성과 주도성을 목 졸라 죽인 관료집단은 대중으로부터 비판적 사고를 끌어낼 수도 없으며 세계 차윈에서 혁명을 수행할 용기를 이들에게 북돋을 수도 없다. 더욱이 특권 지배층이므로 자신과 사회적 성격이 유사한 서방의 부르주아 급진주의자, 개량주의 의회지도자, 노동조합 관료 등의 지원과 우정을 한없이 귀중히 여긴다. 대신 이들과 절연한 노동자들과는 상대적으로 친화력이 더 적다. 지금 여기서 코민테른의 쇠퇴와 퇴보를 논할 수는 없다.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서 필자는 이 주제와 관련된 저서들을 출판했으며 이것들은 문명국의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역자 주: 풀무질 출판사의 [트로츠키의 반파시즘 투쟁]과 [트로츠키의 프랑스 인민전선 비판]을 참조하시오.) 코민테른의 지도부인 소련 관료집단의 일국적 시야, 보수성, 무식, 무책임 등은 세계노동계급에게 불행만을 안겨다 주었다. 마치 역사에도 정의가 실현되는 것처럼 현재 소련의 국제적 지위는 고립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성공보다 세계노동계급의 패배에 의해 훨씬 더 크게 결정된다. 1925년~1927년 중국혁명의 패배는 동양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손을 자유롭게 하였고 독일 노동계급의 패배는 히틀러의 승리와 독일 군국주의의 미친 듯한 팽창을 가져왔다. 이 모든 것이 모두 코민테른 정책의 결과라는 점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관료집단은 세계혁명을 배반했으나 아직도 이것에 대해 충성심을 느끼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을 "중립화"시키는데 주요한 노력을 쏟아왔다. 따라서 자신들을 현 체재를 옹호하는 온건하고 품위가 있으며 진정한 세력인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효과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위장할 수는 없다. 아예 모조품에서 정품으로 전환해야 한다. 관료지배층의 유기적 진화는 이 문제를 해결했다. 자신이 저지른 오류의 결과 앞에서 한 발 한 발 후퇴하면서 관료집단은 한 가지 생각에 도달했다: 유럽과 아시아의 현 체제 속에 소련을 편입시켜 소련의 신성함을 확보하자. 모든 것이 말해지고 행동에 옮겨진 이상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영원히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외교 언어의 사용이 허락된 소련 외무부와 혁명 언어를 말할 것으로 기대되는 코민테른을 통해 널리 홍보된 소련 대외정책의 공식 내용은 이것이다: "우리는 한 뼘의 외국 영토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 영토 역시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 이것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사회체제 사이의 전세계적 투쟁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땅 조각에 대한 분쟁의 문제인 것 같다!

소련 지도부는 자신이 일본에게 동중 철도(Chinese-Eastern Railroad)를 양도하는 것이 분별있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이 이 허약한 행위는 이미 중국혁명의 붕괴로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행위는 평화에 봉사하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칭송되어졌다. 실제로는 적에게 아주 중요한 전략적 철도를 넘겨주는 것을 통해 소련 정부는 일본의 중국 북부지역 점령과 몽고 침략 기도를 부추기고 있을 뿐이었다. 이 강요된 희생은 위험을 "중립화"하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짧은 숨쉴 틈을 소련에게 제공하는 것에 불과했다. 동시에 일본 군국주의 지배파벌의 야욕을 대단히 자극하는 행위였을 뿐이었다.

몽고 문제는 벌써 소련에 대한 이후의 전쟁에서 일본이 전략 거점을 확보하는 문제가 되어 있다. 이제 소련 정부는 일본 군대가 몽고를 침략할 경우 선전포고로 대응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영토"에 대한 즉각적 방어의 문제가 아니다. 몽고는 독립국이다. 국경을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지 않을 때 수동적으로 이것을 방어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소련을 방어하는 진짜 방법은 제국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전세계 노동계급과 식민지 인민들의 지위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 리가 평화조약, 동중 철도의 양도 등에서 드러났듯이 불리한 역관계는 많은 영토를 넘겨줄 것을 강요한다. 동시에 세계 차원에서 역관계를 호전시키려는 투쟁을 전개할 경우 노동자국가는 다른 나라들의 해방운동을 계속 지원할 의무를 지게 된다. 그러나 이 기본적 임무는 현상유지라는 보수적 정책과 절대적으로 모순을 일으킨다.

 

2. 국제연맹과 코민테른

소련은 프랑스와 화해한 직후 전격적으로 군사협정을 체결하였다. 독일에서 나찌당이 승리한 후 인접국들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당시 유럽의 현상유지를 가장 옹호할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소련과 프랑스 사이의 화해조치는 소련보다는 프랑스에게 훨씬 유리하다. 체결된 군사협정에 의하면 프랑스가 군사적 위협을 당하면 소련은 무조건 프랑스를 지원해야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소련이 위협을 당하면 프랑스는 영국, 이탈리아와 먼저 합의한 후 소련을 지원할 수 있다. 따라서 조약의 실제 내용은 프랑스가 소련에 대해 온갖 계략을 부릴 수 있게 여지를 만들어 놓았다. 최근 독일은 군대를 진주시켜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던 라인지방을 다시 빼앗았다. 이 사태를 보면 소련이 상황을 좀더 냉철하게 판단하고 좀더 절제력을 발휘했더라면 프랑스로부터 훨씬 더 확실한 안전보장을 받아낼 수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군사적 블록의 새로운 형성, 계속되는 외교적 위기, 화해, 관계의 단절 등이 밥먹듯이 이루어지는 지금 시기에 조약이 무엇을 "보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련의 관료집단이 부르주아 국가의 외교관들과 협상할 때보다 국내 선진노동자들의 투쟁을 억압할 때 더욱 단호한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 계속 명백해지고 있다.

소련은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으므로 프랑스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틀렸다.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경우 독일군은 국경선이 어디인지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이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를 공격할 경우 폴란드는 단 하루도 중립을 지킬 수 없다. 만약 폴란드가 프랑스에 대해 동맹국 의무를 이행하기로 작정한다면 소련군이 독일을 공격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어야 한다. 만약 폴란드가 프랑스와 맺은 기존의 조약을 파기한다면 독일의 협력자가 될 것이다. 후자의 경우 소련은 "공동 국경선" 즉 독일과 맞서는 전선을 형성할 것이다. 더욱이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서는 육지 뿐 아니라 바다와 하늘의 "국경선"도 중요할 것이다.

소련은 국제연맹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괴벨스에 버금가는 선전술을 동원하여 관료집단은 인민에게 소련의 국제연맹 가입이 사회주의의 승리이며 세계 노동계급의 "압력"으로 성사되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제국주의 세력은 국제혁명의 위험이 매우 약화되었기 때문에 소련의 가입을 허용했을 뿐이다. 이 사건은 소련의 승리가 아니라 심각하게 손상입은 이 국제기구에게 테르미도르 관료집단이 항복한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앞에서 본 볼셰비키당 강령에서 확인된 바 있듯이 국제연맹은 "이후에 노동자 국제혁명운동을 억압하는 데 노력을 기울일 것이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당의 강령이 작성된 때와 지금은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했는가? 국제연맹의 성격, 자본주의 내 평화운동의 기능, 소련의 정책 등 어느 것이 바뀌었는가?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곧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경험은 소련의 국제연맹 가입이 소련에게 자본주의 국가들과 개별적으로 맺은 조약에 실제적인 이익보다는 심각한 한계와 의무를 부과할 뿐이라는 점을 입증했을 뿐이다. 그리고 소련은 새로 확보한 자신의 보수적 입지와 권위를 지키기 위해 가입국의 의무를 가장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국제연맹 내에서 프랑스 뿐 아니라 프랑스의 동맹국들에게도 비위를 맞출 필요가 있어서 소련은 이탈리아와 이디오피아 사이의 분쟁에서 지극히 애매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제연맹 회의장에서 소련 대사 리트비노프(Litvinov)는 프랑스의 외교관 라발(Lava1)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러면서도 "평화를 위해" 노력한 영국과 프랑스 외교관들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이들이 한 일이라고는 이디오피아의 참혹한 패배를 묵인한 것뿐이었다. 한편 소련 코커서스 지역의 석유는 계속해서 이탈리아 함대에게 공급되었다. 소련 정부는 이탈리아와 맺은 상업협정을 공개적으로 파기하는 데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이해한다면 소련 노동조합들은 무역 인민위원의 입장을 고려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소련 노동조합의 결정으로 이탈리아에 대한 석유수출이 실제로 중단될 경우 전 세계적으로 침략국 이탈리아에 대한 불매운동을 촉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조치는 서방의 외교관들과 법학자들이 사전에 무솔리니와 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효력을 전혀 기대할수 없는 배신적인 "경제제재"보다 비교할 수 없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 소련의 노동조합들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이유는 소련 당국이 프랑스에게 아양을 떨기 위해 노동조합의 자발적 움직임을 봉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25년 영국 총파업 당시 소련 노동조합이 공개적으로 수백만 루블을 모금하여 영국 노동자들에게 보낸 것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나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서 소련은 아무리 훌릉한 군사동맹국을 가진다 하더라도 식민지 인민들과 근로대중으로부터 신뢰감을 상실한 것을 보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을 크렘린궁이 모를 리 있을까? 소련의 관영신문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독일 파시즘의 근본 목표는 소련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데에 있다‥‥‥‥ 그런데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있는가? 소련은 과거 어느 때에 비해서도 우방국을 많이 가지고 있다."(『이즈베스챠』 1935년 9월 17일자)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파시즘의 쇠사슬에 매여 있다. 중국혁명은 분쇄되었다. 일본은 중국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독일 노동자들은 너무도 처참히 패배하여 히틀러의 국민투표 움직임은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고 착착 진행되고 있다. 오스트리아 노동계급은 손과 발이 모두 묶여 있다. 발칸반도의 혁명정당들은 짓밟혔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노동자들은 급진적 부르주아들의 꽁무니를 쫓고있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소련 정부는 국제연맹에 가입하면서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우방국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다. 이 자랑은 처음 들으면 너무 황당하지만 소련이 노동자국가라는 사실보다 관료지배층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진정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소련의 관료집단이 국내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자본주의 국가들의 약간 호의적인 "여론"을 등에 업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세계 노동계급의 처절한 패배 때문이 아닌가? 코민테른이 세계 자본주의를 위협할 능력이 적으면 적을수록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그밖의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소련은 더 많은 정치적 신뢰를 받을 것이다. 국내외에서 소련 관료집단의 힘은 사회주의 국가이면서 노동자 혁명 전진기지의 측면을 지닌 소련의 힘과 반비례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전의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다른 면을 살펴보자.

때때로 놀라운 행위와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날카로운 직관력을 드러내는 영국의 로이드 조오지는 1934년 11월 영국 하원에서 독일 파시즘에 대해 비난을 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독일 파시즘은 유럽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가장 믿을 만한 성채가 될 수밖에 없다. "히틀러를 우리의 친구로 맞아들이게 될 것이다."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자본가 국가들이 크렘린궁에 대해서 반은 봐주는 듯 반은 비꼬는 듯한 어조로 찬사를 늘어놓는다고 평화가 조금이라도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전쟁 위험이 조금이라도 감소되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세계가 소련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결국 소련의 소유형태에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자코뱅주의의 전통을 전격적으로 던져버리고 왕위에 올라 카톨릭교회를 부활시켰으나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반(半)봉건 세력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프랑스 혁명에 의해 성취된 새로운 소유체제를 그가 계속 옹호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관료지배층이 자본주의 세계에 대해 온갖 서비스를 베풀어도 스스로 외국무역의 독점을 해제하고 자본의 권리를 부활시키지 않는 한 소련은 이들에게 화해할 수 없는 적으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오늘은 아니지만 최소한 내일은 독일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 나치즘)가 자본주의 세계의 친구가 된다. 바르투(Barthou)와 라발을 대표로 내세운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이 모스크바에서 소련과 협상을 벌일 때 히틀러가 프랑스의 옆구리를 치명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더욱이 프랑스 공산당은 애국주의로노선을 급선회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자본가들은 소련에 대한 도박을 한사코 거부하였다. 라발이 마침내 소련과 조약을 맺었을 때 그는 실제로는 소련에 대항해 독일 및 이탈리아와 화해를 추구하면서 겉으로는 소련을 카드로 독일을 협박한다는 비난을 프랑스 좌익으로부터 받았다.프랑스 좌익의 판단은 약간 시기상조인 측면이 있지만 사태의 자연스러운 전개과정과 결코 모순되지는 않는다.

프랑스와 소련의 협정이 가져올 장단점을 어떻게 판단하든, 진지한 혁명정치가라면 소련이 영토 보존을 위해 특정 제국주의 세력과 일시적 동맹을 맺어 안보를 강화하려는 권리를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세력 역관계의 전체적 상황 속에서 이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조약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대중에게 명확하고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의 적대관계를 이용하려고 부르주아 동맹국과 국제연맹의 겉모습 뒤에 일시적으로 숨어 있는 제국주의 세력간의 동맹을 미화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러나 소련 뿐 아니라 소련의 행보를 한발 뒤에서 되풀이하는 코민테른은 소련의 일시적 동맹국들이 "평화의 친구들"이라고 체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을 "집단안보"나 "군비축소"라는 구호로 속이고 있다. 결국 노동계급 속에서 제국주의 세력의 앞잡이 역할을 실제적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1936년 3월 1일 스딸린은 스크립스-하워드(Scripps-Howard) 신문그룹의 사장 로이 하워드(Roy Howard)와 악명높은 인터뷰를 하였다. 이 인터뷰 내용은 중대한 세계정치 현안에 대한 관료집단의 무지와 관료집단과 세계 노동운동 사이의 거짓관계를 집약하여 보여주는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전쟁이 불가피하냐는 질문에 대해 스딸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평화를 옹호하는 동맹국들의 지위가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있으며 여론의 힘을 등에 업고 있다. 그리고 예를 들어 국제연맹과 같은 기구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발언에는 현실감각이 조금도 없다. 부르주아 국가들은 평화의 "친구"와 "적"을 나누지 않는다. 왜냐하면 순수한 의미에서 "평화"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평화에만 관심이 있으며 적대국과의 이해관계가 첨예하면 할수록 적대국이 추구하는 평화를 더욱 참지 못한다. "모든 국가들이 국제연맹에 가입하면 평화가 유지된다." 이것은 스딸린, 볼드윈, 레옹 블룸(Leon Blum)에게 공통되는 평화관이다. 이 평화관은 평화 위반의 원인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만 평화가 보장된다는 의미이다. 이 사고는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확히 말해 거의 무의미하다. 미국과 같이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강대국들은 "평화"라는 추상적 개념을 마음대로 해석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때가 되면 이들은 해석의 자유가 왜 필요한지를 보여줄 것이다. 국제연맹에서 탈퇴하는 일본이나 독일 그리고 일시적으로 "불참"하고 있는 이탈리아는 나름대로 이런 행동을 취할 물질적 근거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국가들의 행동은 현존하는 적대관계의 외교적 형태를 바꿀 뿐 적대관계의 성격과 국제연맹의 성격을 바꾸지는 못한다. 국제연맹에게 영원히 충성하겠다고 맹세하는 국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평화를 확립시키기 위해 이 국제기구를 활용하려고 더 날뛸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영국은 유럽과 아프리카의 프랑스 이익을 희생시키면서 평화의 시기를 연장하려고 한다. 한편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지지하면서 영국 항로의 안전을 희생하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이 두 강대국은 전쟁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중 가장 정의로운 나라가 모든 전쟁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마지막으로 약소국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으므로 국제연맹의 그림자를 피난처로 이용하려고 하면서 장기적으로는 "평화"가 아니라 가장 강력한 연합세력에게 붙을 것이다.

현상유지를 목적으로 창설된 국제연맹은 "평화"기구가 아니라 인류 절대다수에 대한 극소수 제국주의자들의 폭력기구이다. 이 기구가 추구하는 "질서"는 오늘은 식민지에서 내일은 강대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계속적인 전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그리고 현상유지에 대한 제국주의 세력의 충성은 언제나 조건적, 일시적, 제한적 성격을 띠어 왔다. 이탈리아는 어제 유럽의 현상유지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는 이것을 깨뜨렸다. 내일 이탈리아의 유럽정책이 어떻게 바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아프리카 국경선은 바뀌었으며 유럽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무쏠리니가 이디오피아를 공격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히틀러는 군대를 라인지역으로 진주시켰다. 이제 이탈리아를 평화의 "친구"에 포함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소련보다 이탈리아와의 우정을 비교할 수 없이 더 귀중히 여기고 있다. 한편 영국은 독일과 우방이 되려고 한다. 동맹관계는 변화한다. 그러나 침략의 탐욕은 그대로 남아 있다. 소위 현상유지파 국가들의 핵심적 목표는 국제연맹 내에서 가장 좋은 연합세력을 구성하고 이 결과 미래 전쟁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가림막을 치는 것이다. 누가 어떻게 전쟁을 시작할 것인가는 부차적 상황에 달려 있다. 누군가가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현상유지는 폭약이 가득 쌓인 지하실과 같기 때문이다.

"군비축소" 정책은 제국주의 세력간의 적대관계가 그대로 살아 있는이상 가장 해로운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 합의를 통해 군비축소가 실현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명백한 환상에 불과하며 결코 새로운 전쟁을 피할 수는 없다. 무기가 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는 것이아니다. 이와 반대로 전쟁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기가 생산되는 것이다. 현대기술은 새로운 무기를 매우 빠르게 생산할 수 있다. 협정, 규제, "군비축소"가 아무리 난무해도 무기고, 무기공장, 실험실 그리고 자본주의 산업은 그대로 힘을 유지하고 있다. 독일은 진정한 "군비축소"를 통해 가장 면밀한 통제 속에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에게 무장해제 당했다. 그러나 강력한 산업의 위력 덕분에 다시 유럽 군국주의의 요새가 되고 있다. 독일은 이제 자기 차례가 되어 몇몇 이웃 나라들을 "무장해제"시키려 한다. 소위 "누진적 군비축소"는 평화시에 과도한 군사지출을 감축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문제는 군사비에 있지 평화에 대한 사랑에 있지 않다. 그러나 군비축소나마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지리적 위치, 경제력, 식민지 경영의 완료 정도 등의 차이에 따라 군비축소의 기준은 불가피하게 역관계를 변화시켜 어느 세력에게는 불리하게 또 어느 세력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따라서 제네바에서 진행되어온 군비축소를 위한 온갖 협상과 회의는 결실을 맺을 수 없다. 거의 20년 동안 군비축소에 대한 협상과 대화가 진행되었지만 새로운 그리고 사상 유례없는 군비증강의 물결만을 초래했다. 노동계급의 혁명전략을 군비축소 정책의 기반 위에 건설하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군국주의의 연막술 위에 집을 짓는 것이다.

제국주의적 살육의 과정이 막힘없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이 질식되어야 한다. 이것은 노동자 대중조직 지도부의 매개를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 1914년에 이것이 성사되었을 때 제시된 구호는 "마지막 전쟁", "프로이센 군국주의에 대한 전쟁",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 등이었다. 그러나 이 구호들은 지난 20년의 역사 속에서 완전히 신뢰를 상실했다. "집단안보", "전반적 군비축소"가 이 헛된 구호들을 현재 대신하고 있다. 국제연맹의 평화노력을 지원한다는 구실 아래 유럽 노동자 조직의 지도자들은 "성스러운 연합"을 새로 실현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성스러운 연합은 탱크, 비행기, "금지된" 독가스만큼이나 전쟁 준비를 위해서 필요하다.

제3 인터내셔널은 사회애국주의(social patriotism)(역자 주: 제 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자국 지배계급의 전쟁노력을 조국방어 행위라고 치켜세웠다. 결국 이 정당들은 자기나라 노동계급을 제국주의 전쟁의 총알밥, 대포밥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말로는 사회주의를 외치면서 행동은 애국주의인 기회주의 노선을 사회애국주의 또는 사회국수주의라고 한다.) 에 대한 격렬한 항의를 통해 탄생했다. 그러나 러시아 10월 혁명에 의해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유립된 혁명적 활력은 소진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이제 코민테른은 제2 인터내셔널과 마찬가지로 국제연맹의 깃발 밑에 있다. 다만 제2 인터내셔널에 비해 혁명에 대한 냉소의 정도가 더욱 커졌을 뿐이다. 영국의 사회주의자 스태포드 크립스 경(Sir Stafford Cripps)이 여론을 경멸하며 정당하게 국제연맹을 강도들의 세계연합이라고 불렀을 때 『런던타임즈』는 역설적 어조로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소련이 국제연맹에 가입한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소련의 관료지배층은 10월 혁명이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사회애국주의를 이제 강력하게 지지하는 세력이 되었다.

로이 하워드 역시 이 점에 대해 간간히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는 스딸린에게 물었다: "세계혁명에 대한 계획과 견해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현재 그러한 계획이나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오해가있는 것 같군요" "비극적인 오해입니까?" "아닙니다. 희극적 또는 뭐라고 할까 희비극적 오해입니다." 이 인용문은 인터뷰 내용을 글자 하나 빼지 않고 그대로 옮긴 것이다. 스딸린이 계속 이어서 말했다: "소련 인접국들이 정말 안전하게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면 소련 인민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든 위험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 로이 하워드가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국가들이 안전하게 평화를 누리고 있지 못하면 어떻게 하죠? 이에 대해 스딸린은 불안을 가라앉히는 주장을 하나 더 꺼냈다: "혁명을 수출한다는 생각은 넌센스에 불과합니다. 혁명을 원하는 나라는 혁명을 성취하면 됩니다. 이 나라에 혁명이 발생하지 않으면 혁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는 혁명을 원했고 혁명을 성취했습니다‥‥‥" 이 말도 인터뷰 내용을 글자 하나 빼지 않고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일국 사회주의 이론이 일국 혁명 이론으로 자연스러이 이행했다. 로이 하워드는 다시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터내셔널은 무슨 목적으로 존재합니까? 그러나 하워드는 호기심의 적절한 한도를 확실히 알고 있는 듯했다. 이 점에 대한 스딸린의 설명은,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가 다 주목하고 있는데, 아주 안심되는 것이었다. 다만 논리가 엉망일 뿐이다. "우리 나라"는 혁명을 하고자 했을 때 외국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수입했고 외국의 혁명투쟁 경험을 연구했다. 수십 년 동안 해외 망명 지도부가 러시아 국내의 투쟁을 지도했다. 그리고 당시 유럽과 미국의 노동자 조직들로부터 우리는 도덕적·물질적 지원을 받았다. 혁명을 성취한 후 1919년에 우리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조직했다. 혁명을 성공시킨 나라의 노동계급이 타국의 피억압 저항 계급들을 사상 뿐 아니라 가능하면 무기를 가지고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우리는 누차 선언했었다. 그리고 선언으로 만족하지도 않았다. 군대를 동원하여 핀란드,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그루지아 노동자들을 지원했다. 바르샤바에 적군이 진주하여 폴란드 노동자들의 봉기를 지원하려고 하기조차했다. 중국혁명을 돕기 위해 조직가와 사령관들을 보냈었다. 1926년 총파업을 벌이고 있던 영국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수백만 루블을 모금하였다. 스딸린은 과거 노동자 국제연대의 모든 활동들이 오해로 인해 발생했다고 말하는 것 같다. 비극적인 오해라고? 아니다. 차라리 희극적인 오해이다. 소련에서 사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고 스딸린이 선언한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코민테른의 진지한 인물들은 이제 모두 희극적인 인물들로 교체되었다.

과거 소련 노동자들의 영웅적 행위들을 비방하는 대신 테르미도르 반동의 정책과 10월 혁명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교했다면 스딸린은 로이 하워드에게 더 강한 인상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참으로 아쉽다. 그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레닌이 보기에 국제연맹은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국제연맹을 평화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레닌은 혁명 전쟁의 불가피성을 말했다. 우리는 혁명을 수출한다는 사고가 넌센스라고 생각한다. 레닌은 제국주의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이 연합하는 것을 반역이라고 비난하였다. 우리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바로 이 연합의 길로 국제 노동계급을 인도할 것이다. 레닌은 자본주의 체제 하의 군비축소를 노동자에 대한 사기라고 맹비난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정책 전체를 군비축소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스딸린은 이렇게 결론내렸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볼세비즘의 무덤을 파는 우리를 볼세비즘의 계승자로 잘못 안 것에서 귀하의 희비극적 오해가 발생했다."

 

3. 적군(赤軍)과 그 군사이론

옛날 러시아 병사는 농촌공동체의 가부장적 문화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맹목적 무리 본능을 두드러지게 가지고 있었다. 캐더린 2세와 바울의 치세에 대원수였던 수보로프(Suvorov)는 농노군의 출중한 사령관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은 과거 유럽과 짜르시대 러시아의 군사술을 영원히 매장시켜 버렸다. 러시아 제국은 계속해서 광활한 영토를 정복했으나 문명국 군대에게 승리한 경우는 없었다. 일련의 원정에서의 패배와 뒤이은 국내의 사회적 격동이 진행되면서 군대의 국민적 특성이 변하였다. 적군은 새로운 사회적·심리적 기초 위에서만 형성될 수 있었다.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병사를 괴롭혀 왔던 무리 본능과 자연에 대한 복종심은 젊은 세대의 담대한 기상과 기술 숭배로 바뀌었다. 개성에 대한 자각과 함께 문화수준이 급격히 상승했다. 글을 모르는 병사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적군은 글을 모르는 병사를 제대시키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운동경기가 군 내부와 주위에서 급속히 발전하였다. 노동자, 관료, 학생들 사이에서 특등 사수 명찰은 커다란 인기를 누렸다. 겨을 스키는 지금까지 몰랐던 기동력을 제공했다. 고공 낙하, 글라이딩, 항공 분야에서 놀라운 성공들이 잇따랐다. 북극해와 성층권 비행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이 절정기에 엄청난 업적들이 계속 성취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보여주었던 적군의 조직과 전투력 수준을 이상적인 것으로 묘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젊은 장교들은 이 시기를 통해 많은 경험을 쌓았다. 짜르 군대에서 복무했던 하사관과 상병들은 조직가와 군사지도자의 자질을 발휘하였고 대규모 전투에서 의지력을 단련시켰다. 이 자수성가한 병사들은 여러 번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나 결국에는 승리하였다. 이들 중 우수한 군인들은 열성적으로 공부에 몰입하였다. 내전이라는 학교를 거쳐간 현재의 사령관들 절대 다수가 군사학교나 특별 과정을 이수하였다. 고위장교들 약 반수 정도는 고등군사교육을 받았다. 나머지는 사관생도 과정을 거쳤다. 군사이론은 군인에게 필요한 사고방식을 훈련시켰다. 그러나 내전을 극적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획득된 과감한 기상은 파괴되지 않았다. 이 세대는 현재 40대와 50대가 되었다. 이 나이에는 육체적·정신적 힘이 균형을 이루며 경험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지만 대담성이 사그러들지는 않는다.

당, 공산주의청년동맹, 노동조합, 국유화 산업 행정기구, 협동조합, 집단농장, 국영농장 등이 사회주의 건설과 경제적 과업을 어느 정도 성취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사회조직들은 수없이 많은 젊은 행정간부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이들은 인적·물적 자원들을 운영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으며 자신들을 국가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전쟁시 군대 지휘부를 구성할 것이다. 입대 이전의 학생들 역시 높은 수준으로 미래를 준비하면서 미래에 군대 지휘부의 일원이 될 것이다. 학생들은 특별 훈련대대로 편성되어 있어 동원될 경우 지휘관을 훈련하는 임시학교로 발전할 수 있다. 고등교육기관을 졸업하는 학생이 매년 8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대학생은 50만 명을 넘고 있다는 사실이 전시에 동원 가능한 자원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더욱이 각급학교 학생은 모두 2천8백만 명에 접근하고 있다.

사회혁명은 경제와 특히 공업에서 짜르시대 러시아가 꿈도 꿀 수 없었던 군수산업을 형성시켰다. 계획경제는 근본적으로 정부가 산업을 원하는 대로 계속해서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고 기계를 구비하면서도 국방의 목적에 부합할 수 있게 조치할 수 있다. 적군의 인적·기술적 능력의 상호관계는 서방의 가장 훌륭한 군대와 수준이 같다고 말할 수 있다. 포병 재무장도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결정적 성공을 거두었다. 트럭, 장갑차, 탱크, 비행기 생산에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투여되고 있다. 현재 소련에는 최소한 50만 대의 트랙터가 있다. 1936년에는 16만 대가 생산되어 850만 마력이 공급될 예정이다. 탱크 생산도 이와 비슷한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다. 적군의 동원 계획에 의하면 전선 1킬로미터마다 30에서 45대의 탱크가 필요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해군이 보유한 배의 총톤수는 1917년의 54만 8천 톤에서 1928년의 8만 2천 톤으로 감소되었다. 이 분야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1936년 1월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투하체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 강력한 해군이 건설되고 있다. 특히 잠수함 함대를 개발하는 일에 주로 힘을 집중하고 있다." 이 분야의 성과에 대해서 일본 해군본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발트해에서 활동중인 해군에 대해서도 이제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미래에도 해군은 해안전선의 방위에서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행대는 위력적으로 성장했다. 2년 전, 언론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프랑스 항공기술 대표단이 "이 분야에서 소련이 거둔 성과가 놀라우면서도 기쁘다"고 했다. 특히 적군이 반경 1,200킬로미터에서 1,500킬로미터에 이르는 중폭격기를 점점 많이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극동전쟁이 발발할 경우 일본의 정치적·군사적 중심지들이 소련 해안으로부터 직접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언론에 배포된 자료에 의하면 1935년이 되면 62개 비행연대가 동시에 5천 대의 비행기를 출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계획은 이미 달성되었고 아마 초과달성되었을 것이 확실하다.

짜르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나 최근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화학산업은 항공기 제작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소련과 외국 정부들이 종종 되풀이되고 있는 독가스 사용 "금지" 선언을 단 1초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디오피아에서 이탈리아 문명군대가 했던 일은 국제 강도들의 인도주의적 제한조치들이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명백히 보여주었다. 가장 의문스럽고 무시무시한 재앙들이 갑자기 벌어질 사태에 대비하여 적군은 군사화학과 군사세균학 분야에서 서방의 군대만큼 철저히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군수물자 품질에 대한 의심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산도구들은 일상용품들보다 더 고급으로 생산되고 있다고 이미 말한 적이 있다. 물품 구매자가 지배 관료집단의 영향력 있는 그룹일 경우 품질은 보통의 수준보다 상당히 올라간다. 일반 소비재는 품질이 아직도 형편없다. 가장 입김이 센 고객은 전쟁성이다. 소비재와 생산도구보다 전쟁 도구들이 더 좋은 품질을 자랑한다는 사실은 놀라울 것이 없다. 그러나 군수산업은 산업 전체의 일부이고 다소간 산업 전체의 문제점들을 반영하고 있다. 보로쉴로프와 투하체프스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산업지도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상기시킨다: "여러분이 적군에 공급하는 제품의 품질에 대해서 항상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석에서는 군대 지도자들이 좀더 딱부러지게 표현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군대 매점에 공급되는 물품들은 무기보다 질이 더 나쁘다. 신발은 자동소총보다 질이 더 낮다. 그러나 비행기 엔진도 의심의 여지없는 진전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은 서방의 엔진에 비해 상당히 뒤쳐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군사장비의 경우 가능한 빨리 적국이 될지도 모르는 서방의 수준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과업이 여전히 달성되지 않고 있다.

농업의 상황은 더 나쁘다. 모스크바에서 얘기되는 말이 있다. 공업노동자의 수입이 농민의 수입을 이미 능가하고 있기 때문에 소련은 실제로 농공업국에서 공농업국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수입 격차는 공업발전의 상당한 진행과 함께 존재하는 농업의 지극히 낮은 수준때문에 나타난다. 몇 년 동안 소련의 외교정책이 일본에 대해 유난히 유화적이었던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식량공급의 심각한 어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난 3년 동안 이 분야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으며 특히 극동에서 군대용 식량공급기지가 건설될 수 있었다.

역설적이지만 말의 생산이 군대에서 가장 골치아픈 문제가 되고 있다. 완벽한 농업 집단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소련의 말 숫자는 약 55% 감소했다. 더욱이 자동차의 이용이 일반화된 지금도 군대는 나폴레옹 시대와 마찬가지로 병사 세 명당 말 한 마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난 한해 이 분야에서도 좋은 성과가 나타났다. 말의 숫자는 다시 증가 추세에 있다. 어쨌든 몇 달 뒤에 전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1억 7천만 소련 인구는 언제나 필요한 식량과 말을 전선으로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인구 전체를 희생시키면서 이 과업이 진행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나라의 인민들은 전쟁이 터지면 기아, 독가스, 전염병밖에 기대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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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은 전선의 왕립 대대에 새로이 대형들을 추가시키면서 국민군대를 창설하였다. 10월 혁명은 짜르의 군대를 완전히 해산하여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적군은 처음부터 새로 구성되었다. 소련 정권과 쌍동이인 군대는 크고 작은 일에서 국가와 운명을 같이했다. 위대한 혁명때문에 적군은 짜르군대보다 비교할 수 없이 우수했다. 그러나 군대는 노동자국가의 퇴보를 가장 완성된 형태로 표현했다.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서 적군이 맡을 역할을 말하기 전에 군대의 지도사상과 체계의 변천을 잠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1918년 1월 12일 인민위원 소비에트는 정규군의 토대를 마련하는 포고령에서 이렇게 군대의 목적을 규정하였다: "국가권력이 이제 근로 피착취 인민에게 넘어갔으므로 소비에트 권력의 요새가 될 새로운 군대를 창설할 필요가 생겼다 ‥‥‥ 그리고 이 군대는 유럽에서 곧 이어질 사회주의 혁명들의 지원군이 될 것이다." 1918년 이후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노동절의 "사회주의자 선서"에서 적군 병사는 "사회주의와 전 세계 인민들의 형제애를 위해 힘과 목숨조차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러시아와 전 세계 근로계급의 눈 앞에서" 약속한다. 스딸린이 혁명의 국제적 성격을 "희극적인 오해"와 "넌센스"로 묘사하는 것을 보면 그는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폐기되지 않고 있는 소비에트 정부의 기본 포고령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군대는 당연히 당과 국가기구를 떠받치는 사상에 의해서 동시에 지탱되었다. 군대의 성문법, 언론, 구두선동 등도 실천 과업인 국제혁명을 위해 존재하였다. 전쟁성에서는 혁명적 국제주의 강령이 종종 과장된 지위를 부여받았다. 군대 정치국 의장이었으며 이후 스딸린의 밀접한 동맹자였던 구세프(Gussev)는 군대신문에 1921년 이렇게 썼다: "부르주아-지주의 반혁명을 막기 위해서 뿐 아니라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혁명전쟁을 위해서 ‥‥‥ 우리는 노동계급 군대를 양성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적군을 국제혁명 과업에 제대로 준비시키지 못한다고 당시 전쟁성을 지휘하고 있던 필자를 직접 비난했다. 이에 대해 필자는 신문을 통해 군사 강대국들은 혁명 과정에서 보조적 역할 밖에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오직 유리한 상황에서만 군사 강대국들은 혁명의 승리를 재촉할 수 있을 뿐이다. "군사적 개입은 의사의 족집게와 같다. 적절한 때에 사용하면 출산의 고통을 덜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일찍 사용하면 사산을 자초할 뿐이다."(1921년 12월 5일) 불행하게 지금 이 중요한 문제를 충분히 논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의 총사령관 투하체프스키는 1921년 코민테른에 편지를 보내 그가 주도하는 "국제 군지휘부" 구성을 제안했다 그런데 이 흥미있는 편지는 "계급전쟁"이라는 그럴싸한 제목으로 그의 논문집에 실려 출판되었다. 이 재능 있지만 약간 성급한 사령관은 신문에 실린 필자의 "국제 군지휘부는 여러 노동자국가 군지휘부의 기초 하에서만 성립이 가능하다.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 국제 군지휘부는 우스꽝스런 모양새가 될 뿐이다"라는 글을 읽었어야했다. 일반적으로 원칙의 문제들-특히 새로운 문제들-에서는 명확한 입장을 취하기를 회피하는 스딸린 자신은 그렇지 않았지만, 적어도 미래에 그의 측근이 될 인물들 다수가 그 당시에는 당과 군 지도부의 "좌익적" 입장을 취했었다. 그들의 사상에는 소박한 과장이나 혹은-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희극적 오해"도 적지 않았다. 물론 이런 일들이 없이 위대한 혁명이 성취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일국 사회주의"에 연관된 극단적으로 황당한 이론에 대해 공격의 화살을 퍼붓는 것이 필요하기 아주 오래 전에 이미 국제주의에 대한 좌파의 이 "황당한 이론"에 대해우리는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를 회상하는 회고담과는 달리 내전이 가장 엄중한 단계를 경과하고 있던 당시 볼셰비키당의 지적인 생활은 온천처럼 들끓고 있었다. 군대를 위시로 당과 국가기구의 모든 단위에서 모든 문제 그리고 특히 군사 문제들에 대해 토론이 격화되고 있었다. 지도부의 정책은 종종 격렬한 자유 비판에 직면하였다. 과도한 군사검열제도의 문제에 대해 당시 필자는 주요한 군사문제 잡지에서 이렇게 썼다: "검열이 산더미처럼 많은 오류를 범한 사실을 기꺼이 인정한다. 검열이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 아주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검열은 군사기밀을 방어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어떤 일에 대해서도 간섭해서는 안된다."(1919년 2월 23일)

국제 군지휘부에 대한 문제는 지적 투쟁의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투쟁은 행동통일이라는 규율에 의해 적절한 범위 내에서 벌어졌지만 최소한 군대 상층부에서 반대 분파의 성격을 띤 정치집단이 구성되기까지 했다. 프룬제, 투하체프스키, 구세프, 보로쉴로프 외에 다른 인사들이 속한 "노동계급 군사이론" 분파는 정치적 목적, 군대체계, 전략, 전술 등에서 적군은 자본주의 국가의 군대와 아무 공통점도 없다는 선험적 확신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새로운 지배계급은 모든 측면에서 이전의 군대와 뚜렷이 구별되는 군대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이제 이 군대를 창건하는 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내전 중에 이 분파의 활동은 짜르 군대의 장교들을 영입하는 문제에 대해 원칙적 항의서한을 제출하는 것으로 주로 제한되었다. 그리고 지역 전투에서 보여진 무원칙한 임기응변 방식과 특정 규율 위반에대해서 투쟁하는 총사령부를 뒤에서 비방하는 정도에 그쳤다. 새로운 군사이론의 극단적 추종자들은 극단적으로 의미를 확대한 전략적 원칙, "기동주의(maneuverism)", "공격주의(offensivism)" 등의 이름 아래 군대의 중앙집중적 체계마저 거부하려했다. 앞으로 전개될 국제적 차원의 전투에서 중앙집중적 체계는 혁명적 주도성을 억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핵심적으로 말해 이 이론은 내전 첫 몇 년간 수행되었던 게릴라 전투방식을 영원하고 보편적인 체계로 확대시키려는 시도였다. 많은 수의 혁명군 사령관들은 이 새로운 이론에 대해 더 적극적이었다. 왜냐하면 과거의 군사이론들을 연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분위기의 주요 중심지는 부데니와 보로쉴로프 그리고 이후 스딸린이 군사적 임무를 시작한 짜리친 즉 지금의 스딸린그라드였다.

내전이 끝난 후에야 이 새로운 고안물들을 완성된 이론으로 구축하려는 좀더 체계적인 시도가 진행되었다. 이 시도의 주창자는 내전 당시 출중한 사령관의 하나였던 프룬제였다. 그는 과거 중노동을 겪은 정치범이었는데 보로쉴로프 그리고 어느 정도 투하체프스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핵심적으로 말하면 노동계급 군사이론은 완전히 형이상학적 도식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노동계급 문화" 이론과 전적으로 유사하였다. 이 새로운 경향의 주창자들이 남긴 저작들을 보면 이러저러한 실제적 처방들은 전혀 새롭지 않으며 다만 노동계급을 국제적이며 전투적인 계급으로 보고 이 가정을 군사이론의 토대로 삼았을 뿐이다. 즉 노동계급을 현실에 존재하는 시간과 장소의 조건들로부터 고찰하지 않고 정태적인 심리적 추상으로 바라보았다. 이 저작들은 한줄 한줄마다 마르크스주의를 칭송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마르크스주의를 순수한 관념론으로 대체하고 있었다. 이 이론은 진지한 탐색을 동반하고 있지만 관료집단이 급속도로 발전시키고 있던 자만심의 맹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특별한 준비나 물질적 전제조건이 갖추어지지도 않은 가운데 모든 분야에서 역사적인 기적을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관료집단은 믿고 싶어했고 또 다른 사람들이 믿도록 하고 싶었다.

당시 필자는 신문을 통해 프룬제에게 이렇게 답변했다: "발전한 사회주의 경제를 보유한 나라가 부르주아 국가와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사회주의 국가의 전략은 지금의 전략과 완전히 다를 것이다. 이 점은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지금 이 '노동계급 전략`을 바로 실천할 수 있다는 근거는 없다‥‥‥ 사회주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대중의 문화수준을 높이는 것을 통해 ‥‥‥ 우리는 새로운 군사술을 풍부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 당분간 선진 자본주의국가들로부터 열심히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혁명적 성격으로부터 사변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전략을 유추" 하려는 시도는 필요없다(1922년 4월 1일). 아르키메데스는 받침대가 주어지면 지구를 움직이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잘못된 말은 아니다. 그러나 받침대가 주어졌다 해도 받침대를 가지고 지구를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나 동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을 것이다. 승리한 혁명은 새로운 받침대를 제공한다. 그러나 지구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지렛대들을 갖추어야 한다.

"노동계급 군사이론"은 그것의 자매 이론인 "노동계급 문화이론"과 같이 당시 볼셰비키당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그러나 이후 이 이론들의 운명은 달랐다. "노동계급 문화"의 깃발은 "일국 사회주의"와 모든 계급의 철폐가 선포되었던 1924년에서 1931년 동안 스딸린과 부하린에 의해 치켜 올려졌으나 별 성과없이 흐지부지되었다. 반면에 "노동계급 군사이론"은 이 이론의 주창자들이 국가기구를 장악하는 위치에 올랐지만 다시는 부활되지 않았다.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 두 이론들이 다른 운명을 가진 이유는 소련 사회의 변화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노동계급 문화"는 추상적이어서 무게를 측량할 수 없는 문제들과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관료집단은 노동계급을 권좌에서 거칠게 밀어내면 낼수록 도덕적 보상을 제시하는 이 이론에 대해서 그만큼 더 관대했다. 반면에 군사이론은 국방의 이해 뿐 아니라 지배층의 이해에도 아주 핵심적인 문제였다. 여기서는 이론 장난을 허용할 여지가 없었다. 짜르군대의 장교들을 군대로 영입하는 것에 반대한 자들이 이제 "장군"이 되었다. 국제 군지휘부를 예견한 이 선지자들은 "일국" 지휘부의 사열대 지붕 아래에서 조용해졌다. "계급 전쟁"은 "집단 안보" 이론으로 대체되었다. 세계혁명의 전망은 현상유지를 신격화하는 정책으로 바뀌었다. 이후에 동맹국이 될 수 있는 나라들의 신뢰를 얻고 지금의 적대국들을 가능하면 자극하지 않기 위해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자본주의 국가의 군대들과 가능하면 차이가 없게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이론과 겉모습의 변화 뒤에는 역사적 중요성을 가진 사회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935년은 군대에게 일종의 이중혁명의 해였다. 민병대 체계 그리고 군지휘부에 관련하여 일어난 혁명이 이것이다.

 

4. 민병대의 해체와 장교계급의 부활

20년이 지난 지금 적군은 어느 정도 볼셰비키당의 군대 강령을 실현했는가?

노동계급 독제체제를 수호하는 군대는 강령에 따르면, "공공연하게 계급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노동계급과 반(半)노동계급 농민층으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계급이 철폐되면 계급 군대가 사회주의 전국 민병대로 전환될 것이다." 전국적 성격의 군대를 미래의 일로 연기했으나 당은 민병대 체제를 결코 거부하지 알았다. 이와 반대로 1919년 3월 제8차 당 대회 결의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민병대를 계급적 토대에 두면서 소비에트 민병대로 전환시킨다." "노동계급의 노동조건과 밀접한 방식으로" 군대를 서서히 창설하는 것이 군사사업의목적이었다. 장기적으로 군대의 모든 단위는 "지역 단위의 지휘부, 무기와 보급품 창고를 보유하며" 지역적으로 공장, 광산, 마을, 농촌공동체, 그 밖의 다른 유기체 집단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지역, 학교, 산업, 체육 등 각 단위에서 청년이 유기적으로 결합되면서 군대에서 각인되는 집단정신을 실천할 것이고 더욱이 직업장교단을 창설하지 않으면서 의식적 규율을 각인할 것이었다.

그러나 민병대가 사회주의 사회와 아무리 잘 조응된다 해도 민병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경제적 기반이 조성되어야 한다. 정규군을 창설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상황이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지역 군대는 나라의 실제 현실을 훨씬 더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문화의 수준이 낮을수록, 농촌과 도시의 구별이 날카로울수록, 민병대는 그만큼 불완전하고 이질적이 된다. 자동차 및 도로가 부족하고 철도, 고속도로, 수로 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지역군은 전쟁의 아주 결정적인 첫 몇 주 또는 몇 달간 기동력이 매우 저조할 것이다. 자원이 동원되고 전략적으로 이동되고 병력이 집중되는 동안 전선을 확실히 방어하기 위해서는 지역군과 함께 정규군이 있어야 한다. 필요상 애초부터 이 두 체제를 절충하되 정규군에 강조점을 두고 적군은 창설되었다.

1924년 당시 전쟁성을 지휘한 필자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항상 두 가지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소비에트 체제로 의해 민병대 체제로 전환할 가능성이 처음 대두되었지만 이 변화의 속도는 기술, 통신수단, 문자해독률 등 나라의 일반적 문화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민병대를 유지할 경제적·문화적 조건이 매우 낙후한 반면에 정치적 조건은 확고히 마련되었다." 필요한 물질적 조건이 마련될 경우 지역군은 정규군보다 열등하지 않을 뿐 아니라 훨씬 우세할 것이다. 소련은 국방에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왜냐하면 저렴한 민병대 체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지 않으므로 정규군에 자원을 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소련 사회가 아주 비용이 많이 드는 관료집단을 목에 걸고 있는 이유는 바로 사회의 빈곤 때문이다.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상부구조(정치체제) 사이의 불균형은 거의 모든 분야가 절대적으로 같은 수준으로 발전하게 강제하였다. 소련 내 모든 사회적 관계의 기초는 생산력의 낮은 수준과 원칙적으로 사회주의적인 소유형태 사이의 괴리이다. 새로운 사회주의적 사회관계는 문화수준을 높여준다. 그러나 불충분한 문화는 사회주의적 형태들을 갉아먹는다. 소련의 현실은 이 두 경향 사이의 균형에 의해 결정된다. 군대에서는 체계가 너무도 명확하기 때문에 결과는 충분히 정확한 수치를 통해 측정될 수 있다. 정규군과 민병대 사이의 상호관계는 사회주의로의 전진 정도를 현실적이고 공정하게 보여줄 수 있다.

자연 조건과 역사적 과정에 의해 소련은 낮은 인구밀도와 열악한 도로를 사이에 두고 국경이 1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국가가 되었다. 1924년 10월 15일 오래된 군지도부는 재임을 한 달 남겨 놓고 있었는데 다시 한번 현실을 상기시켰다: "앞으로 몇 년간은 민병대 창설을 준비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이것은 필연이다. 이전의 성공이 앞으로의 정책을 밑받침할 수 있도록 정책의 성과가 면밀하게 입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1925년에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 과거 노동계급 군대이론을 주창했던 자들이 권력을 잡았다. "공격주의"와 "기동주의"는 지역군의 개념과 핵심적으로 매우 모순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세계혁명의 과업을 잊어먹기 시작하고 있었다. 새로운 군지휘부는 세계 부르주아계급을 "중립화"하면서 전쟁을 피하려했다. 이후 몇 년 동안 군대의 74%는 민병대로 재조직되었다!

독일이 무장 해제의 상태에 있고 "우방"처럼 행동하는 한 소련 군지휘부의 계산은 바로 인접국들의 군사력에 기초하고 있었다. 루마니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등이 서쪽 인접국인데 이들은 가장 강력한 적대국인 프랑스의 물질적 지원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1933년에 끝난 이 시기에 프랑스는 불행하게 "평화의 친구"가 아니었다. 인접국들은 모두 합쳐 보병 120 사단 즉 약 3백5십만 병력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다. 적군의 동원 계회은 서부 전선에 같은 숫자의 일급 병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극동전선의 경우는 수백만이 아니라 수십만의 병력으로 충분하였다. 대체로 1년 동안 100명의 병사에 대해 15명의 병사가 보충되어야 한다. 병원에서 회복되어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는 병사들을 제외하면 전쟁은 2년 동안 농촌으로부터 1천만 내지 1천2백만 명의 성인 남성을 데리고 간다. 1935년까지 적군에 소속된 병사의 수는 55만 2천 이었다. 그리고 비밀경찰에 딸린 병사까지 포함하면 전부 62만 명이었으며 장교는 4만 명이었다. 더욱이 1935년이 시작될 때 이미 말했듯이 74%는 지역 군에 편성되어 있었고 26%만이 정규군에 속해 있었다. 100%는 아니지만 최소한 74%가 민병대이므로 사회주의 민병대가 군대를 "최종적으로 그리고 역전시킬 수 없을 정도로" 장악한 것은 명확하지 않은가?

그러나 위에서 제시한 모든 계산은 그 자체로만 해도 조건적이었으나 히틀러가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한 후 모두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독일은 열정적으로 무장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주로 소련에 대항하여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세계와 평화적으로 동거하겠다는 전망은 즉시 사라졌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전쟁위험은 소련이 총병력을 1백30만 명으로 늘리고 적군의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도록 강요하였다. 현재 적군의 77%는 정규군이며 23%만이 지역 민병대이다. 지역군을 대대적으로 청산한 것은 민병대 체제의 포기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군대는 평화의 시기가 아니라 전쟁 위협의 시기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이렇게 농담이 전혀 허용될 수 없는 분야의 역사적 경험은 사회의 생산적 기반에 의해 사회주의의 이 정도만이 "최종적으로 그리고 역전시킬 수 없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가차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74%에서 23%로 민병대의 비율이 하락한 것은 과도한 것처럼 보인다. 이 과정은 프랑스 군지휘부의 "우정어린" 압력이 아니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관료집단이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는데 갑자기 좋은 구실이 저절로 생겼다고 볼 수도 있다. 군대의 정규군화는 상당한 정도 정치적 고려에 의해 강제되었다. 민병대 조직은 그 성격 자체로 인해 대중에게 직접 의존할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 측면은 민병대 체제의 주요한 장점이다. 그러나 크렘린궁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야말로 위험 요소임에 틀림없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생산력 수준으로 보면 민병대를조직할 수 있으나 거부하는 것은 민병대와 인민의 밀접한 관계가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1차 5개년계획 기간중 적군은 정부 당국에 대해 날카로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요인은 의심할 여지없이 지역 민병대를 해체하는 심각한 동기로 작용했다.

적군의 체계 개악 이전과 이후의 정확한 수치들을 보면 이 생각은 틀림없이 올바른 것으로 확인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자료는 없다. 그리고 자료가 입수되었다 하더라도 공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해석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소련 정부가 민병대의 비중을 51%로 낮추었을 때 짜르 군대에서 유일한 민병대였던 코사크 기병대를 부활시켰다! 기병대는 언제나 군대의 특권보수집단이다. 그리고 코사크 부대는 모든 군대 내에서 가장 보수적이었다. 전쟁과 혁명 기간 중 코사크 부대는 처음에는 짜르, 다음에는 케렌스키의 경찰병력이었다. 소비에트 권력 하에서도 이들은 언제나 반동적이었다. 더욱이 특별 폭력수단들이 동원되어 코사크족의 집단화가 강제되었으나 아직도 이들의 전통과 성격을 바꾸지 못했다. 더욱이 특별법에 의해 이들은 말을 개인적으로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다른 특혜들도 한없이 많았다. 이 초원의 기마병사들이 다시 특권 억압층의 편이 된 것을 의심할 수 있을까? 청년노동자들의 체제 저항 경향을 끊임없이 억압하고 있는 와중에 코사크 기병대가 부활되었다. 이것은 테르미도르 반동의 가장 명확한 표현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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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적 분위기를 그대로 살린 장교단의 부활 포고령은 10월 혁명의 원칙에 대한 더욱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적군 지휘부는 불충분한 측면도 있고 측량할 수 없는 강점도 있지만 어쨌든 혁명과 내전을 통해 탄생했다. 독립적 정치활동이 봉쇄된 청년은 적군에게 능력있는 병사들을 적지 않이 공급하는 인구집단임에 틀림없다. 반면에 국가기구의 누진적 퇴보는 광범위한 지휘부 계층에서 반영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공개 회의에서 보로쉴로프는 지휘관이 병사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말을 하면서 이렇게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특히 자랑할 것이 없다"; "지도적 장교들이 뒤처지고 있는 동안" 하급장교들은 성장하고 있다.; "빈번하게 지휘관들은 새로운 문제들을 적절한 방식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등등.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군대의 가장 책임있는 지도자가 한 고백인데 그 내용이 놀랍기보다는 차라리 경고를 담고 있다. 보로쉴로프가 지휘관들에 대해 하고 있는 말은 모든 관료들에게도 해당한다. 물론 발언자 자신은 관료집단의 상층부가 "뒤처지는" 축에 속한다고 감히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언제 어느 곳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화가 나서 발을 쿵쿵 구르면서 "최선을 다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현상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간단한 사실이지만 소련 사회의 후진성과 타성을 지속시키는 주요한 원인이며 보로쉴로프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은 바로 이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지도자" 집단이다.

군대는 사회의 복사판이며 사회의 질병을 더 고열로 앓고 있다. 전쟁을 수행하는 직업은 너무나 엄격한 것이어서 허구나 모방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군대는 비판이라는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다. 지휘부는 민주적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적군 조직가들은 애초부터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휘부의 선거 같은 절차들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군사문제에 대한 당의 기본 결정사항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대 내부의 단결을 도모하고 비판적 태도를 발전시키면 지휘부의 선거 원칙이 더욱 광범위하게 적용될 조건이 조성될 것이다." 이 결정이 채택된 후 이미 15년이 흘렀다. 이 정도 시간이면 단결과 비판정신이 충분히 성장했을 것이다. 그런데 관료지배층은 이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1935년 9월 소련의 우방과 적대국을 포함하여 문명세계는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들었다. 적군이 소위에서 총사령관까지 장교제도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전쟁성의 실제 지도자인 투하체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장교 직위의 도입은 지휘 및 기술 분야의 간부들을 개발할 좀더 안정적인 기반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고의적으로 애매하다. 지휘급 간부들은 무엇보다 병사들의 자신감에 의해 강화된다. 바로 이 때문에 적군은 장교단을 일소하기 시작했다. 위계 체제의 부활은 군대의 이해와 조금도 관계 없었다. 중요한 것은 계급이 아니라 지휘할 수 있는 위치이다. 엔지니어와 의사들은 계급이 없다. 그러나 사회는 이들을 필요한 위치에 배치시키는 수단을 찾아낸다. 지휘권은 연구, 자질, 성격, 경험 등에 의해 보장되며 더욱이 이에 대한 지속적이고 개별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소령 계급은 대대 지휘관에게 실제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5명의 고위 지휘관을 총사령관으로 승진시킨다고 해서 이들이 새로운 재능이나 보충적인 권한을 갖는 것은 아니다. "안정적인 기반"을 부여받는 것은 군대가 아니라 장교집단일 뿐이다. 더욱이 지휘관들은 병사 대중과의 유대감을 상실하는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군대 체제의 개혁은 지휘관들의 중요성을 증대시킨다는 순전히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단순히 계급 제도를 도입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지휘관 사옥 건설이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1936년에 47,000채의 가옥이 건설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난 해에 비해 봉급 예산이 57% 증가해야 한다. "지휘관들의 중요성 신장"은 군대의 도덕적 유대를 약화시키면서 장교들을 지배집단과 더 밀접하게 유착하도록 한다.

군 개혁가들이 부활된 계급제도에 걸맞는 새로운 직위를 발명할 필요성을 생각하지 않는 점이 주목된다. 한편 이들은 서방 자본주의 군대와 보조를 맞추기를 원했다. 동시에 이들은 장군이란 직위를 감히 부활시키지 못하면서 자신들의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냈다. 장군이란 이름은 러시아인에게 너무도 아이러니컬한 어감을 가지고있다. 5명의 군 요인들을 총사령관 직위로 승격시키는 사실을 알리면서 소련 언론은 독자들에게 짜르 시절 군대의 "계급과 직위에 대한 숭배 그리고 아첨"을 상기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실 5명이 총사령관으로 승진된 기준은 재능이나 헌신성보다 스딸린에 대한 충성심이었다. 그러면 왜 짜르 군대를 노예처럼 모방하는가? 새로운 특권층을 만들면서 관료집단은 언제나 구시대 특권 폐지 시 등장한 논거를 든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만과 비겁이 돌아가며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위선의 수위는 점점 올라간다.

언뜻 보기에 "계급과 직위에 대한 숭배와 아첨"이 공식적으로 부활한다는 사실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정부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 자질에 의한 지휘관의 승진은 군대 내부의 자유로운 발의와 비판 그리고 군대에 대한 대중의 통제력이 존재할 때만 실현될 수 있다. 엄격한 규율은 광범위한 민주주의와 아주 잘 어울리며 사실 이것에 직접 의존하기조차 한다. 그러나 어떤 군대도 군대를 양성하는 사회체제보다 더 민주적일 수는 없다. 형식과 화려함으로 치장된 관료주의의 원천은 특별한 군사적 필요보다 지배층의 정치적 필요에 있다. 군대는 이 필요를 가장 완성된 형태로 표현할 뿐이다. 혁명에 의해 철폐된 지 18년 만에 부활된 장교제도는 통치자들과 피통치자들을 갈라놓고 있는 깊은 골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적군의 "적(赤)"자에 걸맞는 주요한 특성 즉 공산주의적 평등 원칙을 소련군이 상실했다는 사실과 타락의 결과들을 법으로 영구화하는 관료집단의 냉소성을 증명하고 있다.

한편 부르주아 언론들은 이 개악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고 있다. 프랑스의 관영신문 『르땅』(Le Temps)은 1935년 9월 25일 이렇게 논평했다: "이 외적인 변모는 소련 전체가 겪고 있는 심대한 변화의 징후 가운데 하나이다. 이제 확고하게 구축된 체제는 점차 안정되고 있다.혁명적 습관과 풍습은 소련 가족과 사회 내에서 소위 자본주의 국가에서 지배적인 감정과 풍습들로 대체되고 있다. 소련은 부르주아 국가가 되고 있다." 이 정확한 판단에 덧붙일 말은 거의 없을 것이다.

 

5. 전쟁 상황의 소련

군사적 위험은 소련이 나머지 세계에 의존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표현에 불과하다. 그리고 고립된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유토피아적 사고를 거부하는 주장이 된다. 그러나이 불길한 "주장"은 바로 지금 제기되고 있다.

국가들 사이에 곧 다가올 치열한 싸움의 요인들을 미리 나열하는 것은 가망없는 일이다. 만약 이 선험적 계산이 가능하다면 이해관계의 충돌은 언제나 장부 정리인의 평온한 계산으로 끝날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는 미리 알 수 없는 요인들이 너무 많다. 어쨌든 소련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았거나 새로운 체제에 의해 창조된 유리한 요인들이 대단히 많이 보유하고 있다. 내전 기간에 제국주의 간섭전쟁이 야기한 경험은 러시아의 가장 커다란 장점이 광활한 영토였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제국주의 세력은 소비에트 헝가리를 며칠 내로 전복시켰다. 물론 불쌍한 벨라 쿤(Bela Kun) 정부의 잘못된 정책도 이 결과에 일조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애초부터 인접국들로부터 고립되었으나 3년 동안 제국주의의 개입에 대항하여 투쟁하였다. 어떤 시점에는 혁명정부의 영토가 옛날 모스크바 공국의 영토로 거의 축소되었었다. 그러나 이 좁은 땅도 러시아가 계속 버티는데 충분하다고 점이 입증되었다. 결국 제국주의 간섭전쟁은 패배했다.

러시아의 두 번째 커다란 장점은 인적 자원이다. 매년 인구는 3백만명 수준으로 늘어나면서 현재 총인구는 1억 7천만을 넘어섰다. 매년 1백3십만명이 징집대상이다. 신체적 정치적 제한으로 걸러내어도 40만명 이상이 군대에 입대할 수 있다. 따라서 예비군은 이론상으로 1천8백만명에서 2천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실제로는 거의 무제한적인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은 전쟁의 재료에 불과하다. 소위 군사적 "잠재력"은 주요하게 나라의 경제력에 의존한다. 이 점에서 옛날 러시아에 비해 소련이 갖는 장점은 어마어마하다. 이미 말했듯이 지금까지 계획경제는 군사적으로 거대한 장점이 되고 있다. 특히 시베리아 등 변방의 공업화는 초원과 삼림지역에 완전히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소련은 낙후한 나라이다. 낮은 노동생산성, 제품의 낮은 품질, 운송수단의 허약함 등은 영토의 크기, 풍부한 천연자원, 많은 인구에 의해서 부분적으로만 벌충되고 있을 뿐이다. 평화시 두 적대체제 사이의 경제력 측정은 정치제도에 의해 특히 외국무역의 독점으로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장기간 연기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면 누가 강한지는 싸움터에서 직접 판가름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군사적 패배는 보통 거대한 정치적 변화를 동반하지만 반드시 사회의 경제적 토대에 혼란을 조성하는 것은 아니다. 부와 문화의 더 높은 발전을 보장하는 사회체제는 총칼에 의해 타도되지 않는다. 반대로 정복자는 정복된 자의 제도와 풍습을 물려받는다. 소유형태는 나라의 경제적 기반과 날카롭게 갈등을 일으킬 때에만 군사력에 의해 타도될 수 있다. 독일이 소련에게 패배할 경우 히틀러 뿐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가 필연적으로 압살될 것이다. 반면 소련이 패배할 경우 관료지배층 뿐 아니라 사회적 토대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 틀림없다. 현재 독일의 불안정한 체제는 독일의 생산력이 자본주의 소유형태를 이미 오래 전에 능가했기 때문에 나타나고 있다. 반면 소련의 불안정한 체제는 소련의 생산력이 사회주의 소유형태에 걸맞지 않게 한참 뒤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고 있다. 소련의 사회적 기초가 평화시에 관료집단의 등장과 외국무역의 독점을 요구할 만큼 허약하기 때문에 군사적 패배는 소련의 사회적 토대를 위협한다.

그러나 소련이 다가올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을까? 이 솔직하게 제기된 질문에 대해 역시 솔직하게 대답해보자. 만약 전쟁이 전쟁으로만 수행된다면 소련의 패배는 불가피하다. 기술수준, 경제력, 군사력 등에서 제국주의 세력은 소련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 제국주의 세력이 노동계급 혁명에 의해 마비되지 않는다면 제국주의 세력은 10월 혁명에 의해 탄생한 체제를 쓸어버릴 것이다.

"제국주의"는 모순들로 갈갈이 찢겨져 있으므로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고 대답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 대답은 대단히 올바르다. 이 모순들이 없었다면 소련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을 것이다. 소련의 외교적·군사적 협정들은 부분적으로 이 모순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순들이 가라앉는 한계점들을 보지 못한다면 치명적인 오류가 될 것이다. 가장 반동적인 정당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 정당들의 암투가 임박한 노동계급 혁명의 위협 앞에서 가라앉듯이 제국주의 세력들간의 적대관계는 소련의 군사적 승리를 저지하기 위해 항상 타협안을 찾을 것이다.

어느 수상이 한때 이성적으로 말했듯이 외교적 합의는 "종이쪽지"에 불과하다. 전쟁 발발 시점까지 이것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유럽의 어느 곳이든 사회혁명의 임박한 위협이 있을 경우 소련이 자본주의 세력들과 맺은 어떠한 협정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프랑스는 제쳐놓더라도 스페인의 정치 위기가 혁명적 단계로 진입한다고 하자. "구세주 히틀러"라는 말로 로이드 조오지가 표명했던 희망이 모든 부르주아 정부들을 거역할 수 없이 사로잡을 것이다. 반면 스페인, 프랑스, 벨기에 등의 불안정한 상황이 반동의 승리로 끝날 경우에도 역시 소련과 맺은 협약은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종이쪽지"가 전쟁 초기에 효력을 유지한다면 전쟁의 결정적 국면에서 세력연합 관계는 외교관들의 선서보다 비교할 수 없이 훨씬 강력한 요인들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해대는 것이 외교관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련이 전쟁의 참호 뿐 아니라 계급전쟁의 참호에서도 부르주아 동맹국들과 같은 편에 선다는 뚜렷한 보장이 있다면 물론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소련이 제국주의 세력과 세계 노동자계급 사이의 포화에 끼여 있을 경우 물론 자본주의 "평화의 친구들"은 소련의 난관을 이용하여 소련의 외국무역 독점과 소유법에 균열을 내기위해 모든 조치를 다 취할 것이다.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러시아 반동 망명자들 사이에는 "조국방어" 운동이 점점 커지고 있는데 이 운동도 이 조치들을 최대한 이용하려 들 것이다. 만약 세계 차원의 투쟁이 군사적 수준에서만 진행된다면 연합국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할 좋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혁명이 제국주의 세력들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소련의 사회적 토대는 소련이 패배할 경우 뿐 아니라 승리할 경우에도 압살당할 것이다.

지금부터 2년도 더 전에 발표된 강령 「제4인터내셔널과 전쟁」은 이 전망을 이렇게 개괄하고 있다: "필수품에 대한 국가의 급박한 필요 때문에 농민경제의 개인주의 경향은 상당히 지지받을 것이다. 그리고 집단농장 내의 원심적 경향은 달이 갈수록 증가할 것이다‥‥‥열띤 전쟁 분위기 속에서 소련은 ‥‥ 연합국 자본을 유치하고 외국무역 독점과 복합기업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완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복합기업 사이에 또 복합기업과 노동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등등 ... 다른 말로 하면 전쟁이 장기화 되고 세계 노동계급이 수동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소련 내부의 사회모순들은 반드시 부르주아 보나파르트 반혁명을 낳을 것이다." 지난 2년간의 사건들은 이 예상의 설득력을 배가시켰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예상이 소위 "비관적" 결론을 이끄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본주의 세계가 보유하고 있는 엄청난 물질적 우월성, 제국주의 "연합국들"의 소련에 대한 불가피한 배반, 소련 체제의 내적 모순 등에 대해 눈을 감기를 원치 않는다면 한편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성을 과대평가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전쟁이 지구전으로 들어가 경제력의 상호관계를 바닥까지 드러내기 오래 전에 각 체제의 상대적 안정성은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사람을 살육할 전쟁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모든 이론가들은 혁명의 가능성 아니 어쩌면 불가피성을 전쟁의 결과로 고려하고 있다. 소수 "직업" 군인들의 집단들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제시한 생각들은 비록 다윗과 골리앗 같은 영웅들에 관한 생각만큼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무장한 인민에 대한 두려움은 이들의 생각이 갖는 환상성 속에서도 그 현실성을 드러낸다. 히틀러는 서방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볼셰비키주의의 새로운 폭풍이 몰아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평화 애호" 정신을 더욱 강력하게 선전하고 있다. 당분간 전쟁의 열화를 억제하고 있는 힘은 국제연맹도 아니고 상호안전보장 조약들도 아니며 평화주의 국민투표도 아니다. 지배계급의 혁명에 대한 자기보호 본능적인 두려움만이 전쟁을 연기시키고 있다.

다른 모든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체제도 비교해서 고려해야 한다. 모든 모순에도 불구하고 소련 체제는 가상의 적대국들보다 더 안정적이다. 이것이 소련의 대단한 장점이다. 나치가 독일을 통치하는 이유는 독일 내부의 사회적 적대관계의 참을 수 없는 격화 때문이다. 이 적대관계들은 파시즘이라는 뚜껑에 의해 제거되거나 약화된 것이 아니라 억압되고 있을 뿐이다. 전쟁은 이 적대관계들을 표면으로 들어올릴 것이다. 히틀러는 빌헬름 2세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 가능성이 훨씬 적다. 독일이 전쟁에 끼어들기 전에 발발하는 혁명만이 독일의 새로운 패배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세계 언론은 최근 일본 장교들이 장관들을 유혈 낭자하게 공격한 사건에 대해 너무도 열화 같은 애국심이 신중하지 못하게 표현된 것 뿐이라고 논평하였다. 그러나 이 공격적 행동들은 이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짜르 관료들에게 폭탄을 투척한 러시아 허무주의자들의 행동과역사적 유형이 같다. 일본 인민은 아시아식 농업주의와 초현대 자본주의의 결합된 멍에 아래 질식하고 있다. 조선, 만주, 중국 등은 군국주의의 세력이 약화되는 첫 순간에 일본의 학정에 대항하여 봉기할 것이다. 전쟁은 일본 천황 제국에게 가장 커다란 사회적 재앙을 안겨줄 것이다.

폴란드의 상황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필수스키(Pilsudski) 정권은 모든 정권 중에서 이룬 것이 정권인데 농민의 토지노예제를 약화시키는 조치조차 취할 수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서우크라이나(갈리시아)는 지독한 민족적 억압 속에서 살고 있다. 노동자들은 계속적인 파업과 봉기로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프랑스와 연합하고 독일과 우호조약을 체결하여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는 폴란드 부르주아 계급은 전쟁을 재촉하고 전쟁을 통해 즉사하는 것 이외에 다른 조치를 취할 능력이 없다.

전쟁의 위험과 소련의 패배는 현실로 다가왔다. 그러나 혁명 역시 현실로 다가왔다. 혁명이 발발하여 전쟁을 막지 못한다 할지라도 전쟁은 혁명을 도울 것이다. 두 번째 출산은 첫번째 출산보다 대체로 덜 고통스럽다. 새로운 전쟁에서 2년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첫번째 봉기가 일어날 것이다. 더욱이 혁명은 일단 시작되면 이번에는 도중에 멈추지 않을 것이다. 소련의 운명은 장기적으로 군지휘부의 지도 위에서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지도 위에서 결정될 것이다. 자국의 부르주아 지배계급 그리고 "평화의 친구들"에 대해 사정없이 저항하고 있는 유럽의 노동계급만이 소련을 멸망이나 "연합국들"의 배신에서 보호할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 노동계급이 승리할 경우 소련의 군사적 패배는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할 것이다. 반면에 제국주의가 살아남는다면 어떤 군사적 승리도 10월 혁명의 남아 있는 성과를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다.

소련 관료집단의 심복들은 우리가 소련의 내적 동력이나 적군의 위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우리가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 가능성을 "부인"한다고도 말한 적이 있다. 이 주장들은 너무도 수준이 낮아서 논쟁을 해도 결실을 맺기 힘들다. 적군이 없을 경우 소련은 중국처럼 압살당하고 분할될 것이다. 적군이 미래의 자본주의 적들과 완강하고 영웅적으로 저항할 경우에만 제국주의 진영 내의 계급투쟁이 발전할 호조건을 조성할 수 있다. 따라서 적군은 대단히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적군만이 유일한 역사적 요소라는 얘기는 아니다. 적군은 혁명에 강력한 자극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오직 혁명만이 주요한 과업을 성취할 수 있다. 이 과업을 적군 혼자 성취하려면 어림도 없을 것이다.

소련 정부가 국제적으로 모험을 하고 비합리적인 행동을 저지르며 무력을 통해 세계 정세의 전개과정을 강요하라고 어느 누구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이 시도들이 과거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중국의 광동 등지에서 있었을 때마다 관료집단은 반동 세력에게 이용당했다. 그리고 좌익반대파로부터 제때에 비판을 받았다. 문제는 소련의 일반 노선이다. 소련의 대외정책과 세계 노동계급 및 식민지 인민의 이익 사이의 모순은 코민테른이 보수적 관료집단의 새로운 종교 즉 무기력증에 빠져 있는 현상에서 가장 재앙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유럽의 노동계급과 식민지 인민들은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그리고 전쟁 --- 이것은 다 자란 태아가 임신 상태를 깨뜨리는 것만큼 불가피하게 현 상황을 깨뜨리고 내팽개칠 것임에 틀림없다 --- 에 대항하여 봉기할 수 있다. 근로인민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명령 하에서건 혹은 그들에 대항하는 혁명적 봉기 속에서건 현재의 국경선들 특히 유럽의 국경선들을 방어하는 데에 추호의 이해관계도 없다. 유럽의 침체는 거의 40개에 달하는 준국가들에 의해서 경제적으로 분할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각기 다른 관세제도, 여권, 화폐제도, 그리고 민족적 특성을 옹호하는 끔찍할 정도의 군대들이 인류의 경제적·문화적 발전의 길에 거대한 장애물이 되어왔다.

유럽 노동계급의 과업은 현재의 국경선을 영구화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것들을 혁명으로 철폐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상유지의 옹호가 아니라 사회주의 유럽합중국 건설에 나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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